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30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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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옹(炭翁)에게 올리다- 광주 목사(光州牧使) 이장(李丈)의 일이 거론되다
- 上炭翁(十月十五日)明齋遺稿 권9 / 書 윤증(尹拯, 1629~1714)탄옹(炭翁)에게 올리다며칠 동안 인편이 없어 오래도록 안부를 여쭙지 못하고 매번 사모하는 마음만 간절하였는데 뜻밖에도 탄촌(炭村)으로부터 3장의 편지를 전해 받았습니다. 펼쳐 보고 난 뒤에 얼음이 얼고 서리가 내리는 차가운 날씨에도 기체가 편안하심을 알게 되어 지극히 위안이 되는 심정을 무어라 형언할 수가 없습니다.꿈속의 일을 읽고 문하가 강호에서 얼마나 근심하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서신의 끝머리에서 하신 말씀은 앞서의 여러 번의 서신에서 하신 말씀과 같았으니, 매우 자상하게 답해 주는 데에서 싫어하지 않고 애써 주는 아름다운 뜻을 볼 수 있습니다. 이에 감탄하며 명심하고 있으니 어찌 감히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직접 찾아뵙고 저의 흉금을 다 털어놓지 못하고 서찰로는 뜻을 다 드러낼 수 없으니 아쉬울 뿐입니다.지난번에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해하지 않는다.”라는 구절을 말씀드린 것은 저의 지나친 근심에서 나온 것으로 평소 가르쳐 주신 말을 되풀이했을 뿐이지 달리 들은 바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제가 비록 어리석지만 어찌 감히 이러한 점으로 문하를 의심하겠습니까. 다만 지난번에 광주 목사(光州牧使) 이장(李丈)이 찾아와 “이번 일이 있은 후에 차인(次仁)의 무리가 도성에 들어와서도 예전처럼 방문하지 않는 것이 마치 다른 사람들이 종용하는 말을 들은 듯하다.”라고 말하니,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매우 의아스러웠습니다. 저 이장(李丈)이 조정 관료들 사이에서 이론(異論)을 내세우지 못한 것은 형편상 그런 것이므로 심하게 허물할 수 없습니다만 이 때문에 그러한 생각에 마음이 얽매임을 면치 못하였으니 참으로 이른바 서운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문하의 규모와는 같지 않고 또 차인(次仁) 형의 무리가 평소 논의했던 견해와도 다르니, 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이미 들은 바가 있으므로 감히 여쭙는 것인데 과연 어떻게 된 것인지요?삼가 선조의 묘석 세우는 일을 시작하셨다고 하니 생각건대 마음 쓸 일이 적지 않을 듯하여 매우 염려가 됩니다. 중부(仲父)에게 일전에 부탁하신 뜻을 감히 알려드리지 못하였습니다만, 중부께서는 눈이 어두워 글씨를 반듯하게 쓰지 못하신 지가 수년이 되었습니다. 또 복관되어 도성으로 가셨으니 도성에서 나와 묘석에 직접 글씨를 쓸 수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북칠(北漆)하여 글씨를 묘석에 옮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으니 무슨 염려가 되겠습니까. 제가 한 번 가는 것은 꺼릴 일이 아니지만 비면(碑面)의 글씨를 중부에게 부탁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여기는 전과 다름없이 별다른 일은 없으나 가친의 아픈 팔이 여러 달 지났는데도 낫지 않고 오래도록 신음하고 계시어 근심과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달 초에 조금 안정되셨기에 저는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상수리를 주우러 산중으로 들어갔다가 어제 저녁에 돌아왔습니다. 내일은 다시 둔악(芚岳)으로 들어갈 예정이니, 이는 두소릉(杜少陵)이 말한 “황산(荒山)에서 원숭이를 좇는 자의 생애”와 같아 진실로 우습습니다. 깊은 산중의 작은 암자에서 바깥 세상일을 듣지 않고 열흘간 독서한 것이 1년 동안 공부한 것보다 낫습니다. 그러나 매양 마음에 와 닿는 곳이 있어도 지난해 모곡(茅谷)의 작은 움집에 있을 때처럼 직접 뵙고 가르침 받을 길이 없어 한스럽기만 합니다. -10월 15일-數日來絶無往便。久闕修候。每切馳慕而已。意外自炭村傳送下書三紙。披玩之餘。仍伏審氷霜。氣候萬福。慰幸之至。不容名言。夢寐間事。有以仰見江湖之憂。紙末之誨。若前度累便。垂答諄諭。足見惓惓不倦之義。感歎藏戢。何敢忘之。第無因一拜床下。豁此心胸。筆札固不能盡人意。是用介然耳。不慍之說。曾以薦聞者。自是過計之憂。爲誦平日俯敎之言而已。非有所聞也。拯雖愚昧。何敢以是奉疑於門下哉。但昨者光牧李丈。見過爲言。今番事後。次仁輩入京。不曾如前來相訪。似聽他人慫㥚之言云云。聞來不能無訝。彼李小諫之不能立異於僚席勢也。無足深咎。而至以此不免有所滯芥於其間。則眞所謂慍也。恐不似門下規模。又不似次仁兄輩平日論議知見。拯則有以知其不然。而旣有所聞。敢此奉質。未知果如何也。伏承先墓石事方始。竊想勞神不少。爲之貢慮。仲父前所屬之意。敢不通告。第仲父目昏。不能作楷。已數年矣。且復官入京。似不能出來臨石。然北漆移石。甚非難事。何慮之有。拯則一動雖非所憚。而石面事。則非其任矣。此間都依舊狀。而家嚴臂痛。數月不瘳。長在呻吟中。憂煎度日。自月初少定。又爲拾橡救飢之計。走入山中。昨夕始歸。明又再入芚岳。杜少陵所謂荒山隨狙者生涯。良可笑也。深山小庵。不聞外事。一旬讀書。勝却消一年工夫。每到會心處。恨無由對案承謦欬。如往年在茅谷小窩時也。奈何。十月十五日。
- 2023-07-13 | NO.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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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에게 올린 편지〔上退溪書〕 -금계집 내집
- 퇴계에게 올린 편지〔上退溪書〕 금계집 내집 제4권 / 잡저(雜著) : 이이한 번 주남(周南)에 누워 지금까지 체류하고 있으며 증세가 더욱 심해져 아직 떠날 날짜를 잡지 못하니 마음이 울울합니다. 사직한 후 공무를 일체 끊고 시골집에서 임시로 거처하고 있으며, 스무날 사이에 출발하려고 하나 몸이 이미 극도로 허약해져서 무사히 돌아가는 것을 보장하기 어려울 듯합니다.소식이 오래 끊어졌었는데 요즘 동정이 어떠하신지요? 아마도 지금쯤 도산(陶山) 주위를 두루 다니면서 매화와 버들을 구경하는 즐거움을 누리시리라 생각하지만, 저는 병상에 누워 부질없이 탄식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또 이곳 서원(書院)의 위차를 정하는 일은, 이미 기문(記文)을 지어주셨으니 시끄러운 논란이 조금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한 차례 위차를 정해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제 병이 깊어 외부의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으니 후임 군자에게 걱정 끼치는 것을 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난달에 우연히 사방의 명유(名儒) 및 오자강(吳子强)이 문병을 왔기에 고을 선비들과 서원에 모여 여러 날 묵었으며, 이때 류 광주(柳光州)도 함께 했습니다. 그때 모두 말하기를, “서원의 위차를 정하지 않고 돌아가면 뒤에 오는 자가 감히 그 가부를 논의할 수 없을 것이고, 또 유생들이 서원에 들어갈 때 마치 탱화가 없는 절과 같아 즐거이 모여 공부하지 않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유생들과 그 가부를 권점(圈點)하니, 한훤당(寒暄堂 김굉필)을 홀로 제향 하여 정위 남향으로 모시려고 하는 것에 대해 모두 찬성하였고, 문충공(文忠公 이인복)을 동쪽 벽에 배향하기를 원하는 자도 1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열공(文烈公)은 손에 염주를 들고 있어서 학궁에 모실 수 없다는 것이, 우리뿐만 아니라 경향 각지의 논의가 이미 정해졌으므로 절대로 다시 논의할 수 없습니다. 손에 염주를 들고 있는 늙은이를 사당에 넣고자 의논한다면 유생들은 차라리 신발을 신고 떠나고 말아 서원 가운데 유생의 자취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의견을 합하여 논의를 결정해야 하는데 유생들의 말도 지나치다고 할 수 없습니다.삼가 생각건대, 선생님께서 지으신 서원 기문은 엄연히 하나의 학문 규범인데, 저로부터 선생님의 가르침을 위반하는 일은 차마 못할 바이고, 이를 고집하며 유생들의 요청을 거절하는 것도 형편상 행하기 어렵습니다. 병으로 지친 마음이 더욱 어지러워 감히 급히 사자(使者)를 보냈습니다. 제 생각에 그 기문은 목사 노경린(盧慶麟)이 급박할 때 나왔고 여러 논의가 분분한 날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아마 다시 요량해야 할 곳이 있을 듯합니다. 십분 타당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고치는 것도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약 이미 정해진 기문이란 핑계로 다시 논의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아마도 중외 유생들의 의혹을 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밝은 가르침을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와병중이라 두서없이 한두 가지 말씀드렸을 뿐 자세히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허둥지둥 대필을 시켜서 더욱 송구스럽습니다. 중간에 두 이씨(李氏)의 후예들도 말하기를, “이씨 두 분을 고을의 현인이라 하여 사당에 들인 것은 퇴계가 결정한 일이고 노 목사(盧牧使)의 본래 뜻이니, 후배 젊은이들이 가볍게 고칠 일이 아니다. 만약 한훤당을 높이 받들고자 한다면 정당(正堂) 북쪽에 따로 세 칸 사당을 짓고 스승을 높이는 곳으로 삼으면 될 것이다.……”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서원 안에서 동쪽에는 향현사(鄕賢祠)를 모시고 북쪽에는 존현사(尊賢祠)를 모시는 일은 형세상 시행할 수 없을 듯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삼가 품의하는 편지를 올립니다.[주-D001] 주남(周南)에 …… 있으며 : 질병 등으로 인하여 지방에 머물러 있게 된 것을 말한다. 주남은 중국의 낙양(洛陽)을 이른 것이다. 한 무제(漢武帝) 때의 태사(太史)인 사마담(司馬談)이 병이 위독하여 주남에 머물러 있다가 한나라 봉선(奉禪)의 일에 참예하지 못하여 울분으로 죽었던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130 太史公自序》[주-D002] 서원(書院) : 1555년(명종10)에 노경린(盧慶麟)이 성주 목사로 부임하여 건립하고 황준량(黃俊良)이 중수한 영봉서원(迎鳳書院)이다.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에 있다. 숙정자(叔程子), 주자(朱子), 김굉필(金宏弼), 이언적(李彦迪), 정구(鄭逑), 장현광(張顯光)의 위패를 모셨다. 정구(鄭逑)가 1568년(선조1) 봄에 퇴계 선생에게 품의(稟議)하여 천곡서원(川谷書院)으로 고쳤다.[주-D003] 기문(記文)을 지어주셨으니 : 1560년(명종15) 7월에 이황이 〈영봉서원기(迎鳳書院記)〉를 지었으며, 《퇴계집》 권42에 실려 있다.[주-D004] 오자강(吳子强) : 오건(吳健, 1521~1574)으로, 자강은 그의 자이다. 본관은 함양(咸陽), 호는 덕계(德溪)이다. 남명 조식이 덕산동(德山洞)에서 강론하자 그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김인후(金麟厚)ㆍ이황(李滉)의 문인이기도 하다.[주-D005] 류 광주(柳光州) : 광주 목사(光州牧使)를 역임한 류경심(柳景深, 1516~1571)을 말한다.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태호(太浩), 호는 구촌(龜村)이다. 1560년 광주 목사가 되었고, 뒤에 호조 참판, 예조 참판, 대사헌, 병조 참판, 평안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문집에 《구촌집》이 있다.[주-D006] 권점(圈點) : 그림이나 글씨 옆에 동그라미를 치며 의견을 표시하는 것이다.[주-D007] 문열공(文烈公)은 …… 있어서 : 문열공은 고려 때 문신 이조년(李兆年, 1269~1343)이며, 고려 시대부터 전해오던 그의 영정 왼손에 염주가 들려 있던 것을 이른 것이다. 이조년의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원로(元老), 호는 매운당(梅雲堂)ㆍ백화헌(百花軒)이다.[주-D008] 노경린(盧慶麟) : 1516~1568. 본관은 곡산(谷山), 자는 인보(仁甫), 호는 사인당(四印堂)이다.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있을 때 영봉서원(迎鳳書院)을 세워 유학(儒學)을 장려하였다.[주-D009] 두 이씨(李氏) : 애초에 노경린이 영봉서원에 제향 하고자 했던 문열공(文烈公) 이조년(李兆年)과 그 장손 이인복(李仁復)이다.
- 2020-12-11 | NO.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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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집 권17, 서, 答奇明彦 답 기명언
- 答奇明彦 辛酉 有無限合叩底。限於此數言。想默諭也。
- 2023-07-06 | NO.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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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가섭필 상 병인 경오- 신기영
- 팔가섭필 상 병인 경오년(1870, 고종7) 〔八家涉筆上 竝引 庚午〕 산북노인(汕北老人) 신기영(申耆永) 두평-운양집 제14권 / 잡저(雜著) 4편 : 김윤식(金允植, 1835~1922)유종원의 문장 11〔柳文十一〕 산수기 자후가 〈소석성산기(小石城山記)〉 및 〈만석정기(萬石亭記)〉를 지어 하늘이 떨어지고 땅이 솟아난 조화의 흔적이라고 하며 신물(神物)을 홀로 샀다고 매우 자랑하였다. 내가 본 것들을 따져보면 거의 어양돌기(漁陽突騎)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 금강산 만이천봉이지만 내가 미처 보지 못했다. 내가 본 것은 오직 동남쪽 몇 구역이지만 그 기이함을 이미 이루 말할 수 없다. 단양(丹陽)의 삼선봉(三仙峯), 사인봉(舍人峯), 구담봉(龜潭峯), 옥순봉(玉筍峯) 같은 경우는 걸출하고 수려하고 험준하고 명정(明淨)하다. 청주(淸州)의 파곶동(巴串洞), 선유동(仙遊洞), 옥량동(玉樑洞) 같은 경우는 깊숙하고 깨끗하고 고요하고 그윽하다. 광주(光州) 무등산(無等山)의 삼황봉(三皇峯) 및 광석대(廣石臺), 입석대(立石臺) 같은 경우는 맑게 트이고 쑥 솟아나서 만 개의 기둥을 묶어세운 듯하고[如光州無等之三皇峯及廣石立石之淸曠超拔。束立萬柱。], 양주(楊州) 만장봉(萬丈峯) 같은 경우는 곧바로 높이 하늘로 솟아 있고 그 아래 작은 바위는 천병만마(千兵萬馬)의 칼과 방패, 창의 형상과 같다. 이는 모두 괴이한 경관을 지닌 바위들이다. 귀신이 설치하고 조성한 듯 인간 세상 같지 않다. 내 마음은 기쁘지만 미처 서술하지 못하니, 바위가 나를 만난 것이 어찌 불행이 아니겠는가?
- 2020-12-31 | NO.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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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사하여 땅에 묻은 소의 숫자를 순영(巡營)에 보고하다 광주목사
- 보첩고(報牒攷) - 光州牧使○ 영조(英祖) 39년(1763) 8월 16일 폐사하여 땅에 묻은 소의 숫자를 순영(巡營)에 보고하다올려 보내는 일. 본부(本府)의 경내에 우역(牛疫)이 점점 치성하여 소가 잇따라 폐사하고 있어서 민사(民事)가 고민된다는 연유에 관해 전에 이미 첩보하였습니다. 우역이 불처럼 더욱더 치성하여 소가 잠시 병을 앓아도 곧바로 폐사하고 마는데, 이러한 증세가 7월부터 더욱더 심하였습니다. 그래서 7월 이후로 폐사한 소에 대해서는 주인의 성명을 일일이 수록(收錄)한 다음 책자로 작성하여 올려 보냅니다.47방(坊) 중에 오직 진전방(眞田坊)만 청정(淸淨)하여 아직은 이러한 환난이 없는데, 깊디깊은 외진 산골에 도처마다 장막을 설치하여 소를 옮겨 놓고 사람이 모두 지키고 있으니, 그 광경이 시름겹고 참담하였습니다. 이외에 46방은 고실(故失)이 비록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우역의 치성은 실로 피차의 구별이 없으므로 2개월 사이에 폐사한 소의 수가 무려 9백 85두에 이르렀으니, 매우 민망합니다. 그런데 우역이 날마다 더 치성하여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으니, 앞날의 민사(民事)를 생각할 적에 더욱더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폐사한 소는 낱낱이 엄하게 신칙하여 땅에 묻도록 하였습니다. 이상의 연유를 모두 첩보합니다.제사(題辭)1천 두(頭)에 가까운 소가 일시에 병들어 죽었으니, 민사를 생각할 적에 너무나도 고민스럽다. 폐사한 소는 신칙하여 땅에 묻도록 해야 할 것이다.
- 2023-08-17 | NO.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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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재(風災)의 상황을 순영(巡營)에 보고하다 광주목사
- 보첩고(報牒攷) - 光州牧使○ 영조(英祖) 39년(1763) 8월 14일풍재(風災)의 상황을 순영(巡營)에 보고하다첩보(牒報)하는 일. 본부(本府)의 농형(農形)에 대해서는 지난달 말에 대략 첩보하였습니다. 이달 초4일 아침부터 동풍(東風)이 크게 일어나 3일 밤낮으로 그치지 않고 불다가 초7일 인시(寅時 오전 3시~5시)에 그치더니, 비가 또 저녁부터 밤새도록 주룩주룩 내리기도 하고 흩뿌리기도 하였습니다. 초8일 사시(巳時 오전 9시~11시)에 동풍이 다시 비를 대동하고 불다가 초9일 저녁에 이르러 비로소 바람이 그치고 비가 개었습니다. 그런데 개천과 도랑이 넘쳐흐른 바람에 물 주변의 전답(田畓)이 또 간간이 떨어져나가거나 토사(土沙)가 뒤덮은 환난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이미 익은 올벼는 바람이 지나간 곳마다 간간이 낱알이 떨어지기도 하였고 또 쓰러져서 일어나지 않은 곳도 많았는가 하면 익어 가는 늦벼와 늦게 이앙하여 이삭이 막 패는 벼 및 전지의 팥ㆍ콩ㆍ기장ㆍ벼 등은 더욱더 재해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높은 지대 건조한 곳에 가장 늦게 이앙하여 지금 막 이삭을 머금고 있는 벼는 역풍(逆風)이 짓밟아서 전혀 열매를 따먹을 가망이 없습니다. 다래가 약간 남아 있는 목화(木花)도 모두 시들고 손상되어 전부 농사를 실패하였습니다.그중에 동면(東面)의 하번암(下磻巖)과 산동(山東), 남면(南面)의 산동(山洞), 북면(北面)의 보현(寶賢)과 고사(高寺) 등 5방(坊)은 협곡에 가까운 지대여서 혹독하게 풍재를 입어 혹은 온 들이 재해를 입기도 하고 혹은 일자(一字)의 전 지역이 재해를 입기도 하였으므로 면보(面報)에 백성의 하소연이 매우 분분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별도로 사람을 파견하여 조사해 보니 낱알이 약간 떨어진 올벼는 돌아볼 것도 없고 늦게 이앙하여 이삭을 머금고 아직 열매를 이루지 못한 늦벼는 비가 지나간 뒤에 햇볕이 쨍쨍 내리쬐어 꼿꼿이 서서 말라버렸으므로 보기에 수심을 자아내고 마음이 아팠습니다.산동(山東)ㆍ산동(山洞)ㆍ고사(高寺) 등 3방(坊)은 이른바 전 들판과 전 일자(一字)가 재해를 입었다는 백성들의 말이 더러 실정에 지나친 바가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일자(一字)나 일필지(一筆地)의 재해가 다소 천심의 구별이 있으므로 평명(坪名)과 자호(字號)를 전부 들어 재해를 입었다고 보고하지는 않았습니다만 하번암과 보현 2방(坊)은 전 지역이 재해를 입은 곳이 가장 많아 열매를 따먹을 가망이 없습니다. 이는 논곡식만 그렇지 않고 밭의 각종 곡식 중에 풍재(風災)를 입은 곳이 도처마다 된서리를 맞아 시들어 하얗게 되어버렸으므로 매우 애긍하고 참담하였습니다.금년의 농사는 가뭄과 장마가 번갈아 도래한 바람에 이미 많이 재해를 입은 데다 뜻밖에 풍재로 입은 손상이 또 이처럼 심하므로 결국 흉년의 탄식을 면치 못하게 되었으니, 민사(民事)를 생각할 적에 고민과 염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비가 내린 상황은 곧바로 치보(馳報)해야 합니다만 지역이 광대하여 각 면(面)에서 일제히 보고하기를 기다려 자세히 조사하는 사이에 자연히 지연되었으니, 또한 매우 황송합니다. 이상의 연유를 모두 첩보합니다.제사(題辭)계문(啓聞)하겠다. 첩보는 접수하였음.[주-D001] 자호(字號) : 어떤 사물의 차례를 천자문(千字文)의 글자 차례에 따라 매긴 호수(號數). 토지의 경우 5결(結)마다 하나의 자호를 부과하였음.
- 2023-08-17 | NO.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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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유천(韓柳川)에게 보냄 - 성소부부고 제20권
- 한유천(韓柳川)에게 보냄 신축년(1601) 8월 - 성소부부고 제20권 / 문부(文部) 17 ○ 척독 상(尺牘上) : 양천(陽川) 허균(許筠 1569~1618)해양(海陽 광주(光州)의 고호)의 모임에 감히 즐겁게 달려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마는 다만 부사(府使)가 있어 참견할 수 없는 형편이니 공께서 알아서 처리하시기 바랍니다.사람들이 혹은 저의 이번 행차를 소상(蕭湘)의 만남이라고 비웃는데, 이것은 충분히 피할 수는 있으나 역시 꼭 피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장부가 세상에 태어나 젋은 시절은 번개처럼 빠른데, 한 차례의 환락은 충분히 만종(萬鍾)의 녹봉에 해당됩니다. 참으로 그러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면 욕하는 사람이 아무리 많은들 어찌 나의 털구멍 하나라도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꼭 의리에 해롭지도 않는데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공께서 음식을 드시다가 이것을 보시면 반드시 웃음이 나서 밥상 가득히 입 속의 밥을 뿜고 말 것입니다. 다 갖추지 못합니다.[주-D001] 한유천(韓柳川) : 선조ㆍ광해군 때에 벼슬이 호조 판서ㆍ영돈령부사에 이르렀던 한준겸(韓浚謙)을 말함. 유천(柳川)은 그의 호.[주-D002] 소상(瀟湘)의 만남 : 기이하게 서로 만나는 것을 뜻함. 소상은 소상우(瀟湘雨)의 준말로, 원(元) 나라 양현지(楊顯之)가 지은 극곡(劇曲) 이름. 그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지방관(地方官) 장상영(張商英)이 딸 취란(翠鸞)을 데리고 부임하는 도중, 회하(淮河)를 건너다가 풍랑을 만나 배가 전복되었을 때 취란은 어옹(漁翁)에게 구조를 받았다. 이것을 인연으로 취란은 그 어옹의 조카 최통(崔通)과 결혼을 하였는데, 그 후 최통이 과거에 급제하여서는 시관(試官)의 딸과 다시 결혼을 하고 그 고을에 부임해 왔다. 취란이 그를 찾아가자 그는 무정하게 배척하여 취란을 관권(官權)으로 사문도(沙門島)에 유배하였는데, 그 유배 도중 임강역(臨江驛)에서 아버지와 딸이 기이하게 서로 만나게 된 것이다.
- 2020-09-22 | NO.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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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중(鄕中)에 체문(帖文)을 하달하다- 광주목사
- 보첩고(報牒攷) 光州牧使영조(英祖) 39년(1763) 7월 초6일 향중(鄕中)에 체문(帖文)을 하달하다본관(本官, 광주목사光州牧使)이 부임한 지 지금 3년이 되었으나 고을의 폐단과 백성의 폐막을 바로잡거나 구제한 바가 없으므로 고인(古人)처럼 녹봉을 받은 만큼 일을 하지 못하여 부끄러워하고 있다.재 취합해 놓은 쌀이 40포(包)가 있어서 각 면(面)에 내주었으나 수량이 넉넉하지 않아 하나의 폐막을 없애는 밑천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모름지기 향중(鄕中)에서 편의에 따라 조처하여 목전에 직면한 공공방역(公共防役)의 일에 혹시라도 균등하게 배분되지 않는 폐단이 있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주-D001] 체문(帖文) : 수령(守令)이 관하의 면임(面任)ㆍ훈장(訓長), 향교의 유생 등에게 유시하는 문서.
- 2023-08-17 | NO.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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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집강안(鄕執綱案)을 봉인(封印)하여 바칠 것을 지시하는 순영(巡營)의 관문(關文), 1766.6.18.- 광주목사
- 보첩고(報牒攷)○영조(英祖) / 영조(英祖) 42년(1766)6월 18일 향집강안(鄕執綱案)을 봉인(封印)하여 바칠 것을 지시하는 순영(巡營)의 관문(關文)관찰사 겸 순찰사(觀察使兼巡察使)가 상고(相考)하는 일. 들어본 바에 의하면 향집강의 명색문안(名色文案)에 명단의 표를 붙인 수가 매우 많은데, 향중(鄕中)의 권한을 마음대로 부리기 위해 수많은 부류를 불러들이고 끌어모아 읍과 촌락을 횡행한 바람에 백성들이 고초를 받는다고 한다. 이른바 교중회(校中會)ㆍ서원회(書院會)ㆍ읍중회(邑中會) 등이 없는 달이 없는가 하면 절일(節日)에 도처의 각 사찰마다 모여 놀면서 음식을 요구하는 등 침해하는 폐단이 하나뿐이 아니라고 한다. 아울러 다른 가호(家戶)에 빌려준 곡물의 권한을 대신 받아 그 호주(戶主)로 하여금 납부하도록 하면서 강제로 결역(結役)의 값을 징수하되, 결주(結主)로 하여금 담당하게 하고, 이 밖에도 그들이 기세를 부리며 횡행하는 허다한 버릇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고 한다.이를 엄하게 징계하지 않을 경우에는 말류의 폐단이 반드시 끝없을 것이다. 이에 관문을 보내는 바이니, 관문이 도착한 즉시 각별히 엄하게 조사하여 우두머리로 폐단을 저지른 두세 사람의 이름을 적발하되, 그들이 범한 죄목과 아울러 신속하게 첩보함으로써 엄하게 처벌할 수 있게끔 하고, 이른바 향적(鄕籍)과 집강안(執綱案)도 일체로 수색해 넣은 다음 봉인하여 올려야 할 것이다.
- 2023-10-16 | NO.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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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집강안(鄕執綱案)을 올리는 일에 관해 순영(巡營)에 보고하다, 1766.9월 초2일 -광주목사
- 보첩고(報牒攷)○영조(英祖) / 영조(英祖) 42년(1766)9월 초2일 향집강안(鄕執綱案)을 올리는 일에 관해 순영(巡營)에 보고하다첩보(牒報)하는 일. 이번에 도착한 사또(使道)의 관문에 이른바 향적은 바로 본주(本州)에서 전 고려조 이래 명공(名公)과 거유(巨儒)의 이름을 차례대로 기록한 문안인데, 향청(鄕廳)의 높은 벽장 가운데 깊이 간직한 다음 자물쇠를 채우고 굳게 봉인해 놓았으므로 평상시에 개폐(開閉)한 일이 없었습니다. 지난 정묘년(丁卯年, 1747, 영조23) 간에 새 문안을 편성하였으나 그때 소요가 크게 일어난 바람에 작파하여 사용하지 않고 단지 옛날 문안 2건만 있는데, 그것도 70여 년 전에 작성한 것이기 때문에 문안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 하나도 세상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는 향집강의 명색이 기록된 문안이 아니고 바로 한 고을 향당(鄕黨)의 고로(古老) 성명을 기록해둔 것이므로 지금 거론할 필요가 없습니다.향집강은 지금 문안이 없고 향로(鄕老) 6원(員), 향유사(鄕有司) 6원 등의 명색을 판자에다 새겨서 향청(鄕廳)의 벽에 걸어두고 이를 허목판(虛目板)이라 이르는데, 향유(鄕儒) 중에 연로자의 이름표를 그 명색의 밑에 붙여 놓고 거행합니다. 그 수가 무려 18원이나 되지만 문안으로 작성된 책은 없고 현판에다 죽 명단을 붙여 시행하고 있으니, 문안을 바치는 것을 어떻게 할 지 지시를 내려 주셨으면 합니다.목사(牧使)가 부임한 뒤로 향회(鄕會)를 연 일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하였고 앞장서서 폐단을 저지른 사람이 아직 발각되지 않았습니다만 각별히 엄하게 금지하여 차후에 만약 그러한 폐단이 있을 경우에는 나타나는 대로 적발한 다음 이름을 지적하여 첩보하려고 합니다. 이상의 연유를 모두 첩보합니다.제사(題辭)이른바 현판은 즉시 파쇄(破碎)한 뒤에 첩보해야 할 것이다.
- 2023-10-16 | NO.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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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집강안(鄕執綱案)을 올리는 일에 관해 순영(巡營)에 보고하다- 1766.8.22 -광주목사
- 보첩고(報牒攷)○영조(英祖) / 영조(英祖) 42년(1766)8월 22일 향집강안(鄕執綱案)을 올리는 일에 관해 순영(巡營)에 보고하다첩보(牒報)하는 일. 이번에 도착한 사또(使道)의 관문에 이른바 향적은 바로 본주(本州)에서 전 고려조 이래 명공(名公)과 거유(巨儒)의 이름을 차례대로 기록한 문안인데, 향청(鄕廳)의 높은 벽장 가운데 깊이 간직한 다음 자물쇠를 채우고 굳게 봉인해 놓았으므로 평상시에 개폐(開閉)한 일이 없었습니다. 지난 정묘년(丁卯年, 1747, 영조23) 간에 새 문안을 편성하였으나 그때 소요가 크게 일어난 바람에 작파하여 사용하지 않고 단지 옛날 문안 2건만 있는데, 그것도 70여 년 전에 작성한 것이기 때문에 문안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 하나도 세상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는 향집강의 명색이 기록된 문안이 아니고 바로 한 고을 향당(鄕黨)의 고로(古老) 성명을 기록해둔 것이므로 지금 거론할 필요가 없습니다.향집강은 지금 문안이 없고 향로(鄕老) 6원(員), 향유사(鄕有司) 6원 등의 명색을 판자에다 새겨서 향청(鄕廳)의 벽에 걸어두고 이를 허목판(虛目板)이라 이르는데, 향유(鄕儒) 중에 연로자의 이름표를 그 명색의 밑에 붙여 놓고 거행합니다. 그 수가 무려 18원이나 되지만 문안으로 작성된 책은 없고 현판에다 죽 명단을 붙여 시행하고 있으니, 문안을 바치는 것을 어떻게 할 지 지시를 내려 주셨으면 합니다.목사(牧使)가 부임한 뒤로 향회(鄕會)를 연 일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하였고 앞장서서 폐단을 저지른 사람이 아직 발각되지 않았습니다만 각별히 엄하게 금지하여 차후에 만약 그러한 폐단이 있을 경우에는 나타나는 대로 적발한 다음 이름을 지적하여 첩보하려고 합니다. 이상의 연유를 모두 첩보합니다.제사(題辭)이른바 현판은 즉시 파쇄(破碎)한 뒤에 첩보해야 할 것이다.
- 2023-10-16 | NO.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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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고(顯考) 장사랑(將仕郞) 경기 참봉(慶基參奉) 기 부군(奇府君)에 대한 묘기(墓記)- 고봉집 제3권
- *고봉집 제3권 / [비명(碑銘)] 현고(顯考) 장사랑(將仕郞) 경기 참봉(慶基參奉) 기 부군(奇府君)에 대한 묘기(墓記) 선부군(先府君)의 휘는 모(某)요, 자는 자순(子順)이며, 성은 기씨(奇氏)이니, 행주인(幸州人)이다. 증조의 휘는 건(虔)인데 판중추부원사(判中樞府院使)로 시호는 정무공(貞武公)이며, 증조비는 정경부인 홍씨(洪氏)이다. 조고의 휘는 축(軸)인데 행 풍저창 부사(行豐儲倉副使)로 사헌부 장령에 추증되었으며, 조비는 영인(令人) 정씨(鄭氏)이다. 선고의 휘는 찬(襸)인데 홍문관 부응교이며, 선비는 숙인(淑人) 김씨이다. 부군은 성화(成化) 정미년(1487, 성종18) 12월 정해일에 출생하였는데, 6세에 부친을 잃었다. 장성하자 높은 뜻이 있어 아우 준(遵)과 함께 공부하였는데 하루에 수백 자를 외웠다. 그리하여 마침내 문자에 힘을 써 경사(經史)를 통달하고 옛날과 지금의 일을 꿰뚫었다. 공은 널리 배우고 예(禮)로 몸을 단속하고자 하였고, 오로지 과거에 급제하여 녹을 먹으려는 계책을 하지 않았다.아우가 먼저 조정에 올라 이름을 드날렸는데 불행히도 견책을 받아 죽자 부군은 이미 당세에 벼슬할 뜻이 없었다. 그러나 모친인 숙인께서 당(堂)에 계셨으므로 남을 따라 과거에 응시하였다. 가정(嘉靖) 원년인 임오년(1522, 중종17)에 사마시에 입격하였으며, 그 후 5년에 재상의 천거로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에 제수되고 장사랑(將仕郞)에 올랐다. 다음 해인 무자년(1528)에 모친상을 당했으며, 상을 마치자 벼슬을 구하지 않고 마침내 광주(光州)에 거주하였다. 집은 광주 읍내의 서북쪽 40리쯤 되는 곳에 있었으니, 지방 이름을 고룡(古龍)이라 하고 동네 이름을 금정(金井)이라 하였다.부군은 집에 있을 때에 쓸쓸하여 일이 없는 듯하였다. 화목(花木)을 심어 꽃이 피고 지는 것을 구경하였으며, 서사(書史)를 열람하여 득실을 상고할 뿐이었다. 말년에 흉년을 만나 아침저녁의 끼니가 걱정인데도 태연히 자처하였다. 을묘년(1555, 명종10) 1월 신해일에 정침(正寢)에서 별세하니 향년 69세였다.부군은 천품이 정직 성실하고 소탈하여 자기 주장을 고집하지 않았으며, 엄하면서도 까다롭지 않고 검박하며 사치하지 않았다. 책을 볼 때에는 대의를 통달하기에 힘썼으며, 일찍이 장구(章句)를 표절이나 하려고 하지 않았다. 지은 시문이 수백 편이다.전배(前配)는 남양 방씨(南陽房氏)인데 일찍 별세하였고, 후배(後配)는 유인(孺人) 강씨(姜氏)인데 관향이 진주(晉州)이다. 부친의 휘는 영수(永壽)로 충좌위 사과(忠佐衛司果)이며, 조고의 휘는 학손(鶴孫)으로 장례원 사평(掌隷院司評)이며, 증조의 휘는 희맹(希孟)으로 의정부 좌찬성을 지내고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량공(文良公)이다. 유인은 단정하고 공손하며 은혜로워 부군에 배필할 만하였다.5남 1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대림(大臨)이요, 차남은 대승인데 생원이며, 막내는 대절(大節)이다. 나머지는 모두 요절하였다. 유인은 부군보다 22년 전에 별세하였는바 집 뒤 2리쯤 되는 갑좌경향(甲坐庚向)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부군이 별세하자, 그해 3월 경신일에 유인의 무덤 남쪽에 장례하니 선산이기 때문이었다.선비께서 별세할 때에 여러 아들들은 모두 10세가 넘지 못하였다. 부군께서는 홀아비로 살면서 온갖 고생을 무릅쓰고 자식들을 부지런히 어루만지고 가르쳐 장성함에 이르렀는데, 모두들 미련하고 어질지 못해서 가정의 교훈을 만분의 일도 현양하지 못하였다. 그리고는 죄악이 쌓여 마침내 부군에게 화가 미쳐 별세하였으니, 슬피 울부짖으매 애통한 마음이 뼛속에 사무친다. 이에 감히 묘기를 이와 같이 짓는 것이다. 묘표에 글을 적는 일은 후일을 기다려 할 것이다. 슬픈 마음 하늘처럼 다함이 없으니, 아, 애통하다.
- 2020-09-10 | NO.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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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남(湖南) 의병 -연려실기술 제17권
- 호남(湖南) 의병 -연려실기술 제17권의병장 고경명은 이미 죽었고, 김천일은 경기 좌의병(左義兵) 진중으로 갔다. 사자(士子)들이 흩어진 군사 8백 명을 모으고, 전 부사 화순(和順) 사람 최경회(崔慶會)를 추대하여 맹주로 삼았다. 7월 26일에 깃발과 북을 광주(光州)에 세우고 골(鶻)자로 신표를 삼았다. 전라우도에서 군사를 거두어 남원으로 향하면서 격문을 지어 돌리고 효유하였다.○ 10월에 진주성을 포위하고 있던 적군이 사방으로 나뉘어서 약탈하였다. 경회가 군사를 단성(丹城)에 주둔시키고 있는데, 적군이 갑자기 닥치니 장수와 군사들이 놀라서 무너졌다.○ 11월에 통정에 오르고, 계사년 2월에 우병사(右兵使)에 임명되었으며, 6월에 진주 전투에서 죽었다.○ 7월에 보성(寶城) 사람 임계영(任啓英)은 동지 여러 사람과 함께 격문을 전하여 군사를 모집해서 향토를 지킬 계획으로 본국을 출발하여 낙안(樂安)ㆍ순천(順天)을 거쳐 그 역시 남원으로 향해 갔는데, 가는 도중에 군사 천여 명이 얻었다. 좌의병장(左義兵長)이라고 일컬으면서 호(虎)자로 신표를 삼았다. 처음 인장에는 호랑이를 그렸으나 뒤에는 호자를 썼다. ○ 남원 사람 전 참봉 변사정(邊士貞)은 흩어진 군사를 불러 모아 수십일 안에 2천여 명이나 되었는데, 적개의병장(敵愾義兵將)이라고 불렀다. 진주 전투에 부장 이잠(李潛)을 파견하였는데, 성이 함락되어 죽었다.○ 남원의 백성들이 흩어진 군사를 불러 모아 향병(鄕兵)이라 부르면서 정염(丁焰)을 장수로 추대하였다.○ 순천 무사인 강희열(姜希悅)은 처음에는 고경명을 따라 군사를 일으켰는데, 금산(錦山)에서 패하자 울면서 고향으로 돌아가 군사를 불러모아 전진하였다.○ 해남 사람 진사 임희진(任希進)과 영광(靈光) 사람 첨정(僉正) 심우신(沈友信)과 태인(泰仁) 사람 민여운(閔汝雲)이 각각 군사를 모집하여 영남으로 갔는데, 모두 진주 전투에서 죽었다.○ 해남의 임시 장군 성천기(成天祇)는 뇌진군(雷震軍)이라고 써서 신표를 삼고 국가의 일에 힘을 다 하였다.○ 임피 사람 진사 채겸진(蔡謙進)ㆍ이이남(李以南)이 의병을 일으켰다.○ 계사년 8월에 전라 우의병(全羅右義兵)과 복수병(復讐兵) 선비들이 나머지 군사를 수습하여 전 제독관 화순 사람 최경장(崔慶長)을 추대하여 장수로 삼고 계의(繼義)라고 써서 신표를 삼았다. 경장은 경회의 아우이다.○ 11월에 계의군(繼義軍)을 해체시키고 그 군량을 초승군(超乘軍 김덕룡(金德龍)의 군대를 칭하는 것으로 초승(超乘)은 말을 훌쩍 뛰어서 탄다는 뜻이다.)에 귀속하게 하였다.○ 적군이 지례(知禮)로부터 호남을 침범할 때에 알수 없는 5, 백 명의 사람들이 청학장군(靑鶴將軍)ㆍ백학장군(白鶴將軍)이라고 자칭하면서 매복하고 있다가 적을 쏘아 죽였다.
- 2020-09-24 | NO.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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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조 참판을 사직한 상소〔辭戶曹參判疏〕- 서형수
- 명고전집 제3권 / 소계(疏啓)호조 참판을 사직한 상소〔辭戶曹參判疏〕삼가 아룁니다. 신은 조정에 나가지 않고 칩거하며 분수를 지켜온 지 어느덧 8년이 되었습니다. 중간에 지방관을 지내고 사행(使行)을 다녀온 것은 감히 그 직임을 자처해서가 아니라 오직 성상께서 보살펴 주신 하늘 같은 은혜 때문이었으니, 보잘것없는 충정(衷情)이 생각마다 북받쳐 말을 하려니 목이 멥니다.조정 밖에서 하는 일이라면 동서남북을 막론하고 어디로든 가서 오직 명에 따르겠다는 것이 신이 밖으로 표방하고 가슴에 새겨 온 다짐입니다. 이 때문에 고을 수령이 되어 일산을 쓰고 인끈을 차는 영광을 많이도 받았고, 고관의 신분으로 부절(符節)을 들고 사행길에 오르는 등 점점 더 융숭한 총애를 받았지만, 신의 처지로 어찌 아무 탈 없는 사람들처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겠습니까. 다만, 신하로서의 도의(道義)가 큰 분한(分限)으로 이미 정해진 마당에 관례대로 으레 사양만 하는 것은 가식(假飾)에 가깝겠기에 직임이 제수될 때마다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응했던 것입니다. 신의 이러한 처신에 대해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빗발치는 것은 당연하지만, 천지요 부모이신 우리 성상께서만은 신의 고충을 이해해 주시고 위태로운 처지를 불쌍히 여겨 주실 줄로 압니다.신은 반년 동안 멀리 떠나 있다가 이제 다시 조정에 올라 성상의 옥음(玉音)을 직접 들었으니, 어린 자식이 부모의 품으로 돌아왔을 때 기쁨으로 충만한 것은 천리와 인정상 막을 수 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신이 거처로 돌아오자마자 호조 참판에 제수하는 소패(召牌)가 내렸으니, 벼슬을 제수받으면 사은숙배하는 신하의 도리상 어찌 감히 황급히 받들어 숙배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비록 규례에 저촉되어 잠시 소명(召命)을 어기지 않을 수 없었으나 이내 “구애하지 말라”는 특교를 받아 그런대로 신하로서의 도리를 행할 수 있었으니, 신의 진심이 드러나고 신의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관직에 나아가는 일로 말하면, 아, 신이 어찌 감히 다시 논할 수 있겠습니까.신은 연전에 왕명을 받들어 《대학유의(大學類義)》를 교열(校閱)하였는데, 그때 구준(邱濬)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읽고는 저도 모르게 수없이 읊조리며 눈물을 줄줄 흘렸습니다.“임금은 신하를 자식처럼 대하는데 신하가 임금을 아비처럼 섬기지 않고 임금은 신하를 가족처럼 길러주는데 신하가 나랏일을 집안일처럼 보지 않는다면 사람도 아니다.”아, 이는 천고(千古)의 충신과 지사(志士)가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신의 평소 맹세와 염원은 오직 이 마음을 보존하자는 것뿐이니, 어찌 굳이 조정에서 벼슬하여 영화와 녹봉을 거머쥔 뒤에야 망극한 성은에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의복이 신분에 걸맞지 않으면 사람들의 시기가 집중되고, 인품에 비해 복이 지나치면 귀신의 노여움이 닥칩니다. 신은 환해(宦海)의 풍파 속에 거의 죽어가던 몸으로 성상의 망극한 은혜를 입었으니, 성상께서는 정적(政敵)들의 집중포화 속에서 신을 빼내어 살려주시어 여생을 이어갈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뱀이 야광주로 보답하고 참새가 흰 옥고리로 보답한 일을 본받지는 못할지언정, 무슨 마음으로 복이 지나치면 재앙이 닥침을 생각지 않고 세상에서 활개 치며 더 높은 벼슬에 올라 차마 목숨을 살려주신 우리 자애로운 성상의 지극한 은덕을 저버리겠습니까.아, 만나기 어려운 밝은 시대에 성상께서 이렇게까지 돌보아주시니, 목숨이 다하도록 노력해도 만분의 일도 보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안일을 탐하여 옹송그리고 있기를 즐거워하겠습니까. 혹여 밝으신 성상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천지조화 같은 은혜를 곡진히 베푸시어 신의 벼슬을 체차하고 산직(散職 일정한 직무가 없는 벼슬)에 있게 해 주신다면, 신은 성상을 영영 떠나 나랏일을 외면하지 않고 때때로 벼슬에서 물러난 비정규 인원으로서 서책을 편집하고 교정하는 등의 일에 끝까지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말이 가슴 깊은 곳에서 나오다보니 글자마다 어조가 너무 무거워지고 말았습니다.신이 상소문을 작성하여 올리려던 참에 승정원의 직임으로 옮겨 제수하신 명을 또 받았으니, 더욱더 황공합니다. 그러나 신의 구구한 처지가 위에 말씀드린 바와 같아 달려 나갈 수가 없습니다. 결국 왕명을 어기게 되었으니, 성상께서 계신 곳을 바라보노라면 가슴이 메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신은 피눈물로 간절히 기원하며 두 손 모아 명을 기다립니다.[주-D001] 호조 참판을 사직한 상소 : 【작품해제】 명고가 51세 때인 1799년(정조23) 11월 20일에 올린 상소이다. 이 상소가 《승정원일기》 1799년(정조23) 11월 20일 조에는 ‘행 좌승지 서형수(行左承旨徐瀅修)’가 올린 상소로 실려 있으며, 뒤의 〈한성부 좌윤을 사직한 상소[辭左尹疏]〉에서 이 상소의 언급 “조정 밖에서 하는 일이라면 동서남북을 막론하고 어디로든 가서 오직 명에 따르겠다는 것이 신이 밖으로 표방하고 안으로 가슴에 새겨 온 다짐입니다.”를 인용하면서 “작년 겨울 승지에 제수하셨을 때”의 일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상소를 올린 시점의 직임을 기준으로 하는 사직 상소 제목의 상례(常例)에 따르면 이 작품의 제목은 ‘좌승지를 사직한 상소[辭左承旨疏]’가 되어야 한다.명고는 1799년 7월 8일에 진하 겸 사은부사(進賀兼謝恩副使)로 차출되어 연경(燕京)에 다녀온 뒤 11월 17일에 귀국 보고를 하였는데, 이날 바로 호조 참판에 제수되었다가 이틀 뒤인 19일에 좌승지에 제수되었다. 좌승지에 제수된 시점이 호조 참판에 대한 사직소를 작성하고 미처 올리기 전이었다. 이 때문에 기왕에 작성해 둔 호조 참판 사직 상소 말미에 좌승지에 대한 사직 의사를 간단히 덧붙여 올린 것인데, 이로 인해 이 상소는 호조 참판을 사직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좌승지를 사직하는 내용은 말미의 한 문장에 불과하게 되었다. 문집을 편차할 때 내용의 비중을 고려하여 제목을 정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으나 상례에는 맞지 않다.명고는 이해 사행을 떠나기 직전에 영변 부사(寧邊府使)로 재직 중이었는데, 아직 해유장(解由狀 벼슬아치가 물러날 때 후임자에게 사무를 인수인계한 내용을 적은 문건. 실제 근무 일수, 재정 관계 문건과 그 정확성 따위를 적음)을 제출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 때문에 호조 참판과 좌승지에 새로 제수하는 것이 격식에 맞지 않았지만 정조는 “구애하지 말라[勿拘]”는 특교(特敎)를 내려 그대로 제수하게 하였다. 《承政院日記 해당 날짜》이 상소에서 명고는 1791년(정조15) 우승지(右承旨)를 지낸 것을 마지막으로 8년 동안 조정의 벼슬에는 나가지 않고 지방관과 임시 벼슬에만 응해온 자신의 정상(情狀)을 들어 호조 참판과 좌승지를 차례로 사직하였다. 정조가 이에 대해 “사직하지 말라”는 비답을 내리지만 명고는 끝내 응하지 않는다.[주-D002] 신은 …… 되었습니다 : 명고는 우승지로 재직 중이던 1791년(43세) 6월 지방에서 올라온 전최(殿最 근무 성적 평가) 문서를 임금의 주관 하에 개봉하여 결재하는 자리에 규정을 어기고 불참했다는 이유로 추고(推考) 당한 이후, 같은 해 성천 부사(成川府使), 1796년(48세) 광주 목사(光州牧使), 1799년(51세) 영변 부사(寧邊府使) 등 외직(外職)으로만 돌고 중앙의 관직은 맡지 않았다. 《承政院日記 正祖 15年 6月 15日ㆍ24日, 20年 7月 17日, 23年 6月 19日》이는 임자년(1792, 정조16)에 정동준(鄭東浚) 등이 명고의 집안을 무고(誣告)했기 때문으로(《明皐全集 卷3 辭左尹䟽, 卷4 辭刑曹參判䟽 》), 1792년부터 이해까지가 햇수로 8년이 된다.[주-D003] 사행(使行)을 다녀온 것 : 명고는 1799년 7월 8일에 진하 겸 사은부사(進賀兼謝恩副使)로 차출되어 연경(燕京)에 다녀온 뒤 11월 17일에 귀국 보고를 하였다.[주-D004] 반년 …… 들었으니 : 명고는 1799년 7월 8일에 진하 겸 사은부사(進賀兼謝恩副使)로 차출되어 연경(燕京)에 다녀온 뒤 11월 17일에 귀국 보고를 하였다.[주-D005] 비록 …… 있었으니 : 명고가 미처 해유장(解由狀)을 제출하지 않은 관계로 잠시 제수가 보류되는 바람에 사은숙배를 하지 못하다가, “구애하지 말라”는 특교로 인해 그대로 제수되어 사은숙배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명고는 1799년(51세) 6월부터 영변 부사(寧邊府使)의 직임을 수행하다가 7월 8일에 진하 겸 사은부사로 차출되어 연경에 갔으며 귀국 보고를 한 11월 17일 당일에 호조 참판에 제수되었으니, 영변 부사의 직임을 정리하여 후임자에게 인수인계할 겨를이 없었다. 이는 새로운 벼슬을 제수하는 데 있어 하자(瑕疵) 사항이므로 이조(吏曹)에서 이의 제기가 있었다. 이에 대해 정조는 “해유장 제출 여부에 구애하지 말라”는 특교를 내렸다. 《承政院日記 正祖 23年 7月 8日, 11月 17日ㆍ19日》[주-D006] 신은 …… 교열(校閱)하였는데 : 《대학유의(大學類義)》는 정조가 송(宋)나라 진덕수(眞德秀, 1178~1235)의 《대학연의(大學衍義)》와 명(明)나라 구준(丘濬, 1421~1495)의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에서 초록할 부분에 직접 비점을 찍고 규장각 신하들 및 신구(新舊) 초계문신(抄啓文臣)들에게 명하여 초록과 교정을 시킨 다음 《대학장구》의 각 장(章) 밑에 주석 형태로 덧붙여 1799년 간행한 책으로, 모두 21권 10책(규장각 소장 청구번호 : 奎291-v.1-10)이다. 《홍재전서(弘齋全書)》 〈군서표기(羣書標記)〉에는 20권으로 기재되어 있어 현전본보다 1권이 적으나, 권차별 항목을 비교해 보면 내용상의 변화는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명고는 이때 광주 목사(光州牧使)였는데, 전(前) 초계문신의 자격으로 초록 내용의 1차 교정을 수행하였다. 《承政院日記 正祖 22年 9月 6日》[주-D007] 임금은 신하를 자식처럼 …… 아니다 : 송 태조(宋太祖)가 장수(將帥)들을 자식처럼 아끼고 보살핀 일에 대해 명(明)나라 구준(丘濬)이 한 말이다. 《大學衍義補 卷130 將帥之任 中》[주-D008] 뱀이 야광주로 보답하고 : 수(隋)나라 임금이 대궐 밖에 나갔다가 큰 뱀이 토막 난 것을 보고 약을 써서 잘 봉합해 주었는데, 1년여 뒤에 뱀이 야광주를 물어와 보답했다고 한다. 《淮南子 覽冥訓》[주-D009] 참새가 …… 일 : 한(漢)나라 양보(楊寶)가 9세 때 올빼미의 공격으로 나무 밑에 떨어져 개미에게 뜯기는 노란 참새를 구해다가 100여 일 동안 간호해 살려 보냈다. 참새가 밤에 노란 옷을 입은 동자로 나타나 자신은 서왕모(西王母)의 사자라면서 흰 옥고리 4개를 주며 양보의 자손이 옥고리처럼 깨끗이 지조를 지켜 삼공(三公)에 오르기를 축원하였다. 뒤에 과연 그의 후손이 4대에 걸쳐 모두 대신(大臣)이 되었다고 한다. 《搜神記 卷20》
- 2023-12-04 | NO.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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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명원- 하모당기(何暮堂記)
- 堂以何暮名何 識實也 蓋自有州而有衙 衙徙而基廢且百年 燒于兵燹 寓于民廬 而後斯堂作 非暮也耶 歷賢守宰八九輩 倉廨門樓鄕射之所靡不具 而斯堂獨後焉 非暮而何 嗟夫 荊榛灌莽 滿目蕭然 而一朝突兀 望之翬飛 則父老歎其何暮 窪庭局簷 累肩疊蹠 而廊廡縵廻 步驟安閑 則吏胥歎其何暮 濕寢雨立 男女勃谿 而庖房庫廏各得其所 則僕御歎其何暮 接席傾床 尊卑雜沓 而華筵秩秩 獻酬有容 則賓客歎其何暮 至於梅窓暖而朝睡甘 夏簟淸而晝棋宜 街槐脫葉而遠岫呈狀 山雪肆虐而奧室排寒 太守歎其何暮 此堂之所以得名 而名與實稱也 堂旣名 客有嘲余曰 叔度之謠 史氏記其異政 老郞之詩 昌黎美其高唱 今子掇此而名堂 無乃近於自譽耶 余應之曰否 詩取短章 不全以辭 政事文章則吾豈敢 若以堂之興廢 歎人之來暮 則吾亦無讓焉 遂笑而爲之記당을 ‘하모’라고 명명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대개 고을이 있고서부터 관아를 두었는데, 관아가 옮겨가자 터가 황폐해진지 거의 100년에 병화에 소실되어 민가에 기우한 이후에 이 당이 지어졌으니 늦었지 아니한가. 어진 수령 8~9인을 거쳐 창해와 문루, 향사의 장소를 갖추지 않음이 없었는데 이 당만 홀로 뒤쳐졌으니 늦은 것이 아닌가. 아! 가시덤불과 잡목이 눈 가득 쓸쓸하다가 하루아침에 우뚝 솟아 바라보면 꿩이 나는 듯 하니 부로들이 어찌 늦었나 하고 탄식하였고, 움푹 팬 뜰과 좁은 처마 아래 어깨를 움츠리고 발걸음을 좁게 하다가 회랑과 처마가 길게 둘러 걸음이 편안하고 한가하니 아전들이 그 늦은 것을 탄식하였다. 습기 찬데 눕고 빗속에 서서 남녀가 다투다가 주방과 방, 창고와 마구간이 각각 제자리를 잡으니 하인들이 그 늦음을 탄식하였고, 자리를 붙이고 상을 기울이며 존비가 뒤섞여 있다가 화려한 잔치자리가 질서정연하고 헌수(獻酬)함에 위의(威儀)를 갖추니 빈객들이 그 늦었음을 탄식하였다.게다가 매화창가에 아침잠이 달콤하고 맑은 대자리는 낮에 바둑이 어울리며, 거리의 회나무에 낙엽이 지면 먼 산이 모습을 드러내고 산설(山雪)이 사나울 제 아랫목에서 추위를 물리칠 때면 태수도 그 늦었음을 탄식할 것이니, 이것이 ‘하모당’이란 이름을 얻고 이름과 실제가 서로 부합하는 이유이다. 하모당의 이름을 얻고 나자 손님 중에 나를 조롱하는 이가 있어 말하기를 “범숙도의 노래는 사관이 그 기특한 정사를 기록하였고 노랑(老郞)의 시는 창려(昌黎)가 높은 곡조임을 찬미하였다. 이제 그대가 이런 일들을 주워서 당의 이름으로 삼으니 자기 자랑에 가깝지 않은가”하였다. 내가 응대하여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시는 단장(短章)만을 취하였으니 문사대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정사와 문장은 내가 어찌 자부하겠는가만, 만약 당의 흥폐 때문에 사람이 늦게 온 것을 탄식하는 것이라면 나 또한 사양하지 않겠다”하고 드디어 웃으며 기문을 썼다.
- 2018-07-30 | NO.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