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720
게시물 검색 폼
  • 수사 증 형조 판서 이공 행장〔水使贈刑曹判書李公行狀〕 : 강재집 제12권
    수사 증 형조 판서 이공 행장〔水使贈刑曹判書李公行狀〕 : 강재집 제12권 / 행장(行狀) - 송치규(宋穉圭, 1759~1838) 공의 휘는 지효(止孝), 자는 중순(仲純)이다. 이씨는 선계가 함평(咸平)에서 나왔으며 고려의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 휘 언(彦)이 시조이다. 대대로 벼슬아치가 이어졌으며 절의로 저명하였다. 고조 휘 종수(從遂)는 부사정(副司正)으로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증조 휘 종인(宗仁)은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지냈으며, 조부 휘 시(偲)는 내섬시 주부(內贍寺主簿)를 지냈다. 아버지 휘 유근(惟謹)은 대구 부사와 지제고(知製誥)를 지냈고 호는 죽담(竹潭)이며 초동(草洞) 보산사(寶山祠)에 배향되었다. 어머니 현풍 곽씨(玄風郭氏)는 부사 한(翰)의 따님이다. 공은 가정(嘉靖) 32년 계축년(1553, 명종8) 모월 모일에 태어났다. 영리하여 여느 아이와 달랐다. 외모가 헌칠하고 재주도 뛰어났으며 절의(節義)를 좋아하였다. 《한서(漢書)》를 읽다가 충신과 열사의 전(傳)에 이르면 그때마다 무릎을 치고 감정이 고조되었다.만력(萬曆) 기축년(1589, 선조22)에 증광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이듬해 경인년 3월 선전관에 제수되었다. 임진년(1592, 선조25) 봄에 훈련원 주부에 제수되었고 가을에 도총부 도사로 옮겼다. 계사년(1593, 선조26) 봄에 경력(經歷)에 승진하였으며, 여름에 보령 현감(保寧縣監)에 제수되었는데 청렴결백하여 인사 고과에 높은 점수를 받았다. 병신년(1596, 선조29)에 박천 군수(博川郡守)로 옮겼는데 1년이 안 되어 고질적인 폐단을 없애 백성들이 살아나게 되었다. 임기가 아직 차지 않았는데 창성 부사(昌城府使)에 발탁되었다. 행정이 청렴하고 은혜가 두루 미치자 칭송하는 소리가 길에 가득하였다. 이웃 고을의 가난한 백성들이 소문을 듣고서 아이들을 들쳐 업고 왔는데 거의 수백여 가구나 되었다. 관찰사가 치적을 높이 평가해서 보고하여 통정대부로 특별히 승진시켰다. 얼마 있다가 봉화 전달에 실수해서 파직되어 귀향하게 되었을 때 고을 주민이 대궐로 가 상소를 올려 1년을 더 머물러 주기를 간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송덕비를 새기고 또 생고치 수백 말을 거두어 본가로 실어 보냈는데, 토산품으로써 떠난 후에도 잊지 않는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공이 물리치면서 싣고 온 사람들로 하여금 가지고 되돌아가도록 하고 고을 백성이 세금 낼 때 보태 쓰라고 하였다. 싣고 온 사람이 밤중에 공의 대문 바깥에 몰래 두고 가버리자 공이 사람을 시켜 뒤쫓아 가게 하였으나 따라잡지 못하여 마침내 가난한 친척과 이웃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갑진년(1604, 선조37)에 구성 부사(龜城府使)에 제수되어 청렴하게 지내면서 잘 돌보아 주기를 창성 부사에 있을 때와 같이 하니 백성들이 사랑하고 받들기를 부모처럼 하였다. 을사년(1605, 선조38)에 조정에서 변방에 우환이 있다고 여겨 만포 첨사(滿浦僉使)로 옮기게 하였다. 군사를 다스리고 백성을 구휼하는 데 모두 적절하게 하였으며 위급상황에 대비하는 데 더욱 신경을 기울였다. 병오년(1606, 선조39) 2월에 모친 곽부인 상을 당하였다. 슬퍼하면서 울부짖다 기절하여 주위 사람을 감동시켰으며 거상(居喪), 장례, 제사를 한결같이 《주자가례》를 따랐다. 삼년상을 마치고 4년이 지나 충청도 수군절도사에 제수되었다. 부임한 지 겨우 몇 달 만에 무기를 정비하고 군량미를 충분히 확보하였으며 성벽의 깃발도 활기찬 모습을 띠면서 확 바뀌었다. 이해 12월에 상의 특명으로 가선대부에 승진하였으며 교서를 내려 유시하기를 “그대를 의지하여 만 리에 성을 쌓고 절도사 임무를 맡긴다. 그대가 나라에 한마음으로 봉사한 것을 가상히 여겨 포상하는 은전을 특별히 내린다. 재주가 있으면 반드시 쓰일 때가 있으니 하급 병졸 사이에 있을 사람이 아니다. 신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임금이니 참으로 장수에서도 걸출한 사람이다. 군량을 비축하고 말꼴을 쌓아 두어 군수물자를 풍부하게 하고, 창을 만들고 갑옷을 수선하여 너의 군사를 다스리라. 칭찬이 날로 이르는 것은 나의 좌우가 사사로이 하는 말이 아니며 공적인 논의가 오는 것은 실로 그대의 명성과 공적이 드러난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은 누차 변경 지방으로 나가 벼슬하였으므로 풍토병을 심하게 앓았다. 마침 질병이 심해져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왔는데 귀향하는 여장은 텅 비어 단지 수중(手中)에 채찍 하나 뿐이었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극력 감탄하였고 공의 현명함을 자주 칭찬하였으며,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도 “이 아저씨의 청렴결백함은 보통 사람이 따라가기 어렵다.”라고 하였다.광해군 때 정치가 문란하고 국사가 나날이 잘못되자 공이 한숨을 쉬며 크게 탄식하기를 “이러한 시국에 벼슬하니 마음이 부끄럽다.”라고 하면서 끝내 가족을 데리고 풍덕(豊德)의 시골 별장에 이사하였다. 계축년(1613, 광해군5)에 국구(國舅)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이 감옥에 갇히자 인목대비를 별궁(別宮)에 두자는 논의가 계속 일어나서 인륜이 무너지려 하자 여론이 통분하였고 소인배들의 기세가 물길처럼 치솟았는데 어누 누구도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공이 분통을 견디지 못하고 앞장서서 상소문을 지어서 대궐로 달려가 올렸으나 흉악한 일당이 물리치고 왕에게 올리지 않았다. 공이 더욱 울분을 참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영의정 박승종(朴承宗)의 집에 곧장 달려가서 책망하기를 “대감이 어찌 차마 하늘 아래에서 이이첨(李爾瞻) 패거리와 함께 인륜을 무너뜨리고 의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대비를 폐위하고 국구를 죽이려 하니 이것은 천지간에 용납할 수 없는 죄악이다. 대감이 그들과 함께 일을 저지르지 않으면 간악한 무리의 기세는 반드시 중단될 것이니 대감이 헤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감은 이이첨 패거리와 함께 나의 손에 있는 한 자루 칼에서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은 당시 분연히 일어나 자신을 돌보지 않고 단지 나라를 위하여 한 목숨 버리기로 작정해서 의분에 찬 의견을 올렸으며 눈치 보는 것이 없었다. 흉도들이 벌벌 떨면서 앞날에 대한 두려움을 가졌으며 공이 역적을 옹호한다는 죄목으로 엮어서 감옥에 가두었다. 공은 감옥 속에서도 매일 새벽에 일어나 서쪽을 향하여 대비가 계시는 곳에 절하고 7일간 먹지 않고 말하기를 “국모가 없는 나라에 살아서 무엇하겠는가.”라고 하면서 끝내 피를 토하고 사망하였다. 이이첨 패거리가 소식을 듣고 기뻐하기를 “통쾌하게 죽이지 못한 것이 한이다.”라고 하였다. 당시 대비가 공이 의로운 일을 하다가 감옥에 갇힌 것을 들었지만 공이 감옥에서 굶어 죽었음을 알지 못하였다. 인조반정 뒤에 공의 생사를 묻자 의금부에서 사실대로 보고하니 대비가 매우 슬퍼하였다. 내탕금(內帑金)에서 조복(朝服) 한 벌과 고운 무명 50단(段)을 추후에 부의하고 해당 관아에 교서를 내려 자헌대부 형조판서 겸 지의금부사(資憲大夫刑曹判書兼知義禁府事)에 추증하고 아울러 공의 자손을 등용하라고 하였다. 모년 모월 모일에 나주(羅州) 서쪽 죽포면(竹浦面) 분토동(粉土洞) 임좌(壬坐) 언덕 선영에 안장하였다. 부인인 정부인(貞夫人)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부사 여랑(汝良)의 따님으로 어질고 자애로웠으며 부녀자의 법도가 모두 격식에 맞았다. 공보다 몇 년 뒤에 작고하였으며 공의 묘에 합장하였다.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선철(先哲)은 군수이며, 차남 선계(先繼)는 양자로 나갔고, 딸은 사인 장륜(張綸)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정(珵)이고, 손녀는 교리 조중려(趙重呂)에게 시집갔다. 증손은 만영(萬英)이고, 증손녀는 심각(沈殼), 이광화(李光華)에게 시집갔다. 현손은 천삼(天三)이고, 현손녀는 홍서징(洪瑞徵), 김태광(金泰光)에게 시집갔다. 5대손은 경휘(景輝)이며, 둘째는 현감인 경악(景岳)이며, 셋째는 경항(景恒)이고, 5대손녀는 정시창(鄭始昌)에게 시집갔다. 공이 작고한 지 1백여 년 뒤에 광주(光州)의 진사 박광세(朴光世) 등이 상소를 올려서 정증(旌贈)하고 사당을 세울 것을 청원하자 조정에서는 사체(事體)가 중대하다고 판단하여 단지 정려문을 세우라고 명하였다.아, 공은 기이한 자질을 타고났으며 덕행이 뛰어났다. 무관으로 출신(出身)하였으나 문장 또한 남보다 뛰어났다. 집안이 본래 청렴하고 검소하여 여러 고을의 수령을 두루 역임하였지만 재산 증식에 마음을 두지 않았고 빙벽(氷蘗)에도 한결같은 절조는 시종일관 변하지 않았으며 가정에서는 화목하게 지내고 인척과는 친근히 지내고 친구와 신뢰로 사귀며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었으며 친구를 버리지 않았다. 공이 창성 부사(昌城府使)로 있을 적에 첨사(僉使) 원유남(元裕男)과 평소 사이좋게 지냈는데 원유남이 마침 사건에 연좌되어 잡혀가면서 공에게 자신의 처자식을 부탁하자 공이 자기 집사람처럼 보살펴주었다. 원유남이 남에게 공의 풍모와 의리를 말할 때마다 옛사람에게도 부끄럽지 않다고 하였다. 이런 까닭에 당대의 명사 모두가 인정하였으며 감히 무인(武人)으로 보지 않았다.계축년(1613, 광해군5)에 금용(金墉)의 변이 일어났을 적에 위로는 조정의 관료부터 아래로는 일반 평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흉당(凶黨)에 달라붙어서 다투어 흉악한 상소를 올렸다. 흉악한 패거리들이 함정을 크게 설치하여 말하는 사람은 무거운 죄를 주겠다고 하자 사람들 모두 겁을 먹었다. 하지만 공은 직책도 없는 무신(武臣)으로서 백사 이항복, 성옹(醒翁) 김덕함(金德諴)보다 먼저 상소를 올려 대의(大義)를 말하여 “단지 국모가 있음을 알고 내 몸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올린 소가 승정원에서 막히자 울분을 견디지 못하고 국정을 책임지는 영의정을 꾸짖고 기세등등한 흉도를 멸시하였다. 7일간 감옥에 있으면서 죽는 것을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하였는데 순수하고 강직한 정기를 타고나지 않았다면 굳세고 결연한 태도가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아, 위대하다. 계축년에 올린 소가 임금에게 올라가지 못한 채 산일(散逸)되어 후대에 의를 숭상하는 선비가 고증할 수 없게 되었으니 이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나는 《초동팔현행록(草洞八賢行錄)》에 서문을 쓴 적이 있는데 죽담공(竹潭公)의 행적과 관련된 부분에서 공이 수립한 탁월한 업적도 대개 거론하였다. 지금 공의 후손 돈풍(敦豐)이 공의 외손(外孫) 부솔(副率) 이의경(李毅敬)이 지은 행록(行錄)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행장을 지어 주기를 부탁하였다. 나는 늙고 병들어서 오랫동안 붓을 잡지 않았지만 공의 탁월한 절개와 위대한 행적이 후대에 사라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쓴 것이 이와 같다.[주-D001] 이공 : 이지효(李止孝, 1553~1613)로, 본관은 함평(咸平), 자는 중순(仲純)이다. 창성 부사(昌城府使)를 역임하였으며 형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계축옥사 때 바른 말을 하다가 옥에 갇혀 죽었다.[주-D002] 보산사(寶山祠) : 나주시(羅州市) 다시면(多時面) 영동리(永同里) 초동(草洞)에 있다. 이곳에는 가정(嘉靖)과 만력(萬曆) 연간에 활동한 여덟 사람을 모시고 있는데 죽담(竹潭) 이유근(李惟謹),야우(野憂) 장이길(張以吉),창주(滄洲) 정상(鄭詳),한천(寒泉) 유주(柳澍),삼주(三洲) 최희열(崔希說),금애(錦崖) 이언상(李彥詳),남호(南湖) 유은(柳溵),사촌(莎村) 최사물(崔四勿)이다. 《강재집》 권5에 〈초동팔현행록서(草洞八賢行錄序)〉가 있다.[주-D003] 정증(旌贈) : 사후에 정려문을 세워 포창하는 일을 말한다.[주-D004] 빙벽(氷蘗) : 맑은 얼음물을 마시고 쓰디 쓴 소태나무를 씹는다는 뜻으로, 굳게 절조를 지키면서 청백하게 사는 것을 비유할 때 흔히 쓰는 표현이다. 당(唐)나라 백거이(白居易)의 “3년 동안 자사로 있으면서, 맑은 얼음물을 마시고 쓰디쓴 소태를 씹었노라.[三年爲刺史 飮氷復食蘗]”라는 시구에서 유래한 것이다. 《白樂天詩集 卷1 三年爲刺史》[주-D005] 금용(金墉)의 변 : 광해군에 의해 인목대비가 서궁(西宮)에 유폐된 것을 말한다. 중국 삼국 시대의 위주(魏主) 조방(曹芳)과 진(晉)나라의 혜제(惠帝) 등이 각각 폐위된 뒤 금용성(金墉城)에 옮겨진 것에서 유래한다.
    2020-11-03 | NO.255
  • 순영(巡營)에 돈을 청구하다- 광주목사
    보첩고(報牒攷) - 光州牧使○ 영조(英祖) 41년(1765) 9월 12일 순영(巡營)에 돈을 청구하는 보장(報狀)첩보(牒報)하는 일. 본주(本州)가 특히 심하게 피폐해진 상황에 대해서는 사또(使道)께서 이미 통촉하고 계실 것입니다. 백 가지 중에 하나도 제대로 모양이 갖추어진 것이 없는데, 그중에 공해(公廨 공무(公務)를 집행하는 청사(廳舍))가 모두 무너져 훼손되고 군기(軍器)가 파손되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제때에 수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재력을 준비하기 어려워서 감히 이렇게 낱낱이 보고하는 바이오니, 영문(營門)의 모양 목전(某樣木錢) 중에서 1년간 이자가 없이 넉넉히 대여해 주셨으면 합니다.제사(題辭)본주의 사세가 모양을 갖추지 못한 것에 대해 영문(營門)에서 이미 잘 알고 있으므로 소홀히 할 수 없다. 진고전(賑庫錢) 1천 냥을 1년간 대여해 줄 것이니, 기한 내에 수납(收納)해야 할 것이다.[주-D001] 보장(報狀) : 어떤 사실이나 내용을 윗사람에게 보고하는 공문임.
    2023-08-17 | NO.254
  • 신광수-登光州折楊樓
    早春雲物古光州  이른 봄날 옛 빛고을의 풍광 물씬한데尙憶詞臣此共遊  아직도 사신과 함께 놀던 일 추억하네萬事長沙餘舊宅  수많은 일 중 장사의 옛집만 남았고十年王粲再高樓  10년 만에 왕찬의 고루에 다시 오르네.黃溪樹入斜陽盡  황계의 나무는 석양빛에 들어 사라지고瑞石天兼霽雪浮  서석의 하늘은 맑은 눈과 함께 떠있다城下往來無古老  성 아래엔 왕래하는 옛 늙은이 없으니行人怊悵不堪留  나그네는 추창하여 머물 수가 없구나靑橙石堞帶寒流  푸른 등자나무 석첩엔 한류가 흐르니滿目依俙物色稠  눈에 가득 어렴풋이 물색이 빽빽하다存沒古今惟有淚  고금의 흥망에 눈물만 흘릴 뿐이요朅來南北自然愁  남북으로 오고가니 자연히 시름겹네.春潭送客王孫草  객을 보낸 봄 못엔 왕손의 풀 무성하고明月無人燕子樓  사람없는 연자루엔 밝은 달만 비치네向晩長城騎馬去  저물 무렵 말을 타고 장성으로 향하며兩行官樹一回頭  두 줄로 늘어선 관수를 한번 돌아보네又南遊迢遞廾年間  남녘으로 아득히 노닌지 20년學士風流不可攀  학사의 풍류 잡을 길이 없어라下榻少年今白髮  걸상 내리던 소년도 이젠 백발 登樓落日舊靑山  누각 오르니 낙일은 옛 청산에錦城春早花無意  금성의 이른 봄에 꽃은 뜻 없고蘆嶺天長鳥自還  노령의 먼 하늘 새만 돌아오네更憶柳生詩寂寞  유생의 시 추억하니 적막하기만畫欄西望淚雙潸  화란 서쪽을 보며 눈물 흘리네-석북집(石北集) :권1신광수(申光洙, 1712-1775)의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성연(聖淵)이며 호는 석북(石北), 오악산인(五嶽山人)이다. 윤두서(尹斗緖)의 딸과 혼인하여 실학파와 유대를 맺었다. 영릉참봉(寧陵參奉 능을 맡아 일보던 종9품 벼슬)이 되고, 53세에 금오랑(金吾郎 금부도사)으로 제주도에 갔다가 표류하여, 제주에 40여일 머무르는 동안 탐라록(耽羅錄)을 지었으며, 우승지. 영월부사를 역임하였다.
    2018-07-12 | NO.253
  • 신숙주-喜慶樓記(희경루기)
    2018-07-26 | NO.252
  • 신숙주-寄光州留鄕所(광주 유향소에 부치다)
    早將書劍事羈遊 일찍이 서검¹ 가지고 객지를 떠돌았는데浪逐浮名尙未休 부질없이 헛된 명예 쫒는 일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一見鄕書歸興急 한 번 고향편지를 보니 돌아가고 싶은 마음 복받치니故園三逕又新秋 고향동산의 세 오솔길 또 새로운 가을이겠지¹ 문인과 무인을 의미함-보한재집(保閑齋集)신숙주(申叔舟, 1417~1475)의 자는 범옹(泛翁)이며 호는 보한재(保閑齋)· 희현당(希賢堂) 이다.
    2018-07-10 | NO.251
  • 신숙주-次光州東軒韻 1
    南國光山是古州 남쪽나라 광산은 옛 고을이네鶴歸華柱起淸愁 학이 화표의 기둥에 돌아오니 맑은 시름 일어나네時移節變隨人事 시절은 변하여 인사에 따르니但見黃雲麥壟秋 다만 누런 구름 같은 보리밭의 가을을 볼뿐이네- 보한재집(保閑齋集) 권5
    2018-07-26 | NO.250
  • 신숙주-次光州東軒韻 2
    十載宦遊客 십년 벼슬살이한 나그네歸心百折東 동쪽으로 돌아갈 마음을 백번이나 꺾었네 鄕人猶舊面 고을 사람들이 오히려 친숙한 얼굴 되어旅況屬薰風 나그네길이 오히려 훈풍을 만난 듯하네椒桂天恩遠 산초와 계수에 하늘 은혜 아득하여松篁馬鬣空 소나무 대나무 숲에 말갈기만 부질없네無從問往事 지나간 일은 물을 길 없으니木老翠重重 늙은 나무만 푸르게 우거졌구나 - 보한재집(保閑齋集) 권8
    2018-07-26 | NO.249
  • 신숙주-贈別之望兄
    男子功名少壯時 春風握節擁旌旗年來自恨身多病 贈別空傳一首詩光山山下有荒村 歸夢超超寄故園臺柳煙絲依舊否 春風相送暗銷魂-보한재집(保閑齋集) 권6
    2018-07-10 | NO.248
  • 신숙주-題光州西軒
    (題光州西軒 令嚴守令 例不以修整館宇爲事 坐視頹毀 吾同年柳公敏爲州牧 事旣理 又能新之 爲人 所不爲 詩以爲賀) 시령이 수령에 엄하여 으레 관우를 수리하는 것을 일삼지 않아 무너진 것을 좌시하였다. 나와 동갑인 유민이 주목이 되어 일을 이미 다스려 새롭게 하였다. 사람이 하지 못할 일을 했기에 시를 지어 축하하였다.西軒舊湫隘 서헌이 오래되어 낡고 좁은데制度今奐然 제도는 지금도 빛나는구나.鄕人多戚屬 향인은 대부분 친척들이고城主況同年 원님이 하물며 동년배라네.政理無前日 정사 다스림에 예전의 경험 없으나循良比昔賢 좋은 전례 따르니 옛 현인에 비견되네.歸來記異事 돌아가서 특이한 일을 기록하려고援筆寫荒篇 붓을 잡고 거친 책에 써내려가네.- 보한재집(保閑齋集) 권2서헌은 수령 가족들이 생활하는 지방관아의 안채를 의미하며, 내아(內衙) 또는 내동헌(內東軒)이라고도 한다. 이름처럼 보통 동헌의 반대편에 위치해 서헌이라고 부른다. 서헌은 일반적으로 조선 상류층의 살림집과 비슷한 형태였다고 하는데, 광주서헌과 관련한 기록은 신숙주(申叔舟, 1417~1475)의 시 ‘광주서헌에 제하다(題光州西軒)’가 유일하다.
    2018-07-26 | NO.247
  • 신응시- 用光山板上韻 칠언률
    用光山板上韻光山歲暮臥涔涔。未展高樓向北襟。嶺嶠不遮千里夢。鱗鴻久斷故園音。床堆短燭三更淚。月轉修篁十丈陰。客宦頻年今又病。向來摧却壯遊心。신응시, 《백록유고(白麓遺稿)》
    2024-04-15 | NO.246
  • 신응시- 만절정에서 晩節亭。爲思庵朴相公作。(亭在光山)
    繞亭松樹政堪憐。정자를 감싼 소나무는 정녕 사랑스럽다.合。빽빽한 나무는 푸르름 두른채 높은 구름에 숨어있고不獨大材樑棟用。그 홀로 큰 재목으로 동량에 쓰일 뿐만 아니오霜前。눈과 서리 앞에서도 얼마나 엄격한 지 볼 수 있으리.取比他年晩節全。훗날 만절의 온전함을 비유하였네.신응시, 《백록유고(白麓遺稿)》思庵朴相公은 사암 박순을 말한다.
    2024-04-15 | NO.245
  • 신응시- 풍영정에서, 風詠亭(光山)
    老作雄州力未休。登臨聊遣簿書愁。天高衆嶽爭抽䯻。野曠長江任轉洲。勝賞固非山簡出。淸樽强被習家留。坐中逃醉先騎馬。正是河橋一篴秋。신응시, 《백록유고(白麓遺稿)》
    2024-04-15 | NO.244
  • 신응시-光山
    ‘그간에 능성 군수 김중오가 여러 아우들과 봉생당에서 술자리를 열어 함께 능성에서 기숙하였다.(間綾城守金仲悟 與諸弟開酌於鳳笙堂 同寄綾城)’이라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公餘東閣午眠回 공무 여가에 동각에서 낮잠을 깨니咫尺笙歌隔鳳臺 지척의 피리 소리 봉대에서 나도다.白首一隅慙老醜 백발로 한 구석에서 늙은 모습 부끄러워傾甁空自續官醅 술병 비우자 공연히 관청 술 잇따르네.-백록유고(白麓遺稿)
    2018-07-12 | NO.243
  • 신응시-光山敎坊歌謠. 爲李監司可謙作
    使家風調景濂前 自古光山有可憐絳節直從雲縹緲 錦屛深貯玉嬋娟(妓名)夢隨行雨曾相過 心似靈屛不待燃想見肝腸非鐵石 忘情何必隔窓眠(使相在羅州 却妓而使妓寢於窓外)-백록유고(白麓遺稿) 七言律
    2018-07-12 | NO.242
  • 신응시-光山東閣 同安處士慶昌夜話書水澄詩軸
    坐絶炎氛一點飛 雨聲東閣燭花微神嵩處士天冠衲 山水淸談玉屑霏-백록유고(白麓遺稿)
    2018-07-26 | NO.241
  • 광주광역시
  • 한국학호남진흥원
  • 사이버광주읍성
  • 광주서구청
  • 광주동구청
  • 광주남구청
  • 광주북구청
  • 광주광산구청
  • 전남대학교
  • 조선대학교
  • 호남대학교
  • 광주대학교
  • 광주여자대학교
  • 남부대학교
  • 송원대학교
  • 동신대학교
  • 문화체육관광부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 국립아시아문화전당
  • 광주문화예술회관
  • 광주비엔날레
  • 광주시립미술관
  • 광주문화재단
  • 광주국립박물관
  • 광주시립민속박물관
  • 국민권익위원회
  • 국세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