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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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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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건
    신건(申楗), 湖節1上-053-2, 光州, 壬辰, 高敬命同殉-《호남절의록》(1799)
    2020-04-02 | NO.77
  • 신덕균(申德均)
    지리산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펼친 신덕균(1878∼1908)은 광주 우산동(또는 각화동 277) 출신이다. 초명(初名)은 덕순(德淳), 자는 정효(正孝), 호는 몽암(夢菴), 본관은 평산으로 신태수(申泰洙)의 아들이다.일찍이 기우만(奇宇萬)과 전우(田愚)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문에 뛰어났다.광주북구지(1994)에는 우산동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호적부 제적등본에는 각화동 277번지로 등재되어 있다. 출신지에 대한 세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그의 손자 후복(厚福)이 현재 각화동에 거주하고 있다.1906년 6월 최익현, 임병찬이 태인에서 호남의병을 일으킬 때 달려가서 참여하려 했으나 의병이 쉽게 패하자 중단하였다. 그는 1907년 4월에 창평에서 고광순(高光洵)이 의병을 일으켜 화순을 점령하고 동복으로 진군한다는 소식을 듣고 부하들을 이끌고 달려갔으나 고광순 의병대가 도마치전투에서 패하여 해산해 버리자 광주로 돌아와 재기의 날을 기다렸다.그는 1907년 9월 1일을 기하여 고광순 의병대가 재기하자 가담하여 참모의 중책을 맡았으나 병력과 무기가 부족하여 신덕균은 윤영기(尹永淇)와 함께 광주에 가서 해산군인들을 소모하여 그 수가 40여 명이 되었다. 그런데 병력을 거느리고 구례로 가는데 도중에서 고광순 의병대의 패배 소식과 고광순 등의 전사 소식을 듣고 독자적으로 지리산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벌였다.신덕균은 1908년 초에 의병대를 정비하여 3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화개(花開)로 진군하다가 왜적 30여 명을 무찌르고 지리산을 종횡하면서 적과 전투를 벌였다. 그는 차츰 병력과 장비가 부족해지자 부장에게 맡기고 광주로 돌아와 전답을 팔아 군기를 마련한 후 부대로 돌아와 전남․북의 경계를 누비면서 활동하다가 11월 초순에 의병을 해산하고 도피 은신하던 중 전라북도 순창 회문산(回文山)에서 왜군에게 붙잡혀 7일 정읍 고부의 두승산(斗升山)에서 적에게 피살, 순국하였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2020-03-06 | NO.76
  • 신응하
    신응하(申應河), 湖節1上-046-2, 光州, 壬辰, 高敬命同殉-《호남절의록》(1799)
    2020-04-02 | NO.75
  • 안길환(安吉煥)
    안길환(安吉煥, 1851~1908)의 본관은 竹山 , 자는 성운(成運)이다.부 : 安秀權조 : 安志默증조 : 安起魯외조 : 全幸魯처부1 : 羅相翊1916년 송사 선생 襄禮 때 喪次司書로 참석하였다.1927년 8월에 吳駿善 柳昌秀 등과 함께 蘆沙 문도들에게 高山祠에 함께 배향할 제자들의 위패를 정하자는 내용의 통문을 보냈다.
    2020-08-05 | NO.74
  • 안용환
    1931년 간행된 기우만(奇宇萬,1846~1916)의 《송사집松沙集》 48권에 죽산안씨 20세 안용환(安龍煥,1857~1911)의 행장(行狀)이 기록으로 남아있다.淸深堂安君行狀 君諱龍煥字慶雲。淸深其堂顔也。安氏本順興人。文成公晦軒先生諱裕其上祖。有闢異衛正之功。從祀夫子廟。文惠公諱元衡門下侍中。勳封竹城君。子孫分貫竹山。雙淸堂諱勉官判典。封興寧君。竹溪諱魯生。始仕國朝。集賢殿大提學。生員諱孟孫。始居光州。荷谷諱忠達。文章行義。爲世宗仰。官正郞。士林建祠俎豆之。高祖諱斗胤。曾祖諱宅魯。祖諱思孝。考諱載五。下鄕數世後。顯榮雖少替。而世篤文行。爲鄕邦矜式。衣冠古家。妣光山金氏父修儀。德配君子。君生哲宗丁巳(1857)五月戊寅。才晬而孤。不記父顔。爲畢生痛。誠敬事母。出外遄反曰吾母待我。得異味。必以獻。與儕兒遊。口無戲言曰。悖出必悖入。羞辱及於父母。甫上學。自知劬書。不煩提敎。每日授課。歸讀於母側曰。母氏孤踽。須臾不可離也。少長。乃閣書曰。親老不養。徒事文墨。子職有闕。樵山漁水。庋閣常餘。慈夫人常多疾。迎醫合藥。舍置他事。疾革。晝宵涕淚。遭故。擗踊頓絶。水穀不入於口三日。雖甚貧困。而附身附棺。誠信無憾。旣殯。曰吾據禮守廬。則奠獻莫需。行傭樵採。饋食無闕。及葬。展晨昏不廢。當膝成坎。至行所感。有欲妻之者。君卻之曰。雖甚竆厄。禮限不可違越。服闋娶婦。勤儉立家。先置祭田。以永香火。周恤族戚。不計有無。收養族子女。嫁娶資生者亦數人。凡民有喪。貧不能經紀。則出力相助。使無遺憾。族黨墳墓無主頹圮。改築之。使不犯五患。蓋其天性仁厚。見人之急。若癏在己。嘗靑馬邪熾。勒人爲黨。君乃與里人立約曰。凡我同約之人。勿染於邪。否者不可與同閈。有潛誘里子弟者。君招致諭之曰。惑亂黔首。鄕有八刑。人雖可欺。不畏于天。人之異乎禽獸。爲不失其良心。耕田鑿井。庶民常職。左道惑衆。爲獸爲禽。辭氣懇至。其人愧謝。是以一里賴而潔淨。每爲彼輩眼釘。數被侵擾。亂平後皆來請罪。君笑曰。往日之事。否運所使。革心爲貴。何至相謝。聞者皆服其寬弘。平居不見邑宰。或致書願見。輒辭以愚劣。歲丙申。余妄意討復。駐陣在光山館。君仗劒而至。誓以同死。僨事之後。痛哭杜門。敎子課孫。爲日間事業。于後五賊賣國。憤不自勝。卽欲叫閤請斬。沮格莫遂。仰天痛歎。或至廢食。晩構一堂將落。夢有老人大書壁上曰淸深。覺而自解曰。擧世皆濁。反之則淸。擧世皆淺。反之則深。所以爲戒者大矣。因受以爲扁。蓋其平日所守者正。故發於宵寐者如此。所謂老人者。豈靈臺主人歟。辛亥(1911)冬。偶得難醫之祟。臨命。顧謂子圭冕曰。世衰道微。魍魎晝行。世間萬事。無足置胷中。須立心制行。從師取友。謹守世風。則入地之目。庶可瞑矣。以翌年正月二日乙丑(1925)終。得年僅五十五。嗚呼短矣。見今滔滔胥淪。不與俱。所謂千萬人中常知有己。如君者不數數有焉。使久於世。庶可以激濁揚淸。而何天奪之速也。葬再遷於白蓮洞後佳藏洞戌坐之原。夫人河東鄭氏仁默女。有婦德。一男卽圭冕。副室一女適高濟崑。圭冕以父命從余遊。淳謹好學。庶不負君之遺訓矣。草事行爲家狀。以余知君深。請刪潤以示久遠。吾何忍辭。
    2020-04-08 | NO.73
  • 양경매
    양경매(梁景梅), 湖節4中-114-4, 光州, 甲子, 扈從-《호남절의록》(1799)
    2020-04-02 | NO.72
  • 양산룡(1552~1597)
    양산룡(梁山龍)의 본관은 제주. 자는 우상宇翔이다. 부친은 송천 양응정이며 어머니는 죽산박씨로 판관 박중윤의 딸 사이에 차남으로 1552년 박뫼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5~16세부터 문장이 뛰어났다.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 23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41세에 임진왜란을 맞게 되자 송제민(宋濟民)ㆍ양산숙(梁山璹) 등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김천일 휘하에 들어가서 아우인 양산숙을 부장으로 하고 자신의 아들인 양상건을 종사관으로 임명하였다. 1592년 5월16일 김천일(金千鎰), 양산룡(梁山龍)ㆍ양산숙(梁山璹) 등은 의병을 모아 6월3일 서울을 향해 북진하는 출병식을 열었다. 그 장소가 바로 나주의 금성관이다.얼마 후 아우인 양산숙梁山璹이 진주 남강에 몸을 던져 절사하였다는 비보를 듣고 달려가 시신을 찾으려고 하였으나 찾지 못하고 초혼장招魂裝으로 아버지 양응정의 묘 아래에 장사하고 모친의 슬픔을 달래는데 온갖 효성을 다하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나 왜군의 횡포가 극심하자 피난을 위해 일가족을 배에 싣고 무안의 삼향포(지금의 몽탄강)에 다다랐을 때 적선이 들이닥쳐 화를 당하게 되자 적을 크게 꾸짖고는 대성통곡을 하면서 어머니 죽산박씨를 모시고 바다에 뛰어들어 절사하였다. 1635년 나라에서는 양산룡에 대하여 효자 정려를 내렸다.
    2020-05-08 | NO.71
  • 양산숙(1561~1592)
    양산숙梁山璹의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회원會元. 기묘명현 학포 양팽손梁彭孫의 손자이며, 대사성을 지낸 양응정梁應鼎의 셋째 아들이다. 광산구 어룡동 박메마을 출신으로 성혼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경서에 전심하였으며 천문ㆍ지리ㆍ병학에도 뛰어났다.양산숙이 다섯살 난 어느날 아버지 송천공이 그 손목을 잡고 들에 나가 논밭을 살피다가 문득 아들을 시험해 보기 위해 질문했다.밭을 갈고 있는 소와 말을 가리키며 산숙아 너는 저 소와 말 가운데 하나를 가지라면 어느 것을 갖겠느냐? 이 물음에 어린 산숙의 입에서 거침없이 다음과 같은 대답이 나왔다. 말은 남자의 보배입니다. 천하를 마음대로 돌아 다닐 라면 말이 없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저는 말을 갖겠습니다. 음 참으로 훌륭한 생각이다. 그 마음 잊지 않도록 하여라. 산숙은 나이 열 살이 되기 전에 벌써 학문이 깊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열여섯 살 때 산숙은 아버지가 의주목사(義州牧使)로 부임함에 따라 그곳으로 갔다. 만원(萬院)이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우연히 그 당시의 대학지인 미암 유희춘(眉岩 柳希春)을 만나게 되었다. 유희춘은 산숙의 기상이 늠름하고 행동이 진중한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는 마음이 항상 평온하고 선(善)과 정의(正義)를 좋아하겠다고. 16세 때 형 산룡(山龍)과 병법(兵法)을 논의 하다가 아버지로 부터 진도(陣圖:진터의 그림)를 받아들고 연구한 끝에 합변의 원리(合變의 原理:합하면 변화하는 법칙)등을 익히기도 하였다. 그 뒤에 우계 성혼(牛溪成渾)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스승 성혼은 양산숙의 영득함에 탄복하여 항상 나이 어린 그에게 유지지사(有志之士)라 존칭을 했다고 한다 .큰 뜻을 품은 선비라는 뜻이다. 그는 성혼문하에서 공부를 마친 뒤 반계(蟠溪)라는 곳에 정사(精舍:학문을 닦기 위해 지은 집)를 짓고 수양에 힘썼다. 그는 1555년 왜구(倭寇:일본해적)가 고흥 손죽도(損竹島)를 침범하자 만호(萬戶) 이대원이 이를 맞아 싸우다 전사했다는 애기를 듣고 슬픔에 잠겨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가 26세 되던 해 가을 대마도주(對馬島主) 다찌바나 야스히로(橋康廣)라는 자가 왜의 사신으로 건너와 강화조약(講和條約)을 맺기를 청해왔다. 양산숙은 남원에 사는 양대박(梁大樸, 義兵장으로 고경명과 같이 금산에서 순절)을 찾아가서 같이 일본사신(日本使臣)의 거동을 살필 것을 약속하고 두 사람은 국왕의 사신(使臣)처럼 가장하고 영남(嶺南)으로 향하였다. 실은 다찌바나란 자는 강화조약을 맺으로 온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방위태세(防衛態勢)를 살피러온 첩자였다. 그자는 우리나라에 상륙하여 동래부사(東萊府使)가 술대접하는 자리에서 일부러 술잔을 떨어뜨려 깨버리는 무례를 저질렀다. 이 말을 전해들은 양산숙과 양대박은 다찌바나가 일본첩자 라는 확신을 가졌다. 얼마 후 양산숙과 다찌바나는 동래부사의 소개로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그 석상에서 다찌바나가 대뜸 시비를 걸어왔다. 물론 통역을 통해서였다. 당신이 찬 칼을 왜 그리 짧으냐? 즉 우리나라의 무방비를 비웃은 것이다. 그대가 가진 창은 너무 길어서 그대의 운신을 그릇칠 것이다. 그러자 다찌바나는 황급히 말에서 내려 나부시 절을 하고 상주(尙州)까지 동행해주기를 간청했다. 다찌바나는 상주에 도착하자 목사 송응동(宋應洞)이 잔치를 베풀고 기생들의 춤이 시작되었는데 다찌바나는 송목사의 늙은 모습을 보고 통역을 시켜 나는 여러 해 동안 싸움터에서 살아서 이렇게 수염과 머리털이 희게 되었소이다만 사또께서는 늘 기생속에 파묻혀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지내셨을 것인데 왜 그렇게 허-였습니까? 하고 비꼬았다. 자리를 같이한 양산숙은 그 말을 듣고 울화통이 터졌지만 상대가 한나라의 사신이니 만큼 꾹 참을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것이 우리의 방비가 없어서 당하는 수모라 생각하니 절분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그는 고향 광산으로 돌아와서 더욱 무예를 닦고 학문에도 힘을 썼다.1592(선조25년)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산숙은 고향인 박메마을로 와서 형 산룡(山龍) 동생 산축(山軸)과 더불어 목이 메이도록 통곡을 하며 어머니 죽산박씨(竹山朴氏)앞에 자기의 소신을 아뢰었다. 어머님 저희들 삼형제는 나라가 위태로운 이때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기를 뜻을 모았습니다. 용서를 바랍니다. 여느 어머니 같으면 그 무슨 당찮은 소리냐-. 나라를 지키는 군사들이 있는데. 하고 펄쩍 뛸 것이다. 그러나 박씨부인은 그렇지가 않았다. 오히려 그 뜻을 가상히 여기고 타이르듯 말했다. 우리 집안은 세록(世祿)이 있는 가문으로 나라의 은덕을 많이 입은 가문의 자제로서 마땅히 그래야 하느니라- 돌아가신 아버님께서도 늘 남쪽에 왜침의 징후가 있으니 그때가 오면 나라를 지키는데 신명을 바쳐야 하느니라 하셨습니다. 어머님 저희들의 뜻을 헤아려 주셔서 감사하옵니다. 이렇게 3형제는 거의(擧義)하기로 결심을 했다. 나주에서 창의하여, 김천일을 맹주로 삼고 양산숙은 부장이 되었다. 그 뒤 김천일과 함께 북상하여 수원에 출진하여 활약했다. 강화도로 이진할 무렵, 곽현과 함께 주장의 밀서를 가지고 해로를 통해 의주 행궁行宮(임시 궁궐)에 도착하여 선조에게 호남ㆍ영남의 정세와 창의활동을 자세히 보고하였다. 이 공으로 공조좌랑에 제수되었다. 돌아올 때 호남ㆍ영남에 보내는 교서를 받아 남도에 조명을 하달하였다. 적이 남도로 퇴각하자 김천일과 함께 남하하여 진주성에 들어갔으나 침공하려는 왜의 대군 앞에 군사가 부족하자 명나라 장군 유정의 군진에 가서 군원을 강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할 수 없이 단신으로 입성하여 적과 끝까지 항전하다가 김천일과 함께 남강에 투신 자결하였다. 동서분당 때 서인으로 조헌(趙憲)과 함께 이이(李珥)·성혼을 지지하며 동인 이산해(李山海)·유성룡(柳成龍)을 배격하는 소를 올렸다. 사후에는 좌승지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민이다. 나주의 정렬사旌烈祠, 진주의 창렬사彰烈祠에 제향되었다.
    2020-05-08 | NO.70
  • 양산축(1571~1597)
    양산축梁山軸의 본관은 제주濟州이며 자는 유석維石이다. 1571년 박뫼마을에서 송천 양응정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1세에 부친상을 당하였으며 예의범절이 어른들과 다름없었으며 두 형 양산룡梁山龍과 양산숙梁山璹을 본받아 차분한 마음으로 글을 외우고 읽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도량이 넓어 아버지 유언에 따라 일찍이 율곡 이이를 찾아가 대학을 배우고 1년 후 돌아왔다. 성인이 되어 제봉 고경명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산룡, 산숙 두 형과 창의하였고 정유재란 당시 가족들과 함께 무안 삼향포로 피난 중 적병을 만나 함께 투신하여 순절하였는데 이때 나이가 27세였다.양산축의 부인 장흥고씨는 고경명 의병장의 손녀이다. 전 가족이 순절하던 날 고씨는 양산축의 뒤를 따라 바다에 몸을 던졌는데 두 여종의 도움으로 살아남아 뱃 속의 아이 만용을 낳아 후손을 잇게 했다.광주광역시 광산구 박호동에 있는 양씨삼강문은 충민공 양산숙 일가 7명을 기리기 위해 인조 13년(1635)에 세운 정려문(旌閭門)이다. 정려문은 충신, 효자, 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해 나라에서 그 동네에 세워주는 문을 뜻한다. 양씨삼강문은 정면 5칸·측면 1칸짜리 맞배지붕의 평범한 건물이다.
    2020-05-11 | NO.69
  • 엄덕록
    엄덕록(嚴德祿), 湖節3下-178-1, 光州, 壬辰, 熊峙殉節-《호남절의록》(1799)
    2020-04-02 | NO.68
  • 엄순
    엄순(嚴純), 湖節5中-135-3, 光州, 戊申, 倡義-《호남절의록》(1799)
    2020-04-02 | NO.67
  • 오자치 (吳自治)
    본관은 나주이며 금성군 오신중(錦城君 吳愼中)의 아들로 태어났다.조선 전기의 무신 오자치 장군은 어려서부터 용력이 뛰어나 같은 나이 또래에서는 감히 당할 자가 없었다고 한다. 무예를 닦으며 자라면서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했고 병서를 두루 읽으며 무장으로서의 자질을 키워 나갔다. 이후 무과 시험에서 장원급제를 한 오자치는 주부벼슬에 올랐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가 난을 일으키자 부장 조석문과 더불어 3개월에 걸친 토벌전 끝에 이시애, 이시합의 형제를 평정하여 왕이 훈장을 내렸다. 1476년(성종 7) 9월 부친의 봉양을 이유로 낙향하였다.현재 그의 영정인 ‘오자치 영정(吳自治影幀)’이 남아 있는데 조선 초기 화법을 보여주는 중요한 초상화로 보물 1190호로 지정되었다. 또 광산구 지평리에는 오자치가 자신의 애마를 기념하기 위해 자연석을 깨뜨려 만들었다는 ‘오자치 용마’가 있다. 오자치의 용마바위에 관한 전설은 오자치의 강인함을 말해주고 있다. 조선 전기의 무신인 오자치 장군은 민가에 피해를 주던 야생마를 단숨에 잡아 길들이고 말과 함께 무예를 닦던 중 하루는 ‘말이 화살보다 느릴 경우 목을 베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복룡산을 향해 화살을 쏜 오자치는 말을 타고 달려 산위에 도착해 화살을 찾아보았지만 화살이 보이지 않자 말의 목을 벴다. 그 순간 화살이 뒤에 날아와 꽂혔고 오자치 장군은 자신의 성급함을 뉘우치며 그곳에 놓인 자연석을 이용해 비석을 세운 뒤 죽은 말을 달랬다는 이야기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이 바위를 부숴 도로공사에 사용하려고 했다가 돌을 떨어낸 사람이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일이 있었다는 등 이 용마바위에는 불의를 참지 못하는 신령함이 깃들어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그의 묘와 영당은 광주광역시 광산구의 용진산 아래 원당마을 원당영각에 자리하고 있으며 오자치 장군의 재실인 시기재와 근처엔 재현된 용마바위가 놓여있다. 오자치의 묘 옆에 심어져 있는 백일홍은 나라에 슬픈 일이 생기면 꽃을 피지 않는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2020-03-02 | NO.66
  • 유광천(柳匡天)
    1732년(영조 8) 1월 26일∼1799년(정조 23) 1월 19일. 조선 후기 문신‧유학자. 자는 군필(君弼), 호는 귀락와(歸樂窩)이며, 본관은 서산(瑞山)이다. 광주(光州) 오호리(五湖里)에서 출생하였다.증조부는 나옹(懶翁) 유익서(柳益瑞)이고, 조부는 생원(生員) 유지채(柳之采)이며, 부친은 증사복시정(贈司僕寺正) 양기공(兩棄公) 유휘소(柳輝韶)이고, 모친은 함평이씨(咸平李氏) 생원 이숙빈(李淑馪)의 딸이며, 처부는 문정공(文正公) 김인후(金麟厚)의 6세손 김기조(金基祖)이다.7세 때부터 학문을 익혀, 9세에 『논어(論語)』와 『맹자(孟子)』를 마쳤다.28세 때인 1759년(영조 35) 기묘 별시(別試) 병과 6위로 급제한 뒤, 벼슬은 1779년(정조 3) 장령(掌令)을 거쳐 경성판관(鏡城判官)에 제수(除授)되고, 1786년(정조 10) 헌납(獻納), 1792년(정조 16) 사간(司諫)에 이어, 1796년(정조 20) 승지(承旨)에 이르렀다.『정조실록(正祖實錄)』에 의하면, 1787년(정조 11) 2월 헌납(獻納) 유광천이 성군의 도리와 백성들의 구제에 대해 상소하였고, 3월에 성균관(成均館) 유생의 일과 선정(先正) 조헌(趙憲)의 후손의 녹용에 대해 건의하였으며, 12월에는 청렴한 관리의 등용 등을 들어 오늘날의 폐단을 없애기를 주청한 상소가 있다.부인 울산김씨(蔚山金氏) 사이에 두 아들 유학(幼學) 유동식(柳東植)‧유학 유동환(柳東煥)을 두었다. 저서는 시문집 『귀락와문집(歸樂窩文集)』 16권 8책의 석판본이 있는데, 1934년 그의 5세손 유영희(柳永禧)가 연보(年譜)를 작성하고, 6세손 유병구(柳秉九)와 유병희(柳秉熙)가 편집 간행하였다. 서문(序文)은 없고, 권말에 유병구와 유병희의 발문(跋文)이 있다. 잡저 가운데 「산언(散言)」은 주로 경전(經典)에 있는 은미한 말과 매우 깊은 뜻만을 발췌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으로, 국립중앙도서관에 있다.묘지는 군북(郡北) 오동촌(梧桐村) 뒤 간좌(艮坐)의 언덕에 있다. 묘갈명(墓碣銘)은 이조판서(吏曹判書) 이조원(李肇源)이 짓고, 행장(行狀)은 정기(鄭琦)가 지었다.
    2020-09-17 | NO.65
  • 유진근(柳晉根)
    유진근(柳晉根, 1853~?)의 본관은 서산이며 자는 중진(仲進)이며 호는 나재(懶齋)이다.  광주 동각에 살았다.부 : 柳是漢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다.1929년 羅燾圭 문인들의 昭義契案에 참여했다.
    2020-08-05 | NO.64
  • 유평(柳玶 : 1577~1645)
    지난해도 봄바람 삼월 봄일 때  /한번 둘러 서로 봐 말로는 그려 이제처럼 또 바래 남쪽은 멀어 /예대로 수양버들 푸릇푸릇 나 去歲春風三月時 一回相見語相思 如今又向南天遠 依舊垂楊사명대사(四溟大師)가 송암(松庵) 유평(柳玶)과 헤어지며 이 시를 읊었다.유평(柳玶)은 1577년 설강 유사의 여섯째 아들인 아버지 유경진과 금호 임형수의 딸 평택임씨 사이에서 광주시 광산구 본덕동 창교에서 태어났다. 자는 화보(和甫)이고 호는 송암(松庵)이며, 서산인(瑞山人)으로 을사명신(乙巳名臣)인 광주 호가정 주인 설강(雪江) 유사(柳泗)의 손자이며,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의 외손이다. 재주가 뛰어나고 체구가 건장하였으며, 용력이 남달라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과 이름이 나란히 하였다. 사계 김장생 문하에서 수업을 받았으며 거인장덕(鋸人長德)이라며 칭하였다. 그는 정유재란 때에는 선생을 따라서 황주(黃州)와 봉산(鳳山) 사이에서 피난하여 3년 동안 머물다가 돌아왔다. 선생이 일찍이 효우(孝友)가 독실하다고 허여 하였는데, 이에 대해서 헐뜯는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1624년(인조 2) 갑자식년사마시(甲子式年司馬試)에 진사 3등으로 합격하여 광해군 때에는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서 참봉(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마침내 과거 공부를 폐한 채 학문을 강마하였는데, 이때 그의 스승 김장생은 이 편지를 보내어 장려하면서 ‘그대의 높은 의기는 하늘에까지 닿았다.’고 하였다. 이때 조선 중기 유학자요 같이 김장생에게 동문수학했으며 의병을 일으키며 유유상종했던  영광출신 성재(省齋) 신응순(辛應純 1572 선조 5∼1636 인조 14)에 이때의 심정을 이렇게 시로 남긴다.인간세상 허망한 것 멋대로 되라지!/툭 트인 회포는 구주(九州 중국 땅)가 좁다.초당(草堂)이 높이 누워 이따금 잠을 깨고/양보음(梁甫吟) 읊조리니 귀밑에 가을이 왔구나.천문(天門)에서 사책(射策 과거시험)하는데 나는 뜻이 없고 /종사(宗社)사 넘어짐을 그 누가 붙잡을꼬?자유롭고 노는 것이 일월(日月 생명)을 늦추는 것/나라의 안위(安危)는 대신(大臣)들의 근심거리라네여기서 양보음(梁甫吟)은 제갈량(諸葛亮)이 남양 융중(南陽隆中)에 은거할 때 부르던 노래 이름으로 제(齊)의 태산(太山) 기슭에 있는 양보산(梁甫山) 지방을 노래한 것이다. 어진 사람이 세상에서 박해받음을 탄식하고 제의 안평중(晏平仲)이 모략으로 세 선비를 죽인 이도살삼사(二桃殺三士) 고사다. 두보(杜甫)는 등루(登樓)라는 시에서 "가련타, 후주도 사당에 모셔졌구나. 해 저무는 날 애오라지 양보음을 읊조리네.可憐後主還祀廟 日暮聊爲梁父吟"하며 읊었다.이후 인조반정을 일으킨 뒤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 1587~1624)이 반란을 일으키자 의곡(義穀)을 끌어 모았다. 정묘년의 난리 때 선생이 공을 뽑아 양향유사(糧餉有司)로 삼자, 그는 의병과 군량을 모집하여 달려와서 동궁을 호위하는 등 공을 세웠다.그는 슬하에 유창익(柳昌翊), 유명익(柳明翊), 유소익(柳昭翊), 유형익(柳亨翊) 4형제를 두었다. 그리고 가훈으로 이렇게 훈계했다.구세(九世)를 집에서 같이 살았던 장공예(張公藝)는 바로 나의 스승이다.다만 서로가 화목하게 지내야지 어째서 의(意) 상하고 살아야 하나.일을 당하면 인(仁)자를 생각하고 심점을 논할 때는 사(私)를 먼저 끊으라시를 쓰는 것이 진실로 뜻이 있으니 그 누가가 나의 슬픔을 알리요.시에서 장공예(張公藝)는 당(唐) 나라 수장(壽張) 사람으로 9세(世)의 친족을 한집안에서 거느리며 생활하였다. 이에 당 황제 고종(高宗)이 직접 그 집을 방문하여 그 비결을 물었는데, 그가 지필(紙筆)을 청한 뒤 단지 참을 인(忍) 자만 백여 차례 쓰자 고종이 눈물을 흘리며 비단을 하사하였다 한다. 舊唐書 卷188. 그 뜻은 백 번 참는 것이 한집에서 대가족이 다투지 않고 살아가는 비결이라는 것이다.병자호란이라는  난리를 맞는다. 전남지역에서 옥과현감 이흥순(李興淳)과 대동찰방 이기순(李起淳) 형제는 순창현감 최온(崔殡)· 전한림(前翰林)  양만용(梁漫容)· 전 찰방 유즙(柳楫) 등과 더불어 '거의격문(擧義檄文)'을 돌려 의병을 모집, 여산(礪山)에서 집결하여 국란을 구제할 것을 외쳤다. 유평(柳坪)은 두 아들 유명익(柳明翊), 유세익(柳世翊)을 거느리고 탁양루(拆楊樓)에서 의병을 거의한다. 당시의 관군들의 한심한 꼴을 고발하는 시를 이렇게  남긴다.난리의 소식이 진실을 알기 어려워/몇 사람 의를 위해 생명을 버렸던가.무너진 관군들 앞 다투어 병갑을 버리고/지모있다는 장수들 목숨보전 급급했다.亂離消息若難眞 仗義忘生問幾人 遺散官軍爭棄甲 智謀諸將競全身남한산 바라보면 창자가 찢어진 듯/북진을 위한 심정 수건에 눈물 젖는다.일편의 외로운 성일발 마냥 위태로우니/진평같은 비계를 뉘라서 써보리오望南漢日膓如裂 拱北辰時淚滿巾 一片孤城危一髮 陣平秘計竟誰陣 여기서 진평(陳平: B.C. ? ~ 179)은 전한(前漢)의 건국 공신이며 정치가로 유방 고조가 흉노에 포위되었을 때 벗어나게 했던 인물이다. 유평은  나주의 김선(金璇)·나해봉(羅海鳳) 등과 더불어 1월 20일 여산에서 모였으며 당시 대사간(大司諫) 으로 있던 정홍명(鄭弘溟)이 소모사(召募使)로 공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정홍명을 대장으로 삼고 칼을 들고서 적진으로 달려가다가 청주에 이르러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통곡하고서 되돌아갔다. 이때 유즙(柳楫)에게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읊는다.서울의 소식은 멀어서 알 수 없으나 /산상의 외로운 성이 포위 속에 있다고 쇄하고 병든몸이 말을 만지며 슬퍼하노니/ 그 누가 이 시대를 구제하는 공을 세울꼬 그러고는 마침내 세상일을 사절한 채 산자락에 집을 짓고는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崇禎日月)’이라는 8자를 써 붙여서 충분(忠憤)의 뜻을 붙였다. 익산군수를 제수받기도 했는데, 제봉 고경명이 죽자(1592), 이듬해에는 권율의 막하로 가서 행주싸움에 참여했던 사람 탄음(灘陰) 고부민(高傅敏, 1577-1642)과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친했다. 그가 보내온 시는덧없는 인생 뒤숭숭하고 갈림길도 많아 / 우리의 만남 헤아려 보면 지금으로 몇번인가?서로의 입장과 심정 멀지 않음을 아는데 /소식 한자 받기가 어찌 수후의 구슬, 화씨(천하의 보배)의 구슬 얻기처럼 어려운가? 浮生擾擾路岐多 屈指交遊今幾何 兩地心情知不隔 書來奚 得隋和조정에서 천거하여 태릉 참봉(泰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사림(士林)들은 대명처사(大明處士)라고 불렀으며, 경렬사(景烈祠)에 향사되었다. 그는 어느날 넋두리 하며 읊은 시로 마무리한다.이(利)의 이름 돌아오면 세상이 내게 오고/공업(功業)이 이룩되면 유명(有名)하고 능(能)하다고 하니공(功)과 이(利)가 다투느라 끊날 날이 없이/세상의 사람들은 자기만 잘나려 하는구나.利名來處世歸我功業成時莫顯能爭功爭利無時己人世人皆好己勝그는 어느날 광주읍성에 절양루에 올랐다. 공북루(拱北樓)의 옛 이름이다. 1669년 부임한 목사 오두인(吳斗寅)이 절양루를 공북으로 고쳤으며, 1875년 목사 신석유(申錫游)가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절양(折楊)’은 버드나무를 꺾는다는 뜻으로 이별을 의미하는데, 주로 관리들이 이임하며 이별하는 장소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 같은 이름이 붙여진 듯하다. 유평은 ‘병자(1636)년에 의청을 광주의 절양루에 설치했다(丙子說募義廳于 光州折楊樓)’는 통문(通文)을 여러 고을에 보냈다.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해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발하자 병사와 양식을 모아 함께 국난을 이겨내자고 독촉한 글이다. 아! 우리 유림으로 뜻을 가다듬고 학문을 한 사람치고 그 누가 부모님께 효하고 임금께 충하는 의(義)를 강습하지 않을 분이 있겠는가? 어버이께 효하면서 임금께 불충한 사람은 없고 임금께 충하면서 어버이께 불효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충신은 반드시 효자의 문(門)에서 구한다는 것이니 어버이를 위하여 원수를 갚는 것은 사람(人子)의 도리요, 임금을 위하여 원수를 갚는 것은 신하(臣子)의 직분입니다. 이것은 만고에 변할 수 없는 통의(通義)인데 이제 우리 군부(君父)께서 포위의 속에 계시니 신하(臣子)로서 통분을 어떻다고 하리요. 하물며 이 교서(敎書)가 포위(包圍) 속에서 나왔는데 모두가 애통하신 말씀이어서 받들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목이 메어 통곡을 하게 합니다. 즉시 통문을 돌리노니 원컨대 열읍(列邑)의 모든 군자(君子)들은 행여 지체하거나 관망하지 말고 각기 분발하여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동지들을 규합하여 병량(兵粮)을 도와주어 군부(君父)의 급함을 구함이 어떠합니까? 이는 다만 국가를 저버리지 않는 대의일 뿐 아니라 장부가 공명을 세울 수도 있는 기회입니다. 통문이 도달하면 시각을 지체하지 말고 경내에 돌리고 알려서 힘을 합하고 서로 붙잡아 같이 국난을 건지도록 부디 바라는 바입니다.
    2018-10-16 | NO.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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