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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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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노씨 비석군
    광주시 북구 오치동 109광주노씨 비석군은 노씨삼릉단 재각 앞에 있다.
    2018-12-07 | NO.18
  • 눌재 박상 행장비- 訥齋先生集附錄卷第一
    서구 사동길 93(서창동)   訥齋先生行狀[尹衢]      귤정(橘亭) 윤구(尹衢, 1495~?)가 박상이 세상을 떠난 지 1년 후인 1531년 4월에 두 아들 부사공 박민제와 진사공 박민중의 요청으로 쓴 글이다. 윤구는 윤선도(1587~1671)의 증조부이다. 윤구는 1516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지제교, 경연 검토관, 춘추관 기사관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이 글은 당시 바로 쓰였기 때문에 박상의 진면목을 알아볼 수 있는 귀중한 글로 그 의미가 크다.先生姓朴。諱祥。字昌世。系出忠州。高王考諱世梁。高麗匡靖大夫,知都僉議司事。曾王考諱光理。中散大夫,民部郞中。贈司僕寺正。王考諱蘇。本朝成均進士。官至朝散大夫,宜川郡事。贈資憲大夫,吏曹判書。考諱智興。成均進士。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妣桂城徐氏。生員宗夏之女。先生以成化甲午五月十八日生。生而神氣英爽。異於常兒。少孤。從伯氏學。强記過人。稍長。能自勸學。博通經史。爲文詞日進。弘治丙辰歲。年二十三。中進士選。辛酉歲登第。授校書館正字。例遷至博士。拜承文院校檢。遷侍講院司書,兵曹佐郞。乙丑歲。出爲全羅道都事。正德丙寅秋。今上反正。秩滿。除長興庫令。擢授司諫院獻納。有戚里人。越資陞堂上。是時廢朝積威之餘。士氣摧沮。人皆畏懦蓄縮。雖知其非。而莫敢言。先生慷慨首議。同憲府廷爭彌旬。方解冠辭職。會有國試。命先生考選。乃辭曰。臣旣不能盡所職。不敢奉命。上大怒。命下于理。將加之罪。朝廷咸危懼。大學生上書訟之。宰相亦交救得解。先生猶不自悔。在諫院一年。彈論無所避。謇然有直名。執政惡之。出補韓山郡守。故事。侍從臺諫。銓曹不得擅擬外官。憲府卽日。擧劾銓曹。改授先生宗廟署令。尋徙昭格署 缺。先生旣仕不得志。又以親老乞外。得守臨陂縣令。公廉明斷。務祛冤滯。三年而政成。一日。引疾投紱。謝歸光城之里第。唯日以圖書自娛。辛未冬。拜弘文館修撰。陞校理。半歲。又陞應敎。時館中凡有所章疏。必屬先生。先生操紙立就。文約而義盡。同列稱其能。未幾。以親年益高。上疏乞歸養。故例。近侍爲親乞養者。嘗授近鄕守宰。於是。來守潭陽府。爲府二年。觀察使以淸謹聞。特賜表裏。以優奬之。乙亥春。章敬王后上賓後。中壼無主。時災異疊臻。求聞直言。先生乃與淳昌郡守金淨。上封事。請復廢妃愼氏正中位。且論三元勳。謀爲自全。建廢國母之失。於是。臺諫交章請罪。天怒震動。命繫詔獄以鞫之。群下洶洶。莫不爲先生危之。賴大臣救理。上亦恕其狂直。只令除名。配隷于南平之烏林驛。丙子夏。大旱赤地。宰相言之于上。乃命放歸。是年冬。復授儀賓府都事。遷掌樂院僉正。先生以屢繫縲絏。怪謗叢集。忽忽不樂仕進。黽勉就職。丁丑春。出守順天府。冬十月。丁內憂。居廬三載。執喪過禮。哀毀骨立。杖而後起。己卯冬。服除。拜儀賓府經歷。未幾。陞授繕工監正。是時。士林禍起。同時儕流。奔竄貶黜無餘。先生以久侍經幄。受國恩厚。義不可以含默無言。乃具疏若干言。將一陳于上。雖更得罪黜。不恨。子弟親戚。咸諫止之曰。疏雖上。於事無益。祗重其禍。先生喟然仰天歎曰。一至於此乎。遂焚之。先生自以孤危之蹤。踽踽周行。如浮江之木。泛泛東西。益不喜居中。而欲外補。朝廷亦不惜其去。辛巳春。出爲尙州牧使。其年夏。換移忠州。先生不以疏外自嫌。盡心職事三年。觀察使又以廉能聞。又命褒贈表裏。秩滿。拜司導寺副正。嘉靖丙戌冬。擢重試壯元。陞堂上階。以前在忠州。有軍丁漏失。丁亥春。罷歸鄕里。是年夏。又授羅州牧使。先生旣以道不容於世。進退之難。跋胡疐尾。强之就官。非其好也。爲治務振紀綱。大矯時弊。遂致多口喧騰。然不以此少撓。益自厲焉。己丑夏。風邪乘虛。疾病內搆。不能視事。卽移疾駕車以俟。遂爲觀察使所抑。竟不能焉。然其志將不久於官也。未幾。考課居殿。官居野處。遠近聞之。咸駭以歎。先生之道。吁亦窮矣。又至於此。窮之極也。卽日。輿返里舍。謝絶往來。日以醫藥爲事。疾或作或止。歲餘。庶幾大瘳。庚寅三月。疾復作轉劇。四月十一日。終于家。享年五十有七。夫旣不能於人。而天又不與之年。其知先生者。莫不慟傷而惜之。先生少而聰明穎脫。長而剛毅。不顧流俗是非。涉世逾多。兢危險艱。靡所不嘗。以成其器。好古益篤。前言往行。無有不識。以養其正。故持身整肅。而準繩有截。處心莊栗。而言笑不妄。其接物也。溫然可愛。其臨事也。凜然不可犯。莅官居家。常終日端坐。儼然若齊。無偸惰戲豫之色。雖庸人傲夫。自不覺其起敬。而不敢侮狎也。先生好惡。每與世俗相反。羶薰厚味。世俗皆然。而先生所餐。蔬菜淡如。畫棟丹楹。世俗皆是。而先生所居。僅蔽風雨。世俗所悅者媚順。先生之所賤惡也。世俗所忌者剛方。先生之所自寶也。世俗所競騖者財利。先生之所唾擲不顧也。先生所愛者。佳山秀水。遊賞而忘歸。所好者。典籍辭章。自少至老。未嘗暫輟。自視平生。他物未足以易其樂。所欲與之處者。淸修吉士。幸而遇之。則披心徹肝。論文說古。竟日夜不知厭。所不齒者。貪叨饕餮。視之若糞壤。若將浼焉。宜夫世之與先生者常尠。而疵議者居多也。先生爲詩與文。亦不樂熟軟。力去陳言。獨追古作者爲徒。夫其中之所存。旣拔乎萃。而又博觀古昔。冥探幽搜。擷芳咀華。靡所不至。以至於成。故源流混渾。而氣力雄勁。託興幽遠。而稱物芳美。其存者凡八百餘篇。號訥齋稿。實希世之奇寶也。先生爲政。嚴明一斷。絜持維綱。鉏削荒類。必先夫窮寡無告。而抑豪右兼幷。其一心奉公。惓惓而不懈。未知古君子何如爾。先生立朝。少居於內。而在外者常多。其在諫院一歲。侍講經帷半歲。率不得展其所抱。行其所學。輒以親故。卷而之外。歷一縣二府三州。其綱條法度。有可稱述。而先生之所長者。豈止於斯而已乎。若夫才不爲世好。道不爲世重。命與仇謀。謗隨事集。是則昔之人所不免也。何與於先生哉。先生再娶。先夫人晉陽柳氏。昌平縣令宗漢之女。綾城縣令誼之孫女。有美德淑行。先先生二十四年而卒。夫人生二女三男。男長曰敏齊。金海府使。次曰敏中。進士。能世其業。餘皆夭。後夫人河東鄭氏。生員稅之女。河原君守忠之孫女。生一男。幼。敏古。蔭出監役。 庚寅。葬于光州芳荷洞鳳凰山成才之原。夫人柳氏墓右。衢愚不肖。嘗辱先生。不以鄙夷拒絶。今因先生之子敏齊,敏中之請。義不敢固辭。謹敍家世行業及歷官行事之大槩。俾求誌於作者。嘉靖十年四月日。海南尹衢。謹狀。
    2019-11-15 | NO.17
  • 두암사묘정비
    광주시 북구 두암동 837-1(두암사 내)1977년이 두암사묘정비(斗巖祠廟庭碑)는 魏錫漢 짓고 金容桓(전면) 金鎬永 쓰다. 산정문중 貞烈‧禎熙 건립하다.두암사(斗巖祠)는 장열사(壯烈祠) 옆에 있는 사우로 1850년(철종 1) 우치동에 건립되어 김해 김씨 京파의 중조인 고려조 삼중대광 금녕군(金寧君) 김목경(金牧卿)과 문민공(文愍公) 탁영 김일손(濯纓 金馹孫), 망헌 김광립(望軒 金光立)의 삼위를 봉사하였다. 1977년 장열사에서 독립해 두암사라 하여 김목경을 추배하고 있다. 김목경은 ‘조적(曺頔)의 난’을 평정하여 조정에서 ‘금녕군’의 호를 받았으며 후일에 세속을 떠나 속리산으로 들어갔다.그의 후손들이 묘를 찾지 못하여 장열사에서 제단을 쌓고 함께 제를 올렸는데, 지금으로부터 1984년께 우연히 지석을 발견해 금녕군의 묘를 확인하고 후손이 장열사에서 따로 모셔 두암사를 짓고 모시게 됐다.두암사 건물은 장열사를 중건하면서 뜯어낸 건물을 그대로 옮겨서 다시 지은 것이라 한다. 이곳에서는 매년 음력 3월 13일과 9월 13일에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2018-11-12 | NO.16
  • 매동사묘정비
    광주시 광산구 본량매동길 80(매동마을)1980년매동사는 1980년 건립되었다.梅洞祠廟庭碑는 진주 정복규가 짓고
    2018-12-02 | NO.15
  • 봉산사 묘정비
    서구 용두동 산 79(봉산사)봉산사 묘정비鳳山祠廟庭碑는 현와弦窩 고광선高光善(1855~1934)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의 건립 취지와 그 사당의 주인, 곧 주벽主壁으로 모시는 인물에 대한 추앙의 문장 등이 적혀 있다. 1976년에 묘정비를 세워 기록을 남겼다.전 성균관장 영가永嘉 권중해權重海가 글을 지었고 덕양德陽 기영명奇靈命이 글씨를 썼다. 비문에는 당대 거목들인 송사 기우만, 일신재 정의림, 난와 오계수, 후석 오준선, 석음 박노술, 춘담 기동준 등과 함께 교유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2018-05-31 | NO.14
  • 서강사묘정비
    광주시 남구 방림2동 82-1(서강사 내)1974년서강사는  남구 방림동 현재 숭의고등학교 밑에 위치해 있으며 고려 태사공 윤신달(삼한공신)을 주벽으로 하고 개국백 문정공 윤관, 호조상서 문강공 윤언이, 남원백 벽송 윤위, 함안백 행촌 윤돈, 영평부원군 문현공 윤요 등 6위를 배향한다.묘정비는 1974년에 문중에서 건립하였으며, 비문은 진성 이가원이 지었으며, 후손 윤석오가 썼다.瑞岡祠廟庭碑銘瑞石山光凝天碧芳林花木自千春爰有新祠淸且肅崇爾俎豆秩秩陳萼昔丁未禮成日多士駿奔古法遵疇與刱者曰尹氏東方巨族自詵詵坡平南原與咸安派流雖遠誼彌新六賢洋洋神其假祖臨孫躋皆有倫觥觥太師諱莘達王麗之惕魚甫臾統二蘶勳垂百代肇一家業啓無垠龍淵石函事非誕英雄神異古亦然日月亦痣七黑子良怪八十有二鱗彼筌心號奇數化一詘東京不復伸太保諱瓘諡文肅文佸武憘賦才均豆滿界石穹屹立六鎭歸來淨腥塵原厥事功之自出五經津腴嘿嘗眞北學當年謁正叔斥佛崇儒悟夙因一篇無逸多啓沃愛君丹忠簿蒼旻尙書文康公彦頤經術文章也彬彬天人性命無窮理玄玄妙妙靡不臻四夷聞風俱膽冷宥人望德不敢嗔萬里長空雲一片令日途中觀此身悟來儒仙無二致金剛居士道不貧威號碧松南原伯猗歟晟代德位尊聘于帝庭辭令義且與葉適酬唱頻一展湖南櫌龍手感泣奇男擴亦馴太學章甫詣丹闕胡爲酉京放逐臣澤流綿綿麗不億如稷如契在昌辰敦刺咸州雄才展民安其業不嚬呻時主大嘉厥茂績封伯稱賞曰國珍退休酉坡舊別墅優遊卒歲歌苓榛文杏居然成蔭厚風流老臣髮如銀積累之澤猶未汔迺誕鈴平府院君其諱曰山旬諡文顯好爵來縻蹄台鈞際會忠烈魚水樂承以機密感交紉玉潔金精天授資優哉晩節更嶙珤謙光猶自樵不居究竟學邃德彌醇所以雲仍永不替文章鴻碩復篡紳沙麓之慶更修義0將父家作有莘罄誠竭力報其本崇奉列祖若帝神保源之會育英館刱新理想好經綸妙選俊髦資其讀箇箇人間玉麒麟是花樹敦睦義此是鄕坊風俗淳也世不墜文字業家家竺行孝悌人積善之家有餘慶此理明明不暫煙芸芸有生誰無本我作銘詩告齊民眞城 李家源 謹撰 始祖降生一千八十二年三月日堅 後孫錫五 敬書
    2018-06-13 | NO.13
  • 신륜(辛崙), 通訓大夫光州牧使辛公墓銘
    광주목사 신륜 [光州牧使 辛崙]辛崙(1504年 燕山君 10年~1565年 明宗 20年)은 朝鮮 前期의 文臣으로, 本貫은 靈山. 字는 景立이다. 奉翊大夫 典公判書를 歷任한 曲江 辛斯蕆의 後孫으로, 高祖는 郡事를 歷任한 辛劑이며, 曾祖는 節度使를 歷任한 辛俶晴이며, 할아버지는 黃州判官을 歷任한 辛秀武이며, 아버지는 參議를 歷任한 辛弼周이며, 어머니는 昌原黃氏이며, 夫人은 宣務郞을 歷任한 南廷召의 딸 宜寧南氏이다.어려서부터 學文을 좋아하여 曺植과 交遊하였다. 1546年(明宗 1年) 增廣文科에 乙科로 及第, 成均館學正·博士를 거쳐 典籍에 오르고 다시 刑曹佐郎에 任用되었다. 1550年에는 慶尙道都事·春秋館記注官을 歷任하고, 1552年에는 咸鏡道都事로 任命되었으나 老母를 奉養하기 위하여 赴任하지 않았다. 뒤에 禮曹·工曹·刑曹의 正郎을 지내고 1563年 光州牧使가 되었으나 어머니의 奉養을 위하여 官職을 抛棄하고 돌아와 孝道를 다하였다. 向陽祠에 祭享되었다.辛崙의 墓碣銘을 紹介한다. 1567年(明宗 22年)에 세워진 辛崙의 墓碣의 碑文은 神明舍圖, 破閑雜記 等을 著述한 學者이며 親舊인 文貞公 南冥 曺植이 撰述하였고, 글씨는 朝鮮 前期 第4代 世宗의 셋째 아들로 王子이며 書藝家인 匪懈堂 安平大君의 글자를 모아서 새겼다. 碑文의 初盤部에는 辛崙의 家系圖에 대해 적혀 있으며 中盤部에는 官職生活과 行蹟이, 後半部에는 家族과 子孫의 事項이 적혀 있다.신륜 묘갈 [辛崙 墓碣]有明朝鮮國通訓大夫光州牧使辛公墓銘 幷序友人 南冥 曺植 撰辛氏系出靈山爲東國石宗猶尹姞於周也公諱崙字景立玄祖諱斯蕆仕高麗爲典工判書高祖諱劑爲郡事娶宗簿寺正鄭仁慈之女生節度使俶晴是公之曾王父也郡事當麗季賊旽慕其名欲托以同宗怵以禍福竟不屈祖諱秀武爲黃州判官考諱弼周爲參議娶昌原黃氏生公參議公中弘治丙辰進士燕山政亂遂廢擧子業至正德丁卯中中廟朝文科有文武長才顯敭中外者四十餘年公少好文甫十五歲中進士鄕選嘉靖丙午登第辛氏世樹家聲藍田生美玉固也始調授成均館學諭學正博士陞典籍遷刑曹佐郞伸寃撥伏曹吏逮事參議公之爲正郞者稱之爲淑問如正郞庚戌年授慶尙道都事兼春秋館記注官是年十月丁內虞哀毁踰禮躬執奠饌定省慈圍不入燕室壬子年除咸鏡道都事以母夫人之遠不就遷禮工刑曹正郞爲養乞醴泉郡又乞爲寧海府使癸亥秋又乞爲光州牧使母夫人以年老不任登道遂棄官歸養躬自滫瀡乙丑五月以疾終于家享年六十二娶宣務郞南廷召之女廷召娶竹溪節婦府使安璋之女生夫人是生二子曰汝謹汝誠女嫁司成陳瓘子裕慶汝謹娶生員郭之元女生一男曰膂女幼汝誠娶經歷張世沈女生一男曰胤公狀貌魁峨質性醇尨事親孝理民和應事以實接物以誠言不美華行無虛僞鄕里稱其孝位不稱器爲人所惜夫人端雅有婦規先公十年卒汝謹以植有分於先公且以爲不諛來乞銘 銘曰馬浦之北 靈鷲有神 周楨之降 其辛維申 簪纓苽瓞 非勃其起 仁者之壽於參議 仁者之不 壽唯牧使 賢勞之獨 三已其位 敬色之勤 累朱其轓 惟鄕國有臣 惟玄考有昆 而曾參莫養 而黃媼抱孫 皐景立 不瞑爾目 何以樹之 雙白其玉 君之淵兮子之山 徯我侯兮天送之 後千香絶 石乎在玆隆慶元年丁卯十二月十七日安平大君 書字륜 묘갈 해설유명조선국 통훈대부 광주목사 신공묘명: 서문(序文)을 아울러 쓰다.친구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글을 짓다.신씨(辛氏)는 세계가 영산(靈山)에서 나왔으니 우리나라의 이름난 집안으로 주(周)나라의 윤씨(尹氏), 길씨(姞氏)와 마찬가지이다. 공의 이름은 륜(崙)이고 자는 경립(景立)이다. 현조부의 이름은 사천(斯蕆)이니 고려에 벼슬하여 전공판서를 지냈다. 고조부의 이름은 제(劑)이고 군사(郡事)를 지냈는데 종부시정 정인자의 따님을 맞이하여 절도사 숙청(俶晴)을 낳았으니 이분이 공의 증조부이다. 군사는 고려말년에 역적 신돈(辛旽)이 그 명성을 흠모하고 같은 집안이라 핑계하여 화복(禍福)으로 유혹하고자 하였으나 끝내 굽히지 않았다. 조부 수무(秀武)는 황주판관을 지냈고 부친 필주(弼周)는 참의를 지냈는데 창원황씨(昌原黃氏)를 맞아들여 공을 낳았다. 참의공은 홍치 병진년(1496, 연산군 2)에 진사에 합격하였으나 연산군 때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마침내 과거 공부를 그만두었다가 정덕 정묘년(1507, 중종 2)에 이르러 중종 때의 문과에 합격하였다. 문무에 큰 재주가 있어 내외에 이름을 드날린 것이 40여 년이나 되었다. 공은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겨우 15세에 진사시험의 향시에 합격하였고 가정 병오년(1546, 명종 1))에 급제하였다. 신씨는 대대로 가문의 명성을 세웠으니 남전(藍田: 섬서성에 있는 옥이 많이 나는 고장으로 좋은 집안에서 말한다)에서 옥(玉: 훌륭한 자손)이 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처음에 선발되어 성균관 학유, 학정, 박사에 제수되었다가 전적으로 승진하였다. 형조좌랑에 옮겨서는 원통함을 풀어주고 숨은 죄를 다스리니 형조의 서리 중 참의공이 정랑으로 계실 때 섬기던 사람들이 공을 칭송하여 숙문(淑問: 송사를 잘 다스리는 것)하는 것이 정랑과 같다고 하였다. 경술년(1550)에 경상도도사 겸 춘추관기주관에 제수되었는데 그해 10월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예법에 지나치도록 슬퍼하여 몸을 상할 지경이었지만 몸소 제물을 준비하였고 밤낮으로 어머니를 보살폈으며 내실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임자년(1552, 명종 7)에 함경도도사에 제수되었으나 어머니와 멀리 있게 된다고 부임하지 않았다. 예조·공조·형조의 정랑으로 옮겼으나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예천군수의 자리를 청하였고 다시 청하여 영해부사가 되었다. 계해년(1563) 가을에 또 청하여 광주목사가 되었는데 어머니가 연로하여 길에 오를 수 없게 되자 마침내 관직을 버리고 돌아가 모셨는데 몸소 음식을 만들어 봉양하였다. 을축년(1565, 명종 20) 5월 병으로 집에서 별세하니 향년 62세였다. 선무랑(宣務郞) 남정소(南廷召)의 딸에게 장가갔는데 정소는 죽계(竹溪: 순흥을 말함)의 절부(節婦), 부사 안장(安璋)의 딸에게 장가가서 부인을 낳았다. 부인이 아들 둘을 낳으니 여근(汝謹)과 여성(汝誠)이고 딸은 사성 진관(陳瓘)의 아들 유경(裕慶)에게 시집갔다. 여근은 생원 곽지원(郭之元)의 딸을 맞아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려(膂)라 하고 딸은 어리다. 여성은 경력 장세침(張世沈)의 딸을 맞아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윤(胤)이라고 한다. 공은 용모가 장대하였고 타고난 성품이 순수하고 독실하였다. 어버이를 효로 섬기고 백성들을 화목하게 다스렸다. 일은 진실되게 응하고 남을 성심으로 대하였으며 말은 화려하지 않고 행동에는 거짓이 없었다. 고을 사람들이 그 효성을 칭찬하였으나 지위가 기량에 걸맞지 않아서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부인은 단아하고 부녀자의 법도가 있었으나 공보다 10년 먼저 별세하였다. 여근(汝謹)은 내가 돌아가신 부친과 교분이 있고 또한 아첨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 와서 명을 청하였다. 명하노니,마포의 북쪽에 영취산(靈鷲山)이 신령스러워서나라의 동량을 내려주니 신씨(辛氏)에게 이르렀구나훌륭한 벼슬, 자손이 번창하니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로다.어진 사람으로 오래 산 분은 참의공이고 어질지만오래 살지 못한 사람은 오직 공이라네현명하여 남달리 수고하였으며세 번이나 그 자리를 그만두었구나.공경하는 기색으로 부지런하여붉은 깃발달린 지방관의 수레를 타니나라에는 훌륭한 신하요,조상에게는 훌륭한 후손이라네다만 증자처럼 어머니를 봉양하지 못하고늙은 어머니에게 손자를 맡겼으니그대를 부름에 눈 감지 못하리.어떻게 세울 것인가? 한 쌍의 흰 옥이라.임금의 못은 그대에게 산이니우리 수령을 기다리자 하늘이 보내주시네.천년 후에 향기 끊어져도비석은 여기에 있으리라.융경 원년 정묘년(1567, 명종 22) 12월 17일안평대군(安平大君)의 글씨를 모았다.
    2024-04-09 | NO.12
  • 운리사(벽진서원) 묘정비
    광주시 서구 송풍로 42(풍암동)운리영당이 훼철되고 운리사가 세워지자 운리사 묘정비廟庭碑를 쓴 박석무 전 한국고전번역원 원장(다산연구소 이사장)은 “학향이자 의향인 광주의 상징적 인물이던 선생은 살아계시던 당시에 옥玉 같은 마음과 옥 같은 용모, 이름까지 옥이어서 삼옥三玉이라고 불렸다”고 쓰고 있다. ‘옥 같은 마음’은 운리사와 회재로의 주인공 박광옥이 당대에 어떤 인품의 소유자였는가를 느끼게 한다. 회재 박광옥의 영정은 서구 풍암동 운리사雲裏祠에 있다. 다만 지금은 개보수 중이라 금호동 회재회관 음성박씨 종친회 사무실에 보관되어 있다. 운리사는 2018년 중에 벽진서원으로 변경하여 문중과 청소년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할 예정이다.
    2018-05-25 | NO.11
  • 운암서원 묘정비
    광주시 북구 화암동 235-1 동배마을 앞에 있는 운암서원 내에 있다. 충민사에서 시내 방향으로 조금 더 내려오면 왼쪽에 조그마한 서원 하나가 있는데, 운암서원[雲岩書院]이다. 숙종 32년(1706) 지역 유림들의 청원으로 광주광역시 북구 운암동에 건립하고 조선 중기의 학자 해광(海狂) 송제민(宋濟民, 1549∼1602)을 비롯하여 고경리(高敬履) 송 타(宋 柁) 권 필(權 韠) 신 필(申 鞸) 신한주(申漢柱) 등을 배향하였다.   廟 庭 碑 雲 巖 書 院雲巖書院은 湖南儒林 朴致泰 等 300餘名의 發議로 洪州人 海狂 宋齊民 先生의 精靈을 奉安한 祠宇로써 肅宗 34年(1708)에 光州市 北區 雲巖洞 東背 마을 앞 山에 터를 잡아 建立하였다.海狂 宋先生은 "仁"과 "義"를 갖추신 분으로 湖南義兵 從事官으로 壬辰倭亂 時에 義兵을 일으키어 倭敵을 殲滅하고 軍馬와 軍需 物資를 調達하여 戰爭 터에 보냈고 임금에께 萬言疏를 作成하여 보내는等 救國의 一念으로 義兵活動에 專念하시였고 孔子께서 春秋를 지으셨던 義와.장재(張載)가 學堂의 한쪽 窓에" 어리석게 보일지언정 바른길로 나아가라고"써붙이며 强調하였든 仁을 同時에 갖추신 분이시다. 朝奉大夫司憲府 持平에 贈되시었다. 이듬해 先生의 사위 石洲 權 필(韠)先生을 配享하였고 石洲 權 先生은 安東人으로 朱子學에 通達하고 詩文에 뛰어나 童蒙敎官에 제수되었으나 不就하고 學文을 하고 남는 餘暇마다 高竹淸風을 題材로 삼아 詩賦를 지었다. 특히 훌륭한 文章家로 後儒들의 尊崇을 받았으나 光海祖에 宮柳詩를 지어 親鞫을 맡고 流配 途中 卒하고 그後 持平에 贈되시었다. 그 60年後에 祠宇 重修와 더불어 큰아드님이신 花菴 宋 타 先生은 海狂 先生의 長子로 天性이 至孝하였고 丁酉再亂時 捕虜가 되어 배에 실려 가든중 閑山島에 이르러 홀로 倭寇의 칼을 脫取하여 倭寇 數十名을 죽이니 살아 남은 倭寇가 逃亡하여 倭寇陳營에 가서 다시 처들어오니 衆過不足으로 다시 잡히시니 바다에 投身하면서 나는 光州 사는 누구에 아들인데 여러분 중에 살아 도라가신 분이 계시면 나의 父母님께 이事實을 傳하여 주라는 遺言을 남기고 殉節 하셨으며 그後에 朝奉大夫司憲府 持平에 贈되시었다. 滄浪 高敬履 先生은 여러 차례 名山을 찾아 다니며 修道하였고 올바른 길을 分別하고 거짓들을 씻어 버리니 公의 靈 靈은 萬物의 根源 인 太極에 머문다고 했다. 靜友堂 申公은 나라에서 벼슬을 授與하려 해도 받지 않고 終身토록 國家의 悲運을 슬퍼함이 父母喪을 當한겄 같이 하고 義兵을 糾合하고 王統을 保位하였으니 그의 忠 과 孝를 잘알수 있다.道溪 申公은 經學硏究에 全念하였고 當代및後代 儒者들의 模範이되었다.이상과 같이 六位를 모시였으나 그후 高宗 一年에 全國의 書院撤廢令에 따라 高宗 五年(1868)書院이 毁撤되어 있다가 1994年부터 書院 復元事業을 儒林과 門中 宗員들의 誠金으로 始作하여 1998年(戊寅)十月에 竣工을 하여 現在는 海狂 宋 齊民 先生을 主壁으로 하고 石洲 權 韠 先生과 花菴 宋 柁 先生 三賢을 奉安하고 있다.
    2018-06-18 | NO.10
  • 월봉서원 묘정비
    광주시 광산구 광곡길 133 너브실마을월봉서원 연혁과 고봉 기대승 선생의 행장 등을 기록한 묘정비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을 기리는 월봉서원은 고봉 사후 7년만인 1578(선조 11)년 호남유생들의 공의로 지은 신룡동의 망천사(望川祠)로부터 비롯되었다.그 후 정유재란의 화로 피해를 입고 월봉산 아래로 옮겨 지으면서 1654년(효종 5) 월봉(月峰)으로 사액되었으나 1868년 대원군 서원철폐령 때 훼철의 비운을 맞았다. 이어 1941년 현재의 위치에 빙월당을 짓고 1978년 증축을 거쳐 1981년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고봉은 본관이 행주로 아버지 진(進)과, 어머니 진주인 강영수(姜永壽)의 딸 사이에 광주에서 태어났다. 기묘명현의 한 사람인 기준(奇遵)이 그의 삼촌이다. 퇴계 이황의 문인이다. 그는 소과는 물론 대과를 장원으로 급제한 엘리트코스를 밟고 조선조 학문의 최고 기관인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한 정통관료이자 올곧은 유학자이다. 특히, 이황과의 편지를 통한 8년간의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논쟁은 조선유학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당시 퇴계는 58세의 대학자이자 관직이 대사성인데 비해 그는 이제 갓 벼슬길에 나선 32살의 신출내기였다. 이러한 지위나 나이 차이에 구애받지 아니하고 자기주장을 펼치고 나중에는 서로가 인간적으로 신뢰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는 이황의 사단, 즉 인(仁), 의(義), 예(禮), 지(智)는 이(理)에서, 희(喜), 노(怒), 애(哀), 낙(樂), 애(愛), 오(惡), 욕(欲) 등 칠정은 기(氣)에서 발생한다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반대하고 “사단칠정이 모두 다 정(情)이다.”라고 하여 주정설(主情說)을 주장했다. 제자로는 정운룡, 고경명, 최경회, 최시망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고봉집>, <논사록>·<주자문록> 등이 있고 시호는 문헌(文憲)이다.고봉이 얼마나 퇴계를 존경했는지는 한편의 시 “꿈에 퇴계선생을 뵙다”에 잘 나타나 있다. 前夜依俙杖屨陪 지난밤에 어렴풋이 스승을 모시었고今宵款曲笑談開 오늘 밤에도 정답게 웃고 말씀하셨네.分明一念猶憂世 분명한 생각으로 아직도 세상걱정하시니可識先生不著梅 선생께서 매화에만 집착 않으심을 알 수가 있네  월봉서원 묘정비문 병서 조선조 명종ㆍ선조 연간에 문운(文運)이 빈빈(彬彬)하고 사류(士類)가 성(盛)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전대(前代)에 겪은 사화(士禍)의 남은 불씨가 아직도 척신(戚臣)과 간인(奸人) 사이에 남아 있어서 은밀히 선비를 해치는 재앙을 빚고 있기도 했다. 이런 때를 당해 힘써 독류(毒流)를 배척하고 청의(淸議)를 끌어당기며 의리를 밝혀 학문이 이룩되고 도가 높아 우뚝하게 유종(儒宗)이 된 분은 고봉(高峯) 기 선생이시다. 일찍이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가 되어 경연(經筵)에 입시하여 아뢰기를 “천하의 일에 옳고 그름이 없을 수 없습니다. 옳고 그름을 밝힌 뒤에야 사람들이 마음으로 복종하고 정부의 명령도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입니다. 대저 옳고 그름은 비단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실상 천리(天理)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한때 비록 가리고 베어내 버린다 하더라도 그 옳고 그름을 아는 본심(本心)은 끝내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였고, 또 아뢰기를 “언론 창달(言論暢達)은 국가의 중대한 일입니다. 언로(言路)가 열려 있으면 국가가 평안하고 언로가 막혀 있으면 국가가 위태롭습니다.” 하였으며, 또 어진 이를 등용하는 도(道)를 논하기를 “학교 교육을 밝게 닦아 인재를 양성해서 그 성취도에 따라 뽑아 등용할 것이며, 능히 국가의 치란(治亂)과 백성의 기쁨ㆍ슬픔을 헤아려 아는 자와 더불어 정치를 하면 묵은 병폐(病弊)를 개혁하고 앞사람들이 미처 하지 못한 일들을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치를 논하고 주장을 세움에 있어서 도를 지키지 않음이 없었다. 상세한 것은 《논사록(論思錄)》에 실려 있다.선생의 휘는 대승(大升)이고, 자는 명언(明彦)이며, 호는 고봉(高峯)이고 또 존재(存齋)라고도 한다. 성은 기씨(奇氏)로 행주(幸州) 사람이다. 고(考)의 휘는 진(進)이고 호는 물재(勿齋)이며, 호가 복재(服齋)인 아우 준(遵)과 더불어 학행으로 세상에 저명했다.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복재가 화를 입자 세상일에 뜻을 멀리하고 광주(光州) 고룡향(古龍鄕)으로 물러나 살게 되었다. 비(妣)는 진주 강씨(晉州姜氏)로 사과(司果) 휘 영수(永壽)의 따님이다. 중종(中宗) 22년 정해년(1527) 11월 18일 선생께서 고룡리(古龍里) 집에서 태어났다.공은 천자(天資)가 빼어나고 꿋꿋하여 어릴 적부터 지절(志節)이 있었으며 성품이 또한 강개(慷慨)해 항상 도의(道義)를 선양(宣揚)하고 퇴패적(頹敗的)인 풍조를 일소해서 천박한 학문에 대해 모범을 보이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음식을 물리치고 눈물을 흘렸으며 두문불출(杜門不出)했다. 〈자경설(自警說)〉을 지어 스스로를 경계(警戒)했다.기유년(1549, 명종4)에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였고, 을묘년(1555)에 물재공(勿齋公)의 상을 당해 여묘(廬墓)로 삼년상을 마쳤다. 《주자문록(朱子文錄)》을 저술하였다. 무오년(1558) 7월에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선생과 일재(一齋) 이항(李恒) 선생을 찾아뵈었고, 10월에 문과(文科) 을과(乙科) 제1명(第一名)으로 과거에 올라 권지 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었으며, 이달에 퇴계 선생을 서울에서 찾아뵈었다. 추만(秋巒) 정지운(鄭之雲)이 〈천명도(天命圖)〉를 선생에게 보여 주었다. 기미년(1559) 3월에 퇴계 선생에게 편지를 올렸는데, 이로부터 8년여 동안 두 선생께서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논변(論辨)했다.계해년(1563, 명종18)에 거듭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에 제수되었으며 사관(史官)이 되고 홍문관부수찬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弘文館副修撰兼經筵檢討官春秋館記事官)에 올랐다. 주강(晝講)에 입시해 “국가의 안위는 재상(宰相)에게 달려 있고 임금의 덕이 성취되는 것은 경연(經筵)에 책임이 있다.”라고 하였다. 을축년(1565)에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과 지제교(知製敎)가 되고, 또 이조정랑 겸 교서관교리(吏曹正郞兼校書館校理)로 임명되었으나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12월에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을 진국원(鎭國院)으로 찾아보고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을 논하였다. 소재가 나정암(羅整菴)이 지은 《곤지기(困知記)》를 옳다고 주장하니, 선생께서 〈곤지기론(困知記論)〉을 지어 분변해 주었다.정묘년(1567) 5월에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로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관서(關西)로 가서 허국(許國)과 위시량(魏時亮) 두 사신을 영송(迎送)했다. 마침 명종이 승하(昇遐)하여 중로(中路)에서 부음(訃音)을 들었다. 두 사신은 모두 중국의 명유(名儒)로, 많은 질문을 하였으나 선생께서 응대(應待)하되 상(常)과 변(變)을 강론하는 것이 다 적절하였다. 조정에 돌아오자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제수되었고, 조강(朝講)에서 사림이 화를 입는 이유 및 선정(先正) 조광조(趙光祖) 등 기묘제현(己卯諸賢)의 신원(伸寃)을 건의하였으며 어진 이를 등용하는 도를 자세하게 논하였다. 여러 번 옮겨 대사성(大司成)과 대사간(大司諫)에 두 번이나 임명되었다.경오년(1570, 선조3)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한강으로 나와 하룻밤 묵는데 서울의 사대부들이 조정을 비우다시피 전송(餞送)을 나왔다. 5월에 고마산(顧馬山) 아래에 자그마한 집을 지어 낙암(樂庵)이라 이름 붙였으니, 퇴계의 글 가운데 “가난할수록 더욱 도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었다. 이보다 앞서 선생께서는 청량봉(淸凉峯) 아래에 자그마한 집을 짓고 은거하며 공부할 곳으로 삼았는데 귀전(歸全)이라 이름하였다. 부모가 온전히 낳으시매 자식이 온전히 몸을 보전하여 돌아간다는 뜻을 담은 것이다. 문인으로 좇아 배우는 자가 더욱 많았으며 사림의 중망(重望)이 선생에게로 돌아왔다. 여러 번 소명(召命)이 있었으나 소장을 올려 사퇴(辭退)했다.임신년(1572, 선조5) 2월에 종계변무 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또 소명이 있게 되니, 선생께서 사명(使命)이 중대한지라 부득이 조정에 나아가기로 하였다. 중도에서 대사간에 임명되고, 7월에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제수되었다. 10월에 벼슬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당대의 많은 사대부가 한강까지 전송을 나왔다. 천안(天安)에 이르러 갑자기 둔종(臀腫)이 생겼고 태인(泰仁)에 이르자 더욱 위독해졌다. 매당(梅堂) 김점(金坫)이 달려와 병문안을 하니, 선생께서 “목숨이 길고 짧은 것은 명(命)이고 죽고 사는 것은 천(天)이니 모름지기 관념(關念)하지 마시오. 다만 어릴 적부터 문한(文翰)에 힘쓰다가 드디어 성현(聖賢)의 학문에 뜻을 두었는데, 중년 이래로 비록 스스로 체득(體得)한 것이 있었다 치더라도 다만 공부가 독실(篤實)하지 못해 처음 마음먹은 바에 부응하지 못할까 항상 저어하였지만 늠름(凜凜)하게 날로 반성하고 조심하였습니다. 만약 공부한 이들 사이에서 옛 성현의 진면목(眞面目)을 헤아려 논한다면 나도 또한 부끄러울 것이 없지만 단지 한 일들이 옛사람에게 미치지 못하니 그것이 두렵습니다.” 하였다. 이튿날 길을 재촉해 김공(金公)의 집에 이르러 이틀 만에 돌아가시니, 11월 1일이었다. 이때가 밤이 4경인데 갑자기 바람이 거세게 불고 우레와 번개가 치므로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향년 46세였다.임금이 선생의 병환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특별히 어의에게 약을 갖고 달려가 치료하게 하고, 또 위문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지만 다 미치지 못하였다. 임금이 부음을 듣고는 크게 슬퍼하였고, 간원(諫院)에서 아뢰기를 “대사간 기대승은 어릴 적부터 성현의 학문에 종사하여 견식(見識)이 고명(高明)했고, 이황(李滉)과 더불어 의리(義理)를 논변하니 앞사람이 발명하지 못한 바를 많이 발명했으며, 경악(經幄)에 입시해서 진술하고 계옥한 것이 모두 성제(聖帝)ㆍ명왕(明王)의 도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온 세상이 추앙하고 존중해서 유종(儒宗)이 되었으나 불행히도 병이 있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졸(卒)하였습니다. 가세(家勢)가 청빈(淸貧)해 상장례(喪葬禮)를 치르기가 어려우니 청컨대 본도(本道)에 명해서 넉넉하게 도와줘 나라에서 선비를 높이고 도를 중히 여기는 뜻을 보여 주소서.” 하니, 상이 이에 따랐다.선생께서 평소에 주대(奏對)한 말씀들을 상이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1권으로 기록해서 《논사록(論思錄)》이라 이름 붙였다. 시문(詩文) 6권과 《주자문록》4권, 퇴계와 왕복한 서간(書簡) 3권과 《양 선생 이기왕복서(兩先生理氣往復書)》 상하 2권이 간행되었다. 증 수충익모광국 공신(輸忠翼謨光國功臣)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 의금부 성균관 춘추관사(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義禁府成均館春秋館事) 덕원군(德原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선생께서 돌아가신 후 7년 되던 해인 무인년(1578, 선조11)에 사림이 뜻을 모아 고마봉(顧馬峯) 아래 낙암동(樂庵洞)에 사당을 건립하였다. 이때에 황강(黃岡) 김계휘(金繼輝) 공이 본도의 감사(監司)로 있으면서 힘을 많이 썼고 또한 강진(康津)의 언답(堰畓) 30여 석지(石地)를 서원으로 넣어 주었다. 그 후에 송강(松江) 정철(鄭澈) 공이 감사가 되어 또한 많이 돌보아 주었고 노비와 전토(田土)도 지급해 주었다. 임진왜란 후에 망월봉(望月峯) 아래 동천(桐川) 위로 이건(移建)하였으며, 효종 5년 갑오년(1654)에 월봉서원(月峯書院)으로 사액이 되었으며, 6년 을미년(1655) 4월에 편액을 맞이하고 예랑(禮郞) 원격(元格)이 제문(祭文)을 받들고 와서 치제했다. 현종 10년 기유년(1669)에 중창(重刱)을 했고, 12년 신해년(1671)에 문간공(文簡公) 눌재(訥齋) 박 선생과 문충공(文忠公) 사암(思菴) 박 선생을 추향(追享)하였으며, 숙종 9년 계해년(1683)에 문원공(文元公) 사계(沙溪) 김 선생을 추향하였고, 문경공(文敬公) 신독재(愼獨齋) 김 선생을 종향(從享)하였다. 정조 12년 무신년(1788) 4월에 예조 좌랑(禮曹佐郞) 박흥복(朴興福)이 명을 받들고 와서 치제하였다. 고종 5년 무진년(1868)에 훼철(毁撤)되니 사림과 자손이 모두 슬퍼하고 통탄해 마지않았다.광복 전 무인년(1938)에 문중에서 논의가 발의되어 계획을 세우고 재정을 모아 광주시(光州市) 광산구(光山區) 광산동(光山洞) 광곡(廣谷)에 빙월당(氷月堂)을 중건하여 강당으로 하고 광복 후 기미년(1979)에 지방문화재로 등록되었으며, 사림과 본손(本孫)이 당국에 건의하여 국비로 임술년(1982)에 숭덕사(崇德祠)와 내삼문(內三門)을 세웠고, 계해년(1983)에 장판각(藏板閣)을 지었으며, 경오년(1990)에 명성재(明誠齋) 4칸과 존성재(存省齋) 4칸 및 외삼문(外三門)을 세웠다. 신미년(1991)에 서원을 복원해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의전(儀典)을 순성(順成)했으며 3월 상정일(上丁日)에 향사하게 되었으니, 어찌 사문의 큰 다행이고 사림의 성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루는 예손(裔孫) 대종회(大宗會) 회장 세훈(世勳)과 서원복원회(書院復元會) 회장 세탁(世鐸)이 나를 성균관(成均館)으로 찾아와 묘정비문(廟庭碑文)을 청탁하니, 내가 비록 그럴 사람이 못 되지만 어찌 감히 사양하리오. 대략 위와 같이 서술하고 다음과 같이 명한다.미묘를 정밀하게 연구하니 / 精究微妙도체를 꿰뚫었네 / 道體透洞널리 보고 조예가 뛰어나서 / 博覽超詣탐구하고 토의해 종합하고 분석하였네 / 探討約綜주대한 말씀은 / 奏對之辭논사록으로 외우고 / 論思以誦사칠이기설은 / 四七之說철학의 지표라 칭송하네 / 指南以頌법도 지키기를 준엄하게 하니 / 典則峻嚴예학에도 달통하였네 / 禮學達通많은 선비 추앙해 / 多士追仰사당 세워 받들고 / 建祠供奉백세의 모범 되니 / 百世矜式월봉이라 사액하였다네 / 賜額月峯경과 의 함께 세웠으니 / 敬義偕立길이 뒤를 따르리 / 永年隨踵서기 1998년 무인 5월 상한(上澣)에 성균관장(成均館長) 후학(後學) 경주(慶州) 최근덕(崔根德)은 삼가 짓고 번역하다.
    2018-12-04 | NO.9
  • 유애서원 묘정비
    광주시 광산구 용아로 460(경장각)유애서원은 광산구 흑석사거리 부근에 1754년 시정 유애사로 건립되어 대원군의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2005년 유애서원으로 복원하여 성균관에 등록하였다. 광주 유림들의 주관으로 매년 (음)2월 20일 문정공 석탄 이신의 선생의 춘향제를 봉행하고 있다. 석탄石灘 이신의李愼儀(1551~1627)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행촌 민순을 스승으로 수학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 300여명을 이끌고 왜적에 맞서 싸웠으며, 그 공로로 선무원종공신에 녹훈 되었다. 광해군 때에는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 유폐에 대하여 목숨을 걸고 항소하여 변방인 회령으로 위리안치 유배되었다. 이후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형조참의, 형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문정文貞의 시호를 하사 받았으며, 고양의 문봉서원과 괴산의 화암서원, 광주 유애사에 배향되었다.석탄 이신의는 당대에 충의와 절의의 선비로 이름이 높았으며, 해주목사를 마치고 돌아갈 때에는 온 고을 백성이 그의 길을 막아설 정도로 백성을 사랑하고 어진 정치를 폈던 관리였다. 회령의 유배 시절 거문고를 구해 지은 송松,국菊,매梅,죽竹의 사우가四友歌는 윤선도 오우가보다 24년이나 앞서 지어진 작품이다. 석탄집을 비롯한 이신의 종가 소장 고문서는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25호로 지정되었으며, 명문이 새겨진 400년이 넘는 석탄금과 선조어필 병풍은 국립광주박물관에 기증하여 전시되고 있다. 石灘李愼儀先生神道碑銘은 우암 송시열이 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찾을 수 없었다.경장각이 위치하고 있는 하남 흑석동 시리마을은 옛부터 감이 많이 나는 곳이라 하여 「감남징이」라고 하였다가 그후 시정枾亭과  이동李洞을 합하여 시리枾理라 부르게 되었다 . 조선조 인종때의 명신名臣 이신의공李愼儀公의 후손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지금은 광주와 하남간 도로 확장공사로 교통의 중심지역으로 변모하고 있으며 공단工團으로 들어가는 하남산단중앙로의 길목이다. 
    2018-12-02 | NO.8
  • 장렬사묘정비
    광주시 북구 동문대로112번길 99(장렬사 내)2009년이 장렬사묘정비(壯烈祠廟庭碑)는 이석종(李錫鍾)이 글을 짓고 김종태(金鍾泰)가 해석하고 쓰다.
    2018-11-12 | NO.7
  • 재명석등(在銘石燈)
    광주시 동구 광산동 13번지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호석등롱(石燈籠)은 광주 성내면(城內面)에 있던 고비명(古碑名)이다. 남내리(南內里)에 소재하고 신라시대 유물이다.  옛 광주 읍성 남문안의 대황사터에 있었던 석등이다.8각 기둥에 "무진년에 임금이 오래 살고 나라가 편안하기를 바라며 세웠다."는 글이 새겨져 있어 '재명석등'으로 부르고 있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등양식을 따른 고려전기 석등으로 나주 서문 석등과 비교되어 11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원래 대황사의 옛터에 남아있던 것을 도청 앞 무덕전 앞마당 담장 안에 옮겼다가 공사로 인해 현재의 자리에 세웠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의 일반적인 석등양식을 하고 있으나, 당시에 비해 조각기법이 조잡하고 섬세하지 못하다. 석등의 가운데 기둥에는 ‘무진(戊辰)’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조각양식과 관련지어 볼 때 고려 전기 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옛 전라남도 도청 앞뜰에 놓여 있는 8각 석등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3단의 받침을 두고, 위에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올렸다. 받침부분은 길쭉한 가운데기둥을 사이에 두고, 아래 ·위 받침돌에 연꽃무늬를 대칭적으로 새겼다. 화사석은 4곳에 창을 두었으며, 그 위에 얹어진 지붕돌은 규모가 작아서인지 다른 부재들과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광주 동구 광산동 13 옛 전남도청안에 있었다. 경양방죽, 보들 땅이름이 있다. (조선지지자료)
    2018-07-03 | NO.6
  • 포충사묘정비
    광주시 남구 포충로 767(원산동) 포충사 內원래 포충사는 이 자리였으나 1980년 동쪽에 새롭게 포충사를 지으면서 사당 기능을 그곳으로 넘겨주었다.광주광역시 기념물 제7호인 포충사(褒忠祠)는 임진왜란 때 호남의병을 이끌고 금산(錦山)싸움에서 순절한 고경명(高敬命, 1533~1592) · 종후(從厚, 1554~1593) · 인후(因厚, 1561~1592) 3부자와 유팽로(柳彭老, 1554~1592) · 안영(安瑛, 1564~1592)을 모신 곳이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장성의 필암서원과 함께 헐리지 않았던 전남지역 2대 서원 中 하나이다.이 건물은 왜란 후 호남유생들이 충의로운 인물을 기리고자 세웠는데 1603년 고경명의 후손과 제자인 박지효(朴之孝) 등이 임금에게 청하여 '포충(褒忠)'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1980년에 새로운 사당과 유물전시관(正氣館) · 내외삼문 · 정화비 및 관리사무소 등을 세웠고 이때 옛 사당을 보수하면서 충효당(忠孝堂) · 청사영당(晴沙影堂) · 전사청(典祀廳) · 고직사(庫直舍) 등을 철거하였다. 그러나, 옛 사당과 동 ·서재는 본래의 위치에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된 채로 남아있다. 포충사에 소장되어 있는 문적(文籍) 4종 9점은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2018-06-11 | NO.5
  • 학산사 묘정비
    광주시 서구 불암길 82-100(서창동)1592년 임진왜란 때 충남 금산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순절한 삽봉 김세근 장군의 업적을 새긴 비이다. 1974년(갑인년)에 유림 지도자인 안동 김윤동金潤東이 글을 지었다. 묘정비 내용은 극락강변 팔학산 아래에 건물을 짓고 창렬단이라 하였다. 고제봉, 유월파, 안청계, 고학봉 등과 함께 전북 금산의 와평전투에서 임진년 7월 10일 순절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958년 학산사가 건립되면서 창렬문으로 현판을 바꾸었다.
    2018-05-25 | NO.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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