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72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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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봉 박광오공 묘표〔參奉朴公墓表〕 -손재집
- 참봉 박공 묘표〔參奉朴公墓表〕 -손재집 제8권 / 묘표(墓表) : 박광일(朴光一, 1655~1723)공은 휘가 광오(光五)이며, 자는 사정(士正)이고, 성은 박씨(朴氏)로, 평양(平陽) 사람이다. 우리나라 문숙공(文肅公 박석명(朴錫命))의 후손이다. 증조는 휘 운정(雲挺)이다. 조부는 휘 창문(昌文)이다. 아버지는 휘 상고(尙古)이다. 어머니는 광산 이씨(光山李氏)로, 성균관 진사 이지원(李之遠)의 딸이다.공은 숭정(崇禎) 후 신묘년(1651, 효종2) 3월 1일에 태어났다. 운명이 기구하여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었고, 공의 재종형인 안촌(安村 박광후(朴光後))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는데, 문예(文藝)가 일찍 완성되어 문장으로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었다. 무오년(1678, 숙종4) 안촌의 초상에 상복으로 기년복을 입었다.을묘년(1675)부터 기미년(1679)까지 5년 동안, 시배(時輩)들에게 무함을 당하여 과거를 폐하였다. 신유년(1681) 진사 시험에 입격하였다. 병인년(1686) 효릉(孝陵) 참봉에 임명되었다. 이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병환이 위독해지자 손가락 피를 올렸다. 복을 마쳤을 무렵, 시사(時事)가 또 크게 변하여 관직에 나갈 마음이 다시는 나지 않았다. 임신년(1692, 숙종18) 1월 1일 병으로 세상을 떴는데, 향년 42세였다. 광주(光州) 북쪽 석제리(石堤里)에 장례 지냈다가, 뒤에 광주 거점리(巨岾里) 오좌자향(午坐子向 북향) 언덕에 다시 무덤을 썼다.공은 천품이 자애롭고 어질었으므로 종친을 사랑하여 은혜와 의리가 있었고, 후배가 장족의 발전을 하는 것을 보면 성심으로 기뻐하며 개발하였다. 위난을 당했을 때 의리로 보아 해야 할 일은 회피하지 않았다. 을묘년(1675)에 사화가 일어났던 날에도 크게 참소의 예봉을 건드려 안촌(安村) 같은 분들과 꼼짝없이 엄히 옥에 갇혀 결국 형틀에서 매일 화를 당하면서도 의지와 기개가 쇠하지 않았다. 우암(尤菴) 선생이 봉해(蓬海)에 위리안치되었을 때, 시배들이 종묘에 고하자는 청이 더욱 급박해지자 호남의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신원하였는데 공은 기꺼이 그 소에 참여하니, 고(故) 판서 서하(西河) 이공(李公)이 무척 중히 아꼈다.아내는 함양 박씨(咸陽朴氏)로, 박성(朴惺)의 딸이다. 아들 넷을 낳았으니, 중현(重鉉)ㆍ중대(重大)ㆍ중집(重集)ㆍ중서(重瑞)이다. 중집은 안촌에게 후사로 갔다. 딸은 두 명으로, 장녀는 생원 윤도함(尹道涵)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임진효(任鎭孝)에게 시집갔다. 손녀, 손자는 모두 어리다.임진년(1712, 숙종38) 봄, 내가 방장산(方丈山) 아래 있을 때, 중대가 수백 리 길을 멀다 않고 찾아와, 나에게 명(銘)을 써 달라고 매우 간곡히 말하였다. 예전에 서로 돈독히 사랑했던 것을 생각하면 차마 사양하지 못할 점이 있었고, 더구나 중대가 묘소를 다시 정하고 묘도(墓道)에 표시하고자 하는 정성이 매우 가상하니 또 어찌 사양할 수 있겠는가. 마침내 다음과 같이 명을 썼다.갈라지는 길 어찌 겁내리오 / 岐路奚㥘바른길이면 가고 굽은 길이면 버렸으니 / 趨正舍曲도중에 횡액을 만났으나 / 中罹屯厄의지와 기개 더욱 확고했네 / 志氣愈確이제 비석에 새기어 / 載鑱于石숨은 덕을 천명하노라 / 用闡潛德[주-D001] 운명이 …… 여의었고 : 박광오 행장에 의하면 10세에 고아가 되었다. 《性潭集 卷30 參奉朴公行狀, 韓國文集叢刊 244輯》[주-D002] 을묘년부터 …… 폐하였다 : 갑인예송으로 송시열이 귀양을 간 뒤, 송시열을 역적죄로 종묘에 고해야 한다는 고묘론(告廟論)이 제기되었고, 이를 반대하던 박광호는 관찰사 권대재(權大載), 목사 박흥문(朴興文)에게 거슬러 옥을 살았다. 《性潭集 卷30 參奉朴公行狀, 韓國文集叢刊 244輯》[주-D003] 시사(時事)가 …… 않았다 : 1689년(숙종15) 장희빈 소생 아들(훗날 경종)의 원자 책봉을 계기로 정국이 바뀐 기사환국(己巳換局)을 말한다. 이로 인해 송시열(宋時烈), 김수항(金壽恒) 등이 귀양 갔다가 사사되었고, 많은 노론과 소론의 인물들이 귀양 갔다.[주-D004] 시배들이 …… 신원하였는데 : 갑인예송으로 오례(誤禮)의 죄를 입어 송시열이 귀양 간 뒤, 조사기(趙嗣基)와 허목(許穆) 등은 송시열을 종묘에 반역으로 고하고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고묘론(告廟論)을 폈다. 호남 유생의 상소란 생원(生員) 윤헌(尹攇) 등 5백 42인의 상소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국역 숙종실록 1년 윤5월 12일, 3년 6월 7일ㆍ19일》
- 2020-12-28 | NO.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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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판 신여만 익전 에 대한 만시〔申參判汝萬 翊全 挽〕- 동명집 제7권
- 참판 신여만 익전 에 대한 만시〔申參判汝萬 翊全 挽〕- 동명집 제7권 : 동명(東溟) 정두경(鄭斗卿, 1597~1673)서석산의 앞머리서 호부 나눠 받았으며 / 瑞石山前剖虎符다시 송악 머무르며 송도 땅을 지켰다네 / 更留松嶽守松都예부에선 아경 맡아 관직 낮지 않았으며 / 禮部亞卿官不賤은대에선 지사 맡아 총애 항상 특별했네 / 銀臺知事寵常殊집안 명성 선승상의 뒤를 이미 잘 이었고 / 家聲已繼先丞相예전의 업 이에 다섯 아들에게 전하였네 / 舊業仍傳五丈夫한마을서 친분 나눠 동생같이 여겼기에 / 同里故人曾弟畜백발인 나 눈물 속에 황천길을 전송하네 / 白頭垂淚送黃壚[주-D001] 익전(翊全) : 신익전(申翊全, 1605~1660)으로,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여만(汝萬), 호는 동강(東江)이다. 영의정을 지낸 신흠(申欽)의 아들이며, 김상헌(金尙憲)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관직에 있는 동안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죽음으로 미묘한 처지에 놓여 한때 위태로운 경우도 있었으나, 충신(忠信)을 생활신조로 삼은 탓에 큰 위난을 당하는 일 없이 관직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주역》을 애독하여 깊이 연찬하였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글씨에도 뛰어났다. 저서로는 《동강유집(東江遺集)》이 있다.[주-D002] 서석산(瑞石山)의 …… 받았으며 : 신익전이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돌아와 광주 목사(光州牧使)를 지냈으므로 한 말이다. 서석산은 광주의 무등산(無等山)을 말한다. 호부(虎符)는 한(漢)나라 때 지방관이 차던 신부(信符)로, 오른쪽은 경사(京師)에 두고 왼쪽은 군국(郡國)에 주어 군사를 출동하는 데에 썼다. 《한서》 권4 〈문제기(文帝紀)〉에 이르기를 “처음에 군수(郡守)에게 동호부(銅虎符)와 죽사부(竹使符)를 주었다.”라고 하였다.[주-D003] 다시 …… 지켰다네 : 신익전이 효종 때 개성 유수(開城留守)를 지냈으므로 한 말이다.[주-D004] 예부(禮部)에선 …… 특별했네 : 신익전이 효종 때 예조 참판과 도승지를 지냈으므로 한 말이다. 은대(銀臺)는 승정원의 별칭이다.
- 2020-09-15 | NO.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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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판(參判) 한공(韓公) 성우(聖佑) 의 신도비명 병서- 한성우 광주목사
- 참판(參判) 한공(韓公) 성우(聖佑) 의 신도비명 병서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의 《한수재집(寒水齋集)》 제25권 / 신도비(神道碑)근세에 사계ㆍ우암 두 선생이 도학을 전승하여 온 세상의 사종(師宗)이 되었는데, 한공 여윤(韓公汝尹)은 사계의 외손자로 우암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젊어서부터 모든 것을 보고 듣고 하여 깨끗한 조행을 스스로 지니었고, 나아가 벼슬할 때에 미쳐서는 곧은 도리로 임금을 섬기어 끝까지 법문(法門)의 끼친 법도를 훼손시키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의 천성이 그러하거니와 연원(淵源)의 소유래(所由來) 또한 속일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공의 휘는 성우(聖佑)인데, 숭정(崇禎) 계유년 4월 1일에 태어났다. 총명하고 단아하며 글재주가 뛰어났으므로, 어른들이 공의 조예가 한량할 수 없을 정도로 기약하였다. 약관 시절에 누차 해액(解額)을 따냈었는데, 기유년에야 사마시에 합격하니, 사우(士友)들이 늦은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이때 송곡(松谷) 조공 복양(趙公復陽)이 이조 판서로 있으면서 공을 금오랑(金吾郞)에 의망하려 하자, 공은 마치 자신을 더럽힐 것처럼 극력 사양하였다. 이해 겨울에 부친상을 당하였고, 다음해에 또 모친상을 당하였다.갑인년에 사화(士禍)가 일어나려 하자, 수백 인의 선비들을 인솔하고 우암 선생의 억울함을 변명하고는, 인하여 세상과 인연을 끊고 호우(湖右)에 자취를 감추었다. 경신년의 대출척으로 인하여 으뜸으로 녹용되어 숭릉침랑(崇陵寢郞)에 제배되고, 관례에 따라 봉사ㆍ직장에 옮겨졌다.갑자년에는 성균관 제술에서 장원하였고, 이해 겨울에는 전시(殿試)에 합격하여 자궁(資窮)으로 예조 좌랑에 승진되었다. 을축년에는 병조에 옮겨져 호남에서 시험을 관장하였는데, 호남 사람들이 공의 공정함에 심복하였다. 이때에 사론(士論)이 이미 갈라져서 한 전랑(銓郞)이 공을 함경도 도사로 내보내자, 친구들이 모두 공의 좌천된 것을 위문하였는데, 공은 조금도 언짢은 기색이 없이 하직하여 말하기를 “북도의 명산(名山)은 내가 평소 보고 싶었던 곳이다.” 하였다. 그리고 막부(幕府)에 이르러서는 다만 시가나 읊조리는 것으로 유유자적하였고 성기(聲妓)는 한 번도 가까이하지 않았다.병인년에는 사헌부 지평에 소배(召拜)되었는데, 이때 원임대신 이상진(李尙眞)이 민희(閔煕)와 홍우원(洪宇遠)을 석방할 것을 청하자, 공이 양사와 함께 이상진을 공박하였다. 그런데 동료 대관 가운데 이의를 세우는 자가 있자, 공이 인피하여 말하기를 “홍우원의 말은 왕대비를 범하였고 민희의 죄는 종사에 관계되는데, 대신이 그들을 신구한 것은 진실로 무슨 마음에서인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아울러 사간 이홍적(李弘迪)과 장령 안규(安圭)의 언론을 회피한 과실을 논핵하였다. 우상 정재숭(鄭載嵩)이 연경에 사신으로 가서 상께 벌환(罰鍰)을 매기는 치욕을 받고 돌아오자, 공이 동료와 함께 그를 논핵하였고, 또 차자를 올려 궁가(宮家)의 절수(折受)의 폐단을 논하여 말하기를 “하루 사이에 이미 혁파할 것을 윤허했다가 다시 그전대로 두도록 하시니, 이는 실로 임금의 말 한마디가 나라를 일으키고 망치는 기미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하였다.이윽고 사간원 정언에 옮겨졌다. 이에 앞서 교리 이징명(李徵明)이 궁금의 일을 말했다가 상의 뜻에 거슬리었으므로, 공이 상소하여 그를 구하였다. 그후에 다시 앞서의 논의를 되풀이하였는바 말이 더욱 격절하였으므로, 상이 진노하여 차마 들을 수 없는 엄한 전교를 내리고 즉시 공의 간관직을 체직하였다. 그러자 정원이 체직의 명을 돌려보내고 옥당이 차자를 올려 시정을 요구하니, 상이 이에 공에 대한 체직의 명을 환수할 것을 명하고 비답의 말도 고쳐서 내렸다. 이때에 조정과 외방이 모두 공을 대신해서 두려워 떨었으나 공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전조(銓曹)에서 공을 40여 차례 이상 여러 내외직에 의망하였으나 끝내 상이 권점(圈點)을 내리지 않으므로, 노봉(老峯) 민 상공(閔相公)이 공을 불러 금위 종사(禁衛從事)로 삼았다. 그러다가 무진년에 원자(元子)가 탄생함으로써 비로소 공에게 예빈시 정을 제수하였다.기사년에는 큰 사화가 일어나서 또 우암 선생이 제주도에 유배되자, 공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있으면서 서울에는 발도 딛지 않았다. 갑술년에는 성상이 크게 뉘우쳐 깨달음으로써 공이 으뜸으로 소명을 받아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공은 강연(講筵)에 오를 때마다 글 뜻을 해석하고 나서는 경사(經史)를 널리 인증하여 일에 따라 개도(開導)하고, 또 청하기를 “《성학집요(聖學輯要)》가 임금의 일상 행사에 가장 적절하니, 때때로 열람하면 반드시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계달한 말이 매우 적절하니, 의당 각별히 유념할 것이다.” 하였다.이윽고 교리에 옮겨서는 우상 윤지완(尹趾完)에 대한 불윤비답(不允批答)을 대신 지으면서 ‘인륜이 무너졌다[彝倫斁敗]’는 말을 썼는데, 이에 대해 윤 정승이 자기에게 비난의 뜻을 부친 것인가 의심하여 매우 노여워하자,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나의 본의가 아니다.” 하였다. 그러나 끝내 변명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사년의 방중(榜中)에 급제한 명가(名家)의 자식으로 병조의 낭관이 된 자가 하나 있자, 공이 말하기를 “만일 그가 스스로 옳게 처신하지 않으면 내가 반드시 그를 공박할 것이다.” 하였고, 홍문록(弘文錄)을 만들 때에 이르러서는 부제학 오도일(吳道一)과 쟁론하여, 기사년의 방중에 급제한 사람은 하나도 그 선(選)에 들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청의(淸議)는 조금 펴졌으나, 시배들이 공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것은 더욱 심해졌다.이때 칠(漆) 3두, 호초(胡椒) 40두를 대내로 들여오라는 명이 있자, 공이 응교로 차자를 올려 그 일을 논하였다. 그 대략에 “지금 이 물품의 수량이 매우 많은데, 전하께서 어디에 쓰시려는 것입니까. 만일 아무런 쓸데없는 일을 하는 데에 면치 못한다면, 신은 성상의 마음이 사치의 지경으로 들어간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깊숙한 방 안에서 남이 모르는 가운데 한 생각이 겨우 싹이 텄더라도 하늘은 이미 환하게 내려다보는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삼가고 두려워하는 뜻을 더욱 지키소서.” 하였는데, 상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그리고 집의에 체배되었는데, 이때 묘향(廟享)을 재감하자는 의논이 있자, 공이 주자(朱子)의 말을 인용하여 헌의하기를 “지금 상하 기관의 쓸데없는 비용을 전체적으로 계산하여 감하거나 혁파하는 일을 모든 기관에 모조리 다 시행하지 못하면서 먼저 묘향부터 감한다면 어찌 온당치 못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성명께서는 큰 뜻을 분발하여 힘써서 먼저 스스로 검약하소서.” 하였다.공이 일찍이 국문하는 자리에 참여했었는데, 이때 위관(委官)인 남상 구만(南相九萬)이 이의징(李義徵)을 감사(減死)하자는 의논을 제기하자, 공이 쟁론하기를 “의징은 화심(禍心)을 품고 누차 큰 옥사를 일으켜 사대부들을 마구 죽이고 국가에 해를 끼쳤으니, 용서해서는 안 된다.” 하고 누차 말하였으나 듣지 않으므로, 공이 일어나서 나오려고 하니, 위관이 부득불 공의 말대로 따랐다.이로부터 수찬을 두 번, 교리ㆍ응교ㆍ사간을 각각 세 번, 집의를 두 번 역임하고 동부승지에 올라 병으로 체직되었다. 그후 호조 참의에서 회양 부사(淮陽府使)로 나갔다가 을해년에 들어와 다시 승지가 되었다. 병자년에는 예조 참의로 삼척 부사(三陟府使)에 보임되었다. 정축년에는 사간원 대사간이 되어, 무지개와 천둥의 이변을 인해서 분부에 응하여 소장을 올려 재변을 중지시킬 절실한 방도를 극력 말하고, 또 경연에 자주 나갈 것과 세자를 보익할 것과 임금의 덕을 닦아 조정을 바르게 하고 염치를 면려하여 장법(贜法)을 엄히 할 방도에 대해 거의 수천 언을 진술하였는데, 상이 온후하게 비답하였다.무인년에는 철원 부사(鐵原府使)가 되었다가 기묘년에 돌아와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 이해 가을에는 또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나갔는데, 다음해에 그만두고 돌아오니, 광주 백성들이 공의 덕을 기리어 산비탈을 깎고 쇠를 주조하여 비를 세웠다. 신사년에는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자신을 단속하는 것이 매우 엄격하였고, 호령이 명확하고 엄숙하였다. 당시 도내에 여러 궁가(宮家)가 널리 점유한 산택(山澤)이 수십 군데에 이르렀으므로, 공이 장계(狀啓)를 올려 혁파하기를 청하면서 거취(去就)를 조건부로 삼아 쟁론하였으나, 조정이 이를 덮어 두고 시행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계미년에는 누차 소를 올려 체직되어 돌아와 호조ㆍ병조ㆍ예조의 참의와 승지ㆍ대사간ㆍ판결사에 제배되었는데, 그중에는 재차 제배된 벼슬도 있었다.갑신년 가을에는 또 대사간이 되어 3건의 일을 상소하여 논했는데, 하나는 선혜청(宣惠廳)의 쌀을 가져다가 시전(市廛)에서 외상으로 가져온 물건 값을 갚으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대관(臺官) 김만근(金萬謹)을 변방 고을에 물리쳐 보직시키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지평 김재(金栽)가 아첨하여 할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을유년에는 또 승지에서 예조로 옮겨졌는데, 이때 존호(尊號)에 관한 의논이 있자, 공이 자신의 직사(職事)로 상께 간하면서 육 선공(陸宣公)의 “태평한 때에 행하여도 이미 겸허함에 누가 되거니와, 상란(喪亂)이 있는 때에 행하는 것은 더욱 사체를 손상시킨다.”는 말을 인용하여 정성을 다해 개진하니, 상이 윤허하고 “과인을 지성으로 사랑한다.[忠愛寡躬]”는 전교를 내렸다. 이해 가을에는 개성 유수에 승진되어 무비(武備)를 일신시키고 부고(府庫)를 가득 채워놓으니, 피폐한 백성을 소생시키고 폐해진 일들을 흥기시킨 효과가 크게 있었다.정해년에는 병조 참판에 체배되었고, 무자년에는 서반직으로 의금부 당상을 겸하였다. 이때에 직신(直臣) 이동언(李東彥)이 시배들에게 증오가 쌓임으로 인하여 불효의 죄에 빠져 3년 동안 옥에 갇혀 있었는데, 성상의 뜻도 그에게 의도적인 것이 있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그 일을 말하기를 꺼려 했었다. 그런데 공이 상소하여 그 일을 논하되, 사건의 근본적인 것을 숨김없이 설파하고 증거의 단서를 죽 열거하였다. 그리고 인하여 이동언의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운 정상을 명백하고 적절하게 말하였으므로, 보는 이들은 다 통쾌하게 여기었으나 성상의 비답은 매우 엄하였다. 이로 인해 1년이 넘도록 벼슬길이 막히었는데, 뒤에 상의 명으로 이동언을 신원시키니, 사람들이 공의 상소가 그 장본이었다고 말하였다.기축년에야 비로소 병조ㆍ예조의 참판과 좌윤ㆍ우윤에 제배되었으나, 모두 병으로 사면하였다. 경인년에는 이조 참판이 되어 깨끗한 언론을 확장시키고 곧음을 굳게 지켜 굽히지 않았으므로, 시배들이 공에게 앙심을 품었다. 그래서 끝내 권첨(權詹)으로부터 상소하여 헐뜯음을 입고 이로 인해 정체(呈遞)되었다가 다시 공조 참판ㆍ대사성에 옮겨졌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고 강교(江郊)로 물러가 있으면서 일곱 번이나 소명(召命)을 어김으로써 파직되었다. 그러자 산수 속에 노닐면서 생을 마칠 계획을 하였다. 그해 11월 13일에 병으로 정침에서 작고하니, 향년이 78세였다. 공은 병중에 백여 마디 말을 입으로 불러서 자손들에게 남겨주었고, 임종시에도 성상의 병환이 중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애타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여 곡진히 말을 하였는데, 기식이 약하여 마치 꿈속의 말처럼 희미하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상이 예관을 보내 치제(致祭)하고 조문과 부의를 의식대로 하였다. 다음해 1월에 광주(廣州)의 월곡(月谷)에 장사 지냈다가, 을미년 9월에 본주(本州) 부곡촌(富谷村) 인좌(寅坐)의 언덕에 이장하고 부인 홍씨(洪氏)를 합장하였다.공은 천품이 대단히 강직했는데, 얼굴은 수척하고 정신은 맑았으며, 뜻은 고결하고 행실은 방정하였다.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어 항상 좌우에 모시면서 사랑과 공경을 곡진히 다하였고, 질고(疾故)가 있지 않으면 잠깐이라도 부모의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부모가 하찮은 병환이라도 있으면 얼굴에 근심스러운 빛이 드러났다. 일찍이 말하기를 “어버이를 모시는 사람은 의약(醫藥)을 몰라서는 안 된다.” 하고, 모든 의방(醫方)을 두루 상고하여 의술을 대략 알게 되었다. 어버이 상을 당하여서는 상심하여 슬퍼하는 정도가 예제에 지나쳤고, 비바람도 아랑곳없이 여묘에서 곡배(哭拜)하였다. 또 선대에 언급이 되면 반드시 목이 메어 울었는데, 늙어서도 그 슬픔이 줄지 않았다.공은 외가의 선대 비갈(碑碣)을 몸소 다 마련하여 세웠다. 두 형을 마치 아버지처럼 섬겼고, 막내아우가 매우 가난했으므로 토지를 떼주어 생계를 꾸려 나가게 하였다. 부친을 여읜 세 조카들을 지성으로 교도하였고, 종형제들을 동기간과 똑같이 대하였다.일찍부터 위기(爲己)의 학문을 사모하여 대현(大賢)을 사사하였는데, 비록 일찍이 유자(儒者)로 자처하지는 않았으나 행신과 처사가 법도에 맞지 않은 것이 적었다. 매일 새벽이면 반드시 일어나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있었고, 상스럽고 술수적인 말을 전혀 하지 않았다. 서책을 매우 좋아하였는데, 그중에도 주자의 글에 더욱 힘써 깊이 연구하고 흡수하여 이치가 밝아지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아서 이것을 일생의 체험으로 삼았다. 만년에는 《소학》 일부(一部)를 정하게 베껴가지고 늘 펼쳐보면서 말하기를 “사람들이 만일 이것을 안다면 어버이와 임금을 거의 섬길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문(文)을 짓는 데는 기력이 매우 힘찼고 억지로 꾸민 흔적이 없었는데, 임금에게 상주한 문자에 이르러서는 사람들이 모두 박식하고 문견이 많다고 칭도하였다. 시를 짓는 데 있어서는 생각이 침울하고 전중하였으며, 화려함을 일삼지 않았으므로, 문단의 여러 노장들이 공의 시를 감상한 것이 많았다.사람을 접대하는 데는 반드시 정성과 신의로써 하였고 간격을 두지 않았다. 남의 잘한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포양할 것을 생각하였고, 만일 불선한 사람을 보면 마치 자신을 더럽힐 것처럼 여기었다. 평온하고 조용하게 자신을 단속하고 출세 길에 분주하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문정(門庭)이 고요하여 잡객들이 들어오지 않았다. 검소함을 숭상하여 자신 받드는 것을 마치 한빈한 선비와 같이 하였고, 염치와 절의를 면려하여 깨끗한 명성이 조정의 고관들 가운데 으뜸이었다. 객지에 집을 사서 우거하는 것을 남들은 그 고통을 견디지 못했으나 공은 태연하게 지냈다.산수를 매우 좋아하여 역내(域內)의 명산들을 두루 유람하고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10구(區)를 그림으로 그려서 병풍을 만들어 둘러놓고 누워서 유람하였다. 모든 물(物)에 인자하여 비록 곤충 같은 미물도 차마 함부로 죽이지 않았고, 정사를 하는 데는 엄격함을 숭상했으나 한 번도 인명을 손상시킨 적이 없었다. 저술한 것이 매우 많았으나 스스로 수장(收藏)하지 않아서 절반 이상이 산일되었고, 약간 권만이 집에 소장되어 있다.상당 한씨(上黨韓氏)는 고려 태위(太尉) 난(蘭)을 상조(上祖)로 삼는다. 아조에 들어와서는 대대로 고관이 나서 귀한 지위를 계승하여 동방의 갑을족(甲乙族)이 되었다. 근세에 우의정을 지낸 충정공(忠靖公) 휘 응인(應寅) 같은 분은 큰 훈업(勳業)이 있어 중흥의 명상이 되었다. 충정공이 휘 덕급(德及)을 낳았는데 덕급은 지돈녕(知敦寧)으로 청녕군(淸寧君)을 습봉받았고, 사계 선생의 집에 장가들어 휘 수원(壽遠)을 낳았다. 수원은 사림들 사이에 중한 명망이 있었고, 목사를 지내고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는데, 이분이 바로 공의 고(考)이다. 비(妣)는 함평 이씨(咸平李氏)인데 그의 고 용계 처사(龍溪處士) 영원(榮元)은 승지에 추증되었다.홍 부인(洪夫人)은 당성(唐城)의 대성으로 도관찰사인 성암공(醒菴公) 처후(處厚)의 딸인데, 단정하고 엄숙하고 차분하고 전일하여 일마다 예법을 따라서 하였다. 그리하여 집에 있을 적에는 부모가 그를 훌륭하게 여겼고, 시집간 뒤에는 시부모가 그를 좋게 여겼다. 동서들을 마치 친형제처럼 대하였고, 여러 아비 여읜 조카들을 자기 자식과 똑같이 어루만져 보살피었다. 상자에는 패물이 없었고, 문에는 무당이나 점쟁이를 들이지 않았다. 공을 따라 여러 지방 고을에 가서도 아무것도 팔고 사지 않으니, 안과 밖이 엄숙하였다. 그리하여 집안사람들이 모두 그를 모범으로 삼았다.4남 1녀를 길렀는데 장남 배의(配義)는 정랑이고, 다음은 배도(配道)ㆍ배문(配文)ㆍ배기(配琪)이며, 딸은 조명휘(趙命徽)에게 시집갔다. 측실이 낳은 아들은 배희(配煕)이고, 딸은 박필무(朴弼懋)에게 시집갔으며, 그 다음 딸은 아직 비녀를 꽂지 않았다. 배의의 아들 사범(師范)은 진사이고, 2녀는 이홍좌(李弘佐)와 유세모(柳世模)에게 시집갔다. 배도의 양자는 사식(師軾)이고, 3녀 가운데 둘은 윤지(尹志)ㆍ윤득검(尹得儉)에게 시집갔고, 막내딸은 아직 정혼하지 않았다. 배문의 아들은 사일(師逸)이고, 딸은 신진하(申鎭夏)에게 시집갔다. 배기는 일찍 죽었다. 사위 조명휘의 아들은 한종(漢宗)ㆍ한명(漢明)ㆍ한장(漢章)이다. 내외 증ㆍ현손이 모두 50여 인이다.아, 공은 명문의 귀한 자제로 재학(才學)이 뛰어나서, 유생으로 있을 때부터 명성과 인망이 성대하였다. 늦게야 임금의 알아줌을 받게 되어서는 풍도와 위엄이 한 세상을 떨쳤으니, 의당 조정에 예복을 차리고 앉아 그 경륜을 크게 펼 듯했었는데, 누차 임금의 뜻에 거슬리고 시론(時論)과도 거슬림이 쌓여, 쓰인 것이 항상 시배들의 마음에 달려 있음으로써 포부와 능력을 다 펴지 못하고 뜻을 가진 채로 작고하였으니, 이것이 혹 이른바 운명이라는 것인가.비록 그러나 삼가 공의 벼슬한 시말을 상고해 보건대, 대각(臺閣)에 있을 적에는 고인의 정직한 풍도가 있었고, 강연(講筵)에 들어가서는 진학사(眞學士)란 칭송이 있었다. 그 늠름한 풍성(風聲)이 사책에 빛나서, 백세 뒤에까지도 반드시 나약한 자를 일으켜 세우고 탐욕스러운 자를 청렴하게 하는 것이 있을 것이니, 살아서는 존귀를 극도로 누렸으나 죽어서는 일컬을 만한 것이 없는 사람과 비교해 보면 그 현ㆍ불초의 차이가 어떠하겠는가. 옛날 구양공(歐陽公 송 나라 구양수(歐陽脩))은 정사에 가장 뛰어났으나 그것이 문장에 가리었었는데, 지금 공은 행의가 순수하고 구비한데도 사람들이 혹 다 알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이 또한 공의 직절(直節)에 가리어진 것인가.나는 공과 대대로 다져온 친밀함과 동문의 정분이 있으므로, 비록 은거함과 현달함의 길이 서로 달라서 자주 서로 종유하여 봉마(蓬麻)의 이익은 힘입지 못했으나, 그 높은 풍도를 멀리서 사모해온 지는 오래되었다. 공이 작고한 지 오래되어 지금 공의 묘목(墓木)이 이미 아름드리가 되었는데, 정랑군(正郞君)이 비문을 지어달라고 울면서 청하니, 내가 어찌 감히 글을 못한다 해서 사양하겠는가. 삼가 행장의 글에서 발췌하여 이상과 같이 차례대로 기록하고 명(銘)으로 잇노라. 명은 다음과 같다.여기에 한 신하가 있어 / 若有一个강하기가 철석 같았네 / 其剛鐵石일찍부터 사문에서 수학하여 / 夙遊師門학문이 바르고 곧았네 / 學其方直예송이 화의 계제가 되어 / 禮訟階禍우암 선생이 멀리 유배되자 / 大老栫棘수백 인의 선비를 거느리고 / 倡數百士상소하여 선생을 변호했네 / 抗章昭析경신년의 대출척으로 인해 / 白猿更化공이 비로소 벼슬을 했는데 / 公始通籍정색하고 대관의 자리에 있으니 / 正色臺端위엄이 가을 하늘 수리새 같아 / 秋天一鶚준엄한 말로 대면하여 힐책하매 / 危言面折조야가 모두 위축되었네 / 朝野瑟縮그런데 겁화가 하늘에 가득하여 / 劫火彌空시사가 망극한 지경에 이르자 / 時事罔極벼슬 내놓고 영원히 은퇴하여 / 掛冠長往산수 사이에서 노닐었네 / 婆娑林壑그러다가 임금님이 마음 돌리어 / 黃道回光바른 선비들 다시 돌아오자 / 正士來復깐깐하게 충성스러운 계책으로 / 侃侃忠規임금님 정사 힘써 도왔네 / 密勿經幄큰 고을 수령과 감사를 지내면서 / 大邑名藩매우 검소한 생활을 하였고 / 淸氷苦蘗개성 유수로 있을 적에는 / 居留舊京상의 의뢰하는 마음 더욱 두터웠네 / 倚畀益篤이조 참판으로 들어와서는 / 入佐天官호선오악의 정사부터 먼저 하니 / 政先揚激증오하는 자가 세상에 가득차서 / 白眼滿世쉬파리 옥 더럽히듯 공을 해쳤네 / 靑蠅點玉용납되지 못한 게 무어 해로울쏘냐 / 不容何病우유자적함이 즐겁기만 했었지 / 優閒可樂내 곡식 무성하게 자라고 / 我稼油油내 호수 맑고 푸르렀었네 / 我湖澄碧그러다가 선뜻 세상 떠나니 / 翛然乘化천지간에 부끄러울 것 없어라 / 俯仰無怍효성스러운 아들이 좋은 돌 다듬어 / 孝子劖珉공의 명성과 덕행 드러내려 하니 / 思顯名德맑은 명성 끝없이 전해져서 / 淸芬不沫구름과 물과 함께 깨끗하리라 / 雲水俱白[주-D001] 육 선공(陸宣公)의 …… 손상시킨다 : 육 선공은 당(唐) 나라 때의 직신(直臣) 육지(陸贄)를 말한다. 선공은 그의 시호. 이 말은 육지의 봉천논존호가자장(奉天論尊號加字狀)에 나온다. 《四庫全書 集部 翰苑集 卷13》[주-D002] 봉마(蓬麻)의 이익 : 《순자(荀子)》 권학(勸學)에 “쑥대가 삼밭 속에 나면 손을 쓰지 않아도 절로 곧게 자란다.[蓬生麻中 不扶而直]” 한 데서 온 말로, 즉 착한 사람과 사귀면 자신도 자연히 착해짐을 비유한 것이다.
- 2023-08-14 | NO.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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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평(昌平) 장세방(張世方)ㆍ정만의(鄭萬儀)의 수령 모함, 3차보고- 광주목사
- 보첩고(報牒攷)○영조(英祖) / 영조(英祖) 42년(1766)4월 초6일 3차 보고첩보(牒報)하는 일. 본주(本州)의 수추 죄인(囚推罪人 가두어 놓고 심문하는 죄인) 장세방(張世方)ㆍ정만의(鄭萬儀) 등에게 형벌을 가하여 추문(推問)한 다음 첩보하였는데, 그에 대한 서목(書目)의 제사(題辭)에, “최둑금(崔豆ㄱ金)은 보고한 대로 분간(分揀)할 것이며, 장세방은 조율할 것이므로 그냥 구금해둘 것이며, 정만의는 다시 보고한 대로 지만(遲晩)한다는 공초를 받아 첩보함으로써 일체로 조율(照律)할 수 있게끔 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그들에게 공초를 받았습니다.병술년 4월 초6일에 창평(昌平)의 재인(才人) 정만의 나이 30세, 아뢰기를, “‘너에게 형벌을 가하여 추문한 다음 순영(巡營)의 사또(使道)에게 첩보하였는데, 그에 대한 서목의 제사에, 「정만의는 다시 보고한 대로 지만의 공초를 받아 첩보함으로써 일체로 조율할 수 있게끔 해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 네가 이전의 공초 내용 중에 장세방이 의송을 바칠 때 너는 참여하여 대략적인 내용만 알 뿐이고 원래 의송(議送)을 바치자고 주장한 일은 없었다고 하였다. 네가 이미 참여하여 그 대략적인 내용을 알았다면 예사롭게 참여하여 아는 것으로 논할 수 없다. 네가 창평현의 백성으로 암암리에 장세방과 같이 이리저리 엮어서 의송을 작성하였으니, 비록 장세방으로 하여금 의송을 바쳤으나 같이 의논하여 작성한 자가 너였으니만큼 토주(土主)를 모함한 죄를 네가 어찌 감히 해명할 수 있겠는가. 문목 내의 사연을 사실에 따라 지만의 공초를 바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비록 의송을 바치는 일을 주장한 일이 없기는 하나 이미 장세방과 같이 상의하는 등 참여하여 알았으니, 토주를 모함한 죄를 어찌 감히 해명할 수 있겠습니까. 지만의 공초를 바치오니, 상고하여 처리하였으면 합니다.”라고 하였는데, 이상이 공초의 내용입니다.정만의는 제사에 따라 지만의 공초를 받아 첩보하고 최둑금은 분간(分揀)하여 방면하였으며 장세방은 그대로 수금해두었습니다. 이상의 연유를 모두 첩보합니다.제사(題辭)정만의도 그냥 수금해두어 일체로 조율하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 2023-10-16 | NO.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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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평(昌平) 장세방(張世方)ㆍ정만의(鄭萬儀)의 수령 모함, 재차보고- 광주목사
- 보첩고(報牒攷)○영조(英祖) / 영조(英祖) 42년(1766)3월 28일 재차 보고첩보(牒報)하는 일. 창평현(昌平縣)에 소속된 여종 분애(分愛)와 간통한 장세방(張世方)이 정만의(鄭萬儀)ㆍ최둑금(崔豆ㄱ金) 등과 짜고 의송(議送)을 바친 사연에 관해 공초를 받아 첩보하니, 사또(使道)께서 서목(書目)에 제사를 보냈는데, 그에 의하여 그들에게 형벌을 가하여 공초를 받았습니다.병술년 3월 28일에 경양 역리(景陽驛吏) 장세방 나이 36세가 아뢰기를, “‘네가 분애와 간통한 사건으로 의송을 바친 사연에 관해 공초를 받아 첩보하니, 순영(巡營)의 사또께서 보낸 그에 대한 서목의 제사에, 「장세방은 자기가 간통한 정황을 창평에서 분명하게 공초를 바쳤는데, 그 뒤에 다시 심문할 때 교묘한 말로 해명하여 허물이 드러나지 않게 감추어 꾸민 흔적이 뚜렷하게 있었으니, 매우 간악(奸惡)하였다. 그에게 한 차례 형장(刑杖)을 가하여 신문(訊問)하고 지만(遲晩)한다는 공초를 받아 첩보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너를 순영 사또의 제사를 보냄에 따라 각별하게 엄히 형벌을 가할 것이니, 유부녀와 간통한 정황에 대한 지만(遲晩)한다는 공초를 바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네가 분애와 간통할 때 최둑금이 분애의 친속으로 그녀가 본남편에게 소박을 당하였다는 이유로 너와 서로 간통하도록 주선한 정황을 이미 창평의 사안(査案)에 사실대로 공초를 바쳤다. 그런데 지금 사관(査官)을 다른 관아로 옮긴 뒤에는 최둑금이 애당초 간섭하지 않았고 분애의 형부가 주선하였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최둑금은 분애의 친속이니만큼 어찌 간섭한 일이 없었겠는가. 이 한 조목도 아울러 사실대로 공초를 바쳐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같은 날 장세방에게 한 차례 형벌을 가하여 심문하고 형장(刑杖) 30대를 친 다음 다시 추문(推問)하니, 그가 아뢰기를, “제가 당초에 단지 분애의 형부 말만 듣고 그녀가 남편이 없어서 구혼(求婚)할 줄로 여긴 나머지 과연 서로 간통하였습니다. 그 뒤에 나장추(羅長秋)가 창평 관아의 뜰에서 고한 것으로 인해 사실을 추문하는 지경에 이러러 분애는 창평현에 관비(官婢)로 예속되었습니다. 제가 처음에 비록 남편이 없는 여자로 알고 간통하였으나 필경에는 자연히 유부녀와 간통한 셈이 되어버렸습니다. 지금 엄하게 심문하시므로 지만(遲晩)한다는 공초를 바칩니다. 분애의 일가붙이 최둑금은 애당초 서로 왕래하며 속말을 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창평의 관정(官庭)에서 공초를 바칠 때 다짐(侤音 범인이 자백한 범죄 사실을 다짐하는 것, 그러한 문서)이 무슨 말인지 몰랐고 또한 종말에 이러한 환난이 있으리라 생각지 않은 채 범연히 공초를 바쳤습니다. 지금 이 문제를 다시 조사하시므로 최둑금이 간여하지 않은 정황을 사실대로 공초를 바칩니다. 모두 아울러 처리해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하였는데, 이상이 공초의 내용입니다. 제사(題辭)에 따라 장세방에게 한 차례 형벌을 가해 추문하여 지만의 공초를 받았습니다.정만의는 한 차례 형벌을 가하여 추문한 뒤에 첩보하였습니다. 장세방이 의송을 바칠 때에 정만의가 비록 주장한 바가 없기는 하나 그가 참여해 아는 바가 긴요한지 긴요하지 않은지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 놈과 장세방이 암암리에 이리저리 엮어서 의송을 작성하였을 경우 나아가 바친 자가 장세방이고 같이 의논한 자가 정만의였으니, 이는 그냥 참여해 아는 정도로 논할 수 없습니다. 그가 창평현의 백성으로 이렇게 토주(土主)를 모함하는 행위를 하였는데, 경하게 다스린다면 먼 지방의 악습(惡習)을 징계할 수 없으므로 다시 지만의 공초를 받아 율(律)에 따라 치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최둑금은 당초 심문할 때에 그가 아주 절실하게 간여한 바를 볼 수 없었으므로 구별하여 별개로 보고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사가 하달되었으므로 장세방에 대해 문목(問目)을 작성하여 그 부분에 관해 별도로 엄하게 심문하였으나 그 또한 간여하지 않은 것으로 공초를 바쳤습니다. 참작하고 상량하여 처분을 내려 주셨으면 합니다.제사(題辭)최둑금은 보고한 대로 분간(分揀 죄상(罪狀)을 살펴서 용서함)해야 할 것이며, 장세방은 조율(照律)해야 하므로 그냥 구금해둘 것이며, 정만의는 다시 보고한 대로 지만의 공초를 받아 첩보함으로써 일체로 조율할 수 있게끔 해야 할 것이다.
- 2023-08-17 | NO.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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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평(昌平) 장세방(張世方)ㆍ정만의(鄭萬儀)의 수령 모함- 광주목사
- 보첩고(報牒攷) -光州牧使○ 영조(英祖) 42년(1766) 2월 26일 창평(昌平) 장세방(張世方)ㆍ정만의(鄭萬儀) 등이 토주(土主 고을의 수령)를 모함하여 거짓말로 의송(議送)을 바친 일을 조사하여 보고하다첩보(牒報)하는 일. 방금 전에 도착한 창평현(昌平縣)의 이문(移文 공문(公文)을 보내 조회함. 또는 그 문건)에, “저의 현에 소속된 관비(官婢) 분애(分愛)의 샛서방 장세방이 정만의(鄭萬儀)ㆍ최둑금(崔豆ㄱ金)과 같이 짜고 송관(訟官)을 모함하여 의송을 바친 일에 관해 저의 현에서 사관(査官)을 청하여 조사해 보고하겠다는 뜻으로 영문(營門)에 보고하였습니다. 그에 대한 서목(書目 하부 관아에서 상부 관아로 올리는 원장(原狀)에 구비하는 문서)의 제사(題辭)에, ‘본현(本縣)에서 이미 사관을 청하였기에 광주목(光州牧)에서 차정(差定)하도록 하였으니, 위의 죄인을 광주로 이송해야 할 것이다. 제사를 낱낱이 들어 이문하여 시행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동 죄인 장세방ㆍ최둑금 등을 지정한 관인(官人)으로 하여금 압송하도록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그 죄인들에게 공초(供招)를 받았는데, 병술년(丙戌年, 1766, 영조42) 2월 26일에 창평 속오군(束伍軍) 최둑금 58세, 경양 역리(景陽驛吏) 장세방 26세, 창평 재인(才人) 정만의 30세 등이 아뢰기를, “‘최둑금! 네가 경양 역리 장세방이 유부녀 분애와 간통한 일에 관련해서, 네가 분애의 친속으로 그녀가 본남편에게 소박을 당했다는 이유로 그녀로 하여금 장세방과 간통하도록 한 상황을 이미 창평의 사안(査案)에 남김없이 자복하였다. 지금 그 조사를 여기로 이관(移管)하였으니, 다시 사실대로 공초를 바치도록 하라. 장세방! 네가 유부녀와 간통한 죄가 이미 전후의 문안(文案)에 이미 드러났으므로 지금 다시 물을 필요가 없으나, 네가 간통한 여자 분애가 남편이 있는데도 다시 간통한 바람에 너를 법에 따라 관노비(官奴婢)로 편입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무슨 원통함이 있기에 정만의 등과 짜고 모함하는 의송을 바쳐 송관(訟官)을 침해하고 핍박하였는가. 그간의 내막을 숨김없이 사실대로 고하도록 하라. 정만의! 너는 분애와 친속이 아니므로 해당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데 분애가 관아에 예속되는 것이 너에게 무슨 관계가 있기에 그녀의 샛서방과 같이 의송을 바쳐 토주(土主)를 모함하였는가. 그간의 정황을 사실대로 공초를 바치도록 하라.’고 추문(推問)하셨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최둑금이 아뢰기를, “이른바 분애는 저의 7촌 질녀(姪女)입니다. 분애가 애당초 남평에 사는 서삼덕(徐三德)에게 출가하였는데, 서삼덕의 나이가 어렸습니다. 서삼덕의 의부(義父) 박대건(朴大建)은 본래 사나운 자로 그의 며느리를 구박하며 내쫓아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분애가 부득이 창평에 사는 그의 형부(兄夫) 나장추(羅長秋)의 집으로 가서 의지하였습니다. 그러자 분애의 형부가 그녀의 처지를 가엾이 여긴 나머지 장세방에게 소개하여 서로 간통하게 한 것이지, 제가 간섭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였습니다.장세방이 아뢰기를, “분애의 형부가 과연 저와 결혼하라고 하였기 때문에 그녀가 유부녀인 줄을 모르고 서로 간통하였습니다. 그 뒤에 나장추의 마을에서 이로 인해 시비가 발생하여 관아에 고발하여 관노비로 편입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이는 분애의 본남편이 고발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작란삼아 한 일로 인해 관노비로 몰수되어 너무나도 원통하기에 과연 의송을 바치게 되었습니다. 정만의는 나장추와 같은 마을에 살기 때문에 피차의 사정을 중간에서 아는 바가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만 원래 소장(訴狀)을 바칠 것을 주장한 일이 없습니다. 상고하여 처결해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정만의가 아뢰기를, “분애는 저와 천부당만부당한 사람입니다. 그녀의 샛서방을 만들어주거나 관노비를 만든 일은 저와 전혀 상관이 없고 단지 나장추와 같은 마을에 살기 때문에 그녀가 관노비로 예속되는 것이 억울하다는 공론을 들어본 것입니다. 그 뒤에 장세방이 의송을 바칠 때 그 대략적인 것만 알았을 뿐이고 원래 의송을 바치는 것을 주장한 일이 없습니다. 상고하여 처리해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하였는데, 이상이 공초의 내용입니다.창평현의 전후 문안을 가져와 상고해 보니, 장세방 등이 자복한 공초에 그 죄가 훤히 드러나서 사실을 발췌하여 끝까지 궁구해 보니 다시금 미진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관(査官)을 다른 관아로 옮겨 정하였기 때문에 이전의 공초와 비해 허물이 드러나지 않게 감추어 꾸민 바가 있었으므로 장세방이 유부녀와 간통한 것이 잘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정만의가 의송을 바친 것은 그가 비록 주장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이미 참여하여 아는 일이 있었으니, 토주를 모함한 죄를 어떻게 면할 수 있겠습니까. 위의 두 놈은 결코 엄하게 형벌을 가하여 법을 적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최둑금은 애당초 장세방이 분애와 간통하였을 때 그가 비록 몰랐다고 말하기는 하였으나 그의 모습을 살펴보고 말을 들어보니 저절로 서로 주선해 준 형적이 있었습니다. 이놈은 비록 두 놈과 차이는 있으나 분애의 친속으로 사람을 잘못 유도하여 음탕하게 만든 죄를 지었으니만큼 치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두 참작하고 상량하여 처분을 내려 주셨으면 합니다.제사(題辭)장세방은 자기가 간통한 정황을 창평에서 분명하게 공초를 바쳤는데, 그 뒤에 다시 심문할 적에 교묘한 말로 해명하여 허물이 드러나지 않게 감추어 꾸민 흔적이 뚜렷하게 있었으니 매우 간악(奸惡)하였다. 그에게 한 차례 형장(刑杖)을 가하여 신문(訊問)하고 지만(遲晩)한다는 공초를 받아 첩보하고, 정만의는 장세방이 의송을 바칠 때에 비록 주장하지는 않았더라도 이미 참여하여 알았으니만큼 토주를 모함한 죄를 그도 면하기 어려우니, 한 차례 형장을 가하여 심문한 뒤에 첩보해야 할 것이다. 최둑금은 처음에 자세히 알지 못했다고 공초를 바쳤으니 모습과 말을 가지고 억측으로 단정할 수 없으니, 이 조목은 장세방에게 추궁해 심문하면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장세방을 심문할 때 문목(問目)에 추가로 넣어 상세히 조사한 다음 첩보해야 할 것이다.[주-D001] 속오군(束伍軍) : 선조(宣祖) 27년(1594) 왜군에 대항할 군대를 확보하기 위해 지방에서 신역(身役)이나 벼슬이 없는 15세 이상의 양반, 양민과 천민을 뽑아 조직한 군대.[주-D002] 재인(才人) : 천인(賤人)의 하나. 남자는 노래와 춤과 줄타기를 업(業)으로 하고, 여자는 무당 노릇 기타(其他)를 업으로 하여 농업 등의 정업(正業)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을 말함.[주-D003] 지만(遲晩) : 지체되어 늦었다는 직접적인 문의(文意)에서 확장되어, ‘너무 오래 속이고 자백하지 않은 것이 미안하다’는, 즉 자복(自服)을 가리키는 법제어.
- 2023-08-17 | NO.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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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평현(昌平縣) 삼지천(三支川) 마을 사망자 정몽표(鄭夢杓)의 복검장(覆檢狀)- 광주목사
- 보첩고(報牒攷) - 光州牧使○ 영조(英祖) 41년(1765) 9월 23일 창평현(昌平縣) 삼지천(三支川) 마을에 사망한 사람 정몽표(鄭夢杓)의 복검장(覆檢狀)첩보(牒報)하는 일. 각 사람들의 공초(供招)를 받았습니다. 살옥(殺獄)의 핵심은 사망의 원인이 명백해져야만 산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간에 억울한 바가 없을 것입니다. 이번에 정몽표의 시신을 법물(法物 검시(檢屍)에 사용되는 기물(器物))로 앞뒤로 돌려가며 세척한 뒤에 전신(全身)의 상하를 직접 손으로 만져보니 앞면과 뒷면에 비록 색이 다소 변하기는 하였으나 간간이 피부가 벗겨진 곳이 전부 유연하여 하나도 굳어있지 않았으므로 결국 구타를 당했다고 말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병이 나 사망하였으므로 혹시 독극물을 마시지 않았는지 염려되어 은동곳을 입과 항문에 삽입해 놓았다가 한참 뒤에 꺼내어 조각수(皂角水 쥐엄나무를 달인 물)로 세척해 보니 은동곳의 색이 변하지 않았으므로 그 또한 논할 만한 의심스러운 것이 없었습니다.그런데 시친(屍親 사망자의 가족이나 가까운 친속) 정상언(鄭相彦)의 공초를 볼 적에 그가 조광윤(曺光潤)에게 노한 나머지 관청으로 달려가 고하였다고 하였으나 그의 모습을 살펴보고 말을 들어보면 거의 실성(失性)하여 언어가 착란한 것 같았습니다. 그의 언어가 착란한 것이 혹시 전후로 마음과 입이 같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닌지 염려되어 재삼 힐문(詰問 따져 물음)하여 기어이 사실을 밝혀내려고 하였으나 시종 다른 말이 없다가 결국 자기가 미쳐서 망령이 들었다고 자복(自服)하였으니, 그의 아들이 병으로 죽은 것에 대해 조금도 의심할 만한 단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죽은 원인을 병으로 인해 사망하였다고 기록한 뒤에 시장(屍帳 시체 검안서(檢案書)) 3건을 작성하여 천자(天字)의 자호(字號)를 써넣은 다음에 1건은 시체의 친척에게 주고, 1건은 관아에 보관하고, 1건은 봉하여 올립니다.이처럼 맹랑한 옥사(獄事)로 인해 지금 한창 파종하고 수확하는 시기를 맞아 이웃에 사는 사람들이 갇혀 있어서 민망하므로 즉시 방면하여 보내고 시체는 친척에게 내주어 매장(埋葬)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조광윤은 이미 피고(被告)가 되었으므로 그냥 엄하게 가두어두고 처분이 내리기를 기다리도록 하였습니다. 이상의 연유를 모두 첩보합니다.제사(題辭)초검장(初檢狀)을 대조해 조사한 시장(屍帳)을 바쳤지만 시체에 상처의 흔적이 없었으므로 그가 병으로 사망한 것임이 확실하다. 그런데 정상언이 피살(被殺)로 고발하였으니, 너무나도 허망(虛妄)하다. 그의 공초에도 이미 그러한 사실을 자복(自服)하였으니만큼 사리상 마땅히 그의 죄를 다스려서 살옥(殺獄)의 무고(誣告)에 관한 율(律)을 중하게 해야겠으니, 그를 한 차례 엄하게 형벌을 가하여 방면한 뒤에 시체를 내주어 매장(埋葬)하도록 하고, 관련된 사람들과 피고인은 모두 일체 방면하도록 한다.[주-D001] 복검장(覆檢狀) : 두 번째로 검시(檢屍)한 문안이다. 살인사건이 났을 때 《무원록(無寃錄)》에 의거하여 시체(屍體)를 검안(檢案)하는데, 첫 번의 검안(檢案)인 초검(初檢)과 복검(覆檢)이 차이가 없으면 이것으로 판결(判決)하고 차이가 있으면 삼검(三檢)하여 초검ㆍ복검ㆍ삼검의 결과를 종합하여 처리함.
- 2023-08-17 | NO.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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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국계 採菊契
- 채국계는 교유계(交遊契), 풍류계(風流契)로 지금의 전남대학교 뒷편 반룡부락에 거주하던 운파(雲坡) 김진현(金珍鉉)을 위하여 이철종(李哲琮) 등이 1933년 중구일(重九日)에 동료 제자들과 스승의 지우(知友) 등 300여명을 모아 창계하였다. 김진현은 이미 강의계(講誼契)를 만든바 있고 채국계의 창계를 지원하였으며 해방 후 난심계(蘭心契)까지 결성하는 등 시문을 좋아하고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즐겼다. 채국계라는 계명을 붙인 것은 중양절(음력 9월 9일)과 관계가 깊다. 지금은 우리 기억에서 멀어졌지만 구구절, 구일날 또는 귈날이라고도 하는 중양절은 추석 못지 않은 큰 명절이었다. 햇곡식으로 조상께 천신(薦新)하고 누런 국화를 따서 국화전을 부치고 국화주를 빚어 시식(時食)으로 삼았다. 중국에서는 옛날부터 1에서 10까지의 기본수 가운데 기수(奇數)를 양수(陽數)라 하여 1월 1일, 3월 3일, 5월 5일, 7월 7일, 9월 9일을 명절로 삼았다. 그 가운데에서도 양수의 극이라 믿는 9가 겹치는 날을 중양이라 하여 양기를 존중하는 사상에서 큰 명절로 삼아 왔다. 한.위(漢.魏)시대부터 국화를 감상하고 높은 곳에 올라 시를 읊는 상국등고(賞菊登高)의 습속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 이래로 중구절을 숭상하여 군신(君臣)이 설연창화(設宴唱和)하였고 풍류를 아는 선비들은 높은 곳에 올라 시를 쓰고 단풍과 국화를 감상하며 하루를 즐겼다 조선시대 이래 중구절은 일반백성의 명절이라기보다 양반들 특히 남자들의 명절이었다. 중양절의 의미를 살려주는 국화를 계명에 붙인 것은 이와같은 전통에서 기인한 것으로 계절감 및 계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잘 나타내준다. 1968년 운파 사후 채국계는 받드는 대상을 상실하고 소멸하였다. 채국계는 성년이 된 운파의 문인과 친우들로 구성되었는데 거주지는 서방.용봉 지역이었다. 창계시 계원이 300명이 넘었으니 운파를 흠모하고 따르는 이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짐작할 수 있고 그의 높은 학식과 문장의 고매함을 알 수 있다. 한학의 대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조직이므로 단결력이 튼튼하고 스승이 생존해 있는 기간 동안은 별다른 계원의 변동없이 잘 유지되어 왔다. 채국계의 강신일은 매년 음력 9월 10일이었다. 강신일이 되면 20여명의 유사가 200명 이상이 참석하는 계회의 음식물을 각자의 자비로 부담하여 준비하고 가마솥, 땔감, 그릇 등을 터가 넓은 정자나 냇가의 나무숲 아래로 가지고 나가 직접 밥을 지어먹었다. 같은 솥의 밥을 함께 먹음으로써 일문이라는 일체감을 더욱 다진 것이다. 채국계도 강의계와 유사하게 스승을 받들고 교제를 넓히자는 취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상국등고(賞菊登高)는 못하였지만 지참한 지필묵으로 운에 맞춰 한편의 싯구를 읊으며 늦가을의 정취를 한껏 표출하는 장을 마련하였으며 이를 본계의 중요한 대목으로 여겼다. 이 자리에서 직강에 의해 한시 짓는 법이 강의되었고 서로 앞다투어 시문을 써내 주고받으며 필력을 향상시키고 우의를 돈독히 하였다. 계비는 창계시 20전, 해방이후 30원씩의 계비를 각출하는 등 최소 운영비용만을 거두었을 따름이며 계원에 대한 상조 기능은 거의 없었고 그때그때 계원 상호간 부조만 있었다. 운파 사후 유족과 그를 따르는 몇몇 제자에 의해 <雲坡遺稿> 文集이 발간되었다. 지금까지 채국계를 통해 선인들의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알 수 있으며, 해방 후 극히 짧은 기간동안 우리의 의식이 급변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 2020-05-24 | NO.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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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사(處士) 묵재(默齋) 김공(金公)의 행장
- 갈암집 별집 제6권 / 행장(行狀)본관은 전라도 광주목(光州牧) 평장리(平章里)이다.증조는 휘가 부의(富儀)인데 성균관 생원이었고, 자호를 읍청당(挹淸堂)이라고 하였다. 비(妣)는 안동 권씨(安東權氏)이고, 계비는 가평 이씨(嘉平李氏)이다.조부는 휘가 해(垓)인데 통사랑(通仕郞) 행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行藝文館檢閱兼春秋館記事官)을 지냈고, 승의랑(承議郞) 홍문관수찬 지제교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弘文館修撰知製敎兼經筵檢討官春秋館記事官)에 추증되었으며, 자호를 근시재(近始齋)라고 하였다. 비는 단인(端人) 진성 이씨(眞城李氏)이다.부는 휘가 광계(光繼)인데 동몽교관을 지냈고, 자호를 매원(梅園)이라고 하였다. 비는 유인(孺人) 광주 이씨(廣州李氏)이다.공의 휘는 렴(????)이고, 자는 여용(汝用)이며, 본관은 광주(光州)인데, 신라 왕자(王子) 흥광(興光)의 후손이다. 신라의 정치가 쇠하자 왕자가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광주로 피신하였는데, 자손들이 그대로 살며 관향(貫鄕)을 삼았다.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가 된 분이 있었고, 그 후에 대를 이어서 그 직위를 맡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사는 곳을 평장동(平章洞)이라고 불렀으나 세대가 멀어서 자세한 것을 알 수 없다. 본조에 들어와서 휘 천리(天理)가 벼슬이 재상에 이르러 비로소 한양에 옮겨 살았고, 8대조 휘 무(務)가 또 안동부(安東府) 일직현(一直縣)으로 옮겼다. 증(贈) 이조 참판 휘 효로(孝盧)가 예안현(禮安縣) 오천리(烏川里)에 터를 잡아 살았는데, 이분이 가선대부(嘉善大夫) 강원도 관찰사 휘 연(緣)을 낳았으니, 공에게는 고조가 된다. 김씨는 대대로 영남의 저명한 성씨였는데, 읍청공에 이르러 퇴계 이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사문(師門)에서 인정을 받았고, 묻고 논란한 여러 설들이 《도산문집(陶山文集)》 안에 많이 보인다. 근시재 선생은 타고난 자품이 온화하고 순수하였으며, 학문이 정밀하고 깊어서 처음 벼슬할 때부터 훌륭한 명성이 날로 드러났는데 불행히 일찍 세상을 떠나니 원근의 그를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모두들 탄식하고 애석해하였다. 매원공은 덕을 좋아하고 노성(老成)하여 능히 그 가문을 이었으나 아들이 없어서 공을 후사로 삼았으니, 공은 실로 근시재의 둘째 아들인 처사 휘 광실(光實)의 셋째 아들이다.공은 어려서부터 지극한 품성이 있어서 어버이께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로웠으며, 백부의 후사(後嗣)가 되어서는 교훈을 새겨 익히고 부모의 뜻을 받드는 데 극진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관례를 하고 나서 석담(石潭) 이공 윤우(李公潤雨)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이공이 매우 아껴서 한강(寒岡) 정 선생(鄭先生)에게 받은 《역경(易經)》을 그에게 주었으니, 그 기대한 뜻이 적지 않았다. 갑신년(1644, 인조22) 가을에 부모의 명으로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경사에 갔는데, 하루는 홀연히 가슴이 두근거리기에 집안에 필시 큰 우환이 생긴 것이라고 여기고 즉시 재촉해서 여장을 꾸려 길에 올랐는데, 며칠을 가서 태석인(太碩人)이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訃音)을 들었다. 공이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급히 달려갔다. 도착해서 예법대로 곡하고, 단문(袒免)하고, 성복(成服)하였고, 중문(中門) 밖의 여막(廬幕)에서 지내면서 상복을 벗지 않고 잤으며, 하관(下棺)할 때 받드는 것과 제전(祭奠)의 예를 모두 예법에 따라 하였다. 매원공을 섬기면서 온화한 얼굴로 뜻을 받들어 털끝만큼도 뜻에 맞지 않게 한 적이 없었고, 아침저녁으로 문안하는 의절(儀節)과 음식 공양을 반드시 정성스럽고 삼가서 마음을 다해 봉양하는 도리를 다하였다. 병술년(1646) 여름에 매원공의 병세가 위독하자 공이 근심하여 침식도 잊은 채 직접 탕제를 올리며 잠시도 해이하지 않았다. 상을 당해서는 곡읍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상복을 벗지 않았으며, 3년을 마치도록 매우 슬퍼하였으니, 상례를 치르고 제사 지낸 정성이 모두 사대부의 모범이 될 만하였다. 본생부모(本生父母)의 상을 당해서는 예법보다 더 심하게 슬퍼하였고, 빈궁(殯宮) 곁에 집을 지어 기거하였으며, 장사와 제전의 제수를 힘을 다해 마련해서 대종(大宗)으로 출계(出繼)했다고 하여 형제들과 차이를 두지 않았다. 연상(練祥)이 지나기 전에 종가(宗家)에 기제(忌祭)나 절사(節祀)가 있으면 하루 전에 사당 앞 행랑에 와서 기거하면서 제수를 올리는 일을 감독하고, 종제나 조카 중에서 복(服)이 조금 가벼운 자를 시켜 사당에 들어가 제사 지내게 하고, 제사를 마치고 나면 공이 당에서 내려와 맞이하여 절하고서 제사 지내는 데 무사하였는지를 물은 뒤에 상차(喪次)로 돌아갔다. 복제(服制)를 마친 뒤에 제사가 있으면 미리 청소하고 재숙(齊宿)하면서 빈객을 만나지 않고 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 시제(時祭) 때에는 제사를 마치고 나면 집안의 친척과 마을 사람들을 맞아서 음준례(飮餕禮)를 행하고, 남은 음식은 마을의 장로(長老)와 늙은 서인(庶人)에게 나누어 주어서 집에 두고 하룻밤을 묵힌 적이 없었다. 무술년(1658) 가을에 도산(陶山)의 동주(洞主)가 되어 모든 법규를 따르고 조치하는 것들이 두루 하고 상세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경내(境內)의 유사(儒士)를 불러 모아 노선생(老先生)의 문집(文集)을 강(講)하니, 이에 소문을 듣고 먼 곳에서 찾아온 자들이 많아 재사(齋舍)에 수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공이 모두 예로써 접대하고 그들과 주고받은 말은 도덕과 인의, 풍아(風雅)와 화초(花草)에 관한 얘기 아닌 것이 없었고, 강을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파하였는데, 선성(宣城)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미담(美談)이라고 일컫고 있다. 기해년(1659) 12월 모일에 집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춘추가 48세였다. 이듬해 경자년 4월 모일에 현의 북쪽에 있는 태자산(太慈山) 선영 곁에 장사 지냈다.부인은 광주 이씨이니, 바로 석담 선생 증 이조 판서 윤우의 따님이다. 18세에 공에게 시집왔는데, 아름다운 덕과 순수한 행실이 있었고, 시부모를 섬기고 남편을 받드는 것과 종족 간과 동서 간에 처신한 것이 모두 도에 합당하였다. 공보다 33년 뒤에 80세로 세상을 떠나서 공의 묘 왼쪽에 부장(祔葬)하였다. 공은 불행히 재차 대가 끊어져 아우의 아들 순의(純義)를 후사로 삼았으니,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이름이 대(岱)이고, 차남은 교(嶠)이며, 딸은 사인(士人) 남여형(南汝衡)에게 시집갔다. 증손은 남녀가 몇 명 있는데 모두 어리다.공은 총명함과 기억력이 동류(同類)들보다 특출나게 뛰어났다. 처음에 기억하고 두루 보는 데에 힘써서 많이 듣고 박식해지는 공부를 하였고, 역사서를 읽으면서 날마다 1000자를 외웠으며, 사장(詞章)으로 발휘된 것들은 법도에 맞고 한아(閒雅)하였다. 누차 향공(鄕貢)에 올랐으나 성시(省試)에서 번번이 낙방하자 이에 탄식하기를, “내가 이미 때를 만나지 못했으니, 어찌 글을 지어 득실을 다투는 자들과 한 사람의 눈에서 결판을 구하겠는가.” 하였다. 이에 그 방을 묵재(默齋)라고 이름 짓고, 잠(箴)을 지어 벽에 붙여서 그 뜻을 담았으며, 그곳에서 글을 읽으며 여유롭게 자득(自得)하여 말하지 않고 몸소 행하는 뜻을 독실히 하였다. 평소 새벽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 빗고 의관을 갖추고서 가묘(家廟)에 전알(展謁)하고, 물러나와 한 방에 앉아서 좌우에 도서를 비치하고 엄숙하게 종일토록 책을 대하였다. 객이 오면 반드시 당(堂)에 내려가 접대하면서 조용히 얘기를 나누었는데 속된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마음이 맞고 뜻이 같은 벗을 만나면 머물게 하여 함께 잠을 자면서 경서의 뜻을 강론하기도 하고 시를 외기도 하며 고금의 사변에 대해 담론하기도 하였는데, 종일토록 하고 또 밤새도록 하면서도 피곤한 줄을 몰랐다. 동종(同宗)의 자제와 마을의 후생으로서 와서 배우는 자가 많았는데, 지성으로 가르쳐서 성립시키려고 하였고, 한 가지라도 취할 만한 장점이 있으면 기뻐하는 감정이 안색에 나타났고, 그를 드러내고 칭송하여 남들이 모를까 염려하였다. 또 과실이 있으면 조용한 곳으로 불러서 자상하게 가르치고 경계시켜 반드시 고치게 한 뒤에야 그만두었다. 족당(族黨)과 인척(姻戚)에 대해서는 궁핍한 사람을 구휼해 주면서 자기의 역량이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였고, 남에게 다급한 일이 있거나 곤경에 처했다는 말을 들으면 힘을 아끼지 않고 마음을 다해 돌봐 주었다. 만약 먼 지방에서 나는 맛있는 음식을 구하면 반드시 먼저 일가의 장로(長老)에게 올리고, 다음으로 아우와 조카들에게 주고, 다음으로 이웃의 노친(老親)이 있는 자에게 주었다. 숙부인 상사공(上舍公)의 연세가 이미 많아서 질병으로 몹시 쇠약하였는데, 공이 부친을 섬기듯이 섬겨서 아침저녁으로 문안하고 신중히 명을 받들었다. 계모(季母)와 맏형수가 의지할 데 없는 과부가 되자 집안일을 돌봐 주어 쓸쓸하게 혼자 사는 괴로움을 잊게 해 주었다. 외삼촌인 이공 환(李公煥)이 나이 80에 외아들을 잃고서 홀아비로 살며 매우 곤궁하였는데, 공이 매번 사람을 보내 문안하고 음식물을 보내는 것이 끊이지 않았다. 공이 세상을 떠나자 이공이 시를 지어 곡하기를, “인편이 있으면 반드시 편지를 보내고, 노자가 있으면 반드시 맛있고 부드러운 음식을 보냈네.” 하였으니, 이는 지성스럽게 돌봐 준 뜻을 잊지 못한 것이다. 남이 초상을 당하면 반드시 남보다 먼저 조문하여 위로하고 부조하였고, 향리의 미천한 사람이라도 반드시 공평한 마음으로 대하여 차별을 두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 덕에 감복하고 그 은혜를 감사하였다. 공은 대가(大家)의 후손으로서 물려받은 재산이 매우 넉넉하였는데, 가장이 되어 집안일을 주관하게 되자 남에게 베풀어 주기를 좋아하여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고 가난한 사람을 구휼하는 것을 의리로 여겨 재물을 후손에게 남겨 줄 계획을 세우지 않았으므로 중년이 되어서는 겨우 자급할 정도이고 남은 재물이 없었다. 종부제(從父弟) 이(怡)가 일찍이 가정에서 처신할 도리는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묻자 대답하기를, “가장이 된 자는 가장의 도리를 다하고, 자제가 된 자는 자제의 도리를 다해야 할 것이니, 각각 자기의 도리를 다하고 서로 책망하지 않는다면 가정에서 처신하는 도리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하였으니, 이는 그 마음에 보존된 것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말로 나온 것이 능히 이와 같았던 것이다. 이 또한 “여기에 있어도 원망이 없고, 저기에 있어도 미워하는 자가 없다.”라는 말에 가까운 것이니 아, 어질도다.현일의 선인이 처음에 근시재 선생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부인이 아들 하나를 낳고 세상을 떠났으니 그 아들이 바로 고(故) 능서랑(陵署郞) 상일(尙逸)이다. 나에게는 백형(伯兄)이 되고 공에게는 외형(外兄)이 되는데, 공과 한 살 차이였고, 서로의 교분이 매우 두터웠다. 나의 중씨형(仲氏兄) 이하는 김씨 부인 소생이 아니지만 공과 뜻이 맞아서 매우 기뻐하였고, 형제처럼 붙어 다녔다. 현일이 공보다 15세 연하라서 항상 형으로 섬겼는데, 공은 나를 한결같이 붕우로 대하였다. 처음에 서로 알 때에 내가 선군(先君)의 곁에 시립(侍立)해서 바라보니 공의 용모가 수려하고 풍도(風度)가 고상하고 순결해서 훌륭한 군자의 모습이었다. 이때부터 이미 마음이 기울어 교유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그 뒤에 도산(陶山)과 역동(易東)의 회합 때 현일이 말석에 끼어 공맹(孔孟)의 학풍이 살아 있는 고장에서 강학하는 유풍을 보고서 더욱 감탄하고 흠모하였다. 이때부터 서로 왕래하면서 훈도되고 본받았으며, 편지를 왕복하면서 지성스럽게 권면하고 장려해 주신 은혜를 입었다. 그래서 항상 뜻을 가다듬고서 공에게 의지하여 소인이 되는 것을 면할 수 있기를 바랐는데, 불행히도 공이 일찍 세상을 떠나 버리고 양가의 형들도 잇달아 세상을 떠났다. 허둥지둥 길을 잃고서 갈 곳을 몰라 헤매다가 마침내 경솔하게 국법을 범하여 스스로 귀양 가는 화를 초래하였다. 실의에 빠지고 곤궁하여 뜻과 사업이 황폐하고 실추되어 부형(父兄)과 사우(師友)들이 책망하고 기대한 뜻에 부응하지 못했으니, 매번 생각할 때마다 달연(怛然)히 두려워 두문불출하고 조용히 지내면서 감히 스스로 보통 사람에 견주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공의 사자(嗣子) 순의가 아들 대를 보냈는데, 집안에 전해 오는 행실기 한 통을 안고서 천리를 멀다 않고 장독(瘴毒)이 있는 호남의 바닷가로 나를 찾아왔다. 그 편지에서 말하기를, “선인(先人)이 어려서부터 가정의 훈도를 받아 효제(孝悌)를 돈독히 행하여 그 근본을 세웠고, 또 사방으로 벗을 취하여 그 덕을 이루었습니다. 더불어 사귀며 왕래한 사람이 매우 많았고, 사적을 자세히 알고 믿을 만한 사람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인이 저희들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셨을 때 제가 나이가 아직 어려서 글을 부탁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럭저럭 세월을 보내다가 세대가 바뀌게 되니 지금은 살아 있는 선인의 벗이 아무도 없고, 오직 집사만이 대대로 통가(通家)하였고, 또 선인께서 무양(無恙)하실 때 친하게 지낸 옛 벗으로서의 정이 있으시니, 반드시 우리 부친의 드러나지 않은 덕을 잘 말씀해 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감히 재배하고 청합니다.” 하였다. 현일이 편지를 뜯어 보고 초연(愀然)히 말하기를, “그대가 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대 집안이 우리 집안과 정의(情誼)가 특별히 두텁고, 또 그대 조부가 우리 백씨, 중씨와 교유하여 도의(道義)와 덕업(德業)으로 서로 기대하고 허여하였는데, 불행히 하늘이 수(壽)를 주지 않아서 양가의 정황이 모두 이와 같다 보니 내가 항상 슬퍼하고 탄식하며 돌아가신 분을 다시 살려 내지 못하는 애통한 마음만 간절하였다. 지금 그대가 선인의 드러나지 않은 덕을 천양하라고 부탁하였는데, 평생 흠모하던 정성을 생각할 때 어찌 감히 사양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현일은 이름이 죄적에 올라 있어 현재 두문불출하고 크게 뉘우치고 있으므로 감히 한마디 말을 내서 사람들의 비난을 초래할 수 없으니, 어찌 갑자기 파계(破戒)하여 이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비록 나 자신은 애석해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찌 선인의 덕에 누가 되지 않겠는가.” 하니, 김군이 일어나 절하고 또 청하였다. 현일이 굳게 거절할 수 없어 받아서 상자에 보관해 둔 지 여러 해가 되었다. 이제 다행히 성은을 입어 방귀전리(放歸田里)하라는 명을 받고서 비로소 그 집안에 전해 오는 행실기에 의거하고 내가 직접 듣고 본 것을 참고하여 우선 위와 같이 기록하고, 당세의 문장가가 필삭(筆削)하기를 기다린다. 삼가 쓴다.[주-D001] 여기에 …… 없다 : 이 말은 원래 《시경(詩經)》 〈진로(振鷺)〉에 나오는 말로, 하(夏)나라의 후예인 기(杞)와 상(商)나라의 후예인 송(宋)의 제후들이 주(周)나라의 제사에 참석하여 돕는 것을 노래한 것인데, 그들이 자기 나라에서도 미워하는 자가 없고, 이곳 주나라에서도 싫어하는 이가 없어서 길이 영예로울 것이라는 내용이다. 여기에서는 시 본래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 아니라 단장취의(斷章取義)하여, 가장이 된 자와 자제가 된 자가 각각 자기의 도리를 다하면 집안에서의 처신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내용으로 인용한 것이다.
- 2022-04-29 | NO.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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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사(處士) 이공(李公) 행장
- 갈암집 제28권 / 행장(行狀)공의 휘는 순일(純一)이고, 자는 성지(誠之)이며, 그 선조는 광주인(光州人)이다. 그 시조는 순백(珣白)으로 고려 때에 좌복야(左僕射)를 지냈다. 이때부터 여러 대에 걸쳐 높은 벼슬을 지냈다. 본조(本朝)에 들어와서는 휘 광제(光齊)라는 분이 있었으니, 영묘조(英廟朝)의 명신(名臣)으로서 벼슬은 예문관 제학에 이르렀고 경창군(慶昌君)에 봉해졌다. 증조의 휘는 방형(邦衡)으로 헌릉 참봉(獻陵參奉)을 지냈으며, 조의 휘는 지남(地男)으로 성균관 생원이었다. 부의 휘는 관(灌)인데, 양자(養子)를 가서 중부(仲父)인 생원 휘 운남(雲男)의 후사가 되었다. 학행과 풍절(風節)이 있었으며 동암(東巖) 이공 발(李公潑)의 문인(門人)으로 기축옥사(己丑獄事)에 연좌되어 온성(穩城)으로 장류(杖流)되었다. 임진년 난리가 일어났을 때 용서를 받아 돌아왔다가 적의 예봉(銳鋒)에 죽으니, 그때 나이 23세였다. 비(妣) 조씨(趙氏)는 판윤(判尹) 유(踰)의 후손이며 참봉 원(愿)의 따님이다. 만력(萬曆) 정해년(1587, 선조20) 8월 기묘일에 공을 낳았다.공은 태어난 지 3년 만에 부친이 유배를 당하는 화를 만났는데, 밤낮으로 울부짖기를 그치지 않았다. 또한 적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나이 겨우 6세였는데, 곡읍(哭泣)하면서 슬퍼하는 것이 성인(成人)과 다름이 없었다. 정유재란 때는 공의 나이가 겨우 10여 세였는데, 모친을 모시고 피난을 하면서 험난한 지경에 빠지거나 생사의 고비를 드나들면서도 매우 정성을 갖추어 공경스럽게 봉양을 하니, 보는 이들이 모두 기특하게 여겼다. 기해년(1599, 선조32)에 난리가 조금 진정되자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황폐한 터와 무너진 벽에 잡목이 가득하였다. 이런 때에 본생(本生) 조부모(祖父母)의 상을 당하고 또 소후(所後) 조비(祖妣)의 상을 당하였는데, 폐허가 된 와중에서도 예를 갖추어 장사와 제사를 지내니, 친척들과 이웃들이 칭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이미 지성(至性)이 있었는데, 일을 살필 나이가 되어서는 집안의 비상(非常)한 화(禍)를 애통해하면서 언제고 피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 종자(從者)의 말에 따라 11월 24일을 기일(忌日)로 정하고 매번 제사를 올릴 때가 되면 반드시 소식(素食)을 하면서 그달을 보냈다고 한다. 늘 말하기를,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해골을 수습하지 못하였고 기일도 자세히 알지 못하니, 천지 사이의 한 죄인이다. 태어나면서부터 한(恨)을 품었고 죽어서도 원통함을 품게 되었다. 나의 자손들은 반드시 이 뜻을 체인(體認)하여야 할 것이며, 내가 죽거든 장사 때에는 회곽(灰槨)을 쓰지 말고 제사 때에는 유밀(油蜜) 같은 좋은 음식을 차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밤이면 반드시 경건하게 묵도(默禱)하면서 말하기를, “불초(不肖)한 자식이 이렇게 천지에 사무치는 슬픔을 안게 되었습니다. 만약 꿈에서라도 신명(神明)께서 불쌍히 여기시어 돌아가신 아비가 뼈를 묻은 곳과 돌아가신 날을 알려 주신다면, 망극한 심정이 조금이나마 풀릴 것 같습니다.” 하였으며, 날마다 이렇게 하기를 죽을 때까지 하였다.공은 어린아이 때부터 자친(慈親)의 뜻을 조금도 어겨본 적이 없었으며, 성장해서는 출타할 때나 귀가할 때 반드시 고하였고 돌아올 날짜를 예정했을 때는 조금도 기일을 어기지 않았다. 식사 때에는 반드시 곁에서 모시면서 먼저 맛을 보고 난 뒤에 드렸으며, 만약 병환이 드셨을 때는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먹어도 맛을 알지 못하고 거처할 때도 편안히 앉아 있지 못하였다. 언젠가 갑자기 어머니의 병이 위독하시어 백약(百藥)이 효과가 없자 온 집안이 황급히 여겨 무당을 시켜 기도를 하게 하려고 하였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제가 직접 조상들께 빌어 보겠습니다.” 하고는, 목욕재계하고 의관을 정돈한 채 사당 앞에 서서 울면서 사연을 고하였는데, 그 내용이 애절하여 신명을 감동시킬 만한 바가 있었다. 고하는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병환이 조금씩 차도가 있기 시작하여 반나절이 지나자 완쾌되니, 사람들이 성효(誠孝)에 감응한 것이라고 하였다.정해년(1647, 인조25) 가을에 모친이 천수(天壽)를 누리고 하세(下世)하시니, 공의 나이 61세였다. 가슴을 치고 울부짖으며 애통해하여 기절했다가 깨어났으며, 성빈(成殯)한 뒤에는 의복(衣服)과 침식(寢食)을 한결같이 예법(禮法)에 맞게 행하였다. 한겨울의 심한 추위 속에서도 홑옷만을 걸친 채 밤낮으로 분주하게 주선하면서 장사(葬事)를 준비하였다. 종제(從弟) 순형(純馨)이 울면서 설득하기를, “노년(老年)의 상제(喪制)는 마땅히 권도(權道)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대사(大事)를 스스로 다해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먼저 스스로 몸을 상하게 한단 말입니까.” 하니, 답하기를, “나는 추위를 겁내지 않는 편이다.” 하면서, 끝내 바꾸지 않았다. 매번 석곡(夕哭)을 한 뒤에야 비로소 여차(廬次)로 돌아왔으며, 수질(首絰)과 요질(要絰)을 벗지 않고 잠을 잤다. 새벽이 되면 다시 빈청(殯廳)에 들어가 바닥에 엎드려 슬피 곡하고 인하여 종일토록 띠자리 위에서 지내니, 몇 개월 사이에 형용(形容)이 수척하여 거의 지탱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친한 이들이 더러 권하기를, “애통하여 몸이 수척해질 수는 있으나 자신의 생명을 해칠 정도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옛날부터 분명한 경계가 있다. 더구나 연기(年紀)가 그토록 높으니 이처럼 몸을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 하면, 공은 울면서 사례하기를, “거적자리에서 자고 흙베개를 베지 않고 여차에서 편안히 거처하면서 예제(禮制)를 따르지 못한 것이 또한 이미 많았는데, 어찌 생명을 해치게 될 것을 걱정하겠는가.” 하였다. 장지(葬地)를 정하지 못해 다음 해 봄에야 비로소 장사를 치를 수 있었다. 졸곡(卒哭)을 마치고 나자 비로소 거친 음식을 먹고 물을 마셨는데, 그래도 채소와 과일은 먹지 않았다. 또 노환(老患)으로 여묘(廬墓)를 하지 못하는 것을 지극한 한으로 여겨 한 달에 두세 번은 묘소를 찾았으며, 상(喪)을 마칠 때까지 아무리 심한 추위나 더위에도 그만둔 적이 없었다. 매번 성묘를 할 때마다 눈물이 빗물처럼 떨어지니, 묘 앞의 절하는 자리의 사초(莎草)가 그로 인해 말라죽었다.기축년(1649, 인조27) 봄에 병으로 온몸이 모두 마비되고 타는 듯하여 직접 제전을 드릴 수는 없었지만, 매일 한 차례 부축을 받으며 영연(靈筵)에 나아가 살피고 돌아왔다. 이해 겨울에 상기(喪期)가 끝나자 공은 눈물을 흘리고 호곡(號哭)하는 등, 슬픔을 이기지 못하면서 이르기를, “내년은 내 선인(先人)께서 화(禍)를 당하신 해이니, 어찌 무사히 상기를 마쳤다고 하여 갑자기 길사(吉事)로 나아가면서 나의 한없이 망극한 슬픔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면서, 마침내 심상(心喪)의 상제를 행하였다. 거처하는 곳에는 북창(北窓)을 가리지 않았으며, 조석으로 기장을 먹고 물을 마시면서 채소는 먹지 않았다. 장자(長子) 원우(元雨)가 울면서 간하기를, “대인(大人)께서는 고령의 몸으로 막 모상(母喪)을 마치시면서 몸이 심하게 축나셨는데, 이제 또 이처럼 고집하며 바꾸지 않으시니, 그러시다가 몸을 보전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니, 공이 울면서 말하기를, “편모께서 이미 돌아가셨고 너희들도 벌써 장성하였으니, 내가 정을 펴지 못한 상태에서 정을 펴다 죽은들 무엇이 한스럽겠느냐.” 하였다. 경인년(1650) 겨울에 병환이 심해졌는데도 오히려 조석(朝夕)으로 참알(參謁)하는 것을 폐하지 않았다. 신묘년(1651) 원일(元日)에 친히 제사를 드리고 마침내 조석으로 참알하는 것과 북창을 가리지 않는 일 등을 그쳤다. 그러나 아직 상기가 끝나지 않았다고 하여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셨다. 병환이 점차 깊어지자 원우가 다시 울면서 간하니, 이에 마침내 심상(心喪)의 담제(禫祭)를 행하고 비로소 평상(平常)을 회복하였다. 효종대왕(孝宗大王)이 즉위한 지 3년 되던 해는 그 선공(先公)이 돌아가신 지 1주갑(周甲)이 되는 해이다. 공의 찢어지는 듯이 애통한 심정은 부음을 처음 들었을 때와 같았으므로, 마침내 6월 모일(某日)에 따로 축문을 지어 곡하며 신주(神主)에 바쳤다. 이는 어떤 사람이 선공이 해를 입은 날이라고 전해 준 것이 6월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공은 늘 죄인으로 자처하여 모든 거상(居喪)하는 의절(儀節)이 자신도 모르게 예제(禮制)보다 지나치곤 하였다. 또 몸을 영화롭게 하여 명예를 얻어 세상에 드러나고자 하지 않았으므로 과거 공부를 일삼지 않았다. 다만 서적(書籍)을 가지고 자오(自娛)하면서 《소학(小學)》, 북정편(北征篇), 애일가(愛日歌) 등의 글에 대해서는 외우고 읊조리면서 한시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무심히 세상에 뜻이 없는 자처럼 하였으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은 천성(天性)에서 나온 것이었다. 천계(天啓) 갑자년(1624, 인조2)에 이괄(李适)의 반란이 일어나 대가(大駕)가 파천(播遷)을 하게 되었을 때 공은 의병(義兵)을 규합하여 관군의 세력을 도왔고, 또 군량을 모아 경창(京倉)까지 운반하기도 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에 그 공을 포상하는 은전이 내렸으나 공 자신은 그것을 공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공을 돌렸다. 숭정(崇禎) 병자년(1636, 인조14)에는 북쪽의 군대가 창궐하여 인조대왕(仁祖大王)이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포위되어 있을 때 공은 한두 동지들과 의병을 일으켜 공문(公門) 밖에서 모였는데, 날마다 얼어붙은 땅에서 지내고 음식을 상에 올려놓고 먹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주상(主上)께서 고립된 성에서 추위와 배고픔을 참고 계신다. 우리 소인(小人)들이 비록 나라의 녹을 먹은 적은 없으나 그래도 이 땅의 음식을 먹었으니, 어찌 차마 따뜻한 방에서 지내며 소반 위의 음식을 먹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한창 의병을 모을 즈음에 군령을 어긴 한 아전이 있었다. 공이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들고 성난 소리로 말하기를, “이렇게 위난(危難)한 때는 군신(君臣)의 대의(大義)에 존비(尊卑)와 귀천(貴賤)의 차이가 없거늘 네가 어찌 감히 이럴 수가 있느냐.” 하면서 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니, 보는 이들이 모두들 격동되고 감탄하여 모집에 응하는 자들이 많았다. 이에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눈물을 훔치면서 북향하여 죽음을 무릅쓸 뜻을 가지게 되었다. 마침내 길을 떠나 반 정도 올라갔을 때 대가(大駕)가 성에서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돌아왔다. 경인년(1650, 효종1) 여름에 고을의 대부가 그 행의(行誼)를 조정에 아뢰려고 하였으나, 공이 듣고는 굳게 사양하여 마침내 그만두었다. 계사년(1653) 여름에 후임 태수(太守)가 이르렀을 때 사대(使臺)에 자세히 보고하여 조정에 전하도록 하였으나 답을 얻지 못하였다. 무술년(1658, 효종9)에 집안에서 병환으로 졸(卒)하니, 2월 7일이었다. 향년 72세였다. 이해 9월 모일(某日)에 순천부(順天府) 동막리(桐幕里)의 해향(亥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처(妻) 방씨(房氏)는 직제학(直提學) 사량(士良)의 후손이며 처사(處士) 덕참(德驂)의 따님이다. 공보다 18년 앞서 졸하였으며 같은 언덕에 봉분을 달리하여 장사 지냈다. 3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원우(元雨)이다. 차남은 주우(柱宇)인데 장가를 들기 전에 요절하였다. 막내는 성우(聖雨)인데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남해 현령(南海縣令)에 이르렀다. 딸은 사인 이상하(李相夏)에게 시집갔다. 원우는 3남을 두었는데, 두광(斗光), 두채(斗采), 두망(斗望)이며, 성우는 자식이 없어 족자(族子) 두성(斗成)으로 후사를 삼았다.공은 천성적으로 효성이 독실하였으며 또 강개한 뜻이 많았다. 매번 충신이나 의사가 목숨을 바쳐 절의(節義)를 세운 일을 볼 때마다 반드시 감격하고 오열하였으며 그 일을 상상하며 흠탄(欽歎)하곤 하였는데, 항상 말하기를, “문문산(文文山 문천상(文天祥))이나 육수부(陸秀夫 육유(陸游))의 전기를 읽고서 크게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 아니다.” 하였다. 일찍이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정충비(旌忠碑)를 지나면서 말에서 내려 재배(再拜)한 뒤에 절구(絶句) 한 수를 읊조리기를, “남쪽에 세워진 천년의 빗돌, 그 위풍 만고토록 유구하네. 말을 멈추고 내려 절을 하자니, 감격의 눈물이 마구 쏟아지네.〔南柱千年石 威風萬古長 停驂一下拜 感淚爲滂滂〕” 하여, 그 경앙(景仰)하는 뜻을 나타내었다.‘불기심(不欺心)’ 세 글자를 평생 가슴에 새기고 늘 그것을 말하여 자손들을 경계하였다. 집안을 다스릴 때는 내외(內外)의 구분을 엄격히 하여 남녀가 설만한 옷차림으로 만나지 못하였다. 《열녀전(烈女傳)》을 번역하여 써서 집안의 부녀자들에게 주어 송습(誦習)하게 하고 잡설(雜說)에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하였다. 만약 고아나 과부가 억울하게 법망(法網)에 걸리면 수고를 꺼리지 않고 힘을 다해 구제하고자 하였으며, 어쩌다 빈궁한 사람이 혼인(婚姻)이나 장사(葬事)를 제때에 치르지 못하고 있으면 구휼해 주고 보조해 주는 데에 또한 그 힘을 아끼지 않았다. 재산을 늘리는 등의 일에 대해서는 피하고 꺼리기를 마치 몸이 더럽혀질 것처럼 하였다. 집안에는 비축된 양식이 없어 처자가 기한을 면하지 못하였으나 처신하는 것이 느긋하였다.공은 대대로 호남(湖南)의 낙안군(樂安郡)에서 거주하였고, 현일(玄逸)은 동쪽 구석에서 나고 자랐는지라 실은 공을 알지 못하였다. 그런데 경오년(1690, 숙종16) 여름 벼슬살이 때문에 서울에 있을 때였다. 하루는 공의 손자 두망이 집으로 나를 찾아와서 그 형 두광이 공의 행적의 대체(大體)를 기술한 것을 현일에게 주면서 행장을 엮어서 글 잘하는 이에게 지(誌)를 청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하였다. 현일이 능력이 없다고 사양하였으나 그 청이 갈수록 정성스러웠다. 말뜻이 애절하고 성의가 간절한 데다 또 천리 밖에서 멀리 나를 찾아온 뜻을 저버려서는 안 될 듯하여 마침내 그 일을 맡기로 허락하였다.현일이 삼가 생각건대, 공의 자효(慈孝)한 성품과 제행(制行)의 독실함은 모두 다른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거니와, 그 충의(忠義)롭고 장렬(壯烈)한 기상 또한 충분히 쇠퇴해진 풍속을 진작시키고 유약한 사람을 흥기시킬 만하다. 고인(古人) 중에서 찾아본다면 왕위원(王偉元), 송충가(宋忠嘉)와 같은 무리가 아니겠는가. 참으로 이른바 “의도하는 바가 없이 행하여, 그 본심을 잃지 않았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행적을 차례로 기록하고 이처럼 그 본말을 자세히 논하는 것이니, 삼가 당세(當世)의 입언(立言)하는 군자가 다행히 채택하여 영원토록 전해질 수 있기를 바란다. 삼가 행장을 쓴다.
- 2022-04-29 | NO.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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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척금당기〔滌襟堂記〕 - 동강유집 제10권
- 척금당기〔滌襟堂記〕 - 동강유집 제10권 : 동강(東江) 신익전(申翊全, 1605~1660)광주(光州) 치소 북쪽으로 5리 정도 되는 가까운 곳에 경양(景陽)이라는 역(驛)이 있다. 노령의 큰 길에 있어 북쪽으로는 진원(珍原)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데 서울로 길이 나 있다. 서쪽으로는 영암과 나주를 이웃하고 있고 남쪽으로는 병영(兵營)을 향하는데 바다 가까이에 이르러 길이 끝난다. 동쪽으로는 화순(和順)으로 나가 남원(南原)에 이르니 노령 남쪽 지역을 관통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각 갈림길마다 둔 역마가 항상 넉넉하지 않았다.병자년(1636, 인조14)과 정축년(1637)의 난리 후에는 양서(兩西)의 역말의 공급을 대신 감당해왔는데, 조금 조련된 좋은 말은 모두 심양과 연경으로 몰고 가서 열 마리 가운데 여덟을 잃게 되거나 아니면 북인(北人)의 행차에 쓰여 격렬하게 달리며 활 쏘고 사냥하느라 북인이 강을 건너고 나면 모두 병들어 뼈만 남게 되었다. 말을 관리하는 행정이 이처럼 시급하니 일을 맡은 사람이 쉴 겨를이 없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있다.나의 외사촌 동생 이선장(李善長)이 이 역에 부임해 자못 자득한 기색이 있었다. 과연 해를 넘기자 정사가 이루어져서 오는 이를 맞고 가는 이를 전송하는데 이곳이 대로(大路)라는 것도 잊을 정도이다. 뿐만 아니라 그간 열 마리 가운데 여덟을 잃었던 말이 순식간에 수를 채우고 병들어 뼈가 드러나던 말이 잠깐 사이에 살찌고 윤기가 흘렀다. 다만 우사(郵舍)가 있는 곳이 낮고 협소해서 손님을 맞을 수가 없었다. 봉급을 덜어 재목을 모아 별당을 지으니 얼마 걸리지 않아 공사가 끝났다.사치스럽지도 누추하지도 않으며 터가 자못 시원하게 트여서 멀리 초목 무성한 평야가 손에 잡힐 듯하고 그 너머로 광주의 외곽이 어렴풋하게 보인다. 우러러보면 서석산(瑞石山 무등산)이 공중에 푸르게 솟아있고 그 앞의 큰 저수지에는 물이 고여 있다. 저수지에 심은 연꽃 만 송이가 이어져 긴 제방을 그늘지게 하고, 교목 수천 그루가 절양루(折楊樓)에 곧바로 이어진다. 이 제방을 걷는 사람들은 유월에 청량하여 좋다고 한다. 선장이 날마다 그곳에 머물면서 한껏 멀리 바라보며 맑고 깨끗한 바람을 쐬니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시원해서 이에 ‘척금(滌襟)’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로 와서 나에게 기문(記文)을 지어 빛내주기를 부탁하며,“우리 형님께서 광주 목사를 그만둔 것이 최근의 일이니, 집은 비록 새로 지었지만 그 승경(勝景)을 기록하는 데 별도의 말이 필요없을 것입니다.”하였다. 나는 대답하기를,“그대가 이 당에 이름을 붙인 것이 훌륭하지 않은가. 경치야 사람마다 모두 보는 것이고, 이름의 의미는 내가 밝혀주겠네.”하였다.금(襟)이란 옷에서 심장에 닿는 부분이다. 맑고 편안한 마음이 골몰하고 어지럽게 되는 것은 외물에 얽매였기 때문이다. 얽매였는데 씻어낼 생각을 하지 않으면 번뇌에 휩싸여 일을 할 수 없게 되니 어찌 고생스러운 여름 밭일 정도에 비하겠는가.아, 이 당은 앞이 트인 곳에 자리하고 있어 무성한 평야가 손에 잡힐 듯하고 누대와 외성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우러르면 서석산이 있고 굽어보면 저수지가 있으며 연꽃과 제방의 나무가 무성히 있으니 끊임없이 세사에 골몰하는 수고로움을 쉬기에 참으로 충분하다. 다만 이것뿐만이 아니다. 선장이 이 당에 힘입어 흉금을 씻어내기는 하지만 필시 평소 그의 흉금은 절로 번뇌가 없어서 큰 길을 관리하는데 충분하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다른 사람이 겨를을 낼 수 없는 곳에서 겨를을 만들어 마치 할 일이 없는 것처럼 시원하게 이 당에서 쉴 수 있겠는가. 이 도를 확장하면 나라 다스리는 일을 보좌하는 데 쓰고도 남을 것인데 하물며 작은 일개 역참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선장의 임기가 거의 다 되었다. 고과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칭찬을 받고 발탁될 것이 틀림없다. 내가 광주 목사를 그만둔 뒤여서 그대와 함께 한번 감상하지도 못하고 멀리서 기문만 쓰는 것이 아쉽구나.선장의 이름은 이원기(元基)이니 선장은 그의 자이다. 어려서 집안의 가르침을 따라 유자의 학문을 공부하고 과거를 달갑게 여기지 않아 우선 이 역참의 찰방이 되었는데, 그가 부임하여 선대부 잠와공(潛窩公)이 고산역(高山驛)을 훌륭히 다스린 업적을 똑같이 따르고자 하였다고 한다. 이 당에 오르는 자는 내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주-D001] 선대부 …… 업적 : 잠와공(潛窩公)은 이명준(李命俊, 1572~1630)으로, 호는 잠와이다. 이명준이 고산 찰방(高山察訪)으로 있을 때 법을 준수하고 흔들리지 않아서 비록 감사가 오더라도 반드시 마패를 확인하고 말을 내주었다. 감사가 화가 나서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아 감사와 다투고 결국 조정에 판결을 청하였다. 조정에서 공이 옳고 감사가 잘못한 것으로 인정하자 오랜 폐단이 혁파되었는데, 공은 마침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牧民心書 卷3》
- 2020-10-07 | NO.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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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석정(叢石亭)과 무등산(無等山) 바위의 우열(優劣) - 임하필기 제27권
- 총석정(叢石亭)과 무등산(無等山) 바위의 우열(優劣) - 임하필기 제27권 / 춘명일사(春明逸史) 총석정은 통천군(通川郡)의 바닷가에 있는데, 마치 기둥처럼 서 있고 몸체에 여섯 모가 갖춰져 있으며 각 모의 길이는 한 자쯤 되고 높이는 10여 길이다. 네모반듯하고 평평하여 마치 승묵(繩墨)으로 재서 만든 것과 같으니, 진실로 조화(造化)의 솜씨가 아니라면 어찌 이와 같을 수가 있겠는가. 내가 광주(光州) 무등산의 바위를 보고서 기이하다고 자랑을 하였는데, 지금 이 바위를 보고난 뒤로는 더 이상 볼 필요가 없어졌다. 혹자가 말하기를, “두 바위의 우열을 어떻게 변별하오?” 하기에, 내가 응답하기를, “만약 미전(米顚)으로 하여금 그것들을 보게 한다면, 무등산의 바위에 대해서는 틀림없이 도포(道袍)와 홀(笏)을 가져오게 하여 절을 할 것이고, 총석정의 바위에 대해서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이 오체(五體)를 땅에 던져 덥석 절을 할 것이오. 이것으로써 그 고하(高下)를 정하면 될 것이오.” 하였는데, 바위는 말을 할 줄 모르되 마치 고개를 끄덕이는 듯하였다.[주-D001] 미전(米顚) : 송(宋)나라 때의 서예가 미불(米芾)을 말한다. 그의 행동거지가 괴상하였기 때문에 미치광이라는 뜻으로 그렇게 불렀다 한다.《宋史 卷444 米芾列傳》* 무등산의 바위는 서석대로 보인다.
- 2020-09-25 | NO.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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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기모-광주를 지나며(過光山府)
- 百雉雄城十里濱 翻令野客眼眶新朱旗翠幕家家市 暖酒高歌日日春山水湖南名勝邑 衣冠海左鮮明人半千休運無疆業 胡乃淪爲醜虜塵-산곡유고(山谷遺稿)최기모(崔基模, 1869-1925)의 자는 진우(進愚)이며 호는 산곡(山谷)이다.
- 2018-07-10 | NO.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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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석휴-신시야화(新市夜火)
- 新市夜火(신시야화) 신시가의 밤 불빛如星如月復如神 별빛인 듯 달빛인 듯 신령스러워夜雨蕭蕭色正新 소소한 밤비에도 빛은 새롭구나天上人間通用電 천상과 인간에 전기가 통용되니見之非假想非眞 보고는 있으나 꿈인지 생시인지<신시야화>는 1930년대 최석휴(崔錫休)가 지은 팔경시(八景詩) 중에 마지막 작품의 제목이다. 이 팔경시는 한시로 되어 있으며, 당시 교유한 인물들과 함께 해양음사라는 시사(詩社)에서 창작된 시를 모아 엮은 《운림당시문집(雲林堂詩文集)》에 수록되어 있다. 자신이 지은 운림당(雲林堂)에서 당시 시내의 밤풍경을 묘사했다.최석휴가 말하는 8경인 <신시야화(新市夜火)>를 비롯하여, <선원벽화(仙源碧花)>, <경수홍우(鏡水紅藕)>, <창아모연(蒼鴉暮烟)>, <황계효월(黃鷄曉月)>, <남정장적(南亭長笛)>, <소사한종(蕭寺寒鐘)>, <고단설림(古壇雪林)> 등이 명시되어 있어 그 의미를 더한다. 지금은 비록 새월의 변화로 인해 찾아 볼 수 없다.최석휴는 당시 일제강점기에 광주의 병천사를 지은 지응현, 광주극장을 지은 최선진, 정낙교 등과 같이 지역을 대표하는 부호 중 한 명이다. 그는 운림당에서 늘 시내를 바라다보곤 하였을 것이다. 불이 켜진 밤에 시가를 내려다 본 풍경을 읊고 있다.그는 물론이고 모든 사람들이 촛불이 아닌 전기불을 접하니 왜 신기해하지 않았겠는가. 별빛달빛처럼 찬란한 밤의 야경은 여러 번 보아도 믿기지 않은 황홀한 풍경 중 하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마치 지금의 각 지역에서 축제 때 행하는 불꽃축제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그 아름다운 풍경을 내려다 볼 수 있었던 운림당은 어디쯤에 있었을까? 아쉽게도 운림당은 현재 전하지 않아 그 정확한 위치를 알 수는 없다. 다만 《운림당시문집》에 수록된 <운림당기(雲林堂記)>에 의존해 보면 대략적인 위치는 짐작할 수 있다. 즉 기문에는 “광주의 동남쪽에 위치한 선원동(仙源洞)에 운림당이 있고, 가운거사(可雲居士) 최석휴(崔錫休)가 세웠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운곡(雲谷)과 홍림(洪林)이 서로 비치고 어울려 있어 운림당이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 2018-07-06 | NO.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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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석휴-쟁반같은 경수위에 푸른 연기 둘렀는데
- 쟁반같은 경수위에 푸른 연기 둘렀는데한가롭게 기대앉아 북창바람 맞는다네.바람따라 오고 가는 맑은 향기 들려오니부용꽃이 모두 피어 그의 빛이 붉는구나.-운림당시문집(雲林堂詩文集)조선대학교 뒷산 언저리에 자리했던 운림당(雲林堂) 정자주인 최석휴(崔錫休)가 8경 중 2수의 경수에 비친 붉은 연꽃을 보고 읖은 시다. 하운(河雲) 최석휴(崔錫休)는 광주의 부호로 한말 참서(參書)를 지냈으며 정자는 1871년(고종8년)에 지어졌고 이곳에서 시문에도 뛰어나 유유상종한 많은 인물들과 시주를 즐기며 살다 떠났다.최석휴가 1933년 펴낸 운림당시문집(雲林堂詩文集)이 남아 있다. 이 책에는 광주의 전경을 묘사한 남농 허건(南農 許楗)의 그림이 권두화(卷頭畵)로 실려 있어 그의 인맥을 대변하고 있다.
- 2018-07-09 | NO.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