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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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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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병택(安秉宅)
    안병택(安秉宅, 1861~1936)의 본관은 竹山, 자는 처인(處仁) , 호는 부해(浮海)이다. 하남면 장자동에 거주했다. 《부해유고》가 있다.부 : 安達三조 : 安鍾秀증조 : 安弼蓮외조 : 坡州 尹처부1 : 金海 金송사 기우만에게 수학하였다.1916년 송사 선생 襄禮 때 執禮로 참석하였다.1924년 담대헌의 중건시 30냥을 성금으로 내었다.
    2020-08-05 | NO.327
  • 안용환
    1931년 간행된 기우만(奇宇萬,1846~1916)의 《송사집松沙集》 48권에 죽산안씨 20세 안용환(安龍煥,1857~1911)의 행장(行狀)이 기록으로 남아있다.淸深堂安君行狀 君諱龍煥字慶雲。淸深其堂顔也。安氏本順興人。文成公晦軒先生諱裕其上祖。有闢異衛正之功。從祀夫子廟。文惠公諱元衡門下侍中。勳封竹城君。子孫分貫竹山。雙淸堂諱勉官判典。封興寧君。竹溪諱魯生。始仕國朝。集賢殿大提學。生員諱孟孫。始居光州。荷谷諱忠達。文章行義。爲世宗仰。官正郞。士林建祠俎豆之。高祖諱斗胤。曾祖諱宅魯。祖諱思孝。考諱載五。下鄕數世後。顯榮雖少替。而世篤文行。爲鄕邦矜式。衣冠古家。妣光山金氏父修儀。德配君子。君生哲宗丁巳(1857)五月戊寅。才晬而孤。不記父顔。爲畢生痛。誠敬事母。出外遄反曰吾母待我。得異味。必以獻。與儕兒遊。口無戲言曰。悖出必悖入。羞辱及於父母。甫上學。自知劬書。不煩提敎。每日授課。歸讀於母側曰。母氏孤踽。須臾不可離也。少長。乃閣書曰。親老不養。徒事文墨。子職有闕。樵山漁水。庋閣常餘。慈夫人常多疾。迎醫合藥。舍置他事。疾革。晝宵涕淚。遭故。擗踊頓絶。水穀不入於口三日。雖甚貧困。而附身附棺。誠信無憾。旣殯。曰吾據禮守廬。則奠獻莫需。行傭樵採。饋食無闕。及葬。展晨昏不廢。當膝成坎。至行所感。有欲妻之者。君卻之曰。雖甚竆厄。禮限不可違越。服闋娶婦。勤儉立家。先置祭田。以永香火。周恤族戚。不計有無。收養族子女。嫁娶資生者亦數人。凡民有喪。貧不能經紀。則出力相助。使無遺憾。族黨墳墓無主頹圮。改築之。使不犯五患。蓋其天性仁厚。見人之急。若癏在己。嘗靑馬邪熾。勒人爲黨。君乃與里人立約曰。凡我同約之人。勿染於邪。否者不可與同閈。有潛誘里子弟者。君招致諭之曰。惑亂黔首。鄕有八刑。人雖可欺。不畏于天。人之異乎禽獸。爲不失其良心。耕田鑿井。庶民常職。左道惑衆。爲獸爲禽。辭氣懇至。其人愧謝。是以一里賴而潔淨。每爲彼輩眼釘。數被侵擾。亂平後皆來請罪。君笑曰。往日之事。否運所使。革心爲貴。何至相謝。聞者皆服其寬弘。平居不見邑宰。或致書願見。輒辭以愚劣。歲丙申。余妄意討復。駐陣在光山館。君仗劒而至。誓以同死。僨事之後。痛哭杜門。敎子課孫。爲日間事業。于後五賊賣國。憤不自勝。卽欲叫閤請斬。沮格莫遂。仰天痛歎。或至廢食。晩構一堂將落。夢有老人大書壁上曰淸深。覺而自解曰。擧世皆濁。反之則淸。擧世皆淺。反之則深。所以爲戒者大矣。因受以爲扁。蓋其平日所守者正。故發於宵寐者如此。所謂老人者。豈靈臺主人歟。辛亥(1911)冬。偶得難醫之祟。臨命。顧謂子圭冕曰。世衰道微。魍魎晝行。世間萬事。無足置胷中。須立心制行。從師取友。謹守世風。則入地之目。庶可瞑矣。以翌年正月二日乙丑(1925)終。得年僅五十五。嗚呼短矣。見今滔滔胥淪。不與俱。所謂千萬人中常知有己。如君者不數數有焉。使久於世。庶可以激濁揚淸。而何天奪之速也。葬再遷於白蓮洞後佳藏洞戌坐之原。夫人河東鄭氏仁默女。有婦德。一男卽圭冕。副室一女適高濟崑。圭冕以父命從余遊。淳謹好學。庶不負君之遺訓矣。草事行爲家狀。以余知君深。請刪潤以示久遠。吾何忍辭。
    2020-04-08 | NO.326
  • 안정환(安正煥)
    안정환(安正煥, 1843~1909)의 본관은 죽산이고 자는 덕유(德有), 호는 명수(明水)이다.부 : 安瑛壽조 : 安思行증조 : 安碩魯외조 : 盧彦鉉처부1 : 尹佑鎭처부2 : 丁奇杓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다.
    2020-08-05 | NO.325
  • 안종기(安鍾基)
    안종기(安鍾基, 1881~1949)의 본관은 죽산이며 자는 중술(仲述), 호는 술재(述齋)이다.부 : 安圭容조 : 安國煥증조 : 安鳳壽외조 : 李相輝처부1 : 奇春衍송사 기우만에게 수학하였다.1916년 송사 선생 襄禮 때 贊引으로 참석하였다.1924년 담대헌의 중건시 50냥을 성금으로 내었다.1927년 8월에 吳駿善 柳昌秀 등과 함께 蘆沙 문도들에게 高山祠에 함께 배향할 제자들의 위패를 정하자는 내용의 통문을 보냈다.
    2020-08-05 | NO.324
  • 안종수 安宗洙 고종 32년(1895) 12월∼건양 1년(1896) 2월 9일
    안종수 安宗洙 고종 32년(1895) 12월∼건양 1년(1896) 2월 9일안종수(1849∼1896)의 광주(廣州)이며, 자는 경존(敬尊), 호는 기정(起亭)이다. 아버지는 통사랑 선공감가감역을 지낸 안석우(安錫瑀)이다. 1882년 증광시 진사에 합격하여 우정총국 사사를 시작으로 1885년 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 1886년 외아문 주사로 있다가 개혁파인 김옥균(⾦⽟均)의 여당으로 성토되어 마도(⾺島)에 정배, 1894년 7월에 풀려난다. 1895년 1월에 탁지아문 주사로 복귀하여 2월에 내무아문 황해도시찰위원을 지냈다. 1895년 6월 24일 나주부 참서관으로 임명된다. 1896년 3월 4일 단발령의 강력한 시행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나주의병들에게 피살을 당한다. 이로 말미암아 나주는 일시 의병이 지배하기도 하였으나 15일 만에 소탕되었고 이 과정에서 해남군수 정석 진(鄭錫珍)을 비롯한 많은 관련자들이 희생을 당하기도 하였다. 안종수는 1910년에 종 2품 규장각부제학으로 추증되었다. 특별한 점은 관직에 들어오기 전 1881년에 조사시 찰단(朝⼠視察團) 조병직(趙秉稷)을 수행하여 함께 일본을 가게 되는데, 일본에 머물렀을 때 근대화된 농법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일본의 농학자 쓰다센[津⽥仙]을 통해 많은 농서를 구입하였다는 것이다. 귀국 뒤에는 서양식 근대농법을 소개한 『농정신편(農政新 編)』을 편찬, 1885년 광인사(廣印社)에서 간행하였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11 | NO.323
  • 안준 安俊 태조 2년(1393) 10월 20일∼태조 3년(1394) 10월 2일
    안준 安俊 태조 2년(1393) 10월 20일∼태조 3년(1394) 10월 2일안준(?∼?)의 본관은 순흥(順興), 호는 노포(蘆浦)이며, 아버지는 중랑장 안손주(安孫拄) 이다. 정몽주의 제자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우왕 때 남양부사, 연안부사를 지내고 전라 충청 경상 삼도체찰사, 봉상시 판사를 지냈다. 1392년 정몽주가 살해되자 그 일당으로 몰려 의령으로 유배되었다. 조선건국 뒤 태조 이성계가 함께 일하자 했으나 완강히 거절했다. 『금성일기』 「계유년 1393년」에 “목사 안준이 10월 20일 도임하였다가 갑술 (1394년) 10월 2일에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고, 『금성읍지』“계유(1393년) 10월 20일 도임, 갑술(1394년) 10월 2일에 교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4 | NO.322
  • 안축 安舳 명종 8년(1553) 8월∼명종 9년(1554) 4월
    안축 安舳 명종 8년(1553) 8월∼명종 9년(1554) 4월안축(1500∼1572)의 본관은 죽산(⽵⼭)이며, 자는 해빈(海賓), 호는 둔암(鈍庵)으로 보성 출신이다. 아버지는 의정부사록 안수륜(安秀崙)으로 문과 급제자이다. 1531년 식년 시에서 생원ˑ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542년 정시(庭試)에서 을과에 1위로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다. 승문원 정자를 시작으로 병조좌랑, 호조좌랑을 거쳐 1547년 사간원 정언, 1548년 사헌부 지평, 영광군수를 거쳐 1553년 실록 편수관을 겸한 나주목사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1554년 3월 27일 실록에 명종이 “‘나주목사 안축은 마음을 써 구황을 하지 않았으니 먼저 파직시킨 뒤에 추고하라.’ 하였는데, 이는 구황어사 김홍도(⾦ 弘度)의 장계에 의한 것이었다.”라는 기록이 있고, 1554년 4월에 파직되었다. 이후 1557년에 춘추관 편수관 겸 남원도호부사를 맡았다. 낙향한 후 하서 김인후(⾦麟厚), 석천 임억령(林億齡)과 함께 어울려 ‘호남의 세 높은 선비’라는 뜻의 호남 삼고(湖南三 ⾼)로 불렸다. 『금성읍지』에는 “춘추편수관을 겸하여 계축(1553년) 7월에 도임하였고, 동년 대한해 때 광양에서 본주까지 주변 11개 지역이 우심하여 구황하여야 하는데 성실히 하지 않는다는 어사 이조좌랑 김홍도의 장계에 따라 갑인(1554년) 4월에 파직 당하여 고향 보성으로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5 | NO.321
  • 안충달(安忠達)
    안충달(安忠達, ?)의 본관은 죽산(竹山)이며, 자는 효언(孝彦), 호는 하곡(荷谷)이다. 증조부는 안맹손(安孟孫), 조부는 안순정(安順貞), 부친은 장사랑(將仕郞) 안린(安鱗)이다. 부인은 노극창(盧克昌)의 딸 함평노씨(咸平盧氏)이다.《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 의하면, 안충달은 1525년(중종20) 생원 3등 36위에 입격하였고, 1534년(중종29)에 식년시 을과에 2위로 급제하여 과거를 통과하였다[당시 을과 1위는 퇴계 이황이었다].그러나 과거 급제 이후 안충달의 행적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현령과 예조정랑을 지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1540년(중종 35) 기사에 ‘좌랑 안충달’이라는 짤막한 세주(細註)가 안충달에 관한 기록의 전부일 뿐이다.안충달이 속한 죽산안씨(竹山安氏)는 본래 광주 지역에 터를 잡고 살았는데,  송계 (松溪) 노극창(盧克昌, 1482~1568)이 남원부사로 재임할 때 자신의 고향인 함평으로 내려오던 중 광주 지역에서 안충달을 만났고, 문장이 특별히 뛰어난 것을 보고는 안충달을 사위로 맞아들였다.이것이 계기가 되어 안충달 가문은 지금의 전라남도 함평군 나산면 나산리 대정(大正)마을, 동신(洞新)마을 일대에 정착하였다.전라남도 함평군 나산면 나산리 대정마을에 있는  나산사(羅山祠)에 죽산안씨 8세 안충달(安忠達), 안여해(安汝諧, 1657~1691), 안여기(安汝器), 안치택(安致宅, 1702~1777) 등 4분을 향사해서 모시던 죽산안씨 문중 서원이었는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면서, 위 네 분에 대해서 기념할 만한 것을 안시용이 기거했던 곳을 사현각(四賢閣)이라 이름하여 1908년에 새롭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의 셋째 아들 안사활(安士姡)은 1592년 임진란이 일어나자 김상충(金尙忠) 등과 창의했고,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하는 충인이었다.“황금이 가득한 상자를 자식에게 물려주기보다는 경서 한 권을 제대로 가르치는 것이 훨씬 낫다.遺子黃金滿籯 不如一經 漢書 卷73 韋賢傳"
    2024-11-18 | NO.320
  • 양경매
    양경매(梁景梅), 湖節4中-114-4, 光州, 甲子, 扈從-《호남절의록》(1799)
    2020-04-02 | NO.319
  • 양산룡(1552~1597)
    양산룡(梁山龍)의 본관은 제주. 자는 우상宇翔이다. 부친은 송천 양응정이며 어머니는 죽산박씨로 판관 박중윤의 딸 사이에 차남으로 1552년 박뫼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5~16세부터 문장이 뛰어났다.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 23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41세에 임진왜란을 맞게 되자 송제민(宋濟民)ㆍ양산숙(梁山璹) 등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김천일 휘하에 들어가서 아우인 양산숙을 부장으로 하고 자신의 아들인 양상건을 종사관으로 임명하였다. 1592년 5월16일 김천일(金千鎰), 양산룡(梁山龍)ㆍ양산숙(梁山璹) 등은 의병을 모아 6월3일 서울을 향해 북진하는 출병식을 열었다. 그 장소가 바로 나주의 금성관이다.얼마 후 아우인 양산숙梁山璹이 진주 남강에 몸을 던져 절사하였다는 비보를 듣고 달려가 시신을 찾으려고 하였으나 찾지 못하고 초혼장招魂裝으로 아버지 양응정의 묘 아래에 장사하고 모친의 슬픔을 달래는데 온갖 효성을 다하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나 왜군의 횡포가 극심하자 피난을 위해 일가족을 배에 싣고 무안의 삼향포(지금의 몽탄강)에 다다랐을 때 적선이 들이닥쳐 화를 당하게 되자 적을 크게 꾸짖고는 대성통곡을 하면서 어머니 죽산박씨를 모시고 바다에 뛰어들어 절사하였다. 1635년 나라에서는 양산룡에 대하여 효자 정려를 내렸다.
    2020-05-08 | NO.318
  • 양산숙(1561~1592)
    양산숙梁山璹의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회원會元. 기묘명현 학포 양팽손梁彭孫의 손자이며, 대사성을 지낸 양응정梁應鼎의 셋째 아들이다. 광산구 어룡동 박메마을 출신으로 성혼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경서에 전심하였으며 천문ㆍ지리ㆍ병학에도 뛰어났다.양산숙이 다섯살 난 어느날 아버지 송천공이 그 손목을 잡고 들에 나가 논밭을 살피다가 문득 아들을 시험해 보기 위해 질문했다.밭을 갈고 있는 소와 말을 가리키며 산숙아 너는 저 소와 말 가운데 하나를 가지라면 어느 것을 갖겠느냐? 이 물음에 어린 산숙의 입에서 거침없이 다음과 같은 대답이 나왔다. 말은 남자의 보배입니다. 천하를 마음대로 돌아 다닐 라면 말이 없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저는 말을 갖겠습니다. 음 참으로 훌륭한 생각이다. 그 마음 잊지 않도록 하여라. 산숙은 나이 열 살이 되기 전에 벌써 학문이 깊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열여섯 살 때 산숙은 아버지가 의주목사(義州牧使)로 부임함에 따라 그곳으로 갔다. 만원(萬院)이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우연히 그 당시의 대학지인 미암 유희춘(眉岩 柳希春)을 만나게 되었다. 유희춘은 산숙의 기상이 늠름하고 행동이 진중한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는 마음이 항상 평온하고 선(善)과 정의(正義)를 좋아하겠다고. 16세 때 형 산룡(山龍)과 병법(兵法)을 논의 하다가 아버지로 부터 진도(陣圖:진터의 그림)를 받아들고 연구한 끝에 합변의 원리(合變의 原理:합하면 변화하는 법칙)등을 익히기도 하였다. 그 뒤에 우계 성혼(牛溪成渾)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스승 성혼은 양산숙의 영득함에 탄복하여 항상 나이 어린 그에게 유지지사(有志之士)라 존칭을 했다고 한다 .큰 뜻을 품은 선비라는 뜻이다. 그는 성혼문하에서 공부를 마친 뒤 반계(蟠溪)라는 곳에 정사(精舍:학문을 닦기 위해 지은 집)를 짓고 수양에 힘썼다. 그는 1555년 왜구(倭寇:일본해적)가 고흥 손죽도(損竹島)를 침범하자 만호(萬戶) 이대원이 이를 맞아 싸우다 전사했다는 애기를 듣고 슬픔에 잠겨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가 26세 되던 해 가을 대마도주(對馬島主) 다찌바나 야스히로(橋康廣)라는 자가 왜의 사신으로 건너와 강화조약(講和條約)을 맺기를 청해왔다. 양산숙은 남원에 사는 양대박(梁大樸, 義兵장으로 고경명과 같이 금산에서 순절)을 찾아가서 같이 일본사신(日本使臣)의 거동을 살필 것을 약속하고 두 사람은 국왕의 사신(使臣)처럼 가장하고 영남(嶺南)으로 향하였다. 실은 다찌바나란 자는 강화조약을 맺으로 온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방위태세(防衛態勢)를 살피러온 첩자였다. 그자는 우리나라에 상륙하여 동래부사(東萊府使)가 술대접하는 자리에서 일부러 술잔을 떨어뜨려 깨버리는 무례를 저질렀다. 이 말을 전해들은 양산숙과 양대박은 다찌바나가 일본첩자 라는 확신을 가졌다. 얼마 후 양산숙과 다찌바나는 동래부사의 소개로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그 석상에서 다찌바나가 대뜸 시비를 걸어왔다. 물론 통역을 통해서였다. 당신이 찬 칼을 왜 그리 짧으냐? 즉 우리나라의 무방비를 비웃은 것이다. 그대가 가진 창은 너무 길어서 그대의 운신을 그릇칠 것이다. 그러자 다찌바나는 황급히 말에서 내려 나부시 절을 하고 상주(尙州)까지 동행해주기를 간청했다. 다찌바나는 상주에 도착하자 목사 송응동(宋應洞)이 잔치를 베풀고 기생들의 춤이 시작되었는데 다찌바나는 송목사의 늙은 모습을 보고 통역을 시켜 나는 여러 해 동안 싸움터에서 살아서 이렇게 수염과 머리털이 희게 되었소이다만 사또께서는 늘 기생속에 파묻혀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지내셨을 것인데 왜 그렇게 허-였습니까? 하고 비꼬았다. 자리를 같이한 양산숙은 그 말을 듣고 울화통이 터졌지만 상대가 한나라의 사신이니 만큼 꾹 참을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것이 우리의 방비가 없어서 당하는 수모라 생각하니 절분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그는 고향 광산으로 돌아와서 더욱 무예를 닦고 학문에도 힘을 썼다.1592(선조25년)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산숙은 고향인 박메마을로 와서 형 산룡(山龍) 동생 산축(山軸)과 더불어 목이 메이도록 통곡을 하며 어머니 죽산박씨(竹山朴氏)앞에 자기의 소신을 아뢰었다. 어머님 저희들 삼형제는 나라가 위태로운 이때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기를 뜻을 모았습니다. 용서를 바랍니다. 여느 어머니 같으면 그 무슨 당찮은 소리냐-. 나라를 지키는 군사들이 있는데. 하고 펄쩍 뛸 것이다. 그러나 박씨부인은 그렇지가 않았다. 오히려 그 뜻을 가상히 여기고 타이르듯 말했다. 우리 집안은 세록(世祿)이 있는 가문으로 나라의 은덕을 많이 입은 가문의 자제로서 마땅히 그래야 하느니라- 돌아가신 아버님께서도 늘 남쪽에 왜침의 징후가 있으니 그때가 오면 나라를 지키는데 신명을 바쳐야 하느니라 하셨습니다. 어머님 저희들의 뜻을 헤아려 주셔서 감사하옵니다. 이렇게 3형제는 거의(擧義)하기로 결심을 했다. 나주에서 창의하여, 김천일을 맹주로 삼고 양산숙은 부장이 되었다. 그 뒤 김천일과 함께 북상하여 수원에 출진하여 활약했다. 강화도로 이진할 무렵, 곽현과 함께 주장의 밀서를 가지고 해로를 통해 의주 행궁行宮(임시 궁궐)에 도착하여 선조에게 호남ㆍ영남의 정세와 창의활동을 자세히 보고하였다. 이 공으로 공조좌랑에 제수되었다. 돌아올 때 호남ㆍ영남에 보내는 교서를 받아 남도에 조명을 하달하였다. 적이 남도로 퇴각하자 김천일과 함께 남하하여 진주성에 들어갔으나 침공하려는 왜의 대군 앞에 군사가 부족하자 명나라 장군 유정의 군진에 가서 군원을 강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할 수 없이 단신으로 입성하여 적과 끝까지 항전하다가 김천일과 함께 남강에 투신 자결하였다. 동서분당 때 서인으로 조헌(趙憲)과 함께 이이(李珥)·성혼을 지지하며 동인 이산해(李山海)·유성룡(柳成龍)을 배격하는 소를 올렸다. 사후에는 좌승지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민이다. 나주의 정렬사旌烈祠, 진주의 창렬사彰烈祠에 제향되었다.
    2020-05-08 | NO.317
  • 양산축(1571~1597)
    양산축梁山軸의 본관은 제주濟州이며 자는 유석維石이다. 1571년 박뫼마을에서 송천 양응정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1세에 부친상을 당하였으며 예의범절이 어른들과 다름없었으며 두 형 양산룡梁山龍과 양산숙梁山璹을 본받아 차분한 마음으로 글을 외우고 읽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도량이 넓어 아버지 유언에 따라 일찍이 율곡 이이를 찾아가 대학을 배우고 1년 후 돌아왔다. 성인이 되어 제봉 고경명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산룡, 산숙 두 형과 창의하였고 정유재란 당시 가족들과 함께 무안 삼향포로 피난 중 적병을 만나 함께 투신하여 순절하였는데 이때 나이가 27세였다.양산축의 부인 장흥고씨는 고경명 의병장의 손녀이다. 전 가족이 순절하던 날 고씨는 양산축의 뒤를 따라 바다에 몸을 던졌는데 두 여종의 도움으로 살아남아 뱃 속의 아이 만용을 낳아 후손을 잇게 했다.광주광역시 광산구 박호동에 있는 양씨삼강문은 충민공 양산숙 일가 7명을 기리기 위해 인조 13년(1635)에 세운 정려문(旌閭門)이다. 정려문은 충신, 효자, 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해 나라에서 그 동네에 세워주는 문을 뜻한다. 양씨삼강문은 정면 5칸·측면 1칸짜리 맞배지붕의 평범한 건물이다.
    2020-05-11 | NO.316
  • 양상기
    양상기梁相基(1883~1910) 의병장은 1883년 광주군 서양면 니동(북구 중흥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제주이며, 호는 설죽雪竹이다. 의병장 양진여의 장남으로 어린 시절 풍암정에서 병서를 읽고, 무예를 닦았다. 20대 대한제국의 군인 진위대 병사 출신이었는데, 1907년 8월에 강제 해산되자 광주경찰서에서 순사로 근무했다. 1908년 4월 23일, 아버지가 의병장인 것이 알려져 순사직에서 면직되자 곧장 의병장인 아버지의 뜻을 따라 대일 항쟁의 길로 들어섰다. 1908년 5월에 독립적으로 거병하여 의병장으로 추대된 양상기 부대의 규모는 최대 80여 명이었고 주로 화승총으로 무장하였다. 이 부대의 편제는 도통장에 안판구安判九, 후군장에 이문거李文擧, 포군장에 안영숙安永淑, 도선봉장에 조사윤曺士允, 참모장에 유병기劉秉基 등이었다.양상기 의병부대는 구식군인이 참여한 평민부대로 김태원 의병장의 순국 뒤에는 그 부대원을 흡수 계승하였다. 양상기 의병부대는 ‘한국의 복구’를 주창하며, 군자금 모금, 밀고자 및 일진회원 처단, 일제 헌병분견소 습격 및 방화와 같은 활동을 펼쳤다. 1908년 11월에는 아버지 양진여 의병부대와 연합작전으로 2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광주수비대와 접전하여 크게 이겼으나, 이듬해인 1909년 4월 동복 서촌 전투에서 10여 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고, 그해 5월 담양 덕곡리 전투에서는 23명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이는 무기의 열세도 있었지만 밀정들의 밀고로 일제 토벌대에게 기습을 당한 때문이었다. 1909년 12월, 양상기 의병장은 남원 도통리에서 은거 중 일제 토벌대에게 체포되었다. 양상기 의병장이 취조과정에서 귀순할 의사가 없느냐는 물음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귀순할 뜻은 추호도 없으며 다만 죽음이 있을 뿐이다. 만일 내가 살아날 수 있다면 다시 의병을 일으켜 일제 침략자와 싸우겠다.”1910년 3월 29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내란 강도 방화 및 살인 죄목으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대구공소원에 공소하였다. 1910년 5월 17일 대구공소원은 다시 동일한 죄를 적용하여 교수형을 공소하였다. 1910년 8월 1일, 아버지 양진여 의병장이 순국한 지 두 달 뒤, 똑같은 대구감옥소에서 아들 양상기 의병장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그는 “살아서 영광 있고 죽어서 애달프니, 몸은 비록 죽었어도 명성이 남았도다”고 유언을 남겼다. 그때 양상기 의병장 나이는 28세였다.광복 후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그의 묘소는 부친인 양진여와 함께 서구 매월동 산151-9 백마산 기슭에 모셔져 있다. 그의 호를 딴 설죽로가 아버지 이름을 딴 서암대로에 위치한 신안1교에서 시작이 된다. 임동과 신안동, 오치동, 용봉동, 매곡동, 일곡동에 이르는 6.6㎞에 달한다.
    2018-05-28 | NO.315
  • 양안용 梁安⿓ 우왕 13년(1387) 10월 17일∼우왕 14년(1388) 2월 6일
    양안용 梁安⿓ 우왕 13년(1387) 10월 17일∼우왕 14년(1388) 2월 6일양안용(?∼?)의 인적사항이나 행적을 기록한 문헌은 확인이 어렵다. 『금성일기』 「정묘년 1387년」에 “목사 양안룡이 10월 17일 도임하였다가 무진(1388년) 2월 6일에 돌아 갔다.”고 기록되었으며, 『금성읍지』에는 “정묘(1387년) 10월 17일 도임, 무진(1388년) 2월 6일에 교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4 | NO.314
  • 양원준 광주 수령- 고려사절요 제11권 / 의종 장효대왕(毅宗莊孝大王)
    무인 12년(1158), 송 소흥 28년ㆍ금 정융 3년 11월○ 문하시랑 평장사로 치사한 양원준(梁元俊)이 졸하였다. 원준은 서리 출신으로, 일찍이 간관이 되어서 정함을 탄핵할 때 고집을 꺾지 않아, 당시의 공론이 이를 중하여 여겼다. 성질이 청렴ㆍ검소하고 순진하고 정직하여 시종 한결같았으며, 집안 살림을 일삼지 않았고, 선사 받는 것을 멀리하여 문앞이 항상 쓸쓸했다. 일찍이 광주(光州)의 수령이 되었을 때, 아내가 시어머니 섬기기를 정성껏 하지 않는다 하여 내쫓았다. 처자가 울며 애걸하여도 끝내 허락지 않고 그 아내를 홀로 친정으로 돌아가게 하니, 사람들이 혹 그의 인자하지 못함을 기롱하기도 하였다.
    2022-04-29 | NO.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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