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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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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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열사 / 景烈祠
    경열사景烈祠는 광주 무등산 자락과 나주, 두 곳에 있다. 두 곳의 경열사 모두 고려장군으로 우리나라 수군을 창설한 정지 장군을 모시고 있다. 대체 왜 정지 장군을 모신 사당이 두군데나 있는 것일까? 정지 장군의 고향은 나주였지만 정지 장군이 머물며 왜구창궐에 나섰고, 일생을 마감한 곳은 광주였다. 이에 충청도 사람들이 발통하고 충청, 전라, 경상도 3도의 사림들이 의논하여 공의 유허가 있는 편방면(현 광주 동명동)에 경열사를 건립을 하기로 정한다. 『경열사요람』(1981년)을 살펴보면 경렬사는 인조22년인 1644년에 창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시작은 소박한 작은 사당이었다. 숙종 때 사우로서 격식을 갖추게 되며 규모가 확장된다. 규모가 확대되면서 이곳 경열사에는 정지 장군 외에 설강雪江 유사柳泗, 송설松雪 고중영高仲英, 구성龜城 전상의全尙毅, 구암龜岩 고경조高敬祖, 충무공忠武公 정충신鄭忠信, 송암松庵 유평柳坪, 시은市隱 유성익柳聖翊 등 7현을 더 추배하게 된다. 하지만 고종 5년인 1868년, 흥선대원군은 전국의 서원을 철폐하는 서원철폐령을 내린다. 1871년 경열사가 철폐되자 호남사림들은 경열사 유허비를 세워 선현의 뜻을 기린다. 1896년의 일이었다. 경열사가 철폐된 것에 대한 아쉬움은 정지 장군의 고향인 나주에서도 이어졌다. 1914년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에 경열사가 다시 세워진 이유다. 이후 1976년 나주 경열사는 중수된다. 경열사의 현판은 고종시대의 서예가인 김규진이 썼으며 경열사 건립에 공헌한 정해일의 별장에는 채용신이 1914년에 그린 영정이 있다. 1981년 광주에서는 북구 망월동 산176번지에 있는 정지 장군의 묘소 옆에 경열사를 다시 건립한다. 정면 3칸, 측면 반 칸으로 앞에 툇칸을 둔 2익공 겹처마 맞배지붕의 사당과 외삼문을 갖췄다. 사당의 좌우 양쪽에는 척서정陟西亭과 강당인 경신재敬信齋가 있다. 정지장군예장석묘鄭地將軍禮葬石墓는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2호로 지정되었는데, 묘 앞의 묘비는 1808년에 세웠다. 사당에 들어서면 영정 속 정지 장군이 한 손에 칼을 들고 용맹스런 모습으로 참배객을 맞는다. 우람한 체구와 치켜 올라간 눈썹, 또렷한 눈매와 야무진 입술, 얼굴의 절반을 차지하는 구레나룻에서 장군다운 풍채가 느껴진다. 사당으로 향하는 길에 유물관이 있고, 유물관 앞 산언덕에 정지 장군의 무덤이 보인다. 그런데 무덤이 특이하다. 우리가 흔히 아는 봉분이 동그랗게 솟아있는 무덤이 아니다. 사다리꼴 모양에 가까운 네모난 무덤이다. 무덤 위는 편평하다. 그리고 큰 돌로 무덤 주위를 둘러쌓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형태의 무덤인데, 이는 고려 후기의 무덤 양식이라고 한다. 안내문에 '정지장군 예장 석묘禮葬 石墓'라 적혀 있다. 예장이란 국가에서 예를 갖추어 장사를 지내는 것으로 국장의 다음 가는 국가장이다. 즉, 고려 말, 나라를 지킨 용장으로 그의 충의와 절개를 높이 사 국가에서 장례를 주관해 치른 것이다. 왜적의 침략이 있을 때마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돌봤던 고려의 명장, 정지 장군. 장군의 무덤 앞에 서니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정지(鄭地, 1347~1391)의 본관은 하동(河東), 나주 태생.정충신(鄭忠信, 1576~1636)의 자는 가행(可行), 호는 만운(晩雲), 정지(鄭地)의 9대손. * 2023.6.22. 수정
    2020-02-27 | NO.48
  • 경현사(지) / 景賢祠(地)
    광주광역시 광산구 비아동 김극기(金克己)를 배향했던 사우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 김극기(金克己, 1397~1463) 본관-광산(光山) 자-예근(禮謹) 호-지월당(池月堂) 주(州)의 서쪽 30리에 있다. 지월당(池月堂) 김극기(金克己), 탄암(炭岩) 김득종(金得宗), 모계당(暮階堂) 김효종(金孝宗), 우봉(牛峯) 이근(李根)을 향사(享祀)하며장의(掌議) 2인, 색장(色掌) 2인 원생(院生) 15인인데 고종 무진(戊辰, 1868)에 철폐되었다.- 광주읍지(1924)
    2020-03-02 | NO.47
  • 광산사 / 廣山祠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산동 837 오겸(吳謙)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사당이다.1825년(순조 25) 오겸의 후손들이 건립하였으며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후에 중수 하였다.사당 : 정면 3칸, 측면1칸, 단층 맞배지붕 오겸(吳謙, 1496~1582) 본관-나주(羅州) 자-경부(敬夫) 호-지족암(知足庵)·국재(菊齋) 음력 9월 9일 향사일
    2020-03-02 | NO.46
  • 국제사우 / 國濟祠宇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산동 세동마을오겸(吳謙)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우1916년 창건규모: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지붕향사인물: 오겸(吳謙, 1496~1582) 본관-나주(羅州) 자-경부(敬夫) 호-지족암(知足庵), 국재(菊齋)
    2020-03-03 | NO.45
  • 남동사
    광산구 동호동 419 청송심씨 동족마을인 남동마을 입구에 만취정 정자 옆에 있는 사당 남동사에는 석지 채용신(1850-1941)이 그린 심원표의 영정을 비롯하여 남석(南石) 심종대(沈鐘大), 주봉(柱峰) 심한구(沈翰求)의 초상화가 봉안되어 있다. 심재규가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2019-12-03 | NO.44
  • 남동사(남동영각) / 南洞祠(南洞影閣)
    광주광역시 광산구 동호동 420, 남동마을심원표(沈遠杓) 아들 심종대(沈鍾大) 손자 심한구(沈翰求) 3대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사우로 1946년 창건했다. 건물의 형태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평기와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주변에는 풍광을 더해주는 정원수가 심어져 있고 노목이 우거져 한적한 공간을 꾸며주고 있다.향사인물심원표(沈遠杓, 1853∼1939) 본관-청송(靑松) , 심종대(沈鍾大, 1882~1959) 본관-청송(靑松). 심한구(沈翰求, 1898∼1974) 본관-청송(靑松) 광주광역시 광산구 동호동에 있는 청송심씨 3인의 영당(影堂)이다. 남동사(南洞祠) 또는 남동영당(南洞影堂)이라고도 한다. 남동영당은 晩翠(만취) 沈遠杓(심원표), 南石(남석) 沈鐘大(심종대), 柱峰(주봉) 沈翰求(심한구)의 影幀(영정)을 봉안한 곳으로 그 문하생들이 이들의 학덕과 행의를 기리기 위해 1946년 봄에 건립하였다.남동영당에 배향된 심원표(1853-1939)는 己卯名賢(기묘명현) 默軒(묵헌) 沈豊(심풍)의 13대손으로서 조선말 감역을 지냈으며 한일합방 이후 일제의 은사금을 거절하고 만취정을 지어 강학과 효도로서 후학의 양성에 힘썼다.남석 심중대(1882-1959)는 기송사의 문하인으로서 시서에 능하고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계봉 심한구(1898-1974)는 후석 오준선의 문인으로 조선 말기 항일투사이며 명필이었던 해강 金圭鎭(김규진)과 윤용구에게서 사사하여 특출한 재능을 발휘하였으며 유목 「光山公園安重根義士碑(광산공원안중근의사비)」와 「光山警察署忠魂婢文(광산경찰서충혼비문)」을 남겼으며 유림의 발전을 위해 「宋子大全(송자대전)」을 간행하는데도 적극적으로 기여하였다.
    2020-03-03 | NO.43
  • 대동사
    광주광역시 광산구 동호동 신촌마을(광산구 본량신촌동길 47-8)1948년 대동사는 1727년(영조3년)에 아사 유차달(鵝沙 柳車達)의 유덕(遺德)을 추모하기 위해 황해도 연안군 구월산아래 사우를 건립하고 제향해 왔다. 1868년(고종5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1945년 광복 후 후손들과 유림들의 협력으로 동호동 칠봉산 앞에 옮겨 세워졌다.연안차씨(延安車氏) 문화유씨(文化柳氏) 차효전(車孝全) 유공권(柳公權) 유효금(柳孝金) 차포온(車蒲溫) 차원부(車原頫) 유자미(柳自湄) 유헌(柳軒) 등의 위패를 봉안하고 배향하고 있다. 건물은 정면 3간 측면 2간의 골기와 맛배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정평주초위에 원주기둥을 세워 창방 소로 장혀를 가구하여 도리를 올렸다. 포작은 2익 공식이며 3량집으로 되어있다. 창문는 분합문이며 중앙은 좌우 퇴칸은 띠살창으로 되어있고 겹처마와 평3문이 있다.1727년(영조 3) 문화유씨 시조 유차달(柳車達)을 추모하기 위해 황해도 연안군 구월산 아래 사우 창건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1948년 후손과 지역유림들이 현재위치에 사당을 옮겨 세움사당 규모: 정면 3칸, 측면 2칸, 지붕은 골기와 맞배지붕 형태 평삼문(平三門)향사인물차효전(車孝全, ?~?) 본관-연안(延安) 자-양운(良運) 호-강촌(江村) 연안차씨(延安車氏) 시조 유차달(柳車達)의 아들유공권(柳公權, 1132~1196) 본관-문화(文化) 자-정평(正平) 유차달(柳車達)의 6세손유효금(柳孝金, ?~?) 본관-문화(文化) 유차달(柳車達)의 아들차포온(車蒲溫, ?~?) 본관-연안(延安)차원부(車原頫, 1320~?) 본관-연안(延安) 자-사평(思平) 호-운암(雲巖)유자미(柳自湄, ?~1462) 본관-문화(文化) 자-원지(元之) 호-서산(西山)유헌(柳軒, 1462~1506) 본관-전주(全州) 자-백여(伯輿) 호-낙봉(駱峰)
    2019-12-03 | NO.42
  • 대명사
    광산구 명도동 가마마을 1963년 나주오씨문중 영사재 그 뒤편 높은 곳 대명사는 1963년 이 마을의 유림들이 조선 중기의 문신 생로당 오효석(生老堂 吳孝錫)과 그와 각별한 사이였던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유덕(遺德)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난와(難窩) 오광선의 8대조이기도 하다. 대명사(大明祠)를 건립하여 배청(排淸) 숭명(崇明) 의리의 종주(宗主)인 우암을 주벽에 모시고 생로당을 종향(從享)하고 있다. '숭정일월 대명별구(崇禎日月 大明別區)'는 명나라 천하의 세계질서를 정통으로 삼고 청도 왜도 인정하지 않는 정신적 독립구역을 선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양평공 오자치(襄平公 吳自治)의 6대손이며 증좌승지 오이구(贈左承旨 吳以久)의 아들인 생로당 오효석(生老堂 吳孝錫)은 본관은 금성(錦城)이요 호는 생로당(生老堂)이며 나주에서 출생하였다.병자호란이 일어나 남한산성이 무너지자 인조15년(1673)에 대명동에 있는 대명산중으로 들어와 영사재(永思齋)를 짓고 벼슬과 인연을 끊은 채 은둔하면서 평생을 책과 함께 하며 주자학과 배청사상, 자주독립정신을 후진들에게 교육하였다.
    2019-12-03 | NO.41
  • 대명사 / 大明祠
    광주광역시 광산구 명도동 가마마을송시열(宋時烈) 오효석(吳孝錫)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사우1963년 창건연혁 1963년 지역유림의 뜻을 모아 건립(나주 오씨 문중에서 소유 및 관리)사당 : 정면 4칸, 측면 2칸, 팔작지붕향사인물송시열(宋時烈, 1607~1689) 본관-은진(恩津) 자-영보(英甫) 호-우암(尤菴)·우재(尤齋)오효석(吳孝錫, 1620~1697) 본관-나주(羅州) 자-선이(善詒) 호-생로당(生老堂)·대명처사(大明處士)
    2020-03-03 | NO.40
  • 대산사 / 大山祠
    광주광역시 광산구 대산동 대야마을, 송정리에서 영광쪽으로 10여 km를 가다가 삼도 삼거리에서 나주쪽으로 2km 남짓 가면 오른편으로 대산동 대야마을이 나온다.이 마을 후록(後麓)에 대산사(大山祠)가 있다.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과  수당睡堂 류인석(柳寅奭)을 배향하고 있는 사우1727년(영조 3) 창건연혁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고 광복 후인 1957년 창건된 사우이다.향사인물최익현(崔益鉉, 1833~1906) 류인석(柳寅奭, 1859~1931) 기유의거를 우러러 송축함(仰頌己酉義事) 亡身殉義最爲難 이 한 몸 내던져 의(義)를 따라 죽기란 지극히 어려운데慷慨誓師血淚斑 의분에 복받치어 군중 앞에 맹세하니 피눈물이 얼룩지네雄心倡動風雲裡 웅지를 품고 풍운 속에 앞장서서 감동을 일으키니壯氣彌唄宇宙間 장렬한 기상 우주(宇宙) 사이에 가득 넘치네擧旌何必龍蛇役 의로운 깃발 날림이 어찌 꼭 용사(龍蛇)의/역(役)[임진왜란]뿐이리요殲賊先從婦鷺班 적을 섬멸하기 위해 원로(婦鷺)의 반열[조정에/늘어선 백관]에서 가장 먼저 앞장을 섰도다毅魄丁寧如左右 의연한 그 충혼 정녕코 좌우에 머무시리니試看他日洗兵還 후일 무기 씻고 돌아올 때를 시험 삼아 보시오/ 수당(睡堂) 우국시(憂國詩) <수당유고(睡堂遺稿)> 중 이 시는 기유의사(己酉義事) 즉,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사살한 의거를 우러러 송축한 시이다. 결구에서 광복의 날이 기어이 올 것을 예언하고 있다.
    2020-03-03 | NO.39
  • 대치사 / 大峙祠
    주(州)의 북쪽 40리에 있는데 대제학(大提學) 이석지(李釋之), 직제학(直提學) 이안직(李安直), 효우당(孝友堂) 이종검(李宗儉), 충장공(忠藏公) 이보흠(李甫欽), 부제학(副提學) 이종겸(李宗謙), 주부(主簿) 이정실(李鼎實), 묵은(默隱) 이정신(李鼎新), 야은(野隱) 이정태(李鼎泰)를 향사(享祀)한다.장의(掌議) 2인, 색장(色掌) 2인 원생(院生) 15인인데 고종 무진(戊辰, 1868)에 철폐되었다.- 광주읍지(1924)
    2020-04-20 | NO.38
  • 덕림사 / 德林祠
    광주광역시 광산구 덕림동 송산마을문화 류씨(文化 柳氏) 문중 사우1798년(정조 22) 창건연혁1798년(정조 22) 건립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철폐1963년 호남유림에 의해 복설 류인옥(柳寅玉) 추배규모: 사우 : 정면 3칸, 측면 1칸, 영보재향사인물류절(柳節, 1517~1580) 본관-문화(文化) 호-일당(逸堂)류희달(柳希達, ?~?) 본관-문화(文化) 호-농포(農圃) 류절의 아들류시필(柳時必, ?~?) 본관-문화(文化) 호-고암(高巖) 류희달의 아들류인옥(柳寅玉, ?~?) 본관-문화(文化) 호-경은(耕隱) 류희달의 9세손
    2020-03-03 | NO.37
  • 도림사 / 道林祠
    광주광역시 광산구 도덕동(광산구 도림하길 33) 마을 안에 있는 도림사는 1934년 노사 기정진, 난와 오계수, 후석 오준선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유림들이 세운 사우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 위의 기둥이나 단청 등은 고풍스럽게 느껴지지만 기단은 콘크리트로 쌓아 축조된 1930년대식 건축물이다.도림사는 나주 오씨 문중과는 다소 특이한 관계 속에 운영된다. 이 사우에 제향된 오계수와 오준선은 나주 오씨인데다 출생지도 도림마을인 반면 기정진은 친족이 아니다. 다만 오계수와 오준선이 기정진의 문인이었다는 연고가 있을 따름이다. 도림사는 기본적으로 학연에 기반을 두고 운영되는 사우라는 특징을 지닌다. 그리고 도림사의 운영에 관여하는 오씨들도 문중이 아니라 문인의 자격으로 참여한다. 매년 양력 5월5일 제향을 지낸다.  기정진(奇正鎭) 오계수(吳繼洙) 오준선(吳駿善)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사우1934년 창건향사인물기정진(奇正鎭, 1798~1879) 본관-행주(幸州) 자-대중(大中) 호-노사(蘆沙)오계수(吳繼洙, 1843~1915) 본관-나주(羅州) 자-중함(重涵) 호-난와(難窩)오준선(吳駿善, 1851~1931) 본관-나주(羅州) 호-후암(後石)
    2020-03-03 | NO.36
  • 동호사
    광산구 본량본촌길 29 동호사는 1956년 이 고장 유림들의 발의로 조선 개국공신인 정안 청성백 심덕부(沈德符, 1328~1401)를 비롯하여 인수부윤 심징(沈澄), 관찰사 망세정忘世亭  심선璿, 기묘명현 묵헌 심풍灃, 선무원종공신 김해부사 삼암三巖 심광헌光憲, 심용 등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사우로 매년 2월 25일 제향을 올린다. 심덕부는 청화부원군 심용의 아들로 자-득지(得之) 호-노당(蘆堂)·허당(虛堂)이다. 1328년(고려 충숙왕 15)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서 충숙왕 말에 소부윤을 거친 후 공민왕 때 파위위시하로 옮겼다가 우왕 원년(1375)에 예의판서로 강계도 만호를 겸하였다. 심덕부의 넷째아들인 사부 심징(沈澄, ?~?)의 자는 총옥으로 벼슬은 가정대부(嘉靖大夫)로 인수부(동궁의 호칭)의 사부를 역임한 바 있다.묵헌 심풍(沈豊, ?~?)은 1482년(성종13년)에 태어나 이조정랑에 올랐다가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유배되자 이의 부당함을 상소했다가 오히려 영암으로 유배되었다.망세정 심선(沈璿, ?~1467)의 자-윤부(潤夫)로 가정대부, 경기도관찰사, 개성유수를 역임하였고 사후에는 보국숭록대부 영돈령부사를 추증하였다. 심암 심광헌(沈光憲, ?~?)은 심례의 아들로 음사(蔭仕)로 주부(主부)가 된 후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노량해전에서 전공을 세웠다.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지붕이며 삼문은 솟을대문 형식이다.東湖祠創建顚末事實記동호사(東湖祠)는 유오선조오선생(惟吾先祖五先生)의 게건타령지소(揭虔妥靈之所)이며 조선조개국공신(朝鮮朝開國功臣) 정안 휘 덕부(定安 諱 德符)를 주벽(主壁)으로 인수부윤 휘 징(仁壽府尹 諱 澄), 관찰사 망세정 휘 선(觀察使 忘世亭 諱 璿), 기묘명현 묵헌 휘 풍(己卯名賢 默軒 諱 灃), 선무원종공신 삼암 휘 광헌등 선조오선생(宣武原從功臣 三巖 諱 光憲等 先祖五先生)의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한 사우(祠宇)이다.오선생(五先生)의 절의훈업(節義勳業)은 이미 사서(史書)에 기록(記錄)되어 널리 후세(後世)에 전(傳)하여 족(足)히 강상(綱常)이 부식(扶植)되어 세도(世道)에 비익(裨益)되어 경향사림(京鄕士林)이 흠숭(欽崇)하며 정안선생(定安先生)을 주벽(主壁)으로 인수부윤공(仁壽府尹公) 망세정공(忘世亭公) 묵헌공(默軒公) 삼암공(三巖公) 사선생(四先生)을 배향(配享)한다면 그 누가 부가(不可)타 하리요 하며 입사(立祠)를 권장(勸奬)함에 본손(本孫) 한구(翰求) 부승감창(不勝感愴)하며 사론(士論)을 종중(宗中)에 전(傳)하니 전(全) 자손(子孫)이 환호이찬(歡呼以贊)하고 1956年 병신춘(丙申春)에 다소유여(多少有餘)한 남동 본촌량사문중(南洞 本村兩私門中)에서 황조일백습이석(黃租壹百拾貳石)을 성출(誠出)하고 만취정경내(晩翠亭境內) 한구부지(翰求敷地)에 同年 11月 5日 개기(開基)하여 신실(神室) 3間 內3門 3間을 건축(建築)하고 삼년후(三年後)인 己亥에 번와저문(飜瓦著門)하고 수리(修理)하니 건물(建物)이 준공(竣工)되었다.1963年 癸卯春 호당(豪堂) 석계(石溪) 남동(南洞) 본촌등(本村等) 각사문중(各私門中)에서 위토(位土)를 성출(誠出)하니 유지지책(維持之策)이 조성(造成)되고 사림(士林)의 협조(協助)와 자손(子孫)의 탄갈심력(殫竭心力)으로 同年 11月 15日 각지(各地)의 사림(士林)과 자손(子孫)이 모여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고 례성(禮成)하였다.
    2019-12-03 | NO.35
  • 두암사 / 斗岩祠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동 837-1(광주광역시 북구 면앙로170번길 12-17)두암사(斗巖祠)는 장열사(壯烈祠) 옆에 있는 사우이다. 1850년(철종 1) 우치동에 건립되어 고려조 삼중대광 금녕군(金寧君) 김목경(金牧卿)과 문민공(文愍公) 탁영 김일손(濯纓 金馹孫), 망헌 김광립(望軒 金光立)의 삼위를 봉사하였다. 그러다 1977년 장열사에서 독립해 두암사라 하여 김목경을 추배하고 있다.김목경은 ‘조적(曺頔)의 난’을 평정하여 조정에서 ‘금녕군’의 호를 받았다. 후일에 세속을 떠나 속리산으로 들어갔다. 그의 후손들이 묘를 찾지 못하여 장열사에서 제단을 쌓고 함께 제를 올렸다.  우연히 지석을 발견해 금녕군의 묘를 확인하고 후손이 장열사에서 따로 모셔 두암사를 짓고 모시게 됐다. 두암사 건물은 장열사를 중건하면서 뜯어낸 건물을 그대로 옮겨서 다시 지은 것 이라 한다.이곳에서는 매년 음력 3월 13일과 9월 13일에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1998년에는 양력 11월 1일에 제사를 지냈다.배향인물1)김목경(金牧卿) :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품계가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다. 충혜왕(忠惠王) 때 조적(曺頔)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김녕군(金寧君)에 봉해졌으나, 국사(國事)가 날로 어지러워짐을 보고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조년(李兆年)과 함께 누차 왕에게 간(諫)했으나 듣지 않자, 속리산(俗離山)에 들어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여생을 마쳤다.2)김일손(金馹孫, 1464∼1498) : 조선 전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 또는 소미산인(少微山人). 대대로 청도에서 살았다. 할아버지는 극일(克一)이고, 아버지는 집의(執義) 맹(孟)이며, 어머니는 이씨이다.1486년(성종 17) 생원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이 해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이어 같은 해에 식년 문과 갑과 제2인으로 급제하였다. 처음 승문원에 들어가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관직 생활을 시작해, 곧 정자(正字)로서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였다. 그 뒤 진주의 교수(敎授)로 나갔다가 곧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운계정사(雲溪精舍)를 열고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 시기에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정여창(鄭汝昌)·강혼(姜渾) 등과 깊이 교유하였다. 다시 벼슬길에 들어서서 승정원의 주서(注書), 홍문관의 박사·부수찬(副修撰), 전적(典籍)·장령(掌令)·정언(正言)을 지냈으며, 다시 홍문관의 수찬을 거쳐 병조좌랑·이조좌랑이 되었다. 그 뒤 홍문관의 부교리(副校理)·교리 및 헌납(獻納)·이조정랑 등을 지냈다. 관료 생활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사가독서(賜暇讀書 : 재능이 있는 문신들에게 문흥을 위해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한 제도)를 하여 학문과 문장의 깊이를 다졌다. 그리고 주로 언관(言官)에 재직하면서 문종의 비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을 복위하라는 과감한 주장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훈구파의 불의·부패 및 ‘권귀화(權貴化 : 권세가 있는 귀족으로 됨)’를 공격하고 사림파의 중앙 정계 진출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 결과 1498년(연산군 4) 유자광(柳子光)·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가 일으킨 무오사화에서 조의제문(弔義帝文)의 사초화(史草化) 및 소릉 복위 상소 등 일련의 사실 때문에 능지처참을 당했다. 그 뒤 중종반정으로 복관되고, 중종 때 직제학(直提學), 현종 때 도승지, 순조 때 이조판서로 각각 추증되었다. 17세 때까지는 할아버지 극일(克一)로부터 ≪소학≫·사서(四書)·≪통감강목 通鑑綱目≫ 등을 배웠으며, 이후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 평생 사사하였다. 김종직의 문인 중에는 김굉필(金宏弼)·정여창 등과 같이 ‘수기(修己 : 자기 자신을 닦으면서 수양함)’를 지향하는 계열과, 사장(詞章)을 중시하면서 ‘치인(治人 : 남을 다스리는 정치)’을 지향하는 계열이 있었는데, 후자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한편, 현실 대응 자세는 매우 과감하고 진취적이었다. 예컨데 소릉 복위 상소나 조의제문을 사초에 수록한 사실 등에서 정치적 성향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세조의 즉위 사실 자체와 그로 인해 배출된 공신의 존재 명분을 간접적으로 부정한 것으로서, 당시로서는 극히 모험적인 일이었다. 이같은 일련의 일들이 사림파의 잠정적인 세력을 잃게 한 표면적인 원인이 되었다.저서로는 ≪탁영집 濯纓集≫이 있으며, <회로당기 會老堂記>·<속두류록 續頭流錄> 등 26편이 ≪속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 자계서원(紫溪書院)과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3)김광립(金光立, 1591~1646) : 호(號)는 망헌(望軒),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인조(仁祖) 때 훈련원 첨정(訓練院僉正) 등을 거쳐 안주 목사(安州牧使)로 나가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진무공신(振武功臣)에 오르고, 이어 황주 목사(黃州牧使)가 되었다. 광주(光州)의 두암사(斗巖祠)에 제향(祭享)되었다. 건축물두암사(斗巖祠) 건물은 장열사를 중건하면서 뜯어낸 건물을 그대로 옮겨서 다시 지은 것 이라 한다. 입구인 외삼문을 들어서면 우측에 강당이 존재하고 좌측엔 부속건물이 있다. 정면에는 내삼문이 있고 내삼문 안에는 두암사가 자리잡고 있다. 김유신(金庾信) 김일손(金馹孫) 김광립(金光立)을 배향하는 사우1850년(철종1) 창건1850년(철종 1) 우치동에 건립 금녕군(金寧君) 김목경(金牧卿), 탁영 김일손(濯纓 金馹孫), 망헌 김광립(望軒 金光立)의 3위(位)를 봉사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폐지령(廢止令)으로 훼철(毁撤)1977년 장열사에서 독립, 명칭을 두암사라 하고 김목경을 추배사우 :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 추모재향사인물 김유신(金庾信, 595~673) 본관-김해(金海)김일손(金馹孫, 1464~1498) 본관-김해(金海) 자-계운(季雲) 호-탁영(濯纓), 소미산인(少微山人)김광립(金光立, 1591~1646): 본관-김해(金海), 호(號)는 망헌(望軒) 김목경(金牧卿, 생몰년미상): 본관은 김해(金海), 고려 충혜왕(忠惠王) 조적(曺頔)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금녕군(金寧君)에 봉해짐.  김해 김씨 경파의 중시조향사일음력 3월 13일, 9월 13일기타사항  : 두암사(斗巖祠) 건물은 장열사를 중건하면서 뜯어낸 건물을 그대로 옮겨서 다시 지은 것.
    2020-03-03 | NO.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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