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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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목사 권율의 묘지

증(贈)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사 지춘추관사 홍문관제학 동지성균관사(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知經筵事知春秋館事弘文館提學同知成均館事) 행(行) 정헌대부(正憲大夫) 지중추부사 겸 제도도원수(知中樞府事兼諸道都元帥) 권공(權公)의 묘지


만력(萬曆) 20년인 임진년 4월에 일본의 전군(全軍)이 쳐들어왔는데 그 군중이 60만으로 호칭되었다. 그리하여 열군(列郡)은 기왓장이 깨지듯 산산조각이 나고, 경사(京師)에서는 모두 짐보따리를 짊어지고 피난길을 재촉하였다. 이때 권모(權某)라는 신하가 있어 일찍이 재능과 국량으로 한 세상에 우뚝했었다가, 그때는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있었다. 그런데 상(上)이 공을 생각하여 이르기를, “내가 듣건대 권모가 재능이 있다고 하니, 거진(巨鎭)에 시험해 볼 만하다.” 하고, 즉일로 공을 기용하여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삼았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적이 상주(尙州)를 약탈하고 조령(鳥嶺)을 넘어와서 충주를 크게 유린한 다음, 곧장 경성(京城)을 함락시키자, 주상(主上)이 서쪽으로 몽진하였다. 그러자 공은 방군(傍郡)에 격문(檄文)을 돌려 1500여 명의 군사를 얻어서 이치(梨峙)로 나가 진영(陣營)을 설치하여 호남ㆍ영남의 목이 되는 요해처를 누르고 있다가, 대대적으로 쳐들어오는 적의 예봉(銳鋒)을 만나 영하(嶺下)에서 그들을 꺾어 넘어뜨렸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공을 더욱 크게 쓰기 위하여, 가을에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전임시켰다가, 미처 부임하기도 전에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발탁 임명하였다. 그러자 공은 임명을 받고 통곡을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전주(全州)에서 대대적으로 군사를 선발하여 스스로 1만 명의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날짜를 기약하여 서쪽으로 진군하였다.


공이 수원(水原)에 있을 적에는 독성(禿城)을 점거하여 요해처로 삼고 있으면서, 경도(京都)의 적을 경동시키고 곧장 서로(西路)를 요동시키자, 적장(賊將) 수가(秀嘉)는 공이 그들의 헛점을 틈탈까 두려워하고, 행장(行長)은 공이 그 뒤에서 도모할까 염려하여, 우뚝이 호표(虎豹)의 형세가 되어 가만히 앉아서 관서(關西)의 중심지를 견고하게 하였다.


공이 고양(高陽)에 있을 적에는 행주(幸州)에 성책(城柵)을 쌓고 있었는데, 적의 대군(大軍)이 헛점을 틈타 갑자기 쳐들어와서 여러 겹으로 성책을 포위하자, 공이 성가퀴에 올라가서 큰 소리로 꾸짖으니, 여러 장수들이 기가 꺾이어 전둔(全軍)이 바람에 쓸리듯이 굴복하였다. 공은 적이 더욱 많아짐을 보고는 정신이 더욱 분발하여, 멀리서 온 2천 명의 군졸을 가지고 한창 치성한 수만 명의 적과 싸워서 백여 급(級)의 머리를 베고 성세(聲勢)가 더욱 장대해졌다.


공이 파주(坡州)에 있을 적에는 산성(山城)을 보루(堡壘)로 삼았는데, 적이 누차 선봉(先鋒)을 내어 먼저 우리 군사를 시험해 보고는, 우리 군사의 위엄과 정예함을 두려워하여 끝내 감히 범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능히 대난(大難)을 홀로 막아서 제군(諸軍)의 으뜸이 되었다. 공은 끝내 동쪽으로 군도(羣盜)를 억제하고, 서쪽으로는 행장(行長)을 방어하여 서로(西路)의 방패가 되고, 행재(行在)의 호위가 되어 줌으로써 신하를 알아보는 우리 성상(聖上)의 밝은 슬기에 누를 끼치지 않았으니, 아, 위대하도다.


그런데 천조(天朝)의 대장군(大將軍)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수가(秀嘉) 등 여러 추장(酋長)들과 강화(講和)를 약속함에 미쳐서는 공의 선전(善戰)을 꺼리어 공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억누르고 적들을 놓아 주어 온전히 돌아가도록 하였는데, 공이 비밀리에 군대를 출동시켜 적의 뒤를 밟다가 끝내 그 사실이 발각되자, 제독(提督)이 한 편장(偏將)을 보내어, 나루를 막아서 군사들을 건너게 하였다. 그 후 천장(天將)이 군대를 파하여 돌아감에 미쳐서는 공 또한 군대를 거느리고 본도(本道)로 돌아갔다.


조정에서는 공이 누차 큰 공을 세워서 병위(兵威)가 더욱 장대해졌다는 것으로, 계사년 6월에 제도 도원수(諸道都元帥)로 승진시키어 영남에 진주(進駐)하게 하였다. 병신년에는 체직되어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ㆍ호조 판서(戶曹判書)가 되고, 이윽고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에 제배되었다가, 다시 원수에 제배되었다.


정유년 겨울에는 천자(天子)가 대대적으로 군대를 징발하여 총병관(總兵官) 마귀(麻貴)에게 4만의 군대를 거느려 보내 오자, 도어사(都御史) 양호(楊鎬)가 군대를 감독하여 울산(蔚山)을 공격하였고, 무술년에는 또 대사마(大司馬) 형개(邢介), 제독(提督) 유정(劉綎) 등을 보내 와서 삼로(三路)의 총병(總兵)으로 순천(順天)을 공격하였다. 이 때 공은 두 번 다 양로(兩路)에 종정(從征)하여 호령(號令)이 엄명(嚴明)하고 항상 자신이 사졸(士卒)들에 앞장서니, 천조(天朝)의 장관(將官)들이 모두 주목하면서 공의 재능을 칭찬하였다.


기해년 여름에는 병 때문에 돌아가기를 청하니, 상(上)이 윤허하였다. 이제 막 투구를 벗어 버리고 물러가 도(道)와 함께하여 공허하고 적막함 속에 심신을 보호하면서 가만히 앉아 장수(長壽)를 누리게 되었는데, 이 해 7월 7일에 우사(寓舍)에서 작고하니, 향년이 63세였다.


전부인(前夫人) 조씨(曺氏)는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 휘원(輝遠)의 딸이고, 후부인(後夫人) 박씨(朴氏)는 강서 현령(江西顯令) 세형(世炯)의 딸이다. 모두 아들은 없고, 전부인에게 1녀가 있었으니, 그 사위는 바로 나인데, 추충분의평난공신(推忠奮義平難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이다.


삼가 상고하건대, 권씨(權氏)는 안동(安東)에서 나왔다. 그 시조인 김행(金幸)이란 분이 고려 태조(高麗太祖)를 섬기어 안동에 실봉(實封)되고 관작이 태사(太師)에 이르러 권씨의 성을 하사받았다. 그로부터 16세(世)에 이르러 휘(諱) 근(近)이 벼슬은 찬성(贊成)에 이르렀고 호는 양촌(陽村)인데, 공까지의 사이는 6세(世)가 되었다. 증조(曾祖) 교(僑)는 양근 군수(楊根郡守)이고, 조(祖) 적(勣)은 강화 부사(江華府使)이며, 부(父) 철(轍)은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인데, 선부인(先夫人) 조씨(曺氏)는 하성부원군(夏城府院君) 익청(益淸)의 후예인 적순부위(迪順副尉) 승현(承晛)의 딸로서 이성(二姓)의 귀(貴)가 합하여 공의 한 몸에 돌아와 이루어져서 능히 그 서업(緖業)을 이었으니, 이것이 공의 세계(世系)의 대략이다.


공의 자는 언신(彦愼)이고 호는 만취당(晩翠堂)인데, 가정(嘉靖) 16년인 정유년 12월 20일에 태어났다. 나이 46세인 만력(萬曆) 임오년에 등제(登第)하여 처음으로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다가,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ㆍ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ㆍ예조 좌랑(禮曹佐郞)ㆍ호조 정랑(戶曹正郞)에 전임되었고, 외직으로 세 번 나가서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 경성부 판관(鏡城府判官), 의주 목사(義州牧使)를 역임하였다. 난리 뒤에는 일찍이 광주(光州)에서 맨 처음 군대를 일으켰던 공으로 1년 중에 초천(超遷)되어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르렀으니, 품계는 이품(二品)이 되고 지위는 구경(九卿)에 반열하였다. 그리하여 아기(牙旗)를 높이 세우고 막부(幕府)를 열어서 가만히 앉아 호남과 영남을 진압하였고, 계책이 행해지고 공(功)이 뒤따라서 대적(大敵)을 격파하였다. 이것은 공의 이력(履歷)의 대강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장난하며 놀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보통 아이들과 달랐고 함부로 자제들의 사치스러운 일을 하지 않았으므로, 선부인이 일찍이 공을 어루만지면서 기특하게 여겨 이르기를, “우리 가문에 아이가 있다.”고 하였는데, 자람에 미쳐 과연 그러하였다.


공은 갑자기 분기하여 군중을 통솔할 적에는 원대한 명성이 없었는데, 이치(梨峙)의 싸움에서 제장(諸將)들이 공의 앞장서서 칼날을 무릅쓰고 나가는 모습을 보고는, 은밀히 서로 이르기를, “유자(儒者)가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그 후 행주대첩(幸州大捷)을 거둠에 미쳐서는, 천조(天朝)의 대사마(大司馬) 송응창(宋應昌)이 홍단견(紅段絹) 4단(端)과 백금(白金) 50냥(兩)을 상으로 주면서 말하기를, “판탕(板蕩 어지러운 세상을 이름)의 충신이요, 중흥(中興)의 명장이다.” 하였고, 병부 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은 ‘홀로 외롭고 위태로움을 지키어 강경한 왜적을 대항했다’는 일로 보고하니, 천자가 공을 가상히 여겨 이르기를, “이제야 전라도에서 왜적을 수다하게 참획(斬獲)한 것을 보았다.”고 하였다.


뒤에 공이 입조(入朝)하자 상이 공을 위로하여 이르기를, “경(卿)이 아니었으면 국가가 어떻게 오늘에 이를 수 있겠는가.” 하고 다시 공을 원수(元帥)로 삼았다. 공이 원수의 직임을 사양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의 명성은 천하에 드러났고 위엄은 적국(敵國)을 습복(慴伏)시켰으니, 원수의 직임을 경말고 누가 감당하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청정(淸正)ㆍ행장(行長)은 공의 위명(威名)을 두려워하여 매양 우리 사신을 만날 적마다 반드시 권 원수(權元帥)의 기거(起居)를 물었다. 이것이 공의 공렬(功烈)의 대강이다.


9월 15일로 날짜를 잡아 장차 홍복산(洪福山) 압곡(鴨谷)의 언덕에 장사 지내려면서, 일찍이 군무(軍務)에 종사했던 그의 종인(宗人)이 울면서 나에게 고하기를,


“공이 영남에 있을 적에 일찍이 성지(聖旨) 및 천조(天朝)의 자문(咨文)ㆍ게첩(揭帖) 두어 마디 말을 손수 기록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죽으면 나의 사위 이 의정(李議政)이 반드시 나의 묘지(墓誌)를 쓸 것이니, 이 정도면 나의 후손을 빛내기에 충분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감탄하며 말하기를,


“아, 사실이로다! 우리 공이 작고함으로부터 장사 지내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조(吊)ㆍ부(賻)ㆍ제(祭)에 대한 사자(使者)가 길에 연달았고, 이어서 은혜를 미루어 숭질(崇秩)에 봉작(封爵)되었으니, 이 정도면 애영(哀榮)에 유감이 없다고 이를 만하다. 게다가 또 훌륭한 명성을 후세에 전하여 그 공적을 드러낼 만한 것으로는, 성주(聖主)의 하교(下敎)가 있고, 천자(天子)의 조서(詔書)가 있고, 송공(宋公)ㆍ석공(石公)의 포창이 있으니, 이것들이야말로 말 한마디가 법이 되어 영원히 구비(口碑)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러니 만일 군더더기의 말로 태산교악(泰山喬嶽)을 모사(摸寫)하여 대공(大功)의 밑에 머뭇거리려고 한다면 이것은 뻔뻔스러운 일일 뿐이다.”


하니, 모두 그렇다고 하므로, 마침내 그 사실만을 서술하고 명(銘)은 쓰지 않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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