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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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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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진여 梁振汝
    양진여梁振汝(1862~1910) 의병장은 1862년 광주목 서양면 니동리, 현 중흥동 498-1번지에서 선비 양남중梁南中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제주이며, 자는 진여振汝, 호는 서암瑞菴이다. 장성군 불태산에 있는 정이암鄭李庵에서 수학했고 한말에 국운이 기울자 담양군 대전면 삼인산 뒷편에 풍정암風征庵을 세우고 많은 제자를 모아 글을 가르쳤다. 1904년 한일의정서가 강제 조인되자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고 부인 밀양 박순덕朴順德 여사와 함께 주막을 하면서 거병준비를 하였다. 가산을 정리하여 인근 고을 10여 곳에 주막을 차려 의병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자금을 마련했는데, 이 일은 서암의 부인 박씨가 맡았다. 1905년에는 맏아들 상기相基로 하여금 대한제국 진위대에 입대하도록 했다.1907년 정미7조약이 체결되고 구한국군이 강제 해산되었다. 양진여는 이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1907년 10월 30여 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의병부대를 조직, 광주 담양 창평 일대를 근거지로 의병활동을 시작하였다. 양진여 의병부대는 단독으로, 혹은 전해산 강판열 의병부대와 연합작전으로 일제 군경에 맞섰다. 장성 비치非峙 전투에서는 왜군 대군에게 포위되어 막심한 피해를 입었으나 담양 남면 전투에서는 왜장 요시다吉田를 죽였다.1908년 10월 23일에는 단독으로 담양에서 일본군 기병 2명을 기습 공격하고, 10월 26일에는 나까코지中小路 군조가 인솔하는 일본군 헌병과 순사로 편성된 이른바 폭도토벌대를 광주군 송정읍 신촌리에서 치열한 교전 끝에 물리치기도 하였다. 11월 25일, 담양 추월산에 머물고 있는 양진여 의병부대를 일본군 야마다山田 소위가 이끄는 토벌대가 공격해 왔다. 끝내 화력의 열세를 극복치 못하고 아군 15명이 전사하였다. 1909년 2월, 양진여는 새로 구성된 연합 의진에 총대장으로 추진되었지만 지병과 부상으로 원할한 활동은 하지 못하였다. 그해 3월 이후에는 양진여 의병부대는 사실상 와해된 채, 부대원 일부는 아들 양상기 의병부대에, 다른 일부는 새로운 독립부대로 활동하였다. 1909년 8월 일본군 2천2백여명의 대병력이 호남에 투입되어 남한 대토벌작전을 전개할 때 총상을 입고 장성군 갑향면 향정리에서 은둔하며 부상을 치료 중, 40여 명의 정찰대의 급습을 받고 체포되었다. 1909년 12월 13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내란죄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불복, 공소하였으나 대구공소원에서도 교수형을 받았다. 다시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지만 1910년 4월 13일 기각됨에 따라 교수형이 확정, 그해 5월 30일 대구형무소에서 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그는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오늘 행하지 못하면 내일 행할 것이요, 금년에 죽이지 못하면 내년에는 기필코 죽이기로 맹서하였다”고 선언했다. 서암은 순국 당시 다음의 말을 남겨 비석에 새겨져 있다. “내 한 목숨은 아깝지 않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는 것이 유감이다.”해방 후 1977년 건국훈장독립장을 추서 받았다. 그의 묘소는 아들 양상기와 함께 서구 매월동 산151-9 백마산 기슭에 모셔져 있다. 광주에는 그의 호를 딴 3.2㎞의 서암대로가 북구 동운고가에서 운암동, 신안동, 중흥동, 계림동을 지나 서방사거리까지 있다.
    2018-05-28 | NO.19
  • 엄소사(엄조이)
    광주에서 농민전쟁은 1894년 말과 이듬해 1월 사이에 집중적으로 전개됐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광주사람들이 항쟁에 참여했는데 그 가운데 눈길을 끄는 인물이 있다. 이 사람은 1894년 12월 광주지역의 농민전쟁이 관군의 무력진압에 의해 와해되어 갈 즈음 관아에 자수를 했는데 동학 관련 문헌에는 그를 엄소사(엄조이라고도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엄은 성이고 소사는 평민 아낙네에게 붙이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 문헌에 의하면 엄소사의 별명이 ‘여자 통령’이었다고 한다. 이는 엄소사가 광주지역 농민군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비록 엄소사에 대한 보다 상세한 기록은 찾을 길 없으나 같은 기록에는 엄소사가 다른 동학 관련자들과 함께 광주관아에 끌려와 곤장을 맞았다고 적고 있다. 전후 상황은 아직 베일에 싸인 면이 많으나 농민전쟁에서 여성의 역할이 확인된 몇 안되는 사례라는 점에 의미가 있어 보인다.
    2018-06-27 | NO.18
  • 오재영(吳在永, 1865~1911)
    전남 화순 동복출신 소재(小齋)  오재영(吳在永, 1865~1911), 동복오씨로 아버지 식시(息是) 오연수(吳然秀)로 어려서부터 글씨에 재주가 있었고 부모에 효도하며 집안에 두루 우애했다. 그는 집 뒤의 산기슭에 정자를 짓고 공자와 주자의 상을 그려 벽에 모셔 놓고 조석(朝夕)으로 참배했다. 갑오경장이후 의원(議員)의 제도를 채용함에 그는 동복의 대표로 촉망이 높았고 1897년 7월에 관찰사의 천거로 보성군수(寶城郡守)를 제수받아 풍속을 바로잡고 엄정하고 부정을 척결하여 명성이 높았다. 그는 1910년 한일합방을 당하자 실의와 분노로 그 직을 사직하고 죽지 못함을 한탄하다가 1919년 고종의 장례를 치르고 고향에서 운명했다. 그의 아들들과 문인들이 그의 시문을 수집하여 염재 송태회(念齋 宋泰會)의 서문을 받아 1920년에 소재집(小齋集)을 간행했다. 무등산(題瑞石奎峰庵, 遊瑞石上峰,  瑞石道中)
    2018-07-06 | NO.17
  • 오준선(吳駿善)
    후석後石 오준선(吳駿善)은 광주시 도덕동 출신으로 최익현崔益鉉의 문인이다.『後石遺稿』가 있다. 
    2020-08-08 | NO.16
  • 유영직(柳永稷)
    유영직(柳永稷, 1880~?)은 본관이 서산이며 자는 성칙(聖則)이다. 광주 동각에 살았다.1929년 羅燾圭 문인들의 契에 참여하였다.1935년 4월에 秉天祠의 일로 鳳山精舍에서 吳東洙 등 회합을 갖자는 통문을 내는 데 동참하였다.
    2020-08-05 | NO.15
  • 윤태한(尹泰翰)
    남구 대지동 윤태한(尹泰翰. 1857~1932)은 본관이 남원이고  호는 한암(漢菴)이다. 1882년(고종 19) 25세에 동학의 교리에 심취하여 제2대 동학교주인 최시형(崔時亨)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동학에 입도하였다.32세에 동학접주가 되어 광산(光山)‧화순(和順)‧나주(羅州) 지역에서 포교 활동을 하였으며, 1894년(고종 31) 1월 수백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선봉으로 전투에 참여하였다.1895년(고종 32) 근대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과 우금치(牛禁峙)전투에서 동학군은 패퇴하였다.이후 을사조약, 고종의 퇴위, 군대해산 등에 울분을 느껴 반일운동과 의병 활동에 가담하였다.  동학접주로 김개남군에 참여한 뒤 살아돌아와 한말의병에 가담했다가 1907년 12월 체포되어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하였다. 그는 손발톱이 빠지고 오른팔이 불구가 되었으며, 동상으로 발이 썩어 가는 고초를 겪으며 2년간 옥고를 치렀다.고문 후유증으로 성불구가 되는 등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당하였지만 그는 종교 집회와 교육활동을 계속하여 사람들에게 항일의식과 애국심을 고취시켰다.1932년 사망한 뒤, 계룡산(鷄龍山) 천도교 본당에 제향(祭享) 되었다.
    2020-03-06 | NO.14
  • 이계익(李啓翼)
    이계익(李啓翼, 1878~?)의 본관은 함평이며 자는 경직(敬稷), 호는 오촌(梧村)이다. 광주 누문리에 살았다. 부 : 李龍憲조 : 李敏炯증조 : 李萬燁외조 : 閔三顯송사 기우만에게 수학하였다.1916년 송사 선생 襄禮 때 通贊으로 참석하였다.1924년 담대헌의 중건시 750냥을 성금으로 내었다.1935년 4월에 秉天祠의 일로 鳳山精舍에서 회합을 갖자는 吳東洙 등 通文을 내는 데 동참하였다
    2020-08-05 | NO.13
  • 이호헌
    초은(樵隱) 이호헌(李顥獻)(1858~1919)문집으로 《초은유고(樵隱遺稿)》(1929)가 있다.李顥獻(1858~1919)이 편찬했고 현와弦窩 고광선高光善이 병환 중에 서문을 쓰고, 하한下澣 김기상金基尙이 발문을 썼다.
    2020-04-06 | NO.12
  • 이희용
    쌍석(雙石) 이희용(李熙容, 1853∼1931)의 자는 國瑞, 본관은 全義로, 1853년 1월 27일 광주 흑석동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행동거지가 단정했으며, 독실하게 배웠다. 1874년 약관에 장성의 노사 기정진 문하에 들어가, 1875년 莘塢 金祿休와 사귐을 맺고 노사선생 문하에서 동문수학했다.1879년면암 최익현을 만났다. 1879년 12월에 노사선생이 별세한 후로는 老先生을 섬기는 마음으로 송사 기우만을 모셨다. 1884년 어머니 상을 당했으며, 1891년 式年試 進士에 급제했다. 1896년 송사 기우만이 격문을 각 읍에 띄워 의병을 모집할 때 시종 같이 일하다가 해산의 왕명을 받고 통곡하고 귀향하여 자연에 묻혀 낚시로 소일했다. 1898년 경술국치를 분통해 하면서 단발령이 내려지자 “부모가 주신 머리털을 훼손할 수 없다.”고 하면서 죽음을 불사하고 단발을 하지 않았다. 그의 10대조 石灘 李愼儀를 위해 遺愛祠 옛터에 藏閣을 건립했다. 또한 나라를 일제에 빼앗기자 城市의 티끌에 발을 들어놓을 수 없다고 하면서 정원 앞에 雙石亭을 세우고 花鳥雲月에 마음을 붙였다. 이 雙石亭에서 弦窩 高光善․石陰 朴魯述․後石 吳駿善․植齋 奇宰․普山 奇宇承 등의 일대 명사들과 道義之交를 맺었다. 스스로 실천궁행의 학문에 힘쓰다 79세의 일기로 1931년 6월 30일에 타계했다. 부인 長興高氏 사이에서 敎一과 敎翼 2남과 2녀를 두었다. 
    2020-04-08 | NO.11
  • 이희용(李熙容)
    이희용(李熙容, 1853~1931)의 본관은 전의이며 자는 국서(國瑞), 호는 쌍석(雙石) 이다. 광주 하남면 장자동에 살았다.부 : 李淙植조 : 李達鉉증조 : 李志嶷외조 : 奇師賢처부1 : 高濟喆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다.1889년에 眉巖 柳希春을 기리는 모임에 참여하였다.1916년 송사 선생 襄禮 때 참석하였다.1924년 담대헌의 중건시 20냥을 성금으로 내었다.1927년 8월에 吳駿善 柳昌秀 등과 함께 蘆沙 문도들에게 高山祠에 함께 배향할 제자들의 위패를 정하자는 내용의 통문을 보냈다.『雙石遺稿』가 있다.
    2020-08-05 | NO.10
  • 장재성
    장재성(張載性, 1908-1950)은 1929년 광주학생독립 운동의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다.  1908년 광주군 광주면 금계리에서 광주면의 회계공무원이었던 아버지 장원용과 어머니 최예언 사이에서 1남 1녀중 첫째로 태어났다. 그렇게 어렵지 않은 가정형편으로 광주서석보통학교를 졸업한후 장재성은 광주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한다. *장재성, 왕재일 등 광주고보생 등이 1926년 11월에 조직했던 학생비밀모임 ‘성진회’ 회원들. 원안이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 장재성 선생.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 제공광주지역에서는 당시의 학생들의 비밀 지하조직으로 1926년 11월 3일 성진회(醒進會)가 광주고등보통학교 생도와 광주농업학교 생도 15명으로 조직되었다. 이 성진회는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이던 장재성, 왕재일과 광주농업학교 학생이던 박인생 등이 중심이되어 조직되었다. 그 배후에는 제3차 조선공산당의 전남지부 위원장인 강석봉과 청년학생부 책임위원인 지용수가 있었다. 성진회의 조직목적은 "궁극적으로는 조선민족의 독립과 공산주의 사회의 실현을 위해 우선 공산주의 이론을 연구하는 것" 이었다. 성진회는 총무에 왕재일, 서기에 박인생, 회계에 장재성을 결정하고 매월 2차례씩 만나 사회주의를 연구하였다. 회원으로는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과 광주농업학교 학생을 비롯한 15명이었다. 1927년 3월, 광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장재성은 일본 도쿄에 있는 주오 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도쿄에서 그는 조선인 유학생 연구모임중 하나인 신흥과학연구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신흥과학연구회는 1926년 11월 결성되어 기관지 <신흥과학>을 발행하고 있었으며, 1928년-29년 당시 학생운동에 관한 이론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보여주었다. 1929년 6월 중순 장재성은 일본에서 귀국했다. 그는 당시 광주지역내 각 학교에 개별적으로 조직되어 있던 사회과학연구의 독서회원을 두루 만나 독서회 중앙부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장재성은 책입비서로서 회를 통솔하였다. 1929년 11월 3일 조선인학생들과 일본인학생들 사이에 광주역驛전前에서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제1차 시위가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났다. 이 시위로 조선인학생 수십명이 체포되었는데 장재성은 이에 대한 조직적, 계획적 대응을 모색했다. 1929년 11월 12일 광주지역 제2차 시위가 발생한 이후 장재성은 260여명의 학생들과 함께 구속되었다. 장재성은 광주지방법원에서 7년형을, 대구 복심覆審(항소심)법원에서 4년형을 선고받았는데, 이는 학생운동 관련자중 가장 많은 형량이다. 광주여자고보에서도 장재성의 누이동생인 장매성張梅性이 중심이 되어 11월초에 소녀회라는 독서회가 조직되었다. 1945년 8월 30일 광주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될 당시 장재성은 조직부장을 맡았다. 1945년 11월 3일 광주서중 교정에서 해방후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첫 기념행사가 열렸다. 여기서 장재성이 사자후를 토했다. 1945년 12월 2일 광주 청년동맹 대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 후 청년동맹은 민주청년연맹으로 개편되었다. 그는 1946년 2월 15일 서울에서 열린 <전국 민주주의 민족전선>(약칭 민전民戰) 결성대회에 전남대표 14중 한명으로 참가하였다. 장재성은 민전 준비위원회에서 총무부 소속으로 활동하지만 웬일인지 민전의 부서 책임자 선발에서는 배제되었다. 1948년 남한의 단독선거가 진행되면서 단독정권을 반대했던 좌익들 중 일부는 북한으로 건너가 4.3문제를 성토하고 북한정권 수립을 위한 해주海州 남조선 인민대표자회의를 진행한다. 이때 장재성도 이 모임에 참석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데 장재성의 명단은 당시 대의원명단에 보이지 않고 있다. 장재성은 1949년 7월 일본을 경유하여 귀국했으나 체포되어 7년형의 선고를 받고 광주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6.25 남침이 일어나자 경찰은 후퇴하면서 형무소내의 좌익사범들을 처형했다. 이때 장재성도 무등산으로 끌여가 처형당하면서 43세의 삶을 마감했다. 장재성은 1962년 독립유공자 표창 대상자 208명에 포함돼 있었지만, ‘해방 후 조선공산당에 가입한 사실이 확인됐다’며 취소됐다.
    2020-03-24 | NO.9
  • 정대현
    정대현(鄭大鉉,  1873~1946)의 자는 익삼(益三), 호는 석계(石溪), 본관은 하동(河東) 정씨다. 아버지는 정지초(鄭志楚), 어머니는 강화최씨(江華崔氏) 사이에 광주광역시 오치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천성이 온후하고 행동거지가 단정하였으며,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였다. 어려서부터 영민하여 날마다 책을 읽었으며, 일제가 강점기에 시행한 단발령과 변복에 따르지 않고 죽을 때 까지 상투를 틀고 한복을 입었다. 그는 시문에 능해 용진정사 속수계(次湧珍精舍續修稧韻), 표충사미국계(褒忠祠薇菊契), 초은정시계(樵隱亭詩會),  삼익계(三益契)등을 참여하고 많은 시문을 남겼으며 서문은 외당(畏堂) 고한주(高漢柱 1871∼1959), 발문은 정해영(鄭海英)이 쓴 《석계시고(石溪가 1975년 간행되었다.장성 삼산재(謹次三山亭原韻, 自三山齋至長洞路中作, 三山齋與諸益共話)에서 시를 남겼다. 삼산재는 송사 기우만이 학문을 강구하며 후학인을 가르쳤던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읊은 상산사호가(商山四皓歌)의 시(商山四皓歌上三山齋松沙奇先生)를 남겼다. 기우만을 상산(商山)의 은자라고 칭한 것이다.이밖에 광주 오준선의 용진정사(謹次吳後石丈湧珍精舍原韻, 謹次鳳山精舍原韻, 謹次湧珍精舍原韻),  고광선의 엄이재(謹次高弦窩丈掩耳齋韻), 표충사(褒忠祠薇菊契韻),  이계익의 회농정( 六月晦農亭與李梧村(啓翼)叙話), 쌍석정(謹次雙石亭原韻),   무등산(登瑞石), 장연사(長淵祠奉安文忠宣公影幀), 정양재(次梁守默靜養齋韻), 요요재(次蓼蓼齋韻), 박노선의 오헌(次朴魯宣梧軒韻), 강윤원의 농은정(次姜允源農隱亭韻), 송암(次松菴韻), 송광사(松廣寺),  이상호 초은정(次李相皓樵隱亭韻), 경현사(景賢祠韻) 등에서 시문을 남겼다.
    2020-04-08 | NO.8
  • 정락교
    온양정씨(溫陽鄭氏)로 참봉(參奉) 벼슬을 역임한 양파(楊波) 정락교(鄭洛敎, 1863~1938)는  광주 양림동에 살았다. 정락교는 구한말에 이 지역의 소문난 부자로 많은 공덕을 쌓았으며, 시문(詩文)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정락교는 1920년 3월 30일 전라남도 광주군 송정면 송정리에 세운 湖南物産(株)의 이사로 있었으며, 광주부 양림정 157에 1934년 11월 8일에 세운 楊波農場(合名)의 정상호(鄭尙好)와 공동대표였다.1905년(고종 42년 3월 2일) 慶基殿參奉으로 임명됐으나 10여일 뒤인 3월 13일에 의원면직되었다.朝鮮總督府官報 1916년 9월 5일에 따르면 9월 1일자로 조선총독부 산하 全羅南道地方土地調査委員會 臨時委員에 任命됐다.1919년(大正8年 4月 30日) 광주 참사(參事)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주소는 光州郡 孝泉面 楊林里이다. 1919년 9월 8일 <朝鮮總督府官報> 2137에 10명으로 무역업을 하는 湖南物産(株)을 설립했다.朝鮮總督府官報 1920년 2월 16일에 따르면 2월 9일자로 鄭洛敎 외 23명이 자본금 150萬圓으로 全羅南道 光州에 株式會社 湖南銀行을 설립하고 木浦에 支店을 두었다고 하여 지역 은행 설립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1926년 4월 28일자 동아일보에는 광주 鄭洛敎씨의 호의로 光州靑年會館을 建築寄贈했고, 1938년 5월 4일자 동아일보에 유지(遺志)에 따라 광주 22개 학교에 1600원을 희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2019-08-01 | NO.7
  • 지응현
    지응현池應鉉(1869~1959)은 농업만이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방법이라고 믿고 농업학교 건립, 농업 투자 등 근대 전라도 농업의 좌표를 세운 인물이다.본관은 충주이며 자는 형숙亨淑, 호는 붕남鵬南이다. 기우만奇宇萬(1846~1916)의 항일의거 때 군량을 조달하였고, 병천사를 세웠다. 1934년 응세농도학원을 설립하여 교육에 노력을 기울였다. 응세농민독본應世農民讀本을 간행하였다. 1950년에는 원효사를 중창하였고 호남 각지에 시혜비가 세워졌다.문집인 『붕남실기』는 3권 1책의 석인본으로 1939년 간행했다. 서문은 민병승, 고광렬, 정인찬, 발문은 양효묵이 지었다. 권1은 충주지씨 세계 소개와 지응현이 개인 및 단체와 주고받은 시, 서, 문이다. 권2는 일본 강점기 지응현이 설립한 금석농장, 응세농도학원 설립과 운영에 관한 내용이다. 권3은 유림들이 지응현에 대한 소회와 공덕을 기리는 각 지역 시혜비 내용이다.당시 대부분의 전라도 지주들은 농업 이외의 사업에 투자하여 돈을 벌어들일 궁리만 하고 잇을 때 그는 과감히 농업에 투자했다. 응세농도학교와 응세수의학교를 설립했으며 아들 지창선을 일본으로 유학본어 신문물과 새로운 사상을 접하게 했다. 아들 창선은 덴마크 축산업만이 농업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면서 아버지에게 청년 농군 양성을 제안했다.흔히 옛 사람들이 ‘지참봉’으로 기억하는 지응현은 일제강점기에 광주에서 손꼽히는 땅 부자였다. 전성기에 그가 소유한 땅은 150만평에 달했다고 한다. 당시 광주 시내인 금남로 4~5가도 상당수 그의 땅이었는데 이 때문에 광주를 드나드는 사람치고 그의 땅을 밟지 않고 오가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그의 소유지는 금남로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병천사 앞에는 현재 13개에 달하는 지응현의 시혜비(송덕비)가 늘어서 있다. 지응현의 문집인 『붕남실기』에는 그보다 더 많은 수의 시혜비를 소개하고 있다. 이들 시혜비는 그의 땅을 붙여먹고 살던 소작인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그의 은혜를 기리는 뜻에서 세운 것인데 대개 비문에는 소작인들의 거주지가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지응현이 소유했던 토지의 분포상황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그에 따르면 지응현의 소작지는 당시 광주군 지한면.서방면.석곡면.효천면.우치면.극락면.대촌면.누문동.지금의 첨단지구, 장성군 진원면, 담양군 대전면, 곡성군 옥과, 전라북도 순창군 등이 망라되어 있다. 물론 이들 비석은 원래는 해당지역의 마을 입구나 도로변에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현재처럼 비석들이 병천사 입구에 모인 것은 해방 후의 일이라고 한다.지응현은 단순한 대지주가 아니었다. 1927년 지응현은 금남로5가에 있던 숭명학교에 자기 소유의 땅 150평을 운동장으로 기부한 일이 있었다. 숭명학교는 당시 미국인 선교사 스와인하트Martin L. swinehart(1874~1957, 서로득)가 세운 사립학교였는데 이 선교사는 서구 내방동에 서흥학교를 비롯해 광주시내 곳곳에 여러 사립학교를 세워 운영하고 있었다. 그 대부분의 학교들이 경영난으로 어려움을 겪던 차에 때마침 지응현이 나서 땅을 기부했다.지응현이 개신교 신자였다는 정황은 없는 것으로 보아 그의 기부는 교육에 대한 평소의 관심이 작용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관심은 1934년 응세농도학원설립으로 이어졌다. 이 학교는 피폐한 농촌상황을 타개할 개혁운동의 일환으로 건립됐다. 기숙생활을 전제로 한 수업기간은 단 1년이었지만 군대식 교육 탓에 수강생들은 1년이 몇 년처럼 느껴질 정도로 혹독한 교육과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학교는 예전 가톨릭대학교가 있던 자리에 있었다.그런데 태평양전쟁 말기에 그 부지가 일제에 의해 수용되면서 학교는 사라졌다. 그럼에도 지응현은 조선대학교 근처의 현 살레시오여고 자리에 응세축산고급중학교와 광주수의고등학교 광주중학중학교 등을 열어 그 명맥을 이어나가고자 했다.응세축산학교는 1946년에 개교했고, 광주수의고와 중앙중학교는 1950년에 각각 문을 열었다. 응세축산고는 1951년에, 광주수의고와 중앙중학교는 1958년에 다시 폐교되고 말았다. 참고로 이들 세 학교의 학적부는 지금도 살레시오여고에서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이런 인연으로 살레시오여고 자체가 이들 세 학교의 후신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병천사의 건립자이자 응세농도학원 등을 설립한 지응현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는 원래 담양군 대전면 중옥리 사람이었다. 그가 태어났을 즈음 담양군 대전면은 아직 광주 땅이었다. 대전면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광주에서 분할되어 지금처럼 담양군 관할로 바뀌었다.지응현이 처음부터 부호였던 것 같지는 않다. 그가 담양에 살 때만해도 일찍 부모를 여위고 가진 것이라고는 땅 두마지기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런 지응현이 어떻게 굴지의 부자가 된 과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일부에서는 10대 때부터 포목상과 미곡상 등 장사로 재산을 모았다고 하며 일부에서는 조상의 묘 자리가 좋아 그 복으로 자수성가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어느 것도 현재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지응현의 아들 가운데는 일제강점기 때 육상선수로 유명했던 지계선이 있다. 지계선은 이른바 씨 없는 수박의 개발자로 알려진 우장춘 박사의 제자이기도 했다. 지응현은 광주를 대표하는 서양화가였던 오지호 화백(작고)의 장인이다.
    2018-05-28 | NO.6
  • 최기룡(崔基龍, 1843∼1913)
    죽파(竹坡) 최기룡(崔基龍 1843~1913)의 자는 찬서(贊瑞).  본관은 경주(慶州). 최유환(崔有煥)의 아들로 광주 지산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선천적으로 성실하고 친절하며 인정이 두텁고 의지와 취향이 훌륭하였다. 8세에 글을 쉽게 배우고 일취월장하여 주자(朱子)의 글을 한 번 읽으면 이를 깨우치고 수용하였다. 문장과 행실이 올바라서 당시 향당(鄕黨)의 사표가 되었다.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1884년(고종 21) 청나라에서 만주의 조선족에 대한 편적위민과 치발역복 정책으로 조상이 물려 준 백의(白衣) 흑관(黑冠)을 버리고, 호복(胡服)을 갈아입고 부모가 준 머리카락을 깎아버리도록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삼강이 무너짐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며 조상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하였다. 1888년(고종 25) 호남지방에 큰 흉년이 들어 굶주림을 면하기 어려운데 광주가 더욱 심하여 그는 수령 및 향유들과 구휼(救恤)하기를 도모하여 광양(光陽) 세미(稅米)를 옮겨 관내로 가져오는데 힘썼다.1894년(고종31) 동학란을 당하여 백성에게 엄중히 경계하며 고을의 모든 사람이 고금에 없는 기이한 일로 하늘이 반드시 그대로 두지 않을 것이라면서. 우리들은 신중히 대처할 것이며 이는 본주 목사 이희성과 나주초토사 민종열이 비도들로 하여금 느끼고 깨달음이 있기를 도모할 것이니 동요치 말라 하였다.  1896년(건양 1)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날마다 성묘를 하며 피눈물을 흘리니 땅위의 풀이 말라 죽었다. 1899년(광무 3) 부친의 탈상을 마치고 어머니 상을 당하여 예를 갖추어 장사지내고 하늘을 보고 탄식했다. 이제 부모가 계시지 않으니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재산을 이루고자 학문을 닦기 위하여 멀리 면암 최익현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송사 기우만과 교류하였다. 그 후 면암 선생이 광주에 내려와 그의 효행과 학문에 대해서 그는 세상이 변하여도 변치 않을 것이다 하였다. 1902년(광무 6) 세상의 변함이 예측을 불가능함을 보고, 1910년에 나라가 망하자 백운 산중에 들어가 후손을 가르치고 농사짓는 과업을 버리고, 시詩ㆍ사詞로 서로 주고받으며 방황의 세월을 보냈다.1928년에는 병천사에 세워진 제하상모자비에 대한 글을 쓰기도 했다. 그 글은 지응현(1869~1959)의 《붕남실기》에 실려 있다.증심사(與鄕中諸益登瑞石宿澄心寺), 무등산(登瑞石絶頂) 등의 시가 있다. 그가 정자에서 남긴 시로는 함벽루( 陪勉菴先生上涵碧樓 陜川), 관란정( 觀瀾亭講會), 광주 영사정(敬次永思亭韻), 양과정(與良苽亭會所, 良苽亭次板上韻), 광주 불환정(不換亭次板上韻), 운호정(雲湖亭次板上韻), 죽파정사(竹坡精舍自吟),  증심사(與鄕中諸益登瑞石宿澄心寺), 무등산(登瑞石絶頂),  심진정(尋眞亭次板上韻), 해솔당(次鄭公梅松堂韻), 삼노당(次朴友(在鉉)三老堂韻), 농은정(次孝公農隱亭韻),석호재(次李公石湖齋韻), 해송당(次鄭公梅松堂韻), 이로당(次朴友(在鉉)三老堂韻), 삼파재(次文友(轍載)三坡齋韻), 화순 만연사(諸萬淵寺壁上), 광주 호가정( 浩歌亭和柳魯岡 是漢),  광주 양과정(與良苽亭會所), 죽파정사(竹坡精舍次韻, 竹坡精舍記) 등에서 시문을 남겼다.후손인 최병채崔炳彩가 1967년에 흩어진 유고를 모아 《죽파유고竹坡遺稿》 4권 1책을 석인본으로 간행했다.
    2018-07-06 | NO.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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