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72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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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신재 정의림- 영귀정기 詠歸亭記
- 정의림 일신재집 권14鄭義林(1845~1910) 《日新齋集》詠歸亭記往在丁亥秋 余從諸友後 風乎瑞石 浴乎映江 詠而歸於富春之野 因以創設規約 為春秋講聚之擧 始以人衆儀繁屬鉅村輪會 擇閒野設行 行之稍久 會者愈夥 村力難繼野處多暴 人莫不病之 辛卵九月龍里之會 經室之議起壬辰春卜地于七松之里 秋設役 越明年冬十二月落之其房室廳堂 牖戶序廂 端密宏敞 可以爰居爰處 然是舉也以冷希殘力 辛勤拮据 積歲積年 乃始見就者 其意將欲何為耶 為尋寂耽閒之計耶 爲燕飲玩戲之資耶為作文干進之所耶 嗚乎 士生斯世 欲求爲人之道非學問不可 學問之道 非師友不可 所以親師友而道問學者亦不可以無其所 庠序學校 固明倫立教之地 而三代以降導率不古 且在朝市城郭之中 多奔競熱鬧之意 少寂寞寬閒之趣此書院所由起也 然書院之䂓 又不如古 則今日之士所從遊業恐無以多乎此矣 遊此室者 以小學立基本以大學定規模 入則愛親敬兄 出則隆師親友 立心以忠信持身以端莊 講討以明之 規警以督之 不厭不改日究遠大 則下可以立家範正鄉俗 上可以勵世道補國光此是三代學校之遺制 而亦今日經始之意云爾
- 2020-06-06 | NO.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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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덕함(林德涵)에게 답함경오년(1690) - 농암집 제13권
- 임덕함(林德涵)에게 답함경오년(1690) - 농암집 제13권 :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1651~1708)별지에 하신 말씀을 보니 고명의 뜻이 더욱 고마웠습니다. 앞서의 편지에 말씀드린 학문을 하는 공부는 다만 한때의 소견을 근거로 써 보내어 가르침을 청한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그처럼 칭찬해 주시니, 이는 아마도 고명께서 남이 선행하는 것을 도와주기를 좋아하시어 우선 그런 말씀으로 너그럽게 보아주고 앞으로 더 잘하도록 바라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 말의 요지가 크게 틀리지는 않았다는 것을 또한 알 수 있으니, 이 점이 저에게는 매우 다행스럽습니다.다만 한낱 말만 잘하고 힘써 실천하여 실효를 거두지 못하니 이 점이 부끄럽습니다. 고통스러운 눈병이 사실 글을 보는 데에 방해가 되긴 하겠지만 주 선생(朱先生)이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한가로이 앉아 있음으로 인하여 조용히 심성을 함양하는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요. 훗날 또 말씀하시기를, “일찍 눈이 어두워지지 않은 것이 매우 한스럽다.”라고 하셨는데, 이는 정말 실제로 겪은 뒤에 한 말로서 농담으로 보아 넘길 수 없는 것입니다.우리들이 학문을 할 때에는 암송을 많이 못 하고 강론을 정밀히 못 하는 것을 근심할 것이 아니라 바로 심지를 단단히 지키고 본성을 함양하는 공부에 혹 집중하지 못하는가를 근심해야 하니, 만약 지금처럼 고요히 앉아 있는 기회에 책을 펼쳐 읽는 공부를 줄이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본원을 함양하는 데에 집중한다면 그 효과가 반드시 독서보다 진일보하는 점이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지난날 읽었던 글 중에 암송할 수 있는 것을 반복하여 깊이 연구하고 자세히 이해한다면, 이러한 공부가 또 어찌 책만 두루 많이 보는 것에 비할 바이겠습니까. 그렇다면 고명의 병은 하늘이 훌륭한 인재로 만들기 위해 내린 시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니 근심할 것이 못 될 듯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주 선생이 만년에 오로지 《맹자(孟子)》의 구방심장(求放心章)을 가지고 학자들을 이끌고 깨우쳐 주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노파심이 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상산(陸象山)과 왕양명(王陽明)의 무리 또한 이 말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그들의 뜻은 마침내 한낱 이 마음 찾기만을 일로 여기자는 것이었고 독서하고 궁리(窮理)하기를 더 이상 그와 병행하지 않았으니, 이는 주 선생이 사람을 가르친 뜻과 같지 않습니다. 털끝만한 차이에서 걷잡을 수 없는 잘못이 파생된 것이니, 이 또한 잘 살피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요컨대 이 한마디 말이 학문을 하는 데에 있어 기초요 본령이며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부분임을 알아야 합니다.저는 이전에 이 한 가지가 없었기 때문에 하는 일마다 모두 구차하고 지리멸렬하여 일에 대처할 때에는 무력하여 활기가 없고 이치를 볼 때에는 범범하여 정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보고 이해한 것이며 강설하여 얻은 것일지라도 모두 있는 듯 없는 듯 흐리멍덩하여 내면적으로 응집된 것도 없고 외면적으로 응용할 수도 없었으니, 학문을 이처럼 한다면 어찌 한평생을 허비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을 생각하면 매우 두렵습니다.고명의 병폐가 꼭 이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두 가지 비슷한 점이 있는 듯합니다. 저는 그래서 고명께서 《맹자》의 이 말에 종사하여 오로지 일상생활에 대하여 실제적으로 살피고 실제적으로 수습하여 근본을 북돋기를 내심 바라는 바이니, 그렇게 한 뒤에야 독서하고 궁리하는 공부가 비로소 귀착되는 바가 있어 한 치, 한 자를 얻어도 모두 자신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저는 근래에 이러한 뜻을 매우 분명히 알긴 했지만 타고난 기품이 조급하고 또 본심을 잃어버린 지가 벌써 오래된 까닭에 갑작스레 수습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하루 동안에 마음이 보존된 때는 드물고 도망간 때가 많으며 맑은 때는 적고 어두운 때가 많으니, 이 때문에 매우 마음이 유쾌하지 못합니다.책을 읽는 공부마저 계속하지 못하여 더욱 걱정입니다. 《논어(論語)》는 아직 절반도 보지 못하였는데 슬프고 쓰라린 마음과 질병으로 계속 고통스러워서 독서의 진도가 제대로 나가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리고 한창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를 교정하는 일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공부하는 힘이 분산되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더욱 전일하고 정밀하게 공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주자대전차의》는 우옹(尤翁)이 지은 것으로서 《주자대전》에 처음부터 주석을 달았는데 20여 권쯤 됩니다. 근년에 간행하자는 대신(大臣)의 논의로 인해 성상께서 옥당에 교정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제가 그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의심스러운 부분을 보고는 어쩔 수 없이 그러한 부분마다 저의 의견을 써내게 되었습니다.노선생(老先生)이 살아 계실 적에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수정해야 한다고 하신 부분이 열예닐곱 군데가 됩니다. 그런데 불행히 그 작업을 마치기 전에 급작스레 오늘의 화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듣건대 노선생이 임종하실 적에 간절히 이 일을 부탁하셨다 하니 그 뜻이 정말 비통하다 하겠습니다.지금 사안은 비록 이전과 다르지만 우선 의심스러운 부분을 모두 풀이하여 문인(門人)들과 상의하게 되기를 기다리고자 합니다. 저의 견해를 비록 이따금 드러내어 밝힌 부분이 있긴 하지만 대체로 문장의 뜻을 훈고한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의리상 중요한 부분도 이따금 있기는 하나 많지 않습니다. 이 책의 전말에 대해서 어쩌면 듣지 못했을 듯하므로 아울러 언급합니다.고명께 찾아와서 묻고 배우는 선비들이 상당히 있는지요? 전에 들으니, 광주(光州)에 박중회(朴重繪)라는 사람이 있고 영암(靈巖)에 양득중(梁得中)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모두들 후배 가운데 수재라고 칭찬한다 하였는데 그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인물과 문장, 학문이 모두 어떠합니까? 부디 품평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세상에 우리 유학을 공부하는 자가 없지는 않으나 성심으로 진보하여 뭔가 크게 이룰 수 있다고 기대할 만한 자는 드문 것 같습니다. 사우(師友)간의 도가 상실된 지 오래되어 모든 가르치고 배우고 강론하는 것들이 대체로 다 허울뿐이고 더 이상 실제로 이끌어 주고 진정으로 절차탁마하는 경우가 없으니 이러한 버릇이 오래되다 보면 어찌 이처럼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비단 인재를 찾아보기 어려울 뿐만이 아닙니다. 배우러 오는 사람이 있다면 이러한 뜻을 살피고서 맞이하고 이끌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성경(成卿 조성기(趙聖期))이 마침내 저세상 사람이 되어 버렸으니 서글픕니다. 그의 학문은 비록 그다지 바르고 합당하지는 못하나, 중요한 것은 사색이 깊고 식견이 환하여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높이는 공부에 있어서 터득한 것이 실로 깊었으니, 근래의 선배들 중에 찾아보더라도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륜 지키기를 좋아하고 우의를 돈독히 하여 그 영향이 크고 넓었으며 후학을 열심히 가르친 것으로 말하면 더욱 그를 잊지 못하게 하니, 그를 생각할 적이면 슬프고 안타깝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논맹정의(論孟精義)》도 반평생을 보고 싶었으나 보지 못하였습니다. 언젠가 우옹의 말씀을 들으니, 지난날 소설을 보니 중국 사람들도 보지 못했다고 했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연경(燕京)의 저자에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근년에야 비로소 사신 갔다 온 사람을 통하여 이른바 《주자유서(朱子遺書)》라는 책을 얻게 되었는데, 주자가 편집한 책들이 다 그 속에 들어 있어서 《근사록(近思錄)》, 《연평답문(延平答問)》, 《상채어록(上蔡語錄)》 같은 글들이 모두 한 책으로 묶여 있었고 《논맹정의》도 그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이 책은 근년에 간행된 것으로서, 이 책이 우리나라로 오게 된 것은 정말 크나큰 다행입니다.반드시 이 책을 보고 난 뒤에야 두 선생과 그 이하 여러 문인들의 학문의 깊이와 순수성을 자세히 보고 더욱 확고히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혹문(或問)》에 논한 여러 설들의 시비와 득실은 정말 고요(皐陶)의 판결처럼 털끝만치의 잘못도 없고, 《집주(集註)》의 풀이는 지극히 정밀하고도 정확하여 한 글자 한 구절도 더하거나 뺄 수 없었으니 정말 정밀한 저울로 단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요즈음은 민가에 많이 소장하고 있을 것이니, 조만간에 한번 보고 싶다면 구해 보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주-D001] 임덕함(林德涵)에게 답함 : 작자의 나이 40세 때인 1690년(숙종16)에 쓴 것이다. 임덕함의 이름은 영(泳, 1649~1696), 자는 덕함(德涵), 호는 창계(滄溪), 나주임씨 정자공파이며 첨지중추부사 서윤공(庶尹公) 일유(一儒)의 아들로 몽촌공 타의 손자다. 이단상(李端相), 박세채(朴世采),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등에게 수학하였는데, 경사(經史)에 정통하고 문장이 뛰어났다. 작자보다 2년 연상이며 작자와 많은 서신을 주고받았다.* 박중회(朴重繪, 1664~1691)의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수여(受汝), 호는 소은(素隱). 광주에 살던 안촌(安村) 박광후(朴光後)의 아들이다. 진천사(眞泉祠)에 배향되었고 양득중(梁得中)의 『덕촌집(德村集)』에 그의 만시(挽詩)가 실려 있다. 저서로 『소은집(素隱集)』이 있다.
- 2020-09-14 | NO.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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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붕 광주목사가 귀래정을 짓고 떠나다 林光牧鵬。乞郡而去。將有永休之志。錦城營山之側於舊居。構歸來亭。求詩於縉紳。將申二相鄭禮判詩邀和。次其韻。
- 天地藏孤境。雲山滿四隈。園林開蔣徑。松菊待陶來。夙負穿楊技。今爲製錦才。北門須臥護。南路肯低回。右申韻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 1486~1562) 《양곡집(陽谷集)》 권52023.6.16.
- 2023-06-16 | NO.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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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실(任實)의 추관(推官)을 체차(遞差)할 것은 순영에 보고하다- 광주목사
- 보첩고(報牒攷) - 光州牧使○영조(英祖) / 영조(英祖) 39년(1763) 8월 25일 임실(任實)의 추관(推官)을 체차(遞差)해 줄 것을 순영(巡營)에 보고하다첩보(牒報)하는 일. 부사(府使)가 위에 70세의 편모(偏母)가 있는데, 너무나 많이 노쇠하여 숨이 오락가락한데다 평소에 담병(痰病)이 있어서 편안한 날이 항상 적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또 독한 학질(瘧疾)까지 얻어서 오래도록 떠나지 않다가 기학(氣瘧)으로 변하여 날마다 통증이 일어나는 등 여러 가지 별증(別症)이 층층이 겹쳐서 발생하므로 다방면으로 약이(藥餌)를 써보았으나 조금도 효과가 없습니다. 부사가 형제가 없어서 혼자 밤낮으로 간호하면서 애가 타 눈물을 흘리며 어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그런데 임실현(任實縣)의 살옥(殺獄 살인 사건에 대한 옥사) 죄인(罪人) 오(吳)를 수추(囚推 가두어 놓고 심문함)할 때 중간에 부사가 동추관(同推官)으로 차출되어 거행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이달 하순이면 부사가 동추관으로 수일간 나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 인정과 도리를 돌아보면 잠시도 편모의 곁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정(加定)한 동추관 진안 현감(鎭安縣監)도 경성을 향해 이미 떠났으므로 다른 사람에게 이관하여 거행할 방도가 없습니다. 그래서 감히 이렇게 우매함을 무릅쓰고 효도로 다스리는 사또(使道)께 우러러 보고하오니, 위의 정경을 특별히 굽어살피시어 부사의 동추관 임무를 속히 체차하고 연고가 없는 다른 읍재(邑宰)로 정하여 수추(囚推)할 때 궐원(闕員)이 발생하는 환난이 없도록 해 주셨으면 합니다.제사(題辭)어머니의 병환이 더욱더 위중하여 사세상 곁을 떠나기 어렵다고 하니, 추관(推官)을 임시로 운봉(雲峰) 영장(營將)으로 정하라는 뜻으로 배관(背關 하급 관아에서 보낸 첩보(牒報)의 뒷면에 쓴 관문(關文))하였음.[주-D001] 영장(營將) : 진영장(鎭營將). 조선 후기 인조(仁祖) 때 설치된 정3품직으로 각 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겸병사(兼兵使)인 감사(監司) 포함)에 소속되어 지방 군대를 지휘ㆍ감독하였다. 진영장은 전임 무관을 파견하거나 도내(道內) 수령 가운데서 겸직하였는데, 조선 말기에는 8도 46인의 전체 진영장에서 33인이 겸영장(兼營將)이었다. 각 도의 진영(鎭營)은 원칙적으로 전ㆍ후ㆍ중ㆍ좌ㆍ우(前後中左右)의 5영(營)을 설치하되, 필요한 경우에는 별중영(別中營)ㆍ별전영(別前營) 등을 더 두었다. 현종(顯宗) 때부터는 진영장이 토포사(討捕使)를 겸하여 도적을 잡도록 하였다. 전라도의 경우 전영은 순천(順天)에, 좌영은 운봉(雲峯)에, 중영은 전주(全州)에, 우영은 나주(羅州)에, 후영은 여산(礪山)에 설치하였음.
- 2023-08-17 | NO.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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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억령-息影亭二十詠 (식영정20영)
- 석천 임억령(石川 林億齡 1496~1568), 서하당 김성원(棲霞堂 金成遠) , 高敬命(고경명), 松江(정철) 네 사람을 '식영정 四仙(사선)'이라 불렀는데, 이들이 성산의 경치 좋은 20곳을 택하여 20수씩 모두 80수의 息影亭二十詠(식영정이십영)을 지은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이 식영정이십영은 후에 정철의 星山別曲(성산별곡)의 밑바탕이 되었다.1. 瑞石閑雲 서석산의 한가한 구름무등산의 한가한 구름 : 서석한운(瑞石閑雲)溶溶嶺上雲。纔出而還斂。無事孰如雲。相看兩不厭。한가롭구나. 산마루에 저 구름. 잠깐 날리더니 금방 걷히어 숨네.한가할 때 제일 좋은 벗은 구름이로다. 서로 보고 또 보아도 싫지가 않네.2. 蒼溪白波 푸른 시내 흰 물결창계의 흰 물결 : 창계백파(蒼溪白波)古峽斜陽裏。蒼龍噴水銀。囊中如可拾。欲寄熱中人。골짜기를 비추는 해는 서산에 빗겼는데 푸른 용이 수은(水銀)을 머금어 뿜누나.그 고운 물방울 주머니 속에 주워 넣을 수 있다면, 더위 속 지친 사람에게 전해 줄텐데.3. 水檻觀魚 난간에 서서 고기를 본다.물 난간에서 바라보는 물고기 : 수함관어(水檻觀魚)吾方憑水檻。鷺亦立沙灘。白髮雖相似。吾閑鷺不閑。물 난간에 기대어 서 있노라니 모래톱 여울가에 해오라기도 서 있구나.흰 머리는 네나 내나 같은데 나는 한가하다마는 너는 왜 그리 바쁜고.4. 陽坡種瓜 볕바른 언덕에 오이를 심다.양지 바른 언덕에 심은 오이 : 양파종과(陽坡種苽)有陰皆可息。何地不宜苽。細雨荷鋤立。蕭蕭沾綠蓑。그늘진 어디든 쉴 만한 곳 어느 땅인들 오이를 심지 못하리!빗속에 호미 들고 서 있노라니 가는 비 부슬부슬 도롱이를 적시네.5. 碧梧凉月 벽오동에 비치는 서늘한 달벽오동에 떠오른 가을 달 : 벽오량월(碧梧凉月)秋山吐涼月。中夜掛庭梧。鳳鳥何時至。吾今命矣夫。가을 산이 시원한 달을 토해 내어 한 밤중에 뜰에 섰는 오동나무에 걸렸구려.봉황은 어느 때에나 오려는고. 나는 지금 천명이 다해가는데.6. 蒼松晴雪 푸른 솔에 빛나는 눈소나무 위의 맑은 눈 : 창송청설(蒼松晴雪)萬徑人皆絶。蒼松蓋盡傾。無風時落片。孤鶴夢初驚。길이란 길은 모두 인적 끊기고 푸른 솔은 비스듬히 기울어졌네.바람이 없는 데도 눈송이 우수수 떨어지니 나무에서 졸던 학이 놀라 꿈을 깨네.7. 釣臺雙松 조대의 두 그루 소나무 조대의 두 그루 소나무 : 조대쌍송(釣臺雙松)雨洗石無垢。霜侵松有鱗。此翁唯取適。不是釣周人。비에 하도 씻기어 돌에도 때가 없네. 서리에 이겨져서 소나무엔 비늘 돋아.이 늙은 낚시꾼에겐 알맞다마는 곧은 낚시 드리우던 강태공에겐 아니로구나.8. 環碧靈湫 환벽당 아래의 영추환벽당 아래 영추 : 환벽영추(環碧靈湫)澄湫平少浪。飛閣望如船。明月吹長笛。潛蛟不得眠。맑은 용추에 물결도 잔잔한데 날 듯이 솟은 정자 정말 배같구나.밝은 달 아래 긴 피리 불고 있으니 잠긴 용도 잠 못 든다 투덜대겠지.9. 松潭泛舟 송담에 배 띄워라.송담에 띄운 배 : 송담범주(松潭泛舟)明月蒼松下。孤舟繫釣磯。沙頭雙白鷺。爭拂酒筵飛。밝은 달 푸른 솔 아래 외로운 배를 낚시터 옆에 매었구나.모래톱에 서 있는 두 마리 백로 서로 한 몫 다퉈 주연(酒筵)위를 빙빙 도네.10. 石亭納凉 석정에서 더위피하다.석정에서 씻는 더위 : 석정납량(石亭納凉)礙目松爲蓋。搘頤石作床。蕭然出塵世。六月裌衣涼。해를 가리는 소나무로 좋지! 양산을 삼자. 너른 바위 네가 곧 평상이다.진세에서 떠나 소연히 있으니 유월인데 겹옷도 서늘하구나.11. 鶴洞暮煙 학동의 저문 연기학마을의 저녁연기 : 학동모연(鶴洞暮煙)孤煙生野店。漠漠帶山腰。遙想松間鶴。驚飛不下巢。연기 모락모락 들판에서 일어나서 어느덧 아스라하게 산허리를 감고 도네.아마 소나무 사이에서 졸던 학이 놀라 빙빙 돌며, 어랏! 내 둥지 어디인고.12. 平郊牧笛 평교의 목동의 피리 소리들녘의 목동 피리소리 : 평교목적(平郊牧笛)牧童倒騎牛。平郊細雨裏。行人問酒家。短笛山村指。목동은 소를 거꾸로 타고는 가는 비 속에 들에서 돌아온다.행인이 목동아! 술집이 어디냐? 단적(短笛)으로 산촌을 가리키며 저기요.13. 短橋歸僧 다리를 건너 돌아가는 중 다리 건너가는 스님 : 단교귀승(短橋歸僧)深峽橫沙路。孤村照夕曛。一筇潭底影。雙眼嶺頭雲。깊은 골짜기 오솔길 꼬불꼬불 외로운 마을에 저녁 해가 비치네.못 속에 그림자! 저도 지팡이 짚고 있네. 바쁘다, 어서 가자 두 눈을 멀리 구름만 바라본다.14. 白沙睡鴨 흰 모래사장에 조는 오리 흰 모래톱에서 조는 오리 : 백사수압(白沙睡鴨)溪邊沙皎皎。沙上鴨娟娟。海客忘機久。松間相對眠。시냇가의 가는 모래 희고도 희다. 모래 위에 섰는 오리 곱고도 곱고.떠도는 나그네 세상 일 다 잊어 솔 사이에 마주 누워 잠을 자누나.15. 鸕鶿巖 가마우지 바위가마우지 바위 : 노자암(鸕鶿岩)蒼石水中央 夕陽明滅處 鸕鶿驚路人 飛向靈湫去 이끼낀 바위 물 가운데 있는데 저녁 햇빛에 반짝반짝 빛나는구나길가는 나그네에 놀란 가마우지 영추(靈湫)를 향해 날아가는 도다.16. 紫薇灘 배롱나무꽃 핀 여울배롱나무 꽃 비친 여울 : 자미탄(紫薇灘)誰把中書物 今於山澗栽 仙粧明水底 魚鳥亦驚猜 누가 가장 아끼던 것을 산 아래 시내에다 심었나 보다.신선이 단장하는 맑은 물 아래 어조(魚鳥)도 놀라서 시샘을 하네.17.桃花徑 복숭아꽃 핀 오솔길 복숭아꽃 핀 길거리 : 도화경(桃花徑)石徑雲埋小 桃花雨剪齊 更添今日寂 正似昔人迷 돌길은 구름에 붇혀 비좁은데 복사꽃 비에 떨어져 곱게도 깔렸네.오늘따라 호젓하기 그지 없으니 옛님이 길 잃었던 곳 예 아닌지.18. 芳草洲 향기풀 나있는 모래톱향기풀 핀 모래톱 : 방초주(芳草洲)晴沙明似雪 細草軟勝綿 中有白頭璟 閑隨黃犢眠 고운 모래 눈처럼 희고 애기풀은 솜보다 더 부드럽구나.섬 가운데 머리 흰 늙은이 한가로이 송아지따라 졸고 있네.19. 芙蓉塘 연못에 꽃 피고 연꽃 핀 연못 : 부용당(芙蓉塘)白露凝仙掌 淸風動麝臍 微時可以削 妙語有濂溪 넓은 손바닥 같은 연잎에 이슬 내렸는데 사향노루 배꼽을 청풍이 스쳐간다.하찮은 나의 시야 버려도 괜찮거니와 주렴계의 말에는 아름다움이 넘친다네.20. 仙遊洞 신선이 노니는 동네신선이 노는 동네 : 선유동(仙遊洞)蒼溪小洞天 明月淸風裏 時下羽衣翁 不知何道士 푸른 시내곁 작은 마을은 밝은 달 맑은 바람 사는 곳이지.요즈음 깃털 옷 입은 늙은이 있는데 어떤 도사인지 알 수가 없네.
- 2018-08-02 | NO.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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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억령-次光州喜慶樓韻
- 風滿高樓雨滿岑 바람은 고루에 가득하고 비는 산봉우리에 가득하니孤臣向北獨開襟 외로운 신하 북녘을 향해 홀로 흉금을 열어보네三杯綠酒顏生暈 석 잔 푸른 술로 얼굴에 취기가 돌고一拍淸琴瓦振音 한 박자의 맑은 거문고 기와에까지 울리네老去居官眞製錦 늘그막에 관직에 머물러 진정 비단옷 만들다가年來息影爲休陰 근래에 그림자를 쉬어 그늘에서 쉬누나浮雲天末閑舒卷 하늘 끝의 뜬 구름 한가로이 폈다 말았다 하니自是無心豈有心 절로 무심한데 어찌 유심하겠는가千年王粲後登樓 천년 전 왕찬 다음에 누대에 오르니風雨凄凄五月秋 처량한 비바람 오월이 가을인양親友重逢靑我眼 다시 만난 친구들 내 눈을 반갑게 하고干戈又動白人頭 창과 방패 또 출동하니 사람들 머리 희어지네身如野馬元無係 야생마 같은 몸 원래 걸릴 것이 없고心似山雲本自浮 산구름과 흡사한 마음 절로 떠다니네猶有尋僧山下路 아직도 산 아래 길에서 스님을 찾으니塵中奔走甚時由 속세에서 바삐 달림은 어느 때에 말미암았는고 -석천선생시집(石川先生詩集) 권6
- 2018-07-26 | NO.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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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억령-次光州東軒韻
- 爲愛山容好 산의 모양이 아름다움을 좋아해移時坐向東 옮겨질 때마다 동쪽을 향해 앉네洩雲低度野 흐르는 구름은 낮게 들을 지나고 飛雨細隨風 날리는 비는 가늘게 바람을 따르네只恐兵戈動 다만 전쟁이 일어날까 두려워하노니寧辭酒盞空 어찌 술잔 비는 것을 사양하랴元龍豪氣在 항룡은 호방한 기상이 있으니詩榻綺羅重 시 짓는 자리엔 고운 비단 겹겹일레라 -석천선생시집(石川先生詩集) 권3
- 2018-07-26 | NO.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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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억령-次景陽韻 趙昱
- 萬事栽培白髮長 一聲淸嘯不禁狂幽居如避山侵帙 鄕夢初廻雨送涼思與故人尋窅窕 欲將秋水洗心腸晨星宿草親知盡 同調于今只景陽-석천선생시집(石川先生詩集) 권6
- 2018-07-12 | NO.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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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억령-次良苽茅亭韻 ‘양과모정시를 차운하다
- 童稚從吾舅 어렸을 때에 우리 외삼촌을 따라서詩書講此亭 시서를 이 정자에서 읽었다丘原無復起 구원에 계신 분을 다시 뵈올 수는 없지만松柏至今靑 송백만은 지금껏 푸르도다弔古同遼鶴 옛날을 슬퍼하니 요학과 같고寬心仗酒甁 속을 누그리기는 술병에 의탁한다山川含萬古 산천은 오랜 세월을 머금고 있나니鬱鬱馬前形 말 앞의 울창한 모습들이여瀏瀏風生袖 시원한 바람은 소매에 일고悠悠客倚亭 객은 유유히 정자에 의지해 섰다歸來頭盡白 벼슬에서 돌아오니 머리가 다 희었고故老眼重靑 옛 늙은이들 다시금 반갑게 본다世事詩千首 세상사는 일은 시 천 수 뿐이요村談酒一甁 마을 사람과의 담소는 술 한 병이면 족하지揮鞭湖海向 말채찍 휘두르고 호해로 향하니萬里淡天形 만 리 하늘 모습이 담담하기만 하다 -석천선생시집(石川先生詩集) 권3임억령(林億齡, 1496-1568)의 자는 대수(大樹)이며 호는 석천(石川)이다.
- 2018-07-10 | NO.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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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영- 조양대에서
- 君子任行止 군자는 오고감을 마음대로 한다는데吾當於此求 나는 지금 그것을 여기에서 바라노라.夕陽多慷慨 석양이라 강개(慷慨)함이 한이 없는데遺蹟古臺秋 선생의 유적과 고대에도 가을빛 완연하구나.창계(滄溪) 임영(林泳, 1649~1696)은 백호 임제(林悌) 재종증손(再從曾孫)으로 대사헌, 전라도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그가 조양대 유허지에 들려 시를 남긴다.
- 2020-05-02 | NO.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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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영-풍영정경차죽음선생운(風詠亭敬次竹陰先生韻)- 창계집 제2권
- 임영-풍영정경차죽음선생운(風詠亭敬次竹陰先生韻)- 창계집 제2권 : 창계(滄溪) 임영(林泳, 1649~1696)客行未可發 나그네 아직 길을 나서지 못함은 江雨復今夕 강에 비가 오늘 저녁 다시 내림일세名亭佳麗地 이름난 정자 아 름다운 풍광 속에 一醉如有約 약속이나 한 듯 한번 취해 보노라窓前白玉樹 창 앞으로 백옥수가 서 있는데 樹老花寂歷 나무는 늙고 꽃은 적막하여라 持杯向花言 술잔 들고 꽃에게 말을 거노니 與爾成主客 너와 함께 주인과 손님 되었구나광주(光州) 서쪽 20리에 있는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 선창산(仙滄山)과 극락강(極樂江)이 마주치는 강변의 대지 위에 있는 정자 풍영정(風詠亭)에서 조선 후기 문신 겸 학자. 검상 · 대사헌 등을 거쳐 개성부유수가 되고 부제학에 이어 참판에 이르렀던 나주출신 창계(滄溪) 임영(林泳 1649 ~ 1696)이 광주 목사(光州牧使) 담양부사(潭陽 府使)를 지내면서 인연이 있었던 죽음(竹陰) 조희일(趙希逸, 1575~1638)의 시에 차운한 시다. [주-D001] 풍영정(風詠亭) : 광주(光州) 서쪽 20리에 있는 정자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35 全羅道 光山縣》 1560년(명종15)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온 김언거(金彦据, 1503~1584)가 지은 정자이다. 정자 안에는 당대의 명필 석봉(石峯) 한호(韓濩)가 쓴 ‘제일호산(第一湖山)’이라는 커다란 편액이 걸려 있으며 송순, 이황, 김인후, 기대승, 고경명, 이덕형 등 여러 문인들의 시가 남아 있다.[주-D002] 죽음(竹陰) 선생 : 죽음은 조희일(趙希逸, 1575~1638)의 호이다. 조희일의 본관은 임천(林川), 자는 이숙(怡叔)이며, 창계의 외조부 조석형(趙錫馨)의 부친이다. 광주 목사(光州牧使), 예조와 형조의 참판, 승문원 제조, 경상 감사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에 《죽음집(竹陰集)》, 《경사질의(經史質疑)》 10여 책이 있다.[주-D003] 백옥수(白玉樹) : 천제(天帝) 혹은 신선이 사는 곳에 있다는 선수(仙樹)로, 풍영정 곁에 서 있는 나무를 미화하여 말한 것이다.
- 2018-07-06 | NO.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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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제-喜慶樓 光州客館 名於湖南
- 誤入芙蓉洞 어쩌다 부용동(芙蓉洞)엘 잘못 들어가風流會曼鄕 풍류 속에 만경을 만났노라樓鍾報淸曉 누각의 종소리 새벽을 알리고山雨送微凉 산자락의 비 산들바람 보내주누나肺病猶耽酒 폐를 앓는데 술을 탐하고身閑不計程 몸이 한가해 노정을 생각않네琴尊更一醉 거문고랑 술에 또 한 번 취하니塵事摠茫茫 세상일은 모두가 아득하기만 하네 -백호집(白湖集) 권1임제(林悌, 1549-1587)의 자는 자순(子順) 이며 호는 백호(白湖), 겸재(謙齋), 풍강(楓江)이다.
- 2018-07-17 | NO.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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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제-投宿光山城中
- 路入東城門巷深 櫻桃花發壞墻陰鷄鳴犬吠客初到 斜日依依桑柘林*광주의 모습을 노래했다.-백호집(白湖集) 권2임제(林悌, 1549-1587)의 자는 자순(子順)이며 호는 白湖, 謙齋, 楓江 이다.
- 2018-06-16 | NO.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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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경편(自警編) 에 사견을 기록함〔自警編私箚〕 - 구사당집 제7권
- 자경편(自警編) 에 사견을 기록함〔自警編私箚〕 - 구사당집 제7권 : 구사당(九思堂) 김낙행(金樂行, 1708~1766)구황(救荒)○ 참정(參政) 문충공(文忠公) 왕요신(王堯臣)이 광주(光州)를 다스릴 때, 심한 가뭄이 들어 도적 떼가 백성의 곡식 창고를 털었다. 관법(官法)에는 사형에 해당하였지만, 공이 “이것은 주린 백성이 양식을 구함이었을 뿐이니, 황정(荒政)으로 구휼해야 할 일이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사형을 감면하자는 논의를 청하였는데, 그 뒤 마침내 법령으로 기록하여 지금까지 사용한다.나는 살펴보니, 문충공의 이 일은 왕기공(王沂公)의 일과 같다. 혹 눈앞에 당면하여 임시로 알맞게 하는 수야 있겠지만 영갑(令甲)으로 기록하기까지 함이 옳은지는 알지 못하겠다.*송나라 왕요신
- 2020-10-04 | NO.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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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세방(張世方)ㆍ정만의(鄭萬儀) 등이 토주를 모함하다(1766) - 보첩고(報牒攷)
- 2월 26일 창평(昌平) 장세방(張世方)ㆍ정만의(鄭萬儀) 등이 토주(土主 고을의 수령)를 모함하여 거짓말로 의송(議送)을 바친 일을 조사하여 보고하다 - 보첩고(報牒攷) ○영조(英祖) / 영조(英祖) 42년(1766) 첩보(牒報)하는 일. 방금 전에 도착한 창평현(昌平縣)의 이문(移文 공문(公文)을 보내 조회함. 또는 그 문건)에, “저의 현에 소속된 관비(官婢) 분애(分愛)의 샛서방 장세방이 정만의(鄭萬儀)ㆍ최둑금(崔豆ㄱ金)과 같이 짜고 송관(訟官)을 모함하여 의송을 바친 일에 관해 저의 현에서 사관(査官)을 청하여 조사해 보고하겠다는 뜻으로 영문(營門)에 보고하였습니다. 그에 대한 서목(書目 하부 관아에서 상부 관아로 올리는 원장(原狀)에 구비하는 문서)의 제사(題辭)에, ‘본현(本縣)에서 이미 사관을 청하였기에 광주목(光州牧)에서 차정(差定)하도록 하였으니, 위의 죄인을 광주로 이송해야 할 것이다. 제사를 낱낱이 들어 이문하여 시행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동 죄인 장세방ㆍ최둑금 등을 지정한 관인(官人)으로 하여금 압송하도록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그 죄인들에게 공초(供招)를 받았는데, 병술년(丙戌年, 1766, 영조42) 2월 26일에 창평 속오군(束伍軍) 최둑금 58세, 경양 역리(景陽驛吏) 장세방 26세, 창평 재인(才人) 정만의 30세 등이 아뢰기를, “‘최둑금! 네가 경양 역리 장세방이 유부녀 분애와 간통한 일에 관련해서, 네가 분애의 친속으로 그녀가 본남편에게 소박을 당했다는 이유로 그녀로 하여금 장세방과 간통하도록 한 상황을 이미 창평의 사안(査案)에 남김없이 자복하였다. 지금 그 조사를 여기로 이관(移管)하였으니, 다시 사실대로 공초를 바치도록 하라. 장세방! 네가 유부녀와 간통한 죄가 이미 전후의 문안(文案)에 이미 드러났으므로 지금 다시 물을 필요가 없으나, 네가 간통한 여자 분애가 남편이 있는데도 다시 간통한 바람에 너를 법에 따라 관노비(官奴婢)로 편입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무슨 원통함이 있기에 정만의 등과 짜고 모함하는 의송을 바쳐 송관(訟官)을 침해하고 핍박하였는가. 그간의 내막을 숨김없이 사실대로 고하도록 하라. 정만의! 너는 분애와 친속이 아니므로 해당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데 분애가 관아에 예속되는 것이 너에게 무슨 관계가 있기에 그녀의 샛서방과 같이 의송을 바쳐 토주(土主)를 모함하였는가. 그간의 정황을 사실대로 공초를 바치도록 하라.’고 추문(推問)하셨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최둑금이 아뢰기를, “이른바 분애는 저의 7촌 질녀(姪女)입니다. 분애가 애당초 남평에 사는 서삼덕(徐三德)에게 출가하였는데, 서삼덕의 나이가 어렸습니다. 서삼덕의 의부(義父) 박대건(朴大建)은 본래 사나운 자로 그의 며느리를 구박하며 내쫓아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분애가 부득이 창평에 사는 그의 형부(兄夫) 나장추(羅長秋)의 집으로 가서 의지하였습니다. 그러자 분애의 형부가 그녀의 처지를 가엾이 여긴 나머지 장세방에게 소개하여 서로 간통하게 한 것이지, 제가 간섭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였습니다.장세방이 아뢰기를, “분애의 형부가 과연 저와 결혼하라고 하였기 때문에 그녀가 유부녀인 줄을 모르고 서로 간통하였습니다. 그 뒤에 나장추의 마을에서 이로 인해 시비가 발생하여 관아에 고발하여 관노비로 편입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이는 분애의 본남편이 고발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작란삼아 한 일로 인해 관노비로 몰수되어 너무나도 원통하기에 과연 의송을 바치게 되었습니다. 정만의는 나장추와 같은 마을에 살기 때문에 피차의 사정을 중간에서 아는 바가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만 원래 소장(訴狀)을 바칠 것을 주장한 일이 없습니다. 상고하여 처결해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정만의가 아뢰기를, “분애는 저와 천부당만부당한 사람입니다. 그녀의 샛서방을 만들어주거나 관노비를 만든 일은 저와 전혀 상관이 없고 단지 나장추와 같은 마을에 살기 때문에 그녀가 관노비로 예속되는 것이 억울하다는 공론을 들어본 것입니다. 그 뒤에 장세방이 의송을 바칠 때 그 대략적인 것만 알았을 뿐이고 원래 의송을 바치는 것을 주장한 일이 없습니다. 상고하여 처리해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하였는데, 이상이 공초의 내용입니다.창평현의 전후 문안을 가져와 상고해 보니, 장세방 등이 자복한 공초에 그 죄가 훤히 드러나서 사실을 발췌하여 끝까지 궁구해 보니 다시금 미진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관(査官)을 다른 관아로 옮겨 정하였기 때문에 이전의 공초와 비해 허물이 드러나지 않게 감추어 꾸민 바가 있었으므로 장세방이 유부녀와 간통한 것이 잘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정만의가 의송을 바친 것은 그가 비록 주장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이미 참여하여 아는 일이 있었으니, 토주를 모함한 죄를 어떻게 면할 수 있겠습니까. 위의 두 놈은 결코 엄하게 형벌을 가하여 법을 적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최둑금은 애당초 장세방이 분애와 간통하였을 때 그가 비록 몰랐다고 말하기는 하였으나 그의 모습을 살펴보고 말을 들어보니 저절로 서로 주선해 준 형적이 있었습니다. 이놈은 비록 두 놈과 차이는 있으나 분애의 친속으로 사람을 잘못 유도하여 음탕하게 만든 죄를 지었으니만큼 치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두 참작하고 상량하여 처분을 내려 주셨으면 합니다.제사(題辭) 장세방은 자기가 간통한 정황을 창평에서 분명하게 공초를 바쳤는데, 그 뒤에 다시 심문할 적에 교묘한 말로 해명하여 허물이 드러나지 않게 감추어 꾸민 흔적이 뚜렷하게 있었으니 매우 간악(奸惡)하였다. 그에게 한 차례 형장(刑杖)을 가하여 신문(訊問)하고 지만(遲晩)한다는 공초를 받아 첩보하고, 정만의는 장세방이 의송을 바칠 때에 비록 주장하지는 않았더라도 이미 참여하여 알았으니만큼 토주를 모함한 죄를 그도 면하기 어려우니, 한 차례 형장을 가하여 심문한 뒤에 첩보해야 할 것이다. 최둑금은 처음에 자세히 알지 못했다고 공초를 바쳤으니 모습과 말을 가지고 억측으로 단정할 수 없으니, 이 조목은 장세방에게 추궁해 심문하면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장세방을 심문할 때 문목(問目)에 추가로 넣어 상세히 조사한 다음 첩보해야 할 것이다.[주-D001] 속오군(束伍軍) : 선조(宣祖) 27년(1594) 왜군에 대항할 군대를 확보하기 위해 지방에서 신역(身役)이나 벼슬이 없는 15세 이상의 양반, 양민과 천민을 뽑아 조직한 군대.[주-D002] 재인(才人) : 천인(賤人)의 하나. 남자는 노래와 춤과 줄타기를 업(業)으로 하고, 여자는 무당 노릇 기타(其他)를 업으로 하여 농업 등의 정업(正業)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을 말함.[주-D003] 지만(遲晩) : 지체되어 늦었다는 직접적인 문의(文意)에서 확장되어, ‘너무 오래 속이고 자백하지 않은 것이 미안하다’는, 즉 자복(自服)을 가리키는 법제어.
- 2020-10-03 | NO.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