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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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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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응시-奉次疊韻錄呈苔軒文右兼叙燕賀
    平生睡足古光城 千里脩程十日輕不獨靑山曾面目 眞憐石友舊心情數詩珎重筒先遞 一棹參尋雪已晴似報春風將起蟄 送君長樂聽鍾聲-백록유고(白麓遺稿) 七言律신응시(辛應時, 1532-1585)의 자는 군망(君望)이며, 호는 백록(白麓)이다.
    2018-06-16 | NO.240
  • 신응시-用光山板上韻
    病肺經旬久 폐병 든 지 열흘이나 지나頹然在牖東 무너지듯 창 동쪽에 있도다.人傳三尺雪 사람들 눈이 석 자나 쌓였다 말하고耳慣五更風 귀는 오경의 바람에 익숙하도다.近臘年垂盡 섣달에 가까우니 해가 다 되었고還家夢屢空 집에 돌아오니 꿈이 자주 비도다.何時登喜慶 언제쯤 희경루에 오를고.雲樹望千重 바라보니 운수가 천 겹이로다. -백록유고(白麓遺稿)신응시(辛應時, 1532-1585)의 자는 군망(君望)이며 호는 백록(白麓)이다.
    2018-07-26 | NO.239
  • 신응시-赴光山道中 口占近體一首 錄呈霽峯 仰索和敎 非敢言詩 只要瓊報耳
    分憂百里養專城 恩較君親孰重輕 擁雪板輿南去日 隔雲金闕北歸情 地經錦水悲前躅 天入湖山喜遠晴 舊按使今新牧伯 愧無歌頌作先聲(先人嘗爲公山通判 奉母歷入 不勝悲感 故頸聯及之)-백록유고(白麓遺稿)신응시(辛應時, 1532~1585)의 자는 군망(君望)이며 호는 백록(白麓) 이다.
    2018-07-10 | NO.238
  • 신응시-만절정, 사암 박상공을 위해 짓다(晩節亭 爲思庵朴相公作)
    一曲溪山萬勝專  한 구비의 시내와 산은 온갖 승경을 독점하였고繞亭松樹政堪憐  정자를 감싸고 있는 소나무는 정녕 사랑스럽다.千章擁翠層雲合  빽빽이 들어선 나무는 푸르름 둘러 높은 구름과 합쳐있고十里聞聲爽籟傳  십리 밖에서 소리 들어도 상쾌한 가락 전한다.不獨大材棟樑用  큰 재목으로 동량에 쓰일 뿐만 아니오須看正色雪霜前  눈과 서리 앞에서 정색한 그 모습을 보니相公佳篇寧無意  상공의 아름다운 시는 어찌 뜻이 없으랴取比他年晩節全  훗날 만절의 온전함을 비유하였네-사암집(思菴集) 卷7
    2018-07-27 | NO.237
  • 신즙-題光山極樂亭
    路出光山縣 길을 나섰더니 어느덧 광산현行登極樂亭 내친 김에 극락정을 오르는데江分平野闊 강은 둘로 나뉘고 들은 광활하고雨洗遠峯靑 비는 먼발치 푸른 산을 씻어내네宇宙身如葉 드넓은 세상에 이네 몸은 한낱 작은 잎새風塵鬢欲星 풍진에 살쩍만 희어갈 뿐浮生長役役 떠도는 인생 모질게도 길기만 하여猶記昔曾經 옛일을 가슴에 묻고 다시 길을 재촉할 뿐이네.河陰先生文集 卷之三 題光山極樂亭  경북 상주 출신 하음河陰 신즙申楫(1580~1639)이 호남기행湖南紀行 중 광산의 극락원에 달린 극락정極樂亭에서 읊은 시다.
    2018-07-17 | NO.236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5권 / 전라도(全羅道) 광산현(光山縣)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5권 / 전라도(全羅道) 광산현(光山縣) 동쪽으로 창평현(昌平縣) 경계까지 18리, 남쪽으로 화순현(和順縣) 경계까지 21리, 남평현(南平縣) 경계까지 28리, 서쪽으로 나주(羅州) 경계까지 47리, 북쪽으로 진원현(珍原縣) 경계까지 21리이며, 서울까지의 거리는 7백 2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무진주(武珍州)인데, 일명 노지(奴只)라고도 한다. 신라가 백제를 빼앗은 뒤 그대로 도독(都督)을 두었다. 경덕왕(景德王) 16년에 무주(武州)로 고치고, 진성왕(眞聖王) 6년에 견훤(甄萱)이 습격하여 의거하고 후백제(後百濟)라 칭하다가, 이윽고 전주(全州)로 도읍을 옮겼다. 궁예(弓裔)가 고려 태조를 정기태감(精騎太監)으로 삼으니, 태조는 해군을 거느리고 쳐들어와 주의 경계를 대략 평정했는데 성주(城主) 지훤(池萱)이 견훤의 사위로서 굳게 성을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태조 19년에 이르러 신검(神劍)을 쳐서 멸망시키고 23년에 광주(光州)라 고쳤다. 지금 《고려사》를 상고하건대, 천복(天復) 3년에 궁예가 태조에게 명하여 수군을 거느리고 서해로부터 광주 경계까지 가서 금성(錦城)을 쳐서 빼앗게 했다. 개평(開平) 3년에 또 태조를 시켜서 전함을 수리하고 가서 광주와 진도군(珍島郡)을 쳐서 빼앗게 했다. 뒤에 또 광주 서남쪽 반남현(潘南縣) 포구(浦口)에 이르러, 압해현(壓海縣) 수적(水賊) 능창(能昌)을 잡아 궁예에게 보냈다. 태조 즉위 19년 친히 신검(神劍)을 칠 적에 영마성(營馬城)에 주둔하니, 신검은 그의 아우 정주성주(菁州城主) 양검(良劍)과 광주성주(光州城主) 용검(龍劍)과 함께 와서 투항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무주(武州)를 광주(光州)라고 부른 것은 견훤 때부터였으니 태조 23년에 비로소 광주라 칭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고려의 사신(史臣)이 추후에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데, 그렇다면 나머지 주현(州縣)은 모두 당시의 이름으로 기록했는데 광주만 그렇게 기록했을 것인가. 생각하건대, 견훤이 후에 광주라 하고 무주라 하여 다 함께 불렀다가 이해(태조 23년)에 이르러 광주로 정한 것인가 한다. 정확히 아는 사람을 기다린다. 성종 15년에 강등하여 자사(刺史)가 되고 후에 또 강등하여 해양 현령(海陽縣令)이 되었다. 고종 46년 공신 김인준(金仁俊)의 외가의 고향이므로 승격하여 익주 지사(翼州知事)가 되고, 후에 또 승격하여 무진주(武珍州)가 되었다. 충선왕 2년에 강등하여 화평부(化平府)가 되고, 공민왕 11년에 무진부(茂珍府)라 개칭했다. 혜종(惠宗)의 휘(諱)를 피해서 무(武) 자를 무(茂) 자로 고쳤다. 22년 다시 광주라 칭하고 목(牧)을 삼았으며 본조에 와서도 그대로 따랐다. 세종 12년에 그 고을 사람 노흥준(盧興俊)이 목사(牧使) 신보안(辛保安)을 때렸으므로, 노흥준을 장형(杖刑)에 처하여 변방으로 쫓아 보내고 강등하여 무진군(茂珍郡)으로 만들었다가 문종 원년에 옛날대로 복구하고, 성종 20년에 판관(判官) 우윤공(禹允功)이 날아온 화살에 맞았는데 조정에서는 그 고을 사람의 행위인가 의심해서 강등하여 현을 만들고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신증』 연산군 7년에 다시 주(州)가 되었다.【관원】 목사ㆍ판관 각 1인. 【군명】 무진(武珍)ㆍ무주(武州)ㆍ광주(光州)ㆍ해양(海陽)ㆍ익주(翼州)ㆍ화평(化平)ㆍ무진(茂珍)ㆍ익양(翼陽)ㆍ서석(瑞石).【성씨】 본현 탁(卓)ㆍ이(李)ㆍ김(金)ㆍ채(蔡)ㆍ노(盧)ㆍ장(張)ㆍ정(鄭)ㆍ박(朴)ㆍ진(陳)ㆍ허(許)ㆍ번(藩)ㆍ성(成)ㆍ승(承), 유(庾) 촌성(村姓)이다. 김(金) 개성(開城), 정(程) 한산(韓山), 신(申) 고흥(高興), 최 강진(康津). 양고(良苽) 김(金) 경지(慶旨)ㆍ벽진(碧津)도 같다. 【풍속】 백성 중에 어진 사람이 많다. 성임(成任)의 시에 있다. 【형승】 전라도의 거읍(巨邑)이다. 《고려사》 악지(樂志)에 있다. 모든 봉우리는 중첩하고 온 골짜기는 구불구불 하도다.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있다. 남국의 웅장한 번진(藩鎭)이다. 이집(李集)의 시에, 광주는 남쪽 지방의 가장 큰 번진이라 하였다. 한 도의 요충지이다. 신숙주(申叔舟)의 기(記)에 있다. 【산천】 무등산(無等山) 현의 동쪽 10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며, 일명 무진악(武珍岳) 또는 서석산(瑞石山)이라고도 한다. 하늘같이 높고 큰 것이 웅장하게 50여 리에 걸쳐 있다. 제주도의 한라산, 경상도의 남해(南海)ㆍ거제도(巨濟島) 등이 모두 한눈에 들어온다. 이 산 서쪽 양지 바른 언덕에 돌기둥 수십 개가 즐비하게 서 있는데 높이가 백 척이나 된다. 산 이름 서석(瑞石)은 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날이 가물다가 비가 오려고 할 때나 오랫 동안 비가 오다가 개려고 할 때에는 산이 우는데 수십 리까지 들린다. ○ 세속에 〈무등산곡(無等山曲)〉이 있는데, 백제 때 이 산에 성을 쌓자 백성들이 이에 편안히 살면서 즐거워 부른 것이라 한다. 양림산(陽林山) 현의 서쪽 2리에 있다. 삼각산(三角山) 현의 북쪽 5리에 있다. 건지산(巾之山) 현의 남쪽 25리에 있다. 하늘이 비를 내리려면 이 산이 울어 그 소리가 수 리까지 들린다. 어등산(魚登山) 현의 서쪽 30리에 있다. 벽진(碧津)ㆍ생압도(生鴨渡) 둘 다 현의 서쪽 30리에 있다. 선암도(仙巖渡)ㆍ병화로진(幷火老津) 둘 다 현의 서쪽 40리에 있다. 건천(巾川) 현의 남쪽 5리에 있다. 무등산 서쪽 산록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흘러 칠천(漆川)으로 들어간다. 칠천(漆川) 현의 북쪽 30리에 있다. 담양(潭陽)과 창평(平昌)의 물이 합쳐 서쪽으로 흘러 칠천이 되고, 벽진ㆍ생압도ㆍ선암도ㆍ병화로진을 거쳐 나주(羅州)의 경계로 들어간다. 혈포(穴浦) 칠천에서 동쪽으로 갈라진 곳이다. 풍혈(風穴) 규봉사(圭峯寺) 곁 석벽 아래에 있다. 길이가 한 자이고 너비가 다섯 치이며, 바람이 불다 그쳤다 한다. 속칭 그 석벽을 풍혈대(風穴臺)라 한다. 보지지(普智池) 현의 남쪽 40리에 있다. 금물제지(今勿梯池) 현의 남쪽 5리에 있다.『신증』 장원봉(壯元峯) 곧 무등산의 지봉(支峯)이다. 속설에 향교가 옛날에는 이 봉우리 아래에 있었는데, 이 고을 사람 중에 장원하는 자가 많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생겼다 한다. 용연(龍淵) 주의 남쪽 25리에 있는데, 날이 가물어 기우제를 지내면 효험이 있다 한다. 【토산】 감ㆍ차ㆍ석류ㆍ꿀ㆍ철(鐵) 무등산 장불동(長佛洞)에서 생산된다. 사기그릇[磁器] 현의 동쪽 석보리(石保里)에서 생산된다. 지황(地黃)ㆍ죽전(竹箭) 현의 남쪽 양림산(陽林山)에서 생산된다.『신증』 대추ㆍ호두[胡桃]ㆍ매실ㆍ밤ㆍ붕어[鯽魚].【성곽】 읍성(邑城) 돌로 쌓았다. 주위가 8천 2백 53척이고, 높이가 9척이며, 안에 우물 백 개가 있다. 『신증』 【궁실】 객관(客館) 성현(成俔)의 〈중수기(重修記)〉에, “한 도(道)에서 중요한 곳은 주(州)와 같은 곳이 없고, 한 고을(邑)에서 긴요한 거주지는 관사(館舍)만한 것이 없으니, 주는 고을이 큰 것이고, 관사는 손님들을 대접하고 여행자를 보호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사에는 동서에 헌(軒)이 있는데, 동헌(東軒)에는 귀인들이 와서 머물고 관찰사가 재판하기 위하여 송사를 듣는 곳이니, 아기(牙旗)와 절월(節鉞)이 세워지고 문안(文案)과 간독(簡牘)이 놓여져, 백성들이 모이면 반드시 그 구조와 뜰을 장엄하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위엄을 느껴 바라보고 두려워하게 한다. 그리고 사화(使華)와 빈객들이 연회하는 곳이니, 가무가 베풀어지고 술잔들이 널려져, 위로는 읍양(揖讓)과 주선(周旋)하는 것이 용납되어야 하고, 아래로는 진퇴(進退)와 보무(步武)가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반드시 마루와 집이 넓어야 합당하다. 그러므로 정치를 잘하는 이가 퇴폐되고 쓰러진 것을 수리하고 세울 때에는 백성들이 그 수고로움을 잊으며, 정치를 잘 못하는 자는 처음도 두렵고 끝도 두려워, 기와 한 장, 서까래 한 개를 바꾸지 못하는데도 그 고을은 날로 쇠폐해 간다. 지금 설순조(薛順祖)는 첨추(僉樞)로서 지방에 나와 주목(州牧)이 되고 최영(崔榮)은 그의 보좌가 되어, 정치가 화평하고 송사가 잘 다스려지며, 시절이 태평하고 농사가 풍년 들어서, 재해를 만난 만물들이 따뜻한 어머니를 만난 듯, 시들고 병든 백성들이 소생하여 숨쉬게 되어서 모든 퇴폐했던 것이 다시 일어나고, 사방에는 근심이 없어졌다. 드디어 사람들이 서로 꾀하여 말하기를, ‘광산(光山)은 도회지 중에서 큰 읍내가 되었으므로 사신의 행렬이 연락부절하고, 인물의 풍부함이 나주나 전주와 맞먹는다. 그런데 동헌의 규모가 협소하고 또 앞으로 세월이 오래되면 허물어질 염려가 있으니, 어찌 다시 고쳐 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별로 꾀함도 없이 동의하여 며칠 안 되어 준공하였는데, 새기고 깎고 한 것이 지극히 교묘하고, 짓고 만든 것이 지극히 커서, 비록 찌는 듯한 더위나 진저리나는 장마 때에도 손님이 와서 침울한 괴로움을 잊게 되었고, 비록 손님들이 모여들어 붐비게 되어도 각기 거처할 곳을 얻어 법도를 잃지 않게 되었다. 이런 뒤에야 이 고을과 걸맞게 되었다.최군은 내 친구이다. 편지를 보내어 나에게 기(記)를 청했고, 나는 광산 김씨에게서 태어났으니, 광산에 대하여 어찌 무정할 수가 있겠는가. 항상 광산 산천의 아름다움을 구경하고자 하였고 그 옛날 조상들의 근본이 되는 땅임을 추상하면서도, 호남지방에는 한 번도 발을 내디뎌 보지 못하고 지금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경연(經筵)에서 모시고 아침 저녁 강론하기에도 여가가 없고, 백발마저 드믄드믄하니, 비록 한 잔의 술을 가지고 두 사군(使君)을 모시고 동헌(東軒)에서 읍양(揖讓)하고 수작(酬酌)하고, 그 뒤에 물러나 부로(父老)들과 더불어 공황(龔黃 공수(龔遂) 황패(黃霸))의 덕을 칭송하며 즐거이 노래부르며 이야기하고자 하나 불가능하다. 이에 부득불 붓을 잡고 사실을 적어, 내 남쪽으로 가기를 바라는 뜻을 붙인다.” 하였다. ○ 고태필(高台弼)의 시에, “광산의 진산(鎭山)인 무등산(無等山)은 우뚝하여 해동에서 이름을 날리네. 옛날에는 좌막(佐幕)을 지냈는데 오늘날 또다시 풍화(風化)를 살피도다. 밤이 차니 벌레가 자리에서 시끄럽고, 구름이 걷히니 달이 하늘에 가득하구나. 객창에 근심으로 잠 못 이루니, 이별의 한이 더욱 겹치고 겹치누나.” 하였다. ○ 황필(黃㻶)의 시에, “이야기를 오래도록 하니 뜰의 끝[跋]이 보이고 발이 성그니 달이 동쪽에서 뜨는구나. 나그네 수심은 조돈(趙盾)의 말이요, 여기에 와 즐김은 고인의 기풍이로다. 오늘밤 잠깐 모임을 가졌으나, 내일 아침에는 도로 비게 되리라. 천리 멀리 서로 그리워하는 뜻은 바다와 산이 겹쳐있어도 막지 못하리.” 하였다. 【누정】 희경루(喜慶樓) 객관 북쪽에 있다. ○ 신숙주(申叔舟)의 기(記)에, “광산은 전라도의 거읍(巨邑)이다. 옛날에는 누각(樓閣)이 이 고을 치소(治所)의 북쪽에 있었는데, 이름을 공북루(拱北樓)라 했었으나 허물어진 지 이미 오래 되었다. 이번에 태수 죽산(竹山) 안철석(安哲石)이 부임하여 1년도 되지 않았는데, 정사를 다스리는 바쁜 가운데 틈을 내어 고을의 부로(父老)들을 모아 놓고 물었다. ‘고을에 유람할 장소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사실이오. 더욱이 광산은 이 도의 요충지로 사객(使客)이 벌 모이듯 하는데, 막히고 답답하고 깊고 가려져서 시원하게 해 줄 길이 없으니, 이를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니, 모든 부로들이 말하기를, ‘높고 밝고 시원스러운 땅으로는 공북루의 옛터 만한 곳이 없습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재목을 모아다가 집을 짓되 옛 건물보다 더 크게 지었는데, 몇 달이 안 되어 완성되었다. 그 칸수를 세어 보면 남북이 5칸이고, 동서가 4칸이니, 넓고 훌륭한 것이 우리나라에서 제일이었다. 동쪽으로는 큰 길에 닿았고 서쪽으로는 긴 대밭을 굽어 보며, 북쪽에는 연못을 파서 연꽃을 심고 동쪽에는 사장(射場)을 만들어 덕을 보[歡德]는 장소로 삼으니, 손님과 주인이 이제야 비로소 올라 쉬는 즐거움을 누리게 되었다. 이는 태수의 뜻을 고을의 백성들이 이루어 놓은 것이다. 그러나 경술년(庚戌年)에 이 고을 사람 중에 미련한 자가 있어 강등되어 무진군(茂珍郡)이 되었다. 사건은 애매한 데서 생겨서 위로 산천 귀신으로부터 아래로 향곡(鄕曲)의 노소에 이르기까지 모두 억울함을 참고 말하지 못한 지가 1년이 넘었는데, 지금 임금 원년 신미년 여름에 비로소 이 고을 사람 이선제(李先齊) 등이 꾀하여 말하기를, ‘상감께서 대통을 이어 등극하사 유신(維新)의 은택을 베푸시는데, 하나라도 알맞은 자리를 얻지 못할까 염려하시거든, 하물며 우리 주의 오래도록 억울한 것이겠는가.’ 하고, 드디어 이 고을의 부로와 관리들을 이끌고 함께 상소를 올려 간청했다. 그리하여 상감께서 특별히 옛 칭호로 회복하도록 명하시어 광주목(光州牧)이 되었다. 이러한 소식이 전해지고 마침 이 누각마저 낙성되자, 부로들은 모두 모여 태수에게 치하를 드리고 희경루라 이름을 짓자고 요청하니, 이는 고을 모든 사람의 기쁜 경사를 뜻하는 것이다. 태수가 좋다고 하고 또 이 신숙주가 이 고을 사람이라 하여 나에게 기문 지을 것을 명했다.대저 물건이 성취되고 허물어짐에는 운수가 있고 일이 흥하고 폐함에도 때가 있으나, 그 물건과 일에 있어서 시기와 운수가 물건에 합치되는 것에 이르러서는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 광주는 백제 때는 무진주 도독부(武珍州都督府)가 되었고, 신라에 들어와서는 무주(武州)가 되었으며, 고려 태조 때는 광주로 고쳐졌고, 성종 때에는 해양현(海陽縣)이 되었다가 고종 때 다시 광주로 승격되었고, 충선왕 때에는 화평부(化平府)가 되었으며 공민왕 때 다시 광주목이 되었다. 이조 때 와서도 강등되었다가 또 승격되었다. 한번 승격되고 한번 강등되어 흥하고 폐하는 것이 잇달았는데, 역시 각기 그 때가 있었다. 하물며 이 누각을 지음에 있어서도 오랫동안 허물어져 있다가 기공하여 낙성하였으니, 그 시기와 만남이 반드시 운수가 있었던 것이다. 광주는 무등산으로 진산을 삼았으니, 이 산은 남방의 거악(巨嶽)으로 정기를 모으고 길상(吉祥)을 내려 우리의 모든 위인을 낳았고 또 우리의 어진 태수를 얻었으니, 오늘에 이르러 폐했던 것이 흥하고 허물어졌던 것이 이루어진 것이 어찌 한갓 이 누각뿐이겠는가.” 하였다. 『신증』 허종(許琮)의 시에, “고향은 무수히 연기 낀 봉우리가 가렸는데, 이를 빌려 만리의 흉금을 털어놓도다. 두 눈의 풍류는 반드시 멋대로 보는데, 앞산의 송죽(松竹)만이 내 마음을 아는 친구로다. 모든 가지는 점점이 청춘의 빛을 드러내고, 사이 사이의 잎은 가리어 대낮에 그늘을 만드는구나. 서쪽으로 가고 북쪽에서 왔지만, 어찌 너 같은 것 있겠는가. 한 동이 술로 서로 유쾌하게 하여 마음을 변치 말 것이로다.” 하였다. ○ 유순(柳洵)의 시에, “열두 난간이 먼 산을 대했는데, 올라가 보니 고단한 손이 그윽한 흉금을 터놓을 만하다. 석류 꽃과 대잎은 아름다운 빛이고, 검은 제비 누른 꾀꼬리는 모두가 좋은 소리로다. 난간에 기대어서 단전(丹篆)의 짝을 부르고자 하고, 발을 걷어 올리니, 흰 구름 그늘에 누운 듯하도다. 이윽고 달이 돋아 높은 흥취를 더하니, 구구한 한 조각 마음이 없어지누나.” 하였다. ○ 성임(成任)의 시에, “호남 50고을 중에서 경치는 내 고향을 꼽는다네. 산은 높은 누각과 멀리 대하였고, 연못엔 좋은 달빛 잠겼어라. 대숲 깊은데 뜰은 고요하고, 꽃 가까우니 술잔도 향기롭구나. 물건마다 시흥을 돋우니, 어찌 봄낮이 긴 줄을 알랴.” 하였다. 황화루(皇華樓) 객관 북쪽에 있다. 봉생정(鳳笙亭) 황화루 동쪽에 있다. ○ 정창손(鄭昌孫)의 시에, “황화루가 아득히 고대(高臺)를 누르니, 고대 주위에는 꽃만이 제대로 피었구나. 봉황은 날아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데, 부질없이 남은 한 쌍의 나무가 푸르름을 보내 오는구나.” 하였다. 【학교】 향교(鄕校) 현의 서쪽 2리에 있다. 옛날에는 성안에 있었는데, 현감 권수평(權守平)이 이리로 옮겼다. 『신증』 성현(成俔)의 기(記)에, “경신년(庚申年) 11월 표제(表弟) 상사(上舍) 박이온(朴以溫)이 와서 〈광산학기(光山學記)〉를 써 달라고 한다. 현감 권수평이 부임해온 이래 마음을 다해 백성들을 사랑하고 길러 병든 백성들이 은혜를 흡족하게 입었으니, 고을의 피폐한 것들이 모두 없어지고, 옥에는 갇힌 사람이 없었으며, 교활한 관리가 그 간교한 꾀를 부리지 못하였다. 이에 백성들이 편안하여 한 지아비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동리가 평안하여 도적이 없었고, 정치가 공정하고 송사(訟事)가 없어져서 장부와 문서가 적어졌다. 매양 공무를 보는 틈을 타서 친히 유생(儒生)들을 이끌고 경학(經學)을 담론하여 이끌어 주고 깨우쳐 주며, 도와 주고 인도해 주는 것이 모두 합당했다. 학교가 전에는 성안에 있었는데, 낮고 습하고 좁고 퇴락하여 허물어졌었다. 현감이 부로(父老)들을 불러들여 말하기를, ‘선성(先聖)의 거소(居所)로는 맞지 않는데 어찌 새로 지을 것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하니, 모든 부로들이 모두, ‘좋습니다.’ 했다. 그리하여 성의 서쪽 2리쯤에 터를 잡고 공사를 시작했는데, 모든 현민들이 줄을 이어 모여들기를 마치 자식이 어버이를 좇아 일하는 것같이 하여 몇 달 만에 일이 끝났다. 먼저 성전(聖殿)을 지어 오성(五聖)과 십철(十哲)을 안치하고, 또 동서에 행랑을 지어 70제자와 역대의 여러 현인을 안치했다. 앞에는 명륜당(明倫堂)을 두어 강학(講學)하는 곳으로 삼고, 또 동쪽과 서쪽에 협실(俠室)을 두었으니, 동쪽에 있는 협실은 교관(敎官)이 앉는 곳이고, 서쪽에 있는 협실은 사마재(司馬齋)라 했는데, 이 고을의 상사(上舍 진사(進士))가 우거하면서 학업을 닦는 곳이며, 또 동쪽과 서쪽에 재(齋)를 두었으니, 여기가 곧 유생들이 거처하는 곳이다. 또 서재(西齋) 뒤에는 전사청(奠祀廳)이 있고, 동재 뒤에는 교관들의 사무실이 있다. 이에 신과 사람이 모두 편안하고 스승과 학생이 집이 있으며, 당(堂)과 창고와 부엌과 목욕탕이 각각 있을 곳에 있어 무려 60여 칸이나 되었다. 학교 앞에 있는 백성의 밭 수백 묘(畝)를 현감이 돈을 내어 사들여, 혹은 논을 만들고 혹은 채마전을 만들고 혹은 종들이 있을 집을 만들었으며, 또 옛 향교의 터를 모두 학교에 예속시켜 밭을 만들었다. 또 백성의 밭은 사서 반은 학교로 들여보내고 반은 사마재(司馬齋)로 들여보냈으며, 또 무명 백 필과 조세(租稅)로 들어오는 곡식 백 석, 콩 20석으로 학생의 소용에 충당시켰고, 무명 20필, 조세 곡식 20석은 상사인(上舍人)들의 소용으로 쓰게 했다. 또 사서(四書)ㆍ오경(五經)ㆍ제자(諸子)ㆍ운서(韻書)를 갖추어 책장에 비장해 놓아 열람할 수 있게 했다. 이때 감사(監司) 이숙함(李叔瑊)과 도사(都事) 정탁(鄭鐸)은 그 뜻을 가상히 여겨 감영(監營) 중에 있는 무명 30여 필, 조세 곡식 70여 석을 내주어 비용을 도와주었으니, 이로 인해 유풍(儒風)이 크게 진작되고 문화의 교화가 더욱 밝아져서 고을 사람 중에 준수한 인물이 여기에 와서 놀았는데, 배울 때에는 깊이 탐구하고 애써 찾는 뜻을 가져 정진하고 수련하는 공이 그치지 않았으며, 제사를 지내면 마치 앞에 계시듯 정성을 다하여 나쁘고 편벽된 마음이 들어오지 못했다. 그런 뒤에는 광산의 학교가 다른 읍보다 성하고 인재가 찬연하게 배출되었다. 그 뒤에 선생께서도 광산 출신의 후예이니, 원컨대 전말을 적어 그 아름다움을 길이 장식하게 하여 달라고 하였다.나는 생각건대, 공자(孔子)의 도는 지극하다. 하늘과 땅이 만물을 덮어주고 기르듯이 그 크기를 다했으며, 해와 달이 비치듯이 그 밝기를 다했으며, 하해(河海)가 넓고 깊듯 하여 헤아릴 수 없으며, 산악이 높고 험한 듯하여 미칠 수 없다. 고금을 통하여 변함이 없어 모든 사물이 고루 구비되어 있으며, 인륜이 이를 의지하여 베풀어지고, 정교(政敎)가 이를 의지하여 행해지고, 존비(尊卑)와 상하(上下)가 이를 의지하여 문란하지 않고, 왜곡된 말과 간사한 말이 이를 의지하여 방자해지지 않으며, 중국의 인물과 사물이 이로 말미암아 옷을 왼쪽으로 여미는 오랑캐가 되는 것을 면했나니, 이것을 따르면 다스려지고 따르지 않으면 어지러워진다. 이를 버리면 한 때도 살지 못하므로 안으로는 서울로부터 밖으로는 주(州)ㆍ군(郡)ㆍ현(縣)에 이르기까지 문묘(文廟)를 숭상하여 제사지내지 않는 이 없고, 학교를 세워 이를 가르치지 않음이 없으니, 어찌 까닭 없는 일일 것인가. 우리나라는 본래 문헌(文獻)의 나라이며, 광산은 의관(衣冠)과 진신(縉紳)을 배출하는 지방이었는데, 또 현명한 태수를 만나 추(鄒)ㆍ노(魯)의 교화를 이루었으니, 촉군(蜀郡)의 문옹(文翁)의 기풍은 이 아래에 든다고 할 것이다. 그런즉 이 광산의 백성된 것이 어찌 행복하지 않겠는가. 오직 광산 백성들의 행복일 뿐 아니라 또한 조정 풍교(風敎)의 일대 다행인 것이다.” 하였다. 【역원】 경양역(景陽驛) 현의 동쪽 8리에 있는데 승(丞)을 두었다. 본도에 속한 역은 여섯이니, 덕기(德奇)ㆍ가림(加林)ㆍ인물(人物)ㆍ검부(黔富)ㆍ창신(昌新)ㆍ대부(大富)가 그것이다. ○ 승(丞) 1명이다. 『신증』 지금 임금 5년에 승을 혁파하고 찰방(察訪)을 두었다. 선암역(仙巖驛) 현의 서쪽 40리에 있다. 수여원(水餘院) 현의 서쪽 33리에 있다. 증원(甑院) 현의 서쪽 45리에 있다. 최정원(崔鄭院) 현의 남쪽 25리에 있다. 저원(猪院) 현의 동쪽 20리에 있다. 보통원(普通院) 현의 북쪽 2리에 있다. 분수원(分水院) 현의 남쪽 5리에 있다. 장록원(長祿院) 현의 서쪽30리에 있다. 견암원(堅巖院) 현의 남쪽 18리에 있다. 혈보원(穴洑院) 현의 북쪽 25리에 있다. 누문원(樓門院) 현의 북쪽 5리에 있다.『신증』 극락원(極樂願) 주의 서쪽 30리에 있다. 진국원(鎭國院) 주의 북쪽 40리에 있다. 신원(新院) 주의 서쪽 45리에 있다. 【불우】 무량사(無量寺)ㆍ천복사(薦福寺)ㆍ개룡사(開龍寺)ㆍ원효사(元曉寺) 모두 무등산(無等山)에 있다. 성거사(聖居寺) 성거산(聖居山)에 있다. 십신사(十信寺) 현의 북쪽 5리 평지에 있는데 범어(梵語)로 쓴 비가 있다. 선원사(禪院寺) 현의 동쪽 2리 평지에 있다. 증심사(證心寺) 무등산에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잣나무는 뜰 앞에서 푸르고, 복사꽃은 언덕 위에서 붉구나. 어찌 반드시 지경 밖에서 찾으랴, 다만 둘려 있는 속에서 찾을 것이로다. 막힌 경내에서는 마음도 끝까지 막히나니, 말[言]을 잊어야 도가 비로소 통하는 것이다. 누가 이 절 이름을 지었는가. 묘한 이치를 홀로 깊이 궁리하였도다.” 하였다. 『신증』 규봉사(圭峯寺) 무등산에 있다. 절 옆에 세 개의 돌이 있는데, 높이가 수백 척이 되어 삼존석(三尊石)이라고 한다. 또 열 개의 대(臺)가 있는데, 송하(送下)ㆍ광석(廣石)ㆍ풍혈(風穴)ㆍ장추(藏秋)ㆍ청학(靑鶴)ㆍ송광(松廣)ㆍ능엄(楞嚴)ㆍ법화(法華)ㆍ설법(說法)ㆍ은신(隱身)이라고 이름한다. 세상에 전하기를, 도선(道詵)이 이 대 위에 두루 앉아서 송광(松廣)의 산세를 본 다음 절을 창건했다고 한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이상한 모양이라 이름을 붙이기 어렵더니, 올라와 보니 만상(萬像)이 공평하구나. 돌 모양은 비단으로 말라낸 듯하고 봉우리 형세는 옥을 다듬어 이룬 듯하다. 명승을 밝으니 속세의 자취가 막히고, 그윽한 곳에 사니 진리에 대한 정서가 더해지누나. 어떻게 속세의 인연을 끊을까, 가부(跏趺)하고 앉아 무생(無生)을 배우노라.” 하였다. 금석암(錦石庵) 무등산에 있다. ○ 김극기의 시에, “지격이 궁벽하니 인적이 끊어졌는데, 봉우리와 숲이 천만겹이로다. 길은 시내 비[溪雨]에 깨끗하고, 문은 고개의 구름으로 봉하였다. 상쾌한 퉁소 소리는 바람 대[風竹]에서 나고, 맑은 그늘은 달 아래 소나무 따라 돌아간다. 도인(道人)은 원래 관장하지 않고서 길이 자금용(紫金容 불상)에 예를 올린다.” 하였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鄕校)에 있다. 무등산 신사(無等山神祠) 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신라 때는 소사(小祀)를 지냈으며, 고려 때는 국제(國祭)를 올렸다. 동정원수(東征元帥) 김주정(金周鼎)이 각 관청의 성황신(城隍神)에게 제사를 지낼 때 차례로 신명(神名)을 불러 신의 기이함을 징험했다. 그런데 이 광주의 성황신이 큰기[纛旗]의 방울을 울린 것이 세 번이었기 때문에 김주정이 조정에 보고하여 작위를 봉했다. 본조에 와서도 춘추로 본읍에 명하여 제사를 올리도록 했다. 성황사(城隍祠) 현의 남쪽 5리에 있다. 금당산 신사(金堂山神祠) 현의 남쪽 10리에 있다. 용진연소(龍津衍所) 현의 서쪽 30리에 있다. 춘추에 본읍에서 제사를 올린다. 여단(厲壇)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석서정(石犀亭) 현의 남쪽 2리에 있다. ○ 이색(李穡)의 기(記)에, “광주(光州)의 지리는 삼면이 모두 큰 산이고 북쪽만이 평탄하게 멀리 틔어 있다. 남산 계곡에서 흘러 나오는 물은 둘이 있는데 물의 근원이 또한 멀기 때문에 합류하면 그 형세가 더 크게 될 것은 알 수 있는 일이다. 매년 한 여름에 장마가 들면 세차게 흐르는 급류가 사납게 쏠려, 가옥을 파괴하고 전답을 깎아가서 백성의 피해가 적지 않으니, 수령 된 자가 어찌 크게 우려하지 않겠는가. 남산 아래에 분수원(分水院)을 둔 것은 옛 사람이 그 물의 형세를 감쇄(減殺)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끝내 그 물을 나누지 못했다. 그리하여 두 물이 교충(交衝)하는 곳에 돌을 쌓아 성을 만들고 물결을 조금 서쪽으로 돌렸다가 북쪽으로 흐르게 하니, 지세가 북쪽으로 조금 내려간지라, 그 지세를 따라 물이 천천히 흘러서 백성의 피해가 그제야 겨우 없어졌다. 이에 물의 옛 길에 정자를 짓고 그 한 중간을 거점(據點)으로 해서 보(洑) 물을 양쪽으로 흐르게 하니, 사면으로 정자를 두른 것이 마치 벽수(壁水)의 모양처럼 되었다. 정자의 전후에 흙을 모아 작은 섬을 만들어 두 곳에 모두 꽃나무를 심고 부교(浮橋)를 놓아 출입하게 하니, 그 가운데에 앉아 휘파람을 불면, 마치 바다에서 뗏목을 타고 앉아 섬들이 안개와 파도 사이로 출몰하는 것을 보는 것 같아 참으로 즐겁다. 위구르[回鶻]의 설천용(偰天用)이 남방을 유람할 적에 그 정자에 갔다가 이미 서울로 돌아왔는데, 목사(牧使) 김후(金侯 후는 지방 장관에 대한 존칭)가 서신을 보내어 정자의 이름과 기(記)를 요구하였다. 이에 나는 이렇게 말한다.대우(大禹)가 치수(治水)를 한 것이 우공(禹貢 서전(書傳)에 있는 편명) 한 편에 나타나 있는데 대개 물의 형세를 따라 인도했을 뿐이다. 진(秦) 나라 효문왕(孝文王)이 이빙(李氷)을 임용하여 촉(蜀) 땅을 다스리게 했는데, 이빙이 돌로 물소를 만들어 수재를 진압한 바가 있다. 역도원(酈道元)이 《수경(水經)》을 편찬함에 있어서는 그 돌물소가 이미 영구한 것이 아니었으나, 후에 물의 이해를 말하는 자가 반드시 이빙을 칭송한다 하였으니, 이는 이것을 통해 이빙의 마음씀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보(杜甫)가 노래를 지었으니, ‘다만 원기만 항상 조화롭게 된다면 홍수로 인한 민폐를 스스로 면할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장사를 얻어 하늘 그물[天綱]을 들어다가 또다시 돌물소를 바쁘게 부려서 수토(水土)를 잘 다스리게 할까.’ 하였다. 대개 원기를 조화시켜서 수토를 잘 다스리는 것은 이제(二帝)와 삼왕(三王)의 일이었는데 이제와 삼왕의 마음은 바로 후세에 진실로 있는 바로서 일찍이 잠시라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괴상하고 정도를 벗어난 말을 찾아 경국제세(經國濟世)의 영원한 정책으로 삼았으니, 여기에서 두보의 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러하나 공자가 일찍이 말하기를, ‘비록 조그마한 도로라도 반드시 볼 만한 것이있다.’ 하였거니와, 돌이 물을 진압한다는 사실은 어리석은 남자 어리석은 여자라도 다 아는 바이니 물소의 형상으로 만든 것도 반드시 그 이치가 있을 것이다. 포박자(抱朴子)가 말하기를, ‘물소를 조각하여 어함(魚銜)을 만들어 물에 넣으니 물이 석 자나 갈라졌다.’ 하였으니, 물소란 물건이 수재를 없앨 수 있다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다. 더구나 돌은 산의 뼈가 되고 물소는 또 물을 물리치는 것이니, 물이 이것을 피할 것은 틀림없다. 물도 이미 피할 줄 알고 또 아래로 인도하니, 지체없이 흘러 조금도 어긋남이 없어서 날로 비고 넓은 땅으로 향하여 도도히 흘러 바다에 이르고야 말리니, 물의 환란이 어디로부터 다시 일어나며, 읍의 주민들이 무엇 때문에 불안을 느낄 것인가. 이 정자를 지은 내력을 쓰면 마땅히 폄(貶)하는 예(例)에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돌물소[石犀]로 이 정자의 이름을 삼고, 두보의 〈석서행(石犀行)〉이란 노래를 취하여 근본을 삼으며, 또 《포박자》를 증거로 삼아, 《춘추(春秋)》의 법으로 단정하여 후대 사람으로 하여금 이 정자를 지음이 수재를 막기 위함이며, 백성의 삶을 편안하게 하기 위함이요, 한갓 놀고 관람하기 위하여 지음이 아님을 알게 하고자 한다. 이 정자에 오르는 자가 그 이름을 생각하고 뜻을 생각하면 반드시 김후(金侯)에 대한 경의가 우러나게 될 것이다. 김후의 이름은 상(賞)이며 재부(宰府)의 지인(知印)과 헌사(憲司)의 장령(掌令)을 역임한 바 있어서, 행정에 있어 청렴하고 능력있는 행정가로 이름이 높다.” 하였다. 고내상성(古內廂城) 현의 서쪽 30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1천 6백 81척이다. 무진도독고성(武珍都督古城) 현의 북쪽 5리에 있다. 흙으로 쌓았는데 주위가 3만 2천 4백 48척이다. 궁수(弓樹) 현의 성 남문 밖에 있다. 가지와 줄기가 둥근데 크기가 수십 아름이나 되고, 높이가 70여 척이나 된다. 고을 사람들이 잎이 일찍 피고 늦게 피는 것으로써 그해의 풍흉을 점쳤다. 지금은 말라죽었다. 양고부곡(良苽部曲) 현의 서쪽 15리에 있다. 경지부곡(慶旨部曲) 현의 서쪽 30리에 있다. 벽진부곡(碧津部曲) 현의 서쪽 20리에 있다. 【명환】 신라 천훈(天訓) 신라 문무왕 18년에 아찬(阿湌)으로서 나와 도독(都督)이 되었다. 김양(金陽) 흥덕왕 때 도독이 되었다.고려 이서(李舒) 공양왕 2년에 좌사의(左司議)로서 목사(牧使)가 되었다.본조 권담(權湛) 목사였다. 이영구(李英耈) 목사가 되어 나이가 많다고 사직하려 하자, 주(州)에서 상소하여 유임해 주기를 청했으므로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시켰다. 【인물】 신라 염장(閻長) 문성왕(文聖王) 8년에 장보고(張保皐)가 진(鎭)에 의거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 조정에서 토벌하고자 하나 이기지 못할까 걱정하여 유예하고 있었다. 이때 염장이 아뢰기를, “신의 계책을 들으시면 한 명의 병졸도 괴롭히지 않고 장보고의 목을 베어 바치겠습니다.” 하므로, 왕이 허락했다. 염장은 거짓으로 배반한 체하고 청해진(淸海鎭)으로 투항했다. 장보고는 그의 용감함을 사랑하여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상객(上客)으로 대접했다. 그래서 그와 더불어 마시고 즐기다가 취하자 장보고의 칼을 빼앗아 목을 자르고 그의 무리들을 불러 타이르니 군중이 감히 동요하지 않았다. 왕이 기뻐하여 아간(阿干)의 벼슬을 주었다.고려 김길(金吉) 태조를 도와 공이 있었으므로 벼슬이 사공(司空)에 이르렀다. 채순희(蔡順禧) 명종 때 조원정(曺元正) 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채순희가 입시(入侍)하여 공이 있었으므로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김주정(金周鼎)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침착하였으며 말이 적었고 망녕되이 사귀어 놀지 않았다. 부성위(富城尉)가 되었을 때 몽고병이 대거 침입하니, 김주정이 잘 조치하여 널리 칭송을 받았다. 원종 때 괴과(魁科)에 발탁되고 여러 번 승진되어 이부 시랑(吏部侍郞)이 되었다. 충렬왕 때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고, 원(元) 나라가 일본을 정벌하려 할 때, 김주정이 장수의 계략이 있다고 하여 소용대장군 좌부도통(昭勇大將軍左副都統)을 삼고 호두금패(虎頭金牌)를 하사하였다. 일본을 정벌하게 되어 대명포(大明浦)에 이르자 갑자기 대풍이 불어 배가 전복되고 수군들이 많이 빠져 죽었는데, 김주정이 계교를 써서 살린 자가 매우 많았다. 벼슬이 지도첨의사(知都僉議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김수(金須) 김길(金吉)의 후손이다. 담력과 지략이 뛰어났으며, 과거에 급제하자 어사(御史)를 거쳐 나와 영광군(靈光郡)의 지사가 되었다. 김태현(金台鉉) 김수(金須)의 아들로 어머니 고씨(高氏)가 꿈에 명성(明星)이 품에 들어오더니 태현을 낳았다. 일찍이 동무들과 선배[先進]의 집에서 공부했다. 선배의 집에 있는 딸이 새로 과부가 되었는데, 시를 좀 할 줄 알았다. 그 여자가 하루는 창틈으로 시를 던졌는데, “말 탄 사람 뉘 집의 백면서생(白面書生)인가, 3개월 동안 그 이름을 몰랐었도다. 이제야 그가 김태현인 줄 알았으니, 가는 눈 긴 눈썹에 가만히 정이 생기네.” 하니, 김태현은 이 시를 받은 뒤부터는 발길을 딱 끊고 그 집에 다시 가지 않았다. 충렬왕 때 과거에 급제하고 여러 번 승진되어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다. 성절(聖節)을 하례하기 위하여 원 나라로 갔는데, 때마침 원 나라 황제는 감숙성(甘肅省)에 가 있으면서 조서를 내려 여러 나라 사신들을 모두 경사(京師)에 머물러 있게 했다. 김태현이 중서성(中書省)에 말하기를, “경사에 머물러 있으라는 것은 황제의 명령이고, 감숙성의 행재소(行在所)까지 가는 것은 우리나라 임금의 명령입니다. 차라리 황제께 죄를 지을지언정 우리 임금의 명을 어길 수는 없습니다.” 하니, 중서성에서 허락했다. 드디어 행재소에 도착하니, 황제가 그 충성의 간절함을 가상히 여기고 크게 상을 주었다. 후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새로 급제한 사람들을 데리고 왕께 배알하니, 왕은 잔치를 베풀었다. 때마침 원 나라 사신 이 학사(李學士)가 자리에 있다가 왕에게 아뢰기를, “천하에는 이런 일이 없어지고 오직 귀국에만 고풍(古風)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감히 절하여 하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원 나라에서 정동행 중서성 좌우사랑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으로 제수하였다. 충숙왕 때 원 나라에서 보낸 사신이 와서 국왕의 인(印)을 가져갈 때, 마침 태현은 행성(行省)에서 서리로 있었다. 태현이 가족을 이끌고 동쪽 금강산으로 갔으니, 이는 혐의를 멀리 하기 위해서였다. 원 나라에서 또다시 역마(驛馬)로 급히 불러 태현으로 하여금 다시 행성의 일을 맡게 하였으나, 이해에 죽었다. 호는 쾌헌(快軒)이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아들은 광식(光軾)ㆍ광철(光轍)ㆍ광재(光載)ㆍ광로(光輅)가 있는데, 모두 과거에 급제했다. 광철ㆍ광재ㆍ광로는 계실(繼室) 왕씨(王氏)의 소생이다. 왕씨는 세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했으므로 해마다 나라에서 곡식을 내려 주었다. 김광철(金光轍) 벼슬이 판밀직(判密直)에 이르렀고, 화평군(化平君)에 봉해졌다. 김광재(金光載) 벼슬이 전리 판서(典理判書)에 이르렀다. 공민왕 때 두문불출하면서 지극한 효도로 어머니를 섬기고 장례 때에는 예를 다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가상히 여겨 사람을 보내어 교유(敎諭)하기를, “경과 더불어 말하고자 하는데 만날 수 있겠는가.” 하니, 광재는 병을 앓으면서도 들어가 뵈었다. 왕이 이르기를, “나이나 안색은 매우 쇠약하지 않았는데 이렇듯 병이 들다니.” 하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그가 사는 곳에 정문(旌門)을 세워 영창방 효자리(靈昌坊孝子里)라 하고, 그 동네의 약간 호수를 예속시켜 받들어 섬기게 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김회조(金懷祖) 김광철의 아들로 벼슬이 판도 판서(版圖判書)에 이르렀다. 김흥조(金興祖) 김광재의 아들로 호걸스러워 얽매이지 아니하였으며[倜儻], 벼슬이 중현군기감(中顯軍器監)에 이르렀다. 김심(金深) 김주정의 아들로 진국상장군 고려병마도원수(鎭國上將軍高麗兵馬都元帥)로 제수되었다가, 첨의정승(僉議政丞)을 지내고 화평부원군(化平府院君)이 되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김승진(金承晉) 김심(金深)의 아들로 공손하고 검소하며 충직하였고, 벼슬이 상호군(上護軍)에 이르렀다. 김적선(金積善) 김승진의 아들로 홍무(洪武) 연간에 남원도 병마사(南原道兵馬使)가 되어 왜병과 사포(沙浦)에서 싸웠고, 또 임실(任實)에서도 싸웠는데 모두 크게 승리했다. 벼슬이 중추원사(中樞院事)에 이르렀다. 정세운(鄭世雲) 공민왕을 따라 원 나라로 들어가 숙직하여 지켰고, 여러 번 승진되어 대호군(大護軍)이 되었다. 공민왕이 즉위하자 그 공이 일등에 책록되어 군부판서 지문하성사(軍簿判書知門下省事)가 되었으며, 기철(奇轍)을 죽이는데 일등의 공로로 기록되었다. 공민왕 8년에 홍건적이 서경(西京)을 함락하자, 세운이 서북면 도순찰사(西北面都巡察使)가 되어 황주(黃州)로부터 돌아와 아뢰기를, “홍건적이 서경으로 쳐들어와 목책을 쌓고 성을 수리하므로 공격할 계략이 없으니, 원컨대 놀라 들먹이지 말고 민심을 안심시키십시오.” 하였다.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다가 공민왕 10년에 홍건적이 서경을 함락하여 왕이 복주(福州 지금의 안동(安東))로 피난을 가니, 정세운은 추밀겸 응양군상장군(樞密兼鷹揚軍上將軍)으로 따라갔다. 그는 성품이 충직하고 결백하여 주야로 조심하고 분개하면서 적을 무찌르고 나라를 회복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여겼다. 이에 왕은 정세운으로 총병관(摠兵官)을 삼고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를 제수했다. 공민왕 11년에 그는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서울을 회복했으나, 이윽고 안우(安祐) 등에게 살해당했다. 공이 일등으로 책록되어 첨의정승을 추증하였다. 이홍길(李弘吉)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이르렀다. 탁광무(卓光茂) 높은 관직에 발탁되어 벼슬이 간의(諫議)에 이르렀다. 김속명(金續命) 성품이 청렴하고 강직하며 말을 용감하게 하였다. 공민왕 초에 감찰(監察)이 되어 법을 집행하는데 아부할 줄 몰랐으며, 후에 경상도 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가 되어 왜병들이 진해현(鎭海縣)을 침략하자, 속명이 급히 쳐서 크게 격파하니 왕은 기뻐하여 옷과 술과 금띠를 하사했다. 신우 때 삼사우부사(三司右副使)가 되었는데, 마침 반야(般若)의 사건이 생기니 그는 탄식하면서, “천하에 그 아버지를 분간하지 못하는 자는 혹 있어도 그 어머니를 분간하지 못하는 자는 내 듣지 못했다.” 하였다. 이인임(李仁任)이 사의(司議) 허시(許時) 등을 교사하여 그를 탄핵하게 했으나, 태후(太后)가 힘써 구하여 문의현(文義縣)으로 유배당했다. 죽은 후 충간(忠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공양왕 초에 윤소종(尹紹宗) 등이 글을 올려 그 억울함을 밝혀 포상(褒賞)과 시호를 추가해 주기를 애걸하므로 그의 자손을 책록함으로써 충혼을 위로했다. 김정(金鼎) 벼슬이 중대광광성군(重大匡光城軍)에 이르렀다. 본조 김첨(金瞻) 김회조(金懷祖)의 아들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우군총제겸 보문각제학(右軍摠制兼寶文閣提學)에 이르렀다. 탁신(卓愼) 탁광무(卓光茂)의 아들로 성리학(性理學)에 전심하니 탁광무가 말하기를, “우리집의 증삼(曾參)이다.” 하였다.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대성(臺省)의 벼슬을 여러 번 거쳐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정귀진(鄭龜晉) 두 번째로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이 여러 번 올라가 형조 참의(刑曹參議)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다. 김구경(金久冏) 두 번이나 문과에 급제하여 문명을 날렸으나 일찍 죽었다. 김약채(金若采) 김정(金鼎)의 아들로 고려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했다. 성품이 강개하여 강한 상대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일찍이 좌사의(左司議)로 있을 때 조반(趙胖)의 옥사를 다스리는데 참여했다. 염흥방(廉興邦)이 기필코 조반을 무복(誣服)시키고자 하여 매우 참혹하게 다스리니, 조반은 마구 욕을 하면서 조금도 굽히지 않고 말하기를, “내 너 같은 나라의 도적[國賊]을 베고자 한다. 너는 나와 서로 송사를 벌인 자인데, 어떻게 국문하느냐.” 하니, 염흥방이 노하여 사람을 시켜 그의 입을 마구 때리게 했다. 이때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일부러 자는 척, 못들은 척, 혹은 입을 함봉하고 감히 어떻다 말이 없었다. 다만 김약채만이 옳지 않다고 못하게 하니, 조반은 이로 인하여 사면되고 염흥방이 드디어 죽임을 당했다. 그리하여 조야(朝野)가 모두 통쾌하게 여겼다. 본조에 들어와서 여러 번 승진되어 충청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김약항(金若恒) 김약채의 아우로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번 승진되어 사헌부 장령을 지냈고, 우리 태조 4년에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명 나라 고황제(高皇帝)가 우리나라에서 올리는 하표(賀表)에 휘자(諱字)를 범했다 하여 그 표를 지은 사람을 불렀는데, 약항은 방물표(方物表)를 지었으므로 정총(鄭摠)과 함께 경사(京師)에 가니, 황제가 먼 국경지방으로 귀양을 보냈다. 태조는 그에게 자헌대부(資憲大夫) 광산군(光山君)을 내렸으나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다. 김청(金聽) 중국어를 잘 하였으며, 벼슬이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희정(僖靖)이다. 이선제(李先齊) 이홍길(李弘吉)의 손자로 과거에 급제하고 여러 번 승진되어 벼슬이 예문관 제학이 되었다. 김예몽(金禮蒙)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判書)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며, 문명(文名)이 있었다. 아들 김덕원(金德源)과 김성원(金性源)도 모두 과거에 급제했다. 김국광(金國光) 김약채의 증손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익대적개좌리공신(翊戴敵愾佐理功臣)으로서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해지고,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는 정정(丁靖)이다. 아들 김극유(金克忸)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간에 이르렀다. 김겸광(金謙光) 김국광의 아우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의정부 좌참찬에 이르고,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참여되어 광성군(光城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공안(恭安)이다. 노자형(盧自亨)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렀고, 이학(理學)에 정통하고 지조와 절개가 있었다. 이형원(李亨元) 이선제(李先齊)의 아들로 사람됨이 위풍과 거동이 단정하고 빼어났었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홍문관 부제학에 이르렀다. 성화(成化) 기해년에 통신사(通信使)로 일본에 가다가 대마도(對馬島)에 이르러 병이 나서 돌아왔는데, 결국 죽었다. 【효자】 고려 노준공(盧俊恭) 우왕 때 상례 제도가 폐지되고 없어져 모두 백일 동안 복을 입고 벗는데, 준공은 묘의 여막(廬幕)에서 3년을 지냈다. 【열녀】 고려 문씨(文氏)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강호문(康好文)의 아내이다. 신우 무진년에 왜구가 동리로 쳐들어 왔을 때 문씨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어린 것은 업고 큰 것은 이끌고 달아나 숨다가 붙들렸다. 왜구는 그녀의 목을 매어 핍박하며 앞서가게 했으며, 또 업은 아이를 버리라고 핍박했다. 문씨는 모면하지 못할 줄을 알고 곧 어린애를 보자기에 싸서 나무 그늘에 두고 큰 아이에게 말하기를, “너도 여기 있으면 데려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큰 아이는 굳이 쫓아 왔다. 그녀는 걸어 몽불산(夢佛山) 극락암(極樂庵) 근처에 이르렀는데, 거기에는 높이가 천 척이나 되는 낭떠러지가 있었다. 문씨는 함께 붙들려 가는 이웃집 여자에게, “적에게 더럽히면서 살기를 바라느니보다 깨끗한 몸으로 죽는 것이 낫겠소.” 하고 곧 몸을 날려 떨어졌다. 왜구들은 미처 말리지 못하고 욕만 되게 하면서 그 큰 아이를 죽이고 가버렸다. 그 낭떠러지 아래에는 담쟁이 덩굴이 있었고 창포풀이 또 빽빽했으므로 죽지는 않고 오른 팔만 부러져서 한참 있다가 소생했다. 마침 동네 늙은이들이 먼저 언덕의 구멍에 있다가 이를 보고 불쌍히 여겨 미음을 먹여 구했다. 3일 후에 왜구가 물러나자 곧 돌아오니, 동네 사람으로 경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김씨(金氏) 서운정(書雲正) 김언경(金彦卿)의 아내이다. 우왕 때 왜구가 갑자기 쳐들어 와 김씨를 붙잡아다 욕을 보이려 하자, 김씨는 “차라리 만 번 죽을지언정 욕을 당하지는 않겠다.” 하고 끝까지 굽히지 않으니 적이 죽이고 말았다. 본조 태종 때 정문(旌門)을 세웠다.본조 민씨(閔氏) 예조 정랑(禮曹正郞) 권극중(權克中)의 아내이다. 남편이 죽자 여막에서 3년상을 치르고 애통해 하는 것이 예를 넘었으며,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어 그대로 묘 곁에서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이 일이 조정에 보고되어 정려하였다. 【제영】 해북호양지(海北浩穰地)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바다 북쪽의 넓게 넘실대는 땅이라, 담장을 연하여 집짓기를 다투도다. 천 개의 봉우리는 많이 몰려왔고, 만 개의 골짜기는 굽이굽이 흘러가는도다. 들에 풍족한 것은 매매 우는 사슴이요, 강 속에 넉넉한 것은 펄펄 뛰는 물고기로다. 어느 골[洞] 이끼 위에서 단서(丹書)를 엿보는지 알고 싶구나.” 하였다. 수죽가가비취체(脩竹家家翡翠啼) 최원우(崔元祐)의 시에, “긴 대 집집마다 물총새 울고, 비가 한식을 재촉하니 물이 시내에 흐르는구나. 푸른 이끼 잔풀 관교(官橋) 길에, 떨어진 꽃이 말발굽에 밟힐까 걱정이로다.” 하였다. 산천웅일도(山天雄一道) 성임(成任)의 시에, “광산은 명승지라, 옛 일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득하구나. 부(府)라 칭한 것이 어느 시대며, 주(州)가 된 것이 몇 년이던가. 산천은 도 안에서 제일이요, 민재(民財)와 어진 사람 많다고 일컬어 왔네. 서헌(西軒) 마루 넓은 줄을 자못 깨달아 올라가 단편시 몇 수를 읊조리노라.”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연혁】 고종 23년에 군(郡)으로 고쳤다.《대동지지(大東地志)》【연혁】 본래 백제의 노지(奴只)이다. 인조 2년에 광산현으로 강등시켰다가 12년에 다시 승격시켰다.【방면】 성내(城內)ㆍ기례(奇禮)ㆍ부동(不動)ㆍ공수(公須) 위의 4면(面)은 모두 읍내에 있다. 상대곡(上大谷) 동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0리이다. 하대곡(下大谷) 동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0리이다. 편방(片方) 동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0리이다. 홍도(舡道)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30리이다. 석제(石堤) 북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5리이다. 덕산(德山)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25리이다. 왕소지(王所旨)ㆍ천곡(泉谷)ㆍ우치(牛峙) 모두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35리이다. 계촌(界村)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35리이다. 소지(所旨) 서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0리이다. 흑석(黑石)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35리이다. 내정(內丁)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25리이다. 당부(當夫) 위와 같다. 고내상(苦內廂)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35리이다. 군분(軍盆) 서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0리이다. 독산(禿山) 서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0리이다. 거치(巨峙) 서북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5리이다. 대치(大峙) 위와 같다. 마지(馬池) 서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25리이다. 황계(黃界)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효우동(孝友洞)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유등곡(柳等谷) 서남쪽으로 처음이 35리에 있다. 동각(東角) 서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5리이다. 마곡(馬谷) 서남쪽으로 처음이 35리, 끝이 40리이다. 방하동(方下洞) 서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35리이다. 대지(大枝) 서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와곡(瓦谷) 서북쪽으로 처음이 15리에 있다. 소고룡(召古龍) 서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55리이다. 지한(池漢) 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0리이다. 갈전(葛田) 북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55리이다. 칠석(漆石) 서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35리이다. 경양(景陽) 동쪽으로 10리에 있다. 석보(石保) 동남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5리이다. 미십보(彌十保) 동북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0리이다. 옹정(瓮井) 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5리이다. 지동(池洞) 남쪽으로 20리에 있다. 오치(梧峙)ㆍ부산(釜山)ㆍ도천(陶泉) 양고부곡(良苽部曲)은 서쪽으로 15리에 있고, 경지부곡(慶旨部曲)은 서쪽으로 30리에 있다. 【창고】 창(倉) 셋 읍내에 있다. 동창(東倉) 북쪽으로 20리, 천곡(泉谷)에 있다. 서창(西倉) 서남쪽으로 30리, 방하동(方下洞)에 있다. 성창(城倉) 북쪽으로 1백 리, 장성(長城)의 입암산성(立巖山城)에 있다. 【진도】 생압진(生鴨鎭) 서쪽으로 30리에 있으며 물이 빠지면 다리를 놓는다. 극락진(極樂津) 옛날에는 벽진(碧津)이라 불렀다. 서쪽으로 30리에 있으며, 겨울에는 다리를 놓는다. 선암진(仙巖津) 병화로진(幷火老津)이라고도 부르며 서쪽으로 40리에 있다. 황룡진(黃龍津) 서쪽으로 40리에 있으며 겨울에는 다리를 놓는다. 공락교(孔樂橋) 서쪽으로 30리에 있으며 물이 넘치면 배[丹]를 사용한다. 【토산】 왕대[篁竹]ㆍ닥종이[楮]ㆍ옻[漆]ㆍ뽕[桑].【정지】 경호정(鏡湖亭) 동쪽으로 5리에 있다. 공북정(拱北亭) 북쪽으로 5리에 있다. 양고정(良苽亭)ㆍ풍영정(風詠亭) 모두 서쪽으로 20리에 있다. 부용정(芙蓉亭) 서남쪽으로 30리에 있다. 【단묘】 무등산단(無等山檀) 신라 때에는 무진악(武珍岳)이라 부르고, 명산이라 하여 소사(小祀)로 모셨고, 고려 원종 14년에 봄과 가을에 무등산에서 제사지내도록 명령하였으며, 본조(本朝)에서도 봄과 가을에 제사지내도록 본읍에 명하였다. 용진연소단(龍津衍所壇) 서쪽으로 30리에 있다. 봄과 가을에 제사지내도록 본읍에 영(令)을 내렸다. 【사원】 월봉서원(月峯書院) 인조 병술년에 세우고 효종 갑오년에 사액(賜額)하였다. 기대승(奇大升) 자는 명언(明彦)이고, 호는 고봉(高峯)이며,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벼슬은 부제학(副提學)이었는데 이조 판서(吏曹判書) 덕원군(德原君)을 추증하였고,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박상(朴祥) 자는 창세(昌世)이고, 호는 눌재(訥齋)이며, 본관은 충주(忠州)이다. 벼슬은 나주 목사(羅州牧使)였는데 이조 판서를 추증하였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박순(朴淳) 박상의 조카이다. 개성(開城) 편을 보라. 김장생(金長生) 문묘(文廟)편을 보라. 김집(金集) 태묘(太廟) 편을 보라. ○ 보충사(褒忠祠) 선조 신축년에 세우고 계묘년에 사액하였다. 고경명(高敬命) 자는 이순(而順)이고, 호는 제봉(齊峯)이며, 본관은 장흥이다. 임진왜란 때에 금산(錦山)에서 순절하였다. 벼슬은 공조 참의(工曹參議)였는데 좌찬성을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고종후(高從厚) 진주(晉州) 편을 보라. 유팽로(柳彭老) 자는 군수(君壽)이고, 호는 월파(月坡)이며,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임진왜란 때에 금산에서 전사하였다. 벼슬은 학유(學諭)였는데 좌승지를 추증하였다. 고인후(高因厚) 자는 선건(善建)이며, 호는 학봉(鶴峯)이다. 고경명의 아들인데 임진왜란 때에 아버지와 함께 죽었다. 벼슬은 성균 권지(成均權知)였는데 영의정(領議政)을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의열(義烈)이다. 안영(安瑛) 자는 원단(元端)이고, 호는 사재(思齋)이며,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임진왜란 때에 유팽로와 함께 죽었으며 좌승지를 추증하였다. ○ 의열사(義烈祠) 선조 갑진년에 건립하고 숙종 신유년에 사액하였다. 박광옥(朴光玉) 자는 경환(景煥)이고, 호는 회제(懷齊)이며, 본관은 음성(陰城)이다. 벼슬은 봉상시 정(奉常寺正)이었는데 도승지를 추증하였다. 김덕령(金德齡) 자는 경수(景樹)이며,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선조 계사년에 의병장으로 충용장군(忠勇將軍)을 배명(拜命)받았는데, 병신년에 옥사하였다. 병조 판서를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오두인(吳斗寅) 파주(陂州州) 편을 보라. 김덕홍(金德弘) 벼슬은 지평이다. 김덕보(金德普) 벼슬은 집의이다. [주-D001] 풍화(風化)를 살피도다 : 이 말은 감사가 되었다는 말이다.[주-D002] 조돈(趙盾)의 말이요 : 예전 춘추 시대 진(晉) 나라의 대부(大夫)이다. 그는 조쇠(趙衰)의 아들인데, 어떤 사람이 그 부자를 평하여, “조쇠는 겨울의 햇빛 같아서 사람들이 따스한 것을 사모하고[冬日之日人懷其溫], 조돈은 여름의 햇빛 같아서 사람들이 뜨거운 것을 두려워한다[夏日之日人恐其烈].” 하였다.[주-D003] 단전(丹篆)의 짝 : 단전(丹篆)은 옛날 신선들이 읽은 글이니, 단전의 짝은 같은 신선이란 말이다.[주-D004] 추(鄒)……교화 : 추(鄒)는 맹자가 출생한 땅이요 노(魯)는 공자가 난 땅으로 그 유풍이 남아 교화가 잘 되어 있다 한다.[주-D005] 문옹(文翁) : 한 나라 촉군(蜀郡)의 태수로 문교(文敎)에 힘써서 정치를 잘하였다는 사람이다.[주-D006] 가부(跏趺) : 가부(跏趺)하여 앉는 것은 불가(佛家)에서 앉는 한 가지 자세이니, 앉아서 두 발바닥을 두 무릎 위에 올려 놓는 자세이다.[주-D007] 폄(貶)하는 예(例) : 공자가 《춘추》를 편찬할 때에 토목 건축(土木建築)을 때 아닌 때에 시행한 것은 모두 폄(貶)하여서 기록하였다.
    2020-09-23 | NO.235
  • 신천익(愼天翊) - - 연려실기술 제23권
    신천익(愼天翊), 계해정사(癸亥靖社) - 연려실기술 제23권 /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중략>○ 이후원 완남(完南) 이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있을 때 신천익(愼天翊)을 방문하였는데, 마당에 풀이 우거지고 완골 자리가 뚫어지고 헤져 있었다. 그의 벼슬하지 않는 뜻을 물었더니, 천익이 손뼉을 치고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어찌 뜻이 있어 벼슬하지 않는 것이리오. 다만 병 때문이오.” 하고, 또 손뼉을 치며 크게 웃는데 마치 곁에 사람이 없는 것 같이 하였다. 한참 뒤 이야기 끝에 “반정 초에 대간으로서 승평(昇平 김류)에게 가보니 승평이 먼저 파방(罷榜)하라는 논계를 정지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더라.” 하였다. 대개 천익의 뜻은 일대의 으뜸가는 훈신으로서 사의(私意)를 가진 것이 이와 같으니 시사(時事)를 알겠다고 한 것이다. 《청야만집(靑野謾輯)》
    2020-09-24 | NO.234
  • 심언광-喜慶樓記(희경루기)
    2018-07-26 | NO.233
  • 안방준 광주목사의 연보 중에서
    안방준(安邦俊, 1573~1654)隱峯全書附錄上 / 年譜隱峯先生年譜 중에서大明神宗皇帝萬曆元年癸酉 我宣祖大王六年 十一月丙申。二十日酉時 先生生于寶城郡梧野里。二十四年辛卯(1651) 先生79歲二月。修正老辣瀡辭。因跋其後。先生與延平李公貴。特以義氣許爲心交。至是延陽君李公時白,延城君李公時昉有書曰。亡親日記三卷。付於光牧之行。下覽後特加筆削。使先人行蹟不至於泯滅。則其恩輕重。宜如何報也。又曰。亡親心行。得賴尊丈。庶免後日沈滅之患。平生感仰。何以盡喩。先生感其前日從遊之意。纂集其遺事。分類爲八篇。名曰老辣瀡辭。延城有書曰。亡親事迹。極其詳悉。可爲傳後之寶。幽明之感。何可勝喩。或序或跋。更蒙製惠。則將欲入梓以圖不朽。而第題目。本意雖好。後人或不無致訝者。未可改以他字耶。先生跋其後略曰。或問老辣是何意。余曰。昔秦檜使所親說晏敦復曰。公能曲從。要地朝夕可至。敦復曰。薑桂之性。老而愈辣。瀡。滑也。今於篇末。聊敍首尾如此。未知後日吾三家子孫。其亦有覽此而同一悲感者歟。
    2023-07-13 | NO.232
  • 안방준- 제청원정 題淸遠亭
    主人方寸中 정자주인의 마음 속에는分明見涇渭 세상이치 분명히 볼 것이라獨坐淸遠亭 청원정에 홀로 앉아 있으니幽興人知未 그윽한 흥취 어찌 느끼지 못하리오- 隱峯全書 卷一 우산(牛山) 안방준(1573∼1654 )은 보성 출신으로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국난이 닥칠 때마다 의병을 일으켰으며, 광해군 때 후진 교육에 힘쓰고 학문에 전념했다.경위(涇渭)의 경(涇)과 위(渭)는 모두 중국의 강물 이름이다. 경수(涇水)는 강물이 몹시 흐리고, 위수(渭水)는 강물이 아주 맑았다. 두 물줄기는 중간 지점에서 하나로 합쳐지는데, 두 물은 합쳐진 뒤에도 맑은 물과 흐린 물이 섞이지 않고 강 가운데 뚜렷한 경계를 그으면서 흘러갔다. 그래서 경위(涇渭)는 인품의 청탁(淸濁)이나 사물의 진위(眞僞) 또는 시비(是非)를 비유하는 말로 사용하게 되었다. 경위(涇渭)가 분명하다는 말도 여기서 나왔다.
    2020-04-07 | NO.231
  • 약사암 중건기〔藥師庵重建記〕 - 운양속집
    약사암 중건기〔藥師庵重建記〕 - 운양속집 제3권 / 기(記) : 김윤식(金允植, 1835~1922)옛날에 서석산(瑞石山)에 작은 암자가 하나 있었는데, 이름이 약사암(藥師庵)이다. 언제 창건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지금은 부서진 집 몇 칸만이 남았고 찾아오는 이도 없다. 학산 선사(鶴傘禪師)는 젊어서 사방 유람하기를 좋아하여 명산 고찰(古刹)에 발자취가 두루 미쳤다. 이윽고 중생 제도에 지쳐서 조용히 쉴 만한 궁벽한 장소를 얻어 편히 앉아서 도를 닦으려고 생각했다.이러하던 차에, 약사암 옛터를 보고는 흔연히 마음에 들어 “여기라면 노년을 마칠 만하다.”라고 말하고는 마침내 그곳에 머물렀다. 군(郡)의 신사(紳士)와 원근의 시주들 중 선사의 풍모를 사모하는 자들이 다투어 재물을 바쳐 약사암 건축 비용을 도왔다. 이에 기와 조각과 자갈을 쓸어 제거하고 다시 기초를 다지니, 새 날개처럼 날아갈 듯한 용마루며 길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 풍경소리며, 의젓한 한 구역의 사찰이 되었다. 마침내 암자의 공사가 끝나자 선사께서 내게 청하여 글을 써 기록하게 하고 이를 산중의 고실(故實)로 전하려고 했다. 내가 말하기를 “지난날 경신년(1860, 철종11) 가을에 서석산을 유람한 적이 있는데, 그 꼭대기에 올라가서 이백(李白)의 시 〈낙안봉(落鴈峯)〉을 큰 소리로 읊고는 산중의 장관이 여기에 다 있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약사암이 어디 있는지 몰랐는데, 지금 60년 후에야 비로소 그 이름을 들었고 또 우리 선사께서 차지하셨습니다. 사물이 드러나고 감춰지는 것과 땅이 참 주인을 만나고 만나지 못하는 것은 각각 그 때가 있습니다. 이로부터 암자의 이름이 이 나라에 알려질 것이니, 이 어찌 땅이 사람으로 인해 드러나는 것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암자에서 바라본 경치에 대해서는 내가 상세하게 말할 길 없지만, 삼황봉(三皇峯)의 소탈하고 깨끗하고 맑고 탁 트인 모습과 입석대(立石臺)와 광석대(廣石臺)의 빼어나고 우뚝한 모습은 지금도 눈앞에 삼삼한 게 잊혀지지 않는다. 암자가 그 사이에 있다니, 분명 온갖 아름다움을 다 끌어 모아 온 산의 승경을 독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 기를 지으니, 초당(草堂)의 신령들이여, 부디 낯선 사람이라고 내치지 말기를![주-D001] 서석산(瑞石山) : 광주(光州) 무등산(無等山)의 옛 이름이다.[주-D002] 약사암(藥師庵) : 광주광역시 동구 운림동 무등산에 있는 절로, 통일신라 시대의 석조여래좌상이 보물 제600호로 지정되어 있다.[주-D003] 학산 선사(鶴傘禪師) : 함명 태선(涵溟 太先, 1824~1902)이 지은 〈무진주 무등산원효암중수상량문(武珍州無等山元曉庵重修上樑文)〉에 의하면 1894년 학산 대사(鶴傘大師)가 관청에 호소하여 100금의 재력을 시주받고 고을의 유지들의 도움으로 원효사(元曉寺)를 중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주-D004] 중생 제도에 지쳐서 : 원문의 ‘진량(津梁)’은 중생을 제도(濟渡)함을 비유한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언어(言語)〉에 “유공(庾公)이 일찍이 불도(佛圖)를 들여왔는데 와불(臥佛)을 보고 말하기를 ‘이 부처는 진량에 피곤했구나’라고 했다”고 했다.[주-D005] 머물렀다 : 원문의 ‘탁석(卓錫)’은 석장(錫杖)을 꽂는 것으로, 승려가 머무는 것을 말한다.[주-D006] 낙안봉(落鴈峯) : 섬서성 화산(華山)의 남봉(南峰)이다. 《화산지(華山志)》에 “이백(李白)이 낙안봉에 올라 말하기를 ‘이 봉우리가 가장 높은데 호흡하는 기가 상제(上帝)의 좌석에 닿을 것 같다. 사조(謝朓)의 경인시(驚人詩)를 가져오지 못한 것이 한스러운데, 머리 긁적이며 푸른 하늘에 물어볼 뿐이다’라고 했다”고 했다.[주-D007] 삼황봉(三皇峯) : 무등산의 천황봉(天皇峰), 지황봉(地皇峰), 인황봉(人皇峰)이다.
    2020-12-31 | NO.230
  • 약천 남운로에게 보내는 편지〔與藥泉南雲路書〕 - 서하집
    약천 남운로에게 보내는 편지〔與藥泉南雲路書〕 - 서하집 제17권 / 서독(書牘) : 이민서(李敏敍, 1633~1688)천 리 거리에 떨어져 편지로 왕복하자니 매번 한 달 이상 걸리는 데다 제가 동주(東州)에 있어 또 자주 편지를 받지 못하니 그저 간절히 그리움만 내달릴 뿐입니다. 지난번 우편을 통해 영형(令兄)이 북관(北關)에 있으면서 보낸 편지를 받았습니다. 영형이 장거리를 순선(巡宣 관찰사의 순시)한 뒤 기거가 편안하다는 것을 알고서 편지를 읽으며 지극히 안타깝고도 위로되었습니다.저는 지난번 딸을 묻은 뒤 동쪽으로 돌아왔는데, 지금 또 지평현(砥平縣) 동쪽에 죽은 형의 장례를 지내니, 빈산에서 통곡을 해도 더욱 어쩔 수 없습니다. 더구나 노친(老親)의 기력이 날로 점점 쇠약하시어 지금 모시고 서울 집으로 돌아가려고 얼음이 녹기를 고대하고 있으나 여러 가지 고통스러운 마음이 하루가 다르게 더욱 심해지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영윤(令胤 상대방의 아들)이 오래 서울에 머물고 있었는데도 같이 거처하지 못하였고, 한식(寒食)이 지난 뒤 함경도로 간다고 들었으나 아마 서로 만나지는 못할 듯합니다. 휘령(輝令)은 근래 편지를 받았는데 자못 옛 모습을 회복한 듯하니 진실로 위로가 되고 다행입니다. 듣자니 영형께서 제가 술 마시는 것을 염려하신다고 하는데, 이는 비록 서로 지극히 사랑하는 뜻에서 나왔더라도, 지금은 저에게 그럴 우려는 없습니다. 다만 저의 병증은 단지 인삼(人蔘)을 많이 섭취하면 저절로 근심이 없어질 수 있는데, 전후로 보내 주신 인삼 때문에 지금까지 생명을 연장하고 있습니다. 또다시 살고 싶은 마음이 끝이 없어 더 많이 보내 주시기를 바라니, 그 만족을 모르는 것이 가소롭습니다. 편지를 우편에 부칩니다만, 잘 들어갈지 알 수 없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다 적지 못합니다.[주-D001] 약천 남운로 : 약천은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의 호로, 운로는 자이다. 본관은 의령(宜寧), 호는 약천ㆍ미재(美齋),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아들 남학명(南鶴鳴)이 이민서의 사위로, 남구만과 이민서는 사돈 간이다. 송준길(宋浚吉)에게 수학하였다. 1656(효종7)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저술로 《약천집》이 있다.[주-D002] 영형(令兄)이 …… 받았습니다 : 남구만은 1671년(현종12) 10월부터 만 3년 넘도록 함경 감사를 지냈다. 현종이 죽은 뒤 애책(哀冊)의 지을 관원으로 선발되어 상경하였다. 《국역 현종개수실록 12년 10월 24일》[주-D003] 딸을 묻은 뒤 : 남구만의 아들 남학명과 혼인했던 딸을 말한다. 완산 이씨(1652~ 1673)는 1673년에 2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고, 용인현(龍仁縣) 남씨(南氏) 선산에 묻혔다. 《西河集 卷14 亡女墓誌銘》 남학명은 이민서의 딸인 전주 이씨와 사별한 뒤, 공주 목사(公州牧使)를 지낸 이시현(李時顯)의 셋째 딸을 맞아들였다. 《국역 명재유고 제36권 숙인(淑人) 신씨(申氏) 묘지명》[주-D004] 죽은 형의 장례 : 형은 이민적(李敏迪, 1625~1673)을 말한다. 자는 혜중(惠仲), 호는 죽서(竹西)이다. 문집에 《죽서집(竹西集)》이 있다.[주-D005] 노친(老親) : 아버지 이경여(李敬輿, 1585~1657)는 1657년(효종8) 가을에 세상을 떴으므로, 여기서의 노친은 어머니 임씨(任氏)를 가리킨다.[주-D006] 휘령(輝令) : 남구만의 작은아버지 남이성(南二星, 1625~1683)을 가리킨다. 자는 중휘(仲輝), 호는 의졸(宜拙)이다. 1674년(현종15) 예조 참의를 거쳐 대사간이 되었다. 1675년(숙종1) 인조의 계비이던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 문제(服喪問題)로 갑인예송(甲寅禮訟) 일어나 김수항(金壽恒)이 중도부처(中途付處)되자 남인 권대운(權大運)을 규탄하고 김수항을 변호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진도에 유배되었다. 그 후 배천(白川)으로 이배되었다가, 1678년 풀려나 1680년 좌부승지에 이어 대사성, 홍문관 부제학을 지냈다.[주-D007] 듣자니 …… 없습니다 : 이민서에게 지병이 있었다. 홍문관에 있을 때에 여러 날 동안 술을 마시고 숙직을 하다가 갑자기 미치광이 병이 발작하여 당시 사람들로부터 해괴하다는 말을 듣기도 했고 이 때문에 조정에 있기가 불안하여 고양 군수(高陽郡守)를 맡기도 했다. 또한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재직 중일 때 또 이 증세가 발동하여 스스로 배를 찔렀던 일이 있었다. 《국역 현종개수실록 11년 10월 23일》 《국역 숙종실록 4년 9월 13일》
    2020-12-23 | NO.229
  • 양경우-光牧竹陰令公觀漁景陽坊築有詩 次韻
    양경우(梁慶遇, 1568~1629) ‘ 광주목사 죽음공(조희일)이 경양방죽에서 낚시를 구경하며 시를 지었기에 차운을 씀(光牧竹陰令公觀漁景陽坊築有詩 次韻)’錦樹經霜葉脫枝 서리 지나간 나뭇가지가 모두 낙엽 되었으니城西此會恨差遲 성 서쪽 이 모임 더딘 것이 아쉬워라村居無事政多暇 마을에 사건이 없으니 정치에 쉬는 날 많고 太守出遊民不知 목사께서 노닌 것을 백성은 알지 못해水闊跳魚鱗鬣壯 넓은 물에 뛰노는 고기는 비늘이 큼직한데天寒病鶴翅翎垂 차가운 하늘에 고달픈 학이 날개를 드리웠어生憎畫角無情極 악기 따위는 정이 없어 일평생 싫어하며不許華畫住少時 화려한 수레는 잠시도 가까이 두지 않았네- 제호집(霽湖集) 권8양경우(梁慶遇, 1568-1629)의 자는 자점(子漸)이며 호는 제호(霽湖), 점이재(點易齋), 요정(蓼汀), 태암(泰巖) 등이다.
    2018-07-12 | NO.228
  • 양경지-次趙光州柳林觀獵韻(戊子)
     ‘광주목사 조정만이 유림에서 사냥하는 것을 보고 읊다(次趙光州柳林觀獵韻)’白雪樓中誰最雄 백설 누각 가운데 누가 가장 으뜸인고 淵老文章奪天功 연로의 문장이 하늘의 공을 빼앗았네 倚樓高才先後之 의루의 높은 재주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句法頗與漢魏同 구법은 자못 한나라 위나라와 같다네 徃時專塲誇觜距 예전에 문단 독점해 부리와 발톱 뽐내니 籍籍聲價凌靑穹 성대한 성가가 푸른 하늘로 솟구쳤네 城濮之戰屹然伯 성복의 전투에서 우뚝 천하를 제패하니 椘壁徒爾千羆熊 초나라 성벽의 날랜 군사들도 부질없네鮑照江淹大小兒 포조와 강엄도 알량한 어린애일 뿐 餘子紛紛眼底空 나머지 분분한 문인들 안중에도 없다네 將期大鳴國家盛 장차 국가의 태평을 크게 표현하리니 太白元不棲蒿蓬 이태백은 원래 봉호에 살지 않았네 合置金門白玉堂 마땅히 금마문 백옥당에 둘 것이거늘 如何陸沈州縣中 어찌 작은 주현에 육침하며 지내는가 風塵白髮走東西 풍진에 백발로 동서를 분주히 달리다 蹔跨南州都護騘 잠시 도호의 총마 타고 남녘에 왔네 淮陽卧理亦一時 회양에서 누워 다스림도 또한 한 때 漢水日日波起風 한수는 날마다 바람에 파도가 이네 彭澤歸舟任輕颺 팽택의 가는 배는 가볍게 흔들리는데 一樹梅花冬栢紅 한그루 매화에 동백은 붉게 피었네 物理由來有叅差 사물의 이치는 예로부터 일정치 않아 矩不諧圓商不宮 방원도 맞지 않고 궁상도 다르다네 末流懷襄復奚疑 말세의 회양을 다시 어찌 의심하랴 向來室中生寇戎 예로부터 실중에 도적떼가 나는 법 歸對淵翁當大笑 돌아가 연옹을 마주하면 대소하리니 有詩寄我開顓蒙 때로 시를 부쳐 어리석음 깨워주소-방암유고(方菴遺稿) 권1양경지(梁敬之, 1662-1734)의 자는 중직(仲直)이며 호는 방암(方菴)이다.
    2018-07-12 | NO.227
  • 양경지-광주여점에 머물던 차 오헌과 송별의 잔을 나누다(光州旅店次寤軒韵送別)
    行趂長安未盡春 襟懷皎潔玉如人蚌珠况是堪輝乘 塵土何由得上輪杜曲烟霞應有待 湖中親友倍傷神良宵幸신連床話 惟恐瓊籤促報晨-방암유고(方菴遺稿)양경지(梁敬之1662-1734)의 자는 중직(仲直)이며 호는 방암(方菴)이다.
    2018-07-10 | NO.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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