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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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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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주관성의 옛 칠의사를 조상하다〔石柱關弔古〕 -매천집 제1권
    석주관성의 옛 칠의사를 조상하다〔石柱關弔古〕 -매천집 제1권: 매천 황현(黃玹, 자 雲卿, 본관 長水, 1855~1910)목릉 때는 인물이 성하던 시대라 / 穆陵斯爲盛조정에도 훌륭한 장상이 있었지만 / 朝廷亦將相때가 위급하면 뛰어난 인물이 나와 / 時危異人興이따금 초야에서 떨쳐 일어났으니 / 往往奮草莽지금까지도 고조곽에 대해서는 / 至今高趙郭언급만 되면 정신이 문득 왕성해지네 / 語及神輒王같은 시대에 호남 영남 사이에선 / 幷時湖嶺間의병 깃발 창도한 이도 많았었지 / 義旗亦多倡슬픈 것은 인물이 혹 미천한 경우엔 / 所嗟人或微일이 오래도록 세상에 알려지지 않아 / 事久沉影響몸을 죽였지만 공신록에서 빠지고 / 解軆勳盟漏이름을 바랐지만 야사마저 빠뜨리니 / 噉名野史忘전사한 해골만 절로 향기로울 뿐 / 戰骨徒自香천추만고에 애통하기 그지없구려 / 千秋足悽愴가련도 하여라 석주관성에는 / 可憐石柱城시름겨운 구름이 첩첩 산에 잠기었네 / 愁雲鎖疊嶂한 고을에서 일곱 의사가 순절하여 / 一縣七士殉기를 토한 절의가 전에 없던 일이거니 / 吐氣前代曠어찌 성패만 가지고 논하리오 / 詎以成敗論이 일만으로도 이미 장하다마다 / 辦此已可壯남아가 생명을 버리는 날에는 / 男兒捐軀日강개한 제 맘에 보답할 뿐이고말고 / 要自酬慨慷누가 뜨거운 물불에 즐겨 뛰어들어 / 誰肯樂湯火후세의 추앙을 받으려고 하겠는가 / 博得後來仰[주-C001] 을미고(乙未稿) : 1895년(고종32), 매천의 나이 41세 때 지은 시고이다.[주-D001] 석주관성(石柱關城)의 …… 조상하다 : 석주관성은 전남 구례군(求禮郡) 송정리에 위치한 요새이다. 칠의사(七義士)는 바로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구례 지방으로 침입한 왜구를 석주관성에서 그들과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일곱 의사, 그 당시 구례 현감(求禮縣監)이었던 이원춘(李元春)을 비롯하여 사인(士人) 왕득인(王得仁), 이정익(李廷翼), 한호성(韓好誠), 양응록(梁應祿), 고정철(高貞喆), 오종(吳琮)을 가리킨다. 순조(純祖) 연간에 나라에서 칠의사에게 각각 벼슬을 추증하였고, 근대에 들어와서 그 지방 인사들이 칠의각(七義閣)과 영모정(永慕亭)을 지어서 그 일을 기리고 있다 한다.[주-D002] 목릉(穆陵) : 조선 선조(宣祖)의 능호(陵號)로, 전하여 선조를 가리킨다.[주-D003] 고조곽(高趙郭) :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장(義兵將)으로 왜적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고경명(高敬命), 조헌(趙憲)과 역시 의병장으로 여러 차례 왜적을 크게 무찔렀던 곽재우(郭再祐)를 합칭한 말이다. 고경명의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峯),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명종(明宗) 연간, 문과에 장원 급제한 이후, 정언(正言) 등 여러 관직을 거쳐 동래 부사(東萊府使)를 마지막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했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光州)에서 모집한 의병 6000여 명을 이끌고 금산(錦山)에 침입한 왜적과 싸우다 전사했다. 조헌의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峰),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그 역시 명종 연간 문과에 급제하고, 선조 연간에 교서관 정자(校書館正字), 저작(著作) 등 여러 관직을 거쳐 종묘서 영(宗廟署令), 보은 현감(報恩縣監)을 역임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玉川)에서 의병 1700여 명을 규합하여 승병(僧兵)과 합세해서 청주(淸州)를 수복하고, 이어 전라도로 향하는 왜적을 막기 위해 금산으로 향했으나 전공(戰功)을 시기하는 관군(官軍)의 방해로 대부분의 의병이 해산되고 고작 700여 명의 의병으로 금산 전투에 참가하여 끝까지 용전(勇戰)하다가 700의 의병과 함께 모두 전사했다. 곽재우의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당(忘憂堂),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선조 연간 문과에 급제했으나 파방(罷榜)당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령(宜嶺)에서 의병을 일으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칭하고 연거푸 왜적을 물리쳤으나, 관찰사의 모함으로 한때 누명을 쓰고 체포되었다가 김성일(金誠一)의 도움으로 석방되었고, 정유재란 때에는 경상 좌도 방어사(慶尙左道防禦使)가 되어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켰다. 뒤에 한성부 좌윤, 함경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2020-09-16 | NO.285
  • 선고 우헌 부군(박상현) 광지〔先考寓軒府君壙誌〕 -손재집
    선고 우헌 부군 광지〔先考寓軒府君壙誌〕 -손재집 제8권 / 묘지(墓誌) : 박광일(朴光一, 1655~1723)선부군의 휘는 상현(尙玄)이고, 자는 경초(景初)이며, 성은 박씨(朴氏)이고, 본관은 평양(平陽)이다. 본래 고려 시대 순천부원군(順天府院君) 휘 난봉(蘭鳳)의 후손이며, 우리 왕조 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 시호 문숙공(文肅公) 석명(錫命)의 9대손이다.7대조는 참판 휘 숙선(叔善)인데, 집안 조카인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 영의정 원종(元宗)의 위세가 지나치게 성대한 것을 보고는 걱정스럽고 불안하여 한양에서 나주(羅州)로 이사 와서 거주하였다. 이분의 셋째 아들 휘 이공(而恭)이 또 광주(光州)로 옮겨 와 그대로 세거하였다.6대조의 형제는 5명인데, 장형 이온(而溫)은 승평군(昇平君)이고, 동생 이검(而儉)은 순성군(順城君)이다. 6대조는 세상을 잊고 시골집에서 살면서 뜻을 고상하게 가졌다. 선군의 5대조 휘 의손(義孫)이 아직 과거에 급제하지 않았을 때 평성(平城 박원종(朴元宗))이 적사(嫡嗣)가 없어 계자(繼子)로 삼기를 요구하였는데, 6대조가 답장하기를, “우리 집안 자제는 벼슬하는 집안에 어울리지 않는다.”라고 하고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과거에 급제한 뒤에도 관직은 현감 하나에 그쳤다.고조는 휘 원수(元壽)이며, 성균관 진사이다. 고조모는 완산 이씨(完山李氏)로, 찰방 이세형(李世亨)의 딸이다. 증조는 휘 언심(彦琛)으로,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아름다웠으며, 고제봉(高霽峯 고경명(高敬命))의 문하에서 배웠는데 불행하게도 일찍 세상을 떴다. 증조모는 광산 이씨(光山李氏)로, 경력 이명우(李明佑)의 딸이다. 조부는 휘 진정(震挺)이다. 조모는 청송 심씨(靑松沈氏)로, 심주(沈洲)의 딸이다. 생조(生祖)는 휘 세정(世挺)으로, 정유왜란 이후 세상에 뜻이 없어 진곡(眞谷)에 띳집을 짓고 호를 오산(鰲山)이라고 했다. 생조모는 완산 이씨(完山李氏)로, 별제(別提) 이광종(李光鍾)의 딸이다. 아버지는 휘가 수림(遂林)으로, 백부에게 후사로 들어갔는데 30세 전에 일찍 세상을 떴다. 어머니는 봉산 이씨(鳳山李氏)로, 이사숙(李思淑)의 딸이다. 계비(繼妣)는 홍주 송씨(洪州宋氏)로, 호가 해광(海狂)인 송제민(宋濟民)의 손녀이다.부군은 숭정(崇禎) 2년 기사년(1629, 인조7) 5월 계사일에 태어났다. 인품이 매우 고상하고 지행(志行)이 맑고 깨끗하였으며, 경전(經傳)에 침잠하여 즐거움에 근심을 잊었다. 정미년(1667, 현종8)부터 조정에서 중국 사람 90명을 다그쳐 노정(虜庭 청나라 조정)으로 보내자, 진곡(眞谷)에 두문불출하면서 세상을 잊고 우헌(寓軒)이라고 자호하면서, 한결같이 잠심하여 이치를 탐구하는 것을 종신의 사업으로 삼았다.경서(經書)의 뜻 중에서 재량해야 할 것은 모두 우암(尤菴) 선생에게 가서 바로잡았으니, 편지로 왕복하며 논변한 것이 거의 30년이었다. 선생은 부군이 늙어서도 배우기 좋아한다는 것을 깊이 알고 만년의 지기(知己)로 인정하였다. 승지 어은공(漁隱公)이 일찍이 그 고상함에 심복하여 “평생의 족적이 우헌 문밖으로 한 발자욱도 나가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을축년(1685, 숙종11) 겨울에 교리 김만길(金萬吉)이 남주(南州)로 명을 받고 와서 부군의 품행과 도의를 들어 조정에 계달하였다. 공은 계유년(1693) 1월 병진일에 집에서 세상을 떴으니, 향년 65세였다. 남긴 유고 약간 권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같은 군(郡)의 고씨(高氏)를 아내로 맞았는데, 통훈대부, 행 익산 군수, 증 통정대부 예조 참의의 아들인 처사 고부민(高傅敏)의 딸이다. 부인다운 덕이 있었고 규문(閨門)이 엄숙하고 화목하여 남들이 흠잡을 말이 없었으며, 집안에서 모두 여자 중의 군자라고 칭찬하였다. 아들 셋을 두었으니, 광일(光一), 광원(光元), 광선(光善)이다. 딸 넷을 두었으니, 장녀는 기진성(奇震省)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이석필(李碩弼)에게 시집갔으며, 다음은 홍운(洪橒)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기정륜(奇挺倫)에게 시집갔는데, 기씨는 모두 덕양(德陽)이 본적이다. 손자 다섯 명과 손녀 4명이 있는데 모두 어리다.석 달 지난 경신일에 광주(光州) 거점리(巨岾里) 태산(台山) 묘향(卯向) 자리에 장례 지냈는데, 고비(考妣)의 무덤과 백여 보 떨어져 있다. 불초자 광일이 통곡하며 기진맥진한 채 감히 이렇게 광지(壙誌)를 쓴다. 슬픈 마음 하늘처럼 한량이 없나니, 아, 애통하도다![주-D001] 정미년부터 …… 보내자 : 1667년(현종8) 중국 배 한 척이 제주로 표류해 왔다. 배는 부서지고 물건은 모두 물에 잠겨 있었는데, 모두 95명의 중국 사람이 타고 있었다. 이들은 일본으로 가거나 자신들이 직접 배를 몰아 중국으로 가고자 하였으나 조정에서 청나라로 압송하였다. 《국역 현종실록 8년 6월 21일, 10월 3일》[주-D002] 교리 …… 와서 : 김만길(1645~?)은 본관이 광산(光山)이며, 자는 자적(子迪)이다. 김장생(金長生)의 증손이다. 1685년(숙종11) 김만길은 전라도(全羅道)로, 민진주(閔鎭周)는 평안도(平安道)로, 이징명(李徵明)은 함경도(咸鏡道)로 암행 어사의 임무를 띠어 파견되었다. 당시 김만길은 부수찬이었다. 《국역 숙종실록 11년 9월 1일》[주-D003] 같은 …… 딸이다 : 고부민의 아버지는 고성후(高成厚, 1549~1602)이다. 고성후는 1583년(선조16)에 문과에 급제하여, 1593년에 익산 군수가 되었다. 당시 전라도 관찰사였던 권율(權慄)을 따라 왜적을 물리쳤다. 후에 예조 참의 지제교에 증직되었다. 《明皐全集 卷16 安城郡守竹村高公墓表》
    2020-12-28 | NO.284
  • 선암역에서 유배지를 옮기는 문곡 김 상공 수항 의 행차를 전송하다- 서하집
    선암역에서 유배지를 옮기는 문곡 김 상공 수항 의 행차를 전송하다〔仙巖驛送文谷金相公 壽恒 移配之行〕만나서 별다른 말 없이 / 相逢無雜語함께 백운산 얘기하나니 / 共說白雲山조만간 집 지어 놓고 / 早晩誅茅計이 사이에서 종유하렵니다 / 從遊在此間서하집 제2권 / 오언절구(五言絶句)이민서(李敏敍, 1633~1688). 그러나 지병(持病)으로 광질을 앓아, 관직에 종사하면서 두 번이나 자해를 시도하여 입방아에 올랐다. 이민서(李敏敍)의 시문(詩文)은 그의 사후, 아들 이관명(李觀命)과 이건명(李健命)에 의해 편찬, 간행되었다. [주-D001] 선암역(仙巖驛)에서 …… 전송하다 : 선암역은 지금의 전라남도 승주군에 있던 역참이다. 이 시는 1678년(숙종4) 가을 김수항(金壽恒)이 전라도 영암(靈巖) 유배지에서 철원으로 옮겨 갈 때 지은 것이다. 《문곡집(文谷集)》 권4에 〈선암역에서 입으로 부른 시를 부채에 써서 광주 목사 이이중에게 주다[仙巖驛口號書扇 贈光牧李彝中]〉라는 답시가 있다.[주-D002] 백운산(白雲山) : 경기 영평(永平)에 있는 산 이름으로, 김수항의 형 김수증(金壽增)이 은거했던 곳이다. 그리고 뒷날 김수항의 아들 김창협이 29세 때인 1679년에 아버지의 명에 따라 이곳에 터를 잡아 집을 짓고 들어가 살기도 하였다. 《農巖集 卷35 年譜上》
    2023-07-05 | NO.283
  • 선암역에서 입으로 불렀다가, 부채에 써서 광주 목사 이이중에게 주다- 문곡집
    선암역에서 입으로 불렀다가, 부채에 써서 광주 목사 이이중에게 주다〔仙巖驛 口號書扇 贈光牧李彝仲〕해 지는 선암역에 / 落日仙巖驛서석산으로 돌아가는 구름아 / 歸雲瑞石山만났다가 또 헤어지니 / 相逢又相別갈림길 사이의 슬픔이로다 / 惆悵路岐間차운 이중 (次韻 彝仲 )만나서 별다른 말 없이 / 相逢無別語백운산만 서로 얘기하니 / 共說白雲山조만간에 오두막 지어 / 早晩誅茅計여기서 함께 놀아야지 / 從遊在此間문곡집 제4권 / 시(詩)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의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字)는 구지(久之)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문곡집》은 문곡 사후에 먼저 두 아들 창집(昌集)과 창협(昌協)이 주도하여 총 28권 13책의 편차로 산정(刪定)하였다. [주-D001] 이이중(李彝仲) : 이중은 이민서의 자이다.
    2023-07-05 | NO.282
  • 섣달 그믐날 밤에 광주(光州)에서 지은 시 - 택당선생 속집 제2권
    섣달 그믐날 밤에 광주(光州)에서 지은 시, 2수 - 택당선생 속집 제2권 / 시(詩)  :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일(一)몇 군데 푸닥거리 벌이느라 쿵작쿵작 / 幾處儺聲閙외로운 이부자리 시름 속에 앉았나니 / 孤衾坐悄然새해를 맞으려고 잠들지 못함이 아니요 / 不眠非守歲타향에서 또 한 해를 보내게 됨이로세 / 爲客又增年격문(檄文) 빗발치는 요동 벌판 요새지 / 羽檄喧遼塞덩달아 가로막힌 해변가 시골 소식 / 鄕書阻海堧지금쯤 아녀자들 등불 앞에 모여들어 / 樗蒲兒女聚신나게 윷놀이판 벌이고들 있으련만 / 想見在燈前이(二)만고토록 알아야 할 지식은 끝이 없고 / 萬古無涯智한평생 마음 공부 아직도 못 끝낸 몸 / 平生未了心타들어 가는 촛불처럼 남은 세월 짧아지니 / 年光燒燭短문 닫고 앉은 나그네 더욱 한이 깊을 밖에 / 客恨閉門深더구나 늙으신 어머님이 계심에랴 / 況屬萱花暮그 누가 백엽주(柏葉酒)를 따라 드릴꼬 / 誰部柏葉斟한매 소식 농두에서 애타게 기다리며 / 寒梅隴頭信내일 새해에도 옷깃을 또 적시리니 / 明日又沾襟[주-D001] 만고토록 …… 없고 :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에 “우리의 삶은 유한한데 알아야 할 일은 끝이 없다.[吾生也有涯而知也無涯]”라는 말이 있다.[주-D002] 백엽주(柏葉酒) : 새해 아침에 어른에게 따라 올리며 축수(祝壽)하는 술 이름이다.[주-D003] 한매(寒梅) 소식 …… 기다리며 : 친지(親知), 특히 모친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뜻이다. 남조 송(南朝宋)의 육개(陸凱)가 강남(江南)의 매화 한 가지를 장안(長安)에 있던 친구 범엽(范曄)에게 부치면서 “매화 가지 꺾다가 역마 탄 사신 만나, 농두의 벗 생각하고 부쳐 보내노라.[折梅逢驛使 寄與隴頭人]”라는 시를 지은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2020-09-27 | NO.281
  • 성 광주(成光州) 정진(鼎鎭) 에게 보냄 금정(金井)에서 - 다산시문집 제18권
    성 광주(成光州) 정진(鼎鎭) 에게 보냄, 금정(金井)에서 - 다산시문집 제18권 : 정약용(丁若鏞, 1762~1836)요즘 들으니 호남(湖南)에 선동이 아주 심하다고 하는데, 그들을 진정시키는 책임은 집사(執事)가 지고 깨우쳐 주는 방도는 원발(元發)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렇게 한 다음에야 호남 지방이 그릇된 데에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이번 조 진사(曺進士 이름은 익현(翊鉉))에게 가는 편지를 곧바로 전해줬으면 합니다. 그 편지 속에도 요긴한 문자가 들어 있으니 조공(曺公)으로 하여금 한번 보게 하여도 무방할 것입니다.*성정진(成鼎鎭, 1738~?),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증조부는 성항(成伉)이고, 조부는 성윤장(成胤章)이며, 부친은 성규(成珪)이다.
    2020-09-14 | NO.280
  • 성임-희경루
    湖南五十縣  호남 오십고을 중에서 形勝說吾鄕  경치는 내 고향을 꼽는다네山對高樓迥  산은 높은 누각과 멀리 대하였고,池涵好月光  연못엔 좋은 달빛 잠겼어라. 竹深庭宇靜  대숲 깊은데 뜰은 고요하고花近酒杯香  꽃이 가까우니 술잔도 향기롭구나物物牽詩興  보는 것마다 시흥을 돋우니寧知春晝長  어찌 봄낮이 긴 줄을 알랴- 광주읍지성임(成任, 1421-1484)의 자는 중경(重卿)이며 호는 일재(逸齋), 안재(安齋)이다.
    2018-07-26 | NO.279
  • 성현(成俔)-光州客舍東軒記 허백당문집 제3권
    광주 객사 동헌기〔光州客舍東軒記〕 - 허백당문집 제3권 一道之重莫如州一邑之居莫如館舍州者邑之大者而館舍所以待衆賓庇群旅也然而館有東西軒東乃貴者所寓而觀察使聽訟之所則牙節建焉案牘委焉人民萃焉必壯其廉陛使人儼然瞻望而畏之也使華賓客讌飮之地則張歌管羅樽罍上可以容揖讓周旋下可以容進退步武必廣其堂宇然后允合其宜也是故善莅政者修擧廢墜而人忘其勞其不善者畏首畏尾不能改一瓦易一榱而州邑曰以耗矣今薜公順祖以僉嫗出爲州牧而崔君榮爲之佐政平訟理時和歲穰物之疲癘者得煦嫗人之凋瘵者得蘇息百廢俱興而四野已無虞遂相與謀曰光之於都爲大邑冠蓋之絡繹人物之殷富與羅全二州相甲乙然東軒規模狹隘且將歲久傾圮盍更構而重新之於是不謀而同不日而成剞劂極其巧制作極其大雖炎蒸困溽之時客至忘沈鬱之苦雖賓旅叢劇之際人各得其所寓而不失規度然後於斯邑爲稱也崔君於余友也飛書請記於余余則出於州金氏之後於光烏得無情每欲覽山川之勝追想厥祖根本之地而足跡一不涉湖南迨今日侍經帷卯酉講論之無暇而髮已種種雖欲把一盃酒陪兩使君揖讓酬酢於軒中然後退與父老頌龔黃之德欨歈歌咏而長言之不可得矣則不可不操毫敍事以寓余南望之意한 도(道)에서 중요한 곳은 주(州)와 같은 곳이 없고, 한 고을(邑)에서 긴요한 거주지는 관사(館舍)만한 것이 없으니, 주는 고을이 큰 것이고, 관사는 손님들을 대접하고 여행자를 보호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사에는 동서에 헌(軒)이 있는데, 동헌(東軒)에는 귀인들이 와서 머물고 관찰사가 재판하기 위하여 송사를 듣는 곳이니, 아기(牙旗)와 절월(節鉞)이 세워지고 문안(文案)과 간독(簡牘)이 놓여져, 백성들이 모이면 반드시 그 구조와 뜰을 장엄하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위엄을 느껴 바라보고 두려워하게 한다. 그리고 사화(使華)와 빈객들이 연회하는 곳이니, 가무가 베풀어지고 술잔들이 널려져, 위로는 읍양(揖讓)과 주선(周旋)하는 것이 용납되어야 하고, 아래로는 진퇴(進退)와 보무(步武)가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반드시 마루와 집이 넓어야 합당하다. 그러므로 정치를 잘하는 이가 퇴폐되고 쓰러진 것을 수리하고 세울 때에는 백성들이 그 수고로움을 잊으며, 정치를 잘 못하는 자는 처음도 두렵고 끝도 두려워 기와 한 장, 서까래 한 개를 바꾸지 못하는데도 그 고을은 날로 쇠폐해 간다.지금 설순조(薛順祖)는 첨추(僉樞)로서 지방에 나와 주목(州牧)이 되고 최영(崔榮)은 그의 보좌가 되어, 정치가 화평하고 송사가 잘 다스려지며, 시절이 태평하고 농사가 풍년 들어서, 재해를 만난 만물들이 따뜻한 어머니를 만난 듯, 시들고 병든 백성들이 소생하여 숨 쉬게 되어서 모든 퇴폐했던 것이 다시 일어나고, 사방에는 근심이 없어졌다. 드디어 사람들이 서로 꾀하여 말하기를, ‘광산(光山)은 도회지 중에서 큰 읍내가 되었으므로 사신의 행렬이 연락부절하고, 인물의 풍부함이 나주나 전주와 맞먹는다. 그런데 동헌의 규모가 협소하고 또 앞으로 세월이 오래되면 허물어질 염려가 있으니, 어찌 다시 고쳐 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별로 꾀함도 없이 동의하여 며칠 안 되어 준공하였는데, 새기고 깎고 한 것이 지극히 교묘하고, 짓고 만든 것이 지극히 커서, 비록 찌는 듯 한 더위나 진저리나는 장마 때에도 손님이 와서 침울한 괴로움을 잊게 되었고, 비록 손님들이 모여들어 붐비게 되어도 각기 거처할 곳을 얻어 법도를 잃지 않게 되었다. 이런 뒤에야 이 고을과 걸맞게 되었다.최군은 내 친구이다. 편지를 보내어 나에게 기(記)를 청했고, 나는 광산 김씨에게서 태어났으니, 광산에 대하여 어찌 무정할 수가 있겠는가. 항상 광산 산천의 아름다움을 구경하고자 하였고 그 옛날 조상들의 근본이 되는 땅임을 추상하면서도, 호남지방에는 한 번도 발을 내디뎌 보지 못하고 지금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경연(經筵)에서 모시고 아침 저녁 강론하기에도 여가가 없고, 백발마저 드문드문하니, 비록 한 잔의 술을 가지고 두 사군(使君)을 모시고 동헌(東軒)에서 읍양(揖讓)하고 수작(酬酌)하고, 그 뒤에 물러나 부로(父老)들과 더불어 공황(龔黃) 공수(龔遂) 황패(黃霸)의 덕을 칭송하며 즐거이 노래 부르며 이야기하고자 하나 불가능하다. 이에 부득불 붓을 잡고 사실을 적어, 내 남쪽으로 가기를 바라는 뜻을 붙인다” 하였다. -광주읍지(허백당집)성현(成俔, 1439-1504)의 자는 경숙(磬叔)이며 호는 용재(慵齋), 부휴자(浮休子), 허백당(虛白堂), 국오(菊塢) 등이다. [주-D001] 광주 객사 동헌기(光州客舍東軒記) : 광주의 객사인 광산관(光山館)에 써 붙인 기문이다. 객사는 다른 말로 객관(客館)이라고도 하는데 중앙인 정당(正堂)과 동서의 익헌(翼軒)이 연접한 구조로 되어 있다. 대개 객사는 그 고을에서 가장 웅장한 건물이기 마련인데, 정당에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 놓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수령 이하 모든 관리가 이곳에 모여 배례(拜禮)를 하였으며 그 지방으로 출장 온 사신도 배례를 올려야 했다. 본문에서 사신 접대나 송사 판결, 숙소 등 객사의 여러 용도에 대해 언급한 것은 자료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보인다. 이 기문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5 〈광산현(光山縣) 궁실(宮室)〉에도 실려 있는데, 1530년(중종25)에 간행되어 시기적으로 가장 앞서는 자료인 데다 본 번역본의 대본이나 규장각본에 비해 오자가 적어 문맥이 잘 통할 뿐만 아니라 앞 대목이 더 있는 점으로 보아 원작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추정한다. 《광주읍지(光州邑誌)》(규장각 도서번호 10787) 공해조(公廨條)에 수록된 중수기(重修記)는 이 책의 내용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대략 4종의 광주읍지 중에서 이 읍지는 읍선생조(邑先生條)의 마지막에 저록된 김경규(金敬圭)의 부임 연도가 을미(乙未)로 되어 있어 고종 32년(1895)에 해당하므로 최소한 그 이후에 편찬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수록된 내용이 풍부하고 교정이 세밀한 것으로 평가되므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기문의 신빙성을 더욱 뒷받침해 준다. 따라서 본 번역은 대본의 체재를 존중하되 글자의 교감과 문맥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내용을 적극 반영하였다.[주-D002] 주군(州郡)에 :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앞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더 있다. “한 도 안에서 주보다 비중이 높은 고을은 없으며 한 고을 안에서 관사보다 더 나은 거처는 없다. 주는 고을 중에 큰 고을을 말하는데 …… 〔一道之重, 莫如州, 一邑之居, 莫如館舍. 州者邑之大者而 …… 〕”[주-D003] 아절(牙節) : 주장(主將)을 상징하는 아기(牙旗)와 부절(符節)을 말한다. 한국문집총간 277집에 수록된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외집 권53 〈당제고(唐制考) 아절(牙節)〉에 “아절은 당나라 때 절도사가 그 행차의 앞에 세우는 아기와 짚고 있는 하사받은 부절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제도에는 관찰사가 순시를 할 때 영기(令旗)와 절월(節鉞)로 앞에서 인도한다.”라고 아절의 의미와 용도를 설명하고 있다.[주-D004] 그 월대와 계단을 : 대본에는 ‘簾陛’로 되어 있는데, 규장각본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근거하여 ‘簾’을 ‘廉’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05] 고을의 …… 자는 : 대본에는 ‘莅政者’로 되어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근거하여 ‘莅’ 앞에 ‘善’ 1자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주-D006] 시종일관 …… 나머지 : 원문의 ‘외수외미(畏首畏尾)’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문공(文公) 17년 조의 “머리도 두려워하고 꼬리도 두려워한다면 몸 가운데 두려워하지 않는 부분이 얼마나 되겠는가.〔畏首畏尾, 身其餘幾.〕”라는 대목에 나오는 말이다. 《회남자(淮南子)》에도 이 말이 나오는데 주석을 낸 고유(高誘)는 외수외미를 ‘항상 두려워한다’는 의미로 풀이하였다.[주-D007] 설공 순조(薛公順祖) : 대본에는 ‘薛公循祖’로 되어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본 기문과 《광주읍지(光州邑誌)》 읍선생조(邑先生條)에는 ‘薛順祖’로 되어 있고 《성종실록(成宗實錄)》 등에도 ‘薛順祖’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대본의 ‘循’은 ‘順’의 오자로 판단된다. 《성종실록》 24년(1493)에, 김해 부사(金海府使) 설순조를 사간원에서 탄핵하는 기사가 보이는데 “지난 경자년에 광주 목사로 나가 고과에서 하등을 맞았다.〔往在庚子間, 出牧光州, 貶居下等.〕”라고 하였고 임금의 전교 가운데 설순조의 당시 나이를 67세라고 하였으므로, 이를 바탕으로 계산해 보면 설순조는 1480년 54세의 나이로 광주 목사에 부임하였음을 알 수 있다.[주-D008] 최군 영(崔君榮) : 자세한 인적 사항은 미상이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최군은 나와 친구이다.〔崔君於余友也.〕”라고 한 것이나 《점필재집(佔畢齋集)》 권7 〈삼월 삼일에 …… 계사를 위해 술을 마시다〔三月三日 …… 爲禊飮〕〉라는 시의 제목에 계사(禊事) 참여자의 명단이 나오는데 진주 판관(晉州判官) 최영(崔榮)이 가장 앞에 기술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최영이란 인물은 성현과 김종직(金宗直) 모두와 교유한 어느 정도 비중 있는 인물로 보인다.[주-D009] 나로 …… 후예 : 성현의 조모는 광산 김씨(光山金氏)로, 광산군(光山君) 김약항(金若恒, ?~1397)의 딸이다. 《대동야승(大東野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김약항이 명나라에 사신 간 이야기와 자신의 조모가 광산군의 딸이라는 내용을 언급해 놓았다.[주-D010] 공수(龔遂)나 황패(黃覇) : 둘 다 《한서(漢書)》 권89 〈순리전(循吏傳)〉에 수록된 인물로, 선정을 베푼 지방 수령을 칭송할 때 즐겨 언급된다. 공수는 선제(宣帝) 때 발해 태수(渤海太守)로 있으면서 도둑을 없애고 백성에게 농상(農桑)을 전하여 발해가 크게 다스려지게 하였다. 황패는 무제(武帝) 때에는 하남 태수승(河南太守丞)으로, 선제 때에는 영천 태수(穎川太守)로 있으면서 옥사(獄事)를 관대하게 처리하고 백성을 잘 보살폈다고 한다.[주-D011] 붓을 잡고 : 대본에는 ‘標毫’로 되어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근거하여 ‘標’를 ‘操’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2018-07-26 | NO.278
  • 소세양-次光州喜慶樓韻
    急雨來從瑞石岑 소낙비 서석산 봉우리를 타고 내려오니試登高閣快開襟 높은 누각에 올라 시원스레 흉금을 열어 보네蓬蓬涼吹千林動 쏴쏴하게 부는 서늘바람 온 숲을 움직이고隱隱驚雷萬鼓音 우르릉 심한 천둥소리 온갖 북 소리를 내네拂檻貓頭分爽氣 난간을 스친 죽순 상쾌한 기운을 나누고緣簷鴨脚豁淸陰 처마를 이은 은행나무 맑은 그늘을 활짝 여네更將酪粉調氷椀 다시 타락(駝酪) 가루를 가져다가 얼음사발에 타서消得三庚病暍心 삼경의 소갈증을 삭혀보네 - 양곡선생집(陽谷先生集) 권2소세양(蘇世讓, 1486-1562)의 자는 언겸(彦謙)이며 호는 양곡(陽谷), 퇴재(退齋), 퇴휴당(退休堂)이다.
    2018-07-26 | NO.277
  • 소은 박중회공에 대한 제문〔祭素隱朴公 重繪 文〕 -손재집
    소은 박공 중회 에 대한 제문〔祭素隱朴公 重繪 文〕 -손재집 제8권 / 제문(祭文) : 박광일(朴光一, 1655~1723)숭정(崇禎) 세차(歲次) 임신년(1692, 숙종18) 10월 병자삭(丙子朔) 21일에 족숙(族叔) 광일(光一)이 술과 과일을 올리고 소은(素隱) 박수여(朴受汝)의 영연(靈筵)에 고합니다.아, 수여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인가. 그대의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명랑한 자질은 천부적으로 타고난 것이었고, 선(善)을 좋아하고 현자(賢者)를 좋아하는 마음은 지극정성이었지. 젊은 나이부터 바른길 가기 시작해, 힘껏 이치를 궁구하여 밝게 분변하고 독실히 실천하였네. 사물에 접할 때에는 중정(中正)으로 대처하였고 몸가짐은 예법을 따르니, 안으로 효도와 우애가 가정에 나타났고 밖으로 어질고 의로움이 친구들 사이에서 신뢰를 받았지. 이에 사문(斯文)이 의탁하고 오도(吾道)가 전해지게 되었는데, 불행히도 단명하여 지금 세상을 등지고 말았으니, 어찌 내가 하늘을 부르짖으며 통곡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아, 산이 무너진 뒤로 안앙(安仰)의 비통함이 더욱 심해진 데다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먼데 묵을 곳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그대마저 나를 버리고 떠나가니, 어찌 내가 하늘을 부르짖으며 통곡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아, 안중화(安仲和)와 박후로(朴後老)가 연이어 별세하였는데 이 두 친구가 별세한 달에 그대가 죽었구려. 용사(龍蛇)의 해도 아니건만 어찌하여 좋은 사람들의 불행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어리석은 내게 문제가 생기면 앞으로 누가 경계시켜 주며 과실이 있으면 앞으로 누가 살펴 주어, 나로 하여금 낭패를 당하지 않게 하겠는가. 세상에 외로이 남겨진 것이 마치 소경이 상(相 소경을 돕는 사람)을 잃은 격이니, 어찌 내가 하늘을 부르짖으며 통곡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아, 돌아가신 선생님이 지은 ‘솔개 날고 물고기 뛴다’는 시구는 그대의 학문이 이것을 말해 줄 만한 수준이었던 것이요, 파산(坡山) 사람과의 ‘공(公)’ 자에 대한 논변은 그대의 논의가 세도(世道)에 유익한 것이었네. 세속의 견문 밖으로 초연히 빠져나왔고, 많은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어 대던 날에 확고부동하였으니, 옛날의 이른바 ‘밤하늘에 장경성(長庚星)이 홀로 빛나고, 봄에 불어난 흙탕물로 인해 지주(砥柱)가 기울지 않는다’는 것이 그대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남쪽 고을에 오늘날 다시 그대 같은 사람이 있겠는가.아, 수여가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른 것인가. 오도(吾道)의 쇠퇴함이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른 것인가. 어찌 내가 하늘을 부르짖으며 통곡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영신(靈辰)은 머물지 않아 내일 장례를 치르게 되었으니, 술잔을 들고 길게 통곡하며 영원히 이별을 고한다네. 밝은 영령(英靈)은 나의 슬픔을 알아줄 것이오. 아, 슬프다. 흠향하시게.[주-D001] 소은 박공(素隱朴公) : 소은은 박중회(朴重繪, 1664~1691)의 호이다.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수여(受汝)이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89년(숙종15) 송시열이 제주(濟州)로 귀양 갈 때에 안여해(安汝諧) 등과 함께 배송(陪送)하였다. 한편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도 임영(林泳)에게 보낸 글에서 “광주의 박중회가 힘써 배워 얻음이 있었고 문예가 함께 나아가 남쪽에서 온 사람들이 모두들 칭찬하였는데 불행히 일찍 죽었다.”라고 하였다. 저서로 《소은집(素隱集)》이 전한다.[주-D002] 숭정(崇禎) …… 21일 : 박중회를 장사 지내기 전날이다. 박중회는 1691년 겨울에 마마[痘疹]에 걸려 같은 해 12월 18일에 별세하였고, 이듬해 10월 22일에 광주(光州) 정광산(淨光山)에 장례를 치렀다. 《素隱集 卷2 續編附錄 行狀》[주-D003] 족숙(族叔) 광일(光一) : 박중회의 아버지인 박광후(朴光後)는 박광일의 재종형이다. 《遜齋集 卷8 先考寓軒府君壙誌》 《性潭集 卷30 素隱朴公墓表》[주-D004] 산이 …… 비통함 : 위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심정을 표현한 말로, 여기서는 스승인 송시열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이른 것이다. 공자가 세상을 떠나기 1주일 전에 “태산이 무너지는구나. 들보가 쓰러지는구나. 철인이 시드는구나.[泰山其頹乎! 梁木其壞乎! 哲人其萎乎!]”라고 노래하였는데, 자공(子貢)이 이 노래를 듣고는 “태산이 무너지면 내가 장차 어디를 우러러보며, 들보가 쓰러지고 철인이 시들면 내가 장차 어디에 의지하겠는가.[泰山其頹, 則吾將安仰? 梁木其壞, 哲人其萎, 則吾將安放?]”라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禮記 檀弓上》[주-D005] 안중화(安仲和) : 안여해(安汝諧, 1657~1691)로,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중화, 호는 이병재(理病齋)이다. 어려서부터 경학과 성리학에 힘써 조예가 깊었다. 26세에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1689년(숙종15)에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스승인 송시열이 제주(濟州)로 귀양하게 되자, 찾아가 만덕사(萬德寺)에 머물면서 강학을 하고 돌아오기도 하였다. 《遜齋集 卷8 理病齋安公墓誌銘》[주-D006] 박후로(朴後老) : 박송령(朴松齡)의 자로, 생몰연대는 미상이다. 다만 안여해가 1691년 12월 15일에 별세하였고 박중회는 3일 뒤인 18일에 별세했으므로, 이 사이에 별세한 것으로 보인다. 박중회의 행장을 보면, 박중회와 박송령은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은 사이였다. 박중회가 죽으면 사용하려고 준비해 두었던 심의(深衣)가 있었는데 박송령이 먼저 죽자, 친구를 위해서 자신의 심의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素隱集 卷2 續編附錄 行狀》[주-D007] 용사(龍蛇)의 해 : 현인군자가 죽는다는 진년(辰年)이나 사년(巳年)을 말한다. 후한의 대유(大儒) 정현(鄭玄)이 죽을 때의 고사를 원용한 것인데, 정현의 꿈에 공자(孔子)가 나타나 이르기를 “빨리 일어나라. 금년은 용의 해이고 내년은 뱀의 해이니라.” 하였는데, 잠을 깨어 그 말을 비결로 맞춰 보고 자신이 죽을 것을 알았으며 그해 6월에 죽었다고 한다. 《後漢書 卷35 鄭玄列傳》[주-D008] 돌아가신 …… 것이요 : 송시열이 지은 〈요부(堯夫) 선생의 뜻으로 박수여(朴受汝)의 운에 차하다〉라는 시를 가리킨다. 그 내용은 “분분한 말로에 도가 참되지 못했는데, 오직 주자께서 성신을 이으셨네. 물고기 뛰고 솔개 날음 발명한 후엔, 천 년 동안 사람 없다 말하지 마오.[紛紛末路道非眞, 惟有閩翁繼聖神. 魚躍鳶飛揮發後, 莫言千載更無人.]”라고 하였다. 《국역 송자대전 권2 요부(堯夫) 선생의 뜻으로 박수여의 운에 차하다》[주-D009] 파산(坡山) …… 것이었네 : 송시열과 그의 제자인 윤증(尹拯)이 반목하는 이른바 ‘회니시비(懷尼是非)’가 일어나자 박세채(朴世采)는 어느 편을 들지 않고 중립적인 노선을 견지하였다. 이런 즈음, 파산에서 박중회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는데 박세채의 처신이 공정[公]한 행위라고 추키자 박중회는 〈공자설(公字說)〉을 지어 옳은 쪽으로 편들지 않는 행위를 비판하였던 것이다. 《素隱集 卷2 續編附錄 行狀》 《性潭集 卷25 素隱朴公墓表》[주-D010] 밤하늘에 …… 않는다 : 이와 비슷한 말이 《오백가파방대전문수(五百家播芳大全文粹)》 권8 〈하왕추사계(賀王樞使啓)〉에 보인다.[주-D011] 영신(靈辰)은 머물지 않아 : ‘영신’은 영구가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다. 원문의 ‘영신불류(靈辰不留)’는 발인하기 하루 전날 저녁에 지내는 조전(祖奠) 때 읽는 고사(告辭) 중에 있는 구이다.
    2020-12-28 | NO.276
  • 속잡록 2(續雜錄二)- 광주목 강등
    속잡록 2(續雜錄二) 산서(山西) 조경남(趙慶男, 1570~1641)이 저술한 야사(野史)갑자년 천계 4년, 인조 2년(1624년) 7월○ 광주목(光州牧)을 강등(降等)하여 광산현(光山縣)으로 만들었다. 역적 이괄과 연좌된 사람이 있었음.
    2023-08-08 | NO.275
  • 손재 박광일공 묘갈〔遜齋朴公墓碣〕 - 손재집
    손재 박공 묘갈〔遜齋朴公墓碣〕 - 손재집 묘갈 우암(尤菴) 문정 선생(文正先生)이 돌아가신 뒤, 그의 문인들 대부분이 호서와 호남에 흩어져 살았다. 배우는 자들이 날마다 도의(道義)를 강구하고 연마하였는데, 남방에서는 손재(遜齋) 박공 광일(朴公光一)이 그들의 선망이었다.공은 본관이 평양(平陽)으로, 대제학(大提學) 문숙공(文肅公) 박석명(朴錫命)이 우리 조선조에서 처음으로 현달하였다. 그 후 훈봉(勳封)을 세습하다가 교위(校尉) 박창신(彰信)이 있었는데, 박이공(朴而恭)이 자취를 감추고 남방에 숨어서 자손들은 마침내 광주(光州) 사람이 되었다. 창신교위로부터 5대를 내려가 우헌(寓軒) 박상현(朴尙玄)에 이르렀으니, 공은 우헌의 아들이다.어머니 고씨(高氏)가 공을 잉태했을 적에 국화가 뜰에 만개하는 꿈을 꾸었다. 우헌은 평소 《주역》에 조예가 깊었는데, 문정공이 말년의 지기(知己)로 인정하였다. 공은 어려서 《소학(小學)》을 배웠는데, 효제(孝悌)의 도리에 관해 듣는 것을 기뻐하였다.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사서(四書)와 《근사록(近思錄)》, 《계몽편(啓蒙篇)》, 《태극도설(太極圖說)》 등과 같은 여러 책들을 모두 읽었다.문정공이 봉산(蓬山)에 위리안치되었을 적에 공은 나이가 스물 셋이었는데, 부친의 명에 따라 폐백을 갖추어 배알하였다. 선생은 공의 영특함을 기뻐하여 오래도록 힘써서 큰 학문을 이루라고 격려하였다. 공은 이때부터 거경궁리(居敬窮理)가 성문(聖門)의 요결(要訣)임을 알고 부지런히 힘써서, 의심스럽거나 잘 모르는 곳이 있으면 한결같이 선생께 나아가 바로잡아 식견(識見)이 정밀해졌다. 요씨(饒氏)가 이(理)를 본(本)으로 삼고 사(事)를 말(末)로 삼은 잘못을 논함에 이르러서는 선생이 매우 칭찬하며 “물을 담더라도 새지 않겠구나.[置水不漏]”라고 하였고, 선생이 조정의 명을 받아 《주자대전(朱子大典)》을 교열할 적에는 공에게 참석하여 확인하기를 요청하였다.기사년(1689, 숙종15)에 선생이 탐라로 유배를 갈 때 절간에서 바람을 기다렸는데, 공은 사우들과 함께 송별하는 기회에 호연장(浩然章)의 문답과 괘변설(卦變說)을 질문하여 문득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선생이 초산(楚山)에서 화를 입을 적에 수암(遂菴) 권공(權公 권상하(權尙夏))과 함께 들어가 영결을 고하였는데, 선생은 권공을 돌아보면서 “괘변(卦變)의 뜻은 사원(士元)의 설이 가장 명확하다.”라고 하셨으니, 사원은 공의 자(字)이다.공은 이후로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문을 닫아건 채 학문을 강마하였다. 우헌공이 일찍이 나무틀로 혼천의(渾天儀)를 제작하였는데, 공이 대바구니를 사용하여 그 제도를 확대시키자, 우헌공이 놀라면서 기뻐하였다.공은 부친을 여읜 뒤 스스로 분발하여 “내가 불행히도 아버지와 스승을 잃었으니, 공력을 백배로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사람이 될 수 있으랴?”라고 하고는 심사숙고하고 배움을 실천하느라 먹고 자는 일조차 거의 잊었으니, 호남의 학자들이 우르르 그에게 달려갔다. 당시 수암(遂菴)이 황강(黃江)에 있었는데, 공은 편지를 보내 경전(經傳)의 뜻을 논변하였다. 수암은 그때마다 적확(的確)하고 타당하다고 칭찬하였으며, 가끔은 자신의 견해를 버리고 공의 설을 따르기도 하였다.신사년(1701, 숙종27)에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되었지만 병 때문에 사양하였으며, 익위사 시직(翊衛司侍直)과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연달아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지리산 문수동(文洙洞)에 터를 잡고 거처하며 산수를 즐기면서 그 사이에서 자적하였다.정유년(1717)에 시강원 자의(侍講院諮議)에 배수되었지만, 여러 번 상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문정공이 사당(邪黨)에게 무고와 모욕을 당하자, 공은 상소문 말미에서 통렬히 분변하면서 그들을 토벌하고 복수할 뜻을 드러냈지만, 상소를 올리지는 않았다. 체직되어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에 제수되었지만 또한 사양하였다.신축년(1721, 경종1)과 임인년(1722)에 화가 일어나 문정공이 도봉서원(道峯書院)에서 출향(黜享)되자, 공은 애통해하면서 “백성들이 아마도 오랑캐가 되리라.”라고 하였다. 장암(丈菴) 정공 호(鄭公澔)가 남쪽으로 이배(移配)되어 마을을 지나치자 공은 찾아가 뵙고 새벽까지 학문을 논하였다. 간암(艮菴) 이공 희조(李公喜朝)가 낭주(朗州 전라도 영암)에서 서쪽으로 유배지를 옮길 적에 간암이 세상의 앙화를 근심하자, 공은 혀를 차거나 위로하는 말도 없이 다만 “평파왕복(平陂往復)은 하늘의 일입니다.”라고 하였다.공은 숭정(崇禎) 을미년(1655, 효종6)에 태어나 계묘년(1723, 경종3) 12월 임신에 세상을 떴는데, 임종 하루 전날까지 친구들에게 손수 답장을 쓸 정도로 정신과 기운이 온전하였다. 병이 깊어져 가족들이 부둥켜안고 울자, 공은 그들을 위해 밤과 낮의 이치로 타일렀다. 공이 세상을 뜨자, 광주의 정광산(凈光山)에 장례를 지냈다.아내는 청천 정씨(菁川鄭氏)로 현감(縣監) 정택주(鄭宅周)의 딸인데, 공보다 4년 먼저 세상을 떴다. 큰아들 중휘(重輝)는 일찍 죽었고, 둘째 중거(重擧)는 생원을 지냈으며, 딸은 진덕유(陳德維)에게 시집갔다.중거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생원 휘진(徽鎭)은 중휘의 후사가 되었고, 한진(漢鎭)은 진사(進士)이며, 하진(夏鎭)은 생원이다. 중휘의 딸들은 이경일(李慶一)과 양종원(楊宗元)에게 시집갔고, 중거의 딸들은 이진희(李晉禧),조석옥(曺錫玉),서진호(徐震灝)에게 시집갔다.휘진의 아들은 성호(聖浩),성회(聖淮),생원 성은(聖溵)이고, 딸들은 정술선(鄭述善),이정근(李貞根)에게 시집갔다. 한진의 아들은 성준(聖濬),성온(聖溫),성탁(聖濯)이고,딸은 이원(李烜)에게 시집갔다. 하진의 아들은 성발(聖潑)이고, 딸들은 이성태(李成泰),송영순(宋英淳),김몽석(金夢舃)에게 시집갔다.공은 수려하고 화락하며 기상과 도량이 편안하고 중후하였다. 남과 어울릴 적에는 온화하고 관대해서, 보기만 해도 군자임을 알 수 있었다. 항상 비바람을 가릴 수 없었지만, 느긋하게 처하였다.우헌공은 벗들과 강설(講說)하기를 좋아해서 객들이 늘 자리에 가득했는데, 공은 힘을 다해 뒷받침하여 우헌공으로 하여금 그 살림이 어려운 것을 알지 못하도록 하였다. 부모님의 병이 심해졌을 때마다 모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드시게 하고 상중에는 예를 다하였으며, 해마다 먼 조상들의 묘를 수리하여 여러 종친들과 우호를 다졌다. 그의 학문은 가정에 뿌리를 두고 마침내 대현(大賢)을 목표로 삼았기에, 이 때문에 문로(門路)가 바르고 실천이 돈독하였으니, 어진 부형(父兄)과 사우(師友) 없이 덕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은 드물기 마련이다.공은 일찍이 《나소변무(羅疏辨誣)》와 《진호문답(晉湖問答)》을 저술하여 사문(斯文)을 위해 시비(是非)를 가렸으며, 또 벽에다 ‘숭정일월(崇禎日月)’이라고 크게 써 놓고 때때로 〈출사표(出師表)〉와 담암(澹菴)의 상소문을 암송하며 비분(悲憤)한 심정을 달랬다. 문정공이 주자를 독실하게 믿었고 공이 문정공을 독실하게 믿었던 까닭에, 이단을 물리치고 대의를 밝힌 것이 이와 같았다. 또한 그가 베푼 경설(經說)에는 자득(自得)한 뜻이 간간이 있었으나, 요컨대 주자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다. 뒷날 반기를 들며 스스로 깨우쳤다는 사람은 유독 무슨 심보인가? 공과 같은 분은 이 노인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집안에는 명성도(命性道)와 삼재(三才), 태극(太極)에 관한 도설(圖說), 하도(河圖)의 생수(生數)와 성수(成數), 고괘(蠱卦)에 관한 선후의 갑설(甲說)[蠱卦先後甲說], 차기(箚記), 면재(勉齋)의 오행설변(五行說辨) 등 몇 권의 책이 보관되어 있다.중거(重擧)가 와서 명(銘)을 지어 달라고 청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우리의 스승은 자양(紫陽)의 뒤를 이었도다.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는 해와 달인데, 아! 사설(邪說)이 홍수보다 심하여라. 내가 들은 말 있으니 하늘은 잊지 않아서, 힘쓰고 부지런하면 비색한 운이 형통하게 되리라. 주작영(朱雀影) 가운데 우뚝 솟은 한 기둥이라 하였으니, 수옹의 이 말로 명을 삼을 수 있으리라. 삼주(三州) 이재(李縡)는 삼가 짓다.[주-D001] 문정 선생(文正先生) :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가리키는데, 그의 시호가 문정이다.[주-D002] 박석명(朴錫命) : 1370~1406. 여말선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순천이고 호는 이헌(頤軒)이다. 1385년(우왕11)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 판서를 지냈고, 태종 때에 좌명 공신(佐命功臣)에 봉해졌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주-D003] 봉산(蓬山) : 1675년(숙종1) 6월 이후에 송시열이 유배 가 있던 경상도 장기(長鬐)의 이칭이다.[주-D004] 요씨(饒氏) : 송나라 말기의 이학가(理學家)인 요노(饒魯)를 가리킨다. 그는 여간(餘干) 사람으로, 자가 백여(伯與), 중니(仲尼)이며, 황간(黃幹)의 문하(門下)로서 석동서원(石洞書院)을 세우고 강학하였다. 그의 학문은 주희를 근본으로 하였으나, 주희의 학설을 그대로 고수하지만은 않았다. 《오경강의(五經講義)》, 《어맹기문(語孟紀聞)》, 《근사록주(近思錄注)》 등을 저술하였다.[주-D005] 초산(楚山) : 정읍(井邑)의 옛 이름으로, 1689년에 송시열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그해 6월에 나국(拿鞫)의 명을 받고 상경하다가 그달 8일에 정읍에서 사사(賜死)되었다.[주-D006] 황강(黃江) : 충청북도 청풍(淸風) 일대의 남한강 유역에 있었던 고을 이름이다. 지금은 충주(忠州)댐 건설로 인해 수몰되었는데, 권상하(權尙夏)가 이곳에서 제자를 양성하였다.[주-D007] 문수동(文洙洞) : 지리산에 있는 골짝 이름으로, 구례군(求禮郡) 토지면(吐指面) 오미리(鰲尾里)에서 문수사(文洙寺)까지 이르는 계곡을 가리킨다.[주-D008] 장암(丈菴) …… 이배(移配)되어 : 정호는 1722년(경종2) 유봉휘(柳鳳輝)와 조태구(趙泰耈)를 논척하다가 이산(理山)으로 귀양을 갔는데, 그해 10월에 다시 강진(康津)의 신지도(薪智島)로 옮겨 갔다. 《陶菴集 卷49 領議政丈巖鄭公行狀》[주-D009] 간암(艮菴) …… 적에 : 이희조는 1722년에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노론 사대신(老論四大臣)이 주살되자, 이들과 결탁했다는 죄로 문외출송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1월에 영암(靈巖)으로 정배되었다가, 11월에 철산(鐵山)으로 이배되었다. 《黎湖集 권29 芝村李先生行狀》[주-D010] 평파왕복(平陂往復) : 필연적인 세상의 변천을 뜻한다. 《주역》 〈태괘(泰卦) 구삼효(九三爻)〉에 “평탄한 것은 반드시 기울어질 때가 있고, 가는 것은 반드시 돌아올 때가 있다.[無平不陂, 無往不復.]”라고 한 데에서 온 말이다.[주-D011] 출사표(出師表) : 제갈량(諸葛亮)이 출정하기에 앞서 한(漢)나라 유선(劉禪)에게 올린 글인데, 전후 두 편으로 되어 있다. 〈전출사표〉는 선제(先帝)의 은혜에 대한 감격과 국가에 대한 충성 및 후주(後主)에 대한 간절한 부탁을 담고 있으며, 〈후출사표〉는 위(魏)와 촉(蜀)이 양립할 수 없음을 피력하고 중원(中原)으로 진출하여 싸워야 함을 주장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三國志 卷30 蜀書5 諸葛亮傳》[주-D012] 담암(澹菴)의 상소문 : 담암은 송나라 때의 명신(名臣) 호전(胡銓)의 호이다. 그는 일찍이 금(金)나라와의 화의(和議)를 적극 반대하여, 당시 화의를 주장하던 진회(秦檜)ㆍ손근(孫近)ㆍ왕륜(王倫) 등의 목을 베라는 상소를 올렸다. 《宋史 卷374 胡銓傳》[주-D013] 반기를 …… 사람 : 윤휴(尹鑴)와 박세당(朴世堂)을 가리킨다. 윤휴는 《독서기(讀書記)》라는 저서에서 《중용》과 《대학》 등 주요 경전을 해석하면서 주자(朱子)의 설을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해석하여 지탄을 받았다. 박세당은 《사변록(思辨錄)》이라는 저서에서 사서(四書), 특히 《중용》과 《대학》에 더욱 역점을 두어 해석하면서 주자의 설을 비판하고 독자적으로 해석하였다.[주-D014] 면재(勉齋) : 주희(朱熹)의 문인(門人)인 황간(黃榦)의 호이다. 황간은 자가 직경(直卿)이며, 복주(福州) 민현(閩縣) 사람이다. 저서로는 《경해(經解)》, 《중용총론(中庸總論)》, 《면재문집(勉齋文集)》 등이 있다.[주-D015] 자양(紫陽) : 안휘성(安徽省)에 있는 산 이름인데, 여기서는 송(宋)나라 주희를 가리킨다. 주희의 아버지 주송(朱松)이 안휘성(安徽省) 흡현(歙縣)에 있는 자양산(紫陽山)에서 독서하였는데, 주희가 그곳에 청사(廳事)를 자양서당(紫陽書堂)이라 하였으므로, 자양은 주희의 호(號)가 되었다. 후세 사람들이 흡현에 자양서원(紫陽書院)을 세웠다.[주-D016] 홍수(洪水) : 원문 ‘회양(懷襄)’은 회산양릉(懷山襄陵)의 준말이다. 큰물이 창일하여 산과 언덕을 둘러싸고 있다는 뜻으로, 수습할 수 없는 낭패의 지경에 이른 것을 가리킨다.[주-D017] 하늘은 잊지 않아서 : 《순자(荀子)》 〈부(賦)〉의 내용으로 “밝은 하늘이 회복되지 않아 근심이 끝도 없구나. 천 년 이후에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니 이것이 도의 당연함이다. 제자들이여 힘써 공부하라, 하늘이 잊지 않으리라.[皓天不復, 憂無疆也. 千秋必反, 道之常也. 弟子勉學, 天不忘也.]”라고 하였다. 지금의 시련에 굴하지 않고 자신을 수양해 나아가면 언젠가는 바른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는 당부의 말이다.[주-D018] 주작영(朱雀影) …… 있으리라 : 주작영은 남쪽 7수(宿)의 별자리 이름으로, 흔히 중국의 최남단을 가리킨다. 이 구절은 우리나라 남쪽의 전라도에 박광일이 우뚝해서 든든했었다는 말이다. 《손재집》 권1의 〈세상을 탄식하는 노래를 수암에게 부치다[歎世吟寄呈遂菴]〉라는 시의 하단에 〈수암이 화답하다[遂菴所和]〉란 시가 부기(附記)되어 있다. 이 시의 전문(全文)은 “태산이 무너져 도가 멀어지려 하니, 시운이 바야흐로 양이 시드는 가을에 이르렀네. 주작영 속에 기둥 하나 우뚝하니, 이 늙은이 이제부터 근심하지 않으리라.[泰山頹矣道將幽, 時運方當大往秋. 朱雀影中亭一柱, 老夫從此不搔頭.]”라는 내용이다.
    2020-12-28 | NO.274
  • 송 김회옹 부 화평부서(送金晦翁赴化平府序)
    송 김회옹 부 화평부서(送金晦翁赴化平府序) - 동문선 제85권 :  가정(稼亭) 이곡(李穀, 1298~1351) 화평부(化平府)에 부임하는 김회옹(金晦翁)을 전송한 시의 서문 - 가정집 제10권 / 서(序) : 가정(稼亭) 이곡(李穀)내가 도하(都下, 중국 연경燕京)에 있을 적에 듣자니 새로 수령(守令)으로 제수된 자들이, “어떤 주는 장기(瘴氣)가 있어 살 수 없다. 어떤 현은 그 습속이 완악하고 어리석어서 다스릴 수 없다고 하거나, 그 다음에는 고향과 거리가 너무 멀어 가기가 어렵다. 봉급이 박하여 청렴을 유지하기 어렵다.” 하며, “전관이 임소에서 죽었으니 어찌 그 주에 갈 마음이 있겠는가. 전관이 벼슬 운수가 좋지 않았으니, 어찌 그 현을 맡을 생각이 나겠는가.” 하는 따위의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무릇 중국의 선비라고 해서 어찌 어질고 어리석은 자가 없겠는가만 사생(死生)과 궁달(窮達)을 밖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에 이르러서는 동일하니, 대개 그 습속이 아직 올바른 때문이다. 이러므로 중국이 중국답게 된 까닭이다.내 친구 회옹(晦翁)이 광주(光州)로 가게 되자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근자에 광주를 얻은 자는 전관이 임소에서 죽었다 해서 흔히 기피하고 사면하는 처지니, 옹은 반드시 임소에 가서는 안 된다.” 하니, 옹은 말하기를, “어허, 광주는 장기가 없으니 내가 살 수 있고, 백성이 비록 완악하고 어리석을지라도 따로 법의 조문이 있으니, 내가 다스릴 수 있고, 내 고향과 거리가 가까우니 내가 어찌 가기를 꺼리리오. 그 봉급이 비록 박하다 하지만 오히려 나날이 태창미(太倉米)를 꾸어 먹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천하 고금에 수(壽)를 못한 자는 다 광주에 벼슬살이한 자였던가. 그 벼슬운이 좋은 자는 다 광주에 제수되어도 사면하고 부임하지 않은 자였던가.” 하였다. 회옹의 말이 얼마나 옳은 말인지 옛날 도성에서 들은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나는 나도 모르게 무릎을 치며 일어나서 말하기를, “옹의 이번 걸음은 분명 다섯 가지 이익이 있을 것이다. 남이 버리는 것을 나는 취하였으니 반드시 정사에 장구(長久)할 것이니 하나요, 착한 정사가 오래가면 백성이 그 복을 받게 될 것이니 둘이요, 정사가 성공하여 성적이 제일이라 임금의 부름을 받게 될 것이니 셋이요, 옹이 이미 소환되면 대신하는 자가 반드시 어질 것이니 넷이요, 어진 자가 뒤를 이으면 광주가 반드시 다시 흥기하리니 다섯이다. 옹은 그 점을 기억할지어다.” 하였다.우리 동네 예전과 달리 쓸쓸하기만 한데 / 井邑蕭條異舊時원님 친구 전송하며 시만 괜히 읊조리네 / 送人作郡謾吟詩흥이 일면 술 마실 짝이 어찌 없으리오 / 興來飮酒寧無偶그다지 어리석지 않은 나의 동년이 있느니 / 我有同年不甚癡[주-D001] 화평부(化平府) : 전라도 광산현(光山縣)의 고려 때 이름이다. 원래 백제의 무진주(武珍州)였는데, 고려 태조(太祖) 23년에 광주(光州)로 고쳤다. 1258년(고종 45)에 공신 김인준(金仁俊)의 외가의 고향이라서 승격하여 익주 지사(翼州知事)의 고을이 되었고, 뒤에 또 승격하여 무진주가 되었다. 1310년(충선왕 2)에 화평부로 강등되었다가, 1362년(공민왕 11)에 무진주로 다시 회복되었고, 1373년에 다시 광주라고 칭하였다.[주-D002] 김회옹(金晦翁) : 회옹은 김연(金曣)의 호이다.[주-D003] 날마다 …… 것 : 두보(杜甫)의 시에 “날마다 태창에서 닷 되의 쌀을 사 먹는다.〔日糴太倉五升米〕”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3 醉時歌》[주-D004] 남이 …… 점이다 : 백거이(白居易)의 시에 “지방 장관으로 오랜 기간 정사를 편 뒤에야 풍교를 돈후하게 할 수가 있는 것이다.〔長吏久於政 然後風敎敦〕”라는 표현이 있다. 《白樂天詩集 卷2 贈友》[주-D005] 원님 …… 읊조리네 : 가정(稼亭) 자신은 고을 하나 맡아서 나가지 못하고, 친구가 부임하는 것을 전송하며 시를 짓기나 한다는 뜻의 해학적인 말이다. 동진(東晉)의 나우(羅友)가 성격이 호방하고 구속을 받기 싫어하는 탓으로 환온(桓溫)에게 중용(重用)이 되지 않던 중에, 어느 날 태수(太守)로 부임하는 어떤 사람의 송별연에 뒤늦게 참석하여 환온에게 질책을 받자, “길에서 만난 귀신이 나를 보고는 ‘나는 당신이 태수로 부임하는 다른 사람을 전송하는 것만 보았지 다른 사람들이 태수로 부임하는 당신을 전송해 주는 것은 보지 못했다.〔我只見汝送人作郡 何以不見人送汝作郡〕’라고 야유하였다.”고 해학적인 답변을 하였는데, 이때 속으로 꽤나 부끄러움을 느낀 환온이 나중에 그를 양양 태수(襄陽太守)로 임명했다는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任誕》[주-D006] 흥이 …… 없으리오 : 광주에 가 있는 김연이 불현듯 생각나서 찾아가고 싶어지는 때가 있으리라는 말이다. 진(晉)나라 왕휘지(王徽之)가 눈 덮인 달 밝은 밤에 산음(山陰)에서 홀로 술을 마시다가, 불현듯 섬계(剡溪)에 있는 벗 대규(戴逵)가 보고 싶어지자, 밤새도록 배를 몰고 그 집 앞에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와서는, 흥이 일어나서 찾아갔다가 흥이 다해서 돌아왔다고 말한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任誕》
    2020-09-15 | NO.273
  • 송기로(宋綺老) 광주목사 화순 겸임
    호남계록(湖南啓錄)  / 고종(高宗) 22년(1885)3월 11일전라도 화순 겸임 광주 목사(和順兼任光州牧使) 송기로(宋綺老)가 봉진하여 온 4월령(月令) 진상입니다.청대죽(靑大竹) 25개광서 11년 3월 11일관찰사 겸 순찰사 신 윤(尹)전라도 운운(云云) 진상의 수목(數目)과 물종(物種)은 위와 같습니다.광서 11년 3월 11일관찰사 겸 순찰사 신 윤(尹)
    2023-08-14 | NO.272
  • 송생 명행기(宋生名行記) - 석주집 별집 제2권
    송생 명행기(宋生名行記) - 석주집 별집 제2권 : 권필(權韠,1569~1612)군의 이름은 타(柁)이고 자는 시정(時正)이며 호남 사람이다. 정유년(1597, 선조30)에 왜적이 호남을 도륙할 때 군은 무안현(務安縣)에서 피난하였는데 밤중에 가다가 길을 잃어 적에게 사로잡혔다. 적의 배가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가려 할 때 군이 보니 적이 열 명도 채 못 되고 한 배에 포로로 탄 조선 사람이 많았다. 이에 몰래 한 배에 탄 사람들과 모의하여 틈을 타서 적의 칼을 빼앗아 적을 거의 다 베어 죽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한 명의 적이 물에 몸을 던져 도망쳐서 다른 적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 때문에 군은 적의 수중을 벗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군은 죽음에 임해 큰 소리로 외치기를 “나는 광주(光州) 송 아무개의 아들 아무개이다. 불행히 적의 수중에 떨어졌고 이제 또 불행히 죽게 되었다. 포로로 잡혀 배에 탄 그대들이 혹 조만간 적의 수중을 벗어나 귀환하거든 우리 부모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기 바란다.” 하였다. 그리고 4년 뒤 경자년(1600)에 강태초 항(姜太初沆)이 일본에서 돌아와 이 사실을 상세히 말해 주었다.아아! 군은 평소에 기도(氣度)가 한아(閑雅)하며 몸이 여위고 섬약하여 마치 옷을 가누지 못할 듯하였으니, 바로 일개 서생일 뿐이었다. 그러나 환난에 빠졌을 때 기회를 틈타서 계책을 세워 칼로 적을 쳐 죽이고 마침내 떳떳하게 죽었으니, 열렬한 장부가 아니면 이러할 수 있겠는가. 군이 죽을 때 나이 31세였다.군은 어려서 모친을 잃고 계모를 섬김에 효성을 다하였으며, 아우와 누이를 대할 때 터럭만큼도 차별을 두지 않았다. 나는 군에게 매서(妹壻)가 된다. 예전에 내가 누차 중병에 걸려 걸핏하면 몇 달을 앓아누웠는데 군이 정성을 다해 탕약을 보살펴 옷에 띠를 풀지 않고 간호한 것이 여러 날에 이르기도 했다. 그리하여 내 병이 낫고 나서야 그만두었다. 아아! 나는 여기서 군의 인(仁)을 알았고, 군의 죽음에서 또 군의 용(勇)을 알았다. 아아! 군 같은 사람이야말로 옛날의 이른바 선인(善人)이 아니겠는가. 살아 있을 때 곤궁했고 죽을 때는 참혹했으니, 세상 사람들이 그저 하는 말로 “하늘은 선인을 저버리지 않는다.” 하는 것을 나는 믿지 못하겠다.군이 적의 포로가 된 뒤로 군의 아우 장(檣)이 부모를 모시고 북쪽으로 갔다. 진원현(珍原縣)에 이르러 허물어진 집에 들어가 쉬는데 왜적 한 명이 느닷없이 들이닥쳤다. 적이 부모를 해칠까 두려워 곧바로 나가서 왜적을 유인해서 가다가 도중에 왜적에게 다른 동료가 없는 것을 보고 그 왜적을 때려 죽였다. 그리고 돌아가려 할 때 또 다른 왜적에게 사로잡혀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들어갔다. 적장이 그를 사랑하여 머물러 있게 하려고 미녀 세 사람을 내어 놓고 마음대로 골라서 가지게 했으나 그는 받지 않고 날마다 도망쳐 우리나라로 돌아올 궁리만 하였다. 지금 우리나라에 돌아오지는 못했으나 뜻은 가상하기에 그 사실을 덧붙여 둔다.경자년(1600, 선조33) 섣달 5일에 기록한다.[주-D001] 강태초 항(姜太初沆) : 1567~1618. 자는 태초이고 이름이 항이며 호는 수은(睡隱)이다. 정유재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싸우다가 일본에 피랍되었다. 그 후 오사카에서 성리학을 전파하는 동시에 일본 정세를 조선에 보고하였다. 1600년에 돌아왔다. 저서에 《간양록(看羊錄)》, 《수은집(睡隱集)》 등이 있다.[주-D002] 옷을 가누지 못할 : 매우 몸이 약하고 공손한 모습을 형용한 것이다. 주공(周公)이 부친 문왕(文王)을 섬길 때에 너무도 공손하여 “몸은 옷을 가누지 못할 듯하고 말은 입 밖에 나오지 못할 듯했다.〔身若不勝衣 言若不出口〕” 한다. 《淮南子 氾論》《小學 稽古》
    2020-09-21 | NO.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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