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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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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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은 박중회공에 대한 제문〔祭素隱朴公 重繪 文〕 -손재집
    소은 박공 중회 에 대한 제문〔祭素隱朴公 重繪 文〕 -손재집 제8권 / 제문(祭文) : 박광일(朴光一, 1655~1723)숭정(崇禎) 세차(歲次) 임신년(1692, 숙종18) 10월 병자삭(丙子朔) 21일에 족숙(族叔) 광일(光一)이 술과 과일을 올리고 소은(素隱) 박수여(朴受汝)의 영연(靈筵)에 고합니다.아, 수여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인가. 그대의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명랑한 자질은 천부적으로 타고난 것이었고, 선(善)을 좋아하고 현자(賢者)를 좋아하는 마음은 지극정성이었지. 젊은 나이부터 바른길 가기 시작해, 힘껏 이치를 궁구하여 밝게 분변하고 독실히 실천하였네. 사물에 접할 때에는 중정(中正)으로 대처하였고 몸가짐은 예법을 따르니, 안으로 효도와 우애가 가정에 나타났고 밖으로 어질고 의로움이 친구들 사이에서 신뢰를 받았지. 이에 사문(斯文)이 의탁하고 오도(吾道)가 전해지게 되었는데, 불행히도 단명하여 지금 세상을 등지고 말았으니, 어찌 내가 하늘을 부르짖으며 통곡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아, 산이 무너진 뒤로 안앙(安仰)의 비통함이 더욱 심해진 데다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먼데 묵을 곳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그대마저 나를 버리고 떠나가니, 어찌 내가 하늘을 부르짖으며 통곡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아, 안중화(安仲和)와 박후로(朴後老)가 연이어 별세하였는데 이 두 친구가 별세한 달에 그대가 죽었구려. 용사(龍蛇)의 해도 아니건만 어찌하여 좋은 사람들의 불행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어리석은 내게 문제가 생기면 앞으로 누가 경계시켜 주며 과실이 있으면 앞으로 누가 살펴 주어, 나로 하여금 낭패를 당하지 않게 하겠는가. 세상에 외로이 남겨진 것이 마치 소경이 상(相 소경을 돕는 사람)을 잃은 격이니, 어찌 내가 하늘을 부르짖으며 통곡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아, 돌아가신 선생님이 지은 ‘솔개 날고 물고기 뛴다’는 시구는 그대의 학문이 이것을 말해 줄 만한 수준이었던 것이요, 파산(坡山) 사람과의 ‘공(公)’ 자에 대한 논변은 그대의 논의가 세도(世道)에 유익한 것이었네. 세속의 견문 밖으로 초연히 빠져나왔고, 많은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어 대던 날에 확고부동하였으니, 옛날의 이른바 ‘밤하늘에 장경성(長庚星)이 홀로 빛나고, 봄에 불어난 흙탕물로 인해 지주(砥柱)가 기울지 않는다’는 것이 그대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남쪽 고을에 오늘날 다시 그대 같은 사람이 있겠는가.아, 수여가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른 것인가. 오도(吾道)의 쇠퇴함이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른 것인가. 어찌 내가 하늘을 부르짖으며 통곡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영신(靈辰)은 머물지 않아 내일 장례를 치르게 되었으니, 술잔을 들고 길게 통곡하며 영원히 이별을 고한다네. 밝은 영령(英靈)은 나의 슬픔을 알아줄 것이오. 아, 슬프다. 흠향하시게.[주-D001] 소은 박공(素隱朴公) : 소은은 박중회(朴重繪, 1664~1691)의 호이다.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수여(受汝)이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89년(숙종15) 송시열이 제주(濟州)로 귀양 갈 때에 안여해(安汝諧) 등과 함께 배송(陪送)하였다. 한편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도 임영(林泳)에게 보낸 글에서 “광주의 박중회가 힘써 배워 얻음이 있었고 문예가 함께 나아가 남쪽에서 온 사람들이 모두들 칭찬하였는데 불행히 일찍 죽었다.”라고 하였다. 저서로 《소은집(素隱集)》이 전한다.[주-D002] 숭정(崇禎) …… 21일 : 박중회를 장사 지내기 전날이다. 박중회는 1691년 겨울에 마마[痘疹]에 걸려 같은 해 12월 18일에 별세하였고, 이듬해 10월 22일에 광주(光州) 정광산(淨光山)에 장례를 치렀다. 《素隱集 卷2 續編附錄 行狀》[주-D003] 족숙(族叔) 광일(光一) : 박중회의 아버지인 박광후(朴光後)는 박광일의 재종형이다. 《遜齋集 卷8 先考寓軒府君壙誌》 《性潭集 卷30 素隱朴公墓表》[주-D004] 산이 …… 비통함 : 위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심정을 표현한 말로, 여기서는 스승인 송시열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이른 것이다. 공자가 세상을 떠나기 1주일 전에 “태산이 무너지는구나. 들보가 쓰러지는구나. 철인이 시드는구나.[泰山其頹乎! 梁木其壞乎! 哲人其萎乎!]”라고 노래하였는데, 자공(子貢)이 이 노래를 듣고는 “태산이 무너지면 내가 장차 어디를 우러러보며, 들보가 쓰러지고 철인이 시들면 내가 장차 어디에 의지하겠는가.[泰山其頹, 則吾將安仰? 梁木其壞, 哲人其萎, 則吾將安放?]”라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禮記 檀弓上》[주-D005] 안중화(安仲和) : 안여해(安汝諧, 1657~1691)로,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중화, 호는 이병재(理病齋)이다. 어려서부터 경학과 성리학에 힘써 조예가 깊었다. 26세에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1689년(숙종15)에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스승인 송시열이 제주(濟州)로 귀양하게 되자, 찾아가 만덕사(萬德寺)에 머물면서 강학을 하고 돌아오기도 하였다. 《遜齋集 卷8 理病齋安公墓誌銘》[주-D006] 박후로(朴後老) : 박송령(朴松齡)의 자로, 생몰연대는 미상이다. 다만 안여해가 1691년 12월 15일에 별세하였고 박중회는 3일 뒤인 18일에 별세했으므로, 이 사이에 별세한 것으로 보인다. 박중회의 행장을 보면, 박중회와 박송령은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은 사이였다. 박중회가 죽으면 사용하려고 준비해 두었던 심의(深衣)가 있었는데 박송령이 먼저 죽자, 친구를 위해서 자신의 심의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素隱集 卷2 續編附錄 行狀》[주-D007] 용사(龍蛇)의 해 : 현인군자가 죽는다는 진년(辰年)이나 사년(巳年)을 말한다. 후한의 대유(大儒) 정현(鄭玄)이 죽을 때의 고사를 원용한 것인데, 정현의 꿈에 공자(孔子)가 나타나 이르기를 “빨리 일어나라. 금년은 용의 해이고 내년은 뱀의 해이니라.” 하였는데, 잠을 깨어 그 말을 비결로 맞춰 보고 자신이 죽을 것을 알았으며 그해 6월에 죽었다고 한다. 《後漢書 卷35 鄭玄列傳》[주-D008] 돌아가신 …… 것이요 : 송시열이 지은 〈요부(堯夫) 선생의 뜻으로 박수여(朴受汝)의 운에 차하다〉라는 시를 가리킨다. 그 내용은 “분분한 말로에 도가 참되지 못했는데, 오직 주자께서 성신을 이으셨네. 물고기 뛰고 솔개 날음 발명한 후엔, 천 년 동안 사람 없다 말하지 마오.[紛紛末路道非眞, 惟有閩翁繼聖神. 魚躍鳶飛揮發後, 莫言千載更無人.]”라고 하였다. 《국역 송자대전 권2 요부(堯夫) 선생의 뜻으로 박수여의 운에 차하다》[주-D009] 파산(坡山) …… 것이었네 : 송시열과 그의 제자인 윤증(尹拯)이 반목하는 이른바 ‘회니시비(懷尼是非)’가 일어나자 박세채(朴世采)는 어느 편을 들지 않고 중립적인 노선을 견지하였다. 이런 즈음, 파산에서 박중회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는데 박세채의 처신이 공정[公]한 행위라고 추키자 박중회는 〈공자설(公字說)〉을 지어 옳은 쪽으로 편들지 않는 행위를 비판하였던 것이다. 《素隱集 卷2 續編附錄 行狀》 《性潭集 卷25 素隱朴公墓表》[주-D010] 밤하늘에 …… 않는다 : 이와 비슷한 말이 《오백가파방대전문수(五百家播芳大全文粹)》 권8 〈하왕추사계(賀王樞使啓)〉에 보인다.[주-D011] 영신(靈辰)은 머물지 않아 : ‘영신’은 영구가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다. 원문의 ‘영신불류(靈辰不留)’는 발인하기 하루 전날 저녁에 지내는 조전(祖奠) 때 읽는 고사(告辭) 중에 있는 구이다.
    2020-12-28 | NO.110
  • 속잡록 2(續雜錄二)- 광주목 강등
    속잡록 2(續雜錄二) 산서(山西) 조경남(趙慶男, 1570~1641)이 저술한 야사(野史)갑자년 천계 4년, 인조 2년(1624년) 7월○ 광주목(光州牧)을 강등(降等)하여 광산현(光山縣)으로 만들었다. 역적 이괄과 연좌된 사람이 있었음.
    2023-08-08 | NO.109
  • 손재 박광일공 묘갈〔遜齋朴公墓碣〕 - 손재집
    손재 박공 묘갈〔遜齋朴公墓碣〕 - 손재집 묘갈 우암(尤菴) 문정 선생(文正先生)이 돌아가신 뒤, 그의 문인들 대부분이 호서와 호남에 흩어져 살았다. 배우는 자들이 날마다 도의(道義)를 강구하고 연마하였는데, 남방에서는 손재(遜齋) 박공 광일(朴公光一)이 그들의 선망이었다.공은 본관이 평양(平陽)으로, 대제학(大提學) 문숙공(文肅公) 박석명(朴錫命)이 우리 조선조에서 처음으로 현달하였다. 그 후 훈봉(勳封)을 세습하다가 교위(校尉) 박창신(彰信)이 있었는데, 박이공(朴而恭)이 자취를 감추고 남방에 숨어서 자손들은 마침내 광주(光州) 사람이 되었다. 창신교위로부터 5대를 내려가 우헌(寓軒) 박상현(朴尙玄)에 이르렀으니, 공은 우헌의 아들이다.어머니 고씨(高氏)가 공을 잉태했을 적에 국화가 뜰에 만개하는 꿈을 꾸었다. 우헌은 평소 《주역》에 조예가 깊었는데, 문정공이 말년의 지기(知己)로 인정하였다. 공은 어려서 《소학(小學)》을 배웠는데, 효제(孝悌)의 도리에 관해 듣는 것을 기뻐하였다.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사서(四書)와 《근사록(近思錄)》, 《계몽편(啓蒙篇)》, 《태극도설(太極圖說)》 등과 같은 여러 책들을 모두 읽었다.문정공이 봉산(蓬山)에 위리안치되었을 적에 공은 나이가 스물 셋이었는데, 부친의 명에 따라 폐백을 갖추어 배알하였다. 선생은 공의 영특함을 기뻐하여 오래도록 힘써서 큰 학문을 이루라고 격려하였다. 공은 이때부터 거경궁리(居敬窮理)가 성문(聖門)의 요결(要訣)임을 알고 부지런히 힘써서, 의심스럽거나 잘 모르는 곳이 있으면 한결같이 선생께 나아가 바로잡아 식견(識見)이 정밀해졌다. 요씨(饒氏)가 이(理)를 본(本)으로 삼고 사(事)를 말(末)로 삼은 잘못을 논함에 이르러서는 선생이 매우 칭찬하며 “물을 담더라도 새지 않겠구나.[置水不漏]”라고 하였고, 선생이 조정의 명을 받아 《주자대전(朱子大典)》을 교열할 적에는 공에게 참석하여 확인하기를 요청하였다.기사년(1689, 숙종15)에 선생이 탐라로 유배를 갈 때 절간에서 바람을 기다렸는데, 공은 사우들과 함께 송별하는 기회에 호연장(浩然章)의 문답과 괘변설(卦變說)을 질문하여 문득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선생이 초산(楚山)에서 화를 입을 적에 수암(遂菴) 권공(權公 권상하(權尙夏))과 함께 들어가 영결을 고하였는데, 선생은 권공을 돌아보면서 “괘변(卦變)의 뜻은 사원(士元)의 설이 가장 명확하다.”라고 하셨으니, 사원은 공의 자(字)이다.공은 이후로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문을 닫아건 채 학문을 강마하였다. 우헌공이 일찍이 나무틀로 혼천의(渾天儀)를 제작하였는데, 공이 대바구니를 사용하여 그 제도를 확대시키자, 우헌공이 놀라면서 기뻐하였다.공은 부친을 여읜 뒤 스스로 분발하여 “내가 불행히도 아버지와 스승을 잃었으니, 공력을 백배로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사람이 될 수 있으랴?”라고 하고는 심사숙고하고 배움을 실천하느라 먹고 자는 일조차 거의 잊었으니, 호남의 학자들이 우르르 그에게 달려갔다. 당시 수암(遂菴)이 황강(黃江)에 있었는데, 공은 편지를 보내 경전(經傳)의 뜻을 논변하였다. 수암은 그때마다 적확(的確)하고 타당하다고 칭찬하였으며, 가끔은 자신의 견해를 버리고 공의 설을 따르기도 하였다.신사년(1701, 숙종27)에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되었지만 병 때문에 사양하였으며, 익위사 시직(翊衛司侍直)과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연달아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지리산 문수동(文洙洞)에 터를 잡고 거처하며 산수를 즐기면서 그 사이에서 자적하였다.정유년(1717)에 시강원 자의(侍講院諮議)에 배수되었지만, 여러 번 상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문정공이 사당(邪黨)에게 무고와 모욕을 당하자, 공은 상소문 말미에서 통렬히 분변하면서 그들을 토벌하고 복수할 뜻을 드러냈지만, 상소를 올리지는 않았다. 체직되어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에 제수되었지만 또한 사양하였다.신축년(1721, 경종1)과 임인년(1722)에 화가 일어나 문정공이 도봉서원(道峯書院)에서 출향(黜享)되자, 공은 애통해하면서 “백성들이 아마도 오랑캐가 되리라.”라고 하였다. 장암(丈菴) 정공 호(鄭公澔)가 남쪽으로 이배(移配)되어 마을을 지나치자 공은 찾아가 뵙고 새벽까지 학문을 논하였다. 간암(艮菴) 이공 희조(李公喜朝)가 낭주(朗州 전라도 영암)에서 서쪽으로 유배지를 옮길 적에 간암이 세상의 앙화를 근심하자, 공은 혀를 차거나 위로하는 말도 없이 다만 “평파왕복(平陂往復)은 하늘의 일입니다.”라고 하였다.공은 숭정(崇禎) 을미년(1655, 효종6)에 태어나 계묘년(1723, 경종3) 12월 임신에 세상을 떴는데, 임종 하루 전날까지 친구들에게 손수 답장을 쓸 정도로 정신과 기운이 온전하였다. 병이 깊어져 가족들이 부둥켜안고 울자, 공은 그들을 위해 밤과 낮의 이치로 타일렀다. 공이 세상을 뜨자, 광주의 정광산(凈光山)에 장례를 지냈다.아내는 청천 정씨(菁川鄭氏)로 현감(縣監) 정택주(鄭宅周)의 딸인데, 공보다 4년 먼저 세상을 떴다. 큰아들 중휘(重輝)는 일찍 죽었고, 둘째 중거(重擧)는 생원을 지냈으며, 딸은 진덕유(陳德維)에게 시집갔다.중거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생원 휘진(徽鎭)은 중휘의 후사가 되었고, 한진(漢鎭)은 진사(進士)이며, 하진(夏鎭)은 생원이다. 중휘의 딸들은 이경일(李慶一)과 양종원(楊宗元)에게 시집갔고, 중거의 딸들은 이진희(李晉禧),조석옥(曺錫玉),서진호(徐震灝)에게 시집갔다.휘진의 아들은 성호(聖浩),성회(聖淮),생원 성은(聖溵)이고, 딸들은 정술선(鄭述善),이정근(李貞根)에게 시집갔다. 한진의 아들은 성준(聖濬),성온(聖溫),성탁(聖濯)이고,딸은 이원(李烜)에게 시집갔다. 하진의 아들은 성발(聖潑)이고, 딸들은 이성태(李成泰),송영순(宋英淳),김몽석(金夢舃)에게 시집갔다.공은 수려하고 화락하며 기상과 도량이 편안하고 중후하였다. 남과 어울릴 적에는 온화하고 관대해서, 보기만 해도 군자임을 알 수 있었다. 항상 비바람을 가릴 수 없었지만, 느긋하게 처하였다.우헌공은 벗들과 강설(講說)하기를 좋아해서 객들이 늘 자리에 가득했는데, 공은 힘을 다해 뒷받침하여 우헌공으로 하여금 그 살림이 어려운 것을 알지 못하도록 하였다. 부모님의 병이 심해졌을 때마다 모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드시게 하고 상중에는 예를 다하였으며, 해마다 먼 조상들의 묘를 수리하여 여러 종친들과 우호를 다졌다. 그의 학문은 가정에 뿌리를 두고 마침내 대현(大賢)을 목표로 삼았기에, 이 때문에 문로(門路)가 바르고 실천이 돈독하였으니, 어진 부형(父兄)과 사우(師友) 없이 덕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은 드물기 마련이다.공은 일찍이 《나소변무(羅疏辨誣)》와 《진호문답(晉湖問答)》을 저술하여 사문(斯文)을 위해 시비(是非)를 가렸으며, 또 벽에다 ‘숭정일월(崇禎日月)’이라고 크게 써 놓고 때때로 〈출사표(出師表)〉와 담암(澹菴)의 상소문을 암송하며 비분(悲憤)한 심정을 달랬다. 문정공이 주자를 독실하게 믿었고 공이 문정공을 독실하게 믿었던 까닭에, 이단을 물리치고 대의를 밝힌 것이 이와 같았다. 또한 그가 베푼 경설(經說)에는 자득(自得)한 뜻이 간간이 있었으나, 요컨대 주자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다. 뒷날 반기를 들며 스스로 깨우쳤다는 사람은 유독 무슨 심보인가? 공과 같은 분은 이 노인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집안에는 명성도(命性道)와 삼재(三才), 태극(太極)에 관한 도설(圖說), 하도(河圖)의 생수(生數)와 성수(成數), 고괘(蠱卦)에 관한 선후의 갑설(甲說)[蠱卦先後甲說], 차기(箚記), 면재(勉齋)의 오행설변(五行說辨) 등 몇 권의 책이 보관되어 있다.중거(重擧)가 와서 명(銘)을 지어 달라고 청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우리의 스승은 자양(紫陽)의 뒤를 이었도다.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는 해와 달인데, 아! 사설(邪說)이 홍수보다 심하여라. 내가 들은 말 있으니 하늘은 잊지 않아서, 힘쓰고 부지런하면 비색한 운이 형통하게 되리라. 주작영(朱雀影) 가운데 우뚝 솟은 한 기둥이라 하였으니, 수옹의 이 말로 명을 삼을 수 있으리라. 삼주(三州) 이재(李縡)는 삼가 짓다.[주-D001] 문정 선생(文正先生) :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가리키는데, 그의 시호가 문정이다.[주-D002] 박석명(朴錫命) : 1370~1406. 여말선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순천이고 호는 이헌(頤軒)이다. 1385년(우왕11)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 판서를 지냈고, 태종 때에 좌명 공신(佐命功臣)에 봉해졌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주-D003] 봉산(蓬山) : 1675년(숙종1) 6월 이후에 송시열이 유배 가 있던 경상도 장기(長鬐)의 이칭이다.[주-D004] 요씨(饒氏) : 송나라 말기의 이학가(理學家)인 요노(饒魯)를 가리킨다. 그는 여간(餘干) 사람으로, 자가 백여(伯與), 중니(仲尼)이며, 황간(黃幹)의 문하(門下)로서 석동서원(石洞書院)을 세우고 강학하였다. 그의 학문은 주희를 근본으로 하였으나, 주희의 학설을 그대로 고수하지만은 않았다. 《오경강의(五經講義)》, 《어맹기문(語孟紀聞)》, 《근사록주(近思錄注)》 등을 저술하였다.[주-D005] 초산(楚山) : 정읍(井邑)의 옛 이름으로, 1689년에 송시열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그해 6월에 나국(拿鞫)의 명을 받고 상경하다가 그달 8일에 정읍에서 사사(賜死)되었다.[주-D006] 황강(黃江) : 충청북도 청풍(淸風) 일대의 남한강 유역에 있었던 고을 이름이다. 지금은 충주(忠州)댐 건설로 인해 수몰되었는데, 권상하(權尙夏)가 이곳에서 제자를 양성하였다.[주-D007] 문수동(文洙洞) : 지리산에 있는 골짝 이름으로, 구례군(求禮郡) 토지면(吐指面) 오미리(鰲尾里)에서 문수사(文洙寺)까지 이르는 계곡을 가리킨다.[주-D008] 장암(丈菴) …… 이배(移配)되어 : 정호는 1722년(경종2) 유봉휘(柳鳳輝)와 조태구(趙泰耈)를 논척하다가 이산(理山)으로 귀양을 갔는데, 그해 10월에 다시 강진(康津)의 신지도(薪智島)로 옮겨 갔다. 《陶菴集 卷49 領議政丈巖鄭公行狀》[주-D009] 간암(艮菴) …… 적에 : 이희조는 1722년에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노론 사대신(老論四大臣)이 주살되자, 이들과 결탁했다는 죄로 문외출송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1월에 영암(靈巖)으로 정배되었다가, 11월에 철산(鐵山)으로 이배되었다. 《黎湖集 권29 芝村李先生行狀》[주-D010] 평파왕복(平陂往復) : 필연적인 세상의 변천을 뜻한다. 《주역》 〈태괘(泰卦) 구삼효(九三爻)〉에 “평탄한 것은 반드시 기울어질 때가 있고, 가는 것은 반드시 돌아올 때가 있다.[無平不陂, 無往不復.]”라고 한 데에서 온 말이다.[주-D011] 출사표(出師表) : 제갈량(諸葛亮)이 출정하기에 앞서 한(漢)나라 유선(劉禪)에게 올린 글인데, 전후 두 편으로 되어 있다. 〈전출사표〉는 선제(先帝)의 은혜에 대한 감격과 국가에 대한 충성 및 후주(後主)에 대한 간절한 부탁을 담고 있으며, 〈후출사표〉는 위(魏)와 촉(蜀)이 양립할 수 없음을 피력하고 중원(中原)으로 진출하여 싸워야 함을 주장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三國志 卷30 蜀書5 諸葛亮傳》[주-D012] 담암(澹菴)의 상소문 : 담암은 송나라 때의 명신(名臣) 호전(胡銓)의 호이다. 그는 일찍이 금(金)나라와의 화의(和議)를 적극 반대하여, 당시 화의를 주장하던 진회(秦檜)ㆍ손근(孫近)ㆍ왕륜(王倫) 등의 목을 베라는 상소를 올렸다. 《宋史 卷374 胡銓傳》[주-D013] 반기를 …… 사람 : 윤휴(尹鑴)와 박세당(朴世堂)을 가리킨다. 윤휴는 《독서기(讀書記)》라는 저서에서 《중용》과 《대학》 등 주요 경전을 해석하면서 주자(朱子)의 설을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해석하여 지탄을 받았다. 박세당은 《사변록(思辨錄)》이라는 저서에서 사서(四書), 특히 《중용》과 《대학》에 더욱 역점을 두어 해석하면서 주자의 설을 비판하고 독자적으로 해석하였다.[주-D014] 면재(勉齋) : 주희(朱熹)의 문인(門人)인 황간(黃榦)의 호이다. 황간은 자가 직경(直卿)이며, 복주(福州) 민현(閩縣) 사람이다. 저서로는 《경해(經解)》, 《중용총론(中庸總論)》, 《면재문집(勉齋文集)》 등이 있다.[주-D015] 자양(紫陽) : 안휘성(安徽省)에 있는 산 이름인데, 여기서는 송(宋)나라 주희를 가리킨다. 주희의 아버지 주송(朱松)이 안휘성(安徽省) 흡현(歙縣)에 있는 자양산(紫陽山)에서 독서하였는데, 주희가 그곳에 청사(廳事)를 자양서당(紫陽書堂)이라 하였으므로, 자양은 주희의 호(號)가 되었다. 후세 사람들이 흡현에 자양서원(紫陽書院)을 세웠다.[주-D016] 홍수(洪水) : 원문 ‘회양(懷襄)’은 회산양릉(懷山襄陵)의 준말이다. 큰물이 창일하여 산과 언덕을 둘러싸고 있다는 뜻으로, 수습할 수 없는 낭패의 지경에 이른 것을 가리킨다.[주-D017] 하늘은 잊지 않아서 : 《순자(荀子)》 〈부(賦)〉의 내용으로 “밝은 하늘이 회복되지 않아 근심이 끝도 없구나. 천 년 이후에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니 이것이 도의 당연함이다. 제자들이여 힘써 공부하라, 하늘이 잊지 않으리라.[皓天不復, 憂無疆也. 千秋必反, 道之常也. 弟子勉學, 天不忘也.]”라고 하였다. 지금의 시련에 굴하지 않고 자신을 수양해 나아가면 언젠가는 바른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는 당부의 말이다.[주-D018] 주작영(朱雀影) …… 있으리라 : 주작영은 남쪽 7수(宿)의 별자리 이름으로, 흔히 중국의 최남단을 가리킨다. 이 구절은 우리나라 남쪽의 전라도에 박광일이 우뚝해서 든든했었다는 말이다. 《손재집》 권1의 〈세상을 탄식하는 노래를 수암에게 부치다[歎世吟寄呈遂菴]〉라는 시의 하단에 〈수암이 화답하다[遂菴所和]〉란 시가 부기(附記)되어 있다. 이 시의 전문(全文)은 “태산이 무너져 도가 멀어지려 하니, 시운이 바야흐로 양이 시드는 가을에 이르렀네. 주작영 속에 기둥 하나 우뚝하니, 이 늙은이 이제부터 근심하지 않으리라.[泰山頹矣道將幽, 時運方當大往秋. 朱雀影中亭一柱, 老夫從此不搔頭.]”라는 내용이다.
    2020-12-28 | NO.108
  • 송 김회옹 부 화평부서(送金晦翁赴化平府序)
    송 김회옹 부 화평부서(送金晦翁赴化平府序) - 동문선 제85권 :  가정(稼亭) 이곡(李穀, 1298~1351) 화평부(化平府)에 부임하는 김회옹(金晦翁)을 전송한 시의 서문 - 가정집 제10권 / 서(序) : 가정(稼亭) 이곡(李穀)내가 도하(都下, 중국 연경燕京)에 있을 적에 듣자니 새로 수령(守令)으로 제수된 자들이, “어떤 주는 장기(瘴氣)가 있어 살 수 없다. 어떤 현은 그 습속이 완악하고 어리석어서 다스릴 수 없다고 하거나, 그 다음에는 고향과 거리가 너무 멀어 가기가 어렵다. 봉급이 박하여 청렴을 유지하기 어렵다.” 하며, “전관이 임소에서 죽었으니 어찌 그 주에 갈 마음이 있겠는가. 전관이 벼슬 운수가 좋지 않았으니, 어찌 그 현을 맡을 생각이 나겠는가.” 하는 따위의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무릇 중국의 선비라고 해서 어찌 어질고 어리석은 자가 없겠는가만 사생(死生)과 궁달(窮達)을 밖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에 이르러서는 동일하니, 대개 그 습속이 아직 올바른 때문이다. 이러므로 중국이 중국답게 된 까닭이다.내 친구 회옹(晦翁)이 광주(光州)로 가게 되자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근자에 광주를 얻은 자는 전관이 임소에서 죽었다 해서 흔히 기피하고 사면하는 처지니, 옹은 반드시 임소에 가서는 안 된다.” 하니, 옹은 말하기를, “어허, 광주는 장기가 없으니 내가 살 수 있고, 백성이 비록 완악하고 어리석을지라도 따로 법의 조문이 있으니, 내가 다스릴 수 있고, 내 고향과 거리가 가까우니 내가 어찌 가기를 꺼리리오. 그 봉급이 비록 박하다 하지만 오히려 나날이 태창미(太倉米)를 꾸어 먹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천하 고금에 수(壽)를 못한 자는 다 광주에 벼슬살이한 자였던가. 그 벼슬운이 좋은 자는 다 광주에 제수되어도 사면하고 부임하지 않은 자였던가.” 하였다. 회옹의 말이 얼마나 옳은 말인지 옛날 도성에서 들은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나는 나도 모르게 무릎을 치며 일어나서 말하기를, “옹의 이번 걸음은 분명 다섯 가지 이익이 있을 것이다. 남이 버리는 것을 나는 취하였으니 반드시 정사에 장구(長久)할 것이니 하나요, 착한 정사가 오래가면 백성이 그 복을 받게 될 것이니 둘이요, 정사가 성공하여 성적이 제일이라 임금의 부름을 받게 될 것이니 셋이요, 옹이 이미 소환되면 대신하는 자가 반드시 어질 것이니 넷이요, 어진 자가 뒤를 이으면 광주가 반드시 다시 흥기하리니 다섯이다. 옹은 그 점을 기억할지어다.” 하였다.우리 동네 예전과 달리 쓸쓸하기만 한데 / 井邑蕭條異舊時원님 친구 전송하며 시만 괜히 읊조리네 / 送人作郡謾吟詩흥이 일면 술 마실 짝이 어찌 없으리오 / 興來飮酒寧無偶그다지 어리석지 않은 나의 동년이 있느니 / 我有同年不甚癡[주-D001] 화평부(化平府) : 전라도 광산현(光山縣)의 고려 때 이름이다. 원래 백제의 무진주(武珍州)였는데, 고려 태조(太祖) 23년에 광주(光州)로 고쳤다. 1258년(고종 45)에 공신 김인준(金仁俊)의 외가의 고향이라서 승격하여 익주 지사(翼州知事)의 고을이 되었고, 뒤에 또 승격하여 무진주가 되었다. 1310년(충선왕 2)에 화평부로 강등되었다가, 1362년(공민왕 11)에 무진주로 다시 회복되었고, 1373년에 다시 광주라고 칭하였다.[주-D002] 김회옹(金晦翁) : 회옹은 김연(金曣)의 호이다.[주-D003] 날마다 …… 것 : 두보(杜甫)의 시에 “날마다 태창에서 닷 되의 쌀을 사 먹는다.〔日糴太倉五升米〕”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3 醉時歌》[주-D004] 남이 …… 점이다 : 백거이(白居易)의 시에 “지방 장관으로 오랜 기간 정사를 편 뒤에야 풍교를 돈후하게 할 수가 있는 것이다.〔長吏久於政 然後風敎敦〕”라는 표현이 있다. 《白樂天詩集 卷2 贈友》[주-D005] 원님 …… 읊조리네 : 가정(稼亭) 자신은 고을 하나 맡아서 나가지 못하고, 친구가 부임하는 것을 전송하며 시를 짓기나 한다는 뜻의 해학적인 말이다. 동진(東晉)의 나우(羅友)가 성격이 호방하고 구속을 받기 싫어하는 탓으로 환온(桓溫)에게 중용(重用)이 되지 않던 중에, 어느 날 태수(太守)로 부임하는 어떤 사람의 송별연에 뒤늦게 참석하여 환온에게 질책을 받자, “길에서 만난 귀신이 나를 보고는 ‘나는 당신이 태수로 부임하는 다른 사람을 전송하는 것만 보았지 다른 사람들이 태수로 부임하는 당신을 전송해 주는 것은 보지 못했다.〔我只見汝送人作郡 何以不見人送汝作郡〕’라고 야유하였다.”고 해학적인 답변을 하였는데, 이때 속으로 꽤나 부끄러움을 느낀 환온이 나중에 그를 양양 태수(襄陽太守)로 임명했다는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任誕》[주-D006] 흥이 …… 없으리오 : 광주에 가 있는 김연이 불현듯 생각나서 찾아가고 싶어지는 때가 있으리라는 말이다. 진(晉)나라 왕휘지(王徽之)가 눈 덮인 달 밝은 밤에 산음(山陰)에서 홀로 술을 마시다가, 불현듯 섬계(剡溪)에 있는 벗 대규(戴逵)가 보고 싶어지자, 밤새도록 배를 몰고 그 집 앞에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와서는, 흥이 일어나서 찾아갔다가 흥이 다해서 돌아왔다고 말한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任誕》
    2020-09-15 | NO.107
  • 송기로(宋綺老) 광주목사 화순 겸임
    호남계록(湖南啓錄)  / 고종(高宗) 22년(1885)3월 11일전라도 화순 겸임 광주 목사(和順兼任光州牧使) 송기로(宋綺老)가 봉진하여 온 4월령(月令) 진상입니다.청대죽(靑大竹) 25개광서 11년 3월 11일관찰사 겸 순찰사 신 윤(尹)전라도 운운(云云) 진상의 수목(數目)과 물종(物種)은 위와 같습니다.광서 11년 3월 11일관찰사 겸 순찰사 신 윤(尹)
    2023-08-14 | NO.106
  • 송생 명행기(宋生名行記) - 석주집 별집 제2권
    송생 명행기(宋生名行記) - 석주집 별집 제2권 : 권필(權韠,1569~1612)군의 이름은 타(柁)이고 자는 시정(時正)이며 호남 사람이다. 정유년(1597, 선조30)에 왜적이 호남을 도륙할 때 군은 무안현(務安縣)에서 피난하였는데 밤중에 가다가 길을 잃어 적에게 사로잡혔다. 적의 배가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가려 할 때 군이 보니 적이 열 명도 채 못 되고 한 배에 포로로 탄 조선 사람이 많았다. 이에 몰래 한 배에 탄 사람들과 모의하여 틈을 타서 적의 칼을 빼앗아 적을 거의 다 베어 죽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한 명의 적이 물에 몸을 던져 도망쳐서 다른 적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 때문에 군은 적의 수중을 벗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군은 죽음에 임해 큰 소리로 외치기를 “나는 광주(光州) 송 아무개의 아들 아무개이다. 불행히 적의 수중에 떨어졌고 이제 또 불행히 죽게 되었다. 포로로 잡혀 배에 탄 그대들이 혹 조만간 적의 수중을 벗어나 귀환하거든 우리 부모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기 바란다.” 하였다. 그리고 4년 뒤 경자년(1600)에 강태초 항(姜太初沆)이 일본에서 돌아와 이 사실을 상세히 말해 주었다.아아! 군은 평소에 기도(氣度)가 한아(閑雅)하며 몸이 여위고 섬약하여 마치 옷을 가누지 못할 듯하였으니, 바로 일개 서생일 뿐이었다. 그러나 환난에 빠졌을 때 기회를 틈타서 계책을 세워 칼로 적을 쳐 죽이고 마침내 떳떳하게 죽었으니, 열렬한 장부가 아니면 이러할 수 있겠는가. 군이 죽을 때 나이 31세였다.군은 어려서 모친을 잃고 계모를 섬김에 효성을 다하였으며, 아우와 누이를 대할 때 터럭만큼도 차별을 두지 않았다. 나는 군에게 매서(妹壻)가 된다. 예전에 내가 누차 중병에 걸려 걸핏하면 몇 달을 앓아누웠는데 군이 정성을 다해 탕약을 보살펴 옷에 띠를 풀지 않고 간호한 것이 여러 날에 이르기도 했다. 그리하여 내 병이 낫고 나서야 그만두었다. 아아! 나는 여기서 군의 인(仁)을 알았고, 군의 죽음에서 또 군의 용(勇)을 알았다. 아아! 군 같은 사람이야말로 옛날의 이른바 선인(善人)이 아니겠는가. 살아 있을 때 곤궁했고 죽을 때는 참혹했으니, 세상 사람들이 그저 하는 말로 “하늘은 선인을 저버리지 않는다.” 하는 것을 나는 믿지 못하겠다.군이 적의 포로가 된 뒤로 군의 아우 장(檣)이 부모를 모시고 북쪽으로 갔다. 진원현(珍原縣)에 이르러 허물어진 집에 들어가 쉬는데 왜적 한 명이 느닷없이 들이닥쳤다. 적이 부모를 해칠까 두려워 곧바로 나가서 왜적을 유인해서 가다가 도중에 왜적에게 다른 동료가 없는 것을 보고 그 왜적을 때려 죽였다. 그리고 돌아가려 할 때 또 다른 왜적에게 사로잡혀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들어갔다. 적장이 그를 사랑하여 머물러 있게 하려고 미녀 세 사람을 내어 놓고 마음대로 골라서 가지게 했으나 그는 받지 않고 날마다 도망쳐 우리나라로 돌아올 궁리만 하였다. 지금 우리나라에 돌아오지는 못했으나 뜻은 가상하기에 그 사실을 덧붙여 둔다.경자년(1600, 선조33) 섣달 5일에 기록한다.[주-D001] 강태초 항(姜太初沆) : 1567~1618. 자는 태초이고 이름이 항이며 호는 수은(睡隱)이다. 정유재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싸우다가 일본에 피랍되었다. 그 후 오사카에서 성리학을 전파하는 동시에 일본 정세를 조선에 보고하였다. 1600년에 돌아왔다. 저서에 《간양록(看羊錄)》, 《수은집(睡隱集)》 등이 있다.[주-D002] 옷을 가누지 못할 : 매우 몸이 약하고 공손한 모습을 형용한 것이다. 주공(周公)이 부친 문왕(文王)을 섬길 때에 너무도 공손하여 “몸은 옷을 가누지 못할 듯하고 말은 입 밖에 나오지 못할 듯했다.〔身若不勝衣 言若不出口〕” 한다. 《淮南子 氾論》《小學 稽古》
    2020-09-21 | NO.105
  • 송순 전(宋純傳) -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송순 전(宋純傳) -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 과재(果齋) 이중열(李中悅)송순의 자는 수초(遂初)이며 본관은 신평(新平)이다. 경술년 대간에서, 구수담(具壽耼)과 결탁하고 다른 논의를 선동했다는 일로써, 귀양 보내기를 청해서 서천(舒川)으로 정배되었고, 이기가 정승이 파직된 뒤에 다시 서용되었다. 선조조(宣祖朝) 무진년 봄에 수상(首相) 이준경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송순은 선조(先朝)의 옛 신하로서, 재기(才器)가 준수하니 뽑아 쓰기를 청합니다.” 하니, 우참찬(右參贊)을 임명하였다. 만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광주(光州) 고향에 돌아가서 산수에 노닐면서 수양에 전심하였는데 향년은 80여 세라고 이른다.
    2020-09-25 | NO.104
  • 송순- 기언 별집 제10권 / 발(跋)
    송 상공(宋相公) 간독첩(簡牘帖)의 발        계미년(1643, 인조21) 봄에 영남 관찰사 임공(林公)이 동쪽을 순행(巡行)하던 길에 바닷가로 나를 찾아왔다. 그때 나에게 면앙정(俛仰亭) 송 상공의 편지 세 편이 든 서첩(書帖) 하나를 보여 주었는데, 그 지면에 ‘임 진사(林進士)’, ‘임 상사(林上舍)’, ‘임 정자(林正字)’라고 쓰여 있었으니, 모두 우리 외조(外祖) 백호공(白湖公)을 가리킨 말이다.그중 한 편지는 면앙정이 시를 지어 달라고 청한 것이고, 또 하나는 시를 받은 뒤에 감사의 뜻을 전한 것이었다. 이 두 편지는 연월(年月)이 병자년(1576) 5월과 6월로 되어 있는데, 그때 우리 백호공이 중부(仲父)의 상을 당하였으니, 편지에서 “정자공(正字公)의 부음(訃音)을 받았다.”라고 한 것이 바로 그 말이다. 정자공은 뛰어난 기개와 큰 재주가 있었으나 배척당한 채 고향에서 지내다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편지에서 슬프고 애석한 뜻을 거듭 말하였다. 우리 백호공이 그 이듬해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그때 대부(大府) 절도공(節度公)이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재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장차 바다를 건너가서 과거에 합격한 영광을 고하려 하였다. 이때 상공이 은근하게 여행길의 안부를 물었으니, 이것이 또 한 편지이다.편지를 읽어 보니 상공의 풍신(風神)과 의기(意氣)가 마치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오래된 편지라서 종이가 떨어져 나간 곳이 많으나, 연월일은 모두 남아 있어서 알아볼 수 있다. 상공은 중종ㆍ인종ㆍ명종을 섬기고 선조 18년인 을유년(1585)에 이르러 네 조정을 거친 기로(耆老)로서 치사(致仕)하고 별세하였으니, 연세가 90여 세였다고 한다.아! 정자공이 10년 전에 가장 먼저 돌아가셨고, 또 상공이 별세한 3년 뒤에는 우리 백호공이 별세하였다. 사상(使相)은 정자공의 친손이고 나는 백호공의 외손이다. 지금 이 편지를 거의 6, 7십 년이 지난 뒤에 헌 상자 안의 버려진 종이 속에서 찾아냈는데, 글씨가 또렷하여 어떤 일은 아무 해에 있었고 아무 말은 어떤 일과 관계가 있는지를 알려 주는 것이 직접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것처럼 역력하니, 마주 대하매 옛일에 대한 감회가 끝이 없다.몇 년 전에 내가 호남을 여행하였을 때 담양(潭陽)에서 상공의 묘소에 참배하고 면앙정에 올랐었다. 그러고는 그 자손을 방문하여 유고(遺稿) 속에서 〈을유년 10월에 임 한림과 금강에서 뱃놀이하다〔乙酉冬十月與林翰林泛舟錦江〕〉라는 시 3수와 〈낙봉과 호음 두 선생의 운을 써서 귀래장에게 올리다〔駱峯湖陰二先生韻奉贈歸來丈〕〉라는 시 2수를 얻었으니, 이는 모두 우리 외고조(外高祖) 대윤공(大尹公)과 주고받은 시이다. 대윤공이 상공과 함께 중종조에 벼슬하여 일찍이 한림으로서 북도 병마평사(北道兵馬評事)가 되었으며, 명종 때에 벼슬이 동경 대윤(東京大尹)에까지 이르렀다가 뒤에 좌천되어 광주(光州)에서 별세했으니, 귀래당(歸來堂)은 별호이다.지금 대윤공의 시 5수를 간독첩에 이어서 썼는데, 사상(使相)이 장차 낙봉과 호음의 시를 아울러 구하여 이 첩에 옮겨 쓰겠다고 한다. 이어서 나를 위해서 말하기를,“지금 내가 다행히 이 편지를 얻었으니 자네는 기록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하므로, 삼가 그 대략을 위와 같이 쓴다.[주-D001] 송 상공(宋相公) : 송순(宋純, 1493~1582)으로, 본관은 신평(新平), 자는 수초(遂初)ㆍ성지(誠之), 호는 기촌(企村)ㆍ면앙정(俛仰亭)이며, 부친은 증 이조 판서 송태(宋泰)이다. 1519년(중종14) 별시 문과에 합격한 뒤 여러 관직을 거치고 의정부 우참찬으로 은퇴하였다. 면앙정가단(俛仰亭歌壇)의 창설자이자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선구자로서 조선 시가문학에 크게 기여하였다.[주-D002] 임공(林公) : 임담(林墰, 1596~1652)으로,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재숙(載叔), 호는 청요(淸曜)이며, 부친은 감사 임서(林㥠)이다.[주-D003] 백호공(白湖公) : 임제(林悌, 1549~1587)로, 본관은 나주, 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ㆍ풍강(楓江) 등이며, 부친은 절도사 임진(林晉)이다. 조선 중기의 유명한 시인이며, 한문소설, 시조 등을 남겼다.[주-D004] 정자공(正字公) : 임복(林復, 1521~1576)으로, 본관은 나주, 자는 희인(希仁), 호는 풍암(楓巖)이며, 부친은 승지 임붕(林鵬)이다. 1546년(명종1) 증광 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 정자에 등용되었다가 이듬해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삭주에 유배되었다. 1551년(명종6) 특사령으로 고향에 돌아갔다가 선조 초에 박사에 임명되었으나 무고를 받아 취임하지 못하고 고향에 은거하였다.[주-D005] 대부(大府) 절도공(節度公) : 대부는 부군(府君)과 같은 말로 부친을 뜻하고, 절도공은 백호(白湖) 임제(林悌)의 부친 임진(林晉, 1526~1587)을 가리킨다. 임진은 자가 희선(希善)이며, 1546년(명종1) 무과에 합격한 뒤 훈련원 정(訓鍊院正), 전라도 수군절도사, 제주 목사(濟州牧使), 오도 병마절도사(五道兵馬節度使) 등을 역임하였다.[주-D006] 사상(使相) : 관찰사(觀察使)로서, 여기에서는 영남 관찰사 임담(林墰)을 가리킨다.[주-D007] 낙봉(駱峯) : 신광한(申光漢, 1484~1555)의 호이다.[주-D008] 호음(湖陰) : 정사룡(鄭士龍, 1494~1573)의 호이다.[주-D009] 귀래장(歸來丈) : 임붕(林鵬, 1486~?)으로, 미수의 외고조부이다.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중거(仲擧), 호는 귀래당(歸來堂)이며, 부친은 임평(林枰)이다. 1521년(중종16) 별시 문과에 합격하여 삼사(三司)의 관직, 승지, 병사(兵使), 경주 부윤(慶州府尹) 등을 역임하였다.[주-D010] 대윤공(大尹公) : 임붕이 경주 부윤을 지냈으므로 이렇게 칭한 것이다.
    2022-05-03 | NO.103
  • 수뢰(愁牢) - 성호사설 제11권 / 인사문(人事門)
    수뢰(愁牢)  - 성호사설 제11권 / 인사문(人事門)  : 성호 이익(李瀷, 1680~1763) 방언(方言)에 차(車)를 수뢰라 하고 또한 단오(端午)도 수뢰라고 하는데, 이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다.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의 서제(庶弟) 차득공(車得公)이 미행(微行)하여 무진(武珍 광주(光州)의 고호) 주리(州吏) 안길(安吉)의 집에 이르러 말하기를 “나는 서울 사람인데, 집은 황룡사(皇龍寺)와 황성사(皇聖寺)두 절 사이에 있고 이름은 단오(端午)다.”라고 하였다.당시 국가제도에 외방(外方)의 주리 한 사람씩을 서울에 올라와 집무(執務)하게 했으니, 지금의 기인(其人)이 바로 그것이다. 안길이 당번(當番)이 되어 서울에 올라와 황룡사와 황성사 두 절 사이에 있는 단오의 집을 찾았으나, 아무도 아는 자가 없었다.그런데 한 노인이 “두 절 사이는 거의가 궁궐이니 단오는 차득공(車得公)일 것이오.”라고 했으니, 차(車)를 수뢰라고 이른 지가 오래되었다.오늘날 기인(其人)이 맡은 일도 대궐 안의 일용물품을 공급하는 것이니, 그 근원은 역시 신라로부터 전해온 것이다. 저 방언은 한때 이어(俚語)에 지나지 않아 아무 뜻이 없는 것인데도 오히려 이같이 오래 전해왔으니, 기인의 일이 내려오며 후세의 폐단이 되어 졸연히 혁파하지 못하게 된 것이 마땅하다. 수뢰(愁牢) 두 글자는 시가(詩家)들이 또한 운어(韻語)로 삼을 수도 있다.[주-D001] 기인(其人) : 신라 말기의 중. 성은 김(金). 고려의 임금들은 그를 매우 높여, 현종(顯宗)은 대선사(大禪師), 숙종(肅宗)은 왕사(王師), 인종(仁宗)은 선각국사(先覺國師)의 존호(尊號)를 각각 주었다. 그의 음양지리설(陰陽地理說)은 중국의 것을 고려화(高麗化)한 것이며, 우리나라 절터는 그가 정한 것이 많다 한다. 시호는 요공(了空)이다.
    2020-09-22 | NO.102
  • 수사 증 형조 판서 이공 행장〔水使贈刑曹判書李公行狀〕 : 강재집 제12권
    수사 증 형조 판서 이공 행장〔水使贈刑曹判書李公行狀〕 : 강재집 제12권 / 행장(行狀) - 송치규(宋穉圭, 1759~1838) 공의 휘는 지효(止孝), 자는 중순(仲純)이다. 이씨는 선계가 함평(咸平)에서 나왔으며 고려의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 휘 언(彦)이 시조이다. 대대로 벼슬아치가 이어졌으며 절의로 저명하였다. 고조 휘 종수(從遂)는 부사정(副司正)으로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증조 휘 종인(宗仁)은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지냈으며, 조부 휘 시(偲)는 내섬시 주부(內贍寺主簿)를 지냈다. 아버지 휘 유근(惟謹)은 대구 부사와 지제고(知製誥)를 지냈고 호는 죽담(竹潭)이며 초동(草洞) 보산사(寶山祠)에 배향되었다. 어머니 현풍 곽씨(玄風郭氏)는 부사 한(翰)의 따님이다. 공은 가정(嘉靖) 32년 계축년(1553, 명종8) 모월 모일에 태어났다. 영리하여 여느 아이와 달랐다. 외모가 헌칠하고 재주도 뛰어났으며 절의(節義)를 좋아하였다. 《한서(漢書)》를 읽다가 충신과 열사의 전(傳)에 이르면 그때마다 무릎을 치고 감정이 고조되었다.만력(萬曆) 기축년(1589, 선조22)에 증광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이듬해 경인년 3월 선전관에 제수되었다. 임진년(1592, 선조25) 봄에 훈련원 주부에 제수되었고 가을에 도총부 도사로 옮겼다. 계사년(1593, 선조26) 봄에 경력(經歷)에 승진하였으며, 여름에 보령 현감(保寧縣監)에 제수되었는데 청렴결백하여 인사 고과에 높은 점수를 받았다. 병신년(1596, 선조29)에 박천 군수(博川郡守)로 옮겼는데 1년이 안 되어 고질적인 폐단을 없애 백성들이 살아나게 되었다. 임기가 아직 차지 않았는데 창성 부사(昌城府使)에 발탁되었다. 행정이 청렴하고 은혜가 두루 미치자 칭송하는 소리가 길에 가득하였다. 이웃 고을의 가난한 백성들이 소문을 듣고서 아이들을 들쳐 업고 왔는데 거의 수백여 가구나 되었다. 관찰사가 치적을 높이 평가해서 보고하여 통정대부로 특별히 승진시켰다. 얼마 있다가 봉화 전달에 실수해서 파직되어 귀향하게 되었을 때 고을 주민이 대궐로 가 상소를 올려 1년을 더 머물러 주기를 간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송덕비를 새기고 또 생고치 수백 말을 거두어 본가로 실어 보냈는데, 토산품으로써 떠난 후에도 잊지 않는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공이 물리치면서 싣고 온 사람들로 하여금 가지고 되돌아가도록 하고 고을 백성이 세금 낼 때 보태 쓰라고 하였다. 싣고 온 사람이 밤중에 공의 대문 바깥에 몰래 두고 가버리자 공이 사람을 시켜 뒤쫓아 가게 하였으나 따라잡지 못하여 마침내 가난한 친척과 이웃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갑진년(1604, 선조37)에 구성 부사(龜城府使)에 제수되어 청렴하게 지내면서 잘 돌보아 주기를 창성 부사에 있을 때와 같이 하니 백성들이 사랑하고 받들기를 부모처럼 하였다. 을사년(1605, 선조38)에 조정에서 변방에 우환이 있다고 여겨 만포 첨사(滿浦僉使)로 옮기게 하였다. 군사를 다스리고 백성을 구휼하는 데 모두 적절하게 하였으며 위급상황에 대비하는 데 더욱 신경을 기울였다. 병오년(1606, 선조39) 2월에 모친 곽부인 상을 당하였다. 슬퍼하면서 울부짖다 기절하여 주위 사람을 감동시켰으며 거상(居喪), 장례, 제사를 한결같이 《주자가례》를 따랐다. 삼년상을 마치고 4년이 지나 충청도 수군절도사에 제수되었다. 부임한 지 겨우 몇 달 만에 무기를 정비하고 군량미를 충분히 확보하였으며 성벽의 깃발도 활기찬 모습을 띠면서 확 바뀌었다. 이해 12월에 상의 특명으로 가선대부에 승진하였으며 교서를 내려 유시하기를 “그대를 의지하여 만 리에 성을 쌓고 절도사 임무를 맡긴다. 그대가 나라에 한마음으로 봉사한 것을 가상히 여겨 포상하는 은전을 특별히 내린다. 재주가 있으면 반드시 쓰일 때가 있으니 하급 병졸 사이에 있을 사람이 아니다. 신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임금이니 참으로 장수에서도 걸출한 사람이다. 군량을 비축하고 말꼴을 쌓아 두어 군수물자를 풍부하게 하고, 창을 만들고 갑옷을 수선하여 너의 군사를 다스리라. 칭찬이 날로 이르는 것은 나의 좌우가 사사로이 하는 말이 아니며 공적인 논의가 오는 것은 실로 그대의 명성과 공적이 드러난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은 누차 변경 지방으로 나가 벼슬하였으므로 풍토병을 심하게 앓았다. 마침 질병이 심해져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왔는데 귀향하는 여장은 텅 비어 단지 수중(手中)에 채찍 하나 뿐이었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극력 감탄하였고 공의 현명함을 자주 칭찬하였으며,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도 “이 아저씨의 청렴결백함은 보통 사람이 따라가기 어렵다.”라고 하였다.광해군 때 정치가 문란하고 국사가 나날이 잘못되자 공이 한숨을 쉬며 크게 탄식하기를 “이러한 시국에 벼슬하니 마음이 부끄럽다.”라고 하면서 끝내 가족을 데리고 풍덕(豊德)의 시골 별장에 이사하였다. 계축년(1613, 광해군5)에 국구(國舅)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이 감옥에 갇히자 인목대비를 별궁(別宮)에 두자는 논의가 계속 일어나서 인륜이 무너지려 하자 여론이 통분하였고 소인배들의 기세가 물길처럼 치솟았는데 어누 누구도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공이 분통을 견디지 못하고 앞장서서 상소문을 지어서 대궐로 달려가 올렸으나 흉악한 일당이 물리치고 왕에게 올리지 않았다. 공이 더욱 울분을 참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영의정 박승종(朴承宗)의 집에 곧장 달려가서 책망하기를 “대감이 어찌 차마 하늘 아래에서 이이첨(李爾瞻) 패거리와 함께 인륜을 무너뜨리고 의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대비를 폐위하고 국구를 죽이려 하니 이것은 천지간에 용납할 수 없는 죄악이다. 대감이 그들과 함께 일을 저지르지 않으면 간악한 무리의 기세는 반드시 중단될 것이니 대감이 헤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감은 이이첨 패거리와 함께 나의 손에 있는 한 자루 칼에서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은 당시 분연히 일어나 자신을 돌보지 않고 단지 나라를 위하여 한 목숨 버리기로 작정해서 의분에 찬 의견을 올렸으며 눈치 보는 것이 없었다. 흉도들이 벌벌 떨면서 앞날에 대한 두려움을 가졌으며 공이 역적을 옹호한다는 죄목으로 엮어서 감옥에 가두었다. 공은 감옥 속에서도 매일 새벽에 일어나 서쪽을 향하여 대비가 계시는 곳에 절하고 7일간 먹지 않고 말하기를 “국모가 없는 나라에 살아서 무엇하겠는가.”라고 하면서 끝내 피를 토하고 사망하였다. 이이첨 패거리가 소식을 듣고 기뻐하기를 “통쾌하게 죽이지 못한 것이 한이다.”라고 하였다. 당시 대비가 공이 의로운 일을 하다가 감옥에 갇힌 것을 들었지만 공이 감옥에서 굶어 죽었음을 알지 못하였다. 인조반정 뒤에 공의 생사를 묻자 의금부에서 사실대로 보고하니 대비가 매우 슬퍼하였다. 내탕금(內帑金)에서 조복(朝服) 한 벌과 고운 무명 50단(段)을 추후에 부의하고 해당 관아에 교서를 내려 자헌대부 형조판서 겸 지의금부사(資憲大夫刑曹判書兼知義禁府事)에 추증하고 아울러 공의 자손을 등용하라고 하였다. 모년 모월 모일에 나주(羅州) 서쪽 죽포면(竹浦面) 분토동(粉土洞) 임좌(壬坐) 언덕 선영에 안장하였다. 부인인 정부인(貞夫人)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부사 여랑(汝良)의 따님으로 어질고 자애로웠으며 부녀자의 법도가 모두 격식에 맞았다. 공보다 몇 년 뒤에 작고하였으며 공의 묘에 합장하였다.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선철(先哲)은 군수이며, 차남 선계(先繼)는 양자로 나갔고, 딸은 사인 장륜(張綸)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정(珵)이고, 손녀는 교리 조중려(趙重呂)에게 시집갔다. 증손은 만영(萬英)이고, 증손녀는 심각(沈殼), 이광화(李光華)에게 시집갔다. 현손은 천삼(天三)이고, 현손녀는 홍서징(洪瑞徵), 김태광(金泰光)에게 시집갔다. 5대손은 경휘(景輝)이며, 둘째는 현감인 경악(景岳)이며, 셋째는 경항(景恒)이고, 5대손녀는 정시창(鄭始昌)에게 시집갔다. 공이 작고한 지 1백여 년 뒤에 광주(光州)의 진사 박광세(朴光世) 등이 상소를 올려서 정증(旌贈)하고 사당을 세울 것을 청원하자 조정에서는 사체(事體)가 중대하다고 판단하여 단지 정려문을 세우라고 명하였다.아, 공은 기이한 자질을 타고났으며 덕행이 뛰어났다. 무관으로 출신(出身)하였으나 문장 또한 남보다 뛰어났다. 집안이 본래 청렴하고 검소하여 여러 고을의 수령을 두루 역임하였지만 재산 증식에 마음을 두지 않았고 빙벽(氷蘗)에도 한결같은 절조는 시종일관 변하지 않았으며 가정에서는 화목하게 지내고 인척과는 친근히 지내고 친구와 신뢰로 사귀며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었으며 친구를 버리지 않았다. 공이 창성 부사(昌城府使)로 있을 적에 첨사(僉使) 원유남(元裕男)과 평소 사이좋게 지냈는데 원유남이 마침 사건에 연좌되어 잡혀가면서 공에게 자신의 처자식을 부탁하자 공이 자기 집사람처럼 보살펴주었다. 원유남이 남에게 공의 풍모와 의리를 말할 때마다 옛사람에게도 부끄럽지 않다고 하였다. 이런 까닭에 당대의 명사 모두가 인정하였으며 감히 무인(武人)으로 보지 않았다.계축년(1613, 광해군5)에 금용(金墉)의 변이 일어났을 적에 위로는 조정의 관료부터 아래로는 일반 평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흉당(凶黨)에 달라붙어서 다투어 흉악한 상소를 올렸다. 흉악한 패거리들이 함정을 크게 설치하여 말하는 사람은 무거운 죄를 주겠다고 하자 사람들 모두 겁을 먹었다. 하지만 공은 직책도 없는 무신(武臣)으로서 백사 이항복, 성옹(醒翁) 김덕함(金德諴)보다 먼저 상소를 올려 대의(大義)를 말하여 “단지 국모가 있음을 알고 내 몸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올린 소가 승정원에서 막히자 울분을 견디지 못하고 국정을 책임지는 영의정을 꾸짖고 기세등등한 흉도를 멸시하였다. 7일간 감옥에 있으면서 죽는 것을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하였는데 순수하고 강직한 정기를 타고나지 않았다면 굳세고 결연한 태도가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아, 위대하다. 계축년에 올린 소가 임금에게 올라가지 못한 채 산일(散逸)되어 후대에 의를 숭상하는 선비가 고증할 수 없게 되었으니 이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나는 《초동팔현행록(草洞八賢行錄)》에 서문을 쓴 적이 있는데 죽담공(竹潭公)의 행적과 관련된 부분에서 공이 수립한 탁월한 업적도 대개 거론하였다. 지금 공의 후손 돈풍(敦豐)이 공의 외손(外孫) 부솔(副率) 이의경(李毅敬)이 지은 행록(行錄)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행장을 지어 주기를 부탁하였다. 나는 늙고 병들어서 오랫동안 붓을 잡지 않았지만 공의 탁월한 절개와 위대한 행적이 후대에 사라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쓴 것이 이와 같다.[주-D001] 이공 : 이지효(李止孝, 1553~1613)로, 본관은 함평(咸平), 자는 중순(仲純)이다. 창성 부사(昌城府使)를 역임하였으며 형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계축옥사 때 바른 말을 하다가 옥에 갇혀 죽었다.[주-D002] 보산사(寶山祠) : 나주시(羅州市) 다시면(多時面) 영동리(永同里) 초동(草洞)에 있다. 이곳에는 가정(嘉靖)과 만력(萬曆) 연간에 활동한 여덟 사람을 모시고 있는데 죽담(竹潭) 이유근(李惟謹),야우(野憂) 장이길(張以吉),창주(滄洲) 정상(鄭詳),한천(寒泉) 유주(柳澍),삼주(三洲) 최희열(崔希說),금애(錦崖) 이언상(李彥詳),남호(南湖) 유은(柳溵),사촌(莎村) 최사물(崔四勿)이다. 《강재집》 권5에 〈초동팔현행록서(草洞八賢行錄序)〉가 있다.[주-D003] 정증(旌贈) : 사후에 정려문을 세워 포창하는 일을 말한다.[주-D004] 빙벽(氷蘗) : 맑은 얼음물을 마시고 쓰디 쓴 소태나무를 씹는다는 뜻으로, 굳게 절조를 지키면서 청백하게 사는 것을 비유할 때 흔히 쓰는 표현이다. 당(唐)나라 백거이(白居易)의 “3년 동안 자사로 있으면서, 맑은 얼음물을 마시고 쓰디쓴 소태를 씹었노라.[三年爲刺史 飮氷復食蘗]”라는 시구에서 유래한 것이다. 《白樂天詩集 卷1 三年爲刺史》[주-D005] 금용(金墉)의 변 : 광해군에 의해 인목대비가 서궁(西宮)에 유폐된 것을 말한다. 중국 삼국 시대의 위주(魏主) 조방(曹芳)과 진(晉)나라의 혜제(惠帝) 등이 각각 폐위된 뒤 금용성(金墉城)에 옮겨진 것에서 유래한다.
    2020-11-03 | NO.101
  • 순영(巡營)에 돈을 청구하다- 광주목사
    보첩고(報牒攷) - 光州牧使○ 영조(英祖) 41년(1765) 9월 12일 순영(巡營)에 돈을 청구하는 보장(報狀)첩보(牒報)하는 일. 본주(本州)가 특히 심하게 피폐해진 상황에 대해서는 사또(使道)께서 이미 통촉하고 계실 것입니다. 백 가지 중에 하나도 제대로 모양이 갖추어진 것이 없는데, 그중에 공해(公廨 공무(公務)를 집행하는 청사(廳舍))가 모두 무너져 훼손되고 군기(軍器)가 파손되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제때에 수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재력을 준비하기 어려워서 감히 이렇게 낱낱이 보고하는 바이오니, 영문(營門)의 모양 목전(某樣木錢) 중에서 1년간 이자가 없이 넉넉히 대여해 주셨으면 합니다.제사(題辭)본주의 사세가 모양을 갖추지 못한 것에 대해 영문(營門)에서 이미 잘 알고 있으므로 소홀히 할 수 없다. 진고전(賑庫錢) 1천 냥을 1년간 대여해 줄 것이니, 기한 내에 수납(收納)해야 할 것이다.[주-D001] 보장(報狀) : 어떤 사실이나 내용을 윗사람에게 보고하는 공문임.
    2023-08-17 | NO.100
  • 신숙주-喜慶樓記(희경루기)
    2018-07-26 | NO.99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5권 / 전라도(全羅道) 광산현(光山縣)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5권 / 전라도(全羅道) 광산현(光山縣) 동쪽으로 창평현(昌平縣) 경계까지 18리, 남쪽으로 화순현(和順縣) 경계까지 21리, 남평현(南平縣) 경계까지 28리, 서쪽으로 나주(羅州) 경계까지 47리, 북쪽으로 진원현(珍原縣) 경계까지 21리이며, 서울까지의 거리는 7백 2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무진주(武珍州)인데, 일명 노지(奴只)라고도 한다. 신라가 백제를 빼앗은 뒤 그대로 도독(都督)을 두었다. 경덕왕(景德王) 16년에 무주(武州)로 고치고, 진성왕(眞聖王) 6년에 견훤(甄萱)이 습격하여 의거하고 후백제(後百濟)라 칭하다가, 이윽고 전주(全州)로 도읍을 옮겼다. 궁예(弓裔)가 고려 태조를 정기태감(精騎太監)으로 삼으니, 태조는 해군을 거느리고 쳐들어와 주의 경계를 대략 평정했는데 성주(城主) 지훤(池萱)이 견훤의 사위로서 굳게 성을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태조 19년에 이르러 신검(神劍)을 쳐서 멸망시키고 23년에 광주(光州)라 고쳤다. 지금 《고려사》를 상고하건대, 천복(天復) 3년에 궁예가 태조에게 명하여 수군을 거느리고 서해로부터 광주 경계까지 가서 금성(錦城)을 쳐서 빼앗게 했다. 개평(開平) 3년에 또 태조를 시켜서 전함을 수리하고 가서 광주와 진도군(珍島郡)을 쳐서 빼앗게 했다. 뒤에 또 광주 서남쪽 반남현(潘南縣) 포구(浦口)에 이르러, 압해현(壓海縣) 수적(水賊) 능창(能昌)을 잡아 궁예에게 보냈다. 태조 즉위 19년 친히 신검(神劍)을 칠 적에 영마성(營馬城)에 주둔하니, 신검은 그의 아우 정주성주(菁州城主) 양검(良劍)과 광주성주(光州城主) 용검(龍劍)과 함께 와서 투항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무주(武州)를 광주(光州)라고 부른 것은 견훤 때부터였으니 태조 23년에 비로소 광주라 칭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고려의 사신(史臣)이 추후에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데, 그렇다면 나머지 주현(州縣)은 모두 당시의 이름으로 기록했는데 광주만 그렇게 기록했을 것인가. 생각하건대, 견훤이 후에 광주라 하고 무주라 하여 다 함께 불렀다가 이해(태조 23년)에 이르러 광주로 정한 것인가 한다. 정확히 아는 사람을 기다린다. 성종 15년에 강등하여 자사(刺史)가 되고 후에 또 강등하여 해양 현령(海陽縣令)이 되었다. 고종 46년 공신 김인준(金仁俊)의 외가의 고향이므로 승격하여 익주 지사(翼州知事)가 되고, 후에 또 승격하여 무진주(武珍州)가 되었다. 충선왕 2년에 강등하여 화평부(化平府)가 되고, 공민왕 11년에 무진부(茂珍府)라 개칭했다. 혜종(惠宗)의 휘(諱)를 피해서 무(武) 자를 무(茂) 자로 고쳤다. 22년 다시 광주라 칭하고 목(牧)을 삼았으며 본조에 와서도 그대로 따랐다. 세종 12년에 그 고을 사람 노흥준(盧興俊)이 목사(牧使) 신보안(辛保安)을 때렸으므로, 노흥준을 장형(杖刑)에 처하여 변방으로 쫓아 보내고 강등하여 무진군(茂珍郡)으로 만들었다가 문종 원년에 옛날대로 복구하고, 성종 20년에 판관(判官) 우윤공(禹允功)이 날아온 화살에 맞았는데 조정에서는 그 고을 사람의 행위인가 의심해서 강등하여 현을 만들고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신증』 연산군 7년에 다시 주(州)가 되었다.【관원】 목사ㆍ판관 각 1인. 【군명】 무진(武珍)ㆍ무주(武州)ㆍ광주(光州)ㆍ해양(海陽)ㆍ익주(翼州)ㆍ화평(化平)ㆍ무진(茂珍)ㆍ익양(翼陽)ㆍ서석(瑞石).【성씨】 본현 탁(卓)ㆍ이(李)ㆍ김(金)ㆍ채(蔡)ㆍ노(盧)ㆍ장(張)ㆍ정(鄭)ㆍ박(朴)ㆍ진(陳)ㆍ허(許)ㆍ번(藩)ㆍ성(成)ㆍ승(承), 유(庾) 촌성(村姓)이다. 김(金) 개성(開城), 정(程) 한산(韓山), 신(申) 고흥(高興), 최 강진(康津). 양고(良苽) 김(金) 경지(慶旨)ㆍ벽진(碧津)도 같다. 【풍속】 백성 중에 어진 사람이 많다. 성임(成任)의 시에 있다. 【형승】 전라도의 거읍(巨邑)이다. 《고려사》 악지(樂志)에 있다. 모든 봉우리는 중첩하고 온 골짜기는 구불구불 하도다.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있다. 남국의 웅장한 번진(藩鎭)이다. 이집(李集)의 시에, 광주는 남쪽 지방의 가장 큰 번진이라 하였다. 한 도의 요충지이다. 신숙주(申叔舟)의 기(記)에 있다. 【산천】 무등산(無等山) 현의 동쪽 10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며, 일명 무진악(武珍岳) 또는 서석산(瑞石山)이라고도 한다. 하늘같이 높고 큰 것이 웅장하게 50여 리에 걸쳐 있다. 제주도의 한라산, 경상도의 남해(南海)ㆍ거제도(巨濟島) 등이 모두 한눈에 들어온다. 이 산 서쪽 양지 바른 언덕에 돌기둥 수십 개가 즐비하게 서 있는데 높이가 백 척이나 된다. 산 이름 서석(瑞石)은 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날이 가물다가 비가 오려고 할 때나 오랫 동안 비가 오다가 개려고 할 때에는 산이 우는데 수십 리까지 들린다. ○ 세속에 〈무등산곡(無等山曲)〉이 있는데, 백제 때 이 산에 성을 쌓자 백성들이 이에 편안히 살면서 즐거워 부른 것이라 한다. 양림산(陽林山) 현의 서쪽 2리에 있다. 삼각산(三角山) 현의 북쪽 5리에 있다. 건지산(巾之山) 현의 남쪽 25리에 있다. 하늘이 비를 내리려면 이 산이 울어 그 소리가 수 리까지 들린다. 어등산(魚登山) 현의 서쪽 30리에 있다. 벽진(碧津)ㆍ생압도(生鴨渡) 둘 다 현의 서쪽 30리에 있다. 선암도(仙巖渡)ㆍ병화로진(幷火老津) 둘 다 현의 서쪽 40리에 있다. 건천(巾川) 현의 남쪽 5리에 있다. 무등산 서쪽 산록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흘러 칠천(漆川)으로 들어간다. 칠천(漆川) 현의 북쪽 30리에 있다. 담양(潭陽)과 창평(平昌)의 물이 합쳐 서쪽으로 흘러 칠천이 되고, 벽진ㆍ생압도ㆍ선암도ㆍ병화로진을 거쳐 나주(羅州)의 경계로 들어간다. 혈포(穴浦) 칠천에서 동쪽으로 갈라진 곳이다. 풍혈(風穴) 규봉사(圭峯寺) 곁 석벽 아래에 있다. 길이가 한 자이고 너비가 다섯 치이며, 바람이 불다 그쳤다 한다. 속칭 그 석벽을 풍혈대(風穴臺)라 한다. 보지지(普智池) 현의 남쪽 40리에 있다. 금물제지(今勿梯池) 현의 남쪽 5리에 있다.『신증』 장원봉(壯元峯) 곧 무등산의 지봉(支峯)이다. 속설에 향교가 옛날에는 이 봉우리 아래에 있었는데, 이 고을 사람 중에 장원하는 자가 많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생겼다 한다. 용연(龍淵) 주의 남쪽 25리에 있는데, 날이 가물어 기우제를 지내면 효험이 있다 한다. 【토산】 감ㆍ차ㆍ석류ㆍ꿀ㆍ철(鐵) 무등산 장불동(長佛洞)에서 생산된다. 사기그릇[磁器] 현의 동쪽 석보리(石保里)에서 생산된다. 지황(地黃)ㆍ죽전(竹箭) 현의 남쪽 양림산(陽林山)에서 생산된다.『신증』 대추ㆍ호두[胡桃]ㆍ매실ㆍ밤ㆍ붕어[鯽魚].【성곽】 읍성(邑城) 돌로 쌓았다. 주위가 8천 2백 53척이고, 높이가 9척이며, 안에 우물 백 개가 있다. 『신증』 【궁실】 객관(客館) 성현(成俔)의 〈중수기(重修記)〉에, “한 도(道)에서 중요한 곳은 주(州)와 같은 곳이 없고, 한 고을(邑)에서 긴요한 거주지는 관사(館舍)만한 것이 없으니, 주는 고을이 큰 것이고, 관사는 손님들을 대접하고 여행자를 보호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사에는 동서에 헌(軒)이 있는데, 동헌(東軒)에는 귀인들이 와서 머물고 관찰사가 재판하기 위하여 송사를 듣는 곳이니, 아기(牙旗)와 절월(節鉞)이 세워지고 문안(文案)과 간독(簡牘)이 놓여져, 백성들이 모이면 반드시 그 구조와 뜰을 장엄하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위엄을 느껴 바라보고 두려워하게 한다. 그리고 사화(使華)와 빈객들이 연회하는 곳이니, 가무가 베풀어지고 술잔들이 널려져, 위로는 읍양(揖讓)과 주선(周旋)하는 것이 용납되어야 하고, 아래로는 진퇴(進退)와 보무(步武)가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반드시 마루와 집이 넓어야 합당하다. 그러므로 정치를 잘하는 이가 퇴폐되고 쓰러진 것을 수리하고 세울 때에는 백성들이 그 수고로움을 잊으며, 정치를 잘 못하는 자는 처음도 두렵고 끝도 두려워, 기와 한 장, 서까래 한 개를 바꾸지 못하는데도 그 고을은 날로 쇠폐해 간다. 지금 설순조(薛順祖)는 첨추(僉樞)로서 지방에 나와 주목(州牧)이 되고 최영(崔榮)은 그의 보좌가 되어, 정치가 화평하고 송사가 잘 다스려지며, 시절이 태평하고 농사가 풍년 들어서, 재해를 만난 만물들이 따뜻한 어머니를 만난 듯, 시들고 병든 백성들이 소생하여 숨쉬게 되어서 모든 퇴폐했던 것이 다시 일어나고, 사방에는 근심이 없어졌다. 드디어 사람들이 서로 꾀하여 말하기를, ‘광산(光山)은 도회지 중에서 큰 읍내가 되었으므로 사신의 행렬이 연락부절하고, 인물의 풍부함이 나주나 전주와 맞먹는다. 그런데 동헌의 규모가 협소하고 또 앞으로 세월이 오래되면 허물어질 염려가 있으니, 어찌 다시 고쳐 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별로 꾀함도 없이 동의하여 며칠 안 되어 준공하였는데, 새기고 깎고 한 것이 지극히 교묘하고, 짓고 만든 것이 지극히 커서, 비록 찌는 듯한 더위나 진저리나는 장마 때에도 손님이 와서 침울한 괴로움을 잊게 되었고, 비록 손님들이 모여들어 붐비게 되어도 각기 거처할 곳을 얻어 법도를 잃지 않게 되었다. 이런 뒤에야 이 고을과 걸맞게 되었다.최군은 내 친구이다. 편지를 보내어 나에게 기(記)를 청했고, 나는 광산 김씨에게서 태어났으니, 광산에 대하여 어찌 무정할 수가 있겠는가. 항상 광산 산천의 아름다움을 구경하고자 하였고 그 옛날 조상들의 근본이 되는 땅임을 추상하면서도, 호남지방에는 한 번도 발을 내디뎌 보지 못하고 지금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경연(經筵)에서 모시고 아침 저녁 강론하기에도 여가가 없고, 백발마저 드믄드믄하니, 비록 한 잔의 술을 가지고 두 사군(使君)을 모시고 동헌(東軒)에서 읍양(揖讓)하고 수작(酬酌)하고, 그 뒤에 물러나 부로(父老)들과 더불어 공황(龔黃 공수(龔遂) 황패(黃霸))의 덕을 칭송하며 즐거이 노래부르며 이야기하고자 하나 불가능하다. 이에 부득불 붓을 잡고 사실을 적어, 내 남쪽으로 가기를 바라는 뜻을 붙인다.” 하였다. ○ 고태필(高台弼)의 시에, “광산의 진산(鎭山)인 무등산(無等山)은 우뚝하여 해동에서 이름을 날리네. 옛날에는 좌막(佐幕)을 지냈는데 오늘날 또다시 풍화(風化)를 살피도다. 밤이 차니 벌레가 자리에서 시끄럽고, 구름이 걷히니 달이 하늘에 가득하구나. 객창에 근심으로 잠 못 이루니, 이별의 한이 더욱 겹치고 겹치누나.” 하였다. ○ 황필(黃㻶)의 시에, “이야기를 오래도록 하니 뜰의 끝[跋]이 보이고 발이 성그니 달이 동쪽에서 뜨는구나. 나그네 수심은 조돈(趙盾)의 말이요, 여기에 와 즐김은 고인의 기풍이로다. 오늘밤 잠깐 모임을 가졌으나, 내일 아침에는 도로 비게 되리라. 천리 멀리 서로 그리워하는 뜻은 바다와 산이 겹쳐있어도 막지 못하리.” 하였다. 【누정】 희경루(喜慶樓) 객관 북쪽에 있다. ○ 신숙주(申叔舟)의 기(記)에, “광산은 전라도의 거읍(巨邑)이다. 옛날에는 누각(樓閣)이 이 고을 치소(治所)의 북쪽에 있었는데, 이름을 공북루(拱北樓)라 했었으나 허물어진 지 이미 오래 되었다. 이번에 태수 죽산(竹山) 안철석(安哲石)이 부임하여 1년도 되지 않았는데, 정사를 다스리는 바쁜 가운데 틈을 내어 고을의 부로(父老)들을 모아 놓고 물었다. ‘고을에 유람할 장소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사실이오. 더욱이 광산은 이 도의 요충지로 사객(使客)이 벌 모이듯 하는데, 막히고 답답하고 깊고 가려져서 시원하게 해 줄 길이 없으니, 이를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니, 모든 부로들이 말하기를, ‘높고 밝고 시원스러운 땅으로는 공북루의 옛터 만한 곳이 없습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재목을 모아다가 집을 짓되 옛 건물보다 더 크게 지었는데, 몇 달이 안 되어 완성되었다. 그 칸수를 세어 보면 남북이 5칸이고, 동서가 4칸이니, 넓고 훌륭한 것이 우리나라에서 제일이었다. 동쪽으로는 큰 길에 닿았고 서쪽으로는 긴 대밭을 굽어 보며, 북쪽에는 연못을 파서 연꽃을 심고 동쪽에는 사장(射場)을 만들어 덕을 보[歡德]는 장소로 삼으니, 손님과 주인이 이제야 비로소 올라 쉬는 즐거움을 누리게 되었다. 이는 태수의 뜻을 고을의 백성들이 이루어 놓은 것이다. 그러나 경술년(庚戌年)에 이 고을 사람 중에 미련한 자가 있어 강등되어 무진군(茂珍郡)이 되었다. 사건은 애매한 데서 생겨서 위로 산천 귀신으로부터 아래로 향곡(鄕曲)의 노소에 이르기까지 모두 억울함을 참고 말하지 못한 지가 1년이 넘었는데, 지금 임금 원년 신미년 여름에 비로소 이 고을 사람 이선제(李先齊) 등이 꾀하여 말하기를, ‘상감께서 대통을 이어 등극하사 유신(維新)의 은택을 베푸시는데, 하나라도 알맞은 자리를 얻지 못할까 염려하시거든, 하물며 우리 주의 오래도록 억울한 것이겠는가.’ 하고, 드디어 이 고을의 부로와 관리들을 이끌고 함께 상소를 올려 간청했다. 그리하여 상감께서 특별히 옛 칭호로 회복하도록 명하시어 광주목(光州牧)이 되었다. 이러한 소식이 전해지고 마침 이 누각마저 낙성되자, 부로들은 모두 모여 태수에게 치하를 드리고 희경루라 이름을 짓자고 요청하니, 이는 고을 모든 사람의 기쁜 경사를 뜻하는 것이다. 태수가 좋다고 하고 또 이 신숙주가 이 고을 사람이라 하여 나에게 기문 지을 것을 명했다.대저 물건이 성취되고 허물어짐에는 운수가 있고 일이 흥하고 폐함에도 때가 있으나, 그 물건과 일에 있어서 시기와 운수가 물건에 합치되는 것에 이르러서는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 광주는 백제 때는 무진주 도독부(武珍州都督府)가 되었고, 신라에 들어와서는 무주(武州)가 되었으며, 고려 태조 때는 광주로 고쳐졌고, 성종 때에는 해양현(海陽縣)이 되었다가 고종 때 다시 광주로 승격되었고, 충선왕 때에는 화평부(化平府)가 되었으며 공민왕 때 다시 광주목이 되었다. 이조 때 와서도 강등되었다가 또 승격되었다. 한번 승격되고 한번 강등되어 흥하고 폐하는 것이 잇달았는데, 역시 각기 그 때가 있었다. 하물며 이 누각을 지음에 있어서도 오랫동안 허물어져 있다가 기공하여 낙성하였으니, 그 시기와 만남이 반드시 운수가 있었던 것이다. 광주는 무등산으로 진산을 삼았으니, 이 산은 남방의 거악(巨嶽)으로 정기를 모으고 길상(吉祥)을 내려 우리의 모든 위인을 낳았고 또 우리의 어진 태수를 얻었으니, 오늘에 이르러 폐했던 것이 흥하고 허물어졌던 것이 이루어진 것이 어찌 한갓 이 누각뿐이겠는가.” 하였다. 『신증』 허종(許琮)의 시에, “고향은 무수히 연기 낀 봉우리가 가렸는데, 이를 빌려 만리의 흉금을 털어놓도다. 두 눈의 풍류는 반드시 멋대로 보는데, 앞산의 송죽(松竹)만이 내 마음을 아는 친구로다. 모든 가지는 점점이 청춘의 빛을 드러내고, 사이 사이의 잎은 가리어 대낮에 그늘을 만드는구나. 서쪽으로 가고 북쪽에서 왔지만, 어찌 너 같은 것 있겠는가. 한 동이 술로 서로 유쾌하게 하여 마음을 변치 말 것이로다.” 하였다. ○ 유순(柳洵)의 시에, “열두 난간이 먼 산을 대했는데, 올라가 보니 고단한 손이 그윽한 흉금을 터놓을 만하다. 석류 꽃과 대잎은 아름다운 빛이고, 검은 제비 누른 꾀꼬리는 모두가 좋은 소리로다. 난간에 기대어서 단전(丹篆)의 짝을 부르고자 하고, 발을 걷어 올리니, 흰 구름 그늘에 누운 듯하도다. 이윽고 달이 돋아 높은 흥취를 더하니, 구구한 한 조각 마음이 없어지누나.” 하였다. ○ 성임(成任)의 시에, “호남 50고을 중에서 경치는 내 고향을 꼽는다네. 산은 높은 누각과 멀리 대하였고, 연못엔 좋은 달빛 잠겼어라. 대숲 깊은데 뜰은 고요하고, 꽃 가까우니 술잔도 향기롭구나. 물건마다 시흥을 돋우니, 어찌 봄낮이 긴 줄을 알랴.” 하였다. 황화루(皇華樓) 객관 북쪽에 있다. 봉생정(鳳笙亭) 황화루 동쪽에 있다. ○ 정창손(鄭昌孫)의 시에, “황화루가 아득히 고대(高臺)를 누르니, 고대 주위에는 꽃만이 제대로 피었구나. 봉황은 날아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데, 부질없이 남은 한 쌍의 나무가 푸르름을 보내 오는구나.” 하였다. 【학교】 향교(鄕校) 현의 서쪽 2리에 있다. 옛날에는 성안에 있었는데, 현감 권수평(權守平)이 이리로 옮겼다. 『신증』 성현(成俔)의 기(記)에, “경신년(庚申年) 11월 표제(表弟) 상사(上舍) 박이온(朴以溫)이 와서 〈광산학기(光山學記)〉를 써 달라고 한다. 현감 권수평이 부임해온 이래 마음을 다해 백성들을 사랑하고 길러 병든 백성들이 은혜를 흡족하게 입었으니, 고을의 피폐한 것들이 모두 없어지고, 옥에는 갇힌 사람이 없었으며, 교활한 관리가 그 간교한 꾀를 부리지 못하였다. 이에 백성들이 편안하여 한 지아비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동리가 평안하여 도적이 없었고, 정치가 공정하고 송사(訟事)가 없어져서 장부와 문서가 적어졌다. 매양 공무를 보는 틈을 타서 친히 유생(儒生)들을 이끌고 경학(經學)을 담론하여 이끌어 주고 깨우쳐 주며, 도와 주고 인도해 주는 것이 모두 합당했다. 학교가 전에는 성안에 있었는데, 낮고 습하고 좁고 퇴락하여 허물어졌었다. 현감이 부로(父老)들을 불러들여 말하기를, ‘선성(先聖)의 거소(居所)로는 맞지 않는데 어찌 새로 지을 것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하니, 모든 부로들이 모두, ‘좋습니다.’ 했다. 그리하여 성의 서쪽 2리쯤에 터를 잡고 공사를 시작했는데, 모든 현민들이 줄을 이어 모여들기를 마치 자식이 어버이를 좇아 일하는 것같이 하여 몇 달 만에 일이 끝났다. 먼저 성전(聖殿)을 지어 오성(五聖)과 십철(十哲)을 안치하고, 또 동서에 행랑을 지어 70제자와 역대의 여러 현인을 안치했다. 앞에는 명륜당(明倫堂)을 두어 강학(講學)하는 곳으로 삼고, 또 동쪽과 서쪽에 협실(俠室)을 두었으니, 동쪽에 있는 협실은 교관(敎官)이 앉는 곳이고, 서쪽에 있는 협실은 사마재(司馬齋)라 했는데, 이 고을의 상사(上舍 진사(進士))가 우거하면서 학업을 닦는 곳이며, 또 동쪽과 서쪽에 재(齋)를 두었으니, 여기가 곧 유생들이 거처하는 곳이다. 또 서재(西齋) 뒤에는 전사청(奠祀廳)이 있고, 동재 뒤에는 교관들의 사무실이 있다. 이에 신과 사람이 모두 편안하고 스승과 학생이 집이 있으며, 당(堂)과 창고와 부엌과 목욕탕이 각각 있을 곳에 있어 무려 60여 칸이나 되었다. 학교 앞에 있는 백성의 밭 수백 묘(畝)를 현감이 돈을 내어 사들여, 혹은 논을 만들고 혹은 채마전을 만들고 혹은 종들이 있을 집을 만들었으며, 또 옛 향교의 터를 모두 학교에 예속시켜 밭을 만들었다. 또 백성의 밭은 사서 반은 학교로 들여보내고 반은 사마재(司馬齋)로 들여보냈으며, 또 무명 백 필과 조세(租稅)로 들어오는 곡식 백 석, 콩 20석으로 학생의 소용에 충당시켰고, 무명 20필, 조세 곡식 20석은 상사인(上舍人)들의 소용으로 쓰게 했다. 또 사서(四書)ㆍ오경(五經)ㆍ제자(諸子)ㆍ운서(韻書)를 갖추어 책장에 비장해 놓아 열람할 수 있게 했다. 이때 감사(監司) 이숙함(李叔瑊)과 도사(都事) 정탁(鄭鐸)은 그 뜻을 가상히 여겨 감영(監營) 중에 있는 무명 30여 필, 조세 곡식 70여 석을 내주어 비용을 도와주었으니, 이로 인해 유풍(儒風)이 크게 진작되고 문화의 교화가 더욱 밝아져서 고을 사람 중에 준수한 인물이 여기에 와서 놀았는데, 배울 때에는 깊이 탐구하고 애써 찾는 뜻을 가져 정진하고 수련하는 공이 그치지 않았으며, 제사를 지내면 마치 앞에 계시듯 정성을 다하여 나쁘고 편벽된 마음이 들어오지 못했다. 그런 뒤에는 광산의 학교가 다른 읍보다 성하고 인재가 찬연하게 배출되었다. 그 뒤에 선생께서도 광산 출신의 후예이니, 원컨대 전말을 적어 그 아름다움을 길이 장식하게 하여 달라고 하였다.나는 생각건대, 공자(孔子)의 도는 지극하다. 하늘과 땅이 만물을 덮어주고 기르듯이 그 크기를 다했으며, 해와 달이 비치듯이 그 밝기를 다했으며, 하해(河海)가 넓고 깊듯 하여 헤아릴 수 없으며, 산악이 높고 험한 듯하여 미칠 수 없다. 고금을 통하여 변함이 없어 모든 사물이 고루 구비되어 있으며, 인륜이 이를 의지하여 베풀어지고, 정교(政敎)가 이를 의지하여 행해지고, 존비(尊卑)와 상하(上下)가 이를 의지하여 문란하지 않고, 왜곡된 말과 간사한 말이 이를 의지하여 방자해지지 않으며, 중국의 인물과 사물이 이로 말미암아 옷을 왼쪽으로 여미는 오랑캐가 되는 것을 면했나니, 이것을 따르면 다스려지고 따르지 않으면 어지러워진다. 이를 버리면 한 때도 살지 못하므로 안으로는 서울로부터 밖으로는 주(州)ㆍ군(郡)ㆍ현(縣)에 이르기까지 문묘(文廟)를 숭상하여 제사지내지 않는 이 없고, 학교를 세워 이를 가르치지 않음이 없으니, 어찌 까닭 없는 일일 것인가. 우리나라는 본래 문헌(文獻)의 나라이며, 광산은 의관(衣冠)과 진신(縉紳)을 배출하는 지방이었는데, 또 현명한 태수를 만나 추(鄒)ㆍ노(魯)의 교화를 이루었으니, 촉군(蜀郡)의 문옹(文翁)의 기풍은 이 아래에 든다고 할 것이다. 그런즉 이 광산의 백성된 것이 어찌 행복하지 않겠는가. 오직 광산 백성들의 행복일 뿐 아니라 또한 조정 풍교(風敎)의 일대 다행인 것이다.” 하였다. 【역원】 경양역(景陽驛) 현의 동쪽 8리에 있는데 승(丞)을 두었다. 본도에 속한 역은 여섯이니, 덕기(德奇)ㆍ가림(加林)ㆍ인물(人物)ㆍ검부(黔富)ㆍ창신(昌新)ㆍ대부(大富)가 그것이다. ○ 승(丞) 1명이다. 『신증』 지금 임금 5년에 승을 혁파하고 찰방(察訪)을 두었다. 선암역(仙巖驛) 현의 서쪽 40리에 있다. 수여원(水餘院) 현의 서쪽 33리에 있다. 증원(甑院) 현의 서쪽 45리에 있다. 최정원(崔鄭院) 현의 남쪽 25리에 있다. 저원(猪院) 현의 동쪽 20리에 있다. 보통원(普通院) 현의 북쪽 2리에 있다. 분수원(分水院) 현의 남쪽 5리에 있다. 장록원(長祿院) 현의 서쪽30리에 있다. 견암원(堅巖院) 현의 남쪽 18리에 있다. 혈보원(穴洑院) 현의 북쪽 25리에 있다. 누문원(樓門院) 현의 북쪽 5리에 있다.『신증』 극락원(極樂願) 주의 서쪽 30리에 있다. 진국원(鎭國院) 주의 북쪽 40리에 있다. 신원(新院) 주의 서쪽 45리에 있다. 【불우】 무량사(無量寺)ㆍ천복사(薦福寺)ㆍ개룡사(開龍寺)ㆍ원효사(元曉寺) 모두 무등산(無等山)에 있다. 성거사(聖居寺) 성거산(聖居山)에 있다. 십신사(十信寺) 현의 북쪽 5리 평지에 있는데 범어(梵語)로 쓴 비가 있다. 선원사(禪院寺) 현의 동쪽 2리 평지에 있다. 증심사(證心寺) 무등산에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잣나무는 뜰 앞에서 푸르고, 복사꽃은 언덕 위에서 붉구나. 어찌 반드시 지경 밖에서 찾으랴, 다만 둘려 있는 속에서 찾을 것이로다. 막힌 경내에서는 마음도 끝까지 막히나니, 말[言]을 잊어야 도가 비로소 통하는 것이다. 누가 이 절 이름을 지었는가. 묘한 이치를 홀로 깊이 궁리하였도다.” 하였다. 『신증』 규봉사(圭峯寺) 무등산에 있다. 절 옆에 세 개의 돌이 있는데, 높이가 수백 척이 되어 삼존석(三尊石)이라고 한다. 또 열 개의 대(臺)가 있는데, 송하(送下)ㆍ광석(廣石)ㆍ풍혈(風穴)ㆍ장추(藏秋)ㆍ청학(靑鶴)ㆍ송광(松廣)ㆍ능엄(楞嚴)ㆍ법화(法華)ㆍ설법(說法)ㆍ은신(隱身)이라고 이름한다. 세상에 전하기를, 도선(道詵)이 이 대 위에 두루 앉아서 송광(松廣)의 산세를 본 다음 절을 창건했다고 한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이상한 모양이라 이름을 붙이기 어렵더니, 올라와 보니 만상(萬像)이 공평하구나. 돌 모양은 비단으로 말라낸 듯하고 봉우리 형세는 옥을 다듬어 이룬 듯하다. 명승을 밝으니 속세의 자취가 막히고, 그윽한 곳에 사니 진리에 대한 정서가 더해지누나. 어떻게 속세의 인연을 끊을까, 가부(跏趺)하고 앉아 무생(無生)을 배우노라.” 하였다. 금석암(錦石庵) 무등산에 있다. ○ 김극기의 시에, “지격이 궁벽하니 인적이 끊어졌는데, 봉우리와 숲이 천만겹이로다. 길은 시내 비[溪雨]에 깨끗하고, 문은 고개의 구름으로 봉하였다. 상쾌한 퉁소 소리는 바람 대[風竹]에서 나고, 맑은 그늘은 달 아래 소나무 따라 돌아간다. 도인(道人)은 원래 관장하지 않고서 길이 자금용(紫金容 불상)에 예를 올린다.” 하였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鄕校)에 있다. 무등산 신사(無等山神祠) 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신라 때는 소사(小祀)를 지냈으며, 고려 때는 국제(國祭)를 올렸다. 동정원수(東征元帥) 김주정(金周鼎)이 각 관청의 성황신(城隍神)에게 제사를 지낼 때 차례로 신명(神名)을 불러 신의 기이함을 징험했다. 그런데 이 광주의 성황신이 큰기[纛旗]의 방울을 울린 것이 세 번이었기 때문에 김주정이 조정에 보고하여 작위를 봉했다. 본조에 와서도 춘추로 본읍에 명하여 제사를 올리도록 했다. 성황사(城隍祠) 현의 남쪽 5리에 있다. 금당산 신사(金堂山神祠) 현의 남쪽 10리에 있다. 용진연소(龍津衍所) 현의 서쪽 30리에 있다. 춘추에 본읍에서 제사를 올린다. 여단(厲壇)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석서정(石犀亭) 현의 남쪽 2리에 있다. ○ 이색(李穡)의 기(記)에, “광주(光州)의 지리는 삼면이 모두 큰 산이고 북쪽만이 평탄하게 멀리 틔어 있다. 남산 계곡에서 흘러 나오는 물은 둘이 있는데 물의 근원이 또한 멀기 때문에 합류하면 그 형세가 더 크게 될 것은 알 수 있는 일이다. 매년 한 여름에 장마가 들면 세차게 흐르는 급류가 사납게 쏠려, 가옥을 파괴하고 전답을 깎아가서 백성의 피해가 적지 않으니, 수령 된 자가 어찌 크게 우려하지 않겠는가. 남산 아래에 분수원(分水院)을 둔 것은 옛 사람이 그 물의 형세를 감쇄(減殺)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끝내 그 물을 나누지 못했다. 그리하여 두 물이 교충(交衝)하는 곳에 돌을 쌓아 성을 만들고 물결을 조금 서쪽으로 돌렸다가 북쪽으로 흐르게 하니, 지세가 북쪽으로 조금 내려간지라, 그 지세를 따라 물이 천천히 흘러서 백성의 피해가 그제야 겨우 없어졌다. 이에 물의 옛 길에 정자를 짓고 그 한 중간을 거점(據點)으로 해서 보(洑) 물을 양쪽으로 흐르게 하니, 사면으로 정자를 두른 것이 마치 벽수(壁水)의 모양처럼 되었다. 정자의 전후에 흙을 모아 작은 섬을 만들어 두 곳에 모두 꽃나무를 심고 부교(浮橋)를 놓아 출입하게 하니, 그 가운데에 앉아 휘파람을 불면, 마치 바다에서 뗏목을 타고 앉아 섬들이 안개와 파도 사이로 출몰하는 것을 보는 것 같아 참으로 즐겁다. 위구르[回鶻]의 설천용(偰天用)이 남방을 유람할 적에 그 정자에 갔다가 이미 서울로 돌아왔는데, 목사(牧使) 김후(金侯 후는 지방 장관에 대한 존칭)가 서신을 보내어 정자의 이름과 기(記)를 요구하였다. 이에 나는 이렇게 말한다.대우(大禹)가 치수(治水)를 한 것이 우공(禹貢 서전(書傳)에 있는 편명) 한 편에 나타나 있는데 대개 물의 형세를 따라 인도했을 뿐이다. 진(秦) 나라 효문왕(孝文王)이 이빙(李氷)을 임용하여 촉(蜀) 땅을 다스리게 했는데, 이빙이 돌로 물소를 만들어 수재를 진압한 바가 있다. 역도원(酈道元)이 《수경(水經)》을 편찬함에 있어서는 그 돌물소가 이미 영구한 것이 아니었으나, 후에 물의 이해를 말하는 자가 반드시 이빙을 칭송한다 하였으니, 이는 이것을 통해 이빙의 마음씀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보(杜甫)가 노래를 지었으니, ‘다만 원기만 항상 조화롭게 된다면 홍수로 인한 민폐를 스스로 면할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장사를 얻어 하늘 그물[天綱]을 들어다가 또다시 돌물소를 바쁘게 부려서 수토(水土)를 잘 다스리게 할까.’ 하였다. 대개 원기를 조화시켜서 수토를 잘 다스리는 것은 이제(二帝)와 삼왕(三王)의 일이었는데 이제와 삼왕의 마음은 바로 후세에 진실로 있는 바로서 일찍이 잠시라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괴상하고 정도를 벗어난 말을 찾아 경국제세(經國濟世)의 영원한 정책으로 삼았으니, 여기에서 두보의 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러하나 공자가 일찍이 말하기를, ‘비록 조그마한 도로라도 반드시 볼 만한 것이있다.’ 하였거니와, 돌이 물을 진압한다는 사실은 어리석은 남자 어리석은 여자라도 다 아는 바이니 물소의 형상으로 만든 것도 반드시 그 이치가 있을 것이다. 포박자(抱朴子)가 말하기를, ‘물소를 조각하여 어함(魚銜)을 만들어 물에 넣으니 물이 석 자나 갈라졌다.’ 하였으니, 물소란 물건이 수재를 없앨 수 있다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다. 더구나 돌은 산의 뼈가 되고 물소는 또 물을 물리치는 것이니, 물이 이것을 피할 것은 틀림없다. 물도 이미 피할 줄 알고 또 아래로 인도하니, 지체없이 흘러 조금도 어긋남이 없어서 날로 비고 넓은 땅으로 향하여 도도히 흘러 바다에 이르고야 말리니, 물의 환란이 어디로부터 다시 일어나며, 읍의 주민들이 무엇 때문에 불안을 느낄 것인가. 이 정자를 지은 내력을 쓰면 마땅히 폄(貶)하는 예(例)에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돌물소[石犀]로 이 정자의 이름을 삼고, 두보의 〈석서행(石犀行)〉이란 노래를 취하여 근본을 삼으며, 또 《포박자》를 증거로 삼아, 《춘추(春秋)》의 법으로 단정하여 후대 사람으로 하여금 이 정자를 지음이 수재를 막기 위함이며, 백성의 삶을 편안하게 하기 위함이요, 한갓 놀고 관람하기 위하여 지음이 아님을 알게 하고자 한다. 이 정자에 오르는 자가 그 이름을 생각하고 뜻을 생각하면 반드시 김후(金侯)에 대한 경의가 우러나게 될 것이다. 김후의 이름은 상(賞)이며 재부(宰府)의 지인(知印)과 헌사(憲司)의 장령(掌令)을 역임한 바 있어서, 행정에 있어 청렴하고 능력있는 행정가로 이름이 높다.” 하였다. 고내상성(古內廂城) 현의 서쪽 30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1천 6백 81척이다. 무진도독고성(武珍都督古城) 현의 북쪽 5리에 있다. 흙으로 쌓았는데 주위가 3만 2천 4백 48척이다. 궁수(弓樹) 현의 성 남문 밖에 있다. 가지와 줄기가 둥근데 크기가 수십 아름이나 되고, 높이가 70여 척이나 된다. 고을 사람들이 잎이 일찍 피고 늦게 피는 것으로써 그해의 풍흉을 점쳤다. 지금은 말라죽었다. 양고부곡(良苽部曲) 현의 서쪽 15리에 있다. 경지부곡(慶旨部曲) 현의 서쪽 30리에 있다. 벽진부곡(碧津部曲) 현의 서쪽 20리에 있다. 【명환】 신라 천훈(天訓) 신라 문무왕 18년에 아찬(阿湌)으로서 나와 도독(都督)이 되었다. 김양(金陽) 흥덕왕 때 도독이 되었다.고려 이서(李舒) 공양왕 2년에 좌사의(左司議)로서 목사(牧使)가 되었다.본조 권담(權湛) 목사였다. 이영구(李英耈) 목사가 되어 나이가 많다고 사직하려 하자, 주(州)에서 상소하여 유임해 주기를 청했으므로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시켰다. 【인물】 신라 염장(閻長) 문성왕(文聖王) 8년에 장보고(張保皐)가 진(鎭)에 의거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 조정에서 토벌하고자 하나 이기지 못할까 걱정하여 유예하고 있었다. 이때 염장이 아뢰기를, “신의 계책을 들으시면 한 명의 병졸도 괴롭히지 않고 장보고의 목을 베어 바치겠습니다.” 하므로, 왕이 허락했다. 염장은 거짓으로 배반한 체하고 청해진(淸海鎭)으로 투항했다. 장보고는 그의 용감함을 사랑하여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상객(上客)으로 대접했다. 그래서 그와 더불어 마시고 즐기다가 취하자 장보고의 칼을 빼앗아 목을 자르고 그의 무리들을 불러 타이르니 군중이 감히 동요하지 않았다. 왕이 기뻐하여 아간(阿干)의 벼슬을 주었다.고려 김길(金吉) 태조를 도와 공이 있었으므로 벼슬이 사공(司空)에 이르렀다. 채순희(蔡順禧) 명종 때 조원정(曺元正) 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채순희가 입시(入侍)하여 공이 있었으므로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김주정(金周鼎)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침착하였으며 말이 적었고 망녕되이 사귀어 놀지 않았다. 부성위(富城尉)가 되었을 때 몽고병이 대거 침입하니, 김주정이 잘 조치하여 널리 칭송을 받았다. 원종 때 괴과(魁科)에 발탁되고 여러 번 승진되어 이부 시랑(吏部侍郞)이 되었다. 충렬왕 때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고, 원(元) 나라가 일본을 정벌하려 할 때, 김주정이 장수의 계략이 있다고 하여 소용대장군 좌부도통(昭勇大將軍左副都統)을 삼고 호두금패(虎頭金牌)를 하사하였다. 일본을 정벌하게 되어 대명포(大明浦)에 이르자 갑자기 대풍이 불어 배가 전복되고 수군들이 많이 빠져 죽었는데, 김주정이 계교를 써서 살린 자가 매우 많았다. 벼슬이 지도첨의사(知都僉議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김수(金須) 김길(金吉)의 후손이다. 담력과 지략이 뛰어났으며, 과거에 급제하자 어사(御史)를 거쳐 나와 영광군(靈光郡)의 지사가 되었다. 김태현(金台鉉) 김수(金須)의 아들로 어머니 고씨(高氏)가 꿈에 명성(明星)이 품에 들어오더니 태현을 낳았다. 일찍이 동무들과 선배[先進]의 집에서 공부했다. 선배의 집에 있는 딸이 새로 과부가 되었는데, 시를 좀 할 줄 알았다. 그 여자가 하루는 창틈으로 시를 던졌는데, “말 탄 사람 뉘 집의 백면서생(白面書生)인가, 3개월 동안 그 이름을 몰랐었도다. 이제야 그가 김태현인 줄 알았으니, 가는 눈 긴 눈썹에 가만히 정이 생기네.” 하니, 김태현은 이 시를 받은 뒤부터는 발길을 딱 끊고 그 집에 다시 가지 않았다. 충렬왕 때 과거에 급제하고 여러 번 승진되어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다. 성절(聖節)을 하례하기 위하여 원 나라로 갔는데, 때마침 원 나라 황제는 감숙성(甘肅省)에 가 있으면서 조서를 내려 여러 나라 사신들을 모두 경사(京師)에 머물러 있게 했다. 김태현이 중서성(中書省)에 말하기를, “경사에 머물러 있으라는 것은 황제의 명령이고, 감숙성의 행재소(行在所)까지 가는 것은 우리나라 임금의 명령입니다. 차라리 황제께 죄를 지을지언정 우리 임금의 명을 어길 수는 없습니다.” 하니, 중서성에서 허락했다. 드디어 행재소에 도착하니, 황제가 그 충성의 간절함을 가상히 여기고 크게 상을 주었다. 후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새로 급제한 사람들을 데리고 왕께 배알하니, 왕은 잔치를 베풀었다. 때마침 원 나라 사신 이 학사(李學士)가 자리에 있다가 왕에게 아뢰기를, “천하에는 이런 일이 없어지고 오직 귀국에만 고풍(古風)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감히 절하여 하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원 나라에서 정동행 중서성 좌우사랑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으로 제수하였다. 충숙왕 때 원 나라에서 보낸 사신이 와서 국왕의 인(印)을 가져갈 때, 마침 태현은 행성(行省)에서 서리로 있었다. 태현이 가족을 이끌고 동쪽 금강산으로 갔으니, 이는 혐의를 멀리 하기 위해서였다. 원 나라에서 또다시 역마(驛馬)로 급히 불러 태현으로 하여금 다시 행성의 일을 맡게 하였으나, 이해에 죽었다. 호는 쾌헌(快軒)이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아들은 광식(光軾)ㆍ광철(光轍)ㆍ광재(光載)ㆍ광로(光輅)가 있는데, 모두 과거에 급제했다. 광철ㆍ광재ㆍ광로는 계실(繼室) 왕씨(王氏)의 소생이다. 왕씨는 세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했으므로 해마다 나라에서 곡식을 내려 주었다. 김광철(金光轍) 벼슬이 판밀직(判密直)에 이르렀고, 화평군(化平君)에 봉해졌다. 김광재(金光載) 벼슬이 전리 판서(典理判書)에 이르렀다. 공민왕 때 두문불출하면서 지극한 효도로 어머니를 섬기고 장례 때에는 예를 다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가상히 여겨 사람을 보내어 교유(敎諭)하기를, “경과 더불어 말하고자 하는데 만날 수 있겠는가.” 하니, 광재는 병을 앓으면서도 들어가 뵈었다. 왕이 이르기를, “나이나 안색은 매우 쇠약하지 않았는데 이렇듯 병이 들다니.” 하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그가 사는 곳에 정문(旌門)을 세워 영창방 효자리(靈昌坊孝子里)라 하고, 그 동네의 약간 호수를 예속시켜 받들어 섬기게 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김회조(金懷祖) 김광철의 아들로 벼슬이 판도 판서(版圖判書)에 이르렀다. 김흥조(金興祖) 김광재의 아들로 호걸스러워 얽매이지 아니하였으며[倜儻], 벼슬이 중현군기감(中顯軍器監)에 이르렀다. 김심(金深) 김주정의 아들로 진국상장군 고려병마도원수(鎭國上將軍高麗兵馬都元帥)로 제수되었다가, 첨의정승(僉議政丞)을 지내고 화평부원군(化平府院君)이 되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김승진(金承晉) 김심(金深)의 아들로 공손하고 검소하며 충직하였고, 벼슬이 상호군(上護軍)에 이르렀다. 김적선(金積善) 김승진의 아들로 홍무(洪武) 연간에 남원도 병마사(南原道兵馬使)가 되어 왜병과 사포(沙浦)에서 싸웠고, 또 임실(任實)에서도 싸웠는데 모두 크게 승리했다. 벼슬이 중추원사(中樞院事)에 이르렀다. 정세운(鄭世雲) 공민왕을 따라 원 나라로 들어가 숙직하여 지켰고, 여러 번 승진되어 대호군(大護軍)이 되었다. 공민왕이 즉위하자 그 공이 일등에 책록되어 군부판서 지문하성사(軍簿判書知門下省事)가 되었으며, 기철(奇轍)을 죽이는데 일등의 공로로 기록되었다. 공민왕 8년에 홍건적이 서경(西京)을 함락하자, 세운이 서북면 도순찰사(西北面都巡察使)가 되어 황주(黃州)로부터 돌아와 아뢰기를, “홍건적이 서경으로 쳐들어와 목책을 쌓고 성을 수리하므로 공격할 계략이 없으니, 원컨대 놀라 들먹이지 말고 민심을 안심시키십시오.” 하였다.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다가 공민왕 10년에 홍건적이 서경을 함락하여 왕이 복주(福州 지금의 안동(安東))로 피난을 가니, 정세운은 추밀겸 응양군상장군(樞密兼鷹揚軍上將軍)으로 따라갔다. 그는 성품이 충직하고 결백하여 주야로 조심하고 분개하면서 적을 무찌르고 나라를 회복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여겼다. 이에 왕은 정세운으로 총병관(摠兵官)을 삼고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를 제수했다. 공민왕 11년에 그는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서울을 회복했으나, 이윽고 안우(安祐) 등에게 살해당했다. 공이 일등으로 책록되어 첨의정승을 추증하였다. 이홍길(李弘吉)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이르렀다. 탁광무(卓光茂) 높은 관직에 발탁되어 벼슬이 간의(諫議)에 이르렀다. 김속명(金續命) 성품이 청렴하고 강직하며 말을 용감하게 하였다. 공민왕 초에 감찰(監察)이 되어 법을 집행하는데 아부할 줄 몰랐으며, 후에 경상도 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가 되어 왜병들이 진해현(鎭海縣)을 침략하자, 속명이 급히 쳐서 크게 격파하니 왕은 기뻐하여 옷과 술과 금띠를 하사했다. 신우 때 삼사우부사(三司右副使)가 되었는데, 마침 반야(般若)의 사건이 생기니 그는 탄식하면서, “천하에 그 아버지를 분간하지 못하는 자는 혹 있어도 그 어머니를 분간하지 못하는 자는 내 듣지 못했다.” 하였다. 이인임(李仁任)이 사의(司議) 허시(許時) 등을 교사하여 그를 탄핵하게 했으나, 태후(太后)가 힘써 구하여 문의현(文義縣)으로 유배당했다. 죽은 후 충간(忠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공양왕 초에 윤소종(尹紹宗) 등이 글을 올려 그 억울함을 밝혀 포상(褒賞)과 시호를 추가해 주기를 애걸하므로 그의 자손을 책록함으로써 충혼을 위로했다. 김정(金鼎) 벼슬이 중대광광성군(重大匡光城軍)에 이르렀다. 본조 김첨(金瞻) 김회조(金懷祖)의 아들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우군총제겸 보문각제학(右軍摠制兼寶文閣提學)에 이르렀다. 탁신(卓愼) 탁광무(卓光茂)의 아들로 성리학(性理學)에 전심하니 탁광무가 말하기를, “우리집의 증삼(曾參)이다.” 하였다.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대성(臺省)의 벼슬을 여러 번 거쳐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정귀진(鄭龜晉) 두 번째로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이 여러 번 올라가 형조 참의(刑曹參議)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다. 김구경(金久冏) 두 번이나 문과에 급제하여 문명을 날렸으나 일찍 죽었다. 김약채(金若采) 김정(金鼎)의 아들로 고려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했다. 성품이 강개하여 강한 상대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일찍이 좌사의(左司議)로 있을 때 조반(趙胖)의 옥사를 다스리는데 참여했다. 염흥방(廉興邦)이 기필코 조반을 무복(誣服)시키고자 하여 매우 참혹하게 다스리니, 조반은 마구 욕을 하면서 조금도 굽히지 않고 말하기를, “내 너 같은 나라의 도적[國賊]을 베고자 한다. 너는 나와 서로 송사를 벌인 자인데, 어떻게 국문하느냐.” 하니, 염흥방이 노하여 사람을 시켜 그의 입을 마구 때리게 했다. 이때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일부러 자는 척, 못들은 척, 혹은 입을 함봉하고 감히 어떻다 말이 없었다. 다만 김약채만이 옳지 않다고 못하게 하니, 조반은 이로 인하여 사면되고 염흥방이 드디어 죽임을 당했다. 그리하여 조야(朝野)가 모두 통쾌하게 여겼다. 본조에 들어와서 여러 번 승진되어 충청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김약항(金若恒) 김약채의 아우로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번 승진되어 사헌부 장령을 지냈고, 우리 태조 4년에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명 나라 고황제(高皇帝)가 우리나라에서 올리는 하표(賀表)에 휘자(諱字)를 범했다 하여 그 표를 지은 사람을 불렀는데, 약항은 방물표(方物表)를 지었으므로 정총(鄭摠)과 함께 경사(京師)에 가니, 황제가 먼 국경지방으로 귀양을 보냈다. 태조는 그에게 자헌대부(資憲大夫) 광산군(光山君)을 내렸으나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다. 김청(金聽) 중국어를 잘 하였으며, 벼슬이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희정(僖靖)이다. 이선제(李先齊) 이홍길(李弘吉)의 손자로 과거에 급제하고 여러 번 승진되어 벼슬이 예문관 제학이 되었다. 김예몽(金禮蒙)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判書)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며, 문명(文名)이 있었다. 아들 김덕원(金德源)과 김성원(金性源)도 모두 과거에 급제했다. 김국광(金國光) 김약채의 증손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익대적개좌리공신(翊戴敵愾佐理功臣)으로서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해지고,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는 정정(丁靖)이다. 아들 김극유(金克忸)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간에 이르렀다. 김겸광(金謙光) 김국광의 아우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의정부 좌참찬에 이르고,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참여되어 광성군(光城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공안(恭安)이다. 노자형(盧自亨)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렀고, 이학(理學)에 정통하고 지조와 절개가 있었다. 이형원(李亨元) 이선제(李先齊)의 아들로 사람됨이 위풍과 거동이 단정하고 빼어났었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홍문관 부제학에 이르렀다. 성화(成化) 기해년에 통신사(通信使)로 일본에 가다가 대마도(對馬島)에 이르러 병이 나서 돌아왔는데, 결국 죽었다. 【효자】 고려 노준공(盧俊恭) 우왕 때 상례 제도가 폐지되고 없어져 모두 백일 동안 복을 입고 벗는데, 준공은 묘의 여막(廬幕)에서 3년을 지냈다. 【열녀】 고려 문씨(文氏)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강호문(康好文)의 아내이다. 신우 무진년에 왜구가 동리로 쳐들어 왔을 때 문씨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어린 것은 업고 큰 것은 이끌고 달아나 숨다가 붙들렸다. 왜구는 그녀의 목을 매어 핍박하며 앞서가게 했으며, 또 업은 아이를 버리라고 핍박했다. 문씨는 모면하지 못할 줄을 알고 곧 어린애를 보자기에 싸서 나무 그늘에 두고 큰 아이에게 말하기를, “너도 여기 있으면 데려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큰 아이는 굳이 쫓아 왔다. 그녀는 걸어 몽불산(夢佛山) 극락암(極樂庵) 근처에 이르렀는데, 거기에는 높이가 천 척이나 되는 낭떠러지가 있었다. 문씨는 함께 붙들려 가는 이웃집 여자에게, “적에게 더럽히면서 살기를 바라느니보다 깨끗한 몸으로 죽는 것이 낫겠소.” 하고 곧 몸을 날려 떨어졌다. 왜구들은 미처 말리지 못하고 욕만 되게 하면서 그 큰 아이를 죽이고 가버렸다. 그 낭떠러지 아래에는 담쟁이 덩굴이 있었고 창포풀이 또 빽빽했으므로 죽지는 않고 오른 팔만 부러져서 한참 있다가 소생했다. 마침 동네 늙은이들이 먼저 언덕의 구멍에 있다가 이를 보고 불쌍히 여겨 미음을 먹여 구했다. 3일 후에 왜구가 물러나자 곧 돌아오니, 동네 사람으로 경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김씨(金氏) 서운정(書雲正) 김언경(金彦卿)의 아내이다. 우왕 때 왜구가 갑자기 쳐들어 와 김씨를 붙잡아다 욕을 보이려 하자, 김씨는 “차라리 만 번 죽을지언정 욕을 당하지는 않겠다.” 하고 끝까지 굽히지 않으니 적이 죽이고 말았다. 본조 태종 때 정문(旌門)을 세웠다.본조 민씨(閔氏) 예조 정랑(禮曹正郞) 권극중(權克中)의 아내이다. 남편이 죽자 여막에서 3년상을 치르고 애통해 하는 것이 예를 넘었으며,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어 그대로 묘 곁에서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이 일이 조정에 보고되어 정려하였다. 【제영】 해북호양지(海北浩穰地)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바다 북쪽의 넓게 넘실대는 땅이라, 담장을 연하여 집짓기를 다투도다. 천 개의 봉우리는 많이 몰려왔고, 만 개의 골짜기는 굽이굽이 흘러가는도다. 들에 풍족한 것은 매매 우는 사슴이요, 강 속에 넉넉한 것은 펄펄 뛰는 물고기로다. 어느 골[洞] 이끼 위에서 단서(丹書)를 엿보는지 알고 싶구나.” 하였다. 수죽가가비취체(脩竹家家翡翠啼) 최원우(崔元祐)의 시에, “긴 대 집집마다 물총새 울고, 비가 한식을 재촉하니 물이 시내에 흐르는구나. 푸른 이끼 잔풀 관교(官橋) 길에, 떨어진 꽃이 말발굽에 밟힐까 걱정이로다.” 하였다. 산천웅일도(山天雄一道) 성임(成任)의 시에, “광산은 명승지라, 옛 일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득하구나. 부(府)라 칭한 것이 어느 시대며, 주(州)가 된 것이 몇 년이던가. 산천은 도 안에서 제일이요, 민재(民財)와 어진 사람 많다고 일컬어 왔네. 서헌(西軒) 마루 넓은 줄을 자못 깨달아 올라가 단편시 몇 수를 읊조리노라.”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연혁】 고종 23년에 군(郡)으로 고쳤다.《대동지지(大東地志)》【연혁】 본래 백제의 노지(奴只)이다. 인조 2년에 광산현으로 강등시켰다가 12년에 다시 승격시켰다.【방면】 성내(城內)ㆍ기례(奇禮)ㆍ부동(不動)ㆍ공수(公須) 위의 4면(面)은 모두 읍내에 있다. 상대곡(上大谷) 동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0리이다. 하대곡(下大谷) 동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0리이다. 편방(片方) 동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0리이다. 홍도(舡道)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30리이다. 석제(石堤) 북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5리이다. 덕산(德山)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25리이다. 왕소지(王所旨)ㆍ천곡(泉谷)ㆍ우치(牛峙) 모두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35리이다. 계촌(界村)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35리이다. 소지(所旨) 서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0리이다. 흑석(黑石)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35리이다. 내정(內丁)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25리이다. 당부(當夫) 위와 같다. 고내상(苦內廂)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35리이다. 군분(軍盆) 서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0리이다. 독산(禿山) 서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0리이다. 거치(巨峙) 서북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5리이다. 대치(大峙) 위와 같다. 마지(馬池) 서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25리이다. 황계(黃界)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효우동(孝友洞)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유등곡(柳等谷) 서남쪽으로 처음이 35리에 있다. 동각(東角) 서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5리이다. 마곡(馬谷) 서남쪽으로 처음이 35리, 끝이 40리이다. 방하동(方下洞) 서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35리이다. 대지(大枝) 서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와곡(瓦谷) 서북쪽으로 처음이 15리에 있다. 소고룡(召古龍) 서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55리이다. 지한(池漢) 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0리이다. 갈전(葛田) 북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55리이다. 칠석(漆石) 서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35리이다. 경양(景陽) 동쪽으로 10리에 있다. 석보(石保) 동남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5리이다. 미십보(彌十保) 동북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0리이다. 옹정(瓮井) 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5리이다. 지동(池洞) 남쪽으로 20리에 있다. 오치(梧峙)ㆍ부산(釜山)ㆍ도천(陶泉) 양고부곡(良苽部曲)은 서쪽으로 15리에 있고, 경지부곡(慶旨部曲)은 서쪽으로 30리에 있다. 【창고】 창(倉) 셋 읍내에 있다. 동창(東倉) 북쪽으로 20리, 천곡(泉谷)에 있다. 서창(西倉) 서남쪽으로 30리, 방하동(方下洞)에 있다. 성창(城倉) 북쪽으로 1백 리, 장성(長城)의 입암산성(立巖山城)에 있다. 【진도】 생압진(生鴨鎭) 서쪽으로 30리에 있으며 물이 빠지면 다리를 놓는다. 극락진(極樂津) 옛날에는 벽진(碧津)이라 불렀다. 서쪽으로 30리에 있으며, 겨울에는 다리를 놓는다. 선암진(仙巖津) 병화로진(幷火老津)이라고도 부르며 서쪽으로 40리에 있다. 황룡진(黃龍津) 서쪽으로 40리에 있으며 겨울에는 다리를 놓는다. 공락교(孔樂橋) 서쪽으로 30리에 있으며 물이 넘치면 배[丹]를 사용한다. 【토산】 왕대[篁竹]ㆍ닥종이[楮]ㆍ옻[漆]ㆍ뽕[桑].【정지】 경호정(鏡湖亭) 동쪽으로 5리에 있다. 공북정(拱北亭) 북쪽으로 5리에 있다. 양고정(良苽亭)ㆍ풍영정(風詠亭) 모두 서쪽으로 20리에 있다. 부용정(芙蓉亭) 서남쪽으로 30리에 있다. 【단묘】 무등산단(無等山檀) 신라 때에는 무진악(武珍岳)이라 부르고, 명산이라 하여 소사(小祀)로 모셨고, 고려 원종 14년에 봄과 가을에 무등산에서 제사지내도록 명령하였으며, 본조(本朝)에서도 봄과 가을에 제사지내도록 본읍에 명하였다. 용진연소단(龍津衍所壇) 서쪽으로 30리에 있다. 봄과 가을에 제사지내도록 본읍에 영(令)을 내렸다. 【사원】 월봉서원(月峯書院) 인조 병술년에 세우고 효종 갑오년에 사액(賜額)하였다. 기대승(奇大升) 자는 명언(明彦)이고, 호는 고봉(高峯)이며,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벼슬은 부제학(副提學)이었는데 이조 판서(吏曹判書) 덕원군(德原君)을 추증하였고,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박상(朴祥) 자는 창세(昌世)이고, 호는 눌재(訥齋)이며, 본관은 충주(忠州)이다. 벼슬은 나주 목사(羅州牧使)였는데 이조 판서를 추증하였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박순(朴淳) 박상의 조카이다. 개성(開城) 편을 보라. 김장생(金長生) 문묘(文廟)편을 보라. 김집(金集) 태묘(太廟) 편을 보라. ○ 보충사(褒忠祠) 선조 신축년에 세우고 계묘년에 사액하였다. 고경명(高敬命) 자는 이순(而順)이고, 호는 제봉(齊峯)이며, 본관은 장흥이다. 임진왜란 때에 금산(錦山)에서 순절하였다. 벼슬은 공조 참의(工曹參議)였는데 좌찬성을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고종후(高從厚) 진주(晉州) 편을 보라. 유팽로(柳彭老) 자는 군수(君壽)이고, 호는 월파(月坡)이며,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임진왜란 때에 금산에서 전사하였다. 벼슬은 학유(學諭)였는데 좌승지를 추증하였다. 고인후(高因厚) 자는 선건(善建)이며, 호는 학봉(鶴峯)이다. 고경명의 아들인데 임진왜란 때에 아버지와 함께 죽었다. 벼슬은 성균 권지(成均權知)였는데 영의정(領議政)을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의열(義烈)이다. 안영(安瑛) 자는 원단(元端)이고, 호는 사재(思齋)이며,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임진왜란 때에 유팽로와 함께 죽었으며 좌승지를 추증하였다. ○ 의열사(義烈祠) 선조 갑진년에 건립하고 숙종 신유년에 사액하였다. 박광옥(朴光玉) 자는 경환(景煥)이고, 호는 회제(懷齊)이며, 본관은 음성(陰城)이다. 벼슬은 봉상시 정(奉常寺正)이었는데 도승지를 추증하였다. 김덕령(金德齡) 자는 경수(景樹)이며,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선조 계사년에 의병장으로 충용장군(忠勇將軍)을 배명(拜命)받았는데, 병신년에 옥사하였다. 병조 판서를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오두인(吳斗寅) 파주(陂州州) 편을 보라. 김덕홍(金德弘) 벼슬은 지평이다. 김덕보(金德普) 벼슬은 집의이다. [주-D001] 풍화(風化)를 살피도다 : 이 말은 감사가 되었다는 말이다.[주-D002] 조돈(趙盾)의 말이요 : 예전 춘추 시대 진(晉) 나라의 대부(大夫)이다. 그는 조쇠(趙衰)의 아들인데, 어떤 사람이 그 부자를 평하여, “조쇠는 겨울의 햇빛 같아서 사람들이 따스한 것을 사모하고[冬日之日人懷其溫], 조돈은 여름의 햇빛 같아서 사람들이 뜨거운 것을 두려워한다[夏日之日人恐其烈].” 하였다.[주-D003] 단전(丹篆)의 짝 : 단전(丹篆)은 옛날 신선들이 읽은 글이니, 단전의 짝은 같은 신선이란 말이다.[주-D004] 추(鄒)……교화 : 추(鄒)는 맹자가 출생한 땅이요 노(魯)는 공자가 난 땅으로 그 유풍이 남아 교화가 잘 되어 있다 한다.[주-D005] 문옹(文翁) : 한 나라 촉군(蜀郡)의 태수로 문교(文敎)에 힘써서 정치를 잘하였다는 사람이다.[주-D006] 가부(跏趺) : 가부(跏趺)하여 앉는 것은 불가(佛家)에서 앉는 한 가지 자세이니, 앉아서 두 발바닥을 두 무릎 위에 올려 놓는 자세이다.[주-D007] 폄(貶)하는 예(例) : 공자가 《춘추》를 편찬할 때에 토목 건축(土木建築)을 때 아닌 때에 시행한 것은 모두 폄(貶)하여서 기록하였다.
    2020-09-23 | NO.98
  • 신천익(愼天翊) - - 연려실기술 제23권
    신천익(愼天翊), 계해정사(癸亥靖社) - 연려실기술 제23권 /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중략>○ 이후원 완남(完南) 이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있을 때 신천익(愼天翊)을 방문하였는데, 마당에 풀이 우거지고 완골 자리가 뚫어지고 헤져 있었다. 그의 벼슬하지 않는 뜻을 물었더니, 천익이 손뼉을 치고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어찌 뜻이 있어 벼슬하지 않는 것이리오. 다만 병 때문이오.” 하고, 또 손뼉을 치며 크게 웃는데 마치 곁에 사람이 없는 것 같이 하였다. 한참 뒤 이야기 끝에 “반정 초에 대간으로서 승평(昇平 김류)에게 가보니 승평이 먼저 파방(罷榜)하라는 논계를 정지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더라.” 하였다. 대개 천익의 뜻은 일대의 으뜸가는 훈신으로서 사의(私意)를 가진 것이 이와 같으니 시사(時事)를 알겠다고 한 것이다. 《청야만집(靑野謾輯)》
    2020-09-24 | NO.97
  • 심언광-喜慶樓記(희경루기)
    2018-07-26 | NO.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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