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64
게시물 검색 폼
  • 박하형(朴夏炯)
    박하형(朴夏炯, 1891~1971)의 자는 춘엽(春燁)이며 호는 송애(松厓)이다. 광주 서창면 사동리 출생이다. 후석 오준선의 문인으로 『松涯遺稿』 가 있다.
    2020-08-08 | NO.34
  • 박현동(朴玄東)
    박현동(朴玄東, 1886~1962)은 광산구 장수길 33(독립운동 당시 주소 全南 光州郡 瓦谷面 相村)번지의 강학공간인 율수재(聿修齋) 뒤에 있는 살림채에서 율수재 박해량(朴海量, 1850~1886)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06년 4월 부친의 스승인 최익현(崔益鉉)이 의병을 일으키자 적극 참여했으며, 그 이후에도 의병으로 활동하였다. 그후 체포되어 1910년 3월 2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유형(流刑) 5년형을 언도받았다. 그는 병오, 정미, 무신 호남창의기군대장을 맡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20-03-09 | NO.33
  • 범희대(范熙大)
    지은(芝隱) 범희대(范熙大)
    2020-08-10 | NO.32
  • 송용만(宋用萬)
    송용만(宋用萬, 1888~1962)은 광산군 본량면 매동리에사 살았고, 자는 현중(賢仲), 호는 매산(梅山)이다. 본관은 여산이다. 아버지는 경(坰)이고, 어머니는 진주 강씨(姜氏) 익상(翊尙)의 딸이다. 난와(難窩) 오계수(吳繼洙 1843∼1915)와 후석 오준선吳駿善(1851~1931)의 문인이다. 송용만은 용진정사(聳珍精舍)에서 수학하였다. 이때 두 선생으로부터 남주가사(南州佳士)란 칭호를 받게 되었다. 이기(理氣)의 설에 침잠하였으며  스승의 정신을 이어 위정척사운동과 항일민족운동의 사상적 연원의 호서학파(湖西學派) 학맥을 잇고 그 일원으로 참여했다.부수재시회(芙水齋詩會) 등을 참여하고 정자에서는 여산 영호정(礪山永護齋重建韻), 나주 모현정(池洞慕賢亭韻), 쌍계정(登金安﨎溪亭, 登﨎溪亭), 장성 하담정(題荷潭亭長城臥夻), 광주 불환정(次不換亭煮伏韻) 등에서 시를 남겼다.문집 『매산시고 (梅山詩稿)』는 2권 1책으로 1992년에 손자 송병대(宋炳大)가 발행하였다.
    2020-08-08 | NO.31
  • 송재학(宋在鶴)
    송재학(宋在鶴)은 광주 거진리 출신으로 후석 오준선吳駿善의 문인이다.  『三岡集』이 있다.
    2020-08-08 | NO.30
  • 송정묵(宋廷默)
    송정묵(1855~1927)의 본관은 홍주, 초명은 황묵(晃黙), 자는 명오(鳴吾)이며 호는 후해(後海)이다. 광주시 본촌면 치촌리, 지금의 북구 건국동(옛 오룡동)에 살았다.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다. 1889년에 眉巖 柳希春을 기리는 모임에 참여하였다. 1924년 담대헌의 중건시 15냥을 성금으로 내었다.강직한 성품과 고결한 지기로 가정교훈을 받고 사부를 찾아 학문에 전력을 다하여 학식이 높았다. 무오년의 대상(大喪)을 당한 뒤에 국가의 원수를 갚지 못하자 끝내 복을 벗지 않고 않고 슬퍼하였다. 『後海遺稿』는 석판본으로 5권 2책이다. 발문은 송남옥宋男鈺이 썼다.현감 宋駒의 후손으로 증조부는 송수호(宋守浩)이며, 조부는 송찬현(宋贊賢)이고, 부친은 송내규(宋來奎)이다. 외조부는 진양정씨(晉陽鄭氏) 정기찬(鄭杞燦)이고, 처부는 순천박씨(順天朴氏) 박해룡(朴海龍)이다(.
    2020-03-06 | NO.29
  • 심남일
    심남일(沈南一, 1871~1910)의 본명은 심수택(沈守澤), 자가 남일(南一), 호는 덕홍(德弘)이다. 1907년부터 1909년까지 전라남도 일대에서 의병장으로 항일 투쟁을 활발하게 전개하였고, 1910년 교수형을 당해 순국하였다.심남일은 1871년 2월 10일[음력] 전남 함평군(咸平郡) 월야면(月也面) 정산리 새터에서 출생하였다. 1907년 11월 1일 함평군 신광면(新光面)에서 의병을 모집·훈련하였꼬 기삼연 의병장이 주도한 ‘호남창의회맹소’의 일원이었다.심남일 의병장이 의병을 일으킬 때 작성한 시, ‘거의유감’(擧義有感)은 다음과 같다.乘風南渡馬如飛 (승풍남도마여비) 바람을 타고 남쪽으로 가니 말도 나는 듯 하구나.林下書生振鐵衣 (임하서생진철의) 초야에 글 읽는 이가 갑옷을 떨쳐입고蠻夷若末掃平盡(만이약미소평진) 내 만약 왜놈들을 쓸어버리지 못하면一死沙場誓不歸(일사사장서불귀) 모래밭에 죽어서 돌아오지 않으리왜 모래밭에 죽으리라고 맹서했을까? 1908년 1월 기삼연 의병장이 총살당한 곳이 광주천의 모래밭이었다.1909년 7월 30일 영암 사촌(沙村) 전투에서 일본군 평금산 대장 등 적 10여 명을 죽이는 등 전라남도 곳곳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며 활발한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1909년 고종 황제의 의병 해산에 대한 조칙이 내려지자, 심남일은 1909년 7월 21일 영암군 금마면(金磨面) 고인동(古引洞)에서 부대를 자진 해산하였다. 이후 능주로 잠행하여 이전 전투지였던 풍치의 바위굴 안에서 신병을 치료하다 1909년 10월 9일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심남일은 체포된 후에도 끝까지 일제에 굴하지 않고 그들의 불의를 질책하였으며, 1910년 7월 23일에 대구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고 39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심남일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 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1909년 7월 21일, 영암군 금마면 고인동에서 의병 부대를 자진 해산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秋風將卒泣相離 쓸쓸히 장수랑 군사들은 눈물로 이별 짓고古引山前馬去遲 고인산을 떠남에 말조차 더디구나一掃腥塵終有一 왜적을 없앨 날이 언젠가 있으리니草違三載死生期 지난 3년 맹서한 일 부디 잊지 마세
    2020-03-24 | NO.28
  • 심의종 沈宜鍾
    심의종沈宜鍾은 천성이 효순孝純하고 경학을 탐구하여 문행文行으로 세상에 알려지고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였던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1811∼1876)의 문인으로 『광주읍지』에 전하고 있다. 지응현池應鉉(1869~1959)의 붕남실기鵬南實記에 실린 29명 가운데 석하石下 심의종沈宜鍾의 글(정미, 1907)이 있다.이재홍과 함께 포목상으로 이름을 날린 심덕선은 충장로 4가에 남창상회南昌商會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심덕선은 광주 북동 출신으로 일찍이 행상부터 시작해 광주장, 송정장, 장성장을 돌며 어느 정도 자본이 모아지자 충장로 점포를 낸 것이다.그는 호남 일대에서 큰 판로를 가진 거상이 되었는데 1927년 1월에는 경영체제를 합명회사의 형태로 바꾸었다. 1936년부터는 광주 임동의 가네보방적鐘淵紡績 공장에서 생산했던 면직물의 총판매를 맡게 되어 남창상회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충장로4가에 도매부, 소매부의 넓은 점포와 창고는 물론 수기동에 있었던 3채의 대형창고에도 중국산과 일본산 비단과 옷감, 광목 등이 가득 쌓여 있었다.심덕선은 사회사업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 계유구락부癸酉俱樂部의 핵심멤버로 참여하여 민중계몽운동과 빈민구제사업에 앞장서기도 했다.
    2020-03-10 | NO.27
  • 안규면(安圭冕)
    안규면(安圭冕, 1880~1958))의 본관은 竹山이고 자는 자용(子用), 호는 삼곡(三谷) 이다.거주지역은 광주 서방면 봉곡리이다.송사 기우만에게 수학하였다. 916년 송사 선생 襄禮 때 喪次司書로 참석하였다.1924년 담대헌의 중건시 5냥을 성금으로 내었다.
    2020-08-04 | NO.26
  • 안규일(安圭鎰)
    안규일(安圭鎰, 1888~1965)의 본관은 竹山 자는 공익(公益), 호는 만성(晩惺)이다. 부 : 安正煥조 : 安瑛壽증조 : 安思行외조 : 尹佑鎭처부1 : 曺圭斗송사 기우만에게 수학하였다.1916년 송사 선생 襄禮 때 賓次司書로 참석하였다
    2020-08-04 | NO.25
  • 안병택(安秉宅)
    안병택(安秉宅, 1861~1936)의 본관은 竹山, 자는 처인(處仁) , 호는 부해(浮海)이다. 하남면 장자동에 거주했다. 《부해유고》가 있다.부 : 安達三조 : 安鍾秀증조 : 安弼蓮외조 : 坡州 尹처부1 : 金海 金송사 기우만에게 수학하였다.1916년 송사 선생 襄禮 때 執禮로 참석하였다.1924년 담대헌의 중건시 30냥을 성금으로 내었다.
    2020-08-05 | NO.24
  • 안정환(安正煥)
    안정환(安正煥, 1843~1909)의 본관은 죽산이고 자는 덕유(德有), 호는 명수(明水)이다.부 : 安瑛壽조 : 安思行증조 : 安碩魯외조 : 盧彦鉉처부1 : 尹佑鎭처부2 : 丁奇杓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다.
    2020-08-05 | NO.23
  • 안종기(安鍾基)
    안종기(安鍾基, 1881~1949)의 본관은 죽산이며 자는 중술(仲述), 호는 술재(述齋)이다.부 : 安圭容조 : 安國煥증조 : 安鳳壽외조 : 李相輝처부1 : 奇春衍송사 기우만에게 수학하였다.1916년 송사 선생 襄禮 때 贊引으로 참석하였다.1924년 담대헌의 중건시 50냥을 성금으로 내었다.1927년 8월에 吳駿善 柳昌秀 등과 함께 蘆沙 문도들에게 高山祠에 함께 배향할 제자들의 위패를 정하자는 내용의 통문을 보냈다.
    2020-08-05 | NO.22
  • 양상기
    양상기梁相基(1883~1910) 의병장은 1883년 광주군 서양면 니동(북구 중흥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제주이며, 호는 설죽雪竹이다. 의병장 양진여의 장남으로 어린 시절 풍암정에서 병서를 읽고, 무예를 닦았다. 20대 대한제국의 군인 진위대 병사 출신이었는데, 1907년 8월에 강제 해산되자 광주경찰서에서 순사로 근무했다. 1908년 4월 23일, 아버지가 의병장인 것이 알려져 순사직에서 면직되자 곧장 의병장인 아버지의 뜻을 따라 대일 항쟁의 길로 들어섰다. 1908년 5월에 독립적으로 거병하여 의병장으로 추대된 양상기 부대의 규모는 최대 80여 명이었고 주로 화승총으로 무장하였다. 이 부대의 편제는 도통장에 안판구安判九, 후군장에 이문거李文擧, 포군장에 안영숙安永淑, 도선봉장에 조사윤曺士允, 참모장에 유병기劉秉基 등이었다.양상기 의병부대는 구식군인이 참여한 평민부대로 김태원 의병장의 순국 뒤에는 그 부대원을 흡수 계승하였다. 양상기 의병부대는 ‘한국의 복구’를 주창하며, 군자금 모금, 밀고자 및 일진회원 처단, 일제 헌병분견소 습격 및 방화와 같은 활동을 펼쳤다. 1908년 11월에는 아버지 양진여 의병부대와 연합작전으로 2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광주수비대와 접전하여 크게 이겼으나, 이듬해인 1909년 4월 동복 서촌 전투에서 10여 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고, 그해 5월 담양 덕곡리 전투에서는 23명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이는 무기의 열세도 있었지만 밀정들의 밀고로 일제 토벌대에게 기습을 당한 때문이었다. 1909년 12월, 양상기 의병장은 남원 도통리에서 은거 중 일제 토벌대에게 체포되었다. 양상기 의병장이 취조과정에서 귀순할 의사가 없느냐는 물음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귀순할 뜻은 추호도 없으며 다만 죽음이 있을 뿐이다. 만일 내가 살아날 수 있다면 다시 의병을 일으켜 일제 침략자와 싸우겠다.”1910년 3월 29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내란 강도 방화 및 살인 죄목으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대구공소원에 공소하였다. 1910년 5월 17일 대구공소원은 다시 동일한 죄를 적용하여 교수형을 공소하였다. 1910년 8월 1일, 아버지 양진여 의병장이 순국한 지 두 달 뒤, 똑같은 대구감옥소에서 아들 양상기 의병장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그는 “살아서 영광 있고 죽어서 애달프니, 몸은 비록 죽었어도 명성이 남았도다”고 유언을 남겼다. 그때 양상기 의병장 나이는 28세였다.광복 후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그의 묘소는 부친인 양진여와 함께 서구 매월동 산151-9 백마산 기슭에 모셔져 있다. 그의 호를 딴 설죽로가 아버지 이름을 딴 서암대로에 위치한 신안1교에서 시작이 된다. 임동과 신안동, 오치동, 용봉동, 매곡동, 일곡동에 이르는 6.6㎞에 달한다.
    2018-05-28 | NO.21
  • 양일묵(梁鎰默)
    양일묵(梁鎰默, 1876~1957)의 본관은 제주이고 자는 중오(重吾), 호는 회산(晦山)이다.광산구 임곡면 박호리에 거주하였다.부 : 梁相萬조 : 梁紀永증조 : 梁錫龜외조 : 全州 李致求처부1 : 全州 李奎淳처부2 : 全州 李周寬1924년 담대헌의 중건시 5냥을 성금으로 내었다.1929년 羅燾圭 문인들의 契에 참여하였다.
    2020-08-05 | NO.20
  • 광주광역시
  • 한국학호남진흥원
  • 사이버광주읍성
  • 광주서구청
  • 광주동구청
  • 광주남구청
  • 광주북구청
  • 광주광산구청
  • 전남대학교
  • 조선대학교
  • 호남대학교
  • 광주대학교
  • 광주여자대학교
  • 남부대학교
  • 송원대학교
  • 동신대학교
  • 문화체육관광부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 국립아시아문화전당
  • 광주문화예술회관
  • 광주비엔날레
  • 광주시립미술관
  • 광주문화재단
  • 광주국립박물관
  • 광주시립민속박물관
  • 국민권익위원회
  • 국세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