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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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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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동선 ⾦東選 철종 13년(1862) 3월 15일∼철종 14년(1863) 7월 3일
    김동선 ⾦東選 철종 13년(1862) 3월 15일∼철종 14년(1863) 7월 3일김동선(1800∼1874)의 본관은 청풍(⾭⾵)이며, 자는 자의(⼦儀)이다. 아버지는 성균진사 김기협(⾦基恊)으로, 예조참의 김회연(⾦會淵)에게 입양 되었다. 1837년 식년시 생원에 합격하여, 1839년 영희전 참봉, 1841년 금부도사, 1842년 사재직장, 1844년 활인별제·제용주부·가례도감 낭청, 1845년 의빈도사, 1847년 백천군수, 1849년 합천군 수, 1853년 이천부사, 1855년 성주목사, 1858년 의성현령을 지냈다. 1862년 1월 28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3월 15일에 부임하였다. 9월 8일에 대동(⼤同) 결전(結錢) 상납을 지체한 일로 나수하라는 전교가 있었다. 조운의 출발을 지연시킨 일이었다. 1869년 통정대부에 오르고, 돈녕도정, 조사 오위장, 1874년 부호군, 1874년 공조참판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임술(1862년) 1월 28일에 제수되어 3월 4일에 임금을 사조하고, 3월 15일에 부임하였으며 계해(1863년) 4월에 대동선 1척이 치패된 일로 취리차 상경하였는데 용서를 받고 7월 3일에 서원현감으로 이동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천시 안흥동 안흥지에 「부사김공동선 청근선정비」가 서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11 | NO.471
  • 김만증 ⾦萬增 숙종 25년(1699) 윤7월 22일∼숙종 26년(1700) 6월 10일 파직
    김만증 ⾦萬增 숙종 25년(1699) 윤7월 22일∼숙종 26년(1700) 6월 10일 파직김만증(1635∼1720)의 본관은 광산(光⼭)이며, 자는 경능(景能), 호는 둔촌(遯村)이다. 아버지는 판서 김익희(⾦益熙)이며, 김장생(⾦⾧⽣)의 증손이다. 승지 김만균(⾦萬均)의 동생이다. 1663년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64년 음보로 내시교관, 1669년 사옹참봉, 1670년 세마, 1672년 우수운판관, 1674년 신녕현감, 1680년 공조좌랑·좌수운판관, 1681년 임피현령, 1685년 돈녕판관, 1686년 호조정랑, 1689년 사복첨정, 1694년 한성판관·선산부사, 1698년 좌윤을 지냈다. 1699년 7월 22일 나주목사에 부임하였다. 1701년 부호군, 1702년 청주목사, 1704년 오위장, 1708년 첨지, 1709년 돈녕도정, 1716년 부호군, 1718년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금성읍지』에는 “기묘(1699년) 윤7월 22일 도임하였고 경진(1700년) 6월 10일에 장계에 의해 파직되었다.”라 하였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2 | NO.470
  • 김말문 ⾦末⽂ 중종 8년(1513) 10월 17일∼중종 11년(1516) 1월
    김말문 ⾦末⽂ 중종 8년(1513) 10월 17일∼중종 11년(1516) 1월김말문(1469∼1525)의 본관은 광산(光⼭)이다. 1492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498년 별시 문과에 병과 1위로 급제하였다. 아버지 김성원(⾦性源), 할아버지 김예몽(⾦禮蒙), 증조할아버지 김소(⾦遡)와 형 김윤문(⾦胤⽂), 김철문(⾦綴⽂), 동생 김내문(⾦乃⽂)까지 모두 문과에 급제한 명문가이다. 형제 여덟 명이 모두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 중 네 명이 대과에 합격해 ‘팔문(⼋⽂)’으로 이름을 높였다. 1501년 예문관 대교(待敎)를 시작으로 사간, 동부승지를 거쳐 1513년 8월 21일 통정대부 나주목사로 제수를 받아 부임하여 1516년 1월까지 재직하고 형조참의로 영전했다. 1522년 우승지, 1524년 좌승지를 거쳐 1525년 사망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계유(1513년) 10월 17일 도임하였고, 병자 (1516년) 1월에 이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5 | NO.469
  • 김명원 ⾦命元 선조 7년(1574) 1월 12일∼선조 9년(1576) 7월
    김명원 ⾦命元 선조 7년(1574) 1월 12일∼선조 9년(1576) 7월김명원(1534∼1602)은 1583년 전라감사를 역임하였다.『금성읍지』에는 “만력 갑술 (1574년) 1월 12일 도임하였고, 병자(1576년) 7월에 임기가 만료되어 떠났다.”는 기록이 있다. *상세이력은 전라감사편 참조*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5 | NO.468
  • 김명진 ⾦明鎭 순조 12년(1812) 7월 17일∼순조 14년(1814) 4월 2일
    김명진 ⾦明鎭 순조 12년(1812) 7월 17일∼순조 14년(1814) 4월 2일김명진(1748∼?)의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성윤(聖允)이다. 아버지는 유학 김상경(⾦尙 慶)인데 이조판서를 지낸 김상성(⾦尙星 1703∼1755)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1764년 성균관 유학으로 들어가 1774년 생원에 급제하였다. 1778년 원릉참봉, 1779년 종묘 부봉사, 1780년 상서부직장, 1781년 상서직장·공조좌랑, 1782년 한성주부, 1797년 사옹주부·사직령·경기전령, 1798년 한성서윤·공조좌랑, 1799년 한성판관, 1800년 통천군수, 1808년 이천부사를 지냈다. 1812년 6월 21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었다. 『금성 읍지』에는 “임신(1812년) 7월 17일 부임하였고 갑술(1814년) 4월 1일 선산부사와 서로 바꾸어 근무하게 하였다.”라 기록되었다. 실록에 1814년 3월 26일에 연안부사 권준과 서로 바꾸고자 하였으나 두 사람이 교동수사로 있을 때 갈등 관계로 상피한 적이 있었다는 보고에 연안부사는 그대로 계속 근무케 하는 대신 4월 2일에 선산부사 이민 식과 서로 바꾸는 인사를 하게 되었다. 이후 선산부사 재직 시 행정을 잘 하였기에 「부사김후명진청덕선정비」가 지금의 구미시 선산읍에 세워져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07 | NO.467
  • 김방 金倣
    광산김씨 김방(金倣)의 아버지는 예조판서(禮曹判書) 승노(承魯)이며, 어머니는 경주이씨(慶州李氏) 민부상서(民部尙書) 복득(福得)의 딸이다. 고려 우왕(禑王) 때를 거쳐 조선(朝鮮)초에 좌찬성(左贊成)을 지내고 통훈대부, 김제(金堤)군사 겸 권농병마단련부사로 근무할 때 황폐해 가는 김제 땅 벽골제(金堤 碧骨堤= 저수지)를 확장 보수하여 김제 만경(萬頃) 평야를 옥토(沃土)로 만들었다. 그 후 광주 목사로 재임시 세종대왕(世宗大王)의 중농정책으로 경국제민하는 뜻을 받들어 공의 개인 소유지인 저습지(低濕地) 수만평(현 광주시 중흥동 효죽동 계림동의 일부)에 전천후(全天候) 사업으로 3년간에 걸쳐 경양제(光州 景陽堤) 방죽을 만들어 광주 일원의 농토를 옥답(沃畓)으로 만들어 국리민복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 후 좌찬성(左贊成)에 올랐다. 공이 죽은 후 공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향인(鄕人)이 광주 증심사(증心寺) 능주(綾州)의 쌍봉사(雙峰寺) 낙안(樂安)의 (증光寺)에 영정(影幀)을 봉안(奉安)하였다. 후손이 남면(南面) 재궁동(梓宮洞)에 재실을 지어 세일사를 봉행하고 있다. (見勝覽及兩郡誌) 배(配)는 원주원씨(原州元氏)이다.
    2020-05-17 | NO.466
  • 김병우 ⾦炳愚 고종 5년(1868) 10월 24일∼고종 8년(1871) 6월 20일
    김병우 ⾦炳愚 고종 5년(1868) 10월 24일∼고종 8년(1871) 6월 20일김병우(?∼?)의 본관은 안동, 자는 성여(聖汝), 호는 우전(⾬⽥)이다. 문정공(⽂正公) 청음(淸陰) 김상헌(⾦尙憲)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사헌부집의 김직순(⾦直淳), 아버지는 사헌부장령 정헌(靜軒) 김인근(⾦仁根)이다. 어머니는 해평윤씨이다. 1850년 음보로 공릉 참봉으로 출사하여 1852년 내자시 참봉이 되었고, 1854년 장악원 주부·사복시 주부·한 성부 주부를 지냈다. 1855년 의령현감, 1859년 괴산군수, 1864년 선산부사를 지냈다. 1868년 9월 17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10월 24일 부임하였다. 1870년 10월 7일 세곡(稅穀)을 더 싣는 일에 대해 선혜청의 복계(覆啓)로 인하여 잡아오기를 청한다하였으나 성역(城役)이 한창 바쁜데 아직 준공을 보지 못하여 직무를 비워두는 것은 염려스러 우니 의금부로 잡아다 처리하는 일은 그만두고 죄를 진 로거행하게 한다. 1870년 8월 1일에는 전라감사 (李鎬俊)장계에 따라 성첩(城堞), 문루(⾨樓)를 새로 건축할 때 녹봉을 털어 재물을 모은 것을 차례로 시작하였으니, 포상을 감독한 사람이 정성과 힘을 다하여 보답을 베풀어야 마땅하다 해 8) 표리(表裏) 1습(襲)을 특별히 사급받는다. 12월 27일 에는 전라감사의 장계에 따라 3년 동안 다스리면서 패국(敗局)이 거의 회복되었다 하여 특별히 한 임기를 잉임시키도록 한다. 1871년 1월 3일 잉임 전지를 받는다. 1873년 동부승지·우부승지, 1880년 공조참의를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무진(1868년) 9월 17일에 통정대부 선산부사에서 옮겨와 제수되어 임금을 사조한 후, 10월 24일에 부임 하여 재직하다 신미(1871년) 1월 3일 만기를 넘겨 근무하다 6월 20일에 양주목사로 발령이 나 이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869년 나주향교 대성전을 중수하였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11 | NO.465
  • 김빈길 ⾦贇吉 태종 1년(1401) 1월 12일∼태종 1년(1401) 윤3월 21일
    김빈길 ⾦贇吉 태종 1년(1401) 1월 12일∼태종 1년(1401) 윤3월 21일김빈길(?∼1405)의 본관은 고성(固城), 호는 죽강(⽵崗), 낙안 출신이다. 이름을 ‘김윤 길’로 읽기도 한다. 아버지는 집현전 제학과 경기도 관찰사를 지낸 양평공 김미(⾦彌) 이다. 외할아버지는 개성소윤(少尹)을 지낸 정길(鄭吉)로 문정공 정가신(鄭可⾂)의 7남 3녀 가운데 중 5남이다. 1394년에 전라도수군첨절제사가 되어 왜구 토벌에 앞장섰다.1397년에는 낙안군 읍성을 흙으로 쌓았다. 1401년에는 전라도수군도절제사가 되었다.『금성일기』 「신사년 1401년」에 “판목사(判牧使) 김빈길이 수군도절제사에 임명되어 윤 3월 21일 바가리(⾶加⾥) 군영에서 떠났다.”라고 되어 있는데, 판목사는 종2품이다.『금성읍지』에는 “신사(1401년) 1월 12일 도임, 동년 윤3월 21일에 교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시호는 양혜(襄惠)다. 『태종실록』 그의 졸기에, “충직(忠直)하고 근검(勤儉)하 였으며, 수전(⽔戰)에 능하였었다. 군사(軍⼠)가 병든 자가 있으면 마음을 다하여 치료해 주고, 추위에 언 자가 있으면 옷을 벗어 입혀 주고, 항상 사졸(⼠卒)들과 더불어 감고(⽢苦)를 같이하였다. …… 이르는 곳마다 반드시 이기었다. 매양 상사(賞賜)를 받으면 군사(軍⼠)의 공(功)이 있는 자에게 나누어 주었으니, 변방의 백성들이 힘을 입었 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4 | NO.464
  • 김사희 ⾦思羲 순조 8년(1808) 5월 9일∼순조 10년(1810) 8월 15일
    김사희 ⾦思羲 순조 8년(1808) 5월 9일∼순조 10년(1810) 8월 15일김사희(1753∼?)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일여(逸如), 호는 이아탕주인(爾雅宕主 ⼈)이다. 아버지는 판서 김기대(⾦器⼤)이다. 1773년 증광시 진사에 합격하여 1782년 금부도사, 1785년 공조좌랑, 의빈부도사, 형조정랑, 1787년 토산현감, 1791년 공조정 랑, 전의현감, 1795년 시흥현령, 1797년 수원판관, 1799년 화성판관, 1800년 평양서 윤, 1803년 호조정랑, 1804년 건릉수개도감 낭청, 1805년 호조정랑, 1807년 강릉수 개도감 낭청을 역임하였다. 1808년 4월 17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5월 9일 부임하였 는데, 1810년 5월 27일에는 진휼을 잘 한 수령으로 뽑혀 표리를 받았다. 1810년 8월 14일 전라감사의 장계에 의하면 김사희 목사가 휴가 후에 돌아오지 않아 독촉을 하였 다는 보고가 있은 후 8월 15일에는 “병이 심해져서 거동이 불편하여 내려갈 수 없다.” 는 홍양호 이조판서의 보고에 파직 된다. 1811년 12월에 재령군수에 제수되고, 1813 년엔 진주목사, 1818년 사복첨정, 1821년 사복시정, 1826년 군자정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무진(1808년) 5월 9일에 도임하였고 경오(1810년) 8월 15일에 상경 하면서 체직하였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07 | NO.463
  • 김상복 ⾦尙宓 인조 17년(1639) 10월 16일∼인조 20년(1642) 9월
    김상복 ⾦尙宓 인조 17년(1639) 10월 16일∼인조 20년(1642) 9월김상복(1573∼1652)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중정(仲靜)이다. 아버지는 돈령부 도정 김극효(⾦克孝)이며, 우의정 김상용(⾦尙容)과 좌의정 김상헌(⾦尙憲)의 동생이다. 1591년 19세에 사마시에 급제하여 사옹원 봉사, 종부시 주부 등을 역임하고 1631년 대구부사, 1638년 부호군, 1639년 부사과, 1639년 9월 4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9 월 29일 하직인사를 하고 10월 16일에 부임하여 선정을 펼친 결과 1641년 12월 10 일에 ‘구황(救荒)하는 동안에 한정하여 잉임해 달라’는 전라감사의 서목이 있었으며, 12월 12일에는 잉임을 허락한다는 윤허가 있었고, 1642년 9월에 이임하였다. 1644년 판결사, 1645년 경주부윤·호조참의, 1646년 홍주목사, 1648년 오위장·형조참의, 1651년 돈녕도정 등 내외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면서 선정을 베풀어 명성을 떨쳤다. 『금성읍지』에는 “기묘(1639년) 10월 16일에 도임하였고 임오(1642년) 3월에 임기가 만료되었으나 임기를 연장받아 동년 9월에 이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가 나주목사로 부임할 때 신익성(申翊聖)이 쓴 전별서 「송김나주서(送⾦羅州序)」가 『낙전당집(樂全堂 集)』에 수록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7 | NO.462
  • 김서성 ⾦瑞星 명종 3년(1548) 6월∼명종 3년(1548) 8월
    김서성 ⾦瑞星 명종 3년(1548) 6월∼명종 3년(1548) 8월김서성(1497∼1548)의 본관은 부안(扶安)이며, 자는 응경(應卿), 호는 청수재(淸修齋)이 다. 할아버지는 한산군수 김직손(⾦直孫), 아버지는 희릉참봉 김석홍(⾦錫弘)이다. 1525 년 식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벼슬에 올랐다. 1537년 지평, 1539년 장령, 1541 년 사헌부 장령, 1542년 홍문관 응교, 1543년 사헌부 집의, 1544년 사재감 정으로 산릉도감 낭관을 역임하다가 1548년 6월에 나주목사로 부임하였으나 8월에 신병으로 교체되었다. 『금성읍지』에는 “무신(1548년) 6월에 도임하였고, 동년 8월에 신병으로 사직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5 | NO.461
  • 김석구金錫龜
    金錫龜의 자는 景範, 호는 大谷, 본관은 金海이다. 1835(헌종 1) 2월 남원 松洞面細田에서 金國賢의 아들로 출생했다. 김국현은 아들 김석구가 학문에 힘쓰자 그를 위하여 곡성으로 옮겨 글공부를 하게 하였다. 그는 隣里書塾에서 『小學』을 배우고 이어 맹자를 배우자 스스로 맹자를 자처하였다. 이후 그는 17․8세에 蘆沙 奇正鎭를 뵙고 사사한 지 몇 개월 만에 光州 大谷(現, 潭陽 大峙里 金谷)으로 옮겨서 기정진의 학문을 전수받았다. 이후 김석구는 학문에 더욱 전념하여 정진으로부터 자신의 문하 중 당세의 輔弼治澤을 맡길 만한 인물로 지목받았으며, 문인 중에서도 기정진의 철학과 사상을 가장 깊이 이해하여 스승인 기정진에 의해 김석구, 老栢軒 鄭載圭, 日新齋 鄭義林 등 蘆門三子 중에서도 첫 번째로 손꼽히게 되었다. 그는 평생 場屋(과거 보는 곳)에 드나들지 않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며, 집안이 가난하여 처는 베를 짜고 아들은 밭을 갈아 독서하면서 그를 봉양했다. 기정진의 喪에 三年持服하였고, 內難母喪을 만나 3년 상을 마치고 1885년 고종 22년 8월 8일 별세했다. 기정진은 김석구를 일컬어 ‘夫人不言 言必有中(말을 하지 않으나 말하면 반드시 이치에 맞는다)’이라 하여 공자의 제자 안자에 비유하였으며, 최익현은 스승인 기정진에 대한 관계를 주렴계와 정명도 형제와 비유하기도 하였다.
    2020-08-03 | NO.460
  • 김선근 ⾦善根 고종 13년(1876) 10월 30일∼고종 15년(1878) 2월 27일
    김선근 ⾦善根 고종 13년(1876) 10월 30일∼고종 15년(1878) 2월 27일김선근(1823∼?)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인회(仁會)이다. 아버지는 통덕랑 김정순(⾦⿍淳)이고 병조참판 김매순(⾦邁淳)에게 입적하였다. 1855년 식년시 생원에 합격 하여 1857년 홍릉참봉, 1859년 종묘 부봉사, 1860년 상서 부직장·공조좌랑, 1861년 공조정랑, 1862년 전적, 1863년 영유현령, 1866년 덕천군수, 1867년 평양서윤, 1869년 김제군수, 1872년 무주부사, 1873년 황주목사를 지냈다. 1876년 9월 24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10월 30일 부임하였다. 1877년 2월 1일에는 제도 수령의 천거 단자가 격례(端川府使⾦翼濟, 有違格例)에 어긋난다 하여 추고를 받는다. 6월 19일에는 나수된다. 선주(船主)의 포흠(逋⽋)에 관한 일이었다. 1877년 8월 21일에는 자신의 녹봉을 털어 보충한 돈이 5000량이라는 전라감사 이돈상(李敦相)의 진휼 장계와 성책(成 冊)에 따라 숙마(熟⾺)를 하사받는다. 1878년 2월 27일에는 나주목사 김선근이 신병이 갑자기 중해져 고을로 돌아갈 가망이 전혀없다는 호노(⼾奴)의 장정에 따라 이조가 아뢰자 파출하기 보다는 연석에서 잘 다스린 수령이니 홍주목사 오달선(吳達善)과 서로 바꾸라고 한다. 1880년 동래부사, 1883년 동부승지, 1884년 동의금, 1885년 강원도 독련어사, 1886년 해방총관(海防摠管)·개성유수, 1888년 승지, 1892년 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병자(1876년) 9월 24일에 황주목사에서 옮겨와 제수되어 10월 30일 부임하여 무인(1878년) 2월 27일 홍주목사로 이동하였다.”고 기록되었다. 부산 동래구 가야공원에 1883년에 세운 「부사김공선근영세불망비」가 서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11 | NO.459
  • 김선지
    김선지(金銑之, 1570~1597), 湖節3下-182-2, 光州, 壬辰, 熊峙殉節-《호남절의록》(1799)김선지의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여휘(汝輝), 호는 제남(濟南)이며 참봉 김하(金河)의 후손, 생원 김안방(金安邦)의 아들이다. 지혜와 용맹이 남달리 뛰어나 선조 21년 戊子에 무과에 합격했다.임진왜란(壬辰倭亂)에 선전관(宣傳官) 곡포만호로 전함을 만들어 이순신 정운 어영담 배흥립 신호등과 더불어 한산 사천 부산 당포 당항포 옥포 노량싸움에서 연전연승 함으로써 군공(軍功)을 세우고 좌부장을 역임했다. 또한 의주(義州)에서 왕을 호위하고 보성군수(寶城郡守)로 임명받았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전사하니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기록되었다. 1867년 기정진(奇正鎭, 1798 ~1879) 선생이 撰書한 宣武原從功臣 行寶城郡守 김선지(金銑之, 1570~1597) 선생의 <제남공묘갈명(濟南公墓碣銘)>이 있다. 
    2020-04-01 | NO.458
  • 김섭 ⾦涉 세종 12년(1430) 4월 24일∼세종 12년(1430) 11월 6일
    김섭 ⾦涉 세종 12년(1430) 4월 24일∼세종 12년(1430) 11월 6일김섭(?∼?)의 본관은 영광(靈光)이다. 1400년 사관(史官)이 되었고, 우정언을 거쳐 호조 좌랑, 지평, 우헌납에 오른다. 그러나 1408년 임형의 참서(讖書)사건으로 영해로 귀양을 갔다. 1426년에 우사간으로 복직이 되고 이어서 좌사간이 되었으나 1427년에 상고(上告) 문제로 파직되었다. 1430년에 복직이 되면서 나주목사로 부임하였으나 이듬해 고성으로 귀양 보내졌다. 『금성일기』 「경술년 1430년」의 기록에 “4월에 온 신임 목사 통정대부 김섭이 11월에 사표를 내고 상경하였다.”라 되어 있다. 『금성읍지』에는 “경술(1430년) 4월 24일 도임, 동년 11월 6일 부여군수로 발령받아 상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4 | NO.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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