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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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원희가옥
    광주시 남구 압촌길 68(압촌동)1917년남구 압촌동의 고씨삼강문과 추원각을 지나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솔숲을 배경으로 산기슭에 자리잡은 고원희 가옥이 있다. 고택에 못미쳐 작은 정자가 하나 있는데 이름하여 ‘파향정(把香亭)’이다. 정자 옆으로는 고원희 가옥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콩문화센터가 있다. 대문채는 세칸 규모로 양쪽에 방을 두고 가운데 문이 위치해 있다. 소박한 모습의 대문이다. 대문 옆으로 담장을 터서 주 출입구로 이용하고 있는데 이는 대문으로 차량 등이 드나들 수 없기 때문이다. 고원희 고택늬 사랑채는 대가집치고는 규모가 크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다. 화려한 벼슬살이를 하지는 않았지만 기품있게 살다 간 고경명 장군의 모습과 닮은 듯하다. 담백하게 서 있는 모습이 오히려 더욱 기품있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사랑채는 정면 4칸 규모로 사랑방에 이어 한칸 규모의 대청이 오른쪽 끝으로 약간 높게 자리하고 있다. 이 대청은 양쪽 2면이 모두 창호로 닫혀 있다. 한쪽 창호는 들어열개로 열 수 있도록 돼 있다. 또한 사랑방에서 대청쪽으로도 들어열개가 있어 이를 통해 공간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구조다.사랑채 옆으로는 안채로 통하는 중문이 있다. 안채는 사랑채에 비해 규모도 크고 널찍하다. 정면 7칸에 측면 2칸반의 겹집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팔작지붕의 합각부분에 새긴 문양도 아름답다. 정면에는 안방에서부터 건넌방까지 툇마루가 이어져 있다. 가운데 두칸이 대청이다. 이곳 역시 사랑채처럼 창호를 만들었다. 겹집 구조나 대청의 창호 등을 보면 이곳이 겨울에는 다소 추웠던 지역으로 짐작된다.안채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조금 높은 곳에 사당이 있다. 이 사당은 고경명 장군을 비롯해 그의 두 아들인 고종후와 고인후를 모시는 불천위 사당이다. 대개의 경우 종가에서도 4대 선조까지의 제사를 모시는 것이 일반적인데, 불천위란 영원히 제사를 모실 수 있는 인물로 이는 나라에서 정해주는 인물들이다. 장흥 고씨가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것은 현 종손 고원희씨의 20대 선조인 고자검(高自儉)때다. 압촌마을 장흥 고씨의 중시조이다. 집에서 마주 보이는 마을 오른편 산기슭에 아래 위로 묘가 있는데, 바로 고자검과 그의 아들인 고운(高雲)의 묘이다. 당시 살던 집도 그곳에 있었다.고경명 장군이 고운의 아들이자 부친인 고맹영(高孟英)의 묘를 현재 삼강문이 있는 쪽으로 모시면서 집터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잡았다. 당초에는 지금보다 건물이 더 많았다고 한다. 콩문화센터가 있는 곳도 원래는 이 집의 일부로 고종석의 둘째 아들에게 분가시켜준 집이었다. 광주시에서 콩문화센터 운영을 위해 임대를 요청해 30년간 임대해주기로 했다는 게 고원희씨의 설명이다.고씨 문중 종가에 자손이 귀해 양자들이 더러 들어왔다. 현재의 집을 건립한 고종석도 양자로 들어왔고, 그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큰 아들에게는 아들이 없고 작은 아들에게 아들이 있어서 큰 집에 양자로 들어오게 됐다. 고원희씨는 바로 그 양자로 들어온 이의 아들이다.
    2018-12-03 | NO.13
  • 광천동성당 들불야학터
    서구 죽봉대로119번길 28-13, 광천동성당대건안드레아교육관 건물(교리실)에서 1978년 들불야학이 개교했다. 빨간 벽돌의 입구였던 부분만 남아 당시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옆에는 2013년 10월 15일 지정 고시된 5.18광주민중항쟁 사적 27호 들불야학 옛터 표지석이 따뜻한 햇볕을 받아 옛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2018-06-19 | NO.12
  • 박학독지- 한국방송통신대학 광주전남지역대학
    한국방송통신대학 광주전남지역대학 준공기념비 2005년 12월 18일광주광역시 광산구 첨단내촌로 6 (월계동)2003학번 중어중문학과 김종렬이 글을 쓰고 건립추진위원으로 광주전남지역대학장 김형근, 제23대 광주전남지역대학 총학생회장 김정곤, 제19대 광주전남지역대학 중문학과 학생회장 이극이 참여함박학독지博學篤志(널리 배워서 뜻을 굳게 하다.) 子夏曰 博學而篤志 切問而近思 仁在其中矣(論語, 子張篇)자하(子夏)가 말하였다."널리 배워서 뜻을 굳게 하고, 절박하게 질문하여 몸 가까운 문제에 대해 생각한다면 인(仁)의 덕은 스스로 그 중에서 생겨 나리라.
    2021-06-26 | NO.11
  • 비움의 십자가
    서구 상무2동 997-1 광주가톨릭대 평생교육원2016년천주교광주대교구 설정 80주년을 맞아 이를 기념하는 십자가로 27점의 금산석 조각이 모여 4개의 형체를 만들고 이 사이 공간이 3개의 십자가를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본 형체에는 6.25전쟁과 5.18광주민중항쟁, 4.16세월호 참사 등 한국 근현대사에서 비극적이고 고통스러운 사건과 선교 초기의 박해와 순교의 모습을 담고 있다.
    2018-06-19 | NO.10
  • 양림동 호남순교자 추모공간
    광주시 남구 제중로 77 호남신학대2011년전남북 지역에서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1791년 전북 금산군 윤지중 권상연을 비롯하여 순교한 850여명의 명단을 새긴 추모공간이다.
    2018-06-20 | NO.9
  • 오웬기념각
    광주시 남구 백서로 70번길 6(양림동)1914년유진 벨 목사와 함께 전남 최초의 선교사로 들어와 광주에서 순교한 오웬선교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미국 친지들이 보낸 기금 4,200 달러로 1914년에 세워진 연면적 434평방미터(부속건물 포함)인 양옥건물이다.
    2018-06-26 | NO.8
  • 용아 박용철 생가
    광산구 소촌로46번길 24박용철(1904~1938)은 1930년대 시문학파를 탄생시키고 한국 순수 서정시대를 개척한 시인이다. 또한 이곳에서 새로운 문명을 소개하고 자주독립 정신을 일깨워 주기도 하였다.
    2018-06-26 | NO.7
  • 윤상원 열사 생가
    광산구 천동길 46 1979년 들불야학 1기에 일반사회를 가르치며 교사로 참여했고 5.18 당시 시민군 대변인으로 큰 활약을 했으며 <투사회보>의 발행인으로 활동하다가 5월 27일 전남도청 본관 2층 사무실에서 계엄군의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윤상원 열사의 생가에는 '해파제海波齋'라는 현판이 있다.
    2018-06-26 | NO.6
  • 전남대 '임을 위한 행진'
    광주시 북구 용봉로 77, 전남대학교2004년전남대학교 중앙도서관 앞 광장에는 용봉동 호수를 줄여 '봉지'라 불리는 분수가 나오는 곳에 있는 조각상이다. 학생, 교수, 직원, 시민을 상징하는 4개의 형상이 있다. 민주화를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했던 박승희 열사의 추모석이 있다는 데 확인하지 못했다.
    2018-06-26 | NO.5
  • 중앙초등학교 본관(1928)
    동구일제강점기 당시 1907년 광주심상고등소학교로 개교하여 1914년 궁동으로 이전했고 해방후 중앙국민학교로 개교했다. 전형적인 빨간 벽돌 건물로 외부와 내부를 거의 고치지 않고 일제강점기 건축 당시 모습을 원형 그대로 가장 잘 보존하고 있다. 학교와 건축물로서 이 지역이 갖고 있는 훌륭한 문화유산이자 소중한 자원이며 문화도시 광주에 잘 어울리는 문화콘텐츠가 될 수도 있다.
    2018-06-26 | NO.4
  • 커티스메모리홀(1924)
    남구 백서로13, 수피아여자고등학교양림동 호랑가시나무 산책길에서 수피아여학교로 내려가는 언덕에는 고딕 양식의 아담하고 단정한, 원형창과 아치형상의 창문을 조화롭게 배치하고 독특한 첨두아치가 사용되어 결코 흐트러짐이 없어 보이는 회색 벽돌 건물은 벽돌쌓기형 외형을 이루고 있다.
    2018-06-26 | NO.3
  • 태봉산 태실
    북구 신안동 121번지 일대의 50여 미터의 작은 태봉산에서 1624년 9월에 태어난 조선 인조의 아들 아지대군의 태를 묻은 태실이다. 지금은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공원에 있다.태봉산은 조선 인조 때 이괄의 난으로 공주에 피신(1624년)하고 있던 중에 왕자를 낳아 태를 묻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1928년 7월 하순 심한 가뭄이 계속되자 주민들이 태봉산에 암장한 무덤을 파헤치다가 우연히 태실과 함께 많은 유물을 발견하게 되어 전설로만 내려오던 태봉산이란 이름을 비로소 고증하게 된다.태봉산은 광주 신역 옆에 위치하였던 해발 52.5m, 넓이 약 1 정보 쯤 되는 무덤같이 둥글고 납작한 산이었다.그러나 1967년 광주시의 시가지 정리 계획에 의하여 태봉산을 헐어 경양방죽을 메우면서 사라져 버렸다. 여기에서 발굴된 유물은 다음과 같다.태실은 화강석으로 된 절구 모양의 평방형으로 직경이 130cm, 높이가 62cm 명기반석은 납석질로 된 다갈색 석반인데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皇明天啓四年(1624년) 九月初三日辰時 誕生王 王男大君阿只氏胎    天啓五年三月二十五日藏금박 한 장 : 길이 12.3cm,  넓이 4cm, 무게 한돈 오푼출토된 유뮬 가운데 태실을 1968년 8월 광주시립민속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그런데 아지왕자의 태가 공주에서 멀리 떨어진 광주의 태봉산에 묻히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인조대왕과 인열왕후는 피난길에 얻은 왕자(용성대군이라 하는 이도 있음)가 태어나면서 부터 잔병이 끊이지 않아 근심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온 궁중이 수심에 잠기고 인열왕후는 근심 끝에 왕자를 안고 백일기도에 나섰다. 몇날 며칠을 절에서 불공을 드리는데 하루는 백발도승이 나타나 이르기를 음악한 지기가 충동해서 계룡산에 묻인 왕자의 태를 괴롭히니 이대로 두면 수는 돌을 넘기지 못할 것이며 왕후의 불심이 갸륵하여 이르노니 왕자의 태를 이장하되 광주고을 북쪽에 여의주 모양으로 둥글고 작은 산이 있을 것이니 손바닥만한 금조각을 태와 함께 넣어 그곳에 안장하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인열왕후는 필시 왕자를 위해 하늘이 보낸 도승이라 여기고 즉시 도승의 분부대로 거행할 것을 하명했고 왕자의 태는 아기가 태어난 이듬해 봄 1625년 3월 25일 옮겨졌다.위의 내용이 태봉산에 얽힌 전설인데 1928년 7월의 발굴로 사실로 확인된 것이다.
    2018-06-26 | NO.2
  • 평동성당(1996)
    광산구 평동로735번길 291956년 노안성당 공소로 출발해 오늘날 평동성당이 되었다. 빨간 지붕이 눈에 띈다. 옆의 종루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2018-06-26 | NO.1
  • 광주광역시
  • 한국학호남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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