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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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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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次林冲擧 鶴- 임충거는 임붕(林鵬) 광주목사이다.
    次林冲擧 鶴龍巖集 권1/ 시謾寄無窮托此身。還將物色醉根塵。神專刻鵠靑陽晩。技罷屠龍白髮新。石澗琮琤賡白雪。蘿巖芬馥奏陽春。山前荷蕢休經過。千古何人會得眞。임붕(林鵬) 또는 귀래정공(歸來亭公)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나주, 자는 충거(沖擧), 아호는 귀래당(歸來堂)이다. 명종 때 승문원정자를 지낸 임복의 아버지이고, 선조 때 정랑을 지내고 시인으로 유명한 임제의 할아버지이다. 벼슬은 예조판서까지 지냈다.
    2023-07-13 | NO.290
  • 牧隱藁碑陰記 - 이숙야 광주목사의 기록이 있다
    牧隱藁碑陰記/ 비음기(碑陰記) [이맹균(李孟畇)]선조(先祖) 한산백(韓山伯)의 신도비(神道碑)는 문인 하 문충공(河文忠公)이 영락(永樂) 을유년 겨울에 지은 것이다. 금년 여름에야 비로소 좋은 빗돌을 얻어 각자(刻字)를 시작하여 가을에 이르러 마쳤는데, 숙부(叔父) 유후공(留後公)께서 나에게 산맥(山脈)이 내려온 근원과 좌향(坐向)을 기록해서 비석 후면에 쓰도록 명하셨다.또 이르기를, “내가 비문(碑文)을 보건대, 숙옹부 승(肅雍府丞)에 제수되면서부터 한산백에 봉해지는 사이의 산관(散官)은 모두 기록하지 않았으니, 대체로 글을 간략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연보(年譜)가 있으니, 관직은 상고할 수가 있다. 그리고 비문에 기재된 자손들이 이제는 모두 성립하여 관질(官秩)이 승진되어서 현달(顯達)한 지위에 이른 자가 실로 많고, 비문을 지은 이후에 태어난 친손(親孫)과 증손(曾孫), 현손(玄孫) 또한 많으니, 이들을 다 기록해서 후손에게 보이지 않을 수 없다. 빠짐없이 다 기록해서 모두 비석 후면에 기재하라.” 하시므로, 내가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기록하는 바이다.선조의 묘는 한산군(韓山郡) 기린봉(麒麟峯)의 남쪽 기슭 축간(丑艮)의 산 계좌정향(癸坐丁向)에 있는데, 동남쪽으로 한산군 소재지와의 거리는 5리이다. 삼가 상고하건대, 이 산맥은 홍산(鴻山)의 영흥산(永興山)으로부터 내려왔는데, 영흥산에서 꺾어져 동남쪽으로 30여 리를 내려와서 우뚝 솟은 것이 바로 기린봉이니, 그 근원을 추구해 보면 실로 장백산(長白山)에서 나온 것이다. 기린봉 아래 가지(加智)의 언덕은 청룡(靑龍) 백호(白虎)와 안산(案山)이 굼틀거리며 빙 둘러 옹위하여 가기(佳氣)가 충만하니, 아, 하늘과 땅이 아끼고 숨겨 두었다가 현철(賢哲)한 이의 좋은 묏자리가 되기를 기다렸던가? 묘의 손방(巽方)으로 33보(步)가 되는 곳에 큰 비석을 세워서 선조의 아름다운 덕을 기록하여 무궁한 후세에 밝게 보이고, 또 자손들의 이름을 차례로 적어서 다음과 같이 갖추 열거하는 바이다.선조의 장남은 우리 선군(先君)으로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휘 종덕(種德)인데, 문하 평리(門下評理) 유혜손(柳惠孫)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2녀를 낳았다. 장남 맹유(孟㽥)는 인녕부 사윤(仁寧府司尹)이고, 그다음은 맹균(孟畇)이며, 그다음 맹준(孟畯)은 별장(別將)인데 일찍 죽었고, 막내 맹진(孟畛)은 한성부 부윤(漢城府府尹)이다. 장녀는 서령(瑞寧) 유기(柳沂)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도총제(都摠制) 하구(河久)에게 시집갔다. 부윤은 3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 연기(衍基)는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이고, 그다음 유기(裕基)와 보기(保基)는 글을 읽고 있으며, 장녀는 돈녕부 판관(敦寧府判官) 이후(李厚)에게 시집갔고, 그다음은 사섬시 직장(司贍寺直長) 이의(李椅)에게 시집갔으며, 그다음은 도염서 녹사(都染署錄事) 김자행(金自行)에게 시집갔다. 감찰은 2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주(澍)이고, 다음은 엄(渰)이며,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서령은 2남을 낳았는데, 장남은 방선(方善)이고, 차남은 방경(方敬)이다.중남(仲男)인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 휘 종학(種學)은 문하 시중(門下侍中) 이춘부(李春富)의 딸에게 장가들어 6남 1녀를 낳았다. 장남 숙야(叔野)는 광주 목사(光州牧使)이고, 그다음 숙규(叔畦)는 진주 목사(晉州牧使)이며, 그다음 숙당(叔當)은 우군첨총제(右軍僉摠制)인데, 지금 모두 사망하였다. 그다음 숙묘(叔畝)는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이고, 그다음 숙복(叔福)은 급제하였으며, 막내 숙치(叔畤)는 공조 참판(工曹參判)이다. 딸은 전주 부윤(全州府尹) 이점(李漸)에게 시집갔다. 광주 목사는 1남 2녀를 낳았는데, 1남 축(蓄)은 호조 정랑(戶曹正郞)이고, 장녀는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 안숭신(安崇信)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서운관 부정(書雲觀副正) 이원근(李元根)에게 시집갔다. 정랑의 1남 1녀는 모두 어리다. 진주 목사는 5녀를 낳았는데, 장녀는 감목관(監牧官) 유쟁(柳諍)에게 시집갔고, 그다음은 능직(陵直) 곽분(郭汾)에게 시집갔으며, 그다음은 유학(幼學) 전극경(全克敬)에게 시집갔고, 그다음은 유학 이사남(李思南)에게 시집갔으며, 그다음은 어리다. 첨총제는 3남을 낳았는데, 장남 사(思)는 사역원 주부(司譯院注簿)이고, 그다음 외(畏)는 능직이며, 그다음 이(異)는 동부 녹사(東部錄事)이다. 주부는 1남 2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능직의 1녀는 어리다. 녹사는 1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동지는 2남 4녀를 낳았는데, 장남 치(菑)는 원평도호부 부사(原平都護府副使)이고, 그다음 여(畬)는 사헌부 감찰이며, 장녀는 의령감무(宜寧監務) 하맹질(河孟晊)에게 시집갔고, 그다음은 공조 좌랑(工曹佐郞) 안숭효(安崇孝)에게 시집갔으며, 그다음은 통례문 봉례(通禮門奉禮) 김리(金理)에게 시집갔고, 그다음은 어리다. 부사는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수은(壽垠)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감찰은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인견(仁堅)이고, 그다음은 의견(義堅)이며, 모두 어리다. 급제는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문비(文埤)이고, 차남은 문강(文疆)이며, 장녀는 군자감 녹사(軍資監錄事) 윤빈(尹濱)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유학 유중인(柳仲諲)에게 시집갔다. 문비의 1남은 어리다. 참판의 1녀는 전농시 직장(典農寺直長) 이경현(李敬賢)에게 시집갔다. 부윤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1남 의산(義山)은 사정(司正)이고, 1녀는 집현전 정자(集賢殿正字) 김문효(金文孝)에게 시집갔다.계남(季男) 개성유후사 유후(開城留後司留後) 휘 종선(種善)은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로 치사(致仕)한 권균(權鈞)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계주(季疇)를 낳았는데, 계주는 호조 정랑(戶曹正郞)이다. 또 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의 딸에게 재취하여 4남 2녀를 낳았다. 장남 계린(季疄)은 판사역원사(判司譯院事)이고, 그다음 계전(季甸)은 집현전 수찬(集賢殿修撰)인데 정미년 친시(親試)에 급제하였으며, 그다음 계원(季畹)은 전직(殿直)인데 임자년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였고, 그다음 계정(季町)은 글을 읽고 있다. 장녀는 강화도호부 부사(江華都護府副使) 이백상(李伯常)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능직 김숭로(金崇老)에게 시집갔다. 정랑은 1남 4녀를 낳았는데, 1남은 개(塏)이고, 장녀는 유학 이휘(李徽)에게 시집갔고, 그다음은 유학 이분연(李賁然)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판사는 4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숙(塾)이고, 그다음은 훈(壎)이며, 그다음은 해(垓)이고, 그다음은 경(坰)이며, 모두 어리다. 수찬은 2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육(堉)이고, 그다음은 우(堣)이며, 모두 어리다. 전직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1남은 연(堧)이고, 모두 어리다. 능직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외현손(外玄孫)은 모두 50여 인이나 되므로, 글이 많아서 명씨(名氏)를 다 쓰지 않는다. 그리고 혼인(婚姻)한 가운데 이성(李姓)을 가진 사람의 경우는 모두 우리와 같은 이씨가 아니다.자손이 많고 대대로 높은 관작이 나서 통현(通顯)한 지위에 이르렀고, 심지어는 나처럼 불초한 사람도 외람되이 중외(中外)의 관직을 두루 거쳐 낭묘(廊廟)의 직임에까지 참여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적덕(積德)으로 인한 여경(餘慶)이 미친 바가 아니겠는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덕을 많이 쌓은 자는 덕택이 먼 후세까지 전해지고, 근본이 깊은 나무는 지엽이 무성하게 된다.” 하였으니, 그 말이 사실이로다.또 홍무(洪武) 을축년 가을에 명(明)나라 국자감 학록(國子監學錄) 장보(張溥), 전부(典簿) 주탁(周倬)이 사명을 받들고 와서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서 우리 선조를 바라보고는 역자(譯者)에게 묻기를, “저 몇째 번에 서 있는 이는 순수한 유도인(有道人)인데, 저분이 바로 이 선생(李先生) 모(某)가 아닌가?” 하므로, 역자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선조의 앞으로 다가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매우 공경하였다. 그리고 무진년에 명년(明年)의 하정사(賀正使)로 경사(京師)에 갔을 적에는 고황제(高皇帝)가 한 번 보고 선조의 어짊을 알고는 한참 동안 말을 나누어 주고, 선조가 물러감에 미쳐서는 물러가는 모습을 계속 바라보면서 이르기를, “그려 놓음 직하다.” 하였으니, 대체로 선조의 풍도(風度)를 아름답게 여겼던 것이다.영락(永樂) 계미년에는 태복 소경(太僕少卿) 축맹헌(祝孟獻)이 사명을 받들고 본국에 와서 일 때문에 오랫동안 머무르면서 그간에 목은 문집을 구하여 보고는 탄복하여 마지않았다. 또 행장(行狀)을 구하여 열람하고는 또한 매우 사모하여 시(詩)를 지어서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을 표하였다. 그러자 그때 곁에 있던 사람이 청하여 말하기를, “대인(大人)께서 이렇게 간절히 탄복하고 사모하시니, 서(序)를 지어서 권수(卷首)에 붙여 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축군(祝君)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감히 할 수 있겠는가. 의당 환조(還朝)하여 글 잘하는 조신(朝臣)에게 청해서 지어 보내겠다.” 하였다. 과연 그 후 국자감 조교(國子監助敎) 양성(羊城) 진련(陳璉)이 찬한 묘지명(墓誌銘)을 보내왔는데, 사적을 서술함에 있어서는 양촌 선생(陽村先生)이 찬한 행장에 근본하여 조사(措辭)를 변개하려다가 오히려 실상을 잃게 된 곳이 있다. 그러나 덕행을 논함에 있어서는 역시 양촌의 말에 근본하여 약간 손익(損益)을 가하였고, 문장을 논함에 이르러서는 말하기를, “문사(文辭)가 전실(典實)하고 풍창(豐鬯)하되, 흥치(興致)는 풍아(風雅)에서 근본하였고, 언론(言論)은 덕의(德義)에 도달하였으므로, 화평한 음조와 정대한 기운이 편질(編帙)의 사이에 성대히 드러난다.” 하였고, 명(銘)의 한 구절에는, “오직 공이 제작한 것은 화곤처럼 문채가 나도다.[惟公製作 華袞之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만약 공이 천조(天朝)에서 벼슬을 했다면 반드시 평소에 온축(蘊蓄)한 것을 크게 펴서 천자(天子)에게 알아줌을 받았을 것이니, 그래서 훈명(勳名)을 수립하여 역사(歷史)에 길이 빛나게 되었더라면 왕사례(王思禮)만 유독 당(唐)나라에 훌륭한 공훈을 남기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한 나라에서만 벼슬을 하여 경륜을 다 펴지 못하였으니, 그 애석함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이 총결(總結)의 말을 보면 이는 양촌이 하지 않은 말이다. 이것은 틀림없이 그 문집을 보고 그 위인을 알아서, 감히 외국 사람이라 하여 낮게 보지 못하고 칭찬한 말이 여기에 이르렀던 것이니, 그 성심으로 감복한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겠다.우리 선조의 도덕의 숭고함과 문장의 훌륭함에 대해서는 동방 사람들만이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우러러 사모할 뿐 아니라, 고황제의 명철함으로도 한 번 보고 그 어짊을 알았었고, 또 장 학록(張學錄), 주 전부(周典簿) 같은 이들은 중조(中朝)에서 명성이 높은 사람들이었는데도 역시 매우 공경하였으니, 반드시 성덕(盛德)의 광휘가 사람들에게 감지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축 소경(祝少卿), 진 조교(陳助敎)의 탄복하고 칭찬한 것도 어찌 문장의 오묘함이 풍아에 잘 합치되었기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그러므로 아울러 여기에 나타내는 바이다.선덕(宣德) 8년 8월 하한(下澣)에 정헌대부(正憲大夫) 의정부참찬 집현전대제학 겸 성균대사성(議政府參贊集賢殿大提學兼成均大司成) 손(孫) 이맹균(李孟畇)은 삼가 기록하다.선조(先祖) 한산백(韓山伯)의 신도비(神道碑)는 문인 하 문충공(河文忠公)이 영락(永樂) 을유년 겨울에 지은 것이다. 금년 여름에야 비로소 좋은 빗돌을 얻어 각자(刻字)를 시작하여 가을에 이르러 마쳤는데, 숙부(叔父) 유후공(留後公)께서 나에게 산맥(山脈)이 내려온 근원과 좌향(坐向)을 기록해서 비석 후면에 쓰도록 명하시고, 또 이르기를, “내가 비문(碑文)을 보건대, 숙옹부 승(肅雍府丞)에 제수되면서부터 한산백에 봉해지는 사이의 산관(散官)은 모두 기록하지 않았으니, 대체로 글을 간략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연보(年譜)가 있으니, 관직은 상고할 수가 있다. 그리고 비문에 기재된 자손들이 이제는 모두 성립하여 관질(官秩)이 승진되어서 현달(顯達)한 지위에 이른 자가 실로 많고, 비문을 지은 이후에 태어난 친손(親孫)과 증손(曾孫), 현손(玄孫) 또한 많으니, 이들을 다 기록해서 후손에게 보이지 않을 수 없다. 빠짐없이 다 기록해서 모두 비석 후면에 기재하라.” 하시므로, 내가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기록하는 바이다.선조의 묘는 한산군(韓山郡) 기린봉(麒麟峯)의 남쪽 기슭 축간(丑艮)의 산 계좌정향(癸坐丁向)에 있는데, 동남쪽으로 한산군 소재지와의 거리는 5리이다. 삼가 상고하건대, 이 산맥은 홍산(鴻山)의 영흥산(永興山)으로부터 내려왔는데, 영흥산에서 꺾어져 동남쪽으로 30여 리를 내려와서 우뚝 솟은 것이 바로 기린봉이니, 그 근원을 추구해 보면 실로 장백산(長白山)에서 나온 것이다. 기린봉 아래 가지(加智)의 언덕은 청룡(靑龍) 백호(白虎)와 안산(案山)이 굼틀거리며 빙 둘러 옹위하여 가기(佳氣)가 충만하니, 아, 하늘과 땅이 아끼고 숨겨 두었다가 현철(賢哲)한 이의 좋은 묏자리가 되기를 기다렸던가? 묘의 손방(巽方)으로 33보(步)가 되는 곳에 큰 비석을 세워서 선조의 아름다운 덕을 기록하여 무궁한 후세에 밝게 보이고, 또 자손들의 이름을 차례로 적어서 다음과 같이 갖추 열거하는 바이다.선조의 장남은 우리 선군(先君)으로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휘 종덕(種德)인데, 문하 평리(門下評理) 유혜손(柳惠孫)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2녀를 낳았다. 장남 맹유(孟㽥)는 인녕부 사윤(仁寧府司尹)이고, 그다음은 맹균(孟畇)이며, 그다음 맹준(孟畯)은 별장(別將)인데 일찍 죽었고, 막내 맹진(孟畛)은 한성부 부윤(漢城府府尹)이다. 장녀는 서령(瑞寧) 유기(柳沂)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도총제(都摠制) 하구(河久)에게 시집갔다. 부윤은 3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 연기(衍基)는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이고, 그다음 유기(裕基)와 보기(保基)는 글을 읽고 있으며, 장녀는 돈녕부 판관(敦寧府判官) 이후(李厚)에게 시집갔고, 그다음은 사섬시 직장(司贍寺直長) 이의(李椅)에게 시집갔으며, 그다음은 도염서 녹사(都染署錄事) 김자행(金自行)에게 시집갔다. 감찰은 2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주(澍)이고, 다음은 엄(渰)이며,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서령은 2남을 낳았는데, 장남은 방선(方善)이고, 차남은 방경(方敬)이다.중남(仲男)인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 휘 종학(種學)은 문하 시중(門下侍中) 이춘부(李春富)의 딸에게 장가들어 6남 1녀를 낳았다. 장남 숙야(叔野)는 광주 목사(光州牧使)이고, 그다음 숙규(叔畦)는 진주 목사(晉州牧使)이며, 그다음 숙당(叔當)은 우군첨총제(右軍僉摠制)인데, 지금 모두 사망하였다. 그다음 숙묘(叔畝)는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이고, 그다음 숙복(叔福)은 급제하였으며, 막내 숙치(叔畤)는 공조 참판(工曹參判)이다. 딸은 전주 부윤(全州府尹) 이점(李漸)에게 시집갔다. 광주 목사는 1남 2녀를 낳았는데, 1남 축(蓄)은 호조 정랑(戶曹正郞)이고, 장녀는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 안숭신(安崇信)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서운관 부정(書雲觀副正) 이원근(李元根)에게 시집갔다. 정랑의 1남 1녀는 모두 어리다. 진주 목사는 5녀를 낳았는데, 장녀는 감목관(監牧官) 유쟁(柳諍)에게 시집갔고, 그다음은 능직(陵直) 곽분(郭汾)에게 시집갔으며, 그다음은 유학(幼學) 전극경(全克敬)에게 시집갔고, 그다음은 유학 이사남(李思南)에게 시집갔으며, 그다음은 어리다. 첨총제는 3남을 낳았는데, 장남 사(思)는 사역원 주부(司譯院注簿)이고, 그다음 외(畏)는 능직이며, 그다음 이(異)는 동부 녹사(東部錄事)이다. 주부는 1남 2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능직의 1녀는 어리다. 녹사는 1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동지는 2남 4녀를 낳았는데, 장남 치(菑)는 원평도호부 부사(原平都護府副使)이고, 그다음 여(畬)는 사헌부 감찰이며, 장녀는 의령감무(宜寧監務) 하맹질(河孟晊)에게 시집갔고, 그다음은 공조 좌랑(工曹佐郞) 안숭효(安崇孝)에게 시집갔으며, 그다음은 통례문 봉례(通禮門奉禮) 김리(金理)에게 시집갔고, 그다음은 어리다. 부사는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수은(壽垠)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감찰은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인견(仁堅)이고, 그다음은 의견(義堅)이며, 모두 어리다. 급제는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문비(文埤)이고, 차남은 문강(文疆)이며, 장녀는 군자감 녹사(軍資監錄事) 윤빈(尹濱)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유학 유중인(柳仲諲)에게 시집갔다. 문비의 1남은 어리다. 참판의 1녀는 전농시 직장(典農寺直長) 이경현(李敬賢)에게 시집갔다. 부윤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1남 의산(義山)은 사정(司正)이고, 1녀는 집현전 정자(集賢殿正字) 김문효(金文孝)에게 시집갔다.계남(季男) 개성유후사 유후(開城留後司留後) 휘 종선(種善)은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로 치사(致仕)한 권균(權鈞)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계주(季疇)를 낳았는데, 계주는 호조 정랑(戶曹正郞)이다. 또 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의 딸에게 재취하여 4남 2녀를 낳았다. 장남 계린(季疄)은 판사역원사(判司譯院事)이고, 그다음 계전(季甸)은 집현전 수찬(集賢殿修撰)인데 정미년 친시(親試)에 급제하였으며, 그다음 계원(季畹)은 전직(殿直)인데 임자년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였고, 그다음 계정(季町)은 글을 읽고 있다. 장녀는 강화도호부 부사(江華都護府副使) 이백상(李伯常)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능직 김숭로(金崇老)에게 시집갔다. 정랑은 1남 4녀를 낳았는데, 1남은 개(塏)이고, 장녀는 유학 이휘(李徽)에게 시집갔고, 그다음은 유학 이분연(李賁然)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판사는 4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숙(塾)이고, 그다음은 훈(壎)이며, 그다음은 해(垓)이고, 그다음은 경(坰)이며, 모두 어리다. 수찬은 2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육(堉)이고, 그다음은 우(堣)이며, 모두 어리다. 전직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1남은 연(堧)이고, 모두 어리다. 능직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외현손(外玄孫)은 모두 50여 인이나 되므로, 글이 많아서 명씨(名氏)를 다 쓰지 않는다. 그리고 혼인(婚姻)한 가운데 이성(李姓)을 가진 사람의 경우는 모두 우리와 같은 이씨가 아니다.자손이 많고 대대로 높은 관작이 나서 통현(通顯)한 지위에 이르렀고, 심지어는 나처럼 불초한 사람도 외람되이 중외(中外)의 관직을 두루 거쳐 낭묘(廊廟)의 직임에까지 참여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적덕(積德)으로 인한 여경(餘慶)이 미친 바가 아니겠는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덕을 많이 쌓은 자는 덕택이 먼 후세까지 전해지고, 근본이 깊은 나무는 지엽이 무성하게 된다.” 하였으니, 그 말이 사실이로다.또 홍무(洪武) 을축년 가을에 명(明)나라 국자감 학록(國子監學錄) 장보(張溥), 전부(典簿) 주탁(周倬)이 사명을 받들고 와서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서 우리 선조를 바라보고는 역자(譯者)에게 묻기를, “저 몇째 번에 서 있는 이는 순수한 유도인(有道人)인데, 저분이 바로 이 선생(李先生) 모(某)가 아닌가?” 하므로, 역자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선조의 앞으로 다가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매우 공경하였다. 그리고 무진년에 명년(明年)의 하정사(賀正使)로 경사(京師)에 갔을 적에는 고황제(高皇帝)가 한 번 보고 선조의 어짊을 알고는 한참 동안 말을 나누어 주고, 선조가 물러감에 미쳐서는 물러가는 모습을 계속 바라보면서 이르기를, “그려 놓음 직하다.” 하였으니, 대체로 선조의 풍도(風度)를 아름답게 여겼던 것이다.영락(永樂) 계미년에는 태복 소경(太僕少卿) 축맹헌(祝孟獻)이 사명을 받들고 본국에 와서 일 때문에 오랫동안 머무르면서 그간에 목은 문집을 구하여 보고는 탄복하여 마지않았다. 또 행장(行狀)을 구하여 열람하고는 또한 매우 사모하여 시(詩)를 지어서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을 표하였다. 그러자 그때 곁에 있던 사람이 청하여 말하기를, “대인(大人)께서 이렇게 간절히 탄복하고 사모하시니, 서(序)를 지어서 권수(卷首)에 붙여 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축군(祝君)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감히 할 수 있겠는가. 의당 환조(還朝)하여 글 잘하는 조신(朝臣)에게 청해서 지어 보내겠다.” 하였다. 과연 그 후 국자감 조교(國子監助敎) 양성(羊城) 진련(陳璉)이 찬한 묘지명(墓誌銘)을 보내왔는데, 사적을 서술함에 있어서는 양촌 선생(陽村先生)이 찬한 행장에 근본하여 조사(措辭)를 변개하려다가 오히려 실상을 잃게 된 곳이 있다. 그러나 덕행을 논함에 있어서는 역시 양촌의 말에 근본하여 약간 손익(損益)을 가하였고, 문장을 논함에 이르러서는 말하기를, “문사(文辭)가 전실(典實)하고 풍창(豐鬯)하되, 흥치(興致)는 풍아(風雅)에서 근본하였고, 언론(言論)은 덕의(德義)에 도달하였으므로, 화평한 음조와 정대한 기운이 편질(編帙)의 사이에 성대히 드러난다.” 하였고, 명(銘)의 한 구절에는, “오직 공이 제작한 것은 화곤처럼 문채가 나도다.[惟公製作 華袞之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만약 공이 천조(天朝)에서 벼슬을 했다면 반드시 평소에 온축(蘊蓄)한 것을 크게 펴서 천자(天子)에게 알아줌을 받았을 것이니, 그래서 훈명(勳名)을 수립하여 역사(歷史)에 길이 빛나게 되었더라면 왕사례(王思禮)만 유독 당(唐)나라에 훌륭한 공훈을 남기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한 나라에서만 벼슬을 하여 경륜을 다 펴지 못하였으니, 그 애석함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이 총결(總結)의 말을 보면 이는 양촌이 하지 않은 말이다. 이것은 틀림없이 그 문집을 보고 그 위인을 알아서, 감히 외국 사람이라 하여 낮게 보지 못하고 칭찬한 말이 여기에 이르렀던 것이니, 그 성심으로 감복한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겠다.우리 선조의 도덕의 숭고함과 문장의 훌륭함에 대해서는 동방 사람들만이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우러러 사모할 뿐 아니라, 고황제의 명철함으로도 한 번 보고 그 어짊을 알았었고, 또 장 학록(張學錄), 주 전부(周典簿) 같은 이들은 중조(中朝)에서 명성이 높은 사람들이었는데도 역시 매우 공경하였으니, 반드시 성덕(盛德)의 광휘가 사람들에게 감지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축 소경(祝少卿), 진 조교(陳助敎)의 탄복하고 칭찬한 것도 어찌 문장의 오묘함이 풍아에 잘 합치되었기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그러므로 아울러 여기에 나타내는 바이다.선덕(宣德) 8년 8월 하한(下澣)에 정헌대부(正憲大夫) 의정부참찬 집현전대제학 겸 성균대사성(議政府參贊集賢殿大提學兼成均大司成) 손(孫) 이맹균(李孟畇)은 삼가 기록하다.先祖韓山伯神道碑。門人河文忠公。永樂乙酉冬。所撰也。今夏。始得貞石而鐫刻。至秋乃畢。叔父留後公。命孟畇記山來坐向書諸碑陰。又曰。余觀碑文。自授肅雍府丞。至封韓山伯。竝不書散官。蓋簡其文也。然年譜在。可攷也。其碑文所載子孫。今皆成立陞秩。至於顯達者寔多。後生親孫若曾玄男女亦衆矣。不可不錄示後裔也。其悉記之。倂載碑陰。孟畇不敢辭。謹記之。先祖墓在韓山郡猉獜峯之南麓丑艮之山癸坐丁向。東南距郡治五里。謹稽山來自鴻山之永興山。折而東南三十餘里。崒然停峙。是爲猉獜峯。原其所自。實出於長白山也。峯之下加智之原。龍虎與案。蜿蜒環擁。佳氣沖融。嗚呼。天慳地祕。以待賢哲之吉兆歟。卽墓之巽方三十三步。樹立豐碑。以記德美。昭示無窮。又序次子孫之名。具列如左。長男吾先君。知密直司事諱種德。娶門下評理柳惠孫之女。生四男二女。長孟㽥。仁寧府司尹。次孟畇。次孟畯。別將。早亡。季孟畛。漢城府尹。女長適瑞寧柳沂。次適都摠制河久。府尹三男三女。長衍基。司憲監察。次裕基。次保基。讀書。女長適敦寧府判官李厚。次適司瞻直長李椅。次適都染錄事金自行。監察二男三女。長澍。次渰。皆幼。瑞寧二男。長方善。次方敬。仲男簽書密直司事諱種學。娶門下侍中李春富之女。生六男一女。長叔野。光州牧使。次叔畦。晉州牧使。次叔當。右軍僉摠制。今皆云亡。次叔畝。同知中樞院事。次叔福。及第。季叔畤。工曹參判。女適全州府君李漸。光牧一男二女。男蓄。戶曹正郞。女長適漢城判官安崇信。次適書雲副正李元根。正郞一男一女。皆幼。晉牧五女。長適監牧官柳諍。次適陵直郭汾。次適幼學全克敬。次適幼學李思南。次幼。僉摠制三男。長思。司譯院注簿。次畏。陵直。次異。東部錄事注簿。一男二女。皆幼。陵直一女。幼。錄事一男一女。皆幼。同知二男四女。長菑。原平都護府副使。次畬。司憲監察。女長適宜寧監務河孟晊。次適工曹佐郞安崇孝。次適通禮門奉禮金理。次幼。副使二男二女。長壽垠。餘幼。監察二男二女。長仁堅。次義堅。皆幼。及第二男二女。長文埤。次文疆。女長適軍資錄事尹濱。次適幼學柳仲諲。文埤一男。幼。參判一女。適典農直長李敬賢。府尹一男一女。男義山。司正。女適集賢殿正字金文孝。季男開城留後司留後諱種善。娶參贊門下府事致仕權鈞之女。生一男。季疇。戶曹正郞。後娶吉昌君權近之女。生四男二女。長季疄。判司譯院事。次季甸。集賢殿修撰。中丁未年親試。次季畹。殿直。中壬子年成均試。次季町。讀書。女長適江華都護府副使李伯常。次適陵直金崇老。正郞一男四女。男塏。女長適幼學李徽。次適幼學李賁然。餘幼。判事四男二女。長塾。次壎。次垓。次坰。皆幼。修撰二男三女。長堉。次堣。皆幼。殿直一男一女。男堧。皆幼。陵直一男一女。皆幼。外玄孫男女共五十餘。文繁不悉書名氏。婚姻有姓李者。皆非一李也。子孫衆多。而奕世簪纓。致位通顯。至於孟畇之不肖。亦得濫歷中外。至參廊廟。豈非積德流慶之所及也。古人云德厚者流光。本深者末茂。信哉。且洪武乙丑秋。大明國子學錄張溥,典簿周倬。奉使而來。望見我祖於稠人之中。問諸譯者曰。彼立第幾者。精粹有道人也。不是李先生某耶。譯者答曰是。卽前相語甚敬。歲戊辰。以明年賀正使赴京師。高皇帝一見知其賢。賜語移時。及退。目送之曰。堪畫。蓋美其風度也。永樂癸未。太僕少卿祝孟獻奉使到國。以事久留。間求見牧隱文集。嘆服無已。又索閱行狀。亦甚景慕。因賦詩以表景仰之心。時在旁者請曰。大人嘆服景慕如此之切。幸作序以冠卷首。祝君曰。吾豈敢爲。當俟還朝。請於縉紳之能文者製送。其後乃送國子助敎羊城陳璉所撰墓誌銘。其序事則本於陽村先生所撰行狀。而欲變措辭。有致失實處。然論德行則亦本陽村之辭。而小加損益。至於論文章則日。爲文辭典實豐鬯。興致本乎風雅。言論迪乎德義。和平之音。正大之氣。藹然見於編帙之間。銘一句云。惟公製作。華衮之章。又云。使公獲仕天朝。必能大推所蘊。受知天子。建立勳名。垂輝竹帛。則罔俾王思禮專美於有唐矣。惜乎。仕止一國。未究厥施。可勝惜哉。觀此總結之語。則陽村之所未道也。必也見其文集。知其爲人。而不敢以外國人下視之。稱揚讚美。至於如此。其誠服也無疑矣。我祖道德之崇。文章之盛。不唯東方之人仰之如山斗。以高皇帝之明。一見知賢。又若張學錄,周典簿。中朝聞人也。亦且甚敬。必有盛德光輝。接於人者故也。祝少卿,陳助敎之嘆服讚美。豈非文章之妙脗合於風雅也耶。故倂著云。宣德八年八月下澣。正憲大夫議政府參贊,集賢殿大提學兼成均大司成孫孟畇。謹記。
    2023-07-13 | NO.289
  • 祭伯氏判書公文 서형수가 형 서호수에게 쓴 제문
    祭伯氏判書公文 : 서형수가 형인 서호수(徐浩修, 1736~1799)를 위해쓴 제문이다.명고전집(明臯全集) 권 13서형수(徐瀅修, 1749~1824)의 자는 유청(幼淸), 여림(汝琳)이고 호는 명고(明臯), 오여(五如)이다.백씨 판서공에게 올린 제문아! 형님께서 무오년(1798, 정조22) 제석(除夕)에 성상께 문후하는 반열에서 물러 나와 제가 있는 곳으로 오셔서 저의 침소에서 머무시며 흘러가는 세월을 탄식하시고 인생이 덧없다고 개탄하신 지 겨우 두 달이 지났습니다. 형님께서는 지금 어디에 가셨기에 빈 들보에는 먼지가 끼고 난데없이 여막이 보인단 말입니까? 형님께서 진실로 저를 버리고 먼저 가셨으니, 저는 앞으로 형님 없이 홀로 살아야 한단 말입니까?《시경》 〈육아(蓼莪)〉 편에서 길러주고 돌보며 어디서든 생각한다고 읊은 부자와 같고, 〈치효(鴟鴞)〉 편에서 부지런히 갈대를 물어오고 비바람 치면 울부짖는다고 말한 군신과 같습니다. 〈여왈계명(女曰鷄鳴)〉 편에서 주살로 잡아오면 그대와 맛있게 요리하겠다고 읊은 부부와 같고, 〈북풍(北風)〉 편에서 은혜롭게 나를 좋아하는 이와 손잡고 함께 돌아가겠다고 말한 붕우와 같습니다. 그리고 〈소완(小宛)〉 편에서 날이 밝도록 잠 못 이루며 부모님을 생각하고, 곡식을 쥐고 나가 점을 쳐서 어디로 가는 것이 좋을까라고 읊은 형제와 같습니다. 이와 같은 것을 어찌 형제간의 윤리 하나만을 지키면서도 죽고 살고 헤어지는 다른 사람의 형제들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형님께서 돌아가신 뒤에 위문하러 온 친지와 빈객들은 저마다 형님에 대해 말을 하였습니다. 어떤 이는 “내직으로 팔좌(八座)를 두루 지내고 외직으로 사절(四節)을 쥐었으니 영화와 존귀함이 더할 나위 없었고, 슬하에 아들 넷을 두어 소과와 대과에 급제하였으니 자손이 번성하였고, 예순이 넘은 연세에도 건강하여 책을 읽고 일을 처리하였으니 장수하고 강녕하였다. 공이 무슨 복을 누리지 못해 유감이 있겠는가.” 하고, 어떤 이는 “주인(疇人)의 자제들이 주(周)나라 말기에 흩어진 뒤로 율력(律曆)이 세상에 전해지지 않은 지 오래되어, 아무리 소옹(邵雍)과 주자(朱子) 같은 대현(大賢)과 채(蔡)ㆍ허(許) 같은 대유(大儒)라 할지라도 아득하여 상고하기 어려운 기수(器數)에 대해서는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런데 공은 변방의 후학으로서 단절된 천문(天文)과 역산(曆算)에 직접 통하여 책을 저술하였다. 가령 소하(蕭何)와 조참(曹參)이 재상이 되고 한유(韓愈)와 구양수(歐陽脩)가 대제학이 된다면, 공이 서운관(書雲觀)과 이원(梨苑)에서 어깨를 나란히 해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니, 안목 있는 사람은 인정할 것이다. 공이 무슨 명성을 이루지 못하여 미련이 있겠는가.” 하고, 어떤 이는 “효자의 소원은 어버이를 영화롭게 봉양하는 것보다 큰 것이 없는데, 어느 누가 이러한 소원이 없겠는가마는 이룬 사람이 드물다. 공은 젊은 나이에 총재(冢宰 이조 판서)가 되어 집안이 전성했던 시기에 몸소 양친을 봉양하여 천하의 즐거움을 다 누렸으니, 효자로서 원하는 일에 빠진 것이 없었다. 공이 무슨 소원을 이루지 못해 여한이 있겠는가.” 하였습니다.아, 간사한 무리들이 우리 집안에 대해 시종 짖어댄 것이 지금까지 3, 40년이 되었습니다. 계교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어 시기하는 사심으로 이어져서, 권력을 잡으면 달려와 애걸하다가 권세를 잃으면 야유하며 돌을 떨어뜨려 아첨하고 배반하는 행태가 몇 번이나 급변한 줄 모릅니다. 그러나 선군자께서는 산처럼 요지부동하여 두려워하거나 갈등하지 않았고 이해(利害)와 화복(禍福)으로 그 마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나가서는 관망하고 들어와서는 애태우며 몸은 사통팔달한 드넓은 길에 있었으나 마음은 구절양장(九折羊腸)의 험로에 얽매인 것은 오직 형님 한 분이었고 저는 아직 어렸습니다.형님은 기상이 맑고 풍채가 좋아 조정의 모임에서든 사적인 자리에서든 바라보면 옥산(玉山)과 요림(瑤林)이 하늘 높이 솟은 것 같아 아무도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기상이 이러한데도 복록이 돌아가지 않으랴.” 하였습니다. 형님은 효성과 우애가 월등하고 지극정성이 외모로 드러나, 수저 하나 약물 하나에서부터 장례와 제사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모두 손수 담당하여 기쁨만 가득하고 유감이 없었으며, 잠시라도 부모를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우들과 누이들에 대해서는 보지 않으면 그리워하고 보면 기뻐하였으며, 나이도 잊고 지위도 잊은 채 서로 즐겁게 어울렸지요. 이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행실이 이러한데도 복록을 누리지 못하랴.” 하였습니다. 지금에 와서 보면 기상과 행실은 참으로 사람의 한평생을 점칠 것이 못 됩니다. 눈썹을 치켜들고 기운을 토하며 아침저녁으로 떠들어대는 용렬하고 쥐새끼 같은 저 무리들로 말하면 진실로 말세의 기수(氣數)에서 정도로 돌리지 않을 수 없는 현상인가 봅니다.형님께서는 감격하여 생사도 잊은 채 서울의 저택에 들어가 머무셨지요. 당시에 벼슬에 나아가 성상을 모시는 정성을 다하였고, 또 형제자매와 가까이 살아서 가는 곳마다 술잔을 주고받았지요. 마음속에 맺혀 털어놓지 못하고 목이 메어 말할 수 없었던 일들을 남김없이 말하고 후련하게 들었으니, 우리 형님께서 만년의 즐거움으로 지난날의 답답했던 심정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을 듯했지요.그러나 형님의 부음이 전해지자 성상께서 누차 애석해하는 뜻을 보이셨고, 또 형수께서 중도에 위태하고 유구(有榘)가 천 리를 급히 달려간 일로 슬퍼하시는 전교가 정중할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연신(筵臣)이 돌아와서는 대궐 사람들이 슬피 울고 각중(閣中)의 상하 신료들과 겸임했던 관직의 관원들이 누구나 아까운 분을 잃었노라 안타까워하고 몹시 애통해하였으며, 형님의 공적을 열거하며 이제 누구를 믿고 살까 하였다고 전해주었습니다. 그렇다면 형님께서 돌아가신 것은 다만 문중의 성쇠가 걸린 일일 뿐만 아니라 세도(世道)와 시운(時運)에 크게 관련된다는 것을 여기에서 증험할 수 있습니다. 생전에는 아무런 보탬을 주지 못하고 죽어서는 아무런 명성이 없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형님께서는 우리 성상께 이런 대우를 받고 관료들에게 이러한 평판을 얻고 또 사람들의 한결같은 칭송을 받았습니다. 아, 이 결함투성이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심신의 영췌(榮悴)와 고락(苦樂)이야 지금 형님을 위해 따져볼 필요는 없겠지요. 그러나 저의 번뇌와 원통한 마음으로 말하면 끝내 이로써 슬픔을 막을 수 없습니다.차마 형님께서 돌아가셨다고 인정하지 못하는 의리로 어찌 감히 일체 유언을 명심하여 그대로 시행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임좌(壬坐)의 언덕은 지관(地官)이 이의를 제기하여 방향을 살펴 기좌(己坐)로 다시 잡았으니, 누차 살펴 자리를 택한 것은 알맞기를 기약했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실로 정간공(貞簡公 서문유(徐文裕))과 문민공(文敏公 서종옥(徐宗玉)) 양대의 묘와 언덕을 사이에 두고 있고 문정공(文靖公)의 묘와는 더욱 가까워 바라보이니, 형님을 그 사이에 묻은 것은 선영에 묻히기를 원하던 형님의 소원을 따랐기 때문입니다.아, 제가 형님을 영결하는 자리에서 아뢰고자 하는 애통한 심정으로 말하면 비록 수미산(須彌山)을 붓으로 삼고 바다를 먹물로 삼는다 한들 어찌 가슴속에 가득한 슬픔을 만의 하나라도 쏟아놓을 수 있겠습니까? 형님을 잃은 뒤로 바보인 듯 술 취한 듯 정신이 몽롱하여 아뢸 일이 생기면 형님이 집에 계시다고 착각하여 일어나 찾아가려던 적이 여러 번이니 어이합니까? 넋이 나가 마음은 멍하고 손은 뜻대로 되지 않으며 한 글자 쓸 때마다 눈물 떨어져 작은 종이가 다 젖었습니다. 계절이 바뀌어 시식(時食)을 올리오니, 길게 말해봤자 이별이며 구구절절 말해봤자 이별입니다. 아, 형님이여! 아, 형님이여! 흠향하시기 바랍니다.[주-D001] 백씨 …… 제문 : 【작품해제】 큰형 서호수(徐浩修, 1736~1799)에게 올린 제문이다.[주-D002] 장단(長湍)은 …… 거리이고 : 원문의 단산(湍山)은 경기도 장단(長湍)을 말하고, 원문의 상유순(上由旬)은 불교에서 말하는 거리의 단위이다. 《홍재전서(弘齋全書)》 권55 〈화산(花山) 용주사(龍珠寺) 봉불식(奉佛式)에 복을 기원하는 게송[花山龍珠寺奉佛祈福偈]〉 결게분(結偈分) 정토 극락(淨土極樂)에, “단 이슬은 청정한 국토에 두루 내리고, 가을 달빛은 넓은 하늘에 가득하도다. 한 언덕에 있는 아란야는, 왕성과의 거리가 팔십 리도다.[甘露遍淨界, 秋月滿長天. 一曲阿蘭若, 王城上由旬.]” 하였는데, 그 주석에서 “유순(由旬)은 중국 말로 한량(限量)이며, 세 등급이 있는데 다르다. 상(上)은 80리(里)이고, 중(中)은 60리이며, 하(下)는 40리이다. 용주사(龍珠寺)는 왕성(王城)과 80리 거리이다.” 하였다.[주-D003] 송매(宋妹) : 송위재(宋偉載)에게 시집간 누이동생을 말한다.[주-D004] 팔좌(八座) : 육조(六曹)의 상서(尙書) 및 좌우 복야(僕射)의 총칭이다. 서호수가 판서의 반열에 올랐으므로 이와 같이 말하였다.[주-D005] 사절(四節)을 쥐었으니 : 네 고을의 관찰사를 역임했다는 뜻이다. 서호수는 1774년(영조50)에 전라도 관찰사를, 1779년(정조3)에 함경도 관찰사를, 1782년(정조6)에 평안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나머지 한 곳은 미상이다.[주-D006] 주인(疇人) : 대대로 부조(父祖)의 업을 계승하는 자를 말하는데, 후세에 와서는 오로지 역산가(曆算家)를 일컫게 되었다.[주-D007] 몽장씨(蒙莊氏)는 …… 여겼으니 : 몽장씨는 장자(莊子)를 말하고, 반백씨는 반고(班固)를 말한다. 구양수(歐陽脩)가 〈방희칙을 전송하는 서(送方希則序)〉에서 “몽장은 벼슬을 감옥으로 여겼고, 반백은 명성을 족쇄로 여겼다.” 하였다. 《文忠集 卷64 送方希則序》[주-D008] 날로 …… 것 : 《서경》 〈주관(周官)〉의 “덕을 행하면 마음이 편안한 가운데 날로 아름다워지겠지만, 그 반면에 거짓을 행하면 마음이 수고로운 가운데 날로 졸렬해지게 될 것이다.[作德, 心逸日休: 作僞, 心勞日拙.]”라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주-D009] 살아서 …… 경지 : 《논어》 〈이인(里仁)〉 편의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는 구절에 대한 주희의 집주에 보이는 말이다.[주-D010] 돌을 떨어뜨려 : 위급한 상황에 놓인 사람을 보고 구해주기는커녕 더욱 곤경에 빠뜨리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당(唐)나라 한유(韓愈)가 지은 〈유자후묘지명(柳子厚墓志銘)〉에 “사람들이 작은 이해에 걸리면 그것이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안면을 몰수하는 경우가 있고, 함정에 빠졌을 경우에 손을 내밀어 구제해주는 것이 아니라 더욱 밀어 넣고 돌을 던진다.” 하였다.[주-D011] 칠리탄(七里灘) : 은거지를 말한다. 동한(東漢)의 은사(隱士) 엄광(嚴光)이 은거하여 낚시하던 곳이다.[주-D012] 술잔 …… 되고 : 재앙의 조짐이 보이다가 기어이 재앙을 입게 되었다는 말이다. 역(蜮)은 일명 단호(短狐)라고도 하는데, 자라처럼 생기고 세 발이 달렸으며, 입속에 가로질러 있는 뿔로 만든 쇠뇌[弩] 같은 물건에 기(氣)를 화살[矢]로 삼아 물속에서 사람을 쏘아 해친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모래를 입에 물었다가 사람을 쏘아 맞히면 부스럼을 앓게 되며 그림자를 맞혀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즉 몰래 사람을 해치는 것을 말한다.[주-D013] 창틈으로 …… 되어 : 미상이다.[주-D014] 결함투성이의 세상 : 도가(道家)에서 원시천존(元始天尊)이 사는 도읍을 백옥경(白玉京)이라고 하는데, 백옥경은 천상의 세계로 인간의 생로병사가 없는 완전무결한 세계이다. 이와 반대로 생로병사로 고통받는 이 세상을 결함투성이의 세상이라고 말한다.[주-D015] 군자의 …… 말입니다 :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나오는 말이다.[주-D016] 소장공(蘇長公)이 …… 하였으니 : 소장공은 소식(蘇軾)이고, 자유(子由)는 소철(蘇轍)의 자이다. 소식이 사건에 연루되어 어사대(御史臺) 옥에 갇혀 있을 때 옥리(獄吏)의 괴롭힘이 심하여 살아서 나갈 수가 없다고 생각되자, 영결의 뜻을 담은 칠언율시 두 수를 지어 옥졸(獄卒)을 통해 아우 소철에게 보냈는데, 이 구절은 바로 그 첫 수의 마지막 부분이다. 《東坡全集 卷29 獄中寄子由 二首》弟瀅修。因三月三日之奠。爲文哭告于伯氏判書公靈筵曰。嗚呼。公於戊午除夕。退自候班。臨弟之所。欹弟之枕。歎年光之如流。而慨人生之不足把翫者。堇月兩易耳。公今安往。而空樑欲塵。倚廬忽現也。公誠棄弟而先逝。弟將無公而獨存耶。夫以分形連氣之至愛。而相失於望秋紛白之頹景。此人事之至難遣而物情之所大慼也。若弟之於公。則奚但曰兄弟而已。其長育顧復。出入腹我。蓼莪之父子也。拮据捋荼。風雨嘵嘵。鴟鴞之君臣也。弋言加之。與子宜之。鷄鳴之夫婦也。惠而好我。携手同歸。北風之朋友也。而明發不寐。有懷二人。握粟出卜。自何能穀。又小宛之兄弟也。若是者。豈他人之兄弟。只處一倫。而猶可以死生契濶者比耶。湍山上由旬地也。光山之於日下。亦不盡千里而遙也。然弟之自湍移湖也。公不能捨弟盡室而從焉。弟爲光牧。往來如梭。盖未甞終三年淹。而公常謂宋妹曰。做官豈必每食兩盂。吾今老矣。老人心弱。不耐渠遠遊。嗚呼。公不耐弟遠遊。而弟獨耐公先逝乎。自公之沒。親賓之來慰者。亦各有其說矣。或曰。內遍八座。外按四節。榮貴極矣。庭蘭四茁。蓮桂芬芳。子姓繁矣。耆年精強。劬書幹務。壽而康寧矣。何福之不除。而公其有餘憾耶。或曰。自疇人子弟之周末分散也。律曆之不傳於世久矣。雖以邵朱之大賢。蔡許之宏儒。無奈乎器數之邈難考信。則公以偏邦後學。身通絶藝。著有成書。藉令蕭曺作相。韓歐典文。公於雲觀梨苑。幷駕而無愧色。具眼者當許之。何名之未成。而公其有餘戀耶。或曰。孝子之願。莫大於榮養其親。而人孰無此願。得之者盖鮮。公以黑頭冢宰。躬奉兩親於門闌全盛之日。擧天下之樂。而所願於孝子之心者。未或闕焉。何願之未酬而公其有餘恨耶。夫福也名也願也。古人所以視履考祥。而徵天報之厚薄者也。公之庶幾乎此。或者之說。非曰不是。獨弟之爲公煩寃。呼天而欲問之者別有之。蒙莊氏以紳笏爲柴柵。班伯氏以聲名爲韁鎖。則彼於人身。固外也末也。惟吾少壯老之間。不大有恐惧憂患者亂我方寸。然後日休日拙。於斯乎判。而生順死安。可得以言。嗚呼。羣壬之於吾家。其首尾狺狺。迨今三四十年矣。始以計較之心。仍之忮忌之私。當其柄用。則望走而乞憐。及其勢去。則揶揄而下石。側媚反覆之態。不知爲幾番狂劫。而先君子凝然山立。不懾不撓。利害禍福。無纖毫動其中。則其出而觀玩。入而薰灼。身處乎八達康莊之衢。而心纏乎九折羊腸之塗。獨有公一人。而弟則幼耳。公甞悽告于先妣曰。百年之身泰。不如一日之心安。吾生之勞。汔可休矣。願與吾慈。復爲後生之母子。穩做七里灘中無思無慮之一家計。可乎。此言絶悲。足見公滿腔熱血。而盃心之弓影。眞作蜮弩。牎隙之瓦礫。幻成賊礟。遂至有壬子罔極之憯言。公於是乎六旬衰境。東西漂泊。多歧受侮。靡苦不甞。而數十年富貴空花。忽焉若前塵影事。向所謂外也末也者。亦何有於厚享哉。嗚呼寃矣。公風神淸娟。骨相遒俊。朝會私集。望之如玉山瑤林。秀出天外。不可梯接。故人皆曰氣象如此而福祿有不歸者乎。公孝友出人。至誠見貌。自夫一匕箸一藥物。以至送死奉祭。必皆手自經理。有恔無憾。未曾頃刻忘父母。而其於弟妹。未見而思。旣見而喜。忘年忘位。相與嬉戱。故人皆曰實行如此而福祿有不副者乎。由今觀之。氣象也實行也。果未足以占人平生。而彼闒茸之倫。狐鼠之輩。揚眉吐氣。朝咻而夕嚇者。固叔世氣數之不得不反常也歟。尤可寃者。甲寅日星之綸。煌煌乎文謨之闡揚。而沒世不忘之澤。旁達于九地之下。則吾家之前後恩造。亦復何限。而其深仁大德。華枯而肉骨者。此爲第一蒙被。公卽感激忘生。入處京第。時因起居之班。自竭瞻覲之誠。又與兄弟娚妹。接屋連墻。杖屨所至。杯盤錯互。凡胸中之結轖不可解。喉間之塡咽不能道者。言之傾倒。聽之愉快。則我公桑楡之樂。若可以少舒前日欝悒之懷。而纔及四載。一朝至此。使多少擬議之成說。都不免於浮根妄想。何侈於分。而奪之斯速。臯復之夕。屢唏而不釋然者。豈亦爲此。而天所以厚我公者。其如台已乎。嗚呼寃矣。雖然公之訃聞也。自上屢示嗟惜之意。又以嫂氏之中路阽危。有榘之千里戴星。憫惻之敎。不啻鄭重。筵臣歸傳。闔門感泣。而閣中上下。兼綰率屬。莫不有百身之思。殄瘁之慟。歷擧實績。云今誰恃。則公之亡。不但爲一門盛衰之大關。而其於世道時運。綦有輕重者。此可驗矣。生無益而死無聞者。滔滔皆是。而公能得此於吾君。得此於僚寀。又得此於大同之衆論。噫。彼缺陷世界。心身之榮悴苦樂。今不須爲公較絜耶。然後死之煩寃。則終不可以此塞悲矣。嗚呼。君子曰終。小人曰死。禮之建言也。然君子之於正終。自古盖難之。而公則疾革之後。言語動止。視平昔愈益雍容。間甞執弟之手。諄諄語國恩之虛負。家事之句當。推及衣衾棺槨之節。宅兆儀物之圖。細大不遺。曲加指導。而乘化之刻。尙且有問則答。有聲則喏。似此正終。未知古君子何如也。在後人不忍死之義。曷敢不一遵治命。服膺勿替。而惟是壬坐之原。以有堪輿家之異議。見方更卜己坐。謀所以屢審擇决。期於允叶。此實貞簡文敏兩世塋域之隔岡。而於文靖公幽宅。密邇而相望焉。則公居其間。亦合公首邱之願故也。嗚呼。公之引期。今不滿十日。而弟將先公而行。待公於鶴山精舍矣。肩輿往來之陳跡未入室。已涌我千斛寃淚。而楚楚之几案。秩秩之琴書。又不忍堪余摩挲。則逝將與故山猿鶴。相與哀號於松雲檜月之下耶。蘓長公贈子由詩曰。與君世世爲兄弟。更結來生未了因。此公告先妣之餘義。而亦弟之今日情事。公其許我乎。否乎。嗚呼。弟於公終天之訣。所欲訢衷者。雖須彌爲筆。大海爲墨。顧安能輸寫其弸中之萬一。而奈自失公以來。神精惝怳。如痴如醉。遇有可告可禀之事。謂公在堂。起身且向者數矣。心不守舍。手不從心。一字一涕。腐盡寸牘。而節物易遷。時食告辦。則長言之亦別。緖言之亦別。嗚呼我公。嗚呼我公。尙饗。
    2023-07-17 | NO.288
  • 祭文[趙顯錫]- 柏谷集 附錄 김득신(金得臣, 1604~1684)
    祭文[趙顯錫]柏谷集 附錄김득신(金得臣, 1604~1684), 자는 자공(子公)이며 호는 백곡(柏谷), 구석산인(龜石山人)이다.先君石友。匪公伊誰。崇禎庚午。始遌洛師。心志俱同。雷陳相許。聯榻攻詩。必偕赴擧。公書試牋。惟己是後。竝轡騷壇。騰華藝囿。曷嘗久別。兩地參尋。柏莊煙月。蓮洞園林。歲在辛丑。小子銜恤。路隔京鄕。時當暑熱。公卽奔哭。羸弱奴馬。辭意懇惻。恤我諸孤。輓詩兩章。寫盡哀思。交友之情。罔間終始。不肖兄弟。義當父事。南郭書齋。屢陪杖几。述作甚多。幾盡披示。詩將東溟。文如簡易。公嘗有言。幼甚魯鈍。孜孜讀書。蓋自齠齓。嗜文成癖。至老不衰。馬書列傳。尤好伯夷。攷其所讀。十有二萬。本之有得。詞氣雄渾。見知澤堂。猶賀奬李。價增一顧。名動遐邇。不特吾東。皆推宗匠。華人採詩。首加稱賞。文雖大鳴。乃公餘事。信以持身。剛以固志。忠孝之門。家聲益播。尙書朴爺。雅少許可。膠漆我公。曰士類最。俗眼未奇。以其韜晦。權門斂跡。玉潔淸氷。一心所願。惟在成名。竟至蓮榜。復折桂枝。春官水部。館職憲同。位雖通顯。匪其所好。命駕還鄕。田園送老。宅近先隴。情篤永思。好水佳山。吟嘯自怡。寶樹盈庭。家訓切至。齒踰八帙。邵德彌隆。聖朝敬耇。世勳襲封。文聲壽福。孰如公盛。鳩杖逍遙。鄕黨加敬。久稽趨庭。歲月屢徂。山川悠遠。音信頓疏。曠世先分。有若都忘。罪恨曷極。徒勞瞻望。雖甚無狀。蓋亦有由。老母嬰疾。沈綿未瘳。夙夜煎憂。西山日薄。比年以來。奔走醫藥。家又甚貧。了無易事。茲未抽身。鄙懷莫遂。癸亥中秋。西赴于沔。白袍荊園。方酣蟻戰。辛勤訪我。乃公賢孫。謂承祖命。來問寒睻。遂呈一札。略敍衷情。前秋石邑。復聞康寧。纔及一月。遽承凶報。光牧李公。慘然傳道。適値庭擧。黽勉赴洛。反至還家。私故又迫。祖墓營遷。弟嫂更定。肆致遷延。時月荏苒。門人金生。安邑拆簡。獲聞旣葬。益切痛恨。孟春己卯。茲行乃啓。拜辭先廟。遺意用體。行行策馬。險路泥淖。稍近槐鄕。彌增酸悼。旣造遺居。荒寒籬落。老鶴癯形。今不復觀。九流百家。蘊奧誰解。篆刻雕蟲。推敲孰政。公身雖逝。名耀來世。詩卷長留。江河不廢。士生世間。所貴不朽。九原千秋。柳何恨有。夙余承敎。可行終身。今其已矣。脩夜無晨。斂不憑棺。葬未執紼。餘生人世。此恨無絶。嗚呼先人。曁我先生。從先乘化。間二十齡。幽明何異。定付神交。敢綴哀辭。長些▦招。懷似羊曇。誄慙任昉。奠觴一慟。淫淚斯逬。
    2023-07-13 | NO.287
  • 與蟾村閔公 (庚午)
    與蟾村閔公 (庚午)역천선생문집(櫟泉先生文集) 권6송명흠(宋明欽, 1705~1768)의 자는 회가(晦可), 호는 역천(櫟泉) 頃於禮郞之過。伏覩議紙。手墨爛然。怳如親奉顔采。欽玩不能釋手。兼亦深有警悟。玆更仰質。葢自昔隱遯高尙之士。雖遺外榮利。擺落名敎。而至於君上禮問。則鮮有不對者。豈不以祿仕與問對。大煞不同故耶。若吾儒平正法門。則尤不宜打乖。迫斯可見。有問則對。恐是恰當道理。近世遂翁所處。亦似如此。故年前皇壇事。不免冐對。當時倉卒。未及稟裁。伊後獲見過去謄本。則執事謙挹之義。尤中語默之節。始覺孤陋猥越。擬引不倫。惶愧何及。今番則謹已畫葫。可幸無罪。然須一經稟請。爲終身誦法之地。故不敢自隱。以俟鐫誨耳。歲月流駛。宗伯父三年垂訖。兩世祧廟。禮當遷奉長房。而家叔父。自以與光牧叔父。皆已臨年。而支庶散居。竆不自立。若不及今變通。則將日遠日怠。終至於不忍言。故詢議一家。依問解所論。營立別廟於宗家之東偏。略起義例。而係是私家大事。不可苟率。玆敢具禀。伏望卽賜批諭。俾得久行無廢。如何如何。
    2023-07-13 | NO.286
  • 與許尙書
    與許尙書歸巖先生文集 권5 / 書再昨撥便。伏承去月二十六日下覆書。憑審趨朝供劇。氣體有相。燕山奉璧。出於格外。一慰一慮。無任下誠。灣尹之事。驚心則極矣。而非繫宗社安危。則請處囊中。無乃過乎。長府事備在推緘。不必縷陳。城內移倉。出於朝命。旣撤倉庫。而露置米穀。任其潦雨之所朽。盜賊之所竊。則方可謂能勝其任乎。不得已面議於方伯。加糶於民戶。秋捧之耗。箇箇公用。糶陳糴新。賑餓莩而厚保障。息耗取贏。備器械而完鉅役。未知玆事害於國乎。病於民乎。年前長倅輕播逋欠之說。盛傳中外。當繡衣査覈之日。必欲以逋爲過。實其前言。而光牧爲差員。詳査實數。有賸無縮。故長倅羞其言之不售。乃於啓下公事之外。搜出己亥分給文書。生事於無事之中。原其本意。非必欲陷我也。不過一時無聊之致。而旋卽悔恨。使吏輩訟冤於繡衣。指陳別備之數。蓋耗米盡歸於別備價故也。繡衣亦頗後悔。捧別備成冊意。欲申解於書啓云。縛之解之。果出一手。則亦可見其公心。而夫豈易哉。初免就理。專荷首揆之德。雖非有私於元禎。而惟邊事之是重。席藁之中。禍機稍緩。人非木石。寧不知感。倭人之利。專在釜山。雖日鞭撻而驅之。日設宴而請之。斷無移佗之理。初不敢直請堂船。假借釜城。以爲換面之語。終不忍無端還島。降請熊浦。欲爲遮面之資。其間情態。明若觀火。元禎之前後狀啓中。備陳其形勢。試取而考之。則其詳可得也。兩差所供凡百浮費。姑舍勿論。一月米穀。通計粮料與魚價而三百有餘石。八朔之用。已至於二千五百四十六石。列邑財力。旣已竭矣。本府庫儲。亦已罄矣。馬島一種。無非商賈。雖出沒風濤。備嘗危險。一年之利。能幾何哉。而今乃偃卧淨館。白得厚利。安有速還之意哉。三浦土兵。逼居館側。男女交淫。言語相慣。漏我機事。捷於影響。探我動靜。速於置郵。雖嚴法刻刑。日誅一人。奸細成風。懲戢無路。脫有邊警。則釜山之民。擧將相率而爲敵向導。其爲寒心。不特不可使聞於鄰國而已也。彼雖不欲棄舊而就新。我宜速令撤此而移彼。使約束申明。防禁稍嚴。然後可以有爲也。直患其詐請移館。而實非眞情耳。苟其眞情。實欲移設。則釜城堡障。雖難輕許。熊浦空地。乃其舊基。又何重難而堅持至此耶。今姑快許。促令移去。待彼懇請仍存然後。不得已而停止則容或可也。彼自爲請而我反牢塞。經歲相持。重困民力。爲盜齎粮。亦已多矣。一邊年少之輩。或以爲彼以詐而請之。我以權而許之。則甚非待強鄰忠信之道。羣非衆訾。媒孼其短。廟堂亦不得不動於淸議云。古人所謂束之高閣。竢天下太平者。正爲此輩發也。諸葛武侯忠信智武。豈不及於今世之淸流。而猶曰兵不厭詐。則待鄰敵之道。其可徒經而無權乎。桓溫上疏。請遷都洛陽。自永嘉之亂。播流江表者。一切北徙。以實河南。朝廷畏溫。不敢爲異。至欲遣侍中止之。王述獨言溫欲以虛辭威朝廷。非事實也。但從之。自無所至。詔從其計。溫果不行。今以酬應外敵。比之節制強臣。則權經取舍。宜如何也。以移設倭館。比之遷都徙民。則事體輕重。又如何哉。而王述之策。當時賴以爲便。後世不以爲非。况玆化外殊俗。不可以中國之治治之者乎。且元禎之所謂當許者。非必以權許爲得也。許之而彼果移去則可飭邊關之舊禁。許之而彼自中止則猶不失爲今日。以此言之則權許之可也。眞許之亦可也。何必徒權哉。初斥僭妄。不許館接。一如元禎所云。則深得事體。了無勞費。而廟堂不惟不施。至欲加以重罪。催送侍從。顚倒迎接。使其驕氣倍增。妄心益肆。然後卽今所以處之者。斷其歸路。使不得還。不啻若縶之維之。於焉嘉客。而乃以不能開諭速送。欲罪邊臣。爲邊臣者。不亦冤乎。夫邊臣之所建明。有所施行而不效則罪之可也。廟堂之所指揮。有所違越而僨事則罪之可也。今也不然。前後建請。率被沮格。終無一事如意。片言半辭。皆禀廟堂而酬酢。以此爲罪則其肯心服乎。最後回下措語尤緊。有曰今見李某狀啓。有似旣發難止者然。殊未曉其所以云。其所謂旣發難止者何謂也。抑以爲朝廷之所不許而邊臣輕自先發於彼人。難於結局之意耶。我國邊臣雖一動一靜之微。亦難擅便。矧玆大段所爭。而輕發朝廷所不許之言耶。不愚不狂。不蹈河而入海。則不當如許也。廟堂之意。終以爲勞費不暇計。熊浦不可許。則雖欲開諭防塞。業已辭竭計竆。有何新語可以動彼狡心。惟撤去日供之需。召還接慰之官。以杜覬覦之望。永絶希冀之路。使其去留決在一著。亦或一道也。何用曠日持久。苟冀回聽使之擧踵引頸。有若痿人之不忘起者哉。當此之時。領台與執事。幷有萬里之行。前頭可虞之勢。不待思量而可想。欲趁星軺未發之前。以還送首譯。面稟備局之意。啓聞于朝。因送金謹行於京中。細陳曲折。得以停當。則口達必詳於文字。須將此意。商議於領台。趁卽回示如何。귀암집 12권, 귀암이원정연행록(歸巖李元禎燕行錄) 1670년(현종11, 경술) 8월 7일 이원정(李元禎, 1622~1680)은 인조~숙종대의 문신으로 1670년 사은부사로 북경에 다녀간 바 있다. 그는 계주에서 출발해 방균점(邦均店)에 들르면서, 이 곳의 바늘이 중국 최고란 기록을 남긴다. 바늘을 샀다는 이야기는 없지만 방균점의 바늘에 대한 최초 기록으로 보아 분명 바늘을 샀을 것으로 읽혀진다.방균점(邦均店)은 계주(薊州)에서 남서쪽에 위치한 현재의 방쥔진(邦均镇)으로 추정된다. 점(店)이란 상인이 모이는 곳을 지칭하는 오래된 지명이고, 청나라의 공식적인 지명은 방균진(邦均鎮)이었던 것 같다.
    2023-07-28 | NO.285
  • 與金羲瑞 (김희서에게)
    與金羲瑞 (己亥)三淵集拾遺 권18 / 書김창흡(金昌翕, 1653~1722), 자는 자익(子益)이며 호는 낙송자(洛誦子), 삼연(三淵)이다. 김희서(1675~1742)의 호는 환암(喚菴). 본관은 울산, 기하(器夏, 1649~1701)의 아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의 5세손이다.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의 문인이다. 학문이 독실하며 효도가 후순 지행(厚純至行)하고, 향리의 화목을 도모하여 그 명성이 방방곡곡에 알려졌다. 일찍이 《격치지설(格致之說)》을 저술하여 후학을 장진(獎進)함으로써 풍속(風俗)을 돈독히 하였다.阻懷襞積不在言。卽日霜冷。緬惟靜履佳迪。曾承惠札。有遭慽奔避之報。有駭遙聞。未知今已底定否。服人慘遭仲婦喪。並緦功疊制。八九在身。淚眼枯矣。氣力之摧損可知。爲吊切人于恩津。作此遠來。光牧適同發。邀以過冬于環碧。而中路深思。有些不便者數件。未免改計中止于高山近處。前頭觀勢進退。有未可預卜者。與左右接面遅速。又難準擬。浩嘆奈何。此去家奴。卽春金同榻者也。使之歷拜。實有意在。想爲之興悲且憐也。所住安心。距完山只宿舂。倘蒙命駕則奇矣。
    2023-07-13 | NO.284
  • 蓬海錄- 安村集 권3
    蓬海錄- 安村集 권3박광후(朴光後, 1637~1678), 자는 사술(士述)이며 호는 안촌(安村)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丁巳九月二十七日。與高斗經,柳漢徵,柳應壽,三從弟光一同行。十月十一日。到長鬐縣。尋先生謫廬。兩三茅屋。依在山下。中有稍大一家。以山竹作編爲籬。高可三四丈。南有一小門。僅僅出入。人聞先生在此荊棘中。益不堪傷時之痛。仍到邑之東一村。得占所寓之家。然後吾五人連袂步行。至于棘門外。使所帶奴招得應門之童。使之通刺于先生前。俄有一少儒自棘裏而出。引我輩至一空舍。乃本縣禀官家云。少儒卽先生之孫疇錫也。形容端正。行止安詳。可知爲先生長者門下人。問先生安否。相與語。少頃。少儒還入于棘裡。以告吾輩必欲進拜之意。先生乃令少儒傳辭于吾輩曰。聞跋涉遠來。慰喜且感。卽欲相見。而所入來穴門至小且高。不敢請客而入云云。吾五人卽與少儒同入棘門之內。有大杏樹立在門內。可作壇盤旋。其下有竹床二。一高而一低。意者先生避暑于此。諸門生或且講業也。圍籬內。有三間廳堂頗精灑。又其內有三間屋。二間房。一間竹床。卽先生所寓之室也。吾五人幷入參拜。則先生手小竹杖。迎我輩於房中。逢迎之喜。藹然可掬。叙暄凉畢。以諸友及吾輩所封之物。親自入納。則先生曰。來見旣感。而且有惠物。還切不安。光後跪而言曰。自先生遭禍以來。久欲來候。而以疾病事故。人事有不如意者。先生曰。道里夐絶。何可易也。復跪曰。此來高儒年近六十。而必欲候先生。跋涉而來矣。先生向高丈曰。尊果爲霽峯後乎。高丈曰。霽峯乃侍生傍親也。先生曰。霽峯爺兄弟行。有以履字爲名。是於尊爲何也。高丈曰。乃侍生曾祖之四寸也。侍生曾祖之諱。某字也。先生曰。吾曾聞愼獨齋爺之言則高某甫 指高進士敬履 上䟽中。只擧四賢而遺晦齋。故其時一邊人。大斥高進士。愼獨齋適於其時爲泮中掌議。以高進士爲執事。一邊物議有不怏者。故乃遞其執事。則吾邊儕輩。皆以愼獨齋輕遞執事爲咎云云。此丈有子孫乎。光後曰。其曾孫有進士高斗翼。而其他子孫亦盛耳。柳應壽以城主所封錦湖集跪進之。則先生曰。錦湖集幸得刊行。光後乃指昌老而告之曰。彼乃錦湖之外孫也。昌老亦曰。錦湖乃生之外先祖也。光後又指光一而告曰。此乃前日往復論理某字叔之子也。先生卽有欣慰之色。乃向光一曰。尊大人平安否。先生披覽諸簡。使疇錫坼封而進。先生見奇子亮挺翼之書。光後乃跪而言曰。奇某自數年前。慘遭喪禍。故曾未得一候於先生。常以爲媿嘆。先生曰。何其喪禍之此甚也。先生又見吳百汝朋錫之書。光後又跪而言曰。吳友朋錫。去侍生居二十餘里。故知侍生來此而寄送候書矣。先生曰。吳之所居。非羅州耶。光後曰。雖羅州地。而近於侍生之居也。光後又跪而言曰。往者河西金先生之孫亨祉甫。往來于先生之門。尙亦記得乎。先生曰。其人短壽。甚以爲惜。光後曰。其人有子。今欲與侍生同來。緣有疾故。以待冬間必來候矣。朴掌令世采甫所製河西狀草。先生亦已得覽否。先生曰。未及見也。光後曰。河西子孫。欲書送其狀草。而意必先生已覽。故只送此年譜矣。先生曾許墓道文字之製。而危禍中未及搆成耶。先生曰。未成也。先生仍披閱年譜。後曰。年譜與狀體相異。狀則必書撰者之名。譜則只以記其事蹟。故不書撰者之名。撰年譜者。其祖先之名。或可入於年譜中則當諱之耶。仍指奇錦江一段而告之曰。此譜乃奇挺翼之撰也。錦江乃其曾祖。故不書其名而只書其號矣。先生曰。書錦江姓名。而於註脚。乃曰某之曾祖云者。似得其宜云。又於崔新齋一欵。後乃跪進曰。河西先生旣受業於新齋之門。則只以出入崔新齋山斗書之者。似近於泛然。添之門二字則如何也。先生曰。如崔新齋。何可不書先生乎。以出入於新齋崔先生之門書之似當。乃於註脚。曰崔某可也。先生又指靜庵一欵而言之曰。靜庵何可書名也。或以謚號。或以別號書之。乃以姓名錄出於註脚可也。後又問曰。司醞直長同正。是何官也。先生曰。國初之官。多用前朝爵名。至於中代。亦難詳知云。先生曰。痛哭卯山中之卯字。以卵字書之云。然耶。後曰。卵山乃實辭也。河西所居村前。有卵山故云。先生曰。實辭雖卵山。而卵字氣像似庸拙云云。後乃跪進族譜曰。前日書辭。間有誤達之辭者。乃仍人聞先生曾爲侍生門族製給序文。故敢欲得先生手筆。爲弁卷之計。今仍濟州判官有鋟刊之勢。故汲汲奉請于先生前矣。先生曰。爲朴判書元象已撰文字。而未及作序文矣。後又跪而懇告曰。欲得先生序文以弁于譜牒之首。先生曰。屢蒙勤請。欲從盛敎。但卽今形勢。有不便者。昔朱夫子在罪時。有人請文字。朱先生曰。若以今時製給則似不便。若退計製給則又不當云云。今日之事。殆近於是。後曰。若以今時製給爲不便。則當得序文付刊。仍藏其板。以待後日傳之。猶或可也耶。先生笑。曰退計而製給旣不當。則留時而傳之。其可乎哉。然朱夫子製給陳俊卿之狀。考其時則極遭危禍時也。然則朱夫子亦或製之矣。後乃欣然更進曰。請得如陳俊卿之狀。先生之意。似將許製矣。日已暮矣。將告退於主人家。後乃跪言曰。侍生等不遠千里而來者。必欲侍先生也。若以出入棘裏。添今日之禍。則侍生等何敢請之乎。若不爾則侍生請連日出入以侍先生也。先生曰。此亦勢也。往者或人來見。而不敢入棘門。吾或立見于門內。向日李監司䎘,李兵使重臣。不意馳來。不通於內。卛爾入來。自是之後。外人之來見者。不忌入此門。吾亦無禁憚之心。後曰。然則侍生當連日入來矣。遂退宿於主人家。十二日。促飯而齊進。暫休于外舍。與宋疇錫,晦錫兄弟及周希濂相話。俄而使一小婢。促令延客而入。吾五人以疇錫爲前導而進候于先生。後曰。夜來痔疾何如。先生曰。苦歇無常。非朝夕可差之疾。後曰。已成腫乎。先生曰。此疾之根已久。而及其成濃之後始知之。柳漢徵叔起曰。人言此疾乃壽證也。先生初以水疾誤聽而曰。乃濕症也。後曰。非水疾也。乃長壽之證云。先生微哂曰。卽今七十。旣爲長壽。更何望哉。後乃以牧使所贈詩跪進曰。侍生來時。光州牧李令公贈別詩一篇。敢請先生之次韻以惠。先生手自捧之。再讀其詩曰。此令公元是鈍根。而以勤讀之故。遂已成章。卽今亦能讀書乎。後曰。罷衙之後。必讀書云。仍以後之次牧使韻一詩跪進之曰。侍生來路。拙次光令之韻。無足登淸案而敢進之。先生又捧而讀之畢。乃向後而言曰。吾不知從事之至於此也。仍以詩二章幷給疇錫而觀之。俄而先生曰。吾向來赴京中。則京中人有曰。退溪書院在眞寶。沙溪書院宜設於光州云。後卽答曰。侍生於辛亥冬拜先生。則先生之敎如此。故卽與鄕中多士相議。呈禮曹受題。已奉沙溪,愼獨齋兩先生享于月峰。而兩先生春秋祭文。乃先生點撰之文也。先生曰。吾亦知之。仍問其神位坐次。後乃自訥齋先生次次明數則先生曰。位板皆書謚號乎。後曰。四先生皆書謚號。而唯訥齋無謚號。故以訥齋朴先生書之。先生曰。訥齋之官止於何。後曰。止於羅州牧使。先生曰。然則訥齋上䟽之後。更不得爲仕乎。後曰。復愼妃之䟽。在潭陽時。其後爲牧使矣。先生曰。平章洞在何里耶。後曰。平章洞在大峙村之後。先生曰。其基所結之山。自何而來也。後曰。自內藏山逶迤遠來。到平章洞後。大山高立。石峯森列。翻身入首之際。峯巒甚姸。及其成基之處。僅可作三間屋。左右龍虎。如人兩手之衛。但白虎邊。明有築土成山之痕。外白虎下。古有林藪云。先生曰。平章之金。自前極盛。而猶未出王妃。今始出中殿。向者仁宣王后擇中殿之際。聞爲沙溪之孫。而極以爲幸云。後曰。沙溪門下。谿谷曾已出入。故大妃亦甞聞之矣。先生曰。谿谷實受業於沙溪。而自少稱弟子矣。世禍未起之前。欲立碑於平章洞。使我爲文字。吾亦許之。今已如此奈何。後曰。侍生亦曾知有立碑之意。計終不成。甚可恨也。後又跪而言曰。先生爲光州兩書院洞主。卽今不吉輩。作亂於月峯書院。而汚穢諱字。至今思之。不覺憤痛。非但此也。又將有作亂褒忠祠之擧。故年老諸儒。恐復有汚穢之患。敢撤先生諱字於院籍矣。厥後卽宜仰報。而多士之事。自至於遷延。光儒之恥。何可喩哉。盖於乙卯五月。光儒與羅州多士。會于山寺。欲伸先生之寃。將以七月望間。定䟽會於長城矣。光州有數三不吉輩。呈于官家。訴于方伯。終至於囚械五人。而使不得䟽事矣。先生曰。其時方伯及牧使誰人耶。後曰。權大載爲方伯。朴興文爲牧使。盖其亂始起於羅州及南平。有若干大北之後。送通於光州。而語極凶悖。侍生等七十餘人。適會于鄕校。不忍見賊孽輩通文來到公會。卽令燒火。凶輩以焚通爲執言而治之甚毒。侍生與柳應壽則以攻斥大北之後。至受笞五十之刑矣。先生酸鼻驚慄曰。何其甚耶。後曰。若以法論之則方伯,守令。何可加笞於侍生。而近日之官。蔑法恣行。是所憤也。先生曰。生進何可加笞乎。卽今方伯爲誰也。黃敎官其終免杖耶。後曰。方伯報于朝廷。而朝廷不爲深治。朴信圭亦不無無聊之心。以此止其杖云矣。先生曰。唯唯。後又跪而進曰。今年六月得地師。往見李潑先代之墳。有李達善墓碑。外面卽尹衢之文而李山海書之。陰有栗谷先生誌文。不過五六行。而其字畫似是栗谷親筆。先生曰。栗谷之筆。雖非有名。而端正可愛。李達善於李潑。爲幾代祖耶。高丈卽對曰。李潑之曾祖也。後曰。聞朴掌令世采甫,李三陟選甫。有收拾栗谷遺文之事。卽謄送于李三陟家矣。先生曰。果有收聚之事矣。完南爲光牧時。尊與李選相見乎。後曰。完南爲光牧時。是侍生幼少時也。何可及見乎。中年遊洛時。與之相知耳。先生曰。栗谷先生。初與李潑相親。爲共濟國事計也。重峯元是潑黨。而終至於絶交也。後曰。侍生亦聞而知之。後曰。李潑之弟溭之外孫李韶甫。方居于李潑之基。先生曰。是何人也。後曰。是石灘李愼儀之孫。而曾以請石灘墓道文字事。進謁先生者也。先生曰。吾亦始記之矣。李愼儀。卽昏朝立節之士。故吾亦許其文字而未及構成也。若是李溭外孫。則李溭終不叛牛溪先生。李韶輩亦不變否。後曰。李韶甫尙不變。故使其子雲標。參於今夏卞誣之䟽章矣。後曰。其姪李雲搏。光州高霽峰之外孫而朴判官之妹夫也。但李家皆以松江爲讐矣。先生曰。若知李潑母之忌日。則松爺之不殺潑母。分明可知矣。後曰。侍生今年春三月。過李韶甫家問之。則亦以松爺爲怨而言曰。己丑禍後庚寅十月。外曾祖母自此移于彼上村。村卽李潑村之上也。十二月。被連累而捕致于京。其時趙重峯來要于路傍。贈以毛裘俾禦寒。外曾祖母多致慰謝之言。以辛卯五月二十二日。死於壓膝之禍云。侍生曰。若然則李家元無歸怨於松爺之事。松爺以辛卯二月遞相職。仍爲遠竄於江界。果如李丈之言。則尹氏之死。政在松爺謫在江界之時。而柳成龍委官時盡殺。昭可知矣。李韶甫專信傳來之訛言。而不以爲然曰。鄭相被謫與否及其某年某月。吾不及知。而尹氏之死。果如此云云。侍生聞其言而卽記之。以爲發明松江搆殺潑母之說矣。先生曰。若果如此則松爺之不殺潑母。不攻自敗矣。壬辰亂時。松爺見柳相西崖而責之曰。大監何忍殺潑母與其子也。西崖曰。大監若在則可救乎。松爺曰。吾何忍不救哉。其時答問旣如此。潑母之死。又在辛卯五月。則柳相之殺潑母無疑矣。尹氏旣有子孫而行忌祀。則以忌日推之。豈不分明乎。後曰。松爺事實如此。而怨歸於松爺矣。侍生外高祖李察訪某。亦死沈守慶爲委官時。而其子孫歸怨於松爺。甚可異也。後又作而言曰。先生見佔????齋文集乎。先生曰。未甞得覽矣。文集板本在於何處。後曰。未知板本之所在。而借得於人而見之。則其集中甚有可疑之文。所謂萬卷堂。卽高麗忠肅王往在元朝時。聚得萬卷書。作堂而置之。號曰萬卷堂。其文所錄中。初以李益齋諸人。亦皆同坐陪侍云。而佔????公乃成廟朝人也。何可廁乎其中。而以余亦廁乎其中書之。又於末端。以翰林學士承旨某記云云。此官名未知果國初所有耶。先生曰。吾不知國初有此官名。忠肅王在高麗之末。佔????齋何可廁於其中耶。必是誤錄於集也。佔????文字。柳子光輩皆令焚燒。此必出於傳記而不實也。後作而言曰。物格知至之說。向於答書中。不啻若面命。今無所疑。而第致知在格物。諺解。知  致 홈이 物 을 格 의잇다 解之。而或人曰。物 이 格 홈의잇다 如是解之。然後方爲分明。何可改解乎。後曰。章句曰窮至事物之理。欲其極處無不到也。所謂窮字。是窮究之義。而所謂至字。何以解之。先生曰。窮夫物而使之至者。乃使事物之理而至其極處也。後曰。然則事物 의 理 을 窮 야 至 케홈은 如是解之耶。先生曰然。後曰。欲其極處。口訣或以 로 讀之。或以 이로 讀之。未知孰是。先生曰。旣知物理到其極處之義。則 이 之分。何必強辨乎。然不若以 로 讀之也。後曰。大學在明明德在新民。此皆止於至善者也。宜以二節分之。而反以止至善對明德,新民而並爲三者。有若以至善爲明德新民之外別樣物者然。未知何如。章句之意。不必強分爲三。而至於末端。曰三者大學之綱領者。何意耶。先生曰。至善雖是明德新民中事。而明德新民。不止於至善。則不可謂明德新民。至善是恰好道理也。旣下三在字。則分三之義。可知也。後曰。事物之義。何以分之。先生曰。明德新民。兩事相對。故謂之物。知止能得。是一事。故謂之事也。後曰。以復其初下附註。須是磨去如塵垢之如字。似是衍。此乃洪夔所考正之板也。先生曰。必是衍字。乃取語類而考之。果無如字。後曰。誠意章附註有賺。此何音而何義也。先生曰。此字音有二。或談或占也。其意則重複放賣之義也。重複放賣云者。太近於陋。以賣物失實訓之。可也。後曰。然則賺連下文云者。何義也。先生曰。如惡惡臭。如好好色。此之謂自慊云。而旣下愼獨於此。又於下文小人爲不善。亦下愼獨。似近於賣物失實矣。後曰。治國章推化之道。乃孝悌慈。而獨以如保赤子解其慈。而不及於孝悌。何也。先生曰。慈是人所易行者。而孝悌之道亦如慈。故獨擧慈也。先生曰。識其端而推廣之端字。何以解之。後曰。因其發端而推廣之意也。此非如四端之端字也。先生曰然。先生曰。治國章第一節。化也。如保赤子一節化也。一家仁。一節推也。率天下以仁。一節推也。後曰。末章章句下附註。眞是眞非莫辨。而後何所適從之後字。似是復字之誤。知行自是一串事。何以謂之後乎。先生曰。此是蔡氏之註。則無從可質。而以文義求之。似是復字之誤也。工人鋟刊之際。例有誤刊之弊矣。後作而言曰。性情中和之說。固難解知。以中爲狀性之德者。先生所敎。而眞谷族叔。猶不免有疑。故今復有所禀矣。先生曰。所見如何。可聞其說乎。此以下。族弟光一對之。先生答族弟無徵不信之問。而仍言閔愼家喪禮曰。此則不可謂無徵也。朱子上寧宗箚。不啻分明。而反不信矣。後曰。喪不可以無主。而愼之父。狂易之甚。侍生目見也。愼之父。家在京中。故往者鄭直長涖從仕時。寓於其家。侍生爲見鄭涖而往。則滿壁以墨畫之。如蠱虫之雕食。而終日讀此。其聲似非人聲。若是則其不可主喪也明矣。愼之代服。似無疑矣。而但其遞遷。似難處矣。先生曰。愼之代服固也。而至於遞遷一欵。吾亦以爲重難。吾之門族。有三代喪性者。如此可遷祖與父神主。是爲大慮。故使閔家呈于禮曹。得朝家制爲一王之禮。然後行之。則似無紛紛之㢢。故以此言於閔家。閔家依吾言呈于禮曹。則鄭致和爺以禮判。終拒不受矣。又曰。鄭涖眞佳士也。禍斯將及於松江。而棄職而歸。誠未易也。後曰。非但此一欵。其人多美行。故湖南士類。與之許交矣。柳應壽跪而請曰。願得先生之文。以爲錦湖集序也。先生曰。光牧之文。足以傳遠矣。若使吾強爲之。則吾當爲跋語。後曰。此友請於先生者。欲得先生之文。以爲弁卷之計也。看他文集中。序文不止一二。况朱子旣製陳俊卿之狀於危禍中。則先生何可固辭乎。先生曰。朱子於危禍中。爲跋文則多矣。後乃以族譜所寫空冊進之。柳應壽亦袖出錦湖集所書空冊以進。先生皆親受。而使疇錫各表記以置之。日已暮矣。拜辭而退。十三日。促飯入先生所問候。先生於昨日。終日酬應。氣不安節矣。後曰。光州舊有司馬齋。廢棄於城中久矣。今城主使之移建於鄕校之旁。斯齋適成。城主以文會齋名之。欲得先生之筆揭諸額矣。先生披覽光後所編譜牒而敎曰。宋判書麒壽。明是蔡忱之婿。而今錄於蔡忱妹夫行。必是誤書矣。仍以退溪先生所製宋世忠墓碑文示之。世忠。麒壽之父也。果爲誤書。卽改之。後問曰。退溪作此墓道文字。在麒壽爲小人之前乎。先生曰。旣封麒壽爲德恩君。則在乙巳之後矣。後曰。然則退溪何以製之也。先生曰。退溪以應敎。亦參於請殺鳳城君之箚。故不爲深罪乙巳小人矣。其時李晦齋爲委官。而杖殺諸賢類。終至於錄其勳。郭詢不忍其杖。乃呼於庭中曰。豈料吾輩死於復古之手乎。復古卽晦齋字 其後栗谷先生爲都憲。鄭仁弘爲掌令。仁弘欲駁沈靑陽義謙。栗谷欲不從。則仁弘將有下歸之勢。仁弘若下歸。則國事頗有難處者。以此相議於牛溪。則牛溪亦曰。當強從靑陽之駁云。栗谷先生作啓草。付諸仁弘曰。此啓極穩當。愼勿加减也。仁弘曰。何可增减乎。及啓達之際。仁弘又添論思庵與松江。栗谷先生大以爲駭。大責仁弘。則仁弘亦自服其非。栗各先生敎仁弘曰。君當引嫌。吾將處置而以便公私。仁弘初若順從。而終違栗谷之旨。松江乃大怒曰。豈料吾輩死於叔獻之手乎云。後問晦齋至今爲士類所疑。栗谷先生亦不無貶辭。先生曰。沙溪先生親禀於栗谷先生曰。晦齋,退溪皆參於乙巳戕賢之啓。而先生獨疑晦齋而尊崇退溪。何耶。栗谷先生曰。觀人必於成德後。其時晦齋年已老。退溪年尙少。所以獨咎晦齋也。後曰。贒人所爲。或有所未盡者。於此之時。其氣反有些濁也耶。先生曰然。後問朱子氣質。以十分論之。當至九分淸耶。先生曰。未知其淸之至於幾分。而但其少時爲宰。以心之走作爲悶。此心之操存。實爲難事。後曰。成德之後。猶可爲九分淸耶。先生曰。雖未知幾分淸。而幾乎爲聖人也。後問曰。日行所謂起度端。終度端。無盈縮之說。未知其詳。若起度端。終度端。周得無盈縮。則何甞有退一度處耶。先生曰。此惟我孝宗大王明知其所以然。甞下敎曰。二人同入房中。與之參坐。而其間雖襯。亦不無絲毫之相間。故終至於一坐於東。一坐於西。其所以退一度者。盖如此也。聖學高明處。於此可見矣。後曰。以文勢觀之。則同起於一度處。窮之難得。二人同入房之諭。雖似分明。而亦未知退度之妙矣。先生曰。參坐之際。不無絲毫之間。故一日二日而積以至於七十五年則乃退一度也。是故。孝宗大王亦甞下敎曰。三十年退一度云。則是太過也。若百十二年退一度云。則是差緩也。唯七十五年退一度。乃爲不差矣。此聖學極其高明處也。十四日曉。登縣之後山看日出。食後往遊小蓬島。當午。自海島至先生所入拜。問夜來調候何如。以寫事貽勞。甚爲未安。先生曰。放意書之。何勞之有。後曰。今日往觀東海則雖無風。而喧如怒而壯於雷矣。先生曰。若風勢不順之日。則其聲振動。此後山若將崩破矣。後進錦湖集。請得題目之筆。先生受置之。先生以錦湖集跋及吾門族譜序文搆草者。示之後曰。吾搆草。諸君見之。後及柳應壽受而讀之訖。後乃俯伏致謝曰。不但吾身之榮感。將有光於祖先矣。先生曰。何至於此乎。日已昏矣。將欲辭退而不忍告別。後曰。侍生等初欲留許多日侍先生矣。行糧已盡。勢不得不以明日歸。心甚缺然。先生曰。臨別之際。固難堪悵懷。遠道來見。已極感荷。何敢望久留乎。窮索之人。賴諸君不遺。得數日之欵。良幸良幸。後曰。明早當更來拜辭。兼受諸簡也。先生曰。聞諸君早發。深以不得摻別爲歎。明若更枉則幸何喩哉。十五日曉飯。待東方之明。齊進于外舍。坐移時。先生使人引入。五人俱進則先生曰。今方作行乎。後曰卜馬已出送矣。先生以族譜及錦湖集及諸書封。出付於後焉。後乃跪進而手捧。以文谷答簡授柳漢徵。後曰。先生豈久處於炎瘴之地耶。侍生等當隨先生所寓。更爲進拜矣。先生曰。有此生前。豈離於此耶。於是拜辭而出。先生下竹床下。佇立而望之。有悵然之色矣。
    2023-07-28 | NO.283
  • 謚狀[趙甯夏] -석산유고(石山遺稿) 附錄
    謚狀[趙甯夏] -石山遺稿 附錄치강(致剛), 호는 이성오(李星五), 김익용(金益容), 한경원(韓敬源) 등과 교유했다. 의정부좌참찬, 비변사유사, 경연관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崇政大夫行龍驤衛上護軍趙甯夏謹撰。이지광(李趾光), 1734∼1800 양녕대군派, 자(字)는 자응(子應), 호(號)는 행와(行窩),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 정윤(靖胤). 증(贈) 가선대부(嘉善大夫) 종정경 이조(吏曹)참판(參判) 겸(兼)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 행(行) 통훈대부(通訓大夫) 충주(忠州)목사(牧使) 겸(兼) 충주진영(忠州鎭營)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에 올랐다.이지광(李趾光)에 얽힌 야사사당(祠堂) 앞의 나무를 베고 발복(發福)하다.이지광(李趾光)은 양녕대군(讓寧大君)의 十三대 종손(宗孫)으로 영조(英祖) 시대의 인물이다. 남대문 밖의 관왕묘(關王廟‥南廟) 건너편 언덕에 살았는데, 가세가 심히 가난하여 생계를 이어갈 계책이 없어 천역(賤役)이라도 나가야 할 형편이었다. 하루는 탁발(托鉢)을 하는 걸승(乞僧)이 밥을 구걸하므로 李공은 스님을 방으로 들어오게 하여 어려운 사정을 이야기하고 멀건 죽(粥) 한 그릇을 나누어 먹었는데, 날이 이미 저물어 차가운 방에서 하룻밤을 함께 유숙하였다. 이에 스님은 "그렇다면 내일 사당 주위의 나무를 모두 베어버리시오 그렇게 하면 몇 일 안에 가히 발복(發福)하게 될 것입니다" 라고 말을 마치고는 떠나갔다. 李공은 마음속으로 이상하게 여기고 스님의 말대로 사당 주위의 나무를 모두 베어버렸다. 몇 일이 지난 뒤에 영조(英祖)대왕께서 헌릉(獻陵‥太宗陵)에 행차하셨다가 돌아오시는 길에 남산 아래에 있는 관왕묘에 들리셨다. 어연(御輦)에서 내리시어 건너편을 바라보니 산기슭에 퇴락한 고묘(古廟)가 덩그렇게 드러나 보이므로 좌우의 신하에게 "저 사당은 뉘 집 사당인고" 라고 하문하셨다. 모시고 있던 승지(承旨)가 "이는 양녕대군을 모신 지덕사(至德祠)이옵니다" 라고 아뢰니, "사손(祀孫)이 있는가" 라고 다시 하문하시어 승지는 다시 "듣기로는 사손이 지극히 가난하고 궁색하여 천역(賤役)이라도 나가야 할 형편이라고 합니다" 라고 아뢰었다. 그리고 호조(戶曹)에 명하여 사당을 중수(重修)하게 하고 또 전곡(錢穀)을 넉넉하게 보내 주도록 하였다. 李공은 사은(謝恩)을 하고 물러 나온 후, 남부도사로 부임하였으나 얼마 안되어 고을 수령(守令)으로 발탁되어 벼슬이 목사(牧使)에 이르렀으며, 고을을 잘 다스려 선치(善治)한 목민관으로 이름을 남겼다. 李공의 증손 승보(承輔)는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고 고손 근수(根秀) 역시 문과에 올라 판서에 이르러 대대로 부귀를 누렸다. 죽(粥) 한 그릇을 나누어 준 덕(德)이 이처럼 두터운 보답으로 돌아왔으니,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023-07-31 | NO.282
  • 賀趙侯(雲漢) 晬宴(조후의 생신을 축하하다)
    성   명 :장태경(張泰慶)자       :자화(子華)호       :우잠(愚岑)생몰년 :1809~1887문집명 :우잠만고(愚岑漫稿)葭籥云暮 桃符更新 伏念我侯遐祺 卽仰希七之華甲 微民賤跡 亦幸順五之同庚 桑門煉丹 自切壽鄕之祝 梅閣依斗 尤倍京華之望 玆將菲薄之儀 敢陳忻忭之意 伏望同抱之澤 無物不容 用蘄遐齡 願享熙熙之樂 務察窮巷 俾副區區之忱가약이 저물어 도부가 다시 새롭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 조후께서는 복이 많아 칠순을 바라보는 화갑이 되셨습니다. 미천한 백성인 저의 삶도 또한 다행히 쉰 살 생일이 되었습니다. 사찰이나 도관에서나 장수를 기원하는 축수가 절절하고, 매화 핀 관청에서는 더욱 서울 인사들의 존경이 배가됩니다. 이에 별 것 아닌 선물로 감히 기쁨의 뜻을 전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함께 품어안는 은택으로 어떤 존재라도 용납하십시오. 천수를 누리시길 기원하고 화락한 즐거움을 누리십시오. 곤궁한 동네를 힘써 살피셔서 작은 저의 마음에 부응해주십시오.¹ 조운한(趙雲漢) : 고종 9년(1872년) 8월 25일 광주목사에 임명
    2021-04-09 | NO.281
  • 通政大夫掌隷院判决事知製敎耆齋姜公行狀- 강여호(1619~1683)
    通政大夫掌隷院判决事知製敎耆齋姜公行狀*諱汝㦿字啓叔。耆齋其號也。訥隱集 권15 / 行狀이광정(李光庭, 1674~1756)의 자는 천상(天祥), 호는 눌은(訥隱)이다.晉陽之姜。出自中州。其後散處京鄕。多達官鉅人。國初。通亭淮伯及其孫希顔,希孟。以文章致盛名。今居京城諸姜。皆其後也。居於懷德者。祖於高麗兵部尙書民瞻。尙書副姜公邯贊。破契丹錄功。卒諡殷烈公。世有衣冠。中徙南原。遷于溫陽。至司僕寺正文翰。始居懷德之紫雲洞。至曾孫生貟符。再從兄弟凡十二人。並列于朝。節,籤,籒相繼入翰苑。世稱懷德竹下。其後有復泉,鶴年,雪峯,栢年,三休堂世龜。俱以淸白著稱。耆齋姜公。亦其一也。公諱汝㦿。字啓叔。耆齋其號也。高祖進士諱龜祥。寺正公之孫。有文行。隱居敎授。號齋心堂。卒。贈左承旨。曾大父號紫雲。卽生貟公。以學行薦授金泉道察訪。大父諱海老陵署郞。考諱渫進士。光海時。隨計吏貢。外親有得勢者。啗公以淸要官。不入試而歸。自懷德踰嶺。家于金山之耆老洞。實娶星山呂氏。正郞大老之女。以泰昌庚申十二月十六日生公。幼秀異。甫語。已解文字。有唐人過而相之曰。非凡人也。必流芳百世。甫成童。厲志讀書竆日夜。進士公慮其生疾。或時撤去書卷。已受業于族祖復泉公。復泉撫頂曰。必高大門閭者。十六。捷鄕解。連擧十餘試。輒不利禮部。辛卯。丁進士公憂。喪祭一用家禮。菜果不近口者三年。服闋。中甲午明經丙科。選入槐院。由正字,著作博士。己亥秋。陞典籍。乞覲還。冬。拜戶曹佐郞。庚子春。移禮佐。俱不赴。辛丑春。陞正郞。出知康津縣三年。棄歸。乙巳冬。拜平安道都事。翼年春。拜刑正。秋。除忠淸道都事。丁未夏。拜兵曹佐郞。移黃州牧判官。俱辭不赴。秋。拜正言䟽辭。冬。又拜正言疏辭。以母夫人年老故。戊申春。除晉州牧未幾。爲兵臬所不悅。卽棄歸。州民士女遮不聽去。迺乘夜馳出。兵臬搆公就理禁府。州民數百詣闕訟公。乃坐兵臬出公。己酉。丁母夫人憂。居喪喪祭。一如前喪。辛亥大饑癘。闔室渾遘。公獨奉几筵。隨凈移寓。躬執祭膳。時莅隣郡者。多公知舊。悶竆甚。爭致饋助。公先計祭需有餘。卽分竆族。賑及丐流。囊無䝰餘。服闋。拜掌令辭。壬子冬。守靈光郡。甲寅秋。以事棄歸。乙卯秋。拜獻納赴召未至。移司諫錄弘文。又移司成。冬拜執義。還司諫。同日又移執義。還司諫。許文正公穆於筵席。論公允協論思之地。拜副修撰。又移執義。還修撰。又拜司諫。以處置間事罷歸。未幾。拜副校理。又移執義。辭不赴。丙辰春。拜校理。旋擬東壁。未幾。加資出爲鍾城府使。始公以司成入齋太學。尹公鑴與公談論終日。出語人曰。姜某眞士君子。朝著中。豈多其人。而尙遲回左僚耶。公與尹初不相識。而疾尹公者猶疑其素相習。迺排擯公。遷之邊地。族祖雪峯公贈詩云。天資美玉溫。氣味春蘭馥。詩禮繼家風。忠貞迺素蓄。篤敬鏡重磨。愼言圭三復。四隣稱孝悌。六親欽婣睦。浮榮任倘來。雅志羞干祿。卑栖州郡間。及歸輒留犢。聖主方側席。知君最才淑。登于白玉堂。令人爭拭目。外重內還輕。寵擢分虎竹。宸衷軫遐氓。所以揀良牧。淸議惜遠出。經幃曠侍讀。後懶齋李公東標見之曰。莫如雪峯知公深。此百世信筆也。在鍾城。聞上求言。陳時弊數千言。戊午瓜還。鍾人立石刻公淸德。己未夏。拜判决事。不赴。連擬承旨,參議。出牧羅州。庚申禍起。閔宗道謫是州。觀察使素嗛閔。欲因嫁禍。迺言八力士昏夜屯集。牧使不擧覈發關行査。事將不測。適有武弁言於觀察曰。公將幷禍牧使耶。牧使士流。此事起。牧使必不免。公如公論何。觀察乃止。公三次辭報。直陳不撓。且搜邑人之陰嗾者。嚴械請罪。觀察辭屈。猶怒公。啓公揜伏鄕戰罷。公因就理。時大獄方張。禁府不遑覆。渰滯累朔乃出。壬戌六月七日。以疾終于家。享年六十三。用其年某月日。葬于星州薪谷坊慕禧川未向之原。從先兆也。公天資溫潤。氣度英秀。接人之際。和氣藹然。平居未明而起。斂容端坐終日。調諧之語。惰慢之氣。不設身體。事親則怡怡愉愉。甘旨之供。左右無匱。祭祀則必誠必敬。蘋蘩之薦。齊蠲俱致。居家有法。內外斬斬。率履蹈義。下至僕隷。亦皆觀感而愛敬焉。處鄕也。謙謙恂恂。不以爵位加人。居官也。公明以莅事。廉勤以律己。凡有饋遺。必量度義情。不以無名妄與。其爲官在外。家有峙餘。必散之親戚。不爲毫髮留。爲子孫計畫也。秉心公平。在朝無黨。絶跡權埶之門。常恬退。不榮幸進。雖有恩召。逡廵避縮。辭不得而後拜命。故立朝三十年。在京之日。不滿數朞。伯兄早沒。事嫂甚謹。奉養不怠。撫育孤姪。資給生理。鍾城歸。隣族爲病索蔘不得。及公病。貨諸人。乃服公。及沒。無以斂葬。待質田具庀。見者咸顧歎。公歷典名邑。其凊寒乃如此。尹相趾善代公鍾城交符。談語移日。及詢公居官節目。乃大服。語鏡城尹通判理曰。吾於當朝士類。必以姜某爲第一。公之歸。韓慶興翼世亦解龜同行。遇濟深。輸兩行載解裝暴之。韓見公裝途資寢具外無一物。歸語人曰。姜使君以一馬前。吾心偉之。而猶疑所齎者。及㬥見之。吾心赧焉。欲直投所齎于水而不能。眞使君之罪人也。韓於西班。有淸名者。而其歎服公如此。公嘗言北關之以士名者。無不聞字。情面與熟。而吾掌試。無一干者。及入塲。亦俟吾不見而納券。士習誠不易得。公孫震錫嘗赴漢城試。遇北士語其故。則曰我猶知之。是豈北儒之習迺然。迺先大夫公明正直。有以服其心故耳。羅州時。長孫當醮。家人請具幣。公召賈誶直。曰米四石。公笑曰。吾其爲一孫婚具。犯贓律乎。及拿命至。只齎路資而去。旣滯獄。費皆出債貸。時金公車+畺, 金孝基。再娶豐山金氏夫人。士人時翼之女。吏曹參判榮祖之孫。鶴沙之兄孫女也。順執婦道無違行。生一男一女。男棟天未冠夭。女朴命益。側室有二子。必中文科主簿,必儁。必亨有四男。震錫,震秀,震煥。喜達未冠夭。二女金昌鉉,金夢海。必昌以震秀後。必泰有四男。震顯,震益,震休,震彦。一女柳夢瑞生貟。李海潤有二男。柱臣,柱邦。黃無後。金孝基有嗣子世䤴生貟。朴命益有二女。必中有一男震德。四女許輗,李挺源,金亨錫,柳。必儁有二男。震甲,震望。曾玄以下凡若干人。鍾城時有一賤出。柳冢宰命天雅敬公。語人曰。人之遠色。不亦難乎。以耆翁之淸高。處塞上三年。則猶不能脫如也。公之見重於時可知已。近世之論士大夫淸修苦節者。必推復泉,雪峰,三休及公。俱有冰蘗聲。同出一門。輝映一時。爲當世淸門之宗。何其偉與。惟公位不稱德。蘊不大施。雖若可恨。而此則自有命物者。抑公斂約自守。不以爵祿爲心。而難進易退。希合寡與。有以致之也。其視世之隨時趨附。高致勢位者。得失何如也。顧其恭儉之德。孝友之行。植立之操。蘭雪之標。與同門數公者。有足以蟬蛻泥滓。飄洒末俗。愈久而不朽者。唐人之云流芳百世者。亦可謂善相公矣。光庭生也後。不得接公之遺塵。而少從長者後。聞公之遺風宿矣。迺者公之曾孫日觀氏以其叔父震休氏之記行一篇屬光庭。有所叙述之。顧老且無識。有言不信。曷足以當傳信之托。辭之固而請益勤。則取其記而讀之。其叙事謹而核。詳而不盡。有可以徵信者。迺不揆僭末。就記中略加櫽括。編次其始終如右。非敢以是而冀秉筆者之有所採擇。姑以塞慈孫遠逮之至意云爾。
    2023-07-13 | NO.280
  • 錦城日錄 -可庵遺稿 권31 / 襍著 -光州牧使 鄭日煥
    錦城日錄 -可庵遺稿 권31 / 襍著여범(汝範), 호는 이다. 乙巳尋許入。而不敢承見。還付來奴。○五月間。廵營以疑獄査事。招會五六守宰。留之旬日。本倅亦與焉。本倅甞與求禮沈益賢,順天柳協基鼎坐。語及御札還納事。沈柳皆曰此罪人㐫悍陰鷙。不似凡漢。操切之道。亦不可太急。須徐徐觀勢爲之云云。堪一捧腹也。光州牧使
    2023-07-31 | NO.279
  • 題光牧林沖擧歸來堂 - 임충거는 임붕 광주목사이다.
    題光牧林沖擧歸來堂
    2023-07-13 | NO.278
  • 가야금인(伽倻琹引) : 洛下生集冊五 / 因樹屋集[戊辰]
    東廛北市俱歎息。景陽 景陽湖。在湖南光州府北三十里。 盲師行乞食。盲師一生琹出名。十指腁胝因按抑。徘徊引卻竹杖行。有女如花顔色慽。當場拂拭悄遲回。生麻接絃帋補????。自言生小便離家。尋橦度索遊京華。學成能事最輕命。衆中得意遭驚嗟。沿江八月潦水盛。舊遊淹沒同漂楂。卽今眼枯筋力短。卻因就食來天涯。頃從湓上逐秊少。五日一市竆南徼。卻來市日盛逢人。拊節安知指灋玅。寧州玉纖 高麗田埜隱祿生。有贈金海琹妓玉纖纖詩。見金官????志。 通步虛。今世琹曲。有步虛調。 遠從百結 百結先生。失其名。新羅人。善操琹。 傳其要。而今不操向時音。依㨾京城作時調。長枝大葉風雨聲。天鵝海鸖邈飛鳴。南漢城邊賊騎逸。靑坡驛路輀車行。霛山女巫喉訴語。神房 今世琹曲。有神房調。 一曲頗傾城。鳴鐃擪篴轟陸續。百遭掩抑無能名。須臾斂撥悄自整。五絃一聲呺 平聲 而永。依肰仰息爲欷歔。四座無言顧餘景。聲音本自合神變。意氣應須惜瘦㾪。金官太守風流客。爲將匹帛慰凄冷。從來此琹出南陲。繁飾絃柱競新奇。府中小宋 宋剛▦內▣頗▦操琹。其父最善洞簫。府人呼剛爲小宋。 稍操弄。依似玄琴 玄琹。本出高麗王山岳。世傳山岳皷琹。玄鸖下舞。因名爲玄琹。 聲調遲。卽逢杯酒去相屬。入耳何必論參差。師乎師乎盍自重。琹中有舌人未知。이학규(李學逵, 1770~1835) 洛下生集冊五 / 因樹屋集[戊辰] 저자의 자는 성수(惺叟), 성수(醒叟), 본관은 평창(平昌)이다. 유복자로 태어나 외가인 星湖 李瀷 家門에서 자라면서 외조부 李用休로부터 星湖學派의 학문을 전수받았다. 정조에게 文詞를 인정받았으나, 1801년에 일어난 辛酉邪獄과 黃嗣永 帛書 事件 때 외숙 李家煥, 三從叔 李承勳이 죽었고, 저자 또한 이에 연루되어 전라도 綾州, 경상도 金海 등에서 24년간 유배 생활을 하였다. 유배 기간 중, 茶山 丁若鏞과 문학과 사상면에서 긴밀한 교유를 하였다.
    2022-02-22 | NO.277
  • 강남간사록〔江南幹事錄〕 - 미산집
    강남간사록〔江南幹事錄〕 직무 수행 기록 - 미산집 제8권 / 기(記) : 한장석(韓章錫, 1832~1894)갑술년(1874) 2월에 나라에 원자(元子) 탄생의 경사가 있어 증광시를 시행하였으므로 내가 왕명을 받고 호남좌도에 가게 되었다. 3월 상순 임자일에 대궐에 이르러 하직인사를 올리고 계판(啓板) 앞에서 별도로 분부를 받들었다. 또 특명(特命)으로 중희당(重煕堂)에 입대(入對)하여 직접 하유(下諭)를 받들었는데, 공정함을 갖추도록 힘쓰고 주선을 편리하게 하도록 노력하라는 말씀이었다. 그리고 여정의 원근과 왕복에 걸리는 시간을 물어보셨는데 말씀이 간곡하고 근엄하셨다. 은혜로이 돌아봐주시고 정중히 접대해주신 것은 대개 특별한 대우이다. 물러나 가만히 스스로 생각해보니 천신(賤臣)이 수십 년간 문필에 종사하면서 과거장에서 고생하며 대양(對揚)하리라는 일념을 일찍이 마음에 맹세했었다. 하물며 이제 지척에서 임금의 말씀을 들으매 돈어(豚魚)를 감읍시킬 만한데, 어찌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사사로운 뜻을 품겠으며, 두려운 마음으로 분발하여 정성과 노력을 다해 우러러 선발하여 보내시는 지극한 뜻에 부응할 생각을 하지 않겠는가? 시 한 수를 지어 뜻을 나타내고 절을 올리고 대궐을 물러나와 노량진을 건너는데, 청지기 김희상(金煕祥)ㆍ최경순(崔景淳)과 하인 김원길(金元吉)이 따라왔다. 고리(故吏) 오용묵(吳容默)이 일 때문에 남쪽으로 내려가게 되어 또한 함께 하였다. 해 질 녘에 문성동(文星洞) 선영에 두루 참배하고 시흥현(始興縣)에서 묵는데 수령 이근집(李根集)이 나와서 만나 보았다.계축일에 일찍 출발하여 부곡(富谷)의 여러 선조들 묘소에 성묘하고 점사(店舍)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광주(廣州) 주전(厨傳)이었다. 율전(栗田)에 있는 할아버지 묘소에 들러 참배하고 저녁에 화성부(華城府)에 이르렀다. 명령을 전하여 거쳐 가게 되는 여러 고을의 모든 친지와 인사들에게 만나러 오지 말도록 했다. 문지기에게 경계하여 편지나 명함을 통하지 말도록 하니 이르는 곳마다 엄숙하였다.갑인일 한낮에 진위현(振威縣)에 이르니 현령 목양석(睦養錫)이 나와서 만나보았다. 저녁에 성환역(成歡驛)에서 묵었는데 직산(稷山) 주전(厨傳)이었다.을묘일 한낮에 천안군(天安郡)에서 쉬는데, 군수 이민성(李敏性)이 나와서 만나보았다. 저녁에 광정역(廣亭驛 공주목에 속함)에서 묵었다. 병진일 한낮에 금강(錦江)에서 밥을 먹고 저녁에 노성현(魯城縣)에서 잤다.정사일 한낮에 은진현(恩津縣)에서 쉬는데, 현령 조종필(趙鍾弼)이 나와서 만나 보았다. 황화정(皇華亭)에 이르렀는데 호남의 첫 경계이다. 영읍(營邑)에서 맞이하는 의식이 이곳부터 점차 성대해졌다. 저녁에 여산부(礪山府)에 머물며 근민헌(近民軒)에서 묵는데 부사(府使) 권인병(權寅秉)이 들어와 만나보고 묵은 회포를 풀었다.무오일에 시읍(試邑) 화순현(和順縣)에 공문을 보내 많은 선비들에게 포고하기를 각기 마음을 다해 공부에 정진하고 부정한 방법을 쓰지 말도록 하였다. 낮에 삼례역원(參禮驛院)을 거쳐 저녁에 전주부에 이르렀다. 판관 김계진(金啓鎭)이 하루 전에 와 있어서 반갑게 만나 즐거움을 다하였다.기미일에 안찰사 조성교(趙性敎)가 나와서 만나보고 선화당(宣化堂)으로 맞아 들여 술자리를 마련하고 기악(妓樂)을 베풀어 대접해주었다. 비에 막혀 그대로 머물렀다.경신일에 비가 그치자 늦게 출발하여 유점(鍮店)에서 점심밥을 먹었는데, 전주 관주(官厨)에서 제공한 것이었다. 산길로 6, 7리를 가서 운암강(雲巖江)에서 배를 타고 가니 골짜기 여울이 매우 세찼는데 비가 온 뒤라 더욱 기세가 강했다. 배는 작고 사람은 많은데다 해 질 녘이 되자 바람이 높아져 건너기를 다투는데 날이 저물어서야 비로소 뭍으로 오를 수 있었다. 여기서부터 이 강물을 끼고 고개를 넘으니 잔로(棧路)는 매우 좁았지만 바위 틈 골짜기의 농장이며 밭과 촌락이 서로 바라보이고 뽕나무와 대나무며 가시나무 사립문이 은은히 그림과 같아서 닭과 개를 이끌고 가서 살고 싶을 지경이었다. 밤이 깊어 갈담점(葛覃店)에 이르렀고 임실(任實)에서 묵었다.신유일에 또 배를 타고 운암강 하류를 건너 정오에 순창군(淳昌郡)에서 쉬었다. 군수 조태영(趙台永)이 만나러 나와서 기녀를 대동하여 풍악을 울리고 함께 응향각(凝香閣)에 올랐다. 응향각은 군문(軍門) 안의 큰 못 가에 있는데, 붉은 기둥은 거울 같은 수면에 어리고 푸른 연잎이 바람을 부채질하며 아름다운 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며 고운 놀잇배를 마주해 있어 시원하게 트였으면서도 맑고 그윽하고 온갖 형상이 모두 잠겨 있으니 그곳을 호남의 명루라 일컫는데, 기녀와 관현의 성대함 역시 한 도의 으뜸이라고 할 만하다. 연주가 끝나기도 전에 〈여구(驪駒)〉가 이미 불리니 구점(口占)으로 시 한수를 짓고 작별하였다. 밤 2고(二鼓 10시 경)에 담양부(潭陽府)에 당도하니 부사 이승경(李承敬) 어른이 나오셔서 만났고 또한 노래하는 기녀들이 술자리를 도왔다.임술일에 5십 리를 가서 광주목에 이르러 잤다. 고을에 당도하기 5리쯤 전에 큰 도랑과 긴 숲이 길 왼편을 끼고 있었는데 연꽃이 필 때여서 서호(西湖)의 멋진 풍광보다 못하지 않았다. 목사 박봉하(朴鳳夏) 어른은 아버지의 친구이신데 만나 뵙자 매우 기뻐하셨다. 남평(南平) 사또인 벗 이위재(李渭在)는 부시관(副試官)으로 부안 사또인 벗 이영(李永)과 함께 와서 만났는데 천리 길에 부평초처럼 만나니 참으로 즐거워할 만하였다.계해일에 화순현을 향해 출발하는데 비가 갑자기 쏟아졌다. 험준한 절벽인 판치(板峙)를 넘어 10여 리를 말달려 읍에 당도하였다. 높은 가마를 타고 공복을 갖춰 입고 서양관(瑞陽館)으로 들어가 망궐례(望闕禮)를 행했다. 극위(棘圍) 밖에서 스물다섯 고을에서 책 상자를 지고 온 선비들이 길을 끼고 비를 맞으며 담처럼 둘러서서 보았다. 동청(東廳)으로 들어가 부시관 및 참시관인 동복(同福) 현감 이학래(李鶴來) 및 참시관인 본 고을 현감 강문영(姜文永)과 더불어 상견례를 하고 관리와 선비들을 호령하니 부서(部署)가 이윽고 엄숙해졌다.이튿날인 갑자일 아침 해가 돋을 무렵에 여러 유생들이 과거장에 모이기를 마쳤다. 글제를 게시하고 시권을 거두니 눈처럼 쌓이고 물결치듯 펄럭여 순식간에 웅이산(熊耳山)과 나란해졌다. 시필(試筆)의 흔적이 흥건한 것을 주의(朱衣)에게 일임하여 저울처럼 공정한 마음을 지니고 거울에 비추듯 주목하니 천군(天君 마음)이 환히 트여 온갖 사특함이 스스로 달아났다. 한낮부터 새벽에 이르기까지 고정(考定)을 다 마치고 그 다음날을 지나 병인일에 종장(終場)을 시험보이기를 역시 초장(初場)과 같이 하였다. 정묘일에 탁호(坼號)하여 방을 게시하였다. 무진일에 수계(修啓)했다. 기사일에 봉서(封書)를 보내고 비를 무릅쓰고 동복현(同福縣)에 이르러 잤으니 적벽(赤壁)을 보기 위해서였다.경오일에 동복 현감 이청전(李靑田)과 함께 무진루(無盡樓)에 올랐는데 무진루 위에 외조부이신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 선생의 시판(詩板)이 있었다. 옛날 순조 계해년(1803, 순조3) 봄에 선생이 경시관으로 이곳에 들리셨는데, 지금 72년이 지나 내가 또 이 임무로 마침 이곳에 왔으니 이 일은 우연이 아니다. 둘러보고 감회가 일어 시판의 시를 차운하여 그 아래에 새겨 걸었다. 수령과 함께 적벽(赤壁)에서 노닐었는데 고개 너머 10리 밖 저 멀리 붉은 벼랑이 가파르게 들쑥날쑥 솟았고 절벽이 병풍을 이루어 우뚝한 봉우리는 조각해 놓은 듯한데 무성한 녹음이 덮고 있었다. 한 줄기 맑은 계곡 물이 그 아래를 띠처럼 감돌아 배를 띄울 만했다. 붉은 산 푸른 물이 멀리까지 젖어들어 잠겨 있었다. 산꼭대기에 학소대(鶴巢臺)와 지기석(支機石)이 있고, 절벽 아래 조금 넓은 곳에는 ‘강선대(降仙臺)’며 ‘적벽동천(赤壁洞天)’이라고 새겨놓았는데 푸른 이끼 속에 붉은 글자라 물 건너편에서도 볼 수 있었다. 북쪽 벼랑의 몇 그루 반송(盤松)이 물에 임해 일산을 드리운 듯, 규룡이 서리고 용이 엎드린 듯한데 그 수령을 알 수 없었다. 조그만 집이 날개를 편 듯 절벽과 서로 마주보는데 편액에 ‘망미(望美)’라고 되어 있지만 옛 이름은 ‘환선(喚仙)’이었다. 숭정(崇禎) 정축년(1637)에 정지준(丁之儁)씨가 재난을 듣고 의병을 일으켰다가 얼마 후 산으로 들어가 은거하며 노년을 마치고자 하였는데 정자는 그때에 건립되었다. 자손들이 대대로 지켜오다가 여러 번 흥폐를 겪었으나 지금은 완전히 새로 수리하였다. 선현들의 제영(題詠)이 자못 많았는데, 외할아버지께서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의 시에 차운한 것도 있었다. 공경히 그 운자를 따라 지어서 수령에게 판에 새겨 달라고 부탁하여 흔적 없이 사라질 수도 있는 자취를 의탁하였다.술이 깨기도 전에 다시 물염정(勿染亭)으로 향했다. 물길을 따라 산을 둘러 물굽이를 돌아 6, 7리를 가니, 문득 조그만 골짜기가 열렸다. 기이한 봉우리가 둥글게 에워싸서 마치 성벽 같은데 조그만 언덕이 돌출하여 가운데 있고 맑은 냇물이 띠처럼 둘렀으며 푸른 솔이 이어졌는데 나는 듯한 용마루가 그 위에 우뚝하니, 깊으면서도 실은 트여 있고 맑으면서도 실은 화려하였다. 그 속에 들어간 사람은 마치 호중구화(壺中九華)에 노니는 것 같았다. 정자를 지은 사람은 창주옹(滄洲翁)으로 지금도 나씨(羅氏)의 소유이다.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시를 차운하여 시를 짓고, 동복(同福) 수령과 작별하였다. 30리를 가서 광주 무등산에 당도하였고 산길로 들어가 10리를 가서 원효암(元曉庵)에 닿았는데 산길은 매우 험했고 날도 저물어 어두워졌다. 사또 박 어른께서 주방 아전과 가기(歌妓)를 보내어 산행을 도와주었다.신미일에 간편한 가마를 타고 승경을 찾아갔다. 산승이 알려주기를, “오른편으로 산발치를 따라 10여 리쯤 가면 입석대(立石臺)이고, 수백 보를 더 가면 서석대(瑞石臺)입니다. 또 5, 6리를 더 가서 상봉에 오르면 그곳이 이 산의 가장 높은 곳입니다. 또 10리를 가다가 내려가면서 풍혈(風穴)을 보고, 광석대(廣石臺)에서 쉬면 관람이 끝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승려의 말대로 차례차례 올라가 구경하였다. 입석대는 색이 검푸르고 네 모서리가 먹줄을 대고 깎은 듯했으며 우뚝하게 산등성이 위에 나란히 버티고 서 있었다. 높이는 10여 장(丈)이고 병풍처럼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는데, 관악기가 옥처럼 쌓이고 기둥이 금빛 죽순처럼 솟은 것 같아 사람으로 하여금 폐부가 모두 맑아지게 했다. 북을 치고 피리를 부는데 소리가 어디로부터 나는지 알 수 없더니 한참 후에 그쳤다.서석대는 얽힌 바위가 큰 언덕을 이루었고 흙이 덮여 평평한 대(臺)를 이룬 것이 여러 층이어서 아래에서 올려다보아야만 비로소 그 높이를 깨닫게 된다. 상봉(上峯)은 특히 우뚝 높고 커서 수만 떨기를 묶어 평지에서 솟구쳐 올라 있었다. 그 모양이 마치 용이 헤엄치며 바다로 가는 듯, 비늘과 지느러미가 노여워 뻗친 듯, 빽빽이 모이고 삐쭉삐쭉 솟아 있었다. 높다랗게 세 봉우리를 이룬 것은 천(天), 지(地), 인(人) 삼황봉(三皇峯)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그 정상에 올라보니 돌이 가지런하여 나막신을 수용할 만했지만 좌우로 여유 공간이 없어 말에 걸터앉듯이 하였다. 바다 위를 굽어보니 늘어선 고을이 빽빽하여 바둑돌을 늘어놓은 듯하고 끝자락의 산기슭과 단절된 항구들이 높았다 낮았다 하였다. 하늘 끝 구름 안개 아득한 곳을 가리켜 보이며 아마도 남해일 것이라 했다.붉은 해가 뜨겁게 내리쬐는데 일산에 의지해 술을 마시고 술을 마신 후에는 노래를 부르라고 명하여 푸른 벼랑이 떠나갈 듯하니 호탕하여 한문(寒門)에 날아오르고 홍애(洪崖)를 치는 듯한 생각이 들어 배회하며 한참을 있다가 떠났다. 이 길을 따라 조금씩 내려오는데 참대나무와 오래된 등나무 덩굴이 옷과 띠를 갈고리 마냥 걸리게 하여 허리를 구부리고 땅을 골라 디디며 지나왔다. 거의 산허리쯤 이르자 큰 바위가 빽빽이 늘어서서 칼을 뽑은 듯 중첩한 봉우리를 이루고 있었는데 꼭대기에 구멍이 있어 햇빛이 새어들기에 바라보니 문과 같았다. 운근(雲根)을 밟고 월굴(月窟)을 더듬으며 거의 사람이 통할 수 없는 길을 까치걸음으로 더위잡고 올라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크고 작은 바위들이 눕기도 하고 서기도 한 채 뒤섞여 있었다. 그 틈새가 봉합되지 못한 곳이 저절로 깊숙한 구멍을 이루었는데 그 넓이가 가로 세로 두어 개의 홀(笏)만 하여 고개를 숙여 들어갔다가 빠져 나와 그 꼭대기로 올라가니 심히 위태로웠으며 또 기이한 경관도 없었다. 정송강(鄭松江 정철(鄭澈))의 발길이 닿은 곳인 까닭에 유명한 것이다. 이곳이 이른바 풍혈(風穴)이다.그 밑은 광석대(廣石臺)로 어지러운 바위가 사방으로 둘러 서 있는데 높이가 모두 수십 길이었다. 대가 그 가운데 자리하여 수십 인이 앉을 만하였고 금강산 명경대(明鏡臺)와 같았는데, 움푹 깊은 것은 그보다 심했으나 깨끗하게 솟은 것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바위틈으로 흐르는 물과 숲 속 꽃송이가 짙푸르고 붉게 빛나 술을 마시며 노래를 하는데 바람이 세차 벽락동(碧落洞)에 들어선 듯 떨려서 오래 머물수가 없었다. 호남의 산은 기묘함이 적은데 오직 바다를 둘러싼 여러 산들은 자못 우뚝하고 훌륭하다고 하나 지대는 더욱 낮다. 오직 이 산만 높이 솟아 남방의 으뜸이 되었으니 무등(無等)이라는 이름이 이런 이유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나무와 맑은 샘은 없고 웅장한 하나의 산일뿐인데 특별히 바위로써 그 변화를 다했다. 다만 그 드러내 보임이 일정치 않아 나머지 땅에는 소홀하였고 조각을 하는 데는 너무 기교를 부리다가 천진함에서 멀어졌다. 사람에게 비유하자면 평소에 녹녹하여 빼어난 절조가 없던 사람이 출세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는 행동이 있는 것과 같다. 《시경》에 이르기를 “위의가 매우 성대하여 가려낼 수가 없다.〔威儀棣棣, 不可選也.〕”하였으니, 가려낼 수 있다면 어찌 훌륭한 선비이겠는가? 저녁에 증심사(證心寺)에 이르러 묵었다. 절이 산문(山門)에 있어 대숲과 시내와 골짜기의 승경을 갖추고 있었다.임신일 새벽에 비가 오다가 아침에 갰다. 광주(光州)에 들러 박 어른께 인사드리고 동창(東倉)에 당도하여 오찬을 먹었다. 저녁에 장성부(長城府)에 도착했는데 18년 전 아버님께서 부임하셨던 곳이다. 소자가 모시고 따라 온 적이 없어서 일찍이 기징사(奇徵士)와 백양산(白羊山)을 보지 못한 것이 매우 유감이었다. 징사는 이름이 정진(正鎭)인데 남방의 유종(儒宗)이며, 백양도 역시 남방의 명산이다. 이번 걸음에 오래 묵은 소원을 풀게 되었다. 제민헌(濟民軒) 관아에서 묵으니 이졸(吏卒)이 모두 구면인 듯이 기뻐하였으며 그 이름을 들어보니 종종 예전 근무자도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늙었다. 기징사가 사는 곳을 물어보니 이미 지나쳐 왔다.이튿날 계유일에 하인을 물리치고 혼자 먼 길을 말을 타고 가서 장성부 하사(下沙)에 이르러 찾아뵈었다. 큰 체격에 용모가 훌륭하고 훤칠하여 존경할 만하였다. 연세가 지금 연세 70여 세에 늙고 또 병들었으나 낙천적이고 장중하여 도(道)를 지닌 자임을 알 수 있었다. 한참 동안 더불어 이야기하였는데 의논이 순정(醇正)하고 심성이 소탈하였다. 작별에 임하여 “저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시겠습니까?” 물으니, 이렇게 답하였다. “ 일명지사(一命之士)가 마음을 보존하고 사물을 사랑한다면 반드시 백성을 구제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그대는 이미 벼슬길에 나가 임금을 섬기니 나랏일에 힘을 쏟으시길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또, “근세의 유자(儒者)들은 입만 열면 문득 심성(心性)과 이기(理氣)를 말하며 일생을 애쓰지만 일에 무슨 보탬이 있겠습니까? 마땅히 삼가 정주(程朱)의 서언(緖言)을 지켜 궁행 실천할 뿐입니다. 장점을 겨루고 단점을 끌어내어 송사하듯 설이 분분한 것과 같은 것은 저는 귀를 막고 듣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들어보면 대개 뜻이 독실하고 지키는 바가 간략한 것이 노년에 이르기까지 변함없는 선비였으니, 지금 세상에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이겠는가?장성부로 돌아오는 길에 백양산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아형(雅兄)인 이재국(李在國)은 오랜 친구인데, 상을 당하여 집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집이 큰길 곁에 있으므로 조문하려고 들렀다. 청암역(靑巖驛)을 지나 백양산 아래에 이르니 길은 평탄하나 궁벽한 곳이라 나무숲 그늘이 짙었으며 초가집이 나란히 어우러져서 매우 그윽한 운치가 있었다. 두 산이 바짝 좁아져 골짜기를 이루었고 골짜기 입구에는 단청한 들보가 시내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이곳이 쌍계루(雙溪樓)였다. 노승 인정(印正)이 시를 청하기에 포옹(圃翁)의 판상(板上) 시를 차운하여 주었다. 견여(肩輿)를 갖추도록 명하여 숲길을 뚫고 냇물을 건너 구불구불 돌아 올라갔다. 울창한 숲 속에 석봉(石峰)이 빼어남을 다투며 종종 반쯤 드러나 보여 흰 구름처럼 하얗게 푸른 하늘에 솟아 있었다. 백련암(白蓮庵)에 투숙하였는데 산꼭대기 높은 절벽이라 진세를 벗어난 듯한 뜻이 있었다. 난간 밖으로 몇몇 봉우리가 엄연히 다가와 손을 맞잡고 읍하는 듯하였다. 한밤중 경쇠와 범패 소리에 뭇 산들이 모두 메아리쳐서 충분히 사람에게 깊은 반성을 일으켰다.갑술일에 운문사(雲門寺)를 방문했다. 스님 한 사람이 앞장서고 푸르름이 싸인 하늘 속으로 사람의 그림자가 오르내리는데 바라보니 흰 새가 오가는 것 같았다. 빽빽한 숲은 햇빛을 가리고 그윽한 샘은 답하듯 울리는데 잔도와 비탈길을 꺾어 돌며 누차 멋진 경치를 만났다. 비온 후라 더욱 선명하고 윤기 나는 데다 맑게 내달리는 것이 즐길 만하였다. 절에 당도하니 높고 널찍하여 조망이 탁 트였다. 경담(鏡潭)이라고 부르는 산인(山人)은 총명하여 불경에 능통하고 자못 계행(戒行)이 있었다. 앞길을 찾아 가다가 왼쪽으로 가니 돌길이 갑자기 끊겼으므로 남여를 버리고 걸어서 한 등성이를 올라가니 제단처럼 넓고 평평한데 그 위에 큰 소나무가 솟아있고 햇빛이 땅에 닿지 못하며 바람이 불어 옥구슬 소리를 냈다. 물외암(物外庵)과 약사암(藥師庵) 두 암자를 굽어보며 영천암(靈泉庵)에 이르니 모두 절벽 밑에 깃들어 있었다. 지난번에 보았던 푸른 산 중 석봉(石峰)의 중턱인데, 그 배 부분을 불룩하게 하여 처마를 토해내고 있어 바라보니 학의 둥지나 호랑이굴과 같았다. 그런데 영천굴(靈泉窟)은 더욱 기이하여 속은 넓고 밖은 좁게 오므라져 휑하니 문이 되었고 사찰이 깊이 감추어져 비바람을 가릴 수 있었다. 그 속으로 들어서니 매우 어둡고 차가웠으며 맑은 물방울이 바위 구멍으로부터 방울방울 떨어지는 것을 대를 쪼개 받아내는데 물맛이 차가워 품평할 만했다. 굴 문을 나서서 오른쪽으로 가니 연이은 산봉우리의 정상이 홀연히 갈라져 길쭉하게 뻗어 마치 문틀에서 들보가 삐져나온 듯, 한 점의 흙도 없이 가파르게 솟아 있었다. 사다리를 부여잡고 올라가 보니 그 밖은 바로 백련암 경내였다. 풀ㆍ나무ㆍ산봉우리ㆍ골짜기가 모두 전에 두루 지나온 곳이었으나, 굴속의 풍광은 별세계 같았다. 쌍계루에 돌아와 밥을 재촉해 먹고 산을 나서서 갈현(葛峴)을 넘어 내장산(內藏山)으로 들어서니 정읍(井邑) 땅이다. 고갯길이 구불구불해서 물고기를 꿴 듯 줄지어 개미가 쳇바퀴 돌 듯 돌아서 겨우 평지에 도착했다. 맑은 샘과 흰 바위, 빽빽한 숲과 겹겹한 산등성이로 그 경내가 매우 그윽하였다. 산길을 여러 번 구비 돌아 그 열고 닫히는 비경을 이루 다 감당할 수 없었는데 온통 푸른색이어서 원근을 구별하지 못했다. 사찰 대여섯 곳은 지금은 모두 영락했고, 오직 벽련암(碧蓮菴)이 쉴 만했다. 이번 걸음에 명산을 구경한 것이 셋인데, 서석산(瑞石山 무등산)은 우뚝 솟았으나 벌거숭이 산이고, 내장산은 그윽하지만 속되고, 물과 바위와 숲과 산봉우리가 승경을 아우른 것으로는 마땅히 백양산이 최고라 하겠다. 각각 시 한편을 지어 승경을 기록하였다.을해일 한낮에 입비촌(立碑村)에서 쉬고, 저녁에 담양부(潭陽府)에서 잤다. 병자일에 비가 심하게 내렸다. 포시(晡時 오후 3~5시)에 순창군에 도착해서 머물러 잤다. 조 사또가 노래하고 춤추는 기녀를 선발해 풍악을 울려 즐겁게 해주었다.정축일에 여전히 비가 내렸다. 느지막이 밥을 먹고 조 사또와 응향각(凝香閣)에서 작별한 다음 적성강(赤城江)을 건넜는데 강가의 산이 맑고 고와서 사랑스러웠다. 배 안에서 시를 지어 조 사또에게 부치고 남원에 도착하여 묵는데, 관사(館舍)며 성지(城池)가 가장 웅장하고 화려하다고 일컬었다. 남문밖에는 높다랗고 널찍한 누가 있는데 앞으로는 큰 못에 임했고 대숲 섬과 연못과 무지개다리며 붉은 사다리가 표연히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오를 것 같은 상상을 갖게 하였다. 오른쪽으로 교룡산성(蛟龍山城)을 바라보니 푸르름이 서로 얽혔고, 앞으로는 큰 들판이 있어 저 멀리까지 드넓고 맑고도 깨끗하였다. 여기가 예로부터 일컫던 광한루(廣寒樓)인데, 선현들의 시제 판이 벽에 가득하였다. 또 요선관(邀仙館), 영주각(瀛洲閣), 삼신산(三神山), 오작교(烏鵲橋)가 있어 좌우로 늘어서 있다. 모두 신선의 이름을 빌려 쓴 것이지만 시정(市井)과 너무 가까우니 진짜 신선을 불러오진 못할 듯 했다. 임백호(林白湖)의 시에 차운하여 시를 짓고, 비로소 화순에서 임실로 향했다. 직로(直路)를 취하면 이틀 만에 이를 수 있지만 시험 시기가 아직 멀었기 때문에 길을 우회하여 여기에 이른 것인데, 여전히 날짜에 여유가 있었다. 마침 서울에 있을 때는 만나지 못했던 벗인 부사(府使) 윤횡선(尹宖善)을 만났다. 며칠 머무를 흥취는 없었지만 일찍 남쪽으로 내려와 송광산(松廣山)과 월출산(月出山)의 승경을 맘껏 보지 못한 것이 유감스러웠다.무인일에 오수역(獒樹驛)에 도착하니 해가 아직 정오가 되기 전이었지만 머물러 그곳에서 묵었다. 관사(官舍) 동쪽 편에 조그만 누각은 득월루(得月樓)라고 불렀는데, 역시 맑고 탁 트여 바라볼 만하였다.기묘일에 30리를 가서 임실현(任實縣)에 도착해 교열루(敎閱樓)에 올라가 공복(公服)으로 바꿔 입고 운수관(雲水館)에서 망궐례(望闕禮)를 행했다. 운수관의 편액은 바로 종증조부이신 익정공(翼貞公)의 필적이었다. 동청(東廳)에 자리를 열고 현감 정준화(鄭駿和) 수령과 상견례를 하였다. 부안(扶安) 수령이 또 부시관(副試官)으로 왔고, 참시(參試)는 오수(獒樹) 승(丞) 왕경련(王景鍊)이었다.무인일에 유생들을 크게 모아 초장(初場)에서 논(論)과 의(疑)를 시험하였다. 기묘일에 도 전체에 부(賦)와 표(表)를 시험하였다. 경진일에 책(策)을 시험하여 삼장(三場)을 다 마쳤다. 답안을 고시(考試)하여 방을 내건 것이 바로 신사일 새벽이다. 근년에 조정의 명으로 매양 감영(監營)에서 동당시(東堂試)를 합설하였는데 도별로 나누어 옛 제도를 회복한 것은 금년부터 시작되었다.임오일에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20리쯤 가서 오원강(五黿江)을 건넜다. 한 줄기가 골짜기를 의지하여 흐르는데 맑고 투명하여 밑바닥이 보였으며 얕아서 옷을 걷고 건널 만했다. 또 20리를 가 만마관(萬馬關)에서 쉬었다. 관은 두 산이 협소해지는 곳이자 남쪽으로 가는 길의 요충지에 위치해 있다. 옛날부터 견훤(甄萱)이 웅거했다는 곳으로 전해오는데, 옛 성(城)은 훼손되고 무너져서 방어할 수는 없다. 전 관찰사 이호준(李鎬俊) 공이 처음 수리하여 보(堡)를 설치하고 남고진장(南固鎭將)으로 하여금 월별로 구분하여 지키게 하니 망루와 관아가 환하게 빛나 웅부(雄府)와 같았다. 시 2편을 지었다. 30리를 갔지만 전주성(全州城)에 이르지 못했다. 두 산이 마주 솟아 있고 여러 물줄기가 합쳐져 협곡에서 쏟아져 내리니 바위와 돌무더기에 부딪혀 금(琴)이며 축(筑) 소리를 이루었다. 한 굽이를 막 돌아들어 바라보니 붉은 기둥이 아스라이 건너편 벼랑에 나는 듯이 솟아 있었다. 하인이 “한벽당(寒碧堂)입니다.”라고 알려주더니 물을 건너 달려갔다. 높이 층층한 산봉우리를 베고 저 멀리 맑은 물결을 움키면서 비스듬히 남고산성(南固山城)을 마주하고 있는데, 성가퀴가 가려졌다가 보였다가 하고 그윽하면서도 시야가 넓고 평평하여 흉금을 펼칠 만하였다. 낭랑히 좌태충(左太冲)의 “천길 높은 산봉에 옷 먼지 털고, 만 리 흐르는 강물에 발을 씻노라.〔振衣千仞岡, 濯足萬里流.〕” 구절을 읊조리는데 시를 마치기도 전에 석양이 산에 걸렸으므로 누를 내려와 수레를 몰아 남성(南城)으로 들어왔다. 통판(通判)이 관소로 와서 만나보고 인근 지역의 인사 또한 찾아온 자가 있어 비로소 문을 활짝 열고 평소처럼 접대하니 모두들 시험에 탈락한 자도 원망이 없다고 말하였다. 아아, 한 치의 마음이 비록 은미하나 남을 속일 수 있겠는가? 스스로를 속이면서 남에게 믿음을 구하기는 어려우리라.계미일에 오랜 친구인 관찰 통판(觀察通判) 이우선(李禹善)군을 찾아갔다. 서울로부터 남쪽 지방에 와서 살고 있어 몇 해 동안 만나지 못했다. 운수관에서 게효(揭曉)하던 날 저녁에 시로써 풍자하며 손을 잡고 막혔던 회포를 풀었는데 전송을 위해 이곳에 뒤쫓아 왔다가 이곳에 이르러 작별하고 갔다. 이날 밤새도록 크게 비바람이 쳤다. 영부(營府)에서 가희(歌姬)를 보냈는데 거문고와 시(詩)와 그림에 능한 기녀였다.갑신일에 비가 오고 날이 개질 않으니 사또가 내가 가는 것을 만류했지만 가고 머무는 것에는 기한이 있으니 한번 어기면 여러 고을에 폐를 끼치게 됨을 생각하고 드디어 출발하여 공북루(拱北樓)를 지났다. 공북루와 만경대(萬景臺)와 승금호(勝金湖)는 모두 예전에 보았던 곳이므로 생략하고, 배를 타고 대천(大川)을 건너 낮에 삼례원(參禮院)에서 밥을 먹었다. 도랑물이 넘쳐 진창이 미끄럽고 비가 아직 개지 않았다. 마부와 하인이 고생하며 말을 몰아 황혼녘에 여산부(礪山府)에 닿았다.을유일은 쾌청하였다. 황화정(皇華亭)에 이르니 감영에서 나와 모시던 사람과 아전, 관노들이 모두 인사하고 떠났다. 이날 고시와 근체시 각 1편을 지었다. 저녁에 경천역(擎天驛)에서 잤다. 병술일은 광정역(廣亭驛)에서 잤다.정해(丁亥) 일에 목천(木川) 땅에 들러 산장으로 박영래(朴永來) 군을 방문하고 저녁에 성환역(成歡驛)에서 잤다. 일가 사람 한원교(韓元敎)가 만나러 왔기에 그가 사는 마을을 물어보니 큰길에서 5리 정도 거리였다. 무자일에 지나오다가 저녁에 오산점(五山店)에서 잤다. 기축일에 과천현에서 잤다. 경인일에 도성으로 들어와 복명(復命)하고 집으로 돌아가니 실로 4월 중순이었다. 날짜를 세어보니 41일이 지났고 다닌 길이 1,947리여서 기록해둔다.[주-D001] 직무 수행 : 원문은 우역(于役)으로, 《시경》 〈군자우역(君子于役)〉에서 나온 말이다. 왕명을 받아 직무를 수행하러 가는 것을 의미한다.[주-D002] 대양(對揚) : 임금의 명을 받들어 백성에게 널리 알리는 것을 의미한다. 《서경》〈열명 하(說命下)〉에, “감히 천자의 아름다운 명을 그대로 선양(宣揚)하겠습니다.〔敢對揚天子之休命.〕”라고 한 문장에서 나온 말이다. 대(對)는 답한다는 뜻이고, 양(揚)은 선양한다, 송양(頌揚)한다는 뜻이다.[주-D003] 돈어(豚魚) : 미물을 의미한다. 《주역》 〈중부괘(中孚卦) 단(彖)〉에 “괘사(卦辭)에서 돼지와 물고기에까지 미치게 되면 길하다고 한 것은 그 믿음이 돼지와 물고기에게까지 미치게 되기 때문이다.〔豚魚吉, 信及豚魚也.〕”라는 말이 나온다.[주-D004] 오용묵(吳容默) : 본관은 해주이다. 유학(幼學)으로 1883년 박문국 사사(博文局司事)로 근무하였으며, 다른 인적 사항은 자세히 알 수 없다.[주-D005] 문성동(文星洞) : 경기도 시흥현(始興縣)에 속한 마을이다.[주-D006] 이근집(李根集) : 1823~?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성여(成汝)이다. 1858년에 진사시에 합격, 음직으로 진출하여 하급 관직을 거쳐 1873년부터 시흥 현령으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다는 평가를 받았다.[주-D007] 주전(廚傳) : 지방에 나가는 관원에게 경유하는 역참에서 음식과 거마를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역주 사직악기조성청의궤》[주-D008] 목양석(睦養錫) : 본관은 사천이며, 1872년 11월부터 1875년 7월까지 진위 현령을 지냈다.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전한다.[주-D009] 이민성(李敏性) : 자세한 인적 사항은 알 수 없다. 고종 때 현릉 영, 진잠 현감(鎭岑縣監)을 거쳐 1872년에 천안 군수로 부임했다.[주-D010] 조종필(趙鍾弼) : 1840~? 본관은 한양, 자는 은상(殷相)이다. 1867년(고종4) 진사시에 장원, 1874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선공감 주부 등 여러 관직을 거쳐 1872년에 은진 현감으로 부임했다.[주-D011] 황화정(皇華亭) : 충남 논산시 연무읍 고내리에 있던 정자이다. 조선 시대에는 충청도 땅이 아니라 전라도 여산읍 소속이었다. 이곳에서 전라도 관찰사가 임무를 교대하던 곳으로 우암 송시열이 지은 〈황화정기(皇華亭記)〉현판이 걸려 있었다.[주-D012] 권인병(權寅秉) : 자세한 인적 사항은 알 수 없다. 1873년에 여산 군수로 부임했다.[주-D013] 시읍(試邑) : 과거장을 여러 고을을 돌아가면서 설시(設施)하는데, 그해 과장을 설시한 곳을 시읍이라고 한다.[주-D014] 김계진(金啓鎭) : 인적 사항은 미상이며, 1864년(고종1)부터 장악원 주부, 청산(靑山) 현감, 남원 현감을 지냈고, 1874년(고종11) 전주 판관으로 부임하였다.[주-D015] 조성교(趙性敎) : 1818~1876. 본관은 한양, 자는 성유(聖惟),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1859년(철종10) 문과에 급제, 1866년(고종3) 성균관 대사성ㆍ이조 참의 등을 역임하였고 이듬해 동지사 부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71년(고종8)에 예조 판서에 올랐고, 동지사의 정사로 재차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1874년에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주-D016] 조태영(趙台永) : 인적 사항은 자세히 알 수 없다. 1868년(고종5) 충훈부 봉조관을 지내는 것을 시작으로 노성 현감(魯城縣監), 안성 군수(安城郡守)를 지냈고, 1873년(고종10)에 순창 군수(淳昌郡守)로 부임했다.[주-D017] 여구(驪駒) : 《대대례기(大戴禮記)》에 나타나는 일시(逸詩)의 편명으로, 손님이 떠나려 하면서 이별의 정을 표시하는 노래이다. 손님이 “검정 망아지 문에 있고 마부 모두 대기하오. 검정 망아지 길 위에 있고 마부 멍에 올리었소.〔驪驅在門, 僕夫具存. 驪驅在路, 僕夫整駕.〕”라고 노래를 부르면, 주인은 ‘손님이여 돌아가지 마오’라는 뜻의 〈객무용귀곡(客無庸歸曲)〉을 불렀다 한다. 《漢書 卷88 王式傳》[주-D018] 이승경(李承敬) : 1815~? 인적 사항은 자세히 알 수 없다. 1866년(고종3)부터 문의 현령, 괴산 군수, 은율 현감 등을 지냈으며 1872년(고종9)에 담양 부사로 부임했다. 《경조부지(京兆府誌)》를 편찬하였으며, 문집으로 《여사난고(餘事亂藁)》를 남겼다.[주-D019] 서호(西湖) : 중국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에 있는 호수로 풍광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주-D020] 박봉하(朴鳳夏) : 1809~1881. 본관은 밀양, 자는 성구(成九), 호는 동정(東井)이다. 1852년(철종3) 음사(蔭仕)로 은진 현감을 지냈으며, 장흥 부사ㆍ대구 판관ㆍ대흥 군수(大興郡守)ㆍ해주 판관을 거쳐 1873년 광주 목사로 부임했다. 경상북도 영천에 애민선정비(愛民善政碑)가 있다.[주-D021] 이위재(李渭在) : 인적 사항은 자세히 알 수 없다. 1866년 강릉 참봉(康陵參奉)을 지내고 그 이후로 의금부 도사, 장악원 주부를 거쳐 1873년에 남평 현감으로 부임하였다.[주-D022] 이영(李永) : 자세한 인적 사항을 알 수 없다.[주-D023] 극위(棘圍) : 경비가 삼엄한 과거 시험장을 가리키는 말이다. 극원(棘院)이라고도 한다. 합격자 발표를 하는 날 낙방한 응시자들의 난동을 방지하기 위하여 가시나무 울타리를 쳤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舊五代史 卷127 和凝列傳》[주-D024] 이학래(李鶴來) : 인적 사항은 자세히 알 수 없다. 1866년(고종3) 서부 도사(西部都事)를 지냈고, 그 이후 사재감 봉사, 화령전 수문장(華寧殿守門將), 희릉 영(禧陵令) 등을 거쳐 1874년에 보성 군수로 부임했다.[주-D025] 강문영(姜文永) : 인적 사항은 자세히 알 수 없다. 1873년(고종10)에 화순 현감(和順縣監)으로 부임했다가 이듬해 전라 감사 조성교(趙性敎)에 의해 파직되었다.[주-D026] 웅이산(熊耳山)과 나란해졌다 : 몹시 높은 것을 말한다. 웅이산(熊耳山)은 하남성(河南省) 의양현(宜陽縣)에 있는 산인 바, 한나라 때 광무제(光武帝)가 적미군(赤眉軍)을 진압하고서 그들에게서 노획한 병갑(兵甲)을 의양성 서쪽에 쌓아 놓았는데, 그 높이가 웅이산과 나란하였다고 한다. 《後漢書 卷11 劉盆子列傳》[주-D027] 주의(朱衣) : 주의사자(朱衣使者)를 줄인 말로 과거시험 고시관을 가리킨다.[주-D028] 종장(終場)을 …… 하였다 : 과거 시험을 초ㆍ중ㆍ종장이라 하여 3일 동안 보는데, 초장(初場)에는 사서(四書) 가운데 의심을 일으키게 할 만한 대목을 논하도록 하여 논(論)과 표(表)를 짓게 하고, 중장(中場)에는 부(賦)와 표(表)를 짓게 하고, 종장(終場)에는 책문(策文)을 짓도록 했다. 여기서 종장을 초장과 같이 했다는 말은 시험을 시행하고 관리하는 방식을 동일하게 했다는 의미이다.[주-D029] 탁호(坼號) : 과거 급제자 명단이 든 봉투를 뜯어보고 성명을 부르는 것을 말한다.[주-D030] 수계(修啓) : 보고할 내용을 정리하여 계문(啓文)을 작성하는 것을 말한다.[주-D031] 적벽(赤壁) : 현재 전남 화순군(和順郡) 이서면(二西面) 창랑천(滄浪川) 일대의 절벽을 말한다. 적벽이란 명칭은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동복으로 귀양 온 최산두(崔山斗)가 중국의 적벽에 버금간다 하여 붙였다고 한다.[주-D032] 이청전(李靑田) : 청전은 이학래(李鶴來)의 호이다. 인적 사항은 자세히 알 수 없다. 1866년(고종3) 서부 도사(西部都事)를 지냈고, 그 이후 사재감 봉사, 화령전 수문장(華寧殿守門將), 희릉 영(禧陵令) 등을 거쳐 1874년에 보성 군수로 부임했다.[주-D033] 무진루(無盡樓) : 동복현에 적벽 부근에 있었던 누정이다. 치헌(癡軒) 조효능(趙孝能)이 세운 것으로, 소동파의 《적벽부》 내용 가운데 맑은 바람과 밝은 달빛은 조물주가 무진장 허락한 것이니 누리는 사람이 주인이라는 뜻을 따서 정자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豊墅集 無盡樓記》[주-D034] 망미(望美) : 망미정은 병자호란때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정지준(丁之儁, 1592~1663)이 1646년(인조24)에 세운 정자로, 화순군 이서면 장학리의 적벽을 바라보는 곳에 있다.[주-D035] 정지준(丁之儁) : 1592~1663. 본관은 압해(押海), 자는 자웅(子雄), 호는 적송(赤松)이다. 준(儁)은 준(雋)으로 표기된 곳도 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양인용 등과 함께 호남 의병 100여 명을 이끌고 청주를 거쳐 남한산성에서 싸우던 중,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귀향하여 망미정을 짓고 학문에 전념했다.[주-D036] 물염정(勿染亭) : 전라남도 화순군의 경승지인 화순 적벽(和順赤壁) 상류에 있는 정자이다.[주-D037] 호중구화(壺中九華) : 돌이 매우 기이하고 아름다운 광경을 이룬 것을 의미한다. 송나라 때 호구(湖口) 사람 이정신(李正臣)이 괴이한 돌을 쌓아 구봉(九峯)을 만들었는데, 소동파(蘇東坡)가 호중구화(壺中九華)라 이름 짓고 시를 읊었다. 소식의 〈호중구화시서(壺中九華詩序)〉에 “호구 사람 이정신이 이석(異石)을 가졌는데 아홉 봉우리가 영롱하게 굽이져 창령(窓櫺)과 같았다. 그래서 나는 1백 금(金)으로 그것을 사서 구지석(仇池石)과 짝을 지으려 했는데 남쪽으로 옮기게 되어 미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름을 호중구화라 함과 동시에 시로써 기록한다.”라고 하였다.[주-D038] 창주옹(滄洲翁) : 나무송(羅茂松, 1577~1653)으로, 본관은 나주, 자는 수부(秀夫), 호는 창주(滄洲)ㆍ만취(晩翠)ㆍ물염정(勿染亭)이다. 1615년(광해군7) 문과에 급제하여 거산 찰방(居山察訪), 정언(正言), 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에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몽진(蒙塵)하자 병조 정랑으로 임금을 호종(扈從)하였으며, 강화가 이루어지자 관직에서 물러나 물염정(勿染亭)에서 학문을 닦으며 여생을 보냈다. 《창주문집(滄洲文集)》이 있다.[주-D039] 원효암(元曉庵) : 광주 무등산 원효 계곡에 있는 사찰로, 문무왕 때 원효(元曉)가 이곳에 머무르면서 절을 개축한 후부터 원효사ㆍ원효암ㆍ원효당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었던 영규(靈圭)가 이곳에서 수도하였다고 전한다.[주-D040] 한문(寒門)에 날아오르고 : 시원하다는 의미이다. 주자(朱子)가 공풍(鞏豐)에게 답한 편지에, “이 무더운 여름철을 당하여 한문에 날아올라 시원한 바람에 씻은 듯하다.〔當此炎燠, 灑然如羾寒門而濯淸風也.〕” 하였는데, 《초사(楚辭)》 〈왕일(王逸)〉의 주(注)에, “한문은 북극(北極)에 있는 차가운 곳이다.” 하였다. 《朱熹集 卷64 答鞏仲至》[주-D041] 홍애(洪崖)를 치는 : 신선이 된 듯하다는 의미이다. 홍애는 전설상 황제(黃帝)의 신하로서 신선이 된 영륜(伶倫)의 호이다. 요(堯) 임금 때 이미 나이가 삼천 살이었다 한다. 《神仙傳》 곽박(郭璞)의 〈유선시(游仙詩)〉에, “왼손으로는 부구의 소매를 당기고, 오른손으로는 홍애의 어깨를 친다.〔左相浮丘袖, 右拍洪崖肩.〕”는 표현이 보인다.[주-D042] 운근(雲根) : 벼랑이나 바윗돌을 뜻하는 시어(詩語)이다. 두보(杜甫)의 시에 “충주 고을은 삼협의 안에 있는지라, 마을 인가가 운근 아래 모여 있네.〔忠州三峽內, 井邑聚雲根.〕”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그 주(註)에 “오악(五岳)의 구름이 바위에 부딪쳐 일어나기 때문에, 구름의 뿌리라고 한 것이다.” 하였다. 《杜少陵詩集 卷14 題忠州龍興寺所居院壁》[주-D043] 월굴(月窟) : 전설에 달이 지면 들어가 쉰다는 굴로, 서쪽에 있다고 한다. 월굴을 더듬는다는 표현은 높이 올라갔다는 의미이다.[주-D044] 벽락동(碧落洞) : 풍광이 깨끗하고 좋은 곳의 대명사처럼 쓰이는 말이기도 하고, 구체적 지명을 일컫는 경우도 있다. 《계승(桂勝)》에는 벽락동을 막연한 숲이 깊고 그늘지며 물이 맑고 운치 있으며 바위가 높지만 밝고 트인 곳을 대개 벽락동과 같다고 설명하였고, 《강서통지(江西通志)》에는 익양현(弋陽縣) 관아 동북쪽에 산이 깊고 바위가 험한 곳이 있는데 그곳 석벽에 ‘벽락동천(碧落洞天)’이라는 넉자가 새겨져 있다고 하였으며, 소동파의 시에 언급된 벽락동은 영주(英州) 아래 14리에 있는 곳이라고 스스로 주석을 달았다.[주-D045] 위의가 …… 없다〔威儀棣棣, 不可選也.〕 : 《시경》 〈백주(柏舟)〉에서 인용한 구절이다.[주-D046] 증심사(證心寺) : 무등산에 있는 사찰이다. 860년에 철감선사(澈鑑禪師)가 창건하였고, 1094년에 혜조국사(慧照國師)가 중수하였으며, 1443년 전라도 관찰사 김방(金倣)이 자신의 녹봉으로 중창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자 1609년(광해군1) 석경(釋經), 수장(修裝), 도광(道光) 등의 선사들이 중창하여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임제종(臨濟宗) 운동의 본부가 되었다. 1951년 4월 50여 명의 무장공비들에 의하여 대부분의 건물이 불탔으며 1971년에 크게 증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주-D047] 기징사(奇徵士) : 기정진(奇正鎭, 1798~1879)으로,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대중(大中), 호는 노사(蘆沙),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학덕이 높아 조정의 부름을 받은 선비를 징사라고 하는데, 기정진은 1866년(고종3)에 조정에서 동부승지, 호조 참판 등에 임명하였으나 사양하였다. 학문에 전념하여 서경덕(徐敬德), 이황(李滉), 이이(李珥), 이진상(李震相), 임성주(任聖周)와 함께 성리학의 6대가(六大家)로 일컬어진다. 《노사문집(蘆沙文集)》이 있다.[주-D048] 일명지사(一命之士)가 …… 것입니다 : 일명지사는 처음 벼슬길에 나선 선비를 가리키는데, 벼슬하는 선비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와 대동소이한 말이 《근사록(近思錄)》 권10에, 정명도(程明道) 선생의 말로 있다. “처음 벼슬한 사가 진실로 만물을 사랑하는 데 마음을 두면 사람에게 반드시 구제해 주는 바가 있을 것이다.〔一命之士, 苟存心於愛物, 於人, 必有所濟.〕”라고 하였다.[주-D049] 이재국(李在國) : 1838~? 본관은 청안, 1885년(고종22) 사마시 증광시에 3등으로 합격, 1890년 무렵에 의령원 수봉관(懿寧園守奉官)을 지냈다. 그 외 인적 사항은 자세히 알 수 없다.[주-D050] 쌍계루(雙溪樓) : 백암산 백양사 입구에 있는 누각이다. 1370년에 무너진 뒤 1377년에 복구되었으며, 정도전ㆍ이색 등이 기문을 남겼다. 이색의 〈백암산정토사쌍계루기〉에 의하면 이곳에서 두 계곡의 물이 합쳐지므로 ‘쌍계루’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주-D051] 포옹(圃翁) : 정몽주(鄭夢周)를 가리킨다. 《신증 동국여지승람》 〈장성현〉에, 백암사의 승려가 요청하여 포은 정몽주가 쌍계루에서 지어준 시가 전한다.[주-D052] 백련암(白蓮庵) : 백양산 중턱에 있었던 암자인데,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주-D053] 운문사(雲門寺) : 백양사(白羊寺)의 산내암자인 운문암을 가리킨다. 백암산 최고봉인 상왕봉(象王峰) 아래에 있다. 고려 충정왕(재위 1349~1351) 때 각진국사(覺眞國師) 복구(復丘, 1270~1355)가 개창하면서부터 고승들의 수도장으로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유적만 남아 있다가 1985년 복원되었다.[주-D054] 경담(鏡潭) : 1824~1904. 경담은 법명이며, 본명은 서관(瑞寬)이다. 어려서 장성 백양사(白羊寺)로 출가하였으며, 그 뒤 구암사(龜巖寺)의 백파(白波)로부터 불경과 외전(外典)을 배운 뒤 선암사(仙巖寺)의 침명(枕溟)으로부터 선법(禪法)을 공부하였다. 임종에 관해서는 전하지 않는다. 《東師列傳》[주-D055] 물외암(物外庵)과 …… 영천암(靈泉庵) : 물외암, 약사암, 영천굴은 모두 백양사의 산내암자이다. 영천암은 영천굴 속에 있다.[주-D056] 영천굴(靈泉窟) : 백양사 경내에 있다. 영천굴은 20평 남짓한 천연석굴로 단칸의 영천암이 있는 곳이다. 굴속의 바위틈에서 샘이 솟아나오는데 이를 영천이라 한다.[주-D057] 벽련암(碧蓮菴) : 내장산 서래봉 중턱에 있다. 한동안 내장사라 불리기도 하다가 근세에 와서 영은암을 내장사로 개칭하고 이곳은 다시 벽련암이라 칭한다.[주-D058] 입비촌(立碑村) : 정읍과 담양 사이의 길목에 있었던 마을인 듯한데, 구체적인 위치는 알 수 없다.[주-D059] 응향각(凝香閣) : 순창 관아 안의 동헌 옆 연못가에 있었던 누각이다.[주-D060] 적성강(赤城江) : 섬진강의 상류로서 순창군 적성면을 흐르는 구간을 적성강이라고 부르며 남원군 대강면에서부터 섬진강으로 불린다.[주-D061] 붉은 사다리 : 원문은 단제(丹梯)인데, 선경(仙境)으로 들어가는 길을 의미한다.[주-D062] 교룡산성(蛟龍山城) : 남원산성(南原山城)이라고도 불린다. 산성을 언제 쌓았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성을 쌓은 입지나 형식으로 볼 때 백제 때 만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주-D063] 임백호(林白湖) : 임제(林悌, 1549~1587)로, 본관은 나주, 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ㆍ풍강(楓江)ㆍ소치(嘯癡)ㆍ벽산(碧山)ㆍ겸재(謙齋)이다. 1576년(선조9) 생원진사시에 합격, 이듬해 알성시에 급제한 뒤 흥양 현감, 북도 병마사, 예조 정랑을 거쳐 홍문관 지제교를 지냈다. 《임백호집》이 있다.[주-D064] 윤횡선(尹宖善) : 1832~?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경구(景搆)이다. 1872년에 남원 부사로 부임해 있었다. 1882년(고종19) 증광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임금의 특별 명령으로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임명되었다. 그 후 사간원 대사간, 성균관 대사성, 이조 참의 등을 역임하였다.[주-D065] 송광산(松廣山) : 전라남도 순천의 송광면 신평리에 있는 조계산(曹溪山)의 옛 이름이다.[주-D066] 월출산(月出山) :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과 강진군 성전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광주의 무등산(無等山), 순천의 조계산(曹溪山)과 함께 호남의 명산으로 손꼽힌다.[주-D067] 교열루(敎閱樓) : 임실현 관아 안에 있었던 누각이다.[주-D068] 운수관(雲水館) : 임실현 관아인 동헌이다.[주-D069] 익정공(翼貞公) : 한용귀(韓用龜, 1747~1828)로, 본관은 청주, 자는 계형(季亨), 호는 만오(晩悟), 시호는 익정이다. 1772년(영조48) 성균관 재학시 황감제(黃柑製)에서 장원급제하고, 이듬해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진하사(進賀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바 있으며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지냈다.[주-D070] 정준화(鄭駿和) : 인적 사항은 자세히 알 수 없다. 1866년부터 의릉 참봉, 선공감 봉사 등을 지내고 1872년 임실 현감으로 부임했다.[주-D071] 삼장(三場) : 과거(科擧)에서 초장(初場), 중장(中場), 종장(終場) 세 번의 시험을 치는 것을 가리킨다.[주-D072] 동당시(東堂試) : 대과(大科)나 문과(文科)의 속칭, 혹은 증광시(增廣試)를 말한다.[주-D073] 오원강(五黿江) : 임실 관촌면 일대를 흘러가는 섬진강 줄기를 부르는 명칭이다.[주-D074] 만마관(萬馬關) : 전주에서 남원(南原)으로 가는 길에 슬치재를 못 가서 있는 전주의 관문이다.[주-D075] 견훤(甄萱) : 867~936. 전주 견씨(全州甄氏)의 시조이고, 본성은 이(李)이며, 아자개(阿慈介)의 아들이다. 후백제의 초대 왕(재위 900~935)으로 관제를 정비하고 중국과의 국교를 맺고 궁예의 후고구려와 충돌하며 세력 확장에 힘썼다. 후에 고려 왕건에게 투항하여 신검 토벌을 요청해 후백제를 멸망시켰다.[주-D076] 이호준(李鎬俊) : 1821~1901.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충백(忠伯),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1864년(고종1) 경과 증광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 홍문관 부제학을 거쳐 이조 참의에 임명되었다. 1867년에 친척의 자제인 이완용(李完用)을 양자(養子)로 입적, 당시 서자(庶子)로 이윤용(李允用)을 두고 있었다. 1870년 전라도 관찰사 재임 중 외침에 대비한 성의 수보(修補)와 군사훈련에 힘썼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중추원 의장, 궁내부 특진관, 의정부 참정을 지냈다.[주-D077] 전 …… 하니 : 《승정원일기》 고종 10년(1873) 4월 15일 기사에 보면, 전주부의 만마관은 육로(陸路)로 통하는 요해처이니 그 성을 완전히 축조하고 곁에 관아(官衙)를 설치하여 남고진장(南固鎭將)으로 하여금 봄가을로 돌아가며 지키도록 해 달라는 전라 감사 이호준(李鎬俊)의 장계에 대해 윤허하는 내용이 나온다.[주-D078] 좌태충(左太沖) : 태충은 진(晉)나라 좌사(左思)의 자이다. 인용한 시구는 그가 지은 〈영사시(詠史詩) 8수〉가운데 제5수에서 나온 구절이다. 《文選 卷21》[주-D079] 관찰 통판(觀察通判) : 관찰사의 감영에 소속된 판관(判官)을 가리킨다.[주-D080] 게효(揭曉) : 과거 시험 합격자 명단을 공포(公布)하는 것을 의미한다.[주-D081] 공북루(拱北樓) : 전주부의 공북루를 가리킨다. 지금의 전라북도 전주시 팔복동에 자리한 누각으로 조선 시대에는 조정에서 조령(朝令)을 받들고 사람이 내려올 때 부윤(府尹)이 나가 맞던 곳이기도 하다.[주-D082] 삼례원(參禮院) : 전라도 전주부(全州府) 삼례도(參禮道)로, 전주부 북쪽 35리에 있다. 지금의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면 지역이다.[주-D083] 여산부(礪山府) :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군 여산면에 해당하는 곳이다.[주-D084] 경천역(擎天驛) : 경천역(敬天驛)이라고 쓰기도 한다. 지금의 충남 공주시 계룡면 경천리 일대이다.[주-D085] 광정역(廣亭驛) : 광정역(廣程驛)이라고 쓰기도 한다. 지금의 충남 공주시에 속했던 지명이다.
    2020-12-14 | NO.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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