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316
게시물 검색 폼
  • 삼암 심광헌(1541~1593)
    심광헌沈光憲의 본관은 청송이며 자는 언장彦章, 호는 삼암三岩. 묵헌 심풍沈豊의 아들로 조선 1541년(중종36) 본량 동호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타고난 재능이 출중하고 학덕을 겸비하여 일에 임하면 충직하여 사림들이 추중하였다.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주부를 역임한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국은을 입은 가문의 후예로 적개충심이 강하여 나이 52세에 나라의 위급함을 중시하고 정예 수천명을 모병하여 충무공 이순신 막하로 훈련주부(訓練主簿)로 들어갔다. 옥포해전에서 적선 30척을 격파한 후 고성 다월포로 가서 전라도사 최철견과 힘을 합쳐 방어진을 구축하였다. 노량해전에 참전하여 패주 적병들을 사천까지 추격하여 적선 10여척을 격파하고 이어서 점포한산도 안골포해전에서도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후 분진을 이끌고 강릉에 당도하니 명나라 장수 송대빈이 적에게 포위되어 고전함을 보고 즉시 공격하여 왜적을 토벌하고 명나라 장수를 사지에서 구출하는 공을 세웠다. 이에 명장 송대빈이 조정에 장계를 올려 만일 심장군의 구원이 없었다면 적봉에 명군이 전멸을 면치 못했으리라 하니 선조가 삼암장군의 전공을 가상하여 김해부사와 선무원중공신 2등으로 특별히 제수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임진록》과 《나주읍지》에 기록되어 있으며 송사 기우만의 찬으로 된 묘갈비에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삼암의 충지를 추모하고자 향천으로 동호사에 배향되었다.처음의 시호는 공정恭靖이며, 나중에 정안定安으로 고쳐졌다.광산구 동호사는 1946년 이 고장 유림들의 발의로 고려말 공신인 장안공 심덕부를 비롯하여 사부 심징, 망세정 심선, 묵헌 심례, 삼암 심광헌, 심용 등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했다. 
    2020-05-06 | NO.136
  • 삽봉 김세근金世斤(1550~1592)
    김세근金世斤(1550~1592)은경남 함안군 마륜동 출생으로 본관은 김해이며 자는 중빈重賓, 호는 삽봉揷峰이다. 김해인으로서 절효공 극일의 후손으로 1550(명종5년)년 4월 16일 출생하였다. 임진왜란 때 스승 중봉 조헌선생의 격문을 받고 의병을 일으켰으며 제봉 고경명의 의병과 합세한 금산전투에서 순군한 의병부장이다. 광주에 오게 된 것은 1498년의 무오사화 연좌를 피해서이다. 그의 방조傍祖였던 김일손金馹孫이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으면서 벌어진 사건 때문이다. 김일손은 영남사림파의 중심이자 사관으로 사림파와 훈구파의 힘겨루기에 밀려 무오사화 때 참살을 당했다.그는 1576년 진사가 되고 다음해 문과에 급제하여 종부시주부를 지내다가 왜적의 침입에 대비한 율곡 이이를 따라 양병론을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1588년께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그러던중 그의 아버지 김석경金碩慶이 무오사화의 연좌에 화를 피하기 위해 식솔들을 이끌고 전남의 흥양(지금의 고흥)으로 옮겼다가 이듬해 다시 광주시 서구 세하동으로 터전을 옮겼다. 세하동은 그의 이름 ‘세世’ 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으로 일제강점기 이후부터는 세細를 쓰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그는 인근의 장정들을 모아 세하동 뒷자락에 있는 해발 134m의 나지막한 세하동 백마산 수련골에서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수련 연마를 한다. 이 소문이 장성, 나주, 화순 일대에 퍼져 그 수가 수백 명을 넘어서게 되었다.그 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 동안 세하동 백마산 수련골에서 함께 한 장정 수백명을 이끌고 의병을 일으켜 전국 최초로 6천여명의 연합의병이 모인 담양회맹군에 합류했다. 김덕령의 큰형인 김덕홍, 유팽로, 얀영 등과 더불어 고경명을 따라 의병 대열에 합세하여 충북의 영동군 황간까지 진출해 적을 무찌르는 전과를 올렸다.그러나 전장에서 병을 얻어 귀향하여 요병 중에 스승인 호서의병장 조헌의 부름을 받고 병든 몸으로 다시 출정했다. 그는 전주에서 군영을 정돈하던 중 적군이 금산으로 침입한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금산으로 진군해 부장으로서 전투에 참가했으나 충북 충주 인근의 눈벌이라 부르는 와평臥坪 전투에서 제봉 고경명과 같이 순절하였다. 김세근(金世斤), 湖節1上-054-3, 光州, 壬辰, 高敬命同殉-《호남절의록》(1799)이 소식을 들은 부인 한씨는 “지아비는 충에 죽고 지어미는 열에 죽으니 이는 곧 사람 된 당연한 도리리라”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여 그를 따랐다. 13년 뒤인 1605년 선조는 김세근 의병장에게 선무원종공신으로 녹훈하며 병조참판을, 부인 한씨에게는 정부인을 내렸다. 그의 묘가 광주시 서구 서창동 불암마을에 남아 있다.1952년 7월 10일 광주 지역의 유림들이 사우 ‘창열단彰烈壇’을 건립하였고, 1958년에는 학산사鶴山祠를 건립하여 매년 음력 3월 22일에 제향하고 있다.
    2018-05-28 | NO.135
  • 설강 류사 柳泗(1503~1571)
     설강 유사(雪江 柳泗)(1502~1571)는 조선 중기 문신이며 자는 중연, 본관은 서신이고 호는 설강이다. 교수였던 서희송과 어머니 청송심씨 아들로 유득공현(현재 대촌면 이장동)에서 태어났다. 1522년 21세에 진사가 되었고, 1528년 27세에는 문과 별시에 병과 4등으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병국의 추천으로 외임을 많이 맡았으며 무장현감, 전라도사, 낙안군수, 삭주부사, 종성부사 등을 역임하였다.1558년 명종의 왕비인 인순왕후의 외숙인 이량이 왕의 총애를 계기로 전권을 휘두르며 당파를 만들어 윤근수, 심의겸 등을 제거하려 하자 승지에 있으면서 그를 위시한 권신들을 배척하는 상소를 했다가 무고로 몰려 권신 이량과도 사이가 벌어져 고향에 돌아와 자연 속에서 욕심없이 유유자적하면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자신이 제례를 제정하여 자손들을 가르치고 유자후의 글을 베껴서 간행하고자 자손에 훈계하는 글을 써서 심광언에게 부탁하여 간행하였다.이때 고향의 건너편인 극락강과 황룡강이 합류하는 본덕동 남쪽 구강인 노평산 기슭에 터를 잡아 정자를 처음 세우고 소강절의 호가지의를 취해  '호가정'이라 이름을 붙였다. 퇴계 이황, 국재 오겸, 회재 이언적 등 여러 명현들과 더불어 도의를 강마하였다.1563년에 삼사의 탄핵으로 파직되어 보령에 유배되어 이량이 세력을 잃게 되자 선생을 다시 기용하려고 영해부사를 제수하였으나 나이도 많고 병이 있어서 사퇴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후에 전남지역 내의 유림들이 그의 문장기절을 추중하여 편방사(지금의 경렬사)에 배향되었고 《해동명현록》에 실려 있다. 저서로 《설강집》2권과 <위친필봉제축유서>가 전하고 있다. 호가정 내에는 호가정 현판과 설강의 호가정기, 노사 기정진의 호가정 중건기, 후손 유보한의 호가정 중수기, 호가정 원운과 당대에 교분이 두터웠던 이황,이언적, 오겸 등과 사위로 맞이한 김성원과 후대의 이안눌, 노사 기정진, 유보한 등이 그의 시를 즐겨 차운한 편액들이 걸려 있다.사위로 맞이한 김성원과 후대의 이안눌 등이 그의 시를 즐겨 차운 하였다.설강 선생이 호가정을 짓고 자신의 마음을 노래한 시가 있다.  시원한 돌베개에 솔그늘 더욱 짙고  바람은 난간을 돌아 들빛이 뚜렷하네  차가운 강물 위의 밝은 달빛아래  눈을 실은 작은 배가 한가로이 돌아온다  아래는 구강(九江)이요 위에는 하늘인데   은이 할 일 없어 세속에 내맡겼네  바빴던 지난일을 뭣하러 생각할꼬  늦사귄 물새가 한가로이 졸고 있네
    2020-03-19 | NO.134
  • 송래룡(宋來龍)
    송래룡(1823~1888)의 본관은 홍주, 초휘는 현규(現奎), 자는 운보(雲甫), 호는 서암(瑞菴)이다. 현감 宋駒의 후손이다.存心養性이고 安貧樂義이며 文學篤行이라 孝友慈仁이고 無不飮服이며 有墓碣畏이라 堂高漢住로 묘갈명에는 "繼述先美이고 孝友根天이며 永言孺慕하고 心潛經學이라" 하였다.부 : 宋邦賢조 : 宋守範증조 : 宋益恒외조 : 李仁坤처부1 : 曺箕承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다
    2020-03-06 | NO.133
  • 송래홍(宋來洪)
    송래홍(1836~1916)의 본관은 홍주, 초위는 宗奎, 자는 경범(敬範) 또는 성범(聖範), 광주 거진(오늘날 북구 용두동)에 살았다.  천성이 강직하며 효도하고 우애함은 물론 선대의 유업을 계승하여 후손의 장래를 보호하는 등 굳은 지조를 가졌다.1889년에 眉巖 柳希春을 기리는 모임에 참여하였다. 宋駒의 후손이다.부 : 宋三賢조 : 宋守大증조 : 宋益佐외조 : 洪基祥처부1 : 金道原
    2020-03-06 | NO.132
  • 송암 조언수(1575~1592)
    조언수曺彥壽의 본관은 창녕, 자는 일여, 호는 송암松庵이다. 시조는 신라 창성부원군 조계룡을 시조로 증조는  조대진으로 조선왕조 변융 문과 중시에 합격하여 예조 참의를 지냈으며 할아버지 조경덕은 예조좌랑을 지냈다. 아버지 조세랑은 상주영장을 지냈으며 외할아버지는 전주 이학림으로 사헌부 감찰을 지냈다. 어려서 완력이 뛰어나고 재주가 빼어나 8세에 사략을 읽고, 10세에 소학에 들어 자경시를 짓기도 하였다. 조언수는 임진왜란 때 제봉 고경명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의병이다.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량을 모아 광주군고에 바치고 무기 쓰는 법을 익히고 용사들에게 권장하는 시를 지었다. "내 돌아보니 부끄러운 여덟 살 어린이 삼년동안 헛되이 글만 배웠도다. 전국의 흥망사를 논하지 말고 쇄소응대하는 예의와 같이 하리라"이로부터 문장이 성취되었다. 행군이 순창 적성강에 이르러 진을 쳤을 때 적세가 몰아쳐옴에 사졸들이  많이 흩어지려 하니 송암이 충용의가忠勇義歌 삼장을 지어 깊이 깨우치게 하여 사졸들이 흩어지지 않게 하였다.금산전투에 임하여서는 적과 함께 혈전하여 많은 참획을 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제봉 고경명이 패하여 순절하고 송암도 화살이 떨어지고 힘이 다하여 제봉의 아들 학봉 인후와 월파 유팽로, 은재 안영과 같은 날 전사하였다. 이로써 송암은 임진왜란 떄 17세로 전사한 최연소 의병이라고 할 수 있다. 송암 조언수의 사적은 '호남절의록'과 '금산순의비'에 실려 있다. 후일 나라에서는 송암을 선무원종훈에 훈록하고 병조참판에 증직하였다.송암을 기리는 조도현의 시가 한 편 있다.북성예원조도현왼쪽에 장등너뫼오른쪽에 모세추리앞쪽으로 동기미테가작은 구릉으로 길게 누워 있는 그곳적량산 자락에 터를 닦으신 향조송암조언수님의 얼이 서린 자리조상에 대한 책임감불의에 항거한 애정이녹아내린 세월만큼숭조상문의 장으로 삼아 정엄한 뜻을 가슴에 새겨 일상에 가두련다.감상>광산구 본량면 북산리 북성부락 북성예원은 좌청룡 우백호로 앞으로는 바람을 모으고 배산 임수까지 갖춘 명당이다.
    2020-05-11 | NO.131
  • 송암 최응룡(1537~1592)
    의병장 松巖 崔應龍(1537~1592) 선생의 행적 *선무원종공신록권(宣武原從功臣錄券)공의 姓貫(성관)은 朔寧崔氏(삭녕최씨)로서, 諱(휘)는 應龍(응룡)이요, 字(자)는 士瑞(사서)이며 號(호)는 松巖(송암)이고, 別號(별호)는 忠節公(충절공)이라고도 불리운다. 公(공)의 始祖(시조)는 高麗前期(고려전기)의 文臣(문신)으로 文下侍郞平章事(문하시랑펑장사)를 歷任(역임)한 諱(휘) 天老(천로)이고, 中始祖(중시조)는 고려 명종조에 參知政事(참지정사)를 거쳐 文下侍郞平章事(문하시랑평장사)에 오른 諱(휘) 瑜價(유가)이며, 一世祖(1세조)는 고려말기 親御侮軍(친어모군) 郎將(낭장)을 歷任(역임)한 諱(휘) 善甫(선보)이다. 朝鮮朝(조선조)에 들어서는 世宗朝(세종조)때 集賢殿(집현전)의 大學者(대학자)이자 名臣(명신)으로 訓民正音(훈민정음)의 創製(창제)에 기여하였고 또한 成宗朝(성종조)에 이르러서는 經國大典(경국대전)을 完成(완성)하는 등 朝鮮前期(조선전기)의 文物(문물)을 整備(정비)하였으며 領議政(영의정)을 歷任(역임)한 寧城府院君(영성부원군) 文靖公(문정공) 諱(휘) 恒(항)은 公(공)의 高祖(고조)가 된다.曾祖(증조)는 文科(문과)에 及第(급제)하여 司饔院正(사옹원정)을 歷任(역임)하고 左贊成(좌찬성)에 贈職(증직)된 諱(휘) 永顥(영호)[一諱(일휘)는 處仁(처인)이라고도 한다]이며, 中宗朝(중종조)에 吏曺判書(이조판서)에 오른 諱(휘) 秀彦(수언)[一諱(일휘)는 溫(온)]의 孫子(손자)이고. 明宗祖(명종조)에 通德郞(통덕랑)에 오른 諱(휘) 卿立(경립)은 公(공)의 皇考(황고)가 된다. 公(공)은 어려서부터 總名(총명)하고 才質(재질)이 타고나서 讀書(독서)에 能(능)하여 스스로 證驗(증험)하고 經史(경사)에 밝았으며 性品(성품)이 强直(강직)하였다. 당시 地方(지방) 士類(사류)들과 瑞石山(서석산)의 證心寺(증심사)에 올라 시류를 講論(강론)하고 唱酬(창수)하였으며 이때 지은 詩(시)가 翠栢樓(취백루) 樓橋(누교) 아래 시냇가 바위에 새겨졌다고 전해오나 1950년 6. 25 전란으로 인해 훼손되어 안타깝기만하다. 倭寇(왜구)들이 남해안 일대에 침범하여 노략질을 일삼는 것을 直視(직시)하고 國防(국방)의 중요성을 논했으나 귀를 기울이는 이가 없어 안타까워하였으며 이를 기화로 兵事(병사)에 觀心(관심)을갖고 文靖公(문정공)께서 著述(저술)한 무정보감(武定寶鑑)등 兵書(병서)에도 조예가 깊어 文武(문무)를 兼備(겸비)하게 되었다. 先親(선친)께서 末年(말년)에 머물렀던 湖南(호남) 南平縣(남평현) 頭山面(두산면) 九沼村(구소촌)[이후 光州(광주) 西面(서면) 柒石里(칠석리) 九沼村(구소촌)- 현재는 광주광역시 남구 구소동 -으로 落鄕(낙향)하여 松下(송하)의 江亭(강정)에서 隱居(은거)하며 山水(산수)와 經史(경사)를 벗삼아 시화(詩畵)를 自娛(자오)하였다. 1592년 宣祖(선조25) 壬辰年(임진년) 4월에 壬辰倭亂(임진왜란)이 일어나자 公(공)은 “國運(국운)이 風前燈火(풍전등화)의 危機(위기)에 놓여 있고 官僚(관료)들과 百姓(백성)들이 塗炭(도탄)에 빠져있는 이때 勳家(훈가)의 後裔(후예)로서 國難(국난)을 坐視(좌시)할 수 있으리오 마땅히 百姓(백성)들과 生死(생사)를 함께 하리라” 라는 遺訓(유훈)를 남기고 南平(남평)에서 아들 參奉(참봉) 諱(휘) 永水(영수)와 더불어 家僮(가동)을 이끌고 倡義(창의)를 하였다. 사흘만에 數百(수백)여명의 義兵(의병)이 몰려들었데 대부분이 民草(민초)들인 것을 보고 “정녕 이들이 이 나라의 主人(주인)이자 의로운 百姓(백성)들이구나”하고 歎息(탄식)과 함께 結義(결의)를 다졌다. 義兵(의병)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南平(남평)에 사는 主簿(주부) 豊山洪公(풍산홍공) 民彦(민언)은 軍糧(군량) 10淅(석)을 보내오고 宗姪(종질)인 崔未能(최미능) 尙重(상중)과 李正郞(이정랑) 大胤(대윤)은 고을에서 運糧(운량)을 담당하고 楊直長(양직장) 士衡(사형)과 朴進士(박진사) 天挺(천정)은 陣中(진중)으로 運糧(운량)을 하고 士人(사인) 慶州崔公(경주최공) 厚立(후립)·弘立(홍립)등 壯丁(장정)들이 찾아와 함께 하여 500여명의 南平義兵(남평의병)을 이루었다. 公(공)은 南平義兵(남평의병)을 이끌고 同年(동년) 6월 3일에 月波(월파) 文化柳公(문화유공) 彭老(팽노)가 이끄는 玉果義兵(옥과의병) 齊峯(제봉) 長興高公(장흥고공) 敬命(경명)등과 合流(합류)하여 全羅左義兵(전라좌의병)을 이루었다. 連山(연산) 珍山(진산)과 礪山(여산)을 지나 7월 8일에 錦山(금산)에 도착하여 7월 9일 官軍(관군)과 義兵(의병)이 左右翼(좌우익)으로 하여 倭敵(왜적)과 對敵(대적)하여 수백명을 무찌르고 다음날인 7월 10일에 倭敵(왜적)은 官軍(관군)을 먼저 急襲(급습)하여 官軍(관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後退(후퇴)하자 義兵(의병)의 陣(진)에도 삽시간에 陣中(진중)이 술렁이고 士氣(사기)가 급격히 저하되자 이에 松巖公(송암공)은 아들 竹峰公(죽봉공) 諱(휘) 永水(영수)로 하여금 先鋒(선봉)에 나아가 倭敵(왜적)을 對敵(대적)케 하여 倭敵(왜적) 수백명을 斬殺(참살)하니 義兵(의병)들은 士氣(사기)가 오르고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수천명의 倭敵(왜적)을 무찔렀으나 衆寡不敵(중과부적)으로 義兵(의병)의 陣(진)도 무너지고 말았다. 戰勢(전세)가 敗(패)함에 이르자 松巖公(송암공)은 조금도 물러섬이 없이 직접 劍(검)을 빼들고 큰 소리로 號令(호령)을하며 수많은 敵(적)을 斬殺(참살)하다가 全身(전신)에 槍傷(창상)을 입고 마침내 殉節(순절)하였다. 義兵(의병)의 死傷者(사상자)가 많았던 이유는 松巖公(송암공) 父子(부자)가 退却(퇴각)하지 않고 앞장서서 勇敢(용감)히 싸운 모습에 義兵(의병)들이 感服(감복)을 하여 끋까지 倭敵(왜적)을 對敵(대적)한 때문이라고한다. 아들 竹峰公(죽봉공) 參奉(참봉) 永水(영수)와 더불어 三代獨子(삼대독자) 父子(부자)가 殉節(순절)하여 宣武原從功臣(선무원종공신)에 策勳(책훈)되어 錄(녹)되었다.당시의 世人(세인)들은 二代獨子(이대독자) 松巖公(송암공)과 三代獨子(삼대독자) 竹峰公(죽봉공) 父子(부자)의 崇高(숭고)한 殉節(순절)에 哀悼(애도)의 뜻을 표하고 忠節公(충절공)과 武烈公(무열공) 父子(부자)라고 불렀다. 1789년 正祖(정조13) 己酉(기유)년에 左副承旨(좌부승지) 滌齋(척재) 李書九(이서구) 先生(선생)은 松巖公(송암공)과 竹峰公(죽봉공) 父子(부자)의 忠節(충절)과 戰功(전공)이 묻혀 있음을 歎息(탄식)을 하고 松巖公(송암공)을 吏曹判書(이조판서)에 竹峰公(죽봉공)을 都承旨(도승지)에 贈職(증직)할 것을 薦擧(천거)하여 증직되었다 松巖公(송암공) 諡號(시호)는 忠節(충절) 竹峯公(죽봉공) 諡號(시호)는 武烈(무열) 이다. 正祖十三(정조13) 己酉(기유:1789)년에 忠勳府(충훈부)에서 靖難(정난), 佐翊(좌익), 佐理(좌리) 3훈의 正勳功臣(정훈공신)인 寧城府院君(영성부원군) 崔恒(최항)과 그의 玄孫(현손)인 宣武原從功臣(선무원종공신) 松巖公(송암공) 崔應龍(최응룡)과 竹峰公(죽봉공) 崔永水(최영수) 父子(부자)의 功勳(공훈)으로 後孫(후손)들에게 忠義衛(충의위) 崔漢福(최한복)등 二十三人(23인)에게 啓下事目(계하사목)을 발급하였다. * 위 내용 중에 일부 광주목사를 지낸 송정(松亭) 최응룡(崔應龍, 1514~1580)과 섞여 있어 자료의 확인이 필요합니다.
    2020-05-12 | NO.130
  • 송영묵(宋永默)
    송영묵(1843~?)의 본관은 홍주, 자는 효일(孝一)이며 광주시 거진(오늘날 북구 용두동)에 살았다.   1889년에 眉巖 柳希春을 기리는 모임에 참여하였다.부 : 宋文龜조 : 宋仁源증조 : 宋福鉉외조 : 崔基馥처부1 : 朴東煥
    2020-03-06 | NO.129
  • 송온묵(宋溫默)
    송온묵(1853~1903)의 본관은 홍주, 자는 일문(一文)이며 호는 낙헌(樂軒)이다. 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다. 宋駒의 후손이다.天賦聰頴하고 志操淸貞이며 孝於事親하여 誠於奉先이라 自幼勤學이고 甞就에 노사 기정진 선생이 ‘之門獲聞 爲己之學’이라 말했다.부 : 宋來良조 : 宋鶴賢증조 : 宋守憲외조 : 李益五
    2020-03-06 | NO.128
  • 송용만(宋用萬)
    송용만(宋用萬, 1888~1962)은 광산군 본량면 매동리에사 살았고, 자는 현중(賢仲), 호는 매산(梅山)이다. 본관은 여산이다. 아버지는 경(坰)이고, 어머니는 진주 강씨(姜氏) 익상(翊尙)의 딸이다. 난와(難窩) 오계수(吳繼洙 1843∼1915)와 후석 오준선吳駿善(1851~1931)의 문인이다. 송용만은 용진정사(聳珍精舍)에서 수학하였다. 이때 두 선생으로부터 남주가사(南州佳士)란 칭호를 받게 되었다. 이기(理氣)의 설에 침잠하였으며  스승의 정신을 이어 위정척사운동과 항일민족운동의 사상적 연원의 호서학파(湖西學派) 학맥을 잇고 그 일원으로 참여했다.부수재시회(芙水齋詩會) 등을 참여하고 정자에서는 여산 영호정(礪山永護齋重建韻), 나주 모현정(池洞慕賢亭韻), 쌍계정(登金安﨎溪亭, 登﨎溪亭), 장성 하담정(題荷潭亭長城臥夻), 광주 불환정(次不換亭煮伏韻) 등에서 시를 남겼다.문집 『매산시고 (梅山詩稿)』는 2권 1책으로 1992년에 손자 송병대(宋炳大)가 발행하였다.
    2020-08-08 | NO.127
  • 송재학(宋在鶴)
    송재학(宋在鶴)은 광주 거진리 출신으로 후석 오준선吳駿善의 문인이다.  『三岡集』이 있다.
    2020-08-08 | NO.126
  • 송정묵(宋廷默)
    송정묵(1855~1927)의 본관은 홍주, 초명은 황묵(晃黙), 자는 명오(鳴吾)이며 호는 후해(後海)이다. 광주시 본촌면 치촌리, 지금의 북구 건국동(옛 오룡동)에 살았다.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다. 1889년에 眉巖 柳希春을 기리는 모임에 참여하였다. 1924년 담대헌의 중건시 15냥을 성금으로 내었다.강직한 성품과 고결한 지기로 가정교훈을 받고 사부를 찾아 학문에 전력을 다하여 학식이 높았다. 무오년의 대상(大喪)을 당한 뒤에 국가의 원수를 갚지 못하자 끝내 복을 벗지 않고 않고 슬퍼하였다. 『後海遺稿』는 석판본으로 5권 2책이다. 발문은 송남옥宋男鈺이 썼다.현감 宋駒의 후손으로 증조부는 송수호(宋守浩)이며, 조부는 송찬현(宋贊賢)이고, 부친은 송내규(宋來奎)이다. 외조부는 진양정씨(晉陽鄭氏) 정기찬(鄭杞燦)이고, 처부는 순천박씨(順天朴氏) 박해룡(朴海龍)이다(.
    2020-03-06 | NO.125
  • 송제민
    송제민(宋濟民), 湖節1上-057-1, 光州, 壬辰, 高敬命同倡-《호남절의록》(1799)
    2020-04-02 | NO.124
  • 송지묵(宋智默)
    송지묵(1842~1886)의 본관은 홍주, 초명은 시묵(時黙), 자는 여오(汝吾)이고 호는 우재(愚齋)이다.  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다. 현감 宋駒의 후손으로 착한 성품으로 선대의 미덕을 실천하고 몸소 밭 갈아 양친하고 글 읽어 학식을 넓이니 경전의 깊은 뜻의 문답 수십 권을 남겼다. 부 : 宋來奎조 : 宋一賢증조 : 宋守浩외조 : 鄭杞燦처부1 : 李宗憲
    2020-03-06 | NO.123
  • 송천 양응정(1519~1581)
    양응정은 1519(중종14)년 전라도 화순군 능주 월곡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제주. 자는 공섭(公燮), 호 송천(松川)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양담梁湛, 할아버지는 양이하梁以河, 아버지는 교리 양팽손梁彭孫이다. 어머니는 금산김씨로 김화金話의 딸이다. 형은 동래부사를 지낸 양응태이고 의병장을 지낸 양산숙이 셋째 아들이다.부친 양팽손이 기묘사화에 연좌되어 화순 중조산 아래 쌍봉리에 학포당學圃堂을 짓고 은둔하였으므로 조양대에서 수학했다. 1540년 생원시에 장원했다.1552(명종7)년 식년 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검열 등을 지냈다. 1556년 병조좌랑으로 문과 중시에서 장원급제하여 특출한 실력을 내보였으며 호당湖堂(독서당의 다른 이름으로 신하들에게 학문을 권장하기 위하여 독서할 수 있도록 만든 장소)에서 사가독서를 하였다. 그 이듬해 공조좌랑으로 있을 때 당시 권신이었던 윤원형尹元衡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가 1560(명종15)년에 복직되었다. 다시 외직으로 관서 관북 평사評事로 지내다가 능주에서 나주 박산으로 이주하여 조양대와 임류정을 짓고 시주와 강학을 일삼았다. 1563년 순창군수에 부임하였다가 1565년 홍문관 수찬修撰으로 영전하였다. 이후 1567년 광주 목사, 진주 목사를 거쳐 1571(선조4)년 경주부윤이 되어 1574년까지 재임하다가 진주목사 재직 당시 청렴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576년에 의주부윤으로 기용되었고 이듬해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대사성이 되었다. 이후 벼슬에 나가지 않고 전남 나주에서 경전연구와 생도, 자제 교수에 전념하다가 1581(선조14)년 세상을 떠났다. 김인후, 임억령, 이안눌 등과 교유하였고,  정철(鄭澈)·백광훈(白光勳)·최경창(崔慶昌) 등의 제자를 길렀다. 세 아들을 이이ㆍ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하게 하였다.양응정의 묘소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동호동에 있으며,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8호로 지정되었다. 효행으로 정문이 세워졌다. 1631(인조9)년 아들 양산숙이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자 추은을 입어 예조참판에 증직되었다.시문에 능하여 선조 때 8문장의 한 사람으로 뽑혔다.《진본 청구영언》에 “太平 天地間에 簞瓢 두러메고 / 두 매 느리혀고 우즑우즑  은 / 人世에 걸닌 일 업스니 그 죠하노라”와 “嚴冬에 뵈 옷 닙고 岩穴에 눈비 마자 / 구룸  볏 뉘  적이 업건마 / 西山에  지다니 눈물겨워 노라”의 시조 2편이 전한다. 저서로 《송천유집 松川遺集》, 《용성창수록 龍城唱酬錄》이 있다.
    2020-04-28 | NO.122
  • 광주광역시
  • 한국학호남진흥원
  • 사이버광주읍성
  • 광주서구청
  • 광주동구청
  • 광주남구청
  • 광주북구청
  • 광주광산구청
  • 전남대학교
  • 조선대학교
  • 호남대학교
  • 광주대학교
  • 광주여자대학교
  • 남부대학교
  • 송원대학교
  • 동신대학교
  • 문화체육관광부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 국립아시아문화전당
  • 광주문화예술회관
  • 광주비엔날레
  • 광주시립미술관
  • 광주문화재단
  • 광주국립박물관
  • 광주시립민속박물관
  • 국민권익위원회
  • 국세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