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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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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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류박
    류박(柳璞), 湖節5上-091-1, 光州, 丙子, 扈從-《호남절의록》(1799)정묘호란(1627)·병자호란(1636) 때는 이 고장 출신 전상의(全尙毅)의 순국과 정반(鄭槃)·고일립(高日立)·유박(柳璞) 등의 의병활동이 두드러진다.
    2020-04-02 | NO.137
  • 류사경
    류사경(柳思敬, 1556~?), 湖節1上-070-1, 光州, 壬辰, 高敬命同倡 -《호남절의록》(1799)류사경은 문화류씨이며 자는 덕신德新, 호는 육유당이다. 우의정을 지낸 류량의 8대손, 유혜의 아들이며 광주 이장(光州 泥場), 현 남구 양과동에서 자랐다. 문장에 뛰어났고 절개(節槪)가 있어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회재 박광옥의 사위이다. 임진왜란 때 늘 박광옥의 곁에 머물러 의병도청을 설치하고 운영하는 데 노력했고, 박광옥의 행장을 지었다.‘양과동적입의서(良苽洞籍入議序)’나 ‘양과동정향약서(良苽洞亭鄕約序)’ 등에 따르면 ‘옛 부곡(部曲) 일대의 동약이 잘 지켜지지 않아 성종 때 다시 동적을 만들었으나 이 또한 세월이 흐르며 준수가 안 되어 새로이 1604년 류사경(柳思敬)이 동약을 재정했다’는 등의 기록이 보인다.1605년(선조 38)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예조좌랑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 진사 박종정(朴宗挺) 등과 함께 상소를 올려 도신(道臣) 이황(李滉)의 두류(逗流)의 죄(罪)를 논척(論斥)하였고 별제학(別提學)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시배(時輩)들을 미워하고 전리(田里)로 돌아갔다. [참고문헌] 광주읍지, 광주시사 『육유당일기(六有堂日記)』는 장성 필암서원의 1975년 『필암서원지』권 12. 장서목록 - 206종 777책에 들어 있다. 임진왜란 이후의 정유재란 때의 일기가 실려있다. 광주에서 올라와서 한양에서 벼슬살이하면서 기록한 서행일기도 나온다. 월파집3권의 의병기인 월파 류팽로장군 의병일기 임진(壬辰) 6월 초4일 임진에 보면 "광주의 수령 정윤우(丁允祐)가 군량 50석과 소 두 마리를 보내왔고 전 진사 류사경(柳思敬)도 양식과 기계를 모아서 도와줬다."고 기록하고 있다.
    2020-04-02 | NO.136
  • 류술
    류술(柳述, 1582~1652)의 자는 효숙(孝叔). 호는 애죽헌(愛竹軒)이다. 종부시소윤 한생(宗簿寺少尹 漢生)의 8대손, 예조좌랑 육유당 사경(禮馴佐郞 六有堂 恩敬)의  둘째로 선조(宣祖) 15년 壬午에 광주에서 태어났다. 일찌기 외조(外祖) 회재 박광옥(懷齋 朴光玉)에게 학문을 익혀 문장과 행의로 그 명성이 드러났었다. 인조(仁祖) 5년 丁卯(1627) 정묘호란에 호소사 김장생(號召使 金長生) 소모유사(召幕有司)가 되어 의병(義兵)과 군량(軍糧)을 모아 전주에 이르렀는데 의병을 해산하라는 엄지(嚴旨)가 있어 의병을 해산했다. 김장생의 거의록(擧義錄)에 柳述。字孝叔 號愛竹軒 文化人 朴懷齋光玉外孫也 丁卯亂 先生辟公以軍器有司 公到全州 聞媾成罷歸(居光州) 동궁(東宮)을 호종(扈從)하고 여산(礪山)에 이르러 화전(和戰) 성립의 소식을 듣고 시골로 돌아왔다. 湖節4下-128-1, 光州, 丁卯, 高循厚同倡 -《호남절의록》(1799)광산군 대촌면 유등곡 건덕산 선영 북록(光山郡 大村面 柳等谷 建德山 先瑩 北麓)에 안장되었다. 배위 광산김씨(光山金氏)는 온침(蘊沈)의 女, 함양박씨(咸陽朴氏)는 생원 엄(生員 儼)의 女인데 모두 자녀를 두지 못하였다. 동생 선(季弟 選)의 장자 종기(宗起)를 맞아 계자하였다.
    2020-04-02 | NO.135
  • 류휘진(1556~1593)
    조선 중기 문신. 본관은 서산瑞山이고 유곡동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 때 거의하여 초토사 고경명 막하에 들어가 병량막취의병장兵糧幕聚義兵將으로 활약하였으며 그 후 강화도에서의 전공으로 군기시주부 벼슬이 제수되었다. 1593년 6월에 왜장 가등청정이 진주성을 침공할 때 김천일과 같이 순절하니 호조판서에 증직되었고 충의 시호가 내려졌다.류휘진(柳彙進)의 자는 언우(彦遇)이다. 임진왜란 때 김천일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우고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가 되었다.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가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판서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가증(加贈)되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湖節1下-096-1, 光州, 壬辰, 金千鎰同殉 -《호남절의록》(1799)성해응(成海應, 1760~1839) 의 『硏經齋全集』 卷之五十九 蘭室史科二의 <晉陽殉難諸臣傳>에는  柳彙進字彦遇。文化人。素倜儻好奇節。壬辰從金千鎰起兵。常爲軍鋒。及晉州陷。與千鎰俱死。年三十八。甞以軍功拜軍器主簿。後贈戶曹參判。子瓘,璜亦死丁酉之難조선 후기 문신 원경하(元景夏, 1698~1761)의 『창하집(蒼霞集)』 권8의 묘갈명 중에 <軍器寺主簿。贈戶曹參判柳公墓碣>에 …節光州。閱輿地誌。有曰。柳彙進佐倡義使金千鎰幕。同死于晉州。公雖不幸而失白沙之筆。幸而載斯誌。使後人徵焉。庶有以慰公於九原也歟。余銘湖南義烈之墓多矣。表高霽峰。誌鄭運金浚。而今又書公事于碣。公未與數公振顯于世。則其書也宜可以詳과 같은 기록이 있다.
    2020-04-02 | NO.134
  • 명곡 오희도(1583~1623)
    오희도吳希道의 본관은 나주. 자는 득원得原이며 호는 명곡明谷이다. 오세훈(吳世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오원(吳謜)이다.아버지 오언표吳彦彪는 지조가 있어 남을 허가함이 드물었고 과거 공부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는데 비로소 창평에 옮겨와 은둔하며 삶을 마쳤다. 어머니는 순천박씨(順天朴氏)로, 박명성(朴命星)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였으며 재기가 숙성하여 19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602(선조35년)년에 아버지상을 당하여 슬퍼한 나머지 몹시 야위었는데 보는 이들이 모두들 감동하였다. 묘곁에 여막을 지어놓고 지내면서 매양 조석으로 묘역을 살펴 청소하고 상식하였으며, 몸소 밥을 지어 먹으며 3년상을 마쳤다. 모부인을 섬김에 있어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일에 정성과 공경함을 다하였고 형제들과 함께 살며 독서로 서로 권면하면서 자질을 가르쳐 가정이 화목하였으므로 미천한 동복 역시 모두 감화되었다. 집안일을 계획함에 있어 모두 정돈하였고 혼인은 때에 맞게 행하였다.효성이 남달리 지극하였으며 형제와 함께 살면서 독서하며 서로 권면하였다. 일찍이 본량 대명곡에 살았던 적이 있었는데 이로 인해 '명곡明谷'이라 자호 하였고 만년에는 뒷산 지록에 집을 지어놓고 '망재忘齋'라 하여 세속의 사물을 버리는 뜻을 담았다. 사람들을 대하는 데에는 소장귀천(少長貴賤)을 막론하고 두루 환심을 얻었다.1623(인조원년)년초에 알성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마침내 추천에 의해 한원 예문관에 들어갔다. 일찍이 가주를 대행하여 탑전榻前에 입시入侍하였는데 일을 기록함에 있어 문장의 어휘가 넉넉하고 기록이 민첩하였다. 그만두고 난 뒤에 승정원의 여러 공들이 하리에게 명하여 초기草記를 취하여 올리라 하고 서로 돌아보며 칭찬들을 하였다. 얼마 후에 검열에 임명되어 조정에서 진용되기를 기대하였으나 불행히도 두창에 걸려 객사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향년 41세였다. 공은 순천김씨에게 장가들어 5남을 낳았다. 장남 오이두는 생원이고 다음 오이규는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정랑을 지냈는데 영사 원종공신에 참여하였으므로 예에 따라 공은 도승지에 추증되었다.한편 그의 넷째 아들인 오이정(1619~1655)이 담양군 고서면 산덕리 후산마을 안쪽 도장곡에  명옥헌원림은 창건하였다. 별뫼의 원림들보다 한세대 뒤인 1625년의 일이다.명옥헌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정자로 교육을 하기 위한 적절한 형태의 건물 모양을 갖추고 있다. 명승 제58호이다.
    2020-05-11 | NO.133
  • 명종조의 유일(遺逸)- 임훈(林薰)
    명종조의 유일(遺逸)- 연려실기술 제11권 / 명종조 고사본말(明宗朝故事本末)임훈(林薰)임훈은, 자는 중성(仲成)이며, 호는 자이당(自怡堂)이요, 뒤에 고사옹(枯査翁)이라 고치고 사람들은 갈천 선생(葛川先生)이라 부른다. 경신년에 출생하다. 경자년에 생원에 입격하고, 병인년에 언양 현감을 제수하고 벼슬이 판결사에 이르렀으며, 갑신년에 죽으니 나이 85세였다.○ 계축년에 홍문관의 천거로 사직서 참봉(社稷署參奉)을 제수하니 도신(道臣 감사(監司))이 공 형제의 효행을 아뢰어 갑자년에 정문을 명하였다. 병인년에 유일로 천거되어 역마를 타고 올라와 궁궐에 나아갔다. 임금이 불러 보고 정치하는 도리를 물으니, 공이 아뢰기를, “인군의 정치와 교화는 수신이 제일이니, 오로지 수신의 도에 힘을 써서 마지 않으면 이른바 나라를 다스리는 도와 학문을 하는 방도는 다른 데서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다.선조 초년에 비안 현감(比安縣監)에 제수되었는데 하직하는 날에 임금의 편전으로 불러 보고 하문하기를, “네가 학행이 있다함을 들었으니 할 말이 있으면 말하라.” 하니, 대답하기를, “선왕조에 일찍이 한번 불리어 치도를 물으시기에 신이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으소서 하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물음에도 감히 다른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신이 보건대 예로부터 제왕들이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는 것을 말하지 않은 이가 없으나 뚜렷한 효과는 적으니, 그 병통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그 하나는 으레 유자의 말을 보통으로 여겨 더 살피지 않음이요, 그 하나는 스스로 노력하여 쉬지 않는 공부가 없어 마침내 해이하여지기 때문이오니,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유자의 말을 상투적인 말로 알지 마시고 스스로 노력하여 쉬지 않는 공부를 더욱 하소서.” 하였다.○ 광주 목사(光州牧使)가 되었을 때에 선조가, “수령으로 맑은 덕이 있는 이를 가리라.” 명하니, 감사가 공을 천거하고, “공이 청렴결백하여 백성들이 그를 지목하기를 ‘얼음 병[氷壺]’이라 합니다.”는 말을 하였다.
    2023-08-09 | NO.132
  • 문숙공 황거중(黃居中)-《양촌집(陽村集)》
    문숙공 황거중(黃居中)황거중은 우주황씨(紆州黃氏)를 중흥시킨 인물로, 고려 말 우왕 때 이성계(李成桂, 1335~1408)와 남원 운봉 전투에서 아지발도(阿只拔都)를 무찌를 때 종사관으로 참전하여 개국 공신이 되었으며 정당문학에 발탁되었다. 황거중은 1380년 무렵 광주목사를 지낸 것으로 보인다.조선 초기의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일으킨 공이 크다. 1395년(태조 4) 원종공신의 칭호를 받았다. 저서로는 『사가유고(四佳遺稿)』가 있으며, 죽은 지 400여년 뒤인 1842년(헌종 8)에 김제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권근(權近 1352~1409)의 《양촌집(陽村集)》 권11 / 기류(記類) / 용안성 조전기(龍安城漕轉記, 홍무 23년(1390) 경오 가을 9월)에 "도관찰사(都觀察使) 노공 숭(盧公嵩)이 이곳을 맡아 내려온 이래로 민생의 이득과 병폐를 빠짐없이 따져서 계획을 세우되, 더욱 조전에 치의(致意)하였다. 장구한 계책을 세워 백성을 이롭게 하려 하매 바다를 따라 그 지형을 관찰하여, 전주(全州)에서는 진포(鎭浦)의 용안(龍安)을 발견하고, 나주(羅州)에서는 목포(木浦)의 영산(榮山)을 발견했는데, 모두 바닷가에 언덕이 활처럼 구부정하게 둘러 있고 앞에는 바다가 활짝 트였다. *용안현은 전라북도 익산시 용안면 일대에 있던 옛 고을.노공은 이에 민중들과 상의하기를,”여기에 성을 쌓고 조세를 받는다면 수송하는 백성들이 단번에 끝낼 수 있고, 바다로 조전할 때에도 배를 성 밑에다 대고 져다가 실을 수 있으며, 왜적(倭賊)이 오면 굳게 지켜 병한(屛翰 담)이 될 수 있으니, 깊이 들어와서 노략질하지 못할 것이다. 백성에게 편리하고 국가에도 이로운 것이니, 어찌 여기다 성을 쌓지 않겠는가.”하니, 민중들이 즐겁게 명령을 들으므로 즉시 역문(驛聞)하였는데, 조정의 의논도 좋다고 여겨 이첩(移牒)하여 알리었다.가을 8월이 되어 농사일이 한가하여지자, 지고부군사(知古阜郡事) 정혼(鄭渾)ㆍ전 광주 목사(光州牧使) 황거중(黃居中)ㆍ전 판사(判事) 노원명(盧元明)ㆍ전 고부군사 정사운(鄭士雲)을 명하여 용안의 성 역사를 감독하게 하고, 나주 판관(羅州判官) 윤의(尹義)ㆍ전 개성 윤(開城尹) 김중광(金仲光)과 정윤부(鄭允孚)ㆍ전 판사 나진(羅璡)을 명하여 영산의 성 쌓는 일을 감독하도록 하니, 각각 관할하는 모든 고을의 백성들을 징발하여 역사를 시작하자, 백성들은 모두 좋아하며 나서게 되어, 권장하는 북소리가 멈출 겨를이 없었다. 가래질하며 달구질하며 흙을 뭉치며 주워다 쌓으니, 이미 두텁고도 높으며 튼튼하고도 깎은 듯한데 여장(女墻)을 두르고 성문을 굳게 하니, 바라보매 엄숙하고 다가가매 우뚝하게 높다.영원히 전할 업적을 한 달 만에 끝내니, 마을 사람과 농부들이 병폐가 없어지게 된 것을 기뻐하여 서로들 집에서 경축하고 길에서 노래하였다. ---------- (중략)노공의 혜택이 마땅히 진포(鎭浦)ㆍ목포(木浦) 두 포구와 더불어 한없이 같이 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기문(記文)을 쓴다.”
    2023-08-09 | NO.131
  • 물재 기진
    물재物齋 기진奇進(1487~1555)은 동생인 복재 기준奇遵(1492~1521)의 기묘사화로 인한 죽음에 서울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남쪽인 광주 광산구 신룡동 용동마을로 내려와 살았다. 기진은 조선 전기 문인으로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자순子順, 호는 물재勿齋이다. 오남재吾南齋는 덕성군 기진을 기리는 재각이다.용동마을은 광주 광산구 신룡동, 광산군 소고룡면召古龍面에 속한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촌리新村里·천동리·용동리·구룡리九龍里 등의 일부를 합하여 임곡면林谷面 신용리가 되었다가 1995년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용동이 되었다. 행주幸州 기씨奇氏 집성촌으로 형성됐다.기진의 부친은 1487년 응교를 지낸 기찬奇襸으로 김수형金壽亨의 딸 안동김씨와의 사이에서 기형奇逈, 기원奇遠, 기괄奇适, 기진奇進, 기준奇遵 등 아들 다섯을 두었다. 기진은 넷째 아들로 동생 기준과 함께 성리학을 연구했다. 기준이 1519년에 일어난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1521년에 죽자, 둘째 형 기원과 함께 낙향하여 광주에서 여생을 보냈다. 1522년 진사가 되었고 1527에 경기전 참봉을 제수받았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평생 시골에 은거하다 죽었다. 기진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둘째 아들인 기대승奇大升이 종계변무宗系辨誣(조선 건국 초기부터 선조 때까지 200여 년간 중국 명나라에 태조 이성계에 대한 잘못된 기록을 고쳐달라고 주청하던 일)의 주문奏文을 훌륭하게 쓴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오르자, 그도 사후에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를 추증받고 덕성군德成君에 봉해졌다. 기대승 문집인 고봉집을 보면 기진은 기대승이 8살일 때 부인을 잃는다. 혼자 아들 셋을 길렀는데 기대승은 “어려서부터 오직 아버지만을 의지하였다. 아버지께서는 고생하시면서 나를 길러 주셨는데, 어려서부터 질병이 많아 죽다가 살아나곤 하였다. 이제 와서 아련히 그때 일을 생각하니, 비통함이 하늘에 사무친다. 아, 곤궁하고 고통스러운 사람 중에 나보다 더한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하고 회상했다.
    2020-07-09 | NO.130
  • 물재 기진(1487~1555)
    기진의 본관은 행주, 휘는 진, 자는 자순, 호는 물재이다. 정무공 기건의 증손으로 1487년(성종18) 응교를 지낸 기찬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6살에 부모를 여의고 동생 기준奇遵과 함께 성리학을 연구하다가 기준이 1519(중종13년)년에 일어난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1521년(중종15)에 사약을 받고 죽자, 둘째 형 기원과 함께 낙향하여 광주광역시 광산구 고룡동에서 여생을 보냈다. 1522년(중종16) 진사가 되었고 1527(중종21년)년에 경기전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1555년(명종10)에 죽었다. 둘째 아들 기대승奇大升이 종계변무(宗系辯巫:조선 건국 초기부터 선조 때까지 200여 년간 중국 명나라에 태조 이성계에 대한 잘못된 기록을 고쳐달라고 주청하던 일)의 주문을 훌륭하게 쓴 공으로 광국공신 3등에 오르자 사후에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를 추증받고 덕성군에 봉해졌다.
    2020-04-28 | NO.129
  • 민경호
    민경호민경호閔京鎬(1863~1930)는 조선말기의 문신으로 민유중閔維重의 6세손이자 민치순閔致純의 아들이다. 호는 청우당聽雨堂 이다.1880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1885년 규장각직각奎章閣直閣에 임명되었으며, 1888년에는 이조참의가 되었다.1891년에는 이조참판이 되었고 1899년 일시 면직되어 고군산古群山으로 유배되었으나 1900년 사면되었다. 1901년 궁내부특진관이 되었으며 1903년에는 중추원의관이 되었다. 1906년에는 시강원첨사가 되었으며 1907년에는 궁내부특진관이 되었다.
    2020-03-12 | NO.128
  • 민제장
    충장공 민제장閔濟章(1671∼1729)의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회백(晦伯), 호는 삼금당(三錦堂),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문경공(文景公) 민영모(閔令謨)와 민회삼(閔懷參)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민담령(閔聃齡)이며, 아버지는 민준경(閔俊慶)이고, 어머니는 함안 박씨(咸安朴氏)이다.민제장은 민정중(閔鼎重)의 문인으로 신장이 9척이나 될만큼 체모가 훌륭하고 능히 5석의 활을 당길만큼 무예가 뛰어나서 1705년(숙종 31)에 무과에 급제했다. 1711년 통신사 조태억(趙泰億)‧임수간(任守諫) 등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들어가다가 대마도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이때 풍랑이 크게 일어나 해상에 있는 배들이 표류하는 것을 보고 직접 바다로 들어가 노를 저어 배를 끌고 왔다. 혼자 일행을 구출하여 무사히 일본을 다녀온 뒤, 무산 부사(茂山府使)가 되었다. 1718년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 제주 목사(濟州牧使), 충청 병사, 전라 병사를 역임하였다. 1726년 북병사(北兵使), 회령 부사가 되었으나 국고를 탕진하였다는 죄목으로 탄핵을 받아 파직당했으나 영조의 신임으로 무사하여 1728년(영조 4) 안성 군수가 되었다. 이때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곧 계문을 써서 방략을 올렸다. 도순무군(都巡撫軍)이 곧바로 직산으로 향하자, 사람을 모집하고 적세를 정탐하여 순무에게 알렸다. 또 보병을 거느리고 선봉이 되어 아우 민제만(閔濟萬)과 함께 몸을 떨쳐 출진하여 적들을 거의 섬멸하였다. 안성과 죽산의 전투에서 민제장 형제의 공이 가장 컸다. 이어 그해 황해도병마절도사를 지내고 그 이듬해 병으로 죽었다.분무 원종일등훈(奮武原從一等勳)에 책록되었고, 고종 1869년에 특별히 자헌 대부 병조 판서 겸 지의금부 훈련원사에 증직되었다. 섬촌(蟾村) 민우수(閔遇洙)가 행장을 찬술하고 도암(陶庵) 이재(李縡)가 묘갈명을 찬하였다.묘는 전라남도 영광군 구수에 있다.민제장(閔濟章), 湖節5中-136-1, 光州, 戊申, 樹勳 -《호남절의록》(1799)
    2020-04-02 | NO.127
  • 박광옥
    박광옥朴光玉(1526~1593)은 조선 중엽 명종과 선조 때에 성리학을 연구하고 향약을 널리 실시해 이름을 세우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살리기 위해 의병을 일으킨 의기로운 선비이다.박광옥의 본관은 음성陰城. 자는 경원景瑗, 호는 회재懷齋. 할아버지는 박자회朴子回이고, 아버지는 사예 박곤朴鯤이며, 어머니는 찰방 윤인손尹仁孫의 딸이다. 광주시 서구 매월동 회산마을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범상하지 않은 행동을 했다는 기록이 국역된 《회재집》에 있다. 어릴 때부터 이미 동량이 커서 소꿉장난을 하지 않았으며 일곱 살 때 아버지상을 당했는데 어른처럼 통곡하며 3년상을 치렀다고 한다.형 박광현은 성격이 엄격하여 아우를 가르치는데 총력을 다했고 회재도 형을 아버치처럼 섬기며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면학에 힘썼다. 21세 때인 1546년 생원 진사에 합격했으나 형이 세상을 뜨자 가통을 이어받아 후학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했다. 광주 선도면(지금의 매월동)에 집을 지어 개산송당蓋山松堂이라 이름하고 문하생들과 함께 성리학을 연구하고 향약을 실시했다. 당대의 학자로 이름 난 기대승, 박순, 이이, 노사신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닦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1560년 목사 유경심을 도와 향교를 중수하고 학헌과 학규를 제정하였다.1568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내시교관에 임명되었다. 1574년 문과에 급제하여 종부시주부가 되었으며 1577년 운봉 현감이 되었을 때 황산대첩비를 세웠다. 1578년 전라도사, 충청도사, 1579년 예조정랑, 1580년 지평이 되었다. 그 뒤 성균관직강을 거쳐 영광군수.밀양부사가 되어 영광과 밀양에 송덕비가 세워졌다. 뒤에 광주.전주의 교수와 사예.사섬시정.봉상시정 등에 재직하였다.1589년 정여립옥사鄭汝立獄事가 일어나자, 전에 정여립의 전장직 진출을 막은 이경중李敬中을 탄핵한 죄로 삭탈 관직되었다. 1581년 이경중이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정여립이 당시 명망이 있음을 보고 극력 배척하며, 청현(淸顯)의 자리에 두지 말라고 논책하였다가 도리어 정인홍(鄭仁弘)·박광옥(朴光玉)·정탁(鄭琢) 등 동인의 언관들로부터 논핵(論劾)당하여 파직당한 것이다.박광옥은 광주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학문을 연구하던 중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고경명, 김천일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왜병이 상주에 도착했다는 정보를 듣고 수레를 타고 달려가 정윤우 광주목사에게 근왕병을 일으켜 험악한 요새지를 차단하고 서울을 호위케 한 다음 각 고을에 통문을 보내 의병을 모았다. 정윤우(丁允祐)는 전라순찰사(全羅巡察使) 이광(李洸)에게 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해야 하는 의리를 극력 말했어도 따르려 하지 않았다. 자제들을 가담시키고 군량을 많이 보냈다. 광주에 의병도청을 설치하고 무기와 군량을 조달했다. 그런 와중에 복직하라는 어명이 내려오자 승문원 판교에 올랐다가 나주목사로 내려왔다. *承文院(승문원): 다른 나라와의 외교문서를 관리하는 관청으로서 괴원(槐院)이라고도 하며 태종 十년에 창설되었는데 여기 관직으로서는 판교(判校), 참교(參校), 교감(校勘) 교리(校理), 교검(校檢), 박사(博士), 저작(著作), 정자(正字), 부정자(副正字) 국가가 위기에 처한 상황이라 사양할 수 없어 어렵사리 부임했으나 겨우 껍질을 벗긴 곡식밥을 먹었고 음식을 먹을 때마다 울면서 “임금은 어디 계시며 이때가 어느 때냐”고 말했다고 전한다. 지방수령의 세력으로 재차 의병을 규합해 이전에 가졌던 뜻을 이루려고 했으나 병세가 위독해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병가를 내가 집에 돌아와 1593년 생을 마감했다. 선조는 그에게 호남의 충의신이라 극찬하였다. 박광옥은 시를 무척 잘 지었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광산구 신창동 선창산과 극락강이 마주치는 강변의 대지 위에 자리한 김언거의 풍영정에서 그의 시상을 펼쳤다. 그는 문학에도 재질이 뛰어나 호남에서는 박광옥, 기대승, 박상, 박순, 이도학 이어세라 하였다.1602년 광주 벽진촌(지금의 벽진동)에 세워진 의열사에 제향되었고 뒤에 벽진서원으로 바뀌었다. 전북 남원시 운봉면의 용암서원에도 제향되었다. 광주광역시에서는 그 공을 기려 남구 칠석동에서 시작되어 서구 농산물유통단지-풍암지구 신암마을을 지나 남구 백운동까지의 길을 회재로라고 명명하였다. 음성박씨 문중에서는 풍암동에 운리사雲裏祠를 세워 영정을 모셨고 2018년 7월 벽진서원으로 바꾸었다. 저서로는 <회재유고懷齋遺稿>가 있다.박광옥(朴光玉), 湖節1上-055-1, 光州, 壬辰, 高敬命同倡 -《호남절의록》(1799)*수정 2023.11.12. '나주 벽진촌'을 '광주 벽진촌'으로, '나주 선도면'을 '광주 선도면'으로
    2018-05-28 | NO.126
  • 박광조
    박광조朴光祖(?~1592)는 임진왜란 때 왜군의 말굽 아래 쓰러져가는 나라와 백성을 지키려는 큰 뜻을 세우고 의병활동에 참가하였으며 고경명장군이 참가했던 금산전투에서 생을 마감했던 의인이다. 본관이 음성이며 시영市榮, 호는 지봉砥峯이다. 정랑正郞을 지낸 박번朴蕃(1469~1542)의 아들이다. 1588년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주부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고경명, 김천일 막하에서 군량수송부부장으로 나라를 지키는데 혼신을 다하였다.월파 유팽로 장군 의병일기 임진 6월 초6일편에 양공이 내일 행군을 하겠다고 편지로 담양의 창의소로 알려왔고 광주의 전 첨사 신건申健과 첨정 하정河丁, 선비 김세근金世斤과 무안의 전 주부 박광조朴光祖 박광종朴光宗의 형제와 해남의 전 부장 고몽룡高夢龍과 장성의 전 첨정 강염姜恬이 전후하여 잇따라 도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초토사 고경명의 막하로 들어가 금산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부인이 가솔을 이끌고 전장을 찾아가 그의 시신을 찾았는데, 상투에 자신의 성명을 써넣은 종이를 넣어놨다고 전한다. 죽음을 불사하고 왜군에 맞서 싸웠음을 알 수 있었던 대목이다. 사후 선무원종공신으로 녹훈되었다.박광조(朴光祖), 湖節1上-082-1, 光州, 壬辰, 高敬命同倡  -《호남절의록》(1799)
    2018-05-28 | NO.125
  • 박광후 朴光後
    안촌(安村) 박광후(朴光後, 1637(인조 15)∼1678년숙종 4)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사술(士述), 호는 안촌(安村)이다.조부는 진사(進士) 칠졸재(七拙齋) 박창우(朴昌禹)이고, 부친은 충의위(忠義衛) 박천용(朴天用)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모친은 남씨(南氏)이고 부인은 홍씨(洪氏)이다. 광산구 비아 도천동(光州 鵝山里)에서 출생했고 가까운 안청동에 머물렀다. 1666년(현종 7) 병오식년사마시(丙午式年司馬試)에 생원 3등으로 합격하고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갔으나 병약으로 벼슬할 뜻을 접고 42세의 젊은 나이로 죽어 기질을 세상에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였다.안청마을은 조선 효종 때 박광후가 정착 개촌하면서 그 아호를 따 안청安淸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는 불의에 굴하지 않는 강직한 성품으로 당시의 혼탁한 정국을 비판하고 벼슬길에 나갈 뜻을 접고 안청마을 외성당에서 학문에 열중했다.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은 그를 '은산(銀山)과 철벽(鐵壁)'에 비유하였고, 또한 "큰불이 동연(洞然)에 타지 않은 구슬이다'라고 평한 인물이다.  그의 확고부동한 절개와 의리를 기리며 “슬프다 이 험악한 시운)에 사술(士述 안촌의 자)같은 순결한 성품의 그가 어찌 안 죽을 수 있으랴?”라 하고 묘비문에, “아아 사술이여, 이렇게 죽고 말다니 이 세상 어디에 이 사람을 다시 볼 수 있으랴?”하며 애통해 했다. 그가 죽은 후  송시열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했던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은 우암에게 보낸 글에서 “사술(士述)이 죽으니 남쪽지방(南州)에 다시 사람이 없다”라고 말하였다. 안촌의 유고인 <안촌세고(安村世稿>)에는 면암 최익현, 송사 기우만의 외성당기(畏省堂記) 등의 기문이 실려 있고 우암 송시열의 외성당 시 1수와 봉곡 송주석, 손재 박광일, 노사 기정진, 최승현, 최익현, 관어헌 박양동, 기우만, 난와 오계수 등의 외성당 차운시가 실려 있다. 시문집으로 《안촌집(安村集)》이 전해진다. 광주(光州) 진곡리(晉谷里)에 장사지냈다. 부인 홍씨와 사이에 1남 6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박중회(朴重繪)이다.인조 15 1637 정축 崇禎 10 1 3월 3일, 光州 鵝山里에서 태어나다. 인조 16 1638 무인 崇禎 11 2 부친상을 당하다. 효종 1 1650 경인 順治 7 14 南陽洪氏와 혼인하다. 효종 5 1654 갑오 順治 11 18 조부상을 당하다. 承重하여 상을 치르다. 효종 7 1656 병신 順治 13 20 향교를 출입하며 공부하다. 현종 1 1660 경자 順治 17 24 서울과 호서를 왕래하며 宋時烈을 비롯한 명사들과 교유하다. 현종 7 1666 병오 康熙 5 30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하다. 현종 9 1668 무신 康熙 7 32 겨울, 成渾과 李珥를 모욕하였다는 이유로 閔黯의 謁聖을 저지하다. ○ 12월, 朴祥, 奇大升, 朴淳의 合享을 宋浚吉, 宋時烈에게 상의하다. 현종 11 1670 경술 康熙 9 34 月峯書院에 박상, 기대승, 박순을 합향하다. 숙종 1 1675 을묘 康熙 14 39 5월, 송시열의 신원을 위해 도내에 통문을 돌리다. ○ 민암의 알성을 저지한 일이 문제되어 朴光五, 柳益瑞, 金震羽, 柳應壽 등과 함께 형을 받다. 숙종 3 1677 정사 康熙 16 41 송시열의 長鬐 謫所를 방문하여 5일간 머무르고 돌아오다. ○ 귀로에 慶州와 智異山을 유람하다. 숙종 4 1678 무오 康熙 17 42 楊夢擧 등이 鄭澈을 무함하자 상소하여 변론하다. ○ 9월, 金壽恒이 鐵原으로 移配 도중 방문하다. ○ 11월 15일, 安淸里 자택에서 졸하다. 숙종 5 1679 기미 康熙 18 - 2월, 晉谷里에 장사 지내다. 순종 2 1908 무신 隆熙 2 - 嗣孫 朴元圭가 활자로 문집을 인행하다.*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등을 참고함*2023.3.2. 최종 수정
    2020-08-11 | NO.124
  • 박노술(朴魯述)
    박노술(1851~1917)의 본관은 순천이다. 자는 공선(公善)이며 호는 석음(石陰)이다. 光州 安淸里에서 觀魚軒 朴陽東과 長興高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6세 때 그의 伯兄과 더불어 부친에게 학문을 배우고, 蘆沙 奇正鎭에게서 四書五經과 濂洛群書를 두루 섭렵하여 文學節義로 추앙받았다. 특히 性理學에 조예가 깊어 노사의 후손인 松沙와 더불어 자주 논변이 있었다. 淵齋 宋秉璿이 考巖書院에서 향음주례를 행할 적에 執禮가 되었는데, 이것을 보고 연재는 학문이 宏博하고 操守가 엄정하다고 크게 칭찬하였다.1889년에 眉巖 柳希春을 기리는 모임에 참여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奇宇萬이 일으킨 의병활동에 참여하였으며, 당시의 檄書가 문집 등에 전한다. 1911년 11월 5일에 奇雲度에게 혼서편지를 보냈다. 을사조약에 淵齋와 勉菴이 차례로 殉節함에 세속과의 인연을 끊고서 자신이 지은 栗里田舍에 숨어 살면서 제자를 양성하였다. 1916년 송사 기우만 선생 襄禮 때 참석하였다.이후 일제가 보내온 소위 恩賜金勅帖을 거절하였고, 고종의 회갑 때에 북망통곡을 하였는데, 자손과 문인들이 그곳에 風泉臺를 짓고 해마다 제향하고 있다. 1917년 6월 23일에 향년 67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부 : 朴陽東조 : 朴濟邦증조 : 朴懿鉉외조 : 高濟儒처부1 : 竹山 安命和『石陰遺稿』가 있다.
    2020-02-27 | NO.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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