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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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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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라왕자단비
    담양군 대전면 평장리신라왕자단비(新羅王子壇碑)는 <광주읍지>에 따르면 주(州)의 북쪽 50리의 거리인 평장동(平章洞)에 있는 건물로 광산김씨시조(光山金氏始祖)의 제향(祭享)을 모시는 김씨문중(金氏門中)의 단소(壇所)이다.기문(記文)후손 참판(參判) 김철현(金喆鉉) 지음우리의 시조(始祖) 이신 신라왕자(新羅王子) 김공(金公)의 이름은 흥광(興光)으로 신라말기의 어지러운 시기를 만나 광주의 북쪽 불대산(佛臺山) 아래에 있는 서일동(西一洞)으로 거처를 옮겨 이곳을 중심으로 그의 몸을 숨기어 드러내지 않는 둔적(遯跡)의 일생을 마치었다. 이로 인하여 광산(光山)이라는 우리의 본가가 생기게 된 것이다.우리 시조께서 이처럼 이곳에 터를 잡아 많은 학덕을 쌓은 관계로 그의 자손들이 세(世)를 이어 이곳에 살면서 8대(代)의 오랜 세월을 거쳐 연이은 평장사(平章事)의 벼슬을 하였기 때문에 일부러 이 마을의 이름을 평장(平章)이라 한 것이다.고려(高麗)로부터 조선(朝鮮)에 이르는 사이에 여러 후손들이 더욱 번창하여 팔도의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대를 이어 세거(世居)하는 이 사실을 생각할 때 오늘의 이 마을이 옛날과 달라 이처럼 황폐하게 된 그 시기에 대한 많은 궁금함이 없지 않다. 이는 다름 아닌 우리 김씨가 이미 오래 전부터 이 마을에 살지 않은 관계로 이러한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왕자부군(王子府君)께서 생존하신 그 당시의 년기가 애매하고 또 그의 유적이 모두 없어져 이를 고증할 수 있는 별다른 문헌(文獻)이 없다. 그러나 다행히 당시의 사적을 상상할 수 있는 그 유허(遺墟)가 있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제향의 사원(祠院)을 세우려는 그간의 많은 거론이 있었음에도 마침내 이의 뜻을 이루지 못한 안타까움이 없지 않다.슬프다! 이처럼 예측하기 어려운 세정(世情) 인사(人事) 등의 변화를 생각할 때 앞으로의 후손들이 어찌 오늘의 우리와 다름없는 이러한 생각을 가질 수 있겠는가? 지난 경신(庚申)년에 나의 사제(舍弟)인 판서(判書) 각현(H )이 경향각지의 여러 종친들에게 통문(通文)을 보내 이 사실을 알린 나머지 민현(珉鉉) 용주(容柱) 진현(珍鉉) 세 유사(有司)와 함께 유허(遺墟)위에 제단(祭壇)을 쌓아 매년 늦가을에 여러 종친들과 함께 향사(享祀)의 예를 다함으로써 비로소 옛날의 시조(始祖)를 추묘(追墓)하고 종족(宗族)의 화목(和睦)을 다질 수 있는 결정적 계기를 이루었다.이로 인해 사람과 영혼이 서로 감응하고 정의와 예도가 함께 어울리는 이의 사실을 생각할 때 어찌 "이 세상의 모든 일이 반드시 그 시기가 있고 또 이를 주도하는 그 사람이 있다"는 옛날의 이 말에 대한 깊은 실감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의 뒤를 이어 반드시 있어야 할 이 단소(壇所)의 표석(表石)을 미처 세우지 못한 이 사실을 생각할 때 또다시 이에 대한 제2의 아쉬움이 없지 않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많은 노력이 있었지만 수년의 오랜 세월을 끌어온 사이에 판서(判書) 각현(珏鉉)이 이미 세상을 떠나 거의 중단된 상태의 침체를 면치 못하였다.다행히 금년 봄에 장성(長城)의 종인(宗人) 영관(永寬)이 이미 앞에서 말한 바 있는 세 사람의 유사(有司)와 함께 서로의 성금(誠金)을 모아 이 일을 착수하면서 나를 찾아와 이 사실을 알리었다. 내 그 성의에 깊은 흠모(欽慕를 느낀 나머지 대략 이러한 내용의 전말을 서술하고 아울러 명사(銘辭)를 지어 이르기를"불대산(佛臺山)과 서석산(瑞石山)이 서로 함께 어울리니신라왕자(新羅王子) 귀한 분이 이 가운데 살았도다여러 자손 사랑하는 맑은 유덕(遺德) 남기었고동국(東國)에서 으뜸가는 많은 영화 누렀도다지난 옛날 그 유지遺趾)가 오늘까지 이어지니여러 종친 힘을 모아 맑은 제단(祭壇) 쌓았도다추모(追慕)하는 그 마음을 무어라고 말할손가오늘날의 이 빗돌이 그지없이 빛나리라"하였다축문(祝文)"우리 시조(始祖) 어진 덕이 그지없이 뛰어나니지난 옛날 이곳에서 그의 몸을 숨겼도다그 당시의 그 유지가 오늘까지 이어지니그 위에 단(壇)을 쌓아 추모제 향 모셨도다보본(報本하는 이런일을 어찌 감히 잊을손가한결같은 성심으로 많은 감응(感應) 얻었도다."후손 판서(判書) 김각현(金珏鉉) 지음
    2018-06-18 | NO.164
  • 신륜(辛崙), 通訓大夫光州牧使辛公墓銘
    광주목사 신륜 [光州牧使 辛崙]辛崙(1504年 燕山君 10年~1565年 明宗 20年)은 朝鮮 前期의 文臣으로, 本貫은 靈山. 字는 景立이다. 奉翊大夫 典公判書를 歷任한 曲江 辛斯蕆의 後孫으로, 高祖는 郡事를 歷任한 辛劑이며, 曾祖는 節度使를 歷任한 辛俶晴이며, 할아버지는 黃州判官을 歷任한 辛秀武이며, 아버지는 參議를 歷任한 辛弼周이며, 어머니는 昌原黃氏이며, 夫人은 宣務郞을 歷任한 南廷召의 딸 宜寧南氏이다.어려서부터 學文을 좋아하여 曺植과 交遊하였다. 1546年(明宗 1年) 增廣文科에 乙科로 及第, 成均館學正·博士를 거쳐 典籍에 오르고 다시 刑曹佐郎에 任用되었다. 1550年에는 慶尙道都事·春秋館記注官을 歷任하고, 1552年에는 咸鏡道都事로 任命되었으나 老母를 奉養하기 위하여 赴任하지 않았다. 뒤에 禮曹·工曹·刑曹의 正郎을 지내고 1563年 光州牧使가 되었으나 어머니의 奉養을 위하여 官職을 抛棄하고 돌아와 孝道를 다하였다. 向陽祠에 祭享되었다.辛崙의 墓碣銘을 紹介한다. 1567年(明宗 22年)에 세워진 辛崙의 墓碣의 碑文은 神明舍圖, 破閑雜記 等을 著述한 學者이며 親舊인 文貞公 南冥 曺植이 撰述하였고, 글씨는 朝鮮 前期 第4代 世宗의 셋째 아들로 王子이며 書藝家인 匪懈堂 安平大君의 글자를 모아서 새겼다. 碑文의 初盤部에는 辛崙의 家系圖에 대해 적혀 있으며 中盤部에는 官職生活과 行蹟이, 後半部에는 家族과 子孫의 事項이 적혀 있다.신륜 묘갈 [辛崙 墓碣]有明朝鮮國通訓大夫光州牧使辛公墓銘 幷序友人 南冥 曺植 撰辛氏系出靈山爲東國石宗猶尹姞於周也公諱崙字景立玄祖諱斯蕆仕高麗爲典工判書高祖諱劑爲郡事娶宗簿寺正鄭仁慈之女生節度使俶晴是公之曾王父也郡事當麗季賊旽慕其名欲托以同宗怵以禍福竟不屈祖諱秀武爲黃州判官考諱弼周爲參議娶昌原黃氏生公參議公中弘治丙辰進士燕山政亂遂廢擧子業至正德丁卯中中廟朝文科有文武長才顯敭中外者四十餘年公少好文甫十五歲中進士鄕選嘉靖丙午登第辛氏世樹家聲藍田生美玉固也始調授成均館學諭學正博士陞典籍遷刑曹佐郞伸寃撥伏曹吏逮事參議公之爲正郞者稱之爲淑問如正郞庚戌年授慶尙道都事兼春秋館記注官是年十月丁內虞哀毁踰禮躬執奠饌定省慈圍不入燕室壬子年除咸鏡道都事以母夫人之遠不就遷禮工刑曹正郞爲養乞醴泉郡又乞爲寧海府使癸亥秋又乞爲光州牧使母夫人以年老不任登道遂棄官歸養躬自滫瀡乙丑五月以疾終于家享年六十二娶宣務郞南廷召之女廷召娶竹溪節婦府使安璋之女生夫人是生二子曰汝謹汝誠女嫁司成陳瓘子裕慶汝謹娶生員郭之元女生一男曰膂女幼汝誠娶經歷張世沈女生一男曰胤公狀貌魁峨質性醇尨事親孝理民和應事以實接物以誠言不美華行無虛僞鄕里稱其孝位不稱器爲人所惜夫人端雅有婦規先公十年卒汝謹以植有分於先公且以爲不諛來乞銘 銘曰馬浦之北 靈鷲有神 周楨之降 其辛維申 簪纓苽瓞 非勃其起 仁者之壽於參議 仁者之不 壽唯牧使 賢勞之獨 三已其位 敬色之勤 累朱其轓 惟鄕國有臣 惟玄考有昆 而曾參莫養 而黃媼抱孫 皐景立 不瞑爾目 何以樹之 雙白其玉 君之淵兮子之山 徯我侯兮天送之 後千香絶 石乎在玆隆慶元年丁卯十二月十七日安平大君 書字륜 묘갈 해설유명조선국 통훈대부 광주목사 신공묘명: 서문(序文)을 아울러 쓰다.친구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글을 짓다.신씨(辛氏)는 세계가 영산(靈山)에서 나왔으니 우리나라의 이름난 집안으로 주(周)나라의 윤씨(尹氏), 길씨(姞氏)와 마찬가지이다. 공의 이름은 륜(崙)이고 자는 경립(景立)이다. 현조부의 이름은 사천(斯蕆)이니 고려에 벼슬하여 전공판서를 지냈다. 고조부의 이름은 제(劑)이고 군사(郡事)를 지냈는데 종부시정 정인자의 따님을 맞이하여 절도사 숙청(俶晴)을 낳았으니 이분이 공의 증조부이다. 군사는 고려말년에 역적 신돈(辛旽)이 그 명성을 흠모하고 같은 집안이라 핑계하여 화복(禍福)으로 유혹하고자 하였으나 끝내 굽히지 않았다. 조부 수무(秀武)는 황주판관을 지냈고 부친 필주(弼周)는 참의를 지냈는데 창원황씨(昌原黃氏)를 맞아들여 공을 낳았다. 참의공은 홍치 병진년(1496, 연산군 2)에 진사에 합격하였으나 연산군 때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마침내 과거 공부를 그만두었다가 정덕 정묘년(1507, 중종 2)에 이르러 중종 때의 문과에 합격하였다. 문무에 큰 재주가 있어 내외에 이름을 드날린 것이 40여 년이나 되었다. 공은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겨우 15세에 진사시험의 향시에 합격하였고 가정 병오년(1546, 명종 1))에 급제하였다. 신씨는 대대로 가문의 명성을 세웠으니 남전(藍田: 섬서성에 있는 옥이 많이 나는 고장으로 좋은 집안에서 말한다)에서 옥(玉: 훌륭한 자손)이 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처음에 선발되어 성균관 학유, 학정, 박사에 제수되었다가 전적으로 승진하였다. 형조좌랑에 옮겨서는 원통함을 풀어주고 숨은 죄를 다스리니 형조의 서리 중 참의공이 정랑으로 계실 때 섬기던 사람들이 공을 칭송하여 숙문(淑問: 송사를 잘 다스리는 것)하는 것이 정랑과 같다고 하였다. 경술년(1550)에 경상도도사 겸 춘추관기주관에 제수되었는데 그해 10월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예법에 지나치도록 슬퍼하여 몸을 상할 지경이었지만 몸소 제물을 준비하였고 밤낮으로 어머니를 보살폈으며 내실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임자년(1552, 명종 7)에 함경도도사에 제수되었으나 어머니와 멀리 있게 된다고 부임하지 않았다. 예조·공조·형조의 정랑으로 옮겼으나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예천군수의 자리를 청하였고 다시 청하여 영해부사가 되었다. 계해년(1563) 가을에 또 청하여 광주목사가 되었는데 어머니가 연로하여 길에 오를 수 없게 되자 마침내 관직을 버리고 돌아가 모셨는데 몸소 음식을 만들어 봉양하였다. 을축년(1565, 명종 20) 5월 병으로 집에서 별세하니 향년 62세였다. 선무랑(宣務郞) 남정소(南廷召)의 딸에게 장가갔는데 정소는 죽계(竹溪: 순흥을 말함)의 절부(節婦), 부사 안장(安璋)의 딸에게 장가가서 부인을 낳았다. 부인이 아들 둘을 낳으니 여근(汝謹)과 여성(汝誠)이고 딸은 사성 진관(陳瓘)의 아들 유경(裕慶)에게 시집갔다. 여근은 생원 곽지원(郭之元)의 딸을 맞아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려(膂)라 하고 딸은 어리다. 여성은 경력 장세침(張世沈)의 딸을 맞아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윤(胤)이라고 한다. 공은 용모가 장대하였고 타고난 성품이 순수하고 독실하였다. 어버이를 효로 섬기고 백성들을 화목하게 다스렸다. 일은 진실되게 응하고 남을 성심으로 대하였으며 말은 화려하지 않고 행동에는 거짓이 없었다. 고을 사람들이 그 효성을 칭찬하였으나 지위가 기량에 걸맞지 않아서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부인은 단아하고 부녀자의 법도가 있었으나 공보다 10년 먼저 별세하였다. 여근(汝謹)은 내가 돌아가신 부친과 교분이 있고 또한 아첨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 와서 명을 청하였다. 명하노니,마포의 북쪽에 영취산(靈鷲山)이 신령스러워서나라의 동량을 내려주니 신씨(辛氏)에게 이르렀구나훌륭한 벼슬, 자손이 번창하니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로다.어진 사람으로 오래 산 분은 참의공이고 어질지만오래 살지 못한 사람은 오직 공이라네현명하여 남달리 수고하였으며세 번이나 그 자리를 그만두었구나.공경하는 기색으로 부지런하여붉은 깃발달린 지방관의 수레를 타니나라에는 훌륭한 신하요,조상에게는 훌륭한 후손이라네다만 증자처럼 어머니를 봉양하지 못하고늙은 어머니에게 손자를 맡겼으니그대를 부름에 눈 감지 못하리.어떻게 세울 것인가? 한 쌍의 흰 옥이라.임금의 못은 그대에게 산이니우리 수령을 기다리자 하늘이 보내주시네.천년 후에 향기 끊어져도비석은 여기에 있으리라.융경 원년 정묘년(1567, 명종 22) 12월 17일안평대군(安平大君)의 글씨를 모았다.
    2024-04-09 | NO.163
  • 신사박경주유혜영세불망비
    광주시 광산구 선암동 350번지1920년 건립, 1984년 재건립옛 선암역촌 어귀에는 가뭄 때 소작료를 면해주었다는 선암역 찰방이었던 박경주 송덕비가 있다. 송정동에서 호남대 방향으로 가다가 오른쪽 선암마을 쪽으로 100여미터 들어가면 왼쪽에 있다. 지주이면서 덕을 베풀었다고 한다.박경주 유혜비는 지주이면서 소작료를 받아 계속 농토를 늘려가면서도 자신이 받아들이는 전체 소작료는 농지가 늘기 전과 같은 수량만을 거둬 소작인들이 박씨 땅이 늘어나기를 빌었다는 사연이 담긴 석비이다. 선암마을 최초 노블리스 오브리주의 실천 사례라고 할 수 있다.선암역은 조선시대 역으로 광주시 광산구 선암동에 있었다. 전라우도에는 전북 삼례찰방역에 속하는 13개 역과 장성 청암찰방역에 속하는 12개 역 등 모두 25개 역이 있었고, 전라좌도에는 광주 경양찰방역 아래 7개 역, 임실 오수찰방역 아래 12개 역, 장흥 벽사찰방역 아래 10개 역, 금산 제원찰방역 아래 5개 등 총 34개 역이 있었다. 선암역은 어등산 기슭에 있었는데, 장성 청암찰방역에 속했다. 당시 역은 관리들이 서울과 지방을 오갈 때 숙식을 제공받고 말을 빌려 탈 수 있도록 편의를 돕는 관청이었다. 관리 직급에 따라 빌려 탈 수 있는 말의 숫자에 차등이 있었다. 원래는 소촌동에 있었다고 하나 정조 때 황룡강 선암나루 근처로 옮겨왔다고 하며, 역이 있던 자리는 도로확장공사와 평동산단 조성사업 등으로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선암역은 광주 소지면에 있었고 72호에 304명이 살고 있었고 노비는 17명이었다. 관리들에게 빌려주는 말 6필을 길렀다. 제주도로 유배갔던 우암 송시열이 이곳을 지나갔으며 동학농민운동 당시 오권선의 동학군과 나주 수성군이 이곳에서 대치했다고 한다. 1890년대 일본인이 쓴 자료에는 선암역과 선암나루, 중보장 터에 주막이 있었다. 선암역촌과 어등산 중턱의 탑동, 장이 섰던 강변의 중보마을이 합쳐져 광산구 선암동이 되었다. 호남대학교는 선암동과 서봉동 경계에 세워졌고 옛 선암역촌은 송정-영광간 도로 오른편에 있었다. 연안차씨들이 살았으나 이후 충주박씨들이 들어왔다. 선암역 동헌 자리는 434번지라고 하며 고려시대 세워진 삼층석탑이 인근에 있다. 2018.11.29. 수정
    2018-10-15 | NO.162
  • 아미산영원정추모비
    광주시 북구 일곡동 산 69-1(숭일고 입구)1982년이 아미산영원정추모비(峨嵋山永遠亭追慕碑)는 광주노씨 종친회 건립하다.    
    2018-11-13 | NO.161
  • 안중근의사 동상
    서구 상무자유로 상무시민공원2017년안중근 의사는 일제 침략의 원흉이자 초대 조선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할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3발의 총을 쏴 저격해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선고받고 3월 26일 순국했다. 안중근 의사 순국 107주기에 그 분의 유해는 못 모셨어도 안 의사의 호국사상을 민주, 인권, 평화의 도시 광주에 새겼다.
    2018-06-20 | NO.160
  • 안중근의사상
    북구 하서로 52북구 중외공원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로를 따라 가는 중에 왼편의 공원 중앙에 안중근의사상이 있다. 1987년 4월 4일 건립했다.안중근의사상 건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회장 안학선, 명예회장 박용훈, 추진위원장 심상준, 총무부장 이석주, 감사 안덕순 등이며 김대길이 조각했고 장전 하남호가 글씨를 썼다.안중근(1879~1910)은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1909년 중국 하얼빈에서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처단한 구한말의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순흥, 자는 응칠, 세례명은 토마스로 양반가에서 태어났으며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 1906년부터 계몽운동을 벌였다. 1907년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09년 우덕순과 단지회라는 소수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만주의 하얼빈 역, 지야이지스고 역 근처에서 초대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 등의 하차 시 암살을 준비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 잠입하여 역전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다이지로(森泰二郞), 남만주 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田中淸次郞) 등에게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게 붙잡혔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에 살인의 죄형으로 관동주 뤼순 감옥(뤼순형무소)에서 사형(교수형) 집행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2018-06-07 | NO.159
  • 암행어사 민달용 마애비
    광주시 북구 금곡동 818번지암행어사 민달용 마애비는 무등산 원효사  미처 못가서 무등로 1448 인근에 있다. 일명 무등산 어사바위이다. 광주목사로 온 그의 아들 민영직이 새겼다.여흥 민달용(閔達鏞)의 자는 자겸(子兼)이며 1802년 출생했다. 부친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울산도호부사(行蔚山都護府使) 민치문(閔致文)과 모친 김재익(金載翼)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1834년(순조 34) 식년시에서 진사 3등 20위로 합격하였다. 1844년(헌종 10)에 과거에 급제하였지만, 대사간(大司諫) 권직(權溭)에 의해 당시 과거시험의 부정이 발각되었다. 그 결과 해당 감독관은 파직되었고, 그의 급제 사실 또한 취소되었으며, 이후 투옥되어 심문을 받았다. 최초 사형에 처해졌지만 감면되어 종의 신분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1853년(철종 4)에 사은을 입어 죄명이 삭제되었고, 정시에서 병과 3위로 문과 급제하였던 과거 급제 기록도 복원되었다. 1855년(철종 6)에는 관록(館錄)에 선발되었다. 1858년(철종 9)에 전라좌도암행어사(全羅左道暗行御史)가 되어, 각 지방 관리들의 비리를 적발하였다. 1861년(철종 12)에는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중국을 다녀왔다.어사 민공달용구폐사민비(御史 閔 公 達鏞 扏弊思民碑)가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 558번지에 있다.에 있다. 전라좌도 암행어사 민달용이 나쁜 것을 두드리고 백성을 생각한 비로 1890년에 다시 세웠다.庚寅 改立(경인 개립)
    2018-07-03 | NO.158
  • 양림동 개비(狗碑)
    광주시 동구 양림동 157번지의 11558년 (명종 13) 양촌 정엄의 효행정려가 있으며, 정려 앞에 석상이 있다. 여기를 양림동 일대의 주민들은 속칭 '개비'라고 부른다. 지금으로부터 4백여년전 (명종·선조연간)에 한양 천리를 달려 조정에까지 주인이 심부름을 하였던 충견의 석상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양림동 오거리에서 사직공원쪽으로 50m 지점에 있는 이 개비는 광주 정씨인 양촌이 자신이 길렀던 명견의 넋을 달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이 개는 양촌이 써주는 상소문이나 조정에 보내는 각종 문서를 보자기에 싸서 목에 걸고가 전하는 심부름을 사람 이상으로 해냈다는 것이다. 양촌은 개에게 심부름을 시킬 때 전대에 엽전을 넣어서 따로 목에 걸어주며 한양까지 가고 오는 길에 밥을 사먹도록 했는데, 이 개는 주막집 아낙이 주는 밥을 먹고도 돈을 너무 많이 가져가면 떠나지 않는 등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영특했다는 것이다. 이때는 통신 및 교통수단이 불편하여 비둘기 발목에 쪽지를 매달아 편지를 띄우기도 하고 또 말을 타고 가도 10일 이상이나 걸렸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개의 간단한 서신 심부름은 시간과 경비를 크게 줄이는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조정을 드나들며 주인의 심부름을 충실하게 해오던 이 개는 집으로 돌아오던 어느날 전주 부근의 강변 다리밑에서 새끼 9마리를 낳고 한 마리씩 집으로 물어 나르다가 9번째 마지막 새끼를 물고오다 그만 지쳐 길에서 쓰러져 죽고 말았다. 양촌은 애견이 새끼를 낳을 때가 닥친 것도 모르고 심부름을 보냈다가 죽게 되자 개의 모양을 한 석상을 세우고 충견의 죽음을 슬퍼하고 그 넋을 위로했다는 것이다. 이 석상은 양촌공이 죽은 뒤 후손들이 그의 정려 앞에 세웠다. 이 땅의 소유주가 여러번 바뀌는 가운데 관리를 제대로 안되어 정려의 지붕이 썩어내리는 등 문제가 많아 결국 무너졌으나 나중에 석재로 지붕을 만들고 주변에 담을 쌓아 보존하고 있다.
    2018-06-13 | NO.157
  • 양림동 고난의 길
    광주시 남구 제중로 77 호남신학대2011년불편하게 놓은 65개의 디딤돌은 한국에서 선교하는 동안 아내와 자녀를 잃고 이곳에 묻힌 45명의 선교사들과 850여명의 호남지방 순교자들의 눈물, 아픔, 고통과 피 흘림을 느끼는 고난의 발걸음이다. 이 불편함이 우리의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디딤돌 하나하나마다 선교사와 순교자들의 이름을 새겨넣었다.
    2018-06-20 | NO.156
  • 양림동 호남순교자 추모공간
    광주시 남구 제중로 77 호남신학대2011년전남북 지역에서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1791년 전북 금산군 윤지중 권상연을 비롯하여 순교한 850여명의 명단을 새긴 추모공간이다.
    2018-06-20 | NO.155
  • 양파거사정공락교의혜불망비
    광주시 북구 금곡동 산 891937년양파거사정공락교의혜불망비(楊波居士鄭公洛敎義惠不忘碑)는 석곡면 금곡․충효․덕의리 소작인 일동 건립했다.
    2018-11-13 | NO.154
  • 어등산 한말호남의병 전적지
    광주시 광산구 어등대로 417 (서봉동)1997년 12월어등산은 광주를 비롯한 장성·나주·함평 등지를 잇는, 지리적으로 매우 편리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3-4개 군의 경계에 위치하기 때문에 관할구역이 애매한데다 주위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었기 때문에 일본군경의 추적을 따돌리고 주변지역의 관측에도 편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크고 작은 전투가 어등산과 그 주변지역에서 주로 벌어졌다는 점에서 그러한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어등산은 의병장 김준·조경환·김원범 등을 포함한 한말의병이 최소한 50여 명이 전사한 격전지라 할 수 있다. 어등산한말호남의병전적지 표지석은 어등산이 한말호남의병의 숭고한 희생의 터전이었기에 이를 기리기 위하여 1997년 12월 한말호남의병기념사업 광산구추진위원회 주관으로 세웠다.
    2018-11-11 | NO.153
  • 어린이헌장탑1(광주공원)
    광주시 남구 구동 16, 광주공원1959년광주공원 어린이 놀이터에 있는 어린이 헌장 탑이다. 원래는 1959년 5월 5일에 광주공원 중앙광장에 세워져 있었으나 1975년에 옮겨졌다.
    2018-06-20 | NO.152
  • 어린이헌장탑2(시립미술관)
     광주시 북구 하서로 52 중외공원 광주시립미술관 앞1981년이  어린이헌장탑은 1981년 6월 30일 국제로타리 357지구 재광로타리클럽 일동 이름으로 건립하였다.탑의 앞면 하단에는 어린이헌장의 이념인 "대한민국 어린이 헌장은 어린이날의 참뜻을 바탕으로 하여 모든 어린이가 차별없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니고, 나라의 앞날을 이어나갈 새사람으로 존중되며 바르고 아름답고 씩씩하게 자라도록 함을 길잡이로 삼는다"는 내용과 11개항의 선언문을 담았다.1. 어린이는 건전하게 태어나 따뜻한 가정에서 사랑 속에 자라야 한다.2. 어린이는 고른 영양을 취하고, 질병의 예방과 치료를 받으며, 맑고 깨끗한 환경에서 살아야 한다.3. 어린이는 좋은 교육시설에서 개인의 능력과 소질에 따라 교육을 받아야 한다.4. 어린이는 빛나는 우리 문화를 이어받아, 새롭게 창조하고 널리 펴나가는 힘을 길러야 한다.5. 어린이는 즐겁고 유익한 놀이와 오락을 위한 시설과 공간을 제공받아야 한다.6. 어린이는 해로운 사회 환경과 위험으로부터 먼저 보호되어야 한다.7. 어린이는 자연과 예술을 사랑하고 과학을 탐구하는 마음과 태도를 길러야 한다.8. 어린이는 해로운 사회 환경과 고학을 탐구하는 마음과 태도를 길러야 한다.9. 어린이는 학대를 받거나 버림을 당해서는 안 되고, 나쁜 일과 힘겨운 노동에 이용되지 말아야 한다.10. 몸이나 마음에 장애를 가진 어린이는 필요한 교육과 치료를 받아야 하고, 빗나간 어린이는 선도되어야 한다.11. 어린이는 우리의 내일이며 소망이다. 나라의 앞날을 짊어질 한국인으로, 인류의 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는 세계인으로 자라야 한다.글씨 : 경암 김상필, 완제 심순택설계 및 조각 : 고정수비석 뒷면 하단에는 이 탑을 세운 국제로타클럽의 건립취지문이 있다. 내용은 "우리 로타리 회원들은 각자 직업을 통하여 살기 좋은 지역사회 건설과 국제 친선 및 세계평화를 위해 봉사하고 있거니와 장차 이 나라 이 겨레의 앞날을 이어 나갈 어린이들의 소중함을 재인식하고 여기에 우리의 뜻을 모아 이 탑을 세워 어린이 헌장을 보다 성실히 실천할 것을 다집한다"고 했다.
    2018-06-06 | NO.151
  • 어비슨 동상(2011)
    남구 백서로 66-1(양림동)광주YMCA와 광주양림교회가 고든 어비슨(Gordon W. Avison 1891~1967) 부부의 희생적 발자취를 기려 광주 남구 양림교회 맞은편에 어비슨기념관을 짓고 동상을 세워, 2010년4월11일 준공식과 제막식을 가졌다.
    2018-06-20 | NO.150
  • 광주광역시
  • 한국학호남진흥원
  • 사이버광주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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