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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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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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신(崔愼)의 기록- 송자대전 부록 제18권
    최신(崔愼)의 기록 - 하, 송자대전 부록 제18권 / 어록(語錄) 5 :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1607~1689)[신] 세속(世俗)에 전하기로는, 김덕령(金德齡)은 용력(勇力)이 있는 외에도 신이(神異)한 일화가 많았습니다. 이를테면 두 겨드랑이에 날개가 있었다는 말과 수감(收監)되었을 적에 고문을 무수히 당했으나 살갗이 쇠처럼 단단하여 상처가 나지 않았는가 하면, 형틀을 부수고 지붕 위에 올라앉았다는 등등의 얘기가 있습니다. 또 선조께서 친히 국문(鞫問)하려고 궐정(闕庭)으로 끌어들였을 때 김덕령이 갑자기 맨몸에서 칼을 빼들고 나아와서 ‘전하께서 신이 반역했다고 하시는데, 그렇다면 신이 이 자리에서 참으로 반역 행위를 해 볼까요?’ 하므로 선조께서 ‘너는 네 스스로 죽으라. 어째서 이처럼 난잡하게 구는가.’ 하였다 합니다. 이 같은 말들이 혹 하나라도 근사한 것이 있습니까?[선생] 김덕령은 광주(光州) 사람으로 월사(月沙)의 가문(家門)에 의해 발신(發身)하였다. 그러므로 김덕령의 일에 관해서는 월사의 자손만큼 잘 아는 이가 없다. 내가 일찍이 백주(白洲 이명한(李明漢)) 등 제공(諸公)에게서 들었는데, 모두 세속에서 전하는 것과 같이 거짓이 아니었다. 또 ‘만약 김덕령의 일을 직접 본 사람이 아니면 반드시 그 말을 믿으려 할 이치가 없을 것이니, 말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그리고 지난날에 월사의 부친(이름은 계啓)이 장성 현감(長城縣監)으로 있었는데, 마침 단오절(端午節)이어서 인근 몇몇 고을의 수령(守令)들이 모두 모이게 되었다. 호남의 민속(民俗)에 단옷날이면 관아(官衙)의 마당에 모여 씨름판을 벌이는데, 이른바 판을 쓸고 일등하는 자는 후한 상을 받았다. 때문에 먼 데 사는 백성들 중에는 식량을 싸 가지고 오는 자까지 있었다.그날, 장성에 모였던 몇몇 고을 사람들 중에 어떤 장사(壯士) 하나가 많은 사람들을 모두 이겨 내고 혼자서 춤추면서 큰소리치기를 ‘만약 나와 힘을 겨룰 자가 있다면 나와서 승부를 결판내자.’ 하였다. 그때 문밖에서 어떤 선비가 들어오려다가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여러 고을의 수령들이 이 말을 듣고는 빨리 맞아들이도록 했는데, 바로 김덕령이었다. 수령들이 술과 안주를 먹이고 권하기를 ‘자네가 만약 저 사람을 이긴다면 눈앞의 통쾌한 일이 될 걸세.’ 하였다. 그러나 김덕령은 굳이 사양하면서 ‘저는 본디 유생(儒生)으로 몸마저 허약한데 어떻게 저 사람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여러 사람이 계속 권해 마지않으므로 이에 초립(草笠)과 도포(道袍)에 신발을 신은 채 뜰가로 내려왔다. 여러 사람들이 ‘어째서 신을 벗지 않는가?’ 하자, 김덕령이 ‘어쨌든 시험해 보겠습니다.’ 하였다. 그 장사는 어린애처럼 깔보는 말을 많이 하자, 김덕령이 ‘그대는 많은 말을 말라. 힘만 겨루어 보면 되는 것이다.’ 하였다. 이에 그 장사가 김덕령의 허리를 안아들고 몇 바퀴 돌리다가 땅에 집어던지니, 김덕령의 신을 신은 두 발이 마른 땅에 한 자쯤 빠져 들었으나 꼿꼿하게 선 채로 넘어지지 않았다. 장사는 그제야 비로소 두려워하는 기색이 보였다. 다시 어울리게 되어서는 김덕령이 한 번 휘둘러 쓰러뜨리니, 장사가 ‘실수했다.’ 하면서 다시 대결하자고 하였다. 그러자 김덕령의 눈에 불빛이 발하면서 호랑이의 포효(咆哮)처럼 소리를 지르며 장사를 죽이려 하였다. 이는 김덕령은 눈에서 불빛이 발하면 용기(勇氣)가 대발(大發)하고 용기가 대발하면 비록 자제(自制)하려 해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크게 놀라며 일제히 입을 열어 제지시켰다. 그 뒤로부터 명성이 온 세상에 진동하였고, 월사의 가문에서 천거하여 등용되었다.또한 그가 모친상(母親喪)에 복을 입고 있을 때 왜구(倭寇)가 갑자기 쳐들어왔으므로 그는 나라를 걱정하다가 기복(起復)되어 나와서 왜구를 격퇴한 공로가 많았다. 그가 수감되어서는 온갖 고문을 가했으나 살갗에 상처가 나지 않았다. 이에 ‘나는 유생(儒生)으로서 기복되어 종군(從軍)하였으니, 이는 큰 죄이다. 이제 나는 이를 이유로 하여 죽는 것이다. 어찌 감히 반역했다는 무함으로 죽을 수가 있겠는가.’ 하고, 그 길로 자결했다 한다. 그의 말이 가긍(可矜)한데도 아직까지 신원(伸冤)되지 못하고 있으니, 애석하다.선생이 일찍이 좌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었다.“그대들은 방언자폐(放言自廢)란 문구(文句)의 뜻을 아는가?”응답하는 자가 없었다.[신] 무슨 깊은 뜻이라도 있습니까?[선생] 그대는 아는가?[신] 일찍이 스승으로부터 배우지 못하고 임의대로 읽었으니, 어떻게 잘 알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말을 함부로 하고 스스로 폐인이 되어 벼슬하지 않는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선생] 그것은 바로 주자(朱子)의 주설(註說)이다.[문생(門生)] 주자의 주설 외에도 다른 해설이 있습니까?[선생] 옛날의 주석에 방언(放言)을 방언(防言)으로 풀이하였으니, 대개 말을 하지 않고 스스로 폐인이 된다는 뜻이다.[문생] 고주(古註)가 비록 이와 같다 해도 이미 주자의 주설이 있으니, 누가 주자의 주설을 버리고 옛 주석을 따르겠습니까.선생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씀하셨다.“그렇다. 우윤(右尹) 권시(權諰)의 서신(書信)에 이러한 옛 주석을 인용하여 ‘스스로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고 스스로 폐인이 되어 행세(行世)하지 않으려 한다.’ 하였다.”좌중에 있던 이들이 모두 말하였다.“굳이 주자의 주설을 따르지 않으려는 것이니, 그것이 권 우윤의 티를 내는 것입니다.”
    2020-09-23 | NO.45
  • 최원우-제무진객사(題茂珍客舍)
    脩竹家家翡翠啼  대수풀 집집마다 비취가 우는데雨催寒食水生溪  비는 한식을 재촉해 시내에 물이 나네 蒼苔小草官橋路  푸른 이끼와 잔 풀이 돋은 관교의 길에  怕見殘紅入馬蹄  쇠잔한 꽃이 말발굽에 들어가는 것을 볼까 두려워한다고려 문신이요 1326년(충숙왕 13)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던 최원우(崔元祐 1546 ~?))가 무진객사(題(茂珍客舍)에 들려 읊은 시다. 최원우는 충목왕 때 안렴존무사(按廉存撫使)가 되고, 공민왕) 때 감찰집의(監察執義)ㆍ정해감무(貞海監務)를 지냈던 인물로 광주를 다녀가며 이런 걱정을 하며 떠났다.여기서 무진군(茂珍郡)은 광주광역시로  광주(光州) 사람인 전 만호(萬戶) 노흥준(盧興俊)이 목사(牧使) 신보안(辛保安)을 시기하여 구타한 죄를 물어 광주목(光州牧)이 무진군(茂珍郡)으로 강등(降等)되어 계수관(界首官)을 장흥부(長興府)로 옮긴 시기에 들렸다.광주를 두고 옛 지명으로 무진(武珍)ㆍ무주(武州)ㆍ광주(光州)ㆍ해양(海陽)ㆍ익주(翼州)ㆍ화평(化平)ㆍ무진(茂珍)ㆍ익양(翼陽)ㆍ서석(瑞石)으로 불렀다.
    2018-07-06 | NO.44
  • 최익현-외성당기
    광주목(光州牧) 안청리(安淸里)의 조촐한 초가에 ‘외성당(畏省堂)’이라고 편액(扁額)한 집이 있다. 이는 옛날 안촌(安村) 박공(朴公, 이름은 광후(光後))이 평소에 거처하던 옛집으로, 우암(尤菴) 송 선생(宋先生)이 친필로 쓴 것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는 수백 년이 지났건만, 동우(棟宇)가 탈이 없고 당의 편액도 완연하게 보존되어 이 당에 오르는 후인들을 자연스럽게 감발하고 격려하여 감히 태만하지 못하게 하니, 선생의 덕의(德義)와 풍도(風度)가 사람의 마음속에 있게 하는 것이 아, 영원하구나.내가 바다에서 귀양이 풀려 돌아오던 날, 박공의 후손인 박만동씨(朴萬東氏)를 우연히 하남(河南)에서 만났는데, 좌상에서 그를 보니 그 온화한 덕용(德容)과 엄정한 의론이 참으로 고가(故家)의 전형(典型)이어서 나는 마음속으로 그윽이 흠모하게 되었다. 그 후 편지를 보내 나에게 외람스럽게도 당기(堂記)를 부탁하였는데, 그 뜻이 너무 진중하여 나는 재삼 적격자가 아니라고 사양하였으나 끝내 허락의 명을 받지 못하여 붓을 들었다.삼가 생각건대, 군자의 학문은 존심(存心), 양성(養性), 사천(事天), 입명(立命)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작용의 법문(法門)을 말한다면, 계신(戒愼), 공구(恐懼)와 스스로를 속이지 말고 혼자만이 아는 곳을 삼가야 할 것이며, 그 실사(實事)의 제목을 말한다면 역시 천명을 두려워하고 대인(大人)을 두려워하며 성인의 말을 두려워해야 한다. 또 남을 위해 도모할 때 자신의 마음을 다 바치고 벗들과 사귀는 데 믿음으로 하며 스승에게 배운 것을 익히는 것이다. 하나라도 혹시 여기에서 반대되는 일을 하게 되면 사욕(私欲)이 넘쳐흐르고 천지가 뒤바뀌며 삼강(三綱)이 없어지고 구법(九法)이 무너지게 되니, 오히려 홍수(洪水)와 맹수(猛獸)의 화보다 심한데도 구원하지 못하게 된다.송 선생(宋先生)은 수사(洙泗, 공자(孔子)), 낙건(洛建, 정주(程朱))의 학문을 지니고 깊은 못에 임하듯, 얇은 얼음을 밟듯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공부까지 더하였으니, 그 전체 대용(全體大用)이 우주에 충만하고 고금을 관철하였다. 그러므로 천지 강상(綱常)의 중한 책임을 졌지만 실천할 바를 의심하지 않았으며, 위험하고 답답한 역경에 처하였지만 그 지키는 바를 바꾸지 않았다. 그 첫째는 중화(中華)를 높이고 이적(夷狄)을 물리치는 것이며, 둘째는 흑수(黑水, 백호(白湖) 윤휴(尹鑴)를 말함)를 공격하고 주자(朱子)를 호위하는 것이며, 셋째는 명교(名敎)를 부식(扶植)하고 도학을 천명한 퇴계(退溪), 율곡(栗谷) 이하 여러 선생을 본받고 추념(追念)하는 일들이다. 이는 외성(畏省)하고 존양(存養)하는 공부가 짧은 시간이라도 중단하지 않아서 긴요함을 맛보고 힘을 얻어 평생에 수용하여 많은 사업(事業)을 이룬 것이니, 이는 천지에 세우거나 백세 후의 성현을 기다려서도 의혹됨이 없을 것이다. 이것을 말미암아 말한다면 당시 사제 간에 가르치고 배우며 부탁한 뜻을 비록 상세하게는 알 수 없지만, 역시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남을 사랑하고 자신을 다스린 도로 남을 다스리지 않았겠는가.오늘날은 세상이 더욱 말세가 되어 변란이 거듭하여 일어나서 서귀(西鬼)들이 중국에 횡행하며 오상(五常)을 어지럽히고 삼강오륜을 무너뜨려 화환(禍患)과 걱정이 크고 중하여 지난날 북호(北胡, 청(淸)을 가리킴)나 흑수(黑水)에 비교가 되지 않으니, 저들을 약화시켜서 우리를 강화시키고 더러운 것을 일소하는 정치를 해야 하는데 어찌 잠깐이나 털끝만큼이라도 외성(畏省) 두 글자를 버리고서 공효를 거둘 수 있겠는가.바라건대, 그대는 시대의 변화를 잘 관찰하여 이왕의 업적으로 스스로 만족하지 말고, 늙었다 하여 스스로 꺾이지 말고, 위 무공(衛武公)의 90세에 자경(自警)한 것과 거백옥(蘧伯玉)의 70세에 변화한 공을 본받아 실제로 체험하고 확충하여야 한다. 그러면 선대를 승술(承述)하여 수거(修擧)한 업적뿐만 아니라, 사문(斯文)과 세교(世敎)에도 많은 도움이 되고 남을 것이다. 그러기에 감히 이 회답을 하는 바이다.-최익현(崔益鉉, 1833~1906) 외성당기(畏省堂記) 光州牧安淸之里 蕭然茅屋而扁畏省堂者 故安村朴公燕居舊室 而尤菴宋先生手筆也 迄今數百年 棟宇無恙 堂額宛存 使後人之升斯堂者 自然感發惕厲 而不敢慢焉 先生德義之風之在人者 嗚呼遠矣 不佞自海放還之日 邂逅朴公后孫萬東氏於河南座上 見其德容溫粹 論議峻整 眞故家典型 心竊欽服 伊後書來 猥以堂記之述 屬意鄭重 不佞再三辭非其人 而不獲命 則竊惟君子之學 不外乎存心養性事天立命之間 而言其用功法門 則曰戒愼恐懼無自欺謹其獨 言其實事題目 則亦惟曰畏天命畏大人畏聖人之言 而又曰爲人謀忠 與朋友信 習其所傳於師而已 一或反是 則私欲橫流 天壤倒置 三綱淪而九法斁 有甚於洪水猛獸之禍 而莫之救矣 宋先生以洙 泗洛建之學 加戰兢臨履之功 全體大用 充滿宇宙 貫徹古今 任天地綱常之重 而不疑其所行 處危險拂欝之境 而不易其所守者 一則曰尊中華而攘夷狄 二則曰攻黑水而衛朱子也 三則曰扶植名敎 闡明道學之退 栗以下諸先生 不可不慕法羹墻也 是其畏省存養之功 頓無一日一時之間斷 喫緊得力 平生受用 做成得許多事功 可建天地俟百世而無疑惑焉 由是言之 當日師弟間授受付託之意 雖若未易詳者 而亦豈不以愛己之心愛人 自治之道治人者耶 方今世級愈降 變亂層生 彼西鬼各種 交迹中國 汩陳五行 墮壞倫綱 患之大 憂慮之重 又非北胡黑水輩之比 則其弱彼強此 掃淸開廓之政 豈容一毫一息捨畏省二字而可以收功也 惟吾子觀變玩象 勿以已往而自足 勿以老衰而自沮 益勤衛武 蘧玉九十七十之功 而體驗擴充 則非只承述修擧之爲大業 抑亦有補於斯文世敎而有餘裕矣 敢以是復焉
    2018-08-02 | NO.43
  • 최태진-光州拱北樓
    秣馬樓前逈放眺 누각 앞 말을 먹이며 멀리 바라보니庚炎初退午天晴 삼복더위 물러가 정오의 하늘 맑네山川壯麗千年鎭 산천은 장려하니 천년의 진이요文物繁華萬戶城 문물은 번화하니 만호의 성이라曲路亭臺臨北望 굽은 길 정대에서 북쪽을 바라보니平郊秔稻占西成 평야엔 가을날의 벼 수확이 한창風煙括盡奚囊裏 풍연을 시 주머니에 가득 담으니無限騷人此日情 오늘 시인들의 정은 한이 없어라 -오산선생문집(吾山先生文集)   :권1
    2018-07-12 | NO.42
  • 최태진-智島趨拜錄
    최태진(崔台鎭, 1804-1867)의 자는 응천(應天), 호는 오산(五山)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광주목사 등을 지냈던 신석우(申錫愚), 정홍경(鄭鴻慶), 조두순(趙斗淳), 유기상(柳基相), 홍직필(洪直弼) 등 당대의 명사들과 교유했다최태진은 광주읍성의 북문 공북루에 올랐다. 신안 앞바다에 있는 지도(智島)로 가는 여정 중이었다. 여기에서 한여름 지나간 가을의 풍경과 자신을 빗대어 노래하고 있다. 秣馬樓前逈放眺 누각 앞 말을 먹이며 멀리 바라보니庚炎初退午天晴 삼복더위 물러가 정오의 하늘 맑네山川壯麗千年鎭 산천은 장려하니 천년의 진이요文物繁華萬戶城 문물은 번화하니 만호의 성이라曲路亭臺臨北望 굽은 길 정대에서 북쪽을 바라보니平郊秔稻占西成 평야엔 가을날의 벼 수확이 한창이네風煙括盡奚囊裏 풍연을 시 주머니에 가득 담으니無限騷人此日情 오늘 시인들의 정은 한이 없어라그는 신안 앞바다에 있는 지도(智島)로 가는 여정을 담은 ‘지도추배록(智島趨拜錄)’을 지었는데 이 여정 중 공북루에 올랐다. 기록을 보면 그는 1855년 7월 17일 광주에 도착했다.“17일 새벽에 출발하여 광주에 닿았다. 길가에 한 누각이 있었는데 이름은 공북루로 이른바 유문이다. 그 아래에서 묵었다. 읍의 뒤쪽은 무등산으로 고려 초부터 음사가 있었는데, 필재 선생이 관찰사로 있었을 때 나의 집안 선조이신 산당공(山堂公)께서 편지를 올려 통렬하게 금하셨다. 공북루에 올라보면 문미에 ‘매의북두망경화(每依北斗望京華)’라는 일곱 글자가 크게 걸려있다. 아래를 굽어보면 사방으로 들판이 망망하게 펼쳐져 둘레가 거의 100여리이다. 시 한수를 읊고 창평 땅에 다다르니 정송강의 서원이 보였다.”최태진의 문집으로 《오산집(吾山先生文集)》이 있는 데 발문은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 1825~1912)와 정우(正愚)가 썼다.吾山先生文集卷之四  雜著   智島趨拜錄 歲乙卯定齋先生上疏論景慕宮典禮事貶居 于湖南羅州之智島噫義理晦矣吾道窮矣忝在 門庭者不可無往候故陪叔父約族祖保汝族叔 汝善及其弟躍汝以七月初三日治發踰梁山過 田榮雨下如注冠裳盡濕鞭馬至玉洞店避雨已 而少霽八唁姜周祜午後還自倉村過小境川川 水漲溢艱渡踰石堅峙抵熊谷從妹家日已昏矣 朝見雲霧四塞須臾又滂沱食後策馬至十水橋 靑天少露雲氣解駁促鞭自濟民倉前過野平村 至龍塘店且騎且步踰小嶺雨注如昨抵省峙店 解裝而憩雨久不止因午火做一睡天少霽束裝 欲往汪沙野更卜桐谷路由馬洞渡市前津促馬 至元堂村村前大川黃流漲溢澟乎不可濟使葉 奴牽馬試渡馬腹沈沒徘徊川上四顧無雇涉者 躬自脫衣艱涉日已在西鞭馬至水谷津急灘怒 吼招長年二人挾舟而渡雨又滂沱乘昏入桐谷 六日晩朝始有晴意疾踰黃峙到橫步市場午火 促發踰公道里峙直向河東府府舍宏侈基址深 奧眞都護雄邑憩小店問族叔涉氏前日治績居 民說淸白慈惠之澤向光陽疾馳渡斗置津昔翼 虎將軍金公德齡居光州時以親患聞晉州自妹 谷金參奉楠善醫苦請而載歸臨江江船在遠不 得渡公素有神勇使醫瞑目掖而超江恐醫驚悸 顧其後曰水廣纔二寸云故謂之二寸江而俗呼 斗置江江之西卽湖南光陽地踰鷹峙日已暮矣 石路崎嶇馬躓不能前少頃月光始出微徑僅通 艱關到城島驛幕門深閉寂無人聲訪秣馬處寓 宿翼日早飯促裝至楡亭二十里至光陽城門外 問羅州去路則曰誤路入此自此尋小逕抵十五 里有大路如其言寸寸而進到順天橫川店托宿 舍窄不能容相與枕藉而睡鷄三唱各索裝將發 保汝氏失氅衣糚刀行縢汝善氏失帶扇躍汝氏 失細笠煙竹油衫蓋有一業漁者稱黃鱉同宿而 覓之無有人心之不可測如是矣相與一笑各搜 行橐隨有無變通但無副件笠子可著以黃鱉所 棄破冠著躍汝叔相噱不休朝飯行二十里接峙 問松廣寺步步踰吾道峙懸崖崱屴石路參差艱 下坦路踰一小嶺下有標木書曰國用栗木封山 洞壑秀麗煙雲深鎖依然成別界洞天住馬立漕 溪門傍有兩小閣曰滌珠曰洗月閣前有枯木無 甹蘖如植杖僧云普照國師拄植香木經幾百載 如一樣爪其皮皮中含生意亦異事也登枕溪樓 吟一律跨寺前溪起虹橋橋上作樓名曰凌虛閣 一名羽化閣登而頫視溪流成亞爲一方塘游魚 潑潑又吟一律入中門有四天王小憩退小西有 三淸閣對羽化樓京鄕貴遊名銜徧四壁層層簇 簇照耀一閣由法王門玩大雄殿有一釋戴松衲 手念珠義拜因導詣佛前開櫝出銅鉢五箇五箇 換合毫釐無差佛語所謂須彌納芥子芥子藏須 彌者此耶且有屐下體以棕櫚草結成此兩件普 照師舊物云詠一律小東隅有眞影堂左右有殿 曰靑雲曰白雲小歇進午饌山肴野簌稍可適口 書記僧憲彦聰敏而知禮摠攝僧性心又謁見書 名姓板揭于六鑑亭壁午後更上法堂後飮三日 水一椀卽普照師洗心三日覺道之泉云因觀諸 刹曰海淸堂尋劍寮法聖殿晉濟堂不可殫記九 日早朝治發午火同福邑離家六日路不過三百 里而閱來山川無非太行瞿塘川則或騎或擔或 裸一日所渡八九山則或峻或臥或長一日所踰 六七到和順地過伏龍川往往有水石巖壑之勝 宿曲頭店初十日小憩和順邑抵一嶺歇有潭陽 柳雅與之語頗識博因與步下遙望東南有石屹 立柳指而語曰昔李舍人潑全盛時世謂此巖曰 雙轎曰印臺及其家袂禍改名此巖曰喪輿曰斷 頭其事與宋代席帽峯相類到南平市午火卽發 過大野三十里宿羅州邑十一日曉發至咸平馬 院宿十二日至兔嶝前路無秣馬處因午火抵二 十里糠山津津卽渡智島處而靈光界也潮汐進 退之處相望幾五里其路非沙非泥非燥非濕往 往水穴多凹鑿馱馬甚艱而潮入則尤不可易渡 沿路聚石層鱗以備潮入時行人褰涉之勞船路 不過一里向智島鎭所直馳數弓許有大村在路 左曰東里有健兒前導有一人冠而來見曰吾再 從同知梁國順守番鎭所未卽來謁吾代爲擧行 因怪問曰絶島初面何若是申勤對曰觀行色必 是嶺南兩班爲柳參判台監問候而來俺等感悅 之心油然而生故耳其言出於天眞秉彝之心而 吾先生德敎之盛過化之妙及於俄傾之間者有 如是矣改著上衣入謁時先生以泄患愆和雖在 枕席而竦然端坐謂曰遠來訪我此意良勤但老 悖妄觸致勞知友如此良苦良苦其侍傍者柳致 任仲車先生三從弟也金大銖道凝先生外孫也 先生顧而哂曰留此數月孤寂莫甚今日之會可 謂侈矣退定舍館夕飯訖與仲車道凝入侍函筵 夜半退宿連三日與同起居周旋唯諾之間竊覵 榮衛敷潤敎誨諄複患難危險不存于心左右列 侍誾侃湛樂不覺楚囚湘纍之爲何事也翼日與 道凝遊鎭館周覽島中鎭下村落四五十戶竹扉 茅簷頹毁無完屋制如斗如蝸其西有一村村中 有一屋土墻方正樹林幽邃問之乃康津兵使李 公健緖謫居之所李公艶服先生道義伻書往來 烹飪供奉間日不絶彝性所篤尊慕如此亦武人 中高義者也其東南海也嶺南漕運所通之路有 煮鹽幕登主山北望大洋所謂七山海荏子島在 其南云魚族一無可稱而且無市凡欲貿易則詣 馬院一見市費三日五穀僅成樣而早粟最宜結 卜則每負當一兩錢居民不能支而惟燔鹽爲利 一年所煮每戶各數十石以此民賴以安俗則蚩 蠢不知尊卑對人通稱碩士四方十里村無讀書 聲亦無醫藥有急病坐而待命所尙巫覡而已公 廨蕭條無可觀十四日朝質問疑目數條是夕以 篤老下情地難於久曠陳辭告以明日歸先生愀 然曰逢時之喜預料別時之懷十五日告退先生 贈言曰老炎尙酷前路甚遠須愼攝行李無貽瑕 慮因下階送之拜辭之際目不敢仰視足不忍前 道只有飮泣而已仲車兄餞街外道凝及其同留 者柳生然文泮人梁弘隨至數弓許含淚送別午 火馬院懷思悠悠感吟一律舍來路左轉乘暮抵 咸平邑城市寥寥雲月隱隱難於托馬扣路傍一 扉經宿與汝善叔賦聯句十六日冒雨抵四街奴 病留宿十七日曉發抵光州路傍有一樓名拱北 所謂留門也館其下邑之後曰無等山勝國初淫 祠在焉畢齋先生觀察時吾族先祖山堂公上書 痛禁之登拱北樓楣揭每倚北斗望京華七大字 俯瞰四野茫茫周回殆百餘里詠一律抵昌平地 望鄭松江書院邑傍有蔡孝子碩徵碩福復讎碑 過六一亭到潭陽梧柳院宿十八日過玉果縣因 踰谷城界淸明山在東隅而向時所歷雲月峙在 其南云至驛村水砧店秣馬平原廣野巨山扼其 吭沙土多流濆午療至鴨綠院院名白鷺亭以二 水中分也板上有李白軒景奭詩因次韻十九日 抵求禮邑山氣麤厲路險不能馳步抵漢水倉村 店蕭條無秣馬處到蓮谷人馬俱乏且大雨猝下 勢難前進遂止宿翼日促飯行十里花開店河東 界也呼船渡津到二十里船渡岳陽津吟一律望 姑蘇臺鳳凰山瀟湘江其上蓋有班竹云而雨聲 關愁歸期忙迫未能周覽抵十里山水秀麗杉檜 蔚密乃黑龍村也雲天漸薄夷道坦坦馬騰而走 馳入府中午火過桂影樓宿橫步店二十一日到 花亭村與贊楫族氏往桐谷備說往來閱歷二十 二日到家庭闈一安眷累無恙離發後爲日十九 周行凡一千里有奇 《오산선생문집(吾山先生文集)》 권4
    2018-07-12 | NO.41
  • 최현 스님에게 보낸 편지 1〔與璀絢上人〕- 서형수
    명고전집 제5권 / 서(書)최현 스님에게 보낸 편지 1〔與璀絢上人〕관사(官舍)에서 촛불 밝히며 세속의 장부(帳簿)를 매일 살피다 보니 허망한 일에건 실상이 있는 일에건 온통 마음이 혼란스럽고 어수선합니다. 순간의 짧은 생각에도 스님의 가르침을 듣고 싶던 참인데, 뜻밖에 편지를 보내어 혼미하고 게으른 정신을 일깨워주셨습니다. 허망한 속념(俗念)을 흩어버리고 오묘한 깨달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쩌면 이로부터 힘을 얻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큰 은혜에 깊이 감사드립니다.다만, 보내오신 편지에 ‘사랑 애(愛)’자를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사랑도 정욕의 뿌리이기에, 사랑의 대상이 같고 다름을 막론하고 이는 불도(佛道)의 경지에 오른 행자(行者)들이 힘써 마음에서 뽑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처럼 연연하시는지요? 황하의 모래처럼 무수한 덧없는 논의가 겨우 가리개 하나를 사이에 둔 것과 같은 것은 아닌지요? 이 편지를 깨달음의 징후로 생각하신다면 불성(佛性)을 깨닫고 무상함을 깨닫는 데에 은연중의 도움이 되지 말란 법도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법수(法數)》는 서울 집에 깊이 보관해 둔 터라 지금은 찾아서 보내드릴 길이 없으니, 우선은 조만간 고을 수령의 인끈을 풀게 될 날을 기다려야겠습니다. 이전에 태만했던 점 사과드립니다. 목면 한 필을 가사(袈裟) 만드는 데 쓰십사 보내드립니다. 눈이 피로하여 어릿어릿한 바람에 많은 말씀 올리지 못하고 이만 줄입니다.[주-D001] 최현 스님에게 보낸 편지 1 : 【작품해제】 명고가 지방관으로 있을 때 승려 최현(璀絢)이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묻고 전에 빌려준 《법수(法數)》를 돌려달라고 청한 데 대해 답한 편지이다. 명고는 최현의 편지에서 ‘사랑 애(愛)’자를 많이 사용한 것을 가지고 일체의 정욕을 배제하라는 불가의 가르침은 허망한 것이 아닌지 숙고해 보기를 청하고, 책을 즉시 돌려주지 못함을 사과하였다.승려 최현은 본서에 모두 4번 등장하는데, 시고(詩稿) 부분에는 모두 ‘絢上人’으로, 문고(文稿) 부분에는 모두 ‘璀絢上人’으로 표기되었다. 명고의 조카인 서유본(徐有本, 1762~1822)의 《좌소산인집(左蘓山人集)》에도 1번 등장하는데(권1 〈금경암에서 최현 스님에게 준 시[金經庵贈璀絢上人]〉), 호는 삼봉(三峯)이며 북한산의 초가에 거처한다고 하였다. 명고는 본서 권1 〈최현 스님이 내방하였기에 달 아래서 운을 뽑아[絢上人來訪 月下拈韻]〉에서 그가 명고정거에서 가까운 암자에 거처한다고 하였다. ‘상인(上人)’은 승려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본문의 내용으로 보아 이 편지가 쓰인 시기는 명고가 서울을 떠나 지방관으로 있을 때이다. 곧 강릉 현감으로 있었던 1785년(37세) 9월~1786년 7월,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있었던 1796년(48세) 7월~1799년 6월, 영변 부사(寧邊府使)로 있었던 1799년(51세) 6월~7월초의 기간 중 하나이다.[주-D002] 법수(法數) : 명나라 일여(一如, 1352~1425)가 영락(永樂) 연간에 칙명으로 편찬한 《대명삼장법수(大明三藏法數)》로 생각된다. 줄여서 ‘삼장법수’ㆍ‘대명법수’라고도 한다. 이 책은 대장경전(大藏經典)에서 숫자와 조합된 명사 1,555항목을 ‘일심(一心)’부터 ‘팔만사천법문(八萬四千法門)’까지 배열하고 그 전거와 이설을 상세히 단 것이다. 일여는 절강(浙江) 상우(上虞) 사람으로, 속성(俗姓)은 손씨(孫氏)이다. 그는 남조 시대 천태종 대사 지의(智顗)의 《법화문구(法華文句)》에 대해 ‘일여의 신주[一如新註]’로 일컬어지는 《법화과주(法華科註)》를 지은 인물이다. 《佛敎大辭典 大明三藏法數, 一如》
    2023-12-04 | NO.40
  • 취봉사 누 뒤에서 절 한 수를 지어 탁선생에게 봉기하다- 삼봉집 제2권
    취봉사 누 뒤에서 절 한 수를 지어 탁선생에게 봉기하다[鷲峯寺樓上賦得一絶奉寄卓先生] - 삼봉집 제2권 : 정도전【안】 탁선생의 이름은 광무(光茂), 호(號)는 경렴정(景濂亭)인데 이때에 광주(光州)에 있었음. 일엽(一葉)의 가을이라 나그네 꿈이 설레어 / 客夢初驚一葉秋우연히 비를 타고 높은 누에 올랐다오 / 偶乘微雨上高樓중이 멀리 선생의 댁을 가리키는데 / 居僧遙指先生宅하얀 돌 맑은 샘 깊숙한 골이었소 / 白石淸泉谷口幽[주-D001] 일엽(一葉) : 가을을 표현한 말임. 당인(唐人)의 시에 “산 중은 갑자 셀 줄 모르고, 나뭇잎 떨어지면 가을 왔다 생각하네[山僧不解數甲子 一葉落知天下秋].” 하였음.
    2020-09-21 | NO.39
  • 탄옹(炭翁)에게 올리다- 광주 목사(光州牧使) 이장(李丈)의 일이 거론되다
    上炭翁(十月十五日)明齋遺稿 권9 / 書 윤증(尹拯, 1629~1714)탄옹(炭翁)에게 올리다며칠 동안 인편이 없어 오래도록 안부를 여쭙지 못하고 매번 사모하는 마음만 간절하였는데 뜻밖에도 탄촌(炭村)으로부터 3장의 편지를 전해 받았습니다. 펼쳐 보고 난 뒤에 얼음이 얼고 서리가 내리는 차가운 날씨에도 기체가 편안하심을 알게 되어 지극히 위안이 되는 심정을 무어라 형언할 수가 없습니다.꿈속의 일을 읽고 문하가 강호에서 얼마나 근심하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서신의 끝머리에서 하신 말씀은 앞서의 여러 번의 서신에서 하신 말씀과 같았으니, 매우 자상하게 답해 주는 데에서 싫어하지 않고 애써 주는 아름다운 뜻을 볼 수 있습니다. 이에 감탄하며 명심하고 있으니 어찌 감히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직접 찾아뵙고 저의 흉금을 다 털어놓지 못하고 서찰로는 뜻을 다 드러낼 수 없으니 아쉬울 뿐입니다.지난번에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해하지 않는다.”라는 구절을 말씀드린 것은 저의 지나친 근심에서 나온 것으로 평소 가르쳐 주신 말을 되풀이했을 뿐이지 달리 들은 바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제가 비록 어리석지만 어찌 감히 이러한 점으로 문하를 의심하겠습니까. 다만 지난번에 광주 목사(光州牧使) 이장(李丈)이 찾아와 “이번 일이 있은 후에 차인(次仁)의 무리가 도성에 들어와서도 예전처럼 방문하지 않는 것이 마치 다른 사람들이 종용하는 말을 들은 듯하다.”라고 말하니,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매우 의아스러웠습니다. 저 이장(李丈)이 조정 관료들 사이에서 이론(異論)을 내세우지 못한 것은 형편상 그런 것이므로 심하게 허물할 수 없습니다만 이 때문에 그러한 생각에 마음이 얽매임을 면치 못하였으니 참으로 이른바 서운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문하의 규모와는 같지 않고 또 차인(次仁) 형의 무리가 평소 논의했던 견해와도 다르니, 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이미 들은 바가 있으므로 감히 여쭙는 것인데 과연 어떻게 된 것인지요?삼가 선조의 묘석 세우는 일을 시작하셨다고 하니 생각건대 마음 쓸 일이 적지 않을 듯하여 매우 염려가 됩니다. 중부(仲父)에게 일전에 부탁하신 뜻을 감히 알려드리지 못하였습니다만, 중부께서는 눈이 어두워 글씨를 반듯하게 쓰지 못하신 지가 수년이 되었습니다. 또 복관되어 도성으로 가셨으니 도성에서 나와 묘석에 직접 글씨를 쓸 수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북칠(北漆)하여 글씨를 묘석에 옮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으니 무슨 염려가 되겠습니까. 제가 한 번 가는 것은 꺼릴 일이 아니지만 비면(碑面)의 글씨를 중부에게 부탁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여기는 전과 다름없이 별다른 일은 없으나 가친의 아픈 팔이 여러 달 지났는데도 낫지 않고 오래도록 신음하고 계시어 근심과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달 초에 조금 안정되셨기에 저는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상수리를 주우러 산중으로 들어갔다가 어제 저녁에 돌아왔습니다. 내일은 다시 둔악(芚岳)으로 들어갈 예정이니, 이는 두소릉(杜少陵)이 말한 “황산(荒山)에서 원숭이를 좇는 자의 생애”와 같아 진실로 우습습니다. 깊은 산중의 작은 암자에서 바깥 세상일을 듣지 않고 열흘간 독서한 것이 1년 동안 공부한 것보다 낫습니다. 그러나 매양 마음에 와 닿는 곳이 있어도 지난해 모곡(茅谷)의 작은 움집에 있을 때처럼 직접 뵙고 가르침 받을 길이 없어 한스럽기만 합니다. -10월 15일-數日來絶無往便。久闕修候。每切馳慕而已。意外自炭村傳送下書三紙。披玩之餘。仍伏審氷霜。氣候萬福。慰幸之至。不容名言。夢寐間事。有以仰見江湖之憂。紙末之誨。若前度累便。垂答諄諭。足見惓惓不倦之義。感歎藏戢。何敢忘之。第無因一拜床下。豁此心胸。筆札固不能盡人意。是用介然耳。不慍之說。曾以薦聞者。自是過計之憂。爲誦平日俯敎之言而已。非有所聞也。拯雖愚昧。何敢以是奉疑於門下哉。但昨者光牧李丈。見過爲言。今番事後。次仁輩入京。不曾如前來相訪。似聽他人慫㥚之言云云。聞來不能無訝。彼李小諫之不能立異於僚席勢也。無足深咎。而至以此不免有所滯芥於其間。則眞所謂慍也。恐不似門下規模。又不似次仁兄輩平日論議知見。拯則有以知其不然。而旣有所聞。敢此奉質。未知果如何也。伏承先墓石事方始。竊想勞神不少。爲之貢慮。仲父前所屬之意。敢不通告。第仲父目昏。不能作楷。已數年矣。且復官入京。似不能出來臨石。然北漆移石。甚非難事。何慮之有。拯則一動雖非所憚。而石面事。則非其任矣。此間都依舊狀。而家嚴臂痛。數月不瘳。長在呻吟中。憂煎度日。自月初少定。又爲拾橡救飢之計。走入山中。昨夕始歸。明又再入芚岳。杜少陵所謂荒山隨狙者生涯。良可笑也。深山小庵。不聞外事。一旬讀書。勝却消一年工夫。每到會心處。恨無由對案承謦欬。如往年在茅谷小窩時也。奈何。十月十五日。
    2023-07-13 | NO.38
  • 퇴계에게 올린 편지〔上退溪書〕 -금계집 내집
    퇴계에게 올린 편지〔上退溪書〕 금계집 내집 제4권 / 잡저(雜著) : 이이한 번 주남(周南)에 누워 지금까지 체류하고 있으며 증세가 더욱 심해져 아직 떠날 날짜를 잡지 못하니 마음이 울울합니다. 사직한 후 공무를 일체 끊고 시골집에서 임시로 거처하고 있으며, 스무날 사이에 출발하려고 하나 몸이 이미 극도로 허약해져서 무사히 돌아가는 것을 보장하기 어려울 듯합니다.소식이 오래 끊어졌었는데 요즘 동정이 어떠하신지요? 아마도 지금쯤 도산(陶山) 주위를 두루 다니면서 매화와 버들을 구경하는 즐거움을 누리시리라 생각하지만, 저는 병상에 누워 부질없이 탄식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또 이곳 서원(書院)의 위차를 정하는 일은, 이미 기문(記文)을 지어주셨으니 시끄러운 논란이 조금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한 차례 위차를 정해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제 병이 깊어 외부의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으니 후임 군자에게 걱정 끼치는 것을 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난달에 우연히 사방의 명유(名儒) 및 오자강(吳子强)이 문병을 왔기에 고을 선비들과 서원에 모여 여러 날 묵었으며, 이때 류 광주(柳光州)도 함께 했습니다. 그때 모두 말하기를, “서원의 위차를 정하지 않고 돌아가면 뒤에 오는 자가 감히 그 가부를 논의할 수 없을 것이고, 또 유생들이 서원에 들어갈 때 마치 탱화가 없는 절과 같아 즐거이 모여 공부하지 않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유생들과 그 가부를 권점(圈點)하니, 한훤당(寒暄堂 김굉필)을 홀로 제향 하여 정위 남향으로 모시려고 하는 것에 대해 모두 찬성하였고, 문충공(文忠公 이인복)을 동쪽 벽에 배향하기를 원하는 자도 1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열공(文烈公)은 손에 염주를 들고 있어서 학궁에 모실 수 없다는 것이, 우리뿐만 아니라 경향 각지의 논의가 이미 정해졌으므로 절대로 다시 논의할 수 없습니다. 손에 염주를 들고 있는 늙은이를 사당에 넣고자 의논한다면 유생들은 차라리 신발을 신고 떠나고 말아 서원 가운데 유생의 자취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의견을 합하여 논의를 결정해야 하는데 유생들의 말도 지나치다고 할 수 없습니다.삼가 생각건대, 선생님께서 지으신 서원 기문은 엄연히 하나의 학문 규범인데, 저로부터 선생님의 가르침을 위반하는 일은 차마 못할 바이고, 이를 고집하며 유생들의 요청을 거절하는 것도 형편상 행하기 어렵습니다. 병으로 지친 마음이 더욱 어지러워 감히 급히 사자(使者)를 보냈습니다. 제 생각에 그 기문은 목사 노경린(盧慶麟)이 급박할 때 나왔고 여러 논의가 분분한 날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아마 다시 요량해야 할 곳이 있을 듯합니다. 십분 타당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고치는 것도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약 이미 정해진 기문이란 핑계로 다시 논의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아마도 중외 유생들의 의혹을 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밝은 가르침을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와병중이라 두서없이 한두 가지 말씀드렸을 뿐 자세히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허둥지둥 대필을 시켜서 더욱 송구스럽습니다. 중간에 두 이씨(李氏)의 후예들도 말하기를, “이씨 두 분을 고을의 현인이라 하여 사당에 들인 것은 퇴계가 결정한 일이고 노 목사(盧牧使)의 본래 뜻이니, 후배 젊은이들이 가볍게 고칠 일이 아니다. 만약 한훤당을 높이 받들고자 한다면 정당(正堂) 북쪽에 따로 세 칸 사당을 짓고 스승을 높이는 곳으로 삼으면 될 것이다.……”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서원 안에서 동쪽에는 향현사(鄕賢祠)를 모시고 북쪽에는 존현사(尊賢祠)를 모시는 일은 형세상 시행할 수 없을 듯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삼가 품의하는 편지를 올립니다.[주-D001] 주남(周南)에 …… 있으며 : 질병 등으로 인하여 지방에 머물러 있게 된 것을 말한다. 주남은 중국의 낙양(洛陽)을 이른 것이다. 한 무제(漢武帝) 때의 태사(太史)인 사마담(司馬談)이 병이 위독하여 주남에 머물러 있다가 한나라 봉선(奉禪)의 일에 참예하지 못하여 울분으로 죽었던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130 太史公自序》[주-D002] 서원(書院) : 1555년(명종10)에 노경린(盧慶麟)이 성주 목사로 부임하여 건립하고 황준량(黃俊良)이 중수한 영봉서원(迎鳳書院)이다.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에 있다. 숙정자(叔程子), 주자(朱子), 김굉필(金宏弼), 이언적(李彦迪), 정구(鄭逑), 장현광(張顯光)의 위패를 모셨다. 정구(鄭逑)가 1568년(선조1) 봄에 퇴계 선생에게 품의(稟議)하여 천곡서원(川谷書院)으로 고쳤다.[주-D003] 기문(記文)을 지어주셨으니 : 1560년(명종15) 7월에 이황이 〈영봉서원기(迎鳳書院記)〉를 지었으며, 《퇴계집》 권42에 실려 있다.[주-D004] 오자강(吳子强) : 오건(吳健, 1521~1574)으로, 자강은 그의 자이다. 본관은 함양(咸陽), 호는 덕계(德溪)이다. 남명 조식이 덕산동(德山洞)에서 강론하자 그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김인후(金麟厚)ㆍ이황(李滉)의 문인이기도 하다.[주-D005] 류 광주(柳光州) : 광주 목사(光州牧使)를 역임한 류경심(柳景深, 1516~1571)을 말한다.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태호(太浩), 호는 구촌(龜村)이다. 1560년 광주 목사가 되었고, 뒤에 호조 참판, 예조 참판, 대사헌, 병조 참판, 평안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문집에 《구촌집》이 있다.[주-D006] 권점(圈點) : 그림이나 글씨 옆에 동그라미를 치며 의견을 표시하는 것이다.[주-D007] 문열공(文烈公)은 …… 있어서 : 문열공은 고려 때 문신 이조년(李兆年, 1269~1343)이며, 고려 시대부터 전해오던 그의 영정 왼손에 염주가 들려 있던 것을 이른 것이다. 이조년의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원로(元老), 호는 매운당(梅雲堂)ㆍ백화헌(百花軒)이다.[주-D008] 노경린(盧慶麟) : 1516~1568. 본관은 곡산(谷山), 자는 인보(仁甫), 호는 사인당(四印堂)이다.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있을 때 영봉서원(迎鳳書院)을 세워 유학(儒學)을 장려하였다.[주-D009] 두 이씨(李氏) : 애초에 노경린이 영봉서원에 제향 하고자 했던 문열공(文烈公) 이조년(李兆年)과 그 장손 이인복(李仁復)이다.
    2020-12-11 | NO.37
  • 퇴계집 권17, 서, 答奇明彦 답 기명언
    答奇明彦 辛酉 有無限合叩底。限於此數言。想默諭也。
    2023-07-06 | NO.36
  • 팔가섭필 상 병인 경오- 신기영
    팔가섭필 상 병인 경오년(1870, 고종7) 〔八家涉筆上 竝引 庚午〕 산북노인(汕北老人) 신기영(申耆永) 두평-운양집 제14권 / 잡저(雜著) 4편 : 김윤식(金允植, 1835~1922)유종원의 문장 11〔柳文十一〕 산수기 자후가 〈소석성산기(小石城山記)〉 및 〈만석정기(萬石亭記)〉를 지어 하늘이 떨어지고 땅이 솟아난 조화의 흔적이라고 하며 신물(神物)을 홀로 샀다고 매우 자랑하였다. 내가 본 것들을 따져보면 거의 어양돌기(漁陽突騎)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 금강산 만이천봉이지만 내가 미처 보지 못했다. 내가 본 것은 오직 동남쪽 몇 구역이지만 그 기이함을 이미 이루 말할 수 없다. 단양(丹陽)의 삼선봉(三仙峯), 사인봉(舍人峯), 구담봉(龜潭峯), 옥순봉(玉筍峯) 같은 경우는 걸출하고 수려하고 험준하고 명정(明淨)하다. 청주(淸州)의 파곶동(巴串洞), 선유동(仙遊洞), 옥량동(玉樑洞) 같은 경우는 깊숙하고 깨끗하고 고요하고 그윽하다. 광주(光州) 무등산(無等山)의 삼황봉(三皇峯) 및 광석대(廣石臺), 입석대(立石臺) 같은 경우는 맑게 트이고 쑥 솟아나서 만 개의 기둥을 묶어세운 듯하고[如光州無等之三皇峯及廣石立石之淸曠超拔。束立萬柱。], 양주(楊州) 만장봉(萬丈峯) 같은 경우는 곧바로 높이 하늘로 솟아 있고 그 아래 작은 바위는 천병만마(千兵萬馬)의 칼과 방패, 창의 형상과 같다. 이는 모두 괴이한 경관을 지닌 바위들이다. 귀신이 설치하고 조성한 듯 인간 세상 같지 않다. 내 마음은 기쁘지만 미처 서술하지 못하니, 바위가 나를 만난 것이 어찌 불행이 아니겠는가?
    2020-12-31 | NO.35
  • 폐사하여 땅에 묻은 소의 숫자를 순영(巡營)에 보고하다 광주목사
    보첩고(報牒攷) - 光州牧使○ 영조(英祖) 39년(1763) 8월 16일 폐사하여 땅에 묻은 소의 숫자를 순영(巡營)에 보고하다올려 보내는 일. 본부(本府)의 경내에 우역(牛疫)이 점점 치성하여 소가 잇따라 폐사하고 있어서 민사(民事)가 고민된다는 연유에 관해 전에 이미 첩보하였습니다. 우역이 불처럼 더욱더 치성하여 소가 잠시 병을 앓아도 곧바로 폐사하고 마는데, 이러한 증세가 7월부터 더욱더 심하였습니다. 그래서 7월 이후로 폐사한 소에 대해서는 주인의 성명을 일일이 수록(收錄)한 다음 책자로 작성하여 올려 보냅니다.47방(坊) 중에 오직 진전방(眞田坊)만 청정(淸淨)하여 아직은 이러한 환난이 없는데, 깊디깊은 외진 산골에 도처마다 장막을 설치하여 소를 옮겨 놓고 사람이 모두 지키고 있으니, 그 광경이 시름겹고 참담하였습니다. 이외에 46방은 고실(故失)이 비록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우역의 치성은 실로 피차의 구별이 없으므로 2개월 사이에 폐사한 소의 수가 무려 9백 85두에 이르렀으니, 매우 민망합니다. 그런데 우역이 날마다 더 치성하여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으니, 앞날의 민사(民事)를 생각할 적에 더욱더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폐사한 소는 낱낱이 엄하게 신칙하여 땅에 묻도록 하였습니다. 이상의 연유를 모두 첩보합니다.제사(題辭)1천 두(頭)에 가까운 소가 일시에 병들어 죽었으니, 민사를 생각할 적에 너무나도 고민스럽다. 폐사한 소는 신칙하여 땅에 묻도록 해야 할 것이다.
    2023-08-17 | NO.34
  • 포로수용소 탈출작전
    포로수용소하면 먼저 거제도를 떠올립니다. 대명사처럼 거제도가 언급되지만 사실 광주에도 포로수용소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시민도 많지 않습니다. 6.25한국전쟁 중에는 광주에 포로수용소를 두 군데 두었지요. 동구 학동의 전남대병원 뒤편에 있었던 중앙포로수용소와 상무대 일원에 있었던 상무대포로수용소가 그곳입니다. 상무대 일원의 포로수용소에는 세 곳의 막사를 두게 되고 벽진동과 금호동에 있었지요. 두 군데 중 한곳이 서구에 설치된 것이죠. 포로수용소는 엄밀하게 보자면 살았다는 안도감 보다는 우선 좌우이데올로기의 극심한 대립 속에 발생한 비극적인 일이고, 숙명적인 아픔으로 봐야 하겠지요.광주에 포로수용소를 둔 것은 1952년 5월과 6월에 거제도에서 일어난 포로들의 폭동에 따른 영향이 컸어요. 거제도 폭동의 규모가 커진 이유 중 하나가 한곳에 너무 많은 북한군 포로를 집단으로 수용하면서 여러 부작용을 우려한 유엔군이 포로들을 전국에 분산하기로 결정하면서 비롯됐어요. 이에 따라 광주에는 제1포로수용소(일명 제15포로수용소) 산하에 세 군데 막사를 두게 됐습니다.그 중 하나가 비행장 근처에 있었고, 다른 두 곳이 사월산 아래인 벽진동과 금호동에 있었지요. 현재 벽진동 일대의 공군탄약고 자리가 당시 두 개의 포로 막사가 있었던 곳입니다. 이들 세 곳에 분산된 막사 중 상무대 비행장 근처(훗날 군인아파트 자리)의 제1막사에 3700여명이, 벽진동 사월산 아래인 제2막사에 3700여명이, 그리고 금호동의 제3막사에 3100여명 등 모두 1만여 명의 북한군 포로들이 수용돼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 포로는 한국에 잔류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었지요.1만여 명의 포로가 수용되다 보니 역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자취와 움직임이 남았지요. 그런 포로들 가운데는 1931년 황해도 안악군 출신으로 평양사범학교 재학 중에 징집돼 전투 중 포로가 돼 사월산 주변 막사로 이송되어 온 강용준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훗날 다시 국군에 입대해 대위로 예편하게 됩니다. 그는 1970년대에는 소설가로 변신했지요. 그가 낸 작품들 가운데 포로수용소 당시의 체험을 기반으로 쓴 ‘사월산’이 있습니다. 또 광주포로수용소에 머문 사람으로는 ‘진달래꽃’의 시인 김소월(1902∼1934)의 아들인 김정호도 그 중 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런데 포로 탈출과정에서 인명피해가 발생해 슬픔을 더했지요. 1953년 6월18일 새벽 2시에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으로 유엔군을 따돌리고 이들 포로의 탈출을 돕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포로 석방으로 10,432명이 탈출했고, 미탈주자는 165명이었지요. 또 탈출 도중에 안타깝게도 부상자 8명과 사망자 5명이 발생했어요. 사상자들은 이 석방계획이 워낙 은밀하게 진행돼 수용소를 감시하던 국군 초병들에게도 알리지 않았던 데서 발생했다고 합니다. 비밀엄수를 위해 일반 국군들에게도 탈출 소식을 감춰야 했고, 이를 전혀 모르던 병사들이 탈출하려는 포로들에게 총기를 발사하면서 일부 사상자들이 생겼던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중앙포로수용소는 주로 지리산 등 전남지역에서 체포되어 온 빨치산이나 그 가족 혹은 혐의자 등 민간인들이 수용됐으며, 상무대 일원에 있었던 포로수용소는 전쟁 중에 생포된 북한 정규군을 수감했던 곳입니다. 지금은 그 흔적마저 없어졌어요. 안내이정표라도 세워서 잊혀져 가는 역사를 되살리는 작업이 진행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소설가 강용준은 1960년 단편 ‘철조망’이 사상계 제1회 신인문학상에 당선돼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철조망’, ‘설원’, ‘종소리 전쟁’,‘광인일기’, ‘밤으로의 긴 여로’, ‘바람이여 산으로’, ‘광야’, ‘사월산’ 등 다수가 있다. 제4회 한국창작문학상과 제1회 대한민국문학상, 한국문학 작가상과 한무숙 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사상계와 한국해외개발공사에 재직했다.
    2018-05-28 | NO.33
  • 풍암동 12당산과 도둑
    서구 풍암동의 옛 신암마을을 비롯 인근 매월동 동산마을, 임암동 화방마을엔 남아있는 고인돌군은 신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다는 흔적을 보여주는 것으로 주거의 역사가 장구한 곳이지요. 풍암지구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신암근린공원과 금호아파트 옆의 근린공원에는 이들 마을에서 옮겨온 신석기시대의 역사를 증명하는 고인돌과 선돌이 옮겨져 복원돼 있습니다. 지금 옮겨져 오기 전의 고인돌과 선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통마을의 역사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지요. 풍암지구 금호아파트 근처에 있는 ‘근린공원’과 주은모아아파트 뒤편에 있는 ‘신암근린공원’이 있는데 예전에 온 동네 대소사가 전해지던 사랑방 같은 ‘시암(샘)터’가 있었어요. 신암마을은 시암이 신암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신암마을 안에는 옛날에 샘이 많았어요. 특히 지금 이 할머니 당산나무가 있던 인근 금호아파트 1차 단지 안에는 ‘말샘물’이라 해 겨울에는 따뜻한 샘물이, 여름에는 차디찬 샘물이 나오는 곳이었어요. 신암마을 사람들은 여름이건, 겨울이건 이곳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마을의 대소사를 서로 논의했지요.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이 살아온 신암마을은 뒤쪽으로는 금당산이 자리하고, 앞으로는 저수지와 너른 들판이 있어 전체가 명당으로 불릴만했지요. 이 신암마을 입구에 수백 년의 수령을 지닌 당산나무가 있었죠. 어른들한테 들은 이야기로는 이 마을에 무려 ‘12당산나무’가 있었다고 해요. 그런데 어렵사리 나무들이 자라더니 지금은 두 그루만 남았죠. "어릴 때는 이 당산나무를 붙잡고 동네 아이들과 놀았어요. 할아버지 당산은 아래쪽에 큰 구멍이 뚫려있어 그곳에서 놀기도 하고, 겨울에는 구멍 안에서 불을 지피고 앉아 놀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40여 년 전에 할아버지 당산이 죽었지요. 아무래도 우리가 죽인 것 같아 늘 죄송스런 마음뿐이지요. 다행히 할머니 당산이라도 살아남아 당산제를 지낼 수 있으니 그나마 걱정을 덜게 됐습니다."신암근린공원에서 100여m 쯤 떨어진 금호아파트 101동과 102동 뒤편에는 두 팔을 뻗은 것 마냥 푸른 잎이 무성한 ‘당산나무’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당산나무는 지금 ‘할머니 당산이라 부르는데 할아버지 당산은 아깝게도 1960년대 중반 고목이 되어 유실되고 말았습니다. 오래 전 이곳에 12당산이 있었는데 각 당산마다 큰아버지 당산, 큰어머니 당산, 작은아버지 당산, 작은어머니 당산 등 이름이 붙여져 있었고, 마을사람들은 매년 정월 보름이 되면 지성으로 당산제를 올렸지요.1982년 1월3일 ‘왕버들 보호수’로 지정된 이 할머니 당산나무는 둘레가 4.6m, 높이가 15m로 풍암지구 인근에서 발견된 선돌 및 고인돌과 함께 자리하고 있어요. 마을 입구에서 있던 당산나무는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뿌리째 뽑혀져 버릴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마을 주민들이 건설회사와 싸워가면서 이 나무를 지켰다고 합니다.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면서 없어질 번한 것을 주민들 요구에 따라 공원 한 켠에 자리하게 됐지만 여전히 위력을 잃지 않은 모양새예요. 12당산나무는 옛날부터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었지요. 그래서 옛날 신암마을에 도둑이 들어도 쉽게 도망가지 못했다고 그래요. 이와 관련한 옛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한 번은 도둑이 들어 한 밤중에 어떤 집의 소[牛]를 훔쳐 갔어요. 도둑은 이 소 고삐를 잡고 밤새도록 마을길을 꼬불꼬불 걸어 나갔다고 해요. 이미 한 번 들러서 나가는 길을 봐둔 터라 나름대로 ‘작은 안터’와 ‘큰 안터’를 지나 염주마을을 넘어 빠져나갔다고 생각했죠. 도둑은 이렇게 밤새도록 걸어 새벽녘이 다가오자 상당한 거리를 나왔다고 안심하고 한 나무 밑에 앉아 숨을 돌리며 담배 한 대를 물고 있었어요. 그런데 소 주인이 나타나 ‘이 소도둑놈아, 내 소를 훔쳐가려고 하느냐’라고 달려오자 도둑은 마치 이른 아침 농사를 짓기 위해 소를 몰고 나온 다른 마을 주민인 냥 ‘무슨 소리요, 이것은 내 황소요’라고 대꾸하다가 소주인이 ‘너는 이 마을 사람도 아닌데 여기서 무슨 황소를 끌고 간다는 말이냐’하며 멱살을 쥐어잡았습니다."이렇게 도둑은 멱살을 잡힌 채 정신을 차렸으나 신암마을 입구를 떠나지도 못한 채 열두 당산나무 주위만 빙빙 돌았던 것이지요. ※당산제는 논농사를 짓던 시절 마을 주민들은 해마다 정월대보름에 올렸다. 주민들이 농사를 짓고 생활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이 당산나무에서 지신제, 천신제, 용신제 등 갖가지 당산제를 지내왔다. 보통 당산제는 마을의 조상신이나 수호신에게 지내는 제사로 이것은 마을의 평안과 풍요 등을 기원하기 위해서 지낸다. 당산제는 제사와 굿의 이중성격을 갖고 있는 점이 특이하며 축제 분위기로 부락민의 유대강화에 큰 역할을 한다. 풍암지구에서는 아파트 대단지가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2018-05-28 | NO.32
  • 풍영정의 시에 차운하다〔次風詠亭韻〕, 김언거(金彦琚)의 정자이다. - 고봉속집 제1권
    풍영정의 시에 차운하다〔次風詠亭韻〕, 김언거(金彦琚)의 정자이다. - 고봉속집 제1권 : 기대승(奇大升, 1527~1572).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ㆍ존재(存齋)이며, 본관은 행주(幸州)이고, 시호는 문헌(文憲)이다.산에 노는 나그네 쉬지 못하다가 / 遊山羈客不能休우연히 선창에 이르러 시름을 풀었노라 / 偶到仙滄一散愁바람은 숲 끝에 불어 먼 들에 보내고 / 風約林梢呈遠野안개는 물결에 걷혀 긴 모래톱 드러나네 / 烟開波浪露長洲풍진 속에 삼신산 막혀 한스러울 뿐이니 / 塵埃只恨三山隔동이 술에 한나절 머문들 어떠하리 / 樽酒何妨半日留사람의 일 유유해서 마치기 어려우니 / 人事悠悠難自了응당 와서 늦가을 완상하리라 / 故應來賞待高秋[주-D001] 김언거(金彦琚) :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계진(季珍), 호는 풍영(豊咏)이다. 1531년 식년시(式年試) 병과에 합격하여 사헌부 장령, 헌납, 금산 군수(錦山郡守), 연안 부사(延安府使) 등의 벼슬을 지냈다.
    2020-09-13 | NO.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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