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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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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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사절요 제35권 / 공양왕 2(恭讓王二)- 유백유 광주 귀양, 정지 졸
    신미 3년(1391), 대명 홍무 24년 6월○ 과거에 성균 사예 유백순(柳伯淳)이 순녕군(順寧君) 담(耼)과 말하기를, “무진년에 여러 장수들이 명령을 받고 요동을 쳤는데 머뭇거리다가 군사를 돌이켰으니, 공이 없는 것 같은데도 지금 도리어 포상을 받았으며, 그 군사를 돌이켰을 때에 왕씨를 세우는 것을 저지하고 아들 창을 세운 것도 또한 형세가 그렇게 된 것인데, 대신이 이 일로 옥에 갇히었다. 옛날 의종 때 조정의 난을 또한 거울로 삼을 만하다. 지금 유자 정도전 등이 나라의 권력을 마음대로 부리려 하니, 혹시 전날과 같은 난이 있다면 우리들이 그 화를 입을까 두렵다." 하였다. 이때에 와서 대간과 형조가 자은사(慈恩寺)에 모여서 담과 백순을 잡아서 신문하니 상세히 자백하므로, 드디어 담은 견주(見州)로 귀양보내어 속적(屬籍 왕실의 족보)을 삭제하고, 백순은 곤장을 쳐서 기주(基州)로 귀양보냈다. 또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 유백유(柳伯濡)가 전법(田法)을 비난하였기 때문에 광주(光州)로 귀양보내었다.10월 ○ 판개성부사 정지(鄭地)가 졸하였다. 정지는 젊을 때 큰 뜻이 있고 자질이 뛰어나게 훌륭하였으며, 성품이 너그럽고 후하였다, 장수가 되어 글 읽기를 좋아하여 대의에 통하였으며, 드나들 때마다 항상 서적을 지니고 다녔다. 윤이ㆍ이초의 옥사에 잡혀서 청주(淸州)에 갇혔는데, 불복하며 말하기를, “이 시중(李侍中 이성계(李成桂))이 대의를 주장하여 군사를 돌이킬 때 내가 이윤(伊尹)ㆍ곽광(霍光)의 고사로써 시중에게 암시한 것은 깊은 뜻이 있었는데 다시 어찌 윤이ㆍ이초에게 편당하였겠느냐." 하면서 말할 때마다 반드시 하늘에 맹서하며 말뜻이 사무쳤는데, 결국 수재 때문에 죄를 면하고 물러나와 광주(光州)에 있었다. 이때에 와서 왕의 부름을 받았는데, 나아가기 전에 졸하였다.
    2022-04-29 | NO.260
  • 고운 선생 문집 중간 서문〔孤雲先生文集重刊序〕[노상직(盧相稷)]
    세상에서 신라(新羅)를 논할 때면 산에 대해서는 반드시 두류(頭流)와 가야(伽倻)와 청량(淸涼)을 말하고, 물에 대해서는 반드시 동명(東溟)과 동락(東洛)을 말하고, 사람에 대해서는 반드시 문창(文昌) 최 선생(崔先生)을 말한다.대개 나라가 나라답게 되기 위해서는 명산(名山)과 명천(名川)과 명인(名人)이 있어야 한다. 그런 뒤에야 산천의 빼어난 기운을 온전히 받아 이상적인 정치를 행할 수가 있는 것이다.이 세 가지는 또 서로 화합해야만 아름다운 결과를 이루어 낼 수가 있다. 그러한 까닭에 명산과 명천의 빼어난 기운이 두텁게 쌓여서 인재를 배출한 결과 선생이 태어나게 된 것이다.선생도 명산과 명천에 대해서 뜻을 두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선생 스스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하늘이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가령 선생이 끝내 당(唐)나라에서 뜻을 펼 수 있었다면 선생은 당나라 사람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또 신라에서 뜻을 펼 수 있었다면 선생의 자취는 명산과 명천에 두루 미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선생은 약관이 되기도 전에 중국 조정에서 실시한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리고 23세 때에는 절강(浙江)의 적도(賊徒)인 황소(黃巢)를 붓으로 꺾었는데, 이에 천자가 어대(魚袋)를 하사하고 천하가 그 문장을 암송하였다.이때에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당나라의 고운(孤雲)으로만 알고 있었으니, 자기가 태어난 나라를 찾아서 다시 돌아갈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는가.선생은 그때 이미 기미를 눈치채고 있었다. 그리하여 어지러운 나라에는 거주하고 싶지 않았으므로은하(銀河)에 열수(列宿)가 벌여 있는 나이에 조서(詔書)를 받들고 금의환향하는 사람이 되었으니, 신라로서는 엄청난 행운을 맞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그러나 신라는 좁은 나라였다. 그러니 사해(四海)의 제일가는 인물을 어떻게 용납할 수가 있었겠는가. 시기하는 자들이 점차 떼를 지어 일어나게 되었으니, 이렇게 해서 선생이 다시 불우하게 되고 말았다.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나는 선생이 불우하게 된 것을 한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다만 선생이 만난 그 시대의 운수가 길하지 못했던 것을 슬퍼할 따름이다.당나라는 개국 이래 19명의 황제를 거치고 나서 탕산(碭山)의 부로(俘虜)가 새로 하늘의 총애를 받았고, 신라의 삼성(三姓)은 49명이 왕위를 전하고 나서 보리(菩提)의 당부(堂斧)가 거듭 일어나는 가운데 음탕한 여제(女弟)가 왕의 자리에 올랐으니, 선생이 어떻게 한 손으로 이를 부지(扶持)할 수가 있었겠는가.선생이 일단 조정에 편안히 있을 수 없게 된 뒤에는 해운대(海雲臺)와 임경대(臨鏡臺)와 월영대(月影臺)에서 고신(孤臣)의 분개한 회포를 풀 수 있었고, 두류(頭流)의 암문(巖門)에서 널리 구제하려는 뜻을 보였으며, 청량(淸涼)의 기판(棋板)에서는 승패의 운수를 관찰하였고, 가야(伽倻)의 유수(流水)에서는 시비(是非)의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었으니, 이를 통해서 선생이 불행해지면서 산천과 조우하게 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그 뒤 세월이 오래 흐르면서 아름다운 명성이 차츰 인멸됨에 따라 사람들이 단지 근거 없는 소문만을 가지고 자기들끼리 헤아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황엽(黃葉) 청송(靑松)의 구절을 가지고 고려의 왕을 위해 상서한 것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고려의 후대의 왕도 그 구절이 태조(太祖)의 왕업을 은밀히 도운 것이라고 하여 성무(聖廡)에 올려서 제사를 받게 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홍(洪)과 배(裵)와 신(申)과 복(卜)의 네 공신이 응당 선생보다 앞서야만 했을 것이다.종사(從祀)는 대례(大禮)인 만큼 왕이 독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신하들과 의논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고려에서 신라의 현인을 종사함에 있어서는 선생이 아니면 해당되는 자가 없었을 것이다.선생은 실로 우리 동방에서 처음으로 출현한 문학가였다. 그리고 삼천리강산에 예의의 풍속이 있게 된 것도 선생이 실로 창발시킨 공로라고 해야 할 것이다.혹자는 선생의 문구(文句)에 왕왕 범어(梵語)가 섞여 있는 것을 흠으로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세속에서 숭상하는 것에 대해서는 성인도 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으니, 엽각(獵較)이 바로 그것이다. 선생이 어찌 참으로 불교에 아첨한 사람이었겠는가.선생의 학문은 사술(四術)과 육경(六經)에서 인(仁)을 근본으로 삼고 효(孝)를 시작으로 삼는 것을 종지(宗旨)로 하였다. 선생은 심약(沈約)의 “공자는 단초를 열었고 석가는 극치를 다했다.〔孔發其端 釋窮其致〕”라는 말을 변론하여 말하기를, “부처가 심법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으로 말하면 현묘하고 현묘해서 끝내는 바람이나 그림자를 붙잡기 어려운 것과 같다.〔佛語心法 玄之又玄 終類係風影難行捕〕”라고 하였고,노장(老莊)과 불교가 이도(異道)라고 못 박으면서 말하기를 “공자(孔子)는 인에 의지하고 덕에 의거하였으며, 노자(老子)는 백을 알면서도 흑을 잘 지켰다. 불일을 다시 맞이하여 공색을 분변하니, 교문이 이로부터 계척을 나누게 되었다.〔麟聖依仁乃據德 鹿仙知白能守黑 更迎佛日辨空色 敎門從此分階墄〕”라고 하였으며,장자방(張子房)이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노닐었다는 설을 배척하며 말하기를 “그가 가령 신선술을 처음부터 끝까지 배웠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한낮에 하늘로 올라갈 수가 있었겠는가. 학의 등 위의 허깨비 같은 몸이 되고 말았을 뿐이다.〔假學仙有始終 果能白日上升去 止得爲鶴背上幻軀〕”라고 하였다. 이상 세 가지의 말을 가지고 유추해 본다면, 선생이 원한 것은 공자를 배우는 것이었다. 선생이 승려와 어울려 노닐었던 것은 멀리 은둔하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요, 어느 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숲 사이에 신발을 남겨 두었던 것은 인간 세상에 다시 살지 않겠다는 뜻을 보여준 것일 따름이다. 이 밖에 또 다른 무엇이 있겠는가. 점필(佔畢 김종직(金宗直)) 선생의 “세상에서는 신선이 되어 떠났다 말할 뿐, 빈산에 무덤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한다네.〔世上但云尸解去 那知馬鬣在空山〕”라는 시구야말로 천고(千古)의 의혹을 풀 수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선생은 《경학대장(經學隊仗)》이라는 책 1권을 저술하여 성리(性理)를 드러내 밝혔는데, 이는 암암리에 시대를 앞서서 송유(宋儒)의 주장과 서로 부합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상에서 모두 이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생도 사람들에게 보여 주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고려 시대에는 불경을 애송하는 정도가 더욱 심했기 때문에 《경학대장》을 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선생의 시문조차 읽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러고는 오직 《사산비명(四山碑銘)》 하나가 사방에 전파되었으므로 이를 통해서만 방불한 모습을 구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고운 선생의 참모습을 사람들은 알지 못하였다.그러다가 아조(我朝)에 들어와서는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이 선생의 지팡이와 신발을 들고 시봉하며 따르고 싶다 발원하였고,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가 문학을 창도한 선생의 공을 찬탄하였으며, 이자(李子 이황(李滉))가 서악정사(西岳精舍)라고 선생의 서원(書院)을 명명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때에도 《경학대장》에 대한 말은 보이지 않았으니, 이는 선생이 또 요부(堯夫)에게 진가를 인정받지 못한 것이었다. 그 밖에 많은 사람들이 불명(佛銘)을 지었다고 분분하게 선생을 비평하는 일이 아직도 끊이지 않고 있는데, 이는 실로 사도(斯道)를 보위하고 이단을 배척한 공이 불명 속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창려(昌黎)가 태전(太顚)을 위해 의복을 남겨 주었지만 그의 〈불골표(佛骨表)〉는 오히려 만고(萬古)의 창언(昌言)이 된 것처럼 선생이 불교를 위해 명(銘)을 지었지만 불교를 배척하는 뜻이 은연중에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후손 최국술(崔國述) 군이 여러 해 동안 선생의 유문(遺文)을 수집한 다음 자금을 내어 간행에 부쳤다. 이는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선생이 불교를 위해 명을 지은 것은 모두 임금의 명을 삼가 받들면서 그 속에 풍간(諷諫)하는 뜻을 부치려 했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함이요, 선생이 산택(山澤)에서 소요(逍遙)하며 종신토록 돌아오지 않은 것은 명승지에서 지내려 함이 아니라 오직 왕씨(王氏)의 조정에서 몸을 더럽힐까 염려한 나머지 처음에는 미록(麋鹿)으로 벗을 삼다가 끝내는 기러기처럼 아득한 하늘로 날아오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계원필경(桂苑筆耕)》과 《경학대장》은 이미 각각 1책씩 간행하여 배포하였지만, 《사륙집(四六集)》은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책에 기재된 것이 이처럼 허술하게 되었으니, 후학이 함께 한스럽게 여기는 바이다.병인년(1926) 6월 하순에 후학 광주(光州) 노상직(盧相稷)은 삼가 쓰다. [주-D001] 어지러운 …… 않았으므로 : 참고로 《논어》 〈태백(泰伯)〉에 “위태로운 나라에는 들어가지 말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거주하지 말아야 한다. 천하에 도가 있으면 자기를 드러내고, 천하에 도가 없으면 숨어야 한다.〔危邦不入 亂邦不居 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주-D002] 은하(銀河)에 …… 나이 : 28세를 가리킨다. 열수(列宿)는 28수(宿)의 별자리를 뜻한다.[주-D003] 탕산(碭山)의 부로(俘虜) : 부로는 송주(宋州) 탕산 출신으로,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후량(後梁)의 태조가 된 주전충(朱全忠)을 가리킨다. 원래 황소(黃巢)의 적도(賊徒) 출신으로 당나라에 귀순하여 사진절도사(四鎭節度使)에 이르고 양왕(梁王)에 봉해졌는데, 그 뒤 소종(昭宗)과 애제(哀帝)를 시해하고 국호를 양(梁)으로 바꿨으나, 만년에 누차 패하면서 세력이 위축되다가 마침내는 차자(次子)인 주우규(朱友珪)에게 시해당하였다. 《新五代史 卷1 梁本紀 太祖》[주-D004] 보리(菩提)의 당부(堂斧) : 불교의 사탑(寺塔)을 가리킨다. 보리는 깨달음이라는 뜻을 지닌 산스크리트어의 음역으로 불교를 의미하고, 당부는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나오는 말로 무덤을 뜻하는데, 사원의 탑이 원래 사리(舍利)를 보관하는 곳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참고로 신라 문성왕(文聖王) 17년(855)에는 창림사(昌林寺)에 무구정탑(無垢淨塔)이 세워지고, 경문왕(景文王) 10년(870)에는 보림사(寶林寺)에 남북으로 두 개의 석탑이 세워지고, 3년 뒤에는 높이 23장(丈)의 황룡사(皇龍寺) 9층탑이 개수(改修)되었는데, 그 이듬해인 경문왕 14년에 고운이 당나라에서 등과(登科)하였다.[주-D005] 음탕한 여제(女弟) : 신라 정강왕(定康王)의 여동생인 김만(金曼) 즉 진성여왕(眞聖女王)을 가리킨다. 젊은 미소년을 불러들여 음행을 하는가 하면 각간(角干) 위홍(魏弘)과 사통했다는 설이 전한다.[주-D006] 월영대(月影臺) : 창원(昌原)의 남쪽 바닷가에 있는 대이다. 고운이 일찍이 이곳에서 노닐었다고 하는데, 서거정(徐居正)의 시 〈월영대〉에 이르기를, “월영대 앞에 달은 길게 있건만, 월영대 위에 사람은 이미 갔네. 최고운이 고래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뒤, 흰 구름만 아득하여 찾을 곳이 없구나.〔月影臺前月長在 月影臺上人已去 孤雲騎鯨飛上天 白雲渺渺尋無處〕” 하였다.[주-D007] 두류(頭流)의 암문(巖門) : 두류는 지리산(智異山)을 말하고, 암문은 쌍계사(雙溪寺)를 말한다. 쌍계사의 골짜기 입구에는 두 바위가 서로 마주 서 있어 대문의 모양새를 이루고 있는데, 고운이 이곳에서 글을 읽을 적에 동쪽의 바위에는 ‘쌍계(雙溪)’, 서쪽의 바위에는 ‘석문(石門)’이라고 새겼다고 한다.[주-D008] 청량(淸涼)의 기판(棋板) : 청량산은 안동(安東)에 있는 산이며, 이 산의 풍혈(風穴) 입구에는 두 개의 판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고운이 앉아서 바둑을 두던 판이라고 한다.[주-D009] 황엽(黃葉) …… 하는데 : 《동국통감(東國通鑑)》에 “고려 현종(顯宗) 경신(庚申) 11년(1020)에 신라의 집사성 시랑(執事省侍郞) 최치원을 내사령(內史令)에 추증하고, 선성(先聖)의 묘정에 종사(從祀)하게 하였다. 당초 태조(太祖)가 잠저(潛邸)에 있을 적에 고운이 보낸 글 중에 “계림에는 누런 잎이 지고, 곡령에는 소나무가 푸르다.〔雞林黃葉 鵠嶺靑松〕”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이와 관련하여 “최치원이 태조의 왕업을 은밀히 도운 그 공을 잊을 수 없다고 하여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이 밖에 《동사찬요(東史纂要)》와 《서악지(西岳誌)》와 〈청학동비명(靑鶴洞碑銘)〉에도 청송(靑松) 황엽(黃葉)의 구절이 각각 언급되어 있는데, 한마디로 청송은 새로이 흥기하는 고려를 가리키고 황엽은 시들어 가는 신라를 가리키는 것으로 고운이 비유했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곡령은 개경(開京)의 송악(松嶽)을 가리킨다.[주-D010] 홍(洪)과 …… 공신 : 고려의 개국 공신(開國功臣)인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을 가리킨다.[주-D011] 엽각(獵較) : 사람들과 경쟁적으로 사냥하여 잡은 짐승으로 제사 지내는 것을 말하는데,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공자가 노나라에서 벼슬할 적에 노나라 사람들이 엽각을 하자 공자 역시 엽각하는 일을 행하였다.〔孔子之仕於魯也 魯人獵較 孔子亦獵較〕”라는 말이 나온다.[주-D012] 사술(四術)과 육경(六經) : 사술은 시(詩)ㆍ서(書)ㆍ예(禮)ㆍ악(樂)의 네 가지 경술(經術)을 말하고, 육경은 《시경》ㆍ《서경》ㆍ《역경(易經)》ㆍ《춘추(春秋)》ㆍ《예기(禮記)》ㆍ《악경(樂經)》을 말한다.[주-D013] 선생은 …… 하였고 : 《고운집》 권2 〈진감 화상 비명(眞監和尙碑銘)〉에 “심약의 말 중에 ‘공자는 단초를 열었고 석가는 극치를 다했다.’라는 말이 있다. 그는 대체(大體)를 안 자라고 이를 만하니, 이 정도는 되어야 비로소 지극한 도에 대해서 더불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불교가 심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말하면 현묘하고 현묘해서 어떤 이름으로도 이름 지을 수가 없고 어떤 설명으로도 설명할 수가 없다. 비록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뜻이나 앉아서 잊는 경지를 체득했다고 할지라도, 끝내는 바람이나 그림자를 붙잡아 매기기 어려운 것처럼 표현하기 어렵다고 해야 할 것이다.〔沈約有云 孔發其端 釋窮其致 眞可謂識其大者 始可與言至道矣 至若佛語心法 玄之又玄 名不可名 說無可說 雖云得月指或坐忘 終類係風影難行捕〕”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불교를 폄하하여 비판한 말이 아닌데, 서문의 저자는 이를 잘못 해석해서 이렇게 인용한 듯하다. 아래의 말도 마찬가지이다.[주-D014] 노장(老莊)과 …… 하였으며 : 《고운집》 권3 〈지증 화상 비명(智證和尙碑銘)〉에 “공자는 인에 의지하고 덕에 의거하였으며, 노자는 백을 알면서도 흑을 잘 지켰다네. 두 종교만이 천하의 법도로 일컬어졌으므로, 석가의 가르침은 경쟁하기 어려웠다네. 그래서 십만 리 밖에서 서역의 거울이 되었다가, 일천 년 후에야 동국의 촛불이 되었다오. 계림은 땅이 오산의 옆에 있는지라, 예로부터 도교와 유교에 기특한 자가 많았다네. 어여쁘게도 희중이 직분에 충실하여, 다시 불일을 맞아 공색을 분변하였다오. 종교의 문이 이로부터 단계별로 나뉘고, 말의 물길이 특색 있게 각자 퍼져 나갔다네.〔麟聖依仁乃據德 鹿仙知白能守黑 二敎徒稱天下式 螺髻眞人難确力 十萬里外鏡西域 一千年後燭東國 鷄林地在鼇山側 儒仙自古多奇特 可憐曦仲不曠職 更迎佛日辨空色 敎門從此分階墄 言路因之理溝洫〕”라는 말이 나온다.[주-D015] 장자방(張子房)이 …… 하였다 : 《고운집》 권2 〈무염화상비명(無染和尙碑銘)〉에 “저 문성후는 한 고조(漢高祖)의 사부가 되어 만호에 봉해지고 열후의 지위에 오른 것을 크게 과시하였다. 그리하여 한나라 재상의 자손으로서 최고의 영광으로 여겼으니 비루한 일이다. 그가 가령 신선술을 처음부터 끝까지 배웠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한낮에 하늘로 올라갈 수가 있었겠는가. 그런데 그것도 중간에 그만두어 학의 등 위의 하나의 허깨비 같은 몸이 되고 말았을 뿐이다. 그러니 어떻게 우리 대사가 처음에 속세를 초월하고 중도에 중생을 제도하고 마지막에 자기 자신을 깨끗이 한 것과 같을 수가 있겠는가.〔彼文成侯爲師漢祖 大誇封萬戶位列侯 爲韓相子孫之極 則㑋矣 假學仙有始終 果能白日上升 去於中止得爲鶴背上一幻軀爾 又焉珿大師拔俗於始 濟衆於中 潔己於終矣乎〕”라는 말이 나온다. 자방(子房)은 한(漢)나라 개국 공신 장량(張良)의 자이고, 문성후(文成侯)는 그의 시호이다.[주-D016] 경학대장(經學隊仗) : 《유설경학대장(類說經學隊仗)》의 약칭이다. 중국인 주경원(朱景元)이 지은 것으로, 고운의 작품이 아니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흠정사고전서총목(欽定四庫全書總目)》 권137 〈자부(子部) 47 유서류존목(類書類存目) 1〉에 《경학대장》 3권의 저자와 책에 대한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주-D017] 이는 …… 것이었다 : 후세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는 말이다. 후세에 제대로 평가해 주는 식견이 높은 사람을 기다린다고 할 때, 흔히 양자운(揚子雲)과 소요부(邵堯夫)를 거론하는데, 자운은 한(漢)나라 양웅(揚雄)의 자이고, 요부는 송(宋)나라 소옹(邵雍)의 자이다.[주-D018] 창려(昌黎)가 …… 것이다 : 고운이 어디까지나 유자(儒者)로서 불교를 배척했다는 주장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무리하게 논리를 전개하며 견강부회하고 있다는 느낌이 짙다. 창려는 창려백(昌黎伯)에 봉해진 당(唐)나라 한유(韓愈)를 가리킨다. 그가 조주 자사(潮州刺史)로 있을 적에 친하게 지냈던 노승 태전(太顚)과 작별하면서 자신의 의복을 남겨 주었던〔留衣服爲別〕 이야기가 그의 〈여맹상서서(與孟尙書書)〉에 실려 있다.[주-D019] 계원필경(桂苑筆耕)과 …… 없었다 : 고운의 저술은 문집으로는 중국에서 지은 시문집인 《계원필경》 20권,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5권, 《금체시(今體詩)》 1권,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1권, 《잡시부(雜詩賦)》 1권, 《사륙집(四六集)》 1권이 있고, 국내에서 지은 문집(文集) 30권이 있다. 역사서로는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이 있고, 불교 관계 저술로는 《부석존자전(浮石尊者傳)》 1권,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1권, 《석이정전(釋利貞傳)》, 《석순응전(釋順應傳)》, 《사산비명(四山碑銘)》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서 《계원필경》 20권과 《법장화상전》 1권, 《사산비명》만이 현전한다. 《정구복 외, 譯註 三國史記 권4 주석편 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762쪽》 고운의 문집은 고려 때부터 여러 차례 간행되었으나 모두 중간에 없어져 버렸다. 본 《고운집》은 《계원필경집》이나 《동문선》에 실린 것과 불교 관계 자료집, 금석문 등에 산재한 것을 한데 모아 놓은 것으로, 사실상 ‘습유(拾遺)’의 형태를 면치 못하고 있으며, 잘못된 글자나 내용이 있음을 면치 못하고 있다. 《최영성, 譯註 崔致遠全集2, 아세아문화사, 1999, 18~19쪽》[주-D020] 노상직(盧相稷) : 1855~1931. 한말(韓末)의 뛰어난 성리학자(性理學者)로,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치팔(致八), 호는 소눌(小訥)이며, 밀양(密陽) 단장면(丹場面) 노곡(蘆谷)에 거주하였다. 허전(許傳)의 문인이다. 성리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실학(實學)에 관해서도 저술을 남겼다. 저서로는 《소눌집(小訥集)》, 《역대국계고(歷代國界考)》, 《역고(曆考)》, 《육관사의목록(六官私議目錄)》, 《심의고증(深衣考證)》, 《주자성리설절요(朱子性理說節要)》가 있다.
    2022-04-30 | NO.259
  • 고적지법(考績之法) - 경세유표 제4권 / 천관 수제(天官修制)
    아무 달 아무 날, 광주 저리(光州邸吏) 최모(崔某)는 판관(判官)에게 가만히 뇌물을 주어 그 역가(役價)를 증액(增額)했음을 밝혀내었다.
    2022-04-29 | NO.258
  • 과거지규(科擧之規) 1- 경세유표 제15권 / 춘관 수제(春官修制)
    과거지규(科擧之規) 1,  과거 규정은 오직 먼저 거액(擧額 : 擧子의 정원)을 정해야 한다. 거액이 정해지면 온갖 폐단이 없어지게 된다.ㆍ남방(무남성의 경우) 거인의 정원(단위 : 명)무남성(武南省)광주(光州)나주(羅州)승주(昇州)광주 12나주 12승주 8장성(長城) 7영광(靈光) 6장흥(長興) 5능성(綾城) 4영암(靈巖) 4보성(寶城) 4담양(潭陽) 4함평(咸平) 4광양(光陽) 2창평(昌平) 5무안(務安) 3흥양(興陽) 3화순(和順) 4강진(康津) 3낙안(樂安) 3남평(南平) 3해남(海南) 4동복(同福) 3옥과(玉果) 3진도(珍島) 2금오(金鰲) 없음곡성(谷城) 2압해(押海) 없음검주(黔州) 없음공 44공 38공 28※ 위의 통계는 112명임.또한 반드시 거액을 정해서 응시하도록 할 것이며, 행검(行檢) 없고 글을 못하는 자는 함부로 응시할 수 없도록 한다.
    2022-04-29 | NO.257
  • 광산 김공(김성유) 묘갈명 병서 〔光山金公墓碣銘 幷叙〕 -사미헌집
    광산 김공 묘갈명 병서 〔光山金公墓碣銘 幷叙〕-사미헌집 제10권 / 묘갈명(墓碣銘) : 장복추(張福樞, 1815~1900)광산(光山) 김공(金公)의 휘는 성유(性儒)이며 자는 유선(幼善)이다. 헌종 정미년(1847, 헌종13) 정월 30일에 돌아가셨고, 을축년(1865, 고종2)에 인동부(仁同府) 서쪽 세덕(世德)의 간좌(艮坐) 언덕에 이장하였다. 하루는 공의 증손자 봉상(鳳相)이 가장(家狀)을 지어 묘갈명을 부탁하였는데, 입언군자(立言君子)에게 청탁하지 않고 병들고 피폐한 나에게 반드시 받고자 함은 공을 앎이 나보다 상세한 이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삼가 살펴보건대, 신라 말에 왕자 휘 흥광(興光 성덕왕)은 덕으로 백성을 구제하고 복택을 퍼뜨렸다. 고려 시대에 이르러 대대로 평장사(平章事) 벼슬을 한 이가 있었으며, 그리고 문안공(文安公) 휘 양감(良鑑)은 송(宋)나라에 사신 가서 그곳의 태학(太學)을 본떠 우리나라의 성교(聖校 국자감)를 창설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와 국자감(國子監) 생원 효로(孝盧)는 북문(北門)의 화를 만나 광주(光州)로부터 선성(宣城 예안(禮安))에 터를 잡아 은거하면서 벼슬하지 않았는데, 죽어서는 사당에 제향 되었다.중종 때 명신 휘 연(緣)은 호가 운암(雲巖)이다. 징사(徵士)였던 휘 부필(富弼)은 호가 후조당(後凋堂)이고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문순(文純)으로 호가 읍청정(挹淸亭)인 휘 부의(富儀)와 함께 퇴도(退陶) 선생의 문하에서 배웠으니, 두 분 모두 덕망과 학문으로 세상에 난형난제로 일컬어졌다. 후조당은 읍청정의 아들 휘 해(垓)를 양자로 삼았는데, 해는 내한(內翰)의 관직을 지냈으며 호는 근시재(近始齋)로 임진왜란 때 순절하여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그의 아들 휘 광계(光繼)는 호가 매원(梅園)으로 숭정(崇禎) 후에 여러 번 벼슬에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으니, 나의 여헌(旅軒) 선조의 고제(高弟)이다.고조부는 휘가 순의(純義)이고 호는 과헌(果軒)이며 증직이 도헌(都憲 대사헌)이다. 증조부는 휘가 교(嶠)이다. 조부는 휘가 명원(命元)이니 통덕랑에 올랐으며 호가 몽암(蒙菴)으로 인동부(仁同府)의 약목(若木)에 옮겨 우거하였다. 아버지의 휘는 재()이다. 전처는 의성 김씨(義城金氏)로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여황(汝晃)의 따님이고 후처는 아주 신씨(鵝州申氏)로 부위(副尉) 벼슬을 지낸 효표(孝標)의 따님이니, 영조 계사년(1773, 영조49)에 공을 낳았다.공은 어려서부터 숙성하여 나이 14세에 아버지 상을 당하여 슬퍼하며 몸이 여위기를 노성한 사람같이 하였다. 어머니를 섬김에 힘을 다하여 겨울에 따뜻하게 해드림과 여름에 시원하게 해드림, 그리고 맛있는 음식을 해드림에 있어서 지극한 마음을 쓰지 않음이 없었으며, 어머니 상을 당하자 척이(戚易 상례의 형식과 내용)의 예를 극진히 하였다. 동생을 우애롭게 대함이 자연스러운 마음에서 나왔으며, 동생이 요절하여 후사가 없는 것을 애달프게 여겨 친히 스스로 양자를 구하여 교육시키고 집안을 세워주었다. 선조를 받드는 일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제기(祭器)를 만들었고 묘소의 석물도 두루 갖추었다. 자식을 가르침에 의리에 입각하였다. 책장에는 경서를 가득 채워놓고 빈붕들이 오면 함께 강론하고 토론하여 비록 여러 날 머물러도 항상 부족한 듯이 여겼다. 신극재(申克齋)가 창건한 사창(社倉)을 이건하고 동락서원(東洛書院)의 학계(學契)를 주관하였으니, 이것은 현자를 사모하고 선비를 장려하는 성의에서 나온 것이다.나는 묘령(妙齡 20세 안짝의 나이) 때부터 옆에서 공을 모시면서, 공이 어린 나이 때부터 집안 일을 주관하고 남은 힘으로 글 공부하는 것을 그윽이 보아왔다. 공부한 것을 다른 일에 적용함에 넉넉함이 있었고, 필획은 정밀하고 발랐다. 집안을 다스림과 사람을 대함, 그리고 아래 사람을 부림에 있어서 조리 정연하게 법도가 있었다. 그러나 세도에 문제가 있어서 끝내 곤궁함을 면하지 못한 채 아래 지위에 있었으니, 개탄스러움이 마땅히 어떠하겠는가.부인은 인동 장씨(仁同張氏) 우섭(禹燮)의 따님이며 만회당(晩悔堂) 경우(慶遇)의 후손으로 규방에서의 법도가 있었다. 공보다 2년 전에 태어나서 공보다 7년 뒤에 죽었으며, 묘소는 공과 합장되어 있다. 1남 운교(澐敎)는 수직(壽職)으로 부호군(副護軍)을 지냈으며 3녀는 장석민(張錫敏),정연(鄭埏),허회(許檜)에게 각각 시집을 갔다. 부호군의 아들은 제동(濟東)과 제로(濟櫓)이다. 장석민의 아들 진원(晉遠)은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正字) 벼슬을 지냈으며, 딸은 김원규(金元奎),홍치규(洪致奎),송진수(宋鎭洙)에게 각각 시집을 갔다. 정연의 아들은 태석(台錫)이며 딸은 이탁소(李鐸韶)에게 시집을 갔다. 허회의 아들은 군수를 지낸 식(烒)과 위(煒),첨(燂)이다. 증손자와 현손자는 많아서 기록하지 않는다.명은 다음과 같다.신라와 고려 시대 이래로 / 自羅麗來고위 관직과 큰 덕을 가진 이가 있었네 / 巨卿碩德중세에 다섯 현자가 있어서 / 中世五贒명성을 날리며 집안을 빛냈네 / 揚聲潤色공은 그런 집안에 태어나 / 公又其家타고난 품성이 비상하였네 / 天賦異常몸을 계칙함에는 근검절약하였고 / 飭躬儉約처세에는 적절하게 대처하였네 / 處世圓方효손이 나에게 묘갈명을 구하여 / 孝孫求銘불후하게 남길 것을 도모하네 / 爲圖不朽산은 푸르고 물은 깊은 곳에 / 山蒼水深공의 묘소가 불룩하네 / 公藏之厚백세토록 묘소를 쓸고 성묘하니 / 百世瞻掃믿을 만한 근거가 비석에 있네 / 徵信在玆감히 아부하는 좋은 말을 할 수 있으랴 / 敢有阿好내가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을 기록하네 / 記耳目之[주-D001] 북문(北門)의 화 : 북문(北門)은 신무문(神武門)을 말하니 심정과 남곤 등이 신무문을 열고 일으킨 기묘사화를 말한다.[주-D002] 내한(內翰) : 한림원을 말한다. 여기서는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子)와 검열(檢閱)에 재직한 사실을 두고 말한다.[주-D003] 양자 : 원문 ‘螟兒’는 명령(螟蛉)을 말하는 것으로 양자(養子)를 비유하는 말이다. 벌의 종류 가운데 나나니벌〔蜾蠃〕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항상 자기 새끼가 아닌 명령을 취해다 기른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명령은 양자를 말한다.[주-D004] 신극재(申克齋) : 신익황(申益愰, 1672~1722)을 말한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명중(明仲), 호는 극재로 인동(仁同) 출신이다.[주-D005] 동락서원(東洛書院) : 경북 구미시 임수동에 있는 서원이다. 1655년(효종6) 지방유림의 공의로 장현광(張顯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76년(숙종2) ‘동락’이라고 사액되었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해오다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5)에 훼철되었다. 1932년 다시 서원으로 복원되었다.
    2020-12-14 | NO.256
  • 광산 향교 중수기〔光山鄕校重修記〕 - 허백당문집 제4권
    광산향교 중수기〔光山鄕校重修記〕 - 허백당문집 제4권 : 용재(慵齋) 성현(成俔, 1439~1504)경신년(1500, 연산군6) 11월에 표제(表弟) 상사(上舍) 박이온(朴以溫)이 와서 〈광산학기(光山學記)〉를 지어 달라고 부탁하면서 말하였다.“현감 권군 수평(權君守平)이 부임해 온 이래 마음을 다해 백성을 사랑하고 길러 고달픈 백성들이 은혜를 흡족하게 입었습니다. 그래서 고을의 폐해가 모두 제거되고 지체된 옥송(獄訟)이 남아 있지 않으며, 교활한 관리가 그 간교한 꾀를 부리지 못하고 백성들이 편안하여 제자리를 얻지 못한 사람이 없었으며, 여염이 평온하여 도적이 일어나지 않고 다스림이 공정하고 송사(訟事)가 없어져서 그에 관련된 장부와 문서가 아주 드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늘 공무를 보는 틈틈이 친히 유생(儒生)들을 이끌고 경학(經學)을 담론하여 자상하게 가르쳐 주고 잘 이끌어 주었는데 모두 사리에 합당하였습니다.학교가 예전에는 성안에 있었는데 지대가 낮고 비좁으며 퇴락하였습니다. 현감이 부로(父老)들을 불러들여 말하기를 ‘선성(先聖)의 거소(居所)로는 걸맞지 않으니 어찌 중수하여 새롭게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니, 이에 부로들이 모두 ‘명대로 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성의 서쪽 2리쯤에 터를 잡고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백성들이 마치 자식이 어버이의 일에 달려오듯이 연이어 모여들어 몇 달 지나지 않아 낙성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대성전(大聖殿)을 지어 선사(先師)와 십철(十哲)을 위차하고, 또 동무(東廡)와 서무를 지어 70제자와 역대의 여러 현인을 안치하였습니다. 앞에는 명륜당(明倫堂)을 두어 강학하는 장소로 삼았습니다. 명륜당의 동쪽과 서쪽에는 또 협실(俠室)을 두었습니다. 동쪽 협실은 교관(敎官)이 앉아 있는 곳이고, 서쪽 협실은 사마재(司馬齋)라 하였는데 이 고을의 상사(上舍)가 우거하면서 학업을 닦는 곳입니다. 또 동재와 서재를 두었으니 바로 유생들이 거처하는 곳입니다. 서재의 뒤에는 전사청(典祀廳)이 있고 동재의 뒤에는 교관들의 사무실인 아실(衙室)이 있습니다. 이에 신과 사람이 문란하지 않고 스승과 학생이 각각 거처할 집이 있게 되었으며, 당(堂)과 창고와 부엌과 목욕탕이 각각 제자리에 있게 되었는데, 무려 50여 칸이나 되었습니다.학교 앞에 있는 백성의 밭 몇 이랑〔頃〕을 현감이 돈을 내어 사들여 논을 만들기도 하고 채마전을 만들기도 하였으며 종들이 거처할 집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또 옛 향교의 터를 모두 학교에 소속시켜 밭을 만들었습니다. 또 백성의 밭을 사서 절반은 학교의 소유로 들이고 나머지 절반은 사마재의 소유로 들였으며, 또 면포(綿布) 100필과 조곡(租穀) 100섬으로 학생의 비용에 충당하였고, 또 면포 20필, 조곡 20섬은 상사인(上舍人)들의 비용으로 쓰게 하였습니다. 또 사서(四書)ㆍ오경(五經)ㆍ제자(諸子)ㆍ운서(韻書)를 갖추어 책장에 보관해 놓아 후진들이 볼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이때 감사 이공 숙감(李公淑瑊)과 도사 정군 탁(鄭君鐸)이 그 뜻을 가상히 여겨 감영에 있는 면포 40필, 조곡 50여 섬을 내주어 비용에 보태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문풍(文風)이 크게 진작되고 덕치의 교화가 더욱 밝아졌습니다. 고을 사람 중에 준수한 자들이 여기에 와서 유학하였는데, 배울 때에는 성현을 본받아 덕성을 도야하고 행동할 때에는 성(誠)과 경(敬)에 정성을 다하게 하니 점차 인의(仁義)의 도에 교화되어 모두 선한 사람으로 변화하였습니다. 이렇게 된 뒤에는 광산의 학교가 다른 읍에 비해 번창하고 인재가 빈빈하게 배출되었습니다. 선생께서도 광산 김씨(光山金氏)의 후예이니 광산 향교 중수의 전말을 기록하여 그 아름다움을 길이 남기게 해 주십시오.”나는 공자(孔子)의 도가 참으로 지극하다고 생각한다. 하늘과 대지가 만물을 덮어 주고 기르는 것 같아 그 크기를 다하였고 해와 달이 비춰 주는 것 같아 그 밝기를 다하였으며, 하해가 넓고도 깊은 것 같아 측량할 수 없고 산악이 높고 험준한 것 같아 미칠 수가 없다. 고금을 관통하여 변함이 없고 사물을 포괄하여 모두 구비하였으며, 인륜이 이에 의지하여 베풀어지고 정교(政敎)가 이에 의지하여 시행되며, 존비와 상하의 구분이 이 때문에 문란하지 않고 잘못된 말과 간사한 의론이 이 때문에 함부로 횡행하지 않으며, 문명 세계의 백성들이 이 덕분에 옷을 왼쪽으로 여미는 오랑캐의 풍속을 따르는 것을 면하였다. 이러한 공자의 도를 따르면 세상이 다스려지고 따르지 않으면 어지러워진다. 이를 버리면 하루아침도 살지 못하므로 안으로는 경사(京師)로부터 밖으로는 주군현(州郡縣)에 이르기까지 문묘(文廟)를 숭상하여 제사를 지내고 학교를 설립하여 학생을 가르치지 않는 곳이 없으니, 어찌 공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겠는가. 생각건대 우리 동방은 본래 문헌의 나라이며 광산은 진신(縉紳)을 배출하는 지방이었는데, 또 현명한 태수를 만나 추로(鄒魯)의 고장과 같은 성현의 교화를 이루었으니, 촉군(蜀郡) 문옹(文翁)의 풍화(風化)가 오히려 이보다 아래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이 광산의 백성이 된 것이 어찌 행운이 아니겠는가. 광산 백성들의 행운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조정의 풍교(風敎)에 있어서도 큰 다행일 것이다.[주-D001] 광산 향교 중수기(光山鄕校重修記) : 광산은 광주(光州)의 고호이다. 이 글은 1488년 부임한 광산현감 권수평(權守平)이 향교를 중수한 공적을 칭송한 기문이다. 권수평의 치적과 향교의 규모와 재원 등에 대해서는 이종사촌 동생인 박이온(朴以溫)의 말로 서술하여 백성들의 중론이라는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다. 후반부는 공자의 도의 위대성과 향교 중수의 의의에 대하여 강조하고 이를 조정의 풍교로 귀결 짓고 있는데, 대구를 맞추어 서술하여 중후한 맛을 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주-D002] 박이온(朴以溫) : 성현의 이종사촌 동생이다. 성현의 부친 성염조(成念祖)의 전배(前配)는 박고(朴翶)의 딸인 죽산 박씨(竹山朴氏)이고 후배(後配)는 안종약(安從約)의 딸인 순흥 안씨(順興安氏)인데, 성현은 후취 안씨 소생이다. 안종약은 순흥 안씨의 시조 안자미(安子美)로부터 9세(世)에 해당하는 인물로, 장남 안구(安玖)를 비롯하여 4남 2녀를 두었는데, 그중 장녀가 성염조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박수지(朴遂智)에게 시집갔다. 박수지는 함양 박씨(咸陽朴氏)의 시조 박선(朴善)으로부터 12세에 해당하는 인물이고, 박이온은 박수지의 장남으로 진사(進士)였다. 족보에 의하면 박이온의 조부인 박선(朴鮮)이 나주(羅州)에서 광주(光州)로 이거하였다. 박수지는 세자익위사 우익찬(世子翊衛司右翊贊)을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된 인물로 5남을 두었는데, 차례로 이온(以溫), 이양(以良), 이공(以恭), 이근(以謹), 이신(以信)이다. 《昌寧成氏族譜, 肅宗35(1709)》 《順興安氏族譜, 顯宗6(1665)》 《咸陽朴氏世譜, 哲宗1(1850)》[주-D003] 권군 수평(權君守平) : 권수평(?~?)의 본관은 안동, 자는 정숙(正叔)이고, 부친은 권우(權虞)이다. 1483년(성종14)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고봉집(高峯集)》 권2 〈광주향교중수기(光州鄕校重修記)〉에 의하면 “1488년에 병부 시랑(兵部侍郞)으로 있다가 외직으로 나와서 이곳을 맡았다.”라고 하였고, 《연산군일기》 1년(1495) 2월 1일에 병조 정랑으로 상소를 올린 기사가 보인다.정약용의 『목민심서』(권7, 예전 흥학조)에서는 "이로 인하여 유학의 풍교가 크게 진작되고, 유학의 가르침이 더욱 밝아지게 되었다. 단정하고 올바른 사람을 선택하여 향교의 재장(齋長)으로 삼고 사표(師表)가 되어 교생들을 통솔하게 하였다. 그들을 예의로서 대우하여 향촌민들이 예의염치를 알도록 하였다.(由是儒風大振, 文敎益明. 簡選端方, 使爲齋長, 以作表率, 待之以禮, 養其廉恥.)"고 권수평(權守平) 현감의 일화에 대한 평가를 했다. 고을 수령으로서 지방 관학인 향교에 대한 지원이 모범적 사례가 되었다고 본 것이다.광주는 당시 광산으로 불리웠고 읍격은 현이었다. 판관 우윤공이 부민이 쏜 화살에 맞는 사건이 일어나 광산현으로 강등되었고, 이 무렵 부임해 온 권수평 현감은 향민 교화에 그만큼 힘을 다한 것으로 보인다.[주-D004] 제자리를 …… 없었으며 : 대본에는 ‘無不獲其所’로 되어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5 〈광산현(光山縣)〉에는 ‘無一夫不得其所’로 되어 있다.[주-D005] 자식이 …… 달려오듯이 : 백성들이 즐거워하여 자발적으로 부응하였다는 뜻이다. 《시경》 〈대아(大雅) 영대(靈臺)〉에 “서민들이 일을 하는지라 하루가 되지 않아 완성되도다. 빨리 짓지 말라고 하여도 서민들이 자식처럼 오도다.〔庶民攻之, 不日成之. 經始勿亟, 庶民子來.〕”라고 하였는데, 주희의 주에 “민심이 즐거워하여 자식이 어버이 일에 달려오듯이 하여 부르지 않아도 스스로 온 것이다.〔民心樂之, 如子趣父事, 不召自來也.〕”라고 하였다. 《맹자》 〈양혜왕 상(梁惠王上)〉에도 같은 내용이 있다.[주-D006] 선사(先師)와 십철(十哲) : 선사는 선성(先聖)인 공자(孔子)와 선사인 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를 아울러 말한 것이고, 십철은 공문십철(孔門十哲)로, 민자건(閔子騫), 염백우(冉伯牛), 중궁(仲弓), 재아(宰我), 자공(子貢), 염유(冉有), 계로(季路), 자유(子游), 자하(子夏), 자장(子張)을 가리킨다. 대성전에 배향한 십철은 《논어》 〈선진(先進)〉에서 열거한 덕행, 언어, 정사, 문학의 4과(科)에 각각 우수한 사람 중에서 안연이 빠지고 자장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주-D007] 70제자와 …… 현인 : 70제자는 공자의 제자 3000명 중 육예(六藝)에 통달한 제자가 72인이었는데 성수(成數)를 들어 말한 것으로, 《사기(史記)》 권67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에 그들의 인적 사항이 기술되어 있다. 역대의 여러 현인은 송조 육현(宋朝六賢)과 동국 십팔현(東國十八賢)을 말한다.[주-D008] 신과 …… 않고 : 대본에는 ‘神人不紊’으로 되어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不紊’이 ‘咸寧’으로 되어 있다.[주-D009] 50여 칸 :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육십여 칸(六十餘間)’으로 되어 있다.[주-D010] 조곡(租穀) 100섬으로 :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 구절 다음에 ‘콩 20섬〔黃豆卄碩〕’이란 구절이 더 있다.[주-D011] 후진들이 …… 베풀었습니다 : 대본에는 ‘以惠後進’으로 되어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資考覽’으로 되어 있다.[주-D012] 이공 숙감(李公淑瑊) : 대본에는 ‘朴公淑瑊’으로 되어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 《문과방목》, 실록 등에 근거하여 ‘朴’을 ‘李’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이숙감은 세종ㆍ연산군 때의 인물로,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차공(次公), 호는 몽암(夢菴)ㆍ양원(楊原) 등이며, 1454년(단종2) 증광 문과에 급제한 이래 홍문관 부제학, 이조 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대제학에 증직되었고,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이숙감은 1499년(연산군5) 수 전라도 관찰사가 된 경력이 있다.[주-D013] 정군 탁(鄭君鐸) : 정탁(1452~1496)의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경숙(警叔)이며, 지평 충기(忠基)의 아들이다. 1484년(성종15) 진사시에 합격하여 문과에 오른 뒤 호조 정랑 등을 지냈으며, 상의원 첨정(尙衣院僉正)으로 호남에서 봉사하던 중 죽었다.[주-D014] 면포 40필, 조곡 50여 섬 :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綿布卅餘匹, 租穀七十餘碩.’으로 되어 있다.[주-D015] 문풍(文風)이 …… 밝아졌습니다 : 대본에는 ‘文風大振, 德敎益明.’으로 되어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文’이 ‘儒’로, ‘德’이 ‘文’으로 되어 있다.[주-D016] 배울 …… 변화하였습니다 : 대본에는 ‘學則薰陶德性, 行則罄盡誠敬, 漸仁磨義, 皆化於善.’으로 되어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學則持鑽仰之志, 而進德之功不已, 祠則秉對越之誠, 而非僻之心不入.’으로 되어 있다.[주-D017] 광산 김씨(光山金氏)의 후예이니 : 성현의 조모가 광산 김씨로, 광산군 김약항(金若恒, ?~1397)의 딸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주-D018] 문명 세계의 백성들 : 원문은 ‘화하민물(華夏民物)’이다. 화하(華夏)는 중화(中華)와 같은 말이나 여기서는 지역적인 개념보다는 문명과 야만을 구분하여 문명 세상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민물(民物)은 백성이란 뜻이다.[주-D019] 진신(縉紳) : 대본에는 ‘縉紳’으로 되어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 글자 앞에 ‘衣冠’이 더 있다.[주-D020] 촉군(蜀郡) 문옹(文翁)의 풍화(風化) : 한 경제(漢景帝) 때 문옹이 촉군 태수로 나가서 저잣거리에 학교를 세우고 성적이 우수한 자를 관리로 임용하는 등 획기적인 문교정책을 실시하여 문풍(文風)을 크게 진작한 결과, 촉 지방이 제(齊)ㆍ노(魯)처럼 변화되었던 고사를 말한다. 《漢書 卷89 循吏傳 文翁》
    2020-09-30 | NO.255
  • 광산(光山)의 호칭을 광주(光州)로 회복하다 - 전라병영계록(全羅兵營啓錄) 1871년
    광산(光山)의 호칭을 광주(光州)로 회복하다 - 전라병영계록(全羅兵營啓錄)○고종(高宗)/ 고종(高宗) 8년(1871) 9월 초10일 승정원 개탁 : 각사등록(各司謄錄) 절충 장군 수전라도 병마절도사 신 유(柳)지난 8월 24일에 동부승지(同副承旨) 신 이동욱(李東旭)이 담당하여 성첩(成貼)한 유지(有旨)에, “광산(光山)의 호칭을 광주(光州)로 회복하고 병부(兵符)를 개조(改造)한 다음 본영(本營)에 있는 목사(牧使)의 병부 왼쪽 하나도 금군(禁軍)을 정하여 내려 보내니, 경은 경건히 수령하고 옛날 병부를 본 승정원으로 올려 보내어 불태우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개조한 병부 왼쪽 하나를 금군 홍재하(洪在夏)가 싸가지고 왔기에 당일에 경건히 수령한 다음 옛날 병부 왼쪽 하나를 단단히 봉하여 싸서 신의 영(營) 대솔 군관(帶率軍官) 전 낭청(郎廳) 김유각(金有珏)에게 주어 승정원으로 올려 보냅니다. 연유를 치계(馳啓)하오니 잘 아뢰어 주소서.동치 10년 9월 초10일
    2020-10-01 | NO.254
  • 광주 군현분예(郡縣分隸) -경세유표 제3권 / 천관 수제(天官修制)
    *경세유표 제3권 / 천관 수제(天官修制)  정약용(1817) 중 일부. 무남성(武南省) : 포정사는 광주부(光州府) 성안에 있으며, 3주, 6군, 18현을 관할한다(또 濟州는 2현을 거느린다).광주(光州)는 2군, 6현을 거느린다.2군은 장성(長城)능성(綾城 : 綾州)이고, 6현은 담양(潭陽)ㆍ창평(昌平)ㆍ화순(和順)ㆍ남평(南平)ㆍ옥과(玉果)ㆍ곡성(谷城)이다.무남성 순찰사는 무주(武州) 도호부 대사를 겸하며, 판관 한 사람이 있어 민사를 다스린다.살피건대, 광주(光州)란무주(武州)이다. 신라 말부터 항상 큰 진(鎭)이었고, 고려 때에도 또한 그러했다. 우리나라에 와서는 창의(倡義)하는 군사가 이곳에서 먼저 일어났으니 그 고을을 포정사로 한 것이 그것에 연유한다.나주(羅州)는 2군, 6현을 거느린다.2군은 영광(靈光)ㆍ영암(靈巖)이고, 6현은 함평(咸平)ㆍ무안(務安)ㆍ강진(康津)ㆍ해남(海南)ㆍ진도(珍島)ㆍ압해(押海)이다.나주 도호부 목사는 무남성 우도 방어사를 겸한다.생각건대, 압해는 나주 바다의 바깥 섬이다. 나주 바다에 열두 개의 큰 섬이 있고, 작은 섬으로서 큰 섬에 딸린 것은 수십 개나 된다. 여러 섬에서 1년 동안 요역(徭役)으로서 고을 관청 사람의 요구에 응(應)하는데 곡식이 1만 섬이나 들고 다른 물건도 이만큼은 든다 한다. 나주 군관이 바깥 섬 주인이 되어, 그 이(利)를 다 먹으면서, 목사가 쓰는 목물(木物)과 잡비를 충당해준다 하니 천하에 무의 무법(無義無法)함이 이와 같을 수 없다. 섬 백성이 바다를 건너 육지에 와서 고소(告訴)하려 하여도 한 번 부성(府城)에 들어오려면, 헛되이 드는 비용이 매우 많고 사건은 결국 바로잡아지지 않기 때문에 원통함과 억울함이 쌓여서, 별도로 한 현을 세우고, 열두 섬을 다 이 현에다 붙이기를 원하고 있다. 내가 그 실정을 익히 알므로, 이번에는 열두 섬 중에 하나를 택해서 관아를 세우고자 하는데 자은(慈恩)ㆍ암태(巖泰)ㆍ압해가 그 후보지이다. 그런데 압해는 본시 옛 현이니 여기에다 관아를 설치함이 또한 마땅하다.생각건대, 신라ㆍ고려 때에 왜구가 우리 서해(西海)를 여러 번 침범했고, 만력 임진년과 정유년 난리에는, 다만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힘을 입어서, 왜적이 울두홍(熨斗谼)을 넘지 못했다. 만약 그때에 왜적이 이곳을 넘었더라면 나주 열두 섬이 맨 먼저 뱀과 돼지 같은 놈들의 먹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여러 섬에 성 하나, 보(堡) 하나 없으니 우리나라 서남해의 방어는 허술하다 할 수 있다. 바삐 한 현을 설치해서 그 침입을 막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일이다.승주(昇州)는 2군, 6현을 거느린다(승주는 곧 順天이다).2군은 장흥(長興)ㆍ보성(寶城)이고, 6현은 광양(光陽)ㆍ흥양(興陽)ㆍ낙안(樂安)ㆍ동복(同福)ㆍ금오(金鼇)ㆍ검주(黔州)이다.승주 도호부 목사는 무남성 좌도 방어사를 겸한다.살피건대, 순천 수영(水營) 남쪽에 금오도(金鼇島)가 있는데 둘레가 300리이고, 그 서쪽에 수태도(愁太島)가 있는데 주위가 200리나 된다. 그리고 돌산(突山)ㆍ내발(乃發)ㆍ횡간(橫看) 따위 여러 섬은 그 수효도 모를 정도이다. 지금은 금오도를 현으로 만들고 그 옆에 있는 수십 개 섬을 다 이 현에 예속시켜서 왜구의 침입을 막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생각건대, 흥양 남쪽에 있는 절금도(折今島)는 둘레가 100여 리인데 백성이 많고 토지가 기름지다. 그 서쪽에 산이(山伊)ㆍ조약(助藥)ㆍ벌라(伐羅)ㆍ금당(衾堂) 따위의 섬이 있는데 그 수효도 모를 지경이다. 절금도에 금주현을 만들고, 그 옆에 있는 수십 개 섬을 다 이 현에다 예속시킴도 또한 마땅한 일이다.제주(濟州)는 2현을 거느린다.2현은 정의(旌義)ㆍ대정(大靜)이다.제주 도호부 대사는 탐라부 병마 수군 도절제사(耽羅府兵馬水軍都節制使)를 겸하며, 판관 한 사람이 있어 민사를 다스린다.생각건대, 제주는 모두 원래 제도대로 하고 고칠 것이 아니다.-<하략>12성(省) 주ㆍ군ㆍ현의 총수(가경 병자년, 곧 순조 16년, 1816년 8월 23일에 시험삼아 기록했다)봉천성(奉天省) 38읍(4주, 10군, 22현. 또 沁州 1주, 1군)사천성(泗川省) 42읍(4주, 10군, 28현)완남성(完南省) 27읍(3주, 6군, 18현)무남성(武南省) 27읍(3주, 6군, 18현)제주(濟州) 3읍(1주, 2현)영남성(嶺南省) 30읍(3주, 9군, 18현)황서성(潢西省) 30읍(3주, 9군, 18현)열동성(洌東省) 21읍(3주, 6군, 12현)송해성(松海省) 27읍(1경, 2주, 12군, 12현)패서성(浿西省) 20읍(1경, 1주, 6군, 12현)청서성(淸西省) 19읍(3주, 14군, 2현)폐4군 4읍(4군)현도성(玄菟省) 16읍(2주, 4군, 10현)만하성(滿河省) 10읍(2주, 8군)이상 공 314읍이다. 본래는 346읍인데, 줄인 것이 43읍이고(풍덕ㆍ교하ㆍ목천ㆍ석성ㆍ비인ㆍ신창ㆍ덕산ㆍ해미ㆍ평택ㆍ영동ㆍ회인ㆍ전의ㆍ진잠ㆍ함열ㆍ구례ㆍ자인ㆍ하양ㆍ순흥ㆍ진보ㆍ비안ㆍ영덕ㆍ청하ㆍ연일ㆍ안의ㆍ칠원ㆍ곤양ㆍ진해ㆍ흡곡ㆍ송화ㆍ옹진ㆍ증산), 증설한 것이 11읍이다(압해ㆍ금오ㆍ검주ㆍ화령ㆍ인성ㆍ계산ㆍ후주ㆍ폐4군).
    2020-09-12 | NO.253
  • 광주 목사 권공 묘갈명 병서 〔光州牧使權公墓碣銘 幷序〕- 용주유고 제17권 / 묘갈(墓碣)
    선조 말엽 단성(丹城)에 과거 공부로 뛰어난 자가 있으니 권달보(權達甫 권집(權潗))라고 한다. 그의 종제 정보(靜甫 권도(權濤))와 그의 아우 도보(道甫 권준(權濬))와 아울러 세상에서는 ‘삼권(三權)’이라고 일컬었다. 도보가 죽은 지 십여 년 만에 그의 아들 극유(克有)가 그의 형과 아우와 함께 부친의 일을 성실하게 서술해 가장(家狀)을 만들어 나에게 주며 말하기를,“선생은 우리 선친의 벗이십니다. 감히 선친의 혼령을 빌려 선생께 글을 써 주십사 간청을 드립니다.”하였다. 나는 눈물을 거두며 대답하였다.“아, 참으로 잘 왔네. 자네 부친과 나는 오십 년 오랜 친구 사이니 자네 부친의 평생을 나만큼 아는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이네. 묘갈명을 어찌 사양할 수 있겠는가.”가장을 살펴보건대, 도보의 성은 권(權)이고 휘는 준(濬)이며 호는 상암(霜嵒)이고 도보(道甫)는 그의 자이다. 책을 읽을 줄 안 때부터 부형이 시키지 않아도 걸상의 무릎 닿는 부분이 뚫어질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여 읽지 않은 책이 없을 정도였는데 그 중 《맹자》를 가장 열심히 읽었다. 약관의 나이에 향시에 여러 차례 합격하였다. 계축년(1613, 광해군5)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그의 종제 정보(靜甫)와 함께 그해 증광시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분관(分館)되었다. 권지에서 규례대로 박사에 올랐고, 성현 찰방(省峴察訪)으로 나갔다가 다시 규례대로 전적으로 승진하였다.당시 광해군의 정사가 혼란하여 간신들이 권력을 휘둘러 인사를 마음대로 단행하면서 어진 이를 낮추고 자신의 당인(黨人)을 높였다. 황덕부(黃德符), 이위경(李偉卿) 등이 마음대로 날뛰고 아첨하였는데 도보와 잘 지내고자 좋은 관직으로 꼬였지만 도보가 좋게 여기지 않는 데야 어찌 하였겠는가. 성균관과 찰방을 전전한 것은 이 일에 관계된 것이라 한다.계해년(1623, 인조1) 인조반정 때에 한 가지 재주 한 가지 능력을 가진 사람도 등용되지 않은 사람이 없는데, 도보만은 형조 낭관에 제수되었다가 결성 현감(結城縣監)으로 나갔다.정묘년(1627)에 예조 낭관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후 황해 도사(黃海都事)에 제수되었다.무진년(1628)에 중앙으로 들어와 예조 정랑이 되었고, 얼마 있지 않아 수안 군수(遂安郡守)에 제수되었다.신미년(1631) 가을에 종묘서 령(宗廟署令)에 제수되었다가 공조 낭관으로 전직되어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을 겸직하였다. 겨울에 사예(司藝)로 개차되고 다시 상례로 개차되었다가 태복시 정으로 옮겼다. 한 달여 만에 삼척 부사(三陟府使)에 제수되었다.갑술년(1634)에 직강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을해년(1635)에 장악원 정을 거쳐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나갔다.병자년(1636) 가을에 청나라가 우리나라를 침략하여 남한성이 포위되고 호남과 영남의 두 절도사가 잇따라 패전하였다. 당시 온 도의 인심이 흉흉하였는데 여러 고을의 수령들은 오직 자신의 몸을 보존하고 처자를 보호할 계획에 여념이 없었다. 도보는 분개하여 우뚝 서서 마을의 부로들을 의로써 격동하고 흩어진 병졸들을 군령으로 수습하였다. 정홍명(鄭弘溟)에게 호소사(號召使)에 응하도록 권했으며 겁먹고 굼뜬 체부 종사관(體府從事官)을 꾸짖었다. 그러자 난민들이 두려워할 줄 알게 되어 창고가 그런대로 보존되었으니 도보의 공이다.무인년(1638)에 파주 목사(坡州牧使)에 제수되었다가 곧바로 상의원 정으로 개차되었다. 부임하기 전에 삼척에서 횡령하였다는 모함으로 죄를 받아 광양에 유배되었다가 얼마 뒤에 방면되어 돌아왔다.임오년(1642, 인조20) 10월 16일에 단성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65세였다.아, 도보의 넓은 도량과 아름다운 재주가 누구만 못하기에 여기에서 그치고 말았는가. 군자들은 이렇게 말한다.도보가 혼란한 조정에서 쫓겨난 것은 보통 선비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계해년(1623, 인조1) 이후로 도보를 아는 자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섰지만 도보를 밀어준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고 도보도 거의 얼굴과 언사에 드러낸 적이 없다. 이는 거의 ‘자신을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 군자’라고 할 수 있지만, 계해년 이전 현달하지 못했을 때보다 더 어려움이 있었다.그러나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당시에 쓰임이 되는 것을 중시하는 것은 자신의 뜻을 행하고 싶어서가 아니겠는가. 도보는 세 곳의 큰 고을 수령을 지내면서 모든 일을 신속하게 다스려 모두 고과에서 최고로 위에 보고되어 안팎 옷감을 하사받았으니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이 표창된 것이다. 그가 떠났을 때에는 떠난 후의 추모하는 마음을 돌에 새기지 않고 동(銅)에 새겼으니, 백성에게 은택을 주겠다는 평소 지닌 도보의 뜻이 여기에서 펼쳐진 것이다. 후한(後漢) 때의 순리(循吏)의 공적이 어찌 표비(豹朏)의 두려움을 부끄러워하겠는가? 처음에 내가 세 권씨에 대해 혼자서 평을 해보았었다. 달보는 외면은 단정하고 내면은 고아하며 정보는 융통성과 지조를 둘 다 갖추고 때로 규각을 드러내니 모두 한 때의 명사가 되기에 충분한데, 지극한 성실함으로 화려함이 없고 밖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 모두 진솔하다는 평은 도보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듯하다. 그 뒤 입신양명하고 행한 일이 대략 나의 말과 비슷하게 되었다.도보는 본래 안동 사람으로 그의 먼 조상인 김행(金幸)이 고려 초에 권씨 성을 하사받았는데 그 일이 《고려사》에 보인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 휘 금석(金錫)이 단성(丹城)에 살기 시작하여 마침내 단성 사람이 되었다. 증조 휘 시준(時準)은 영경전(永慶殿) 참봉이다. 참봉은 휘 운(運)을 낳았는데 상의원 별제이다. 별제는 휘 세인(世仁)을 낳았는데 군기시 판관이다. 이씨에게 장가들어 3남을 낳았는데, 장남 집(潗)은 임자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자는 달보이다. 도보는 그의 막내아우이다. 도보는 고성 현령(固城縣令) 조응도(趙凝道)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현숙하고 아녀자의 법도가 있어 숙인에 봉해졌다. 도보보다 6년 앞서 죽었다. 도보의 묘는 의령(宜寧) 박령산(縛領山) 묘향(卯向)의 언덕인데 조숙인과 같은 묘역 안의 다른 무덤에 묻혔다.아들 넷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장남은 극리(克履)로 업유(業儒)이다. 차남은 극관(克觀)이고 삼남은 극유(克有)이다. 극유는 성균관 진사로 벼슬하여 선공 참봉(繕工參奉)이 되었다. 사남은 극겸(克謙)으로 그 역시 업유이다. 극리는 부사 조정생(曹挺生)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극관은 일찍 죽었다. 극유는 목사 이지천(李志賤)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극항(克恒)은 윤정벽(尹正辟)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흠(欽)과 유(鑐)는 극리의 아들인데, 유는 생원이다. 익(釴)과 윤(鈗)은 극유의 아들인데, 익은 진사이다. 전(錪)은 극항의 아들이다. 흠은 이준로(李俊老)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셋을 낳았는데 장남은 우형(宇亨)이다. 우형은 현감 송정렴(宋挺濂)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나머지는 어리다. 유는 윤정남(尹挺男)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익은 찰방 이귀징(李龜徵)에게 장가들어 아들 셋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윤은 박이혁(朴以赫)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전은 심유진(沈儒珍)의 따님에게 장가들었고 측실에게서 딸 둘을 두었다. 장녀는 심여(沈櫖)에게 출가하여 딸 둘을 낳았다. 차녀는 정연휴(鄭延休)에게 출가하여 딸 하나를 낳았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세상은 말 잘하는 것 좋아해서 / 世好佞美그대에게 억지로 ‘어눌하다’ 이름붙이고 / 强名君曰吶세상은 꾸미는 것 좋아해서 / 世好飾羽그대에게 억지로 ‘질박하다’ 이름붙이네 / 强名君曰質어눌하고 질박함이 / 惟吶與質기름진 권세의 길엔 불리하겠지만 / 雖不利於脂膏形勢之途탁무(卓茂)와 주읍(朱邑)의 무리와 함께 / 與卓茂朱邑之倫백성의 사당에 거하면서 칭송의 노래 성대하리니 / 居民社而歌于于그렇다면 세상의 교활한 자들은 / 則世之巧儇者90리 길 양보하고, 한 수를 물리는 그 정도 뿐 아니네 / 不趐三舍讓一籌輸그대의 뜻과 사업은 바로 질박하고 어눌함 속에 있다는 것 / 惟君志業正在質吶之中兮세상에 누가 알리요 / 世誰知之참으로 사람들은 몰라도 하늘은 아시리니 / 固有人不識而天翁知兮그대 자손 마땅히 번성하리라 / 宜爾子孫之振振猗[주-D001] 광주 …… 묘갈명 : 이 글은 권준(權濬, 1578~?)의 묘갈명이다. 권준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도보(道甫), 호는 상암(霜嵒)이다.[주-D002] 걸상의 …… 정도로 : 후한(後漢)의 관영은 55년 동안 나무로 만든 탑상(榻牀)에 앉아 있었는데, 단정한 자세를 한번도 잃은 적이 없었으므로, 무릎 닿는 곳에 모두 구멍이 뚫렸다고 한다. 《高士傳 管寧》[주-D003] 두 절도사 : 남병사(南兵使) 서우신(徐佑申)과 전라 병사(全羅兵使) 김준룡(金俊龍)을 가리킨다.[주-D004] 자신을 …… 군자 : 《논어》 〈학이〉 제1장에 나오는 말로, 공자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아니하면 또한 군자가 아닌가.”라고 하였다.[주-D005] 어찌 …… 부끄러워하겠는가 : 원문은 ‘해뉵표비지출재(奚恧豹朏之怵哉)’인데, “표비(豹朏)”의 의미가 불분명하고 관련된 전고를 찾을 수 없어 일단 위와 같이 번역한다.[주-D006] 탁무(卓茂)와 주읍(朱邑) : 두 사람 모두 선정을 베풀어 고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웠다. 탁무(?~28)는 전한(前漢) 원제(元帝) 때에 밀현령(密縣令)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왕망(王莽)이 집권할 때 벼슬을 내렸으나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광무제(光武帝)가 즉위하자 민심을 수습하는 차원에서 그를 태부(太傅)로 발탁하고 포덕후(褒德侯)에 봉하였는데, 뒤에 밀현에 탁무의 사당이 세워졌다고 한다. 《後漢書 卷25 卓茂列傳》 주읍(朱邑, ?~기원전 61)은 동향(桐鄕)의 색부(嗇夫)가 되어 치적을 남겼다. 주읍이 죽자 그의 아들이 유언에 따라 그를 동향에 장사지냈는데, 그 고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우고 세시(歲時)로 제사를 지냈다. 《漢書 卷89 循吏傳 朱邑》
    2022-03-04 | NO.252
  • 광주 목사 박미를 보내다[送光州朴牧使楣] - 점필재집 시집 제16권
    광주 목사 박미를 보내다[送光州朴牧使楣] - 점필재집 시집 제16권 : 김종직(金宗直, 1431~1492) 응당 먼 곳 백성을 위해 조정 반열 떠났으리니 / 應爲遐萌輟鷺班한 깃대로 강관 나가는 것을 한하지 마소 / 一麾休恨出江關해양의 옛땅은 남쪽 지방서 가장 웅대하고 / 海陽舊壤雄南服서석산의 높은 표치는 뭇 산의 으뜸이로세 / 瑞石高標冠衆山넓은 도량은 청렴한 관리를 나무라지 않을 게고 / 曠度不敎廉吏讁좋은 때엔 의당 춤추는 허리 굽은 걸 감상하리 / 良辰宜賞舞腰彎묻노니 지금도 견훤의 집 풍속이 있다던가 / 問今尙有甄家俗적자와 용사로 다스리긴 또한 매우 어려우리 / 赤子龍蛇亦甚難견훤(甄萱)이 처음 무진(武珍)에서 일어나 뒤에 전주(全州)에 도읍하였다. 무진은 바로 광주이다. [주-D001] 해양 : 광주(光州)의 고호임.[주-D002] 서석산 : 광주에 있는 무등산(無等山)의 고호임.[주-D003] 적자와 용사로……어려우리 : 무지한 백성들을 다스리기 어려움을 비유한 말. 한유(韓愈)가 운조복절도관찰등사(鄆曹濮節度觀察等使) 마공(馬公)을 칭송한 운주계당시서(鄆州谿堂詩序)에 “공(公)이 고을에 처음 이르렀을 적에는 백성들이 교화가 되지 못하여 무(武)로 다스리면 분개하여 원망을 품고, 은혜로 다스리면 방자해지므로 한편으로는 적자(赤子)로 취급하고, 한편으로는 용사(龍蛇)로 취급하여 오랜 세월 동안 노심 초사를 거듭하고 나서 교화가 크게 행해진 다음에는 백성들이 모두 공을 친부모처럼 떠받들었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韓昌黎集 補遺》
    2020-09-25 | NO.251
  •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부임하는 곽문징(郭文徵)을 전송하는 서 - 기언 별집 제8권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부임하는 곽문징(郭文徵)을 전송하는 서  - 기언 별집 제8권 :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 선생의 문집, 《기언(記言)》 67권과 《기언별집(記言 別集)》 26권난리 후 내가 남쪽에서 객지살이를 한 지 4년째 되던 해에 호남으로 나가 낭주(朗州)를 유람하는 길에 석포(石浦)로 군을 찾아갔는데, 이때 군은 1년 전에 시종(侍從)의 직임을 사직하고 바닷가로 돌아와 있었다. 내가 지금은 병든 몸으로 경성에 머무르고 있는데, 군은 광주로 부임하라는 명을 받았고, 이어서 만리나 떨어진 연경(燕京)으로 떠나는 맏아들을 전송하게 되었으니, 내가 그 자리에 참석하여 군과 더불어 슬퍼하였다.아! 수십 년 동안에 군과 나눈 만남은 항상 나그네 길에서였다. 지금 나는 가련하게도 벌써 늙어 인사(人事)를 기약하기 어렵다. 더구나 광주는 경성에서 천 리나 떨어져 있는 곳이 아닌가.광주는 산수가 아름다운 곳에 위치하고 있는 데다 인구가 많고 물산이 풍부하여 노령(蘆嶺) 남쪽의 큰 도회로 꼽힌다. 그곳의 풍속이며 인물의 성쇠, 상서(祥瑞)와 요얼(妖孼), 고금의 변화를 북쪽으로 오는 인편이 있을 때 적어 보내도록 하라. 내 비록 늙었으나 아직 문학의 말업(末業)을 일삼고 있으니, 그것을 보고서 남국고사(南國故事)에 붙이고자 한다.[주-D001] 곽문징(郭文徵) : 곽성귀(郭聖龜, 1606~1668)로 문징은 자이다. 본관은 해미(海美), 부친은 곽치요(郭致堯)이다. 생원시에 합격하고, 1631년(인조9)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저서로 《현주세고(玄洲世稿)》가 있다.[주-D002] 낭주(朗州) : 전라남도 영암(靈巖)의 고호이다.
    2020-09-13 | NO.250
  • 광주 목사로 부임하는 이경함 을 전송하는 절구시의 서문-어우집
    광주 목사로 부임하는 이양원 경함(1553~1627) 을 전송하는 절구시의 서문〔送光州牧使李養源 慶涵 絶句序〕-어우집 제3권 / 서(序) : 어우(於于) 유몽인(柳夢寅, 1559~1623)만력(萬曆) 32년(1604, 선조37) 봄에 이군(李君)이 광주(光州)로 부임하게 되어 나에게 이별을 고하였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옛날 사람들은 길을 떠날 때 전별의 선물을 주었습니다. 설(薛)나라 군주는 맹자(孟子)에게 금을 주었으니 제가 금을 드릴까요? 그렇지만 저는 금이 없습니다. 자산(子産)은 계찰(季札)에게 모시옷을 주었으니 제가 모시옷을 드릴까요? 그렇지만 저는 모시옷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채찍을 드려야겠네요. 옛날에 요조(繞朝)는 채찍을 전별의 선물로 주었는데, 채찍은 말을 달리게 하는 것이니 이별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저는 채찍을 뺏고 싶은 심정인데 그러지 못하거늘 하물며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버들가지를 드려야겠네요. 옛날 사람은 송별할 때 버들가지를 꺾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버들가지는 실처럼 약하여 떠나는 사람을 묶어놓을 수도 없거늘 더구나 꺾어서 준다면 더욱 붙들어 매어놓을 수 없으니 어찌 드리겠습니까. 이것도 아니라면 물 한 잔 채워 권해야겠네요. 옛사람이 태수를 전송할 때 물 한 잔 채워주는 자가 있었습니다. 물맛은 심심하여 존귀한 빈객을 대접하기에 마땅하지 않으니 한 병의 맛 좋은 술을 가지고 한강(漢江) 가로 따라가 전송해야 마땅하겠습니다. 다만 이군(李君)은 백천(百川)을 들이마시는 주량이니 한 병의 술로는 대접할 수 없고 저 또한 병 때문에 집 밖을 나아가지 못하니 어찌 한강 가의 전별을 기대하겠습니까.이군은 수십 년 사귄 친구이고 광주는 천 리밖에 떨어져 있으며 목사는 삼 년 동안 객으로 살아야 하니, 어찌 전별의 선물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전별의 선물로는 마땅히 시만한 것이 없는데, 시가 시답지 못하면 마음을 다 표현하지 못함을 어찌하겠습니까. 시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니 마음이 귀하지 시가 귀한 것이 아닙니다. 시에는 본디 크고 작음이 있으니, 저는 우선 작은 시를 전별의 선물로 드립니다.”광주에는 공문서가 언덕처럼 쌓였을 것인데 / 光山朱墨積如陵어제는 아득한 구층의 은대에서 잠을 잤네 / 昨夢銀臺渺九層그래도 종일토록 잠자는 장군보다 나으니 / 猶勝將軍盡日睡세상의 힘들고 편안함은 능력에 달려있다네 / 世間勞逸能無能[주-D001] 광주 …… 서문 : 이 글은 1604년(선조37)에 광주 목사로 부임하는 이경함(李慶涵, 1553~1627)을 전송하며 쓴 시의 서문이다. 이경함의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양원(養源), 호는 만사(晩沙)이다. 내직으로는 정언ㆍ지평ㆍ호조 참판ㆍ병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고, 외직으로는 성주 목사ㆍ광주 목사ㆍ경상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탄핵을 받고 사직하였는데, 인조반정 이후 한성부 우윤으로 총관(摠管)을 겸하였다.[주-D002] 설(薛)나라 …… 주었으니 : 맹자(孟子)가 제(齊)나라에서 금(金) 1백 일(鎰)을 주는 것은 받지 않다가, 송(宋)나라에서 70일(鎰)을 주는 것을 받고 설(薛)나라에서 50일을 주는 것을 받았다. 그의 제자 진진(陳臻)이 받는 것에 옳고 그름을 물으니, 맹자는 “제나라에서는 받을 일이 없어서 받지 않았고, 송나라에서는 노자로 주는 것이라 받았으며, 설나라에서는 그 때 내가 의외에 대비할 것이 있는 것을 알고서 병기(兵器)를 준비하라고 주기 때문에 받았으니, 받은 것이 모두 옳다.”라고 대답하였다. 《孟子 公孫丑下》[주-D003] 자산(子産)은 …… 주었으니 : 이별의 자리에서 각자 소중한 물건을 주고받는 것을 뜻한다. 춘추 시대 오(吳)나라 계찰(季札)이 일찍이 정(鄭)나라에 가서 대부(大夫) 자산(子産)을 만났을 때 마치 예전부터 잘 아는 사이처럼 여겨져서 자산에게 흰 비단띠[縞帶]를 선사하자, 자산은 계찰에게 모시옷[紵衣]을 선사하였다. 오나라에서는 흰 것을 귀중히 여기고, 정나라에서는 모시를 귀중히 여기기 때문에 각각 자기가 귀중히 여기는 물품을 서로 선사한 것이다. 《春秋左氏傳 襄公29年》[주-D004] 요조(繞朝)는 …… 주었는데 : 길 떠나는 사람을 전송하면서 의미 있는 한 마디 말을 해 주는 것을 뜻한다. 춘추 시대 진(晉)나라의 사회(士會)가 진(秦)나라로 망명 가 있었는데, 진(晉)나라에서는 진(秦)나라에서 사회의 계책을 쓸까 두려워하였다. 이에 계책을 써서 사회를 진(晉)나라로 돌아오게 하였는데, 사회가 돌아올 때 진(秦)나라의 요조가 사회에게 채찍을 주면서 말하기를, “그대는 우리 진(秦)나라에 인물이 없다고 여기지 말라. 나는 진(晉)나라의 계책을 알고 있다.”라고 하였다. 《春秋左氏傳 文公13年》[주-D005] 옛 …… 채워주는 : 태수에게 물처럼 청렴한 정사를 펼치기를 당부하는 것이다. 후한 방삼(龐參)이 한양 태수(漢陽太守)로 부임하여 고사(高士)인 임당(任棠)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가 아무 말 없이 염교의 큰 뿌리 하나와 물 한 사발을 문 앞에 놓고는 손자 아이를 품에 안고 엎드려 있자, 방삼이 한참 동안 그 의미를 생각하다가 ‘물처럼 청렴하고, 염교 뿌리를 뽑아 버리듯 힘 있는 자를 억누르고, 손자 아이처럼 약한 백성을 돌보아 주라는 뜻’임을 깨닫고는 돌아가서 그대로 실천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51 龐參列傳》[주-D006] 백천(百川)을 들이마시는 : 술을 고래처럼 들이마시는 것을 뜻한다. 두보(杜甫)의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에, “좌상은 날마다 주흥으로 만전을 허비하여, 술을 큰 고래가 백천을 들이마시듯 하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07] 은대(銀臺) : 승정원(承政院)을 가리킨다.
    2020-12-31 | NO.249
  • 광주 신사에 제사를 지내다- 표해록 제1권 / 1488년 윤1월 14일
    광주 신사에 제사를 지내다- 표해록 제1권 / 무신년(1488, 성종 19) 윤1월 14일 : 금남(錦南) 최부(崔溥)큰 바다 가운데서 표류하였음.이날은 맑았습니다. 신시에 배가 표류하여 한 섬에 이르니 동, 서, 남의 3면(面)이 아득하게 끝없이 멀어 눈을 가리는 것이 없었으나, 다만 북풍을 피할 만한 곳은 있었는데 도리어 닻이 없는 것이 근심이 되었습니다. 처음에 제주도를 출발할 때는 배가 매우 큰데도 실을 물건이 없으므로 몇 개의 돌덩이를 배 안에 실어서 배가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허상리(許尙理) 등이 새끼줄로 그 돌 4개를 얽어매어 합쳐서 임시 닻을 만들어 배를 머물게 하였습니다. 안의(安義)가 군인 등과 서로 말하여 신에게 알아듣도록 하기를,“이번 행차가 표류해 죽게 될 까닭을 나는 알고 있었다. 자고로 무릇 제주도에 가는 사람들은 모두 광주(光州) 무등산(無等山)의 신사(神祠)와 나주(羅州) 금성산(錦城山)의 신사에 제사를 지냈으며, 제주도에서 육지로 나오는 사람들도 모두 광양(廣壤)의 차귀(遮歸)ㆍ천외(川外)ㆍ초춘(楚春) 등의 신사에 제사를 지내고 나서 떠났던 까닭으로, 신(神)의 도움을 받아 큰 바다를 순조롭게 건너갈 수가 있었는데, 지금 이 경차관은 특별히 큰소리를 치면서 이를 그르게 여겨, 올 때도 무등산과 금성산의 신사에 제사를 지내지 않았고 갈 때도 광양의 여러 신사에 제사를 지내지 않아 신을 업신여겨 공경하지 않았으므로, 신 또한 돌보지 아니하여 이러한 극도의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누구를 허물하겠는가?”하니, 군인들은 동조하면서 모두 신(臣)을 책망하였으나, 권송(權松)만은 홀로 말하기를,“그렇지 않다. 이에 앞서 정의 군수(旌義郡守) 이섬(李暹)은 3일 동안 광양 등의 신에게 재계(齋戒)하여 정성껏 제사를 지냈는데도, 표류되어 거의 죽을 뻔했다가 다시 살아나게 되었으며, 경차관(敬差官) 권경우(權景祐)는 여러 곳에 제사를 지내지 않고서 왕래하였으나 조그만 탈도 없었다. 바다를 건너는 데 편리함과 편리하지 못함은 순풍을 기다리는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지, 어찌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 일에 관계되겠는가?”하므로, 신 또한 타이르기를,“천지(天地)는 사심(私心)이 없고, 귀신은 말없이 운행(運行)하면서 착한 사람에게 복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 재앙을 주되, 오직 그것이 공평할 뿐이다. 악한 사람이 귀신을 아첨해 섬겨서 복을 구한다면 그 사람에게 복을 주겠는가? 착한 사람이 사설(邪說)에 미혹되지 않아서 부당하게 제사 지내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 재앙을 주겠는가? 일찍이 천지와 귀신이 음식으로 아첨해 섬긴다고 해서 사람에게 재앙과 복을 준다고 생각하겠는가? 절대로 이런 이치는 없을 것이다. 하물며 제사도 일정한 등급이 있으니, 사대부와 서인(庶人)이 산천에 제사 지내는 것은 예절에 어긋난 일이다. 예절에 어긋난 제사는 곧 음사(淫祀 부정한 귀신에게 제사 지냄)인데, 음사를 하면서 복을 얻은 일은 나는 보지 못하였다.너희들 제주도 사람들은 귀신을 몹시 좋아하여 산택(山澤)과 천수(川藪)에 모두 신사를 설치해서, 광양 등의 신당(神堂) 같은 데는 아침저녁으로 공경하여 제사를 지냄이 지극하지 않은 점이 없었으니, 그 바다를 건너가는 데 있어서 마땅히 표류하고 침몰되는 근심이 없어야 될 것이지마는, 그러나 오늘은 어떤 배가 표류하고, 내일은 어떤 배가 침몰되어, 표류하고 침몰하는 배가 앞뒤로 서로 잇따르게 되었으니, 이것이 과연 신(神)의 신령스러운 감응이 있는 일이겠는가? 제사를 지내어 능히 복을 받는 일이겠는가? 하물며 지금 함께 배를 탄 우리들 중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은 사람은 다만 나 한 사람뿐이고, 너희 군인들은 모두 성심으로 재계하여 제사를 지내고 왔으니, 신이 만약 영험이 있다면 어찌 나 한 사람이 제사를 지내지 않은 까닭으로 너희들 40여 명이 재계하여 제사를 지낸 정성을 폐(廢)할 수 있겠는가? 우리 배가 표류한 것은 오로지 행리(行李 여행)가 전도되어 배가 떠날 때 순풍을 잘 기다리지 않은 데서 그렇게 된 것인데, 도리어 제사를 지내지 않은 일로 나를 책망하게 되니, 또한 미혹된 일이 아니겠는가?”하였으나, 안의 등은 오히려 신의 말을 오활(迂闊)하다고 여겨 옳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2020-09-28 | NO.248
  • 광주 왕서에게 보낸 글〔光州王緖〕 - 계원필경집 제12권
    광주 왕서에게 보낸 글〔光州王緖〕 - 계원필경집 제12권/위곡(委曲)  :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왕서(王緖) 님에게 알립니다. 하늘은 간사함을 결코 용납하지 않고, 사람은 오직 순리(順理)에 따르는 자만을 돕게 마련입니다. 만약 지극한 이치를 어기면 반드시 떳떳한 법을 어지럽히게 될 것입니다.내가 알기에, 그대는 지난번에 안장(顔璋)으로 인하여 오래도록 화심(禍心)을 품고 있다가 대중의 노여움을 불러 일으켰고, 안장이 주륙(誅戮)을 당하자 그만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어찌하여 전장(戰場)에서 손을 묶어 의역(義域)에 몸을 던지려고는 하지 않고서, 감히 다시 도당을 불러 모으려고 모의하며 여전히 방자하게 떠들어 대는 것입니까. 상서(相鼠)의 기롱만을 자초(自招)할 뿐, 견양(牽羊)의 예법은 알지 못하고 있으니, 그대의 뜻이 끝내 어떻게 하려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지금 이렇게 은혜를 먼저 하고 처벌을 뒤로 하는 것은 무경(武經)에서 소중히 여기는 바요, 살리기를 좋아하고 죽이기를 싫어하는 것은 왕화(王化)에서 행하는 바입니다. 선(善)으로 인도하는 문을 활짝 열어, 인(仁)으로 돌아오는 길을 밟게 하려고, 마침내 회유(誨諭)를 가하면서 의향을 묻는 바이니, 빨리 본래의 속셈을 버리고 다른 소망을 일러 주기 바랍니다. 회답의 내용을 자세히 살피고 나서, 곧바로 지시를 내리려고 합니다.예(禮)에 이르기를 “뜻을 가득 채우면 안 된다.”라고 하였고, 전(傳)에 이르기를 “악한 일은 키워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대의 오늘날 뜻은 어떠합니까? 무고한 백성들을 몰아 죄의 그물에 잘못 들어가게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가을 날씨가 싸늘하니 건강에 특히 유의하시고, 절급(節級)들에게도 각기 위문해 주기 바랍니다. 이만 줄입니다.[주-D001] 왕서(王緖) : 원래 수주(壽州)의 백정이었는데, 중화(中和) 1년(881) 8월에 매부(妹夫) 유행전(劉行全)과 함께 500명의 도적을 모아 수주를 점거하고, 다시 광주(光州)를 함락하고는 자칭 장군(將軍)이라 하였으며, 그 뒤에 진종권(秦宗權)의 주청에 의해 광주 자사(光州刺史)가 되었다. 《資治通鑑 卷254》 《新唐書 卷9 僖宗本紀》[주-D002] 상서(相鼠)의 기롱 : 예의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하는 것을 말한다. 《시경》 〈상서(相鼠)〉에 “쥐를 보아도 가죽이 있는데, 사람으로서 예의가 없단 말인가. 사람으로서 예의가 없다면, 죽지 않고 또 무엇하리오.〔相鼠有皮 人而無儀 人而無儀 不死何爲〕”라는 말이 나온다.[주-D003] 견양(牽羊)의 예법 : 항복하여 귀순하는 법도라는 말이다. 춘추 시대 정(鄭)나라 군주가 초(楚)나라 왕에게 항복하였는데, 그때의 광경을 “정나라 군주가 웃옷을 벗고 양을 끌고서 영접하였다.〔鄭伯肉袒牽羊以逆〕”라고 표현한 말이 《춘추좌씨전》 선공(宣公) 12년에 나온다.[주-D004] 뜻을 …… 된다 :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오만함을 키우면 안 되고, 욕심나는 대로 따르면 안 되고, 뜻을 가득 채우면 안 되고, 즐거움을 끝까지 추구하면 안 된다.〔敖不可長 欲不可從 志不可滿 樂不可極〕”라는 말이 나온다.[주-D005] 악한 …… 된다 : 《춘추좌씨전》 은공(隱公) 6년에 “좋은 일은 놓쳐서는 안 되고, 악한 일은 키워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데, 이는 진 환공을 두고 한 말인 듯하다.〔善不可失 惡不可長 其陳桓公之謂乎〕”라는 말이 나온다.
    2020-09-12 | NO.247
  • 광주 유현의 아들 유명환 - 부상록(扶桑錄) [석문(石門) 이경직(李景稷)]/ 9월
    광주 유현의 아들 유명환 - 부상록(扶桑錄) [석문(石門) 이경직(李景稷)]/ 1617년(광해군 9) 9월 2일(갑자) 맑음. 일기가 매우 추웠다. 해진 후에 조흥이 왔다는 것을 듣고 죄다 돌려보내도록 하는 곡절 및 문서를 수정하는 일을 다시 청했는가를 물었더니, 답하기를,“오늘 집정에게 다시 청해 두고 왔는데, 오자 곧 또 부릅니다. 지금 또 복견으로 갈 참이니, 오는 즉시 자세히 보고하겠습니다.”하였다.포로당한 사람으로서, 진주(晉州)에 거주하던 하위보(河魏寶)의 아들 하선(河愃)이 중이 되어 관 앞에 와서 뵙는데, 이 사람이 바로 좌의정이 칭념(稱念)하던 사람이므로 역관 등이 서로 만나게 됨을 기뻐하여, 그 부모의 소식을 자세히 전해 주고, 이어서 관백이 이미 영을 내려 쇄환한다는 뜻을 말하며, 그가 거주하는 사찰(寺刹)을 물으니, 우물거리며 말하지 않았다. 그 부모의 말을 듣고도 조금도 생각이 움직이지 않았으며, 내일 다시 오겠다고 핑계하고는 한 번 간 후에는 형적(形跡)도 없으니, 정상(情狀)이 지극히 밉살스러웠다.광주(光州)에 사는 유현(柳玹)의 아들 유명환(柳命環)이 대판(大坂)에서 양천경(梁千頃)의 아들 몽인(夢寅)ㆍ몽린(夢麟) 등 및 전일에 편지했던 신향(愼向) 등 딸과 그 누이동생 혜란(惠蘭)의 편지 아울러 3통을 가지고 왔는데, 신향의 딸 등의 편지는 곧 전일 편지에 돌아가기를 원하던 그 뜻이었고, 혜란의 편지도 또한 그 뜻이었다. 몽인 등의 편지는 대략,“어미를 모시고 아우ㆍ누이동생과 같이 탈 없이 보존하고 있습니다. 멀리 동떨어진 지역에 흘러온 지 20년 동안 여름의 긴 날, 겨울의 긴 밤 잠깐 동안도 고국으로 돌아가려는 심정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마는, 호랑이 아가리 같은 데를 벗어나기 어려워 지금까지 그 뜻을 이루지 못하니, 부끄럽고도 부끄럽습니다. 원컨대 은덕(恩德)을 힘입어 고국에 돌아가고 싶습니다.……”하였다. 명환을 불러서 물으니, 답하기를,“협판 중서(脇板中書)가 나이 많아 그 임무를 그 아들에게 전해 주어서, 그 아들이 신농주(信濃州)로 바꿔 제수되어서 장차 그곳에 부임하고, 중서(中書)는 왜경에 영주(永住)하게 되므로, 권속(眷屬)을 데리고 대판부에 왔으나, 장군이 복견성에 있기 때문에 들어오지 못하고 우선 체류하고 있습니다. 저희 모자(母子)와 양몽인은 제 뜻대로 가고 옴을 허락하나 그 나머지는 모두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중에도 몽린은 중이 되어 차(茶) 끓이는 것을 맡아 하는데 중서가 가장 애중(愛重)하게 여기므로 도망갈까 염려하여 그 모친을 담보(擔保)로 하고 있습니다. 모친은 비록 늙었으나 이 때문에 돌아가기가 어렵습니다.……”하였다. 곧 각 사람의 성명을 별지(別紙)에다 기록하여 조흥에게 주며 장군에게 청해서 돌아가도록 하게 하였다. 다만 듣건대, ‘중서의 아들로서 15~16세 이하인 두 사람이 방금 관백의 좌우에 있으면서 신임과 사랑을 받고 있다 하며 그들이 가로막을까 염려된다.……’ 하였다. 들으니, ‘쇄환하라는 영을 왜경에 알리되, 만약 가기를 원하는데도 숨기고 귀환(歸還)시키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중한 죄를 준다.……’고 하였다. 내장(內匠)이 박대근을 불러,“문서 고치는 일을 집정 및 숭전(崇傳)에게 말하였더니, 집정이 말하기를, ‘왕(王) 자를 쓰지 않는 것은 바로 일본의 고례(古例)일 뿐 아니라, 낮추어서 쓰지 않는 것이 예도에 무엇이 해롭겠는가?’ 하고 숭전은, ‘장군은 왕이 아닌데 어떻게 쓰느냐?’ 했습니다. 그러나 숭전은 나와 더불어 함께 공부하던 동무이니, 다시 가서 말해 보겠습니다.”하였다.
    2020-09-18 | NO.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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