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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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정홍명의 기옹만필畸翁漫筆

송강 정철의 넷째아들 기암 정홍명의 <기옹만필畸翁漫筆> 鄭弘溟著

●율곡 선생이 화담(花潭.서경덕)의 학문에 대해 말할 때에는, “기(氣)를 이(理)로 아는 병폐가 좀 있다.” 하고, 《대학》소주(小註) 중 진북계(陳北溪.송나라 학자)의 설명에 대해 반박하여 말하기를,“이(理)와 기(氣)는 원래 서로 떨어지지 않은 것이나, 합함이 있지는 않다.” 하였다. 또 들으니, 항상 의논하기를,

“〈태극도설(太極圖說)〉의 ‘묘하게 합하여 엉긴다.’는 것은 주자의 ‘한 덩어리가 되어 간격이 없다.’는 설명만 못하다.” 라고 하였는데, 훗날에 반드시 그 뜻을 알 자가 있을 것이다.

율곡의 사서(四書)의 토와 주석 및 소주(小註)의 평정(評訂)이 극히 정밀하고 자세하여, 후학들을 감발하게 할 만하다. 그런데 애석한 것은 그 일을 경전에까지 미치지 못하였으며, 또 당세에 널리 전포하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좋아하지 않는 자가 보면 버리고 거두지 않는 일이 없다고 기필하지 못하겠다.

●‘이(理)와 기(氣)는 선후(先後)가 없다.’는 설은 선유(先儒)들이 이미 다 말하였다. 그런데 전에 보니, 여장(汝章) 권필(權鞸)이 우연히 여기에 대하여 말하였는데, 여장(汝章)은,

“정일두(鄭一蠹.정여창)가 《중용》첫 장 주의 ‘기로써 형체를 이루고 이 또한 부여[賦]한다.’고 한두 글귀를 가지고서, 주자가 선후의 분변을 말하였다 하였으니, 그것은 본뜻을 잘못 안 것이다.” 하였다.

●사계(沙溪.김장생) 선생이 《심경(心經)》중의, ‘마음이란 붙잡으면 있고 버리면 없으며, 출입함에 일정한 시간이 없고 그 방향을 모른다.’는 구절을 강의하고, 또 다시 범순부(范淳夫.범조우)의 딸이 말한 ‘맹자는 마음이라는 것을 모른다. 마음이 어찌 나고 드는 것이 있겠느냐?’ 한 데 대하여 정자(程子)가 ‘이 여인이 맹자를 알지는 못하지만, 마음은 알았다.’고 칭찬한 것을 들어 말하면서, 맹자와 범녀(范女)의 말이 다른 것은 무엇이냐고 자주 여러 생도들에게 물었었다. 그런데 내가 작은 설명문을 지어서 선생에게 여쭈어 의논하기를,

“대저 사람의 마음이란 방 안의 불빛과 같아서 비록 바깥의 바람에 끌려 움직이게 되어 이리저리 흔들려 안정하기 어렵게 되기는 하지만, 원래 일찍이 다른 물건을 따라 밖으로 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끌려 움직일 때에도 그 자리에 있고 안정될 때에도 역시 그 자리에 있는 것으로서, 사람이 말을 타고 문 밖으로 나가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그 존망과 출입이라고 한 것은 다만 감응하여 통하는 묘리를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장자(莊子)가 ‘하루 동안에 두 번씩 사해(四海) 밖을 돌아다닌다.’고 말한 것도, 안에서 밖으로 나가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을 말함이 아닙니다. 어떠합니까?”

하였었다. 그런데 선생께서 나중에 과연 그것을 옳다고 하였는지 아니라고 하였는지는 아직 알지 못하겠다.

●사계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성인의 마음은 맑은 거울이나 고요한 물과 같아서 학자들이 엿보아 측량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 나머지 중인(衆人)들은 마음이 달리고 뛰어 오르는 병통이 많으니 반드시 먼저 본체(本體)를 세운 뒤에 발동하는 곳에 따라서 성찰하며, 더 공부하여야만 찾아 잡음이 있을 것이다.”

하고, 언제나 경서(經書)와 강해(講解)에 있어서도 반드시 동(動)과 정(靜)을 겸하여 보는 것을 위주하였다. 거기에서 노선생께서 실지 공부에 힘을 쓴 것이 허술하지 않음을 알겠다.

●여윤(汝允) 최명룡(崔命龍)이 말하기를,

“지(志)란 견주어 생각하고 헤아림이 정한 방향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발동하게 되면 선도 있고 악도 있다. 때문에 도학에 뜻을 두는 자도 있고, 공명과 부귀에 뜻을 두는 자도 있어서, 사람에 따라 일정하지 않다.” 고 하였다.

●젊었을 때 해서(海西) 지방을 왕래하면서 석담(石潭)의 사당을 찾아뵈었다. 사당에서 나와 몇몇 선비들과 못가를 거닐었는데, 시내와 산이 아주 아름답고 솟은 돌이 병풍처럼 둘려 있었다. 그 중 율곡 선생 문하에서 배운 선비들이 모두 말하기를,

“선생께서 이곳 산수 구곡(九曲)이 완연히 중국 무이(武夷)의 경치와 같다고 여겨 드디어 몇 동지들과 힘을 합하여 주자의 사당을 세웠는데, 산수도 그러하지만 또 평생을 두고 항상 주자를 숭상했기 때문이었다.”하였다. 또 말하기를,

“선생은 풍채가 간결하고 언어가 평탄하여 지방 사람들과 상대하는 데에 있어서도 젊은이나 어른, 어리석은 이나 지혜로운 이 할 것 없이 모두 환심을 가지게 하였다. 때로는 혹 사색하는 것이 있으면, 잠자코 한참 동안을 있다가도 다시 평상시와 같이 하였다.”한다.

●일학(一學) 노숙(老宿)은 불문(佛門)의 종사(宗師)이다. 오대산(五臺山)에서 입정(入定)한 지 근 50년이나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일찍이 말하기를,

“젊어서 율곡을 따라 산놀이를 하였는데, 어떤 곳을 지나다가 돌구멍에서 나오는 작은 샘물이 있어 여러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물을 마셨다. 율곡도 물을 길어오라고 하여 한 모금 마시고는 ‘이 물은 둘도 없는 맛이다.’ 하였으나, 여러 사람들은 조금도 특이한 것을 몰랐다. 율곡이 말하기를 ‘대저 물은 맑은 것이 좋은데, 맑으면 무게가 무겁다. 흐린 물은 비록 모래와 진흙이 섞였더라도 무게는 맑은 물을 따르지 못한다.’ 하니, 같이 가던 사람들이 다투어 시험해 보니, 과연 무게가 다른 물의 두 배나 되었다. 마침내 철인(哲人)은 만물의 이치에 모르는 것이 없음이 다 이런 줄을 알았다.” 하였다.

●오래 전에 우연히 늙은 중을 만났는데, 그의 말이 용문산(龍門山)에 있을 때에 우계(牛溪.성혼)선생과 여러 날을 함께 거처하여 그 분의 일상생활을 잘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선생이 조석으로 무엇을 하던가?” 물으니, 대답하기를,

“새벽에 일어나면 반드시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고 의관을 정제한 다음 단정히 팔짱을 끼고 바로 앉는다. 오정 때쯤 되면 또 세수를 하고는 머리를 빗고 앉으며 때로는 책을 펴 본다. 생각할 것이 있으면 곧 책을 덮고 엄숙히 말하지 않고 있는데, 바라보면 엄숙하여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 없게 된다.” 하였다.

●우계는 집에 거처할 때에도 일처리가 세밀하였다. 이른 아침에 그날 일을 시키는데, 비록 농사짓는 사소한 일일지라도 하인들에게 반드시 시간과 노력을 계산하여 분부하는데 조금도 차이가 생기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고향에 거처할 때에도 집안이 가난하고 궁핍한 적이 없었다.

청송(聽松.성수침) 선생은 평생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제사 드리고 손님 대접하는 준비는 모두 우계가 마련하였다. 혹 서울 객중에 있을 적에도 매양 친구들이 찾아가면 반드시 술과 고기가 있었는데, 청송은 이것을 원래부터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하였다.

●율곡ㆍ우계 및 우리 선인이 함께 진사 이희삼(李希參)의 집에 모였을 적에, 주인 집에서 술자리를 마련하였는데, 석개(石介)가 당시의 이름난 기생으로 자리에 참석하였다. 술을 돌리고 노래를 부르려 하자 우계가 갑자기 일어섰으나 좌중에서 감히 만류하는 이가 없었다. 이는 평생에 음탕한 소리를 듣지 않는 것으로 법을 삼았기 때문이라 한다.

●퇴계(退溪)는 남명(南溟.조식)과 시대가 같고 동갑이며 같은 도에 함께 있었지만 끝내 만나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것은 그들의 의논이 서로 달라서 그런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옛날에 ‘천고의 옛 사람을 벗 삼는다.’ 하였으며 ‘천리 길을 가서 만나본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또 무엇 때문이었던가?

●성대곡(成大谷)이 지은 남명의 〈행록(行錄)〉에,

“공이 두류산에 놀 때 한 소년을 만나보고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시기하고 질투하며 착한 사람을 원수처럼 보니, 훗날에 만일 뜻을 얻게 된다면 착한 사람들이 화를 입을 것이다.’고 했다 한다.” 하였다. 후인이 그것은 기고봉(奇高峰)을 지목한 것으로 의심하나,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괴이한 일이다.

●김하서(金河西.김인후)는 풍채가 맑고 빼어나며 골격이 기이하여 세속 사람들보다 특출하였다. 젊을 때에 인종(仁宗)에게 인정을 받아 특별한 대우를 받았는데, 을사년(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났던 해) 이후로는 인간사의 생각을 끊어 그 모습이 마른 나무나 식은 재와 같았다. 매년 7월의 기일(忌日)을 당하면 기일에 앞서 술을 가지고 산중으로 들어가서 한없이 통곡하였다. 선인(先人)이 평소 깊이 사모하여 시를 지었는데,

해마다 7월이 되면 / 年年七月日

일만 산중에서 통곡하네 / 痛哭萬山中

이라 하였으니, 그 사실을 읊은 것이다.

●토정(土亭)의 소설(小說)에,

“악한 범은 사람의 작은 몸을 엿보고, 사특한 생각은 사람의 큰 몸을 먹어 들어가는데, 사람들이 악한 범은 무서워하고 사특한 생각은 무서워하지 않으니 어찌된 일인가?”하였다.

토정(土亭.이지함)이 포천 군수로 있을 때에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는데, 그 중 ‘사람을 쓰는 데에는 반드시 그 재주대로 하여야 한다.’는 조목에서는,

“해동청(海東靑)은 천하의 좋은 매이지만 새벽을 알리는 일을 맡게 한다면 늙은 닭만 못하고, 한혈구(汗血駒.하루 천리를 간다는 좋은 말)는 천하의 좋은 말이지만 쥐를 잡게 한다면 늙은 고양이만 못할 것입니다. 하물며 닭으로 사냥을 할 수 있겠으며, 고양이로 수레를 끌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토정은 행적이 탁월하고 기이하며 구속을 받지 않았으며, 천성은 순수하고 어질며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였다. 선산(先山)이 바다 가까이 있어 백 년 뒤에는 큰 변란이 있을 것이라고 하여 몸소 밭 갈고 소금을 팔면서 노고를 싫어하지 않고 산을 옮겨다 바다를 메울 계획을 하였다.

형이 죽으니 마음으로 3년상을 치르고, 성현의 글을 읽되, 길을 가나 자리에 앉으나 마음으로 생각하고 외웠다. 학도들과 함께 다닐 때마다 이따금 갑자기 경서와 역사에 대해 물어 혹 잘 대답하지 못하면, 반드시 탄식하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어찌 길 다니는 것이 괴롭다고 여겨 글을 외고 읽기를 중지할 것이냐.”

하였다. 다만 토정이 강해(江海)에 떠돌아다니며 방랑 행각을 한 것은 세상을 싫어해서만이 아니라, 구속받는 것을 피하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조중봉(趙重峰.조헌)은 토정에게 배웠는데, 경서와 역사에 깊이 잠심하여 노력을 남보다 더하였다. 그의 저술한 글을 보면, 앞일을 아는 슬기가 자연히 부합되니, 이것이 이른바 ‘지성(至誠)은 미리 안다.’는 것인가.

중봉이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여관에 들었는데, 밤이 깊고 인정(人定)이 된 뒤에도 관솔을 태워 단정히 앉아 책을 읽었다. 옆집에 마침 어떤 선비가 엿보았는데, 손에 들고 보는 책은 《송조명신언행록(宋朝名臣言行錄)》으로 거의 닭이 울게 되어서야 글 읽기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중봉은 천문학에 밝았는데, 신묘년(1591, 선조 24) 세모에는 매양 왜구를 근심하여 전후 상소를 올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임진년 초봄에 아내가 죽어 장사지내는데, 미처 구덩이를 덮기 전에 문득 매우 놀라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천고(天鼓.별의 이름)가 동하였으니, 반드시 평수길(平秀吉)이 군사를 일으켰다.”

하였다. 그리고 집안 사람과 장례에 참석한 친척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각기 돌아가서 빨리 피난할 준비를 하라. 나는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할 것이다.”

하니, 듣는 사람들이 대부분 믿지 않았는데, 얼마 안 되어서 적의 경보가 이르렀다.

중봉은 젊었을 때부터 이씨 집 형제(이발.이길)와 친근하게 교제하여 정분이 형제와 같았는데, 만년에 와서 이씨 집 형제가 정적(鄭賊.정여립을 말함)과 서로 친근하니, 중봉이 간절히 절교하라고 주의시켰지만, 이씨는 친구 간에 까닭없이 절교할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중봉은 그들이 끝내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옥천(沃川)에서 도보로 남평(南平) 이씨의 집으로 가서 수일 동안 유숙하면서 여러 가지로 비유하며 타일렀지만, 이씨가 끝내 듣지 않았다. 중봉은 떠나가면서 칼을 뽑아 앉은 자리를 베어 칠언시(七言詩) 한 절구를 써 주며 작별하였는데, 끝 구에,

나는 가고 그대는 머물러 각자 닦을지어다 / 我去君留各自修

하였는데, 그 후로 그만 절교되었다.

●사계가 매양 말 위에서 글을 보며 혹 《중용》과 《대학》 등의 글을 항상 외웠다. 내가 젊을 때부터 그분의 집안에 드나들어 모시고 잘 때도 많았는데, 새벽이나 밤에는 반드시 옛글을 마음속으로 반복하여 외우기를 마지않았다. 늘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중용》과 《대학》은 외워 읽기를 수천 번이나 하였지만 역시 더하는 것이 있는 줄은 모르겠다.” 하였다.

●《중용》 첫 장의,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 에 대한 훈고에서,

“교(敎)는 예악 형정 교화(禮樂刑政敎化) 같은 등속을 말한 것이다.”

하였는데, 계곡(谿谷.장유)은 온당하지 못하다고 하면서, 의견을 저술하기까지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무릇 성현이 남긴 말이나 문장은 마땅히 먼저 받들고 믿어 바탕을 삼아야 할 것이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더라도 잘 연구하여 그 뜻을 깨달은 뒤에 평해야 할 것인데, 어찌 간단히 자기 생각으로 단정할 수 있으랴. 하물며 주자의 사서집주(四書集註)는 극히 정밀하여 후학들이 가벼이 의논할 것이 아니다.” 하였는데, 계곡은 끝내 수긍하지 않았다.

사계가 일찍이 말하기를,

“선유(先儒)들이 학문을 논한 것은 비록 정자와 주자의 말일지라도 이내 그 가부를 알 수 있는데, 문장의 잘못은 시골 학자에게서 나온 것이라도 잘 알 수 없다.”

하였다. 아마도 공부하는 것이 한 곳에만 치우쳐서 다른 데 미칠 겨를이 없기 때문인가?

율곡이 고봉(高峯)과 같은 때에 벼슬하였고, 비록 나이의 차이는 있지만 원래 도학으로도 서로 통할 만하였는데, 끝내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대학》에 대한 논쟁에서 서로 양보하지 않은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하는데, 어찌 그래서 그렇겠는가?

퇴계는 고봉을 극히 존중하였는데, 이는 왕복한 서신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선인은 고봉보다 아홉 살 아래요, 소시부터 글을 배우며 선생으로 불렀다. 평상시에 고봉ㆍ윤월정(尹月汀.윤근수)과 함께 호당(湖堂)에 숙직할 때에 고봉이 기세를 올려 율곡에 대해 흠을 잡자, 선인이 조용히 말하기를,

“선생은 이미 이모(李某)와 도의(道義)의 교제를 허락하였으니, 매양 헐뜯는 것은 부당합니다.”

하였으나, 고봉은 더욱 분이 풀리지 않았다. 월정이 매양 말하기를,

“평상시 고봉 및 황강(黃岡.김계휘)ㆍ이산해(李山海)와 같은 당번이 되어 호당에 숙직하였는데, 예전부터 〈천하여지도(天下輿地圖)〉가 벽 위에 걸려 있었다. 고봉과 황강이 우연히 서로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산천의 형세와 거리의 원근, 인물의 출처, 주군(州郡)의 연혁을 담론하는데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며, 두어 밤이 새도록 쉬지 않았다. 아성(鵝城.이산해)이 나와서 나에게 ‘우리들이 저 사람과 함께 벼슬하는 것이 어찌 크게 부끄럽지 않은가.’ 하였다.” 하였다.

●월정은 박식하고 옛일을 좋아하였다. 늘 나에게 말하기를,

“송 태조(宋太祖)가 끝내는 시역을 당하였다.”

하였는데, 어릴 적에는 그 까닭을 알지 못하여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역사책에 범질(范質)의 충후(忠厚)함을 말하는 대목에 ‘범질이 본조를 위하여 시종 한결같았기 때문에 범질의 생전에는 태후나 어린 임금에게 탈이 없게 되었다.’ 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범질이 죽은 뒤에는 마침내 반드시 해를 당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뒤에 〈언행록(言行錄)〉을 상고하여 보니 정말 그러하였다.

●월정이 말하기를,


“전에 고봉이 말한 것을 보니, 어릴 적에는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책이 없어 고통이었으며, 역사에 대한 것은 다만 《강목(綱目)》을 본 것으로 만족하게 여기다가, 서울에 와서 남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빌려 보니 생각하는 것이 자연 달라졌다.” 하였다.


●《소미통감(少微通鑑)》은 우리 나라에서 숭상하는 책이지만, 자세히 보면 《자치통감》 을 잘라놓았을 뿐만 아니라, 구절의 취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으며, 간혹 문리가 접속되지 않는 것도 있다.


우선 생각나는 대로 들어 본다면, 항우(項羽)의 오강(吳江) 일에 대하여는, 여마동(呂馬童.항우의 옛날 친구)과 이야기한 근본은 빠뜨렸다가 후에야 잘라 맞추어서 ‘약덕(若德)’이라는 한 구절을 만들었으며, 전천추(田千秋)의 일에 있어서는, 백두옹(白頭翁)의 근본은 전혀 빠뜨리고 다만 ‘고묘(高廟)의 신령이 내게 고하여 주었다.’고만 하였으니, 이는 매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기타 소소한 하자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내용이 정밀하고 자세한 점은 《사략(史略)》만도 훨씬 못하다.


●옛날 사람들은 자(字)로 통행하는 이가 많은데, 두 가지 자(字)로 통하는 이는 적었다. 《강목(綱目)》에는 두 가지 자가 번갈아 나오는데, 조적(祖逖)같은 이의 자는 사아(士雅)와 사치(士稚)이니, 어느 것을 따라야 좋을지 몰랐다. 그래서 《세설(世說)》을 찾아보니 사아(士雅)로 와 있었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소로 밭을 가는 것은 후세에 와서 한 일이다.” 하였는데, 김황강(金黃岡.김계휘)이 말하기를,


“염경(冉耕)의 자가 백우(伯牛)인 것으로 보면 상고 시대에도 역시 소로 밭을 갈았다.”


하니, 세상에서들 모두 명언(名言)이라고 하였다.


●역사로 상고해 보면, 주(周) 나라 무왕(武王)이 그의 아버지인 문왕(文王)보다 14세가 아래인데 그에게 형 백읍고(伯邑考)가 있었으니, 문왕이 일찍 자식을 두었음을 알 수 있으며, 무왕이 93세로 세상을 떠났는데,주공(周公)이 무왕의 어린 아들 성왕(成王)을 업고 제후들의 조회를 받았으며, 또 성왕의 아우 당숙우한후(唐叔虞韓侯)도 있었으니, 무왕이 자식을 늦게 두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무왕의 후비 읍강(邑姜)의 나이가 무왕보다 몇 살 적었는데, 부인이 노쇠한 후에도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옛날 사람들이 사용한 통운(通韻)을 지금 사람들은 흔히 깨닫지 못하고 협음(叶音)은 더욱 어려워 억지로 풀이하고 있다. 예를 들면 동(東) 자와 침(侵) 자의 음운은 원래가 서로 유사하지 않은 것인데, 협음ㆍ통운으로 쓴 곳이 많다. 《주역》의 소상(小象)에 이런 것이 자못 많으며, 《시전(詩傳)》에도


길보가 송을 지으니 / 吉甫作頌


화목하기 청풍 같네 / 穆如淸風


중산보가 길이 생각하여 / 仲山甫永懷


그 마음을 위로하노라 / 以慰其心


하였다. 이런 것은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사부(詞賦)에 더욱 많은데, 〈장문부(長門賦)〉같은 것은 오로지 이런 체를 사용한 것으로서, 초혼(招魂)ㆍ담담(湛湛)ㆍ강수(江水)의 세 구도 역시 통운으로 운자(韻字)를 단 것이지만 읽는 이들이 살피지 못한 것이 많다.


●옛날 사람들은 네 살 때에 사성(四聲)을 가릴 줄 알며, 너덧 살이면 글을 지었는데, 이런 것은 그 신이(神異)함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서 그런 것이었던가? 지금은 서너 살에 말을 다 할 수 있는 아이도 매우 적다. 근세의 청한(淸寒)ㆍ하서(河西) 같은 이들은 모두 신동으로 불려졌지만 그들이 지은 시문의 꾸밈새는 한때의 작가(作家)만 못한 점도 있으니, 이것은 노력의 적고 많음에 따라서 그런 것인가?


●옛 사람들의 글에 대한 의논을 지금 역시 다 믿지 못하겠다. 한 문공(韓文公)은 자운(子雲.양웅)의 《태현경(太玄經)》이 《노자(老子)》와 우열을 다툴 것이 못된다고 하고 후파(侯芭)의 이른바 ‘《주역》보다 낫다.’는 것을 지언(知言)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지나친 것 같다. 유자후(柳子厚)의 한퇴지(韓退之)에 대한 말도 역시 그러하다.


소장공(蕭長公.소식)의 〈사마공신도비(司馬公神道碑)〉와 같은 글은 천고의 걸작이라고 할 만한 것인데, 다만 글 중에서 이세적(李世勣)ㆍ모용소종(慕容紹宗)의 일을 들어 비유한 것은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다.


●어릴 적에 윤월정(尹月汀.윤근수)의 문하에 나가 뵈었더니, 마침 환갑 날이 되어 술 자리를 베풀었는데, 최동고(崔東皐.최립)가 상좌에 앉았다. 월정이 묻기를,


“들으니, 영공(令公)은 구양수(歐陽修)의 글이 한창려(韓昌黎)보다 낫다고 한다는데, 정말 그렇습니까?”하니, 동고의 말이,


“진실로 그렇습니다. 천변만화하는 한창려의 글이 자연스럽게 한 가지 문체만을 쓰는 구양공의 글을 따를 수 없소.” 하였다. 또 묻기를, “명(明) 나라의 글은 누구의 것이 제일 우수하오?”하니, 동고가 대답하기를,


“일찍이 잘 읽어보지는 못하였지만, 대개가 부화하고 내용이 없소. 그 중에서 황홍헌(黃洪憲)의 글은 과문(科文)에 가까웠소.”하매, 월정이 아무 말이 없었다.


●동고(東皐)가 또 말하기를,


“유문(유종원의 글)은 평생 펴보지 않았는데, 전일에 어느 재상이 초록하여 달라고 독촉하여 처음으로 뒤져 보았더니, 전혀 의미가 없었고, 소동파의 여러 작품 같은 것은 더욱 보잘것이 없었다.” 하였다. 그의 큰 소리가 대개 이러한 것이다.


●동고는 안하무인이었지만 늘 율곡을 칭찬하기를,


“말을 하면 글이 되며,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누구도 따를 수 없다.” 하였다.


●주자가 육상산(陸象山)과 더불어 각각 학도들을 데리고 백록서원(白鹿書院)에 모여 강의하였는데, 그 발문에 극히 존중하였다. 그런데 태극(太極)에 관해 논쟁하면서는 의견이 서로 어긋나서 친교가 드디어 틀어지게 되었다. 심지어 영구가 지날 때에는 큰 소리로 박수치며 아무렇게 지꺼렸다……하니, 만일 육상산이 죽어서 지각이 있다면 어찌 저승에서도 유감을 품지 않겠는가.


주자는 소동파를 여지없이 배척하였다. 그러나 소동파가 그린 석죽(石竹)에 발문 지은 것을 보면, “이 늙은이의 얽매임 없는 한 자질과 조촐한 지조는 죽군(竹君)ㆍ석우(石友)와 거의 비슷하다.” 하였으니, 주자가 동파를 인정하는 것 역시 보통이 아니었던 것 같다.


●왕양명(王陽明)이 처음 선학(禪學)에 물들었고 중간에는 주자의 학문을 배우다가 또 버리고 선학을 좇았다. 그의 문집 중의,


강학엔 매양 중회(仲晦.주자의 자)가 의심스럽고 / 講學每疑朱仲晦


지리한 것은 정강성 되기를 부끄러워했네 / 支離羞作鄭康成


쨍그렁 비파를 던진 봄바람 속에 / 鏗然舍瑟春風裏


광인이나 증점이 마음에 들어 / 點也雖狂我得情


라는 율시 한 수로써 평소 뜻하는 바를 알겠다.


●양명(陽明.왕수인)이 산에서 노닐다가 한 승방(僧房)을 보았는데, 앞 문의 빗장이 굳게 잠겼고 먼지가 무릎 위까지 올라왔다. 그 연고를 물으니, 중의 말이,


“선사(先師)가 세상을 떠날 때에 제자들에게 간곡히 부탁하기를 ‘한 번 창문을 닫은 다음에는 함부로 열어보지 말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양명이 괴이하게 여기고 바로 앞으로 나가 손으로 방문을 열어보니, 한 늙은 중이 앉은 채로 죽었는데, 얼굴빛이 변함없고 자신의 모습과 다름이 없으며 등에,


삼십 년 전 왕수인 / 三十年前王守仁


문 연 사람이 곧 문 닫을 사람이네 / 開門還是閉門人


이라 쓰여 있어 양명이 깜짝 놀랐다. 그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성인은 괴이한 것을 말하지 않지만, 괴이한 것 역시 없는 것은 아니다. 불가(佛家)의 요술하는 것을 믿을 수는 없지만, 침갱(針羹)과 세장(洗臟) 같은 일은 만일 혹시라도 그랬다면 어찌 사람들을 미혹하게 하지 않았겠는가.


●정해 연간(1587, 선조20)에 선인께서 세상과 뜻이 맞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노소재(盧蘇齋.노수신)를 찾아 작별 인사를 하였다. 그때 소재는 수상이었는데 마침 병으로 집에 있다가 손을 잡고 안방으로 들어가서 술을 가져오게 하여 같이 들면서 진심으로 위로하고 권면하였다. 공사간의 정으로 보아서 물러갈 수 없다고 하면서 한 절구의 시를 부채에 써 주었다.


언덕 위의 풀은 해마다 늙어지고 / 壟草年年老


뜰 앞의 가시나무 날마다 쇠해지네 / 庭荊日日衰


한 평생 충효로 자임하던 그대 / 平生任忠孝


그걸 가지고 어디로 가려 하시나 / 持此欲何之


평소 책 광우리에 간직해 두었기에 나도 보았다.


●퇴계가 남쪽으로 돌아갈 적에 전송하는 사람이 배 위에 가득 찼다. 선인은 공무로 좀 늦어 뒤에 강가로 나갔더니, 배는 벌써 강 가운데로 나갔다. 뱃사람 편에 시 한 절구를 노선생에게 드렸다.


광릉(廣陵)까지 따라 이르렀지만 / 追到廣陵上


타신 그 배 벌써 아득하여라 / 仙舟已杳冥


가을 바람에 수심 가득 안고 / 秋風滿腔思


석양에 홀로 정자에 오르네 / 斜日獨登亭


퇴계가 배 위에서 손을 들어 사례하고 집에 돌아가서는 차운(次韻)하여 붙였었는데, 지금 문집에 실려 있지 않다.


●근세 문인들은 선묘조(宣廟朝.선조임금)에 성대하였다. 시학(詩學)으로는 권석주(權石洲.권필) 같은 이가 있으니, 재주와 생각이 특출한 데 안목이 있는 사람으로서 유고(遺稿)를 보면 알 수 있다. 다만 석주는 술을 마시면 농담이 많아서 글을 논하는 데 자못 일정하지 않았다. 내가 어느 날 우연히 조용한 기회에 시문의 내용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국초(國初)부터 지금까지 저술을 나보다 낫게 한 사람이 있기는 하나 마음과 보는 눈이 모두 열려서 묘한 이치까지 알아낸 것은 나만한 이가 없을 것이다.” 하였으니, 그의 자부심이 작지 않았던 것이다.


●석주(石洲)의 시집은 원래 수효가 많지 않고 내용을 너무 정밀하게 선택하였으니, 지금 세상에 통행하는 시집이 그것이다. 그 집에 간직한 사고(私稿) 중에 석주 자신이 비점(批點)을 찍은 것을 전에 한 번 들쳐보니 볼 만한 것이었는데, 이미 전란 통에 잃어버렸다고 하니, 애석하다.


●소시에 체소(體素) 이공(李公) 춘영(春英)이 해서(海西)의 중씨(仲氏) 처소에 들렀는데, 과거 공부하는 선비들이 그가 왔다는 말을 듣고, 각자 읽던 책을 가지고 와서 앞에 벌여놓고 좌우에서 묻고 논란하였다. 체소가 술잔을 들고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마치 노련한 법관이 송사 처리하듯 척척 대답하였으니, 역시 유쾌한 일이었다.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는 백가서(百家書)를 다 통하여 학식이 매우 풍부하였다. 그러나 유쾌한 기분으로 휘둘러 써두고는 고치지를 아니하고 끝내 어지럽게 쓴 초고를 광주리 속에 던져두고 다시 꺼내보지도 않았다고 하니, 이것은 반드시 후세에 전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기묘 제현(己卯諸賢)이 요순(堯舜) 시대의 임금과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을 자기들의 임무로 삼았는데, 당시 선배들이 대부분 그 장래을 염려하였다. 그리고 큰 일을 하는 것이나 현량과(賢良科)를 설립하는 등의 일은 대부분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에게서 나왔는데, 여러 어진 이들이 실패하게 된 뒤에는 모재만이 큰 화를 면하여 파직을 당하는 데에 그쳤다.


모재는 젊어서 김안로(金安老)와 친절하게 지냈는데, 하루는 김안로가 모재가 서울에 왔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다. 모재가 취한 김에 농담으로 말하기를,


“영공(令公)이 문형을 주관하는 것은 인재가 없어서 그런 것뿐인데 무엇이 귀할 것인가.”


하니, 김안로가 웃고 갔다. 자제들이 근심하고 두려워하면서 실언이라고 여겨 그가 반드시 매우 유감을 품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모재는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안로와 가장 친하여 그 사람됨을 잘 아는데, 반드시 한때의 농담으로 나를 해치지는 않을 것이다.” 하더니, 후에 과연 무사하였다. 김안로가 죽은 뒤에도 모재는 변함없이 철마다 그 집을 돌보아주었다.


●기묘년(1519, 중종14)에 대사성 김식(金湜)이 도망하여 지방으로 나가 있었는데, 밤에 눌재(訥齋) 박상(朴詳)을 광주(光州) 촌가로 찾아가서 함께 자며 여러 간신들이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세도를 마음대로 하는 것을 자세히 말하고 오늘날의 화는 반드시 주상께서 알지 못하는 것이니, 조만간에 자연히 드러날 것이라고 하였다. 눌재가 대답하기를,


“남곤(南袞)과 심정(沈貞)의 간악한 계교는 깊고 세밀하니 그렇게 허술하지 않을 것이며, 또 전대의 권신이나 판관들이 임금을 위협하고 견제하는 것과는 비교할 정도가 아니니, 이승에서는 다시 전하를 보기 어려울 것이다.”


하니, 김식은 비로소 실망하고 뉘우쳤다. 이날 새벽에 작별하고 가다가 길가의 다리 아래에서 목매어 죽었다.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이 유배지에 있을 적에, 서울 하인이 밤에 와서 문을 두드리며, “좋은 소식이 왔습니다. 여러 간신들이 모두 실패하고 어르신께서 소명(召命)을 받게 되었는데, 몇 가지 서신이 여기 있습니다.” 하니, 공이 천천히 말하기를,


“우선 그대로 두라. 밝은 날에 뜯어 보겠다.”


하고, 예전처럼 코를 골며 잠드니 사람들이 그의 넓은 도량에 탄복하였다.


●신묘년(1591,선조24)에 화가 일어나자, 월정(月汀)은 관직을 삭탈하고 축출하는 데 그쳤다.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평소 이가(李家)의 나쁜 점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당초에 사람을 보내어 자제들을 통하여 말하기를 ‘이때에 한 번만 가서 보면 다른 우려가 없음을 보증하겠다.’ 하였으나, 나는 대답하기를 ‘옛 사람이 사생(死生)과 영욕(榮辱) 때문에 의리를 구차하게 할 수 없다.’ 하였고, 당대의 친구들이 모두 잘못되었는데, 나만 편안한 것이 어찌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였다.


●선인은 평생에 꿈이 반드시 맞았다. 신묘년에 화를 당하여 남양(南陽) 구포(鷗浦)로 나가 살았는데, 새벽녘에 곁에 있는 사람을 보고 말하기를, “꿈에 내가 강계 부사(江界府使)가 되었으니 그곳이 유배지가 될 것이다.”


하였는데, 얼마 있다가 서울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진주로 정배(定配)되었다고 하니, 선인께서 탄식하기를,


“평생에 꿈을 믿었는데, 늙으니 꿈도 맞지 않는다.”


하였다. 그런데 남쪽으로 내려간 지 며칠 만에 대간의 논쟁으로 강계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사람이 천금의 구슬을 깨버릴 수는 있지만 가마[釜]가 깨지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고 한 소공(蘇公)의 이 말을 가지고 세속 사람에게 징험해 보니 거짓말이 아님을 알았다.


●일이 인정에 가깝지 않은 것은 큰 간특(姦慝)이 되지 않는 것이 드물다.”


하였다. 이것은 노천(老泉)의 변간론(辨姦論)에서 나온 말인데, 선유(先儒)는 공정한 말이 아니라고 반박하였다. 왕씨(王氏)ㆍ소씨(蘇氏)의 시비는 누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그 말을 《대학》가운데에,


“후히 대할 자에게 박하게 대하고, 박하게 대할 자에게 후하게 대한다.”


는 것과 서로 참고하여 사람 보는 법을 삼는다면 백의 하나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옛 사람의 이른바, “신(臣)의 아버지의 청백한 것은 사람이 알까 두려워했고, 신의 청백함은 알지 못할까 두려워했다.”


라고 한 것은 공사를 분간하는 데에 정말 격언인 것이다. 말세에 와서 청백하고 좋은 행실이 있다고 하는 자가 흔히 스스로 뽐내고 자랑한 자요, 몸소 실천하는 자는 전혀 형적이 드러나지 않아서 세상이 알 수 없다.


●일찍이 옛 사람은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으로 사람을 칭찬하는 말로 쓴다는 것을 보고, 혼자 이것이 사람의 무슨 미덕(美德)이 될 것인가 생각하였는데, 세상의 여러 일을 겪은 지금에 와서 보니 대개 금주(金注)에 현혹됨이 많아 비로소 그 말에 의미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세도에 아부하고 장사 수단으로 교제하는 자를 누가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는가. 더위와 서늘함의 차례가 바뀌어 영욕(榮辱)이 자리를 바꿀 때에는 평일에 지기(知己)라고 하던 사람들도 문 앞을 지날 때는 목을 움츠리고 한 번도 들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우물에 빠지면 돌을 던지는 자도 많다. 이것이 적공(翟公)이 대문에 글을 써 붙인 까닭이요,창려(昌黎.한유)가 유자후(柳子厚)의 묘지(墓誌)를 적은 이유이다.


●말세의 사람들은 원래 의리를 아는 자가 적지만 이해를 아는 자도 적다. 일생을 부귀에 뜻을 두어 온갖 계책을 다 쓰며 시세에 따라 아첨하면서 오히려 못 미칠까 염려하던 자들도 나중에 화란을 기어이 만나고, 간혹 분수를 편하게 여기고 본 뜻을 지켜 일하기를 부끄러워하고, 안색을 바로 하여 조정에서 일하면서 꼿꼿하게 지내던 사람도 반드시 모두 함정에 빠지지는 않으니, 이런 것은 불선한 자들의 경계가 된다.


●안정된 자는 조급함을 제어할 수 있기 때문에 일을 이루게 되고, 내실이 없이 과장하는 자는 분쟁만을 일삼기 때문에 끝내는 실효가 없게 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제 자랑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조용히 할 일만 하는 사람을 싫어하기 때문에 사람을 부릴 때에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하여 나중에는 나라를 그르치고 일을 망치게 되는 것이 전후에 잇달았지만 뉘우칠 줄을 모른다. 지금 보아도 이런 경우가 많다.


●고금을 통하여 조심하여 복을 누린 자는 있지만, 교만하고서 끝까지 안전한 자는 적다. 이것은 어찌 사람들의 비방이 모이면 귀신의 책망이 따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내가 일찍이 왕언방(王彦邦)의 시 가운데,


영화와 은총엔 무심하기 쉽지만 / 榮寵無心易


위태로울 때에 절개 지키기는 어렵네 / 臨危抗節難


라는 두 구를 벽 위에 써 붙였는데, 와서 보는 객들이 대부분 위와 아래 구의 난(難)ㆍ가(易) 두 글자를 서로 바꾸어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서도 영예와 명리가 사람의 마음에 깊이 배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박수암(朴守庵.지화)은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스스로 글을 읽고 학문에 힘쓰니 세상에서 많이 칭찬하였다. 임진왜란 때 산골로 피난 갔었다. 하루는 집안 사람들이 그가 간 곳을 몰라 뒤를 밟아 어느 큰 물가에 이르렀는데, 물가에 벗어놓은 옷과 신발을 보고 물에 뜬 시체를 찾아왔다. 옷 속에 이러한 두보의 율시 한 편이 있었다.


임 계신 서울은 구름과 산 밖인데 / 京洛雲山外


소식 전하는 글월 전혀 오지 않네 / 音書靜不來


흰 갈매기 원래 물에서 자는 것이니 / 白鷗元水宿


무슨 일로 남은 슬픔 있으리 / 何事有餘哀


이 역시 회사(懷沙)의 남긴 뜻이 아니겠는가.


●조정암(趙靜庵)은 8~9세 때 김한훤(金寒暄.김굉필)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하루는 한훤을 모시고 있는데, 한훤이 고양이가 포육을 훔쳐가는 것을 여종이 잘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여겨 성을 내어 꾸지람하여 마지않았다. 그 포육은 어머니에게 반찬으로 드리려던 것이었다. 정암이 천천히 말하기를,


“선생님의 어버이를 위하는 정성은 진실로 지극합니다만, 고양이는 그런 것을 모르고 여종들 역시 일부러 범한 것은 아닌데, 선생님이 이로써 너무 화를 내시니 좀 온당치 못할까 합니다.” 하였다. 한훤이 놀라고 탄복하며 말하기를,


“네가 어린아이로 내게 와서 공부하는데 내가 도리어 너에게 배웠다.”


하면서, 종일토록 데리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천연(天然)은 남쪽의 중인데, 키가 8척이요 담력이 뛰어났다. 일찍이 길을 가다가 지리산을 지나는데 곁에 소위 천왕봉 음사(天王峰淫祠)가 있었다. 이전부터 괴이한 영험으로 알려졌으며 지나는 사람이 만약 경건하게 기도하지 않으면 몇 걸음을 못 가서 사람과 말이 쓰러져 죽는다 하니, 지나가는 객들이 무서워 공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천연이 괴이하고 망령된 것이라 하여 팔을 휘두르며 지나갔는데, 별안간 탔던 말이 땅에 넘어졌다. 천연은 매우 성내어 곧 죽은 말을 가져다 사당 가운데에서 도살하여 피로써 사당의 벽을 더럽히고 다시 주먹을 휘둘러 신상(神像)을 쳐부순 다음 불을 놓아 태우고 갔는데, 그 뒤로는 신의 괴이한 영험이 드디어 없어지고 상인이나 길손들이 편안히 지나게 되었다.


퇴계와 고봉이 모두 시를 지었으며, 당시의 명사들이 화답하여 읊은 이가 매우 많았다. 천연은 일찍부터 고봉을 찾아 《주역》을 배워 매우 뜻을 통달하였다. 퇴계와 고봉이 성리(性理)에 대하여 논변하게 되자 천연은 서신을 가지고 왕래하여서 그 사이의 논변하는 내용을 기억할 수 있었다.무신년(1608,선조 41)에 내가 일이 있어 신천(信川)에 가니, 천연이 듣고서 소를 타고 왔다. 그때 나이 80여 세였는데, 여전히 건강하였다. 옛 일을 말할 때에는 피곤한 기색이 없이 말을 계속하였다. 베개를 가지런히 하고 며칠 밤을 지내며 듣지 못했던 일들을 많이 들었는데, 참으로 방외(方外)의 기걸이었다. 천연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평소 박사암(朴思庵) 상공의 알아줌을 받아 항상 영평(永平) 전장(田庄)에 있었는데, 사암은 날마다 대해 주면서 소일하였다. 무자년(1588, 선조21) 겨울에 역적 정여립(鄭汝立)이 전주에 있으면서 인마(人馬)를 보내어 글로 천연을 오라고 하였는데, 천연이 거절하고 가지 않으니, 사암이 그가 이름있는 사람을 따르지 않는다고 하여 더욱 귀하게 여겼다.기축년 봄에 역적 정여립이 또 인마를 보내었는데, 서신의 사연이 간곡하며, 또 모시 도포 한 벌을 보내어 뜻을 표하기에 천연이 사암에게 하직하니, 사암은 굳이 머무르라고 하지는 않았다. 천연이 곧 도포를 입고 말을 타고 떠나 하루를 갔는데, 여관에서 밤에 앉아 문득 생각하기를, ‘박 상공이 나를 만류하지 않은 것은 저 사람이 나를 두 번씩이나 오라고 하였으므로 혐의쩍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가면 저 사람과 새로 사귀는 즐거움이 어찌 사암과 비교할 수 있으랴. 그러나 옛 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을 따르는 것은 의리가 아니다.’ 하고, 곧 글을 지어 정여립에게 사례하고 도포를 벗어 돌려보낸 다음 지팡이를 짚고 영평의 전장으로 돌아왔다. 사암이 보고서 이상하게 여기다가, 물어서 실정을 알고 더욱 믿고 사랑하였다. 이 해 겨울에, 정여립의 역모가 드러나니 그때에야 그의 간곡하게 청한 뜻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몸이 오싹해짐을 느낀다.” 고 하였다.


●권여장(權汝章.권필)이 궁류시(宮柳詩)한 편으로 인하여 임자년(1612, 광해4)에 옥에 갇혔다. 옥문을 나와서도 상처가 아파서 곧 귀양길을 떠나지 못하고 흥인문(興仁門) 밖의 민가에 유숙하였다. 하루는 친구들이 와서 문병을 하고 전송하는데 와서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여장이 누워 있는 방안의 벽을 보니 옛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았다.


때는 바야흐로 청춘이요 날은 저물려는데 / 正是靑春日將暮


복사꽃 어지러이 붉은 비처럼 떨어지누나 / 桃花亂落如紅雨


권하노니 그대여 온종일 진하게 취해 보소 / 勸君終日酩酊醉


술이 많다 해도 유령의 무덤 위엔 이르지 못한다네 / 酒不到劉伶墳上土


대개 이것은 어떤 시골 훈장이 아무렇게나 전에 썼던 것인데, 권(勸) 자를 잘못 권(權) 자로 쓰고, 유영(劉伶)을 잘못 유영(柳聆)으로 써놓았으니, 보는 사람들이 서로 돌아다보며 어쩔 줄을 모르고 놀랐다.


좀 있다가 여장이 목마르다고 하면서 술을 찾아서 큰 그릇으로 하나를 마시고는 그만 눈 감고 마니, 이날이 바로 3월 그믐날이었으며, 창 밖의 풍경이 그 시중의 풍경과 같았다. 조물주가 인간의 생사에 대한 처분을 미리 정해 놓았으니, 슬픈 일이다.


●고옥(古玉) 정작(鄭碏)과 석전(石田) 성로(成輅)는 모두 나이 40에 상처하였는데, 재취하지 않고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으며 종신토록 홀아비로 지냈는데, 마치 선정(禪定)에 든 중 같았다. 오직 술을 매우 좋아하여 잔뜩 취하여 나날을 보내었다. 고옥은 서울의 친구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취하지 않고는 돌아오지 않았는데, 그의 시에,


산림이나 성곽 둘 다 의지할 데 없으니 / 山林城郭兩無依


아침에 나가면 언제나 저물어서 취해 돌아온다네 / 朝出常常暮醉歸


라는 것은 그의 사실 행적을 말한 것이다.


석전은 평소 인왕산(仁王山) 아래에 문을 닫고 숨어 있으면서 벼슬을 제수해도 나가지 않았다. 임진왜란 후에는 양화도(楊花渡)강가에 임시 거주하면서, 사위 조영(趙嶸)과 함께 서로 의지하여 지냈는데, 술이 있으면 반드시 취해 쓰러지는 것을 한계로 삼았으며, 하루 아침에 병도 없이 죽었다. 이 두 늙은이는 억제하기 어려운 큰 욕심을 끊으면서도 취향(醉鄕) 밖으로는 뛰어나오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정욕(情慾)과 분수가 앝고 깊음이 있어서 그런 것인가?


●윤광계(尹光啓)는 자가 경열(景說), 호는 귤옥(橘屋)인데, 남도의 문사이다. 한평생 시와 술로 즐거움을 삼으며 명예나 이욕에는 담담하였다. 일찍이 벼슬을 따라 도성 안으로 들어와서 인왕봉(仁王峰) 아래에 집을 짓고, 꽃을 심고 약초를 기르면서 조금도 풍진 세상의 기운이 없었다. 날마다 그의 외사촌 정봉(鄭韸)과 이웃에 살며 서로 마주 앉아 술을 들면서 세월을 보냈다. 이웃에 술집이 있는데, 날마다 가져다 마시되 값을 묻지 않으며 술집 주인 역시 언제 갚을 것을 묻지 않았다. 그러다가 남쪽에서 오는 배가 미곡을 싣고 강가에 와 닿으면 그때는 쌀을 나누어 술집으로 보내는데 수효를 계산하지 않았다. 세상일과 인연을 끊고 문밖을 나서지 않았는데, 일찍이 나를 대하여 말하기를,


“서울에 들어온 지 3년 동안에, 친척집 조상(弔喪)으로 의관을 갖추고 나간 적이 겨우 두 번이었다.” 하였다.


●옛 친구 정봉(鄭韸)은 자(字)가 상고(尙古)로 사람이 조용하고 깨끗하여 사귈 만하였다. 귤옥(橘屋) 윤광계와 외사촌 형제간이며 일생을 서로 추종하며, 세상을 등진 생활에 날마다 술을 취하도록 마셨다. 윤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상고도 더욱 살 맛을 잃고 병과 술에 잠겨 있다가 나이 겨우 60에 세상을 떠났다.


임종시에 사람을 시켜 술을 가져오게 하고, 술을 가져오니 멀건히 보다가 술잔이 작은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이 늙은이가 한평생 이것만을 좋아했는데, 지금 떠나가면서 어찌 한 방울을 마시겠느냐.”


하며, 다시 명하여 큰 술잔을 가져다 둘을 마시고 쓰러져 베개에 누워 가고 말았다.


●김영휘(金永暉)는 자는 국서(國舒)요, 집이 광주(光州) 석보촌(石堡村)에 있었는데, 한평생 문을 닫고 양생(養生)하며 매우 수련(修鍊)하는 방법을 좋아하였다. 집 둘레에 구기(枸杞)를 가득 심고, 그 뿌리와 가지로 좁쌀을 쪄서 밥을 지으며, 그 잎과 열매로 나물을 하고 술을 빚어서 항상 먹고 마시며 때로 뜻이 맞는 친구가 오면 문득 내놓고 권하였다. 재주와 학식이 비범하고 언어가 강개하여 사람들을 감동시킬 만하였다.


내가 소시적에 함께 놀게 되었는데, 미목(眉目)이 환하여 산택(山澤) 간의 높은 선비의 골격이었으며, 술자리에는 반드시 마음을 털어놓고 못할 말이 없이 하면서, 서로 알기가 늦었다고 하였다. 나이 60이 못되어 아무 병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영남 사람 곽재우가 일찍이 말하기를, “우연히 난리 중에 김영휘를 만나서 양생법을 알았다.” 하였다.


● 최연복(崔連福)은 자는 경응(景膺)인데, 김영휘(金永暉)와 같은 마을에서 사이좋게 지냈다. 사람됨이 중후하고 근신하여 일생동안 남의 잘못을 말하지 않았으며, 교제하는 사람은 모두 한 고을의 착한 선비들이었다. 종신토록 《대학》 한 권을 읽었는데, 집주(集註)와 《혹문(或問)》을 아울러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문을 닫고 종적을 숨기다가 이 세상을 떠났다. 이런 사람들은 생전 산골에 거주하여 이름이 알려지지 않으니, 슬픈 일이다.


●홍명원(洪命元)은 자는 낙부(樂夫)요, 익녕(益寧) 홍 정승의 종질(從姪)이다. 기국과 도량이 크고 단정하며 재주와 지혜가 민첩하고 문장도 누구에게 못지 않으니, 사람들이 재상감이라고 기대하였다. 여러 번 주부(州府)를 맡았는데, 치적이 매우 드러났으며 계해년(1623,인조1) 초에 경기 감사가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죽었다.


●송방조(宋邦祚)는 자는 영숙(永叔)이다. 성질이 준엄하고 결백하여 악을 원수처럼 미워하였다. 혼조(昏朝.광해군) 때에 요사한 무리들이 조정에 가득하니, 사람들이 모두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머리를 보전하지 못할 것처럼 여겼다. 일찍이 우리들 몇 명과 함께 모여 이야기하는데, 좌중의 담화가 시사(時事)에 모두 근심되는 듯 두려워하였으나, 영숙이 혼자서 분연히 말하기를,


“하늘이 정해지면 사람을 이길 수도 있는데, 사람의 도리가 저렇게 없어졌으니, 여기에 어찌 천도의 극단이 없겠는가. 제군들은 다만 고요히 기다려 보라. 나의 말이 자연 맞게 될 것이다.”


하였다. 내가 일찍이 그 말을 들었는데, 이때에 와서 깊이 그의 앞일을 아는 지혜를 탄복하였다. 영숙이 서장관으로 북경에 갈 때에 역관을 구속하여 그 수족을 함부로 놀리지 못하게 하니, 역관이 매우 괴로워하였는데, 도중에 갑자기 죽었다. 혹은 그에게 독살을 당하였는가 의심한다고 한다.


●양응락(梁應洛)은 자는 심원(深源)인데, 문장과 글씨에 모두 뛰어났으며 장원 급제에 뽑혔지만 벼슬은 낭관에 그치고 세상을 떠났다. 젊었을 때 조인보(趙仁甫)와 서로 친하여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도 서로 떠나는 일이 없었다. 사람됨이 중후하고 말이 더듬거리는 듯하였지만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여, 스스로 꿋꿋하여 흔들리지 않고 섞여도 물들지 않는 지조가 있었다. 계곡(谿谷.장유)이 그 묘도문(墓道文)을 지을 적에 그의 평생을 자세히 서술하였다고 한다.


●이경탁(李慶倬)은 자는 덕여(德餘)인데, 나보다 열 살이 위이다. 일찍이 집안 대대로 교분이 있는 관계로 아우처럼 나를 보아 정리가 친형제나 같았다. 풍도가 넓으며 재주가 뛰어나 한때 교제하는 이들이 모두 원대한 지위를 기대하였다. 광해군 때에 관서 감사 막하에 좌관(佐官)으로 나가 있으면서 몸을 많이 축내었는데, 하루아침에 객지에서 세상을 떠나니 나이 겨우 40 남짓 되었다. 나는 외로운 신세로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하여 이 친구만이 기개가 서로 통하여 종시 막역한 심정이었는데, 존망을 달리한 지 이미 수십 년이 되었다. 이를 생각할 때마다 서글프게 가슴이 아프지 않은 적이 없다.


●나는 오랫동안 고질병으로 온갖 일을 다 폐하고, 날마다 피곤하고 수척하여 스스로 견디지 못할 형편이었는데, 좀 뜸하여 우연히 당(唐)나라 사람의 시집을 가져다 베개에 엎드려 뒤져보니, 한가하고 바쁘며 즐거워하고 괴로워하는 정경이 감발할 만한 것이 있었고, 또 옛 사람들이 나보다 먼저 손을 댄 것을 기뻐하면서 부질없게 약간의 경구(警句)를 기록하여, 때로 혼자 읊으면서 소일하기도 하였다.


●청련(靑蓮.이태백)ㆍ소릉(少陵.두자미)ㆍ창려(昌黎.한퇴지) 3대가는 그들의 지은 글이 너무 많아서, 따다 쓰기에 합당하지 못하고, 그 밖의 명가(名家)들의 여러 작품은 그 내용이 화려하려 내가 병중에 생각하는 것과는 서로 가깝지 않고, 귀머거리와 장님이 소리와 빛의 진정한 지경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 같기 때문에, 좋고 나쁜 것을 논할 것 없이 모두 버리고 적지 않는다. 대개 이 《만록(漫錄)》은 남에게 보이려는 것이 아니요, 다만 내가 오랫동안 병으로 의지할 데가 없어 때로 혹 들쳐보며 번민한 생각을 씻게 된다면 반드시 청량산(淸凉散)을 한 번 복용하는 것보다 못하지 않을 것이다. 계미년(1643년) 여름에 기옹(畸翁)이 청정헌(淸靖軒)에서 쓰다.




栗谷先生論花潭則曰。微有認氣爲理之病。至於大學小註陳北溪說一款。駁之曰。理氣元不相離。非有合也。又聞常論太極圖說。妙合而凝。不如朱子渾融無間之說也。後世必有知其解者。栗谷四書訣釋。及小註批抹。極其精詳。可使後學有所感發。而惜其未及畢工於經傳。且未廣布於當世。然使不悅者得之。未必不棄而不收矣。
理氣無先後之說。先儒已盡言之矣。昔見權汝章韠。偶及此事。汝章因言鄭一蠹。以中庸首章註。氣以成形。而理亦賦焉二句。以爲朱子有先後之辨。殊失本旨云。
沙溪先生因講心經。操則存。舍則亡。出入無時。莫知其鄕。再擧范淳夫女所言。孟子不識心。心豈有出入。程子因贊。此女雖不識孟子。却識心。孟子與范女所言。異同何義。亟問於諸生。某作小說。稟於先生曰。凡人心有如室中火光。雖被外間風氣牽動。擾攘難定。固未嘗隨他出外。牽動時却在此。安定時亦却在此。非如人乘馬出門相似。其謂存亡出入。只言感通之妙。莊子所言一日而再撫四海之外。亦非謂自內出外而適他也。如何如何。未知先生。終果印可否也耶。
沙溪先生嘗言。聖人之心。如明鏡止水時節。學者有難窺測。自餘衆人。多患走作跳擧。必須先立本體。然後隨其發動處。省察加工。方有摸捉。每於經書講解。必以兼觀動靜爲主。乃知老先生用力實地。非草草也。
崔汝允命龍言。志者計較思量之有所定向者也。然旣已發動。有善有惡。故有志於道學者。有志於功名富貴。不一其人也。汝允聰明絶人淹貫經史氣品溫良規矩不紊但以地望寒素居鄕爲群不逞所嫉坎壈危辱年纔五十而終
少時往來海西。歷謁石潭祠宇。退與數四儒生。逍遙潭上。溪山絶佳。攢石如屛。其中有及門之士。皆言先生以此處山水九曲。宛似武夷形勝。遂與若干同志。管立朱子廟。且以平生素所尊尙故也。因言先生風儀簡潔。言語坦蕩。與鄕人相接。無少長愚智。各得懽心。時或有所思索。端嘿移時。旣而如初。
一學老宿。桑門宗師也。入定五臺山。殆五十年而化去。嘗言少從栗谷遊山。行過一處。有小泉出石竇。衆皆聚飮。栗谷亦命酌取。一啜曰。此水之絶味也。衆固不知有異。栗谷曰。凡水淸者佳。淸則斤兩重。濁者雖雜以沙泥。斤兩不及於淸水。同行者爭試之。果然斤兩倍於他水。乃知哲人於物。無所不通。皆此類云。
昔年偶見老僧。自言在龍門。時與牛溪先生。同棲累日。瞷其起居頗熟。仍問先生蚤夜何爲。答曰。晨起必盥櫛整衣冠。端拱正坐。恰到午間。又盥櫛而坐。有時披覽書冊。如有所考。旋卽捲卷莊默。望之儼然。無不起敬。
牛溪居家。綜理詳密。早朝出令。雖耘穫微事。役使僮役。必計日力以分付。未嘗少差。以故鄕居不患貧乏。聽松先生。平生不治生業。凡有祭祀賓客。幹蠱出於牛溪。或在京洛逆旅。每値親舊來訪。必有酒肉。而聽松若固有之。
栗谷牛溪。及吾先子。同會李進士希參家。主家設酌。石介以一時名娼與席。將行酒發歌。牛溪遽起。座上無敢挽止。蓋平生以不聽淫聲爲法云。
退溪之於南溟。旣同時同庚。同在一道。而終未得會面云。豈言議有出入而然耶。不然古固有尙友千古。千里命駕者。抑又何也。
成大谷作南溟行錄。有云。公遊頭流時。遇一少年。語人曰。陰猜娼嫉。仇視善人。後日若使得志。善類赤矣。後人或疑其指奇高峰。而不知何所據也。可怪。
金河西。淸風異骨。敻出流俗。少時受知仁廟。恩遇異常。自乙巳以後。絶意人事。有同枯木死灰。每値七月諱辰。輒前期携酒入山。號哭無節。先子平日嘗所艶慕。有詩云。年年七月日。痛哭萬山中。蓋實迹也。
土亭小說云。惡虎窺人之小軆。邪思蝕人之大軆。人畏惡虎。而不畏邪思。何耶。其守抱川。進萬言疏。論用人必當其才一款。有云。海東靑。天下之良鷹也。使之司晨。則曾老鷄之不若矣。汗血駒。天下之良馬也。使之捕鼠。則曾老猫之不若矣。況鷄可獵。猫可駕乎。
土亭卓佹不羈跡也。其天賦淳良。孝友出天。以其先阡傍海。百年之後。將有滄桑之變。躬耕販鹽。不辭勤苦。爲移山塡海之計。兄死。心喪三年。讀聖賢書。行坐念誦。每與學徒同行。有時卒然問及經史。如或未對。則必咄嗟曰。爾輩豈以道路之苦。而廢誦讀乎。但其浮游江海。放浪形骸。非特厭薄世故。亦出於避彀之計云。其子山輝以知音名於世見知者稱以神明憂中爲惡虎所害早夭
趙重峰學於土亭。沈潛經史。勤苦過人。觀其所著文字。先見之智。如合符契。豈所謂至誠前知者耶。
重峰平日。行次旅店。夜深人定後。爇松薪。端坐看書。傍舍適有士子窺之。手中所把玩。卽宋朝名臣言行錄。幾至鷄鳴而罷。
重峰精於象緯。辛卯歲末。每以南寇爲憂。前後章疏非一。至於壬辰春初。喪其內子。將窆。未及掩壙。忽大驚怖曰。天鼓動矣。平秀吉。必已興師矣。謂其家人及隨喪親族。汝輩各速歸去。亟謀避亂。我則以死報國耳。聞者頗不信。未幾。賊報至矣。
重峰與李家兄弟。自少交親。情如骨肉。及其晩節。李兄弟與鄭賊相親。重峰切加禁戒。李以朋友無故不絶爲答。重峰知其終無奈何。自沃川徒步。抵南平李家。宿留數日。多方譬諭。李終不聽。重峰辭去。臨行抽刀割坐席。題七言一絶以爲別。落句曰。我去君留各自修。因此遂絶。
沙溪每於馬上看書。或誦庸學等書。無時不然。余自少出入門庭。侍寢時多。晨夜必默誦古書。循環不輟。常自言。吾於庸學。誦讀殆過數千遍。而亦未覺增長之益云。
中庸首章。修道之謂敎。訓誥敎若禮樂刑政敎化之屬是也。谿谷以爲未安。至於著說。吾言凡聖賢言語文字。當先尊信以爲依据。如有不安於吾心者。亦當十分硏究。期於得其旨義而後已。何可草草以己意斷定。況朱子四書集註。極其精密。非後學所可輕議。谿谷終不首肯。
沙溪嘗言。先儒論學處。雖程朱話頭。便能曉解其當否。而至於詞章利病。出於村家學究者。亦未通透。豈業專而不暇他及耶。栗谷與高峰。同時立朝。雖年輩差池。固可以道學相契。而終是牴牾。未知其故。或云。因大學爭辨不相下。以致如此。豈其然耶。退溪之於高峰。極其推重。觀其往復書札可知。先子少高峯九歲。而自少受書。稱以先生。平時與高峯及尹月汀。同直湖堂。高峯盛氣。瑕點栗谷。先子從容言。先生旣與李某。許以道義。不當每加訾毀。高峯愈恚不釋。月汀言 月汀每言。平時與高峯。及黃岡 金公繼輝 李山海。同作一番。直宿湖堂。舊有天下輿地圖。掛在壁上。高峯黃岡。偶與指點。談討其山川形勢道里遠近人物出處州郡因革。靡不貫穿無遺。窮數晝夜不已。鵝城出謂月汀曰。吾輩同仕於此。豈非大可愧乎。
月汀博雅好古。每對余言。宋祖終爲弑逆。余少時莫曉所以。請其故。答云。史稱范質忠厚處曰。質爲本朝。終始如一。是以終質之世。太后少主得無恙。以此觀之。范歿之後。終必遇害。後考言行錄。信然。
月汀云。昔見高峯爲言。少長鄕曲。苦無書冊。於史只見綱目。自以爲足。及到京中。借人資治以覽。意思自別。
少微通鑑。國俗所尙。而仔細看來。非徒裁翦資治。文字頗失取舍。間有文理不相接續。姑擧可記者。如項羽吳江事。專沒與呂馬童接話根本。後乃截取。爲若德一句。田千秋事。專沒白頭翁根本。只言高廟神靈告我。此甚無義。其他小小瑕類。不可勝記。其精詳。不及史略甚遠。
古人以字行者多。以兩字行者少。綱目一編之中。兩字迭出。如祖逖字士雅士稚。莫適所從。及考世說。以士雅見。
或云。以牛耕田。乃是末世事。金黃岡言。以冉耕字伯牛觀之。其在上古亦然。一世以爲名言。
以史考之。武王少文王十四歲。而其長有伯邑考。則文王之早育可知。武王九十三而終。周公負成王朝諸侯。其季有唐叔虞韓侯。則武王之晩育可知。但未知邑姜之年。少武王幾歲。而婦人衰耗之後。亦能誕育否也。
古人通韵。今人多不曉。其叶音。尤難强解。如東侵音韵。本不相類。而多有叶通處。易小象此類頗多。詩吉甫作頌。穆如淸風。仲山甫永懷。以慰其心。此司馬相如詞賦中尤多。如長門賦。專用此體。招魂湛湛江水三句。亦通押。而讀者多不察焉。
古人四歲。知辨四聲。四五歲能有作述者。豈神異與凡人。絶不相類耶。今之孩提。三四歲能言者亦尠矣。近世如淸寒河西。俱稱神童。而其所著詩文粧點。或不及一時作家。豈用功有淺深而然耶。
古人論文。今亦不敢盡信。韓文公以子雲太玄。不足與老子爭强。侯芭所謂勝周易。爲知言。此似過當。子厚之於退之。亦然。
蘇長公司馬公神道碑。可謂千古傑作。但用李世勣慕容紹宗事爲比。何也。
少時謁尹月汀門下。適値初度設酌。崔東皐占首席。月汀問。聞令公以歐文勝於昌黎。信否。東皐曰固然。韓之千變萬化。不及歐公專用一體爲自然。又問。皇明文字。孰爲最勝。崔答。不曾看熟。槪是浮華不實。其中黃洪憲所作。近於科文。月汀默然。
東皐又言柳文。平生不曾寓目。頃因一宰相督令抄出。始得披閱。全無意味。如東坡諸作。尤庳庳矣。其亢論類此。
東皐眼下無人。每稱栗谷吐辭成章。胸中流出。人不可及。
朱子與象山。各率學徒。會白鹿書院。講義跋文。極加推重。及其爭辨太極。枘鑿不入。交契遂至乖角。至其旅櫬過時。大拍頭胡叫喚云云。如使象山有知。寧不銜憾於泉下乎。
朱子於東坡。排斥不遺餘力。而觀其跋坡公所畫石竹曰。此翁磊落不羈之資。淸秀後凋之操。竹君石友。庶幾似之。其見許亦似不凡。
王陽明。初染禪學。中間服膺朱子。後又棄而從禪。其集中。講學每疑朱仲晦。支離羞作鄭康成。鏗然舍瑟春風裡。點也雖狂得我情。一律。志尙可知。
陽明遊山時。有一丈室。扃鐍甚牢。塵埃沒膝。問其故。居僧云。先師臨化。丁嚀付囑徒弟。一閉窓闥。勿妄開視。陽明怪之直前。手拓其戶。見一老僧坐化。容色不變。與陽明面目無別。背上有文。曰。三十年前王守仁。開門還是閉門人。陽明錯愕。未知其眞妄如何也。
聖人不語怪。怪亦未必不有。浮屠善幻。雖不可信。如針羹洗臟。萬一或然。豈非惑衆。
丁亥年間。先子有不適於時。棄官南歸。歷辭盧蘇齋。蘇齋時爲首相。適以病在家。引入臥內。命酒合懽。信辭慰勉。以爲。公私情義。不可退去。因以絶句題扇面曰。壟草年年老。庭荊日日衰。平生任忠孝。持此欲何之。平時藏于書簏。某亦及見。
退溪南歸。送者滿船。先子因公務差遲。追到江上。則船已中流矣。因船人致一絶于老先生曰。追到廣陵上。仙舟已杳冥。秋風滿腔思。斜日獨登亭退溪於船上。擧手爲謝。及還鄕家。次韵以寄。今未必載在本集。
近代文人。至宣廟朝而盛矣。詩學如權石洲者。才思絶倫。具眼者觀其遺稿可知。但石洲酒後多戱言。論文殊無定價。余一日偶與從容問其本色。則答云。自國初至今。述作或有過我者。若其心眼俱到。透得妙解。無如我者。其自負不淺。
石洲詩集。元數不多。而抄選太慳。今其行於世者是已。至其家藏私稿。自爲批點者。曾一披閱。可堪把翫。聞已見失於兵禍云。可惜。
少時體素李公。春英 過海西仲氏所。村中士子治擧業者。聞其至。各持所讀冊子。羅列於前。左右問難。體素把酒掀髥。酬應如響。有如老吏剖決之爲。亦自婾快。
車五山天輅。牢籠百家。贍給無比。而聞其乘快揮洒。殊欠點化。終以亂稿。投在箱篋。未嘗再閱。此必不以傳後爲意也。
己卯諸賢。以堯舜君民爲己任。而一時前輩。多憂其無漸。至如大段施爲。如設立賢良科等事。多出於金慕齋安國。而及諸賢敗後。慕齋獨免。止於罷職。慕齋少與金老安親切。一日安老聞慕齋入城。委往訪之。時安老方典文衡。慕齋乘醉戱之曰。令公主文。只是承乏。曷足貴乎。安老笑而去。諸子弟憂怖。以爲失言。彼必大銜憾。慕齋笑曰。我與安老最親。稔知其人。必不以一時戱言害我。後果無事。安老死後。慕齋每於時節。存遺其家不替云。
己卯金大成湜。出亡在外。夜投朴訥齋祥光州村舍同宿。備陳群奸壅蔽天聰。自作威福。今日之禍。主上實未必知。早晩當自暴白。訥齋答以衮貞奸謀。機緘深密。不應如許空疎。且非如前代權臣閹豎。脅制君上之比。此生復見天日難矣。金始缺望悔悟。是曉辭去。自縊於道傍橋下。
鄭文翼公 光弼 在謫所。有京使。夜叩棘門云。吉報至矣。群奸皆敗。老爺承召。有多少書信在此。公徐曰。姑置之。待明開封。鼾睡如初。人服其偉量。
辛卯禍作。月汀最後。止於削黜。嘗自言。平日口不道李家過惡。故當初送人因子弟爲言。此時一番通問。則保無他虞。余答云。古人有言。死生榮辱。義不可苟。一時儕輩。皆已行違。而吾獨晏然。豈不愧於心乎。
先子平生。夢兆必驗。辛卯遇禍。出寓南陽鷗浦。向曉起坐。語傍人曰。夜夢吾爲江界府使。謫所其必此地乎。旣而有人自京來言。定配晉州。先子嗟嘆。平生信夢。老而忒矣。南行數日。因臺論移配江界。人能破千金之璧。而不能不失聲於破釜。常以蘇公此言驗之。流俗知其不誣。
事之不近人情者。鮮不爲大姦慝。此出於老泉辨姦論。而先儒駁其非公。王蘇是非。雖不知誰何。然以其言與大學所厚者薄。所薄者厚。參互爲觀人法。百不失一。
古人所謂。臣父之淸。猶畏人知。臣之淸。猶畏不知。此公私之辨。眞格言也。末世以淸白操行爲名者。多是自衒自鬻。其有躬行實踐。泯然無跡者。則世無得以稱焉。
嘗見古人。以不爲表襮。爲稱贊人語。私謂。此何足爲人美德。到今經歷世路。率多金注之惑。始覺有味乎其言也。
勢利爭附。巿道爲交。人誰曰不知恥焉。及至炎涼代序。榮辱易置。雖平日號爲知己。不唯過門縮頸。不一省問。又從落井下石者多。此翟公所以題門。昌黎所以誌子厚墓者歟。
末俗之人。知義理者固少。至於知利害者亦少。一生志於富貴。費盡機關。隨時曲傅。猶恐不及者。終不免禍敗。間有安分守拙。恥爲非義。正色立朝。棘棘不阿者。未必皆陷機穽。此足爲爲不善者戒。
安靜者。能制躁妄。故事有所立。浮誇者。徒事紛競。故終無實效。世人喜人之自誇。而多厭其守靜。任使之際。捨此取彼。終至誤國僨事者。前後相踵。而不知悔也。適見今人多此類云。
古今謹愿而享完福者有之矣。驕傲而終安全者少。豈非人誹所萃。鬼責隨之歟。
余嘗以王彥方詩中榮寵無心易。臨危抗節難。二句。漫題壁上。客有來見者。多言上下句難易二字。宜相易。可見榮名之中人深矣。
朴守庵。枝華 出於寒微。能自讀書。莊修一時。多所稱譽。壬辰倭變。避亂山谷間。一日家人不知其處。跟至一泓下。見其衣屨蛻脫在水邊。得其浮屍而歸。衣帶間見有老杜一律。卽京洛雲山外。音書靜不來。白鷗元水宿。何事有餘哀全篇也。豈亦懷沙之遺意歟。
趙靜庵八九歲。受學於金寒暄門下。一日侍坐寒暄。寒暄以猫兒偸取脯脩。謂其婢使不謹守視。盛氣詬罵不已。蓋將用爲大夫人甘旨供也。靜庵徐曰。先生爲親之誠。則固至矣。但猫自無知。婢輩亦非故犯。先生以此過用血氣。恐未安。寒喧驚服曰。汝以童稚。來學於我。我反學汝。終日提携歎賞云。
天然。南中僧也。身長八尺。膽力過人。嘗行過智異山。側有所謂天王峯淫祠。夙著靈怪。過者若失虔祈。行不數步。人馬傷斃。以此行旅無不畏敬。天然以爲怪妄。攘臂過去。俄見所騎踣地。天然大恚。卽以死馬。屠於祠中。血汙祠壁。因復張拳打破神像。縱火焚滅以去。是後神怪遂絶。商旅晏如。退溪高峯。皆有詩軸。一時名人。和而張之者甚多。天然早從高峯學易。頗通六義。及退溪高峯論辨性理。然持簡牘往復。能記其間語義。戊申年間。余以事往信川。然聞之。騎牛來訪。時年八十餘。康健不衰。道及先故。亹亹不倦。仍與聯枕數夜。多聞所未聞。眞方外奇傑也。天然言。平日受知於朴思庵相公常在永平庄舍。思庵日相對消遣。戊子冬。逆賊鄭汝立在全州。委送人馬。作書要然。然辭不行。思庵尤以不逐名士貴之。己丑春。鄭賊又送人馬。書辭勤懇。且以綈袍一領寄餉。天然辭於思庵。思庵不强其留。然卽着袍跨馬。行到一日程。旅次夜坐。忽自念朴相不欲挽我。以彼要請至再。有所嫌難也。我今往。彼新知之樂。寧比思庵。捨舊從新。非義也。卽修書致謝。捲還其袍。杖錫還到永庄。則思庵見而怪之。旣而問知實情。益加信愛。是冬。汝立逆謀彰露。始知其所勤請。意有所在。至今思之。每覺寒粟云。
權汝章氏。以宮柳一詩。壬子逮獄。旣出創痛。不卽登途。留興仁門外氓舍。一日親舊問疾送行。頗有來觀者。見汝章臥內壁上。有舊題古詩。曰。正是靑春日將暮。桃花亂落如紅雨。勸君終日酩酊醉。酒不到劉伶墳上土。蓋是村家學究。曾所漫書者。而勸字。誤作權字。劉伶誤作柳聆。見者相顧錯愕。俄而汝章飢渴索酒。飮一大器訖。溘然就瞑。是日卽三月之晦。窓外所見。恰似詩景。造物之生死斯人。處分前定。悲夫。
鄭古玉碏。成石田輅。皆年四十喪耦。不再娶。不近女色。終身鰥居棲息。有似入定僧。惟酷嗜麯孼。沈酣度日。古玉周流城巿相知間。不醉無歸。其自詠有云。山林城郭兩無依。朝出常常暮醉歸。蓋實迹也。石田平時。杜門仁王山下。除官不就。亂後寓居楊花江上。與女婿趙嶸。相依爲命。得酒必以醉倒爲限。一朝無疾而卒。斯兩老能斷難制之大慾。而不能超出醉鄕之外。豈其情慾分數。有淺深而然耶。
尹光啓字景說。號橘屋。南中文士也。一生以詩酒自娛。恬於名利。嘗從宦入城。築室仁王峯下。種花蒔藥。絶無塵土氣。日與其表弟鄭韸比隣。相對以酒爲年。隣里有酒家。日取以飮。不問其直。酒主亦不責以時償。及其南船載米穀。到泊江上。便卽分米。送于酒家。不計多少。絶意人事。不出門庭。嘗對余言。入京三年。以親屬弔喪。掛冠束帶以出者。僅兩度云。
故友鄭韸。字尙古。爲人閑雅可愛。與橘屋尹丈。爲表從兄弟。一生相隨不離。遺落身世。日飮無何。及尹丈歿後。尙古益無生趣。沈冥病醉。年僅六十而終。臨終。使家人進酒。酒至張視。嫌其器小曰。此翁平生。惟嗜此物。今將辭去。安用此涓滴爲。更命浮二大白訖。頹然就枕而逝。
金永暉字國舒。家在光州石堡村里。一生杜門養生。頗愛修鍊家法。繞屋滿栽枸杞。以其根枝。蒸煮粟米作飯。其葉實作菜作酒。常自啖啜。時見同好客至。輒出而勸之。才識不凡。言語慷慨。有足以感動人者。余少時得與從遊。眉宇瀅然。有山澤癯儒骨相。酒間必開懷傾倒。以爲相知之晩。年未六十。無疾而歿。嶺南郭再祐嘗言偶於亂離中逢着金永暉得養生法云
崔連福字景膺。與金丈永暉。同里閈相善。爲人厚重謹密。一生未嘗言人長短。其所與交。則皆一鄕善士也。終身讀一部大學。幷其集註或問。淹貫無遺。杜門絶跡。以沒其世。若此類。身居岩穴。名湮滅而不稱。悲夫。
洪命元字樂夫。益寧洪相從姪也。器量峻整。才諝敏達。詞華亦不讓於流輩。人以公輔期之。屢典州府。治績茂著。癸亥初爲畿伯。未幾卒。
宋邦祚字永叔。性峻潔。疾惡如讎。當昏朝時。鬼魅滿朝。人皆憂栗。如不得保其首領。嘗與吾輩若干。會一處敍話。座中談及時事。無不愍然危懼。永叔獨奮然曰。天定亦能勝人。人理泯絶如許。此豈無天道之極乎。諸君但當靜而待之。吾言自有驗矣。余嘗與聞其言。到此時。深服先見之智也。永叔以書狀官赴京時。束縛譯官。使不得逞其手足。譯官甚苦之。道中暴卒。或疑爲其所毒云
梁應洛字深源。詞翰俱優。擢魁科。官止郞寮以沒。與趙仁甫。少相親善。流離遷次。未或相離。爲人厚重。言若吶吶。然而好善疾惡。自有確乎不拔涅而不緇之操。張谿谷持國。誌其墓道。備述其平生云。
李慶倬字德餘。長余十歲。嘗以世好弟畜我。義同骨肉。風度夷曠。才調超邁。一時交遊。無不期以遠到。昏朝時。出佐關西幕。多所傷敗。一朝沒於客館。年僅四十有餘。余以心迹孤疇。未見許可於世。獨此友氣槪相契。終始莫逆于心。而存亡異路。已過數十年。每一念來。未嘗不愴然疚懷。
余積年沈痼。萬事都廢。惟日困惙。不自堪耐。稍間。偶取唐人詩集。伏枕披閱。其閑忙欣悴情境。宛然有足相感發者。且喜古人先我着鞭。謾錄若干警句。時自諷翫。以消遣云。
靑蓮少陵昌黎三大家。以其篇章浩漫。不合尋摘。其他名家諸作。其詞意涉於華艶。與余病中懷思。不相侔擬者。有同聾盲之於聲色。不能分別眞境。故亡論美惡。悉置不收。蓋此錄。非欲示人。只以余久病亡憀。時或寓目。湔滌煩愗。未必不敵淸涼散一服耳。癸未夏。畸翁書于淸靖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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