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56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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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순 宋純 명종 16년(1561) 9월 12일∼명종 17년(1562) 12월 15일
- 송순 宋純 명종 16년(1561) 9월 12일∼명종 17년(1562) 12월 15일송순(1493∼1582)의 본관은 신평(新平), 담양 출신으로 1542년(중종 37) 전라감사를 지냈다. 1561년 8월 2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9월 12일 부임하여 1562년 12월 15 일까지 재임하였다. 1568년 한성부 좌윤이 되어 1569년에 한성판윤으로 특별 승진하고 의정부 우참찬이 된 뒤 낙향하였다. 문집으로는 『면앙집(俛仰集)』이 있고, 『미암일 기(眉巖⽇記)』를 남겼다. 『금성읍지』에는 “신유(1561년) 9월 12일 도임하였고, 임술 (1562년) 12월 15일에 사직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상세이력은 전라감사편 참조.*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5 | NO.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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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시길 宋時吉 인조 23년(1645) 12월 12일∼인조 24년(1646) 12월 2일
- 송시길 宋時吉 인조 23년(1645) 12월 12일∼인조 24년(1646) 12월 2일현감(縣監) 송시길(1597∼1656)의 본관은 여산(礪⼭)이며, 자는 중립(仲⽴)이다. 아버지는 1617년 4월에 나주목사로 부임했던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송일(宋馹)이다. 1615 년에 진사가 되고, 1623년 알성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을 거쳐 1626 년 사간원 정언, 1627년 지평, 1633년 장령, 1637년 상의원 정, 1639년 우부승지, 1642년 동부승지, 1643년 경주부윤, 1653년 도승지, 1645년 11월 12일에 금성현감이 되고 12월에 도임하여 토포사(討捕使)를 겸임하였다. 1648년 형조참판 겸 오위도총 부부총관 등을 거쳐 1652년 한성부우윤·도승지·경기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금성읍지』 에는 “을유(1645년) 12월 12일 도임하였는데 토포사를 겸하였다. 병술(1646년) 봄에 여황면 토적을 잡아 괴수 김방헌 등 20여 인을 체포하여 이 공으로 가선대부가 되었 다. 병술(1646년) 12월 2일에 이임하였다.”라고 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7 | NO.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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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암 조언수(1575~1592)
- 조언수曺彥壽의 본관은 창녕, 자는 일여, 호는 송암松庵이다. 시조는 신라 창성부원군 조계룡을 시조로 증조는 조대진으로 조선왕조 변융 문과 중시에 합격하여 예조 참의를 지냈으며 할아버지 조경덕은 예조좌랑을 지냈다. 아버지 조세랑은 상주영장을 지냈으며 외할아버지는 전주 이학림으로 사헌부 감찰을 지냈다. 어려서 완력이 뛰어나고 재주가 빼어나 8세에 사략을 읽고, 10세에 소학에 들어 자경시를 짓기도 하였다. 조언수는 임진왜란 때 제봉 고경명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의병이다.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량을 모아 광주군고에 바치고 무기 쓰는 법을 익히고 용사들에게 권장하는 시를 지었다. "내 돌아보니 부끄러운 여덟 살 어린이 삼년동안 헛되이 글만 배웠도다. 전국의 흥망사를 논하지 말고 쇄소응대하는 예의와 같이 하리라"이로부터 문장이 성취되었다. 행군이 순창 적성강에 이르러 진을 쳤을 때 적세가 몰아쳐옴에 사졸들이 많이 흩어지려 하니 송암이 충용의가忠勇義歌 삼장을 지어 깊이 깨우치게 하여 사졸들이 흩어지지 않게 하였다.금산전투에 임하여서는 적과 함께 혈전하여 많은 참획을 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제봉 고경명이 패하여 순절하고 송암도 화살이 떨어지고 힘이 다하여 제봉의 아들 학봉 인후와 월파 유팽로, 은재 안영과 같은 날 전사하였다. 이로써 송암은 임진왜란 떄 17세로 전사한 최연소 의병이라고 할 수 있다. 송암 조언수의 사적은 '호남절의록'과 '금산순의비'에 실려 있다. 후일 나라에서는 송암을 선무원종훈에 훈록하고 병조참판에 증직하였다.송암을 기리는 조도현의 시가 한 편 있다.북성예원조도현왼쪽에 장등너뫼오른쪽에 모세추리앞쪽으로 동기미테가작은 구릉으로 길게 누워 있는 그곳적량산 자락에 터를 닦으신 향조송암조언수님의 얼이 서린 자리조상에 대한 책임감불의에 항거한 애정이녹아내린 세월만큼숭조상문의 장으로 삼아 정엄한 뜻을 가슴에 새겨 일상에 가두련다.감상>광산구 본량면 북산리 북성부락 북성예원은 좌청룡 우백호로 앞으로는 바람을 모으고 배산 임수까지 갖춘 명당이다.
- 2020-05-11 | NO.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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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암 최응룡(1537~1592)
- 의병장 松巖 崔應龍(1537~1592) 선생의 행적 *선무원종공신록권(宣武原從功臣錄券)공의 姓貫(성관)은 朔寧崔氏(삭녕최씨)로서, 諱(휘)는 應龍(응룡)이요, 字(자)는 士瑞(사서)이며 號(호)는 松巖(송암)이고, 別號(별호)는 忠節公(충절공)이라고도 불리운다. 公(공)의 始祖(시조)는 高麗前期(고려전기)의 文臣(문신)으로 文下侍郞平章事(문하시랑펑장사)를 歷任(역임)한 諱(휘) 天老(천로)이고, 中始祖(중시조)는 고려 명종조에 參知政事(참지정사)를 거쳐 文下侍郞平章事(문하시랑평장사)에 오른 諱(휘) 瑜價(유가)이며, 一世祖(1세조)는 고려말기 親御侮軍(친어모군) 郎將(낭장)을 歷任(역임)한 諱(휘) 善甫(선보)이다. 朝鮮朝(조선조)에 들어서는 世宗朝(세종조)때 集賢殿(집현전)의 大學者(대학자)이자 名臣(명신)으로 訓民正音(훈민정음)의 創製(창제)에 기여하였고 또한 成宗朝(성종조)에 이르러서는 經國大典(경국대전)을 完成(완성)하는 등 朝鮮前期(조선전기)의 文物(문물)을 整備(정비)하였으며 領議政(영의정)을 歷任(역임)한 寧城府院君(영성부원군) 文靖公(문정공) 諱(휘) 恒(항)은 公(공)의 高祖(고조)가 된다.曾祖(증조)는 文科(문과)에 及第(급제)하여 司饔院正(사옹원정)을 歷任(역임)하고 左贊成(좌찬성)에 贈職(증직)된 諱(휘) 永顥(영호)[一諱(일휘)는 處仁(처인)이라고도 한다]이며, 中宗朝(중종조)에 吏曺判書(이조판서)에 오른 諱(휘) 秀彦(수언)[一諱(일휘)는 溫(온)]의 孫子(손자)이고. 明宗祖(명종조)에 通德郞(통덕랑)에 오른 諱(휘) 卿立(경립)은 公(공)의 皇考(황고)가 된다. 公(공)은 어려서부터 總名(총명)하고 才質(재질)이 타고나서 讀書(독서)에 能(능)하여 스스로 證驗(증험)하고 經史(경사)에 밝았으며 性品(성품)이 强直(강직)하였다. 당시 地方(지방) 士類(사류)들과 瑞石山(서석산)의 證心寺(증심사)에 올라 시류를 講論(강론)하고 唱酬(창수)하였으며 이때 지은 詩(시)가 翠栢樓(취백루) 樓橋(누교) 아래 시냇가 바위에 새겨졌다고 전해오나 1950년 6. 25 전란으로 인해 훼손되어 안타깝기만하다. 倭寇(왜구)들이 남해안 일대에 침범하여 노략질을 일삼는 것을 直視(직시)하고 國防(국방)의 중요성을 논했으나 귀를 기울이는 이가 없어 안타까워하였으며 이를 기화로 兵事(병사)에 觀心(관심)을갖고 文靖公(문정공)께서 著述(저술)한 무정보감(武定寶鑑)등 兵書(병서)에도 조예가 깊어 文武(문무)를 兼備(겸비)하게 되었다. 先親(선친)께서 末年(말년)에 머물렀던 湖南(호남) 南平縣(남평현) 頭山面(두산면) 九沼村(구소촌)[이후 光州(광주) 西面(서면) 柒石里(칠석리) 九沼村(구소촌)- 현재는 광주광역시 남구 구소동 -으로 落鄕(낙향)하여 松下(송하)의 江亭(강정)에서 隱居(은거)하며 山水(산수)와 經史(경사)를 벗삼아 시화(詩畵)를 自娛(자오)하였다. 1592년 宣祖(선조25) 壬辰年(임진년) 4월에 壬辰倭亂(임진왜란)이 일어나자 公(공)은 “國運(국운)이 風前燈火(풍전등화)의 危機(위기)에 놓여 있고 官僚(관료)들과 百姓(백성)들이 塗炭(도탄)에 빠져있는 이때 勳家(훈가)의 後裔(후예)로서 國難(국난)을 坐視(좌시)할 수 있으리오 마땅히 百姓(백성)들과 生死(생사)를 함께 하리라” 라는 遺訓(유훈)를 남기고 南平(남평)에서 아들 參奉(참봉) 諱(휘) 永水(영수)와 더불어 家僮(가동)을 이끌고 倡義(창의)를 하였다. 사흘만에 數百(수백)여명의 義兵(의병)이 몰려들었데 대부분이 民草(민초)들인 것을 보고 “정녕 이들이 이 나라의 主人(주인)이자 의로운 百姓(백성)들이구나”하고 歎息(탄식)과 함께 結義(결의)를 다졌다. 義兵(의병)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南平(남평)에 사는 主簿(주부) 豊山洪公(풍산홍공) 民彦(민언)은 軍糧(군량) 10淅(석)을 보내오고 宗姪(종질)인 崔未能(최미능) 尙重(상중)과 李正郞(이정랑) 大胤(대윤)은 고을에서 運糧(운량)을 담당하고 楊直長(양직장) 士衡(사형)과 朴進士(박진사) 天挺(천정)은 陣中(진중)으로 運糧(운량)을 하고 士人(사인) 慶州崔公(경주최공) 厚立(후립)·弘立(홍립)등 壯丁(장정)들이 찾아와 함께 하여 500여명의 南平義兵(남평의병)을 이루었다. 公(공)은 南平義兵(남평의병)을 이끌고 同年(동년) 6월 3일에 月波(월파) 文化柳公(문화유공) 彭老(팽노)가 이끄는 玉果義兵(옥과의병) 齊峯(제봉) 長興高公(장흥고공) 敬命(경명)등과 合流(합류)하여 全羅左義兵(전라좌의병)을 이루었다. 連山(연산) 珍山(진산)과 礪山(여산)을 지나 7월 8일에 錦山(금산)에 도착하여 7월 9일 官軍(관군)과 義兵(의병)이 左右翼(좌우익)으로 하여 倭敵(왜적)과 對敵(대적)하여 수백명을 무찌르고 다음날인 7월 10일에 倭敵(왜적)은 官軍(관군)을 먼저 急襲(급습)하여 官軍(관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後退(후퇴)하자 義兵(의병)의 陣(진)에도 삽시간에 陣中(진중)이 술렁이고 士氣(사기)가 급격히 저하되자 이에 松巖公(송암공)은 아들 竹峰公(죽봉공) 諱(휘) 永水(영수)로 하여금 先鋒(선봉)에 나아가 倭敵(왜적)을 對敵(대적)케 하여 倭敵(왜적) 수백명을 斬殺(참살)하니 義兵(의병)들은 士氣(사기)가 오르고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수천명의 倭敵(왜적)을 무찔렀으나 衆寡不敵(중과부적)으로 義兵(의병)의 陣(진)도 무너지고 말았다. 戰勢(전세)가 敗(패)함에 이르자 松巖公(송암공)은 조금도 물러섬이 없이 직접 劍(검)을 빼들고 큰 소리로 號令(호령)을하며 수많은 敵(적)을 斬殺(참살)하다가 全身(전신)에 槍傷(창상)을 입고 마침내 殉節(순절)하였다. 義兵(의병)의 死傷者(사상자)가 많았던 이유는 松巖公(송암공) 父子(부자)가 退却(퇴각)하지 않고 앞장서서 勇敢(용감)히 싸운 모습에 義兵(의병)들이 感服(감복)을 하여 끋까지 倭敵(왜적)을 對敵(대적)한 때문이라고한다. 아들 竹峰公(죽봉공) 參奉(참봉) 永水(영수)와 더불어 三代獨子(삼대독자) 父子(부자)가 殉節(순절)하여 宣武原從功臣(선무원종공신)에 策勳(책훈)되어 錄(녹)되었다.당시의 世人(세인)들은 二代獨子(이대독자) 松巖公(송암공)과 三代獨子(삼대독자) 竹峰公(죽봉공) 父子(부자)의 崇高(숭고)한 殉節(순절)에 哀悼(애도)의 뜻을 표하고 忠節公(충절공)과 武烈公(무열공) 父子(부자)라고 불렀다. 1789년 正祖(정조13) 己酉(기유)년에 左副承旨(좌부승지) 滌齋(척재) 李書九(이서구) 先生(선생)은 松巖公(송암공)과 竹峰公(죽봉공) 父子(부자)의 忠節(충절)과 戰功(전공)이 묻혀 있음을 歎息(탄식)을 하고 松巖公(송암공)을 吏曹判書(이조판서)에 竹峰公(죽봉공)을 都承旨(도승지)에 贈職(증직)할 것을 薦擧(천거)하여 증직되었다 松巖公(송암공) 諡號(시호)는 忠節(충절) 竹峯公(죽봉공) 諡號(시호)는 武烈(무열) 이다. 正祖十三(정조13) 己酉(기유:1789)년에 忠勳府(충훈부)에서 靖難(정난), 佐翊(좌익), 佐理(좌리) 3훈의 正勳功臣(정훈공신)인 寧城府院君(영성부원군) 崔恒(최항)과 그의 玄孫(현손)인 宣武原從功臣(선무원종공신) 松巖公(송암공) 崔應龍(최응룡)과 竹峰公(죽봉공) 崔永水(최영수) 父子(부자)의 功勳(공훈)으로 後孫(후손)들에게 忠義衛(충의위) 崔漢福(최한복)등 二十三人(23인)에게 啓下事目(계하사목)을 발급하였다. * 위 내용 중에 일부 광주목사를 지낸 송정(松亭) 최응룡(崔應龍, 1514~1580)과 섞여 있어 자료의 확인이 필요합니다.
- 2020-05-12 | NO.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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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영묵(宋永默)
- 송영묵(1843~?)의 본관은 홍주, 자는 효일(孝一)이며 광주시 거진(오늘날 북구 용두동)에 살았다. 1889년에 眉巖 柳希春을 기리는 모임에 참여하였다.부 : 宋文龜조 : 宋仁源증조 : 宋福鉉외조 : 崔基馥처부1 : 朴東煥
- 2020-03-06 | NO.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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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온묵(宋溫默)
- 송온묵(1853~1903)의 본관은 홍주, 자는 일문(一文)이며 호는 낙헌(樂軒)이다. 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다. 宋駒의 후손이다.天賦聰頴하고 志操淸貞이며 孝於事親하여 誠於奉先이라 自幼勤學이고 甞就에 노사 기정진 선생이 ‘之門獲聞 爲己之學’이라 말했다.부 : 宋來良조 : 宋鶴賢증조 : 宋守憲외조 : 李益五
- 2020-03-06 | NO.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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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요경 宋堯卿 영조 1년(1725) 11월 27일∼영조 3년(1727) 9월
- 송요경 宋堯卿 영조 1년(1725) 11월 27일∼영조 3년(1727) 9월송요경(1668∼1748)의 본관은 은진(恩津)이며, 자는 백유(伯兪)이다. 아버지는 증 이조 참판 송병문(宋炳⽂)이며, 증조할아버지가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이다. 1699년 영릉참봉을 시작으로 1700년 경안찰방, 1702년 진천현감, 1703년 제천현감, 1709년 제용판관, 청도군수, 1716년 선산부사, 1720 충주목사, 1724년 금천군수(⾦川), 1725 년 6월 담양부사, 1725년 10월 21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11월 27일 부임하다가 1727년 11월 28일에 의금부로 잡아들이라는 명령이 있어 파직되었으나 1741년에 다시 심의한 결과 이 사건은 어사 이광덕(李匡德)의 무고로 관직을 박탈당하여 금고형(禁 錮刑)을 받았음을 확인하고 다시 오위장(五衛將)에 임용되었던 일이 있었다. 1735년 부호군, 1736년 첨지중추부사, 1737년 돈녕도정, 1741년 오위장, 1744년 통정대부에 가자, 1745년 부호군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을사(1725년) 11월 27일 도임하 였고 정미(1727년) 9월에 어사의 장계에 의하여 파직되었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22 | NO.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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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우 宋愚 태종 3년(1403) 8월 19일∼태종 5년(1405) 12월 24일
- 송우 宋愚 태종 3년(1403) 8월 19일∼태종 5년(1405) 12월 24일송우(1354∼1422)의 본관은 진천(鎭川), 자는 여성(汝省), 호는 송정(松亭)이다. 아버지는 서령 송임(宋琳)이다. 1372년 식년시 문과에 동진사로 합격, 1390년 사헌부 지평, 지성주군사, 우헌납이 되었다. 1391년 3월에 김종연의 모의사건에 연루되어 우홍부 등과 함께 귀양 갔다가 11월에 풀려났다. 1402년 사헌부 집의, 평양도 찰방, 1406년 예조참의, 뒤에 판정주목사와 판안변부사를 지냈다. 『금성일기』 「계미년 1403년」에 “목사 송우가 8월 19일에 도임하였다가 을유(1405년) 12월에 사간으로 임명되어 갔다.”고 기록되었으며, 『금성읍지』에는 “계미(1403년) 8월 19일 도임, 을유(1405년) 2 월 24일 좌사간(左司諫)으로 승진 이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4 | NO.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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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익손 宋益孫 세조 9년(1463) 10월 26일∼세조 10년(1464) 9월 4일
- 송익손 宋益孫 세조 9년(1463) 10월 26일∼세조 10년(1464) 9월 4일송익손(1419∼1482)의 본관은 여산(礪⼭)이며, 자는 익지(益知)이다. 당시 고부 출신으로 공조전서 송희(宋禧)의 증손이며, 처남인 홍달손(洪達孫·左相)으로 말미암아 계유정난에 참여하여 정난공신(靖難功⾂) 3등에 책봉되었다. 전농시 직장에 임명되고 통례문 봉례랑, 의영고사·선공 한성판관을 거쳐서 1456년에 선공 부정에 임명되었다가 곧 전농 소윤에 뽑혔다. 1457년에 종부시·한성부·예빈시 소윤, 부지통례문사로 전직되었다가 세자 우사어로 옮겼다. 1459년 에 판선공감사, 1461년에 통정대부 첨지중추원사에 오르 고, 1463년에 가선대부 나주목사로 여산군(礪⼭君)에 봉해졌다. 1464년 9월 불경한 일을 한다고 상소하자 9월 14일 의금부에 하옥되었다가, 무고로 밝혀져 9월 27일 석방되었다. 1469년에 가정대부에 오르고, 1471년에 부호군에 임명되고, 1474년에 양민을 은폐(隱蔽)한 일에 연좌되었다. 뒤에 부조지전(不祧之典)이 내려졌다. 『금성일기』 「계미년 1463년」에 “신임 령공 추충난정공신 가선대부 송익손이 11월 24일 도임하였 다.”라고 되어 있다. 이임 기록은 없으나, 실록에 의거하면 1464년 9월에 투옥되면서 떠난 것으로 보인다. 시호는 양묵(襄墨)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5 | NO.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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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인 宋寅(宋因) 태종 1년(1401) 4월 25일∼태종 2년(1402) 1월 6일
- 송인 宋寅(宋因) 태종 1년(1401) 4월 25일∼태종 2년(1402) 1월 6일송인(1356∼1432)의 본관은 남양, 호는 행정(杏亭) 또는 송촌(松村)이다. 전라도 보성에 살다가 해적이 소란을 피우자 양친과 과주(과천)로 이주하였다 한다.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동진사로 합격하고, 1392년 좌헌납, 1395년 호조급전사 시사, 1402년 우사간, 1404년 좌사간, 한양부판관, 1408년 상주목사 등을 거쳐 1410년에 강원도관 찰사가 되었다. 『동문선』에 「차강릉동헌운(次江陵東軒韻)」과 「차평해월송정운(次平海越松 亭韻)」이라는 시가 있다. 1408년에는 상주목사로서 풍영루를 중건하였다. 두문동 72현중 한 사람으로 고흥 운곡사(雲⾕祠)에 배향되어 있다. 『금성일기』 「신사년 1401년」에 “목사 송인이 4월 25일 도임하였다가 임오(1402년) 1월 6일 사재판사가 되어 서울로 갔다.”고 되어 있어 우사간으로 임명된 것과 일치한다. 『금성읍지』에는 “신사(1401년) 4월 25일 도임, 임오(1402년) 1월 6일에 교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4 | NO.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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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인옥 宋寅⽟ 고종 9년(1872) 9월 2일∼고종 12년(1875) 9월 3일
- 송인옥 宋寅⽟ 고종 9년(1872) 9월 2일∼고종 12년(1875) 9월 3일송인옥(1826∼?)의 본관은 여산(礪⼭)이며, 자는 맹여(孟汝)이다. 아버지는 김해부사 송지양(宋持養)이다. 1843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여 1846년 규장전운을 하사 받았다. 1855년 휘경원 참봉, 1857년 선공봉사, 1858년 사포직장, 1863년 경릉직장·제용주 부·삼물소 낭청, 1864년 의흥현감, 1866년 교하군수, 1870년 맹산현감, 1871년 울산 부사를 지냈다. 1872년 7월 27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9월 2일 부임하였다. 1873년 12월 2일에 삼군부가 나주진의 포군을 나주목에 합설하도록 행회하였는데, 전라감사 이호준이 송인옥 목사의 첩정에 따라 포료(砲料)가 넉넉치 못하니 읍진(⾢鎭)의 화포군 200명을 절반을 남겨두고 액수는 덜어서 급료를 보태 연습하는데 전념한다고 보고하자 그대로 시행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1874년 9월 24일에는 나주의 세선(稅船)이 남포(藍浦)에서 취재(臭載) 되었는데, 충청감사의 사계(査啓)로 인하여 선장관(船裝官)인 나주목사 송인옥(宋寅⽟)이 짐을 꾸려 출발하는 일이 지체되고 있으니 죄상을 품처하도록 의정부가 아뢰는데, 세선에 늦게 짐을 꾸리는 것은 용서해 주기 어렵지만 나주는 호남의 큰 곳으로 가을 농사가 한창 바쁜 때여서 죄를 진채 거행하게 한다. 1882년 부사 과, 1894년 장성부사, 1897년 중추원 의관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임신(1872 년) 7월 27일에 울산부사에서 옮겨와 제수되어 9월 2일 부임하여 재직하다 을해(1875 년) 5월 7일 상경하여 9월 3일에 삼척부사로 자리를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울산 동헌 뒷마당에 「부사 송공인옥 청덕비(府使宋公寅⽟淸德碑)」가 세워져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11 | NO.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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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일 宋馹 광해군 9년(1617) 6월 2일∼광해군 10년(1618) 4월
- 송일 宋馹 광해군 9년(1617) 6월 2일∼광해군 10년(1618) 4월송일(1557∼1640)의 본관은 여산(礪⼭)이며, 자는 덕보(德甫), 호는 반학(伴鶴)이다. 아버지는 장령 송승희(宋承禧), 동생 송준(宋駿)과 송박(宋 ), 아들 송시길(宋時吉)까지 3 대가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송시길은 나주현감을 역임하였다. 1595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596년 세자시강원 사서가 되었다. 1597년 사간원 헌납·예조좌랑, 1598년 사헌부 장령·세자시강원 필선, 1599년 사헌부 집의·부응교를 거쳐 성균 직강에 이르렀다가 삭탈관직 당했다. 1607년 광주목사(廣州牧使), 1612년 9월에 해주목사, 1614년 황해도관찰사, 1616년 형조참판, 1617년 4월에 나주목사로 제수되었다. 이어서 병조참판, 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기로소(耆⽼所)에 들어갔다. 『금성읍지』에는 “정사 (1617년) 6월 2일 도임하였고, 무오(1618년) 4월에 사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7 | NO.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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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전 宋琠 태종 15년(1415) 4월 26일∼태종 15년(1415) 7월 13일
- 송전 宋琠 태종 15년(1415) 4월 26일∼태종 15년(1415) 7월 13일송전(?∼1435)의 본관은 여산(礪⼭)이며, 아버지는 송윤번(宋允蕃)이다. 1431년 의서 『향약집성방(鄕藥集成⽅)』을 편찬한 유효통(兪孝通)이 그의 사위가 되면서 여산송씨 세거지인 연산(현재 논산시 연산면)으로 와 기계유씨 전서공파의 입향조가 되었다. 1407년 도만호로 충청도 병선 11척을 이끌고 바다에서 구황할 물건을 채취하고, 전라 도의 왜구를 수색하였으나 군산도에 이르렀다가 회오리바람을 만나 병선 1척이 침몰하여 10명이 죽은 일로 죄를 치르기도 하였다. 『금성일기』 「을미년 1415년」의 기록에 “판목사 송전이 같은 달 26일에 도임하였다가 7월 13일 임무를 바꾸었다.”라고 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4 | NO.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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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정규 宋廷奎 숙종 26년(1700) 7월 28일∼숙종 27년(1701) 1월 17일
- 송정규 宋廷奎 숙종 26년(1700) 7월 28일∼숙종 27년(1701) 1월 17일송정규(1656∼1710)의 본관은 여산(礪⼭)이며, 자는 원경(元卿), 호는 우수(迂叟)이다. 참판 송일(宋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도승지 송시길(宋時吉)이고, 아버지는 송증(宋 拯)이다. 1679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고, 1683년 증광시 문과에 갑과 3위로 급제하 여, 1686년 보안찰방, 1688년 장연현감, 1690년 사간원 정언, 1691년 충청도사, 1694년 수찬, 1696년 경성판관, 1697년 양주목사, 1698년 광주(光州)목사, 1699년 병조참의에 올랐다. 1700년 6월 5일 나주목사 제수되어 7월 28일 부임하였다. 1700 년(숙종 26) 12월 30일 실록에 나주의 사인을 장살한 일로 그 가족이 두 번이나 격쟁을 하고 사헌부에 정장을 낸 내용이 있다. 1708년 강원도관찰사, 1709년 승지를 역임 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경진(1700년) 7월 28일 도임하였고 신사(1701년) 1월 17일에 사직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글씨가 뛰어나 문묘 대성전(⼤成殿)의 현판을 썼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22 | NO.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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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정희 宋正熙 철종 14년(1863) 3월 15일∼고종 2년(1865) 6월
- 송정희 宋正熙 철종 14년(1863) 3월 15일∼고종 2년(1865) 6월송정희(1802∼1881)의 본관은 은진(恩津)이며, 자는 문오(⽂吾), 호는 풍야(豊埜)이다. 아버지는 판관 송계근(宋啓根)이고 이조참판에 추증된 송계락(宋啓樂)에게 입양되었다. 1834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여 1836년 영릉창봉, 1837년 가례도감 감조관·부사용, 1840년 한성주부, 1841년 제용판관, 1842년 홍산현감, 1854년 상의첨정·공조좌랑, 1856년 효릉령, 1857년 건릉령, 1858년 보은군수, 1861년 양양부사를 지냈다. 1863 년 7월 3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었다. 1865년 사복정을 지내고 1875년 통정대부에 가자, 1881년 공조참판·부총관·호군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계해(1863년) 7월 3 일에 양양부사에서 옮겨와 제수되어 임금을 사조하고, 8월 22일에 부임하였으며 갑자 (1864년) 4월 12일에 순영의 장계에 의해 파직되고, 4월 17일 동조(東朝, ⼤妃殿)의 특사로 임기를 채우게 되어 6월 15일에 나주에 도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나주향 교, 계성사(啓聖祠), 망화루, 민고 등을 중수하였다. 문집으로 『풍야집(豊埜集)』과 『남유 록(南遊錄)』이 있다. 『남유록』에 「나주동헌금금헌시판(羅州東軒錦琴軒詩板)」, 「나주향교 중수기」, 「망화루중수기」 등의 시문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11 | NO.29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