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30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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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방준 광주목사의 연보 중에서
- 안방준(安邦俊, 1573~1654)隱峯全書附錄上 / 年譜隱峯先生年譜 중에서大明神宗皇帝萬曆元年癸酉 我宣祖大王六年 十一月丙申。二十日酉時 先生生于寶城郡梧野里。二十四年辛卯(1651) 先生79歲二月。修正老辣瀡辭。因跋其後。先生與延平李公貴。特以義氣許爲心交。至是延陽君李公時白,延城君李公時昉有書曰。亡親日記三卷。付於光牧之行。下覽後特加筆削。使先人行蹟不至於泯滅。則其恩輕重。宜如何報也。又曰。亡親心行。得賴尊丈。庶免後日沈滅之患。平生感仰。何以盡喩。先生感其前日從遊之意。纂集其遺事。分類爲八篇。名曰老辣瀡辭。延城有書曰。亡親事迹。極其詳悉。可爲傳後之寶。幽明之感。何可勝喩。或序或跋。更蒙製惠。則將欲入梓以圖不朽。而第題目。本意雖好。後人或不無致訝者。未可改以他字耶。先生跋其後略曰。或問老辣是何意。余曰。昔秦檜使所親說晏敦復曰。公能曲從。要地朝夕可至。敦復曰。薑桂之性。老而愈辣。瀡。滑也。今於篇末。聊敍首尾如此。未知後日吾三家子孫。其亦有覽此而同一悲感者歟。
- 2023-07-13 | NO.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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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사암 중건기〔藥師庵重建記〕 - 운양속집
- 약사암 중건기〔藥師庵重建記〕 - 운양속집 제3권 / 기(記) : 김윤식(金允植, 1835~1922)옛날에 서석산(瑞石山)에 작은 암자가 하나 있었는데, 이름이 약사암(藥師庵)이다. 언제 창건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지금은 부서진 집 몇 칸만이 남았고 찾아오는 이도 없다. 학산 선사(鶴傘禪師)는 젊어서 사방 유람하기를 좋아하여 명산 고찰(古刹)에 발자취가 두루 미쳤다. 이윽고 중생 제도에 지쳐서 조용히 쉴 만한 궁벽한 장소를 얻어 편히 앉아서 도를 닦으려고 생각했다.이러하던 차에, 약사암 옛터를 보고는 흔연히 마음에 들어 “여기라면 노년을 마칠 만하다.”라고 말하고는 마침내 그곳에 머물렀다. 군(郡)의 신사(紳士)와 원근의 시주들 중 선사의 풍모를 사모하는 자들이 다투어 재물을 바쳐 약사암 건축 비용을 도왔다. 이에 기와 조각과 자갈을 쓸어 제거하고 다시 기초를 다지니, 새 날개처럼 날아갈 듯한 용마루며 길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 풍경소리며, 의젓한 한 구역의 사찰이 되었다. 마침내 암자의 공사가 끝나자 선사께서 내게 청하여 글을 써 기록하게 하고 이를 산중의 고실(故實)로 전하려고 했다. 내가 말하기를 “지난날 경신년(1860, 철종11) 가을에 서석산을 유람한 적이 있는데, 그 꼭대기에 올라가서 이백(李白)의 시 〈낙안봉(落鴈峯)〉을 큰 소리로 읊고는 산중의 장관이 여기에 다 있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약사암이 어디 있는지 몰랐는데, 지금 60년 후에야 비로소 그 이름을 들었고 또 우리 선사께서 차지하셨습니다. 사물이 드러나고 감춰지는 것과 땅이 참 주인을 만나고 만나지 못하는 것은 각각 그 때가 있습니다. 이로부터 암자의 이름이 이 나라에 알려질 것이니, 이 어찌 땅이 사람으로 인해 드러나는 것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암자에서 바라본 경치에 대해서는 내가 상세하게 말할 길 없지만, 삼황봉(三皇峯)의 소탈하고 깨끗하고 맑고 탁 트인 모습과 입석대(立石臺)와 광석대(廣石臺)의 빼어나고 우뚝한 모습은 지금도 눈앞에 삼삼한 게 잊혀지지 않는다. 암자가 그 사이에 있다니, 분명 온갖 아름다움을 다 끌어 모아 온 산의 승경을 독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 기를 지으니, 초당(草堂)의 신령들이여, 부디 낯선 사람이라고 내치지 말기를![주-D001] 서석산(瑞石山) : 광주(光州) 무등산(無等山)의 옛 이름이다.[주-D002] 약사암(藥師庵) : 광주광역시 동구 운림동 무등산에 있는 절로, 통일신라 시대의 석조여래좌상이 보물 제600호로 지정되어 있다.[주-D003] 학산 선사(鶴傘禪師) : 함명 태선(涵溟 太先, 1824~1902)이 지은 〈무진주 무등산원효암중수상량문(武珍州無等山元曉庵重修上樑文)〉에 의하면 1894년 학산 대사(鶴傘大師)가 관청에 호소하여 100금의 재력을 시주받고 고을의 유지들의 도움으로 원효사(元曉寺)를 중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주-D004] 중생 제도에 지쳐서 : 원문의 ‘진량(津梁)’은 중생을 제도(濟渡)함을 비유한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언어(言語)〉에 “유공(庾公)이 일찍이 불도(佛圖)를 들여왔는데 와불(臥佛)을 보고 말하기를 ‘이 부처는 진량에 피곤했구나’라고 했다”고 했다.[주-D005] 머물렀다 : 원문의 ‘탁석(卓錫)’은 석장(錫杖)을 꽂는 것으로, 승려가 머무는 것을 말한다.[주-D006] 낙안봉(落鴈峯) : 섬서성 화산(華山)의 남봉(南峰)이다. 《화산지(華山志)》에 “이백(李白)이 낙안봉에 올라 말하기를 ‘이 봉우리가 가장 높은데 호흡하는 기가 상제(上帝)의 좌석에 닿을 것 같다. 사조(謝朓)의 경인시(驚人詩)를 가져오지 못한 것이 한스러운데, 머리 긁적이며 푸른 하늘에 물어볼 뿐이다’라고 했다”고 했다.[주-D007] 삼황봉(三皇峯) : 무등산의 천황봉(天皇峰), 지황봉(地皇峰), 인황봉(人皇峰)이다.
- 2020-12-31 | NO.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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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천 남운로에게 보내는 편지〔與藥泉南雲路書〕 - 서하집
- 약천 남운로에게 보내는 편지〔與藥泉南雲路書〕 - 서하집 제17권 / 서독(書牘) : 이민서(李敏敍, 1633~1688)천 리 거리에 떨어져 편지로 왕복하자니 매번 한 달 이상 걸리는 데다 제가 동주(東州)에 있어 또 자주 편지를 받지 못하니 그저 간절히 그리움만 내달릴 뿐입니다. 지난번 우편을 통해 영형(令兄)이 북관(北關)에 있으면서 보낸 편지를 받았습니다. 영형이 장거리를 순선(巡宣 관찰사의 순시)한 뒤 기거가 편안하다는 것을 알고서 편지를 읽으며 지극히 안타깝고도 위로되었습니다.저는 지난번 딸을 묻은 뒤 동쪽으로 돌아왔는데, 지금 또 지평현(砥平縣) 동쪽에 죽은 형의 장례를 지내니, 빈산에서 통곡을 해도 더욱 어쩔 수 없습니다. 더구나 노친(老親)의 기력이 날로 점점 쇠약하시어 지금 모시고 서울 집으로 돌아가려고 얼음이 녹기를 고대하고 있으나 여러 가지 고통스러운 마음이 하루가 다르게 더욱 심해지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영윤(令胤 상대방의 아들)이 오래 서울에 머물고 있었는데도 같이 거처하지 못하였고, 한식(寒食)이 지난 뒤 함경도로 간다고 들었으나 아마 서로 만나지는 못할 듯합니다. 휘령(輝令)은 근래 편지를 받았는데 자못 옛 모습을 회복한 듯하니 진실로 위로가 되고 다행입니다. 듣자니 영형께서 제가 술 마시는 것을 염려하신다고 하는데, 이는 비록 서로 지극히 사랑하는 뜻에서 나왔더라도, 지금은 저에게 그럴 우려는 없습니다. 다만 저의 병증은 단지 인삼(人蔘)을 많이 섭취하면 저절로 근심이 없어질 수 있는데, 전후로 보내 주신 인삼 때문에 지금까지 생명을 연장하고 있습니다. 또다시 살고 싶은 마음이 끝이 없어 더 많이 보내 주시기를 바라니, 그 만족을 모르는 것이 가소롭습니다. 편지를 우편에 부칩니다만, 잘 들어갈지 알 수 없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다 적지 못합니다.[주-D001] 약천 남운로 : 약천은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의 호로, 운로는 자이다. 본관은 의령(宜寧), 호는 약천ㆍ미재(美齋),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아들 남학명(南鶴鳴)이 이민서의 사위로, 남구만과 이민서는 사돈 간이다. 송준길(宋浚吉)에게 수학하였다. 1656(효종7)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저술로 《약천집》이 있다.[주-D002] 영형(令兄)이 …… 받았습니다 : 남구만은 1671년(현종12) 10월부터 만 3년 넘도록 함경 감사를 지냈다. 현종이 죽은 뒤 애책(哀冊)의 지을 관원으로 선발되어 상경하였다. 《국역 현종개수실록 12년 10월 24일》[주-D003] 딸을 묻은 뒤 : 남구만의 아들 남학명과 혼인했던 딸을 말한다. 완산 이씨(1652~ 1673)는 1673년에 2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고, 용인현(龍仁縣) 남씨(南氏) 선산에 묻혔다. 《西河集 卷14 亡女墓誌銘》 남학명은 이민서의 딸인 전주 이씨와 사별한 뒤, 공주 목사(公州牧使)를 지낸 이시현(李時顯)의 셋째 딸을 맞아들였다. 《국역 명재유고 제36권 숙인(淑人) 신씨(申氏) 묘지명》[주-D004] 죽은 형의 장례 : 형은 이민적(李敏迪, 1625~1673)을 말한다. 자는 혜중(惠仲), 호는 죽서(竹西)이다. 문집에 《죽서집(竹西集)》이 있다.[주-D005] 노친(老親) : 아버지 이경여(李敬輿, 1585~1657)는 1657년(효종8) 가을에 세상을 떴으므로, 여기서의 노친은 어머니 임씨(任氏)를 가리킨다.[주-D006] 휘령(輝令) : 남구만의 작은아버지 남이성(南二星, 1625~1683)을 가리킨다. 자는 중휘(仲輝), 호는 의졸(宜拙)이다. 1674년(현종15) 예조 참의를 거쳐 대사간이 되었다. 1675년(숙종1) 인조의 계비이던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 문제(服喪問題)로 갑인예송(甲寅禮訟) 일어나 김수항(金壽恒)이 중도부처(中途付處)되자 남인 권대운(權大運)을 규탄하고 김수항을 변호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진도에 유배되었다. 그 후 배천(白川)으로 이배되었다가, 1678년 풀려나 1680년 좌부승지에 이어 대사성, 홍문관 부제학을 지냈다.[주-D007] 듣자니 …… 없습니다 : 이민서에게 지병이 있었다. 홍문관에 있을 때에 여러 날 동안 술을 마시고 숙직을 하다가 갑자기 미치광이 병이 발작하여 당시 사람들로부터 해괴하다는 말을 듣기도 했고 이 때문에 조정에 있기가 불안하여 고양 군수(高陽郡守)를 맡기도 했다. 또한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재직 중일 때 또 이 증세가 발동하여 스스로 배를 찔렀던 일이 있었다. 《국역 현종개수실록 11년 10월 23일》 《국역 숙종실록 4년 9월 13일》
- 2020-12-23 | NO.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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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천(良賤) 변별의 송사- 광주목사
- 보첩고(報牒攷) -光州牧使○ 영조(英祖) 42년(1766) 2월 초1일 조윤관(曺允寬)ㆍ이필제(李必齊) 등이 제소한 양천(良賤) 변별의 송사에 관한 입안(立案)결급(決給)에 관한 일. 본주(本州)의 하리(下吏) 조윤관의 정장(呈狀)에, “제가 이필제ㆍ이한적(李漢迪)ㆍ이한복(李漢復) 등과 더불어 서로 송사를 벌인 것은 이미 전 사또(使道)가 재임할 때였는데, 원정(原情)과 문목(問目)을 빠짐없이 모두 바쳤으므로 뒤에 마땅히 결안(決案)이 나와 이 송사가 매듭지어줄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전 사또가 별도로 쓴 글에, ‘너희들의 송사에 대한 곡직(曲直)은 이미 피차의 원정과 문목을 통해 잘 파악하여 털끝만큼도 의심할 만한 단서가 없으니만큼 마땅히 결안을 작성하여 조윤관에게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큰 송사이니만큼 관가(官家)에서 경솔하게 처결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판결에 임해 송사를 기각하였습니다.제가 이미 송사를 제기한 뒤에 결안을 받지 못하여 너무나도 억울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뜻으로 사유를 갖추어 의송(議送)을 바치니, 그 제사(題辭)에, ‘과연 그 정장(呈狀)의 말대로라면 본주(本州)에서 송사를 기각한 점이 매우 괴이하다. 곧바로 판결을 내려 송사를 체류하지 말라는 뜻으로 다시 제사를 써서 본관(本官)에 하달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전 사또가 불시에 체직(遞職)되었으므로 새 사또가 부임하기를 기다렸다가 처음에 판결에 임한 송사를 판결해 줄 것을 청하니, 새 사또가 말하기를, ‘지금은 송사를 판결할 때가 아니니, 가을을 기다려 다시 정소(呈訴)하도록 하라.’고 하시기에 이렇게 다시 소장을 바칩니다.대체로 이 송사의 근본 원인은 다음과 같습니다. 위의 이한복 등이 다투는 것은 바로 그들의 외증조(外曾祖) 몫의 제위노(祭位奴)인 몽용(夢用)의 양처(良妻)가 낳은 자식을 차지하겠다고 운운(云云)한 것이고, 제가 다투는 것은 바로 몽용의 양처가 낳은 자식은 그가 차지할 물건이 아니라는 것인데, 이 문제로 송사를 제기하게 된 것입니다.대체로 몽용은 바로 남평(南平) 사람 손후창(孫後昌)의 노복이고 몽용의 아내 구례(九禮)는 바로 손후창의 아우 손후권(孫後權)의 딸입니다. 그런데 이한복 등이 위의 몽용은 자기들의 외증조 손후창의 노복이란 이유로 그들의 화회문기(和會文記) 중 제위(祭位)조에 기록하였는데, 그들이 자칭 외손봉사(外孫奉祀)라고 하면서 몽용의 후손을 차지하겠다는 것입니다.그들이 이른바 ‘두 번 지나간 병인년(丙寅年, 1686, 숙종12)의 화회(和會)에 운운(云云)하였다.’라고 한 것은 재주(財主)가 생존하였을 때 참여해 간섭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으나 화회문기의 말 중에는, ‘그 재주 손후창이 나이가 차지 않아 죽었기 때문에 문기를 작성하지 못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손후창이 나이가 68세에 이르러 죽었으니, ‘나이가 차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또 그들이 말하기를, ‘손후창의 아우 손후권이 벼슬을 구하려 상경(上京)하였다가 아우의 초상이 나고 형수의 초상이 났다는 부음(訃音)을 듣고도 오지 않았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거주한 고을의 장적(帳籍)을 상고해 보니 그들이 이른바 아우란 자는 나이가 62세였고 그들이 이른바 형이란 자는 나이가 59세였습니다. 이는 아우와 형이 전도되어 천륜(天倫)의 자리가 뒤바뀐 것이니, 그들이 이른바 화회문기는 너무나도 맹랑하였습니다. 또 그들이 말하기를, ‘손후권이 벼슬을 구하러 상경하여 부음을 듣고도 오지 않았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고증할 만한 문안(文案)에는 그 화회문기를 작성한 해에 손후권이 나주(羅州) 지도 만호(智島萬戶)로 임명받은 직첩(職帖)이 분명히 당시의 임소(任所)에 있었으니, ‘손후권이 상경하여 오지 않았다.’는 말이 완전 거짓말임이 편연하게 드러났습니다.또 말하기를, ‘저희들의 외증조가 계해년에 죽었다.’라고 하였는데, 그들의 외증조가 거주한 고을의 장적에는 계해년과 갑자년에도 여전히 입적(入籍)한 것이 존재하였으니, 계해년에 죽었다가 갑자년에 다시 살아났단 것입니까. 사람의 생사는 얼마나 큰일입니까. 그런데 산 사람을 죽었다고 하였으니, 무슨 일인들 무함(誣陷)하지 못하겠습니까. 이외에도 위조한 단서를 낱낱이 다 열거하고 낱낱이 다 셀 수 없고 보면 그들이 이른바 화회 운운하는 것은 필시 인위적으로 만든 거짓의 글자이니만큼 결코 그들의 말을 믿을 수 없습니다.그리고 외손봉사(外孫奉祀)란 말이 단지 오늘날 그들의 입에서만 나오고 원래부터 문권(文券) 가운데 증거가 될 만한 것이 한 글자도 없습니다. 또 인정이나 사리로 말한다면 이한복 등의 외증조모(外曾祖母) 만향(萬香)이 저의 처조모(妻祖母) 구례(九禮)와 동성(同姓) 간의 사촌(四寸)이니, 동성의 사촌이 상호 노복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고, 또 질녀서(姪女壻) 몽용(夢用)을 외손봉사의 몫으로 준다는 것도 인정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로 보나 저로 보나 이한거 등이 말 한마디마다 거짓으로 농간을 부린 것이니, 하늘이 반드시 싫어할 것이고 귀신이 반드시 처벌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결국 이것으로 인해 송사를 제기하였던 것입니다.이미 이에 대한 원정(原情)을 바치고 문목(問目)에 대해 공초(供招)를 바쳐서 피차의 곡직이 일성(日星)처럼 명백해졌기 때문에 전 사또(使道)가 송사를 기각할 때 적은 제사(題辭) 중에 저에게 결급(決給)한다는 말뜻이 과연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판결에 임해 송사를 기각한 바람에 결안(決案)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하늘에 사무치는 저의 원한입니다. 물러나와 의송(議送)을 바치고 엊그제 사또께 소장(訴狀)을 올렸던 것은 제가 결급을 얻은 뒤에 결안을 받지 못한 원통함에서 나온 것입니다.또 한 가지 근거가 없는 일이 있습니다. 저와 이한복 등은 한 성(城) 안에 살고 있는데, 대대로 사귀어 그 정의가 형제와 같았고 조석으로 상종하여 마치 지친(至親)과도 같았으나 원래부터 이 일에 대해 한 마디 말이나 반 마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근백년(近百年) 전에 있었고 그 사이에 아무 말 없이 지내오다가 지금 비로소 말을 꺼낸 것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세월이 오래되고 사람이 죽어서 사적을 밝히기 어렵게 된 뒤를 기다렸다가 마치 해를 피하는 도깨비가 밤이 되면 활동하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전 사또(使道)가 결안(決案)을 작성하지 않고 미루어두었다가 금일의 사또를 기다린 것이니. 이는 저의 불행 중에 큰 다행입니다.엎드려 바라건대, 신감(神鑑)을 소유하신 사또께서는 피차가 이미 도장을 찍은 원정과 문목을 다시 가져다가 자세히 통촉하신 뒤에 분명하게 처결을 내리어 사리상 맞지 않아 패소한 자에게 율(律)에 따라 엄하게 처벌을 내려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하였다.소지(所志)에 이와 같이 말하였기에 지나간 분기에 원고와 피고가 서로 송사를 제기한 문안을 일일이 다 바치도록 하였다.갑신년(甲申年, 1764, 영조40) 12월 20일에 인리(人吏) 조윤관(曺允寬)의 이름으로 바친 소지(所志)에, “저의 처조모(妻祖母)와 이필제(李必齊)의 어머니는 동성 사촌간입니다. 그런데 이필제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서 저에게 말하기를, ‘너의 처조모는 우리 외가(外家)의 물건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제 아내의 어머니는 금년에 75세인데, 지난 을해년(乙亥年, 1755, 영조31)에 죽었습니다. 이필제와 제 아내의 어머니가 한 성(城) 안에 같이 살면서 조석으로 상대한 지 몇 년이나 되었는지 모를 정도였으나 그간에 이 일에 관해 전혀 한 마디 말이나 반 마디 말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제 아내의 어머니가 죽은 뒤에 지금 비로소 이 말을 꺼냈으므로 너무나도 놀라웠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우러러 하소연하오니, 이필제를 잡아다 종래의 근맥(根脈)을 각별히 엄하게 조사한 뒤에 법대로 처결해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하였다.갑신년(甲申年) 12월 23일에 원고와 피고가 처음 송사를 제기하였을 때 바친 공초(供招)에, “이한거(李漢擧)의 나이는 42세이고 인리(人吏) 조윤관(曺允寬)의 나이는 39세인데, 아룁니다. 저희들이 노비(奴婢)를 변별(辨別)하는 일로 당일에 처음 송사를 제기하였는데, 아무런 이유 없이 30일이 다 되도록 송사의 장소에 나오지 않을 경우에는 법전(法典)에 따라 처결한다고 하셨으며, 노비를 소급해 변별하려고 할 때 반드시 믿을 만한 문기(文記)가 있을 터이니, 문기와 원정을 또한 바치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원고 조윤관의 원정에, “아룁니다. 산이 비록 백 번 구불구불 뻗었으나 그 근본을 찾아보면 곤륜산(崑崙山)이고 물이 비록 만 번 꺾여서 흘렀으나 그 근원을 궁구해 보면 황하(黃河)입니다. 대체로 송사의 이치도 그 뿌리를 찾아보고 그 근원을 궁구해 보아야만 백(白)이 백(白)으로 판명되고 흑(黑)이 흑(黑)으로 판명될 것입니다.이 송사의 핵심은 몽용을 제위노(祭位奴)로 분배받았는지의 허실(虛實)과 화회문기(和會文記)의 진위(眞僞)에 있습니다. 만약 이한거의 말대로 몽용을 제위노로 분배받은 것이 적실하다면 사리상 당연히 분배받은 첫해부터 몽용 두 글자를 그의 장적(帳籍)에 기재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강희(康熙 청(淸)나라 성조(聖祖)의 연호로 1662~1722년) 병인년(丙寅年, 1686, 숙종12) 이후 장적을 상고해 보니 강희 계유식(癸酉式)에 이한거의 할아버지 생존 시 원호적(元戶籍) 가운데 ‘아내 쪽에서 분배받은 노(奴) 후초(厚肖)의 나이는 42세인데, 그의 아비는 사노(私奴) 동금(同金)이고 어머니는 양녀(良女) 정생(丁生)이다.’라고 기재되어 있고 원래 몽용 두 글자는 없었습니다.병인년에서 을유년까지는 20여 년인데, 을유식(乙酉式) 장적에 비로소 아내 쪽에 분배받은 노 폐금(閉金)의 나이는 38세라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무신년(戊申年, 1728, 영조4) 장적에는 분배받은 비(婢) 폐덕(閉德)의 나이는 35세로 기재되어 있고 신해년(辛亥年, 1731, 영조7)의 장적에는 비 폐덕이 하나의 비 선화(善化)를 낳았는데, 그의 나이는 15세라고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미년(辛未年, 1751, 영조27) 장적에는 아비 반노(班奴) 몽용(夢用), 어미 양녀(良女) 구례(九禮) 등이 남평(南平) 정광촌(正光村)에 거주하였다고 기재되어 있었습니다.병인년에 작성한 화회문기가 과연 진짜라면 계유식 호적 중에 제위조 몫으로 분배받은 노 몽용이 왜 기재되어있지 않고 후재(厚載)로 기록되어있단 말입니까. 계유식부터 임오식에 이르기까지 네 개의 호적 가운데 아내 쪽 몫으로 분배받은 후초(厚肖)는 계속해서 기재되어 있고 몽용 두 글자는 아애 없다가 을유식 장적 중에 은연히 폐금ㆍ폐덕ㆍ선화 등이 기재되어 있으니, 저 이한거가 ‘제위조 몫으로 몽용을 분배받았다.’라고 한 말이 과연 말이 되겠습니까. 전후의 장적과 그의 몫으로 분배받은 문기가 이처럼 서로 틀리니, 문기를 위조(僞造)한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이외에 또 한 가지 단서로 위조한 것임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 문기의 내용 중에, ‘처삼촌(妻三寸) 손후권(孫後權)이 벼슬을 구하러 상경(上京)하였다가 미처 내려오지 못하였다고 동서화회(同壻和會)에 이렇게 되어있으며, 막내 후내(後內)의 5녀 중에 3녀는 성혼(成婚)하고 2녀는 성혼하지 않았다.’라고 운운(云云)하였습니다. 손후창 부부가 1년 안에 모두 죽었는데, 그의 아우 손후권이 이미 만호(萬戶)를 지내어 조금 예절은 알 것이므로 영화의 욕망이 비록 간절해도 동기간에 부음(訃音)을 듣고 초상(初喪)에 달려가지 않을 리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손후창이 비록 후사(後嗣)가 없이 죽었다고 하나 이미 그의 아우 손후권이 있으니만큼 전답(田畓)과 노비를 물려받았을 터이고 손후권은 법리상 마땅히 재주(財主)가 되어 이를 맡아 처리하였을 것입니다. 설사 그의 말대로 손후권이 벼슬을 구하러 상경하였다가 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삼년상(三年喪)이 지나지 않고 2녀가 성혼하지 않았으니, 무슨 숨길 일이 있기에 손후권이 내려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이처럼 구차하게 말을 만들어 법에 벗어난 화회를 한단 말입니까. 법리(法理)로 참작해 보고 사례(事例)로 논해 보면 모두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 점에 대해 남평(南平)의 관청에 공문을 발송하여 손후창의 전후 장적 및 전답양안(田畓量案)을 한 번 상고해 줄 것을 요청하고 오동서화회문기(五同壻和會文記)도 일체로 가져다 한 자리에 놓고 서로 상고해 보니 위조한 간계를 엄폐하려 해도 엄폐하기 어렵고 회피하려고 해도 회피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저의 처조모(妻祖母) 구례는 바로 손후권의 여식인데, 이시원(李時元)의 아내 손(孫) 조이(召史 양민의 아내)와 동성 사촌이므로 구례의 자녀 폐금과 폐덕은 손 조이와 이성 오촌의 숙질(叔姪)간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외톨이로 의지할 곳이 없어서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닐 적에 그 이시원이 흉중에 비의(非義)의 마음을 품고 밖으로 목족(睦族)의 의리를 가탁하여 폐덕 1인을 보호하여 데리고 와서 집안에 두고 살면서 서로 숙질(叔姪)로 호칭하다가 폐금과 폐덕을 암암리에 그의 호적에 기재하였습니다. 그의 꾀가 이처럼 음흉하고 간사하였으니, 무식하고 어리석은 폐금ㆍ폐덕과 같은 백성이 어떻게 앞으로 닥칠 우려를 알 수 있겠습니까.폐금ㆍ폐덕이 죽고 폐덕의 아들 학봉(鶴奉)도 죽은 뒤에 학봉의 아들 태산(泰山)ㆍ태남(泰南)ㆍ태금(泰今) 등이 노(奴)의 양처(良妻) 소생이라고 일컬으며 그들에게 매질을 하고 공갈협박하면서 스스로 속전(贖錢 천역(賤役)이나 죄를 면하기 위해 바치는 돈)을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태산 등이 연소하여 형장(刑杖)을 견뎌내지 못하고 우매하여 옥석(玉石)을 분변하지 못한 바람에 그들의 가산을 털어도 부족하여 전답(田畓)의 값을 논하여 속전을 바쳤으니, 이것이 어찌 인정상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설사 그의 말대로 폐금ㆍ폐덕이 진짜 노비라 하더라도 그들의 손녀 태남 등 5명은 모두 신해년(辛亥年) 뒤에 양처(良妻)에게서 낳았으니, 법리상 강제로 속전을 내도록 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법을 어기고 속전을 징수하였습니다. 이로 미루어보건대, 양인을 강제로 노비로 삼는 것이 바로 그들의 집안에 유래한 습관입니다.지난 병인년(丙寅年)부터 올해 식년(式年)에 이르기까지 전후의 장적을 죽 상고해 보면 폐금ㆍ폐덕이 이미 백골(白骨)이 되었는데, 그때에 살아있는 것처럼 혹은 남평(南平)에 거주하였다 하기도 하고 혹은 이필제(李必齊)의 장적에 기재하기도 하고 혹은 이필대(李必大)의 장적에 기재해 놓기도 하고 혹은 이한적(李漢迪)의 장적에 기재하기도 하고 또 이한복(李漢復)의 장적에 기재해 놓기도 하고 또 이동량(李東良)의 장적에 기재해 놓기도 하는 등 천 가지 허점과 백 가지 구멍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변환(變幻)되었으나 이상 각 사람들의 전후 호적 중에 윤화(允化) 두 글자는 한 곳도 기재된 곳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나간 경오식(庚午式) 이한적의 호적 중에, ‘노(奴) 몽용(夢用)의 셋째 소생 비(婢) 윤화(允化)의 나이는 58세인데, 부동방(不動坊)의 각 호(戶)’라고 이처럼 모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그들이 그 윤화를 가리켜 저의 아내 어머니라고 하였습니다.저의 아내 어머니가 만약 그들의 몫으로 분배받은 자의 소생일 경우에 한 성(城)에 같이 산 지 몇십 년이나 된 줄 모를 정도이고 금년에 나이 75세로, 죽은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생전에 어찌하여 한 마디 말이나 반 마디 말도 침해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그리고 제가 아내를 맞이한 지도 17년 정도나 오래되었고 그들과 더불어 조석으로 만나 호형호제(呼兄呼弟)하면서 자주 상종하였는데, 또한 한 마디 말이나 반 마디 말도 침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지금에 이르러 폐금ㆍ폐덕ㆍ학봉 등이 죽은 지 오래되고 저의 아내 어머니도 이미 하얀 백골(白骨)이 되어 물어볼 데가 없게 된 뒤에 갑자기 자기들이 상전(上典)이라고 하면서 으르렁거리며 침해하고 있으니, 이는 바로 이른바 요망한 여우가 촉루(髑髏)로 분장하여 백주에는 출현하지 못하고 어두운 밤에 횡행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그리고 가장 매우 통분한 것은 폐덕 1인을 유인해 데리고 와서 거짓으로 편안하게 보호한 체하면서 은연 중 그의 장적에 기재해 놓았다가 죽은 지 오래된 뒤에 그의 손녀(孫女)의 아들과 양처(良妻)가 모두 신해년(辛亥年)에 태어난 뒤에 그의 소생(所生) 태남(泰男) 등을 강제로 자기의 물건으로 삼아 속전(贖錢)을 받고 내주었으니, 이는 이미 용서할 수 없는 율(律)을 범하였습니다. 이를 본받아 기꺼이 하나의 칼자루로 만들어 스스로 분배받은 몽용의 일파(一派)라고 하며 침해하려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이미 맛보았던 솥 안의 음식에 침을 흘리고 과도하게 요행수에 뜻을 둔 것이 아니겠습니까.다만 지금 식년(式年) 이한복의 호구(戶口)로 본다면 폐금ㆍ폐덕의 나이가 백 년이 지나고 죽어서 백골(白骨)이 된 사람을 고인이 되었다는 의미의 고(故) 자를 쓰지 않고 당시에 부동방(不動坊) 각 호(戶)에 존재한 것처럼 기재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의도이겠습니까. 그리고 여러 이가(李哥)의 호적 중에 폐금ㆍ폐덕ㆍ선화 등을 번갈아 기록하여 마치 누락된 것처럼 만들어 그의 자손을 먹으려는 묘술(妙術)을 부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폐금ㆍ폐덕의 자손은 비록 수백 년이 되더라도 끝내 양인(良人)이 될 날이 없을 것입니다. 그들의 정적(情迹)을 궁구해 보면 어찌 극도로 흉악한 자가 아니겠습니까. 그의 호적 중에 간사한 거짓행위가 백 가지로 나오고 허점의 단서가 여러 가지로 많습니다. 또 화회문기를 위조한 바가 이처럼 명백하니, 그가 비록 밥을 쳐서 떡을 만들고 싶지만 되겠습니까.양인을 강압적으로 노비로 만들 경우에는 마땅히 시행하는 율(律)이 있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전후의 내맥(來脈)을 세세히 참고하여 법대로 처리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인심을 통쾌하게 해 주고 한편으로는 지하에 있는 저의 처모(妻母)의 원통함을 씻어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전후로 호적을 변환(變幻)한 한 조목에 있어서는 이한적ㆍ이한복 등을 심문하여 엄하게 처리해 주소서.”라고 하였다.송척(訟隻 송사(訟事) 하는 상대자) 이한거(李漢擧)의 원정(原情)에, “아룁니다. 몽용은 바로 저의 외증조(外曾祖) 손후창(孫後昌)의 종입니다. 외증조가 원래 아들이 없고 단지 딸만 있었기 때문에 외손(外孫)으로 하여금 제사를 받들게 하고 그 몫으로 약간의 전지와 노비를 모두 저의 할아버지에게 주었습니다. 몽용의 양처(良妻) 구례(九禮)는 바로 외증조의 동복형 손후권(孫後權)의 미천한 딸입니다. 그런데 몽용이 구례와 암암리에 사통하여 데리고 지도(智島)로 도망가 산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몽용이 첫째로 낳은 종 폐금(閉金)ㆍ폐덕(閉德)ㆍ윤화(允和) 등은 모두 같은 태(胎)에서 태어났는데, 그들이 저의 집에서 여러 해 동안 일을 하다가 폐덕은 지금 이미 면천(免賤)하여 양인(良人)이 되었습니다. 윤화는 역리(驛吏) 김구덕(金九德)의 아내가 되었는데, 그가 낳은 첫째 촉운덕(亍云德)은 하리(下吏) 조배성(曺培星)의 아내가 되었고 둘째 아이도리(我伊道里)는 능주(綾州) 하리(下吏) 박등(朴登)의 아내가 되었습니다.대체로 촉운덕ㆍ아이도리는 윤화의 소생이고 윤화는 몽용의 소생이며 몽용은 저의 할아버지가 외가(外家)에서 분배받은 종인데, 몽용 1구(口)가 외증조의 도문기(都文記) 제위(祭位)조에 명백하게 기재되어 있고 몽용 및 그의 소생 폐금ㆍ폐덕 등도 모두 저의 호적 가운데에 기재되어 있으므로 장적(帳籍)을 상고해 보면 한 글자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몽용의 내역이 분명하여 엄폐하기 어렵고 그가 낳은 자녀의 계파(系派)가 분명하여 틀린 바가 없으니, 그 사이에 무슨 의심할 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김구석(金九碩)의 호적에는 그의 아내 아버지가 몽용으로 기록되어 있고 조배성(曺培星)의 호적에는 그의 아내 외할아버지가 몽용으로 기재되어 있으니, 이것이 어찌 하나의 큰 증안(證案)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공초한 바는 사실을 적출하여 진술하였으니, 참작하여 처리해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하였다.문목(問目)에, “조윤관이 아뢰기를, ‘이한거가 바친 화회문서와 원정을 가져다 상고해 보니 병인년(丙寅年) 간에 몽용을 제위조(祭位條) 몫으로 분배받았고 이한거의 할아버지가 봉사(奉祀)를 하였으니, 제위조 몫으로 분배받은 몽용은 마땅히 이한거가 전래한 종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가 낳은 폐금ㆍ폐덕ㆍ윤화는 모두 같은 태(台)의 소생으로 이한거의 집에서 노역을 하였는데, 폐덕은 지금 이미 면천하여 양인이 되었다. 같은 태에서 낳은 형제가 혹은 노역을 하거나, 혹은 양인이 되었으니, 윤화의 딸 촉운덕은 본래 그의 여종이고, 김구석의 호적 중에 그의 아내의 아버지를 몽용이라고 기재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는 너의 아내가 이한거의 여종이라는 하나의 큰 증거이다. 그러니, 이한거의 여종이 아닌 곡절에 대해 다시 고하라.’고 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원고 조윤관을 다시 추문(推問)하니, 그가 아뢰기를, “저 교활한 이한거가 농간을 부린 바가 이미 한 가지가 아니고 화회문기를 위조한 바가 또 이와 같이 명백하므로 지금 말을 허비하여 다시 진술할 만한 단서가 없으나 이렇게까지 물으시므로 감히 조목조목 진술하겠습니다. 대체로 이한거의 원정 중에, ‘병인년 간에 몽용을 제위조로 분배받았고, 그가 낳은 폐금ㆍ폐덕ㆍ윤화는 모두 같은 태(台)의 소생으로 이한거의 집에서 노역을 하였는데, 폐덕은 지금 이미 면천하여 양인이 되었습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너무나도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만약 그의 말대로 몽용을 병인년 간에 분배받은 것이 적실할 경우에 분배받은 그해부터 아내 쪽에 분배받은 것을 반드시 몽용으로 기록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분배받은 몽용을 기록하지 않고 후초(厚肖)로 기록하였단 말입니까. 이것으로 말하건대, 아내 쪽에 분배받은 것은 후초지 몽용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미 후초를 화회에서 분배한 뒤에는 반드시 몽용을 다시 화회에서 분배하지 않았을 터이므로 이른바 후초를 분배한 화회문기가 당연히 진짜 문안입니다. 그 문기를 그로 하여금 바치도록 하면 몽용을 분배받았다는 문기가 저절로 위조로 귀결될 것입니다. 이 송사의 큰 요점은 모두 이 문기에 있으니, 후초를 분배받은 문기를 그로 하여금 속히 바치도록 하소서.병인년에서 을유년까지는 20여 년의 뒤인데, 갑자기 아내 쪽에 분배받은 종 폐금ㆍ폐덕ㆍ선화 등의 아비는 반노(班奴) 몽용, 어미는 양녀 구례라고 은연히 기록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농간을 부린 하나의 큰 증안(證案)입니다. 두 번 지나간 병인년에서 저번에 지나간 경오년까지는 67년이나 되는 오랜 기간입니다. 그런데 67년 사이에 이한거 등의 호적 가운데 윤화(允化)란 두 글자가 기재된 곳이 단 한 곳도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과 같이 한 성(城)에 산 지 또한 몇 년인 줄 모를 정도였으나 원래부터 한 마디 말이나 반 마디 말도 침해하지 않았고 또한 말하는 사이에 털끝만큼도 내비치지 않다가 이제 와서 ‘노역을 하였다.’라고 운운(云云)하니, 이는 허위로 꾸며 낸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저절로 허망(虛妄)한 것으로 귀결되고 말 것입니다.그리고 저희 집안이 대대로 이 땅에서 거주하면서 이한거 무리들과 같이 이웃집에서 살았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는 그들과 더불어 죽마(竹馬)를 타고 파피리를 부는 등 사이가 친밀하였고 장성해서는 호형호제(呼兄呼弟)하는 등 세의(世誼)가 남달랐으며 사내를 장가보내거나 여자를 시집보낼 적에 피차가 서로 대등한 사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어찌 동서(同壻)의 딸에게 장가를 들고 노역(奴役)을 할 리가 있겠습니까. ‘폐덕은 지금 이미 면천하여 양인이 되었다.’라고 하는 말은 더욱더 말이 되지 않습니다. 폐덕은 이한거의 할머니 손 조이(孫召史)와 이성 오촌숙질(五寸叔姪)의 사이였는데, 혈혈단신(孑孑單身)으로 의지할 데가 없어서 떠돌아다니며 살 곳을 잃었을 때에 이한거의 할아버지 이시원(李時元)이 흉중에 비의(非義)의 마음을 품고 밖으로 목족(睦族)의 의리에 가탁하여 편안히 보호하겠다며 데리고 와서 집안에 두고 서로 아저씨와 조카로 호칭하다가 암암리에 폐금ㆍ폐덕 등을 호적에 기재하여 장래의 기물(器物)로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비록 그의 꾀가 음흉하였으나 도리어 금일 이한거가 망신(亡身)당하는 함정이 되어버렸습니다. 복을 구하는 계책이 도리어 화를 얻게 된 것이 어찌 이런 경우가 아니겠습니까.위의 폐덕이 죽고 폐덕의 아들 학봉(鶴奉)도 세상을 떠난 뒤에 학봉의 자식 태남(太男) 등 5명을 종과 양처(良妻)의 소생으로 지칭하고 자칭 상전이라 하면서 곤장을 치고 협박하여 그들로 하여금 대가(代價)를 바치고 속죄(贖罪)하도록 한 바람에 그들이 가산을 탕진하는 데 이르렀습니다. 이른바 학봉이 과연 진짜 이한거의 종이라면 그의 소생 태남 등은 이미 신해년(辛亥年) 후에 양처가 낳은 것이므로 법리상 대가를 요구하거나 속전을 징수할 없습니다. 그런데 태남 등이 우매 무지하다고 여기어 법을 벗어나 강제로 속전을 징수하였으니, 이러한 짓도 잔인하게 하는데, 무슨 짓인들 못하겠습니까. 그가 이미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하고 나서 봄철에 꿩이 스스로 울듯이 이를 구실로 삼아 ‘태남 등을 방면하여 양인이 되도록 하였다.’라고 하니, 그게 과연 말이 되겠습니까. 이는 바로 이른바 스스로 자기의 뺨을 때린 격입니다.또 한 마디 말로 판가름을 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한거가 바친 화회문기(和會文記)가 과연 진짜의 문안이고 몽용을 분배받은 것도 적실할 경우에 병인년에 화회(和會)할 때에 몽용의 아들 폐금의 나이는 18세이고 몽용의 딸 폐덕은 나이 15세입니다. 폐금과 폐덕의 나이가 이미 장성하였으니만큼 화회문기 가운데 마땅히 ‘몽용과 그의 양처가 모두 폐금ㆍ폐덕을 낳았다.’라고 써넣어 처리해야만 사리상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른바 문기 중에 단지 몽용 1구(口)만 기재하였으니, 그 문기를 위조했다는 것이 명명백백(明明白白)하여 엄폐하기 어렵습니다.그리고 문목(問目) 중에, ‘너의 아내의 아버지를 몽용으로 기록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너의 아내가 이한거의 여종이라는 하나의 큰 증안(證案)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문기의 위조가 이처럼 명백하니, 몽용을 분배받지 않았다는 것도 명백합니다. 그런데 지금 몽용을 아내의 아버지로 기록하였으니, 이것을 어찌 노비의 증안으로 귀결지울 수 있겠습니까.또 윤화(允化) 두 글자를 저번에 지나간 경오식(庚午式) 이한거의 호적 가운데 비로소 암암리에 기재해 놓고 제 아내의 어머니라고 지칭하였습니다. 노비의 허실(虛實)에 대해서는 우선 놔두고 논하지 않고 사리만 가지고 말하더라도 침해한 자는 마땅히 이한적이 되어야 하고 송사에 응해야 할 자도 마땅히 이한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한적이 자기가 한 짓이 비리임을 알고 송사를 기각해 줄 것을 애걸하다가 억울하다고 호소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른바 이한적이 중간에 돌출하여 앞장서서 침해하고 앞장서서 대신 송사를 하였으니, 무슨 의도란 말입니까. 그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대저 송사의 요점은 사리를 벗어나지 않고 법문(法文)이 분명하여 일성(日星)과 같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피차의 곡직을 참고하여 법대로 처결해 주시기 바랍니다.전답(田畓)과 노비는 말할 것도 없고 크고 작은 송사 중에 상고할 만한 문기를 처음 송사를 제기할 때 한 번 바친 뒤에는 비록 혹시 상고할 곳이 있더라도 송사의 상대방과 같이 관아의 뜰에 들어가 피차가 보는 곳에서 한번 고열(考閱)한 뒤에 곧바로 반납하는 것은 본래 송사의 체통입니다. 저 교활한 이한거는 이 일을 꾀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만큼 그의 집에 유래 운운한 화회문기(和會文記)를 필시 달마다 강론하고 날마다 눈여겨보았을 것이므로 의당 한 마디 말이나 하나의 글자도 잘 알지 못한 곳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제 와서 오동서화회문기(五同壻和會文記)에 대한 문목(問目)이 하달된 뒤에 간사한 허점을 막기 어려울까 겁을 먹고 너무나 초조한 나머지 송사의 체통을 헤아려 보지 않은 채 고열할 곳이 있다는 이유로 당돌하게 혼자 들어가 문기를 가지고 나와 자기 집에 엎드려 1통의 말을 만들고 참증(參證)을 뽑아 그 뒤에 조목조목 열거하였는데,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베껴냈습니다. 그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헤아려 보면 전후로 위조한 묘술(妙術)이 오늘날 발단이 되었다는 것이 너무나도 분명합니다.이른바 화회문기 중에 비록 제위(祭位)에 대해 조목별로 열거한 사항이 있기는 하나 이시원의 이름 아래 별도로 봉사(奉仕)란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금일 외손봉사(外孫奉祀)라고 한 말도 진실인지 추측하기 어려우니, 그 말이 극도로 궁색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한거가 전후로 저지른 간사한 행위가 이미 이와 같이 훤히 드러났으니, 모두 참작하여 처분을 내려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하였다.이한거(李漢擧) 나이 43세. 아뢰기를, “‘너희 할아버지 이시원(李時元)의 아내 쪽 전민(田民)에 대한 오동서화회문기(五同壻和會文記)를 이미 바쳤다. 너희 할아버지 이시원의 처가가 이미 후사(後嗣)가 없으므로 제위조(祭位條)의 전민(田民)이 귀속(歸屬)할 데가 없었는데, 너희 할아버지 이시원이 도의상 외손봉사(外孫奉祀)하게 되자, 그 전민을 분배해 주었을 것이니, 그때 몽용을 분배받은 명문(明文)을 바치도록 하라. 그리고 어느 해부터 비로소 봉사를 하였으며 봉사한 연조(年條)를 모두 고하도록 하라.’고 추문(推問)하셨습니다.저의 할아버지 이시원의 아내 쪽 사내종 몽용을 분배받은 명문은, 저의 외증조(外曾祖)가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그 제위조의 전민을 저의 할아버지의 오동서화회명문 중에 몽용을 제위조에 기재하였는데, 이것이 저의 할아버지 몫으로 분배받은 명문입니다. 외가의 제사를 받든 것은 병인년부터 비로소 하였습니다. 상고하여 처리해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하였다.문목(問目) “이한거가 아뢰기를, ‘「몽용을 손가(孫哥)의 집에서 제위조의 몫으로 분배받았다면 분배받을 때에 너의 할아버지 처삼촌(妻三寸) 손후권(孫後權)이 마땅히 재주(財主)가 되어 문서를 작성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의 사위 3인 등이 스스로 재주가 되어 그 일을 맡아 분배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법리(法理)란 말인가. 몽용을 과연 병인년에 분배받았다면 강희(康熙) 계유식(癸酉式) 너의 할아버지 이시원 호적 가운데 아내 쪽에서 분배받은 사내종 후초(厚肖) 하나만 기재되어있고 몽용 두 글자는 아애 없었는가 하면 20년 후 을유식(乙酉式)의 호적 중에 아내 쪽에서 분배받은 종 폐금(閉金)ㆍ폐덕(閉德)ㆍ선화(善化) 등이 비로소 기재되어 있었다.그리고 그들의 아비 반노(班奴) 몽용(夢用)과 어미 양녀(良女) 구례(九禮) 등이 남평(南平) 정광촌(正光村)에서 살았다고 하였으니만큼 몽용을 과연 병인년에 제위조로 분배받았다면 마땅히 호적에 기재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계유년부터 임오년까지 네 번 식년(式年)에 이른 뒤에 호적에 기재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곡절인가.노비를 몫으로 분배받을 적에 각각 그 주인이 있으니, 가령 몽용을 진짜로 네가 분배받은 종이라면 너의 호적에 마땅히 기재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필대(李必大)ㆍ이한적(李漢迪)ㆍ이한복(李漢復)ㆍ이동량(李東良) 등 5인의 호적 중에 모두 기재한 것은 무슨 뜻인가.윤화(允化) 두 글자는 기재된 곳이 하나도 없다가 비로소 이번에 지나간 경오식(庚午式)의 이한적 호적 중에 몽용의 셋째 소생 여종 윤화의 나이는 58세라고 기록되어 있다. 과연 마땅히 추심해야 할 노비라면 몇 년이나 된지 모를 정도로 그들과 같이 한 성(城) 안에 살면서 그들이 노비란 것을 한 마디 말이나 반 마디 말도 하지 않다가 폐금ㆍ폐덕ㆍ윤화 등이 모두 죽어서 물어볼 데가 없게 된 뒤에 비로소 그들이 너의 노비라고 말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곡절이란 말인가.다시 너의 원정을 보니, 구례는 바로 너의 외증조의 아우 손후권(孫後權)의 미천한 딸이고 구례가 낳은 윤화는 바로 너의 외증조 손후창(孫後昌)의 질녀이다. 그러므로 오동서(五同壻)가 전민(田民)을 분배하는 문서를 작성할 때에 만약 손후권이 있었다면 필시 그의 딸을 질녀서(姪女壻)에게 분배해 줄 리가 없으며, 가령 오여서(五女壻)가 전민을 분배할 때에 손후권이 혹시 몰랐다고 하더라도 그 뒤에 분배한 문서를 필시 보았을 것이고 그러면 아마도 그들이 분배한 대로 그냥 두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볼 적에 그 화회문기를 위조한 것임이 명백하여 의심할 바가 없다. 오여서(五女壻)의 분배문기(分配文記)를 취하여 상고할 것이니, 모두 바치도록 하라.」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송척(訟隻) 이한거가 아뢰기를, “문목의 내용에 운운(云云)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 가문에서 전민(田民)을 분배하는 방도는 원재주(元財主)가 없을 경우에 차재주(次財主)가 분배할 수 있고, 형제가 화회(和會)할 때 반드시 문장(門長 가문의 어른)이 증인으로 참석해야 하는데, 이는 본래 마땅히 시행하는 규정입니다. 그런데 저의 외증조 부부가 미처 전민을 분배하지 못하고 해마다 잇따라 돌아가셨으므로 뒤에 동복형 손후권이 마땅히 주관하여 전민을 분배했어야 할 것입니다.그런데 손후권이 무과(武科) 출신(出身)으로 벼슬을 구하러 상경(上京)한 지 여러 해 만에 겨우 만호(萬戶) 벼슬을 얻어 그때 임소에 있으면서 형의 초상과 제수의 초상이 났다는 기별을 듣고도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는데, 이는 벼슬을 탐한 소치가 아님이 없습니다. 또한 중간에 소식이 서로 끊어졌을 적에 그의 천첩(賤妾)에게서 난 구례가 그의 아우 집 사내종 몽용과 간통하여 도망가 숨어버렸는데, 가문의 변괴가 이보다 더 큰 것이 없기 때문에 너무나도 통분한 나머지 참여하여 간여하지 않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그리고 문장이 올 기약도 묘연한데다 결혼을 하지 않은 동생이 의탁할 곳이 없고 처부모의 제사를 주관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 동성 8촌인 손순매(孫順每)와 이성 5촌인 강시재(姜時裁)를 참관의 증인으로 삼아 화회문서를 작성한 다음 여러 동서가 각각 1장씩 나누어 가졌습니다. 어찌 동서가 스스로 재주가 된 혐의가 있겠으며, 또 이것이 어찌 위조를 의심할 만한 단서가 되겠습니까.문목 중에 거론한 몽용을 기재한 일은 의심할 것조차도 없습니다. 대개 후초(厚肖)는 아내 쪽에서 분배받은 종이기 때문에 병인년에 기재한 것이고, 몽용은 애당초 분배받은 종이 아니고 아내의 부모 제위조(祭位條)로 별도로 분배한 종이므로 병인년에 화회문서를 작성할 때 제위조에 분명하게 기재한 것입니다. 제위조는 마땅히 큰 사위에게 해당하나 둘째 사위 박지수(朴之秀)가 남평(南平)에 살기 때문에 동향(同鄕)인 점을 취하여 그로 하여금 제사를 받들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박지수 부부가 불행히도 후사(後嗣)가 없이 모두 죽은 뒤에 도리어 제사를 주관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여러 동서가 강희(康熙) 계미년(癸未年, 1703, 숙종29)에 또다시 화회를 열어 저의 할아버지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하고 차지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병인년(丙寅年, 1686, 숙종12)부터 임오년(壬午年, 1702, 숙종28)까지는 박지수가 차지한 걸로 기재하고 계미년(癸未年) 이후에는 저의 할아버지가 차지하였기 때문에 아내 쪽 제위조의 종 몽용을 을유년(乙酉年)부터 기재한 것이니, 그 사이에 무슨 의심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문목 중에, ‘윤화(允化) 두 글자를 경오식(庚午式) 호적에 비로소 기록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윤화는 저의 큰삼촌 호적에 분명하게 기재되어 있는데, 식년(式年)마다 반드시 기록한 바가 한두 번이 아니었으므로 더욱더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이는 전일 장적을 가져다 상고할 때에 저의 삼촌 호적을 끝내 두루 상고해 보지 않은 까닭입니다.문목 중에, ‘노비가 각각 그 주인이 있는데, 두세 사람을 모두 기재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몽용을 이미 제위조에 기재하였으면 제사를 주관한 사람이 마땅히 차지한 걸로 기재해야 하기 때문에 저의 할아버지 생전에 마땅히 차지한 걸로 기재한 것이고, 저의 할아버지의 호적을 파기한 뒤에 저의 아버지가 대신 호적을 수립하였기 때문에 예전대로 기재한 것입니다. 저의 할아버지가 임종(臨終)할 때에 제위조를 중자(仲子)에게 이속(移屬)하였기 때문에 경오식(庚午式) 호적부터 기재하였다가 가운데삼촌이 죽은 뒤에 장종형(長從兄) 이한적(李漢迪)이 아버지 대신 호적을 수립하였기 때문에 몽용이 그 호적에 들어간 것이니, 이는 당연한 도리입니다. 이는 부자와 형제가 차례대로 이어서 기재한 것이니, 또한 어찌 의심할 것이 있겠습니까.문목 중에, ‘같이 한 성안에 살면서 한 마디도 노비라고 말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는데, 이 대목을 재삼 읽으면서 한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개 윤화의 모녀가 같이 이웃마을에 살면서 혹은 세시(歲時)에 찾아와 인사를 하기도 하고 혹은 명절에 반찬을 바치기도 하였습니다. 그 뒤에 윤화의 딸 사십덕(四十德)과 아도이(我道伊) 2구(口)가 시집을 가려고 할 때 그의 어미 윤화가 20냥을 가지고 와서 양인(良人)으로 만들어주어 혼사 길을 열어달라고 간청하였으나 저의 종형이 ‘너희들은 외증조 제위조의 종이므로 임의로 양인을 허락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굳이 거절하고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찌 같이 한 성안에 살면서 한 마디 말이나 반 마디 말도 노비라고 언급한 일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또 종형의 집에서 노역을 한 학봉(鶴奉)ㆍ태산(太山) 등은 바로 몽용의 손자이고 사십덕과 사촌의 사이입니다. 그렇다면 학봉ㆍ태산 등이 어찌하여 저의 집 종이 되겠으며, 사십덕이 어찌하여 저의 집 종이 될 수 없겠습니까.그지없이 분개한 나머지 많이 변론하지 않겠습니다. 사십덕과 아석이(我石伊)는 모두 윤화의 소생인데, 아석이는 능주(綾州) 하리(下吏) 박등(朴登)의 아내가 되고 사십덕은 오늘날 조배성(曺培星)과 송사를 벌이고 있습니다. 장적을 상고해 보고 각장의 문기를 상고해 보면 내맥(來脈)이 분명하니,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의심할 것이 있겠습니까.대개 손후권(孫後權)이 재주(財主)가 되지 않았던 것은 녹봉(祿俸)을 구하는 데 탐욕을 부려 끝내 고향을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봉사(奉祀)를 주관할 사람이 없고 동생(同生)이 의탁할 데가 없어서 다급한 나머지 여러 동서가 동성(同姓)의 처당(妻黨), 이성(異姓)의 처족(妻族)과 같이 의논하여 전민(田民)을 분배하였는데, 이는 정리상 당연한 것이고 사리상 떳떳한 것입니다. 또 손후권이 경성(京城)에서 죽어서 돌아왔으니, 그가 전후의 문서에 끝내 참석하여 간여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말로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몽용을 이미 제위조로 분배받은 것이니만큼 제사를 받들기 전에는 차지할 수 없으므로 제사를 받든 뒤에 비로소 호적에 기록하였으니, 이는 법리의 경상적인 것이고 사리의 당연한 것입니다.윤화가 처음부터 나중에 이르기까지 주인이라 호칭하고 여종이라 호칭하였고 저의 큰삼촌 호적에 잇따라 기록하였으니, 몽용의 내맥(來脈)이 분명하여 엄폐하기 어렵고 문권(文券)의 참증(參證)이 뚜렷하여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조배성(曺培星)이 무슨 상고할 만한 문권(文券)이 있고 무슨 근거할 만한 법리(法理)가 있기에 간계를 꾸며 백방으로 주인을 거절하고 있으니, 너무나도 터무니없습니다. 또 그가 저의 집 화회문서를 위조했다고 한 말은 더욱더 매우 통분합니다. 설사 저의 할아버지가 탐욕스럽고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한 장의 문자는 혹시 위조할 수 있지만 여러 동서의 각 가정에 있는 문권을 모두 낱낱이 위조할 수 있겠습니까. 백 년 가까이 유래한 문권을 금일에 이르러 위조한 것으로 의심하고 있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외람됨을 피하지 않고 조목마다 진술하오니, 전후 문서의 진위, 몽용의 내맥, 조배성의 교활, 제가 세력이 없어 고단한 연유에 대해 일일이 통촉하신 뒤에 법전과 문권에 따라 공정 명확하게 처결해 주시기를 천만번 바랍니다.”라고 하였다.문목(問目)“조윤관이 말하기를, ‘몽용은 분명 손씨(孫氏) 집의 종인데, 외손봉사(外孫奉祀)조로 박지수(朴之秀)에게 분배해 주었다가 박지수가 죽은 뒤에 이시원(李時元)에게 이속(移屬)하였기 때문에 몽용의 자식은 모두 이시원의 노비이다.’라고 하였다. 몽용이 호적에 누락된 것에 대해 너의 원정 중에, ‘비록 이것이 의심의 단서가 될 수 있으나 지금 이한거의 원정을 보면 봉사를 처음 박지수에게 위임하였기 때문에 병인년부터 임오년에 이르기까지 박지수가 차지한 걸로 기재하였고 계미년 이후에 비로소 그의 호적 중에 기재하였습니다. 이로 본다면 화회문기가 위조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윤화의 자녀가 이미 몽용의 자손이므로 그의 동생 등이 혹은 사환(使喚 심부름꾼)으로 부리기도 하고 혹은 양인(良人)으로 내보내기도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너의 아내만 어찌 이한거의 노비가 될 수 없겠는가. 몽용을 과연 이시원에게 분배하지 않았다면 지금 몽용의 상전은 누구이겠는가. 이 한 조목에 대해 고하도록 하라. 박지수가 남평(南平)에다 호적을 만들었으면 몽용이 그 호적에 기재되었는지의 여부를 상고(相考)해야겠으니, 이한거와 같이 베께서 가지고 오도록 하라.”고 하였다.같은 날 이한거 42세, 아뢰기를, “네가 바친 분재도문서(分財都文書)를 상고해 보니 강희(康熙) 55년 병술(丙戌)에 작성하였는데, 사십덕(四十德)의 어미 윤화(允化)는 과연 너의 몫으로 분배받은 것이었다. 윤화는 계유생(癸酉生)이므로 병신년에 분배받을 때 그의 나이가 이미 24세이다. 어찌하여 분배한 문서에 기재하지 않았는지 다시 고하도록 하라. 계유년부터 임오년까지 40년 동안 기재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그 곡절을 그 사이로 돌릴 것이다. 그렇다면 외가의 봉사를 박지수(朴之秀)로 정하였기 때문에 마땅히 남평 박지수의 호적에 기록되어 있을 터이니만큼 박지수의 호적을 한 번 상고해 보면 당장 분변될 것이다. 조윤관(曺允寬)과 같이 가서 남평의 호적을 베껴서 성첩(成貼)해 가지고 오도록 하라.”고 하였다.원고 조윤관을 다시 추문하니, 아뢰기를, “문목 중에, ‘남평현(南平縣) 장적에 몽용이 기재되어 있는지의 여부에 관해 송척 이한거와 같이 베껴오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한거와 같이 가서 베껴보니 본현(本縣) 두산면(頭山面) 마성리(馬城里) 15통의 신유식(辛酉式) 손후창(孫後昌)의 호적에, ‘여종 시월(十月)의 셋째 소생 사내종 몽용의 나이 37세’로 기재되어 있었고 을유식(乙酉式) 호적에는 ‘아비 사노(私奴) 언명(彦命)’으로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을유식 손후창의 동복아우 손후권의 호적에는 ‘여종 시월의 셋째 소생 사내종 수점(水占) 나이 36세’로 기재되어 있었고 병술년 호적에는 ‘아비 언명’으로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7년 뒤에 손후창이 죽고 사위 박지수(朴之秀)가 대신한 정묘식(丁卯式)의 호적에는 ‘여종 시월의 소생 사내종 목용(木用)의 나이 44세’로 기재되어 있었고 을유식 호적에도 이와 같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상 3개의 호적을 근거로 삼아 거짓말의 단서를 추출해 보니 단 한 명의 여종 시월이 낳은 자식이 어찌하여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는 몽용이고 하나는 수점이고 하나는 목용이니, 한 어미가 1년에 세 번 출산하지 않았다면 이는 반드시 허위이므로 여러 번 많이 변론할 것조차도 없습니다.또 그 가운데 하나의 큰 허위의 단서가 있습니다. 피고 이한거가 이른바 손후권은 손후창의 형인데, 손후권의 호적에는 그의 나이가 59세로 기재되어 있었고 계해식의 아우 손후창의 호적에는 그의 나이가 62세로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경신년(庚申年)에 나이 62세 먹은 자가 59세 먹은 자의 아우가 되었고 나이 59세 먹은 자가 62세 먹은 자의 형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낳은 연도를 계산해 보면 아우가 형이 되고 형이 아우가 되었는데, 이한거가 이른 바로 말한다면 아우가 거꾸로 형이 되고 형이 거꾸로 아우가 되었으니, 형제의 순서가 도착되어 천륜의 자리가 뒤바뀌었습니다. 그렇다면 관가(官家)에서 신빙(信憑)의 자료로 삼아야 할 것은 당사자들의 본적(本籍)이겠습니까. 송사를 제기한 자의 위조문서이겠습니까. 남평현에 만약 장적이 없다면 이한거의 문기와 원정이 거의 말을 가리켜 사슴이라고 한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너무나도 음험합니다. 이 하나의 거짓 단서만으로도 충분히 이 송사의 단안(斷案)이 될 수 있으므로 다시금 번거롭게 다른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그리고 이한거의 집안에서 대대로 쌓아온 공부가 모두 허위로 꾸미는 데 뜻을 기울이고 힘을 기울인 바가 비일비재한 자취를 아울러 거론하여 밝히겠습니다. 이한거가 바친 문기에 말하기를, ‘손후창이 임술년(壬戌年)에 사망한 것이 적실하다.’라고 하였는데, 남평현 장적에는, ‘손후창이 정묘년(丁卯年)에 사망하였고 그의 사위가 대신 호적을 세웠다.’라고 분명하게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임술년에 이미 죽은 손후창이 다시 살아나 6년 후에 생을 마쳤다는 말입니까. 정묘년에 생을 마친 것을 정묘년이라 말하지 않고 62세 먹은 형을 거꾸로 59세의 아우라고 한 것입니다. 이처럼 제형(弟兄)이 뒤바뀌고 사생(死生)이 전도되었으니, 어느 일이든 속이지 않겠으며 무슨 말인들 지어내지 못하겠습니까. 천친(天親)의 큰 윤리를 뒤바꾸고 막대한 사생을 변개(變改)하였으니, 외손봉사를 했다는 거짓말과 화회문서를 위조한 것은 정말로 이한거 등이 소유한 재능의 나머지 버릇입니다.또 손후창의 소생은 본래 7녀인데, 이한거가 이른바 화회문서에는 숫자를 줄여 단지 5녀로 기록하였으니, 이는 농간을 부리는 허위가 많아 번다한 것이 싫어서 줄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또 송사마당의 한 가지 단서입니다.또 외손봉사의 설을 사람의 상정(常情)으로 헤아려 보면 더욱더 기만 중에 완전히 기만한 것입니다. 그 이유를 어떻게 밝히느냐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손후권이 이미 전 만호였는 만큼 행신이 옹졸하지 않을 것이니, 자기에게 비록 아들 한 명만 있더라도 큰형님의 종사(宗祀)를 완전히 단절하지 않고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아들이 두 명이나 있었으니, 어찌 차마 아버지의 형제 제사를 외면하고 외손(外孫)에게 맡길 수 있겠습니까. 이는 너무나도 사리에 벗어나 근거가 없는 허황된 말입니다.문목 중에, ‘몽용을 제위조로 이시원에게 분배하지 않았다면 지금 몽용의 상전은 누구인가? 이 한 조목에 대해 분명히 고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몽용이 비록 손후창의 종이지만 그의 아내 구례는 바로 손후창의 아우 손후권의 여식입니다. 그렇다면 몽용은 이시원과 사촌동서의 사이이고 손후창의 질녀서이므로 그의 자손은 손후창의 지친(至親)이니, 이는 외손에게 제위조로 분배해 준 노비가 아닙니다. 만약 손후창을 상전으로 가리킬 경우에는 상전인 손후창이 도리어 처삼촌이 되니, 이외에 어떤 사람이 그의 상전이 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정리(情理)가 다한 뒤에 차지한 손후권의 후손이라면 그래도 되겠으나 손후창의 외손은 천만 부당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밖에 허위의 단서를 이루 다 지적할 수 없고 필단(筆端)으로 이루 다 거론할 수 없으나 몇 건의 큰 조목만으로도 충분히 명감(明鑑)이 꿰뚫어 볼 수 있고 도깨비를 깨뜨리는 태양이 될 수 있기에 요점을 뽑아서 공초를 바치고 법대로 처결해 주시기를 기다립니다.”라고 하였다.송척 이한거의 원정에, “아룁니다. 저의 아버지가 병신년(丙申年)에 재산을 분배할 적에 촉운덕(亍雲德)의 어미 윤화(允化)를 도문서(都文書) 가운데 기재하지 않은 일에 대해 저번의 공초 중에 이미 누락된 경위를 대략 진술하였습니다. 대개 목용(木用)과 구례(九禮)가 은밀히 간통한 뒤에 자취가 탄로 날까 두려워한 나머지 해도(海島)로 도망가 여러 해 동안 살다가 목용 부부가 모두 죽은 뒤에 그의 소생 폐금ㆍ폐덕 등이 의지할 데가 없자 스스로 상전의 집에 나타났는데, 이로 인해 그냥 눌러앉아 사역(使役)을 하게 되었습니다. 윤화는 해도에서 타처로 시집가 숨어살았는데, 폐금 등이 완전히 숨겼기 때문에 윤화의 유무를 알지 못하여 문서에 기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뒤에 윤화가 나이 30이 가까워져서 본남편에게 구박을 당하여 갈 데가 없자, 부득이 폐금ㆍ폐덕을 찾아와 의탁한 뒤에 비로소 윤화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윤화가 찾아와 나타난 뒤에 그냥 김구석(金九碩)의 아내가 되어 촉운덕과 이도리(伊道里)를 낳았습니다. 그러므로 병신년에 전민(田民)을 분배할 적에 윤화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윤화가 목용의 소생임이 적실하여 의심할 바가 없고, 몽용을 저의 할아버지가 제위조의 몫으로 분배받았다는 것이 또 적실하여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윤화가 문서 중에 기재되었는지의 여부가 송사의 단안이 될 가치가 없습니다.박지수(朴之秀)의 호적은 분부하신 대로 조윤관(曺允寬)과 같이 등서(謄書)하여 인장을 찍어 바칩니다. 조윤관이 거짓을 꾸며 농간을 부리는 바가 갈수록 더해지고 있으니, 차후에 또 무슨 탈잡을 만한 단서를 만들어낼지 모르겠습니다. 전후의 문권을 일일이 조사하고 상고하여 공정하게 처결해 주시고, 조윤관의 백 가지 간사한 정황도 통촉해 주시어 관정(官庭)에서 시끄럽게 소요를 일으키는 폐단이 없도록 해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하였다.남평(南平) 이광필(李光必) 나이 60세. 아뢰기를, “‘남평현(南平縣) 전 만호(萬戶) 손후권(孫後權)이 벼슬을 구하러 상경하였는데, 혹은 경성에서 죽었다 하고 혹은 집에서 죽었다 하기도 하였다. 손후권이 어디에서 죽었는지 사실대로 고하라.’고 하셨으므로 아룁니다. 손후권이 경성에서 내려와 집에서 죽은 정황에 대해 저의 아내 및 동(洞)에 거주하는 8, 90세 노인 중에 90세 황여기(黃汝己), 80세 조신방(曺信方) 등이 모두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상고하여 처결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성안에 거주하는 주 조이(朱召史) 나이 63세. 아뢰기를, “문목 중에 남평현 전 만호 손후권이 죽은 곳에 대해 추문(推問)하였습니다. 저는 손후권의 외손부(外孫婦)이므로 손후권이 경성에서 죽었는지의 여부에 대해 알지 못하오니, 상고하여 처리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원고 조윤관의 원정에, “아룁니다. 제가 송사를 시작한 뒤에 3통의 원정과 두 차례의 문목에 대한 진술을 모두 바쳤으므로 지금 마땅히 곡직을 판별하여 결안(決案)을 작성할 단계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문자 중에 명백한 허위의 단서를 혹시 다 채취하지 못하여 신감(神鑑)의 착오를 초래하지나 않을까 염려되기에 이전에 진술하여 드렸을 때 적실하여 의심할 것이 없는 허위의 단서 중에 가장 큰 14개 조목을 간추려서 결말을 지을 때에 상고하기에 편리하도록 하였습니다.1. 송척(訟隻) 이한거가 송사를 제기한 초기에 단지 화회문기 한 장을 바치면서 말하기를, ‘이 밖에 다른 문권은 없습니다. 봉사(奉祀)는 병인년부터 시작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몽용이 병인년과 을유년의 호적에 누락된 것에 대해 그의 원정 중에 말하기를 ‘해도로 도망가 살았기 때문에 호적에 기재되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가 관가에서 물어보자 말하기를, ‘저의 할아버지 이시원의 동서 박지수가 중간에 봉사를 맡았기 때문에 호적에서 누락된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송사의 핵심은 모두 봉사 한 조목에 달려있는데, 어찌하여 문권을 바칠 때에 이 일을 말하지 않고 있다가 관가에서 물어본 뒤에 이 일을 말하였단 말입니까. 그가 궁지에 몰리자 갑자기 만들어낸 허위의 말임이 분명하게 탄로 났으니, 이것이 하나입니다.1. 저와 이한거 등이 같이 한 성안에 살면서 정이 형제와 같은 벗이었습니다. 만약 이러한 일이 있다면 제가 장가간 뒤 17년 동안에 어찌하여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다가 저의 아내 어머니와 폐덕 등이 죽은 지 오래되어 물어볼 데가 없게 된 뒤에 이 일을 끄집어냈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마치 여우가 촉루(髑髏)로 분장하여 증인의 눈이 있을 때에는 나타나지 못하고 하늘이 흐려져 비가 젖기를 기다렸다가 머리를 내민 것임이 명백하여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1. 폐덕의 아들 학봉이 정말로 이한거의 말대로 그의 종이 되었다면 그의 자녀는 바로 양처(良妻)의 소생이고 또 신해년 뒤에 태어났으니, 그가 법을 어기고 차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감히 곤장을 치고 위협하여 속전(贖錢)을 징수하였고 지금에 이르러 말을 만들어 말하기를, ‘주인으로서 그를 양인(良人)으로 만들어 풀어 주었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그의 가풍(家風)을 이어받은 것이 아니겠으며, 또한 계략 위에 꾀를 써서 그 간특함이 비할 데가 없는 자가 아니겠습니까.1. 이한거가 이른바 화회(和會) 운운한 것은, 설사 그의 말대로 재주 손후권이 벼슬을 구하러 상경하여 문기를 작성할 때 미처 참석하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그의 아들 손시흥(孫時興)의 나이가 36세이고 그의 아우 손우작(孫右作)의 나이가 또 장성하였으니, 법리상 마땅히 참석하여 화회문기를 작성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재주 부자가 모두 참석하지 않고 화회를 구성했다고 하니, 이것이 어찌 거짓으로 말한 것임이 명백하여 의심할 바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1. 오동서화회문기를 모두 바칠 것을 분부하였으니, 이한거가 마땅히 각장의 문서를 취합하여 바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허겁지겁 관정(官庭)으로 들어가 전에 바친 문서에 상고할 부분이 있다고 핑계 대면서 도로 추심해 가지고 나와 암암리에 사실(私室)에 엎드려 1자의 가감도 없이 베껴냈는데, 그 베껴낸 것이 비로소 오동서가 소지한 각장의 문서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의 그릇된 습관이 성질로 굳어져 계속 허위의 농간을 부리고 있으니, 더욱더 사람으로 하여금 모발이 쭈뼛쭈뼛하여 소름이 끼칩니다.1. 이한거가 이른바 ‘화회문기는 재주 손후권이 알지 못하고 참석하지 않았다.’라고 한 말에 대해 꾀를 써서 엄폐하기를, ‘손후권이 벼슬을 구하러 상경하였다가 죽어서 오지 않았다.’라고 하는 등 그의 원정 중에 공허한 것을 빌려서 공허한 것을 보충하였으나, 실은 손후권이 자기 집에서 죽은 것을 그의 손녀사위 이가(李哥)가 스스로 증명하였습니다. 또 손후권이 백신(白身)으로 벼슬을 구하러 갔다고 하면 말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출신(出身)으로 공초를 하였으나 실은 애당초부터 활을 잡아보지도 않았던 자입니다. 만약 사실을 확인하려고 할 경우 홍패(紅牌)를 바치도록 하면 곧바로 그 말이 허위임이 판명될 것입니다. 한 가지 허위를 잡아내면 백 가지 허위가 모두 탄로 난다는 것을 하늘을 두고 증명할 수 있습니다.1. 이한거의 원정 중에, ‘박지수가 후손이 없다.’라고 한 것은 박지수가 후손이 없다고 말해야만 제위조(祭位條)로 분배한 것을 이속(移屬)했다는 말이 성립되기 때문에 후손이 없다는 말을 완전히 허위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렇다면 박지수의 아들 박필주(朴必周)와 박지수의 손자가 어찌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며 통읍(慟泣)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아들이 있고 손자가 있는 박지수를, ‘후손 없이 죽었다.’라고 하였으니, 그 위조(僞造)의 화가 오늘날 저에게 해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하에 있는 박지수에게 얼마나 통한을 안겨주었겠습니까.1. 박지수가 죽은 뒤에 이른바 아내 쪽의 제위조를 동서 이시원에게 넘겼다면 그 퇴납(退納) 문서 중에 어찌 다만 전지 3마지기를 전해 주었다는 글만 있고 원래 그 글에 몽용이란 글자가 없단 말입니까. 몽용은 애초부터 제위조로 분배되지 않았다는 것을 이것으로 증거를 삼으면 적실하여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1. 남평현의 장적으로 본다면 손후창과 박지수의 호적에 사내종의 양처 소생의 아이 이름 아래에 아무 해에 아비 아무개, 어미 아무개가 낱낱이 기재되어 있었으나, 몽용에 있어서는 병자년(丙子年)에 이미 나이 52라고만 기재되어 있었는데, 이는 다른 이유가 아니라, 그의 아내 구례가 손후창의 질녀(姪女)이고 그의 자녀는 손후창의 지친이기 때문에 노비의 줄에 싸잡아 넣어 기록하지 않고 싶었기 때문이니, 이는 너무나 분명하여 엄폐하기 어렵습니다. 이한거의 할아버지 이시원이 재주(財主)가 이와 같이 용의주도(用意周到)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만 후일의 간계(奸計)를 만들어내기 위해 재주의 호적에 누락된 폐금과 폐덕을 암암리에 기재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러 이한거가 영원히 그 간계를 이어받아 송사의 단서를 야기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제위조로 내준 노비이겠으며, 또한 어찌 외손봉사에서 누락된 것이겠습니까. 허위로 농간을 부린 자취를 여기에서 크게 통촉할 수 있을 것입니다.1. 몽용이 과연 제위조에 해당되고 과연 외손에게 전해 주었다면 이시원이 그의 자녀를 구처한 문기 중에 마땅히 아내 쪽에서 분배받은 몽용의 아들 아무개, 딸 아무개라고 분명하게 기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그러한 기록이 없고 부모도 없고 나이도 없는 폐덕(閉德) 두 글자를 은연 중 문기에 기록하였습니다. 화회문기를 작성할 때에 몽용을 제위조의 몫으로 분배받은 것이 적실하다면 어찌하여 구처(區處)의 글에 써넣지 않고 단지 십분 불분명한 폐덕 두 글자만 써넣었단 말입니까. 이것을 가지고 궁구해 보면 이른바 화회문기를 작성할 때 몽용을 제위조의 몫으로 분배받았다고 한 것은 이시원이 구처한 뒤에 소급해 작성했다는 것임이 불을 보듯이 분명합니다. 또 전후의 문서에 윤화(允化)란 두 글자가 없는데, 어느 문서를 근거로 삼아 그의 몫으로 분배받아 그의 제위조가 되었단 말입니까. 이른바 제위조의 몫으로 분배받았다는 말은 완전히 허위로 만들어낸 말임이 판명되어 마치 그의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습니다.1. 일반적으로 사람의 가문에서 노복이 태어나거나 죽으면 그 연월일을 기록하고 남자 아무개나 여자 아무개를 낳았다고 분명하게 기재하는데, 이는 본디 규식에 따라 장적을 수정하는 규정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한거의 호적에는 단지 백 년이 지난 백골(白骨)의 종만 기록하고 그가 어느 해에 죽었다는 것은 말하지 않았는가 하면 그가 낳은 자녀가 누구인지 기재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무슨 법규이고 이것이 무슨 의미란 말입니까. 그의 의도가 어디에 있었는가 하면 만약 호적에 시기와 이름을 기록할 경우에는 암암리의 간계가 지레 먼저 사람들의 이목에 드러나 햇수와 날수가 얼마 되지 않은 것을 엄폐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먼저 꾸며 놓고 뒤에 터뜨리려는 계략이었다는 것임이 적실하여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이것으로 보건대, 오징어가 먹물을 토한 것은 자기의 형체를 엄폐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사람이 그 먹물을 따라가 포획한다는 말이 바로 이한거를 두고 이르는 말입니다.1. 재주 손후창의 아우 손후권에게 이미 두 명의 아들이 있었으니, 큰아버지의 제사를 조카에게 맡기지 않고 외손에게 전하였다는 것이 인정으로 헤아려 보거나 법리로 헤아려 볼 때 이치에 맞는 말이 아닙니다. 또 외손봉사(外孫奉祀) 네 글자는 그가 바친 전후의 문권 가운데 전혀 있지 않았고 단지 화회문기에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이른바 화회라는 것도 원재주(元財主)가 알지 못하고 그의 자녀도 참석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진짜 화회를 이르는 것입니까. 가짜 화회를 이르는 것입니까. 명안(明案) 전의 신감(神鑑)이 반드시 태양처럼 간파하실 것입니다.1. 이한거가 이른바 제위조의 몫으로 몽용을 분배받았다고 한 것은 원래 한 글자의 문권도 없고 그의 입으로 공초한 내용 중에, ‘을유식(乙酉式)의 호적 중에 기록되어 있다.’는 말만 있는데, 이 말 역시 매우 불분명합니다. 그의 을유식 호적 중에 단지 폐금ㆍ폐덕만 기재되어 있고 제위조로 몽용을 분배받았다는 글자는 비록 옛날 눈이 밝은 이루(離婁)로 하여금 찾아보게 하더라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몽용(夢用)이란 몽(夢) 자가 진짜 믿을 수 없는 춘몽(春夢)이란 것을 그가 어떻게 명감(明鑑)의 앞에 엄폐할 수 있겠습니까.1. 위의 13개 항은 허위로 만들어낸 형적이니만큼 그중 하나만 가지고도 충분히 이 송사의 단안이 되므로 전부 다 설파(說破)할 필요가 없고 그 가운데 더욱더 명백하게 드러난 허위의 단서가 하나 있으니, 형을 아우로 바꾸고 산 사람을 죽은 사람으로 만든 이 2건의 일입니다. 이러한 허위는 말을 가리켜 사슴이라고 한 조고(趙高)도 손을 움츠리고 하얀 것을 가리켜 검다고 한 공손룡(公孫龍)도 말문이 막힐 터인데, 이한거가 이와 같은 허무맹랑한 말을 지어내어 안전(案前)의 신명(神明)을 시험하였으니, 그 죄는 마디마디 베더라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균거(鈞鉅)의 아래에서 먼저 그 허위를 밝혀내어 특별히 징계하고 치죄함으로써 사방에서 듣는 사람이 통쾌하게 해 주소서. 그러면 그지없는 다행이겠습니다.”라고 하였다.원고(原告) 조윤관(曺允寬)의 원정(原情)에, “아룁니다. 송척(訟隻) 이한거의 외증조(外曾祖) 손후창(孫後昌)이 갑자년(甲子年)에 생존해 있었는데, 이한거가 전년도인 계해년(癸亥年)에 죽은 것으로 이른바 화회문기(和會文記)에 논하였으니, 그가 위조한 바가 이 한 대목이 명백합니다. 그런데 이한거가 위조한 것을 교묘하게 엄폐하기 위해 더욱더 꾀를 써서 말하기를, ‘갑자식(甲子式) 호적의 단자(單子)를 세전(歲前)에 받았기 때문에 갑자 단자를 계해년 겨울에 작성하였고 그해 12월 25일에 죽었기 때문에 갑자년에 생존한 것으로 된 것인데, 이러한 것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이다.’라고 운운하였으니, 그 속임수가 이보다 더 심할 수가 없고 그 간사함이 이보다 더 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연소(年少)하여 중고(中古)의 일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그 즉시 관정(官庭)에서 그 거짓말을 깨뜨리지 못하였습니다.그 뒤에 중고에 단자를 받은 일을 인근의 읍(邑)과 이 고을에 사는 노인 및 퇴사(退仕)한 하리(下吏)에게 물어보니 여러 사람이 입을 모아 말하기를, ‘세전에 단자를 받는 것은 근년에 처음 시작한 것으로 4, 5년에 불과하고 예전부터 세운 규례는 해당 식년(式年)에 농사를 지어 곡식이 성숙할 때에 비로소 단자를 받았다. 그 의미의 소재는 농사를 지어 곡식이 성숙하면 떠돌아다니며 걸식(乞食)하는 사람들이 모두 귀농(歸農)하여 하나도 누락한 자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영문(營門)과 도내(道內) 열읍(列邑)에서 다 같이 통행하는 규례이니, 이한거가 이른바 이미 지나간 갑자년 세전에 단자를 받았다는 말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다.’라고 하면서 일제히 웃었습니다. 만약 안전(案前)에서 중고(中古)에 단자를 받아들이는 절차를 확인하려고 할 경우에는 우선 읍에 사는 노인을 초치하여 물어보시면 한 마디 말로 깨뜨릴 수 있습니다.그리고 계해(癸亥)ㆍ갑자년(甲子年)이 지금 80여 년이 되었는데, 타관(他官)에서 낳고 거주한 외증손(外曾孫)이 낳은 후손이 백 년 가까이 된 기왕의 일을 어떻게 이처럼 적실하게 증거를 댈 수 있단 말입니까. 갑자식(甲子式) 장적을 작성할 때 세전에 단자를 받아들인 문적을 그에게 바치라고 하면 수시로 갑자기 변명한 거짓말이 한마당에 깨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대체로 손후창이 진짜로 죽은 날이 2월 25일이란 것에 대해 이선필(李先必)의 아내가 된 그의 종손녀(宗孫女)가 명백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한거가 이른바 12월 25일에 죽었다고 한 것은, 첫째는 세전에 단자를 받아들였다는 거짓말을 엄폐하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화회문기에 계해년에 죽었다고 한 거짓말을 엄폐하려고 한 것이니, 이렇게 마디마디 탄로 나 차례대로 증거를 댈 수 있습니다.1. 또 하나의 큰 허위의 단서가 있습니다. 손후창의 아우 손후권이 경성에서 죽었기 때문에 병인년 화회 때 참석하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병인년 한 해 뒤인 정해년에 어찌하여 손후창이 경성에 있지 않고 집에 있으면서 그의 외사촌 석태원(石泰元)과 같이 노비를 살 때 그의 이름으로 남평현에서 성사(成斜)하였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이한거의 원정 중에 손후창이 경성에서 죽었다는 말이 옳겠습니까. 남평의 관아에서 인장을 찍고 성사한 문적이 적실하겠습니까. 이를 통해 보건대, 손후권이 병인년 화회 때 집에 생존해있었다는 것이 명백하여 의심할 바가 없어 마치 태양처럼 분명하다는 것을 하늘을 가리켜 증명할 수 있습니다.1. 또 한 가지 이한거가 부끄러워할 만한 일이 있습니다. 제가 허위의 단서에 대해 증거를 제시하여 밝힌 14건 중에 또 6개 항의 큰 조목이 있었는데, 이한거가 이에 대해 입증(立證)한 바가 단지 우매한 여자 한 명이였습니다. 그런데 양척(兩隻 송사(訟事)의 양쪽 당사자)이 분부를 받고 대질할 적에 그 여자가 묵묵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좌우를 돌아볼 뿐이었으니, 간신히 얻은 한 명의 여자가 어찌 그리도 맹랑하였단 말입니까. 이로 인해 그녀를 문밖으로 퇴출하였으므로 만인이 이 이야기를 서로 전하며 웃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한거를 대신해 그지없이 부끄러워하였습니다.1. 이한거의 화회문서 중에 그의 외증조(外曾祖) 손후창이 나이가 아직 차지 않았기 때문에 전민(田民)을 처리하지 못하였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런데 남평(南平)의 장적(帳籍)을 상고해 보니 손후창이 정묘년(丁卯年)에 죽었다고 하였으니, 정묘년에서 역으로 손후창의 나이를 계산해 보면 그때 나이가 68세였습니다. 68세를 먹은 자를 나이가 차지 않았다고 하였으므로 문장이 성립되지 않으니, 이를 믿을 수 있는 글이라고 하겠습니까. 이한거가 위조한 것임이 이를 근거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1. 박지수가 같은 고을 사람 천협(千協)과 동서의 사이입니다. 박지수 부부가 모두 죽은 뒤에 처가(妻家)의 제사에 대해, 천협의 아내가 자기의 가산(家産)이 풍족한데다 지극한 정이 있었으므로 차마 향화(香火)를 갑자기 끊을 수 없다고 하여 그의 부모 묘소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그러한 행적을 같은 면(面) 부로(父老) 및 옛날 노복이 지금까지 끊임없이 칭송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한거가 ‘봉사(奉祀)했다.’라고 운운한 말이 거의 꿈속에서 헛소리하는 말과 같습니다.1. 완전히 백지(白地)에서 만들어낸 공허한 말이 있습니다. 병인년에 화회문기를 작성할 때에, 그의 문장(門長) 손후권(孫後權)이 제수와 아우의 상(喪)을 당한 뒤에 상경(上京)하여 4, 5년간 고향에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동참하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손후권을 지도 만호(智島萬戶)로 임명한 유지(有旨) 한 장을 얻어 상고해 보니 유지 상의 연조가 강희(康熙) 22년 윤6월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강희 22년은 바로 갑자년(甲子年)이므로 바로 손후권이 나주 지도의 임소에 있을 때입니다. 그런데 화회문기에, ‘상경하여 돌아오지 않았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손후권에게 벼슬을 제수한 유지가 지금 발견되리라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만든 것이므로 그의 위조 문자에 대한 하나의 큰 증거입니다. 이한거의 화회문기가 만약 위조한 것이 아니라면 하늘에서 떨어진 옥새(玉璽) 찍힌 직첩(職牒)을 어떻게 해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 한 조목이 천만 가지의 허위를 깨뜨리기에 충분하니만큼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외에 두서너 건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거짓이지만 입을 다물고 침묵만 지킬 수 없기에 모두 우러러 개진하여 사또(使道)의 명감(明鑑)이 남김없이 통촉하시기를 바랍니다.1. 이 송사의 하나의 큰 핵심은 모두 몽용을 제위조로 분배받았는지의 여부에 달려있습니다. 그런데 전후 문권에 원래 그러한 말이 기재된 바가 없으므로 이른바 화회문서라고 하는 것이 위조한 것이었음이 마디마디 탄로 나서 이처럼 분명하니만큼 다시금 의심스러워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단서가 없어졌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관가(官家)에서 여전히 몽용의 상전이 누구인지 파악하지 못하여 이를 가지고 다그쳐 물으셨습니다. 몽용의 상전은 본래 손후창이고 몽용의 아내 아비는 바로 손후창의 아우 손후권입니다. 그렇다면 손후창이 결코 질녀(姪女) 지아비의 주인이 될 수 없고, 따라서 손후권도 봉사(奉祀)조에 기록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가 하면 또 그 화회문기에 구구절절마다 허위의 단서가 드러나 무려 백 개의 구멍과 천 개의 허점에 이르러서 이한거의 약낭(藥囊)과 의술(醫術)로는 완치하기 어렵게 되었으니, 비록 몽용이 죽지 않고 지금 살아 있더라도 이한거가 물어볼 바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본관(本官)의 제사(題辭)이 송사의 곡직은 여하를 막론하고 《대전(大典)》에, ‘할아버지 비첩(婢妾)의 소생은 바로 동성(同姓) 간 사촌이므로 사역(使役)할 수 없고 5, 6촌에 이르러 친속(親屬)이 점점 멀어지면 안 될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구례는 바로 손후권 첩의 소생이고 몽용은 손후권의 형 손후창의 종인데, 구례가 몽용의 아내가 되었으니, 손후창의 입장에서 볼 때 비록 종의 양처라도 역시 삼촌 질녀(三寸姪女)이다. 비록 손후권이 전민(田民)을 분배하였더라도 자기 비첩(婢妾)의 소생을 결코 도문서(都文書)에 기재할 리가 없으며, 만약 손후창이 종의 양처라고 하여 분배하고자 했더라도 삼촌 질녀를 외손봉사(外孫奉祀)조로 분배할 리가 결코 없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러 이한거가 손후창의 외손으로 이른바 몽용을 외손봉사조로 분배받은 것이라고 하여 몽용의 양처 구례가 낳은 자녀를 추심하려고 하였다. 구례는 이한거와 8촌간이므로 친속이 점점 멀어졌다고 이를 수 있으나 삼촌 질녀를 종의 양처라고 하여 외손봉사조로 분배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니만큼 이한거가 외손으로 손후창의 질녀 구례를 종의 양처라고 하여 구례가 낳은 자녀를 추심하려고 한 것은 너무나도 부당하다. 그러므로 마땅히 곧바로 조윤관에게 결급(決給)해야 하나 이는 큰 송사에 관계되어 경솔하게 처결할 수 없다는 말로 송사를 기각한다. 양척(兩隻)이 만약 송사를 기각한 것을 불쾌하게 여길 경우에는 후일 다시 다른 송관(訟官)에게 송사를 제기해도 마땅하다. 이상과 같은 말로 논하여 송사를 퇴출한다.조윤관이 다시 올린 정장(呈狀)에, “사또(使道)께서 송사 판결의 말씀 중에, ‘이번 구례는 바로 손후권의 첩 소생이고 몽용은 바로 손후권의 형 손후창의 종인데, 구례가 몽용의 아내가 되었으니, 손후창의 입장에서 볼 때 비록 종의 양처이기는 하나 역시 삼촌 질녀이다. 비록 손후권으로 하여금 전민(田民)을 분배하게 하였더라도 자기 비첩(婢妾)의 소생을 결코 도문서(都文書)에 기재할 리가 없고, 만약 손후창이 종의 양처라고 하여 분배하더라도 삼촌 질녀를 외손봉사조로 분배할 리가 결코 없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한거가 외손으로 이른바 몽용을 외손봉사조로 분배받은 것이라고 하여 몽용의 양처 구례가 낳은 자녀를 추심하려고 한 것은 인정(人情)과 법리(法理)에서 전혀 이치에 맞지 않다. 그러므로 마땅히 곧바로 조윤관에게 결급(決給)해야 하나 이는 큰 송사에 관계되어 경솔하게 처결할 수 없다는 말로 송사를 기각한다.’라고 하였습니다.그렇다면 이른바 저에게 결급해야 한다는 뜻은 곡(曲)은 이한거에게 있고 직(直)은 저에게 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똑같은 한 사람의 자손이니만큼 곡직이 반반이 될 리가 전혀 없으므로 굽으면 완전히 굽을 것이고 곧으면 완전히 곧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한거ㆍ이한상(李漢祥) 등이 이미 사또가 내린 처결의 언지(言旨)를 받고도 제가 감히 생각지도 않은 제와 같은 부모의 소생인 태남(太男) 등을 예전처럼 침략하려고 감히 연한 땅에 말뚝을 박으려는 꾀를 생각해내어 날마다 말할 수 없이 협박공갈을 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심지어 그가 감히 고질병으로 폐인이 되어 애긍하기만 한 태남의 사촌여동생 태금(太今)이 순순히 복종하지 않는다고 트집을 잡아 그의 족당(族黨)을 거느리고 가 밤을 틈타 수색해 체포하였는데, 마치 살림살이를 철거하고 재물을 훔치는 명화적(明火賊)과 같이 행동하여 강제로 협박하는 위엄을 혹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이로 인해 태금이 죽음을 피해 도망 다닌 참상을 차마 형언할 수 없었습니다.만약 사또(使道)께서 처결해 주신 언지로 본다면 이한거 등은 이미 패소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전에 마구 침해한 속전(贖錢)을 정말로 마땅히 추심해 받아야 할 것이고, 투식(偸食)한 식구도 마땅히 추심해 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미처 그 일을 시작하기 전에 그들이 공갈협박을 이처럼 심하게 하였으니, 이한거 등의 죄는 양족(良族)을 마구 침해한 것뿐만 아니라, 사또께서 하달한 언지를 어기고 거절한 바가 막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마땅히 의송(議送)을 바쳐 다른 관청으로 송사를 옮김으로써 이한거 등이 전후로 저지른 죄악이 훤히 드러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 이유도 없이 협박을 당한 무리들이 우선 애긍하게 여겨졌으므로 이한거ㆍ이한복ㆍ이한상 등이 사또의 언지를 어기고 불법을 저지른 정황에 대해 감히 이렇게 우러러 호소하오니, 법정(法庭)에서 엄하게 다스려 금단시켜 주셨으면 합니다.이한거 등이 이러한 짓을 하게 된 것은 신해년(辛亥年) 뒤에 낳은 자녀에게 그들이 법전(法典)을 어기고 몰래 속전(贖錢)을 받은 죄를 징계하여 다스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본받아 마음에 달게 여기어 갈수록 더욱더 간계를 부린 버릇을 파격적으로 통렬히 징계하여 먼 지방의 간세(奸細)한 무리가 법을 무시하고 허위로 조작하여 농간을 부리는 버릇을 막아주시라고 하니, 그 제사(題辭)에, ‘관가(官家)에서 이미 송사를 기각하였으니, 의송(議送)을 바쳐 다른 관아로 송사를 옮기든지 임의로 하라.’고 하기에 위의 조윤관 명의로 의송을 바쳤습니다.”라고 하였다.그 의송에, “말이 공정하다는 것은 바로 송사할 송(訟) 자의 의미이니, 의심이 있어서 쟁송(爭訟)할 경우에 공정한 말 한마디로 결판내는 것은 본래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미 원정과 문목에 대한 진술을 바쳤으면 한 마당에서 분변하여 깨뜨리면 되지 허구한 날을 지체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이 송사를 지난해 12월에 시작하여 지금까지 결말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본관(本官)이 지금 비로소 안전(案前)에서 송사를 기각하면서 말하기를, 「일의 곡직이 이미 이와 같이 분명하니, 마땅히 조윤관에게 결급(決給)해야 할 것이나 이는 큰 송사에 관계되므로 경솔하게 처결할 수 없으니, 다시 다른 관청에 송사를 제기해 보도록 하라.」고 하였는데, 조윤관은 바로 저입니다.관청에서 비록 송사를 기각하였으나 피차의 곡직이 이미 그 언지(言旨) 중에 다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관가의 뜻이 이러한데도 불구하고 다투는 것에 탐닉한 무리가 사사로이 침해하고 공갈하였는가 하면 심지어 구타를 가하여 목숨을 보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송사가 출장(出場)하기도 전에 이처럼 악행을 저지른 행위는 송법(訟法)이 생긴 이래로 일찍이 들어보지 못하고 지금 비로소 직접 보았습니다. 만약 농사철이라고 하여 다른 관청으로 송사를 옮기지 않고 지체할 경우에는 가엾은 저 공갈협박을 당한 무리들이 장차 뿔뿔이 흩어지는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그래서 불속에 든 사람을 구하고 물에 빠진 사람을 구는 것보다 더 급하여 이렇게 우러러 호소합니다.송척(訟隻) 이필제(李必齊)ㆍ이한적(李漢迪)ㆍ이한복(李漢復)ㆍ이한거(李漢擧)ㆍ이한상(李漢祥) 무리들이 다투는 바는 바로 그들의 외증조(外曾祖) 제위조(祭位條) 몫의 종 몽용(夢用)과 양처(良妻)가 낳은 자식을 차지하겠다는 것이고, 제가 다투는 바는 바로 몽용과 양처가 낳은 자식은 그들이 차지할 물건이 아니라는 것인데, 이 문제로 송사를 제기한 것입니다.대개 몽용은 바로 남평(南平) 손후창(孫後昌)의 종이고 몽용의 아내 구례는 바로 손후창의 아우 손후권(孫後權)의 딸입니다. 이한거 등이 위의 몽용을 그의 외증조 손후창의 종이라고 하여 그들의 화회문기(和會文記) 제위(祭位)조에 기록한 다음 자기가 외손으로 외증조의 제사를 지낸다고 차지하면서 몽용과 구례가 낳은 후손을 차지하려고 하였습니다.그가 이른바 두 번 지나간 병인년(丙寅年)에 작성한 화회문기에 운운(云云)했다고 한 것은, 생존한 재주(財主)가 참석하여 간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화회문기의 글 중에, ‘재주 손후창이 나이가 차지 않아 죽었기 때문에 문기를 작성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는데, 그 손후창이 나이 68세에 이르러 죽었으니, 이른바 나이가 차지 않아 죽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또 화회문기의 글 중에, ‘손후창의 아우 손후권이 벼슬을 구하러 상경하였다가 제수의 초상이 나고 아우의 초상이 났다는 부음(訃音)을 듣고 오지 않았다.’라고 하였는데, 남평현(南平縣)의 장적(帳籍)을 상고해 보면 그가 이른바 아우란 자는 나이가 62세였고 그가 이른바 형이란 자는 나이가 59세였으니, 이는 아우와 형이 뒤바뀌어 천륜(天倫)의 자리가 바뀐 것이므로 그가 이른바 화회문기는 결코 믿을 만한 문자가 아닙니다.또 화회문기 글 중에 ‘손후권이 벼슬을 구하러 상경하였다가 부음(訃音)을 듣고 오지 않았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고증할 만한 문안(文案)을 상고해 보니 그 화회문기를 작성한 해에 손후권이 받은 지도 만호(智島萬戶)의 직첩(職帖)이 현존한 것으로 보아 그때 임소(任所)에 있었으니, 상경하여 오지 않았다고 한 말은 완전히 거짓말임이 판연합니다. 또 말하기를 ‘그의 외증조 손후창이 계해년에 죽었다.’라고 하였으나 남평현 장적에는 계해년 뒤 갑자년까지 생존하였으니, 계해년에 죽은 자가 갑자년에 다시 살아났단 것입니까.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얼마나 큰일입니까. 그런데 산 사람을 죽었다고 하였으니, 무슨 일인들 속이지 않겠습니까. 이외에 허위의 단서를 낱낱이 열거하고 다 세기 어려우니, 그가 이른바 화회문기는 필시 사람이 만든 위(僞) 자이지, 결코 진짜의 문서가 아닙니다.또 외손봉사(外孫奉祀)의 설은 단지 금일 그들의 입에서만 나왔지 원래 문권(文券)에는 한 글자도 없습니다. 그리고 인정과 사리로 말하자면 이한거 등의 외증조모(外曾祖母) 만향(萬香)은 제 아내의 할머니 구례(九禮)와 동성 사촌이므로 동성 사촌이 상호 종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은 우선 전혀 이치에 맞지 않은 말이고, 또 질녀서(姪女壻) 몽용을 외손봉사(外孫奉祀)조로 기재한다는 것 역시 인정상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로 보나 저로 보나 이한거가 구구절절마다 허위로 농간을 부렸으니, 하늘이 반드시 싫어할 것이고 귀신이 반드시 질책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로 인해 송사를 제기한 것입니다.대개 요점을 약간 뽑아 위에서 우러러 호소한 것으로 보면 이 송사를 분변하여 설파한 바가 흑백처럼 분명하였기 때문에 본관(本官)이 안전(案前)에서 송사를 기각할 때 한 말씀 중에 제에게 결급(決給)한다는 말씀이 있었던 것인데, 그 뜻이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다른 관청으로 송사를 옮기라는 언지(言旨)가 있었으므로 이 억울한 원망을 안은 채 허구한 날을 지체할 수 없고 또 공갈협박을 당한 자들이 한시라도 견디기 어려운 사정을 위하여 이렇게 호소하는 바입니다.또 한 가지 전혀 근거가 없는 일이 있습니다. 저와 이한거 등은 같이 한 성(城) 안에 거주하면서 대대로 사귀어온 정이 형제와 같았고 조석으로 상종하여 마치 지친(至親)과도 같았으나 원래부터 한 마디 말이나 반 마디 말도 이러한 일을 뒤섞어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백 년이 가까워질 때가지 한마디 말도 없이 지나갔던 이유는 그가 계략을 꾸며 만들어낸 일이 위에서처럼 불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가 일부러 햇수가 오래되고 사람이 죽어서 사적을 밝히기 어려워진 뒤를 기다렸다가 형체가 없는 도깨비가 밤을 틈타 출현하는 것처럼 이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숨어있는 간계를 적발하는 명견(明見)을 지닌 도내 공정한 관청이 아니면 그가 허위로 만들어 진짜처럼 농간을 부리는 자취를 파헤치기 어려울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백성의 고통을 자세하게 살펴 주시는 대감(大監)께서는 별도로 도내 강명(剛明)한 관청의 사관(査官)에게 이 사건을 이관(移管)하여 그로 하여금 궁천극지(窮天極地)의 통한을 씻어주도록 하셨으면 합니다.”라고 하니, 그 제사(題辭)에, “과연 정장(呈狀)의 말대로라면 본주(本州)에서 송사를 기각한 것은 매우 괴이하고 의아스럽습니다. 만약 큰 송사라는 이유로 결급(決給)하지 않고 송사를 다른 관청으로 옮기도록 하였다면 세상에 어찌 결급할 송사가 있겠으며 다른 관청에서도 어찌 대신 맡을 리가 있겠습니까. 비록 원고와 피고가 각각 다른 관아의 지역에 살더라도 본관(本官)으로 가서 송사를 제기하면 마땅히 정안(正案)을 궁구하여 법리상 공평하게 처결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본읍(本邑) 백성의 송사를 어찌 이와 같이 다른 관청으로 떠넘길 수 있단 말입니까. 곧바로 판결을 내림으로써 송사의 지체로 인해 억울하다고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이상이 원정과 의송의 내용이다.이 송사는 이전 분기에 시작되었는데, 양척(兩隻)의 원정과 다시 공초한 문기를 호적과 비교 대조한 것을 등서하는 여러 가지 일을 남김없이 자세히 다 하였으므로 그들로 하여금 다시 격식을 갖추어 응대하게 할 필요가 없다. 그 문서들을 상세하게 고열(考閱)해 보니, 원고 조윤관 아내의 외할아버지 몽용은 바로 송척 이한거의 외증조 손후창의 종이고, 몽용의 양처 구례는 손후창의 아우 손후권의 첩이 낳은 딸이다. 구례는 손후창의 삼촌 질녀이고 이한거의 할머니와는 또 동당(同堂 같은 고조부(高祖父) 아래의 친척)의 자매(姉妹)이다. 법전(法典)에, “비첩(婢妾)의 소생은 5촌에 이른 뒤에 사환(使喚)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 있고, 5촌에 이르기 전에는 속전(贖錢)을 내어 양인(良人)이 될 수 없는데, 이는 친속이 소원해진 뒤에 골육상잔(骨肉相殘)의 지경에 이르지 않게 하는 것으로서, 고금이 통행하는 규정이다.이한거가 쥐고 있는 요점은 병인년에 작성한 화회문기에 있는데, 그 문기는 본가(本家)의 재주(財主)가 없고 외부의 사람들이 스스로 재주가 되어 작성한 문권이니만큼 이는 불법의 일이고 근거가 없는 문권이다. 또한 어떻게 화회문기를 타인이 집필(執筆)할 수 있겠는가. 이는 문서의 두뇌(頭腦)가 잘못된 것이다.손후창이 이미 딸 5명을 낳고 사위 3명을 얻은 뒤에 죽었으니, 그가 조년에 죽지 않았다. 그리고 이른바 화회문기 중에 그들의 아내 부모가 나이가 차지 않아 죽어서 문권을 작성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이것이 어찌 말이 성립되겠는가. 손후권은 바로 손후창의 아우인데, 문기 중에 제수와 아우의 초상을 당하였다고 한 것은 형제의 순서를 뒤바꾼 것이다. 사위가 되어 아내 아버지의 형제 순서를 알지 못하였으니,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상 ‘나이가 차지 않았다.’는 말과 ‘아우의 초상을 당했다’는 말 이 두 조목으로 미루어보건대, 이른바 병인년에 작성한 도문서가 어찌 가짜가 아닌지 알 수 있겠는가.설령 도문서가 가짜가 아니고 진짜일 경우에도 이른바 제위조의 사내종 몽용만 기록되어 있고 몽용의 아내 구례 및 그들이 낳은 자식 19세의 폐금과 16세의 폐덕은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그 이유는 차마 지친(至親)의 입장에서 그들을 강제로 노비로 삼을 수 없어서 그런 것이니, 이는 인정(人情)과 천리(天理)상 당연한 것이다. 그 뒤 수십 년간의 장적 중 노비(奴婢)조에도 기재되어 있지 않았으니, 양인이 되는 것을 허락하여 골육지친(骨肉之親)을 보호했다는 것이 불을 보듯이 분명하다.병인년 뒤 20년에 이르러 을유식의 호적에 비로소 간계(奸計)가 싹트기 시작하여 몽용의 자녀를 갑자기 호적에 기재하였다. 이한거가 그들과 한 성안에 살 때 원래부터 주인이니, 종이니 하는 말이 없다가 지금 백 년 가까이 이르러 후속(後屬)이 소원해진 뒤에 강압적으로 양인을 노비로 만들려고 하였으니, 이미 너무나도 간악(奸惡)하였다. 그리고 몽용이 셋째로 낳은 윤화(允化)에 있어서는 최후에 침탈하려고 한 것은 무슨 의도란 말인가. 문권으로 보면 두뇌가 그처럼 어긋났고 법리로 보면 골육상잔(骨肉相殘)의 경고 대상이었다. 그래서 이전 분기의 송사 때 법에 비추어보고 간계를 간파하여 조윤관에게 승소를, 이한거에게 패소를 결정하여 이미 단안(斷案)을 성립한 것이다.이상과 같이 이전의 소견이나 나중의 소견이 별로 다른 바가 없다. 이전에는 비록 큰 송사를 경솔하게 처결할 수 없어서 기각하였으나 조윤관이 바친 의송(議送)에 대한 순영(巡營)의 제사(題辭)에, “송사를 다른 관청으로 옮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본주(本州)로 하여금 처결하도록 한다.”라고 하였는데, 이상과 같이 제사를 작성하여 보냈다.이에 한결같이 뒤로 미룰 수 없어서 한결같이 지난번 송사에 대한 결사(結辭)에 따라 몽용 소생의 화명(花名) 뒤에다 기록하여 조윤관에게 결급(決給)한 다음 입안(立案)을 작성해 준다. 이한거가 비록 출타하여 부재중이기는 하나 이 송사는 이미 이전의 판결을 뒤집은 것이 아니고 일체 이전에 결급한 것을 베껴서 입안하였을 뿐이니만큼 별로 양척(兩隻)에게 다시 반문(盤問 자세히 캐물음)할 일이 없으므로 이한거의 변론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더구나 이한거의 사촌 이한복은 같은 송척으로 앞장서서 나와 스스로 대변(對辯)하였으니, 이한거와 이한복이 몸은 둘이지만 하나의 송척이다. 이한거가 돌아온 뒤에 비록 백 개의 입을 놀려 만 마디의 말을 늘어놓더라도 어찌 굽은 것을 전환하여 곧은 것으로 만들고 패소한 것을 변경하여 승소한 것으로 만들 리가 있겠는가. 모두 입안의 끝에 사리를 논하였으니, 상고하여 시행해야 할 것이다.후고차(後考次) 합행입안자(合行立案者)[주-D001] 의송(議送) : 개인이 관찰사(觀察使)ㆍ순찰사(巡察使) 등에게 올리는 민원서(民願書). 대개 수령(守令)에게 소지(所志)를 올렸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면 관찰사에게 올리거나, 곧바로 올리기도 하였다. 양반이 의송을 올릴 때에는 직접 하지 않고 그 집 노비의 이름으로 올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음.[주-D002] 외손봉사(外孫奉祀) : 조상의 제사를 계승할 때 적장자(嫡長者)ㆍ적손(嫡孫)ㆍ차자(次子) 이하의 아들이나 직계 손자 순으로 되어 있는데, 이들 중 아무도 없는 경우 즉 후사가 없을 때 외손에게 재산을 상속하고 사후의 제사를 의뢰하는 것을 말함.[주-D003] 재주(財主) : 재산의 임자. 화주(貨主). 노비와 전택(田宅)의 소유자가 그 재산을 처분하지 않고 사망한 경우 그 유산의 분할에 분쟁이 있을 때 이것을 공평하게 처리하기 위하여 관(官)에서 소유자 곧 재주를 대신하여 처분하는 수가 있다. 이를 관이 만든 재주[官作財主]라고 함.[주-D004] 출신(出身) : 문ㆍ무과(文武科) 또는 잡과(雜科)에 급제하고 아직 출사(出仕)하지 못한 사람. 주로 무과 급제자를 지칭함.[주-D005] 말을 …… 것 :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 “조고(趙高)가 권력을 휘두르려고 하였으나 신하들이 따르지 않을까 염려한 나머지 시험해 보기 위하여 이세(二世)에게 사슴을 바치기 전에 사슴을 가리키면서 말이라고 하니, 이세가 웃으며 말하기를, ‘승상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사슴을 말이라고 하다니.’고 하고 주위 사람에게 물었다. 그러자 신하들이 묵묵히 말하지 않기도 하고 말이라고 말하기도 하여 조고의 뜻에 아부하였다. 그중 말이라고 말한 사람은 조고가 은밀히 중상모략을 하여 법을 적용하여 처벌하니, 신하들이 모두 조고를 두려워하였다.”라고 하였는데, 후세에 고의로 시비(是非)를 전도시키는 것에 비유하였음.[주-D006] 홍패(紅牌) : 문과(文科)의 회시(會試)에 급제한 사람에게 내어 주는 붉은 종이에 쓴 교지(敎旨)임.[주-D007] 이루(離婁) : 중국 황제(黃帝) 때에 살았으며, 눈이 아주 밝았다고 전해지는 전설상의 인물. 《신자(愼子)》 〈내편(內篇)〉에, ‘이루(離婁)는 눈이 밝아서 백 보 밖에서도 능히 털끝을 살핀다.’라고 하였음.[주-D008] 사관(査官) : 감영 등에서 파견된 조사관으로, 죄인을 심문하는 등 사건을 검사하는 일을 맡아 보던 벼슬아치.[주-D009] 결사(結辭) : 추관(推官)이나 검시관(檢屍官)이 살인한 원인과 경과를 조사하여 조서(調書)에 적어 넣는 의견서.[주-D010] 화명(花名) : 호적부(戶籍簿)에 등록된 인명(人名).
- 2023-08-17 | NO.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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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 광주 이한지 서(與光州李罕之書) - 동문선 제57권
- 여 광주 이한지 서(與光州李罕之書) - 동문선 제57권: 최치원(崔致遠)이한지(李罕之)에게 아룁니다. 성간(成覵)은 말하기를, “저도 장부요 나도 장부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공(功)을 이룩하고 절(節)을 세우는 것은 옛사람뿐 아니라, 순(順)함을 앞세워 충성을 바치는 것은 바로 오늘에도 마땅한 것입니다. 요즈음 칙서(勅書)와 수조(手詔)를 반드시 다 중심(衆心)을 격려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겸하여 왕영공(王令公)에게 도통(都統)을 제수하여 서문군용(西門軍容) 도감(都監)에 보충하였으니, 이렇게 한 것은 번진(藩鎭)이 공이 없어 조정에서 계책이 다하였으므로 늙은 선비에게 큰 책임을 맡겨 준 것이니, 비록 부질없이 소문이 전파하였으나 반드시 일을 이룩하기 어려울 것입니다.여기는 지난해에 용맹스럽고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장차 완흉(頑兇)을 소탕하려 하다가 곧 왕명을 받들어 회해(淮海)를 안정하게 하였습니다.조서에 이르기를, “짐을 위하여 오ㆍ월(吳越)의 땅을 보존하되 짐에게 동남(東南)의 걱정이 없도록 하라.” 하시므로, 감히 명(命)을 어기지 못하여 드디어 군사를 돌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물의(物議)를 상심(詳審)하고 군기(軍期)를 참작하여 관중(關中)에 도끼를 잡은 무리가 있는데 곤외(閫外)에 창을 벼개 삼는 이가 없으니 누가 능히 힘을 다하겠습니까. 실로 분통할 일입니다. 내가 만약 행하지 않는다면 장차 중심(衆心)이 어디로 가겠습니까.지금 바로 변로(汴路)를 따라 문득 동관(潼關)에 들어가 봉성(鳳城)을 회복하고 난가(鑾駕)를 맞이하여, 길이 공명을 만대에 전하고 끝까지 사방을 숙청할 것입니다.한지(罕之)는 이미 임금의 근심을 나누는 처지에서 오랫동안 용맹을 길렀으니, 반드시 정예(精銳)를 가려 반적(叛賊)을 토벌(討伐)할 것을 기약하고 있을 것입니다.이제 칙서와 수조(手詔)를 기록해서 같이 보내드리니, 성지(聖旨)를 우러러 반드시 충성을 힘써 바로 토벌을 결행(決行)하여 함께 부귀(富貴)를 도모하여야할 것입니다.때는 놓칠 수 없고 그대가 이에 힘써 할 것이기 때문에 이제 고하여 알게 하니, 속히 회보(回報)를 보내십시오. 이를 살피시오.[주-D001] 임금의 근심 …… 처지 : 지방의 장관은 황제의 근심을 나누어서 그 지방을 다스리는 것이다.
- 2020-09-15 | NO.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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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장사들이 임진란 초에 무너져 패한 기록- 상촌선생집 제56권
- 여러 장사들이 임진란 초에 무너져 패한 기록[諸將士難初陷敗志] - 상촌선생집 제56권 : 상촌(象村) 신흠(申欽 : 1566~1628)적병이 처음 부산에 이르렀을 때 망을 보던 관리가 대략 4백여 척쯤 된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다가 적이 부산을 함락하고 잇따라 그 지역 일대의 진보(鎭堡)를 함락하자 여러 고을에서 멀리 바라만 보고 저절로 무너져 그 뒤로는 망을 보며 정탐하는 일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적의 대군이 계속 이르기를 밤낮으로 끊이지 않아 바다를 덮으며 왔는데도 변장(邊將)이 이를 깨닫지 못한 채 그저 처음 보고해 온 것에 의거하여 늘 적의 병력은 단지 4백 척에 불과하다고 말하였다. 우순찰사(右巡察使) 김성일(金誠一)은 말하기를 “적의 배가 4백 척이 채 되지 않는데 한 척에 수십 명밖에 싣지 못하는 실정이고 보면 다 합해도 1만 명을 넘지 않을 것이다.” 하였는데, 성일의 이러한 주장이 조정에 알려지자 조정에서도 그렇게만 여겼다.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이 출정할 때 단지 군관(軍官) 및 사수(射手) 60여 인을 이끌고 가면서 내려가는 도중에 군사 4천여 명을 거두워 모았다. 4월 24일 상주(尙州)에 도착했는데, 이일의 생각에 우리 군사가 오합지졸인 만큼 마땅히 습진(習陣)시켜 기다려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진을 미처 반도 펼치기 전에 적이 갑자기 이르렀으므로 별수없이 대진(對陣)하였으나, 교전하기도 전에 적이 먼저 포를 쏘아대 철환(鐵丸)이 비오듯 쏟아졌으므로 아군이 대적하지 못하였는데, 이에 적이 함성을 지르며 진을 무너뜨리자 우리 군사가 궤멸되면서 사상자가 무더기로 발생하였다. 이 와중에서 이일만 단기(單騎)로 몸을 빼어 달아나고 종사관(從事官) 윤섬(尹暹)ㆍ박호(朴箎) 등은 모두 죽었다.조정이 이일을 보낸 뒤 얼마 되지 않아 날로 급하게 변보(邊報)가 들어오기를 “적이 이미 내지(內地)로 쳐들어오고 있는데 장차 조령(鳥嶺)을 넘으려 한다.” 하자, 도성 인심이 어수선해지면서 피난갈 준비들을 하느라 부산하였다. 이에 또 신립(申砬)을 도순변사(都巡邊使)로 삼은 뒤, 더욱 도성 내의 무사와 재관(材官)을 동원하고 삼의사(三醫司 내의원(內醫院)ㆍ전의감(典醫監)ㆍ혜민서(惠民署)) 한량인(閑良人) 중에서 활을 쏠 줄 아는 자까지 뽑아 모두 그에게 소속시키는 한편, 조관(朝官)으로 하여금 각각 전마(戰馬) 1필씩을 내어 조력하게 하고, 무고(武庫)의 군기(軍器)를 꺼내 주어 그가 쓰게끔 하였다. 이때 징집된 제도(諸道)의 군사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나 신립이 급히 내려가면서 단지 인근 고을의 군사만 이끌고 갔다.4월 26일 충주(忠州)에 도착했을 때 병력이 겨우 수천 명밖에 안 되었는데 이 군사로 단월역(丹月驛) 근방의 언덕에 진을 쳤다. 이때 이일을 만났는데 이일로 선봉을 삼아 그로 하여금 공적을 세워 보답하게 하였다. 혹 말하기를 “적의 세력이 지극히 성대하니 그 예봉에 직접 맞서기는 어렵다. 조령에 나아가 협곡 안에 군사를 매복하고 적이 골짜기 입구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우리가 양 쪽 언덕에 의거하여 높은 곳에서 활을 쏘면 승리를 거둘 수 있다.” 하였으나, 신립은 말하기를 “그들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니 넓은 들판으로 끌어들여 철기(鐵騎)로 짓밟아버리면 성공하지 못할 리가 없다.” 하였다.그러나 적은 이미 조령(鳥嶺)과 죽령(竹嶺) 두 고개를 거쳐 몰래 군사를 잠입시켜 충주 성중에 이르렀는데도 신립은 이를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28일에 적이 민가를 불태운 뒤에야 적이 이미 조령을 넘어왔다는 것을 우리 군사가 알고는 간담이 떨어지도록 모두 경악하며 두려워하였다. 이윽고 바라보니 왜적들이 조령의 큰 길을 통해 산을 뒤덮으며 내려오는데 칼빛이 번쩍번쩍하였다. 신립이 군사들을 지휘하여 차례로 진격시켰으나 마을 길이 비좁은데다 논밭이 많아 말을 치달리기에 불편하여 지체되는 사이에 적이 우리 군사의 좌측으로 돌아 나와 동쪽과 서쪽에서 끼고 공격해 오는 바람에 우리 군대가 크게 어지러워지면서 적에게 난도질을 당한 결과 시체가 산처럼 쌓였고 군자(軍資)와 군기(軍器)가 일시에 모두 결딴나고 말았다. 신립이 단신으로 말을 타고 강 언덕에 이르렀는데 적이 군대를 풀어 추격하자 신립이 물에 몸을 던져 죽었으며 김여물(金汝岉)도 물 속으로 투신하였다.신립의 군대가 패하자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파천(播遷)하였는데, 우상 이양원(李陽元)을 남겨두어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삼아 경성을 지키게 하였으며,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과 부원수(副元帥) 신각(申恪)으로 하여금 대군을 이끌고 한강에 나아가 진을 치게 하였다. 5월 2일 적의 선발 부대가 이르자 대군이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졌다. 대가가 성을 빠져 나간 뒤 도성 백성들이 서로들 도적떼로 변해 궁실을 불태우고 재물을 노략질하는 등 도성 안이 크게 어지러워지자 이양원이 지키지 못할 줄을 알고 양주(楊州)로 달아났는데 성문도 폐쇄하지 않은 상태였다. 적이 처음 이르렀을 때 성문이 열려져 있고 사마(士馬)의 흔적이 전연 없이 조용한 것을 보고는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감히 들어오지 못하다가 3일이 되어서야 성이 실제로 텅 빈 것을 알고는 마침내 도성에 들어왔다.남도 절도사(南道節度使) 신할(申硈)이 변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대가가 머문 곳을 뒤따라 오다가 송경(松京)에서 배알하자, 상이 이를 인하여 신할을 방어사로 삼아 임진(臨津)에 머물러 진을 치게 하였다. 또 한응인(韓應寅)을 제도 도순찰사(諸道都巡察使)로 삼아 김명원을 대신해서 임진에 나아가 주둔하게 하고, 평안도 강변의 토병(土兵) 8백 명을 동원하여 성세(聲勢)를 돕게 하였다. 당시 이양원(李陽元)ㆍ이일(李鎰)ㆍ신각(申恪)ㆍ김우고(金友皐) 등은 대탄(大灘)에 있고, 한응인ㆍ권징(權徵)ㆍ신할ㆍ이천(李薦)ㆍ이빈(李薲)ㆍ유극량(劉克良)ㆍ변기(邊磯) 등은 임진에 있었는데, 5월 18일에 회전(會戰)하기로 약속하였다.이때 의논하는 이가 말하기를 “우리 군사가 많다고는 하나 거의 대부분이 약졸(弱卒)이고, 믿을 수 있는 것은 강변의 토병뿐인데 토병이 멀리서 오느라고 지쳐 있으니, 며칠쯤 늦추어 그들이 휴식을 취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거사한다면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하였으나, 여러 장수들이 듣지 않았다. 그리하여 17일 야음을 틈타 군사를 도하(渡河)시켰는데, 좌위장(左衛將) 이천이 상류 강 언덕에서 적군을 만나 급히 치다 패배를 당하였으며, 유극량도 죽고 신할도 패몰(敗沒)한 가운데 적이 마침내 임진을 건너오게 되었다.조정이 제도(諸道)의 군사를 동원하여 들어와 응원토록 하니, 전라 순찰사(全羅巡察使) 이광(李洸)이 그 도의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 및 조방장(助防將) 이지시(李之詩)ㆍ백광언(白光彦) 등과 함께 전라도 군사를 이끌고 오고, 충청 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이 그 도의 방어사 이옥(李沃) 및 절도사(節度使) 신익(申翌) 등과 함께 충청도 군사를 이끌고 왔는데 무리가 수만이었으며, 경상 순찰사 김수(金睟)는 사졸을 잃고 단지 군관 30여 인만 이끌고 왔다. 이에 약속한 대로 6월 4일에 각자 길을 나누어 진격해 양천(陽川) 후포(後浦)에서 집결하였는데, 백광언이 선봉장으로 용인(龍仁)에서 적을 만나 창졸간에 교전하다가 패하여 전사하면서 대군이 한꺼번에 산이 무너지고 바닷물이 빠지듯 저절로 궤멸되어 어떻게 막을 도리가 없었으며, 그 결과 군기(軍器)와 치중(輜重)을 몽땅 적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그런데 뒤에 듣건대 처음에 왔던 적은 3명뿐이었고 그 뒤에 온 적도 겨우 1백 명에 불과했다고 하는데, 양도(兩道)의 수만 군사가 백 명의 적을 보고 혼비백산하여 마치 폭풍에 나뭇잎 떨어지듯 하였으니, 이는 옛날에 보지 못했던 일이었다.그런데 3도 군사가 모이게 된 것부터가 그러하였다. 김수는 이미 패망한 뒤끝이라서 겨우 자기 몸만 왔고, 윤국형은 원래 장재(將才)가 못 되었다. 그리고 이광은 변란 소식을 듣고서도 난을 구하러 달려갈 뜻이 없었는데, 본도에 있을 때 광주 목사(光州牧使) 정윤우(丁允祐)가 이광을 찾아가서 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해야 하는 의리를 극력 말했어도 따르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군대를 동원하는 명이 내려오고 나서야 비로소 급히 서둘러 군사를 모은 뒤 공주(公州)까지 갔다가 경성을 지키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는 곧바로 군대를 해산시켰는데, 이때에 이르러 재차 기병(起兵)했다가 재차 무너졌으므로 조야(朝野)가 모두 이광을 죄인으로 여겼다.하여튼 이로부터는 나라에 방어하는 자가 없게 되어 적이 위세를 한껏 떨치면서 마치 무인지경을 달리듯 팔로(八路)를 석권하였다. 그리고 각 두목들을 제도(諸道)에 나누어 보내고 수가(秀家) 자신은 경성에 주둔하였는데, 부산에서 평양에 이르기까지 각 사(舍)마다 보루를 쌓아 방벽을 삼았다. 이때 거느린 적의 무리가 대략 25~26만쯤 되었다고 하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정탐을 잘하지 못해 실제로 몇만이 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한편 청정(淸正)은 함경도에 들어가 왕자 임해군(臨海君)ㆍ순화군(順和君) 및 수행한 재신(宰臣) 김귀영(金貴榮)ㆍ황정욱(黃廷彧)ㆍ황혁(黃赫) 등을 사로잡아 구류시켰고, 기보(畿輔)의 적은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을 파헤치는 등 국세가 미약한 탓으로 신인(神人)에게 비통함을 안겨 주었는데, 다행히도 평양으로 진출한 적의 경우만은 순안(順安) 일보 직전에서 멈추고 진격하지 않았다.이 와중에서 이광(李洸)의 직책이 깎이고 권율(權慄)이 그를 대신한 뒤로 정기(旌旗)가 성벽 위에 힘차게 나부끼고 옛 모습이 일신되었는데, 권율이 군사를 이끌고 북상(北上)하다가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대첩을 거두었다. 초토사(招討使) 이정암(李廷馣)은 연안성(延安城)을 지키면서 성을 포위한 적을 격퇴하였다. 전라 수사(全羅水使) 이순신(李舜臣)ㆍ이억기(李億棋) 등은 여러 차례에 걸쳐 수군으로 적을 꺾으며 전승을 거두었다. 의병 역시 각처에서 다투어 일어나 관군에 호응하였다. 그 중에서도 경상도의 김면(金㴐)ㆍ곽재우(郭再佑)와 전라도의 고경명(高敬命)ㆍ김천일(金千鎰)과 충청도의 조헌(趙憲)ㆍ영규(靈圭)가 더욱 유명하였으며, 기타 각 고을에서 일어난 소규모의 의병들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는데, 나라의 명맥이 이들 덕분에 보존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는 중국 조정에서 원군을 내보냄으로써 위태로운 나라를 구하는 공적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었다.
- 2020-09-21 | NO.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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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남과 호남의 인물들, 도협총설 104조항 〔陶峽叢說 一百四則〕 -도곡집
- 도협총설 104조항 〔陶峽叢說 一百四則〕 -도곡집 제28권 / 잡저(雜著) : 이의현(李宜顯, 1669~1745)102. 조선조에서는 양남(兩南) 지방의 인물이 가장 현달하였으니, 경주(慶州)에는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이고, 안동(安東)에는 충정공(忠定公) 권벌(權橃)과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과 백담(栢潭) 구봉령(具鳳齡)과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고, 상주(尙州)에는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과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와 창석(蒼石) 이준(李埈)이고, 성주(星州)에는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동강(東崗) 김우옹(金宇顒)이고, 진주(晉州)에는 남명(南冥) 조식(曺植), 보덕(輔德) 조지서(趙之瑞)이고, 대구(大丘)에는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이고, 밀양(密陽)에는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이고, 선산(善山)에는 하위지(河緯地) 선생과 경은(耕隱) 이맹전(李孟專)과 신당(新堂) 정붕(鄭鵬)과 송당(松堂) 박영(朴英)이고, 인동(仁同)에는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이고, 함양(咸陽)에는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과 옥계(玉溪) 노진(盧禛)이고, 청도(淸道)에는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과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이고, 합천(陜川)에는 야천(冶川) 박소(朴紹)이고, 영천(永川)에는 사간(司諫) 곽순(郭珣)이고, 함안(咸安)에는 의정(議政) 어세겸(魚世謙)이고, 금산(金山)에는 매계(梅溪) 조위(曺偉)이고, 영천(榮川)에는 화포(花浦) 홍 선생(洪先生 홍익한(洪翼漢))이고, 예천(醴泉)에는 수헌(睡軒) 권오복(權五福)과 의정(議政) 정탁(鄭琢)이고, 용궁(龍宮)에는 참판 문근(文瑾)이고, 함창(咸昌)에는 문광공(文匡公) 홍귀달(洪貴達)과 양정공(襄靖公) 채수(蔡壽)와 교리 권달수(權達手)이고, 고령(高靈)에는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이고, 현풍(玄風)에는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과 장군 곽재우(郭再祐)이고, 예안(禮安)에는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와 월천(月川) 조목(趙穆)이고, 안음(安陰)에는 갈천(葛川) 임훈(林薰)과 동계(桐溪) 정온(鄭蘊)이고, 칠원(漆原)에는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고, 산음(山陰)에는 덕계(德溪) 오건(吳健)이고, 사천(泗川)에는 구암(龜巖) 이정(李楨)이 있다.전라도 나주(羅州)에는 금남(錦南) 최부(崔溥)와 눌재(訥齋) 박상(朴祥), 사암(思菴) 박순(朴淳)과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와 백호(白湖) 임제(林悌)이고, 광주(光州)에는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과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 장군 김덕령(金德齡)과 금남(錦南) 정충신(鄭忠信)이고, 남원(南原)에는 사인(舍人) 정황(丁熿)과 병사 황진(黃進)이고, 장성(長城)에는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이고, 익산(益山)에는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이고, 김제(金堤)에는 찬성 이계맹(李繼孟)이고, 영암(靈巖)에는 소은(素隱) 신천익(愼天翊)이고, 영광(靈光)에는 수은(睡隱) 강항(姜沆)이고, 보성(寶城)에는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이고, 창평(昌平)에는 송강(松江) 정철(鄭澈)과 기옹(畸翁) 정홍명(鄭弘溟)이고, 태인(泰仁)에는 일재(一齋) 이항(李恒)이고, 강진(康津)에는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이고, 해남(海南)에는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과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과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이니, 이상의 분들은 유현(儒賢)과 절개를 지킨 선비, 문인과 명신, 양장(良將) 아닌 이가 없다.기타 경재(卿宰)와 시종관과 훌륭한 행실을 닦으면서 스스로 삼간 선비가 매우 성대하게 함께 배출되어 조정에 나열된 자 중에 양남 지방 사람이 거의 절반을 넘었으니, 이 때문에 양남 지방을 칭하여 인재의 창고라고 하였다. 그런데 인조조 이후로는 점차 예전에 미치지 못하더니, 지금에는 더욱 쇠하여 말할 만한 것이 못 된다.
- 2020-12-11 | NO.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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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사정기 永思亭記 - 허백당문집 제4권
- 영사정기 永思亭記 - 허백당문집 제4권 : 용재(慵齋) 성현(成俔, 1439~1504)최후(崔侯)가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있다가 외직인 옥과 현감(玉果縣監)으로 나가게 되었다. 그가 출발할 때 우리 집으로 와서 나에게 말하였다.“나는 광주(光州) 사람입니다. 그래서 광주 경내에 세거(世居)하면서 양친을 받들어 모시고 있었는데 지금은 부모님이 돌아가시어 건지산(巾之山) 기슭에 장사 지냈는데, 건지산은 집에서 10리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정자를 지어 ‘영사(永思)’라 이름하고 아침저녁으로 바라보면서 사모하는 마음을 붙이고 있습니다. 운각(芸閣)에서 공을 종유한 지 하루 이틀이 아니니 한마디 말을 받아 돌아가고 싶습니다.”나는 ‘영원히 효심을 지닌다.〔永思〕’라는 뜻이 참으로 크다고 본다. 이는 《시경(詩經)》에서 ‘영원히 효도할 것을 생각하는지라, 그 효심이 법이 된다.〔永言孝思, 孝思維則.〕’라고 하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무릇 사람에게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반드시 이목을 통해 느끼는 바가 있어서인데, 마음이 맡은 일은 생각하는 것이니 생각하면 반드시 그 정성을 다하게 되고, 그 결과 반드시 자신의 직분에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다하게 된다. 집 안에 들어가서는 부모에게 효도할 것을 생각하고 출사해서는 임금에게 충성할 것을 생각하는데, 그 마음은 매 한가지인 것이다.부모가 자식에 대해서 더할 나위 없는 지극정성으로 자애롭게 따뜻이 보살펴 주었으니, 자식 된 자가 그 망극한 은혜를 다 값을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오직 나의 마음과 힘을 다하여 부모의 뜻을 공경히 순종하여 어김이 없어야 할 것이다. 옷이 따뜻한지 추운지를 여쭈어 그 마땅하게 해 드릴 것을 생각하고, 음식을 달고 부드럽게 하여 부모의 구미에 맞도록 할 것을 생각하며, 병들어 아프거나 몸이 가려울 때는 공경히 안마하고 가려운 데를 긁어 드릴 것을 생각하고, 출입할 때는 앞서기도 하고 뒤에 따라가기도 하여 공경히 부축할 것을 생각하며, 기쁜 얼굴빛과 부드러운 태도를 지녀 그 효심을 일으킬 것을 생각해야 한다. 출세하여 세상에 이름을 드날려 부모의 영예를 현창할 것을 생각하되 혹 불행히도 부모가 죽게 되면 상사에는 슬픔을 생각할 뿐이고 제사에는 공경을 생각할 뿐이니, 마치 부모의 탄식하는 음성을 곁에서 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하고 국그릇이나 담장에서 부모의 모습을 뵙기라도 하는 것처럼 하여 언제 어디서라도 생각하지 않음이 없어야 하는데, 하물며 그 부모가 묻힌 선산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선인(先人)이 이곳에 혼백을 남긴 것을 생각한다면 나아가서는 부모의 묘소를 둘러보고서 그 봉축과 도랑을 수리할 것을 생각하고 그 잔디와 나무를 잘 기를 것을 생각하며, 물러나서는 잔디와 나무가 푸르게 잘 자란 것을 보고서 사모하는 마음을 가눌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자를 지은 까닭인 것이다.오래도록 이러한 마음을 생각하면 효심이 줄어들지 않을 것이고 효심이 줄어들지 않으면 능히 그 직분을 다하게 될 것이다. 최후가 능히 부모를 섬기는 정성을 임금을 섬기는 일에 옮기고, 또 능히 임금을 섬기고 남는 충성을 미루어 이 현(縣)에서 자신의 직분을 다한다면, 옥과의 백성들이 그 혜택을 받는 것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최후는 문사(文詞)로 과거에 급제하여 명성이 조정에 자자하다. 이번에 이처럼 웅재(雄才)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지방으로 내려가 탄환 같은 소읍(小邑)을 다스리게 되어, 사람들이 모두들 난봉(鸞鳳)이 가시나무에 앉아 곤욕을 당한다고 애석해하지만, 부모에 대한 효심을 길이 간직하려는 최후의 마음에서 볼 때는 조금 위로가 되기도 할 것이다. 최후는 아무쪼록 노력할지어다.소양(昭陽) 단오(端午) 뒤 3일에 경숙(磬叔)은 기문을 쓴다.[주-D001] 영사정기(永思亭記) : 옥과 현감(玉果縣監)으로 부임하는 최형한(崔亨漢, 1460?~1504)을 위해 그의 양친 묘소가 바라보이는 곳에 위치한 정자에 붙인 기문으로, 1493년(성종24) 5월 8일에 지었다. 정자의 이름은 《시경》 〈대아(大雅) 하무(下武)〉에 “영원히 효도할 것을 생각하는지라, 그 효심이 법이 된다.〔永言孝思, 孝思維則.〕”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지은이는 이 ‘영원히 효심을 지니는 것〔永思〕’에 대하여 가정과 조정에서의 적절한 마음가짐을 언급한 다음, 효와 충은 한가지 마음이고 이 마음을 미루어 고을을 다스릴 것을 당부한 뒤, 유능한 인재가 지방관으로 내려가는 것을 위로하고 있다. 이 글은 사(思)의 의미를 《예기》 등의 구문을 인용하여 부모와 임금, 그리고 고을로 확장해 나간 것이 특징이다.[주-D002] 최후(崔侯) : 최형한을 말한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탁경(倬卿)이다. 1483년(성종14)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전교서 정자(典校署正字)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연이어 양친의 상을 당하였고 복을 마친 뒤에 사헌부 감찰을 맡았다. 1493년 옥과 현감으로 나갔다가 내직으로 들어와 1498년(연산군4)에 사간원 헌납이 되고, 이해 4월에 장령이 되었다. 1503년 영암 군수(靈巖郡守)가 되었다. 다음 해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폭정에 항의하여 궁궐 앞에서 대명(待命)하다가 굶어 죽었다.[주-D003]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 사헌부 감찰을 고려 시대 관직으로 표현한 것이다. 《企齋集 監察李侯墓碣銘》 전중시어사는 고려 시대 어사대(御史臺)의 벼슬 이름인데, 이 어사대의 기능을 한 것이 조선 시대의 사헌부여서 어사대는 사헌부의 별칭으로 쓰였다.[주-D004] 운각(芸閣)에서 …… 지 : 대본에는 ‘從公藝閣者’로 되어 있는데, 규장각본에 근거하여 ‘藝’를 ‘芸’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운각은 교서관(校書館)의 별칭이다. 운각은 운향각(芸香閣)의 준말로, 고려 시대에 경적(經籍)과 축문(祝文)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인 비서성(秘書省)의 별칭인데, 운초(芸草)가 본디 서적의 좀벌레를 없애는 효과가 있어 서고에는 반드시 운초를 비치했던 데서 유래한 말이다. 최형한(崔亨漢)이 1484년(성종15)에 전교서 정자(典校署正字)를 맡은 적이 있는데, 이 전교서는 1466년(세조12)에 교서관을 고친 이름으로, 1484년에 다시 교서관으로 고쳤다. 성현과 교서관의 관계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으나, 성현이 1484년 《풍소궤범(風騷軌範)》 등의 서책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최형한과 교유하였을 가능성이 높다.[주-D005] 그 효심이 …… 말 : 대본에는 ‘孝思維則之思也’로 되어 있는데, 규장각본에 근거하여 ‘之’ 뒤의 ‘思’를 ‘辭’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06] 무릇 …… 있어서인데 : 이 글의 취지와 관계가 깊은 진사도(陳師道)의 〈사정기(思亭記)〉에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에 따라 생각이 달라지니 …… 묘사를 보면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난다.〔目之所視而思從之 …… 視廟社則思敬.〕”라고 한 구절을 연상하게 하는 표현이다.[주-D007] 마음이 …… 것이니 :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마음이 맡은 일은 생각하는 것이니, 생각하면 그 맡은 일을 잘 해내고 생각하지 않으면 맡은 일을 잘 해내지 못한다.〔心之官則思, 思則得之, 不思則不得也.〕”라고 하였다.[주-D008] 옷이 …… 지녀 : 《예기》 〈내칙(內則)〉에 “며느리가 시부모의 거처에 가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목소리를 부드럽게 해서 입고 있는 옷이 춥고 더운지를 묻고 아프고 가려운 데는 없는지 여쭈어 공경히 안마도 하고 긁어 드리기도 한다. 출입할 때는 앞서기도 하고 뒤서기도 하여 공경히 부축해 드린다.〔及所, 下氣怡聲, 問衣燠寒, 疾痛苛癢, 而敬抑搔之. 出入則或先或後, 而敬扶持之.〕”라고 하는 말이 있다.[주-D009] 혹 …… 되면 : 대본에는 ‘其惟不幸而死亡焉’으로 되어 있는데, 규장각본에 근거하여 ‘惟’를 ‘有’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10] 상사에는 …… 뿐이니 : 《논어》 〈자장(子張)〉의 “선비가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치며, 얻을 것을 보면 의로움을 생각하며, 제사에는 공경을 생각하고, 상사에는 슬픔을 생각한다면 괜찮을 것이다.〔士見危致命, 見得思義, 祭思敬, 喪思哀, 其可已矣.〕”라고 하는 구절에 나오는 말이다.[주-D011] 마치 …… 하고 : 《예기》 〈제의(祭儀)〉에 “제사 지내기에 앞서 재계한 지 3일이 되면 마침내 고인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르게 된다. 이리하여 제삿날, 사당 안으로 들어가면 고인의 영혼이 그 자리에 있는 것과 방불하게 느껴지며, 제사를 마치고 나가려고 하면 반드시 마음이 숙연해져서 고인의 음성을 듣는 것 같으며, 문밖으로 나가 들으면 반드시 방 안에서 뚜렷하게 고인의 탄식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齊三日, 乃見其所爲齊者. 祭之日, 入室, 僾然必有見乎其位, 周還出戶, 肅然必有聞乎其容聲, 出戶而聽, 愾然必有聞乎其歎息之聲.〕”라고 하였다.[주-D012] 국그릇이나 …… 하여 : 요(堯) 임금이 생전에 허름한 궁실에서 거처하고 음식도 조촐하였으므로, 요 임금이 죽은 뒤에 순(舜)이 3년 동안이나 사모하면서 “앉으면 담장에 요 임금이 나타나고, 밥상을 대하면 국그릇에 요 임금이 보였다.〔坐則見堯于墻, 食則覩堯于羹.〕”라는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53 李固列傳》[주-D013] 난봉(鸞鳳)이 …… 당한다 : 현사(賢士)가 낮은 지위에 있어 자신의 역량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후한 때 고성 영(考城令) 왕환(王渙)은 엄맹(嚴猛)한 정사를 숭상하였는데, 그 고을 포(蒲)의 정장(亭長)인 구람(仇覽)이 덕으로 사람을 교화시킨다는 말을 듣고 그를 주부(主簿)로 삼은 다음 그에게 말하기를 “주부는 진원(陳元)이란 사람의 죄과를 듣고도 처벌하지 않고 그를 교화하였다 하니, 응전(鷹鸇) 같은 맹렬한 뜻이 적은 게 아닌가?” 하니, 구람이 말하기를 “응전이라는 것이 난봉만 못합니다.” 하였다. 이에 왕환이 사과하고 그를 보내면서 말하기를 “가시나무는 난봉이 깃들 곳이 아니거니, 백 리의 작은 고을이 어찌 대현이 맡을 곳이리오.〔枳棘非鸞鳳所棲, 百里豈大賢之路?〕”라고 하고서 자신의 한 달 봉급을 그에게 주어 태학(太學)으로 보냈다고 한다. 《後漢書 卷76 循吏列傳》[주-D014] 소양(昭陽) : 고갑자(古甲子)로 천간(天干) 계(癸)를 의미하는데, 실록과 이재(李縡)의 《도암집(陶菴集)》 권31 〈장령최공묘갈(掌令崔公墓碣)〉을 상고하면, 최형한이 옥과 현감으로 나간 것은 1493년(성종24) 계축년에 해당한다.
- 2020-09-30 | NO.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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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倭)가 광주(光州)를 함락시켰다 - 동사강목 제17상
- 동사강목 제17상 기사년 후폐왕 창(後廢王昌) 즉위년(6월 즉위) 추7월 도당(都堂)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폐왕(廢王)에게 의대(衣帶)를 바쳤다.우(禑)의 생일이기 때문이었다. 곧 우를 여흥(驪興)으로 옮겨서 그 고을의 군사로 숙위(宿衛)하고 세(稅)를 거두어서 공봉(供奉)하게 하였다.○ 왜(倭)가 광주(光州)를 함락시켰다.
- 2020-09-15 | NO.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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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적이 광주(光州) 등지의 군에 침구하니 - 동사강목 제16상
- 동사강목 제16상 을묘 고려 전폐왕 우(前廢王禑) 원년부터, 무진 14년 6월까지 14년간 경신년 전폐왕 우 6년(명 태조 홍무 13, 1380) 3월 왜적이 광주(光州) 등지의 군에 침구하니, 원수(元帥) 최공철(崔公哲)ㆍ정지(鄭地) 등을 보내어 막게 하였다.
- 2020-09-15 | NO.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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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사호종록(龍蛇扈從錄)- 후광세첩
- 용사호종록(龍蛇扈從錄) - 梧陰公의 外交洞察力과 救國精神 - 후광세첩 제3권 / 문정공 사실(文靖公事實) : 오음 공(梧陰公) 윤두수(尹斗壽, 1533~1601)임진년(1592, 선조25) 9월에 윤두수가 입대(入對)하여 아뢰기를,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은 기골(氣骨)과 도량이 있어, 참으로 장수감입니다. 전라 감사로는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됩니다”라고 하니, 마침내 권율로 순찰사(巡察使)를 삼았다. 《임진일록》○ 전라 감사 이광(李洸)이 군사를 거느리고 금강(錦江)에 진을 치고 있다가 뜬소문을 듣고는 진을 파하였다. 그러자 당시에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있던 권율(權慄)이 판치(板峙)에 주둔해 있다가 여러 군사들이 퇴각하는 것을 보고는 자신의 소속 군사들로 하여금 동요치 말게 한 다음, 큰소리로 이광을 힐책하니, 이광이 사죄하였다. 그러고는 권율 등과 함께 전주(全州)로 내려가서 재차 거병하기로 꾀하였다. 장성(長城)에 사는 왕자사부(王子師傅) 정운룡(鄭雲龍), 광주(光州)에 사는 진사(進士) 박종정(朴宗挺), 생원(生員) 유사경(柳思敬) 등이 항소(抗疏)를 올려 이광이 머뭇거리면서 진격을 하지 않은 상황을 진술하고는, 무인(武人) 박희수(朴希壽)를 보내어 행조(行朝)에 진달하게 하였다. 당시에 정승으로 있던 해원군 윤두수는 바로 박종정의 처종형(妻從兄)이었다. 박종정이 해원군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본도의 감사를 만약 행조에서 제수해 보낸다면, 한 달 안으로는 이곳까지 오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도내의 수령 가운데에서는 오직 권율만이 담략과 기략이 있습니다. 이 사람보다 더 적임자는 없습니다.” 하였다. 《우산기사(牛山記事)》
- 2020-12-31 | NO.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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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부승지 이공 행장〔右副承旨李公行狀〕- 이화진(1626~1696)
- 우부승지 이공 행장〔右副承旨李公行狀〕- 이화진 광주목사(1691~1694)성호전집 제67권 / 행장(行狀)- 성호(星湖) 이익(李瀷)공의 휘는 화진(華鎭)이고 자는 자서(子西)이며 재호(齋號)는 묵졸(默拙)이다. 여흥 이씨(驪興李氏)는 고려조에 인용교위(仁勇校尉)를 지낸 휘 인덕(仁德)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뒤 10대를 내려와 병조 판서를 지내고 시호가 경헌(敬憲)인 휘 계손(繼孫)에 이르렀다. 이분은 실로 광묘조(光廟朝)에 명덕(名德)이 최고인 분으로 꼽혔으니, 사적이 국승(國乘)에 실려 있다. 또 3대를 내려와 응교를 지낸 휘 사필(士弼)에 이르렀으니, 이분이 첨정을 지낸 휘 우인(友仁)을 낳았고, 휘 우인이 군수를 지낸 상관(尙寬)을 낳았고, 휘 상관이 별제(別提)를 지낸 휘 지일(志一)을 낳았으니, 이분이 바로 공의 고(考)이다. 비(妣)는 함양 오씨(咸陽吳氏)로 정랑 오익창(吳益昌)의 따님이다.공은 우리 순효대왕(純孝大王) 4년 병인년(1626, 인조4) 1월 13일에 무장현(茂長縣) 욕곡(浴谷) 사제(私第)에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영민하고 빼어났는데 몸이 약해서 놀이를 좋아하지 않았다.6세에 오 부인의 상을 당하였는데, 상례(喪禮)를 행하기를 거의 어른처럼 하였다. 마침내 외왕부 오공에게 나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오공은 선비들에게 명망이 있었다. 훈육하여 깨우쳐 주니 공의 학업이 크게 진보하였다. 총명함이 월등하여 한 번 보면 다시는 잊지 않았다. 책을 잡고 강송하게 되어서는 음성이 낭랑하였으며 독실하게 밤낮없이 읽으면서도 피곤해할 줄 몰랐다. 이따금씩 무릎 위에서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 말을 하여 사람들이 모두 기특하게 여겼다.병자년(1636, 인조14)에 서천(舒川) 해도(海島)로 피란을 갔는데, 오랑캐가 이르려 하자 민심이 끊임없이 소요하여 하루에 세 번은 혼비백산하였다. 그런데도 공은 오히려 게을리하지 않고 편안하게 책을 읽었으니, 섬 사람들 모두가 탄복하였다. 일찍이 종 한 명만 따르게 하고서 책을 끼고 산사(山寺)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이때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며 다가왔다. 종은 두려워서 꼼짝도 못하였는데, 공은 얼굴색도 변하지 않았다. 바로 종으로 하여금 앞서 달아나게 하고는 자신은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자 호랑이도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조금 자라서는 시험장에서 제법 명성을 드러내었다. 당시에 사람들이 남쪽 고을의 큰 인물을 꼽아 보았는데 공 한 사람뿐이었다. 무자년(1648)에 진사가 되고 계축년(1673, 현종14)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당시 꺼리는 자가 있어 말하기를, “연소한 자가 아니면 괴원(槐院)의 직임을 맡게 해서는 안 된다.” 하여 결국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에 보임되었다.갑인년(1674)에 성균관 학록(成均館學錄)에 전보되었다가 마침내 6품의 품계에 올라 전적이 되었고 조금 뒤에 병조 좌랑으로 옮겨졌다.을묘년(1675, 숙종1) 1월에 외직으로 나가 전라도의 좌막(佐幕)이 되었다. 3월에 그대로 삼도(三道)의 해운 판관(海運判官)을 겸하였다. 겨울에 조정에 들어와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가 병조 정랑에 옮겨졌다.병진년(1676)에 다시 정언에 옮겨졌다가 조금 뒤에 다시 병조 정랑이 되었다. 6월에 요직을 담당한 자의 뜻을 거슬러서 외직으로 나가 북청 판관(北靑判官)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임 재상이 변방 지역에 군사가 부족한 것을 걱정하여 본도로 하여금 유적(儒籍)을 없애고 유생을 군사에 충원시키도록 건의하였다. 이에 북쪽 지방이 떠들썩해지고 유생들이 왕왕 불만을 얘기하며 서로 나와 호소하였다. 공이 이때 차사원(差使員)으로 서울에 왔는데 도착하자마자 즉시 당시 재상을 만나 말하기를, “북쪽 지방은 본래 오랑캐 땅이었는데 조정이 실로 문교(文敎)로 유지하여 300년을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유신(儒紳)들을 몰아 군대로 귀속시켰습니다. 세속의 풍조는 한번 잘못 되면 다시 바로잡을 수 없고 인심은 떠나면 다시 거둘 수 없으니 이는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하니, 시임 재상이 수긍하면서 옳다고 하여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다음 해 6월에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에 차임되었다. 얼마 뒤에 성균관 사예가 되어 조신(朝臣)을 고시(考試)하였는데, 여기서 내놓은 제목(題目)에 시휘(時諱)를 범한 것이 있다는 논의가 있어 여러 시험 담당관이 모두 죄를 입었고 공도 홍천현(洪川縣)에 찬배되었다.무오년(1678, 숙종4)에 방환되어 다시 사예를 거쳐 헌납에 옮겨졌다. 기미년(1679) 2월에 사헌부에 들어가 장령이 되었다가 헌납, 사성을 역임하였다. 7월에 다시 사은사의 서장관에 차임되어 중국에 갔다. 12월에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도중 아직 복명(復命)도 하기 전에 집의에 승진되었다.경신년(1680)에 사간에 옮겨지고 도로 집의에 제수되었다. 또 봉상시 부정에 옮겨졌다. 당시 당인(黨人)이 국정을 주도하였으므로 공 또한 조정에 있기가 편치 않았다. 이에 서천 군수(舒川郡守)에 보임되어 외직으로 나갔다. 겨울에 사소한 일로 체직되어 돌아왔다.신유년(1681, 숙종7)에 경성 판관(鏡城判官)이 되었다. 다음 해 봄에 백성 가운데 윤기(倫紀)를 범한 자가 있었다. 경성은 북쪽 변방이라 눈이 많이 와서 길이 막혔는데 방백이 잘못 알고 옥사 처리를 제때 하지 않았다고 계문하자 공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뒤따라 논박하였다. 3월에 마침내 해남현(海南縣)에 찬배되었으니, 무고하게 죄를 받은 것이다. 겨울에 사면되어 돌아왔다.정묘년(1687) 겨울에 이르러 방백이 다시 당시 사실을 밝혀 아뢰었으므로 비로소 서용되어 고산 찰방(高山察訪)이 되었다. 무진년(1688) 7월에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라 경흥 도호부사(慶興都護府使)가 되었다.경오년(1690) 봄에 임기를 채우고 해임되어 돌아왔다. 5월에 병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7월에 후사(喉司)에 들어가 동부승지가 되었다. 8월에 병으로 체직되었다.신미년(1691) 3월에 병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5월에 우부승지에 옮겨졌다. 6월에 광주 목사(光州牧使)에 제수되었다. 갑술년(1694) 봄에 또 임기를 채우고 해임되어 돌아왔다.병자년(1696) 4월 7일에 서울 집에서 임종하니 향년 71세였다. 7월에 양근군(楊根郡) 용문산(龍門山) 임좌(壬坐) 언덕에 안장되었다.공은 타고난 성품이 관대하고 넉넉하였으며 내면을 기름에 방도가 있었다. 고아한 풍모와 진실된 마음은 안팎이 똑같았다. 자신을 단속함에 있어서는 담박하게 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자혜롭게 하였다. 종족 간에 매우 화목하고 붕우 간에 신의가 있었다. 다른 사람을 논할 때는 장점을 들어 논하였고 일을 할 때는 충실함을 위주로 하였다. 고결하다는 이름을 얻는 데에 마음 쓰지 않았지만 엄연히 누구나 닮고 싶어 하는 군자였다.물러나 집에 거처할 때는 깊숙이 들어앉아 교제를 끊고 날마다 후생들과 글을 읽고 글씨를 쓰며 가르치기를 부지런히 하였다. 출사하여 임금을 섬길 때에는 분수에 맞게 최선을 다해 직임을 수행하였으며, 작은 관직도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 평생 산업을 경영하지 않아서 사람들과 대화하는 중에 재물을 말하는 것을 들으면 반드시 얼굴을 찌푸리며 좋아하지 않았다. 아래로 노비들에게까지 또한 너그럽게 대해 주어 비록 잘못이 있더라도 성색(聲色)에 노기를 띤 적이 없었다. 예전에 거룻배〔步船〕 한 척을 보유한 적이 있는데, 매년 거두는 미곡이 적지 않았다. 공이 말하기를, “재물의 수입이 매우 많아 마음에 편치 않다.” 하고는 이어 태반을 덜어 내어 곤궁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으니, 스스로 바르게 한 것이 이와 같았다.또 일찍이 혼자 장원(莊園)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밤이 되자 흰옷 입은 산도깨비들이 수풀 사이를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공이 정색하고 자세히 살펴보니 귀신이 홀연히 사라졌다. 얼마 뒤에 친족 중에 귀신 들린 자가 있었는데, 자세히 알아보니 바로 지난번 흰옷 입은 도깨비였다. 공이 가서 문후하니 귀신이 발자국 소리만 듣고 바로 사라졌다.하루는 바다를 건너는데 바다 한복판에서 노를 빠뜨렸다. 당시 한창 물이 불어나던 때라 배가 거의 뒤집힐 지경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당황하고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공은 동요하지 않고 파도에 일렁이는 뱃전에 걸터앉아 말하기를, “너희들은 내 말대로만 하라. 그렇지 않으면 영락없이 죽을 것이다.” 하였다. 배 안의 사람들이 손을 나란히 하여 노 젓는 것처럼 하니, 배가 즉시 해안에 당도하였다. 이에 모두들 큰절을 올리며 사례하기를, “우리들이 고기밥이 되지 않은 것은 공이 힘쓴 덕분입니다.” 하였다.무장(茂長)에 있을 때 많은 배가 파도에 패몰당한 일이 있었다. 많은 사람이 빠져 죽어 갯벌에 묻혀 있었는데, 조수(潮水)가 들어와 시신이 떠내려가면 다시 찾을 수 없게 될 형세였다. 공은 직접 동복(僮僕)을 데리고 가서 즉시 거두어들이고 또 거주민들을 효유하여 힘을 합쳐 건져낸 다음 친속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며칠 후에 과연 그들의 처자가 모두 와서 시신을 찾고는 감읍하고 돌아갔다.경흥(慶興)을 맡아서는 선비 양성을 정사의 최우선에 두었으니, 경헌공(敬憲公)의 유업을 이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대개 경헌공이 일찍이 본도의 방백이 되어서 처음으로 궁마(弓馬)의 풍속을 혁파하였으니, 북방 사람들이 지금까지 향사(享祀)를 올리고 있다. 이후 158년이 지나 공이 부사로 부임하였는데, 지역이 가장 멀고 외져서 임금의 교화가 미치지 못하는 곳이었다. 공은 제일 먼저 성묘(聖廟)에 참배하고 유생들을 보니 전립(氈笠)에 가죽신 차림이고 일자무식인 것이 거의 옥저(沃沮), 말갈(靺鞨)의 유습이었다. 공은 즉시 관아에 명하여 의건(衣巾)을 지급하게 하고 감사에게 청하여 경사(經史) 약간 권을 얻었다. 또 총명하고 재주 있는 십여 명을 뽑아 직접 가르치고 권면하였으며 매일 과정을 정해 두어 학업에 대한 흥미를 일으키게 하자, 몇 년 사이에 이미 성과가 나타났다. 고사(古事)에, 국가 시험이 있으면 열읍에서 반드시 먼저 과거 응시자 명단을 올렸다. 그러나 경흥은 외지고 멀어서 참여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미 4, 5인이 시험에 응시하였고 또한 충분한 실력으로 합격하였으니 모두들 놀라워하였다.당시 크게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어 죽게 될 판이었다. 이에 공이 또 감영 및 병마영(兵馬營)에 환곡을 청하였다. 마침내 이웃 고을에서 매우 많은 미속(米粟)을 얻게 되어 우선 길주(吉州) 이북으로 보내어 진휼하였다. 겨울과 봄까지는 영남에서 계속 보내와 보리 수확 때까지 대 주었다. 부역과 세금을 줄이거나 면제해 주어 백성들에게 해가 되는 모든 일들이 다 제거되었다. 아울러 부지런히 권면하여 농작 시기를 놓치지 않게 하니, 사람들이 덕분에 온전히 살아남았다. 이윽고 또 부중(府中)에 방을 붙여 유시하기를, “백성을 기르는 도리는 노인을 위문하고 곤궁한 자를 구제하며 따르지 않는 자를 교도하는 데에 있다. 유품(儒品)은 70세, 군민(軍民)은 75세 이상인 자 및 늙었는데 처자가 없거나 어린데 부모형제가 없는 자, 그리고 효자와 열부(烈婦)를 마을에서 각각 보고하라. 또 효제(孝悌)를 하지 않는 자, 어른을 능멸하고 싸움을 좋아하는 패려궂은 자, 남의 물건을 빼앗거나 도둑질하는 자, 남녀가 분별없이 내외하지 않는 자가 있는가?” 하였다. 이에 완급에 따라 흡족하게 구휼하고 경중에 따라 합당하게 상벌을 주었으므로 모두 기쁜 마음을 갖게 되었다.자신의 생활은 매우 검약하여 비록 잔치를 베풀 때라도 한결같이 집에 있을 때와 같이 하였다. 말하기를, “본래 가난하고 근검하니 녹을 받는 자리에 있다고 해서 마음을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다.” 하였다. 돌아가게 되어서는 의복과 사용하던 물건 가운데 자신이 가져온 것이 아니면 바로 남겨 두며 말하기를, “나는 떠나면서 재물을 챙겨 가는 것을 싫어한다.” 하였다. 부의 백성들이 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길을 막고서 멀리까지 나와 전송하였다.돌아온 뒤에 또 소장을 올려 본부의 폐단 및 북도의 편의에 대한 14가지 일을 논하였다. 그 대략에,“우리나라의 관방(關防)은 북도가 중요한데 진보(鎭堡)의 허술함이 막심합니다. 군민(軍民)들의 원성도 이미 극도에 달했으니 만약 뜻밖의 일이 생긴다면 창졸간에 조처하기 어렵습니다. 강을 따라 설치한 보(堡)는 그 거리가 가까워야 4, 5십 리이고 배속된 군사는 많아야 3, 4십 인입니다. 뜻밖의 변고가 생겨 철기(鐵騎)의 군대가 나는 듯이 짓쳐들어온다면 다른 보의 군사가 구원하러 오기도 전에 이곳의 군사는 먼저 사로잡힐 것입니다. 변장은 기껏해야 저들의 길잡이 노릇만 할 것이고 저축해 놓은 군량은 단지 저들의 몫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행영(行營)의 거리가 강변길에서 지극히 가까우니 강변의 수비가 무너지면 화가 필시 먼저 미칠 것입니다. 비록 손(孫)ㆍ오(吳)와 분(賁)ㆍ육(育)이 있더라도 머리를 내주는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으니, 이 때문에 대장은 군대의 위세를 유지할 수 없고 국가는 전쟁을 치를 근심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행영이 함락되고 나면 더는 계속 지원할 수 없으니 그 방책이 또한 부실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계책은 강변 연안의 육진(六鎭)을 점차 내지로 옮겨 설치하고 강변의 높은 지역에 망루(望樓)를 많이 설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랑캐가 나타나는 즉시 성화같이 재빨리 보고하면 근처에 있는 군병을 소집해서 성을 지키게 할 수 있습니다. 잔폐한 보를 철폐해서 그 군졸을 합병한다면 보탬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경성(鏡城)은 요해지로서 성 또한 튼튼하고 완벽하여 북쪽의 보장으로 이만한 곳이 없습니다. 대장은 항상 이곳에 거류하도록 하고, 부수(副帥)는 행영에서 급작스러운 사태에 대비하도록 하는 것이 변란에 대응하는 방도에 합당할 듯합니다.”하였다. 공은 변방의 일을 익숙히 알았고 나랏일을 집안일처럼 걱정하였다. 그리하여 그 말이 모두 나라를 경륜하는 원대한 계책이었으나 조정이 써 주지 못하였다.광주(光州)에 부임하였을 때는 재이가 있어서 상이 교서를 내려 구언(求言)하였다. 공은 즉시 상소를 올려 폐단을 논하였는데, 모두 3천여 글자가 되는 말이 모두 백성을 구제하는 데 절실한 일이었다. 공은 선비로 있을 때부터 이미 백성을 사랑하는 데에 마음을 두어 죽을 때까지도 말이 나랏일에 미치기만 하면 말이 끝없이 이어졌다. 반면에 편당(偏黨)하는 말이라면 일절 함묵하고 말하지 않았다.때로 한가하면 운을 골라 시를 짓기를 단지 성향대로 하였다. 변방 고을에 있을 때 상공(相公) 남구만(南九萬)이 이곳에 유배되어 거처하고 있었다. 평소 공의 시명(詩名)을 중시하여 공이 지은 시편을 들으면 반드시 장중하게 암송하였고, 또 한 권을 전사(傳寫)하여 궤 안에 두었다. 남상이 조정에 돌아오게 되어 공을 크게 발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묵졸재집(默拙齋集)》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불초한 나 익은 공에게 실로 당질(堂姪)이 되는데 늦게 태어나 문하생이 되어 모시지는 못했으나 돌봐 주고 길러 주시는 중에 베푼 가르침을 받았다. 또한 일찍이 도성의 서문(西門) 쪽 사제(私第)에서 뵌 적이 있는데, 아름다운 수염과 장대한 용모에 말씀하시는 것이 진지하여 지금까지도 그 후덕한 모습이 눈에 선하다.지금 공의 막내아들 정(涏)이 나에게 공의 행장을 짓도록 명하였다. 나는 의리상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지만, 이 몸이 어리석고 보잘것없어서 공의 덕업을 드러내지 못할까 실로 염려되었다. 그런데 어르신들에게 듣건대, “비록 공을 좋아하지 않는 자로 하여금 공을 평하게 하더라도 똑같이 반드시 남을 상해하는 마음이 없었다고 할 것이다.”라고 하니, 여기서 공을 잘 알 수 있었다.전 부인은 광산 김씨(光山金氏)로 학생 김우참(金友參)의 딸이고, 계해년(1623, 인조1)에 태어나 신축년(1661, 현종2)에 졸하여 무장현(茂長縣) 송운산(松雲山)의 별제공 무덤 아래에 안장되었다. 아들 3인을 두었다. 후 부인은 단양 이씨(丹陽李氏)로 학생 이홍익(李弘翼)의 딸이고, 경신년(1680, 숙종6)에 태어나 기해년(1719)에 졸하여 안산(安山) 첨성리(瞻星里) 계좌(癸坐) 언덕에 안장되었다. 아들 1인을 두었다.[주-D001] 광묘조(光廟朝) : 세조(世祖)이다.[주-D002] 순효대왕(純孝大王) : 인조(仁祖)를 말한다.[주-D003] 좌막(佐幕) : 감영 등에서 장관을 보좌하는 관원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도사(都事)를 지칭한다.[주-D004] 당인(黨人)이 국정을 주도하였으므로 : 1680년(숙종6) 경신환국(庚申換局) 이후 남인들이 조정에서 대거 물러나고 서인들이 요직을 차지하여 국정을 주도하게 된 것을 말한다.[주-D005] 후사(喉司) : 승정원을 말한다.[주-D006] 엄연히 …… 군자였다 :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누구나 닮고 싶어 하는 사람을 선인(善人)이라 한다.〔可欲之謂善〕”라는 말이 나오는데, 집주에 “천하의 이치가, 선한 자는 반드시 좋아하여 따르고 싶어 하고 악한 자는 반드시 미워하니, 그 사람됨이 따르고 싶어 하고 미워하지 않는다면 선인이라 할 만하다.” 하였다.[주-D007] 경헌공(敬憲公)의 유업 : 경헌공 이계손(李繼孫)은 1470년(성종1)에 영안도 관찰사(永安道觀察使)에 제수되었는데, 부임하여 본도의 향교를 진흥시켜 선비를 양성할 것을 계문(啓聞)하였다. 《국역 성종실록 1년 6월 15일》[주-D008] 158년 : 218년의 오기인 듯하다. 이화진(李華鎭)이 경흥 도호부사(慶興都護府使)에 부임한 것은 1688년(숙종14)이고 이계손이 방백으로 부임한 것은 1470년이므로 218년 뒤의 일이다.[주-D009] 손(孫)ㆍ오(吳)와 분(賁)ㆍ육(育) : 손ㆍ오는 춘추전국 시대의 병가(兵家)인 손무(孫武)와 오기(吳起)를 말하고, 분ㆍ육은 진 무왕(秦武王) 때의 역사(力士)인 맹분(孟賁)과 하육(夏育)을 말한다.[주-D010] 상공(相公) …… 있었다 :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이 1688년(숙종14)에 박세채(朴世采)를 변호하고,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 전평군(全坪君) 이곽(李漷)에 대해 간언하다가 경흥(慶興)에 위리안치되었다. 《藥泉年譜》
- 2023-08-08 | NO.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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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역(牛疫)으로 폐사한 상황을 순영(巡營)에 보고하다- 광주목사
- 보첩고(報牒攷) - 光州牧使 소가 병들어 죽다○ 영조(英祖) 39년(1763) 8월 11일 경내(境內)에 우역(牛疫)이 크게 치성하여 소가 병을 앓았다 하면 곧바로 폐사한 상황을 순영(巡營)에 보고하다첩보(牒報)하는 일. 우역이 지난해 겨울부터 발생하여 금년 봄과 여름에 이르렀으나 그 기세가 별로 대단하지 않다가 몇 개월 전부터 점점 전염되어 소가 병을 앓았다 하면 곧바로 폐사하였기 때문에 일일이 신칙하여 폐사한 족족 땅에 묻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역이 마치 불처럼 치성하여 소가 잇따라 폐사한 바람에 심지어 한 마을에 소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경우도 있으니, 머지않은 가을갈이에 사람이 소 대신 쟁기를 끌어야 하는 염려가 있습니다. 이는 보통의 재앙이 아니므로 민사(民事)가 정말로 매우 고민됩니다.전후로 폐사한 소에 대해 지금 막 각각 주인의 성명을 조사하여 수록(收錄)하고 있는데, 그 일이 끝나면 별도로 책자를 작성하여 올리려고 합니다. 간사한 백성의 무리가 은밀히 폐사한 소를 도살하는 폐단이 없지 않습니다. 이는 산 소를 도살한 경우와 다르기는 합니다만 이 역시 금법(禁法)을 범한 것이어서 그냥 방치할 수 없으므로 한편으로는 다방면으로 기찰하고 한편으로는 엄히 신칙하여 땅에 묻도록 하였습니다. 이상의 연유를 먼저 첩보합니다.제사(題辭)우역이 이와 같이 치성하고 있으니, 정말로 고민이 된다. 폐사한 소는 낱낱이 묻을 것이며, 도살하는 것도 엄히 신칙하여 금단(禁斷)해야 할 것이다.
- 2023-08-17 | NO.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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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재 선생께 올리는 편지〔上尤齋〕 -문곡집
- 우재 선생께 올리는 편지〔上尤齋〕 -문곡집 제27권 / 서독(書牘): 김수항(金壽恒, 1629~1689)늦가을, 어르신께 문안을 가는 광주(光州)와 나주(羅州) 유생들이 있어서, 삼가 편지 한 장을 써서 문후를 여쭈었고 아울러 《차의(劄疑)》 한 책을 보냈는데, 과연 지체되지 않고 제대로 들어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소식이 뜸한 지 이미 몇 달이 지나,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계절이고 박(剝)과 복(復)이 교체되는 시절입니다. 삼가 균체(勻體 편지에서 정승을 지칭하는 말)의 건강이 철따라 강녕하고 복되리라 생각되니, 우러러 그리는 저의 마음이 하루도 떠난 적이 없습니다.저 수항은 그런대로 죽이나 먹는 생활을 유지하고 있으니 진실로 이른바 혜주(惠州)의 급제하지 못한 수재(秀才)는 어디에 있은들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오직 병과 게으름이 날로 고질이 되고 뜻과 학업이 날로 황폐한 것은 참으로 횡거(橫渠 장재(張載)의 호)의 말처럼 오로지 구습에 얽매어 탈피하지 못한 데서 연유하니, 종전에 좋은 시절을 헛되이 버리고 단지 어르신께 상심과 슬픔만 끼치는 것이 더욱 슬픕니다. 만일 때때로 가르침을 받아 저의 혼미함을 깨우칠 수 있다면 혹시 끝내 소인(小人)이 되지는 않겠지요? 마침 조생(曺生) 집에 회향(懷鄕 회덕(懷德))에서 온 인편이 있다는 말을 듣고 대략 이렇게 문안 편지를 썼으니 조만간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많은 말씀을 자세히 갖출 겨를이 없어 이만 줄입니다.[주-D001] 우재 …… 편지 : 이 편지에 대한 답장을 송시열이 10월 14일에 부쳤다. 송시열의 편지는 《송자대전(宋子大全)》 권54 〈김구지에게 답함-정사년 6월 12일〔答金久之 丁巳十月十四日〕〉이다.[주-D002] 박(剝)과 …… 시절 : 박과 복은 《주역》의 괘명(卦名)이다. 산지(山地) 박(剝)괘는 9월에 해당되며, 지뢰(地雷) 복(復)괘는 11월에 해당된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시절을 뜻하면서 동시에 난세(亂世)에서 치세(治世)의 싹이 튼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주-D003] 혜주(惠州)의 …… 수재(秀才) : 여기서는 귀양 간 신세를 말한다. 송나라 소식(蘇軾)이 왕안석(王安石)의 화를 당하여 그곳으로 귀양을 간 일이 있었으므로 귀양살이를 흔히 혜주라 칭한다. 소식이 자신을 묘사했던 말이다. 《東坡全集 卷84 與程正輔提刑》[주-D004] 구습에 …… 못한 : 《장자전서(張子全書)》 권14 〈성리습유(性理拾遺)〉에 나온다.[주-D005] 조생(曺生) : 누군지는 미상이다.
- 2020-12-14 | NO.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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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후(虞侯) 김준민(金俊民)의 복수 사건
- 연려실기술 별집 제13권 / 정교전고(政敎典故) / 형옥(刑獄)○ 인조 조에 우후(虞侯) 김준민(金俊民)의 종 금이(金伊)가 준민의 집에 들어가서 팔다리를 부러뜨려 죽였는데, 그 아들 성일(成一)ㆍ성구(成九)가 장사를 지내지 않고 도적 괴수의 동정을 살피다가, 시장 가운데서 김이와 그 부모를 잡아가지고 자기들이 손수 도륙(屠戮)하고 집안 사람을 시켜 그들의 간을 그 아버지 빈소(殯所) 앞에 매달아 놓게 하고, 곧 관청으로 나아가 자수(自首)하여 옥에 갇혀 죽여주기를 청하였다.담양부사(潭陽府使) 이윤우(李潤雨, 1569~1634)와 취조관인 광주목사(光州牧使) 임효달(任孝達, 1584~1646)이 예전에 있었던 복수(復讐)는 사형을 면한다는 의논을 증거로 끌어대어 조정에까지 보고하니, 형조에서 《대명률(大明律)》 장벌조(杖罰條)에 의거하여 시행하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특별히 사면하여 주었다. 《우암집》* 다른 기록에서 <丁丑庭試文武科榜目>에 의하면 金成一(1538~1593)은 선전관(宣傳官)으로 부는 우후(虞侯) 김준민(金俊民), 형은 김성구(金成九)라 하였는데 <광산김씨 정묘대보>에는 형 성구가 성일의 아우로 기록되어 있다. 이 파는 담양과 광주일원에 세거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김준민의 아들 김성일이 선전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인물로 나와 인조의 재위(1623~1649) 기간을 고려하면 이야기의 앞뒤가 맞지 않다. 또 김성일의 자는 사순(士純)인데, 아래의 송시열이 쓴 글에서 자는 응건으로 나온다.김 삭주(金朔州) 형제의 복수전(復讎傳) / 송시열김성일(金成一)의 자는 응건(應乾)인데, 광주(光州) 평장동(平章洞) 사람으로 담양부(潭陽府)에서 대대로 살았다. 그의 아버지 준민(俊民)은 벼슬이 우후(虞候)였고, 어머니는 하동 정씨(河東鄭氏)였는데, 용(龍)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꿈을 꾸고 공을 낳았기 때문에 아명(兒名)은 현룡(見龍)이었다. 키는 8척이었고, 붉은 수염은 창끝처럼 곧았으며, 용력(勇力)이 뛰어난 데다 음양가(陰陽家)를 섭렵(涉獵)하여 장차 무재(武才)로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준민의 아우는 세민(世民)이었는데, 그의 종[奴] 금이(金伊)가 동생 세민의 아내 예합(禮合)과 간통하였다. 준민은 이를 통분하게 여겨 장차 그들을 제거하려 하였는데, 미처 거사(擧事)하기 전에 종 금이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제 아비와 두 동생을 거느리고 기사년(1629, 인조7) 10월 30일 밤에 준민의 집으로 쳐들어가 준민을 매우 참혹하게 어지러이 찍어 죽였다.)이때에 성일은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에 갔다가 아버지의 부음(訃音)을 듣고 돌아왔는데, 그의 아우 성구(成九)는 피를 토하며 실성(失性)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형제가 서로 굳게 결심하고 창을 베개 삼아 거적자리에서 잠을 자며, 아버지를 장사 지내지 않고 적괴(賊魁)의 동정만을 살폈다.이해 12월 15일에 시장(市場) 안에서 금이와 그의 부모를 찾아 손수 잡아 죽이고 그의 간(肝)을 잘라 내어 가인(家人)을 시켜서 아버지의 빈전(殯前)에 매달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즉시 부(府)에 나아가 형제가 자수(自首)하면서 죽여 주기를 청하였으니, 준민이 죽은 지 겨우 45일째였다. 담양 부사(潭陽府使) 이공 윤우(李公潤雨)가 추관(推官)인 광주 목사(光州牧使) 임효달(任孝達)과 함께 예전의 복수면사의(復讎免死議 군부(君父)의 원수를 갚고 죽음을 면한 데 대한 의논)를 끌어대어 감사(監司)에게 보고하였다.감사 송공 상인(宋公象仁)이 이를 조정에 보고한 결과, 승지(承旨) 이공 경용(李公景容)이 해조(該曹)에 알려, 《대명률(大明律)》의 장벌조(杖罰條)에 의거하여 시행하기를 청하였는데, 인조대왕(仁祖大王)은 그의 효의(孝義)를 가상하게 여겨 특사(特赦)하였다. 대체로 처음 변(變)이 났을 때부터 이제까지의 기간은 9개월이었다. 그러자 인리(隣里)의 여러 친지들은 준민의 시체가 돌아갈 곳이 없음을 민망하게 여겨 힘을 합해서 그를 장사 지냈다.성일은 담양(潭陽)을 선친이 살해당한 지역이라 하여 차마 그대로 살지 못하고, 형제가 드디어 흥덕(興德)ㆍ부안(扶安) 등지로 옮겨 가 우거(寓居)하였다. 사인(士人) 박문두(朴文斗)는 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들 형제를 자기 집으로 맞이하여 재산을 기울여서 접대하였다. 그들 형제가 아버지의 상(喪)을 마치자, 백강(白江) 상공(相公) 이경여(李敬輿)는 그들을 막하(幕下)에 두고 후히 대우하였는데,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 신공 경진(申公景禛)도 역시 그렇게 대우하였다.병자호란 때는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가 동성(東城)에 나누어 예속되었다. 선전관(宣傳官) 윤겸지(尹謙之)와 함께 베개를 연하고 잠시 토우(土宇)에서 쉬고 있었는데, 갑자기 세 번 부르는 소리가 들리므로 놀라 일어나서 뛰어나가다 뒤돌아 보니, 적(賊)의 포(砲)가 벌써 윤겸지의 머리를 부숴버렸다. 이리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 일을 아주 이상하게 여겼다.난(亂)이 끝나자 선전관이 되었고, 무과(武科)에 합격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도총부 경력(都摠府經歷)이 되었으며, 영원 군수(寧遠郡守)로 나갔다가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였다. 복(服)을 마친 다음 곡산(谷山)과 철산(鐵山)의 군수(郡守)를 거쳐 간간이 장관(將官)이 되었는데, 대체로 문무관(文武官) 제공(諸公)에게 깊이 알려졌기 때문에 직임(職任)이 몸에서 떠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젊은 때의 패기가 줄어지자 전리(田里)에 물러나 살면서 여생을 마치려 하였다. 그러나 정유년(1657, 효종8) 6월에 효종대왕(孝宗大王)이 삭주 도호부사(朔州都護府使)를 특별히 제수하므로 한숨지으며 탄식하기를,“나는 늙었는데 어찌 다시 젊은 패기가 있겠는가마는 상의 은혜가 지극히 중하니 어찌 감히 죽기로써 기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고는, 드디어 애써 부임하였다. 그러나 어떤 일 때문에 눈바람을 맞으면서 용만(龍灣)을 왕래하다가 한질(寒疾)을 얻어 나이 66세로 무술년(1658, 효종9) 1월 1일에 졸(卒)하였다. 그러자 비변사(備邊司)에서 연도(沿道)에 명하여 그를 운상(運喪)해 돌아오도록 해서, 담양군(潭陽郡) 무이동(武夷洞) 정좌(丁坐)의 언덕 선영(先塋)에 장사 지냈다.그의 아내 이씨(李氏)는 아들 수태(守兌)가 있었는데, 그 아이를 낳은 지 돌도 안 되어 변(變)이 일어났으므로 아이를 온전히 보전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남몰래 재종형(再從兄)인 진경(振慶)의 집에 의탁하였다. 진경은 그를 길러서 자기 자식으로 삼았다. 수태의 아들 정하(鼎夏)가 삭주(朔州 삭주 도호부사를 지낸 김성일을 가리킴)에 대한 시말(始末)을 갖추어 가지고 와서 전(傳)을 만들어 주기를 청하였다. 나는 늙고 병들어 거의 죽게 된 지경이라, 필연(筆硯)을 손에서 놓은 지 오래지만, 이제 성일 형제의 사적은 세교(世敎)에 도움이 매우 크기 때문에 이상과 같이 대략 쓴다.삼가 예경(禮經)과 《춘추(春秋)》를 상고하건대 복수(復讎)에 대한 의리가 자상하였는데, 주 부자(朱夫子)에 이르러 그를 더욱 발휘(發揮)하고 천명(闡明)하였다. 그러나 세상이 쇠퇴하고 풍속이 투박하여 이런 의리를 아는 자가 적다. 이제 성일 형제는 꼭 예경이나 《춘추》의 뜻을 연구해서가 아니고, 다만 천부(天賦)의 성(性)을 가지고 생사(生死)를 잊고 분발하여 이런 큰일을 처리하였으니, 어찌 위대하지 않은가.인조대왕은 그가 제 맘대로 살인한 죄를 특사(特赦)하였고, 효종대왕은 또 그에게 벼슬을 제수하였으며, 상공 이경여는 가장(嘉奬 칭찬하고 장려함)하고 친후(親厚)하게 대하였다. 심지어 옥관(獄官)들까지도 모두 그를 살리자는 의논을 펴서 풍화(風化)를 도왔으니, 본조(本朝)의 예의(禮義)의 밝음이 중화(中華)에 비해 손색이 없음을 더욱 믿을 만하다.그 아버지의 장례(葬禮)를 뒤로 미루었던 것은 더욱이 주자의 설(說)과 부합된 점이 있다. 주자가 일찍이,“《춘추》의 법에, 임금이 시해(弑害)되었을 때 임금을 시해한 적(賊)을 토벌하지 못했으면 장(葬)이라고 쓰지 않은 것은 바로 복수의 대의(大義)를 중히 여기고 장사 치르는 상례(常禮)를 가볍게 여겨, 만세의 신자(臣子)에게 반드시 적을 토벌해서 원수를 갚은 다음에야 그 군친(君親)을 장사 지낼 수 있음을 보이기 위함이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면 비록 관곽(棺槨)과 의금(衣衾)이 더없이 융후(隆厚)하다 할지라도 실상은 시체를 구학(丘壑)에 버려서 여우와 너구리가 뜯어먹고 파리와 모기가 빨아먹도록 내버려두는 것과 같은 것이다.”하였으니, 그 의리가 아주 적절하다 하겠다. 이제 성일 형제의 처사가 그와 은연중 부합되며, 대체로 하늘에서 얻은 의리의 마음이 이와 같은 것이다. 아, 기특하도다.숭정(崇禎) 기원 후(紀元後) 8월 일에 은진 송시열은 쓴다.
- 2023-08-09 | NO.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