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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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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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광주교대)
    광주시 북구 필문대로 552008년광주사범.사대.교육대학교총동문회는 2008년 11월 3일 광주교육대학교 교육대학원 앞 광장에서 광주.전남사범학교 선배들의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 기념탑을 건립했다.일제강점기 학생독립운동은 광주를 진원지로 불길처럼 전국으로 확산됐던 저항운동으로 3.1운동과 함께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독립운동이다. 이 기념탑은 광주교대 선배들의 애국정신과 희생적 투쟁을 기리기 위해 제1차 광주학생독립운동시기인 전남사범학교 학생의 역사적 사실, 제2차 광주학생독립운동시기인 광주사범학교 무등독서회 사건을 기록해 시민.동문.학생들의 민족혼을 기르기 위해 건립됐다.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의 조형적 특징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을 무등산 입석대의 상징성과 결합해 표현했고 탑의 기둥을 받치고 있는 아래의 원형 공간은 광주 시민의 삶터로, 중앙의 투박한 덩어리는 삶에 내재된 저항의 힘을, 중앙의 우뚝 솟은 3개의 기둥은 저항의 힘들이 모여 분출하는 항일정신과 기상'을 나타내고 있다.
    2018-12-16 | NO.299
  •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자연과학고)
    광주광역시 오치동 5 (능안로 30) 광주자연과학고1959년 6월 10일(1976년 9월 30일 현 위치 이건)이 비는 원래 1959년 6월 10일 개교 50주년을 맞아 그 당시 학교 자리인 광주시 북구 임동 92번지에 광주농업고등학교와 동창회가 함께 세웠으나, 1976년 9월 30일 광주시 북구 오치동으로 학교를 이전함에 따라 제14대 이대로 교장 재임 시 현 위치로 옮겨 개축하였다. 이후 1983년 6월 10일과 1998년 4월 20일 두 차례 성역화 사업을 실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기념비에는 “1929년 11월 3일 일어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일제의 굴욕적인 식민지 교육에 대한 학생들의 불평이 점차 높아가던 중 광주고보생의 일본인 중학생과의 충돌이 도화선이 되어 이 고장 광주에서 일어났던 항일독립운동이다. 이로 인해 광주농고를 비롯한 280여 명의 학생이 구속되어 많은 학생이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2018-11-15 | NO.298
  •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제일고)
    광주시 북구 독립로 237번지길 33 제일고등학교1954년일제강점기 때의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궐기하는 학생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청동부조로 탑의 꼭대기에는 횃불 모양의 청동장식을 덧붙여 조형물의 기념비성을 강조하고 있다.기념탑 규모는 높이 10.9m, 밑넓이 8.2m이다. 둥근 받침대 위에 네모난 탑신이 크게 3단계를 이루도록 하였고, 맨 위에 구리로 타오르는 봉화를 만들었다. 이 봉화 바로 밑에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 '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후면 탑명은 이은상과 고재기가 지은 것으로 글씨는 김상필이 썼다.아래에는 '우리는 피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 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 '라는 글을 한글로 새겼다. 그 밑에는 구리판으로 일제에 항거하며 울부짖는 남녀 학생들이 부조로 구성되어 있다.
    2018-06-19 | NO.297
  •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화정동)
    광주시 서구 학생독립로 30(화정동)광주시는 일제의 억압을 뚫고 불같이 일어난 광주 학생들의 숭고한 독립 정신을 계승ㆍ발전시키고자 1967년 설립한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을 건립했다. 선배들의 얼을 이어받을 수 있는 배움의 장으로 거듭나기 위해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전개 과정을 입체적으로 복합 전시 연출하여 지난 2005년 11월,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의 문을 새롭게 열었다.높이 39미터의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을 볼 수 있다. 하나의 구심점으로 군중이 집합하는 힘을 생각하면서, 광주학생독립운동을 펼친 학생들의 단결된 의지를 상징화한 것이다. 멀리서 보면, 입석군들의 조화로 타오르는 횃불의 이미지가 연상된다.
    2018-12-16 | NO.296
  • 광주학생독립운동여학도기념비
    광주시 동구 제봉로158번길 8 (전남여고)광주광역시기념물 제26호1959년광주학생독립운동여학도기념비는 전남여자고등학교에 있다.앞면에 이승만 대통령이 쓴 글씨와 뒷면에 '배달 여자의 전통적 덕행을 이어, 맨 손으로 왜정의 총칼에 항거하여, 독립의 한길을 닦은 여학도의 절의는 골 해의 거울 이요, 잘 사람의 본이다 '라는 최현배의 글이 새겨져 있다이 기념비의 주춧돌 속에는 방부지로 싼 비혼궤를 넣고 시멘트로 붙였다고 한다.  비혼궤는 비의 혼을 담은 상자로 크기는 6×4×1치의 강철, 유리로 된 2중 상자이다. 이 상자에는 전국의 여학도들이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가하여 활약하고, 잡혀서 감옥에 갇혔으며, 희생이 된 일들을 모아 엮은 내용과 기념비 건립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함께 넣었다.
    2018-11-11 | NO.295
  • 광주학생운동 시위지 표석
    광주시 동구 대인동 324-9(동부소방서)1929년 11월 1일과 3일 한국인과 일본인 학생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광주학생운동의 시발점이 된 곳이다.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양측 학생들의 충돌이 일어나자 11월 1일에는 광주역에 광주고보생과 일본인 학생인 광주중학생 수십명씩이 모여 철도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였다. 이어 11월 3일에는 광주 시내 수기옥정 우체국 앞에서 양교 학생들 사이에 시비가 일어 격투가 벌어졌으며, 이 소식을 들은 양쪽 학생 수백명이 광주역 앞에 모여 집단난투극이 벌어졌다.광주역은 1969년 7월 25일 광주시 북구 중흥동에 역사를 신축하여 이전하였으며, 당시 자리에는 현재 광주동부소방서가 들어서 있다.
    2018-12-19 | NO.294
  • 광천동성당 들불야학터
    서구 죽봉대로119번길 28-13, 광천동성당대건안드레아교육관 건물(교리실)에서 1978년 들불야학이 개교했다. 빨간 벽돌의 입구였던 부분만 남아 당시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옆에는 2013년 10월 15일 지정 고시된 5.18광주민중항쟁 사적 27호 들불야학 옛터 표지석이 따뜻한 햇볕을 받아 옛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2018-06-19 | NO.293
  • 괘고정보수헌성비
    광주시 남구 구만산길 6 (원산동)괘고정보수헌성비(掛鼓亭補修獻誠碑)는 괘고정수 아래에 있다.
    2018-06-11 | NO.292
  • 국제라이온스의장사은김병기기념비
    광주시 동구 용연동 573용연마을2017광주·전남지역 출신으로 최초로 2013년 6월 독일 함부르크 국제대회에서 정회원 140만명의 세계 최대 국제봉사 단체인 국제라이온스협회의 2013~2015 국제이사로 선출됐다. 김병기 라이온은 (사)국제라이온스협회 한국연합회 2014~2015 회장을 역임했으며 대한민국 광주광역시의 향토 기업인으로서 지역사회의 화합발전과 지구촌의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봉사에 평생을 헌신했을뿐만 아니라 지도력과 봉사 사업에 만인의 귀감이 됐다.지난 2014년 제53차 인천 동양 및 동남아대회의 라이온스 파견감독관으로 활약하며 이밖에도 중국 길림성 용정시 자선총회에 암소 300여마리와 농장시설지윈 및 장학회을 설립했다.100여명의 후원자로서 2000만원의 후원금으로 라이온스창립 100주년일을 맞이해 향리인 동구 용연동에 김병기 국제이사 재직기념비가 건립됐다.
    2018-11-22 | NO.291
  • 국창임방울선생기념비
      광주시 광산구 신촌동 산4-1. 송정공원1986년송정공원에 국창임방울선생 기념비가 있다.  기념비는 부채와 북의 모양을 띠고 있다.임방울은 광산구 도산동 출신의 판소리 명창으로 국창의 칭호를 받았다. 국창이라는 칭호는 민중들이 붙여준 최고의 찬사로 임방울 선생은 민중들이 원하는 자리라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소리판을 열기도 했다. 그가 활동했던 시기는 일제강점기와 남북 분단의 시련기였기때문에 그의 소리에는 시대상과 관련된 계면조의 애절함이 반영되어 있다. 임방울은 가난한 농가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임승근으로 14세때 부터 콜롬비아 빅타오케이 등 레코드 회사의 전속가수로 활약했다. 당대의 명창 이재현에게 춘향가와 흥보가를 배우고 유성준에게 수궁가와 적벽가를 배워 당시의 명창으로 이화중선과 쌍벽을 이루었다고 한다. 특히 일제시대 전후에 명맥을 이어온 판소리의 전통적 계승자로는 으뜸가는 귀중한 존재였다. 그 공로가 인정되어 1960년 대한민국 국악상을 받았고 1979년 <광산군민의 상>을 수상했으며, 그의 작품으로는 호남가, 사별곡 등이 있다. 비문은 김정호가 쓰고 글씨는 경암 김상필이 썼다. 조각은 김대길이 했다.
    2018-06-19 | NO.290
  • 권율-도원수충장권공창의비
    광주시 남구 중앙로107번길 15 (광주공원內)행주산성 전투로 잘 알려진 권율 장군의 도원수충장권공창의비(都元帥忠莊權公倡義碑)는 사적비군 입구 은행나무 정중앙 앞자리에 자리하고 있다. 가장 갚진 비다. 권율 장군은 팔도 총사령관이었으며 광주목사와 도원수를 지내며 이순신 장군과 함께 육지는 권율, 바다는 이순신이 지켰다고 할 만큼 큰 공을 이룬 인물이다. 권율과 이순신은 서해 류성룡이 추천했던 인물들로 권율은 광주목사 도원수로 이순신은 좌수사요 통제사로 바로 여기에서 두 역사적 인물이 나라를 위기에서 구했으니 그 호남의 정기가 참으로 빛나는 곳이다. <광주읍지>에 따르면 주(州)의 서쪽 1리의 거리인 향사(鄕社)마을에 있다.기 문(記文)심석(心石) 송병순(宋秉珣) 지음주상(主上) 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듣는 바에 의하면 '권율(權慄)이 군사를 거느리는 장수(將帥)의 재능(才能)이 있다'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내 특별히 그를 광주목사로 임명한다"라고 하시었다. 이러한 명을 받은 권공이 광주의 임지에 도착한 그 즉시 10개 조항(條項)의 약법(約法)으로 많은 무기를 비축하여 빈틈없는 수비(守備)를 다지 었다. 이 때문에 이 지역에 대한 외적의 침범이 근절되어 모든 주민들이 평안한 생활을 누림에 따라 또다시 경내(境內)의 여러 자제(子弟)들과 함께 이웃고을에 격문(檄文)을 보내 많은 의병(義兵)을 모집하였다. 이로 인해 이치(理致)의 전투에서 외적을 물리쳐 호남의 안전을 도모한 그 전공(戰功)으로 본도(本道)의 순찰사(巡察使)를 역임하였고 또 행주(幸州) 전투에 나아가 왜적(倭敵)의 무리를 모두 주살(誅殺)하는 대승(大勝)의 전공(戰功)을 이루었다. 그리고 또 왜적의 무리가 경성(京城)을 함락한 그때에 각도의 의병(義兵)을 총괄하는 도원수(都元帥)의 책임을 맡아 파멸 직전(破滅直前)의 종사(宗社)를 구제하고 빈사직전(瀕死直前)의 백성을 회생시키는 등의 지대한 공적을 남기었다. 중국의 천자가 이 소식을 듣고 이에 대한 포상을 아끼지 않았고 또 적의 무리가 공의 안부를 살피는 이 사실을 생각할 때 그 당시에 있어서는 공의 위명(威名)이 어느 정도 수준임을 알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된 것이다. 공께서는 무관(武官)이 아닌 선비출신의 장군으로 일등공신(一等功臣)의 책훈(策勳)을 받은 최대의 영예를 누리었다. 어찌 이를 가리켜 보기 드문 위대한 일이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이미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공의 이러한 출세의 기반이 이 고을의 목사를 역임한 그때로부터 비롯된 서로간의 깊은 인연이 있기 때문에 이 고을의 백성들이 오늘의 현재까지 그의 유업을 기리어 잊지 않는 많은 추모(追慕)를 가지었다. 공의 10세 손인 재윤(在允)이 지난 신축(辛丑)년에 이 고을의 원님으로 부임하였다. 신축이란 이 연도는 공의 책훈이 있는 그 해로부터 네 차례의 갑오년이 지난 1901년(광무5년)으로 그 다음 해인 1902년(壬寅)에 이 고을의 여러 인사와 함께 공익 창의비를 세우기 위해 나를 찾아와 이 비의 음기(陰記)를 부탁하였다. 오호(呜呼) 통재(痛哉)라! 공의 이러한 뛰어난 공적이 이미 나라의 사책(史册) 및 이정(彛鼎) 등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구태여 천루(賤陋)한 이 사람의 처지로 또다시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이 때문에 대략 고의 사적에 대한 약간의 전말을 서술한 나머지 이에 대한 송사(頌辭)를 지어 이르기를조그마한 이 빗돌(碑石)이 이 가운데 자리하니하늘땅과 다름없는 오랜 수명(長壽)를 누렸도다광주고을 여러 사민(士民) 서로 함께 힘을 모아지난 옛날 그 유업(遺業)을 그지없이 기렸도다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원 권율(權慄, 1537~1599)장군의 창의비(倡義碑)이다. 공(公)의 10세손 권재윤(權在允)이 신축년(1901년)에 광주군수로 부임하여 임인년(1902년)에 건립하였다. 찬자(撰者)는 은진 송병순(宋秉珣,)이고 서자(書者)는 11세손인 권교현(權敎鉉)이다. 송병순은 우암 송시열의 9대손으로서 1905년 을사보호조약 때 자결한 유학자 송병선의 동생이고, 그 역시 1910년 한일강제병합에 항거하여 1912년 자결한 사람이다. 비문에 의하면 권율은 광주목사로 재임 시 격문을 돌려 군사를 모집하여 이치(梨峙)전투에서 승리한 후 이 공(功)으로 전라도순찰사로 승진하였고, 행주(幸州)의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여 경성(京城)을 회복하였으며, 제도도원수(諸道都元帥)가 되어 위태로움에 처한 종사(宗社)와 수많은 백성들이 보존될 수 있었다고 한다.이 비 옆면 두 곳에는 권율과 같이 전투에 참여한 주요 인물들의 명단이 적혀 있고 뒷면은 권율 장군의 업적이 한자로 간략하게 적혀 있다. 광주목사 시절의 약법 10조와 의병모집, 이치 전투 승리, 행주대첩에 관한 내용 등이다. 비 양면에는 참좌(參佐, 아랫사람으로 참여하여 도움)한 여러 공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정충신, 이세환, 김경립, 박대수, 김덕령, 박종정, 고성후, 유사경, 정빈, 권승경, 이완근, 박희수, 고인후, 이충립, 김치원, 김극추, 박천용, 정사준, 김제민, 선거이, 표헌, 정사현, 송제민, 정귀세, 권동현, 정지영 등 모두 26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26명 중 낯익은 이름이 바로 금남공 정충신이다.전면 都元帥 忠壯權公倡義碑후면嗚呼奧在壬辰天降大亂島夷猖獗長驅入寇兩南爲死地 上曰予聞權慄有將帥才拜光州牧使公膺 命至州 約法十條蓄銳以竢賊不敢入境而居民安堵如古於是招募境內子弟傳檄旁郡響應參佐者甚衆遂一戰而奏梨峙之捷湖南賴全以功陞本道巡察使再擧而鏖幸州之敵京城重恢爲諸道都元帥幾危之 宗社賴而後安無類之生靈得以更存 天子聞而獎大賞賊酋問公起居當世威名大震華夷卒以儒將策勳第一其猗歟休哉公之樹立盖基於是州而州之民懷其遺愛迄今不忘焉公十世孫在允辛丑莅郡乃是勘勳之五甲越明年與州人士謀以勒石徵文於余記其陰嗚呼公之豐功偉烈旣銘彛鼎而耀竹帛則固不待賤陋之贊述而明矣故畧識其顚末以歸之系以頌曰一片貞珉與天壤俱存光之士民庶無感於崇報光之溪山草木亦有輝乎 壬寅 陽月上旬 通仕郞義禁府都事 恩津宋秉珣 謹撰十一世孫 前參奉 敎鉉 謹書측면 參佐諸公 忠壯公 金德齡忠武 鄭忠信 別提 朴宗挺水使 李世環 郡守 高成厚 癸卯 三月 日直長 金敬立 佐郞 柳思敬萬戶 朴太壽 縣監 鄭 擯측면 僉使 權升慶 僉正 金致謜 兵使 宣居怡 有司 權東鉉察訪 李完根 承旨 金克秋 護軍 表 憲 鄭志榮 佐郞 朴希壽 參軍 朴天鵬 縣監 鄭思竤毅烈 高因厚 吏參 鄭思竣 持平 宋濟民府使 李忠立 忠剛 金齊閔 奉事 鄭貴世
    2018-06-11 | NO.289
  • 권재윤-행군수권공재윤청덕불망비
    광주시 남구 중앙로107번길 15 (광주공원內)1903년이 행군수권공재윤청덕불망비(行郡守權公在允淸德不忘碑)는 광주군수(光州郡守) 권재윤(權在允)의 불망비(不忘碑)로 계묘년(1903년)에 건립되었다. 권재윤은 1901년에 광주군수로 부임하였고, 비의 앞면에 중은(重殷)으로 개명(改名)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권재윤은 1900년(고종 37) 12월 광주군수로 임용되었다. 1903년 8월 조선왕조실록 기사에 ‘광주 군수 권재윤의 이름을 권중은(重殷)으로 고치겠다’고 내부 대신이 계를 올린 점으로 미루어 그때까지는 군수로 재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또 만취(晩翠) 권율(權慄)의 후손으로 청렴결백하였고 일심(一心)으로 다스려 칭송이 자자하였다는 내용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비의 앞면에 다음의 글이 있다.晩翠肖孫 淸白循吏  捐修公廨 恤及遷戶    一心爲治 萬口有譽   伐石無等 頌德永世
    2018-06-11 | NO.288
  • 금암김희수송덕비
    광주시 북구 금곡동 산 187(귀후재 옆)1985년이 금암김희수송덕비(錦庵金熙壽頌德碑)는 金明均 짓고 康仁煥 쓰다.낭장공파 사촌 종중 건립하다.
    2018-11-13 | NO.287
  • 금학김규현탑성거사공덕비
    광주시 북구 금곡동 846(원효사 아래 부도 및 비석군)1998년이 금학김규현탑성거사공덕비(金鶴金圭炫塔成居士功德碑)는 원효사 주지 현지 건립하다.
    2018-11-13 | NO.286
  • 금호최공원택실적비
    광주시 광산구 산월로21번길 26 (무양서원)1934년금호최공원택실적비(錦湖崔公元澤實績碑)는 무양서원 앞에 있다. 최원택(崔元澤)의 자는 도경(道京), 호는 금호(錦湖), 본은 탐진이며 벼슬은 참봉, 1862년(임술)생이다.이 비는 1934년(단기 4267년) 2월에 전 가의대부이조참판겸동지 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 규장각직제학 세자시강원검교보덕 여흥 민병승이 기문을 쓰고 해주 오세창이 글씨를 썼으며 현직에 있는 시임(時任) 벼슬아치와 전직에 있던 원임(原任) 벼슬아치인 시원임은 박노선, 고광수, 기종섭, 이재춘, 이완상 등이다.면암 최익현 선생이 1906년(병오년)  4월 10일 문인을 명하여 동맹록을 만들었는데 110명 가운데 최원택이 참가했다. 일본인들과 서양 사람들의 정착으로 개화의 바람이 일자 최원택은 이 지방의 선각자들과 토착세력인 지방 개화 인사들과 함께 자강・자립의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계몽운동에 나섰다. 주요 인사로는 최성기(최태군의 부친), 최종섭(최호연의 부친), 최원택(광주전등회사・무양서원의 창설 참여), 김인수(김양균의 조부), 정인준 등이 있다. 광주에 전등이 등장한 건 1917년 8월께. 동구 수기동 43번지에 있던 광주전등회사가 전기를 공급하면서부터였다. 《광주지방사정》이란 책에 의하면, 처음 광주전등의 발전양은 3500개의 전등을 켤 수 있는 정도였다고 한다. 최원택은 무양사원 창설에 참여했다. 이 비가 세워진 무양서원(武陽書院)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계동에 있는 일제강점기의 서원이다. 1984년 2월 29일 광주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3호로 지정되었다. 고려 인종(재위 1122∼1146) 때 어의(御醫)이면서 명신인 장경공 최사전을 중심으로 그의 후손 4명(손암 최윤덕, 금남 최부, 문절공 유희춘, 충열공 나덕헌)을 모시고 있는 서원이다. 최사전은 의술로써 벼슬에 나갔는데 왕의 총애를 받아 높은 벼슬에 오른 사람이다. 무양서원은 1927년에 탐진 최씨 문중이 전국 유림의 호응을 얻어서 세운 서원이다. 서원의 이름은 광주의 옛 지명에서 따 왔다고 하는데, 강당인 이택당을 중심으로 왼편과 오른편에 합의문과 합인문이 있다. 합의문을 지나면 오른편에 동재인 성지재가 있고 왼편에는 서재인 낙호재가 있다. 또한 높은 땅 위에 담장이 있는 무양사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것은 사당 안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원래 서원은 제사 기능과 교육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탐진 최씨 문중에서는 1945년 광산구 쌍암동에 무양중학교(현 비아중학교)를 설립하여 지금까지 교육기관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2018-06-25 | NO.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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