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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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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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동준(奇東準)
    기동준(1869~1918)의 본관은 행주이며 자는 평중(平仲), 호는 춘담(春潭)으로 진사를 지냈다.부 : 奇昌鉉조 : 奇文國증조 : 奇象德외조 : 海州 崔煥潤처부1 : 長興 高濟斗1860년 11월 17일 奇大升의 후손인 昌鉉의 아들로 光州 廣谷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총명하였으나 잦은 질병에 시달렸다. 평소 어버이 섬기기를 극진히 했으며, 항상 『小學』의 가르침으로 몸을 검속했다. 18세에 奇正鎭을 배알한 뒤 인고의 노력으로 제자백가서를 탐독했다. 선조인 文憲公 奇進이 己卯士禍로 인해 光州의 古龍에 내려와 卜居했는데, 1877년 기동준은 이곳으로 옮겨와 살면서 講學을 하면서 선조의 業을 이었다. 1880년 勉庵 崔益鉉을 만났으며, 1888년 한 달에 한 차례 講會를 열자, 사방의 문사들이 모여들었다. 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고 1889년에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을 기리는 모임에 참여하였다. 1894년 司馬試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뜻이 없음을 밝히고 다시 기정진에게 귀의하여 松沙와 함께 학문에 전념했다. 후진 양성에 전념하여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다. 1895년 을미사변이 발발하자 두문불출했으며, 1896년에는 송사선생이 의병을 일으킨다는 것을 듣고 鰲城 李恒福에게 가서 계책을 진술했다. 1901년 9월 11일에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에게 편지를 보냈고, 1903년에는 문헌공의 문집을 새로이 간행했고, 기봉선생의 續集 2권과 別集, 附錄 1권을 1907년 간행했다. 1910년에는 나라의 변고에 통한하면서 『春秋』한 권을 들고서 산으로 들어가자 수많은 사람이 따랐다. 항상 諸葛亮의「出師表」, 司馬遷의 「俠客傳」과 杜甫의 「古栢行」 등을 읽으면서도 『대학』에 심취했다. 1913년 도산서원을 방문했고 이해 이황의 『陶山及門錄』을 찬집하면서 후진 양성에 매진했다.1916년 기우만 선생 장례를 지낼 때[襄禮] 참석하였다. 1918년 9월 29일 59세로 세상을 떠났다.고봉 기대승의 <고봉속집 논사록 발高峯續集論思錄跋>을 쓴 조찬한趙纉韓의 글에 따르면 "사칠이기 속편(四七理氣續篇)은 청주서원(淸州書院)에서 별도로 간행하였으나 중간에 유실되었는데, 정조 병오년(1786)에 관찰사인 조공 준(趙公竣)이 의연금을 내어서 거듭 중간한 것이었다. 속집(續集) 2권과 별집(別集) 부록(附錄) 1권은 족조(族祖)이신 춘담공(春潭公) 기동준(奇東準)이 나의 조고(祖考)와 더불어 고종(高宗) 정미년(1907)에 비로소 간행하니, 모두 11권이었다."는 내용이 있다.*참고: 『澹對軒重建扶成錄』 『蘆沙門人錄』 『眉巖先生墓下會案』 1901년 기동준(奇東準) 서간『春潭文集』
    2020-02-21 | NO.49
  • 기동직(奇東稷)
    기동직(1869~1919)의 본관은 행주이며 자는 중백(仲百)이다.부 : 奇中鉉조 : 奇師贒증조 : 奇商胤외조 : 南平 文世憲처부1 : 咸平 李台範1916년 송사 기우만 선생 장례를 지낼 때[襄禮] 참석하였다.*참고 『澹對軒重建扶成錄』
    2020-02-21 | NO.48
  • 기세관(奇世觀)
    기세관(1890~1955)의 본관은 행주이다. 자는 광국(光國)이며 호는 양묵재(養默齋)이다. 부 : 奇蘭燮조 : 奇東參증조 : 奇夏雲외조 : 長澤 高濟馨처부1 : 長興 高燦柱송사 기우만에게 수학하였고 기우만의 문인들이 寒泉齋에서 계를 맺었다. 1924년 담대헌(澹對軒)의 중건 때 330냥을 성금으로 내었다.담대헌은 노사 기정진이 1878년에 정사(精舍)를 지어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후손들이 1924년 중건하였으며, 1927년에 고산서원(高山書院)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1994년 사당과 주변 담장을 보수하였다. 1982년 10월 15일 전라남도기념물 제63호로 지정되었다. *장성 고산서원
    2020-02-24 | NO.47
  • 기승섭(奇承燮)
    기승섭(1976~1939)의 본관은 행주이다. 자는 치술(致述)이며 호는  월곡(月谷)이다.부 : 奇東秀조 : 奇連永증조 : 奇師復외조 : 洪洲 宋日宗처부1 : 珍原 朴瓊柱송사 기우만에게 수학하였고 1916년 송사 선생 襄禮 때 참석하였다.
    2020-02-24 | NO.46
  • 기회성(奇會性)
    기회성(奇會性, 1889~1943)의 본관은 행주, 자는 연술(然述),성술(成述)이고 호는 연파(蓮波)이다.부 : 奇世國조 : 奇景燮증조 : 奇東燁외조 : 尹泰浩, 鄭鼎鉉처부1 : 朴魯術송사 기우만에게 수학하였다.1916년 송사 선생 襄禮 때 참석하였다.
    2020-08-08 | NO.45
  • 김동수(金東洙)
    광주, 담양 등지에서 일제군경과 친일파를 응징한 김동수(1879∼1910)는 본관은 김해로 광주목 경양면景陽 병문리屛門 , 현 북구 우산동 283번지에서 태어났다. 처가는 중흥동 84-3번지이다.(후손 김홍두 증언) 그는 포목상과 농업에 종사하였다. 한말의 망국과정을 지켜보면서 의분을 품고 살다가 결국 의병을 주도한 전남의병이 도처에서 봉기하자 1907년 이원오(李元五)·조경환(曺京煥)·양상기(梁相基)·김현길(金玄吉) 등과 함께 광주에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1908년 2월 광주 출신으로 의병을 일으킨 양진여 의병대에 합진하여 활약하였다.  2월 양진여 의병장의 지휘 아래 동료 의병 5~6명과 함께 전남 광주군 갑마보(甲馬保)면의 친일 면장(面長) 집에 들어가 군수품을 징발하였다.김동수 의병장은 뒤에 독립부대를 편성하여 광주․담양․장성 등지에서 일제 군경과 친일파를 응징하였다. 그의 의병대는 65명의 의병으로 편성되었고, 부관은 이기섭(李基燮, 서방면 모른거리(毛弄里) 출신), 선전병은 선덕현(宣德玄, 서방면 신나굴(溪川里) 출신), 도포사는 임윤팔(林允八)․임윤오(林允五, 오치면 외촌 출신) 형제, 도십장 김재민(金在珉, 천곡면 봉산리 출신)이었고, 의원(義員)은 양동골(梁東骨, 서방면 솔대거리(孝竹里) 출신), 백학선(白學善, 모른거리 출신), 그리고 박포대(朴砲大, 신나굴 출신)이었다.일제 측 기록인 전남폭도사와 의병항쟁 재판기록에 담겨 있는 장군의 활약상은 의병을 폭도라 하고 군자금 징수를 강도나 갈취로 친일분자를 양민으로, 침략자인 군경을 치안담당자로 표현하고 있어 내용을 잘 음미하여야 할 것이다.그런데 의병장 김동수와 그 예하부대들이 한 활동을 일제 측 기록에서 발췌하여 날짜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김동수 의병장은 양진여의 부하로 1908년 12월 25일 5∼6명의 부하들을 인솔하고 면장 집에 60원을 요구하였으나 돈이 없다고 거절당하자 그를 구타하고 그로부터 짚신 50켤레를 징수하였다.1909년 1월 12일에 광주군 갑마보면 복용리(伏龍里)  이장집에 들어가 총기로 위협하면서 20원을 강요하였으나 돈이 없어 백목 2필을 군수품을 수합하였다. 1909년 2월 하순에 광주 오치동의 동장집에 들어가 현금 20원과 백목 10필을 강요했으나 거절당하고 백목 3필만 군수품을 수합하였다. 1909년 2월 30일부터 15명과 함께 총기를 들고 5월까지 광주․화순․담양․창평․장성 등지를 돌아다녔다.1909년 3월 15일에 삼취지(三取旨)동에서 동장집에 들어가 백목 4필을 군수품을 수합하였다. 20일에는 장성군에 사는 최봉근 집에 2명과 함께 들어가 군도 1자루를 탈취했다. 1909년 3월 23일에는 광주군 동장집에 들어가 현금 5원을 갈취했으며 29일까지 광주를 무대로 계속 활동했다.또한 1909년 4월 1일부터 4월 29일까지 7차례에 걸쳐 현금과 백목 수합, 교전으로 인한 3명의 전사자와 총 9정을 빼앗기는 등의 피해를 입었다.특히 1909년 5월 19일에  50여 명의 의병을 지휘하여 광주군 덕산(德山)면 덕산에서 일본군 헌병대 광주분견소의 적군들과 접전을 벌였고, 화승총 10정을 빼앗아 갔고, 31일에 광주시 갑마보면 본촌(本村)동 김영조 집에서 광주경찰서 순사부장 외 11명과 교전하였다. 의병장 김동수는 이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광주 뿐만 아니라 담양(潭陽)·장성(長城)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다가 같은 해 9월 사창(社倉) 전투에서 오른쪽 다리에 총상을 입고 피체되어 1910년 2월 22일 경성공소원(京城控訴院)에서 징역 15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옥중에서 순국하였다.1995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김동수 의병실록(1986)》, 《광주시보》(이상식, 1985년 12월호)
    2020-03-06 | NO.44
  • 김만식(金晩植)
    김민식(1845~1922)의 본관은 광산이며 충효리에서 살았다. 자는 사성(司晟)이며 호는 난실(蘭室)이다. 부 : 金洪泰조 : 金琦鉉증조 : 金致儀외조 : 金學中처부1 : 高殷鎭1889년에 眉巖 柳希春을 기리는 모임에 참여하였다.취가정을 경영하였고 『蘭室遺稿』가 있다.
    2020-02-24 | NO.43
  • 김원범
    김원범金元範(1886~1909)은 항일 의병장 김원국의 아우로 일제 감옥에서 자결한 애국지인이다. 서창동 북촌마을 출신이다. 형인 원국이 1905년 9월 광주군 송정리 시장에서 일본헌병을 타살하고 피신하자, 보다 조직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동지를 규합, 1906년 3월 형과 함께 광주 무등산에서 거사를 일으켰다.이때 선봉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의병의 규모는 3백명이었다. 그 뒤 각처에서 적과 교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리던 중 1907년 6월 광주 우암면牛岩面에서 접전 끝에 대패, 원국이 붙잡히는 등 적지 않은 인명피해로 의진은 해산되었다.다시 조경환 의진에 들어가 도포장에 임명되었다. 1908년 1월 창평 무동촌에서 매복 중 일본헌병의 습격을 받고 교전 끝에 적의 대장 요시다 이하 수 명을 사살하였다.또한 장성 낭월산에서 적과 교전하였으며, 3월 영광의 토산에서 패전하고 불갑산으로 후퇴하였다. 다시 광주 어등산에서 적과 접전하였으나 참패하였다. 6월 이대왕 의진과 합세하여 적을 공격, 격퇴하였으며, 그 뒤 오수산과 함평의 석문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9년 1월 어등산에서 적과 교전중 의병장 조경환이 전사하자, 전기홍 의진과 합진하여 대동창의단을 조직, 중군장에 임명되어 광주.나주.장성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2월에 다시 무등산에서 적과 교전 중 붙잡혀 광주주재 일본수비대에서 조사를 받던 중 자결하였다.2월에 다시 무등산에서 적과 교전 중 붙잡혀 광주주재 일본수비대에서 조사를 받던 중 자결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018-05-28 | NO.42
  • 김재명(1901~1930)
    김재명(金在明, 1901~1930)의 본적은 광주시 동구 불로동 76으로 2006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1925년 광주청년회; 임원, 1927년 조선청년총동맹 전남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1927년 3월 제3차조선공산당 전라남도 책임비서, 광주 야체이카 담당자로 활동했다.1928년 2월말 정비된 제4차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등으로 활동하면서 고려공산청년회 지속으로 학생위원회를 설치하여 3.1운동 10주년 기념시위를 준비하는 등의 활동을 수행했다.1928년 7월 검거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병보석으로 석방된 후 옥고의 여독으로 폐병에 걸려 순국했다.'김재병의 상태를 다룬 당시 동아일보(1929.12.30.) 기사에서는 "김재명은 정신을 일코 피골이 상접하얏스며 대소변을 바더내는 중이라 하며 ~ "라고 쓰고 있다.*김재기 전남대 교수 페이스북에서
    2021-02-26 | NO.41
  • 김홍두
    김홍두金弘斗(1879~1933)의 아호는 악포樂浦이며 서창면 용두리 155, 학동마을에서 출생한 독립운동가이다. 고향 서당에서 글을 배운 후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에게 본격적으로 공부하여 남달리 애국심이 강하였다. 1910년 강제로 국권이 강탈되자 독립운동을 결심하고, 1913년 경상북도 풍기에서 채기중蔡祺中, 한훈韓焄, 유장열柳璋烈 등과 함께 대한광복단을 비밀리에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대구에서는 박상진, 양제안, 우재룡 등과 합류하여 광복회라 개칭하였다. 1916년에는 노백린盧伯麟, 김좌진金佐鎭, 신현대申鉉大, 윤홍중尹洪重, 신두현申斗鉉, 김정호金鼎浩, 권태진權泰鎭, 임병한林炳翰, 윤형중尹瀅重, 윤치성尹致晟, 이현李鉉. 박성태朴性泰, 기명섭奇明燮 등과 규합하여 다시 광복단으로 개칭하였다. 이때 단원들은 수백명으로 증가하였고 군자금 보급과 친일파 처단 등의 활동을 하였다.일본 경찰에 탐지되어 국내활동이 어려워지자 김홍두는 1918년 해외로 망명하여 상해, 남경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1920년 7월에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안창호安昌浩 김구金九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연락하여 회합한 후 군자금 모집과 독립운동 조직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국내에 잠입하였다. 그는 서창 학동 본가에 근거를 두고, 군자금 조달과 국내 각지의 청년회 조직정비를 위하여 활동을 하던 중 나주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나주 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고 스스로 혀를 깨물고 함구하니, 1920년 11월 27일에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여 1921년 3월 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확정받아 옥고를 치렀다. 박상진朴尙鎭, 안재홍安在鴻, 현익길玄益拮, 이기선李起選, 기산도奇山度 등과 같은 감방에서 형기를 마쳤다.출감 후 1926년에 다시 전남과 전북에서 동지를 규합하여 항일운동을 계속 하다가 장성경찰서에 피체되어 3개월간 옥중생활을 하였다. 그 당시 고등계 형사였던 서승열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고문의 여독으로 신음하다 1933년 6월 9일 55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대전 애국지사 제1묘역에 잠들어있으며, 서구 용두동 163-4에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2018-05-28 | NO.40
  • 노문규(盧汶奎)
    노문규(1850~1935)는 본관이 광산으로 자는 응삼(應三), 호는 송해(松海)이다. 1850년 7월 29일 당시 본촌면 일곡리에서 살았다. 오늘날 북구 일곡동이다.문장과 도덕을 갖추었으며, 편지로 간재(艮齋) 전우(田愚)와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등과 교유하였다. 향교에서 유사를 맡은 여러 해 동안에는 읍강을 진흥하고, 향약을 만들어서 관찰부주사에 올랐다. 시사가 날로 그른 것을 보고 진취하는데 뜻을 끊고 사직하려하니 도백이 만류하였고, 영암군수를 맡기려하니 기어이 하직하였다. 풍질(風疾)로 1935년 5월 6일에 수북 삼각산에 장사했다.『송해유집』은 4권 1책의 석인본으로 되어 있다. 1권에는 시 70여 수, 「복록수부(福祿壽賦)」ㆍ「승평성세부(昇平聖世賦)」ㆍ「성학군덕부(聖學君德賦)」와 「공부자찬(孔夫子贊)」이 있으며, 2권에는 잡저(雜著)로 마지막에 「금융상황(金融狀況)」을 기록하였으며, 3권은 제문(祭文)ㆍ행장, 4권은 부록ㆍ부편(附編)이 들어있다. 일곡동 입구 북구 일곡로41번길 26에 송해당이라는 정자가 있다.1960년 국역으로 간행되었으며, 시의 원문은 한문으로, 번역은 한글로 기록되어 있다. 서문은 1960년 고연주(高淵柱), 행장은 1938년 이범석(李範錫), 묘표는 이병관(李炳觀)이 썼다. 卷1詩 : 溫井, 悼閔忠貞, 松汀詩會, 其二, 漢陽南山詩會, 謹題日新齋, 春夜與友敍懷, 完山秋夜與田艮齋(愚)諸友吟, 附田艮齋和吟, 續吟, 又吟, 又吟, 附金秋河和吟, 春雨, 燈, 筆, 龍興寺譜所敍懷, 續吟, 又吟, 書室偶吟, 書室對諸生吟, 草溪說濂堂小會, 和蓮塘贈別詩, 與沈承旨(九澤)李都事(奭)會話, 日新齋諸生席上與鄭江山(在舜)吟, 其二, 其三, 其四, 瑞南齋淸夜敍懷, 其二, 貨玄上舍(基奉)?韻(二首), 和錦雲(鄭泰老)原韻, 次楊波亭(鄭?奉洛敎)原韻, 謹次願豊亭韻, 次鄭?奉(洛敎)?韻, 次房素澗原韻, 題儒館, 與諸益暢懷, 白鷺二首, 偶題, 謹次天山齋韻, 次昌平小山亭韻, 次樂圃堂?韻, 日新齋詩會, 次樵隱亭(李章燮)韻, 謹次慕龍臺韻, 次心汕(李周英)韻, 宿東萊梵魚寺, 其二, 觀海, 回甲韻, 附和韻, 隱居有感, 其二, 次洛雲(李龍喆)韻, 九老會, 松海堂原韻, 附次韻賦 : 福祿壽賦, 昇平聖世賦, 聖學君德賦贊 : 孔夫子贊卷2雜著 : 嶺南宗中通文, 代光州鄕校儒林答京城人道公議所通文, 光州鄕校西齋(及)碑閣重建事通文, 代全南儒林以湖南誌事通文, 代湖南誌發起儒林通文, ●道宗中通文, 本郡民會趣旨書, 謝却封金, 光南測量學校趣旨書, 同追書, 勸學論理, 儒道彰明會趣旨書, 儒道彰明論, 金融狀況卷3記 : 日新齋記, 節李先生旌閭重修記, 永慕齋記, 松海堂記, 附記序 : 盧氏族譜序, 爲親?序, 門規序, 松海序, 附書卷4附錄 : 輓章, 祭文, 家狀, 行狀, 墓表, 跋附編 : 贈童蒙敎官朝奉大夫慕窩公行狀, 慕窩公墓表, 慕窩公旌閭記, 卷後小記祭文 부 : 盧啓悅조 : 盧弼英증조 : 盧有光외조 : 務安 車廷燁처부1 : 光山 金揚采송사 기우만에게 수학하였다.1924년 담대헌(장성 고산서원)의 중건 때 20냥을 성금으로 내었다.
    2020-02-26 | NO.39
  • 노병운(盧炳云)
    노병운(盧炳云, 1911~1951)의 본관은 광산, 극락면 월곡리에 살았다.부 : 盧尙永조 : 盧錫興증조 : 盧宗奎외조 : 朱光玉처부1 : 崔洛鎭1924년 담대헌의 중건시 5냥을 성금으로 내었다.
    2020-08-08 | NO.38
  • 노석용(盧錫容)
    노석용(盧錫容, 1879~1954)의 본관은 광산, 자는 성행(性行), 호는 秉燭(齊)이다.부 : 盧澤奎조 : 盧景薰증조 : 盧弼仁외조 : 宋在淇처부1 : 鄭圭鎭송사 기우만에게 수학하였다.1935년 4월에 吳東洙 高光洙 등 33명과 함께 도내 유생에게 通文을 보냈다.
    2020-08-08 | NO.37
  • 노종룡(盧鍾龍)
    노종룡(1856~1940)의 본관은 광산이고 자는 치운(致雲), 호는 소해(蘇海),농아(聾啞)이다. 당시 본촌면 일곡리에서 살았는데 오늘날 북구 일곡동이다. 최익현의 문인이다.부 : 盧在奎조 : 盧鎭權증조 : 盧弼元외조 : 鄭錫源처부1 : 金箕彩 1916년 송사 선생 襄禮 때 掌位로 참석하였다.1924년 담대헌의 중건시 220냥을 성금으로 내었다.1905년 11월 12일에 奇宇萬에게 편지를 보냈다.『蘇海遺稿』가 있다.노종용의 소해정(蘇海亭)이 오늘날 남아 있다.
    2020-02-26 | NO.36
  • 류인석(柳寅奭)
    유인석(柳寅奭)의 자는 춘백(春伯), 호는 수당(睡堂)으로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아버지는 유하영(柳河永, 號 農山), 어머니는 파주(坡州) 염씨(廉氏) 재묵(在黙)의 딸이다. 1859년(철종 10) 5월 9일 태어나 광산구 삼도면에서 살다가 1931년 2월 25일에 세상을 떠났다. 수당(睡堂) 류인석(柳寅奭)은 문화 류씨(文化 柳氏) 좌상공파(左相公派)로 단묘절신(端廟節臣) 서산공(西山公) 자미(自湄)의 16세손이다. 선친은 농산공(農山公) 하영(河永)으로 광산구 본량면 동호리(東湖里) 신촌(莘村)에서 수당을 낳았다. 수당은 어려서부터 지극한 효성을 보이는 천성에 의용(儀容)이 단중(端重)하고 영민하여 범인과 달랐다.노사 기정진의 문인 대곡(大谷) 김석구(金錫龜:1835∼1885) 문하에서 수학했다.공부가 무르익으면서는 면암 최익현에게 집지(執贄)의 예를 갖추었다. 따라서 노사 기정진과 화서 이항로로 이어지는 위정척사 사상에 철저했음을 알 수 있다.문집으로 『수당유고(睡堂遺稿)』가 있다. 는 4권 1책의 연활자본이다. 문집의 서문에는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의 문인이라고 밝히고 있다. 권 1에 수록된 서(書)에 면암(勉菴), 연재(淵齋), 송사(松沙) 선생 등에게 보낸 서간이 다수 실려 있어 그의 교유와 학문이력을 짐작하게 한다. 수당유고(睡堂遺稿)에는 사사(師事)했던 대곡 김석구 선생, 면암 최익현 선생 외에 송사 기우만,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선생 등에게도 학문을 묻고, 후석(後石) 오준선(吳駿善), 난와(難窩) 오계수(吳繼洙), 이당(以堂) 정경원(鄭經源), 석전(石田) 이병수(李炳壽) 등 당대 이 고장 명유(名儒)들과 교유하면서 학문을 논하고 민족의 앞날을 걱정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수당유고>에는 ‘면암의 의거시에 신병(身病)으로 달려가지 못해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면암 순절(殉節) 후로는 향리산간(鄕里山間)에 멸영자정(滅影自靖)하더니, 경술국치(庚戌國恥) 후로는 민족정기를 후진들에게 전수하는 교육에 전념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또 단발령이 내려지자, ‘손자들의 단발을 엄금하고 일인들에 항거했다’는 구절도 엿보인다.서문은 1974년 권용현(權龍鉉), 발문은 1974년 문생 송흥진(宋興鎭)ㆍ증손 유장현(柳璋鉉), 묘지명은 1974년 문생 윤요중(尹堯重)이 작성하였다. 1975년 광산군 대산사(大山祠)에서 편집ㆍ발행하고 광주 청우당(靑友堂)에서 인쇄하여 발간하였다.
    2020-08-08 | NO.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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