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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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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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라대가 해양(海陽)의 무등산(無等山) 꼭대기에 주둔하였다 - 동사강목 제11상
    동사강목 제11상 신해 고려 고종 38년부터, 을해 고려 충렬왕 원년까지 25년간 병진년 고종 43년(송 이종 보우 4, 몽고 헌종 6, 1256) 8월 최항이 신흥창(新興倉)을 열어서 그의 가병(家兵)을 진휼하였다.○ 장군 송길유(宋吉儒)를 보내어 청주(淸州) 백성을 섬으로 옮기게 하였다.○ 몽고군이 갑관강(甲串江) 밖에 둔쳤다.앞서 차라대가 해양(海陽)의 무등산(無等山)지금의 광주부(光州府 동쪽 10리에 있다 꼭대기에 주둔하였다. 군사 1천 명을 남쪽으로 보내 노략질하고 또 수군[舟師] 70척[艘]을 거느리고 압해(押海)지금의 나주(羅州) 압해현(壓海縣) 를 쳤다. 압해 사람들이 큰 배[大艦]에다 대포를 설치하고 기다리니, 차라대가 바라보고 말하기를,“우리 배가 포를 맞으면 다 부숴질 터이니 당해낼 수가 없다.”하고, 다시 배를 옮겨서 공격하게 하니, 압해 사람들이 옮기는 곳을 따라 대포를 비치하므로, 차라대가 이기지 못할 줄 알고 마침내 수공(水攻)하는 기구를 파해 버리고 왕준ㆍ홍복원 등과 더불어 갑관강 밖에 이르러 크게 기치를 늘어세우고, 밭에 말을 먹이며 통진산(通津山)에 올라 강도의 형세를 바라보고, 물러가 수안현(守安縣)폐현(廢縣)으로 지금 통진부(通津府) 남쪽 15리에 있다 에 주둔하였다.
    2020-09-15 | NO.35
  • 참봉 박광오공 묘표〔參奉朴公墓表〕 -손재집
    참봉 박공 묘표〔參奉朴公墓表〕 -손재집 제8권 / 묘표(墓表) : 박광일(朴光一, 1655~1723)공은 휘가 광오(光五)이며, 자는 사정(士正)이고, 성은 박씨(朴氏)로, 평양(平陽) 사람이다. 우리나라 문숙공(文肅公 박석명(朴錫命))의 후손이다. 증조는 휘 운정(雲挺)이다. 조부는 휘 창문(昌文)이다. 아버지는 휘 상고(尙古)이다. 어머니는 광산 이씨(光山李氏)로, 성균관 진사 이지원(李之遠)의 딸이다.공은 숭정(崇禎) 후 신묘년(1651, 효종2) 3월 1일에 태어났다. 운명이 기구하여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었고, 공의 재종형인 안촌(安村 박광후(朴光後))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는데, 문예(文藝)가 일찍 완성되어 문장으로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었다. 무오년(1678, 숙종4) 안촌의 초상에 상복으로 기년복을 입었다.을묘년(1675)부터 기미년(1679)까지 5년 동안, 시배(時輩)들에게 무함을 당하여 과거를 폐하였다. 신유년(1681) 진사 시험에 입격하였다. 병인년(1686) 효릉(孝陵) 참봉에 임명되었다. 이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병환이 위독해지자 손가락 피를 올렸다. 복을 마쳤을 무렵, 시사(時事)가 또 크게 변하여 관직에 나갈 마음이 다시는 나지 않았다. 임신년(1692, 숙종18) 1월 1일 병으로 세상을 떴는데, 향년 42세였다. 광주(光州) 북쪽 석제리(石堤里)에 장례 지냈다가, 뒤에 광주 거점리(巨岾里) 오좌자향(午坐子向 북향) 언덕에 다시 무덤을 썼다.공은 천품이 자애롭고 어질었으므로 종친을 사랑하여 은혜와 의리가 있었고, 후배가 장족의 발전을 하는 것을 보면 성심으로 기뻐하며 개발하였다. 위난을 당했을 때 의리로 보아 해야 할 일은 회피하지 않았다. 을묘년(1675)에 사화가 일어났던 날에도 크게 참소의 예봉을 건드려 안촌(安村) 같은 분들과 꼼짝없이 엄히 옥에 갇혀 결국 형틀에서 매일 화를 당하면서도 의지와 기개가 쇠하지 않았다. 우암(尤菴) 선생이 봉해(蓬海)에 위리안치되었을 때, 시배들이 종묘에 고하자는 청이 더욱 급박해지자 호남의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신원하였는데 공은 기꺼이 그 소에 참여하니, 고(故) 판서 서하(西河) 이공(李公)이 무척 중히 아꼈다.아내는 함양 박씨(咸陽朴氏)로, 박성(朴惺)의 딸이다. 아들 넷을 낳았으니, 중현(重鉉)ㆍ중대(重大)ㆍ중집(重集)ㆍ중서(重瑞)이다. 중집은 안촌에게 후사로 갔다. 딸은 두 명으로, 장녀는 생원 윤도함(尹道涵)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임진효(任鎭孝)에게 시집갔다. 손녀, 손자는 모두 어리다.임진년(1712, 숙종38) 봄, 내가 방장산(方丈山) 아래 있을 때, 중대가 수백 리 길을 멀다 않고 찾아와, 나에게 명(銘)을 써 달라고 매우 간곡히 말하였다. 예전에 서로 돈독히 사랑했던 것을 생각하면 차마 사양하지 못할 점이 있었고, 더구나 중대가 묘소를 다시 정하고 묘도(墓道)에 표시하고자 하는 정성이 매우 가상하니 또 어찌 사양할 수 있겠는가. 마침내 다음과 같이 명을 썼다.갈라지는 길 어찌 겁내리오 / 岐路奚㥘바른길이면 가고 굽은 길이면 버렸으니 / 趨正舍曲도중에 횡액을 만났으나 / 中罹屯厄의지와 기개 더욱 확고했네 / 志氣愈確이제 비석에 새기어 / 載鑱于石숨은 덕을 천명하노라 / 用闡潛德[주-D001] 운명이 …… 여의었고 : 박광오 행장에 의하면 10세에 고아가 되었다. 《性潭集 卷30 參奉朴公行狀, 韓國文集叢刊 244輯》[주-D002] 을묘년부터 …… 폐하였다 : 갑인예송으로 송시열이 귀양을 간 뒤, 송시열을 역적죄로 종묘에 고해야 한다는 고묘론(告廟論)이 제기되었고, 이를 반대하던 박광호는 관찰사 권대재(權大載), 목사 박흥문(朴興文)에게 거슬러 옥을 살았다. 《性潭集 卷30 參奉朴公行狀, 韓國文集叢刊 244輯》[주-D003] 시사(時事)가 …… 않았다 : 1689년(숙종15) 장희빈 소생 아들(훗날 경종)의 원자 책봉을 계기로 정국이 바뀐 기사환국(己巳換局)을 말한다. 이로 인해 송시열(宋時烈), 김수항(金壽恒) 등이 귀양 갔다가 사사되었고, 많은 노론과 소론의 인물들이 귀양 갔다.[주-D004] 시배들이 …… 신원하였는데 : 갑인예송으로 오례(誤禮)의 죄를 입어 송시열이 귀양 간 뒤, 조사기(趙嗣基)와 허목(許穆) 등은 송시열을 종묘에 반역으로 고하고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고묘론(告廟論)을 폈다. 호남 유생의 상소란 생원(生員) 윤헌(尹攇) 등 5백 42인의 상소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국역 숙종실록 1년 윤5월 12일, 3년 6월 7일ㆍ19일》
    2020-12-28 | NO.34
  • 참판(參判) 한공(韓公) 성우(聖佑) 의 신도비명 병서- 한성우 광주목사
    참판(參判) 한공(韓公) 성우(聖佑) 의 신도비명 병서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의 《한수재집(寒水齋集)》 제25권 / 신도비(神道碑)근세에 사계ㆍ우암 두 선생이 도학을 전승하여 온 세상의 사종(師宗)이 되었는데, 한공 여윤(韓公汝尹)은 사계의 외손자로 우암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젊어서부터 모든 것을 보고 듣고 하여 깨끗한 조행을 스스로 지니었고, 나아가 벼슬할 때에 미쳐서는 곧은 도리로 임금을 섬기어 끝까지 법문(法門)의 끼친 법도를 훼손시키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의 천성이 그러하거니와 연원(淵源)의 소유래(所由來) 또한 속일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공의 휘는 성우(聖佑)인데, 숭정(崇禎) 계유년 4월 1일에 태어났다. 총명하고 단아하며 글재주가 뛰어났으므로, 어른들이 공의 조예가 한량할 수 없을 정도로 기약하였다. 약관 시절에 누차 해액(解額)을 따냈었는데, 기유년에야 사마시에 합격하니, 사우(士友)들이 늦은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이때 송곡(松谷) 조공 복양(趙公復陽)이 이조 판서로 있으면서 공을 금오랑(金吾郞)에 의망하려 하자, 공은 마치 자신을 더럽힐 것처럼 극력 사양하였다. 이해 겨울에 부친상을 당하였고, 다음해에 또 모친상을 당하였다.갑인년에 사화(士禍)가 일어나려 하자, 수백 인의 선비들을 인솔하고 우암 선생의 억울함을 변명하고는, 인하여 세상과 인연을 끊고 호우(湖右)에 자취를 감추었다. 경신년의 대출척으로 인하여 으뜸으로 녹용되어 숭릉침랑(崇陵寢郞)에 제배되고, 관례에 따라 봉사ㆍ직장에 옮겨졌다.갑자년에는 성균관 제술에서 장원하였고, 이해 겨울에는 전시(殿試)에 합격하여 자궁(資窮)으로 예조 좌랑에 승진되었다. 을축년에는 병조에 옮겨져 호남에서 시험을 관장하였는데, 호남 사람들이 공의 공정함에 심복하였다. 이때에 사론(士論)이 이미 갈라져서 한 전랑(銓郞)이 공을 함경도 도사로 내보내자, 친구들이 모두 공의 좌천된 것을 위문하였는데, 공은 조금도 언짢은 기색이 없이 하직하여 말하기를 “북도의 명산(名山)은 내가 평소 보고 싶었던 곳이다.” 하였다. 그리고 막부(幕府)에 이르러서는 다만 시가나 읊조리는 것으로 유유자적하였고 성기(聲妓)는 한 번도 가까이하지 않았다.병인년에는 사헌부 지평에 소배(召拜)되었는데, 이때 원임대신 이상진(李尙眞)이 민희(閔煕)와 홍우원(洪宇遠)을 석방할 것을 청하자, 공이 양사와 함께 이상진을 공박하였다. 그런데 동료 대관 가운데 이의를 세우는 자가 있자, 공이 인피하여 말하기를 “홍우원의 말은 왕대비를 범하였고 민희의 죄는 종사에 관계되는데, 대신이 그들을 신구한 것은 진실로 무슨 마음에서인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아울러 사간 이홍적(李弘迪)과 장령 안규(安圭)의 언론을 회피한 과실을 논핵하였다. 우상 정재숭(鄭載嵩)이 연경에 사신으로 가서 상께 벌환(罰鍰)을 매기는 치욕을 받고 돌아오자, 공이 동료와 함께 그를 논핵하였고, 또 차자를 올려 궁가(宮家)의 절수(折受)의 폐단을 논하여 말하기를 “하루 사이에 이미 혁파할 것을 윤허했다가 다시 그전대로 두도록 하시니, 이는 실로 임금의 말 한마디가 나라를 일으키고 망치는 기미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하였다.이윽고 사간원 정언에 옮겨졌다. 이에 앞서 교리 이징명(李徵明)이 궁금의 일을 말했다가 상의 뜻에 거슬리었으므로, 공이 상소하여 그를 구하였다. 그후에 다시 앞서의 논의를 되풀이하였는바 말이 더욱 격절하였으므로, 상이 진노하여 차마 들을 수 없는 엄한 전교를 내리고 즉시 공의 간관직을 체직하였다. 그러자 정원이 체직의 명을 돌려보내고 옥당이 차자를 올려 시정을 요구하니, 상이 이에 공에 대한 체직의 명을 환수할 것을 명하고 비답의 말도 고쳐서 내렸다. 이때에 조정과 외방이 모두 공을 대신해서 두려워 떨었으나 공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전조(銓曹)에서 공을 40여 차례 이상 여러 내외직에 의망하였으나 끝내 상이 권점(圈點)을 내리지 않으므로, 노봉(老峯) 민 상공(閔相公)이 공을 불러 금위 종사(禁衛從事)로 삼았다. 그러다가 무진년에 원자(元子)가 탄생함으로써 비로소 공에게 예빈시 정을 제수하였다.기사년에는 큰 사화가 일어나서 또 우암 선생이 제주도에 유배되자, 공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있으면서 서울에는 발도 딛지 않았다. 갑술년에는 성상이 크게 뉘우쳐 깨달음으로써 공이 으뜸으로 소명을 받아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공은 강연(講筵)에 오를 때마다 글 뜻을 해석하고 나서는 경사(經史)를 널리 인증하여 일에 따라 개도(開導)하고, 또 청하기를 “《성학집요(聖學輯要)》가 임금의 일상 행사에 가장 적절하니, 때때로 열람하면 반드시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계달한 말이 매우 적절하니, 의당 각별히 유념할 것이다.” 하였다.이윽고 교리에 옮겨서는 우상 윤지완(尹趾完)에 대한 불윤비답(不允批答)을 대신 지으면서 ‘인륜이 무너졌다[彝倫斁敗]’는 말을 썼는데, 이에 대해 윤 정승이 자기에게 비난의 뜻을 부친 것인가 의심하여 매우 노여워하자,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나의 본의가 아니다.” 하였다. 그러나 끝내 변명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사년의 방중(榜中)에 급제한 명가(名家)의 자식으로 병조의 낭관이 된 자가 하나 있자, 공이 말하기를 “만일 그가 스스로 옳게 처신하지 않으면 내가 반드시 그를 공박할 것이다.” 하였고, 홍문록(弘文錄)을 만들 때에 이르러서는 부제학 오도일(吳道一)과 쟁론하여, 기사년의 방중에 급제한 사람은 하나도 그 선(選)에 들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청의(淸議)는 조금 펴졌으나, 시배들이 공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것은 더욱 심해졌다.이때 칠(漆) 3두, 호초(胡椒) 40두를 대내로 들여오라는 명이 있자, 공이 응교로 차자를 올려 그 일을 논하였다. 그 대략에 “지금 이 물품의 수량이 매우 많은데, 전하께서 어디에 쓰시려는 것입니까. 만일 아무런 쓸데없는 일을 하는 데에 면치 못한다면, 신은 성상의 마음이 사치의 지경으로 들어간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깊숙한 방 안에서 남이 모르는 가운데 한 생각이 겨우 싹이 텄더라도 하늘은 이미 환하게 내려다보는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삼가고 두려워하는 뜻을 더욱 지키소서.” 하였는데, 상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그리고 집의에 체배되었는데, 이때 묘향(廟享)을 재감하자는 의논이 있자, 공이 주자(朱子)의 말을 인용하여 헌의하기를 “지금 상하 기관의 쓸데없는 비용을 전체적으로 계산하여 감하거나 혁파하는 일을 모든 기관에 모조리 다 시행하지 못하면서 먼저 묘향부터 감한다면 어찌 온당치 못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성명께서는 큰 뜻을 분발하여 힘써서 먼저 스스로 검약하소서.” 하였다.공이 일찍이 국문하는 자리에 참여했었는데, 이때 위관(委官)인 남상 구만(南相九萬)이 이의징(李義徵)을 감사(減死)하자는 의논을 제기하자, 공이 쟁론하기를 “의징은 화심(禍心)을 품고 누차 큰 옥사를 일으켜 사대부들을 마구 죽이고 국가에 해를 끼쳤으니, 용서해서는 안 된다.” 하고 누차 말하였으나 듣지 않으므로, 공이 일어나서 나오려고 하니, 위관이 부득불 공의 말대로 따랐다.이로부터 수찬을 두 번, 교리ㆍ응교ㆍ사간을 각각 세 번, 집의를 두 번 역임하고 동부승지에 올라 병으로 체직되었다. 그후 호조 참의에서 회양 부사(淮陽府使)로 나갔다가 을해년에 들어와 다시 승지가 되었다. 병자년에는 예조 참의로 삼척 부사(三陟府使)에 보임되었다. 정축년에는 사간원 대사간이 되어, 무지개와 천둥의 이변을 인해서 분부에 응하여 소장을 올려 재변을 중지시킬 절실한 방도를 극력 말하고, 또 경연에 자주 나갈 것과 세자를 보익할 것과 임금의 덕을 닦아 조정을 바르게 하고 염치를 면려하여 장법(贜法)을 엄히 할 방도에 대해 거의 수천 언을 진술하였는데, 상이 온후하게 비답하였다.무인년에는 철원 부사(鐵原府使)가 되었다가 기묘년에 돌아와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 이해 가을에는 또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나갔는데, 다음해에 그만두고 돌아오니, 광주 백성들이 공의 덕을 기리어 산비탈을 깎고 쇠를 주조하여 비를 세웠다. 신사년에는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자신을 단속하는 것이 매우 엄격하였고, 호령이 명확하고 엄숙하였다. 당시 도내에 여러 궁가(宮家)가 널리 점유한 산택(山澤)이 수십 군데에 이르렀으므로, 공이 장계(狀啓)를 올려 혁파하기를 청하면서 거취(去就)를 조건부로 삼아 쟁론하였으나, 조정이 이를 덮어 두고 시행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계미년에는 누차 소를 올려 체직되어 돌아와 호조ㆍ병조ㆍ예조의 참의와 승지ㆍ대사간ㆍ판결사에 제배되었는데, 그중에는 재차 제배된 벼슬도 있었다.갑신년 가을에는 또 대사간이 되어 3건의 일을 상소하여 논했는데, 하나는 선혜청(宣惠廳)의 쌀을 가져다가 시전(市廛)에서 외상으로 가져온 물건 값을 갚으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대관(臺官) 김만근(金萬謹)을 변방 고을에 물리쳐 보직시키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지평 김재(金栽)가 아첨하여 할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을유년에는 또 승지에서 예조로 옮겨졌는데, 이때 존호(尊號)에 관한 의논이 있자, 공이 자신의 직사(職事)로 상께 간하면서 육 선공(陸宣公)의 “태평한 때에 행하여도 이미 겸허함에 누가 되거니와, 상란(喪亂)이 있는 때에 행하는 것은 더욱 사체를 손상시킨다.”는 말을 인용하여 정성을 다해 개진하니, 상이 윤허하고 “과인을 지성으로 사랑한다.[忠愛寡躬]”는 전교를 내렸다. 이해 가을에는 개성 유수에 승진되어 무비(武備)를 일신시키고 부고(府庫)를 가득 채워놓으니, 피폐한 백성을 소생시키고 폐해진 일들을 흥기시킨 효과가 크게 있었다.정해년에는 병조 참판에 체배되었고, 무자년에는 서반직으로 의금부 당상을 겸하였다. 이때에 직신(直臣) 이동언(李東彥)이 시배들에게 증오가 쌓임으로 인하여 불효의 죄에 빠져 3년 동안 옥에 갇혀 있었는데, 성상의 뜻도 그에게 의도적인 것이 있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그 일을 말하기를 꺼려 했었다. 그런데 공이 상소하여 그 일을 논하되, 사건의 근본적인 것을 숨김없이 설파하고 증거의 단서를 죽 열거하였다. 그리고 인하여 이동언의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운 정상을 명백하고 적절하게 말하였으므로, 보는 이들은 다 통쾌하게 여기었으나 성상의 비답은 매우 엄하였다. 이로 인해 1년이 넘도록 벼슬길이 막히었는데, 뒤에 상의 명으로 이동언을 신원시키니, 사람들이 공의 상소가 그 장본이었다고 말하였다.기축년에야 비로소 병조ㆍ예조의 참판과 좌윤ㆍ우윤에 제배되었으나, 모두 병으로 사면하였다. 경인년에는 이조 참판이 되어 깨끗한 언론을 확장시키고 곧음을 굳게 지켜 굽히지 않았으므로, 시배들이 공에게 앙심을 품었다. 그래서 끝내 권첨(權詹)으로부터 상소하여 헐뜯음을 입고 이로 인해 정체(呈遞)되었다가 다시 공조 참판ㆍ대사성에 옮겨졌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고 강교(江郊)로 물러가 있으면서 일곱 번이나 소명(召命)을 어김으로써 파직되었다. 그러자 산수 속에 노닐면서 생을 마칠 계획을 하였다. 그해 11월 13일에 병으로 정침에서 작고하니, 향년이 78세였다. 공은 병중에 백여 마디 말을 입으로 불러서 자손들에게 남겨주었고, 임종시에도 성상의 병환이 중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애타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여 곡진히 말을 하였는데, 기식이 약하여 마치 꿈속의 말처럼 희미하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상이 예관을 보내 치제(致祭)하고 조문과 부의를 의식대로 하였다. 다음해 1월에 광주(廣州)의 월곡(月谷)에 장사 지냈다가, 을미년 9월에 본주(本州) 부곡촌(富谷村) 인좌(寅坐)의 언덕에 이장하고 부인 홍씨(洪氏)를 합장하였다.공은 천품이 대단히 강직했는데, 얼굴은 수척하고 정신은 맑았으며, 뜻은 고결하고 행실은 방정하였다.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어 항상 좌우에 모시면서 사랑과 공경을 곡진히 다하였고, 질고(疾故)가 있지 않으면 잠깐이라도 부모의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부모가 하찮은 병환이라도 있으면 얼굴에 근심스러운 빛이 드러났다. 일찍이 말하기를 “어버이를 모시는 사람은 의약(醫藥)을 몰라서는 안 된다.” 하고, 모든 의방(醫方)을 두루 상고하여 의술을 대략 알게 되었다. 어버이 상을 당하여서는 상심하여 슬퍼하는 정도가 예제에 지나쳤고, 비바람도 아랑곳없이 여묘에서 곡배(哭拜)하였다. 또 선대에 언급이 되면 반드시 목이 메어 울었는데, 늙어서도 그 슬픔이 줄지 않았다.공은 외가의 선대 비갈(碑碣)을 몸소 다 마련하여 세웠다. 두 형을 마치 아버지처럼 섬겼고, 막내아우가 매우 가난했으므로 토지를 떼주어 생계를 꾸려 나가게 하였다. 부친을 여읜 세 조카들을 지성으로 교도하였고, 종형제들을 동기간과 똑같이 대하였다.일찍부터 위기(爲己)의 학문을 사모하여 대현(大賢)을 사사하였는데, 비록 일찍이 유자(儒者)로 자처하지는 않았으나 행신과 처사가 법도에 맞지 않은 것이 적었다. 매일 새벽이면 반드시 일어나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있었고, 상스럽고 술수적인 말을 전혀 하지 않았다. 서책을 매우 좋아하였는데, 그중에도 주자의 글에 더욱 힘써 깊이 연구하고 흡수하여 이치가 밝아지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아서 이것을 일생의 체험으로 삼았다. 만년에는 《소학》 일부(一部)를 정하게 베껴가지고 늘 펼쳐보면서 말하기를 “사람들이 만일 이것을 안다면 어버이와 임금을 거의 섬길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문(文)을 짓는 데는 기력이 매우 힘찼고 억지로 꾸민 흔적이 없었는데, 임금에게 상주한 문자에 이르러서는 사람들이 모두 박식하고 문견이 많다고 칭도하였다. 시를 짓는 데 있어서는 생각이 침울하고 전중하였으며, 화려함을 일삼지 않았으므로, 문단의 여러 노장들이 공의 시를 감상한 것이 많았다.사람을 접대하는 데는 반드시 정성과 신의로써 하였고 간격을 두지 않았다. 남의 잘한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포양할 것을 생각하였고, 만일 불선한 사람을 보면 마치 자신을 더럽힐 것처럼 여기었다. 평온하고 조용하게 자신을 단속하고 출세 길에 분주하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문정(門庭)이 고요하여 잡객들이 들어오지 않았다. 검소함을 숭상하여 자신 받드는 것을 마치 한빈한 선비와 같이 하였고, 염치와 절의를 면려하여 깨끗한 명성이 조정의 고관들 가운데 으뜸이었다. 객지에 집을 사서 우거하는 것을 남들은 그 고통을 견디지 못했으나 공은 태연하게 지냈다.산수를 매우 좋아하여 역내(域內)의 명산들을 두루 유람하고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10구(區)를 그림으로 그려서 병풍을 만들어 둘러놓고 누워서 유람하였다. 모든 물(物)에 인자하여 비록 곤충 같은 미물도 차마 함부로 죽이지 않았고, 정사를 하는 데는 엄격함을 숭상했으나 한 번도 인명을 손상시킨 적이 없었다. 저술한 것이 매우 많았으나 스스로 수장(收藏)하지 않아서 절반 이상이 산일되었고, 약간 권만이 집에 소장되어 있다.상당 한씨(上黨韓氏)는 고려 태위(太尉) 난(蘭)을 상조(上祖)로 삼는다. 아조에 들어와서는 대대로 고관이 나서 귀한 지위를 계승하여 동방의 갑을족(甲乙族)이 되었다. 근세에 우의정을 지낸 충정공(忠靖公) 휘 응인(應寅) 같은 분은 큰 훈업(勳業)이 있어 중흥의 명상이 되었다. 충정공이 휘 덕급(德及)을 낳았는데 덕급은 지돈녕(知敦寧)으로 청녕군(淸寧君)을 습봉받았고, 사계 선생의 집에 장가들어 휘 수원(壽遠)을 낳았다. 수원은 사림들 사이에 중한 명망이 있었고, 목사를 지내고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는데, 이분이 바로 공의 고(考)이다. 비(妣)는 함평 이씨(咸平李氏)인데 그의 고 용계 처사(龍溪處士) 영원(榮元)은 승지에 추증되었다.홍 부인(洪夫人)은 당성(唐城)의 대성으로 도관찰사인 성암공(醒菴公) 처후(處厚)의 딸인데, 단정하고 엄숙하고 차분하고 전일하여 일마다 예법을 따라서 하였다. 그리하여 집에 있을 적에는 부모가 그를 훌륭하게 여겼고, 시집간 뒤에는 시부모가 그를 좋게 여겼다. 동서들을 마치 친형제처럼 대하였고, 여러 아비 여읜 조카들을 자기 자식과 똑같이 어루만져 보살피었다. 상자에는 패물이 없었고, 문에는 무당이나 점쟁이를 들이지 않았다. 공을 따라 여러 지방 고을에 가서도 아무것도 팔고 사지 않으니, 안과 밖이 엄숙하였다. 그리하여 집안사람들이 모두 그를 모범으로 삼았다.4남 1녀를 길렀는데 장남 배의(配義)는 정랑이고, 다음은 배도(配道)ㆍ배문(配文)ㆍ배기(配琪)이며, 딸은 조명휘(趙命徽)에게 시집갔다. 측실이 낳은 아들은 배희(配煕)이고, 딸은 박필무(朴弼懋)에게 시집갔으며, 그 다음 딸은 아직 비녀를 꽂지 않았다. 배의의 아들 사범(師范)은 진사이고, 2녀는 이홍좌(李弘佐)와 유세모(柳世模)에게 시집갔다. 배도의 양자는 사식(師軾)이고, 3녀 가운데 둘은 윤지(尹志)ㆍ윤득검(尹得儉)에게 시집갔고, 막내딸은 아직 정혼하지 않았다. 배문의 아들은 사일(師逸)이고, 딸은 신진하(申鎭夏)에게 시집갔다. 배기는 일찍 죽었다. 사위 조명휘의 아들은 한종(漢宗)ㆍ한명(漢明)ㆍ한장(漢章)이다. 내외 증ㆍ현손이 모두 50여 인이다.아, 공은 명문의 귀한 자제로 재학(才學)이 뛰어나서, 유생으로 있을 때부터 명성과 인망이 성대하였다. 늦게야 임금의 알아줌을 받게 되어서는 풍도와 위엄이 한 세상을 떨쳤으니, 의당 조정에 예복을 차리고 앉아 그 경륜을 크게 펼 듯했었는데, 누차 임금의 뜻에 거슬리고 시론(時論)과도 거슬림이 쌓여, 쓰인 것이 항상 시배들의 마음에 달려 있음으로써 포부와 능력을 다 펴지 못하고 뜻을 가진 채로 작고하였으니, 이것이 혹 이른바 운명이라는 것인가.비록 그러나 삼가 공의 벼슬한 시말을 상고해 보건대, 대각(臺閣)에 있을 적에는 고인의 정직한 풍도가 있었고, 강연(講筵)에 들어가서는 진학사(眞學士)란 칭송이 있었다. 그 늠름한 풍성(風聲)이 사책에 빛나서, 백세 뒤에까지도 반드시 나약한 자를 일으켜 세우고 탐욕스러운 자를 청렴하게 하는 것이 있을 것이니, 살아서는 존귀를 극도로 누렸으나 죽어서는 일컬을 만한 것이 없는 사람과 비교해 보면 그 현ㆍ불초의 차이가 어떠하겠는가. 옛날 구양공(歐陽公 송 나라 구양수(歐陽脩))은 정사에 가장 뛰어났으나 그것이 문장에 가리었었는데, 지금 공은 행의가 순수하고 구비한데도 사람들이 혹 다 알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이 또한 공의 직절(直節)에 가리어진 것인가.나는 공과 대대로 다져온 친밀함과 동문의 정분이 있으므로, 비록 은거함과 현달함의 길이 서로 달라서 자주 서로 종유하여 봉마(蓬麻)의 이익은 힘입지 못했으나, 그 높은 풍도를 멀리서 사모해온 지는 오래되었다. 공이 작고한 지 오래되어 지금 공의 묘목(墓木)이 이미 아름드리가 되었는데, 정랑군(正郞君)이 비문을 지어달라고 울면서 청하니, 내가 어찌 감히 글을 못한다 해서 사양하겠는가. 삼가 행장의 글에서 발췌하여 이상과 같이 차례대로 기록하고 명(銘)으로 잇노라. 명은 다음과 같다.여기에 한 신하가 있어 / 若有一个강하기가 철석 같았네 / 其剛鐵石일찍부터 사문에서 수학하여 / 夙遊師門학문이 바르고 곧았네 / 學其方直예송이 화의 계제가 되어 / 禮訟階禍우암 선생이 멀리 유배되자 / 大老栫棘수백 인의 선비를 거느리고 / 倡數百士상소하여 선생을 변호했네 / 抗章昭析경신년의 대출척으로 인해 / 白猿更化공이 비로소 벼슬을 했는데 / 公始通籍정색하고 대관의 자리에 있으니 / 正色臺端위엄이 가을 하늘 수리새 같아 / 秋天一鶚준엄한 말로 대면하여 힐책하매 / 危言面折조야가 모두 위축되었네 / 朝野瑟縮그런데 겁화가 하늘에 가득하여 / 劫火彌空시사가 망극한 지경에 이르자 / 時事罔極벼슬 내놓고 영원히 은퇴하여 / 掛冠長往산수 사이에서 노닐었네 / 婆娑林壑그러다가 임금님이 마음 돌리어 / 黃道回光바른 선비들 다시 돌아오자 / 正士來復깐깐하게 충성스러운 계책으로 / 侃侃忠規임금님 정사 힘써 도왔네 / 密勿經幄큰 고을 수령과 감사를 지내면서 / 大邑名藩매우 검소한 생활을 하였고 / 淸氷苦蘗개성 유수로 있을 적에는 / 居留舊京상의 의뢰하는 마음 더욱 두터웠네 / 倚畀益篤이조 참판으로 들어와서는 / 入佐天官호선오악의 정사부터 먼저 하니 / 政先揚激증오하는 자가 세상에 가득차서 / 白眼滿世쉬파리 옥 더럽히듯 공을 해쳤네 / 靑蠅點玉용납되지 못한 게 무어 해로울쏘냐 / 不容何病우유자적함이 즐겁기만 했었지 / 優閒可樂내 곡식 무성하게 자라고 / 我稼油油내 호수 맑고 푸르렀었네 / 我湖澄碧그러다가 선뜻 세상 떠나니 / 翛然乘化천지간에 부끄러울 것 없어라 / 俯仰無怍효성스러운 아들이 좋은 돌 다듬어 / 孝子劖珉공의 명성과 덕행 드러내려 하니 / 思顯名德맑은 명성 끝없이 전해져서 / 淸芬不沫구름과 물과 함께 깨끗하리라 / 雲水俱白[주-D001] 육 선공(陸宣公)의 …… 손상시킨다 : 육 선공은 당(唐) 나라 때의 직신(直臣) 육지(陸贄)를 말한다. 선공은 그의 시호. 이 말은 육지의 봉천논존호가자장(奉天論尊號加字狀)에 나온다. 《四庫全書 集部 翰苑集 卷13》[주-D002] 봉마(蓬麻)의 이익 : 《순자(荀子)》 권학(勸學)에 “쑥대가 삼밭 속에 나면 손을 쓰지 않아도 절로 곧게 자란다.[蓬生麻中 不扶而直]” 한 데서 온 말로, 즉 착한 사람과 사귀면 자신도 자연히 착해짐을 비유한 것이다.
    2023-08-14 | NO.33
  • 창평(昌平) 장세방(張世方)ㆍ정만의(鄭萬儀)의 수령 모함, 3차보고- 광주목사
    보첩고(報牒攷)○영조(英祖) / 영조(英祖) 42년(1766)4월 초6일 3차 보고첩보(牒報)하는 일. 본주(本州)의 수추 죄인(囚推罪人 가두어 놓고 심문하는 죄인) 장세방(張世方)ㆍ정만의(鄭萬儀) 등에게 형벌을 가하여 추문(推問)한 다음 첩보하였는데, 그에 대한 서목(書目)의 제사(題辭)에, “최둑금(崔豆ㄱ金)은 보고한 대로 분간(分揀)할 것이며, 장세방은 조율할 것이므로 그냥 구금해둘 것이며, 정만의는 다시 보고한 대로 지만(遲晩)한다는 공초를 받아 첩보함으로써 일체로 조율(照律)할 수 있게끔 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그들에게 공초를 받았습니다.병술년 4월 초6일에 창평(昌平)의 재인(才人) 정만의 나이 30세, 아뢰기를, “‘너에게 형벌을 가하여 추문한 다음 순영(巡營)의 사또(使道)에게 첩보하였는데, 그에 대한 서목의 제사에, 「정만의는 다시 보고한 대로 지만의 공초를 받아 첩보함으로써 일체로 조율할 수 있게끔 해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 네가 이전의 공초 내용 중에 장세방이 의송을 바칠 때 너는 참여하여 대략적인 내용만 알 뿐이고 원래 의송(議送)을 바치자고 주장한 일은 없었다고 하였다. 네가 이미 참여하여 그 대략적인 내용을 알았다면 예사롭게 참여하여 아는 것으로 논할 수 없다. 네가 창평현의 백성으로 암암리에 장세방과 같이 이리저리 엮어서 의송을 작성하였으니, 비록 장세방으로 하여금 의송을 바쳤으나 같이 의논하여 작성한 자가 너였으니만큼 토주(土主)를 모함한 죄를 네가 어찌 감히 해명할 수 있겠는가. 문목 내의 사연을 사실에 따라 지만의 공초를 바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비록 의송을 바치는 일을 주장한 일이 없기는 하나 이미 장세방과 같이 상의하는 등 참여하여 알았으니, 토주를 모함한 죄를 어찌 감히 해명할 수 있겠습니까. 지만의 공초를 바치오니, 상고하여 처리하였으면 합니다.”라고 하였는데, 이상이 공초의 내용입니다.정만의는 제사에 따라 지만의 공초를 받아 첩보하고 최둑금은 분간(分揀)하여 방면하였으며 장세방은 그대로 수금해두었습니다. 이상의 연유를 모두 첩보합니다.제사(題辭)정만의도 그냥 수금해두어 일체로 조율하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2023-10-16 | NO.32
  • 창평(昌平) 장세방(張世方)ㆍ정만의(鄭萬儀)의 수령 모함, 재차보고- 광주목사
    보첩고(報牒攷)○영조(英祖) / 영조(英祖) 42년(1766)3월 28일 재차 보고첩보(牒報)하는 일. 창평현(昌平縣)에 소속된 여종 분애(分愛)와 간통한 장세방(張世方)이 정만의(鄭萬儀)ㆍ최둑금(崔豆ㄱ金) 등과 짜고 의송(議送)을 바친 사연에 관해 공초를 받아 첩보하니, 사또(使道)께서 서목(書目)에 제사를 보냈는데, 그에 의하여 그들에게 형벌을 가하여 공초를 받았습니다.병술년 3월 28일에 경양 역리(景陽驛吏) 장세방 나이 36세가 아뢰기를, “‘네가 분애와 간통한 사건으로 의송을 바친 사연에 관해 공초를 받아 첩보하니, 순영(巡營)의 사또께서 보낸 그에 대한 서목의 제사에, 「장세방은 자기가 간통한 정황을 창평에서 분명하게 공초를 바쳤는데, 그 뒤에 다시 심문할 때 교묘한 말로 해명하여 허물이 드러나지 않게 감추어 꾸민 흔적이 뚜렷하게 있었으니, 매우 간악(奸惡)하였다. 그에게 한 차례 형장(刑杖)을 가하여 신문(訊問)하고 지만(遲晩)한다는 공초를 받아 첩보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너를 순영 사또의 제사를 보냄에 따라 각별하게 엄히 형벌을 가할 것이니, 유부녀와 간통한 정황에 대한 지만(遲晩)한다는 공초를 바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네가 분애와 간통할 때 최둑금이 분애의 친속으로 그녀가 본남편에게 소박을 당하였다는 이유로 너와 서로 간통하도록 주선한 정황을 이미 창평의 사안(査案)에 사실대로 공초를 바쳤다. 그런데 지금 사관(査官)을 다른 관아로 옮긴 뒤에는 최둑금이 애당초 간섭하지 않았고 분애의 형부가 주선하였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최둑금은 분애의 친속이니만큼 어찌 간섭한 일이 없었겠는가. 이 한 조목도 아울러 사실대로 공초를 바쳐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같은 날 장세방에게 한 차례 형벌을 가하여 심문하고 형장(刑杖) 30대를 친 다음 다시 추문(推問)하니, 그가 아뢰기를, “제가 당초에 단지 분애의 형부 말만 듣고 그녀가 남편이 없어서 구혼(求婚)할 줄로 여긴 나머지 과연 서로 간통하였습니다. 그 뒤에 나장추(羅長秋)가 창평 관아의 뜰에서 고한 것으로 인해 사실을 추문하는 지경에 이러러 분애는 창평현에 관비(官婢)로 예속되었습니다. 제가 처음에 비록 남편이 없는 여자로 알고 간통하였으나 필경에는 자연히 유부녀와 간통한 셈이 되어버렸습니다. 지금 엄하게 심문하시므로 지만(遲晩)한다는 공초를 바칩니다. 분애의 일가붙이 최둑금은 애당초 서로 왕래하며 속말을 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창평의 관정(官庭)에서 공초를 바칠 때 다짐(侤音 범인이 자백한 범죄 사실을 다짐하는 것, 그러한 문서)이 무슨 말인지 몰랐고 또한 종말에 이러한 환난이 있으리라 생각지 않은 채 범연히 공초를 바쳤습니다. 지금 이 문제를 다시 조사하시므로 최둑금이 간여하지 않은 정황을 사실대로 공초를 바칩니다. 모두 아울러 처리해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하였는데, 이상이 공초의 내용입니다. 제사(題辭)에 따라 장세방에게 한 차례 형벌을 가해 추문하여 지만의 공초를 받았습니다.정만의는 한 차례 형벌을 가하여 추문한 뒤에 첩보하였습니다. 장세방이 의송을 바칠 때에 정만의가 비록 주장한 바가 없기는 하나 그가 참여해 아는 바가 긴요한지 긴요하지 않은지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 놈과 장세방이 암암리에 이리저리 엮어서 의송을 작성하였을 경우 나아가 바친 자가 장세방이고 같이 의논한 자가 정만의였으니, 이는 그냥 참여해 아는 정도로 논할 수 없습니다. 그가 창평현의 백성으로 이렇게 토주(土主)를 모함하는 행위를 하였는데, 경하게 다스린다면 먼 지방의 악습(惡習)을 징계할 수 없으므로 다시 지만의 공초를 받아 율(律)에 따라 치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최둑금은 당초 심문할 때에 그가 아주 절실하게 간여한 바를 볼 수 없었으므로 구별하여 별개로 보고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사가 하달되었으므로 장세방에 대해 문목(問目)을 작성하여 그 부분에 관해 별도로 엄하게 심문하였으나 그 또한 간여하지 않은 것으로 공초를 바쳤습니다. 참작하고 상량하여 처분을 내려 주셨으면 합니다.제사(題辭)최둑금은 보고한 대로 분간(分揀 죄상(罪狀)을 살펴서 용서함)해야 할 것이며, 장세방은 조율(照律)해야 하므로 그냥 구금해둘 것이며, 정만의는 다시 보고한 대로 지만의 공초를 받아 첩보함으로써 일체로 조율할 수 있게끔 해야 할 것이다.
    2023-08-17 | NO.31
  • 창평(昌平) 장세방(張世方)ㆍ정만의(鄭萬儀)의 수령 모함- 광주목사
    보첩고(報牒攷) -光州牧使○ 영조(英祖) 42년(1766) 2월 26일 창평(昌平) 장세방(張世方)ㆍ정만의(鄭萬儀) 등이 토주(土主 고을의 수령)를 모함하여 거짓말로 의송(議送)을 바친 일을 조사하여 보고하다첩보(牒報)하는 일. 방금 전에 도착한 창평현(昌平縣)의 이문(移文 공문(公文)을 보내 조회함. 또는 그 문건)에, “저의 현에 소속된 관비(官婢) 분애(分愛)의 샛서방 장세방이 정만의(鄭萬儀)ㆍ최둑금(崔豆ㄱ金)과 같이 짜고 송관(訟官)을 모함하여 의송을 바친 일에 관해 저의 현에서 사관(査官)을 청하여 조사해 보고하겠다는 뜻으로 영문(營門)에 보고하였습니다. 그에 대한 서목(書目 하부 관아에서 상부 관아로 올리는 원장(原狀)에 구비하는 문서)의 제사(題辭)에, ‘본현(本縣)에서 이미 사관을 청하였기에 광주목(光州牧)에서 차정(差定)하도록 하였으니, 위의 죄인을 광주로 이송해야 할 것이다. 제사를 낱낱이 들어 이문하여 시행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동 죄인 장세방ㆍ최둑금 등을 지정한 관인(官人)으로 하여금 압송하도록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그 죄인들에게 공초(供招)를 받았는데, 병술년(丙戌年, 1766, 영조42) 2월 26일에 창평 속오군(束伍軍) 최둑금 58세, 경양 역리(景陽驛吏) 장세방 26세, 창평 재인(才人) 정만의 30세 등이 아뢰기를, “‘최둑금! 네가 경양 역리 장세방이 유부녀 분애와 간통한 일에 관련해서, 네가 분애의 친속으로 그녀가 본남편에게 소박을 당했다는 이유로 그녀로 하여금 장세방과 간통하도록 한 상황을 이미 창평의 사안(査案)에 남김없이 자복하였다. 지금 그 조사를 여기로 이관(移管)하였으니, 다시 사실대로 공초를 바치도록 하라. 장세방! 네가 유부녀와 간통한 죄가 이미 전후의 문안(文案)에 이미 드러났으므로 지금 다시 물을 필요가 없으나, 네가 간통한 여자 분애가 남편이 있는데도 다시 간통한 바람에 너를 법에 따라 관노비(官奴婢)로 편입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무슨 원통함이 있기에 정만의 등과 짜고 모함하는 의송을 바쳐 송관(訟官)을 침해하고 핍박하였는가. 그간의 내막을 숨김없이 사실대로 고하도록 하라. 정만의! 너는 분애와 친속이 아니므로 해당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데 분애가 관아에 예속되는 것이 너에게 무슨 관계가 있기에 그녀의 샛서방과 같이 의송을 바쳐 토주(土主)를 모함하였는가. 그간의 정황을 사실대로 공초를 바치도록 하라.’고 추문(推問)하셨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최둑금이 아뢰기를, “이른바 분애는 저의 7촌 질녀(姪女)입니다. 분애가 애당초 남평에 사는 서삼덕(徐三德)에게 출가하였는데, 서삼덕의 나이가 어렸습니다. 서삼덕의 의부(義父) 박대건(朴大建)은 본래 사나운 자로 그의 며느리를 구박하며 내쫓아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분애가 부득이 창평에 사는 그의 형부(兄夫) 나장추(羅長秋)의 집으로 가서 의지하였습니다. 그러자 분애의 형부가 그녀의 처지를 가엾이 여긴 나머지 장세방에게 소개하여 서로 간통하게 한 것이지, 제가 간섭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였습니다.장세방이 아뢰기를, “분애의 형부가 과연 저와 결혼하라고 하였기 때문에 그녀가 유부녀인 줄을 모르고 서로 간통하였습니다. 그 뒤에 나장추의 마을에서 이로 인해 시비가 발생하여 관아에 고발하여 관노비로 편입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이는 분애의 본남편이 고발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작란삼아 한 일로 인해 관노비로 몰수되어 너무나도 원통하기에 과연 의송을 바치게 되었습니다. 정만의는 나장추와 같은 마을에 살기 때문에 피차의 사정을 중간에서 아는 바가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만 원래 소장(訴狀)을 바칠 것을 주장한 일이 없습니다. 상고하여 처결해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정만의가 아뢰기를, “분애는 저와 천부당만부당한 사람입니다. 그녀의 샛서방을 만들어주거나 관노비를 만든 일은 저와 전혀 상관이 없고 단지 나장추와 같은 마을에 살기 때문에 그녀가 관노비로 예속되는 것이 억울하다는 공론을 들어본 것입니다. 그 뒤에 장세방이 의송을 바칠 때 그 대략적인 것만 알았을 뿐이고 원래 의송을 바치는 것을 주장한 일이 없습니다. 상고하여 처리해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하였는데, 이상이 공초의 내용입니다.창평현의 전후 문안을 가져와 상고해 보니, 장세방 등이 자복한 공초에 그 죄가 훤히 드러나서 사실을 발췌하여 끝까지 궁구해 보니 다시금 미진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관(査官)을 다른 관아로 옮겨 정하였기 때문에 이전의 공초와 비해 허물이 드러나지 않게 감추어 꾸민 바가 있었으므로 장세방이 유부녀와 간통한 것이 잘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정만의가 의송을 바친 것은 그가 비록 주장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이미 참여하여 아는 일이 있었으니, 토주를 모함한 죄를 어떻게 면할 수 있겠습니까. 위의 두 놈은 결코 엄하게 형벌을 가하여 법을 적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최둑금은 애당초 장세방이 분애와 간통하였을 때 그가 비록 몰랐다고 말하기는 하였으나 그의 모습을 살펴보고 말을 들어보니 저절로 서로 주선해 준 형적이 있었습니다. 이놈은 비록 두 놈과 차이는 있으나 분애의 친속으로 사람을 잘못 유도하여 음탕하게 만든 죄를 지었으니만큼 치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두 참작하고 상량하여 처분을 내려 주셨으면 합니다.제사(題辭)장세방은 자기가 간통한 정황을 창평에서 분명하게 공초를 바쳤는데, 그 뒤에 다시 심문할 적에 교묘한 말로 해명하여 허물이 드러나지 않게 감추어 꾸민 흔적이 뚜렷하게 있었으니 매우 간악(奸惡)하였다. 그에게 한 차례 형장(刑杖)을 가하여 신문(訊問)하고 지만(遲晩)한다는 공초를 받아 첩보하고, 정만의는 장세방이 의송을 바칠 때에 비록 주장하지는 않았더라도 이미 참여하여 알았으니만큼 토주를 모함한 죄를 그도 면하기 어려우니, 한 차례 형장을 가하여 심문한 뒤에 첩보해야 할 것이다. 최둑금은 처음에 자세히 알지 못했다고 공초를 바쳤으니 모습과 말을 가지고 억측으로 단정할 수 없으니, 이 조목은 장세방에게 추궁해 심문하면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장세방을 심문할 때 문목(問目)에 추가로 넣어 상세히 조사한 다음 첩보해야 할 것이다.[주-D001] 속오군(束伍軍) : 선조(宣祖) 27년(1594) 왜군에 대항할 군대를 확보하기 위해 지방에서 신역(身役)이나 벼슬이 없는 15세 이상의 양반, 양민과 천민을 뽑아 조직한 군대.[주-D002] 재인(才人) : 천인(賤人)의 하나. 남자는 노래와 춤과 줄타기를 업(業)으로 하고, 여자는 무당 노릇 기타(其他)를 업으로 하여 농업 등의 정업(正業)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을 말함.[주-D003] 지만(遲晩) : 지체되어 늦었다는 직접적인 문의(文意)에서 확장되어, ‘너무 오래 속이고 자백하지 않은 것이 미안하다’는, 즉 자복(自服)을 가리키는 법제어.
    2023-08-17 | NO.30
  • 창평현(昌平縣) 삼지천(三支川) 마을 사망자 정몽표(鄭夢杓)의 복검장(覆檢狀)- 광주목사
    보첩고(報牒攷) - 光州牧使○ 영조(英祖) 41년(1765) 9월 23일 창평현(昌平縣) 삼지천(三支川) 마을에 사망한 사람 정몽표(鄭夢杓)의 복검장(覆檢狀)첩보(牒報)하는 일. 각 사람들의 공초(供招)를 받았습니다. 살옥(殺獄)의 핵심은 사망의 원인이 명백해져야만 산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간에 억울한 바가 없을 것입니다. 이번에 정몽표의 시신을 법물(法物 검시(檢屍)에 사용되는 기물(器物))로 앞뒤로 돌려가며 세척한 뒤에 전신(全身)의 상하를 직접 손으로 만져보니 앞면과 뒷면에 비록 색이 다소 변하기는 하였으나 간간이 피부가 벗겨진 곳이 전부 유연하여 하나도 굳어있지 않았으므로 결국 구타를 당했다고 말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병이 나 사망하였으므로 혹시 독극물을 마시지 않았는지 염려되어 은동곳을 입과 항문에 삽입해 놓았다가 한참 뒤에 꺼내어 조각수(皂角水 쥐엄나무를 달인 물)로 세척해 보니 은동곳의 색이 변하지 않았으므로 그 또한 논할 만한 의심스러운 것이 없었습니다.그런데 시친(屍親 사망자의 가족이나 가까운 친속) 정상언(鄭相彦)의 공초를 볼 적에 그가 조광윤(曺光潤)에게 노한 나머지 관청으로 달려가 고하였다고 하였으나 그의 모습을 살펴보고 말을 들어보면 거의 실성(失性)하여 언어가 착란한 것 같았습니다. 그의 언어가 착란한 것이 혹시 전후로 마음과 입이 같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닌지 염려되어 재삼 힐문(詰問 따져 물음)하여 기어이 사실을 밝혀내려고 하였으나 시종 다른 말이 없다가 결국 자기가 미쳐서 망령이 들었다고 자복(自服)하였으니, 그의 아들이 병으로 죽은 것에 대해 조금도 의심할 만한 단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죽은 원인을 병으로 인해 사망하였다고 기록한 뒤에 시장(屍帳 시체 검안서(檢案書)) 3건을 작성하여 천자(天字)의 자호(字號)를 써넣은 다음에 1건은 시체의 친척에게 주고, 1건은 관아에 보관하고, 1건은 봉하여 올립니다.이처럼 맹랑한 옥사(獄事)로 인해 지금 한창 파종하고 수확하는 시기를 맞아 이웃에 사는 사람들이 갇혀 있어서 민망하므로 즉시 방면하여 보내고 시체는 친척에게 내주어 매장(埋葬)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조광윤은 이미 피고(被告)가 되었으므로 그냥 엄하게 가두어두고 처분이 내리기를 기다리도록 하였습니다. 이상의 연유를 모두 첩보합니다.제사(題辭)초검장(初檢狀)을 대조해 조사한 시장(屍帳)을 바쳤지만 시체에 상처의 흔적이 없었으므로 그가 병으로 사망한 것임이 확실하다. 그런데 정상언이 피살(被殺)로 고발하였으니, 너무나도 허망(虛妄)하다. 그의 공초에도 이미 그러한 사실을 자복(自服)하였으니만큼 사리상 마땅히 그의 죄를 다스려서 살옥(殺獄)의 무고(誣告)에 관한 율(律)을 중하게 해야겠으니, 그를 한 차례 엄하게 형벌을 가하여 방면한 뒤에 시체를 내주어 매장(埋葬)하도록 하고, 관련된 사람들과 피고인은 모두 일체 방면하도록 한다.[주-D001] 복검장(覆檢狀) : 두 번째로 검시(檢屍)한 문안이다. 살인사건이 났을 때 《무원록(無寃錄)》에 의거하여 시체(屍體)를 검안(檢案)하는데, 첫 번의 검안(檢案)인 초검(初檢)과 복검(覆檢)이 차이가 없으면 이것으로 판결(判決)하고 차이가 있으면 삼검(三檢)하여 초검ㆍ복검ㆍ삼검의 결과를 종합하여 처리함.
    2023-08-17 | NO.29
  • 처사(處士) 묵재(默齋) 김공(金公)의 행장
    갈암집 별집 제6권 / 행장(行狀)본관은 전라도 광주목(光州牧) 평장리(平章里)이다.증조는 휘가 부의(富儀)인데 성균관 생원이었고, 자호를 읍청당(挹淸堂)이라고 하였다. 비(妣)는 안동 권씨(安東權氏)이고, 계비는 가평 이씨(嘉平李氏)이다.조부는 휘가 해(垓)인데 통사랑(通仕郞) 행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行藝文館檢閱兼春秋館記事官)을 지냈고, 승의랑(承議郞) 홍문관수찬 지제교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弘文館修撰知製敎兼經筵檢討官春秋館記事官)에 추증되었으며, 자호를 근시재(近始齋)라고 하였다. 비는 단인(端人) 진성 이씨(眞城李氏)이다.부는 휘가 광계(光繼)인데 동몽교관을 지냈고, 자호를 매원(梅園)이라고 하였다. 비는 유인(孺人) 광주 이씨(廣州李氏)이다.공의 휘는 렴(????)이고, 자는 여용(汝用)이며, 본관은 광주(光州)인데, 신라 왕자(王子) 흥광(興光)의 후손이다. 신라의 정치가 쇠하자 왕자가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광주로 피신하였는데, 자손들이 그대로 살며 관향(貫鄕)을 삼았다.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가 된 분이 있었고, 그 후에 대를 이어서 그 직위를 맡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사는 곳을 평장동(平章洞)이라고 불렀으나 세대가 멀어서 자세한 것을 알 수 없다. 본조에 들어와서 휘 천리(天理)가 벼슬이 재상에 이르러 비로소 한양에 옮겨 살았고, 8대조 휘 무(務)가 또 안동부(安東府) 일직현(一直縣)으로 옮겼다. 증(贈) 이조 참판 휘 효로(孝盧)가 예안현(禮安縣) 오천리(烏川里)에 터를 잡아 살았는데, 이분이 가선대부(嘉善大夫) 강원도 관찰사 휘 연(緣)을 낳았으니, 공에게는 고조가 된다. 김씨는 대대로 영남의 저명한 성씨였는데, 읍청공에 이르러 퇴계 이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사문(師門)에서 인정을 받았고, 묻고 논란한 여러 설들이 《도산문집(陶山文集)》 안에 많이 보인다. 근시재 선생은 타고난 자품이 온화하고 순수하였으며, 학문이 정밀하고 깊어서 처음 벼슬할 때부터 훌륭한 명성이 날로 드러났는데 불행히 일찍 세상을 떠나니 원근의 그를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모두들 탄식하고 애석해하였다. 매원공은 덕을 좋아하고 노성(老成)하여 능히 그 가문을 이었으나 아들이 없어서 공을 후사로 삼았으니, 공은 실로 근시재의 둘째 아들인 처사 휘 광실(光實)의 셋째 아들이다.공은 어려서부터 지극한 품성이 있어서 어버이께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로웠으며, 백부의 후사(後嗣)가 되어서는 교훈을 새겨 익히고 부모의 뜻을 받드는 데 극진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관례를 하고 나서 석담(石潭) 이공 윤우(李公潤雨)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이공이 매우 아껴서 한강(寒岡) 정 선생(鄭先生)에게 받은 《역경(易經)》을 그에게 주었으니, 그 기대한 뜻이 적지 않았다. 갑신년(1644, 인조22) 가을에 부모의 명으로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경사에 갔는데, 하루는 홀연히 가슴이 두근거리기에 집안에 필시 큰 우환이 생긴 것이라고 여기고 즉시 재촉해서 여장을 꾸려 길에 올랐는데, 며칠을 가서 태석인(太碩人)이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訃音)을 들었다. 공이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급히 달려갔다. 도착해서 예법대로 곡하고, 단문(袒免)하고, 성복(成服)하였고, 중문(中門) 밖의 여막(廬幕)에서 지내면서 상복을 벗지 않고 잤으며, 하관(下棺)할 때 받드는 것과 제전(祭奠)의 예를 모두 예법에 따라 하였다. 매원공을 섬기면서 온화한 얼굴로 뜻을 받들어 털끝만큼도 뜻에 맞지 않게 한 적이 없었고, 아침저녁으로 문안하는 의절(儀節)과 음식 공양을 반드시 정성스럽고 삼가서 마음을 다해 봉양하는 도리를 다하였다. 병술년(1646) 여름에 매원공의 병세가 위독하자 공이 근심하여 침식도 잊은 채 직접 탕제를 올리며 잠시도 해이하지 않았다. 상을 당해서는 곡읍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상복을 벗지 않았으며, 3년을 마치도록 매우 슬퍼하였으니, 상례를 치르고 제사 지낸 정성이 모두 사대부의 모범이 될 만하였다. 본생부모(本生父母)의 상을 당해서는 예법보다 더 심하게 슬퍼하였고, 빈궁(殯宮) 곁에 집을 지어 기거하였으며, 장사와 제전의 제수를 힘을 다해 마련해서 대종(大宗)으로 출계(出繼)했다고 하여 형제들과 차이를 두지 않았다. 연상(練祥)이 지나기 전에 종가(宗家)에 기제(忌祭)나 절사(節祀)가 있으면 하루 전에 사당 앞 행랑에 와서 기거하면서 제수를 올리는 일을 감독하고, 종제나 조카 중에서 복(服)이 조금 가벼운 자를 시켜 사당에 들어가 제사 지내게 하고, 제사를 마치고 나면 공이 당에서 내려와 맞이하여 절하고서 제사 지내는 데 무사하였는지를 물은 뒤에 상차(喪次)로 돌아갔다. 복제(服制)를 마친 뒤에 제사가 있으면 미리 청소하고 재숙(齊宿)하면서 빈객을 만나지 않고 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 시제(時祭) 때에는 제사를 마치고 나면 집안의 친척과 마을 사람들을 맞아서 음준례(飮餕禮)를 행하고, 남은 음식은 마을의 장로(長老)와 늙은 서인(庶人)에게 나누어 주어서 집에 두고 하룻밤을 묵힌 적이 없었다. 무술년(1658) 가을에 도산(陶山)의 동주(洞主)가 되어 모든 법규를 따르고 조치하는 것들이 두루 하고 상세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경내(境內)의 유사(儒士)를 불러 모아 노선생(老先生)의 문집(文集)을 강(講)하니, 이에 소문을 듣고 먼 곳에서 찾아온 자들이 많아 재사(齋舍)에 수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공이 모두 예로써 접대하고 그들과 주고받은 말은 도덕과 인의, 풍아(風雅)와 화초(花草)에 관한 얘기 아닌 것이 없었고, 강을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파하였는데, 선성(宣城)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미담(美談)이라고 일컫고 있다. 기해년(1659) 12월 모일에 집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춘추가 48세였다. 이듬해 경자년 4월 모일에 현의 북쪽에 있는 태자산(太慈山) 선영 곁에 장사 지냈다.부인은 광주 이씨이니, 바로 석담 선생 증 이조 판서 윤우의 따님이다. 18세에 공에게 시집왔는데, 아름다운 덕과 순수한 행실이 있었고, 시부모를 섬기고 남편을 받드는 것과 종족 간과 동서 간에 처신한 것이 모두 도에 합당하였다. 공보다 33년 뒤에 80세로 세상을 떠나서 공의 묘 왼쪽에 부장(祔葬)하였다. 공은 불행히 재차 대가 끊어져 아우의 아들 순의(純義)를 후사로 삼았으니,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이름이 대(岱)이고, 차남은 교(嶠)이며, 딸은 사인(士人) 남여형(南汝衡)에게 시집갔다. 증손은 남녀가 몇 명 있는데 모두 어리다.공은 총명함과 기억력이 동류(同類)들보다 특출나게 뛰어났다. 처음에 기억하고 두루 보는 데에 힘써서 많이 듣고 박식해지는 공부를 하였고, 역사서를 읽으면서 날마다 1000자를 외웠으며, 사장(詞章)으로 발휘된 것들은 법도에 맞고 한아(閒雅)하였다. 누차 향공(鄕貢)에 올랐으나 성시(省試)에서 번번이 낙방하자 이에 탄식하기를, “내가 이미 때를 만나지 못했으니, 어찌 글을 지어 득실을 다투는 자들과 한 사람의 눈에서 결판을 구하겠는가.” 하였다. 이에 그 방을 묵재(默齋)라고 이름 짓고, 잠(箴)을 지어 벽에 붙여서 그 뜻을 담았으며, 그곳에서 글을 읽으며 여유롭게 자득(自得)하여 말하지 않고 몸소 행하는 뜻을 독실히 하였다. 평소 새벽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 빗고 의관을 갖추고서 가묘(家廟)에 전알(展謁)하고, 물러나와 한 방에 앉아서 좌우에 도서를 비치하고 엄숙하게 종일토록 책을 대하였다. 객이 오면 반드시 당(堂)에 내려가 접대하면서 조용히 얘기를 나누었는데 속된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마음이 맞고 뜻이 같은 벗을 만나면 머물게 하여 함께 잠을 자면서 경서의 뜻을 강론하기도 하고 시를 외기도 하며 고금의 사변에 대해 담론하기도 하였는데, 종일토록 하고 또 밤새도록 하면서도 피곤한 줄을 몰랐다. 동종(同宗)의 자제와 마을의 후생으로서 와서 배우는 자가 많았는데, 지성으로 가르쳐서 성립시키려고 하였고, 한 가지라도 취할 만한 장점이 있으면 기뻐하는 감정이 안색에 나타났고, 그를 드러내고 칭송하여 남들이 모를까 염려하였다. 또 과실이 있으면 조용한 곳으로 불러서 자상하게 가르치고 경계시켜 반드시 고치게 한 뒤에야 그만두었다. 족당(族黨)과 인척(姻戚)에 대해서는 궁핍한 사람을 구휼해 주면서 자기의 역량이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였고, 남에게 다급한 일이 있거나 곤경에 처했다는 말을 들으면 힘을 아끼지 않고 마음을 다해 돌봐 주었다. 만약 먼 지방에서 나는 맛있는 음식을 구하면 반드시 먼저 일가의 장로(長老)에게 올리고, 다음으로 아우와 조카들에게 주고, 다음으로 이웃의 노친(老親)이 있는 자에게 주었다. 숙부인 상사공(上舍公)의 연세가 이미 많아서 질병으로 몹시 쇠약하였는데, 공이 부친을 섬기듯이 섬겨서 아침저녁으로 문안하고 신중히 명을 받들었다. 계모(季母)와 맏형수가 의지할 데 없는 과부가 되자 집안일을 돌봐 주어 쓸쓸하게 혼자 사는 괴로움을 잊게 해 주었다. 외삼촌인 이공 환(李公煥)이 나이 80에 외아들을 잃고서 홀아비로 살며 매우 곤궁하였는데, 공이 매번 사람을 보내 문안하고 음식물을 보내는 것이 끊이지 않았다. 공이 세상을 떠나자 이공이 시를 지어 곡하기를, “인편이 있으면 반드시 편지를 보내고, 노자가 있으면 반드시 맛있고 부드러운 음식을 보냈네.” 하였으니, 이는 지성스럽게 돌봐 준 뜻을 잊지 못한 것이다. 남이 초상을 당하면 반드시 남보다 먼저 조문하여 위로하고 부조하였고, 향리의 미천한 사람이라도 반드시 공평한 마음으로 대하여 차별을 두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 덕에 감복하고 그 은혜를 감사하였다. 공은 대가(大家)의 후손으로서 물려받은 재산이 매우 넉넉하였는데, 가장이 되어 집안일을 주관하게 되자 남에게 베풀어 주기를 좋아하여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고 가난한 사람을 구휼하는 것을 의리로 여겨 재물을 후손에게 남겨 줄 계획을 세우지 않았으므로 중년이 되어서는 겨우 자급할 정도이고 남은 재물이 없었다. 종부제(從父弟) 이(怡)가 일찍이 가정에서 처신할 도리는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묻자 대답하기를, “가장이 된 자는 가장의 도리를 다하고, 자제가 된 자는 자제의 도리를 다해야 할 것이니, 각각 자기의 도리를 다하고 서로 책망하지 않는다면 가정에서 처신하는 도리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하였으니, 이는 그 마음에 보존된 것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말로 나온 것이 능히 이와 같았던 것이다. 이 또한 “여기에 있어도 원망이 없고, 저기에 있어도 미워하는 자가 없다.”라는 말에 가까운 것이니 아, 어질도다.현일의 선인이 처음에 근시재 선생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부인이 아들 하나를 낳고 세상을 떠났으니 그 아들이 바로 고(故) 능서랑(陵署郞) 상일(尙逸)이다. 나에게는 백형(伯兄)이 되고 공에게는 외형(外兄)이 되는데, 공과 한 살 차이였고, 서로의 교분이 매우 두터웠다. 나의 중씨형(仲氏兄) 이하는 김씨 부인 소생이 아니지만 공과 뜻이 맞아서 매우 기뻐하였고, 형제처럼 붙어 다녔다. 현일이 공보다 15세 연하라서 항상 형으로 섬겼는데, 공은 나를 한결같이 붕우로 대하였다. 처음에 서로 알 때에 내가 선군(先君)의 곁에 시립(侍立)해서 바라보니 공의 용모가 수려하고 풍도(風度)가 고상하고 순결해서 훌륭한 군자의 모습이었다. 이때부터 이미 마음이 기울어 교유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그 뒤에 도산(陶山)과 역동(易東)의 회합 때 현일이 말석에 끼어 공맹(孔孟)의 학풍이 살아 있는 고장에서 강학하는 유풍을 보고서 더욱 감탄하고 흠모하였다. 이때부터 서로 왕래하면서 훈도되고 본받았으며, 편지를 왕복하면서 지성스럽게 권면하고 장려해 주신 은혜를 입었다. 그래서 항상 뜻을 가다듬고서 공에게 의지하여 소인이 되는 것을 면할 수 있기를 바랐는데, 불행히도 공이 일찍 세상을 떠나 버리고 양가의 형들도 잇달아 세상을 떠났다. 허둥지둥 길을 잃고서 갈 곳을 몰라 헤매다가 마침내 경솔하게 국법을 범하여 스스로 귀양 가는 화를 초래하였다. 실의에 빠지고 곤궁하여 뜻과 사업이 황폐하고 실추되어 부형(父兄)과 사우(師友)들이 책망하고 기대한 뜻에 부응하지 못했으니, 매번 생각할 때마다 달연(怛然)히 두려워 두문불출하고 조용히 지내면서 감히 스스로 보통 사람에 견주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공의 사자(嗣子) 순의가 아들 대를 보냈는데, 집안에 전해 오는 행실기 한 통을 안고서 천리를 멀다 않고 장독(瘴毒)이 있는 호남의 바닷가로 나를 찾아왔다. 그 편지에서 말하기를, “선인(先人)이 어려서부터 가정의 훈도를 받아 효제(孝悌)를 돈독히 행하여 그 근본을 세웠고, 또 사방으로 벗을 취하여 그 덕을 이루었습니다. 더불어 사귀며 왕래한 사람이 매우 많았고, 사적을 자세히 알고 믿을 만한 사람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인이 저희들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셨을 때 제가 나이가 아직 어려서 글을 부탁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럭저럭 세월을 보내다가 세대가 바뀌게 되니 지금은 살아 있는 선인의 벗이 아무도 없고, 오직 집사만이 대대로 통가(通家)하였고, 또 선인께서 무양(無恙)하실 때 친하게 지낸 옛 벗으로서의 정이 있으시니, 반드시 우리 부친의 드러나지 않은 덕을 잘 말씀해 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감히 재배하고 청합니다.” 하였다. 현일이 편지를 뜯어 보고 초연(愀然)히 말하기를, “그대가 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대 집안이 우리 집안과 정의(情誼)가 특별히 두텁고, 또 그대 조부가 우리 백씨, 중씨와 교유하여 도의(道義)와 덕업(德業)으로 서로 기대하고 허여하였는데, 불행히 하늘이 수(壽)를 주지 않아서 양가의 정황이 모두 이와 같다 보니 내가 항상 슬퍼하고 탄식하며 돌아가신 분을 다시 살려 내지 못하는 애통한 마음만 간절하였다. 지금 그대가 선인의 드러나지 않은 덕을 천양하라고 부탁하였는데, 평생 흠모하던 정성을 생각할 때 어찌 감히 사양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현일은 이름이 죄적에 올라 있어 현재 두문불출하고 크게 뉘우치고 있으므로 감히 한마디 말을 내서 사람들의 비난을 초래할 수 없으니, 어찌 갑자기 파계(破戒)하여 이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비록 나 자신은 애석해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찌 선인의 덕에 누가 되지 않겠는가.” 하니, 김군이 일어나 절하고 또 청하였다. 현일이 굳게 거절할 수 없어 받아서 상자에 보관해 둔 지 여러 해가 되었다. 이제 다행히 성은을 입어 방귀전리(放歸田里)하라는 명을 받고서 비로소 그 집안에 전해 오는 행실기에 의거하고 내가 직접 듣고 본 것을 참고하여 우선 위와 같이 기록하고, 당세의 문장가가 필삭(筆削)하기를 기다린다. 삼가 쓴다.[주-D001] 여기에 …… 없다 : 이 말은 원래 《시경(詩經)》 〈진로(振鷺)〉에 나오는 말로, 하(夏)나라의 후예인 기(杞)와 상(商)나라의 후예인 송(宋)의 제후들이 주(周)나라의 제사에 참석하여 돕는 것을 노래한 것인데, 그들이 자기 나라에서도 미워하는 자가 없고, 이곳 주나라에서도 싫어하는 이가 없어서 길이 영예로울 것이라는 내용이다. 여기에서는 시 본래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 아니라 단장취의(斷章取義)하여, 가장이 된 자와 자제가 된 자가 각각 자기의 도리를 다하면 집안에서의 처신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내용으로 인용한 것이다.
    2022-04-29 | NO.28
  • 처사(處士) 이공(李公) 행장
    갈암집 제28권 / 행장(行狀)공의 휘는 순일(純一)이고, 자는 성지(誠之)이며, 그 선조는 광주인(光州人)이다. 그 시조는 순백(珣白)으로 고려 때에 좌복야(左僕射)를 지냈다. 이때부터 여러 대에 걸쳐 높은 벼슬을 지냈다. 본조(本朝)에 들어와서는 휘 광제(光齊)라는 분이 있었으니, 영묘조(英廟朝)의 명신(名臣)으로서 벼슬은 예문관 제학에 이르렀고 경창군(慶昌君)에 봉해졌다. 증조의 휘는 방형(邦衡)으로 헌릉 참봉(獻陵參奉)을 지냈으며, 조의 휘는 지남(地男)으로 성균관 생원이었다. 부의 휘는 관(灌)인데, 양자(養子)를 가서 중부(仲父)인 생원 휘 운남(雲男)의 후사가 되었다. 학행과 풍절(風節)이 있었으며 동암(東巖) 이공 발(李公潑)의 문인(門人)으로 기축옥사(己丑獄事)에 연좌되어 온성(穩城)으로 장류(杖流)되었다. 임진년 난리가 일어났을 때 용서를 받아 돌아왔다가 적의 예봉(銳鋒)에 죽으니, 그때 나이 23세였다. 비(妣) 조씨(趙氏)는 판윤(判尹) 유(踰)의 후손이며 참봉 원(愿)의 따님이다. 만력(萬曆) 정해년(1587, 선조20) 8월 기묘일에 공을 낳았다.공은 태어난 지 3년 만에 부친이 유배를 당하는 화를 만났는데, 밤낮으로 울부짖기를 그치지 않았다. 또한 적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나이 겨우 6세였는데, 곡읍(哭泣)하면서 슬퍼하는 것이 성인(成人)과 다름이 없었다. 정유재란 때는 공의 나이가 겨우 10여 세였는데, 모친을 모시고 피난을 하면서 험난한 지경에 빠지거나 생사의 고비를 드나들면서도 매우 정성을 갖추어 공경스럽게 봉양을 하니, 보는 이들이 모두 기특하게 여겼다. 기해년(1599, 선조32)에 난리가 조금 진정되자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황폐한 터와 무너진 벽에 잡목이 가득하였다. 이런 때에 본생(本生) 조부모(祖父母)의 상을 당하고 또 소후(所後) 조비(祖妣)의 상을 당하였는데, 폐허가 된 와중에서도 예를 갖추어 장사와 제사를 지내니, 친척들과 이웃들이 칭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이미 지성(至性)이 있었는데, 일을 살필 나이가 되어서는 집안의 비상(非常)한 화(禍)를 애통해하면서 언제고 피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 종자(從者)의 말에 따라 11월 24일을 기일(忌日)로 정하고 매번 제사를 올릴 때가 되면 반드시 소식(素食)을 하면서 그달을 보냈다고 한다. 늘 말하기를,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해골을 수습하지 못하였고 기일도 자세히 알지 못하니, 천지 사이의 한 죄인이다. 태어나면서부터 한(恨)을 품었고 죽어서도 원통함을 품게 되었다. 나의 자손들은 반드시 이 뜻을 체인(體認)하여야 할 것이며, 내가 죽거든 장사 때에는 회곽(灰槨)을 쓰지 말고 제사 때에는 유밀(油蜜) 같은 좋은 음식을 차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밤이면 반드시 경건하게 묵도(默禱)하면서 말하기를, “불초(不肖)한 자식이 이렇게 천지에 사무치는 슬픔을 안게 되었습니다. 만약 꿈에서라도 신명(神明)께서 불쌍히 여기시어 돌아가신 아비가 뼈를 묻은 곳과 돌아가신 날을 알려 주신다면, 망극한 심정이 조금이나마 풀릴 것 같습니다.” 하였으며, 날마다 이렇게 하기를 죽을 때까지 하였다.공은 어린아이 때부터 자친(慈親)의 뜻을 조금도 어겨본 적이 없었으며, 성장해서는 출타할 때나 귀가할 때 반드시 고하였고 돌아올 날짜를 예정했을 때는 조금도 기일을 어기지 않았다. 식사 때에는 반드시 곁에서 모시면서 먼저 맛을 보고 난 뒤에 드렸으며, 만약 병환이 드셨을 때는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먹어도 맛을 알지 못하고 거처할 때도 편안히 앉아 있지 못하였다. 언젠가 갑자기 어머니의 병이 위독하시어 백약(百藥)이 효과가 없자 온 집안이 황급히 여겨 무당을 시켜 기도를 하게 하려고 하였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제가 직접 조상들께 빌어 보겠습니다.” 하고는, 목욕재계하고 의관을 정돈한 채 사당 앞에 서서 울면서 사연을 고하였는데, 그 내용이 애절하여 신명을 감동시킬 만한 바가 있었다. 고하는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병환이 조금씩 차도가 있기 시작하여 반나절이 지나자 완쾌되니, 사람들이 성효(誠孝)에 감응한 것이라고 하였다.정해년(1647, 인조25) 가을에 모친이 천수(天壽)를 누리고 하세(下世)하시니, 공의 나이 61세였다. 가슴을 치고 울부짖으며 애통해하여 기절했다가 깨어났으며, 성빈(成殯)한 뒤에는 의복(衣服)과 침식(寢食)을 한결같이 예법(禮法)에 맞게 행하였다. 한겨울의 심한 추위 속에서도 홑옷만을 걸친 채 밤낮으로 분주하게 주선하면서 장사(葬事)를 준비하였다. 종제(從弟) 순형(純馨)이 울면서 설득하기를, “노년(老年)의 상제(喪制)는 마땅히 권도(權道)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대사(大事)를 스스로 다해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먼저 스스로 몸을 상하게 한단 말입니까.” 하니, 답하기를, “나는 추위를 겁내지 않는 편이다.” 하면서, 끝내 바꾸지 않았다. 매번 석곡(夕哭)을 한 뒤에야 비로소 여차(廬次)로 돌아왔으며, 수질(首絰)과 요질(要絰)을 벗지 않고 잠을 잤다. 새벽이 되면 다시 빈청(殯廳)에 들어가 바닥에 엎드려 슬피 곡하고 인하여 종일토록 띠자리 위에서 지내니, 몇 개월 사이에 형용(形容)이 수척하여 거의 지탱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친한 이들이 더러 권하기를, “애통하여 몸이 수척해질 수는 있으나 자신의 생명을 해칠 정도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옛날부터 분명한 경계가 있다. 더구나 연기(年紀)가 그토록 높으니 이처럼 몸을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 하면, 공은 울면서 사례하기를, “거적자리에서 자고 흙베개를 베지 않고 여차에서 편안히 거처하면서 예제(禮制)를 따르지 못한 것이 또한 이미 많았는데, 어찌 생명을 해치게 될 것을 걱정하겠는가.” 하였다. 장지(葬地)를 정하지 못해 다음 해 봄에야 비로소 장사를 치를 수 있었다. 졸곡(卒哭)을 마치고 나자 비로소 거친 음식을 먹고 물을 마셨는데, 그래도 채소와 과일은 먹지 않았다. 또 노환(老患)으로 여묘(廬墓)를 하지 못하는 것을 지극한 한으로 여겨 한 달에 두세 번은 묘소를 찾았으며, 상(喪)을 마칠 때까지 아무리 심한 추위나 더위에도 그만둔 적이 없었다. 매번 성묘를 할 때마다 눈물이 빗물처럼 떨어지니, 묘 앞의 절하는 자리의 사초(莎草)가 그로 인해 말라죽었다.기축년(1649, 인조27) 봄에 병으로 온몸이 모두 마비되고 타는 듯하여 직접 제전을 드릴 수는 없었지만, 매일 한 차례 부축을 받으며 영연(靈筵)에 나아가 살피고 돌아왔다. 이해 겨울에 상기(喪期)가 끝나자 공은 눈물을 흘리고 호곡(號哭)하는 등, 슬픔을 이기지 못하면서 이르기를, “내년은 내 선인(先人)께서 화(禍)를 당하신 해이니, 어찌 무사히 상기를 마쳤다고 하여 갑자기 길사(吉事)로 나아가면서 나의 한없이 망극한 슬픔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면서, 마침내 심상(心喪)의 상제를 행하였다. 거처하는 곳에는 북창(北窓)을 가리지 않았으며, 조석으로 기장을 먹고 물을 마시면서 채소는 먹지 않았다. 장자(長子) 원우(元雨)가 울면서 간하기를, “대인(大人)께서는 고령의 몸으로 막 모상(母喪)을 마치시면서 몸이 심하게 축나셨는데, 이제 또 이처럼 고집하며 바꾸지 않으시니, 그러시다가 몸을 보전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니, 공이 울면서 말하기를, “편모께서 이미 돌아가셨고 너희들도 벌써 장성하였으니, 내가 정을 펴지 못한 상태에서 정을 펴다 죽은들 무엇이 한스럽겠느냐.” 하였다. 경인년(1650) 겨울에 병환이 심해졌는데도 오히려 조석(朝夕)으로 참알(參謁)하는 것을 폐하지 않았다. 신묘년(1651) 원일(元日)에 친히 제사를 드리고 마침내 조석으로 참알하는 것과 북창을 가리지 않는 일 등을 그쳤다. 그러나 아직 상기가 끝나지 않았다고 하여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셨다. 병환이 점차 깊어지자 원우가 다시 울면서 간하니, 이에 마침내 심상(心喪)의 담제(禫祭)를 행하고 비로소 평상(平常)을 회복하였다. 효종대왕(孝宗大王)이 즉위한 지 3년 되던 해는 그 선공(先公)이 돌아가신 지 1주갑(周甲)이 되는 해이다. 공의 찢어지는 듯이 애통한 심정은 부음을 처음 들었을 때와 같았으므로, 마침내 6월 모일(某日)에 따로 축문을 지어 곡하며 신주(神主)에 바쳤다. 이는 어떤 사람이 선공이 해를 입은 날이라고 전해 준 것이 6월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공은 늘 죄인으로 자처하여 모든 거상(居喪)하는 의절(儀節)이 자신도 모르게 예제(禮制)보다 지나치곤 하였다. 또 몸을 영화롭게 하여 명예를 얻어 세상에 드러나고자 하지 않았으므로 과거 공부를 일삼지 않았다. 다만 서적(書籍)을 가지고 자오(自娛)하면서 《소학(小學)》, 북정편(北征篇), 애일가(愛日歌) 등의 글에 대해서는 외우고 읊조리면서 한시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무심히 세상에 뜻이 없는 자처럼 하였으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은 천성(天性)에서 나온 것이었다. 천계(天啓) 갑자년(1624, 인조2)에 이괄(李适)의 반란이 일어나 대가(大駕)가 파천(播遷)을 하게 되었을 때 공은 의병(義兵)을 규합하여 관군의 세력을 도왔고, 또 군량을 모아 경창(京倉)까지 운반하기도 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에 그 공을 포상하는 은전이 내렸으나 공 자신은 그것을 공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공을 돌렸다. 숭정(崇禎) 병자년(1636, 인조14)에는 북쪽의 군대가 창궐하여 인조대왕(仁祖大王)이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포위되어 있을 때 공은 한두 동지들과 의병을 일으켜 공문(公門) 밖에서 모였는데, 날마다 얼어붙은 땅에서 지내고 음식을 상에 올려놓고 먹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주상(主上)께서 고립된 성에서 추위와 배고픔을 참고 계신다. 우리 소인(小人)들이 비록 나라의 녹을 먹은 적은 없으나 그래도 이 땅의 음식을 먹었으니, 어찌 차마 따뜻한 방에서 지내며 소반 위의 음식을 먹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한창 의병을 모을 즈음에 군령을 어긴 한 아전이 있었다. 공이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들고 성난 소리로 말하기를, “이렇게 위난(危難)한 때는 군신(君臣)의 대의(大義)에 존비(尊卑)와 귀천(貴賤)의 차이가 없거늘 네가 어찌 감히 이럴 수가 있느냐.” 하면서 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니, 보는 이들이 모두들 격동되고 감탄하여 모집에 응하는 자들이 많았다. 이에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눈물을 훔치면서 북향하여 죽음을 무릅쓸 뜻을 가지게 되었다. 마침내 길을 떠나 반 정도 올라갔을 때 대가(大駕)가 성에서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돌아왔다. 경인년(1650, 효종1) 여름에 고을의 대부가 그 행의(行誼)를 조정에 아뢰려고 하였으나, 공이 듣고는 굳게 사양하여 마침내 그만두었다. 계사년(1653) 여름에 후임 태수(太守)가 이르렀을 때 사대(使臺)에 자세히 보고하여 조정에 전하도록 하였으나 답을 얻지 못하였다. 무술년(1658, 효종9)에 집안에서 병환으로 졸(卒)하니, 2월 7일이었다. 향년 72세였다. 이해 9월 모일(某日)에 순천부(順天府) 동막리(桐幕里)의 해향(亥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처(妻) 방씨(房氏)는 직제학(直提學) 사량(士良)의 후손이며 처사(處士) 덕참(德驂)의 따님이다. 공보다 18년 앞서 졸하였으며 같은 언덕에 봉분을 달리하여 장사 지냈다. 3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원우(元雨)이다. 차남은 주우(柱宇)인데 장가를 들기 전에 요절하였다. 막내는 성우(聖雨)인데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남해 현령(南海縣令)에 이르렀다. 딸은 사인 이상하(李相夏)에게 시집갔다. 원우는 3남을 두었는데, 두광(斗光), 두채(斗采), 두망(斗望)이며, 성우는 자식이 없어 족자(族子) 두성(斗成)으로 후사를 삼았다.공은 천성적으로 효성이 독실하였으며 또 강개한 뜻이 많았다. 매번 충신이나 의사가 목숨을 바쳐 절의(節義)를 세운 일을 볼 때마다 반드시 감격하고 오열하였으며 그 일을 상상하며 흠탄(欽歎)하곤 하였는데, 항상 말하기를, “문문산(文文山 문천상(文天祥))이나 육수부(陸秀夫 육유(陸游))의 전기를 읽고서 크게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 아니다.” 하였다. 일찍이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정충비(旌忠碑)를 지나면서 말에서 내려 재배(再拜)한 뒤에 절구(絶句) 한 수를 읊조리기를, “남쪽에 세워진 천년의 빗돌, 그 위풍 만고토록 유구하네. 말을 멈추고 내려 절을 하자니, 감격의 눈물이 마구 쏟아지네.〔南柱千年石 威風萬古長 停驂一下拜 感淚爲滂滂〕” 하여, 그 경앙(景仰)하는 뜻을 나타내었다.‘불기심(不欺心)’ 세 글자를 평생 가슴에 새기고 늘 그것을 말하여 자손들을 경계하였다. 집안을 다스릴 때는 내외(內外)의 구분을 엄격히 하여 남녀가 설만한 옷차림으로 만나지 못하였다. 《열녀전(烈女傳)》을 번역하여 써서 집안의 부녀자들에게 주어 송습(誦習)하게 하고 잡설(雜說)에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하였다. 만약 고아나 과부가 억울하게 법망(法網)에 걸리면 수고를 꺼리지 않고 힘을 다해 구제하고자 하였으며, 어쩌다 빈궁한 사람이 혼인(婚姻)이나 장사(葬事)를 제때에 치르지 못하고 있으면 구휼해 주고 보조해 주는 데에 또한 그 힘을 아끼지 않았다. 재산을 늘리는 등의 일에 대해서는 피하고 꺼리기를 마치 몸이 더럽혀질 것처럼 하였다. 집안에는 비축된 양식이 없어 처자가 기한을 면하지 못하였으나 처신하는 것이 느긋하였다.공은 대대로 호남(湖南)의 낙안군(樂安郡)에서 거주하였고, 현일(玄逸)은 동쪽 구석에서 나고 자랐는지라 실은 공을 알지 못하였다. 그런데 경오년(1690, 숙종16) 여름 벼슬살이 때문에 서울에 있을 때였다. 하루는 공의 손자 두망이 집으로 나를 찾아와서 그 형 두광이 공의 행적의 대체(大體)를 기술한 것을 현일에게 주면서 행장을 엮어서 글 잘하는 이에게 지(誌)를 청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하였다. 현일이 능력이 없다고 사양하였으나 그 청이 갈수록 정성스러웠다. 말뜻이 애절하고 성의가 간절한 데다 또 천리 밖에서 멀리 나를 찾아온 뜻을 저버려서는 안 될 듯하여 마침내 그 일을 맡기로 허락하였다.현일이 삼가 생각건대, 공의 자효(慈孝)한 성품과 제행(制行)의 독실함은 모두 다른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거니와, 그 충의(忠義)롭고 장렬(壯烈)한 기상 또한 충분히 쇠퇴해진 풍속을 진작시키고 유약한 사람을 흥기시킬 만하다. 고인(古人) 중에서 찾아본다면 왕위원(王偉元), 송충가(宋忠嘉)와 같은 무리가 아니겠는가. 참으로 이른바 “의도하는 바가 없이 행하여, 그 본심을 잃지 않았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행적을 차례로 기록하고 이처럼 그 본말을 자세히 논하는 것이니, 삼가 당세(當世)의 입언(立言)하는 군자가 다행히 채택하여 영원토록 전해질 수 있기를 바란다. 삼가 행장을 쓴다.
    2022-04-29 | NO.27
  • 척금당기〔滌襟堂記〕 - 동강유집 제10권
    척금당기〔滌襟堂記〕 - 동강유집 제10권 : 동강(東江) 신익전(申翊全, 1605~1660)광주(光州) 치소 북쪽으로 5리 정도 되는 가까운 곳에 경양(景陽)이라는 역(驛)이 있다. 노령의 큰 길에 있어 북쪽으로는 진원(珍原)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데 서울로 길이 나 있다. 서쪽으로는 영암과 나주를 이웃하고 있고 남쪽으로는 병영(兵營)을 향하는데 바다 가까이에 이르러 길이 끝난다. 동쪽으로는 화순(和順)으로 나가 남원(南原)에 이르니 노령 남쪽 지역을 관통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각 갈림길마다 둔 역마가 항상 넉넉하지 않았다.병자년(1636, 인조14)과 정축년(1637)의 난리 후에는 양서(兩西)의 역말의 공급을 대신 감당해왔는데, 조금 조련된 좋은 말은 모두 심양과 연경으로 몰고 가서 열 마리 가운데 여덟을 잃게 되거나 아니면 북인(北人)의 행차에 쓰여 격렬하게 달리며 활 쏘고 사냥하느라 북인이 강을 건너고 나면 모두 병들어 뼈만 남게 되었다. 말을 관리하는 행정이 이처럼 시급하니 일을 맡은 사람이 쉴 겨를이 없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있다.나의 외사촌 동생 이선장(李善長)이 이 역에 부임해 자못 자득한 기색이 있었다. 과연 해를 넘기자 정사가 이루어져서 오는 이를 맞고 가는 이를 전송하는데 이곳이 대로(大路)라는 것도 잊을 정도이다. 뿐만 아니라 그간 열 마리 가운데 여덟을 잃었던 말이 순식간에 수를 채우고 병들어 뼈가 드러나던 말이 잠깐 사이에 살찌고 윤기가 흘렀다. 다만 우사(郵舍)가 있는 곳이 낮고 협소해서 손님을 맞을 수가 없었다. 봉급을 덜어 재목을 모아 별당을 지으니 얼마 걸리지 않아 공사가 끝났다.사치스럽지도 누추하지도 않으며 터가 자못 시원하게 트여서 멀리 초목 무성한 평야가 손에 잡힐 듯하고 그 너머로 광주의 외곽이 어렴풋하게 보인다. 우러러보면 서석산(瑞石山 무등산)이 공중에 푸르게 솟아있고 그 앞의 큰 저수지에는 물이 고여 있다. 저수지에 심은 연꽃 만 송이가 이어져 긴 제방을 그늘지게 하고, 교목 수천 그루가 절양루(折楊樓)에 곧바로 이어진다. 이 제방을 걷는 사람들은 유월에 청량하여 좋다고 한다. 선장이 날마다 그곳에 머물면서 한껏 멀리 바라보며 맑고 깨끗한 바람을 쐬니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시원해서 이에 ‘척금(滌襟)’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로 와서 나에게 기문(記文)을 지어 빛내주기를 부탁하며,“우리 형님께서 광주 목사를 그만둔 것이 최근의 일이니, 집은 비록 새로 지었지만 그 승경(勝景)을 기록하는 데 별도의 말이 필요없을 것입니다.”하였다. 나는 대답하기를,“그대가 이 당에 이름을 붙인 것이 훌륭하지 않은가. 경치야 사람마다 모두 보는 것이고, 이름의 의미는 내가 밝혀주겠네.”하였다.금(襟)이란 옷에서 심장에 닿는 부분이다. 맑고 편안한 마음이 골몰하고 어지럽게 되는 것은 외물에 얽매였기 때문이다. 얽매였는데 씻어낼 생각을 하지 않으면 번뇌에 휩싸여 일을 할 수 없게 되니 어찌 고생스러운 여름 밭일 정도에 비하겠는가.아, 이 당은 앞이 트인 곳에 자리하고 있어 무성한 평야가 손에 잡힐 듯하고 누대와 외성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우러르면 서석산이 있고 굽어보면 저수지가 있으며 연꽃과 제방의 나무가 무성히 있으니 끊임없이 세사에 골몰하는 수고로움을 쉬기에 참으로 충분하다. 다만 이것뿐만이 아니다. 선장이 이 당에 힘입어 흉금을 씻어내기는 하지만 필시 평소 그의 흉금은 절로 번뇌가 없어서 큰 길을 관리하는데 충분하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다른 사람이 겨를을 낼 수 없는 곳에서 겨를을 만들어 마치 할 일이 없는 것처럼 시원하게 이 당에서 쉴 수 있겠는가. 이 도를 확장하면 나라 다스리는 일을 보좌하는 데 쓰고도 남을 것인데 하물며 작은 일개 역참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선장의 임기가 거의 다 되었다. 고과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칭찬을 받고 발탁될 것이 틀림없다. 내가 광주 목사를 그만둔 뒤여서 그대와 함께 한번 감상하지도 못하고 멀리서 기문만 쓰는 것이 아쉽구나.선장의 이름은 이원기(元基)이니 선장은 그의 자이다. 어려서 집안의 가르침을 따라 유자의 학문을 공부하고 과거를 달갑게 여기지 않아 우선 이 역참의 찰방이 되었는데, 그가 부임하여 선대부 잠와공(潛窩公)이 고산역(高山驛)을 훌륭히 다스린 업적을 똑같이 따르고자 하였다고 한다. 이 당에 오르는 자는 내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주-D001] 선대부 …… 업적 : 잠와공(潛窩公)은 이명준(李命俊, 1572~1630)으로, 호는 잠와이다. 이명준이 고산 찰방(高山察訪)으로 있을 때 법을 준수하고 흔들리지 않아서 비록 감사가 오더라도 반드시 마패를 확인하고 말을 내주었다. 감사가 화가 나서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아 감사와 다투고 결국 조정에 판결을 청하였다. 조정에서 공이 옳고 감사가 잘못한 것으로 인정하자 오랜 폐단이 혁파되었는데, 공은 마침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牧民心書 卷3》
    2020-10-07 | NO.26
  • 총석정(叢石亭)과 무등산(無等山) 바위의 우열(優劣) - 임하필기 제27권
    총석정(叢石亭)과 무등산(無等山) 바위의 우열(優劣) - 임하필기 제27권 / 춘명일사(春明逸史) 총석정은 통천군(通川郡)의 바닷가에 있는데, 마치 기둥처럼 서 있고 몸체에 여섯 모가 갖춰져 있으며 각 모의 길이는 한 자쯤 되고 높이는 10여 길이다. 네모반듯하고 평평하여 마치 승묵(繩墨)으로 재서 만든 것과 같으니, 진실로 조화(造化)의 솜씨가 아니라면 어찌 이와 같을 수가 있겠는가. 내가 광주(光州) 무등산의 바위를 보고서 기이하다고 자랑을 하였는데, 지금 이 바위를 보고난 뒤로는 더 이상 볼 필요가 없어졌다. 혹자가 말하기를, “두 바위의 우열을 어떻게 변별하오?” 하기에, 내가 응답하기를, “만약 미전(米顚)으로 하여금 그것들을 보게 한다면, 무등산의 바위에 대해서는 틀림없이 도포(道袍)와 홀(笏)을 가져오게 하여 절을 할 것이고, 총석정의 바위에 대해서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이 오체(五體)를 땅에 던져 덥석 절을 할 것이오. 이것으로써 그 고하(高下)를 정하면 될 것이오.” 하였는데, 바위는 말을 할 줄 모르되 마치 고개를 끄덕이는 듯하였다.[주-D001] 미전(米顚) : 송(宋)나라 때의 서예가 미불(米芾)을 말한다. 그의 행동거지가 괴상하였기 때문에 미치광이라는 뜻으로 그렇게 불렀다 한다.《宋史 卷444 米芾列傳》* 무등산의 바위는 서석대로 보인다.
    2020-09-25 | NO.25
  • 최신(崔愼)의 기록- 송자대전 부록 제18권
    최신(崔愼)의 기록 - 하, 송자대전 부록 제18권 / 어록(語錄) 5 :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1607~1689)[신] 세속(世俗)에 전하기로는, 김덕령(金德齡)은 용력(勇力)이 있는 외에도 신이(神異)한 일화가 많았습니다. 이를테면 두 겨드랑이에 날개가 있었다는 말과 수감(收監)되었을 적에 고문을 무수히 당했으나 살갗이 쇠처럼 단단하여 상처가 나지 않았는가 하면, 형틀을 부수고 지붕 위에 올라앉았다는 등등의 얘기가 있습니다. 또 선조께서 친히 국문(鞫問)하려고 궐정(闕庭)으로 끌어들였을 때 김덕령이 갑자기 맨몸에서 칼을 빼들고 나아와서 ‘전하께서 신이 반역했다고 하시는데, 그렇다면 신이 이 자리에서 참으로 반역 행위를 해 볼까요?’ 하므로 선조께서 ‘너는 네 스스로 죽으라. 어째서 이처럼 난잡하게 구는가.’ 하였다 합니다. 이 같은 말들이 혹 하나라도 근사한 것이 있습니까?[선생] 김덕령은 광주(光州) 사람으로 월사(月沙)의 가문(家門)에 의해 발신(發身)하였다. 그러므로 김덕령의 일에 관해서는 월사의 자손만큼 잘 아는 이가 없다. 내가 일찍이 백주(白洲 이명한(李明漢)) 등 제공(諸公)에게서 들었는데, 모두 세속에서 전하는 것과 같이 거짓이 아니었다. 또 ‘만약 김덕령의 일을 직접 본 사람이 아니면 반드시 그 말을 믿으려 할 이치가 없을 것이니, 말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그리고 지난날에 월사의 부친(이름은 계啓)이 장성 현감(長城縣監)으로 있었는데, 마침 단오절(端午節)이어서 인근 몇몇 고을의 수령(守令)들이 모두 모이게 되었다. 호남의 민속(民俗)에 단옷날이면 관아(官衙)의 마당에 모여 씨름판을 벌이는데, 이른바 판을 쓸고 일등하는 자는 후한 상을 받았다. 때문에 먼 데 사는 백성들 중에는 식량을 싸 가지고 오는 자까지 있었다.그날, 장성에 모였던 몇몇 고을 사람들 중에 어떤 장사(壯士) 하나가 많은 사람들을 모두 이겨 내고 혼자서 춤추면서 큰소리치기를 ‘만약 나와 힘을 겨룰 자가 있다면 나와서 승부를 결판내자.’ 하였다. 그때 문밖에서 어떤 선비가 들어오려다가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여러 고을의 수령들이 이 말을 듣고는 빨리 맞아들이도록 했는데, 바로 김덕령이었다. 수령들이 술과 안주를 먹이고 권하기를 ‘자네가 만약 저 사람을 이긴다면 눈앞의 통쾌한 일이 될 걸세.’ 하였다. 그러나 김덕령은 굳이 사양하면서 ‘저는 본디 유생(儒生)으로 몸마저 허약한데 어떻게 저 사람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여러 사람이 계속 권해 마지않으므로 이에 초립(草笠)과 도포(道袍)에 신발을 신은 채 뜰가로 내려왔다. 여러 사람들이 ‘어째서 신을 벗지 않는가?’ 하자, 김덕령이 ‘어쨌든 시험해 보겠습니다.’ 하였다. 그 장사는 어린애처럼 깔보는 말을 많이 하자, 김덕령이 ‘그대는 많은 말을 말라. 힘만 겨루어 보면 되는 것이다.’ 하였다. 이에 그 장사가 김덕령의 허리를 안아들고 몇 바퀴 돌리다가 땅에 집어던지니, 김덕령의 신을 신은 두 발이 마른 땅에 한 자쯤 빠져 들었으나 꼿꼿하게 선 채로 넘어지지 않았다. 장사는 그제야 비로소 두려워하는 기색이 보였다. 다시 어울리게 되어서는 김덕령이 한 번 휘둘러 쓰러뜨리니, 장사가 ‘실수했다.’ 하면서 다시 대결하자고 하였다. 그러자 김덕령의 눈에 불빛이 발하면서 호랑이의 포효(咆哮)처럼 소리를 지르며 장사를 죽이려 하였다. 이는 김덕령은 눈에서 불빛이 발하면 용기(勇氣)가 대발(大發)하고 용기가 대발하면 비록 자제(自制)하려 해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크게 놀라며 일제히 입을 열어 제지시켰다. 그 뒤로부터 명성이 온 세상에 진동하였고, 월사의 가문에서 천거하여 등용되었다.또한 그가 모친상(母親喪)에 복을 입고 있을 때 왜구(倭寇)가 갑자기 쳐들어왔으므로 그는 나라를 걱정하다가 기복(起復)되어 나와서 왜구를 격퇴한 공로가 많았다. 그가 수감되어서는 온갖 고문을 가했으나 살갗에 상처가 나지 않았다. 이에 ‘나는 유생(儒生)으로서 기복되어 종군(從軍)하였으니, 이는 큰 죄이다. 이제 나는 이를 이유로 하여 죽는 것이다. 어찌 감히 반역했다는 무함으로 죽을 수가 있겠는가.’ 하고, 그 길로 자결했다 한다. 그의 말이 가긍(可矜)한데도 아직까지 신원(伸冤)되지 못하고 있으니, 애석하다.선생이 일찍이 좌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었다.“그대들은 방언자폐(放言自廢)란 문구(文句)의 뜻을 아는가?”응답하는 자가 없었다.[신] 무슨 깊은 뜻이라도 있습니까?[선생] 그대는 아는가?[신] 일찍이 스승으로부터 배우지 못하고 임의대로 읽었으니, 어떻게 잘 알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말을 함부로 하고 스스로 폐인이 되어 벼슬하지 않는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선생] 그것은 바로 주자(朱子)의 주설(註說)이다.[문생(門生)] 주자의 주설 외에도 다른 해설이 있습니까?[선생] 옛날의 주석에 방언(放言)을 방언(防言)으로 풀이하였으니, 대개 말을 하지 않고 스스로 폐인이 된다는 뜻이다.[문생] 고주(古註)가 비록 이와 같다 해도 이미 주자의 주설이 있으니, 누가 주자의 주설을 버리고 옛 주석을 따르겠습니까.선생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씀하셨다.“그렇다. 우윤(右尹) 권시(權諰)의 서신(書信)에 이러한 옛 주석을 인용하여 ‘스스로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고 스스로 폐인이 되어 행세(行世)하지 않으려 한다.’ 하였다.”좌중에 있던 이들이 모두 말하였다.“굳이 주자의 주설을 따르지 않으려는 것이니, 그것이 권 우윤의 티를 내는 것입니다.”
    2020-09-23 | NO.24
  • 최익현-외성당기
    광주목(光州牧) 안청리(安淸里)의 조촐한 초가에 ‘외성당(畏省堂)’이라고 편액(扁額)한 집이 있다. 이는 옛날 안촌(安村) 박공(朴公, 이름은 광후(光後))이 평소에 거처하던 옛집으로, 우암(尤菴) 송 선생(宋先生)이 친필로 쓴 것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는 수백 년이 지났건만, 동우(棟宇)가 탈이 없고 당의 편액도 완연하게 보존되어 이 당에 오르는 후인들을 자연스럽게 감발하고 격려하여 감히 태만하지 못하게 하니, 선생의 덕의(德義)와 풍도(風度)가 사람의 마음속에 있게 하는 것이 아, 영원하구나.내가 바다에서 귀양이 풀려 돌아오던 날, 박공의 후손인 박만동씨(朴萬東氏)를 우연히 하남(河南)에서 만났는데, 좌상에서 그를 보니 그 온화한 덕용(德容)과 엄정한 의론이 참으로 고가(故家)의 전형(典型)이어서 나는 마음속으로 그윽이 흠모하게 되었다. 그 후 편지를 보내 나에게 외람스럽게도 당기(堂記)를 부탁하였는데, 그 뜻이 너무 진중하여 나는 재삼 적격자가 아니라고 사양하였으나 끝내 허락의 명을 받지 못하여 붓을 들었다.삼가 생각건대, 군자의 학문은 존심(存心), 양성(養性), 사천(事天), 입명(立命)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작용의 법문(法門)을 말한다면, 계신(戒愼), 공구(恐懼)와 스스로를 속이지 말고 혼자만이 아는 곳을 삼가야 할 것이며, 그 실사(實事)의 제목을 말한다면 역시 천명을 두려워하고 대인(大人)을 두려워하며 성인의 말을 두려워해야 한다. 또 남을 위해 도모할 때 자신의 마음을 다 바치고 벗들과 사귀는 데 믿음으로 하며 스승에게 배운 것을 익히는 것이다. 하나라도 혹시 여기에서 반대되는 일을 하게 되면 사욕(私欲)이 넘쳐흐르고 천지가 뒤바뀌며 삼강(三綱)이 없어지고 구법(九法)이 무너지게 되니, 오히려 홍수(洪水)와 맹수(猛獸)의 화보다 심한데도 구원하지 못하게 된다.송 선생(宋先生)은 수사(洙泗, 공자(孔子)), 낙건(洛建, 정주(程朱))의 학문을 지니고 깊은 못에 임하듯, 얇은 얼음을 밟듯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공부까지 더하였으니, 그 전체 대용(全體大用)이 우주에 충만하고 고금을 관철하였다. 그러므로 천지 강상(綱常)의 중한 책임을 졌지만 실천할 바를 의심하지 않았으며, 위험하고 답답한 역경에 처하였지만 그 지키는 바를 바꾸지 않았다. 그 첫째는 중화(中華)를 높이고 이적(夷狄)을 물리치는 것이며, 둘째는 흑수(黑水, 백호(白湖) 윤휴(尹鑴)를 말함)를 공격하고 주자(朱子)를 호위하는 것이며, 셋째는 명교(名敎)를 부식(扶植)하고 도학을 천명한 퇴계(退溪), 율곡(栗谷) 이하 여러 선생을 본받고 추념(追念)하는 일들이다. 이는 외성(畏省)하고 존양(存養)하는 공부가 짧은 시간이라도 중단하지 않아서 긴요함을 맛보고 힘을 얻어 평생에 수용하여 많은 사업(事業)을 이룬 것이니, 이는 천지에 세우거나 백세 후의 성현을 기다려서도 의혹됨이 없을 것이다. 이것을 말미암아 말한다면 당시 사제 간에 가르치고 배우며 부탁한 뜻을 비록 상세하게는 알 수 없지만, 역시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남을 사랑하고 자신을 다스린 도로 남을 다스리지 않았겠는가.오늘날은 세상이 더욱 말세가 되어 변란이 거듭하여 일어나서 서귀(西鬼)들이 중국에 횡행하며 오상(五常)을 어지럽히고 삼강오륜을 무너뜨려 화환(禍患)과 걱정이 크고 중하여 지난날 북호(北胡, 청(淸)을 가리킴)나 흑수(黑水)에 비교가 되지 않으니, 저들을 약화시켜서 우리를 강화시키고 더러운 것을 일소하는 정치를 해야 하는데 어찌 잠깐이나 털끝만큼이라도 외성(畏省) 두 글자를 버리고서 공효를 거둘 수 있겠는가.바라건대, 그대는 시대의 변화를 잘 관찰하여 이왕의 업적으로 스스로 만족하지 말고, 늙었다 하여 스스로 꺾이지 말고, 위 무공(衛武公)의 90세에 자경(自警)한 것과 거백옥(蘧伯玉)의 70세에 변화한 공을 본받아 실제로 체험하고 확충하여야 한다. 그러면 선대를 승술(承述)하여 수거(修擧)한 업적뿐만 아니라, 사문(斯文)과 세교(世敎)에도 많은 도움이 되고 남을 것이다. 그러기에 감히 이 회답을 하는 바이다.-최익현(崔益鉉, 1833~1906) 외성당기(畏省堂記) 光州牧安淸之里 蕭然茅屋而扁畏省堂者 故安村朴公燕居舊室 而尤菴宋先生手筆也 迄今數百年 棟宇無恙 堂額宛存 使後人之升斯堂者 自然感發惕厲 而不敢慢焉 先生德義之風之在人者 嗚呼遠矣 不佞自海放還之日 邂逅朴公后孫萬東氏於河南座上 見其德容溫粹 論議峻整 眞故家典型 心竊欽服 伊後書來 猥以堂記之述 屬意鄭重 不佞再三辭非其人 而不獲命 則竊惟君子之學 不外乎存心養性事天立命之間 而言其用功法門 則曰戒愼恐懼無自欺謹其獨 言其實事題目 則亦惟曰畏天命畏大人畏聖人之言 而又曰爲人謀忠 與朋友信 習其所傳於師而已 一或反是 則私欲橫流 天壤倒置 三綱淪而九法斁 有甚於洪水猛獸之禍 而莫之救矣 宋先生以洙 泗洛建之學 加戰兢臨履之功 全體大用 充滿宇宙 貫徹古今 任天地綱常之重 而不疑其所行 處危險拂欝之境 而不易其所守者 一則曰尊中華而攘夷狄 二則曰攻黑水而衛朱子也 三則曰扶植名敎 闡明道學之退 栗以下諸先生 不可不慕法羹墻也 是其畏省存養之功 頓無一日一時之間斷 喫緊得力 平生受用 做成得許多事功 可建天地俟百世而無疑惑焉 由是言之 當日師弟間授受付託之意 雖若未易詳者 而亦豈不以愛己之心愛人 自治之道治人者耶 方今世級愈降 變亂層生 彼西鬼各種 交迹中國 汩陳五行 墮壞倫綱 患之大 憂慮之重 又非北胡黑水輩之比 則其弱彼強此 掃淸開廓之政 豈容一毫一息捨畏省二字而可以收功也 惟吾子觀變玩象 勿以已往而自足 勿以老衰而自沮 益勤衛武 蘧玉九十七十之功 而體驗擴充 則非只承述修擧之爲大業 抑亦有補於斯文世敎而有餘裕矣 敢以是復焉
    2018-08-02 | NO.23
  • 최태진-智島趨拜錄
    최태진(崔台鎭, 1804-1867)의 자는 응천(應天), 호는 오산(五山)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광주목사 등을 지냈던 신석우(申錫愚), 정홍경(鄭鴻慶), 조두순(趙斗淳), 유기상(柳基相), 홍직필(洪直弼) 등 당대의 명사들과 교유했다최태진은 광주읍성의 북문 공북루에 올랐다. 신안 앞바다에 있는 지도(智島)로 가는 여정 중이었다. 여기에서 한여름 지나간 가을의 풍경과 자신을 빗대어 노래하고 있다. 秣馬樓前逈放眺 누각 앞 말을 먹이며 멀리 바라보니庚炎初退午天晴 삼복더위 물러가 정오의 하늘 맑네山川壯麗千年鎭 산천은 장려하니 천년의 진이요文物繁華萬戶城 문물은 번화하니 만호의 성이라曲路亭臺臨北望 굽은 길 정대에서 북쪽을 바라보니平郊秔稻占西成 평야엔 가을날의 벼 수확이 한창이네風煙括盡奚囊裏 풍연을 시 주머니에 가득 담으니無限騷人此日情 오늘 시인들의 정은 한이 없어라그는 신안 앞바다에 있는 지도(智島)로 가는 여정을 담은 ‘지도추배록(智島趨拜錄)’을 지었는데 이 여정 중 공북루에 올랐다. 기록을 보면 그는 1855년 7월 17일 광주에 도착했다.“17일 새벽에 출발하여 광주에 닿았다. 길가에 한 누각이 있었는데 이름은 공북루로 이른바 유문이다. 그 아래에서 묵었다. 읍의 뒤쪽은 무등산으로 고려 초부터 음사가 있었는데, 필재 선생이 관찰사로 있었을 때 나의 집안 선조이신 산당공(山堂公)께서 편지를 올려 통렬하게 금하셨다. 공북루에 올라보면 문미에 ‘매의북두망경화(每依北斗望京華)’라는 일곱 글자가 크게 걸려있다. 아래를 굽어보면 사방으로 들판이 망망하게 펼쳐져 둘레가 거의 100여리이다. 시 한수를 읊고 창평 땅에 다다르니 정송강의 서원이 보였다.”최태진의 문집으로 《오산집(吾山先生文集)》이 있는 데 발문은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 1825~1912)와 정우(正愚)가 썼다.吾山先生文集卷之四  雜著   智島趨拜錄 歲乙卯定齋先生上疏論景慕宮典禮事貶居 于湖南羅州之智島噫義理晦矣吾道窮矣忝在 門庭者不可無往候故陪叔父約族祖保汝族叔 汝善及其弟躍汝以七月初三日治發踰梁山過 田榮雨下如注冠裳盡濕鞭馬至玉洞店避雨已 而少霽八唁姜周祜午後還自倉村過小境川川 水漲溢艱渡踰石堅峙抵熊谷從妹家日已昏矣 朝見雲霧四塞須臾又滂沱食後策馬至十水橋 靑天少露雲氣解駁促鞭自濟民倉前過野平村 至龍塘店且騎且步踰小嶺雨注如昨抵省峙店 解裝而憩雨久不止因午火做一睡天少霽束裝 欲往汪沙野更卜桐谷路由馬洞渡市前津促馬 至元堂村村前大川黃流漲溢澟乎不可濟使葉 奴牽馬試渡馬腹沈沒徘徊川上四顧無雇涉者 躬自脫衣艱涉日已在西鞭馬至水谷津急灘怒 吼招長年二人挾舟而渡雨又滂沱乘昏入桐谷 六日晩朝始有晴意疾踰黃峙到橫步市場午火 促發踰公道里峙直向河東府府舍宏侈基址深 奧眞都護雄邑憩小店問族叔涉氏前日治績居 民說淸白慈惠之澤向光陽疾馳渡斗置津昔翼 虎將軍金公德齡居光州時以親患聞晉州自妹 谷金參奉楠善醫苦請而載歸臨江江船在遠不 得渡公素有神勇使醫瞑目掖而超江恐醫驚悸 顧其後曰水廣纔二寸云故謂之二寸江而俗呼 斗置江江之西卽湖南光陽地踰鷹峙日已暮矣 石路崎嶇馬躓不能前少頃月光始出微徑僅通 艱關到城島驛幕門深閉寂無人聲訪秣馬處寓 宿翼日早飯促裝至楡亭二十里至光陽城門外 問羅州去路則曰誤路入此自此尋小逕抵十五 里有大路如其言寸寸而進到順天橫川店托宿 舍窄不能容相與枕藉而睡鷄三唱各索裝將發 保汝氏失氅衣糚刀行縢汝善氏失帶扇躍汝氏 失細笠煙竹油衫蓋有一業漁者稱黃鱉同宿而 覓之無有人心之不可測如是矣相與一笑各搜 行橐隨有無變通但無副件笠子可著以黃鱉所 棄破冠著躍汝叔相噱不休朝飯行二十里接峙 問松廣寺步步踰吾道峙懸崖崱屴石路參差艱 下坦路踰一小嶺下有標木書曰國用栗木封山 洞壑秀麗煙雲深鎖依然成別界洞天住馬立漕 溪門傍有兩小閣曰滌珠曰洗月閣前有枯木無 甹蘖如植杖僧云普照國師拄植香木經幾百載 如一樣爪其皮皮中含生意亦異事也登枕溪樓 吟一律跨寺前溪起虹橋橋上作樓名曰凌虛閣 一名羽化閣登而頫視溪流成亞爲一方塘游魚 潑潑又吟一律入中門有四天王小憩退小西有 三淸閣對羽化樓京鄕貴遊名銜徧四壁層層簇 簇照耀一閣由法王門玩大雄殿有一釋戴松衲 手念珠義拜因導詣佛前開櫝出銅鉢五箇五箇 換合毫釐無差佛語所謂須彌納芥子芥子藏須 彌者此耶且有屐下體以棕櫚草結成此兩件普 照師舊物云詠一律小東隅有眞影堂左右有殿 曰靑雲曰白雲小歇進午饌山肴野簌稍可適口 書記僧憲彦聰敏而知禮摠攝僧性心又謁見書 名姓板揭于六鑑亭壁午後更上法堂後飮三日 水一椀卽普照師洗心三日覺道之泉云因觀諸 刹曰海淸堂尋劍寮法聖殿晉濟堂不可殫記九 日早朝治發午火同福邑離家六日路不過三百 里而閱來山川無非太行瞿塘川則或騎或擔或 裸一日所渡八九山則或峻或臥或長一日所踰 六七到和順地過伏龍川往往有水石巖壑之勝 宿曲頭店初十日小憩和順邑抵一嶺歇有潭陽 柳雅與之語頗識博因與步下遙望東南有石屹 立柳指而語曰昔李舍人潑全盛時世謂此巖曰 雙轎曰印臺及其家袂禍改名此巖曰喪輿曰斷 頭其事與宋代席帽峯相類到南平市午火卽發 過大野三十里宿羅州邑十一日曉發至咸平馬 院宿十二日至兔嶝前路無秣馬處因午火抵二 十里糠山津津卽渡智島處而靈光界也潮汐進 退之處相望幾五里其路非沙非泥非燥非濕往 往水穴多凹鑿馱馬甚艱而潮入則尤不可易渡 沿路聚石層鱗以備潮入時行人褰涉之勞船路 不過一里向智島鎭所直馳數弓許有大村在路 左曰東里有健兒前導有一人冠而來見曰吾再 從同知梁國順守番鎭所未卽來謁吾代爲擧行 因怪問曰絶島初面何若是申勤對曰觀行色必 是嶺南兩班爲柳參判台監問候而來俺等感悅 之心油然而生故耳其言出於天眞秉彝之心而 吾先生德敎之盛過化之妙及於俄傾之間者有 如是矣改著上衣入謁時先生以泄患愆和雖在 枕席而竦然端坐謂曰遠來訪我此意良勤但老 悖妄觸致勞知友如此良苦良苦其侍傍者柳致 任仲車先生三從弟也金大銖道凝先生外孫也 先生顧而哂曰留此數月孤寂莫甚今日之會可 謂侈矣退定舍館夕飯訖與仲車道凝入侍函筵 夜半退宿連三日與同起居周旋唯諾之間竊覵 榮衛敷潤敎誨諄複患難危險不存于心左右列 侍誾侃湛樂不覺楚囚湘纍之爲何事也翼日與 道凝遊鎭館周覽島中鎭下村落四五十戶竹扉 茅簷頹毁無完屋制如斗如蝸其西有一村村中 有一屋土墻方正樹林幽邃問之乃康津兵使李 公健緖謫居之所李公艶服先生道義伻書往來 烹飪供奉間日不絶彝性所篤尊慕如此亦武人 中高義者也其東南海也嶺南漕運所通之路有 煮鹽幕登主山北望大洋所謂七山海荏子島在 其南云魚族一無可稱而且無市凡欲貿易則詣 馬院一見市費三日五穀僅成樣而早粟最宜結 卜則每負當一兩錢居民不能支而惟燔鹽爲利 一年所煮每戶各數十石以此民賴以安俗則蚩 蠢不知尊卑對人通稱碩士四方十里村無讀書 聲亦無醫藥有急病坐而待命所尙巫覡而已公 廨蕭條無可觀十四日朝質問疑目數條是夕以 篤老下情地難於久曠陳辭告以明日歸先生愀 然曰逢時之喜預料別時之懷十五日告退先生 贈言曰老炎尙酷前路甚遠須愼攝行李無貽瑕 慮因下階送之拜辭之際目不敢仰視足不忍前 道只有飮泣而已仲車兄餞街外道凝及其同留 者柳生然文泮人梁弘隨至數弓許含淚送別午 火馬院懷思悠悠感吟一律舍來路左轉乘暮抵 咸平邑城市寥寥雲月隱隱難於托馬扣路傍一 扉經宿與汝善叔賦聯句十六日冒雨抵四街奴 病留宿十七日曉發抵光州路傍有一樓名拱北 所謂留門也館其下邑之後曰無等山勝國初淫 祠在焉畢齋先生觀察時吾族先祖山堂公上書 痛禁之登拱北樓楣揭每倚北斗望京華七大字 俯瞰四野茫茫周回殆百餘里詠一律抵昌平地 望鄭松江書院邑傍有蔡孝子碩徵碩福復讎碑 過六一亭到潭陽梧柳院宿十八日過玉果縣因 踰谷城界淸明山在東隅而向時所歷雲月峙在 其南云至驛村水砧店秣馬平原廣野巨山扼其 吭沙土多流濆午療至鴨綠院院名白鷺亭以二 水中分也板上有李白軒景奭詩因次韻十九日 抵求禮邑山氣麤厲路險不能馳步抵漢水倉村 店蕭條無秣馬處到蓮谷人馬俱乏且大雨猝下 勢難前進遂止宿翼日促飯行十里花開店河東 界也呼船渡津到二十里船渡岳陽津吟一律望 姑蘇臺鳳凰山瀟湘江其上蓋有班竹云而雨聲 關愁歸期忙迫未能周覽抵十里山水秀麗杉檜 蔚密乃黑龍村也雲天漸薄夷道坦坦馬騰而走 馳入府中午火過桂影樓宿橫步店二十一日到 花亭村與贊楫族氏往桐谷備說往來閱歷二十 二日到家庭闈一安眷累無恙離發後爲日十九 周行凡一千里有奇 《오산선생문집(吾山先生文集)》 권4
    2018-07-12 | NO.22
  • 최현 스님에게 보낸 편지 1〔與璀絢上人〕- 서형수
    명고전집 제5권 / 서(書)최현 스님에게 보낸 편지 1〔與璀絢上人〕관사(官舍)에서 촛불 밝히며 세속의 장부(帳簿)를 매일 살피다 보니 허망한 일에건 실상이 있는 일에건 온통 마음이 혼란스럽고 어수선합니다. 순간의 짧은 생각에도 스님의 가르침을 듣고 싶던 참인데, 뜻밖에 편지를 보내어 혼미하고 게으른 정신을 일깨워주셨습니다. 허망한 속념(俗念)을 흩어버리고 오묘한 깨달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쩌면 이로부터 힘을 얻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큰 은혜에 깊이 감사드립니다.다만, 보내오신 편지에 ‘사랑 애(愛)’자를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사랑도 정욕의 뿌리이기에, 사랑의 대상이 같고 다름을 막론하고 이는 불도(佛道)의 경지에 오른 행자(行者)들이 힘써 마음에서 뽑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처럼 연연하시는지요? 황하의 모래처럼 무수한 덧없는 논의가 겨우 가리개 하나를 사이에 둔 것과 같은 것은 아닌지요? 이 편지를 깨달음의 징후로 생각하신다면 불성(佛性)을 깨닫고 무상함을 깨닫는 데에 은연중의 도움이 되지 말란 법도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법수(法數)》는 서울 집에 깊이 보관해 둔 터라 지금은 찾아서 보내드릴 길이 없으니, 우선은 조만간 고을 수령의 인끈을 풀게 될 날을 기다려야겠습니다. 이전에 태만했던 점 사과드립니다. 목면 한 필을 가사(袈裟) 만드는 데 쓰십사 보내드립니다. 눈이 피로하여 어릿어릿한 바람에 많은 말씀 올리지 못하고 이만 줄입니다.[주-D001] 최현 스님에게 보낸 편지 1 : 【작품해제】 명고가 지방관으로 있을 때 승려 최현(璀絢)이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묻고 전에 빌려준 《법수(法數)》를 돌려달라고 청한 데 대해 답한 편지이다. 명고는 최현의 편지에서 ‘사랑 애(愛)’자를 많이 사용한 것을 가지고 일체의 정욕을 배제하라는 불가의 가르침은 허망한 것이 아닌지 숙고해 보기를 청하고, 책을 즉시 돌려주지 못함을 사과하였다.승려 최현은 본서에 모두 4번 등장하는데, 시고(詩稿) 부분에는 모두 ‘絢上人’으로, 문고(文稿) 부분에는 모두 ‘璀絢上人’으로 표기되었다. 명고의 조카인 서유본(徐有本, 1762~1822)의 《좌소산인집(左蘓山人集)》에도 1번 등장하는데(권1 〈금경암에서 최현 스님에게 준 시[金經庵贈璀絢上人]〉), 호는 삼봉(三峯)이며 북한산의 초가에 거처한다고 하였다. 명고는 본서 권1 〈최현 스님이 내방하였기에 달 아래서 운을 뽑아[絢上人來訪 月下拈韻]〉에서 그가 명고정거에서 가까운 암자에 거처한다고 하였다. ‘상인(上人)’은 승려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본문의 내용으로 보아 이 편지가 쓰인 시기는 명고가 서울을 떠나 지방관으로 있을 때이다. 곧 강릉 현감으로 있었던 1785년(37세) 9월~1786년 7월,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있었던 1796년(48세) 7월~1799년 6월, 영변 부사(寧邊府使)로 있었던 1799년(51세) 6월~7월초의 기간 중 하나이다.[주-D002] 법수(法數) : 명나라 일여(一如, 1352~1425)가 영락(永樂) 연간에 칙명으로 편찬한 《대명삼장법수(大明三藏法數)》로 생각된다. 줄여서 ‘삼장법수’ㆍ‘대명법수’라고도 한다. 이 책은 대장경전(大藏經典)에서 숫자와 조합된 명사 1,555항목을 ‘일심(一心)’부터 ‘팔만사천법문(八萬四千法門)’까지 배열하고 그 전거와 이설을 상세히 단 것이다. 일여는 절강(浙江) 상우(上虞) 사람으로, 속성(俗姓)은 손씨(孫氏)이다. 그는 남조 시대 천태종 대사 지의(智顗)의 《법화문구(法華文句)》에 대해 ‘일여의 신주[一如新註]’로 일컬어지는 《법화과주(法華科註)》를 지은 인물이다. 《佛敎大辭典 大明三藏法數, 一如》
    2023-12-04 | NO.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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