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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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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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일 ⾟馹 명종 20년(1565) 10월 2일∼명종 20년(1565) 10월 11일
    신일 ⾟馹 명종 20년(1565) 10월 2일∼명종 20년(1565) 10월 11일신일(1508∼?)의 본관은 영산(靈⼭), 자는 치원(致遠), 호는 삼일당(三⼀堂)으로 아버지는 덕원교수를 지낸 신국균(⾟國鈞)이다. 1538년(중종 33) 별시 병과에 급제한 뒤 벼슬에 올랐다. 1560년 대구부사로 있을 때에 마음을 다해 구황을 하였다 하여 향표리 (鄕表裏) 1습을 하사받았다. 1565년 10월에 나주목사로 부임하였으나 바로 파직되었 다. 1574년 선산부사로 있을 때는 사욕을 탐했다는 이유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578년 선공감정으로 있을 때 국장도감 낭청을 겸했으면서도 발인할 때에 병을 핑계하고 나가지 않아 사헌부의 탄핵으로 파직 당하였다. 또 1578년 제용감정에 제수되었으나 노쇠하다는 사간원의 주청에 따라 교체되기도 하였다. 저서로 『삼일당시 집(三⼀堂詩集)』이 있다. 『금성읍지』에는 “을축(1565년) 10월 2일 도임하였으나 동월 11일에 파직 당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5 | NO.342
  • 신태호
    성암晟巖 신태호申泰浩(1922~2012)는 광주상공회의소 9~12대 회장을 4번이나 연임하며 광주 경제발전에 기여한 바가 큰 경제인이다. 전남 장성군 북이면에서 독립운동 가문 후손으로 태어난 신태호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시샤 대학에서 경제와 법률 공부를 한 뒤 귀국해 광주에서 평생을 기업인으로서 지역 경제부흥에 힘써 왔다.1952년 대광산업을 설립, 일본으로 우뭇가사리 수출하는 등 수출업에 뛰어들어 지역경제를 세웠으며 1968년에는 동화석유(현 소모석유)를 설립해 지역 에너지 산업에 기운을 불어넣었다. 소모석유는 '정량공급·신속배달'을 모토로 창사 5년 만에 광주·전남 유류시장 점유율 55%를 달성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소모석유는 소모홀딩스엔테크놀로지, 소모옵티칼, 성암산업, 소모농산 등을 거느린 소모그룹의 모태가 됐다.신태호는 1976년 광주상공회의소 제9대 회장에 취임한 직후 본촌산단, 송암산단 등의 조성에 힘써 ‘광주권 생산도시화’라는 구호를 내걸고 생산도시운동을 앞장섰다. 그에 그치지 않고 하남산단 대기업 유치 등에도 적극 나서 지역산단 활성화에 박차를 기했으며 그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15년이란 긴 시간 동안 광주상공회의소 회장직을 수행했다. 고령 성암문화재단을 설립해 문화사업을 통한 지역 문화예술 부흥에 기여했으며 만대학원 광주 광덕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설립해 교육사업에도 상당한 관심을 쏟았다.
    2018-05-29 | NO.341
  • 신호 申浩 태종 13년(1413) 11월 16일∼태종 15년(1415) 4월 20일
    신호 申浩 태종 13년(1413) 11월 16일∼태종 15년(1415) 4월 20일신호(?∼1432)의 본관은 평산, 자는 선오(善吾)다. 사간공파(思簡公派)의 파조(派祖)로 아버지는 집현전 한림 겸 직학사 신혼(申琿)이다. 1401년 형조전서를 지내고 1405년 풍해도관찰사로 있을 때 부자들의 곡식을 거두어 굶주린 백성을 진휼하였다. 1406년 에는 병사의 갑옷을 실용적인 청색 방의(⾭⾊防⾐)로 바꾸자는 건의를 하여 받아들여졌 다. 이후 풍해도관찰사, 개성유후, 1412년 10월 10일 나주목사, 1415년 4월 20일 한성윤, 1419년 전라도관찰사, 1420년 우군총제, 1421년 형조·호조판서, 1422년 국장 도감을 지냈다. 1432년 졸하자 3일간 조회를 폐하였다. 『금성일기』 「기축년 1409년」 에는 “판목사 신호가 11월 16일 도임하였다가 을미(1415년) 4월 20일 한성윤으로 선환되었다.”라고 되어 있다. 시호는 사간(思簡)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4 | NO.340
  • 신환 申渙 ?∼성종 10년(1479) 3월 5일
    신환 申渙 ?∼성종 10년(1479) 3월 5일신환(?∼?)의 본관은 고령(⾼靈)이다. 대제학 신장(申檣)이 할아버지, 신중주(申仲⾈)가 아버지이고, 신숙주(申叔⾈)가 큰아버지다. 1457년 알성시 병과에 2위로 급제하여 1458년 사간원 우정언으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1464년 사헌부 정랑, 충청도 경차관. 그리고 1471년부터 1473년까지 사복시정을 거쳐 나주목사에 부임했다. 『금성일기』 「기해년 1479년」 기록에 “구 목사 신환이 종부정으로 승진되어 상경하였다.”고 기록되 었고, 『금성읍지』에는 “도임일은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기해(1479년) 3월 5일에 종부 정(宗簿正)으로 승진하여 상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5 | NO.339
  • 신후명 申厚命 숙종 4년(1678) 1월 1일∼숙종 5년(1679) 6월
    신후명 申厚命 숙종 4년(1678) 1월 1일∼숙종 5년(1679) 6월신후명(1638∼1701)의 본관은 평산(平⼭)이며, 자는 천휴(天休), 호는 임하당(林下堂) 이다. 아버지는 용양위 부호군 신형구(申衡耉)이며, 어머니는 참의 성시헌(成時憲)의 딸이다. 1666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67년 승문원 부정자, 1676년 병조좌 랑, 1677년 지평을 지냈다. 1677년 12월 20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1678년 1월 1 일 도임하고 1679년 6월에 홍문관 부수찬으로 이임하였다. 1679년 부수찬·장령, 1680년 사간, 1689년 강춘관찰사, 1693년 사은사, 1697년 형조참판·충청도관찰사, 1698년 해운접반사, 1700년 동지의금부사를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무오(1678 년) 1월 1일 도임하였고 기미(1679년) 6월에 홍문관 부수찬으로 이동 이임하였다.”라 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2 | NO.338
  • 심남일
    심남일(沈南一, 1871~1910)의 본명은 심수택(沈守澤), 자가 남일(南一), 호는 덕홍(德弘)이다. 1907년부터 1909년까지 전라남도 일대에서 의병장으로 항일 투쟁을 활발하게 전개하였고, 1910년 교수형을 당해 순국하였다.심남일은 1871년 2월 10일[음력] 전남 함평군(咸平郡) 월야면(月也面) 정산리 새터에서 출생하였다. 1907년 11월 1일 함평군 신광면(新光面)에서 의병을 모집·훈련하였꼬 기삼연 의병장이 주도한 ‘호남창의회맹소’의 일원이었다.심남일 의병장이 의병을 일으킬 때 작성한 시, ‘거의유감’(擧義有感)은 다음과 같다.乘風南渡馬如飛 (승풍남도마여비) 바람을 타고 남쪽으로 가니 말도 나는 듯 하구나.林下書生振鐵衣 (임하서생진철의) 초야에 글 읽는 이가 갑옷을 떨쳐입고蠻夷若末掃平盡(만이약미소평진) 내 만약 왜놈들을 쓸어버리지 못하면一死沙場誓不歸(일사사장서불귀) 모래밭에 죽어서 돌아오지 않으리왜 모래밭에 죽으리라고 맹서했을까? 1908년 1월 기삼연 의병장이 총살당한 곳이 광주천의 모래밭이었다.1909년 7월 30일 영암 사촌(沙村) 전투에서 일본군 평금산 대장 등 적 10여 명을 죽이는 등 전라남도 곳곳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며 활발한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1909년 고종 황제의 의병 해산에 대한 조칙이 내려지자, 심남일은 1909년 7월 21일 영암군 금마면(金磨面) 고인동(古引洞)에서 부대를 자진 해산하였다. 이후 능주로 잠행하여 이전 전투지였던 풍치의 바위굴 안에서 신병을 치료하다 1909년 10월 9일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심남일은 체포된 후에도 끝까지 일제에 굴하지 않고 그들의 불의를 질책하였으며, 1910년 7월 23일에 대구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고 39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심남일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 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1909년 7월 21일, 영암군 금마면 고인동에서 의병 부대를 자진 해산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秋風將卒泣相離 쓸쓸히 장수랑 군사들은 눈물로 이별 짓고古引山前馬去遲 고인산을 떠남에 말조차 더디구나一掃腥塵終有一 왜적을 없앨 날이 언젠가 있으리니草違三載死生期 지난 3년 맹서한 일 부디 잊지 마세
    2020-03-24 | NO.337
  • 심명규 沈明奎 철종 6년(1855) 12월 22일∼철종 7년(1856) 7월 5일
    심명규 沈明奎 철종 6년(1855) 12월 22일∼철종 7년(1856) 7월 5일심명규(1799∼1878)의 본관은 청송(⾭松)이며, 자는 문보(⽂甫)이다. 아버지는 통덕랑 심영조(沈榮祖)이다. 1834년 식년시 생원에 합격하여 1836년 강릉참봉, 1838년 선공 부봉사, 1839년 상서원 직장, 1842년 금부도사, 1845년 예빈주부·호조좌랑, 1846년 노성현감, 1849년 양근군수, 1851년 음성현감, 1852년 울산부사, 1853년 황주목사, 1855년 4월 평양서윤을 지냈다. 1855년 10월 16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12월 2일 도임하였다. 1856년 충주목사, 1860년 선혜청 낭청, 1861년 첨지, 1862년 동부승지· 경주부윤, 1868년 부호군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을묘(1855년) 10월 16일에 평양서윤에서 옮길 것을 제수 받고, 12월 2일에 임금을 사조하고, 12월 22일에 부임 하였으며 병진(1856년) 7월 5일에 충주목사로 자리를 옮겼다.”고 기록되었다. 그의 묘표는 최익현이 작성하여 『면암집(勉菴集)』에 수록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08 | NO.336
  • 심의복 沈宜復 헌종 6년(1840) 5월 10일∼헌종 8년(1842) 8월 9일
    심의복 沈宜復 헌종 6년(1840) 5월 10일∼헌종 8년(1842) 8월 9일심의복(1788∼?)의 본관은 청송(⾭松)이며, 자는 경심(景⼼), 호는 창북(滄北)이다. 아버 지는 정자(正字) 심능적(沈能迪), 아들은 철종대 전라감사를 지낸 예조판서 심경택(沈敬 澤)이다. 1813년 증광시 진사에 합격하여 1820년 현릉참봉, 1821년 천릉도감 감조관, 1823년 부사과, 1824년 공조좌랑, 1825년 충훈도사, 1826년 창녕현감, 1830년 해주 판관, 1832년 순창군수, 1834년 장성부사, 1836년 호조정랑, 1836년 낭청, 1838년 밀양부사를 지냈다. 1840년 3월 18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5월 10일 부임하였다.1840년 9월 10일과 1841년 8월 1일, 1842년 5월 20일 상경 기록이 있다. 1842년 8월 9일 신병으로 내려갈 수 없다하여 파출되었다. 1845년 장악첨정, 1847년 강릉부 사, 1853년 통정대부에 가자되었으며 동부승지·여주목사를 지내고 1857년 70세가 되어 가선대부 가자, 1858년 동의금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경자(1840년) 5월 10일에 부임하였고 임인(1842년) 8월 8일에 상경하여 체직되었다.”고 기록되었다. 문집 『창북유고』가 일본 오사카[⼤阪] 부립 나카노시마[中之島]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나주객사 금성관 안에 「목사심의복거사비」가 서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07 | NO.335
  • 심의종 沈宜鍾
    심의종沈宜鍾은 천성이 효순孝純하고 경학을 탐구하여 문행文行으로 세상에 알려지고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였던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1811∼1876)의 문인으로 『광주읍지』에 전하고 있다. 지응현池應鉉(1869~1959)의 붕남실기鵬南實記에 실린 29명 가운데 석하石下 심의종沈宜鍾의 글(정미, 1907)이 있다.이재홍과 함께 포목상으로 이름을 날린 심덕선은 충장로 4가에 남창상회南昌商會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심덕선은 광주 북동 출신으로 일찍이 행상부터 시작해 광주장, 송정장, 장성장을 돌며 어느 정도 자본이 모아지자 충장로 점포를 낸 것이다.그는 호남 일대에서 큰 판로를 가진 거상이 되었는데 1927년 1월에는 경영체제를 합명회사의 형태로 바꾸었다. 1936년부터는 광주 임동의 가네보방적鐘淵紡績 공장에서 생산했던 면직물의 총판매를 맡게 되어 남창상회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충장로4가에 도매부, 소매부의 넓은 점포와 창고는 물론 수기동에 있었던 3채의 대형창고에도 중국산과 일본산 비단과 옷감, 광목 등이 가득 쌓여 있었다.심덕선은 사회사업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 계유구락부癸酉俱樂部의 핵심멤버로 참여하여 민중계몽운동과 빈민구제사업에 앞장서기도 했다.
    2020-03-10 | NO.334
  • 심이지 沈頤之 정조 10년(1786) 3월 15일∼정조 10년(1786) 6월 29일
    심이지 沈頤之 정조 10년(1786) 3월 15일∼정조 10년(1786) 6월 29일심이지(1735∼1796)는 1786년(정조 10) 전라감사를 역임하였다. 1786년 3월 7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3월 15일 도임하였고 6월 29일 전라도 관찰사로 옮겼다. 『금성읍 지』에는 “병오(1786년) 3월 15일 도임하였으며 6월 29일에 전라도관찰사로 자리를 옮겼다.”고 기록되었다. *상세이력은 전라감사편 참조.*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05 | NO.333
  • 심지명 沈之溟 효종 8년(1657) 7월 2일∼*효종 10년(1659) 상반기
    심지명 沈之溟 효종 8년(1657) 7월 2일∼*효종 10년(1659) 상반기현감 심지명(1599∼1685)의 본관은 청송(⾭松)이며, 자는 자우(⼦⽻), 호는 농암(聾巖) 이다. 아버지는 참봉 심준(沈僔)이다. 1616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618년 증광시 문과에 병과로 등제하여 1627년 연서찰방, 1630년 진위사 서장관, 1633년 어모장군, 1635년 오위장, 1638년 태안군수, 1640년 의주부윤, 1641년 통정대부·남병사, 1643 년 충청수사, 1644년 동래부사, 1645년 판결사, 1648년 평안병사, 1650년 광주부윤, 1651년 가선대부, 1657년 7월에 금성현감을 제수받아 7월 2일 도임하였다. 1661년 부호군, 1662년 도총관, 1664년 연안현감, 1665년 양주목사, 1668년 도총관, 1669 년 광주부윤, 1673년 좌윤, 1675년 개성유수 등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정유 (1662년) 7월 2일 도임하였는데 체직일은 기록되지 않았다.”고 되어 있으나 1659년 상반기까지 재임한 것으로 추정한다. 시호는 호안(胡安)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2 | NO.332
  • 심후지 沈厚之 순조 1년(1801) 9월 21일∼순조 6년(1806) 6월 7일
    심후지 沈厚之 순조 1년(1801) 9월 21일∼순조 6년(1806) 6월 7일심후지(1744∼?)의 본관은 청송(⾭松)이며, 자는 자순(⼦順)이다. 아버지는 통훈대부 문화현령을 지낸 심전(沈鋑)이다. 1774년 증광시 생원에 합격하여 1785년 참봉, 1787 년 내섬시 봉사·금부도사, 1789년 감찰, 1790년 문화현령, 1792년 수안군수, 1794년 함안군수, 1797년 연안부사를 지냈다. 1801년 9월 2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9월 21 일 부임하고 1806년 6월 7일 임기가 만료되어 이임하였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07 | NO.331
  • 안규면(安圭冕)
    안규면(安圭冕, 1880~1958))의 본관은 竹山이고 자는 자용(子用), 호는 삼곡(三谷) 이다.거주지역은 광주 서방면 봉곡리이다.송사 기우만에게 수학하였다. 916년 송사 선생 襄禮 때 喪次司書로 참석하였다.1924년 담대헌의 중건시 5냥을 성금으로 내었다.
    2020-08-04 | NO.330
  • 안규일(安圭鎰)
    안규일(安圭鎰, 1888~1965)의 본관은 竹山 자는 공익(公益), 호는 만성(晩惺)이다. 부 : 安正煥조 : 安瑛壽증조 : 安思行외조 : 尹佑鎭처부1 : 曺圭斗송사 기우만에게 수학하였다.1916년 송사 선생 襄禮 때 賓次司書로 참석하였다
    2020-08-04 | NO.329
  • 안길환(安吉煥)
    안길환(安吉煥, 1851~1908)의 본관은 竹山 , 자는 성운(成運)이다.부 : 安秀權조 : 安志默증조 : 安起魯외조 : 全幸魯처부1 : 羅相翊1916년 송사 선생 襄禮 때 喪次司書로 참석하였다.1927년 8월에 吳駿善 柳昌秀 등과 함께 蘆沙 문도들에게 高山祠에 함께 배향할 제자들의 위패를 정하자는 내용의 통문을 보냈다.
    2020-08-05 | NO.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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