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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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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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사강목 제17하; 정지가 졸하다, 정도전이 나주로 유배가다
    동사강목 제17하신미년 공양왕 3년(명 태조 홍무 24, 1391)동10월 원요준에게 사신을 보내어 보빙(報聘)하였다.○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정지(鄭地)가 졸하였다.정지는 외모가 우람하며 성품이 관후(寬厚)하였다. 어려서부터 큰 뜻이 있어 책읽기를 좋아하고 대의(大義)를 통하였으며, 집에서나 밖에서나 항상 서책을 가까이하였다. 이(彛)ㆍ초(初)의 옥사가 일어나 청주옥(淸州獄)에 갇혔을 때 고문을 해도 불복하고 말마다 하늘에 맹세하였는데 말뜻이 매우 강개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나 광주(光州)의 별장(別莊)에서 살다가 졸하니 시호는 경렬(景烈)이다.○ 조반(趙胖)의 관작을 삭탈하고 유배하였다.성헌(省憲)에서 논핵하기를,“개성윤(開城尹) 조반은 간악하고 탐욕스러운 행위를 자행하여 공전(公田) 수십 결(結)을 임의로 빼앗았으니, 청컨대 죄를 다스리고 가산을 적몰하여 탐악(貪惡)한 무리를 징계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조반이 이ㆍ초의 옥사를 일으켰기 때문에 이ㆍ초의 무리가 헌사(憲司)를 부추겨 조반을 중상(中傷)한 것이다.○ 정도전을 나주(羅州)에 유배하였다.성헌과 형조에서 상소하여 정도전을 탄핵하기를,“정도전은 속으로는 간악한 마음을 품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충직한 체하며 국정을 더럽히니 대죄(大罪)로 다스리소서.”하였는데, 왕이 공신이라고 하여 용서해 주고 그의 고향인 봉화현(奉化縣)으로 방축(放逐)하였다. 다시 논핵하기를,“정도전은 가풍(家風)이 부정(不正)하고 파계(派系)가 명백하지 못한데도 외람되이 중한 관직을 받아 조정을 혼란시켰으니, 고신(告身) 및 공신녹권(功臣錄券)을 거두글 그의 죄를 밝히소서.”하였으므로 드디어 나주로 이배(移配)하였는데, 김주(金湊) 등이 또 그 아들 전농정(典農正) 진(津)과 종부부령(宗簿副令) 담(澹)을 논박하자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만들었다. 밀직부사(密直副使) 남은(南誾)이 힘을 다했으나 구할 수 없자 병을 핑계하고 면직하였고, 도전은 얼마 있다가 봉화로 양이(量移)되었다.
    2022-05-07 | NO.155
  • 두 아들이 서로 음경을 자르다 : 청장관전서 제49권 -이목구심서 2(耳目口心書二)
    광주(光州)의 촌부(村婦)가 아들 둘을 두어, 하나는 일곱 살, 하나는 다섯 살이었는데 모두 군적(軍籍)에 편입되어 있으므로 이장[里正]이 군포(軍布)를 징수하러 오갔었다. 촌부가 밤이 새도록 물레로 무명실을 뽑는데 두 아이가 모두 잠들자, 촌부가 자애로운 마음이 일어 손으로 두 아이의 음경(陰莖)을 만지며 혼자서 스스로 말하기를,“너희들이 이것이 있어 사내 자식이 되었기 때문에 내가 수고로움을 사양치 않고 실을 뽑는 것이다.”했었는데, 두 아이가 거짓 잠든 체하여 몰래 듣고 있다가, 이튿날 함께 아무도 없는 곳에서 서로 대하여 울며 말하기를,“우리들이 음경을 지녔기 때문에 어머니가 근심하고 수고하시니, 어찌 이를 없애어 우리 어머니의 근심을 풀어드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고, 드디어 칼을 가져다가, 형은 아우의 음경을 베고 아우는 형의 음경을 베어 묻어버리고서, 솜으로 상처를 쌌었는데, 피가 바지에 흐르므로 어머니가 놀라며 묻자, 아이들이 그 까닭을 말하니, 어머니가 붙들고 통곡하기를,“너희들이 음경 지닌 것을 미워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들이 사내 자식으로 태어난 것을 어여삐 여겨 농담한 것이었다.”하였었다. 원[太守]이 이 말을 듣고 그 집의 호역(戶役)을 면제해 주었다는데, 5~6년 전에 우리 외가 친척 박여수(朴汝秀)씨가 나를 위해 말해 주었다.병술 1월에 쓴다.이덕무(李德懋, 1741~1793)
    2022-02-22 | NO.154
  • 만계(蔓溪)에게 답함, 을묘(1795) - 다산시문집 제19권
    만계(蔓溪)에게 답함, 을묘(1795, 정조 19년생 34세)  11월 27일 - 다산시문집 제19권편지를 받으니 세모(歲暮)의 슬픈 생각이 위로됩니다. 용(鏞)의 병은 깊은 빌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보름께 눈 위에 비친 달빛이 희고 하늘이 맑으므로 밤에 두 손[客]과 앞 시내로 걸어나아가 시를 읊으며 산보도하고 물결을 일으키려고 돌도 던지다가 새벽 닭이 운 뒤에 돌아왔는데, 갑자기 왼쪽 겨드랑이의 담핵(痰核)이 불어났습니다. 요사이 또 꼼짝하지 않고 집에 있으면서 조리를 하였더니 담핵이 점차 풀리고 있습니다. 광주(光州)의 일은 바로 짖어대는 무리들이라 말할 가치도 없습니다. 더구나 사주(使嗾)한 자가 분명한 이상 다만 그의 죄만이 더해질 뿐입니다. 우리는 편안한 몸으로 수고로운 저들을 기다려야 되겠기에 용은 가형(家兄)께 부탁하여 부디 난잡한 말을 서로 전하지 말고 혹시 경사(京使)가 오더라도 안부를 묻는 인사말 이외에는 모두 청담(淸談)이나 아학(雅謔 고상한 해학)만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화(子和)는 매우 성실한 사람이어서 부지런히 채집하고 탐문하고 또 보고를 받아 자세히 알게 될 것이니, 여러 말을 해보았자 아무 소용없고 다만 남의 마음만을 어지럽힐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온양(溫陽)의 물론도 놀라거나 괴이하게 여길 것 없습니다. 모든 훼방이란 자기로부터 선동되어 우연히 부박(浮薄)하고 불량한 무리가 비어(蜚語 근거 없는 말)를 만들어 내고서는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잊고 마는 경우가 많은 것인데, 내가 그 훼방하는 말을 듣고서 사람들에게 변명한다면 한 사람이 두 사람에게 전하고 두 사람이 백 사람 천 사람에게 전할 것이니, 어찌 어리석은 짓이 아니겠습니까.옛날에 어떤 사람이 갑자기 큰 망치 소리에 놀라 병이 되어서 조그마한 소리까지 모두 꺼렸는데, 약으로는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의원은 병자를 좌중에 앉혀 놓고 느닷없이 큰 망치 소리를 내어 병자를 다시 한번 깜짝 놀라게 하고는 연이어 백 번 천 번의 망치 소리를 내니 병이 나았다고 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도 지금 다시 한번 모여 향인(鄕人)의 병을 고쳐주고자 하나, 나약하여 떨쳐 일어나 행할 수가 없으니 매우 한스럽습니다. 한술의 밥에 살이 찌고 한술의 밥에 마른다면 사람들이 천히 여기는 것인데, 하물며 사군자(士君子)가 서로 모여 강학(講學)하는데 한 미친 흉악한 자가 말을 꾸며 헐뜯었다고 하여 땅이 꺼질 듯이 한숨지으며 낙심만 한다면 어찌 진보하여 기국(器局)을 이룰 가망이 있겠습니까. 무릇 일에는 스스로 반성하여 허물을 인증할 것도 있고 뜻을 지켜 굽히지 않을 것도 있습니다. 나의 이차(離次)로써 말할지라도 찰방(察訪)의 직무는 본디 각역(各驛)을 순행하며 그 고막(苦瘼)을 살피는 것이니 소속된 역이 있는 곳이면 모두 가야 되는 것인데, 외임(外任)으로 있던 감사가 왔다 하여 그 순찰(巡察)을 폐해서야 되겠습니까. 내가 떠나온 것은 모두 충분히 생각하고서 한 일이니, 후회한다고 여기지 마십시오. 비록 철륜(鐵輪)이 이마 위를 굴러간다 해도 머리털 하나 까닥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여러 벗들이 이 일로 인하여 종전에 받았던 우리들의 훼방이 대부분 이런 유형이란 것을 알게 될 것이니, 벗들에게 이런 마음을 알리는 것이 어찌 다행스럽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서울의 제공(諸公)들은 바야흐로 크게 서로 축하하고 있으니 절대로 이러한 괴상한 말이 한강(漢江)을 건너지 못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비록 집안 편지라 하더라도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주-D001] 이차(離次) : 《서경(書經)》 윤정(胤征)에 나오는 말로 머물러 있던 자리를 버린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다산이 서울에서 금정 찰방(金井察訪)으로 좌천되어 온 것을 말한다.*만계 이승훈(1756~1801) : 정약용은 이승훈에 대하여 ‘만계’(蔓溪)라는 호를 사용하거나  ‘이형(李兄)’으로만 불렀다. 이승훈은 모든 천주교 관련 사건의 출발점이었다. 그는 당시 다산과 함께 주문모 신부 실포(失捕) 사건에 연루되어 예산에 귀양 와 있었다. 이승훈의 이름을 지운 것은 1801년 그가 천주교 신앙문제로 처형당했기 때문이다. ‘서암강학기’에도 마땅히 그의 이름이 들어갔어야 하는데, 훗날 편집 과정에서 삭제되었다.
    2020-09-14 | NO.153
  • 몰래 장사지내자 사굴(私掘)하여 옮긴 죄 - 각사등록(各司謄錄)
    경상감영계록(慶尙監營啓錄) ○철종(哲宗) / 철종(哲宗) 14년(1863) 11월 15일 - 각사등록(各司謄錄) 상고(相考)한 일을 아룁니다. 도내 각 읍의 지난 10월 달 정배 죄인(定配罪人)들의 도배(到配)한 연월일 및 보수(保授)하는 사람의 역(役)과 성명을 모두 아래에 개좌(開坐)합니다. 이러한 일이니만큼 삼가 갖추어 계문합니다.계해년 11월 15일 <중략>곤양(昆陽)전라도 광주(光州)에서 온 유3천리 죄인 박기환(朴奇煥)은 전라 감사의 이문에, “담양부(潭陽府)에서 수추한 죄인 박기환임. ‘저는 선산(先山)과 지극히 가까운 땅에 홍시남(洪時南)이 그의 아비를 몰래 장사지냈기에, 선조를 위하는 마음에 분완(憤惋)을 견디지 못하고 법을 어기고 사굴(私掘)하여 다른 곳에 옮겨 두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스스로 저지른 죄를 돌아보건대 어찌 해당 형률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변명 없이 지만(遲晩)합니다.’라고 한 죄를 검률로 하여금 조율하게 하였더니, 검률 최석운(崔錫運)의 수본에, ‘《대명률》 발총(發塚)조에 이르기를, 「분총을 발굴하여 관곽을 드러낸 경우에는 장1백, 유3천리에 처한다.〔發掘墳塚 見棺槨者 杖一百流三千里〕」고 하였으니, 박기환은 장1백, 유3천리 사죄입니다.’라고 한 것에 의거하여 위 죄인 박기환을 위 율문에 따라 장1백을 친 뒤 유3천리로 귀도 곤양군에 정배하는 일.”이라고 한 것에 의거하여, 계해년 10월 초10일 도배함. 보수하는 사람은 양인 김석홍(金錫弘).경상감영계록(慶尙監營啓錄) ○고종(高宗) / 고종(高宗) 원년(1864)  정월 14일 상고(相考)한 일을 아룁니다. 도내(道內) 각 읍에 작년 11월과 12월의 정배 죄인(定配罪人)들이 도배(到配 죄인이 유배지에 도착함)한 연월일(年月日) 및 보수(保授 유배 죄인의 숙식을 책임짐)하는 사람의 직역(職域)과 성명을 아울러 아래에 죽 기록하는 일이니만큼 삼가 갖추어 계문합니다.갑자년 정월 14일<중략>사천(泗川)전라도(全羅道) 광주(光州)에서 온 유3천리 죄인 김성숙(金成叔)은, 전라 감사의 이문에, “광주목(光州牧)의 수추 죄인 김성숙의, ‘저의 선산(先山)의 압맥(壓脈)인 곳에 이민형(李敏炯)이 그 어미를 억지로 장례를 치렀으므로 선조(先祖)를 위하는 마음에 분노를 견딜 수 없어서 법을 어기고 사사로이 파서 관(棺)을 드러나게 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스스로 저지른 짓을 돌아보니 어찌 당률을 면하겠습니까? 변명 없이 지만합니다.’라고 한 죄를 검률(檢律)에게 조율하게 하니, 검률 최석운(崔錫運)의 수본에, ‘《대명률》의 발총(發塚)조에, 「무덤을 파서 관곽(棺槨)을 드러나게 한 경우에는 장1백에 유3천리이다.」라고 했으며, 사죄(私罪)입니다.’라고 하였다. 위의 죄인 김성숙은 위에서 말한 율문(律文)을 적용하여 장1백에 귀도 사천현에 유3천리로 정배한다.”라고 한 데 근거하여 계해년 11월 초6일 도배(到配)함. 보수하는 사람은 양인 김택인(金宅仁).
    2020-10-01 | NO.152
  • 무등산 기우제문〔無等山祈雨祭文〕 - 동강유집 제12권
    무등산 기우제문〔無等山祈雨祭文〕 - 동강유집 제12권 / 제문(祭文) : 동강(東江) 신익전(申翊全, 1605~1660)정해년(1647, 인조25) 5월 15일 을묘에 행(行) 광주 목사(光州牧使) 신 모는 삼가 희생과 술을 갖추어 감히 무등산(無等山) 신령께 밝게 고합니다.아, 지독합니다. 이 백성들의 고난이 어찌 이처럼 혹독하단 말입니까. 병자년과 정축년 호란 이후로 한 해도 흉년에 고통받지 않은 해가 없습니다. 또 국가에 일이 많은 탓에 때아닌 부역과 부득이한 세금이 매월 발생하는데 남쪽 지방은 또 양서(兩西 평안도와 황해도) 대신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합니다. 이어 전염병마저 돌아 열에 네다섯은 죽었으니, 장래에 피폐한 백성들을 살릴 희망은 오직 금년 농사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5월에 절기도 망종(芒種)이 지났건만 열흘이 넘도록 해만 쨍쨍 뜨고 비가 오지 않는단 말입니까. 논밭은 메말라 갈라지고 도로엔 먼지만 날리고 있으니, 밭 갈던 자들은 쟁기를 멈추고 모내기 하던 자들은 속수무책입니다. 물줄기는 바닥을 드러내려 하고 샘물은 메말라가고 있으니, 가련한 저 백성들이 어디에서 복을 받아 죽어가는 목숨을 부지하고 허다한 세금을 낼 수 있겠습니까.이는 참으로 성상께서 편안히 있을 수 없는 일이요, 여러 신하들이 게을리할 수 없는 일이기에 날마다 여러 산천에 망제(望祭)를 올리며 기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처럼 보잘것없는 사람이 벼슬자리에 올라 한 고을을 다스리면서 이런 어려움을 보고서도 폐단 하나도 제거하지 못하고 은혜 하나도 베풀지 못하여 고을 백성들을 구제하기는커녕 굶주림에 허덕이게 하여 성상의 근심을 나누는 지극한 책임을 거듭 저버렸으니, 제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어찌 감히 스스로 편안히 여기면서 고을 진산의 밝으신 신령께 경건히 정성을 올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아, 나라는 백성에게 의지하고 백성은 신령을 따르는데, 신령이 의지하는 것은 또한 나라와 백성입니다. 하늘은 오로지 살리기를 좋아하고 신령도 반드시 그렇건만 이런 재앙의 징조가 보이는 것은 저와 같은 자가 그저 먹고 마시기만 할 뿐 제대로 직분을 수행하지 못한 탓이니, 저 서민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아, 이 백성들이 일정한 생업이 없어 선한 본심을 잃은 지 오래되었습니다만, 세금 내는 기한을 어기는 자들은 드뭅니다. 아침에 와서 ‘포백(布帛)을 내라’ 하면 그 명령대로 따르고, 저녁에 와서 ‘속미(粟米)를 내라’ 하면 그 명령대로 따르고, 또 다음날 ‘무슨 부역에 나오라’ 하면 또 그 명령대로 따르면서 조금도 지체하지 않으니, 이것이 어찌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겠습니까. 단지 두려워서 그런 것뿐입니다.목민관(牧民官)이 되어 폐단을 제거하고 은혜를 베풀지도 못한 처지에 백성들만 두려움에 떨게 하였습니다. 또 태형(笞刑)을 치고 구금하는 것으로 태만한 자를 감독하기만 하였을 뿐, 간악하고 교활한 자들이 권세를 믿고 수탈하는 것을 또 살피지 못하였으니, 이야말로 하늘이 노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백성들은 노할 만한 실정이 없고 오로지 불쌍히 여길 점만 있으니, 오직 하늘을 받드는 신령께서 지성으로 올리는 저의 기도를 어찌 살펴주지 않으시겠습니까.이에 한 고을 백성들의 염원을 모아 삼가 밤을 새워 목욕재계하고 제사를 올립니다. 성심으로 바라건대, 산신령께서는 살리기 좋아하는 하늘의 도를 속히 본받아 가련한 이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단비를 흡족히 내려 온 천지에 고루 스며들게 하심으로써 쟁기질 멈추었던 자들이 깊이 밭 갈고 속수무책으로 있던 자들이 수월하게 모내기하도록 해 주소서. 그렇게 된다면 풍년을 기대할 수 있고 백성들의 생업이 풍족하게 될 것이니 신령의 은혜가 클 것입니다. 제가 감히 게을리할 수 있겠습니까. 아, 흠향하소서.[주-D001] 백성들이 …… 오래되었습니다만 : 《맹자》 〈양혜왕 상(梁惠王上)〉에 “일정한 생업이 없어도 언제나 선한 본심을 견지할 수 있는 것은 선비만이 가능한 일이다. 백성의 경우엔 일정한 생업이 없으면 선한 본심을 지킬 수 없게 된다.〔無恒産而有恒心者, 惟士爲能 若民則無恒産, 因無恒心.〕”라는 말이 나온다.
    2020-10-07 | NO.151
  • 무등산 기우제문〔無等山祈雨祭文〕- 서하집
    무등산 기우제문〔無等山祈雨祭文〕- 서하집 제11권 / 제문(祭文) : 이민서(李敏敍, 1633~1688). 신명과 사람의 사이 / 神人之際하나의 이치로 감통하니 / 一理感通성정의 좋아하고 싫어함이 / 性情好惡거의 차이 없습니다 / 幾無異同우리 사람을 기쁘게 하여 / 使吾人而歡欣모두 신명의 공덕에 춤을 춘다면 / 咸鼓舞於神功신명이 기쁠 뿐만 아니라 / 非惟神之悅豫상제께서도 훌륭히 여길 것입니다 / 亦上帝之所崇진실로 병들고 파리하여 탄식하거늘 / 苟病瘠而愁歎신령의 은혜 끝까지 내려 주지 않으시어 / 致神賜之不終사람들 머리 아파하며 모두 호소하는데 / 人疾首而咸籲어찌 신령께서 들어주지 않는단 말입니까 / 豈神聽之不聰하물며 산천이 사람을 비호함에 / 矧山川之庇人진실로 비와 바람 맡아 / 寔有司乎雨風마치 대소의 관리가 / 猶大小之官吏또한 모두 하늘의 일을 대신하는 것과 같으니 / 亦皆代乎天工만약 직임을 잃어 잘못하면 / 儻失職而致愆하늘에 무어라 변명하겠나이까 / 焉有辭於上穹지금 너무나 참혹한 이 가뭄이 / 今玆旱之孔慘늦봄부터 한여름까지 이어져 / 自春末而夏中사방 들판은 시들어 푸르름 없고 / 四野枯而無靑논은 쩍쩍 갈라지고 병충해도 생겼습니다 / 田坼龜而生螽샘은 원천이 마르고 산도 벌거숭인데 / 泉源涸而山滌해는 밝게 떠올라 푹푹 찌니 / 日杲杲而蘊隆이미 싹이 모두 시들었고 / 旣苗秧之皆萎모든 생물이 살아갈 이치 다했나이다 / 擧生植之理窮지난 기근 겪은 지 멀지 않은데 / 昔大侵之未遠지금 여러 해 풍년이 없으니 / 今累歲之無豐백성의 명줄이 다해 가 한탄스럽고 / 嗟民命之旣近온 나라가 텅 비어 애통합니다 / 痛大東之其空오직 이 드높은 산악은 / 惟玆嶽之峻極실로 여러 산 가운데 으뜸이니 / 實群山之長雄산경과 지리지에 오래 전부터 이름 올라 / 名久登於經志중국의 화산과 숭산에 짝합니다 / 配中國之華嵩여기부터 구름 모여든다면 / 而膚寸之自我만물에 큰 은혜 미칠 것인데 / 施及物之其洪생각하면 진산 이리도 가깝거늘 / 念鎭望之密邇어찌 제 애통함 살펴 주지 않으시나요 / 寧不察余之哀恫만약 장리가 벌 받을 만하면 / 苟長吏之可罰응당 그 몸에 재앙 내릴 것이니 / 宜致殃於其躬우리 죄 없는 백성 애처로이 여기며 / 哀吾民之無辜신명께서 공평하게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 仰神鑑之有公감히 깨끗하게 하고 정성을 올리며 / 敢潔淸而薦誠미천한 마음에 강림하시길 바라노니 / 冀降格于微衷부디 영험한 은택을 한번 내리시어 / 庶靈澤之一霈백성들과 함께 모두 입게 하소서 / 與群黎而皆蒙[주-D001] 무등산(無等山) 기우제문 : 무등산은 광주(光州)에 있는 진산(鎭山)이며, 일명 무진악(武珍嶽) 또는 서석산(瑞石山)이라고도 한다. 《승정원일기》 숙종 3년 1월 22일 기사에 이민서가 광주 목사에 제수된 일이 보이는데, 이때 지은 것으로 보인다.[주-D002] 온 나라가 …… 애통합니다 : 원문의 ‘대동(大東)’은 우리나라를 가리킨다. 《시경》 〈대동〉에 “소동(小東)과 대동에 북과 바디 모두 비었도다.[小東大東, 杼柚其空.]” 하였는데, 주희(朱熹)의 주(注)에 “소동과 대동은 동방의 크고 작은 나라이니, 주(周)나라로부터 본다면 제후국이 모두 동방에 있다.” 하였다. 《시경》의 본뜻은 제후국이 과도한 부역에 시달려 재물이 피폐한 것을 말하였는데, 여기에서는 우리나라의 재정이 궁핍함을 말한 것이다.[주-D003] 중국의 …… 짝합니다 : 화산(華山)과 숭산(嵩山)은 태산(泰山)ㆍ항산(恒山)ㆍ형산(衡山)과 더불어 중국의 오악(五嶽)으로 일컬어지니, 여기에서는 무등산이 광주의 진산(鎭山)으로 화산과 숭산에 비견하는 명산임을 말한 것이다.[주-D004] 구름 모여든다면 : 원문의 ‘부촌(膚寸)’은 비가 내리기 전 구름이 점점 모이는 것을 말하니,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희공(僖公) 31년조에 “구름 기운이 돌을 부딪치며 나와 점점 모여들어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천하에 비를 뿌리는 것은 다만 태산일 뿐이다.[觸石而出, 膚寸而合, 不崇朝而徧雨天下者, 唯泰山爾.]” 하였다.
    2020-12-17 | NO.150
  • 무등산(無等山) - 임하필기 제13권
    무등산(無等山) - 임하필기 제13권 /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 1814~1888) 광주(光州)의 동쪽 10리에 무등산이 있는데 백여 리의 지역을 걸터타고 앉아 있다. 산 위에는 수십 개의 돌기둥이 서 있는데 마치 사람이 일부러 깎아서 세운 듯하며 높이가 거의 백 척이나 되고 모두 여섯 개의 모서리가 나 있다. 또 석벽(石壁)이 있는데 길이가 수십 무(武 반보(半步))가량 되고 높이는 수십 장(丈 10척(尺))이나 되는바, 그 돌 무늬가 마치 물결 같고 구름 같으며 희고 붉은 색들이 마구 뒤섞여 있다. 또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석실(石室)이 있는데 산 이름을 서석산(瑞石山)이라고도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매양 날이 가물다가 비가 오려고 하거나 장마가 지다가 날씨가 개려고 하면 문득 소리를 내어 우는데 그 소리가 수십 리 밖까지 들린다고 한다. 그래서 속악(俗樂)에 무등산곡(無等山曲)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2020-09-25 | NO.149
  • 무등산곡(無等山曲) - 백제의 음악
    무등산곡(無等山曲) - 백제의 음악, 임하필기 제12권 /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 1814~1888) 지리산가(智異山歌)는, 구례(求禮) 고을 사람의 딸이 지리산 밑에 살고 있었는데 그 자색이 아름답고 여자로서의 도리를 다하였으므로 임금이 그 여자가 이처럼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는 궁중으로 불러들이려고 하였던바, 여인이 이 노래를 지어서 죽기로써 따르지 않을 것을 맹세한 것이라고 한다.선운산곡(禪雲山曲)은, 무장(茂長)에 선운산이 있는데 백제 때에 장사(長沙)에 사는 사람이 정역(征役)을 나갔다가 기한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으므로 그의 아내가 남편을 생각하면서 이 산에 올라가서 남편이 가 있는 곳을 바라보면서 부른 노래라고 한다.또 무등산곡(無等山曲)은, 광주(光州)에 무등산이 있는데 백제 때에 이 산에 성을 쌓아 백성들이 이 때문에 편안히 지낼 수 있었으므로 이것이 즐거워서 노래 부른 것이라고 한다.
    2020-09-25 | NO.148
  • 무송 유씨 족보 서〔茂松庾氏族譜序〕- 강재집 제5권
    무송 유씨 족보 서〔茂松庾氏族譜序〕 : 강재집 제5권송치규(宋穉圭, 1759~1838) 《강재집(剛齋集)》 나는 목천(木川) 현감(縣監) 유공(庾公)의 묘표(墓表)를 선조의 글에서 읽어 본 적이 있다. 그 재기(才器)가 보통 사람을 뛰어넘지만 지위가 덕행과 어울리지 않는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또 유씨(庾氏)가 실로 고려 왕조의 명문대가였지만 지금은 우뚝 떨쳐 일어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기도 하였다. 어느 날 목천공(木川公)의 후손 광택(光澤)이 자세하게 조사하고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우리 일족이 족보를 정리하여 간행하고자 합니다. 한 마디 말을 주시면 책의 권두에 붙이고자 하는 것이 여러 친척들의 소원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글솜씨가 부족하고 병들어 정신이 혼미하다는 말로 사양하였으나 그 요청이 대단히 간절하였다. 생각건대, 유씨(庾氏)는 모두 고려 태사(太師) 충절공(忠節公)을 시조(始祖)로 삼는다. 충절공은 태조 왕건(王建)을 도와 삼한(三韓)을 통합하여 평산(平山 황해도에 있음)에 봉(封)해졌다. 평산에 봉지를 받은 뒤로부터 무송(茂松)으로 본관을 옮긴 사람은 태자소보(太子少保) 안정공(安貞公)이다. 이로부터 여러 대에 걸쳐 공(公)과 경(卿)이 줄을 잇듯이 나오고 효성과 우애를 실천하며 청백리로 소문난 사람이 대대로 역사책에 끊이지 않고 기록되었다. 특히 시랑공(侍郞公)의 높은 충성이 어찌 우뚝하지 않겠는가. 우리 조선이 천명을 받아 개국하자 시랑공의 후손 유하(庾賀)는 정포은(鄭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문도로서 벼슬을 하려 하지 않아 광주(光州 전라도)로 귀양살이를 가게 되었고, 이에 자손들이 남녘땅 사람이 되었다. 이것 또한 다른 족보에서 듣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목천공(木川公) 및 추헌공(楸軒公)과 추봉공(秋峯公) 부자는 그 지절(志節)의 훌륭함이 1백 년 지나서도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만하며, 그것이 유래가 있어서 진실로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아! 영달하고 영달하지 못하는 것은 본래 운명이고, 수양하고 수양하지 못하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 유씨(庾氏)가 비록 대단히 보잘것없이 되었지만 이미 족보가 만들어져서 각각 그 내원을 알게 되었다. 진실로 내외(內外)의 분간을 잘 밝히고 서로 삼가며 힘써서 효도와 공경을 도탑게 행하여 선조들의 업적을 사라지지 않게 할 것을 생각한다면, 어떤 사람들이 그들을 가볍게 여길 수 있겠으며 집안 명성을 다시 크게 떨칠 수 있을 것이다. 유씨는 힘써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견식이 좁은 사람으로, 외람되게도 서문을 써 달라는 부탁을 기회로 하여 공들의 실제 사적을 자세하게 알 수 있었고, 또 유씨가 우리 집안과의 우애가 깊은 것이 목천공 한 계파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나서 크게 다행으로 여겼다. 이에 엉성한 글솜씨를 잊고 대략 이 글을 써서 그의 간절한 뜻에 보답한다. [주-D001] 충절공(忠節公) : 유금필(庾黔弼) 장군으로, 황해도 평주 출신이다. 고려 개국 초기 도통대장군(都統大將軍)으로 태조(太祖) 왕건(王建)을 도와 북번족(北蕃族)을 평정하고 후백제와 신라를 통합하여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큰 공을 세워 삼중대광 통합삼한 익찬공신(三重大匡統合三韓翊贊功臣)이 되었다. 시호(諡號)는 충절공(忠節公)이고, 태사(太師)에 추증(追贈)되었다.[주-D002] 안정공(安貞公) : 유녹숭(庾祿崇)으로, 충절공의 5대손이고 시호는 안정공이다. 고려 숙종(肅宗) 때에 무송(茂松) 부원군(府院君)에 봉(封)해짐으로써 후손들이 안정공을 중시조(中始祖)로 모시고 본관을 평산(平山)에서 무송(茂松)으로 옮겼다.[주-D003] 시랑공(侍郞公) : 유방(庾方)으로, 유금필의 손자이다. 고려 성종 때 거란군의 침입을 격퇴하여 전공을 세우고, 현종 때 병부 상서(兵部尙書) 겸 상장군(上將軍)을 거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역임하였으며, 이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2020-11-03 | NO.147
  • 문곡 김상국에게 보내는 편지〔與文谷金相國書〕 - 서하집
    문곡 김상국에게 보내는 편지〔與文谷金相國書〕 - 서하집 제17권 / 서독(書牘) : 이민서(李敏敍, 1633~1688). 봄날이 아직도 찬데, 삼가 이 시기에 대감의 조섭이 계절에 맞게 편안하시리라 생각하며, 구구한 마음에 지극히 우러러 사모합니다. 저는 집안의 우환이 잇달았는데, 지난달에 또 서매(庶妹)의 상을 당하였습니다. 지난해 남쪽으로 온 뒤로 잇달아 기공(朞功)에 해당하는 상이 예닐곱 번이나 났으니, 이 어찌 사람의 도리에 차마 감당할 일이겠습니까. 법성(法聖)에 가려던 일을 또한 실행하지 못하였고, 지나는 길에 인사드리려던 계획도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삼가 끝없이 탄식할 뿐입니다.근일에 한양 소식을 대감께서 혹 들으신 것이 있는지요? 주상의 환후는 이제 약을 쓰지 않을 정도로 회복되셨는지요?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아뢸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지역에서 바야흐로 김덕령(金德齡) 장군의 사우를 영건하여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과 함께 배향(配享)하고자 합니다. 이들은 모두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인물로, 비록 문무(文武)의 차이는 있지만 그 풍렬(風烈)은 모두 존경받을 만합니다. 회재는 예전에 지은 원사(院祠)가 있기 때문에 조금 수리하고 넓혀서 함께 모시려고 합니다. 공사를 벌이는 날이 정해진 상황에서, 고을 사람들이 상량문(上樑文)을 얻는 데 기어이 대감의 글 한 편을 청하여 사우(祠宇)를 훌륭하게 꾸미고자 하니, 대감께서 유념하시어 아름다운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기문(記文)은 이미 우암(尤菴) 어른께 청하였으니, 대감의 글을 얻는다면 더욱 유감이 없을 것이기에 감히 청합니다. 저 또한 졸렬함을 헤아리지 않고 고을 사람과 자손들의 청에 못 이겨 대략 사실을 기록한 글을 지었으니, 아울러 이번에 보내드리니 같이 고쳐 주시기 바랍니다.《남화경(南華經)》 한 건(件)은, 이곳에 옛날 간행본이 있으나 훼손이 심하여 읽을 수가 없어서 근래 겨우 보완하여 간행하였는데, 비록 모두 새로 간행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읽을 만합니다. 이 책은 비록 외서(外書)이고 명리(名理)에 대한 말이 많지만, 경멸하여 버리기에는 아깝기 때문에 지금 올립니다.[주-D001] 기공(朞功) : 기년복과 대공(大功)ㆍ소공(小功)의 상기(喪期)를 말한다. 상기 1년인 경우를 기복(朞服)이라 하는데 조부모ㆍ백숙부모ㆍ형제자매ㆍ처 등의 상이 이에 해당하고, 9개월인 경우를 대공이라 하는데 사촌 형제자매의 상이 이에 해당하며, 5개월인 경우를 소공이라 하는데 증조부모ㆍ재종형제 등의 상이 이에 해당한다.[주-D002] 김덕령(金德齡) 장군의 사우 : 1567~1596.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경수(景樹)이다. 이민서의 아들 이관명(李觀命)이 지은 〈선부군행장(先父君行狀)〉에 “정사년(1677, 숙종3) 봄에 광주 목사에 임명되었다.……고을 안에 예전에 향현사(鄕賢祠)가 있었으니, 바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박광옥(朴光玉)의 사당이었다. 공이 이에 옛 규모를 증수하고 또 김덕령 장군과 함께 배향하였다.” 하였다. 김덕령은 전라도 광주(光州) 석저촌(石底村)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1596년(선조29)에 도체찰사 윤근수(尹根壽)의 노복을 장살하여 투옥되었으나 유생들의 상소와 정탁(鄭琢)의 변호로 곧 석방되었다. 그해 7월 홍산(鴻山)에서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충청도 체찰사 종사관 신경행(辛景行)과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이 이몽학과 내통했다고 무고하였다. 그리하여 최담년ㆍ곽재우ㆍ고언백(高彦伯)ㆍ홍계남(洪季男) 등과 함께 체포되어, 26일 동안 여섯 차례의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1661년(현종2)에 신원(伸寃)하고 복관(復官)하였다. 1785년(정조9) 시호를 충장(忠壯)이라고 하였다. 《국역 선조실록 29년 8월 4일》 《국역 선조수정실록 29년 8월 1일》 《국역 현종실록 2년 8월 30일》[주-D003]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 : 1526~1593. 본관은 음성(陰城), 자는 경원(景瑗), 회재는 그의 호이다. 전라도 광주에 세거(世居)하였고, 10세 때 정황(丁潢)의 문하에 들어갔다. 1546년(명종1) 진사시에 입격하였으나, 광주(광산) 선도면(船道面)에 집을 지어 개산송당(蓋山松堂)이라 이름하고 문하생들과 함께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또 향약을 실시하고, 기대승(奇大升)ㆍ박순(朴淳)ㆍ이이(李珥)ㆍ노사신(盧思愼) 등과 교유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는데, 고경명(高敬命)ㆍ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고향의 의병도청(義兵都廳)에서 군대의 장비와 양식을 조달하였다. 1602년 광주 벽진촌(碧津村)에 세워진 벽진서원(碧津書院)에 제향되었는데, 그 사당은 1678년(숙종4) 이민서가 확장하여 김덕령을 병향하였고, 1681년 의열사(義烈祠)라고 사액받았다. 박광옥은 운봉(雲峰)의 용암서원(龍巖書院)에도 제향되었다. 저서에 《회재유집(懷齋遺集)》이 있다.[주-D004] 고을 …… 바랍니다 : 이때 김수항이 영암에 귀양 와 있었는데, 상량문은 김수항이 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의열사의 상량문은 나중에 이민서가 썼다. 《西河集 卷13 義烈祠上樑文》[주-D005] 기문(記文)은 …… 청하였으니 : 송시열이 기문을 썼는지는 미상이지만, 이민서의 편지를 통해 소식은 듣고 있었다. 이민서가 김덕령의 향사(享祀)를 추진한다는 소식을 듣고 송시열은 곽재우(郭再祐)도 함께 제향할 것을 제안하였다. 《국역 송자대전 제75권 이이중(李彝仲)에게 답함 - 정사년(1677) 12월》[주-D006] 남화경(南華經) : 당(唐)나라가 노자(老子) 이담(李聃)을 조상으로 삼아 현원황제(玄元皇帝)로 추존하고 장자(莊子)를 남화진인(南華眞人)으로 높였기 때문에 《장자》를 《남화경》이라고 한다. 박세당(朴世堂)이 《남화경주해산보(南華經註解刪補)》를 저술하여 교서관에서 현종실록자로 간행한 적이 있는데, 본문에서 말하는 《남화경》은 박세당의 저술이 아니라 《장자》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주-D007] 외서(外書) : 원래 불교도들이 불교 경전 이외의 책을 일컫던 말이었으나, 차츰 뜻이 넓어져 유가 경전 이외의 책을 외서라고 하기도 하였다.*2023.11.12. 수정 : '나주 선도면'을 '광주(광산) 선도면'으로 
    2020-12-23 | NO.146
  • 미암집 제9권 / 일기(日記)
    미암집 제9권 / 일기(日記) 축약함 ○임신년(1572) 융경(隆慶) 6년 우리 선조대왕 5년 11월 : 유희춘(柳希春, 1513~1577)【5일】나는 광주 목사(光州牧使) 임회 헌가(林誨獻可)와 제시진사(製詩進士) 백광훈(白光勳)을 초대하여 잠시 술을 주고받았다.【7일】정철(鄭澈)이 소식을 전하여 기대승이 서거했음을 알게 되었다. 놀랍고 슬프기 그지없다. 이 사람은 지기(志氣)가 뛰어나고 강개한 마음으로 일을 행하며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며 학식이 넓고 옛것을 좋아하며 문장에도 능하였으니, 호련(瑚璉) 같은 그릇이라고 할 수 있고 세상에 드문 인재라 할 수 있다. 다만 강단 있고 과감하여 자기 생각대로 행하고 말을 쉽게 하여 기로(耆老)들을 책망함으로서 구신(舊臣)과 정승들에게 크게 미움을 샀다. 이것은 날카로운 기질이 닳아지지 못하여 갑자기 통곡하는 병폐가 있었기 때문이다.【14일】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정철(鄭澈)이 첨지 기명언(奇明彦 기대승)에게 부의를 표하자는 회문(回文)을 보내왔기에 나도 4승목(升木)을 내주었다.[주-D008] 호련(瑚璉) : 주(周)나라의 종묘 제사 때 곡식을 담던 그릇인데, 그 귀중함으로 인하여 재능이 있어 큰 임무를 감당할 만한 사람을 비유하였다.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이 “저는 어떠한 그릇입니까?〔何器也〕” 하고 묻자, 공자가 “자네는 호련이다.〔瑚璉也〕”라고 대답하였다. 《論語 公冶長》[주-D013] 회문(回文) : 여러 사람이 차례로 돌려 보도록 쓴 글로, 회장(回章)과 같은 말이다.미암집 제13권 / 일기(日記) 축약함 ○을해년(1575, 선조8) 만력(萬曆) 3년 우리 선조대왕 8년 11월【1일】공의전이 비망기를 정원에 전하여 이르기를,“주상이 근일에 침수(寢睡)하지 못하고 또 구토를 하며 수라 또한 들지 못하여 내가 종일 간청하니 부득이 권제를 따랐습니다. 지극히 감격스럽습니다.”하였다. 내가 엎드려 읽고 탄식하며 말하기를,“주상의 추모하시는 효성이 너무 지나치고 공의전이 보호하시는 공 또한 극진하시다. 이는 실로 조선의 한없는 복이니 무릇 혈기가 있는 자라면 누가 감동하여 기뻐하지 않겠는가.”하였다.○ 직제학 정철 계함(鄭澈季涵)이 질병의 요양을 위해 광주(光州) 석저리(石底里)로 왔는데 집에 도착한 다음날 편지로 안부를 물었다. 내가 그때에 해남에 가 있다가 어제 비로소 듣고 편지로 사례하였더니 정군이 답장에 말하였다.“사람을 보내 하문해 주시니 간곡히 교시하신 뜻을 잘 살펴 여러 번 읽고 감사하고 송구하여 말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저는 병세가 위중하여 전하의 부름에 나아가지 못하고 황공하게 대죄(待罪)하고 있는 중입니다. 한 번 뵙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아직 뜻을 이루지 못하니 우러러 그리워하는 마음을 어찌 다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굽어살펴주소서. 삼가 백배하고 답장 올립니다.”○ 사시 초에 관찰사 최응용(崔應龍)이 찾아와 인사를 마치자 담양 부사 이중호(李仲虎)도 뒤따라 왔다. 내가 방백(方伯) 최견숙(崔見叔 최응룡)과 재미있게 담화를 나눴는데 방백이 먼저 과일 상을 베풀고 먼저 술을 쳤다. 다음은 이부사(李府使), 다음은 송진(宋震), 다음은 내가 쳤다. 나는 양사형(楊士衡)의 일과, 조유성(趙惟誠)의 처씨(妻氏)가 이계복(李繼福)의 노(奴) 세옥(世玉)을 찾아달라는 일과, 무안 정개청(鄭介淸)에게 와서 사서(四書)의 토석(吐釋)에 참여하여 종사하게 해줄 것과 한응성(韓應星)의 억울함과 안방선(安邦善)의 죄가 아주 무겁지는 않다는 것 등을 부탁하였다. 또 손남(孫男)의 혼서지(婚書紙)와 수서(修書)하고 정서(正書)할 종이와 장지(狀紙)와 광주의 먹을 부탁하였더니 모두 승낙하였다.【21일】광주 목사 성수익(成壽益)이 편지로 《어류(語類)》의 의심나고 어려운 곳 네 곳을 묻기에 내가 곧 답해주었다. 내가 조정에 있을 때에 경대부가 독서하다 어려운 것을 와서 묻는 이가 헤아릴 수 없었다. 김덕용ㆍ김귀영ㆍ박계현ㆍ민기문ㆍ이담ㆍ허엽ㆍ이헌국ㆍ권덕여ㆍ신응시ㆍ윤두수ㆍ윤근수ㆍ심수경ㆍ우성전ㆍ원혼ㆍ박순 및 옥당의 여러 학사가 더욱 부지런하였다.【23일】저녁에 무안에 사는 전 참봉 정개청 인백(鄭介淸仁伯)이 와서 인사하였다. 감사 최공이 친히 말해 보낸 것이다. 감사가 역마를 주었지만 인백이 받지 않고 자기 말을 타고 짐바리 말까지 끌고 왔다. 나는 반가워 나가서 보고 대학의 토석을 의논하였는데 뜻이 맞는 곳이 많았다. 또 한두 군데 구결이 새롭고 합당한 것을 들으니 매우 기쁘다.【24일】광주 목사 성수익이 백력(白曆)을 보내오고 편지로 묻기를,“측천무후(則天武后)를 죽이고 종실을 바꿔 세울 것을 논한 조목에서 ‘후세에서 말한다면 중종은 불료(不了)했다.’라고 했는데 이른바 ‘불료(不了)’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또 ‘담판한(擔板漢)’이란 것이 판을 짊어진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 뜻을 어디에 쓰는 지 알 수가 없습니다.”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요(了)란 일을 아는 것이니 중종이 무삼사(武三思)가 왕후(王后)와 사통하는 것을 방치하고 그의 참소를 들어 5왕을 죽이고 대란(大亂)을 초래했으니 이것이 이른바 일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담판한의 한은 사내를 칭합니다. 호인(胡人)이 중화인을 한이라고 부르니 번한(蕃漢)의 한도 또한 한의 사내를 이릅니다.”하였다.[주-D005] 담판한(擔板漢) : 판자를 짊어진 사내라는 뜻으로 판자를 짊어지면 앞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어리석은 사내라는 뜻으로 쓰인다.미암집 제14권 / 일기(日記) 축약함 ○정축년(1577) 만력(萬曆) 5년 우리 선조대왕 10년 4월【16일】 아침에 하서(河西)의 문인으로 광주(光州)에 사는 이각(李恪 자는 원작(元作))이 경렴(景濂)을 전별하려고 술병을 들고 와서 광선(光先)을 통해 나를 뵈었다. 나는 대하여 아침밥을 들고 그 술을 함께 마시며 더불어 말을 해 보니 괜찮은 사람이었다. 나는 붓 한 자루를 주었다.
    2020-12-14 | NO.145
  • 민철명(閔哲命) 고봉 제문 - 고봉별집 부록 제1권 / 제문(祭文)
    세차 계유년 2월 8일 기미에 광주 목사(光州牧使) 민철명은 맑은 술과 조촐한 제물을 마련하여 삼가 고 부제학 고봉 선생의 영전에 제사 드립니다.산악이 신을 내려 / 維岳降神호걸이 태어났네 / 鍾生豪英호학하긴 안자 같고 / 好學幷顔검속하긴 정자 같아 / 斂束同程조예가 정심하니 / 造詣精深마침내 대성하여 / 終就大成문장은 한구에다 / 文比韓歐도통은 염락일세 / 道傳濂洛우매한 자 거절 않고 / 不拒空空선으로써 인도했네 / 誘掖式穀인정해 준 사람 있어 / 相許有人덕불고를 알았어라 / 知德不孤지방 달라도 한마음 / 地異心同영호남 뉘 나눌쏘냐 / 孰分嶺湖서찰을 주고받으며 / 往來書尺연비어약 다 캐고 / 究極魚鳶오성과 칠정에다 / 五性七情양지와 삼천까지 / 兩地參天철저히 궁구하여 / 直窮到底귀촉마냥 환했어라 / 理若龜燭더구나 조정에 올라서는 / 况登朝堂바른 자만 들어 쓰고 / 措枉擧直진퇴에 정도 지키니 / 進退持正누구나가 존경하여 / 莫不欽服사람들은 사표로 알고 / 人指蓍龜나라는 기둥에 비겼지 / 國擬柱石장차 세도 바로잡고 / 方期扶世임금 보필 하렸더니 / 永輔袞職어인 일로 불행하여 / 云胡不淑이 세상을 떠나셨나 / 曾簀遽易수명은 인에 아니 맞고 / 壽不稱仁벼슬은 덕에 아니 찼네 / 位不滿德선한 사람 돌아가니 / 善人云亡내 아픔 곡한 게 아니요 / 非哭吾私나라의 흥망성쇠 / 國之休戚실로 이에 달렸어라 / 實繫於斯도의 명맥 병이 들고 / 道脉俱瘁선비는 갈 곳 없으니 / 士失依歸명색이 유림이라면 / 凡在儒林그 누가 아니 슬프리 / 孰不含悲교분은 비록 없으나 / 縱無素分슬픔을 가누지 못해 / 難堪痛傷한 잔 술 부어 올리니 / 把奠單杯눈물이 줄줄 흐르네 / 雙淚浪浪아 슬프오이다 / 嗚呼哀哉부디 흠향하소서 / 尙饗[주-D001] 산악이 신을 내려 : 고봉 같은 위대한 인물의 탄생과 죽음은 산천과 하늘이 주관한다는 말이다. 《시경》〈대아(大雅) 숭고(崧高)〉에 “산악이 신을 내려 보후(甫侯)와 신후(申侯)를 내셨도다.〔維嶽降神 生甫及申〕” 하였고, 《장자》〈대종사(大宗師)〉에 “부열(傅說)이 도를 얻어……죽은 뒤에 천상의 별이 되어서 동유성(東維星)과 기미성(箕尾星)을 걸터타고서 뭇별과 나란히 있다.〔傅說得之……乘東維騎箕尾 而比於列星〕” 하였다.[주-D002] 호학(好學)하긴 안자(顔子) 같고 : 안자는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학문하는 즐거움을 버리지 않았다는 안연(顔淵)이다. 노나라 애공(哀公)이 공자에게 학문을 좋아하는 제자가 누구인지 물었다. 이때 공자는 “안회라는 제자가 학문을 좋아하여 노여움을 옮기지 않고 허물을 거듭 범하지 않더니, 불행히도 단명하여 죽었습니다. 지금은 없으니 학문을 좋아하는 이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有顔回者好學 不遷怒 不貳過 不幸短命死矣 今也則亡 未聞好學者也〕”라고 대답했다. 《論語 雍也》[주-D003] 검속하긴 정자(程子) 같아 : 정자는 이천(伊川)을 말한다. 그는 단정하게 검속함을 중요시하여 ‘정제엄숙(整齊嚴肅)’을 강조했다. 그래서 마음이 분란한 것을 학자의 공통된 병폐로 지적하며, “마음을 전일하게 하는 것은 다른 방법이 없고 외면을 정제하고 엄숙하게 하면 마음이 전일하게 된다.〔一者無他 只是整齊嚴肅則心便一〕” 하였다. 《近思錄 卷4》[주-D004] 한구(韓歐) : 당송팔가(唐宋八家)의 대표적 인물인 한유(韓愈 : 768~824)와 구양수(歐陽脩 : 1007~1072)를 말한다. 고봉이 이들의 문학을 계승하여 조선의 문단을 일신했다는 말이다. 한유는 당나라의 문장가로, 자는 퇴지(退之), 시호는 문공(文公)이며 회주(懷州) 수무현(修武縣) 출신이다. 대구(對句)를 중심으로 수사에 치중하는 변려문을 반대하고, 친구 유종원(柳宗元) 등과 함께 고문(古文)을 창도하였다. 저서에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이 있다. 구양수는 송나라의 문학가로, 자는 영숙(永叔), 호는 취옹(醉翁) 또는 육일거사(六一居士)이다. 10세 때 한유의 문집을 읽고 매료되어 서곤체(西崑體)가 유행하던 송나라 초기의 문단을 혁신한다. 저서에 《신오대사(新五代史)》, 《신당서(新唐書)》, 《모시본의(毛詩本義)》 등이 있다.[주-D005] 염락(濂洛) : 염락관민(濂洛關閩)의 준말이다. 염계(濂溪)의 주돈이(周敦頤), 낙양(洛陽)의 정자(程子), 관중(關中)의 장재(張載), 민중(閩中)의 주자를 통칭한 것으로, 곧 송대의 성리학을 뜻한다. 여기서는 고봉이 도학의 전통을 계승하였다는 말이다.[주-D006] 인정해 준 사람 : 퇴계 이황을 말한다.[주-D007] 덕불고(德不孤) : 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는다는 뜻이다. 《논어》〈이인(里仁)〉에 “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德不孤 必有隣〕” 하였다.[주-D008] 연비어약(鳶飛魚躍) : 하늘에는 솔개가 날고 못에는 고기가 뛴다는 뜻으로, 현상으로 나타나는 모습은 다르지만 관통하는 원리는 하나인 자연 만물의 이치를 가리킨다. 《시경》〈대아(大雅) 한록(旱麓)〉에 “솔개 날아 하늘에 이르고, 고기는 못에서 뛰네.〔鳶飛戾天 魚躍于淵〕” 하였다.[주-D009] 오성(五性)과 칠정(七情) : 오성은 사람이 타고난 다섯 가지 선한 본성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ㆍ신(信)을 말하고, 칠정은 사람의 일곱 가지 감정인 희(喜)ㆍ노(怒)ㆍ애(哀)ㆍ구(懼)ㆍ애(愛)ㆍ오(惡)ㆍ욕(欲)을 말한다.[주-D010] 양지(兩地)와 삼천(參天) : 삼천양지(參天兩地)와 같은 말로 하늘의 숫자는 홀수인 3이고 땅의 숫자는 짝수인 2라는 뜻인데, 《주역》 괘(卦)에서 숫자를 설정한 것이다. 여기서는 천지간의 모든 이치를 말한다. 《주역》〈설괘전(說卦傳)〉에 “하늘은 3이고 땅은 2로서 서로 숫자가 어울린다.〔參天兩地而倚數〕” 하였다.[주-D011] 귀촉(龜燭) : 거북과 촛불을 말한다. 거북은 점을 쳐서 알 수 없는 미래의 일을 밝히는 것이고, 촛불은 어두운 곳을 환하게 비추는 것이다. 즉 깊은 이치를 끝까지 연구하여 분명하고 확실히 알았다는 말이다.[주-D012] 수명은……맞고 : 어진 사람은 잡념이나 욕심이 적어 항상 편안하고 조용하기 때문에 흔히 장수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고봉이 마땅히 오래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마쳤다는 말이다. 《논어》〈옹야(雍也)〉에 “지혜로운 자는 즐겁고 어진 자는 장수한다.〔知者樂 仁者壽〕” 하였다.[주-D013] 벼슬은……찼네 : 고봉이 지닌 덕이 높으므로 지위가 높아야 마땅한데, 그렇지 못하고 지위가 낮아 덕에 걸맞지 않았다는 말이다. 맹자가 “천하에 도가 있을 때엔 작은 덕을 지닌 사람이 큰 덕을 지닌 사람에게 부림을 당한다.〔天下有道 小德役大德〕” 하였는데, 주자의 주에 “도가 있는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모두 덕을 닦아 지위가 반드시 덕의 크기에 걸맞았다.〔有道之世 人皆修德 而位必稱其德之大小〕”고 하였다. 《孟子 離婁上》 ‘位’ 자가 원문에는 ‘仁’으로 되어 있는데, 오자로 판단되어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2022-03-04 | NO.144
  • 밀주 사실을 순영(巡營)에 보고하다 -광주목사
    보첩고(報牒攷) 光州牧使○ 영조(英祖) 39년(1763)8월 초5일 금법(禁法)을 어기고 술을 빚은 자들에 대해 새로 반포한 영(令)에 따라 발각되는 대로 감처(勘處)한 일을 순영(巡營)에 보고하다첩보(牒報)하는 일. 술 빚는 것을 금지하는 일에 대해 잇따라 엄하게 신칙하여 기찰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본부(本府) 남면(南面) 흑성방(黑城坊)에 거주하는 백성 심차중(沈次中)이 기탄하지 않고 금법을 범하였으므로 그 방의 임장(任掌 호적 업무를 담당하는 하급 임시직)이 장물(臟物)을 압수해 바쳤습니다. 금령(禁令)이 더없이 지엄(至嚴)한데도 불구하고 간사한 백성이 두려워하지 않은 채 감히 이렇게 은밀히 술을 빚었으니, 너무나도 통분하였습니다. 그래서 새로 반포한 영에 따라 감처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위의 심차중을 먼저 수금(囚禁)해 놓고 첩보한 다음 회답의 제사(題辭)를 기다려 엄하게 형벌을 가하려고 합니다.차후에도 금법을 법한 자는 사체상 발각되는 대로 보고한 뒤에 회답의 제사를 받아 형벌을 시행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미 특교(特敎)의 정식(定式)이 있으니만큼 초범(初犯)과 재범(再犯)은 정식에 따라 곧바로 엄하게 형벌을 가함으로써 번거롭게 문보(文報)를 왕복하는 폐단을 없애야겠습니다만 마땅히 조율(照律 범죄 사실에 대하여 법조문을 적용함)해야 할 삼범(三犯)은 첩보를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모두 참작하여 지시를 내려 주셨으면 합니다.제사(題辭)간사한 백성이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감히 은밀히 술을 빚었으니 너무나도 놀랍고 통분하다. 심차중에게 한 차례 엄하게 형벌을 가한 뒤에 첩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초범과 재범의 부류는 새로 반포한 영(令)에 따라 본관(本官)이 징계하여 치죄해야 할 것이며, 조율해야 할 삼범은 마땅히 첩보해야 할 것이다.
    2023-08-17 | NO.143
  • 박공(朴公, 상현尙玄) 묘갈명 병서 - 한수재선생문집 제28권
    박상현(朴尙玄, 1629~1693) 묘갈명 병서 - 한수재선생문집 제28권 :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 1641~1721) 남쪽 지방에 명망이 유림(儒林)에 막중하고 학문이 정미(精微)한 경지에 도달한 자가 있으니, 우헌 처사(寓軒處士) 박공(朴公)으로 휘는 상현(尙玄)이요 자는 경초(景初)인데, 숭정 기사년(1629, 인조7) 5월 9일에 출생하였다.공은 어려서부터 더럽고 상스러운 말을 들으면 마치 자신을 오염시킬 듯이 여겼으며, 지극한 성품이 있어 15세에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3년 동안 채소와 국도 먹지 않고, 제사를 올리고 상식(上食)할 때에 정성과 공경을 지극히 하였다. 여러 삼촌들을 섬김에 공손하고 근신하여 비록 무더운 여름철이라도 나태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스승에게 취학하자,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부지런히 힘썼다. 경전(經傳)을 널리 통달하였는데, 특히 《대학(大學)》에 많은 공부를 하여 학문의 기초를 삼았으며, 회옹 부자(晦翁夫子 주희(朱熹))를 반드시 스승 삼고 본받아야 한다고 여기고, 산림에서 고요히 있으면서 부귀와 화려함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병자년과 정축년에 국가의 치욕을 당한 이후의 일을 언급하게 되면 일찍이 슬퍼하고 크게 한숨짓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집에 보관되어 있는 책력은 반드시 위호(僞號)를 지워 은미한 뜻을 부쳤다. 정미년에 중국 복식을 하고 중국 말을 하는 자 백여 명이 표류하여 우리나라에 도착하였는데, 그들은 스스로 말하기를 “중국의 동남쪽 조그마한 땅에는 황통(皇統)이 아직도 남아 있는바, 우리들이 바로 그 백성이다.” 하였다. 조정에서는 이 사실이 누설될까 두려워하여 이들을 붙잡아 북쪽의 청 나라 조정에 보내니, 공은 이를 통분히 여기고 서글퍼 하며 마침내 당세에 진출할 뜻을 단념하였다.일찍이 승려의 시축(詩軸)에 시(詩)를 쓰기를 “이 몸 뒤따라 바다에 뛰어들지 못하니, 나라를 떠나는 요양(遼陽)의 승려 대하기 부끄럽네.[將身未得追蹈海 羞對遼陽去國僧]” 하였다. 이에 공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지조를 우러러 흠모하였다.공은 한 방에 고요히 앉아 있으며 고명(高明)한 경지에 마음을 두었는데, 태극도설(太極圖說)과 《통서(通書)》ㆍ《정몽(正蒙)》ㆍ《황극경세(皇極經世)》ㆍ《계몽(啓蒙)》 등의 여러 책을 하나하나 정밀하게 연구하였으며, 편찬한 《음양소장도(陰陽消長圖)》는 크게는 일원(一元)의 수(數)와 작게는 1년의 운행으로부터 해의 주야와 달의 차고 기욺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안에 자세히 포함되어 있었다.또 혼천의(渾天儀)를 만들어 배우는 자들에게 밝게 보여 주었는데, 이것을 천상(天象)에 상고해 보면 부합하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승려인 운계(雲溪)라는 자는 역법(易法)에 조예가 깊었는데, 이것을 보고 감탄하기를 “우헌(寓軒)의 가슴속에는 온 천지를 포함하고 있다.” 하였으며, 족자(族子)인 승지 광후(光後)도 또한 일찍이 탄복하기를 “우헌의 학식은 자득(自得)한 맛이 있어 사람들이 미치기 어렵다.” 하였다.공은 일찍이 말씀하기를 “궁리(窮理)의 공부는 반드시 붕우의 강습에 의뢰하여야 한다.” 하였다. 그리하여 이른바 도의지교(道義之交) 중에는 유명한 선비와 대학자들이 많이 있었다.전현(前賢) 중에는 퇴계(退溪)와 율곡(栗谷)을 정주(程朱)의 정통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사단칠정(四端七情)의 이기설(理氣說)에 있어서는 퇴계를 버리고 율곡을 취하였다. 예학(禮學)에 있어서는 사계(沙溪)가, 주자(朱子)께서 미처 이룩하지 못한 것을 마침내 이룩하여 우리나라로 하여금 거룩한 추로지향(鄒魯之鄕)이 되게 하였으니, 그 공로가 크다 하였고, 현재 호걸스러운 재주와 성현의 학문은 또 우암(尤菴)만한 분이 없다 하여 편지를 주고받으며 논변하기를 거의 30년 가까이하였다. 그리하여 성명 이기(性命理氣)에 대한 말씀과 도기(道器)의 분별과 성기(誠幾)의 뜻을 많이 말씀하고 논란하여 밝게 통달하기를 구하였다.《중용(中庸)》의 미발(未發)의 뜻은 바로 주자께서 추요(樞要)라고 하신 것인데, 공은 이에 대하여 강하게 질문하기를 매우 많이 하여 《옹계일록(翁季一錄)》을 완성하였다. 우암 선생은 공이 마음 쓰기를 부지런히 하고 애쓰는 것을 깊이 아시고는 일찍이 “환히 알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는다.”고 칭찬하셨고, 또 말씀하기를 “늙어서도 학문을 좋아하니, 사문(斯文)이 의탁할 사람이 있다.” 하셨으며, 또 “모년(暮年)의 지기(知己)요, 천리의 신교(神交)이다.” 하셨으니, 공이 사종(師宗)에서 소중하게 여겨짐이 이와 같았다.교리 김만길(金萬吉)이 암행어사로 있으면서 공의 뛰어난 행실을 들어 임금께 아뢰었는데, 공은 갑자기 계유년(1693, 숙종19) 정월 병진일에 집에서 별세하니, 향년이 65세였다. 3월 경신일에 광주(光州)의 북쪽 태산(台山) 유좌묘향(酉坐卯向)의 산에 안장하였으며, 배위인 장택 고씨(長澤高氏)를 부묘하였다.공은 기상과 모습이 장엄하고 후중하였으며, 신채(神采)가 안정되었다. 말씀이 적고 조용하였으며, 걸음걸이가 안정되고 얌전하였다. 부정한 소리와 어지러운 색을 멀리 피하여 화살을 피하듯이 하였으며, 규문 안이 엄숙하고 온화하였고, 친척을 대함에 각기 그 환심을 얻었다.상대방이 횡포를 가해오면 공은 그와 더불어 따지지 않고 매양 옛사람의 “비방을 받으면 더불어 변론하지 말라.”는 말씀을 외었다. 이 때문에 시골과 이웃에서 교화되어 복종하고는 우헌 선생(寓軒先生)이라 칭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평양 박씨(平陽朴氏)는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 휘 가흥(可興)이란 분이 계신데 우의정을 지냈으며, 휘 석명(錫命)을 낳았는데 집현전 대제학을 지냈는바 공의 9대조이다. 증조의 휘는 언심(彦深)이요, 조고의 휘는 진정(震挺)이요, 선고의 휘는 수림(遂林)이며, 선비는 봉산 이씨(鳳山李氏)이다.배위인 고씨(高氏)는 처사(處士) 부민(傅敏)의 따님이며, 군수인 성후(成厚)의 손녀인데 부덕이 있었는바, 공보다 12년 뒤에 별세하였다. 3남 4녀를 두었는데, 장남 광일(光一)은 학행으로 천거되어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었으며, 차남인 광원(光元)은 사마시에 급제하여 봉사이고, 다음은 광선(光善)이다. 장녀는 기진성(奇震省)에게 출가하였고, 그 밖의 딸들은 이석필(李碩弼)과 생원 홍운(洪橒)과 기정륜(奇挺倫)에게 출가하였다. 왕자사부는 중휘(重輝)ㆍ중거(重擧) 등 2남을 두었다. 봉사는 6남을 두었는데, 중린(重麟)ㆍ중귀(重龜)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광선은 1남을 두었는데 어리다. 외손은 남녀가 약간 명이다.아, 상고 시대에는 지위가 반드시 덕에 걸맞았는데, 지금 세상에는 덕이 있으나 지위가 없는 자가 많으니, 공(公)에게 있어 어찌 가감될 것이 있겠는가마는 세도(世道)가 옛날만 같지 못함은 개탄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사부공(師傅公)은 가학(家學)을 전하여 명성이 한 세상에 가득하니, 누가 영지(靈芝)에 씨가 없고, 예천(醴泉)에 근원이 없다 말하겠는가.나는 기사년에 여러 번 장성(長城)에서 공의 훌륭한 모습을 가까이 뵈었으며, 근년에 선사(先師)의 유고(遺稿)를 편집하면서 또 공의 의론이 정밀하고 해박함에 감복하여 평소에 존경하고 우러러 왔다. 이제 사부가 나를 비루하다 여기지 않고 묘문을 부탁하니, 의리상 감히 사양하지 못하여 마침내 가장(家狀)을 뽑아 위와 같이 서하고 명문을 붙인다.종사의 한마디 말씀은 / 宗師片言구정과 대려처럼 소중한데 / 九鼎大呂공의 학문 훌륭하게 여겨 / 多公之學칭찬하고 표창하였네 / 以揚以詡이름이 남쪽 지방에 전하고 / 名流南服유풍이 학자들에게 입혀졌네 / 功被學者이 족히 후세에 없어지지 않을 것이니 / 斯足不朽나머지는 생략해도 괜찮으리 / 餘可略也[주-D001] 위호(僞號) : 청 나라의 연호(年號)를 낮추어 부르던 말. 당시 청 나라를 괴뢰(傀儡) 정권으로 보아, 위조(僞朝)의 연호란 뜻으로 말한 것이다.[주-D002] 일원(一元)의 수(數) : 옛날 역법(曆法)에서는 4617년을 일원이라 하였으며, 강절(康節) 소옹(邵雍)이 지은 《황극경세(皇極經世)》에는 12만 9600년을 일원이라 하였는데, 이는 천지(天地)가 생성되어 없어질 때까지의 기간을 통틀어 말한 것이다. 이외에도 술수가(術數家)에서는 ‘태을일원(太乙一元)’이라 하여 72년을 가리키기도 한다.[주-D003] 추로지향(鄒魯之鄕) : 교화(敎化)가 잘 베풀어지고 문화가 찬란한 지방을 가리키는 말. 주(周) 나라 말기 공자(孔子)는 노(魯) 나라에서 출생하였고, 맹자(孟子)는 추(鄒) 땅에서 출생하여, 이들 지방에 문풍(文風)이 크게 일어났으므로, 이를 비유하여 말한 것이다.[주-D004] 도기(道器)의 …… 뜻 : 《주역》 계사전(繫辭傳)에 “형이상(形而上)을 도(道)라 이르고, 형이하(形而下)를 기(器)라 이른다.” 하였는데, 도는 태극(太極)으로 이(理)를 가르키며, 기는 음양(陰陽)으로 기(氣)를 가리킨다.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의 《통서(通書)》에 “성(誠)은 무위(無爲)이고 기(幾)에는 선악(善惡)이 있다.” 하였는데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본성을 잘 보존한 상태를 성(誠)이라 하며, 정이 이미 나오면 선ㆍ악 기미(幾微)로 나누어진다 하여 기(幾)라고 이름한 것이다.[주-D005] 종사(宗師)의 …… 소중한데 : 종사는 훌륭한 스승을 일컫는 말로 우암을 가리킨다. 구정은 하(夏) 나라 우왕(禹王)이 구주(九州)의 쇠를 모아 주조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의 보정(寶鼎)으로, 역대 왕조에서는 수도(首都)를 새로 정할 때마다 반드시 이 구정을 옮겨 가곤 하였다. 대려(大呂)는 주(周) 나라 종묘(宗廟)에 있던 종(鐘)인데, 역시 보물로 알려져 구정과 함께 가장 소중한 것의 대명사로 쓰이고 있다.* 담양 창평의 동쪽에 있는 산이 월봉산이고 월봉산에서 무등산으로 이어지는 긴 산줄기가 태산(台山)이다. 이곳에서 김천일 장군이 태어났으며 그가 나주로 이주해 살았던 마을의 이름도 그래서 태산리다. 유천리는 신라시대 태산으로 불렀으며 고려 때 동촌으로 바뀌었다. 조선조에 들어와 유촌(柳村)으로 부르다가 유천(柳川)으로 바뀌었다. 태산이 유촌으로 바뀐 것은 능양군이 인조 임금이 되기 전 고경명-고인후-고부천으로 이어지는 3대에 걸친 충신고을을 세 번이나 찾아왔다가면서 이 마을이 ‘버들의 형국’이라 말한 데서 비롯되었고 전한다. 이후 고부천(高傅川)은 자신의 호를 월봉산에서 따와 월봉으로 지었고 고씨 후손들이 자작일촌으로 살면서 고부천의 이름에서 ‘천(川)’를 따와 유천으로 바뀐 것으로 전해진다.
    2020-09-29 | NO.142
  • 박광옥ㆍ김덕령의 사우에 대하여 사액하는 건 - 서원등록(書院謄錄)
    박광옥(朴光玉)ㆍ김덕령(金德齡)의 사우(祠宇)에 대하여 대신들에게 논의하게 하여 사액하는 건 - 숙종(肅宗) 6년(1680) : 서원등록(書院謄錄)윤8월 25일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이번 윤8월 24일 주강(晝講)에 입시(入侍)하였을 때, 동지사(同知事) 이민서(李敏敍)가 아뢰기를, ‘신이 광주(光州)에서 직책을 수행하고 있을 때, 광주의 백성들이 전송(傳誦)하는 말을 듣고 또 초야(草野)에 기록되어 있는 글을 참고해 보니, 광주 사람 박광옥(朴光玉)은 바로 명종(明宗)ㆍ선조(宣祖) 때의 사류(士流)입니다. 문과(文科) 출신으로 대관(臺官)과 시종(侍從)을 지냈으며, 언사(言事)를 올리고는 귀국하였는데,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하여 같은 고을 사람인 고경명(高敬命) 등과 더불어 창의(倡義)하여 군사를 일으켰으나, 노병(老病 늙어 쇠약해져서 생기는 병)이 깊어서 종군하지는 못하고 집에서 응접(應接)하고 모병(募兵)하며 군량(軍糧)을 모으는 등의 일을 하고 규획(規劃)한 바가 많았는데,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김덕령(金德齡)도 광주 사람인데, 그의 사적(事蹟)은 더욱 뛰어납니다. 그가 지닌 절륜(絶倫)의 용맹과 해를 꿰뚫을 충성심 그리고 하늘에 닿을 원통함은 온 세상 사람들이 송(宋)나라 때 악비(岳飛)에 견줍니다. 그 당시 원통하게 죽은 상황에 대하여 일찍이 선조(先朝)에서 공조 참판(工曹參判) 이단하(李端夏)가 탑전(榻前)에서 진달하여 대신들과 논의하여 원통한 것을 풀어주고,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습니다.’고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김덕령은 어찌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에 익호장군(翼虎將軍)이라고 칭한 것인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민서가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임금께서 이미 그 기록을 보셨으니, 그 사람의 생애에 대하여서는 상세하게 알고 계실 것입니다. 박광옥은 일찍이 고을 사람들이 사당(祠堂)을 세워서 제향(祭享)하였고, 김덕령은 추후에 병향(並享)하여 그 사우를 의열사(義烈祠)라고 하였는데, 당시에는 사액을 청하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비록 문무(文武)가 다르다고 할지라도 충의(忠義)의 절개는 모두 한 시대에서 나온 것이니, 조정에서 마땅히 포장(褒奬)하여 후세 사람들을 권면해야 합니다. 해조(該曹)에 분부하여 대신들과 의논하게 하여서 특별히 사액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해조에 명하여 대신들과 의논하여 사액(賜額)하라.’고 전교(傳敎)하였습니다. 대신들에게 논의하게 하니,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신이 공무를 본 이래로 장로(長老)가 전하는 말을 들어보니, 모두 김덕령이 충성스럽고 용맹스러운 사적과 원통하게 죽은 사실을 칭송하였습니다. 박광옥 경우에도 일찍이 그의 이름을 듣기는 하였으나, 여태껏 상세한 사행(事行)을 듣지 못하였는데, 지난해에 영남(嶺南)으로 내려가서 영남의 인사들과 만나 듣지 못했던 것을 더 듣게 되었습니다. 박광옥이 삼가고 힘써 실천하여 선배들에게 추중(推重)을 받고, 학도(學徒)를 모아 학문을 강하여 후생들에게 공(功)이 있었습니다. 만년에 이르러서는 또 의병들을 불러 모았으니, 사림들이 존숭하고 흠모하여서 향사(享祀)하는 것은 진실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김덕령의 경우에는 생전에 충효(忠孝)와 대절(大節)이 있었고, 또 아주 뛰어난 용맹을 겸비하여 임진년(壬辰年, 1592, 선조25)의 난리를 당하여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비록 왜적과 싸워 큰 공로를 세우지는 못하였으나, 왜적들이 그의 이름을 듣고서 두려워하여 벌벌 떨면서 감히 기세를 떨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왜적들이 사람을 보내어 몰래 그의 형상을 그려 오게 하여 그가 오는 것을 보고는 왜적들이 갑자기 병사들을 거두어 먼저 도망하였습니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모두 날뛰며 서로 기뻐하였으니, 그의 위명(威名)이 대단히 떨쳐졌던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功)을 세우기도 전에 죄 없이 죽자, 나라 안의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면서 송나라의 악비에 견주었습니다. 선조(先朝)에서 원통함을 풀어주고 거듭 관작을 추증하여 호남(湖南)의 인심(人心)을 크게 위로하니, 김덕령의 풍성(風聲)과 의열(義烈)이 사람들에게 칭송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관작을 추증하여 조정에서 숭상하고 장려하는 뜻을 보인 것은 과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지금 고을 사람들이 이미 두 사람을 한 사우에 병향(並享)하였으니, 연신(筵臣)이 진달한 대로 특별히 은액(恩額)을 하사하는 것이 진실로 충절을 드러내고 선(善)을 표창하는 도리에 합당하여 따로 더 의논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삼가 임금께서 재결(裁決)하여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김수흥(金壽興)이 아뢰기를, ‘신이 선조(先朝) 때 신축년(辛丑年, 1601, 선조34)에 호남(湖南)에서 염문(廉問)하도록 명령을 받아 오랫동안 광주에 머무르며 유생(儒生)ㆍ부로(父老)들과 만나게 되었는데, 김덕령의 일을 말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팔에 불끈 힘을 주고 매우 슬퍼하며 비탄에 잠겼습니다. 신이 이에 비로소 김덕령의 타고난 효성과 우애, 출중한 지략과 용맹은 진실로 세상에서 흔하지 않으며, 옛날의 열렬(烈烈)한 장부(丈夫)라고 하는 자들과 견주어도 부끄럽지 않다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불행하게도 난리를 만나서 몸을 떨쳐 의병을 일으켰으나, 공은 세우지 못하고 명성만 날로 드러났습니다. 마침내 이름은 존숭을 받았으나, 몸은 참화(慘禍)를 당하여 원통함을 품고 저승에서 지낸 지 70년이 되었습니다. 신이 당시에 인심(人心)을 파악하지 못하고 임금께 아뢰었는데, 당시에 아뢴 것을 항상 부끄러워하고 한탄하였습니다. 그 후에 원통한 사정을 아뢰는 자가 있어서 비로소 포증(褒贈)의 은전(恩典)을 시행하게 되어, 한편으로는 인심(人心)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박광옥의 경우에는 신이 비록 그의 인물됨에 대하여 여전히 논하지 못하였으나, 그가 학문을 닦고 자신을 엄격하게 단속한 것은 이미 선배들에게 인정을 받았으며, 그 유풍(遺風)과 여운(餘韻)은 후생(後生)들에게 충분히 모범이 될 만합니다. 이처럼 그가 수립한 경지는 사당에 제사를 드리는 것만으로는 아니 됩니다. 지금 김덕령과 박광옥을 병향한 사우에 의열(義烈)이라는 칭호를 더해 주는 것이 진실로 두 사람의 행적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은액(恩額)을 하사하여 임금께서 숭상하고 장려하는 성덕(盛德)을 보여 주심이 진실로 사리(事理)에 마땅합니다. 삼가 임금께서 재결하여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우의정(右議政) 민정중(閔鼎重)이 아뢰기를, ‘김덕령이 화를 입은 지 이미 백 년이 되었는데, 오늘날까지도 그의 풍문(風聞)을 들은 자는 비록 어린아이와 아녀자라 할지라도 모두 원통해하니, 영남의 인사들만이 감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충용(忠勇)한 절개는 충분히 후세 사람들을 흥기시킬 수 있으며, 참혹하게 화를 당한 것은 실로 뛰어난 충성심과 용맹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나라 사람들이 그를 송나라의 악비에 견준 것은 매우 안타까워서 슬퍼하는 말이었습니다. 일찍이 선조(先朝)에서 그를 특별히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추증(追贈)하여 저승에 있는 원혼을 위로하고, 매우 원통해하는 인심(人心)을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참혹하게 화를 당한 것은 여전히 씻어내기 어려우니, 그가 나라를 위하여 바친 충성을 숭상하고 장려해야 할 것입니다. 박광옥은 어릴 때부터 자신을 엄격하게 단속하고, 늙기도 전에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와 선배들에게 인정을 받고, 후생(後生)들에게 존경과 흠모를 받았습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는 죽음을 앞에 두고도 의병을 일으켜서 국가를 위하여 왜적의 침입을 막아냈습니다. 그의 생애를 궁구해 보면, 다만 한 고을만의 훌륭한 선비가 아니니, 제사를 지내는 일은 참으로 과람(過濫 분수에 넘치는 데가 있음)된 것이 아닙니다. 이어서 임진왜란 때의 일을 생각해 보면, 선조께서 중흥의 업을 이룩할 때, 진실로 호남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선비들에게 힘을 입은 바가 있었으니, 성조(聖祖)께서 인재를 배양하신 효과가 더욱 중흥의 성대한 공업(功業)에 빛이 났던 것입니다. 지금 김덕령과 박광옥 등을 병향한 사우에 직질(職秩)을 더하고 편액(扁額)을 내려주어 여러 대에 미처 행하지 못했던 일을 거행하여, 한 도(道)의 오랜 숙원(宿怨)을 위로해 주시는 것이, 진실로 포숭(褒崇)하고 권면(勸勉)하는 떳떳한 일에 합당할 것입니다. 삼가 임금의 재결을 바랍니다.’고 하였습니다. 좌의정(左議政) 정지화(鄭知和)는 병으로 수의(收議)하지 못하였습니다. 대신들의 뜻이 이와 같으니, 임금께서 재결하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니, 임금이 “특별히 증직(贈職)하고 사액(賜額)하여 포장(褒獎)의 뜻을 보이라.”고 전교(傳敎)하였다.[주-D001] 주강(晝講) : 조선 시대에 경연 특진관(經筵特進官) 이하가 오시(午時)에 임금을 모시고 법강(法講)을 행하던 일로서, 주강 외에도 조강(朝講)과 석강(夕講) 등이 있음.9월 초9일 박광옥(朴光玉)ㆍ김덕령(金德齡)을 병향(並享)한 사우(祠宇)에 사액(賜額)하는 건예조(禮曹)의 단자(單子)에, “광주(光州)의 박광옥(朴光玉)과 김덕령(金德齡)을 합향(合享)한 사우(祠宇)에 사액(賜額)하는 일을 대신들과 논의하여 이미 계하(啓下)를 받았습니다. 교서(敎書)와 액호(額號)를 전례대로 예문관(藝文館)으로 하여금 짓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2020-12-17 | NO.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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