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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고 심하옹 장초〔祖考尋何翁狀草〕 - 덕촌집

조고 심하옹 장초〔祖考尋何翁狀草〕 - 덕촌집 제10권 / 비장(碑狀)


공의 휘는 도남(道南), 자는 수오(壽吾), 그 선세(先世)는 능주(綾州)에 살았다. 조고(祖考) 건계공(建溪公) 휘 산형(山逈)은 하동 정공(河東鄭公) 우(遇)의 딸에게 장가들어 영암군(靈巖郡) 옥천(玉泉) 대산리(大山里)에 췌거(贅居)하였다. 정공(鄭公)은 곧 참판공(參判公) 운(運)의 종부(從父) 형제이다. 건계공은 문재(文才)가 민첩하여 사람들이 가성(家聲)을 이을 자손이라 칭하였으나 과거에 누차 급제하지 못하여 현달하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아들 넷을 두었는데 공의 부친이 그 장자(長子)로 휘는 범용(範容)이며 문학에 종사하여 능히 선조의 사업을 이었다. 이때 임강공(臨江公) 예용(禮容) 또한 같은 군의 팔마리(八馬里)에 췌거하였는데, 공에게는 종조(從祖) 숙부(叔父)가 된다. 공은 이에 대산(大山)으로부터 용정리(龍井里)로 옮겨 살았는데 팔마리와는 5리의 거리로 상종하기에 편리하였다.
선산 임씨(善山林氏) 석천(石川) 선생 억령(億齡)의 종부 형제의 아들 정해(挺海)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셋을 낳았는데 공이 둘째 아들로, 두 살 때 부친을 여의었는데 막내아우는 태어난 지 겨우 몇 달이었고 백형(伯兄)은 겨우 5세였다. 나이 12세에 모부인이 또 세상을 떠나 외롭고 고단하게 의지할 곳이 없어서 임강공(臨江公)이 거두어 돌보고 가르치고 길렀다. 공의 외가 임씨가 후손이 없어 제사가 끊기니 백형이 외가의 제사를 모시며 외숙모에게 맡겨 길러졌고, 공과 아우는 끝내 의지할 곳이 없었다. 22세에 광산 김씨(光山金氏) 진사 응해(應海)의 딸에게 장가들어 광주(光州)에서 수 년 동안 췌거(贅居)하였으나 형제가 화락하게 지내기를 오랫동안 하지 못하여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갔다.


공의 성품은 중후하고 정직하며 바르고 엄숙하였으며, 말은 과묵하고 몸가짐은 검소하며 효우(孝友)가 매우 돈독하였다. 떠돌면서 탕패(蕩敗)한 나머지 가산이 흩어져서 반묘(半畞)의 밭이나 문에서 손님 맞을 동자도 없어서 공의 처가에서 데리고 온 노비 몇 명을 아우와 나누어 부렸다. 기타 일용의 세세한 일 또한 나와 너의 구분이 없이 하였으며 친애의 정이 늙을수록 더욱 돈독하였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봉양을 하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이 되어 그 기일(忌日)에 추도하는 애통함이 참절(慘切)하여 슬픔을 스스로 견디지 못하였다. 연세가 높은 사람을 존경하여 그 예를 극진히 하고 비록 일찍이 서로 알지 못한 사람이라도 길에서 만나면 반드시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었으며, 여염(閭閻)의 노인에 이르기까지 애휼(愛恤)이 그침 없었다. 먼 길을 떠날 때에는 객관의 주인 중에 나이가 많은 사람이 있으면 여비를 내어 주었으니 대개 어버이를 추념하는 일단을 볼 수 있다.


조고비(祖考妣)와 고비(考妣) 양세(兩世)의 터를 잡아 장사 지낸 자리가 상서롭지 못하여 체백(體魄)이 편안하지 못할까 두려워 마침내 모두 새로운 산에 터를 잡고 이장하였다. 장사를 지낼 때 필요한 물품은 모두 친히 힘써 마련하여 공급하고 한 물건이라도 자손들에게 분정(分定)하지 않았다. 항상 당성배(堂姓輩)들이 여유롭게 놀며 세월을 보내고 학문에 전념할 뜻이 없을까를 걱정하여 책면(責勉)함이 간절하여 모두 집에 머물게 하고 가르쳤으며 그 가난하여 양식을 댈 수 없는 사람은 먹여주었다. 붕우 사이에는 절차탁마하고 경계하여 자신의 성의를 다하였다. 성품이 본래 강개하여 시속을 따라 부앙(俯仰)하지 않고 간혹 싫어하는 사람이 인정에 벗어나는 비난을 가해오면 듣고 바로 잊어버려 헤아려 따져보거나 멀리하는 뜻이 없으니, 비난한 사람이 나중에 곧 부끄러워하며 복종하였다. 무릇 그 사용하는 것은 극히 검소하였고 음식은 배가 부를 정도만 취하였으며 의복은 몸을 가릴 정도만 취하였다. 중년에 만대산(萬代山)의 영계(永溪) 물가에 집터를 정했는데 묵은 땅을 널리 힘써 개척하여 스스로 잘 조절하였으므로 가산이 점점 넉넉해졌다. 그러나 매양 가족들에게 화미(華靡)한 일을 하지 않도록 엄히 타일러 사용하는 것이 빈군(貧窘)할 때와 다름이 없게 하였다.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과 있을 때 남은 화려한 옷을 입고 자신은 소박한 옷을 입은 줄 알지 못하고 편안하게 대하며 조금도 시샘하는 뜻이 없었다. 빈객을 접대할 때에는 성의가 애연(藹然)하여 사람의 고하와 귀천에 따라 후박의 차이를 두지 않았다. 일찍이 가족들에게 말하기를, “무릇 음식의 법도는 만드는 사람이 많이 준비하기가 어려우니 손님을 대할 때 만약 고루 미칠 수 없으면 후박(厚薄)의 차별이 있게 되어 매우 편치 않다. 오직 마땅히 쉽게 장만하기에 힘을 기울여 계속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처음에 공은 임강공(臨江公)에게 수업하면서 사람들을 따라 과거 공부를 익히다가 중간에 스스로 깨닫고 말하기를, “만약 성현의 경전(經傳)을 읽지 않으면 참으로 사람 될 길이 없다. 또한 경전에 이미 익숙하고 문리가 이미 성장하면 과거 공부 또한 따라서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대학(大學)》으로부터 순서대로 강독하고 의심스러운 곳을 표기하여 붕우들과 더불어 강론하며 기어이 관통한 후에 그쳤다. 말년의 공부는 《주역(周易)》과 《주자서(朱子書)》에 더욱 정(精)하여 일이 있지 않으면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말하기를, “성현의 책은 참으로 사람다운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항상 말하기를, “내 성품이 편벽하여 자주 화를 내니 이것을 제거하는 공부는 마땅히 교왕과직(矯枉過直)의 방법을 써야한다.” 하고, 유관(劉寬)에게 국을 엎지른 일을 써서 자리 우측에 걸어두고 조석으로 성찰하였다. 지평(持平) 조공(趙公) 평(枰)이 사계(沙溪) 김 선생(金先生)의 문하에 출입하며 중명(重名)이 있었는데, 공의 명성을 듣고 만나기를 청하여 한번 만나보고 바로 지기(知己)로 인정하여, 《자양집(紫陽集)》일부(一部)를 주면서 말하기를, “공의 자질은 당세에 구하더라도 실로 쉽게 얻기 어려우니 더욱더 공부하여 반드시 원대한 뜻을 이루시오.”라고 하였다. 공의 과거공부에 대하여 사람들은 그 능력이 된다고 하였고 또한 이미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예부(禮部)에는 떨어져 마침내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날마다 경서(經書)를 스스로 즐기고 인하여 자호를 심하옹(尋何翁)이라 하였다. 이것은 주염계(周濂溪)가 정부자(程夫子)에게 매양 중니(仲尼)와 안자(顔子)가 어떤 일을 즐거워했는가를 찾도록 한 뜻을 취한 것이다.


제자(諸子)들을 가르칠 때도 말과 행동을 법도(法度)에 맞도록 하여 가르침을 따라 행하지 못하면 매우 엄하게 꾸짖어 조금도 봐주지 않았다. 항상 ‘자신을 낮추고 남을 존중한다.’는 것과 ‘자만은 손해를 부르고 겸손은 이익을 얻는다.’는 뜻으로 거듭거듭 이끌어 가르쳤다. 또 말하기를, “말을 삼가는 것은 덕성(德性)을 기르는 일단(一端)이다. 또한 영욕에 관계되는 것은 더욱 마땅히 삼가야 할 것이다. 비록 적막한 곳에 홀로 처할지라도 사람을 대하여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은 말하지 않아야 한다. 입에 습관이 되면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입에서 나오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람들에게 독서를 가르치는 것은 한결같이 주문(朱門)의 독서법을 따라, 《소학(小學)》으로부터 순서대로 송독(誦讀)하고 문리(文理)가 점점 진척된 뒤에는 의의(疑義)를 짓게 하고, 세속의 박잡(駁雜)한 글은 눈에 보지 못하게 하였다. 집안에는 장기와 바둑의 도구가 없었고 금가(琴歌)와 연음(宴飮)은 집에서 베풀지 않았으며, 또한 일찍이 남의 집에서도 참견(參見)하지 않았다. 규방의 안팎이 엄숙하고 질서정연하여, 노비들도 반드시 일정한 부부가 있게 하여 바꾸지 않게 하였다. 무격(巫覡)이 기도하는 일은 가정(家庭)에 들이지 않았으며 노복에게도 금지하여 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백형(伯兄)이 일찍 세상을 떠나고 계제(季弟) 또한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 공은 추념(追念)하며 몹시 그리워하여 매일 밤 탄식하면서 자리에 편히 눕지 못하고 말하기를, “나는 아우와 사방을 떠돌아다니며 온갖 고생을 모두 맛보았는데 지금은 없으니 하늘이 그런 것을 어찌한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임강공(臨江公)의 교육하신 은혜를 잊지 못하여 기일(忌日)이면 반드시 행소(行素)하고, 혹 제수(祭需)를 갖추어 보냈다. 일찍이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대대로 임강공(臨江公)의 자손과 형제의 정을 길이 맺어 오래도록 변하지 말거라.”고 하였다. 이것이 공의 마음가짐과 일을 행한 것의 대개(大槪)이다.


그 굳세어 꺾을 수 없는 기상과 탁월하고 원대한 도량에 이르러서는 사우(士友)들 사이에 서로 아는 사람들은 칭송하여 말하기를, “만약 당세에 시험 삼아 기용하였다면 얼마나 많은 공업(功業)을 이룰 수 있었을지 알 수 없으나 불행히 기용되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아, 공이 기업을 창건하고 그 전통을 남겨 계승할 수 있도록 한 것은 그 정대광명(正大光明)함이 이와 같은데, 자손이 준행(遵行)하여 대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는가. 공은 정미년(1607, 선조40) 6월 26일 태어나 정미년(1667, 현종8) 4월 15일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61세였다. 부인 김씨(金氏)는 공보다 6년 뒤에 세상을 떠나 동군(同郡) 달마산(達摩山) 동쪽 기슭의 완도(完島)를 안대(案對)하는 양화포(良化浦) 가의 유좌원(酉坐原)에 합장하였다. 계유년(1693, 숙종19) 월 일 불초고(不肖孤) 우주(禹疇)는 피눈물을 흘리며 삼가 적는다.



이상은 선군자(先君子)께서 말년에 서술한 조고(祖考) 심하옹(尋何翁) 부군(府君)의 유사로 아우 형중(瑩中)으로 하여금 집필하게 하고 구술하신 것이다. 매양 너무 간략하다고 여겨 다듬고 윤색할 뜻을 가지고 있었으나 다시 상세히 살피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으니, 아, 슬프다. 초본(草本)이 흐리거나 지워진 곳이 많고 종이 또한 오래되고 낡아서 후세에 전할 수 없으므로 감히 다른 종이에 옮겨 적어 정본(正本)으로 삼고 삼가 본문에 의거하여 전사(傳寫)하였다. 한 글자도 감히 움직이지 않았으나, 다만 평소 들은 조고(祖考)의 행적 몇 가지를 아래쪽에 별록(別錄)하여 원본(元本)의 미비함을 보충하고 인하여 행장(行狀)의 체재를 이루었다.


영계(永溪) 남쪽에 이웃한 박산촌(朴山村) 사람 장주(張籌)는 본군(本郡)의 교생(校生)이다. 어려서부터 조고(祖考)에게 수학(受學)하여 문(文)은 뜻을 통할 수 있었고 계산에 가장 뛰어났으며 사람됨이 성실하고 신중하며 질실(質實)하였다. 조고께서 과거시험장에 출입하실 때 항상 모시고 따랐고, 평소에는 전결(田結) 등의 일을 맡아보아 집안 식구처럼 신임하였다. 선군자(先君子)와 선백부(先伯父)의 때에 이르기까지 항상 우리들과 함께 거주하고 소심재(小心齋)에서 숙식하면서 집안의 농사일을 비롯한 대소사를 총괄하여 살피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선군자(先君子)와 선백부(先伯父)께서 우리들과 함께 문학(文學)에 전념할 수 있었다. 이에 사람들은 장생(張生)을 우리 집안의 가로(家老)라고 칭하였는데 나이가 80세를 넘어서 세상을 떠났다. 매양 우리들에게 조고의 평소의 몸가짐과 처사(處事)를 칭송하여 말하기를 부지런히 힘쓰며 싫증을 내지 않았다.


그가 말하기를, “공이 과거를 보러 갈 때 행색이 꾸밈없이 소박하여 비할 데가 없었으나 매양 촌사(村舍)에 투숙할 때는 주인이 나와서 절을 하고 안색을 우러러 보고는 한마디 말이 없이 그 내방(內房)을 비우고 맞아 들여 공봉(供奉)하기를 오직 삼갔다. 이때 가만히 들어보니 사방에서 과거보러 가는 사람들이 묵을 집을 다투느라 떠들썩한 소리여서, 넘어다보니 그 행색이 호사스럽기가 몇 배나 더하였는데, 이는 가는 곳마다 모두 그러하였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평소 가죽신을 신지 않고 솜씨 있게 작게 만들어 등자(鐙子)에 맞는 버드나무 나막신을 따로 만들어 길을 갈 때 신었다. 일찍이 먼 길을 다녀오시던 길에 한한정(閒閒亭)에 들렀는데, 주인은 곧 임공(林公) 백호(白湖)의 후손으로 남쪽 고을의 고사(高士)였다. 임공이 공의 나막신을 취하여 손수 부숴 뜰에 던지면서 공의 자(字)를 부르며 말하기를, ‘이후에는 이와 같이 괴이한 일을 하지 마시오.’라고 하고 인하여 신고 있던 채색 가죽신을 취하여 주며 말하기를, ‘이것을 신고 가면서 시험 삼아 나막신과 어떠한지 보시오.’라고 하였다. 공이 집으로 돌아오자 문안 하러 온 이웃사람들이 자리에 가득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누가 능히 좋은 나막신을 만들어 내게 주어 이 가죽신과 바꾸겠는가.’라고 하시자, 혹자가 말하기를, ‘반드시 가죽신을 나막신과 바꾸고자하시니 실은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그렇겠다. 가죽신과 나막신을 선택함에 내 어찌 다른 사람과 다르겠는가. 다만 가죽신은 혹 개가 물어뜯을까 걱정하고, 또 남이 훔쳐갈까 걱정하여 이미 벗어둔 후에 항상 스스로 관심을 두고 있다. 나막신은 이미 벗어둔 뒤에 이를 모두 잊는다. 발에 신고 길을 가는 것은 원래 다름이 없는데 어찌 능히 몸 밖의 물건으로 내 마음을 한 터럭만큼이라도 움직일 수 있겠는가.’라고 하셨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공께서 먼 길을 가실 때에는 점심(點心)은 반드시 백모(白茅)를 깔아 밥을 놓고, 감장(甘醬)과 감태(甘苔)를 유지(油紙)에 따로 쌌다. 낮에 촌사(村舍)에 들러 말을 먹이며 종으로 하여금 나뭇가지를 꺾어오게 하여 칼로 다듬어 젓가락을 만들어 밥을 드시고 나면 띠풀과 젓가락을 깨끗한 땅에 버리고 길을 나섰다. 일찍이 말씀하기를, ‘이날의 밥은 오시(午時)의 요기(療飢)를 위한 것인데, 몇 홉의 밥에 유기(鍮器)의 무게가 밥보다 세배는 더하니 이미 이것이 허위(虛僞)이다. 더구나 또 오후에는 빈 그릇을 지고 가야하니 이것이 더욱 허위 중의 허위이다.’라고 하셨다. 일찍이 먼 길을 다녀오다가 낮에 부소원(扶蘇院)에 머물고 있었는데, 마침 병사(兵使)의 순행(巡行)이 있었다. 강진(康津)의 아전들 또한 이 원에서 기다리느라 낮에 머물고 있었다. 공이 막 원에 도착했을 때 병사의 행차도 도착하였다. 이에 병사가 정당(正堂)을 차지하고 앉았고, 공은 서쪽 가의 작은 누각에 앉아 병사의 밥상이 오는 것을 보고 종을 불러 ‘내 밥을 가져오라’고 하니 종이 띠풀로 묶은 것을 드렸다. 또 종을 불러 말하기를, ‘나뭇가지를 꺾어 오너라.’고 하니, 종이 나뭇가지를 꺾어와 드렸다. 공이 차고 있던 칼을 꺼내 그 나뭇가지를 다듬어 젓가락을 만들었는데, 병사는 밥을 먹지 않고 앉아서 공을 한참동안 유심히 보다가 몸을 일으켜서 공을 향해오므로 공도 또한 일어나 마침내 서로 절을 하고 앉았다. 병사가 말하기를, ‘우리 함께 점심을 드시겠습니까.’라고 하니, 공이 ‘그렇게 하시지요.’라고 하였다. 병사가 아전으로 하여금 그 옆에 있는 소반을 들어 공의 앞에 놓게 하였는데, 소반에는 생선과 고기, 국 등 여러 그릇이었다. 공은 띠풀로 묶은 것을 소반 위에 놓고 젓가락으로 먹었다. 밥과 국을 모두 먹고 병사가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를 묻고 은근(慇懃)하게 정의(情誼)를 보이고 떠났다.”라고 하였다. 병사의 성명을 장생은 능히 말했으나 지금은 잊어버렸다.


장생이 또 말하기를, “공께서 광주(光州)에 췌거(贅居)하실 때 공의 부옹(婦翁)은 이미 돌아가셔서, 상가(孀家)에 주인이 없었다. 하루는 환곡을 독촉하는 관인(官人)이 와서 내외(內外)를 가리지 않고 방자하게 굴며 거리낌이 없으니, 공이 관인을 불러 꾸짖어 물리쳤다. 관인이 관에 무고하기를 아무개 집의 양반에게 곤장을 맞았다고 하여 태수(太守)가 크게 노하여 발패(發牌)하여 잡아들였다. 공이 부득이 관에 들어가 장차 자신이 한 일이 아님을 밝히려고 하는데, 사민(土民)과 곤장을 맞았다고 무고한 자가 뜰에 들어가 한참 동안 서 있었고, 태수는 때때로 돌아보기만 하면서 함께 말하지 않고 있었다. 다만 대청의 위를 바라보니 한 백발노인과 태수가 마주 앉아 서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가, 이윽고 아전으로 하여금 말을 전하여 이르기를, ‘물을 만한 일이 없으니 나가도 좋다.’라고 하여 이에 공이 나왔다. 그 노인 또한 머문 곳으로 찾아와 말하기를, ‘오랫동안 만나보려 했는데 지금에야 다행히 만났소.’라고 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예전 어느 때 모처를 지나다 길가의 샘터에서 점심밥을 먹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말을 타고 지나가다 행차가 내 앞에 이르렀을 때 문득 말에서 내려 몇 길을 걸어간 연후에 말을 타고 갔소. 마음속으로 괴이하게 여겨 그 뒤를 따르며 짐을 지고 뒤쳐진 노비를 불러 물으니 그 노비가 말하기를, 「우리 상전께서 노인을 보면 말에서 내리는 것은 본래 그러합니다. 길에서 백발노인을 만나면 반드시 말에서 내려 예를 차립니다. 가을과 여름 농사철에는 길가에서 밥을 먹는 농부를 보면 그중에 백발노인이 있으면 반드시 말에서 내려 지나가기를 오늘과 같이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소. 내 그 말을 듣고 탄복하여 인하여 사는 곳과 성명을 자세하게 물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는데 오늘 만나고 보니 의연(依然)히 그때의 안면(顔面)이라 나도 모르게 너무 기뻐서 태수에게 이 일을 칭송하여 말하고, 이와 같이 근신(謹愼)한 사람이 반드시 이런 망동을 할 리가 없다고 하자, 태수가 이에 의혹을 풀고 온화한 말로 내보내라 한 것이오.’라고 말하였다.”고 하였다. 노인의 성명을 장생은 능히 말하였으나 이 또한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장생이 또 말하기를, “일찍이 공께서 붕우와 담론할 때 모시고 앉아 가만히 들어보니, ‘무릇 기생이 가무를 하는 곳에는 결코 한시도 자리에 참석해 본적이 없었다. 비단 사람의 마음을 혼란하게 할 뿐만 아니라, 한 기생의 가무를 자리에 있는 부자(父子) 형제(兄弟)가 일시에 주목하다니, 천하에 어찌 이와 같은 광경이 있겠는가.’라고 하셨다.”고 하였다.


갑진년(1724, 경종4) 여름 나는 익찬(翊贊)으로 입번(入番)하였는데, 조태만(趙泰萬) 제박(濟博)이 시직(侍直)으로 함께 입번하여 그와 더불어 대화를 하였다. 제박이 말하기를, “일찍이 강화(江華)의 정 참판(鄭參判) 제두(齊斗)를 뵈었는데, 말이 형 쪽에 미치자, 정 참판이 말하기를, ‘나는 그 집안에 대해 들은 지 오래다. 그 집안이 비록 외도(外道)이나 삼세(三世)를 학문한 집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외도가 무슨 도인가 물으니, ‘노자의 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정 참판은 어찌 형의 집안을 가리켜 노자의 도를 한다고 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정 참판의 말이 무엇을 이르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아천(鵝川) 박 선생께서 일찍이 선군자께 말하기를, ‘현강(玄江) 족숙(族叔)이 노형(老兄) 집안의 학문에 대하여 내게 말하면서, 「그 집안은 도회(韜晦)에 오로지 힘써서 천지만물(天地萬物)을 몸 밖의 물건으로 여기고 오직 독선(獨善)이 귀함만을 알아 그 흐름이 노자의 도에 들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하였소. 그대는 모름지기 서로 권면하며 학문을 닦을 때에 이 뜻으로 서로 강론하여 확실히 해야 할 것이오.’라고 하였는데, 정 참판의 말을 생각하건대 또한 현강의 뜻과 같을 따름이오.”라고 하였다. 제박은 머리를 끄덕이며 “그렇군요.”라고 하였다. 나는 제박과 말을 주고받은 후에 깊이 생각해보니 나막신을 신고 길을 가고 띠풀로 밥을 싸는 등의 일이 사람들로 하여금 노자의 도를 하는 것으로 의아해하게 한 것 같으니 또한 괴이할 것이 없다. 사람의 말은 반드시 깊이 헤아려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주-D001] 췌거(贅居) : 
처가살이. 더부살이를 말한다.
[주-D002] 체백(體魄) : 
사람의 육체에 붙어 다닌다는 넋. 사람이 죽은 뒤 육체를 떠난다는 혼(魂)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이다.
[주-D003] 당성배(堂姓輩) : 
고조부가 같은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주-D004] 교왕과직(矯枉過直) : 
굽은 것을 바로잡음에 바름을 과하게 한다는 말이다. 《주역》 〈소과괘(小過卦) 괘사(卦辭)〉에 “소과는 형통하니 정함이 이롭다.〔小過 亨 利貞〕”라고 하였다. 전(傳)에 “과는 보통을 넘는 것이다. 굽은 것을 바로잡음에 바룸을 과하게 함과 같으니, 과하게 함은 바름에 나아가는 것이다. 일은 때의 당연함이 있어 과하게 함을 기다린 뒤에 능히 형통함이 있다. 그러므로 소과는 스스로 형통할 뜻이 있는 것이다.〔過者 過其常也 若矯枉而過正 過所以就正也 事有時而當然 有待過而後能亨者 故小過自有亨義〕”라고 하였다.
[주-D005] 유관(劉寬)에게 국을 엎지른 : 
후한(後漢) 장제(章帝) 때 유관(劉寬)은 성질이 매우 너그러워 좀처럼 화를 내지 않았다. 그 부인이 그가 얼마나 너그러운가를 시험하고자 하여 그가 조회에 들어가려고 관복(官服)을 차려 입었을 적에 종을 시켜서 관복에 국을 엎질렀으나, 다만 “네 손이 데지나 않았느냐.”라고 했을 뿐 다른 말은 없었다 한다. 《後漢書 卷25 劉寬傳》
[주-D006] 주염계(周濂溪) : 
주돈이(周敦頤, 1017~1073)로, 자는 무숙(茂叔)이다. 강서성 여산(廬山) 기슭에 있는 염계(濂溪)에 서당을 짓고 살아서 호를 염계(濂溪)라 하였다. 북송의 대유학자이자 송학의 비조로, 그의 〈태극도설(太極圖說)〉은 주자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정이천ㆍ정명도 형제의 스승이기도 하다. 저서로는 《통서(通書)》가 있다.
[주-D007] 주염계(周濂溪)가 …… 뜻을 : 
정자가 일찍이 주염계에게 수학할 때, 주염계가 매양 중니(仲尼)와 안자(顔子)가 즐긴 것은 무엇인가 찾아보라고 하였는데, 주자(朱子)가 이에 대해 “만약 그들이 한 공부를 배우면 곧 그들이 즐긴 것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주염계는 즐긴 바가 무엇인지를 말해 주지 않고 단지 그것을 찾도록 하였고, 주자는 또 ‘그들이 한 공부를 배우면 곧 그들이 즐긴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였으니, 후학으로 하여금 그 이치를 찾도록 한 것이라고 한다.
[주-D008] 자신을 …… 존중한다 :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예라는 것은 자신을 낮추고 남을 존중하는 것이다.〔夫禮者 自卑而尊人〕”라고 하였다.
[주-D009] 자만은 …… 얻는다 :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자만은 손해를 부르고 겸손은 이익을 얻는다. 이것이 바로 천도이다.〔滿招損 謙受益 時乃天道〕”라고 하였다.
[주-D010] 행소(行素) : 
소반(素飯)을 먹음. 슬퍼하여 기름진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을 말한다.
[주-D011] 기업을 …… 것은 : 
창업수통(創業垂統)은 기업(基業)을 개창하고 이를 후대에 전한다는 말이다. 《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 “군자는 기업을 창건하고 전통을 드리워서 계승할 수 있게 한다.〔君子創業垂統 爲可繼也〕”라고 하였다.
[주-D012] 등자(鐙子) : 
말을 타고 앉아 두 발로 디디게 되어 있는 물건으로, 안장에 달아 말의 양쪽 옆구리로 늘어뜨린다.
[주-D013] 정당(正堂) : 
정사를 처결하는 대청(大廳)을 말한다.
[주-D014] 발패(發牌) : 
금령을 위반한 사람을 잡아 오게 하기 위하여 금란패(禁亂牌)를 보냄을 이른다.
[주-D015] 조태만(趙泰萬) : 
1672~1727.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제박(濟博), 호는 고박재(古朴齋)이다.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이다. 1717년(숙종43)에 학행으로 돈녕부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22년(경종2) 또다시 돈녕부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자,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시직(侍直)으로 임명되었다. 1724년 사간원으로부터 그의 말과 행동이 시직이라는 직책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탄핵을 받아 체직되었다. 1743년(영조19) 시직 재직 때에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였다 하여 가자(加資)되었다.
[주-D016] 도회(韜晦) : 
재주나 지혜, 학문, 자취 등을 숨기고 드러내지 않음을 말한다.
[주-D017] 독선(獨善) : 
자신을 수양하고 절조를 지키는 데에 힘씀을 이른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옛사람들이 뜻을 얻으면 은택이 백성에게 가해지고, 뜻을 얻지 못하면 몸을 닦아 세상에 드러냈으니, 궁하면 그 몸을 홀로 선하게 하고 영달하면 천하를 겸하여 선하게 한다.〔古之人得志 澤加於民 不得志 修身見於世 窮則獨善其身 達則兼善天下〕”라고 하였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저자(연도) 제목 발행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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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Ⅰ 인물과 문헌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Ⅱ 문화유적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마을(동)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민속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21) 양림 인물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동구문화원(2014) 광주광역시 동구 마을문화총서 Ⅰ 광주동구문화원
광주문화관광탐험대(2011~16) 문화관광탐험대의 광주견문록Ⅰ~Ⅵ 누리집(20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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