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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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목사 권율의 유사 - 백사집 제4권

광주목사 권율의 유사 - 백사집 제4권

증(贈)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춘추관사 홍문관제학 동지성균관사(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事弘文館提學同知成均館事) 행(行) 정헌대부(正憲大夫) 지중추부사 제도도원수(知中樞府事諸道都元帥) 권공(權公)의 유사(遺事)


원조(遠祖) 김행(金幸)은 본디 신라(新羅)의 종성(宗姓)으로 처음에 고창군(古昌郡)을 지켰는데, 견훤(甄萱)의 난리로 인하여 신라가 망한 것을 마음아프게 여기고 고창군을 가지고 고려 태조(高麗太祖)를 맞이하니, 태조가 김행을 병기 달권(炳機達權)한 사람이라 하여 권씨(權氏)의 성(姓)을 하사하고 태사(太師)의 관작을 내렸으며, 고창군을 식읍(食邑)으로 삼아 안동부(安東府)로 승격시켰으니, 권씨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십삼세(十三世)에 이르러 비로소 창대해졌으니, 휘 보(溥)가 고려를 섬겨 벼슬이 도첨의(都僉議)에 이르렀고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다섯 아들과 세 사위가 모두 봉군(封君)되어 한 집안에 아홉 사람의 봉군이 있었으니, 그분이 공에게 구대조(九代祖)가 된다.


팔대조(八代祖) 휘 고(皐)는 벼슬이 검교 시중(檢校侍中)에 이르렀고 또한 영가부원군에 봉해졌다. 칠대조(七代祖) 휘 희(僖)는 벼슬이 검교좌정승(檢校左政丞)에 이르렀다.


육대조(六代祖) 휘 근(近)은 우리 태조(太祖), 태종(太宗)을 내리섬기어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록되고 벼슬이 찬성에 이르렀으며, 문충(文忠)이란 시호가 내려졌고, 호는 양촌(陽村)이다.


오대조(五代祖) 휘 제(踶)는 벼슬이 좌찬성에 이르렀다.


고조(高祖) 휘 마(摩)는 벼슬이 연천 현감(漣川縣監)에 이르렀고, 자헌대부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증조(曾祖) 휘 교(僑)는 벼슬이 양근 군수(陽根郡守)에 이르렀고,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조(祖) 휘 적(勣)은 벼슬이 강화 도호부사(江華都護府使)에 이르렀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관상감사에 추증되었다.


고(考) 휘 철(轍)은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이다.


외조(外祖)의 성은 조씨(曺氏)이고 휘는 승현(承晛)인데, 적순 부위(迪順副尉)가 되었다. 고려(高麗) 좌정승(左政丞) 하성부원군(夏城府院君) 익청(益淸)의 후예이다.


공의 휘는 율(慄)이고 자는 언신(彦愼)이며 호는 만취당(晩翠堂)인데, 가정(嘉靖) 16년인 정유년 12월 28일에 태어났다. 공은 어려서부터 놀고 장난하는 것이 보통 아이들과 달랐고, 자람에 미쳐서는 뜻을 독실히 하여 학문에 힘썼다. 의정공(議政公)이 일찍부터 시망(時望)을 지니어 화려한 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호남ㆍ영남의 관찰사가 되어 나갔다가 들어와서 이조ㆍ형조ㆍ병조의 판서를 역임하는 동안 집안이 크게 빛나고 명성이 자심하였다. 그러나 공은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여가에는 한결같이 독서에만 뜻을 두고 스스로 심신을 담박하게 지키어 호강(豪强)한 기습을 없애었다. 그리하여 나가서 동류들과 노닐 적에도 귀세(貴勢)를 띠지 않았으므로, 귀족 자제의 기습이 전혀 없었다.


공은 나이 40이 되도록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으므로, 어떤 이가 음사(蔭仕)하기를 권하였으나 응하지 않고 학문에만 더욱 열중하였다. 그러다가 나이 46세 때인 만력(萬曆) 임오년에 명경(明經)으로 진사제(進士第)에 합격하여 승문원 정자에 선보(選補)되었다. 그해 9월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병술년에는 복을 마치고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이 되었다. 정해년에는 전라도 도사로 나갔다가, 무자년에 들어와서 예조 좌랑이 되었고, 이해 9월에는 호조 정랑에 승진되었으며, 10월에는 경성부 판관(鏡城府判官)이 되어 나갔다. 경인년 8월에는 관직을 그만두고 집에서 쉬었다. 신묘년에는 다시 기용되어 호조 정랑이 되었는데, 언제나 재능 있는 관리로 이름이 거론되었다. 그해 9월에는 의주 목사(義州牧使) 자리가 비었으므로 조정에서 공을 천거하여 의주 목사에 임명하니, 낭료(郞僚)에서 발탁되어 당상(堂上)에 뛰어오른 것을 시론(時論)이 영광스럽게 여기었다.


임진년 봄에는 경사(京師)에 간 역관(驛官)이 상국(上國)에 유언비어를 퍼뜨리어 요동(遼東)을 진경(震驚)시켰다는 말이 있어, 모두 옥관(獄官)에게 부쳐 국문한 결과, 말이 본주(本州)에 관련되었으므로, 공 또한 조사를 받았으나 일이 끝내 실증이 없어 무사하게 되었다.


그해 4월에는 일본국(日本國)의 관백(關伯) 평수길(平秀吉)이 60만이라 호칭하는 대군(大軍)을 징발하여 휘원(輝元), 청정(淸正), 행장(行長) 등 여러 추장(酋長)들을 장수로 삼아 조선을 침략해 와서 부산(釜山), 동래(東萊) 등의 성(城)을 연해서 함락시키자, 중외(中外)가 크게 진경하였다. 그러자 상이 이르기를,


“내가 들으니, 권모(權某)가 쓸 만한 재능이 있다고 하는데 지금 어디에 있는가? 양남(兩南)의 거진(巨鎭)에 관직을 제수하여 그 재능을 시험해 보겠다.”


하고, 그날로 공을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삼았다. 그러자 공은 사은(謝恩)하고 곧바로 떠났다. 이때 나는 도승지로 정원(政院)에 직숙하고 있었는데, 공이 찾아와서 나와 작별을 하였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왜 그리 급하게 떠나십니까?”


하니, 공이 이르기를,


“국가의 일이 급해졌으니, 이는 정히 신자(臣子)가 몸을 바칠 시기인데, 어찌 감히 잠시나마 머뭇거려서 세속 아배(兒輩)들의 슬피 울부짖는 꼴을 본받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때 나라가 태평세월이 오래 지속되어 온 터라, 갑자기 왜병(倭兵)이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는 조신(朝臣)들이 양남(兩南) 지방을 마치 사지(死地)처럼 여겼는데, 공은 말이 비분강개한데다 당당하게 길을 출발하니, 정원의 동료들이 모두가 공의 큰 도량을 칭찬하여 마지않았다.


공은 단기(單騎)로 달려서 광주(光州)에 이르렀는데, 미처 직사(職事)에 임하기도 전에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몽진하면서 군대를 징발하여 들어와서 방위하게 하였다. 그러자 전라도 순찰사 이광(李洸)과 방어사 곽영(郭嶸)이 4만의 군대를 징발하여, 이광은 스스로 2만의 군대를 거느리고서 나주 목사(羅州牧使) 이경록(李慶祿)을 중위장(中衛將)으로, 조방장(助防將) 이지시(李之詩)를 선봉(先鋒)으로 삼았고, 곽영은 또 2만의 군대를 거느리고서 공을 중위장으로, 조방장 백광언(白光彦)을 선봉으로 삼았다. 그런데 공이 문인(文人)으로서 전행(前行)에 서게 된 것을 어떤 이가 의아하게 여기자,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나의 직사이다.”


라고 하였다.


이달 20일에 양군(兩軍)이 길을 나누어 전진하여, 이광은 용안(龍安)에서 강을 건너 임천(林川), 온양(溫陽) 등의 길을 경유하였고, 곽영은 전주(全州)로부터 여산(礪山), 공주(公州) 등의 길을 경유하여 함께 직산(稷山)에서 모이었다. 이때 경상 순찰사 김수(金睟)와 충청 순찰사 윤국형(尹國馨)도 모두 여기에 와서 모였는데, 충청의 병력 또한 수만이나 되어 군용(軍容)이 매우 성대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수원(水原)에 나아가 진을 쳤는데, 이광이 곽영으로 하여금 용인(龍仁)으로 진격하게 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적(賊)이 이미 험고한 지역을 점거했으니, 지금 그들을 쳐다보고 공격하기는 어렵다. 지금 주공(主公)이 경내(境內)의 군사들을 몽땅 징발하여 들어와서 구원을 하는 중이니, 국가의 존망이 이번 한 차례의 일에 달려 있는 만큼 힘써 신중히 하여 만전을 도모해야지, 소소한 적과 교전하여 신위(神威)를 지레 허비해서는 안 된다. 오직 의당 조강(祖江)을 곧바로 건너서 임진(臨津)을 막는다면 서로(西路)가 절로 튼튼해지고 군량의 길 또한 트일 것이니, 그 형세의 편의함을 얻어 예기(銳氣)를 기르고 틈을 엿보면서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는 것이 옳다.”


고 하였으나, 이광이 듣지 않았다. 그리하여 곽영이 먼저 백광언을 시켜 가서 도로를 살펴보게 하였는데, 백광언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길은 좁고 수목이 빽빽하여 함부로 진격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하니, 이광이 성내는 빛이 있었다. 그러자 곽영이 말하기를,


“그러면 일을 장차 어찌해야겠는가.”


하고 마침내 진군(進軍)시키니, 이광이 이지시로 하여금 와서 싸움을 돕게 하였다. 그리하여 5월 5일에 이지시와 백광언이 각각 정병(精兵) 1천 명씩을 거느리고 출전하면서 적을 매우 가벼이 여기는 기색이 있으므로, 공이 그들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신중하여 함부로 진격하지 말고 중위군(中衛軍)이 이르기를 기다려서 싸워야 한다.”


고 하였다. 그런데 공이 이르기도 전에 백광언이 적의 숫자가 적은 것을 보고는 군사들을 독촉하여 적을 맞아 싸웠다. 그래서 적이 칼을 뽑아 들고 큰 소리를 외치면서 구릉을 따라 내려오자 아군이 바람에 쓸리듯이 무너져 버리므로, 적들이 승세를 타서 아군을 마구 찔러 이지시와 백광언이 모두 죽었다. 그리하여 이날 밤에 군중(軍中)이 지나치게 놀란 나머지 전사(戰士)들이 모두 싸울 뜻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에는 적들이 산골짜기를 따라 기(旗)를 펼치고 나오자, 제군(諸軍)이 크게 궤멸되었다.


공은 마침내 광주(光州)로 돌아가면서 말하기를,


“주장(主將)이 의당 분부(分付)가 있을 터이니, 군대를 정돈하고서 기다리겠다.”


하였는데, 그 후 오래도록 소식이 없었다. 그러자 공이 말하기를,


“종사(宗社)가 잿더미가 되고 대가(大駕)가 파천을 하였는데, 신하로서 어찌 가만히 앉아서 나라가 망하기만을 기다릴 수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광주 경내의 자제(子弟) 500여 인을 모으고, 방군(傍郡)에 격문(檄文)을 전하여 또 천여 명의 군사를 얻어서 경상도의 계상(界上)에 나아가 진을 쳤다. 그랬다가 남원(南原)의 백성들이 스스로 여사(盧舍)를 불지르고 관창(官倉)을 겁략한다는 말을 듣고는, 공이 본부(本府)로 진을 옮겨 치고 인심을 위무하여 진정시켰다. 이때 순찰사 이광이, 공이 군대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는 공을 임시로 도절제사(都節制使)라 칭하고 인하여 제군(諸郡)의 군사들을 독솔(督率)하여 돌격하는 적을 차단하게 하였다. 그래서 공이 이치(梨峙)로 나아가 주둔하였는데, 이때 영남의 여러 적들이 형세가 매우 창궐하여 곧바로 전라도를 공격하고 군대를 나누어 공을 향해 오고 있었다. 그러자 공이 적의 형세가 매우 치장하다는 말을 듣고 영(嶺)을 의지하여 험고(險固)로 삼고 군대를 엄격히 정돈하고서 기다리었다.


이해 7월에는 영상(嶺上)에서 적과 만나서 군대를 놓아 급히 공격하였다. 동복 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은 용맹이 제군(諸軍)에 으뜸이었는데, 그가 적탄을 맞고 퇴각하자 일군(一軍)이 사기가 꺾여 군사들이 모두 싸울 마음이 없어 차차로 창을 싸매고 머리를 안고 달아나니, 군중(軍中)이 흉흉하였다. 그리하여 이날 포시(晡時)에 적들이 아군이 지친 틈을 타서 아군의 성채(城砦) 안으로 뛰어들어오자, 공이 이에 칼을 뽑아 들고 크게 소리를 외치면서 친히 칼날을 무릅쓰고 더욱 힘차게 싸움을 독책하니, 사람들마다 죽기를 결단하고 싸움으로써 모두가 일당백(一當百)이 되었다. 그래서 이에 외치는 소리가 땅을 진동하고 시석(矢石)이 비 오듯 쏟아지므로, 적들이 아군을 당적하지 못하고 마침내 갑옷을 버리고 시체를 질질 끌고서 도망쳐 버렸다. 그리하여 군자(軍資)와 기계(器械)들이 낭자하게 버려지고 길바닥에는 피가 벌겋게 흘러서 천곡(川谷)이 온통 비린내투성이었다. 그래서 적이 재차 호남을 엿보지 못하여, 여기가 근본이 되고 나라의 보장(保障)이 됨으로써 수년 동안에 걸쳐 동서(東西)로 물자를 운반 공급하여 군량이 한 번도 핍절된 적이 없었던 것은 바로 공의 힘이었다.


이해 가을에 나주 목사(羅州牧使)에 제수되었는데,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본도(本道)의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공이 진중(陣中)에서 교서(敎書)를 맞이하여 받고는 머리를 조아리고 서쪽으로 향하여 통곡하니, 슬퍼하는 기상이 일군을 감동시켜 군교(軍校), 장리(將吏), 사졸(士卒)들이 눈물을 뿌리지 않은 자가 없었다.


공은 이에 방어사로 하여금 이치(梨峙)를 대신 지키게 하고, 친히 전주(全州)에 이르러 도내(道內)의 군사 만여 명을 징발하여 이해 9월에 근왕(勤王)차 서쪽으로 향하였다. 이때 적추(賊酋) 행장(行長)은 이미 평양(平壤)을 함락하여 그 성에 들어가 점거하였고, 장정(長政)은 황해도(黃海道)를 점거하였으며, 융경(隆景)은 개성부(開城府)에 있었고, 평수가(平秀嘉)는 여러 추장들을 독솔하여 대군을 거느리고 경성(京城)에 주둔하면서 군대를 놓아 사방으로 겁략함으로써 서로(西路)가 이미 단절되었다. 그래서 근왕하는 제장(諸將)들은 모두 강화(江華)로 들어가 강을 의지하여 험고로 삼아서 적의 예봉을 피하였다.


이때 공은 상(上)이 의주(義州)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장수들을 불러서 계책을 논의하여 말하기를,


“지금 평양 이남 지역은 모두 적의 소굴이 되었는데, 경성(京城)이 가장 근본이 되는 지역이니 먼저 경성을 수복하여 행장이 주둔한 평양성과 군대를 연접시켜서, 행장으로 하여금 의혹을 품고 동쪽을 돌아보느라 서쪽으로 추축하는 데에 전념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렇게 한다면 여러 적들이 어찌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 만일 강화로 들어간다면 이는 적에게 약점을 보이는 것이다.”


하고, 마침내 수원(水原)의 독성(禿城)으로 나아가 주둔하였다. 이때 상은 공이 독성에 주둔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칼 한 자루를 급히 보내 하사하면서 이르기를,


“여러 장수들 가운데 명령을 따르지 않은 자가 있거든 이 칼을 가지고임의로 처단하라.”


하였다.


이때 평수가는 공의 병세(兵勢)가 매우 정예함을 두려워한 나머지, 수만의 군대를 삼진(三陣)으로 나누어 오산(烏山) 등지의 군영과 연결하여 왕래하면서 싸움을 걸어 왔다. 그러나 공은 성벽을 견고히 하여 굳게 지키기만 하고 적과 교전을 하지 않으면서 가끔 정예한 군사를 내어 적이 향하는 곳에 응전해서 적의 예봉을 꺾었다. 그러자 적의 기아(機牙)가 절로 무너지고 각거(角距)가 모두 타락되어 표략(剽掠)하여도 얻어진 것이 없었으므로 수일 후에는 군영을 불태우고 밤에 도망쳐 버렸고, 기내(畿內)의 다른 여러 적들도 차례로 성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래서 이때부터 서로(西路)가 통하게 되자 열군(列郡)의 의병(義兵)들이 공의 풍채를 바라보고 봉기(蜂起)하여 일시에 메아리처럼 호응해 왔다.


공은 어지러운 난리 속에 기용되어 외로운 군대를 거느리고 수많은 적들의 사이에 있으면서 허세를 부려 협박을 하고 억지로 위엄을 떨치어 호남, 호서를 붙들어 보호하였으므로, 지금 중흥(中興)의 공을 논하는 이들이 공을 으뜸으로 일컫는다.


계사년 2월에는 휘하의 정병(精兵) 4000을 나누어 전라 병사 선거이(宣居怡)에게 주어서 그로 하여금 금주산(衿州山)에 군영(軍營)을 만들어 멀리서 성원을 하게 하고, 공은 스스로 정병 2300을 거느리고 양천강(陽川江)을 건너 고양(高陽)의 행주산성(幸州山城)으로 나아가 진을 쳤으니, 그것은 서로(西路)를 누르면서 경성(京城)을 엿보려는 뜻에서였다.


이때 천조(天朝)의 대장군(大將軍)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대군을 거느리고 평양을 수복하여 위명(威名)이 크게 진동하였다. 그러자 적추(賊酋) 청정(淸正)은 함경도에 있다가 경성으로 회군하였고, 융경(隆景), 장정(長政) 또한 달아나서 경성으로 돌아갔으며, 행장(行長)은 의지(義智), 조신(調信) 등과 함께 흩어진 군졸들을 거두어 모아서 여러 추장들과 경성에서 합세하니, 적의 형세가 날로 더욱 치성해졌다.


그러자 공이 군대를 멀리 인솔하여 깊이 들어가서 곧바로 서쪽 겨드랑이 부분을 핍박하니, 적들이 아군의 규모가 적은 것을 보고는 별로 신경도 쓰지 않으면서, 신 끝으로 걷어차서 대번에 거꾸러뜨릴 계획으로 군중을 몽땅 동원하여 나왔다. 드디어 2월 12일 새벽에 후리(候吏)가, 적들이 좌익(左翼), 우익(右翼)으로 나누어 홍기(紅旗), 백기(白旗)를 들고 본영(本營)을 향하여 온다고 아뢰므로, 공이 군중(軍中)에 동요하지 말라고 명하고 대(臺)에 올라서 바라보니 본영과 5리쯤 떨어진 언덕 위에 적의 무리가 이미 그득하게 퍼져 있었다. 그런데 선봉(先鋒) 100여 기(騎)가 차츰차츰 핍박해 오더니, 이윽고 수만여 병졸이 들판을 가득 덮어와서 본영을 포위하고 최후에는 대군으로 계속 진격해 오므로, 아군은 모두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는데, 적들은 군대를 삼영(三營)으로 나누어 군졸들을 휴식시키면서 교대로 진격해 왔다. 그런데 묘시로부터 유시에 이르기까지 무릇 세 차례의 싸움에서 모두 적이 불리하였다. 그러자 적이 군중 사람들로 하여금 섶뭉치[束芻]를 가지고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놓아서 우리 성책(城柵)을 불지르게 하므로, 우리 성중에서는 물을 쏟아 내리었다.


처음에 승군(僧軍)으로 하여금 서북면(西北面)의 자성(子城)을 지키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승군이 잠시 퇴각한 사이에 적들이 큰 소리를 외치며 성 안으로 어지러이 쳐들어오니, 온 군중이 바람에 쓸리듯 괴란되었다. 그러자 공이 스스로 칼을 뽑아 들고 장수들을 독책하니, 장수들이 모두 칼날을 무릅쓰고 격투를 벌임으로써 적이 이에 퇴각하였다. 적이 물러가서는 시체들을 네 무더기로 쌓고서 섶을 모아 시체를 불태우니, 그 냄새가 10리 밖까지 풍기었다. 이때 아군은 적의 남은 시체들을 수습하여 130여 급(級)을 베고, 군자(軍資), 개갑(鎧甲), 기치(旗幟), 도창(刀槍) 등을 무수히 노획하였다.


이때 이 제독은 개성부(開城府)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먼저 선봉(先鋒) 유격장군(遊擊將軍) 사대수(査大受)를 보내어 임진강(臨津江)을 건너 왕래하면서 적정(賊情)을 탐지하게 했는데, 이로 인해 공의 대첩(大捷) 소식을 듣고는 바로 그 다음날에 부장(副將)을 보내어 어제 전투한 곳을 살펴보게 하고 예물(禮物)을 보내어서 하례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수일 후에는 공과 서로 만나 보기를 요청하므로, 공이 군진을 정돈하고서 기다렸는데, 기치(旗幟)는 선명하고 기계(器械)는 정예하며 호령(號令)은 엄명하고 부오(部伍)는 질서 정연하였으므로, 천장(天將)이 공을 더욱 공경히 대우하였고, 심지어는 서로 말하기를,


“권가군(權家軍)은 다른 진영과 자별(自別)하니, 참으로 외국(外國)에 참다운 장수가 있도다.”


라고까지 하였다.


그로부터 3개월 뒤에는 천조(天朝)의 총독 군문(總督軍門)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이 본국에 이자(移咨)하여 공에게 별도로 장상(獎賞)을 행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왜노(倭奴)가 조선(朝鮮)을 꺾어 무너뜨림으로부터 왕국(王國)의 삼도(三都)와 여러 군현(郡縣)들이 모두 왜노를 바라만 보고도 궤멸되었고, 일찍이 의사(義師)를 일으켜 대란(大亂)을 평정하고 봉강(封疆)을 지켜서 회복(恢復)을 도모한 영웅 걸사(英雄傑士)가 한 사람도 없었으니, 왕국에는 진정 사람이 없다고 이를 만하다. 그런데 유독 전라 관찰사(全羅觀察使) 권모(權某)는 외로이 떨어진 지역을 눌러 지키면서 군중을 불러모으고 자주 기계(奇計)를 내어 수시로 대적(大敵)을 방어하였고, 요즘에는 다시 모래주머니를 군량인 것처럼 위장하여 왜노들이 와서 약탈하도록 유인해서 그들을 겁살하였으니, 이는 정히 왕국에 있어 난세(亂世)의 충신(忠臣)이요 중흥(中興)의 명장(名將)이다.”


하고, 인하여 홍단견(紅段絹) 4단(端)과 백은(白銀) 50냥(兩)을 상으로 내리어 충용(忠勇)을 권장하는 뜻으로 삼고, 또 국왕(國王)으로 하여금 작록(爵祿)을 올려 주어 본국의 요재(僚宰)들을 감화시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천조의 병부 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의 상서(上書)에서는,


“전라도가 썩 조정의 명을 잘 받들어 배신(陪臣) 권모(權某)가 홀로 외롭고 위태로운 지역을 지키면서 강경한 적을 막아냈다.”


는 일로 주문(奏聞)하니, 천자가 공을 가상히 여겼다. 그리하여 이해 3월에 병부(兵部)에서 성지(聖旨)를 받들어 말하기를,


“조선은 본디 강하기로 일컬어졌거니와, 이제 전라도에서 참획(斬獲)한 것이 매우 수다함을 보니, 해국(該國)의 인민들이 스스로 진작할 수 있겠다.”


하고, 인하여 홍로시(鴻臚寺)의 관원을 차견해서 본국에 선유(宣諭)하였다. 이로부터 천조의 문무(文武) 대소관(大小官)들이 매양 공의 이름을 들을 적마다 반드시 말하기를,


“이 사람이 바로 지난날에 행주대첩을 아뢴 사람이 아닌가.”


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행주대첩이 있은 뒤로는 전라도의 일진(一陣)이 제군(諸軍)의 으뜸이 되었다.


그 후 공은 파주산성(坡州山城)으로 진을 옮겼는데, 적이 군중을 총동원하여 서쪽으로 가서 행주의 패배를 보복하려 하였으나, 공의 벽루(壁壘)가 높고 깊음을 보고는 군중을 거두어 물러갔는데, 이렇게 한 것이 무려 세 번이었다. 그런데 그해 4월에 평수가(平秀嘉)의 여러 추장들이 스스로 저들의 병세(兵勢)가 점점 쇠퇴해짐을 알고는 제독(提督)과 서로 강화(講和)를 하고 군대를 전부 거두어서 도망쳐 돌아갔다. 이때 공이 그 소식을 듣고 간단한 병력으로 밤새도록 달려서 성에 들어가 보니, 적은 이미 강을 건너버린 뒤였다. 그러자 공이 재촉하여 선봉(先鋒)으로 하여금 이틀길을 하루로 잡아 급히 달려서 그 뒤를 밟아 쫓도록 하고, 공은 대군을 정돈하여 진격할 차비를 갖추었는데, 공이 미처 길을 떠나기 전에 제독이 여러 장수들을 독책하여 모의하기를,


“전라 포정사(全羅布政使)는 비분강개하여 싸움을 잘하고 사졸(士卒)들이 그의 명을 잘 따르므로, 지금 그가 만일 군중을 총동원하여 적을 추격한다면 우리가 강화한 일을 무너뜨릴 것이다.”


하고, 한밤중에 급히 유격장군(遊擊將軍) 척금(戚金)을 보내어 노량진(露梁津)으로 달려가서 진선(津船)을 모조리 걷어치워서 군사들을 건너지 못하게 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척금이 자기 심복을 공에게 보내어 함께 일을 계획하기 위해 서로 만나기를 요청하므로, 공이 그곳에 가니 척금이 공을 힐책하여 말하기를,


“공이 이야(李爺)의 분부를 기다리지 않고 지레 적을 추격하려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였다. 그리고는 날마다 그 밑에 사람을 보내어 공의 동정을 살피게 하여 은밀히 방비를 하였으므로, 공이 감히 움직일 수 없어 마침내 군대를 거느리고 본도로 돌아갔다. 이해 6월에는 도원수(都元帥)에 임명되어 제군(諸軍)을 독솔하여 영남으로 옮겨 주둔하였다.


갑오년에는 병으로 해면을 요청하니, 상이 특별히 내의(內醫)를 보내어 간병을 하게 하였다. 그때 한 무관(武官)이 전장에 나가기를 꺼리어 금주(金州)로 도망가 숨어서 스스로 천장(天將)에게 의탁하였으므로, 공이 누차 본주(本州)에 이서(移書)하여 그를 결박해서 군문(軍門)으로 압송하도록 하였으나, 주관(州官)이 천장을 두려워하여 감히 누구냐고 말도 못하였다. 그러다가 을미년에 공이 본주에 이르러 이졸(吏卒)을 풀어서 그를 체포하니, 천장이 입이 닳도록 애걸하였으나 공이 끝내 그를 목 베었다. 그런데 그 후 얼마 안 되어 남방으로 군사를 시찰하러 나간 국상(國相)이 본주에 이르렀을 때, 그 무관의 집에서 국상에게 공을 모함함으로써 공이 마침내 이 일로 파면되었다. 그러자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대장(大將)이 된 지 3년에 도망간 병졸 하나를 목 베고 관직이해면되기에 이르렀단 말인가.”


하였다. 이해 10월에는 한성부 판윤, 비변사 당상, 호조 판서를 역임하였다.


병신년에는 충청도 관찰사에 제배되었다. 이때 적이 오래도록 물러가지 않으므로 조정에서 한창 원수(元帥) 임명할 일을 의논하였는데, 상이 묻기를,


“누가 원수가 되기에 적합한가?”


하니, 좌우에서 다른 사람으로 대답하자, 상이 이르기를,


“어찌하여 권모(權某)로 삼지 않는가?


하고, 인하여 공을 특별히 원수로 임명하였다. 그러자 공이 상소하여 해면하기를 요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卿)은 충로(忠勞)가 성대히 드러났고 용략(勇略)이 세상에 뛰어나서, 명성은 천하에 널리 알려지고 위엄은 적국을 습복(慴伏)하게 하였으니, 원수의 직임을 경말고 그 누가 맡겠는가. 경은 의당 사양하지 말고 다시 더욱 마음을 다하여 시국의 어려움을 구제하라.”


하였다. 그로부터 수일 뒤에 공이 경연에 입시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죄로 인하여 경이 오랫동안 밖에서 노고를 하였으니, 경이 아니면 국가가 어떻게 오늘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


하고, 특별히 내구마(內廐馬) 한 필을 하사하였다.


이해 3월에 공이 원수로 나가면서 배사(拜辭)하니, 상이 공을 인견하고 남방(南方)의 형세와 군량(軍糧), 기계(器械)의 많고 적음, 인심(人心)과 풍속(風俗), 수령(守令)의 현부(賢否)와 제장(諸將)의 용겁(勇怯), 군정(軍情)의 고락(苦樂)과 인재(人材)의 침체(沈滯) 등에 관하여 반복해서 자문하되, 해가 기울도록 태만한 표정이 없었으며, 또 말하기를,


“경을 수고롭게 하여 재차 내보내노니, 흉적들을 섬멸하여 국가를 편안하게 해 주기만을 내가 오직 바라노라.”


하고, 인하여 술을 내리었다. 공이 나옴에 미쳐서는 상이 또 이르기를,


“국사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은 나의 죄이지만, 경이 사졸들을 독려하여 한시바삐 적을 평정하라. 지금 시사(時事)가 조금 편안해진 것은 바로 경의 공을 힘입은 것이다.”


하고, 또 내구마 한 필 및 마장(馬粧)을 하사하였다.


이때 천조(天朝)에서 막 일본(日本)에 사신을 보내어 수길(秀吉)을 일본 국왕(日本國王)에 봉하였으므로, 우리 나라 변방에 주둔한 왜추(倭酋)들과 본국의 제장(諸將)들이 모구 각각 진군(進軍)을 정지하고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공은 임지에 부임하자마자 군무(軍務)에 관한 칠사(七事)를 조목조목 올렸는데, 적봉(賊鋒)이 재차 창궐하게 될 것을 깊이 걱정하는 내용이었다.


병신년 겨울에는 우리 쪽 사람이 일본에서 돌아옴으로 인하여 조정에서 비로소 두 사신을 받아들이지 않은 일과 청정(淸正)이 곧 재차 조선을 건너오게 될 것을 알게 되어, 중외(中外)의 인심이 흉흉하여 안정치 못하였다. 공은 이때 밀양(密陽)에 있으면서 내가 그 경계에 들렀다는 말을 듣고 찾아와서 서로 만났는데, 공이 큰 소리로 말하기를,


“요즘 듣건대, 좋지 못한 변보(邊報)가 있음으로 인하여 제공(諸公)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괴로이 근심 걱정만 하고 있을 뿐, 변방의 일에 대하여 한 가지 계책도 언급한 것이 없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란 말인가. 가령 청정이 재차 나온다 하더라도 단지 지난날의 청정에 불과할 것이니, 이 적이 지난날에 이미 뜻을 얻지 못했는데 어찌 재차의 도전에서 공을 거둘 것을 기필하겠는가. 그런데도 장상(將相)들은 앉아서 걱정만 하고 있단 말인가. 국가의 일을 그러고도 해낼 수 있겠는가. 만일 조정에서 소아배(小兒輩)들이 대사(大事)를 그르치도록 놔두지 않고 나로 하여금 손을 쓰게 하여 약간의 시일만 허용해 준다면, 청정이 설령 온다 하더라도 나에세 스스로 그를 대비하는 방책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인하여 군대를 나누고 성책을 나열하여 동서로 응원하는 계책을 진술해 올리니, 상이 매우 가납(嘉納)하여 그 의논을 정신(廷臣)들에게 내리었다. 그런데 이때 변보(邊報)가 날로 급박해지자, 정신들이 눈을 부릅뜨고 서로 쳐다보기만 하고 감히 한 가지 생각이라도 짜내서 말하는 자가 없었다가, 공의 장계(狀啓)를 보고는 모두 말하기를,


“원수가 이러하니, 약간 마음이 든든해진다.”


하고, 즉시 공의 의논을 칭찬하고 장려하는 뜻으로 복계(覆啓)하였으나, 그 일이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정유년 가을에는 적들이 길을 나누어 서쪽으로 올라오는데 선봉이 이미 충청도에 이르렀다. 그러자 조정에서 한강(漢江)을 차단하고자 하여 공으로 하여금 급히 달려 입조(入朝)하여 도체찰사(都體察使)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서로 협력해서 한성을 수어(守禦)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공이 입조하여 유성룡과 함께 입시(入侍)했는데, 유성룡이 강면(江面)을 차단할 일을 오로지 공에게 책임지울 것을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처음에 공이 입조했을 때, 상이 놀라면서 이르기를,


“남방의 적세(賊勢)가 한창 치성한데, 원수가 어찌하여 갑자기 입조하였는가?”


하니, 공이 말하기를,


“분부가 있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좌우에서 모두 말하기를,


“요즘에 적봉(賊鋒)이 이미 경기(京畿) 지역을 핍박하였으므로, 조정의 의논이 한강을 차단하여 지키자는 쪽으로 모아졌는데, 권모가 아니면 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를 불렀던 것입니다.”


하였다.


그런데 이때 적들이 직산(稷山)에서 막 꺾이어 군중을 말듯이 몰아쳐 돌아가므로, 조정에서는 또한 서북병(西北兵)을 징발하여 적을 추격하게 하고, 공을 재촉하여 남쪽으로 내려가 여신(餘燼)을 수습하고 장수들을 책려(策勵)해서 천병(天兵)과 협동하여 재차의 거사를 도모하도록 하였다.


이해 겨울에는 흠차경리도찰원도어사(欽差經理都察院都御史) 양호(楊鎬)가 제독총병(提督總兵) 마귀(麻貴)와 함께 4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삼도(三道)로 나누어 수륙(水陸)으로 아울러 진군해 왔다. 그러자 공은 여러 장수들에게 각자의 직무를 분담시키어 천병을 협조하여 따르면서, 자신은 경기(輕騎)를 거느리고 효용(梟勇)한 장수를 뽑아 대동하고서 친히 제독의 군영을 따랐다.


그런데 제독이 문경현(聞慶縣)에 이르러서는 삼로(三路)의 여러 장수들을 불러 놓고 은밀히 군무(軍務)를 논의했는데, 공 또한 그 자리에 참여했었다. 이때 제독이 은밀히 말하기를,


“천병이 울산(蔚山)에 이르거든 원수 또한 수군(水軍)으로 하여금 전선(戰船)을 정비하게 하여 포수(砲手)를 많이 싣고 앞바다에서 병위(兵威)를 과시하여 성세(聲勢)를 돕도록 하시오.”


하므로, 공은 일체 그의 말대로 하였다. 그런데 제독이 울산을 공격하다 불리함에 미쳐서는, 경리(經理)가 공으로 하여금 홀로 본국의 토병(土兵)을 거느리고 화공전(火攻戰)을 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공이 여러 장수들을 독책하여 돌진하다가 가장 뒤늦게 온 군졸 두 사람을 목베어 조리를 돌리니, 제군(諸軍)이 모두 팔짝팔짝 뛰며 환호성을 지르면서 진격하였다. 그리고 본국의 대장(大將), 병사(兵使), 방어사(防禦使) 이하 여러 장수들이 개미처럼 늘어붙어 올라가 함께 책내(柵內)로 들어가서 성하(城下)에 육박하니, 제독이 장전(帳前)에서 바라보고 은밀히 공의 뛰어난 용병술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원수가 호령(號令)을 능히 행한다.”


하였고, 그 이튿날에는 경리 또한 칭찬하여 말하기를,


“조선의 군병(軍兵)이 힘껏 싸워서 성세를 도와 주니 매우 기쁘다.”


고 하였다.


공이 일찍이 경리에게 말하기를,


“지금 도산(島山)을 공격하자면, 우도(右道)의 연해에 적진(賊陣)이 별처럼 나열해 있으니, 그들이 도산이 급하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 형세가 반드시 군대를 규합해 와서 구원할 것입니다. 그러니 의당 일진(一陣)의 병마(兵馬)를 나누어서 외부의 구원병을 차단한다면 청정의 머리를 휘하에 가져올 수 있습니다.”


하였다. 그런데 천병이 도산을 12일 동안이나 포위한 결과, 성(城)이 작고 견고한데다 적들 또한 성대히 방비를 하였으므로 온갖 방도로 성을 공격했지만 끝내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이때 공은 천병을 협조하여 주선하면서 창을 베고 한데에서 거처를 하다 보니, 투구와 갑옷 속에서 이[蟣虱]가 생기기까지 하였으나 예기(銳氣)가 조금도 쇠하지 않았다. 그 후 끝내 적의 원병이 크게 몰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천병이 그 때문에 안전 지대로 퇴각하게 되었으니, 모두가 일체 공의 말대로 되었던 것이다.


무술년에는 대군(大軍)이 이미 돌아간 뒤였으므로 공이 병을 핑계로 상소하여 파면을 요청하니, 상이 사람을 급히 달려 보내어 하유하기를,


“경은 이미 행주(幸州)의 공을 세워서 위명(威名)이 원래 드러났는데, 지금 이 도산의 싸움에서는 제독이 또한 호령을 능히 행한다고 경을 칭찬하였으니, 재반(宰班)에서 찾는다 하더라도 실로 경을 대신할 사람을 얻기가 어렵다. 경은 다시 더 책려(策勵)하여 적을 완전히 섬멸하는 것을 한정으로 삼을지어다.”


하였다.


이해 가을에는 천조의 총독 군문(總督軍門) 대사마(大司馬) 형개(邢玠)가 세 대장(大將)으로 하여금 삼로(三路)로 재차 진격하게 하여, 제독 마귀(麻貴)는 울산(蔚山)의 길로 향하고, 제독 동일원(董一元)은 사천(泗川)의 길로 향하고, 제독 유정(劉綎)은 순천(順天)의 길로 향하게 되었는데, 대군(大軍)이 곧 출발하려 할 적에 세 대장이 각각 희망하는 것이 있었으니, 본국의 명장을 얻어서 자기들을 협조하여 따르게 해 주기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 마귀와 유정은 모두 권 원수를 얻기를 요구하여 서로 다투어 마지않으므로, 상이 끝내 공을 유정에게 맡겨 주었다.


이윽고 천병이 순천에 이르러서는 왜교(倭橋)를 포위하고도 함락하지 못하였고, 유 제독은 아예 싸울 마음도 없었다. 그러자 공이 몹시 분개하게 여기어 스스로 각 영(各營)에서 결사적으로 싸울 수 있는 군사로서 적봉(賊鋒)을 돌격하는 데에 용감한 자들을 모집하여 소리를 크게 외치고 먼저 올라서 천병과 협력하여 일제히 진격하기를 청하니, 제독이 말하기를,


“시험삼아 여러 장수들을 불러서 의논하겠다.”


하고는 우물쭈물하고만 있었으니, 그의 뜻은 이미 퇴각하기를 결정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제독이 왜교를 9일 동안이나 포위하여 공격했으나 군(軍)이 끝내 공을 세우지 못하였다.


공이 처음에는 마귀를 따랐고 두 번째는 유정을 따랐는데, 도산의 싸움과 왜교의 싸움은 대소(大小)의 체제와 존비(尊卑)의 차서가 서로 같지 않았다. 그리하여 천장(天將)을 받들어 섬기느라 손을 놓고 성공하기만을 기다리면서 천장의 통제를 받아 그 명령만을 오직 삼가서 따를 뿐이었고, 감히 자기 주장을 써서 그 능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누차 해 볼 만한 기회를 만나서도 머뭇거리며 감히 진취하지 못함으로써, 끝내 화류(驊騮), 산자(山子)와 같은 천하 준마의 재능으로 하여금 중도에서 발을 굽히게 하고 말았으니, 이 또한 하늘의 뜻이던가. 애석하도다.


공이 이치(梨峙)의 싸움에서 위성(威聲)이 처음 드러났고, 행주(幸州)의 대첩에서는 영문(榮聞)이 멀리 전파되었다. 그래서 뒤에 행장(行長)이 의지(義智), 조신(調信)과 함께 매우 간절히 강화(講和)를 요구하면서 경상 병사(慶尙兵使) 김응서(金應瑞)와 중로(中路)에서 만나기를 요청하였는데, 서로 만나서 이야기를 절반도 하기 전에 세 추장이 권 원수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으면서 정성을 바치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그리고 청정(淸正)이 본국의 순신(純信)한 사람과 강화하기를 원했을 적에는 조정에서 산인(山人) 유정(惟政)을 그의 군영에 들여보냈는데, 청정이 맨 먼저 권 원수의 안부를 물었다. 그리하여 이로부터는 왜인(倭人)들이 매양 본국 사람을 만날 때마다 반드시 권 원수는 어디에 있으며 요즘에는 무엇을 하는가 등을 물었다. 그리고 경사(京師)에 조회 간 본국 사신이 어떤 일로 병부 아문(兵部衙門)에 갔을 적에는 상서(尙書) 석성(石星)이 이야기하던 차에 말하기를,


“너의 나라의 군신(群臣)들 가운데 권모(權某) 같은 사람 수인(數人)만 더 있다면 내가 무슨 걱정을 하겠는가.”


고 하였다.


기해년 봄에는 공이 영남에 있었는데, 하루는 두루마리[卷子] 하나를 가져다가 임진년 이후 전후로 받은 성지(聖旨)들을 기록하고서 두어 번 훑어보고 말하기를,


“나는 아들이 없으니, 내가 죽으면 선덕(先德)을 천양(闡揚)할 사람이 없거니와, 나 또한 본디 내 신후(身後)의 일을 꾸며 주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비록 그러나 사위 이 의정(李議政)이 있어 반드시 나의 묘지(墓誌)를 쓸 것이니, 만일 나의 평생사(平生事)를 찾으려고 한다면 다만 이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고 하였다. 그런데 이해 여름에 끝내 담질(痰疾)을 얻어 고향에 돌아가 죽기를 요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공이 이 명(命)을 얻고는 먼저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강화(江華)의 촌사(村舍)로 돌아가서 문을 닫고 들어앉아 수년 동안 질병을 요양한 다음에 환조(還朝)하겠다는 뜻을 말하였다. 그런데 강화로 돌아갈 때에 미쳐 병이 위독해져서 길을 출발할 수 없으므로,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와 경성에 들어와서 의약(醫藥)을 찾아갔는데, 경성에 이르러서는 이미 조회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해 7월 6일에 우사(寓舍)에서 작고하니, 향년이 63세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상이 몹시 애도하고 그를 위하여 2일 동안 철조(輟朝)하였으며, 낭관(郞官)이 그 집에 조문하였다.


병란(兵亂)이 일어난 이후로는 국가의 저축이 고갈됨으로 인하여, 무릇 재상(宰相)의 죽음에 있어서도 모두 치부(致賻)를 그만두었다. 그래서 이때에 이르러 유사(有司)가 전례에 따라 치부하지 말기를 청하니, 상이 특별히 부제(賻祭)를 내리었다. 그로부터 수일 후에는 상이 공에게 관직을 추증하고자 하여 그 의논을 대신에게 내리니, 대신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권모는 처음에 일개 수령(守令)으로서 군대를 이끌고 들어와 구원할 적에도 의기(義氣)가 가상하였거니와, 행주(幸州)의 싸움에 이르러서는 난리가 일어난 이후 하나의 대첩(大捷)이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경성(京城)을 수복한 것은 권모의 공이라고 하였습니다. 적과 대진(對陣)한 지 8년 동안에 기나긴 풍로(風露)를 겪으면서 몸이 파리해지도록 몸과 마음을 다하여 나라에 보답하였으니, 인신(人臣)의 의리가 무엇이 이보다 더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윤허하여 특별히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하였다.


공의 전취(前娶)는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 조휘원(曺輝遠)의 딸인데, 공보다 먼저 작고하였다. 후취(後娶)는 강서 현령(江西縣令) 박세형(朴世炯)의 딸인데, 자식이 없었다. 그리고 전부인(前夫人)에게 1녀가 있어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게 시집갔으니, 이가 바로 나이다. 9월 15일에 홍복산(洪福山) 압곡(鴨谷) 건좌 손향(乾坐巽向)의 언덕에 공을 장사지냈는데, 선대부(先大夫) 의정(議政)의 묘가 바로 그 위에 있다.


이에 앞서 공이 작고하여 염(殮)을 끝낸 뒤 빈객(賓客)들이 일을 마치고 나서 회곡(會哭)하고 물러가려 할 적에 공의 형(兄)인 가선대부(嘉善大夫) 행(行) 상호군(上護軍) 권군 순(權君恂)이 공의 군좌(軍佐), 고리(故吏)들과 꾀하여 말하기를,


“아, 내 아우의 재덕(才德)과 공렬(功烈)은 의당 서술하여 죽은 이를 높여 주는 후인(後人)을 기다려야 한다. 그렇게 하면 끝없이 전하는 데에 또한 크게 유익할 것이다.”


하고, 마침내 이 일을 나에게 명하였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어려서 의탁할 곳 없는 고아(孤兒)가 되어 공의 집에 몸을 의탁하고 있으면서, 삼가 일찍이 공의 사실을 능히 말할 만한 구가 고로(舊家故老)에게서 공에 대한 사실을 들은 적이 있다. 그의 말에 이르기를,


“공이 조정에 있을 때는 고니처럼 우뚝 서서 일을 만나면 천둥처럼 격동하였고, 신출귀몰하여 기변(機變)이 무궁하면서도 정도를 잃지 않은 것으로 말하면 시조인 태사(太師) 권행(權幸)의 유풍(遺風)이 있었다. 그리고 멀리서 바라보면 의연(毅然)하고 곁에 나아가 보면 온화하며 화락함으로써 사람을 접대하여 충심을 남김없이 토로한 것으로 말하면 양촌(陽村)과 같은 아름다운 행실이 있었다. 그리고 높은 관(冠)에 큰 띠를 띠어 풍채가 준정(峻整)하고 일을 당해서는 정도를 굳게 지키어 질박하게 하고 까다롭게 하지 않는 것으로 말하면 의정(議政)의 국량이 있었다. 그러니 이 세 가지를 겸하고도 공렬(功烈)은 그분들보다 뛰어났다는 것이 공을 두고 이른 말이다.”


고 하였다. 나는 이제 감히 여러 장리(將吏)와 종인(宗人)의 말을 취하여 붓을 잡은 이의 채택(採擇)에 대비하는 바이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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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남구역사문화인물간행위원회(2015) 역사를 배우며 문화에 노닐다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Ⅰ 인물과 문헌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Ⅱ 문화유적 광주남구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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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민속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21) 양림 인물 광주남구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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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문화관광탐험대(2011~16) 문화관광탐험대의 광주견문록Ⅰ~Ⅵ 누리집(20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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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득염(2006) 광주건축100년 전남대학교출판부
한국학호남진흥원(2022) 광주향약 1,2,3. 한국학호남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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