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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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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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 원수(權元帥)의 행주비(幸州碑) - 간이집 제1권 / 비(碑)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제도 도원수(諸道都元帥) 정헌대부(正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증(贈)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춘추관사 홍문관제학 동지성균관사 권공 율(權公慄)이 세상을 떠난 지 일 년이 지나고 나서, 공의 막료(幕僚)였던 사람들이 ‘공이 전에 거두었던 행주(幸州)의 승첩(勝捷)이야말로 그 공이 워낙 컸던 만큼 그 당시 현장의 언덕에 비를 세워 그 공적을 영원히 전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뜻으로, 공의 사위인 현재의 영상(領相) 이공(李公)을 찾아가 나에게 글을 보내 비문을 청하도록 부탁하기에 이르렀다.삼가 살펴보건대, 임진년 4월에 일본이 병력을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우리나라를 침범해 왔다. 그러고는 미처 대비하지 못한 우리의 허점을 틈타서 잇따라 우리의 군진(軍陣)과 고을을 함락시켰으므로 중외(中外)가 모두 크게 경악하였다.이에 상이 이르기를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권모(權某)의 재주를 한 번 시험해 볼만하다고 하는데, 지금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하였다. 이렇게 해서 공이 전임(前任) 의주 목사(義州牧使)의 신분에서 바로 기용되어 광주 목사(光州牧使)에 임명되었다.당시에 조정의 신하들은 호남과 영남 지방을 사지(死地)로 여기고 있었는데, 공은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곧장 단기(單騎)로 치달려 갔다. 그러나 광주에 도착하자마자 경성(京城)을 이미 지킬 수 없게 되어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몽진(蒙塵)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징집한 군사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들어가 호위하려는 계책을 세우게 되었다.이때 전라 순찰사(全羅巡察使) 이광(李洸)이 군사 4만 명을 징발한 다음,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과 함께 영(嶺)을 사이에 두고 북상(北上)하면서, 공에게 방어군(防禦軍)의 중위장(中衛將) 임무를 맡게 하였다. 이는 서생(書生)을 무부(武夫) 취급하는 조치였으므로 혹 난색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공은 의연히 “내가 행해야 할 직분이다.” 하였다. 직산(稷山)에 이르러 충청(忠淸) 군사와 합세, 수만의 군세(軍勢)를 이룬 뒤에 다시 수원(水原)으로 진군하였다.이때 이광이 곽영으로 하여금 용인(龍仁)에 있는 적의 진영을 먼저 공격하게 하였으므로, 공이 건의하기를 “왜적이 우리보다 먼저 험준한 지세를 점거하고 있는 만큼, 우리가 습격하기에 유리한 형세가 못 된다. 그리고 지금 이것보다 큰 문제가 있으니, 그것은 경성(京城)이 이미 적의 손에 넘어가 있는 상황에서 주공(主公)이 한 지방의 군사들을 모두 이끌고 왔다는 점이다. 그러니 지금으로서는 오직 곧장 위로 올라가 조강(祖江)을 건넌 다음 임진(臨津)을 굳게 막아 적이 서쪽으로 향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제압하기에 유리한 형세가 전개될뿐더러, 행재소(行在所)에 품달하여 명령을 받을 수 있는 길도 열리게 될 것이니, 장차 큰 계획을 실천에 옮길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 소규모의 적을 상대로 예봉(銳鋒)을 다투어서는 안 될 것이요, 그렇게 하는 일은 또 만전을 기하는 일이 못 되는 만큼 우리의 성세(聲勢)와 위신을 손상시키는 결과만 빚게 되고 말 것이다.” 하였다.그리고 선봉장(先鋒將) 백광언(白光彦)과 조전장(助戰將) 이지시(李之詩)가 각각 정예 군사 1천 명을 직접 이끌고 갈 때에도 그들이 경솔하게 진격하려는 뜻을 보이자, 공이 또 경계시키면서 상대가 먼저 공격해 오기를 기다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공의 이 모든 말들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백광언 등이 모두 전사(戰死)하는 사태에까지 이르고 말았는데, 이날 밤에 군중(軍中)이 지레 겁내며 놀라더니 아침에 적의 모습만 보고도 크게 무너지고 말았으므로, 제군(諸軍)이 모두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이에 공 역시 부득이 광주(光州)로 되돌아오고 나서 잠을 잘 때에도 옷을 벗지 않은 채 다시금 주장(主將)을 설득해 보려고 하였으나 오래도록 조용히 있기만 하자, 곧장 분연(奮然)히 일어나 말하기를 “지금은 신자(臣子)가 가만히 앉아서 나라가 망하는 날만 기다리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하고는, 마침내 경내(境內)의 자제 5백여 인을 끌어모으는 한편 이웃 고을에 격문(檄文)을 돌려 또 1천여 인을 얻은 다음, 경상도와의 경계로 나아가 진을 쳤다.이때 남원(南原)의 백성들이 왜적이 들이닥치기도 전에 자기들끼리 소요를 일으키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잠시 이를 진정시키고 위무(慰撫)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순찰사가 공의 보고를 접하고는 공에게 부절(符節)을 내주어 임시로 도절제(都節制)를 맡게 하면서, 열읍(列邑)의 관군(官軍)을 지휘 감독하여 영(嶺)에서 호남으로 넘어오는 왜적의 길목을 차단하게 하였으므로, 공이 이치(梨峙)로 진군하여 험준한 지세를 의지하고 적을 기다렸다.7월에 왜적의 공격을 받고 신속히 격퇴시켰으나, 군중(軍中)에서 용명(勇名)을 떨치던 동복 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이 적의 탄환에 맞아 퇴각하는 바람에 군사들의 사기가 크게 저하되면서, 미처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왜적이 요새지 안으로 뛰어들어 형세가 매우 급하게 되었다. 이에 공이 칼을 빼어 들고 크게 소리를 지르며 앞장서서 적의 칼날을 무릅쓰자, 전사(戰士)들이 모두 일당백(一當百)의 용맹심을 발휘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왜적들이 사상자를 돌볼 틈도 없이 치중(輜重)을 낭자하게 내버려 둔 채 달아나고 말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 행재소(行在所)에서 공을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임명하였는데, 이는 나주가 광주보다도 중요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나서 곧이어 본도(本道)의 순찰사(巡察使)를 또 제수받게 되었다. 교서(敎書)가 진중(陣中)에 도착하던 날, 공이 서쪽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눈물을 쏟자, 그 비통한 모습에 군사들 모두가 감동되었다. 공이 방어사(防禦使)로 하여금 이치(梨峙)를 대신 지키게 하고, 자신은 전주(全州)로 달려가 도내(道內)의 군사 1만여 명을 수습한 뒤, 9월에 근왕(勤王)의 계책을 실행에 옮기려 하였다.당시에 여러 왜적들은 평양(平壤)과 황해(黃海)와 개성(開城)을 나누어 점거하고 있었으며, 경성을 점거하고 있는 자들은 꽤나 큰 진영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이들이 군사들을 풀어 놓아 사방을 약탈하게 하는 바람에 서쪽 행재소로 가는 길이 끊어지자, 여러 근왕(勤王)의 부대들 역시 모두 강화(江華)로 들어가서 그저 강을 사이에 두고 굳게 지키고만 있는 실정이었다.공은 상이 의주(義州)에 머물러 있는 상황에서 왜적이 아직은 평양 이북을 넘어가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는, 우선 경성에 대한 공격을 도모함으로써 서쪽에 가 있는 적들로 하여금 동쪽을 돌보느라 틈이 없게끔 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상의 방책이라고 판단을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수원(水原)의 독성(禿城)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상에게 보고를 올리니, 상이 상방검(尙方劍)을 풀어 급히 내려 주며 이르기를 “장수들 중에 군령(軍令)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거든 이것으로 처단하라.” 하였다.경성에 있는 왜적들로서는 공이 군사상의 요해지(要害地)에 버티고 있는 것이 걱정거리였다. 그래서 병력 수만 명을 세 개의 진영으로 나눈 뒤 오산(烏山) 등 지역에 분산 배치하고는 수시로 왕래하면서 도전을 해 왔다. 그러나 공은 성벽을 굳게 지키고 대응을 하지 않으면서 이따금씩 기병(奇兵)을 내보내 예봉을 꺾어 놓곤 하였으므로, 왜적이 결국에는 아무런 소득도 거두지 못한 채 밤에 영채(營寨)를 불사르고 떠나갔다.계사년 2월에 공이 휘하의 정병(精兵) 약 4천 명을 두 개의 부대로 나눈 뒤, 하나는 절도사(節度使) 선거이(宣居怡)에게 주어 금주(衿州)의 산에 진을 치고서 성원(聲援)을 하게 하는 한편, 하나는 공이 직접 이끌고서 양천강(陽川江)을 건너 고양(高陽)의 행주산성(幸州山城)에 진을 쳤는데, 이때의 병력이 실로 2300인에 불과하였다.이때 중국의 대장인 이공 여송(李公如松)이 구원병을 총지휘하여 동쪽으로 내려와서는 벌써 평양을 탈환하는 등 그 위명(威名)을 크게 떨치고 있었다. 그래서 왜적 중에 평양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자, 황해 지방을 버리고 온 자, 개성에서 후퇴한 자, 함경도에서 풍문을 듣고 도망쳐 온 자들이 모두 경성에 모여들었으므로, 경성에 있는 왜적들은 오히려 그 형세가 더욱 치성해지고 있었다.이러한 때에 공이 외로운 군대를 이끌고서 경성과 근접한 지역으로 들어갔던 것인데, 왜적은 공의 병력이 소수인 것을 알고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그저 한번 엿보다가 발로 짓밟아 버리면 그만이라고 여기고 있었다.그달 12일 여명(黎明)에 척후(斥候)하던 관리가 왜적의 출현을 보고하자, 공이 군중에 동요하지 말라고 경계시킨 뒤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니, 성으로부터 5리(里) 떨어진 지점에 벌써 왜적이 벌판을 까맣게 뒤덮으며 밀려오고 있었다. 왜적은 먼저 1백여 기(騎)를 내보내 우리를 압박하더니, 이윽고 대대적으로 병력을 동원하여 성 주위를 포위하고 성곽을 타고 올라왔는데, 계속 증가되는 숫자가 다시 헤아릴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이에 아군(我軍)이 결사적으로 항전하면서 화살과 바윗돌을 비 오듯 아래로 쏟아 붓자, 왜적이 병력을 셋으로 나눈 뒤에 계속 교대로 휴식을 취하면서 공격을 가해 왔다. 묘시(卯時)에서 유시(酉時)까지 이어진 세 차례의 격전에서 왜적의 전세(戰勢)가 불리해지자, 이제는 갈대 단을 묶어 바람결에 불을 놓기 시작하였는데, 그 불길이 목책(木柵)에까지 번져 오자 성안에서 물을 길어 와 끄기도 하였다.그런데 다만 서북쪽의 자성(子城 성안에 설치한 또 다른 작은 성)을 지키던 승병(僧兵)의 기세가 약간 꺾인 틈을 타서 왜적이 함성을 지르며 쳐들어오자 군사들 모두가 그 분위기에 휩쓸려 무너지려는 조짐을 보였다. 이에 공이 칼을 빼들고 장수들을 질타하자 여러 장수들이 다투어 예봉(銳鋒)을 막아 서며 육박전을 벌이기에 이르렀다.그리하여 결국에는 왜적이 대패(大敗)한 나머지 시체를 네 곳에 쌓아 두고 불을 지른 뒤에 그곳을 빠져나갔는데, 우리 군대가 아직 남아 있는 왜적들을 붙잡아 목을 벤 것만도 130여 급(級)이나 되었으며, 그들이 버리고 간 기치(旗幟)와 개갑(鎧甲)과 도창(刀槍) 등을 노획한 것 역시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당시에 이 제독(李提督)이 개성(開城)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그 선봉(先鋒)인 유격(遊擊) 사대수(査大受)가 공의 대첩(大捷) 소식을 듣고는 다음 날 편비(褊裨)를 보내 전쟁터를 돌아보게 하였으며, 또 며칠 지난 뒤에는 공과의 면회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에 공이 군진(軍陣)을 정돈하고서 그를 맞았는데, 그가 와서는 탄식하며 말하기를 “외국에도 이런 진짜 장수가 있었구나.” 하였다.얼마 지난 뒤에 공이 파주(坡州)의 산성으로 군대를 이동시켰다. 왜적이 행주에서의 패배를 기필코 보복하려고 군사를 총동원하여 서쪽으로 향하다가, 공이 성벽 위에 서서 행주에서보다 더 엄하게 대비하고 있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고는, 그곳을 공격하지 말라고 서로 경계하며 그냥 돌아간 것이 무려 세 차례나 되었다.4월에 이 제독(李提督)이 심유경(沈惟敬)의 계책을 들어 줌에 따라, 여러 왜적들이 강화(講和)의 약속을 얻어 냈다고 일컬으면서 어느 날 갑자기 경성을 버리고 떠나가기 시작하였다. 공이 이 소문을 듣고는 날랜 군사들을 이끌고 경성으로 치달려 들어갔으나, 그때는 이미 왜적이 한강(漢江)을 건넌 뒤였다.그런데 이 제독이 유격(遊擊) 척금(戚金)을 보내 공의 동정(動靜)을 일일이 보고하게 하다가, 한강 나루에 있는 배들을 모두 거두어 추격하는 군대가 건너가지 못하게 방해하였으므로, 공이 울분을 터뜨리면서도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군대를 해산시키고 본도(本道)로 돌아오게 되었다.대체로 살펴보건대, 공은 처음부터 경성을 수복(收復)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는데, 그것이 그만 전임 순찰사(巡察使) 때문에 좌절되고 말았었다. 그리하여 양호(兩湖)의 6만 병력이 집결했던 것을 계기로, 임진(臨津)으로 달려가서 기필코 지켜 낼 수 있는 그 좋은 기회를 무산시킨 채, 급기야는 수원(水原)에서 어처구니없는 패배를 맛보게 되기에 이르렀으니, 이치(梨峙)에서의 승리 같은 것은 불행을 당하고 나서 조금밖에 분풀이를 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몇 년 동안이나 봉시 장사(封豕長蛇)가 다시는 호남 지방을 넘보지 못하게 한 결과, 호남의 그 풍성한 곡물을 거두어 동쪽과 서쪽에 수송해서 충분히 공급하게 해 주었으니, 이것이 모두 누구의 덕분이라고 해야 하겠는가.그러다가 순찰사의 직책을 대신 맡게 된 뒤로부터는 일도(一道)의 군사들을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는 하였으나, 당시에 그 병력을 진작부터 쓰고 있는 자들이 많았으니, 가령 절도사(節度使) 최원(崔遠)이 병력을 먼저 장악하고서 근왕(勤王)하는 대군(大軍)이라고 일컫다가 강화(江華)에서 기세가 꺾여 버린 경우 같은 것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밖에도 곳곳마다 의병이나 관군(官軍) 등 여러 부대들이 혹은 싸우고 혹은 지키고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그래서 공이 겨우 1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서 북상(北上)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정도의 군세(軍勢)로는 곧장 승냥이와 범의 소굴을 두들겨 팰 수가 없었기 때문에 독성(禿城)에서 그들의 목을 잠시 누르고 있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좌충우돌하는 적의 위세를 꺾어 놓음으로써 양호(兩湖)와 기우(畿右)의 길이 막힘없이 뚫리게 하는 효과를 거둘 수가 있었다.그러다가 행주(幸州)에 이르게 되어서는, 주인이 객을 맞는 유리한 위치에서 부족한 병력으로 엄청난 수의 왜적을 무찌르는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대체로 보건대, 중국 장수가 평양을 탈환한 그 위세도 아직 남아 있었지만, 그뿐만이 아니라 이 행주의 대첩 역시 흉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 충분한 효과가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만약에 왜적을 겁나게 하는 이런 승리가 있지 않았더라면, 심유경(沈惟敬) 같은 자가 백 명이 있었다 하더라도, 하루아침에 왜적이 경성을 버리고 떠나가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쯤 되어서는 공이 당초에 경성을 수복하려고 했던 그 뜻이 어느 정도나마 풀어지게 되었다고도 할 것이다.6월에 도원수(都元帥)에 임명되어 영남(嶺南)의 제군(諸軍)까지 모두 지휘하게 되었는데, 그 뒤로 도원수의 직책을 내놓기도 하고 다시 임명되기도 하다가, 정유년 겨울에 제독(提督) 마귀(麻貴)를 따라 울산(蔚山)의 전역(戰役)에 참가하였다.그리고 무술년 가을에는 제독 유정(劉綎)을 따라 순천(順天)의 전역(戰役)에 참여하였는데, 제독의 지휘를 받는 신분상의 제약 때문에, 선견지명을 발휘하여 건의를 올려도 채택이 되지 않고, 성곽을 먼저 타고 올라가는 용맹이 있어도 공을 세울 수가 없었으므로, 공만이 비통한 눈물을 흘렸을 뿐만이 아니라 뜻있는 인사들 모두가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그러나 이제는 왜적이 또다시 엿보면서 깊이 침입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얼마 뒤에는 또 군대를 철수하여 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일단 경성을 수복하고 우리 힘으로 지켜 낼 수가 있게 되었으니, 이쯤 되어서는 공이 원래 품은 뜻이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하겠다. 만약에 중흥을 이룬 공적을 세운 사람이 없다고 한다면 그만이지만, 있다고 한다면 과연 누구를 첫째로 꼽아야 하겠는가.기해년에 공이 병으로 면직을 청하고 돌아간 뒤 도성에서 치료를 받기도 하였으나 다시 조정에 복귀하지 못한 채 7월에 세상을 하직하니 향년 63세였다. 부음(訃音)이 들리자 상이 애도하며 정사(政事)를 보지 않고 조문(弔問)과 제례(祭禮)와 부의(賻儀)를 특별히 더하게 하였다.아, 공의 공적에 대해서 본조(本朝)에서는 얼마나 뚜렷하게 드러내 보여 주었던가. 병신년에 공이 재차 도원수의 직책을 사직하자 윤허하지 않고 내구마(內廐馬)를 하사하며 교서(敎書)를 내렸고, 하직 인사를 드리자 술을 하사하는 동시에 또 내구마와 말 안장을 주면서 교서를 내렸고, 다시 무술년에 파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자 특별히 장려하며 유시(諭示)를 내렸었다. 그리고 공이 세상을 하직하자 관직을 추증(追贈)하도록 하는 한편 대신(大臣)에게 자문을 하며 시호(諡號)를 의논토록 하였다.아, 공의 명성이 중국 조정에는 얼마나 성대하게 전파되었던가.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은 본국에 상(賞)을 행하는 것과 관련하여 자문(咨文)을 보내었고, 병부 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은 천자에게 주문(奏文)을 올려 공의 공적을 아뢰었고, 천자의 명을 받든 홍려시(鴻臚寺)의 관원은 본국에 칙지(勅旨)를 선유(宣諭)하였다.그리고 전진(戰陣)에 임했을 당시에는 제독 마귀(麻貴)가 호령을 제대로 행한다고 칭찬하였고, 경리(經理) 양호(楊鎬)는 공의 장병이 역전(力戰)하는 것을 가상하게 여겼으며, 세월이 흐른 뒤에도 중국 조정의 대소 관원들이 공의 이름만 듣고서도 그 사람됨이 어떠한지를 모두 가늠해 알 수 있게 되었는가 하면, 왜적의 여러 수령들조차도 권 원수(權元帥)의 기거가 어떠한지 꼭 안부를 묻곤 하였다. 이러한 종류에 대해서는 태사씨(太史氏 사관(史官))가 역사에 모두 기록해 놓을 것인데, 비문에 구체적으로 써넣을 성격의 것도 아닌 만큼 이쯤 해서 생략하기로 한다.공의 자(字)는 언신(彦愼)이요, 관향은 안동(安東)으로서 고려(高麗)의 태사(太師) 권행(權幸)의 후예이다. 그리고 본조(本朝)에 들어와서는 찬성(贊成) 권근(權近)의 6대손이요, 영의정 권철(權轍)의 아들이니, 그러고 보면 공이 세운 공업(功業) 역시 본디 그 유래가 있다고 하겠다.공은 사람을 다스리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특히 성심(誠心)과 화기(和氣)로 대하였을 뿐 결코 엄의(嚴毅)를 앞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든 간에 감복을 하여 사력(死力)을 다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공은 46세 되던 해인 임오년 문과(文科)에 급제한 뒤 낭관(郞官)을 거쳐 당상(堂上)에 뛰어올랐고, 급기야는 유장(儒將)으로서 현달하게 되었다. 공은 관직을 역임한 것도 그다지 많지 않고 조정의 반열에 서 있었던 적도 드물기만 하다. 그저 어렵고 힘든 시대를 만나 그 능력을 다 발휘한 것은 아니다.그러나 옛날 공의 대장 깃발 아래에 있었던 인사들이 공의 덕의(德誼)를 사모하면서도 이를 선양(宣揚)할 길이 없자, 다투어 출자(出資)하여 힘을 모은 다음에 공의 형인 상호군공(上護軍公)에게 이를 알리고서 이 비석 건립에 서로들 힘을 쏟고 있으니, 이 또한 얼마나 가상하다 하겠는가.상호군공은 가선대부(嘉善大夫) 권순(權恂)이요, 영상(領相) 이공(李公)은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항복(恒福)이다. 공은 두 번 장가들었으나 모두 아들을 두지 못하였다. 공의 묘소는 경성 서쪽 홍복산(洪福山)에 있다.[주-D001] 봉시 장사(封豕長蛇) : 엄청나게 큰 멧돼지와 뱀처럼 포학하고 탐욕스러운 무리를 가리키는 말인데, 여기서는 왜적이 그렇다는 말이다.최립(崔岦 1539~1612), 《간이집(簡易集)》 
    2022-03-04 | NO.215
  • 권율 광주목사일 때 정충신(鄭忠信, 1575~1636)
    晩雲集 附錄 권2 / 年譜晩雲先生年譜, 정충신(鄭忠信, 1575~1636)贈崇政大夫,判敦寧府事兼判義禁府事。行竭誠奮威出氣效力振武功臣,正憲大夫,五衛都摠府都摠管兼八道副元帥。錦南君。諡忠武。鄭公諱忠信。字可行。自號晩雲。自參判公至公。三世以正兵。爲兵營鎭撫。公下番則又爲本州知印。萬曆三年乙亥十二月二十九日子時。公生於光州故 卿校洞。丙子立春。已入於二十七。日故以丙子行。 及長。短小精悍。目如曙星。公少入番兵營。嘗館老妓家。一日。老妓苞裹兵使宴餘物以饋之。公却而不食曰。大丈夫當自爲兵使。以食方丈之饌。何以食人頷下物乎。壬辰公年十七。時倭寇大入。權元帥慄。以光牧。起兵討賊。公自請偵探。率數人以往。則倭陣已捲去。而只有一覆甕。公疑其中。試持滿射之。果有一病倭。中箭而倒。遂斬首而還。人莫不奇之。權公又將募人。以本道討倭事情。狀聞行朝。時倭奴充斥八路。道途不通。人皆畏避。無有應募者。公獨挺身請行。晝伏夜行。跋涉數千里。始達龍灣。白沙李相公。以兵判招見。與語大奇之。遂留幕下。仍授以左,國,史記等諸書。公聰明絶人。過目輒成誦。白沙歎賞。宣廟命設科灣上。以慰本道及扈從諸臣。公乃登武科丙科。宣廟一日。謂李相曰。鄭某之才。已聞卿言。後日。卿須率來。李相遂與公入對。宣廟奬諭曰。年尙少。竢稍壯。可大用也。*光州 牧使 權慄의 휘하에 있으면서 敵情을 정탐하다. 전라도의 討倭事情을 보고하는 權慄의 장계를 義州 行朝로 전달하고, 병조 판서 李恒福의 휘하에서 「左傳」, 「國語」, 「史記」 등의 책을 섭렵하다. 宣祖가 본도 및 호종 신하들을 위로하기 위해 의주에서 시행한 武科에 丙科로 합격하다.
    2023-07-13 | NO.214
  • 권율의 행주 승첩(幸州勝捷) -연려실기술 제16권 /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권율의 행주 승첩(幸州勝捷), 정담(鄭湛)의 웅령전사(熊嶺戰死)붙임. 권율(權慄)ㆍ황진(黃進)의 이티[梨峙]승첩 붙임. -연려실기술 제16권 /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처음에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이 용인(龍仁)에서 돌아와 고을 안의 젊은 사람들 5백여 명을 모으고 이웃 고을에 격서를 보내어 천여명을 모았다. 전라 감사 이광은 권율이 군사를 일으킨다는 소문을 듣고 권율을 전라도 도절제사(全羅道都節制使)라고 일컫고, 각 고을을 독려하여 적군이 달려드는 것을 막게 하였다.○ 7월에 적이 금산(錦山)에서 웅티(熊峙)를 넘어 전주 땅으로 들어오려고 하므로 권율이 도복병장(都伏兵將) 나주 판관(羅州判官) 이복남(李福男)과 의병장(義兵將) 황박(黃璞)ㆍ김제 군수(金堤郡守) 정담(鄭湛) 등을 보내어 험난한 곳에 웅거하여 적을 맞아 쳐서 막게 하였더니, 이광(李洸)이 군사를 보내어 싸움을 돕게 하였다. 복남은 산봉우리의 중턱에 진을 치고, 황박은 그 위를 지키고, 정담은 그 아래를 지키고 있었다. 8일 새벽에 왜적 수천 명이 칼을 휘두르며 정면으로 덤벼들어 총탄이 비오듯 하였으나 복남 등이 죽음을 무릅쓰고 앞장을 서니 군사들이 모두 죽기로 싸웠다.적병이 조금 물러서더니 적의 대군(大軍)이 해 뜰 무렵에 다시 오는데 산골짜기에 가득하였다. 적이 육박하여 재에 올라오며 패를 나누어 교대로 싸우므로 복남 등이 적의 일진(一陣)을 무찔러 싸웠으나 결국 당해내지 못하고 퇴각하였고, 박의 군사도 힘이 다하여 무너져 나주 군사의 진으로 들어갔다. 적이 기세를 올리며 재에 오르니 나주 군사의 진 또한 무너지고 말았다. 정담은 처음부터 힘을 다해 싸우면서 붉은 기 아래 백마를 타고 있는 적병의 장수를 쏘아 죽이니 적이 바람 앞에 풀 쓰러지듯 물러갔다.그러나 이제는 정담이 고립된 군사로서 포위당하자 부하 장수들이 담에게 군진을 후퇴시키기를 권하였으나 담은 말하기를, “차라리 적병 한 놈을 더 죽이고 죽을지언정 한 걸음 물러나 살아서 적으로 하여금 전진하게 할 수는 없다.” 하고 꿋꿋이 서서 적을 쏘는데 시위소리와 함께 적은 모두 거꾸러졌다. 육박전으로 드디어 죽었으며 종사관 이봉(李葑)도 전사하였다. 복남 등이 물러나와 안덕원(安德院)에 진치니 적이 우리 측에 방비가 있음을 알고 감히 재를 넘지 못하고 멈추었다.담이 처음에 이광을 따라 공산(公山)으로부터 파군(罷軍)하고 돌아와서는 분하고 한스럽게 생각하여 사람을 대하면 반드시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항상 부하 장수들에게 말하기를, “나물 한 가지 밥 한알, 그 어느 것인들 임금이 주시지 않은 것이겠는가. 임금께서는 지금 왕성을 떠나 피난하고 계시는데 오직 나와 너만이 차마 어찌, 편안하게 이 찬(饌)을 먹을 수 있으랴.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면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하고 목이 메어 자신을 억제치 못하였다.군사를 일으키던 날에는 희생(犧牲)을 죽여서 사사(社祠)에 제사하고, 맹세를 고유하고 떠났으며 이에 이르러 고을 사람들이 쌓여 있는 해골 속에서 시체를 찾다가 꿰맨 옷 속에서 성명을 써놓은 것을 발견하고 그가 평일에 죽기로 결심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고들 하였으며 적도 의롭게 여겨 시체를 모아 큰 무덤을 만들고 돌을 세워, “조선의 충간의담(忠肝義膽)을 조상한다.”고 써놓았다. 조정에서 뒤에 이 사실을 듣고 벼슬을 추증하고 정려하였다. 《계갑록》 《기재잡기》 《일월록》 ○ 그때 모든 군사가 오히려 진을 한군데에 합치고 물러나지 아니 하였더니, 적이 드디어 금산에 주둔하였다. 권율이 군사를 진산(珍山)에 진주시키고 동복 현감(同福縣監) 황진 등과 더불어 험난한 곳에 의거하여 기다리고 있는데 적병 수천여 명이 진산을 불질러 약탈하고 이티[梨峙]로 덤벼들므로 권율 등이, 부장(副將) 위대기(魏大奇)ㆍ공시억(孔時億) 등과 더불어 군사를 독려하여 재에 의거하여 막아 싸우니 적이 낭떠러지로 기어 올라왔다. 이에 황진이 나무에 의지하여 총탄을 막으면서 활을 쏘는데 쏘면 안 맞는 것이 없었다.황진이 탄환에 맞아 다리에 부상하고 조금 물러섰더니 적이 진(陳) 속으로 뛰어 들어, 우리 군사들이 놀라 흩어져 달아나려고 하므로 권율이 물러나는 자를 베어 죽이니 모두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다. 황진도 상처를 붙들고 다시 싸우니 군사들은 모두 한 사람이 백 사람을 당해낼 만큼 용감하게 종일토록 싸웠으므로 적병이 크게 패하여 병기를 다 버리고 달아났다. 이에 수백 명을 목 베니 송장이 더미로 눕고 피가 흘러 시내와 골짜기가 피 비린내로 채워졌다.적중(賊中)에서 조선의 3대 승첩을 말하는데 이티(梨峙)의 승리를 첫째로 쳤다. 논평하는 이가 말하기를, “이 승리가 없었으면 왜적은 반드시 호남 전체를 유린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8월에 권율이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승진하였다가, 승첩의 보고가 들어가자 전라 감사(全羅監司)로 승진되었고, 황진은 익산 군수(益山郡守)로 승진되었다가 또 충청 조방장(忠淸助防將)으로 승진되었다. 이복남(李福男)은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진시켜 운봉(雲峰)의 팔량신성(八良新城)을 지키라고 명하였다.9월에 이광이 붙잡혀 와서 치죄(治罪)를 받게 되니 윤두수(尹斗壽)가 아뢰기를,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이 기개가 있고 도량이 있어서 장수의 재질이 있으니 전라 감사는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됩니다.” 하여 드디어 권율을 감사에 임명했다. 《기재잡기》 ○ 그때 적병이 전주(全州)에 육박하여 성 밖에서 무력을 과시하자 광이 도망쳐 금구(金溝)로 달아나니 여러 군사가 일시에 무너져 흩어졌다. 적병은 우리 군사가 달아나는 것을 보고 저들의 배후를 습격할까 의심하여 그날 밤으로 무주ㆍ금산으로 도망쳐 돌아갔다.○ 권율이 진중에서 감사 임명을 받고 머리를 조아리며 임금이 피난하여 있는 서쪽을 향하여 우니 온 군중이 슬퍼하였다. 권율이 방어사(防禦使)로 하여금 대신 이현(梨峴)을 지키게 하고, 친히 전주(全州)에 이르러 기율(紀律)을 일신(一新)하게 하고, 모든 장수를 불러 의논하여 말하기를, “지금 평양 이남이 모두 적의 진지(陣地)가 되어 버렸지만 경성(京城)은 근본이 되는 곳이니 먼저 경성을 수복하여야 한다.” 하고 군사 2만 명을 일으켜 북으로 올라갔다.○ 전라 감사 권율이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임금을 도우려 오니 각지의 수령장수들과 승장(僧將) 처영(處英) 등이 따랐다.○ 10월에 체찰사(軆察使) 정철(鄭澈)이 아산(牙山)에 배를 정박시켰다. 권율이 지나는 길에 가보았더니 철이 권율에게 같이 전라도 지역을 지키자고 하였으나 율이 듣지 아니하고 북으로 나아가 수원(水原)의 독성(禿城)에 진을 치니, 임금이 칼을 풀어 가지고 말을 달려 보내어 권율에게 주며 이르기를, “모든 장수 중에 명령을 듣지 않는 자가 있거든 이 칼로 처단하라.” 하였다. 그때 서울에 있던 적병이 호남(湖南)의 군사가 또 왔다는 말을 듣고 군사 수만을 출동시켜 길을 나누어 쳐들어 왔다.이에 권율이 성벽을 굳게 지키고 움직이지 아니하니 적이 세 개의 진채(陳寨)를 오산(烏山) 등지에 만들어 놓고 날마다 와서 싸움을 돋우었으나 응하지 아니하고 이따금 기습병(奇襲兵)을 내보내어 적병을 베어 죽이고 적의 영채(營寨)를 불사르곤 하니 적이 도로 서울로 돌아갔다. 바야흐로 적이 쳐들어 오려 할 때 권율이 날마다 체찰사(軆察使)에게 보고하면서 구원병(救援兵)을 청하니 정철이 전라 도사(全羅都使) 등에게 급히 기별을 보내어, 성화(星火)같이 군사를 전진시켜 수원성(水原城)의 위급을 구(救)하였고, 도사(都事) 최철견(崔鐵堅)ㆍ변사정(邊士貞)ㆍ임희진(任希進) 등의 의병(義兵)도 달려와 원조하였다.○ 12월에 권율이 장계를 올렸는데, “체찰사 정철이 신에게 명하기를, ‘신에게 호남의 도적을 방어하도록 명하고, 근왕은 다른 장수를 시켜 올려보내겠다.’고 하였으나 신이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수원에 이르렀더니 군사들의 마음이 호남을 지키라는 체찰사(정철)의 말을 기쁘게 생각하고 호남으로 도망간 자가 천여 명이나 됩니다.” 하였다.이에 임금이 크게 화를 내니 유영길(柳永吉)이 아뢰기를, “정철은 술에 빠져 정신이 흐리멍텅하여 기밀 사무에 어두워서 임금의 세력이 고립되고, 공론(公論)이 행하여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윤두수는 나라를 회복시킬 만한 재주가 없고 지공무사(至公無私)하지 못하여 하는 일이 마침내 실적이 없게 되었습니다. ……” 하였다. 《일월록》 ○ 계사년 2월 권율이 수원(水原)에서 고양(高陽)의 행주산성(幸州山城)으로 나아가 주둔하였는데, 군사를 나누어 4천여 명을 병사(兵使) 선거이(宣居怡)에게 주어 금천(衿川)에 머물며 성원하게 하고, 권율 자신은 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양천강(楊川江)을 건너서 행주(幸州)에 진을 쳤다. 한편 창의사(倡義使) 김천일은 강화로부터 나와 해안에 진을 치고, 충청 감사(忠淸監司) 허욱(許頊)은 통진(通津)에 진을 치고, 충청 수사(忠淸水使) 정걸(丁傑) 또한 응원하기로 하였다. 그때 서북(西北)에 있던 왜적이 모두 경성에 모여 있어서 기세가 더욱 치열하였는데 전라도의 군사가 강을 건너왔다는 말을 듣고 길을 나누어서 나오는데 그 수효를 셀 수 없었다.적장 평수가(平秀家)는 우리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발끝으로 차서 거꾸러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12일 새벽에 우리 척후 장교가, 적이 좌ㆍ우익(左右翼)으로 나뉘어 붉은 기와 흰 기를 들고 온다고 보고하니 권율이 모든 군사에게 현혹(眩惑)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니 우리 진영에서 5리쯤 떨어진 곳에 적이 이미 가득 차 있었다. 이에 곧 모든 장수와 더불어 의논하기를, “고립된 군사가 깊이 들어와서 갑자기 적병을 만나니 세력이 서로 대적할 수 없다.만약 한 목숨을 버리지 않으면 나라에 보답할 길이 없다.” 하고, 모든 장수에게 타일러서 대오(大悟)를 엄중히 단속하여 활을 버티고 기다리는데, 적의 선봉(先鋒)인 기병(騎兵) 백여 명이 먼저 와서 시위(示威)를 하더니 금방 대군 수만 명이 들을 덮고 우리 진영을 포위하였다. 이에 군사를 세 패로 나누어 쉬어가면서 교대로 달려드니 고함 소리는 땅을 흔들고 포탄이 비오듯 하였으나 우리 군사는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으며, 권율은 몸소 물과 미음을 가지고 돌아다니면서 군사들의 갈증을 풀어 주었다.묘시(卯時)에서부터 유시(酉時)에 이르기까지에 적병은 세 번 달려들었다가 세 번 퇴각하였는데 번번이 적이 불리하니 적이 드디어 갈대를 가지고 바람 부는 방향을 따라 불을 놓아 우리 성책(城柵)을 태우려 하므로 성안에서는 물을 끼얹어 꺼버렸다. 처음 승병(僧兵)에게 서북면(西北面)을 지키게 하였는데 적의 군사가 크게 고함지르며 돌격하여 오자 승병이 무너져 내성(內城)으로 들어오므로 권율이 칼을 빼들고 독전(督戰)하니 모든 장수가 칼날을 무릅쓰고 육박전을 하였다. 이에 적군이 크게 패하여, 드디어 시체를 네 무더기로 쌓고 불태우니 냄새가 10리에 퍼졌다.적병이 물러가자 우리 군사가 그 나머지를 수습(收拾)하여 1백 30여 명을 베고 군용 자재를 무수하게 얻었다. 《일월록》ㆍ《권원수유사(權元帥遺事)》 《자해필담(紫海筆談)》에, “날이 저물 무렵에 일본장수 평수가(平秀家)가 유시(流矢)에 맞아 드디어 병갑(兵甲)을 거두어 가지고 달아나니 행주(幸州)로부터 서울에 이르는 길에는 거꾸러진 시체가 서로 이어졌다.”고 하였다. 한창 싸우고 있을 때 화살이 거의 다하여 군중(軍中)이 바야흐로 위태로웠는데 정걸(丁傑)이 두 척의 배로 화살을 싣고 와서 바다 쪽에서 들여보냈으므로 계속하여 사용할 수가 있었다.○ 어떤 이는 전해 말하기를, “권율도 또한 겁내고 미혹(迷惑)하여 스스로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그의 형 전(悛)이 와서 보고, ‘이것은 해내기 쉬운 일이다. 내가 전쟁하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 하고 율을 대신하여 지휘하니, 율은 머리에 구리솥을 덮어쓰고 돌아다니며 모든 군사들을 타이르다가 총소리가 조금 그치면 즉시 구리솥을 벗어서 물을 담아 가지고 싸우는 군사의 입에 대어 주었으니 전(悛)의 공도 또한 많다.”고 한다.○ 그때 이여송이 개성에 주둔하였고, 선봉(先鋒) 사대수(査大受)는 행주 승첩의 기별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싸움한 곳을 시찰하고 또 수일 후에는 권율을 청하여 서로 만나보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권장군의 진은 다른 군사들과는 유별나게 다르다. 외국에 이러한 참다운 장수가 있었구나.” 하고 군사를 임진(臨津)으로 이동시켜 이빈(李薲)과 합력하여 파주산성(坡州山城)을 지키기로 하였다. 승첩의 보고가 행재소에 올라가자 권율에게는 자헌대부(資憲大夫), 조경에게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중 처영에게는 절충장군(折衝將軍)을 가자(加資)하고 모든 장사(將士)에게 상과 벼슬을 주었는데 등차(等差)가 있었다.○ 권율이 일찍이 말하기를, “세상에서는 행주의 싸움에 공(功)이 있다고들 하지만 실상은 이티[梨峙] ‘이티[梨峙]’를 본래 ‘웅티[熊峙]’라고 썼으나 아마 이(梨)자의 잘못일 것이다. 의 싸움이 제일 중요한 것이었고 그 다음이 행주싸움이다. 대개 이티의 싸움 전쟁의 시초부터 적의 기세는 한창 날카로운데 우리 군사는 외롭고 약할 뿐만 아니라, 또 건장한 군사도 없었으므로 군사들의 마음이 흉흉(洶洶)하여 이긴다고 믿기 어려웠으나 드디어 능히 있는 힘을 다하여 죽음으로서 싸웠기 때문에 천 명도 되지 않는 약한 군사를 가지고 10배나 되는 사나운 적병을 당해내고 마침내 호남을 보전하여 국가의 근본이 되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려웠다고 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때는 서쪽 길은 막혀 끊어졌고 본도(本道)가 무너져 이산(離散)하였기 때문에 내가 비록 공이 있어도 드러내어 칭찬하는 사람이 없었으나, 행주의 싸움은 내가 이티에서 공을 세운 뒤에 있었고, 권력과 지위가 벌써 무거웠기 때문에 군사의 마음들이 이미 내게 돌아온데다가, 호남의 정맹(精猛)한 장졸들이 다 내 수하(手下)에 예속해 있을 뿐만 아니라 군사의 수효도 수천 명을 넘었고 지리(地利)도 또한 험하여서 적병의 수가 비록 배나 되었지마는, 그 기세가 이미 쇠약해 있었으므로 공(功)을 세우기 쉬웠던 것이며, 바로 명 나라 군사가 위압(威壓)해 있고 각도의 근왕하는 군사들이 경기내에 바둑돌처럼 깔려 있었으나, 나의 행주 싸움의 성공이 때마침 모든 군진보다 먼저 있었기 때문에 그 공이 드러나기가 쉬웠던 것이다.” 하였다. 《백사집》 ○ 조경(趙儆)이 권율의 중군장(中軍將)으로서 밤에 강을 건너가서 먼저 지형을 살피다가 군사를 주둔시킬 만한 높은 언덕을 발견하니 그것이 즉 행주였다. 권율이 말하기를, “명 나라의 군사가 많이 왔으니 적병이 필시 감히 나오지 못할 것이다. 반드시 성책(城柵)을 만들어야 할 필요는 없다.” 하니 경이, “외로운 군사로서 큰 적과 가까이 있으니 성책이 없을 수 없다.” 하였으나 율이 듣지 아니하였다. 마침 그때 체찰사(軆察使)가 양주(楊州)에 있으면서 율을 불러다가 일을 의논하는 동안에 경이 모든 군사를 시켜 이틀 동안에 성책을 완성한 후에, 율이 돌아왔고, 목책(木柵)을 만든 지 사흘만에 적의 대군이 쳐들어 왔다.이에 정오(正午)가 지나도록 힘껏 싸우니, 적병은 드디어 긴 나무[長木]를 가져다가 다락같은 모양의 높다란 가마[轎]를 만들어서, 그 위에 총수(銃手) 수십 명을 싣고 수백 명이 메어 올려 우리 진영 안을 사격하므로 조경이 지자포(地字砲)를 가져오게 하여, 큰 칼 두 개를 포(砲) 앞에 매어달고 적의 가마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려 포를 쏘니, 지나간 곳마다 천둥ㆍ벼락을 맞은 것 같아서 가마는 모두 부숴지고 가마 위에 있던 적병은 몸뚱이와 팔ㆍ다리가 흩어져 날아가 떨어졌으므로 적병이 감히 다시 진격하지 못하였다.이 싸움에서 적병은 죽은 자가 거의 반이나 되었다. 권율과 모든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오늘의 승리는 모두 공(公 조경)의 힘이요.” 하였음을 대개 그가 목책을 설치한 것을 말한 것이었다. 풍양군(豐壤君) 조경(趙儆)의 비(碑) ○ 권율(權慄)은 자는 언신(彦愼)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요, 영상 철(轍)의 아들이다. 임오년 46세 때 명경과(明經科)에 합격하고 계사년에 도원수(都元帥)가 되었으며 벼슬이 호조 판서에 이르렀다. 기해년에 죽으니 나이가 63세였다. 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책훈(策勳)되고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을 봉하고 영의정을 추증(追贈)하였다.○ 신묘년 9월, 의주 목사(義州牧使)가 결원되었을 때 조정에서 공을 천거하여 낭료(郞僚)호조 정랑 에서 발탁되어 정규의 승진 순서를 뛰어 임명되니 그때의 세론(世論)이 영예스럽다고 하였다. 임진년 봄에 북경으로 간 역관이 유언비어를 중국에 퍼뜨려 요동(遼東) 지방을 놀라 떨게 하였다는 말이 있으므로 이들을 옥에 내려 국문하였는데 공도 그들의 공사(供辭)에 관련되어 옥에 갇혔다. 4월에 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들으니 권율이라는 쓸 만한 재질이 있다는데 지금 어디에 있는가. 호남이나 영남의 거진(巨鎭)을 맡겨 시험해 보겠다.” 하고, 즉시 광주 목사(光州牧使)에 임명하였다. 그때 그의 사위 이항복(李恒福)이 승정원(承政院)에 당직하고 있었는데 공(公)이 가서 작별하니 항복이 말하기를, “왜 그렇게 급히 가십니까?” 하자 율이, “국가의 일이 급하니 이때야말로 신하로서 죽음을 바쳐야 할 때이다. 어찌 감히 잠시 동안인들 지체하여 아녀자(兒女子)의 슬피 우는 꼴을 흉내낼 것인가?” 하였다. 그때는 평화가 오랫 동안 계속되다가 갑자기 왜병이 온다는 기별을 들었기 때문에, 조신들은 호남과 영남은 죽으러 가는 곳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권율은 말과 기색이 강개(慷慨)하니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여 마지않았다.전라 감사 이광(李洸)이 공을 중위장(中衛將)으로 삼아 선봉으로 하였더니, 혹 공이 문인으로서 군대의 선봉이 된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이가 있으면 공은 웃으며 말하기를, “이것이 나의 직분이다.” 하였다. 백사가 가려 뽑은 유사 ○ 송응창(宋應昌)이 본국에서 자문(咨文)을 보냈는데 그 대략에, “왜놈들이 당신네 나라를 쳐부수고 함락시켜 조선에는 충성스러운 사람이 없다고 말할 수 있었는데, 홀로 권모만은 고립된 성을 굳게 지켜서 많은 군사를 불러모아 자주 기묘한 꾀를 내고 때로는 큰 부대의 적을 대항하였다. 요사이는 다시 부대에 모래를 넣어 군량을 가장하여 왜놈이 와서 약탈하도록 유인하여 놓고는 습격하여 죽였으니, 이 사람이야말로 나라가 어지러운 때에야 알아볼 수 있는 충신이요, 중흥의 명장이라 하겠습니다. 인하여 붉은 비단 네 필과 백은(白銀) 50냥(兩)을 상으로 주어 충용(忠勇)을 권장하십시오.” 하였다. 백사가 가려 뽑은 유사 ○ 명 나라 조정의 대소 문무관(大小文武官)들은 공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반드시, “이 이가 전일 행주에서 승첩한 이가 아닌가.” 하였으며 왜놈의 추장(酋長)도 반드시 권 원수의 동정을 물었다고 한다. 《일월록》 ○석성(石星)이 사신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의 모든 신하 가운데 만약 권율과 같은 자가 두어 사람만 있다면 내가 무엇을 근심하겠는가.” 하였다. ○ 유사(遺事) ○ 한 무관(武官)이 싸움터에 나가는 것을 싫어하여 달아나 전주(全州)에 숨어 있으면서 스스로 명 나라 장수에게 의탁하여 공이 여러 번 전주에 공문을 보내어 잡아 보내라고 하였으나 전주의 관리가 명 나라 장수를 두려워하여 감히 잡지 못하였는데 을미년에 공이 순시하다가 전주에 이르러 베어 죽였다. 얼마 안 되어 정승[國相]이 남방에 군사 시찰을 갔는데 처형된 무관의 집 사람들이 공을 무고하여 마침내 파면되니 공은 웃으며 말하기를, “대장된 지 3년에 한 사람의 도망병을 벤 것이 파면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하였다. 유사 ○ 병신년에 적병이 오래도록 물러가지 않으므로 조정(朝廷)에서 한창 원수(元帥)의 임명을 의논하는데 임금이 묻기를, “누가 원수가 될 만한 사람인가?” 하니, 좌우에 있던 신하들이 다른 사람을 가지고 대답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어찌 권율을 원수로 삼지 않으랴.” 하고 특히 도원수(都元帥)에 임명하였다. 이에 공이 즉시 숙배(肅拜)하고 하직을 아뢰니 특히 내구(內廐)의 말을 하사하였다. 《조야첨재》 ○ 명 나라의 장수들이 네 길로 나누어 진군하려 할 때, 유정(劉綎)과 마귀(麻貴)에게 권 원수(權元帥)가 협력하여 따라와 주기를 요망하자 두 사람이 다투기를 마지 아니하여 임금이 마침내 권율을 유정(劉綎)에게 붙여 주었다. 《조야첨재》 ○ 기해년 가을에 병이 나서 벼슬을 그만두고 강화(江華)의 시골집으로 돌아왔는데 병이 위독해지자 배를 타고 서울로 들어가 7월 6일에 우거(寓居)하던 집에서 죽으니 나이가 63세였다. 특별히 좌찬성을 추증하였다.○ 권율은 인품이 사람을 거느림에 있어 친화와 사랑으로 성심을 보이고, 엄격하기만을 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즐겨 복종함으로써 위급한 때에 힘입었던 것이다. 《일월록》 공은 조정에 우뚝 서서, 일을 만나면 우레처럼 움직여서 출입하고 변통함에 막힘이 없으면서도 바른 길을 잃지 않는 권태사(權太師 권율의 조상)의 유풍과, 바라보면 의젓하고 가까이 가면 따사로워 친화로서 사람을 대하여 충심으로 심복하게 만드는 권양촌(權陽村 권율의 조상, 이름은 근(近))의 미행(美行)과, 높고 큰 띠로 풍채와 용의(容儀)를 의젓이 바로 가지며 일에 당하여서는 곧고 꿋꿋하나 질박하여 까다롭지 않은 그의 아버지인 영의정 권철의 국량이 있었다. 공은 이 세 가지를 겸하여 가졌으되 공훈과 충렬(忠烈)은 이 세 사람보다 더하였다.○ 허 균(許筠)이 공의 제문을 지었는데, “원공(元公 영의정)의 증직은 그 아버지의 정승을 이었음이요, 길창(吉昌)부원군으로 한 것은 문충(文忠 권근)의 봉군을 승습(承襲)한 것이다.”는 구절이 있었는데 공의 사위 이항복(李恒福)이 잘 지었다고 극구 칭찬하였다.
    2020-09-24 | NO.213
  • 권지학유 고공(고인후)의 시호를 청하는 행장 -문곡집
    권지학유 고공의 시호를 청하는 행장〔權知學諭高公請諡行狀〕 -문곡집 제22권 / 행장(行狀) : 김수항(金壽恒, 1629~1689)본관은 전라도 장흥부(長興府)이다. 증조는 휘(諱) 운(雲)으로,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형조 좌랑(刑曹佐郞)을 지냈으며,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추증되었다. 할아버지는 휘 맹영(孟英)으로, 문과에 급제하고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을 지냈으며,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에 추증되었다. 아버지는 휘 경명(敬命)으로, 호(號)는 제봉(霽峯)이다.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공조 참의(工曹參議)와 지제교(知製敎)를 지냈으며,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공은 휘 인후(因厚)로, 자(字)는 선건(善建)이고, 자호(自號)는 학봉(鶴峯)이다.고씨(高氏)는 본래 탐라(耽羅)에서 나왔는데, 공의 선대가 장흥(長興)을 본적으로 하사받아 마침내 장흥 사람이 되었다. 충렬공은 일찍이 문장으로써 세상에 명성을 떨쳤고 화현직(華顯職)을 두루 거쳤는데 중간에 연좌되어 파출되고 당시 등용에 좌절되었지만 끝내 충절(忠節)로써 크게 드러났다. 울산 김씨(蔚山金氏)에게 장가들었으니, 부제학(副提學) 김백균(金百鈞)의 딸이며, 장부(丈夫)인 아들 여섯을 두었다. 공은 그 가운데 둘째로, 가정(嘉靖) 신유년(1561, 명종16)에 태어났다.태어나면서 민첩하고 총명함이 남들보다 뛰어났다. 3세에 글자를 알았고, 6세에 처음 학문을 배웠는데 스승을 번거롭게 하지 않으면서 일취월장하였다. 또 뜻이 고상하고 원대하여 여러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놀 때 사상견례(士相見禮)를 설행했는데 읍양(揖讓)하고 주선(周旋)하는 것이 엄숙하게 법도에 들어맞았으니, 장로들이 보고서 남다르게 여겼다. 성장해서는 아버지에게 가르침을 받고 지조와 행실에 독실하게 힘썼다. 장가들고 나서 처가가 본디 재산이 넉넉하여 공을 매우 후하게 대접했는데, 공은 화려하고 사치스런 의복이나 일용품을 일체 거절하고 검소함으로써 자신을 신칙하며, 밤낮없이 오직 경서(經書)와 사서(史書)에만 부지런히 힘을 다하였다.정축년(1577, 선조10)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는데, 당시 나이가 겨우 17세였다. 기축년(1589)에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의 의논이 공의 문학으로는 한원(翰苑 예문관)이나 호당(湖堂)에 두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니 앞다투어 천거하고자 하였다. 당시 충렬공이 요직에 있는 자에게 꺼림을 당했는데, 이로 인해 아울러 공까지 배척하여 성균관 권지학유(成均館權知學諭)로 축출해서 보임하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하였다.임진년(1592)에 왜구(倭寇)가 대거 침입하자 여러 고을이 와해되어 왜적들이 마침내 멀리 북쪽까지 쳐들어가는데도 그 칼날에 맞서는 자가 없었다. 당시 호남(湖南)의 관찰사(이광(李洸))는 변고를 듣고 위축되어 근왕(勤王)할 뜻이 전혀 없었는데, 충렬공은 공의 형제와 함께 바야흐로 광주(光州)의 고향에 은거하고 있다가 의병을 일으켜 달려가 국난을 구하기로 의논하였다. 관찰사가 조정의 명령을 받아 비로소 군대를 거느리고 행차가 금강(錦江)에 이르렀는데, 어가(御駕)가 서쪽으로 거둥했으며 경성(京城) 또한 사수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급작스럽게 진(陣)을 해산시키고 돌아가자, 온 도내의 인심이 더욱 흉흉한 채 안정되지 못하였다. 급기야 재차 병사를 징발하자, 사람들이 모두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곳곳마다 도망쳐 숨어 버렸다.충렬공이 박광옥(朴光玉)과 함께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효유하여 본주(本州 광주)의 흩어진 병졸들을 수습하고, 공과 공의 백씨(伯氏) 임피공(臨陂公 고종후(高從厚))에게 군대를 나눈 다음 수원(水原)에 이르러 목사(牧使) 권율(權慄)에게 군대를 넘겨주도록 했다. 이어 서쪽의 행재소로 달려가려 했으나 길이 막혀 나아갈 수가 없었다. 돌아와 담양(潭陽)에 이르니, 충렬공이 이미 의병의 깃발을 세워 대장이 되었다. 공이 임피공과 실로 충렬공을 따랐다.장차 완산(完山 전주(全州))으로 군대를 옮기려 할 적에 한 사인(士人)이 “내게 늙은 어머님이 계시니 돌아가 어머님을 뵙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뒤따라 계원장(繼援將)에 소속되고자 합니다.”라고 청하자, 공이 분개하여 “저 사람은 참형(斬刑)에 처해야 옳다. 사람들 모두 떠나려고 한다면 어떻게 군대를 유지하겠는가.”라고 하니, 군중(軍中)이 두려워하였다. 완산에 주둔할 적에 충렬공이 공에게 휘하의 용맹한 군사들을 거느리고 진안(鎭安)과 무주(茂朱)의 경계에 매복한 다음 영남(嶺南) 쪽 왜적들의 침범을 막게 했는데, 얼마 뒤에 왜적들이 무주에서 다시 영남으로 향하였다.충렬공이 비로소 병사들을 정비하여 북상할 계획을 세우고 여산(礪山)으로 나아가 주둔하며 이에 여러 도에 격문을 보내 관서(關西 평안도)에 이르게 하였다. 호서(湖西)의 경계에 다다랐을 때 또 황간(黃澗)과 영동(永同)의 왜적들이 금산으로 넘어 쳐들어왔는데 기세가 더욱 사나워 완산이 머지않아 위급해지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자 충렬공이 휘하 여러 사람들과 상의하여 먼저 금산의 왜적들을 공격해서 본도(本道)를 구하고자 마침내 병사들을 진산(珍山)으로 이동시켰다.전사 가운데 모집에 응한 자들이 점점 많아져 이에 장수와 병졸들을 부대로 나누었다. 공을 선봉으로 삼아 금산에 이르러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과 영(營)을 나누어 좌우익(左右翼)으로 만들었다. 의병이 먼저 전투를 독려하여 적병을 토성으로 몰아넣고 사방에서 공격하며 에워싸자 왜적들이 많이 죽거나 다쳐 감히 밖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마침 날이 저물고 관군이 또 기꺼이 전투를 돕지 않았기에 바로 군대를 퇴각시켜 진(陣)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의병과 방어군(防禦軍)이 함께 전투에 나가 미처 교전하지도 못했는데 왜적들이 성벽을 뚫고 나와 먼저 관군을 공격하자, 방어사의 여러 군사들이 멀리서 이 광경을 바라보다 먼저 궤멸되었고, 의병 또한 따라서 궤멸되었으며, 충렬공은 왜적의 칼에 맞아 죽고 말았다.공은 항상 선두에 있으면서 무사(武士)들을 이끌고 격려했는데, 군사들이 궤멸되자 말에서 내려 부대의 대오를 정리하고 다시 전투를 하려다가 결국 진중(陣中)에서 죽고 말았으니, 바로 이해 7월 10일이었다. 남쪽 백성들 가운데 이 소식을 듣고 목 놓아 울며 서로 조문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임피공이 승려들에게 청하여 공의 시신을 찾아 염(殮)했는데, 죽은 지 이미 40여 일이 지났는데도 낯빛이 산 사람 같았다. 모년(某年) 모월(某月) 모일(某日)에 창평현(昌平縣) 수곡리(壽谷里) 모향(某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처음에 선조(宣祖)께서 공(公)의 부자가 전몰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매우 슬퍼하며 공을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추증하라는 명을 내렸고, 을미년(1595, 선조28)에 또 유사(有司)에게 정문(旌門)을 내리라는 명을 내렸다. 신축년(1601)에 또 고을 사람들이 청을 올렸기 때문에 사당을 세워 충렬공을 제사 지내고 공을 배향하도록 명한 다음 포충(褒忠)이라고 사액(賜額)하였다. 임피공은 상차(喪次)에서 의병을 일으켜 복수하다가 정유년(1597)에 진주성(晉州城)이 함락되자 강물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공의 누이동생과 사촌 누이동생 또한 왜적을 꾸짖은 다음 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충렬공의 서제(庶弟)인 경형(敬兄) 또한 임피공과 함께 죽었다. 세상에서 부자간의 의로운 죽음을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제갈첨(諸葛瞻)과 변 성양(卞成陽)을 말하는데, 공과 같은 경우는 한집안에서 5, 6명이 앞뒤로 목숨을 바치고 부자와 형제가 모두 충효(忠孝)와 의열(義烈)로써 세상에 드러났으니, 어찌 고금(古今)에 보기 드문 일이 아니겠는가.공의 부인은 이 부인(李夫人)으로, 감사(監司) 이경(李璥)의 딸이다. 4남 1녀를 두었으니, 큰아들은 부림(傅霖)이고, 그 다음은 부천(傅川)으로 문과에 급제했으며 장령(掌令)을 지냈다. 그 다음은 부즙(傅楫)으로 생원(生員)이며, 그 다음은 부량(傅良)으로 진사(進士)이다. 딸은 오희일(吳希一)에게 시집갔다. 첩은 아들이 1명으로 부매(傅梅)이며, 3녀 가운데 큰딸은 금계군(錦溪君) 박동량(朴東亮)의 첩이 되었고, 그 다음은 참봉(參奉) 장응붕(張應鵬)에게 시집갔고, 그 다음은 참의(參議) 유성증(兪省曾)의 첩이 되었다. 내외 손과 증손이 수십 명이다.공은 타고난 자질이 빼어나고 깨끗하며, 의지와 기개가 강개하여 세상의 영욕(榮辱)과 이해(利害)의 득실에 대해서는 욕심이 없어 조금도 그 마음을 동요시키는 것이 없었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충렬공을 섬길 적에 옆에서 부지런히 시중들었으니, 사랑과 공경이 모두 극진하였다.충렬공이 군(郡)에 부임했을 적에 공이 잠시 가서 뵈었는데 이 부인이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충렬공이 공을 바로 돌려보내려 하지 않고 공도 감히 굳이 청하지 못하고 있는데 갑작스레 재차 급보(急報)가 있었다. 충렬공이 그제야 서둘러 공을 돌려보냈지만 병은 이미 어찌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 부인이 임종할 적에 여러 어린 자식들을 부탁하자, 공이 애통해하며 “마땅히 아이들을 위한 작은 계책으로 다시는 아내를 두지 않겠소.”라고 하였다. 상기(喪期)를 마치고 나서 충렬공이 다시 장가를 들이려 했지만 공이 이러한 자신의 뜻을 말씀드렸기 때문에 충렬공 또한 강요하지 않았다.소싯적에 정시(庭試)를 보러 들어가 시제(試製)를 보니 바로 공이 이전에 사사로이 지었던 것이어서 꺼려져 선뜻 써서 바치지 못하고 있는데, 친한 벗이 강력히 권하자, 공이 “선비의 입신(立身)은 구차해서는 안 되네.”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다시 자기가 그 글을 사용하기를 청하자 또한 허락하지 않았다. 마침내 다시 다른 글을 구상하여 쓰기를 겨우 끝냈는데 정해진 시간이 이미 지나 버렸다. 권세 있는 집안의 자제가 공이 지은 글이 뛰어나게 아름다운 것을 보고 매우 안타까워하며 곡진히 공의 처지를 위하고자 하여 여러 번 말을 했지만 공이 끝내 듣지 않고 오히려 시권(試券)을 접어 소매에 넣은 다음 나와 버리자, 사람들이 모두 혀를 차며 칭찬하고 감탄하였다.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억력이 뛰어나 독서를 할 때는 세 번을 넘기지 않아도 죽을 때까지 잊지 않았으며, 문장을 지으면 글귀가 아름답고 민첩하였다. 임진년(1652, 효종3)에 서간이나 격문 같은 여러 글들은 충렬공이 손수 초안을 잡은 것이 아니면 대부분 공의 형제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임피공이 공이 쓴 격문 중의 말을 거론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하며 “‘저들이 곧 제멋대로 하면 노중련(魯仲連)처럼 바다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다. 지금은 오히려 이렇지만 전단(田單)이 제(齊)나라를 돌이킨 것과 같이 되기를 기대한다.’라고 하였으니, 이를 가지고 미루어 보면 또한 그 마음가짐을 징험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군중(軍中)에 있을 적에 공은 보잘것없는 일개 서생(書生)으로 활쏘기와 말 타기는 평소 익힌 것이 아니었지만 몸소 전투에 나가 홀로 한 방면을 맡으며 일찍이 두려운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항상 “오늘날의 일이 비록 자신을 죽이고 일족을 모두 죽이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바야흐로 의병을 일으킬 적에 충렬공이 스스로 옷 위에 성명(姓名)을 적고 공 또한 똑같이 했는데, 이로써 훗날 시신을 찾는 데 증거가 되었으니, 공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한 뜻이 이미 처음에 결정되었음을 여기에서 알 수가 있다.아! 공이 재주와 행실로 이미 과거에 급제하고 조정에 출사했으니, 만약 때를 타서 포부를 펼쳤다면 경악(經幄 경연(慶筵))과 사원(詞苑 예문관(藝文館))이 어찌 합당하지 않았겠으며, 세상에 끼친 그 명성과 업적이 필시 당대의 여러 이름난 공들보다 못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도리어 시론(時論)에 곤액을 당하여 논사(論思)하고 찬술(撰述)하는 자리에서 한번도 포부를 펼치지 못하고 마침내 나라가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들판에서 시신이 되어 자신의 불행을 나라의 영광으로 만들었으니, 슬프도다.인조(仁祖)조에 아들 부천이 원종훈(原從勳)에 참여했기 때문에 누차 공을 영의정에 추증하였다. 금상(今上 숙종(肅宗)) 정묘년(1687, 숙종13)에 이르러 호남의 많은 선비들이 대궐문 앞에 엎드려 글을 올려 임피공과 공의 사적을 상세히 진술하며 아울러 시호를 내려 주기를 청하자, 임금이 특별히 허락하여 일을 태상시(太常寺)에 명하였다. 공의 현손(玄孫)인 응익(應翼)이 여러 부형의 요청으로 내게 행장을 지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나는 비록 공의 부자보다 늦게 태어났지만 평소 깊이 사모했기에 이에 감히 비루하고 졸렬함을 헤아리지 않고 삼가 그 가첩(家牒)을 모아 위와 같이 차례대로 엮어 유사(有司)에게 알린다.[주-D001] 중간에 연좌되어 파출되고 : 고경명은 명종 때 홍문관 교리가 되었지만, 아버지 고맹영의 죄에 연좌되어 파출되었다가 선조 때 동래 부사가 되었다. 《국역 선조수정실록 22년 10월 1일》[주-D002] 당시 등용에 좌절되었지만 : 고경명은 동래 부사로 재임 중에 날마다 술을 마시며 직무를 살피지 않는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국역 선조실록 24년 4월 4일》[주-D003] 제갈첨(諸葛瞻)과 변 성양(卞成陽) : 제갈첨(227~263)은 촉한(蜀漢)의 장수로, 제갈량(諸葛亮)의 아들이다. 위(魏)나라가 촉한을 공격할 당시 위나라 장수 등애(鄧艾)와 싸우다 전사했고, 아들 제갈상(諸葛商) 또한 전투 중 전사했다. 《三國志 卷35 蜀書 諸葛亮傳》 변 성양은 진(晉)나라의 변호(卞壺, 281~328)로, 성양(成陽)은 지명이다. 소준(蘇峻)의 반란 때 전사하고, 아들 변진(卞眕)과 변우(卞盱)가 뒤이어 전사했기 때문에 ‘변문충효(卞門忠孝)’의 고사가 전한다. 《晉書 卷70 卞壺列傳》[주-D004] 노중련(魯仲連)처럼 …… 수밖에 : 노중련은 제(齊)나라의 고사(高士)이다. 노중련이 조(趙)나라에 있을 적에 진(秦)나라가 조나라를 포위하면서, 위(魏)나라가 신원연(新垣衍)을 보내 진나라를 천자(天子)로 받들면 살려 주겠다고 하자, 노중련이 진나라는 예(禮)를 버리고 공(功)만을 숭상하기 때문에 진나라를 섬기느니 동해에 빠져 죽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史記 卷83 魯仲連趨陽列傳》[주-D005] 전단(田單)이 …… 것 : 전단은 제나라의 전씨(田氏) 왕족이다. 연(燕)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하여 70여 성을 함락했는데, 전단이 즉묵성(卽墨城)을 지켜내 연나라 군사들을 물리치고 제나라를 수복했다. 《史記 卷82 田單列傳》[주-D006] 금상(今上) …… 명하였다 : 1688년(숙종14) 3월 7일에 호남 유생들이 청을 올려 고인후에게 시호를 내리라는 명이 있었고, 1694년 10월 11일에 고인후에게 의열(毅烈)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국역 숙종실록 14년 3월 7일, 20년 10월 11일》
    2020-12-14 | NO.212
  • 귀락와 서문〔歸樂窩序〕
    귀락와 서문〔歸樂窩序〕  우리 유가(儒家)의 법문(法門)에서는 풀어 놓은 마음을 거두는 것을 지극한 비결로 삼았고, 외전(外傳 《장자(莊子)》)에는 “어려서 고향을 떠났다가 돌아올 줄 모른다.”를 슬퍼할 만한 일로 삼았다. 대개 마음을 풀어 놓고 거두지 않는 것을 ‘상(喪)’이라고 하고, 풀어 놓은 마음을 거두어 돌아오게 하는 것을 ‘귀(歸)’라고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슬퍼할 만한 일은 마음을 풀어 놓는 것보다 심한 것이 없고, 즐거워할 만한 일은 풀어 놓은 마음을 돌아오게 하는 것보다 큰 것이 없다.마음이 만약 자신에게 돌아온다면, 천지 사이의 만물이 그 마음을 동요시킬 수 없다. 위로 이기씨(伊祈氏 요 임금)는 천하를 소유하였지만 관여하지 않았으며, 우순(虞舜 순 임금)은 진의(袗衣)를 입고서 두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을 본래 소유한 듯이 하였다. 아래로 사성(思聖 자사(子思))은 부귀한 곳에 처해서는 부귀한 대로 행하였으며, 추 부자(鄒夫子 맹자)는 경상(卿相)이라는 직책을 주더라도 마음에 동요가 없었으니, 이 모두가 마음을 자신에게 돌아오게 했던 위대한 인물들의 경우이다.이를테면 자방(子房 장량(張良))이 유악(帷幄)에서도 적송자(赤松子)를 흠모한 것, 공명(孔明 제갈량(諸葛亮))이 장상(將相)의 직위에 있으면서도 〈양보음(梁甫吟)〉을 노래한 것, 배중립(裵中立 배도(裴度))이 전쟁터에 나가서는 장수요, 조정에 들어서는 재상의 지위에 있었지만 그 마음만은 녹야(綠野)에 있었다고 한 것, 곽 영공(郭令公 곽자의(郭子儀))이 24차례나 고과(考課)를 주관하였지만 그 마음을 늘 벼슬하지 않는 선비처럼 한 것이 그렇다. 그 즐거울 만한 일 가운데 무엇이 이보다 크겠는가.마음이 만약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는다면 부귀한 곳에 가서는 교만해지고 명리(名利)에 가서는 방일해지니, 내 8척의 작은 육신을 가지고 그 큰 것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항상 발돋움을 해 보려고 하지만 서 있을 수 없고, 항상 넘어가고자 하지만 걸을 수도 없어 천지간에 두려워 몸 둘 바를 모르고 해와 달이 떠올라도 긴 밤처럼 어둡게 느끼니, 이 어찌 매우 슬퍼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슬프기만 하고 즐겁지 않으니 어떻게 평생을 살 수 있겠는가.승지(承旨) 유광천(柳匡天)은 일찍부터 벼슬길에 올라 승정원에서 많은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마침내 ‘귀락(歸樂)’으로써 자신의 집에 편액을 걸었으니 아, 이것이 진정 마음이 돌아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진(晉)나라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천명을 즐기는데 다시 무엇을 의심하랴.〔樂夫天命復奚疑〕”라는 글귀로 끝을 맺고 있으니, 유광천은 과연 천명을 즐기는 사람인가. 애오라지 이 글을 지어 물어본다.존재 위백규 <존재집> 권21 吾儒法門,以收放心爲摯訣,《外傳》以“弱喪不知歸”爲可哀。蓋放而不收則爲喪,收而反之則爲歸。是以人之可哀,莫甚於放,可樂莫大於歸。心苟歸矣,天地間萬物,不能動其心。上焉則伊祈氏有天下而不與,虞舜被袗衣二女婐而若固有之;下焉則思聖素富貴而行富貴,鄒夫子加卿相而不動心,此皆心歸之大者也。乃若子房則赤松於帷幄,孔明則《梁甫》於將相,裴中立出將入相,而其心則綠野也;郭令公二十四考,而其心則布衣也。其爲可樂,孰大於是?心苟不歸,則之富貴而驕之,之名利而溢之,挾吾八尺之軀,不勝其大。恒企而不得立,常跨而不能步,跼蹐於天地,長夜於日月,斯豈非可哀之甚者乎?哀而不樂,何以生百年爲哉?柳匡天承旨早騰雲路,羽儀銀臺,而乃以“歸樂”扁其窩。噫!是眞所謂心歸者歟?晉徵士《歸去來辭》,結之以“樂夫天命復奚疑”,柳子其果樂天者歟?聊爲之說而問之。[주D-001]어려서 …… 모른다 : 어려서 집을 떠나 오래도록 타향에서 편안하게 살다 보니 마침내 고향에 돌아갈 줄도 모르게 된 경우를 말한다. 《장자》 〈제물론(齊物論)〉에 “죽음을 싫어하는 것 역시 어려서 집을 떠나 돌아갈 줄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으랴.〔予惡乎 知惡死之非弱喪而不知歸者邪〕”라고 하였다.[주D-002]이기씨(伊祈氏)는 …… 않았으며 :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나온다.[주D-003]우순(虞舜)은 …… 하였다 :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나온다.[주D-004]사성(思聖)은 …… 행하였으며 :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4장에 “부귀에 처해서는 부귀대로 행하며, 빈천에 처해서는 빈천대로 행하며, 이적(夷狄)에 처해서는 이적대로 행하며, 환난에 처해서는 환난대로 행했다.”라고 하였다.[주D-005]추 부자(鄒夫子)는 …… 없었으니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나온다.[주D-006]자방(子房)이 …… 것 : 《사기》 권55 〈유후세가(留侯世家)〉에 한 고조(漢高祖)가 공신을 봉할 때 “장막 속에서 작전 계획을 세워 천리 밖의 승리를 결정지은 것은 자방의 공이다.”라고 한 말이 있다. 고조 만년에 장량은 인간 세상의 일을 버리고 적송자를 따라 노닐었다고 한다.[주D-007]공명(孔明)이 …… 것 : 〈양보음〉은 촉한(蜀漢)의 승상 제갈량이 출사하기 전 남양(南陽)에서 몸소 농사지을 때 매일 새벽과 저녁에 무릎을 감싸 안은 채 길게 불렀던 노래로, 천하에 뜻을 품은 선비가 울울한 심정을 토로함을 뜻한다. 〈포슬음(抱膝吟)〉이라고도 한다. 《三國志 卷35 諸葛亮傳》[주D-008]배중립(裴中立)이 …… 것 : 배도는 자가 중립(中立)으로, 중국 당(唐)나라 때의 재상이다. 시인 백낙천(白樂天)과 자기의 별장인 녹야당(綠野堂)에서 함께 풍류를 즐긴 인물이다. 《新唐書 卷173 裴度列傳》[주D-009]곽 영공(郭令公)이 …… 것 : 곽자의가 중서령(中書令)을 오래 역임하여 24차례에 걸쳐 관리들의 고과를 주관하였다. 《舊唐書 卷120 郭子儀列傳》[주D-010]유광천(柳匡天) : 1732~? 조선 후기 문신으로 자는 군필(君弼)이고 호는 귀락와(歸樂窩)이다. 1759년(영조35) 별시(別試)에 병과 6위로 합격하였고 관직에 올라 사간원 헌납과 사간원 장령을 거쳐 승지에 이르렀다.
    2020-08-26 | NO.211
  • 금계집 내집 제4권 / 잡저(雜著)-퇴계에게 올린 편지〔上退溪書〕
    금계집 내집 제4권 / 잡저(雜著)-퇴계에게 올린 편지〔上退溪書〕황준량(黃俊良, 1517~1563)한 번 주남(周南)에 누워 지금까지 체류하고 있으며 증세가 더욱 심해져 아직 떠날 날짜를 잡지 못하니 마음이 울울합니다. 사직한 후 공무를 일체 끊고 시골집에서 임시로 거처하고 있으며, 스무날 사이에 출발하려고 하나 몸이 이미 극도로 허약해져서 무사히 돌아가는 것을 보장하기 어려울 듯합니다.소식이 오래 끊어졌었는데 요즘 동정이 어떠하신지요? 아마도 지금쯤 도산(陶山) 주위를 두루 다니면서 매화와 버들을 구경하는 즐거움을 누리시리라 생각하지만, 저는 병상에 누워 부질없이 탄식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또 이곳 서원(書院)의 위차를 정하는 일은, 이미 기문(記文)을 지어주셨으니 시끄러운 논란이 조금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한 차례 위차를 정해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제 병이 깊어 외부의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으니 후임 군자에게 걱정 끼치는 것을 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난달에 우연히 사방의 명유(名儒) 및 오자강(吳子强)이 문병을 왔기에 고을 선비들과 서원에 모여 여러 날 묵었으며, 이때 류 광주(柳光州)도 함께 했습니다. 그때 모두 말하기를, “서원의 위차를 정하지 않고 돌아가면 뒤에 오는 자가 감히 그 가부를 논의할 수 없을 것이고, 또 유생들이 서원에 들어갈 때 마치 탱화가 없는 절과 같아 즐거이 모여 공부하지 않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유생들과 그 가부를 권점(圈點)하니, 한훤당(寒暄堂 김굉필)을 홀로 제향 하여 정위 남향으로 모시려고 하는 것에 대해 모두 찬성하였고, 문충공(文忠公 이인복)을 동쪽 벽에 배향하기를 원하는 자도 1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열공(文烈公)은 손에 염주를 들고 있어서 학궁에 모실 수 없다는 것이, 우리뿐만 아니라 경향 각지의 논의가 이미 정해졌으므로 절대로 다시 논의할 수 없습니다. 손에 염주를 들고 있는 늙은이를 사당에 넣고자 의논한다면 유생들은 차라리 신발을 신고 떠나고 말아 서원 가운데 유생의 자취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의견을 합하여 논의를 결정해야 하는데 유생들의 말도 지나치다고 할 수 없습니다.삼가 생각건대, 선생님께서 지으신 서원 기문은 엄연히 하나의 학문 규범인데, 저로부터 선생님의 가르침을 위반하는 일은 차마 못할 바이고, 이를 고집하며 유생들의 요청을 거절하는 것도 형편상 행하기 어렵습니다. 병으로 지친 마음이 더욱 어지러워 감히 급히 사자(使者)를 보냈습니다. 제 생각에 그 기문은 목사 노경린(盧慶麟)이 급박할 때 나왔고 여러 논의가 분분한 날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아마 다시 요량해야 할 곳이 있을 듯합니다. 십분 타당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고치는 것도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약 이미 정해진 기문이란 핑계로 다시 논의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아마도 중외 유생들의 의혹을 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밝은 가르침을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와병중이라 두서없이 한두 가지 말씀드렸을 뿐 자세히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허둥지둥 대필을 시켜서 더욱 송구스럽습니다. 중간에 두 이씨(李氏)의 후예들도 말하기를, “이씨 두 분을 고을의 현인이라 하여 사당에 들인 것은 퇴계가 결정한 일이고 노 목사(盧牧使)의 본래 뜻이니, 후배 젊은이들이 가볍게 고칠 일이 아니다. 만약 한훤당을 높이 받들고자 한다면 정당(正堂) 북쪽에 따로 세 칸 사당을 짓고 스승을 높이는 곳으로 삼으면 될 것이다.……”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서원 안에서 동쪽에는 향현사(鄕賢祠)를 모시고 북쪽에는 존현사(尊賢祠)를 모시는 일은 형세상 시행할 수 없을 듯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삼가 품의하는 편지를 올립니다.[주-D001] 주남(周南)에 …… 있으며 : 질병 등으로 인하여 지방에 머물러 있게 된 것을 말한다. 주남은 중국의 낙양(洛陽)을 이른 것이다. 한 무제(漢武帝) 때의 태사(太史)인 사마담(司馬談)이 병이 위독하여 주남에 머물러 있다가 한나라 봉선(奉禪)의 일에 참예하지 못하여 울분으로 죽었던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130 太史公自序》[주-D002] 서원(書院) : 1555년(명종10)에 노경린(盧慶麟)이 성주 목사로 부임하여 건립하고 황준량(黃俊良)이 중수한 영봉서원(迎鳳書院)이다.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에 있다. 숙정자(叔程子), 주자(朱子), 김굉필(金宏弼), 이언적(李彦迪), 정구(鄭逑), 장현광(張顯光)의 위패를 모셨다. 정구(鄭逑)가 1568년(선조1) 봄에 퇴계 선생에게 품의(稟議)하여 천곡서원(川谷書院)으로 고쳤다.[주-D003] 기문(記文)을 지어주셨으니 : 1560년(명종15) 7월에 이황이 〈영봉서원기(迎鳳書院記)〉를 지었으며, 《퇴계집》 권42에 실려 있다.[주-D004] 오자강(吳子强) : 오건(吳健, 1521~1574)으로, 자강은 그의 자이다. 본관은 함양(咸陽), 호는 덕계(德溪)이다. 남명 조식이 덕산동(德山洞)에서 강론하자 그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김인후(金麟厚)ㆍ이황(李滉)의 문인이기도 하다.[주-D005] 류 광주(柳光州) : 광주 목사(光州牧使)를 역임한 류경심(柳景深, 1516~1571)을 말한다.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태호(太浩), 호는 구촌(龜村)이다. 1560년 광주 목사가 되었고, 뒤에 호조 참판, 예조 참판, 대사헌, 병조 참판, 평안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문집에 《구촌집》이 있다.[주-D006] 권점(圈點) : 그림이나 글씨 옆에 동그라미를 치며 의견을 표시하는 것이다.[주-D007] 문열공(文烈公)은 …… 있어서 : 문열공은 고려 때 문신 이조년(李兆年, 1269~1343)이며, 고려 시대부터 전해오던 그의 영정 왼손에 염주가 들려 있던 것을 이른 것이다. 이조년의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원로(元老), 호는 매운당(梅雲堂)ㆍ백화헌(百花軒)이다.[주-D008] 노경린(盧慶麟) : 1516~1568. 본관은 곡산(谷山), 자는 인보(仁甫), 호는 사인당(四印堂)이다.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있을 때 영봉서원(迎鳳書院)을 세워 유학(儒學)을 장려하였다.[주-D009] 두 이씨(李氏) : 애초에 노경린이 영봉서원에 제향 하고자 했던 문열공(文烈公) 이조년(李兆年)과 그 장손 이인복(李仁復)이다.
    2023-12-04 | NO.210
  • 기우용 에게 답함 〔答奇羽用 文鉉○辛丑二月〕 - 매산집 제16권
    기우용문현 에게 답함 신축년(1841, 헌종7) 2월〔答奇羽用 文鉉○辛丑二月〕 - 매산집 제16권 / 서(書) :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 1776~1852)학궁(學宮)은 수선(首善)하는 곳이므로 사양함을 예(禮)로 여기는데, 사양함은 나이가 많은 이를 높이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연향(宴享)할 때에 머리 색깔에 따라 자리를 배치하는 것은 나이 순서대로 차례를 정하기 위함이다.〔燕毛所以序齒也〕”라는 것입니다. 살았을 때에 이미 장유(長幼)를 구별하여 좌차(座次)를 정하였다면 죽은 후에도 연수(年數)의 차례대로 자리를 정해야 합니다. 이 때문에 우옹(尤翁)께서도 눌재(訥齋)와 사암(思菴)을 합사(合祀)할 때에 고봉(高峯)에게 고유하는 글에서, “세대의 선후에 따라 눌재 선생을 서쪽 자리에 모시고 사암 선생을 다음 자리에 모시고 고봉 선생을 동쪽 자리에 모십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도(神道)는 오른쪽을 높이기 때문에 서쪽을 상석(上席)으로 삼는 것이니, 세 분의 위차를 이렇게 정한 것은 바로 나이에 따라 차례를 정하는 의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나이에 따라 차례를 정하는 것이 중요한 이상, 본 서원의 빈주(賓主)는 굳이 따질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눌재ㆍ사암 두 현인과 고봉이 나이에 선후가 있기 때문에 고봉의 위패를 두 현인의 아래에 모시는 것이라면 고봉의 위상에 있어서 조금도 격하될 것이 없습니다. 만약 고봉의 위패를 두 현인의 위에 모신다면 고봉이 제향을 받을 때에 편안하지 못할 듯하니, 신도(神道)와 인정(人情)으로 볼 때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할 것입니다. 《송자대전(宋子大全)》에 실려 있는 춘향(春享)과 추향(秋享)의 축문에서 그 차례를 고봉을 먼저 하고 눌재와 사암을 나중에 한 것은 위차를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고 바로 고봉에게 고유하는 글 아래에 이 축문을 썼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고봉에게 고유하는 글 가운데에서 ‘서쪽’, ‘동쪽’이라고 한 것을 가지고 자리의 차례를 정해야 하니, 이는 바꿀 수 없는 정론입니다. 이전부터 행해 오던 대로 따르고 고치지 않는 것이 정도(正道)에 맞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주-D001] 기우용(奇羽用) : 기문현(奇文鉉, 1811~?)으로,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우용이다. 거주지는 광주(光州)이고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의 후손이다. 1844년(헌종10)에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정언, 충청 도사(忠淸都事), 부수찬, 부사직 등을 역임하였다.[주-D002] 학궁(學宮)은 수선(首善)하는 곳이므로 : 수선은 ‘선(善)을 시작함’ 또는 ‘모범을 세움’의 뜻으로, 한 무제(漢武帝) 때의 재상인 공손홍(公孫弘)이 학관(學官)이 되었을 때에 교육과 관련된 제도를 혁신할 것을 청하면서 한 말에, “교화를 시행하려면 수선하기를 도성으로부터 시작해서 안에서 밖으로 미쳐 가야 합니다.[教化之行也, 建首善自京師始, 由内及外.]”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수선이 도성이나 태학(太學)을 지칭하게 되었다. 《史記 卷121 儒林列傳》[주-D003] 연향(宴享)할 …… 위함이다〔燕毛所以序齒也〕 : 이 말은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9장에 보인다.[주-D004] 우옹(尤翁)께서도 …… 하였습니다 : 우옹은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다. 눌재(訥齋)는 박상(朴祥, 1474~1530)으로,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창세(昌世), 호는 눌재이다. 사암(思菴)은 박순(朴淳, 1523~1589)으로,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이다. 고봉(高峯)은 기대승(奇大升, 1527~1572)으로,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ㆍ존재(存齋)이다. 1578년(선조11)에 김계휘(金繼輝)의 주도로 기대승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광주(光州)에 망천사(望川祠)를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는데, 1654년(효종5)에 ‘월봉(月峯)’이라고 사액되었고, 1671년(숙종27)에 송시열 등의 건의로 인근의 덕산사(德山祠)에 모셔져 있던 박상과 박순의 위패를 옮겨 와 기대승과 함께 합사(合祀)하였다. 합사할 때에 송시열이 기대승에게 고유하는 축문을 지었는데, 이 축문은 송시열의 문집인 《송자대전(宋子大全)》 권151에 〈월봉서원눌재사암합향시고기고봉문(月峯書院訥齋思菴合享時告奇高峯文)〉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주-D005] 본 서원의 빈주(賓主) : 본 서원은 월봉서원(月峯書院)을 이른다. 월봉서원은 본래 기대승(奇大升)을 제향하기 위해 창건된 곳이므로 기대승이 서원의 ‘주(主)’가 되고 박상(朴祥)과 박순(朴淳)이 ‘빈(賓)’이 된다.[주-D006] 송자대전(宋子大全)에 …… 것은 : 앞서 말한 〈월봉서원눌재사암합향시고기고봉문(月峯書院訥齋思菴合享時告奇高峯文)〉 아래에 춘향(春享)과 추향(秋享)의 축문도 함께 덧붙여져 있는데, 여기에는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눌재(訥齋) 박상(朴祥), 사암(思菴) 박순(朴淳)의 순서로 실려 있다. 《宋子大全 卷151 月峯書院訥齋思菴合享時告奇高峯文》
    2020-10-08 | NO.209
  • 기은 기공(기의헌) 행장〔棄隱奇公行狀〕 - 강재집 제12권
    기은 기공 행장〔棄隱奇公行狀〕 - 강재집 제12권 : 강재(剛齋) 송치규(宋穉圭, 1759~1838)공의 휘는 의헌(義獻), 자는 사직(士直), 성은 기씨(奇氏),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기씨 뿌리는 기자(箕子)에서 나왔으며 평(平)이 시조이다. 조선조에 들어와 휘 건(虔)이 세종조에 포의(布衣)로 지평(持平)에 발탁되었고 대사헌을 거쳐 판중추부사가 되었는데 광묘(光廟 세조)가 수선(受禪)하자 청맹과니라고 핑계를 대고 벼슬하지 않았다. 청백리로 기록되었으며 시호는 정무(貞武)이다. 고조 휘 찬(禶)은 홍문관 부응교로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증조 휘 진(進)은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으로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되었는데, 덕성군(德成君) 복재(服齋) 선생 준(遵)이 그의 동생이다. 기묘사화 뒤에 광주(光州)로 은퇴하여 그대로 광주 사람이 되었다. 조부 휘 대림(大臨)은 고봉(高峯) 선승 대승(大升)의 형이며 동부 참봉(東部參奉)으로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아버지 휘 효분(孝芬)은 부사과(副司果)로 이조 참의에 증직되었고, 어머니 함평 이씨(咸平李氏)는 유회(惟誨)의 따님이다.만력(萬曆) 정해년(1587, 선조20) 1월 9일 고룡리(古龍里) 집에서 태어나 조실부모하여 계부(季父)인 현감공 효전(孝筌)의 집에서 성장하였다. 타고난 자질이 화평하였고 덕성이 심후하여 남을 대할 때는 경계를 설정하지 않고 꾸밈없이 있는 모습을 드러내었으며 마음가짐과 처신은 자연스러웠다. 여러 사람을 널리 사랑하고 받아들여 한결같이 성신(誠信)으로 하였으며 귀천(貴賤)과 현우(賢愚)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환심을 얻었다. 손님과 벗이 항상 자리에 가득하여도 여유롭게 담소하여 가타부타하는 것이 없었으며 일을 처리할 때는 강단(剛斷)이 남보다 뛰어났다. 집안에서의 행실은 매우 독실하여 계부와 백형이 사는 곳이 조금 멀었으나 명절과 삭망(朔望)에는 반드시 가묘(家廟)에 참배하고 물러나서는 공손하게 인사를 올리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다. 백형이 병이 들자 집으로 모셔와 정성을 다해 치료를 하였다. 돌아가시자 장례를 치르고 여러 조카들을 길러 혼인시킬 때까지 유감이 없도록 하였다. 종통을 귀중하게 여기는 데에 뜻을 다하였고 제전(祭奠)을 돕는 데에 반드시 정성과 공경을 바쳤다. 평소 성격은 영리(榮利)에 담담하였다. 광해군 때에 8촌 형 자헌(自獻)이 나라의 권력을 쥐자 달라붙는 사람이 문에 가득하였으나 공 홀로 굳건히 지조를 지켰다. 내한(內翰 한림원 학사) 남성신(南省身)은 곧 공의 인척으로 당시 사람들의 추중을 받았다. 공을 끌어당기려고 누차 은근히 말하였으나 또한 듣지 않았으니 공의 선견지명과 지조의 탁월함이 이와 같다.인조 정묘년(1627, 인조5)에 강로(姜虜 강홍립(姜弘立))가 청나라 군대를 끌고 국경으로 들어오자 위급 상황을 알리는 보고가 나날이 급하였으며 임금은 강화도로 피신 가고 세자는 전주(全州)로 내려갔다. 사계 김선생이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서 공을 도유사(都有司)로 임명하였다. 공은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모아서 밤을 새워 달려갔으나 강화(講和)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왕세자를 전송하여 여산(礪山)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숭정(崇禎) 병자호란(1636, 인조14)으로 청나라 군대가 도성으로 쳐들어왔다. 남한산성이 포위되자 애통한 조서를 내리고 근왕병(勤王兵)을 징발하자 공이 또 거의도유사(擧義都有司)로서 한 도(道)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모집하였다. 청주(淸州)에 이르자 화해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해산하고 돌아왔다. 공이 꿈에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병자, 정축 연간의 큰 화란에 / 子丑年間時大亂임금 수레는 어디로 향하는가 / 聖君車駕向何之오늘날 이 몸이 쓸데없다고 말하지 마시오 / 莫言今日身無用백발백중 오호궁을 가지고 있다오 / 百發烏號手自持공이 나라를 깊이 생각하고 의리를 부지하는 정성이 본성에 근거한 것을 이 시에서 알 수 있다.공은 고봉 선생의 종손(從孫)으로 가학에 이미 연원(淵源)이 있었다. 동심인성(動心忍性) 네 글자에 공부를 깊이 하였으며, 《주역》을 파고들어 《계몽전의(啓蒙傳疑)》를 가장 오래도록 읽었는데 다음의 짤막한 시가 있다.하나의 이치가 천지 이전에 이미 존재하였으니 / 一理已具兩儀前흩어져 천 가지가 됨을 속유들이 어찌 알리오 / 俗儒寧識散爲千손수 성현의 격언을 써서 좌우에 걸어 두고 좌우명을 지었으며 또 한 편의 글을 지어 자질(子姪)의 학업을 권면하였다. 《근사록》, 설문청(薛文淸)의 《독서록(讀書錄)》 등의 저서를 더욱 좋아하여서 깊이 빠져 연구하느라 침식을 잊었으며 노년이 다가오는 것조차도 잊었다.집이 본래 곤궁하였으나 태연히 대처하였으며 ‘육오(六吾)’라고 서재 이름을 지었는데 시명(詩銘)이 있으며, 자호를 기은(棄隱)이라 하고 설(說)을 지어 자신의 뜻을 드러내었다. 의약과 천문 또한 그 개요를 대략 이해하였으며 만년에는 조예가 더욱 정심하고 덕행과 도량이 순수하여 고을의 모범이 되었다. 서로 송사를 일으킨 사람이 판정을 구하면 공이 옳고 그름을 깨우쳐 주었는데 듣는 사람이 기뻐하며 복종하였다.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이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처신을 비난하여 망대부(莽大夫)라고 비유하자 공이 글을 지어 변호하였는데 상론자(尙論者)가 공의 말을 옳다고 하였다. 숭정 계사년(1653, 효종4) 4월 9일에 작고하였으니 향년 67세였다.부인 광주 조씨(廣州趙氏)는 지기(之麒)의 따님이다. 자녀 넷을 두었는데 장녀는 충의위 이원혁(李元赫)에게 시집갔고, 장남은 전(瑑)이고, 차남은 문과에 급제한 정자(正字) 침(琛)이고, 막내딸은 요절하였다. 내외 손자와 증손은 다 기록하지 않지만 학문과 행실로 집안을 계승한 사람이 많은데 증손 정룡(挺龍)은 학술과 덕망으로 더욱 알려졌고 교관(敎官)으로 증직되었으며, 현손 처훈(處勳) 또한 집안의 아름다움을 잘 이어갔다.아, 공은 복재와 고봉 두 분 집안의 후예로서 덕성(德性)이 아름답고 지조가 견고하여 행실은 가정에서 드러났고 신뢰는 고을에서 인정받았다. 광해군 때의 재상이 공과 가까운 인척이었지만 끝내 오염됨이 없이 초탈하게 자신을 지켰다. 두 차례나 의병을 일으켜 나라의 어려움에 달려갔을 때는 충성과 울분이 솟구쳐 세운 공적이 매우 대단하였다. 또 선현의 출처를 변론한 글과 자질(子姪)에게 학문을 권면한 글은 공명정대하고 진실하여 공의 학문을 더욱 징험할 수 있다. 공의 5대손 종락(宗洛)이 아들 상협(商協)을 보내어 나에게 행장을 부탁하였다. 나는 후대에 태어나서 듣고 본 것이 직접 미치지 못하였지만 삼가 공의 아들 정자군(正字君)이 지은 가장과 종락이 기술한 것을 근거로 수정한 것이 이와 같다. 덕을 아는 자가 살펴 주기를 바란다.[주-D001] 기공 : 기의헌(奇義獻, 1587~1653)으로,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사직(士直), 호는 기은(棄隱)이다. 병자호란 때 의병활동을 하였다. 저서로 《기은유고(棄隱遺稿)》가 있다.[주-D002] 고룡리(古龍里) : 현재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 용동 마을이다.[주-D003] 오호궁(烏號弓) : 뽕나무 가지로 만들었다는 질 좋은 활의 이름이다.[주-D004] 동심인성(動心忍性) :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마음을 발동(發動)하고 성색취미(聲色臭味)의 성품을 참는다는 뜻으로, 어떤 고난에도 흔들리지 않고 의연히 자신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孟子 告子下》[주-D005] 설문청(薛文淸) : 명(明)나라의 학자 설선(薛瑄, 1389~1464)을 말한다. 자는 덕온(德溫), 호는 경헌(敬軒), 문청은 그의 시호이다. 성리학에 밝으며 저서로 《독서록(讀書錄)》, 《설문청집(薛文淸集)》이 있다.[주-D006] 망대부(莽大夫) : 후한(後漢)의 양웅(揚雄)을 폄하하는 말이다. 왕망(王莽)이 한나라를 찬탈하여 국호를 신(新)으로 고치고 칭제(稱帝)하였을 때 양웅이 절개를 잃고 왕망 밑에서 대부(大夫)를 지냈으므로 그렇게 부른 것이다.[주-D007] 상론자(尙論者) : 옛 사람의 일을 평가하는 사람을 말한다.
    2020-10-03 | NO.208
  • 기자량(奇子亮) 정익(挺翼) 에게 답함 - 명재유고 제17권
    기자량(奇子亮) 정익(挺翼) 에게 답함 갑인년(1674, 현종15) 5월 16일 명재유고 제17권 윤증(尹拯)어깨를 나란히 한 것처럼 서로 바라보면서도 다른 세상을 사는 것처럼 서로 막혀서 살아왔으니, 어찌 그대의 편지가 멀리서 날아와 혼자 외롭게 살아가는 나를 크게 위로해 주리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감동이 일었습니다. 슬하의 세 아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 하니 듣는 사람도 차마 듣지 못하겠거늘 하물며 직접 당한 사람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치에 맞게 세상을 달관하고 평소 건강을 유지하여 아무리 어렵고 우환이 있는 가운데에서도 학문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으니, 그대에게 감복하는 마음이 그치지 않습니다.나는 화란 속에서 목숨이 살아남아 질기고도 구차하게 세월을 보내며 한결같이 칩거해 살아가고 있으니, 그다지 말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박군(朴君)과 주고받은 여러 설들을 나에게 보여 주었으니, 나를 따돌리지 않은 점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 세상에 이러한 이야기로 서로 강설을 하는 경우가 실로 드물고 오로지 과거 공부에 휩쓸려서 이록(利祿)만을 추구할 뿐이니, 어찌 눈을 비비고 보지 않겠습니까. 다만, 식견이 고루하고 몽매하여 여기에 참여하기에 부족한데도 과분하게 이런 배려를 받고 보니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그러나 그대의 말씀이 정중하기에 끝내 저버리지 못하겠습니다. 게다가 이를 통하여 따끔한 가르침을 계속해서 받을 수 있다면 나로서도 다행이겠습니다. 그래서 감히 나의 견해를 일일이 피력하여 별지(別紙)에다 기록하였으니,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길이 멀어서 함께 모이지 못하는 것을 그대가 한탄하였는데, 이는 실로 나의 한탄이기도 합니다. 헛된 명성과 실제의 병폐가 안팎으로 나를 병들게 하고 사방의 외우(畏友)들과 교유하여 가르침을 받을 길도 없으며, 나이가 50이 되어 더 이상 진보할 가망도 없으니, 나 자신에 대한 개탄스러움을 이루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노형(老兄)이 덕음(德音)을 아끼지 않고 계속해서 나에게 가르침을 준다면 노형이 두터운 은혜를 베푸는 것이 될 것이요, 나에게는 더욱 큰 다행이 되겠습니다. 간절하게 기다리겠습니다. 마침 감기로 거의 죽었다 겨우 살아나서 병상에 누워 있은 지가 지금 40여 일이 되었습니다. 기력이 떨어지고 정신이 혼몽하여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하겠습니다.[별지]박군(朴君)에 대해서는 그 이름을 들은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 노형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으니, 고루한 내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그의 학설을 본다면 아무리 노형이 그를 두둔한다 하더라도 이단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단에도 크기가 있어서 주장하는 인물이 크면 그 폐단이 깊고 인물이 작으면 그 폐단이 얕습니다. 노형이 이미 그와 벗을 하였다 하니 불가불 그 학설의 오류를 힘껏 파헤치고 공격하여 끝까지 회개를 시켜야 할 것입니다. 선친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이른바 선비의 자득(自得)이라는 것은 반드시 성현이 말씀하지 않은 이치를 터득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성현의 말씀 가운데에서 지극히 당연하여 바꿀 수 없는 이치를 진정으로 알아내는 것이 바로 자득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성리설(性理說)은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에 이르러 크게 체계화되어 더 이상 추가할 것이 없습니다. 만약 정자와 주자의 학설 밖에서 이치를 찾으려고 한다면 이는 착견(鑿見)이요, 사설(邪說)이 될 뿐입니다. 박군이 이 말을 들으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에서 마음을 쓰는 데가 없는 사람은 그럭저럭 범범하게 일생을 보내고, 학문에 뜻을 두었다고 하는 사람들은 또 대부분 이와 같습니다. 바른길을 내버려 두고 굽은 길을 찾으며 경솔하게 자신을 너무 크게 여겨 끝내는 아무것도 터득하지 못하니 매우 한탄스러운 노릇입니다. 보여 주신 책자는 의당 돌려 드려야 하겠지만 한 번 더 보기 위해 그대로 가지고 있겠습니다.말씀하신 사우(士佑)는 어떤 사람입니다. 남쪽 지방에 함께 학문을 할 만한 사람으로 지금 누구누구가 있습니까? 나에게 알려 주어 고루함을 풀어 주시기 바랍니다.이설(理說) 운운변론한 것이 맞는 듯합니다. 다만, 그의 주장에서 이른 바 “사물은 이(理)에 의지한다.[物依於理]”라고 한 것 또한 폐단이 있으니, “사물이 그 이(理)를 가지고 있다.[物有其理]”라고 고치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체용변화(體用變化)” 이하는 그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대체로 변화귀신(變化鬼神)과 진퇴존망(進退存亡)은 모두 기(氣)이니, 이(理)를 논할 것이 아닙니다. 그의 말 가운데 “진퇴존망지간(進退存亡之間)”이라 한 것과 “유무동정지간(有無動靜之間)”이라고 한 것은 아마도 이(理)를 별개의 사물로 보아서 그 사이에 매달려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표현한 것인 듯합니다. 인용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라고 한 것 역시 그 뜻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도기설(道器說) 운운이 단락은 전체가 선유(先儒)의 학설과 다르므로 굳이 변론할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변론한 내용 가운데 “상면지상(上面之上)과 하면지하(下面之下)가 아니다.”라고 한 것은 아마도 적절치 않은 듯합니다. 상하(上下) 두 자를 상면(上面)과 하면(下面)으로 보지 않고 무엇으로 보겠습니까. 또 “무형이상(無形而上)”과 “유형이하(有形而下)”라고 하였는데, 이 또한 적절치 않습니다. 대체로 형(形)은 사물이므로 그 상면에 비어 있는 것을 도(道)라 하고 하면에 꽉 차 있는 것을 기(器)라고 한 것뿐이니, 그렇다고 어찌 이(理)가 위에 있고 기(氣)가 아래에 있어 그의 견해처럼 확연히 두 가지로 나뉜다고 말하겠습니까?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운운이 단락 역시 모두 주자(朱子)와 다른 견해를 내세웠으니, 굳이 변론할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두 선생의 말에 각자 치우침이 있어 경문(經文)의 본뜻과는 합치되지 않는다.” 하고 또 “두 선생의 뜻은 모두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을 두 개의 마음으로 나누고 있다.”라고 하였는데, 그의 말투를 보건대 오만하게도 자신을 정자(程子)와 주자의 위에다 놓고 더 이상 후학(後學)으로서 선사(先師)를 존경하는 뜻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처럼 심하게 도리에 어긋난 사람은 곧장 북을 쳐서 성토하여야 마땅하고, 그와 사사로이 어울려 성현을 모독하는 죄에 함께 빠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변론 가운데 남헌(南軒)의 말을 인용하였는데 그의 생각과는 다른 듯합니다. 그가 말한 유위무위(有爲無爲)는 곧 동정(動靜)을 말한 것이고 남헌이 말한 유위무위는 의리(義利)를 말한 것입니다. 다만, 하문(下文)의 보설(補說)로 보건대 그대도 이미 그 오류를 깨닫고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성설(性說) 운운근래에 정랑(正郞) 김극형(金克亨)이 성(性)을 체(體)로 삼고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용(用)으로 삼은 적이 있었는데, 지금 이 주장이 또한 그와 같습니다. 대체로 그의 의도는 필시 성을 높여서 제일층(第一層)으로 삼으려 한 나머지 다음의 네 가지로 불리는 것을 꺼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일리(一理)라는 것이 바로 인의예지요, 인의예지 밖에 별도로 일리가 있는 것이 아님을 모른 것입니다. 명도(明道)는 “성(性)이라 말하는 순간 이미 성(性)이 아니다.”라고 말하였는데, 위의 ‘성’ 자는 “생지위성(生之謂性)”의 성이요 아래 ‘성’ 자는 “본연지성(本然之性)”의 성입니다. 만약 위의 말을 바꿔 “본연지성이라 말하는 순간 이미 본연지성이 아니다.”라고 하게 되면 정말 말이 되지 않습니다. 논의의 대강은 맞는 말입니다. 다만 “성을 논한 것이 매우 어긋나지 않았다.”라고 말하였으니, 그가 인의예지가 성이 되는 줄을 모르고 있는데도 매우 어긋났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장차 무엇을 가지고 매우 어긋났다고 하겠습니까. 또 “중선(衆善)은 인의예지의 기(紀)이다.”라고 하였는데, ‘기’ 자는 아마도 ‘목(目)’ 자만큼 적합하지 않은 듯합니다.논수설(論數說) 운운무릇 이(理)가 있은 뒤에 기(氣)가 있고 기가 있은 뒤에 상(象)이 있고 상이 있은 뒤에 수(數)가 있으니, 기에서 상까지에는 청탁(淸濁), 수박(粹駁), 장단(長短), 대소(大小)에 모두 일정한 수(數)가 있습니다. 그가 말한 “한 가지 일도 수가 아닌 것이 없고 한 가지 물건도 수가 없는 것이 없으며 사람의 일에는 수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 것이 없다.”라고 한 것은 진실로 본 바가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수요(壽夭)와 궁달(窮達)은 모두 수(數)로써 말할 수 있지만, 유독 선악(善惡)만은 수로 돌리지 못합니다. 이는 이(理)가 그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맹자가 “성(性)이 들어 있으므로 명(命)이라 말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니, 어찌 박군이 이에 대해서는 따져 보지 않은 것입니까? 지금 자포(自暴)하여 악을 행하는 것과 자강(自强)하여 선을 행하는 것을 똑같이 수(數)로 돌리고 만다면 배우는 이들이 어디에다 힘을 쓰겠습니까. 이 설을 주장하는 것은 실로 유자(儒者)의 주장이 아니어서 혹 사람을 자포하여 악을 행하는 지경으로 인도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그 마음의 씀씀이가 어긋나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대의 변론은 가히 노력을 다하였다고 할 만하지만, 기(氣)와 수(數)를 둘로 나누려고 한 것에 대해서는 내 생각으로는 적절치 않다고 봅니다.대체로 기와 수는 똑같은 것[一般]입니다. 예를 들어 인용한 내용을 가지고 말해 보겠습니다.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이 처음에는 재물을 불리는 일에 종사하다가 말년에는 학문의 조예가 고원(高遠)한 경지에 올랐습니다. 이는 기품(氣稟)에 맑은 분수(分數)가 많고 탁한 분수가 적었기 때문이니, 이 또한 수(數)로 말할 수 없겠습니까. 안연(顔淵)은 아성(亞聖)이 되었으면서도 끝내 가난하게 살다가 요절하였으니, 이는 청수(淸粹)한 기를 받았으면서도 단명(短命)한 것입니다. 이 또한 기가 아니겠습니까. 봄이 변하여 여름이 되고 가을이 변하여 겨울이 되며, 오행(五行)이 서로 교대함에 각각 정해진 수(數)가 있어 바꿀 수가 없으니, 수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일육(一六), 이칠(二七), 삼팔(三八), 사구(四九)의 수는 모두 생성(生成)의 기(氣)이니, 기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대의 견해는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태극무극해(太極無極解) 운운퇴계(退溪)가 남장보(南張甫)에게 답한 편지에서 “어떤 사람이 말한 궁극(窮極)이 없다는 주장은 주자가 이미 잘못된 것으로 여겼으니, 주자의 설을 살펴보게나.”라고 하였습니다.“태극(太極)의 이(理)는 낳고 낳아서 끝이 없으므로 무극(無極)이라고 한다.”라고 한 것은 이른바 유(有)는 무(無)에서 난다는 주장과 같으니, 그 오류가 대단히 심합니다. 이에 대한 그대의 변론은 대체로 타당합니다. 다만, “물(物)의 극고처(極高處)를 극(極)이라 한다.”라고 한 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닌 듯합니다. 주자는 극지처(極至處)로 극(極) 자를 풀이하였지 극고(極高)를 말한 적이 없습니다.또 “태(太)는 심대(甚大)의 뜻이다.”라고 하였으니, 그리되면 또 “심대한 극”이 되므로 또한 적절하지 않습니다. 대체로 태(太)가 바로 심(甚)이요 지(至)입니다. 그 의미는 “극지지(極之至)”일 뿐이니, 심대(甚大)로 극(極)을 꾸며 준다고 해서 더 나아지는지는 것이 아닙니다.또 “무극(無極)이라는 것은 무형(無形)의 극(極)이다.”라고 한 것 또한 적절하지 않습니다. 대체로 태극은 실로 입으로 표현할 수 있는 소리도 냄새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극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무극이라는 것은 “그 극이 없는 것[無其極]”입니다. 만약 “무형의 극”이라 한다면 마땅히 “무의 극[無之極]”이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그의 주장에 따르면 “물(物)이 태허(太虛)에서 변화하는 것은 얼음이 물에서 얼었다 녹았다 하는 것과 같다.” 하였는데, 이 말은 바로 정자(程子)가 그 잘못을 지적한 바 있는, 형태가 없어지면 근원으로 돌아간다[形潰反原]는 횡거(橫渠)의 주장과 같은 말입니다. 대체로 만물이 세상에 태어나는 원리를 말하자면, 가는 것은 영원히 지나가 버리고 새로이 오는 것이 그 뒤를 이어서 끝없이 낳고 또 낳습니다. 그동안 굽혀 있던 기[旣屈之氣]를 가지고 다시 현재 펴 있는 기[方伸之氣]를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물이 얼음이 되고 얼음이 다시 물이 되는 것으로 비유를 한다면, 이는 전혀 천지조화의 낳고 낳는 뜻이 없고 부처의 윤회설(輪回說)과 가깝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자가 이를 배척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으로 기(氣)를 논하는 것도 옳지 않거늘 하물며 이것으로 태극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역해(易解) 운운무슨 자는 마땅히 무슨 자가 되어야 하고 또 무슨 자는 마땅히 무슨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감히 독창적인 견해와 새로운 주장을 함부로 만들어 내어서는 안 됩니다. 그대가 이에 대해 남다른 것을 좋아하는 병폐가 있다고 지적한 것은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남다른 것을 좋아하는 병폐뿐만 아니라 큰 소리를 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말하는 병폐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누가 그에게 무실위기(務實爲己)와 하학손지(下學遜志)의 방도를 말해 줄 수 있겠습니까?[주-D001] 박군(朴君) : 박상현(朴尙玄, 1629~1693)을 가리킨다. 자는 경초(景初), 호는 우헌(寓軒), 본관은 순천(順天)이며, 전라도 광주(光州)의 진곡(眞谷)에서 학문에만 전념한 학자이다. 아들 박광일(朴光一)을 송시열에게 보내 학문을 배우게 하였고, 그의 문집인 《우헌집(寓軒集)》에 송시열과 주고받은 편지가 여러 편 있으며, 송시열은 그를 모년지기(暮年知己)로 허여하였다고 한다. 《우헌집》에는 기정익(奇挺翼)에게 보낸 11편의 편지가 수록되어 있는데 주로 성리학의 격물, 이기, 태극에 관한 내용들이다. 《韓國文集叢刊解題 4輯 寓軒集, 遜齋集》[주-D002] 사우(士佑) : 유세익(柳世翊)의 자이다. 본관은 서산(瑞山)으로 광주 동곡(東谷)에 살았다. 호는 회와(悔窩)이다. 서산 유씨 유익서(柳益瑞)가 기정익의 매부였던 까닭에 일가가 모두 기정익의 문인이 되었다. 기정익의 사후 문인들과 함께 그를 모신 장성의 추산서원(秋山書院)의 건립을 주도하였다. 박상현의 문집 《우헌집》에 유세익과 주고받은 학술적인 내용의 시와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문집으로 《회와유고(悔窩遺稿)》가 있다. 《寓軒集 卷1 次柳士佑詠陰陽韻ㆍ卷4 與柳士佑, 韓國文集叢刊 134輯》[주-D003] 자포(自暴)하여 악을 행하는 : 대본에는 ‘自暴□惡’로 한 자가 결락되어 있다. 동일본인 국립중앙도서관장본(도서번호:b13648-61-10)에 의거하여 ‘爲’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주-D004] 자포하여 악을 행하는 : 대본에는 ‘自暴□惡’로 한 자가 결락되어 있다. 동일본인 국립중앙도서관장본(도서번호:b13648-61-10)에 의거하여 ‘爲’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주-D005] 남장보(南張甫) : 남언기(南彦紀)로 장보는 자이다.
    2020-09-16 | NO.207
  • 기축록 속(己丑錄續) 성명 미상(1700년대)
    기축록 속(己丑錄續) 성명 미상(1700년대)《기축록》에 이어 효종 8년 정유(丁酉 1657)로부터 숙종 28년(1702)까지 45년간에 일어났던 정개청(鄭介淸)의 서원 철훼를 두고 동서(東西) 양파간의 싸움을 기록한 일기이다.이 일기를 쓴 사람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1700년대 전후에 생존하였던 것만은 확실하다. 그 외의 사실은 알 길이 없다.이 일기를 보면 효종 때 송준길(宋浚吉)이 호남 유생(湖南儒生)들이 정개청의 서원 철훼를 반대하는 상소를 왕께 올리게 된 데 대하여 호남 유생들을 다시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그리하여 호남 유생들은 이에 반발하여 선조 때에 정철의 불공평한 처사로 정개청이 억울하게 죽었으며, 인조 때에 김장생(金長生) 등이 올린 정개청에 관한 상소문이 옳지 못한 것을 통렬하게 논박함과 동시에 송준길의 상소도 옳지 못하니 정개청을 호남의 큰 스승으로 높혀 받들 것을 간청하였다.이 동서인(東西人) 간의 싸움은 숙종 28년에도 종식이 되지 않고 계속되어 조선 말기까지 계속되어 조정에서 동인들의 청을 들어주어 정개청의 관작을 회복시키고 서원을 다시 세우게 되면 이번에는 서인들이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다시 정개청의 관작을 삭탈케함과 아울러 서원을 헐어 버리게 하여 관작의 여탈(與奪)과 서원의 철훼가 반복하기를 3백 연간이나 계속되었던 것이다.이 싸움에 있어서 동인의 대표적 인물로는 윤선도(尹善道)ㆍ허목(許穆) 등이 있고, 서인의 대표 인물은 전기 김장생ㆍ송준길 이외에도 이만성(李晩成) 등이 있다.이 속록도 《기축록》과 마찬가지로 전부가 각 인물들의 상소문을 연차 순에 따라 모아 편집한 것인데, 이것들을 보면 동ㆍ서인 간의 당쟁이 얼마나 연원(淵源)이 길었던 것과 동시에 치열했었던 것을 알 수 있다.그리고 이 일기 속에는 전기 대표적 인물들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의 글이 있으므로 조선 당쟁의 연구에 《기축록》과 아울러 많은 참고가 될 것이다.------------------------------------------어떤 사람이 개청에게 정철의 사람됨을 물으면서 청백한 것을 칭찬하니, 정개청이 대답하기를, “선유의 말에 사람이 몸가짐을 청백하게 하는 것은 도리어 벼슬을 사랑함이니, 비록 아버지와 임금을 죽이더라도 감히 할 것이다…….” 하였으며, 또 무자 연간에 정철이 광주(光州)에 있었는데 정개청이 곡성 현감으로서 근친(覲親)하러 내왕하는 길에 한 번도 존문(存問)하지 않고, 그 문을 지나면서도 들어가지 않아서 정철이 더욱 감정을 두었는데, 이것이 두 사람에게 앙화가 되어 공교하게 무함하고 얽어서 극율(極律)로써 섬멸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선비를 죽였다는 이름은 만고에 큰 죄악이니, 공론이 마침내 민몰(泯沒)되지 않아, 양도(兩道)에서는 사림의 소장(疏章)이 해마다 일어나고, 조정에서는 대간(臺諫)의 논박이 때로 준절하였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선조 대왕께서도 마음속으로 곧바로 깨달으시고 깨달은 후에 곧 명을 내려 정철의 관작을 삭탈하고 강계(江界)에 안치(安置)하였으며, 매양 정철은 간철(奸澈) 또는 독철(毒澈)이라 하시면서 심지어는 그 아들을 독종이라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전조(銓曹)에 엄칙하여 벼슬에 의망(擬望)하지 말도록 하셨으니, 비록 효자 자손(孝子慈孫)이라도 감히 원통함을 호소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혼조(昏朝)에 와서 정철의 아들 종명(宗溟) 등이 아비의 설원을 청하는 소에, 그 아비가 정개청을 무함한 장계의 말은 전혀 없고 이르기를, “선조 대왕께서 문목(問目) 가운데에 절의를 배척한 논설도 아울러 넣을 것을 명하시어 형추하였다.” 하였으며, 최영경의 일에 대해서도 역시 그 아비가 구원하려 하였으니 이루지 못하였다는 뜻으로 말하여 마침내 그 무리들로 하여금 모두 이 말을 하게 하였는데, 그 뜻은 대개 선비를 죽인 이름을 임금에게로 돌리고, 선비를 죽인 그 아비의 죄를 벗으려는 것이니 그 계획이 참독(慘毒)합니다. 이단상의 소에도 정철이 정개청을 무함한 계사의 말은 빼고서 다만 말하기를, “선조 대왕께서 절의를 배척한 조항을 문목 가운데 넣으라고 하교하시어, 한 차례 형신(刑訊)한 후 명하여 북쪽 변방으로 귀양보내어 죽였다.” 하였으니, 이단상의 소에 있는 말은 대개 종명의 말을 조술(祖述)한 것입니다. 단상의 분의는 종명과 다른데, 이와 같이 그의 말이 같은 것은 무슨 곡절이겠습니까. 김장생이 항상 정철을 군자로 삼아 송준길이 개청을 무함할 때, 그 말이 그의 스승의 말을 증거함이 많았던 것이니, 이것은 스승의 중망을 빌려 정철을 두둔한 것이고, 정철을 두둔하는 것은 그 스승의 말을 옳게 여기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무망한 것이 이제 밝게 나타나서 반드시 만세의 공론으로 되었으니, 스승을 위한다는 것이 끝내는 그 스승을 해로운 데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단상이 개청을 무함한 말이 모두 송준길과 안팎으로 호응하였는데, 그 말이 준길보다 더욱 가중(加重)한 것은 모두 준길을 위하여 두둔한 것입니다. 그러나 송준길로 하여금 만세 공론에 흠절을 더욱 무겁게 만든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하였으니, 역시 깊게 생각하지 못한 일입니다. 정개청이 구원(九原)의 썩은 뼈가 된 지 이미 70년이 지났는데, 지금 사람으로 누가 혐의하고 누가 원망하겠습니까. 비록 죄를 얽더라도 이로울 바 없고, 원통을 씻더라도 해로울 바 없을 것인데, 무함하는 것이 반드시 기축년보다 곱절이나 되는 것은 그 뜻이 어디 있겠습니까. 정개청은 자초한 화로 돌리고, 정철이 선비 죽였다는 이름을 벗기려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추후로 정개청의 죄명을 얽는다는 것은 끝내 이루어 질 수 없는 일이니, 후세에도 어찌 분변할 사람이 없겠습니까. 저 사람들도 이것을 생각했으므로 선비 죽인 이름을 마침내 임금에게로 돌리려고 했던 것이니, 어찌 심히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서원의 유무에 대해서는 그 손실과 이익이 다만 사림에게 있는 것이고, 그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개청을 사종(師宗)으로 삼는 사람들이 또한 어찌 서원의 유무로 정개청의 경중을 삼아서 있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고 없는 것을 혐의쩍게 알겠습니까. 다만 우리 나라에서 정개청만 못한 자가 서원에서 향사하는 이가 또한 반드시 이루 헤아릴 수 없는데, 서원을 허물어뜨리는데 오직 정개청의 서원만을 유독 먼저 급급하게 하려고 하는 것은 모두 그 뜻하는 바가 있어서입니다. 또 서원을 세우고 허물어뜨리는 것은 다만 그 사람의 도덕의 높고 낮음으로 논할 뿐이니, 하필 평소에 없었던 죄목을 억지로 찾아낼 필요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정개청 같은 사람은 벼슬이 낮고 붕당의 후원이 끊어져서, 서원을 허물어버리는 데에도 많은 언사(言辭)와 노력을 허비할 필요가 없을 것인데, 기축년에도 없었던 허다한 죄상으로 모함하는 것이 어찌 그 이유가 없겠습니까. 그 뜻이 반드시 정철이 한 착한 선비를 죽인 이름을 벗기려는 것이니, 신은 정개청을 해친 뒤에 장차 최영경에게도 미칠까 두렵습니다. 종명(宗溟)이 논설을 한데 모으자 이러한 근거 없는 말이 같은 편 사람들 가운데 떠돌아, 위로는 천지 신명을 속이고 아래로는 사람들의 이목을 현란하게 하니, 당론이 국시를 해롭게 하고 국맥(國脈)을 위태롭게 함이 이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송준길은 같은 편 사람들 가운데에서 중망이 있어 당시에 추앙을 받았는데, 신이 정개청을 논함이 송준길과는 상반되자 어떤 사람들은 혹 신에게 해가 있을까 두려워서 신을 경계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신의 뜻으로는, “임금이 말을 하면서 스스로 옳다고 하면 경대부가 감히 그 그른 것을 바로잡지 못한다.” 한 것은, 곧 자사(子思)가 깊이 경계한 바로써 임금과 신하의 사이에도 이와 같은 것인데, 하물며 그 아랫 사람이야 어떻겠습니까. 그 말이 혹 국시에 어긋난다면 신이 차마 어찌 준길이 있는 것만 알고 국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하여 임금의 앞에 밝게 분변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준길이 말한 바가 어찌 그가 지어낸 것이겠습니까. 반드시 사람들에게서 들은 것이니 사람들이 준길을 그르치게 한 것이요, 준길이 국시를 그르치게 한 것은 아닙니다. 자로(子路)는 과실(過失) 듣는 것을 기뻐하였고, 공자(孔子)는, “내가 진실로 과실이 있으면 사람들이 꼭 알게 되니 다행이다.” 하였으며, 순(舜) 임금은 자기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따르며, 남이 선을 하도록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송준길이 과연 군자로서 신의 말이 옳은 것을 깨달았으면 반드시 자로가 과실 듣는 것을 기뻐하고, 공자가 자기 과실이 있으면 사람들이 반드시 앎을 다행으로 여기며, 순임금이 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르며, 남이 선을 하도록 도와준 것처럼 할 것이니,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신의 말에 감정둘 것이 있겠습니까. 준길은 과연 이런 마음으로 과실을 고치고 착한 것을 하는 데 인색하지 않다면, 신이 어찌 송준길을 혐의하여 끝까지 피차를 구별하는 마음을 두겠습니까. 훗날 혹 서로 만난다면 처음에 서로 어긋나서 길이 달랐던 것을 한탄하고 마침내 원만히 같이 돌아가게 된 것을 기뻐할 것이니, 신이 두려워하는 바는 그가 허물 고치기를 꺼리지 않음을 알지 못하고, 송준길을 버리는 데 있는 것입니다. 신은 정개청의 지극한 원통함을 안타깝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국시가 크게 문란하게 됨을 통탄하는 것이며, 국가를 위하여 심히 두려워하고 전하를 위하여 지극한 정성이 있으므로 전혀 꺼리거나 숨기는 것 없이 말을 하는데 가릴 바를 모르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사소한 것을 통촉하시고 덕음(德音)을 내리시어 황천(黃泉)에 있는 정개청의 원통을 씻어 주시고, 사방 사림의 공론을 통쾌하게 하시어 국시를 바로잡아 나라의 명맥을 길이 이어 주신다면 국가에 있어 매우 다행일 것입니다. 아! 신이 보건대, 지금 개청을 두둔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정개청의 어진 것을 아는 것은 아니나, 진실로 개청의 원통한 것을 애석해 하는 것은 진실로 정철의 간독한 것을 미워하는 데서 나온 것이고, 개청을 모함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개청의 어짊과 개청의 원통을 아는 것은 아니면서도 입으로는 모두 이 말을 하는 것은 대개 정철이 착한 선비를 죽였다는 이름을 급급하게 벗기려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선악과 일의 시비를 그릇되게 논하는 것은 모두 그 사람의 선악과 그 일의 시비를 적실하게 알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만약 참으로 안다면 비록 매이고 인색해 하는 마음이 있더라도, 어찌 차마 하늘을 속이고 임금을 속이는 데 스스로 빠져 천고의 간사한 소인이 되는데에 만족스러워 하겠습니까. 다만 천운이 쇠잔하고 세상이 말세가 되어 교화가 무너지고 풍속이 퇴폐하여, 사람들이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윤리에 어두운 까닭이니, 이는 바로, “그 실정을 알았으면, 불쌍히 여기고 기뻐하지 말라.”는 증자(曾子)의 말과 같은 것입니다. 어찌, 다만 한두 가지 일만 그렇겠습니까. 만사가 모두 이와 같으니, 만사가 모두 이와 같으면 나라가 나라 꼴이 되지 않을 것은 지혜 있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명도 선생(明道先生)이 조정에서 말하기를,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풍속을 바르게 하며, 어진 인재 얻는 것을 근본으로 삼으라.” 하여, 누누이 정학(正學)의 도(道)를 강론하여 밝히는 것을 언급하였으니, 아름답다, 그 말씀이여! 신은 아마도 현재 나라 다스리는 도(道)가 이보다 앞설 것이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2022-05-03 | NO.206
  • 김 삭주(金朔州) 형제의 복수전(復讎傳)
    김 삭주(金朔州) 형제의 복수전(復讎傳)송자대전 제214권 / 전(傳)김성일(金成一)의 자는 응건(應乾)인데, 광주(光州) 평장동(平章洞) 사람으로 담양부(潭陽府)에서 대대로 살았다. 그의 아버지 준민(俊民)은 벼슬이 우후(虞候)였고, 어머니는 하동 정씨(河東鄭氏)였는데, 용(龍)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꿈을 꾸고 공을 낳았기 때문에 아명(兒名)은 현룡(見龍)이었다. 키는 8척이었고, 붉은 수염은 창끝처럼 곧았으며, 용력(勇力)이 뛰어난 데다 음양가(陰陽家)를 섭렵(涉獵)하여 장차 무재(武才)로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준민의 아우는 세민(世民)이었는데, 그의 종[奴] 금이(金伊)가 세민의 아내 예합(禮合)과 간통하였다. 준민은 이를 통분하게 여겨 장차 그들을 제거하려 하였는데, 미처 거사(擧事)하기 전에 종 금이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제 아비와 두 동생을 거느리고 기사년(1629, 인조7) 10월 30일 밤에 준민의 집으로 쳐들어가 준민을 매우 참혹하게 어지러이 찍어 죽였다. 때에 성일은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에 갔다가 아버지의 부음(訃音)을 듣고 돌아왔는데, 그의 아우 성구(成九)는 피를 토하며 실성(失性)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형제가 서로 굳게 결심하고 창을 베개 삼아 거적자리에서 잠을 자며, 아버지를 장사 지내지 않고 적괴(賊魁)의 동정만을 살폈다. 이해 12월 15일에 시장(市場) 안에서 금이와 그의 부모를 찾아 손수 잡아 죽이고 그의 간(肝)을 잘라 내어 가인(家人)을 시켜서 아버지의 빈전(殯前)에 매달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즉시 부(府)에 나아가 형제가 자수(自首)하면서 죽여 주기를 청하였으니, 준민이 죽은 지 겨우 45일째였다.담양 부사(潭陽府使) 이공 윤우(李公潤雨)가 추관(推官)인 광주 목사(光州牧使) 임효달(任孝達)과 함께 예전의 복수면사의(復讎免死議 군부(君父)의 원수를 갚고 죽음을 면한 데 대한 의논)를 끌어대어 감사(監司)에게 보고하였다. 감사 송공 상인(宋公象仁)이 이를 조정에 보고한 결과, 승지(承旨) 이공 경용(李公景容)이 해조(該曹)에 알려, 《대명률(大明律)》의 장벌조(杖罰條)에 의거하여 시행하기를 청하였는데, 인조대왕(仁祖大王)은 그의 효의(孝義)를 가상하게 여겨 특사(特赦)하였다. 대체로 처음 변(變)이 났을 때부터 이제까지의 기간은 9개월이었다. 그러자 인리(隣里)의 여러 친지들은 준민의 시체가 돌아갈 곳이 없음을 민망하게 여겨 힘을 합해서 그를 장사 지냈다.성일은 담양(潭陽)을 선친이 살해당한 지역이라 하여 차마 그대로 살지 못하고, 형제가 드디어 흥덕(興德)ㆍ부안(扶安) 등지로 옮겨 가 우거(寓居)하였다. 사인(士人) 박문두(朴文斗)는 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들 형제를 자기 집으로 맞이하여 재산을 기울여서 접대하였다. 그들 형제가 아버지의 상(喪)을 마치자, 백강(白江) 상공(相公) 이경여(李敬輿)는 그들을 막하(幕下)에 두고 후히 대우하였는데,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 신공 경진(申公景禛)도 역시 그렇게 대우하였다.병자호란 때는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가 동성(東城)에 나누어 예속되었다. 선전관(宣傳官) 윤겸지(尹謙之)와 함께 베개를 연하고 잠시 토우(土宇)에서 쉬고 있었는데, 갑자기 세 번 부르는 소리가 들리므로 놀라 일어나서 뛰어나가다 뒤돌아 보니, 적(賊)의 포(砲)가 벌써 윤겸지의 머리를 부숴버렸다. 이리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 일을 아주 이상하게 여겼다.난(亂)이 끝나자 선전관이 되었고, 무과(武科)에 합격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도총부 경력(都摠府經歷)이 되었으며, 영원 군수(寧遠郡守)로 나갔다가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였다. 복(服)을 마친 다음 곡산(谷山)과 철산(鐵山)의 군수(郡守)를 거쳐 간간이 장관(將官)이 되었는데, 대체로 문무관(文武官) 제공(諸公)에게 깊이 알려졌기 때문에 직임(職任)이 몸에서 떠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젊은 때의 패기가 줄어지자 전리(田里)에 물러나 살면서 여생을 마치려 하였다. 그러나 정유년(1657, 효종8) 6월에 효종대왕(孝宗大王)이 삭주 도호부사(朔州都護府使)를 특별히 제수하므로 한숨지으며 탄식하기를,“나는 늙었는데 어찌 다시 젊은 패기가 있겠는가마는 상의 은혜가 지극히 중하니 어찌 감히 죽기로써 기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고는, 드디어 애써 부임하였다. 그러나 어떤 일 때문에 눈바람을 맞으면서 용만(龍灣)을 왕래하다가 한질(寒疾)을 얻어 나이 66세로 무술년(1658, 효종9) 1월 1일에 졸(卒)하였다. 그러자 비변사(備邊司)에서 연도(沿道)에 명하여 그를 운상(運喪)해 돌아오도록 해서, 담양군(潭陽郡) 무이동(武夷洞) 정좌(丁坐)의 언덕 선영(先塋)에 장사 지냈다.그의 아내 이씨(李氏)는 아들 수태(守兌)가 있었는데, 그 아이를 낳은 지 돌도 안 되어 변(變)이 일어났으므로 아이를 온전히 보전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남몰래 재종형(再從兄)인 진경(振慶)의 집에 의탁하였다. 진경은 그를 길러서 자기 자식으로 삼았다. 수태의 아들 정하(鼎夏)가 삭주(朔州 삭주 도호부사를 지낸 김성일을 가리킴)에 대한 시말(始末)을 갖추어 가지고 와서 전(傳)을 만들어 주기를 청하였다. 나는 늙고 병들어 거의 죽게 된 지경이라, 필연(筆硯)을 손에서 놓은 지 오래지만, 이제 성일 형제의 사적은 세교(世敎)에 도움이 매우 크기 때문에 이상과 같이 대략 쓴다.삼가 예경(禮經)과 《춘추(春秋)》를 상고하건대 복수(復讎)에 대한 의리가 자상하였는데, 주 부자(朱夫子)에 이르러 그를 더욱 발휘(發揮)하고 천명(闡明)하였다. 그러나 세상이 쇠퇴하고 풍속이 투박하여 이런 의리를 아는 자가 적다. 이제 성일 형제는 꼭 예경이나 《춘추》의 뜻을 연구해서가 아니고, 다만 천부(天賦)의 성(性)을 가지고 생사(生死)를 잊고 분발하여 이런 큰일을 처리하였으니, 어찌 위대하지 않은가.인조대왕은 그가 제 맘대로 살인한 죄를 특사(特赦)하였고, 효종대왕은 또 그에게 벼슬을 제수하였으며, 상공 이경여는 가장(嘉奬 칭찬하고 장려함)하고 친후(親厚)하게 대하였다. 심지어 옥관(獄官)들까지도 모두 그를 살리자는 의논을 펴서 풍화(風化)를 도왔으니, 본조(本朝)의 예의(禮義)의 밝음이 중화(中華)에 비해 손색이 없음을 더욱 믿을 만하다.그 아버지의 장례(葬禮)를 뒤로 미루었던 것은 더욱이 주자의 설(說)과 부합된 점이 있다. 주자가 일찍이,“《춘추》의 법에, 임금이 시해(弑害)되었을 때 임금을 시해한 적(賊)을 토벌하지 못했으면 장(葬)이라고 쓰지 않은 것은 바로 복수의 대의(大義)를 중히 여기고 장사 치르는 상례(常禮)를 가볍게 여겨, 만세의 신자(臣子)에게 반드시 적을 토벌해서 원수를 갚은 다음에야 그 군친(君親)을 장사 지낼 수 있음을 보이기 위함이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면 비록 관곽(棺槨)과 의금(衣衾)이 더없이 융후(隆厚)하다 할지라도 실상은 시체를 구학(丘壑)에 버려서 여우와 너구리가 뜯어먹고 파리와 모기가 빨아먹도록 내버려두는 것과 같은 것이다.”하였으니, 그 의리가 아주 적절하다 하겠다. 이제 성일 형제의 처사가 그와 은연중 부합되며, 대체로 하늘에서 얻은 의리의 마음이 이와 같은 것이다. 아, 기특하도다.숭정(崇禎) 기원 후(紀元後) 8월 일에 은진 송시열은 쓴다.
    2023-08-08 | NO.205
  • 김 서장관에게 조천기를 주다 〔贈金書狀朝天記〕- 어우집(於于集) 후집> 제4권 / 기문〔記〕
    김 서장관에게 조천기를 주다 〔贈金書狀朝天記〕  압운押韻동해(東海)의 두 부사(浮槎)가 조수를 따라 흘러와 동국(東國)의 한강(漢江) 가에 이르렀다. 나와 죽계공(竹溪公)은 붙잡고 올라가 타니 그 뗏목이 유유자적 흘러갔다. 서쪽 지역에 이르러 물 하나를 건너는데 이것이 천강(天江)이고 여기를 넘으면 곧 하늘 끝이다. 옥황상제의 궁전까지 거리가 거의 구만 리인데, 이에 하고(河鼓 견우성(牽牛星))로 하여금 여섯 마리 소를 끌게 하고 방후(房侯 방성(房星))로 하여금 천사(天駟)에게 재갈을 물리게 하였다. 헌원성(軒轅星)과 진성(軫星)이 섭제성(攝提星)과 운형성(運衡星)을 따라 이르니, 이에 왕량(王良)으로 하여금 고삐를 잡게 하였다. 또 열결(列缺 번개의 신)로 하여금 채찍을 때리게 하고 풍륭(豐隆 천둥의 신)으로 하여금 수레를 밀게 하고 비렴(飛廉 바람의 신)으로 하여금 길을 깨끗이 하여 인도하게 하였다. 이 날은 날씨가 맑아 산천이 화창하여 광대한 사방이 눈에 모두 들어와 가로막힌 곳이 없었다. 곧장 북쪽으로 바라보니 거대한 낭성(狼星)이 앞으로는 턱밑 살을 밟고 뒤로는 꼬리를 밟아 넘어지면서 숨어있는데, 물어보니 위호씨(威弧氏)가 활을 팽팽하게 겨누어 쏘아 잡으려 해서라고 한다. 여기서부터는 기성(箕星)이 바람을 만들지 않고 필성(畢星)이 비를 만들지 않았다. 서쪽으로 길을 가면 어떤 곳에 이르니 자하성(紫霞城)으로 담장을 둘러 있고 다섯 개의 누각, 열 두 개의 웅장한 관문, 아홉 개의 궁문이 있으며 모두 야차(夜叉 사람을 해치는 귀신)가 지키고 있다.나와 죽계공은 길일을 가려 세 번 목욕하고 세 번 향을 훈습한 이후에 조회에 나아갔다. 구진성(句陳星)을 거쳐 천상의 문을 두드리고 우림성(羽林星)을 물리치고 광한전(廣寒殿)의 뜰에 들어가니, 그 땅은 오직 백옥(白玉)이고, 그 나무는 오직 붉은 계수나무와 흰 느릅나무이며, 그 새들은 오직 삼족오(三足烏), 붉은 새, 푸른 난새, 자줏빛 봉황, 까치이며, 그 짐승은 오직 기린, 옥토끼, 붉은 표범, 흰 호랑이며, 그 인충(鱗蟲)은 푸른 용, 검은 거북이, 검은 뱀이었다.이에 옥황상제가 화려한 일산(日傘)을 끼고 장대 의장 끝을 세우고 나오시어 균천(鈞天)의 음악을 울리고 예상(霓裳)의 곡조가 연주되는 가운데 접견하였다. 삼공(三公)과 팔좌 상서(八座尙書) 그리고 즐비한 낭료들이 북극성에 위치한 황제를 향해 공수하였다. 이에 천시성(天市星)에서 칙령을 내리고 천창성(天倉星)에서 보물을 내어오고 천고성(天庫星)에서 녹봉을 내주었다. 이어서 북두성의 긴 자루를 당겨 유하주(流霞酒)와 추로주(秋露酒)를 떠서 두 번, 세 번 권하였다. 나와 죽계공은 취하고 배가 불러 춤을 추며 되돌아와서 하늘의 은하수 가 옥으로 만든 궁전에서 묵었다.다음 날이 되자 무지개가 흐르고 번개가 치며 아름다운 상서가 연달아 나타났다. 선관(仙官)과 천인(天人)이 옥 계단에서 일제히 하례하였고 하례가 끝나자 떠났다. 옥황상제가 말하길,“너 몽인(夢寅)은 나오거라. 너는 빼어난 기운을 타고나 저 멀고 궁벽한 곳에 살고 있으니 항상 우주를 좁게 여기는 마음을 지녔구나. 내가 이 때문에 세 번 너를 불러 신선들의 반열에 있도록 했다. 아! 재주가 크면 용납하기 어려우니 너는 돌아가거든 삼갈지어다.”하였다. 또 말하길,“존경(存敬)아, 너는 총명하고 온윤하며 미더워 내가 너를 가상히 여기니 너는 가서 공경히 행할지어다.”하였다. 또 말하길,“존경아, 너는 병이 많으니 이에 나의 천의성(天醫星)에게 가서 치료하도록 명하겠다.”하였다. 또 말하길,“천의성아, 동해의 신하 존경이 학질에 걸렸으니 네가 가서 치료할지어다.”하였다. 또 말하길,“천복성(天福星)아, 너는 인간 세상의 복록(福祿)을 주관하니, 선한 사람을 가리는 것은 너에게 달려있다. 장차 몽인과 존경에 큰 복을 내릴지어다.”하였다. 또 말하길,“천덕성(天德星)아, 너는 인간 세상의 후덕(厚德)을 주관하니 훌륭한 사람에게 복을 내리고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지어다. 몽인과 존경이 그 덕을 삼가했으니 너는 이들에게 더욱 복을 내려 동방 사람으로 하여금 큰 은택을 입도록 할지어다.”하였다. 또 말하길,“노인성(老人星)아, 너는 몽인과 존경에게 각각 삼천 육백 년의 수명을 하사할지어다.”하였다. 또 말하길,“직녀성(織女星)아, 너는 손수 짠 오운(五雲)의 비단 약간 필을 내어서 두 현인의 옷을 만들지어다. 규성(奎星)과 벽성(壁星)아, 지금 너희들이 나의 문장을 주관하고 있으니 나의 조명(詔命)을 지어서 두 사람이 동쪽으로 돌아가도록 허여할지어다.”하였다. 규성과 벽성이 삼가 명을 받들어 말하기를,“땅이 봉래산(蓬萊山)과 가까워 가자미가 나는 해역에 신선을 내려 보내노라. 복과 예물을 담은 광주리를 몸소 받들고 가서 궁궐의 섬돌에서 상서로움을 바칠지어다. 발해(渤海)에서 진주를 거두니 너의 패물을 엮을 만하고, 한단(邯鄲)으로 아름다운 옥이 돌아가니 더욱 내 마음이 아프구나.”이에 나와 죽계공은 조서를 받고는 공손히 절을 하고 떠났다.東海有兩浮槎,隨潮波泊東國漢江涯。余與竹溪公攀而乘之,之槎也悠悠泛泛。至西邦越一水,曰天江,越于玆,卽天倪也。去玉皇居,殆九萬里,於是使河鼓牽六牛,使房侯銜勒天駟。有曰軒轅曰軫者,從攝提、運衡而至,乃使王良執其轡。又使列缺者施鞭,豐隆者挾輅,飛廉者淸路以導行。是日也天氣淸,山川開朗,四外曠曠乎極目,靡有碍障。直北而望,有大狼前跋後疐而遁,問之則威弧氏關弓機矢,欲將徼射之爲者,自此箕不風畢不雨。西取道至一所,有繚垣周以紫霞城,有五樓,有十二雄關,有九重,皆守以夜叉。余與竹溪公涓吉朝,三沐三舋,然後乃進。歷句陳叩天扃,排羽林入廣寒之庭,則厥土惟白玉,厥樹惟丹桂、白楡,厥鳥惟踆鴉、紅鳥、靑鸞、紫鳳、鵲鳥,厥獸惟麒麟、玉兔、赤豹、素虎,厥蟲惟碧龍、黑龜、玄蛇。於是玉皇上帝乃擁華葆之蓋,建杠竹之梢,張匀天之樂,奏霓裳之調以見之。三台、八座曁有蔚郞僚,環拱于北極之宸。乃勑天市,開珍天倉,發俸天庫。繼供引北斗長杓,挹流霞、秋露之醥,再三勸之。余與竹溪公醉且飽,蹈舞而返,乃空銀河上玉宇以館之。越翌日,流虹遶電,有休祥見隨。仙官、天人齊賀于玉墀,賀已乃辭。帝曰:“來汝夢寅。惟汝負奇氣處遐偏,常有隘宇宙心。予用是三引汝齒列仙。吁!材大難容,汝歸愼旃。” 曰:“存敬,惟汝聰明溫諒,予嘉乃,欽哉汝往。” 曰:“存敬,汝惟多疢,庸命予天醫往診之。” 曰:“天醫,惟東海臣存敬遘瘧,汝往藥之。” 曰:“天福,汝管人間福祿,惟相善在汝,其福夢寅、存敬甚鉅。” 曰:“天德,汝能主世間德厚,祜碩人惠黔首。惟夢寅、存敬,愼厥德,汝其益之,俾東方蒙丕澤。” 曰:“老人,汝錫夢寅、存敬壽各三千六百年。” 曰:“織女,汝出汝手織五雲錦若干匹,衣兩賢。曰奎曰璧,今汝掌予文章,其製予詔辭,許兩人東歸。” 奎、璧拜命而稱曰:“地近蓬萊,降仙鰈域。身承筐篚,奠瑞龍階。渤海收珠,可綴汝佩;邯鄲還璧,益疚予懷。” 於是余與竹溪公受詔,拜手稽首而辭。[주-D001] 김 …… 주다 : 이 글은 김존경(金存敬, 1569~1631)을 위해 쓴 조천기(朝天記)이다. 김존경의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수오(守吾), 호는 죽계(竹溪)이다. 1617년(광해군 9)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갔었으며, 이후 강원 감사, 지중추부사, 경주 부윤을 역임하였다가 인조반정 이후 대북파의 몰락과 함께 관직에서 밀려났다.[주-D002] 두 부사(浮槎) : 부사는 바닷가와 은하수를 왕래하는 전설상의 뗏목이다. 여기서는 저자와 김존경이 중국으로 사신을 가기 위해 각각 이 뗏목을 타는 것을 가리킨다.[주-D003] 왕량(王良) : 춘추 시대 사람인데 말을 잘 다루었다. 《회남자(淮南子)》 〈남명(覽冥)〉에 “옛날 왕량(王良) 조보(趙父)가 수레에 올라 고삐를 잡으면 말이 차분해서 발을 옮기는 것이 일정하며 노일(勞逸)이 한결같다.” 하였다.[주-D004] 위호씨(威弧氏)가 …… 잡으려 : 장형(張衡)의 〈사현부(思玄賦)〉에 “위호를 휘어지도록 당겨 파총산의 큰 이리를 쏘리라.[彎威弧之拔剌兮, 射幡冡之封狼.]”라고 한 말이 보인다. 여기서는 북쪽 오랑캐들이 중국의 위엄에 숨죽이고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주-D005] 기성(箕星)이 …… 않았다 : 《서경》 〈홍범(洪範)〉에 “서민은 별과 같다. 별은 바람을 좋아하는 것도 있고 비를 좋아하는 것도 있다.” 했는데, 그 주에 “기성은 바람을 좋아하고 필성(畢星)은 비를 좋아한다.” 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주-D006] 구진성(句陳星) : 별 이름으로 북극에 가장 가까운 여섯 개 별 중의 하나이다. 천자(天子)의 군대를 주관한다고 하며, 금군(禁軍)을 상징한다.[주-D007] 우림성(羽林星) : 별 이름으로, 황제의 친위 군병(親衛軍兵)인 금위군(禁衛軍)을 가리킨다.[주-D008] 균천(鈞天)의 음악 : 균천광악(鈞天廣樂)으로 천상(天上)의 음악을 가리킨다.[주-D009] 예상(霓裳)의 곡조 : 선인(仙人)을 노래한 무곡(舞曲)으로,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이라고도 한다. 8월 보름에 나공원(羅公遠)이 당 현종(唐玄宗)과 함께 월궁(月宮)에 갔더니, 선녀 십여 명이 흰 비단 무지개 치마를 입고 넓은 뜰에서 춤추고 있었다. 그 곡의 이름을 물으니 ‘예상우의’라 하기에 나공원이 그 음조를 기억하고 돌아와 악공을 불러 그대로 지었다.[주-D010] 세 …… 불러 : 저자가 1591년(선조24)에 주청사(奏請使) 질정관(質正官)으로, 1596년에 진위사(進慰使) 서장관(書狀官)으로, 1609년(광해군1)에 성절사 겸 사은사(聖節使兼謝恩使)로 중국에 사신간 것을 가리킨다.[주-D011] 한단(邯鄲)으로 …… 돌아가니 : 한단은 전국 시대 조(趙)나라의 수도이다. 조나라 혜문왕(惠文王)이 화씨벽(和氏璧)을 얻자, 진(秦)나라 소왕(昭王)이 15개 성과 바꾸자고 청했다. 이에 인상여(藺相如)가 화씨벽을 가지고 진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소왕이 구슬을 받고 나서 약속을 이행할 생각이 없음을 알고는 다시 계교를 써서 빼앗은 뒤 온전히 조나라로 돌려보냈다. 《史記 卷81 廉頗藺相如列傳》 여기서는 천상에 왔다가 복과 예물을 가지고 온전히 귀국한 사신 일행을 가리킨다.[주-D012] 더욱 …… 아프구나 : 옥황상제가 천상에 온 사신 일행이 잠깐 있다가 떠나자 아쉬워하는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 어우(於于)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의 원집(原集 전집) 6권과 후집 6권 도합 6책 12권으로 된 문집 <어우집(於于集) 후집> 제4권 / 기문〔記〕
    2020-08-23 | NO.204
  • 김극광-社稷壇祈雨祭文 사직단기우제문
    社稷之立本以爲民民之不淑責在明神惟玆亢早不日不月始自種綿 汔于收麥有草皆枯靡穀不痒矧令民事正急分秧泉源亦渴抱甕何補 民之遑遑如彼涸鮒昨者油然霓望正切凄風撥雲虐炎增鑠將雨不雨 神意莫測豈社不臨豈稷不克禦灾捍患民固望神降福佑民此維其辰 胡閟霈澤而爲此虐若過旬時雖雨無及速回玄機甘㴻斯洽高田決渠 枯苗勃興三農慰滿百穀豊登豈惟吾民鼓腹樂生神之粢盛亦頼而出 春秋潔祀庶永無缺自惟菲寸新莅玆邑獲罪神明灾及生靈恐惧柢慄 不敢遑寧適病在床薦不以躬替遣鄕紳陳此醴牲神其降歆庶格微誠-원관헌집(遠觀軒集) 권9김극광(金克光, 1653-1724)의 자는 현보(顯甫)이며, 호는 원관(遠觀)이다. 사직의 본분은 백성을 위한 것이다는 내용이다.
    2018-07-10 | NO.203
  • 김덕령 - 자해필담(紫海筆談)
    김덕령 - 자해필담(紫海筆談) : 하담(荷潭)김시양(金時讓, 1581~1643)<중략>이몽학(李夢鶴)이란 자는 서울의 천한 서얼인데, 몹시 방자하고 건방져서 그의 아비에게 내쫓기었다. 호서와 호남 사이를 왔다 갔다 하다가 한현(韓絢)이 선봉장이 되자 그의 군대에 예속되어 한현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선조 29년 7월에 이몽학이 먼저 홍산(鴻山)에서 군사를 일으켜 그 고을의 수령 윤영현(尹英賢)을 사로잡고 또 임천 군수(林川郡守) 박진국(朴振國)을 사로잡으니, 인심이 무너지고 흩어져서 감히 항거하는 자가 없었다. 잇따라 6ㆍ7개의 고을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한현은 일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고 호응하지 않았다. 이몽학이 진군하여 홍주(洪州)를 핍박하니, 목사 홍가신(洪可臣)은 일이 뜻밖에 일어났으므로 손을 써볼 계책이 없이 다만 성문을 닫을 뿐이었다. 도원수의 종사관 신경행(辛景行)이 마침 왔다가 격문(檄文)을 보내어 수사 최호(崔湖)를 불렀다. 최호가 군대를 거느리고 성안으로 들어오니, 인심이 비로소 진정되었다. 무장 박명현(朴命賢)은 날래고 꾀가 있는 사람인데, 상주노릇을 하느라고 고을 안에 있었다. 홍가신이 부르자, 박명현은 즉시 융복(戎服)을 갖추고 성안으로 들어왔다. 그리하여 성의 수비는 더욱 견고하게 되었다. 이몽학이 처음 군사를 일으킬 때에 그의 무리들에게 속여 말하기를,“김덕령(金德齡)이 나와 약속이 있고, 도원수ㆍ병사ㆍ수사도 다 내통되어 있으므로 반드시 호응할 것이다.”하여, 여러 무리들이 그렇게 여겼는데, 홍주에 군사를 내어 주둔하게 되었을 때, 여러 무리들은 수사가 군사를 거느리고 성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비로소 그가 속였음을 알았다. 그리하여 군사의 사기가 떨어져서 밤중도 안 되어 반군(叛軍)은 무너지고 말았다. 윤영현이 뛰어나와 성 아래에 이르러 부르짖기를,“적병이 무너져 흩어졌으니 나와서 뒤쫓아 치소서.”하였으나, 성중에서는 믿지 않고 명하여 윤영현을 묶어서 잡아 오게 하였다. 그러나 새벽이 되어서 살펴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성중은 비로소 후회하고 군사를 내보내어 추격해서 많은 포로와 수급(首級)을 얻었다. 그의 부하 임억명(林億明)이란 자가 이몽학의 머리를 베어 바치었다. 한현도 일이 발각되어 베임을 당하였다.김덕령(金德齡)이란 사람은 광주(光州)의 교생(校生)인데, 용맹과 힘이 있었으며 스스로 둔갑술을 안다고 하였다. 이귀(李貴)가 그를 믿고 무군사(撫軍司)에 추천하기를,“용과 범을 쫓아 잡고 공중을 날아다니며, 지혜는 제갈공명(諸葛孔明) 같고 용맹은 관우(關羽)보다 더하다.”하니, 세자가 불러서 보고 장려하여 익호장군(翼虎將軍)을 임명하였는데, 선묘가 그 칭호를 초승장군(超乘將軍)이라고 고쳤다. 이때 온 나라가 두려워 떨며 그를 신장(神將)이라고 하였으며, 김덕령 자신도 또한 그렇게 스스로 믿어 사양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상은 술에 취하여 기세를 부리고 법을 어겨 쓸 만한 사람이 못되어, 적진과 3년을 마주 대했지만 한 치의 공도 없었다. 마침내 헛이름 때문에 이몽학이 무리에게 이끌려 이용되었다가 고문을 받고 죽었으니, 이 또한 스스로 화를 부른 것이다.적당이 김덕령의 이름을 인용하자, 상은 매우 놀라 즉시 좌우를 물리치고 여러 대신들과 의논하기를,“김덕령은 용맹이 삼군(三軍)에 으뜸이고 또 친히 거느린 군사가 있으니, 만일 포박에 응하지 않는다면 어찌할 것인가?”하니, 유서애(柳西厓)가 대답하기를,“반드시 명령을 감히 거역하지 못할 것입니다. 서성(徐渻)이 새로 영남에서 왔으므로 반드시 사정을 알 것이오니, 청컨대 그에게 물어보소서.”하였다. 서성이 대답하기를,“신이 오랫동안 남쪽 고을에 있으면서 그의 하는 바를 보니, 망령되고 범상한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용맹과 힘이 있다고 하지만 또한 남보다 썩 뛰어난 것은 아니오며, 크게 민심을 잃어서 친히 거느린 군사들도 다 다른 마음을 품고 있으므로 비록 명령을 거역하고자 하여도 또한 될 수 없을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네가 잡아올 수 있겠느냐?”하니, 대답하기를,“만약 도망해 숨었다면 신이 잡아올 수 없으나 그렇지 않다면 그를 체포하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듯 쉽습니다.”하였다. 상이 위태롭게 여기니, 서애가 아뢰기를,“서성이 어찌 감히 성상의 위엄있는 지척의 거리에서 감당할 수 없는 일을 큰소리 치겠습니까? 그 말이 꼭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신이 보장하겠습니다.”하였다. 서성이 말하기를,“한명련(韓明璉)이 지금 영남에 있는데, 또한 용감하옵니다. 그를 시켜서 도모하게 하고, 김응서(金應瑞)로서 항복한 왜병(倭兵) 50인을 이끌고 조력하게 한다면 김덕령이 어찌 감히 맞서 버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신의 계산으로는, 김덕령이 반드시 손을 모아 포박을 받을 것이므로 반드시 이러한 사태에까지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하였다.이에 상이 서성에게 명하여 급전(急傳)을 타고 가서 잡아오게 하였다. 서성이 가다가 전주(全州)에 이르니, 도원수 권율(權慄)이 이미 김덕령을 진주(晉州)에 감금하고 있었다.권율도 그가 명령에 거역할 것을 염려하여 은밀히 성윤문(成潤文)을 시켜서 도모하게 하였다. 성윤문이 은밀히 김덕령에게 군무(軍務)를 의논하자고 청하니, 김덕령이 알아차리지 못하고 단기(單騎)로 왔다. 좌정한 뒤에 성윤문이 그의 손을 잡으며 말하기를,“조정에서 자네를 잡으라고 명하였네.”하니, 김덕령이 즉시 꿇어앉아 말하기를,“상의 명령이 있었다면 어찌 이렇게까지 하오? 원컨대 나의 손을 뒤로 돌려 묶으시오.”하였다. 성윤문은 그의 원통함을 가엾게 여겨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다만 그의 두 손에 수갑만을 채워서 옥(獄)으로 보냈다. 서성은 김덕령이 이미 갇혔다는 말을 듣고, 조정에 장계를 올리기를,“권율이 김덕령에게 이몽학을 치게 했는데, 김덕령이 4일 동안 머뭇거리며 성패를 관망하므로 가두었습니다.”하였다. 그 여덟 글자가 드디어 김덕령의 단안(斷案)이 되어 사죄를 면치 못하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서성의 잘못이라고 했다.<하략>
    2020-09-25 | NO.202
  • 김덕령 옥사에 대한 계〔金德齡獄事啓〕 -약포집
    김덕령 옥사에 대한 계〔金德齡獄事啓〕 -약포집 제3권 / 계(啓) : 정탁(鄭琢, 1526~1605)김덕령의 옥사에 대해서 신은 끝내 의혹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덕령은 특별히 근거할 만한 정황이 없고 다만 적들의 입에 이름이 올랐다는 이유로 그가 역모를 꾀했다고 의심하여 기어코 죽이고 만다면, 어떻게 나라 사람들의 의혹을 풀 수 있겠습니까. 덕령의 이름은 나라 사람들이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적(夷狄)과 중화(中華)에서도 모두 알고 있습니다. 왜적의 괴수가 당초에 도당들을 모아 어리석은 백성들을 유인하고 협박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저대로 허장성세(虛張聲勢)하여 말하기를 “우리의 오늘 거사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아무개 진영의 아무개 장군도 올 것이며, 아무개 지역의 아무개 역사도 이를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한 사람이 주창하면 백 사람이 화답하니 이는 흉악한 무리들이 꾀하는 가장 심각한 것입니다. 적중의 일도 반드시 이런 도모가 없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홍계남(洪季男)에 있어서는 이때 성을 지키고 있어서 이름이 조금 알려졌기 때문에 면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끝내 덕령에게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덕령은 이름이 가장 높았기 때문에 적들의 입에 오르내림이 더욱 심했던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반드시 역모에 참여했다고 지목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무릇 왜적을 호남으로 불러들여 왕래하면서 서로 통했다고 하기에, 이를 조사해 보니 대개 입증이 되지 않았고, 5도의 군마(軍馬)가 함께 왔다는 말도 왜적들이 하는 말과 같아서 과장된 말이 없지 않으니 결코 이것을 근거로 믿어서는 안 됩니다. 옛날 부소(扶蘇)와 항연(項燕)은 죽은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진승(陳勝)의 무리들은 오히려 그들의 이름을 빌렸으니, 덕령을 역괴(逆魁)라는 구설수에 올리는 것이 어찌 괴이하지 않겠습니까.무릇 왜적이 장황하게 한 말은 대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알기 어렵지 않습니다. 덕령이 남하한 뒤 마침 시의(時宜)를 잃어버려서 비록 기록할 만한 작은 공로가 없었지만, 군대를 잃고 나라를 욕보인 죄도 별로 없었습니다. 호남의 왜적들이 난을 일으키던 초기에 원수(元帥)의 전령(傳令)을 듣고는 그날 즉시 병사를 동원해서 그다음 날 길을 떠났고, 또한 머뭇거리거나 관망한 자취도 별로 없었습니다. 다만 적들의 입에 이름이 올랐다는 이유로 정황을 따져보지도 않고 서둘러 엄한 국문을 하여 경폐(徑斃 형을 집행하기 전에 죽음)하게 한다면, 죄명이 명백하지 않아서 국인들의 의심이 끝내 풀리지 않을 것이며 남쪽 변방의 장수된 자들이 서로 두려워할 것이니, 모두가 전전반측하며 불안한 마음을 품게 된다면 아마도 국가의 복이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신의 지나친 염려는 처음부터 끝까지 여기에 있었습니다.그리고 국가의 많은 어려움이 아직도 진정되지 않았고 해구(海寇)들의 정황도 예측하기 어려운데 이유도 없이 한 명의 명장을 죽인다면, 왜적의 비웃음만 사게 되고 난리를 평정하는 정책에는 아무런 보탬이 없게 될까 매우 두렵습니다. 진실로 가볍게 풀어 줄 수 없다고 여기신다면 또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덕령이 진실로 역모를 꾀하였다면 그 정적(情跡)을 만에 하나라도 끝내 가릴 수 있는 이치가 없었을 것이니 우선 옥에 그대로 가두어 두는 것만 못합니다. 시일을 늦추어 정적(情跡)이 밝게 드러나기를 기다린 뒤에 죄를 성토하여 죽인다면 국법을 씀에 구차하지 않고 죄인은 변명이 없이 죽음으로 나아갈 것이고, 국인들의 의혹 또한 크게 해소될 것이며, 남쪽 변방의 장사들 중에 진력하는 자들도 거의 모두 저절로 안심하여 결국 전전반측하는 마음이 없게 될 것이니, 어찌 다행스럽지 않겠습니까? 삼가 상께서 재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주-D001] 김덕령(金德齡) : 1567~1596.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경수(景樹)이다. 전라도 광주(光州) 출신으로, 1596년(선조29)에 도체찰사 윤근수(尹根壽)의 노복을 장살하여 투옥되었으나 영남 유생들의 상소와 약포 정탁(鄭琢)의 변호로 곧 석방되었다. 그해 7월 홍산(鴻山)에서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충청도 체찰사 종사관 신경행(辛景行)과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이 이몽학과 내통했다고 무고하였다. 그리하여 최담년ㆍ곽재우ㆍ고언백(高彦伯)ㆍ홍계남(洪季男)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에 정탁ㆍ김응남(金應南) 등은 김덕령이 이몽학과 무관함을 힘써 변명하였으나 20일 동안 여섯 차례의 혹독한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주-D002] 부소(扶蘇) : ?~기원전 210. 진 시황(秦始皇)의 장자(長子)로 성품이 인자했으나, 진 시황의 노여움을 사, 북쪽으로 보내어 장군 몽염(蒙恬)의 군사를 감시하게 되었는데, 뒤에 이사(李斯)ㆍ조고(趙高)에 의하여 거짓 조칙(詔勅)으로 사사(賜死)되고 말았다. 《史記 卷6 秦始皇本紀》[주-D003] 항연(項燕) : ?~기원전 223. 전국 시대 말 초(楚)의 장군으로, 항량(項梁)의 아버지이며, 항우(項羽)의 조부이다. 진나라 장수 왕전(王剪)에게 초군(楚軍)이 대패하자 창평군(昌平君)을 초왕으로 세우고 진에 대항하다가 왕전ㆍ몽무(夢武)에게 패하여 자살하였다. 《漢書 卷31 陳勝項籍傳》[주-D004] 진승(陳勝)의 …… 빌렸으니 : 진 이세(秦二世) 때 진승이 오광(吳廣)과 함께 반기를 들고일어나면서 이미 죽은 진의 공자 부소와 초(楚)의 장수 항연이 살아 있다가 나타난 것처럼 꾸며 백성들의 호응을 모았다. 《史記 卷48 陳涉世家》
    2020-12-31 | NO.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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