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305
게시물 검색 폼
  • 농암집 제29권 / 제문(祭文); 오두인
    광주(光州) 의열사(義烈祠)에 양곡(陽谷) 오공(吳公)을 배향한 제문위대한 윤상은 / 丕哉倫常백성의 표준이니 / 生民之極우주를 지탱하여 / 撑拄宇宙어긋남이 없다네 / 終古莫忒그것이 혹 무너지면 / 厥或披攘나라가 망하는 법 / 國不爲國군자가 없다면은 / 不有君子누가 윤상 붙잡으랴 / 孰能扶植거룩하신 선생은 / 猗歟先生좋은 자질 타고나서 / 懿美天錫어린 시절 그때부터 / 粵自髫丱명성이 빛났다네 / 華聞奕奕문과에 장원급제 / 裒然大魁앞길이 트이더니 / 進塗載闢대간을 지내면서 / 颺于臺省꼿꼿함을 드러냈네 / 屢著勁直지위 명망 높은 데다 / 位望旣尊절개를 변치 않아 / 一節靡易외양은 온화하나 / 溫如其外마음속은 굳세었네 / 中則金石지난날 기사년에 / 往在巳歲왕후가 폐위되고 / 坤極傾仄간신들이 아첨할 제 / 羣奸導諛신료들이 침묵하여 / 具僚喑默인륜의 기강이 거의 다 실추되고 / 人紀幾墜신하의 절개가 드러나지 않아서 / 臣節莫白당당한 우리 동방 / 堂堂東魯예의가 사라졌네 / 禮義晦蝕공은 그때 벼슬에서 물러나 있으면서 / 公時寘散충분이 사무쳐서 / 忠憤盈臆뜻이 같은 사람들과 / 爰及同人머리를 조아리며 상소를 올렸는데 / 抗章叩額사람 삶아 처형하는 큰 솥을 앞에 두고 / 鼎鑊在前음식 담긴 솥을 보듯 태연함을 유지했네 / 如卽飮食빛나도다 공의 죽음 / 其死也光신하 도리 세웠어라 / 立臣道則그 소문 들은 이들 / 風聲所感멀리서도 감격거늘 / 聳動遐逖하물며 우리 고을 / 矧我一州공의 은택 입었으니 말할 나위 있겠는가 / 曾沐膏澤시서를 가르쳐서 현송할 줄 알게 하고 / 詩書絃誦배불리 먹여 주고 편안히 살게 하여 / 乳哺袵席아비처럼 가르치고 어미처럼 사랑하니 / 父敎母愛성대할사 공의 은덕 / 藹然休德공은 세상 떠났어도 / 沒世之思어제인 듯 또렷하네 / 凜若宿昔고을 현인 모신 사당 / 乃睠鄕賢그 모습이 빛나는데 / 廟貌有赫여기 함께 배향하면 / 於焉幷享후세 전범 되겠기에 / 宜後永式좋은 날을 가려잡아 / 肆涓穀朝신주 깎아 올리니 / 治主以陟숙연한 기운 그득 / 肹蠁悽愴영령 뵙는 듯하네 / 如見英魄높디높은 서석산이 / 瑞石巖巖푸른 하늘 닿았는데 / 上磨穹碧의열사 이 사당도 / 惟此義烈나란히 높이 솟아 영원히 전해지리 / 幷峙千億[주-D001] 광주(光州) …… 제문 : 의열사(義烈祠)는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을 모신 사당으로, 1604년(선조37)에 건립되어 1681년(숙종7)에 사액받았다. 양곡 오공은 이름은 두인(斗寅), 자는 원징(元徵),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인조 때에 사마시와 별시 문과에 장원하고 효종, 현종 때에 대간(臺諫)을 지냈으며, 1672년(현종13)에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있으면서 진휼을 잘하여 상을 받기도 하였다. 1689년(숙종15) 5월에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가 폐위되자 이세화(李世華), 박태보(朴泰輔)와 함께 이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국문(鞫問)을 받고 의주(義州)로 유배 도중 파주(坡州)에서 66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해에 복관되고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農巖集 卷28 刑曹判書吳公神道碑銘》
    2022-05-06 | NO.185
  • 농은정기(농은 이근태의 농은정3)
    농은 이근태의 농은정에 대한 후석 오준선의 기문이다. 이 때의 농은정은 한자가農隱亭, 膿隱亭 등 출처마다 다르므로 원전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호가 膿隱이므로 膿隱亭이 마땅해보인다.農隱亭記世之隱者或入山而逃名或避地而浮海或屠市酒肆托跡而藏身之數子者非高尙其事以保淸節猖狂自恣以避禍網而然於中行之道胥失之矣夫服田力檣明農而資生民業之本也隱於農其知本者也今李居士根泰躬耕農畝不求聲名扁其亭曰農隱其亦有見於知本之義歟傳曰君子務本本立而道生道也者非高遠難行之事春耕秋穫食吾力而無求仰事俯育勤孝慈而不惰是固隱之大者若入山浮海藏於酒屠者皆賢君子奇南男子之事也非後人之所可議到也吾知農隱主人坐此亭上春酒洋洋課農書而聽農謳襏襫爭席賓朋滿座笑語款洽隱居之樂樂且無央矣李友琫淵以主人之意請余爲記己再三矣余嘉其知本之義於是乎書後石 吳 駿 善-농은정기세상을 버리고 자신의 몸을 숨기는 은자들의 형태를 살펴보면 몇 가지의 종류가 있다.어떤 사람은 산으로 들어가 그 이름을 숨기기도 하고 또 어느 사람은 땅을 피하여 바다로 들어가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시장가의 도장 주점 등에 그 몸을 택하여 자신의 생명을 바꾸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들 몇 사람의 이러한 행위가 비록 자신의 뜻한 바를 이루어 그의 청절을 지키고 또 자신의 처지를 위장하여 그의 목숨을 보전한다 할지라도 이들의 이러한 행위는 이미 중행의 정도를 벗어난 편백된 처사이다. 자신의 힘으로 밭을 갈아 스스로의 생활을 유지하는 그 일은 우리 모두가 함께 힘써야 할 민업의 근본이다. 이 때문에 자신의 몸을 산이나 바다가 아닌 한가한 들녘에 숨기어 스스로의 본업에 힘쓰는 그 일은 참으로 근본의 소중함을 깨달은 올바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이름을 이근태라 한 오늘의 이거사가 몸소 밭을 갈아 농사를 지으며 외부의 성명을 구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 정자를 지어 그 이름을 농은이라 함은 이미 위에서 말한바 있는 근본의 이치를 깨달은 깊은 사려가 있기 때문이다. 옛날의 전에 이르기를 「참다운 군자는 무엇보다도 근본을 힘쓰는 것이다. 근본의 뿌리가 확고히 서게 되면 도의 이치가 저절로 생기게 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도라는 이 도는 얼핏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높고 멀어 행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봄철에 갈고 가을에 거두어 자신의 능력으로 튼튼한 생계를 유지하고 또 위로 부모님을 섬기고 아래로 처자를 거느리는 효자의 일에 충실하는 것이 바로 숨은 선비가 해야할 하나의 임무이다. 이 때문에 위에서 말한 바 있는 입산 부해 장어주도 등의 몇 가지 일은 모두 어진 군자나 기특한 남자들만이 할 수 있는 특수한 일들이다. 우리 후인들의 입장으로서는 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내 비록 현장에 나아가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농은정의 주인이 이곳에 앉아 어떠한 일을 하고 있을까 하는 그 모습을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다. 화창한 봄날에 향기로운 술동이를 어루만지며 옛날의 농서를 펼쳐 보기도 하고 또 은은한 농부의 노래 가락을 듣기도 할 것이다. 또 때때로 일복 차림의 농부들과 자리다툼을 하기도 하고 또 주위의 다정한 여러 벗들과 즐거운 우스개 소리를 하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고요히 숨어사는 은거의 즐거움을 느껴 스스로의 외로운 고독함을 잊게 될 것이다. 나의 다정한 벗인 이봉연이 주인의 이러한 뜻을 전하면서 나에게 이 정자의 기문을 청하였다. 그러나 내 자신이 이러한 문자를 지을 만한 적격자가 아니기 때문에 여러 차례 사양을 거듭하였다. 그럼에도 그의 청이 더욱 간곡하였고 또 근본의 중요함을 깨달은 이 주인의 높은 뜻을 가상히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이로 인하여 부득이 이 기문을 지어 이들의 청에 응하였다.후석 오 준 선
    2020-08-24 | NO.184
  • 눌재와 사암 두 선생을 합향한 서원에 폐백가미 건 - : 서원등록
    눌재(訥齋)와 사암(思菴) 두 선생을 합향한 서원에 폐백가미(幣帛價米)를 회감(會減)하는 것을 점이(粘移)하는 건 - 현종(顯宗) 13년(1672) : 서원등록(書院謄錄)선혜청(宣惠廳)에서 상고(相考)하는 일. 이번에 접수한 전라 감사(全羅監司)가 광주 목사(光州牧使)에게 덧붙여서 이첩한 첩정(牒呈)에, “눌재(訥齋)와 사암(思菴) 두 선생의 사우는 작년 12월 무렵에 이미 월봉서원(月峯書院)에 합향(合享)하였는데, 합향할 때의 폐백가미(幣帛價米)와 춘향(春享) 때의 폐백가미를 한결같이 월봉서원과 포충사(褒忠祠)의 예에 따라서 회감(會減)하고, 앞으로 추향(秋享) 때에도 이에 따라 회감한다는 것을 첨부하여 보고한다고 하였는데, 눌재와 사암 두 선생을 합향할 때, 유생들의 상소에 계하(啓下)한 것인지 상고하여 첩보하라.”고 한 일에 근거하여 예조(禮曹)에서 올린 첩보에, “눌재와 사암 두 선생을 월봉서원에 합향할 때 유생들의 상소가 임금께서 계하한 것인지 상고하여 첩보하는 관문(關文)입니다. 일찍이 병술년(丙戌年, 1646, 인조24)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선생을 회덕(懷德)의 숭현서원(崇賢書院)에 합향할 때와 기유년(己酉年, 1669, 현종10)에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선생을 옥천(沃川)의 창주서원(滄洲書院)에 합향할 때, 혹은 계하 문건을 덧붙여서 이첩하고 혹은 이문(移文)을 하여서 모두 이미 합향하였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지금 눌재와 사암 두 선생을 월봉서원에 합향하는 때에도 앞의 예에 따라 계하 문건을 덧붙여 이첩하여 합향하였습니다. 상고하여 시행하소서.”라고 하였다.
    2020-12-17 | NO.183
  • 눌재의 위판을 서원에 봉안하는 축문 -동강유집
    눌재의 위판을 서원에 봉안하는 축문〔訥齋書院位版奉安祝〕 -동강유집 제12권 / 제문(祭文) :신익전(申翊全, 1605~1660)선생께선 정학에 연원을 두시고 / 淵源正學강직한 고인의 유풍 지니셨지요 / 金矢遺直임금과 백성 위하는 뜻 간절했지만 / 志切君民투옥되고 유배되어 고달프셨습니다 / 身困徽纆선생의 풍모는 비록 멀어졌지만 / 風猷雖遠노닐던 자취는 바로 여기랍니다 / 游躅在卽사우를 세워 모시니 / 祠宇之刱사림이 모범으로 삼게 되었지요 / 士林攸式이에 받들어 제향 올리니 / 載奉載享예법을 따름이 어긋나지 않습니다 / 率禮靡忒부디 은혜로이 돌봐주십시오 / 其庶顧惠성대하게 덕을 향모하리이다 / 祁祁嚮德[주-D001] 눌재의 …… 축문 : 이 글은 1646년(인조24)에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있던 저자가 박상(朴祥, 1474~1530)을 덕산서원(德山書院)에 배향하면서 지은 축문이다. 한국문집총간 19집에 수록된 《눌재집(訥齋集)》 부록 권2 〈덕산서원봉안문(德山書院奉安文)〉에는 정홍명(鄭弘溟)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박상의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창세(昌世), 호는 눌재(訥齋)이다. 1646년에 덕산서원에 배향되었다가 1671년(현종12)에 송시열(宋時烈) 등의 건의로 월봉서원(月峯書院)으로 이향되었다.
    2020-12-11 | NO.182
  • 능주(綾州) 이순성(李舜星)과 광주(本州) 이춘성(李春星) 등의 전답(田畓) 송사- 광주목사
    보첩고(報牒攷) -光州牧使○영조(英祖) 41년(1765) 11월 20일 능주(綾州) 이순성(李舜星)과 본주(本州) 이춘성(李春星) 등의 전답(田畓) 송사에 관한 입안(立案)결급(決給)에 관한 일. 능주에 거주하는 유학(幼學 사족(士族)으로 아직 벼슬하지 아니한 사람) 이순성의 정장(呈狀)에, “관하 천곡면(泉谷面) 완동리(莞洞里)는 바로 저의 고토(故土)이고 그 면에 있는 고자 대전(羔字垈田)은 5, 6대 이하부터 대대로 살아온 종중(宗中)의 터인데, 저의 할아버지 남매의 화회문기(和會文記) 중에 노비와 전지를 각기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종중의 터를 문서에 기록하지 않았던 것은 대체로 종중의 가대(家垈)는 여러 대 동안 종가(宗家)에 전수해 왔기 때문에 애당초 거론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대로 전래한 종중의 터는 비록 지손(支孫)이라도 줄 수 없는데, 더구나 어찌 적손(嫡孫)을 놔두고 서손(庶孫)에게 줄 리가 있겠습니까.저의 가문이 화란(禍亂)을 당하여 도피해 숨어서 지낸 뒤에 종중의 터와 선대의 분묘(墳墓)를 서삼촌 아저씨로 하여금 수호(守護)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춘성의 아버지 이택(李澤)의 형제가 한때 그곳을 빌려서 거주하였는데, 서삼촌 아저씨도 일가 간에 차마 억지로 막지 못하고 그대로 지내왔습니다. 그런데 서삼촌 아저씨가 죽은 뒤에 이춘성ㆍ이창열(李昌烈) 등이 그들의 할아버지에게 나누어 준 증표(證票)의 별지(別紙)에 적힌 고자전(羔字田) 9마지기의 땅을 거기다 싸잡아 넣어 현란스럽게 하면서 30마지기에 가까운 종중의 터를 전부 빼앗으려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이치에 맞는 일이겠습니까. 이춘성ㆍ이창열 등을 잡아다 그 땅을 찾아주셨으면 합니다.”라고 하였다.이에 위의 이춘성ㆍ이창열 등을 잡아온 다음에 원고(原告)와 피고(被告)를 심문하여 사실을 분변하였는데, 을유년(乙酉年, 1765, 영조41) 10월 20일에 원고 능주에 거주하는 유학 이순성의 나이는 57세, 피고 본주 천곡면에 거주하는 이춘성의 나이는 56세, 피고 이창열의 나이는 52세였는데, 그들이 고하기를, “저희들이 종중의 터로 인해 서로 벌인 송사를 당일에 비로소 제기하였는데, 30일이 차도록 송사의 자리에 나오지 않을 경우에는 관가(官家)의 규식에 따라 그와 가까운 사람에게 결급(決給)한다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같은 날 이순성ㆍ이춘성ㆍ이창열 등을 다시 심문하니, 그들이 아뢰기를, “상고할 만한 문기(文記)를 바치라고 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순성은 말하기를, “저는 화회문기에 베껴서 덧붙인 소지(所志 관(官)에 올리는 소장(訴狀)ㆍ진정서(陳情書)) 1장, 계해년(癸亥年) 정월 초1일에 작성한 저의 동생 화회문기 1통, 고자행심등지(羔字行審謄紙) 1장을 바칩니다.”라고 하였고, 이춘성ㆍ이창열은 말하기를, “저희들의 화회문기 1통을 바치오니, 상고하여 처결해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하였다.이순성의 원정(原情 진정서(陳情書))에, “아룁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본주(本州) 천곡면(泉谷面) 완동촌(莞洞村)의 고자전(羔字田)은 바로 저의 선조가 남쪽으로 내려온 뒤에 대대로 전래한 종중의 터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저의 가문이 혹독한 화를 입어 할아버지 형제가 일시에 모두 죽었고 그 뒤 오래지 않아 아버지 형제가 또 한 달 안에 잇따라 죽었습니다. 저희들은 강보(襁褓)에 쌓인 아이로 어머니를 따라 타관(他官)으로 달아나 숨어서 살며 가문의 화를 피한 바람에 옛터가 텅 비고 가사(家事)가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선대의 분묘와 종중의 대지(垈地)를 서삼촌아저씨 한 사람에게 위임하여 살펴보고 보호하도록 하였는데, 서삼촌아저씨도 어려서 옛날의 사적에 대해 잘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를 통해서 저의 증조할아버지의 첩에게서 난 자손 삼형제가 모두 서삼촌아저씨에게는 손위의 장로(長老)였으므로 고토(故土)에 웅거하면서 기회를 틈타 농간을 부린 상황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갑인년(甲寅年, 1734, 영조10) 무렵에 이춘성의 아버지가 종중의 터가 비었다고 하면서 빌려서 살기를 청하였기 때문에 일가간의 후의(厚意)로 그의 청에 따라 빌려주어 살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빌려준 호의(好意)가 결국 문을 열어 도적을 받아들인 화가 될 줄을 그 누가 알았겠습니까. 대체로 이춘성의 아버지가 암암리에 간교한 마음을 품고 협금(挾錦)의 계교를 꾸며 내어 종중의 터를 빌려 거주한 지 4년 뒤에 갑자기 말하기를, ‘우리 가문에 한 가지 괴이한 일이 있다. 고자(羔字)의 종중 터는 나 역시 종중의 터로 알고 있는데, 계해년에 작성한 별지(別紙)의 문서를 고열해 보니, 나의 아버지 몫으로 고자전(羔字田) 9마지기가 적혀있었으나 종가의 문서에는 고자전을 분배해 준 바가 없으니, 이 종중의 터가 어찌 우리 집안의 물건이 아니겠는가.’라고 운운(云云)하였습니다.그 말을 꺼낸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그의 조카 이귀성(李貴星)으로 하여금 그러한 점을 들어 송사를 제기하였는데, 임진년(壬辰年, 1712, 숙종38) 무렵에 종가(宗家)에서 고자전 2마지기를 팔아 사용하였으므로 이를 추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내용으로 소장을 바쳐 관가(官家)를 기만하여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시험해 본 것입니다. 그때 관가에서 종가가 전지를 매도한 명문(明文)을 가져다 상고해 보니 이귀성이 스스로 증인(證人)이 되어 전지를 매도해 종가에 바쳐 놓고 도리어 추심한다고 한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사건이 너무나도 터무니없었으므로 관가에서 그 즉시 엄한 말로 그 소송을 기각하였습니다.대체로 저의 가문 고자전이 거의 39마지기에 가까웠는데, 계해년(癸亥年)에 작성한 별지문서(別紙文書) 중에 그의 집의 몫으로 분배해 준 전지가 단지 9마지기뿐이었고 그 나머지 고자전은 모두 종가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종가의 화회문서(和會文書) 중에 고자의 종중 터를 기재하지 않았던 이유는, 대체로 노비와 전지는 여러 남매들에게 분배해 줄 수 있으나 막중한 종중의 터는 마땅히 대대로 종손(宗孫)에게 전수해야 하므로 재산을 분배해 줄 때 거론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그런데 이춘성의 집에서는 종가의 문건 중에 고자전이 기록된 바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주장하고 있으니, 이는 사리를 알지 못할 뿐만이 아니라, 그의 몫으로 분배받은 9마지기의 전지에다 9마지기 이외의 막중한 종중의 터를 싸잡아 넣으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저희들이 옛날의 사적에 몽매(蒙昧)하여 사실을 적출(摘出)해내기 어려울 것으로 여긴 나머지 싸잡아 뒤섞어 현란시켜 조자의 종중 터를 전후 임의로 매도하였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임진년(壬辰年)에 이르러 그가 스스로 증인이 되어 전지를 팔아 종가에 바쳐 놓고 이를 무함(誣陷)하여 소지(所志)를 바쳐 간계를 부리려고 하다가 그 무함한 소지를 깊이 감추어두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기회를 틈타려고 한 것은 적반하장(賊反荷杖)의 꾀를 부린 것뿐만 아니라, 몰래 전지를 매도한 정황을 엄폐하여 숨기기 위한 데서 나온 것이었습니다.서삼촌아저씨가 그들의 속을 훤히 꿰뚫어보았고 또 후일에 문제가 발생하지나 않을까 염려한 나머지 간평(看坪)할 때에 저의 고자전(羔字田) 일통(一統)을 낱낱이 베껴 놓고 보니 그의 집 몫으로 분배되어있는 9마지기 이외에 몰래 종가의 전지를 팔아먹은 것이 또 9마지기가 넘었습니다. 서삼촌아저씨가 비로소 자기가 어렸을 때 속임을 당한 정황을 깨달았고 또 먼 곳에 사는 종손이 옛날 사적을 잘 알지 못할까 염려한 나머지 병상(病床)에 누어 숨이 오락가락하는 중에서도 고자전에 대해 등서(謄書)한 1통을 서숙모(庶叔母)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후일에 혹시 이것으로 인해 시끄러운 일이 발생할 경우에는 이 문서를 종손에게 전해 주어 분변해 문제를 해결하라.’고 운운(云云)하였습니다. 서삼촌아저씨가 죽은 뒤에 서숙모가 그 유언대로 문서를 저희들에게 전해 주었으므로 비로소 저의 가문 고사(古事)의 전말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그 즉시 관가에 소장을 올려 밝혔어야 할 것입니다만 한 가문의 사람이 서로 송사를 벌이는 것도 매우 중대하고도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전해 준 문서를 그냥 간직해두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춘성ㆍ이창열 등이 또 막중한 종중의 터를 전부 팔아버렸습니다. 저희들이 일이 매우 급하여 어쩔 수 없이 서삼촌아저씨가 베껴준 문서를 바치고 억울한 사정을 아래에 나열하였으니, 세세히 참고하고 상량해 주셨으면 합니다.1. 막중한 종중의 터는 비록 지손(支孫)이라도 분배해 줄 수 없는데, 어찌 대대로 전래한 종중의 터를 종손(宗孫)에게 전수하지 않고 도리어 서자(庶子)에게 줄 리가 있겠습니까. 계해년(癸亥年)에 작성한 화회문서(和會文書) 중에 고자 종중의 터를 기재하지 않았던 것은 대체로 종중의 터는 전래된 지 이미 3, 4대가 지나면 마땅히 상종문서(上宗文書)에만 기록하고 후손에게 전지를 분배해 준 문서에는 기록하지 않아야 하니, 이는 저의 가문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남방의 사대부(士大夫) 가문도 너나없이 모두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그의 몫으로 분배해 준 전지 9마지기가 필지마다 분명하고 9마지기 외에 그가 전후로 농간을 부려 몰래 팔아먹은 것이 또 29마지기에 이르렀으니, 그 사이의 간교한 정황이 분명히 다 탄로 났습니다. 종가(宗家)에서 매도한 전지는 단지 2마지기밖에 안 되는데, 무함(誣陷)하여 소지(所志)를 바쳤으니, 그 마음의 자취가 과연 어떠합니까. 그의 집 몫으로 분배해 준 문서 가운데에는 단지 마지기의 수만 기록되어 있고 전지의 복수(卜數)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몫으로 분배받은 9마지기의 땅으로 9마지기 이외의막중한 종중의 터를 포함시키고자 34마지기의 전지를 축소하여 12마지기의 전지로 만든 다음 문권(文券)이 있는 전지를 문권이 없는 전지라고 하는 등 뒤섞어 현란하여 다방면으로 함정을 만들어둔 것은 대체로 저희들이 먼 곳으로 달아나 숨어 지내어 옛날의 사적을 전혀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여기에 대해 당장 명백하게 깨뜨릴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지상(地上)에 있는 고자(羔字)의 전토(田土)가 필지마다 분명하고 지상(紙上)에 기재되어 있는 매매문권(賣買文券)에 마지기의 숫자가 분명하니만큼 그들이 당시 주장한 말에 대해 당초 매매한 명문(明文)을 가져다 상고해 보면 관가에 소송을 하지 않고도 저절로 분변되어 깨뜨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엊그제 관가에서 추문하고 고열할 때 그러한 뜻으로 여쭈었더니, 회답의 제사(題辭)에 고한 대로 분부하겠다고 하셨으므로 저희들이 그 문서를 추심해 보려고 하였으나 그들이 혹은 꺼내어 보여주기도 하고 혹은 꺼내어 보여주지 않기도 하였으니, 만약 관가에서 각별히 엄하게 추심하지 않는다면 결코 전부 다 추심하기 어려울 것입니다.그들의 몫으로 분배받은 9마지기의 땅이 이미 드러나 증거가 충분하니만큼 다시금 분변할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뒤섞어 현란하려는 심산(心算)에서 ‘전지를 측량해봐야 한다.’는 설로 회보하며 분분하게 소란을 야기하였으니, 그 사이에 한없이 기회를 틈타 농간을 부리려는 꾀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춘성이 다년간 풍헌(風憲)으로 있었으므로 하리(下吏)와 짜고 종중의 터를 측량할 때에 억지로 34마지기의 땅을 12마지기로 만든 것은 그의 흔적을 엄폐해 숨기어 관가를 기만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이는 경계의 넓고 좁은 것을 놓고 서로 다투는 것이 아니므로 원래 측량과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그뿐만 아니라 별지문서에는 단지 마지기의 숫자만 있고 결복(結卜)의 숫자는 없으며, 양안(量案) 문서(文書)에는 단지 결복의 숫자만 있고 원래 마지기의 숫자는 없습니다. 지금 분변하는 핵심이 단지 마지기의 숫자에만 달려있고 결복의 숫자에는 달려있지 않는데, 결복의 숫자만 있고 마지기의 숫자가 없는 양안문서를 가지고 마지기의 숫자만 있고 결복의 숫자가 없는 별지문서를 확인시키려고 하니, 되겠습니까. 그들의 몫으로 분배받은 마지기의 숫자를 알려고 하면 마땅히 마지기의 숫자가 있는 매매문서와 대조해봐야 할 것입니다. 다시금 마지기의 숫자가 없는 양안문서와 억지로 맞추려고 할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들의 기술이 이 한 가지 일로 분명하게 간파되었습니다. 만약 반드시 전지를 측량해야 한다면 직접 측량해 주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이춘성이 작년에 매도한 종중의 고자(羔字) 대지(垈地)는 저의 5대조가 계신 가묘(家廟)와 정침(正寢)으로 기와집의 유지(遺址)와 초석(礎石)이 지금도 분명히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저의 가문 대대로 전래한 종중의 터라는 것을 온 고장의 사람이 다 같이 알 뿐만 아니라, 비록 그들이 무함해 올렸던 소지(所志)로 보더라도 또한 ‘종중의 터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종중의 터를 그가 빌려서 살기 전에도 그 역시 그곳을 가리키며 종중의 터라고 하다가 빌려서 산 뒤에 갑자기 말을 바꾸어 자기의 물건이라고 하니, 과연 말이 성립되겠습니까.갑량(甲量)과 기량(己量) 아래에 모두 종가 노비의 이름을 기록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명백한 큰 문권(文券)이 아니겠습니까. 기해년(己亥年, 1719, 숙종45) 측량 때에 이창열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모두 손위의 연장자였고 서삼촌아저씨는 나이가 어려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서삼촌아저씨의 이름을 양명(量名)의 아래에 기록해 놓고 빌려서 산 뒤에 간교한 꾀를 부렸으니, 더욱더 망측합니다. 그가 한 말 중에, ‘빌려서 살기 전에는 문서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이 종중의 터인 줄로 알았다가 빌려서 산 뒤에 비로소 문서를 보았기 때문에 나의 물건이란 것을 알았다.’라고 하였습니다. 계해년(癸亥年, 1683, 숙종9)에 작성한 문서가 그의 집에 있었으니, 정사년(丁巳年, 1737, 영조13)에 이르러서는 이미 50여 년이 흘렀습니다. 그렇다면 빌려서 살기 전에 문서를 보지 못하였다가 빌려서 산 뒤에 비로소 문서를 보았다고 한 말이 과연 성립되겠습니까.고자(羔字)의 전지는 갑량(甲量) 때 41복(卜) 6속(束)이 1필지(筆地)가 되었는데, 이는 모두 선영(先塋)의 계하(階下) 종중의 터로서, 종가 노비의 이름인 희손(希孫)을 양안(量案)의 밑에 기록하였습니다. 그의 몫으로 분배해 준 9마지기 중에 3두 5되지가 1필지가 되고 2두가 2필지가 되고 1두 5되지가 1필지가 되니, 그의 몫으로 분배받은 것이 분명 4필지이고, 대대로 전래한 종중의 터는 분명 1필지입니다. 그런데 그가 자기의 몫으로 분배받은 4필지를 1필지에다 뒤섞어 넣어 종중의 터를 전부 매도하였으니, 너무나도 터무니없습니다. 만약 1필지의 땅을 주었다면 마땅히 1필지를 주었다고 기록하였을 터인데, 무엇 때문에 4필지로 나누어 주었다고 기록하였겠습니까. 더구나 그의 몫으로 분배받은 4필지의 땅이 필지마다 분명히 있으니, 저희들이 분변한 것을 보지 않아도 관가에서 반드시 통촉하셨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이춘성ㆍ이창열의 원정(原情)에, “아룁니다. 저희들이 비록 미천하지만 적서(嫡庶)의 구분과 일가가 서로 송사를 벌이는 혐오는 조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지를 추심해야 할 일이 없지 않았으나 송사를 제기하려는 뜻이 없었는데, 뜻밖에 지금 적육촌(嫡六寸) 이순성이 스스로 송사를 제기하여 저희들을 끌어들였습니다. 저희들이 애당초 서로 송사를 벌일 뜻이 없었으므로 화해의 도리를 간곡히 요구하였으나 되지 않아 어쩔 수 없기에 부득이 관가의 뜻에 다라 원정을 바치오니, 통촉하고 양찰해 주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대개 저의 할아버지 적서형제(嫡庶兄弟)의 화회문서(和會文書) 중에 저의 할아버지 몫으로 분배받은 고자 대전(羔字垈田) 1두 5되지기와 태전(太田) 7두 5되지기 등 도합 9마지기의 땅이 분명히 기재되어 있는데, 대전 1두 5되지기는 이춘성의 집안이 대대로 거주하였고 태전 5두 5되지기는 저의 아버지 형제가 매도하였습니다. 그리고 2마지기 밭은 이창열의 밭이었는데, 저의 적종조모(嫡從祖母)가 이미 사사로이 매도하였습니다. 적종조모는 적육촌 이순성의 조모입니다. 그 매도한 밭이 마땅히 매도하지 않아야 할 것을 매도한 것이라면 이창열의 아버지가 마땅히 추심하였을 것입니다만 일가가 서로 송사를 벌이는 것을 혐오하여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적육촌이 송사를 제기하여 이 지경에 이를 줄 예상이나 하였겠습니까.적종조모가 2마지기 밭을 사사로이 매도하였을 때 이창열의 아버지가 감히 한마디 말도 꺼내지 못하였던 것은 대개 도문서(都文書)가 옛날에 작성된 것이어서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으므로 마음속 깊이 의심을 품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창열의 아버지가 만년에 도문서를 보고 비로소 그것이 자기의 땅이란 것을 알았습니다만 지금까지 추심하지 않았던 것은 송사로 분변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저희들이 도문서가 작성된 연월(年月)을 상고해 보니 두 번 지나간 계해년(癸亥年, 1683, 숙종9) 정월이었으니, 계해년이 지금 84년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춘성은 어찌하여 자기의 땅이 아닌 곳에 백 년 가까운 오랜 세월 동안 살았으며, 적육촌은 어찌하여 80여 년이 이른 뒤에 정장(呈狀)하여 추심하려고 한단 말입니까. 대체로 전지를 분배한 뒤에 차지(次知)하는 법은 한결같이 문권(文券)에 따릅니다. 그렇다면 적종조(嫡從祖)가 허여한 전지를 적육촌이 무슨 이유로 추심한단 말입니까. 일의 본말이 이러한 것에 불과합니다.다만 두수(斗數)와 복수(卜數)가 옛날과 서로 다른 것은 대개 그 전고(田庫)를 매도할 때 1두가 되지 않은 것을 더러 1두 5되지기 전지로 팔기도 하고 2두가 되지 않은 것을 더러 2두 5되지기 전지로 팔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전고 앞 태전(太田) 뒤의 대지(垈地) 또한 다시 측량한 뒤에 복수가 더 불어난 경우가 어찌 없겠습니까. 그런데 적육촌이 이것으로 소요를 야기하였으니, 옳은 행위인지 더욱더 알지 못하겠습니다.그리고 고자 전지 2마지기는 이미 외손(外孫)인 진사(進士) 정용신(鄭龍臣)에게 주었는데, 이에 관한 전후의 문권이 일성(日星)처럼 분명합니다. 이것이 어찌 저희들이 소유한 전고의 다소(多少)에 대해 의심할 만한 것이 되겠습니까. 대전(垈田) 1두 5되지기는 원래 종중의 터가 아니라는 것이 만분의 일도 의심할 바가 없으니, 이창열의 전지는 결코 종조모(從祖母)가 팔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또한 명백하지 않겠습니까. 다시 엎드려 바라오니, 명철하게 정사를 보시는 사또(使道)께서는 문권에 따라 잘 처리해 주시고 위의 적종조모가 사사로이 매도한 2마지기의 전지도 추심해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하였다.같은 날 다시 유학(幼學) 이순성에게 심문하니, 그가 아뢰기를, “‘너의 할아버지 5남매가 두 번 지나간 계해년(癸亥年) 전에 작성한 화회문기(和會文記) 중에 각각 분배받은 전답은 두수(斗數)와 복수(卜數)가 모두 기록되어 있으나 서동생(庶同生) 이정필(李廷弼)의 몫에 관해 별도로 작성한 문서 중의 전답은 단지 두수만 기록하고 복수는 기록하지 않았고 이른바 종중의 터도 문기 중에 기록되어있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80여 년의 뒤에 이르러 고자에 기재된 전지 중에 어느 필지가 이춘성의 할아버지 이정필의 몫이고 어느 필지가 너의 가문 종중의 터인지에 대해 고증해 확인할 수 없다. 너의 원정(原情) 중에, 「고자의 전지에 대해 갑량(甲量) 때 부친 41복(卜) 6속(束)이 일작(一作)인데, 이것이 전부 종중의 터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너희 오대조(五代祖)의 유지(遺址)가 아직도 있다고 하는데, 그 사당의 터가 과연 41복 6속의 필지 안에 있는지에 대해 다시 상세하게 고하도록 하라.’고 하였고또 말하기를, ‘「계해년에 작성한 문서 중에 종중의 터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대체로 전래된 지 이미 3, 4대가 지나면 마땅히 상종(上宗)의 문서에다 기록해야지 후손의 분배문서에다 중복해 기록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데, 그 상종의 문기에 종중의 터로 부쳐진 것을 고증해 볼 것이니, 그 문기를 바치도록 하라.’고 하였으며, 또한 문목(問目 죄인을 심문하는 조목) 중에, ‘고자(羔字)에 기재된 전지 중에 어느 필지가 이춘성의 몫으로 분배받은 것이며, 어느 필지가 너의 종중의 터인지 고증해 확인할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제가 상화(喪禍)를 겪고 난 목숨이어서 이미 저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말씀을 면전에서 직접 들어보지 못하였고, 또 고토(古土)에서 생장(生長)하지 않고 강보(襁褓)에 싸인 고아로 타향으로 달아나 숨어서 지낸 바람에 가문의 옛일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저의 서삼촌아저씨가 작성한 고자행심등지(羔字行審謄紙) 및 이춘성 집에서 매도한 명문(明文)을 참고해 보니 고자(羔字) 제68의 삼작고(三作庫)는 이창열 집에서 이영곤(李英坤) 등 3인에게 매도한 것으로 3두 5되지기가 1필지(筆地)가 되고, 고자(羔字) 제11의 삼작고(三作庫)는 이택(李澤)이 황만영(黃萬榮)에게 매도한 것으로 2마기가 1필지가 되며, 고자(羔字) 제12작(作)의 대전(垈田)은 이창열 집에서 김추선(金秋先)에게 매도하였으나 문서가 나오지 않은 것으로 1두 5되지기가 1필지가 됩니다. 이 4필지가 별지의 4필지와 착착 부합되니, 이것이 어찌 대조해 확인할 수 있는 하나의 큰 명백한 증거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고자(羔字) 제15의 이작(二作) 필지 2마지기는 이창열 집에서 아직까지 경작해 먹고 있는 것으로 이것이 4필지의 남은 숫자이지만 저희들이 원래부터 따지지 않고 있습니다.문목 중에, ‘너의 오대조(五代祖)의 가묘(家廟) 유지(遺址)가 41복 6속의 필지 안에 있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저의 선영(先塋)의 계단 아래에 있는 고자(羔字) 제32작 및 2마지기의 복수(卜數) 86속의 필지는 바로 저의 오대조 이하가 대대로 거주한 땅인데, 여기에 가묘 유지가 아직도 분명히 남아 있는데, 이춘성이 작년에 정재관(鄭再觀)에게 매도한 것입니다. 그리고 41복 6속의 필지는 바로 선영의 계단 아래에 있는데, 이 또한 위의 가묘 유지와 서로 연접한 다른 필지입니다. 그리고 86속의 필지는 바로 가묘와 정침(正寢)의 유지이고 41복 6속의 필지에 있어서는 또한 촌락의 아래에 있는데, 가묘 유지의 아래 경계와 연접해 있습니다. 이 2필지는 모두 종중의 터인데, 41복 6속의 필지 내에 2마지기는 저의 가문이 상화(喪禍)의 변을 당했을 때 할머니의 언문(諺文) 패자(牌子)에 의거하여 이창열의 아버지 이귀성이 증인이 되어 매도해 종가에 비쳤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종중의 터임이 분명하여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춘성 집 별지의 9마지기가 4필지가 되고 41복 6속이 1필지가 되므로 원래 서로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춘성ㆍ이창열 등이 그들의 몫으로 받은 9마지기를 이곳 종중의 터에 포함하려고 하였으니, 과연 말이 성립되겠습니까. 만약 이것이 절통(切痛)할 일이 아니면 어찌 엊그제 문중(門中)에 글을 올렸겠습니까.아! 유대(遺垈)가 비록 소중하지만 소중한 가운데 더욱더 소중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유대의 기지 1자(字)가 선영(先塋)의 곁을 에워싸고 있기 때문에 집 뒤의 울타리 대나무가 해마다 분묘(墳墓)의 앞을 침범해 들어가고 분묘의 계단 아래 언덕을 매양 호미와 삽이 파들어 가고 있으니, 자손이 된 자의 통박(痛迫)한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만약 이춘성이 그 전지를 매도하지 않고 대대로 살았다면 장차 자손이 선산(先山)을 수호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단지 조상을 받드는 저희들의 마음에 위로가 될 뿐만이 아니라, 실로 이춘성 자신에게 이롭고 자신에게 편리한 도리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타인의 물건이 된 바람에 선영(先塋)으로 하여금 타인의 땅에 붙여있어 끝없이 침해를 받게 되었으니, 저희들이 어떻게 오늘날 쟁송(爭訟)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문목(問目) 중에 있는 종중의 터가 기재된 상계문서(上系文書)는, 저의 할아버지가 중년에 화재를 당하여 전래한 서책(書冊)과 가장(家藏)이 전부 잿더미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화를 겪은 가문의 목숨이 강보(襁褓)에 있을 때 타향으로 달아나 숨어서 살았으니, 수백 년 전의 문서를 어떻게 지금까지 보존할 수 있겠습니까. 엊그제 바친 원정(原情) 중에 ‘지당(只當)’이란 두 글자는 다만 이치로 미루어본다는 말입니다. 만약 전래한 문권이 있다면 어찌 지당(只當)이라는 두 글자를 사용하였겠습니까. 종중의 터를 분배문서(分配文書)에 기재하지 않는 것은 저의 가문뿐만이 아니라, 남방의 사대부(士大夫) 가문도 많이 그렇게 합니다. 만약 이에 대해 하문(下問)하신다면 저희들이 마땅히 증거로 고할 말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같은 날 이춘성ㆍ이창열에게 다심 심문하니, 그들이 아뢰기를, “‘너희 할아버지 적동생(嫡同生) 오남매가 두 번 지난 계해년(癸亥年)에 전답(田畓)과 노비에 대해 화회문서(和會文書)를 작성할 때에 너희 할아버지가 별도로 작성한 문서에 너희들 몫으로 분배한 일이 있었으니, 너희들이 한결같이 문기(文記)에 지급한 대로 차례대로 전수받는 것이 법리상 당연하다. 너희들 몫으로 분배받은 것 중에 고자전(羔字田) 4필지가 모두 9마지기인데, 암암리에 종가(宗家)가 피폐해진 틈을 타다가 고자의 종중 터가 종가의 문기(文記)에 기록되지 않은 것을 엿보고 너희 집의 몫으로 분배받은 것과 종중의 터를 막론하고 전부 싸잡아 너희들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이는 정말로 종가(宗家)를 중히 여기고 적손(嫡孫)을 공경하는 도리가 아니다. 또 갑량(甲量) 때 기록된 것으로 보더라도 고자(羔字)에 41복 6속의 1필지가 있는데, 이것도 충분히 8, 9마지기의 땅이 되고, 너희 할아버지 몫은 고자전(羔字田) 3두 5되지기의 1필지, 두 마지기의 2필지, 1두 5되지기의 1필지이다. 그런데 3마지기나 혹은 2마지기 1필지의 경작지가 어찌 40여 복에 이를 리가 있겠는가. 이 점으로 미루어 보건데, 46복의 필지는 필시 종중의 터이지, 너희 집이 마땅히 주장할 물건이 아니고, 고자(羔字)에 기재된 전지가 이미 다른 분배의 몫에 기재되지 않았으니, 많든 적든 간에 너희 집에서 차지할 물건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너의 적가(嫡家) 종중의 터이기 때문에 신구 양안(新舊量案)에 일괄 3, 4등의 출복(出卜)으로 등출(謄出)한 것을 전부 1등으로 해석하면 도합의 수량이 무려 1결 58복이나 된다. 너희 집 9마지기 결복(結卜)이 어찌 이와 같이 많은 수량에 이를 수 있겠는가. 그리고 42복의 1필지를 만약 너희 할아버지 몫이라고 아울러 말한다면 계해년에 작성한 문기 중에 3두 5되지기란 것이 이것인가? 2마지기란 것이 이것인가? 1두 5되지기란 것이 이것인가? 수량이 서로 맞지 않다는 것은 이치상 알기 어렵지 않다. 너희도 생각이 있을 터인데, 어찌 스스로 헤아려 보지 않고 스스로 깨닫지 않는단 말인가. 사리로 참작해 보고 그 정황을 따져본다면 너희들이 적가를 멸시하고 종중의 터를 가로채려는 행위가 분명하여 엄폐할 수 없다. 너희에게 별도로 근거로 내세울 만한 어떤 단서가 있는지 다시 고하도록 하라.’고 추문(推問 죄의 정상(情狀)을 조사하고 심문함)하셨습니다.저희들이 비록 매우 보잘것없는 사람이기는 하나 종가와 적손의 소중함을 알므로 평생 행사한 바가 털끝만큼도 능멸하거나 설만히 하는 버릇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적육촌(嫡六寸) 이순성이 소장(訴狀)을 바쳐 소급해 분변하는 일로 인해 송사의 뜰에 같이 들어간 폐단을 초래한 것입니다. 저희들의 불행을 어찌 다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이전에 문서로 작성해 줄 것을 간청한 뜻이 모두 허사로 돌아가 버렸으니, 어찌 일가 간에 이러한 일이 있을 줄 예상이나 하였겠습니까.하문(下問) 중에 싸잡아 넣어 주장한다느니, 종가에 대해 불경하다느니 하는 등의 말씀이 있었는데, 이는 실로 본의가 아닙니다. 대체로 종중의 터라는 것은 5세(世) 이상은 원래 몇 대가 여기에 살았는지 알 수 없고, 오세조(五世祖)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피해를 본 뒤에 저희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혹은 본면(本面) 내 용산촌(龍山村)에 살기도 하고 혹은 미산촌(眉山村)에 살기도 하였으므로 오세조가 남긴 대지(垈地)는 이로 인해 고허(古墟)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저의 오대조의 묘소가 묘상산(墓上山)에 있기 때문에 여기에다 산지기(山直)를 두었는데, 계해년에 이르러 화회문서(和會文書)를 작성할 때에는 원래 촌락이 이루어지지 않고 사면이 모두 팥이나 콩을 심은 밭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저희들이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니고 면내(面內) 상하의 사람들에게 다 같이 전래하는 이야기입니다.저의 아버지가 일찍이 장성(長城) 지역에서 유리하며 살다가 지난 갑인년(甲寅年, 1734, 영조10) 사이에 비로소 고토(故土)로 돌아와서 여기에 집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아버지의 적육촌(嫡六寸)인 이순성(李舜星)과 서삼촌(庶三寸)인 이용(李溶)이 종중의 터에 사는 것을 금하였기 때문에 저의 아버지가 간청하여 여기에 살게 되었습니다. 정사년(丁巳年, 1737, 영조13)에 이르러 비로소 저의 할아버지 적동생(嫡同生) 오남매(五男妹)의 화회문서(和會文書)에 각자의 몫으로 분배받은 것을 상고해 보니 저의 할아버지 몫으로 대전(垈田) 1두 5되지기의 필지가 있었기 때문에 저희 아버지가 그 글을 저희 오촌(五寸) 이용에게 보이자, 다시금 그곳에 사는 것을 금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양안등서(量案謄書)를 바쳤다고 하니,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갑인년(甲寅年) 이전에는 저의 아버지도 고자 대전 1두 5되지기 땅이 저의 할아버지 몫으로 되어있는 것을 모르다가 정사년(丁巳年)에 문서를 상고해 보고 나서 그것이 전래한 물건인 줄 알고 그냥 눌러 살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희 오촌 이용이 어찌하여 그 양안등서를 저희 아버지가 죽기 전에 보이지 않고 금일에야 꺼내 놓았던 말입니까. 저희들이 실로 그 이유를 알지 못하겠습니다.대체로 옛날 고자 전지는 지금 마을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땅의 폭이 넓지 않고 협소하여 마치 베를 펼쳐 놓은 모양과 비슷하였으므로 그 한 구역의 가운데가 저희 할아버지 몫으로 분배받은 9두 5되지기의 수량에 지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5대 이하의 자손이 원래 여기에 살지 않았기 때문에 저의 아버지 생각에 여기에 있는 대전(垈田)은 필시 부형(父兄)의 몫으로 분배받은 물건으로 여겼고, 저의 아버지도 저의 할아버지 생시에 들은 바가 없었으니, 이는 가문이 화를 입어 뿔뿔이 흩어진 뒤이므로 정말로 당연한 일입니다. 그 본의가 어찌 종가의 대전을 빼앗으려고 한 것이겠습니까.그리고 그 대전 50여 속(束) 이외에 또 옆으로 30여 속을 개간하였으니, 화회문서를 작성할 때에 1두 5되지기란 것은 50여 속 안의 땅이란 것을 징험(徵驗)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것을 종가의 대전이라고 한다면 저희 할아버지 몫으로 분배받은 1두 5되지기는 다시금 어느 곳이라고 가리킬 데가 없습니다. 적육촌(嫡六寸)이 지난해 연분(年分) 때 이 문제로 소장(訴狀)을 바쳤다가 결국 관가(官家)에서 파기(破棄)하였는데, 그 사실을 인리(人吏 향리(鄕吏)) 최종기(崔宗岐)가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만약 적손(嫡孫)을 능멸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지금 소송하기 전에 어찌하여 성문(成文)을 주면서 서로 송사를 벌이지 말자고 간청하였겠습니까. 적손을 존경하는 마음이 이 한 가지 일을 봐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더구나 적종모(嫡從母)가 일찍이 저의 할아버지 몫으로 분배받은 2마지기의 밭을 매도할 때에는 이창열의 아버지가 원래 이 밭이 할아버지의 몫으로 분배받은 것인 줄 알지 못하고 적종조모의 증인이 되어 매도하였다가 정사년에 문서를 상고해 본 뒤에 적종모가 매도한 밭이 바로 저의 할아버지의 몫으로 분배받은 물건임을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서로 송사를 벌이는 것을 혐오(嫌惡)하여 여전히 추심하지 않았으니, 저의 집이 적손을 공경하는 마음이 대대로 이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이를 종가의 대전(垈田)에다 싸잡아 넣어 빼앗으려는 마음을 먹었겠습니까. 저희들의 본심은 비록 그것이 저희 할아버지 몫으로 분배받은 물건일지라도 종가에서 종가의 물건으로 삼으려고 하였다면 저희들도 송사를 벌여 다투려고 하는 뜻이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적육촌이 굳게 주장하며 놓지 않은 바람에 이러한 지경을 초래한 것입니다.그리고 제가 지난겨울에 상환할 곡물을 마련하지 못하여 임시 거주하고 있는 대전(垈田)의 문서를 전당잡혀 놓고 돈을 얻어 상환하였습니다. 그런데 적육촌이 대전을 매도했다고 책망하기에 제가 ‘영원히 매도한 것이 아니고 앞으로 마땅히 돈을 갚고 문서를 되찾아오려고 한다.’라고 운운(云云)하였으나 적육촌이 저의 말을 믿지 않았으므로 저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스스로 매우 애석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선영(先塋)의 아래 집터에 위로는 마을의 대밭이 가로질러 있는데, 적육촌의 서삼촌이 일찍이 이를 마을 사람에게 팔아넘긴 바람에 대나무뿌리가 해마다 선영의 옆으로 뻗어 올라가고 있으나 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도 차마 눈으로 볼 수 없는데, 더구나 이 대전을 영원히 팔아 타인의 물건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단지 일시 권도(權道)로 상환의 곡물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하문(下問)하신 말씀 중에 41복 6속의 1필지는 제가 별달리 징험(徵驗)하여 알 수 있는 방도가 없고 다만 그 지형이 본래 협소하여 9마기의 밭 외에 별도로 41복 6속의 1필지가 없는 것 같기 때문에 저희들이 생각하는 바가 이와 같은 데 불과합니다. 9마지기의 밭 이외에 만약 41복 6속의 필지가 있다면 종가 대전을 자손에게 분배하는 문서에 기재하지 않았다는 말이 혹시 이치에 맞는 것 같으니, 그 외의 전지도 나누어 종손과 지손에게 분배해 주는 문서에 기재할 수 없습니다. 전지도 종손(宗孫)과 서손(庶孫)의 구분이 있어서 문서에 기재하지 않은 것입니까. 후손이 선대의 문서에 따라 시행하는 것이 법리(法理)에 합당할 것 같으니, 문서 이외에 갑량(甲量)의 복수(卜數)를 어떻게 백 년 뒤에 추심할 수 있겠습니까. 금일 자기의 물건이 명일 혹시 타인의 물건이 되었을 경우에 단지 양복(量卜)으로 미루어 다시 자기의 물건으로 만든다는 것은 반드시 그러한 사리가 없을 것입니다.하문하신 말씀 중에 복수(卜數)가 많아졌다는 것에 대해서는 저희들이 별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만 증거로 고할 것이 있습니다. 옛날 저의 아버지 몫으로 분배받은 고자(羔字) 밭 2마지기 필지를 저희 아버지가 3마지기 밭으로 신양(申洋)에게 매도하고 신양이 또 그 3마지기 밭을 다시 이창열(李昌烈)의 아버지에게 매도하고 이창열의 아버지가 그 3마지기 밭을 나누어 박선흥(朴先興)ㆍ이빈(李彬)ㆍ정석명(鄭碩明) 세 사람에게 매도하였는데, 2마기의 밭이 두 번 전환되어 3마지기로 변하고 세 번 전환되어 5마지기로 변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옛날의 전지가 지금은 대지가 되어 땅이 점점 희귀해진 소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전지가 이미 외와 같이 점점 변하니, 복수(卜數)도 점점 변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9마지기 밭 외에 또 밭 2필지가 더 늘고 1필지에 밭 2마지기가 더 는 것은 이창열이 이미 황광금(黃光金)에게 매도하였으며 1필지에 밭 1마지기가 더 는 것은 이창열이 지금까지 경작해 먹고 있습니다. 대체로 전지와 대지가 서로 바뀌는 사이와 황폐되거나 개간하여 변하는 가운데 복수(卜數)가 옛날과 다른 바가 없지 않을 것 같습니다.하문하신 가운데에, ‘적손의 가문을 멸시하고 종중의 터를 빼앗으려고 하였다.’는 말씀은 저희들이 자신도 모르게 너무나도 황송하였습니다. 저희들이 비록 매우 비천(卑賤)하지만 또한 감정이 있는데, 어찌 감히 이처럼 분수를 벗어나 과도한 뜻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만약 저희들이 개진한 바를 믿지 않는다면 별도로 조사 관리를 파견하여 촌락의 대지 한 구역을 측량해 보았으면 합니다. 저의 할아버지 몫으로 분배받은 9마지기 밭 외에 만약 따로 41복 6속의 필지가 있을 경우에는 저희들이 비록 형장(刑杖)의 아래에서 죽더라도 무엇을 한하겠습니까. 마음을 다 쏟아 진달(進達)한 바가 이와 같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을유년(乙酉年) 11월 26일에 유학 이순성(李舜星)ㆍ이춘성(李春星)ㆍ이창열(李昌烈) 등이 아뢰기를, “저희들이 원정문기(原情文記)를 바친 것 이외에 별로 다 고하지 못한 일이 없으니, 상고하여 처리해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하였는데, 이상이 그들이 공초한 내용이다.원고와 피고의 원정 및 그들이 바친 문기를 상세히 고열(考閱)해 보니 이순성의 증조(曾祖)가 허다한 전지와 노복을 미처 처리하지 못한 채 사망하였고, 이순성의 할아버지 오남매가 두 번 지나간 계해년(癸亥年, 1683, 숙종9) 화회(和會)에서 각각 전답(田畓)을 분배하여 문기를 작성하였으며, 또 서동생(庶同生) 이정필(李廷弼)에게 별도로 전답을 분배해 주고 문기를 작성해 주었는데, 이정필은 바로 이춘성의 할아버지이다. 그 별도의 문기 중에, ‘고자(羔字) 밭 3두 5되지기, 동 고자 밭 2마지기, 동 고자 전지 2마지기, 동 고자 대전(垈田) 1두 5되지기.’라고 기록되어있는데, 두수(斗數)만 기록하고 순서와 복수(卜數)는 기록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른바 종중의 터도 문서 중에 기재되어 있지 않은 바람에 오늘날 적서(嫡庶) 지친(至親)의 사이에 송사를 벌이는 불미스러운 단서를 열어 놓았으니, 매우 애석하다. 계해년에 작성한 문서가 어찌 이처럼 자상하지 않았단 말인가. 옛날의 사적이 묘연(杳然)하여 이미 추론(追論)할 수 없게 되었다.이순성은 말하기를, ‘이춘성의 할아버지 몫으로 분배받은 고자 밭은 모두 9마지기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춘성의 부자(父子)가 적손(嫡孫)의 가문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때를 이용해 고자에 있는 종중의 터를 전부 싸잡아 넣어 자기의 물건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라고 하니, 이춘성이 말하기를, ‘고자의 전지는 협소하여 넓지 않는데, 그 한 구역 가운데가 전부 저희 할아버지 몫으로 분배받은 9마지기이므로 종중의 터를 싸잡아 저의 물건이라고 주장한 일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춘성은 이미 그의 할아버지 몫으로 분배받은 문기가 있으나 이순성은 단지 말하기를, ‘종중의 터를 문기에 기재하지 않은 것은 비로 저의 가문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남방의 사대부(士大夫) 가문도 너나없이 모두 그렇게 합니다.’라고 하였다. 오직 송사의 문권(文券)에 따라 대략 볼 경우에는 마땅히 이춘성에게 승소(勝訴)의 판결을 내려 주어야 할 것 같지만 누차 고열하고 상세히 살펴보면 정말로 그 핵심을 쉽게 분변할 수 있는 점이 있다.아무튼 이 계해년의 문서가 갑량(甲量)을 행용(行用)할 때에 작성되었고 그 갑량 중에 이춘성의 할아버지 몫으로 분배받은 전지 4필지 외에 별도로 다른 필지가 있었으니 이춘성의 부자가 결코 다른 것까지 모두 싸잡아 자기의 물건이라고 주장할 수 없으니, 이것이 이순성 가문의 종중 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지금 갑량의 등서(謄書)로 보건대, 제일대전(第一垈田) 1필지, 제이전(第二田) 1필지, 제삼전(第三田) 1필지, 제사전(第四田) 1필지, 제칠전(第七田) 1필지, 제오십육전(第五十六田) 1필지에다 또 밭 1필지를 더하면 도합 7필지이다. 그 가운데 제2전 1필지는 이순성의 선대 가묘(家廟)의 옛터로, 아직도 유적(遺蹟)이 있다고 하니, 이춘성이 이를 두고 송사를 벌여서는 안 된다. 제삼전 1필지는 4등의 부수(負數)이다. 이 41복 6속을 1등으로 풀면 70여 속에 이르므로 8, 9마지기의 밭이 될 수 있다. 이춘성의 할아버지 몫으로 분배받은 4필지 중에 3두 5되지기 필지란 것이 이를 두고 이르는 것인가? 2마지기 필지란 것이 이를 두고 이르는 것인가?이것을 헤아려 보고 저것을 따져보면 밭 필지의 대소가 결코 근사(近似)하지 않았으므로 이는 이춘성의 할아버지 몫으로 분배받은 것이 아니고 이순성의 가문이 대대로 전래한 종중의 터임이 불을 보는 것처럼 분명하였다. 그래서 이 점을 가지고 다시 이춘성에게 추문(推問)하니, 그의 공초가 구차하고 모호하여 전혀 조리가 없었다. 그가 말한 9마지기 외에 만약 별도로 41복 6속의 필지가 있다면 종중의 터를 자손에게 전지를 분배하는 문서에 기재하지 않았다는 설이 이치에 맞는 것 같기도 하다.’는 것 역시 궁색한 말이다.그뿐만 아니라, 고자에 있는 밭은 이춘성의 할아버지 몫으로 분배받은 것과 종중의 터 신구(新舊) 3, 4등을 막론하고 모두 1등으로 복수(卜數)를 계산하면 1결 50여 복에 이르니, 어찌 9마지기의 경작 면적이 이처럼 많을 수 있겠는가. 양안을 참고하고 사리로 헤아려 보면 고자 전지 도합 7필지 중에 가묘(家廟) 유지라고 하는 제2전 및 41복 6속인 제삼전이 어찌 이춘성이 재차 공초한 내용 중에 이른바 그의 할아버지 몫으로 분배받은 것 이외에 별도로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점들로 볼 때 이순성 가문에서 대대로 전래한 종중의 터임이 백 가지 중에 한 가지도 의심할 바가 없다.이 두 필지를 이순성에게 결급(決給)하고 입안(立案)한 뒤에 신구 양안(新舊量案)에 순서로 나열된 복수(卜數)를 모두 다음에 열거해 기록하였다. 이 두 필지 외에 각 필지는 그대로 이춘성 등으로 하여금 가지라는 뜻으로 분부하였으니, 모두 다음을 상고하여 시행해야 할 것이다. 응당 입안대로 시행해야 할 것임.[주-D001] 입안(立案) : 개인이 청원한 사실에 대하여 관(官)에서 이를 확인하여 공증(公證)해 주는 문서.[주-D002] 결급(決給) : 결정하여 준다는 뜻으로 소송에 대하여 판결을 내려 준다는 것임.[주-D003] 화회문기(和會文記) : 노비, 토지 등의 재산은 재주(財主 부(父))가 살아 있을 때 자녀들에게 나누어 주는 경우도 있으나, 재주가 재산을 나누어 주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경우 재주 사후에 그 자녀들이 모여 합의[和會]하여 재산을 분배하게 된다. 이와 같이 재주 사후에 부인과 자녀에 의하여, 또는 부모가 모두 죽은 뒤에 그 자녀들의 합의에 의하여 재산을 분배할 때 작성하는 문서가 화회문기이다. 자녀들이 재산을 나눌 때 재주의 유서나 유언이 남아 있으면 이에 근거하여 재물을 분배하였으나,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형제자매들이 모여서 합의하여 각자의 몫을 분배하게 됨.[주-D004] 고자행심등지(羔字行審謄紙) : 고자 전지의 소작료를 매기기 위해 농작물의 잘되고 못된 정도를 추수하기 전에 살펴본 것을 기록한 문서를 베낀 것을 말함.[주-D005] 명문(明文) : 어떤 사안에 대해 서로 합의하고 그 사실을 명문화(明文化)하여 서로의 권리 의무 관계를 밝힌 문서로 주로 토지ㆍ노비 등의 매매에 사용되었음.[주-D006] 간평(看坪) : 소작료를 매기기 위해 농작물의 잘되고 못된 정도를 추수하기 전에 지주가 직접 살펴보는 것을 말함.[주-D007] 양안(量案) : 조선 시대 세금을 부과하기 위하여 논밭을 측량하여 만든 토지대장(土地臺帳). 농민층의 토지 소유 상황, 농가 소득 정도, 계층 분화의 정도 따위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서 논밭의 소재지, 자호(字號), 위치, 등급, 형상, 면적, 사표(四標), 소유주 따위가 기록되어 있음.[주-D008] 패자(牌子) : 패지(牌旨). 지위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권한을 위임하던 문서. 주로 전답 등을 매매할 때 위임장 역할을 하였으며, 궁방(宮房)에서 수세(收稅) 등의 목적으로 발급한 도서패지(圖書牌旨), 관아에서 발급한 관패지(官牌旨), 서원이나 문중에서 어떤 사안에 대한 처리를 지시하면서 발급한 패지 등이 있었음.[주-D009] 연분(年分) : 그해 농사의 풍흉에 따라 해마다 토지를 상상(上上)ㆍ상중(上中)ㆍ상하(上下), 중상(中上)ㆍ중중(中中)ㆍ중하(中下), 하상(下上)ㆍ하중(下中)ㆍ하하(下下)의 아홉 등급으로 나누어 등급에 해당하는 세액을 부과한 제도. 조선 세종 28년(1446)부터 실시하였다. 연분구등(年分九等)이라고도 함.
    2023-08-17 | NO.181
  • 다산시문집 제13권 / 기(記); 서석산(瑞石山)에서 노닐은 기
    서석산(瑞石山)에서 노닐은 기 산은 광주(光州) 동쪽 30리에 있다. 일명 무등산(無等山)이라고 한다.내가 적벽(赤壁)에서 노닌 지 며칠 후에 조공 익현(曺公翊鉉) 화순(和順) 사람임. 이 금소당(琴嘯堂)으로 나를 찾아왔다가 내가 적벽의 즐거움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고 탄복하여 말하기를,“적벽의 뛰어난 경치는 여자가 화장을 한 것과 같아서 붉고 푸르게 분을 바른 모습이 비록 눈을 즐겁게 할 수는 있으나, 가슴속의 회포를 열고 기지(氣志)를 펼 수는 없네. 그대는 서석산(瑞石山)을 보지 못하였는가. 우뚝한 모습은 마치 거인(巨人)과 위사(偉士)가 말하지도 웃지도 아니하고 조정에 앉아 비록 움직이는 흔적은 볼 수 없으되 그의 공화(功化)는 사물에 널리 미치는 것과 같네. 그대는 그 산을 가보지 않으려나?”하였다. 이에 우리 형제 네 사람이 다시 서석산(瑞石山)을 유람할 것을 의논하였는데, 조공 역시 그의 아우를 보내어 우리를 따르게 하였다.서석산은 험준하고 커서 이 산은 7개의 군(郡)ㆍ현(縣)에 걸쳐 있다. 이 산의 정상에 오르면 북쪽으로는 적상산(赤裳山)이 바라보이고 남쪽으로는 한라산이 멀리 보인다. 그리고 월출산(月出山)과 송광산(松廣山) 같은 산은 모두 어린 자식이나 손자 격이다. 위에는 13개 봉우리가 있는데 항상 흰 구름이 둘러 있다. 여기에 사당(祠堂)이 있는데 무당이 맡고 있다. 그 무당이 말하기를,“벼락과 번개, 구름과 비의 변화가 항상 이 산의 허리에서 일어나서 자욱하게 아래로 내려가는데, 산 위에는 그대로 푸른 하늘입니다.”하니, 굉장히 높은 산이 아닌가. 가운데 봉우리의 정상에 서면, 날듯이 세상을 가볍게 보고 홀로 특별히 다른 길을 가는 기분이 들어, 인생의 고락(苦樂)은 마음에 둘 것이 못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 또한 그 까닭을 알지 못하였다.대체로 산수가 뛰어난 곳은 반드시 기암(奇巖)과 깎아지른 절벽, 비천(飛泉)과 괴상한 폭포며, 어지러운 자태와 붉고 푸른 온갖 형상이 갖추어져야만 산경(山經)ㆍ수지(水志)에 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서석산은 높고 험준한 것만으로 호남에 웅장하게 자리잡고 있는데, 조공(曺公)이 홀로 그 산이 여러 산 중에서도 뛰어나다는 것을 알았으니, 그 산과 그 산을 알아보는 사람이 모두 위대하다 하겠다.규봉(圭峯)을 지나 집으로 돌아왔다. 규봉이라는 산은 두 봉우리의 깎아지른 모습이 마치 홀[圭]과 같은데, 그 모서리는 방형(方形)의 법칙에 꼭 알맞았다. 그리고 누운 것, 꺾인 것 등이 그 아래에 또 몇십 개가 더 있었다.
    2022-05-06 | NO.180
  • 다산시문집 제19권 / 서(書); 조 진사(曺進士) 에게 보냄
    조 진사(曺進士) 익현(翼弦) 에게 보냄 화순인(和順人)용(鏞)이 국은(國恩)을 입어 호해(湖海) 가로 와서 조용히 지내며 부족한 덕을 닦고 스스로 심신(心身)을 점검하면서 고인(古人)들의 함양(涵養)하던 법을 찾아보니, 더러 의사하고 방불한 것이 있으면 기쁜 마음으로 외모(外慕 부귀 공명을 사모하는 마음)를 잊을 수 있으므로, 이곳으로 온 것이 매우 다행이라 여겨집니다. 이곳에 온 뒤로는 모든 서울의 소식이 도무지 귀에 들어오지 않으니, 이른바 금승지롱(今丞之聾)입니다. 그러나 서울에서 돌아온 이곳의 유사(儒士)가 ‘광주(光州) 유생 몇 사람이 태학(太學)에 이서(移書)하여 여러 사람의 경중 심천을 나열했는데 모두 진실된 말로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말을 전하는데, 모르겠습니다만 과연 이런 일이 있었는지요? 저들이 진실로 군자유(君子儒)입니까? 만약 군자가 아니고 성기(聲氣)가 본래 맞지 않는 자들이라면 월인(越人)의 만궁(彎弓)이니, 슬퍼할 것 없습니다. 아, 이단(異端)이란 말은 천하의 악명입니다. 이단이란 말을 하기는 쉬우나, 그 말을 듣는 사람은 어찌 괴롭지 않겠습니까. 주자(朱子)가 육구연(陸九淵)을 선학(禪學)이라고 배척하였으나, 아호(鵝湖)에서 학문을 강론하면서 그의 용모를 보고 그의 말을 듣고 그의 소존(所存 마음 속에 보존하고 있는 것)을 상고하고 그의 소온(所蘊 마음 속에 축적하고 있는 것)을 탐지하며, 그와 담론하고 그와 시도 짓고 그와 함께 생활한 뒤에야 그가 과연 의심의 여지 없는 선학이란 것을 아셨고, 그와 수천만언(數千萬言)의 편지를 왕복하면서 그의 행위가 천성(天性)을 방임하고 정신을 희롱하며 옛것을 버리고 제멋대로 하는 죄에 해당됨을 본 뒤에 그가 과연 의심의 여지가 없는 선학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 몇 사람들은 아득히 먼 곳에서 생장한 자들로서 얼굴도 한번 보지 못했고 이야기도 한번 나누어 보지 못했는데, 그들의 논저(論著)나 행위를 상고해 보지도 않고 한갓 세인(細人)들의 말만 듣고서 갑자기 청세(淸世 깨끗한 세상) 의관(衣冠)의 무리에게 멋대로 천하의 악명을 씌운다면 너무 경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비의 명예는 지극히 청아(淸雅)한 것인데 언론이나 행위에 조금도 망설임 없이 거짓말과 비방을 만들어 해치고자 하는 자의 말만을 믿고 따르시니, 어쩌면 그렇게 자중하지 않으십니까.[주-D001] 금승지롱(今丞之聾) : 승(丞)은 수령(守令)의 보좌관으로서 아전들에 비하여 지위는 높으나 실권이 없으므로 전혀 상관을 하지 않고 듣고도 못 들은 체한다는 말.[주-D002] 월인(越人)의 만궁(關弓) :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일.《맹자(孟子)》 고자(告子) 하편에, “월 나라 사람이 활을 당겨 사람을 쏘아 죽이려 할 때 옆사람과 담소하며 그러지 말라고 말리는 것은 그와 소원(疏遠)하기 때문이고, 나의 형이 활을 당겨 사람을 쏘아 죽이려 할 때 눈물을 흘리며 그러지 말라고 말리는 것은 친하기 때문이다.”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주-D003] 아호(鵝湖)에서 …… 강론 : 송 효종(宋孝宗) 순희(淳熙) 2년(1175)에 동래(東萊) 여조겸(呂祖謙)이 복재(復齋) 육구령(陸九齡)과 그의 동생 상산(象山) 육구연(陸九淵)을 광신현(廣信縣)에 있는 아호사(鵝湖寺)로 초청하여 주자(朱子)와 학문의 이동(異同)을 강론하게 했던 일을 말한다.《宋元學案 卷57 復齋學案》
    2022-05-06 | NO.179
  • 다산시문집 제22권 / 잡문(雜文); 전라도(全羅道) 창의통문(倡義通文)
    전라도(全羅道) 창의통문(倡義通文)가경(嘉慶 청 인종(淸仁宗)의 연호) 임신년(1812, 순조 12) 봄에 패서(浿西 평안도(平安道))의 토적(土賊) 홍경래(洪景來)ㆍ이희저(李禧著) 등이 정주(定州)를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관군이 이를 포위하여 3개월 동안 이기지 못하였다. 이때 내가 다산(茶山)에 있으면서 일도(一道)의 사림(士林)으로 하여금 창의(倡義)하여 적을 치게 하려는 뜻으로 시험삼아 이 문안을 만들었다가 이내 승첩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만두었다.다음의 글월로 회유(回諭)한다. 우리 호남(湖南) 지역은 예로부터 충신(忠臣)ㆍ의사(義士)가 많은 고장이다. 지역으로 말하면 서울에 밀접하기가 호서(湖西)만 같지 못하고, 인물로 말하면 조정의 반열에 오른 자가 영남(嶺南)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나라에 대난(大難)이 있을 때마다 창의하여 분주히 힘쓴 것은 반드시 팔도에서 제일 먼저였으니, 역시 아름답고 훌륭한 일이 아닌가. 임진 (1592, 선조 25, 임진왜란)ㆍ갑자(1624, 인조 2, 이괄(李适)의 난)ㆍ정묘(1627, 인조 5, 정묘호란)ㆍ병자(1636, 인조 14, 병자호란)를 거쳐 무신(1728, 영조 4, 이인좌(李麟左)의 난)에 이르기까지 지난 사첩(史牒)에 분명하게 실려 있고, 유풍(流風)이 멀리 미쳐 있으니, 이는 여러 군자들이 다 함께 들은 바이다. 여러 군자들은 이러한 선현들의 후예 혹은 후학(後學)으로서 평소에 감화된 바와 심중에 사모하는 바로서 그 빛나는 여운과 아름다운 자취를 계승하기를 바랄 것이니, 어찌 하찮은 사람의 경고(警告)를 기다리겠는가.아아, 우리 정종 대왕(正宗大王)께서 20 년 동안 재위하여 백사가 모두 순조롭게 이루어졌는데, 특히 우리 호남 지역에 있어서는 그 선행(善行)을 정표하고 풍성(風聲)을 심어주기에 최선을 다하였으며, 빛나는 추증(追贈)이 자주 내리고 정표의 문려(門閭)가 잇닿아, 혹은 향(香)을 내려 분묘에 치제(致祭)하기도 하고, 혹은 후예를 책록하여 덕행을 빛내보기도 하였으며, 과거를 열어 인재를 선발하기도 하고, 혹은 행적을 채록(採錄)하여 그 명예를 전함에 영원을 기하기도 하였다. 대개 이와 같이 그 숭보(崇報)의 의식을 다 거행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 또한 모든 군자들이 다 함께 아는 바이다.아아, 건릉(健陵 정조의 능호)의 송백(松柏)이 크기도 전에 누가 오늘날의 변란이 있을 것을 알았으랴. 정월(正月) 초에 서울의 관문(關文)이 반포되었다. 우리 지방의 모든 인사들이 그 누구인들 창을 잡고 앞장서기를 원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 조그마한 역적의 무리는 평정하기 쉽고 변방의 사건은 제어하기 쉬운 것이라, 밤낮 바라는 것은 다만 승첩(勝捷)의 비보(飛報)에 있을 뿐이요, 창졸간의 생각이 미처 의병을 일으키는 데에 미치지 못하였는데, 지금 이미 열흘이 넘어가고 달이 차 가고 있으되 변방 소식이 끓어졌으니, 비록 그 풍편에 전하는 말을 다 믿을 수는 없으나 대개 그 월첩(月捷)의 전공(戰功)이 애초의 생각과 어긋난다고 한다. 알 수 없거니와 현지에 달려가 싸우고 싶은 뜻을 가진 여러 군자의 마음속에서 울분이 치솟지 아니하겠는가.아아, 의병을 일으키는 일은 실로 대사(大事)로서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자제가 그 부모를 호위하고 수족이 그 머리와 눈을 보호함에는 반드시 그림자나 메아리처럼 재빠르고 민첩히 하여야 하는 것이니, 그 어찌 느슨히 하여 바로 대들고 바로 찔림을 당한 후에 비로소 달려가 구하기를 논의하겠는가. 또한 대체로 의병을 일으키는 일은 그 사체가 몹시 호대(浩大)한 것이어서 걱정하고 탓하는 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지시한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창의(倡義)하는 소리가 비록 사전에 일어나더라도 행군(行軍)의 기약은 사후에 이뤄지기 쉬운 것으로, 첫째는 장수를 얻기 어렵고, 둘째는 대오를 결성하기 어렵고, 셋째는 군량을 비축하기 어렵고, 넷째는 병기를 만들기 어렵고, 다섯째는 진법을 익히기 어렵고, 여섯째는 운반을 하기가 어려운 것이니, 규모가 크거나 작거나 간에 군대임은 마찬가지로서 온갖 조건 가운데 한 가지만 잘못되어도 안 된다. 만약 상부의 지시나 순영(巡營)의 권면을 기다린 후에 비로소 주선하게 된다면 이는 억지로 하는 일로서 자신의 양심에 부끄러움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당황하여 무용(武勇)을 떨칠 심적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의논을 정하지 못하고 용병(用兵)의 시기를 잃게 되면 삼척(三尺)의 법문에 죄를 얻을 것이요, 천재(千載)의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살아서는 나라를 배반한 신하가 되고 죽어서는 부질없이 죽은 귀신이 될 것이니 이 어찌 지사(志士)들이 원하는 바이겠는가.우리들은 궁벽한 곳에 살면서 물고기와 이웃을 삼고 있으니, 진실로 그 하열(下列)에 끼이기도 부족한 처지이다. 그러나 선대의 일을 생각할 때마다 욕됨이 없게 하려는 마음이 간절하고, 시국의 일을 돌아볼 때 진실로 성패(成敗)를 따질 수 없는 의분이 앞선다. 이에 가슴속에 찬 열혈(熱血)을 쏟아 여러 어진이들의 숭청(崇聽)을 번거롭게 하노니, 여러 군자들은 이미 사장(四長)의 고을에 사는지라 의당 일도(一道)의 여론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도 의병을 일으키려는 뜻으로 열읍(列邑)에 통유(通諭)하여 그 학궁(學宮 향교)으로 하여금 경내의 명망이 높은 인사를 선발하게 하되, 혹은 지략, 혹은 용력으로 하여 한 몸에 완비한 자만을 구하려 하지 말 것이며, 가문과 지체에 구애받지 말고 힘써 공론을 따를 것이며, 추천을 받은 사람과 의로써 자원한 인사들까지도 그 이름을 거두어 한 책에 기록하여 먼저 순영(巡營)에 보고하여 그의 처분을 기다릴 것이며, 서로 희동하여 상의하며 임무를 분정하는 것 같은 일들은 다시 북쪽에서 오는 소식을 듣고 상사(上司)의 지휘를 기다릴 것이다.그러나 의논을 확립하는 일은 일찍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일을 시작하는 것은 삼가지 않을 수 없다. 여러 군자들의 중의(衆意)는 어떠하다고 생각하는가?아아, 처자를 거느리고 암혈(巖穴) 속에 몸을 숨기고 쌀과 돈을 파묻어 놓고서 숨어서 구차히 목숨을 아끼다가, 혹은 이교(吏校)들에게 잡힌 바 되어 욕을 보며 양 끌려가듯이 끌려가고, 혹은 대오에 편제된 바 되어 구박을 당하며 개 끌려가듯 끌려갈 것이라면 차라리 한 지방의 선열(先烈)을 따르고 영원한 후세에 의로운 명성을 드날려 하늘이 준 나의 본성에 보답하는 것이 보다 좋지 않겠는가. 바라건대 여러 군자는 익히 생각하고 밝게 깨달아 각각 각성하게 된다면 이보다 더 다행함이 없겠다.[주-D001] 삼척(三尺) : 법률(法律)을 이르는 말. 옛날에 법률을 세 자짜리 죽간(竹簡)에 썼다.[주-D002] 사장(四長)의 고을 : 호남(湖南)의 4대읍(大邑)으로 불리는 광주(光州)ㆍ나주(羅州)ㆍ장성(長城)ㆍ창평(昌平)을 가리킨다.
    2022-05-06 | NO.178
  • 대동야승- 난중잡록4 ; 권율이 병으로 죽었다
    기해년 만력 27년, 선조 32년(1599년)○ 도원수 권율(權慄)이 병으로 죽었다. 그 뒤에 휘하의 여러 장병들이 행주산성에 비석을 세우고 이름을 〈행주대첩비(幸州大捷碑)〉라 하였는데 그 비문은 다음과 같다.“공이 세상을 떠나 이미 초빈(草殯)했을 적에 그의 친척으로 종군하던 사람이 나를 보고 울면서 말하기를, ‘공이 군에 있을 때에 일찍이 무엇을 기록해 둔 것 같은 두루마리 하나를 가지고서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사위 이의정(李議政)이 있으니 반드시 이 기록을 바탕으로 하여 나의 묘지(墓誌)를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 주면 나는 만족할 것이다.」 하더라’ 하였다. 내가 그 상자를 열어보니 두루마리가 있는데, 거기에는 행주(幸州)싸움 때 명 나라 총독 군문 대사마(總督軍門大司馬) 송응창(宋應昌)이 우리 나라에 공문을 보내어 장려한 것이 적혀 있는데, ‘권 아무개가 의롭고 위태로운 성을 굳게 지켜 대적과 항전하였으니, 어지러울 때의 충신이요, 중흥시킨 명장이다.’ 하였고, 이어서 병부 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이 아뢰었더니 천자가 가상히 여겨 우리 나라에 칙유(勅諭)를 내렸는데, ‘지금 전라도에서 적의 목을 벤 것이 수많은 것을 보니 나라 백성이 능히 진작할 수 있다.’ 하였고, 그 밑에 또 적기를, ‘병신년에 거듭 교서가 있었는데 이르기를, 「경의 충성된 공로가 대단히 두드러지고 용맹스러운 지략이 세상에 뛰어나, 그 이름이 천하에 알려져 적국을 위압했으니 원수(元帥)의 적임이 경을 버리고 누가 있으리오.」 하였으며, 들어가 임금을 대하니 위로하기를, 「경이 아니었던들 나라가 오늘에 이를 수 있었으랴.」 하였고, 또, 「시국의 안전은 다만 경의 노력에 의지할 뿐이니, 흉적을 섬멸하여 나라를 안정시켜 주기를 나는 바라노라.」 하고, 이에 구마(廐馬)를 하사하였다.’는 등의 말들은 모두 공의 글씨가 분명하였다. 내가 읽고 감탄하기를, ‘대단하도다. 이것으로 족하도다. 빛나는 글이여. 다시 무슨 사연을 더 빌릴 필요가 있겠는가. 하물며 공의 분부가 있었으니, 감히 그것을 지키어 큰 총령(寵靈)을 빛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것을 비문에서 생략하면 또 사관(史官)이 혹시 빠뜨리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비석이 이룩되매 그 뒷면을 빌려 기록한다.” 이항복
    2022-05-06 | NO.177
  • 대동야승- 남중잡록3 ; 김덕령이 옥에서 죽다
    병신년 만력 24년, 선조 29년(1596년)당학(唐瘧)이 전국에 전염되어 사람마다 앓지 않는 이가 없었다.7월 충청도 홍산(鴻山)에 사는 역적 이몽학(李夢鶴)의 군사가 일어났다. 이몽학은 본시 흉하고 교활한 무리로서 처음에 편비(褊裨)가 되어 종군하였다가 국사가 어렵고 위태한 것을 알고 감히 하늘을 쏠 꾀를 내어 동료 한현(韓玄) 등과 가만히 반역을 도모하여 도당을 모았다. 이때에 백성들이 난리와 온갖 침노에 곤궁해졌다가 한 번 풍문을 듣자 따르는 자가 바람에 풀 쓰러지듯 하여 수일이 못 되어 군사가 만여 명이 되었다. 6일에 나아가 임천(林川)과 홍산을 함락시키고, 그 길로 청양(靑陽)ㆍ정산(定山) 등 여섯 고을을 함락시켰다. 임천 군수 박진국(朴振國)이 아전들과 함께 포로가 되어 늘 적중에 머물렀다. 이때 이시언(李時言)이 본도 병사(兵使)로서 군사를 발하여 잡으려 하다가 관군이 두 번이나 무너졌다. 이에 원수에게 위급함을 보고하니 권율이 전주에 있다가 곧 전라 감사로 하여금 군사를 전주에 모이게 하였다.○ 이몽학이 홍주(洪州)를 포위하니 목사 홍가신(洪可臣)이 굳게 지켜 막아 싸우니, 이몽학이 수일 동안 성을 공격하다가 들어가지 못하고 물러나면서 말하기를, “만약 한현이 오면 목사의 머리를 기 끝에 달 것이다.” 하였다. 덕산(德山)길로 향하면서 도처에 거짓말로 꾀기를, “읍내나 촌에 사는 백성들은 편안히 있고 동하지 말라. 이번 거사는 남아 있는 백성을 수화(水火) 가운데서 구제하려는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장군 김덕령(金德齡)과 영천 군수 홍계남(洪季男) 등은 다 우리와 공모되었으니, 마땅히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함께 서울로 향하리라.” 하였다. 이름 드러난 사람들을 거짓 끌어대는 것은 저희들 군사가 믿을 데가 있다는 것을 보이려 함이니, 음흉하고 교활한 꾀가 불측하다.12일 도원수 권율이 전라 감사 박홍로(朴弘老)와 모든 장수와 군사를 거느리고 여산(礪山)을 거쳐 이산(尼山)으로 향하였다. 권율이 길에서 적세가 매우 치성함을 듣고 충용장군(忠勇將軍) 김덕령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오게 하고, 또 군관을 영남 여러 진(鎭)에 나누어 보내어 항복한 왜병을 수합하여 거느리고 오게 하였다. 이때에 남원 판관 김유(金騮)는 이미 갈리고 이덕회(李德恢)가 대신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군사를 거느리고 따라와 토벌하였다.○ 적병이 서울로 간다고 큰소리를 치니 서울이 술렁거리고 두려워하고, 진위(振威)ㆍ수원(水原) 땅에서는 사람들이 모두 짐을 꾸려 가지고 있었다. 이때에 반군이 지나는 곳마다 밭을 매던 자는 호미를 들고, 행상(行商)하던 자는 지팡이를 들고 분주히 즐겨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아! 이것이 어찌 그 본심일까?○ 임천 군수가 적중에서 나와서 원수에게 고하기를, “서산 군수 이충길(李忠吉)이 그의 동생 3명을 거느리고 몰래 역당에게 붙어서 왕래하면서 서로 돕는다.” 하므로, 권율이 본도 감사로 하여금 비밀리에 이충길을 잡아서 공주에 가두었다.○ 권율이 호남 군사로 하여금 나아가 석성(石城)에 주둔하도록 하였는데, 전주 판관 □□이 척후장(斥候將)으로서 먼저 들어가 적을 정탐하였다. 판관의 아병(牙兵) 윤계(尹誡)가 장사 10여 명을 모집하여 밤에 적의 진중에 들어가서 총통을 연달아 쏘며 큰소리로 외치니, 적도들이 크게 놀라 떠들었다. 윤계가 외치기를, “도원수와 전라 감사와 충용장군이 각기 군사와 말 수만을 거느리고 이미 이 땅에 도착하였으니 내일은 마땅히 소굴을 무찔러 죽여 남김이 없게 할 것이다. 너희 적들 가운데는 아마 협박에 어쩔 수 없이 따른 자가 많을 것이니, 만약 적장을 베어 가지고 와서 항복하면 몰사하는 화를 면할 수 있으리라.” 하였더니, 적의 무리들이 들어 알고는 다투어 칼을 가지고 장막 가운데 돌입하여 이몽학을 누운 자리에서 베어 죽이고 일시에 무너져 흩어졌다. 한현이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홍주 땅에 주둔하였는데, 이시언이 본주의 목사 홍가신과 진군하여 치니 적병이 패하여 달아나고, 한현은 생포되어 군중(軍中)에서 베었다. 충청도가 다 평정되었다. 그 뒤 33년 을사년에 홍가신 등 4인을 정난공신(靖亂功臣)으로 녹(錄)하였다.○ 충용장군 김덕령을 잡아다가 국문하였다. 처음에 역적 이몽학이 잡혀 죽은 뒤에 문서를 수색하여 보니, 김ㆍ최ㆍ홍 삼성(三姓)이 있었다. 한현이 생포를 당하자 원수가 물으니, 공술하기를, “김덕령ㆍ최담령ㆍ홍계남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곽재우(郭再佑)ㆍ고언백(高彦伯)도 다 우리의 심복이다.” 하였으므로, 권율이 곧 갖추어 아뢰고, 군관을 나누어 보내어 김덕령 등을 체포하게 하였다. 이때에 김덕령이 역적을 토벌하라는 원수의 명령을 받고 진주로부터 운봉(雲峯)에 도착하였다. 충청도가 평정되었다는 것을 듣고는 원수에게 휴가를 청하여 광주(光州)에 갔다 오려 하였으나 권율이 허락하지 않으므로, 김덕령이 본진으로 돌아왔다가 곧 진주 옥에 잡혀 갇히었다. 임금이 원수의 계를 보고 조정의 신하에게 의논하게 하니, 어떤 이는 말하기를, “김덕령은 용기와 힘이 뛰어나 소홀히 할 수 없으니, 사람을 체찰부에 보내어 일이 있다고 핑계하여 덕령을 불러와서 그 자리에서 사로잡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하고, 어떤 이는, “그것은 불가합니다. 김덕령은 일개 미친 자이니 염려할 것이 못됩니다. 하물며 간사한 꾀를 써서야 어찌 아랫사람을 통제하겠습니까? 법대로 선전관과 금부도사를 보내어 잡아옴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선전관은 무인이라 위임하여 보낼 수 없으니, 근신(近臣)을 보내라.” 하고, 승지(承旨) 서성(徐渻) 등을 보내어 선전관과 도사를 거느리고 가서 김덕령을 잡게 하였더니, 당도한즉 덕령이 옥에 갇힌 지 며칠이 된 상태였다. 27일에 서성 등이 김덕령을 잡아서 남원을 경유하여 서울에 이르러 옥에 가두고 국문하였다. 곽재우 등도 또한 잡혀서 서울에 왔다가 얼마 안 되어 석방되어 진으로 돌아갔다.8월 24일 충용익호장군(忠勇翼虎將軍) 김덕령이 옥에서 죽었다. 김덕령이 전에는 비록 죄가 있었으나 이번에는 죄가 아니었으므로 잡히는 날에 원통하게 여기는 이가 많았으나, 당국자들이 모두 시기하여 하나도 구(救)하는 이가 없어서, 어떤 이는 모함하기를, “김덕령이 사람 죽이기를 삼[麻] 베듯 하였으니 죄를 용서할 수 없고, 또 반역할 골상(骨相)이니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이다.” 하고, 또 몰래 옥리(獄吏)를 사주하여 속히 죽이도록 하였다. 옥중에 있은 지 무릇 20여 일에 형벌로 문초하기 여섯 번에 다리뼈가 이미 부러졌으나 그래도 능히 무릎으로 걸었고, 볼기에 곤장을 때렸으나 목숨은 오히려 붙어 있어 동정이 평상시와 같았다. 조용히 스스로 변명하기를, “신이 만약 다른 뜻을 품었다면 어찌 당초에 원수의 명령을 받고 운봉까지 도착하였으며, 또 명령을 받고는 군사를 거느리고 진으로 돌아갔겠습니까? 다만 신이 만번 죽어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는 것은 계사년에 자모(慈母)가 죽었는데, 3년상의 애통을 잊고 원수를 갚으려고 분발하여 상복을 벗고 칼을 들고 일어나서 여러 해 종군하여도 조그마한 공도 세우지 못하여 충성도 펴지 못하고 효도에도 어기었으니, 죄가 이에 이르니 만번 죽어도 용서받기 어렵습니다. 구구한 속마음은 천지가 굽어 보시나이다. 신은 지금 목숨이 다 되어 가니 무슨 말씀을 드리겠습니까마는 다만 원하옵건대 죄 없는 최담령(崔聃齡)은 죽이지 마옵소서.”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김덕령이 형장(刑杖)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니, 참으로 적(賊)이로다.” 하고, 옥중에서 문초받기 위하여 대궐 뜰에 출입할 적에 그가 힘을 부릴까 의심하여 큰 나무에다 묶어서 옹위하여 다니게 하더니 이에 이르러 죽었다. 김덕령이 군사를 일으킨 지 3년에 이름이 중국과 오랑캐 지역에 가득 찼었다. 전에 영남에 있을 때에 손으로 범 두 마리를 때려 잡아서 왜인에게 자랑하여 팔았다. 온 나라 사람들이 그를 의지하여 안심하였고, 왜놈도 또한 겁내어 항상 스스로 계엄하여 경계를 지키고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는데, 국운이 불행하여 죄가 아닌데 죽였도다. 하늘이 그에게 수년의 수명을 더 주었더라면 정유년의 적이 어찌 전라ㆍ충청도에 쳐들어 올 수 있었으랴. 당시에 뜻 있는 이는 개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뒤에 뒤떨어졌던 왜적이 듣고는 그 진위(眞僞)를 알고자 하여 원수에게 통지하여 충용장군을 보기를 요청하니, 원수는, “집에 돌아가 상(喪)을 마친다.”고 답하였다. 그가 죽은 것을 자세히 알고는 모든 적추(賊酋)들이 술을 마시며 서로 축하하고 날뛰며, 기운을 내기를, “전라ㆍ충청도에는 걱정이 없다.” 하였다.
    2022-05-06 | NO.176
  • 대동야승- 남중잡록3; 김덕령 용력이 뛰어나다
    계사년 하 만력 21년, 선조 26년(1593년)○ 광주(光州) 상인(喪人) 김덕령(金德齡)은 도내 각 고을 여러 군자(君子)에게 공경히 고하나이다. 요사이 보건대, 흉악한 적이 이미 서울에서 나와 영남 변두리에 벌떼처럼 주둔하여 변경(邊境)의 성보(城堡)에 멧돼지처럼 돌격하여 가만히 엿보는 생각을 품고 날로 미친 짓을 방자히 하매, 관군(官軍)이 패배하고 의병도 또한 움츠러져서 군사를 멈추고 둘러서서 보기만 하고 무찔러 멸하는 데는 뜻이 없으니 위엄을 상실하고 적을 길러줌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습니다. 조정에서는 시위(侍衛)하는 신하가 부지런히 힘쓰는 이가 없고 밖으로는 제 몸을 잊는 충신이 몇 사람이나 되는가? 오늘날의 사세를 보건대, 진실로 답답합니다. 김덕령은 처음부터 소탈한 바탕으로 뜻은 갓끈을 청하는 데 간절하였습니다. 변이 난 처음에 군중에 몸을 던져 감히 조그마한 힘이나마 바치려는 생각이 깊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나, 다만 늙은 모친이 병이 들어 서산에 지는 해와 같았으므로 마지막으로 봉양할 정이 간절하여 차마 뿌리치고 갈 수 없어 두 해를 집에 엎드려 있으면서 칼을 어루만지며 동쪽을 돌아볼 뿐이었습니다. 이제 어머니가 이미 돌아가시어 자식으로서 믿을 데가 없고, 국가에 일이 많으니 신하로서 절개를 다할 때입니다. 다행히 담양 부사 이후(李侯) 경린(景麟)을 만났더니, 그는 종실(宗室)의 후손으로 일찍이 나라 위해 적을 칠 뜻을 품은 이라, 나의 헛된 이름을 듣고 전구(戰具)를 준비해 주면서 일어난 국난(國難)에 임하기를 권하므로 두 번이나 사양하다가 마침내 어쩔 수 없어 애통한 정을 끊어 상복을 벗고 사세에 따라 군중(軍中)으로 나왔나이다. 장수 노릇하는 방략(方略)은 비록 표요(票姚)에게 부끄러우나 의기(義氣)는 적이 조사아(祖士雅)를 사모하나이다. 손으로 칼을 휘두르며 몸에는 갑옷을 걸치고 위엄을 기르며 날랜 기운을 쌓아서 범의 굴을 바로 더듬어 백성의 분을 조금이나마 풀어 주고 칠묘(七廟 임금의 종묘)의 수치를 쾌히 씻으려 하오니, 오직 바라건대, 먼 데나 가까운 데서 마음을 협력하여 위태한 나라를 붙드는 지극한 계책을 함께 정합시다. 지금 이에 충심(衷心)을 밝혀서 고하오니, 각 읍의 장사 중에 혹시 나를 따를 이가 있을는지요. 아! 2백 년 동안 기르고 가르친 나머지에 한 사람의 선비도 분에 겨워 순국(殉國)할 이가 없을쏜가. 몸을 버려 국난을 구제해야 할 때가 이때로다. 소매를 떨치고 단(壇)에 오름을 어찌 가히 늦추랴! 김덕령의 힘은 솥을 들기 어렵고, 용맹은 만인을 대적할 사람이 못 됩니다. 회고하건대, 임금이 욕되면 신하가 죽어야 할 것이므로 재주와 지혜의 졸렬함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같은 무리의 선비를 불러 모아 모두 단심(丹心)으로 공업을 성취하려 하나이다. 기회를 타서 변통하는 데는 비록 능히 묘한 계책으로 적을 제어하지는 못하나마 칼날에 부딪치는 데는 마땅히 군사의 선등(先登)이 될 것을 맹세하나이다. 방금 7도가 병화(兵禍)를 입지 않은 데가 없는데 오직 우리 호남만이 도륙을 면하였으니, 회복할 일맥이 여기에 있는데 근자에 물력(物力)이 거의 다 되고 민생이 곤궁하여 병화를 겪은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이때에 적이 이른다면 누가 다시 막아내리오! 부모 처자는 사람마다 있지 않은 이가 없고, 상재송백(桑梓松栢)도 집집마다 기르지 않은 이가 없는데 하루 아침에 살육 약탈되고 분탕질을 당한다면 어찌 그것이 바라는 바이겠는가. 진실로 사람마다 노한 마음을 품어서 사사로운 원수 갚듯 한다면 이 적을 멸하지 못할 이가 없다. 혹시 목전의 편안함을 보존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달려오지 않는다면 이것은 부모를 적에게 주는 것이며, 제 손으로 송백(松栢)을 스스로 자르는 것이니, 어찌 그럴 이가 있으리요. 원하노니, 각 읍의 선비들은 마음을 주저하지 말고 분발하는 기운을 배나 더하여 서릿발 같은 창날과 철기(鐵騎)로 우레처럼 굴리고 바람처럼 몰아쳐 간다면 다 죽어 가는 남은 적들이 반드시 흙처럼 무너지고 와해(瓦解)될 것이며, 칼날에 피 묻히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달려와 죽기를 기다릴 것이니, 비수(淝水)의 공을 오늘에 세울 수 있고, 전연(澶淵)의 승리를 불시(不時)에 얻을 수 있으리니, 어찌 매우 다행하지 아니한가. 아! 명 나라 군사가 항상 불의(不意)의 습격에 욕을 보고, 우리의 강토는 오랫동안 왜놈에게 더럽혀졌네. 칼을 짚고, 수레바퀴를 울려도 군사들이 일어나지 않는도다. 경계에 다다라 목을 찌르니, 옹문(雍門)을 누가 회복하리. 거사(擧事)할 것은 아래와 같이 조목을 나열하니, 이 격문이 도착하거든 자세히 생각하여 힘쓸지어다. 또 군사는 정예하기를 힘쓰고 많기를 힘쓰지 않는 것이니, 오중 장사(吳中壯士) 10여 인을 얻어 함께 가기를 원하나이다.12월 25일 학가가 전주에 도착하여 다음날 알성(謁聖 임금이 공자 신위에 참배하는 것)하고, 27일에 과거를 보여 문신(文臣) 11인과 무신(武臣) 1천 6백 인을 뽑았다. 도원수 권율(權慄)이 또한 명령을 받들어 합천(陜川)으로 진을 옮겨 과거를 보여 무과(武科) 9백 인을 뽑았다. 영남으로 간 장사들을 호남으로 모을 수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이 나누어 시취(試取)하였는데, 철전(鐵箭) 다섯 개를 일순(一巡)에 두 번 맞히고, 말타기 1차(次)에 두 번 맞힌 자는 뽑고, 그 나머지는 합하여 1방(榜)으로 하였다.○ 낙상지 등은 경주로부터, 송대빈 등은 삼가(三嘉)로부터 모두 군사를 철수하여 서울로 향하여 이내 명국으로 돌아갔다.김덕령 장군은 좀처럼 보기 드문 용력(勇力)을 가졌고, 여러 해 동안 적을 평정하지 못함을 분히 여겨 상중(喪中)에서 몸을 빼내 칼을 짚고 일어서니 웅장한 명성에 격동되어 먼 데서나 가까운 데서 그림자처럼 따랐다. 번개처럼 발동하고 구름처럼 모여들어 소탕해 맑히기를 한가지로 맹세하였다. 의기가 이미 영남 바다 한쪽에까지 진동하니, 몇몇 남은 적들은 가마 속에서 노는 물고기처럼 죽을 때만 기다리고, 전라도 한 구석이 도륙을 면하였으니 심히 다행이다. 다만 관청이나 민간의 저축이 모두 다 되어 군중에 필요한 모든 것을 모두 스스로 판출하려고 장수나 군사가 그렇지 아니한 이가 없다. 다 같은 신하요 백성인데 어떤 이는 도망해 숨느라고 겨를이 없는데, 스스로 싸우고 스스로 먹어야 하니 겨울에 종군하는 자만 어찌 잘나서이겠는가. 아! 종군하는 괴로움은 어느 누가 꺼리지 않으며, 가정의 기쁨은 누군들 좋아하지 않으리오마는 남들의 하고 싶어하는 바를 버리고 꺼리는 바를 즐거이 따름은 어찌 딴 뜻이 있으랴! 그들은 전란을 겪은 백성들이 적이 와도 막지 못하여 부모는 칼날에 죽고 처자는 포로로 잡혀가서 집을 잃고 재물을 잃고서 울부짖는 자들을 보고 함께 망하는 것을 차마 할 수 없어 드디어 손바닥에 침 뱉고 소매를 떨치고 격동하여 구름처럼 모여서 위로는 국가를 위해 무궁한 수치를 씻고, 아래로는 집에 자물쇠를 굳게 하기 위하여 만번 죽더라도 아깝지 않은 행동으로 깃발을 들고 갑옷을 걸치고서 영남에까지 싸우러 왔으니, 그 뜻은 장하고 계책은 깊다. 그런데도 그 고향에 처하여 살림을 편안히 하여 집안 처자의 즐거움을 앉아서 누리는 자는 홀로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는가? 아! 이 적이 있으면 이 재물이 없어질 것이며, 이 적이 없어져야 이 재물이 있을 것이니, 재물을 가지고서 망하기를 기다리기보다는 재물을 내어 적을 제거함이 낫지 않겠는가? 옛사람의 말이 있는데, “잠깐 소비하지 않으면 길이 편안할 수 없다.” 하였고, 또, “재물을 저축함은 능히 잘 쓸 수 있기 때문에 귀한 것이다.” 하였는데, 혹시 쌓아 두고 흩지 않아서 훗날의 계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비루하지 아니한가? 대저 사람을 물에서나 불에서 구제해 주면 반드시 그 은덕을 갚으려고 생각함은 나를 살려 준 은혜가 지극히 중하기 때문이다. 지금 왜적의 날뜀이 수화(水火)보다 심한데 그의 해를 입을 사람들이 평범히 보고 돌이켜 생각할 줄 모르니, 이 무슨 뜻인가? 엎드려 원하건대, 창을 메고 싸우는 괴로움 대신에 보존하기 어려운 미곡을 아끼지 말고 빈부(貧富)에 따라 각기 한 되 한 말이라도 내어 군자(軍資)에 보조하면 저 토벌하고 방어하는 군사들이 반드시 기운을 다해 급히 달려서 죽도록 힘껏 싸워서 흉악한 칼날로 하여금 이 도에 가까이하지 못하게 할 것이니, 그러면, 오늘날 한 되 한 말을 내는 것이 장래에 창고를 보존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는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이라도 오히려 할 수 있는 것인데 하물며 여러 군자의 밝고 지혜로움으로 이것을 모르겠는가? 그리고 또 김 장군의 생각으로는 거느린 장사들과 적진에 달려가 싸우더라도 부모 처자는 모두 도내의 제일되는 산성에 들어가게 하였다가 만약 뜻밖의 변이 있을 때에는 군사를 돌이켜서 지키고 방어하여 몰사하는 화를 면하게 하려고 하니, 이것은 실로 싸우고 지키는 상책(上策)이다. 이에 모집된 곡식을 거두어 모아서 한편으로는 싸우러 가는 군사에게 주고, 한편으로는 성을 지키기 급할 때에 대비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실책이 없게 하려 하니,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곡식을 모집한 것은 아래에 조목을 나열해 기록하였다. 도유사 전 첨정(都有司前僉正) 기효증(奇孝曾) 등.○ 원수 권율은 합천에 그대로 머물고, 승의장 첨지(僧儀將僉知) 처영(處英)으로 하여금 남원의 교룡산성을 수축하게 하니, 처영이 의령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서 교룡산성에 주둔하여 수축하였다.
    2022-05-06 | NO.175
  • 대동야승-난중잡록1 ; 조경남(趙慶男)
    대동야승-난중잡록1 ; 조경남(趙慶男)임진년 상 만력 20년, 선조 25년(1592년) 5월14일. 전라 감사 이광(李洸)이 또 근왕병 도합 10여 만을 동원하여 전주(全州)에 주둔하였는데 군량을 수송하는 자가 갑절로 늘어나다.○ 군사를 징발하는 교지가 있었다. 당초에 조정이 송도(松都)에 머무르고 있을 때 호남과 영남에 교지를 내렸으나, 길이 막혀 전달되지 못하다가 이제와서야 본도에 도착한 것이다. 그 내용의 대략은, “왜적이 경기(京畿)에 가득 밀려 들어와 형편상 부득이 송도에 주차(駐箚)하면서 사방에 명령을 내려 왜적 토벌의 계획을 하게 하는 터이다. 경(卿)은 경상 우도에 은밀히 내통하여 경내(境內)의 군사를 총동원해 가지고 올라와 구원하도록 하라.” 하였다. 내린 교지는, 반 조각의 막종이에 잘게 써서 겨우 글자 모양을 이룬 것으로 시골집의 사사로운 편지 조각과도 같았으니, 백성으로서 그것을 본 사람 치고 눈물을 뿌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이광이 그를 영남에 전송했다. 김수(金睟)가 안음(安陰)으로부터 함양(咸陽)에 가서, 방어사 조경(趙儆), 종사관 이수광(李睟光), 조방장 양사준(梁士俊) 등을 거느리고 함양으로부터 남원(南原)으로 향하니 그때 전라병사 최원(崔遠)이 군사를 거느리고 남원에 와서 진을 쳤다.18일. 김수(金睟)가 남원(南原)으로부터 전주(全州)에 갔는데, 이광(李洸)이 이곳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김수를 패군(敗軍)한 장수라 하여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니 김수 일행의 병마는 점점 도망쳐 흩어졌고 장병들은 각자 말을 끌고 가버렸다. 이윽고 김수도 이 광을 만나 약속하고 출발하다.○ 순창(淳昌)과 옥광(玉果)의 군사들이 먼 곳에 가서 싸우는 것을 싫어한 끝에, 도리어 흉악한 음모를 꾸며 형대원(邢大元)과 조인(趙仁)을 맹주(盟主)로 추대하고는 노령(蘆嶺)을 근거지로 난동을 일으키다. 이윽고 본군(本郡)으로 군사를 돌이키고 향사당(鄕射堂)과 형옥(刑獄)을 불태우매, 군수 김예국(金禮國)이 단신으로 탈출하여 이광에게 달려가서 고하였다. 이광은 병사(兵使)에게 군령을 전달하여 군사를 전진시켜 토벌해서 잡으라 했는데, 그때 마침 담양 부사(潭陽府使) 이경린(李景麟)이 군사를 거느리고 전주로 가다가 반란을 일으킨 백성들한테 추격을 당하여 담양의 군사도 무너져 버리다.19일. 이광이(李洸)이 전주(全州)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서울로 향하다. 군사 5만여 명은 이광이 통솔하였는데 전주 부윤과 나주 목사(羅州牧使) 등 수령 20여 명을 거느리고 익산(益山)으로 해서 충청도에 있는 내포(內浦)를 지나면서 진군하고, 군사 4만 8천여 명은 방어사 곽영(郭嶸)이 통솔하였는데 조방장 이지시(李之詩)와 김종례(金宗禮) 및 남원 부사(南原府使) 등 20여 명을 거느리고 여산(礪山)을 거쳐 충청도의 대로(大路)로 해서 진군하여서, 모두 진위(振威)에서 만나기로 약속하다. 김수(金睟)도 이광을 따라 내포로 향하다.○ 본도 군량 수송의 수량은 감사의 분부에 따라 각 관아에서 인부 두 사람에 한 바리, 품관(品官)은 8명에 한 바리, 교생(校生)은 8명에 한 바리씩으로 한 것들과 공(功)을 세우려고 자진해서 군량 수송에 응모한 짐바리, 그리고 각 지방 관아의 수령과 여러 장병들의 개인적인 짐바리 등, 이루 헤아릴수 없이 많아 길에 잇달아 있다.20일. 남원(南原)ㆍ구례(求禮)ㆍ순천(順天)의 군사 8천여 명이 전주(全州)에 와서 참전하다가 일시에 흩어져 마구 찌르는 창에 죽은 자들이 퍽 많았다. 이광(李洸)의 군관 옥경조(玉景祚) 등이 칼을 뽑아 후퇴하는 자들을 베어 죽이자, 무너져 가던 군사들이 옥경조를 에워싸고 전주까지 와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남원 부사 윤안성(尹安性)은 판관 노종령(盧從岭)에게 영(令)을 전하여, 흩어진 군사들을 타일러 모아 보내라고 했고, 구례 현감 조사겸(趙士謙) 등은 직접 본읍에 돌아가 군사들을 불러 모은 다음, 달려 돌아가서는 은진(恩津)까지 이르렀다. 전주ㆍ광주(光州)ㆍ나주(羅州)의 군사가 용안(龍安)에 도달해서 역시 일시에 흩어지자 수령 등이 길에서 불러 모아 봤지만, 무너진 군사들을 한데 모을 수는 없었다. 이광 역시 길에서 머뭇거리곤 하여 전진하기를 꺼리는 기색이 많았다.24일. 이광(李洸)의 군대가 온양(溫陽)에 머물다. 충청 순찰사 윤선각(尹先覺)이 방어사 이옥(李沃), 병사 신익(申益)과 더불어 먼저 이미 이곳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다가, 이때에 와서 두 남도 순찰사와 같이 한때에 서울로 향하였다. 곽영(郭嶸)은 군대를 거느리고 공주(公州)를 지나 천안(天安)으로 향하였다.26일. 대군이 다 진위평(振威坪)에 모이니 무릇 13만이다. 깃발이 해를 가리고 군량을 운반하는 대열이 1백여 리에 늘어섰다. 경호(京湖)의 피난민이 양떼를 몰고 가는 위세를 잘못 믿고 혹간 돌아와 모이는 자들도 있다.○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이 또 전라도의 해군[舟師]에게 영남 바다에서 적을 토벌해 주기를 청하다. 6월의 좌수영 영리(營吏)의 고목(告目)에 보인다. ○ 전 장령(掌令) 정인홍(鄭仁弘)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다. 정인홍은 경상도 합천(陜川) 사람이다. 처음에 관군이 무너져 흩어지고 왜적이 멀리 몰아가 곧장 서울을 향하였으므로 대가가 서북으로 몽진하자, 정인홍이 전 좌랑(佐郞) 김면(金沔)ㆍ박성(朴惺)ㆍ곽추(郭趨) 및 그 제자들과 함께 의거를 모의하고 여러 읍의 사민에게 통문을 냈는데, 들은 자치고 분발하기를 생각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제자인 하혼(河渾)ㆍ조응인(曹應仁)ㆍ문경호(文景虎)ㆍ권양(權瀁) 등 막료들로 유사를 갈라 정해서 그들로 하여금 병사를 모으게 하고, 또 박이장(朴而章)과 문홍도(文弘道)에게 군량을 모아 마련하는 임무를 맡기고, 첨사 손인갑(孫仁甲)을 중위장(中衛將)으로 삼아 모집한 군대를 맡겼다. 손인갑이 초계(草溪)의 사막(沙幕)에서 전사하니, 현령 김준민(金浚民)으로 대신하게 했다가 오래지 않아 교체시켰다. 그후 전투에 임해서 장수를 정해 매복하고 습격하고 하는 것이 하나 둘로 계산할 수 없었다. 개산(開山)의 습격ㆍ언안(彦安)의 전승, 성현(星峴)과 정야(井野)의 포위, 단계(丹溪)와 가전(檟田)의 성공(成功) 같은 것들은 그 가운데서도 두드러진 것이다. 그러나 정인홍은 전승을 보고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대부분 보고하지 않아 군공(軍功)은 남의 맨끝에 있었으나 사실인즉 영남에서 의병을 일으킨 가운데에서는 정인홍이 첫째였다. 김수(金睟)는 삼가(三嘉)ㆍ초계(草溪)ㆍ성주(星州) 및 고령(高靈)의 군대를 그에게 맡겼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왜적이 전라 감사를 칭호하여 의령(宜寧)의 정진(鼎津)으로 몰려 닥쳐오니, 곽재우(郭再祐)가 의병(疑兵)을 설치해서 그를 물리치다.○ 전라 좌우도의 선비들이 의병(義兵)을 일으킬 것을 제창하다. 좌도는 전 부사인 첨지 고 경명(高敬命)을 대장에 모셨고,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와 학관(學官) 양대박(梁大樸)을 종사(從事)로 하고, 정랑(正郞) 이대윤(李大胤)과 정자(正字) 최상중(崔尙重)ㆍ양사형(楊士衡)ㆍ양희적(楊希廸) 등을 모량유사(募糧有司)로 삼았다. 우도는 전 부사인 김천일(金千鎰)을 대장으로 모셨다. 고경명은 광주(光州) 사람으로 전에 동래사(東萊府使)를 지냈고, 김천일은 나주(羅州) 사람으로 전에 수원사(水原府使)를 지냈다. 애초에 유팽로가 서울이 함락되어 거가가 서북으로 봉진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주야로 외쳐 울며 편안히 침식을 하지 못하고, 동지 양대박 및 양희적과 더불어 고경명을 찾아 가서 지방의 병사를 서둘러 일으켜 북으로 향해 근왕(勤王)할 것을 모의하니, 고경명은 그들이 먼저 생각해 낸 것을 기뻐하며 흔연히 그들을 따랐다. 즉일로 여러 읍에 격문을 돌려 추성(秋城)에 모이도록 불러 날을 정하고 깃발을 세웠다. 본도에서 의병을 제창한 것은 유팽로 등이 첫째였으므로, 호남에 삼창의(三倡義)라는 말이 생겼다.6월 5일. 이광(李洸)이 선봉장 백광언(白光彦)을 시켜 용인(龍仁)에서 왜적을 탐지하게 하다. 왜적이 현의 북쪽인 북두문(北斗文)이라는 작은 산에 진을 쳤는데, 진은 미약하고 군사는 쇠잔하여 그 기세가 외롭고 약한 것 같았다. 백광언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이것은 영세한 왜적이니, 급히 공격하고 때를 놓치지 마십시오.” 하였다.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 율(權慄)이 방어사의 중위장으로 군중(軍中)에 있었는데, 이광에게 강력히 말하기를, “서울이 멀지 않고 큰 왜적이 앞을 막고 있는데, 작은 적과 다투어 교전해서 군사의 위세를 꺽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으나, 이광은 그 말을 듣지 않고 곧 조방장 이지시(李之時) 및 선봉인 수령 등을 백광언에게 주어 전투를 독촉하였다. 백광언 등은 적이 눈앞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육박해 들어가 도전했는데, 묘시부터 사시에 이르기까지 적병이 잠복하고 나오지 않자, 오시에 이르러 아군이 해이해졌다. 이때 왜적이 풀 속에 엎드려 무릎으로 전진해 와 검을 휘두르며 일제히 일어나 아군 가운데로 쳐들어오니, 왼쪽에서 목 베고 오른쪽에서 찍어대고 하여 아군의 전사자가 부지기수였다. 이지시ㆍ백광언, 고부 군수(古阜郡守) 이윤인(李允仁), 함열 현감(咸悅縣監) 정연(鄭淵) 등이 모두 이 전투에서 피살되어 대군의 기세가 꺾였다. 이날 교지가 서해로부터 용인의 진중에 도달하여 경상좌우순찰사와 좌감사 이성임(李聖任)을 도로 합하게 하니, 길이 막혀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6일. ○ 전라도 의병장 행부호군 고경명(高敬命)이 여러 도의 수재(守宰) 및 사민(士民)과 군인 등에게 다음과 같은 격문을 급히 보냈다.근자에 국운이 중도에 비색한 때문으로 섬 오랑캐가 밖에서 짖어대어, 처음에는 역적 양(亮)이 맹약을 어긴 일을 본받아 하더니 마침내는 오랑캐 오(吳) 나라가 중국을 먹어 들어오던 짓을 자행해서, 우리가 경계하고 있지 않은 틈을 타 허한 데를 짓이겨대고 멀리 몰고 들어와 ‘하늘을 속일 수 있다’고 여기며 마음대로 곧장 올라왔다. 장수의 절월(節鉞)을 가진 자는 기로(岐路)에서 서성대고 한 군(郡)의 인신(印信)을 찬 자는 수풀 깊은 속으로 도망가서 왜적을 군친(君親)에게로 돌려버렸다. 이것을 참을 수 있는가. 지존(至尊)으로 하여금 사직을 근심하게 하고서 네 마음이 편안한가? 어찌 생각하였으랴, 1백 년이나 휴양해 온 백성 가운데 어찌 의기 있는 사나이가 하나도 없으랴. 고군(孤軍)으로 깊이 들어간 것은 여진(女眞)이 본래 병법을 몰랐던 것이요, 중행(中行)을 매질하지 않은 것은 대한(大漢)이 본래 책략이 없었던 것이다. 장강(長江)이 급작스레 그 천연의 요해지를 잃어버려서 흉악한 칼날이 이미 신경(神京)에 육박한 것이니, 남조(南朝)에 인물이 없었다는 조롱은 진실로 가슴 아프거니와, 북군(北軍)이 날아서 건너왔다는 말은 불행하게도 근사하구나. 이제 우리 성상(聖上)께서는 태왕(太王)이 빈(邠) 땅을 떠나던 마음으로 명황(明皇)이 촉(蜀) 땅으로 갔던 일을 하셨으니 이는 대체로 역시 종묘사직을 위한 지극한 계획에서 나온 것이다. 이에 사방의 지방관이 잠시 애쓰는 것은 기탄하지 않거니와 공락(鞏洛)의 놀란 먼지 속에 임금의 안색에 자주 깊은 진념이 나타났고, 민아(岷峨)의 위험한 잔도(棧道)로 푸른 일산[翠華]이 긴 노정을 멀리 갔다. 하늘이 낸 이성(李晟)이 적을 숙청한 것은 바로 원로(元老)에 힘입었고, 조서를 초한 육지(陸贄)의 애통한 말은 또 성조(聖朝)에서 내렸다. 무릇 혈기를 가지고 생명을 지닌 자라면 그 누가 분개하고 죽으려 들지 않겠는가. 어찌하랴! 사람의 모의가 좋지 않아 국보(國步)의 간난(艱難)이 잦았도다. 봉천(奉天)의 거가(車駕)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상주(相州)의 군대가 이미 무너졌으며, 준동하는 저 벌이나 전갈 같은 무리[蜂蠆之醜]에게 고래나 상어 같은 힘으로 목을 베는 것이 아직도 늦어지고 있다. 그러나 성문에 임시로 쉬고 날아도는 것이 어찌 장막의 제비와 다르겠으며, 외람되이 기보(畿輔)에 버티고 있으니 그 날뛰는 것이 울 안의 원숭이와도 같다. 비록 하늘의 군사가 소탕해버릴 때가 있기는 하겠으나 역시 그 흉악한 무리가 뛰어 달아나기는 기대하기 어렵다. 나 고경명은 단심과 만년의 절개를 가지고 머리가 희어지도록 썩은 선비[腐儒]로 살아왔으나, 밤중의 닭소리를 듣고는 국가의 다난함을 견디지 못하여 중류(中流)에 뜬 배의 노를 치면서 스스로 외로운 충성을 허락하였노라. 한갓 개나 말이 주인을 그리는 정성을 품고 모기나 등에[虻]가 산을 지려 드는 것같이 턱없는 힘을 헤아리지 않고, 이에 의병을 규합하여 곧장 서울로 지향하고자 옷소매를 떨치고 단에 올라 눈물을 뿌리며 여럿과 맹세했다. 곰을 치고 표범을 끌어대는 군사들이 우레같이 세차고 바람같이 날며, 수레를 뛰어넘고 관문을 건너뛰는 무리가 구름같이 합치고 비같이 모였으니, 이는 대개 핍박한 후에 응하여 억지로 나가게 한 것이 아니고 오직 신하로서 충의에 찬 마음이 다 함께 지극한 본성에서 우러난 것이니, 존망의 위기에 임하여 감히 미미한 몸을 아끼겠는가. 군사는 의로써 이름 지었으니 본래 벼슬[職守]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군대는 곧은 것으로 말미암아 씩씩해지는 것이지 취약한가 견고한가를 따지는 것은 아니어서, 대소의 군대들이 모의하지 않고도 뜻을 같이하였고, 원근의 장정들이 소식을 듣고서 다 함께 분발했다. 아아! 우리 여러 군[列郡]의 수재(守宰)들과 여러 길[諸路]의 사민(士民)들의 충성이 어찌 임금을 잊었겠는가. 의리상 마땅히 나라를 위해 죽어야 할 것이다. 혹은 병기(兵器)와 의장(儀仗)으로 도와 주고 혹은 양식으로 구제해 주며, 혹은 말을 달려 군사의 행렬 앞을 가고 혹은 쟁기를 놓고 밭에서 분기하여 힘이 미칠 만한 것을 헤아려 오직 의로운 데로 돌아가 임금을 고난으로부터 막아낼 수 있다면, 나는 그대들과 함께 일어나기를 원하는 것이다. 멀리서 생각하건대, 행궁(行宮)은 서쪽 땅에 멀리 있으나 묘당(廟堂)의 대계(大計)가 장차 정해지리니, 왕업(王業)이 어찌 한쪽에 치우쳐 안정할 것이랴! 잘 패[敗宮]하면 망하지 않나니 복덕(福德)이 바야흐로 오(吳) 나라 분야에 임했고, 깊은 근심으로 열어 주니 노래하고 읊조리는 데 더욱 한가(漢家)를 생각하게 된다. 호걸스럽고 준일한 인물이 시세를 바로잡을 제 신정(新亭)에서 마주보고 우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고, 부로(父老)들이 임금을 기다리니 곧 구도(舊都)에 임금이 돌아오는 것을 보리라. 생각하건대 마땅히 힘을 내서 앞서 나가야 할 것이므로 이상 마음속을 털어놓고 고하노라. 《정기록(正氣錄)》에 나온다. ○ 전라도 의병장 행부호군 고경명이 삼가 제주절제사 양공(楊公) 그때 양대수(楊大樹)가 본주의 목사였다. 의 휘하에 치고(馳告)하나이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섬 오랑캐가 침략을 자행하여 임금께서 몽진하였는데, 지존으로 하여금 홀로 근심하게 해 놓고 처자를 보호할 계책만 먼저 생각하여 왼발을 들여다보고 먼저 응하니 그 누가 사직을 지키는 마음을 가졌겠소. 흥원(興元)의 거가는 돌아오지 않았는데 상주(相州)의 군대는 이미 무너져서, 이수(伊水)와 낙수(洛水)의 적을 빨리 소탕하여도 아직 회복할 기약은 멀었고, 군량은 버려져 도리어 원수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다행히 하늘의 뜻이 끊어지지 않았으면 그래도 국사를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 고경명이 이에 의로운 깃발을 들고 요사한 무리를 숙청하러 나서자 소식을 듣고 그림자같이 모여들었는데 대부분 형초(荊楚)의 기특한 인재들이고, 예리한 무기를 들고 먼저 나서는 중에는 또한 연조(燕趙)의 검객도 들어 있습니다. 다만 한스럽기는, 보졸의 발[足]이 될 것이 없어 말을 채찍질하여 양(良)을 찌를 것을 바라기 어려운 것입니다. 멀리 생각건대, 바다 동쪽의 탐라(耽羅) 땅은 중국의 기북(冀北)과 다름이 없어서 골짜기를 뛰어넘어 다니며 사냥을 할 뿐만 아니라 전투 행진에 따라다녀 또한 목숨을 의탁할 만하다 하니, 만약 그곳에서 나는 말을 바닷배에 가득 실어 보내 주신다면 우리 군대의 위용이 크게 드러나는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귀관께서는 임금의 은혜를 깊이 받아 해역(海域)을 전제(專制)하고 계시니 글로써 호소하면 응당 한 곳의 여론을 일으킬 것이며, 팔뚝을 걷어올리고 외치면 어찌 10실(室)의 마을에 충신(忠信)한 사람이 없기야 하겠습니까. 만약 장사 중에 나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또 그러한 인간의 상정을 막지 말기를 바랍니다. 《정기록(正氣錄)》에 나온다. 고종후(高從厚)가 대신 지은 것이다. ○ 전라도 의병대장 장하사(張下士), 전 현령 고종후(高從厚)ㆍ권지성균관학유(權知成均館學諭) 유팽로(柳彭老) 등이 충청ㆍ경기ㆍ황해ㆍ평안 4도의 여러 읍의 수재 및 향교(鄕校)ㆍ당장(堂長)ㆍ유사에게 다음과 같이 삼가 재배(再拜)하고 통문(通文)하다.외람되게 생각하건대, 섬 오랑캐가 불공함으로 임금께서 멀리 파천하고 7묘(七廟)가 재가 되어버렸으며 만백성이 도탄에 빠졌으니, 이는 진실로 고금에 있어 본 일이 없던 변고이고, 충신(忠臣)과 의사(義士)가 몸을 버려 나라에 보답할 때입니다. 그러나 방진(方鎭)의 중신(重臣)들은 관망하면서 머뭇거려, 군사를 징집하는 교지가 한두 차례 내린 것이 아닌데도 한 사람도 머리를 북으로 향하고 적과 싸워서 죽은 자가 없습니다. 오늘날의 사대부는 조정을 저버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외람되이 생각하건대, 호남은 본래 군사가 정예한 것으로 일컬어져 왔었는데, 근왕군이 겨우 금강(錦江)에 도달하자 도성이 함락되고 거짓말이 멀리 퍼졌으며 주장(主將)은 여러 사람의 의론을 널리 물어 볼 겨를도 없이 급히 진을 파하라는 영을 내려 10 만의 무리가 까닭 없이 그냥 돌아가버리고 온 도의 민심이 흉흉하여 흡사 미친 듯한 물결이 마구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 두 번째의 군사 모집에 가서는 하천한 백성과 지극히 우매한 자들이 그 명령에 따르지 않으니 컴컴한 방안의 근심은 차마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사직의 복과 조종의 위령에 힘입어, 무너져 달아났던 병졸들이 매일같이 모여 와 군의 성세가 크게 진작되어 혹시나 궁금(宮禁)을 숙청하여 거가를 맞이할까 바랐더니, 사람의 모의가 좋지 못하였고 하늘이 내리는 앙화가 가시지 않아서 적은 수의 적이 겨우 나타나자 대군이 또 무너지고 군량을 버려 도리어 원수 왜적의 도움이 되었으니, 아아! 우리 역대 성군께서 수백 년 동안 함양한 나머지에 어찌 적개심에 찬 신하가 한 사람도 없습니까! 공론이 아래에 있는 것을 옛사람이 이미 불길하다고 하였으나, 황폐한 풀섶에서 의병을 창도하는 것은 역시 계략상 부득이했음을 알 것입니다. 군부(君父)가 환난 가운데 놓여져 있는데 그 밖의 일을 돌아볼 겨를이 있겠습니까. 거듭 생각하건대, 영남과 양호는 진실로 우리 동쪽 나라의 근저(根柢)입니다. 그런데 영남인즉 의병이 일어나기는 하였으나 중간이 왜적의 굴혈에 막혀 있어서, 곧장 서울에 올라가 근왕(勤王)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호서 1천 리의 땅엔들 어찌 의기 있는 사나이가 없었겠습니까마는, 왜적들이 죽이고 빼앗는 여세에 겁을 집어먹고 역시 자신을 구해낼 겨를조차 없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오늘날 중외에서 믿는 것은 호남 한 도에 있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 막부(幕府 대장 있는 곳)에서 만 번 죽고서라도 기어이 관철해 낼 계획을 세우고 한 지방의 여러 사람을 격려한 결과, 민심은 왕실을 생각하고 열사들이 운집하여 보병과 기병의 수효가 이미 5만 2천에 이르러 바야흐로 북쪽으로의 길을 멀리 몰고 들어가 요사한 왜적의 무리를 소탕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1천 리의 길에 양곡을 운반하는 일은 사사로운 힘으로는 해내기 어렵습니다. 만약 의를 좋아하는 여러 군자들이 힘을 합해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면 비상한 큰 공이 어찌 한 사람의 손에서 다 나올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이 나라의 땅 치고 임금의 땅 아닌 곳이 없습니다. 양호(兩湖)의 군사는 이 나라를 부흥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제공께서는 함께 나라를 위해 따라 죽을 뜻으로 분발하고노적가리를 가리켜 내주던 의기를 다해서 각기 미곡을 내어 군의 식량을 도와 주신다면, 능히 양주(揚朱)와 묵적(墨翟)을 막겠다고 말하는 자 역시 성인(聖人)의 무리일 것입니다. 또 생각하건대, 산골짜기가 험준하고 평탄한 것과 도로가 우회하고 곧고 한 것은 그 고장의 군사가 가리켜 인도하지 않는다면 역시 창졸간에 당하는 곤란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그 고장의 사람을 모집해서 우리 군의 기세를 돋구게 해 주신다면, 비단 종묘 사직의 깊은 수치를 한바탕 씻어버릴 수 있게 될 뿐 아니라 부자 형제로 창이나 화살에 죽은 이들 역시 황천 속에서 눈을 감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일은 비록 어리석은 백성이라 할지라도 다 마음 아파하고 걱정하겠거늘, 하물며 여러 고을의 수재(守宰)들은 다 나라의 은혜를 받았는데 어찌 차마 근왕군의 곤란[秦瘠]을 좌시하겠습니까. 반드시 옷소매를 떨치고 일어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남의 밥을 먹으면 남의 일을 위해 죽는다.” 했거니와, 만약 소식을 듣고 강개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오는 자가 있다면, 원하건대 소반의 피를 입에 찍어 바르고 함께 왕의 일에 종사하겠거니와 혹 한 끼 양식과 자재를 군 앞에 수송해 주어도 역시 한 가지 도움이 될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해서와 관서는 비록 도로가 통하지 않는다고는 하지마는 각각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모집해서 사잇길로 해서 나와 차례로 전해서 일각도 지체하지 않는다면 원근에서 그 소문을 듣고 혹 그것을 믿고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 통문이 도착한 날 여러 고을 향교의 당장과 유사는 각각 한 통씩 베껴서 경내의 선비들에게 전해 그들로 하여금 모르는 사람이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정기록》에 나온다. ○ 고경명과 김천일(金千鎰), 양산숙(梁山璹)과 곽현(郭玄)을 시켜 출사표(出師表)를 받들고 서해로 해서 행조(行朝)로 보내다. 그때 적병이 5, 6도(道)에 가득 차 있었고 경기와 황해가 더욱 심했기 때문에 서쪽으로 가는 길이 끊겼었는데 이때에 와서 비로소 수로가 통하게 되었다.15일. ○ 좌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이 전주(全州)로 나아가 진을 치고 의병을 불러 모았으며, 이어 본도의 여러 고을에 글을 보내 이르다.대장이 급히 구원을 요청하기 위한 것이다. 국가의 일이 이러한 극단에 이르렀으니 오늘의 소망은 오직 의병을 일으키는 데 있는데, 불러 모인 수효는 수백에 불과하다. 비록 강개(慷慨)에 찬 뜻이 당당하여 범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성세가 떨치지 않으니, 관군이 조력하는 것이 아니면 만전지계가 아닌 것 같다. 조전군(助戰軍)은 다소를 불구하고 단지 정예한 것을 택하고 전일 낙오한 사람을 극력 불러모아 충의로써 타일러 주야를 불문하고 급히 구원하러 보낼 것이다.○ 전라 감사 이광(李洸)이 김수(金睟)와 더불어 전주로 도망해 돌아오다. 김수는 곧 함양(咸陽)으로 향하여 이어 거창에 도달하니, 그때 김성일(金誠一) 역시 본현에 머물러 있었다.○ 전라 병사 최원(崔遠)이 군사 2만여 명을 동원하여 본도 우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의 군사 2천과 함께 근왕군으로 서울로 향하다.○ 도원수(都元帥)가 팔도에 전한 격문은 다음과 같다.군대를 일으키는 데 있어서는 곧아야 씩씩해진다. 바야흐로 왜적을 토벌하는 계획을 넓히고 의가 병들기 전에 서둘러야 하니, 감히 근왕하는 일을 늦추겠는가. 무릇 우리 동지들은 각기 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 생각건대, 우리 국가는 신성한 임금이 계승하여 거듭 밝아 태평세월이 계속되어 누누이 백성들에게 인정(仁政)의 은택이 젖어 있고, 음우(陰雨 위험한 일)에 앞서 선처하여서 수천 리 땅에 옥촉(玉燭 계절 따른 기후)이 고루 조정되어 2백 년 동안 금사발[金甌 국가의 계승된 왕실]에 흠이 없었으므로 장차 안으로는 태평하고 밖으로는 안정되기를 기대하였더니, 도리어 문관은 안일에 흐르고 무장은 장난으로 여기게 되었다. 준동하는 저 바다섬의 간악한 오랑캐는 사실 천지간의 추악한 종자로, 처음에는 중국에 감정을 품고서 하늘을 쏘는 활을 당기려고 하다가 끝내는 우리나라에 앙화를 전가시키고 감히 사람을 씹는 부리를 놀렸다. 요(堯) 임금을 보고 짖는 개가 진(秦) 나라에 사람이 없다고 하는 격으로, 저녁 봉화가 겨우 한궁(漢宮)에 도달하였는데 요사한 독기는 이미 상령(商嶺)을 둘러쌌다. 장강(長江 양자강)의 험한 요새를 잃어버렸으니 진실로 군대의 율법이 엄하지 않은 때문이었고, 임금이 몽진하였으니 조정의 계획이 길하지 않았음을 넉넉히 볼 수 있다. 종묘와 사직이 재로 타버리고 조정과 저자가 변천하였으며, 심한 독이 여염에 두루 미쳤고 더러운 소문이 원근에 뚜렷이 드러났다. 귀신과 사람의 분노가 이미 극도에 도달하였으니, 군부(君父)의 원수를 잊을 수 있겠는가.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여러 성이 흙같이 무너지는데 오직 성문을 열고 맞이해 절할 줄만 알고 뭇 장수들은 담이 떨어졌으니 누가 용기를 내어 먼저 나설 수 있겠는가. 우리가 고수하겠다는 마음을 잃어버리고 저들이 멀리 몰고 들어오는 위세를 도와 주었으니, 주여숙(柱厲叔)이 이것을 보았다면 어찌 예전에 알던 사람을 기다릴 것인가. 만일 안진경(顔眞卿)이 다시 살아난다면 마땅히 무슨 꼴을 할 것인가. 하물며 지금 저 왜적들은 미쳐 날뛰고 교만하고 게을러져 있으며 들떠 붙어 살고 외로이 매달려 있다. 힘은 이미 싸우고 공격하는 데 지쳐버렸으니 그 기세는 반드시 오래 가기 어려울 것이고, 욕망은 오직 약탈에만 있으니 뜻도 또한 알 수 있는 것이다. 한실(漢室)을 생각하는 이들은 앞다투어 노래를 바치고 적에게 붙었던 자도 또한 대부분 헤어졌으니, 이미 죽을 길에 놓인 도적이 되어버려 구차하게 살아날 꾀도 지니지 못하게 되었음에랴. 세성(歲星 5성의 하나, 목성(木星))이 기(箕 별자리 이름)의 분야를 지키니 복덕(福德)이 내릴 징조가 있음을 알겠고, 큰 하늘이 송(宋)을 도우니 어찌 나라를 회복하는 데 기약이 없으랴. 지금 나는 외람되이 추곡(推轂 대장에 임명하는 의식)하는 은혜를 받들고 흉적을 제거하는 책임을 전적으로 위임 받아 여러 도의 도순찰사를 겸임하여 군사 3천을 거느리고 이달 10일에 행재소를 배사(拜辭)하고 곧장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서 수레를 뛰어 넘던 날랜 사람들은 태반이 장교로 편입되었고, 관서의 장수를 넘어뜨리던 인재가 다 부오에 예속되어 있어 3군의 사기가 점차 진작되고 만민의 마음이 약간 소생했다. 이는 진실로 한 나라의 신자(臣子)가 마음을 합하고 힘을 다해 몸을 잊고 순국할 때인 것이다. 생각건대, 각 도의 관찰사와 절도사들은 혹은 지방의 전권을 장악하고 혹은 병권을 위임 받아 한 도에서 많은 군대를 가지고 있으니, 어찌 막고 보호하는 정성을 잊을 것인가. 서방(西方)에 미인(美人)을 바라볼 때에 드는 생각이 눈물을 뿌리는 아픔에 간절할 것이다. 의당 범이나 사자 같은 군대를 거느리고 뱀이나 돼지 같은 무리를 함께 쓸어내야 할 것이다. 수미(首尾)로 협공하여 번갈아 기각(掎角 두 편에서 서로 잡아당겨 협공으로 포획함)의 태세를 이루고 동서로 함께 진격하여 입술과 이와 같이 지원한다면, 구멍에 든 개미가 된 격이니 도망칠 수 있겠는가. 솥 안에 든 물고기가 된 형편이니 뭉글어뜨릴 것이다. 아래 옷을 찢어 발을 싸매고서라도 어찌 천리길의 수고를 꺼릴 것인가. 머리를 풀어 헤친 채 갓을 매어 쓰고서라도 한 집안을 구하는 데에 서둘러야 할 것이다. 각기 세상에 보기 드문 은혜를 갚고 힘써 비상한 공훈을 세울 것이니, 힘쓸지어다. 시기를 놓치지 말도록 하라. 때는 두 번 얻기 어려우니. 운운.그때 김명원(金命元)이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흩어진 군사들을 거두어 순안(順安)에서 왜적을 막고 있었다.23일. ○ 이 광(李洸)은 전주에서 본주(本州) 사람 문관(文官) 이정란(李廷鸞)을 주의 수성장(守城將)으로 하여 이웃 읍의 군사를 모아 계엄을 펴고 왜적의 변란에 대비하게 하였고, 또 남원(南原)에 전령하여 군사를 모아 성을 지키게 하였다. 그때 본부(本府)의 선비들이 흩어진 군졸을 모집하여 향병(鄕兵)이라 칭하고 전 목사 정염(丁焰)을 장수로 추대하였다.○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이 전주로부터 여산(礪山)으로 향발하여 비밀리 장병들과 의논하기를, “금산과 무주의 왜적이 이미 용진(龍鎭)으로 향했으니 이것은 틀림없이 전주와 남원에 뜻이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대군이 본진(本鎭)을 다 떠나가야 할 것이니 노약자만을 남겨서 수비시킬 것이다. 우리 군대가 진산(珍山)으로부터 그 자들이 생각하지 않은 곳으로 나가 나머지 무리들을 다 죽여버리고 뒤쫓아 추격하면, 그 왜적들은 전진해도 거점을 얻지 못하고 후퇴해도 돌아갈 곳이 없어 중도에서 낭패하여 스스로 황산(荒山)의 패전을 초래할 것이다.” 하고, 군사를 이끌고 은진(恩津)의 연산(連山)을 향해서 떠났다. 같은 진의 군량색(軍糧色)을 고목(告目 천한 사람이 높은 이에게 올리는 글)하기를, “가지고 있는 군량은 여산군(礪山郡)에서 수납(輸納)하겠나이다.” 하였다. 색리(色吏)는 남원의 색리이고 군량은 남원의 군량이다. 대체로 의병을 돕는 일은 각 읍이 다 그러했다. 대장의 행차가 22일 전주를 떠나 23일 여산에 머물렀다. 당일 도부(到付)한 금산의 전통(傳通)에, 옥천(沃川)의 양산현(陽山縣)을 분탕질한 왜적이 본군을 지향해 와 진을 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24일 동군(同郡)의 전통에는, 10리 거리에 진을 칠 것이라 했고, 서울의 왜적은 신립(申砬)과 윤두수(尹斗壽)가 각각 좌우 대장이 되어 1천여 명을 잡았다는 것이었으며, 여산군수가 구전(口傳)한 내용은 의병이 은진ㆍ연산ㆍ금산으로 지양한 것과 우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의 행차와 병사(兵使)가 일시에 직산(稷山)으로부터 진위(振威)로 향한 것이었다.○ 전라도 의병장 행 부호군(行副護軍) 고경명(高敬命)이 본도 도순찰사(都巡察使) 절하(節下 순찰사를 말한 것)에 다음과 같이 격문을 발송하다.섬 오랑캐가 난리를 일으켜 임금의 행차가 멀리 순행길을 떠나시니 중외(中外)에서 믿는 것은 오직 호남(湖南)밖에 없는데, 겨우 군사를 일으키라는 어명(御命)을 받들자 갑자기 근왕(勤王)하는 군대를 해산하라고 하니 절하의 마음 속에는 반드시 어떤 계획이 있어서 그렇겠지만 절하의 실지 행동에 있어서는 납득될 만한 것이 없지 않습니까. 조정의 명령은 비록 막혀 끊어졌다 하더라도 한 도내의 물의도 역시 두려운 것이외다. 지난번 용인(龍仁)에서 무너진 것은 실로 선봉장이 패전한 때문이었으나 절하가 주장(主將)이 되어 있는 이상 그 책임을 모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절하는 오늘의 입장에 있어 어떻게 계획하시렵니까? 행여 지나간 실패를 잘 수습하여 주상전하의 남쪽에 대한 근심을 덜어드림으로써 기왕의 허물이 씻겨지고 새로운 업적이 역사에 찬란하게 된다면, 비단 성조(聖朝)에서 난리를 다스리고 정상으로 돌려놓는 기초일 뿐만 아니라 절하에 있어서도 역시 화가 복이 되는 날일 것이외다. 본도 의병이 당초 북도로 향해서 난리를 평정시키고 전하의 행차를 모셔 오려고 했었는데, 길에서 들으니 윤 정승[尹左相]이 서ㆍ북의 정병을 거느리고 서울에 머물러 있는 적을 토벌한다 한즉, 북방의 일은 염려가 없음이 거의 보증됩니다. 그러나 호서(湖西)의 적이 금산(錦山)으로 들어오는데, 방어할 군사가 아직도 용계(龍溪)에 주둔하고 한 사람도 다짐하며 앞서 나오는 자가 없으니, 절하가 이 시기에 있어 진정 병력을 널리 모집하여 형세를 크게 벌리지 않으시면 가엾은 우리 호남 한 지방 백성들은 모두 적의 칼날에 목숨을 빼앗기고 말 것이외다. 그렇게 되면 절하는 위로 국가를 회복하지 못하고 아래로 강회(江淮)를 보장(保障)하지 못하고 있다가, 하루아침에 적이 다 쓰러지고 전하께서 돌아오시어 교서(敎書) 한 장을 내려 사방에 포고한다면, 비단 호남 사람들만 천지간에 용납되지 못할 뿐 아니요 절하 역시 무엇으로써 충성을 바치고 허물을 보상하겠습니까. 절하가 혹 저 왜적이 워낙 사나워서 맞붙어 싸우기 어렵다고 군사를 나누어 험한 곳을 지켜 쳐들어오는 적을 막고 때로 기병(奇兵)을 내어 그 날카로운 기세를 꺾어 버리면, 적의 성집이 경망하고 조급한지라 지구전은 계속하지 못할 것이니 열흘이 넘지 않아서 큰 공을 이룰 수 있는 것이외다. 다 같이 왕의 신하가 되어 나랏일을 함께 하는지라, 피차의 사이가 있을 수 없고 형세를 서로 의지하는 처지니, 각자 소견을 자세히 참작해야 할 것인즉 부디 계획을 잘하여 후회를 끼침이 없기 바랍니다. 《정기록(正氣錄)》에 나온다. 고종후(高從厚)가 지었다. 임진년 6월 일 만력(萬曆 명(明) 나라 신종(神宗)의 연호) 20년 전라도 의병대장 행 부호군 고경명(高敬命)은 해남(海南)ㆍ강진(康津) 두 고을의 사군(使君)으로 있는 의병장 휘하에 다음과 같은 격문을 보냈다.나 고경명은 전일 추성(秋城 담양(潭陽))에서 의거(義擧)하던 당시에 가슴속의 끓는 피를 편지 한 장에 쏟아서 각 읍 수령에게 두루 고하여 함께 어려운 고비를 극복해 나가자고 호소했으나, 정성이 사람을 감동하지 못해서 아무리 외쳐도 반응이 없으니 초야의 인생이 다만 빈주먹만 두들길 뿐이어서 무기와 군량의 뒷받침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던 참이었습니다. 이윽고 들은즉 격문을 받아 보고서 정병을 내어 응원해 준 사람은 호남 50주(州) 중에 유독 두 고을의 원님이 있어, 그 소문이 미치는 곳마다 사기가 백배나 더함과 동시에 정의의 군사를 기다려서 적의 무리를 쓸어버리려 했던 것이외다. 그런데 뜻밖에 병사(兵使)가 격문을 띄워 부르고 있으니 앞으로의 거취가 자유스럽지 못할까 깊이 염려됩니다. 지금 금산의 왜적이 청진(淸鎭)의 왜적과 형세가 서로 연접되어 나아가고 물러가는 것이 자유로우므로, 한 부대는 이미 용담(龍潭)을 함락시키고 또 한 부대는 무주(茂朱)를 함락시켜 세 군데 소굴을 만들고서 완산(完山 전주(全州))을 침범하기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완산 고을은 비단 호남 지방의 근본이 될 뿐만 아니라 진전(眞殿)을 모신 곳으로서 실로 우리 성조(聖朝)의 발상지이므로, 나 고경명은 의기(義旗)를 그쪽으로 돌이켜 적의 칼날을 방어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본즉 저 왜적이 본래 잔꾀가 비상한데다 진산(珍山)의 병력은 극히 약하니, 만약 적으로 하여금 진산ㆍ연산(連山) 같은 험하고 좁은 곳을 넘어서서 은진(恩津)ㆍ여산(礪山) 같은 평탄한 길로 돌진하게 한다면 어찌 다만 호남만 앞뒤로 공격을 받을 뿐이겠습니까. 금강(錦江)의 군사마저 장차 동요가 될 것이외다. 그래서 호서(湖西)가 불통되고 적의 세력이 치성하면 호남의 군량을 어떻게 수원(水原)에 수송할 것이며, 이때 본도 병사 최원(崔遠)ㆍ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이 군사를 거느리고 수원에 주둔하였다. 조정의 소식을 어떻게 사방에 전달하겠습니까. 이에 군사를 옮겨 진산으로 들어가서 금산(錦山)에 있는 적의 후방을 공격하여 용담ㆍ무주의 적으로 하여금 뒤를 돌아보는 염려를 버리지 못하게 하고, 서서히 두 고을 군사를 기다려서 곧장 적의 굴혈을 엄습하여 흉악한 무리들로 하여금 나아가나 물러가나 근거가 없게 만들어 놓으면, 국가를 보전하는 상책이 될 뿐만 아니라 이 역시 완산부(完山府)를 구원하는 하나의 좋은 계책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공들이 지금 만약 예전 상도만을 고수하고 변통할 줄을 모른다면 나 고경명 역시 군사는 외롭고 힘은 적어서 선뜻 움직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호남의 적도 쉽게 전제(剪除)할 수 없고 수원의 아군이 혹시라도 또 시일만 허송하게 될 것입니다. 병사가 거느린 군사는 모두 호남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만약 적의 무리가 오늘에 아무 지대를 통과하고 내일에 아무 현(縣)에 침입한다는 소문을 듣는다면, 식량은 공급되지 않고 군의 정세는 흉흉할 것이니, 이야말로 목전에 닥친 위급이라 비록 지혜있는 자가 아니라도 짐작하고 남음이 있을 것이외다. 그렇다면 두 원님이 합세해서 금산의 적을 치는 것은 다만 호남을 보장하는 계책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병사를 위하여 서로 응원하는 꾀도 될 것입니다. 옛 사람의 말에, “장수가 밖에 있어서는 경우에 따라 임금의 명령도 받지 않을 수 있다.” 하였으니, 이는 일의 기미에 임하여 융통성이 있는 것을 귀하게 여김이요, 마치 교주고슬(膠柱鼓瑟 변통할 줄 모른다는 뜻)하듯이 외곬으로 나가는 것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 병사가 멀리 천리 밖에 있어 이 도리를 알지 못하고 지극히 위급한 처지에 빠졌으니, 어찌 가까운 데 있는 적을 버리고 후회를 남겨서야 되겠습니까. 사사로운 생각으로는, 두 원님이 위로 수원의 기한에도 미치지 못하고 아래로 금산의 약속도 돌아보지 않는다면 뒷날의 공론이, “적의 칼날을 도피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하지 않겠습니까. 원컨대 스스로 계획을 잘해서 남의 비난을 듣지 말도록 하시오. 《정기록(正氣錄)》에 나온다. 고종후(高從厚)가 지었다. ○ 재상(宰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올리다.양산(梁山)ㆍ밀양(密陽)이 연달아 함락된 뒤로 적의 군사가 승세를 타서 이미 거침없이 몰고 갈 기세가 있다는 것을 듣고, 식자 계급에서는 적들이 우리의 허점을 찔러 곧장 올라갈 것을 근심하여 간담이 써늘하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순찰사(巡察使)가 나주(羅州)에 있을 적에 사람들이 모두 하루빨리 군사를 이끌고 서울로 들어가서 응원해 줄 것을 바랐고 광주 목사(光州牧使) 정윤우(丁允祐) 역시 순찰사를 보러 가서 빨리 근왕(勤王) 길에 나가야 한다는 것을 역설했으나, 순찰사가 막연히 들으며 염려하지 아니하니 정 공이 민망히 여기며 그저 물러 나오고 온 도내 사람들은 한갓 두 주먹만 움켜쥐며 통분해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징병하라는 교지가 내리자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모르고 온 도내 군사를 모두 일으켜 일제히 여산(礪山)으로 치닫게 하였는데, 집합 일자는 너무 촉박하고 겸하여 장맛비가 열흘에 걸쳐 내렸습니다. 그러자 각 읍의 수령들은 기약에 뒤졌다는 꾸지람들을 받을까 두려워서 길에서 마구 몰아쳐 밤낮 없이 달리는지라 군사들은 배고픔과 목마름이 자심하여 스스로 길가에서 목을 매어 죽는 자까지도 있었으니, 그 괴로운 형상이 이처럼 심했습니다. 그러나 감히 원망하고 배반하지 않는 것은 모두 근왕(勤王)의 일이 시급하여 정의로써 군사를 일으킨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순찰사가 공주(公州)에 당도하여, 서울이 지켜지지 못하고 임금께서 서도(西道)로 떠나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 한 군관(軍官)을 시켜서 손에 전령패(傳令牌)를 가지고 말을 달려와 외치게 하기를, “진을 파하라. 진을 파하라.” 하니, 모든 군사가 아연하지 않는 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두 수령이 공주로 달려가서 순찰사를 보고 진을 파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말했으나, 순찰사가 듣지 않았습니다. 이에 모든 군사가 한꺼번에 모두 흩어져 함부로 욕하고 길에 가득히 들어차서 모두 하는 말이, “순찰사는 근왕에 전력할 뜻이 없으면서 다만 우리들만 괴롭힌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로부터 군중들이 모두 짜증을 내며 비로소 해산할 생각이 나자 마치 물이 내리 쏟아지듯 하여 억제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 후 두 번째 군사를 징집하게 되자 여러 고을의 군사 중에 도중에서 무너져 흩어진 자가 서로 잇달았으며, 비록 더러 불러서 집합시키기도 했으나 막 집합시켜 놓으면 바로 무너져 그렇게 하기를 두 번 세 번 가도 그치지 않았습니다. 광주로 말하면 박광옥(朴光玉) 군과 더불어 흩어져 도망간 군사를 분주히 개유(開諭)하고 수습해서 천자(賤子)인 고종후(高從厚)와 고인후(高因厚)로 하여금 나누어 거느리고 수원(水原)의 전소(戰所)에 가서 광주 목사에게 교부(交付)하게 하였습니다. 이때에 순찰사는 도중에서 머뭇거리며 모든 군사를 돌려 진위(振威)에 당도하여 4, 5일 동안 유숙하노라니 사람은 모두 비를 맞고 서 있었습니다. 용인(龍仁) 싸움에 이르러 왜적의 군사는 수도 적고 형세도 궁해서 산마루 험한 곳에 진을 치고 울을 막아 스스로 방위하고 있는데, 충청도 순찰사ㆍ절도사의 병력과 전라도 순찰사ㆍ방어사의 병력이 수효가 십만으로 헤일 만하니 그런 조그마한 무리쯤이야 족히 깃발 한 번 휘두르면 박멸할 수 있었을 것이어늘, 불행히도 백광언(白光彦) 등 여러 사람들이 적을 경솔히 여겨 먼저 올라가다가 한꺼번에 진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대부대가 아직 건전한 이상 승리를 거두는 것이 어렵지 않았는데, 갑자기 3명의 왜적이 앞장서서 곧장 전진하는 것을 보고서 충청 절도(忠淸節度)의 군사가 먼저 무너지고 여러 진이 계속 무너져 화약ㆍ총통(銃筒)ㆍ전마(戰馬)를 모두 적에게 버려두었습니다. 나 고경명이 몸소 전사(戰士) 4, 5명을 만나본 바 매우 자상히 말하는데 마치 약속이나 한 것같이 모두 동일하며, 장성 현감(長城縣監) 백수종(白守宗)이 하는 말도 역시 전사들과 서로 같았으니, 고금 천하에 싸우다 패한 자가 퍽 많지만 이와 같이 통분하고 애석한 일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순찰사는 겨우 몸만 빠져 나와서 충청도 내포(內浦)를 경유하여 임피(臨陂)에 당도하자 곧 도내 열읍에 공문을 띄워 정병을 징발하여 바닷길로 임진(臨津)에 도달하려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소란하여 선뜻 명령에 응하지 아니하니 비록 억압하여 몰아댄다 해도 마침내는 반드시 전과 같이 분산될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순찰사가 지금 태인(泰仁)에 있으면서 의논할 일이 있다고 칭탁하고 격문(檄文)을 띄워 좌수사(左水使) 이순신(李舜臣)과 무주(茂朱)의 조방장(助防將) 이계정(李繼鄭)을 불러 모두 태인에 모이게 하였는데, 태인은 좌수영(左水營)과의 거리나 무주와의 길이 모두 너무 머니, 오늘날 적병이 국내에 밀어닥쳐 변란이 숨 한 번 쉴 만큼 짧은 시간에 달려 있는데 순찰사가 의논한다는 일이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나 고경명이 이때 전주에 있으면서 이계정이 달려 가는 것을 보고 또 각관(各官)에서 전달한 보고를 얻어 본즉, 왜적이 무주의 속현(屬縣)에 들어와 민가를 불태웠고 적의 배 두 척이 또 순천(順天)에 침범하여 온 경내가 계엄 속에 들었으니, 대개 왜적이 우리나라 사람을 이용하여 간첩으로 삼기 때문에 빈틈을 타서 몰래 들어온 것입니다. 순찰사의 전후 처사를 더듬어 보면, 실로 그 의도가 무엇을 하려고 함인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도사(都事) 최철견(崔鐵堅)ㆍ부윤(府尹) 권수(權燧)를 만나본즉, 이때 최철견은 전라 도사가 되었고, 권수는 전주 부윤이 되었다. 역시 순찰사의 의도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하니 괴이한 일이요, 통분할 일입니다. 당초 병사(兵使) 최공(崔公)이 의병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기쁨을 얼굴에 나타내며, 도울 수 있는 일이면 힘을 다했습니다. 그때 순찰사가 다른 지방으로 나가 있었기 때문에 병사는 순찰사에게 공문을 보내 각 고을의 남은 무기를 의병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의병을 일으킨 후로 약간의 무기를 지나는 여러 고을에서 얻었으나 대개는 묵고 헐어서 쓰지 못할 물건들이며 그나마 수효도 많지 않아서 일행 중에 군관(軍官)까지도 다 갖지 못했는데, 하물며 싸우는 마당에 쓸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 듣자니 순찰사가 용인에서 패전한 후부터는 매양 본도의 인심이 고약하다고 트집을 잡으며 오직 도망친 군사들에게만 허물을 돌리어 뒷날 자신을 합리화할 계책을 하고 있다가, 마침내 의병이 한 번 일어나서 모집에 응하는 자가 구름같이 모이는 것을 보고서 순찰사가 마음이 몹시 달갑지 않아서, “군고(軍庫)를 함부로 열었다.” 하고 명목을 잡는데 까지 이르고 있으니, 참으로 괴이한 일이요 두려운 일입니다. 무릇 수령 가운데 의거에 따르기를 원하는 이도 역시 많으나 순찰사에게 간섭을 받아[掣肘] 끝내 의병 노릇을 할 수 없게 되고 수령들도 또한 순찰사의 행동을 본받은 자가 있어 다방면으로 저해하여 의거에 참여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좌절시켜서 심지어 의병 모집에 응한 자의 처자를 잡아다 가두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래도 다시 종군을 하고 떠나려고 하지 않으니 진실로 슬픈 일입니다. 요즘에 각 도의 근왕군(勤王軍)은 한 번도 왜적과 더불어 싸운 일이 없이 양경(兩京)을 잿더미로 만들었으며, 마침내는 적이 무서워서 임금을 버리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취화(翠華 임금의 수례)가 길을 떠나 멀리 함경도[咸關]로 순행하고 계시니 구구히 기대할 바는 오직 의병을 한 번 일으키는 데 있거늘, 순찰사의 뜻이 이와 같고 조정은 천리 밖에 떨어져 있어 대궐 문앞에 나아가 호소할 길이 없은즉, 원한을 품고 스스로 불칙한 죄망에 걸려 죽을까 심히 두렵습니다. 믿는 바는 먼 데나 가까운 데나 모두 소문을 듣고 호응하여 힘세고 날랜 자들이 발이 부르트도록 쉬지 않고 모여들고 있으니, 오직 벌판에 나아가 눈물을 뿌리며 이 심정을 밝힐 것을 생각할 따름입니다.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는 것은 고금의 정론이니, 성공하고 못할 것은 계산할 바가 아닙니다. 오직 바라건대 상공(相公)은 비생(鄙生)의 일편단심을 통찰하시어 곡단(曲端)과 같이 원통하게 죽지 않도록 하여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태헌(苔軒)의 수초(手草)로 《정기록(正氣錄)》에 나온다. 가을 7월9일. ○ 이광이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을 남원(南原)의 수성장(守城將)으로 임명하였는데, 권율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남원을 지키면서 도내 각 읍에 공문을 띄워 이광이 근왕(勤王)하는 데 오지 않은 죄상을 들어 공격하기로 하였다.10일. 전라좌도 의병대장 고경명(高敬命)이 금산(錦山)에서 적을 토벌하다 패하여 전사하다. 하루 앞서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과 군사를 합하여 좌ㆍ우익을 만들어 금산 성문 밖 10리 지점에 나가 진을 쳤다. 고경명이 먼저 날랜 기병 수백 명을 발동하여 들락날락하며 적을 쏘아대는데, 군관 김정욱(金廷昱)이 말에서 낙상하여 후퇴해 달아나자 적의 군사가 그 기회를 타서 육박하므로 우리 군사가 차츰 퇴각했다.석양 무렵에 이르러 적병이 성 안으로 들어가므로 고경명이 재주 부리는 사람 30여 명을 시켜 성 밑으로 토성(土城) 들어가게 하고, 성 밖의 관사와 민가를 모두 불태웠다. 또 진천뢰(震天雷 대포(大砲))를 쏘아 성 안의 창고를 불태우니, 적에게 사로잡혀 간 부녀자들이 물을 길어다 불을 껐다. 해가 저물자, 각기 군사를 거두어 진을 치고 지켰다.이튿날 동틀 무렵에 관군ㆍ의병 여러 진이 적의 처소로 진격하였다. 고경명은 추촌(楸村) 앞산에 웅거하여 진지를 정하고 곽영은 사직당(社稷堂) 뒷산에 머물러 결진하여, 관군은 북문에서 싸우고 의병은 동문에서 싸웠다. 적의 무리가 마침내 진지를 비우고 나와 고함치는 소리가 하늘에 연이어지니, 형세가 바람 앞에 불길과 같았다. 먼저 관군에게 덤벼드니, 선봉장 영암군수(靈嵒郡守) 김성헌(金成憲)이 말을 달려 먼저 달아났다. 적이 인하여 광주(光州)ㆍ흥덕(興德) 등의 진을 육박하니, 곽영이 관망하다 도망해 달아났다. 의병의 진도 따라서 무너지고, 고경명 및 그 아들로 문신인 고인후(高因厚)와 종사관 유팽로(柳彭老), 장서기(掌書記)인 유학 안영(安瑛) 등이 다 죽었다. 고경명의 큰 아들 전 현령 고종후(高從厚)는 무너져 흩어질 적에 아버지와 아우가 죽은 것을 알지 못하고 무너지는 군사 속에 끼어 나왔기 때문에 죽지 않았다.○ 그 후 고종후가 이적(李適)에게 답장을 냈는데 다음과 같다.섬 오랑캐가 난리를 꾸며 임금께서 멀리 파천해 계시니 한 집안의 삼 부자가 함께 벼슬에 오른 이상, 재주는 비록 천박하나 차마 앉아서 국가가 전복되는 것을 볼 수 없어 도내 인사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것입니다. 저 고종후는 죽은 아우와 더불어 먼저 본주의 무너진 군사들을 개유시켜 거느리고 가서 수원(水原)의 진에 부속시키고, 장차 평양으로 향하려 하다가 길이 막혀 돌아왔습니다. 죽은 아우는 와서 담양[秋城]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날에 참여했고, 저 고종후는 여산(礪山) 중로에서 병이 들어 고생하다가 와서 태인현(泰仁縣)을 거쳐 폐한 금구현(金溝縣)에 당도하여 인원을 모집하는 한편, 바닷길로 격문을 제주도에 전하여 사슴 쫓는 빠른 말을 보내 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죽은 아우는 선친(先親)을 모시고 전주[完山]로 향하여 남원 일대의 군사와 회합하고 저 고종후는 김제(金堤)ㆍ임피(臨陂) 등 고을을 경유하여 군사를 모집하고 군량을 수합해서 여산에 모이기로 기약했습니다. 죽은 아우는 또 전주로부터 휘하(麾下) 용사를 거느리고 진안(鎭安)ㆍ무주(茂朱) 등지에 복병하여 영남에서 침범하는 적의 군사를 막았고, 선친은 여전히 전주에 머물러 변을 대기하였던 것입니다. 얼마 안 되어 무주에 침범했던 적병이 도로 영남으로 향한 연후에야 비로소 군사를 정돈하여 북으로 올라갈 계획을 하고 삼 부자가 여산(礪山)에 모여 호서(湖西)ㆍ경기(京畿)ㆍ해서(海西)에 격문을 띄워 평안도에 전달되게 하고서 길을 떠나 은진(恩津)에서 유숙하고 장차 이산(尼山)으로 향하려 하는데, 황간(黃澗)ㆍ영동(永同)의 적이 금산(錦山)을 넘어왔다는 말을 듣자 휘하 군사들이 모두 돌아가서 본도를 구원하려 하였습니다. 상의한 끝에 연산(連山)으로 나가 주둔하여 험하고 굳건한 지대를 점령함으로써 양호(兩湖)의 군사와 양식을 바탕 삼아 서서히 적의 형세를 관찰하여 남으로 내려가든지 북으로 올라가든지 하자 하고, 마침내 연산으로 향하여 두 길을 보려고 했습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전주부의 형세가 날로 급하므로 부득이 군사를 옮겨 진산군(珍山郡)으로 들어갔다가, 진산에서 금산으로 들어가서 방어사와 군사를 합하여 좌우익을 만들어, 의병이 종일토록 고전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적에게 밀려 10여 리를 후퇴해 달아났다가 도로 적병을 토성(土城)에서 제압하여 성 밖의 객사(客舍)를 불태우고 진천뢰(震天雷)를 써서 성 안의 창고를 연소시키니, 적에게 사로잡혀 간 부녀자들이 힘을 합해 물을 길어다 불을 껐습니다. 관군이 만약 힘을 합하여 격전했다면 싸움이 하루도 다 걸리지 않았을텐데, 관군이 힘을 쓰지 아니하고 또 해가 저물자 싸움을 중지하니 방어사가 진산 군수를 보내 내일의 일을 의논하였습니다. 저 고종후가 부친께 말씀드리기를, “오늘은 우리 군사가 이득을 보았으니 이 이긴 기세를 타서 군사를 온전히 하여 회군했다가 형세를 보아 다시 와서 들락날락하며 적을 곤란하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적과 대치하여 이 밤을 묵는다면 밤중에 적이 쳐 들어올 염려가 있습니다.” 하였더니, 부친께서 말씀하시길, “너는 부자의 정으로써 내가 죽을까 두려워하는 모양이나, 나는 국가를 위하는 일인데 한 번 죽은들 무엇이 유감되랴.” 하시므로, 저 고종후가 감히 더 말씀드리지 못하고 물러났으며, 방어사는 이날 저녁에 여러 장수들 중에서 힘껏 싸우지 아니한 자를 치죄하였습니다. 적들은 이날 밤에 의병의 진영을 침범하기로 모의하고 있었는데 복병해 있던 우리 장교가 듣자니, 사람이 물 건너는 소리가 나므로 한 졸병을 보내 밭 가운데서 기다려 보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먼저 와서 밭 가운데 잠복해 있던 왜적이 이를 보고서 자기들의 계획이 의병에게 발각되었다고 여겨 마침내 후퇴해 달아났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진격하였는데, 적의 떼가 갑자기 자기 진을 비우고 몰려와 우리 방어진(防禦陣)의 여러 장수에게 덤벼드니, 영암 군수(靈嵒郡守) 김성헌(金成憲)이 대번에 말을 채찍질하여 달아나서 한 번도 맞서지 못하고, 광주(光州)ㆍ흥덕(興德) 두 진도 모두 포위를 당하자 방어진은 바라만보고 무너졌습니다. 의병의 큰 진은 방어진과 서로 바라보며 마주 진치고 있었으므로 이미 그들이 후퇴해 달아난 것을 알고, 오히려 단독으로 적을 당할 계획을 하고 있었습니다. 싸움에 나간 의병이 관군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드디어 퇴각해 달아나 중군진으로 들어와서 진중이 소란했으나, 아직도 든든히 마음을 갖고 대기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사람이 뒤에 와서 방어진을 바라보고 문득 놀라며 외치기를, “방어가 퇴각해 달아났다.” 하자, 의병의 진이 드디어 무너져 흡사 거센 물결이 가로지르는 듯하여 다시 억제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의병의 진이 무너지지 않았을 때 선친은 맨 가운데 계셨고 저 고종후는 한쪽 가에 있었으며, 죽은 아우는 독전소(督戰所)로부터 와서 한쪽 가에 있었는데, 무너질 때 저 고종후의 말이 가시덤불에 걸려 넘어져서 말을 다시 굴레 지어 가노라니 여러 군은 이미 멀어져서 그 뒤를 따라 달려갔습니다. 그래서 부자 형제를 서로 잃고 홀로 구차히 살아서 오히려 말하고 밥먹으니 천지에 죄를 진 몸이라, 날로 신의 꾸지람을 기다릴 따름입니다. 선친이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말타기가 익숙하지 못하니 불행히 싸우다 패하면 오직 죽는 것밖에 없다. 우리들이 성공하고 못하는 것에 국가의 안위가 매여 있으니 어찌 한 몸의 화와 복에 그칠 따름이랴.” 하셨습니다. 군사가 무너지던 날 말에서 떨어져서 말이 빨리 달아나니 모시고 가던 유생(儒生) 안영(安瑛)은 작고한 판서(判書) 이후백(李後白)의 외손인데 말에서 내려 자기의 말을 바치고 걸어서 따라가다가 안영도 역시 적의 손에 죽었습니다. 종사관(從事官) 유팽로(柳彭老)가 건장한 말을 타고 먼저 나와서 그 종에게 묻기를, “대장이 포위망을 벗어났느냐?” 하니, 종이 답하기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하였습니다. 유팽로가 즉시 고삐를 돌려 말을 채찍질하여 선친을 난군(亂軍) 속에서 시종하니, 선친이 돌아보고 말씀하시기를, “나는 반드시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인데 그대는 어찌하여 먼저 나가지 않는가.” 하자, 유군이 대답하기를, “내 어찌 대장을 버리고 구차히 살려 하겠습니까?” 하고, 여러 번 말해도 선뜻 가지 아니하고 종시 보호했던 것입니다. 아! 통분하외다. 불초한 몸이 능히 전장에서 죽지 못하고 유독 두 열사로 하여금 선친과 같은 날에 죽게 하였으니 천지간에 한 죄인이라, 통곡밖에 무슨 말을 하리까. 아우는 뒤에 떨어져서 이미 무너진 군사를 정돈하려 하다가 진에서 죽었고, 군사들은 모두 먼저 달아나서 다행히 함께 죽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의병과 승군(僧軍)의 조력을 얻어 시체를 수습해 왔으며 선친도 변을 당한 즉시 몰래 산중에 매장했다가 역시 의병과 승군의 주선을 입어 입관(入棺)해 와서 두 상(喪)은 이미 고이 장사지냈으니 불초는 비록 죽어도 유감은 없습니다. 병든 몸이 항상 하루도 보전 못 할까 염려했었는데, 변란이 생긴 후에는 죽음을 기약하고 4월 이후로는 노상 말 위에 있었으며 비를 무릅쓰고 들판에서 잔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며, 끝내 의병을 수행하다가 이 대고(大故 선친의 상(喪)을 말함)를 만나니 친구들이 모두 장사를 치루기 전에 죽지나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완악한 목숨이 조금 연장되어 무사히 장사를 치렀습니다. 이와 같이 구차히 산 것은 병든 어머님과 어린 아우를 위하려는 생각이요, 또 죽은 아우의 4남 1녀를 길러 그들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다만 병의 뿌리가 깊이 박혀 한 번 발작하면 비록 편작(扁鵲 중국 전국 시대의 명의(名醫))이라도 역시 손을 들 수밖에 없습니다. 호남의 의병이 두 번째 일어난 것은 대개 선친이 남긴 서업(緖業 사업)으로 인한 것이며, 용감한 군사와 건장한 말은 바로 선친이 제주도에 격문을 보내어 불러온 것입니다. 저 고종후가 그 군사를 따르려고 하니, 친구들이 모두 말하기를, “슬픔을 머금고 병든 몸을 부지하라. 반드시 죽어서 유익할 것이 없다.” 하며, 또 생각해 보니 이 몸이 한 번 죽으면 아버지의 친상(親喪)과 아우의 시체를 수습하는 일이 아우나 조카로는 외롭고 약하여 해내기가 어려우므로 참고 기다렸습니다. 장사를 지낸 다음날 영위(靈位)에 곡하고 떠나 의병의 도청(都廳)으로 가서 여러 친우와 일을 같이 하여 선친의 소원을 조금이나마 풀어 드릴 생각이며,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의 처분에 맡길 뿐입니다. 어버이 원수를 갚지 못하고 나라의 수치를 씻지 못하면 살아서 무엇하리까. 다만 한 번 분명하게 죽는 것이 원입니다. 운운. 부자 형제가 함께 전진(戰陣)에 있다가 패전을 당하여 서로 잃고 홀로 구차히 목숨을 유지하여 지금까지 천지의 사이에 숨을 쉬고 있으니 신명이 용서하지 못할 바라, 오직 한 번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지금 보내주신 편지를 받들어, 어머니를 모시고 적을 피하여 온 집안이 평안하심을 알았습니다. 저 고종후는 처자에 힘입어 보전하고 있으나 한결같이 비감할 따름입니다. 쇠한 병으로 본시 편한 날이 없었는데 또 이 대고(大故)를 만나니 비록 조금이나마 완악한 목숨을 연장하여 어머니와 아우를 보전하고 또 죽은 아우의 고아들을 기르고 싶으나, 기력이 끝내 지탱하지 못할 것을 스스로 두려워합니다. 부자간의 슬픔이란 남에게 말할 수 없거니와, 죽은 아우는 본시 활 쏘고 말 달리는 기술이 없었는데 한갓 구구한 충의로써 옷소매를 털고 일어나서 노상 건장한 군사를 거느리고 홀로 진의 전면을 담당하며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그는 노상 말하기를, “오늘날 일은 비록 제 몸을 희생하고 가족을 함몰시킬지라도 오히려 후회할 것이 없다.” 하여, 친한 이들은 대개 다 들었습니다. 그는 군사가 무너지자 뒤에 남아 목숨을 바쳤는데 무상한 이 몸은 홀로 몸뚱이를 보전하였으니, 못[池] 가에 봄 풀이 나면 혜련(惠連)의 꿈을 누가 꾸며 비바람 치는 한 밤중에 옛 언약을 어디서 찾으리오.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간장이 무너지나 그 영특한 모습은 눈앞에 완연합니다. 곧장 저승으로 따라 가고 싶으면서도 오히려 말하고 밥 먹으니 무슨 사람이라 하리까.또 별지(別紙)에,우리 온 집안이 무예(武藝)를 배우지 않은 것은 여러 사람들이 다 아는 바입니다. 오직 구구한 충의로써 인심을 격동해 일으키려는 것이었는데, 죽은 아우는 본래 의기에 찬 남아라 죽음을 결심하였습니다. 일찍이 적병이 조령(鳥嶺)을 넘은 뒤로 의병을 불러일으키고자 하여 형제가 함께 격문을 지었는데 그 대략에, “조령은 평탄한 길과 다름이 없고 한강(漢江)은 넓이가 허리띠 하나 만하니, 이때를 당하여 국가의 안위는 비록 대신에게 달렸지만 이처럼 방심해서 되겠는가. 모두 싸움터에 나가서 죽어야지.” 하였고, 또 이르기를, “2백 년을 이 땅에서 옷 입고 밥 먹은 것은 모두 여러 선왕이 생성(生成)해주신 은덕인데, 수천 리 예의(禮義)의 나라에 어찌 남자다운 사람 하나가 없단 말인가.” 하였으며, 그 끝 구절은 죽은 아우가 단독으로 지은 것인데 이르기를, “저놈들이 몰려들면 노중련(魯仲連)처럼 동해(東海)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전단(田單)이 제(齊) 나라를 도로 찾듯 하는 일을 바랄 뿐일세.”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역시 그 마음가짐을 징험해 알 수 있습니다. 격문이 완성되었으나 여러 친구들은 응종하지 아니하며 말하기를, “본도 관군이 아직 온전하니 나라를 위해 싸우는 데는 군사가 모자랄 염려가 없으며, 서로 좋아하지 않는 자가 혹시 군사 일으킨 것을 가지고서 모함한다면 어찌하랴.” 하고, 우리 온 가족도 역시 이르기를, “격문을 띄웠으나 호응하지 않으면 유익은 없고 도리어 해가 있을 것이다.” 하여, 마침내 일을 중지하였습니다. 이광(李洸)이 금강(錦江)에서 군사를 후퇴한 뒤로 인심이 흉흉하여 장차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나주(羅州)의 김천일(金千鎰) 영공(令公)이 편지를 보내 다짐하며, 격문을 돌려 그 군사를 혁파한 연유를 들어 죄를 성토한 다음에 의병을 일으키려 한다 하였습니다. 저 고종후의 일가가 답보(答報)하기를, 순찰사가 나랏일에 성실하지 못한 것은 진실로 죄가 있다 하겠으나 이와 같이 처리한다면 사체에 어긋날 염려가 있으며, 더구나 순찰이 방금 다시 거사하는 마당에 있어 도내 선비들이 말을 모아 성토한다면 순찰이 도내를 호령할 수 없게 되는 동시에 군(軍)과 민간이 복종하지 않을 염려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김천일은 이광과 사돈 간이 되므로 절실히 권하여 순찰사로 하여금 최후의 효과를 거두도록 선도하여 과연 순찰사가 군사를 일으켰는데, 각 읍 백성들이 모두 말하기를, “금강(錦江)에서 아무 까닭 없이 진을 파하고서 지금 무엇하자고 다시 군사를 일으켜 백성을 괴롭히려 하는가.” 하며, 곳곳마다 흩어져 도망가 있었습니다. 국가에 대한 근심이 실로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므로 각 읍 관리와 선비들이 함께 설유하여 간신히 떠나 보냈으나, 도중에서 계속 없어져 산중으로 들어가기만 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의병을 일으킬 계획으로 한편으로는 민심을 진정시키고 한편으로는 대군을 계속 원조하려 하였습니다. 삼도(三道)의 군사가 용인(龍仁)에서 무너지고 의병은 격문을 돌려 북으로 올라가면서 근거지인 전주를 구원하려 하다가 금산에서 실패하였으니, 비록 공은 세우지 못했지만 당시에 만약 의병이 없었던들 호남 지방이 어육(魚肉)의 화를 입게 되었을 것은 왜놈이 들어왔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김천일 영공이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로 약속했으나 그 군사는 다만 나주(羅州) 한 고을에서만 징발하였기 때문에 먼저 출발하게 된 것이요, 가친은 몸소 다니며 여러 고을의 군사를 수합했기 때문에 맨 뒤에 출발하였습니다. 가친이 일찍이 편지에 이르기를, “적이 어찌 하루인들 호남을 잊으랴. 대개 반드시 근왕(勤王)하는 의병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기다리는 모양이다.” 하였습니다. 김 영공은 이미 북쪽으로 향하여 지금 강화(江華)로 들어갔고, 선친은 군사를 호서(湖西)에 머무르게 했던 초기에 본도에서 경보가 있어 조정에까지 멀리 가지 못하고 땅속에서 한을 품게 되었으니 아! 원통합니다. 선친께서 일찍이 가족에게 말씀하시기를, “금년에 천문[天象]을 본즉 장성(將星)이 좋지 아니하니 장수에게 반드시 이롭지 못한 일이 있으리라.” 하였으니, 그러고 보면 가친은 의병을 일으킬 때부터 이미 반드시 죽을 것을 각오하셨던 것입니다. 지난 해 7월에 선대에서 손수 심은, 집 앞의 큰 나무 두 그루가 바람에 뽑혔고, 금년 5월에 본 고을 객사(客舍) 향소문(鄕所門) 앞에 선 수백 년 된 고목이 또 바람에 뽑혀 향소문을 눌러서 문이 부서지고 담이 무너졌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괴이히 여겼습니다. 그러나 어찌 알았겠습니까. 본 고을에서 의병을 먼저 일으켜서 내 한 집만 유독 그 화를 받을 것을. 아! 원통합니다. 이광이 두 번째 군사를 일으킬 적에 격문을 우리 집에 부탁하므로 우리 형제가 합작해서 글월을 이루어 보냈는데 도착하기 전에 다른 사람의 격문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집에서는 다만 그가 과오를 인증하고 죄를 보상하여 국가에 충성을 다하기만 원했는데, 그가 도리어 의병에게 감정을 품고 선친이 국사에 몸바친 뒤에 장계를 올리면서 사실과 틀리게 했으며, 함께 죽은 여러 사람의 사적도 또한 자세히 기록하지 아니한 채 조정에 올렸으니, 조정에서 어찌 이 경위를 다 알 수 있으리까. 아! 원통합니다. 또 생각하건대, “태조(太祖)께서 대업을 창건하신 것은 실로 하느님의 뜻을 받드신 것이다. 압록강(鴨綠江)에서 군사를 돌이켜 대의가 천하에 빛났고 황산(荒山)에서 왜적을 무찔러 공덕이 강역을 덮었으니, 신령은 끝내 반드시 힘입을진대 은택을 어찌 잊을쏜가.”라는 이 글월은, 그 당시 격문 가운데 든 것인데 사람들에게 두루 알리고자 하여 아울러 기록해 올립니다. 이상은 모두《정기록》에 나온다. ○ 그 후 3년 만에 동궁(東宮)에서 치제(致祭)하였는데, 그 제문은 다음과 같다.만력 22년 갑오년(1594, 선조 27) 정월 20일 기해(己亥) 왕세자(王世子)는 삼가 신하 익위사 부솔(翊衛司副率) 이희간(李希幹)을 보내어 증직 판서(判書) 고 공(高公)의 영에 제사를 드립니다. 대략(大略) 취해 읊은 3천 수의 시는 몇몇 곳에 벽사롱(碧紗籠) 있던 예전에 지은 것이요, 편의한 방략(方略) 12조목은 2번이나 고향에 남긴 사랑이로다. 국가의 다난한 때를 당하여 충의를 외치며 전장에 나섰구려. 옷소매를 걷고 일어서니 무부(武夫)들도 입이 닫히고 기가 눌리며, 당상에 올라 맹서하니 3군이 팔목을 내밀며 죽음을 결단했지요. 군중은 공을 맹주로 추대했고 사람들은 공의 의거를 흠모했소. 조정에서 군사를 훈련한 지 30년에 적을 토벌하는 것은 도리어 서생(書生)에게서 나왔고, 국가가 선비를 기른 지 2백 년에 충성을 바친 것을 다행히 이번에야 보았도다. 어찌하여 장성(長城)이 갑자기 무너졌는가. 마침내 일목(一木)이 지탱하기 어려웠구려. 혈전(血戰)을 벌여 천금의 몸을 범의 입에 몰아넣었고, 남아란 죽을 자리에 죽는거라, 7척의 몸을 홍모(鴻毛)보다 가벼이 여겼소. 큰 공을 중도에서 포기하고 장한 뜻을 품은 채 순절하다니, 일의 성패는 운명이니 다시 말해 무엇하리. 하늘이 착한 사람을 보답한다는 것을 누가 과연 측량하리까. 한 집안에서 나랏일에 죽은 자가 세 분이라, 1개월 사이에 화를 받은 것이 가장 혹심했소. 죽어도 썩지 않아서 영령의 상기도 남아 있으리니, 혼이여! 알거든 다 흠양하시라. 《정기록》에 나온다. ○ 그 후 윤근수(尹根壽)가 다음과 같이 서(敍)를 지었다.아! 이 책은 임진왜란의 초기에 참의(參議) 고 공이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킬 적에 쓴 격문과 통문(通文) 및 왕복한 편지 등을 모아 만든 것이다. 글이 참의의 수필이 아니면 임피(臨陂) 형제의 수필로서, 한 집안 충의의 사연이 모조리 들어 있어 열렬한 기백이 말 밖에 넘치니, 아! 공경할 만한지고. 사라지는 강상(綱常)이 이에 힘입어 보존되었으며 직언(直言)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실천에 옮겼으니, 이야말로 신하가 국난에 임하여 절개를 다하는 행동을 권장한 것이 자못 무궁하다 하겠다. 아! 공이 그 아들과 함께 국가를 위해 싸우다 죽은 것은 실로 변성양(卞成陽 변호(卞壺))과 같은데, 문장으로 말하자면 변성양은 전하는 것이 없이 장원 급제한 몸으로 적의 손에 순절하였다. 공은 또 문신국(文信國 문천상(文天祥))과 같은데, 문신국의 두 아들은 다만 길 가에서 병들어 죽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또 공의 두 아들이 전후로 순절한 것에 비할 것이 아니니, 공의 한 집에서 이루어진 것이 어찌 보기 드물만큼 우뚝 뛰어났다고 이르지 않겠는가. 승명각(承明閣 옥당(玉堂))에 있을 적에는 사가(賜暇)를 받아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고, 노란 인끈을 띠고 큰 고을 맡아서는 청렴 결백으로 소문이 났으며, 가마귀 떼 같은 군사로 날래고 강한 적과 항거하여서는 다만 대의로써 격려했노라.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는지라 뜻과 같이 되지 않았으니, 몸을 던져 순절하여 마침내 충절로써 나타났네. 공이야말로 한 세상의 전인(全人)이 아니겠는가. 세상에서 날마다 문인(文人)더러 실용성이 적다고 헐뜯는 자가 많으나, 이를 보면 어찌 잘못된 생각이었다고 뉘우치지 않겠는가. 옛날 나일봉(羅一峯)이 문문산(文文山)의 첩(帖)에 발(跋)을 쓰면서 스스로 이르기를, “글자 하나에 눈물 한 방울이라.” 하였는데, 이 기록을 읽는 자는 글자 글자마다 울움이 터질 것이니 글자 하나에 눈물 한 방울 정도가 아니다. 을미년(1595, 선조 28)에 내가 영남(嶺南)을 다녀오다 봉성(鳳城)에 머물렀는데, 공의 아들 유후씨(由厚氏)가 나를 공의 지기지우(知己之友)라 하여 객관(客館)으로 찾아와 보고 이 책을 보이면서 책 이름을 지어 달라고 청하므로 나는《정기록(正氣錄)》이라 쓰고 아울러 서문의 청탁마저 허락했다. 그러나 이내 이루지 못하고 여러 해를 지나는 동안에 유후씨도 역시 세상을 떠났으니 슬픈 일이다. 지금 그 아우 용후씨(用厚氏)가 또 예전의 청을 거듭하는데 내 어찌 감히 죽은 이에게 허락했던 것을 이제 와서 그만두겠는가. 더구나 이로 인해 감개 무량한 바 있으니, 《정절집(靖節集 도잠(陶潛))》ㆍ《문산집(文山集 문천상(文天祥))》 등을 간행하게 한 것이 특명에서 나왔으며 바로 병란 직전의 일인즉, 성상의 깊으신 생각으로 오늘날이 있을 것을 짐작하시고 미리 절의를 배양하기 위해 생각한 것같이 되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뜻과 서로 합치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라 하겠는가. 이 《정기록》이 세상의 교화에 관계되는 것이 실로 《문산집》 등과 더불어 나란할 것이니, 어찌 한 집안에만 수장하는 데 그쳐서야 되겠는가. 난리가 평정되고 의논이 문사(文事)에 미친다면 신하를 위해 충성을 권하는 것이 이 책보다 앞설 것이 없으니, 판각해서 세상에 반포하기를 나는 공수(拱手)하고 기다리는 바이다. 만력 기해년(1599, 선조 32) 10월 □일 수충공성 익모수기 광국공신 보국숭록대부 해평부원군 겸지 경연사(輸忠貢誠翼謨修紀光國功臣輔國崇祿大夫海平府院君兼知經筵事) 윤근수(尹根壽)는 서(敍)함. 《정기록》에 나온다. ○ 비문(碑文)은 유명 조선국 증 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판의금부사 지경연 춘추관 성균관사 행 통정대부 공조참의 지제교 겸 초토사 고공 신도비명(有明朝鮮國贈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行通政大夫工曹參議知製敎兼招討使高公神道碑銘)이라 하다. 만력 임진년(1592, 선조 25)에 나라에 왜난(倭難)이 있자 참의 고공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온 절개를 나타냈다. 이윽고 십여 년이 지났으나 신도비문이 아직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하루는 공의 자제 용후(用厚)가 나를 찾아보고 청하기를, “선친이 공의 형제와 종유한 바 있으니 선친이 나랏일에 몸을 바친 전말은 공께서 분명히 아는 바이므로, 감히 공의 비문 한 장을 얻어서 이 사적을 묻히지 않게 하는 것이 원입니다.” 하고, 또 그 자당의 명을 말하였다. 아! 공의 사적을 이야기하면 눈물이 나며 슬픔이 그지없으니, 내 비록 글은 잘 못할망정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왜적이 크게 몰려와 침범할 즈음에 공은 광주(光州) 향리에 있었다. 우리 군사가 싸울 적마다 무너져 조령(鳥嶺)의 요새를 잃어버리게 되었는데 호남 순찰사가 왕실(王室)을 호위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공은 홀로 아들 고종후(高從厚)ㆍ고인후(高因厚)와 더불어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했다. 이윽고 또 임금께서 서도로 파천하시고 도성(都城)도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공은 밤낮으로 목을 놓아 통곡하였다. 순찰사가 근왕병(勤王兵)을 영솔하고 금강(錦江)에 당도하자 서울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허둥지둥 진을 파하여 온 도내 인심이 흉흉하였다. 공이 순찰사에게 편지를 보내어 뒤에라도 잘하도록 책망했는데 말이 진지하고 절실했으나 반성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공은 국가가 기울어 가는 것을 통분하게 여기고, 나주 사람 전 부사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흥복(興復)할 것을 계획하며 편지 왕래가 많았다. 공은 맨 먼저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고 5월 무자일에 담양부(潭陽府)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옥과(玉果) 사람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 등이 공을 추대하여 맹주(盟主)로 삼으니, 공은 본시 군사면에 익숙하지 못하지만 개연히 장단(將壇)에 오르며 늙고 병든 것으로써 사양하지 않았다. 그리고 도내에 격문을 발송하여, 모집에 응한 자가 날마다 모여 들었다. 6월 기해일에 공이 담양부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나섰다. 이때 삼도(三道)의 군사가 용인(龍仁)에서 무너져 호서(湖西)ㆍ호남이 더욱 흔들렸는데 유독 공을 의지하여 자중했다. 공은 전주로부터 군사를 정돈하여 북으로 올라가 여산(礪山)에 당도하자 손수 격문을 초하여 여러 도에 고하여 관서(關西)로 도달하게 했다. 공이 장차 이산(尼山)으로 향하려 하는데, 적이 황간(黃澗)으로부터 금산(錦山)으로 넘어올 때 군수가 패전하여 죽었으므로 적의 형세가 더욱 성하다는 소식을 듣자, 부하 군사들이 앞다투어 돌아가 본도를 구원하고자 하였고 공도 역시 그렇게 여겼다. 7월 경신일에 공이 마침내 군사를 진산(珍山)으로 옮겨 금산의 적을 치려 하는데, 날랜 군사로 모집에 응한 자가 갈수록 많아서 군(軍)의 기세가 더욱 떨쳤다. 병인일에 드디어 장병들에게 부서를 정하여 금산으로 들어가서 방어사 곽영(郭嶸)과 더불어 좌ㆍ우익이 되었다. 공이 먼저 정병 수백 기(騎)를 보내어 곧장 적의 소굴로 내닫게 하였는데, 그들이 적에게 눌려 후퇴하게 되었다. 공이 북을 울려 싸움을 독려하니, 군사들이 모두 죽음을 걸고 싸워 도로 적병을 토성(土城)에서 제압했다. 성 밖의 관사(館舍)를 불태우고 또 대포를 쏘아 성 안을 연소시키자 기세가 올랐다. 적이 죽음을 무릅쓰고 돌격해 나오므로 의병이 사면으로 포위 공격하니 적은 사상자가 많아서 감히 더 나오지 못했다. 마침 날이 저물고 관군이 또 싸움에 조력하고자 아니하였으며, 토성이 두텁고 완전하여 졸기에 무너뜨릴 수 없으므로, 마침내 퇴군하여 진으로 돌아왔다. 이날 저녁에 방어사가 사람을 보내어 명일에 협력하여 싸울 것을 약속하니, 공의 맏아들 고종후가 공에게 말하기를, “오늘 우리 군사가 이득을 보았으니 이 승리의 기세를 가지고 군사를 온전히 하여 돌아갔다가 기회를 살펴 다시 나와 적을 곤란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며, 적과 대치하여 들에서 잔다면 혹시 야습(夜襲)을 당할까 염려됩니다.” 하자, 공이 말하기를, “너는 부자의 정으로써 나 죽는 것을 두려워하느냐. 나는 나라를 위해 한 번 죽는 것이 직분이다.” 하다. 이날 밤에 적이 과연 침범하기를 모의하고 몰래 나와 복병을 설치하려 하다가 순라군(巡羅軍)에게 발각되었다. 이튿날 정묘일에 공이 방어사와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하는데, 공은 적과 5리쯤 떨어져서 진을 머물러 방어의 진과 마주 보게 되었다. 공이 8백여 명의 기병을 보내어 싸움을 걸어 미처 어울리지 못했는데, 적이 자기네 진지를 비우고 몰려 나와 먼저 관군에게 범하니 방어사 관하 장수 김성헌(金成憲)이 말을 채찍질하여 먼저 도망갔다. 적이 광주(光州)ㆍ흥덕(興德) 두 진을 덮치니 방어의 진이 그 바람에 따라 무너지므로 공은 단독으로 담당할 계획을 하고 군사로 하여금 모두 자신만만하게 가지고 대기하게 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갑자기 외치기를, “방어의 진이 무너졌다.” 하니, 의병의 진도 따라서 무너졌다. 공은 진작부터 하는 말이, “나는 말타기가 익숙하지 못하니 불행히 싸움에 패하면 오직 한 번 죽음이 있을 뿐이다.”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좌우에서 공더러 말을 타고 뛰라고 청하자, 공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구차히 죽음을 모면하려 하겠는가.” 하였다. 공의 부하가 공을 부축하여 말에 올려 앉혔는데, 공은 이내 말에서 떨어지고 말은 빠져 달아나므로 공의 부하 유생(儒生) 안영(安瑛)이 말에서 내려 공을 태우고 자기는 도보로 시종했다. 공의 종사관(從事官) 유팽로(柳彭老)가 탄 말은 몹시 날래서 먼저 나오게 되어 그 마부에게 묻기를, “대장이 벗어났느냐?” 하자, 마부가 벗어나지 못했다고 대답하였다. 유팽로가 문득 말을 몰고 도로 난병(亂兵) 속으로 들어가 공을 모시니, 공이 돌아보고 말하기를, “나는 반드시 면하지 못할 것이니 너는 빨리 벗어나라.” 하니, 유팽로가 대답하기를, “제가 어찌 차마 대장님을 버리고 살 길을 찾겠습니까.” 하였다. 적의 칼날이 마침내 공에게 미쳐 공이 결국 죽고 유팽로는 제 몸으로 공을 막다가 다 함께 죽었으며, 안영도 죽었다. 공의 둘째 아들 고인후(高因厚)가 무사(武士)를 거느리고 앞 줄에서 화살과 돌 속을 출입하다가 군사가 무너지자 말에서 내려 그 부하들을 정제하고 진에서 전사했다. 근처 고을 백성들은 공이 패했다는 말을 듣자 노소간에 모두 짐을 짊어지고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우리들은 이제 다 죽었다.” 하며, 곡성이 들판에 진동하였다. 진은 무너졌으나 군사들이 공의 생사를 모르고 차츰 와 모였는데, 마침내 공이 전사했다는 사실을 알고 모두 울부짖으며 해산했다. 남도 백성들은 알건 모르건 간에 다 서로 조문하며 원통하게 여겼다. 공이 백발 늙은 서생으로 국가가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정의를 부르짖고 일어서서 호남 의병의 선창이 되자, 비록 어리석고 조급한 군졸이나 산중에 도피한 자들이 모두 소문을 듣고 다투어 모여들어 한 달 이내에 의병의 수효가 수천 명에 달했으니, 대개 공의 의기가 지성에서 우러나서 남을 감동시킬 만했기 때문이다. 공이 임진년(1592, 선조 25) 봄에 천문(天文)을 쳐다보고 집안 사람에게 말하기를, “금년에 장성(將星)이 좋지 않으니 장수에게 반드시 불리한 점이 있을 것이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공은 진실로 생사의 이치에 밝음과 동시에 의거하는 날부터 벌써 목숨을 던질 것을 결정했던 것이다. 마침내 금산에 있는 왜적을 토벌하게 되자 사위 박숙(朴橚)에게 편지를 주어 집안일을 부탁하였으니, 공이 처사한 것을 보면 대개 본래부터 마음을 결정했던 모양이다. 왜적이 금산에 웅거해 있을 적에 병권을 장악한 문신ㆍ무신의 장수들이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방황하고 있는데, 유독 공은 일의 성패를 헤아리지 아니하고 친히 범의 소굴로 들어가서 적과 더불어 혈전(血戰)을 벌여 몸을 나라에 바쳐 순절했다. 비록 승첩을 올려 공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공이 순절한 후로 공이 전장에 나가 죽는 것을 보고서 적을 공격하는 자가 계속해 일어났기 때문에, 적이 비록 여러 번 이겼으나 사상자가 역시 반을 넘었으며 군사를 거두어 가지고 밤에 도망했은즉 국가에서 호남을 보유하여 뒷날 국토를 회복하는 근거지가 된 것에 대하여 그 공이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공의 체백(體魄)이 몰래 금산 산중에 묻혔었는데, 적의 군사가 가로막고 있어 바로 곧 거두어 묻지 못하고 8월 모일에야 그 아들 고종후(高從厚) 등이 의병ㆍ승병(僧兵)을 청하여 공의 시체를 발굴해 내서 무릇 40여 일만에 비로소 염습했다. 성상께서 용만(龍灣)에 계시던 날에 공이 의병을 일으켜 온다는 말을 들으시고 기뻐하는 빛이 얼굴에 가득하여 공에게 공조참의 겸 초토사(工曹參議兼招討使)를 제수하고 글월을 내려 위로했는데 그 글월에, “열읍(列邑)을 지휘하여 모든 것을 조달해서 도성을 회복하게 하라.” 하신 말이 있었다. 이때에 공조 좌랑(工曹佐郞) 양산숙(梁山璹)이 행재소(行在所)로부터 남으로 돌아오게 되자, 성상께서 면대하여 타이르시기를, “돌아가거든 고경명(高敬命)ㆍ김천일(金千鎰)에게 말하라. 그대들이 하루빨리 강토를 회복해서 나로 하여금 그대들의 얼굴을 볼 날이 있게 하라.” 하였는데, 벼슬이 전달되기 전에 공은 이미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이 사실이 보고되자 성상께서는 매우 슬퍼하시고 관작을 위에 있다. 추증하도록 명령했으며, 뒤에 다시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의 증직을 내렸다. 공이 순절하자 순찰사는 예전 혐의로써 심지어, “어두운 밤에 군사를 몰고 가다가 군사가 무너져 죽었다.” 하며, 공을 모함하여 장계를 올렸는데 그 이후 이정엄(李廷馣)이 순찰이 되어 공을 표창하여 나랏일에 죽었다는 장계를 올렸다. 그 글에, “고 모는 맨 먼저 의병을 일으켜 근왕(勤王)에 나섰으며 몸소 적의 진지에 들어가 적과 혈전을 벌이다가 불행히 패하여 부자가 함께 죽었다.” 하여, 비로소 그 실상을 파악했다고 한다. 을미년(1595, 선조 28) 여름에 유사(有司)를 명하여 정문(旌門)을 세우게 했고, 신축년(1601, 선조 34) 가을에 문생 전 현감 박지효(朴之孝) 등의 상소로 인하여 특명으로 광주에다 사우(祠宇)를 건립하게 하여 액호(額號)를 포충사(褒忠祠)라 내리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고 이어 봄가을로 제향을 받들어 대대로 끊어지지 말게 하라고 했으니, 아! 이로써 군신 간의 의를 볼 수 있다. 공의 휘(諱)는 경명이요, 자(字)는 이순(而順)이며, 파계는 제주(濟州)에서 나왔는데, 그 선세에서 장흥(長興)으로 관향(貫鄕)을 받아 장흥 고씨가 되었다. 가정(嘉靖) 계사년(1533, 중종 28) 11월 30일 무진일에 태어났으며, 아들 6형제를 두었다. 맏아들은 고종후인데 정축년(1577, 선조 10)에 무과(武科)에 급제했으며 상차(喪次)로부터 군사를 일으켜 아비의 원수를 갚기로 맹서하고 영(嶺) 밖에서 전전(轉戰)하여 싸우다가 진주성(晉州城)이 함락되자 강에 빠져 죽었다. 그 후에 도승지(都承旨)의 증직을 내렸다. 그리고 그 다음은 곧 고인후이니 기축년(1589, 선조 22)에 문과에 급제했으며 공을 따라 함께 진중에서 죽어 예조 참의(禮曹參議)의 증직을 내렸다. 운운. 윤근수(尹根壽)는 찬(撰)함.○ 그 후 또 치제하였는데 그 제문은 다음과 같다.만력 31년 계묘 8월 모일에 국왕(國王)은 신하 호조 정랑(戶曹正郞) 조엽(趙曄)을 보내 판서 고경명의 영(靈)에 제사한다. 영은 성화(聲華)가 일찍부터 드러나고 재주와 학식이 다 우수하며, 문필은 천 사람보다 뛰어나고 가슴속에 수만 군사가 들었었네. 선(先) 조정에 뽑히어 무오년(1558, 명종 13)에 문과 했다. 여러 번 장솔(張率)의 벼슬에 옲겼고, 중간에 이르러 침체되어 안진경(顔眞卿)의 얼굴을 보지 못했도다. 하루아침에 왜적이 침입하자 여러 고을이 파도처럼 휩쓸려서 곽주영(郭州營) 안에 성유(成裕)처럼 모두 밤에 도망을 치니 수양성(睢陽城) 안에 장순(張巡)마냥 사수할 자 누구던가. 유독 의기를 분발하여 군사를 모아서 목숨을 바쳐 나라에 보답하려고 맹서했네. 성지(城池)나 무기가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으니, 어느 누가 몰아치는 오랑캐를 막아내리오. 먼 데나 가까운 데나 크나 작으나 모두 호응하니, 실로 의열(義烈)을 먼저 외친 때문이로다. 외로운 충성을 스스로 허락하는데 한 번 죽는 것이 어찌 어려우랴. 정의의 군사란 강한지라, 순(順)과 역(逆)이 이미 구별되었다. 곧은 편은 언제나 씩씩한 법이라, 많고 적은 것으로 어찌 따지리오. 피를 마시고 단에 오르며, 주먹을 들고 칼날을 무릅썼네. 싸움을 잘못한 탓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과연 알기 어려운 법이라오. 죽을 곳을 얻었으니 글 읽는 선비더러 담력 없다 이르지 마오. 충효(忠孝)의 대절(大節)은 부자(父子) 세 사람일세. 매양 묘소를 수축할 겨를이 없어 한이더니, 이제 영을 모실 곳이 있음을 기쁘게 여기네. 사당 모양이 매우 엄숙하니 족히 절개 굳은 장부의 기풍을 상상할 만하고, 향화(香火)가 해마다 끊어짐이 없으니 한 고을 선생으로 제사하는 정도가 아니외다. 이는 조정에서 거행한 것이 아니라, 바로 선비들의 주선에서 나왔구려. 절개를 천추(千秋)에 표시하고자 하니 사당이 어찌 편액(扁額)이 없을쏜가. 포충(褒忠)이란 두 글자를 내리니 실상과 이름이 서로 알맞네. 시골 마을이 찬란하여 빛이 나니 어찌 조청헌(趙淸獻 조림(趙林))의 이표(里表)에 비할 뿐이랴. 길손이 손으로 가리키며 눈물을 떨어뜨리니 반드시 현산(峴山)의 귀부(龜趺 양고(羊祜)의 비석돌)만이 아니로세. 제사를 드리기 위해 조관(朝官)을 보내는데 관작을 추가(追加)함에 있어 판서(判書)가 오히려 부족하오. 천운이라 어찌하리, 정충(精忠)은 구천에서 다시 보기 어려우리니, 혼이여! 돌아와서 박한 제물이나마 한 잔 술에 흠양하시라. 모두《정기록》에 나온다. ○ 송제민(宋濟民)의 격문은 다음과 같다.삼가 나 송제민(宋濟民)이 지난달 23일에 의병장을 따라 수원산성(水原山城)에 당도하여 5일 동안 머물렀는데, 서울에 있는 적이 아직 치성하고 청주(淸州)ㆍ진천(振川) 등지의 유동하는 적이 역시 날뛰는데 외로운 군사로 깊이 들어가면 군량을 수송하지 못할 염려가 있었으므로, 온 진중이 모두 비생(鄙生)을 추천하여 충청도로 가서 의병을 모집하여 길을 막고 있는 적을 소탕하고, 구원 오는 군사를 통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와서 충청도의 사우(士友)들과 더불어 의병을 모집한 바 20일 사이에 정병 2천여 명을 얻어서 공론에 따라 전 도사(都事) 조헌(趙憲)을 추대하여 좌의대장(左義大將)을 삼아 황간(黃澗)ㆍ영동(永同) 이하의 적을 방어하게 하고, 전 찰방(察訪) 박춘무(朴春茂)를 우의대장(右義大將)으로 삼아 금강(錦江) 이상의 적을 방어하게 하려던 것이었는데, 일을 미처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금산(錦山)의 패보(敗報)를 들었으니 시운인가, 천명인가, 그렇지 않으면 인사(人事)를 제대로 극진히 하지 않은 탓인가. 말을 돌이켜 남쪽으로 돌아와 의병이 흩어지기 전에 다시 또 소집해 볼 계획이었는데, 은진(恩津)에 당도하자 비로소 대군이 흩어져 어찌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아! 사람이 누군들 죽음이 없으리오만 죽을 자리를 얻어 죽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섬 오랑캐가 한창 극성을 부리던 날을 당하여 강병과 용장들도 역시 모두 관망하지 않으면 달아나서 구차스레 목숨을 유지하는데, 고제봉(高霽峰)은 유아(儒雅)한 문관으로서 본시 군사면에 대한 일을 알지 못했으나 하루아침에 군중의 추대를 받아 문득 장단(將壇)에 올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임금에게 보답했다. 그 아들은 아비를 따라 죽어서 충성과 효도가 아울러 한 집안에 났으니 죽어도 영화가 남아서 열렬한 빛이 있는지라, 사람마다 한 번 죽음은 있는데 고제봉은 유독 그 도리를 다하고 그 자리를 얻었으니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만 깊이 애통할 일은 임금님께서 서도를 순행하시고, 종묘와 사직이 잿더미가 되었으며, 조선 7도가 모두 흉한 왜적에게 유린을 당했는데 오직 호남 한 도만이 아직까지 다행히 보전되었으니 국가를 회복할 기본이 실로 이곳에 있거늘, 장수는 태만하고 군사는 교만하여 걸핏하면 무너져 흩어지고 마는 것이다. 대개 창의한 후부터 인심이 비로소 진정되어 모두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번 싸워 패하자 의기가 꺾여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빠져 도리어 나태한 장수와 교만한 군사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아! 저 완악하고 패역한 군졸들이 공(功)을 좋아하고 이욕을 탐내어 유익하면 나가고 해로우면 피하는 것은 본시 그들의 제 몸을 꾀하는 상투 수단이라, 무엇을 책하며 무엇을 나무라겠는가마는, 일찍이 호남은 예의의 지방으로 선왕이 휴양(休養)해 주신 은혜에 젖은 지가 수백여 년인데 평시에 선비라 자칭하여 인의(仁義)를 자랑하는 자들도 이미 공명만 탐내어 피하기를 꾀하며, 수천의 굳센 졸병들도 일시에 무너져 흩어져서 한 사람도 장수의 죽음을 막아낸 자가 없으니 이 어찌 무식한 무리들의 웃음거리만이랴. 실로 흉한 오랑캐에게 부끄럼이 될 것이다. 아! 피를 입에 바르고 장수에게 다짐하던 추성(秋城 담양)의 부정(府庭)이 저기 있고, 마음으로 천지 신명에게 맹서하여 밝은 해가 내리비침이 저러하니 모르겠도다. 장차 무슨 면목으로 천지간에 용납을 받을 것인가. 아! 인의가 마음에 박힌 것은 실로 하늘에서 받은 바라 다른 사람이나 나나 마찬가지이니 진실로 피차의 다름이 없지만, 물욕에 팔리어 그 본심을 상실한 자가 간혹 있으니 사람의 형상을 하고 짐승의 마음을 지닌 자도 역시 있을 것인 즉, 충성과 효도를 어찌 사람들 모두에게 책할 수 있으랴. 그러나 이 왜적을 토벌하는 일은 역시 불충하고 불효하는 자들도 함께 원하는 바이니, 어찌 충신이나 의사의 사사로운 원수일 뿐이겠는가. 이미 당한 바를 들어 말하면 남의 처자 자매를 잡아다가 열 놈이 다투어 간음하여 죽게 하는 일이 잇달아 일어나고, 부형을 찔러 죽이고 아이들을 삶아 죽이며, 동네 인가를 불태우고 재물을 약탈하며, 남의 소와 말을 몰아가고 남의 노복을 부려먹으며, 좋은 전답을 탈취하고 남의 선산을 헐어 버리어 궁흉 극악(窮兇極惡)이 천지에 가득 차니 무고한 백성들이 난을 피해 도망가다 길가에 넘어지고 구렁창에 빠져 죽어 그 수효가 몇천만 명인지 헤아릴 수 없는 정도다. 요즘 7도(道)가 탕진되고 또 5고을이 함락되었는데, 그 5고을은 실로 호남의 함곡관(函谷關) 같은 존재로 사방이 막혀서 산을 의지해 험하고 굳건하니 이쪽에서는 공격하기 어려운 점이 있고, 저 왜적놈들은 팔을 내뻗는 편리함이 있다. 이 형세를 따지면 이미 쉽고 어려운 차이가 있으며, 우리 군사는 이제 막 꺾이어 사기가 □저상되고 적은 이미 승세를 탔으니 왜의 세력은 저절로 확장될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웅현(熊峴)의 혈전(血戰)에 힘입어 적의 기세가 조금 꺾였고 전주가 방비 태세를 갖추고 있으므로, 놈들이 힘을 요량하여 스스로 물러가니 형세가 몰아 쫓아낼 가망이 있다. 호서(湖西)의 의병이 은진(恩津)ㆍ연산(連山)ㆍ진안(鎭安)ㆍ옥구(沃溝)를 옹위하여 수비하는 품이 질서가 있고, 대장 조헌(趙憲), 참장(參將) 이천준(李天駿)이 시대에 부응하는 인물로서 천심을 측정하고 시국을 관찰하여 적을 요량해서 승리를 결정하여 옛사람에게 못지 않다. 형세상 놈들이 서쪽으로나 북쪽으로 달아나지는 못할 것이며 반드시 무주(茂朱)를 경유하여 동으로 영남을 향해 도망갈 것이나, 김(金)ㆍ곽(郭) 두 장수가 군사를 쓰는 것이 귀신과 같아서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할 것이니 반드시 영(嶺)을 넘어서지 않으려 들 것이며, 중국 군사 5만 명이 우리 근왕(勤王)의 군사와 함께 천지를 뒤흔들며 북으로부터 남으로 내려오면 송도(松都)ㆍ한양(漢陽)에 있는 적의 도망병과 충청도에 있는 적의 남은 부대가 내리 밀려서 돌아갈 길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금산(錦山)의 적과 합세하여 서ㆍ남으로 충돌하되 궁지에 빠진 신세라 죽음을 걸고 달려들 것이니, 후퇴하기 좋아하는 장수로 무너지기 잘하는 군사를 몰아친다면 어찌 반드시 지탱할 것을 보장하랴. 이것이 실로 호남 부로(父老)와 사민(士民)들의 막대한 근심거리인 것이다. 아! 옛사람은 천하의 백성을 나의 동포로 삼았는데 하물며 우리 본도 선비들은 조상 때부터 이 땅에서 태어나고 이 땅에서 살았으니 선인들의 혼백이 깃들여 있는 곳이요, 부모 처자가 편안히 살던 곳이요, 형제 자손들이 생식(生息)한 곳이요, 이웃 친구들과 교유하던 곳이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변을 만나 오랑캐 놈들의 신첩(臣妾)과 노복(奴僕)이 된다면 이 이상의 욕됨이 있겠는가. 한 번 죽는 것이 오히려 영광일 것이다. 더구나 흉한 참변이 계속되어 골육과 친척이 함께 적의 손에 도륙됨에 있어서랴 기왕 죽을 바에야 오히려 적과 싸워서 죽는 것이 낫지 않은가. 이제 만약 한 번 싸움을 피하고 반드시 살 길을 찾고자 할진대 그 살 길을 마침내 얻지 못한다면 오늘날 같은 참화가 있을 뿐이요, 그렇지 않고 한 번 싸움을 결심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꼭 죽을 이치도 없는 것이며 결국 참혹한 화를 면하고 길이 무궁한 복을 받을 것이니, 이는 모두 절박하여 결코 그만둘 수 없는 거사이다. 어찌 반드시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이 우러난 연후에만 그러하겠는가. 아! 배를 함께 타다 물에 빠지면 서로 건져주는 것은 호(胡)와 월(越)도 한 마음이라 했는데, 무릇 한 도(道) 안에서 함께 사는 우리로서는 실로 배를 같이 탄 형세로서 서로 물에 빠질 염려가 조석에 임박했으니, 비록 호ㆍ월의 사람이라도 부득불 마음과 힘을 일치하여 어려움을 면해야 하겠거늘 하물며 산천의 기품(氣稟)이 서로 흡사하고 학문의 취향도 서로 같아서 실로 형제의 의(義)가 있은즉 옛사람이 이른바 막연한 동포라는 말 따위에 그칠 바가 아니다. 무릇 우리 도내 각읍 부로(父老)들은 아비가 그 자식을 권장하고 형이 그 아우를 권면하여 지조와 절개를 가다듬고 다시 의병을 일으켜 흉한 칼날을 막아서, 위로 임금의 원수를 갚고 사람과 귀신의 분을 씻으며 아래로 부모를 봉양하고 처자를 보전하여 길이 그 가업을 편안히 하면 천만다행일 것이다.○ 호성감(湖城監)이 양호(兩湖)에서 군사를 수합하여 2천여 명을 얻어 아산(牙山)을 경유하여 서해(西海)로 배를 타고 행재소(行在所)로 향하여 근왕(勤王)의 길을 떠나다.○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이 남원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진안으로 향하다가, 순찰사가 다시 나누어준 군사를 진산(珍山) 이현(梨峴)으로 전진시켜 동복 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 등과 더불어 험한 곳에 웅거하여 복병을 설치하다.○ 금산의 적 수천여 명이 진산(珍山)에 들어와 불을 지르고 약탈하니 이현(梨峴)의 복병장(伏兵將)인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 동복 현감 황진 등이 군사를 독려하여 막아 싸웠다. 황진이 탄환에 맞아 조금 퇴각하는 바람에 적병이 진채(陣寨)로 뛰어드니 우리 군사들이 놀라 무저지는지라, 권율이 칼을 뽑아들고 후퇴하는 아군을 베며 죽음을 무릅쓰고 먼저 오르고 황진도 역시 상처를 움켜쥐고 다시 싸워 우리 군사 한 명이 백 명의 적을 당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적병이 크게 패하여 기계를 다 버리고 달아났는데 30여 명을 베었다.○ 좌의병(左義兵) 진중의 사자(士子)들이 흩어진 군사 8백여 명을 소집하여 전 화순 부사(和順府事) 최경회(崔慶會)를 추대하여 맹주(盟主)로 삼고 금월 26일 광주에서 기고(旗鼓)를 세웠는데, 골(鶻) 자로 장표(章標)를 만들었다. 우도(右道)로부터 군사를 모아 남원으로 향하면서 우의병(右義兵)이라 일컬었다. 거사하던 날에 여러 군(軍)에 다음과 같이 통시(通示)하였다.한 사람을 상 줌으로써 천만 사람을 권하는 것이다. 지금 의병의 패전에 유학(幼學) 안 영(安瑛)은 그 주장이 탄 말이 놀라는 것을 보고서 자기가 탄 말을 주장에게 주어 대신 타게 하고 도보로 포복(匍匐)하다가 달갑게 죽음을 당했으며,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는 왜적의 칼날이 어지럽게 번쩍일 때 노복들이 모두 달려나가 적의 칼날을 피하라고 간청하자, 성내어 거절하며 말하기를, “내가 만약 달아난다면 주장을 어느 곳에 두겠느냐.”하고, 그 주장의 노복이 다 흩어져서 말이 전진할 수 없음을 보자 자기 종을 명하여 주장을 보호해서 나가게 함과 동시에 자신이 뒤를 따라 적을 막다가 갑자기 칼에 맞아 죽었다. 아! 인심이 극도로 어지러운 이즈음을 당하여 임금을 배반하고 나라를 잊어버리며 목숨을 탐내어 구차히 살아가는 것이 곳곳마다 다 그러하고, 윗사람에게 친히 하며 어른을 위해 죽는 일은 전혀 들을 수 없는데, 이 두 사람은 이익을 꾀하거나 공을 계산하는 마음이 없어서 마침내 목숨을 버리고 의(義)를 취하여 분연히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으니 만약 급급히 그 절의(節義)를 드러내어 한때의 이목(耳目)을 솟구치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꺾여진 사기를 일으켜 세우며 무너진 강상(綱常)을 붙잡을 수 있으랴. 일이 시급하지 않은 것 같지만 관계되는 바가 지극히 중하니, 바라건대 각 읍 향교(鄕校)ㆍ향소(鄕所)에 각각 부물(賻物)을 거두어 되는 대로 사람을 시켜 그 집에 조문하고, 의거(義擧)한 뒤에 그 해골을 거두어 제사를 드리고 말미를 갖추어 위에 아뢰어 정문을 세워 의기를 고무시키도록 하라.
    2022-05-04 | NO.174
  • 대동야승-난중잡록2; 고종후 통문 보내다
    10월 18일. 세 개의 해가 함께 나왔다. 국가가 함몰되고 임금이 파천하였으니, 변괴가 나오는 것이 괴이할 것도 없다.○ 전라 감사 권율이 수원 독성에 있으면서 행조(行朝)에 장계하니 임금이 찼던 칼을 풀어 전하여 보내 주며 말하기를, “모든 장수 중에 명령을 받지 않는 자가 있거든 이 칼로 처치하라.” 하다. 이때에 경성의 적이 호남 군사가 또 수원에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군사 수만 명을 내어 길을 나누어서 침범하였다. 권율이 성을 굳게 지키고 움직이지 않으니 적은 오산(烏山) 등지에 세 군데 병영을 만들고 날마다 도전하였으나, 권율이 또한 응하지 않고 때때로 기병(奇兵)을 내어 매복시켰다가 쏘고 베니 적이 밤에 병영을 불태우고 도로 경성으로 들어가다. 바야흐로 적이 침범할 때에 권율이 날마다 체찰사에게 보고하여 본도에 응원병을 처하니, 정철이 전라 도사에게 급히 글을 보내기를, “흉한 적이 수원 땅에 가득하여 청회(靑回) 오산의 들판에 적진이 퍼져 있고, 독성 밑에는 날마다 싸우지 않을 때가 없다. 한 도의 주장이 바야흐로 적병의 포위 속에 있는데 사방을 돌아보아도 응원이 없으므로 날마다 3번씩이나 급히 보고하니, 본도의 관군과 의병을 성화(星火)같이 발송하여 수원성의 군사를 구하라.” 하다. 도사 최철견(崔鐵堅)과 변사정(邊士貞)ㆍ임희진 등 의병이 달려가 응원하다.
    2022-05-04 | NO.173
  • 대사간 증 이조판서 고봉(高峯) 기 선생(奇先生)의 시장 - 택당선생 별집 제10권
    대사간 증 이조판서 고봉(高峯) 기 선생(奇先生, 기대승)의 시장 - 택당선생 별집 제10권  :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공의 휘(諱)는 대승(大升)이요, 자(字)는 명언(明彦)이다. 세상에서는 고봉 선생(高峯先生)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혹은 존재(存齋)라고 일컫기도 한다.기씨(奇氏)는 본래 행주(幸州)에서 나왔으니, 행주는 지금 경기 고양군(高陽郡)에 속한다. 그 선세(先世)는 고려(高麗)에서 현달하였는데, 장상(將相)과 훈척(勳戚)으로 얼마나 번창했는지 국사(國史)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우리 조선에 들어와서는 휘 면(勉)이라는 분이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냈다. 이분이 휘 건(虔)을 낳았는데,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세조조(世祖朝)에 벼슬을 그만두었으며, 청백리(淸白吏)로 뽑혀 소명(召命)을 받고 복관(復官)이 되었으나, 벼슬길에 다시 나아가지 않았다. 시호(諡號)는 정무(貞武)인데, 이분이 공에게 고조가 된다. 증조는 휘가 축(軸)으로 풍저창 부사(豐儲倉副使)를 지냈으며, 좌승지(左承旨)를 증직받았다. 조부 휘 찬(襸)은 홍문관 부응교(弘文館副應敎)로 이조 참판을 증직받았다.부친인 휘 진(進)은 호가 물재(勿齋)인데, 아우인 복재(服齋) 기준(奇遵)과 함께 학행(學行)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기묘년(1519, 중종 14)에 사화(士禍)가 일어나자 향리에 물러가서 살고 있던 중 천거를 받고 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공의 훈전(勳典)에 따라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으며, 호를 하사받고 군(君)에 봉해졌다. 모친인 진주 강씨(晉州姜氏)는 사과(司果) 강영수(姜永壽)의 딸이요, 문량공(文良公) 강희맹(姜希孟)의 증손인데, 가정(嘉靖) 정해년(1527, 중종 22) 11월 11일에 광주(光州) 소고룡(召古龍)의 저택에서 공을 낳았다.공은 겨우 5, 6세 무렵부터 무게 있게 행동하는 것이 벌써 어른과 같았다. 그리고 7세부터는 문득 글공부에 힘써 일과(日課)를 정해 놓고 암송하였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 단정하게 앉아서 낭랑하게 글 읽는 소리가 저녁 때까지 이어졌다. 이에 동복(童僕)이 시험 삼아 공의 뜻을 물어보기라도 하면, “너희들이 이런 맛을 어떻게 알겠느냐.”라고 대답하곤 하였다.8세에 모부인(母夫人)이 세상을 떠나자 호곡(號哭)하며 애통한 심정을 극진히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차마 그 소리를 듣지 못하였다. 상복을 벗고 나서는 집안이 번잡스러운 것을 싫어하여 곧장 마을의 서당에 가서 공부하면서 학업에 더욱 매진하였다. 공은 총명한 데다 기억력이 비상하여 함께 배우는 아이들의 학업 과정을 모두 동시에 마쳤으며, 시구를 지어 내면 사람들이 놀라곤 하였다.물재공(勿齋公)이 일찍이 훈계하는 글을 내린 적이 있었는데, 공은 이를 가슴에 새기고서 그대로 행하였다. 그리하여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정하고 날마다 부지런히 정진하였으며, 과거 공부 같은 것은 그저 하찮게 여기기만 하였다.중종(中宗)과 인종(仁宗)이 서로 잇따라 승하(昇遐)하자, 공이 포의(布衣)의 신분인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소식(素食)을 하며 졸곡(卒哭)을 마쳤다. 그리고 사림(士林)에 변고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서는 음식을 폐하고 눈물을 흘렸으며, 그대로 문을 닫고서 몇 년 동안 출입하지 않았다.기유년(1549, 명종 4)에 비로소 응시하여 생원(生員)과 진사(進士)의 두 시험에 모두 입격(入格)하였다. 그리하여 약관(弱冠)의 나이에 벌써 사림(士林)에 이름을 드러내면서 문장으로 과장(科場)을 압도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윤원형(尹元衡)이 이를 시기한 나머지 공의 시권(試券)이 우등(優等)에 속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축출하였는데, 정작 공 자신은 이런 것을 또한 개의하지 않았다.을묘년(1555, 명종 10)에 물재공이 세상을 떠나자, 여묘(廬墓)살이를 하면서 상을 마쳤다. 32세 되던 해에 다시 응시하여 무오년(1558, 명종 13) 문과(文科)에 등제(登第)하였다. 이때 마침 퇴계 선생이 소명(召命)을 받고 서울에 올라와 있었는데, 공이 선생과 함께 학문을 논하고 난제(難題)를 문답하면서 사단 칠정(四端七情)에 관해 논변(論辨)하였다. 그 뒤에 퇴계가 글을 보내 말하기를, “무오년에 도성에 들어갔던 일로 말하면 정말 낭패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스스로 다행스럽게 여기는 것은 우리 명언(明彦)을 만나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하였다.권지 승문원정자(權知承文院正字)를 거쳐 부정자(副正字)로 승진하였다. 그리고 사관(史官)의 추천을 받았으나 오래도록 발탁되지 못하다가, 신유년(1561, 명종 16) 여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임명되고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게 되었으며, 그 뒤 규례에 따라 봉교(奉敎)로 승진하였다. 계해년(1563, 명종 18)에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로 자리를 옮겼으며, 말미를 청해 고향에 내려갔다가 다시 봉교가 되었는데, 고과(考課)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점수가 깎여 체차되었다.이에 앞서 윤원형(尹元衡)이 국권(國權)을 장악하고 정사를 어지럽게 하자, 명묘(明廟)가 말년에 그 세력을 꺾을 목적으로 이량(李樑)을 진출시켜 그를 대적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량이 다시 인척(姻戚)의 세력에 의지하여 권세를 쥐고 선동하면서 기염을 토하자, 공이 한 시대의 명류(名流)인 윤두수(尹斗壽) 형제와 이문형(李文馨), 허엽(許曄) 등과 함께 청의(淸議)를 만회하기 위하여 힘을 기울였다. 이에 이량이 자기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미워한 나머지 그들을 붕당(朋黨)으로 지목하고는, 대간(臺諫)을 꼬드겨 논핵하게 해서 삭직(削職)하고 밖으로 축출하도록 하는 한편, 장차 사화(士禍)를 일으키려 하였으므로 중외(中外)가 크게 경악하였다.그러나 며칠이 지난 뒤에 옥당(玉堂)에서 차자(箚子)를 올리자 명묘가 크게 깨닫고서 이량 등을 귀양 보내고 조정에서 축출하였으므로, 공이 다시 서용(敍用)되어 사관(史官)이 되었다. 이어 홍문관 부수찬으로 승진하면서 경연 검토관(經筵檢討官)과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대하였으며, 호당(湖堂)에서 사가 독서(賜暇讀書)하는 은혜를 입기에 이르렀다. 이로부터 공이 사림(士林)의 중망(重望)을 받게 되었는데, 이렇게 해서 명묘와 선묘(宣廟) 사이에는 조정이 다시 정도(正道)를 회복하게끔 되었다.갑자년(1564, 명종 19)에 사체(辭遞)하고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이 되었으며 지제교로 선발되었다. 얼마 있다가 다시 수찬에 임명되었으며, 병조 좌랑과 성균관의 전적 및 직강을 역임한 뒤에 이조 정랑으로 승진하면서 교서관 교리를 겸대하였다. 휴가를 청해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 예조 정랑과 홍문관 교리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숙배(肅拜)하지 않았다.병인년(1566, 명종 21) 10월에 헌납(獻納)으로 소명(召命)을 받고 올라와서 의정부의 검상(檢詳)과 사인(舍人)으로 승진하였다. 정묘년(1567, 명종 22)에 장령(掌令)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바로 체차되어 사예(司藝)가 되었으며, 다시 사인과 장령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공 자신은 학문이 아직 크게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여러 차례나 화려한 요직을 역임하는 과정에서도 항상 한직(閑職)을 구하곤 하였다.정묘년 5월에 홍문관 응교로 재직중에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뽑혀 허국(許國)과 위시량(魏時亮) 두 조사(詔使)를 영송(迎送)하였다. 이때 마침 명종(明宗)이 승하(昇遐)하였는데, 조사가 중도에 부음(訃音)을 듣게 되었으므로, 손님과 주인 사이에 행해야 할 예문(禮文) 가운데 많은 변동 사항이 있게 되었다. 허국과 위시량 두 조사는 모두 학식이 넓은 데다 예법을 준수하는 유신(儒臣)이었는데, 서로 자문을 구하며 강정(講定)하는 과정에서 상규(常規)를 벗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공이 단독으로 그들을 응접하는 일을 담당하면서 모두 그들의 뜻에 맞게 하였다.조정에 돌아와서 사헌부 집의로 옮겨졌다. 이때 경연에 입시해서 제일 먼저 논하기를, “선정(先正) 조광조(趙光祖)가 소인에게 참소를 당해 죽었는데, 중묘(中廟) 말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의 억울함을 살펴 주게 되었고, 그 당시에 함께 처벌을 받은 사람들이 혹 서용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선왕(先王)이 어린 나이로 처음 정사를 펼치게 되자, 소인이 또 사림(士林) 가운데 학행(學行)이 있는 자들을 무함하면서, 부박(浮薄)한 무리들이 기묘년의 풍조를 일으키려 하고 있다고 논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난역(亂逆)의 율(律)을 뒤집어쓰게 한 결과, 이언적(李彦迪)과 같은 대유(大儒)가 죄를 얻어 배소(配所)에서 죽기까지 하였습니다. 지금 비록 금망(禁網)이 이미 해제되었다고는 하지만, 시비(是非)가 아직도 분명해지지 않았으니, 조광조와 이언적을 표장(表章)하여 시비를 분명히 정하고 인심을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하고, 또 논하기를, “노수신(盧守愼)과 유희춘(柳希春) 등은 모두 학문이 높은 유신(儒臣)인데, 오래도록 유배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비록 석방해서 돌아오게 하더라도 나이가 벌써 노년에 접어든 만큼, 차서(次序)에 따라 진출시킨다면 크게 등용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단계를 뛰어올려 발탁함으로써 현인을 등용하는 도리를 극진히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얼마 있다가 전한(典翰)과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하면서 교서관 판교(校書館判校)를 겸대하였다. 그리고 조금 뒤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품계가 오르면서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다가 다시 우부승지로 옮겼으며 규례에 따라 다른 직책을 겸대하였다. 명을 받들고 의주(義州)에 가서 조사(詔使)를 송별하며 위로하였다. 조정에 돌아와서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다가 곧바로 체차되어 공조 참의가 되었다. 다시 우승지에 임명되었다가 체차되어 대사간이 되었으며 다시 좌승지로 자리를 옮겼다.이에 앞서 윤원형(尹元衡)이, 인묘(仁廟)의 경우는 재위한 기간이 1년을 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문소전(文昭殿)에 부묘(祔廟)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울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가 명종(明宗)을 부묘해야 할 때를 당하게 되자, 사론(士論)이 이번 기회에 인종(仁宗)까지 아울러 부묘하려고 하였다. 이에 공이 이 의논을 주장하게 되었는데, 대신(大臣)과 의견이 합치되지 않자 공이 입시하여 그 오류를 지적하며 극언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대신이 마음속으로 공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대사헌(大司憲) 김개(金鎧)가 오래도록 폐고(廢錮)되어 있다가 다시 조정에 들어와서는, 마음속으로 사론(士論)을 꺼린 나머지 먼저 기묘년의 사류(士類)를 헐뜯고 나서, 지금 조정에도 아직 이런 풍조가 남아 있다고 배척하니, 상의 뜻이 자못 그쪽으로 기울어졌다. 이에 공이 동료들과 함께 청대(請對)하여, 김개가 사악한 자들을 비호하고 바른 이들을 해치는 정상을 아뢰었으나, 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이에 앞서 예관(禮官)이 사친(私親)의 사당에 관원을 보내 제사를 올리도록 청하면서 황백부(皇伯父)라고 칭했는데, 공이 지방에 있다가 이 말을 듣고는 “이것은 창읍왕(昌邑王)이 즉위해서 태뢰(太牢)의 음식으로 애왕(哀王)을 제사 지내도록 한 것과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이때에 이르러 입시한 기회에, 예학(禮學)이 밝게 드러나지 못한 탓으로 처음 정사를 행할 때에 잘못된 거조(擧措)가 있게 되었다고 논하는 한편, 황백부의 황(皇)이라는 글자는 제후국에서 일컬어서는 안 되는 만큼 먼저 이름부터 바로잡아야 한다는 점을 아뢰었으며, 또 주자(朱子)의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를 발간해서 사대부들이 예학을 익힐 수 있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공이 전후로 경연(經筵)에 입시해서 글을 강설(講說)할 때 치밀하게 분석하여 해설했을 뿐만이 아니라, 그 기회에 시사(時事)에까지 적용하여 정치를 개혁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게 하였다. 그래서 이를 듣는 이마다 탄복하곤 하였는데, 그와 반대로 공을 좋아하지 않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이때 인재들이 바야흐로 조정에 진출해서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을 급선무로 삼아 많이들 건의하였으므로 논의가 분분하였다. 그런데 공의 경우는 뜻을 세워 현인(賢人)을 구하고 나서 그들에게 위임하여 성취시키게 하는 것을 우선적으로 행해야 할 대강령으로 삼고 있었다. 말하자면 근본을 바르게 하는 데에 뜻을 두고서 먼저 교화(敎化)한 다음에 법제(法制)를 정비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장(更張)하려는 의논과 상당히 배치되었는데, 이러한 점에서 대신(大臣)이 더더욱 공에게 불평스러운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이때 퇴계 선생은 이미 남쪽으로 내려가 있었는데, 공에게 글을 보내어 거취(去就)를 논하면서, 장남헌(張南軒)이 우윤문(虞允文)과 뜻이 맞지 않아 지위를 버리고 출사(出仕)하지 않았던 고사를 들어 비유하기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공이 이로부터 시골로 돌아가 은퇴할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체차(遞差)되었다. 경오년(1570, 선조 3) 봄에 휴가를 청해 시골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이때 사대부들이 도성에서 모두 나와 전송하였다.공이 일단 시골로 돌아와서는 고마산(顧馬山) 남쪽에 서실(書室)을 짓고, 퇴계의 글 가운데 나오는 “가난할수록 더욱 즐길 줄 알아야 한다.[貧當益可樂]”는 말을 취해 낙암(樂庵)이라고 편액(扁額)을 내걸고서 학문에 전심(專心)하는 장소로 삼았는데, 제자와 종유(從遊)하는 자들이 이로부터 더욱 많이 불어나게 되었다. 대사성에 제수되고 또 부경사(赴京使)에 임명되었다. 이에 공이 재차 상소를 올려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대죄(待罪)하면서, 성현이 말한 출처(出處)의 의리를 밝히고, 대신의 뜻을 거스른 만큼 의리상 진취(進取)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언급하자, 체차하라는 허락이 내려졌다. 신미년(1571, 선조 4) 여름에 홍문관 부제학으로 소명(召命)을 받았고, 또 이조 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임신년(1572, 선조 5)에 종계(宗係)를 변무(辨誣)하는 일로 주청 부사(奏請副使)에 선발되면서 대사성을 임명받았다. 이에 공이 사신의 일이 중대한 점을 감안하여 부득이 조정에 나아가게 되었는데, 도중에 또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으나 입조(入朝)해서 사직한 결과 체차되었다. 그 뒤 곧바로 다른 사정이 생겨 사행(使行)이 정지되었다. 공조 참의와 대사간에 차례로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여 체차되었다.조정을 하직하고 향리로 돌아오던 도중에 천안군(天安郡)에 이르러서 갑자기 둔종(臀腫)을 앓게 되었는데, 태인현(泰仁縣)에 와서 병세가 더욱 위독하게 되었다. 이때 공의 큰며느리의 부친인 유사(儒士) 김점(金坫)이 고부(古阜)에서 달려와 문병하자, 공이 말하기를, “수요(壽夭)와 사생(死生)은 운명이니, 개의할 것이 없다. 다만 소싯적부터 문한(文翰)에 힘을 기울이면서 성현의 학문에 뜻을 두었는데, 중년 이래로 비록 소득이 있었다고는 하더라도 공부가 독실하지 못해서 평소의 뜻에 부응하지 못했으므로 날마다 두려운 심정으로 지내 왔다. 가령 옛날의 성현들을 앞에 모시고서 자세히 말씀을 나눈다면 나 역시 그다지 부끄러운 점이 없으리라고 여겨지기도 하지만, 사업(事業)의 면에 있어서는 옛사람들에게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이 점을 항상 부족하게 여겨 왔다. 하지만 하늘이 나에게 수명을 조금 더 연장해 주어, 조용한 숲 속에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며 학자들과 학문을 강론할 수 있게 해 준다면, 이 또한 하나의 행운이라고 할 것인데, 지금 병이 이렇게까지 악화되었으니 또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김점이 집안일에 대해서 물으니, 공이 대답하기를, “척박한 토지나마 몇 마지기 정도는 있으니, 자손들이 스스로 생활해 나갈 수가 있을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그대의 집안에서 우리 며느리가 들어왔으니, 우리 집과 다를 것이 없다. 내가 이제 곧 죽으려 하는데, 비록 병이 중하다고는 하나, 그래도 거기까지 갈 수는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는 이튿날 빨리 그곳으로 출발하도록 명하였는데, 시자(侍者)가 병세가 위독한 만큼 머물러 있도록 청하였으나, 공은 “내가 공관(公館)에서 죽을 수는 없다.” 하고, 마침내 의관을 정제(整齊)하고서 가마에 올랐다. 그리하여 김공의 집에 도착한 다음에 이틀 간을 묵고 나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때 아들인 기효증(奇孝曾)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너는 성품이 경박(輕薄)하니, 만약 뜻을 단속하여 제대로 함양(涵養)하기만 한다면 내가 걱정이 없겠다.” 하고 말을 마치고 나서 바로 숨을 거두었는데, 그때가 11월 1일이었다. 이날 밤 공의 숨이 끊어질 무렵에 홀연히 바람이 거세게 불며 천둥과 번개가 쳤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이때 공의 나이 46세였다.공이 중도에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상이 듣고서, 어의(御醫)에게 약물을 가지고 급히 달려가서 구원하도록 하는 한편, 어찰(御札)을 내려 위문하였는데, 모두 제때에 미치지 못하였다. 상이 부음(訃音)을 듣고는 경악하고 애도하면서 부의(賻儀)를 특별히 더 내리게 하였다. 경사(京師)의 사대부들 역시 모두 가슴 아프게 생각하면서 공이 예전에 머물렀던 우사(寓舍)에 나아가 신위(神位)를 설치하고 곡을 하였다. 그리고 간원(諫院)이 아뢰기를, “기모(奇某)는 어려서부터 성현의 학문에 뜻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소견이 월등하게 뛰어나 이황(李滉)과 서한을 왕복하면서 성리(性理)에 관한 설을 토론하였는데, 선현(先賢)이 미처 드러내지 못한 점을 밝힌 바가 있습니다. 또 경악(經幄)에 입시해서 진달드린 내용을 보더라도, 이제(二帝)와 삼왕(三王)의 법도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한세상에서 유종(儒宗)으로 추앙하였는데, 불행히도 병이 들어 향리로 돌아가다가 도중에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집안이 대대로 청한(淸寒)하여 장례조차 제대로 치를 수가 없으니, 상례와 장례 등의 일을 관청에서 보살펴 주게 함으로써, 국가에서 유학(儒學)을 숭상하고 도를 존중하는 뜻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이듬해인 계유년(1573, 선조 6) 2월에 나주(羅州) 관아 북쪽 오산리(烏山里) 통현산(通峴山) 광곡(廣谷) 묘좌(卯坐)의 언덕에 안장하였으니, 공이 평소에 점지해 둔 곳이었다. 이때 원근에서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이 무려 수백여 인에 이르렀다. 그 뒤 경인년(1590, 선조 23)에 녹훈(錄勳)을 할 때, 공이 일찍이 논의에 참여하고 주문(奏文)을 작성했던 공을 참작하여, 수충익모광국공신(輸忠翼謨光國功臣)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의금부성균관춘추관사(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義禁府成均館春秋館事) 덕원군(德原君)을 추증하였다.공은 타고난 바탕과 성품이 탁월하고 위걸(偉傑)스러웠으며, 뜻과 기상이 고매하였다. 그리하여 겨우 지학(志學 15세를 말함)의 나이가 되었을 때, 문득 옛 성현처럼 되겠다고 스스로 다짐하였다. 경전을 널리 연구하면서 그 속에 깃든 미묘한 뜻을 정밀하게 탐구하였음은 물론, 고금의 역사에도 두루 통달하여 어디에도 막히는 바가 없었다. 그리하여 천(天)과 인(人)이나 성(性)과 명(命)의 도리를 분명하게 살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흥망(興亡)과 인물의 득실(得失)에 대해서도 마치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환히 알기에 이르렀다.그중에서도 공은 특히 예학(禮學)에 깊은 조예를 보여 주었다. 그리하여 국가 조정의 일에서부터 집안과 향리의 일에 이르기까지, 내용과 형식이나 상례(常禮)와 변례(變禮)를 강구함에 있어, 그 의절(儀節)과 도수(度數)를 깊이 따져 절충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구류(九流 각종 학술의 유파)와 백가(百家) 등 이단(異端)의 학술에 대해서도 모두 섭렵하여 그 요점을 터득하였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산법(算法)에 정통하여 전문 명가(名家)라도 거의 미칠 수 없는 경지를 보여 주었다. 이는 대체로 공의 총명함이 보통의 경지를 뛰어넘었기 때문에 손대는 것마다 마치 얼음이 녹듯 풀려서 그러한 것이었다.이렇듯 고명(高明)한 경지에서 마음을 노닐면서도 항상 자신의 몸가짐을 방정(方正)하게 하였으며, 사양하고 받아들이며 주고받는 것이라든가 진퇴(進退)와 거취(去就)를 결정할 때에 있어서도 반드시 바른 도리에 입각해서 행하곤 하였다. 공은 엄정(嚴正)하면서도 각박하게 하지 않았고, 사람들과 기꺼이 어울리면서도 그 속에 빠져 들지 않았다. 영걸스러운 기상이 밖으로 흘러넘치면서도 자신을 단속하고 일을 행함에 있어 항상 겸손함을 위주로 하였기 때문에, 중도(中道)에 들어맞지 않는 경우가 드물었다.공은 지성으로 효성과 우애를 실천하였다. 어린아이때에 모친을 잃어 복상(服喪)하지도 못했던 것을 항상 가슴 아프게 생각한 나머지, 기일(忌日)을 맞을 때마다 반드시 한 달 전부터 소식(素食)을 하면서 애모(哀慕)하는 마음을 변치 않았으며, 부친의 뜻을 받들어 봉양하는 일을 장성할수록 더욱 돈독히 하였다. 백형(伯兄)인 모(某)가 공보다 한 살이 더 많았는데, 부친을 섬기듯 모시면서 집안일을 반드시 상의하여 행하곤 하였다. 집안의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도 한결같이 옛날의 예법대로 준행(遵行)하였으며, 가정 내부의 일이나 향리의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도, 안으로 마음을 단정하게 하고 밖으로 온화하게 대했으므로 일절 다른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명종(明宗) 말년에 공이 얼굴빛을 바르게 하고 조정에 서자, 사대부들이 상서로운 기린이나 봉황을 대하듯 우러러보면서 중하게 의지하였다. 그러다가 선묘(宣廟)의 지우(知遇)를 받아 오래도록 경악(經幄)에서 모시게 되자, 간절한 마음으로 임금을 요순(堯舜)처럼 되게 하여 삼대(三代)의 태평 시대를 복원할 뜻을 지니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입대(入對)할 때마다 있는 힘을 다 기울여 분명하게 지적하면서 진달을 드리곤 하였는데, 제일의(第一義)가 아니면 아예 거론하지 않았다.공은 시사(時事)를 논할 적에 무엇보다도 먼저 근본을 확립하고 장구하게 시행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데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속습(俗習)에 얽매이지도 않고 공허한 이론에 치달리지도 않으면서, 반드시 활시위를 한껏 당긴 뒤에야 쏘려고 하는 자세를 견지하며 시기가 성숙되기를 기다려서 발동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일시적으로 변통(變通)하려는 의논 같은 것은 오히려 급급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상의 앞에서 쟁론을 벌이면서 “이 일은 뒤에 가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고 말하기까지 하였는데,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면 공의 말대로 귀결되곤 하였다. 이는 대체로 공이 본래 평소부터 큰 강령(綱領)과 이를 크게 활용할 곳들을 미리 정해 두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었다.선묘(宣廟) 초년에 퇴계가 조정에 있을 적에, 추숭(追崇)하는 전례(典禮)와 문소(文昭 소목(昭穆)을 말함)의 논의를 공이 모두 평소에 강정(講定)해 두었는데, 퇴계가 대부분 이를 따랐다. 그리고 그때에 공의전(恭懿殿 명종(明宗)의 형인 인종(仁宗)의 왕비)이 명묘(明廟)와 수숙(嫂叔)의 관계가 있는 만큼 무복(無服)이 마땅하다는 주장이 있었는데, 퇴계도 여기에 동의하였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형제간이라 할지라도 왕통(王統)을 차례로 이었으면, 군신의 관계가 성립된다. 따라서 부자(父子)의 관계와 동일하게 여겨야 할 것이니, 마땅히 기년복(朞年服)을 입어야 한다.” 하자, 퇴계가 크게 깨닫고는 조정에 글을 보내 말하기를, “군자(君子)가 있지 않으면, 어떻게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사람들 모두가 변례(變禮)에 통달한 공의 식견을 대단하게 여기는 한편으로, 훌륭한 말을 듣고서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빨리 바꿀 줄 아는 퇴계의 태도를 칭찬하였다.당시로 말하면 간악한 권신(權臣)이 혼탁하게 어지럽혀 놓은 뒤를 이어받은 때였기 때문에, 사기(士氣)가 시들시들해진 채 떨쳐지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공이 그 사이에 우뚝 서서 어질고 훌륭한 이들을 스승과 벗으로 삼고 후진(後進)들을 격려하고 인도하며 선을 장려하고 악을 물리쳤다. 그리하여 몇 년 동안이나 마치 큰 물을 막는 제방처럼 조정에 우뚝 서 있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소기묘(小己卯 기묘는 조광조(趙光祖)를 가리킴)로 지목하기까지 하였다.이렇듯 공이 신정(新政)에 기여한 공로가 매우 컸음에도 불구하고, 얼마 있다가 상신(相臣)과 뜻이 맞지 않아 해직되어 고향에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세상을 걱정하는 뜻 만큼은 공이 일찍이 뇌리에서 잊은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임신년(1572, 선조 5)에 입조(入朝)하게 되었을 때, 그것이 비록 어떤 일과 관련하여 소명(召命)을 받고서 들어오는 것이긴 하였으나, 그래도 처음의 뜻을 잊지 않고서 조금 시험을 하여 하나의 계기를 마련해 볼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하지만 막상 조정에 들어오고 나서는 위와 아래의 분위기를 잠자코 살펴본 뒤에 물러나와 “나랏일이 벌써 그르쳐지고 말았다.”고 탄식하였다. 그리고 이 뒤로부터는 조정에 나아가 일해 볼 생각이 더욱더 없어진 나머지, 바야흐로 자신의 뜻을 가슴속에 접어 두고는 조용히 수양할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부족한 점을 더욱 보완하는 한편, 제자를 양성하고 책을 저술하여 후세에 보탬이 되게 하려고 하였던 것인데 불행히도 수명의 제약을 받고 말았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그리고 공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세도(世道)가 곧바로 어그러져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논의가 일어나면서 국가의 큰 걱정거리가 되었다. 그리하여 공이 세워 두었던 제반 시책(施策)들이 모두 제대로 행해지지 못한 채, 진신(搢紳)들이 서로 알력을 하고 선악(善惡)이 한데 뒤섞이게 된 나머지, 조정이 마침내는 크게 혼란스럽게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정해년(1587, 선조 20)에 이르러서는 잘못된 논의가 기승을 부려 편당(偏黨)을 나누어 정치적으로 박해를 가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는데, 선진(先進)의 명현(名賢)이 이를 조정하여 화해시키려고 힘썼으나, 또한 이를 막을 수는 없었다.당시에 공을 추가로 거론하면서 당인(黨人)으로 뒤집어씌우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그 논의를 주도하는 자가 “고봉(高峯)을 모당(某黨)으로 끌어들여 연루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고 하여 마침내 중지된 적도 있었다. 식자(識者)들이 이를 두고서 논하기를, “공이 만약 죽지 않았다면 당론(黨論)을 조정하여 화해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공의 존재 여부가 바로 국가의 운명과 깊이 관련되어 있었던 것이 또한 이와 같았다.공은 거의 도의 경지와 가까운 자품(資稟)을 타고 태어났으므로 도체(道體)를 환히 꿰뚫어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퇴계와 더불어 이기론(理氣論)과 격물치지(格物致知)의 뜻에 대해서 논변할 적에, 투철한 식견과 박학한 학식을 발휘하여 퇴계의 창을 들고서 퇴계의 방 안에 들어가곤 하였으므로, 퇴계가 자신의 견해를 많이 수정하여 따르면서 공 홀로 허령(虛靈)한 근원의 경지를 보고 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퇴계는 주자(朱子) 이후에 나온 제유(諸儒)의 학설을 절충하여, 송 나라 육상산(陸象山)과 명 나라 왕양명(王陽明)의 학설이 사이비(似而非)라고 통렬히 비판하였는데, 그러는 과정에서 의심이 나거나 막히는 점이 있으면 반드시 공에게 물어보곤 하였으니, 다른 문인들은 감히 이런 일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공은 또 노소재(盧蘇齋 소재는 노수신(盧守愼)의 호임)를 상대로 나정암(羅整庵)의 《곤지기(困知記)》에 나오는 잘못된 견해를 논변하며 설을 지어 해명함으로써 퇴계의 뜻을 마무리하였는데, 이러한 내용이 모두 문집 가운데에 보인다.퇴계가 조정을 하직하고 돌아갈 적에, 선묘(宣廟)가 조정의 신하 가운데에 학문을 하는 신하를 꼽는다면 누구를 들 수 있느냐고 하문하였다. 이때 뭇 현신(賢臣)들이 조정에 가득하였는데, 퇴계가 감히 알지 못하겠노라고 사양하다가, 단지 아뢰기를, “기모(奇某)로 말하면 문자를 박람(博覽)한 데다가 이학(理學)에 있어서도 조예가 뛰어나니 통유(通儒)라고 할 만한데, 다만 수렴(收斂)하는 공부가 아직 지극하지 못하다고 여겨집니다.” 하였다. 또 어떤 이가 퇴계에게 묻기를, “기고봉은 아는 것에 비해서 행동하는 면이 뒤떨어지는 것은 아닌가?” 하자, 퇴계가 대답하기를, “고봉은 의리에 입각해서 임금을 섬기고, 예법에 입각해서 진퇴(進退)를 하고 있다. 그러니 아는 것에 비해서 행동하는 면이 뒤떨어진다고 어떻게 말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퇴계가 영남에서 창도(倡道)한 뒤로 공은 멀리 호남에 있었는데, 경사(京師)에서 서로 세 차례 만난 것을 제외하고는, 오직 서한을 통해서 왕복했을 따름이었다. 퇴계는 겸허하고 장중(莊重)한 반면에, 공은 호쾌하고 준걸스러웠으며, 기상(氣像)이 또 서로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은 마음속으로 깊이 퇴계를 섬기면서 어묵동정(語默動靜) 사이에 오직 퇴계를 본받으려고 노력하였다. 그 결과 퇴계의 문하에서 종유(從遊)한 자들이 수백 명이나 되었지만, 퇴계와 마음이 계합(契合)되어 추천을 받은 사람으로는 오직 공이 첫손가락에 꼽혔다.이는 대체로 무두질한 가죽과 팽팽한 활줄이 서로 도와 주는 것처럼, 그리고 궁성(宮聲)과 치성(徵聲)이 서로 어울리는 것처럼, 세상에 보기 드문 멋진 인연을 맺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뒤로 제유(諸儒)가 이를 두고 말하기를, “공이 실로 퇴계로부터 재단(裁斷)할 바를 취하게 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퇴계 역시 공으로부터 유익한 점을 많이 얻게 되었다.”고 하였고, 또 “공과 퇴계의 관계는 횡거(橫渠)와 정씨(程氏), 그리고 서산(西山)과 회암(晦庵)의 관계와 흡사하다.”고 하였는데, 이 말이 또한 타당하다고 여겨진다.아, 우리 동방의 도학(道學)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호임)으로부터 시작되어 그 뒤로 사현(四賢)이 차례로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박문약례(博文約禮)의 취지와 거피 식사(距詖息邪)의 공으로 말하면, 아직도 크게 갖추어지지 못한 점이 있었다. 그러다가 퇴계에 와서 비로소 학문의 목표가 바르게 확립되면서 이단(異端) 사설(邪說)이 거의 모두 깨끗이 숙청(肅淸)되기에 이르렀다.공의 도로 말하면 대체로 퇴계와 같다고 할 수 있는데, 명군(明君)과 양신(良臣)이 서로 만나 그 도를 활짝 꽃피우지 못한 채, 오직 학문을 강명(講明)하고 정사를 보좌하려 했던 내용만이 간책(簡策)에 전해지고 있을 뿐이니, 이는 실로 관락(關洛)이 처했던 경우와 똑같다고 할 수 있다. 사문(斯文)이 흥하고 쇠하는 것도 어쩌면 그 사이에 운수(運數)가 우연히 작용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공이 대각(臺閣)에 몸담고 있을 적에는, 일단 알고 있는 이상에는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일단 말을 한 이상에는 극진하게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다가 조정에서 물러나 돌아온 뒤로부터는 장소(章疏)를 올린 적이 한번도 없었으니, 이는 분수를 뛰어넘어서 굳이 무익한 주장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공이 세상을 떠난 뒤에 허봉(許篈)이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처음으로 공이 주대(奏對)한 내용을 초록(抄錄)하여 《논사록(論思錄)》 2권을 만들었다. 이와 함께 퇴계와 문답한 책 3권과 문집 약간 권이 세상에 유행한다. 공의 글을 보면 모방해서 꾸미는 일이 전혀 없이 웅대한 기력(氣力)이 흘러넘치면서 법도에 입각한 준엄한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그중에서도 비지(碑誌)와 간독(簡牘)에서 공의 특장(特長)을 더욱 볼 수가 있는데, 이 모두가 진정 덕이 있는 군자의 말들이라 하겠다.부인 정부인(貞夫人) 이씨(李氏)는 함풍(咸豐)이 관향으로 19세에 공에게 출가하였다. 공은 가정 교육을 매우 엄격하게 실시하였는데, 부인이 그 뜻을 받들어 근실하게 수행하였다. 부인은 또 식견이 비범한 위에 가정을 다스리는 데에 부지런하였다. 그리하여 과부로 지낸 25년 동안 자녀를 교육시키면서 의리에 입각한 규범을 분명하게 행하였으므로, 부인의 훈계를 듣고 교화된 자가 또한 적지 않았다.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 장남 기효증(奇孝曾)은 일찍부터 재명(才名)을 날려 진사에 올랐으며 관직이 첨정(僉正)에 이르렀다. 그다음 아들의 이름은 기효민(奇孝閔)과 기효맹(奇孝孟)이다. 딸은 사인(士人)인 김남중(金南重)에게 출가하였는데, 정유년 난리 때에 기효민, 기효맹과 함께 왜적을 만나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기효증은 1남 2녀를 두었다. 아들 기정헌(奇廷獻)은 현감이고, 장녀는 승지 조찬한(趙纘韓)에게 출가하였으며, 다음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한이겸(韓履謙)에게 출가하였다.공의 언행과 관련한 자료로는 가장(家狀)이 있고 연보(年譜)가 있으며, 또 국승(國乘 나라의 역사)에 기재된 제유(諸儒)의 평이 있다. 그러나 이 모두를 기재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기에, 지금 중요한 것만을 간추려서 시호(諡號)를 내릴 때에 참고할 자료로 제공하는 바이다.[주-D001] 창읍왕(昌邑王)이 …… 한 것 : 여기서 창읍왕은 한 무제(漢武帝)의 손자인 유하(劉賀)를 말한다. 소제(昭帝)가 죽은 뒤에 곽광(霍光)의 도움으로 즉위했으나, 행동이 음란하기 그지없어 즉위 27일 만에 태후(太后)의 명에 의하여 폐위되었다. 애왕은 무제의 여섯째 아들로서 유하의 부친인 창읍 애왕(昌邑哀王) 유박(劉髆)을 가리킨다.[주-D002] 장남헌(張南軒)이 …… 고사 : 장남헌은 송(宋) 나라 주희(朱熹)의 친구로 세상에서 남헌 선생(南軒先生)으로 일컬어졌던 장식(張栻)을 말한다. 장식이 좌사원외랑(左司員外郞)으로 재직하던 중에, 근신(近臣)인 장열(張說)이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에 임명되자, 상소를 올려 부당함을 극간(極諫)하는 한편, 묘당에 나아가 재상인 우윤문(虞允文)을 대면하고서 “환관이 집정(執政)하는 것이 경(京)과 보(黼)에서부터 시작되더니, 근신이 집정하는 것이 또 상공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고 질책하였는데, 그 뒤로 미움을 받아 원주(袁州)로 쫓겨났다가 급기야는 시골로 돌아가 몇 년 동안이나 집에서 칩거했던 일을 말한다. 《宋史 卷429 張栻列傳》[주-D003] 공은 …… 태어났으므로 :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 하(下)에, “안씨(顔氏)의 아들은 거의 도의 경지와 가깝다고 하겠다. 좋지 못한 점이 있으면 알지 못하는 적이 없었고, 일단 알면 다시는 그런 일을 행하지 않았다.”라고 공자가 안회(顔回)를 칭찬한 말이 있다.[주-D004] 퇴계의 …… 하였으므로 : 고봉이 퇴계의 설을 깊이 이해한 뒤에 퇴계의 설을 가지고 퇴계의 논점을 비판하였다는 말이다. 후한(後漢) 하휴(何休)가 《춘추(春秋)》 삼전(三傳)에 대해서 저술을 하였는데, 정현(鄭玄)이 그 내용을 반박하여 수정을 가하자, 하휴가 “강성(康成)이 나의 방에 들어와서는, 나의 창을 잡고서 나를 치는구나.”라고 탄식하였던 고사가 전한다. 강성(康成)은 정현의 자(字)이다. 《後漢書 卷35 鄭玄列傳》[주-D005] 곤지기(困知記) : 명(明) 나라 나흠순(羅欽順)의 저술로, 대체적으로는 주자학(朱子學)을 신봉하면서도, 단지 일원기론(一元氣論)을 주장하는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정암(整庵)은 그의 호이다.[주-D006] 무두질한 …… 것처럼 : 가죽은 퇴계를, 활줄은 고봉을 가리킨다. 춘추 시대 진(晉) 나라 동안우(董安于)는 완만한 성격을 고치려고 허리에 활줄을 차고 다녔고, 전국 시대 서문표(西門豹)는 조급한 성격을 고치려고 허리에 무두질한 가죽을 차고 다녔다는 고사가 전한다. 《韓非子 觀行》[주-D007] 궁성(宮聲)과 …… 것처럼 : 주객(主客)이 서로 멋지게 어울리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오성(五聲) 가운데 궁(宮)은 가장 탁한 토성(土聲)으로서 주음(主音)에 해당하고, 치(徵)는 약간 맑은 화성(火聲)으로서 궁음(宮音)에서 나오는 소리이다.[주-D008] 횡거(橫渠)와 …… 관계 : 송(宋) 나라 장횡거(張橫渠), 즉 장재(張載)는 이른바 이일분수(理一分殊)의 도리를 밝혀 이학가(理學家)인 정이천(程伊川)의 추숭을 받았으며, 진서산(眞西山), 즉 진덕수(眞德秀)는 주희(朱熹)를 학문의 종주로 삼았다.[주-D009] 사현(四賢) :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을 말한다.[주-D010] 거피 식사(距詖息邪) : 잘못된 행동[詖行]을 막으며, 삿된 주장[邪說]을 종식시킨다는 말로, 《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나온다.[주-D011] 관락(關洛) : 관중(關中)의 장재(張載)와 낙양(洛陽)의 정씨(程氏) 형제를 가리키는 말로, 송(宋) 나라의 이학가(理學家)를 뜻한다.
    2020-09-27 | NO.172
  • 대사헌 김공(金公)의 신도비명
    간이집 제2권 /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국가가, 아조(我朝) 선조(先祖)의 계보(系譜)가 무함을 받은 채로 중국 조정의 전책(典冊)에 실려 있는 것과 관련하여, 이를 해명하면서 고치려고 노력해 온 것이 무려 2백 년이나 되었다. 그리하여 황제의 윤허를 이미 받기는 하였으나 이를 개정하여 다시 간행하는 일은 아직 완결을 보지 못하였는데, 그동안 이 임무를 띠고 중국에 건너가는 사신을 선발할 때에는 반드시 문학으로 이름난 인사 중에서 엄선하곤 하였다.그러다가 만력 신사년(1581, 선조14)에 이르러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대사간(大司諫)으로 있으면서, 이 일을 전담할 사신을 다시 한 번 더 중하게 보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으므로,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있던 김공(金公)을 주청사(奏請使)로 삼아 파견하게 되었다. 이때 상이 유지를 내려 공이 직접 서장관(書狀官)과 질정관(質正官)을 뽑아 같이 가도록 허락해 주었는데, 그 결과 사문(斯文) 고경명(高敬命)과 내가 공과 함께 동행하게 되었다.공으로 말하면, 학문에 널리 통하고 식견이 고매하여 문교(文敎)를 숭상하던 그 시대에 뭇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던 그런 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신의 일과 관련하여 문자를 작성할 적에는 반드시 나와 고 사문에게 자문을 구하려고 하였고 자기의 주장을 한 번도 내세운 적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물러 나와서는 그윽이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자기 주장보다는 항상 남의 의견을 들으려고 노력을 하니 이는 대신(大臣)의 도량이라고 하겠다. 아마도 공이 언젠가는 반드시 정승이 되고 말 것이다.” 하였다.임오년(1582)에 복명(復命)을 하고 나서 또 식자(識者)들의 언론을 들어 보니 모두 말하기를, “공이야말로 고금(古今)을 통달한 데다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자질을 갖추고 있는 만큼 뒷날 정승이 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율곡 공(栗谷公)이 특히 이러한 점을 극구 이야기하였다.4월에 공이 특진관(特進官)으로 경연(經筵)에 입시(入侍)했다가 중풍(中風)이 발작하는 바람에 수레에 실려서 집에 돌아왔다. 이에 상이 내관(內官)을 보내 수시로 병증(病症)을 하문하고 호피(虎皮)를 지급하기까지 하였는데, 이날 밤에 그만 공이 세상을 뜨자 관곽(棺槨)을 내리도록 명하였다.그러고 나서 얼마 뒤에 율곡 공이 경연 석상에서 아뢰기를, “김모(金某)는 재질이 뛰어난 데다 몸가짐이 청백(淸白)하였는데, 비록 크게 쓰이지는 못했으나 넉넉하게 휼전(恤典)의 은혜를 베푸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탄식하며 한참 있다가 이르기를, “어찌하여 일찍 말해 주지 않았는가.” 하고는,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영구(靈柩)를 호송(護送)하고 장례에 관한 일을 도와주도록 하였다.공은 가정(嘉靖) 병술년(1526, 중종21)에 태어났으니, 세상을 떠난 해의 나이가 57세였다. 그해 모월(某月)에 모자(某子)가 연산현(連山縣) 모리(某里) 선영(先塋)의 모원(某原)에 안장(安葬)하였다.그로부터 19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 공의 윤자(胤子)인 김장생(金長生) 씨가 나를 찾아와서 말하기를, “선군(先君)께서 땅속에 묻히신 뒤로 가정 형편에 여유가 없었고, 또 병란(兵亂)을 당하는 바람에 비석을 세울 틈이 없었으므로, 마침내는 뒷사람들이 선군의 자취를 알 수 없게 되지나 않을까 염려가 되었다. 이제는 선군의 비명(碑銘)을 새겨야 하겠는데, 아무래도 그대가 써 주는 것이 제일 좋겠다.” 하였다.나로 말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공으로부터 특별한 지우(知遇)를 받았던 몸이다. 그리고 나 자신도 함께 사신으로 갔던 때의 일에만 국한되지 않고, 망녕되나마 공을 상당히 깊이 알고 있다고 여기고 있는 터이다. 그러니 어떻게 감히 사양할 수가 있겠는가.삼가 살펴보건대, 공은 휘(諱)가 계휘(繼輝)요 자(字)는 중회(重晦)이다. 김씨는 광주(光州)에서 비롯되었는바, 신라(新羅) 왕자(王子)의 먼 후예들로서, 고려(高麗) 초에서부터 본조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의관(衣冠)을 배출하였다.공의 고조인 휘 국광(國光)은 좌의정에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이요, 증조인 휘 극뉵(克忸)은 대사간이다. 조부인 휘 종윤(宗胤)은 진산 군수(珍山郡守)로 병조 참의를 증직받았고, 고(考)인 휘 호(鎬)는 지례 현감(知禮縣監)으로 이조 판서를 증직받았다. 정부인(貞夫人)을 추증받은 비(妣)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공조 정랑 휘 광원(光元)의 딸이다.공은 서너 살이 되던 때에 벌써 문자를 알았고, 7, 8세 때에 문의(文義)를 통했으며, 15세 이전에 경사(經史)를 거의 모두 독파하였다. 조금 더 장성해서 제서(諸書)를 두루 살펴볼 때에는 열 줄을 동시에 읽어 내려갔으며, 한 번 눈을 스치기만 하면 문득 기억하곤 하였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경우 사건에 따라 교대로 바뀌어 나타나는 열국(列國)의 인명(人名)처럼 사람들이 기억하기 어렵다고 난색을 표하는 것까지도 종신토록 분명히 알아 틀리는 적이 없었다.그리고 사장(詞章)에 있어서도 별로 힘을 들이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무슨 글이든지 민첩하게 지어내곤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또 사륙문(四六文) 같은 것은 마치 돈 많은 상인(商人)이 자기 돈을 꺼내어 쓰듯이 전고(典故)를 자유자재로 인용하는 가운데, 잘 지으려고 하지 않는데도 지어내는 것마다 자연스럽게 기막힌 솜씨를 선보이곤 하였다.무신년(1548, 명종3) 한 해 중에 정시(庭試)와 과시(課試)에서 잇따라 장원(壯元)을 하였으므로 직부전시(直赴殿試)의 명이 내려졌는데, 과시를 통해 직부전시하는 전례(前例)를 열어 놓을 수는 없다는 언관(言官)의 반대에 부딪친 나머지, 기유년(1549) 봄에 다시 정시에서 장원을 차지한 뒤에야 가능하게 되었다.그리하여 전시(殿試)에서 을과(乙科)로 급제한 다음에 권지 승문원정자(權知承文院正字)가 되었다가 곧바로 사가독서(賜暇讀書)의 대상으로 뽑혔는데, 이때에도 청반(淸班)의 경력이 없다는 이유로 취소되었다가, 뒤에 옥당(玉堂)에 몸을 담게 된 뒤에야 다시 사가독서를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일화는 모두 공의 성망(聲望)을 드높이는 데에 더욱 일조(一助)를 하였다.그사이에 양모(養母)의 상(喪)을 당했으며, 상복을 벗은 다음에 부정자(副正字)를 거쳐 추천으로 사국(史局)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검열(檢閱)을 거치고 나서 곧장 홍문록(弘文錄)에 뽑히는 영광을 안았으며, 정자(正字)를 거쳐 박사(博士)에 이른 다음 부수찬(副修撰)으로 승진하였는데, 이때부터는 비록 다른 곳으로 옮겨지더라도 항상 지제교(知製敎)의 직책을 겸대(兼帶)하게 되었다.당시로 말하면 을사사화(乙巳士禍)를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서 사람들이 언론 활동을 꺼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진강(進講)할 때에도 장구(章句)를 분석하는 수준을 넘지 못하였는데, 공이 홀로 고사(故事)를 인용하고 시무(時務)를 간절히 진달하면서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일을 자신의 책무로 여겼으므로, 사신(史臣)도 공을 진정한 학사(學士)라고 일컬었다.이때 윤원형(尹元衡)이 서얼(庶孼)을 허통(許通)하는 일에 대한 의논을 제기하면서 자신의 작품인 양 떠벌려 대었지만, 사실은 이를 논한 차자(箚子) 역시 공의 손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다가 간원(諫院)의 정언(正言)에 임명되면서부터는 더욱 강개(慷慨)한 심정으로 일을 논하였는데, 가령 심정(沈貞)의 직첩(職牒)을 돌려주지 말라고 강력하게 쟁집한 일 같은 것은 올곧은 도를 행했던 고인(古人)의 풍도를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천거를 통해 병조 좌랑(兵曹佐郞)이 되었다가 곧이어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추천을 받고 이조 좌랑(吏曹佐郞)이 되었으니, 이때가 을묘년(1555, 명종10)이었다. 이에 이르러서는 한 시대의 화려한 명성을 한 몸에 한껏 누리게 되었다고 할 수 있었는데도, 공은 김공 홍도(金公弘度) 등과 함께 오로지 격탁 양청(激濁揚淸 악을 물리치고 선을 장려하는 것을 말함)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다.그 결과 권세 있는 간신에게 크게 미움을 받게 되었는데, 공과 동시에 조정에 진출한 이들 가운데 형편없는 자들이 또 비루하게 대접받는 자신들의 처지를 계속 유감스럽게 생각해 오다가 그사이에서 화(禍)를 덮어씌우는 꾀를 꾸며 내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한 시대의 명사(名士)들이 귀양살이를 하기도 하고 파직당하기도 하였는데, 공 역시 도성문 밖으로 쫓겨난 뒤 연산(連山)의 선영(先塋) 아래로 물러 나와 거처를 정하고는 적막한 방 안에 틀어박혀 마치 그렇게 일생을 마치려는 것처럼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계해년(1563, 명종18)에 이르러 조정이 익개(益改)하는 거조(擧措)를 취함에 따라 공이 직첩(職牒)을 돌려받게 되었고, 또 잇달아 옛 관직에 서용(敍用)하라는 명이 내려졌는데, 이때 공은 부친상을 당해 복을 입고 있는 중이었다.갑자년(1564)에 상복을 벗고 나서 곧바로 승문원 교리(承文院校理)를 제수받았으며, 이후 예조 정랑, 성균관 직강 및 이조 정랑에 임명되었다. 이처럼 조정에서 공을 특별히 대우하는 것이 예전과 같았으므로, 함께 복관(復官)된 이들도 감히 바라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그 뒤로 제시(諸寺)에서는 첨정(僉正)을 한 번, 정(正)을 세 번 역임하였고, 양사(兩司)에서는 사간(司諫)과 집의(執義)를 역임하였고, 성랑(省郞 의정부 당하관)으로는 검상(檢詳)과 사인(舍人)을 역임하였고, 관직(館職)으로는 응교(應敎)와 전한(典翰)과 직제학을 역임하였다.명묘(明廟)의 상(喪)을 당할 무렵에 세자(世子)를 책봉할 뜻이 아직도 없었으므로 조야(朝野)에서 근심을 하면서도 감히 나서서 말하는 이가 없었다. 이에 공이 전한(典翰)으로 있으면서 차자(箚子)를 올리려고 하였는데, 부제학(副提學)이 병을 핑계 대고는 회피하였다. 그렇지만 결국은 다른 동료들과 함께 진달하며 논하였으므로, 물정(物情)이 하기 힘든 일을 하였다고 여겼다.병인년(1566) 중시(重試)에 을과(乙科) 제일명(第一名)으로 급제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 당상관임)의 품계에 오르고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되었다. 공이 시험장에 제출한 표문(表文)은 한 조정 안에서만 걸출한 것이었다기보다는 당송(唐宋) 명가(名家)의 문집에서 찾아본다 할지라도 그들이 한 걸음 뒤로 양보해야 할 그런 수준의 것이었다.그런데 직제학으로 있다가 당상관으로 승진하는 것이 관례였던 점에 비추어, 신은(新恩)을 받으면서 직제학을 아울러 겸대하게 된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들이 공을 위해서 불만족스럽게 생각했는데도, 공은 그런 말을 듣고서 한번 웃어넘길 따름이었다. 그 뒤로 우부승지(右副承旨)와 좌부승지(左副承旨), 행 호군(行護軍), 대사성(大司成), 수 황해도관찰사(守黃海道觀察使) 등의 직책을 출입하였다.기사년(1569, 선조2)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신미년(1571)에 상복을 벗고 나서 또 행 호군, 이조와 예조의 참의, 좌부승지와 우부승지, 대사간(大司諫)을 출입하고 사은사(謝恩使)로 경사(京師)에 다녀왔다.계유년(1573)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오르면서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그 뒤로 행 대사간을 네 차례, 대사헌을 세 차례나 출입하였다. 또 평안도와 전라도 관찰사로 나가기도 하였고, 공조와 형조의 참판 및 행 상호군(行上護軍),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를 지냈으며, 예조 참판으로 있을 때는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와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겸임하였다.영남 지방은 본래 땅이 넓고 물화(物貨)가 풍성하기로 이름난 곳인 데다 또 바야흐로 갑술년의 병적(兵籍) 정리 사업을 행하느라 분주하기만 하였다. 그런데 공이 이 지방을 안찰(按察)하면서부터는 첩소(牒訴)를 물 흐르듯 판결하여 항상 시간에 여유가 있었으므로, 저녁 시간은 내내 간편한 복장으로 지팡이를 짚고 소요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어떤 일이나 수량에 대한 명목과 관련하여 한번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들은 아무리 시간이 오래 지나더라도 미세한 사항까지 잊어버리는 적이 없었으므로, 이민(吏民)들이 공의 신령스럽고 밝은 식견에 탄복하였다.그러다가 관서(關西) 지방을 안찰하게 되었는데, 당시에 그곳은 정축년의 기근(饑饉)과 역병(疫病) 사태로 바야흐로 신음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에 밤낮으로 구제할 방책을 강구하고 방편을 세워 구료(救療) 사업을 벌이면서 기필코 사람들을 살려 내고 집집마다 온전하게 될 수 있도록 힘쓰느라 수염과 머리가 모두 하얗게 변하기까지 하였다. 공이 정사(政事)에 능하면서도 민첩하게 처리하고 부지런히 뛰어다닌 것이 이와 같았다.인순왕후(仁順王后 명종(明宗)의 비(妃))의 상(喪)을 당했을 때, 왕후가 일찍이 조정에 임하여 청정(聽政)한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라는 상의 하교(下敎)에 따라, 군신(群臣)이 삼년복(三年服)을 입는 문제에 대해서 의논을 하게 되었다. 이때 공이 대사간의 직책을 행하고 있었는데, 이 일과 관련하여 대사헌인 유희춘(柳希春)에게 말하기를, “이 일이 한번 잘못 정해지고 나면 간쟁해서 바로잡기가 무척이나 어렵게 될 것이다.” 하고는, 즉시 합사(合司)로 복합 상소(伏閤上疏)를 올려 ‘왕후의 상(喪)에는 원래 정해진 예법(禮法)이 있다’고 논한 결과, 그 의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그 뒤에 지평 민순(閔純)이 계청하기를, “졸곡(卒哭) 후에는 송 효종(宋孝宗)이 행한 전례에 따라 백관(白冠) 차림으로 정사를 보셔야 합니다.” 하자, 조정에서 의논드리기를, “현관(玄冠 흑색의 관)에 오대(烏帶 흑색의 띠) 차림으로 정사를 보아야 한다는 기록이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실려 있어 조종조(祖宗朝)에서 줄곧 그렇게 행해 왔으니, 경솔하게 바꿔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이 문제와 관련하여 공과 율곡 공(栗谷公)은 “변통해야 할 때에는 근고(近古)에 행했던 예법을 따라야 마땅하다.”고 하였는데, 당시 의정(議政)이었던 사암(思庵) 박순(朴淳)과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도 여기에 동의하였으므로, 마침내 이 의논이 채택되었다.인성왕후(仁聖王后 인종(仁宗)의 비(妃))의 상을 당하여 복제(服制)를 의논할 때, 영상(領相) 권철(權轍)이 ‘송 고종(宋高宗)이 원우황후(元佑皇后)를 위해 입었던 상복의 예(例)’를 인용하며 전하의 상복을 자최 장기(齊衰杖朞)로 정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공이 의논을 주도하며 아뢰기를, “명묘(明廟)께서 이미 인묘(仁廟)의 뒤를 이었고 전하께서 또 명묘의 뒤를 이었는데, 일단 후사(後嗣)가 된 이상에는 그 아들이 된다고 할 것이니, 삼년상을 행하는 것이 원래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이로써 그 의논이 마침내 정해지게 되었다.무인년(1578) 연간에, 왕자의 숫자는 갈수록 늘어만 가는데도 세자(世子)를 아직도 정해 놓지 않아 바깥에서 말들이 분분하게 일어났으므로, 공이 대사헌으로서 입시하여 건의하기를, “왕자가 이미 장성하였으니, 학식과 덕행이 뛰어난 인사를 사부(師傅)로 삼아 보도(輔導)의 책임을 맡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으니, 이는 상의 뜻이 빨리 정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어떤 이는 이에 대해 상의 노여움을 살까 겁을 내면서 편지를 보내 극력 주장하지 말라고 권하기까지 하였으나, 공은 이를 준열하게 꾸짖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상이 하루는 친히 정사(政事)에 임하여 이조(吏曹)에 분부하기를, “될 수 있으면 순후(醇厚)한 사람을 골라서 쓰고, 교격(矯激 고집이 있고 괴팍스러운 것)한 사람은 쓰지 말도록 하라.” 하였는데, 공이 이 말을 듣고는 근심스러운 기색을 띠면서 말하기를, “성상의 분부는 물론 지극히 타당하다. 다만 염려되는 것은, 나약하고 아첨을 잘 하는 사람은 순후하다는 이름을 얻기가 쉬운 반면에, 강직한 성격을 지닌 사람은 교격하다는 비방을 늘 받게 마련인데, 만약 그렇게 된다면 해가 되는 점이 오히려 많아지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하였다.이때 벼슬길이 혼탁해진 나머지 자신의 주견도 없이 남에게 빌붙으며 탐오(貪汚)를 일삼는 무리들이 중외(中外)에 줄을 잇고 있었다. 이에 공이 사헌부에서부터 먼저 수십 명을 도태시키고 나서 위에 아뢰었는데, 이 중에는 권세가의 친속(親屬)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공을 원망하고 미워하는 소리가 일어나게 되었다.공이 예법(禮法)에 의거하여 잘못을 바로잡고 현재의 일을 걱정하여 길이 후환이 없도록 하는 것을 보면 계고(稽古 지난 역사를 거울로 삼아 대처하는 것)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충분히 알 수가 있었는데, 이와 함께 앞뒤를 돌아보지 않고 결단을 내려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려 한 것이 또한 이와 같았다.그런데 10여 년 전부터 사림(士林) 사이에는 동(東)이니 서(西)니 하는 설이 행해지고 있었다. 대개는 전배(前輩)를 서(西)라 하고 후배(後輩)를 동(東)이라 하였는데, 그다지 시비(是非)를 가릴 것도 없건마는 서로들 엎치락뒤치락하는 일이 없지 않았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공과 같은 사람은 자연히 서인(西人)에 속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시배(時輩)가 공의 명망을 중히 여기고서 실제로 서로들 놓아주지 않으려 하는 일이 또 벌어지곤 하였다.하지만 공 자신은 사람들을 대할 적에, 평소에 그 그릇을 아꼈던 사람이 혐의(嫌疑)에 특별히 걸리거나, 기릴 만한 선행(善行)만 있고 특별히 끊어 버려야 할 과오가 없는데도 한때 공격을 받게 된 경우에는, 어느 한편을 따라서 부화뇌동하는 일이 결코 없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언지(言地)에 있는 자신의 신분을 이용하여 혼자서라도 논계(論啓)하여 바로잡기도 하고, 그들과 함께 같은 동네에 살며 예전처럼 정답게 어울려 노닐기도 하였는데, 그러면서도 상대방과의 인간 관계 때문에 정당하게 공무(公務)를 집행하지 못하는 폐단은 아예 있지를 않았다.공은 천성적으로 매우 높은 자질을 타고나 견식(見識)이 고매하였으며, 누가 보아도 그야말로 ‘큰 것을 먼저 확립해 놓은 사람[先立其大者]’이라고 할 만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동거지를 보면 소탈하기만 하였고, 언어 역시 해학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었으며, 괜히 위엄을 갖추려는 기색은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하지만 집안에서의 행실은 사람들이 하기 어려워하는 바가 있었다. 부모님을 모실 때에는 한껏 즐겁도록 해 드렸으며,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를 행할 때에는 오직 예법에 맞게 하였다. 그리고 여러 아우들과 우애롭게 지내면서 시종일관 간격이 없었고, 그들의 자녀를 모두 자신의 소생처럼 여겨 의식(衣食)에 사정(私情)을 두지 않았으며, 봉록(俸祿)을 받으면 번번이 나누어 주곤 하였다. 홀로 된 누이가 심질(心疾)을 앓고 있다가 일찍이 뜻밖의 변고를 당하였는데, 그때에도 가지고 싶은 대로 가재(家財)를 갖고 가게 하여 끝내 환심을 얻은 일도 있었다.평소 집안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아, 선조들이 물려준 재산 외에는 한 사람의 노비(奴婢)나 한 이랑의 전장(田庄)도 늘린 것이 없었다. 그러고는 오직 만년에 이르러서 집 뒤에다 두 칸짜리 집을 짓고 늘 기거하였는데, 사람들이 너무 누추하다고 비웃을 정도였다. 그리고 안독(案牘)이나 집기(什器) 같은 것도 앉은 자리에 따라 구차하게 설치하였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면 다시 수습하지 않았으며, 어떤 때는 그냥 놔두고서 있는지 없는지 물어보지 않는 일조차 있었다.공은 제일류(第一流)의 인물이었는데도 자신을 자랑하며 거드름을 피운 적이 없었다. 그리고 현재(賢才)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한 정성에서 우러나와, 허심탄회하게 자신을 낮추고 그들에게 관심을 쏟으면서 연령이나 직위 따위는 아예 아랑곳하지 않았다. 또 사람들에게서 훌륭한 점을 조금이라도 보게 되면 반드시 칭찬하며 드날리게 해 주었고, 좋지 못한 점을 듣게 되면 귓가로 흘리고서 듣지 않은 것처럼 하였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공은 종척(宗戚)과 향당(鄕黨) 사이에서 특히 후덕스럽게 대하였으므로, 유식한 이들은 그 의리에 감복하였고 무식한 자들도 그 인덕(仁德)을 사모하였다.공은 견문이 넓은 데다가 기억력이 또한 비상하였는데, 틈이 나는 대로 산천(山川), 도리(道里), 성읍(城邑), 병식(兵食) 등의 형세와 명실(名實)이라든가 인물의 현회(顯晦 벼슬과 은둔 등 명암에 관한 일)와 씨족(氏族)의 원류(源流) 및 연대(年代)의 멀고 가까움 등에 대해서, 우리 동방은 물론이고 나아가서는 광대한 천하의 일까지 모두 가슴속에 정리해 두고서, 마치 촛불 아래에서 하나하나 숫자를 계산해 내는 사람처럼 입으로 술술 말해 주고 손바닥으로 가리켜 보여 주곤 하였으며, 법령의 연혁(沿革)이나 고실(故實)이 기재되어 있는 것들 역시 무슨 책 몇 면(面)에 나와 있는지 잘도 기억해 내곤 하였다. 그래서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처럼 견문이 많아 별로 사람을 인정해 주지 않았던 분까지도 극구 찬탄하며 공과 벗으로 지내는 것을 즐겨하였던 것이었다.공은 어떤 사람이나 어떤 일과 관련하여, 뒤에 어떻게 될 것인지 반드시 알아맞히는 선견지명을 가지고 있었으며, 멀고 가까운 일을 막론하고 한번 말을 하면 그 말이 적중되곤 하였다. 이는 마치 양유기(養由基)가 활을 쏘는 것이나 동방삭(東方朔)이 점을 치는 것과도 같았으므로, 사람들이 찬탄을 금치 못하였다. 그래서 공이 세상을 떠나자 노성(老成)한 이나 후진(後進)이나를 막론하고 한 시대의 영귀(靈龜)와 보감(寶鑑)을 잃게 되었다고 슬퍼하였으며, 임진년 이후로 공사(公私) 간에 도적(圖籍)이 모두 병화(兵火)로 소진된 상황에서 막상 일을 당했을 때에는 공의 옛날 일을 생각하며 애석하게 여기는 것이 더욱 끝이 없었다.공의 배필인 정부인(貞夫人)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참찬(參贊) 휘 영(瑛)의 딸이다. 공보다 7년 늦게 태어나서 공보다 24년 먼저 죽었는데, 1남 1녀를 낳았다. 아들 김장생(金長生)은 학행(學行)의 소유자로 현재 안성 군수(安城郡守)로 있는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조대건(曺大乾)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딸은 진사(進士) 정기명(鄭起溟)에게 출가하였는데, 일찍 죽었다.측실 소생으로 4남 2녀가 있다. 아들은 김의손(金義孫), 김연손(金燕孫), 김경손(金慶孫), 김평손(金平孫)인데, 김연손은 일찍 죽었다. 여서(女婿)인 윤경남(尹敬男) 역시 일찍 죽었고, 차녀는 승지(承旨) 김상용(金尙容)의 첩(妾)이 되었다.손자인 김은(金櫽)은 일찍 죽었고, 다음은 김집(金集)으로 진사이며, 다음은 김반(金槃)이다. 여서(女婿)는 서경휼(徐景霱)이고, 다음은 한덕급(韓德及)이다. 얼손(孽孫)으로는 손자가 셋, 손녀가 하나인데, 모두 어리다. 외손자는 정운(鄭沄)이고 여서는 윤홍국(尹弘國)이다. 기타의 어린 손(孫)과 증손은 여기에 싣지 않는다.경자년(1600, 선조33)에, 공이 일찍이 광국 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던 일을 감안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 판서로 추증하였으니, 이는 관례에 따른 것이었다.내가 이상과 같이 서술한 다음에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지어 슬픔을 부치는 바이다.몸은 옷무게도 이기지 못할 듯하였으나 / 體若不能勝衣뜻은 외물에 흔들림이 없었고 / 而志非物移도량은 사람들이 엿볼 수 있는 바가 아니었네 / 量非人窺말은 겨우 입 밖으로 내놓는 듯하였으나 / 言若僅能出口만좌의 담론을 모두 굴복시켰고 / 而滿座之談屈조정 가득 분분한 의논 결판내었네 / 盈庭之議決위대한 사업 이루시리라 잔뜩 기대하였는데 / 蓋方期公於事業之上공의 행적 드러내는 비명을 짓게 되다니요 / 而遽形公於文字之中내가 어찌 걸맞게 써 드릴 수 있으리까 / 安能有以稱끝없는 슬픔만 부칠 따름이외다 / 寄哀於無窮[주-D001] 익개(益改) : 개과천선(改過遷善)의 뜻이다. 《주역(周易)》 익괘(益卦) 상사(象辭)의 “풍뢰가 익이니, 군자는 이 점괘를 보고서 선을 보면 그쪽으로 옮겨 가고 허물이 있으면 고치느니라.[風雷益 君子 以 見善則遷 有過則改]”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주-D002] 큰 것을 …… 사람 : 먼저 큰 마음 자리를 확고하게 정해 놓았기 때문에 자그마한 이목(耳目)의 유혹 따위에는 결코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맹자가 대인(大人)을 설명하면서 표현한 말이다. 《孟子 告子上》[주-D003] 양유기(養由基)가 …… 것 : 전국 시대 초(楚)나라의 장군 양유기가 백 보 떨어진 거리에서 버들잎을 활로 쏘아 백발백중했다는 고사가 있다. 《史記 卷4 周本紀》 한 무제(漢武帝) 때 동방삭이, 엎어 놓은 사발 속에 든 물건을 점쳐서 알아맞혔으며, 추아(騶牙)가 출토되었을 때 흉노가 귀순하리라는 것을 알았다는 고사가 있다. 《史記 卷126 滑稽列傳》 《漢書 卷65 東方朔傳》
    2022-04-29 | NO.171
  • 광주광역시
  • 한국학호남진흥원
  • 사이버광주읍성
  • 광주서구청
  • 광주동구청
  • 광주남구청
  • 광주북구청
  • 광주광산구청
  • 전남대학교
  • 조선대학교
  • 호남대학교
  • 광주대학교
  • 광주여자대학교
  • 남부대학교
  • 송원대학교
  • 동신대학교
  • 문화체육관광부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 국립아시아문화전당
  • 광주문화예술회관
  • 광주비엔날레
  • 광주시립미술관
  • 광주문화재단
  • 광주국립박물관
  • 광주시립민속박물관
  • 국민권익위원회
  • 국세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