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72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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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팽년-喜慶樓別呂尙夫
- 別夕須酌滿滿巵 이별하는 저녁 넘실넘실 술잔이 차기를 기다릴 뿐離亭莫吟勞勞詩 헤어지는 정자 누구도 쉽게 시를 짓지 못하네明朝京洛揮鞭去 내일 아침 한양으로 채찍을 휘두르며 떠나가면 樓外春楊只自垂 희경루 밖 봄버들은 절로 가지를 늘어뜨릴 뿐 -계음집(溪陰集) 권2조팽년(趙彭年, 1549-1612)의 자는 경로(景老)이며 호는 계음(溪陰)이다.
- 2018-07-17 | NO.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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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희일-景陽堰上 押呼 示梁長城
- 조희일(趙希逸, 1575~1638) ‘경양방죽 위에서 양장성에게 보이다(景陽堰上 押呼 示梁長城)’抱霜殷葉墮危枝 서리맞은 무성한 잎은 높은 가지에서 떨어지고地暖江南節較遲 땅이 따뜻한 강남에선 계절도 느릿느릿 가네莫恨白頭成潦倒 늙은 몸이 힘없다고 한탄치 마시게나且開靑眼向親知 친지를 생각하면 반가움에 두 눈이 번쩍이네棲鴉古堞煙光薄 옛 성첩 해질녘엔 갈가마귀 깃들이고回雁遙峯日脚垂 먼 봉우리로 해지니 기러기 돌아오네任使女兒攔道笑 길가의 여자아이들 웃더라도 상관마소 接罹斜影月明時 모자 비껴 쓴 것은 달이 밝기 때문일세 -죽음집(竹陰集) 권7
- 2018-07-12 | NO.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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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희일-次(風亭錦瑟差池約)
- 身如越鳥戀南枝 千里歸程恨太遲把酒詎能陶好興 論文猶足托心知風亭錦瑟差池約 月渚漁竿寂寞垂 從古有才要有用 不應虛老聖明時-죽음집(竹陰集) 권7조희일(趙希逸, 1575-1638)의 자는 이숙(怡叔)이며 호는 죽음(竹陰)이다.
- 2018-07-12 | NO.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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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족질(族姪) 광주목사(光州牧使) 태항(泰恒) 에게 주다- 서계집 권19 / 간독(簡牘)
- 족질(族姪) 광주목사(光州牧使) 태항(泰恒) 에게 주다- 서계집 권19 / 간독(簡牘)요구한 시장(詩章)은 그 당시에 미처 써 보내지 못한 한이 남았고, 지금에 이르러 인사의 변화가 한두 가지일 뿐만이 아니어서 함께 지었던 화숙(和叔 박세채(朴世采))과 사행(士行 박태상(朴泰尙)) 같은 이가 모두 이미 천고의 사람이 되고 말았는데 늙은 이 몸만 세상에 홀로 남았으니 슬프지 않겠는가. 보내온 뜻을 저버릴 수 없어 삼가 기록하여 보낸다. - 병자년(1696, 숙종22) 6월 18일 -[주-D001] 족질(族姪) 광주목사(光州牧使) : 박태항(朴泰恒, 1647~1737)을 이른다.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사심(士心)이다. 경기 관찰사, 형조 판서, 우참찬, 공조 판서, 대사헌 등의 벼슬을 지냈다.
- 2023-07-31 | NO.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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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存齋) 계우(契右)에게 답하여 올림 - 양 선생 왕복서 제1권
- 황(滉)은 머리를 조아려 두 번 절합니다.내가 지난 무오년(1558, 명종13)에 서울로 갔을 때에는 매우 낭패스러웠으나, 그래도 스스로 다행으로 여겼던 것은 우리 명언(明彦)을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남쪽으로 내려온 뒤로 종적을 숨기고 지내다 보니 다시 만날 수 있는 기약이 아득하여 그리운 마음 그지없던 차에 마침 자중(子中)이 전하는 공의 편지와 사단ㆍ칠정에 대한 설을 받고서야 기쁨을 느꼈습니다. 곧 이어 한 통의 편지를 써서 구구(區區)한 나의 정황(情況)을 대략 말하였고, 다시 사칠 문자(四七文字)에 의심스러운 곳이 있어 구차하게 공의 의견에 동의할 수도 없으므로 나의 소견을 대략 진술하여 자중에게 부탁해서 그대에게 전하여 나를 대신해 시정받도록 하였습니다. 대개 곧고 진실한 벗의 도움을 구하여 어리석음을 깨치려면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 일은 매우 경솔하였습니다.이윽고 생각해 보니 나의 설에 온당치 못한 곳이 한두 군데 있는 것을 깨닫고 고치려 하였으나 미처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금년 가을에 자중이 서울서 시골로 내려와 정추만(鄭秋巒)에게 보낸 공의 편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 속에 나의 설을 논박한 곳이 몇 군데 있는데, 전에 내가 온당치 못하다고 깨달았던 것도 그 속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편지 끝에 조목별로 변석(辯析)하여 회답하겠다고 하였으므로 공의 변석을 목마르게 기다린 지 오래였는데, 천 리 밖에 사람을 보내와서 가르쳐 주는 글을 받고 아울러 틀린 것을 바로잡은 글 한 책(冊)을 받아 보니, 논변(論辨)하고 증거를 댄 것이 지극히 자세하여 헤매는 사람에게 길을 가르쳐 주는 계려(計慮)가 더없이 지극했습니다. 그리고 이어 더운 여름이 가고 서늘한 가을이 오는 이때 소리(素履)가 청복(淸福)하고 신상(神相)이 매우 편안하다는 것을 알고는 말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재능이 졸렬하고 형편없는 나는 평생 병이 몸에서 떠나지 않아 벼슬에 나아가면 직책은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서 녹만 탐한다는 비난이 있고, 벼슬에서 물러나면 지체하고 도망하여 부끄럽게도 성은을 저버린다는 책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근래는 노쇠함이 더욱 심하여 현기증이 자주 나고 몸은 마치 마른 등나무 같으니 다시 사람 축에 끼일 수가 없습니다. 지난 세월은 이미 뒤쫓아 가 바로잡을 수 없거니와 오늘에 이르러서 비록 조문석가(朝聞夕可)의 소망이 있으나, 날마다 면려해주는 스승과 벗들도 없이 단지 서책 나부랭이 속에 종사할 줄만 아니 관규여측(管窺蠡測)과 같아 얻은 바가 온전한 것이 아니어서 조금씩 쌓은 것마저 곧 흩어져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명의(名義)를 말하면 바람이나 그림자처럼 실상이 없고 심적(心迹)을 준거(準據)해 보면 엇나가고 모순되어, 이와 같이 지극한 우리 벗님의 충고(忠告)와 선도를 받고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가슴에 담아 공의 고마운 뜻의 만분의 일도 따를 수 없게 될까 두렵습니다.그러나 후한 은혜를 입었으니 조목별로 회답하여 끝까지 가르쳐 주기를 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둔재인 내가 문자와 의리에 대하여 여러 날을 두고 정밀히 생각하지 않고는 깨달을 수가 없는데, 대략 공이 논한 바를 보건대 너무 광대하고 미묘하여 선악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등의 조항에 대하여 스스로 어그러졌다는 것을 깨달은 것 이외에는 끝도 없이 아득하여 요령을 터득할 수 없는 데다가 연일 빈객이 찾아왔으므로 사리를 궁구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또 공이 보낸 사람이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지금 우선 대충 써서 회답하고, 변목(辨目)은 남겨 두었다가 후일 유태호(柳太浩)의 인편을 기다려 불민함을 사죄하려 하니, 그래도 될는지요?우리 벗님은 이렇게 박학하고 조예가 깊어 쭉 뻗은 길에 준마를 풀어놓아 달리도록 한 격이니, 상정으로 말하면 나의 일이 이미 끝났다고 하여 스스로 대단하게 여기고 스스로 만족스럽게 여기기에 겨를이 없을 것인데, 공은 도리어 벼슬을 얻은 것에 대하여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고 뜻을 구하는 데에 분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과(考課)의 일이 마침 그때에 있었던 것은 하늘이 공을 완전한 사람으로 완성시켜 주려는 바였으니, 어쩌면 그리 다행스러운지요. 지난해 내 편지에 운운했던 것은 모두 공이 이미 홀로 터득한 바로서 나의 근심이나 생각으로는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공의 편지에는 부당하게 여기지 않고 매양 반복하여 말하였으니, 또 포용하지 않음이 없는 큰 도량과 비근(卑近)한 말도 살피지 않는 것이 없음을 볼 수 있어 매우 다행입니다.출처거취(出處去就)의 설에 대해 강후(康侯 호안국(胡安國) ) 스스로 마음속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설에 의심을 품고서 회암(晦庵 주자(朱子) )의 벗에게 묻는다는 것으로 질정한 것은 과연 공의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평소 회암의 정견(定見)은 만 길의 절벽처럼 우뚝하여 남들의 말로 인하여 진퇴하는 바가 조금도 없었으니, 또 이것을 몰라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편지에서 “세환(世患)을 겪었기 때문에 처지(處地)와 처시(處時)에 부득이한 경우가 있었다.”라고 한 나의 말은 기세가 꺾이고 위축되어 약해진 데서 나온 늙은이의 말에 가까우니, 기운이 강성하고 한창때인 공은 비루하게 여겨 배척할 것 같은데도 도리어 그 말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였습니다. 의리(義理)를 익히 강구하고 세상에 대처하는 것을 깊이 살피지 않았다면 어찌 이와 같이 할 수가 있겠습니까.병이 생긴 근원은 진실로 용렬한 의원이 알 수 있는 바가 아닌데 더구나 약을 지어 달라고 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나 일찍이 주자의 말을 보건대 “자기의 병을 알고서 제거하고자 한다면 다만 제거하고자 하는 그 마음만이 바로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이다.” 하였으니, 바라건대 공은 다른 사람에게 약을 묻지 말고 곧 이 주자의 말씀 속에서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힘써 치료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입에 쓴 약으로는 미칠 수 없는 신묘한 효험이 있을 것입니다.“학문이 지극하면 처세(處世)에 어려움이 없다.”는 한 조항에 대해서는 당시 나의 소견에는 실로 고명하신 공이 이렇게 자처하는 것에 의심이 없지 않았으나, 지금 공의 편지를 받고는 바야흐로 남의 말을 극진히 살펴보지 않은 나의 실수를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출(出)과 처(處) 양단(兩端)을 가졌다.”라고 한 이하는 공의 처한 바와 말한 바가 매우 훌륭했습니다. 공의 편지에 이른 바 “마치 촛불로 비추고 수(數)를 계산하며 거북으로 점을 친 것 같다.”는 말은 나에게 해당하는 말이 아니고 공에게 해당하는 말입니다. 공의 편지에 ‘무골충(無骨蟲)’이란 한마디 말은 참으로 한바탕 크게 웃을 만합니다. 그러나 이미 이 벌레가 되어서는 안 되지만 앞사람들의 전철(前轍)을 답습하는 것 또한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포정(庖丁)이 칼을 댈 곳이니, 가벼이 처신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자세히 살펴보건대 정 숙자(程叔子 정이(程頤) )와 주 부자(朱夫子)는 지극히 강대(剛大)한 명망으로 처세함에 있어 매사를 저토록 방심하여 지나치지 않아서 세상의 환란에 걸리지 않은 것은 다만 조금이라도 미안한 곳이 있으면 강력히 사퇴하여 자기의 뜻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신하가 사면할 수 있는 길이 막혀 영원히 폐해졌으므로 혹시라도 사면을 청하는 이가 있으면 허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사람들이 노하고 시기하여 갖은 핍박으로 다시는 사피(辭避)하지 못하게 하여 자기들과 파란(波瀾)을 함께하도록 하고야 맙니다. 이와 같으므로 선비가 한번 조정에 서게 되면 모두 낚시에 걸린 고기 꼴이 되어, 마음이 강직하고 악을 미워하는 자는 대부분 화를 면하지 못하고, 아부하여 따르기만 하고 나약한 자들은 서로 이끌고서 시비는 가리지 않고 아첨하는 태도만 지을 뿐이니, 이 두 가지가 모두 안타까운 일입니다. 더구나 관(棺) 뚜껑을 덮기 전에는 중도에 아무리 이 일을 후회해도 소용없고, 발인(發軔)하자마자 이 소문이 사방에 전파되는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덕이 높아지지 않았는데 서둘러 경륜을 맡는 것이 복속(覆餗)의 계제(階梯)이고, 성의가 미덥게 되지 않았는데 자신의 주장을 끊임없이 떠들어 대는 것은 몸을 욕되게 하는 길입니다. 전인(前人)들의 실패를 보건대 대부분이 이에서 연유하였으니, 이 학문을 전공하고자 한다면 숨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나의 소견이 우연히 이에 미쳤기 때문에 지난번 편지에 발설하였으니, 이는 대개 불로 뛰어드는 나방을 사람이 본받아서는 안 되고, 담장 밑에 서서 압사(壓死)하는 화를 취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에서였을 뿐입니다.질병이 나처럼 심하지 않고 부득이 세상에 나아간 사람이라면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직분(職分)과 책무(責務)를 다하는 데 각각 당연한 바가 있고 웅장(熊掌)과 어(魚)를 취하고 버리는 데 분명한 정칙(定則)이 있으니, 그렇다면 이른바 “요사(夭死)와 장수(長壽)에 의심을 하지 않고 몸을 닦아 죽음을 기다린다.”는 면에 있어서 세상에 나아가고 나아가지 않음이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공의 편지에 “정성을 다하여 천명(天命)을 따르겠다.”는 말이 매우 좋으니, 요컨대 종래 버림받기를 바라던 마음으로 이 한마디 말을 굳게 지켜 시종 변하지 않는다면 거의 배운 바를 저버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공이 부디 노력하여 우리 무리의 기대하는 마음을 위로해 주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김하서(金河西)는 반궁(泮宮 성균관(成均館) )과 옥당(玉堂)에서 나와 함께 지낸 적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몸은 세상 속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세상 밖을 표류했습니다. 그가 처음 들어간 곳이 대체로 노장(老莊)에 있었기 때문에 중년에 자못 시와 술로 몸가짐을 무너뜨린 것을 애석히 여겼었습니다. 그런데 듣자니 그가 만년에 이 학에 뜻을 두었다 하고, 근래 바야흐로 그의 학을 논한 문자(文字)를 보건대 그의 식견이 매우 정밀했습니다. 그가 한거하는 가운데 터득한 것이 이와 같음을 생각하고 매우 가상하게 여겼는데 갑자기 고인(故人)이 되었다는 소식이 오니 비통함이 보통 정도가 아닙니다. 이제 그 아들에게 위로하는 글을 보내니 전달해 주기 바랍니다.별지(別紙 고봉이 보낸 소첩자(小貼子) )에서 부탁한 전일의 편지 세 통을 아이들에게 등사시켜 보냅니다. 그리고 대자(大字)로 ‘존재(存齋)’ 두 글자를 써 달라는 것과 백지(白紙)와 당전(唐牋)에 글을 써서 보내 달라는 요청을 감히 경솔히 거절할 수가 없어 우선 받아 두지마는 다만 정력이 너무도 모자라서 평상시에 글씨 몇 폭을 쓰고 나면 피곤함을 느끼는 것이 날로 더해 가니, 어찌 이런 일을 억지로 한다고 해서 뜻대로 되겠습니까. 비록 억지로 쓴다 하더라도 공이 감상할 만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명기(銘記)를 짓는 일이겠습니까. 이 일들은 모두 겨울쯤에 유태호 집안의 인편이 왕래할 때를 탐문하여서 그 편에 보낼까 하는데 말대로 될는지 여부는 모르겠습니다.유태호의 집이 이곳에서 그리 가깝지 않으니, 태호가 천 리 길을 온다 하더라도 천 리의 걸음에 어찌 쉽사리 나를 방문할 수 있겠습니까. 그를 만날 것을 기필하지 못하므로 그 집안 인편에 부치는 것이 서울에서 내려오는 벗에게 부탁하여 그대에게 전하게 하는 것보다 낫겠습니다. 벗에게 전하게 하면 소문이 널리 퍼질 혐의가 있지만 태호의 인편에 부치는 것은 그런 혐의가 없습니다. 끝으로 사문(斯文)을 위하여 천만 보중(保重)하기를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삼가 절하고 이 글을 존재(存齋) 현계(賢契) 좌하(座下)에게 올립니다.가정(嘉靖) 39년 경신년(1560) 9월 1일에 병인(病人) 진성(眞城) 이황은 눈이 어두워 함부로 초했으니 송구합니다.이일재(李一齋)에 대하여 이름을 들은 지는 오래되었으나 그의 학문이 어떠한지는 몰랐는데, 이번에 태극(太極)을 논하면서 서로 더불어 왕복한 설을 보내 준 것을 받았습니다. 미처 겨를이 없어 자세히 참고해 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 대략은 알 수 있었으니 매우 다행입니다. 그의 학설의 잘잘못은 내가 미칠 바가 아니나, 후일을 기다려 내가 의심되는 바를 진헌(進獻)할까 합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미 옛사람이 이른 바 “자기가 있는 줄만 알고 다른 사람이 있는 줄은 모른다.”는 병통이 있음을 알겠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작은 병통이 아닐 듯한데 어쩌면 좋겠습니까. 그가 한두 군데의 글뜻을 잘못 본 것은 논할 것도 없고, 오직 이 병통을 먼저 제거한 뒤에야 더불어 이 학문을 논할 수 있을 것입니다.이런 말을 하는 내가 참람하고 경솔합니다만 공이 일재의 병통이 있는 곳을 찌르는 데는 언뜻 보고도 하나하나 정확하면서, 자신에게도 이러한 병통이 약간 있음을 면하지 못한 듯하니 어째서입니까? 나 역시 그러한 속에 빠져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공의 설을 오인(誤認)함이 이와 같은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깊이 생각하여 뉘우칠 것입니다.왕원택(王元澤)은 어떤 사람이고, 그 말이 어느 책에 나오며, 그것이 무슨 뜻인지 뒤에 분명히 가르쳐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담암(澹庵)이 실절(失節)한 일은 전배(前輩)들의 탄식에 자주 나타났습니다. 주자의 〈자경시(自警詩)〉에 이른 바 ‘탐생좌두(貪生莝豆)’는 이 몸 역시 그 출처를 알 수 없어 매양 마음이 매우 심란하였습니다. 그러나 “뻔뻔스레 다시 와서 준걸 따라 노니네.〔靦面重來躡俊遊〕”의 ‘섭(躡)’ 자로 보건대 다른 사람의 일로서 담암이 그 일을 따라감을 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닌지 또한 알 수 없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후일을 기다립니다.황은 또 복계(覆啓)합니다.[주-D001] 소리(素履) : 안분수기(安分修己)하는 선비의 생활을 가리킨다.[주-D002] 신상(神相) : 다른 사람의 몸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주-D003] 조문석가(朝聞夕可) : 《논어》 〈이인(里仁)〉에 나오는 말로,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朝聞道 夕死可矣〕”를 줄인 말이다.[주-D004] 관규여측(管窺蠡測) : 대통 구멍으로 하늘을 보고 전복껍질로 바닷물의 양을 헤아린다는 말로, 식견이 좁음을 의미한다.[주-D005] 유태호(柳太浩) : 유경심(柳景深 : 1516~1571)을 말한다. 태호는 자이고, 호는 구촌(龜村)이다. 1544년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정자(正字), 수찬(修撰)을 거쳐 광주 목사(光州牧使)가 되었고, 뒤에 대사헌을 거쳐 평안도 관찰사로 재직하다가 죽었다.[주-D006] 포정(庖丁)이……곳 : 포정은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에 나오는 인물로, 능수능란하게 소를 잘 잡는 백정이다. 여기서 이 말은 아주 중요한 곳이라는 뜻이다.[주-D007] 복속(覆餗) : 《주역》 〈정괘(鼎卦) 구사(九四)〉에 “구사는 솥의 발이 부러져서 공(公)에게 바칠 음식을 엎었으니 그 얼굴이 무안하여 붉어진 것이라 흉(凶)하다.” 한 것에서 온 말로, 재능 없이 분수에 넘치는 자리에 앉아 직무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주-D008] 웅장(熊掌)과……데 : 생선을 생(生)에, 웅장을 의(義)에 비유한 말로, 생과 의를 겸하여 얻을 수 없다면 생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는 뜻이다. 《孟子 告子上》
- 2022-03-04 | NO.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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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역각시
- 서구 매월동 회산懷山마을 출생으로 선조가 ‘호남의 충의신’이라 극찬했던 임진왜란 때의 공신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1526~1592) 선생에게는 영특한 따님이 있었어요. 어려서부터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달하고 동물 소리까지 알아듣는, 총명한 재주를 지녔지요. 그 따님의 나이 과년(여자 나이 15.16세 때를 이름)이 되어 전북 남원의 명문가로 이조판서를 지낸 노정盧楨(1518-1578)의 아들과 혼례를 올렸지요.결혼 첫날밤에 신랑과 함께 자리에 누워 있다가 방구들에 숨어있던 쥐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듣고 웃은 것이 화근이 돼 시집에서 퇴박을 맞고 말았습니다. 식혜를 놓고 쥐들끼리 나누는 대화였는데 그게 이렇게까지 일이 커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요."쥐 한 마리가 식혜항아리에서 단맛이 나 그것을 먹고 싶은데 항아리가 미끄러워서 올라가지 못한다고 말하자 다른 쥐가 항아리 밑의 흙을 파면 결국 항아리가 엎어질 것이고 그 때 먹으면 되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이었어요." 이처럼 쥐의 이야기를 들은 새 신부가 잠자리에서 웃자 옛 남자를 잊지 못해 웃는 것이라면서 시집에서 퇴박을 맞게 된 것이죠. 엉뚱한 트집이었지만 그때 당시의 풍습으로 갓 시집 온 양가집 규수가 신혼 첫날밤에 웃는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어요. 아무리 변명을 해도 소용이 없었죠. 결국 그녀는 결혼 첫날밤 이후 친가에서 보내게 되었지요. 남편과의 접촉이 일체 끊어진 상태에서 그 억울한 이야기를 씻을 길도 없었습니다.그로부터 몇 년의 세월이 흘러간 뒤의 일이었습니다. 나뭇잎이 짙은 초록빛으로 물든 초여름 어느 날, 시아버지 노정공盧禎公이 불쑥 이곳 사돈댁을 찾아왔어요. 사돈 박 회재 선생과는 전부터 친숙한 사이로 자식들 간의 불합不合은 그렇다 해도 옛 친구의 두터운 정리情理까지를 저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죠. 노공盧公은 사돈댁에 들어는 길에 집 앞의 큰나무에 제비집이 있고, 그 안에는 아직 제대로 거동하지 못하는 제비새끼가 있는 것을 보았지요. 노공은 정말로 며느리가 쥐들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인지 시험해보기 위해 일부러 제비 새끼 한 마리를 도포 속에 넣고 집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노공은 자부子婦의 인사를 받고 차려 내온 술잔을 손에 들면서 사돈 박공에게 사과 겸 이렇게 말을 꺼내는 것이었어요."영조英祖 임금께서는 아드님 장묵세자(사도세자思悼世子)를 뒤주 속에 가뒀다지만 우리야 어디…"하고 씁쓸한 얼굴로 말끝을 흐리는 거예요. 자기 말을 듣지 않고 아내를 퇴박한 아들을 탓하고 자신의 무위無爲를 자책하는 말이기도 했지요. 박공朴公은 그저 쓸쓸히 웃을 뿐 별다른 말이 없자 방안 분위기는 금방 무겁고 침울해졌어요. 그때 대문 옆의 큰 나무에 어미 제비 한 마리가 날개 짓을 하면서 우는 것이었어요. 노공은 이 때 며느리를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아니, 대문 옆 저 나무의 제비는 이 댁에 손님이 왔는데도 왜 저렇게 슬피 우는지 모르겠구나."다소곳이 꿇어앉아 술시중을 들고 있던 자부子婦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태연한 말투로 술을 따르면서 대답을 했습니다."아버님 , 어서 약주 드셔요. 저 어미 제비가 저리도 슬프게 우는 이유는 내 새끼가 이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고기로도, 가죽으로도, 털로도 쓰지 못하니 돌려달라고 하네요. 아버님 도포 속에 있는 제비새끼를 놓아 주십시오."과연 어미제비 한 마리가 이쪽을 보고 슬픈 목소리로 재잘거리고 있었습니다. 노공은 조용히 일어서서 도포 속에 넣고 온 제비새끼를 꺼내어 마룻바닥에 놓아주었어요. 그러자 어미제비는 재빨리 그것을 입에 물고 날아갔습니다. 그래서 박광옥 선생 따님에 대한 오해는 완전히 풀리고 신원伸寃은 되었지만 노씨 문중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때가 늦어버렸어요. 그녀는 일생을 친정에서 지내면서 아버지를 도와 막대한 가산을 이루게 하고, 그 재산으로 임진왜란 때 군량미를 제공했으며 개금산에 노적가리를 쌓아 군량미가 많은 것처럼 보이게 하는 등 많은 창의倡義를 도와 큰 공훈을 세우게 했습니다.그녀는 사서는 물론, 주역까지를 통달하여 만물을 꿰뚫어보고 심지어 짐승의 말소리까지를 알아듣는 재능을 추앙하여 세칭 ‘주역각시’라는 칭호로서 지금도 널리 인구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더욱이 임종할 때 한 유언 내용은 예지력까지 보여줘 그의 영특함이 죽는 순간까지도 발현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줘요. "‘나는 끝내 친정에서 생을 마치고 이곳에 묻히지만 앞으로 세월이 흘러 시집이 7대손을 지나면 나를 이장해 갈 것이니 그 때까지만 잘 부탁한다’고 말하고는 눈을 감았지요. 그런데 이렇게 묘를 쓴 후 200여년이 지나 그 말대로 노씨 문중의 7대손이 이장해 가 지금은 남원 땅 노씨 문중 선산에 묻히게 되었어요. 후대까지를 내다보면서 묏자리를 썼는데 유언처럼 후손들이 이장해 간 것이죠. 그의 시신도 거의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고 해서 더욱 놀라게 했다지요."그때의 묏자리는 현재 순천 박씨의 묘로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모부인 수연가母夫人壽宴歌日中(일중) 金(금)가마괴 가지 말고 내 말 들어너는 反哺鳥(반포조)라 鳥中(조중)의 曾參(증삼)이니오날은 날을 위하야 長在中天(장재중천) 하얏고자 - 노정 盧禎(1518-1578), <병와가곡집>(甁窩歌曲集)반포조 = 까마귀. 까마귀는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주어 효성을 다한다고 한다.조중의 증삼 = 새 가운데 효성이 지극한 새. 증삼(증자)이 효자였기에 한 말이다.장재중천 = 하늘에 오래 머물다. * 이 시조는 작가가 연로하신 어머니의 생신잔치에서 어머니의 만수무강을 빌면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노정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형조참의, 도승지 등의 벼슬을 지냈다. 호는 옥계玉溪). 1537년 생원시에 급제한 뒤 지례현감이 되었는데,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에 이름을 올렸다. 뒤에 예조판서, 이조판서에 내직을 받았으나 병 때문에 나아가지 못했다. 어머니께 지극한 효도를 해서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옥계집>玉溪集이 있다.
- 2018-05-28 | NO.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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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 조 학사가 광주로 부임하자 내가 가서 방문하였다- 제호집
- 죽음 조 학사가 광주로 부임하자 내가 가서 방문하였다. 동각에서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나누는데 곁에 문자를 아는 이가 있어서 문득 운을 부르게 하였다. 각자 지필을 잡고 바람같이 단율을 지었다 20운 〔竹陰趙學士出守光州 余往訪 翦燭東閣 旁有識字者 輒令呼韻 各操紙筆 走成短律 二十韻〕 - 제호집 제6권 / 시(詩)○오언배율(五言排律) : 양경우(梁慶遇, 1568~1638)노년을 궁벽한 곳 누우니 / 殘年臥荒僻점차 속연도 작아지는 듯 / 漸覺俗緣微달빛 물가에 시와 낚시요 / 月渚吟垂釣운림에 병든 몸 채미하네 / 雲林疾采薇간록을 싫어함이 아니요 / 誰言厭干世잠시 빛을 감추려 할 뿐 / 暫擬學藏輝검갑은 빈 벽에 걸렸고 / 釰匣懸空壁서등은 밤의 휘장 비치네 / 書燈照夜幃성군이 자극에 임하시니 / 聖明臨紫極현준이 궁궐에서 모시네 / 賢俊侍彤闈옥백으로 유일을 부르고 / 玉帛徵遺逸경륜 지닌 선비 방문하네 / 經綸訪布韋그대가 받은 은혜 작으랴 / 恩榮君豈後관면이 줄지어 둘렀어라 / 冠冕列相圍봉소에서 자주 문채 펼쳤고 / 鳳沼頻摛藻이계에선 그릇됨 규찰했네 / 螭階亘糾違시편은 비단무늬 아롱지고 / 詩篇錦生纈담소하면 옥설이 나부끼네 / 談屑玉成霏묵수로 문득 좌천됐으니 / 墨綬俄淪落청운 길에 시비가 있었도다 / 靑雲有是非영재에 가을이 저물어가니 / 鈴齋秋政晩관아 나뭇잎이 처음 날리네 / 官樹葉初飛공무 마치면 발을 드리우고 / 務屛簾垂地거문고 그치면 달이 찾누나 / 琴休月入扉나라의 병폐 인해 근심하고 / 憂應緣國病백성 살찌우고자 수척해졌네 / 瘦亦爲民肥교분 맺어 지우가 되었으나 / 托契蒙知遇재주가 적으니 부끄러워라 / 憐才愧薄菲매번 좋은 시구 읊어주며 / 每將佳句誦뭇사람의 비난 덮으려 했네 / 要壓衆人誹걸상 내려 예우가 깊었고 / 下榻深叨禮단에 오르매 위엄이 두려웠네 / 登壇更怯威세 번 잘려 옥을 안고 울었고 / 玉因三刖泣사지라 하여 황금 물리쳤네 / 金爲四知揮선정을 백성이 모두 칭송하니 / 美政民咸頌사랑하는 정 세상에 드물도다 / 情親世亦稀집을 옮겨 함께 하고자 하나 / 移家欲相就이곳을 두고 어디로 가리요 / 捨此復安歸한잔 술의 이별이 안타까워 / 且惜尊前別헤어질 제 눈물이 옷을 적시네 / 臨分涕滿衣[주-D001] 봉소(鳳沼) : 원래는 당(唐)나라 중서성(中書省)에 있는 연못 봉황지(鳳凰池)를 말한다. 여기에서는 궁궐 안에 있는 연못을 가리킨다.[주-D002] 이계(螭階) : 궁전의 섬돌로서 입구에 뿔 없는 용의 형상을 조각한 것이다.[주-D003] 묵수(墨綬) : 5품관이 차는 검은 인끈인데 지방관을 주로 가리킨다.[주-D004] 걸상 내려 : 후한(後漢)의 남창 태수(南昌太守) 진번(陳蕃)이 그 고을의 높은 선비 서치(徐穉)를 특별히 우대하여 따로 걸상 하나를 걸어 두었다가 서치가 오면 혼자 앉게 하였다고 한다. 《後漢書 徐穉列傳》[주-D005] 옥을 안고 울었고 : 춘추 시대 초(楚)나라 변화(卞和)가 형산(荊山)에서 박옥(璞玉)을 얻어 왕에게 바쳤다. 그러나 옥공(玉工)이 쓸모없는 돌이라 하여 두 발이 잘리고 말았다. 그 후 문왕(文王)이 즉위하자 변화는 형산 아래서 박옥을 안고 사흘을 울었다. 문왕이 묻자, “나는 발이 잘린 것을 슬퍼하는 게 아니라 옥을 돌이라 하기 때문에 우는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옥공(玉工)을 시켜 박옥을 다듬게 하니 티 한 점 없는 큰 옥이 나왔다 한다. 이것이 화씨의 벽이다. 《韓非子》[주-D006] 황금 물리쳤네 : 후한(後漢) 때의 현인인 양진(楊震)은 학문이 높고 청렴하였다. 자기가 천거했던 창읍(昌邑) 수령 왕밀(王密)이 밤중에 금(金) 10근을 바치자, 말하기를, “나는 그대를 알아주었는데, 그대가 나를 몰라주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왕밀이 말하기를, “저문 밤이라, 아는 이가 없습니다.〔暮夜無知者〕” 하자, 양진이 말하기를,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고 내가 알고 그대가 아는데, 어찌 아는 이가 없다고 하는가.〔天知神知我知子知, 何謂無知?〕” 하였다. 《後漢書 卷54 楊震列傳》
- 2020-12-31 | NO.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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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공원 비행장 동굴
- 서구 화정동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 뒤편중앙공원에 동굴이 있다는 것을 이 일대 거주하는 주민들을 제외하면 아는 시민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설령 동굴의 존재를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 용도에 대해서 정확하게 인식하는 주민들은 더더욱 많지 않지요. 이 일대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과 광주광역시 청소년수련원, 성진초등학교 등 어린이와 청소년 시설이 집중돼 있는 만큼 교육공간으로 활용하면 그 가치가 배가될 수 있겠지만 굳게 쇠창살로 닫힌 철문이 현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앞을 와봤거나 지나가본 시민이라면 자연동굴이 아니라는 것쯤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밖에서 확인한 결과 시멘트로 마무리된 동굴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동굴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는데 동굴이 조성된 때는 일제강점기 말로 추정됩니다.이 일대에는 3개의 동굴이 있는데 세 번째 안쪽에 있는 동굴은 출구가 보이는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세 개의 동굴이 모두 직선형이라는 점도 특이합니다. 아직까지 일본군 유적지 동굴은 반원형이나 그를 변형한 형태가 많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크기는 80m와 70m, 50m 콘크리트 아치형 동굴로 광주 서구 상무지구에 일제가 조성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는 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의 ‘본토결전’에 대비한 과정에서 광주비행장의 부속시설물(유류저장소)로 조성된 것으로 보입니다.광주시교육청이 이 동굴들을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시설과 연계, 일제강점기 역사를 이해하는 교육 공간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일고 있으나 예산 부진으로 실제화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후문입니다. 일제강점기 군사시설이 주로 제주도 해안가 등에 남아있지만 이처럼 내륙에 대거 집중돼 있는 경우는 흔치 않아 보존가치가 높은 것으로 풀이됩니다. 다만 이 동굴들 앞에 안내이정표 하나 세워 시민이나 주민들에게 정확하게 역사적 사실을 알릴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정표가 없다보니 동굴의 내용 파악이 어려워서 사람들마다 일제강점기 때 방공호였나, 김장김치 보관을 위한 동굴이었나, 한국전쟁 때 피난 동굴이었나 등등 별별 이야기가 나올 정도입니다. *중앙공원 일제강점기 동굴은 당시 대표적 시설물인 만큼 이에 대한 정밀 검증을 통한 문화유적으로 추진하는 방안도 필요해 보인다. 특히 일제강점기 때의 폭탄고의 경우 광주시 서구 벽진동과 마륵동의 경계지점에 있는 사월산에 있으며 몇 개가 있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최소 1개 이상의 동굴이 있기 때문에 여기도 정밀한 조사가 요구된다. 2014년 8월 광주시교육청에서 이 동굴을 역사교육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한 시민토론회를 연 바 있다.
- 2018-05-28 | NO.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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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화척 어제시에 화답하여 〔春仲朔日 蒙賜御製詩及中和尺 承命賡韻〕- 서형수
- 명고전집 제2권 / 시(詩)중화척 어제시에 화답하여 〔春仲朔日 蒙賜御製詩及中和尺 承命賡韻〕
- 2023-12-04 | NO.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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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 시중 정공화상 찬, 병서 (贈侍中鄭公畵像贊, 幷序 ) - 동문선 제51권
- 증 시중 정공화상 찬, 병서 (贈侍中鄭公畵像贊, 幷序 ) - 동문선 제51권 : 이색(李穡)수문하시중 광평부원군(守門下侍中廣平府院君) 이공(李公)이 임인(壬寅)년에 여러 장군과 함께 서울을 수복했는데, 그 총병관(總兵官)은 곧 찬성사상의 응양군상호군(贊成事商議鷹揚軍上護軍) 정세운(鄭世雲)이었다. 원수(元帥) 세 사람은 총병의 공적이 자기네보다 위에 올라감을 시기하여 부하를 시켜서 끄집어내어 그를 해쳤다. 세 원수는 비록 죄를 받고 죽었으나 세상에서 정공을 슬퍼하는 마음은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았다. 광평공은 생각하기를 “정공의 이름은 영원히 전하고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후세에서 알지 못할 터이니 어찌 슬프지 아니하랴.” 하였다. 또 이르기를, “능연각(凌烟閣)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옛날 제도이긴 하지만 지금에는 실시되고 있지 않으니 그의 화상을 그려서 철을 따라 제사를 드리게 하는 편이 낫겠다.” 하였다. 이미 완성되매, 한산 이색(韓山李穡)에게 청하여 찬을 지으라 하였다. 색이 광평군과는 함께 승선(承宣)으로 있으면서 공민왕을 섬겼다. 그러므로 정공이 비상한 인물임을 알았다.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어 비위를 맞추려한 적이 없었고 뜻을 확고히 가져서 조금도 변한 적이 없었다. 신축(辛丑)년에 남쪽 복주(福州)로 옮겨갈 때에 임금이나 신하가 북쪽을 염려하는 마음이야 다시 말한들 무엇하리오, 정공은 비장히 가기를 자청하였다. 열흘남짓 한달이내에 나라가 다시 안정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었겠는가. 옛적 현종(顯宗)때에 강시중 한찬(姜侍中邯贊)이 경술(庚戌)년에 남쪽으로 행차 하실 것을 청하고 무오(戊午)년에는 북방에서 적을 막아냈으니, 그 공적이 탁월하였다. 근세에 금산 김씨(金山金氏)가 영토를 침범할 적에 조충(趙沖)과 김취려(金就礪)의 공적이 컸고, 기해(己亥)년에 모적(毛賊)이 서경(西京)을 침범할 적에 총병(總兵) 이승경(李承慶)의 힘이 컸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영토 안에서 일어난 일이었고 강시중(姜侍中)처럼 두가지의 계책이 한 몸에서 일어난 것과 비교될 것이 아니었다. 현종(顯宗)은 금성(錦城)까지 가셨고 공민왕은 복주(福州)까지 가셨으니, 아아 참아 말할 수 있는가. 정공은 남쪽으로 행차하기를 결정할 때에 참여하였고 또 능히 모든 군대를 통솔하고 여러 적들을 쫓아 내어 홀로 큰 공을 세웠으니 그 위대함은 강공과 맞세울만 하였다. 그러나 강공은 개선(凱旋)할 때에 현종이 친이 교외에까지 나아가서 맞이하였고 시를 지어주어 그를 표창했으니, 그런즉 곧 정공이 불행을 당한 것은 공민왕으로서의 슬픔이었다. 하늘이여 이것이 무슨 까닭이었는가. 아아, 슬프다. 아아, 슬프다. 뒷날 정공의 화상 앞에 경례를 올리는 사람은 이 화상이 광평공(廣平公)에 의하여 만들어진 줄 알터이니 반드시 천년 뒤에라도 경의를 표하면서 이르기를, “정공이 진실로 공이 있었다. 그러나 광평공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정공의 얼굴을 보게 되었으랴.”할 터인즉 광평공이 선을 좋아한 실효가 더욱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것을 길게 읊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정씨는 광주 장택현(光州 長澤縣) 출신이며 공민왕 11년의 공신이다. 아우는 세문(世文)이며 아들은 없다. 찬에 이르기를, “아아, 정공이여, 겉으로는 소박하며 안은 확고하였다. 공민왕의 공신으로 병신(丙申)년에 출발하였다. 적(賊)이 중국에서 두루 돌아다니다가 우리 영토에까지 침입하였다. 우리는 그들의 무력을 피하였는데 공은 마침내 적을 내쫓았다. 이미 그들을 무찔렀는데 부하가 공을 해쳐버렸네. 해친 자들도 다 없어졌으니 아아, 어쩌면 그렇게 생각이 없었던가, 강공(姜公)은 옛날 일이지만 공의 위대함, 그와 맞서리로다. 우리 광평군 아니었으면 누가 그리며 누가 기록했으랴. 송악산(松嶽山) 푸르른데 우리 명당(明堂) 웅장할사, 정공의 영향은 영원하게 전하리라.”
- 2020-09-15 | NO.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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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 이조참판 행 사헌부장령 정공(鄭公)의 신도비명 (정이주)
- 간이집 제2권 /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공의 휘(諱)는 이주(以周)요, 자(字)는 방무(邦武)요, 별명(別名)은 유성(由盛)이요, 호는 성재(醒齋)이다.정씨는 광주(光州)에서 나와 나라의 망족(望族)이 되었는데, 시조(始祖)와 멀어지면서 파(派)가 더욱 나누어졌으니, 가령 공 같은 분도 스스로 파를 나누어 새로 족보를 만들 만한 분이었다고 하겠다.공의 7세조(世祖)인 정신호(鄭臣扈)는 고려의 전직(殿直)이었고, 6대조인 정윤부(鄭允孚)는 본조(本朝)의 개성 윤(開城尹)이었고, 5대조인 정귀진(鄭龜晉)은 강원도 관찰사로서 그의 문장이 세상에 널리 유행하였고, 고조고(高祖考)인 휘(諱) 지하(之夏)는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이었고, 증조고(曾祖考)인 휘 찬우(纘禹)는 청도 군수(淸道郡守)로서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을 증직받았고, 조고(祖考)인 휘 순인(純仁)은 아산 현감(牙山縣監)으로서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를 증직받았다.공의 고(考)인 휘 경(褧)은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로서 우뚝 솟구쳐 수립한 바가 있었으므로 동료들로부터 중한 기대를 받았는데, 일찌감치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서 강호(江湖) 사이에 노닐기만 할 뿐 벼슬길로 나설 뜻이 전혀 없었다. 이에 외구(外舅)인 의정(議政) 유순정(柳順汀)과 표형(表兄)인 의정 윤개(尹漑)가 번갈아 가며 천거하여 금오랑(金吾郞)에 의망(擬望)하자, 마음을 이해해 주지 못한다고 깊이 유감으로 생각하면서 집에 찾아가도 만나 주지 않기까지 하였다. 뒤에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를 증직받았다.공의 비(妣)인 평강 채씨(平康蔡氏)는 숙부인(淑夫人)에 추증되었는데, 고려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인 채연(蔡淵)의 후예요, 성균관 진사 채순(蔡恂)의 딸로서, 가정(嘉靖) 경인년(1530, 중종25) 1월에 공을 낳았다.공은 보통 사람보다 훨씬 총명한 데다가 학문에 힘을 기울여서 일찍부터 문명(文名)을 드날렸다. 그런데 과거 시험을 통과하는 것만은 유독 뒤늦어서, 무오년(1558, 명종13)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생원(生員)과 진사(進士) 시험에 입격하였다. 그러다가 을축년(1565, 명종20) 연간에 태학생(太學生)들이 요승(妖僧) 보우(普雨)의 죄를 청하는 글을 올리게 되었는데, 대부분이 공의 손으로 작성된 것이었고 또 마침내 윤허를 얻게 된 상소문 역시 공이 작성한 것이었으므로, 임금의 뜻을 되돌린 공을 모두 공에게 돌렸었다.무진년(1568, 선조1)의 문과(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였다. 의영고 직장(義盈庫直長 종7품의 관직임)을 제수받고 몇 개월 있다가 추천을 통해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 정9품의 관직임)에 보임(補任)되었다. 그러나 공은 이미 7품의 관직에 조용(調用)되었던 만큼 이는 원래 바람직한 인사 행정이 못 된다고 하고는 구태여 사국(史局)에 비루하게 들어갈 필요가 없다면서 거부하였다. 이런 행동을 보인 경우는 국조(國朝) 이래 단 두 번밖에 없었는데, 공이 바로 그 하나에 속한다.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에 전직(轉職)되었다가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옮겨진 뒤 공조ㆍ형조ㆍ예조의 좌랑(佐郞)을 역임하였다. 그러고 나서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경사(京師)에 다녀왔는데, 돌아올 때의 짐보따리에 한 자루의 향(香)이나 한 권의 책도 구입해 온 것이 전혀 없었다. 이에 어떤 이가 말하기를, “서적 같은 것이야 사 가지고 온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우리나라에 있는 서적도 제대로 다 읽지를 못하고 있다.” 하였다. 그리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오던 날, 행장(行裝)에 아직 남아 있던 물건들을 죄다 꺼내어 아랫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말하기를, “처음에 내가 열읍(列邑)에서 주는 예물(禮物)을 사양하지 않았던 것은 만리 여행길에 뜻밖에 쓸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무사히 돌아오게 되었으니, 그것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임명되었는데, 쟁신(爭臣)의 기풍이 꽤나 돋보였다. 당시에 임금의 외척(外戚) 한 사람이 등과(登科)하였으므로 바야흐로 상이 친림하여 합격자 발표를 하고 호명을 하였는데, 대소(大小)의 신료(臣僚)들이 서로 다투어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인사하느라 반열(班列)이 텅 빌 지경이 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공만은 홀로 단정하게 서서 미동도 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미움을 받아 평안도 도사(平安道都事)로 나갔다가 얼마 뒤에 소명(召命)을 받고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되었다.그 당시 조정 안에는 붕당(朋黨)의 폐해가 빚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전조(銓曹)의 낭관(郞官) 한 사람이 공을 끌어다 자기들의 세력을 중하게 할 목적으로 세 차례나 공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공은 답례로나마 한 번도 감사의 뜻을 표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뜻을 보여 주었다.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으로 있다가 바뀌어 형조ㆍ예조ㆍ호조의 정랑(正郞)이 되었다. 그때에 국가에서 대대적으로 군적(軍籍)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영남(嶺南) 지방의 경우는 평소 토호(土豪)의 소굴로 소문난 곳이라서 장정(壯丁)을 수괄(收括)하는 데에 어려움이 많았으므로, 공을 특별히 그곳의 경차관(敬差官)으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그런데 과연 공이 내려가서 유지(有旨)에 걸맞게 일을 처리하였으므로, 강포하고 교활한 토호들이 납작 엎드려 복종한 결과 은폐되거나 누락되는 폐단이 결코 없게 되었다.당시에 본도(本道)의 사인(士人) 한 사람이 바야흐로 간관(諫官)의 신분이 되어 돌아와서는 공을 일부러 찾아보았는데, 이는 자기의 집을 보호해 주기를 바라는 뜻에서였다. 이에 공이 면전에서 꾸짖어 말하기를, “그대처럼 임금님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사람까지도 이렇게 할 수가 있단 말인가.” 하니, 그 사람이 안색이 변하면서 앉은 자리에서 자기 집의 양정(良丁) 몇 사람을 써 주고 떠나갔다. 그러고는 마침내 마음속으로 원한을 품고는 은밀히 대관(臺官)을 사주하여 모함하는 말을 얽어서 탄핵하게 하였다.이에 상이 연석(筵席)에서 대신(大臣) 노수신(盧守愼)에게 하문하기를, “정모(鄭某)가 강직하다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바인데, 지금 이처럼 논핵(論劾)을 받기까지 하고 있다. 경은 남쪽 지방 사람이니, 혹시라도 이에 대해서 들은 말이 있는가?” 하였는데, 노수신이 대답하기를, “신은 그가 나랏일에 마음을 다하여 한정(閑丁)을 많이 얻었다는 말만 들었을 뿐, 다른 것은 들은 바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그럴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윤허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뒤에 공이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오면서 군적을 정리하는 일이 결국 두서(頭緖)를 잃게 되고 말았으므로, 식자들이 애석하게 여기며 탄식하였다.얼마 있다가 또 순무어사(巡撫御史)로 본도에 나가게 되었다. 그러자 장리(將吏)들이 소문만 듣고서도 두려움에 몸을 떨었으며, 토호 가운데에는 법제를 어기고 지은 집을 자진 철거하는 자까지 나오게 되었다.조정에 들어와서 사간원 헌납에 임명되었다. 그때 마침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이 대립하는 가운데 조정이 불안해질 조짐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었으므로, 공이 대사간(大司諫) 정지연(鄭芝衍) 및 부제학(副提學) 이이(李珥)와 함께 의논을 통한 뒤에, 두 사람 모두 외직(外職)으로 내보낼 것을 청하였으니, 이는 어디까지나 분위기를 진정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나 그사이에 격렬하게 논하며 한쪽 편을 들어 공격하는 자가 나와 극력 저지하는 바람에 그 일이 그만 흐지부지되고 말았다.사헌부 장령으로 승진한 뒤에 봉상시 첨정(奉常寺僉正),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와 사성(司成), 사섬시 정(司贍寺正)을 역임하였다. 그러고 나서 다시 명을 받들고 경기 순무어사와 재상 경차관(災傷敬差官), 그리고 강원도의 경차관으로 나갔는데, 공이 가는 곳마다 온갖 폐단이 말끔히 정리되곤 하였다.공은 대간(臺諫)으로서 정언(正言)을 세 번, 지평(持平)을 네 번, 장령(掌令)을 여섯 번이나 지내었다. 조정에서도 물론 기강과 언론에 대한 책임을 공에게 빈번히 맡겼지만, 공 역시 그때마다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면서 회피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공의 올곧은 도[直道]가 당시 세상에 용납되지 않았으므로, 조정에서 배척을 받고 정주 목사(定州牧使)로 부임하게 되었다.공은 임지(任地)에 도착하자마자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면서 관직 생활을 물로 씻어 낸 듯 청렴하게 일관하였고, 궁핍한 환경을 만족스럽게 여기면서 부세(賦稅)를 모조리 감면해 주었으므로, 이민(吏民)들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그리고 세시(歲時)에 안부를 물으며 선물을 보낼 적에도 오직 외롭고 빈한하게 지내는 친척과 고구(故舊)에게만 하였을 뿐 세력가나 현달한 이들에게는 하지 않았는데, 이는 당초 공의 성격이 괴팍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급기야 공이 인끈을 풀고 돌아올 적에도 자신의 행장(行裝) 속에 전에 못 보던 옷상자가 둘이나 있는 것을 보고는 크게 노하여 그 자리에서 불태워 버렸는가 하면, 집에 도착한 날에도 이웃집에서 곡식을 꾸어 온 다음에야 비로소 밥을 지을 수가 있었다. 공이 살던 옛집은 춘천(春川)에 있었는데, 너무도 초라하여 살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가하게 세월을 보내다가 생을 마칠 계획을 세우고는 필마(匹馬)에 몸을 싣고서 동쪽으로 돌아왔던 것인데, 사방에 벽만 을씨년스럽게 서 있을 따름이었건만 정작 공 자신은 편안하게 여기며 태연자약하기만 하였다.만력(萬曆) 계미년(1583, 선조16) 2월에 병으로 세상을 하직하니, 향년 54세였다. 그해 5월 모일에 가평군(加平郡) 원남면(遠南面) 간좌(艮坐)의 언덕에 안장(安葬)하였다.부인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 정창손(鄭昌孫)의 5대손이요, 부사과(副司果) 정응서(鄭應瑞)의 딸인데, 3남 1녀를 낳았다.장남 정사호(鄭賜湖)는 계유년에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고 정축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현재 황해도 관찰사로 나가 있다. 처음에 진사 채무외(蔡無畏)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이어 참봉(參奉) 유필영(兪必英)의 딸에게 장가들어 1녀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측실(側室) 소생으로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이름은 정장원(鄭長源)이다.그다음 정명호(鄭明湖)는 경진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로 있다가 일찍 죽었다. 사예(司藝) 김사섬(金士銛)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이름은 정두원(鄭斗源)이다.그다음 정운호(鄭雲湖)는 무자년에 사마시에 입격하여 세자익위사 세마(世子翊衛司洗馬)가 되었다. 처음에 충의위(忠義衛) 이순인(李純仁)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이어 유학(幼學) 강윤(康允)의 딸에게 장가들었다.딸은 현감(縣監) 정회(鄭晦)에게 출가하여 두 아들을 낳았으니, 정팽동(鄭彭仝)과 정두동(鄭斗仝)이다.정두원(鄭斗源)은 판관(判官) 심제겸(沈悌謙)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부인은 임진년의 난리를 피하려고 온양(溫陽)에 있는 정회(鄭晦)의 집에 우거(寓居)하다가 갑오년 5월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북쪽으로 영구(靈柩)를 돌릴 수 없는 상황이라서 청주(淸州) 땅 산외(山外)의 간좌(艮坐)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공은 사람됨이 단정하고 엄숙하였으며 말이 적고 묵중하였다. 어려서부터 붕우와 어울릴 때에도 실없이 농담을 하거나 외설스러운 이야기를 입 밖에 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공이 한 번 웃는 모습을 보는 것을 금옥(金玉)보다도 더 중하게 여기기까지 하였으니, 공을 대하면 누구라도 감히 공경하는 마음을 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당시에 여러 차례나 사화(士禍)를 겪은 터라서 사람들이 이학(理學)을 운위하는 것을 금기로 여기고 있었는데, 공은 홀로 발분(發憤)하여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해 나가면서 《대학장구(大學章句)》나 《근사록(近思錄)》 등 성리학(性理學)과 관련된 서책들에 대해서 매우 투철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초당(草堂) 허엽(許曄)이 대사성(大司成)으로 있을 적에 공과 더불어 통독하고 나서는 탄식하여 말하기를, “지금 같은 세상에서 이런 유자(儒者)를 다시 보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였다.”고 하기도 하였다.집에 있을 적에 제삿날이 돌아오면 목욕재계를 하고 반드시 성의와 공경을 다하였으며, 세척하고 자르고 익히는 일에 있어서도 반드시 직접 그 자리에 임하곤 하였는데, 몸에 병이 있어도 이를 거른 적이 없었다.관직에 몸을 담고 있을 때에는 크건 작건 간에 한결같이 봉공 멸사(奉公滅私)의 정신으로 임하면서 그사이에 털끝만큼이라도 사정(私情)이 개입되지 않도록 하였다. 그래서 공 자신이 남에게 청탁하는 일이 없었을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감히 청탁하여 공을 더럽히는 일이 없게 되었다.그리고 공이 물러 나와서는 방에 조용히 앉아서 좌우에 도서(圖書)를 펼쳐 놓고는 하루 종일 탐독을 하였으며, 오직 솔과 대를 다시 심어 기르면서 그사이에서 한가하게 소요하기만 하였을 뿐, 사람들과 바쁘게 왕래하면서 어울리는 일은 전혀 하지 않았다.공은 집안일에는 일절 신경을 쓰지 않았다. 집이 기울어져도 기둥을 받쳐 놓고 그저 비바람만 피할 뿐이었으며, 자손을 위해서 한 이랑의 전장(田庄)도 마련해 놓지를 않았다. 그리고 공은 평소에 잡기(雜技)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만년에 들어서는 거문고를 배워 거기에 자못 취미를 붙이기도 하였다.공은 학식도 있고 절조(節操)도 있고 위엄도 있었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참신한 기풍을 불어넣기에 충분하였고, 변경에 나아가서는 적을 제어하며 승첩을 거두기에 충분하였다. 그런데 공을 알아주는 사람은 드문 대신에 공을 시기하는 자만 많았고, 거기에 또 운명까지 불우한 나머지 지니고 있는 실력의 십분의 일도 발휘하지 못하였다. 그러니 그 덕이 후손에게 돌아가 이루어지게 된 것 또한 당연한 일이라고도 하겠다.부인 역시 인자하고 온후하여 음덕(陰德)을 많이 쌓았으므로, 사람들이 반드시 보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들을 하였다. 그런데 과연 후사(後嗣)가 된 아들의 지위가 천관(天官 이조(吏曹))의 소재(少宰 참판(參判))에 이르렀기 때문에 어버이에게도 추은(推恩)을 하게 되었는데, 공이 아들의 직질(職秩)에 비례하여 증직(贈職)이 되면서 부인 역시 여기에 함께 참여하여 귀하게 되었다. 그러나 앞으로도 계속 더 귀하게 될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열려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공의 후사(後嗣)인 관찰사가 나에게 찾아와, 일찍이 부자(父子) 사이에서 노닐지 않았느냐며 나에게 비명(碑銘)을 써 달라고 요청하였다. 의리상으로 볼 때 내가 어찌 사양할 수가 있겠는가. 이에 가장(家狀)을 근거로 하여 공의 시말(始末)을 적은 다음, 다음과 같이 명(銘)하는 바이다.세상은 온통 모서리 깎아 둥글둥글 만드는데 / 擧刓廉爲圓兮공 홀로 방정한 모습 견지하였고 / 獨持方也뒤질세라 냄새나는 벼슬을 좇는 세태 속에 / 逐臭者之競兮공만은 끝까지 향기를 잃지 않았어라 / 不易以芳也탁류가 쏟아져 발을 오염시키자 / 濁流染足兮훌쩍 떠나 맑은 물에 몸을 담그고 / 去而之淸也사는 집 스스로 성(醒)이라 명명하였나니 / 繄自命其居兮옛사람이 남긴 풍도 간직하려 함이러라 / 古遺醒也그 경륜 세상에 한번 시험했더라면 / 以是嘗世兮얼마나 멋진 솜씨 선보였을꼬 / 適畫其至也공이 남긴 그 음덕 후손이 이어받았나니 / 收餘于後兮끝없이 발전할 줄 나는 확신하노라 / 吾知其未已也[주-D001] 탁류가 …… 함이러라 :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에 “온 세상이 모두 탁한데 나 홀로 맑고, 사람들 모두 취했는데 나만 정신이 또렷하네.[擧世皆濁 我獨淸 衆人皆醉 我獨醒]”라는 말이 있다.
- 2022-04-29 | NO.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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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길료(秦吉了) - 성호사설 제5권 / 만물문(萬物門)
- 진길료(秦吉了) - 성호사설 제5권 / 만물문(萬物門) : 성호 이익(李瀷, 1680~1763) 백낙천(白樂天)이 진길료(秦吉了)라는 새를 읊은 시에,아롱진 빛깔은 푸르고 검으며 꽃 같은 머리는 붉구나 / 采色靑黑花頭紅하였으니, 이 진길료란 새는 구욕새[鸜鵒]의 한 종류로서 말을 능히 하는 새이다. 《설문(說文)》에는, “왜가리[鵙]와 비슷한데, 머리에 볏이 있다.” 하였으니, ‘꽃 같은 머리.’라는 것이 즉 이것이고, 악곡(樂曲)에는 구욕무(鸜鵒舞)라는 춤이 있으니, 이는 만세무(萬歲舞)라는 것인데, 당(唐) 나라 무후(武后) 때에 궁중에서 기르는 새가 사람처럼 말을 잘하되 항시 만세(萬歲)라고 일컬은 까닭에 악을 만들어 상징하였던 것이다.《통고(通考)》에는, “영남(嶺南)에 새가 있는데 구욕새보다는 조금 큰 듯하나 잠깐 봐서는 분별할 수 없고 오래 기르면 말을 능히 하므로 영남 사람은 이 새를 길료(吉了)라 한다.” 하였다. 개원(開元) 초기에는, “광주(光州)에서 헌납한 새가 있었는데, 말 소리가 쿵쿵 울리는 것이 어른의 목소리와 같고, 이모저모로 사람의 마음을 아는 것도 앵무(鸚鵡)보다 더 예민하다.” 하였다. 북쪽 지방에서는 늘 말하기를, “구욕새는 영남으로 넘어가야만 말을 능히 한다.”고 하니, 이는 잘못 전해진 말이다.”이로 본다면, “구욕새가 와서 집을 만든다[鸜鵒來巢].”는 따위는 비록 혀를 끊어서 말을 못하도록 했다 할지라도 그 중에 말을 능히 하는 새는 이 길료로서, 상징하여 악무(樂舞)를 만들었으니, 이는 통칭 구욕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문유취(事文類聚)》에는 이 길료라는 새를 앵무새 아래에 다 실어 놓아 구욕새와 구별하였으니, 이는 중국 사람도 또한 자세히 분별하지 못했던 까닭이다.[주-D001] 진길료(秦吉了) : 새의 이름. 《이아익(爾雅翼)》에는, “진중(秦中)에 길료조(吉了鳥)라는 새가 있는데, 털 빛이 검은 것은 대개 구욕새와 비슷하나 양쪽 귀가 사람의 귀처럼 생긴 것이 붉다.” 하였음. 또는 구관조(九官鳥)라고도 함. 《類苑》 卷42 鳥獸門.[주-D002] 무후(武后) : 당 고종(唐高宗)의 후비(后妃)인 무측천(武則天)으로서 이름은 조(曌).[주-D003] 개원(開元) :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주-D004] 구욕새가 …… [鸜鵒來巢] : 이 말은 《춘추》 소공(昭公) 25년 조에, “有鸜鵒來巢”라고 보임.
- 2020-09-22 | NO.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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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훤(甄萱)의 별전(別傳) - 동사강목 부록 상권 상 / 고이(考異)
- 동사강목 부록 상권 상 / 고이(考異), 사마광(司馬光)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지을 때에 뭇 책을 참고하여 그 같고 다른 점을 평하고 취사에 뜻을 두어 《고이(考異)》 30권을 지었으니, 전실(典實)하여 법다운 것만 뽑았다. 이것이 역사를 쓰는 자의 절실한 법이 되기에 이제 그를 모방하여 《동사고이(東史考異)》를 짓는다. 진훤(甄萱)의 별전(別傳)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이비가기(李碑家記)를 인용하여,“진흥왕(眞興王)의 비(妃) 사도(思刀)의 시호는 백숭부인(白????夫人)이니, 그의 셋째 아들 구륜공(仇輪公)의 아들인 파진간(波珍干) 선품(善品)의 아들 각간(角干) 작진(酌珍)이 왕교파리(王咬巴里)를 아내로 맞아 각간 원선(元善)을 낳으니 이가 아자개(阿慈介)이다. 자개의 첫째 부인은 상원부인(上院夫人)이요, 둘째 부인은 남원부인(南院夫人)인데, 아들 다섯과 딸 하나를 낳았다. 장자는 훤(萱)이요, 둘째는 능애(能哀)요, 셋째는 용개(龍蓋), 넷째는 보개(寶蓋), 다섯째는 소개(小蓋)이며, 딸은 대주도금(大主刀金)이다.”하였다. 김씨(金氏 일연(一然)의 속명이 김견명(金見明)이다)는 또 고기(古記)의 말을 인용하였으나 그 역시 허황한 말이다.고기(古記)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옛날에 한 부자가 광주 북촌(光州北村)에 살았는데, 딸 하나가 있어 외모가 단정하였다. 그 딸이 아비에게 하는 말이 ‘매양 자주색 옷을 입은 남자가 저의 침실에 들어와 관계합니다.’ 하니, 그 아비가 딸에게 ‘네가 긴 실을 바늘에 꿰어 그 남자 옷에 꽂아 두어라.’ 하고 일렀다. 딸은 이와 같은 아비의 말을 따랐는데, 날이 밝자 바늘에 꿴 실을 북쪽 담 밑에서 찾아 보니, 바늘이 큰 지렁이의 허리에 꽂혀 있었다. 후에 그로 말미암아 한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15세가 되자 자칭 진훤(甄萱)이라 하더니, 뒤에 왕(王)으로 참칭하고 완산(完山)에 도읍을 세웠다.또 김씨는 《삼국사기(三國史記)》 본전(本傳)을 인용하여,“훤(萱)의 본성(本姓)은 이씨(李氏)였는데 후에 진씨(甄氏)라 했다. 그의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농업으로 생활을 하였는데, 광계(光啓 당 희종(唐僖宗)의 연호. 873~888) 연간에 사불성(沙弗城)지금의 상주(尙州) 에 웅거하여 스스로 장군이라 일컬었다. 아들이 넷이 있었는데 모두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으며, 그 중 훤은 걸출(傑出)하다 불렸고 지략이 많았다.” 하였는데, 광계(光啓) 이하 26자는 본사(本史)에 나오지 않았으니 아마 별본(別本)이 있는가 보다. 《동국통감(東國通鑑)》에서 두 가지를 다 뒤섞어 취하였기 때문에 이에 생략한다.이비가기(李碑家記)에 또,“진훤이 아들 아홉을 두었으니, 장자는 신검(神劒) 또는 진성(甄成)이라 하고, 둘째는 태사(太師) 겸뇌(謙惱), 셋째는 좌승(佐丞) 용술(龍述), 넷째는 태사(太師) 총지(聰智), 다섯째는 대아간(大阿干) 종우(宗祐), 여섯째는 실전되고, 일곱째는 좌승(佐丞) 위흥(位興), 여덟째는 태사(太師) 청구(靑丘), 아홉째는 실전되었으며, 딸은 하나로서 국대부인(國大夫人)이니 모두 상원부인(上院夫人)의 소생이다.”하였는데, 이는 본사(本史)에 나오지 않았기에 특별히 이에 기록하여 이문(異聞)을 삼는다.
- 2020-09-15 | NO.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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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훤(甄萱)이 반란을 일으켜 무주(武州)를 근거로 하다 - 동사강목 제5상
- 동사강목 제5상 병오 신라 혜공왕(惠恭王) 2년부터, 을미 신라 경순왕(敬順王) 9년까지 170년간 임자년 진성 여주 6년(당 소종 경복(景福) 원년, 892) 남해(南海)의 수졸(戍卒) 진훤(甄萱) -진(甄)의 음은 진(眞)- 이 반란을 일으켜 무주(武州, 지금의 광주(光州))를 근거로 하고 스스로 한남군 개국공(漢南郡開國公)이라 칭하였다.진훤은 상주(尙州) 가선현(嘉善縣)지금의 문경(聞慶) 남쪽 45리에 속했는데 고려에서 가은(加恩)으로 고쳤다 사람으로 본성은 이씨(李氏)였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농사로 자활(自活)하였고, 뒤에 가세를 일으켜 장군이 되었다. 네 아들이 있어 모두 이름이 알려졌는데, 진훤은 더욱 걸출하여 지략이 많았다. 처음 진훤이 태어나 강보에 싸였을 때에 아버지는 들에서 밭을 갈고 어머니는 점심밥을 가져오느라 아이를 숲속에 두었더니, 범이 와서 젖을 먹였다 한다. 장성하게 되자 체모가 웅위(雄偉)하고 지기가 남달리 뛰어났다. 나이 15세 때에 스스로 성을 진(甄)이라 하고, 종군(從軍)하여 왕경에 갔다가, 서남 해안을 방비하는 수졸로 나아가서는 창을 베고 자면서 적을 대비하고, 항상 사졸(士卒)의 앞장을 섰다. 그 공로로 비장이 되었다.이때 여주가 혼미하고 음란하여 기강이 문란하고 해이해져서 백성은 굶주리고 도적이 일어나자, 진훤이 가만히 딴뜻을 품고 망명(亡命)하는 이들을 불러 모아서 주현을 공략하니, 달포 사이에 무리가 5천 명에 이르렀다. 드디어 무주를 습격하여 차지하였다. 그러나 감히 공공연하게 왕이라 자칭하지는 못하고, 스스로 신라 서남도통 지휘병마제치 지절도독 전무웅등주군사 행전주자사 겸어사중승 상주국 한남군 개국공 식읍이천호(新羅西南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熊等州郡事行全州刺史兼御史中丞上柱國漢南郡開國公食邑二千戶)가 되고 멀리 북원의 적 양길을 제수하여 비장을 삼았다.
- 2020-09-15 | NO.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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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라대가 해양(海陽)의 무등산(無等山) 꼭대기에 주둔하였다 - 동사강목 제11상
- 동사강목 제11상 신해 고려 고종 38년부터, 을해 고려 충렬왕 원년까지 25년간 병진년 고종 43년(송 이종 보우 4, 몽고 헌종 6, 1256) 8월 최항이 신흥창(新興倉)을 열어서 그의 가병(家兵)을 진휼하였다.○ 장군 송길유(宋吉儒)를 보내어 청주(淸州) 백성을 섬으로 옮기게 하였다.○ 몽고군이 갑관강(甲串江) 밖에 둔쳤다.앞서 차라대가 해양(海陽)의 무등산(無等山)지금의 광주부(光州府 동쪽 10리에 있다 꼭대기에 주둔하였다. 군사 1천 명을 남쪽으로 보내 노략질하고 또 수군[舟師] 70척[艘]을 거느리고 압해(押海)지금의 나주(羅州) 압해현(壓海縣) 를 쳤다. 압해 사람들이 큰 배[大艦]에다 대포를 설치하고 기다리니, 차라대가 바라보고 말하기를,“우리 배가 포를 맞으면 다 부숴질 터이니 당해낼 수가 없다.”하고, 다시 배를 옮겨서 공격하게 하니, 압해 사람들이 옮기는 곳을 따라 대포를 비치하므로, 차라대가 이기지 못할 줄 알고 마침내 수공(水攻)하는 기구를 파해 버리고 왕준ㆍ홍복원 등과 더불어 갑관강 밖에 이르러 크게 기치를 늘어세우고, 밭에 말을 먹이며 통진산(通津山)에 올라 강도의 형세를 바라보고, 물러가 수안현(守安縣)폐현(廢縣)으로 지금 통진부(通津府) 남쪽 15리에 있다 에 주둔하였다.
- 2020-09-15 | NO.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