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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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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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준선(吳駿善)
    후석後石 오준선(吳駿善)은 광주시 도덕동 출신으로 최익현崔益鉉의 문인이다.『後石遺稿』가 있다. 
    2020-08-08 | NO.91
  • 오지호(吳之湖 ; 1905~1983)
    오지호(吳之湖 ; 1905~1983)는 화순 출신으로 인상주의 회화 양식을 우리 나라에 토착화시켜 구상화만을 고집하면서 독특한 회화세계를 보여준 우리 나라 현대 회화사의 선구적인 인물이다. 예술원종신회원이며, 국전심사위원장을 역임한 서양화의 원로였던 오지호는 망국을 재촉하는 을사조약이 체결된 직후인 1905년 12월에 화순군 동복에서 오재영의 아들로 태어났다.오지호는 애국애족의 가문에서 자라면서 미술에 대한 취미와 함께 강렬한 민족주의 정신과 애국심을 가졌다. 그는 휘문고보에 진학하여 고영동의 지도로 본격적인 미술공부를 시작한 뒤 고려미술회관 미술연구소에서 계속 공부하였다.그 후 1926년 동경미술학교 서양학과에 입학하여 후기인상파의 기법을 공부하였으며, 한국의 산하를 한국적 색채감으로 담아보려고 하였다. 그는 귀국하여 1928년에 신미술운동을 표방하고 조선총독부가 주최하는 미전에 대항하여 ‘녹향회(綠鄕會)’를 조직하고 조선인이 주체적으로 작품 활동을 펴나가자고 했다. 한때 그는 민족주의자들이 운집해 있는 개성의 송도고보에서 학생들에게 애국사상을 고취하고 작품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후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광주로 돌아와 지산동 초실(草室)에 정착하여, 4·19혁명을 계기로 학원민주화에 앞장서다가 5·16군사정권 때에 조선대학교를 그만두고 야인으로 예술 활동과 한자교육 부활운동에 전념하였다.시에서는 오지호의 서양화발전에 끼친 공로를 높이 평가하고 그 뜻을 기리기 위해 회화발전에 기여한 사람에게 전국규모의 ‘오지호미술상’을 시상해오고 있으며, 지산동의 생가인 초실을 기념물로 지정하여 보존관리하고 있다. 우리 나라 화단에서 소위 ‘남도화단’이라고 일컬어지는 화맥을 형성하였다. 「사과밭」, 「야생화」, 「금강산」등의 작품과 저서로는 1968년 「현대회화의 근본문제」, 「알파벳 문명의 종언」 등이 있다.광주시에서는 오지호선생을 기념하기 위해 광주지방법원에서 무등파크호텔로 이어지는 도로를 지호로라 명명하였다.
    2021-04-08 | NO.90
  • 유광천(柳匡天)
    1732년(영조 8) 1월 26일∼1799년(정조 23) 1월 19일. 조선 후기 문신‧유학자. 자는 군필(君弼), 호는 귀락와(歸樂窩)이며, 본관은 서산(瑞山)이다. 광주(光州) 오호리(五湖里)에서 출생하였다.증조부는 나옹(懶翁) 유익서(柳益瑞)이고, 조부는 생원(生員) 유지채(柳之采)이며, 부친은 증사복시정(贈司僕寺正) 양기공(兩棄公) 유휘소(柳輝韶)이고, 모친은 함평이씨(咸平李氏) 생원 이숙빈(李淑馪)의 딸이며, 처부는 문정공(文正公) 김인후(金麟厚)의 6세손 김기조(金基祖)이다.7세 때부터 학문을 익혀, 9세에 『논어(論語)』와 『맹자(孟子)』를 마쳤다.28세 때인 1759년(영조 35) 기묘 별시(別試) 병과 6위로 급제한 뒤, 벼슬은 1779년(정조 3) 장령(掌令)을 거쳐 경성판관(鏡城判官)에 제수(除授)되고, 1786년(정조 10) 헌납(獻納), 1792년(정조 16) 사간(司諫)에 이어, 1796년(정조 20) 승지(承旨)에 이르렀다.『정조실록(正祖實錄)』에 의하면, 1787년(정조 11) 2월 헌납(獻納) 유광천이 성군의 도리와 백성들의 구제에 대해 상소하였고, 3월에 성균관(成均館) 유생의 일과 선정(先正) 조헌(趙憲)의 후손의 녹용에 대해 건의하였으며, 12월에는 청렴한 관리의 등용 등을 들어 오늘날의 폐단을 없애기를 주청한 상소가 있다.부인 울산김씨(蔚山金氏) 사이에 두 아들 유학(幼學) 유동식(柳東植)‧유학 유동환(柳東煥)을 두었다. 저서는 시문집 『귀락와문집(歸樂窩文集)』 16권 8책의 석판본이 있는데, 1934년 그의 5세손 유영희(柳永禧)가 연보(年譜)를 작성하고, 6세손 유병구(柳秉九)와 유병희(柳秉熙)가 편집 간행하였다. 서문(序文)은 없고, 권말에 유병구와 유병희의 발문(跋文)이 있다. 잡저 가운데 「산언(散言)」은 주로 경전(經典)에 있는 은미한 말과 매우 깊은 뜻만을 발췌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으로, 국립중앙도서관에 있다.묘지는 군북(郡北) 오동촌(梧桐村) 뒤 간좌(艮坐)의 언덕에 있다. 묘갈명(墓碣銘)은 이조판서(吏曹判書) 이조원(李肇源)이 짓고, 행장(行狀)은 정기(鄭琦)가 지었다.
    2020-09-17 | NO.89
  • 유영직(柳永稷)
    유영직(柳永稷, 1880~?)은 본관이 서산이며 자는 성칙(聖則)이다. 광주 동각에 살았다.1929년 羅燾圭 문인들의 契에 참여하였다.1935년 4월에 秉天祠의 일로 鳳山精舍에서 吳東洙 등 회합을 갖자는 통문을 내는 데 동참하였다.
    2020-08-05 | NO.88
  • 유진근(柳晉根)
    유진근(柳晉根, 1853~?)의 본관은 서산이며 자는 중진(仲進)이며 호는 나재(懶齋)이다.  광주 동각에 살았다.부 : 柳是漢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다.1929년 羅燾圭 문인들의 昭義契案에 참여했다.
    2020-08-05 | NO.87
  • 유진벨(배유지, 裵裕祉)
    광주 수피아여고 내에 배유지기념예배당이 있다. 미국 남장로회의 헌금으로 지어진 예배당이다. 가장 많은 헌금을 낸 코넬리아 커티스 여사를 기념하여 커티스메모리얼홀이라 이름을 지었다. 1층은 살림집, 2층은 강당으로 이뤄졌다. 커티스메모리얼홀에서 배유지기념예배당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1955년 선교사들의 뜻이었다. 예배당의 주인인 배유지, 본명 유진벨(Eugene Bell)은 미국에서 건너온 선교사였다. 1868년에 태어난 그는 켄터키 신학교와 유니온 신학교를 나와 1894년에 목사가 되었다.이후 부인과 남장로교 선교사 2진으로 임명되고 1897년에 전라도에 들어와 나주, 목포 등지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1901년 임신 7개월이던 부인이 선교활동을 하다가 군산에서 숨을 거둔다. 아내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유진벨은 미국으로 건너가고, 2년 뒤 마가렛트 벨과 혼인한 후 다시 목포로 돌아온다.목포로 돌아온 유진벨은 교육문제에 큰 관심을 갖고 서당교육의 혜택도 받지 못하고, 일본식 식민교육에도 소외된 이들을 위한 교육사업을 펼쳤다. 1903년 목포 양동 목사관에서 ‘영흥서당’이라는 배움터를 연 것이 시작이었다. 영흥서당은 1905년에 영흥소학교로 명칭을 바꾸고, 1907년에는 중등부까지 규모를 넓힌다. 학제도 개편을 해서 정부의 인가를 얻는다. 한편 목포 양동에는 선교사 부속건물을 이용한 정명여학교도 생겨난다. 목포에서 교육사업의 씨앗을 뿌리던 중에 광주에도 선교부가 설치된다. 유진벨은 1904년 광주로 옮겨와 광주선교의 책임을 맡는다. 광주교회를 운영하던 유진벨 목사는 교회 신도의 아이들이 배울 수 있는 학교를 세운다. 자신의 사택에서 몇 명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아주 작은 학교로 광주에서의 교육사업을 시작한다.1908년, 호남지역 여성교육의 산실이 되는 수피아여학교를 세운다. 1911년 미국 남장로회 신도인 스턴스 여사(Mrs. M. L. Sterns)가 세상을 떠난 여동생 제니 스피어(Jannie Speer)를 추모하기 위해 5천 달러를 기증했고, 이 헌금으로 수피아여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수피아여학교 설립자인 유진벨 목사는 1914년에는 보통과 4년과 고등과 4년제로 정식인가를 받는다.수피아여학교 외에도 숭일학교를 설립했던 유진벨은 의료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광주 최초의 서양식 종합병원인 제중원(현 광주 기독병원)을 건립하고, 고통에 처해있던 한센병 환자들을 치료했다.유진벨이 이러한 활동을 하는 와중에 개인적으로 몇 차례 불행이 닥친다. 두 번 째 부인인 마가렛트 벨여사가 일제의 방화로 수많은 교인들이 학살당한 제암리 교회를 둘러보고 오던 중에 교통사고로 숨진 것이다.그는 잠시 본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1921년 유진벨은 다시 광주로 돌아왔다. 광주로 돌아와 교육 사업과 의료사업으로 지역민들을 살피던 그는 1925년 9월, 뜻하지 않게 세상을 뜬다.유진벨의 유해는 양림동산에 먼저 묻힌 오웬 목사의 곁에 안장됐다.
    2021-05-04 | NO.86
  • 유평(柳玶 : 1577~1645)
    지난해도 봄바람 삼월 봄일 때  /한번 둘러 서로 봐 말로는 그려 이제처럼 또 바래 남쪽은 멀어 /예대로 수양버들 푸릇푸릇 나 去歲春風三月時 一回相見語相思 如今又向南天遠 依舊垂楊사명대사(四溟大師)가 송암(松庵) 유평(柳玶)과 헤어지며 이 시를 읊었다.유평(柳玶)은 1577년 설강 유사의 여섯째 아들인 아버지 유경진과 금호 임형수의 딸 평택임씨 사이에서 광주시 광산구 본덕동 창교에서 태어났다. 자는 화보(和甫)이고 호는 송암(松庵)이며, 서산인(瑞山人)으로 을사명신(乙巳名臣)인 광주 호가정 주인 설강(雪江) 유사(柳泗)의 손자이며,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의 외손이다. 재주가 뛰어나고 체구가 건장하였으며, 용력이 남달라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과 이름이 나란히 하였다. 사계 김장생 문하에서 수업을 받았으며 거인장덕(鋸人長德)이라며 칭하였다. 그는 정유재란 때에는 선생을 따라서 황주(黃州)와 봉산(鳳山) 사이에서 피난하여 3년 동안 머물다가 돌아왔다. 선생이 일찍이 효우(孝友)가 독실하다고 허여 하였는데, 이에 대해서 헐뜯는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1624년(인조 2) 갑자식년사마시(甲子式年司馬試)에 진사 3등으로 합격하여 광해군 때에는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서 참봉(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마침내 과거 공부를 폐한 채 학문을 강마하였는데, 이때 그의 스승 김장생은 이 편지를 보내어 장려하면서 ‘그대의 높은 의기는 하늘에까지 닿았다.’고 하였다. 이때 조선 중기 유학자요 같이 김장생에게 동문수학했으며 의병을 일으키며 유유상종했던  영광출신 성재(省齋) 신응순(辛應純 1572 선조 5∼1636 인조 14)에 이때의 심정을 이렇게 시로 남긴다.인간세상 허망한 것 멋대로 되라지!/툭 트인 회포는 구주(九州 중국 땅)가 좁다.초당(草堂)이 높이 누워 이따금 잠을 깨고/양보음(梁甫吟) 읊조리니 귀밑에 가을이 왔구나.천문(天門)에서 사책(射策 과거시험)하는데 나는 뜻이 없고 /종사(宗社)사 넘어짐을 그 누가 붙잡을꼬?자유롭고 노는 것이 일월(日月 생명)을 늦추는 것/나라의 안위(安危)는 대신(大臣)들의 근심거리라네여기서 양보음(梁甫吟)은 제갈량(諸葛亮)이 남양 융중(南陽隆中)에 은거할 때 부르던 노래 이름으로 제(齊)의 태산(太山) 기슭에 있는 양보산(梁甫山) 지방을 노래한 것이다. 어진 사람이 세상에서 박해받음을 탄식하고 제의 안평중(晏平仲)이 모략으로 세 선비를 죽인 이도살삼사(二桃殺三士) 고사다. 두보(杜甫)는 등루(登樓)라는 시에서 "가련타, 후주도 사당에 모셔졌구나. 해 저무는 날 애오라지 양보음을 읊조리네.可憐後主還祀廟 日暮聊爲梁父吟"하며 읊었다.이후 인조반정을 일으킨 뒤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 1587~1624)이 반란을 일으키자 의곡(義穀)을 끌어 모았다. 정묘년의 난리 때 선생이 공을 뽑아 양향유사(糧餉有司)로 삼자, 그는 의병과 군량을 모집하여 달려와서 동궁을 호위하는 등 공을 세웠다.그는 슬하에 유창익(柳昌翊), 유명익(柳明翊), 유소익(柳昭翊), 유형익(柳亨翊) 4형제를 두었다. 그리고 가훈으로 이렇게 훈계했다.구세(九世)를 집에서 같이 살았던 장공예(張公藝)는 바로 나의 스승이다.다만 서로가 화목하게 지내야지 어째서 의(意) 상하고 살아야 하나.일을 당하면 인(仁)자를 생각하고 심점을 논할 때는 사(私)를 먼저 끊으라시를 쓰는 것이 진실로 뜻이 있으니 그 누가가 나의 슬픔을 알리요.시에서 장공예(張公藝)는 당(唐) 나라 수장(壽張) 사람으로 9세(世)의 친족을 한집안에서 거느리며 생활하였다. 이에 당 황제 고종(高宗)이 직접 그 집을 방문하여 그 비결을 물었는데, 그가 지필(紙筆)을 청한 뒤 단지 참을 인(忍) 자만 백여 차례 쓰자 고종이 눈물을 흘리며 비단을 하사하였다 한다. 舊唐書 卷188. 그 뜻은 백 번 참는 것이 한집에서 대가족이 다투지 않고 살아가는 비결이라는 것이다.병자호란이라는  난리를 맞는다. 전남지역에서 옥과현감 이흥순(李興淳)과 대동찰방 이기순(李起淳) 형제는 순창현감 최온(崔殡)· 전한림(前翰林)  양만용(梁漫容)· 전 찰방 유즙(柳楫) 등과 더불어 '거의격문(擧義檄文)'을 돌려 의병을 모집, 여산(礪山)에서 집결하여 국란을 구제할 것을 외쳤다. 유평(柳坪)은 두 아들 유명익(柳明翊), 유세익(柳世翊)을 거느리고 탁양루(拆楊樓)에서 의병을 거의한다. 당시의 관군들의 한심한 꼴을 고발하는 시를 이렇게  남긴다.난리의 소식이 진실을 알기 어려워/몇 사람 의를 위해 생명을 버렸던가.무너진 관군들 앞 다투어 병갑을 버리고/지모있다는 장수들 목숨보전 급급했다.亂離消息若難眞 仗義忘生問幾人 遺散官軍爭棄甲 智謀諸將競全身남한산 바라보면 창자가 찢어진 듯/북진을 위한 심정 수건에 눈물 젖는다.일편의 외로운 성일발 마냥 위태로우니/진평같은 비계를 뉘라서 써보리오望南漢日膓如裂 拱北辰時淚滿巾 一片孤城危一髮 陣平秘計竟誰陣 여기서 진평(陳平: B.C. ? ~ 179)은 전한(前漢)의 건국 공신이며 정치가로 유방 고조가 흉노에 포위되었을 때 벗어나게 했던 인물이다. 유평은  나주의 김선(金璇)·나해봉(羅海鳳) 등과 더불어 1월 20일 여산에서 모였으며 당시 대사간(大司諫) 으로 있던 정홍명(鄭弘溟)이 소모사(召募使)로 공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정홍명을 대장으로 삼고 칼을 들고서 적진으로 달려가다가 청주에 이르러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통곡하고서 되돌아갔다. 이때 유즙(柳楫)에게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읊는다.서울의 소식은 멀어서 알 수 없으나 /산상의 외로운 성이 포위 속에 있다고 쇄하고 병든몸이 말을 만지며 슬퍼하노니/ 그 누가 이 시대를 구제하는 공을 세울꼬 그러고는 마침내 세상일을 사절한 채 산자락에 집을 짓고는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崇禎日月)’이라는 8자를 써 붙여서 충분(忠憤)의 뜻을 붙였다. 익산군수를 제수받기도 했는데, 제봉 고경명이 죽자(1592), 이듬해에는 권율의 막하로 가서 행주싸움에 참여했던 사람 탄음(灘陰) 고부민(高傅敏, 1577-1642)과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친했다. 그가 보내온 시는덧없는 인생 뒤숭숭하고 갈림길도 많아 / 우리의 만남 헤아려 보면 지금으로 몇번인가?서로의 입장과 심정 멀지 않음을 아는데 /소식 한자 받기가 어찌 수후의 구슬, 화씨(천하의 보배)의 구슬 얻기처럼 어려운가? 浮生擾擾路岐多 屈指交遊今幾何 兩地心情知不隔 書來奚 得隋和조정에서 천거하여 태릉 참봉(泰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사림(士林)들은 대명처사(大明處士)라고 불렀으며, 경렬사(景烈祠)에 향사되었다. 그는 어느날 넋두리 하며 읊은 시로 마무리한다.이(利)의 이름 돌아오면 세상이 내게 오고/공업(功業)이 이룩되면 유명(有名)하고 능(能)하다고 하니공(功)과 이(利)가 다투느라 끊날 날이 없이/세상의 사람들은 자기만 잘나려 하는구나.利名來處世歸我功業成時莫顯能爭功爭利無時己人世人皆好己勝그는 어느날 광주읍성에 절양루에 올랐다. 공북루(拱北樓)의 옛 이름이다. 1669년 부임한 목사 오두인(吳斗寅)이 절양루를 공북으로 고쳤으며, 1875년 목사 신석유(申錫游)가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절양(折楊)’은 버드나무를 꺾는다는 뜻으로 이별을 의미하는데, 주로 관리들이 이임하며 이별하는 장소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 같은 이름이 붙여진 듯하다. 유평은 ‘병자(1636)년에 의청을 광주의 절양루에 설치했다(丙子說募義廳于 光州折楊樓)’는 통문(通文)을 여러 고을에 보냈다.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해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발하자 병사와 양식을 모아 함께 국난을 이겨내자고 독촉한 글이다. 아! 우리 유림으로 뜻을 가다듬고 학문을 한 사람치고 그 누가 부모님께 효하고 임금께 충하는 의(義)를 강습하지 않을 분이 있겠는가? 어버이께 효하면서 임금께 불충한 사람은 없고 임금께 충하면서 어버이께 불효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충신은 반드시 효자의 문(門)에서 구한다는 것이니 어버이를 위하여 원수를 갚는 것은 사람(人子)의 도리요, 임금을 위하여 원수를 갚는 것은 신하(臣子)의 직분입니다. 이것은 만고에 변할 수 없는 통의(通義)인데 이제 우리 군부(君父)께서 포위의 속에 계시니 신하(臣子)로서 통분을 어떻다고 하리요. 하물며 이 교서(敎書)가 포위(包圍) 속에서 나왔는데 모두가 애통하신 말씀이어서 받들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목이 메어 통곡을 하게 합니다. 즉시 통문을 돌리노니 원컨대 열읍(列邑)의 모든 군자(君子)들은 행여 지체하거나 관망하지 말고 각기 분발하여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동지들을 규합하여 병량(兵粮)을 도와주어 군부(君父)의 급함을 구함이 어떠합니까? 이는 다만 국가를 저버리지 않는 대의일 뿐 아니라 장부가 공명을 세울 수도 있는 기회입니다. 통문이 도달하면 시각을 지체하지 말고 경내에 돌리고 알려서 힘을 합하고 서로 붙잡아 같이 국난을 건지도록 부디 바라는 바입니다.
    2018-10-16 | NO.85
  • 육봉 박우(1476~1547)
    박우朴祐(1476~1547)의 본관은 충주. 자는 창방昌邦, 호는 육봉六峰. 박광리朴光理의 중손으로, 할아버지는 박소朴蘇이고, 아버지는 진사 박지흥朴智興이며, 어머니는 서종하徐宗夏의 딸이다.광주 출신으로 1476(성종7년)년 광주시 서구 절골, 불암마을에서 태어났다. 형은 하촌 박정, 눌재 박상이며 아들은 선조시절에 정승을 14년이나 지낸 사암 박순(1523-1589)이다.박우는 젊어서 아버지를 여의고 큰형에게 글을 배웠으며 1510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고 개성유수 등을 하였다.1507년에 진사, 3년 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로 등용되어 곧 전적(典籍)이 되었다. 그 해 흥덕현감으로 나갔다가 얼마 뒤에 어머니 상을 당해 사직하였다.삼년상이 끝나자 다시 전적으로 복직하고 이어서 호조정랑을 거쳐 홍문관교리가 되었다. 경연에서 고금 제왕들의 치란흥망(治亂興亡 선정과 악정 및 부흥과 망함)에 관한 이유를 설파하니 모두 감탄하였다. 3년 뒤에 병으로 사임했다가 다시 공조정랑으로 복직하였다. 이어서 병조정랑ㆍ장령ㆍ집의ㆍ성균관사예ㆍ성균관사성ㆍ세자시강원필선ㆍ직제학ㆍ좌승지를 거쳐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스스로 검약을 지켜 지방관들에게 모범을 보였다.또한 박우는 1538년에 장성의 '삼마태수라'는 별칭을 얻은 청백리 지지당 송흠(1459-1547)이 말년에 낙향하여 지은 정자 관수정에도 들려 시를 남겼다.김안로(金安老)가 권세를 부리면서 바른 선비들을 배척하자 스스로 원해 남원부사가 되었다. 그 때 권세가 허확(許確)이 전주부윤으로 내려왔으나 찾아가 인사하지 않았다. 허확과 그의 아들 허항(許沆) 등이 몇 번 초청하므로 마지못해 잠시 찾아보고 곧 돌아와 버렸다. 병으로 벼슬을 사직하고 나주 옛집으로 내려가서 2년을 지냈다. 다시 도승지로 있을 때 탄핵을 받고 공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파면되었으며 다시 해주목사, 대사성을 거쳐 병조, 이조 참의, 한성부 우윤, 개성부 유수 등을 지냈다. 인종 때는 한성부 좌윤 겸 동지춘추관사가 되어 《중종실록》의 편찬을 감수하였다. 성품이 곧아 윗사람에게 아첨하지 않았으므로 당시 세도가인 김안로나 허확의 부자들로부터 심한 박대를 받았다. 그러나 끝내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사후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2020-04-28 | NO.84
  • 윤경
    윤경(尹?), 湖節4下-131-1, 光州, 丁卯, 高循厚同倡-《호남절의록》(1799)
    2020-04-02 | NO.83
  • 윤지화(尹之和)
    조선 전기의 문신 남촌(南村) 윤지화(尹之和 1476~1558)의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순경(順卿)이다. 현감(縣監) 윤응(尹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봉상시(判奉常寺事) 윤기견(尹起畎) 또는 윤기무(尹起畝)이다. 연산군의 외삼촌인 참판(參判) 윤구(尹遘)의 아들이자, 첨정(僉正) 윤지임(尹之任)의 동생이며, 사복시 첨정 윤지청(尹之淸) 형으로, 제헌왕후(齊獻王后 폐비윤씨) 조카다.1476년에 태어나니 낳아서부터 총명하고 효우(孝友)와 문장이 출충하며 지조가 굳건하고 기상이 엄준 하였다.1504년(연산군 10) 갑자(甲子) 식년(式年) 사마시(司馬試)에 진사로 합격하여 1506년(연산군 12) 벼슬이 호조정랑(戶曹正郞)에 이르렀다. 동년(중종1년)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 외척으로 전남 장흥(長興)으로 부처(付處)된 후 1513년에 해배(解配)되여 30대 초반에 광주(光州)로 이거 함안윤씨 입향조 세거지로  광주광역시 남구 행암동에 자리 잡고  살아왔다.1535년에 아들 제(霽)가 죽음을 당하니 이후로  매우 두려워하여 장차 깊은 못에 빠지는 것 같아 세상에 뜻이 없어, 당시 문장으로 유명한 하천(霞川) 고운 (高雲 1479~1530, 고경명 장군의 조부) 눌재 (訥齋) 박상(朴祥), 양곡 소세양(蘇世讓) 감사(監司) 정만종(鄭萬鍾) 선생 등과 도의(道義)로 사귀어 시와 술로 창수(唱酬)하며 세월을 보내다 1558년(명종13) 83세로 세상을 떠났다.중종 때에 서사정랑(筮仕正郞)으로 치사(致仕)하였다. 귀향 후 은거하여 도학을 강명(講明)하고 후학을 개진(開進)하니, 눌재 박상이 시를 평하기를 ‘동양천화작지선(同養天和作地仙)’이라 하였다.스스로 찬한 지(誌)에 따르면, ‘아홉 마디의 창양(昌陽)은 수명의 긴 것과 같고 높은 뫼는 그 성품의 굳셈과 같다. 겸공(謙恭)을 밖으로 들어내고 성경(誠敬)을 안으로 간직하였다. 오유(五遊)하고 추창(趨昌)하며 구원(邱園)에서 숨어 살아 문장을 스스로 머금고 광채를 스스로 감추었다. 문을 닫고 생도를 가르치며 혹은 방으로 들어가고 혹은 마루로 오른다’라 하였다.성종의 계비인 윤씨가 폐위되자 광주(光州)로 낙향하였다. 묘는 현재 광주광역시 남구 행암동(구 孝友面 龜巖)에 있다.저서로 현재 남촌유고(南村遺稿)가 국립중앙도서관에 남아 있다.
    2018-07-06 | NO.82
  • 윤태한(尹泰翰)
    남구 대지동 윤태한(尹泰翰. 1857~1932)은 본관이 남원이고  호는 한암(漢菴)이다. 1882년(고종 19) 25세에 동학의 교리에 심취하여 제2대 동학교주인 최시형(崔時亨)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동학에 입도하였다.32세에 동학접주가 되어 광산(光山)‧화순(和順)‧나주(羅州) 지역에서 포교 활동을 하였으며, 1894년(고종 31) 1월 수백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선봉으로 전투에 참여하였다.1895년(고종 32) 근대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과 우금치(牛禁峙)전투에서 동학군은 패퇴하였다.이후 을사조약, 고종의 퇴위, 군대해산 등에 울분을 느껴 반일운동과 의병 활동에 가담하였다.  동학접주로 김개남군에 참여한 뒤 살아돌아와 한말의병에 가담했다가 1907년 12월 체포되어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하였다. 그는 손발톱이 빠지고 오른팔이 불구가 되었으며, 동상으로 발이 썩어 가는 고초를 겪으며 2년간 옥고를 치렀다.고문 후유증으로 성불구가 되는 등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당하였지만 그는 종교 집회와 교육활동을 계속하여 사람들에게 항일의식과 애국심을 고취시켰다.1932년 사망한 뒤, 계룡산(鷄龍山) 천도교 본당에 제향(祭享) 되었다.
    2020-03-06 | NO.81
  • 이각(李恪, 1553~?) 광주목사
    이각(李恪, 1553~?) 광주목사로 1641.11~1643년까지 있었다.포저(浦渚) 조익(趙翼, 1579 ~1655)의 문집인 《포저집(浦渚集)》 제33권 / 묘지명(墓誌銘)에 '사위 진사 이상주(李相冑)의 묘지명'에 "나의 사위 진사 이상주는 나의 벗인 병조 판서 연양군(延陽君) 이돈시(李敦詩)의 장손(長孫)이다. 돈시는 증 영의정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휘(諱) 귀(貴)의 사자(嗣子)이다. 나의 사위는 돈시의 아들인 광주목사(光州牧使) 이각(李恪)의 아들이다. 나와 돈시의 관계는 골육의 형제와 같은데, 두 집안이 잇따라 시집을 보내고 장가를 들였으니, 내 아들 내양(來陽)은 돈시의 사위가 되었고 돈시의 손자 상주는 내 사위가 되었다"고 했다.또 '망녀(亡女)의 묘지문'에는 "진사 이상주(李相冑)의 처(妻) 조씨(趙氏)는 전 예조 판서 익(翼)의 딸이요, 고려 개국 공신(開國功臣) 문하시중(門下侍中) 휘(諱) 맹(孟)의 후예이다. 나의 5남 1녀 중에서 이 딸이 또 가장 늦게 태어났으므로 우리 부처가 귀중하게 여긴 것이 매우 남달랐다.나이 16세에 이상주에게 출가하였는데, 상주는 증 영의정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휘 귀(貴)의 증손이요, 병조 판서 연양군(延陽君) 휘 시백(時白)의 손자요, 광주목사(光州牧使) 휘 각(恪)의 아들이다. 연평은 종사(宗社)에 큰 공훈을 세워서 귀한 신분이 되고 총애를 받은 것이 조정의 누구도 따라갈 수 없었으며, 그 집안은 대대로 혁혁한 공적을 세운 성대한 가문이었다. 그런데 상주의 사람됨을 보면 온아(溫雅)하고 간결(簡潔)하였으며 문사(文思)가 또 영발(穎發)하였으니, 뭇 선비들 중에서 으뜸가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고 했다.
    2023-08-09 | NO.80
  • 이계익(李啓翼)
    이계익(李啓翼, 1878~?)의 본관은 함평이며 자는 경직(敬稷), 호는 오촌(梧村)이다. 광주 누문리에 살았다. 부 : 李龍憲조 : 李敏炯증조 : 李萬燁외조 : 閔三顯송사 기우만에게 수학하였다.1916년 송사 선생 襄禮 때 通贊으로 참석하였다.1924년 담대헌의 중건시 750냥을 성금으로 내었다.1935년 4월에 秉天祠의 일로 鳳山精舍에서 회합을 갖자는 吳東洙 등 通文을 내는 데 동참하였다
    2020-08-05 | NO.79
  • 이계인(李繼仁)
    이계인(李繼仁)용인(龍仁) 출신. 도학과 문장이 탁월하여 명류(名流) 가운데 그 이름이 뛰어났다. 을묘사화(乙卯士禍)에 그 장자 윤(允)이 조정암(趙靜菴)과 함께 화를 입자, 명류사회(名流社會)에 이름을 감추고자 광산군(光山郡) 서방면(瑞坊面) 오치(梧峙), 현 서산동(瑞山洞)에 터를 닦고 이주하여 후학에 도의(道義)를 가르치며 여생을 마쳤다. [참고문헌] 전라남도지
    2018-07-06 | NO.78
  • 이계종(李啓琮)
    이계종(李啓琮, 1857~?)의 본관은 함평이며 자는 명숙(明淑), 호는 삼산(三山) 이다. 광주 서방면 오치리에 살았다.송사 기우만에게 수학하였다.1916년 송사 선생 襄禮 때 典賓으로 참석하였다.1924년 담대헌의 중건시 100냥을 성금으로 내었다.1927년 8월에 吳駿善 柳昌秀 등과 함께 蘆沙 문도들에게 高山祠에 함께 배향할 제자들의 위패를 정하자는 내용의 통문을 보냈다
    2020-08-05 | NO.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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