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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덕령 장군 전[金將軍傳]- 서하집
    김 장군 전[金將軍傳] - 서하집 제14권 / 전(傳) : 이민서(李敏敍, 1633~1688). 장군의 이름은 덕령(德齡)이고, 자는 경수(景樹)로, 광주(光州) 석저촌(石底村)의 사람이다. 아버지 붕섭(鵬燮)과 조부 익(翊)은 재행(才行)이 있었으나 모두 현달하지 못하였다. 집안이 대대로 유업(儒業)에 종사하였으니, 장군도 어릴 적에 향교(鄕校)를 출입하며 유아(儒雅)를 쌓았다. 일찍부터 자부심이 강하고 강개한 기질에 큰 뜻을 품고 있었으나, 잘 드러내지 않고 반듯하게 자신을 가다듬어 이를 아는 사람들이 없었다.사람됨은 그리 장대(長大)하지 않았으나, 용맹이 남달랐다. 어릴 때에 이웃집의 감이 익자, 장군은 몸을 날려 입을 갖다 대고는 실컷 먹고서야 내려왔다. 또 두어 길 되는 칼을 즐겨 다루었는데, 때때로 술기운에 말을 타고 산비탈을 질러가며 칼을 좌우로 휘둘러 자르면서 내달리면, 마치 폭풍우가 몰아치듯 지나는 곳마다 큰 소나무가 어지러이 쪼개지고 쓰러졌다. 또 항상 한 쌍의 철추를 늘 좌우에 차고 다녔는데, 철추의 무게가 각각 백 근이나 되었다.더러는 말을 달려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가, 방향을 바꿔 내달려 나오기도 하였다. 더러는 지붕에 올라가 옆으로 누워 처마로 굴러 떨어지다가 미처 땅에 닿기 전에, 몸을 회전시켜 뛰어올라 방 안으로 들어가기도 하였다. 일찍이 사나운 호랑이가 대밭 속에 있으면서 나오지 않자, 장군이 먼저 화살을 쏘아 자극하였다. 호랑이가 놀라고 성이 나서 입을 딱 벌리고 사람을 물려고 하였는데, 장군이 창을 빼어 들고 마주해서 찌르자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으니, 이러한 일들이 매우 많았다. 매양 스스로를 조운(趙雲)에게 견주었는데, 일찍이 시를 지어 ‘군병(軍兵)을 거느려 적을 무찌르고는 갑옷을 벗고 강호(江湖)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스스로 읊었으니, 그 의중을 알 만하였다.만력(萬曆) 임진년(1592, 선조25)에 왜구가 크게 쳐들어오자 선조께서는 용만(龍灣 의주(義州))으로 파천(播遷)하였다. 이듬해에 명(明)나라 황제가 군사를 보내 구원하여 연이어 삼경(三京)을 수복하였으나, 적은 영남(嶺南)에 머물면서 날마다 군병을 증가시키며 재침(再侵)을 꾀하여, 관군(官軍)과 의병(義兵)들이 도처에서 무너지고, 명나라에서 보낸 장리(將吏)들 역시 겁먹고 회피하며 관망만 하고 있었다.이때 장군은 모친의 상(喪)을 당해 집에 있었는데, 담양 부사(潭陽府使) 이경린(李景麟)과 장성 부사(長城府使) 이귀(李貴)가 번갈아 방백(方伯)에게 장군을 천거하였고, 이경린은 또 전투 장비까지 내주며 기병(起兵)해서 싸움에 나가기를 권유하였다. 방백이 이에 조정에 보고하자, 특별히 형조 좌랑(刑曹佐郞)을 제수하였다. 장군의 자부(姊夫) 김응회(金應會) 또한 기개가 있고 뜻이 큰 의사(義士)였는데, 의리로써 장군을 개유(開諭)하니, 11월에 장군은 마침내 상복을 벗고 담양(潭陽)에서 병력을 모집하여 수천 명을 얻었다. 원수(元帥 권율(權慄))는 영남에 있으면서 그 군대를 초승군(超乘軍)이라 표방(標榜)하였다. 세자(世子)는 전주(全州)에 있으면서 장군의 기병(起兵) 소식을 듣고 익호 장군(翼虎將軍)이란 칭호를 내렸다. 이듬해에는 임금께서 사신을 보내 장유(獎諭)하고, 또 군호(軍號)를 충용(忠勇)이라고 하사했다. 1월 26일에 장군이 병력을 거느리고 담양을 출발하면서 영남에 고유(告諭)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정의(正義)에 의거하면 아무리 위태롭더라도 반드시 흥(興)하고, 순리(順理)를 범하면 아무리 강대하더라도 반드시 멸망하는 법이다. 이 때문에 비수(淝水) 가의 작은 부대가 부견(苻堅)의 대군(大軍)을 꺾을 수 있었고, 독부(督府)의 수군(水軍)은 오히려 역적 양(亮)의 군대를 꺾었으니, 이 사실은 역사에 실려 있고, 시기는 고금(古今)에 다름없다. 이제 출병(出兵) 시기도 길괘(吉卦)를 얻었고, 정기(旌旗)는 동쪽을 향하고 있으며, 병사들은 정예하고 병기(兵器)는 예리하며 군사들은 다만 명분이 곧아서 사기가 왕성하니, 저 가마솥 속의 물고기들이 어찌 오랫동안 버티겠는가?”라고 하였다.남원(南原)에 도착하여 병사들을 휴식시키고 있을 때, 이 고을의 사인(士人) 최담령(崔聃齡)을 얻어 별장(別將)으로 삼고, 2월에 영남 지역으로 진출하니 군대의 명성이 크게 떨쳤다. 왜적이 장군의 위명(威名)을 듣고 석저 장군(石底將軍)이라 부르며, 벌벌 떨고 감히 기를 펴지 못하였다. 적장 가등청정(加籐淸正)은 몰래 화공(畵工)을 보내 장군의 형상을 그려 오라고 하여 그 그림을 보면서 이르기를 “참으로 장군이로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병졸을 거두어 노략질을 못하게 하는 한편, 여러 곳의 작은 진지를 철수시키고 병졸을 규합하여 대기하도록 하였다.장군은 도원수를 찾아뵈어 그 지휘를 받고, 또 장군 곽재우(郭再祐)에게 서찰을 보내어 원수를 함께하자는 뜻으로 약속했다. 조정에서는 여러 도(道)의 의병을 혁파하여 오로지 장군 휘하에 소속시키도록 하였다. 장군은 마침내 병졸을 이끌고 나아가 일본에 격문(檄文)을 전하니, 이에 원근에서 향응(響應)하고 진동하였고, 휘하의 졸개들도 용기백배하여 분격하며 싸우고자 하였으며, 왜적들에게 포위되어 진지를 지키던 관군과 중국 군사들도 장군에게 모두 의지하며 중하게 여겼다.마침 조정에서는 강화(講和)를 논의하며, 여러 장군들에게 교전하지 못하도록 경계하였다. 장군은 부득이 진주(晉州)에 주둔해 병사들을 크게 집결시키고 밤낮으로 전투 장비를 더욱 손보았으며, 널리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싸우고 지키는 계책으로 삼아 누차 싸우기를 청했으나,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또 장군의 위명(威名)을 시기하고 공 세우는 걸 싫어하는 자가 있어 백방으로 저지하였다. 장군은 큰 공을 세울 수 없는 데다가 장차 화를 예측할 수 없음을 알아차리고서, 마음이 격해지고 울분이 쌓여 날마다 술을 마시다 얼마 후 마음의 병을 얻게 되었다.이때 군중에 죄를 범한 자가 있어 장군이 목을 베었는데, 어떤 사람이 죄 없는 자를 죽였다고 무고(誣告)하자 임금이 장군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라고 명하였으나, 대신이 힘써 구하여 풀려났다. 임금께서 장군을 소견(召見)하여 위로하고 어구마(御廏馬)를 내리면서 속히 본진(本陣)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그 뒤에 이몽학(李夢鶴)이 호서(湖西 충청도)에서 반란을 일으켜 죽임을 당하자, 그때에 뜬소문이 돌기를 “김(金)ㆍ최(崔)ㆍ홍(洪)이 함께 반역하였다.”라고 하였는데, 김은 장군을 가리키고, 최는 장군의 별장인 최담령이요, 홍은 이천(利川)의 장사 홍계남(洪季男)이다.적당(賊黨) 한현(韓玄)이 체포되어 문초하자 또 그 뜬소문이 실제라 하고, 또 “곽재우와 고언백(高彦伯)도 그의 복심(腹心)이다.”라고 말하였는데, 모두 당대의 명장들이었다. 당시 충청 병사(忠淸兵使) 이시언(李時言)과 경상 병사(慶尙兵使) 김경서(金景瑞)가 더욱 장군을 시기하면서 이때를 이용해 죽이려고 밀계(密啓)를 올려 ‘장군에게 반역한 정상(情狀)이 있다’고 말하였는데,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 이시언 등의 말에 동조하니, 임금께서 대신들과 의논하여 장군을 체포하라고 명하였다.이에 앞서 도원수 권율(權慄)이 장군을 보내서 호서의 역적 이몽학을 토벌하게 하였는데, 운봉(雲峰)에 이르러 이몽학이 이미 사로잡혔다는 말을 듣고 진주(晉州)로 환군하였으나, 얼마 후 장군은 체포되어 차꼬를 차고 서울에 이르게 되었다. 장군이 말하기를 “나는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맹세코 적을 격멸하고자 하였으니, 어찌 역적을 추종하여 반역을 꾀할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신이 만일 딴 뜻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어찌 도원수의 영(令)을 받들어 이몽학을 치려고 운봉까지 갔겠습니까? 이몽학이 체포된 뒤에는 또 어찌하여 병사를 인솔하고 본진으로 돌아가려고 했겠습니까? 다만 신은 상중(喪中)의 슬픔을 잊고 의병을 일으켰는데, 터럭만큼의 공도 없어서 충의를 펴 보지 못하고 도리어 효성만 손상케 하였으니, 이에 신에게 죽을죄가 있는 것입니다. 또 신은 응당 죽어야 하겠지만 최담령은 죄가 없으니, 청컨대 신 때문에 그를 함께 죽이지는 말아 주십시오.”라고 하였다.임금께서 여러 신하에게 물으니, 정공 탁(鄭公琢)과 김공 응남(金公應南) 등이 김덕령은 분명 반역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역설하였지만, 영상(領相) 유성룡(柳成龍)만 홀로 대답하지 않았다. 임금께서 괴이하게 여겨 묻자, 유성룡이 대답하기를 “차후에 만일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긴다면, 김덕령같이 용맹한 자를 풀어 주었다가 다시 잡아들일 수 있을지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엄한 형벌을 받아 옥중에서 죽으니, 나이는 29세요, 때는 병신년(1596, 선조29) 8월이었다. 나라 사람들이 슬퍼하고 애석해하기를 마치 송(宋)나라 사람들이 악무목(岳武穆)을 슬퍼하듯 하였다. 최담령과 곽재우 등도 오랏줄에 묶여 옥에 갇혔으나, 뒷날 모두 풀려났다.당초 장군을 체포할 적에 조정에서는 장군이 명령에 따르지 않을까 의심하여,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음밀하게 일을 핑계로 장군을 불러 군영(軍營)으로 들어오면 포박하도록 하였다. 승지 서성(徐渻)이 말하기를 “김덕령은 반역자가 아닙니다. 사자(使者) 한 사람만 보내서 잡아오게 하면 잡아올 수 있는 것을, 어찌 구태여 사계(詐計)까지 쓰려고 합니까?”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서성이 쉽게 말하는 것을 의심하여 서성에게 성을 내며 말하기를 “네가 가서 잡아오너라.” 하였다. 서성이 도착하니 장군은 벌써 진주(晉州)의 감옥에 갇혀 있었다. 조정에 도착하자, 오히려 더욱 의심하여 쇠사슬로 묶고 큰 나무로 칼을 채웠는데, 장군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만일 모반하고자 한다면 이따위로 어찌 나를 꼼짝 못하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화를 내며 몸에 힘을 주자 쇠사슬이 모두 끊어졌다.애초 장군이 군대를 일으킬 적에 서석산(瑞石山) 골짜기 안으로 가서 큰 칼을 주조하였는데, 칼이 만들어질 무렵 산에서 우레 같은 소리가 울리고 흰 기운이 산골짜기 안에서부터 하늘까지 뻗쳐 며칠간 사라지지 않았다. 그 고을에는 옛 명장(名將) 정지(鄭地)의 묘소가 있고, 자손들이 대대로 정지의 철갑 옷을 간수하고 있었는데, 장군이 그 철갑 옷을 가져다 입고 칼을 차고 가서 정지의 묘소에 제사를 올리며 고하였다. 제사를 지낼 때 차고 있던 칼이 세 번이나 저절로 풀려 땅에 떨어지자, 사람들이 모두 괴상하게 여기며 상서롭지 못하다고 생각하였다.진주에 있을 때에 목장 안에 사나운 말이 있었는데, 한번 날뛰면 나는 듯해서 사람들이 가까이하지 못하였다. 장군이 소문을 듣고 마침내 직접 찾아가서 굴레를 씌우고 올라타니 말이 매우 온순해졌다. 그 후 장군이 처음 체포되었을 때 말이 며칠 전부터 먹지를 않았는데, 재차 체포되자 또 열흘이나 먹지 않았다. 이 때문에 사자(使者)가 채 도착하기도 전에 장군은 이미 자신에게 화가 닥쳐올 것을 알았다.당시에 당화(黨禍)는 이미 벌어졌고 병란까지 일어나 나라가 곧 망하게 되었는데도, 붕당을 짓는 자들은 더욱 심하게 치고받으면서 초야에 있는 선비도 끌어들여 미워하고 저해(沮害)하였다. 장군은 비록 당인(黨人)은 아니었으나, 장군의 자부(姊夫)로서 공을 권하여 군사를 일으키게 했던 김공 응회(金公應會)와 장군은 모두 정공 송강(鄭公松江 정철(鄭澈))과 같은 고을 사람이고, 김응회는 또 우계(牛溪) 성 선생(成先生 성혼(成渾))의 문인이었다. 그때 송강과 우계는 모두 당화(黨禍)를 입은 우두머리였으므로, 이 때문에 김응회 역시 동시에 무함을 당해 체포되어 거의 죽을 뻔했다가 다행히 살아났다. 장군은 당시 제장(諸將)들이 시기하고 미워하는 대상인 데다가, 집정자(執政者)가 안에서 그들을 거들었기 때문에 마침내 죽음을 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장군이 죽은 뒤로 여러 장군들은 각자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것을 의심하여, 곽재우(郭再祐)는 드디어 군병을 해산하고 벽곡(辟穀)을 익힌다며 앙화를 피하였고, 이순신(李舜臣)은 한참 싸울 즈음에 갑옷을 벗어 스스로 적의 탄환을 맞고 죽으니, 호남과 영남 사이에서는 부자와 형제가 의병에 가담하지 말라고 서로 경계하였다. 그런데 적들은 장군의 죽음을 듣고 비로소 날뛰면서 서로 경하하여 이르기를 “김덕령이 죽었으니, 더는 두려울 자가 없다.”라고 하였다.장군은 아들이 없었고, 효종(孝宗) 때에 이르러 원통함을 밝혀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증직하도록 명하였다. 장군의 형 김덕홍(金德弘)은 고공 경명(高公敬命)을 따라 금산(錦山)에서 전사하였고, 장군의 처는 이씨(李氏)로, 정유년(1597, 선조30)에 병란을 피하여 담양(潭陽)에 있다가, 적을 만나 심하게 꾸짖으며 굽히지 않고 죽었다.다음과 같이 논(論)한다. 김 장군이 군사를 일으킨 지 4년 동안 조그마한 공도 세우지 못하고 결국 무함을 받아 죽었으니, 어찌 된 일인가? 대체로 장군은 위명(威名)이 너무 성하여 이르는 곳마다 적은 반드시 군병(軍兵)을 거두고 먼저 피해 버려 끝내 한번의 교전(交戰)도 하지 못했고, 조정에서는 두려워하고 미워하여 시기하고 해치려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화의(和議)와 당화(黨禍)도 그 사이에 끼어들었으니, 공을 이루지 못하고 죽는 것이 마땅하다 하겠다. 세상에 전하기를, 장군이 군중(軍中)에 있을 때에 화란(禍亂)이 반드시 닥칠 것을 염려하여 그의 아우 김덕보(金德普)에게 이르기를 “네게 만일 나의 용맹이 있고 나에게 혹 너의 지혜가 있다면 몸도 보전할 수 있고 공도 세울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니, 아마도 장군이 충용(忠勇)을 스스로 떨치면서 몸을 보전할 지혜를 강구할 겨를이 없었던 것인가? 비록 그러나 응후(應侯)가 백기(白起)를 죽이자 소왕(昭王)은 걱정하는 낯빛이 있었고, 송(宋)나라 사람이 단도제(檀道濟)를 죽이자 위병(魏兵)이 양자강(楊子江)에 이르렀으며, 진회(秦檜)가 악무목(岳武穆)을 죽여 송나라는 그로 인해 망하였으니, 그 사람들 모두가 꼭 꾀에 공교롭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아! 어찌 하늘이 아니겠는가.[주-D001] 유아(儒雅) : 유학(儒學)의 문아(文雅)한 기풍이나, 혹은 그러한 기풍을 가진 단아한 선비를 이른다.[주-D002] 조운(趙雲) : 삼국 시대 촉(蜀)나라의 무장(武將)으로, 자가 자룡(子龍)이다.[주-D003] 삼경(三京) : 서경(西京)인 평양(平壤)ㆍ중경(中京)인 개성(開城)ㆍ남경(南京)인 한양(漢陽)의 통칭이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宣祖)는 요동(遼東)으로의 망명(亡命)을 염두에 두고 의주(義州)로 파천하였는데, 이듬해에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조선에 출정하여 평양성과 개성을 차례로 탈환하고 마침내 한양을 수복하였다.[주-D004] 방백이 …… 보고하자 : 방백은 전라도 관찰사 이정암(李廷馣)을 가리킨다. 이정암은 1593년(선조26) 12월 13일 급히 장계를 올려 아뢰기를, “전일 삼가 받든 유지(有旨)에, 항오(行伍) 가운데 장재(將才)가 있어 쓸 만한 사람이 있는지 다방면으로 알아보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담양 부사(潭陽府使) 이경린(李景麟)의 첩보(牒報)를 보건대, 부내(府內)에 거주하는 교생(校生) 김덕령(金德齡)이 젊어서부터 용기가 뛰어나 한 고장이 모두 탄복하였는데 이제 장재를 발탁함에 있어 이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 없지만 지금 상중(喪中)에 있어 응모하기가 어렵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담양에 이르러 덕령을 불러 보고 기복(起復)하여 종군함으로써 국가의 위급함을 구제하도록 권면하였던바 이제 바야흐로 의병(義兵)을 모집하고 있는데 원근이 다투어 붙좇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동지 수백 명을 모집하게 되면 적의 예봉을 꺾고 진(鎭)을 함몰시키기 위해 일대 사전(死戰)을 벌일 결심이라고 합니다. 그 뜻이 매우 가상하니 이런 사람은 특별히 조정에서 면려 표창하여 그 공효를 책임 지우소서. 그리고 군량과 병기 등의 물품도 사세가 사적으로 판출하기는 어려울 것이니 각 고을에 저축되어 있는 것 가운데서 숫자를 헤아려 제급(題給)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국역 선조실록 26년 12월 13일》[주-D005] 임금께서 …… 하사했다 : 1593년(선조26) 12월 29일 비변사가 아뢰기를, “김덕령 군대의 군용이 매우 성대하다는 것은 신들도 들었습니다. 전에 들은 바에 의하면 덕령이 권율(權慄)에게 군호(軍號)를 청하였는데 권율이 초승장(超乘將)으로 호칭하게 했다고 합니다. 초승이라는 호칭은 별로 근거할 데가 없으니 조정에서 새로 호칭을 내리고 또 한 명의 관원을 보내어 그 군중(軍中)에 나아가 위무, 전진(戰陣)에 달려가 공을 세우도록 충의(忠義)를 격려 권면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선조가 따랐다. 그리고 이튿날 김덕령의 군대에 충용군이라는 호칭을 내릴 것을 계하하였다. 《국역 선조실록 26년 12월 29일, 30일》[주-D006] 비수(淝水) …… 있었고 : 원문의 ‘편사(偏師)’는 주력부대가 아닌 작은 부대를 뜻하는 말이다. 춘추 시대 한헌자(韓獻子)가 환자(桓子)에게 “체자가 편사로 출전해서 적진에 빠졌으니, 그대의 죄가 크다.[彘子以偏師陷, 子罪大矣.]”라고 하였다. 《春秋左氏傳 宣公12年》 부견(苻堅)은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때 전진(前秦)의 왕이다. 군사 백만으로 동진(東晉)을 멸하려다가 비수의 물가에서 동진의 명장 사현(謝玄)이 거느리는 정병 8만 명에게 참패를 당하였다. 《晉書 卷79 謝安列傳》[주-D007] 독부(督府)의 …… 꺾었으니 : 독부는 송 고종(宋高宗) 때 우윤문(虞允文)이 거느렸던 수군(水軍)을 지칭한다. 북송 때에 여진족(女眞族)이 금(金)나라를 건국하고 송(宋)나라를 침략하여 송나라가 강남으로 쫓겨 갔다. 남송은 금나라에 신하가 되겠다는 서약을 올리고 겨우 두 나라의 평화를 유지하였는데, 금나라에서 황족인 완안량(完顔亮)이 임금을 죽이고 자기가 황제가 되었으므로 역적인 양이라고 칭한 것이다. 당시 금(金)나라 폐제(廢帝) 양(亮)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남침하자, 고종이 우윤문에게 명하여 군대를 호궤(犒饋)하게 하였다. 우윤문은 여러 장수들을 지휘하고 작전을 지시하여 금나라를 크게 격파하였다. 《宋史 卷383 虞允文傳》[주-D008] 병사들은 …… 왕성(旺盛)하니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선공(宣公) 12년조에 “명분이 바른 군대는 사기가 왕성한 반면, 명분이 없는 군대는 쇠하기 마련이다.[師直爲壯, 曲爲老.]”라는 말이 나온다.[주-D009] 석저 장군(石底將軍) : 김덕령 장군의 출생지가 광주의 석저촌(石底村)이라서 생긴 별명이다.[주-D010] 원수(怨讎)를 함께하자는 뜻 : 원문의 ‘동구(同仇)’는 원수를 함께한다는 말이다. 《시경(詩經)》 〈무의(無衣)〉에 “어찌 옷이 없다 해서, 그대와 솜옷을 같이 입으리오. 왕이 군사를 일으키면, 우리들 창과 모를 손질하여, 그대와 함께 원수를 치리.[豈曰無衣, 與子同袍? 王于興師, 修我戈矛, 與子同仇.]”라고 하였다.[주-D011] 이때 …… 풀려났다 : 《국역 선조실록》의 29년 2월 1일 기사에 따르면 “김덕령은 첩보(牒報) 전달을 지체했다는 이유로 역졸 한 사람을 매로 쳐서 죽였을 뿐만 아니라 도망한 군사의 아버지를 잡아다가 매를 쳐서 죽게 하였는데, 죽은 자는 바로 윤근수(尹根壽)의 노속(奴屬)이었다. 윤근수가 남쪽 지방을 순시하는 도중에 김덕령을 직접 만나 석방해 주도록 타일렀고 김덕령은 이를 승낙하였는데, 윤근수가 돌아가자 즉시 그를 죽였던 것이다. 이때 논의가 분분해서, 김덕령은 살인을 부지기수로 많이 했으며 심지어 사람을 물에 빠뜨려 죽였다고 말하는 자까지 있었다. 결국 김덕령을 나국(拿鞫)하였는데 증거를 들어 스스로 해명하자 상(上)은 특별히 방면할 것을 명하여 위로하고 달래어 보내고 또 전마(戰馬) 1필을 주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주-D012] 이몽학(李夢鶴)이 …… 당하자 : 1596년(선조29) 임진왜란 중에 충청도에서 일으킨 반란을 가리킨다. 이몽학(?~1596)은 본관이 전주(全州)로, 왕족의 서얼 출신으로 한양에 살았다. 성품이 불량하고 행실이 좋지 않아 아버지에게 쫓겨나서 충청도ㆍ전라도 사이를 전전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 등과 함께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모의하고 의병을 가장하여 조련을 실시하였으며, 동갑회(同甲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친목회를 가장, 반란군 규합에 열중하였다. 한현은 어사 이시발(李時發) 휘하에서 호서(湖西)의 조련을 관리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민심이 이반되고 방비가 없음을 알아채고 이몽학과 함께 거사를 꾀하였다. 1596년 7월 일당이 야음을 틈타 홍산현을 습격하여 이를 함락하고, 이어 임천군(林川郡)ㆍ정산현(定山縣)ㆍ청양현(靑陽顯)ㆍ대흥현(大興縣)을 함락한 뒤 그 여세를 몰아 홍주성(洪州城)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반란군 가운데 이탈하여 관군과 내응하는 자가 속출하여 전세가 불리해졌고, 그는 부하 김경창ㆍ임억명(林億命)ㆍ태근(太斤) 3인에게 피살되었다.[주-D013] 송(宋)나라 …… 하였다 : 악무목(岳武穆)은 송나라의 명장 악비(岳飛)로, 무목(武穆)은 그의 시호(諡號)이다. 그는 금(金)나라를 쳐서 중원(中原) 회복을 목전에 두었는데, 간신 진회(秦檜)가 황제의 명령으로 불러서 군사를 돌리게 하고, 악비를 무함하여 결국 옥중에서 죽도록 하였으니, 송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宋史 卷365 岳飛列傳》[주-D014] 서성(徐渻)이 …… 있었다 : 《국역 선조실록》 1596년(선조29) 8월 1일 기사를 보면, “동부승지 서성의 서장에, ‘신이 단성(丹城)에 달려가 원수(元帥) 권율이 김덕령(金德齡)을 진주(晉州)에 가두었음을 듣고 즉시 선전관(宣傳官)으로 하여금 진주에 달려가 잡아오도록 하는 한편, 전 현감(縣監) 김경눌(金景訥) 등을 시켜 압송해 올려보내도록 했습니다.’ 하였는데, 추국청에 계하하였다.”라는 내용이 나온다.[주-D015] 정지(鄭地)의 묘소 : 정지(1347~1391)의 본관은 나주(羅州), 시호는 경렬(景烈)이다. 고려의 무신(武臣)으로, 공민왕(恭愍王) 때에 왜구를 평정할 방책을 왕에게 올려 전라도 안무사(全羅道按撫使)가 되고, 뒤에 다시 순천도 병마사(順天道兵馬使)가 되어 순천과 낙안(樂安)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소탕하였다. 그의 묘소는 광주의 망월동에 있다.[주-D016] 당화(黨禍) : 기축옥사(己丑獄事)와 신묘옥사(辛卯獄事)를 가리킨다. 기축옥사는 1589년(선조22)에 동인(東人)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당화이다. 이 옥사는 당시에 황해도 관찰사 한준(韓準), 재령 군수 박충간(朴忠侃), 안악 군수 이축(李軸), 신천 군수 한응인(韓應寅) 등이 정여립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함으로써 시작되었는데, 서인(西人)인 정철(鄭澈)이 옥사를 엄하게 다스려서 백유양(白惟讓)ㆍ이발(李潑)ㆍ이길(李洁)ㆍ김우옹(金宇顒)ㆍ정언신(鄭彦信)ㆍ정언지(鄭彦智)ㆍ정창연(鄭昌衍) 등 동인 인물들이 대거 처형되거나 유배당하였다. 신묘옥사는 1651년(효종2) 김자점(金自點)과 그의 아들 김식(金鉽)이 수어청 군사와 수원(水原)의 군대를 동원하여 원두표(元斗杓)ㆍ김집(金集)ㆍ송시열(宋時烈)ㆍ송준길(宋浚吉)을 제거하고 숭선군(崇善君)을 추대하려고 했다는 역모가 폭로됨으로써, 부자(父子)가 함께 복주(伏誅)된 사건을 가리킨다.[주-D017] 같은 고을 사람 : 모두가 전라도 광주 사람들이라는 말이다.[주-D018] 곽재우(郭再祐)는 …… 피하였고 : 벽곡(辟穀)은 도교(道敎)에서 말하는 일종의 수련술(修鍊術)이다. 《국역 광해군일기》 즉위년 8월 13일 기사에 수록된 윤근수(尹根壽)의 차자(箚刺)에 따르면, “곽재우는 임진왜란 초기에 필부로서 군병을 일으켜 정진(鼎津)을 가로막아 지키며 왜적의 진군을 차단하여, 누차에 걸쳐 그 예봉을 무너뜨리고 적의 기세를 꺾어서 마침내 적이 정진을 건너 서쪽으로 향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니, 그 공적은 위대합니다.……중략……그런데 곽재우가 산성 방수(防守)를 그만둔 뒤로 벽곡을 하여 솔잎만을 먹고 있으므로, 남들은 그가 도인(道引)을 하는 것이라고 하나, 아는 사람의 말은, 김덕령(金德齡)이 뛰어난 용맹과 힘을 지니고도 남의 모함에 빠져서 마침내 비명에 죽자, 곽재우가 자신도 명장이므로 혹시나 화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이를 핑계로 세상을 도피하는 것이라고 합니다.”라고 하였다.[주-D019] 효종(孝宗) …… 명하였다 : 실록에 따르면, 김덕령의 신원과 복관(復官)은 1661년(현종2)에 이루어졌다. 《국역 현종실록 2년 8월 30일》[주-D020] 응후(應侯)가 …… 있었고 : 응후는 전국 시대 진 소왕(秦昭王)의 재상이었던 범수(范睢)를 이른다. 당시 장군 백기(白起)가 주위의 나라들과 싸워 무려 70여 성(城)을 탈취하면서 명성을 떨쳤는데, 후일 범수는 진 소왕에게 백기가 왕명에 복종하지 않는다고 참소하고 자결하게 하였는데, 이때 소왕은 얼굴에 걱정스런 빛을 띠었다. 《史記 卷73 白起列傳》[주-D021] 송(宋)나라 …… 이르렀으며 : 단도제(檀道濟)는 남북조 시대 송나라의 인물로, 무제(武帝) 때에 북위(北魏)를 정벌하고서 전군(全軍)을 보전하여 돌아와 사공(司空)에 임명되는 등 위명이 대단하였다. 이후 송나라 조정에서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거짓 조서(詔書)를 내려 불러들이어 주살하였다. 북위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단도제가 죽었으니 꺼릴 것이 없다.”고 하면서 양자강을 건너 공격해 왔다. 《宋書 卷43 檀道濟列傳》[주-D022] 진회(秦檜)가 …… 망하였으니 : 악무목(岳武穆)은 송나라의 명장 악비(岳飛)로, 무목(武穆)은 그의 시호(諡號)이다. 그는 금(金)나라를 쳐서 중원(中原) 회복을 목전에 두었는데, 간신 진회(秦檜)가 황제의 명령으로 불러서 군사를 돌리게 하고, 악비를 무함하여 결국 옥중에서 죽도록 만들었다. 이로 인해 송나라도 결국 망하고 말았다. 《宋史 卷365 岳飛列傳》
    2020-12-23 | NO.200
  • 김덕령을 잡아가다- 고대일록
    김덕령을 잡아가다-고대일록 제2권 / 병신(丙申, 1596) : 정경운(鄭慶雲 : 孤臺, 1556~?)○ 7월 12일 정축(丁丑)전라도(全羅道)에서 전통(傳通)이 군(郡)에 이르렀는데, ‘7월 초이레에 역적(逆賊)들이 무리를 결성하였는데 그 수는 알 수 없다. 홍산현(鴻山縣)으로 돌입하여 군기(軍器)를 모두 빼앗고 창고를 봉하였으며, 현감(縣監) 아무개를 결박하였다. 초여드레 진시(辰時)에 임천군(臨川郡)으로 들어가 군수(郡守) 아무개를 결박하고, 그대로 끌고서 은산역(恩山驛)으로 향해 갔다’고 하였다. 흉적이 경내에 도사리고, 중국 병사들이 끊임없이 오가니, 백성들의 고통이 말할 수 없다. 토적(土賊)이 이 틈을 타고 무리 지어 몰래 일어나니, 사람이 이런 세상에 태어난 것이 그 얼마나 불행인가.○ 7월 13일 무인(戊寅)충용장(忠勇將) 김덕령(金德齡)이 군(郡)에 이르렀다.○ 7월 15일 경진(庚辰)큰비가 내렸다. 김덕령(金德齡)이 운봉(雲峯)으로 향해 비전(碑殿)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호서(湖西)의 적 우두머리가 이미 잡혔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홍산(鴻山)에 사는 이몽학(李夢鶴)이 몰래 반역의 뜻을 품고서 오합(烏合)의 무리를 모으니, 수천여 명에 이르렀다. 연이어 두 군(郡)을 함락하고 사방으로 공격하며 겁을 주니, 대흥(大興)ㆍ청양(靑陽)ㆍ정산(定山)ㆍ부여(夫餘) 등의 영장(令長)들이 기세만 보고도 달아났다. 충청 병사(忠淸兵使)가 금강(錦江)에 진(陣)을 치고 여러 날을 서로 대치했다. 홍주(洪州)에 사는 겸사복(兼司僕) 김모(金某)가 서울에서 오다가 적에게 사로잡혔다. 겉으로 투항하여 들어가 용기와 지략을 보이니, 도적이 크게 기뻐하며 심복으로 삼았다. 촌집에서 함께 잘 때 사복(司僕) 김모(金某)가, 달게 잠을 자는 틈을 엿보아 몽학(夢鶴)을 참수하여 아군(我軍)에 고하였다. 아! 한 필부(匹夫)가 사람을 무리 지어 가만히 발호하니, 호서(湖西) 주군(州郡)의 수령들이 기세만 바라보고 달아났는데, 일개의 사복이 마음을 다해 적을 잡았는데, 손 한 번 드는 사이에 평정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윗사람이 된 이가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7월 25일 경인(庚寅)한 고을 사람들이 서로 읍(揖)하고 헤어졌다. 나는 오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해가 저물녘〔晡時〕에 승지(承旨) 서성(徐渻)이 충용장(忠勇將)을 체포하려고 군(郡)에 도착하였다. 이보다 앞서, 도적들이 공초(供招)한 말에 ‘김덕령(金德齡)은 호남(湖南)에서 거병하고, 홍계남(洪季男)은 영남(嶺南)에서 거병한다.’는 말이 있었다. 덕령이 실제로 간여한 행적이 있다면, 거열형(車裂刑)을 준들 무엇이 애석(哀惜)하겠는가. 그러나 만일 그러한 행적이 없는데도 마구 떠드는 말만 믿었다면, 원통하고 억울함이 막심(莫甚)할 것이니 가련하다.○ 7월 26일 신묘(辛卯)승지(承旨) 서성(徐渻)이 운봉(雲峰)으로 가서 김덕령(金德齡)을 잡아갔다. ○ 광주(光州)에 사는 무진사(武進士) 이완근(李完根)이 조카딸 집에 와서 잤다. 조용히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2020-12-11 | NO.199
  • 김문옥- 노당선생실기서 露堂先生實記序
    김문옥 효당문집 曉堂文集 권7露堂先生實記序天下之理未有無漸 而盛道之將興也 必有大人君子 自任以斯道之重者 倡之作之扶之植之 如導泉而出之山 如養苗而去其稗 然後其盛有不期致而至者 我邦數百年儒他盛矣苟㴑其源之何自而始 則漸於麗季諸賢有不可誣 盖當麗氏佞佛事神之日學士大夫不知有吾聖人之學之可尊 而有露堂秋文憲先生以晦軒安文成之徒 繼文成而敎迪人才 丕興儒學 以漸祛麗氏之陋而啟韓五百載文治之運 至今竆巷私塾 童幼而挾冊者無不誦先生所著之心鑑 殆若以是爲小學之階梯然讀其書不知其人者 世皆是也 嗚乎 建聖廟刱學校 以闢榛荒以惠無窮 固安文成之功爲大 而至若三都監五庫七管十二之徒諸生爲設科條以敎之 俾皆服仁羲之說 習詩書之訓 去佛而就儒捨邪歧而趨康莊者 顧不繇於先生化導之力歟而 其功如此 其效又如此顧上不獲配食於兩廡 下不得尸祝於人人 枉先生何憾哉 自知慕先生者言不能不慨然尒 嗚乎 今之時又非麗季 祇尙竺敎比也 風雨晦盲 百喙爭鳴 昔之儒化 其彬然者索然 燦然者窣然 於是而思先生倡道興學之苦心 政如坐大廈傾覆之下 想昔日匠心獨運構千萬間以遺來世者 其規模營度如彼其壯 而今乃岌 焉不支寧下爲之寒心哉 遠孫鏞禧與其族人 旣爲先生立祠黃山 又圖刊其實記 屬文鈺序之文鈺幼讀心鑑 見其無所引書目者 往往 而有不知爲誰氏語也 今知爲先生自下語 金條玉科亦何必多乎哉 附以叙述諸作 反鄉省士林之議躋聖廡文字 當時事雖未諧 百世下公議亦可以見矣노당(露堂) 추적(秋適)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추계추씨(秋溪秋氏)의 입향시조이다. 충렬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안동서기(安東書記)·직사관(直史館)을 거쳐 좌사간(左司諫)에 올랐다. 1298년(충렬왕 24) 환관 황석량(黃石良)이 권세를 이용, 자신의 고향인 합덕부곡(合德部曲: 지금의 충남 당진시 합덕읍)을 현(縣)으로 승격시키려고 할 때, 그 서명을 거부하자 황석량의 참소로 순마소(巡馬所)에 투옥되었다. 뒤에 풀려나와 시랑으로서 북계 용주(龍州)의 수령을 역임하였다. 충렬왕 말년 안향(安珦)에 의하여 발탁되어 이성(李晟)·최원충(崔元冲) 등과 함께 7품 이하의 관리, 혹은 생원들에 대한 유학교육을 담당하였으며, 한문교양서인 『명심보감』을 편찬하였다고 한다. 민부상서(民部尙書)·예문관제학에 이르러 치사(致仕)하였다. 露堂先生實記序文천하(天下)의 이치가 차츰차츰 나아가지 않을 수 없고 성대한 도(道)가 장차 흥하게 되면 반드시 대인군자(大人君子)가 나타나서 스스로 사도(斯道)의 중책을 자임하고 일으켜 시작하고 도와서 세우게 되나니, 마치 샘물을 인도하여 산곡을 벗어나게 하고 싹을 기르면서 잡초를 제거함과 같다. 그렇게 한 다음이라야 그 성대함이 극치에 이룸을 기대하지 않고도 이르게 되듯이 우리나라 수백년 유도(儒道)의 교화도 성대해 왔었다.진실로 그 근원이 어디에서부터 왔는지를 거슬러보면 고려(高麗)말기 제현(諸賢)들에 의해 점차 이어져 왔음을 부인할 수가 없을 것이다. 대개 고려조 불교(佛敎)가 성하고 신(神)을 숭상하던 시기에 있어서 학식이 있는 선비들도 우리의 성학(聖學: 儒道)이 존귀함을 알지 못하던 차에 문헌공(文憲公) 추노당(秋露堂)선생은 회헌(晦軒) 안문성공(安文成公 이름은 裕)의 제자로서 문성공의 뒤를 이어 인재(人才)를 교육하고 유학(儒學)을 크게 진흥케 되니 고려조의 폐습은 점점 사라지고 우리나라 오백년(五百秊) 문치(文治)의 대운이 열리게 된 것이다. 지금도 궁벽한 시골서당 어디를 가나 어린 아동들이 책을 끼고 다니며 선생이 쓴 명심보감을 외우지 않은 이가 없게 된 것은 어쩌면 이로 인해 소학(小學)의 공부를 닦기 위한 경로를 밟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책을 읽으면서도 그 저자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으며 세상이 모두가 다 그러하니 참 서글픈 일이라 하겠다.향교를 짓고 학교를 창설하여 황무지를 개척하고 무궁한 혜택을 남기게 된 것은 진실로 안문성공의 위대한 공로였고, 삼도감(三都監) 오고(五庫)와 칠관십이도(七管十二徒) 제생(諸生)의 무리 같은 자에 이르기까지 조목별로 법령을 설립하여 가르치고 하여금 모두 인의의 가르침에 복종하며 시서(詩書)의 가르침을 익히게 하고 불도(佛道)를 떠나 유도(儒道)로 나아가게 하며, 올바르지 못한 외길을 버리고 육방(六方)으로 널리 통하는 길을 따르게 하였던 것은 돌아보건대 선생의 교화와 인도의 힘에 의함이 아니었겠는가? 그 공열이 이와 같고 그 효력도 또 이와 같았으나 돌이켜 보건대 먼저 양무(성균관 문묘나 향교의 대성전)에 배향(配享)되지 못하고 다음으로 축문을 맡은 사람들이나 선생을 스스로 추모할 줄 아는 자가 능히 개연(慨然)하며 탄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 지금 이 시기는 또 고려의 말기가 아니므로 단지 불교와 비교할 때가 아니다. 비바람 몰아치듯 세상이 어지럽고 캄캄하여 모두가 요란함에 지난날 유교의 교화도 그토록 빛나고 찬란하던 것이 흩어져 없어지고 찬연한 그 교화가 이에 졸연히 쇠해지니 당시 선생께서 창도하고 학풍을 일으켰던 고심을 생각하면, 정히 기울어져 가는 큰 집 아래 앉아서 지난날 목수장이가 생각나고 혼자서 운반하여 천만 칸을 지어 가지고 후세에 남겨주는 것 같이 그 규모와 설계가 그처럼 웅장했건만 높은 그 자체를 지탱하지 못하고 쓰러져 간다면 어찌 한심하지 않으랴! 후손 용희(鏞禧)는 그 일가들과 더불어 이미 선생을 위해 황추산 아래 사당을 짓고 또 그 실기(實記)를 인출할 것을 계획하면서 나 문옥(文鈺)에게 서문을 부탁하였다. 나 문옥도 어려서 명심보감을 읽었지만 그 인용한 서목(書目)을 볼 수가 없어서 가끔 어느 분이 쓴 글인 줄 알 수가 없었다.이제 와서 알고 보니 선생께서 자손을 위해 전할 말이 있었으니 금과옥조(金科玉條)같은 귀중한 문구가 어찌 많음이 필요하랴! 서술한 모든 저서와 향중에서 유림들이 발의하여 성무(문묘나 대성전)에 올린 문자를 부록으로 하였으며, 당시의 사실은 비록 분명하지 않으나 백세(百世) 후에 공론이 있게 되면 또한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기해(1959년) 4월의 상순 후학 광산(光山) 김문옥(金文鈺)
    2020-06-18 | NO.198
  • 김부윤이 조사경에게 보내 편지( 광주목사 안경부?)
    2023-07-06 | NO.197
  • 김윤현 광주목사는 남원부사로 이배(1886.1.16)
    호남계록(湖南啓錄)○고종(高宗) / 고종(高宗) 23년(1886)2월 14일 승정원 개탁이번에 도착한 남원 부사(南原府使) 김윤현(金胤鉉)의 첩정(牒呈)에, “부사는 통훈 대부(通訓大夫) 본도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정월 16일 정사(政事 관리의 임면과 출척에 관한 사무)에서 본직에 이배(移拜)되어, 2월 초2일에 하직인사는 생략하라는 관문(關文)을 받들고 같은 달 초10일에 도임(到任)하였습니다.”라고 보고해 왔습니다. 연유를 치계하오니 잘 아뢰어 주소서.광서 12년 2월 14일
    2023-08-16 | NO.196
  • 김천일(金千鎰)ㆍ양산숙(梁山璹) - 연려실기술 제16권
    김천일(金千鎰)ㆍ양산숙(梁山璹) - 연려실기술 제16권 /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전라 우도의 의병장 김천일이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였다.○ 천일은, 자는 사중(士重)이요,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나주(羅州)로 이사하여 두 대[二代]째이다.이항(李恒)에게 배웠다. 은일로 천거를 받아 대간이 되었는데, 그는 곧은 말을 과감히 하나 용모는 초라하여 외모가 옷을 이기지 못할 듯이 보였다. 이때 나주에 있다가 임금이 서쪽으로 피난하였다는 말을 듣고 울부짖으며 슬퍼하더니 조금 후에 분연히 말하기를, “울기만 하면 무엇하리오.나라에 환난이 있어 임금이 파천하였는데, 나는 대대로 벼슬해 온 신하로서 새[鳥]처럼 도망하여 살기를 구할 수가 없다.” 하고, 드디어 글로서 고경명(高敬命)ㆍ박광옥(朴光玉)ㆍ최경회(崔慶會) 등 여러 사람에게 통하니, 의기(義氣)있는 선비들이 소문을 듣고 달려와 모였다. 정예한 군사 수백 명을 얻어 군중(群衆)들과 함께 맹세하고 서쪽으로 떠났다. 《명신록》 ○ 의사(義士) 송제민(宋濟民)ㆍ양산룡(梁山龍)ㆍ양산숙(梁山璹)ㆍ임환(林懽)ㆍ이광주(李光宙)ㆍ서정후(徐廷厚) 등과 더불어 피를 마시며 맹서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천일이 평소에 몸이 약하고 병들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기쁜 표정으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오늘 내가 칼을 차고 말을 타니 거뜬하여서 날고 싶다.”고 하였다. 《계곡집》 ○ 처음에 천일이 이광이 적을 보고만 있으면서 근왕(勤王)의 일에 게으른 것을 통분하게 여겨 경명에게 글을 보내어 “먼저 이광을 쳐서 죄를 바로잡은 뒤에 군사를 거느리고 북으로 올라가려 한다.”고 하였더니 경명이 말리었다.○ 각 도의 군사가 모두 무너졌다는 소문을 듣고 온 군중이 두려워하여 위축하였다. 천일이 여럿에게 타일러 말하기를, “우리 군사는 의를 위해서 나선 것이다. 전진이 있을 뿐이요, 후퇴는 없다. 가고자 하는 자는 가는 대로 내버려두겠다.” 하니 여러 군사들이 모두 감동하고 분발하여 몰래 도망하는 자가 없었다. 호서(湖西)에 이르렀을 때 군사가 수천 명이 되었다. 병사(兵使) 최원(崔遠)과 더불어 수원(水原)으로 진군하였다. 천일이 독산(禿山)의 옛 성에 자리 잡고서 적에게 따라 붙은 간사한 백성을 찾아내어 목 베니 기내(畿內)의 선비와 백성 중에 와서 협력하는 자가 많았다. 드디어 금령(金嶺)수원땅 의 적을 습격하여 깨뜨렸다.○ 수원에서 인천(仁川)으로 향하면서 본도에 구원병을 청하니, 이광이 조방장(助防將) 이유의(李由義)와 진도 군수(珍島郡守) 선거이(宣居怡) 등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가게 하였다.○ 유생(儒生) 곽현(郭玄)‘玄’을 기재는 ‘賢’으로 썼다. ㆍ양산숙을 보내어 바닷길로 가서 평안도에 들어가 글을 올리니 임금이 친히 남쪽의 소식을 물었다. 산숙 등이 천일이 최원등과 군사를 합쳐서 수원에 이르렀으며 고경명과 조헌도 또한 군사를 일으켰고, 영남에서도 또한 김면ㆍ정인홍ㆍ박성ㆍ곽재우가 있다는 것을 아뢰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변변치 못한 까닭으로 너희들이 멀리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적의 속으로 모험해 왔구나.” 하였다.산숙이 아뢰기를, “천일의 군사들 중에는 정예하고 용감한 자가 많기는 하나 태반은 유생들인데 다만 충성과 의리만을 의지하고 일어선 것이니 성공과 실패는 하늘에 달렸을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울며 이르기를, “충의가 격동하는 곳에 무슨 일인들 이루어지지 않겠느냐.” 하였다. 곽현이 아뢰기를, “신이 평소에 조헌과 교분이 두터운데, 신의 거사할 무렵에 헌이 말하기를, ‘요사이 천문(天文)을 살펴보니 우리나라에 멸망할 운수가 없으니, 적도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조헌은 기축년 역적의 변이 있을 줄을 알았으며, 신묘년에는 나라에 반드시 큰 난리가 있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 일이 있으니 천문을 관찰한 것이 들어맞은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게 잘 맞는단 말인가.” 하고 드디어 곽현과 양산숙 두 사람에게 상으로 벼슬을 주고 인하여 천일ㆍ경명ㆍ광옥등에게 교지(敎旨)를 전하여 등급을 따라 벼슬을 주고, 산숙 등에게는 공조 좌랑을 임명하였다.○ 7월에 천일이 의병을 이끌고 먼저 경기에 이르니, 임금이 판결사(判決事)에 임명하고, 창의사(倡義使)라는 군호를 내려주고, 인하여 강화(江華)에 들어가 지키면서 남쪽과 북쪽의 아뢰는 소식이 통하게 하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경기로 피난한 조정의 벼슬아치와 의병들이 많이 강화에 모여 있다가, 최원ㆍ김천일의 두 군사가 근왕하러 오는 것을 보고 기뻐 생기가 돌아서 드디어 함께 합세하여 강을 건너 장단(長湍)에서 적을 엿보는데 적의 복병이 사방에서 일어나 형세가 바람 앞의 등불 같아서,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무수하였고, 천일 등은 배 한 척을 타고 달아나 면하였다. 《일월록》 ○ 공은 양화(楊花) 나루에서 군사의 위세를 보이면서 평수길(平秀吉)의 죄상을 게시하여 성안의 적군에게 도전하였으나 적은 끝내 나오지 아니 하였다. 다음 해 이여송이 장차 서울에 있는 적을 치려 할 때 공은 선유봉(仙遊峰)에 진군하여 도독(都督 이여송)을 위하여 성원하였다. 적이 이미 물러간 뒤에 천일이 서울 성안에 들어가니 조정에서 적을 추격하라고 명하였다. 천일이 마침 병으로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나며 말하기를, “내가 이제 죽을 곳을 얻었다.”고 하였는데 그때, 천일의 부하는 여러 군사(軍師)에게 이리저리 빼앗기고 남아 있는 자가 수백 명에 불과하였다.천일이, “호남은 우리나라의 밑뿌리요, 진주는 호남의 병풍이요, 울타리이다.” 하고 드디어 진주에 들어갔다. 성(城)과 병기가 믿을만한 것이 없었으나 천일이 최경회ㆍ황진 등과 더불어 죽음으로서 지킬 것을 약속하였다. 얼마 안되어 적의 대군이 달려드니 임기응변으로 대비하였다. 처음에 수길이 여러 길의 왜적들이 모두 공 세운 것이 없음을 분하게 여겨, 모든 장수를 책망하고 반드시 한 이름난 성을 무찔러 벌충을 하고자 하였다. 그런 까닭에 이 싸움에서는 성이 오래도록 함락되지 아니하고 적병의 전사자도 정도를 넘었건만 오히려 퇴각하지 아니하였다.마침 그때 오래 비가 내려 성의 흙이 풀어져 잘 무너졌다. 적이 군사를 더하여 급히 공격해 오니 성이 드디어 함락되었다. 이때 천일이 촉석루(矗石樓) 위에 있었는데 맏아들 상건(象乾)과 막하의 양산숙등이 옆에 있다가 울며 부르짖어 말하기를, “장차 어찌 하렵니까?” 하니 천일이 태연히 말하기를, “일을 일으키던 날, 나는 이미 나의 죽음을 결정하였다. 다만 너희들이 가엾구나.” 하고 드디어 일어나 북쪽 행재소를 향하여 절하고 나서 먼저 병기를 물속에 던지고 상건과 더불어 서로 안고 촉석루 아래의 깊은 물에 뛰어드니 장수들과 막료(幕僚) 중에 따라 죽은 자가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적도 또한 힘이 다하여 감히 다시 호남을 침범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듣고 크게 슬퍼하여 찬성(贊成)을 증직하고, 치제(致祭)를 내리었다. 호남 사람들이 나주(羅州)의 서쪽 옥정봉(玉井峰) 아래에 사당을 세우니 조정에서 정렬(旌烈)이라고 사액(賜額)하였다. 《명신록(名臣錄)》 ○천계(天啓) 병인년에 비를 세우고 계곡(溪谷)의 비명을 지었다. ○ 명 나라의 지휘(指揮) 오종도(吳宗道)는 평소에 천일을 존경하여 심복하더니, 제문을 지어서 사람을 시켜 보내고 공의 영전에 잔을 드리게 하였다. 제문에, “연월일 병부참모군사 무거지휘사(兵部參謀軍事武擧指揮使) 오종도는 삼가 양과 돼지의 제물로서 조선 창의사(朝鮮倡義使) 김장군의 영위(靈位)에 제사드립니다. 무릇 사람이 하늘과 땅 사이에 있어서 죽어도 오히려 산 자가 있고 살아도 오히려 죽은 자가 있는데, 살았으면서 죽은 자는 지금 천하에 그득합니다. 죽었어도 살아 있는 이로서 나는 창의사 김장군에게서 느낌이 많습니다.왜적들이 미쳐 날뛰는 때를 당하여, 임금이 초야에 파천하고 전국 8도가 거의 온전한 고을이 없는데 오직 장군은 낚시대[竿]를 세워 깃발을 달고, 나무를 베어 칼을 만들어 팔뚝을 걷어붙이고 한 번 부르짖으니, 호걸들이 호응하였습니다. 창의(倡義)하는 선비 천여 명을 얻어 한강(漢江) 가에 주둔하여 지키면서 왜적과 더불어 살고 싶지 않음을 맹세하였습니다. 장군의 명성은 안과 밖에 높았습니다. 불민한 나는 군무(軍務)의 바쁜 틈에 처음 만나 알게 되었는데 곧 다정하게 옛 친구처럼 대해주셨습니다.그때 왜놈들이 바야흐로 강화를 요청하니 장군은 문득 팔을 걷고 꾸짖으며, 항상 이놈들을 멸망시키고야 밥을 먹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뜻과 그 공이 비록 성취되지 못하였으나 장군의 이름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더욱 떨치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왜놈들은 항상 저희끼리의 생각으로 옛 송(宋) 나라의 일을 오늘 일에 비교하여, 악무목(岳武穆)이 죽지 않고는 금(金)과 송(宋)과의 화의(和議)가 성립될 수 없었음과 같이 장군이 죽지 않고는 오늘의 강화가 결정될 수 없겠다고 생각하여, 왜놈들이 밤낮으로 작전계획한 것은 오직 기어코 장군을 죽이는 것으로 일을 삼았던 것입니다.그때에 흩어지고 없어진 나머지의 군사를 가지고 진주를 지키게 됨에 이르러, 때마침 최군(崔君) 경회(慶會)도 거기에 있었는데, 최군은 더욱 왜놈들이 이전부터 꺼려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왜놈들은 대병(大兵)으로 수십 겹을 포위하여 나는 새도 지나가지 못하게 하여 가지고 기어코 두 분을 잡고야 말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때에 나는 명령을 받고 와서 전라도를 지키게 되었는데, 장마비로 인하여 죽산(竹山)에 머물러 있던 중에 별안간 큰 비바람이 불고 천둥벼락이 일어나 모래가 날고 나무가 뽑히어서 마치 나의 행군을 재촉하는 듯하였습니다.나는 비를 무릅쓰고 전진하여 수일을 지나서 남원(南原)에 박도하였고 그때에 기별이 날아왔는데, 진주는 화살이 다하고 식량이 끊어져서 성이 함락된 지가 며칠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장군 부자와 최군이 모두 왜적을 꾸짖고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비로소 죽산의 장마비는 곧 장군 부자의 눈물이요, 큰 바람과 천둥벼락은 장군의 불평의 기운이었던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아아, 장군은 이름이 천추에 빛나서 오래도록 결코 죽지 않을것이니 내 어찌 울 것입니까.나랏일을 잘못하여 임금을 피난 나가게 만들고, 군사를 가지고도 구원하지 못하여 성과 고을을 잿더미로 되게 하고도 부끄러움 없는 얼굴로 여전히 높은 지위의 의관(衣冠)을 하고 있는 자들은 비록 살아 있기는 하지만 어찌 장군의 죽음만 하리오. 슬프다, 하늘이 돕지 아니함이여, 부자가 함께 죽었도다. 절개와 의리가 겸하여 온전함이여, 우리의 강상(綱常)을 세웠도다. 저승과 이승이 달라졌음이여, 몽매(夢寐)에 보는 듯하도다. 어진 친구와 영원히 이별함이여, 나의 한잔 술을 올리나이다.” 하였다. 《동각잡기》 ○ 제독(提督) 형개(邢玠)도 또한 공(公)을, “충성스러운 혼과 씩씩한 넋이 늠름하여 살아 있음과 같다.”고 칭찬하였다.
    2020-09-24 | NO.195
  • 김충장유사서(金忠壯遺事序) - 홍재전서 제9권
    김충장유사서(金忠壯遺事序) - 홍재전서 제9권 / 서인(序引) 2  : 정조대왕(正祖大王, 1752~1800) 공동산(崆峒山) 북쪽의 차가운 바람 끝, 또는 연(燕), 조(趙)의 비장한 노래 여운처럼 쓸쓸하고 비통하면서도 그래도 그것이 한 개인이나 한 가정의 문헌(文獻)이 되어 버리고 말아서는 안 될 책이 바로 이 책이다. 그러니 내 어떻게 말을 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나 그가 한 말이라든지 그가 남긴 사공(事功)이 모두 이 책 속에 있으니 내가 그에 관해 중언부언하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부득이 말을 해야 한다면 그의 언어와 사공에 대한 뿌리를 말해 보겠다.대체로 어쩌다가 어진 이가 되고, 모이고 또 모여서 걸출한 자를 만들어 내는 것은 모두 기(氣)가 하는 일이다. 언어도 사공도 따지고 보면 그 역시 전부 기에서 나온다. 때문에 그 기운이 때를 만나 크게 쓰이게 되면 그 명예, 그 공로가 기상(旂常)에 쓰여지고 정이(鼎彝)에 새겨지며 혜택이 당세에 미치고 사적이 역사에 전해지는데, 그때는 언어나 사공이나 그게 그것으로 별 차이가 없다. 반면에 불행해서 기운과 때가 서로 엇갈리게 되면 펴 보이지 못하고 속에 쌓이고 쌓인 것들이 더러는 언어로 표현되고 더러 문자로도 표현되기 때문에 그가 수립하지 못한 사공의 계획 같은 것을 그 언어나 문자를 통하여 만분의 일이나마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는 가전(家傳)이 국사(國史)보다 비중이 큰 경우가 있으니, 지사(志士) 영웅의 눈물이 이 땅 곳곳에 두루 뿌려지고 있는 원인도 바로 거기에 있다.아, 충장공(忠壯公) 같은 이는 어쩌면 그리도 불행했던가. 그가 태어난 시기는 국운이 한창 왕성하던 선묘(宣廟) 때였다. 그 당시 인재가 배출된 것은 거의 주(周) 나라 무왕(武王) 때에 버금갈 정도였는데, 그가 그 뛰어난 용력과 세상을 요리할 만한 재목으로 칼을 짚고 용기백배한 군사들을 통솔할 때, 익호 장군(翼虎將軍)이니 석저 장군(石底將軍)이니 하여 조정에서 그를 중히 여기기 어떠했으며 또한 적국(敵國)에서는 얼마나 꺼려하던 존재였던가. 그 강대(剛大)하고도 충만한 기운을 절월(節鉞)을 잡고 전군을 지휘하는 데 조금이라도 써 보았더라면 연연산(燕然山)에다 공적을 새길 만도 하고, 능연각(凌煙閣)에 화상이 걸릴 만도 했을뿐더러 임진왜란 때 8년 동안이나 그들로부터 치욕을 당할 까닭도 없었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하늘은 그를 내셨는데 사람이 액을 주고, 재주는 타고났는데 쓰이는 길은 좁아 결국 무고한 탄핵을 받은 무목(武穆), 악비(岳飛)처럼 억울함을 당하고 금인(金人)들이 술을 마시며 축하를 하게 한 장본인이 되었던 것이다.다만 그를 있게 한 조화의 뭉침과 산악의 정기가 어렴풋하나마 그가 남긴 언어 문자(文字) 사이에 남아 있어 백세가 지난 오늘에도 그의 언어 문자를 외우고 읊조리노라면 황홀하게도 그 모습이 그림처럼 나타나고 목소리도 들리는 것 같다. 그것은 왜일까? 이는 그가 참된 기운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참된 기운은 사공(事功)과도 통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보기에 이 세상에서 자기 언어나 사공이 후세에 남겨지기를 바란 이들이 그 얼마나 많았으랴마는, 지금까지 역사에 남아 있고 기록으로 보존되어 있는 이가 과연 몇 사람이나 되던가. 그것을 보면 참된 기운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고 동시에 이 책만은 틀림없이 전해지리라는 것을 점칠 수 있다. 아, 이 드문 일을 두고 내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이렇게 말해 《김충장유사(金忠壯遺事)》의 서(序)로 삼는다.김덕령(金德齡)은 전라도 광주(光州) 사람으로서, 그가 남긴 시문(詩文)과 연보(年譜), 기전(紀傳), 비문(碑文), 찬문(贊文) 등 3권이 있다. 거기에다 그의 형 증(贈) 지평(持平) 김덕홍(金德弘) 및 그의 아우 증(贈) 집의(執義) 김덕보(金德普)의 유적과 유고를 이 책 뒤에다 붙여 인쇄한 후 세상에다 내놓는다.
    2020-09-30 | NO.194
  • 난중일기 속 이충무공의 광주 도착
    李忠武公全書卷之七 / 亂中日記三[丙申]九月十六日己酉。晴。體相發行。自高敞到長城。十七日庚戌。晴。體相與副使往笠巖山城。吾獨到珍原縣。與主倅同話。從事官亦到。暮到衙中。兩姪女出坐叙久。還出小亭。與主倅及諸姪。向夜同話。十八日辛亥。小雨。食後。到光州。與主倅話。十九日壬子。風雨大作。從事官簡及尹侃,荄問簡亦到。○是朝。光牧來。同朝飯。○午。綾城入來。封庫光牧。體相罷黜云。二十日癸丑。雨勢大作。見牧伯登程之際。唐人二名邀話。故饋之以酒。終日雨下。未能遠行。到和順宿。二十一日甲寅。或晴或雨。早到綾城。上最景樓。望見連珠山。
    2023-07-06 | NO.193
  • 난중잡록 (亂中雜錄) - 임진년 상 만력 20년, 선조 25년(1592년)
    난중잡록 1(亂中雜錄一) - 임진년 상 만력 20년, 선조 25년(1592년) : 산서(山西) 조경남(趙慶男, 1570~1641)이 저술한 야사(野史) 해제이 책은 지금부터 약 4백 년 전 전라도 남원에서 유학자이며 무용(武勇)을 겸비한 의병장(義兵將)으로 이름이 높은 산서(山西) 조경남(趙慶男) 선생이 저술한 야사(野史)이다.저자 조경남은 한양 조씨(漢陽趙氏)로서 태종조(太宗朝)의 우상(右相)이었던 한평부원군(漢平府院君) 조연(趙涓)의 후손이며 중종조(中宗朝)에 호조 판서(戶曹判書)를 지낸 조숭진(趙崇進)의 현손이다. 선조(宣祖) 3년(1570년) 11월에 남원부(南原府) 원천내촌리(源泉內村里)에서 났으니, 자는 선술(善述) 호는 산서처사(山西處士) 또는 주몽당(晝夢堂)이라고 한다. 그는 자질이 명민하고 의표가 준수하여 3살 때 시구(詩句)를 듣고서 외었으며, 6세에 부친을 여의고 편모 양씨(梁氏) 슬하에서 자랐다. 13세 때에는 또 모친상을 당하여 외조모 허씨(許氏)의 교양을 받았으나 이때부터 그는 의젓한 성인(成人)의 모습으로 3년상을 애통과 효성으로 마치는 한편, 학업에 정진하여 경전(經傳)과 제자서(諸子書)를 관통하였으며, 저술에도 괄목의 경지에 이르렀고 본《난중잡록》을 시작해서 쓰기도 이때부터였다. 한편으로 활쏘기를 연습하여 백발백중의 묘기를 쌓아서 후일 국난에 위훈을 세운 기초가 된 것이다 17세에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문하에 나아가서 성리학과 실천궁행(實踐窮行)의 요체를 배워 사문(師門)의 격찬을 받았다. 선조 25년(1592년)에 왜란이 일어나니 제봉(齊峯) 고경명(高敬命)의 의진(義陣)에 달려갔다가 외조모 허씨의 병보가 급함을 듣고 돌아와서 시탕(侍湯)하였고, 그해 8월에 동지 정사달(丁士達) 등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켜 10여 차의 전투에서 많은 적추(賊酋)를 사살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 후 선조 30년(1597년)에 왜적의 재침을 당하여 다시 의병을 이끌고 남원ㆍ곡성ㆍ섬진(蟾津)ㆍ함양(咸陽)ㆍ산음(山陰)ㆍ곤양(昆陽)ㆍ하동(河東) 등지로 전전하면서 무수히 적을 섬멸하였으며, 명장(明將) 도독(都督) 유정(劉綎)의 전봉(前鋒)이 되어 초인의 전략을 구사하였으며 한 번 쏜 화살에 5, 6명의 적을 연관(連貫)하여 전 명군을 경탄케 하였다. 유 도독(劉都督)은 그를 평하기를, “동국의 열남자다. 학문은 삼재를 통하였고 가슴에는 만갑을 담았으며 산림기상을 가졌으니 아마 제갈무후에 견줄 만한 위인이다.” [東國豈無烈男子 眞所謂學究三才 胸藏萬甲 又有山林之爭 其諸葛武候之比宇] 하였다. 권율(權慄) 도원수(都元帥)와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이 그의 충용한 공적을 상주하려 하였으나, 그는 힘써 사양하여 이르기를, “나는 다만 신자의 직분을 다한 것일 뿐이다.” 하고, 알리지 못하게 하였다. 31세가 되던 선조 33년(1600년) 경자에는 자기 향리에서 수백의 인명을 해친 큰 백호(白虎)가 횡행하여 방어사(防禦使) 원신(元愼)이 잡으려고 고심을 하다가 못 잡고 나국(拿鞫)까지 받았다는 말을 듣고, 그는 범이 다니는 길에 틀을 차려놓고 기다리는데 걸려서 틀을 달고 산으로 뛰는 호랑이를 활로 명중하여 잡았다. 새로 부임한 방어사 이사명(李思命)이 크게 감사히 여겨 범고기와 말안장, 은장도와 쌀 5석을 상으로 보내니 그는 고기만 받고 다른 것은 다 돌려보내면서, “범 한 마리 잡았다고 이런 것을 받을 수 있겠나. 만약 이런 곡물이 있으면 백성들에게 양곡을 주라.” 하였더니, 방어사는 쌀 30석을 그 마을 민호에 보내왔다. 그 후부터는 문을 닫고 저술에 전념하여 《난중잡록》을 비롯하여 《제례의(祭禮儀)》ㆍ《성리석(性理釋)》ㆍ《오상론(五常論)》ㆍ《소견록(消遣錄)》등 많은 저서를 완성하였다. 인조(仁祖) 2년(1624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아니하였다. 이괄(李适)의 난과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그때마다 의병을 모아 서울로 떠나갔으나 도중에서 난이 평정된 소식을 듣고 돌아갔다. 그는 일생을 국란에 진췌(盡悴)하다가 인조 19년(1641년) 신사년 1월에 72세로 서거하였다. 숙종(肅宗) 7년(1681년)에는 지방 유림이 합의하여 남원 신포(新浦)에 주포서원(周浦書院)을 세워서 유덕을 추모하였으며 철종(哲宗) 12년(1861년)에는 유림 박창규(朴昌奎) 등의 상소로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증직하여 생전의 공훈이 포장되었다.이 《난중잡록》은 저자 조경남선생이 13세 때인 선조 15년(1582년) 임오년 12월에 태양이 세 개로 갈라져서 떠오르면서 쌍무지개가 해를 관통하고 있음을 보고서 앞으로 반드시 이변이 있을 것이라고 예감하면서 그날부터 일록(日錄)을 쓰기 시작하였다. 제 1차로는 광해군(光海君) 2년(1610년) 경술년까지 국내의 중요한 사실을 엮어서 《난중잡록》이라고 명명하여 4권을 완성하였으니, 내용은 대개 임진ㆍ정유 두 차례 왜란의 기사가 주요 부분이 되어 있으므로 표제를 그렇게 정한 것이다. 처음 이 4편이 끝나고서 그의 자서문(自序文)에 이르기를, “7년의 긴 세월을 전쟁으로 지나오면서 나랏일에 큰 힘이 되지 못하였으나 마음만은 이 나라와 왕실을 떠나지 못하여, 승전한 기록은 기쁜 마음으로 춤추면서 쓴 것이고 패전한 기록은 통분한 마음으로 쓴 것이다. 다른 날 이 책이 지사(志士)가 무릎을 치면서 감격하여 읽을 자료가 되기를 바란다.” 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 잇달아 일어나는 명(明) 나라와 청(淸) 나라 사이의 분쟁으로 우리나라에서의 북방 출병 문제와 광해조의 모비 유폐(母妃幽廢), 임해군(臨海君)과 영창대군(永昌大君)의 피살, 인조 반정(仁祖反正) 등 여러 사건과 이괄의 반란, 병자호란(丙子胡亂) 등의 큰 국난을 당하여 그는 계속 기록에 정진하였으니, 즉 광해 3년(1611년) 신해년부터 인조(仁祖) 16년(1638년) 무인년까지의 역사를 서술하여 《속잡록(續雜錄)이라는 이름으로 4권을 완성하였다. 이상 전후의 기간을 통산하면 모두 57년간의 기록이 되는 것이다. 이 책에는 국가 전체의 역사적 기록을 실었고 전란 중 저자 자신이 의병장으로 전투한 사적 등은 객관적 견지에서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중에 특히 임진왜란을 중심으로 수록된 자료 중에는 《경상순영록(慶尙巡營錄)》의 기록이 대부분 실려 있는데 이것은 이 책만으로 그 귀중한 자료가 전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평상시 국내에 큰 일이 없이 평온하게 지난 연대에는 그 중에서 특기할 큰 사건만을 듣고 본 대로 기록하여 극히 적은 양으로 지나가는 해가 많으나 전란과 그 외에 큰 사건이 있던 해는 1년 분의 기록이 상당히 방대하게 수록되어 있다. 그 후손가에 보존된 초본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편찬되어 있다.제 1 권, 선조 15년(1582년)~동 25년(1593년) 7월까지제 2 권, 선조 25년 8월~동 26년(1594) 6월까지제 3 권, 선조 26년 7월~동 31년(1598년) 12월까지제 4 권, 선조 32년 1월~광해 2년(1610년) 2월까지이상 4권 3책으로 《난중잡록》이 성립되었고 그 이후 부분인 《속잡록》은 광해 3년(1611년)부터 인조(仁祖) 16년(1638년)까지의 기사로서 다음과 같이 편집되어 있다.제 1 권, 광해 3년(1611년) 1월~동 13년(1621년) 12월까지제 2 권, 광해 14년(1622년) 1월~인조 6년(1628년) 11월까지제 3 권, 인조 6년 12월~동 13년(1635년) 12월까지제 4 권, 인조 14년(1636년) 1월~동 16년(1638년) 12월까지이것도 4권 2책으로 이상과 같이 구성되었다. 그래서 전후 57년간의 기록이 총 8권 4책으로 되었고, 권수(卷首)에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최시옹(崔是翁), 저자인 산서옹(山西翁)의 서문이 있고 끝에는 한익철(韓翊哲)의 발문과 저자의 11세 종손(宗孫) 조태희(趙台熙)의 간행사(刊行辭)를 붙여서 지난 1964년 9월에 후손들이 석판으로 간행 반포하였다. 이 간행사에 의하면 인조 때에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을 편찬하면서 이 초본을 올려다가 사료(史料)로 참고하였고, 그 부본을 작성하여 정부에 보관하고 원본은 효종(孝宗) 8년(1667년) 정유년에 본가에 돌려주었다. 뒤에 고서간행회에서 《대동야승(大東野乘)》을 간행할 때에 그 중에 이 《난중잡록》이 들어 있었으니, 아마 정부에 보존되었던 부본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추측되는 것이라 하였다.《대동야승》중에는 제 26권부터 34권까지의 사이에 본서를 9편으로 나누어서 수록하였는데, 그 내용이 위에 말한 본손가(本孫家)의 초본과는 다소 다르게 실려 있다. 즉 《대동야승》에 있는 본서의 내용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1. 초본인 《난중잡록》과 《속잡록》중에서 선조 임진년(1592) 8월부터 인조 6년 무진년(1628) 12월까지 부분을 〈난중잡록〉 제 1 내지 제 7 권으로 책정하여 《대동야승》 26권 내지 32권까지에 수록하였고,2. 인조 6년 12월부터 동 9년(1631)년 5월까지의 기사를 〈속잡록(續雜錄)〉이라는 표제로 《대동야승》 제 32 권 후반에 수록하였고,3. 인조 9년 6월부터 동 13년(1635)까지의 기사를 다시 〈난중잡록〉이란 명칭으로 《대동야승》 제 33 권의 전반에 수록하였으며,4. 인조 14년(1636) 1월부터 15년(1637) 3월까지의 기사를 다시 〈속잡록〉의 명칭으로 《대동야승》제 33 권 후반에 수록하였고,5. 인조 15년(1637) 4월부터 동 16년(1638) 12월까지의 기사를 또 다시 〈난중잡록〉의 이름으로 《대동야승》제 34 권의 전반에 수록하였으며,6. 끝으로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17년(1367년 명 태조(明太祖) 홍무(洪武) 원년)부터 조선 왕조 선조 원년(1568년) 사이에 우리나라가 명 나라, 일본, 기타와 서로 교섭하였던 외교 즉 사대 교린(事大交隣) 관계의 기사를 상세히 기록하여 〈역대요람(歷代要覽)〉이라는 명칭으로 《대동야승》제 34 권의 후반에 싣고서 이 책을 완결시켰다.이상과 같이 되어 있으므로 《대동야승》중에는 초본 제 1 권의 선조 15년(1582년) 임오년부터 동 25년(1592년) 임진년 7월까지의 기사가 전부 탈락되었고, 저자가 정한 〈난중잡록〉이란 명칭은 광해 2년(1610년) 경술년까지의 기사에 그쳤는데 여기에는 인조 6년(1628년) 무진년까지 그 명칭으로 내려오다가 그 다음부터는 〈속잡록〉이란 명칭과 한 편씩 교대하여 사용하여 저자가 원래 편집한 순서를 문란케 하였다. 그리고 권말의 〈역대요람〉은 초본에는 없는 것을 《대동야승》에만 부록되어 있다. 이《대동야승》의 내용을 보면, 현재 규장각 도서로 보존된 필사본인 원본 중에도 오자 탈자 등이 많고 그 편집이 조잡함을 볼 수 있는 것이나, 금번 본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대동야승》의 국역을 단행하는 것을 계기로 하여 본가에서 간행한 원본 중에서 제 1 권 기사와 여러 사람의 서문ㆍ발문ㆍ간행사 등 《대동야승》에 탈락된 것을 추가 등재하였으며, 원본에는 실려 있지 아니한 〈역대요람〉 1편도 전과 같이 수록하여 〈난중잡록〉 4권 〈속잡록〉 4권, 부록 1권으로 완전한 편집을 보게 된 것이다. 이 책은 저자 당시에 표기한 명칭 이외에 전체를 총괄하여 〈산서야사(山西野史)〉 또는 〈대방일기(帶方日記)〉 등의 명칭으로 불리고 있어서, 이조 중기 전란사의 귀중한 사료가 되는 동시에 그 시대의 정치ㆍ문화ㆍ사회ㆍ당쟁ㆍ외교 등 관계의 연구에 필요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규장각 도서로 보존된 등사본을 대본으로 《대동야승》에 수록되어 고서간행회에서 간행을 보았고 그 후 수십 년을 지나서 저자의 후손가에서 8권 4책으로 원본 간행이 되었으나 어려운 한문으로 되어 일반의 해독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던 바 지금 국역본으로 세상에 펴게 되었으니 지극히 다행으로 아는 바이다.1971년 7월 30일亂中雜錄[第一]壬辰上 萬曆二十年。宣祖二十五年。如光州則朴君光玉。奔走開諭。收拾散亡。令賤子從厚。因厚分領。到水原戰所。交付于光牧。是時。巡察。在道遲回。2023.6.16. 수정
    2020-09-13 | NO.192
  • 남구만-贈吏曹判書高公請諡行狀 戊子 이조판서에 추증된 고공의 시호를 청한 행장
    남구만-贈吏曹判書高公請諡行狀 戊子 이조판서에 추증된 고공의 시호를 청한 행장 -약천집(藥泉集) 권23여기에서 고공(高公)은 고경명(高敬命)의 아들 고종후(高從厚, 1554~1593)를 말한다. 1592년 금산(錦山) 싸움에서 아버지와 동생을 잃은 그는 이듬해 일본군이 진주를 공략한 뒤 호남지방으로 침입하려 하자 휘하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에 들어가 성을 지켰다. 6월 29일 진주성이 함락되자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경상병사 최경회(崔慶會) 등과 함께 남강(南江)에 투신하였다. 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는데, 그에게 시호를 내려주기를 청하는 이 행장은 죽음을 각오한 고종후가 광주 절양루에서 진주로 출발하기 직전의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공은 성이 고씨이고 휘가 종후이고 자가 도충이고 호가 준봉이다. 그 선대는 탐라의 성주에서 나왔는데 고려 때에 이르러 장흥을 관향으로 하사받았으며, 조선조에 들어와서 좌통례를 지낸 휘 자검이 처음으로 광주에 살았다. 배위인 이부인이 두 아들을 거느리고 안동의 친정에서 피난하고 있었다. 부인은 공이 장차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는 죽음을 무릅쓰고 달려와 겨우 황계(黃溪)의 농막에 이르렀는데 공은 이미 본주의 절양루 아래에서 군대를 정돈하고 있었다. 부인이 계집종을 시켜 말을 전달해서 서로 만나 작별할 것을 청하자 공은 말하기를 “내 이미 군영에 있으니 떠날 수가 없다”고 하였다. 부인이 또다시 계집종을 시켜 두 아들을 보내어 가서 작별하게 하니 큰 아들은 나이가 일곱 살이었고 작은 아들은 다섯 살이었다. 공은 각각 안아서 무릎 위에 올려놓고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나는 너희들이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살아 있었는가”하고는 속옷을 벗어 두 아들로 하여금 부인에게 전하게 하여 작별하니 좌우에 있던 자들이 모두 울고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하였다. 公姓高氏 諱從厚字道沖號隼峯 其先出耽羅星主 及麗朝賜籍長興 入本朝左通禮諱自儉 始居光州 配李夫人率二子避兵安東本家 聞公將起義討賊 冒死奔赴 僅達黃溪農舍 公已治兵于本州之折楊樓下矣 使侍婢傳言請與相訣 公曰我已在軍中不可去 夫人又使婢送二子往訣 長七歲季五歲 公各抱置膝上 撫其背曰吾以汝爲已死 今尙生耶 解裏衣使二子傳于夫人以爲訣 左右皆泣不能視-약천집(藥泉集) 권23남구만(南九萬1629-1711)의 자는 운로(雲路)이며 호는 약천(藥泉), 미재(美齋)이다.
    2018-07-12 | NO.191
  • 남원 부사로 부임하는 고용후를 전송하는 시의 서문 -어우집
    남원 부사로 부임하는 고용후를 전송하는 시의 서문〔送南原府使高用厚 詩序〕 -어우집 제3권 / 서(序) : 어우(於于) 유몽인(柳夢寅, 1559~1623)내가 듣건대, 호랑이의 새끼는 소를 잡아먹을 수 있고 천리마의 새끼는 어미를 추월한다고 한다. 양이 젖을 먹을 때 무릎을 꿇고 먹는 것은 공경할 줄 알아서이고, 새가 먹이를 물어다 어미 새를 먹이는 것은 봉양함을 알아서이다. 백로는 날마다 목욕을 하지 않아도 눈처럼 희고 까마귀는 날마다 검게 칠하지 않아도 옷 칠한 것처럼 검으니 그 족속이 원래 그러해서이다. 얼음이 물에서 생겨나지만 물보다 차갑고 청색이 쪽에서 생겨나지만 쪽보다 푸르러 생기게 해준 대상을 욕되게 하지는 않는다. 이 때문에 활을 잘 만드는 궁장(弓匠)의 아들은 키를 만들고 훌륭한 대장장이의 아들은 가죽옷을 만들며, 아비가 장작을 쪼개 놓으면 그 아들이 지고 가고아비가 집터를 닦으면 자식이 집을 완성시키는 법이니, 이와 반대로 하는 것은 천리(天理)를 거스르는 것이다.지금 용성 태수(龍城太守 용성은 남원(南原)의 옛 지명)는 제봉(霽峰) 선생의 아들이다. 선생은 충성을 바쳐 세상을 떠나고 태수는 효성으로 보답하였다.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는 도는 입신양명이 우선인데 일찌감치 급제하여 청요직에 올라 부친을 추증시켰으니 부모에 대한 보답이 이보다 더할 수 없다. 그런데 이제 예문관을 떠나 묵수(墨綬)를 차고 독서당을 떠나 동부(銅符)를 차니, 그 이유는 무엇인가? 예전 임진왜란 때 선생은 의병을 일으켜 적진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떠날 적에 태수는 열 살도 되지 않은 나이로 말고삐를 부여잡고 울부짖으며 기로에서 영영 이별하였다. 선생이 편지가 든 주머니 하나를 손수 그의 허리에 채우며 말하길,“나와 네 형들은 나라를 위해 마땅히 죽어야하지만 아이가 무얼 알겠는가. 돌아가 네 어미를 봉양하고 네가 장성하거든 나의 유고(遺稿)를 간행하여 세상에 전한다면 내가 죽더라도 영원할 것이다. 그러니 너는 힘쓸지어다.”하였다. 태수는 부친의 유언을 가슴에 새겨 그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근래 용성의 태수 자리가 비게 되었을 때 마침 내가 이조에 있을 때라 여러 번 나의 집에 방문하여 지성으로 그 자리를 구하였으니, 간행하는 자금이 많이 필요하여 집안에서 개인적으로 충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태수의 개인적인 감정이 비록 간절했지만 조정에서 지금 그를 매우 의지하고 믿고 있으니 이조를 주관하는 자는 공적인 일을 우선하고 사적인 일을 뒤로하는 것이 본디 마땅하다. 다만 생각건대, 나 또한 일찍이 문장에 종사하여 망녕되게도 오랫동안 전하려는 마음에 평생의 흩어진 원고를 수습하여 분량이 말만한 것이 50권이니, 만약 후세에 다시 양자운(揚子雲)이 있다면 죽더라도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명월(明月)의 구슬과 야광(夜光)의 보옥이 있어 그 크기는 손에 가득 차고 그 광채는 조승주(照乘珠)와 같거늘 없애버리고 내버려두어 똥 더미처럼 만들어 버린다면 이 두 가지 보물이 또한 욕되지 않겠는가. 종이를 잘라 돈처럼 만들고 꼴을 묶어서 개 모양으로 만들어, 헝겊으로 싸고 상자에 넣어 보관하여 사당에 올리고 향불을 쐬게 한다면 이 두 가지 물건이 또한 영화롭지 않겠는가. 지금 가죽신 만드는 장인이 신발을 만드는데 기술이 부족해도 푸른 가죽으로 덧대고 자주색 실로 끈을 만들며 그 신발 구멍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그 바닥은 분칠하여 시장에 판다면 오히려 열 배의 값어치를 바랄 수 있을 것이다.문(文)이란 어떤 물건인가? 성정(性情)에서 나온 것이다. 주공(周公)의 뜻과 공자(孔子)의 사상, 경전(經傳)의 말과 뜻은 백 대를 가로질러 천하를 뒤덮는다. 이 문장 짓는 재주를 연마하는 자들은 자신의 글이 허무하게 내버려지는 것을 안타까워할 것이다. 그러므로 문장을 지을 적에 간을 끄집어내고 신장을 쥐어짜서 오장을 불태우고 아침저녁으로 고생하며 축을 쌓고 편을 누적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홀연히 길이 이별하며 그 자손에게 맡겼으니, 자손된 자가 만약 훌륭하게 판각하여 책으로 간행하여 온 고을과 큰 도성에 전하고 중국에까지 유입시켜 천하 만세에 퍼지게 한다면 비록 죽었더라도 영원할 것이리라. 만약 이러한 이치를 모른 채 작은 비용을 아끼느라 마멸되도록 내버려두어 끝내 쥐가 파먹게 만든다면, 비록 형산(荊山)의 띠 풀로 술을 걸러 신령을 부르고 강남(江南)의 쌀로 밥을 지어 제수를 올리고 울창주(鬱鬯酒)를 떠서 땅에 부으며, 살찐 소의 다리 힘줄을 삶아 국그릇에 올리고 은색 비늘의 물고기를 잡아다 회를 쳐서 제기에 올리며, 팔일(八日)의 군무와 육영(六英)의 음악으로 제향을 하더라도 혼백이 지각이 있다면 어찌 돌아보려 돌아보겠는가.지금 태수를 보니 진정 선생의 아들이로다. 아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절의를 수립하였고 자식은 다함이 없는 효행을 세워 이미 대대로 그 아름다운 덕을 이루는데, 다시 이조를 맡은 자로 하여금 그 경중을 가리고 그 거취를 살펴서 영원히 전해질 사업을 이루게 하였으니 어질구나, 태수여! 호랑이와 비교하면 울음소리가 모든 짐승을 떨게 할 것이니 어찌 다만 소를 먹을 것뿐이겠는가. 말과 비교하면 하루에 이 천 리를 달릴 것이니 어찌 다만 어미를 초월할 뿐이겠는가. 무릎을 꿇어 젖을 먹는 공경은 천성에 나왔고, 먹이를 물어다 어미를 먹이는 성심은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그 족속에 부끄럽지 않고 생기게 해준 대상을 욕되게 하지 않으며, 키와 가죽옷을 만드는 것을 폐기하지 않고 장작을 지고 집을 만드는 것을 그치지 않아 천리의 올바름에 순응하였다. 태수의 효성은 선생의 충성에 부합하는 바가 있도다! 만약 간행의 일이 끝나 뜻한 바가 이미 이루어졌는데도 또다시 태수로 하여금 백 리 되는 지역에 머물러 있게 한다면 이는 이조를 주관하는 자의 죄일 것이다. 태수여 힘쓸지어다! 태수가 마침 떠날 때 내가 병석에 있었던지라, 지금 뒤늦게 그 본말을 미루어 서술하고 이어서 그 시에 화운(和韻)한다.[주-D001] 남원 …… 서문 : 이 글은 1616년(선조38)에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부임하는 고용후(高用厚, 1577~?)를 전송하며 쓴 시의 서문이다. 그러나 시는 부기되어 있지 않다. 고용후의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선행(善行), 호는 청사(晴沙)이다. 내직으로는 예조 좌랑ㆍ병조 좌랑ㆍ병조 정랑ㆍ판결사 등을 역임하였고 외직으로는 남원 부사ㆍ고성 군수 등을 역임하였다.[주-D002] 백로는 …… 검으니 : 《장자》 〈천운(天運)〉에, “무릇 백로는 날마다 목욕하지 않아도 희고, 까마귀는 날마다 검게 칠하지 않아도 검다.[夫鵠不日浴而白, 烏不日黔而黑,]”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주-D003] 얼음이 …… 푸르러 : 《순자(荀子)》 〈권학(勸學)〉에 나오는 말이다.[주-D004] 활을 …… 만들며 : 《예기》 〈학기(學記)〉에, “훌륭한 대장장이의 아들은 아비의 일을 본받아 응용해서 가죽옷 만드는 것을 익히게 마련이고, 활을 잘 만드는 궁장(弓匠)의 아들은 아비의 일을 본받아 응용해서 키 만드는 것을 익히게 마련이다.”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주-D005] 아비가 …… 가고 :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7년 조에, “그 아비가 장작을 쪼개 놓았는데, 그 아들이 능히 짐지지 못한다.[其父析薪, 其子弗克負荷.]”라고 한 말을 변개하여 사용한 것이다.[주-D006] 아비가 …… 완성시키는 : 《서경》 〈대고(大誥)〉에, “아비가 집을 지으려 하여 이미 설계까지 끝냈다 하더라도, 그 자식이 집터도 닦으려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집이 완성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若考作室, 旣底法, 厥子乃不肯堂, 矧肯構?]”라고 한 말을 변개하여 사용한 것이다.[주-D007] 제봉(霽峰) : 고경명(高敬命, 1533~1592)으로,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ㆍ태헌(苔軒),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光州)의 의병 6천여 명을 이끌고 금산(錦山)에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때 두 아들 인후(因厚)와 종후(從厚)도 참전하여 인후는 함께 죽고 종후는 부친의 시신을 수습해 돌아왔다가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그 후 종후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하였다.[주-D008] 묵수(墨綬)를 차고 : 묵수는 동인(銅印)에 매달아 놓은 끈인데, 지방의 수령으로 나가는 것을 가리킨다.[주-D009] 동부(銅符)를 차니 : 동부는 지방 수령이 차는 관인(官印)을 가리킨다.[주-D010] 후세에 다시 양자운(揚子雲) : 그 저술에 대해 올바르게 평가해 줄 안목을 갖춘 후세 사람을 뜻한다. 자운은 한나라 때의 유학자인 양웅(揚雄)을 가리키는데, 그가 《태현경(太玄經)》을 지었을 때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비웃자 이르기를, “세상이 나를 믿어주지 않아도 상관없다. 후세에 다시 양자운이 있다면 반드시 이 책을 좋아할 것이다.” 하였다. 《五百家注昌黎文集 卷17 與馮宿論文書》[주-D011] 조승주(照乘珠) : 광채가 멀리 비쳐 수레 여러 채의 앞을 볼 수 있게 하는 구슬을 가리킨다. 《사기》 〈전경중완세가(田敬仲完世家)〉에, “위왕(魏王) 이 제왕(齊王)과 들에서 만나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과인(寡人)의 나라는 소국이지만 그래도 열두 채의 수레 앞뒤를 비치는 경촌(經寸)의 구슬이 열 개 있다.”라고 하였다.[주-D012] 형산(荊山)의 …… 걸러 : 축주(縮酒)는 제사에 올리는 술을 띠 풀에 거르는 의식을 가리킨다. 유종원(柳宗元)의 〈여최연주론석종유서(與崔連州論石鐘乳書)〉에 “형산의 띠 풀은 모두 축주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주-D013] 육영(六英) : 전설상의 제곡(帝嚳) 고신씨(高辛氏)의 음악을 가리킨다.[주-D014] 다함이 없는 효행 : 지극한 효성을 뜻한다. 《시경》 〈기취(旣醉)〉에, “효자의 효성이 다함이 없으니, 영원히 그대에게 복을 내리리라.[孝子不匱, 永錫爾類.]”라는 말에서 나온 말이다.[주-D015] 대대로 …… 이루는데 : 후손이 선조의 아름다운 덕업을 계승하는 것을 뜻한다. 《춘추좌씨전》 문공(文公) 18년 조에, “대대로 그 미덕을 이루어서, 그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았다.[世濟其美ㅡ 不隕其名.]”라고 하였다.
    2020-12-28 | NO.190
  • 남원(南原) 정충사(貞忠祠)의 비문 - 청음집 제29권
    남원(南原) 정충사(貞忠祠)의 비문 - 청음집 제29권 : 청음 김상헌(金尙憲, 1570~1652)만력(萬曆) 계사년(1593, 선조26)에 왕사(王師)가 왜병들을 바닷가에서 크게 무찔러 왜적들의 수괴인 풍신수길(豊臣秀吉)이 깊이 원망하였다. 그해 6월에 자신의 장수인 가등청정(加藤淸正)으로 하여금 정예병을 모두 거느리고 진주성(晉州城)을 공격하여 평양성(平壤城)에서의 패전을 갚게 하였는데, 일본 전국의 힘을 이 한 성에 응집시켜서 그 형세가 참으로 바윗덩이로 계란을 억누르는 것과 같았다. 우리 군사들은 하루에 두세 번을 적과 싸우면서 혼자 열 명을 당해 내지 않는 군사가 없어 사기가 백 배는 치솟았다. 그러나 하늘이 순조롭게 도와주지 않아 큰비가 쏟아져 내려 성이 무너진 탓에 열흘 만에 성이 함락되었다. 이에 성 안에 있던 장사는 모두 죽었는데, 그중에 한 분이 바로 충청 절도사(忠淸節度使) 황공(黃公)이었다.공은 휘가 진(進)이고, 장계현인(長溪縣人)으로, 고(故) 상신(相臣)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의 5세손이다. 아버지는 좌의정에 증직된 황윤공(黃允恭)이며, 어머니는 남양 방씨(南陽方氏)인데, 가정(嘉靖) 경술년(1550, 명종5)에 공을 낳았다.공은 체구가 크고 수염이 아름다웠으며 용력(勇力)이 남보다 훨씬 뛰어났다. 성품은 강직하고 굳세었으며 큰 뜻을 지니고 있었다. 27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상제를 마치고 거산도 찰방(居山道察訪)에 제수되었다.계미년(1583, 선조16)에 죄를 물을 때 반호(叛胡)를 활로 쏘면서 먼저 성에 올라가 공을 세웠다. 안원 권관(安原權管)에 제수되었는데, 자신이 노획한 오랑캐의 수급을 나누어 주어 공을 세워 죄를 씻어야 하는 친구의 죄를 벗겨 주자 사람들이 의롭다고 하였다. 이후 다시 선전관에 임명되었다.얼마 있다가 통신상사(通信上使) 황윤길(黃允吉)을 따라 일본에 갔는데, 함께 간 일행이 앞 다투어 물품을 사 가지고 와 이문을 얻으려고 하였으나, 공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보검(寶劍) 두 자루만 구입하였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며 그 까닭을 물으니, “내년에 왜적이 반드시 맹약을 깰 것이다. 나는 그때 이 칼을 써서 섬멸할 것이다.” 하자 공에 대해 잘 모르는 자들은 도리어 큰소리를 치는 것으로 의심하였는데, 훗날에는 과연 공의 뜻을 보게 되었다.조정에 돌아오자 상께서 왜적의 사정을 물었는데, 상사인 황윤길은 왜적이 반드시 침입해 올 것이라고 하였고, 부사인 김성일(金誠一)은 왜적이 반드시 침입해 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때 공은 상소를 올려 김성일을 참수하고 수군(水軍)을 양성해 왜적을 방어할 계책을 진달하려고 하였으나 시의(時議)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후 제용감 주부(濟用監主簿)와 동복 현감(同福縣監)에 제수되었는데, 날마다 전술을 익히면서 대비하느라 편히 쉬는 날이 없었다.다음 해에 과연 왜적이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 오자 어가가 서쪽으로 파천하였다. 전라 감사 이광(李洸) 등은 용인(龍仁)에서 왜적에게 궤멸되었으나, 공만은 홀로 군사를 온전하게 데리고 돌아와 웅치(熊峙)에서 왜적과 싸웠으며 또 이현(梨峴)에서 싸웠는데, 모두 적을 크게 무찔러서 호남이 이에 힘입어 온전하게 보존되었다. 군사를 거느리고 전주(全州)를 지나갈 때 전주 사람들이 은덕에 감격하면서 호장(壺漿)을 싸들고 와 길을 메웠다. 그러나 막부(幕府)에서 공의 공(功)을 엄폐하여 상이 훈련 부정(訓鍊副正)에 그쳤다.체찰사가 승제(承制)로 익산(益山)의 임시 군수(郡守)로 삼았는데, 곧바로 정식으로 익산 군수가 되게 하였다. 전라 병사(全羅兵使) 선거이(宣居怡)가 수원(水原)으로 진격하였을 때 공은 척후(斥候)로 나갔다가 적에게 포위되었는데, 적중에 좋은 말을 탄 자가 있는 것을 보고는 그 말을 빼앗아 타고 적의 포위망을 뚫고 돌아왔다. 이 일이 보고되어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승진되어 충청 조방장(忠淸助防將)에 제수되었다.계사년(1593, 선조26)에 전라 병사로 승진하였다. 이때 경성(京城)에 있던 왜적이 후퇴하는 것을 상주(尙州) 적암(赤巖)까지 추격하여 격퇴시켰다. 다시 함안(咸安)까지 추격하였다가 진주(晉州)로 진영(陣營)을 옮겼는데,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 최경회(崔慶會), 김해 부사(金海府使) 이종인(李宗仁), 복수장(復讐將) 고종후(高從厚) 등이 차례로 와서 모였다. 이때 이미 왜적이 쳐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돌더니, 며칠도 채 지나기 전에 왜적이 갑작스럽게 쳐들어왔는데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았다. 공은 기운이 더욱 굳세어져 여러 왜적들을 집어삼키려고 하였다. 이에 밤낮없이 성가퀴의 사이에 나가 있으면서 조금도 긴장을 풀지 않고 있었다. 왜적이 비가 오는 틈을 타서 성의 허술한 곳으로 넘어오려고 하자, 공은 스스로 흙과 돌을 날라 그곳을 메우니 병사들이 감격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앞 다투어 성을 보수하였다. 또 분발하여 떨쳐 일어나 셀 수 없이 많은 적을 죽였는데, 성 부근의 초목이 붉게 물들 정도였다.왜적이 사방에서 일제히 쳐들어오면서 무기를 몹시 많이 가지고 공격해 왔는데, 공이 번번이 계책을 써서 부숴 버렸다. 또 화살로 왜적의 장수를 쏘아 죽이니, 적장이 스스로 물러갔다. 그때 마침 왜적 한 놈이 성의 해자(垓子) 가에 숨어 있다가 몰래 총을 쏘아 공의 좌측 이마를 맞추었으므로 드디어 공을 구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에 모든 군사가 부모를 잃은 듯이 슬퍼하여 통곡 소리가 천둥이 울리는 것과 같았다.이종인(李宗仁)도 역시 온 힘을 다해 혈전을 치르다가 적병을 양쪽 옆에 끼고는 강물에 투신하여 죽었다. 김천일(金千鎰)ㆍ최경회(崔慶會)ㆍ고종후(高從厚) 등도 모두 촉석루(矗石樓) 아래로 투신하여 죽었는데, 이때 죽은 자가 1만여 명이나 되었다. 드디어 왜적이 성을 함락시키고 떠났다.당초에 공이 “우리들 모두가 한 성에 들어가 있다가 외부에서 원군이 이르지 않을 경우에는 일이 위급하게 될 것이다. 나는 성 밖으로 나가 진을 치고 있다가 안팎에서 서로 호응하려고 한다. 그렇게 하면 왜적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김천일이 그렇게 하는 것을 곤란하게 여겨 성 밖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도 공을 만나서 말하기를, “진주는 공이 관할해야 할 곳도 아니고 조정의 명령도 없는데 하필 성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십니까?” 하니, 공이 말하기를, “이미 창의사와 약속을 하여 저버릴 수가 없습니다.” 하자, 곽재우도 이미 공이 뜻을 정한 것을 알고는 술잔을 나누며 서로 영결하였다. 진주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곽재우가 말하기를, “다른 장수들은 쉽게 얻을 수 있으나, 황 절도사만은 그에 비길 만한 장수를 얻기가 어렵다.” 하면서 애통해 마지않았다.또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추증된 고득뢰(高得賚) 역시 창의사 김천일을 따라 싸우다가 같은 곳에서 죽었으며, 첨정(僉正)에 추증된 안영(安瑛)도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을 따라 싸우다가 금산(錦山)에서 죽었다. 이들은 모두 종시토록 전장을 떠나지 않으면서 죽는 것을 편안하게 받아들였다. 이에 한꺼번에 남원(南原)에서 세 절의사(節義士)가 나오게 되었다. 그들이 성취한 것은 비록 크고 작은 차이가 있었으나, 떳떳한 천성이 열렬하여 뺏을 수 없는 것은 피차간에 차이가 없었다. 그러므로 향리 사람들이 이들을 함께 제사 지내면서 그 사당을 정충사(貞忠祠)라고 하였다.공에게는 정직(廷稷)과 정열(廷說) 두 아들이 있는데, 모두 무과에 급제했다. 손자 위(暐)는 사간원 정언으로 있다. 기축년(1649, 인조27) 봄에 이르러 남원의 향대부(鄕大夫)인 최온(崔蘊) 등 50여 인이 함께 천여 리나 떨어진 양주(楊州)까지 사람을 보내어 나에게 비석에 새길 글을 써 주길 부탁하였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공은 충신과 절의에 관한 일에 대해 말하여 후세에 전하기를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 이제 이 삼현(三賢)의 자취를 기록하여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내가 감히 늙었다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서문을 지은 다음 명(銘)을 지었다. 명은 다음과 같다.지난 옛날 백제 있던 이 한 구역에 / 百濟一區꿋꿋하고 굳센 장부 무리 있었네 / 毅夫之徒계백 장군 뒤에 있어 일으키었고 / 階伯後起성충 장군 앞에 있어 내몰았다네 / 成忠前驅열렬하고 열렬했던 우리 황공은 / 烈烈黃公바로 이곳 남원에서 태어났다네 / 挺生玆鄕삼한 땅의 뛰어났던 장수였으며 / 三韓之良일만 군사 막을 만한 무위 있었네 / 萬夫之防세차 마침 용사의 해 되던 그해에 / 歲丁龍蛇섬 오랑캐 제멋대로 날뛰었다네 / 逆虜跳梁공은 그때 절도사의 부절 잡고서 / 公時杖節호남 지역 전담하여 절제하였네 / 專制湖廂천리 먼 길 외론 군사 거느리고서 / 千里孤軍멀리 있는 진양 향해 달려갔다네 / 遠赴晉陽보는 자들 한심하게 여기었으나 / 見者寒心공은 홀로 떨치어서 일어났다네 / 公自奮揚장군께서 군사에게 내린 그 호령 / 將軍號令부월처럼 엄정하고 엄정하였네 / 鈇鉞其嚴의사께서 한 번 뱉은 승낙의 말은 / 義士一諾중하기가 천금보다 더 중하였네 / 重於千金적들 오는 모습 보면 고슴도치고 / 賊來如蝟공의 용맹 보면 마치 범과 같았네 / 公勇如虎큰소리로 군사들을 질타를 하매 / 音烏叱咤호령 소리 우레처럼 울리었다네 / 雷霆吼怒하늘에서 순조롭게 아니 도와서 / 天不助順요사스러운 별 보루에 떨어졌다네 / 妖星隕壘공의 혼은 상제 뜰에 올라갔으나 / 公神帝庭또한 역시 옛 향리로 돌아왔다네 / 亦返故里왕께서는 공의 그 공 생각하여서 / 王念乃功백성들을 시켜 사당 짓게 하였네 / 俾民以興날짜 가려 뽑고 제수 마련한 다음 / 卜日潔牲신주 깎아 모시고서 제사 올렸네 / 治主以升누가 감히 공경하지 아니하겠나 / 孰敢不敬더군다나 가래나무 숲 있는 데랴 / 況也梓林고득뢰와 안영 두 분 계시었거니 / 曰高曰安아름다움 나란하여 셋이 되었네 / 竝美成三용머리에 솟아 있는 정자가 있어 / 龍頭之亭그 절벽에 사적 지어 새길 수 있네 / 石崖可鐫공의 공적 기록하여 후대에 전해 / 紀蹟傳芳전 시대의 어진 이와 짝하게 하네 / 用配前賢[주-D001] 정충사(貞忠祠) : 남원(南原)에 있는 사당으로 뒤에 정충사(旌忠祠)로 사액(賜額)되었다. 임진왜란 때 순절(殉節)한 황진(黃進)ㆍ고득뢰(高得賚)ㆍ안영(安瑛)을 모신 사당이다.[주-D002] 계미년에……때 : 1583년(선조16)에 니탕개(泥湯介)를 중심으로 한 회령(會寧) 지방의 여진족이 일으킨 반란을 말한다. 니탕개는 선조 초에 우리나라로 귀화한 여진인으로, 육진(六鎭) 지역에 출입하며 조정으로부터 후대를 받아 온 자였다. 이때에 이르러서 경원(慶源)에 사는 여진인들이 민심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경원 부사 김수(金璲)가 이들에게 패해서 여진인들이 부내의 모든 진보(鎭堡)를 점령하여 기세를 떨쳤다. 그 뒤에 온성 부사(穩城府使) 신립(申砬)과 첨사 신상절(申尙節) 등이 힘껏 싸워 강을 건너서 여진족의 소굴을 소탕하매 난이 평정되었다. 《國朝寶鑑 卷28》[주-D003] 승제(承制) : 임금의 명을 받아 외방에 나가 있으면서 편의에 따라 그때그때 임시로 일을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주-D004] 고득뢰(高得賚) : 본관은 용담(龍潭)이고, 자는 은보(殷甫)이다. 어려서부터 무예가 출중하고 경서와 글씨에 뛰어났다.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고향인 남원(南原)에 있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최경회(崔慶會) 휘하의 부장이 되어 금산(錦山) 등지에서 왜병과 맞서 싸웠으며, 진주성(晉州城)이 위급해지자 최경회와 함께 성에 들어가 다른 의병과 협력하여 성을 지키다가 순국하였다.[주-D005] 안영(安瑛) : 본관은 순흥(順興)이고, 자는 원서(元瑞)이다. 임진왜란 때 서울이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光州)에 있던 고경명(高敬命)의 휘하에 들어갔다가 금산의 싸움에서 고경명과 함께 순국하였다.
    2020-09-26 | NO.189
  • 내암집 제12권 / 행장(行狀)- 하진보(河晉寶, 1530~1585)
    내암집 제12권 / 행장(行狀)사간(司諫) 하공(河公) 행록〔司諫 河公 行錄〕 남을 대신하여 지었다.먼 조상 하공신(河拱辰)은 고려에 벼슬하여 좌사낭중(左司郞中)을 지냈으며 거란(契丹)에 사신으로 가서 굽히지 않고 죽어 문하시랑 동평장사(門下侍郞同平章事)에 추증되었다. 고조부 휘 기룡(起龍)은 통덕랑(通德郞)으로 통례문 통찬(通禮門通贊)을 지냈다. 증조부 휘 유(鮪)는 창신교위로 충무위 부사과(彰信校尉行忠武衛副司果)를 지냈다. 조부 휘 우치(禹治)는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안주 목사(安州牧使)를 지냈다. 부친 휘 숙(淑)은 승사랑(承仕郞)이었다. 모친은 함종 어씨(咸從魚氏)로 가선대부(嘉善大夫)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을 지낸 득강(得江)의 딸이다.공은 가정(嘉靖) 경인년(1530, 중종25) 6월 4일에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영특하였고 기골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으며 남달리 총명했다. 책을 읽을 때는 채 세 번을 읽기도 전에 문득 외고 잊어버리지 않았다. 임자년(1552, 명종7)에 부친상을 당했다. 을묘년(1555, 명종10)에 문과에 급제하여 처음에는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다가, 천거를 받아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 봉교(奉敎), 대교(待敎)가 되었으며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가 되고 시강원 설서(侍講院設書), 사서(司書)가 되었다.계해년(1563, 명종18)에 병조 좌랑으로 있으면서 동지사 서장관으로 연경에 갔는데, 공은 중국어에 능통하여 역관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에 중국인들이 그를 칭찬하였다. 사신 갔다 돌아와서 사헌부와 사간원을 두루 거쳤으니 곧 정언, 지평, 헌납, 장령 등이었다. 각 조를 두루 거쳤으니 곧 병조, 예조, 형조의 좌랑과 정랑이었다. 성균관에 제수된 것이 세 번이었으니 사성, 사예, 전적 등이다. 재상어사(災傷御史)로 차출된 것이 네 번이었으니 관동, 호서, 호남 등이었다. 이러한 관직을 거친 것은 모두 계해년(1563, 명종18) 이후지만 날짜의 앞뒤는 살펴볼 수가 없다.정묘년(1567, 선조 즉위년) 가을에 선산 부사(善山府使)에 제수되었다가 경오년(1570, 선조3)에 파직되었고, 임신년(1572, 선조5)에 안주 목사(安州牧使)에 제수되었다가 중도에 병으로 사직하였다. 계유년(1573, 선조6)에 조정에 들어가 종부시 정(宗簿寺正), 사복시 정(司僕寺正)이 되었으며, 이윽고 장령이 되었다가 체차되어 사예가 되었고 다시 외직으로 나가 성주 목사가 되었다. 을해년(1575, 선조8) 가을에 재상(災傷)으로 인해 파직되어 돌아왔다. 병자년(1576, 선조9) 겨울에 상의원 정(尙衣院正)에 제수되었고 정축년(1577, 선조10)에 예빈시 정(禮賓寺正)이 되었다가, 추국경차관(推鞠敬差官)으로 충청도 음부옥사를 처리하였다. 조정으로 들어와 사예가 되었다가 우통례로 옮겼는데 병으로 체직되었다가 가을에 김해 부사에 제수되었다.무인년(1578, 선조11) 겨울에 사간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중도에 병으로 사직하였다. 기묘년(1579, 선조12) 겨울에 밀양 부사에 제수되었다가, 임오년(1582, 선조15) 여름에 남천(南川)의 배가 파선하는 바람에 체직되었는데, 밀양의 선비와 백성들이 길을 막고 성을 에워쌌다. 성문을 밖에서 봉쇄한 지 한 달이 넘자, 그 소식을 듣고 조정에서 그대로 두었다. 계미년(1583, 선조16)에 어떤 일로 파직당해 돌아왔다. 내직과 외직에 제수된 것이 모두 겸춘추(兼春秋)였다. 만년에 또 홍문관에 천거되어 을유년(1585, 선조18)에 좌통례에 제수되었으나 임금의 명이 이르기 전에 졸하였으니 10월 15일이었다. 향연 56세였다. 다음해 2월 7일에 오곡(烏谷)의 달호음산(達好音山) 선영 옆 감좌(坎坐) 언덕에 장례를 지냈다.공은 덕성이 너그럽고 중후하였으며 풍채가 빼어났다. 평소에 다급한 말과 서두르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우애는 타고나서 아무도 이간하는 말이 없었다. 훌륭함을 밖으로 드러내 보이지 않았으나 시비를 가리는 일에는 마음속으로 엄격했다. 다른 사람들의 선행을 칭찬하는 것은 좋아하였으나 불선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았다. 그가 대관(臺官)으로 있을 때 윤원형(尹元衡)을 탄핵하자 남명 선생이 서신을 보내 치하하였다. 또 부사 하정(河珽)의 원한을 논하여 풀어주었는데, 하정은 기묘사화 때에 김식(金湜)을 숨겨주었던 사건으로 인해 죽음을 당하여 오래도록 신원되지 못한 사람이었다.벼슬에 있을 때는 청렴으로 스스로를 지키고 폐정을 힘써 없앴다. 은혜와 사랑으로 백성을 어루만지니 백성들이 그 덕을 마음에 간직하였고, 엄격하고 분명하게 관리들을 부리니 벼슬아치들이 감히 속이지 못했다. 장부와 문서가 구름처럼 쌓여도 물 흐르듯 처리하였고, 송사를 결단할 때는 반드시 공정한 도리를 따랐으며 작지(作紙)에는 곤장을 치는 일이 없었다. 학교에 더욱 마음을 쏟아 권면하고 인도하는 데 힘썼으며, 양로연을 베풀 때는 반드시 직접 술잔을 잡고 술을 따랐다. 봄가을 석전(釋奠)과 사직단, 성황당 등에 제사지낼 때는 반드시 목욕재계하고 직접 행했다.의복에 쓸 옷감이나 면포를 준비할 때는 반드시 하인에게 명하여 집안의 곡식과 바꿔오도록 하였고 벼슬아치들에게 처리하라고 맡긴 적이 없었다. 자신을 돌보는 일에는 매우 박하였으나 친족이 궁핍한 경우에는 온힘을 다해 도와주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그가 일족에게 후하게 대한다고 칭송하였다.성주 창고의 곡식이 거의 삼십만 석이었는데, 계속 썩어서 명목으로는 남아 있으나 실제로는 남은 것이 없었기에 백성들이 그 폐단을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공이 곧 창고의 곡식을 풀어 헤쳐서 둘로 나눈 다음, 반은 그대로 쓰고 나머지는 모곡(耗穀)으로 원래 숫자를 채웠다. 백성들은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그가 떠난 후에도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비석을 세우기로 하였다가 배덕문(裵德文)의 저지를 당했는데, 배덕문은 토호(土豪)로서 일찍이 공의 제제를 받았던 사람이다.김해부에는 포흠(逋欠)이 많았기 때문에, 오래 누적되고 징수하기 어려운 것을 골라서 그 문서를 모두 태워버린 다음 소비를 줄여서 그 숫자를 채웠다. 그래서 거사비(去思碑)가 있다.밀양(密陽)에 부임했을 때는 민간에 귀신을 숭상하는 풍습이 있었다. 밀양부 안에 귀신을 모시는 사당이 있었는데 사대부 집안 여자들이 다투어 몰려들어서, 원하는 것이 있을 때마다 기도를 올리곤 했다. 공이 신상을 끌어내어 강에 빠트리라고 명을 내리니, 이로 말미암아 요사스런 귀신이 마침내 제거되고 오랜 악습이 모두 혁파되었다.또 소송을 좋아하는 습성이 생겨서 부인들이 송정(訟庭)에 자주 들어왔다. 그럴 때마다 염치를 가르쳐서 깨우쳐주니 부끄러움을 알고 마음을 바로 잡을 수 있게 되어 일 년이 채 못 되어 이런 폐단이 없어졌다. 사직단과 성황당의 위판은 관청에 줄을 세워두었는데 너무 더러워졌기에 공이 단 옆에 집을 지어서 보관하였다. 또 바깥에 재실을 지어서 제사지내는 장소로 삼았는데, 그가 떠나자 역시 비석을 세우고 그 덕을 칭송하였다.공은 벼슬길에 있을 적에, 도를 굽혀 진급하려 하지 않았고 구차하게 현달을 바라지도 않았다. 공의가 그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아 자급을 올려주려고 동부승지와 동래부사에 천거하였지만 모두 낙점을 받지 못했다. 지위가 덕에 걸맞지 않아 끝내 당하관에 머물렀으니 운명이었다. 공이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있을 때는 날마다 형제들과 어울리면서 한 집안을 화목하게 했다. 술이 있으면 서로 자기가 거르겠다고 하면서 화락한 모습으로 즐거워했다. 간혹 한밤중이 되어서야 끝나기도 했으며 비바람이 몰아쳐도 하루도 거른 적이 없었으니 그 우애의 돈독함에 사람들이 모두 탄복했다.수우당 최영경 선생과 가장 밀접하게 교유하였으며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공의 병이 위중해지자 선생이 달려와서 병문안을 하고 약을 썼으며, 돌아가시자 직접 염을 하고 안치하였는데 애도와 예의를 빠짐없이 갖추었다. 본가에 관으로 쓸 판목이 없어서 선생이 관과 곽으로 쓸 재목을 부의로 내었고 장례를 지낼 때 또 산소에 머무르면서 장사를 지냈으니, 평소에 서로 어울렸던 마음을 알 수 있다.성주와 밀양 두 고을의 향교, 서원, 향소에서 각각 교생, 원생, 품관 등을 보내 글을 지어 조문하고 제사를 올렸을 뿐만 아니라 또 부의까지 드렸으니 오래 될수록 잊지 못하는 뜻 역시 상상할 수 있다.공의 첫째 부인은 이공도(李公度)의 따님 전의 이씨로, 진사 이정윤(李貞胤)의 손녀였다. 자녀를 낳았는데 모두 요절하였다. 둘째 부인은 본관이 진주인 선전관 정수익(鄭受益)의 딸이자 수사(水使)를 지낸 정은부(鄭殷富)의 손녀였는데, 딸을 하나 낳았는데 그 남편은 정연(鄭沇)이다. 셋째 부인은 영산 신씨(靈山辛氏) 신여근(辛汝謹)의 딸이자 광주 목사(光州牧使) 신륜(辛崙)의 손녀인데 딸 하나를 낳고 요절하였다. 부실이 아들과 딸을 낳았는데 딸은 요절하였고, 아들 신동인(辛同寅)은 정유재란 때 포로가 되었다.[주-D001] 하공(河公) : 하진보(河晉寶, 1530~1585)로, 본관은 진양, 자는 선재(善哉), 호는 영모정(永慕亭)이다.[주-D002] 재상(災傷) : 수재ㆍ한재, 또는 풍해ㆍ병충해로 인해서 발생한 곡식의 피해를 말한다.[주-D003] 남천(南川) : 현 경상남도 밀양시의 밀양강이다.[주-D004] 겸춘추(兼春秋) : 각 고을의 문관 수령(文官守令)이 춘추관(春秋館)의 수찬관(修撰官) 이하 관직을 겸임(兼任)한 경우에 일컫는 말이다.[주-D005] 달호음산(達好音山) : 현 경상남도 진주시에 있는 월아산(月牙山)이다.[주-D006] 윤원형(尹元衡) : ?~1565.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언평(彦平)이다.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이다. 1533년(중종28)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史官)이 되었다. 소윤(小尹)의 우두머리로 1545년(인종1) 을사사화를 일으켜 대윤(大尹) 등 반대파를 숙청하고 집권했다.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죽고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배경으로 대윤 일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개시하고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집권 20년 만인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아 관작을 박탈당하고 전리(田里)에 방귀(放歸)되었다. 강음(江陰)에 은거하다가 죽었다.[주-D007] 김식(金湜) : 1482~1520.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노천(老泉), 호는 동천(東泉)ㆍ정우당(淨友堂)이다. 1519년(중종14) 현량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성에 이르렀다. 기묘사화로 선산에 유배되었는데 거창으로 피했다가 자결했다. 시호는 문의(文毅)이다. 저술로 《사서집》이 있다.[주-D008] 작지(作紙) : 조세를 거두어 창고에 넣는 과정에서 그 장부를 꾸밀 때 쓰는 종이, 또는 명부를 만드는 일을 말한다.[주-D009] 모곡(耗穀) : 환자(還子) 곡식을 받을 때, 곡식을 쌓아둘 동안 축이 날 것을 미리 짐작하고 한 섬에 몇 되씩을 덧붙여 받던 곡식을 말한다.[주-D010] 배덕문(裵德文) : 1525~1603.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숙회(叔晦), 호는 서암(書巖)이다. 임진왜란 때 창의하였다. 저술로 《서암선생실기》가 있다.[주-D011] 포흠(逋欠) : 관물(官物)을 사사로이 소비하는 것을 말한다.[주-D012] 술이 …… 거르겠다고 : 《시경》 〈소아(小雅) 벌목(伐木)〉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주-D013] 화락한 모습으로 즐거워했다 : 《시경》 〈소아(小雅) 녹명(鹿鳴)〉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2023-12-04 | NO.188
  • 내행(內行)이 내려오는 날에는 행장을 아주 검소하게 해야 한다 - 목민심서 율기(律己) 6조 / 제3조 제가 (齊家)
    내행(內行)이 내려오는 날에는 행장을 아주 검소하게 해야 한다 - 목민심서 율기(律己) 6조 / 제3조 제가 (齊家)  :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쌍마교(雙馬轎)는 좋은 제도가 아니다. - 태평차(太平車) 보다 못하다 - 그러나 여자가 태어나면 쌍교 탈 것을 축원하니 어머니를 모시는 자는 불가불 쌍교를 사용해야 하지만, 아내에 대해서는 꼭 그럴 필요가 있겠는가. 무식한 부녀자들이 마음으로 원한다면 남의 쌍교를 빌되, 한 역참(驛站)만 가거나, - 남쪽길은 과천(果川)까지, 서쪽길은 고양(高陽)까지, 동쪽길은 평구(平丘)까지면 된다. - 아니면 하룻길을 가서 - 곧 2참(站) - 그만두는 것이 좋다. 독마교(獨馬轎) 청익장(靑翼帳)에 주렴을 드리우고 읍에 이르더라도 영화롭지 않겠는가. 하루만 타더라도 태어났을 때의 축원을 이룬 셈인데 꼭 10일을 타야만 마음이 쾌하단 말인가.어머니가 타는 가마와 아내가 타는 가마 외에 일행의 인마(人馬)는 관노(官奴)나 관마(官馬)를 사용해서는 안 되고, 집의 하인이나 집의 말이나 혹 사람을 사거나 말을 세내서 사용하는 것이 예(禮)에 맞는 것이다.《야인우담(野人迂談)》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두황상(杜黃裳)이 상부(相府)에 있을 적에 부인(夫人)은 다만 죽두자(竹兜子)를 탔다고 했는데, 하필 쌍교로 행차를 해야만 예(禮)가 되겠는가. 우리나라는 중고(中古) 이전에는 비록 재상의 부인이라 하더라도 말을 타고 너울〔羃羅〕을 쓰고 다녔는데, 요즈음은 부화(浮華)한 풍속만 날로 더욱 심해져서 인마(人馬)의 징발에 한도가 없어졌다. 쌍교 하나가 가는데 좌우로 옹위하는 사람만 해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고, 심하면 많은 인부를 징발하여 천리길을 메고 가게 하는 자도 있다. 대개 쌍교는 군왕(君王)이 타는 것으로, 어깨에 메는 쌍교는 군왕도 타지 않는 것이니 그 참람함이 어떠하겠는가. 옛날에는 감사 부인도 독마교(獨馬轎)를 탔는데 요즈음은 시정의 천한 여자도 그 남편이 현의 수령이 되면 쌍교를 타니 그 참람함이 어떠하겠는가.”생각하건대, 수령으로 뜻이 있는 사람은 중국에서 배워다가 태평차(太平車) 한 대를 만들어서 그 어머니를 모시고 가면 영화롭기도 하려니와, 백성의 원망도 없게 될 것이다.한억(韓億)이 하북전운사(河北轉運使)가 되었을 적에 어머니를 태평차에 앉히고 둘레를 갈대 자리로 드리웠으며, 헌숙공(獻肅公) - 그의 아버지이다. - 은 나귀를 타고 수레 뒤를 따랐으니, 검소함이 이와 같았다.한억(韓億)과 이약곡(李若谷)은 아직 급제하지 못하였을 때는 모두 가난하였다. 함께 경사(京師)에 가서 시험을 치를 적에, 나아가 알현(謁見)할 적마다 서로 바꾸어서 하인 노릇을 하였다. 이약곡이 먼저 등과(登科)하여 장사현 주부(長社縣主簿)를 제수 받고 부임할 때, 손수 아내가 탄 나귀의 고삐를 끌었으며, 한억은 상자 하나를 지고 갔다. 현까지 30리 되는 지점에 이르자, 이약곡이 한억에게,“현 사람들이 올까 두렵네.”하면서, 상자 안에 돈이 겨우 6백 전이 있었는데 그 절반을 한억에게 주고 서로 붙들고 크게 통곡한 후 떠났다. 그 뒤에 한억도 급제하여 다 같이 벼슬이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다.윤석보(尹碩輔) - 연산조(燕山朝) 사람. - 는 풍기 군수(豊基郡守)가 되어 부임할 때에 오직 사내종 하나와 계집종 하나를 데리고 갔고 - 처자는 데리고 가지 않았다. - 뒤에 성주 목사(星州牧使)가 되어서는 그의 처 박씨가 임신한 지 8개월이 되었는데도 말을 타고 가도록 하고 가마는 쓰지 못하게 하였다. 박씨의 남동생 중간(仲幹)이 상주 목사(尙州牧使)가 되어서 찾아와 보니 관에서 공급하는 것이 매우 빈약하므로 소금 몇 말을 보내 주었더니 공은 즉시 돌려보내며, 마치 자신이 더러워지는 듯이 하였다.살피건대, 국초(國初)에는 사족(士族)의 부녀는 너울을 쓰고 말을 탔던 것이 분명하다.효헌공(孝憲公) 송흠(宋欽)이 수령으로 부임할 적마다 신영마(新迎馬) 3필뿐이었으니, 대개 공이 타는 말이 1필, 어머니와 처가 각 1필씩이었다. 당시 사람들이 삼마 태수(三馬太守)라 하였다.자제들은 반드시 초교(草轎) - 지붕이 없는 가마이다. - 를 타는데, 관노(官奴)를 시켜 좌우에서 옹위하도록 하는 것은 예가 아니다. 소년들은 안장 얹은 말을 타는 것을 배워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언치〔屉鞍〕 - 방언으로 길마〔吉鞍〕라 한다. - 에 행구(行具) - 방언으로는 짐〔負擔〕이라 한다. - 를 싣고 타기도 하며 걷기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내행(內行)이 떠나기 하루 전에는 데리고 갈 아전과 종들에게 술ㆍ떡ㆍ국 같은 음식을 먹여야 한다.수령이 떠날 때에 이와 같이 먹이는 일이 없는 것은 수령은 엄해야 하고 또 공적인 행차여서 먹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행은 자선(慈善)을 주로하고, 또 사적인 행차이기 때문에 먹여야 하는 것이다.내행이 고을에 도착한 지 3일 만에 또 먹여서 따라온 수고에 보답해야 한다.[주-C001] 제가(齊家) : 가정을 바로 다스리는 것을 뜻하는 말로, 여기서는 지방 수령으로서 주의해야 할 가정에 관계된 제반 문제를 서술한 것이다.[주-D001] 쌍마교(雙馬轎) : 쌍가마(雙駕馬)로 말 두 필이 각각 앞뒤 채를 메고 가는 가마를 말한다. 쌍교(雙轎)라고도 한다.[주-D002] 태평차(太平車) : 관인이 타던 수레.[주-D003] 독마교(獨馬轎) : 말 한 필이 끄는 가마.[주-D004] 야인우담(野人迂談) : 미상이다.[주-D005] 두황상(杜黄裳) : 당(唐)나라 덕종(德宗)ㆍ헌종(憲宗) 때 사람으로 자는 준소(遵素), 시호는 선헌(宣獻)이다. 벼슬은 문하시랑(門下侍郞)ㆍ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ㆍ하중진강절도사(河中晉絳節度使)를 지냈다. 《唐書 卷169 杜黃裳列傳》 《舊唐書 卷147 杜黄裳列傳》.[주-D006] 상부(相府) : 재상이 일을 보는 관부(官府)이다. 두 황상이 재상을 지냈다.[주-D007] 죽두자(竹兜子) : 대로 만든 가마.[주-D008] 헌숙공(獻肅公) : 한억(韓億)의 아버지의 시호인 듯한데, 이름은 미상이다.[주-D009] 이약곡(李若谷) : 송(宋)나라 진종(眞宗)ㆍ인종(仁宗) 때 사람으로 자는 자연(子淵), 시호는 강정(康靖)이다. 장사현위(長社縣尉)ㆍ강녕지부(江寧知府) 등을 거쳐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다. 《宋史 卷291 李若谷列傳》[주-D010] 장사현 주부(長社縣主簿) : 주부(主簿)는 현의 관물 출납과 문서를 맡아보는데, 승(丞)ㆍ위(尉)와 함께 수령을 보좌하는 관리이다. 《송사(宋史)》 〈이약곡열전(李若谷列傳)〉에는 위(尉)로 되어 있다.[주-D011] 윤석보(尹碩輔) : ?~1505. 자는 자임(子任), 본관은 칠원(漆原)이다.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유배(流配)를 갔다가 이듬해 죽었다.[주-D012] 송흠(宋欽) : 1459~1547. 조선 문신. 영광 출신으로 자는 흠지(欽之), 호는 지지당(知止堂), 시호는 효헌(孝憲)이다. 담양(潭陽)ㆍ장흥(長興)의 부사(府使), 광주(光州)ㆍ나주(羅州)의 목사(牧使),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는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뒤에 이조 판서ㆍ우찬성에 이르렀다.
    2020-09-16 | NO.187
  • 노준공(盧俊恭) - 해동잡록 5 본조(本朝)
    노준공(盧俊恭)  - 해동잡록 5 본조(本朝) : 죽소(竹所) 권별(權鼈, 1589~  ?) 광주(光州) 사람이며, 신우(辛禑) 때에 상제가 폐기되었기 때문에 1백일이면 상복을 벗었는데 준공은 홀로 3년을 묘막에서 지냈다.
    2020-09-30 | NO.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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