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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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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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찬류(遠竄類-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 전 유수(留守) 임길후(任吉後) : 사헌부가 아뢰었다.“폐조 때 후궁의 친속으로 아양을 떨어 사랑을 받아 무리한 일을 자행했습니다. 일찍이 광주(光州) 목사가 되어서는 온 고을이 텅 비다시피 하였으며, 개성 유수가 되어서는 탐독하기가 한이 없었습니다. 크고 작은 제수가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습니다.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병들게 한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으니, 멀리 귀양보내소서.”뒤에 석방되었으나, 유효립의 옥사 때 도로 귀양보냈다. 강진으로 정배.
    2022-04-29 | NO.80
  • 유평-通文(丙子說募義廳于 光州折楊樓)
    유평은 ‘병자(1636)년에 의청을 광주의 절양루에 설치했다(丙子說募義廳于 光州折楊樓)’는 통문(通文)을 여러 고을에 보냈다.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해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발하자 병사와 양식을 모아 함께 국난을 이겨내자고 독촉한 글이다.아! 우리 유림으로 뜻을 가다듬고 학문을 한 사람치고 그 누가 부모님께 효하고 임금께 충하는 의(義)를 강습하지 않을 분이 있겠는가? 어버이께 효하면서 임금께 불충한 사람은 없고 임금께 충하면서 어버이께 불효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충신은 반드시 효자의 문(門)에서 구한다는 것이니 어버이를 위하여 원수를 갚는 것은 사람(人子)의 도리요, 임금을 위하여 원수를 갚는 것은 신하(臣子)의 직분입니다. 이것은 만고에 변할 수 없는 통의(通義)인데 이제 우리 군부(君父)께서 포위의 속에 계시니 신하(臣子)로서 통분을 어떻다고 하리요. 하물며 이 교서(敎書)가 포위(包圍) 속에서 나왔는데 모두가 애통하신 말씀이어서 받들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목이 메어 통곡을 하게 합니다. 즉시 통문을 돌리노니 원컨대 열읍(列邑)의 모든 군자(君子)들은 행여 지체하거나 관망하지 말고 각기 분발하여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동지들을 규합하여 병량(兵粮)을 도와주어 군부(君父)의 급함을 구함이 어떠합니까? 이는 다만 국가를 저버리지 않는 대의일 뿐 아니라 장부가 공명을 세울 수도 있는 기회입니다. 통문이 도달하면 시각을 지체하지 말고 경내에 돌리고 알려서 힘을 합하고 서로 붙잡아 같이 국난을 건지도록 부디 바라는 바입니다. 嗚呼維我儒林勵志爲學者孰不講習孝於親忠於君之義乎孝於親而不忠於君者未之有也忠於君而不孝於親者亦未之有也是故忠臣必求於孝子之門爲親報讐人子之道也爲君報讐臣子之職也此萬古不易之通誼而今我 君父在圍爲人臣憤惋之痛倘復如何况此 敎書自圍中出來無非哀痛之語奉讀不覺失聲長呼卽者傳通惟願列邑僉君子幸無遲回觀望各自奮勵投袂而起紏合同志資助兵粮以救 君父之急如何此非但不負國家之大義而丈夫立功名之會也通到日母滯時刻回諭境內合力相扶共濟國難幸甚- 송암유고(松庵遺稿)  :권2
    2018-07-12 | NO.79
  • 유희춘, 광주목사 임회와 술 한 잔을 나누다
    眉巖先生集卷之九 / 日記壬申 隆慶六年我宣廟六年11월【5일】나는 광주 목사(光州牧使) 임회 헌가(林誨獻可)와 시를 짓는 진사(進士) 백광훈(白光勳)을 초대하여 잠시 술을 주고받았다.初五日。余邀見光牧林誨獻可及製詩。進士白光勳。暫爲酬酢。
    2023-07-06 | NO.78
  • 윤복초에게 답한 편지 윤복초는 윤광안이다.〔答尹復初 光顔〕- 서형수
    명고전집 제6권 / 서(書)윤복초에게 답한 편지 윤복초는 윤광안이다.〔答尹復初 光顔〕전(傳) 수장(首章)에서 전 4장까지【윤】 상편(上編)에 경(經) 1장을 싣고서 《대학연의(大學衍義)》의 〈제왕위치지서(帝王爲治之序)〉를 부록하고, 이 편에 전 4장까지 싣고서 《대학연의》의 〈제왕위학지본(帝王爲學之本)〉을 부록하는 방식은 의의(意義)가 없는 듯합니다.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서(大學衍義序)〉에 “앞에 두 강령을 열거하고 뒤에 네 조목을 나누었다.”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제왕위치지서〉와 〈제왕위학지본〉 두 가지는 모두 강령과 통설(統說)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이것을 나누어 둘로 만들어서 하나는 경에 부록하고 하나는 전에 부록할 수 있겠습니까. 이 편에 실린 전문(傳文)은 상편의 경문(經文) 아래로 이동시키는 것이 합당할 듯하고, 《대학연의》의 〈제왕위치지서〉와 〈제왕위학지본〉 두 편은 예전대로 합편하는 것이 옳겠습니다.【서】 차례를 가지고 말한다면 〈제왕위학지본〉이 앞, 〈제왕위치지서〉가 뒤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편에서 〈제왕위치지서〉를 앞에 둔 것은, 〈제왕위치지서〉에서는 규모(規模)를 총론하고 〈제왕위학지본〉에서 비로소 ‘명덕(明德)’과 ‘신민(新民)’의 공부를 말했기 때문입니다. 책 속에서 인용한 조목들이 명확하게 조리가 있을 뿐 아니라, 진덕수가 지은 서문의 자주(自註)를 보더라도 “이상은 〈제왕위치지서〉를 논한 것이다.〔以上論爲治之序〕” 이상의 글은 모두 규모를 말한 것이고, “이상은 〈제왕위학지본〉을 논한 것이다.〔以上論爲學之本〕” 이상의 글은 모두 학문의 대강(大綱)을 말한 것입니다.또 본서(本書)에서 인용한 것으로 말하면, 경 1장을 굳이 〈제왕위치지서〉에서 인용하고, 전문(傳文)인 ‘탕지반명(湯之盤銘)’을 굳이 〈제왕위학지본〉에서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를 훈석(訓釋)할 때 인용한 것이 각기 층위와 조리가 있음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만약 경 1장과 전 수장(首章)~3장을 함께 서술한 다음 〈제왕위치지서〉와 〈제왕위학지본〉을 연결한다고 합시다. 그렇게 되면 경 1장은 바로 《대학》의 3강령과 8조목을 총론한 것이고 전 수장~3장은 3강령만을 가지고 풀이한 것이니, 3강령과 8조목을 총괄하여 논한 경문과 8조목은 빠뜨리고 3강령만 풀이한 전문을 모두 하나의 조목으로 만들고서 “이것이 〈제왕위치지서〉와 〈제왕위학지본〉의 총목록이다.”라고 하게 되어 버리는 셈입니다. 이것이 과연 무슨 체재이겠으며, 내용을 분류하여 각 부분에 소속시킬 적에 원칙이란 것이 있다 하겠습니까?이 부분은 여러 차례 성상께 뜻을 여쭈어 성상께서 충분히 판단하시어 합당하게 처리한 것이니 일시적인 의견으로 경솔히 의논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제왕위치지서〉《서경》 〈요전(堯典)〉. ‘흠명(欽明)’에서 ‘시옹(時雍)’까지는 마음에서부터 천하에 미쳐 가는 규모를 통론(通論)한 것입니다.《서경》 〈고요모(皐陶謨)〉. ‘신궐신수(愼厥身修)’에서 ‘이가원(邇可遠)’까지는 몸에서부터 천하에 미쳐 가는 규모를 통론한 것입니다.이윤(伊尹)의 말. ‘사궐덕(嗣厥德)’에서 ‘종우사해(終于四海)’까지는 바로 천하에 밝은 덕을 밝힌다는 뜻입니다.《시경》 〈사제(思齊)〉. ‘형우과처(刑于寡妻)’에서 ‘어우가방(御于家邦)’까지는 그 근본이 어지러우면서 말단이 다스려지는 일은 없다는 뜻입니다.《주역》 〈가인(家人)〉. ‘가인(家人)’에서 ‘반신지(反身之)’까지는 수신(修身)이 근본이라는 뜻을 말하였습니다.《대학》 경 1장.《중용》. ‘수신(修身)’에서 ‘회제후(懷諸侯)’까지 인용하고 다시 ‘성(誠)’을 ‘행지자일(行之者一)’로 삼았으니, 이는 후경(後經) 8조목의 ‘후이우후(后而又后)’의 뜻입니다.《맹자》. 천하에서부터 미루어 나가서 자신에게 이르렀으니, 이는 전경(前經) 8조목의 ‘선이우선(先而又先)’의 뜻입니다.《순자(荀子)》. 이는 또한 ‘수신(修身)’이 근본이라는 뜻입니다.동중서(董仲舒)의 말. 이는 ‘명덕(明德)’이 근본이고 ‘신민(新民)’이 말단이라는 뜻입니다.주자(周子)의 말. 이는 또한 ‘수신’이 근본이라는 뜻입니다.〈제왕위학지본〉《서경》 〈대우모(大禹謨)〉.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은 ‘명덕(明德)’을 풀이한 것입니다.《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 ‘덕일신(德日新)’은 ‘신민(新民)’을 풀이한 것입니다. 진덕수(眞德秀)의 설에 또한 “‘탕지반명(湯之盤銘)’이 바로 그 일이니, ‘반명’은 바로 ‘신민’에 대한 전(傳)이다.”라고 하였습니다.주공(周公)이 지은 《서경》 〈입정(立政)〉의 ‘극궐택심(克厥宅心)’과 ‘극준유덕(克俊有德)’. 이는 ‘명명덕(明明德)’이 지선(至善)에 그친 것입니다.《서경》 〈홍범(洪範)〉의 구주(九疇). 이는 ‘신민’이 지선에 그친 것입니다.《대대례(大戴禮)》 〈무왕천조(武王踐阼)〉편. 단서(丹書)의 ‘경(敬)’ 자는 바로 《대학》의 ‘지어지선(止於至善)’에 대한 전(傳)인 ‘오집희경지(於緝煕敬止)’의 ‘경’입니다.《서경》 〈열명(說命)〉.《시경》 〈경지(敬之)〉. 이상은 진덕수의 서문에 이른바 “상(商)나라 고종(高宗)과 주(周)나라 성왕(成王)의 학문이 여기에 가깝다.”는 것입니다.한(漢)나라 고제(高帝), 문제(文帝), 무제(武帝), 선제(宣帝), 광무제(光武帝), 명제(明帝), 장제(章帝)의 언행.당(唐)나라 태종(太宗), 현종(玄宗), 헌종(憲宗)의 언행. 이상은 진덕수의 서문에 이른바 “한나라와 당나라의 현군(賢君)들의 이른바 학문이라는 것은 이미 성현들의 학문에서 어긋남이 없을 수가 없게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이는 주자(朱子)의 이른바 “무릇 전문(傳文)은 경전(經傳)을 섞어 인용하였다.”는 체재입니다.“한나라 고제가 천하를 처음 평정하였을 때”라고 한 조목.【윤】 이 조목 아래에 있는 호오봉(胡五峯 호굉(胡宏))의 설이 매우 좋으니, 첨부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서】 호씨의 이 설은 논리가 맞지 않으니, 꼭 이치에 타당한 말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선유(先儒)들도 호씨의 이 설을 비웃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런 논리로 육가(陸賈)를 책망한다면, 주발(周勃)이나 관영(灌嬰) 같은 이들은 어느 위치에다 자리매김할 것인가.”라고 하며, 또 말하기를 “호굉이 ‘제후를 봉해주었다면 과연 흉노를 제어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한 말은 굳이 수록할 것이 못된다.”라고 하였습니다.“선제(宣帝)가 조서를 내려 ‘짐은 육예(六藝)에 밝지 못하다.’”라고 한 조목.【윤】 이 조목 아래에 있는 선제가 왕도(王道)와 패도(覇道)를 섞어서 사용하였다는 한 조목은 진덕수가 논한 내용과 함께 첨부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서】 귀감(龜鑑)이나 경계(警戒)로 삼기에는 모두 적절치 않으니, 연문(衍文)인 듯합니다.“유강공(劉康公)이 ‘사람은 하늘과 땅의 중정(中正)한 기운을 받아 태어났다.’”라고 한 조목.【윤】 이 조목은 뒤의 〈수신지요(修身之要) 정위의(正威儀)〉 편에 중첩되어 나오니, 재고해서 하나는 삭제해야 할 것입니다.【서】 이 조목은 ‘이른바 명이다.〔所謂命也〕’ 한 구에 중점을 두었고, 〈정위의〉 편은 ‘동작과 예의〔動作禮義〕’ 이하 몇 구에 중점을 둔 것입니다. 그리고 중첩된 부분은 ‘사람은 하늘과 땅의 중정한 기운을 받아 태어나니’ 한 절에 불과하니, 한 쪽은 상세하게 수록하고 한 쪽은 간략하게 수록하는 예에 따라 두 부분 모두 그대로 두어도 무방합니다.“《주역》 〈건(乾) 문언(文言)〉에 ‘원(元)은 선(善)의 으뜸’”이라고 한 조목.【윤】 이 조목 아래에 있는 진덕수의 설에 이른바 ‘이 조목〔此條〕’이라는 것은 바로 주자(朱子)의 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자의 설을 이미 삭제하였으니 진덕수의 설 가운데 이 구절 역시 삭제해야 할 것입니다.【서】 진덕수의 설은 다시 상세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만약 이 구절을 조정한다면 ‘개(蓋)’자 이하로는 문리가 연결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만약 ‘세지(世之)’ 이하를 아울러 모두 삭제한다면 하늘과 사람이 하나인지 하나가 아닌지 하는 문제에 있어 앞뒤 논리가 서로 조응하지 않습니다. 또 ‘이 조목’이라는 말은 분명코 여기에서 인용한 문언전의 한 조목을 가리키는 것이지 주자의 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니, 그대로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중용》에 ‘하늘이 명하신 것을 성(性)이라 한다.’”라고 한 조목.【윤】 이 조목 아래의 주자의 집주(集註) 중에 ‘개(蓋)’ 자 이하는 바로 《중용장구(中庸章句)》 초본(初本)의 내용입니다. 정본(定本) 《중용장구》와 비교해 보면 문의(文義)의 완전함이나 통창함이 부족한 듯하니, 조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서】 주자의 집주의 ‘개’ 자 이하의 내용은 진덕수의 《중용집편(中庸集編)》과 조순손(趙順孫)의 《중용찬소(中庸纂疏)》와 황진(黃震)의 《황씨일초(黃氏日鈔)》와 호병문(胡炳文)의 《사서통(四書通)》이 모두 초본의 내용과 같습니다. 그런데 정우(定宇) 진력(陳櫟)이 이것을 고쳐서 정본 《중용장구》의 내용을 따르고 나서부터 현행본 《사서집석(四書輯釋)》에서 그것을 그대로 따라 마침내 《영락대전(永樂大全)》에 실려 통행본(通行本)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선유(先儒)들은 모두 말하기를 “두 본 모두 주자의 친필에서 나온 것이고, 이 구절에 대한 《중용혹문(中庸或問)》에서의 뜻은 진씨본(眞氏本)의 주요 논지가 된다. 또 초본의 ‘하늘에 근본하여 나에게 구비되었다.’는 한 구절은 초본이 정본에 비해 정밀하다.”라고 하였습니다. 더군다나 이 글은 진덕수의 글이니 더욱이 후대 개정본과의 차이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습니다.“만장(萬章)이 말하기를 ‘순(舜) 임금이 밭에 가서’”라고 한 조목.【윤】 이 조목 아래 진덕수의 설 가운데 ‘개(蓋)’ 자에서 ‘절야(切也)’까지는 삭제하고, ‘양웅(楊雄)’에서부터 ‘지모(之慕)’까지 한 단락을 첨가해 넣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서】 위의 한 구절만 남겨두고 아래는 모두 삭제한다면 진덕수의 이 단락은 크게 새로운 뜻이 없으니, 전부 삭제함만 못합니다.“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 도는 하나의 이치로 꿰뚫는다.’”라고 한 조목.【윤】 이 조목 아래 집주 중의 ‘충출(忠出)’ 아래에다가, 《대학연의》의 내용 가운데 ‘우왈(又曰)’부터 ‘충서(忠恕)’까지 한 단락을 첨가하여 넣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서】 《주자어류(朱子語類)》에는 ‘하기를 구하는 충서〔求做底忠恕〕’라고 하였는데 《대학연의》에서는 ‘인위(人爲)가 있는 충서〔有爲之忠恕〕’라고 하였으니, 주자께서 하신 말씀의 본의를 잃은 듯합니다. 또 이 단락은 예사의(倪士毅)의 《사서집석(四書輯釋)》 뒤에 나온 것들은 모두 수록하지 않았으니 첨가해 넣을 필요가 없습니다.“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인(仁)은 하늘의 높은 벼슬이다.’”라고 한 조목.【윤】 진덕수의 설 중 ‘수언(須焉)’ 아래에는 《대학연의》 본문 가운데 ‘불인(不仁)’에서부터 ‘인의(仁矣)’까지 한 단락을 첨가해 넣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서】 ‘상수(相須)’ 두 글자 안에 이미 ‘불인’에서부터 ‘인의’까지의 아래 두 구절의 뜻이 포함되어 있으니, 다시 첨가하는 것은 군더더기가 될 듯합니다.“한(漢)나라 문제(文帝) 때 가산(賈山)이 말하기를”이라고 한 조목.【윤】 《대학연의》 내용 가운데 문제가 노대(露臺)를 짓지 않은 한 조목을 뽑아서 이 조목 아래에 수록한다면 뜻이 더욱 완비될 것입니다.【서】 노대 조목은 이미 〈법규와 제도를 완비함〔備規制〕 궁궐의 거처〔宮闕之居〕〉에 보이니, 중첩해 수록할 필요는 없습니다.《대학》 전(傳) 6장 제1절 조목.【윤】 이 조목 아래의 구준(丘濬)의 설 가운데 ‘언야(言也)’ 아래에는,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 본문 중에서 ‘개학(蓋學)’에서부터 ‘연기(然其)’까지의 한 단락을 첨가해 넣고, ‘지자(之者)’아래에도 ‘시내(是乃)’에서부터 ‘분지(分之)’까지의 한 단락을 첨가해야 합니다. 그리고 ‘시즉(是則)’에서부터 ‘독야(獨也)’까지의 한 구와 ‘각수(各隨)’에서부터 ‘소효(少效)’까지의 한 절을 모두 삭제하고, ‘보입(補入)’ 운운한 부분은 이미 이와 유사한 논지가 이 조목 전후로 보이니 또한 삭제해야 합니다.【서】 ‘잠깐 사이 단서가 처음 생겨날 때〔須臾之頃, 端緖之初〕’ 부분은 바로 ‘독(獨)’ 자의 경계를 가리킨 것이고, 새로 찌를 붙인 한 절은 ‘지(知)’와 ‘의(意)’가 서로 연관관계를 가진다는 뜻에 불과하니, 마땅히 성상의 비점(批點)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중용》 수장(首章) 제3절 조목.【윤】 《대학유의》의 범례를 따져보면, 오직 《대학》은 이 책의 근간이 되는 경전이므로 “몇 장 몇 절”이라고만 쓴 것입니다. 이는 각 편의 첫머리에 이미 《대학》의 본문을 실었기 때문입니다. 그 나머지 다른 경전을 인용할 때에는 중첩해서 나올 경우 중첩되는 부분을 삭제하였을 뿐입니다. 따라서 지금 이 부분에서 ‘《중용》 아무 장’이라고 한 것은 범례를 매우 어긴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조목에서도 때로 부득이하게 중첩되어 나온 경우가 있으니, 예컨대 《서경》 〈요전(堯典)〉의 수장과 《시경》 〈대아(大雅) 문왕(文王)〉편은 이미 이 책의 첫 편 〈제왕위치지서(帝王爲治之序)〉와 〈성의정심지요(誠意正心之要) 사천지경(事天之敬)〉조에 실려 있는데 ‘흠명문사(欽明文思)’와 ‘오집희경지(於緝煕敬止)’ 두 구를 다시 따로 뽑아내어 〈성의정심지요 수기지경(修己之敬)〉조에 수록한 것이 그러한 경우입니다. 지금 같은 경우도 이러한 예들에 비추어, ‘막현호은(莫見乎隱)’과 ‘막현호미(莫顯乎微)’ 두 구절만 수록하는 것이 혹 한 쪽은 상세하게 수록하고 한 쪽은 간략하게 수록하는 하나의 방법이 되지 않겠습니까.【서】 이 찌에서 논한 내용이 매우 옳으니, 그대로 따라야 하겠습니다.“이상은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이 처음 나누어질 때를 삼가라는 것이다.”라고 한 조목.【윤】 ‘이상’의 아래에, 《대학연의》에는 모두 ‘논(論)’ 자가 있는데 《대학연의보》에서 보유해 넣은 편들에는 모두 ‘논’ 자를 삭제해 버려 혼란스러움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조목 아래 조목들에 모두 다 ‘논’ 자를 적어 넣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서】 본서의 범례를 두루 고찰해 보면, 원편(原篇)인 《대학연의》의 각 조목에는 모두 ‘논’ 자가 있고, 보편(補篇)인 《대학연의보》에는 모두 ‘논’ 자가 없습니다. 지금 《대학연의》와 《대학연의보》의 내용을 선별하는 범례에 있어 본서에 없는 것은 한 글자도 첨가해 넣지 않았으니, 속편(續篇)에 해당하는 《대학유의》 역시 한결같이 본서의 범례를 따를 것이지, 어떤 책에는 있고 어떤 책에는 없다는 점을 문제 삼을 필요는 없습니다.“《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에 ‘학문에 일정한 방법이 없다.’”라고 한 조목.【윤】 이 조목에 대한 구준의 설은 원래 조목에 해당하지 않는데다가 단지 고서(古書)의 내용만 인용해놓고서 결론은 짓지 않았으니 삭제해야 합니다.【서】 구준의 설을 삭제할 것 같으면, 《대학연의보》에서 인용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내용을 수록해야 합니다. 《춘추좌씨전》 기사의 이 의리는 매몰시킬 수 없습니다.“이상은 백성들에게 해악이 되는 것을 제거한 것이다.”라고 한 조목.【윤】 황하(黃河)는 중국의 큰 근심거리이니, 《대학연의보》에서 이 한 가지 일을 별도로 “백성들에게 해악이 되는 것을 제거한 것”이라는 항목으로 만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이 항목 혼자서 따로 놀고 오늘날에 긴요한 일도 아니니 전부 삭제해도 무방합니다.【서】 황하로 인한 근심은 참으로 중국의 가장 큰 근심거리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본래 이런 근심거리가 없으니, 이 항목을 전부 삭제해야 한다는 그대 찌의 견해가 참으로 옳습니다.“태종(太宗)이 경복전고(景福殿庫)를 설치하였다.”라고 한 조목.【윤】 이 조목 아래에 ‘사신왈(史臣曰)’로 시작되는 부분은 비록 송(宋)나라의 일을 논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이 조목에 해당되지 않으니, 그 아래에다 붙여둘 수 없습니다. 또 이 조목과 이 조목 위의 조목을 이미 모두 삭제하였으니, 사신의 논설도 따로 독립시켜 한 칸을 올려 쓰는 《대학연의보》의 방식에 따라 쓰고, 그 아래에 구준의 설을 붙여야 합니다. 그리고 ‘사신왈유(史臣曰有)’ 네 글자는 삭제함이 마땅할 듯합니다.【서】 《대학유의》의 범례는, 사실을 수록할 때는 사서(史書)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해당 국가의 이름을 달고, 의론을 수록할 때는 그 말을 취하면서 그 말을 한 사람의 이름을 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신의 의론에서 ‘사신왈’을 잘라내고서 곧장 ‘송나라는 중세로부터〔宋自中世〕’라고만 한다면, 이것이 누구의 말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범례를 어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구준의 설까지 전부 삭제하느니만 못합니다.“전동(典同)이 육률(六律)과 육동(六同)의 조화를 관장한다.”라고 한 조목.【윤】 《주례(周禮)》에서 악(樂)을 논함에 있어, 오직 태사(太師)의 직책을 언급한 조목이 총요(總要)가 되므로 십이율(十二律)과 팔음(八音)과 오성(五聲)의 명칭 및 뜻이 모두 그 조목에 상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 태사의 직책을 언급한 조목을 수록하지 않아서는 안 될 듯합니다. 응당 이 ‘전동’ 조목을 삭제하고 《대학연의보》에 있는 태사의 직책을 언급한 조목을 대신 수록함이 옳을 것입니다.【서】 ‘전동’ 조목은 악률(樂律)의 근본입니다. ‘육률’과 ‘육동’은 율려(律呂)의 맑고 탁한 정도를 구분한 것이고, ‘수도(數度)’는 율려가 삼분손익(三分損益)하는 것이고, ‘제량(齊量)’은 균조(均調)가 격팔상생(隔八相生)하는 것입니다. 후세에 악(樂)에 대한 말들은 모두 여기에서 나왔고, 태사의 직책을 언급한 조목은 12율의 명칭 및 뜻을 범범하게 논한 것에 불과하니, ‘전동’ 조목을 빼고 ‘태사’ 조목을 수록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두우(杜佑)의 《통전(通典)》에 ‘십이율이 서로 낳는 법은’”이라고 한 조목.【윤】 성률(聲律)에 관한 설은 별도의 책으로 만들어야지, 이처럼 축약한 책으로는 실로 그 상세한 도수(度數)를 다 갖출 수 없습니다. 또 이것은 치도(治道)에 긴요한 것도 아니니 단지 그 대략적인 내용만 남겨두고 마는 것이 좋겠습니다. 구준(丘濬)의 《대학연의보》에서는 주자(朱子)가 《율려신서(律呂新書)》에서 “아무 책 아무 설은 고찰할 만하다.”라고 한 말에 연유하여 거기에 해당하는 글들을 두루 수록하였지만, 지금 굳이 《대학연의보》에 근거해서 다 수록할 것은 없습니다. 이 조목은 아래의 채원정(蔡元定)의 설과 함께 삭제하는 것이 마땅합니다.【서】 자성(子聲 반음(半音))에 관한 설은 두우의 언급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이는 악률(樂律)에서 매우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이 조목을 삭제할 수 있다면, 응당 다른 어떤 내용으로 악률의 제도 부분을 갖추어야 마땅하겠습니까?【윤】 이 조목에서 인용한 《통전》의 글에서 “부씨(鳧氏)” 이하부터는 《대학연의보》와는 내용이 전혀 다르니, 다시 상고해야 합니다.【윤】 이는 주단청(朱端淸 주재육(朱載堉))의 《율려정의(律呂精義)》에서 인용한 《통전》의 설과 《대학연의보》의 내용을 상호 참조하여 성상께서 친히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공영달(孔穎達)의 《예기(禮記)》 소(疏)에 ‘황종(黃鍾)이’”라고 한 조목.【윤】 위에 이미 《예기》 〈예운(禮運)〉의 “돌아가면서 서로 궁음이 된다.〔還相爲宮〕”라는 글과 진호(陳澔)의 주석을 수록하여 그 대강의 내용을 드러냈습니다. 이 조목의 공영달의 소는 중복되는 듯합니다.【서】 돌아가면서 궁음이 된다는 것은 악(樂)에 있어서 가장 큰 요체이니, 참으로 〈예운〉 한 구절을 가지고 이것을 다 설명했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더군다나 이 조목에서 논한 내용은 84조(調)를 주장하는 후세 사람들의 잘못을 증명하는 확실한 조문입니다. 그러므로 주자(朱子)께서도 “변궁(變宮)과 변치(變徵)가 조(調)가 될 수 없음은 공영달의 《예기》 소에서 고찰할 수 있다.”라고 하셨으니, 삭제해서는 안 됩니다.“《당서(唐書)》에 ‘현종(玄宗)이 천자의 생일을 천추철(千秋節)로 삼았다.’라고 하였다.”라고 한 조목.【윤】 이 조목 아래의 구준의 설에서 “재전(在前)” 이하는 삭제하고 《대학연의보》의 내용 가운데 “금승(今承)” 이하 18자를 첨가해 넣는 것이 긴요하겠습니다.【서】 임금 한 사람마다 하나의 명절을 두는 것은 또한 당(唐)나라와 송(宋)나라의 고사(故事) 가운데 없애버려서는 안 될 것이니, 삭제할 필요가 없습니다.“《예기》 〈월령(月令)〉에 ‘계동(季冬)의 달’”이라고 한 조목.【윤】 입춘(立春)에 흙으로 만든 소에게 채찍질을 하면서 풍년을 기원하는 제도는 비록 고례(古例)에서 상고할 수 있지만, 마침내는 상도(常道)를 벗어난 일에 가까운데다가 몹시 쓸데없고 자질구레한 일이니, 삭제하는 것이 옳습니다.【서】 비록 상도를 벗어난 일에 가까우나 풍토(風土)와 절물(節物)에 관한 기록은 옛사람들이 반드시 상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주역》에 ‘역(易)에는 태극(太極)이 있다.’”라고 한 조목.【윤】 이 조목 아래의 구준의 설에서 “생팔(生八)” 아래에는 탈락된 구절이 있는 듯합니다. 또 정자(程子)께서 가일배법(加一倍法)을 《주역》의 종지(宗旨)로 삼으신 적이 없으니, 구준의 이 안설(按說)은 삭제함이 마땅합니다.【서】 요부(堯夫 소강절(邵康節))의 역수(易數)가 매우 정밀하였는데, 명도(明道 정호(程顥))가 이를 매우 익숙하게 들어온 터에, 하루는 감시(監試)를 하면서 일이 없어 요부의 설을 추산(推算)해보았습니다. 그리고 감독을 마친 후 나와서는 요부에게 “요부의 역수는 단지 가일배법일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요부가 놀라며 명도의 등을 어루만졌습니다. 구준의 설에서 숙정자(叔程子 정이(程頤))라고 한 것은 비록 잘 살피지 못한 것이지만 정자께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무릇 천자가 타는 수레 가운데 옥로(玉路)”라고 한 조목.【윤】 이 책을 만드는 주된 의도는 임금의 덕을 보좌하고 치도(治道)의 거울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사물의 명칭과 특징 및 각종 수치는 담당 관원의 일이니, 진실로 임금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 보좌하는 공부에 긴요하지 않습니다. 또 내용을 간추리고 요약해서 싣는 이 책에 상세한 내용까지 다 수록하기는 어려우니, 그 대강만 남겨두고 번다한 내용들은 삭제해도 안 될 것이 없을 듯합니다. 이 조목에서 여위(輿衛 임금의 수레와 호위무사) 등의 부분은 더욱이 삭제해야 마땅합니다.【서】 이와 같은 제도들은 모두 예악(禮樂)을 제정하는 일의 한 가지입니다. 이른바 “치도”라는 것이 예악을 버려두고서 어디에다 힘을 기울이겠습니까. 또 사물의 명칭과 특징 및 각종 수치는 이러한 책에 그 대개(大槪)를 수록해 두지 않는다면, 뒤에 비록 좋은 담당 관원이 있은들 장차 무엇에 의지해서 제도를 보완하고 조정할 수 있겠습니까. 문헌이 부족한 것은 성인께서도 탄식하신 일이니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서경》에 ‘이에 희씨(羲氏)와 화씨(和氏)에게 명하였다.’”라고 한 조목.【윤】 이 조목 아래의 구준의 설에서 “선유(先儒)”에서 “대요(大要)”까지의 한 구절은 삭제해야 합니다.【서】 조정하고자 하는 조목은 이 단락의 안목(眼目)이 되는 부분인 듯합니다.“채옹(蔡邕)의 《천문지(天文志)》에 ‘천체(天體)를 말한 것에’”라고 한 조목.【윤】 이 조목에서 “입팔척(立八尺)” 이하는 삭제하고, 《대학연의보》의 내용 가운데 우희(虞喜)의 설을 가져다가 이 조목 아래에 첨가하여 수록하는 것이 낫겠습니다.【서】 우희의 설이 이 조목과 딱 들어맞아서 반드시 수록해야 할 내용인지는 모르겠습니다.[주-D001] 윤복초에게 답한 편지 : 【작품해제】 본 서찰은 명고가 윤광안(尹光顔, 1757~1815)과 함께 《대학유의(大學類義)》 의 내용 및 편차에 관한 의견을 교환한 것이다. 윤광안의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복초(復初), 호는 반호(盤湖)이다. 교리, 대사성, 충청도 관찰사, 경상도 관찰사, 이조 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본 서찰은 대체적으로 《대학유의》 각 부분에 대한 윤광안의 견해가 먼저 제시되어 있고 이에 대한 명고의 견해가 부기된 형태로 되어 있다. 원문에는 없으나 이해를 위해 윤광안의 말에는 【윤】, 명고의 말에는 【서】라고 표기하였다.《대학유의》는 정조(正祖)가 주희(朱熹)의 《대학장구(大學章句)》가 나온 이후의 수많은 주석서들 가운데 송(宋)나라 진덕수(眞德秀)가 지은 《대학연의(大學衍義)》와 명(明)나라 구준(丘濬)이 지은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의 내용을 발췌 편집하여 만든 책이다. 각 부분마다 주희(朱熹)의 《대학장구(大學章句)》 의 주석이 모두 실려 있으며, 《대학연의》와 《대학연의보》의 내용은 긴요한 부분만을 뽑아서 편차하였다. 정조의 〈어제제(御製題)〉에, “이러한 연구에 힘을 쏟은 지가 30여 년”이라고 한 것을 볼 때 정조 등극 이전부터 이미 사업의 단초가 시작된 것이라 하겠다. 《국조보감(國朝寶鑑)》 정조 23년 기록에 《대학유의》의 완성을 보았다고 되어 있으며, 또한 현재 전해지는 《대학유의》의 표제지(標題紙)에 정조 기미년(1799, 정조23)에 중교(重校)를 보았고 순조 을축년(1805, 순조5)에 활인(活印)하였다고 되어 있다. 한편 《명고전집》 권10 〈경발어찰논주자서후(敬跋御札論朱子書後)〉에 “이상 세 서찰 가운데 하나는 신이 무오년(1798, 정조22) 봄 광주목의 임소에 있을 때 《대학유의》를 교열하라는 명을 받들었을 당시 내려주신 것이다.[右三札, 一則臣於戊午春, 在光州牧任所, 承命校閱大學類義時所蒙賜者也.]”라는 내용이 있고, 앞서 《대학유의》의 완성이 1799년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본 서찰은 1798년을 전후로 한 시기에서 1799년 사이에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명고와 윤광안은 《대학유의》 편교제신(編校諸臣) 목록 첫머리에 편차관(編次官)으로 나란히 이름이 올라 있다. 또한 본 서찰에 기재된 명고와 윤광안의 의견은 《홍재전서(弘齋全書)》 권127 〈유의평례(類義評例)〉에 “첨(籤)” 형식으로 거의 그대로 수록되어 있는데, 본 서찰에서 상대방의 의견에 수긍한 부분은 《홍재전서》에 수긍한 의견으로 바뀌어 실려 있음을 볼 때 정조와의 논의를 앞두고 명고와 윤광안 양자 간 사전 논의의 성격을 띠는 서찰이라 하겠다.[주-D002] 앞에 …… 나누었다 : 《대학연의》의 체재를 보면, 앞부분에 〈제왕위치지서(帝王爲治之序)〉, 〈제왕위학지본(帝王爲學之本)〉의 두 강령을 두고 그 뒤로 〈격물치지지요(格物致知之要)〉, 〈성의정심지요(誠意正心之要)〉, 〈수신지요(修身之要)〉, 〈제가지요(齊家之要)〉의 네 조목을 두고 있다.[주-D003] 규모(規模)를 총론하고 : 《대학연의》 〈대학연의서(大學衍義序)〉에서 〈제왕위치지서〉를 설명한 부분에 “경문 205자를 뽑아 이 편에 싣되, 《서경》의 〈요전〉ㆍ〈고요모(皐陶謨)〉ㆍ〈이훈〉과 《시경》의 〈대아(大雅) 사제〉시, 《주역》의 〈가인〉괘를 앞에 둔 것은 전성의 규모가 이것들과 다른 점이 없음을 드러낸 것이요, 자사와 맹자와 순황과 동중서와 양웅과 주돈이의 설로 이은 것은 후현의 의론이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드러낸 것입니다.[剟取經文二百有五字, 載於是編, 而先之以堯典, 臯謨, 伊訓與思齊之詩, 家人之卦者, 見前聖之規模不異乎此也. 繼之以子思, 孟子, 荀况, 董仲舒, 楊雄, 周敦頤之説者, 見後賢之議論不能外乎此也.]”라고 하였다.[주-D004] 이상은 …… 글 : 《대학연의》 〈대학연의서(大學衍義序)〉에서 〈제왕위치지서〉를 설명한 부분에 “경문 205자를 뽑아 이 편에 싣되, 《서경》의 〈요전〉ㆍ〈고요모(皐陶謨)〉ㆍ〈이훈〉과 《시경》의 〈대아(大雅) 사제〉시, 《주역》의 〈가인〉괘를 앞에 둔 것은 전성의 규모가 이것들과 다른 점이 없음을 드러낸 것이요, 자사와 맹자와 순황과 동중서와 양웅과 주돈이의 설로 이은 것은 후현의 의론이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드러낸 것입니다.[剟取經文二百有五字, 載於是編, 而先之以堯典, 臯謨, 伊訓與思齊之詩, 家人之卦者, 見前聖之規模不異乎此也. 繼之以子思, 孟子, 荀况, 董仲舒, 楊雄, 周敦頤之説者, 見後賢之議論不能外乎此也.]”라고 하였다.[주-D005] 이상의 글 : 《대학연의》 〈대학연의서(大學衍義序)〉에 “요, 순, 우, 탕, 문왕, 무왕의 학문은 성현들의 학문에 비추어 볼 때 순수한 학문이고, 상나라의 고종과 주나라의 성왕의 학문은 성현들의 학문에 가까운 학문입니다. 한나라와 당나라의 현군들의 이른바 학문이라는 것은 이미 성현들의 학문에서 어긋남이 없을 수가 없게 되었는데, 한나라 효원제 이하 몇 사람의 임금들의 학문은 혹은 기예의 학문이었고 혹은 문사의 학문이었으니, 성현들의 학문에서 몹시 어긋나버린 것입니다.[堯, 舜, 禹, 湯, 文, 武之學, 純乎此者也; 商高宗, 周成王之學, 庶幾乎此者也. 漢, 唐賢君之所謂學, 已不能無悖乎此矣, 而漢孝元以下數君之學, 或以技藝, 或以文辭, 則甚謬乎此者也.]”라고 한 부분이다.[주-D006] 경 …… 것 : 《대학연의》 권1 〈제왕위치지서〉에 《대학》의 경문이 인용되어 있고, 권2 〈제왕위학지본〉에서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를 훈석하면서 “《대학》에서 인용한 ‘탕지반명’이 바로 그 일이다.[大學所引湯之盤銘, 卽其事也.]”라고 하였다.[주-D007] 이 부분은 …… 듯합니다 : 이상에서 윤광안과 명고가 논한 것 중 《대학유의》의 실제 간행에서 채택된 방식은 윤광안의 방식이다. 《홍재전서(弘齋全書)》 권127의 〈유의평례(類義評例)〉에서 이 부분에 대해 정조는 “처음에는 서형수(徐瀅修)의 설이 매우 옳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윤광안의 설을 보니 더욱 좋다. 우소암(우집(虞集))은 서산(진덕수(眞德秀))을 사숙한 사람으로 《대학연의》를 일러 ‘성현의 학문에 근본하여 제왕의 다스림을 밝혔다.’라고 했으니, 이 말이 분명한 증거가 된다. 〈제왕위치지서〉와 〈제왕위학지본〉을 합편하는 것은 안 될 까닭이 없다.[徐說初頗深然之, 更觀尹說尤長. 虞邵庵以西山私淑之人, 謂衍義曰‘本諸聖賢之學, 以明帝王之治’, 此爲可證之左契. 爲治爲學之合段, 無所不可.]”라고 하였으며, 현재 전하는 《대학유의》 또한 윤광안의 방식대로 되어 있다.[주-D008] 제왕위치지서 : 이 부분 아래의 목록은 《대학연의》 〈제왕위치지서〉의 내용 중에서 《대학유의》가 인용한 목록 및 그 대의이다. 각 경전의 본문에 대비할 때 《대학유의》에서 인용하고 있는 글은 축약한 부분이 있는 관계로 자구 상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이하 각 단락 역시 마찬가지이다.[주-D009] 흠명(欽明)에서 시옹(時雍)까지는 : 《서경》 〈요전(堯典)〉에 “옛날 요 임금을 상고하건대 공이 크시니, 공경하고 밝고 문채롭고 생각함이 편안하고 편안하시며 진실로 공손하고 능히 겸양하시어 광채가 사방에 입혀지며 상하에 이르셨다. 큰 덕(德)을 밝히시어 구족을 친하게 하셨다. 구족이 이미 화목하거늘 백성을 고루 밝히셨다. 백성이 덕을 밝히며 만방을 합하여 고르게 하시니 여민들이 아! 변하여 이에 화(和)하였다.[曰若稽古帝堯, 曰放勳, 欽明文思安安, 允恭克讓, 光被四表, 格于上下. 克明峻德, 以親九族, 九族旣睦, 平章百姓, 百姓昭明, 協和萬邦, 黎民於變時雍.]”라고 한 부분을 가리킨다.[주-D010] 신궐신수(愼厥身修)에서 이가원(邇可遠)까지는 : 《서경》 〈고요모(皐陶謨)〉에 “몸을 닦음을 삼가며 생각을 영원하게 하며 구족을 돈독하게 펴며 여러 현명한 이가 힘써 도우면 가까운 데로부터 먼 데에 미루어 나감이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愼厥身修, 思永, 惇敍九族, 庶明勵翼, 邇可遠, 在玆.]”라고 한 부분을 가리킨다.[주-D011] 사궐덕(嗣厥德)에서 종우사해(終于四海)까지는 : 《서경》 〈이훈(伊訓)〉에 “지금 왕께서 그 덕을 이으려 하신다면 즉위하는 초기에 있지 않음이 없으니, 사랑을 세우되 어버이로부터 하시며 공경을 세우되 어른으로부터 하시어, 집과 나라에서 시작하여 사해에서 마치소서.[今王嗣厥德, 罔不在初, 立愛惟親, 立敬惟長, 始于家邦, 終于四海.]”라고 한 부분을 가리킨다.[주-D012] 형우과처(刑于寡妻)에서 어우가방(御于家邦)까지는 : 《시경》 〈대아(大雅) 사제(思齊)〉에 “아내에게 모범이 되어 형제에까지 이르러 집과 나라를 다스리셨기 때문이니라.[刑于寡妻, 至于兄弟, 以御于家邦.]”라고 한 부분을 가리킨다.[주-D013] 가인(家人)에서 반신지(反身之)까지는 : 《주역》 〈가인(家人)〉에 “ 〈단전(彖傳)〉에 말하였다. ‘가인은 여자는 안에서 위치를 바르게 하고 남자가 밖에서 위치를 바르게 하니, 남녀가 바름이 천지의 대의이다. 가인에 엄한 군주가 있으니, 부모를 말한다.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답고 형은 형답고 아우는 아우답고 남편은 남편답고 부인은 부인다움에 가도가 바르게 되리니, 집안을 바르게 하면 천하가 정해지리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바람이 불로부터 나옴이 가인이니, 군자가 보고서 말에 진실함이 있고 행실에 항상함이 있게 한다.’……상구는 정성이 있고 위엄이 있으면 마침내 길하리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위엄이 있음의 길함은 자기 몸에 돌이켜 살핌을 말한 것이다.’[彖曰‘ 家人, 女正位乎內, 男正位乎外, 男女正, 天地之大義也. 家人有嚴君焉, 父母之謂也. 父父子子兄兄弟弟夫夫婦婦而家道正, 正家而天下定矣’. 象曰‘風自火出, 家人, 君子以, 言有物而行有恒’. …… 上九, 有孚, 威如, 終吉. 象曰‘威如之吉, 反身之謂也.’]”라고 한 부분을 가리킨다.[주-D014] 수신(修身)에서 회제후(懷諸侯)까지 : 《중용》에 “무릇 천하와 국가를 다스릴 때 아홉 가지 법이 있으니 자신을 수양함, 어진 이를 높임, 친척을 친히 함, 대신을 공경함, 신하들의 마음을 체찰(體察)함,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함, 백공들을 오게 함, 먼 지방의 사람을 회유함, 제후들을 은혜롭게 대함이다. 자신을 수양하면 도가 확립되고, 어진 이를 높이면 의혹되지 않고, 친척을 친히 하면 숙부들과 형제들이 원망하지 않고, 대신을 공경하면 혼란하지 않고, 신하들의 마음을 체찰하면 선비들의 보답하는 예가 중하고, 백성들을 사랑하면 백성들이 권면하고, 백공을 오게 하면 재용이 풍족하고, 먼 지방의 사람을 회유하면 사방이 돌아오고, 제후들을 은혜롭게 대하면 천하가 두려워한다. 재계하고 깨끗이 하며 성복을 하여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음은 자신을 수양하는 것이요, 참소하는 이를 제거하고 여색을 멀리 하며 재물을 천히 여기고 덕을 귀하게 여김은 어진 이를 권면하는 것이요, 그 지위를 높여 주고 봉록을 많이 주며 좋아함과 싫어함을 함께 함은 친친(親親)을 권면하는 것이요, 관속을 많이 두어 부릴 사람을 마음대로 맡기게 함은 대신을 권면하는 것이요, 충신으로 대하고 봉록을 많이 줌은 선비들을 권면하는 것이요, 철에 따라 부역을 시키고 세금을 적게 거둠은 백성들을 권면하는 것이요, 날로 살펴보고 달로 시험하여 창고에서 봉록을 줌에 일에 맞추어 함은 백공을 권면하는 것이요, 가는 이를 전송하고 오는 이를 맞이하며 잘하는 이를 가상히 여기고 잘하지 못한 이를 가엾게 여김은 먼 지방 사람을 회유하는 것이요, 끊긴 대를 이어주고 폐지된 나라를 일으켜 주며 혼란한 나라를 다스려 주고 위태로운 나라를 붙들어 주며 조빙을 때에 따라 하고 가는 것을 후하게 하고 오는 것을 박하게 함은 제후들을 은혜롭게 대하는 것이다.[凡爲天下國家, 有九經, 曰修身也, 尊賢也, 親親也, 敬大臣也, 體群臣也, 子庶民也, 來百工也, 柔遠人也, 懷諸侯也. 修身則道立, 尊賢則不惑, 親親則諸父昆弟不怨, 敬大臣則不眩, 體群臣則士之報禮重, 子庶民則百姓勸, 來百工則財用足, 柔遠人則四方歸之, 懷諸侯則天下畏之. 齊明盛服, 非禮不動, 所以修身也, 去讒遠色, 賤貨而貴德, 所以勸賢也, 尊其位, 重其祿, 同其好惡, 所以勸親親也, 官盛任使, 所以勸大臣也, 忠信重祿, 所以勸士也, 時使薄斂, 所以勸百姓也, 日省月試, 旣稟稱事, 所以勸百工也, 送往迎來, 嘉善而矜不能, 所以柔遠人也, 繼絶世, 擧廢國, 治亂持危, 朝聘以時, 厚往而薄來, 所以懷諸侯也.]”라고 한 부분을 가리킨다.[주-D015] 성(誠)을 행지자일(行之者一)로 삼았으니 : 《중용》의 ‘회제후(懷諸侯)’ 구절의 다음 부분은 “무릇 천하와 국가를 다스림에 아홉 가지 법이 있는데 이것을 행하는 것은 한 가지이다.[凡爲天下國家, 有九經, 所以行之者, 一也.]”이다. 이 부분을 주희(朱熹)는 “한 가지는 성실함이니, 한 가지라도 성실하지 못함이 있으면 이 아홉 가지 법이 모두 헛된 글이 된다.[一者, 誠也. 一有不誠. 則是九者皆爲虛文矣.]”라고 하였고, 진덕수(眞德秀)는 《대학연의》에서 “주희가 한 가지를 성실함이라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천하의 이치는 한 가지이면 순수하고 둘이 되면 잡되며 순수하면 성실하고 잡되면 망녕되다. 자신을 수양함에 한 가지로 하지 못하면 선과 악이 뒤섞여 잡되고 어진 이를 높임에 한 가지로 하지 못하면 삿됨과 바름이 뒤섞여 잡되다. 둘이 되지 않고 잡되지 않음이 성실함이 아니고서 어찌 되겠는가. 그러므로 순 임금은 ‘유일’이라 하였고, 이윤은 ‘극일’이라 하였고, 《중용》에서는 ‘행지자일’이라고 한 것이다.[熹之以一爲誠, 何也? 曰天下之理一則純, 二則雜, 純則誠, 雜則妄. 修身不一, 善惡雜矣; 尊賢不一, 邪正雜矣. 不二不雜, 非誠而何? 故舜曰惟一, 伊尹曰克一, 中庸曰行之者一.]”라고 하였다.[주-D016] 후경(後經) …… 뜻입니다 : ‘후경’, ‘후이우후’ 등의 표현은 《홍재전서(弘齋全書)》 〈경사강의(經史講義)〉에 몇 차례 보이는데, 당시 정조와 신하들 간에 사용되었던 《대학》 경문의 분석법으로 보인다. 〈경사강의〉의 내용을 종합하면, 《대학》의 경문을 앞부분과 뒷부분으로 나누어 앞부분을 ‘전경(前經)’, 뒷부분을 ‘후경’으로 불렀으며 ‘전경’은 ‘大學之道’에서 ‘則近道矣’까지이고 후경은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에서 ‘未之有也’까지이다. ‘후이우후’란 ‘후경’ 부분에서 ‘~而后’가 반복되는 구절을 가리키는 것으로 8조목이 ‘物格’에서 시작하여 ‘天下平’에서 마치는 순서이다. 이와 대비되는 용어로 ‘先~其~’가 반복되는 구절을 가리키는 ‘선이우선(先而又先)’이라는 표현도 사용되었는데, 8조목이 ‘天下’에서 시작하여 ‘格物’에서 마치는 순서이다.[주-D017] 천하에서부터 …… 이르렀으니 : 《대학유의》에 인용된 《맹자》의 해당 구절은 〈이루 상(離婁上)〉의 “사람들이 항상 말하기를 ‘천하ㆍ나라ㆍ집’이라 하니, 천하의 근본은 나라에 있고 나라의 근본은 집에 있고 집의 근본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人有恒言, 皆曰天下國家, 天下之本在國, 國之本在家, 家之本,在身.]”라고 한 부분이다.[주-D018] 전경(前經) …… 뜻입니다 : 《홍재전서(弘齋全書)》 〈경사강의(經史講義)〉의 내용을 종합하면, 《대학》의 경문을 앞부분과 뒷부분으로 나누어 앞부분을 ‘전경(前經)’, 뒷부분을 ‘후경’으로 불렀으며 ‘전경’은 ‘大學之道’에서 ‘則近道矣’까지이고 후경은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에서 ‘未之有也’까지이다. ‘선이우선(先而又先)’란 ‘전경’ 부분에서 ‘先~其~’가 반복되는 구절을 가리키는 것으로 8조목이 ‘天下’에서 시작하여 ‘格物’에서 마치는 순서이다.[주-D019] 순자(荀子) : 현재 전하는 《대학유의》에는 《순자》의 구절이 빠져 있다. 아마도 최종 교정 단계에서 삭제된 것인 듯하다. 《대학연의》에 인용되어 있는 《순자》의 해당 구절은 〈군도(君道)〉편의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 대해 묻습니다.’ ‘자신을 수양한다는 말은 들어보았지만 나라를 다스린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임금은 쟁반이니 쟁반이 둥글면 물도 둥근 법이며, 임금은 사발이니 사발이 모나면 물도 모나는 법이다.……임금은 근원이니 근원이 맑으면 강물도 맑고 근원이 탁하면 강물도 탁한 법이다.’[請問爲國. 曰聞修身矣, 未嘗聞爲國也.……君者, 槃也, 槃圓而水圓; 君者, 盂也, 盂方而水方.……君者, 源也, 源淸則流淸, 源濁則流濁.]”라고 한 부분이다.[주-D020] 동중서(董仲舒)의 말 : 《대학유의》에 인용된 동중서의 말은 《전한서(前漢書)》 권56 〈동중서전(董仲舒傳)〉에 “임금이 된 자는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하여 조정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바르게 하여 백관을 바르게 하고, 백관을 바르게 하여 만민을 바르게 하고, 만민을 바르게 하여 사방을 바르게 하니, 사방이 바르게 되면 멀고 가까운 곳 모두 감히 한결같이 바른 길로 나아오지 않음이 없게 된다.[爲人君者正心以正朝廷, 正朝廷以正百官, 正百官以正萬民, 正萬民以正四方, 四方正, 遠近莫敢不一於正.]”라고 한 부분이다.[주-D021] 주자(周子)의 말 : 주자는 주돈이(周敦頤)이다. 《대학유의》에 인용된 주돈이의 말은 《통서(通書)》에 “천하를 다스리는 데 근본이 있으니 자기 자신이며, 천하를 다스리는 데 준칙이 있으니 집안이다. 근본은 반드시 바르게 되어야 하니 근본을 바르게 하는 것은 마음을 성실히 하는 것일 뿐이요, 준칙은 반드시 좋아야 하니 준칙을 좋게 하는 것은 친척을 화목하게 하는 것일 뿐이다. 집안을 대하는 일이 어렵고 천하를 대하는 일은 쉬우며, 집안은 나와 친한 관계이고 천하는 소원한 관계이다. 집안 식구가 이반하게 되는 것은 반드시 부인에게서 시작한다. 그러므로 《주역》에서 〈규괘(睽卦)〉가 〈가인괘(家人卦)〉 다음에 온 것이니, 이는 두 여자가 함께 거처하지만 뜻이 합치되지 않기 때문이다. 요 임금이 두 딸을 단장하여 규수(嬀水) 북쪽의 순(舜)에게 시집보낸 것은 ‘순이 선위할 만한 사람인가? 내가 이에 시험해 보겠다.’라고 하신 것이니, 이는 천하를 다스리는 일을 집안에서 살핀 것이다. 집안을 다스리는 것은 그 몸을 살필 뿐이니, 몸이 단정하고 마음이 성실함을 이른다. 마음을 성실하게 하는 것은 불선한 마음이 일어나는 때에 마음을 회복하는 것일 뿐이니, 불선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망녕된 것이다. 망녕됨에서 회복되면 망녕됨이 없어지고, 망녕됨이 없어지면 성실하게 된다. 그러므로 〈무망괘(无妄卦)〉가 〈복괘(復卦)〉의 다음이 되었고, 〈무망괘〉의 단전(象傳)에 ‘선왕이 이를 보고서 천시(天時)에 독실하고 성대하게 짝하여 만물을 기른다.’라고 하였으니, 심오하도다.[治天下有本, 身之謂也; 治天下有則, 家之謂也. 本必端, 端本, 誠心而已矣; 則必善, 善則, 和親而已矣. 家難而天下易, 家親而天下疏也. 家人離, 必起於婦人, 故睽次家人, 以二女同居而志不同行也. 堯所以釐降二女于嬀汭, ‘舜可禪乎? 吾兹試矣.’ 是治天下, 觀于家. 治家, 觀身已矣, 身端心誠之謂也. 誠心, 復其不善之動而已矣, 不善之動, 妄也. 妄復則无妄矣, 无妄則誠矣. 故无妄次復, 而曰‘先王以, 茂對時育萬物’, 深哉!]”라고 한 부분이다.[주-D022] 서경 대우모(大禹謨) : 《대학유의》에 인용된 〈대우모〉의 해당 구절은 “오너라. 우야.……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니, 정(精)하게 하고 한결같이 하여야 진실로 그 중도(中道)를 잡을 것이다.[來, 禹!……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고 한 부분이다.[주-D023]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 : 《대학유의》에 인용된 〈중훼지고〉의 해당 구절은 “덕이 날로 새로워지면 만방이 그리워하고, 마음이 자만하면 구족이 마침내 떠나갈 것이니, 왕께서는 힘써 큰 덕을 밝히시어 백성들에게 중도(中道)를 세우소서. 의로 일을 다스리고 예로 마음을 다스려야 후손들에게 넉넉함을 드리울 것입니다. 제가 들으니 ‘스스로 스승을 얻는 자는 왕자(王者)가 되고, 남들이 자기만 못하다고 하는 자는 망한다. 묻기를 좋아하면 여유롭고, 스스로 지혜를 쓰면 작아진다.’라고 하였습니다.[德日新, 萬邦惟懷; 志自滿, 九族乃離, 王懋昭大德, 建中于民. 以義制事, 以禮制心, 垂裕後昆. 予聞, 曰‘能自得師者王, 謂人莫己若者亡. 好問則裕, 自用則小’.]”라고 한 부분이다.[주-D024] 탕지반명(湯之盤銘)이 …… 전(傳)이다 : “‘탕지반명’이 바로 그 일”이라는 말은 진덕수가 《대학연의》에서 한 말이고, “‘반명’은 바로 ‘신민’에 대한 전”이라는 말은 《서산독서기(西山讀書記)》에서 한 말이다.[주-D025] 주공(周公)이 …… 입정(立政) : 《대학유의》에 인용된 〈입정〉의 해당 구절은 “문왕이 삼택(三宅)의 마음에 능하시어 이 상사와 사목인(司牧人)을 세우시되 능히 준걸스런 자와 덕이 있는 자로 하셨습니다.[文王惟克厥宅心, 乃克立玆常事司牧人, 以克俊有德.]”라고 한 부분이다.[주-D026] 서경 홍범(洪範)의 구주(九疇) : 《대학유의》에 인용된 〈홍범〉의 해당 구절은 “13년에 왕이 기자를 방문하셨다. 왕이 이에 말씀하기를, ‘아! 기자여. 하늘이 속으로 하민을 안정시켜 거처하는 것을 도와 화합하게 하시니, 나는 그 병이와 인륜이 펴지게 된 이유를 알지 못한다.’라고 하니, 기자가 말하였다. ‘제가 들으니, 옛적에 곤이 홍수를 막아 오행을 어지럽게 늘어놓자 상제께서 진노하여 홍범구주를 내려주지 않으시니, 이륜(彛倫)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곤이 귀양 가서 죽고 우가 뒤이어 일어나자 하늘이 우에게 홍범구주를 내려 주시니, 이륜이 펴지게 되었습니다. 홍범구주의 첫 번째는 오행(五行)이고, 다음 두 번째는 공경하되 오사로써 함이요, 다음 세 번째는 농사에 팔정을 씀이요, 다음 네 번째는 합함을 오기로써 함이요, 다음 다섯 번째는 세움을 황극으로써 함이요, 다음 여섯 번째는 다스림을 삼덕으로써 함이요, 다음 일곱 번째는 밝힘을 계의로써 함이요, 다음 여덟 번째는 상고함을 서징으로써 함이요, 다음 아홉 번째는 향함을 오복으로써 하고 위엄을 보임을 육극으로써 하는 것입니다.’[惟十有三祀, 王訪于箕子. 王乃言曰‘嗚呼! 箕子. 惟天陰騭下民, 相協厥居, 我不知其彛倫攸敍’. 箕子乃言曰‘我聞在昔鯤陻洪水, 汨陳其五行, 帝乃震怒, 不畀洪範九疇, 彛倫攸斁. 鯀則殛死, 禹乃嗣興, 天乃錫禹洪範九疇, 彛倫攸敍. 初一曰五行, 次二曰敬用五事, 次三曰農用八政, 次四曰協用五紀, 次五曰建用皇極, 次六曰乂用三德, 次七曰明用稽疑, 次八曰念用庶徵, 次九曰嚮用五福, 威用六極’.]”라고 한 부분이다.[주-D027] 대대례(大戴禮) 무왕천조(武王踐阼)편 : 《대학유의》에 인용된 〈무왕천조〉의 해당 구절은 “무왕이 즉위한 지 3일째에……사상보를 불러 묻기를 ‘옛날 황제와 전욱의 도가 남아 있습니까?’라고 하자, 사상보가 말하기를, ‘단서에 있으니 왕께서 듣고자 하신다면 재계하소서.’라고 하였다. 왕이 3일을 재계하고 현단복(玄端服)과 면관(冕冠)을 쓰고 사상보 또한 현단복과 면관을 쓰고서 단서를 받들고 들어왔다.……왕이 동쪽을 보고 서고 사상보가 서쪽을 보고 서서 단서의 ‘경이 나태함을 이기는 자는 길하고, 나태함이 경을 이기는 자는 멸망한다. 의가 욕심을 이기는 자는 순조롭고 욕심이 의를 이기는 자는 흉하다. 모든 일이 강하지 않으면 굽게 되고 경하지 않으면 바르지 못하게 된다. 굽으면 멸망하고 경하면 만세를 누린다.’라는 내용을 읽었다.……왕이 단서의 내용을 듣고서 삼가고 두려워하면서 물러나 경계하는 글을 만들어 자리의 네 끝에 명을 새기고 책상에 명을 새기고 거울에 명을 새기고 대야에 명을 새기고 기둥에 명을 새기고 지팡이에 명을 새기고 띠에 명을 새기고 신에 명을 새기고 술잔에 명을 새기고 문에 명을 새기고 창에 명을 새기고 검에 명을 새기고 활에 명을 새기고 창에 명을 새겼다.[武王踐阼三日,……召師尚父而問焉曰‘昔黃帝顓頊之道存乎’, 曰‘在丹書, 王欲聞之, 則齊矣’. 王齊三日, 端冕, 師尚父亦端冕, 奉書而入.……東面而立, 師尚父西面, 道書之言曰‘敬勝怠者吉, 怠勝敬者滅, 義勝欲者從, 欲勝義者凶. 凡事, 不強則枉, 弗敬則不正. 枉者滅廢, 敬者萬世’.……王聞書之言, 惕若恐懼, 退而爲戒書, 於席之四端爲銘焉, 於机爲銘焉, 於鑑爲銘焉, 於盥盤爲銘焉, 於楹爲銘焉, 於杖爲銘焉, 於帶爲銘焉, 於履屨爲銘焉, 於觴豆爲銘焉, 於戶爲銘焉, 於牖爲銘焉, 於劍爲銘焉, 於弓爲銘焉, 於矛爲銘焉.]”라고 한 부분이다.[주-D028] 오집희경지(於緝煕敬止) : 《대학장구》의 전(傳) 3장에 인용된 《시경》 〈문왕(文王)〉에 나오는 말로 “아! 계속하여 밝혀서 공경하여 그쳤다.”는 뜻이다.[주-D029] 서경 열명(說命) : 《대학유의》에 인용된 〈열명〉의 해당 구절은 “왕이 말하였다. ‘이리 오너라. 부열(傅說)아! 나 소자는 옛날에 감반에게 배웠는데 이윽고 황야로 물러갔으며, 하수 가에 들어가 살았으며, 하수에서 박 땅으로 가서 종국에 이르도록 학문이 드러나지 못했다. 너는 짐의 뜻을 가르쳐서 만약 술과 단술을 만들거든 네가 누룩과 엿기름이 되며, 간을 맞춘 국을 만들거든 네가 소금과 매실이 되어야 한다. 너는 여러 가지 방도로 나를 닦아서 나를 버리지 말라. 내가 너의 가르침을 행할 것이다.’ 부열이 말하였다. ‘왕이여! 문견이 많은 사람을 구하는 것은 이 일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옛 가르침을 배워야 얻음이 있을 것이니, 옛 일을 본받지 않고서 장구하게 한다는 것은 제가 들은 바가 아닙니다. 배움은 뜻을 겸손히 해야 합니다. 힘써 때로 민첩하게 배우면 닦여지게 될 것이니, 독실히 믿어 이것을 생각하면 도가 그 몸에 쌓일 것입니다. 가르침은 배움의 반이니, 생각의 처음과 끝을 학문에 쏟으면 그 덕이 닦여짐을 자신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선왕이 이루어 놓은 법을 보시어 길이 잘못이 없게 하소서.’[王曰‘來汝說. 台小子舊學于甘盤, 旣乃遯于荒野, 入宅于河, 自河徂毫, 曁厥終, 罔顯. 爾惟訓于朕志, 若作酒醴, 爾惟麴糱, 若作和羹, 爾惟鹽梅. 爾交修予, 罔予棄. 予惟克邁乃訓’. 說曰‘王! 人求多聞, 時惟建事, 學于古訓, 乃有獲, 事不師古, 以克永世, 匪說攸聞. 惟學遜志, 務時敏, 厥修乃來, 允懷于玆, 道積于厥躬. 惟斅學半, 念終始, 典于學, 厥德修, 罔覺. 監于先王成憲, 其永無愆’.]”라고 한 부분이다.[주-D030] 시경 경지(敬之) : 《대학유의》에 인용된 〈경지〉의 해당 구절은“ 나 소자가 총명하지 못하여 공경하지 못하나, 날로 나아가며 달로 진전하여 학문을 계속 밝혀서 광명함에 이르려 한다. 신하들이 내가 맡은 짐을 보조해주어 나에게 드러난 덕행을 보여줄지어다.[維予小子, 不聰敬止, 日就月將, 學有緝熙于光明, 佛時仔肩, 示我顯德行.]”라고 한 부분이다.[주-D031] 상(商)나라 …… 가깝다 : 《대학연의》 〈대학연의서(大學衍義序)〉에 “요, 순, 우, 탕, 문왕, 무왕의 학문은 성현들의 학문에 비추어 볼 때 순수한 학문이고, 상나라의 고종과 주나라의 성왕의 학문은 성현들의 학문에 가까운 학문입니다. 한나라와 당나라의 현군들의 이른바 학문이라는 것은 이미 성현들의 학문에서 어긋남이 없을 수가 없게 되었는데, 한나라 효원제 이하 몇 사람의 임금들의 학문은 혹은 기예의 학문이었고 혹은 문사의 학문이었으니, 성현들의 학문에서 몹시 어긋나버린 것입니다.[堯, 舜, 禹, 湯, 文, 武之學, 純乎此者也; 商高宗, 周成王之學, 庶幾乎此者也. 漢, 唐賢君之所謂學, 已不能無悖乎此矣, 而漢孝元以下數君之學, 或以技藝, 或以文辭, 則甚謬乎此者也.]”라고 한 부분이다.[주-D032] 한(漢)나라 …… 언행 : 이상의 각 군왕의 언행은 《대학연의》에는 실려 있으나, 현재 전하는 《대학유의》에는 실려 있지 않다. 고제(高帝)의 언행이란, 고제가 천하를 처음 평정하고서 자신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은 것이지 시서(詩書)에서 도움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하자 육가(陸賈)가 문무(文武)를 함께 써야 천하를 장구하게 지킬 수 있다고 대답하였는데 이를 들은 고제가 부끄러워하면서 육가에게 옛 왕조의 흥망성쇠에 관한 책을 지어 올리게 한 것이다. 문제(文帝)의 언행이란, 문제가 가의(賈誼)에게 귀신의 근본에 대해 묻고 대답을 들은 후 자신이 가의보다 학문이 낫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 말한 것이다. 무제(武帝)의 언행이란, 무제가 동중서(董仲舒)에게 학문의 요체를 묻고 예관(倪寬)과 경학(經學)에 대해 이야기하고 채의(蔡義)에게 시를 진강하게 한 것이다. 선제(宣帝)의 언행이란, 선제가 조칙을 내려 자신은 육예(六藝)와 대도(大道)에 어두우므로 선왕의 도리에 밝은 사람을 천거해 올리라고 한 것이다. 광무제(光武帝)의 언행이란, 광무제가 환영(桓榮)과 함께 경전을 강론하면서 지칠 줄 몰라 했다는 것이다. 명제(明帝)의 언행이란, 명제가 환영에게 경전을 배우면서 신하가 아니라 스승의 예로 지극히 존숭하였다는 것이다. 장제(章帝)의 언행이란, 장제가 동군(東郡) 태수로 있던 장포(張酺)에게 진강을 받으면서 먼저 제자로서의 예를 행한 다음 군신의 예를 행했다는 것이다. 당(唐)나라 태종(太宗)의 언행이란, 태종이 항상 학문에 힘을 쓰면서 요순(堯舜)과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의 도리를 높이고 군주의 한 마음이 흥망의 열쇠임을 말한 것이다. 현종(玄宗)의 언행이란, 현종이 마회소(馬懷素), 저무량(褚無量), 장열(張說) 등의 학자를 우대한 것이다. 헌종(憲宗)의 언행이란, 헌종이 선왕의 전범 및 경전과 사서의 교훈들을 귀감삼아 14조의 경책구를 만든 것이다. 진덕수는 《대학연의》에서 이상 각 군왕의 좋은 언행을 수록함과 동시에 각 조항마다 그 군왕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종 폐단이 생기는 것을 막지 못하고 정사가 어지럽게 된 원인을 함께 제시하였다.[주-D033] 한나라와 …… 되었다 : 《대학연의》 〈대학연의서(大學衍義序)〉에 “요, 순, 우, 탕, 문왕, 무왕의 학문은 성현들의 학문에 비추어 볼 때 순수한 학문이고, 상나라의 고종과 주나라의 성왕의 학문은 성현들의 학문에 가까운 학문입니다. 한나라와 당나라의 현군들의 이른바 학문이라는 것은 이미 성현들의 학문에서 어긋남이 없을 수가 없게 되었는데, 한나라 효원제 이하 몇 사람의 임금들의 학문은 혹은 기예의 학문이었고 혹은 문사의 학문이었으니, 성현들의 학문에서 몹시 어긋나버린 것입니다.[堯, 舜, 禹, 湯, 文, 武之學, 純乎此者也; 商高宗, 周成王之學, 庶幾乎此者也. 漢, 唐賢君之所謂學, 已不能無悖乎此矣, 而漢孝元以下數君之學, 或以技藝, 或以文辭, 則甚謬乎此者也.]”라고 한 부분이다.[주-D034] 무릇 …… 인용하였다 : 《대학장구(大學章句)》의 경문(經文)과 전문(傳文) 사이에 주희가 “무릇 전문은 경전을 섞어 인용하여 정비된 기강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문리가 이어지고 혈맥(血脈)이 관통하여 깊고 얕음과 처음과 끝이 몹시 정밀하니, 익숙히 읽고 자세히 음미하면 오래 시간이 지남에 응당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다 풀이하지 않는다.[凡傳文, 雜引經傳, 若無統紀. 然文理接續, 血脈貫通, 深淺始終, 至爲精密, 熟讀詳味, 久當見之, 今不盡釋也.]”라고 하였다.[주-D035] 한나라 …… 조목 : 《대학연의》에는 실려 있으나, 현재 전하는 《대학유의》에는 실려 있지 않다. 《홍재전서》 127권 〈유의평례(類義評例)〉의 내용을 보면, 정조가 호굉의 설에 속하는 것은 대다수 추려 내었으며 이 조목 역시 추려내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조목은 고제(高帝)의 언행을 수록한 것으로, 고제가 천하를 처음 평정하고서 자신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은 것이지 시서(詩書)에서 도움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하자 육가(陸賈)가 문무(文武)를 함께 써야 천하를 장구하게 지킬 수 있다고 대답하였는데 이를 들은 고제가 부끄러워하면서 육가에게 옛 왕조의 흥망성쇠에 관한 책을 지어 올리게 한 것이다.[주-D036] 호오봉(胡五峯)의 설 : 《대학연의》에 기록된 호굉(胡宏)의 설은 매우 긴데, 그 대략을 요약하여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육가(陸賈)가 만약 ‘폐하께서 천하를 얻은 것은 무력 때문만이 아니라 폐하의 성품 자체가 이미 관대하고 인의로우며 지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폐하께서 유학을 장려한다면 천하가 바로잡힐 것입니다.’라고 대답하고 고제가 이 말을 채용했더라면, 기강이 바로 섰을 것이며 여후(呂后)에 의해 척부인(戚夫人)이 비극적으로 죽거나 제후왕들이 비명횡사하거나 외척이 전횡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군신의 도리가 바로잡히고 제후를 봉하여 세워 튼튼한 버팀목이 되게 하여 흉노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정전(井田)의 제도가 회복되었을 것이며 권력이 바로 섰을 것이다.” 이 설의 원 출처는 호굉이 지은 《지언(知言)》이다.[주-D037] 선제(宣帝)가 …… 조목 : 《대학연의》에는 실려 있으나, 현재 전하는 《대학유의》에는 실려 있지 않다. 《홍재전서》 127권 〈유의평례〉에, 정조가 왕도와 패도를 섞어서 썼다는 설은 굳이 실을 것이 없다고 말한 내용이 있다. 이 설은 선제(宣帝)의 언행을 수록한 것으로, 선제가 조칙을 내려 자신은 육예(六藝)와 대도(大道)에 어두우므로 선왕의 도리에 밝은 사람을 천거해 올리라고 한 것이다.[주-D038] 이 …… 조목 : 《대학연의》에는 선제가 조서를 내린 조목 다음에, 선제가 유학자를 중용하라는 태자의 요청에 “한실(漢室)은 왕도와 패도를 섞어 쓴다.”라고 말한 조목이 실려 있다.[주-D039] 유강공(劉康公)이 …… 조목 : 본 서찰의 이 조목에서부터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인(仁)은 하늘의 높은 벼슬이며’라고 한 조목”까지는 《대학연의》 및 《대학유의》에서 〈격물치지지요(格物致知之要)〉에 해당한다. 이 조목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성공(成公) 13년에, 유강공이 “내가 들으니 사람은 하늘과 땅의 중정한 기운을 받아서 태어나니, 이것이 이른바 명(命)입니다. 그러므로 동작과 예의와 위의의 법칙이 있어서 명을 안정시키는 것입니다. 이를 잘하는 사람은 이것을 수양하여 복을 부르고 잘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것을 실추시켜 재앙을 불러들입니다.[吾聞之, 民受天地之中以生, 所謂命也. 是以有動作禮義威儀之則, 以定命也. 能者養之以福, 不能者敗以取禍.]”라고 한 부분을 《대학연의》에서 인용한 것이다. 유강공의 이 말은 《대학연의》의 〈격물치지지요(格物致知之要)〉와 〈수신지요(修身之要)〉 두 부분에서 인용하고 있는데, ‘民受天地之中以生’은 두 부분 모두에서 인용되었으나 〈격물치지지요〉에서는 그 뒤에 ‘所謂命也’만을 인용하였고 〈수신지요〉에서는 그 뒤에 ‘是以~取禍’를 인용하였다. 윤광안의 말에서 중첩되어 나온다는 것은 후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대학유의》는 《대학연의》와 마찬가지로 현재 두 부분이 모두 인용되어 있다.[주-D040] 한 쪽은 상세하게 …… 예 : 원문의 ‘詳略互見’을 직역하면 “상세함과 간략함을 상호적으로 드러낸다.”이다. 이는 이미 인용된 어떤 내용이 필요에 따라 다른 조목에 중첩되어 나올 경우 각각의 조목의 필요에 따라 어떤 쪽은 상세하게 어떤 쪽은 간략하게 하여 두 부분 모두를 다 수록한다는 뜻이다. 이는 《대학유의》 편찬에 있어서의 한 가지 격식으로, 범례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대학연의(大學衍義)》나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에서 《대학》의 글을 인용하면서 다른 경전의 글을 인용할 때와 마찬가지로 경전의 본문을 온전히 적어놓은 이유는, 《대학연의》나 《대학연의보》에서는 《대학유의》에서처럼 《대학》의 글을 따로 싣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학유의》에서는 지금 이미 경 1장과 전 10장을 각 강목의 첫머리에 적어놓았으니, 그 편 안에서 또 《대학》의 글을 인용함에 있어 비단 중복되게 나와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대학》은 이 책의 근본 경전이므로 더욱이 다른 책들처럼 뒤섞어 인용하는 예를 적용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강목 첫머리가 아니라 편 안에서 《대학》의 글을 인용한 부분에서는 단지 ‘《대학》 제 몇 장 몇 절’이라고만 표기하였고, 중복되게 인용한 그 밖의 다른 고서의 내용들로서 부득불 중복되게 둘 수밖에 없는 것들은 비록 9경과 4자의 책이라 할지라도 각각 해당 조목에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뜻에 따라 해당 구절을 잘라서 나누어 수록하여 상세한 것과 간략한 것이 상호적으로 드러나게 하였다.[本書之引大學文, 與他經傳一例備書者, 以大學之不載此篇也. 今旣以經一傳十, 各冠於綱條之首, 則其篇中所引, 不惟不可重出, 大學爲此書之本經, 尤不當與他書同在雜引之例. 故大學文所引處, 只以大學第幾章第幾節標之, 其外古書之疊引者, 有不得不並存處, 則雖九經四子, 各以其條所重之義, 節取而分載之, 使詳畧互見焉.]”[주-D041] 주역 …… 조목 : 《대학유의》에 인용된 〈문언〉의 해당 구절은 “원은 선의 으뜸이요 형은 아름다움이 모인 것이요 이는 사물이 마땅함을 조화롭게 얻음이요 정은 일의 근간이다. 군자가 인을 체행함이 남의 우두머리가 될 만하며 모임을 아름답게 함이 예에 부합하며 물건을 이롭게 함이 의에 조화되며 정하여 견고함이 일의 근간이 될 수 있다. 군자는 이 네 가지 덕을 행하는 자이므로 건은 원하고 형하고 이하고 정하다 한 것이다.[元者, 善之長也; 亨者, 嘉之會也; 利者, 義之和也; 貞者, 事之幹也. 君子體仁足以長人, 嘉會足以合禮, 利物足以和義, 貞固足以幹事. 君子行此四德者, 故曰乾元亨利貞.]”라고 한 부분이다.[주-D042] 이 …… 것입니다 : 본래 진덕수는 《대학연의》에서 《주역》의 해당구절과 관련된 주희(朱熹)의 설을 대거 인용한 후, “이치에 어두운 세상 사람들은 모두 하늘과 사람이 둘로 나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조목으로 살펴볼 것 같으면 사람과 하늘은 하나가 아닌 적이 없습니다. 대개 하늘에 있어서는 원형이정이 되고 사람에게 있어서는 인의예지가 되는 것입니다.……[世之昧於理者, 皆言天與人二. 今以此條觀之, 則人之與天未嘗不一也. 蓋在天則爲元亨利貞, 而在人則爲仁義禮智.……]”라고 하였다. 그런데 《대학유의》에서는 주희의 설을 모두 수록하지 않았으므로, 진덕수가 ‘이 조목’이라고 한 구절 역시 삭제해야 한다는 것이 지금 윤광안의 견해인 것이다.[주-D043] 중용에 …… 조목 : 《대학유의》에 인용된 《중용》의 해당 구절은 “하늘이 명하신 것을 성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 하고, 도를 법칙에 따라 등급 짓고 제한을 마련해 둔 것을 교라 한다.[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라고 한 부분이다.[주-D044] 주자의 …… 내용입니다 : 《중용》 수장(首章)에 대한 《중용장구(中庸章句)》에서의 주자의 해설은 다른 부분은 모두가 동일한데 마지막 부분은 초본과 정본에 차이가 있다. 정본 해설의 마지막 부분은 “대개 사람들이 자기 몸에 성이 있음은 알면서 그것이 하늘에서 나왔다는 것은 알지 못하고, 일에 도가 있음은 알면서 성에서 말미암았다는 것은 알지 못하고, 성인의 가르침이 있음은 알면서 나에게 본래부터 소유되어 있는 것을 말미암아 만들어졌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사께서 여기에서 첫 번째로 이 점을 드러내 밝히셨으니, 동중서(董仲舒)의 이른바 ‘도의 큰 근원이 하늘에서 나왔다.’는 것 또한 이러한 뜻이다.[蓋人知己之有性而不知其出於天, 知事之有道而不知其由於性, 知聖人之有敎而不知其因吾之所固有者裁之也. 故子思於此, 首發明之, 而董子所謂道之大原出於天, 亦此意也.]”라고 하였고, 초본에서는 “대개 사람이 사람인 까닭과 도가 도인 까닭과 성인이 교인 까닭은 그 유래를 따져보면 하늘에 근본하여 나에게 구비된 것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배우는 자가 이러한 점을 안다면 그 학문에 있어 힘을 어디에다 써야할 지를 알게 되어 스스로 그만둘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자사께서 여기에서 첫 번째로 이 점을 드러내 밝히셨으니, 이 글을 읽는 자들은 마땅히 깊이 체인하여 묵묵히 깨달아야 할 것이다.[蓋人之所以爲人, 道之所以爲道, 聖人之所以爲教, 原其所自, 無一不本於天而備於我, 學者知之, 則其於學, 知所用力而自不能已矣. 故子思於此, 首發明之, 讀者所宜深體而黙識也.]”라고 하였다. 초본의 내용은 《사서대전(四書大全)》의 주석 등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주희(朱熹)의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의 해당 부분에는 초본의 주석대로 되어 있다.[주-D045] 정우(定宇) …… 것입니다 : 《사서대전(四書大全)》은 원나라 때의 예사의(倪士毅, 1303~1348)가 편찬한 《사서집석(四書輯釋)》을 바탕으로 하였으며, 예사의는 진력(1252~1334)의 제자이다.[주-D046] 만장(萬章)이 …… 조목 : 《대학유의》에 인용된 《맹자》 〈만장 상(萬章上)〉의 해당 구절은 “만장이 묻기를 ‘순 임금이 밭에 가서 하늘을 부르며 우셨으니, 어찌하여 부르짖으며 우신 것입니까?’라고 하자 맹자께서 ‘원망하고 사모하신 것이다.’[萬章問曰‘舜往于田, 號泣于旻天, 何爲其號泣也’, 孟子曰‘怨慕也’.]”라고 한 부분에서부터 “대효는 종신토록 부모를 사모하는 것이니, 50세까지 부모를 사모한 자를 나는 위대한 순 임금에게서 보았노라.[大孝, 終身慕父母, 五十而慕者, 予於大舜見之矣.]”라고 한 부분까지이다.[주-D047] 진덕수의 …… 듯합니다 : 《대학연의》에서 진덕수가 “맹자는 위대한 순 임금의 마음을 알았다고 할 만합니다. 대개 천하의 일들 가운데서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할 만한 것들을 궁구해 보면 모두 나의 마음 밖에 있는 외물들입니다. 성인은 이러한 것들을 뜬구름처럼 보았으므로 그것을 얻거나 잃거나 그것이 오거나 가거나 간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오직 부모와의 관계가 순하지 못하면 이것을 자신의 큰 죄로 여기고 감히 스스로를 용서하지 않았던 것인데, 사람들은 순 임금의 원망을 원망으로 알았고 맹자만이 순 임금의 그러한 원망은 바로 부모를 사모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모한다는 말은 깊이 사랑하고 절절히 그리워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나이 50이 되면 쇠약해지기 시작하니, 《예기(禮記)》에 이른바 ‘상을 당하면 지나치게 슬퍼하여 몸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때입니다. 그런데 위대한 순 임금은 이때에 오히려 부모를 사모하였으니, 성인의 순수한 효심은 늙었다고 하여 쇠하지 않는 것입니다. 양웅이 또한 말하기를 ‘부모를 섬김에 부족하다는 것을 스스로 알았던 이는 순 임금일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대개 순 임금이 비록 이미 그 부모에게 순종하였으나 그 마음에는 항상 부족한 듯 여겼으니 이것이 순 임금이 종신토록 부모를 사모하였던 까닭입니다.[孟子可謂知大舜之心矣. 蓋窮天下之可欲, 皆外物也. 聖人視之, 如浮雲然, 得喪去來, 不以介意. 惟不順於父母, 則以爲己之大罪而不敢自恕, 人知舜怨之爲怨, 獨孟子知其怨乃所以爲慕. 慕之爲言, 愛之深思之切也. 五十始衰, 禮所謂不致毁之時也. 大舜於此猶慕焉, 聖人純孝之心, 不以老而衰也. 楊雄亦曰‘事父母, 自知不足者, 其舜乎’, 蓋舜雖已順其親, 而其心常若不足, 此其所以爲終身之慕.]”라고 한 부분을 두고 한 말이다.[주-D048] 전부 삭제함만 못합니다 : 《홍재전서》 127권 〈유의평례〉의 내용을 보면, 정조는 전부 삭제하는 쪽을 옳다고 하였다. 현재 전하는 《대학유의》에는 해당 부분이 모두 삭제되어 있다.[주-D049] 공자께서 …… 조목 : 《대학유의》에 인용된 《논어》 〈이인(里仁)〉의 해당 구절은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증삼아! 우리 도는 하나의 이치로 꿰뚫는다.’라고 하니, 증자가 ‘예.’라고 하였다. 공자가 나가시자 문인들이 ‘무슨 말입니까?’라고 물었는데, 증자가 말하기를 ‘부자의 도는 충서일 뿐이다.’라고 하였다.[子曰‘參乎! 吾道一以貫之’, 曾子曰‘唯’. 子出, 門人問曰‘何謂也’, 曾子曰‘夫子之道, 忠恕而已矣’.]”라고 한 부분이다.[주-D050] 충출(忠出) …… 듯합니다 : 《대학연의》에서는 《논어집주(論語集註)》의 주석들을 인용한 다음 《논어집주》 외에 《논어혹문(論語或問)》, 《주자어류(朱子語類)》 등에서도 해당 부분에 관련된 주석들을 인용하고 있다. 본문에서의 집주란 《논어집주》가 아니라 《대학연의》에서 이러한 주석들을 모아놓은 것을 가리킨다. ‘충출’ 부분은 《주자어류》의 “충은 서를 말미암아 드러나고 서는 충을 말미암아 나온다.[忠因恕見, 恕由忠出.]”라고 한 것을 인용한 부분이다. 《대학연의》에서는 이 부분 다음에 《주자어류》의 “천지는 무심의 충서이고, 성인은 인위가 없는 충서이고 학자는 하기를 구하는 충서이다.[天地是無心底忠恕, 聖人是無爲底忠恕, 學者是求做底忠恕.]”라고 한 부분을 “又曰‘天地則無心之忠恕, 聖人是無爲之忠恕, 學者則有爲之忠恕’.”라고 약간의 변경을 하여 인용하고 있다.[주-D051] 주자어류(朱子語類)에는 …… 없습니다 : 《홍재전서》 127권 〈유의평례〉의 내용을 보면, 정조는 굳이 수록하지 않아도 된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는데 현재 전하는 《대학유의》에는 해당 부분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주-D052] 맹자께서 …… 조목 : 《대학유의》에 인용된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의 해당 구절은 “인은 하늘의 높은 벼슬이며, 사람이 편안히 거처할 집이다. 그러나 이것을 막는 이가 없는 데도 인하지 못하니, 이는 지혜롭지 못한 것이다.[夫仁, 天之尊爵也, 人之安宅也, 莫之禦而不仁, 是不智也.]”라고 한 부분이다.[주-D053] 진덕수의 …… 듯합니다 : 《대학연의》에는 “인은 내가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니, 진실로 인을 실행하고자 한다면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불인한 짓을 기꺼이 하니 어찌 지혜롭지 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인과 지혜 이 두 가지는 항상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이니, 불인하면 지혜롭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하면 불인하게 됩니다.[仁者, 我所自有, 茍欲爲之, 誰能止者? 乃甘心於不仁, 豈非不智乎? 故仁智二者常相須焉, 不仁, 斯不智矣; 不智, 斯不仁矣.]”라는 진덕수의 설이 달려 있다. 현재 전하는 《대학유의》에는 “常相須焉”까지만이 인용되어 있다.[주-D054] 상수(相須) …… 듯합니다 : 《홍재전서》 127권 〈유의평례〉의 내용을 보면, 정조는 “불인한 짓을 기꺼이 하니 어찌 지혜롭지 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라는 부분에 이미 두 구절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현재 전하는 《대학유의》는 이러한 정조의 뜻이 반영된 것이다.[주-D055] 한(漢)나라 …… 조목 : 이 조목에서부터 “이상은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이 처음 나뉘어질 때를 삼가라는 것이다.”라고 한 조목까지는 〈성의정심지요(誠意正心之要)〉에 해당한다. 《대학유의》에 실린 가산의 말은 《전한서(前漢書)》 권51 〈가산열전(賈山列傳)〉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한 것으로, 그 주된 내용은 진나라가 아방궁(阿房宮)과 치도(馳道)를 화려하고 장대하게 만들었으나 결국 다 사라지고 후세 사람들은 그것을 이용할 수도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주-D056] 문제가 …… 조목 : 《대학연의》에는 가산의 말 조목 다음에 문제는 검소하여 노대를 만들려고 하면서 그 비용을 계산해보니 열 가정의 재산에 해당되었으므로 즉시 그쳤다는 조목이 실려 있다. 《대학유의》에는 가산의 말 조목 다음에 이 조목이 없다.[주-D057] 법규와 …… 거처〔宮闕之居〕 : 《대학유의》 〈치국평천하지요(治國平天下之要)〉의 항목이다.[주-D058] 대학 …… 조목 : 이 조목에서부터 “이상은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이 처음 나누어질 때를 삼가라는 것이다.”라고 한 조목까지는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이 조목은 《대학유의》에도 《대학》의 본문은 제시하지 않고 동일하게 “전 6장 제1절”이라고만 되어 있다. 《대학》의 해당구절은 “이른바 그 뜻을 성실히 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것이니, 악을 미워하기를 악취를 싫어하는 것과 같이 하며, 선을 좋아하기를 아름다운 미색을 좋아하는 것과 같이 해야 하니, 이것을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라 이른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것이다.[所謂誠其意者, 毋自欺也, 如惡惡臭, 如好好色, 此之謂自謙. 故君子必愼其獨也.]”이다.[주-D059] 구준(丘濬)의 …… 합니다 : ‘언야’ 구절은 《대학연의보》에 “《대학장구》에서 ‘이것을 삼가서 그 기미를 살펴야 한다.’라고 할 때의 이른바 ‘이것’은 홀로 있을 때를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章句謂‘謹之於此, 以審其幾’, 所謂此者, 指獨而言也.]”라고 한 부분이다.‘개학’에서부터 ‘연기’까지의 구절은 《대학연의보》에 “대개 배우는 자가 앎을 지극히 하는 공부를 할 즈음에는, 진실로 이미 그 마음에 일어나는 것에 선과 악이 있음을 알며, 또한 진실로 이미 선은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이고 악은 마땅히 제거해야 할 것이라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그 한 생각이 처음 마음에서 일어나는 잠깐 사이 단서가 처음 생겨날 때 실제가 있기도 하고 실제가 없기도 합니다.[蓋以學者用功於致知之際, 則固已知其心之所發, 有善有惡矣, 亦固已知其善之當爲而惡之當去矣. 然其一念始發於心, 須臾之頃, 端緒之初, 有實焉, 有不實焉.]”라고 한 부분이다. 이 부분은 현재 전하는 《대학유의》에 실려 있으므로 윤광안의 의견이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대학유의》에는 ‘蓋以學’이 ‘蓋學’으로 되어 있다. 윤광안이 구절을 ‘연기’에서 끊은 것은 아마도 ‘一念始發於心’ 이후로는 당시에 이미 《대학유의》에 싣는 것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지자’ 구절은 《대학연의보》에 “대개 다른 사람은 미처 알지 못하지만 자신은 홀로 알고 있는 것이다.[蓋有他人所不及知, 而己所獨知者.]”라고 한 부분이다. 《대학유의》에는 ‘知者’가 ‘知之者’로 되어 있다.‘시내’에서 ‘분지’까지의 구절은 《대학연의보》에 “이것이 바로 사람의 마음에서 생각이 처음 싹터 움직이는 단서이며 선악과 진위가 나뉘는 시초입니다.[是乃人心念慮初萌動之端, 善惡誠僞所由分之始.]”라고 한 부분이다. 윤광안이 ‘分之始’가 아닌 ‘分之’에서 구절을 끊은 것은 오류인지 아니면 거기까지 해도 말이 되기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부분은 현재 전하는 《대학유의》에 실려 있지 않다.‘시즉’에서부터 ‘독야’까지의 구는 “이것은 이른바 홀로 있을 때라는 것이다.[是則所謂獨也.]”라고 한 부분이며, ‘각수’에서부터 ‘소효’까지의 절은 “각기 이르는 바에 따라 공부를 하고 이미 드러나기를 기다려 힘을 다한다면 또한 범범하기만 하고 절실하지 못하며 수고롭기만 하고 효과는 적을 것입니다.[各隨所至而用功, 待其旣著而致力, 則亦泛而不切, 勞而少效矣.]”라고 한 부분이다. 이 부분들은 모두 《대학유의》에 그대로 실려 있다.‘보입’ 운운한 부분이란 구준이 《대학연의보》를 지으면서 《대학연의》에는 없는 ‘심기미(審幾微)’ 부분을 보충하여 넣은 취지를 설명한 부분으로 이 조목의 전후로 이와 유사한 논지의 말이 서술되어 있다.[주-D060] 새로 …… 불과하니 : 정확히 어떤 부분을 가리키는지 미상이나, 지와 의가 서로 연관관계를 가진다는 말을 미루어보면, 윤광안이 새로 첨가할 것을 제시한 ‘개학’에서부터 ‘연기’까지의 구절을 가리키는 듯하다.[주-D061] 중용 …… 조목 : 《대학유의》에 인용된 《중용》의 해당 구절은 “숨겨진 것보다 드러나는 것은 없으며 미세한 것보다 나타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 있을 때에 삼가는 것이다.[莫見乎隱, 莫顯乎微, 故君子愼其獨也.]”라고 한 부분이다. 아래에 전개되는 윤광안과 명고의 논의를 보면 애초에는 이 조목 위의 “대학 전 6장 제1절” 조목처럼 ‘중용 수장 제3절’이라고만 표기하고 《중용》의 해당 구절은 인용해두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 《대학유의》에는 ‘중용 수장 제3절’이라고 되어 있지 않고 《중용》의 해당 구절이 인용되어 있다. 이는 윤광안과 명고의 논의가 합치되었고 정조 또한 동의하였기 때문에 이루어진 결과이다.[주-D062] 오직 …… 것입니다 : 《대학》의 본문이 나오면 모두 그렇게 썼다는 뜻이 아니라, 각 편에 해당하는 《대학》의 본문을 부연하는 부분에서 《대학》의 내용을 인용할 경우에는 단지 ‘몇 장 몇 절’이라고 썼다는 말이다.[주-D063] 혹 …… 방법 : 원문의 ‘詳略互見’을 직역하면 “상세함과 간략함을 상호적으로 드러낸다.”이다. 이는 이미 인용된 어떤 내용이 필요에 따라 다른 조목에 중첩되어 나올 경우 각각의 조목의 필요에 따라 어떤 쪽은 상세하게 어떤 쪽은 간략하게 하여 두 부분 모두를 다 수록한다는 뜻이다. 이는 《대학유의》 편찬에 있어서의 한 가지 격식으로, 범례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대학연의(大學衍義)》나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에서 《대학》의 글을 인용하면서 다른 경전의 글을 인용할 때와 마찬가지로 경전의 본문을 온전히 적어놓은 이유는, 《대학연의》나 《대학연의보》에서는 《대학유의》에서처럼 《대학》의 글을 따로 싣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학유의》에서는 지금 이미 경 1장과 전 10장을 각 강목의 첫머리에 적어놓았으니, 그 편 안에서 또 《대학》의 글을 인용함에 있어 비단 중복되게 나와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대학》은 이 책의 근본 경전이므로 더욱이 다른 책들처럼 뒤섞어 인용하는 예를 적용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강목 첫머리가 아니라 편 안에서 《대학》의 글을 인용한 부분에서는 단지 ‘《대학》 제 몇 장 몇 절’이라고만 표기하였고, 중복되게 인용한 그 밖의 다른 고서의 내용들로서 부득불 중복되게 둘 수밖에 없는 것들은 비록 9경과 4자의 책이라 할지라도 각각 해당 조목에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뜻에 따라 해당 구절을 잘라서 나누어 수록하여 상세한 것과 간략한 것이 상호적으로 드러나게 하였다.[本書之引大學文, 與他經傳一例備書者, 以大學之不載此篇也. 今旣以經一傳十, 各冠於綱條之首, 則其篇中所引, 不惟不可重出, 大學爲此書之本經, 尤不當與他書同在雜引之例. 故大學文所引處, 只以大學第幾章第幾節標之, 其外古書之疊引者, 有不得不並存處, 則雖九經四子, 各以其條所重之義, 節取而分載之, 使詳畧互見焉.]”[주-D064]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에 …… 조목 : 이 조목에서부터 이 서찰의 마지막까지는 《대학연의보》 및 《대학유의》 〈치국평천하지요(治國平天下之要)〉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대학유의》에 인용된 《춘추곡량전》 소공(昭公) 19년의 해당 구절은 “학문에 일정한 방법이 없고 심지가 열리지 않는 것은 자신의 죄이다. 심지가 이미 열렸는데 명성이 알려지지 않는 것은 벗의 죄이다. 명성이 이미 알려졌는데 유사가 그 사람을 천거하지 않는 것은 유사의 죄이다. 유사가 그 사람을 천거했는데 왕자가 등용하지 않는 것은 왕의 허물이다.[學問無方, 心志不通, 身之罪也. 心志旣通而名譽不聞, 友之罪也. 名譽旣聞, 有司不擧, 有司之罪也, 有司擧之, 王者不用, 王者之過也.]”라고 한 부분이다.[주-D065] 구준의 설 : 《대학연의보》의 《춘추곡량전》 해당 조목에 붙어 있는 구준의 설은 “이 말은 신하가 현자를 보고도 천거하지 않고 임금이 신하가 현자를 천거했는데도 등용하지 못하면 똑같이 과실이 있다는 뜻입니다.[此言則爲臣者見賢而不舉, 爲君者其臣舉賢而不能用, 鈞爲有失.]”이다. 그런데 이 말에는 윤광안의 말처럼 딱히 고서를 인용해 놓은 부분이 없고 결론 운운할 만한 내용도 아니라서 윤광안이 가리킨 구준의 설은 이 설이 아닌 듯하다. 그리고 구준의 설을 삭제하려면 《대학연의보》에서 인용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내용을 수록해야 하며 그 뜻을 없애버릴 수 없다는 명고의 말을 아울러 참고하면 다음과 같이 추측할 수 있다. 《대학연의보》에는 《춘추곡량전》의 조목과 아울러 《춘추좌씨전》 양공(襄公) 3년의, 치사(致仕)를 청하는 진(晉)나라의 중군위(中軍衛) 기해(祁奚)에게 진후(晉侯)가 후임자를 묻자 기해가 자신과는 원수지간인 해호(解狐)와 자신의 아들인 오(午)를 차례로 천거하고, 중군위의 보좌인 양설직(羊舌職)의 후임으로 양설직의 아들 양설적(羊舌赤)을 천거하는 조목이 실려 있다. 구준은 이 《춘추좌씨전》 조목에도 설을 붙였는데, 다른 책에 실려 있는 기해의 천거 고사를 소개하면서 그 책의 내용이 《춘추좌씨전》보다 더욱 분명하며 어떤 부분은 신하가 현자를 천거하고 임금을 보좌하는 중요한 방도에 해당된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그런데 처음 《대학유의》를 편차할 때에는 《춘추곡량전》의 조목만 인용하고 《춘추좌씨전》의 조목은 삭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춘추곡량전》의 조목 아래에 앞서 소개한 바 《춘추곡량전》 조목에 붙어 있던 구준의 원래 설이 아니라 《춘추좌씨전》 조목 아래에 있었던 설을 수록하여, 기해의 인재 천거 고사 내용도 함께 제시될 수 있도록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기 때문에 윤광안은 구준의 설이 원래 조목에 해당되지도 않고 고서의 내용만 인용한 채 결론을 짓지 않았다고 말하였을 것이다. 이는 구준의 설을 없앨 것 같으면 《대학연의보》에 원래 있던 《춘추좌씨전》의 조목을 다시 수록해야 한다는 명고의 말과도 맞아떨어진다.[주-D066] 구준의 …… 없습니다 : 《홍재전서(弘齋全書)》 권127 〈유의평례(類義評例)〉의 내용을 보면, 정조는 “처음에 초록했다가 들어내었던 《춘추좌씨전》의 본전(本傳) 부분을 지금 서형수의 설을 따라 남겨두라.”고 하고 있다. 현재 전하는 《대학유의》에는 이러한 의견이 반영되어 《춘추곡량전》과 《춘추좌씨전》의 기사 내용이 제시되어 있으며, 구준의 설은 모두 삭제되어 있다.[주-D067] 황하로 …… 옳습니다 : 《홍재전서》 권127 〈유의평례〉의 내용을 보면, 윤광안과 명고의 의견은 일치했으나 정조는 다른 부분에서도 우리나라와 긴요한 문제가 아닌데도 수록한 부분이 있고 황하의 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고 있다. 현재 전하는 《대학유의》에는 황하 관련 내용이 그대로 실려 있다.[주-D068] 경복전고(景福殿庫) : 송(宋)나라 태종이 군대를 움직이거나 기근(饑饉)이 발생할 때를 대비하여 재화를 저축해 놓을 용도로 만든 창고의 이름이다.[주-D069] 사신왈(史臣曰)로 …… 없습니다 : ‘사신왈’ 부분은 《송사(宋史)》 173권 〈식화지(食貨志)〉의 내용을 발췌 인용한 것이다. 원래 《대학연의보》에는 경복전고 조목과 〈식화지〉 조목이 별개의 조목으로 독립되어 있다. 그런데 윤광안의 말을 보면 애초의 《대학유의》에서는 경복전고 조목을 두고 그 밑에 구준의 설과 〈식화지〉의 내용을 붙임으로 둔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윤광안이 이 조목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주-D070] 사신왈유(史臣曰有) : 《대학연의보》에서 《송사》 173권 〈식화지〉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사신은 말한다. 송나라는 중세 이후로부터[史臣曰有宋自中世以後]”라고 시작한 것을 가리킨다.[주-D071] 구준의 …… 못합니다 : 현재 전하는 《대학유의》에는 경복전고 조목을 비롯하여 여기에서 논의된 모든 조목이 삭제되어 있다.[주-D072] 전동(典同)이 …… 조목 : 《대학유의》에 인용된 《주례(周禮)》 〈춘관(春官) 전동〉의 해당 구절은 “전동이 육률과 육동의 조화를 관장하여 천지와 사방과 음양의 소리를 분별하여 악기를 만든다.……십이율로 악기의 넓이와 길이를 정하고 십이성으로 종의 용량을 정하니, 무릇 옛 악기를 조율할 때도 이러한 방법으로 한다.[典同掌六律六同之和, 以辨天地四方陰陽之聲, 以爲樂器.……以十有二律爲之數度, 以十有二聲爲之齊量, 凡和樂亦如之.]”라고 한 부분이다. 여기에서 ‘육률’은 양성(陽聲)이고 ‘육동’의 ‘동’은 ‘여(呂)’와 같은 뜻으로 음성(陰聲)이다.[주-D073] 태사(太師)의 …… 조목 : 《주례(周禮)》 〈춘관(春官) 태사〉에 “태사는 육률과 육동을 관장하여 음양의 소리를 화합시킨다. 양의 소리는 황종, 태주, 고선, 유빈, 이칙, 무역이고 음의 소리는 대려, 응종, 남려, 함종(임종(林鐘)), 소려(중려(仲呂)), 협종이다. 이들은 모두 궁, 상, 각, 치, 우의 오성으로 조절하며 금, 석, 토, 혁, 사, 목, 포, 죽의 여덟 가지 재료로 만들어진 악기로 연주한다. 그리고 태사는 풍, 부, 비, 흥, 아, 송의 여섯 가지 시 형식을 가르치는데, 육덕을 근본으로 하고 육률을 음으로 삼는다. 대제사를 봉행할 때에는 노래 부르는 맹인을 당 위로 인솔하여 악기를 치면 노래를 시작하도록 명령한다. 그리고 당 아래에서 관악기 및 기타 악기를 연주할 때 소고(小鼓)를 치도록 명령한다. 대연회 때에도 이와 같이 한다. 대사례(大射禮) 때에는 노래 부르는 맹인을 인솔하여 〈추우(騶虞)〉라는 악곡을 노래하게 한다. 군사를 크게 동원할 때에는 십이율관(十二律管)을 가지고서 군대의 함성소리를 듣고 길흉을 왕에게 아뢴다.[大師掌六律六同, 以合陰陽之聲. 陽聲, 黃鐘大蔟姑洗蕤賓夷則無射, 陰聲, 大呂應鐘南呂函鐘小呂夾鐘. 皆文之以五聲, 宮商角徵羽, 皆播之以八音, 金石土革絲木匏竹. 敎六詩, 曰風曰賦曰比曰興曰雅曰頌, 以六德爲之本, 以六律爲之音. 大祭祀, 帥瞽登歌, 令奏擊拊, 下管, 播樂器, 令奏鼓朄. 大饗亦如之. 大射, 帥瞽而歌射節. 大師, 執同律, 以聽軍聲而詔吉凶.]”라고 한 부분이다.[주-D074] 삼분손익(三分損益) : 율관(律管)의 길이를, 기준값을 3등분한 수에 따라 더하거나 빼서 계산해 내는 방법이다. 양률(陽律)은 음려(陰呂)를 파생해 내는데 이때는 빼는 방식을 사용하며 이를 하생(下生)이라고 한다. 음려(陰呂)는 양률을 파생해 내는데 이때는 더하는 방식을 사용하며 이를 상생(上生)이라고 한다. 우측의 반지상생도설(班志相生圖說)은 《악학궤범(樂學軌範)》에 나오는 것으로, 12율이 생겨나는 것을 부부와 자식에 비유하여 나타낸 것이다. 예를 들면 지아비에 비유된 양률인 황종은 율관의 길이가 9치인데, 이것이 빼는 방식인 하생의 방식으로 지어미에 비유된 음려 임종을 파생해 낼 때는, 기준값 황종의 9치를 3등분하여 그 1분인 3치를 기준값 9치에서 빼면 6치가 되고 이것이 임종(林鐘)이 된다. 그리고 지어미에 비유된 음려인 임종의 길이는 6치인데, 이것이 더하는 방식인 상생의 방식으로 자식에 비유된 양률 태주를 파생해 낼 때는, 기준값 임종의 6치를 3등분하여 그 1분인 2치를 기준값 6치에 더하면 8치가 되고 이것이 태주가 된다. 그 외 12율의 파생도 이러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우측 표의 율관의 길이를 나타낸 수치에서 ‘기(奇)’라고 표기된 것은 딱 떨어지지 않고 남는 수인 소수점을 나타낸 것이다. 이렇게 해서 각 율관의 길이가 정해지고, 그 길이 순서에 따라 12율을 배열하면 황종-대려-태주-협종-고선-중려-유빈-임종-이칙-남려-무역-응종의 순서가 된다.삽화 새창열기[주-D075] 균조(均調) : 12율에서 5음이 생겨나는데, 이때 궁음(宮音)을 12율 가운데 어떤 곳에서 시작하느냐에 따라 12개의 배열 방식이 구성될 수 있다. 이렇게 구성되는 방식을 균(均)이라고 한다. 그리고 각 균에는 5음인 궁, 상, 각, 치, 우에 변음(變音)인 변치(變徵)와 변궁(變宮)을 더하여 7성이 생겨나는데 이들을 조(調)라고 한다. 이론상 12개의 균에서 각각 7성의 소리가 만들어져 84조가 될 수 있다. 《律呂新書》 그러나 변음에 의해 생긴 24개의 성은 조로 치지 않기도 하여 60조가 된다. 《樂學軌範 卷1》 84조가 잘못이라는 논의는 본 조목에서 두 번째 아래의 ‘공영달(孔穎達)의 《예기(禮記)》 소(疏)’를 언급한 조목에서도 논의되고 있다.[주-D076] 격팔상생(隔八相生) : 율관이 8자리를 건너가서 음이 생겨나는 순서를 말한다. 12율을 율관의 길이에 따라 원형으로 배치하면 황종, 대려, 태주, 협종, 고선, 중려, 유빈, 임종, 이칙, 남려, 무역, 응종의 순으로 돌아가는데, 각 율이 생겨나는 순서에 맞추어 보면 순서에 따라 8칸씩의 차이가 있다. 이는 《악학궤범》에 나오는 아래 그림에서 보듯 황종이 낳은 임종은 황종과 8칸, 임종이 낳은 태주는 태주와 8칸의 차이가 나는 식이다.삽화 새창열기[주-D077] 후세에 …… 듯합니다 : 현재 전하는 《대학유의》에는 ‘태사’ 조목과 ‘전동’ 조목이 모두 실려 있다.[주-D078] 두우(杜佑)의 …… 조목 : 《대학유의》에 인용된 《통전》의 내용은 그 분량은 많으나, 축약된 전반부는 “황종이 처음 삼분손익하여 임종을 하생하고……(중략)……무역이 중려를 상생하니, 이것이 12율의 장단이 상생하여 중려에서 일단락되는 법이다.[黃鐘始三分損益, 下生林鐘,……(中略)……無射上生仲呂, 此謂十二律長短相生一終仲呂之法.]”로 일반적인 12율의 상생(相生)법을 말하였고, 후반부는 표준음인 정성(正聲)과 반음(半音)을 가리키는 자성(子聲)의 상관 관계를 언급하였다.[주-D079] 주자(朱子)가 …… 말 : 채원정의 《율려신서》에 주자가 쓴 서문에 나오는 말로, 성률에 관한 여러 부분에 있어 어떤 사람의 설이 참고할 만한지 나열하여 적었다.[주-D080] 부씨(鳧氏) 이하 : 《통전》 인용 부분에서 표준음인 정성(正聲)과 반음(半音)을 가리키는 자성(子聲)의 상관관계를 언급한 후반부를 가리킨다.[주-D081] 공영달(孔穎達)의 …… 조목 : 《대학유의》에 인용된 공영달의 소(疏)는 그 분량은 많으나 내용은 “황종이 제1궁음이 되면 황종에서 하생하는 임종이 치음이 되고 임종에서 상생하는 태주가 상음이 되고 태주에서 하생하는 남려가 우음이 되고 남려에서 상생하는 고선이 각음이 된다. 임종이 제2궁음이 되면 임종에서 상생하는 태주가 치음이 되고……이것이 12궁음에 각각 오성이 있어 무릇 60성이 되는 것이다.[黄鍾爲第一宮, 下生林鍾爲徴, 上生大蔟爲商, 下生南呂爲羽, 上生姑洗爲角. 林鍾爲第二宮, 上生大蔟爲徴,……是十二宮各有五聲, 凡六十聲.]”로, 중략된 부분은 모두 12율 가운데 어떤 것이 궁음이 되느냐에 따라 5성의 나머지가 배열되는 방식을 나열한 것이다.[주-D082] 위에 …… 드러냈습니다 : 해당 조목은 “전동(典同)이 육률(六律)과 육동(六同)의 조화를 관장하여”라고 한 조목 다음에 편차된 것으로 “오성과 육률과 십이관이 돌아가면서 서로 궁음이 된다.[五聲六律十二管還相爲宮也.]”라고 한 부분이다. 진호의 설은 12궁음에 따라 오성이 변화하는 방식을 설명한 것으로 공영달의 소 내용과 대동소이하다.[주-D083] 변궁(變宮)과 …… 있다 : 《주자전서(朱子全書)》 권41 〈악(樂)〉에 나오는 말이다. 12율에서 5음이 생겨나는데, 이때 궁음(宮音)을 12율 가운데 어떤 곳에서 시작하느냐에 따라 12개의 배열 방식이 구성될 수 있다. 이렇게 구성되는 방식을 균(均)이라고 한다. 그리고 각 균에는 5음인 궁, 상, 각, 치, 우에 변음(變音)인 변치(變徵)와 변궁(變宮)을 더하여 7성이 생겨나는데 이들을 조(調)라고 한다. 이론상 12개의 균에서 각각 7성의 소리가 만들어져 84조가 될 수 있다. 《律呂新書》 그러나 변음에 의해 생긴 24개의 성은 조로 치지 않기도 하여 60조가 된다.[주-D084] 당서(唐書)에 …… 조목 : 《대학유의》에도 그대로 실려 있다. 해당 내용은 《구당서(舊唐書)》 권8 〈현종본기(玄宗本紀)〉에 “8월 계해일에 천자께서 탄강일을 맞아 화악루 아래에서 백관들에게 연회를 베푸셨다. 백관들이 표문을 올려 매년 8월 5일을 천추절로 정하여 왕공 이하 사람들은 거울과 승로낭을 바치고 천하의 여러 주에서는 모두 연회를 즐기면서 3일 동안 휴가를 보내도록 하고서 이러한 내용으로 칙령을 만들자고 청하니 따랐다.[八月癸亥, 上以降誕日, 宴百僚於花萼樓下. 百僚表請以每年八月五日爲千秋節, 王公已下獻鏡及承露囊, 天下諸州咸令宴樂, 休暇三日, 仍編爲令, 從之.]”라고 한 부분을 가리킨다.[주-D085] 재전(在前) …… 긴요하겠습니다 : 현재 전하는 《대학유의》의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다. “이는 후세의 임금이 생일을 명절로 삼고 신하들이 표문을 올려 경하한 일의 시초입니다. 전대에는 임금 한 사람마다 하나의 명절을 두었으니 예컨대 송나라 태조는 장춘절, 태종은 건명절을 둔 경우입니다. 우리 명나라의 열성들께서는 모두 만수절로 명칭을 삼았습니다. 전대의 고사를 계승하여 3대 명절을 만들었으니 원단과 동지와 성탄일입니다.[此後世人君以始生日爲節而表賀之始. 在前代毎一君爲一節, 如宋太祖爲長春節, 太宗爲乾明節之類. 我朝列聖一以萬壽聖節爲名. 承前代故事, 爲三大節, 元旦冬至聖誕是也.]” 그런데 보는 바와 같이 “今承” 부분의 “今”이 현재 전하는 《대학유의》에는 빠져있다.[주-D086] 예기 …… 조목 : 《대학유의》에 인용되어 있는 《예기》 〈월령〉의 글은 “계동의 달에는 유사에게 명하여 크게 나례(儺禮)를 행하고 사방의 문에 희생을 찢어서 걸어 음기를 물리치고 흙으로 소를 만들어 한기를 물리친다.[季冬之月,……命有司大難, 旁磔, 出土牛, 以送寒氣.]”라고 한 부분이다.[주-D087] 주역에 …… 조목 : 《대학유의》에 인용되어 있는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의 글은 “역에 태극이 있으니, 태극이 양의를 낳고 양의가 사상을 낳고 사상이 팔괘를 낳으니,……그러므로 하늘이 신묘한 물건을 내자 성인이 법 받으며, 천지가 변화하자 성인이 본받으며, 하늘이 상을 드리워 길흉을 나타내자 성인이 형상하며, 하수에서 도가 나오고 낙수에서 서가 나오자 성인이 법 받았다.[易有太極, 是生兩儀, 兩儀生四象, 四象生八卦,……是故天生神物, 聖人則之, 天地變化, 聖人效之, 天垂象, 見吉凶, 聖人象之, 河出圖, 洛出書, 聖人則之.]”라고 한 부분이다.[주-D088] 구준의 …… 듯합니다 : 구준의 설은 현재 전하는 《대학유의》에는 없으나, 윤광안이 이를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최종 교정 전에는 실려 있었던 듯하다. 《대학연의보》에 실려 있는 구준의 안설(按說)은 다음과 같다. “신이 살펴보건대, 선유가 말하기를 ‘역이라는 것은 생하고 생하는 묘리이고 태극이라는 것은 생하고 생하게 하는 원천이다.’라고 하였습니다. 1이 2를 생하고 2가 4를 생하고 4가 8을 생하고 8이 32를 생하고 32가 64를 생하니, 정이의 이른바 가일배법이라는 것은 역의 이치를 한마디로 다 설명한 것입니다. 이는 역학의 요점이자 《주역》을 펼쳤을 때 가장 우선시 되는 논리입니다.[臣按先儒謂易者生生之妙, 而太極者所以生生者也. 一生二, 二生四, 四生八, 八生三十二, 三十二生六十四, 程頤所謂加一倍法者, 一言以蔽之矣. 此易學綱領, 開卷第一義.]” 여기에서 8 다음에 16이 와야 하는데 곧바로 8이 32를 생한다고 하였으므로 탈락된 부분이 있는 듯하다고 말한 것이다. 가일배법이라는 것은 원래 수에 그 배를 더하여 다음 수를 산출하는 방식을 가리킨다.[주-D089] 요부(堯夫)의 …… 어루만졌습니다 : 이상은 《이정외서(二程外書)》 권12에 나온다.[주-D090] 무릇 …… 조목 : 이 부분은 본래 《신당서(新唐書)》 권24 〈거복지(車服志)〉에 나오는 내용을 《대학연의보》에서 축약 인용한 것인데, 《대학유의》에서는 윤광안의 의견을 따라서 이를 더 축약하여 실었다. 실려 있는 대체적인 내용은 천자의 수레인 옥로, 금로(金路), 상로(象路), 혁로(革路), 목로(木路), 경근거(耕根車), 안거(安車), 사망거(四望車)의 제도와 용도를 설명하고, 속거(屬車)와 연(輦)은 숫자만 밝히고 구체적인 명칭 및 제도는 생략한 것이다.[주-D091] 문헌이 …… 일이니 : 《논어》 〈팔일(八佾)〉에서 공자가 “하나라의 예를 내가 말할 수 있으나 그 후손의 나라인 기나라에 이를 증명할 증거가 부족하며, 은나라의 예를 내가 말할 수 있으나 그 후손의 나라인 송나라에 이를 증명할 증거가 부족한 것은 문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문헌이 충분하다면 내가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夏禮吾能言之, 杞不足徵也, 殷禮吾能言之, 宋不足徵也, 文獻不足故也. 足則吾能徵之矣.]”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주-D092] 서경에 …… 조목 : 《대학연의보》에는 “이에 희씨와 화씨에게 명하여 호천을 공경히 따라서 해와 달과 성신을 책력(冊曆)으로 기록하고 관상(觀象)하는 기구로 관찰하여 백성의 농사철을 공경히 주게 하셨다.[乃命羲和, 欽若昊天, 曆象日月星辰, 敬授人時.]” 조목과 “제요(帝堯)가 말씀하였다. ‘아! 너희 희씨와 화씨야. 1년은 366일이니, 윤달을 사용해야 사시를 정하여 해를 이룰 수 있다.’[帝曰咨汝羲曁和. 朞, 三百有六旬有六日, 以閏月, 定四時成歲.]” 조목이 각각 독립되어 실려 있고 구준(丘濬)의 안설(按說)도 각각 독립적으로 달려 있다. 그런데 윤광안이 말하고 있는 구준의 설은 후자에 대한 안설이다. 그리고 현재 전하는 《대학유의》에는 전자는 없고 후자가 실려 있다. 아마도 처음에는 두 조목이 합쳐서 실려 있고 안설 역시 합쳐서 달려 있었는데 최후에는 후자만을 남겨둔 것으로 생각된다.[주-D093] 선유(先儒)에서 …… 구절 : “선유가 말하기를 ‘해에는 정해진 날이 없고 윤달은 정해진 법이 있다. 기와 윤과 세 이 3자는 이 한 구절의 큰 요체이다.’라고 하였습니다.[先儒謂歲無定日, 閏有定法, 朞閏歲三字爲此一節之大要.]”라고 한 부분을 가리킨다.[주-D094] 채옹(蔡邕)의 …… 조목 : 현재 전하는 《대학유의》에 실려 있는 채옹의 말은 “천체를 말한 것에 삼가가 있으니 하나는 주비설, 하나는 선야설, 하나는 혼천설이다. 선야설은 스승으로부터 전해져 오는 학설이 전혀 없다. 주비설 몇 가지는 모두 천상을 상고하고 징험함에 있어 어긋나고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그러므로 사관이 이 설을 쓰지 않는다. 오직 혼천설은 실정에 가까우니, 지금 사관이 사용하고 있는 후대와 동의가 그 법식이다. 여덟 자의 둥근 몸체로 된 측량 기구를 세워 천지의 형상을 갖추어 황도를 바로잡고 해가 뜨고 지는 것을 관찰하고 해와 달의 운행을 살피고 오위를 측량하니, 정미하고 심묘하여 만세토록 바꿀 수 없는 도이다.[言天體者有三家, 一曰周髀, 二曰宣夜, 三曰渾天. 宣夜之學, 絶無師說. 周髀數術, 具在考驗天象, 多所違失, 故史官不用. 惟渾天者, 近得其情, 今史官所用候臺銅儀, 則其法也. 立八尺圓體之度, 而具天地之形, 以正黄道, 以察發斂, 以行日月, 以步五緯, 精微深妙, 萬世不易之道也.]”라고 한 부분이다.[주-D095] 우희(虞喜)의 설 : 우희(281~356)는 동진(東晉) 때의 천문학자이다. 《대학연의보》에 있는 그의 설은 다음과 같다. “선야에서 ‘선’은 밝음이고 ‘야’는 어두움이다. 밝음과 어두움의 수가 그 학술에 겸비되어 있으므로 선야라고 한 것이다. 다만 스승으로부터 전해져 오는 학설이 없으므로 그 실상이 어떠한지는 알 수 없다. 주비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늘은 엎어놓은 동이와 같으니, 대개 북극을 중앙으로 삼는데 중앙은 높고 네 변은 낮으며 해와 달이 옆으로 운행하면서 두르고 있다. 해가 가까워져서 드러나면 낮이 되고 해가 멀어져서 보이지 않으면 밤이 된다. 혼천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땅이 그 가운데에 있고 하늘이 그 바깥을 두르고 있는데, 해와 달이 처음 하늘에서 떠올라 뒤에 땅으로 들어간다. 낮에는 해가 땅 위에 있고 밤에는 해가 땅속으로 들어간다.[宣, 明也. 夜, 幽也. 幽明之數, 其術兼之, 故曰宣夜. 但絶無師說, 不知其狀如何. 周髀之術以爲天似覆盆, 蓋以斗極爲中, 中高而四邊下, 日月旁行繞之, 日近而見之爲晝, 日遠而不見爲夜. 渾天者以爲地在其中, 天周其外, 日月初登於天, 後入於地, 晝則日在地上, 夜則日入地下.]”
    2023-12-04 | NO.77
  • 율수재기
    重菴先生文集卷之四十三 / 記 - 聿脩齋記 a320_171d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默, 1819~1891)은 한말 격동기의 儒林의 거장으로, 梅山 洪直弼과 華西 李恒老에게 수학하였고, 이항로의 理主氣客論과 尊王攘夷 사상을 그대로 이어받아 실천하고 행동한 인물이다. 같은 同門으로 柳重敎, 崔益鉉 등을 들 수 있으며, 문하에서 洪在龜, 柳麟錫, 柳基一 등이 배출되었다. 저자가 편찬한 것으로는 「近思錄附註」, 「程書分類集疑」, 「隆師錄」, 「道東譜」가 있고, 저술로는 「闢邪錄」, 「淸城家傳」, 「治道私議」, 「宋子事實記」가 있으며, 문집 백여 권이 남아 있다고 하였다.聿脩齋。在光州之魯登山下極樂江上。朴氏栢堂公諱某之墓舍也。栢堂之賢。余嘗爲之立傳矣。至是其孫鼎鉉,弼瑞氏。遣其子海量道謙甫。請記是齋。噫。聖人制爲祭祀之禮。豈故爲無理之虛設哉。父祖旣亡。聲容莫接。奉養無地。雨露之春。霜露之秋。孝子慈孫。自然有怵惕悽愴而不能已者。則惟有虔共祀事。致其著存而來饗也。姑以程朱以來士夫之禮言之。家必有廟。廟必有主。正至朔望必參。俗節必獻。時物必薦。仲月必四祭。季秋祭禰。忌日祭於正寢。瞻掃封塋。歲亦一行。是乃人心天理之同然也。自世敎廢。此心陷溺。則報本追遠之說。不講於邦域之內。其或略因舊俗而不至盡廢者。心旣不誠則神無顧饗之理矣。嗚呼。工商貨色。彌滿六合。而不知有他事。凡彝倫所繫。烏得不然。天意人事。可以哀痛而傷心者矣。弼瑞自其同姓前輩遜齋公。得華陽之正學。而爲湖南之儒宗。則淵源之漸。旣有以異於他族矣。至於道謙。當歲寒之時。南浮漲海。北踏萬山。以與觸罪擯辱廢棄不齒之流。從事而不厭。則陰陽向背。亦可謂得是非之心矣。况其聿脩之扁。盖取諸文王詩所云則其志又將。夙夜念祖。擴大其德。不止於追遠報本以爲孝也。嗚呼。審如是。蹄跡之交。倀鬼之恣。終亦有可制之道矣。吾且引領南嚮而望其日進於高遠也。遂書以還之。永曆四乙酉重陽節。淸城金平默。記。
    2021-03-31 | NO.76
  • 의열사(義烈祠)에 양곡(陽谷) 오공(吳公)을 배향한 제문 - 농암집 제29권
    광주 의열사(義烈祠)에 양곡(陽谷) 오공(吳公)을 배향한 제문 - 농암집 제29권 :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1651~1708)위대한 윤상은 / 丕哉倫常백성의 표준이니 / 生民之極우주를 지탱하여 / 撑拄宇宙어긋남이 없다네 / 終古莫忒그것이 혹 무너지면 / 厥或披攘나라가 망하는 법 / 國不爲國군자가 없다면은 / 不有君子누가 윤상 붙잡으랴 / 孰能扶植거룩하신 선생은 / 猗歟先生좋은 자질 타고나서 / 懿美天錫어린 시절 그때부터 / 粵自髫丱명성이 빛났다네 / 華聞奕奕문과에 장원급제 / 裒然大魁앞길이 트이더니 / 進塗載闢대간을 지내면서 / 颺于臺省꼿꼿함을 드러냈네 / 屢著勁直지위 명망 높은 데다 / 位望旣尊절개를 변치 않아 / 一節靡易외양은 온화하나 / 溫如其外마음속은 굳세었네 / 中則金石지난날 기사년에 / 往在巳歲왕후가 폐위되고 / 坤極傾仄간신들이 아첨할 제 / 羣奸導諛신료들이 침묵하여 / 具僚喑默인륜의 기강이 거의 다 실추되고 / 人紀幾墜신하의 절개가 드러나지 않아서 / 臣節莫白당당한 우리 동방 / 堂堂東魯예의가 사라졌네 / 禮義晦蝕공은 그때 벼슬에서 물러나 있으면서 / 公時寘散충분이 사무쳐서 / 忠憤盈臆뜻이 같은 사람들과 / 爰及同人머리를 조아리며 상소를 올렸는데 / 抗章叩額사람 삶아 처형하는 큰 솥을 앞에 두고 / 鼎鑊在前음식 담긴 솥을 보듯 태연함을 유지했네 / 如卽飮食빛나도다 공의 죽음 / 其死也光신하 도리 세웠어라 / 立臣道則그 소문 들은 이들 / 風聲所感멀리서도 감격거늘 / 聳動遐逖하물며 우리 고을 / 矧我一州공의 은택 입었으니 말할 나위 있겠는가 / 曾沐膏澤시서를 가르쳐서 현송할 줄 알게 하고 / 詩書絃誦배불리 먹여 주고 편안히 살게 하여 / 乳哺袵席아비처럼 가르치고 어미처럼 사랑하니 / 父敎母愛성대할사 공의 은덕 / 藹然休德공은 세상 떠났어도 / 沒世之思어제인 듯 또렷하네 / 凜若宿昔고을 현인 모신 사당 / 乃睠鄕賢그 모습이 빛나는데 / 廟貌有赫여기 함께 배향하면 / 於焉幷享후세 전범 되겠기에 / 宜後永式좋은 날을 가려잡아 / 肆涓穀朝신주 깎아 올리니 / 治主以陟숙연한 기운 그득 / 肹蠁悽愴영령 뵙는 듯하네 / 如見英魄높디높은 서석산이 / 瑞石巖巖푸른 하늘 닿았는데 / 上磨穹碧의열사 이 사당도 / 惟此義烈나란히 높이 솟아 영원히 전해지리 / 幷峙千億[주-D001] 광주(光州) …… 제문 : 의열사(義烈祠)는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 1526~1593)을 모신 사당으로, 1604년(선조37)에 건립되어 1681년(숙종7)에 사액받았다. 양곡 오공은 이름은 두인(斗寅), 자는 원징(元徵, 1624~1689),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인조 때에 사마시와 별시 문과에 장원하고 효종, 현종 때에 대간(臺諫)을 지냈으며, 1672년(현종13)에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있으면서 진휼을 잘하여 상을 받기도 하였다. 1689년(숙종15) 5월에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가 폐위되자 이세화(李世華), 박태보(朴泰輔)와 함께 이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국문(鞫問)을 받고 의주(義州)로 유배 도중 파주(坡州)에서 66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해에 복관되고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農巖集 卷28 刑曹判書吳公神道碑銘》
    2020-09-14 | NO.75
  • 이 지평(李持平)의 묘갈명(墓碣銘) - 기언 별집 제22권 / 구묘문(丘墓文)
    이 지평(李持平)의 묘갈명(墓碣銘) - 기언 별집 제22권 / 구묘문(丘墓文) :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공은 휘(諱)는 완(梡)이요, 자(字)는 자완(子完)이며, 성은 이씨이다. 그 선대는 연안(延安) 사람으로, 고려 때 태자 첨사(太子詹事) 이습홍(李襲洪)의 후예이다. 6대에 도관찰사(都觀察使) 이귀산(李貴山)이 있고, 또 4대에 병조 참의 이인문(李仁文)이 있었다. 참의가 삼척 부사(三陟府使) 이말(李????)을 낳았고, 부사가 여산 군수(礪山郡守) 이경종(李慶宗)을 낳았으며, 군수가 사간원 정언 이주(李澍)를 낳았고, 정언이 관찰사 이창정(李昌庭)을 낳았는데, 공의 아버지이다. 당시에 명망과 지조가 중하게 되었는데, 광해의 정란(政亂) 때가 되어 그다지 현달하지 못했고, 인조 때 함경도 관찰사로 발탁되었다가 졸하였다. 비(妣) 정부인(貞夫人)은 성산 이씨(星山李氏)로 부인의 아버지는 이응명(李應明)인데, 숨어 살고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공은 점잖아 말이 적으며, 독실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문학으로 한때 추중받았다. 22세에 관찰공이 졸했고, 8년 뒤에 정부인이 졸하여 부모를 일찍 여의었는데, 애통한 곡읍(哭泣)과 거상(居喪)하는 예절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바 많았으며, 이로 말미암아 이름이 더욱 드러났다.인조 13년(1635) 증광시(增廣試)에 생원(生員)이 되었고, 이듬해 천거로 동궁 세마(東宮洗馬)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가, 4년 뒤 기묘년(1639, 인조17)에 별시(別試)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괴원(槐院)의 정자(正字)로 선발되었다. 병자호란을 당한 뒤에 또 가뭄이 크게 들자, 상이 자책하며 구언(求言)하였는데, 공이 상소하여 변통(變通), 진작(振作)시키는 알맞은 것을 무릇 7조(條) 수백 마디로 아뢰었다. 신사년(1641, 인조19)에 박사로 승진하여 태상(太常)을 겸임했고, 이듬해 성균관 전적으로 예조와 병조의 좌랑으로 전직되었다가 옥구 현감(沃溝縣監)이 되어 나갔다. 그곳은 바닷가로 소금기가 많아 농사가 잘되지 않아 생선이나 소금을 팔아서 생계를 마련해야 했다. 백성들이 먹고 살기가 매우 어려운데도 관리의 횡포는 그치지 않아 어민들이 흩어져 공사(公私)가 텅텅 비었다. 공이 관용과 절약에 힘쓰고 명목 없는 부세는 모두 없앴으며, 봉급을 덜어 백성을 돕고 자제를 선발하여 학문과 기술을 권장하자 수년 만에 유랑하고 도망갔던 사람들이 돌아와 고을이 잘 다스려졌다.정해년(1647, 인조25)에 다시 예조와 병조의 정랑이 되었다가 사간원 정언으로 옮겼는데, 홍무적(洪茂績), 이응시(李應蓍)가 강빈옥사(姜嬪獄事)를 당하여 직언(直言)으로 간하다가 북쪽 변방에 유배되자, 공이 상소하여 두 신하와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세 아들 일을 말하고, 이어 다스리는 도리가 한결같이 임금의 덕과 마음을 바로잡는 데 있다고 하였다. 뒤에 직강으로 사헌부 지평이 되고, 사국(史局)을 겸임하여 간사와 부정을 다스리되 법을 지키고 사심이 없으므로 인심이 숙연하고 두려워하였으니, 옛날 법관의 기풍이 있었다. 그해에 크게 흉년이 들자 상은 대신에게 명하여 국(局)을 설치하고 기민을 구제하는 일을 관장할 적에 공을 뽑아 맡기었다. 공은 ‘법을 집행하면서 낭서(郞署)의 일을 겸임하는 것이 사체(事體)에 불가하다.’ 하여 사양했으나 허락하지 않았고, 대신들도 ‘인재 구하기가 어려우니, 이 사람이 아니면 사람이 없다.’ 하였다. 상이 특명을 내려 출입할 때에 읍만 하고 절하지 않게 하고 가부(可否)를 결정하기를 대신들과 서로 동등하게 하였으니, 고사(古事)에도 없는 일이다. 상이 본래부터 중하게 여겨 공이 상을 모시다가 물러나자 상이 그를 지목하여 ‘악의(惡衣)와 악식(惡食)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는 오직 이 사람이다.’ 하였다.무자년(1648, 인조26)에 다시 지평이 되었는데, 이때 김자점(金自點)이 영의정이 되어 ‘재이(災異)란 우연한 일이다.’ 하고, 상을 권하여 크게 토목공사를 일으키자 신하들이 모두 못마땅해 하면서도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공이 상소하여 사직을 청하고 이어 재이, 참소, 아첨, 사치, 방종, 뇌물,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 원성 등에 대하여 수백 언(言)을 올려 극력 논하였다. 가을에 다시 지평이 되었을 때, 병이 심하므로 상이 태의(太醫)와 약재를 내려 특별한 은총으로 대우하였으나, 마침내 졸하니 45세였다. 상이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월등한 휼전(恤典)으로 그 집을 구휼하도록 했고, 모든 공경(公卿), 대부(大夫), 사(士)와 대여(臺輿), 하천(下賤)까지도 탄식하며 애석하게 여겨, 어진 법관이 죽었다 하여 눈물 흘리는 사람이 많았다.아버지 관찰공은 집에 있을 때 말보다는 실행을 앞세웠는데, 공도 방정(方正)하고 검약하여 부모와 형제에게 잘했으며, 평소에 사사로이 재물을 갖지 않았다. 충애(忠愛)에 독실하였으며 독서를 좋아하였는데, 특히 경학에 더욱 힘썼다. 그의 학문은 가정에서 효도하고 우애하는 것으로부터 임금을 섬기고 풍속을 개선하는 데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자기 행실 닦는 것으로 근본을 삼아, 이미 세운 바가 정확했고 이행하는 바가 방정하여 남보다 높은 행실이 있었으므로, 세도(世道)가 크게 무너진 때를 당해서도 뜻을 세워 아첨하지 않았고, 세속에 구차하게 맞추려 하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아, 슬프다. 현명하면서도 명이 짧아 큰일을 할 만한 재주와 뜻을 가지고도 마침내 크게 펴지 못하고 죽었으니 천명(天命)이다. 용주(龍州) 조경(趙絅)이 애도문(哀悼文)을 짓기를,“확고한 지조는 만 마리 소의 힘으로도 그 무게를 돌릴 수 없고, 곧게 나아가는 용맹은 삼군(三軍)의 힘으로도 그 기개를 빼앗을 수 없다. 이는 그대가 하늘로부터 타고난 것인데, 하늘은 어찌하여 그대의 수명을 짧게 하고 그대의 도가 이 세상에 펴짐을 막았는가.”하였다. 공은 암천(巖川)에서 즐겨 살았으며, 호남 무성현(武城縣 광주(光州)의 옛 이름)의 경암천(鏡巖川) 위에 집이 하나 있었는데, 공이 졸한 뒤에 지나는 사람들이 이를 가리켜 이 백부(李栢府 백부는 사헌부의 별칭. 이완이 사헌부 지평이었기 때문이다)의 별장이라고 말했다.숙인(淑人) 철성 이씨(鐵城李氏)는 고려 상서(尙書) 이교(李嶠)의 후손인 정랑(正郞) 이원량(李元樑)의 딸인데, 아담하고 조심스러워 부녀자의 일을 부지런히 했으며, 시어머니를 섬기되 뜻을 거스른 적이 없어 시어머니가 칭찬하기를, ‘우리 어진 며느리는 꼭 복받을 것이다.’ 하였다. 숙인은 공보다 한 살 아래로 20년을 과부로 살다가 64세에 죽었다. 여러 아들이 어려서부터 독서하고 행실을 잘 닦아 가훈(家訓)을 떨어뜨리지 않은 것은 숙인의 가르침이다. 다섯 아들과 세 딸을 두었는데, 아들은 이귀징(李龜徵), 이문징(李文徵), 이휴징(李休徵), 이봉징(李鳳徵), 이인징(李麟徵)이고, 사위는 이창주(李昌胄), 송세규(宋世奎), 홍만옥(洪萬玉)이요, 또 서자에 이유징(李悠徵)이 있다. 자손이 3대에 20여 명인데, 성장하여 장가들고 시집갔다. 이문징은 아들 이선(李渲), 이연(李演), 이굉(李浤)과 사위 이기하(李基夏)가 있고, 이휴징의 아들은 이서(李澨)이고, 이창주의 사위는 홍기(洪基), 윤종경(尹宗慶)이다.처음 공이 죽었을 때에 당진(唐津)에 장사했다가 묏자리가 좋지 않다 하여 숙인이 죽은 뒤에 면천(沔川) 숭학산(崇學山) 아래 동남쪽 언덕에 합장했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정도를 잡아 과장하지 않았고 / 秉正無夸청렴과 의리로 자신을 극복하며 / 廉義自克지조가 결백하여 사특하지 않았으니 / 貞白不回옛날 정직의 유풍일세 / 古之遺直[주-D001] 강빈옥사(姜嬪獄事) : 인조(仁祖) 25년(1647)에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빈 강씨가 반역하였다 하여 죽인 일을 말하는데, 이 옥사에 그의 아들 이석철(李石鐵), 이석린(李石麟) 등을 제주로 귀양 보냈다.
    2020-09-18 | NO.74
  • 이경림(李瓊林)과 아망개(牙亡介)의 노주(奴主) 건- 광주목사
    보첩고(報牒攷) - 光州牧使○ 영조(英祖) 41년(1765) 4월 25일 무장현(茂長縣)에서 조사해 보고한 이경림(李瓊林)이 노주(奴主)인지에 대해 변별한 사안을 순영(巡營)의 관문에 따라 연명으로 보고하다연명의 보고에 관한 일. 방금 전에 도착한 사또(使道)의 관문(關文 동등한 관청 상호간이나 상관(上官)에서 하관에 보내는 공문)에, “내려보낸 사장(査狀)을 두 관청에서 상세히 열람한 뒤에 각자의 의견으로 원장(原狀)의 시비를 부결(剖決 판결)하여 모두 첩보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원고와 피고의 공초(供招 죄인이 범죄 사실을 진술하는 것)가 각기 다소 의문의 단서가 있습니다. 이경림은 52년간의 장적(帳籍)이 충분히 근거로 삼을 만한 실적이 되었습니다만 아망개(牙亡介)가 양추(兩雛)와 같이 30년간 노복으로 복역(服役)하였다는 것에 있어서는 어찌 양인(良人)의 종자가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내향(內香)이 거두어 길렀다는 말은 그 내력을 찾아볼 수 없으니, 결국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백(李齊栢)이 ‘잊지 않고 기억한다.’라고 말하지만 그 진위(眞僞)를 분변할 수 없으니만큼 이것으로 이경림이 반드시 소송에 졌다는 단안(斷案)으로 삼기에 부족합니다. 만수(萬守) 등의 공초는 모두 실제적인 일이 아니고 대부분 가상적으로 만들어낸 것으로서 반드시 억울함을 밝혔다는 명확한 증거가 없으니만큼 피차의 곡직(曲直)은 양쪽의 단서를 가지고 분변할 수 있으므로 입락(立落)을 즉시 판단할 수 있으니, 오직 참작하여 처리하시는 데 달려 있습니다.대체로 그들의 아버지 이름이 서로 다른데, 이는 실로 윤리와 기강에 관계되는 일이니만큼 본 송사를 판결짓는 것 이외에 이를 철저하게 분변하여 엄히 처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단지 문안(文案)만 가지고는 확실하게 판단하기 어려우니, 원고와 피고를 철저하게 조사하되, 안색을 살피고 말을 들어보면 필시 진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심문하여 십분 사실을 취합해 본 뒤에 처결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모두 상량하여 지시해 주었으면 합니다. 원래의 관문은 도로 올려 보냅니다. 전주 판관〔完判〕 김상묵(金尙默)이 연명하여 보고함.제사(題辭)보고를 받아 보고 정말로 그 진위(眞僞)를 파악하였음.
    2023-08-17 | NO.73
  • 이을진(李乙珍)이 무등산(無等山)에서 왜적을 섬멸하였다 - 동사강목 제16하
    동사강목 제16하 신유년 전폐왕 우(前廢王禑) 7년(명 태조 홍무 14, 1381) 하4월 순문사(巡問使) 이을진(李乙珍)이 무등산(無等山)에서 왜적을 쳐서 이를 모두 섬멸하였다.왜적이 지리산(智異山)으로부터 무등산 지금의 광주(光州)에 있다. 으로 도망해 들어와 규봉사(圭峯寺) 암석 사이에 목책(木柵)을 쳤는데, 3면은 깎아지른 절벽이고 좁은 길이 절벽에 잇대어 있어 겨우 한 사람이 통행할 정도였다. 이을진이 결사대 1백 인을 모아 높은 곳에 올라가 돌을 굴리고 화전(火箭)을 쏘아 목책을 불사르니, 적들이 다급하여 벼랑에 떨어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적들은 해변으로 달아나 소선(小船)을 훔쳐 타고 도망갔는데, 소윤(少尹) 나공언(羅公彦)이 빠른 배로 추격하여 모두 죽여버렸다.
    2020-09-15 | NO.72
  • 이자진(李子眞) 순(淳) 에게 답함- 정구
    《한강집(寒岡集)》 속집 제7권 / 서(書)이자진(李子眞) 순(淳) 에게 답함보내 주신 편지를 받고 삼가 추운 겨울 날씨 속에 체후가 두루 평안하심을 알고 나니, 감격스럽고 기쁜 마음을 무어라 형언할 수 없습니다. 나는 어혈(瘀血)로 인한 통증이 심하고 피고름이 계속 흘러나오는 가운데 오랫동안 신음하고 있을 뿐, 이 밖에 달리 말씀드릴 만한 소식은 없습니다.사추(士推 여윤서(呂允恕))가 세상을 떠난 일은 어찌 차마 말할 수 있는 일입니까. 통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존형의 아들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아 이상하게 여기며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지금 소식을 들어 보니 사람을 저쪽에 보내 사정을 알아보고 송사가 끝날 무렵이 되면 반드시 그 사람을 대동하고 함께 돌아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조 광주(趙光州 광주 목사(光州牧使) 조씨(趙氏))와는 젊었을 적에 서로 알았으나 소식이 전혀 없이 지낸 지가 20여 년이나 되었습니다. 지난해 목천(木川)에 있을 당시 서로의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았으나 편지 한 장도 서로 주고받지 않아 소원하기가 저 길가는 사람이나 다름없습니다. 그가 귀양을 갔으나 나는 위문하지 않았고 내가 형의 상을 당했으나 그는 조문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갑자기 편지를 보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므로 영공의 말씀을 들어드릴 수 없으니, 매우 유감스럽습니다. 낙복지(落幅紙 과거에 떨어진 사람의 글장)는 수중에 넣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혹시 구한다면 감히 받들어 올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그리고 존형의 외증조 여 충순(呂忠順 충순위(忠順衛) 여우창(呂遇昌))의 무덤에 갈석(碣石)을 새겨 세우는 일은 내가 일찍이 사추에게 존형께 여쭈어 진행하도록 하라고 일러 주어, 지금 이미 비문이 완성되고 술도 이미 담갔다고 하는데, 사추가 갑자기 죽었으니, 더욱 슬프고 한탄스럽습니다. 이제 앞으로의 일을 담당할 사람이 없습니다. 존형께서 부디 유념하시고 문중 후생을 지휘하여 이 일이 끝내 실패하지 않도록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소식이 없어 사무치는 그리움을 어찌 감히 형언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보내 주신 편지를 받고 지금 늦더위에 존형의 체후가 두루 평안하심을 알고 나니, 감격스럽고 기쁜 마음 그지없습니다. 다만 대단치 않은 병환으로 오랫동안 고통을 겪고 계신다니 염려해 마지않습니다.이명룡(李命龍) 등은 강물에 길이 막혀 참석할 수 없으니 형편이 그런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다만 존형의 막내손자 혁(爀)은 강물에 막히지 않았는데도 오지 않았으니, 독중(讀中)의 문책을 면치 못할 것 같아 우려됩니다. 추강(追講)하는 일은 독중이 함께 의논한 결과, 과거 시험을 치를 기일이 이미 임박하여 다시 모일 수 없으므로 다음 강회 때 합쳐서 강을 하자는 것으로 하였습니다.자긍(子兢)이 병이 들었다는 소식은 이제야 비로소 들었습니다. 매우 걱정됩니다.끝으로, 존형의 가르침을 받들 기회가 요원하기에 이 편지를 앞에 놓고 흠모하는 심정이 간절합니다.* 여기에서 조 광주목사는 1601~1602년 광주목사를 거쳐 기축옥사 건으로 1602년 5월 공주에 유배된 조익(趙翊, 1556~1613)으로 보인다. *이순(李淳, 1530~1606)의 자 자진(子眞), 호 야로당(野老堂),  [증조] 필(珌) [조] 우(佑) [부] 언명(彦明)야로당 이순은 성주지역 고성이씨 문중을 드높인 인물 중에 한 사람이다. 영남학파의 거두 퇴계와 남명의 양 문하에서 글을 배워 도학(道學)의 경지에 올랐고, 이를 바탕으로 인심을 흐리게 한 요승 보우를 탄핵하는 소를 올려 소윤의 미움을 받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소모관(召募官)으로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막아냈다. 보학(譜學)에 밝아 고성이씨 최초 계보서인 ????야로당초보????를 편찬했다. 유계서원(柳溪書院)에 제향 되었는데, 저술한 가훈(家訓)과 성리휘집(性理彙集) 등은 병화로 남아 있지 않고, 약간의 시문을 수습한 <야로당문집>만이 전하고 있다.<참고문헌> 고성이씨열전 55, 이순(李淳)
    2023-08-10 | NO.71
  • 이조 판서에 추증된 고공(高公, 고종후)의 시호를 청한 행장 - 약천집 제23권
    이조 판서에 추증된 고공(高公, 고종후)의 시호를 청한 행장, 무자년(1708, 숙종 34) - 약천집 제23권 :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 1629~1711)공은 성이 고씨(高氏)이고 휘가 종후(從厚)이고 자가 도충(道沖)이고 호가 준봉(隼峰)이다. 그 선대는 탐라(耽羅)의 성주(星主)에서 나왔는데, 고려 때에 이르러 장흥(長興)을 관향으로 하사받았으며, 조선조에 들어와서 좌통례(左通禮)를 지낸 휘 자검(自儉)이 처음으로 광주(光州)에 살았다.증조 휘 운(雲)은 예조 좌랑으로 예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조고 휘 맹영(孟英)은 대사간으로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선고 휘 경명(敬命)은 공조 참의로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렬(忠烈)이며 호는 제봉(霽峰)이다. 임진년(1592, 선조 25)에 왜구가 쳐들어오자 의병을 일으켜 순국하였으니 이 사실이 국사(國史)에 자세히 실려 있다. 선비 정경부인(貞敬夫人) 울산 김씨(蔚山金氏)는 부제학 김백균(金百勻)의 따님인데, 가정(嘉靖) 갑인년(1554, 명종 9)에 공을 낳았다.공은 어릴 때부터 단정하고 후중하여 보통 아이와 달랐다.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이 계집종을 보내어 공을 안아 오게 해서 부인으로 하여금 직접 머리를 빗겨 주게 하고 말하기를, “이 아이는 기백과 풍도가 편안하고 다소곳하니, 후일 반드시 독실한 군자가 될 것이다.” 하였다. 겨우 지학(志學)의 나이에 이르자 학업이 이미 크게 이루어졌다. 나이 17세에 성균관에 오르고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처음 교서관(校書館)에 예속되었다가 성균관으로 바뀌어 순서에 따라 전적으로 승진하고 감찰(監察)로 옮겼으며 또다시 예조 좌랑으로 옮겼다.무자년(1588, 선조 21)에 임피 현령(臨陂縣令)에 제수되었는데 문아(文雅)로 다스리다가 당시의 의논과 맞지 않아 사헌부 관원에게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다. 신묘년(1591)에 지제교로 뽑혔는데, 또다시 당시의 무리들에게 탄핵을 받고 조정을 떠났으나 공은 태연하여 조금도 얼굴에 서운한 기색을 나타냄이 없었으며, 충렬공(忠烈公)을 모시고 집에 있을 때에 한가로이 일생을 마치려는 뜻이 있었다.임진년 여름에 왜구가 바다를 건너 곧바로 도성인 한양으로 달려왔는데, 우리 군대는 도처에서 궤멸되어 막아 내는 자가 없었다. 충렬공은 공과 공의 아우인 학유(學諭) 인후(因厚)와 함께 피눈물을 뿌리고 의병을 규합하여 국난(國難)에 달려갈 것을 맹세하였다. 이때 본도(本道 전라도 )의 순찰사로 있던 이광(李洸)이 온 도의 병력을 모두 징발하여 공주(公州)에 이르렀으나 대가가 서쪽으로 파천하고 도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놀라고 기겁하여 군대를 해산하고 돌아왔다. 그러다가 다시 군대를 징집하자 사람들이 모두 도망하여 숨었다. 이에 충렬공은 전임 부사 박광옥(朴光玉)과 함께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효유하여 흩어진 군사들을 수합하고 공의 형제로 하여금 군대를 나누어 거느리게 한 다음 수원으로 쫓아가서 목사 권율(權慄)의 군대에 병력을 맡겼다. 이어 서쪽으로 행조(行朝)에 달려가고자 하였으나 길이 막혀서 전진하지 못하고 돌아오니, 충렬공은 이미 의병의 깃발을 담양(潭陽)에 꽂고 있었다.공은 충렬공을 태인(泰仁)에서 맞이하여 뵙고 다시 폐현(廢縣)인 금구(金溝)로 가서 사람들을 모집하였으며, 탐라에 격문을 보내어 전마(戰馬)를 보내 줄 것을 청하였다. 김제(金堤), 임피(臨陂) 등 여러 현에서 병력과 군량을 거두고 모집하여 충렬공과 여산(礪山)에서 만났으며, 여러 도에 격문을 돌려 행재소에 이르게 하였다.충렬공이 장차 은진(恩津)에서 군대를 정돈하여 북상하려 하였는데, 마침 황간(黃澗)과 영동(永同)에 있던 왜적들이 금산(錦山)을 넘어 쳐들어오니, 완산부(完山府 전주(全州) )의 형세가 더욱 위급하게 되었다. 이에 휘하의 장병들이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 본도를 구원하고자 하였으며, 충렬공 또한 그 계책을 옳게 여겨서 마침내 군대를 옮겨 금산의 왜적을 진격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방어사 곽영(郭嶸)과 함께 군대를 나누어 좌익과 우익을 만들었는데, 의병들이 토성(土城)에서 왜적을 짓밟으니, 왜적들은 죽고 부상한 자가 많아 감히 나오지 못하였으나 관군(官軍)이 전투를 도우려 하지 않고 해가 또 저물어서 마침내 군대를 후퇴하여 본진으로 돌아왔다.이날 밤 방어사가 충렬공에게 사람을 보내어 군사에 관한 일을 의논하였는데, 공은 나와서 아뢰기를, “오늘 아군이 승리하였으니, 이 승세를 유지하여 군대를 온전히 보존하고 돌아갔다가 기회를 보아 다시 나와 싸워서 승리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만약 왜적과 보루를 마주하고 들에서 노숙한다면 밤에 적이 쳐들어와 군사들이 놀랄 우려가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충렬공은 말하기를, “너는 부자간의 정 때문에 내가 죽을까 두려워하느냐? 내가 나라를 위하여 한 번 죽는 것은 나의 직분이다.” 하니, 공은 감히 다시 아뢰지 못하였다.다음 날 아침 왜적이 성벽을 비우고 모조리 나와 먼저 관군을 범하니, 방어사의 여러 군대가 모두 소문만 듣고 놀라서 와해되었다. 의병은 그래도 홀로 대항하여 싸울 계책으로 군사들이 모두 활을 가득히 당기고 대기하였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뒤에서 급히 ‘방어사의 군대가 무너졌다.’라고 고함치니, 의병들도 따라서 무너져 마치 미친 물결이 멋대로 터지는 것과 같아서 다시는 저지할 수가 없었다.공이 타고 있던 말이 마침 발을 헛디뎌 가시덤불에 넘어졌으므로 막 일어나 말에 멍에를 메우려고 하는데, 따르던 종 봉이(鳳伊)와 귀인(貴仁)이 뒤에서 말을 채찍질하여 급히 달려와 아뢰기를, “영공(令公)께서는 이미 멀리 떠나가셨습니다.” 하였다. 공은 마침내 급히 말을 달려 거의 30리가량 쫓아가서야 비로소 충렬공이 학유(學諭 고인후(高因厚) )와 함께 진중(陣中)에서 순절했음을 알고는 말에서 떨어져 혼절하였다가 얼마 후 깨어나 맨몸으로 적에게 달려들어 죽으려 하였다.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공을 안고 만류하기를,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헛되이 죽는 것은 무익합니다. 또 선영공(先令公)의 체백(體魄)이 현재 쌓여 있는 시신 가운데 계신데, 지금 공이 또다시 죽는다면 누가 시신을 거두어 염하겠습니까?” 하니, 공은 마침내 적이 떠나기를 기다렸다가 도보로 전쟁터에 들어가서 충렬공의 유체(遺體)를 찾아내어 몰래 금산(錦山)의 산속에 묻었다.공은 8월에 사람들을 모집하여 다시 금산에 가서 충렬공과 학유의 시신을 받들고 와서 비로소 관에 넣어 빈소하고 밤낮으로 통곡하며 말하기를, “부자 형제가 위태로울 때에 서로 잃고 나만 홀로 구차하게 살았으니, 이는 천지간의 죄인이다. 내 무슨 면목으로 세상에 서서 살겠는가.” 하였다. 공은 장례가 끝나자 곧바로 의병에 종사하려 하였는데, 대부인이 소리 내어 곡하며 만류하기를, “네 아버지와 네 아우가 모두 죽었는데 네가 만약 또 죽는다면 나는 미망인으로 남은 목숨을 장차 누구에게 의지하여 살겠느냐. 내 먼저 자결할 것이니, 차마 또다시 네가 죽는 것을 보지 못하겠다.” 하였다.공은 이때 의병을 따르자니 대부인의 뜻을 상하게 할까 두렵고, 대부인의 명령을 따르자니 또 창을 베고 자는 의리를 잃을까 두려웠다. 그리하여 마침내 문을 닫고 깊숙한 곳에 거처하여 낮에는 해를 보지 않고 밤에는 등불을 밝히지 않으며 미음도 입에 넣지 않아 숨이 끊어지려 하였다. 대부인이 울면서 공에게 이르기를, “내가 의병에 달려가려는 너를 만류한 까닭은 본래 네가 살기를 바라서였는데, 이제 네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니 똑같이 죽을 바에는 차라리 너의 뜻을 따르겠다.” 하였다.공은 즉시 일어나 죽과 미음을 들고 원수(元帥)를 찾아가 요청하여 본도의 사찰에 소속된 노비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공은 마침내 멀고 가까운 지역에 격문을 돌려 병력을 수합하고 군량을 모은 다음 정자(正字) 조수준(趙守準)을 계원장(繼援將)으로 삼고, 또 체찰사부(體察使府)에 보고하여 본주(本州)의 승려인 해정(解政)을 유격장으로 삼고, 김인혼(金麟渾)과 고경신(高敬身) 등을 군관으로 삼았다.공은 군대를 일으키는 날에 복수의병장(復讐義兵將)이라 스스로 이름하고는 정자 오빈(吳玭)을 종사관으로 삼고 부장(部將) 오유(吳宥)를 부장(副將)으로 삼았다. 이때 봉이와 귀인 등도 함께 따랐으며, 고경형(高敬兄)이란 자는 충렬공의 서제(庶弟)였는데 또한 편비(偏裨)로 수행하기를 원하였다. 공은 말하기를, “내 병든 어머니와 어린 아우가 있는데 구원하고 보호할 사람이 없으니, 원컨대 숙부께서는 수행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하였으나 고경형은 말하기를, “내 들으니 형제간의 원수는 병기를 가지러 되돌아가지 않는다 하였다.” 하고는 마침내 눈물을 흘리며 수행하니, 공도 다시 저지하지 못하였다.출병하는 날에 공은 재배하고 눈물을 흘리며 대부인에게 하직하였다. 이미 문을 나왔다가 다시 말을 멈추고 내려와 앉아서 막내아우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오늘 자친(慈親)의 얼굴을 영결하느라 마침내 너에게 일과로 가르치던 공부를 잊었다.” 하고, 조용히 글을 일러 주며 말하기를,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가 없다. 너는 부디 노력하여 나의 뜻을 저버리지 말라.” 하니, 듣는 자들이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배위인 이 부인(李夫人)이 두 아들을 거느리고 안동(安東)의 친정에서 피난하고 있었다. 부인은 공이 장차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는 죽음을 무릅쓰고 달려와 겨우 황계(黃溪)의 농막에 이르렀는데, 공은 이미 본주의 절양루(折楊樓) 아래에서 군대를 정돈하고 있었다. 부인이 계집종을 시켜 말을 전달해서 서로 만나 작별할 것을 청하자, 공은 말하기를, “내 이미 군영에 있으니 떠날 수가 없다.” 하였다. 부인이 또다시 계집종을 시켜 두 아들을 보내어 가서 작별하게 하니, 큰아들은 나이가 일곱 살이고 작은아들은 다섯 살이었다. 공은 각각 안아서 무릎 위에 올려놓고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나는 너희들이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살아 있었는가?” 하고는 속옷을 벗어 두 아들로 하여금 부인에게 전하게 하여 작별하니, 좌우에 있던 자들이 모두 울고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하였다.공은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전투하여 영남(嶺南)에 이르니, 의병이 다소 모여서 군대의 위용을 점차 떨치게 되었으나 군량이 제대로 공급되지 못하여 군사들이 굶주린 기색이 있었다. 그러나 공이 비분강개하고 격려함이 지극한 정성에서 우러나오니,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여 끝내 해산하려는 뜻이 없었다. 이때 관군이 모두 함안(咸安) 등의 여러 고을에 모이니, 공 또한 하동(河東)에 군대를 주둔하여 적의 형세를 정탐하려 하였다. 왜적의 괴수인 청정(淸正)이 일찍이 진주(晉州)에서 승리하지 못하자, 몹시 성을 내고 수십만의 병력을 규합해서 부산(釜山)으로부터 곧장 진주로 향하여 기어이 전일의 패전에 대한 분풀이를 한 다음 호남 지방을 유린하려 하였다.순변사(巡邊使) 이빈(李薲)과 전라 병사 선거이(宣居怡), 조방장(助防將) 홍계남(洪季男),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등이 모두 피해 떠나가고, 다만 김해 부사(金海府使) 이종인(李宗仁),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경상 우병사 최경회(崔慶會), 충청 병사 황진(黃進), 거제 현령(巨濟縣令) 김준민(金俊民), 사천 현감(泗川縣監) 장윤(張潤), 분의병장(奮義兵將) 강희열(姜希悅), 적개의병부장(敵愾義兵副將) 이잠(李潛) 등 수십 명이 각각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합류하였다.공은 진주성의 형세가 위급한 것을 보고는 군대를 재촉하여 성안으로 들어갈 적에 군중(軍中)을 떠나고자 하는 자들을 작별하여 보냈는데, 남은 자가 그래도 400여 명이었다. 순변사는 공에게 전령을 보내어 나가서 선거이, 홍계남 등과 함께 세력을 규합하여 외부에서 지원하게 하였으며, 성안의 장병들은 공이 애통한 마음을 품고 군대에 나와 몸이 지극히 훼손된 것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가엾게 여겨서 또한 공에게 성을 나갈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공은 끝내 따르지 않았으니, 반드시 죽으려는 뜻이 있어서였다.창의사가 공과 상의하고 좌랑 양산숙(梁山璹)으로 하여금 편지를 받들고 가서 명나라 장수인 총병(摠兵) 유정(劉綎)에게 군대를 청하게 하였는데 이 글은 바로 공이 지은 것이었다. 유정은 편지의 내용이 격렬한 것을 보고 이 때문에 옷매무새를 고치고 용모를 바꿔 경의를 표시하였으나 또한 출병할 뜻이 없었다. 진주성이 포위된 9일 동안 밖에서는 하루살이나 개미 새끼만 한 지원도 없으니, 황진, 김준민, 장윤이 서로 잇달아 전사하였다. 목사 서예원(徐禮元)이 두려워하고 겁먹어 먼저 도망하자 여러 군대가 크게 혼란하여 모두 촉석루(矗石樓)로 달아났다.공은 일이 이루어지지 못할 줄을 알고, 김천일, 최경회와 함께 북향하여 재배한 다음 오빈, 김인혼, 고경형과 함께 남강(南江)에 뛰어들어 죽으니, 이때가 바로 계사년(1593) 6월 29일이었다. 종 봉이와 귀인도 물에 뛰어들어 죽었으며, 오유(吳宥)는 이종인, 강희열, 이잠과 함께 분연히 검을 들고 적을 공격하다가 힘이 다하여 죽었다.공이 생명을 버리고 의(義)를 이룰 적에 한 무사가 옆에 있다가 공이 물속으로 뛰어들려는 것을 보고는 울면서 청하기를, “저는 물에 익숙하여 헤엄을 잘 치니, 공을 업고 건널 수 있습니다.” 하였다. 공은 말하기를, “내가 금산에서 죽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는데, 지금 살기를 구한단 말인가. 네가 만약 살아서 돌아가거든 오늘의 이 일을 우리 집안사람들에게 말하라.” 하니, 무사는 바로 공의 이웃 사람이었다. 세월이 오래 지난 뒤에도 그는 매번 이 말을 할 때면 오열을 그치지 못하였다.공의 시신을 진주의 남강에서 잃어버리니, 예(禮)에 초혼장(招魂葬)을 허락하지 않으므로 묘를 만들지 않았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도승지를 추증하였고, 왕세자도 특별히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였다. 그 후 이조 참판을 더 추증하고 규례대로 겸직을 내렸으며, 을미년(1595)에 정려문을 내리고 신축년(1601)에 충렬공을 모신 포충사(褒忠祠)에 배향하였다.금상 무진년(1688, 숙종 14)에 호남의 유생 백광호(白光瑚) 등이 상소하여 공과 공의 아우 학유공에게 모두 시호를 내릴 것을 청하자 조정에서는 이를 허락하였고, 또다시 공에게 자헌대부 이조 판서 겸 지의금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더 추증하였으니, 이는 먼저 정 2 품의 관직을 추증한 뒤에야 시호를 내리는 것이 조정의 법이기 때문이었다.공의 초취 부인 의령 남씨(宜寧南氏)는 2녀를 두었으니, 장녀는 양산축(梁山軸)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진사 유적(柳適)에게 출가하였다. 후취 부인 고성 이씨(固城李氏)는 2남 1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참봉 부립(傅立)이고 차남은 부언(傅言)이며, 딸은 대사간 홍호(洪鎬)에게 출가하였다. 양산축은 1남을 두었으니 양만용(梁曼容)으로 벼슬이 응교이다. 부립은 4남을 두었으니 두일(斗一), 현감 두기(斗紀), 참봉 두평(斗平), 두응(斗應)이고, 부언은 두기를 양자로 삼았다. 홍호는 2남을 두었으니 홍여렴(洪汝濂)과 사간 홍여하(洪汝河)이다. 두일은 2남을 두었으니 가원(可遠)과 참봉 가관(可觀)이다. 두기는 4남을 두었으니 가익(可翼), 진사로 현감인 가인(可寅), 가빈(可賓), 가겸(可謙)이다. 두평은 2남을 두었으니 가적(可廸)과 가영(可永)이다. 두응은 3남을 두었으니 가신(可臣), 가구(可久), 가대(可大)이다. 가원은 가인의 아들 한경(漢慶)을 양자로 삼아서 공의 제사를 주관한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많아서 다 기록하지 못한다.공은 천품이 순수하고 바르며, 말과 행동거지가 각각 일정한 법도가 있었다. 평소 장난하는 말과 나태한 용모를 안색과 말에 나타내지 않으니, 보는 자들이 모두 숙연해하였다. 급제한 지 15년에 겨우 한 작은 현을 얻었으므로 사람들이 혹 불우하다고 말하면 공은 웃으며 말하기를, “인생의 곤궁함과 영달은 천운에 달려 있는 것이다. 사군자의 처신은 마땅히 자신에게 있는 도리를 힘쓸 뿐이다.” 하였다.문장을 지을 적에 준걸스럽고 빼어나며 기발함이 있어서 붓과 종이를 잡으면 즉시 짓곤 하였다. 의병을 일으킨 뒤에 공이 모든 격문을 지었는데, 멀고 가까운 곳에 격문이 이르면 보는 자들이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제주도에서 말을 모집하는 격문에 “소매를 떨치고 일어남은 바다 밖에 그럴 사람이 있음을 내 아노니, 채찍을 잡고 임하면서 천하에 좋은 말이 없다고 말하지 말라.〔投袂而起者 吾知海外有人 執策而臨之 毋曰天下無馬〕”라고 하니, 말뜻이 뛰어나고 대구(對句)가 자연적으로 이루어져 당시에 사람들이 전해 가며 외웠다. 상촌(象村) 상공 신흠(申欽)이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이 이와 같은 훌륭한 재주가 있는데도 끝내 실의하여 그 문장과 함께 버려져서 윤음(綸音)을 맡는 자리에 오르지 못하였다. 인물을 올리고 물리치며 벼슬을 주고 빼앗음이 이와 같으니, 어찌 왜적의 침범을 부르지 않겠는가.” 하였다.세상의 말하는 자들은 공의 부자와 형제가 모두 의리에 죽은 것을 변 성양(卞成陽)에게 견주는데, 노씨(盧氏)에게 시집간 공의 누님과 안씨(安氏)에게 시집간 종매(從妹) 역시 왜적을 꾸짖다가 칼에 찔려 죽었으며, 서숙(庶叔)과 따르던 종도 또한 공과 함께 목숨을 바쳤으니, 이는 변씨(卞氏)에게는 있지 않았던 것이다.아, 슬프다. 공은 집안과 나라의 원수에 대하여 차마 함께 한 하늘 아래에 살 수가 없었으니, 한 번 죽는 것이 진실로 공의 뜻이었다. 그러나 일에 보탬이 없이 한갓 목숨을 버리는 것은 또한 공이 평소 생각한 바가 아니었다. 진주가 한 작은 외로운 성으로 천만 명의 큰 왜적을 당하였으니, 반드시 패할 형세임은 지혜로운 자가 아니라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공은 밖에 있는 여러 장수들과 똑같이 관망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성에 들어간 여러 현자들과 함께 죽음을 달게 여겼으니, 적의 예봉(銳鋒)이 이미 진주성에서 무뎌지면 남은 해독이 반드시 호남 지방에서는 줄어들 것이므로 진주성이 함락됨은 바로 적의 흉악한 위세를 꺾는 것이고, 호남 지방을 보존함은 바로 국가를 중흥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의 한 죽음은 의리를 살핌이 또한 지극해서이니, 어찌 다시 딴 계책을 낼 수가 없어 비분강개해서 함부로 죽음을 택하는 자에게 견줄 수 있겠는가. 조정에서 충렬공에게 충절을 기리고 시호를 내린 것은 그를 애도하고 영화롭게 하기에 유감이 없다. 그러나 공과 학유공은 오랫동안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받지 못하니, 사림들이 답답해하고 서운해한 지가 오래였다. 이제 선비들이 대궐에 호소하여 함께 은혜로운 명령을 얻었으므로 공의 사적을 엮어서 조정에 올려 태상씨의 채택에 대비하고자 한다. 그러나 공이 수립한 것이 이와 같이 드높아서 굳이 문장으로 드날릴 필요가 없으므로 다만 가장(家狀) 가운데 사람마다 함께 전하고 말하는 것을 거론하여 그 시종을 차례로 엮는 바이다.[주-D001] 탐라(耽羅)의 성주(星主) : 탐라는 제주(濟州)로 옛날에 양을나(良乙那)ㆍ부을나(夫乙那)ㆍ고을나(高乙那) 세 신인(神人)이 바위 구멍에서 나왔는데 고을나의 15대손 고후(高厚)ㆍ고청(高淸) 등이 바다를 건너 탐진(耽津)에 도착했을 때 객성(客星)이 남쪽에 보였으므로 신라 왕은 내조(來朝)한 고후를 별한〔星主〕이라 일컬었다 한다. 《高麗史 地理志》[주-D002] 지학(志學)의 나이 : 학문에 뜻을 두는 나이라는 뜻으로 15세를 가리킨다. 공자(孔子)는 일찍이 “나는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 하였는데, 이는 《대학장구》의 수신(修身)ㆍ제가(齊家)ㆍ치국(治國)ㆍ평천하(平天下)의 도(道)에 뜻을 둔 것이라 한다. 《論語 爲政》[주-D003] 창을 베고 자는 의리 : 부모를 죽인 원수를 갚기 위해 신고(辛苦)함을 이른다. 자하(子夏)가 공자에게 부모의 원수에 대처하는 방법을 묻자 공자가 “거적을 깔고 방패를 베개 삼아 자며 벼슬하지 않고 더불어 천하를 함께하지 않으며, 시장과 조정에서 만나면 병기(兵器)를 가지러 되돌아가지 않고 싸운다.〔寢苫枕干 不仕 弗與共天下也 遇諸市朝 不反兵而鬪〕” 하였다. 《禮記 檀弓上》[주-D004] 형제간의 …… 하였다 :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아버지의 원수는 더불어 한 하늘 아래 살지 않고, 형제간의 원수는 병기를 가지러 되돌아가지 않으며, 친구의 원수는 같은 나라에 살지 않는다.〔父之讎 弗與共戴天 兄弟之讎 不反兵 交遊之讎 不同國〕” 하였다.[주-D005] 변 성양(卞成陽) : 진(晉)나라 성양(成陽) 사람으로 소준(蘇峻)의 반란 때에 적과 싸우다 전사한 변호(卞壺)를 가리킨다. 진나라의 육군(六軍)이 패한 상태에서 변호는 수백 명을 이끌고 고전하다가 마침내 죽었는데, 두 아들 진(眕)과 우(盱)가 아비의 죽음을 목격하고 서로 적진 속으로 뛰어들어 함께 해를 당한 까닭에 변문 충효(卞門忠孝)의 고사로 전해져 온다. 《晉書 卷70 卞壺傳》
    2020-09-24 | NO.70
  • 이후원의 신천익 방문 이야기
    연려실기술 제23권 /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계해정사(癸亥靖社)○ 이후원(李厚源, 1598~1660) 완남(完南) 이 광주목사(光州牧使)로 있을 때(1637) 신천익(愼天翊)을 방문하였는데, 마당에 풀이 우거지고 완골 자리가 뚫어지고 헤져 있었다. 그의 벼슬하지 않는 뜻을 물었더니, 천익이 손뼉을 치고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어찌 뜻이 있어 벼슬하지 않는 것이리오. 다만 병 때문이오.” 하고, 또 손뼉을 치며 크게 웃는데 마치 곁에 사람이 없는 것 같이 하였다. 한참 뒤 이야기 끝에 “반정 초에 대간으로서 승평(昇平 김류)에게 가보니 승평이 먼저 파방(罷榜)하라는 논계를 정지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더라.” 하였다. 대개 천익의 뜻은 일대의 으뜸가는 훈신으로서 사의(私意)를 가진 것이 이와 같으니 시사(時事)를 알겠다고 한 것이다. 《청야만집(靑野謾輯)》
    2023-08-09 | NO.69
  • 이희용-何暮堂執事 하모당집사
    村中寒蟄驚奉下存公侯之德可謂先春能雷伏誦萬萬因伏審令體候以政務多惱神上勞則下逸自其道也區區無任慰賀民昨日子婦于歸家兒畧備而窮村凡百如涉險津伏歎奈何俯惠雙暦謹領而惶恐無以爲答從近晉拜伏計未間伏惟加重以慰民情- 쌍석유고(雙石遺稿) 권1이희용(李熙容, 1853-1931)의 자는 국서(國瑞)이며 호는 쌍석(雙石)이다.
    2018-07-26 | NO.68
  • 일신재 정의림- 영귀정기 詠歸亭記
    정의림 일신재집 권14鄭義林(1845~1910) 《日新齋集》詠歸亭記往在丁亥秋 余從諸友後 風乎瑞石 浴乎映江 詠而歸於富春之野 因以創設規約 為春秋講聚之擧 始以人衆儀繁屬鉅村輪會 擇閒野設行 行之稍久 會者愈夥 村力難繼野處多暴 人莫不病之 辛卵九月龍里之會 經室之議起壬辰春卜地于七松之里 秋設役 越明年冬十二月落之其房室廳堂 牖戶序廂 端密宏敞 可以爰居爰處 然是舉也以冷希殘力 辛勤拮据 積歲積年 乃始見就者 其意將欲何為耶 為尋寂耽閒之計耶 爲燕飲玩戲之資耶為作文干進之所耶 嗚乎 士生斯世 欲求爲人之道非學問不可 學問之道 非師友不可 所以親師友而道問學者亦不可以無其所 庠序學校 固明倫立教之地 而三代以降導率不古 且在朝市城郭之中 多奔競熱鬧之意 少寂寞寬閒之趣此書院所由起也 然書院之䂓 又不如古 則今日之士所從遊業恐無以多乎此矣 遊此室者 以小學立基本以大學定規模 入則愛親敬兄 出則隆師親友 立心以忠信持身以端莊 講討以明之 規警以督之 不厭不改日究遠大 則下可以立家範正鄉俗 上可以勵世道補國光此是三代學校之遺制 而亦今日經始之意云爾
    2020-06-06 | NO.67
  • 임덕함(林德涵)에게 답함경오년(1690) - 농암집 제13권
    임덕함(林德涵)에게 답함경오년(1690) - 농암집 제13권 :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1651~1708)별지에 하신 말씀을 보니 고명의 뜻이 더욱 고마웠습니다. 앞서의 편지에 말씀드린 학문을 하는 공부는 다만 한때의 소견을 근거로 써 보내어 가르침을 청한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그처럼 칭찬해 주시니, 이는 아마도 고명께서 남이 선행하는 것을 도와주기를 좋아하시어 우선 그런 말씀으로 너그럽게 보아주고 앞으로 더 잘하도록 바라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 말의 요지가 크게 틀리지는 않았다는 것을 또한 알 수 있으니, 이 점이 저에게는 매우 다행스럽습니다.다만 한낱 말만 잘하고 힘써 실천하여 실효를 거두지 못하니 이 점이 부끄럽습니다. 고통스러운 눈병이 사실 글을 보는 데에 방해가 되긴 하겠지만 주 선생(朱先生)이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한가로이 앉아 있음으로 인하여 조용히 심성을 함양하는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요. 훗날 또 말씀하시기를, “일찍 눈이 어두워지지 않은 것이 매우 한스럽다.”라고 하셨는데, 이는 정말 실제로 겪은 뒤에 한 말로서 농담으로 보아 넘길 수 없는 것입니다.우리들이 학문을 할 때에는 암송을 많이 못 하고 강론을 정밀히 못 하는 것을 근심할 것이 아니라 바로 심지를 단단히 지키고 본성을 함양하는 공부에 혹 집중하지 못하는가를 근심해야 하니, 만약 지금처럼 고요히 앉아 있는 기회에 책을 펼쳐 읽는 공부를 줄이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본원을 함양하는 데에 집중한다면 그 효과가 반드시 독서보다 진일보하는 점이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지난날 읽었던 글 중에 암송할 수 있는 것을 반복하여 깊이 연구하고 자세히 이해한다면, 이러한 공부가 또 어찌 책만 두루 많이 보는 것에 비할 바이겠습니까. 그렇다면 고명의 병은 하늘이 훌륭한 인재로 만들기 위해 내린 시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니 근심할 것이 못 될 듯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주 선생이 만년에 오로지 《맹자(孟子)》의 구방심장(求放心章)을 가지고 학자들을 이끌고 깨우쳐 주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노파심이 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상산(陸象山)과 왕양명(王陽明)의 무리 또한 이 말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그들의 뜻은 마침내 한낱 이 마음 찾기만을 일로 여기자는 것이었고 독서하고 궁리(窮理)하기를 더 이상 그와 병행하지 않았으니, 이는 주 선생이 사람을 가르친 뜻과 같지 않습니다. 털끝만한 차이에서 걷잡을 수 없는 잘못이 파생된 것이니, 이 또한 잘 살피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요컨대 이 한마디 말이 학문을 하는 데에 있어 기초요 본령이며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부분임을 알아야 합니다.저는 이전에 이 한 가지가 없었기 때문에 하는 일마다 모두 구차하고 지리멸렬하여 일에 대처할 때에는 무력하여 활기가 없고 이치를 볼 때에는 범범하여 정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보고 이해한 것이며 강설하여 얻은 것일지라도 모두 있는 듯 없는 듯 흐리멍덩하여 내면적으로 응집된 것도 없고 외면적으로 응용할 수도 없었으니, 학문을 이처럼 한다면 어찌 한평생을 허비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을 생각하면 매우 두렵습니다.고명의 병폐가 꼭 이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두 가지 비슷한 점이 있는 듯합니다. 저는 그래서 고명께서 《맹자》의 이 말에 종사하여 오로지 일상생활에 대하여 실제적으로 살피고 실제적으로 수습하여 근본을 북돋기를 내심 바라는 바이니, 그렇게 한 뒤에야 독서하고 궁리하는 공부가 비로소 귀착되는 바가 있어 한 치, 한 자를 얻어도 모두 자신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저는 근래에 이러한 뜻을 매우 분명히 알긴 했지만 타고난 기품이 조급하고 또 본심을 잃어버린 지가 벌써 오래된 까닭에 갑작스레 수습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하루 동안에 마음이 보존된 때는 드물고 도망간 때가 많으며 맑은 때는 적고 어두운 때가 많으니, 이 때문에 매우 마음이 유쾌하지 못합니다.책을 읽는 공부마저 계속하지 못하여 더욱 걱정입니다. 《논어(論語)》는 아직 절반도 보지 못하였는데 슬프고 쓰라린 마음과 질병으로 계속 고통스러워서 독서의 진도가 제대로 나가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리고 한창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를 교정하는 일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공부하는 힘이 분산되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더욱 전일하고 정밀하게 공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주자대전차의》는 우옹(尤翁)이 지은 것으로서 《주자대전》에 처음부터 주석을 달았는데 20여 권쯤 됩니다. 근년에 간행하자는 대신(大臣)의 논의로 인해 성상께서 옥당에 교정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제가 그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의심스러운 부분을 보고는 어쩔 수 없이 그러한 부분마다 저의 의견을 써내게 되었습니다.노선생(老先生)이 살아 계실 적에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수정해야 한다고 하신 부분이 열예닐곱 군데가 됩니다. 그런데 불행히 그 작업을 마치기 전에 급작스레 오늘의 화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듣건대 노선생이 임종하실 적에 간절히 이 일을 부탁하셨다 하니 그 뜻이 정말 비통하다 하겠습니다.지금 사안은 비록 이전과 다르지만 우선 의심스러운 부분을 모두 풀이하여 문인(門人)들과 상의하게 되기를 기다리고자 합니다. 저의 견해를 비록 이따금 드러내어 밝힌 부분이 있긴 하지만 대체로 문장의 뜻을 훈고한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의리상 중요한 부분도 이따금 있기는 하나 많지 않습니다. 이 책의 전말에 대해서 어쩌면 듣지 못했을 듯하므로 아울러 언급합니다.고명께 찾아와서 묻고 배우는 선비들이 상당히 있는지요? 전에 들으니, 광주(光州)에 박중회(朴重繪)라는 사람이 있고 영암(靈巖)에 양득중(梁得中)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모두들 후배 가운데 수재라고 칭찬한다 하였는데 그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인물과 문장, 학문이 모두 어떠합니까? 부디 품평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세상에 우리 유학을 공부하는 자가 없지는 않으나 성심으로 진보하여 뭔가 크게 이룰 수 있다고 기대할 만한 자는 드문 것 같습니다. 사우(師友)간의 도가 상실된 지 오래되어 모든 가르치고 배우고 강론하는 것들이 대체로 다 허울뿐이고 더 이상 실제로 이끌어 주고 진정으로 절차탁마하는 경우가 없으니 이러한 버릇이 오래되다 보면 어찌 이처럼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비단 인재를 찾아보기 어려울 뿐만이 아닙니다. 배우러 오는 사람이 있다면 이러한 뜻을 살피고서 맞이하고 이끌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성경(成卿 조성기(趙聖期))이 마침내 저세상 사람이 되어 버렸으니 서글픕니다. 그의 학문은 비록 그다지 바르고 합당하지는 못하나, 중요한 것은 사색이 깊고 식견이 환하여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높이는 공부에 있어서 터득한 것이 실로 깊었으니, 근래의 선배들 중에 찾아보더라도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륜 지키기를 좋아하고 우의를 돈독히 하여 그 영향이 크고 넓었으며 후학을 열심히 가르친 것으로 말하면 더욱 그를 잊지 못하게 하니, 그를 생각할 적이면 슬프고 안타깝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논맹정의(論孟精義)》도 반평생을 보고 싶었으나 보지 못하였습니다. 언젠가 우옹의 말씀을 들으니, 지난날 소설을 보니 중국 사람들도 보지 못했다고 했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연경(燕京)의 저자에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근년에야 비로소 사신 갔다 온 사람을 통하여 이른바 《주자유서(朱子遺書)》라는 책을 얻게 되었는데, 주자가 편집한 책들이 다 그 속에 들어 있어서 《근사록(近思錄)》, 《연평답문(延平答問)》, 《상채어록(上蔡語錄)》 같은 글들이 모두 한 책으로 묶여 있었고 《논맹정의》도 그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이 책은 근년에 간행된 것으로서, 이 책이 우리나라로 오게 된 것은 정말 크나큰 다행입니다.반드시 이 책을 보고 난 뒤에야 두 선생과 그 이하 여러 문인들의 학문의 깊이와 순수성을 자세히 보고 더욱 확고히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혹문(或問)》에 논한 여러 설들의 시비와 득실은 정말 고요(皐陶)의 판결처럼 털끝만치의 잘못도 없고, 《집주(集註)》의 풀이는 지극히 정밀하고도 정확하여 한 글자 한 구절도 더하거나 뺄 수 없었으니 정말 정밀한 저울로 단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요즈음은 민가에 많이 소장하고 있을 것이니, 조만간에 한번 보고 싶다면 구해 보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주-D001] 임덕함(林德涵)에게 답함 : 작자의 나이 40세 때인 1690년(숙종16)에 쓴 것이다. 임덕함의 이름은 영(泳, 1649~1696), 자는 덕함(德涵), 호는 창계(滄溪), 나주임씨 정자공파이며 첨지중추부사 서윤공(庶尹公) 일유(一儒)의 아들로 몽촌공 타의 손자다. 이단상(李端相), 박세채(朴世采),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등에게 수학하였는데, 경사(經史)에 정통하고 문장이 뛰어났다. 작자보다 2년 연상이며 작자와 많은 서신을 주고받았다.* 박중회(朴重繪, 1664~1691)의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수여(受汝), 호는 소은(素隱). 광주에 살던 안촌(安村) 박광후(朴光後)의 아들이다.  진천사(眞泉祠)에 배향되었고 양득중(梁得中)의 『덕촌집(德村集)』에 그의 만시(挽詩)가 실려 있다. 저서로 『소은집(素隱集)』이 있다.
    2020-09-14 | NO.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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