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30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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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충신(鄭忠信) - 성호사설 제17권 / 인사문(人事門)
- 정충신(鄭忠信) - 성호사설 제17권 / 인사문(人事門) : 성호 이익(李瀷, 1680~1763) 금남군(錦南君) 정충신은 곧 광주(光州) 통인(通印)이었는데, 통인이란 것은 인장을 맡은[知印] 천리(賤吏)의 속칭이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알아준 바로 발신(發身)하여 벼슬을 하다가 갑자년(1624, 인조 2)의 변란에 큰 공을 세움으로 인해 책훈(策勳)되고 부원수(副元帥)에 이르렀다.대개 서애(西厓)가 미관(微官)으로 죄를 얻고 내쳐진 이순신(李舜臣)을 알았고, 백사가 하읍(下邑)의 천역(賤役)에 종사하던 정충신을 알았는데, 그후로는 다시 그런 사례가 없었다.계해년(癸亥年)에 반정(反正)을 도모할 때 여러 의론이 모두, “옥성(玉城 장만(張晩)의 봉호) 장만(張晩)이 아니면 안 될 것이다.” 하였는데, 그 사위인 정승 최명길(崔鳴吉)은 “장인은 늙고 병들어 일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장 만이 이 말을 듣고, “내 사위가 나를 잘 안다. 내가 어찌 차마 섬기던 임금을 갈아내는 하수자(下手者)가 되겠는가.” 하였으며, 정금남(鄭錦南)은, “장옥성(張玉城)의 갑자년 공로는 어찌 칭할 바가 있으리요마는 반정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은 곧 그의 훌륭한 일이다.” 하였다.또 그의 시에,날마다 강 머리에서 한가로이 술잔만 기울여도 / 日把江頭無事酒어이해 허리띠는 점점 늘어나기만 하는고 / 如何衣帶漸寬圍북으로 장안을 바라보면 삼천 리나 되는데 / 長安北望三千里늦가을 형양에는 기러기 자취마저 드무네 / 秋盡衡陽鴈亦稀하였는데, 읊조릴 적마다 흥미가 있다.[주-D001] 형양(衡陽) : 중국의 형산(衡山) 남쪽에 회안봉(回雁峯)이 있는데, 기러기가 가을에는 이 봉우리에서 남쪽으로 내려왔다가 봄을 기다려서 북쪽으로 돌아간다고 함. 《당시훈해(唐詩訓解)》 지기(地記)에, “衡山一峯極高 雁不能過 故名回雁峯”이라고 하였음.
- 2020-09-22 | NO.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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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충신(鄭忠信) - 연려실기술 제29권
- 정충신(鄭忠信)평안ㆍ경상 병사ㆍ부원수(副元帥)ㆍ형조 판서ㆍ금남군(錦南君) - 연려실기술 제29권 /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정충신은 자는 가행(可行)이며, 본관은 광주(光州)이고, 고려 병장 정지(鄭地)의 후손이다. 미천한 집에 태어나서 절도영(節度營)에 속한 정병(正兵)이었고, 겸하여 부(府)에 예속된 지인(知印 통인)이었다. 일찍이 절도영에 사역되어 불려갔는데, 늙은 기생의 집에 유숙하였다. 기생이 절도영 잔치에서 남은 음식을 먹으라고 주었는데, 공이 물리쳐 먹지 않고 말하기를 “대장부가 마땅히 절도사가 되었으면, 자신이 먹다 남은 음식으로 남에게 먹일지언정 어찌 남이 먹다 남은 음식을 먹는단 말인가.” 하니, 그 뜻과 기운 높음이 이러하였다. 임진년에 목사 권율(權慄)이 행재소에 장계를 전달할 만한 사람을 모집하였는데, 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공이 분연히 가기를 청하니, 그때 나이가 17세였다. 적병이 길에 가득 찼는데, 공이 단신으로 칼을 짚고 행재소에 도착하였다. 이항복 권율의 사위 이 말하기를, “이 아이는 멀리서 와서 몸둘 곳이 없으니, 내게 머무르게 하겠다.” 하였다. 이내 사서(史書)를 가르쳤는데, 공이 재주가 뛰어나 문리가 날로 진보되니, 항복이 아들처럼 사랑하였다. 가을에 행재소에서 시행한 무과에 올랐다. 임금이 항복에게 이르기를, “경이 일찍 정충신의 재주를 말했었는데, 이제 과거에 합격했으니 데리고 와서 나를 보게 하라.” 하였다. 들어가 뵈니, 임금이 칭찬하며 이르기를, “나이가 아직 어리니, 좀 자라면 크게 쓰리라.” 하였다.○ 공은 키와 몸이 작았으나 눈이 샛별 같고, 얼굴이 아름다우며 말솜씨가 있고, 기상이 좋아 영특하였다. 활발하고 의기가 있고 일을 잘 헤아려서 미리 맞히는 것이 많았다. 《곤륜집(昆崙集)》 ○ 만포 첨사(滿浦僉使)가 되었을 때, 명을 받들어 오랑캐들 가운데 들어가 여러 추장들과 이야기를 하였다. 추장이 말하기를, “너희 나라에서 늘 우리를 적이라 말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하였다. 답하기를, “너희들이 천하를 도적질할 마음이 있으니, 도적이 아니고 무엇이냐.” 하니, 여러 추장이 크게 웃었다. 돌아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 오랑캐가 장차 천하의 걱정거리가 될 것이니, 어찌 다만 우리나라의 걱정뿐이겠소.” 하였다. 《곤륜집》 ○ 공은 매우 미천한 집안 출신이면서도 성질이 거만스러워서 여러 이름 있는 사람들에게도 평교의 예로써 대하니, 이 때문에 교만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최명길이 늘 자와 호를 불러 벗하였는데 혹 말하기를, “정충신이 교만하고 망녕된 것은 공들의 잘못 때문이다.” 하였다. 명길이 웃으며 말하기를, “충신의 장점이 바로 교만하고 망녕된 데 있으니, 충신에게 이것이 없다면 무엇을 족히 취할 것인가.” 하였다. 《지천유사》 ○ 병자년 여름에 병이 심하였는데, 임금이 의관에게 명하여 치료하도록 하고 달마다 먹을 것을 내려주었다. 의관의 말이, “마땅히 인삼 두어 근을 써야 하겠다.”고 하면서도 임금에게 청하기를 어렵게 여겼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이 사람을 고칠 수 있다면 국력을 다 소비하더라도 아깝지 않은데, 하물며 몇 근의 인삼이겠는냐.” 하였다. 죽은 뒤에 내시에게 명하여 호상하게 하고, 어포(御袍)를 주어 수의(襚衣)로 하게 하고 관청에서 예로써 장사하게 하였다. 《정장군전(鄭將軍傳)》 ○ 병자년 봄에 왜구가 온다고 말이 와전되었는데, 공이 말하기를, “왜인은 불러도 오지 않을 것이요, 나라의 큰 근심은 곧 북녘 오랑캐다.” 하였다. 조정에서 오랑캐에게 사신을 보내어 국교를 단절하자는 의논이 있었는데, 공이 이때에 병으로 앓아 누웠다가 이 말을 듣고 심히 탄식하여 말하기를, “나라의 존망이 이해에 결정된다.” 하였는데, 이해 12월에 오랑캐가 과연 크게 쳐들어왔다. 《정장군전》 ○ 김시양이 언젠가 조용히 묻기를, “공이 이괄이 반란한 것을 듣고 성을 버리고 달아난 것은 무슨 까닭이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나와 이괄의 친분이 형제와 같은 것은 나라 사람이 모두 아는 것이오. 또한 문회(文晦) 등에 의해 고발되었던 것은 다행히 임금의 은혜를 입어, 잡혀 문초당하는 것을 면할 수 있었소. 그리고 이괄이 모반할 때, 내가 영변(寧邊) 근방에 있었으니, 만약 사람들이 의심하게 된다면 나의 본심을 천하에 분명히 밝히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성을 버리고 도망나옴으로써 내 본심을 밝혀서 사람들이 절로 믿도록 한 것이었소.” 하였다. 《하담록》 ○ 처음 권율이 군사를 일으켜, 근왕(勤王)할 때, 공이 따라왔다. 군사를 보내어 적진을 정탐케 할 때에 공이 함께 가기를 청하니, 권율이 꾸짖어 말하기를, “너는 어린아이다. 가서 장차 무엇을 할 것이냐.” 하였는데도, 공이 굳이 청하니 마침내 보내었다. 달려가 적진에 이르렀는데, 적은 벌써 물러갔다. 공이 마을 집들을 둘러보니, 깨어진 독이 거꾸로 엎어진 것이 있었다. 공이 장난으로 쏘았는데, 독 가운데 병든 왜병이 숨어 엎드려 있다가 화살을 맞고 죽었다. 드디어 목을 베어 깃대에 달고 오니 권율이 심히 기특하게 여겼다.
- 2020-09-25 | NO.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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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충신의 화상과 사당의 전답을 하사하는 건- 서원등록(書院謄錄)
- 정충신(鄭忠信)의 화상과 사당의 유지비를 도와주고 그의 후손을 녹용(錄用)하여 전답을 하사하는 건- 영조(英祖) 13년(1737) : 서원등록(書院謄錄)이번 3월 21일에 봉조하(奉朝賀) 이광좌(李光佐)를 인견(引見)하여 입시(入侍)하였을 때, 봉조하 이광좌가 아뢰기를, “신이 직접 눈으로 보고 상심한 바가 있어서 감히 이렇게 우러러 진달합니다. 고(故) 금남군(錦南君) 정충신(鄭忠信)은 바로 인조조(仁祖朝) 때 역적 이괄(李适)을 토벌하여 평정한 일등공신(一等功臣)입니다. 그는 한미(寒微)한 집안의 출신이었으나 그 영특함이 출중하여, 나이 17세에 광주(光州)에서 승첩(勝捷)의 장계(狀啓)를 가지고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에 달려가 행재소(行在所 왕이 임시로 주재한 곳)에 도착하였습니다. 신의 선조부(先祖父) 문충공(文忠公) 신(臣) 이항복(李恒福)이 한번 정충신을 보고 기특하게 여겨 자식처럼 사랑한 나머지 글을 가르치고 활쏘기를 권장하여 결국 나라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가 되었는데, 그가 혼조(昏朝 광해군(光海君)) 때 여진(女眞)의 노추(老酋)에게 사신으로 갔던 일은 더욱더 기특하였습니다. 그리고 역적 이괄의 변란 때 그가 안주 목사(安州牧使)로 있다가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의 진중(陣中)으로 달려가 병력을 거느리고 역적을 추격할 때 기회를 만나 계책을 결정하여 먼저 안령(鞍嶺)을 점거한 다음 병력을 풀어 크게 교전한 끝에 기세가 하늘을 찌르는 역적을 마침내 멸망시켜 종묘와 사직이 다시 안정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전공(戰功)을 수립한 사례가 정말로 많이 있으나, 이와 같이 기세가 하늘을 찌르는 역적과 만 번의 죽을 고비를 무릅쓰고 극력 싸워서 일거에 평정한 사례는 실로 3백 년 동안 없었으니, 고금에 매우 드문 위대한 업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일찍부터 정충신의 화상(畵像)을 보기를 원하다가, 이번에 충청도에 가서 비로소 찾아보게 되었는데, 그 뛰어난 자태가 늠름하여 마치 살아있는 것 같았습니다만, 궁벽한 산골 초가집 반 칸 방에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그 초가집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단지 중간에 방 한 칸을 비운 다음 반 칸은 치장하여 정충신의 화상과 신주(神主)를 간직해두고, 남은 반 칸은 그대로 비워두었다가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삼았습니다. 이와 같이 뛰어난 인물이 그와 같은 공훈(功勳)으로 사후의 일이 이처럼 참담하였으므로 살펴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공홍 감사(公洪監司) 이종백(李宗白)이 이미 먼저 그곳을 두루 찾아보았기 때문에 신이 힘을 써서 도와달라는 뜻으로 상의한 바가 있었는데,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성상께서 각별히 이러한 사람을 권장하고 격려하여 후세 사람을 권면하는 본보기로 삼는 것이 정말로 사리에 합당하겠기에 감히 진달합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정충신의 일은 일찍이 들은 바가 있었으나, 이렇게 된 줄은 몰랐다. 이는 실로 국가의 사전(祀典)에 결여된 바이니, 어찌 사사로이 도신의 힘을 빌려서 해야 되겠는가? 본도(本道)로 하여금 각별히 도와주도록 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광좌가 아뢰기를, “정충신의 자손은 특히 심하게 몰락(沒落)하였습니다. 고(故) 판서(判書) 유득일(兪得一)이 그 말을 듣고 애석하게 여긴 나머지 정충신의 증손(曾孫) 정시우(鄭時遇)를 불러다 곧바로 만호(萬戶)에 임명하였습니다. 지금은 정시우가 이미 죽고, 그의 양자(養子)는 사람됨이 선량합니다만 단지 일을 경험해보지 못하였습니다. 조정에서 만약 그를 채용하여 일등공신의 가문으로 하여금 땅바닥에 실추하지 않도록 한다면 실로 성덕(聖德)의 빛이 될 것입니다. 사당을 다시 건립하는 일은 방금 전에 도신에게 지시하라는 하교를 받았습니다만, 봄가을로 제사를 올리지 못한 것은 으레 하사하는 전결(田結)을 지급 받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들은 바에 의하면 무신년(戊申年, 1728, 영조4) 뒤로 역적 가문의 전답을 공신(功臣)에게 나누어 주고 남은 것이 여전히 많아 훈부(勳府)와 호조(戶曹)로 보냈다고 하니, 그것을 적당히 떼어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정충신은 본래 장수의 가문이다. 지금 정시우도 곧바로 만호(萬戶)에 제수하였다고 하니, 정시우의 양자도 곧바로 만호에 제수하여 일등공신의 제사를 받들게끔 하되, 이번 도목정사(都目政事) 때 반드시 그를 등용하도록 양전(兩銓)에 지시해야 할 것이다. 조정에서 전답을 하사하는 것도 해조(該曹)로 하여금 수량대로 지급하게 하는 것이 옳다.”라고 하였다.[주-D001] 양전(兩銓) : 이조(吏曹)와 병조(兵曹)를 합하여 일컬은 것인데, 이조는 문관의 전선(銓選)을 맡고 병조는 무관의 전선을 맡았기 때문에 전조(銓曹)라고 일컬은 것임.
- 2020-12-17 | NO.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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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홍명의 기옹만필畸翁漫筆
- 송강 정철의 넷째아들 기암 정홍명의 <기옹만필畸翁漫筆> 鄭弘溟著 ●율곡 선생이 화담(花潭.서경덕)의 학문에 대해 말할 때에는, “기(氣)를 이(理)로 아는 병폐가 좀 있다.” 하고, 《대학》소주(小註) 중 진북계(陳北溪.송나라 학자)의 설명에 대해 반박하여 말하기를,“이(理)와 기(氣)는 원래 서로 떨어지지 않은 것이나, 합함이 있지는 않다.” 하였다. 또 들으니, 항상 의논하기를,“〈태극도설(太極圖說)〉의 ‘묘하게 합하여 엉긴다.’는 것은 주자의 ‘한 덩어리가 되어 간격이 없다.’는 설명만 못하다.” 라고 하였는데, 훗날에 반드시 그 뜻을 알 자가 있을 것이다.율곡의 사서(四書)의 토와 주석 및 소주(小註)의 평정(評訂)이 극히 정밀하고 자세하여, 후학들을 감발하게 할 만하다. 그런데 애석한 것은 그 일을 경전에까지 미치지 못하였으며, 또 당세에 널리 전포하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좋아하지 않는 자가 보면 버리고 거두지 않는 일이 없다고 기필하지 못하겠다.●‘이(理)와 기(氣)는 선후(先後)가 없다.’는 설은 선유(先儒)들이 이미 다 말하였다. 그런데 전에 보니, 여장(汝章) 권필(權鞸)이 우연히 여기에 대하여 말하였는데, 여장(汝章)은,“정일두(鄭一蠹.정여창)가 《중용》첫 장 주의 ‘기로써 형체를 이루고 이 또한 부여[賦]한다.’고 한두 글귀를 가지고서, 주자가 선후의 분변을 말하였다 하였으니, 그것은 본뜻을 잘못 안 것이다.” 하였다.●사계(沙溪.김장생) 선생이 《심경(心經)》중의, ‘마음이란 붙잡으면 있고 버리면 없으며, 출입함에 일정한 시간이 없고 그 방향을 모른다.’는 구절을 강의하고, 또 다시 범순부(范淳夫.범조우)의 딸이 말한 ‘맹자는 마음이라는 것을 모른다. 마음이 어찌 나고 드는 것이 있겠느냐?’ 한 데 대하여 정자(程子)가 ‘이 여인이 맹자를 알지는 못하지만, 마음은 알았다.’고 칭찬한 것을 들어 말하면서, 맹자와 범녀(范女)의 말이 다른 것은 무엇이냐고 자주 여러 생도들에게 물었었다. 그런데 내가 작은 설명문을 지어서 선생에게 여쭈어 의논하기를,“대저 사람의 마음이란 방 안의 불빛과 같아서 비록 바깥의 바람에 끌려 움직이게 되어 이리저리 흔들려 안정하기 어렵게 되기는 하지만, 원래 일찍이 다른 물건을 따라 밖으로 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끌려 움직일 때에도 그 자리에 있고 안정될 때에도 역시 그 자리에 있는 것으로서, 사람이 말을 타고 문 밖으로 나가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그 존망과 출입이라고 한 것은 다만 감응하여 통하는 묘리를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장자(莊子)가 ‘하루 동안에 두 번씩 사해(四海) 밖을 돌아다닌다.’고 말한 것도, 안에서 밖으로 나가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을 말함이 아닙니다. 어떠합니까?”하였었다. 그런데 선생께서 나중에 과연 그것을 옳다고 하였는지 아니라고 하였는지는 아직 알지 못하겠다.●사계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성인의 마음은 맑은 거울이나 고요한 물과 같아서 학자들이 엿보아 측량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 나머지 중인(衆人)들은 마음이 달리고 뛰어 오르는 병통이 많으니 반드시 먼저 본체(本體)를 세운 뒤에 발동하는 곳에 따라서 성찰하며, 더 공부하여야만 찾아 잡음이 있을 것이다.”하고, 언제나 경서(經書)와 강해(講解)에 있어서도 반드시 동(動)과 정(靜)을 겸하여 보는 것을 위주하였다. 거기에서 노선생께서 실지 공부에 힘을 쓴 것이 허술하지 않음을 알겠다.●여윤(汝允) 최명룡(崔命龍)이 말하기를,“지(志)란 견주어 생각하고 헤아림이 정한 방향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발동하게 되면 선도 있고 악도 있다. 때문에 도학에 뜻을 두는 자도 있고, 공명과 부귀에 뜻을 두는 자도 있어서, 사람에 따라 일정하지 않다.” 고 하였다.●젊었을 때 해서(海西) 지방을 왕래하면서 석담(石潭)의 사당을 찾아뵈었다. 사당에서 나와 몇몇 선비들과 못가를 거닐었는데, 시내와 산이 아주 아름답고 솟은 돌이 병풍처럼 둘려 있었다. 그 중 율곡 선생 문하에서 배운 선비들이 모두 말하기를,“선생께서 이곳 산수 구곡(九曲)이 완연히 중국 무이(武夷)의 경치와 같다고 여겨 드디어 몇 동지들과 힘을 합하여 주자의 사당을 세웠는데, 산수도 그러하지만 또 평생을 두고 항상 주자를 숭상했기 때문이었다.”하였다. 또 말하기를,“선생은 풍채가 간결하고 언어가 평탄하여 지방 사람들과 상대하는 데에 있어서도 젊은이나 어른, 어리석은 이나 지혜로운 이 할 것 없이 모두 환심을 가지게 하였다. 때로는 혹 사색하는 것이 있으면, 잠자코 한참 동안을 있다가도 다시 평상시와 같이 하였다.”한다.●일학(一學) 노숙(老宿)은 불문(佛門)의 종사(宗師)이다. 오대산(五臺山)에서 입정(入定)한 지 근 50년이나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일찍이 말하기를,“젊어서 율곡을 따라 산놀이를 하였는데, 어떤 곳을 지나다가 돌구멍에서 나오는 작은 샘물이 있어 여러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물을 마셨다. 율곡도 물을 길어오라고 하여 한 모금 마시고는 ‘이 물은 둘도 없는 맛이다.’ 하였으나, 여러 사람들은 조금도 특이한 것을 몰랐다. 율곡이 말하기를 ‘대저 물은 맑은 것이 좋은데, 맑으면 무게가 무겁다. 흐린 물은 비록 모래와 진흙이 섞였더라도 무게는 맑은 물을 따르지 못한다.’ 하니, 같이 가던 사람들이 다투어 시험해 보니, 과연 무게가 다른 물의 두 배나 되었다. 마침내 철인(哲人)은 만물의 이치에 모르는 것이 없음이 다 이런 줄을 알았다.” 하였다.●오래 전에 우연히 늙은 중을 만났는데, 그의 말이 용문산(龍門山)에 있을 때에 우계(牛溪.성혼)선생과 여러 날을 함께 거처하여 그 분의 일상생활을 잘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선생이 조석으로 무엇을 하던가?” 물으니, 대답하기를,“새벽에 일어나면 반드시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고 의관을 정제한 다음 단정히 팔짱을 끼고 바로 앉는다. 오정 때쯤 되면 또 세수를 하고는 머리를 빗고 앉으며 때로는 책을 펴 본다. 생각할 것이 있으면 곧 책을 덮고 엄숙히 말하지 않고 있는데, 바라보면 엄숙하여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 없게 된다.” 하였다.●우계는 집에 거처할 때에도 일처리가 세밀하였다. 이른 아침에 그날 일을 시키는데, 비록 농사짓는 사소한 일일지라도 하인들에게 반드시 시간과 노력을 계산하여 분부하는데 조금도 차이가 생기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고향에 거처할 때에도 집안이 가난하고 궁핍한 적이 없었다.청송(聽松.성수침) 선생은 평생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제사 드리고 손님 대접하는 준비는 모두 우계가 마련하였다. 혹 서울 객중에 있을 적에도 매양 친구들이 찾아가면 반드시 술과 고기가 있었는데, 청송은 이것을 원래부터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하였다.●율곡ㆍ우계 및 우리 선인이 함께 진사 이희삼(李希參)의 집에 모였을 적에, 주인 집에서 술자리를 마련하였는데, 석개(石介)가 당시의 이름난 기생으로 자리에 참석하였다. 술을 돌리고 노래를 부르려 하자 우계가 갑자기 일어섰으나 좌중에서 감히 만류하는 이가 없었다. 이는 평생에 음탕한 소리를 듣지 않는 것으로 법을 삼았기 때문이라 한다.●퇴계(退溪)는 남명(南溟.조식)과 시대가 같고 동갑이며 같은 도에 함께 있었지만 끝내 만나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것은 그들의 의논이 서로 달라서 그런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옛날에 ‘천고의 옛 사람을 벗 삼는다.’ 하였으며 ‘천리 길을 가서 만나본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또 무엇 때문이었던가?●성대곡(成大谷)이 지은 남명의 〈행록(行錄)〉에,“공이 두류산에 놀 때 한 소년을 만나보고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시기하고 질투하며 착한 사람을 원수처럼 보니, 훗날에 만일 뜻을 얻게 된다면 착한 사람들이 화를 입을 것이다.’고 했다 한다.” 하였다. 후인이 그것은 기고봉(奇高峰)을 지목한 것으로 의심하나,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괴이한 일이다.●김하서(金河西.김인후)는 풍채가 맑고 빼어나며 골격이 기이하여 세속 사람들보다 특출하였다. 젊을 때에 인종(仁宗)에게 인정을 받아 특별한 대우를 받았는데, 을사년(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났던 해) 이후로는 인간사의 생각을 끊어 그 모습이 마른 나무나 식은 재와 같았다. 매년 7월의 기일(忌日)을 당하면 기일에 앞서 술을 가지고 산중으로 들어가서 한없이 통곡하였다. 선인(先人)이 평소 깊이 사모하여 시를 지었는데,해마다 7월이 되면 / 年年七月日일만 산중에서 통곡하네 / 痛哭萬山中이라 하였으니, 그 사실을 읊은 것이다.●토정(土亭)의 소설(小說)에,“악한 범은 사람의 작은 몸을 엿보고, 사특한 생각은 사람의 큰 몸을 먹어 들어가는데, 사람들이 악한 범은 무서워하고 사특한 생각은 무서워하지 않으니 어찌된 일인가?”하였다.토정(土亭.이지함)이 포천 군수로 있을 때에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는데, 그 중 ‘사람을 쓰는 데에는 반드시 그 재주대로 하여야 한다.’는 조목에서는,“해동청(海東靑)은 천하의 좋은 매이지만 새벽을 알리는 일을 맡게 한다면 늙은 닭만 못하고, 한혈구(汗血駒.하루 천리를 간다는 좋은 말)는 천하의 좋은 말이지만 쥐를 잡게 한다면 늙은 고양이만 못할 것입니다. 하물며 닭으로 사냥을 할 수 있겠으며, 고양이로 수레를 끌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토정은 행적이 탁월하고 기이하며 구속을 받지 않았으며, 천성은 순수하고 어질며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였다. 선산(先山)이 바다 가까이 있어 백 년 뒤에는 큰 변란이 있을 것이라고 하여 몸소 밭 갈고 소금을 팔면서 노고를 싫어하지 않고 산을 옮겨다 바다를 메울 계획을 하였다.형이 죽으니 마음으로 3년상을 치르고, 성현의 글을 읽되, 길을 가나 자리에 앉으나 마음으로 생각하고 외웠다. 학도들과 함께 다닐 때마다 이따금 갑자기 경서와 역사에 대해 물어 혹 잘 대답하지 못하면, 반드시 탄식하며 말하기를,“너희들이 어찌 길 다니는 것이 괴롭다고 여겨 글을 외고 읽기를 중지할 것이냐.”하였다. 다만 토정이 강해(江海)에 떠돌아다니며 방랑 행각을 한 것은 세상을 싫어해서만이 아니라, 구속받는 것을 피하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조중봉(趙重峰.조헌)은 토정에게 배웠는데, 경서와 역사에 깊이 잠심하여 노력을 남보다 더하였다. 그의 저술한 글을 보면, 앞일을 아는 슬기가 자연히 부합되니, 이것이 이른바 ‘지성(至誠)은 미리 안다.’는 것인가.중봉이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여관에 들었는데, 밤이 깊고 인정(人定)이 된 뒤에도 관솔을 태워 단정히 앉아 책을 읽었다. 옆집에 마침 어떤 선비가 엿보았는데, 손에 들고 보는 책은 《송조명신언행록(宋朝名臣言行錄)》으로 거의 닭이 울게 되어서야 글 읽기를 그만두었다고 한다.중봉은 천문학에 밝았는데, 신묘년(1591, 선조 24) 세모에는 매양 왜구를 근심하여 전후 상소를 올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임진년 초봄에 아내가 죽어 장사지내는데, 미처 구덩이를 덮기 전에 문득 매우 놀라 두려워하며 말하기를,“천고(天鼓.별의 이름)가 동하였으니, 반드시 평수길(平秀吉)이 군사를 일으켰다.”하였다. 그리고 집안 사람과 장례에 참석한 친척들에게 말하기를,“너희들은 각기 돌아가서 빨리 피난할 준비를 하라. 나는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할 것이다.”하니, 듣는 사람들이 대부분 믿지 않았는데, 얼마 안 되어서 적의 경보가 이르렀다.중봉은 젊었을 때부터 이씨 집 형제(이발.이길)와 친근하게 교제하여 정분이 형제와 같았는데, 만년에 와서 이씨 집 형제가 정적(鄭賊.정여립을 말함)과 서로 친근하니, 중봉이 간절히 절교하라고 주의시켰지만, 이씨는 친구 간에 까닭없이 절교할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중봉은 그들이 끝내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옥천(沃川)에서 도보로 남평(南平) 이씨의 집으로 가서 수일 동안 유숙하면서 여러 가지로 비유하며 타일렀지만, 이씨가 끝내 듣지 않았다. 중봉은 떠나가면서 칼을 뽑아 앉은 자리를 베어 칠언시(七言詩) 한 절구를 써 주며 작별하였는데, 끝 구에,나는 가고 그대는 머물러 각자 닦을지어다 / 我去君留各自修하였는데, 그 후로 그만 절교되었다.●사계가 매양 말 위에서 글을 보며 혹 《중용》과 《대학》 등의 글을 항상 외웠다. 내가 젊을 때부터 그분의 집안에 드나들어 모시고 잘 때도 많았는데, 새벽이나 밤에는 반드시 옛글을 마음속으로 반복하여 외우기를 마지않았다. 늘 스스로 말하기를,“내가 《중용》과 《대학》은 외워 읽기를 수천 번이나 하였지만 역시 더하는 것이 있는 줄은 모르겠다.” 하였다.●《중용》 첫 장의,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 에 대한 훈고에서,“교(敎)는 예악 형정 교화(禮樂刑政敎化) 같은 등속을 말한 것이다.”하였는데, 계곡(谿谷.장유)은 온당하지 못하다고 하면서, 의견을 저술하기까지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무릇 성현이 남긴 말이나 문장은 마땅히 먼저 받들고 믿어 바탕을 삼아야 할 것이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더라도 잘 연구하여 그 뜻을 깨달은 뒤에 평해야 할 것인데, 어찌 간단히 자기 생각으로 단정할 수 있으랴. 하물며 주자의 사서집주(四書集註)는 극히 정밀하여 후학들이 가벼이 의논할 것이 아니다.” 하였는데, 계곡은 끝내 수긍하지 않았다.사계가 일찍이 말하기를,“선유(先儒)들이 학문을 논한 것은 비록 정자와 주자의 말일지라도 이내 그 가부를 알 수 있는데, 문장의 잘못은 시골 학자에게서 나온 것이라도 잘 알 수 없다.”하였다. 아마도 공부하는 것이 한 곳에만 치우쳐서 다른 데 미칠 겨를이 없기 때문인가?율곡이 고봉(高峯)과 같은 때에 벼슬하였고, 비록 나이의 차이는 있지만 원래 도학으로도 서로 통할 만하였는데, 끝내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대학》에 대한 논쟁에서 서로 양보하지 않은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하는데, 어찌 그래서 그렇겠는가?퇴계는 고봉을 극히 존중하였는데, 이는 왕복한 서신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선인은 고봉보다 아홉 살 아래요, 소시부터 글을 배우며 선생으로 불렀다. 평상시에 고봉ㆍ윤월정(尹月汀.윤근수)과 함께 호당(湖堂)에 숙직할 때에 고봉이 기세를 올려 율곡에 대해 흠을 잡자, 선인이 조용히 말하기를,“선생은 이미 이모(李某)와 도의(道義)의 교제를 허락하였으니, 매양 헐뜯는 것은 부당합니다.”하였으나, 고봉은 더욱 분이 풀리지 않았다. 월정이 매양 말하기를,“평상시 고봉 및 황강(黃岡.김계휘)ㆍ이산해(李山海)와 같은 당번이 되어 호당에 숙직하였는데, 예전부터 〈천하여지도(天下輿地圖)〉가 벽 위에 걸려 있었다. 고봉과 황강이 우연히 서로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산천의 형세와 거리의 원근, 인물의 출처, 주군(州郡)의 연혁을 담론하는데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며, 두어 밤이 새도록 쉬지 않았다. 아성(鵝城.이산해)이 나와서 나에게 ‘우리들이 저 사람과 함께 벼슬하는 것이 어찌 크게 부끄럽지 않은가.’ 하였다.” 하였다.●월정은 박식하고 옛일을 좋아하였다. 늘 나에게 말하기를,“송 태조(宋太祖)가 끝내는 시역을 당하였다.”하였는데, 어릴 적에는 그 까닭을 알지 못하여 물었더니 대답하기를,“역사책에 범질(范質)의 충후(忠厚)함을 말하는 대목에 ‘범질이 본조를 위하여 시종 한결같았기 때문에 범질의 생전에는 태후나 어린 임금에게 탈이 없게 되었다.’ 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범질이 죽은 뒤에는 마침내 반드시 해를 당하였을 것이다.”하였다. 뒤에 〈언행록(言行錄)〉을 상고하여 보니 정말 그러하였다.●월정이 말하기를,“전에 고봉이 말한 것을 보니, 어릴 적에는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책이 없어 고통이었으며, 역사에 대한 것은 다만 《강목(綱目)》을 본 것으로 만족하게 여기다가, 서울에 와서 남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빌려 보니 생각하는 것이 자연 달라졌다.” 하였다.●《소미통감(少微通鑑)》은 우리 나라에서 숭상하는 책이지만, 자세히 보면 《자치통감》 을 잘라놓았을 뿐만 아니라, 구절의 취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으며, 간혹 문리가 접속되지 않는 것도 있다.우선 생각나는 대로 들어 본다면, 항우(項羽)의 오강(吳江) 일에 대하여는, 여마동(呂馬童.항우의 옛날 친구)과 이야기한 근본은 빠뜨렸다가 후에야 잘라 맞추어서 ‘약덕(若德)’이라는 한 구절을 만들었으며, 전천추(田千秋)의 일에 있어서는, 백두옹(白頭翁)의 근본은 전혀 빠뜨리고 다만 ‘고묘(高廟)의 신령이 내게 고하여 주었다.’고만 하였으니, 이는 매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기타 소소한 하자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내용이 정밀하고 자세한 점은 《사략(史略)》만도 훨씬 못하다.●옛날 사람들은 자(字)로 통행하는 이가 많은데, 두 가지 자(字)로 통하는 이는 적었다. 《강목(綱目)》에는 두 가지 자가 번갈아 나오는데, 조적(祖逖)같은 이의 자는 사아(士雅)와 사치(士稚)이니, 어느 것을 따라야 좋을지 몰랐다. 그래서 《세설(世說)》을 찾아보니 사아(士雅)로 와 있었다.●어떤 이가 말하기를, “소로 밭을 가는 것은 후세에 와서 한 일이다.” 하였는데, 김황강(金黃岡.김계휘)이 말하기를,“염경(冉耕)의 자가 백우(伯牛)인 것으로 보면 상고 시대에도 역시 소로 밭을 갈았다.”하니, 세상에서들 모두 명언(名言)이라고 하였다.●역사로 상고해 보면, 주(周) 나라 무왕(武王)이 그의 아버지인 문왕(文王)보다 14세가 아래인데 그에게 형 백읍고(伯邑考)가 있었으니, 문왕이 일찍 자식을 두었음을 알 수 있으며, 무왕이 93세로 세상을 떠났는데,주공(周公)이 무왕의 어린 아들 성왕(成王)을 업고 제후들의 조회를 받았으며, 또 성왕의 아우 당숙우한후(唐叔虞韓侯)도 있었으니, 무왕이 자식을 늦게 두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무왕의 후비 읍강(邑姜)의 나이가 무왕보다 몇 살 적었는데, 부인이 노쇠한 후에도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옛날 사람들이 사용한 통운(通韻)을 지금 사람들은 흔히 깨닫지 못하고 협음(叶音)은 더욱 어려워 억지로 풀이하고 있다. 예를 들면 동(東) 자와 침(侵) 자의 음운은 원래가 서로 유사하지 않은 것인데, 협음ㆍ통운으로 쓴 곳이 많다. 《주역》의 소상(小象)에 이런 것이 자못 많으며, 《시전(詩傳)》에도길보가 송을 지으니 / 吉甫作頌화목하기 청풍 같네 / 穆如淸風중산보가 길이 생각하여 / 仲山甫永懷그 마음을 위로하노라 / 以慰其心하였다. 이런 것은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사부(詞賦)에 더욱 많은데, 〈장문부(長門賦)〉같은 것은 오로지 이런 체를 사용한 것으로서, 초혼(招魂)ㆍ담담(湛湛)ㆍ강수(江水)의 세 구도 역시 통운으로 운자(韻字)를 단 것이지만 읽는 이들이 살피지 못한 것이 많다.●옛날 사람들은 네 살 때에 사성(四聲)을 가릴 줄 알며, 너덧 살이면 글을 지었는데, 이런 것은 그 신이(神異)함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서 그런 것이었던가? 지금은 서너 살에 말을 다 할 수 있는 아이도 매우 적다. 근세의 청한(淸寒)ㆍ하서(河西) 같은 이들은 모두 신동으로 불려졌지만 그들이 지은 시문의 꾸밈새는 한때의 작가(作家)만 못한 점도 있으니, 이것은 노력의 적고 많음에 따라서 그런 것인가?●옛 사람들의 글에 대한 의논을 지금 역시 다 믿지 못하겠다. 한 문공(韓文公)은 자운(子雲.양웅)의 《태현경(太玄經)》이 《노자(老子)》와 우열을 다툴 것이 못된다고 하고 후파(侯芭)의 이른바 ‘《주역》보다 낫다.’는 것을 지언(知言)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지나친 것 같다. 유자후(柳子厚)의 한퇴지(韓退之)에 대한 말도 역시 그러하다.소장공(蕭長公.소식)의 〈사마공신도비(司馬公神道碑)〉와 같은 글은 천고의 걸작이라고 할 만한 것인데, 다만 글 중에서 이세적(李世勣)ㆍ모용소종(慕容紹宗)의 일을 들어 비유한 것은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다.●어릴 적에 윤월정(尹月汀.윤근수)의 문하에 나가 뵈었더니, 마침 환갑 날이 되어 술 자리를 베풀었는데, 최동고(崔東皐.최립)가 상좌에 앉았다. 월정이 묻기를,“들으니, 영공(令公)은 구양수(歐陽修)의 글이 한창려(韓昌黎)보다 낫다고 한다는데, 정말 그렇습니까?”하니, 동고의 말이,“진실로 그렇습니다. 천변만화하는 한창려의 글이 자연스럽게 한 가지 문체만을 쓰는 구양공의 글을 따를 수 없소.” 하였다. 또 묻기를, “명(明) 나라의 글은 누구의 것이 제일 우수하오?”하니, 동고가 대답하기를,“일찍이 잘 읽어보지는 못하였지만, 대개가 부화하고 내용이 없소. 그 중에서 황홍헌(黃洪憲)의 글은 과문(科文)에 가까웠소.”하매, 월정이 아무 말이 없었다.●동고(東皐)가 또 말하기를,“유문(유종원의 글)은 평생 펴보지 않았는데, 전일에 어느 재상이 초록하여 달라고 독촉하여 처음으로 뒤져 보았더니, 전혀 의미가 없었고, 소동파의 여러 작품 같은 것은 더욱 보잘것이 없었다.” 하였다. 그의 큰 소리가 대개 이러한 것이다.●동고는 안하무인이었지만 늘 율곡을 칭찬하기를,“말을 하면 글이 되며,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누구도 따를 수 없다.” 하였다.●주자가 육상산(陸象山)과 더불어 각각 학도들을 데리고 백록서원(白鹿書院)에 모여 강의하였는데, 그 발문에 극히 존중하였다. 그런데 태극(太極)에 관해 논쟁하면서는 의견이 서로 어긋나서 친교가 드디어 틀어지게 되었다. 심지어 영구가 지날 때에는 큰 소리로 박수치며 아무렇게 지꺼렸다……하니, 만일 육상산이 죽어서 지각이 있다면 어찌 저승에서도 유감을 품지 않겠는가.주자는 소동파를 여지없이 배척하였다. 그러나 소동파가 그린 석죽(石竹)에 발문 지은 것을 보면, “이 늙은이의 얽매임 없는 한 자질과 조촐한 지조는 죽군(竹君)ㆍ석우(石友)와 거의 비슷하다.” 하였으니, 주자가 동파를 인정하는 것 역시 보통이 아니었던 것 같다.●왕양명(王陽明)이 처음 선학(禪學)에 물들었고 중간에는 주자의 학문을 배우다가 또 버리고 선학을 좇았다. 그의 문집 중의,강학엔 매양 중회(仲晦.주자의 자)가 의심스럽고 / 講學每疑朱仲晦지리한 것은 정강성 되기를 부끄러워했네 / 支離羞作鄭康成쨍그렁 비파를 던진 봄바람 속에 / 鏗然舍瑟春風裏광인이나 증점이 마음에 들어 / 點也雖狂我得情라는 율시 한 수로써 평소 뜻하는 바를 알겠다.●양명(陽明.왕수인)이 산에서 노닐다가 한 승방(僧房)을 보았는데, 앞 문의 빗장이 굳게 잠겼고 먼지가 무릎 위까지 올라왔다. 그 연고를 물으니, 중의 말이,“선사(先師)가 세상을 떠날 때에 제자들에게 간곡히 부탁하기를 ‘한 번 창문을 닫은 다음에는 함부로 열어보지 말라.’ 하였습니다.” 하였다.양명이 괴이하게 여기고 바로 앞으로 나가 손으로 방문을 열어보니, 한 늙은 중이 앉은 채로 죽었는데, 얼굴빛이 변함없고 자신의 모습과 다름이 없으며 등에,삼십 년 전 왕수인 / 三十年前王守仁문 연 사람이 곧 문 닫을 사람이네 / 開門還是閉門人이라 쓰여 있어 양명이 깜짝 놀랐다. 그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성인은 괴이한 것을 말하지 않지만, 괴이한 것 역시 없는 것은 아니다. 불가(佛家)의 요술하는 것을 믿을 수는 없지만, 침갱(針羹)과 세장(洗臟) 같은 일은 만일 혹시라도 그랬다면 어찌 사람들을 미혹하게 하지 않았겠는가.●정해 연간(1587, 선조20)에 선인께서 세상과 뜻이 맞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노소재(盧蘇齋.노수신)를 찾아 작별 인사를 하였다. 그때 소재는 수상이었는데 마침 병으로 집에 있다가 손을 잡고 안방으로 들어가서 술을 가져오게 하여 같이 들면서 진심으로 위로하고 권면하였다. 공사간의 정으로 보아서 물러갈 수 없다고 하면서 한 절구의 시를 부채에 써 주었다.언덕 위의 풀은 해마다 늙어지고 / 壟草年年老뜰 앞의 가시나무 날마다 쇠해지네 / 庭荊日日衰한 평생 충효로 자임하던 그대 / 平生任忠孝그걸 가지고 어디로 가려 하시나 / 持此欲何之평소 책 광우리에 간직해 두었기에 나도 보았다.●퇴계가 남쪽으로 돌아갈 적에 전송하는 사람이 배 위에 가득 찼다. 선인은 공무로 좀 늦어 뒤에 강가로 나갔더니, 배는 벌써 강 가운데로 나갔다. 뱃사람 편에 시 한 절구를 노선생에게 드렸다.광릉(廣陵)까지 따라 이르렀지만 / 追到廣陵上타신 그 배 벌써 아득하여라 / 仙舟已杳冥가을 바람에 수심 가득 안고 / 秋風滿腔思석양에 홀로 정자에 오르네 / 斜日獨登亭퇴계가 배 위에서 손을 들어 사례하고 집에 돌아가서는 차운(次韻)하여 붙였었는데, 지금 문집에 실려 있지 않다.●근세 문인들은 선묘조(宣廟朝.선조임금)에 성대하였다. 시학(詩學)으로는 권석주(權石洲.권필) 같은 이가 있으니, 재주와 생각이 특출한 데 안목이 있는 사람으로서 유고(遺稿)를 보면 알 수 있다. 다만 석주는 술을 마시면 농담이 많아서 글을 논하는 데 자못 일정하지 않았다. 내가 어느 날 우연히 조용한 기회에 시문의 내용을 물으니, 대답하기를,“국초(國初)부터 지금까지 저술을 나보다 낫게 한 사람이 있기는 하나 마음과 보는 눈이 모두 열려서 묘한 이치까지 알아낸 것은 나만한 이가 없을 것이다.” 하였으니, 그의 자부심이 작지 않았던 것이다.●석주(石洲)의 시집은 원래 수효가 많지 않고 내용을 너무 정밀하게 선택하였으니, 지금 세상에 통행하는 시집이 그것이다. 그 집에 간직한 사고(私稿) 중에 석주 자신이 비점(批點)을 찍은 것을 전에 한 번 들쳐보니 볼 만한 것이었는데, 이미 전란 통에 잃어버렸다고 하니, 애석하다.●소시에 체소(體素) 이공(李公) 춘영(春英)이 해서(海西)의 중씨(仲氏) 처소에 들렀는데, 과거 공부하는 선비들이 그가 왔다는 말을 듣고, 각자 읽던 책을 가지고 와서 앞에 벌여놓고 좌우에서 묻고 논란하였다. 체소가 술잔을 들고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마치 노련한 법관이 송사 처리하듯 척척 대답하였으니, 역시 유쾌한 일이었다.●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는 백가서(百家書)를 다 통하여 학식이 매우 풍부하였다. 그러나 유쾌한 기분으로 휘둘러 써두고는 고치지를 아니하고 끝내 어지럽게 쓴 초고를 광주리 속에 던져두고 다시 꺼내보지도 않았다고 하니, 이것은 반드시 후세에 전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기묘 제현(己卯諸賢)이 요순(堯舜) 시대의 임금과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을 자기들의 임무로 삼았는데, 당시 선배들이 대부분 그 장래을 염려하였다. 그리고 큰 일을 하는 것이나 현량과(賢良科)를 설립하는 등의 일은 대부분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에게서 나왔는데, 여러 어진 이들이 실패하게 된 뒤에는 모재만이 큰 화를 면하여 파직을 당하는 데에 그쳤다.모재는 젊어서 김안로(金安老)와 친절하게 지냈는데, 하루는 김안로가 모재가 서울에 왔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다. 모재가 취한 김에 농담으로 말하기를,“영공(令公)이 문형을 주관하는 것은 인재가 없어서 그런 것뿐인데 무엇이 귀할 것인가.”하니, 김안로가 웃고 갔다. 자제들이 근심하고 두려워하면서 실언이라고 여겨 그가 반드시 매우 유감을 품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모재는 웃으며 말하기를,“내가 안로와 가장 친하여 그 사람됨을 잘 아는데, 반드시 한때의 농담으로 나를 해치지는 않을 것이다.” 하더니, 후에 과연 무사하였다. 김안로가 죽은 뒤에도 모재는 변함없이 철마다 그 집을 돌보아주었다.●기묘년(1519, 중종14)에 대사성 김식(金湜)이 도망하여 지방으로 나가 있었는데, 밤에 눌재(訥齋) 박상(朴詳)을 광주(光州) 촌가로 찾아가서 함께 자며 여러 간신들이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세도를 마음대로 하는 것을 자세히 말하고 오늘날의 화는 반드시 주상께서 알지 못하는 것이니, 조만간에 자연히 드러날 것이라고 하였다. 눌재가 대답하기를,“남곤(南袞)과 심정(沈貞)의 간악한 계교는 깊고 세밀하니 그렇게 허술하지 않을 것이며, 또 전대의 권신이나 판관들이 임금을 위협하고 견제하는 것과는 비교할 정도가 아니니, 이승에서는 다시 전하를 보기 어려울 것이다.”하니, 김식은 비로소 실망하고 뉘우쳤다. 이날 새벽에 작별하고 가다가 길가의 다리 아래에서 목매어 죽었다.●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이 유배지에 있을 적에, 서울 하인이 밤에 와서 문을 두드리며, “좋은 소식이 왔습니다. 여러 간신들이 모두 실패하고 어르신께서 소명(召命)을 받게 되었는데, 몇 가지 서신이 여기 있습니다.” 하니, 공이 천천히 말하기를,“우선 그대로 두라. 밝은 날에 뜯어 보겠다.”하고, 예전처럼 코를 골며 잠드니 사람들이 그의 넓은 도량에 탄복하였다.●신묘년(1591,선조24)에 화가 일어나자, 월정(月汀)은 관직을 삭탈하고 축출하는 데 그쳤다.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평소 이가(李家)의 나쁜 점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당초에 사람을 보내어 자제들을 통하여 말하기를 ‘이때에 한 번만 가서 보면 다른 우려가 없음을 보증하겠다.’ 하였으나, 나는 대답하기를 ‘옛 사람이 사생(死生)과 영욕(榮辱) 때문에 의리를 구차하게 할 수 없다.’ 하였고, 당대의 친구들이 모두 잘못되었는데, 나만 편안한 것이 어찌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는가?”하였다.●선인은 평생에 꿈이 반드시 맞았다. 신묘년에 화를 당하여 남양(南陽) 구포(鷗浦)로 나가 살았는데, 새벽녘에 곁에 있는 사람을 보고 말하기를, “꿈에 내가 강계 부사(江界府使)가 되었으니 그곳이 유배지가 될 것이다.”하였는데, 얼마 있다가 서울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진주로 정배(定配)되었다고 하니, 선인께서 탄식하기를,“평생에 꿈을 믿었는데, 늙으니 꿈도 맞지 않는다.”하였다. 그런데 남쪽으로 내려간 지 며칠 만에 대간의 논쟁으로 강계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사람이 천금의 구슬을 깨버릴 수는 있지만 가마[釜]가 깨지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고 한 소공(蘇公)의 이 말을 가지고 세속 사람에게 징험해 보니 거짓말이 아님을 알았다.●일이 인정에 가깝지 않은 것은 큰 간특(姦慝)이 되지 않는 것이 드물다.”하였다. 이것은 노천(老泉)의 변간론(辨姦論)에서 나온 말인데, 선유(先儒)는 공정한 말이 아니라고 반박하였다. 왕씨(王氏)ㆍ소씨(蘇氏)의 시비는 누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그 말을 《대학》가운데에,“후히 대할 자에게 박하게 대하고, 박하게 대할 자에게 후하게 대한다.”는 것과 서로 참고하여 사람 보는 법을 삼는다면 백의 하나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옛 사람의 이른바, “신(臣)의 아버지의 청백한 것은 사람이 알까 두려워했고, 신의 청백함은 알지 못할까 두려워했다.”라고 한 것은 공사를 분간하는 데에 정말 격언인 것이다. 말세에 와서 청백하고 좋은 행실이 있다고 하는 자가 흔히 스스로 뽐내고 자랑한 자요, 몸소 실천하는 자는 전혀 형적이 드러나지 않아서 세상이 알 수 없다.●일찍이 옛 사람은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으로 사람을 칭찬하는 말로 쓴다는 것을 보고, 혼자 이것이 사람의 무슨 미덕(美德)이 될 것인가 생각하였는데, 세상의 여러 일을 겪은 지금에 와서 보니 대개 금주(金注)에 현혹됨이 많아 비로소 그 말에 의미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세도에 아부하고 장사 수단으로 교제하는 자를 누가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는가. 더위와 서늘함의 차례가 바뀌어 영욕(榮辱)이 자리를 바꿀 때에는 평일에 지기(知己)라고 하던 사람들도 문 앞을 지날 때는 목을 움츠리고 한 번도 들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우물에 빠지면 돌을 던지는 자도 많다. 이것이 적공(翟公)이 대문에 글을 써 붙인 까닭이요,창려(昌黎.한유)가 유자후(柳子厚)의 묘지(墓誌)를 적은 이유이다.●말세의 사람들은 원래 의리를 아는 자가 적지만 이해를 아는 자도 적다. 일생을 부귀에 뜻을 두어 온갖 계책을 다 쓰며 시세에 따라 아첨하면서 오히려 못 미칠까 염려하던 자들도 나중에 화란을 기어이 만나고, 간혹 분수를 편하게 여기고 본 뜻을 지켜 일하기를 부끄러워하고, 안색을 바로 하여 조정에서 일하면서 꼿꼿하게 지내던 사람도 반드시 모두 함정에 빠지지는 않으니, 이런 것은 불선한 자들의 경계가 된다.●안정된 자는 조급함을 제어할 수 있기 때문에 일을 이루게 되고, 내실이 없이 과장하는 자는 분쟁만을 일삼기 때문에 끝내는 실효가 없게 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제 자랑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조용히 할 일만 하는 사람을 싫어하기 때문에 사람을 부릴 때에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하여 나중에는 나라를 그르치고 일을 망치게 되는 것이 전후에 잇달았지만 뉘우칠 줄을 모른다. 지금 보아도 이런 경우가 많다.●고금을 통하여 조심하여 복을 누린 자는 있지만, 교만하고서 끝까지 안전한 자는 적다. 이것은 어찌 사람들의 비방이 모이면 귀신의 책망이 따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내가 일찍이 왕언방(王彦邦)의 시 가운데,영화와 은총엔 무심하기 쉽지만 / 榮寵無心易위태로울 때에 절개 지키기는 어렵네 / 臨危抗節難라는 두 구를 벽 위에 써 붙였는데, 와서 보는 객들이 대부분 위와 아래 구의 난(難)ㆍ가(易) 두 글자를 서로 바꾸어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서도 영예와 명리가 사람의 마음에 깊이 배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박수암(朴守庵.지화)은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스스로 글을 읽고 학문에 힘쓰니 세상에서 많이 칭찬하였다. 임진왜란 때 산골로 피난 갔었다. 하루는 집안 사람들이 그가 간 곳을 몰라 뒤를 밟아 어느 큰 물가에 이르렀는데, 물가에 벗어놓은 옷과 신발을 보고 물에 뜬 시체를 찾아왔다. 옷 속에 이러한 두보의 율시 한 편이 있었다.임 계신 서울은 구름과 산 밖인데 / 京洛雲山外소식 전하는 글월 전혀 오지 않네 / 音書靜不來흰 갈매기 원래 물에서 자는 것이니 / 白鷗元水宿무슨 일로 남은 슬픔 있으리 / 何事有餘哀이 역시 회사(懷沙)의 남긴 뜻이 아니겠는가.●조정암(趙靜庵)은 8~9세 때 김한훤(金寒暄.김굉필)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하루는 한훤을 모시고 있는데, 한훤이 고양이가 포육을 훔쳐가는 것을 여종이 잘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여겨 성을 내어 꾸지람하여 마지않았다. 그 포육은 어머니에게 반찬으로 드리려던 것이었다. 정암이 천천히 말하기를,“선생님의 어버이를 위하는 정성은 진실로 지극합니다만, 고양이는 그런 것을 모르고 여종들 역시 일부러 범한 것은 아닌데, 선생님이 이로써 너무 화를 내시니 좀 온당치 못할까 합니다.” 하였다. 한훤이 놀라고 탄복하며 말하기를,“네가 어린아이로 내게 와서 공부하는데 내가 도리어 너에게 배웠다.”하면서, 종일토록 데리고 칭찬하였다고 한다●천연(天然)은 남쪽의 중인데, 키가 8척이요 담력이 뛰어났다. 일찍이 길을 가다가 지리산을 지나는데 곁에 소위 천왕봉 음사(天王峰淫祠)가 있었다. 이전부터 괴이한 영험으로 알려졌으며 지나는 사람이 만약 경건하게 기도하지 않으면 몇 걸음을 못 가서 사람과 말이 쓰러져 죽는다 하니, 지나가는 객들이 무서워 공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천연이 괴이하고 망령된 것이라 하여 팔을 휘두르며 지나갔는데, 별안간 탔던 말이 땅에 넘어졌다. 천연은 매우 성내어 곧 죽은 말을 가져다 사당 가운데에서 도살하여 피로써 사당의 벽을 더럽히고 다시 주먹을 휘둘러 신상(神像)을 쳐부순 다음 불을 놓아 태우고 갔는데, 그 뒤로는 신의 괴이한 영험이 드디어 없어지고 상인이나 길손들이 편안히 지나게 되었다.퇴계와 고봉이 모두 시를 지었으며, 당시의 명사들이 화답하여 읊은 이가 매우 많았다. 천연은 일찍부터 고봉을 찾아 《주역》을 배워 매우 뜻을 통달하였다. 퇴계와 고봉이 성리(性理)에 대하여 논변하게 되자 천연은 서신을 가지고 왕래하여서 그 사이의 논변하는 내용을 기억할 수 있었다.무신년(1608,선조 41)에 내가 일이 있어 신천(信川)에 가니, 천연이 듣고서 소를 타고 왔다. 그때 나이 80여 세였는데, 여전히 건강하였다. 옛 일을 말할 때에는 피곤한 기색이 없이 말을 계속하였다. 베개를 가지런히 하고 며칠 밤을 지내며 듣지 못했던 일들을 많이 들었는데, 참으로 방외(方外)의 기걸이었다. 천연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평소 박사암(朴思庵) 상공의 알아줌을 받아 항상 영평(永平) 전장(田庄)에 있었는데, 사암은 날마다 대해 주면서 소일하였다. 무자년(1588, 선조21) 겨울에 역적 정여립(鄭汝立)이 전주에 있으면서 인마(人馬)를 보내어 글로 천연을 오라고 하였는데, 천연이 거절하고 가지 않으니, 사암이 그가 이름있는 사람을 따르지 않는다고 하여 더욱 귀하게 여겼다.기축년 봄에 역적 정여립이 또 인마를 보내었는데, 서신의 사연이 간곡하며, 또 모시 도포 한 벌을 보내어 뜻을 표하기에 천연이 사암에게 하직하니, 사암은 굳이 머무르라고 하지는 않았다. 천연이 곧 도포를 입고 말을 타고 떠나 하루를 갔는데, 여관에서 밤에 앉아 문득 생각하기를, ‘박 상공이 나를 만류하지 않은 것은 저 사람이 나를 두 번씩이나 오라고 하였으므로 혐의쩍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가면 저 사람과 새로 사귀는 즐거움이 어찌 사암과 비교할 수 있으랴. 그러나 옛 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을 따르는 것은 의리가 아니다.’ 하고, 곧 글을 지어 정여립에게 사례하고 도포를 벗어 돌려보낸 다음 지팡이를 짚고 영평의 전장으로 돌아왔다. 사암이 보고서 이상하게 여기다가, 물어서 실정을 알고 더욱 믿고 사랑하였다. 이 해 겨울에, 정여립의 역모가 드러나니 그때에야 그의 간곡하게 청한 뜻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몸이 오싹해짐을 느낀다.” 고 하였다.●권여장(權汝章.권필)이 궁류시(宮柳詩)한 편으로 인하여 임자년(1612, 광해4)에 옥에 갇혔다. 옥문을 나와서도 상처가 아파서 곧 귀양길을 떠나지 못하고 흥인문(興仁門) 밖의 민가에 유숙하였다. 하루는 친구들이 와서 문병을 하고 전송하는데 와서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여장이 누워 있는 방안의 벽을 보니 옛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았다.때는 바야흐로 청춘이요 날은 저물려는데 / 正是靑春日將暮복사꽃 어지러이 붉은 비처럼 떨어지누나 / 桃花亂落如紅雨권하노니 그대여 온종일 진하게 취해 보소 / 勸君終日酩酊醉술이 많다 해도 유령의 무덤 위엔 이르지 못한다네 / 酒不到劉伶墳上土대개 이것은 어떤 시골 훈장이 아무렇게나 전에 썼던 것인데, 권(勸) 자를 잘못 권(權) 자로 쓰고, 유영(劉伶)을 잘못 유영(柳聆)으로 써놓았으니, 보는 사람들이 서로 돌아다보며 어쩔 줄을 모르고 놀랐다.좀 있다가 여장이 목마르다고 하면서 술을 찾아서 큰 그릇으로 하나를 마시고는 그만 눈 감고 마니, 이날이 바로 3월 그믐날이었으며, 창 밖의 풍경이 그 시중의 풍경과 같았다. 조물주가 인간의 생사에 대한 처분을 미리 정해 놓았으니, 슬픈 일이다.●고옥(古玉) 정작(鄭碏)과 석전(石田) 성로(成輅)는 모두 나이 40에 상처하였는데, 재취하지 않고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으며 종신토록 홀아비로 지냈는데, 마치 선정(禪定)에 든 중 같았다. 오직 술을 매우 좋아하여 잔뜩 취하여 나날을 보내었다. 고옥은 서울의 친구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취하지 않고는 돌아오지 않았는데, 그의 시에,산림이나 성곽 둘 다 의지할 데 없으니 / 山林城郭兩無依아침에 나가면 언제나 저물어서 취해 돌아온다네 / 朝出常常暮醉歸라는 것은 그의 사실 행적을 말한 것이다.석전은 평소 인왕산(仁王山) 아래에 문을 닫고 숨어 있으면서 벼슬을 제수해도 나가지 않았다. 임진왜란 후에는 양화도(楊花渡)강가에 임시 거주하면서, 사위 조영(趙嶸)과 함께 서로 의지하여 지냈는데, 술이 있으면 반드시 취해 쓰러지는 것을 한계로 삼았으며, 하루 아침에 병도 없이 죽었다. 이 두 늙은이는 억제하기 어려운 큰 욕심을 끊으면서도 취향(醉鄕) 밖으로는 뛰어나오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정욕(情慾)과 분수가 앝고 깊음이 있어서 그런 것인가?●윤광계(尹光啓)는 자가 경열(景說), 호는 귤옥(橘屋)인데, 남도의 문사이다. 한평생 시와 술로 즐거움을 삼으며 명예나 이욕에는 담담하였다. 일찍이 벼슬을 따라 도성 안으로 들어와서 인왕봉(仁王峰) 아래에 집을 짓고, 꽃을 심고 약초를 기르면서 조금도 풍진 세상의 기운이 없었다. 날마다 그의 외사촌 정봉(鄭韸)과 이웃에 살며 서로 마주 앉아 술을 들면서 세월을 보냈다. 이웃에 술집이 있는데, 날마다 가져다 마시되 값을 묻지 않으며 술집 주인 역시 언제 갚을 것을 묻지 않았다. 그러다가 남쪽에서 오는 배가 미곡을 싣고 강가에 와 닿으면 그때는 쌀을 나누어 술집으로 보내는데 수효를 계산하지 않았다. 세상일과 인연을 끊고 문밖을 나서지 않았는데, 일찍이 나를 대하여 말하기를,“서울에 들어온 지 3년 동안에, 친척집 조상(弔喪)으로 의관을 갖추고 나간 적이 겨우 두 번이었다.” 하였다.●옛 친구 정봉(鄭韸)은 자(字)가 상고(尙古)로 사람이 조용하고 깨끗하여 사귈 만하였다. 귤옥(橘屋) 윤광계와 외사촌 형제간이며 일생을 서로 추종하며, 세상을 등진 생활에 날마다 술을 취하도록 마셨다. 윤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상고도 더욱 살 맛을 잃고 병과 술에 잠겨 있다가 나이 겨우 60에 세상을 떠났다.임종시에 사람을 시켜 술을 가져오게 하고, 술을 가져오니 멀건히 보다가 술잔이 작은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말하기를,“이 늙은이가 한평생 이것만을 좋아했는데, 지금 떠나가면서 어찌 한 방울을 마시겠느냐.”하며, 다시 명하여 큰 술잔을 가져다 둘을 마시고 쓰러져 베개에 누워 가고 말았다.●김영휘(金永暉)는 자는 국서(國舒)요, 집이 광주(光州) 석보촌(石堡村)에 있었는데, 한평생 문을 닫고 양생(養生)하며 매우 수련(修鍊)하는 방법을 좋아하였다. 집 둘레에 구기(枸杞)를 가득 심고, 그 뿌리와 가지로 좁쌀을 쪄서 밥을 지으며, 그 잎과 열매로 나물을 하고 술을 빚어서 항상 먹고 마시며 때로 뜻이 맞는 친구가 오면 문득 내놓고 권하였다. 재주와 학식이 비범하고 언어가 강개하여 사람들을 감동시킬 만하였다.내가 소시적에 함께 놀게 되었는데, 미목(眉目)이 환하여 산택(山澤) 간의 높은 선비의 골격이었으며, 술자리에는 반드시 마음을 털어놓고 못할 말이 없이 하면서, 서로 알기가 늦었다고 하였다. 나이 60이 못되어 아무 병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영남 사람 곽재우가 일찍이 말하기를, “우연히 난리 중에 김영휘를 만나서 양생법을 알았다.” 하였다.● 최연복(崔連福)은 자는 경응(景膺)인데, 김영휘(金永暉)와 같은 마을에서 사이좋게 지냈다. 사람됨이 중후하고 근신하여 일생동안 남의 잘못을 말하지 않았으며, 교제하는 사람은 모두 한 고을의 착한 선비들이었다. 종신토록 《대학》 한 권을 읽었는데, 집주(集註)와 《혹문(或問)》을 아울러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문을 닫고 종적을 숨기다가 이 세상을 떠났다. 이런 사람들은 생전 산골에 거주하여 이름이 알려지지 않으니, 슬픈 일이다.●홍명원(洪命元)은 자는 낙부(樂夫)요, 익녕(益寧) 홍 정승의 종질(從姪)이다. 기국과 도량이 크고 단정하며 재주와 지혜가 민첩하고 문장도 누구에게 못지 않으니, 사람들이 재상감이라고 기대하였다. 여러 번 주부(州府)를 맡았는데, 치적이 매우 드러났으며 계해년(1623,인조1) 초에 경기 감사가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죽었다.●송방조(宋邦祚)는 자는 영숙(永叔)이다. 성질이 준엄하고 결백하여 악을 원수처럼 미워하였다. 혼조(昏朝.광해군) 때에 요사한 무리들이 조정에 가득하니, 사람들이 모두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머리를 보전하지 못할 것처럼 여겼다. 일찍이 우리들 몇 명과 함께 모여 이야기하는데, 좌중의 담화가 시사(時事)에 모두 근심되는 듯 두려워하였으나, 영숙이 혼자서 분연히 말하기를,“하늘이 정해지면 사람을 이길 수도 있는데, 사람의 도리가 저렇게 없어졌으니, 여기에 어찌 천도의 극단이 없겠는가. 제군들은 다만 고요히 기다려 보라. 나의 말이 자연 맞게 될 것이다.”하였다. 내가 일찍이 그 말을 들었는데, 이때에 와서 깊이 그의 앞일을 아는 지혜를 탄복하였다. 영숙이 서장관으로 북경에 갈 때에 역관을 구속하여 그 수족을 함부로 놀리지 못하게 하니, 역관이 매우 괴로워하였는데, 도중에 갑자기 죽었다. 혹은 그에게 독살을 당하였는가 의심한다고 한다.●양응락(梁應洛)은 자는 심원(深源)인데, 문장과 글씨에 모두 뛰어났으며 장원 급제에 뽑혔지만 벼슬은 낭관에 그치고 세상을 떠났다. 젊었을 때 조인보(趙仁甫)와 서로 친하여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도 서로 떠나는 일이 없었다. 사람됨이 중후하고 말이 더듬거리는 듯하였지만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여, 스스로 꿋꿋하여 흔들리지 않고 섞여도 물들지 않는 지조가 있었다. 계곡(谿谷.장유)이 그 묘도문(墓道文)을 지을 적에 그의 평생을 자세히 서술하였다고 한다.●이경탁(李慶倬)은 자는 덕여(德餘)인데, 나보다 열 살이 위이다. 일찍이 집안 대대로 교분이 있는 관계로 아우처럼 나를 보아 정리가 친형제나 같았다. 풍도가 넓으며 재주가 뛰어나 한때 교제하는 이들이 모두 원대한 지위를 기대하였다. 광해군 때에 관서 감사 막하에 좌관(佐官)으로 나가 있으면서 몸을 많이 축내었는데, 하루아침에 객지에서 세상을 떠나니 나이 겨우 40 남짓 되었다. 나는 외로운 신세로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하여 이 친구만이 기개가 서로 통하여 종시 막역한 심정이었는데, 존망을 달리한 지 이미 수십 년이 되었다. 이를 생각할 때마다 서글프게 가슴이 아프지 않은 적이 없다.●나는 오랫동안 고질병으로 온갖 일을 다 폐하고, 날마다 피곤하고 수척하여 스스로 견디지 못할 형편이었는데, 좀 뜸하여 우연히 당(唐)나라 사람의 시집을 가져다 베개에 엎드려 뒤져보니, 한가하고 바쁘며 즐거워하고 괴로워하는 정경이 감발할 만한 것이 있었고, 또 옛 사람들이 나보다 먼저 손을 댄 것을 기뻐하면서 부질없게 약간의 경구(警句)를 기록하여, 때로 혼자 읊으면서 소일하기도 하였다.●청련(靑蓮.이태백)ㆍ소릉(少陵.두자미)ㆍ창려(昌黎.한퇴지) 3대가는 그들의 지은 글이 너무 많아서, 따다 쓰기에 합당하지 못하고, 그 밖의 명가(名家)들의 여러 작품은 그 내용이 화려하려 내가 병중에 생각하는 것과는 서로 가깝지 않고, 귀머거리와 장님이 소리와 빛의 진정한 지경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 같기 때문에, 좋고 나쁜 것을 논할 것 없이 모두 버리고 적지 않는다. 대개 이 《만록(漫錄)》은 남에게 보이려는 것이 아니요, 다만 내가 오랫동안 병으로 의지할 데가 없어 때로 혹 들쳐보며 번민한 생각을 씻게 된다면 반드시 청량산(淸凉散)을 한 번 복용하는 것보다 못하지 않을 것이다. 계미년(1643년) 여름에 기옹(畸翁)이 청정헌(淸靖軒)에서 쓰다. 栗谷先生論花潭則曰。微有認氣爲理之病。至於大學小註陳北溪說一款。駁之曰。理氣元不相離。非有合也。又聞常論太極圖說。妙合而凝。不如朱子渾融無間之說也。後世必有知其解者。栗谷四書訣釋。及小註批抹。極其精詳。可使後學有所感發。而惜其未及畢工於經傳。且未廣布於當世。然使不悅者得之。未必不棄而不收矣。理氣無先後之說。先儒已盡言之矣。昔見權汝章韠。偶及此事。汝章因言鄭一蠹。以中庸首章註。氣以成形。而理亦賦焉二句。以爲朱子有先後之辨。殊失本旨云。沙溪先生因講心經。操則存。舍則亡。出入無時。莫知其鄕。再擧范淳夫女所言。孟子不識心。心豈有出入。程子因贊。此女雖不識孟子。却識心。孟子與范女所言。異同何義。亟問於諸生。某作小說。稟於先生曰。凡人心有如室中火光。雖被外間風氣牽動。擾攘難定。固未嘗隨他出外。牽動時却在此。安定時亦却在此。非如人乘馬出門相似。其謂存亡出入。只言感通之妙。莊子所言一日而再撫四海之外。亦非謂自內出外而適他也。如何如何。未知先生。終果印可否也耶。沙溪先生嘗言。聖人之心。如明鏡止水時節。學者有難窺測。自餘衆人。多患走作跳擧。必須先立本體。然後隨其發動處。省察加工。方有摸捉。每於經書講解。必以兼觀動靜爲主。乃知老先生用力實地。非草草也。崔汝允命龍言。志者計較思量之有所定向者也。然旣已發動。有善有惡。故有志於道學者。有志於功名富貴。不一其人也。汝允聰明絶人淹貫經史氣品溫良規矩不紊但以地望寒素居鄕爲群不逞所嫉坎壈危辱年纔五十而終 少時往來海西。歷謁石潭祠宇。退與數四儒生。逍遙潭上。溪山絶佳。攢石如屛。其中有及門之士。皆言先生以此處山水九曲。宛似武夷形勝。遂與若干同志。管立朱子廟。且以平生素所尊尙故也。因言先生風儀簡潔。言語坦蕩。與鄕人相接。無少長愚智。各得懽心。時或有所思索。端嘿移時。旣而如初。一學老宿。桑門宗師也。入定五臺山。殆五十年而化去。嘗言少從栗谷遊山。行過一處。有小泉出石竇。衆皆聚飮。栗谷亦命酌取。一啜曰。此水之絶味也。衆固不知有異。栗谷曰。凡水淸者佳。淸則斤兩重。濁者雖雜以沙泥。斤兩不及於淸水。同行者爭試之。果然斤兩倍於他水。乃知哲人於物。無所不通。皆此類云。昔年偶見老僧。自言在龍門。時與牛溪先生。同棲累日。瞷其起居頗熟。仍問先生蚤夜何爲。答曰。晨起必盥櫛整衣冠。端拱正坐。恰到午間。又盥櫛而坐。有時披覽書冊。如有所考。旋卽捲卷莊默。望之儼然。無不起敬。牛溪居家。綜理詳密。早朝出令。雖耘穫微事。役使僮役。必計日力以分付。未嘗少差。以故鄕居不患貧乏。聽松先生。平生不治生業。凡有祭祀賓客。幹蠱出於牛溪。或在京洛逆旅。每値親舊來訪。必有酒肉。而聽松若固有之。栗谷牛溪。及吾先子。同會李進士希參家。主家設酌。石介以一時名娼與席。將行酒發歌。牛溪遽起。座上無敢挽止。蓋平生以不聽淫聲爲法云。退溪之於南溟。旣同時同庚。同在一道。而終未得會面云。豈言議有出入而然耶。不然古固有尙友千古。千里命駕者。抑又何也。成大谷作南溟行錄。有云。公遊頭流時。遇一少年。語人曰。陰猜娼嫉。仇視善人。後日若使得志。善類赤矣。後人或疑其指奇高峰。而不知何所據也。可怪。金河西。淸風異骨。敻出流俗。少時受知仁廟。恩遇異常。自乙巳以後。絶意人事。有同枯木死灰。每値七月諱辰。輒前期携酒入山。號哭無節。先子平日嘗所艶慕。有詩云。年年七月日。痛哭萬山中。蓋實迹也。土亭小說云。惡虎窺人之小軆。邪思蝕人之大軆。人畏惡虎。而不畏邪思。何耶。其守抱川。進萬言疏。論用人必當其才一款。有云。海東靑。天下之良鷹也。使之司晨。則曾老鷄之不若矣。汗血駒。天下之良馬也。使之捕鼠。則曾老猫之不若矣。況鷄可獵。猫可駕乎。土亭卓佹不羈跡也。其天賦淳良。孝友出天。以其先阡傍海。百年之後。將有滄桑之變。躬耕販鹽。不辭勤苦。爲移山塡海之計。兄死。心喪三年。讀聖賢書。行坐念誦。每與學徒同行。有時卒然問及經史。如或未對。則必咄嗟曰。爾輩豈以道路之苦。而廢誦讀乎。但其浮游江海。放浪形骸。非特厭薄世故。亦出於避彀之計云。其子山輝以知音名於世見知者稱以神明憂中爲惡虎所害早夭 趙重峰學於土亭。沈潛經史。勤苦過人。觀其所著文字。先見之智。如合符契。豈所謂至誠前知者耶。重峰平日。行次旅店。夜深人定後。爇松薪。端坐看書。傍舍適有士子窺之。手中所把玩。卽宋朝名臣言行錄。幾至鷄鳴而罷。重峰精於象緯。辛卯歲末。每以南寇爲憂。前後章疏非一。至於壬辰春初。喪其內子。將窆。未及掩壙。忽大驚怖曰。天鼓動矣。平秀吉。必已興師矣。謂其家人及隨喪親族。汝輩各速歸去。亟謀避亂。我則以死報國耳。聞者頗不信。未幾。賊報至矣。重峰與李家兄弟。自少交親。情如骨肉。及其晩節。李兄弟與鄭賊相親。重峰切加禁戒。李以朋友無故不絶爲答。重峰知其終無奈何。自沃川徒步。抵南平李家。宿留數日。多方譬諭。李終不聽。重峰辭去。臨行抽刀割坐席。題七言一絶以爲別。落句曰。我去君留各自修。因此遂絶。沙溪每於馬上看書。或誦庸學等書。無時不然。余自少出入門庭。侍寢時多。晨夜必默誦古書。循環不輟。常自言。吾於庸學。誦讀殆過數千遍。而亦未覺增長之益云。中庸首章。修道之謂敎。訓誥敎若禮樂刑政敎化之屬是也。谿谷以爲未安。至於著說。吾言凡聖賢言語文字。當先尊信以爲依据。如有不安於吾心者。亦當十分硏究。期於得其旨義而後已。何可草草以己意斷定。況朱子四書集註。極其精密。非後學所可輕議。谿谷終不首肯。沙溪嘗言。先儒論學處。雖程朱話頭。便能曉解其當否。而至於詞章利病。出於村家學究者。亦未通透。豈業專而不暇他及耶。栗谷與高峰。同時立朝。雖年輩差池。固可以道學相契。而終是牴牾。未知其故。或云。因大學爭辨不相下。以致如此。豈其然耶。退溪之於高峰。極其推重。觀其往復書札可知。先子少高峯九歲。而自少受書。稱以先生。平時與高峯及尹月汀。同直湖堂。高峯盛氣。瑕點栗谷。先子從容言。先生旣與李某。許以道義。不當每加訾毀。高峯愈恚不釋。月汀言 月汀每言。平時與高峯。及黃岡 金公繼輝 李山海。同作一番。直宿湖堂。舊有天下輿地圖。掛在壁上。高峯黃岡。偶與指點。談討其山川形勢道里遠近人物出處州郡因革。靡不貫穿無遺。窮數晝夜不已。鵝城出謂月汀曰。吾輩同仕於此。豈非大可愧乎。月汀博雅好古。每對余言。宋祖終爲弑逆。余少時莫曉所以。請其故。答云。史稱范質忠厚處曰。質爲本朝。終始如一。是以終質之世。太后少主得無恙。以此觀之。范歿之後。終必遇害。後考言行錄。信然。月汀云。昔見高峯爲言。少長鄕曲。苦無書冊。於史只見綱目。自以爲足。及到京中。借人資治以覽。意思自別。少微通鑑。國俗所尙。而仔細看來。非徒裁翦資治。文字頗失取舍。間有文理不相接續。姑擧可記者。如項羽吳江事。專沒與呂馬童接話根本。後乃截取。爲若德一句。田千秋事。專沒白頭翁根本。只言高廟神靈告我。此甚無義。其他小小瑕類。不可勝記。其精詳。不及史略甚遠。古人以字行者多。以兩字行者少。綱目一編之中。兩字迭出。如祖逖字士雅士稚。莫適所從。及考世說。以士雅見。或云。以牛耕田。乃是末世事。金黃岡言。以冉耕字伯牛觀之。其在上古亦然。一世以爲名言。以史考之。武王少文王十四歲。而其長有伯邑考。則文王之早育可知。武王九十三而終。周公負成王朝諸侯。其季有唐叔虞韓侯。則武王之晩育可知。但未知邑姜之年。少武王幾歲。而婦人衰耗之後。亦能誕育否也。古人通韵。今人多不曉。其叶音。尤難强解。如東侵音韵。本不相類。而多有叶通處。易小象此類頗多。詩吉甫作頌。穆如淸風。仲山甫永懷。以慰其心。此司馬相如詞賦中尤多。如長門賦。專用此體。招魂湛湛江水三句。亦通押。而讀者多不察焉。古人四歲。知辨四聲。四五歲能有作述者。豈神異與凡人。絶不相類耶。今之孩提。三四歲能言者亦尠矣。近世如淸寒河西。俱稱神童。而其所著詩文粧點。或不及一時作家。豈用功有淺深而然耶。古人論文。今亦不敢盡信。韓文公以子雲太玄。不足與老子爭强。侯芭所謂勝周易。爲知言。此似過當。子厚之於退之。亦然。蘇長公司馬公神道碑。可謂千古傑作。但用李世勣慕容紹宗事爲比。何也。少時謁尹月汀門下。適値初度設酌。崔東皐占首席。月汀問。聞令公以歐文勝於昌黎。信否。東皐曰固然。韓之千變萬化。不及歐公專用一體爲自然。又問。皇明文字。孰爲最勝。崔答。不曾看熟。槪是浮華不實。其中黃洪憲所作。近於科文。月汀默然。東皐又言柳文。平生不曾寓目。頃因一宰相督令抄出。始得披閱。全無意味。如東坡諸作。尤庳庳矣。其亢論類此。東皐眼下無人。每稱栗谷吐辭成章。胸中流出。人不可及。朱子與象山。各率學徒。會白鹿書院。講義跋文。極加推重。及其爭辨太極。枘鑿不入。交契遂至乖角。至其旅櫬過時。大拍頭胡叫喚云云。如使象山有知。寧不銜憾於泉下乎。朱子於東坡。排斥不遺餘力。而觀其跋坡公所畫石竹曰。此翁磊落不羈之資。淸秀後凋之操。竹君石友。庶幾似之。其見許亦似不凡。王陽明。初染禪學。中間服膺朱子。後又棄而從禪。其集中。講學每疑朱仲晦。支離羞作鄭康成。鏗然舍瑟春風裡。點也雖狂得我情。一律。志尙可知。陽明遊山時。有一丈室。扃鐍甚牢。塵埃沒膝。問其故。居僧云。先師臨化。丁嚀付囑徒弟。一閉窓闥。勿妄開視。陽明怪之直前。手拓其戶。見一老僧坐化。容色不變。與陽明面目無別。背上有文。曰。三十年前王守仁。開門還是閉門人。陽明錯愕。未知其眞妄如何也。聖人不語怪。怪亦未必不有。浮屠善幻。雖不可信。如針羹洗臟。萬一或然。豈非惑衆。丁亥年間。先子有不適於時。棄官南歸。歷辭盧蘇齋。蘇齋時爲首相。適以病在家。引入臥內。命酒合懽。信辭慰勉。以爲。公私情義。不可退去。因以絶句題扇面曰。壟草年年老。庭荊日日衰。平生任忠孝。持此欲何之。平時藏于書簏。某亦及見。退溪南歸。送者滿船。先子因公務差遲。追到江上。則船已中流矣。因船人致一絶于老先生曰。追到廣陵上。仙舟已杳冥。秋風滿腔思。斜日獨登亭退溪於船上。擧手爲謝。及還鄕家。次韵以寄。今未必載在本集。近代文人。至宣廟朝而盛矣。詩學如權石洲者。才思絶倫。具眼者觀其遺稿可知。但石洲酒後多戱言。論文殊無定價。余一日偶與從容問其本色。則答云。自國初至今。述作或有過我者。若其心眼俱到。透得妙解。無如我者。其自負不淺。石洲詩集。元數不多。而抄選太慳。今其行於世者是已。至其家藏私稿。自爲批點者。曾一披閱。可堪把翫。聞已見失於兵禍云。可惜。少時體素李公。春英 過海西仲氏所。村中士子治擧業者。聞其至。各持所讀冊子。羅列於前。左右問難。體素把酒掀髥。酬應如響。有如老吏剖決之爲。亦自婾快。車五山天輅。牢籠百家。贍給無比。而聞其乘快揮洒。殊欠點化。終以亂稿。投在箱篋。未嘗再閱。此必不以傳後爲意也。己卯諸賢。以堯舜君民爲己任。而一時前輩。多憂其無漸。至如大段施爲。如設立賢良科等事。多出於金慕齋安國。而及諸賢敗後。慕齋獨免。止於罷職。慕齋少與金老安親切。一日安老聞慕齋入城。委往訪之。時安老方典文衡。慕齋乘醉戱之曰。令公主文。只是承乏。曷足貴乎。安老笑而去。諸子弟憂怖。以爲失言。彼必大銜憾。慕齋笑曰。我與安老最親。稔知其人。必不以一時戱言害我。後果無事。安老死後。慕齋每於時節。存遺其家不替云。己卯金大成湜。出亡在外。夜投朴訥齋祥光州村舍同宿。備陳群奸壅蔽天聰。自作威福。今日之禍。主上實未必知。早晩當自暴白。訥齋答以衮貞奸謀。機緘深密。不應如許空疎。且非如前代權臣閹豎。脅制君上之比。此生復見天日難矣。金始缺望悔悟。是曉辭去。自縊於道傍橋下。鄭文翼公 光弼 在謫所。有京使。夜叩棘門云。吉報至矣。群奸皆敗。老爺承召。有多少書信在此。公徐曰。姑置之。待明開封。鼾睡如初。人服其偉量。辛卯禍作。月汀最後。止於削黜。嘗自言。平日口不道李家過惡。故當初送人因子弟爲言。此時一番通問。則保無他虞。余答云。古人有言。死生榮辱。義不可苟。一時儕輩。皆已行違。而吾獨晏然。豈不愧於心乎。先子平生。夢兆必驗。辛卯遇禍。出寓南陽鷗浦。向曉起坐。語傍人曰。夜夢吾爲江界府使。謫所其必此地乎。旣而有人自京來言。定配晉州。先子嗟嘆。平生信夢。老而忒矣。南行數日。因臺論移配江界。人能破千金之璧。而不能不失聲於破釜。常以蘇公此言驗之。流俗知其不誣。事之不近人情者。鮮不爲大姦慝。此出於老泉辨姦論。而先儒駁其非公。王蘇是非。雖不知誰何。然以其言與大學所厚者薄。所薄者厚。參互爲觀人法。百不失一。古人所謂。臣父之淸。猶畏人知。臣之淸。猶畏不知。此公私之辨。眞格言也。末世以淸白操行爲名者。多是自衒自鬻。其有躬行實踐。泯然無跡者。則世無得以稱焉。嘗見古人。以不爲表襮。爲稱贊人語。私謂。此何足爲人美德。到今經歷世路。率多金注之惑。始覺有味乎其言也。勢利爭附。巿道爲交。人誰曰不知恥焉。及至炎涼代序。榮辱易置。雖平日號爲知己。不唯過門縮頸。不一省問。又從落井下石者多。此翟公所以題門。昌黎所以誌子厚墓者歟。末俗之人。知義理者固少。至於知利害者亦少。一生志於富貴。費盡機關。隨時曲傅。猶恐不及者。終不免禍敗。間有安分守拙。恥爲非義。正色立朝。棘棘不阿者。未必皆陷機穽。此足爲爲不善者戒。安靜者。能制躁妄。故事有所立。浮誇者。徒事紛競。故終無實效。世人喜人之自誇。而多厭其守靜。任使之際。捨此取彼。終至誤國僨事者。前後相踵。而不知悔也。適見今人多此類云。古今謹愿而享完福者有之矣。驕傲而終安全者少。豈非人誹所萃。鬼責隨之歟。余嘗以王彥方詩中榮寵無心易。臨危抗節難。二句。漫題壁上。客有來見者。多言上下句難易二字。宜相易。可見榮名之中人深矣。朴守庵。枝華 出於寒微。能自讀書。莊修一時。多所稱譽。壬辰倭變。避亂山谷間。一日家人不知其處。跟至一泓下。見其衣屨蛻脫在水邊。得其浮屍而歸。衣帶間見有老杜一律。卽京洛雲山外。音書靜不來。白鷗元水宿。何事有餘哀全篇也。豈亦懷沙之遺意歟。趙靜庵八九歲。受學於金寒暄門下。一日侍坐寒暄。寒暄以猫兒偸取脯脩。謂其婢使不謹守視。盛氣詬罵不已。蓋將用爲大夫人甘旨供也。靜庵徐曰。先生爲親之誠。則固至矣。但猫自無知。婢輩亦非故犯。先生以此過用血氣。恐未安。寒喧驚服曰。汝以童稚。來學於我。我反學汝。終日提携歎賞云。天然。南中僧也。身長八尺。膽力過人。嘗行過智異山。側有所謂天王峯淫祠。夙著靈怪。過者若失虔祈。行不數步。人馬傷斃。以此行旅無不畏敬。天然以爲怪妄。攘臂過去。俄見所騎踣地。天然大恚。卽以死馬。屠於祠中。血汙祠壁。因復張拳打破神像。縱火焚滅以去。是後神怪遂絶。商旅晏如。退溪高峯。皆有詩軸。一時名人。和而張之者甚多。天然早從高峯學易。頗通六義。及退溪高峯論辨性理。然持簡牘往復。能記其間語義。戊申年間。余以事往信川。然聞之。騎牛來訪。時年八十餘。康健不衰。道及先故。亹亹不倦。仍與聯枕數夜。多聞所未聞。眞方外奇傑也。天然言。平日受知於朴思庵相公常在永平庄舍。思庵日相對消遣。戊子冬。逆賊鄭汝立在全州。委送人馬。作書要然。然辭不行。思庵尤以不逐名士貴之。己丑春。鄭賊又送人馬。書辭勤懇。且以綈袍一領寄餉。天然辭於思庵。思庵不强其留。然卽着袍跨馬。行到一日程。旅次夜坐。忽自念朴相不欲挽我。以彼要請至再。有所嫌難也。我今往。彼新知之樂。寧比思庵。捨舊從新。非義也。卽修書致謝。捲還其袍。杖錫還到永庄。則思庵見而怪之。旣而問知實情。益加信愛。是冬。汝立逆謀彰露。始知其所勤請。意有所在。至今思之。每覺寒粟云。權汝章氏。以宮柳一詩。壬子逮獄。旣出創痛。不卽登途。留興仁門外氓舍。一日親舊問疾送行。頗有來觀者。見汝章臥內壁上。有舊題古詩。曰。正是靑春日將暮。桃花亂落如紅雨。勸君終日酩酊醉。酒不到劉伶墳上土。蓋是村家學究。曾所漫書者。而勸字。誤作權字。劉伶誤作柳聆。見者相顧錯愕。俄而汝章飢渴索酒。飮一大器訖。溘然就瞑。是日卽三月之晦。窓外所見。恰似詩景。造物之生死斯人。處分前定。悲夫。鄭古玉碏。成石田輅。皆年四十喪耦。不再娶。不近女色。終身鰥居棲息。有似入定僧。惟酷嗜麯孼。沈酣度日。古玉周流城巿相知間。不醉無歸。其自詠有云。山林城郭兩無依。朝出常常暮醉歸。蓋實迹也。石田平時。杜門仁王山下。除官不就。亂後寓居楊花江上。與女婿趙嶸。相依爲命。得酒必以醉倒爲限。一朝無疾而卒。斯兩老能斷難制之大慾。而不能超出醉鄕之外。豈其情慾分數。有淺深而然耶。尹光啓字景說。號橘屋。南中文士也。一生以詩酒自娛。恬於名利。嘗從宦入城。築室仁王峯下。種花蒔藥。絶無塵土氣。日與其表弟鄭韸比隣。相對以酒爲年。隣里有酒家。日取以飮。不問其直。酒主亦不責以時償。及其南船載米穀。到泊江上。便卽分米。送于酒家。不計多少。絶意人事。不出門庭。嘗對余言。入京三年。以親屬弔喪。掛冠束帶以出者。僅兩度云。故友鄭韸。字尙古。爲人閑雅可愛。與橘屋尹丈。爲表從兄弟。一生相隨不離。遺落身世。日飮無何。及尹丈歿後。尙古益無生趣。沈冥病醉。年僅六十而終。臨終。使家人進酒。酒至張視。嫌其器小曰。此翁平生。惟嗜此物。今將辭去。安用此涓滴爲。更命浮二大白訖。頹然就枕而逝。金永暉字國舒。家在光州石堡村里。一生杜門養生。頗愛修鍊家法。繞屋滿栽枸杞。以其根枝。蒸煮粟米作飯。其葉實作菜作酒。常自啖啜。時見同好客至。輒出而勸之。才識不凡。言語慷慨。有足以感動人者。余少時得與從遊。眉宇瀅然。有山澤癯儒骨相。酒間必開懷傾倒。以爲相知之晩。年未六十。無疾而歿。嶺南郭再祐嘗言偶於亂離中逢着金永暉得養生法云 崔連福字景膺。與金丈永暉。同里閈相善。爲人厚重謹密。一生未嘗言人長短。其所與交。則皆一鄕善士也。終身讀一部大學。幷其集註或問。淹貫無遺。杜門絶跡。以沒其世。若此類。身居岩穴。名湮滅而不稱。悲夫。洪命元字樂夫。益寧洪相從姪也。器量峻整。才諝敏達。詞華亦不讓於流輩。人以公輔期之。屢典州府。治績茂著。癸亥初爲畿伯。未幾卒。宋邦祚字永叔。性峻潔。疾惡如讎。當昏朝時。鬼魅滿朝。人皆憂栗。如不得保其首領。嘗與吾輩若干。會一處敍話。座中談及時事。無不愍然危懼。永叔獨奮然曰。天定亦能勝人。人理泯絶如許。此豈無天道之極乎。諸君但當靜而待之。吾言自有驗矣。余嘗與聞其言。到此時。深服先見之智也。永叔以書狀官赴京時。束縛譯官。使不得逞其手足。譯官甚苦之。道中暴卒。或疑爲其所毒云 梁應洛字深源。詞翰俱優。擢魁科。官止郞寮以沒。與趙仁甫。少相親善。流離遷次。未或相離。爲人厚重。言若吶吶。然而好善疾惡。自有確乎不拔涅而不緇之操。張谿谷持國。誌其墓道。備述其平生云。李慶倬字德餘。長余十歲。嘗以世好弟畜我。義同骨肉。風度夷曠。才調超邁。一時交遊。無不期以遠到。昏朝時。出佐關西幕。多所傷敗。一朝沒於客館。年僅四十有餘。余以心迹孤疇。未見許可於世。獨此友氣槪相契。終始莫逆于心。而存亡異路。已過數十年。每一念來。未嘗不愴然疚懷。余積年沈痼。萬事都廢。惟日困惙。不自堪耐。稍間。偶取唐人詩集。伏枕披閱。其閑忙欣悴情境。宛然有足相感發者。且喜古人先我着鞭。謾錄若干警句。時自諷翫。以消遣云。靑蓮少陵昌黎三大家。以其篇章浩漫。不合尋摘。其他名家諸作。其詞意涉於華艶。與余病中懷思。不相侔擬者。有同聾盲之於聲色。不能分別眞境。故亡論美惡。悉置不收。蓋此錄。非欲示人。只以余久病亡憀。時或寓目。湔滌煩愗。未必不敵淸涼散一服耳。癸未夏。畸翁書于淸靖軒。
- 2020-08-26 | NO.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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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고 심하옹 장초〔祖考尋何翁狀草〕 - 덕촌집
- 조고 심하옹 장초〔祖考尋何翁狀草〕 - 덕촌집 제10권 / 비장(碑狀) 공의 휘는 도남(道南), 자는 수오(壽吾), 그 선세(先世)는 능주(綾州)에 살았다. 조고(祖考) 건계공(建溪公) 휘 산형(山逈)은 하동 정공(河東鄭公) 우(遇)의 딸에게 장가들어 영암군(靈巖郡) 옥천(玉泉) 대산리(大山里)에 췌거(贅居)하였다. 정공(鄭公)은 곧 참판공(參判公) 운(運)의 종부(從父) 형제이다. 건계공은 문재(文才)가 민첩하여 사람들이 가성(家聲)을 이을 자손이라 칭하였으나 과거에 누차 급제하지 못하여 현달하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아들 넷을 두었는데 공의 부친이 그 장자(長子)로 휘는 범용(範容)이며 문학에 종사하여 능히 선조의 사업을 이었다. 이때 임강공(臨江公) 예용(禮容) 또한 같은 군의 팔마리(八馬里)에 췌거하였는데, 공에게는 종조(從祖) 숙부(叔父)가 된다. 공은 이에 대산(大山)으로부터 용정리(龍井里)로 옮겨 살았는데 팔마리와는 5리의 거리로 상종하기에 편리하였다. 선산 임씨(善山林氏) 석천(石川) 선생 억령(億齡)의 종부 형제의 아들 정해(挺海)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셋을 낳았는데 공이 둘째 아들로, 두 살 때 부친을 여의었는데 막내아우는 태어난 지 겨우 몇 달이었고 백형(伯兄)은 겨우 5세였다. 나이 12세에 모부인이 또 세상을 떠나 외롭고 고단하게 의지할 곳이 없어서 임강공(臨江公)이 거두어 돌보고 가르치고 길렀다. 공의 외가 임씨가 후손이 없어 제사가 끊기니 백형이 외가의 제사를 모시며 외숙모에게 맡겨 길러졌고, 공과 아우는 끝내 의지할 곳이 없었다. 22세에 광산 김씨(光山金氏) 진사 응해(應海)의 딸에게 장가들어 광주(光州)에서 수 년 동안 췌거(贅居)하였으나 형제가 화락하게 지내기를 오랫동안 하지 못하여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갔다.공의 성품은 중후하고 정직하며 바르고 엄숙하였으며, 말은 과묵하고 몸가짐은 검소하며 효우(孝友)가 매우 돈독하였다. 떠돌면서 탕패(蕩敗)한 나머지 가산이 흩어져서 반묘(半畞)의 밭이나 문에서 손님 맞을 동자도 없어서 공의 처가에서 데리고 온 노비 몇 명을 아우와 나누어 부렸다. 기타 일용의 세세한 일 또한 나와 너의 구분이 없이 하였으며 친애의 정이 늙을수록 더욱 돈독하였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봉양을 하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이 되어 그 기일(忌日)에 추도하는 애통함이 참절(慘切)하여 슬픔을 스스로 견디지 못하였다. 연세가 높은 사람을 존경하여 그 예를 극진히 하고 비록 일찍이 서로 알지 못한 사람이라도 길에서 만나면 반드시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었으며, 여염(閭閻)의 노인에 이르기까지 애휼(愛恤)이 그침 없었다. 먼 길을 떠날 때에는 객관의 주인 중에 나이가 많은 사람이 있으면 여비를 내어 주었으니 대개 어버이를 추념하는 일단을 볼 수 있다.조고비(祖考妣)와 고비(考妣) 양세(兩世)의 터를 잡아 장사 지낸 자리가 상서롭지 못하여 체백(體魄)이 편안하지 못할까 두려워 마침내 모두 새로운 산에 터를 잡고 이장하였다. 장사를 지낼 때 필요한 물품은 모두 친히 힘써 마련하여 공급하고 한 물건이라도 자손들에게 분정(分定)하지 않았다. 항상 당성배(堂姓輩)들이 여유롭게 놀며 세월을 보내고 학문에 전념할 뜻이 없을까를 걱정하여 책면(責勉)함이 간절하여 모두 집에 머물게 하고 가르쳤으며 그 가난하여 양식을 댈 수 없는 사람은 먹여주었다. 붕우 사이에는 절차탁마하고 경계하여 자신의 성의를 다하였다. 성품이 본래 강개하여 시속을 따라 부앙(俯仰)하지 않고 간혹 싫어하는 사람이 인정에 벗어나는 비난을 가해오면 듣고 바로 잊어버려 헤아려 따져보거나 멀리하는 뜻이 없으니, 비난한 사람이 나중에 곧 부끄러워하며 복종하였다. 무릇 그 사용하는 것은 극히 검소하였고 음식은 배가 부를 정도만 취하였으며 의복은 몸을 가릴 정도만 취하였다. 중년에 만대산(萬代山)의 영계(永溪) 물가에 집터를 정했는데 묵은 땅을 널리 힘써 개척하여 스스로 잘 조절하였으므로 가산이 점점 넉넉해졌다. 그러나 매양 가족들에게 화미(華靡)한 일을 하지 않도록 엄히 타일러 사용하는 것이 빈군(貧窘)할 때와 다름이 없게 하였다.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과 있을 때 남은 화려한 옷을 입고 자신은 소박한 옷을 입은 줄 알지 못하고 편안하게 대하며 조금도 시샘하는 뜻이 없었다. 빈객을 접대할 때에는 성의가 애연(藹然)하여 사람의 고하와 귀천에 따라 후박의 차이를 두지 않았다. 일찍이 가족들에게 말하기를, “무릇 음식의 법도는 만드는 사람이 많이 준비하기가 어려우니 손님을 대할 때 만약 고루 미칠 수 없으면 후박(厚薄)의 차별이 있게 되어 매우 편치 않다. 오직 마땅히 쉽게 장만하기에 힘을 기울여 계속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다.처음에 공은 임강공(臨江公)에게 수업하면서 사람들을 따라 과거 공부를 익히다가 중간에 스스로 깨닫고 말하기를, “만약 성현의 경전(經傳)을 읽지 않으면 참으로 사람 될 길이 없다. 또한 경전에 이미 익숙하고 문리가 이미 성장하면 과거 공부 또한 따라서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대학(大學)》으로부터 순서대로 강독하고 의심스러운 곳을 표기하여 붕우들과 더불어 강론하며 기어이 관통한 후에 그쳤다. 말년의 공부는 《주역(周易)》과 《주자서(朱子書)》에 더욱 정(精)하여 일이 있지 않으면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말하기를, “성현의 책은 참으로 사람다운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항상 말하기를, “내 성품이 편벽하여 자주 화를 내니 이것을 제거하는 공부는 마땅히 교왕과직(矯枉過直)의 방법을 써야한다.” 하고, 유관(劉寬)에게 국을 엎지른 일을 써서 자리 우측에 걸어두고 조석으로 성찰하였다. 지평(持平) 조공(趙公) 평(枰)이 사계(沙溪) 김 선생(金先生)의 문하에 출입하며 중명(重名)이 있었는데, 공의 명성을 듣고 만나기를 청하여 한번 만나보고 바로 지기(知己)로 인정하여, 《자양집(紫陽集)》일부(一部)를 주면서 말하기를, “공의 자질은 당세에 구하더라도 실로 쉽게 얻기 어려우니 더욱더 공부하여 반드시 원대한 뜻을 이루시오.”라고 하였다. 공의 과거공부에 대하여 사람들은 그 능력이 된다고 하였고 또한 이미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예부(禮部)에는 떨어져 마침내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날마다 경서(經書)를 스스로 즐기고 인하여 자호를 심하옹(尋何翁)이라 하였다. 이것은 주염계(周濂溪)가 정부자(程夫子)에게 매양 중니(仲尼)와 안자(顔子)가 어떤 일을 즐거워했는가를 찾도록 한 뜻을 취한 것이다.제자(諸子)들을 가르칠 때도 말과 행동을 법도(法度)에 맞도록 하여 가르침을 따라 행하지 못하면 매우 엄하게 꾸짖어 조금도 봐주지 않았다. 항상 ‘자신을 낮추고 남을 존중한다.’는 것과 ‘자만은 손해를 부르고 겸손은 이익을 얻는다.’는 뜻으로 거듭거듭 이끌어 가르쳤다. 또 말하기를, “말을 삼가는 것은 덕성(德性)을 기르는 일단(一端)이다. 또한 영욕에 관계되는 것은 더욱 마땅히 삼가야 할 것이다. 비록 적막한 곳에 홀로 처할지라도 사람을 대하여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은 말하지 않아야 한다. 입에 습관이 되면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입에서 나오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람들에게 독서를 가르치는 것은 한결같이 주문(朱門)의 독서법을 따라, 《소학(小學)》으로부터 순서대로 송독(誦讀)하고 문리(文理)가 점점 진척된 뒤에는 의의(疑義)를 짓게 하고, 세속의 박잡(駁雜)한 글은 눈에 보지 못하게 하였다. 집안에는 장기와 바둑의 도구가 없었고 금가(琴歌)와 연음(宴飮)은 집에서 베풀지 않았으며, 또한 일찍이 남의 집에서도 참견(參見)하지 않았다. 규방의 안팎이 엄숙하고 질서정연하여, 노비들도 반드시 일정한 부부가 있게 하여 바꾸지 않게 하였다. 무격(巫覡)이 기도하는 일은 가정(家庭)에 들이지 않았으며 노복에게도 금지하여 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백형(伯兄)이 일찍 세상을 떠나고 계제(季弟) 또한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 공은 추념(追念)하며 몹시 그리워하여 매일 밤 탄식하면서 자리에 편히 눕지 못하고 말하기를, “나는 아우와 사방을 떠돌아다니며 온갖 고생을 모두 맛보았는데 지금은 없으니 하늘이 그런 것을 어찌한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임강공(臨江公)의 교육하신 은혜를 잊지 못하여 기일(忌日)이면 반드시 행소(行素)하고, 혹 제수(祭需)를 갖추어 보냈다. 일찍이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대대로 임강공(臨江公)의 자손과 형제의 정을 길이 맺어 오래도록 변하지 말거라.”고 하였다. 이것이 공의 마음가짐과 일을 행한 것의 대개(大槪)이다.그 굳세어 꺾을 수 없는 기상과 탁월하고 원대한 도량에 이르러서는 사우(士友)들 사이에 서로 아는 사람들은 칭송하여 말하기를, “만약 당세에 시험 삼아 기용하였다면 얼마나 많은 공업(功業)을 이룰 수 있었을지 알 수 없으나 불행히 기용되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아, 공이 기업을 창건하고 그 전통을 남겨 계승할 수 있도록 한 것은 그 정대광명(正大光明)함이 이와 같은데, 자손이 준행(遵行)하여 대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는가. 공은 정미년(1607, 선조40) 6월 26일 태어나 정미년(1667, 현종8) 4월 15일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61세였다. 부인 김씨(金氏)는 공보다 6년 뒤에 세상을 떠나 동군(同郡) 달마산(達摩山) 동쪽 기슭의 완도(完島)를 안대(案對)하는 양화포(良化浦) 가의 유좌원(酉坐原)에 합장하였다. 계유년(1693, 숙종19) 월 일 불초고(不肖孤) 우주(禹疇)는 피눈물을 흘리며 삼가 적는다.이상은 선군자(先君子)께서 말년에 서술한 조고(祖考) 심하옹(尋何翁) 부군(府君)의 유사로 아우 형중(瑩中)으로 하여금 집필하게 하고 구술하신 것이다. 매양 너무 간략하다고 여겨 다듬고 윤색할 뜻을 가지고 있었으나 다시 상세히 살피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으니, 아, 슬프다. 초본(草本)이 흐리거나 지워진 곳이 많고 종이 또한 오래되고 낡아서 후세에 전할 수 없으므로 감히 다른 종이에 옮겨 적어 정본(正本)으로 삼고 삼가 본문에 의거하여 전사(傳寫)하였다. 한 글자도 감히 움직이지 않았으나, 다만 평소 들은 조고(祖考)의 행적 몇 가지를 아래쪽에 별록(別錄)하여 원본(元本)의 미비함을 보충하고 인하여 행장(行狀)의 체재를 이루었다.영계(永溪) 남쪽에 이웃한 박산촌(朴山村) 사람 장주(張籌)는 본군(本郡)의 교생(校生)이다. 어려서부터 조고(祖考)에게 수학(受學)하여 문(文)은 뜻을 통할 수 있었고 계산에 가장 뛰어났으며 사람됨이 성실하고 신중하며 질실(質實)하였다. 조고께서 과거시험장에 출입하실 때 항상 모시고 따랐고, 평소에는 전결(田結) 등의 일을 맡아보아 집안 식구처럼 신임하였다. 선군자(先君子)와 선백부(先伯父)의 때에 이르기까지 항상 우리들과 함께 거주하고 소심재(小心齋)에서 숙식하면서 집안의 농사일을 비롯한 대소사를 총괄하여 살피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선군자(先君子)와 선백부(先伯父)께서 우리들과 함께 문학(文學)에 전념할 수 있었다. 이에 사람들은 장생(張生)을 우리 집안의 가로(家老)라고 칭하였는데 나이가 80세를 넘어서 세상을 떠났다. 매양 우리들에게 조고의 평소의 몸가짐과 처사(處事)를 칭송하여 말하기를 부지런히 힘쓰며 싫증을 내지 않았다.그가 말하기를, “공이 과거를 보러 갈 때 행색이 꾸밈없이 소박하여 비할 데가 없었으나 매양 촌사(村舍)에 투숙할 때는 주인이 나와서 절을 하고 안색을 우러러 보고는 한마디 말이 없이 그 내방(內房)을 비우고 맞아 들여 공봉(供奉)하기를 오직 삼갔다. 이때 가만히 들어보니 사방에서 과거보러 가는 사람들이 묵을 집을 다투느라 떠들썩한 소리여서, 넘어다보니 그 행색이 호사스럽기가 몇 배나 더하였는데, 이는 가는 곳마다 모두 그러하였다.”라고 하였다.또 말하기를, “평소 가죽신을 신지 않고 솜씨 있게 작게 만들어 등자(鐙子)에 맞는 버드나무 나막신을 따로 만들어 길을 갈 때 신었다. 일찍이 먼 길을 다녀오시던 길에 한한정(閒閒亭)에 들렀는데, 주인은 곧 임공(林公) 백호(白湖)의 후손으로 남쪽 고을의 고사(高士)였다. 임공이 공의 나막신을 취하여 손수 부숴 뜰에 던지면서 공의 자(字)를 부르며 말하기를, ‘이후에는 이와 같이 괴이한 일을 하지 마시오.’라고 하고 인하여 신고 있던 채색 가죽신을 취하여 주며 말하기를, ‘이것을 신고 가면서 시험 삼아 나막신과 어떠한지 보시오.’라고 하였다. 공이 집으로 돌아오자 문안 하러 온 이웃사람들이 자리에 가득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누가 능히 좋은 나막신을 만들어 내게 주어 이 가죽신과 바꾸겠는가.’라고 하시자, 혹자가 말하기를, ‘반드시 가죽신을 나막신과 바꾸고자하시니 실은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그렇겠다. 가죽신과 나막신을 선택함에 내 어찌 다른 사람과 다르겠는가. 다만 가죽신은 혹 개가 물어뜯을까 걱정하고, 또 남이 훔쳐갈까 걱정하여 이미 벗어둔 후에 항상 스스로 관심을 두고 있다. 나막신은 이미 벗어둔 뒤에 이를 모두 잊는다. 발에 신고 길을 가는 것은 원래 다름이 없는데 어찌 능히 몸 밖의 물건으로 내 마음을 한 터럭만큼이라도 움직일 수 있겠는가.’라고 하셨다.”고 하였다.또 말하기를, “공께서 먼 길을 가실 때에는 점심(點心)은 반드시 백모(白茅)를 깔아 밥을 놓고, 감장(甘醬)과 감태(甘苔)를 유지(油紙)에 따로 쌌다. 낮에 촌사(村舍)에 들러 말을 먹이며 종으로 하여금 나뭇가지를 꺾어오게 하여 칼로 다듬어 젓가락을 만들어 밥을 드시고 나면 띠풀과 젓가락을 깨끗한 땅에 버리고 길을 나섰다. 일찍이 말씀하기를, ‘이날의 밥은 오시(午時)의 요기(療飢)를 위한 것인데, 몇 홉의 밥에 유기(鍮器)의 무게가 밥보다 세배는 더하니 이미 이것이 허위(虛僞)이다. 더구나 또 오후에는 빈 그릇을 지고 가야하니 이것이 더욱 허위 중의 허위이다.’라고 하셨다. 일찍이 먼 길을 다녀오다가 낮에 부소원(扶蘇院)에 머물고 있었는데, 마침 병사(兵使)의 순행(巡行)이 있었다. 강진(康津)의 아전들 또한 이 원에서 기다리느라 낮에 머물고 있었다. 공이 막 원에 도착했을 때 병사의 행차도 도착하였다. 이에 병사가 정당(正堂)을 차지하고 앉았고, 공은 서쪽 가의 작은 누각에 앉아 병사의 밥상이 오는 것을 보고 종을 불러 ‘내 밥을 가져오라’고 하니 종이 띠풀로 묶은 것을 드렸다. 또 종을 불러 말하기를, ‘나뭇가지를 꺾어 오너라.’고 하니, 종이 나뭇가지를 꺾어와 드렸다. 공이 차고 있던 칼을 꺼내 그 나뭇가지를 다듬어 젓가락을 만들었는데, 병사는 밥을 먹지 않고 앉아서 공을 한참동안 유심히 보다가 몸을 일으켜서 공을 향해오므로 공도 또한 일어나 마침내 서로 절을 하고 앉았다. 병사가 말하기를, ‘우리 함께 점심을 드시겠습니까.’라고 하니, 공이 ‘그렇게 하시지요.’라고 하였다. 병사가 아전으로 하여금 그 옆에 있는 소반을 들어 공의 앞에 놓게 하였는데, 소반에는 생선과 고기, 국 등 여러 그릇이었다. 공은 띠풀로 묶은 것을 소반 위에 놓고 젓가락으로 먹었다. 밥과 국을 모두 먹고 병사가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를 묻고 은근(慇懃)하게 정의(情誼)를 보이고 떠났다.”라고 하였다. 병사의 성명을 장생은 능히 말했으나 지금은 잊어버렸다.장생이 또 말하기를, “공께서 광주(光州)에 췌거(贅居)하실 때 공의 부옹(婦翁)은 이미 돌아가셔서, 상가(孀家)에 주인이 없었다. 하루는 환곡을 독촉하는 관인(官人)이 와서 내외(內外)를 가리지 않고 방자하게 굴며 거리낌이 없으니, 공이 관인을 불러 꾸짖어 물리쳤다. 관인이 관에 무고하기를 아무개 집의 양반에게 곤장을 맞았다고 하여 태수(太守)가 크게 노하여 발패(發牌)하여 잡아들였다. 공이 부득이 관에 들어가 장차 자신이 한 일이 아님을 밝히려고 하는데, 사민(土民)과 곤장을 맞았다고 무고한 자가 뜰에 들어가 한참 동안 서 있었고, 태수는 때때로 돌아보기만 하면서 함께 말하지 않고 있었다. 다만 대청의 위를 바라보니 한 백발노인과 태수가 마주 앉아 서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가, 이윽고 아전으로 하여금 말을 전하여 이르기를, ‘물을 만한 일이 없으니 나가도 좋다.’라고 하여 이에 공이 나왔다. 그 노인 또한 머문 곳으로 찾아와 말하기를, ‘오랫동안 만나보려 했는데 지금에야 다행히 만났소.’라고 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예전 어느 때 모처를 지나다 길가의 샘터에서 점심밥을 먹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말을 타고 지나가다 행차가 내 앞에 이르렀을 때 문득 말에서 내려 몇 길을 걸어간 연후에 말을 타고 갔소. 마음속으로 괴이하게 여겨 그 뒤를 따르며 짐을 지고 뒤쳐진 노비를 불러 물으니 그 노비가 말하기를, 「우리 상전께서 노인을 보면 말에서 내리는 것은 본래 그러합니다. 길에서 백발노인을 만나면 반드시 말에서 내려 예를 차립니다. 가을과 여름 농사철에는 길가에서 밥을 먹는 농부를 보면 그중에 백발노인이 있으면 반드시 말에서 내려 지나가기를 오늘과 같이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소. 내 그 말을 듣고 탄복하여 인하여 사는 곳과 성명을 자세하게 물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는데 오늘 만나고 보니 의연(依然)히 그때의 안면(顔面)이라 나도 모르게 너무 기뻐서 태수에게 이 일을 칭송하여 말하고, 이와 같이 근신(謹愼)한 사람이 반드시 이런 망동을 할 리가 없다고 하자, 태수가 이에 의혹을 풀고 온화한 말로 내보내라 한 것이오.’라고 말하였다.”고 하였다. 노인의 성명을 장생은 능히 말하였으나 이 또한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장생이 또 말하기를, “일찍이 공께서 붕우와 담론할 때 모시고 앉아 가만히 들어보니, ‘무릇 기생이 가무를 하는 곳에는 결코 한시도 자리에 참석해 본적이 없었다. 비단 사람의 마음을 혼란하게 할 뿐만 아니라, 한 기생의 가무를 자리에 있는 부자(父子) 형제(兄弟)가 일시에 주목하다니, 천하에 어찌 이와 같은 광경이 있겠는가.’라고 하셨다.”고 하였다.갑진년(1724, 경종4) 여름 나는 익찬(翊贊)으로 입번(入番)하였는데, 조태만(趙泰萬) 제박(濟博)이 시직(侍直)으로 함께 입번하여 그와 더불어 대화를 하였다. 제박이 말하기를, “일찍이 강화(江華)의 정 참판(鄭參判) 제두(齊斗)를 뵈었는데, 말이 형 쪽에 미치자, 정 참판이 말하기를, ‘나는 그 집안에 대해 들은 지 오래다. 그 집안이 비록 외도(外道)이나 삼세(三世)를 학문한 집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외도가 무슨 도인가 물으니, ‘노자의 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정 참판은 어찌 형의 집안을 가리켜 노자의 도를 한다고 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정 참판의 말이 무엇을 이르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아천(鵝川) 박 선생께서 일찍이 선군자께 말하기를, ‘현강(玄江) 족숙(族叔)이 노형(老兄) 집안의 학문에 대하여 내게 말하면서, 「그 집안은 도회(韜晦)에 오로지 힘써서 천지만물(天地萬物)을 몸 밖의 물건으로 여기고 오직 독선(獨善)이 귀함만을 알아 그 흐름이 노자의 도에 들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하였소. 그대는 모름지기 서로 권면하며 학문을 닦을 때에 이 뜻으로 서로 강론하여 확실히 해야 할 것이오.’라고 하였는데, 정 참판의 말을 생각하건대 또한 현강의 뜻과 같을 따름이오.”라고 하였다. 제박은 머리를 끄덕이며 “그렇군요.”라고 하였다. 나는 제박과 말을 주고받은 후에 깊이 생각해보니 나막신을 신고 길을 가고 띠풀로 밥을 싸는 등의 일이 사람들로 하여금 노자의 도를 하는 것으로 의아해하게 한 것 같으니 또한 괴이할 것이 없다. 사람의 말은 반드시 깊이 헤아려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주-D001] 췌거(贅居) : 처가살이. 더부살이를 말한다.[주-D002] 체백(體魄) : 사람의 육체에 붙어 다닌다는 넋. 사람이 죽은 뒤 육체를 떠난다는 혼(魂)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이다.[주-D003] 당성배(堂姓輩) : 고조부가 같은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주-D004] 교왕과직(矯枉過直) : 굽은 것을 바로잡음에 바름을 과하게 한다는 말이다. 《주역》 〈소과괘(小過卦) 괘사(卦辭)〉에 “소과는 형통하니 정함이 이롭다.〔小過 亨 利貞〕”라고 하였다. 전(傳)에 “과는 보통을 넘는 것이다. 굽은 것을 바로잡음에 바룸을 과하게 함과 같으니, 과하게 함은 바름에 나아가는 것이다. 일은 때의 당연함이 있어 과하게 함을 기다린 뒤에 능히 형통함이 있다. 그러므로 소과는 스스로 형통할 뜻이 있는 것이다.〔過者 過其常也 若矯枉而過正 過所以就正也 事有時而當然 有待過而後能亨者 故小過自有亨義〕”라고 하였다.[주-D005] 유관(劉寬)에게 국을 엎지른 : 후한(後漢) 장제(章帝) 때 유관(劉寬)은 성질이 매우 너그러워 좀처럼 화를 내지 않았다. 그 부인이 그가 얼마나 너그러운가를 시험하고자 하여 그가 조회에 들어가려고 관복(官服)을 차려 입었을 적에 종을 시켜서 관복에 국을 엎질렀으나, 다만 “네 손이 데지나 않았느냐.”라고 했을 뿐 다른 말은 없었다 한다. 《後漢書 卷25 劉寬傳》[주-D006] 주염계(周濂溪) : 주돈이(周敦頤, 1017~1073)로, 자는 무숙(茂叔)이다. 강서성 여산(廬山) 기슭에 있는 염계(濂溪)에 서당을 짓고 살아서 호를 염계(濂溪)라 하였다. 북송의 대유학자이자 송학의 비조로, 그의 〈태극도설(太極圖說)〉은 주자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정이천ㆍ정명도 형제의 스승이기도 하다. 저서로는 《통서(通書)》가 있다.[주-D007] 주염계(周濂溪)가 …… 뜻을 : 정자가 일찍이 주염계에게 수학할 때, 주염계가 매양 중니(仲尼)와 안자(顔子)가 즐긴 것은 무엇인가 찾아보라고 하였는데, 주자(朱子)가 이에 대해 “만약 그들이 한 공부를 배우면 곧 그들이 즐긴 것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주염계는 즐긴 바가 무엇인지를 말해 주지 않고 단지 그것을 찾도록 하였고, 주자는 또 ‘그들이 한 공부를 배우면 곧 그들이 즐긴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였으니, 후학으로 하여금 그 이치를 찾도록 한 것이라고 한다.[주-D008] 자신을 …… 존중한다 :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예라는 것은 자신을 낮추고 남을 존중하는 것이다.〔夫禮者 自卑而尊人〕”라고 하였다.[주-D009] 자만은 …… 얻는다 :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자만은 손해를 부르고 겸손은 이익을 얻는다. 이것이 바로 천도이다.〔滿招損 謙受益 時乃天道〕”라고 하였다.[주-D010] 행소(行素) : 소반(素飯)을 먹음. 슬퍼하여 기름진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을 말한다.[주-D011] 기업을 …… 것은 : 창업수통(創業垂統)은 기업(基業)을 개창하고 이를 후대에 전한다는 말이다. 《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 “군자는 기업을 창건하고 전통을 드리워서 계승할 수 있게 한다.〔君子創業垂統 爲可繼也〕”라고 하였다.[주-D012] 등자(鐙子) : 말을 타고 앉아 두 발로 디디게 되어 있는 물건으로, 안장에 달아 말의 양쪽 옆구리로 늘어뜨린다.[주-D013] 정당(正堂) : 정사를 처결하는 대청(大廳)을 말한다.[주-D014] 발패(發牌) : 금령을 위반한 사람을 잡아 오게 하기 위하여 금란패(禁亂牌)를 보냄을 이른다.[주-D015] 조태만(趙泰萬) : 1672~1727.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제박(濟博), 호는 고박재(古朴齋)이다.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이다. 1717년(숙종43)에 학행으로 돈녕부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22년(경종2) 또다시 돈녕부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자,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시직(侍直)으로 임명되었다. 1724년 사간원으로부터 그의 말과 행동이 시직이라는 직책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탄핵을 받아 체직되었다. 1743년(영조19) 시직 재직 때에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였다 하여 가자(加資)되었다.[주-D016] 도회(韜晦) : 재주나 지혜, 학문, 자취 등을 숨기고 드러내지 않음을 말한다.[주-D017] 독선(獨善) : 자신을 수양하고 절조를 지키는 데에 힘씀을 이른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옛사람들이 뜻을 얻으면 은택이 백성에게 가해지고, 뜻을 얻지 못하면 몸을 닦아 세상에 드러냈으니, 궁하면 그 몸을 홀로 선하게 하고 영달하면 천하를 겸하여 선하게 한다.〔古之人得志 澤加於民 不得志 修身見於世 窮則獨善其身 達則兼善天下〕”라고 하였다.
- 2020-12-11 | NO.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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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고 심하옹 장초〔祖考尋何翁狀草〕 - 덕촌집 제10권
- 조고 심하옹 장초〔祖考尋何翁狀草〕 - 덕촌집 제10권 : 양득중(梁得中, 1665~1742) 공의 휘는 도남(道南), 자는 수오(壽吾), 그 선세(先世)는 능주(綾州)에 살았다. 조고(祖考) 건계공(建溪公) 휘 산형(山逈)은 하동 정공(河東鄭公) 우(遇)의 딸에게 장가들어 영암군(靈巖郡) 옥천(玉泉) 대산리(大山里)에 췌거(贅居)하였다. 정공(鄭公)은 곧 참판공(參判公) 운(運)의 종부(從父) 형제이다. 건계공은 문재(文才)가 민첩하여 사람들이 가성(家聲)을 이을 자손이라 칭하였으나 과거에 누차 급제하지 못하여 현달하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아들 넷을 두었는데 공의 부친이 그 장자(長子)로 휘는 범용(範容)이며 문학에 종사하여 능히 선조의 사업을 이었다. 이때 임강공(臨江公) 예용(禮容) 또한 같은 군의 팔마리(八馬里)에 췌거하였는데, 공에게는 종조(從祖) 숙부(叔父)가 된다. 공은 이에 대산(大山)으로부터 용정리(龍井里)로 옮겨 살았는데 팔마리와는 5리의 거리로 상종하기에 편리하였다. 선산 임씨(善山林氏) 석천(石川) 선생 억령(億齡)의 종부 형제의 아들 정해(挺海)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셋을 낳았는데 공이 둘째 아들로, 두 살 때 부친을 여의었는데 막내아우는 태어난 지 겨우 몇 달이었고 백형(伯兄)은 겨우 5세였다. 나이 12세에 모부인이 또 세상을 떠나 외롭고 고단하게 의지할 곳이 없어서 임강공(臨江公)이 거두어 돌보고 가르치고 길렀다. 공의 외가 임씨가 후손이 없어 제사가 끊기니 백형이 외가의 제사를 모시며 외숙모에게 맡겨 길러졌고, 공과 아우는 끝내 의지할 곳이 없었다. 22세에 광산 김씨(光山金氏) 진사 응해(應海)의 딸에게 장가들어 광주(光州)에서 수 년 동안 췌거(贅居)하였으나 형제가 화락하게 지내기를 오랫동안 하지 못하여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갔다.공의 성품은 중후하고 정직하며 바르고 엄숙하였으며, 말은 과묵하고 몸가짐은 검소하며 효우(孝友)가 매우 돈독하였다. 떠돌면서 탕패(蕩敗)한 나머지 가산이 흩어져서 반묘(半畞)의 밭이나 문에서 손님 맞을 동자도 없어서 공의 처가에서 데리고 온 노비 몇 명을 아우와 나누어 부렸다. 기타 일용의 세세한 일 또한 나와 너의 구분이 없이 하였으며 친애의 정이 늙을수록 더욱 돈독하였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봉양을 하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이 되어 그 기일(忌日)에 추도하는 애통함이 참절(慘切)하여 슬픔을 스스로 견디지 못하였다. 연세가 높은 사람을 존경하여 그 예를 극진히 하고 비록 일찍이 서로 알지 못한 사람이라도 길에서 만나면 반드시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었으며, 여염(閭閻)의 노인에 이르기까지 애휼(愛恤)이 그침 없었다. 먼 길을 떠날 때에는 객관의 주인 중에 나이가 많은 사람이 있으면 여비를 내어 주었으니 대개 어버이를 추념하는 일단을 볼 수 있다.조고비(祖考妣)와 고비(考妣) 양세(兩世)의 터를 잡아 장사 지낸 자리가 상서롭지 못하여 체백(體魄)이 편안하지 못할까 두려워 마침내 모두 새로운 산에 터를 잡고 이장하였다. 장사를 지낼 때 필요한 물품은 모두 친히 힘써 마련하여 공급하고 한 물건이라도 자손들에게 분정(分定)하지 않았다. 항상 당성배(堂姓輩)들이 여유롭게 놀며 세월을 보내고 학문에 전념할 뜻이 없을까를 걱정하여 책면(責勉)함이 간절하여 모두 집에 머물게 하고 가르쳤으며 그 가난하여 양식을 댈 수 없는 사람은 먹여주었다. 붕우 사이에는 절차탁마하고 경계하여 자신의 성의를 다하였다. 성품이 본래 강개하여 시속을 따라 부앙(俯仰)하지 않고 간혹 싫어하는 사람이 인정에 벗어나는 비난을 가해오면 듣고 바로 잊어버려 헤아려 따져보거나 멀리하는 뜻이 없으니, 비난한 사람이 나중에 곧 부끄러워하며 복종하였다. 무릇 그 사용하는 것은 극히 검소하였고 음식은 배가 부를 정도만 취하였으며 의복은 몸을 가릴 정도만 취하였다. 중년에 만대산(萬代山)의 영계(永溪) 물가에 집터를 정했는데 묵은 땅을 널리 힘써 개척하여 스스로 잘 조절하였으므로 가산이 점점 넉넉해졌다. 그러나 매양 가족들에게 화미(華靡)한 일을 하지 않도록 엄히 타일러 사용하는 것이 빈군(貧窘)할 때와 다름이 없게 하였다.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과 있을 때 남은 화려한 옷을 입고 자신은 소박한 옷을 입은 줄 알지 못하고 편안하게 대하며 조금도 시샘하는 뜻이 없었다. 빈객을 접대할 때에는 성의가 애연(藹然)하여 사람의 고하와 귀천에 따라 후박의 차이를 두지 않았다. 일찍이 가족들에게 말하기를, “무릇 음식의 법도는 만드는 사람이 많이 준비하기가 어려우니 손님을 대할 때 만약 고루 미칠 수 없으면 후박(厚薄)의 차별이 있게 되어 매우 편치 않다. 오직 마땅히 쉽게 장만하기에 힘을 기울여 계속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다.처음에 공은 임강공(臨江公)에게 수업하면서 사람들을 따라 과거 공부를 익히다가 중간에 스스로 깨닫고 말하기를, “만약 성현의 경전(經傳)을 읽지 않으면 참으로 사람 될 길이 없다. 또한 경전에 이미 익숙하고 문리가 이미 성장하면 과거 공부 또한 따라서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대학(大學)》으로부터 순서대로 강독하고 의심스러운 곳을 표기하여 붕우들과 더불어 강론하며 기어이 관통한 후에 그쳤다. 말년의 공부는 《주역(周易)》과 《주자서(朱子書)》에 더욱 정(精)하여 일이 있지 않으면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말하기를, “성현의 책은 참으로 사람다운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항상 말하기를, “내 성품이 편벽하여 자주 화를 내니 이것을 제거하는 공부는 마땅히 교왕과직(矯枉過直)의 방법을 써야한다.” 하고, 유관(劉寬)에게 국을 엎지른 일을 써서 자리 우측에 걸어두고 조석으로 성찰하였다. 지평(持平) 조공(趙公) 평(枰)이 사계(沙溪) 김 선생(金先生)의 문하에 출입하며 중명(重名)이 있었는데, 공의 명성을 듣고 만나기를 청하여 한번 만나보고 바로 지기(知己)로 인정하여, 《자양집(紫陽集)》일부(一部)를 주면서 말하기를, “공의 자질은 당세에 구하더라도 실로 쉽게 얻기 어려우니 더욱더 공부하여 반드시 원대한 뜻을 이루시오.”라고 하였다. 공의 과거공부에 대하여 사람들은 그 능력이 된다고 하였고 또한 이미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예부(禮部)에는 떨어져 마침내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날마다 경서(經書)를 스스로 즐기고 인하여 자호를 심하옹(尋何翁)이라 하였다. 이것은 주염계(周濂溪)가 정부자(程夫子)에게 매양 중니(仲尼)와 안자(顔子)가 어떤 일을 즐거워했는가를 찾도록 한 뜻을 취한 것이다.제자(諸子)들을 가르칠 때도 말과 행동을 법도(法度)에 맞도록 하여 가르침을 따라 행하지 못하면 매우 엄하게 꾸짖어 조금도 봐주지 않았다. 항상 ‘자신을 낮추고 남을 존중한다.’는 것과 ‘자만은 손해를 부르고 겸손은 이익을 얻는다.’는 뜻으로 거듭거듭 이끌어 가르쳤다. 또 말하기를, “말을 삼가는 것은 덕성(德性)을 기르는 일단(一端)이다. 또한 영욕에 관계되는 것은 더욱 마땅히 삼가야 할 것이다. 비록 적막한 곳에 홀로 처할지라도 사람을 대하여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은 말하지 않아야 한다. 입에 습관이 되면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입에서 나오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람들에게 독서를 가르치는 것은 한결같이 주문(朱門)의 독서법을 따라, 《소학(小學)》으로부터 순서대로 송독(誦讀)하고 문리(文理)가 점점 진척된 뒤에는 의의(疑義)를 짓게 하고, 세속의 박잡(駁雜)한 글은 눈에 보지 못하게 하였다. 집안에는 장기와 바둑의 도구가 없었고 금가(琴歌)와 연음(宴飮)은 집에서 베풀지 않았으며, 또한 일찍이 남의 집에서도 참견(參見)하지 않았다. 규방의 안팎이 엄숙하고 질서정연하여, 노비들도 반드시 일정한 부부가 있게 하여 바꾸지 않게 하였다. 무격(巫覡)이 기도하는 일은 가정(家庭)에 들이지 않았으며 노복에게도 금지하여 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백형(伯兄)이 일찍 세상을 떠나고 계제(季弟) 또한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 공은 추념(追念)하며 몹시 그리워하여 매일 밤 탄식하면서 자리에 편히 눕지 못하고 말하기를, “나는 아우와 사방을 떠돌아다니며 온갖 고생을 모두 맛보았는데 지금은 없으니 하늘이 그런 것을 어찌한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임강공(臨江公)의 교육하신 은혜를 잊지 못하여 기일(忌日)이면 반드시 행소(行素)하고, 혹 제수(祭需)를 갖추어 보냈다. 일찍이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대대로 임강공(臨江公)의 자손과 형제의 정을 길이 맺어 오래도록 변하지 말거라.”고 하였다. 이것이 공의 마음가짐과 일을 행한 것의 대개(大槪)이다.그 굳세어 꺾을 수 없는 기상과 탁월하고 원대한 도량에 이르러서는 사우(士友)들 사이에 서로 아는 사람들은 칭송하여 말하기를, “만약 당세에 시험 삼아 기용하였다면 얼마나 많은 공업(功業)을 이룰 수 있었을지 알 수 없으나 불행히 기용되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아, 공이 기업을 창건하고 그 전통을 남겨 계승할 수 있도록 한 것은 그 정대광명(正大光明)함이 이와 같은데, 자손이 준행(遵行)하여 대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는가. 공은 정미년(1607, 선조40) 6월 26일 태어나 정미년(1667, 현종8) 4월 15일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61세였다. 부인 김씨(金氏)는 공보다 6년 뒤에 세상을 떠나 동군(同郡) 달마산(達摩山) 동쪽 기슭의 완도(完島)를 안대(案對)하는 양화포(良化浦) 가의 유좌원(酉坐原)에 합장하였다. 계유년(1693, 숙종19) 월 일 불초고(不肖孤) 우주(禹疇)는 피눈물을 흘리며 삼가 적는다.이상은 선군자(先君子)께서 말년에 서술한 조고(祖考) 심하옹(尋何翁) 부군(府君)의 유사로 아우 형중(瑩中)으로 하여금 집필하게 하고 구술하신 것이다. 매양 너무 간략하다고 여겨 다듬고 윤색할 뜻을 가지고 있었으나 다시 상세히 살피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으니, 아, 슬프다. 초본(草本)이 흐리거나 지워진 곳이 많고 종이 또한 오래되고 낡아서 후세에 전할 수 없으므로 감히 다른 종이에 옮겨 적어 정본(正本)으로 삼고 삼가 본문에 의거하여 전사(傳寫)하였다. 한 글자도 감히 움직이지 않았으나, 다만 평소 들은 조고(祖考)의 행적 몇 가지를 아래쪽에 별록(別錄)하여 원본(元本)의 미비함을 보충하고 인하여 행장(行狀)의 체재를 이루었다.영계(永溪) 남쪽에 이웃한 박산촌(朴山村) 사람 장주(張籌)는 본군(本郡)의 교생(校生)이다. 어려서부터 조고(祖考)에게 수학(受學)하여 문(文)은 뜻을 통할 수 있었고 계산에 가장 뛰어났으며 사람됨이 성실하고 신중하며 질실(質實)하였다. 조고께서 과거시험장에 출입하실 때 항상 모시고 따랐고, 평소에는 전결(田結) 등의 일을 맡아보아 집안 식구처럼 신임하였다. 선군자(先君子)와 선백부(先伯父)의 때에 이르기까지 항상 우리들과 함께 거주하고 소심재(小心齋)에서 숙식하면서 집안의 농사일을 비롯한 대소사를 총괄하여 살피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선군자(先君子)와 선백부(先伯父)께서 우리들과 함께 문학(文學)에 전념할 수 있었다. 이에 사람들은 장생(張生)을 우리 집안의 가로(家老)라고 칭하였는데 나이가 80세를 넘어서 세상을 떠났다. 매양 우리들에게 조고의 평소의 몸가짐과 처사(處事)를 칭송하여 말하기를 부지런히 힘쓰며 싫증을 내지 않았다.그가 말하기를, “공이 과거를 보러 갈 때 행색이 꾸밈없이 소박하여 비할 데가 없었으나 매양 촌사(村舍)에 투숙할 때는 주인이 나와서 절을 하고 안색을 우러러 보고는 한마디 말이 없이 그 내방(內房)을 비우고 맞아 들여 공봉(供奉)하기를 오직 삼갔다. 이때 가만히 들어보니 사방에서 과거보러 가는 사람들이 묵을 집을 다투느라 떠들썩한 소리여서, 넘어다보니 그 행색이 호사스럽기가 몇 배나 더하였는데, 이는 가는 곳마다 모두 그러하였다.”라고 하였다.또 말하기를, “평소 가죽신을 신지 않고 솜씨 있게 작게 만들어 등자(鐙子)에 맞는 버드나무 나막신을 따로 만들어 길을 갈 때 신었다. 일찍이 먼 길을 다녀오시던 길에 한한정(閒閒亭)에 들렀는데, 주인은 곧 임공(林公) 백호(白湖)의 후손으로 남쪽 고을의 고사(高士)였다. 임공이 공의 나막신을 취하여 손수 부숴 뜰에 던지면서 공의 자(字)를 부르며 말하기를, ‘이후에는 이와 같이 괴이한 일을 하지 마시오.’라고 하고 인하여 신고 있던 채색 가죽신을 취하여 주며 말하기를, ‘이것을 신고 가면서 시험 삼아 나막신과 어떠한지 보시오.’라고 하였다. 공이 집으로 돌아오자 문안 하러 온 이웃사람들이 자리에 가득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누가 능히 좋은 나막신을 만들어 내게 주어 이 가죽신과 바꾸겠는가.’라고 하시자, 혹자가 말하기를, ‘반드시 가죽신을 나막신과 바꾸고자하시니 실은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그렇겠다. 가죽신과 나막신을 선택함에 내 어찌 다른 사람과 다르겠는가. 다만 가죽신은 혹 개가 물어뜯을까 걱정하고, 또 남이 훔쳐갈까 걱정하여 이미 벗어둔 후에 항상 스스로 관심을 두고 있다. 나막신은 이미 벗어둔 뒤에 이를 모두 잊는다. 발에 신고 길을 가는 것은 원래 다름이 없는데 어찌 능히 몸 밖의 물건으로 내 마음을 한 터럭만큼이라도 움직일 수 있겠는가.’라고 하셨다.”고 하였다.또 말하기를, “공께서 먼 길을 가실 때에는 점심(點心)은 반드시 백모(白茅)를 깔아 밥을 놓고, 감장(甘醬)과 감태(甘苔)를 유지(油紙)에 따로 쌌다. 낮에 촌사(村舍)에 들러 말을 먹이며 종으로 하여금 나뭇가지를 꺾어오게 하여 칼로 다듬어 젓가락을 만들어 밥을 드시고 나면 띠풀과 젓가락을 깨끗한 땅에 버리고 길을 나섰다. 일찍이 말씀하기를, ‘이날의 밥은 오시(午時)의 요기(療飢)를 위한 것인데, 몇 홉의 밥에 유기(鍮器)의 무게가 밥보다 세배는 더하니 이미 이것이 허위(虛僞)이다. 더구나 또 오후에는 빈 그릇을 지고 가야하니 이것이 더욱 허위 중의 허위이다.’라고 하셨다. 일찍이 먼 길을 다녀오다가 낮에 부소원(扶蘇院)에 머물고 있었는데, 마침 병사(兵使)의 순행(巡行)이 있었다. 강진(康津)의 아전들 또한 이 원에서 기다리느라 낮에 머물고 있었다. 공이 막 원에 도착했을 때 병사의 행차도 도착하였다. 이에 병사가 정당(正堂)을 차지하고 앉았고, 공은 서쪽 가의 작은 누각에 앉아 병사의 밥상이 오는 것을 보고 종을 불러 ‘내 밥을 가져오라’고 하니 종이 띠풀로 묶은 것을 드렸다. 또 종을 불러 말하기를, ‘나뭇가지를 꺾어 오너라.’고 하니, 종이 나뭇가지를 꺾어와 드렸다. 공이 차고 있던 칼을 꺼내 그 나뭇가지를 다듬어 젓가락을 만들었는데, 병사는 밥을 먹지 않고 앉아서 공을 한참동안 유심히 보다가 몸을 일으켜서 공을 향해오므로 공도 또한 일어나 마침내 서로 절을 하고 앉았다. 병사가 말하기를, ‘우리 함께 점심을 드시겠습니까.’라고 하니, 공이 ‘그렇게 하시지요.’라고 하였다. 병사가 아전으로 하여금 그 옆에 있는 소반을 들어 공의 앞에 놓게 하였는데, 소반에는 생선과 고기, 국 등 여러 그릇이었다. 공은 띠풀로 묶은 것을 소반 위에 놓고 젓가락으로 먹었다. 밥과 국을 모두 먹고 병사가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를 묻고 은근(慇懃)하게 정의(情誼)를 보이고 떠났다.”라고 하였다. 병사의 성명을 장생은 능히 말했으나 지금은 잊어버렸다.장생이 또 말하기를, “공께서 광주(光州)에 췌거(贅居)하실 때 공의 부옹(婦翁)은 이미 돌아가셔서, 상가(孀家)에 주인이 없었다. 하루는 환곡을 독촉하는 관인(官人)이 와서 내외(內外)를 가리지 않고 방자하게 굴며 거리낌이 없으니, 공이 관인을 불러 꾸짖어 물리쳤다. 관인이 관에 무고하기를 아무개 집의 양반에게 곤장을 맞았다고 하여 태수(太守)가 크게 노하여 발패(發牌)하여 잡아들였다. 공이 부득이 관에 들어가 장차 자신이 한 일이 아님을 밝히려고 하는데, 사민(土民)과 곤장을 맞았다고 무고한 자가 뜰에 들어가 한참 동안 서 있었고, 태수는 때때로 돌아보기만 하면서 함께 말하지 않고 있었다. 다만 대청의 위를 바라보니 한 백발노인과 태수가 마주 앉아 서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가, 이윽고 아전으로 하여금 말을 전하여 이르기를, ‘물을 만한 일이 없으니 나가도 좋다.’라고 하여 이에 공이 나왔다. 그 노인 또한 머문 곳으로 찾아와 말하기를, ‘오랫동안 만나보려 했는데 지금에야 다행히 만났소.’라고 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예전 어느 때 모처를 지나다 길가의 샘터에서 점심밥을 먹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말을 타고 지나가다 행차가 내 앞에 이르렀을 때 문득 말에서 내려 몇 길을 걸어간 연후에 말을 타고 갔소. 마음속으로 괴이하게 여겨 그 뒤를 따르며 짐을 지고 뒤쳐진 노비를 불러 물으니 그 노비가 말하기를, 「우리 상전께서 노인을 보면 말에서 내리는 것은 본래 그러합니다. 길에서 백발노인을 만나면 반드시 말에서 내려 예를 차립니다. 가을과 여름 농사철에는 길가에서 밥을 먹는 농부를 보면 그중에 백발노인이 있으면 반드시 말에서 내려 지나가기를 오늘과 같이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소. 내 그 말을 듣고 탄복하여 인하여 사는 곳과 성명을 자세하게 물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는데 오늘 만나고 보니 의연(依然)히 그때의 안면(顔面)이라 나도 모르게 너무 기뻐서 태수에게 이 일을 칭송하여 말하고, 이와 같이 근신(謹愼)한 사람이 반드시 이런 망동을 할 리가 없다고 하자, 태수가 이에 의혹을 풀고 온화한 말로 내보내라 한 것이오.’라고 말하였다.”고 하였다. 노인의 성명을 장생은 능히 말하였으나 이 또한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장생이 또 말하기를, “일찍이 공께서 붕우와 담론할 때 모시고 앉아 가만히 들어보니, ‘무릇 기생이 가무를 하는 곳에는 결코 한시도 자리에 참석해 본적이 없었다. 비단 사람의 마음을 혼란하게 할 뿐만 아니라, 한 기생의 가무를 자리에 있는 부자(父子) 형제(兄弟)가 일시에 주목하다니, 천하에 어찌 이와 같은 광경이 있겠는가.’라고 하셨다.”고 하였다.갑진년(1724, 경종4) 여름 나는 익찬(翊贊)으로 입번(入番)하였는데, 조태만(趙泰萬) 제박(濟博)이 시직(侍直)으로 함께 입번하여 그와 더불어 대화를 하였다. 제박이 말하기를, “일찍이 강화(江華)의 정 참판(鄭參判) 제두(齊斗)를 뵈었는데, 말이 형 쪽에 미치자, 정 참판이 말하기를, ‘나는 그 집안에 대해 들은 지 오래다. 그 집안이 비록 외도(外道)이나 삼세(三世)를 학문한 집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외도가 무슨 도인가 물으니, ‘노자의 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정 참판은 어찌 형의 집안을 가리켜 노자의 도를 한다고 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정 참판의 말이 무엇을 이르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아천(鵝川) 박 선생께서 일찍이 선군자께 말하기를, ‘현강(玄江) 족숙(族叔)이 노형(老兄) 집안의 학문에 대하여 내게 말하면서, 「그 집안은 도회(韜晦)에 오로지 힘써서 천지만물(天地萬物)을 몸 밖의 물건으로 여기고 오직 독선(獨善)이 귀함만을 알아 그 흐름이 노자의 도에 들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하였소. 그대는 모름지기 서로 권면하며 학문을 닦을 때에 이 뜻으로 서로 강론하여 확실히 해야 할 것이오.’라고 하였는데, 정 참판의 말을 생각하건대 또한 현강의 뜻과 같을 따름이오.”라고 하였다. 제박은 머리를 끄덕이며 “그렇군요.”라고 하였다. 나는 제박과 말을 주고받은 후에 깊이 생각해보니 나막신을 신고 길을 가고 띠풀로 밥을 싸는 등의 일이 사람들로 하여금 노자의 도를 하는 것으로 의아해하게 한 것 같으니 또한 괴이할 것이 없다. 사람의 말은 반드시 깊이 헤아려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주-D001] 췌거(贅居) : 처가살이. 더부살이를 말한다.[주-D002] 체백(體魄) : 사람의 육체에 붙어 다닌다는 넋. 사람이 죽은 뒤 육체를 떠난다는 혼(魂)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이다.[주-D003] 당성배(堂姓輩) : 고조부가 같은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주-D004] 교왕과직(矯枉過直) : 굽은 것을 바로잡음에 바름을 과하게 한다는 말이다. 《주역》 〈소과괘(小過卦) 괘사(卦辭)〉에 “소과는 형통하니 정함이 이롭다.〔小過 亨 利貞〕”라고 하였다. 전(傳)에 “과는 보통을 넘는 것이다. 굽은 것을 바로잡음에 바룸을 과하게 함과 같으니, 과하게 함은 바름에 나아가는 것이다. 일은 때의 당연함이 있어 과하게 함을 기다린 뒤에 능히 형통함이 있다. 그러므로 소과는 스스로 형통할 뜻이 있는 것이다.〔過者 過其常也 若矯枉而過正 過所以就正也 事有時而當然 有待過而後能亨者 故小過自有亨義〕”라고 하였다.[주-D005] 유관(劉寬)에게 국을 엎지른 : 후한(後漢) 장제(章帝) 때 유관(劉寬)은 성질이 매우 너그러워 좀처럼 화를 내지 않았다. 그 부인이 그가 얼마나 너그러운가를 시험하고자 하여 그가 조회에 들어가려고 관복(官服)을 차려 입었을 적에 종을 시켜서 관복에 국을 엎질렀으나, 다만 “네 손이 데지나 않았느냐.”라고 했을 뿐 다른 말은 없었다 한다. 《後漢書 卷25 劉寬傳》[주-D006] 주염계(周濂溪) : 주돈이(周敦頤, 1017~1073)로, 자는 무숙(茂叔)이다. 강서성 여산(廬山) 기슭에 있는 염계(濂溪)에 서당을 짓고 살아서 호를 염계(濂溪)라 하였다. 북송의 대유학자이자 송학의 비조로, 그의 〈태극도설(太極圖說)〉은 주자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정이천ㆍ정명도 형제의 스승이기도 하다. 저서로는 《통서(通書)》가 있다.[주-D007] 주염계(周濂溪)가 …… 뜻을 : 정자가 일찍이 주염계에게 수학할 때, 주염계가 매양 중니(仲尼)와 안자(顔子)가 즐긴 것은 무엇인가 찾아보라고 하였는데, 주자(朱子)가 이에 대해 “만약 그들이 한 공부를 배우면 곧 그들이 즐긴 것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주염계는 즐긴 바가 무엇인지를 말해 주지 않고 단지 그것을 찾도록 하였고, 주자는 또 ‘그들이 한 공부를 배우면 곧 그들이 즐긴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였으니, 후학으로 하여금 그 이치를 찾도록 한 것이라고 한다.[주-D008] 자신을 …… 존중한다 :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예라는 것은 자신을 낮추고 남을 존중하는 것이다.〔夫禮者 自卑而尊人〕”라고 하였다.[주-D009] 자만은 …… 얻는다 :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자만은 손해를 부르고 겸손은 이익을 얻는다. 이것이 바로 천도이다.〔滿招損 謙受益 時乃天道〕”라고 하였다.[주-D010] 행소(行素) : 소반(素飯)을 먹음. 슬퍼하여 기름진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을 말한다.[주-D011] 기업을 …… 것은 : 창업수통(創業垂統)은 기업(基業)을 개창하고 이를 후대에 전한다는 말이다. 《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 “군자는 기업을 창건하고 전통을 드리워서 계승할 수 있게 한다.〔君子創業垂統 爲可繼也〕”라고 하였다.[주-D012] 등자(鐙子) : 말을 타고 앉아 두 발로 디디게 되어 있는 물건으로, 안장에 달아 말의 양쪽 옆구리로 늘어뜨린다.[주-D013] 정당(正堂) : 정사를 처결하는 대청(大廳)을 말한다.[주-D014] 발패(發牌) : 금령을 위반한 사람을 잡아 오게 하기 위하여 금란패(禁亂牌)를 보냄을 이른다.[주-D015] 조태만(趙泰萬) : 1672~1727.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제박(濟博), 호는 고박재(古朴齋)이다.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이다. 1717년(숙종43)에 학행으로 돈녕부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22년(경종2) 또다시 돈녕부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자,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시직(侍直)으로 임명되었다. 1724년 사간원으로부터 그의 말과 행동이 시직이라는 직책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탄핵을 받아 체직되었다. 1743년(영조19) 시직 재직 때에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였다 하여 가자(加資)되었다.[주-D016] 도회(韜晦) : 재주나 지혜, 학문, 자취 등을 숨기고 드러내지 않음을 말한다.[주-D017] 독선(獨善) : 자신을 수양하고 절조를 지키는 데에 힘씀을 이른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옛사람들이 뜻을 얻으면 은택이 백성에게 가해지고, 뜻을 얻지 못하면 몸을 닦아 세상에 드러냈으니, 궁하면 그 몸을 홀로 선하게 하고 영달하면 천하를 겸하여 선하게 한다.〔古之人得志 澤加於民 不得志 修身見於世 窮則獨善其身 達則兼善天下〕”라고 하였다.
- 2020-10-04 | NO.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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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관기행(漕官紀行) - 성소부부고 제18권, 허균과 기녀 광산월
- 조관기행(漕官紀行) - 성소부부고 제18권 / 문부(文部) 15 ○ 기행 상(紀行上) : 양천(陽川) 허균(許筠 1569~1618)신축년(1601,선조34) 6월 가부(駕部 사복시(司僕寺)) 낭관(郞官)으로 있던 나는 전운 판관(轉運判官)에 제수되어 삼창(三倉)에 가서 조운(漕運)을 감독하게 되었다.7월 27일(병진) 좌랑(佐郞) 강항(姜沆)이 인사를 왔다. 부체찰사(副體察使) 한준겸(韓浚謙)과 방백(方伯) 이홍로(李弘老)가 광주(光州)에서 호군(犒軍 군사에게 음식을 주어 위로함)하고 있고 태사(太史) 소광진(蘇光震)이 왕명을 받들고 와 있어 모두 서면으로 안부를 물었다. 한준겸은 조졸(漕卒)을 선격(船格 사공의 일을 돕는 사람)으로 배치하는 데는 만나서 의논해야 한다고 나에게 만나자고 하였다.28일(정사) 지름길을 잡아 사기원(四岐院)에서 점심을 먹었다. 친척인 정성일(鄭成一)과 그의 아들 경득(慶得)ㆍ희득(喜得)이 찾아왔다. 해질 무렵에야 광주에 도착하니 광주에서는 마침 사신(使臣)을 대접하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연회에 참석하라고 여러 번 요청하였으나 가지 않았다. 광주에는 젊은 날 서울에서 정을 준 기녀 광산월(光山月)이 있었는데 그를 보내어 굳이 독촉하니 할 수 없이 참석하였다. 이웃 고을의 소리하는 이는 모두 모아 놓았는데, 술은 동이에 넘치고 고기는 산과 같이 많아 품위가 없었다. 저녁에 한공과 함께 묵었었다. 광산월이 와서 위로하였는데, 평생의 즐거움을 나누며 밤을 새웠다.29일(무오) 소 태사가 장성(長城)으로 떠난다고 인사를 왔다. 그의 나기(羅妓)는 도사(陶辭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부를 줄을 알았다. 술을 조금 마시고 떠났다. 저녁에 옛 관아(官衙)에서 묵었다. 광산월이 찬을 보내왔다. 그의 두터운 정이 느껴진다.30일(기미) 한공(韓公)과 방백(方伯)은 모두 떠나고 나는 만류하여 그대로 머물렀다.8월 1일(경신) 목사[主牧] 이공 상길(李公尙吉)과 초5일에 광산월을 오성(筽城)으로 보내기로 약속하고 말 두 필과 서자(書者 역의 아전)를 남겼다. 정오에 나주(羅州) 관아에 도착하여 목사 권공 협(權公悏)을 뵙고는 바로 자승(子昇 임현(林晛)의 자)의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영암(靈巖) 땅 구림(鳩林)으로 향하였다. 길이 매우 멀어 산소 곁 재실(齋室)에 도착하니 밤은 이미 칠흑같이 어두웠다. 군공(郡供 군에서 제공하는 음식)이 오지 않아 상가(喪家)에서 소소(蔬素 채소 반찬의 음식)를 대접받았다.2일(신유) 영구(靈柩)에 제물을 차려 제사하고 글을 지어 곡하였다.3일(임술) 묘시(卯時)에 하관(下棺)하여 묘혈에 넣으니 아, 아득한 이 이별로 평생의 일은 이제 끝이 났구나. 돌아와 금성(錦城)에 묵었다. 동년(同年 같은 해 과거에 합격한 사람)인 진사(進士) 진경문(陳景文)이 찾아와 율시 한 수를 주었다. 시가 매우 맑아 깨우쳐 주는 데가 있었다.4일(계해) 권공(權公)과 작별하고 돌아와 사기원(四岐院)에 도착하니 정씨(鄭氏) 문중의 다섯 사람과 외가 쪽의 첨지(僉知) 유대린(兪大獜)이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위로해 주었다. 저녁에 오성(筽城)에 돌아와 경퇴부(慶退夫)ㆍ덕원(德遠)ㆍ내기(萊妓) 등과 먼저 만나 즐겁게 마시고 놀았다. 잠자리에 들어 내기가, “해양(海陽)에서 옛 정인을 만났느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했더니 “그가 여기 올 생각이 없더냐.”고 하므로 “목사가 보내주려 했는데 내가 사양했다.”고 속여 대답했다.5일(갑자) 새벽녘에 내기가 먼저 일어났다. 이상하게 생각했더니 과연 경퇴부와 함께 나를 속일 계책을 세우고는 먼저 마두(馬頭 역말을 맡아 보는 사람)를 속여 “광산월이 사기원에서 묵고 아침에 군에 들어설 것이다.”고 하였다. 마두는 광산월에게 말을 남겨둔 것을 보았으므로 그 말을 믿고 내게 와서 고하였다. 나는 마음속에 깨닫는 바가 있어, “광주(光州)는 여기서 하루 걸리는 거리인데 그가 왜 중도에서 묵겠는가.”하고 생각하였다. 세 사람은 늙고 추한 기생을 꾸며 가지고는 내가 정청에 나가는 틈을 이용하여 방에다 숨겨 놓았다. 조금 후에 강태초(姜太初)와 군인(郡人) 이곤(李琨)과 강극문(姜克文)이 찾아왔다. 얼마 뒤에 반인(伴人 시중드는 사람)을 속여 내 귀에 대고 “광인이 벌써 와서 방에 들었다.”고 속삭이게 하고는 거짓으로 방안에서 절절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나는 경퇴부의 얼굴에 웃음을 참는 모습이 있는 것을 보고는 이미 짐작하였다. 퇴부는 “방에 들어가면 즐거운 일이 있을 것이니 다녀오지.” 한다. 아마도 내가 방에 들어가면 노기로 하여금 나를 끌어당기고 하여 곤란하게 하여 웃음거리를 만들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굳이 사양하고 일어나지 않았다. 퇴부도 방에 들어가 문안하는 말을 극진히 늘어놓았다. 얼마 안 있어 점심 때가 되니 상차려 식사까지 대접하였다. 마두는 광주에 남겨두고 온 서자(書者)가 당도하지 않은 것을 보고 비로소 속은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반인을 불러 귓속말로 광산월이 오는 길목에 가서 광산월에게 길을 재촉하라고 일렀다. 해가 어스름해지자 과연 당도하였는데 고운 화장과 아름다운 옷을 입고 들어오니 함께 있던 사람이 모두 멍하니 쳐다보았다. 경퇴부는 그의 계책이 성공하지 못한 것을 매우 분해 하고 내기(萊妓)도 불만스러워하는 모양이어서 웃음이 나왔다. 이어 술과 풍악으로 즐거움을 다하고 사고(四鼓)에야 겨우 잠자리에 들었다. 두 기녀도 모두 머물렀다.
- 2020-09-22 | NO.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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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철영 광주 에게 보내다〔與趙光州 徹永〕 -노사집
- 조 광주 철영 에게 보내다〔與趙光州 徹永〕 -노사집 제6권 / 서(書) 이번에 문공(文公 주희)의 《소학》을 본떠 《해동신편(海東新編)》을 편수코자 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뜻이 매우 훌륭하더군요. 후학들이 이 책의 완성을 볼 수 있다면 또한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한 가지 방도가 될 것입니다. 참으로 반가운 일입니다. 다만 저번에 너무 바쁘게 답장을 올리느라 문맥이 이루어지지 않아 제 스스로 읽어보아도 무슨 뜻인지 까마득히 모를 정도이니, 물어주신 훌륭한 생각을 크게 저버려 돌이켜보면 회한이 한량없습니다.대개 그 규모와 범례의 대강을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는데, 첫 편인 〈열녀전(烈女傳)〉 이하를 곧 다른 말로 대신 채우려 하십니까? 아니면 〈입교(立敎)〉ㆍ〈명륜(明倫)〉ㆍ〈경신(敬身)〉 세 편의 본문을 예전대로 놔두고 〈계고(稽古)〉 이하를 비로소 동국의 사적에서 수집하여 바꾸려 하십니까? 앞처럼 하거나 뒤처럼 하거나 간에 제 생각으로는 모두 이루기 어려울 듯합니다. 그런데 오늘 보내주신 편지 중에서 “〈입교〉와 〈계고〉 두 편……”이라고 한 것을 보면 장차 첫머리부터 바꾸어 채울 생각인 듯한데, 이와 같다면 더욱 완성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대개 천하의 말이 많다 하더라도 그중에서 도리에 딱 맞는 말은 다른 유사한 말을 끌어다 붙일 수 없으니, 예로부터 지금까지 오직 이 말만 있을 뿐입니다. 〈입교(入敎)〉 한 편을 가지고 말하면 “앉을 때 가에 앉지 말고 설 때에 비스듬히 서지 말라.”는 말을 무슨 말로 바꿀 수 있으며, “남자는 빨리 대답하고 여자는 느리게 대답한다.”는 말을 무슨 말로 대신하겠습니까. 〈명륜〉과 〈경신〉은 단락마다 구어(句語)마다 모두 그러하니, 〈입교〉 한 편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계고〉 한 편과 같은 경우는 또한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 인극(人極)을 세워 인륜과 도리를 다하는 것은 성인만이 그렇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오직 성인이라야 천형(踐形)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우주 사이에 몇 명 되지 않지만, 천하 후세는 마땅히 극진하게 실천한 분을 본보기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선생(朱先生 주희)이 편제(篇題) 속에서 특별히 “근심스러우면 어떻게 해야 할까? 순 임금과 같이 할 뿐이다.”라는 한마디 말을 인용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철안(鐵案 확고한 단안)입니다.〈계고편(稽古篇)〉에서 인증한 것이 모두 성인의 일은 아니라 하더라도 반드시 성인을 주체로 삼은 뒤에 도리가 바야흐로 원만해집니다. 이제 이것을 놔두고 따로 구하려 한다면 아무리 그 수집과 꾸밈에 진력한다고 해도 결국 주선생이 이른바 “제1등의 도리를 남에게 양보해 주고 제2등의 도리를 행하는 것”임을 면치 못합니다. 그래서 제 견해로는 《신편》을 편수하는 사람이 〈계고〉 이상에다 손을 대려고 한다면 결단코 완성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광입교(廣立敎)〉ㆍ〈광명륜(廣明倫)〉ㆍ〈광경신(廣敬身)〉과 같은 것은 곧 선현의 교훈에 대한 부연 설명이요, 성인을 희망한 실제 사적입니다. 만일 입언(立言)이 정밀하고 제행(制行)이 독실한 경우가 있다면, 편집을 많이 했다고 해서 꺼릴 것이 없고 수집을 널리 했다고 해서 꺼릴 것도 없으니, 참으로 문공(文公)이 편집한 정도로만 그쳐야 한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하늘이 성조(聖朝)를 보살펴 정치 교화가 아름답고 밝아 어진 선비가 배출되어 유학을 도왔으니, 그들의 가언(嘉言)과 선행(善行)을 수집하여 구편(舊編)과 함께 세상에 행한다면, 보고 느끼고 본받음에 어찌 보탬이 적다고 하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계고〉는 그 속에 있게 되니, 반드시 첫머리부터 바꿔 채운 뒤에 비로소 《동국소학(東國小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찌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러나 ‘동국소학’ 넉 자는 끝내 제목으로는 좋지 않습니다. 대개 《소학》과 《대학》의 도(道)는 천지를 세우고 백세를 기다릴 만하여 동해나 서해에 놓아두어도 표준이 되고 북해나 남해에 놓아두어도 표준이 되니, 동국에 어찌 다른 《소학》이 있겠습니까. 이름을 《해동계고신편(海東稽古新編)》이라고 하면 좋겠습니다. 그저 볼품없는 소견을 기술하였는데 이는 각각 자신의 뜻을 말한 것에 불과합니다.영귀서원(詠歸書院)의 위차(位次)를 개정한 일은 접때에 광주(光州)의 사림(士林)을 통하여 들어본 바가 있습니다. 그 때 들은 바는 대개 “영사정(永思亭)을 북쪽 벽으로 옮겨 봉안하는 일은 그만둘 수가 없으나, 북쪽 벽에서 왼편에 봉안할지 오른편에 봉안할지를 아직 확실히 정하지 못했다.”라고 하였습니다. 근자에 영귀서원의 옛날 위차도(位次圖)와 개정한 뒤의 위차도를 보여주는 사람이 있어서 비로소 이 의례가 이미 거행되었고 영사정이 하서(河西)의 오른편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는 세대의 순서로 자리의 차례를 정한 것이니 본래 원우(院宇)의 통례입니다. 다만 객위(客位)가 주향(主享)을 누르고 있으니 저도 이 점에 대해 끝내 의혹이 풀리지 않습니다. 가령 원우(院宇)는 공체(公體)이니 주객을 논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인정과 여론으로 보면 끝내 그렇지 않습니다. 저번에 사림(士林)들을 접견했을 때 이미 사견으로 대략 말한 바 있으니, 이제 와서 이전의 말을 되풀이해본들 마려(磨驢)처럼 옛 자국만 밟는 격입니다. 더구나 이미 이루어진 의례를 어찌 감히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다만 심히 염려되는 것은 오늘날 혹시 조금이라도 잘 살피지 못했다가 나중에 지적을 받게 되면 현인을 공경하는 의례에 흠이 된다는 점입니다. 지금 춘향(春享)이 아직 멀었으니, 청컨대 마땅히 홀기 꽂고 큰 띠 두른 벼슬아치가 두 고을의 사림들을 지휘하여 이러한 전말(顚末)로 현관(賢關)과 국중의 예법을 아는 학자들에게 널리 상의하되, 그 처변(處變)하는 예절이 최선이 되도록 노력하여 다른 서원의 본보기가 되면,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이렇게까지 번거로움을 끼치니 매우 죄송합니다.[주-D001] 조 광주(趙光州) : 조철영(趙徹永, 1777~1853)으로,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경여(敬汝), 호는 신전(莘田)이다. 조진명(趙鎭明)의 아들이다. 1801년(순조1) 생원시에 합격하고 1841년(헌종7)에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부임했다.[주-D002] 오직 …… 있다 : 천형(踐形)은 사람이 하늘로부터 받은 천성(天性)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으로,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형색(形色)은 천성이니 오직 성인이라야 천형할 수 있다.” 하였다.[주-D003] 근심스러우면 …… 뿐이다 :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군자는 종신토록 근심하는 것이 있고, 일시적인 걱정은 없다. 종신토록 근심할 것은 있으니, 순 임금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인데, 순 임금은 천하에 법이 되어 후세에 전할 만하거늘, 나는 아직도 향인을 면치 못하니, 이것이 곧 근심스러운 것이다. 근심스러우면 어떻게 해야 할까? 순 임금과 같이 할 뿐이다.[君子有終身之憂, 無一朝之患也. 乃若所憂則有之, 舜人也, 我亦人也, 舜爲法於天下, 可傳於後世, 我由未免爲鄕人也, 是則可憂也. 憂之如何? 如舜而已矣.]” 한 데서 온 말이다. 《孟子 離婁下》[주-D004] 영귀서원(詠歸書院) : 전남 곡성군 겸면 현정리에 있다. 1564년(명종19)에 전라도 옥과(玉果) 유림들이 옥과 현감을 지낸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학문과 절의를 추모코자 건립한 서원이다. 1729년(영조5)에 유팽로(柳彭老)와 신이강(辛二剛)을 추가 배향하고, 1797년(정조21)에 허계(許繼), 1846년(헌종12)에 허소(許紹)를 추가 배향하였다. 1965년에는 위백규(魏伯珪)를 봉안하여, 6위를 모시게 되었다.[주-D005] 영사정(永思亭) : 최형한(崔亨漢, 1460?~1504)의 호이다. 본관은 영암(靈巖), 자는 탁경(卓卿), 아버지는 영원(永源), 광주(光州) 출신이다. 1483년(성종14) 식년 문과에 급제하고 1489년(성종20)에 옥과 현감으로 부임하여 영귀정(詠歸亭)을 지었다. 1498년(연산군4)에 사간원 헌납이 되었고, 1503년(연산군9)에 영암 군수로 나갔으나 다음해 갑자사화 때 궁궐 앞에서 대죄(待罪)하다가 굶어 죽었다.[주-D006] 객위(客位)가 …… 않습니다 : 객위는 최형한(崔亨漢)의 위패를 말하고 주향은 김인후(金麟厚)의 위패를 말한다. 영귀서원은 본래 김인후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것이므로 주향이 되어야 합당한데, 최형한이 옥과 현감으로 있을 때 영귀정(詠歸亭)을 지었고 김인후보다 앞 선 시기의 인물이라 하여, 김인후의 위패보다 높은 오른쪽에 위치시키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주-D007] 마려(磨驢)처럼 …… 격입니다 : 마려는 빙글빙글 돌면서 맷돌을 끄는 나귀라는 뜻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답습만 하는 상태를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 소식(蘇軾)의 시에 “나의 생계가 졸렬하기 그지없어서, 맷돌 끄는 나귀처럼 돌기만 하는 것을 비웃겠지.[應笑謀生拙, 團團如磨驢.]”라고 하였고, 또 “돌고 도는 것이 맷돌 끄는 소와 같아서, 걸음걸음마다 묵은 자국만 밟노라.[團團如磨牛, 步步踏陳跡.]”라고 하였다. 《蘇東坡詩集 卷21 伯父送先人下第歸蜀詩云, 卷35 送芝上人游廬山》[주-D008] 두 고을 : 광주(光州)와 옥과(玉果)를 말한다.[주-D009] 현관(賢關) : 어진 선비를 기르는 기관으로, 성균관ㆍ한림원 등을 말한다.
- 2020-12-11 | NO.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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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족질(族姪) 광주목사(光州牧使) 태항(泰恒) 에게 주다- 서계집 권19 / 간독(簡牘)
- 족질(族姪) 광주목사(光州牧使) 태항(泰恒) 에게 주다- 서계집 권19 / 간독(簡牘)요구한 시장(詩章)은 그 당시에 미처 써 보내지 못한 한이 남았고, 지금에 이르러 인사의 변화가 한두 가지일 뿐만이 아니어서 함께 지었던 화숙(和叔 박세채(朴世采))과 사행(士行 박태상(朴泰尙)) 같은 이가 모두 이미 천고의 사람이 되고 말았는데 늙은 이 몸만 세상에 홀로 남았으니 슬프지 않겠는가. 보내온 뜻을 저버릴 수 없어 삼가 기록하여 보낸다. - 병자년(1696, 숙종22) 6월 18일 -[주-D001] 족질(族姪) 광주목사(光州牧使) : 박태항(朴泰恒, 1647~1737)을 이른다.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사심(士心)이다. 경기 관찰사, 형조 판서, 우참찬, 공조 판서, 대사헌 등의 벼슬을 지냈다.
- 2023-07-31 | NO.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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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存齋) 계우(契右)에게 답하여 올림 - 양 선생 왕복서 제1권
- 황(滉)은 머리를 조아려 두 번 절합니다.내가 지난 무오년(1558, 명종13)에 서울로 갔을 때에는 매우 낭패스러웠으나, 그래도 스스로 다행으로 여겼던 것은 우리 명언(明彦)을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남쪽으로 내려온 뒤로 종적을 숨기고 지내다 보니 다시 만날 수 있는 기약이 아득하여 그리운 마음 그지없던 차에 마침 자중(子中)이 전하는 공의 편지와 사단ㆍ칠정에 대한 설을 받고서야 기쁨을 느꼈습니다. 곧 이어 한 통의 편지를 써서 구구(區區)한 나의 정황(情況)을 대략 말하였고, 다시 사칠 문자(四七文字)에 의심스러운 곳이 있어 구차하게 공의 의견에 동의할 수도 없으므로 나의 소견을 대략 진술하여 자중에게 부탁해서 그대에게 전하여 나를 대신해 시정받도록 하였습니다. 대개 곧고 진실한 벗의 도움을 구하여 어리석음을 깨치려면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 일은 매우 경솔하였습니다.이윽고 생각해 보니 나의 설에 온당치 못한 곳이 한두 군데 있는 것을 깨닫고 고치려 하였으나 미처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금년 가을에 자중이 서울서 시골로 내려와 정추만(鄭秋巒)에게 보낸 공의 편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 속에 나의 설을 논박한 곳이 몇 군데 있는데, 전에 내가 온당치 못하다고 깨달았던 것도 그 속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편지 끝에 조목별로 변석(辯析)하여 회답하겠다고 하였으므로 공의 변석을 목마르게 기다린 지 오래였는데, 천 리 밖에 사람을 보내와서 가르쳐 주는 글을 받고 아울러 틀린 것을 바로잡은 글 한 책(冊)을 받아 보니, 논변(論辨)하고 증거를 댄 것이 지극히 자세하여 헤매는 사람에게 길을 가르쳐 주는 계려(計慮)가 더없이 지극했습니다. 그리고 이어 더운 여름이 가고 서늘한 가을이 오는 이때 소리(素履)가 청복(淸福)하고 신상(神相)이 매우 편안하다는 것을 알고는 말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재능이 졸렬하고 형편없는 나는 평생 병이 몸에서 떠나지 않아 벼슬에 나아가면 직책은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서 녹만 탐한다는 비난이 있고, 벼슬에서 물러나면 지체하고 도망하여 부끄럽게도 성은을 저버린다는 책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근래는 노쇠함이 더욱 심하여 현기증이 자주 나고 몸은 마치 마른 등나무 같으니 다시 사람 축에 끼일 수가 없습니다. 지난 세월은 이미 뒤쫓아 가 바로잡을 수 없거니와 오늘에 이르러서 비록 조문석가(朝聞夕可)의 소망이 있으나, 날마다 면려해주는 스승과 벗들도 없이 단지 서책 나부랭이 속에 종사할 줄만 아니 관규여측(管窺蠡測)과 같아 얻은 바가 온전한 것이 아니어서 조금씩 쌓은 것마저 곧 흩어져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명의(名義)를 말하면 바람이나 그림자처럼 실상이 없고 심적(心迹)을 준거(準據)해 보면 엇나가고 모순되어, 이와 같이 지극한 우리 벗님의 충고(忠告)와 선도를 받고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가슴에 담아 공의 고마운 뜻의 만분의 일도 따를 수 없게 될까 두렵습니다.그러나 후한 은혜를 입었으니 조목별로 회답하여 끝까지 가르쳐 주기를 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둔재인 내가 문자와 의리에 대하여 여러 날을 두고 정밀히 생각하지 않고는 깨달을 수가 없는데, 대략 공이 논한 바를 보건대 너무 광대하고 미묘하여 선악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등의 조항에 대하여 스스로 어그러졌다는 것을 깨달은 것 이외에는 끝도 없이 아득하여 요령을 터득할 수 없는 데다가 연일 빈객이 찾아왔으므로 사리를 궁구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또 공이 보낸 사람이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지금 우선 대충 써서 회답하고, 변목(辨目)은 남겨 두었다가 후일 유태호(柳太浩)의 인편을 기다려 불민함을 사죄하려 하니, 그래도 될는지요?우리 벗님은 이렇게 박학하고 조예가 깊어 쭉 뻗은 길에 준마를 풀어놓아 달리도록 한 격이니, 상정으로 말하면 나의 일이 이미 끝났다고 하여 스스로 대단하게 여기고 스스로 만족스럽게 여기기에 겨를이 없을 것인데, 공은 도리어 벼슬을 얻은 것에 대하여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고 뜻을 구하는 데에 분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과(考課)의 일이 마침 그때에 있었던 것은 하늘이 공을 완전한 사람으로 완성시켜 주려는 바였으니, 어쩌면 그리 다행스러운지요. 지난해 내 편지에 운운했던 것은 모두 공이 이미 홀로 터득한 바로서 나의 근심이나 생각으로는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공의 편지에는 부당하게 여기지 않고 매양 반복하여 말하였으니, 또 포용하지 않음이 없는 큰 도량과 비근(卑近)한 말도 살피지 않는 것이 없음을 볼 수 있어 매우 다행입니다.출처거취(出處去就)의 설에 대해 강후(康侯 호안국(胡安國) ) 스스로 마음속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설에 의심을 품고서 회암(晦庵 주자(朱子) )의 벗에게 묻는다는 것으로 질정한 것은 과연 공의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평소 회암의 정견(定見)은 만 길의 절벽처럼 우뚝하여 남들의 말로 인하여 진퇴하는 바가 조금도 없었으니, 또 이것을 몰라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편지에서 “세환(世患)을 겪었기 때문에 처지(處地)와 처시(處時)에 부득이한 경우가 있었다.”라고 한 나의 말은 기세가 꺾이고 위축되어 약해진 데서 나온 늙은이의 말에 가까우니, 기운이 강성하고 한창때인 공은 비루하게 여겨 배척할 것 같은데도 도리어 그 말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였습니다. 의리(義理)를 익히 강구하고 세상에 대처하는 것을 깊이 살피지 않았다면 어찌 이와 같이 할 수가 있겠습니까.병이 생긴 근원은 진실로 용렬한 의원이 알 수 있는 바가 아닌데 더구나 약을 지어 달라고 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나 일찍이 주자의 말을 보건대 “자기의 병을 알고서 제거하고자 한다면 다만 제거하고자 하는 그 마음만이 바로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이다.” 하였으니, 바라건대 공은 다른 사람에게 약을 묻지 말고 곧 이 주자의 말씀 속에서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힘써 치료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입에 쓴 약으로는 미칠 수 없는 신묘한 효험이 있을 것입니다.“학문이 지극하면 처세(處世)에 어려움이 없다.”는 한 조항에 대해서는 당시 나의 소견에는 실로 고명하신 공이 이렇게 자처하는 것에 의심이 없지 않았으나, 지금 공의 편지를 받고는 바야흐로 남의 말을 극진히 살펴보지 않은 나의 실수를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출(出)과 처(處) 양단(兩端)을 가졌다.”라고 한 이하는 공의 처한 바와 말한 바가 매우 훌륭했습니다. 공의 편지에 이른 바 “마치 촛불로 비추고 수(數)를 계산하며 거북으로 점을 친 것 같다.”는 말은 나에게 해당하는 말이 아니고 공에게 해당하는 말입니다. 공의 편지에 ‘무골충(無骨蟲)’이란 한마디 말은 참으로 한바탕 크게 웃을 만합니다. 그러나 이미 이 벌레가 되어서는 안 되지만 앞사람들의 전철(前轍)을 답습하는 것 또한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포정(庖丁)이 칼을 댈 곳이니, 가벼이 처신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자세히 살펴보건대 정 숙자(程叔子 정이(程頤) )와 주 부자(朱夫子)는 지극히 강대(剛大)한 명망으로 처세함에 있어 매사를 저토록 방심하여 지나치지 않아서 세상의 환란에 걸리지 않은 것은 다만 조금이라도 미안한 곳이 있으면 강력히 사퇴하여 자기의 뜻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신하가 사면할 수 있는 길이 막혀 영원히 폐해졌으므로 혹시라도 사면을 청하는 이가 있으면 허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사람들이 노하고 시기하여 갖은 핍박으로 다시는 사피(辭避)하지 못하게 하여 자기들과 파란(波瀾)을 함께하도록 하고야 맙니다. 이와 같으므로 선비가 한번 조정에 서게 되면 모두 낚시에 걸린 고기 꼴이 되어, 마음이 강직하고 악을 미워하는 자는 대부분 화를 면하지 못하고, 아부하여 따르기만 하고 나약한 자들은 서로 이끌고서 시비는 가리지 않고 아첨하는 태도만 지을 뿐이니, 이 두 가지가 모두 안타까운 일입니다. 더구나 관(棺) 뚜껑을 덮기 전에는 중도에 아무리 이 일을 후회해도 소용없고, 발인(發軔)하자마자 이 소문이 사방에 전파되는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덕이 높아지지 않았는데 서둘러 경륜을 맡는 것이 복속(覆餗)의 계제(階梯)이고, 성의가 미덥게 되지 않았는데 자신의 주장을 끊임없이 떠들어 대는 것은 몸을 욕되게 하는 길입니다. 전인(前人)들의 실패를 보건대 대부분이 이에서 연유하였으니, 이 학문을 전공하고자 한다면 숨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나의 소견이 우연히 이에 미쳤기 때문에 지난번 편지에 발설하였으니, 이는 대개 불로 뛰어드는 나방을 사람이 본받아서는 안 되고, 담장 밑에 서서 압사(壓死)하는 화를 취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에서였을 뿐입니다.질병이 나처럼 심하지 않고 부득이 세상에 나아간 사람이라면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직분(職分)과 책무(責務)를 다하는 데 각각 당연한 바가 있고 웅장(熊掌)과 어(魚)를 취하고 버리는 데 분명한 정칙(定則)이 있으니, 그렇다면 이른바 “요사(夭死)와 장수(長壽)에 의심을 하지 않고 몸을 닦아 죽음을 기다린다.”는 면에 있어서 세상에 나아가고 나아가지 않음이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공의 편지에 “정성을 다하여 천명(天命)을 따르겠다.”는 말이 매우 좋으니, 요컨대 종래 버림받기를 바라던 마음으로 이 한마디 말을 굳게 지켜 시종 변하지 않는다면 거의 배운 바를 저버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공이 부디 노력하여 우리 무리의 기대하는 마음을 위로해 주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김하서(金河西)는 반궁(泮宮 성균관(成均館) )과 옥당(玉堂)에서 나와 함께 지낸 적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몸은 세상 속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세상 밖을 표류했습니다. 그가 처음 들어간 곳이 대체로 노장(老莊)에 있었기 때문에 중년에 자못 시와 술로 몸가짐을 무너뜨린 것을 애석히 여겼었습니다. 그런데 듣자니 그가 만년에 이 학에 뜻을 두었다 하고, 근래 바야흐로 그의 학을 논한 문자(文字)를 보건대 그의 식견이 매우 정밀했습니다. 그가 한거하는 가운데 터득한 것이 이와 같음을 생각하고 매우 가상하게 여겼는데 갑자기 고인(故人)이 되었다는 소식이 오니 비통함이 보통 정도가 아닙니다. 이제 그 아들에게 위로하는 글을 보내니 전달해 주기 바랍니다.별지(別紙 고봉이 보낸 소첩자(小貼子) )에서 부탁한 전일의 편지 세 통을 아이들에게 등사시켜 보냅니다. 그리고 대자(大字)로 ‘존재(存齋)’ 두 글자를 써 달라는 것과 백지(白紙)와 당전(唐牋)에 글을 써서 보내 달라는 요청을 감히 경솔히 거절할 수가 없어 우선 받아 두지마는 다만 정력이 너무도 모자라서 평상시에 글씨 몇 폭을 쓰고 나면 피곤함을 느끼는 것이 날로 더해 가니, 어찌 이런 일을 억지로 한다고 해서 뜻대로 되겠습니까. 비록 억지로 쓴다 하더라도 공이 감상할 만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명기(銘記)를 짓는 일이겠습니까. 이 일들은 모두 겨울쯤에 유태호 집안의 인편이 왕래할 때를 탐문하여서 그 편에 보낼까 하는데 말대로 될는지 여부는 모르겠습니다.유태호의 집이 이곳에서 그리 가깝지 않으니, 태호가 천 리 길을 온다 하더라도 천 리의 걸음에 어찌 쉽사리 나를 방문할 수 있겠습니까. 그를 만날 것을 기필하지 못하므로 그 집안 인편에 부치는 것이 서울에서 내려오는 벗에게 부탁하여 그대에게 전하게 하는 것보다 낫겠습니다. 벗에게 전하게 하면 소문이 널리 퍼질 혐의가 있지만 태호의 인편에 부치는 것은 그런 혐의가 없습니다. 끝으로 사문(斯文)을 위하여 천만 보중(保重)하기를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삼가 절하고 이 글을 존재(存齋) 현계(賢契) 좌하(座下)에게 올립니다.가정(嘉靖) 39년 경신년(1560) 9월 1일에 병인(病人) 진성(眞城) 이황은 눈이 어두워 함부로 초했으니 송구합니다.이일재(李一齋)에 대하여 이름을 들은 지는 오래되었으나 그의 학문이 어떠한지는 몰랐는데, 이번에 태극(太極)을 논하면서 서로 더불어 왕복한 설을 보내 준 것을 받았습니다. 미처 겨를이 없어 자세히 참고해 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 대략은 알 수 있었으니 매우 다행입니다. 그의 학설의 잘잘못은 내가 미칠 바가 아니나, 후일을 기다려 내가 의심되는 바를 진헌(進獻)할까 합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미 옛사람이 이른 바 “자기가 있는 줄만 알고 다른 사람이 있는 줄은 모른다.”는 병통이 있음을 알겠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작은 병통이 아닐 듯한데 어쩌면 좋겠습니까. 그가 한두 군데의 글뜻을 잘못 본 것은 논할 것도 없고, 오직 이 병통을 먼저 제거한 뒤에야 더불어 이 학문을 논할 수 있을 것입니다.이런 말을 하는 내가 참람하고 경솔합니다만 공이 일재의 병통이 있는 곳을 찌르는 데는 언뜻 보고도 하나하나 정확하면서, 자신에게도 이러한 병통이 약간 있음을 면하지 못한 듯하니 어째서입니까? 나 역시 그러한 속에 빠져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공의 설을 오인(誤認)함이 이와 같은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깊이 생각하여 뉘우칠 것입니다.왕원택(王元澤)은 어떤 사람이고, 그 말이 어느 책에 나오며, 그것이 무슨 뜻인지 뒤에 분명히 가르쳐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담암(澹庵)이 실절(失節)한 일은 전배(前輩)들의 탄식에 자주 나타났습니다. 주자의 〈자경시(自警詩)〉에 이른 바 ‘탐생좌두(貪生莝豆)’는 이 몸 역시 그 출처를 알 수 없어 매양 마음이 매우 심란하였습니다. 그러나 “뻔뻔스레 다시 와서 준걸 따라 노니네.〔靦面重來躡俊遊〕”의 ‘섭(躡)’ 자로 보건대 다른 사람의 일로서 담암이 그 일을 따라감을 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닌지 또한 알 수 없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후일을 기다립니다.황은 또 복계(覆啓)합니다.[주-D001] 소리(素履) : 안분수기(安分修己)하는 선비의 생활을 가리킨다.[주-D002] 신상(神相) : 다른 사람의 몸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주-D003] 조문석가(朝聞夕可) : 《논어》 〈이인(里仁)〉에 나오는 말로,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朝聞道 夕死可矣〕”를 줄인 말이다.[주-D004] 관규여측(管窺蠡測) : 대통 구멍으로 하늘을 보고 전복껍질로 바닷물의 양을 헤아린다는 말로, 식견이 좁음을 의미한다.[주-D005] 유태호(柳太浩) : 유경심(柳景深 : 1516~1571)을 말한다. 태호는 자이고, 호는 구촌(龜村)이다. 1544년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정자(正字), 수찬(修撰)을 거쳐 광주 목사(光州牧使)가 되었고, 뒤에 대사헌을 거쳐 평안도 관찰사로 재직하다가 죽었다.[주-D006] 포정(庖丁)이……곳 : 포정은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에 나오는 인물로, 능수능란하게 소를 잘 잡는 백정이다. 여기서 이 말은 아주 중요한 곳이라는 뜻이다.[주-D007] 복속(覆餗) : 《주역》 〈정괘(鼎卦) 구사(九四)〉에 “구사는 솥의 발이 부러져서 공(公)에게 바칠 음식을 엎었으니 그 얼굴이 무안하여 붉어진 것이라 흉(凶)하다.” 한 것에서 온 말로, 재능 없이 분수에 넘치는 자리에 앉아 직무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주-D008] 웅장(熊掌)과……데 : 생선을 생(生)에, 웅장을 의(義)에 비유한 말로, 생과 의를 겸하여 얻을 수 없다면 생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는 뜻이다. 《孟子 告子上》
- 2022-03-04 | NO.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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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 시중 정공화상 찬, 병서 (贈侍中鄭公畵像贊, 幷序 ) - 동문선 제51권
- 증 시중 정공화상 찬, 병서 (贈侍中鄭公畵像贊, 幷序 ) - 동문선 제51권 : 이색(李穡)수문하시중 광평부원군(守門下侍中廣平府院君) 이공(李公)이 임인(壬寅)년에 여러 장군과 함께 서울을 수복했는데, 그 총병관(總兵官)은 곧 찬성사상의 응양군상호군(贊成事商議鷹揚軍上護軍) 정세운(鄭世雲)이었다. 원수(元帥) 세 사람은 총병의 공적이 자기네보다 위에 올라감을 시기하여 부하를 시켜서 끄집어내어 그를 해쳤다. 세 원수는 비록 죄를 받고 죽었으나 세상에서 정공을 슬퍼하는 마음은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았다. 광평공은 생각하기를 “정공의 이름은 영원히 전하고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후세에서 알지 못할 터이니 어찌 슬프지 아니하랴.” 하였다. 또 이르기를, “능연각(凌烟閣)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옛날 제도이긴 하지만 지금에는 실시되고 있지 않으니 그의 화상을 그려서 철을 따라 제사를 드리게 하는 편이 낫겠다.” 하였다. 이미 완성되매, 한산 이색(韓山李穡)에게 청하여 찬을 지으라 하였다. 색이 광평군과는 함께 승선(承宣)으로 있으면서 공민왕을 섬겼다. 그러므로 정공이 비상한 인물임을 알았다.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어 비위를 맞추려한 적이 없었고 뜻을 확고히 가져서 조금도 변한 적이 없었다. 신축(辛丑)년에 남쪽 복주(福州)로 옮겨갈 때에 임금이나 신하가 북쪽을 염려하는 마음이야 다시 말한들 무엇하리오, 정공은 비장히 가기를 자청하였다. 열흘남짓 한달이내에 나라가 다시 안정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었겠는가. 옛적 현종(顯宗)때에 강시중 한찬(姜侍中邯贊)이 경술(庚戌)년에 남쪽으로 행차 하실 것을 청하고 무오(戊午)년에는 북방에서 적을 막아냈으니, 그 공적이 탁월하였다. 근세에 금산 김씨(金山金氏)가 영토를 침범할 적에 조충(趙沖)과 김취려(金就礪)의 공적이 컸고, 기해(己亥)년에 모적(毛賊)이 서경(西京)을 침범할 적에 총병(總兵) 이승경(李承慶)의 힘이 컸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영토 안에서 일어난 일이었고 강시중(姜侍中)처럼 두가지의 계책이 한 몸에서 일어난 것과 비교될 것이 아니었다. 현종(顯宗)은 금성(錦城)까지 가셨고 공민왕은 복주(福州)까지 가셨으니, 아아 참아 말할 수 있는가. 정공은 남쪽으로 행차하기를 결정할 때에 참여하였고 또 능히 모든 군대를 통솔하고 여러 적들을 쫓아 내어 홀로 큰 공을 세웠으니 그 위대함은 강공과 맞세울만 하였다. 그러나 강공은 개선(凱旋)할 때에 현종이 친이 교외에까지 나아가서 맞이하였고 시를 지어주어 그를 표창했으니, 그런즉 곧 정공이 불행을 당한 것은 공민왕으로서의 슬픔이었다. 하늘이여 이것이 무슨 까닭이었는가. 아아, 슬프다. 아아, 슬프다. 뒷날 정공의 화상 앞에 경례를 올리는 사람은 이 화상이 광평공(廣平公)에 의하여 만들어진 줄 알터이니 반드시 천년 뒤에라도 경의를 표하면서 이르기를, “정공이 진실로 공이 있었다. 그러나 광평공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정공의 얼굴을 보게 되었으랴.”할 터인즉 광평공이 선을 좋아한 실효가 더욱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것을 길게 읊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정씨는 광주 장택현(光州 長澤縣) 출신이며 공민왕 11년의 공신이다. 아우는 세문(世文)이며 아들은 없다. 찬에 이르기를, “아아, 정공이여, 겉으로는 소박하며 안은 확고하였다. 공민왕의 공신으로 병신(丙申)년에 출발하였다. 적(賊)이 중국에서 두루 돌아다니다가 우리 영토에까지 침입하였다. 우리는 그들의 무력을 피하였는데 공은 마침내 적을 내쫓았다. 이미 그들을 무찔렀는데 부하가 공을 해쳐버렸네. 해친 자들도 다 없어졌으니 아아, 어쩌면 그렇게 생각이 없었던가, 강공(姜公)은 옛날 일이지만 공의 위대함, 그와 맞서리로다. 우리 광평군 아니었으면 누가 그리며 누가 기록했으랴. 송악산(松嶽山) 푸르른데 우리 명당(明堂) 웅장할사, 정공의 영향은 영원하게 전하리라.”
- 2020-09-15 | NO.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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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 이조참판 행 사헌부장령 정공(鄭公)의 신도비명 (정이주)
- 간이집 제2권 /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공의 휘(諱)는 이주(以周)요, 자(字)는 방무(邦武)요, 별명(別名)은 유성(由盛)이요, 호는 성재(醒齋)이다.정씨는 광주(光州)에서 나와 나라의 망족(望族)이 되었는데, 시조(始祖)와 멀어지면서 파(派)가 더욱 나누어졌으니, 가령 공 같은 분도 스스로 파를 나누어 새로 족보를 만들 만한 분이었다고 하겠다.공의 7세조(世祖)인 정신호(鄭臣扈)는 고려의 전직(殿直)이었고, 6대조인 정윤부(鄭允孚)는 본조(本朝)의 개성 윤(開城尹)이었고, 5대조인 정귀진(鄭龜晉)은 강원도 관찰사로서 그의 문장이 세상에 널리 유행하였고, 고조고(高祖考)인 휘(諱) 지하(之夏)는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이었고, 증조고(曾祖考)인 휘 찬우(纘禹)는 청도 군수(淸道郡守)로서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을 증직받았고, 조고(祖考)인 휘 순인(純仁)은 아산 현감(牙山縣監)으로서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를 증직받았다.공의 고(考)인 휘 경(褧)은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로서 우뚝 솟구쳐 수립한 바가 있었으므로 동료들로부터 중한 기대를 받았는데, 일찌감치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서 강호(江湖) 사이에 노닐기만 할 뿐 벼슬길로 나설 뜻이 전혀 없었다. 이에 외구(外舅)인 의정(議政) 유순정(柳順汀)과 표형(表兄)인 의정 윤개(尹漑)가 번갈아 가며 천거하여 금오랑(金吾郞)에 의망(擬望)하자, 마음을 이해해 주지 못한다고 깊이 유감으로 생각하면서 집에 찾아가도 만나 주지 않기까지 하였다. 뒤에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를 증직받았다.공의 비(妣)인 평강 채씨(平康蔡氏)는 숙부인(淑夫人)에 추증되었는데, 고려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인 채연(蔡淵)의 후예요, 성균관 진사 채순(蔡恂)의 딸로서, 가정(嘉靖) 경인년(1530, 중종25) 1월에 공을 낳았다.공은 보통 사람보다 훨씬 총명한 데다가 학문에 힘을 기울여서 일찍부터 문명(文名)을 드날렸다. 그런데 과거 시험을 통과하는 것만은 유독 뒤늦어서, 무오년(1558, 명종13)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생원(生員)과 진사(進士) 시험에 입격하였다. 그러다가 을축년(1565, 명종20) 연간에 태학생(太學生)들이 요승(妖僧) 보우(普雨)의 죄를 청하는 글을 올리게 되었는데, 대부분이 공의 손으로 작성된 것이었고 또 마침내 윤허를 얻게 된 상소문 역시 공이 작성한 것이었으므로, 임금의 뜻을 되돌린 공을 모두 공에게 돌렸었다.무진년(1568, 선조1)의 문과(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였다. 의영고 직장(義盈庫直長 종7품의 관직임)을 제수받고 몇 개월 있다가 추천을 통해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 정9품의 관직임)에 보임(補任)되었다. 그러나 공은 이미 7품의 관직에 조용(調用)되었던 만큼 이는 원래 바람직한 인사 행정이 못 된다고 하고는 구태여 사국(史局)에 비루하게 들어갈 필요가 없다면서 거부하였다. 이런 행동을 보인 경우는 국조(國朝) 이래 단 두 번밖에 없었는데, 공이 바로 그 하나에 속한다.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에 전직(轉職)되었다가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옮겨진 뒤 공조ㆍ형조ㆍ예조의 좌랑(佐郞)을 역임하였다. 그러고 나서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경사(京師)에 다녀왔는데, 돌아올 때의 짐보따리에 한 자루의 향(香)이나 한 권의 책도 구입해 온 것이 전혀 없었다. 이에 어떤 이가 말하기를, “서적 같은 것이야 사 가지고 온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우리나라에 있는 서적도 제대로 다 읽지를 못하고 있다.” 하였다. 그리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오던 날, 행장(行裝)에 아직 남아 있던 물건들을 죄다 꺼내어 아랫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말하기를, “처음에 내가 열읍(列邑)에서 주는 예물(禮物)을 사양하지 않았던 것은 만리 여행길에 뜻밖에 쓸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무사히 돌아오게 되었으니, 그것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임명되었는데, 쟁신(爭臣)의 기풍이 꽤나 돋보였다. 당시에 임금의 외척(外戚) 한 사람이 등과(登科)하였으므로 바야흐로 상이 친림하여 합격자 발표를 하고 호명을 하였는데, 대소(大小)의 신료(臣僚)들이 서로 다투어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인사하느라 반열(班列)이 텅 빌 지경이 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공만은 홀로 단정하게 서서 미동도 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미움을 받아 평안도 도사(平安道都事)로 나갔다가 얼마 뒤에 소명(召命)을 받고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되었다.그 당시 조정 안에는 붕당(朋黨)의 폐해가 빚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전조(銓曹)의 낭관(郞官) 한 사람이 공을 끌어다 자기들의 세력을 중하게 할 목적으로 세 차례나 공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공은 답례로나마 한 번도 감사의 뜻을 표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뜻을 보여 주었다.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으로 있다가 바뀌어 형조ㆍ예조ㆍ호조의 정랑(正郞)이 되었다. 그때에 국가에서 대대적으로 군적(軍籍)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영남(嶺南) 지방의 경우는 평소 토호(土豪)의 소굴로 소문난 곳이라서 장정(壯丁)을 수괄(收括)하는 데에 어려움이 많았으므로, 공을 특별히 그곳의 경차관(敬差官)으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그런데 과연 공이 내려가서 유지(有旨)에 걸맞게 일을 처리하였으므로, 강포하고 교활한 토호들이 납작 엎드려 복종한 결과 은폐되거나 누락되는 폐단이 결코 없게 되었다.당시에 본도(本道)의 사인(士人) 한 사람이 바야흐로 간관(諫官)의 신분이 되어 돌아와서는 공을 일부러 찾아보았는데, 이는 자기의 집을 보호해 주기를 바라는 뜻에서였다. 이에 공이 면전에서 꾸짖어 말하기를, “그대처럼 임금님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사람까지도 이렇게 할 수가 있단 말인가.” 하니, 그 사람이 안색이 변하면서 앉은 자리에서 자기 집의 양정(良丁) 몇 사람을 써 주고 떠나갔다. 그러고는 마침내 마음속으로 원한을 품고는 은밀히 대관(臺官)을 사주하여 모함하는 말을 얽어서 탄핵하게 하였다.이에 상이 연석(筵席)에서 대신(大臣) 노수신(盧守愼)에게 하문하기를, “정모(鄭某)가 강직하다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바인데, 지금 이처럼 논핵(論劾)을 받기까지 하고 있다. 경은 남쪽 지방 사람이니, 혹시라도 이에 대해서 들은 말이 있는가?” 하였는데, 노수신이 대답하기를, “신은 그가 나랏일에 마음을 다하여 한정(閑丁)을 많이 얻었다는 말만 들었을 뿐, 다른 것은 들은 바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그럴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윤허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뒤에 공이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오면서 군적을 정리하는 일이 결국 두서(頭緖)를 잃게 되고 말았으므로, 식자들이 애석하게 여기며 탄식하였다.얼마 있다가 또 순무어사(巡撫御史)로 본도에 나가게 되었다. 그러자 장리(將吏)들이 소문만 듣고서도 두려움에 몸을 떨었으며, 토호 가운데에는 법제를 어기고 지은 집을 자진 철거하는 자까지 나오게 되었다.조정에 들어와서 사간원 헌납에 임명되었다. 그때 마침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이 대립하는 가운데 조정이 불안해질 조짐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었으므로, 공이 대사간(大司諫) 정지연(鄭芝衍) 및 부제학(副提學) 이이(李珥)와 함께 의논을 통한 뒤에, 두 사람 모두 외직(外職)으로 내보낼 것을 청하였으니, 이는 어디까지나 분위기를 진정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나 그사이에 격렬하게 논하며 한쪽 편을 들어 공격하는 자가 나와 극력 저지하는 바람에 그 일이 그만 흐지부지되고 말았다.사헌부 장령으로 승진한 뒤에 봉상시 첨정(奉常寺僉正),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와 사성(司成), 사섬시 정(司贍寺正)을 역임하였다. 그러고 나서 다시 명을 받들고 경기 순무어사와 재상 경차관(災傷敬差官), 그리고 강원도의 경차관으로 나갔는데, 공이 가는 곳마다 온갖 폐단이 말끔히 정리되곤 하였다.공은 대간(臺諫)으로서 정언(正言)을 세 번, 지평(持平)을 네 번, 장령(掌令)을 여섯 번이나 지내었다. 조정에서도 물론 기강과 언론에 대한 책임을 공에게 빈번히 맡겼지만, 공 역시 그때마다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면서 회피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공의 올곧은 도[直道]가 당시 세상에 용납되지 않았으므로, 조정에서 배척을 받고 정주 목사(定州牧使)로 부임하게 되었다.공은 임지(任地)에 도착하자마자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면서 관직 생활을 물로 씻어 낸 듯 청렴하게 일관하였고, 궁핍한 환경을 만족스럽게 여기면서 부세(賦稅)를 모조리 감면해 주었으므로, 이민(吏民)들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그리고 세시(歲時)에 안부를 물으며 선물을 보낼 적에도 오직 외롭고 빈한하게 지내는 친척과 고구(故舊)에게만 하였을 뿐 세력가나 현달한 이들에게는 하지 않았는데, 이는 당초 공의 성격이 괴팍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급기야 공이 인끈을 풀고 돌아올 적에도 자신의 행장(行裝) 속에 전에 못 보던 옷상자가 둘이나 있는 것을 보고는 크게 노하여 그 자리에서 불태워 버렸는가 하면, 집에 도착한 날에도 이웃집에서 곡식을 꾸어 온 다음에야 비로소 밥을 지을 수가 있었다. 공이 살던 옛집은 춘천(春川)에 있었는데, 너무도 초라하여 살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가하게 세월을 보내다가 생을 마칠 계획을 세우고는 필마(匹馬)에 몸을 싣고서 동쪽으로 돌아왔던 것인데, 사방에 벽만 을씨년스럽게 서 있을 따름이었건만 정작 공 자신은 편안하게 여기며 태연자약하기만 하였다.만력(萬曆) 계미년(1583, 선조16) 2월에 병으로 세상을 하직하니, 향년 54세였다. 그해 5월 모일에 가평군(加平郡) 원남면(遠南面) 간좌(艮坐)의 언덕에 안장(安葬)하였다.부인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 정창손(鄭昌孫)의 5대손이요, 부사과(副司果) 정응서(鄭應瑞)의 딸인데, 3남 1녀를 낳았다.장남 정사호(鄭賜湖)는 계유년에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고 정축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현재 황해도 관찰사로 나가 있다. 처음에 진사 채무외(蔡無畏)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이어 참봉(參奉) 유필영(兪必英)의 딸에게 장가들어 1녀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측실(側室) 소생으로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이름은 정장원(鄭長源)이다.그다음 정명호(鄭明湖)는 경진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로 있다가 일찍 죽었다. 사예(司藝) 김사섬(金士銛)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이름은 정두원(鄭斗源)이다.그다음 정운호(鄭雲湖)는 무자년에 사마시에 입격하여 세자익위사 세마(世子翊衛司洗馬)가 되었다. 처음에 충의위(忠義衛) 이순인(李純仁)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이어 유학(幼學) 강윤(康允)의 딸에게 장가들었다.딸은 현감(縣監) 정회(鄭晦)에게 출가하여 두 아들을 낳았으니, 정팽동(鄭彭仝)과 정두동(鄭斗仝)이다.정두원(鄭斗源)은 판관(判官) 심제겸(沈悌謙)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부인은 임진년의 난리를 피하려고 온양(溫陽)에 있는 정회(鄭晦)의 집에 우거(寓居)하다가 갑오년 5월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북쪽으로 영구(靈柩)를 돌릴 수 없는 상황이라서 청주(淸州) 땅 산외(山外)의 간좌(艮坐)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공은 사람됨이 단정하고 엄숙하였으며 말이 적고 묵중하였다. 어려서부터 붕우와 어울릴 때에도 실없이 농담을 하거나 외설스러운 이야기를 입 밖에 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공이 한 번 웃는 모습을 보는 것을 금옥(金玉)보다도 더 중하게 여기기까지 하였으니, 공을 대하면 누구라도 감히 공경하는 마음을 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당시에 여러 차례나 사화(士禍)를 겪은 터라서 사람들이 이학(理學)을 운위하는 것을 금기로 여기고 있었는데, 공은 홀로 발분(發憤)하여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해 나가면서 《대학장구(大學章句)》나 《근사록(近思錄)》 등 성리학(性理學)과 관련된 서책들에 대해서 매우 투철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초당(草堂) 허엽(許曄)이 대사성(大司成)으로 있을 적에 공과 더불어 통독하고 나서는 탄식하여 말하기를, “지금 같은 세상에서 이런 유자(儒者)를 다시 보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였다.”고 하기도 하였다.집에 있을 적에 제삿날이 돌아오면 목욕재계를 하고 반드시 성의와 공경을 다하였으며, 세척하고 자르고 익히는 일에 있어서도 반드시 직접 그 자리에 임하곤 하였는데, 몸에 병이 있어도 이를 거른 적이 없었다.관직에 몸을 담고 있을 때에는 크건 작건 간에 한결같이 봉공 멸사(奉公滅私)의 정신으로 임하면서 그사이에 털끝만큼이라도 사정(私情)이 개입되지 않도록 하였다. 그래서 공 자신이 남에게 청탁하는 일이 없었을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감히 청탁하여 공을 더럽히는 일이 없게 되었다.그리고 공이 물러 나와서는 방에 조용히 앉아서 좌우에 도서(圖書)를 펼쳐 놓고는 하루 종일 탐독을 하였으며, 오직 솔과 대를 다시 심어 기르면서 그사이에서 한가하게 소요하기만 하였을 뿐, 사람들과 바쁘게 왕래하면서 어울리는 일은 전혀 하지 않았다.공은 집안일에는 일절 신경을 쓰지 않았다. 집이 기울어져도 기둥을 받쳐 놓고 그저 비바람만 피할 뿐이었으며, 자손을 위해서 한 이랑의 전장(田庄)도 마련해 놓지를 않았다. 그리고 공은 평소에 잡기(雜技)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만년에 들어서는 거문고를 배워 거기에 자못 취미를 붙이기도 하였다.공은 학식도 있고 절조(節操)도 있고 위엄도 있었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참신한 기풍을 불어넣기에 충분하였고, 변경에 나아가서는 적을 제어하며 승첩을 거두기에 충분하였다. 그런데 공을 알아주는 사람은 드문 대신에 공을 시기하는 자만 많았고, 거기에 또 운명까지 불우한 나머지 지니고 있는 실력의 십분의 일도 발휘하지 못하였다. 그러니 그 덕이 후손에게 돌아가 이루어지게 된 것 또한 당연한 일이라고도 하겠다.부인 역시 인자하고 온후하여 음덕(陰德)을 많이 쌓았으므로, 사람들이 반드시 보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들을 하였다. 그런데 과연 후사(後嗣)가 된 아들의 지위가 천관(天官 이조(吏曹))의 소재(少宰 참판(參判))에 이르렀기 때문에 어버이에게도 추은(推恩)을 하게 되었는데, 공이 아들의 직질(職秩)에 비례하여 증직(贈職)이 되면서 부인 역시 여기에 함께 참여하여 귀하게 되었다. 그러나 앞으로도 계속 더 귀하게 될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열려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공의 후사(後嗣)인 관찰사가 나에게 찾아와, 일찍이 부자(父子) 사이에서 노닐지 않았느냐며 나에게 비명(碑銘)을 써 달라고 요청하였다. 의리상으로 볼 때 내가 어찌 사양할 수가 있겠는가. 이에 가장(家狀)을 근거로 하여 공의 시말(始末)을 적은 다음, 다음과 같이 명(銘)하는 바이다.세상은 온통 모서리 깎아 둥글둥글 만드는데 / 擧刓廉爲圓兮공 홀로 방정한 모습 견지하였고 / 獨持方也뒤질세라 냄새나는 벼슬을 좇는 세태 속에 / 逐臭者之競兮공만은 끝까지 향기를 잃지 않았어라 / 不易以芳也탁류가 쏟아져 발을 오염시키자 / 濁流染足兮훌쩍 떠나 맑은 물에 몸을 담그고 / 去而之淸也사는 집 스스로 성(醒)이라 명명하였나니 / 繄自命其居兮옛사람이 남긴 풍도 간직하려 함이러라 / 古遺醒也그 경륜 세상에 한번 시험했더라면 / 以是嘗世兮얼마나 멋진 솜씨 선보였을꼬 / 適畫其至也공이 남긴 그 음덕 후손이 이어받았나니 / 收餘于後兮끝없이 발전할 줄 나는 확신하노라 / 吾知其未已也[주-D001] 탁류가 …… 함이러라 :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에 “온 세상이 모두 탁한데 나 홀로 맑고, 사람들 모두 취했는데 나만 정신이 또렷하네.[擧世皆濁 我獨淸 衆人皆醉 我獨醒]”라는 말이 있다.
- 2022-04-29 | NO.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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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길료(秦吉了) - 성호사설 제5권 / 만물문(萬物門)
- 진길료(秦吉了) - 성호사설 제5권 / 만물문(萬物門) : 성호 이익(李瀷, 1680~1763) 백낙천(白樂天)이 진길료(秦吉了)라는 새를 읊은 시에,아롱진 빛깔은 푸르고 검으며 꽃 같은 머리는 붉구나 / 采色靑黑花頭紅하였으니, 이 진길료란 새는 구욕새[鸜鵒]의 한 종류로서 말을 능히 하는 새이다. 《설문(說文)》에는, “왜가리[鵙]와 비슷한데, 머리에 볏이 있다.” 하였으니, ‘꽃 같은 머리.’라는 것이 즉 이것이고, 악곡(樂曲)에는 구욕무(鸜鵒舞)라는 춤이 있으니, 이는 만세무(萬歲舞)라는 것인데, 당(唐) 나라 무후(武后) 때에 궁중에서 기르는 새가 사람처럼 말을 잘하되 항시 만세(萬歲)라고 일컬은 까닭에 악을 만들어 상징하였던 것이다.《통고(通考)》에는, “영남(嶺南)에 새가 있는데 구욕새보다는 조금 큰 듯하나 잠깐 봐서는 분별할 수 없고 오래 기르면 말을 능히 하므로 영남 사람은 이 새를 길료(吉了)라 한다.” 하였다. 개원(開元) 초기에는, “광주(光州)에서 헌납한 새가 있었는데, 말 소리가 쿵쿵 울리는 것이 어른의 목소리와 같고, 이모저모로 사람의 마음을 아는 것도 앵무(鸚鵡)보다 더 예민하다.” 하였다. 북쪽 지방에서는 늘 말하기를, “구욕새는 영남으로 넘어가야만 말을 능히 한다.”고 하니, 이는 잘못 전해진 말이다.”이로 본다면, “구욕새가 와서 집을 만든다[鸜鵒來巢].”는 따위는 비록 혀를 끊어서 말을 못하도록 했다 할지라도 그 중에 말을 능히 하는 새는 이 길료로서, 상징하여 악무(樂舞)를 만들었으니, 이는 통칭 구욕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문유취(事文類聚)》에는 이 길료라는 새를 앵무새 아래에 다 실어 놓아 구욕새와 구별하였으니, 이는 중국 사람도 또한 자세히 분별하지 못했던 까닭이다.[주-D001] 진길료(秦吉了) : 새의 이름. 《이아익(爾雅翼)》에는, “진중(秦中)에 길료조(吉了鳥)라는 새가 있는데, 털 빛이 검은 것은 대개 구욕새와 비슷하나 양쪽 귀가 사람의 귀처럼 생긴 것이 붉다.” 하였음. 또는 구관조(九官鳥)라고도 함. 《類苑》 卷42 鳥獸門.[주-D002] 무후(武后) : 당 고종(唐高宗)의 후비(后妃)인 무측천(武則天)으로서 이름은 조(曌).[주-D003] 개원(開元) :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주-D004] 구욕새가 …… [鸜鵒來巢] : 이 말은 《춘추》 소공(昭公) 25년 조에, “有鸜鵒來巢”라고 보임.
- 2020-09-22 | NO.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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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훤(甄萱)의 별전(別傳) - 동사강목 부록 상권 상 / 고이(考異)
- 동사강목 부록 상권 상 / 고이(考異), 사마광(司馬光)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지을 때에 뭇 책을 참고하여 그 같고 다른 점을 평하고 취사에 뜻을 두어 《고이(考異)》 30권을 지었으니, 전실(典實)하여 법다운 것만 뽑았다. 이것이 역사를 쓰는 자의 절실한 법이 되기에 이제 그를 모방하여 《동사고이(東史考異)》를 짓는다. 진훤(甄萱)의 별전(別傳)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이비가기(李碑家記)를 인용하여,“진흥왕(眞興王)의 비(妃) 사도(思刀)의 시호는 백숭부인(白????夫人)이니, 그의 셋째 아들 구륜공(仇輪公)의 아들인 파진간(波珍干) 선품(善品)의 아들 각간(角干) 작진(酌珍)이 왕교파리(王咬巴里)를 아내로 맞아 각간 원선(元善)을 낳으니 이가 아자개(阿慈介)이다. 자개의 첫째 부인은 상원부인(上院夫人)이요, 둘째 부인은 남원부인(南院夫人)인데, 아들 다섯과 딸 하나를 낳았다. 장자는 훤(萱)이요, 둘째는 능애(能哀)요, 셋째는 용개(龍蓋), 넷째는 보개(寶蓋), 다섯째는 소개(小蓋)이며, 딸은 대주도금(大主刀金)이다.”하였다. 김씨(金氏 일연(一然)의 속명이 김견명(金見明)이다)는 또 고기(古記)의 말을 인용하였으나 그 역시 허황한 말이다.고기(古記)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옛날에 한 부자가 광주 북촌(光州北村)에 살았는데, 딸 하나가 있어 외모가 단정하였다. 그 딸이 아비에게 하는 말이 ‘매양 자주색 옷을 입은 남자가 저의 침실에 들어와 관계합니다.’ 하니, 그 아비가 딸에게 ‘네가 긴 실을 바늘에 꿰어 그 남자 옷에 꽂아 두어라.’ 하고 일렀다. 딸은 이와 같은 아비의 말을 따랐는데, 날이 밝자 바늘에 꿴 실을 북쪽 담 밑에서 찾아 보니, 바늘이 큰 지렁이의 허리에 꽂혀 있었다. 후에 그로 말미암아 한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15세가 되자 자칭 진훤(甄萱)이라 하더니, 뒤에 왕(王)으로 참칭하고 완산(完山)에 도읍을 세웠다.또 김씨는 《삼국사기(三國史記)》 본전(本傳)을 인용하여,“훤(萱)의 본성(本姓)은 이씨(李氏)였는데 후에 진씨(甄氏)라 했다. 그의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농업으로 생활을 하였는데, 광계(光啓 당 희종(唐僖宗)의 연호. 873~888) 연간에 사불성(沙弗城)지금의 상주(尙州) 에 웅거하여 스스로 장군이라 일컬었다. 아들이 넷이 있었는데 모두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으며, 그 중 훤은 걸출(傑出)하다 불렸고 지략이 많았다.” 하였는데, 광계(光啓) 이하 26자는 본사(本史)에 나오지 않았으니 아마 별본(別本)이 있는가 보다. 《동국통감(東國通鑑)》에서 두 가지를 다 뒤섞어 취하였기 때문에 이에 생략한다.이비가기(李碑家記)에 또,“진훤이 아들 아홉을 두었으니, 장자는 신검(神劒) 또는 진성(甄成)이라 하고, 둘째는 태사(太師) 겸뇌(謙惱), 셋째는 좌승(佐丞) 용술(龍述), 넷째는 태사(太師) 총지(聰智), 다섯째는 대아간(大阿干) 종우(宗祐), 여섯째는 실전되고, 일곱째는 좌승(佐丞) 위흥(位興), 여덟째는 태사(太師) 청구(靑丘), 아홉째는 실전되었으며, 딸은 하나로서 국대부인(國大夫人)이니 모두 상원부인(上院夫人)의 소생이다.”하였는데, 이는 본사(本史)에 나오지 않았기에 특별히 이에 기록하여 이문(異聞)을 삼는다.
- 2020-09-15 | NO.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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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훤(甄萱)이 반란을 일으켜 무주(武州)를 근거로 하다 - 동사강목 제5상
- 동사강목 제5상 병오 신라 혜공왕(惠恭王) 2년부터, 을미 신라 경순왕(敬順王) 9년까지 170년간 임자년 진성 여주 6년(당 소종 경복(景福) 원년, 892) 남해(南海)의 수졸(戍卒) 진훤(甄萱) -진(甄)의 음은 진(眞)- 이 반란을 일으켜 무주(武州, 지금의 광주(光州))를 근거로 하고 스스로 한남군 개국공(漢南郡開國公)이라 칭하였다.진훤은 상주(尙州) 가선현(嘉善縣)지금의 문경(聞慶) 남쪽 45리에 속했는데 고려에서 가은(加恩)으로 고쳤다 사람으로 본성은 이씨(李氏)였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농사로 자활(自活)하였고, 뒤에 가세를 일으켜 장군이 되었다. 네 아들이 있어 모두 이름이 알려졌는데, 진훤은 더욱 걸출하여 지략이 많았다. 처음 진훤이 태어나 강보에 싸였을 때에 아버지는 들에서 밭을 갈고 어머니는 점심밥을 가져오느라 아이를 숲속에 두었더니, 범이 와서 젖을 먹였다 한다. 장성하게 되자 체모가 웅위(雄偉)하고 지기가 남달리 뛰어났다. 나이 15세 때에 스스로 성을 진(甄)이라 하고, 종군(從軍)하여 왕경에 갔다가, 서남 해안을 방비하는 수졸로 나아가서는 창을 베고 자면서 적을 대비하고, 항상 사졸(士卒)의 앞장을 섰다. 그 공로로 비장이 되었다.이때 여주가 혼미하고 음란하여 기강이 문란하고 해이해져서 백성은 굶주리고 도적이 일어나자, 진훤이 가만히 딴뜻을 품고 망명(亡命)하는 이들을 불러 모아서 주현을 공략하니, 달포 사이에 무리가 5천 명에 이르렀다. 드디어 무주를 습격하여 차지하였다. 그러나 감히 공공연하게 왕이라 자칭하지는 못하고, 스스로 신라 서남도통 지휘병마제치 지절도독 전무웅등주군사 행전주자사 겸어사중승 상주국 한남군 개국공 식읍이천호(新羅西南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熊等州郡事行全州刺史兼御史中丞上柱國漢南郡開國公食邑二千戶)가 되고 멀리 북원의 적 양길을 제수하여 비장을 삼았다.
- 2020-09-15 | NO.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