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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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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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상현
    일농(一聾) 최상현(崔相鉉, 1881~1945)은 광주 최부자로 알려진 최명구(1860~1924)의 장남이다. 일제강점기 때 언론에서는 최상현은 좋은 인물로, 때로는 악덕지주로 보도하기도 해 인물에 대한 평가는 전문 역사가들의 몫으로 남겨둔다.1924년 최명구가 세상을 떠나자 장남 최상현(1881~1945)이 1942년까지 광주 흥학관을 운영했다. 광주광역시 동구 광산동 100번지 일대. 일명 구시청 사거리에 있었다.광주 흥학관은 일제강점기 광주 청년학생들의 애국계몽 교육공간이자 독립운동 산실이었다고 전한다. 이곳은 최명구가 셋째 아들인 최종수(1894~1940)를 위해 내준 공간이었다. 당시 광주공립보통학교(현 광주서석초등학교)의 동창회장직을 맡고 있던 최종수는 이 공간을 광주독립단체의 본 거처이자 청년문화의 산실로 활용했다는 것이다.최명구는 1921년 자신의 회갑을 맞아 잔치를 대신해 그 비용으로 새 건물을 세웠다. 당시 동아일보에는 1921년 3월 26일 자 4면에 ‘진정한 사회사업자가 나타나다’라는 제목으로 흥학관 낙성식과 관련한 기사가 실렸다. 최명구는 이날 200여 평의 부지에 새 건물을 지어 광주민 300여 명을 초대해 낙성식을 거행했다. 1924년 최명구가 세상을 떠나자 장남 최상현(1881~1945)이 1942년까지 이곳을 운영했다.최상현은 일제 말, 흥학관의 건물과 부지를 광주시에 기부했고, 해방 전까지 광주식량배급조합 사무실로 사용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학관은 일부 고령자를 제외하곤 그 존재를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최상현은 독립운동을 돕고 빈민구제에 물심양면으로 힘쓴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인재양성에 힘썼던 그는 손창식을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보내주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양림동에 현(현 최승효 가옥)을 지어 독립운동가들을 숨겨주곤 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그러나 한편으론 (사)한말호남의병기념사업회 등 3개 단체는 2022년 12웡 12일 성명서를 발표하여 일제강점기 광주 3대 부자로 꼽힌 최상현은 친일 행적이 분명하게 기록되어있는 데다 광주 전남지역 농민들의 수탈에 앞장선 악덕 지주이다고 주장했다. 1915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 당시 동아일보와 시대일보, 조선총독부 관보 등 각종 자료와 기록에 따르면 최씨는 대일항쟁기 당시 광주군 석곡면과 광주군 양림리, 화순군 소작 농민들에게 소작료를 60~70%까지 부과해 광주 전남 농민들이 소작쟁의를 3회 이상 일으킨 악덕 지주로 기록돼 있다는 것이다.또한 최씨는 일제강점기 전남도의회 평의원을 지내는 등 친일에 앞장선 대가로 조선총독부로부터 표창패인 목배(木杯)와 훈장 다음의 포상인 감수 포장 등을 최소 5회 이상 받았다고 덧붙였다.이 같은 사실은 ‘석곡면 소작쟁의 악지주의 횡포행동, 소작회의 강경태도’(동아일보 1924년 5월 23일 3면) ‘능노조사 악덕지주 3인, 야욕만 채워 무리 착취’(시대일보 1925년 11월 3일 3면)’ 1943년 8월2일 발행된 조선총독부 관보 제4950호 등에 정확히 기록돼 있다고 밝혔다.이러한 기록에 따르면 최상현의 친일흔적은 있어 보인다. 최상현 가옥은 후손들의 여러가지 사정으로 최승효에게 매매되었다. 이른바 양림동 최승효 가옥은 현재 광주광역시 민속문화재 2호로 지정돼 있다. 현재 최상현의 가옥 중 최씨 일가의 소유로 남아있는 곳은 광주 남구 사동의 한옥이 유일하다. 사동 한옥은 1942년 최상현이 큰아들 최정숙을 위해 지은 집인데 현재 최정숙의 장녀 최순 여사가 거주하고 있다.그는 일본의 모욕적이고 계속되는 핍박에 한쪽 귀를 닫겠다는 뜻으로 호를 일농(一聾)이라 지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흥학관을 근거지로 한 광주 청년학생들의 민족계몽운동은 계속됐고, 이에 일본은 1944년 최상현의 둘째 아들 최정엽(1923~1994)을 학도병으로 끌고 가기도 했다는 것이다.*최상현의 둘째 최정엽의 가족사진2022년 12월 12일 수정
    2020-04-08 | NO.4
  • 최수화(崔洙華)
    최수화(崔洙華, 1885~1962)의 본관은 경주이며 자는 성관(聖觀), 호는 운파(雲坡)이다. 남구 대촌면 양과리에 거주했다.부 : 崔明鎭조 : 崔基龍증조 : 崔有煥외조 : 柳仲根처부1 : 李寅植송사 기우만에게 수학하였다.1916년 송사 선생 襄禮 때 喪次 司書로 참석하였다.1929년 羅燾圭 문인들의 契에 참여1935년 4월에 秉天祠의 일로 鳳山精舍에서 회합을 갖자는 통문을 내는 데 동참하였다.『운파유고雲坡遺稿』가 있다.
    2020-08-06 | NO.3
  • 최승모(崔勝模)
    최승모(崔勝模, 1868~1949)는 본관이 경주, 자는 성언, 호는 전은田隱이다.후석 오준선吳駿善의 문인이다.『전은사고田隱私稿』가 있다.
    2020-08-08 | NO.2
  • 최한일
    최한일(1846~1923)은 당시 이희성이 광주목사로 있을 때 광주성의 방어를 책임진 수성별장(守成別將)에 추대됐다고 한다. 그의 휘하에는 300명의 별동부대가 있었고 그는 이들을 지휘해 농민군과 전투를 벌여 여러 번 공을 세웠다고 한다. 훗날 고종임금이 그의 행적을 듣고 모시 한 필을 상으로 내렸다고 한다. 아울러 이런 포상의 연장선상에서 1900년에는 화순군수에 임명됐고 1902년에는 중추원 의관을 지냈다고도 한다. 이 전언의 일부에는 약간의 과장도 섞인 듯하다. 실제로 1890년대 후반까지 그는 광주관아의 하급관리로 일했고 1900년 이후 그가 받은 관직도 농민전쟁에서 세운 공적(?)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것 같기 때문이다. 여하튼 농민전쟁 당시 광주지역 보수층의 대응에 대해 약간의 단서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최한일의 행적에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18-06-27 | N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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