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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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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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암 심광헌(1541~1593)
    심광헌沈光憲의 본관은 청송이며 자는 언장彦章, 호는 삼암三岩. 묵헌 심풍沈豊의 아들로 조선 1541년(중종36) 본량 동호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타고난 재능이 출중하고 학덕을 겸비하여 일에 임하면 충직하여 사림들이 추중하였다.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주부를 역임한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국은을 입은 가문의 후예로 적개충심이 강하여 나이 52세에 나라의 위급함을 중시하고 정예 수천명을 모병하여 충무공 이순신 막하로 훈련주부(訓練主簿)로 들어갔다. 옥포해전에서 적선 30척을 격파한 후 고성 다월포로 가서 전라도사 최철견과 힘을 합쳐 방어진을 구축하였다. 노량해전에 참전하여 패주 적병들을 사천까지 추격하여 적선 10여척을 격파하고 이어서 점포한산도 안골포해전에서도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후 분진을 이끌고 강릉에 당도하니 명나라 장수 송대빈이 적에게 포위되어 고전함을 보고 즉시 공격하여 왜적을 토벌하고 명나라 장수를 사지에서 구출하는 공을 세웠다. 이에 명장 송대빈이 조정에 장계를 올려 만일 심장군의 구원이 없었다면 적봉에 명군이 전멸을 면치 못했으리라 하니 선조가 삼암장군의 전공을 가상하여 김해부사와 선무원중공신 2등으로 특별히 제수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임진록》과 《나주읍지》에 기록되어 있으며 송사 기우만의 찬으로 된 묘갈비에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삼암의 충지를 추모하고자 향천으로 동호사에 배향되었다.처음의 시호는 공정恭靖이며, 나중에 정안定安으로 고쳐졌다.광산구 동호사는 1946년 이 고장 유림들의 발의로 고려말 공신인 장안공 심덕부를 비롯하여 사부 심징, 망세정 심선, 묵헌 심례, 삼암 심광헌, 심용 등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했다. 
    2020-05-06 | NO.92
  • 삽봉 김세근金世斤(1550~1592)
    김세근金世斤(1550~1592)은경남 함안군 마륜동 출생으로 본관은 김해이며 자는 중빈重賓, 호는 삽봉揷峰이다. 김해인으로서 절효공 극일의 후손으로 1550(명종5년)년 4월 16일 출생하였다. 임진왜란 때 스승 중봉 조헌선생의 격문을 받고 의병을 일으켰으며 제봉 고경명의 의병과 합세한 금산전투에서 순군한 의병부장이다. 광주에 오게 된 것은 1498년의 무오사화 연좌를 피해서이다. 그의 방조傍祖였던 김일손金馹孫이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으면서 벌어진 사건 때문이다. 김일손은 영남사림파의 중심이자 사관으로 사림파와 훈구파의 힘겨루기에 밀려 무오사화 때 참살을 당했다.그는 1576년 진사가 되고 다음해 문과에 급제하여 종부시주부를 지내다가 왜적의 침입에 대비한 율곡 이이를 따라 양병론을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1588년께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그러던중 그의 아버지 김석경金碩慶이 무오사화의 연좌에 화를 피하기 위해 식솔들을 이끌고 전남의 흥양(지금의 고흥)으로 옮겼다가 이듬해 다시 광주시 서구 세하동으로 터전을 옮겼다. 세하동은 그의 이름 ‘세世’ 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으로 일제강점기 이후부터는 세細를 쓰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그는 인근의 장정들을 모아 세하동 뒷자락에 있는 해발 134m의 나지막한 세하동 백마산 수련골에서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수련 연마를 한다. 이 소문이 장성, 나주, 화순 일대에 퍼져 그 수가 수백 명을 넘어서게 되었다.그 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 동안 세하동 백마산 수련골에서 함께 한 장정 수백명을 이끌고 의병을 일으켜 전국 최초로 6천여명의 연합의병이 모인 담양회맹군에 합류했다. 김덕령의 큰형인 김덕홍, 유팽로, 얀영 등과 더불어 고경명을 따라 의병 대열에 합세하여 충북의 영동군 황간까지 진출해 적을 무찌르는 전과를 올렸다.그러나 전장에서 병을 얻어 귀향하여 요병 중에 스승인 호서의병장 조헌의 부름을 받고 병든 몸으로 다시 출정했다. 그는 전주에서 군영을 정돈하던 중 적군이 금산으로 침입한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금산으로 진군해 부장으로서 전투에 참가했으나 충북 충주 인근의 눈벌이라 부르는 와평臥坪 전투에서 제봉 고경명과 같이 순절하였다. 김세근(金世斤), 湖節1上-054-3, 光州, 壬辰, 高敬命同殉-《호남절의록》(1799)이 소식을 들은 부인 한씨는 “지아비는 충에 죽고 지어미는 열에 죽으니 이는 곧 사람 된 당연한 도리리라”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여 그를 따랐다. 13년 뒤인 1605년 선조는 김세근 의병장에게 선무원종공신으로 녹훈하며 병조참판을, 부인 한씨에게는 정부인을 내렸다. 그의 묘가 광주시 서구 서창동 불암마을에 남아 있다.1952년 7월 10일 광주 지역의 유림들이 사우 ‘창열단彰烈壇’을 건립하였고, 1958년에는 학산사鶴山祠를 건립하여 매년 음력 3월 22일에 제향하고 있다.
    2018-05-28 | NO.91
  • 설강 류사 柳泗(1503~1571)
     설강 유사(雪江 柳泗)(1502~1571)는 조선 중기 문신이며 자는 중연, 본관은 서신이고 호는 설강이다. 교수였던 서희송과 어머니 청송심씨 아들로 유득공현(현재 대촌면 이장동)에서 태어났다. 1522년 21세에 진사가 되었고, 1528년 27세에는 문과 별시에 병과 4등으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병국의 추천으로 외임을 많이 맡았으며 무장현감, 전라도사, 낙안군수, 삭주부사, 종성부사 등을 역임하였다.1558년 명종의 왕비인 인순왕후의 외숙인 이량이 왕의 총애를 계기로 전권을 휘두르며 당파를 만들어 윤근수, 심의겸 등을 제거하려 하자 승지에 있으면서 그를 위시한 권신들을 배척하는 상소를 했다가 무고로 몰려 권신 이량과도 사이가 벌어져 고향에 돌아와 자연 속에서 욕심없이 유유자적하면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자신이 제례를 제정하여 자손들을 가르치고 유자후의 글을 베껴서 간행하고자 자손에 훈계하는 글을 써서 심광언에게 부탁하여 간행하였다.이때 고향의 건너편인 극락강과 황룡강이 합류하는 본덕동 남쪽 구강인 노평산 기슭에 터를 잡아 정자를 처음 세우고 소강절의 호가지의를 취해  '호가정'이라 이름을 붙였다. 퇴계 이황, 국재 오겸, 회재 이언적 등 여러 명현들과 더불어 도의를 강마하였다.1563년에 삼사의 탄핵으로 파직되어 보령에 유배되어 이량이 세력을 잃게 되자 선생을 다시 기용하려고 영해부사를 제수하였으나 나이도 많고 병이 있어서 사퇴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후에 전남지역 내의 유림들이 그의 문장기절을 추중하여 편방사(지금의 경렬사)에 배향되었고 《해동명현록》에 실려 있다. 저서로 《설강집》2권과 <위친필봉제축유서>가 전하고 있다. 호가정 내에는 호가정 현판과 설강의 호가정기, 노사 기정진의 호가정 중건기, 후손 유보한의 호가정 중수기, 호가정 원운과 당대에 교분이 두터웠던 이황,이언적, 오겸 등과 사위로 맞이한 김성원과 후대의 이안눌, 노사 기정진, 유보한 등이 그의 시를 즐겨 차운한 편액들이 걸려 있다.사위로 맞이한 김성원과 후대의 이안눌 등이 그의 시를 즐겨 차운 하였다.설강 선생이 호가정을 짓고 자신의 마음을 노래한 시가 있다.  시원한 돌베개에 솔그늘 더욱 짙고  바람은 난간을 돌아 들빛이 뚜렷하네  차가운 강물 위의 밝은 달빛아래  눈을 실은 작은 배가 한가로이 돌아온다  아래는 구강(九江)이요 위에는 하늘인데   은이 할 일 없어 세속에 내맡겼네  바빴던 지난일을 뭣하러 생각할꼬  늦사귄 물새가 한가로이 졸고 있네
    2020-03-19 | NO.90
  • 송래룡(宋來龍)
    송래룡(1823~1888)의 본관은 홍주, 초휘는 현규(現奎), 자는 운보(雲甫), 호는 서암(瑞菴)이다. 현감 宋駒의 후손이다.存心養性이고 安貧樂義이며 文學篤行이라 孝友慈仁이고 無不飮服이며 有墓碣畏이라 堂高漢住로 묘갈명에는 "繼述先美이고 孝友根天이며 永言孺慕하고 心潛經學이라" 하였다.부 : 宋邦賢조 : 宋守範증조 : 宋益恒외조 : 李仁坤처부1 : 曺箕承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다
    2020-03-06 | NO.89
  • 송래홍(宋來洪)
    송래홍(1836~1916)의 본관은 홍주, 초위는 宗奎, 자는 경범(敬範) 또는 성범(聖範), 광주 거진(오늘날 북구 용두동)에 살았다.  천성이 강직하며 효도하고 우애함은 물론 선대의 유업을 계승하여 후손의 장래를 보호하는 등 굳은 지조를 가졌다.1889년에 眉巖 柳希春을 기리는 모임에 참여하였다. 宋駒의 후손이다.부 : 宋三賢조 : 宋守大증조 : 宋益佐외조 : 洪基祥처부1 : 金道原
    2020-03-06 | NO.88
  • 송암 조언수(1575~1592)
    조언수曺彥壽의 본관은 창녕, 자는 일여, 호는 송암松庵이다. 시조는 신라 창성부원군 조계룡을 시조로 증조는  조대진으로 조선왕조 변융 문과 중시에 합격하여 예조 참의를 지냈으며 할아버지 조경덕은 예조좌랑을 지냈다. 아버지 조세랑은 상주영장을 지냈으며 외할아버지는 전주 이학림으로 사헌부 감찰을 지냈다. 어려서 완력이 뛰어나고 재주가 빼어나 8세에 사략을 읽고, 10세에 소학에 들어 자경시를 짓기도 하였다. 조언수는 임진왜란 때 제봉 고경명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의병이다.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량을 모아 광주군고에 바치고 무기 쓰는 법을 익히고 용사들에게 권장하는 시를 지었다. "내 돌아보니 부끄러운 여덟 살 어린이 삼년동안 헛되이 글만 배웠도다. 전국의 흥망사를 논하지 말고 쇄소응대하는 예의와 같이 하리라"이로부터 문장이 성취되었다. 행군이 순창 적성강에 이르러 진을 쳤을 때 적세가 몰아쳐옴에 사졸들이  많이 흩어지려 하니 송암이 충용의가忠勇義歌 삼장을 지어 깊이 깨우치게 하여 사졸들이 흩어지지 않게 하였다.금산전투에 임하여서는 적과 함께 혈전하여 많은 참획을 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제봉 고경명이 패하여 순절하고 송암도 화살이 떨어지고 힘이 다하여 제봉의 아들 학봉 인후와 월파 유팽로, 은재 안영과 같은 날 전사하였다. 이로써 송암은 임진왜란 떄 17세로 전사한 최연소 의병이라고 할 수 있다. 송암 조언수의 사적은 '호남절의록'과 '금산순의비'에 실려 있다. 후일 나라에서는 송암을 선무원종훈에 훈록하고 병조참판에 증직하였다.송암을 기리는 조도현의 시가 한 편 있다.북성예원조도현왼쪽에 장등너뫼오른쪽에 모세추리앞쪽으로 동기미테가작은 구릉으로 길게 누워 있는 그곳적량산 자락에 터를 닦으신 향조송암조언수님의 얼이 서린 자리조상에 대한 책임감불의에 항거한 애정이녹아내린 세월만큼숭조상문의 장으로 삼아 정엄한 뜻을 가슴에 새겨 일상에 가두련다.감상>광산구 본량면 북산리 북성부락 북성예원은 좌청룡 우백호로 앞으로는 바람을 모으고 배산 임수까지 갖춘 명당이다.
    2020-05-11 | NO.87
  • 송암 최응룡(1537~1592)
    의병장 松巖 崔應龍(1537~1592) 선생의 행적 *선무원종공신록권(宣武原從功臣錄券)공의 姓貫(성관)은 朔寧崔氏(삭녕최씨)로서, 諱(휘)는 應龍(응룡)이요, 字(자)는 士瑞(사서)이며 號(호)는 松巖(송암)이고, 別號(별호)는 忠節公(충절공)이라고도 불리운다. 公(공)의 始祖(시조)는 高麗前期(고려전기)의 文臣(문신)으로 文下侍郞平章事(문하시랑펑장사)를 歷任(역임)한 諱(휘) 天老(천로)이고, 中始祖(중시조)는 고려 명종조에 參知政事(참지정사)를 거쳐 文下侍郞平章事(문하시랑평장사)에 오른 諱(휘) 瑜價(유가)이며, 一世祖(1세조)는 고려말기 親御侮軍(친어모군) 郎將(낭장)을 歷任(역임)한 諱(휘) 善甫(선보)이다. 朝鮮朝(조선조)에 들어서는 世宗朝(세종조)때 集賢殿(집현전)의 大學者(대학자)이자 名臣(명신)으로 訓民正音(훈민정음)의 創製(창제)에 기여하였고 또한 成宗朝(성종조)에 이르러서는 經國大典(경국대전)을 完成(완성)하는 등 朝鮮前期(조선전기)의 文物(문물)을 整備(정비)하였으며 領議政(영의정)을 歷任(역임)한 寧城府院君(영성부원군) 文靖公(문정공) 諱(휘) 恒(항)은 公(공)의 高祖(고조)가 된다.曾祖(증조)는 文科(문과)에 及第(급제)하여 司饔院正(사옹원정)을 歷任(역임)하고 左贊成(좌찬성)에 贈職(증직)된 諱(휘) 永顥(영호)[一諱(일휘)는 處仁(처인)이라고도 한다]이며, 中宗朝(중종조)에 吏曺判書(이조판서)에 오른 諱(휘) 秀彦(수언)[一諱(일휘)는 溫(온)]의 孫子(손자)이고. 明宗祖(명종조)에 通德郞(통덕랑)에 오른 諱(휘) 卿立(경립)은 公(공)의 皇考(황고)가 된다. 公(공)은 어려서부터 總名(총명)하고 才質(재질)이 타고나서 讀書(독서)에 能(능)하여 스스로 證驗(증험)하고 經史(경사)에 밝았으며 性品(성품)이 强直(강직)하였다. 당시 地方(지방) 士類(사류)들과 瑞石山(서석산)의 證心寺(증심사)에 올라 시류를 講論(강론)하고 唱酬(창수)하였으며 이때 지은 詩(시)가 翠栢樓(취백루) 樓橋(누교) 아래 시냇가 바위에 새겨졌다고 전해오나 1950년 6. 25 전란으로 인해 훼손되어 안타깝기만하다. 倭寇(왜구)들이 남해안 일대에 침범하여 노략질을 일삼는 것을 直視(직시)하고 國防(국방)의 중요성을 논했으나 귀를 기울이는 이가 없어 안타까워하였으며 이를 기화로 兵事(병사)에 觀心(관심)을갖고 文靖公(문정공)께서 著述(저술)한 무정보감(武定寶鑑)등 兵書(병서)에도 조예가 깊어 文武(문무)를 兼備(겸비)하게 되었다. 先親(선친)께서 末年(말년)에 머물렀던 湖南(호남) 南平縣(남평현) 頭山面(두산면) 九沼村(구소촌)[이후 光州(광주) 西面(서면) 柒石里(칠석리) 九沼村(구소촌)- 현재는 광주광역시 남구 구소동 -으로 落鄕(낙향)하여 松下(송하)의 江亭(강정)에서 隱居(은거)하며 山水(산수)와 經史(경사)를 벗삼아 시화(詩畵)를 自娛(자오)하였다. 1592년 宣祖(선조25) 壬辰年(임진년) 4월에 壬辰倭亂(임진왜란)이 일어나자 公(공)은 “國運(국운)이 風前燈火(풍전등화)의 危機(위기)에 놓여 있고 官僚(관료)들과 百姓(백성)들이 塗炭(도탄)에 빠져있는 이때 勳家(훈가)의 後裔(후예)로서 國難(국난)을 坐視(좌시)할 수 있으리오 마땅히 百姓(백성)들과 生死(생사)를 함께 하리라” 라는 遺訓(유훈)를 남기고 南平(남평)에서 아들 參奉(참봉) 諱(휘) 永水(영수)와 더불어 家僮(가동)을 이끌고 倡義(창의)를 하였다. 사흘만에 數百(수백)여명의 義兵(의병)이 몰려들었데 대부분이 民草(민초)들인 것을 보고 “정녕 이들이 이 나라의 主人(주인)이자 의로운 百姓(백성)들이구나”하고 歎息(탄식)과 함께 結義(결의)를 다졌다. 義兵(의병)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南平(남평)에 사는 主簿(주부) 豊山洪公(풍산홍공) 民彦(민언)은 軍糧(군량) 10淅(석)을 보내오고 宗姪(종질)인 崔未能(최미능) 尙重(상중)과 李正郞(이정랑) 大胤(대윤)은 고을에서 運糧(운량)을 담당하고 楊直長(양직장) 士衡(사형)과 朴進士(박진사) 天挺(천정)은 陣中(진중)으로 運糧(운량)을 하고 士人(사인) 慶州崔公(경주최공) 厚立(후립)·弘立(홍립)등 壯丁(장정)들이 찾아와 함께 하여 500여명의 南平義兵(남평의병)을 이루었다. 公(공)은 南平義兵(남평의병)을 이끌고 同年(동년) 6월 3일에 月波(월파) 文化柳公(문화유공) 彭老(팽노)가 이끄는 玉果義兵(옥과의병) 齊峯(제봉) 長興高公(장흥고공) 敬命(경명)등과 合流(합류)하여 全羅左義兵(전라좌의병)을 이루었다. 連山(연산) 珍山(진산)과 礪山(여산)을 지나 7월 8일에 錦山(금산)에 도착하여 7월 9일 官軍(관군)과 義兵(의병)이 左右翼(좌우익)으로 하여 倭敵(왜적)과 對敵(대적)하여 수백명을 무찌르고 다음날인 7월 10일에 倭敵(왜적)은 官軍(관군)을 먼저 急襲(급습)하여 官軍(관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後退(후퇴)하자 義兵(의병)의 陣(진)에도 삽시간에 陣中(진중)이 술렁이고 士氣(사기)가 급격히 저하되자 이에 松巖公(송암공)은 아들 竹峰公(죽봉공) 諱(휘) 永水(영수)로 하여금 先鋒(선봉)에 나아가 倭敵(왜적)을 對敵(대적)케 하여 倭敵(왜적) 수백명을 斬殺(참살)하니 義兵(의병)들은 士氣(사기)가 오르고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수천명의 倭敵(왜적)을 무찔렀으나 衆寡不敵(중과부적)으로 義兵(의병)의 陣(진)도 무너지고 말았다. 戰勢(전세)가 敗(패)함에 이르자 松巖公(송암공)은 조금도 물러섬이 없이 직접 劍(검)을 빼들고 큰 소리로 號令(호령)을하며 수많은 敵(적)을 斬殺(참살)하다가 全身(전신)에 槍傷(창상)을 입고 마침내 殉節(순절)하였다. 義兵(의병)의 死傷者(사상자)가 많았던 이유는 松巖公(송암공) 父子(부자)가 退却(퇴각)하지 않고 앞장서서 勇敢(용감)히 싸운 모습에 義兵(의병)들이 感服(감복)을 하여 끋까지 倭敵(왜적)을 對敵(대적)한 때문이라고한다. 아들 竹峰公(죽봉공) 參奉(참봉) 永水(영수)와 더불어 三代獨子(삼대독자) 父子(부자)가 殉節(순절)하여 宣武原從功臣(선무원종공신)에 策勳(책훈)되어 錄(녹)되었다.당시의 世人(세인)들은 二代獨子(이대독자) 松巖公(송암공)과 三代獨子(삼대독자) 竹峰公(죽봉공) 父子(부자)의 崇高(숭고)한 殉節(순절)에 哀悼(애도)의 뜻을 표하고 忠節公(충절공)과 武烈公(무열공) 父子(부자)라고 불렀다. 1789년 正祖(정조13) 己酉(기유)년에 左副承旨(좌부승지) 滌齋(척재) 李書九(이서구) 先生(선생)은 松巖公(송암공)과 竹峰公(죽봉공) 父子(부자)의 忠節(충절)과 戰功(전공)이 묻혀 있음을 歎息(탄식)을 하고 松巖公(송암공)을 吏曹判書(이조판서)에 竹峰公(죽봉공)을 都承旨(도승지)에 贈職(증직)할 것을 薦擧(천거)하여 증직되었다 松巖公(송암공) 諡號(시호)는 忠節(충절) 竹峯公(죽봉공) 諡號(시호)는 武烈(무열) 이다. 正祖十三(정조13) 己酉(기유:1789)년에 忠勳府(충훈부)에서 靖難(정난), 佐翊(좌익), 佐理(좌리) 3훈의 正勳功臣(정훈공신)인 寧城府院君(영성부원군) 崔恒(최항)과 그의 玄孫(현손)인 宣武原從功臣(선무원종공신) 松巖公(송암공) 崔應龍(최응룡)과 竹峰公(죽봉공) 崔永水(최영수) 父子(부자)의 功勳(공훈)으로 後孫(후손)들에게 忠義衛(충의위) 崔漢福(최한복)등 二十三人(23인)에게 啓下事目(계하사목)을 발급하였다. * 위 내용 중에 일부 광주목사를 지낸 송정(松亭) 최응룡(崔應龍, 1514~1580)과 섞여 있어 자료의 확인이 필요합니다.
    2020-05-12 | NO.86
  • 송영묵(宋永默)
    송영묵(1843~?)의 본관은 홍주, 자는 효일(孝一)이며 광주시 거진(오늘날 북구 용두동)에 살았다.   1889년에 眉巖 柳希春을 기리는 모임에 참여하였다.부 : 宋文龜조 : 宋仁源증조 : 宋福鉉외조 : 崔基馥처부1 : 朴東煥
    2020-03-06 | NO.85
  • 송온묵(宋溫默)
    송온묵(1853~1903)의 본관은 홍주, 자는 일문(一文)이며 호는 낙헌(樂軒)이다. 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다. 宋駒의 후손이다.天賦聰頴하고 志操淸貞이며 孝於事親하여 誠於奉先이라 自幼勤學이고 甞就에 노사 기정진 선생이 ‘之門獲聞 爲己之學’이라 말했다.부 : 宋來良조 : 宋鶴賢증조 : 宋守憲외조 : 李益五
    2020-03-06 | NO.84
  • 송제민
    송제민(宋濟民), 湖節1上-057-1, 光州, 壬辰, 高敬命同倡-《호남절의록》(1799)
    2020-04-02 | NO.83
  • 송지묵(宋智默)
    송지묵(1842~1886)의 본관은 홍주, 초명은 시묵(時黙), 자는 여오(汝吾)이고 호는 우재(愚齋)이다.  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다. 현감 宋駒의 후손으로 착한 성품으로 선대의 미덕을 실천하고 몸소 밭 갈아 양친하고 글 읽어 학식을 넓이니 경전의 깊은 뜻의 문답 수십 권을 남겼다. 부 : 宋來奎조 : 宋一賢증조 : 宋守浩외조 : 鄭杞燦처부1 : 李宗憲
    2020-03-06 | NO.82
  • 송천 양응정(1519~1581)
    양응정은 1519(중종14)년 전라도 화순군 능주 월곡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제주. 자는 공섭(公燮), 호 송천(松川)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양담梁湛, 할아버지는 양이하梁以河, 아버지는 교리 양팽손梁彭孫이다. 어머니는 금산김씨로 김화金話의 딸이다. 형은 동래부사를 지낸 양응태이고 의병장을 지낸 양산숙이 셋째 아들이다.부친 양팽손이 기묘사화에 연좌되어 화순 중조산 아래 쌍봉리에 학포당學圃堂을 짓고 은둔하였으므로 조양대에서 수학했다. 1540년 생원시에 장원했다.1552(명종7)년 식년 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검열 등을 지냈다. 1556년 병조좌랑으로 문과 중시에서 장원급제하여 특출한 실력을 내보였으며 호당湖堂(독서당의 다른 이름으로 신하들에게 학문을 권장하기 위하여 독서할 수 있도록 만든 장소)에서 사가독서를 하였다. 그 이듬해 공조좌랑으로 있을 때 당시 권신이었던 윤원형尹元衡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가 1560(명종15)년에 복직되었다. 다시 외직으로 관서 관북 평사評事로 지내다가 능주에서 나주 박산으로 이주하여 조양대와 임류정을 짓고 시주와 강학을 일삼았다. 1563년 순창군수에 부임하였다가 1565년 홍문관 수찬修撰으로 영전하였다. 이후 1567년 광주 목사, 진주 목사를 거쳐 1571(선조4)년 경주부윤이 되어 1574년까지 재임하다가 진주목사 재직 당시 청렴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576년에 의주부윤으로 기용되었고 이듬해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대사성이 되었다. 이후 벼슬에 나가지 않고 전남 나주에서 경전연구와 생도, 자제 교수에 전념하다가 1581(선조14)년 세상을 떠났다. 김인후, 임억령, 이안눌 등과 교유하였고,  정철(鄭澈)·백광훈(白光勳)·최경창(崔慶昌) 등의 제자를 길렀다. 세 아들을 이이ㆍ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하게 하였다.양응정의 묘소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동호동에 있으며,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8호로 지정되었다. 효행으로 정문이 세워졌다. 1631(인조9)년 아들 양산숙이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자 추은을 입어 예조참판에 증직되었다.시문에 능하여 선조 때 8문장의 한 사람으로 뽑혔다.《진본 청구영언》에 “太平 天地間에 簞瓢 두러메고 / 두 매 느리혀고 우즑우즑  은 / 人世에 걸닌 일 업스니 그 죠하노라”와 “嚴冬에 뵈 옷 닙고 岩穴에 눈비 마자 / 구룸  볏 뉘  적이 업건마 / 西山에  지다니 눈물겨워 노라”의 시조 2편이 전한다. 저서로 《송천유집 松川遺集》, 《용성창수록 龍城唱酬錄》이 있다.
    2020-04-28 | NO.81
  • 송학묵(宋鶴黙)
    전략가로서 광주와 담양에서 의병활동을 한 송학묵(1870∼1909)의 자는 자화(子化), 본관은 홍주이다. 해광 송제민의 10세손이며 송래영(宋來永)의 둘째아들로 북구 본촌동(용두동 거진마을) 출신이다.증조부는 송수대(宋守大)이고, 조부는 송삼현(宋三賢)이며, 부친은 송내영(宋來永)이다. 외조부는 광주노씨(光州盧氏) 노계주(盧啓胄)이고, 처부는 창녕조씨(昌寧曺氏) 조준(曺駿)이다.그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일으킬 결심을 하고 격문(檄文)을 돌려 의병을 모집하여 극락강 상류 삼각산 요처에서 의병을 훈련시키고 있는데 왜병이 포위하여 온다는 정보를 듣고 적과 10리쯤의 거리를 두고 백주에 강을 건너 서쪽으로 진군하였다. 이를 고지에서 관망한 왜군은 어둠을 타고 추격하니 적의 전략을 미리 알고 북으로부터 다시 회군하여 자기 진지로 돌아와서 훈련을 계속하므로 부하들이 그 전략에 감복하였다.그런데 어느 날 훈련 중에 적에게 포위되자 의병들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자 그는 군사를 향하여 “만일 혼란을 일으키면 대사가 와해될 염려가 있으니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내 계책을 따르라.”하고 “한 시간 후에 산 위에서 총소리가 나면 모두 동쪽으로 탈출하라.”고 하였다. 그는 조금도 당황한 기색이 없이 태연히 남산(南山)으로 올라가 몇 방의 총성을 내어 적을 그쪽으로 유인하여 의병은 한 사람도 다친 사람 없이 모두 무사히 탈출했다.1907년 10월에 의병을 일으켜 광주와 담양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과 교전하는 등 그 활약이 컸다.어느 날 적정을 탐색하기 위해 단총을 몸에 품고 단신으로 적의 경비망 안으로 들어갔다가 도중에 일본 기마병과 마주치게 되어 그의 등 뒤를 쏘아 사살하고 총검을 노획하여 돌아왔다.그런데 1909년 3월로 접어들면서 전국의 의병은 불리하게 되거나 살상당해 그 전력이 크게 쇠퇴하였는데 송학묵도 마침내 짙은 안개 속에서 적과 싸우다가 체포당하여 광주감옥에 구금됐다. 그는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적을 꾸짖으면서 맨주먹으로 감옥을 부수다가 수족(手足)을 모조리 절단당하고 교수형을 받았다.적이 최후의 유언을 묻자, “내가 비록 너희들 칼 앞에 쓰러지나 조금도 유감이 없다. 내가 죽은 뒤에 내 넋이 너희 나라에 들어가 너희 국민을 도륙할 것이니 너희 나라가 망하는 날 나의 혼이 길이 살아 있음을 알리라.”라고 꾸짖고 순국하였다. 국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애국장을 추서하였다.*《광주시사1(1992)》, 《광주북구지(1994)》
    2020-03-06 | NO.80
  • 송형묵(宋亨默)
    송형묵(1856~?)의 본관은 홍주이고 자는 군식(君寔)이다. 오늘날 북구 용두동 지역인 거진에 살았다. 1889년에 眉巖 柳希春을 기리는 모임에 참여하였다.부 : 宋來璇조 : 宋璡源증조 : 宋命鉉외조 : 許晦
    2020-03-06 | NO.79
  • 승지 증(贈) 이조 판서 나은(懶隱) 이공(李公) 시장(諡狀)- 이동표(李東標)
    승지 증(贈) 이조 판서 나은(懶隱) 이공(李公) 시장(諡狀)- 이동표(李東標, 1644~1700)-사신(詞臣) 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연암집 제9권 별집 / 고반당비장(考槃堂秘藏)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금상(今上) 8년 갑진년(1784)에 영남 유생 아무개 등 몇 사람이 대궐 문 앞에 엎드려 소장을 올려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엎드려 생각하건대 우리 영종대왕(英宗大王 영조 )께서 특별히 고(故) 승지 신(臣) 이동표(李東標)에게 이조 판서의 관직을 추증하시고, 그 고신(告身)에 ‘청의(淸議)를 힘써 주장하여 수립한 공로가 남보다 뛰어났다.〔力主淸議 樹立卓然〕’라는 여덟 자를 쓰도록 명하여 포창(褒彰)하였으니, 조정에서 이룩한 대절(大節)이 이에 밝게 빛을 발하고 위대하게 드러나, 공이 기사년(1689)에 구원하려고 했던 박태보(朴泰輔), 오두인(吳斗寅) 등 여러 충신들과 아울러 백세(百世)에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행적의 본말에 있어서는 임금이 임종하시기 직전이라 상세히 아뢰지 못한 바가 있어, 시호(諡號)를 내리는 은전이 밝게 다스려진 이 시대에 아직까지 시행되지 않았으니, 지사(志士)들이 오랫동안 품어 온 유감이 오늘을 기다린 듯합니다.옛날 송(宋) 나라 신하 공도보(孔道輔)는 벼슬이 중승(中丞)이요, 추호(鄒浩)는 벼슬이 우정언(右正言)이었습니다. 법으로 따지자면 마땅히 시호를 얻지 못할 처지인데도 단지 곧은 절개로써 둘 다 당대에 훌륭한 시호를 얻었습니다. 지금 동표(東標)가 행한 의리는 이들 옛 성현과 꼭 같을 뿐만 아니라 학문의 순수하고 심오함에 있어서는 두 사람과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빨리 유음(兪音 허락하는 조서 )을 내리시어 특별히 동표에게 증시(贈諡)의 은전을 거행케 하여 주소서. 신 등은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이 소(疏)가 아침에 올라가자 저녁에 회보를 내리기를,“그가 행한 의리에 대해서는 내가 익히 아는 바이니 소청(疏請)한 대로 시행할 것을 특별히 윤허한다.”하였다. 이에 그 일을 태상(太常 봉상시(奉常寺) )에 내리자 백관들은 경외하며 우러러보고 사림(士林)들은 면목이 섰다.모(某 서유린(徐有隣) )는 일찍이 관각(館閣)의 직책을 맡았고 사관(史官)을 맡은 적이 있으니, 어진 사대부의 덕업(德業 덕행과 사업 )과 명행(名行 명성과 품행 )에 대하여 기꺼이 드러내야 할 처지인데, 하물며 이 시장(諡狀)을 짓는 데 있어 어찌 감히 글재주가 없다 하여 사양할 수 있으랴.삼가 살피건대, 공(公)의 자는 군칙(君則)이요, 호는 나은(懶隱)이요, 그 선세(先世)는 진보(眞寶) 사람이다. 고려 말엽에 활동한 휘(諱) 자수(子修)는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홍건적(紅巾賊) 토벌을 도와 공신이 되고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졌으며, 6세조 휘 우(堣)는 경학과 문장으로써 정릉조(靖陵朝 중종(中宗) )에 이름을 드날려 세상 사람들이 송재(松齋)라 불렀는데, 이분은 퇴계(退溪) 문순공(文純公)의 숙부(叔父)가 된다. 증조(曾祖)인 휘 일도(逸道)는 봉사(奉事)를 지내고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조(祖)인 휘 지형(之馨)은 참봉을 지내고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는데, 일찍이 광해조(光海朝)에 상소를 올려 이이첨(李爾瞻)을 참형에 처하기를 청하였다. 고(考)인 휘 운익(雲翼)은 은거하여 벼슬하지 않았으며, 종조숙부(從祖叔父) 휘 지온(之馧)에게 출계(出系 양자로 나감 )하였다. 비(妣)는 순천 김씨(順天金氏)로 생원(生員) 기후(基厚)의 따님이다.숭정(崇禎) 갑신년(1644, 인조 22) 4월 5일에 공(公)을 낳으니, 용모가 뛰어나고 인품을 타고났다. 지학(志學 15세 )의 나이 때부터 분발하여 성현(聖賢)을 목표로 삼고, 한 가지 기예로써 이름이 나는 것을 부끄러이 여겼다. 처사공(處士公 부친 이운익 )의 임종 시 부탁을 받고 난 뒤로 더욱 스스로 노력하여 아우와 더불어 날마다 반드시 첫닭이 울면 일어나 세수하고 의관을 단정히 하여 자리를 맞대고 학문을 강론하여 침식을 잊을 지경까지 이르렀다.그 아우가 죽게 되자 공은 비로소 과거(科擧) 공부에 힘을 쏟았는데 이는 모부인(母夫人)을 위로하기 위함이었다. 을묘년(1675)에 생원과(生員科)에 합격하니 선비들의 기대가 더욱 커졌다. 일찍이 동당시(東堂試)에 응시한 적이 있었는데 여러 고관(考官)들이 사석에서 서로 말하기를,“재주와 학식이 이모(李某)보다 나은 자가 없으니 마땅히 장원을 차지할 것이다.”하였는데, 공은 어렴풋이 이 말을 듣고서 시험 당일이 되자 일부러 머리를 천 번이나 빗고 또 빗으며 늑장을 부려 마침내 과장(科場)의 문에 들어가지 않고 물러 나왔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이천소(李千梳)라 부르며 웃음거리로 삼았다.정사년(1677)의 증광시(增廣試)에 회시(會試) 장원(壯元)이 되었으나 얼마 뒤 곧 파방(罷榜 급제자 발표 취소 )이 되었고, 계해년(1683)의 증광시에 또다시 회시 장원이 되어 삼관(三館)에 분관(分館)하게 되자,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이 말하기를,“영남 선비들의 여론은 모두 이 사람이 주동한다.”하고서, 마침내 성균관에 눌러두어 4년 동안 등용되지 못했다.정묘년(1687)에 외직으로 쫓겨나 창락 찰방(昌樂察訪)에 제수되었다.기사년(1689)에 사국(史局 춘추관(春秋館) )에 천거되고 다시 남상(南床 홍문관 정자 )에 의선(議選 선발 )되었으며, 얼마 안 있어 전적(典籍)으로 품계를 뛰어 넘어 승진되고 그 이튿날에 홍문관 부수찬에 특별히 제수되니, 공이 너무 빠른 승진이라 하여 사양하고 소명(召命)에 나가지 않았다. 5월에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왕비의 자리에서 물러나자, 이때 오두인(吳斗寅), 박태보(朴泰輔), 이세화(李世華)가 상소를 올려 극력으로 간언하였다. 임금의 노여움이 극에 달하여 이들을 모두 대궐 뜰에서 국문하니, 오두인과 박태보 두 분 모두 국문의 여독으로 귀양 도중 길에서 죽었다. 임금이 명을 내리기를,“이 일로써 다시 말하는 자가 있으면 역적의 죄로써 다스리겠다.”하였다. 공이 이때 시골집에 있다가 변을 듣고 상소를 지어 극언을 올리려 하다가 나이 많은 태부인(太夫人 어머니 )에게 큰 슬픔을 끼칠까 두려워서 망설이고 있는데, 태부인이 그 말을 기껍게 듣고는 공을 재촉해서 길에 오르게 하였다.공이 서울에 당도하자, 상소 내용 가운데, “옥산의 새 무덤엔 양마석(羊馬石)이 우뚝 서고, 여양의 옛집은 기상이 참담하다.〔玉山新阡 羊馬嵯峨 驪陽舊宅 氣像愁慘〕”라는 말이 있어 보는 자마다 모두 얼굴빛이 변했다. 그 상소에 또 이르기를,“전하께서 이세화(李世華)의 죄에 대해서는 이미 다 풀어 주셨으나 이상진(李尙眞)에 대해서는 아직 완전히 다 풀어 주지 않고 있으니 어찌 한결같이 대하고 똑같이 사랑하는 도(道)이겠습니까. 아! 일을 만나면 논쟁하는 것이 신하된 직분이거늘 전하의 오늘날 처사에 대하여 모두가 분부에 순종하여 한 사람도 과감히 말하는 자가 없으니, 천하만세(天下萬世)의 사람들이 전하의 조정에 서서 전하의 녹을 먹고 있는 자를 충신이라 하겠습니까, 아니라 하겠습니까? 오늘날 조정 신하 중에는 합문(閤門)에 엎드려 간언하기를 갑자기 중지한 것을 가지고 지금도 한스럽게 여기는 자들이 있는데, 그 마음이 어찌 다 전하께 불충하거나 국가의 계책을 근심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후회한다는 한 마디 말씀을 아끼시고 사방 백성의 소망을 가볍게 저버리려 하십니까.”하였고, 또 이르기를,“조사기(趙嗣基)의 말이 궁위(宮闈)를 범하여 보고 듣기에 놀라운 점이 있는데 대간(臺諫)의 계사(啓辭)를 갑자기 정지시키셨으니 신은 이를 애석히 여깁니다.”하였다. 이 상소가 올라가자 임금이 진노(震怒)하여 일이 장차 어찌 될지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얼마 있다가 임금의 마음이 풀려 그 죄가 파출(罷黜)에 그쳤다.곧 서용되어 병조 정랑에 제수되고 다시 수찬에 제수되었다. 이때 여론을 쥐고 있는 자들이 노봉(老峯) 민공(閔公)을 논계(論啓)하여 기어코 사지(死地)에 몰아넣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삼사(三司)가 일제히 모여 공에게 논계에 참여하기를 청하자 공이 정색하고 말하기를,“곤성(坤聖 인현왕후 )께서 폐위되던 날에 여러분이 머리가 부서지도록 힘껏 간(諫)하지 못하였으니 이미 신하로서 나라를 위해 죽는 의리를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이번에 또다시 이 사람마저 죽이려 하고 있으니, 성모(聖母 인현왕후 )에 대해 어찌 하려는 것인가?”하였다. 이담명(李聃命)이 이 주장을 특히 강력하게 지지하여 붓과 벼루를 앞에다 내놓으며 말하기를,“그대는 너무 사양하지 말고 나를 봐서라도 계사를 기초하라.”하니, 공이 소리를 버럭 지르며,“그대가 사적인 원한을 갚고자 하면서 어찌 남의 붓을 빌리려 하는가.”하고서, 마침내 그날로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그 뒤 사간원 헌납, - 원문 빠짐 - 수찬에 연이어 제수되었으나 다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공은 나랏일이 걱정되기는 하였으나 세상에 나갈 뜻을 끊어 버리고 영천암(靈泉巖)을 사랑하여 그곳에다 집을 지어 놓고 학문을 닦을 장소로 삼아 평생토록 지낼 듯이 하였다.경오년(1690)에 또 헌납과 교리에 제수되었으나 상소를 올려 어버이 봉양을 이유로 외직을 청하여 양양 부사(襄陽府使)에 제수되었다.그 이듬해 봄에 공의 경학(經學)으로 보아 외방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아뢰는 자가 있어, 헌납으로 부름을 받아 서학 교수(西學敎授)를 겸임하고 이어 수찬으로 옮겼다. 임금이 장릉(章陵 인조의 생부인 원종(元宗)의 묘 )에 행행(幸行)할 때 호종하였는데, 임금이 육신묘(六臣墓)를 지나면서 제사를 내리고 아울러 복관(復官)하도록 명하였다. 조정의 의론이 불가함을 고집하면서 그 이유로써 《춘추(春秋)》의 “어버이를 위하여 그 잘못을 숨긴다.〔爲親者諱〕”는 대문을 들고 나오자, 공이 홀로 앞에 나아가 아뢰기를,“광묘(光廟 세조(世祖) )께서 이미 육신을 죽였으니 만약 그 충절을 포장(褒獎)해 준다면 어찌 성덕(聖德)의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하니, 임금이 이를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교리에 제수되자 휴가를 청하여 근친(覲親)하였고, 가을에 또 헌납으로 부름을 받았다가 교리로 옮겨 제수되었다. 임금이 과거 급제자들에게 광대로 하여금 앞길을 인도하도록 명하자, 공이 아뢰기를,“광대의 잡희(雜戱)는 성인(聖人)이 싫어하신 바이니 아마도 정색(正色)을 함으로써 아랫사람을 통솔하는 도리가 아닌가 싶습니다.”하였다.일찍이 천둥의 이변으로 인하여 차자(箚子)를 올려 임금이 수성(修省)하는 도리를 논했는데 절실한 말들이 많았다. 공이 조정에 있을 때에는 지조가 꿋꿋했으며 풍도가 준엄하였고, 경연(經筵)에서 경서(經書)를 펼쳐 놓고 토론을 할 때에는 그 뜻이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는 데에 있었으므로 임금이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지 않은 적이 없었다. 세속에 따라 적당히 살고자 하지 아니하여 자주 근친을 위한 휴가를 청하고 이로 인해 아주 떠나 버리고자 하였으나, 임금이 매번 공이 떠나가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공에게 따뜻한 봄이 되면 모친을 모시고 서울로 올라오라 명한 다음, 모친에게는 곡식과 비단을 내려 특별히 은총을 베풀었다.또 헌납으로 부름을 받아 이조좌랑 겸 시강원사서(吏曹佐郞兼侍講院司書)에 제수되었다. 전형(銓衡)을 맡은 자가 이수인(李壽仁)과 유재(柳栽)를 청환직(淸宦職)에 통망(通望 후보 추천 )하자고 하자, 공이 유재는 문학(文學)이 없고 이수인은 일찍이 기사년의 대론(大論)을 피해 갔다는 이유를 들어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또 민장도(閔章道)를 통망하자고 하였는데, 그 아비 민암(閔黯)이 당시에 국권을 잡고 있었다. 공이 말하기를,“장도는 평소 훌륭한 행실이 없다.”하고, 매우 준엄하게 막아 버렸다. 이에 강요를 하다가 먹혀들지 않자 심지어 화복(禍福)으로써 유혹하기까지 하니, 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내 이따위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부끄럽다.”하며, 그날로 정고(呈告 사직서를 올림 )하고 비를 무릅쓰고 남으로 돌아갔다. 도롱이를 입고 배에 오르니 공을 전송하는 사람들이 모두 탄식하며 서로 말하기를,“오늘 ‘작은 퇴계〔小退溪〕’를 다시 보게 되었도다.”하였다.고향으로 돌아가자마자 학문을 강론하려는 자들이 날마다 모여들어 그들과 토론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헌납, 부교리, 교리, 겸교수에 제수되고 얼마 후 헌납으로 옮겨 제수되고 다시 이조 좌랑, 겸문학, 교리, 겸필선(兼弼善)에 제수되고 또다시 이조 좌랑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일찍이 영천암(靈泉巖)의 별장에 거처하여 조용히 앉아 《주역》을 읽으면서 지냈는데, 이때 문인(門人)에게 답한 태극(太極)에 대한 변설(辨說)과, ‘천리와 인욕이 행은 같으나 정이 다르다〔天理人欲同行異情〕’는 설에 대한 해석은 그 연구가 극히 정미(精微)하였다.계유년(1693)에 의정부 사인, 사헌부 집의, 시강원 보덕에 오르고 또다시 집의에 제수되었다.이렇게 전후로 역마(驛馬)를 보내 부른 것이 13차례나 되었으므로 마침내 마지못하여 명에 응하였다. 이때 장희재(張希載)가 장부(將符)를 차고 있으면서 권세를 믿고 불법을 많이 자행하고 있었으므로 공이 그의 노비 가운데 심하게 우쭐대는 놈을 호되게 처벌하니, 이 소식을 들은 이들이 통쾌히 여겼다.사복시 정(司僕寺正)으로 옮겨 제수되자 또 휴가를 빌어 귀성하였다. 사간 겸 중학교수(司諫兼中學敎授)에 제수되자, 사직소를 올리고 이와 함께 시정(時政)을 논하기를,“주자(朱子)는 ‘사대부의 출처거취(出處去就)가 풍속의 성쇠(盛衰)에 관계된다.’고 하였습니다. 근래에 대각(臺閣)의 신하들이 한 번이라도 소명(召命)을 어기면 곧바로 이조의 논의를 따라 하옥하고 갈아 치우니, 이는 예로써 신하를 부리는 도리가 아닙니다. 대관(臺官)이 자기 직책을 소홀히 한 지 실로 이미 오래되기는 하였으나, 전하께서 간신(諫臣)을 대우하는 것 또한 그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열 사람의 대간(臺諫)이 강하게 간쟁을 하여도 받아들이지 않던 일을 대신(大臣) 한 사람의 한 마디 말에 거뜬히 해결이 되며, 뻣뻣하게 남의 말을 거부하는 기색이 있을 뿐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는 미덕은 없으시니, 오늘날 언로(言路)가 막혀 버린 것이 어찌 모두가 어물쩡 넘어가는 신하들만의 죄이겠습니까. 군신간에 존재하는 정의(情義)가 신뢰감을 잃고 질책만 뒤따르니, 신하들이 무서워 성상의 마음을 거스르지나 않을까 오직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른바 ‘황공한 마음으로 대죄합니다.〔惶恐待罪〕’만 나불대는 승정원(承政院)과 ‘성교가 지당하십니다.〔聖敎至當〕’만 나불대는 비변사(備邊司)를 불행히도 오늘날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더구나 전하께서는 여러 차례 조정의 신하를 들어 쓰기도 하고 퇴출시키기도 하셨습니다. 한창 중용할 때에는 마치 무릎 위에라도 올려놓을 듯이 하다가 밀어내어 배척할 때에는 못에다 떨어뜨릴 듯이 하였으며, 정권을 바꿔 치울 때에는 대대적으로 주살(誅殺)을 행하였으니, 국운이 어떻게 병들지 않을 수 있겠으며 인심이 어떻게 동요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전하께서 여러 신하에 대하여 은혜와 원수를 마음대로 처리할 수는 있겠으나 그렇게 하면 나라의 위망(危亡)이 장차 그 뒤를 따르게 될 것이니 어찌 크게 두려워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내언(內言)이 문지방 밖으로 나가고 외언(外言)이 문지방 안으로 들어와 정도(正道)를 거치지 않는 것은 모두가 소인들이 사악한 농간을 부리는 매개가 되는 것이니, 임금이 그 술책에 한번 빠지게 되면 그들의 술책대로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그러한 은밀한 샛길을 호되게 막으소서.”하였다.성균관 사성에 제수되었다가 집의로 옮기고 응교에 제수되었다가 또다시 집의에 제수되었고 다시 응교에 제수되었다. 겨울에 조정에 돌아오자 곧 동부승지에 발탁되었다. 왕명에 사은하는 날 임금이 초모(貂帽)를 내리고 탑전(榻前)에서 써 보도록 명하였다. 우부승지로 승진하였다가 부모의 봉양을 위해 광주목사(光州牧使, 1694)로 나가 요역(繇役)을 줄이고 민폐(民弊)를 혁파하니 고을이 크게 다스려졌으나, 관찰사와 일의 가부(可否)를 다투다가 마침내 수령의 인(印)을 던지고 돌아왔다.을해년(1695)에 호조 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병자년(1696)에 삼척 부사(三陟府使)에 제수되었다. 이에 앞서 공은 누차 부제학, 대사성, 이조 참의의 물망에 올랐는데, 급기야 외직으로 나가게 되자 모두들 공이 나가는 것을 애석히 여겼다. 그러나 공은 관직에 나아가기를 어렵게 여기고 물러나기를 쉽게 여기는 지조만은 시종 한결같이 지키면서,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고을이 한가하고 바다의 아름다운 경치가 있기도 해서, 한 고을을 힘껏 잘 다스려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마침 큰 흉년을 만나 백성들이 유랑하여 고을이 거의 다 비게 되었다. 공은 마음을 다하여 백성들을 불러 모아 자신의 녹봉을 털어 진휼하였고, 아울러 삼(蔘), 꿀, 생선, 미역 등을 세금으로 걷던 것을 모두 다 없애주고는 스스로 살길을 찾게 하였다. 그리고 상소를 올려 흉년 구제에 대한 편의를 요청하자 임금은 다 그렇게 하라고 했다. 정승 장암(丈巖) 정호(鄭澔)가 그 당시 암행어사가 되어 수계(繡啓)에서 공의 업적을 칭찬하였고, 해직하고 돌아온 뒤에는 그 고을 사민(士民)들이 공을 추모하여 동비(銅碑)를 만들어 그 덕을 칭송하였다.무인년(1698) 겨울에 모친상을 만나 묘소 곁에 여막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묘소를 살피며 호곡(號哭)하였는데, 아무리 모진 바람과 심한 비가 내려도 이를 폐하지 않았다. 2년 뒤인 경진년(1700) 7월 17일, 마침내 그 슬픔으로 수척해진 끝에 졸하니 향년 57세였다. 수의(襚衣)가 만들어지는 대로 염(斂)을 마치고 부음을 알리니, 임금이 놀라고 슬퍼하여 특별히 부의(賻儀)를 내렸다. 배(配)는 정부인(貞夫人) 안동 권씨(安東權氏)이며, 공이 낳은 아들과 손자들은 지갈(誌碣 묘지와 묘갈 )에 실려 있으므로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아아! 사대부 간의 명론(名論)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서 나라의 불행이 된 지 오래되었다. 이는 단지 그들이 어질다고 여기는 분이 서로 같지 아니하여 이에 따라 호오(好惡)가 편파적으로 이루어지고 심지어 평피의 기회〔平陂之會〕에 이르러 번갈아 국시(國是)를 정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옳다고 여기는 것이 천정(天定)이면 세운(世運)이 융성하고 평화롭게 될 것이요, 옳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 인승(人勝)이면 명의(名義 명분과 도의 )가 어긋나고 어지러워질 것이니, 이는 호오가 공정하냐 아니냐에 달렸을 뿐이다.나은(懶隱) 이공(李公)을 삼가 살펴본 적이 있는데, 공은 국시가 무너지던 날에 초연히 우뚝 서서 권세에도 굽히지 아니하고 화(禍)를 당하는 것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비난 속에서도 윤리를 힘껏 지켜 나갔으니, 스스로 충정(忠正)을 견지하고 평소 의리에 밝아서 공정한 천정(天定)을 확실하게 자득한 자가 아니면 능히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이른바 ‘홀로 서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이 옳다고 인정해 주지 않아도 답답해하지 않는다.’고 한 말은 아마도 공에게 가까운 말이 될 것이다.영남(嶺南)이란 곳은 본래 우리나라의 추로(鄒魯)에 해당되는 지역으로서 그 호오에 있어 공과 차이가 있는 사람이 거의 드무니, 이 또한 나은(懶隱)과 같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기사년 이후로 한결같이 명의(名義)로 인해 질책을 받았으니, 이는 국시를 통일시키고 호오를 함께하려는 조정의 본뜻에서 나온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기에 선조(先朝 영조(英祖) )께서 관직을 추증하는 은전을 내리고 금상(今上)께서 시호(諡號)의 은전을 내린 것이 어찌 다만 공의 이름과 덕이 온 나라 사람들의 추앙을 받는다는 이유로 그렇게 한 것이겠는가. 공이 모범을 보인 것이 저렇듯이 우뚝하니, 이 때문에 권장하고 격려하는 임금의 뜻도 전후에 한결같았던 것이다. 그러하니 조정에서 벼슬을 같이한 사람으로서 어찌 감히 임금의 뜻을 우러러 본받아 이 일에 함께 힘쓰지 않겠는가.삼가 공이 조정에서 벼슬을 한 경위를 수집하여 집사(執事)에게 고하노라.[주-C001] 고반당(考槃堂) : 당명(堂名)을 《시경》 위풍(衛風) 고반(考槃)에서 따왔다. 고반은 은거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지만, 쟁반을 악기처럼 두들기며 즐긴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연암은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할 때 서양금(西洋琴)을 쟁반 삼아 그 위에 밥사발을 놓고 꽁보리밥을 먹으면서 젓가락으로 서양금을 두들기노라고 하면서, 그런 뜻으로 정자의 이름을 ‘고반’이라 지었다고 하였다. 《弄丸堂集 卷4 與朴美仲趾源》[주-D001] 사신(詞臣) : 왕을 측근에서 수행하면서 각종의 글을 기초하는 문학시종(文學侍從)의 신하를 말한다. 시장(諡狀)은 봉상시와 홍문관에서 작성하므로, 여기서는 홍문관 관원을 가리킨다. 《나은선생문집(懶隱先生文集)》 권8에 수록된 시장(諡狀)은 연암이 지은 시장을 바탕으로 한 글인데 지은이가 서유린(徐有隣)으로 되어 있다. 서유린은 연암의 절친한 벗으로, 시장을 찬진할 당시 이조 판서로서 홍문관 제학과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등을 겸하고 있었다.[주-D002] 영남 …… 사람 : 안동(安東) 유생 권이도(權履度) 등을 가리킨다. 《正祖實錄 8年 11月 5日》[주-D003] 공도보(孔道輔) : 공자의 45대손으로, 송 나라 인종(仁宗) 때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자 범중엄(范仲淹) 등과 함께 곽 황후(郭皇后)의 폐위에 극력 반대하여 직신(直臣)으로 명성이 높았다. 사후인 인종 황우(皇祐) 3년(1051)에 공부시랑(工部侍郞)에 특별히 증직(贈職)되었다고 하나, 시호를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宋史 卷297 孔道輔傳》[주-D004] 추호(鄒浩) : 송 나라 철종(哲宗) 때 우정언(右正言)에 발탁되자 맹후(孟后)의 폐위를 반대했으며 그 일로 인해 두 번이나 귀양을 갔다가 복직되었다. 사후인 고종(高宗) 즉위 초에 보문각직학사(寶文閣直學士)에 증직되고 충(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宋史 卷345 鄒浩傳》[주-D005] 민정중(閔鼎重) : 1628~1692.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송시열의 문인이자 서인의 지도자로서 좌의정까지 지냈으나 기사환국 이후 귀양 가서 죽었다.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閔維重)은 그의 동생이다.[주-D006] 옥산(玉山)의 …… 참담하다 : 옥산은 장희빈의 본관인 인동(仁同)의 별칭으로 그 선조의 무덤이 이곳에 있으며, 여양은 인현왕후의 본관인 여흥(驪興)의 별칭으로 그의 아버지 민유중(閔維重)이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에 봉해졌다. 따라서 이 말은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장희빈이 왕후가 된 상황을 개탄한 것이다.[주-D007] 이세화(李世華) : 1630~1701. 경상 감사를 지낸 뒤 향리에 있다가, 인현왕후 폐비에 반대하는 상소에 참여하여 숙종의 친국(親鞫)을 받은 후 유배가던 중 풀려났다.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 서용되어 판서와 지중추부사를 지냈다.[주-D008] 이상진(李尙眞) : 1614~1690. 우의정까지 지냈으나 인현왕후 폐비에 반대하여 간언(諫言)하다가 종성(鍾城) 등지로 귀양을 갔다. 그 뒤 용서되어 향리에서 은둔하던 중 죽었다.[주-D009] 조사기(趙嗣基)의 …… 범하여 : 궁위(宮闈)는 현종(顯宗)의 비인 명성왕후(明聖王后)를 가리킨다. 이는 당시 호군(護軍)으로 있던 조사기가 상소를 올려 명성왕후의 지문(誌文)을 지은 송시열을 비판하면서 명성왕후에 대해 언급한 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숙종실록(肅宗實錄)》 15년 3월 27일 조에 조사기의 상소가 실려 있다. 조사기는 이 상소로 인해 숙종 20년에 참형을 당하였다.[주-D010] 이 상소 : 《숙종실록(肅宗實錄)》 15년 5월 27일 조에 이 상소가 실려 있다.[주-D011] 나라를 …… 의리 : 원문은 ‘循國之義’로 되어 있으나, 《나은선생문집(懶隱先生文集)》 중의 시장에는 ‘殉國之義’로 되어 있으며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주-D012] 이담명(李聃命) : 1646~1701. 남인(南人)으로 허목(許穆)의 문인이다.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때 홍주 목사에서 파직되었으나, 숙종 9년(1683) 복관되어 감사, 참판 등을 지냈다.[주-D013] 원문 빠짐 : 이동표의 문집인 《나은선생문집(懶隱先生文集)》 부록 권8에 실린 홍중효(洪重孝) 찬(撰) 묘지명에는 ‘겸지제교(兼知製敎)’ 4자가 들어 있다.[주-D014] 《춘추(春秋)》의 …… 숨긴다 :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민공(閔公) 원년(元年) 조에 나온다.[주-D015] 과거 …… 명하자 : 유가(遊街)라 하여, 과거 급제자가 광대를 앞세우고 풍악을 울리며 거리를 행진하고 시험관과 선배 급제자, 친지들을 방문하던 풍속이 있었다.[주-D016] 광대의 …… 바이니 : 노(魯) 나라 정공(定公)이 제(齊) 나라 경공(景公)과 협곡(夾谷)에서 회합할 때 당시 재상(宰相)의 일을 섭행(攝行)하던 공자는 제 나라가 노 나라 정공 앞에서 광대와 난쟁이를 시켜 잡희를 벌이는 것을 금지시키고, 임금을 웃긴 죄를 물어 처형하도록 하였다. 《春秋穀梁傳 定公10年》 《史記 卷47 孔子世家》 《孔子家語 卷1 相魯》[주-D017] 정색(正色)을 …… 도리 : 《서경(書經)》 필명(畢命)에서 강왕(康王)은 필공(畢公)에게 훈계하면서 “정색으로 아랫사람들을 통솔하라.〔正色率下〕”고 하였다. 즉, 안색(顔色)을 엄하게 가짐으로써 아랫사람들이 경외(敬畏)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주-D018] 전형(銓衡)을 맡은 자 : 당시 이조 판서 오시복(吳始復)을 가리킨다. 《懶隱先生文集 卷8 行狀》[주-D019] 기사년의 대론(大論) : 숙종 15년(1689) 장희빈의 소생을 원자(元子)로 정하는 것을 반대한 서인(西人)들의 논의를 가리킨다. 이로 인해 남인(南人)들이 집권하는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났다.[주-D020] 민장도(閔章道) : 1655~1694. 남인의 영수인 우의정 민암(閔黯 : 1636~1694)의 아들로, 인현왕후의 복위를 추진하던 서인들을 체포하여 일대 옥사를 일으키려다가, 도리어 갑술환국을 당해 민장도는 국문 도중 장살(杖殺)되고, 민암은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주-D021] 심지어 …… 하니 : 이세택(李世澤)이 쓴 행장에 의하면, 이조 판서 오시복은 심지어 사람을 시켜 넌지시 귀띔하기를 “만약 민장도의 추천을 허락한다면, 나도 역시 영남 사람을 통용(通用)하겠다”고 했다 한다. 《懶隱先生文集 卷8》[주-D022] 천리(天理)와 …… 설 : 호굉(胡宏)은 《지언(知言)》에서 천리와 인욕이 체는 같으나 용이 다르며〔同體異用〕, 행은 같으나 정이 다르다〔同行異情〕고 주장하였다. 주자(朱子)는 이러한 호굉의 주장 중에서 ‘체는 같으나 용이 다르다〔同體異用〕’는 설은 비판하고 물리쳤으나, ‘행은 같으나 정이 다르다〔同行異情〕’는 설은 긍정하여 받아들였다. 즉 시청언동(視聽言動)이나 식색(食色)과 같은 행동은 성인도 범인과 마찬가지이지만, 성인은 그것이 예(禮)와 합치되게 함으로써 천리(天理)를 따른다는 점에서 정(情)이 다르다고 보았다. 《朱子語類 卷101 程子門人 胡康侯》[주-D023] 문인(門人)에게 …… 정미(精微)하였다 : 그의 문인 김이갑(金爾甲 : 자는 원중〈元中〉)에게 준 편지 답김원중문목(答金元中問目)의 내용을 가리킨다. 《懶隱先生文集 卷4》[주-D024] 장희재(張希載)가 …… 있으면서 :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는 숙종 18년(1692) 총융청(摠戎廳)의 우두머리인 총융사(摠戎使)가 되었다.[주-D025] 사대부의 …… 관계된다 : 주자는 “사대부의 사수출처(辭受出處)는 비단 그 자신만의 일이 아니다. 그 처신의 득실은 바로 풍속의 성쇠에 관계가 된다. 그러므로 특히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性理大全書 卷50 學8 力行》[주-D026] 예로써 …… 도리 : 《논어(論語)》 팔일(八佾)에서 공자는 “임금은 신하를 예로써 부려야 한다.〔君使臣以禮〕”고 하였다. 신하를 대할 때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는 뜻이다.[주-D027] 내언(內言)이 …… 들어와 : 내언은 여자가 규방에서 하는 말을 가리키고, 외언(外言)은 남자가 공무에 관해 하는 말을 가리킨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외언이 문지방 안으로 들어오지 말아야 하며, 내언이 문지방 밖으로 나가지 말아야 한다.〔外言不入於梱 內言不出於梱〕”고 하였다.[주-D028] 정호(鄭澔) : 1648~1736.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현손이며 송시열의 문인이다. 기사환국 때 파직되고 유배되었으나, 인현왕후가 복위하자 풀려나 판서까지 지냈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자 노론의 선봉으로 활약하여 파란을 많이 겪었다. 신임사화로 파직되고 유배되었으나, 영조 즉위 후 영의정까지 지냈다.[주-D029] 그 당시 …… 칭찬하였고 : 원문은 ‘褒公績’이라고만 되어 있으나, 《나은선생문집(懶隱先生文集)》 중의 시장에는 ‘啓褒公績’으로 되어 있으며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주-D030] 평피의 기회〔平陂之會〕 : 시운에 따라 세력이 크게 변하는 기회를 이른다. 《주역》 태괘(泰卦) 구삼(九三)의 효사에 “편평하기만 하고 치우치지 않은 경우는 없고 가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는 법은 없다.〔无平不陂 无往不復〕”고 하였다. 여기서는 숙종 때의 환국(換局)을 가리킨다.[주-D031] 옳다고 …… 것이니 : 천정(天定)은 천명으로 정해진 것을 뜻하고, 인승(人勝)은 다수 대중의 힘으로 천명을 어기는 것을 뜻한다. 《사기》 권66 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에서 신포서(申包胥)는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기지만, 천명도 정해지면 사람들을 능히 격파한다.〔人衆者勝天 天定亦能破人〕”는 말을 인용하여, 초 나라 평왕(平王)의 시신을 매질하여 복수한 벗 오자서의 난폭한 행동을 나무랐다. 수많은 사람들이 비록 한때의 난폭한 행동으로 천명을 어길 수 있을지라도, 천명 역시 화를 내려 난폭한 자들을 징계한다는 뜻이다.[주-D032] 홀로 …… 않는다 : 《주역》 대과괘(大過卦)의 단사(彖辭)에 “군자는 홀로 서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에 숨어 살아도 답답해하지 않는다.〔君子以獨立不懼 遯世无悶〕”고 하였다.[주-D033] 추로(鄒魯) : 맹자(孟子)와 공자(孔子)의 고향으로 곧 유교의 발상지를 뜻한다.[주-D034] 공이 …… 고하노라 : 정조 8년(1784) 11월 이동표에게 시호를 내리라는 어명이 내렸으며, 12년(1788) 4월 충간(忠簡)의 시호가 내렸다.
    2023-08-09 | NO.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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