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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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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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목사(光州牧使) 김윤현(金胤鉉)이 천거하는 수령과 변장
    호남계록(湖南啓錄)○고종(高宗) / 고종(高宗) 23년(1886)정월 13일 승정원 개탁매년 봄 맹월(孟月 1월)에 동반(東班 문반(文班)) 3품 이상 서반(西班 무반(武班)) 2품 이상은 각각 수령과 변장에 합당한 사람을 천거하되 모두 세 사람을 넘을 수 없다고 법전에 실려 있습니다. 신이 천거하는 수령과 변장의 천거 단자 각 1건, 병사(兵使) 조희철(趙羲轍)이 천거하는 수령과 변장의 천거 단자 각 1건, 나주 목사(羅州牧使) 박규동(朴奎東)이 천거하는 수령과 변장의 천거 단자 각 1건, 광주 목사(光州牧使) 김윤현(金胤鉉)이 천거하는 수령과 변장의 천거 단자 각 1건, 능주 목사(綾州牧使) 홍우경(洪祐慶)이 천거하는 수령과 변장의 천거 단자 각 1건, 남원 부사(南原府使) 민길호(閔吉鎬)가 천거하는 수령과 변장의 천거 단자 각 1건, 진도 부사(珍島府使) 장봉진(張鳳鎭)이 천거하는 수령과 변장의 천거 단자 각 1건, 장흥 부사(長興府使) 유치희(兪致喜)가 천거하는 수령과 변장의 천거 단자 각 1건, 순천 부사(順天府使) 이범진(李範晉)이 천거하는 수령과 변장의 천거 단자 각 1건, 담양 부사(潭陽都護府使) 김승집(金升集)이 천거하는 수령과 변장의 천거 단자 각 1건, 장성 부사(長城府使) 이희(李僖)가 천거하는 수령과 변장의 천거 단자 각 1건, 무주 부사(茂朱都護府使) 김우근(金右根)이 천거하는 수령과 변장의 천거 단자 각 1건, 여산 부사(礪山府使) 이인술(李寅述)이 천거하는 수령과 변장의 천거 단자 각 1건, 방답 첨사(防踏僉使) 우창배(禹昌培)가 천거하는 수령과 변장의 천거 단자 각 1건, 고금도 첨사(古今島僉使) 정흥득(鄭興得)이 천거하는 수령과 변장의 천거 단자 각 1건, 임자도 첨사(荏子島僉使) 김효원(金孝源)이 천거하는 수령과 변장의 천거 단자 각 1건, 도합 단자 32건을 모두 봉하여 올려 보냅니다. 그런데 제주 목사(濟州牧使) 홍규(洪圭)가 천거하는 단자는 동 주가 바다 밖 절도(絶島)라서 아직 나오지 않았으므로 보고해 오기를 기다려 추후에 올려 보낼 계획입니다. 연유를 아울러 치계하오니 잘 아뢰어 주소서.광서 12년 정월 13일관찰사 윤(尹)의 천거 단자수령(守令)에 적합한 3인…전(前) 봉사(奉事) 김요영(金堯英), 전 참봉(參奉) 황병수(黃秉秀), 전 가감역(假監役) 김동석(金東錫).변장(邊將)에 적합한 3인…절충 장군(折衝將軍) 장희풍(張喜豐), 절충 장군 이재섭(李在燮), 가선 대부(嘉善大夫) 김준희(金俊喜).병사 조희철의 천거 단자수령에 적합한 3인…공사관(公事官) 이기방(李起邦), 선전관(宣傳官) 정희열(鄭熙烈), 선전관 한규석(韓珪錫).변장에 적합한 3인…사과(司果) 신태훈(申泰勳), 절충 장군 방수찬(房洙燦), 출신(出身) 백동조(白東祚).나주 목사 박규동의 천거 단자수령에 적합한 3인…전 감역(監役) 서인순(徐璘淳), 전 감역 정재범(鄭在範), 석성 현감(石城縣監) 이주필(李周弼).변장에 적합한 3인… 전 오위장(五衛將) 손응설(孫應契), 전 오위장 최정권(崔廷權), 출신 김보선(金普善).광주 목사 김윤현의 천거 단자수령에 적합한 3인…창평 현령(昌平縣令) 윤원(尹瑗), 정읍 현감(井邑縣監) 한용원(韓龍源), 임실 현감(任實縣監) 이문연(李文淵).변장에 적합한 3인…전 오위장 최시묵(崔時黙), 전 오위장 최형식(崔亨植), 출신 박의풍(朴義豐).능주 목사 홍우경의 천거 단자수령에 적합한 3인…호조 좌랑(戶曹佐郎) 박교양(朴敎陽), 동몽교관(童蒙敎官) 윤상철(尹相澈), 태릉 영(泰陵令) 홍종철(洪鍾喆).변장에 적합한 3인…전 사과(司果) 박지규(朴志奎), 전 오위장 김필현(金弼鉉), 전 사과 문찬석(文贊錫).남원 부사 민길호의 천거 단자수령에 적합한 3인…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김병완(金炳琬), 경모궁 영(景慕宮令) 오우선(吳友善), 금부도사(禁府都事) 이능구(李能九).변장에 적합한 3인…전 오위장 백재명(白載明), 전 오위장 이진항(李震沆), 전 수문장(守門將) 백영균(白永均).진도 부사 장봉진의 천거 단자수령에 적합한 3인…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 이희일(李熙一), 부장(副將) 심흥택(沈興澤),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 이교영(李敎榮).변장에 적합한 3인…출신 방병구(方柄九), 출신 허상(許尙), 출신 김필조(金弼祚).장흥 부사 유치희의 천거 단자수령에 적합한 3인…창평 현령(昌平縣令) 윤원(尹瑗), 옥과 현감(玉果縣監) 이만익(李萬翼), 무장 현감(茂長縣監) 이희익(李熹翼).변장에 적합한 3인…사과(司果) 위남(魏楠), 사과 엄흥국(嚴興國), 사과 김용달(金龍達).순천 부사 이범진의 천거 단자수령에 적합한 3인…공조 정랑(工曹正郎) 이범선(李範善), 금부도사 심상황(沈相璜), 부사과(副司果) 이교석(李敎奭).변장에 적합한 3인…출신 정치명(鄭致明), 출신 최상헌(崔祥獻), 출신 이기민(李基民).담양 부사 김승집의 천거 단자수령에 적합한 3인…창평 현령(昌平縣令) 윤원(尹瑗), 임실 현감(任實縣監) 이문연(李文淵),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 오영석(吳榮錫).변장에 적합한 3인…금성 별장(金城別將) 박동국(朴同國), 전 오위장 김관표(金寬杓), 전 오위장 국은묵(鞠殷黙).장성 부사 이희의 천거 단자수령에 적합한 3인…창평 현령(昌平縣令) 윤원(尹瑗), 동복 현감(同福縣監) 조성희(趙性憙), 옥구 현감(沃溝縣監) 기양연(奇亮衍).변장에 적합한 3인…전 별장 이용중(李容中), 전 만호 김종우(金鍾祐), 전 만호 김두환(金斗煥).무주 부사 김우근의 천거 단자수령에 적합한 3인…전 부솔(副率) 김병식(金炳軾), 전 판관 양주방(梁柱邦), 전 감역(監役) 김석구(金錫九).변장에 적합한 3인…한량(閑良 무과 응시자 혹은 무반 출신자로서 아직 무과에 합격하지 못한 사람) 김재홍(金在洪), 출신 김환창(金煥昌), 한량 김문귀(金文龜).여산 부사 이인술의 천거 단자수령에 적합한 3인…전 우후(虞候) 오윤영(吳允泳),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 이병덕(李秉德), 전 사과 서상선(徐相璇).변장에 적합한 3인…동지(同知) 황종구(黃鍾九), 전 만호 이성윤(李盛潤), 중추부사(中樞府事) 강응주(姜應周).방답 첨사 우창배의 천거 단자수령에 적합한 3인…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 김재석(金在奭), 중추부사(中樞府事) 이승윤(李承潤),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 손은달(孫殷達).변장에 적합한 3인…자헌 대부(資憲大夫) 최두환(崔斗煥), 가선 대부(嘉善大夫) 임병섭(林秉燮), 절충 장군(折衝將軍) 오준환(吳俊煥).고금도 첨사 정흥득의 천거 단자수령에 적합한 3인…통훈 대부(通訓大夫) 김수억(金壽億), 전 감목관(監牧官) 한억길(韓億吉), 전 수문장(守門將) 이종선(李鍾善)변장에 적합한 3인…가선 대부(嘉善大夫) 천재길(千載吉), 가선 대부 신흥성(申興成), 출신 박원근(朴元根).임자도 첨사 김효원의 천거 단자수령에 적합한 3인…전 교리(校理) 신덕균(申德均), 전 감역(監役) 정해추(鄭海陬), 전 주서(注書) 고시면(高時勉).변장에 적합한 3인…출신 김홍석(金泓錫), 출신 이봉식(異鳳植), 출신 김선익(金善翼).[주-D001] 출신(出身) : 문ㆍ무과(文武科) 또는 잡과(雜科)에 급제하고 아직 출사(出仕)하지 못한 사람. 주로 무과 급제자를 지칭함.[주-D002] 우후(虞候) : 조선 시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의 보좌관으로서 병마우후(兵馬虞候)는 종3품, 수군우후(水軍虞候)는 정4품이었다. 병마우후는 병사(兵使)의 유고(有故) 시에 도내의 군사 전반을 다루는 일 외에도 여러 읍(邑)을 순행하면서 지방군 훈련, 군기(軍器) 정비 상황 등을 살피고 명령 전달과 군자(軍資)의 관리를 담당하였다. 수군우후는 충청도, 전라좌ㆍ우도, 경상좌ㆍ우도의 5수영(水營)에만 있었는데 그 역할은 병마우후와 유사했을 것으로 추측됨.
    2023-08-16 | NO.230
  • 광주목사(光州牧使) 민영우(閔泳愚) (1886.6.27. 제수)
    호남계록(湖南啓錄)○고종(高宗) / 고종(高宗) 23년(1886)9월 26일 승정원 개탁이번에 도착한 광주 목사(光州牧使) 민영우(閔泳愚)의 첩정(牒呈)에, “목사는 통정 대부(通政大夫) 강원도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지난 6월 27일 정사(政事)에서 본직에 제수되고 하직인사는 생략하라는 관문(關文)을 받들고 9월 16일에 도임(到任)하였습니다.”라고 보고해 왔습니다. 연유를 치계하오니 잘 아뢰어 주소서.광서 12년 9월 26일
    2023-08-16 | NO.229
  • 광주목사로 부임하는 곽문징(郭文徵)을 전송하는 서(送郭光州文徵序)
    아! 수십 년 동안에 군과 나눈 만남은 항상 나그네 길에서였다. 지금 나는 가련하게도 벌써 늙어 인사(人事)를 기약하기 어렵다. 더구나 광주는 경성에서 천 리나 떨어져 있는 곳이 아닌가.미수(眉叟) 허목(許穆) 《기언》 별집 제8권 / 서(序)
    2023-06-28 | NO.228
  • 광주와 나주의 유생(儒生)에게 답함 - 한수재선생문집 제19권
    광주와 나주의 유생(儒生)에게 답함 - 한수재선생문집 제19권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 1641~1721)삼가 보내 주신 편지를 받아 보고 고해 주신 뜻을 잘 알았습니다. 지난번에 김생(金生)이 나주 제유(諸儒)의 편지를 가지고 와서 두어 분[數公]의 배향에 관한 일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나의 생각에는, 두 박공(朴公)은 향사하는 곳이 한두 군데에 그치지 않고, 관해(觀海 임회(林澮)) 역시 조정에서 정포(旌褒)하는 은전을 입었으니, 온 고을의 공공한 논의를 인하여 이미 건립된 사우(祀宇)에 배향되는 것이 별로 해로울 것이 없을 듯하기에, 매우 훌륭한 일이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첨존(僉尊)의 편지가 이와 같으므로, 이제야 비로소 다사(多士)들의 의논이 서로 모순됨이 있음을 알고서 자못 의아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일의 여하를 막론하고 과연 당초부터 온 고을의 공공한 뜻이 아니었다면 이 천 리 밖에 있는 내가 어찌 강제로 권하거나 저지할 수 있겠습니까.대저 경현서원(景賢書院)과 월정서원(月井書院)에 대해서는 내가 외람되이 원임(院任)이 되어 있으니, 원중의 모든 일은 부득불 참여해야겠지만 그 밖의 향론(鄕論)이야 어찌 일마다 간섭해야겠습니까. 모름지기 양찰하시어 다시는 그런 일을 묻지 마시기 바랍니다. 서하사우(西河祀宇 서하는 이민서(李敏叙)의 호임)를 별도로 세우는 일에 대해서는 의논이 이미 귀일되었다 하니, 앞으로는 서로 싸움의 단서가 없겠습니다.
    2020-09-29 | NO.227
  • 광주의 정즐(鄭隲, 1495~1564)
    *유희춘, 《미암집》 제14권 / 일기(日記) 병자년(1576, 선조9) 12월 7일“광주의 정즐(鄭隲)과 장성의 정운룡(鄭雲龍)이 모두 기고봉(奇高峯)의 제자인데, 지조와 행실이 취할 만한 사람입니다.”용산(龍山) 정즐(鄭騭, 1495~1564) 기대승의 스승이다. 기대승이 첫번째 스승 김공집(金公緝) 밑에서 11새 때 '연구(聯句)'를 지은 4년 뒤인 15세 때 정즐 밑에서 130구에 이르는 '서경부(西京賦)'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용산 정즐의 평을 바탕으로 그 내용을 살펴보면, 「西京賦」가 비록 澁하고 疵한 곳이 조금 있다고는 하나 思가 遠하고, 氣가 壯하며, 語가 高하고, 辭가 達하여 내용이 걸출하여 일찍부터 奇大升의 시문에 대한 자질을 가히 짐작하기에 충분했다는 이야기이다. 이 용산의 평가는 시인으로서 奇大升의 자질을 높이 찬양하는 내옹이다.*2023.6.1. 수정
    2023-05-15 | NO.226
  • 광주의 제유들에게 답하다〔答光州諸儒〕- 미호집
    광주의 제유들에게 답하다〔答光州諸儒〕- 미호집 제8권 / 서(書) : 김원행金元行(1702~1772) 말씀하신 경렬사(景烈祠)에 금남(錦南)을 배향해야 하는지의 여부는, 선향(仙鄕)이 평소 문헌(文獻)이 있는 고을로 일컬어지고 있으니, 서로 더불어 자세하게 강구한 다음 신중하게 처리하면 될 것입니다. 멀리 칩복하고 있는 국외자가 어떻게 감히 참여하여 논할 문제이겠습니까. 그런데 저의 의견을 기다려 결정하시려는 듯하니,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더 두려워 식은땀이 흐르게 합니다. 다만 이미 질문을 받았으니, 감히 대답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금남은 비록 대난(大難)을 막은 공로가 있기는 하지만 애초 명예와 절조가 있는 도학자(道學者)와 비길 대상이 아니니, 사림이 굳이 높여서 제사를 받들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도 옳습니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본래 그 사람은 충의(忠義)가 우뚝하여 한때 기회를 만나 공을 세운 무리와는 격이 다릅니다. 따라서 경렬(景烈)의 명손(名孫)으로 여기에 종향(從享)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으니, 사림이 여기에서 제향(祭享)하는 것이 찜찜할 일은 아닐 듯합니다.애초 일을 시작할 때 자세히 상의하여 결정하는 것이 좋았을 것입니다. 배향된 지가 벌써 여러 해인데 중도에 거두자는 의론을 하는 것은 사체(事體)가 몹시 중대합니다. 대체로 그 사람에게 중대한 허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모시고 난 뒤 다시 내치는 경우는 없으니, 금남이 비록 사문(斯文)과는 상관이 없는 듯하지만, 또 어찌 내칠 만한 허물이 있겠습니까.그리고 우리들이 숭보(崇報)하는 대상은 정위(正位)에 있으니, 어찌 굳이 그 배위(配位)로 인하여 마침내 경건히 모시는 의리를 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어리석은 저의 견해는 이와 같은데 반드시 이치에 맞지는 못할 것입니다. 삼가 여러분들께서 깊이 생각하신 다음 취사하시기를 바랄 따름입니다.[주-D001] 경렬사(景烈祠) : 고려 시대 명장 정지(鄭地)를 모신 사당으로, 전라도 광주 망월동에 있다.[주-D002] 금남(錦南) : 금남군(錦南君)에 봉해진 정충신(鄭忠信, 1576~1636)으로,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가행(可行), 호는 만운(晩雲),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고려 명장 정지(鄭地)의 9대손으로 금천군(錦川君) 정윤(鄭綸)의 아들이다. 임진왜란 때 어린 나이로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종군하였으며, 이괄(李适)의 난에 공을 세워 금남군에 봉하여졌다. 부원수, 포도대장,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으며, 광주(光州) 경렬사(景烈祠)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만운집》, 《금남집》, 《백사북천일록(白沙北遷日錄)》 등이 있다.[주-D003] 경렬(景烈) : 정지(鄭地)의 시호이다.
    2020-12-14 | NO.225
  • 광주학기〔光州學記〕 - 강한집 제9권
    광주학기〔光州學記〕 - 강한집 제9권 : 강한(江漢) 황경원(黃景源 1709~1787)예부터 사제(師弟)의 도리가 결여되었는데 부자(父子)가 그 윤리를 온전히 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믿지 않는다. 아들이 아버지에 대해서는 은혜를 위주로 하고 제자가 스승에 대해서는 의리를 위주로 한다. 그러나 섬기는 방법에는 다른 점이 있지 않다.스승이 식사를 하시려 하면 옷깃을 여미고 반찬을 차리되 술은 왼쪽에 장은 오른쪽에 놓으며, 채소국을 먼저 올린 뒤에 조수와 어별 반찬을 놓는다. 식사를 마치시면 빨리 달려가 양치할 물을 올리니 이것이 제자가 음식을 올리는 예절이다. 물을 대야에 담아 문으로 들어가서는 빗자루를 잡고 쓰레받기를 내려놓고 아랫목에서부터 물을 여기저기 뿌리는데 경쇠처럼 허리를 굽혀 일을 한다. 청소를 다 했으면 물러나와 쓸어낸 방안의 먼지를 문 안에 모아두니 이것이 제자가 물 뿌리고 쓰는 예절이다.어두워지면 구석에 앉아서 오른손으로는 초를 잡고 왼손으로는 초의 타고 남은 부분을 정리한다. 불이 꺼지려 하면 다시 새 초로 불을 갈되, 앞에 촛불을 잡았던 이는 초의 타고 남은 것을 가지고 나가서 버리고, 뒤에 촛불을 잡은 이는 초가 다 타들어가서 잡을 수 없는 상태를 기다렸다가 들어가 교대하니 이것이 제자가 촛불을 잡는 예절이다.그러나 아들의 직분이 제자의 직분과 같다. 아들의 직분을 잘 닦으면서 제자의 직분을 잘 닦지 못하는 자는 진실로 드물고 제자의 직분을 잘 닦으면서 아들의 직분을 잘 닦지 못하는 자 또한 드물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아버지를 존경하는 것은 그 스승을 존경하는 것이요, 스승을 존경하는 것이 아버지를 존경하는 것이다. 아버지와 스승은 존경하는 것이 동일하다.만일 아버지가 일찍이 과오를 저지른 적이 있는데 그 스승이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발설한다면 제자는 더욱 그 스승을 존경하고 감히 원한의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가령 그 스승이 측은히 아파하는 마음으로 제자를 위하여 그 아버지의 과오를 숨겨준다면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진실로 이와 같다면 아버지에게는 효자가 되고 스승에게는 어진 제자가 될 것이니 어찌 원한을 품고 스승을 배반하여 천하 만세의 비판을 받는 경우와 같겠는가?오늘날의 학자들은 그 스승을 미워하면서 단지 배반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해치기까지 하니 진실로 이른바 인륜의 변고이다.정(鄭)나라 사람이 자탁유자(子濯孺子)로 하여금 위(衛)나라를 공격하게 하니 위나라에서는 유공지사(庾公之斯)로 하여금 자탁유자를 추격하게 하였다. 자탁유자가 말하기를,“나는 병이 나서 활을 쏠 수 없으니 죽게 되었구나.”라고 하였다. 유공지사가 와서 말하기를“소인은 윤공지타(尹公之他)에게 활쏘기를 배웠고 윤공지타는 선생님께 활쏘기를 배웠으니 저는 차마 선생님의 기술을 가지고 도리어 선생님을 해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니 지금의 학자들은 유공지사에 미치지 못하는 거리가 너무도 멀다.광주는 호남의 도회이다. 그러나 유학을 하는 선비들이 서로 당쟁을 하여 백 년이 흐르도록 조금도 회개를 하지 않고 감히 스승을 존경하는 설을 배척하는 자들이 더욱 많아졌다. 이 때문에 사도(師道)가 나날이 상실되어 주학(州學)이 어지러워졌으니 탄식을 이루 다 할 수 있는가?올해 봄에 안동 김후(金侯)가 수령으로 와서 처음으로 주학(州學)을 수립하였다. 제생이 김후에게 와서 묻기를 “아버지와 스승 중에 누가 더 중합니까?”라고 하자 김후가 “스승이 더 중하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제생들이 부끄러워하며 받아들이고 감히 스승을 존경하는 설을 배척하지 않았다.대개 은혜 쪽으로는 아버지가 중할 때가 있고 의리 쪽으로는 스승이 중할 때가 있다. 그러나 지금 김후가 장차 사도를 세워 그 풍속을 바꾸려고 하니 스승이 중하다고 말하는 것이 또한 마땅할 것이다. 주학이 낙성을 고하니 제생들이 김후의 명으로 나에게 와서 기문을 지어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제자의 예를 천명하여 기문으로 삼는다.[주-D001] 스승이 …… 예절이다 : 관중(管仲)이 지은 〈제자직(弟子職)〉에 나오는 내용이다. 〈제자직〉은 제나라 환공(桓公) 때 세워진 직하학궁(稷下學宮)의 학생 생활수칙이다. 직하학궁은 제나라 정권이 국가발전과 정권을 공고하게 하기 위하여, 인재를 불러 모아 그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면서 학술연구와 학생교육을 담당하게 하였던 교육기관이었다. 〈제자직〉에서는 존사(尊師) 및 우애(友愛) 정신과 도덕 수양, 학습활동과 생활습관 등 학생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기본적인 준칙 등을 체계적으로 규정해 놓고 있다. 그 내용은 약 열 가지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으며, 형식은 기억하기 쉽도록 거의 전부가 1구 4언의 운문으로 되어 있다.[주-D002] 정(鄭)나라 …… 하였다 : 이 이야기는 《맹자(孟子)》 〈이루 하(離婁下)〉에 보인다.光州學記 / 黃景源 自古師弟子之道缺,而父子能全其倫者,吾不信也。子之於父,主於恩,弟子之於師,主於義。然而所以事之者,未之有殊也。師將食,攝衽陳膳,左酒右醬,先菜羹,然後置鳥獸魚鼈。及已食,趨走進漱,此弟子饋饌之儀也。實水于盤,旣入戶,執帚下箕,播諸水,自奧而始,俯仰磬折。旣拚乃退,而所掃室中之塵,聚於戶內,此弟子灑掃之儀也。昏則隅坐,右手執燭,左手正櫛。火將盡,更以新燭承其火,前執燭者,取其櫛而出棄之,後執燭者,候其墮而入代之,此弟子執燭之儀也。然子之職,猶弟子之職也。能修子職而不能修弟子之職者,誠寡矣,能修弟子之職,而不能修子之職者,又寡矣。故尊其父者,所以尊其師也,尊其師者,所以尊其父也。父與師其尊一也。有如其父嘗有過,而其師揚言於衆,則弟子益尊其師,不敢懷怨恨之心。使其師惻然感傷,爲弟子諱其父過,豈不休哉?誠如是,則於其父爲孝子,而於其師爲賢弟子也,豈若怨恨而倍其師,犯天下萬世之議哉? 今之學者,嫉其師,非徒倍之,而又害之,信所謂人倫之變也。鄭人使子濯孺子侵衛,衛使庾公之斯追之。子濯孺子曰:“我疾作,不可以執弓,吾死矣。”庾公之斯至曰:“小人學射於尹公之他,尹公之他學射於夫子,我不忍以夫子之道,反害夫子。”今之學者,其不及庾公之斯,遠矣。光州湖南之都會也。儒學之士,與之黨爭,經百年不少改悔,而敢斥尊師之說者,爲尤多。是故師道日益喪而州學亂,可勝歎哉? 今年春,安東金侯爲之牧,初修州學。諸生有問於金侯曰:“父師孰重?”曰:“師重。”諸生慙服,不敢斥尊師之說。 蓋以恩則父有時而重,以義則師有時而重。今金侯將立師道,以變其俗,謂之師重,亦宜矣。州學告成,諸生以金侯之命,求余之文。故推明弟子之禮以爲記。
    2020-11-03 | NO.224
  • 광주향교(光州鄕校) 대성전(大成殿) 상량문(上樑文) - 고봉집 제2권
    광주향교(光州鄕校) 대성전(大成殿) 상량문(上樑文) - 고봉집 제2권 : 기대승(奇大升, 1527~1572).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ㆍ존재(存齋)이며, 본관은 행주(幸州)이고, 시호는 문헌(文憲)이다.삼가 생각건대, 천리(天理)는 사람의 마음에 있어 비록 베어 버리고 녹여 버리려 해도 없어지지 않고, 교화는 시운에 달려 있어 반드시 전파하고 감화시켜야 이루어진다. 이에 학규(學規)를 일신(一新)하고 문묘(文廟)의 모양을 거듭 빛냈다. 상(庠)ㆍ서(序)ㆍ학(學)ㆍ교(校)의 교육을 시행함은 삼대(三代)가 인륜을 밝힌 것이었고, 제기와 우약(羽籥)의 위의(威儀)를 엄격히 함은 만방(萬方)이 선성(先聖)의 제사를 높이 받드는 것이었다.이 동방(東方)은 공자께서도 거주하고 싶어 하신 지방이다. 집집마다 공맹(孔孟)을 외고 있으며 가호마다 주정(周程)을 높이고 있으니 문치(文治)가 크게 빛나고, 시서(詩書)를 열심히 읽고 예악(禮樂)을 좋아하니 선비의 습관이 바르고 순박하다. 백성들이 부유하고 많은 때를 만났으니 참으로 문명하고 덕화가 흡족한 교화를 보게 되었다. 해양(海陽)의 옛 지역은 호남(湖南)의 큰 고을인데 뽕나무와 삼, 벼와 곡식이 가득하니 백성들은 농업을 즐기는 이가 많고, 명경(名卿)과 사대부(士大夫)들이 자취를 이었으니 사람들은 나아갈 방향을 알고 있다. 다만 유궁(儒宮)이 오래되어 기울고 비가 새니, 실로 도맥(道脈)이 따라 쇠퇴하게 되었다. 기둥과 들보, 서까래가 퇴락하니 고로(故老)들은 서글퍼하고 있으며, 등잔불을 켜고 책을 보는 일이 적막해지니 후생들은 나태해져 있다.아, 완전히 보수하기가 쉽지 않았으나 고쳐 만드는 것은 다행히 어렵지 않았다. 이는 봄 햇볕처럼 따뜻한 인(仁)과 가을 산악처럼 우뚝한 의(義)를 지닌 성주 합하(城主閤下)를 만난 덕분이다. 문명한 시대의 덕스러운 정사를 펴니 불우(不遇)한 자들이 은혜를 알았고, 창성한 시운의 인재들을 배양하니 방탕한 자들도 학문을 사모하게 되었다. 이에 삼시(三時)의 틈을 이용하여 단시일에 역사를 끝냈다. 공경히 영령(英靈)을 모시는 묘전(廟殿)을 맨 처음 지었고, 인재를 육성하고 육예(六藝)를 강(講)하는 재사(齋舍)를 수리하였다. 여덟 창문이 영롱하니, 몇 길의 담장이 빛난다. 어찌 눈앞에 우뚝 서 있을 뿐이겠는가. 장차 당하(堂下)에서 걸음을 걸으며 학문을 익힐 것이다. 일월이 비치고 사시가 운행되니 유도(儒道)가 크게 밝아짐을 기다리겠고, 종묘(宗廟)가 아름답고 백관(百官)이 풍부하니 누가 성인의 문에 들어가기 어렵다 의심할 것인가. 이는 곧 무성(武城)의 현가(絃歌)와 같으니 삼가 비궁(閟宮)의 의식을 편다.어영차 떡을 들보 동쪽에 던지노니 / 兒郞偉抛樑東하늘이 도맥을 지금부터 융성하게 하네 / 天敎道脉自今隆현가가 어찌 오공만 교화하였겠는가 / 絃歌奚獨化吳公백성의 풍속 예악 속에서 아름다우리 / 民俗熙熙禮樂中어영차 떡을 들보 남쪽에 던지노니 / 兒郞偉抛樑南고기 뛰놀고 솔개 나는 속에 온갖 이치 담겨 있네 / 魚躍鳶飛萬理涵모름지기 명성의 공부 두 가지 세워야 하고 / 須信明誠宜兩立또 경의의 공부 서로 참여해야 함을 알아야 하네 / 也知敬義更相參어영차 떡을 들보 서쪽에 던지노니 / 兒郞偉抛樑西옛 제도와 새로운 규모 밝아 혼미하지 않네 / 舊制新規耿不迷이 도가 크게 형통할 날이 참으로 있으리니 / 斯道大亨眞有日부잣집 아이들 어찌 감히 초라한 반찬 비웃으랴 / 富兒寧敢笑朝虀어영차 떡을 들보 북쪽에 던지노니 / 兒郞偉抛樑北제자들이 지금까지 존경하고 본받는다오 / 子弟于今有矜式훌륭한 규모가 없다고 말하지 마오 / 莫遣諞言敗盛模후현들이 모름지기 다시 윤색을 가하리 / 後賢須復加潤色어영차 떡을 들보 위에 던지노니 / 兒郞偉抛樑上문학의 기염(氣焰)이 만장이나 높으리 / 文焰應知高萬丈우리 임금 보좌하여 태평성대를 이룩하니 / 輔佐吾君致太平고을마다 장수와 정승이 많이 배출되리 / 井邑翩翩多將相어영차 떡을 들보 아래에 던지노니 / 兒郞偉抛樑下이로부터 궁한 마을에도 아름다운 교화가 흐르리라 / 從此窮閻流美化성인의 도가 하늘에 빛나고 백일처럼 밝으니 / 聖道光天白日明제생들은 마땅히 그 큰 것을 알아야 하리 / 諸生當識其大者삼가 원하건대 상량한 뒤에 패옥(佩玉)을 차고 청금(靑衿)을 입은 선비들이 많고 많아 거문고 타고 글 읽는 소리 양양(洋洋)하게 하고 천백 년 동안 공고(鞏固)해서 비가 침노하거나 바람이 흔들지 말게 하며 억만세에 유전하여 산처럼 높고 물처럼 길 뿐만이 아니게 하소서.[주-D001] 상(庠)ㆍ서(序)ㆍ학(學)ㆍ교(校) : 모두 국가의 교육기관인데, 상ㆍ서ㆍ교는 향교이고, 학은 국학이다. 하(夏)나라 때는 교라 하였고, 은(殷)나라 때는 서라 하였고, 주(周)나라 때는 상이라고 하였다. 《孟子 滕文公上》[주-D002] 우약(羽籥) : 문무(文舞)의 하나로, 깃털을 잡고 춤을 추며 약(籥)이라는 피리를 불기 때문에 붙여진 말이다.[주-D003] 동방(東方)은……지방이다 : 공자께서 구이에 살려고 하시니, 혹자가 말하기를 “그곳은 누추하니, 어떻게 하시렵니까?” 하였다. 이에 공자가 대답하기를 “군자가 거처한다면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子欲居九夷 或曰 陋 如之何 子曰 君子居之 何陋之有〕” 하였다. 구이는 동방을 가리킨다. 《論語 子罕》[주-D004] 해양(海陽) : 전라도의 옛 이름이다. 고려 성종(成宗) 14년(995)에 나주(羅州)ㆍ광주(光州)ㆍ정주(靜州)ㆍ낭주(朗州) 등의 주현(州縣)을 해양도라 하였다가 현종(顯宗) 때 강남도(江南道)와 함께 전라도에 합하였다.[주-D005] 삼시(三時)의……끝냈다 : 삼시는 농번기(農繁期)인 봄, 여름, 가을 세 철을 가리킨다. 농번기를 피하여 한가한 틈에 토목공사를 했다는 말이다.[주-D006] 종묘(宗廟)가……것인가 : 성인의 학문을 통달하여 온갖 진리를 쉽게 깨닫는다는 뜻이다. 숙손무숙(叔孫武叔)이 자공(子貢)이 공자보다 훌륭하다고 평하자, 자공은 “이것을 궁궐과 담장에 비유하면 나의 담장은 겨우 어깨에 미칠 정도여서 그 안에 있는 집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으나, 부자(夫子)의 담장은 몇 길이나 되어서 그 문을 찾아 들어가지 않으면 종묘의 아름다움과 백관의 풍부함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하였다. 《論語 子張》[주-D007] 무성(武城)의 현가(絃歌) : 무성은 춘추 시대 노(魯)나라의 현읍(縣邑)으로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비현(費縣)에 해당하며, 현가는 거문고ㆍ비파 등을 연주하며 시가(詩歌)를 읊는 것이다. 자유(子游)가 무성의 읍재(邑宰)가 되어 백성들에게 예악을 가르쳤으므로, 곳곳마다 현가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한다. 이는 고을마다 독서하는 소리가 들려 유교가 크게 진작되리라는 말이다. 《論語 陽貨》[주-D008] 비궁(閟宮) : 신(神)을 모신 사당이다. 《시경》〈노송(魯頌) 비궁(閟宮)〉에 “깊게 닫혀 있는 사당이 고요하기도 하다.〔閟宮有侐〕” 하였다.[주-D009] 고기……있네 : 《시경》〈대아(大雅) 한록(旱麓)〉에 “솔개는 날아서 하늘에 다다르고, 고기는 연못에서 뛰어오르네.〔鳶飛戾天 魚躍于淵〕”라는 말이 있는데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2장에서 이 시를 인용하여 군자의 도가 상하(上下)로 드러난 것으로 설명하였다.[주-D010] 명성(明誠)의 공부 : 명선(明善)과 성신(誠身)의 준말이다. 명선은 선을 밝히는 것으로 지(知) 공부에 해당하며, 성신은 몸을 성실히 하는 것으로 행(行) 공부에 해당한다.[주-D011] 경의(敬義)의 공부 : 마음속으로는 공경하고 일을 처리할 때에는 의롭게 하는 것이다. 《주역》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군자는 경으로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 일을 바르게 하니, 경과 의가 확립되면 덕이 외롭지 않다.〔君子敬以直內 義以方外 敬義立而德不孤〕” 하였다.
    2020-09-13 | NO.223
  • 광주향교(光州鄕校) 중수기(重修記) - 고봉집 제2권
    광주향교(光州鄕校) 중수기(重修記) - 고봉집 제2권 : 기대승(奇大升, 1527~1572).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ㆍ존재(存齋)이며, 본관은 행주(幸州)이고, 시호는 문헌(文憲)이다.아, 도(道)가 상실된 지 오래되었다. 삼대(三代) 말엽 이후에도 오히려 성인(聖人)의 세대가 이미 멀어지고 훌륭한 교훈이 매몰되었다는 탄식이 있었는데, 하물며 수천백 년이 지난 지금에 있어서랴!우리 국가에서는 도성(都城) 안에 성균관(成均館)과 사학(四學)을 설치하고, 바깥 지방에는 주(州)ㆍ부(府)ㆍ군(郡)ㆍ현(縣)에 이르기까지 모두 향교(鄕校)를 세웠으니, 교육기관을 설치하여 백성을 깨우치려는 뜻이 지극한 것이다. 조종조(祖宗朝) 이래로 인재를 양성하려는 훌륭한 조치는 멀리 한(漢)ㆍ당(唐)을 능가하니, 도가 부흥되는 것도 거의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훌륭한 정치가 시행되어 태평성대가 이어진 지 100여 년에 유학의 풍습과 선비들의 기개가 점점 타락하는 폐습을 따르는 경향이 없지 않으며, 세속의 관리와 무식한 자들의 의논은 또 학교에 대해서 급급히 여기지 않고 있으니, 이 때문에 뜻이 있는 선비들은 길이 염려하고 걱정하며 깊이 탄식하고 슬퍼하여 그대로 있지 못하는 것이다.학교가 제대로 일어나지 못하면 인륜이 제대로 밝혀지지 못하고, 인륜이 밝혀지지 못하면 국가가 의뢰하여 유지할 수 없는 것이며, 국가가 유지할 수 없게 되면 인류가 어찌 미란(糜爛)되고 멸망함에 이르지 않겠는가. 이것은 바로 분명히 드러나는 일이어서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닌데도 세상의 군자(君子)들은 이것을 깊이 염려하려고 하지 않으니, 이 어찌 깊이 생각하지 않은 것이 아니겠는가.광주는 호남(湖南)의 큰 고을이다. 토지가 비옥하고 일이 많으며, 풍속이 질박하고 습관이 투박하여 자못 다스리기 어렵다는 정평이 있었다. 홍치(弘治) 무신년(1488, 성종19)에 사문(斯文)인 권공 수평(權公守平)이 병부 시랑(兵部侍郞)으로 있다가 외직으로 나와서 이곳을 맡았는데, 백성을 다스리고 관리를 지휘하는 것을 모두 올바르게 하였고, 사무를 처리하고 경륜하는 것이 모두 마땅하였다. 옛 향교는 성안에 있었는데 저습하고 퇴락하여 거의 거처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에 적당한 지역을 물색하고 대지를 사서 옮겨 신축하였는데, 읍내의 서쪽 3리쯤 되는 지점에 있어서 거리가 가까우며, 전당(殿堂)과 재무(齋廡)가 모두 법식대로 되었고 서적과 재정도 모두 조리가 있게 마련되었다. 그리하여 지금 70여 년이 되었는데, 노인과 젊은이들이 모두 칭송한다. 고상한 선비와 세속의 사람들이 모두 덕택에 흠뻑 젖게 된 것은 다 권공의 은택이다. 그 후 또 유명한 분들과 훌륭한 명사로서 광주에 부임한 분 중에 혹 이 일에 관심을 둔 자들이 있었으나, 정돈하여 다시 확장시킨 자는 별로 없었다.가정(嘉靖) 경신년(1560, 명종15)에 유공 경심(柳公景深)이 광주 목사로 부임해 왔는데, 가르치는 조항과 시설은 다른 사람보다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재주가 뛰어나고 뜻이 지극하여 보통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크게 뛰어나서 번잡한 일을 잘 정리하여 다스리고 투박한 습관을 진작하여 세우니, 부임한 지 1년이 채 못 되어 온 경내의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이에 준수한 선비들을 뽑아서 모두 향교에 적(籍)을 올리고 격려하여 뜻을 세울 수 있게 하였다. 이윽고 향교의 사당을 둘러보니, 장차 퇴락할 염려가 있었으므로 마침내 개연히 보수할 뜻을 두었다. 옛 규모가 다소 좁아서 법도에 맞게 주선하고 잔을 올리기 어려우므로 마침내 넓게 터서 증수하니, 큰 집이 별안간에 우뚝이 솟아 찬란하게 이룩되었다. 이것을 보는 자들은 모두 놀라서 신(神)이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유공은 다시 뒤를 이어 재사(齋舍)를 완전하게 꾸미고 옆에다가 방들을 새로 건립하였으며, 또 토지를 마련하고 노비를 확보하여 모든 조항을 완비함으로써 공부하는 생도들로 하여금 음식을 먹고 거처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뜻이 있는 여러 생도들도 또한 분발하여 마음을 진작시켜서 모두 몸을 삼가 선(善)에 들어가려고 노력하고 있으니, 아, 이 또한 가상한 일이 아니겠는가.이보다 앞서 권공(權公)이 부임해 와 있을 때에 광주의 백성들은 그의 덕을 그리워하고 공로를 찬양하여 마침내 그의 화상(畫像)을 그려서 향교에 보관하고는, 석채(釋菜)하는 날에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봉안해 둔 곳이 적당하지 못하였고 받들기를 엄숙하게 하지 못하였으므로 유식한 자들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이제 제생들이 유공의 가르침을 받들어서 선을 좋아하는 마음을 흥기하니, 권공의 유풍(遺風)을 흠앙하는 마음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므로 마침내 서로 상의하고는 동무(東廡)의 밖에 사당을 지어 그 화상을 봉안하였으며, 또 유공의 교화를 잊을 수 없었고, 향교의 흥폐(興廢)한 내력과 보수한 사실 또한 유도(儒道)의 쇠퇴와 융성에 관계되니, 이것도 진실로 전하는 글이 없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또 서로 더불어 비석을 장만하고 글을 새겨서 향교 문의 옆에 세워 전말(顚末)을 기록해서 무궁한 후세에 보이며 유공을 사모하는 뜻을 붙이려고 하니, 그 마음 씀이 간곡하고 또 아름답다.나는 삼가 생각건대 도가 제대로 행해지지 못하고 밝혀지지 못함은 모두 지(智)ㆍ우(愚)와 현(賢)ㆍ불초(不肖)의 과불급(過不及)으로부터 말미암는다고 여긴다. 이것은 성인(聖人)께서 진실로 이미 말씀하셨는데 지금 이것을 가지고 징험해 보면, 세상에 이른바 어질고 지혜롭다는 자들은 대부분 학교를 일으키고 사람을 가르치는 방법에 급급해하지 않으며, 어리석고 불초한 자들은 또 이것을 전부 폐지하려고 한다. 그리고 혹 학교의 일에 유념하는 자가 있으면 괴이하고 과격한 행위로써 안정되지 못한 짓이라고 말하면서 비난하고 있으니, 나는 실로 어찌하여 그리하는지를 알지 못하겠다. 아, 슬프다. 도가 끝내 행해지지 못하고 끝내 밝혀지지 못한단 말인가.대승은 광주 사람이다. 학교가 새로이 세워짐을 보고 후래에 이것이 다시 폐추(廢墜)될 것을 두려워하였으며, 또 후생들의 간곡한 부탁을 받았으므로 마침내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그 대강의 내용을 기록하기를 위와 같이 하는 것이다. 후세의 군자들이 혹 기꺼이 이 일에 유념한다면 어찌 사도(斯道)의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주-D001] 지(智)ㆍ우(愚)와……여긴다 : 《중용장구》 제4장에 “도(道)가 행하여지지 못하는 이유를 내 알겠다. ‘지혜로운 자〔智者〕’는 과(過)하고 ‘어리석은 자〔愚者〕’는 불급(不及)하기 때문이다. 도가 밝혀지지 못하는 이유를 내 알겠다. ‘어진 자〔賢者〕’는 과하고 ‘불초한 자〔不肖者〕’는 불급하기 때문이다.” 하였는데, 이는 지혜로운 자는 도를 알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여 도를 행하는 데 힘쓰지 않고, 어진 자는 도를 행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여 도를 밝히는 데 힘쓰지 않으며, 어리석은 자와 불초한 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관심을 두지 못함을 한탄한 것이다.
    2020-09-13 | NO.222
  • 구황(救荒) - 구사당집
    구황(救荒) - 구사당집 제7권 / 잡저(雜著) , 자경편(自警編) 에 사견을 기록함〔自警編私箚〕 : 김낙행(金樂行, 1708~1766)○ 참정(參政) 문충공(文忠公) 왕요신(王堯臣)이 광주(光州)를 다스릴 때, 심한 가뭄이 들어 도적 떼가 백성의 곡식 창고를 털었다. 관법(官法)에는 사형에 해당하였지만, 공이 “이것은 주린 백성이 양식을 구함이었을 뿐이니, 황정(荒政)으로 구휼해야 할 일이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사형을 감면하자는 논의를 청하였는데, 그 뒤 마침내 법령으로 기록하여 지금까지 사용한다.나는 살펴보니, 문충공의 이 일은 왕기공(王沂公)의 일과 같다. 혹 눈앞에 당면하여 임시로 알맞게 하는 수야 있겠지만 영갑(令甲)으로 기록하기까지 함이 옳은지는 알지 못하겠다.*중국 송나라 때의 이야기이다.
    2020-12-11 | NO.221
  • 국시소〔國是疏〕 선문대왕(宣文大王 효종) 9년(1658) 무술년 6월, 공이 고산(孤山)에 있을 때 지었다.
    고산유고 제3권 상 / 소(疏) 삼가 아룁니다.신은 돌아갈 길은 머나먼데 질병이 바야흐로 극심하고, 떠나갈 마음은 다급한데 무더위가 바야흐로 혹독하여, 천리 길을 발섭(跋涉 산 넘고 물 건넘)할 계책을 세우지 못하고서, 아직도 체류하며 나그네 생활을 참고 있노라니, 심회(心懷)가 망연(茫然)해지면서 온갖 생각이 모두 잿더미로 변했습니다만,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만은 그래도 가슴속에 못내 잊지 못한 채 끝내 스스로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대개 신은 어려서부터 어리석고 망녕되어 누차 위급한 사태에 직면하곤 하였는데, 늙어 갈수록 더욱 심해지기만 할 뿐 그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바로 옛사람이 “아홉 번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겠다.”라고 말한 것이나, 또 “이 병은 하늘이 붉은 옷을 입힌 것이다.”라고 말한 것에 해당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구구한 소회를 면류(冕旒)의 아래에 간략히 주달(奏達)하게 되었으니, 삼가 원하옵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사람이 못났다고 해서 말까지 버리지 마시고 관심을 기울여 굽어살펴 주소서.신이 삼가 생각건대, 지금 절후(節候)가 무더워야 하는데도 서늘한 바람이 한 달 넘게 불어오고, 시절이 장마철인데도 가뭄이 날로 심해지니. 이것이 어찌된 현상입니까. 시절과 기후가 절도를 잃은 것이 어찌하여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입니까. 지금 비가 온다고 해도 가을철이 이미 가까워서, 모내지 못한 모와 이미 시든 벼는 더 이상 가망이 없으니, 죽음이 임박하여 전야(田野)가 황급해할 것은 말하지 않아도 상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이 크게 우려하는 것은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신이 삼가 살피건대, 전하께서 좋은 정치를 날마다 간절히 구하는데도 아직껏 요령을 얻지 못하고, 예지(睿智)를 하늘에서 품부받았는데도 강건(剛乾)함이 부족하여, 위복(威福 상벌)의 권한이 위에서 나오지 않고 정사(政事)의 권력이 모두 아래에 있게 되었으니, 이는 옛날 역사에서 “태아(太阿)를 거꾸로 잡고 있다.”라고 하고, “한갓 빈 그릇만 껴안고 있다.”라고 말한 것과 불행히도 가깝다고 하겠습니다. 신은 삼가 뼛골이 오싹하고 심장이 떨리기만 할 뿐, 그렇게 된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대개 완악하고 우둔하면서 염치도 없이, 얻으려 안달하고 잃을까 걱정하는 자는 성인(聖人)이 비루한 자라고 말한 자요, 겉으로는 온갖 선행을 하고 속으로는 자기 한 몸만 이롭게 하는 자는 성인이 자색(紫色)이라고 칭하고 말재주 있는 자라고 칭한 자입니다. 지금 세상에서 내로라하는 자들은 거의 대부분 이러한 부류인데, 전하께서는 외로이 위에 고립되어 밖의 일을 아무것도 보지 못하시니,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모두 여기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신은 참으로 전하를 위해 장탄식을 하다못해 통곡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공자(孔子)는 이르기를 “곧은 자를 기용하고 굽은 자를 버려두면 굽은 자를 곧게 만들 수 있다.〔擧直錯諸枉 能使枉者直〕”라고 하였고, 자하(子夏)는 말하기를 “순 임금이 천하를 소유하여 여러 사람 중에서 선발해 고요를 들어 쓰니 불인한 자들이 멀리 사라졌고, 탕왕(湯王)이 천하를 소유하여 여러 사람 중에서 선발해 이윤을 들어 쓰니 불인한 자들이 멀리 사라졌다.〔舜有天下 選於衆 擧皐陶 不仁者遠矣 湯有天下 選於衆 擧伊尹 不仁者遠矣〕”라고 하였으며, 맹자(孟子)는 말하기를 “요는 순을 얻지 못하는 것을 자기의 걱정으로 삼았고, 순은 우와 고요를 얻지 못하는 것을 자기의 걱정으로 삼았다.〔堯以不得舜爲己憂 舜以不得禹皐陶爲己憂〕”라고 하였습니다.지금 우리 전하께서는 걱정하는 일이 무엇이기에 이에 대해서는 걱정이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까. 만약 이런 일을 걱정하지 않는다면, 신은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각 시대마다 현재(賢才)가 부족하지 않다는 것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격언입니다. 원래 전하께서 구하는 것이 정성스럽지 못하고 살피는 것이 정밀하지 못하기 때문이지, 어찌 인재가 부족한 세상이 있겠습니까.아, 지난날의 현사(賢邪)는 변별하기가 쉽고, 눈앞의 현사는 변별하기가 어려운데, 과거의 현사를 변별하지 못한다면, 눈앞의 현사를 어떻게 변별하겠습니까. 지난날의 시비는 알기가 쉽고, 눈앞의 시비는 알기가 어려운데, 지난날의 시비를 알지 못한다면, 눈앞의 시비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런데 지난날과 눈앞의 일을 변별하는 데에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과거의 일은 나에게 본디 구애되는 바가 없고 저쪽의 일도 이미 모두 드러난 데 반하여, 눈앞의 일은 나에게 본디 구애되는 바가 있고 저쪽의 일도 모두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옛사람이 과거의 현사와 시비를 반드시 변별하려고 했던 그 뜻은 대개 눈앞의 현사와 시비를 반드시 변별하고자 함에 있었습니다. 현사를 변별하지 못하고 시비가 뒤바뀌게 한다면, 어떻게 나라 구실을 하겠습니까.대저 그렇기 때문에 국시(國是)라는 것은 바로 국가의 원기(元氣)가 되는 것입니다. 원기가 충실하면 국가가 활발해지고 원기가 쇠퇴하면 국가가 멸망하는 법이니, 예로부터 국시를 바르게 하는 것으로 국가의 운세가 영원하도록 하늘에 기원하는 근본을 삼고, 국가를 소유한 자의 급선무로 삼은 것 역시 그냥 무턱대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국시를 소홀히 해서야 되겠습니까.지난번에 정개청(鄭介淸)의 일을 신이 상세히 말한 것도 아니고, 단지 정원(政院)이 끝까지 그 자손의 소(疏)를 상달하지 않아 언로(言路)를 가로막은 잘못을 말했을 뿐인데도, 갑자기 떼를 지어 일어나 시끄럽게 떠들어 대었습니다. 그러니 지금 다시 상세히 말씀드린다면, 필시 전일보다 열 배나 더 요란하게 들고일어나서 곧장 신을 죽인 뒤에야 그만두려 할 것이요, 전하께서도 어쩌면 신을 지리(支離)하다고 여기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그렇긴 하지만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정개청의 일이야말로 국시(國是)에 관계되는 바가 작지 아니하니, 분명히 변별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고 여겨집니다. 신이 그러한 줄을 알고서도 말씀드리지 않는다면, 우리 전하를 저버리는 죄가 아마도 저들이 구애되는 바가 있어서 근거 없는 말로 교묘히 꾸며 대며 성총(聖聰)을 기망(欺罔)하는 것보다 더 심한 점이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그러므로 신이 감히 번독(煩瀆)하는 죄를 피하지 않고, 전일에 거론했던 말씀을 끝까지 다하여, 자세히 분석하고 조목별로 반박하고자 합니다. 그 말이 굽이굽이 이치가 있고 마디마디 증거가 있으니, 잠깐만 일월(日月)의 밝은 빛을 돌이켜 살펴 주시면, 피차의 진위(眞僞)와 곡직(曲直)을 어찌 알아내기 어렵겠습니까.그러나 옛사람이 바퀴 깎는 것으로 지극한 도를 비유하였고, 말 기르는 것으로 백성을 기르는 것을 비유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진실로 이에 대해 깨달아 세 모퉁이로 반증하실 수 있다면, 제 위왕(齊威王)이 아(阿)와 즉묵(卽墨)을 다스림에 신하들이 두려워하며 감히 거짓을 꾸미지 못해서 나라가 잘 다스려졌던 고사도 어렵지 않게 이루실 수 있을 것입니다.그리고 전하께서 진실로 이에 대해 깨달아 한 가지 일을 가지고 백 가지 일을 알아내신다면, “왕이 크게 노하여 곧 군병을 정돈하고는 완(阮)을 치러 가는 밀인(密人)의 군사를 막아 내어 주(周)나라의 복을 두텁게 하였으니, 이와 같이 한번 노하여 천하의 백성들을 안정시켜 마침내 천하가 주나라를 종주(宗主)로 삼게 되었다.”라는 주 문왕(周文王)의 고사에도 미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의 이 말이 오직 정개청만을 위해서 발언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라고 하겠습니다.아, 정개청이 소인의 미움을 받고 혹독하게 역사(蜮沙)의 재앙을 입어 기축년(1589, 선조22)의 옥사(獄事) 때에 억울하게 죽었다가 다행히 신설(伸雪)된 지 이미 36년이 지났는데, 지금 와서 무함을 하는 것이 기축년 때보다 갑절이나 더 심한 것은 어찌된 일입니까.정개청은 열성(列聖)이 북돋아 길러 준 훈도(薰陶)를 받고, 열성의 맑은 교화에 몸을 씻었습니다. 초야에서 분발하여 독실하게 배우고 힘껏 실행한 결과, 견식이 투철하고 학업이 이루어져서 세상의 추앙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사림(士林)의 사종(師宗)이 되었을 뿐 아니라, 명경(名卿)이 천거하고 성주(聖主)가 부르신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범상한 사람이 아니었음이 분명합니다.범상한 사람이 아무 죄 없이 억울하게 악명(惡名)을 뒤집어써도 하늘을 움직일 수가 있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천신(賤臣)이 가슴을 두드리자 유월에 서리가 내리고, 서녀(庶女)가 하늘에 울부짖자 3년 동안 가뭄이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지극한 행실을 몸에 지니고 오도(吾道)를 소중히 여긴 사람인데도, 중천(重泉 구천(九泉))의 원통함이 신설(伸雪)된 지 얼마 안 되어, 다시 후세의 무함이 더욱 혹독하게 가해졌다면, 이것이 밝은 시대에 있을 정당한 일이라고 하겠습니까, 부당한 일이라고 하겠습니까. 반드시 밝게 분변해야 할 일이겠습니까, 밝게 분변할 필요가 없는 일이라고 하겠습니까.신이 듣건대, 정개청의 본관은 바로 영남(嶺南)의 철성(鐵城 고성(固城))이라고 하였습니다. 정개청의 6대조(六代祖)인 정가물(鄭可勿)이 고려 말에 영동정(令同正)의 벼슬을 하다가 나주(羅州)에 유배되었는데, 그 당시에 유배된 자는 반드시 관청에 복역(服役)하였으니, 지금의 향리(鄕吏)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 뒤에 천역(賤役)을 면하고 무안(務安)으로 옮겨 가서 살았는데, 대대로 드러난 벼슬을 한 사람이 없었으니 한미했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관속(官屬)이라고 말한다면 또한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관속은 바로 관노(官奴)를 지칭하니, 관노는 천한 노예입니다. 우리나라에서 향리의 자손으로서 판서도 되고 정승도 되는 등 대대로 빛나는 벼슬을 한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으니, 관노와 향리는 그 등급이 실로 하늘과 땅의 차이인 것입니다.더구나 서원(書院)의 건립 여부는 단지 당사자의 현부(賢否)만 논해야 할 것이요, 당사자의 세계(世系) 같은 것은 논할 필요도 없는 데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런데 지난해에 경연(經筵)의 신하인 송준길(宋浚吉)이 등대(登對)했을 적에, 맨 먼저 정개청이 무안의 관속이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무망(誣罔)한 것일 뿐만이 아니요, 군자의 말씨라고 할 수도 없을 듯싶습니다.정개청이 실제로 무안의 관노였다면, 이는 신분을 숨겨 온 것이니 그 죄가 큽니다. 그런데 기축년(1589, 선조22)에 옥사(獄事)를 조작할 당시에, 위관(委官)인 정철(鄭澈)과 동복(同福)의 소유(疏儒)인 정암수(丁巖壽)와 나주(羅州)의 사인(士人)인 홍천경(洪千璟) 등이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날조하여 비단에 문채를 수놓듯 온갖 방법으로 얽어매었는데, 그때에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거론하여 하나의 죄안(罪案)으로 더 첨가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그리고 어찌하여 세월이 오래 지난 오늘에 와서야 이런 말이 있게 되었단 말입니까. 그 말이 진실이 아니고 실로 날조된 것임을 알기 어렵지 않습니다.더구나 이단상(李端相)은 원래 송준길(宋浚吉)과 가장 친밀하여,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인 사이이니, 그들이 정개청을 모함하려는 계책을 필시 익숙하게 강구하며 오래전에 정해 놓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단상의 소에서는 “정개청은 나주(羅州) 향리(鄕吏)의 자손이다.”라고 하였으니, 두 사람의 말이 어찌하여 이렇게도 같지 않단 말입니까. 이 두 사람이 참으로 정확히 알지도 못하고 확실한 견해도 없이, 단지 허구로 날조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아니면 이단상이 당초 송준길과 공모하며 의논을 정했다가, 뒤에 자손이 억울함을 호소했다는 말도 들리고, 사림(士林)의 공론(公論) 또한 강제로 억누른다고 해서 없어지게 할 수가 없자, 성명(聖明)께서 깨닫고서 잘못되었다고 하실까 겁이 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실대로 말하다 보니, 송준길과 다르게 말한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결국 송준길을 팔아넘기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고(故) 상신(相臣) 박순(朴淳)은 계미년(1523, 중종18)에 태어나, 나이 31세 때인 계축년(1553, 명종8)의 정시(庭試)에서 장원(壯元)하였으며, 갑자년(1564)에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승지(承旨)에 올랐고, 을축년(1565)에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으며, 무진년(1568, 선조1)에 예조 판서가 되고, 경오년(1570)에 이조 판서가 된 뒤에, 임신년(1572)에 이르러 정승이 되었습니다.정개청은 기축년(1529)에 태어났으니, 박순은 정개청보다 6년 연상에 불과합니다. 정개청이 견수(肩隨)의 나이로, 어찌 사생(師生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맺고서 수학(受學)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비록 수학하고 싶다 하더라도, 박순이 나이 30세도 채 못 되었는데, 어떻게 남을 가르칠 이치가 있겠습니까. 또 박순이 나이 서른 이후에는 항상 명관(名官)의 지위에 있으면서 서울에 거하였고, 정개청은 시골에서 살았으니, 비록 박순이 정개청을 가르치고 싶거나 정개청이 박순에게 배우고 싶다고 해도,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정개청의 사고(私稿)인 《우득록(愚得錄)》 중에 박순에게 보낸 편지 몇 편이 실려 있는데, 그 제목이 〈사암에게 주는 글〔與思菴書〕〉, 혹은 〈사암에게 올리는 글〔上思菴書〕〉로 되어 있고, 머리말에는 대개 자신을 후생(後生) 모(某)라고 칭하거나 단지 모(某)라고 칭하며 운운하였을 뿐, 문생(門生)이라고는 칭하지 않았으니, 이에 의거하더라도 사생(師生)의 관계가 아닌 것이 또한 분명합니다.그런데 송준길(宋浚吉)이 등대(登對)했을 때에 김장생(金長生)의 말을 외우며 아뢰기를 “정개청은 박순에 대해 사생의 분의(分義)가 있는데, 박순이 파직되어 물러난 뒤에는 거꾸로 박순을 공격하며 배척하는 자에게 빌붙어 의탁하였습니다.”라고 하였고, 또 “김장생이 공식 모임에서 정개청과 대화하며 ‘박 정승을 아는가?’라고 하자, 정개청이 ‘그 집에 서적이 많이 소장되었다고 하기에 왕래하며 참고하였다.’라고 대답하더랍니다.”라고 하였습니다.이것은 스승을 배신했다는 것으로 정개청의 죄안(罪案)을 삼으려 한 것입니다마는, 정개청이 박순에 대해서 본래 사생의 관계가 아닌 것은 뚜렷이 증거가 있어서 의심할 여지가 없이 명백합니다. 그가 스승을 배신했다는 죄를 첨가할 목적으로 사생(師生)의 설을 억지로 만들어 낸 것이 분명하니, 이것도 결과적으로 똑같이 무망(誣罔)한 죄를 면할 수가 없습니다.이단상(李端相)의 소에 말하기를 “정개청이 독실한 뜻으로 학문에 힘쓰는 것을 박순이 가상하게 여겨, 그를 추천하여 나주 교수(羅州敎授)가 되게 함으로써, 마침내 박순의 문하인(門下人)이 되었습니다. 정개청이 박순에게 교육을 받았다는 것은 온 세상이 다 아는 바입니다.”라고 하고, 그 아래에 또 말하기를 “스승을 배반하며 이랬다저랬다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이단상의 말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뜻이 대개 추천하여 나주 교수가 되게 했다는 말을 이용해서 박순의 문하인이 되었다는 설을 만들어 내고, 다시 박순의 문하인이 되었다는 말을 이용해서 박순에게 교육을 받았다는 설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가 구차하게 끌어다 붙인 뜻을 문자 사이에서 들춰낼 수가 있으니, 그가 기필코 스승을 배신했다는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교묘하게 이런 말을 지어낸 것임을 단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그리고 사학 유생(四學儒生)의 상소에서는 “정개청이 본래 나주(羅州) 향리(鄕吏)의 자손으로, 글을 매우 부지런히 읽어서 문의(文義)에 능통하였습니다. 그래서 상신(相臣) 박순이 그 재주를 아껴서 자기 집에 머무르게 하고는 잘 대우하고 보살펴 주면서 유가(儒家)의 서적을 읽도록 권하여 무려 십 년 동안이나 알뜰히 가르쳤습니다. 이로부터 정개청의 글솜씨가 날로 발전하고 겉모습도 예전보다 몰라보게 달라졌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이단상의 말을 송준길의 말에 비교해 보면 이미 부연하여 덧붙인 것이 많은데, 사학 유생의 소는 부연하여 덧붙인 것이 또 이단상에 비해서 몇 배나 됩니다. 그들이 조금도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말을 지어낸 것을 알 수 있으니, 옛날에 이른바 “죄를 뒤집어씌우려 한다면 어찌 할 말이 없을 것을 걱정하겠는가.〔欲加之罪 何患無辭〕”라고 한 것이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말한 것입니다.더군다나 문생(門生)이 되어 스승을 배반했다면, 이는 그야말로 선비가 된 자에게 큰 죄안(罪案)이 되는 것입니다. 정개청이 실제로 박순의 문생이 되고서도 마침내 박순을 배반했다면, 기축년(1589, 선조22)에 죄를 얽어 만들 때에 어찌 이런 일을 더하여 또 하나의 죄안으로 삼지 않고, 이제 와서 처음으로 제기한단 말입니까. 그 말이 무망(誣罔)한 것임을 여기에서도 분명히 증험할 수가 있습니다.다만 정개청이 박순과 같은 고을에 살았기 때문에, 박순이 정개청의 학문과 행실을 자세히 알고는 더불어 친하게 지냈습니다. 선묘(宣廟)께서 일찍이 병란(兵亂)의 조짐을 걱정하다가 어느 날 탑전(榻前)에서 “만약 왜란(倭亂)이 일어나면 누구를 원수(元帥)로 삼을 만한가?”라고 하문하시자, 박순이 대신(大臣)의 신분으로 대답하기를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정개청이 팔도도원수(八道都元帥)가 될 만합니다. 신이 그 위인(爲人)을 살펴보건대, 학문과 행실뿐만이 아니라 인물과 재지(才智)로 볼 때에도 그보다 나은 사람이 드물 줄로 압니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박순의 일기(日記) 중에 실려 있다고 합니다.그러나 정개청이 나주 교수(羅州敎授)가 된 것은 박순이 추천하여 제수된 것이 아닙니다. 임오년(1582) 연간에 유몽정(柳夢鼎)이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있을 당시에, 정개청의 문생인 나주(羅州)의 사인(士人) 나덕준(羅德峻)과 나덕윤(羅德潤) 등이 대안동(大安洞)에 서재를 짓고 공부하는 장소로 삼았는데, 어느 날 나덕준 등이 향음주례(鄕飮酒禮)를 베풀고 정개청을 받들어 존빈(尊賓)으로 모셨습니다. 유몽정이 이 말을 듣고 가서 참관하면서, 그 성대한 예절의 모습을 찬미하며 탄식하기를 “고례(古禮)가 행해지는 광경을 오늘 보게 되었으니 어찌 성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 고을은 바로 인재의 부고(府庫)인데 한갓 사장(詞章)만 힘쓰고 있으니, 모름지기 선생 같은 분을 얻어야만 사림의 기풍을 변화시킬 수 있겠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봉소(封疏)를 올려 위에 아뢰자, 정개청을 제수하여 나주 훈도(羅州訓導)로 삼았습니다.이에 정개청이 재삼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자 어쩔 수 없이 억지로 몸을 일으켜 부임하였습니다. 그러고는 고인(古人)이 전한 스승과 제자의 예법을 엄격하게 행하는 한편, 《소학(小學)》 및 《여씨향약(呂氏鄕約)》 등 성경현전(聖經賢傳)으로부터 《성리대전(性理大全)》ㆍ《심경(心經)》ㆍ《근사록(近思錄)》에 이르기까지 가르침을 베풀고, 틈틈이 《가례(家禮)》ㆍ《의례(儀禮)》ㆍ《예기(禮記)》 등 제서(諸書)를 가지고 정성스럽게 교도(敎導)하였습니다.그리하여 행한 지 1년 남짓 되는 사이에 효제(孝悌)와 예의(禮義)의 기풍이 향당(鄕黨)의 사이에 날로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문인(文人) 재자(才子)로서, 한갓 글 짓는 것을 가지고 스스로 높은 체하는 자들이 집단으로 모여서 조소하고 희롱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교생(校生)인 홍천경(洪千璟)이라는 자가 자신의 글솜씨를 뽐내며 한 번도 향교(鄕校)에 들어오지 않자, 정개청이 목사(牧使)에게 고하여 회초리로 다스렸으므로 그가 마침내 앙심을 품기에 이르렀는데, 정개청은 이를 개의하지 않았습니다.얼마 지나지 않아 유몽정이 체차(遞差)되어 떠나가자, 정개청도 사직하고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뒤에 안동(安東)의 김성일(金誠一)이 유몽정을 대신하여 부임해 와서 예를 갖춰 정개청에게 간절히 청하며 그 직임을 끝까지 행하기를 원하였으나, 정개청은 굳이 사양하며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이 일의 시말(始末)이 정개청의 가승(家乘)에 상세히 나와 있으니, 박순이 천거하여 교수가 되었다는 설도 무함한 것입니다.그러나 정개청과 박순(朴淳)의 교분은 끝까지 어그러지지 않아서, 그 의리상으로 문답한 것과 시문을 주고받은 것이 모두 정개청의 사고(私稿) 안에 들어 있으니, 지금 정개청이 박순을 배반하고서 박순을 공격하며 배척하는 자에게 빌붙어 의탁했다고 말하는 것도 무함한 것입니다.그리고 정개청과 박순이 절친한 것이 이와 같았으므로, 김장생이 장막을 걷어 올리고 서로 문답할 때도 그가 사생(師生)인지의 여부는 묻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생인지 아닌지는 본디 분변할 것도 없는 것으로, 박순과의 교분이 특별히 후했던 이야기를 응당 말했을 법하니, 어찌 다만 문자를 참고하려고 왕래했다고만 말했겠습니까. 이른바 문답했다고 하는 말도 그 자세한 내용은 빼고 약간의 내용만 드러내어 정개청의 죄로 삼으려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니면 혹 말을 전하는 사이에 자세한 내용은 잊어버리고 약간의 내용만 기억하게 된 것입니까. 이것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일단 사생이 아니라고 한다면, 문자를 빌려 보기 위해서 왕래했다고 말했다 하더라도, 그 말이 의리에 무슨 해가 되겠습니까.정개청은 가세(家世)가 빈한한 가운데 어려서부터 산림(山林)에서 고궁(固窮)하였습니다. 하나의 방 안에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학문에 집중하여 심지(心志)를 기울였을 뿐, 세상과 교유하는 것은 일삼지 않았습니다. 한 시대의 명경(名卿)이 그를 벼슬에 천거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정개청은 마음을 침잠하고 은둔하면서 세상의 명예와 현달을 구하지 않았습니다.만력(萬曆) 정축년(1577, 선조10)에 선묘(宣廟)께서 그 명성을 듣고 북부 참봉(北部參奉)에 제수하였고, 경진년(1580)에 연은전 참봉(延恩殿參奉)에 제수하였고, 갑신년(1584)에 사옹원 참봉(司饔院參奉)에 제수하였고, 을유년(1585)에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에 제수하였으나, 모두 숙사(肅謝 사은숙배(謝恩肅拜))하고는 바로 돌아왔습니다. 이해에 또 교정청 낭청(校正廳郞廳)에 제수되어 10여 일 동안 종사(從仕)하였고, 병술년(1586)에 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자 숙사하고 즉시 돌아왔으며, 정해년(1587)에 전생서 주부(典牲署主簿)에 제수되자 숙사한 뒤에 상소하여 도덕을 밝히고 큰 근본을 세워야 한다는 설을 진달하였습니다.이에 선묘(宣廟)께서 비망기(備忘記)를 내리시기를 “이 소장을 보고 지극히 타당한 의론을 얻어 들었으니 참으로 가상한 일이다. 전일에도 소를 올려 진달하였으니, 전후의 간절한 충성심이 더욱 기특하다. 내가 비록 불민(不敏)하나 체념(體念)하여 성찰(省察)하겠다. 정개청을 승진시켜 서용하도록 하라. 그런데 일찍이 듣건대, 노친(老親)이 있어서 관직에 나오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인근 고을의 수령을 제수하도록 하라.”라고 하였습니다.그리하여 곡성 현감(谷城縣監)에 제수되자 정개청이 마지못해 부임하였으나, 늙은 아비가 집에 있는데도 극진히 봉양해야 하는 효자의 도리를 오래도록 행하지 못하였으므로, 8개월이 지나고 나서 체차(遞差)되어 돌아왔습니다. 대개 그가 분수를 지키고 한가함을 좋아하여 세상에 나다닌 것이 매우 드물었으니, 그가 명류(名流)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왕래하지 않은 것을 이로 미루어 알 수가 있습니다.또 역적 정여립(鄭汝立)과 같은 도(道)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사흘이나 가야 할 먼 거리에 떨어져 있었던 데다가, 지기(志氣)가 같지 않고 출처(出處)의 자취가 달라서, 처음부터 서로 만날 수 있는 길이 없었습니다. 또 교정청(校正廳)에 종사(從仕)할 때에도 우연히 정여립과 공석(公席)에 앉아 함께 교정을 한 지 겨우 10여 일 만에 즉시 임하(林下)로 돌아왔으니, 어찌 친밀하게 사귀는 뜻을 둘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그 뒤로는 전혀 상종한 일이 없었습니다.그런데 이단상(李端相)의 소에서는 “정개청이 자주 정여립과 함께 산사(山寺)에서 만나 모의하였는데, 정여립이 ‘고금에 오직 이윤(伊尹)만이 성인 중에 자임한 분이다. 「누구를 섬긴들 나의 임금이 아니며 누구를 다스린들 나의 백성이 아니겠는가.」라는 그의 말이 정말 생동감이 있으니, 후생이 가장 본받을 만하다.’라고 하자, 정개청이 ‘선비는 인의(仁義)와 중정(中正)을 마음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절의(節義)는 한쪽에 치우친 것이니, 동한(東漢) 말에 나라를 망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아, 정개청이 자주 정여립과 산사에서 만나 모의하면서, ‘누구를 섬긴들 나의 임금이 아니겠는가.’라는 이야기까지 나왔다고 한다면, 그 정상(情狀)에 정말 의심할 만한 점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 당시에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다면, 같은 마을의 홍천경(洪千璟) 등이나 이웃 고을의 정암수(丁巖壽) 등이 몰랐을 리가 결코 없는데, 나주에서 무함하여 보고할 때나 위관(委官)과 함께 죄를 얽어 만들 즈음에 어찌하여 이에 대해서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단 말입니까.그리고 절의는 한쪽에 치우친 것이라는 설을 실제로 정여립과 상의하여 확정했다고 한다면, 이것도 정개청을 모함하기에 매우 좋은 재료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정암수 등이 소를 올리면서, 정개청이 지은 〈동한의 절의와 진송의 청담에 대한 논설〔東漢節義晉宋淸談說〕〉 위에 ‘배(排)’라는 글자를 멋대로 첨가하고는 “정개청이 일찍이 배절의(排節義)라는 하나의 설을 지어 후생을 미혹했습니다.……” 하였을 때와 또 위관(委官) 정철(鄭澈)이 계사(啓辭)를 올려 “정개청이 배절의의 논을 지어 한 세상의 인심을 혹란(惑亂)하였으니, 그 사특한 논설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그가 이미 절의를 배척했다면 절의와 상반되는 일을 반드시 좋아했을 것인데, 절의와 상반되는 일이 어떤 일이겠습니까.……” 하면서 기필코 죽이려고 하였을 때에, 또 어찌하여 정여립과 산사에 모여 모의하면서 절의는 한쪽에 치우친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다는 말을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그때에 온갖 방법으로 죄목을 주워 모으면서도 만들어 내지 못했던 말을 이단상(李端相)의 무리가 7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도대체 어디에서 얻어 듣고 이런 말을 한단 말입니까. 자기들이 하고 싶은 대로 지어내었다는 것이 또한 환히 밝혀졌다고 하겠습니다.송준길(宋浚吉)이 등대(登對)했을 때에 아뢰기를 “정개청(鄭介淸)이 역적의 공초(供招)에 두 번이나 나왔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정개청이 나포(拿捕)된 것은 당초 역적의 공초에 나왔기 때문이 아닙니다. 정여립의 역옥(逆獄)이 일어났을 당시에 전라 감사(全羅監司)가 역당(逆黨)에서 탈루된 사람을 적발할 일로 나주에 이문(移文)하여 탐문케 하였는데, 일주(一州)의 유생(儒生) 90여 인이 한데 모여, 역적과 관련된 사람은 전혀 없다는 일로 고장(告狀)을 제출하였습니다. 그 뒤에 향소(鄕所)의 몇 사람과 교생(校生) 6, 7인이 사감(私憾)을 품고 정개청을 죽이려고 모의하여 없는 일을 날조하고는 공론(公論)인 것처럼 꾸며 고장을 제출하기를 “정개청이 그 문생 조봉서(趙鳳瑞)와 함께 정여립의 집에 가서 터를 살펴보았다.……” 하였으므로, 이로 인해 경옥(京獄)으로 잡혀갔는데, 그 공사(供辭)의 대략에 “나주(羅州) 향소(鄕所) 및 향교(鄕校)의 유사(有司)와 당장(堂長) 등을 철저히 추문(推問)하여, 소문의 출처를 속속들이 캐내어야 한다.……” 하였습니다.이에 상이 “의계(議啓)하라.”라고 전교하니, 위관(委官) 정철(鄭澈)이 아뢰기를 “터를 살펴보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줄곧 억울하다고 칭하면서, 정여릉(鄭如陵) 등과 한곳에서 대질하여 증거를 밝히고 싶다고까지 말하고 있으니, 사실이 아닌 듯합니다. 그러나 일찍이 배절의(排節義)의 일설(一說)을 지어서 후진을 현혹한 일로 말하면, 그 유폐(流弊)가 홍수나 맹수보다도 심하니, 형추(刑推)하여 실정을 알아냈으면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한 차례 전형(殿刑)을 가한 뒤에 “조율(照律)하라.”라고 전교하니, 금부(禁府)가 위원(渭源)에 정배(定配)할 것으로 결정하였는데, 위관이 다시 아뢰어 경원(慶源)의 극변(極邊)으로 개정하였습니다. 그리하여 6월에 아산보(阿山堡)의 배소(配所)에 도착해서, 7월에 병으로 죽었습니다. 그 전이나 그 뒤나 역적의 공초(供招)에서 나온 일이 전혀 없는데, 지금 와서 역적의 공초에 두 번이나 나왔다고 말한 것은 무엇을 근거한 것입니까.대저 그렇고 보면 무안(務安)의 관노(官奴)였다는 것, 박순(朴淳)과 사생(師生)의 관계였다는 것, 산사(山寺)에서 모여 모의했다는 것, 역적의 공초에 두 차례 나왔다는 등의 이 네 가지 조목은 모두 기축옥사(己丑獄事) 때에는 없었던 것인데, 지금 와서 만들어 내어 정개청의 죄안으로 삼으려 하니, 정개청이 무함을 받은 것이 기축년(1589, 선조22) 때보다 갑절이나 된다고 신이 말한 것도 근거 없는 말이 아닙니다.역적 정여립(鄭汝立)이 양질호피(羊質虎皮)로 학문을 가탁하여 박식함을 과시하고, 고상하게 성명(性命)을 이야기하며 도의(道義)를 강론하였으므로, 한 세상의 내로라하는 사대부들이 모두 그의 속임수에 넘어갔는데, 정개청은 교정청(校正廳)에서 그의 얼굴을 처음 알았고, 그 뒤에 동료의 신분으로 우연히 글을 보냈을 뿐입니다. 한번 소식을 통하는 것은 인사상(人事上) 보통 있는 일이요, 몇 마디의 존칭은 편지에서 으레 하는 말인데, 이것으로 사람을 빠뜨리는 함정을 팔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당시에 위관(委官) 정철(鄭澈)이 아뢰기를 “이 서찰을 보면, 정개청이 역적과 두터운 교분을 맺었다는 것이 정말 거짓말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일찍부터 도의(德義)를 흠모하여 진심을 토로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라고 하였고, 또 ‘도를 깨달은 높고 밝은 식견은 오직 존형(尊兄)뿐이다.’라고 하였으니, 경악을 금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실로 죄를 얽어 만든 잔혹한 문자입니다. 그런데 송준길(宋浚吉)이 등대(登對)하여 아뢴 말과 이단상(李端相)이 상소한 말 중에도 이런 내용이 들어 있으니, 정철과 앞뒤로 그 수법이 똑같다고 할 것입니다. 이미 오래전에 신설(伸雪)되었는데 뒤에 와서 또 이것을 가지고 죄안(罪案)을 삼다니, 이 또한 심해도 너무 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아, 옛날에 왕안석(王安石)의 관직이 참정(參政)에 이를 때까지 사마광(司馬光)도 그가 소인(小人)인 줄을 알지 못하였고, 후군집(侯君集)이 필경에는 반역을 했지만, 위징(魏徵) 역시 일찍이 그 사람을 추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어떻게 사마광을 왕안석의 패거리라고 할 것이며, 위징을 후군집의 패거리라고 하겠습니까. 정개청이 편지를 보낸 것이 만약 정여립의 흉모(兇謀)가 탄로 난 뒤에 있었다면, 그 죄가 실로 헤아릴 수 없다고 하겠지만, 실제로는 정여립의 흉모가 탄로 나기 이전에 있었고 보면, 그것이 또 무슨 죄가 되겠습니까.굳이 옛일을 멀리 인용할 것도 없이, 우선 가까운 시대의 일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역적 심기원(沈器遠)과 김자점(金自點)이 정권을 잡았을 때에 어떤 사람이 그에게 편지를 보내 문안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모두 역적과 교분을 맺었다고 하여 한패거리로 몰아 죽일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정개청이 한 번 편지를 보낸 것을 가지고 어찌 지금에 와서 큰 죄로 삼아서야 되겠습니까.이이첨(李爾瞻)이 소인(小人)이라는 것은 그가 크게 뜻을 얻기 전부터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 부자(父子)가 서로(西路 관서(關西))에 왕래했을 때에는, 그가 멋대로 권세를 휘두르며 나라를 그르친 지 이미 세월이 오래 흘러서, 그 심보가 탄로 나고 죄상이 뚜렷이 드러난 것이 이미 낭자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이단상의 아비 이명한(李明漢)은 그에게 시를 지어 주기를 “문성이 지금 덕성과 함께 하니, 천리 강산에 흥이 외롭지 않으리. 상상컨대 관서의 새 악보를 얻어, 봉황이 새끼 거느린 곡 너도나도 부르리라.〔文星今與德星俱 千里湖山興不孤 想得關西新樂譜 一時爭唱鳳將雛〕”라고 하였는데, 덕성(德星)과 문성(文星)이라고 표현한 것이나 봉황이 새끼를 거느린다고 한 것은 대개 이이첨 부자를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신은 오랫동안 시골에 있어서 이 시의 내용을 자세히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신이 공조 참의가 되어 네 차례 소를 올려도 체직(遞職)되지 않았을 때에, 다시 다섯 번째 소를 올려 체직을 청하려 하자, 이단상 형제가 신의 소장(疏章) 중에 이 시가 응당 실려 있으리라는 말을 잘못 듣고는, 이를 갈고 손에 침을 뱉어 가며 기필코 신의 상소를 저지하려 하였는데, 혹자는 대론(臺論)이 촉급하게 발동된 것도 대개는 이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단상 형제가 분노한 나머지 가는 곳마다 번거롭게 말하며 신을 모함하느라 여념이 없었으므로, 이 시를 듣지 못했던 사람들까지 모두 듣고서 알게 되어, 그 자세한 내용이 마침내 신의 귀에까지 들어오게 되었으니, 이는 바로 “봄 꿩이 제 울음에 죽는다.〔春雉自鳴〕”라고 하는 것으로서 참으로 가소로운 일입니다. 이 시로 말하면, 한세상 사람들의 마음속 깊이 새겨지고 사방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나라의 사기(史記)에 드나들기까지 하였으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없는데, 어찌하여 유독 이단상만 듣지 못했단 말입니까.사람들은 혹 이 시를 가지고 이명한(李明漢)에게 죄를 돌리기도 하지만, 신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개 당시에 조정에 있던 신하들이 모두 이이첨(李爾瞻)과 절교하지 못하였는데, 어찌 유독 이것을 문제 삼아 이명한을 나무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단상의 처지에서는 이 일을 통해 저 일을 유추하고, 자기를 미루어 남을 이해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어찌하여 정개청이 이미 설원(雪冤)된 뒤에, 정여립의 역모가 드러나기 전에 정개청이 편지를 보내며 우연히 언급한 말을 끄집어내어, 그의 죄안(罪案)으로 삼는단 말입니까. 그가 밝지 못하고 후하지 못함을 다분히 볼 수가 있습니다.신의 이 의논은 실로 공명정대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이단상에게도 이로움만 있고 해로움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 번 말하여 만 번 타당할지라도 한 번 침묵을 지키는 것만 못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입 밖에 내지 않으려 하였습니다만, 이와 같은 의논은 대성인(大聖人)이 포용하는 대도(大度)에 도움이 될 것은 물론이요, 천하에 본보기가 되어 후세에 전할 만한 일도 되겠기에, 감히 구구하게 작은 혐의를 피하지 않는 바입니다.아, 정개청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가 끝내 형(刑)을 받고서 멀리 유배 가는 것을 면치 못한 것은 오직 배절의(排節義)라는 설을 지었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고금 천하에 글을 짓는 사람치고 어찌 배절의라는 말로 제목을 삼을 자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많은 말로 해명할 것도 없는 일입니다. 다만 신이 삼가 두려워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즉 황(簧)과 같은 말이 이미 성총(聖聰)을 현란케 한 이상에는, 비록 일월(日月)과 같은 성명(聖明)을 지니셨다고 하더라도, 만일 전문(全文)을 보지 않으면 분명히 아실 수 없는 점이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疏)의 끝에 전문(全文)을 베껴서 올리고 이와 함께 옥에 갇혔을 때의 공사(供辭)도 첨부하오니, 삼가 청하옵건대 유념하여 살펴 주소서.이단상(李端相)이 소(疏)에서 아뢰기를 “선조대왕(宣祖大王)께서 또 하교하기를 ‘정개청의 논설이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놀라게 하니, 글에 능한 지제교(知製敎)로 하여금 문자를 지어 일일이 변석(辨釋)하게 하고, 이를 팔도(八道)의 향교(鄕校)에 반포하여 목판(木板)에 새기고 벽 위에 붙여서 사습(士習)을 바로잡도록 하라.’라고 하셨습니다. 그 뒤에 고(故) 상신(相臣) 유성룡(柳成龍)이 진계(陳啓)하여, 기축년(1589, 선조22) 당시의 억울함을 신설(伸雪)해 주기를 청할 적에, 정개청의 일도 그 안에 들어 있었는데, 계해년(1623, 인조1)에 반정(反正)한 뒤에야 비로소 그 일을 신리(伸理)하였습니다.”라고 하였고, 또 아뢰기를 “유성룡이 진계(陳啓)하면서 운운한 말은, 역당(逆黨)으로 논한 것은 억울하다는 뜻을 펴려고 한 것에 불과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아, 기축년에 안옥(按獄)할 적에 정철(鄭澈)이 아뢰기를 “배절의(排節義)의 한 논설이 후진을 현혹시켜, 그 유폐(流弊)가 홍수와 맹수보다도 심하니, 형추(刑推)하여 실정을 알아내도록 하소서.”라고 하고, 또 아뢰기를 “배절의의 논설이 일세의 인심을 혹란(惑亂)하였는데, 그 사특한 내용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그가 이미 절의를 배척하였다면, 반드시 절의와 상반되는 일을 좋아했을 것인데, 절의와 상반되는 일이 어떤 일이겠습니까.” 하였는데, 그 말이 지극히 교묘해서 사람들이 흉험(凶險)하기 그지없는 그의 뜻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대신(大臣)의 말이 이와 같았으니, 비록 밝으신 성상께서 위에 계시더라도 어떻게 당장에 깨달을 수 있었겠습니까. 사신(詞臣)으로 하여금 배절의(排節義)를 반박하는 논을 짓게 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그러나 정개청이 논한 것이 실제로 이와 같지 않아서, 천리(天理)에 부합하고 정주(程朱)에 근본한 것이라면, 어떻게 끝까지 정론(正論)을 사설(邪說)이라고 매도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에 간당비(姦黨碑)와 위학금(僞學禁)의 사건이 인주(人主)에게서 나왔습니까, 소인(小人)에게서 나왔습니까. 간당비에 든 자가 길이 간당이 되었으며, 위학금에 든 자가 길이 위학이 되었습니까. 그렇다면 정개청의 경우만 홀로 한때의 소인이 현혹했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반박문을 지어서 사방에 퍼뜨려 고한 일 때문에, 만고토록 분변하지도 못하고 밝히지도 못하겠습니까. 기축년(1589, 선조22)에 무함으로 죽은 것이 오직 이 일 때문이었고 보면, 계해년(1623, 인조1)에 신설(伸雪)된 것도 바로 이 일을 신설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설된 지 이미 36년이 지난 뒤에 다시 이 말을 하는 것은 결코 아무 의도 없이 발한 것이 아닙니다.이단상(李端相)이 소(疏)에서 아뢰기를 “이른바 신리(伸理)라고 한 것은 단지 그가 역당(逆黨)에 참여한 것이 아님을 신리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이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 말입니다. 정개청이 옥에 갇혔을 당시에 공초(供招)를 하고 나서, 상이 의계(議啓)하라고 전교하자, 위관(委官) 정철이 아뢰기를 “터를 보았다는 일은 줄곧 억울하다고 칭하였으며, 심지어는 정여릉(鄭如陵) 등과 한곳에서 대질신문하기를 원한다고 말하기까지 하니 사실이 아닌 듯합니다. 그러나 일찍이 배절의(排節義)의 한 논설을 지은 것으로 말하면, 후진을 현혹하여 그 유폐(流弊)가 홍수와 맹수보다도 심하니, 형추(刑推)하여 실정을 알아냈으면 합니다.”라고 하였으므로, 전형(殿刑)을 한 차례 가하였습니다. 이에 전교하기를 “금부(禁府)로 하여금 조율(照律)하게 하라.”라고 하니, 금부가 위원(渭源)으로 정배(定配)하기를 청하였는데, 위관(委官)이 다시 아뢰어 경원(慶源)의 극변(極邊)으로 개정한 것입니다.그러고 보면 그 당시의 정개청의 죄는 배절의의 한 논설로 말미암은 것에 지나지 않았고, 본래 당역(黨逆)과 관련하여 죄를 입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역의 한 조목은 당초 안옥(按獄)할 때에 이미 신설(伸雪)된 것이니, 그 뒤에 또 신설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계해년(1623, 인조1)에 신설된 것은 바로 배절의(排節義)의 무함을 받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이 배절의의 무함이 이미 신설되었는데, 지금 다시 배절의를 가지고 무함을 하다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도리입니까.선묘(宣廟)께서 죄주신 것은 실로 배절의와 관련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단상이 단지 역당에 참여하지 않았음을 신리(伸理)한 것이라고 말한 것을 가지고 살펴보건대, 선묘께서 역당으로 죄주셨는데 그것이 계해년에 와서야 비로소 신리한 것같이 되었으니, 이는 선묘께서 당역(黨逆)의 무함을 신원(伸冤)해 주신 것을 엄폐한 것입니다. 그리고 선왕(先王 인조)께서 신원해 주신 것은 실제로 배절의에 대한 무함인데, 이단상이 단지 역당에 참여하지 않은 것을 신리한 것이라고 말했으니, 이는 선왕께서 배절의의 무함을 분명히 설원(雪冤)해 주신 것을 엄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단상이 끝내 정개청만 무함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또한 선묘(宣廟)와 인묘(仁廟) 그리고 우리 성상까지도 무망(誣罔)한 것입니다.유성룡(柳成龍)이 진계(陳啓)한 내용 중에 “정개청은 호남 사람 중에서 더욱 명성이 있었고, 평소에 학술(學術)과 행검(行檢)으로 자임하였는데, 우연히 한 편의 논을 지은 것 때문에 몸을 멸하기에 이르렀습니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단상의 소에서는 이 말을 완전히 빼 버리고 단지 “기축년(1589, 선조22) 당시의 억울함을 설원(雪冤)하려고 청하였는데, 정개청도 그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도 아무 의도 없이 나온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무식한 하품(下品)의 사람이라도 억울하게 죽었으면 설원해 주어야 하겠습니다만, 정개청이 만약 평소에 학술과 행검으로 자임한 사실이 없었다면, 유성룡이 이런 말을 할 수도 없었을 뿐 아니라, 아마 말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그리고 유성룡이 또 “우연히 한 편의 논을 지은 것 때문에 몸을 멸하기에 이르렀습니다.”라고 아뢰었고 보면, 유성룡의 말 역시 정개청이 몸을 멸한 원인이 배절의(排節義)의 논설에서 나온 것이지 당역(黨逆)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말한 것임을 또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단상은 “계해년(1623, 인조1)에 반정(反正)한 뒤에야 비로소 신리(伸理)할 수 있었는데, 소위 신리라고 하는 것은 단지 역당에 참여하지 않은 것을 신리한 것입니다.”라고 하였고, 또 “유성룡이 진계(陳啓)한 가운데 운운한 말은, 정개청을 역당으로 논한 것은 억울하다는 뜻을 펴려고 한 것에 불과합니다.”라고 하였는데, 그 말이 모두 근거가 없는 만큼 무망(誣罔)한 것임이 더욱 드러났다고 하겠습니다.맹자(孟子)가 이르기를 “그의 시를 낭송하고 그의 글을 읽으면서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대서야 말이 되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이는 대개 그 사람이 지은 것을 보면 그 사람의 학술과 도덕의 고하(高下)와 심천(深淺)과 진위(眞僞)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개청이 지은 글로, 《수수기(隨手記)》 9권과 《우득록(愚得錄)》 3권이 있는데, 정개청이 처음 체포될 적에 금오랑(金吾郞)이 금중(禁中)에 거둬들였습니다. 그 뒤에 선묘(宣廟)께서 열람하시고 이르기를 “이 사람은 고인(古人)의 글을 읽은 사람이다.”라고 하고는, 현저(縣邸)에 내려 본가(本家)에 환급(還給)하도록 명하였습니다. 그런데 현저에서 잘못 전하는 바람에 《수수기》는 잃어버렸고 《우득록》은 지금도 보관하고 있는데, 이 하나의 글만 보아도 정개청의 사람됨을 알 수 있습니다.또 세상에 《기축록(己丑錄)》 2권이 있는데, 한 권은 최영경(崔永慶)의 행장(行狀)과 묘갈(墓碣) 및 무함을 입고 신원(伸冤)된 일 등을 실었고, 한 권은 정개청이 무함을 당한 일을 실었습니다. 두 권의 책에 다른 말은 없고, 다만 당시의 추안(推案)과 소차(疏箚)를 기록하였는데, 누구의 손에서 나왔는지는 모르겠으나, 덕을 숭상하고 선을 좋아하는 사람이 기록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 두 권을 보시면 그때의 억울했던 곡절을 분변하지 않아도 밝게 드러날 것입니다. 신이 이상 3건(件)의 서적을 함께 올리고 싶기도 합니다만, 황공하여 감히 번독(煩瀆)하지 못하겠습니다.아, 기축년(1589, 선조22) 연간에 당론(黨論)이 바야흐로 치열해지자, 정개청이 그만 무함을 입고 죽었습니다. 그러다가 인묘(仁廟) 초년에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경계하는 마음을 지녀, 피차(彼此)의 파당(派黨)을 타파하고 공도(公道)를 드넓히자, 정개청이 억울함을 씻고 관작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무함을 받은 것이 또 기축년에 비해 갑절이나 되니, 이는 바로 당론이 다시 치열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정개청의 행(幸)과 불행(不幸)이 단지 공도(公道)가 행해지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도 하겠는데, 이것이 어찌 유독 정개청에게만 관련되는 일이겠습니까. 이 역시 성명(聖明)께서 근심해야 마땅한 일이요, 충신(忠臣)이 두려워해야 마땅한 일입니다.아, 기축년의 안옥(按獄)을 정철(鄭澈)이 주도하면서, 국가의 불행한 큰 변고를 자기의 감정을 푸는 기회로 삼아서, 온 조정의 선류(善類)를 거의 모두 해치고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 여파가 정철과 뜻을 달리하는 초야의 인사에게까지 미쳐, 영남의 최영경(崔永慶)과 호남의 정개청(鄭介淸)이 모두 화를 면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에 최영경은 바로 신원(伸冤)이 되고 증작(贈爵)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최영경과 정개청이 똑같은 처지였는데도, 최영경은 먼저 신원이 되고 정개청은 신원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최영경은 역적의 패거리가 되어 기병(起兵)하려 했다는 무함으로 죄를 입었고, 정개청은 절의를 배척하는 설을 지었다는 무함으로 죄를 입었는데, 죄명(罪名)에 경중이 있었던 만큼 신설(伸雪)하는 데에 하나는 빨리 되고 하나는 늦게 된 것도 본디 있을 법한 일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당시에 영남에는 경악(經幄)에 출입하며 임금의 마음을 인도하여 보좌하는 사람이 많았던 반면에, 호남에는 이런 사람이 없었으니, 이것도 동시에 신설될 수 없었던 이유라고 할 것입니다.아, 최영경은 세상 밖에 은거하여 세상의 중망(重望)을 입었고, 정개청은 학술과 행의(行誼)로써 세상의 추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정여립(鄭汝立)과 교분이 없었음은 물론이요, 역적의 초사(招辭)에도 나오지 않았는데, 정철(鄭澈)이 이 두 사람을 꼭 죽이려 했던 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최영경은 항상 정철을 성질을 못 참는 소인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안민학(安敏學)이 최영경에게 정철을 칭찬하며 말하기를 “이 사람이 국가에 마음을 다하는 것을 알 수 있다.”라고 하자, 최영경이 대답하기를 “나는 오래도록 성중(城中)에 있었지만, 그 사람이 좋은 벼슬한다는 말만 들었을 뿐, 국가 대계를 건의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정철이 그 말을 듣고는 깊이 원한을 품었습니다.또 어떤 사람이 정개청에게 정철의 사람됨을 물으면서 그가 청백(淸白)하다고 칭찬하자, 정개청이 대답하기를 “선유(先儒)의 말에 의하면, 사람이 몸가짐을 청고(淸苦)하게 하면서도 관작(官爵)을 사랑한 나머지 아비와 임금을 죽이는 일도 감히 저지른다고 하였다.……” 하였으며, 또 무자년(1588, 선조21) 연간에 정철이 광주(光州)에 있었는데, 정개청이 곡성 현감(谷城縣監)으로서 근친(覲親)하러 왕래할 즈음에 한 번도 존문(存問)하지 않았고, 그 문 앞을 지나가면서도 들어가지 않았으므로 정철이 더욱 심하게 앙심을 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두 사람에게 앙화(殃禍)가 된 까닭으로, 정철이 이들을 교묘하게 무함하여 일률적으로 섬멸하고 만 것입니다.그러나 선비를 죽였다는 이름은 만고(萬古)의 대악(大惡)이 되는 것이요, 공론(公論)도 끝내 없앨 수 없는 바가 있어서, 양도(兩道)에서는 사림(士林)의 상소가 해마다 일어나고, 조정에서는 대각(臺閣)의 논박(論駁)이 때로 준엄하였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선묘(宣廟)께서도 마음속으로 곧바로 깨달으셨고, 깨달으신 후에는 곧장 명을 내려 정철을 삭탈관작(削奪官爵)하고 강계(江界)에 안치(安置)시켰으며, 매양 정철을 간철(姦澈) 또는 독철(毒澈)이라고 칭하는가 하면 심지어 그 자손을 독종(毒種)이라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전조(銓曹)에 엄히 하교하여 벼슬에 의망(擬望)하지 못하게 하셨으니, 비록 효자 자손(孝子慈孫)이라도 감히 원통함을 호소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그런데 혼조(昏朝 광해조) 때에 와서 정철(鄭澈)의 아들 정종명(鄭宗溟) 등이 그 아비의 설원(雪冤)을 청한 소(疏)를 보건대, 그 아비가 계청(啓請)하여 정개청을 무함한 말은 완전히 빼 버리고 아뢰기를 “선묘(宣廟)께서 배절의(排節義)의 논설을 문목(問目) 가운데에 넣어 형추(刑推)하도록 명하셨습니다.”라고 하였으며, 최영경의 일에 대해서도 그 아비가 구원하려 하였으나 그렇게 안 되었다는 뜻으로 말하였습니다. 그러고는 마침내 그 무리로 하여금 모두 이렇게 말하게 하였는데, 그 뜻은 대개 선비를 죽인 이름을 임금에게로 돌리고, 그 아비가 선비를 죽인 죄를 벗겨 주려는 것이었으니, 그 계책이 참독(慘毒)하기만 합니다.이단상(李端相)의 소를 보아도, 정철이 계청하여 정개청을 무함한 말은 빼 버리고, 단지 “선묘께서 배절의의 한 조목을 문목(問目) 중에 첨가해 들이라고 하교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차례 형신(刑訊)한 뒤에 북쪽 변방으로 귀양 보내도록 명하셨는데, 그곳에서 죽었습니다.”라고만 말하였습니다. 이단상이 상소한 말 역시 대개는 정종명의 말을 그대로 본뜬 것인데, 이단상의 분의(分義)가 정종명과는 다른데도 그의 말이 이처럼 똑같은 것은 어찌된 일입니까.또 김장생은 항상 정철을 군자(君子)라고 하였습니다. 송준길이 정개청을 무함하면서 자기 스승의 말을 많이 증거로 삼은 것은 그의 중망(重望)을 빌려서 정철을 두둔하고자 함이요, 정철을 두둔하려고 한 것은 자기 스승의 말을 합리화하고자 함입니다. 그런데 그가 무망(誣罔)한 것이 지금 와서 환히 드러났고, 또 반드시 만세(萬世)의 공론(公論)이 있게 되었으니, 자기 스승을 위하려고 한 것이 끝내는 스승을 해치는 결과가 되지 않겠습니까.이단상이 정개청을 무함한 말이 모두 송준길과 표리(表裏)의 관계를 이루고 있는데, 그 말이 송준길에 비해 더욱 추가되고 더욱 주밀한 것 역시 송준길을 두둔하기 위한 것 아님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만세의 공론에 비추어 볼 때 송준길의 하자(瑕疵)와 흠결을 더욱 중하게 하는 것임을 자각하지 못한 것이니, 이 또한 너무나도 생각이 부족한 것입니다.정개청이 구원(九原)의 썩은 뼈가 된 지 이미 70년이 지났으니, 오늘날의 사람 중에 그 누가 혐의를 하겠으며 그 누가 원망을 하겠습니까. 비록 무함을 한다 해도 이로울 것이 없을 것이요, 신설(伸雪)을 한다 해도 해로울 것이 없을 터인데, 무함하기를 반드시 기축년(1589, 선조22) 때보다 곱절이나 더 하려고 하는 그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이는 대개 그 일을 정개청이 자초한 화로 돌리고, 정철이 선비를 죽였다는 이름을 벗겨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추후로 정개청의 죄명을 날조한다는 것은 끝내 성공할 수 없는 일이요, 또 후세에 가서도 어찌 이를 분변할 사람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저 사람들도 이 점을 생각했기 때문에, 선비를 죽인 악명(惡名)을 마침내 군상(君上)에게 돌리려고 한 것이니, 이 또한 너무나도 통탄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그리고 서원(書院)이 있고 없는 것은 그 손해와 이익이 다만 사림(士林)에나 있을 뿐이요, 서원에 봉안된 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개청을 사종(師宗)으로 삼은 사람들도 어찌 서원의 유무를 가지고 정개청의 경중(輕重)을 삼아서, 있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고 없는 것을 유감스럽게 여기겠습니까.다만 우리나라에서 정개청에 미치지 못하는데도 서원에 봉안된 자들이 또 필시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인데, 유독 먼저 정개청의 서원을 훼철(毁撤)하려고 급급해하니, 이것도 대개는 뜻하는 바가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서원을 건립하고 훼철하는 것은 다만 그 사람의 도덕이 합당한지 부족한지의 여부만 논해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꼭 평소에 없었던 죄안을 애써 찾아내려고 한단 말입니까.더구나 정개청과 같은 경우는 직위도 보잘것없고 붕당의 후원도 없는 처지이니, 그의 서원을 훼철하려면 많은 말과 힘을 허비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축년(1589, 선조22)에도 없었던 허다한 죄상을 가지고 무함하기까지 하였으니, 이것도 어찌 목적하는 바가 없이 그렇게 하였겠습니까.그 의도는 대개 정철이 한 선량한 선비를 죽인 이름을 기필코 벗겨 주려고 하는 것이니, 신은 정개청(鄭介淸)을 일단 해치고 나서는 장차 최영경(崔永慶)에게도 이와 똑같은 일이 미칠까 두렵습니다. 정종명(鄭宗溟)의 서론(緖論)을 주워 모아, 이처럼 형적도 없고 근거도 없는 설을 같은 편 사람들 속에 세운 뒤에, 위로는 분명히 포진(布陣)한 귀신을 무함하고, 아래로는 삼엄하게 지켜보고 가리키는 것을 현혹하였으니, 당론이 국시(國是)를 해롭게 하고 국맥(國脈)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송준길은 한쪽 편의 사람 중에서 명망이 중하여 한 시대의 추존(推尊)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이 정개청을 논하는 것이 송준길과 다른 점이 있자, 사람들 중에는 혹 신을 위하여 두려워하며 신을 경계시키는 자도 있습니다만, 신의 생각은 이와 다릅니다. “임금이 한마디 말을 내놓으며 스스로 옳다고 하면 경대부(卿大夫)가 감히 그 잘못을 바로잡지 못한다.”라고 한 것은 바로 자사(子思)가 깊이 경계한 바입니다. 임금과 신하 사이에서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아랫사람들끼리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 말이 혹 국시(國是)에 맞지 않는 점이 있다면, 신이 어떻게 차마 송준길이 있는 것만 알고 나라가 있는 것은 알지 못하여, 감히 주광(黈纊)의 아래에 밝게 분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더구나 송준길이 말한 것이 어찌 그가 멋대로 지어낸 것이겠습니까. 필시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것일 터이니, 그 사람이 송준길을 그르친 것이요 송준길이 국시(國是)를 그르친 것이 아닙니다. 자로(子路)는 과실(過失)을 들으면 기뻐하였고, 공자(孔子)는 만약 과실이 있으면 사람들이 반드시 알게 되니 다행이라고 하였으며, 대순(大舜)은 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르며 남이 선(善)을 하도록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송준길이 과연 군자(君子)로서 신의 말이 옳다는 것을 실제로 깨닫는다면, 필시 자로가 과실 듣는 것을 기뻐하고, 공자가 과실이 있으면 사람들이 반드시 아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대순이 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르며 남이 선을 하도록 도와준 것처럼 할 것이니,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신의 말을 유감스럽게 생각하겠습니까.송준길이 과연 이 도리를 잘 행하여 과실을 고치는 데에 인색하지 않다면, 신도 어찌 송준길을 혐의하여 끝까지 피차(彼此)를 구별하는 마음을 두겠습니까. 뒷날 혹시 서로 만난다면, 처음에 서로 어긋나서 길이 달랐던 것을 탄식하고, 마침내 다정하게 같이 돌아가게 된 것을 기뻐할 것입니다. 신을 위하여 두려워하며 경계시키는 자는 바로 송준길이 과실을 고치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서 송준길을 포기해 버리는 자입니다.신은 정개청(鄭介淸)의 지극한 원한을 민망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실로 국시(國是)가 크게 문란해진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이에 국가에 대한 심각한 두려움과 전하를 위하는 지극한 정성에서, 기휘(忌諱)해야 할 일도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을 가려서 할 줄도 알지 못한 채 아뢰게 되었으니, 삼가 바라옵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은미(隱微)한 곳도 빠짐없이 비추시어 덕음(德音)을 널리 선포해 주소서. 그리하여 정개청의 지하(地下)의 억울함을 풀어 주고, 만고(萬古)의 사림(士林)의 공론(公論)을 통쾌하게 해 주시어, 국시를 바로잡고 국명(國命)이 영원히 지속되게 한다면, 종사(宗社)에 매우 다행이겠습니다.아,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 정개청을 두둔하는 사람들도 꼭 정개청의 훌륭함을 진실로 알고 정개청의 원통함을 진실로 비통해한다고는 할 수가 없으니, 대개는 정철의 간사하고 악독함을 진실로 증오하는 마음에서 나왔다고 할 것이요, 정개청을 무함하는 사람들도 꼭 정개청의 훌륭함과 억울함을 마음속으로 알면서 입으로 이런 말을 한다고는 할 수가 없으니, 대개는 정철이 선량한 선비를 죽였다는 이름을 벗겨 주려고 급급해하는 마음에서 나왔다고 할 것입니다.대저 그렇다면 사람들이 어떤 사람의 현부(賢否)와 어떤 일의 시비(是非)를 잘못 논하는 것은, 모두 그 사람의 현부와 그 일의 시비를 진실로 알지 못하는 데에서 기인한다고 할 것입니다. 만약 진실로 알기만 한다면, 비록 구애(拘礙)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 차마 하늘을 속이고 임금을 속이는 지경에 스스로 빠져, 천만고(千萬古)토록 음험하고 간사한 소인이 되는 일을 감수하겠습니까.단지 천운(天運)이 쇠퇴하고 세상이 말세가 되어, 교화가 허물어지고 풍속이 퇴폐해진 탓으로, 사람들이 많이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윤리에 어두워졌기 때문이니, 이것이 바로 증자(曾子)가 “범죄의 실정을 알아냈다고 하더라도, 불쌍히 여기고 기뻐하지 말라.”라고 말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어찌 한두 가지 일만 그러하겠습니까. 만 가지 일이 모두 이와 같은데, 만 가지 일이 모두 이와 같으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될 것은 꼭 지혜로운 자가 아니더라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그러므로 명도(明道 정호(程顥)) 선생이 조정에서 말하기를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풍속을 바로잡고 현재를 얻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治天下以正風俗得賢材爲本〕”라고 하면서, 정학(正學)을 강명하는 도리에 대해서 누누이 언급하였으니, 그 말이 참으로 음미할 만합니다. 신이 생각하기에 현재 치국(治國)의 방도 중에서 그 어떤 것도 이보다 앞설 수는 없을 듯싶으니, 삼가 바라옵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실제로 여기에 유념하시어 언제나 급선무로 삼도록 하소서.아, 신이 소싯적에 정개청이 선인(善人)이라는 말을 대략 들었고, 또 정개청이 지극히 억울하게 죽었다는 말을 대략 듣기만 하였습니다. 그 뒤에 유성룡이 기축년(1589, 선조22) 당시의 억울함을 신원(伸冤)해 주기를 청하면서 “정개청이 평소에 학술(學術)과 행검(行檢)으로 자임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는 말을 듣고는, 비로소 그가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만, 그래도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정개청이 저술한 《우득록(愚得錄)》을 얻어서 상세히 음미하고 나서야, 정개청의 학문이 실지(實地)에 발을 딛었으며 연원(淵源)이 또 순수하여 다른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았습니다.아,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말을 잘한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꼭 덕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라고 하였으니, 이로써 말한다면 본디 그 말을 가지고 그 사람을 알 수는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소순(蘇洵)은 말하기를 “한마디 말이라도 도(道)에 가깝게 하기가 어렵다.”라고 하였고, 한유(韓愈)는 말하기를 “순자(荀子)와 양웅(揚雄)이 이 도를 선택하긴 하였으나 정밀하지 못하였고, 이에 대해서 말하긴 하였으나 상세하지 못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의 말을 살펴보면 그가 성인임을 알 수 있고, 현인(賢人)의 말을 살펴보면 그가 현인임을 알 수 있으며, 참된 학자의 말을 보면 그가 참된 학자임을 알 수 있고, 거짓 학자의 말을 보면 그가 거짓 학자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정개청이 만약 참되게 쌓고 힘껏 추구하여 실천하며 체인(體認)한 것이 아니라면, 그 말이 어떻게 순수하게 한결같이 바른 데에서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이는 《역(易)》에서 “문사(文辭)를 닦아서 자신의 참된 뜻을 드러낸다.〔修辭立其誠〕”라고 말한 것과 거의 가까워서, 어떻게 흠을 끄집어내어 따져 볼 수가 없었습니다. 신은 이를 통해서, 정개청의 학문이 가까운 데에서부터 먼 데로 나아가고, 낮은 곳에서부터 높은 곳으로 올라갔으며, 상세히 말하면서 돌이켜 요약하고, 아래로 인사(人事)를 배워 위로 천리(天理)에 통달하였으며, 깊이 나아가 스스로 터득하고, 체(體)를 밝혀 용(用)에 알맞게 하였으며, 배우는 것과 행하는 것이 모두 흠 없이 착실하게 되도록 노력하였을 뿐, 결코 외면을 꾸며 남의 환심을 사거나 세상과 다르게 행동하여 명예를 구하고 세상을 속이며 이름을 도둑질하는 자가 아님을 알았습니다.이는 참으로 염계(濂溪)가 말한 “귀로 듣고 마음속에 간직하여 그것을 몸에 쌓아 두면 덕행이 되고, 밖으로 행하면 사업이 된다.”라고 하는 것이요, 명도(明道)가 말한 “평민으로부터 성인(聖人)에 이르는 도이다.”라고 하는 것이니, 그는 실로 우리 동방(東方)의 진유(眞儒)로 이황(李滉)에 버금가는 자라고 이를 만합니다. 그가 지은 《우득록(愚得錄)》을 만약 세상에 간행한다면 풍화(風化)에 도움을 줄 수도 있고 사습(士習)에도 이로운 점이 있을 것이니, 어찌 간행하느라 괜히 재력(財力)만 허비하는 타인의 부과(浮誇)하고 화조(華藻)한 문사(文詞) 따위에 비교하겠습니까.그런데 세대(世代)가 이미 오래되고 문생(門生)이 모두 죽어서 여기에 뜻을 두는 자가 있지 않습니다. 성조(聖朝)에서 문교(文敎)를 숭상하고 학교(學校)를 일으켜서 사습(士習)을 바로잡으려 하는 이때를 당하여, 한 고을에 명을 내려 간행하고 반포하게 한다면, 조가(朝家)의 영광과 사림(士林)의 다행이 되어 천추(千秋)에 빛을 드리우게 될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후세에 말을 아는 군자들도 반드시 백세(百世)의 시간을 사이에 두고서 상호 감응하게 될 것이니, 성경현전(聖經賢傳)의 뜻을 떨쳐 드러내는 효과가 또한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글을 어찌 차마 밝은 이 시대에 없어지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응당 성명(聖明)께서 깊이 유념하셔야 할 것입니다.그런데 기축년(1589, 선조22) 역옥(逆獄) 당시에 고(故) 상신(相臣) 정언신(鄭彦信)이 잡혀가게 되자, 그 아들 정률(鄭慄)이 그 부친의 지극히 원통한 사정을 비통하게 여긴 나머지 그만 자지러져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때 그 집이 참혹하게 환란에 휩싸인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만사(挽詞)를 청할 생각도 하지 못하였고, 사람들도 감히 만사를 짓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고(故) 상신(相臣) 이항복(李恒福)이 정률과 교분이 있었는데, 그때에 문사랑(問事郞)으로서 지극히 원통한 사정을 상세히 알고 있었으므로, 그를 위해 한 편의 글을 지어서 광중(壙中)에 넣게 하였습니다. 그 뒤에 정률의 아들 정세규(鄭世䂓) 등이 장성하여, 정률을 천조(遷厝)할 때에 무덤을 헤치고 그 만사를 얻었는데, 그 글의 대략에 “입이 있어도 어찌 다시 말을 하랴, 눈물만 흘릴 뿐 감히 곡도 못한다네. 베개 어루만지며 남이 엿볼까 겁을 내고, 소리 삼켜 가며 남몰래 눈물 머금었네. 누가 잘 드는 칼을 가지고, 나의 구곡간장을 잘라 내 줄까.〔有口豈復言 有淚不敢哭 撫枕畏人窺 呑聲潛飮泣 誰持快翦刀 痛割吾心曲〕”라고 하였습니다.그 뒤에 이현영(李顯英)이 강원 감사(江原監司)가 되고, 이명준(李命俊)이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있을 적에, 강릉에서 《백사집(白沙集)》을 발간하였는데, 백사는 바로 이항복의 별호(別號)입니다. 그 문집이 세상에 인행(印行)된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정철의 아들 정홍명(鄭弘溟)이 이 만사(挽詞)를 보고는 꺼려하여, 다시 《백사집》을 진주(晉州)에서 발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진주판(晉州板)에서는 그 시를 삭제해 버리고, 한 편의 글을 말단에 추가하여 집어넣고는 이항복이 지은 것같이 하였는데, 이 글은 모두 정철이 선류(善類)들을 극력 변호하고 구제하였으며 선비를 죽이는 일은 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그러나 안목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문체(文體)가 같지 않다. 반 이상은 이항복의 문체와 같은데, 반 이하는 전혀 같지 않다. 그리고 위와 아래의 말뜻이 또 많이 어긋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항복의 본뜻이 이와 같지 않음을 알고서 모두 이르기를 “이 글은 바로 정홍명이 멋대로 자기의 생각을 더하여 교묘하게 꾸미고 첨가해 조작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그런데 위와 아래의 문체가 같지 않은 것과 위와 아래의 말뜻이 어긋나는 것을 가지고 유추해 보건대, 이 글은 원래 정철의 간사한 실상을 드러냈으므로 이항복의 자제들이 감히 내놓지 못한 까닭에 강릉본(江陵本)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인데, 정홍명이 교묘하게 꾸미고 첨가해 조작한 뒤에 문집의 끝에다 편집하여 진주본(晉州本)을 발간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이 글을 완전히 고치지 않고 정철에게 해로운 반 이상의 말을 그대로 둔 것은, 대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믿지 않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지금 정철을 두호(斗護)하는 무리로 하여금 정개청의 글을 간행하게 한다면, 위와 같은 폐단이 있을까 두려우니, 만일 정개청의 글을 출간하도록 하락하신다면, 이러한 점도 생각하여 미리 조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전하께서 신의 말을 들어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만, 신의 말을 들어주시지 않더라도, 신의 말은 오히려 우주(宇宙) 사이의 공론(公論)이 되어, 오도(吾道)에 만분의 일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신은 삼가 옛사람이 “신이 차라리 할 말을 다하고 죽을지언정 말을 하지 않아 폐하를 저버리는 일은 차마 하지 못하겠다.”라고 한 말을 스스로 따르고자 합니다. 신은 두려워 떨리는 지극한 심정을 가누지 못한 채,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정원(政院)에 무려 열 번이나 올렸으나, 모두 기각당하였으며, 마지막에는 상의 체후(體候)가 미령(未寧)하다는 이유로 도로 출급(出給)하였다.동한의 절의와 진송의 청담에 대한 논설의 서문〔東漢節義晉宋淸談說序〕 [정개청(鄭介淸)]나는 일찍이 이런 의문이 들었다. 그것은 즉 “당우(唐虞 요순(堯舜))와 삼대(三代 하(夏), 은(殷), 주(周))에 사람을 기를 때에는 단지 인륜(人倫)을 밝히면서, 오교(五敎 오륜(五倫))와 구덕(九德)과 육덕(六德)과 육행(六行)을 말했을 뿐인데도, 풍화(風化)가 아름답고 인재(人材)가 성대하여 화락하고 번성하였다. 반면에 후세에서 숭상한 것은 백가(百家)의 중기(衆技)로서, 신한(申韓)과 황로(黃老)와 절의(節義)와 청담(淸談)을 일컬었지만, 인심(人心)이 사특하고 세도(世道)가 오염되는 것이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라는 것이었다.그리고 혼자서 이런 생각을 하였다. 그것은 즉 ‘삼대(三代) 이상의 학문은 그 체(體)를 밝혀 그 용(用)에 맞게 하였으니, 만고토록 어느 때나 행할 수가 있는 것이다. 반면에 한당(漢唐) 이하에서 익힌 것은 지말(枝末)을 일삼고 근본(根本)을 버렸으니, 당시에도 벌써 폐해가 있음을 면치 못하였다. 이것이 치란과 안위가 나뉜 소이(所以)이니, 학자가 강구하여 신중히 택해야 할 것이요, 국가가 성찰하고 경계해야 할 것이다.’라는 것이었다.그러나 이와 같은 나의 생각이 옳은 것인지 확인할 길이 없어서 마음속에 의심으로 남은 지 몇 년이나 되었다. 그러다가 《주자어류(朱子語類)》를 읽다 보니, 혹자(或者)가 이천(伊川 정이(程頤))의 말을 인용하며 “진송의 청담은 동한의 절의에 말미암은 것으로서 한번 물결이 쳐서 이에 이르렀다.〔晉宋淸談因東漢節義 一激而至此〕”라고 하자, 주자(朱子)가 “동한에서 절의를 숭상할 당시에도 청담과 같은 의사가 본래 그 속에 들어 있었다. 대개 당시에 절의를 숭상하는 사람들은 온 세상을 거만하게 흘겨보고 조정을 더럽게 여기는 뜻이 있었는데, 이러한 의사에서 자연히 천하를 경시(輕視)하는 마음이 있게 되어, 얼마 있다가 청담으로 흘러 들어가게 된 것이다.〔東漢節義之時 便自有這箇意思了 蓋當時節義底人 便有傲睨一世 汚濁朝廷之意 這意思便自有高視天下之心 少間流入於淸談去〕”라고 하였고, 또 “절의를 숭상한 인사들은 원래 자기 지위에서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었으니, 이로 인해 화를 자초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節義之士 固是非其位之所當言 宜足以致禍〕”라고 하였고, 또 “후한의 명절이 말년에 이르러서는 자기를 귀하게 여기고 남은 천하게 여기는 폐단이 있었다. 이러한 폐단이 계속해서 쌓이다 보면 그 형세가 반드시 허탄해져서 노장으로 흘러 들어가게 마련이다.〔後漢名節 至於末年 有貴己賤人之弊 積此不已 其勢必至於虛浮 入老莊〕”라고 하였고, 또 “건안 이후에 중국의 사대부들은 조씨가 있는 것만 알았지, 한나라 왕실이 있는 것은 알지 못했다.〔建安以後 中州士大夫只知有曹氏 不知有漢室〕”라고 하였고, 진송(晉宋)의 인물에 대해서는 “비록 청고함을 숭상한다고 하면서도, 개인적으로는 모두 관직을 탐내었으므로, 이쪽에서는 청담을 하는 일면을 보이고, 저쪽에서는 권세를 부리며 뇌물을 받는 일면을 보였다.〔雖曰尙淸高 然箇箇要官職 這邊一面淸談 那邊一面招權納貨〕”라고 하였다.이에 내가 전일에 의심하던 것이 얼음 녹듯 풀어지면서, 마음속으로 희열이 느껴졌으므로, 동한(東漢)의 절의(節義)와 진송(晉宋)의 청담(淸談)이 끼친 폐단을 확실히 논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성현(聖賢)의 학문에 종사하고 예의(禮義)의 규범에 순응할 줄은 알지 못한 채, 단지 조정의 잘못을 들춰내고 인물의 선악을 따질 줄만 알았을 뿐, 사태를 파악하는 것이 밝지 못하고 시국에 대처하는 것이 타당함을 잃은 나머지, 몸을 망치고 공을 무너뜨리며 남의 나라의 멸망을 재촉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그것이 잘못된 줄 스스로 알지 못함을 탄식하였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드러내어 설을 지었다.동한의 절의와 진송의 청담에 대한 논설〔東漢節義晉宋淸談說〕동한(東漢)의 절의(節義)를 공명(功名)에 비교한다면, 그 고상함이 그래도 퇴폐한 자를 격동시키고 나태한 자를 일으킬 수 있으며, 진송(晉宋)의 청담(淸談)을 모리(謀利)에 비교한다면, 그 기개가 또한 정욕을 절제하게 하고 외물(外物)을 진정(鎭靜)시킬 수 있는 것이다.그러나 성문(聖門)에 종사할 줄 알지 못하고 의리(義理)의 편안함을 따르지 않은 채, 의기(意氣)가 제멋대로 발하도록 놔두어서 남의 나라를 망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그것이 잘못된 줄을 스스로 알지 못하였으니, 그렇다면 이 또한 세상의 교화에 보탬이 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대개 절의를 숭상한다는 사람들은 그 마음이 천하를 경시하고 일세(一世)를 오만하게 흘겨보며, 예의의 규범 밖으로 벗어나서 성명(性命)의 바른 도리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그리하여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자기는 옳고 남은 그르다는 생각을 갖게 하여, 끝내는 교활한 자들이 너도나도 일어나서 신기(神器 옥새)를 훔쳐보게까지 하는 것이다.그리고 청담(淸談)의 부류로 말하면, 단지 물결치는 대로 따르는 자들로, 스스로 부귀도 필요하지 않고 빈천도 능히 잊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이 한쪽에서는 청고(淸高)한 것 같은 면모를 보이면서 저 한쪽에서는 실제로 권세를 부리고 재화(財貨)를 받아들이는 행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이 역시 일세의 사모하고 본받는 자들로 하여금 서로 이끌고 허탄(虛誕)하게 거드름만 부리게 할 뿐, 끝내는 회복할 계책은 진작하지 못하고 찬탈(簒奪)하는 형세만 이루게 하고 말았다.대개 절의(節義)는 소보(巢父)와 허유(許由)를 사모하고, 청담은 노자(老子)와 장자(莊子)를 숭상하는 것인데, 철저하게 폐를 끼친 것이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 원인을 살펴보면 모두 명덕(明德)과 신민(新民)의 학문을 알지 못하고서 이륜(彝倫)의 밖에서 자기 한 몸만 보전하려 하고, 시청언동(視聽言動)의 이치는 구하지 않고서 자신을 단속하고 예방하는 절도를 스스로 방일(放逸)한 데에 있다고 하겠다.이 모두가 쇠한 세상에서 숭상하는 것들로, 성현(聖賢)의 중화(中和)의 도에 죄를 얻었다는 것은, 만고토록 누구에게 물어보아도 반드시 똑같이 이야기할 것이니, 후세에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 귀감(龜鑑)으로 삼아야 함은 물론이요, 학문을 하는 자들 역시 이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공사(供辭)절의(節義)는 인심에 근원한 고유(固有)한 것이요, 기강(紀綱)을 붙들어 세우는 동량(棟梁)입니다. 신(臣) 개청(介淸)이 비록 무식하기 그지없지만, 어찌 절의가 세상의 교화와 관련이 있음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신 개청이 전일에 지은 것은, 주자(朱子)의 글을 읽다가 주자가 논한 것을 보고 느낀 점이 있기에, 동한(東漢) 때에 절의를 숭상한 사람들의 폐단을 밝힌 것일 뿐입니다.대개 절의(節義)라고 하는 것은, 의리에 밝아서 사적인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몸에 행해지게 되면, 임금은 분명하고 신하는 정직해서 재앙의 근원을 남몰래 소멸시키고 간악한 싹을 미리 꺾을 수가 있는 것이요, 불행히 환란을 만나더라도 이해를 돌아보지 않고서 절조를 고수하며 의리에 죽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그런데 동한(東漢)의 인사들을 보면, 그 대의가 마음속에 뿌리박혀서 사생(死生)에 변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평가할 만합니다마는, 그들의 본전(本傳)을 상고하고 주자(朱子)의 의사(意思)를 생각해 보건대, 그들은 자신의 직분을 닦지도 않고 의리를 힘쓰지도 않은 채, 조정을 더럽게 여기고 천하를 경시하면서, 항상 인물의 선악을 평론하고 조정의 정사를 비방하는 일을 다투어 숭상하기만 하였습니다.그래서 공경(公卿) 이하가 모두 그들의 평의(評議)를 두려워하여 허둥지둥 그들의 집을 찾곤 하였으니, 이것은 바로 학생(學生)으로서 국명(國命)을 잡은 것입니다. 배신(陪臣)이 국명을 잡아도 남의 나라를 망칠 수가 있는 법인데, 더구나 학생으로서 국명을 잡았으니 그 나라를 오래 보전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주자(朱子)가 “절의를 숭상한 인사들은 원래 자기의 지위에서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었으니, 이로 인해 화를 자초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라고 논한 까닭입니다.그러므로 신이 삼가 주자의 뜻을 취하여 말하기를 “한갓 절의의 이름만 알고 절의의 실상을 알지 못할 경우에는, 그 폐단이 혹 허탄하게 거드름을 부리게 하는 지경에 이르고, 끝내는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빠지게 되어, 정사(政事)가 바른 도리를 얻지 못하고 직위에 적임자를 얻지 못하게 된 나머지, 기미(幾微)를 미리 살펴서 제대로 조처하지 못한 결과, 장차 소인으로 하여금 그 틈을 타게 하여 나라를 다스릴 수 없게 된다.”라고 한 것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양기(梁冀)가 질제(質帝)를 시해했을 적에 이고(李固)가 정승이 되어, 그 죄를 성토하고 공개적으로 주륙(誅戮)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의 명을 듣고 제어를 받으면서 참고 견뎠으며, 환자(宦者)가 권세를 전횡(專橫)할 적에 두무(竇武)가 복주(伏誅)를 꾀하였으나, 그 선후와 경중의 차서(次序)를 스스로 잃은 나머지, 마침내 사류(士類)가 섬멸되고 나라가 뒤따라 망하는 화를 당하고 말았으니, 이것이 모두 절의의 실상을 힘쓰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따라서 반드시 학문이 그 명덕(明德)을 밝히는 데에 이르러야 할 것이니, 격치(格致 격물치지(格物致知))를 통해 그 절의의 근본을 알고, 성정(誠正 성의정심(誠意正心))을 통해 그 절의의 실상을 행하게 되면, 인도(人道)가 바르게 되고 기강(紀綱)이 세워져서, 비록 절조를 고수하며 의리에 죽고자 해도 그런 상황에 처할 걱정이 절로 없어질 것입니다.신이 전일에 절의와 청담을 논한 것은, 그 말에 비록 분명하지 못한 점은 있으나, 사실은 절의의 근본을 배양하려는 데에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절의를 배척했다〔排節義〕’는 비평을 받고 있으니, 이는 신의 본심이 아니라서 억울한 심정만 품고 있을 뿐 어떻게 해명할 길이 없습니다.[주-D001] 아홉 번 …… 않겠다 : 전국 시대 초(楚)나라 충신 굴원(屈原)의 〈이소(離騷)〉에 “임금님이 나를 내치면서 혜초 띠를 주시고, 또 향초인 채초(茝草)를 가려 뽑아 거듭 주셨네. 이 또한 내 마음에 달갑게 여기는 바이니, 아홉 번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으리라.〔旣替余以蕙纕兮 又申之以攬茝 亦余心之所善兮 雖九死其猶未悔〕”라는 말이 나온다.[주-D002] 이 병은 …… 것이다 : 천형(天刑) 즉 하늘이 형벌을 내린 것처럼 끝내 떨쳐 버릴 수가 없다는 말이다. 붉은 옷은 죄수의 옷을 가리킨다. 소식(蘇軾)의 〈사마군실독락원(司馬君實獨樂園)〉 시에 “명성이 우리를 따라다니니, 이 병은 하늘이 붉은 옷을 입힌 것이라.〔名聲逐我輩 此病天所赭〕”라는 말이 나온다. 《蘇東坡詩集 卷15》[주-D003] 태아(太阿)를 …… 있다 : 권한을 남에게 넘겨주고 해를 받는다는 말로, 임금이 대권을 신하에게 뺏기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한서(漢書)》 권67 〈매복전(梅福傳)〉에, 진(秦)나라가 “태아를 거꾸로 잡고서, 초나라에게 칼자루를 넘겨주었다.〔倒持太阿 授楚其柄〕”라는 말이 나온다. 태아는 고대 명검의 이름이다.[주-D004] 한갓 …… 있다 : 《통감절요(通鑑節要)》 권1 〈주기(周紀) 위열왕(威烈王)〉 조에 “이때에 주나라 왕실이 쇠미하여, 한갓 빈 그릇만 껴안고서 천하가 함께 높이는 주인이라고 칭하였다.〔是時周室衰微 徒擁虛器 號爲天下共主〕”라는 말이 나온다.[주-D005] 얻으려 …… 자 : 《논어》 〈양화(陽貨)〉의 “비루한 자들과 함께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부귀를 얻기 전에는 얻으려고 안달하고, 얻고 나서는 잃을까 걱정하니, 참으로 잃을까 걱정한다면 못하는 짓이 없게 될 것이다.〔鄙夫可以事君也與 其未得之也 患得之 旣得之 患失之 苟患失之 無所不至矣〕”라는 공자의 말을 간추려 인용한 것이다.[주-D006] 겉으로는 …… 자입니다 :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공자가 향원(鄕原) 즉 위선자를 비평하면서, “겉으로는 비슷하나 속은 완전히 다른 것을 미워하노니, 가라지를 미워함은 벼 싹을 어지럽힐까 걱정해서요, 말재주 있는 자를 미워함은 의를 어지럽힐까 걱정해서요, 말이 많은 자를 미워함은 진실을 어지럽힐까 걱정해서요, 정나라 음악을 미워함은 정악(正樂)을 어지럽힐까 걱정해서요, 간색(間色)인 자색(紫色)을 미워함은 정색(正色)인 주색(朱色)을 어지럽힐까 걱정해서요, 향원을 미워함은 진정한 덕을 어지럽힐까 두려워해서이다.〔惡似而非者 惡莠恐其亂苗也 惡佞恐其亂義也 惡利口恐其亂信也 惡鄭聲恐其亂樂也 惡紫恐其亂朱也 惡鄕原恐其亂德也〕”라고 한 말이 나온다.[주-D007] 곧은 …… 있다 : 《논어》 〈안연(顔淵)〉에 나온다.[주-D008] 순(舜) 임금이 …… 사라졌다 : 바로 위의 공자의 말을 번지(樊遲)가 묻자 자하(子夏)가 대답해 준 말이다. 《論語 顔淵》[주-D009] 요(堯)는 …… 삼았다 :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나온다.[주-D010] 바퀴 …… 비유하였고 : 빡빡하게 조여 매고 느슨하게 풀어 주는 긴장과 이완의 위복(威福), 즉 상벌(賞罰)이 조화되게 하는 정치의 중도(中道)를 심득해야 한다는 말이다. 수레바퀴 만드는 장인인 편(扁)이 마루 위에서 독서하는 제 환공(齊桓公)에게 책은 고인(古人)이 남긴 조박(糟粕)이라면서, 수레바퀴 깎는 일을 예로 들어 “너무 깎으면 느슨해져서 견고하지 못하고, 덜 깎으면 빡빡해져서 들어가지 않는다. 더 깎지도 덜 깎지도 않는 이 일은 손으로 터득하여 마음으로 수긍할 뿐이지 입으로 말할 수가 없다. 그 사이에 비결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내가 자식에게 깨우쳐 줄 수가 없고, 자식도 나에게서 이어받을 수가 없다. 그래서 나이 칠십이 되도록 늙어서까지 수레바퀴를 깎고 있는 것이다.〔徐則甘而不固 疾則苦而不入 不徐不疾 得之於手而應於心 口不能言 有數存焉於其間 臣不能以喩臣之子 臣之子亦不能受之於臣 是以行年七十而老斲輪〕”라고 설명한 고사가 《장자(莊子)》 〈천도(天道)〉에 나온다.[주-D011] 말 기르는 …… 비유하였습니다 : 황제(黃帝)가 양성(襄城) 들판에서 말을 기르는 동자를 만나 대화를 나누다가 정치에 대해서 묻자, 그 동자가 “천하를 다스리는 것도 말을 기르는 것과 다를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역시 말을 해치는 것만 없애면 될 것입니다.〔夫爲天下者 亦奚以異乎牧馬者哉 亦去其害馬者而已矣〕”라고 대답하니, 황제가 재배(再拜) 계수(稽首)하며 천사(天師)라고 칭하고 물러났다는 이야기가 《장자》 〈서무귀(徐无鬼)〉에 나온다.[주-D012] 세 모퉁이로 …… 있다면 : 하나의 사실을 가지고 나머지를 유추해서 아는 것을 말한다. 《논어》 〈술이(述而)〉의 “한 모퉁이를 가르쳐 주었는데도 나머지 세 모퉁이를 알아채어 반증하지 못한다면 더 가르쳐 줄 것이 없다.〔擧一隅不以三隅反 則不復也〕”라는 공자(孔子)의 말에서 나온 것이다.[주-D013] 제 위왕(齊威王)이 …… 고사 : 제나라 위왕이 즉위한 지 9년이 되도록 나라가 잘 다스려지지 않자, 즉묵(卽墨)과 아(阿) 지방에 각각 사신을 보내 그 정사를 살펴보게 하여 진상을 확인하고는 두 지방을 다스리는 대부를 부른 뒤에, 비방하는 말이 날마다 들린 즉묵 대부(卽墨大夫)에게는 임금의 측근에게 아부를 하지 않고 정치를 잘했다면서 만가(萬家)의 식읍(食邑)을 봉해 주고, 칭찬하는 말이 날마다 들린 아 대부(阿大夫)에게는 임금의 측근에게 아부만 하면서 정치를 잘 못했다면서 그를 칭찬한 사람들과 함께 삶아 죽였는데, 그 뒤로 제나라가 크게 다스려졌다는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46 田敬仲完世家》[주-D014] 왕이 …… 되었다 : 《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 “왕이 크게 노하여 곧 군병을 정돈하고는 완(阮)을 치러 가는 밀인(密人)의 군사를 막아 내어 주나라의 복을 두텁게 함으로써 천하가 바라는 마음에 보답하였다.〔王赫斯怒 爰整其旅 以遏徂莒 以篤周祜 以對于天下〕”라는 《시경》 〈황의(皇矣)〉의 말을 인용하면서, 주(周)나라의 문왕(文王)을 “한 번 노하여 천하의 백성들을 안정시켰다.〔一怒而安天下之民〕”라고 찬양한 말이 나온다.[주-D015] 역사(蜮沙)의 재앙 : 비방과 중상을 당할 때 쓰는 말이다. 역사(蜮射) 혹은 사역(射蜮)이라고도 한다. 물속의 역(蜮)이라는 괴물이 사람의 그림자를 보고 모래를 입으로 뿜으면 그 사람이 병에 걸려 심하면 죽기까지 한다는 고대의 전설에서 유래한 것이다. 역은 단호(短狐)라고도 한다. 《搜神記 卷12》[주-D016] 천신(賤臣)이 …… 내리고 : 전국 시대 제(齊)나라 추연(鄒衍)이 연(燕)나라에서 무함을 받고 하옥되어, 하늘을 우러러 억울함을 호소하며 통곡을 하니, 5월에 하늘에서 서리가 내렸다는 고사가 전하는데, 여기에서 유래하여 유월비상(六月飛霜)이 원옥(冤獄)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後漢書 卷57 劉瑜列傳》 남조(南朝) 양(梁)의 강엄(江淹)이 지은 〈예건평왕상서(詣建平王上書)〉에 “옛날에 천신이 가슴을 두드리자, 하늘이 연나라 땅에 서리를 내렸다.〔昔者賤臣叩心 飛霜擊於燕地〕”라는 표현이 나온다.[주-D017] 서녀(庶女)가 …… 들었다 : 한(漢)나라 때 동해군(東海郡)의 효부(孝婦)가 자식도 없이 일찍 과부가 되었는데, 개가를 권해도 거절하고는 시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였다. 그 뒤 시어머니가 노쇠하여 누를 끼치고 싶지 않은 생각에 목을 매어 자결하였는데, 시누이의 무고(誣告)로 관아에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받고는 거짓 자복(自服)을 하여 사형을 받자, 3년 동안 동해군 전역에 큰 가뭄이 들었다. 그 뒤에 후임 태수가 그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는 소를 잡아서 효부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고 비를 세우니 비로소 큰비가 내려 풍년이 들었다고 한다. 《漢書 卷71 于定國傳》 《說苑 貴德》[주-D018] 견수(肩隨) : 조금 뒤처져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다는 뜻으로, 5년 정도의 나이 차이가 나는 것을 말한다. 수견(隨肩)이라고도 한다. 《예기(禮記)》 〈곡례 상(曲禮上)〉에 “나이가 배나 더 많은 사람에게는 아버지처럼 섬기고, 10년이 더 많은 사람에게는 형처럼 섬기고, 5년이 더 많은 사람과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되 조금 뒤처져서 따라간다.〔年長以倍 則父事之 十年以長 則兄事之 五年以長 則肩隨之〕”라는 말이 나온다.[주-D019] 죄를 …… 걱정하겠는가 : 춘추 시대 진(晉)나라 이극(里克)이 자기를 죽이려는 진 혜공(晉惠公)에게 죽기 직전에 한 말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희공(僖公) 10년에 나온다.[주-D020] 김장생이 …… 때 : 이 대목과 관련하여 이단상(李端相)의 소에 나오는 내용을 참고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지난해에 송준길이 탑전에서 진달한 말을 보면, 그중에 ‘신의 망사인 김장생이 하루는 공회에 갔는데, 마침 정개청과 장막을 사이에 두고 앉게 되었으므로, 장막을 걷어 올리고는 「박 정승을 모르느냐.」라고 묻자 정개청이 「그 집에 서책이 많이 소장되었다고 하기에 문자를 참고하려고 왕래했다.」라고 대답하였다 하니, 그 마음의 자취가 형편없습니다.’라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上年宋浚吉榻前所達之語曰 臣亡師金長生 一日往公會 適與介淸隔帳而坐 擧帳而問曰 不知朴相否 介淸答曰 聞其家多儲書冊 故欲考文字而往來云 其心迹之無狀〕” 《靜觀齋集 卷4 論鄭介淸書院事疏》[주-D021] 고궁(固窮) : 의리를 고수하면서 곤궁한 처지를 편안하게 여기는 것을 말한다.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군자는 아무리 곤궁해도 이를 편안히 여기면서 의리를 고수하지만, 소인은 곤궁하면 제멋대로 굴기 마련이다.〔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주-D022] 이윤(伊尹)만이 …… 만하다 : 이윤은 상(商)나라 탕왕(湯王)의 재상(宰相)이다. 《맹자》 〈만장 하(萬章下)〉 첫머리에, 이윤은 천하의 백성 중에 그 누구라도 요순(堯舜)과 같은 성군(聖君)의 혜택을 받지 못하게 한다면 자기의 책임이라고 하였으니, 그는 “성인 중에 자임한 분이다.〔聖之任者也〕”라고 규정하고는, 이윤이 “누구를 섬긴들 나의 임금이 아니며 누구를 다스린들 나의 백성이 아니랴.” 하면서 치세(治世)에도 나아가고 난세(亂世)에도 나아갔던 언행을 소개한 말이 나온다.[주-D023] 양질호피(羊質虎皮) : 양의 바탕에 범의 가죽이라는 뜻으로, 겉으로는 대단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형편없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한(漢)나라 양웅(揚雄)의 《법언(法言)》 권2 〈오자(吾子)〉에 “양의 바탕에 범의 가죽을 쓰고 있어서, 풀을 보면 좋아하고 승냥이를 보면 벌벌 떤다.〔羊質而虎皮 見草而說 見豺而戰〕”라는 말이 나온다.[주-D024] 봄 꿩이 …… 죽는다 : 남이 모르는 죄를 스스로 드러내어 남이 알게 한다는 뜻의 우리나라 속담이다. ‘춘산치이명사(春山雉以鳴死)’ 혹은 ‘애피춘치자명이사(哀彼春雉自鳴以死)’라고도 한다. 《與猶堂全書 耳談續纂 東諺》[주-D025] 황(簧)과 같은 말 : 듣기 좋게 나불거리며 모함하는 말을 뜻한다. 황은 피리〔笙〕 속의 금엽(金葉)으로, 팔랑거리며 소리를 내는 것이다. 《시경》 〈교언(巧言)〉에 “교묘한 말이 황과 같은 자는 얼굴이 두껍도다.〔巧言如簧 顔之厚矣〕”라는 말이 나온다.[주-D026] 간당비(姦黨碑) : 송 철종(宋哲宗) 원우(元祐) 1년(1085)에 사마광(司馬光)이 재상이 되고 나서 왕안석(王安石)이 신종(神宗) 때에 실시한 신법(新法)을 모두 폐지하고 옛 법을 회복하였는데, 소성(紹聖) 1년(1094)에 장돈(章惇)이 재상이 된 뒤에 다시 사마광 등을 배척하여 조정에서 축출하였으며, 휘종(徽宗) 숭녕(崇寧) 1년(1102)에 채경(蔡京)이 재상이 된 뒤에는 사마광ㆍ문언박(文彦博)ㆍ소식(蘇軾)ㆍ정이(程頤) 등 120인을 간당(姦黨)으로 지목하여 이른바 원우간당비(元祐姦黨碑)를 세우고, 다시 사마광 이하 309인을 기록하여 원우당적비(元祐黨籍碑)를 세운 뒤에 천하에 반포한 고사가 있다. 《宋史 卷19 徽宗本紀, 卷472 姦臣列傳2 蔡京》[주-D027] 위학금(僞學禁) : 송 영종(宋寧宗) 경원(慶元) 연간에 한탁주(韓侂冑)와 조여우(趙汝愚)가 권력 쟁탈전을 벌일 적에 주희(朱熹) 등이 조여우의 편을 들었는데, 한탁주가 득세한 뒤에 승상 조여우 이하 59인을 모조리 몰아내는 한편, 도학(道學)을 위학(僞學)이라고 규정하고는 주희의 학문을 일체 금지시키도록 한 이른바 ‘경원 당금(慶元黨禁)’의 사건을 말한다. 위학이란 거짓된 학문이라는 뜻으로, 욕망에 따라 자기 뜻대로 살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진정한 속성인 만큼, 이를 단속하여 굳이 수양하게 하려는 주희의 학문은 허위라고 한탁주가 주장하면서 도학을 배척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宋史 卷434 儒林列傳 蔡元定, 卷474 姦臣列傳4 韓侂冑》[주-D028] 그의 …… 되겠는가 :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이 세상의 훌륭한 선비와 벗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못하면 다시 옛 시대로 올라가서 옛사람을 논한다. 그의 시를 낭송하고 그의 글을 읽으면서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대서야 말이 되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그의 삶을 논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옛 시대로 올라가서 벗하는 것이다.〔以友天下之善士爲未足 又尙論古之人 讀其書誦其詩 不知其人可乎 是以論其世也 是尙友也〕”라는 말이 나온다.[주-D029] 선유(先儒)의 …… 하였다 : 선유의 말이란 주희(朱熹)의 말을 가리킨다. 《주자어류(朱子語類)》 권13 〈학(學)7 역행(力行)〉에 “어떤 사람은 몸가짐을 매우 검소하게 하여 그 절조를 채우려면 지렁이처럼 위로 마른 흙을 먹고 아래로 누런 흙탕물을 마셔야 할 정도인데도 단지 관직만을 사랑하고, 어떤 사람은 몸가짐이 청고한데도 여색(女色)을 좋아한다. 그들은 그저 사욕만을 따를 뿐 이를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에 임해서도 단지 이것이 중한 것만 알고 다른 것은 도시 보지 못한다.……그들은 단지 관직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문득 아비와 임금을 죽이는 일도 감히 저지르는 것이다.〔有人奉身儉嗇之甚 充其操 上食槁壤 下飮黃泉底 却只愛官職 有人奉身淸苦而好色 他只緣私欲不能克 臨事只見這個重 都不見別个了……他只愛官職 便弑父與君也敢〕”라는 말이 나온다.[주-D030] 위로는 …… 무함하고 : 한유(韓愈)의 〈여맹상서서(與孟尙書書)〉에 “천지신명이 분명히 포진하고 삼엄히 벌여 있으니, 무함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天地神祇 昭布森列 非可誣也〕”라는 말이 나온다.[주-D031] 삼엄하게 …… 것 : 《대학장구(大學章句)》 전 6장 성의장(誠意章)에 “열 개의 눈이 지켜보고, 열 개의 손이 가리키고 있으니, 얼마나 삼엄한가.〔十目所視 十手所指 其嚴乎〕”라는 말이 나온다.[주-D032] 임금이 …… 못한다 : 자사(子思)가 위후(衛侯)에게 “왕의 국사가 장차 날로 잘못될 것이다.〔君之國事 將日非矣〕”라고 하자, 위후가 그 까닭을 물었는데, 이에 자사가 “임금이 한마디 말을 내놓으며 스스로 옳다고 하면 경대부가 감히 그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경대부가 한마디 말을 내놓으며 역시 스스로 옳다고 하면 사서인이 감히 그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니, 이는 임금과 신하가 모두 혼자 잘났다고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랫사람들이 같은 목소리로 치켜세우고만 있으니, 이는 치켜세우면 순순히 따르는 것이 되어 복이 오는 반면에, 바로잡으면 거역하는 것이 되어서 화를 자초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다면 좋은 일이 어디에서 생겨나겠는가.〔君出言 自以爲是 而卿大夫莫敢矯其非 卿大夫出言 亦自以爲是 而士庶人莫敢矯其非 君臣旣自賢矣 而群下同聲賢之 賢之則順而有福 矯之則逆而有禍 如此則善安從生〕”라고 대답한 고사가 전한다. 《資治通鑑 卷1 周紀1 安王25年》[주-D033] 주광(黈纊) : 면류관(冕旒冠) 양쪽으로 귀에 닿을 만큼 늘어뜨린 누런 솜 방울을 말하는데, 임금이 무익한 말은 듣지 않음을 상징한다.[주-D034] 자로(子路)는 …… 합니다 : 자로와 순(舜)의 고사는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실려 있고, 공자의 말은 《논어》 〈술이(述而)〉에 보인다.[주-D035] 범죄의 …… 말라 : 사법관(司法官)이 범법자를 대할 때의 마음가짐을 표현한 말이다. 《논어》 〈자장(子張)〉에 “윗사람이 도를 잃어 백성들의 마음이 흐트러진 지 오래되었다. 죄인의 증거를 확실하게 찾아냈다 할지라도, 불쌍하게 여기며 연민의 정을 가질 것이요 성과를 올렸다고 좋아하지 말 것이다.〔上失其道 民散久矣 如得其情 則哀矜而勿喜〕”라는 증자(曾子)의 말이 나온다.[주-D036] 천하를 …… 한다 : 《근사록(近思錄)》〈치법(治法)〉에나온다.《소학(小學)》 〈선행(善行)〉에도 소개되어 있다.[주-D037] 말을 …… 없다 : 《논어》 〈헌문(憲問)〉에 “덕을 소유한 사람은 반드시 이에 합당한 말을 하게 마련이지만, 말을 잘한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꼭 덕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有德者 必有言 有言者 不必有德〕”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주-D038] 한마디 …… 어렵다 : 소순(蘇洵)의 〈상전추밀서(上田樞密書)〉에, 천하의 학자와 천금(千金)의 아들과 천자(天子)의 재상(宰相)을 예로 들어 “한마디 말이라도 도에 가깝게 하기를 구하여도 그렇게 될 수가 없다.〔求一言之幾乎道 而不可得也〕”라고 세 번이나 강조한 말이 나온다. 이 글은 《고문진보(古文眞寶)》 후집(後集)에 수록되어 있다.[주-D039] 순자(荀子)와 …… 못하였다 : 한유(韓愈)의 〈원도(原道)〉에, 유가(儒家)에서 말하는 도가 요(堯), 순(舜), 우(禹), 탕(湯), 문왕(文王), 무왕(武王), 주공(周公), 공자(孔子), 맹자(孟子)로 전해졌다고 전제한 뒤에, “맹자가 죽은 뒤로는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으니, 순자와 양웅(揚雄)이 이 도를 선택하긴 하였으나 정밀하지 못하였고 이에 대해서 말하긴 하였으나 상세하지 못하였다.〔軻之死不得其傳焉 荀與揚也 擇焉而不精 語焉而不詳〕”라고 말한 대목이 나온다.[주-D040] 문사(文辭)를 …… 드러낸다 : 《주역(周易)》 〈건괘(乾卦) 문언(文言)〉에 나오는 말이다.[주-D041] 귀로 …… 된다 : 주돈이(周敦頤)의 《통서(通書)》 〈누편(陋篇)〉에 “성인의 도를 귀로 듣고 마음속에 간직하여 그것을 몸에 쌓아 두면 덕행이 되고, 밖으로 행하면 사업이 된다. 저 문사만을 일삼는 사람은 비루하다.〔聖人之道 入乎耳 存乎心 蘊之爲德行 行之爲事業 彼以文辭而已者 陋矣〕”라는 말이 나온다. 《근사록(近思錄)》 〈위학(爲學)〉에도 실려 있다.[주-D042] 평민으로부터 …… 도이다 : 《근사록》 〈치법(治法)〉에 “정학(正學)의 요체는 선을 가리고 몸을 닦아 천하를 교화시키는 데에 있으니, 이것은 평민으로부터 성인에 이르는 도이다.〔其要在於擇善修身 至於化成天下 自鄕人而可至於聖人之道〕”라는 정호(程顥)의 말이 나온다. 《소학(小學)》 〈선행(善行)〉에도 실려 있다.[주-D043] 입이 …… 줄까 :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도 이때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시를 함께 싣고 있는데, 거기에는 ‘有口豈復言’이 ‘有口不敢言’으로 되어 있다. 참고로 《성호사설》에 수록된 당시의 정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기축옥사(己丑獄事) 때에 정승 정언신(鄭彦信)이 조정에서 매를 맞고 갑산(甲山)으로 귀양을 가게 되니, 그 아들 정률(鄭慄)이 단식(斷食) 끝에 피를 토하고 죽었다. 이때에 자칫하면 연루죄(連累罪)에 걸려들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고, 심지어 집안사람들도 장사조차 예(禮)에 맞게 치르지 못하였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은 당시에 문사랑(問事郞)이 되었던 까닭에 그 원통함을 알고서 바야흐로 관(棺) 뚜껑을 덮을 적에 시 한 수를 지어서 비밀히 관 속에 넣었는데, 집안사람들도 이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그 아들이 장성한 뒤에 천장(遷葬)을 하면서 관을 열어 보니, 세월이 이미 30년이 지났는데도 종이와 먹빛이 그대로 있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이 말을 듣는 자들치고 코끝이 시큰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 시는 처음에 본집(本集)에 실렸었는데 금본(今本)에는 삭제되었으며, 구집(舊集)이 세상에 혹 있는데도 크게 기휘(忌諱)하는 바가 되었다. 나는 광주(廣州)에 사는 송씨(宋氏) 성을 가진 사람의 집에 수장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서 사람을 시켜 기록하게 하였는데, 세상의 변괴가 이와 같은 것이 허다하다.” 《星湖僿說 卷30 詩文門 白沙挽人詩》[주-D044] 구덕(九德) : 순(舜) 임금 앞에서 고요(皐陶)가 우(禹)에게 말한 ‘관이율(寬而栗)’ ‘직이온(直而溫)’ 등 아홉 가지 덕을 말한다. 《書經 皐陶謨》 혹은 간단히 충(忠), 신(信), 경(敬), 강(剛), 유(柔), 화(和), 고(固), 정(貞), 순(順) 등을 지칭하기도 한다. 《逸周書 常訓》[주-D045] 육덕(六德)과 육행(六行) : 육덕은 여섯 항목의 도덕규범으로 지(知)ㆍ인(仁)ㆍ성(聖)ㆍ의(義)ㆍ충(忠)ㆍ화(和)를 가리키고, 육행은 여섯 가지 선행으로 효(孝)ㆍ우(友)ㆍ목(睦)ㆍ인(婣)ㆍ임(任)ㆍ휼(恤)을 가리키는데, 모두 《주례(周禮)》 〈지관사도(地官司徒)〉 대사도조(大司徒條)에 나온다.[주-D046] 신한(申韓) : 전국 시대의 법가(法家)인 신불해(申不害)와 한비자(韓非子)의 병칭이다.[주-D047] 황로(黃老) : 황제(黃帝)와 노자(老子)의 병칭으로 도가(道家)를 가리킨다.[주-D048] 혹자(或者)가 …… 하였고 : 《주자어류(朱子語類)》 권34 〈논어(論語)16 술이편(述而篇)〉 자위안연왈장(子謂顔淵曰章)에 나온다. 거기에는 ‘東漢節義之時’가 ‘東漢崇尙節義之時’로 되어 있다.[주-D049] 절의(節義)를 …… 일이었다 : 《주자어류》 권135 〈역대(歷代)2〉 문기원조(問器遠條)에 나온다.[주-D050] 후한(後漢)의 …… 마련이다 : 《주자어류》 권129 〈본조(本朝)3 자국초지희령인물(自國初至煕寧人物)〉에 나오는데, 대본은 원문의 일부 내용을 생략하고 인용하였다.[주-D051] 건안(建安) …… 못했다 : 《회암집(晦菴集)》 권35 〈답유자징(答劉子澄)〉에 나온다.[주-D052] 비록 …… 보였다 : 《주자어류》 권34 〈논어16 술이편〉 자위안연왈장(子謂顔淵曰章)에 나온다.[주-D053] 명덕(明德)과 신민(新民) :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한다는 뜻으로, 《대학(大學)》의 삼강령(三綱領)에 나오는데, 각각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을 가리킨다.[주-D054] 양기(梁冀)가 …… 견뎠으며 : 양기는 후한 순제(後漢順帝)의 왕후 양씨(梁氏)의 오라비로, 누이동생인 양 태후(楊太后)가 임조(臨朝)하면서 정권을 독점하였다. 충제(冲帝)가 죽자 질제(質帝)를 세웠는데, 질제가 “이 사람이 발호장군이다.〔此跋扈將軍也〕”라고 자신을 평한 것을 미워하여 독살하고 환제(桓帝)를 세웠다. 이고(李固)는 충제 때의 태위(太尉)로 조야(朝野)의 명망이 높았는데, 충제가 죽었을 때와 질제가 시해되었을 때에 모두 청하왕(淸河王) 유산(劉蒜)을 옹립하려고 노력하다가 양기의 비위를 거슬러 면직되었다. 환제 건화(建和) 1년(147)에 유문(劉文) 등이 유산을 황제로 세우려다 실패하고 죽음을 당하였는데, 양기가 이고를 이 사건에 연루시켜 하옥시키자, 이고의 문생 등이 상소하여 무죄를 주장하며 대궐에 나아가 호소하였다. 이에 양 태후가 사면하여 출옥시키자 경사(京師)의 시민들이 환호하며 만세를 부르니, 양기가 대경실색하며 위협을 느낀 나머지 다시 무옥(誣獄)을 일으켜 이고와 두교(杜喬)를 죽이고 그 시신을 성 북쪽에 전시하였다. 양기는 20여 년 동안 권력을 전횡하다가 연희(延煕) 2년(159)에 양 태후가 죽자 환제가 환관 5인과 합세하여 그를 복주(伏誅)하고 그 종족을 모두 기시(棄市)하였다. 《後漢書 卷34 梁冀列傳, 卷63 李固列傳》[주-D055] 환자(宦者)가 …… 말았으니 : 후한 영제(後漢靈帝)가 즉위한 뒤에 두 태후(竇太后)의 부친인 대장군 두무(竇武)가 환관(宦官)들의 전횡을 막기 위해 진번(陳蕃)ㆍ이응(李膺) 등 이른바 청류(淸流)와 함께 환관들을 제거하려고 계획하였는데, 그 일이 누설되어 두무가 환관들에게 먼저 살해당하자, 진번이 70여 세의 나이로 곧장 관속(官屬)과 제생(諸生) 등 80여 인을 이끌고서 칼을 빼 들고 승명문(承明門)으로 돌입했다가 패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이로 인해 100여 인이 피살을 당하였는데, 뒤를 이어 계속해서 사형과 유배를 당하고 수금(囚禁)된 자가 700여 인에 이르렀다. 두 태후는 환제(桓帝)의 황후로, 환제가 죽자 수렴청정하면서, 장제(章帝)의 현손(玄孫)으로 당시 12세였던 영제를 맞아들여 황제로 세웠다. 《後漢書 卷69 竇武列傳》
    2022-04-30 | NO.220
  • 국조보감 제23권 / 명종조 2
    10년(을묘, 1555)  ○ 5월. 날이 가물었다. 상이 대궐에서 직접 기우제를 지내자 비가 내렸다.○ 왜노(倭奴)가 전라도 전주(全州)를 침략하였는데 부윤 이윤경(李潤慶)이 격퇴하였다. 처음에 왜선 70여 척이 먼저 달량진(達梁鎭)을 침범하여 민간을 분탕질하고 마침내 성을 포위하였다. 절도사 원적(元績)이 장흥 부사(長興府使) 한온(韓蘊), 영암 군수(靈巖郡守) 이덕견(李德堅)과 함께 가서 구원하였으나 군대가 무너져 모두 죽고 이덕견은 사로잡혔다. 적이 난마도(蘭馬島), 가리포(加里浦) 등의 진영 및 장흥, 강진(康津) 등의 고을들을 연달아 함락시키고, 수사(水使) 김빈(金贇)과 광주 목사(光州牧使) 이희손(李希孫)의 군대를 패퇴시켰다. 그리고는 곧장 서울을 침범하겠다고 큰소리를 치며 승세를 몰아 영암에 이르렀다. 관찰사 김주(金澍)가 이윤경으로 하여금 병사 3000명을 거느리고 가서 영암을 구원하게 하였는데, 호령이 분명하고 은혜와 위엄을 아울러 행하였다. 이때 우방어사 김경석(金景錫)도 병사를 거느리고 달려가 구원하였으며, 병사(兵使) 조안국(趙安國)과 좌방어사 남치근(南齒勤)은 작천(鵲川)에서 적병의 동정을 관망하고 있었다. 이윤경이 여러 차례 나가 싸우려 하였으나 김경석이 겁을 내어 따르지 않았으므로 이윤경이 만일 군사가 패하면 그에 대한 죄를 혼자 져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제서야 김경석이 자신의 병사들로 하여금 이윤경의 군대를 도와 출전하게 하고 자신은 혼자 성안에 남아 있었는데, 장사(將士)들이 모두 분개하여 이윤경의 지시를 받아 어기는 자가 없었다. 이윤경이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출전하여 향교에서 적과 맞붙었다. 적장이 성전(聖殿)의 교의(交椅)에 걸터앉아 누런 깃발로 지휘하자 군사들이 창과 검을 뽑아 들고 손뼉을 쳐서 소리를 내었는데, 그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이윤경이, ‘앞으로 전진하는 자는 살고 퇴각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고 명을 내리고, 몰래 활을 잘 쏘는 자를 시켜 편전(片箭)을 쏘아 적장의 왼쪽 대퇴부에 적중시켰다. 그리고는 서풍(西風)을 이용하여 화전(火箭)을 대대적으로 쏘아대고 군사를 풀어 마구 쳐죽이니 적병이 크게 무너졌다. 백 수십 급(級)을 참수(斬首)하자 남은 적들이 식량과 꼴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준경(李浚慶)을 전라도 도순찰사로, 심수경(沈守慶), 김귀영(金貴榮)을 종사관으로 삼아 군대를 이끌고 왜적을 방비하게 하였다. 처음에 전라도 관찰사 김주가 왜적이 국경을 침범한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였으므로 상이 대신과 재상들을 불러 방어할 계책에 대해 물었다. 그리고는 이준경을 순찰사로 삼아 사납고 용맹스러운 경군(京軍) 500명 및 금군과 한량 가운데 활을 잘 쏘는 사람을 데리고 가서 나주에 주둔하면서 군마(軍馬)를 뽑아 놓았다가 기미를 보아가며 대비하고 방어하게 하였다. 이준경이 나주에 이르러 왜구가 모두 달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군대를 철수시킬 것을 청하였다.
    2022-04-30 | NO.219
  • 국조보감 제31권 / 선조조 8 - 고경명
    25년(임진, 1592)  - 고경명○ 6월. 삼도(三道)의 군사가 용인(龍仁)에서 패하여 이광 등이 본도로 돌아갔다.(중략)○ 전 부사 고경명(高敬命)은 광주(光州)에 살다가 적이 도성에 침입하였다는 사실을 듣고,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할 것을 도모하고 글을 지어 도내(道內)의 백성들에게 효유하기를,“지난번 본도의 근왕병(勤王兵)이 금강(錦江)에서 돌아오던 날에 첫 번째로 패배했고 여러 군에서 군사를 초유(招諭)하던 때에 두 번째로 패하였다. 이는 대체로 수비 방법이 어긋나고 기율이 전혀 없으며 유언비어가 비등하여 군사들의 마음이 놀라고 의심했기 때문이다. 지금 흩어지고 도망한 나머지를 수습한다 하더라도 사기는 꺾였고 정예는 없어졌으니 어떻게 응급책을 세워 늦게나마 성과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항상 생각건대 승여(乘輿)가 피난을 떠났는데도 관수(官守)는 오래도록 달려가 문안드리는 일을 폐하였고, 종사(宗社)가 모두 타버렸는데도 왕사(王師)로서 평정시킬 시기는 아직도 지체되고 있다. 이에 대해 말을 하자니 통분함이 가슴속에 사무친다.우리 본도는 본래부터 군사와 말이 날래고 굳세다고 일컬어져 왔다. 성조(聖祖 조선 태조를 가르킴)께서 황산(黃山)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러 삼한(三韓)을 다시 일으킨 공로가 있으며, 선조(先朝 고려를 가리킴)의 낭주(朗州) 전투에서는 한 척의 배도 되돌아가지 못했다는 노래가 있는데, 지금까지도 빛나게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비춰지고 있으니 그때에 용맹을 뽐내며 적의 성벽에 먼저 오른 자는 이 도의 사람이 아니었던가. 더구나 근년 이래로 유도(儒道)가 크게 일어나 사람들이 모두 학문에 뜻을 가다듬었으니 임금 섬기는 대의(大義)를 그 누가 강독하지 않았겠는가.그런데 유독 오늘날에 이르러 의로운 소문이 사라져버리고 두려워한 나머지 스스로 무너져버린 채 기력(氣力)을 내어 적과 교전하는 자는 한 사람도 없이 서로들 제 몸만 보전하고 처자를 보호할 계획만 하면서 혹시 뒤질세라 머리를 움켜쥐고 쥐처럼 도망하고 있다. 이는 본도의 사람으로서 국가의 은혜를 깊이 저버리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선조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지금은 적의 형세가 크게 꺾이고 왕의 영위(靈威)가 날로 확장되니 이야말로 대장부가 공명을 세울 기회이고 군부(君父)의 은혜에 보답할 때이다. 경명은 장구(章句)나 외는 오활한 선비로서 병법에는 문외한인데 이렇게 단(壇)에 올라 망령되이 대장으로 추대되니 이미 흩어진 사졸의 마음을 수습하지 못하여 여러 동지에게 수치거리가 될까 두렵다. 그러나 오직 마땅히 피를 뿌리고 진군한다면 조금이나마 임금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을 것 같기에 금월 11일 군사를 일으키기로 하였다. 우리 도내의 모든 사람들은 아비는 그 자식을 깨우치고 형은 그 동생을 도와 의병을 규합하여 함께 일어나자. 원컨대 속히 결정하여 착한 일을 따르고 미혹된 나머지 스스로를 그르치지 말라.”하였다. 경명은 연로(年老)한 문관이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맹주(盟主)로 추대하자 개연히 사양하지 않았다. 이에 선비와 서민이 많이 응모하여 군사 6천여 명을 얻었다. 그리고 또 격문을 여러 도에 전하였는데 문사(文辭)가 격렬하고 절실하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외며 전하였다.(중략)○ 호남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이 군사를 거느리고 북상하였다. 삼도(三道)의 군사가 무너진 뒤로부터 경기 안이 완전히 살육과 노략질을 당했는데, 적에게 빌붙어 도성에 들어간 자도 많았다. 천일이 의병 수천 명을 규합하니, 상이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에 임명하는 동시에 창의사(倡義使)라는 칭호를 내렸다. 천일의 군사가 수원(水原)에 이르러 독산고성(禿山古城)에 웅거하여 적에게 빌붙은 간민(奸民)을 찾아내어 목을 베니, 돌아와 따르는 경기의 사민(士民)이 많았다.○ 7월. 전라 절제사 권율(權慄)이 군사를 보내어 왜적을 웅치(熊峙)에서 물리쳤는데 김제 군수 정담(鄭湛)이 전사하였다. 왜병이 또 이치(梨峙)를 침범하니 동복 현감 황진(黃進)이 패배시켰다.이때 적이 금산(錦山)에서 웅치를 넘어 전주(全州) 지경으로 침입하려고 했는데, 나주 판관 이복남(李福男)이 황박(黃璞)ㆍ정담 등과 요해지에 웅거하여 적을 맞아 공격하였으므로 감사 이광(李洸)이 군사를 보내어 싸움을 돕게 하였다. 왜적의 선봉(先鋒) 수천 명이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며 정면으로 돌진해 왔는데, 복남 등이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활로 쏘아 죽인 것이 헤아릴 수 없었으며 적이 패하여 물러갔다.이튿날 새벽에 적이 병력을 총동원하여 산골짜기에 가득하였고 총포 소리가 우레처럼 났다. 복남 등이 최후까지 힘을 다하여 한바탕 싸웠으나 결국 당해내지 못하고 퇴각하였으며, 황박의 군사도 패하여 복남의 진으로 들어갔다. 정담은 처음부터 힘을 다해 싸웠는데 붉은 기 아래 백마(白馬)를 타고 있는 적장을 쏘아 죽이니 적이 와해되어 물러갔다. 조금 뒤에 나주(羅州) 군사가 퇴각하자, 정담이 고군(孤軍)으로 포위당했는데 부하 장수가 정담에게 후퇴시키기를 권하니 정담이 말하기를 “차라리 적병 한 놈을 더 죽이고 죽고 말지 차마 내 몸을 위해 도망하여 적으로 하여금 기세를 부리게 할 수는 없다.” 하고 꼿꼿이 서서 동요하지 않고 활을 쏘아 빠짐없이 적을 맞혔다. 이윽고 적병이 사방으로 포위하자 군사들이 모두 흩어져 버리고 정담 혼자서 힘이 다하여 전사하였다. 종사관 이봉(李葑)도 전사하였다. 복남이 퇴각하여 재 아래 안진원(安鎭院)에 진을 쳤는데, 적이 방비가 있음을 알고 감히 재를 넘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정담은 임금이 도성을 떠나 피난했다는 사실을 듣고부터 눈물을 흘리고 분격해 하며 반드시 죽음으로 국가의 은혜를 보답하겠다고 맹세하였다. 군사를 일으키던 날에는 희생(犧牲)을 잡아 사사(社詞)에 제사를 지내고 맹세를 고한 뒤 떠났는데, 고을 사람들이 그의 충의(忠義)에 감복하였다. 뒷날 조정에 아뢰어 관직을 추증하고 정문(旌門)을 세웠다.왜장(倭將)이 또 대군(大君)을 출동시켜 이치(梨峙)를 침범하자 권율이 황진을 독려하여 동복현의 군사를 거느리고 편비(偏裨 부장(副將)) 위대기(魏大奇)ㆍ공시억(孔時億) 등과 함께 재를 점거하여 크게 싸웠다. 적이 낭떠러지를 타고 기어오르자 황진이 나무를 의지하여 총탄을 막으며 활을 쏘았는데 쏘는 대로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종일토록 교전하여 적병을 대파하였는데, 시체가 쌓이고 피가 흘러 초목(草木)까지 피비린내가 났다. 이날 황진이 탄환에 맞아 조금 사기가 저하되자 권율이 장사들을 독려하여 계속하게 하였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다. 왜적들이 조선의 3대 전투를 일컬을 때에 이치(梨峙)의 전투를 첫째로 쳤다. 이복남ㆍ황진은 이 전투로 이름이 드러났다. 왜적이 웅치(熊峙)의 전진(戰陣)에서 죽은 시체를 모아 길 가에 묻어 몇 개의 큰 무덤을 만들고서 그 위에 “조선의 충간의담을 위로한다.[吊朝鮮國忠肝義膽]”라고 썼다.○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이 금산(錦山)의 적을 토벌하다가 패하여 전사하였다.경명이 모집한 병사 6~7천 명을 단속해서 북상하여 여산(礪山)에 주둔하였는데 왜적이 호남 지역을 침입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휘하 장사들이 본도를 염려하여 먼저 도내의 적을 토벌한 뒤에 북쪽으로 정벌할 것을 다투어 청하자 경명이 여러 사람의 의논을 따라 군사를 진산(珍山)으로 옮겼는데 당시 왜적은 금산으로 퇴각하여 진을 두터이 치고 견고하게 하고 있었다. 경명이 방어사 곽영(郭嶸)과 함께 재를 넘어 험한 곳으로 들어가 곧장 금산성 밖에 육박하였는데 곽영이 먼저 날랜 장사 수백 명을 보내어 적을 시험하다가 적에게 패하여 물러나자 경명이 북을 울리며 전투를 독려하여 도로 적병을 성 밖에서 위축시키고 성 안에서는 화포를 쏘아 적이 주둔하던 관사(館舍)를 불태우니 적이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이튿날 동틀녘에 다시 방어사와 같이 성 밖으로 군사를 진격시켜 관군은 북문을 공격하고 경명은 서문을 공격하였다. 그런데 적이 관군의 진이 약한 것을 알고 군사를 총동원하여 나와 급히 공격하니, 관군이 크게 패배하였다. 경명은 군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일제히 활을 당기고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의병이 급히 부르짖기를 “방어사의 군사가 패하였다.”고 하자 대오가 무너져 흩어졌다. 경명이 말에서 떨어졌는데 말이 달아나 버리니 종사관 안영(安瑛)이 자기가 타고 있던 말을 주어 타게 하고 도보로 따라갔다. 종사관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는 말이 건장해서 먼저 나가다가 그의 종에게 묻기를 “대장은 모면하였는가?” 하니, 아직 못 나왔다고 하자, 팽로가 급히 말을 채찍질하여 어지러운 군사들 속으로 되돌아 들어갔다. 이에 경명이 돌아보며 말하기를 “나는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그대는 말을 달려 빠져나가라.” 하였다. 팽로가 말하기를 “어떻게 차마 대장을 버리고 살기를 구하겠는가.” 하고 드디어 안영과 함께 경명을 보호하다가 적진에서 함께 전사하고 경명의 차자(次子) 인후(因厚)도 달려가 싸우다가 진중에서 전사하였다.경명은 문학(文學)에 종사하여 무예를 익히지 않았으며 나이 또한 노쇠하였다. 이때에 맨 먼저 의병을 일으켰는데 충의심만으로 많은 군사들을 격려하여 위험한 곳으로 깊이 들어가 솔선하여 적과 맞서다가 전사한 것이다. 공은 성취하지 못했어도 의로운 소문이 사람을 감동시켜 계속 의병을 일으킨 자가 많았으며, 나라 사람들이 그의 충렬(忠烈)을 칭송하면서 오래도록 잊지 않았다. 처음에 상이, 경명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듣고 공조참의 겸 초토사에 제수하도록 명하고, 글을 내려 칭찬하고 위로하였다. 공조 좌랑 양산숙(梁山璹)이 행재소에서 남쪽으로 돌아올 적에 상이 직접 유시하기를 “돌아가 고경명과 김천일(金千鎰)에게 말하라. 그대들이 빨리 수복하여 나로 하여금 그대들의 얼굴을 조만간 볼 수 있게 하기를 바란다고 하라.” 하였다. 그러니 관작 제수의 명이 이르지도 않아서 경명이 패하여 전사하였는데 예조 판서에 추증하였다. 그 뒤에 광주(光州)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포충사(褒忠祠)라고 편액을 하사하였다.○ 고경명 휘하의 사자(士子)들이 흩어진 군사 8백 명을 불러모아 화순(和順) 사람인 전 부사 최경회를 추대하여 장군으로 삼고 골(鶻) 자로 표신(標信)을 삼았다. 절의를 지키다 죽은 유팽로(柳彭老)등을 높이고 본보기로 삼아 많은 사람들을 권면하니 도내의 사민(士民)들이 많이 추종하였다.○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등이 유생 곽현(郭玄)ㆍ양산숙(梁山璹)을 보내어 바닷길을 따라 관서(關西)에 들어가 행조(行朝)에 일을 아뢰었다. 양산숙이 또 상소하여 계책을 올리니, 상이 자주 불러서 위로하고 공조 좌랑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이호민(李好閔)으로 하여금 교서(敎書) 2통(通)을 짓게 하여 양산숙에게 부쳐 보냈다. 하나는 호남에 유시하는 것이었는데, 그 대략에,“이광(李洸)의 군사가 용인(龍仁)에서 패배하였다는 말을 듣고부터 다시 남쪽을 바라보며 구원을 기대하는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들으니 고경명과 김천일 등이 의병 수천 명을 규합하여 절도사 최원(崔遠)과 함께 수원(水原)으로 진주(進駐)했다 한다. 부덕(不德)한 내가 어떻게 이토록까지 사람들이 사력을 다하게 할 수 있었겠는가. 이제 양산숙 등을 보내어 돌아가서 알리게 하니 그대들은 나의 괴로운 뜻을 헤아리도록 하라.내가 비록 인애(仁愛)가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고 정치에 실수한 것이 많았다 하더라도 본래의 마음은 언제나 백성을 사랑하고 어여삐 여기는 것으로 뜻을 삼지 않은 적이 없었다. 다만 살피건대 근래 변방에 흔단이 많고 군정(軍政)이 피폐하고 해이해졌으므로 중외에 신칙하여 엄중하게 방비를 더하도록 하였는데, 성을 높이 쌓을수록 국가의 형세는 날마다 낮아지고 못을 깊게 팔수록 백성의 원망이 더욱 깊어지는 것은 정말 헤아리지 못하였다. 게다가 궁중이 엄밀하지 못하여 백성들의 조그마한 이익까지도 거둬들이고 형옥(刑獄)이 중도를 상실하여 원통한 기운이 화기를 손상케 하였으며, 왕자(王子)가 이익을 독점하여 소민(小民)들이 생업을 잃게 하였으니, 백성들이 나를 허물하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이제 유사(有司)로 하여금 모두 혁파하여 돌려주게 하였다. 무릇 이러한 유(類)를 내가 어찌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겠는가. 그러나 내가 몰랐던 것도 나의 잘못이다.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면 후회스럽다마는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대 사민(士民)들은 내가 잘못을 뉘우치고 새롭게 다스리려는 것을 허락하기 바란다.”하고, 또 이르기를,“용만(龍灣)의 한 모퉁이에서 천운이 어렵게 되었고 지운(地運)이 이미 다 되었으니 내 어디로 간단 말인가? 인정이 극도로 곤궁해지면 회복하기를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서늘한 가을 기운이 조금 움직이는데 변방은 벌써 추워진다. 저 장강(長江)을 보니 역시 동쪽으로 흐르는데, 돌아가려는 한 생각이 흐르는 강물처럼 왕성하다.”하고, 또 이르기를,“하늘이 이성(李晟 당 덕종(唐德宗) 때의 인물)을 탄생시키니 성궐(城闕)을 회복할 기약이 있었고, 날마다 장소(張所 송 고종(宋高宗) 때의 인물)를 기다리니 원릉(園陵)에 흠이 없음을 아뢰었다. 가뭄에 비를 바라듯 하는 마음에 속히 부응하여 나의 어려운 고생살이를 면하게 하라.”하였다. 하나는 영남의 사민(士民)에게 유시하는 것이었는데 호남에 보내는 것과 같았다. 끝 부분에 이르기를,“지난번에 듣건대, 우감사(右監司) 김수(金睟)는 용인에서 패하여 퇴각하였고 좌감사 김성일(金誠一)은 진주(晉州)에서 용사를 모집한다 하였다. 좌병사 이각(李珏)이 참수(斬首)당했으므로 박진(朴晉)이 충용하다 하여 그를 대신하게 하였으며, 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은 늙고 쇠약하므로 양사준(梁士俊)으로 대신하게 하고, 변응성(邊應星)을 좌도 수사로 삼았는데, 모두 각기 본도로 돌아가 힘써 주선하여 경영하는지 모르겠다. 좌도의 영해(寧海) 일대와 우도의 진주 등 약간의 고을이 아직 보존되고 있으니, 이것은 그래도 1성(成 사방 10리의 땅)이나 1려(旅 5백 명의 단위)보다는 나은 것이 아니겠는가. 본도의 백성들은 성실하고 후덕하여 본래 충성스럽고 의로운 인사가 많았다. 그대들이 진정 서로 분발하고 면려한다면 틀림없이 회복시키는 근본이 되지 않는다고 못할 것이다.듣건대, 정인홍(鄭仁弘)ㆍ김면(金沔)ㆍ박성(朴惺)ㆍ곽율(郭????)ㆍ조종도(趙宗道)ㆍ곽재우(郭再祐) 등이 의병을 일으켜 많은 무리를 규합했다 하니, 본도의 충성과 의리는 오늘날에 있어서도 오히려 없어지지 않았다 하겠다. 더구나 곽재우는 비상한 작전으로 적을 더욱 많이 죽였는데도 그 공로를 스스로 진달하지 않고 있으니 내가 더욱 기특하게 여기는 바로 그의 명성을 늦게 들은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그리고 호남에도 전 부사 고경명(高敬命)ㆍ김천일(金千鎰)이 의병 수천 명을 규합하여 본도 절도사 최원(崔遠) 등과 수원(水原)으로 진군하여 주둔하면서 바야흐로 경기(京畿)를 회복하려고 도모하면서 그의 무리인 양산숙 등으로 하여금 수륙(水陸)의 험한 길을 달려와 행재(行在)에 아뢰게 하였다. 내가 아뢴 내용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한편으로는 위로가 되고 한편으로는 슬픈 마음이 들었다. 양산숙 등이 돌아가는데 이 글을 부쳐서 그로 하여금 상세히 전하게 하였으니, 내가 알리는 뜻을 잘 헤아리라.요즈음 맑은 가을철에 태백(太白)이 바야흐로 높아 군사의 위용이 갖추어진 곳에 살기(殺氣)마저 따르니, 충성과 의리가 향하는 곳에 어떤 적인들 무찌르지 못하겠는가. 그대들은 마땅히 요해처를 제어하여 구적(寇賊)들을 초멸하도록 하라. 그리고 또한 연도에 복병을 설치하고 좌우에서 협공하여 적이 마음대로 말을 달릴 수 없게 하라. 그리하여 한 지방을 안정시켜 노약자들을 불러 모은 연후에 힘을 합하여 도성을 수복하고 와서 승여(乘輿)를 영접하도록 하라. 그리하면 그대들은 살아서는 아름다운 이름을 누리게 될 것이며, 혜택이 자손들에게 전해질 것이니 위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에 정인홍을 제용감 정으로, 김면을 합천 군수(陜川郡守)로, 박성을 공조 좌랑으로, 곽재우를 유곡 찰방(幽谷察訪)에 임명하여 표창하고 면려한다.”하였다.교서(敎書)가 길이 막혀 몇 개월 만에야 도착하였는데 사민(士民)들이 임금의 교서 내용을 듣고 감격하여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2022-04-30 | NO.218
  • 국조보감 제39권 / 현종조 1 >김덕령
    2년(신축, 1661)  8월○ 고 익호장군(翼虎將軍) 김덕령(金德齡)의 관작을 옛날대로 도로 주고 억울함도 풀어 주었다. 김덕령은 광주(光州) 사람으로서 용력이 뛰어났었는데 임진년 난리에 의병을 일으켜 그가 가는 곳이면 모두가 깨졌기 때문에 왜놈들이 감히 접근을 못하고 피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선조는 그를 가상히 여겨 곧 공조 좌랑(工曹佐郞)을 제수하고 또 익호장군으로 불렀으므로 그때부터 그의 위명(威名)이 크게 떨치기 시작했었다. 그런데 때마침 이몽학(李夢鶴)이 호서에서 반기를 들었다가 사로잡혀 와서 덕령을 걸고 넘어졌기 때문에 덕령이 결국 하옥되고 곤장 아래서 죽어가 호남(湖南) 사람들이 다 억울하게 여기고 있던 터였는데 이때 와서 가뭄으로 인하여, 원한을 품고 아직 신원되지 않은 사건들을 들추고 있을 때 전라 감사 김시진(金始振)이 덕령 사건을 치계하였던 것이고 상은 대신들과 논의하여 특명으로 신원했던 것이다.
    2022-05-03 | NO.217
  • 궁중의 버들〔宮中柳〕 - 성호전집 제8권 / 해동악부(海東樂府)
    궁중의 버들〔宮中柳〕 - 성호전집 제8권 / 해동악부(海東樂府) : 성호(星湖) 이익(李瀷)광해군 때에 유씨(柳氏)가 외척으로 정사를 주도하였다. 소암(疎菴) 임숙영(任叔英)이 과거 시험의 대책(對策)에서 극언을 하니, 석주(石洲) 권필(權韠)이 이를 두고 시를 지었다. 궁 버들은 푸르고 꾀꼬리 어지러이 나는데 / 宮柳靑靑鸎亂飛 온 도성의 벼슬아치 봄볕에 아양 떠네 / 滿城冠蓋媚春暉조정에선 다 같이 태평성대 축하하거늘 / 朝家共賀昇平樂누가 곧은 말이 선비 입에서 나오게 했나 / 誰遣危言出布衣 석주가 이 필화(筆禍) 사건에 걸려 장을 맞고 유배 가던 도중에 죽으니, 온 나라 사람들이 슬프게 여겼다. 천지가 모두 봄이라 만물이 번창하는데 / 天地同春物皆昌그중에 버들이 먼저 향기를 발하누나 / 就中楊柳先芬芳구름까지 솟은 윗가지엔 봉황이 깃들고 / 上枝干雲宿鸞鳳늘어진 아랫가지엔 천 가닥이 자라네 / 下枝拂地千絲長분칠한 담장 머리에 비단 휘장 둘렀는데 / 粉牆前頭錦幃張그 가운데 온갖 꽃이 마음껏 향기롭구나 / 中間百花隨意香바람결에 한 곡조 풍악 소리 들리니 / 風便一曲聽絲篁뾰로롱 가늘게 화답하며 꾀꼬리 날아가네 / 嚶鳴細和黃鸎翔꾀꼬리가 때로 화려한 누각 곁을 맴도니 / 黃鸎時繞畫樓傍행인의 마음은 부질없이 방황하네 / 行人著意徒彷徨다들 태평의 상서를 말하고 / 皆言太平祥화창한 기운이 사방에 가득하여 / 玉燭轉四方집집마다 즐거움 그치지 않고 / 家家樂未央거리에는 많은 사람 줄을 이뤘는데 / 街路列成行대담한 선비가 거리낌 없이 간언하여 / 士有大膽言不妨붓 휘둘러 지적하니 임금도 무색해라 / 奮筆指天天無光인정은 바삐 가는 물처럼 쉬이 떠나는데 / 人情易逝如水忙세도는 부질없이 봄날을 붙잡으려 하네 / 世道欲挽留春陽아아, 홀로 원통하고 분한 마음 품으니 / 嗟爾獨抱冤憤腸선인이 버림받는 것 감당할 수 없네 / 蘭焚蕙委不可當그대는 들어 보았나 / 君不聞여장이란 서생이 지은 노래를 / 書生作歌字汝章악부에 전하는 노랫소리도 양양하다 / 樂府傳唱聲洋洋훌륭한 문장은 몸의 재앙이 될 뿐인 걸 / 文章只解爲身殃궁 버들에 미친 듯 부는 바람만 보이네 / 但見宮柳風吹狂바람 부는 궁 버들에 나뭇잎 드날리나 / 風吹宮柳葉飄揚한겨울의 된서리는 어찌할 수 없으리 / 無柰歲暮多繁霜[주-D001] 궁중의 버들 : 이 내용은 광해군 조에 선비가 시로 인해 화를 당한 사건으로 매우 널리 회자되었다. 《명재유고(明齋遺稿)》 권43 〈동몽교관 증 사헌부 지평 권공 행장〉에 전후의 내용이 자세히 실려 있다.[주-D002] 임숙영(任叔英)이 …… 하니 : 임숙영(1576~1623)은 자는 무숙(茂叔)이고, 호가 소암(疎菴)이다. 문과 별시 대책(對策)에서 올린 글에 외척의 전횡과 후궁의 청탁에 대해 비판한 내용이 있어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서 삭방(削榜)되었다가 후에 이항복의 구원으로 다시 복과(復科)되었다. 임숙영의 대책 내용은 《광해군일기》 3년 3월 11일 기사에 전문이 실려 있다.[주-D003] 권필(權韠) : 1569~1612.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여장(汝章), 호는 석주(石洲)이다. 권벽(權擘)의 아들이자 정철(鄭澈)의 문인으로, 문재가 매우 뛰어났으나 성격이 자유분방하고 구속받기 싫어하여 제술관과 동몽교관에 추천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광해군 때 김직재(金直哉)의 옥사에 연루되어 장을 맞고 귀양 가다가 죽었다. 인조반정 이후 사헌부 지평에 추증되었고, 광주(光州) 운암사(雲巖祠)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석주집(石洲集)》이 전한다.[주-D004] 鸎亂飛 : 대본에는 ‘鸎亂飛’라고 되어 있으나, 권필의 《석주집》과 본시가 인용된 다른 문헌에는 모두 ‘花亂飛’라고 되어 있다. 성호의 실수인지 의도적으로 고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래 성호의 악부에서도 계속 꾀꼬리를 시 전개의 한 소재로 삼고 있어서 대본대로 번역하였다.[주-D005] 석주가 …… 죽으니 : 권필이 지은 시를 〈궁류시(宮柳詩)〉라고 하는데 광해군의 처남인 유희분(柳希奮) 등이 외척으로 권세를 부리던 폐단을 기롱한 것이다. 당시 김직재의 무옥(誣獄)에 연루된 조수륜(趙守倫)의 집을 수색하다 이 시를 발견해 올렸는데, 광해군이 대로하여 그 출처를 조사하여 권필임을 알게 되자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친국(親鞫)을 하였다. 권필은 친국에서 장을 맞은 뒤 함경도 경원(慶源)으로 귀양 길에 올랐는데 동대문 밖에서 사람들이 주는 전별의 술을 폭음하고 이튿날 죽었다. 시에서 말한 궁궐의 버들은 유씨(柳氏)를 비유한 것이라고 알려졌다. 이 시가 《석주집》 권7에는 〈임무숙이 삭과되었다는 말을 듣고〔聞任茂叔削科〕〉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주-D006] 선인(善人)이 버림받는 것 : 원문의 난분혜위(蘭焚蕙委)는 난초를 불태우고 혜초를 버렸다는 뜻으로, 학덕 있는 선인이 버림받은 것을 말한다. 굴원의 〈이소(離騷)〉에 “내 이미 난초를 구원에 심고, 또 혜초를 백묘에 심었네.〔余旣滋蘭之九畹兮 又樹蕙之百畝〕” 하였다.
    2020-09-23 | NO.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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