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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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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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암사 / 斗岩祠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동 837-1(광주광역시 북구 면앙로170번길 12-17)두암사(斗巖祠)는 장열사(壯烈祠) 옆에 있는 사우이다. 1850년(철종 1) 우치동에 건립되어 고려조 삼중대광 금녕군(金寧君) 김목경(金牧卿)과 문민공(文愍公) 탁영 김일손(濯纓 金馹孫), 망헌 김광립(望軒 金光立)의 삼위를 봉사하였다. 그러다 1977년 장열사에서 독립해 두암사라 하여 김목경을 추배하고 있다.김목경은 ‘조적(曺頔)의 난’을 평정하여 조정에서 ‘금녕군’의 호를 받았다. 후일에 세속을 떠나 속리산으로 들어갔다. 그의 후손들이 묘를 찾지 못하여 장열사에서 제단을 쌓고 함께 제를 올렸다.  우연히 지석을 발견해 금녕군의 묘를 확인하고 후손이 장열사에서 따로 모셔 두암사를 짓고 모시게 됐다. 두암사 건물은 장열사를 중건하면서 뜯어낸 건물을 그대로 옮겨서 다시 지은 것 이라 한다.이곳에서는 매년 음력 3월 13일과 9월 13일에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1998년에는 양력 11월 1일에 제사를 지냈다.배향인물1)김목경(金牧卿) :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품계가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다. 충혜왕(忠惠王) 때 조적(曺頔)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김녕군(金寧君)에 봉해졌으나, 국사(國事)가 날로 어지러워짐을 보고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조년(李兆年)과 함께 누차 왕에게 간(諫)했으나 듣지 않자, 속리산(俗離山)에 들어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여생을 마쳤다.2)김일손(金馹孫, 1464∼1498) : 조선 전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 또는 소미산인(少微山人). 대대로 청도에서 살았다. 할아버지는 극일(克一)이고, 아버지는 집의(執義) 맹(孟)이며, 어머니는 이씨이다.1486년(성종 17) 생원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이 해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이어 같은 해에 식년 문과 갑과 제2인으로 급제하였다. 처음 승문원에 들어가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관직 생활을 시작해, 곧 정자(正字)로서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였다. 그 뒤 진주의 교수(敎授)로 나갔다가 곧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운계정사(雲溪精舍)를 열고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 시기에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정여창(鄭汝昌)·강혼(姜渾) 등과 깊이 교유하였다. 다시 벼슬길에 들어서서 승정원의 주서(注書), 홍문관의 박사·부수찬(副修撰), 전적(典籍)·장령(掌令)·정언(正言)을 지냈으며, 다시 홍문관의 수찬을 거쳐 병조좌랑·이조좌랑이 되었다. 그 뒤 홍문관의 부교리(副校理)·교리 및 헌납(獻納)·이조정랑 등을 지냈다. 관료 생활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사가독서(賜暇讀書 : 재능이 있는 문신들에게 문흥을 위해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한 제도)를 하여 학문과 문장의 깊이를 다졌다. 그리고 주로 언관(言官)에 재직하면서 문종의 비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을 복위하라는 과감한 주장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훈구파의 불의·부패 및 ‘권귀화(權貴化 : 권세가 있는 귀족으로 됨)’를 공격하고 사림파의 중앙 정계 진출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 결과 1498년(연산군 4) 유자광(柳子光)·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가 일으킨 무오사화에서 조의제문(弔義帝文)의 사초화(史草化) 및 소릉 복위 상소 등 일련의 사실 때문에 능지처참을 당했다. 그 뒤 중종반정으로 복관되고, 중종 때 직제학(直提學), 현종 때 도승지, 순조 때 이조판서로 각각 추증되었다. 17세 때까지는 할아버지 극일(克一)로부터 ≪소학≫·사서(四書)·≪통감강목 通鑑綱目≫ 등을 배웠으며, 이후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 평생 사사하였다. 김종직의 문인 중에는 김굉필(金宏弼)·정여창 등과 같이 ‘수기(修己 : 자기 자신을 닦으면서 수양함)’를 지향하는 계열과, 사장(詞章)을 중시하면서 ‘치인(治人 : 남을 다스리는 정치)’을 지향하는 계열이 있었는데, 후자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한편, 현실 대응 자세는 매우 과감하고 진취적이었다. 예컨데 소릉 복위 상소나 조의제문을 사초에 수록한 사실 등에서 정치적 성향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세조의 즉위 사실 자체와 그로 인해 배출된 공신의 존재 명분을 간접적으로 부정한 것으로서, 당시로서는 극히 모험적인 일이었다. 이같은 일련의 일들이 사림파의 잠정적인 세력을 잃게 한 표면적인 원인이 되었다.저서로는 ≪탁영집 濯纓集≫이 있으며, <회로당기 會老堂記>·<속두류록 續頭流錄> 등 26편이 ≪속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 자계서원(紫溪書院)과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3)김광립(金光立, 1591~1646) : 호(號)는 망헌(望軒),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인조(仁祖) 때 훈련원 첨정(訓練院僉正) 등을 거쳐 안주 목사(安州牧使)로 나가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진무공신(振武功臣)에 오르고, 이어 황주 목사(黃州牧使)가 되었다. 광주(光州)의 두암사(斗巖祠)에 제향(祭享)되었다. 건축물두암사(斗巖祠) 건물은 장열사를 중건하면서 뜯어낸 건물을 그대로 옮겨서 다시 지은 것 이라 한다. 입구인 외삼문을 들어서면 우측에 강당이 존재하고 좌측엔 부속건물이 있다. 정면에는 내삼문이 있고 내삼문 안에는 두암사가 자리잡고 있다. 김유신(金庾信) 김일손(金馹孫) 김광립(金光立)을 배향하는 사우1850년(철종1) 창건1850년(철종 1) 우치동에 건립 금녕군(金寧君) 김목경(金牧卿), 탁영 김일손(濯纓 金馹孫), 망헌 김광립(望軒 金光立)의 3위(位)를 봉사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폐지령(廢止令)으로 훼철(毁撤)1977년 장열사에서 독립, 명칭을 두암사라 하고 김목경을 추배사우 :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 추모재향사인물 김유신(金庾信, 595~673) 본관-김해(金海)김일손(金馹孫, 1464~1498) 본관-김해(金海) 자-계운(季雲) 호-탁영(濯纓), 소미산인(少微山人)김광립(金光立, 1591~1646): 본관-김해(金海), 호(號)는 망헌(望軒) 김목경(金牧卿, 생몰년미상): 본관은 김해(金海), 고려 충혜왕(忠惠王) 조적(曺頔)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금녕군(金寧君)에 봉해짐.  김해 김씨 경파의 중시조향사일음력 3월 13일, 9월 13일기타사항  : 두암사(斗巖祠) 건물은 장열사를 중건하면서 뜯어낸 건물을 그대로 옮겨서 다시 지은 것.
    2020-03-03 | NO.39
  • 등림사
    광산구 등임동 531-1 1957년등림사는 조선 명종때의 절신(節臣), 금호 임형수(林享秀), 송파 임식(林植,), 관해 임회(林檜)를 배향한 사우이며 등임동에 있다.임형수는 외모가 준수(俊秀)하고 풍의(風儀)가 멋졌으며 언행이 활달하고 기개를 숭상했다. 자잘한 관습이나 예절에 구애받지 않고 시원스럽게 행동했다. 식견이 뛰어나고 담론이 비범하고 참신했으며 해학에도 능해 남들로 하여금 솔깃해 귀 기울여 듣게 했다. 또 궁마(弓馬)에도 솜씨가 있어서 재능이 눈에 띄게 드러났다. 임형수는 어떤 일로 시험을 하더라도 적절하지 않은 것이 없어 당시 사람들은 그를 나라의 큰 일을 맡길 만한 인물로 높이 받들어 귀하게 여겼다.정조 때 편찬된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에 전해진 선비 임형수의 모습이다.1531년(중종26년) 18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5년 22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사국의 한림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몇 해후 인종이 동궁으로 계씰 땐 시강원 설서로 뽑혔다가 시강원 사서로 지내다 홍문관 수찬으로 있다가 1538년 호당에서 퇴계 이황 등과 같이 학문을 연구하였다.퇴계는 임형수와 기질이나 취미가 달랐지만 그를 유난히 가까이했고 그와의 교분이 두터웠다. 퇴계는 임형수 생전에 매양 그를 기남자(奇男子)라고 칭찬했는데 기남자란 재주와 슬기가 남달리 뛰어난 남자를 가리킨다.병조좌랑으로 있다가 회령판관으로 있을 때는 때때로 며칠분의 식사를 한꺼번에 하기도 하고 또 며칠씩 굶기도 하면서 말하기를 "무장된 자는 누구나 평소부터 이러한 습성을 길러야 한다"고 가르쳤다.전심전력을 다해 모든 분야의 숙폐를 뿌리 뽑고 백성을 자녀 가족과 같이 돌보니 오랑캐의 무리도 그의 높은 덕에 감회되어 귀화 오는 자가 많으며, '대야(大爺)'라 불러 존대했다. 판관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 이조좌랑으로 있다가 홍문관 교리로 옮기고 이조정랑, 사헌부 장령, 사간원 사간, 의정부 사인, 홍문관 응교, 전한, 부제학을 역임했다. 을사사화로 제주목사로 갔다가 돌아오자 정언각 등이 정미 괴벽서 사건에 공을 연루시켰다.그러나 당시 정치는 사화(士禍)의 피로 물들었고 임형수는 누명을 쓰고 정미사화로 희생되고 만다. 사약을 받기 전, 임형수는 부모님께 고별인사를 올리고 아이들에게 “나는 나쁜 일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끝내 이렇게 되었으니 너희들은 과거를 보지 말아라.”라고 한 뒤 1547년 (명종 2년)9월 15일 34세의 나이로 죽게 된다. 퇴계 이황은 임형수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며 ‘아 어쩌면 林士遂(林公의 字)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며 울부짖었다 한다. 금호집 상하2권을 남겼다. 공의 위패는 나주 송재사와 등림사에 배향되어 있다.임식(林植)의 자는 숙무 호는 송파인데 금호의 종자(從子)로 1539년(중종병자) 출생, 1564년 사마시에 합격 1572년 문과급제 하여 승문원에 보직하였다. 영남호송관, 승정원주서를 거쳐 공조, 병조좌랑, 성균관 전적, 호남순무어사, 4조정랑(이조, 병조, 예조, 형조), 호서경차관, 홍문관 교리, 평안도사, 해운, 영변판관, 구성, 강계부사등을 두루 역임했다. 1586년에 충남 결성 용호해구에 부해정을 짓고 은거하다가 1589년 51세로 졸(卒)하였다. 유고 송파집 1권이 남아있다.임회(林檜)의 자는 공직 호는 관해이다. 금호의 종자 송파의 계제로 1562년(명종임술)출생, 1582년 진사시 합격, 1611년 50세에 문과급제, 성균관전적, 1613년 대북파 이이첨 등의 무고로 양산에 유배, 1623년 인조반정후 예조정랑 군기시첨정을 거쳐 광주목사로 재임 중 남한산성 수축, 1624년 이괄의 난으로 경안역에서 대적하다가 적에게 잡혀 단설(斷舌)하여 순절하니 향년 63세였다. 유고 관해집은 금호유고 하권 말미에 병철되어 있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등임동 내동마을임형수(林亨秀) 임식(林植) 임회(林檜)를 배향하고 있는 사우1957년 평택 임씨 문중에서 사우를 창건사당 : 정면 4칸, 측면 1칸, 묘정비 출입문 : 솟을대문 형식향사인물임형수(林亨秀, 1504~1547) 본관-평택(平澤) 자-사수(士遂) 호-금호(錦湖)임식(林植, 1539~1589) 본관-평택(平澤) 자-숙무(叔茂) 호-송파(松坡)임회(林檜, 1562~1624) 본관-평택(平澤) 자-공직(公直) 호-관해(觀海)향사일 : 음력 9월 15일
    2019-12-03 | NO.38
  • 만주사 / 晩州祠
    광주광역시 북구 일곡동 515송병선(宋秉璿) 노종룡(盧種龍)을 배향하는 사우1944년 창건규모사당 :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경의재(景義齋) : 정면 3칸, 측면 3칸, 팔작지붕농암정(聾岩亭) : 정면 5칸, 측면 3칸, 팔작지붕향사인물송병선(宋秉璿, 1836~1905) 본관-은진(恩津) 자-화옥(華玉) 호-동방일사(東方一士)‧연재(淵齋)노종룡(盧種龍, ?~?) 호-소해(蘇海) 송병선의 제자
    2020-03-03 | NO.37
  • 매동사(지) / 梅洞祠(地)
    광주광역시 광산구 선동송천희(宋千喜)를 배향하는 사우1984년 창건향사인물 : 송천희(宋千喜, ?~1520) 본관-여산(礪山) 자-구부(懼夫)
    2020-03-03 | NO.36
  • 무광사 / 武光祠
    광주광역시 동구 학동 513이순신(李舜臣) 김덕령(金德齡) 김천일(金千鎰) 강항(姜沆) 정운(鄭運) 송희립(宋希立)을 배향하는 사우1958년 창건향사인물이순신(李舜臣, 1545~1598) 본관-덕수(德水) 자-여해(汝諧) 시호-충무(忠武)김덕령(金德齡, 1567~1596) 본관-광산(光山) 자-경수(景樹) 시호-충장(忠壯)김천일(金千鎰, 1537~1593) 본관-언양(彦陽) 자-사중(士重) 호-건재(健齋)강항(姜沆, 1567~1618) 본관-진주(晉州) 자-태초(太初) 호-수은(睡隱)정운(鄭運, 1543~1592) 본관-하동(河東) 자-창진(昌辰) 시호-충장(忠壯)송희립(宋希立, ?~?) 본관-여산(礪山) 자-신중(信仲)
    2020-03-04 | NO.35
  • 무양사 / 무양서원
    주(州)의 북쪽 20리의 거리에 위치하여 장경공(壯景公) 최사전(崔思全)을 비롯한 손암(孫菴) 최윤덕(崔允德), 가의(嘉義) 최응원(崔應遠)을 제향한 장소이다.고종 계묘년에 장의(掌議) 2인, 색장(色掌) 2인 원생(院生) 5인이다.- 광주읍지(1924) 무양서원 (武陽書院)은 고려 인종(재위 1122∼1146) 때 어의(御醫)이면서 명신인 장경공 최사전을 중심으로 그의 후손 4명(손암 최윤덕, 금남 최부, 문절공 유희춘, 충열공 나덕헌)을 모시고 있는 서원이다.무양서원은 1927년에 탐진 최씨 문중이 전국 유림의 호응을 얻어서 세운 서원이다. 서원의 이름은 광주의 옛 지명에서 따 왔다고 하는데, 강당인 이택당을 중심으로 왼편과 오른편에 합의문과 합인문이 있다.합의문을 지나면 오른편에 동재인 성지재가 있고 왼편에는 서재인 낙호재가 있다.또한 높은 땅 위에 담장이 있는 무양사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것은 사당 안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원래 서원은 제사 기능과 교육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탐진 최씨 문중에서는 1945년 광산구 쌍암동에 무양중학교를 설립하여 지금까지 교육기관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계동 535-1(산월로21번길)최사전(崔思全), 최윤덕(崔潤德), 최부(崔溥), 유희춘柳希春), 나덕헌(羅德憲)을 배향한 서원1927년 창건1927년 탐진최씨 문중이 전국 유림의 호응을 얻어 건립1984년 2월 29일 광주광역시문화재자료 제3호로 지정규모강당–이택당(以澤堂) 정면 5칸, 측면 2칸 팔작지붕사당–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향사인물주벽-최윤덕(崔潤德, 1376~1445): 본관은 통천(通川), 자는 여화(汝和)·백수(伯修), 호는임곡(霖谷).최사전(崔思全, 1067~1139): 자는 휼세(恤世), 시호는 장경(莊景).최부(崔溥, 1454~1504): 본관은 탐진(耽津), 자는 연연(淵淵), 호는 금남(錦南).유희춘(柳希春, 1513~1577):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인중(仁仲), 호는 미암(眉巖). 해남출신.나덕헌(羅德憲, 1573년~ 1640년):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헌지(憲之), 호는 장암(壯巖), 시호는 충렬(忠烈).향사일 : 9월6일 
    2020-04-20 | NO.34
  • 벽진서원
    서구 송풍로 42(풍암동)벽진서원壁津書院은 선조 때의 문신인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1526~1593)의 영정과 문집 목판 등을 보관하기 위해 1999년에 준공한 운리사雲裏祠로 개원한 서원이다. 박광옥의 자는 경원景瑗, 호는 회재懷齋, 본관은 음성이며, 광주에서 사예司藝 박곤朴鯤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조광조의 문인 유헌遊軒 정황丁潢(1512~1560)에게 수학하였으며, 21세에 생원 진사시에 합격하고, 향리에서 동지들과 개산향약을 정하여 풍속을 순후하게 하였다.그는 직언을 잘하는 선비로 당시 윤원형의 죄상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리고, 선조가 즉위하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내시교관이 되었다. 종부시 주부에서 운봉현감이 되어 태조의 이성계의 황산대첩비를 세웠다. 49세에 문과에 합격하고 전라도사, 예조정랑을 거쳐 사헌부 지평이 되어 언관으로 대사헌을 논박하는 계문을 올려 이로 인하여 영광군수로 자리를 옮겼다가 밀양도호부사가 되었는데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에 내려와 광주향교 교수가 되었다. 64세에 성균관 사예 겸 지제교에 부임하였다가 사임하고 향리에서 후학을 지도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 임금이 의주로 파천하자 의병을 모집하여 김천일 의병과 고경명 의병을 출병케 하고, 자신은 군량 조달을 담당하였다. 또 계속해서 의병을 모집하여 권율에게 보내어 행주대첩을 이루게 하였다. 권율의 추천으로 나주목사를 제수받았으나 병으로 취임하지 못하였다.1602년(선조 35) 지방 유림들이 회재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벽진동에 사우를 짓고 1604년 벽진서원壁津書院이라 하였다. 1681년에 도승지에 증직되고, 1796년에 김덕령을 추향하면서 의열사義烈祠로 바뀌어 사액서원이 되었다. 1868년 서원훼철령에 의해 훼철이 되고, 영정은 1927년 운리영당雲裏影堂에 보존되었다. 1996년 운리영당이 도시개발로 훼철되자 다시 짓기 시작해 1999년에  운리사로 완공되었다. 현재 이곳은 홍살문을 세우는 등 2018년 6월에 벽진서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새로 개원했다. 현재 규모는 경내 및 관리사 등이 674평이고 연건평은 77평이다. 사당과 본숭당 제각, 내삼문, 외삼문, 동문, 관리사 등이 있다.회재 문집 목판은 광주시 유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2018-05-24 | NO.33
  • 병천사
    서구 금호운천길 31(금호동) 병천사秉天祠는 지방 세력가로 알려진 지응현池應鉉(1868∼1957)이 일제강점기에 지은 사당으로 충주 지씨들의 사우이다. 고려 말의 충신인 정몽주(1337∼1392)를 비롯해 전라도도원수를 지냈던 지용기(1330∼1392), 고려 명장 정지의 9대손인 정충신(1576∼1636), 서흥부사를 지냈던 지계최(?∼1636), 지용기의 8대손이자 우암 송시열의 외조부인 지여해(1591∼1636)등 5명을 모시는 배향 공간이다. 고려왕조는 지켜야 한다는 신념으로 역성혁명을 꿈꾸는 이성계의 정적으로 희생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지켜 순절한 고려말의 충신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동시대를 활동했던  고려의 후기에 명장으로 1389년(공양왕 1)에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세운 공으로 문하찬성사에 발탁되었으며 1391년 처의 재종 왕익부(王益富)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유배지에서 죽어 비록 역모와 관련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기는 했으나 그의 행동은 전장에서는 관우(關羽)와 장비(張飛)의 용맹에 비교된 인물로 추앙받고 있는 충의군(忠義君) 의재(毅齋) 지용기(池湧奇)광주출신으로 고려 말의 명장 만운(晩雲) 정지(鄭地)의 9세손으로 임진왜란 중에 광주목사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종군하여 많은 공을 세웠으며 인조 때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부원수를 지내며 많은 공을 세운  공신 정충신(鄭忠信)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외조부로 병자호란 때 체찰사 김류의 비장으로서 분전하다가 전사한 무장 철산부사 지용기 후손 지여해(池汝海)조선후기의 무신으로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안현(鞍峴)에서 정충신(鄭忠信) ·남이흥(南以興) 등과 난을 진압하고 1636년 병자호란 때 서흥 검수참(劍水站)에서 용전하다가 전세가 불리하자 남한산성으로 철수하다 포위되자 자결한 충성군 지계최(池繼崔)지응현은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는 치욕을 당한 뒤 선조들의 절의와 애국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이 사당을 건립했다. 이 사당은 경내는 사당.영당.동재.서재.강당.전사실.내삼문.원직사 등으로 구성돼 있다. 건물 가운데 강당인 존심당 1동만이 문화재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는 가운데 강당은 앞면 5칸, 옆면 2칸 규모로 가운데 3칸에는 대청마루를 두었고, 양쪽에는 방을 만든 것이 특징이다. 병천사는 다른 사당처럼 대대로 내려오던 마을에 있었다. 그 마을 이름은 심곡마을이었다. 지금은 이곳에 전통마을이 있었다는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심곡마을도 도심 속 금호지구로 편입되어서다. 심곡마을로 불린 데는 이곳에 이현문李顯文이 1859년 건립한 심곡재心谷齋가 있었던 데서 비롯됐다. 광주 부자로 소문 난 지응현이 이 마을에 사당을 짓기 시작해 1930년대에 마무리 할 무렵 심곡재가 금호동 564번지로 이전해 일신당日新堂과 함께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일부 자료에는 병천사가 1924년에 완공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병천사는 여러 채의 건물로 이뤄져 있고, 그 가운데 위패를 모신 사당만을 지칭하는 좁은 의미의 병천사는 이 해에 완성, 그해부터 훗날 봉안될 인물들에 대한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 것으로 사료된다. 지응현의 사위인 서양화가 오지호의 막내딸인 오난이씨가 그려놓은 영정도 있다. 병천사에 모신 이들은 정몽주 지용기 정충신 지여해 지계최 등 5명이지만 지씨 성을 가진 인물들이 배향되는 것은 병천사가 기본적으로 지응현에 의해 건립된 충주 지씨의 사당이라는 점 때문이다. 병천사는 ‘천리天理를 병집秉執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 뜻은 ‘세상의 모든 이치를 모은다’는 의미이다. 사우는 위쪽에 선현을 봉사하는 사묘역祠廟域과 아래쪽에 교육하는 강학역講學域을 두어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기본 형태를 갖추었다. 건립 초기의 입지형태는 문중 소유의 병천사산도秉天祠山圖에 있다고 한다. 앞뒤의 죽림竹林과 연못을 배경으로 신문神門 1동과 병천사 현전賢殿1동, 영당 1동, 존심당存心堂(강당) 1동, 동재東齋(숭인재) 1동, 서재西齋(집의재) 1동, 거경재居敬齋 1동이 배치됐다. 존심당 오른편에는 사우의 대문격인 광제문光霽門이 있다. 이처럼 많은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병천사는 광주 도심 최고이자 최대 규모의 사당으로 충주지씨忠州池氏 문중이 관리하고 있다. 현실적 여건으로 인해 비개방 사당으로 남았다. 수시 접근이 어려워 아쉬움이 남는다. 전통혼례식이나 달빛음악회 등 프로그램을 통해 시민들과 접촉면을 넓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광주광역시 서구 금호동 458(금호운천길 31)정몽주(鄭夢周) 지용기(池湧奇) 정충신(鄭忠信) 지여해(池汝海) 지계최(池繼漼)를 배향하는 사우1924년 창건 1924년 지응현(池應鉉)이 세움1979년 8월 3일 광주광역시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강당 : 정면 5칸, 측면 2칸, 맞배지붕향사인물정몽주(鄭夢周, 1337~1392) 본관-영일(迎日) 자-달가(達可) 호-포은(圃隱)지용기(池湧奇, ?~1392) 본관-충주(忠州)정충신(鄭忠信, 1576~1636) 본관-금성(錦城) 자-가행(可行) 호-만운(晩雲)지여해(池汝海, 1591~1636) 본관-충주(忠州) 자-수지(受之) 지용기(池湧奇)의 후손지계최(池繼漼, ?~1636) 본관-충주(忠州) 자-언숙(彦叔)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1호(1979년 8월 3일) 
    2018-05-24 | NO.32
  • 복룡사(지) / 伏龍祠(址
    광주광역시 북구 생용동 314범세동(范世東) 범가용(范可容) 범천배(范天培) 범기생(范起生) 범기봉(范起鳳)을 배향했던 사우생룡동 314번지에 마을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복룡사유허비(伏龍祠遺墟碑)는 고려말 72현의 한 사람 문춘공 복애 범세동(范世東)을 주축으로 학봉(鶴峰) 범가용(范可容), 용계(龍溪) 범천배(范天培), 죽천(竹川) 범기생(范起生), 성와(省窩) 범기봉(范起鳳)을 배향한 복룡사(伏龍祠)를 1825년에 세웠으나, 1868년에 훼철되고 1914년 건립한 유허비만 남아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1914년 금성범씨(錦城范氏) 후손들이 금성범씨의 재실 용호재(龍湖齋) 재건용호재: 정면 4칸, 측면 1칸, 단층 맞배지붕향사인물범세동(范世東, ?~?) 본관-금성(錦城) 자-여명(汝明) 호-복애(伏崖)범가용(范可容, ?~?) 본관-금성(錦城) 호-학봉(鶴峰) 범세동(范世東)의 6세손범천배(范天培, ?~?) 본관-금성(錦城) 호-용계(龍溪)범기생(范起生, 1553~1593) 본관-금성(錦城) 자-원보(元甫) 호-죽천(竹川)범기봉(范起鳳, ?~?) 본관-금성(錦城) 호-성와(省窩)기타사항용호재(龍湖齋) : 금성범씨(范氏)의 재실복룡사유허비(伏龍祠遺墟碑)
    2020-03-04 | NO.31
  • 봉산사
    광주시 서구 용두동 산 79번지서구 용두동 봉학마을 깊숙한 꽤 높은 곳 봉황산 가파른 중턱에 봉산사가 있었다. 이곳은 을사늑약 이후 어지러운 세상에 그만 ‘귀를 닫아버리고[掩耳]’ 싶었다고 해서 ‘가리다, 숨기다’의 엄(掩)자를 쓴 엄이재 띠집을 짓고 후학을 가르친 현와 고광선이 지낸 곳이다.주변 숲속에 읍궁암泣弓菴이 있다, 한 지식인이 시대적 아픔에 어쩌지 못하고 울분을 삭히며 세상을 마감했던 유서 깊은 흔적이다. 국권회복을 획책하다가 슬픔 속에 가신 고종 임금을 몹시 흠모하며 큰 바위에 읍궁암이라는 글씨를 새겨놓고 고종임금의 능묘로 삼아 조석으로 그 앞에 꿇어앉아 곡하기를 3년, 그 눈물자국은 파란 이끼가 되어 지금도 선연히 남아있다는 일화가 전할 정도이다. 고광선은 고정헌高廷憲의 후손이며 고박주高璞柱의 아들로 남구 압촌동 복촌復村 출신이다. 1864년에 부모를 12세에 일찍 여의고 노사 기정진과 덕암 나도규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봉산사鳳山祠는 650여명에 달한 고광선의 문인들이 고광선의 유풍을 추모하여 엄이재 옆에 영당을 건립하여 제향했던 곳이다. 1934년 그의 사후에 문인들과 후손들에 의해 1936년 영당으로 유지되었다. 1964년 향교 유림들의 논의로 봉산사鳳山祠로 이름을 고치고 그의 위패를 봉안했다. 하지만 봉산사는 최근 몇 년 사이에 관리가 전혀 안되어 훼손되고 허물어져 결국은 2016년 여름 흔적도 없이 터만 남아 있다. 역사적인 장소가 사라져 아쉬움만 남는다. 현재 봉산정사라 간판을 붙인 곳은 보살절로 운영되는 듯 해 보인다. 연등이 처마에 줄줄이 걸려 있었다. 그의 행적은 <현와유고(弦窩遺稿)>에 주로 실려 있다. 이 책은 16권 8책으로 된 방대한 개인 문집인 석인본이다. 그의 시문은 1686편에 달한다. 문집은 서, 기, 비명, 행장, 찬, 발, 잡저 등으로 이루어졌다.권1에 시 165수, 권2·3에 서(書) 442편, 권4에 잡저 107편, 권5에 서(序) 99편, 권6·7에 기(記) 283편, 권8에 발(跋) 37편, 명(銘) 4편, 찬(贊) 5편, 사(辭) 5편, 혼서(婚書) 1편, 상량문 22편, 축문 11편, 제문 6편, 권9에 비(碑) 57편, 권10·11에 묘갈명 109편, 권12에 묘지명 5편, 묘표 52편, 권13∼15에 행장 103편, 권16에 실적(實蹟) 26편, 전(傳) 14편, 부록으로 언행록(言行錄)·가장(家狀)·행장·묘갈명·묘지명 각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2018-05-24 | NO.30
  • 봉산사 / 鳳山祠
    광주광역시 서구 용두동 봉황산 구릉지대고광선(高光善)을 배향하는 사우1906년 창건1906년 지역유림과 제자들이 고광선을 기리고자 건립사당 :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봉산사 묘정비추모제 유허비상의문(솟을대문)엄이재(掩耳齋) : 정면 4칸, 측면 1칸, 팔작지붕향사인물: 고광선(高光善, 1855~1910) 본관-장흥(長興) 호-현와(弦窩)2017년 무렵 봉산사는 무너지고 현존 건물은 엄이재와 봉산정사만 남아 있다.
    2020-03-04 | NO.29
  • 서강사 / 瑞岡祠
    광주광역시 남구 방림동 28-1(효행4길 22)윤신달(尹莘達) 윤관(尹瓘) 윤언이(尹彦頤) 윤위(尹威) 윤돈(尹敦) 윤보(尹珤)를 모신 사우1968년 창건 사당 : 정면 3칸, 측면 1칸, 팔작지붕강당 : 정면 5칸, 측면 1칸, 팔작지붕서강사 창건기념비향사인물윤신달(尹莘達, 893~973) 본관-파평(坡平)윤관(尹瓘, ?~1111) 본관-파평(坡平) 자-동현(同玄)윤언이(尹彦頤, 1090~1149) 본관-파평(坡平) 자-원로(元老) 호-금강거사(金剛居士)윤위(尹威, ?~?) 본관-파평(坡平) 호-벽송(碧松)·벽송거사(碧松居士)윤돈(尹敦, ?~?) 본관-파평(坡平)윤보(尹珤, ?~1329) 본관-파평(坡平)향사일: 3월 18일
    2020-03-04 | NO.28
  • 송호영당 / 松湖影堂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동(송정공원로 74)박상(朴祥) 박순(朴淳)을 배향하고 있는 사우장의(掌議) 2인, 색장(色掌) 2인 원생(院生) 15인 1728년(영조 4) 창건고종 무진(戊辰, 1868)에 철폐계묘(1903)년의 조령(朝令)에 의해 다시 복설(復設)되었다.    -광주읍지(1924)1992~1995년 사당, 담장, 진입계단보수, 효자각 등이 건립사당 : 정면 3칸, 측면 1칸, 골기와 맞배지붕향사인물박상(朴祥, 1474~1530) 본관-충주(忠州) 자-창세(昌世) 호-눌재(訥齋)박순(朴淳, 1523~1589) 본관-충주(忠州) 자-화숙(和叔) 호-사암(思菴) 박상(朴祥)의 조카
    2020-03-04 | NO.27
  • 시정유애사 / 枾亭遺愛祠
    주(州)의 서쪽 30리에 있다. 석탄(石灘) 이신의(李愼儀)를 향사(享祀)한다. 장의(掌議) 2인, 색장(色掌) 2인 원생(院生) 15인인데 고종 무진(戊辰, 1868)에 철폐되었다.- 광주읍지(1924)1754년(영조 30)에 이신의(李愼儀)의 학덕(學德)과 충절(忠節)을 추모하기 위하여 호남의 유림(儒林)이 건립(建立)하였다.1868년(고종 5) 대원군은 향호유림(鄕濠儒林)의 소굴이며 당쟁(黨爭)의 본거지인 서원이 경제적 폐단까지 겹쳐있어 그 피해가 극심함으로 서원 폐지령(廢止令)을 내려 훼철(毁撤)을 단행하였다.1901년(고종 38) 서적과 거문고 유품을 임시로 보관하기 위해서 금서재(琴書齋)를 지었다. 1919년 봄 경장각을 짓기 위하여 18년이 된 금서재(琴書齋)를 철거하였다.금서재(琴書齋)는 제도가 비천하고 풍우(風雨)와 수화(水火)가 걱정이 되어 철거하고 기미년 봄에 후손들이 의논하여 옛 사우(祠宇)가 있던 자리에 경장각(敬章閣)을 건립(建立)하였다.2000년 유애사 사우건립은 사우 훼철 후 81년 만에 敬章閣 후면에 화려한 단청 사우(祠宇)를 마련 석탄공(石灘公) 할아버지를 모시게 되었으며 2005년 6월 20일 유애서원(遺愛書院)으로 성균관(成均館)에 등록하였다.
    2020-04-20 | NO.26
  • 신호사 / 辛湖祠
    광주광역시 광산구 동호동 신촌마을류상렬(柳庠烈)의 영정을 모시는 사우1967년 창건사당 : 정면 3칸, 측면 1칸, 팔작지붕류상렬(柳庠烈, 1880~1962) 본관-문화(文化) 자-관일(寬逸) 호-관암(寬庵)향사 일 : 매년 봄 
    2020-03-04 | NO.25
  • 광주광역시
  • 한국학호남진흥원
  • 사이버광주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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