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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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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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곡집 제8권 / 응제록(應製錄)- 한성우
    도곡집 제8권 / 응제록(應製錄)전 참판 한성우에게 내린 치제문 신묘년(1711, 숙종37) 〔前參判韓聖佑致祭文 辛卯〕선왕께서 훌륭한 사람들을 등용하시니 / 宣后宅俊충정공이 보필하였고 / 有弼忠靖또한 문원공이 있었으니 / 亦維文元그 학문 성인을 바라는 것이었네 / 其學希聖경은 이 두 대현을 이어서 / 卿承兩大대대로 훌륭함에 걸맞았네 / 克稱世令기개와 도량이 단정하고 / 器度端介풍모가 굳세었네 / 風標剛挺성균관 유생으로 있을 때부터 / 自在儒衿화려한 명성을 떨쳤다네 / 華聞蔚炳일마다 어려움이 없었으니 / 遇事無難오직 강직함을 지켰기 때문이라오 / 惟直是秉현자의 무고를 힘써 변론하니 / 力辨賢誣어찌 화난을 두려워했겠는가 / 奚怵禍穽늦은 나이에 음직으로 굽혀 나아가니 / 晩屈蔭階벼슬길이 막힘을 모두 서글퍼하였네 / 咸嗟蹭蹬문과에 급제한 뒤에는 / 迨其奮翼그 명성 누가 다툴 수 있었겠는가 / 厥聲孰競벼슬길이 열림에 / 旣闢晉塗대간직에 여러 번 등용되었네 / 婁登臺省홀로 깨끗한 지조를 지키니 / 獨持淸裁사람들이 골경의 신하라 추앙하였네 / 人推骨鯁얼굴빛 엄정히 하고 직간을 하니 / 正色讜言보는 자들이 목을 움추렸지 / 觀者縮頸행보가 또 다시 막혔으나 / 跡仍淹閡마음은 절로 고요하였네 / 心自閒靜음과 양이 소장하는 즈음에 / 消長之際그 뜻이 더욱 굳건하였네 / 其志彌勁그러다 마침 갑술경장을 만나 / 屬値更張다시 사명을 도왔네 / 起贊詞命경연에서 좋은 말로 나의 마음 적셔주니 / 經帷沃心경계한 말이 간곡하였다네 / 懇懇箴警승지가 되고 육조의 일 맡음에 / 納言佐部관직에 걸맞지 않은 적 없었네 / 靡不官稱지방관으로 나가서도 / 出涖州鎭훌륭한 정사가 많았다오 / 又多異政병폐를 없애고 폐단을 제거하며 / 剔瘼祛弊자신의 몸가짐은 깨끗하게 하였네 / 自礪則淨외직과 내직이 모두 알맞았으니 / 外內俱宜명망과 실재가 더욱 성대하였네 / 望實愈盛개성 유수에 발탁되고 / 庸擢留筦중간에 관찰사도 맡았었네 / 間寄藩屛해임하고 간 후에도 은택이 흡족하니 / 惠洽去後백성들이 공덕을 칭송하였네 / 民口有詠조정에 있을 때에는 / 當其在朝번번이 대사간을 맡았는데 / 輒都諫諍강개하게 정사를 논하니 / 忼慨論事늙어도 더욱 굳세었네 / 老而益硬상소 또한 있었으니 / 亦有章牘충성스런 마음이 빛나고 빛났도다 / 忠悃耿耿억울한 이를 신원해준 것은 / 伸直幽枉또 핵심을 찌른 것이었다네 / 復中肯綮전형의 일에 참여하게 되자 / 及參銓衡감식안이 더욱 드러났다네 / 尤著藻鏡탁한 것 헤쳐내고 맑은 것 뽑아 올리는 것을 임무로 삼으니 / 激揚是任비방과 중상이 무슨 문제이겠는가 / 謗傷何病머리 숙여 배회하며 자취를 숨겼는데 / 低徊屛跡갑자기 영영 가버렸네 / 奄促頹景쓰임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 其用未究그를 위해 눈물 줄줄 흘리노라 / 涕爲之逬경의 평생을 생각해보면 / 摡卿平生그 아름다움에 누가 짝할 수 있으리오 / 懿美誰並집안에서 효도하고 우애한 것은 / 家庭孝友천성에서 나온 것이었네 / 寔出天性청백하고 고아한 규범은 / 淸規雅範소태나무처럼 쓰고 얼음처럼 맑았다네 / 蘗苦氷瑩인물을 간별하는 것이 분명하였고 / 臧否之晳지조를 지킴이 엄정하였네 / 執守之正시종 명예와 절개를 지켰으니 / 始終名節작은 하자도 볼 수 없네 / 不見瑕眚지금 어찌 다시 살아날 수 있겠는가 / 今何可作끝났으니 갱생하기 어렵도다 / 已矣難更어느덧 장례일에 이르러 / 遠日忽届상여에 이미 멍에를 정돈했도다 / 輀車旣整이에 사관에게 명하여 / 爰命祠官대신 술잔을 권하고 고하도록 하였네 / 侑告是倩내 말이 애처롭고 / 予辭之戚내 술이 깨끗하니 / 予酌之泂신령이 만약 어둡지 않다면 / 靈如不昧흠향하고 들으소 / 尙克歆聽[주-D001] 한성우(韓聖佑) : 1633~1710. 자는 여윤(汝尹),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1669년(현종10)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84년(숙종10)에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조 좌랑이 되었으며, 1689년 기사환국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갔다. 이후 1694년 갑술옥사로 남인세력이 무너지자 수찬에 재기용된 뒤, 교리ㆍ응교ㆍ집의ㆍ사간 등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699년 대사간에 올라 시무책 3개조를 상소하는 등 활약하였으며, 그 뒤 철원 부사ㆍ광주 목사(光州牧使) 등을 거치면서 선정을 베풀었고, 광주에서는 그의 덕망을 기려 주철(鑄鐵)로 된 송덕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이후 전라도 관찰사ㆍ대사간ㆍ판결사 등을 역임했고, 개성 유수로 나갔다가 1707년 병조 참판에 올랐다. 그 뒤 이조와 공조의 참판, 대사성 등의 벼슬이 내려졌지만 병을 이유로 모두 물리쳤으며, 향리에서 머무르다가 78세로 졸하였다. 주자학(朱子學)에 조예가 깊었으며, 많은 저서를 남겼다고 하나 대부분 흩어져 남아있지 않다.[주-D002] 훌륭한 사람들을 등용하시니 : 원문의 ‘택준(宅俊)’은 삼택(三宅)과 삼준(三俊)을 가리키는 것으로, 《서경》 〈주서(周書) 입정(立政)〉에 “성탕(成湯)이 천자가 되어 상제의 빛나는 명을 크게 다스리신 것은, 등용한 삼유택(三有宅)이 택(宅)의 지위에 나가며, 이른바 삼유준(三有俊)이 준(俊)의 덕에 나아갔기 때문이니, 엄숙히 생각하고 크게 본받으시어 삼택(三宅)ㆍ삼준(三俊)을 잘 쓰셨던 것입니다.〔亦越成湯陟丕釐上帝之耿命, 乃用三有宅克卽宅, 曰三有俊克卽俊, 嚴惟丕式, 克用三宅三俊.〕”라고 보인다. 삼택은 상백(常伯)ㆍ상임(常任)ㆍ준인(準人)의 지위에 거한 자를 이르고, 삼준은 상백(常伯)ㆍ상임(常任)ㆍ준인(準人)의 재주가 있는 자를 이르는바, 택준은 훌륭한 임금이 어진 사람을 잘 쓰고 기름을 의미한다.[주-D003] 충정공(忠靖公) : 한응인(韓應寅, 1554~1614)으로,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졸재(百拙齋)ㆍ유촌(柳村),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다. 한성우의 고조이다.[주-D004] 문원공(文元公) : 김장생(金長生, 1548~1631)으로,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이다. 이이(李珥)의 문인이며 예학(禮學)을 깊이 연구하여 조선예학의 태두가 되었다. 한응인의 아들 덕급(德及)이 김장생의 사위였으므로, 김장생은 한성우의 외외증조부가 된다.[주-D005] 성인을 바라는 것이었네 : 문원공의 학문이 성인이 되기를 바라는 현인의 학문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주돈이(周敦頤)의 《통서(通書)》에 “성인은 하늘이 되기를 바라고, 현인은 성인이 되기를 바라고, 선비는 현인이 되기를 바란다.〔聖希天, 賢希聖, 士希賢.〕”고 한 말에서 온 것이다.[주-D006] 현자의 …… 변론하니 : 1674년(숙종 즉위년) 인선왕후(仁宣王后)에 대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로 송시열(宋時烈) 등이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되자, 한성우가 180인의 유생들과 함께 소를 올려 부당함을 주장한 일을 말한다. 《肅宗實錄 卽位年 10月 2日》[주-D007] 늦은 …… 나아가니 : 1680년(숙종6)에 경신대출척으로 송시열 등이 다시 등용되었는데, 당시 문과에 급제하기 전이었던 한성우는 숭릉 참봉(崇陵參奉)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봉사ㆍ직장 등을 역임하였다.[주-D008] 문과에 급제한 뒤에는 : 1684년(숙종10)에 성균관 제술에서 장원을 하였으며 그해 52세의 나이로 전시에 합격하였다.[주-D009] 골경(骨鯁)의 신하 : 골경은 짐승의 잔뼈와 생선의 뼈를 의미하는 말인데, 이것들은 뻣뻣하여 목에 잘 넘어가지 않으므로, 임금이 거북해하는 직간도 꺼리지 않는 강직한 신하를 비유하여 ‘골경의 신하’라고 한다.[주-D010] 행보가 또 다시 막혔으나 : 1689년(숙종15) 기사사화에 송시열이 제주도에 유배되자, 한성우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일을 가리킨다. 《寒水齋集 卷25 參判韓公聖佑神道碑銘并序》[주-D011] 음과 …… 즈음에 : 양이 자라면 음이 사라지고 음이 자라면 양이 사라지는 것이 음양이 소장(消長)하는 이치인데, 여기에서는 음이 자라나 양이 사라짐에 의미를 두고 한 말로서, 당시 당쟁에서 서인이 실권하고 남인이 집권했을 때를 가리킨 것이다.[주-D012] 그러다 …… 도왔네 : 1694년(숙종20)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이 등용되었으며, 한성우는 소명을 받아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사명(詞命)은 외교문서나 임금의 글을 가리키니, 한성우가 홍문관 관직에 임명되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주-D013] 좋은 …… 적셔주니 : 원문의 ‘옥심(沃心)’은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인도하여 보좌하는 것을 말한다. 고종(高宗)이 재상 부열(傅說)에게 “그대 마음속의 물줄기를 터서 나의 마음속으로 흘려보내 적시도록 하라.〔啓乃心, 沃朕心.〕”고 부탁한 말에서 나온 것이다. 《書經 商書 說命上》[주-D014] 병폐를 …… 제거하며 : 1701년(숙종40)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궁가에서 점유한 산택이 수십 군데에 이르러 그 폐단이 심하였으므로 장계를 올려 혁파하기를 청한 일 등이 있다.[주-D015] 억울한 …… 것이었다네 : 1708년(숙종34)에 이동언(李東彦)이 불효의 죄를 얻어 옥에 갇혀 있었는데 한성우가 동지의금부사로 상소하여 그를 대변해주었다. 이동언은 대간활동을 활발히 하여 남의 미움을 많이 샀었는데, 당시 조태억의 모함으로 투옥되었던 것이었다. 한성우의 변호에도 불구하고 석방되지 못해 옥사하였다. 이듬해 이재(李縡)의 상소로 이동언이 신원되자 사람들은 한성우의 상소가 장본이었다고 말하였다. 한성우는 이 일로 1년이 넘도록 벼슬길이 막혔다. 《肅宗實錄 34年 閏3月 19日》 《寒水齋集 卷25 參判韓公聖佑神道碑銘并序》
    2023-12-04 | NO.170
  • 동강유집 제10권 / 서(序)- 《고갑신편》의 서문〔蠱甲新編序〕
    동강유집 제10권 / 서(序)- 《고갑신편》의 서문〔蠱甲新編序〕신익전《주역》 〈고괘(蠱卦)〉 효사(爻辭)에 ‘선갑삼일 후갑삼일(先甲三日, 後甲三日)’이라고 하였는데, 고(蠱)는 일이고, 갑(甲)은 때이니, 앞의 3일은 시작하는 것이고 뒤의 3일은 마치는 것이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번번이 일을 만나는데 일은 천만 가지가 있다. 평상시에나 변화를 만났을 때나 그 중도를 지킬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은 성현도 어렵게 여기신 것인데 하물며 난세의 끝에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어떠하겠는가. 제갈무후(諸葛武侯 제갈량)는 왕좌(王佐)의 재주를 가진 사람이다. 주군에게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 일입니다.〔難平者事也〕”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선갑삼일 후갑삼일’의 은미한 뜻을 알았던 것이 아니겠는가.내가 태어난 지 겨우 43년인데, 참으로 천지가 뒤바뀐 때를 만나 내우외환(內憂外患)을 겪느라 전후로 근 천년 동안 만나기 어려운 일이 모두 목전에 모여 어떻게 해결할 방도가 없다. 이러한 때 나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야 할 책임이 어떠하겠는가. 하지만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뜻이 약해져 마치 장님에게 도와주는 사람이 없는 것과 같으니 큰 길에서도 쉬이 길을 잃을 판인데 태항산(太行山) 험한 길에 수레가 부서진 이러한 상황에서야 어떠하겠는가.이 때문에 우울해서 누구와도 말을 나누지 않고, 그저 옛 책을 가져다 옛사람이 먼저 얻은 것을 찾았다. 그러나 주공(周公) 이후로 더 이상 선정이 없었고 사변이 일어나는 것은 후대로 내려올수록 더욱 심해져서, 무지한 나로서는 늦게 태어났다는 한탄만 더할 뿐이었다. 매번 책에서 위기를 볼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리지 않은 적이 없어서 마치 묵은 병을 가진 사람이 의서(醫書)를 보고 또 보고 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나는 본래 어리석어서 잘 기억하지 못한다. 방금 덮은 책도 읽지 않은 것 같을 정도이니, 마음에 드는 글을 볼 때마다 쪽지에 적어 잊어버릴 것에 대비한 지가 몇 년이나 되었다.아들 정(晸)이 옆에 있다가 깨끗이 써서 책으로 엮을 것을 청하고 또 표제를 써 달라고 청하였다. 그래서 ‘고갑신편(蠱甲新編)’이라고 제목을 달았으니 고괘(蠱卦)의 뜻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기록한 것은 모두 전국 시대 칠웅(七雄) 이후 쇠퇴한 말세의 문헌이니 고(蠱)를 만나 고괘의 도에 어긋나지 않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그러나 10월은 모두 음효(陰爻)인데 선유들이 도리어 양월(陽月)이라고 부른 것은 양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표제를 지은 의도는 음(陰)을 억제하는 뜻을 담은 것이고 또 일을 다스리기 어려움이 이와 같다는 것을 보여 스스로 힘쓰고자 한 것이다. 뒤에 보는 사람들이 나의 이 뜻을 참람하게 여기지 않고 안타깝게 여겨줄지 모르겠다.정해년(1647, 인조25) 겨울, 일헌도인(一軒道人)은 광산(光山)에서 이 글을 쓴다.[주-D001] 고갑신편의 서문 : 1647년(인조25), 저자 나이 43세에 쓴 글이다. 이때 저자는 광주 목사(光州牧使)를 지내고 있었다.[주-D002] 다스리기 …… 일입니다 : 제갈량(諸葛亮)의 〈출사표(出師表)〉에 나오는 말이다.[주-D003] 태항산(太行山) …… 부서진 : 태항산은 중국 하남성(河南省)에 있는 산으로 매우 험준하기로 유명하다. 백낙천(白樂天)의 〈태항로(太行路)〉란 시에, “태항산 길이 능히 수레를 부수지만 임금의 마음에 비긴다면 평탄한 길이요, 무협의 물이 능히 배를 전복시키지만 임금의 마음에 비긴다면 안온한 흐름이다.〔太行之路能摧車, 若比君心是坦途. 巫峽之水能覆舟, 若比君心是安流.〕” 하였다.
    2023-12-04 | NO.169
  • 동강유집 제12권 / 제문(祭文)- 청음 김상헌 선생에 대한 제문〔祭淸陰金先生文〕
    동강유집 제12권 / 제문(祭文)- 청음 김 선생에 대한 제문〔祭淸陰金先生文〕아, 하늘은 우리 선생을 석과(碩果)로 인정하였건만 어찌하여 선생(金尙憲, 1570~1652)께선 갑자기 이 세상을 헌신짝처럼 버리셨습니까. 선생의 절의와 문장은 이미 온 천하를 진동시키고 역사에 빛나기에 충분하니 지난날 선생을 시기하여 모함하던 자들도 장차 이마에 땀이 흐를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는 선생을 조금 안다고 말하는 자들이 필시 적지 않겠지만, 천하를 진동시키고 역사에 빛날 선생의 절의와 문장이 실로 근본이 있음을 살핀 자들이야 얼마나 되겠습니까.제가 비록 보잘것없는 몸이지만 일찍이 선친께서 남기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선친께선 평소 항상 선생을 언급하시면서 꼭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습니다.“그 사람의 뛰어난 절의는 어린 임금을 맡길 만하고, 그의 문장은 나라를 빛내고 훌륭한 문장가의 뒤를 잇기에 충분하다. 이는 본래 빼어난 기운을 타고난 것이지만 학문으로 터득한 것이 많았다.”아직도 귀에 쟁쟁한 그 말씀을 저는 마음속 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그런 선생께서 이제 끝나고 말았습니다. 선친의 막역지우도 소자가 믿고 의지하던 분도 모두 하루아침에 잃고 말았으니, 갈 길을 잃고 헤매는 이 몸은 장차 누구를 의지한단 말입니까.선생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엔 단지 조정의 석과였을 뿐만 아니라 실로 선친의 벗 가운데서도 석과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헌신짝처럼 세상을 버리고 아득히 날아가는 새를 타고 돌아보지 않으시니, 이제부터 우리 양가 자손들이 아버지와 스승을 사모하는 마음을 붙일 곳은 오직 우리 선친이 선생께 준 서문 두 편, 선생께서 써주신 선친의 행장과 문집 서문, 두 분이 평소 주고받으신 시편 등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아, 슬픕니다.사람들은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단련할수록 순정해지는 것은 좋은 금이고, 태울수록 향이 짙어지는 것은 향기로운 난초이다.”그러나 역경을 만날수록 더욱 빛나는 선생의 도는 금이나 난초에 비할 바가 아니니, 천하를 진동시키고 역사에 빛날 선생의 절의와 문장은 마땅히 먼 훗날까지 길이 전해질 것입니다. 아, 슬픕니다.선생께서 심양(瀋陽)에 들어가 계실 때 저도 뒤따르게 되었는데, 그때 본 선생의 안색과 음성은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습니다. 선생께서 고국으로 돌아오신 뒤에 제가 석실(石室)에서 뵈었고, 또 서울 집에서도 뵈었는데, 그때의 안색과 음성이 심양 객관에 계실 때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이를 보고난 뒤에야 저는 선생의 절의와 문장이 모두 근본이 있고 괜히 그런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 슬픕니다.을유년(1645, 인조23) 겨울에 제가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나갈 때엔 선생께서 율시 한 수를 지어 주시고, 또 소서(小序)를 지어 아픈 사람 보살피듯 백성을 살피라는 뜻으로 격려하셨습니다. 지난 가을 제가 송도 유수(松都留守)에 제수되어 선생께 하직 인사 올리러 찾아뵈었을 때 선생께선 병석에 계셨습니다. 제 손을 잡고서,“이번에 헤어지는 것이 영원한 이별이겠구나.”라고 슬프게 말씀하시면서 선친과 돈독했던 교분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셨습니다. 아! 슬픕니다. 그 때가 얼마나 지났기에 더 이상 조정과 선친의 벗 사이에서 선생을 볼 수 없단 말입니까. 더구나 지금 내가 온 것이 사(賜)보다 늦어서 선생의 장례에 상엿줄도 잡지 못하여 뒤늦게 궤연(几筵)에 제물을 올리니, 스승을 잃고 헤매는 소자의 슬픔이 어찌 심하지 않겠습니까. 아, 슬픕니다.[주-D001] 청음 …… 제문 : 이 글은 1652년 6월 25일 세상을 떠난 김상헌(金尙憲, 1570~1652)에 대한 제문이다. 김상헌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ㆍ석실산인(石室山人)ㆍ서간노인(西磵老人)이다. 1596년(선조29)에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 육조의 판서, 좌의정 등을 역임하였다.[주-D002] 석과(碩果) : 과일 나무 높은 가지 끝에 달려 있어 사람들이 따 먹지 못하는 한 개 남은 큰 과일을 말하는데, 종자가 되어 다시 훗날을 기약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어지러운 세상에서도 큰 덕을 지닌 채 소인들에게 해를 당하지 않고 있는 군자를 지칭한다. 《주역》 〈박괘(剝卦) 상구(上九)〉 효사(爻辭)의 ‘큰 과일은 먹지 않는다.〔碩果不食〕’는 것은 음(陰)이 아무리 치성해도 양(陽)이 없어지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다.[주-D003] 우리 …… 서문 : 한국문집총간 71집에 수록된 《상촌고(象村稿)》에 저자의 부친이 쓴 〈송김교리상헌이안무어사부제주서(送金校理尙憲以按撫御史赴濟州序)〉와 〈송김판관상헌부경성서(送金判官尙憲赴鏡城序)〉 및 청음 김상헌이 쓴 〈상촌선생집서(象村先生集序)〉와 〈행장(行狀)〉이 실려 있다.[주-D004] 선생께서 …… 되었는데 : 김상헌은 청나라의 출병 요구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1940년(인조18)에 청나라에 압송되었고, 저자는 1642년에 명나라를 지지하고 청나라를 배척하였다는 일로 심양으로 압송되었다.[주-D005] 석실(石室) : 양주(楊州) 동쪽에 있는 산 이름인데, 김상헌이 이곳에서 은거하며 석실산인(石室山人)이라는 자호(自號)를 쓰기도 하였다.[주-D006] 사(賜)보다 : 사는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이다. 자공은 공자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왔는데, 저자는 청음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에 찾아왔다는 말이다. 공자가 세상을 떠나기 일주일 전에 아침 일찍 일어나서 뒷짐을 진 채 지팡이를 끌고 문에서 소요하며 위인의 죽음을 노래하자, 자공이 그 노래를 듣고 탄식하면서 달려가니, 공자가 “사야,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더디게 오느냐.”라고 하며 자신이 죽을 것을 예견했다는 고사가 있다. 《禮記 檀弓上》
    2023-12-04 | NO.168
  • 동강유집 제19권 / 부록 3(附錄三)- 사제문〔賜祭文〕 [이유명(李惟明)]
    동강유집 제19권 / 부록 3(附錄三)- 사제문〔賜祭文〕 [이유명(李惟明)]경자년(1660, 현종1) 5월 을묘삭(乙卯朔) 28일 임오일, 국왕은 신(臣) 예조 정랑 이유명(李惟明)을 보내 고(故) 상호군 신익전(申翊全)의 영전에 유제(諭祭)한다.경은 / 惟卿교목세가 출신으로 / 喬木世家옥 같은 사람이었네 / 其人如玉집안의 가르침 받아 / 服襲庭訓경학을 깊이 파고들었네 / 沈潛經學의지가 굳고 행실이 순수하여 / 志篤行純몸을 수양하고 덕을 함양하였네 / 澡身浴德여사로 문예에 노닐어 / 餘事游藝글씨로 칭송이 자자했네 / 譽洽文墨명망이 매우 높았는데 / 聲望藹蔚일찍 과거에 급제하여 / 早通桂籍옛적 선조(先朝 효종) 때부터 / 粤自先朝항상 성은을 입었네 / 常垂睿渥처음 예문관에 들어가 / 初登翰苑동호처럼 직필을 잡더니 / 狐筆秉直곧 사간원에 들어가서는 / 俄入薇垣약석 같은 충언을 올렸네 / 忠言藥石홍문관에서 문장을 짓고 / 玉署摛文사헌부에서 직언하며 / 烏臺謇諤원묘의 일을 주관하고 / 董事園墓나라의 책문을 썼네 / 揮翰寶冊그동안 가자받은 것은 / 前後恩資실로 성상의 총애에서 나왔다네 / 實出寵擢영남과 호남의 수령이 되어서는 / 分憂二南모두 명성과 치적이 있었고 / 皆有聲績개성 유수로 재직할 때는 / 居留舊都청백리로 칭송이 자자했네 / 頌騰淸白오조의 참판을 지낼 적에는 / 貳卿五曹문앞에 청탁이 끊어졌네 / 門絶請托한성부 좌윤과 우윤을 지내자 / 亞尹三輔백성이 은택을 구가하였네 / 民歌遺澤몇 번이나 도승지에 올라 / 幾長銀臺출납의 직무를 잘 수행했던가 / 出納稱職왕실과 혼인을 맺어 / 姻聯宮掖기쁨과 슬픔 함께 하였네 / 義同休戚내외의 관직을 두루 거치며 / 歷試外內마음과 힘을 다하였네 / 殫竭心力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 終始如一조심하면서도 편안하였네 / 畏愼恬泊영욕과 희비에 관계 없이 / 榮辱喜戚평소의 지조를 바꾸지 않았네 / 素操不易어진 이는 장수해야 하는데 / 仁宜有壽하늘은 어찌 빨리 빼앗아갔나 / 胡奪之速목가의 재앙이 심하니 / 災深木稼나의 서러움 끝이 있으랴 / 予慟何極경이 죽어 한스럽지만 / 云亡有恨구천에서 살려낼 길 없구나 / 九原難作이에 담당 관원을 보내어 / 茲遣有司변변찮은 제수를 올리노라 / 奠此菲薄아, 애통하다 / 嗚呼痛哉영령은 흠향하기 바라오 / 靈庶歆格[주-D001] 유제(諭祭) : 제왕이 예관(禮官)을 보내어 신하를 제사하는 것으로 치제(致祭)라고도 한다. 유제문(諭祭文)은 제문에 해당하는 문체이다.[주-D002] 교목세가(喬木世家) : 국가의 훈구대신 집안을 가리킨다. 교목은 높고 큰 나무로 고국이나 고리(故里)를 가리키고, 세가는 누대에 걸쳐 덕을 닦은 훈구(勳舊)의 가문을 뜻한다. 《孟子 梁惠王下》[주-D003] 몸을 …… 함양하였네 : 심신을 수양하여 고결하게 하는 것이다. 《예기》에 “선비는 몸을 씻어 정결히 하고 덕에 목욕한다.〔儒有澡身而浴德〕” 하였는데, 공영달(孔穎達)의 소(疏)에 “조신(澡身)은 그 몸을 씻어 깨끗하게 하여 혼탁한 데 물들지 않게 하는 것이고, 욕덕(浴德)은 덕에 목욕하여 덕으로 스스로 맑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禮記 儒行》[주-D004] 동호(董狐)처럼 직필을 잡더니 : 사관으로서 사실을 기록하는 데 꺼리거나 숨김이 없었다는 뜻이다. 춘추 시대 진(晉)나라의 사관 동호가 역사서에 직서하였는데, 공자가 “동호는 옛날의 훌륭한 사관이다. 필법에 숨김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春秋左氏傳 宣公2年》[주-D005] 원묘의 일을 주관하고 : 저자는 1645년(인조23)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서거하자 묘소도감 도청(墓所都監都廳)에 차임되었다. 《東江遺集 卷17 附錄1 家狀》[주-D006] 나라의 책문을 썼네 : 저자는 1649년(인조27)에 세손교명문(世孫敎命文)을 썼고, 인조가 승하하자 시책문(諡冊文)을 썼으며, 1659년(효종10)에 효종이 승하하자 애책문(哀冊文)을 썼다. 《東江遺集 卷17 附錄1 家狀》[주-D007] 영남과 …… 되어서는 : 저자가 광주 목사(光州牧使)와 밀양 부사(密陽府使)를 역임한 일을 가리킨다. 《東江遺集 卷17 附錄1 家狀》[주-D008] 왕실과 혼인을 맺어 : 신익전의 둘째 딸이 왕자 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에게 출가했다. 《東江遺集 卷17 附錄1 家狀》[주-D009] 목가(木稼) : 현달한 관원의 죽음을 가리킨다. 목가는 비, 눈, 서리, 안개가 나무에 붙어 있다가 추위에 응결되어 얼어붙는 것으로, 이런 현상이 발생하면 고관이 죽는다는 속설이 있다. 《舊唐書 卷95 睿宗諸子列傳 讓皇帝憲》
    2023-12-04 | NO.167
  • 동강유집 제19권 / 부록 3(附錄三)- 제문〔祭文〕 [박세채(朴世采)]
    동강유집 제19권 / 부록 3(附錄三)- 제문〔祭文〕 [박세채(朴世采)]무신년(1668, 현종9) 8월 정묘삭 11일 정축일, 외숙 동강(東江) 신공(申公)을 장차 양주(楊州)에서 충주(忠州)로 이장하게 되었습니다. 조카 반남(潘南) 박세채(朴世采)는 마침 병으로 체류하느라 삼가 아들 태은(泰殷)을 보내어 영전에 술과 과일을 대신 올리게 하고 제문을 지어 흠향하시길 권합니다.아 / 嗚呼고려의 국운이 열리려 하자 / 麗運方始태사가 우뚝 일어났는데 / 太師崛起그 충성스러운 절개는 / 厥有忠烈한나라의 기신 같았네 / 若漢之紀천년 뒤에 나란히 우뚝 솟은 / 千載竝峙문정공이 있었으니 / 曰維文貞재주는 삼대에 견줄 만하고 / 材比三代문장은 양한을 계승하였네 / 辭纂二京당나라에는 장열과 육지가 있고 / 在唐張陸송나라에는 범중엄과 구양수가 있는데 / 在宋范歐이런 쌍벽을 낳았으니 / 乃生聯璧세상에 그 짝이 드물었다오 / 而世寡儔큰외삼촌은 우뚝하게 / 元舅卓卓현명하고 고매한 뜻과 절조 지녔다오 / 志節賢豪자질은 순수하고 소박하며 / 純素之質지조는 편안하고 차분했네 / 恬靜之操옷깃을 여미고 공을 높였으니 / 斂衽推公실제가 그러했다오 / 其實則然그리하여 이른 나이부터 / 爰自早歲아름다운 명성을 드러내었네 / 蓋著令聞집안에서 부친의 가르침을 받고 / 趨庭周召형제가 함께 자며 우애가 돈독했네 / 共床塤篪마침 혼란한 시대를 만나 / 適丁昏亂저 춘천으로 옮겨갔네 / 遷彼貊陲학문에 몸을 맡겼으니 / 委己于學사탕수수보다 좋아하였네 / 其嗜愈蔗문단에 발걸음을 내딛고 / 發軔詞苑방에서 휘장을 드리웠네 / 下帷子舍성상께서 반정하자 / 聖主龍興현신들이 그림자처럼 따랐는데 / 賢臣景隨당시 문정공께서는 / 維時文貞의정부에 들어가 보좌하였네 / 入贊黃扉새벽부터 저녁까지 돕자 / 晨昏之助중론이 기울었네 / 衆論以傾학궁에서 명망을 쌓았고 / 儒宮貯望과장에서 명성을 떨쳤네 / 禮闈蜚英얼마 뒤에 어버이를 여의고 / 俄驚風樹늦게서야 과거에 급제했네 / 晩登桂籍호란이 몹시 급박하여 / 胡塵孔棘천지가 뒤바뀌었네 / 天地辟易강화도에서 돌아와 / 歸來海島사관으로 역사를 기록했으며 / 載筆西廂사간원에서 벼슬하고 / 乃試薇垣옥당에 몸담았네 / 乃盛玉堂출세가도를 달리며 / 雲霄展步규벽이 가치를 인정받았네 / 圭璧滿價세상은 가시밭길 같아 / 世路如枳풍파가 갑자기 일어나서 / 風波忽駕거산도 찰방으로 좌천되니 / 邈爾居山철령의 모퉁이였네 / 鐵嶺之角정도를 잃지 않았는데 / 不失其正어찌 이런 참소를 당했는가 / 何有謠諑임오년(1642, 인조20)에는 / 歲在敦牂오랑캐의 앞잡이가 모함하여 / 羯虜搆禍동회공은 주모자가 되고 / 東淮爲首공도 공모자가 되어 / 公乃在左침침한 심양의 감옥에 / 沈沈燕獄초나라 죄수처럼 갇혔으나 / 纍纍楚囚엄혹한 위협에 떨지 않고 / 淫威罔慴변함없이 지조를 지켰네 / 素履無渝고국으로 돌아오자 / 迨返故國화려한 벼슬을 두루 거쳤네 / 徧歷華銜박태기나무 숲에 슬픔이 감도니 / 荊林纏慟벼슬하기 좋아하지 않았네 / 鵷班非耽서석산에 계실 때 생각하면 / 眷言瑞石실로 남쪽 지방 진무하였네 / 實鎭炎荒수령으로 부임할 때 / 雙旌出守행낭에는 거문고 하나였네 / 一琴行裝옛날에 이은이 있었는데 / 古稱吏隱아, 공을 두고 한 말이네 / 繄公自得조정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 還朝未幾작위가 여러 번 올라 / 王爵屢陟이미 도승지를 지내고 / 旣長銀臺이내 예조 참판에 올랐는데 / 旋貳南宮벌벌 떨며 두려워하여 / 凜然而懼밤낮으로 몸을 아끼지 않았네 / 夙夜匪躬다시 지방관이 되어서 / 再懷州章개성과 밀양으로 부임하였네 / 于崧于密소동파가 귀양 갔을 때와 같고 / 蘇翁類謫백거이처럼 굴하지 않았네 / 白傅非屈위태로운 때를 만나 / 時當臲卼온갖 변고가 일어나니 / 事有萬變형세는 가까워 혐의가 있고 / 勢嫌而邇처지는 장애가 겹쳤는데 / 跡礙而荐공은 일편단심 지켰으니 / 公秉寸心이때부터 더욱 굳건하였네 / 洎茲愈赬오직 삼가고 조심하여 / 惟恪惟愼두려워하거나 놀라지 않았네 / 不震不驚험한 곳도 평지처럼 여기니 / 處險若夷군자들이 훌륭하다 하였네 / 君子曰臧이후로 십 년 동안 / 由來十載비로소 앞길이 평탄하였네 / 始安周行매양 한직을 맡았고 / 每帶閑局여러 업무 도맡기도 했네 / 或綜庶務나아가나 물러가나 충성할 생각뿐 / 進退攸思어찌 궂은 일 마다하리오 / 燥濕寧顧남산에 집을 지었는데 / 築室南岳시내와 골짜기 그윽하였네 / 川谷窈窕이곳에서 읊조리며 / 歎詠於斯노년을 보내려 하였네 / 庶儗終老공은 효성스럽고 우애있으며 / 惟公孝友청렴결백을 겸하였네 / 濟以廉白문장은 진한을 모범 삼아 / 文軌秦漢조예가 해박하였으며 / 所造蓋博학문은 염락을 존숭하여 / 學尊濂洛그 뜻이 탁 트였네 / 其志可疏이밖의 모든 일은 / 是外萬事시덥지 않게 여겼네 / 視猶籧篨세상 사람들은 언변을 숭상했지만 / 時崇利口공은 침묵을 지켰고 / 公乃斂聲세상 사람들은 출세에 분주했지만 / 世奔要途공은 뒤로 물러섰네 / 公乃郤行묵묵히 마음을 보존하고 / 默默內存공손히 몸가짐을 지켰으니 / 恂恂外持벼슬은 설령 막히더라도 / 身名縱閼편안히 복록을 누려야 하니 / 福履宜綏이 미덕에 부응하여 / 謂膺此媺만수무강하리라 여겼네 / 黃髮無疆또한 문정공이 남기신 / 亦惟文貞상서가 끊이지 않았는데 / 不斬厥祥어찌 크게 어긋나서 / 云胡大謬한 번 병들자 위독해졌는가 / 一疾告谻병이 낫기를 기다렸는데 / 方俟勿藥갑자기 부고를 받게 되었네 / 遽傳易簀수명은 겨우 쉰을 넘겼고 / 壽才踰艾지위는 덕에 걸맞지 않았네 / 位不滿德풍류가 길이 묻혔고 / 風流長祕현인은 멀리 떠나셨네 / 文獻已逖아! 애통합니다 / 嗚呼痛哉아, 저 소자는 / 嗟我小子삶이 박복하고 비색하여 / 寔生多吝생전에 선대부를 뵙지 못했네 / 罔逮先故이내 재앙이 모여들어 / 乃鍾凶釁다섯 살에 모친을 여의고 / 五歲失母열네 살에 부친을 여의어 / 未童而孤이 세상 외로이 살며 / 惸惸斯世공의 도움에 의지하였네 / 賴公有扶비록 다시 잠깐 나와 / 雖復簡出공의 문하에 들어갔는데 / 間廁門墻비루하다 여기지 않으시어 / 不謂卑鄙다행히 토론에 참여했지요 / 幸與商量시서를 읽으며 / 出入詩書고금을 오르내리고 / 沿泝古今수시로 영향을 받으며 / 時沾賸馥진심으로 감복했지요 / 敬服中心임종하시던 날에 / 啓手之日관 만드는 일을 주관했는데 / 匠事是敦가슴에 사무치는 아픔이 / 痛結于胸마치 어제 일 같습니다 / 怳隔前晨처음에는 병에 걸렸고 / 初遘疾病나중에는 상을 당하여 / 後値喪畏술 한 잔 올리며 영결했을 뿐 / 一觴永訣숙원을 풀지 못했지요 / 莫伸宿志지금 이장하게 되었는데 / 今當移宅훌쩍 십 년이 흘렀습니다 / 倏迫十朞중간에 거듭 화를 당했으니 / 中間荐禍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 熸矣何辭다시 이렇게 영락한 신세라 / 復此留落아들을 시켜 전을 올립니다 / 執奠以使혼백에게 지각이 있다면 / 精爽有知부디 제문을 살펴주소서 / 庶鑑哀誄아, 애통합니다 / 嗚呼痛哉흠향하소서 / 尙饗[주-D001] 태사(太師) : 신익전의 시조 신숭겸(申崇謙, ?~927)을 가리킨다. 994년(고려 성종13) 4월에 태사에 추증되어 태사 개국장절공(太師開國壯節公)으로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주-D002] 한나라의 기신 같았네 : 한 고조(漢高祖)가 형양(滎陽)에서 항우(項羽)에게 포위되자 기신(紀信)이 고조로 위장하고 초(楚)나라 군대에 투항하였는데, 고조는 그 틈을 이용하여 탈출하였다. 항우는 기신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고 그를 불태워 죽였다. 고려 태조가 공산(公山) 동수(桐藪)에서 견훤(甄萱)에게 포위당했을 때 신숭겸이 싸우다가 전사한 덕택에 태조가 위기에서 벗어난 일을 비유한 것이다. 《史記 卷7 項羽本紀》 《高麗史節要 卷1 太祖 10年》[주-D003] 문정공(文貞公) : 저자의 부친 신흠(申欽)의 시호이다.[주-D004] 이런 쌍벽(雙璧)을 낳았으니 : 원문의 연벽(聯璧)은 한 쌍의 아름다운 옥으로, 두 가지가 서로 필적할 정도로 훌륭함을 비유하는데, 연벽(連璧)과 같은 말이다. 쌍벽은 형제 또는 두 사람이 서로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만큼 나란히 뛰어난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저자와 저자의 형 신익성(申翊聖)을 칭찬한 말이다. 《文心雕龍 時序》 《世說新語 容止》[주-D005] 큰외삼촌 : 신익성을 가리킨다. 신흠의 셋째 딸이 박의(朴漪)에게 출가하여 박세채를 낳았다. 신익성은 상촌의 큰아들이므로 박세채에게는 큰외삼촌이 된다. 《象村稿 附錄2上 神道碑銘》[주-D006] 저 춘천으로 옮겨갔네 : 1617년(광해군9) 1월, 저자의 부친 신흠이 춘천에 부처(付處)된 일을 가리킨다. 신흠은 선조로부터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으로 지목되어 방귀전리(放歸田里)되었다가 1616년 9월에 양사(兩司)에서 한응인(韓應寅), 박동량(朴東亮), 서성(徐渻) 등과 함께 사흉(四凶)으로 지목되어 춘천에 부처되었다.[주-D007] 방에서 휘장을 드리웠네 : 학문에 전념하는 것을 말한다. 《사기(史記)》에 “동중서(董仲舒)는 휘장을 드리우고 강송하였는데, 수업할 때 제자들끼리 입문한 순서대로 서로 가르쳤으므로 어떤 제자는 스승의 얼굴을 보지도 못하였다. 동중서는 3년 동안 집의 정원을 구경하지 않을 정도로 학문에 정진하였다.”라고 하였다. 《史記 卷121 儒林列傳 董仲舒》[주-D008] 의정부에 들어가 보좌하였네 : 1623년(인조1) 3월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난 뒤 신흠은 이조 판서가 되었으며, 7월에는 우의정이 되었다.[주-D009] 규벽(圭璧)이 가치를 인정받았네 : 규벽은 고대에 제왕이나 제후가 제사를 지내거나 조빙(朝聘)할 때 사용하던 일종의 옥기(玉器)로, 옥으로 만든 귀중한 기물을 널리 가리킨다. 여기서는 저자의 인품과 능력을 인정받은 것을 비유한다. 《詩經 雲漢》[주-D010] 초나라 죄수처럼 갇혔으나 : 《춘추좌씨전》에 “진후(晉侯)가 군부(軍府)를 순시하다가 종의(鍾儀)를 보고 유사(有司)에게 ‘남관(南冠)을 쓴 채 묶여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고 물으니, 유사가 ‘정(鄭)나라 사람이 잡아서 바친 초나라 죄수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라고 하였다. 《春秋左氏傳 成公9年》[주-D011] 변함없이 지조를 지켰네 : 저자는 1642년(인조20) 겨울에 이계(李烓)의 고변으로 청나라로 압송되었는데, 1640년 사행 때 기자묘(箕子廟)에 제사하고 명나라를 숭상했다는 이유였다. 《東江遺集 卷17 附錄1 家狀》[주-D012] 박태기나무 …… 감도니 : 저자의 형 신익성이 세상을 떠난 것을 비유한다. 박태기나무는 형제를 비유한다. 《續齊諧記 紫荊樹》[주-D013] 서석산(瑞石山) : 서석산은 광주에 있는데, 여기서는 신익전이 1645년(인조23) 광주 목사(光州牧使)에 임명된 일을 가리킨다. 《東江遺集 卷17 附錄1 家狀》[주-D014] 이은(吏隱) : 마음이 이록(利祿)에 얽매이지 않아 비록 관직에 있으나 은자(隱者)와 같은 사람, 또는 낮은 벼슬에 은거한 사람을 가리킨다.[주-D015] 염락(濂洛) : 송학(宋學)의 비조(鼻祖)인 주돈이(周敦頤)가 거주했던 염계(濂溪)와 정호(程顥)ㆍ정이(程頤)가 거주했던 낙양(洛陽)을 합칭한 말인데, 성리학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주-D016] 생전에 …… 못했네 : 박세채(1631~1695)가 태어났을 때는 저자의 부친 신흠(1566~1628)이 작고한 뒤이므로 직접 뵙지 못했다는 말이다.
    2023-12-04 | NO.166
  • 동계초당기 東溪草堂記
    매천 황현 <매천집> 권6- 동계초당기 東溪草堂記曾子固序劉向《新序》,推論一道德同風俗,爲王者之極功。其說蓋美矣。然此以三代之盛,漸摩薰漬之極,自無異言異行者而言耳,非所與論於秦、漢以後也。嗚呼!大樸旣散,虛僞日滋,微窺國家之所尙,則群下靡然趨之,遂成一代之俗。自宋儒創明理學,人人知卑功利,人人知排異端,可謂道德一而風俗同矣。然治天下則蔑其效,且在當時號爲是學者,尙往往有可議,况其愈下者乎?我朝立國,與趙宋同,眞儒輩出,庶幾洛、建之盛。而積勢所趨,浮慕成痼,及其久也,未嘗無虛僞之混焉。夫前史所傳隱逸獨行之倫,不必皆說心說性,而奇偉卓絶輝映千古者何限?乃近世之士則生前稍自修飾,身後必有幾卷文字,劈理抽氣,張皇飣餖,又推所謂立言者而成其誌狀,則又未甞非儼然道學先生。然上焉而無梁鴻、徐穉之苦節,下之求其有林逋、魏野性情之詩而亦不可得,依假剿襲,惟理學是云,不幾於自欺而欺世乎?故余嘗謂“後之撰本朝史者傳儒學,將不勝其夥,而傳隱逸,將不勝其寥寥也”。豈士之懷奇蘊寶者盡出爲當世之用,而無枯黃之歎歟?抑道德一風俗同,庶幾古昔之盛,而小子狂簡未能有以測識歟?元陵之世有申光宅先生者,世居瑞石山中,自號東溪處士,就所謂東溪者,構草堂其上,漁樵畊讀而終其身。子孫至今遵其遺矱,斤斤其勿替。而至於草堂之旣仆而復新,鄕邦之士從而詠歌之不衰,則是其卓行隱德必有所以遯世无悶之實。而所少者,幾篇性理文字耳,叔世澆漓之時,其回淳返樸如處士者,曷可少哉?往年余過瑞石東麓,見其溪潭澄泓,竹木葱蒨,雞鳴犬吠,杳然嵐雲之際,意其有隱君子,而路忙未之入焉。今而聞之,蓋草堂之所在也。噫!余雖不獲登斯堂,把酒賦詩以悅處士之風,而庶幾異日錄處士之跡,以備湖南耆舊隱逸之遺,則斯堂者未必非藥囊畵師之徵爾。증자고(曾子固)는 유향(劉向)의 《신서(新序)》에 대한 서(序)에서, 도덕이 일치되게 하고 풍속을 동일하게 하는 것이 왕자(王者)의 최고 공적이라 추론(推論)하였는데, 그 논리가 대체로 훌륭하기는 하다. 하지만 이는 삼대(三代)의 태평성대에 정치 교화가 최고조에 달하여 전혀 말이나 행동을 달리하는 자가 없던 시절을 두고 말한 것이지, 진한(秦漢) 이후까지 함께 논하여 말한 것은 아니다. 아아, 삼대 이후로는 극도의 질박함이 사라지고 허위가 날로 판을 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국가가 무엇을 숭상하는지 눈치를 살피고는 다들 그쪽으로 휩쓸리고, 결국에는 그것이 당대의 풍속이 되곤 하였다. 그 뒤 송유(宋儒)들이 성리학을 천명하면서 사람들이 공리(功利)를 경시하고 이단(異端)을 배척할 줄 알게 되었다. 이른바 도덕이 일치되고 풍속이 동일하게 되었다고 할 만하다. 하지만 이때에는 천하를 다스리는 일에 실제적인 공효가 없었던 데다, 당시에 이 학문을 한다고 일컫던 자들조차 종종 논란이 될 만한 점이 없지 않았다. 더구나 그들보다 낮은 사람들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우리 조선이 나라를 세운 것이 송(宋)나라와 같고 진유(眞儒)가 배출된 것도 정주(程朱)의 융성기에 버금간다. 하지만 그러한 추세가 누적되면서 표면상의 존모(尊慕)가 고질이 되었고, 그것이 오래 지속되면서 허위가 혼재하는 상태가 계속되었다. 대체로 지난 역사책에 전해지는 남다른 행실의 은일지사(隱逸之士)들이 모두 마음과 본성에 대해 논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 중에 위대하고 우뚝한 절행(節行)으로 천고에 빛날 자가 어찌 끝이 있겠는가. 이에 비해 근세(近世)의 선비들을 보자. 하나같이 생전에는 선비입네 치장하고, 죽은 뒤에는 반드시 몇 권의 문집을 남기며, 이(理)와 기(氣)를 분석하여 장황하게 늘어놓거나 소위 그 입언(立言)들을 추숭(推崇)하여 묘지(墓誌)와 행장(行狀)을 만든다. 그렇게 보면 모두 의젓한 도학선생(道學先生) 아닌 사람이 없다.그러나 그들은 위로 양홍(梁鴻)이나 서치(徐穉) 같은 굳은 절개도 없고, 아래로 임포(林逋)나 위야(魏野) 같은 성정(性情)이 담긴 시(詩)를 쓸 능력도 없다. 오로지 남의 학설을 표절하여 성리학은 이런 것이라는 말들만 늘어놓으니, 어찌 자신을 속이고 세상을 속이는 데에 가깝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후세에 조선의 역사를 찬술하는 자가 유학자의 열전(列傳)을 낼 때에는 너무 많아서 이루 다 기록할 수 없고, 은일지사의 열전을 쓸 때에는 기록할 만한 사람이 거의 없지 않을까.’라고 말이다. 이렇게 된 원인은, 선비 중에 특출한 재덕을 지닌 선비가 모두 나와서 당세에 등용되고 영락(零落)된 채 탄식하는 이가 없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도덕이 일치하고 풍속이 동일해진 것이 옛날의 태평성대와 같아진 결과, 광간(狂簡)한 사람들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어서 그런 것일까? 영조(英祖) 때에 신광택(申光宅) 선생이란 분이 있었다. 대대로 서석산(瑞石山) 산중에 살면서 동계처사(東溪處士)라고 자호(自號)하였다. 그는 이른바 동계(東溪)라는 곳에 나아가 그 시냇가에 초당(草堂)을 짓고는, 고기 잡고 나무 하고 밭 갈고 책 읽으면서 한평생을 보냈다. 자손들이 지금까지도 그분이 남긴 법도를 하나도 바꾸지 않은 채 준수하며 살고 있다. 그러다 초당이 무너져서 다시 짓게 되자, 이 고장의 선비들이 모두들 변함없이 그 덕을 기리고 송축하였다. 이런 것을 보면 그분의 뛰어난 행실과 은일의 덕은, 세상을 피해 숨어 살되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해하지 않은 실제가 분명 있다 하겠다. 다만 그에게 부족한 것은 몇 편의 성리학에 대한 글뿐이니, 이런 말세의 경박한 시대에 순박(淳朴)의 원형으로 돌아간 처사와 같은 사람을 어찌 하찮게 볼 수 있겠는가.왕년에 나는 서석산 동쪽 산기슭을 지나다가, 시내가 맑고 대나무가 푸르며 닭이 울고 개가 짖는 아득히 푸른 운기(雲氣)가 도는 곳을 바라본 적이 있다. 그때 저곳에는 아마도 은거하는 군자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였는데, 당시에는 노정이 바빠 들어가 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지금 들으니, 그곳이 바로 동계초당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아, 내 비록 그 초당에 올라가 술 마시고 시 읊으며 처사의 풍모에 열복(悅服)할 기회를 얻지는 못했지만, 행여 훗날 처사의 자취를 기록하여 호남(湖南)의 중망 있는 노인과 은일지사의 유전(遺傳)에 대비한다면, 이 초당이 바로 약초 캐는 은일지사가 살았던 증거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으리라.[주-D001] 증자고(曾子固) : 자고는 송나라 때의 문장가 증공(曾鞏)의 자이다.[주-D002] 유향(劉向) : 전한(前漢)의 학자로, 자는 자정(子政)이다. 《열녀전(列女傳)》, 《설원(說苑)》 등의 저서가 있다.[주-D003] 신서(新序) : 유향이 편찬한 책으로 10권이다. 춘추 시대부터 한대(漢代)까지의 일사(逸事)를 기록하였다.[주-D004] 양홍(梁鴻) : 후한(後漢) 때의 현사(賢士)로, 평릉(平陵) 사람이다. 부인 맹광(孟光)과 서로 공경했다는 거안제미(擧案齊眉)의 고사가 있는데, 이 부부는 패릉(覇陵)의 산속으로 들어가 평생 은거하며 살았다.[주-D005] 서치(徐穉) : 후한 예장(豫章) 사람이고 자는 유자(孺子)이다. 그 역시 평생 벼슬에 응하지 않은 채 은거하고 살았으므로 남주(南州)의 고사(高士)로 일컬어졌다.[주-D006] 임포(林逋) : 967~1028. 북송 때의 시인으로, 평생 은거하며 매화와 학을 길렀으므로 매처학자(梅妻鶴子)의 고사가 있다.[주-D007] 위야(魏野) : 960~1019. 북송 때의 시인으로, 자는 중선(仲先)이다. 저서로 《초당집(草堂集)》이 있다.[주-D008] 선비 …… 것일까 : 김소영은 이 구절을 예시하며 반어적 수법을 통해 당대의 유학자들을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고 지적하면서 이런 반어적 수법을 매천 산문의 한 특징으로 제시하였다. 《김소영, 매천 산문의 표현형식 연구, 한문학보 제18집, 2008》[주-D009] 서석산(瑞石山) : 광주 무등산(無等山)의 옛 이름이다.[주-D010] 그에게 …… 글뿐이니 : 실제로 동계처사에게 성리학에 관한 글이 없는 것을 문제 삼은 것이 아니다. 이 구절 또한 성리학에 관한 글을 남겨야 학자로 대접받는 당시 세속의 기준을 비판하려는 반어적 표현법이다.[주-D011] 약초 …… 증거 : 대본에는 ‘藥囊畫師之徵’으로 되어 있다. 의미상 ‘은일지사가 살았던 증거’라는 뜻으로 쓰인 듯하나 이에 대한 전거는 찾지 못하였다.
    2020-08-19 | NO.165
  • 동몽교관 증 사헌부 지평 권공 행장 - 명재유고 제43권
    동몽교관 증 사헌부 지평 권공 행장(권필) - 명재유고 제43권 : 명재(明齋) 윤증(尹拯, 1629~1714)선생의 성은 권(權)씨이고 휘는 필(韠)이다. 자는 여장(汝章), 호는 석주(石洲)이며 안동(安東) 사람이다. 문충공(文忠公) 근(近)의 6세손이다. 조부 승지 휘 기(祺)는 아들 둘을 두었으니, 장남 벽(擘)은 관직이 참의에 이르렀고 호는 습재(習齋)이며, 차남 경(擎)은 생원이다. 선생은 습재의 아들로서 생원의 후사가 되었다.선생은 태어나면서부터 유달리 영특하여 9세에는 글을 지을 줄 알았다. 19세에 초시(初試)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복시(覆試)에 또 수석으로 합격하였는데 한 글자를 잘못 써서 탈락하였다. 이로부터 더 이상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임진년(1592, 선조25) 4월에 친구 구용(具容)과 함께 대궐에 나아가 항소(抗疏)를 올렸다. 상소에 이르기를,“유성룡(柳成龍)과 이산해(李山海)가 화친을 주장하여 나라를 그르쳤으니 실로 오늘날의 진회(秦檜)와 양국충(楊國忠)입니다. 그들을 참수하여 백성들에게 사죄하게 하소서.”하였는데, 비답이 없었다.신축년(1601, 선조34)에 명나라 사신 고천준(顧天埈)과 최정건(崔廷健)이 조서를 반포하는 일로 나왔다. 월사(月沙) 이공 정귀(李公廷龜)가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떠나려 하면서 아뢰기를,“전부터 중국 사신을 접대할 때는 반드시 문인을 널리 선발하여 제술관으로 삼았습니다. 유학(幼學) 권필이 시재(詩才)가 상당해서 비록 벼슬은 없지만 명성이 자자하니, 데리고 가게 해 주소서.”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이어 전교하기를,“권필의 이름은 지금 처음 들었다. 그가 지은 시문을 구해 볼 수 있겠는가?”하니, 정원에서 시고(詩藁) 수십 편을 베껴서 올렸다. 상이 크게 칭찬하고 이어 관직을 주도록 명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순릉 참봉(順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받지 않고 백의로 종사하였다. 당시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 학곡(鶴谷) 홍서봉(洪瑞鳳), 남곽(南郭) 박동열(朴東說), 남창(南牕) 김현성(金玄成) 및 차천로(車天輅) 등이 모두 문장으로 이름이 났는데 일행이 되어 같이 일하게 되자 모두 선생에게 앞자리를 양보하였다. 그 뒤에 상서(尙書) 유근(柳根)이 원접사가 되어 또 선생에게 수행해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선생이 병으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예조 판서인 월사가 선생의 가난함을 걱정하여 천거하여 동몽교관에 제수되었다. 규례로 보면 의당 관디 차림으로 해조에 나아가 참알해야 한다. 그런데 선생이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두승(斗升)의 쌀을 위해 허리를 굽히는 것은 평소의 뜻이 아니다.”하고는 즉시 그만두고 떠났다. 이리저리 떠돌다가 강화부(江華府)에 들어가 오천(五川) 가에 초당을 짓고 우거하였는데, 배우는 자들이 존경하는 자세로 날마다 문에 나아왔다. 심지어는 식량을 싸 들고 미투리를 삼아 신고 천리 먼 곳에서 와서 따르는 자도 있었다. 선생의 집이 가난하여 음식을 제공할 수가 없었으므로 제자들이 직접 땔나무를 해다가 밥을 지어 먹었는데, 모두들 싫어하는 기색이 없었다.고을 사람 양택(梁澤)이란 자가 그 아비를 죽였으므로 마을에서 연명(聯名)하여 관아에 고발하였다. 그런데 양택이 뇌물을 많이 써서 고발한 자들이 도리어 죄를 받게 되었다. 고을 사람들이 모두 분하고 억울하게 여겼으나 감히 말할 수가 없었는데, 선생이 상소를 올려 그 죄를 바로잡았다.현석촌(玄石村) 강가로 돌아와 문을 닫고 교유를 끊었는데 오직 동악공과 체소(體素) 이춘영(李春英), 현곡(玄谷) 조위한(趙緯韓) 등 몇몇 공들과 서로 왕래하였다.광해군이 즉위하자 이이첨(李爾瞻)과 유희분(柳希奮) 등이 정사를 주도하였다. 이이첨이 선생의 이름을 사모하여 일찍이 교제를 청하고자 하였는데, 선생이 사절하고 만나 주지 않았다. 하루는 친구 집에서 우연히 마주치자 담을 넘어 피하였다. 이에 이이첨이 몹시 유감을 품게 되었다.선생은 혼탁한 세상에 살면서도 기탄없이 사실대로 말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혹 술자리에서 시를 지으며 시정(時政)을 기롱하고 풍자하였다. 소암(疎庵) 임숙영(任叔英)이 전시(殿試) 대책(對策)에서 정사의 잘못된 점을 극력 말하니 광해군이 삭과(削科)하라고 명하였다. 선생이 그 말을 듣고는 개탄하여 시를 짓기를,궁궐 버들 푸르고 꽃은 어지러이 나는데 / 宮柳靑靑花亂飛성안 가득 벼슬아치들 봄볕에 아양 떤다 / 滿城冠蓋媚春暉조정에서는 다 같이 태평성대 축하하거늘 / 朝家共賀昇平樂그 누가 위태한 말 포의 입에서 나오게 했나 / 誰遣危言出布衣하였다. 시가 세상에 나와 전송되어 궐 안에 유입되자 광해군이 보고는 매우 노하였다. 마침 승지 황혁(黃赫)이 무고를 입어 형을 받아 죽고 그 사위 조공 수륜(趙公守倫)이 연좌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다. 광해군이 조공의 집 문서를 수색하도록 명하였는데 이르러 보니 궁류시(宮柳詩) 절구 한 수가 우연히 어떤 책 겉장에 끼워져 있었다. 드디어 선생을 체포하라고 명하여 선생이 옥에 갇히게 되었다. 조공이 고문을 받고 벽을 사이에 둔 곳에 있었는데 선생의 자를 부르며 말하기를,“여장(汝章)이 나로 말미암아 죽는구나.”하였다. 선생이 대답하고자 하였는데 이미 죽었다. 선생이 소리 죽여 통곡하였다. 다음 날 국문할 때 광해군이 직접 힐문하기를,“네가 말한 궁류(宮柳)는 누구를 지적하는 것인가?”하였으니, 이는 외척을 지척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한 것으로, 마침내 형장을 치며 고신(拷訊)하도록 명하였다. 백사(白沙) 이공 항복(李公恒福)이 당시 국문에 참여하였다가 자리를 피하며 아뢰기를,“권필은 일개 방외의 선비인데 시안(詩案)으로 죄를 얻는다면 성세(盛世)의 일이 절대 아닙니다. 저러한 구유(癯儒)에게 혹 중형을 가한다면 선비를 죽였다는 오명을 면하기 어려우니, 형장을 가하여 고신해서는 안 됩니다.”하였는데, 광해군이 듣지 않았다. 이 상공은 차마 보지 못하고 마침내 총총히 나갔다.다음 날 또 진계하여 힘써 간쟁함으로써 사형을 면하고 경원(慶源)에 유배되는 처벌을 받았다. 숭인문(崇仁門) 밖에 나가 길가의 민가에서 죽으니 임자년(1612, 광해군4) 4월 7일이다.선생은 기사년(1569, 선조2)에 태어나 이때 이르러 향년 겨우 44세였다. 원근에서 듣고 애통하고 억울해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문인 심척(沈惕) 등이 그가 죄 없이 죽은 것을 슬퍼하여 대부분 과거 공부를 포기한 채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고양(高陽) 위양리(渭陽里) 선영 곁에 안장하였다. 12년 뒤인 천계(天啓) 계해년(1623, 인조1)에 인조가 즉위하여 제일 먼저 선생에게 사헌부 지평을 추증하고 예관을 보내 사제(賜祭)하였다.부인 송씨(宋氏)는 호남의 고사(高士) 제민(濟民)의 딸로서 선생이 졸한 뒤 24년이 지난 숭정 병자년(1636)의 난리에 적을 만나 목을 매서 자결하였다. 선생의 묘에 부장하였다. 아들 항(伉) 또한 시를 잘한다는 명성이 있었고 일찍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관직은 청하 현감(淸河縣監)에 이르렀다. 딸은 사인 최계창(崔繼昌)에게 시집갔다.청하 현감은 두 번 아내를 맞았는데 모두 이씨이다. 전처에게 1녀를 두었으니 감찰 정휴(鄭庥)의 처가 되었다. 후처에게 1남을 두었으니 속(謖)이다. 측실에게 2남을 두었으니 밀(謐)과 조(調)이다. 1녀의 사위는 조윤한(趙胤漢)이다. 속은 자식 없이 요절하였다. 현종조에 선생은 절행(節行)이 있으므로 제사를 끊기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선생의 형의 증손 수(㥞)를 속의 후사로 삼도록 명하였으니 대개 특별한 은전이었다. 최계창은 2남을 두었으니, 장남 최선(崔宣)은 참봉이고 차남은 최헌(崔憲)이다.수가 선생의 제사를 모시게 되자 즉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을 찾아뵙고 발문을 받아 묘갈명으로 삼고 또 나에게 행장을 짓도록 하였다. 내가 감당하지 못한다고 사양하였으나 수가 더욱 굳게 청하였다.삼가 살피건대 선배들이 선생을 논한 것이 이미 있다. 상촌(象村) 신 문정공(申文貞公)은 말하기를,“공은 소탈하고 무슨 일이든 거침없이 추진하는 성격이었다. 사소한 의절(儀節)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세상을 도외시하고 떠돌아다니면서 시와 술로 스스로 즐겼다.”하였고, 월사(月沙) 이 문충공(李文忠公)은 말하기를,“공은 풍류가 있고 재기가 뛰어났으며 오묘한 언어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기운은 우주를 좁게 여기고 안목은 천고 시대를 넘나들었다. 그의 포부는 속인들이 엿보고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이미 세상과 뜻이 맞지 않아서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르려 하지 않고 기이한 재주와 의리를 품은 채 혼탁한 세상에 항거하며 개탄하였다.”하였다. 계곡(谿谷) 장 문충공(張文忠公)은 말하기를,“공은 이마가 넓고 입이 크며 미간이 넓었으며 체구가 크고 기상이 호방하였다. 언론은 우뚝하여 사람을 놀라게 하고 이따금 농담을 섞어 말하였다. 성격이 술을 몹시 좋아하였고 술을 마신 뒤에는 말하는 것이 더욱 호탕해졌는데, 오만한 자세로 시를 음영할 때면 풍채가 한가롭고 명랑하였다.”하였다.아, 이 세 군자는 모두 문장이 훌륭한 거공(鉅公)으로서 인물평을 할 만한 분들인데, 월사는 선생과 막역한 교분이 있었으니, 그 말이 모두 믿을 만하고 징험할 만하다. 이 세 분의 말로 미루어 보면 선생의 인품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선생은 후모(後母) 김씨를 지성껏 모시어 질병이 있으면 약시중을 들면서 의대를 풀지 않고 새벽까지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집이 몹시 가난하였는데, 친구 가운데 재신이 된 자가 혹 음식과 옷감을 보내면 모두 김씨에게 보내고 한 가지 물건도 자기 것으로 남겨 두지 않아서 자신은 항상 거친 밥에 나물국을 들었다. 처자가 굶주림과 추위를 면치 못하였지만 여유가 있는 듯이 생활하고 조금도 가슴속에 불평하는 뜻이 없었다.다섯 형제가 모두 시를 잘하여 그들과 함께 놀며 글 짓는 것을 참된 낙으로 여겼다. 평소 허여하는 사람이 적었으니, 이를테면 명리(名利)를 따르는 자나 부유한 집의 자제들과는 더욱 가까이 지내려 하지 않았다. 부귀와 영달에 대해서는 담담하였다. 일찍이 중국 사람과 우리나라 선비 한 사람이 만나 말하는데, 모두 나라를 위해 악한 것을 숨기는 의리를 알지 못하였다. 선생이 질타하니 모두 부끄러워하며 감복하였다. 여기서 선생의 떳떳한 행실을 볼 수 있다. 종손인 모관(某官) 집(諿)과 모관 열(說)이 기록한 것이다.선생이 일찍이 벗에게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장차 물러나 산야에 은거하여 마음을 거두고 본성을 길러서 옛사람이 말한 도를 구하려고 생각하여 송나라 제현들의 서책을 구해다가 읽고 사유하였다. 비록 감히 스스로 터득하였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 문의(文義) 사이에 분명하게 마음에 닿는 것이 있는 듯하였다. 그러므로 흔쾌히 학문에 정진한 지 이제 6, 7년이 되었네.”하였으니, 당시 선생의 나이가 31세였다. 만년에는 박잠야(朴潛冶) 선생과 만나 경외하며 심복하여 단 몇 마디를 나누고서 사표(師表)로 인정하였다. 잠야 또한 매우 공경하고 중히 여겨 선생이 졸하자 애도하여 마지않았다. 그가 말하기를,“여장은 증점(曾點)의 뜻이 있어서 종전의 자기가 추구하던 것을 버리고 정주(程朱)의 학문을 좇아 장차 파죽지세(破竹之勢)를 이룰 참이었는데, 반년도 못 되어 하늘이 참혹한 화를 내렸으니, 우리 유도(儒道)의 불행이다.” 하였다. 묘갈명에서 말한, 관심을 돌려 성리학에 종사한 뒤 사문(斯文)에 앞서 도달하여 기수(沂水)에 목욕하게 되었다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지적한 것이다.그의 시는 천부적인 재주에서 나왔으므로 후일 시 짓는 자들은 제일로 추대하였다. 계곡은 말하기를,“공이 호걸의 자질로서 전일한 뜻으로 학문하여 오로지 시에서 재능을 발휘하였다.”하고, 마침내 탄식하기를,“그런데 세상에서 지우(知遇)를 입은 것은 단지 한 번 중국 사신을 접반하게 된 것뿐이었고, 참혹하게 화를 당한 것도 결국 시로 말미암아 초래된 것이니, 하늘이 공에게 재주를 준 것이 영광스럽게 한 것인가, 아니면 재앙을 준 것인가.”하였다. 그리고 묘갈명에서는 시종 선생을 시만 가지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참으로 선생의 시를 선생의 여사로 본 것이다.아, 우리 조선에서 인재가 성대하기로는 명종ㆍ선조(宣祖) 연간이 제일이다. 선생은 늦게 나와서 비록 한 가지 기예로 이름을 날렸지만 또한 우뚝하게 서서 미칠 수 있는 자가 없었으니 세상에 매우 드문 특이한 인물이라 하겠다. 한 번 변하여 도에 이르기를 거의 횡거(橫渠)의 용기에 근접하였으니, 고명하게 뻗어 나가 조만간 높은 경지에 나아갈 수 있었는데, 이루지 못한 것은 하늘의 뜻이다. 그러나 그 시를 읊으며 그 풍도를 들으면 모두 쇄신하여 명리를 천시하게 되고 완악하고 나약한 뜻을 분발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선생이 세상의 교화에 보탬을 준 것이 또 어찌 적다고 하겠는가.내가 늦게 태어나 학문이 비루하여 선생을 알기에 부족하다. 또 글재주가 없어서 제대로 다 드러낼 수가 없다. 삼가 전해지는 말을 위와 같이 정리한 다음 수에게 돌려보내어 훌륭한 논객이 함께 정정해 주기를 기다린다. 수가 나이는 어리지만 재주가 있는데 또 이 일을 서둘러 잘해내고 있으니, 역시 선생의 덕을 이을 만하다고 하겠다.[주-D001] 진회(秦檜)와 양국충(楊國忠) : 진회는 송 고종(宋高宗) 때 재상으로, 금(金)나라와 화친(和親)을 적극 주장하였다. 《宋史 卷473 秦檜列傳》 양국충은 당 현종(唐玄宗) 때의 권신(權臣)으로 양 귀비(楊貴妃)의 오빠이다.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자, 현종을 충동하여 촉(蜀)으로 피란하게 하였다. 《舊唐書 卷106 楊國忠列傳》 두 사람 모두 나라를 망하게 한 간신인데, 1592년(선조25) 당시 좌의정 유성룡(柳成龍)은 강화를 주장하였고 영의정 이산해(李山海)는 임금을 파천하게 하였으므로 이 두 사람에 비유한 것이다.[주-D002] 마침 …… 되었다 : 1612년(광해군4) 2월에 일어난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을 말한다. 김직재가 황혁(黃赫)과 더불어 역모하여 진릉군(晉陵君) 이태경(李泰慶)을 세우려고 하였다는 고변이 들어와 100여 명이 연루되어 처벌을 받은 옥사로, 대북파가 소북파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무옥으로 밝혀졌다. 조수륜(趙守倫)은 편지를 왕래했다는 죄목으로 연루되었다. 《국역 연려실기술 제19권 폐주 광해군 고사본말》[주-D003] 외척 : 유희분(柳希奮) 등 광해군의 처가인 유씨(柳氏)들을 말한다.[주-D004] 구유(癯儒) : 산택 사이에 은거하는 수척하고 청렴한 학사(學士)를 뜻한다.[주-D005] 상촌(象村) : 신흠(申欽, 1566~1628)의 호이다.[주-D006] 월사(月沙) : 이정귀(李廷龜, 1564~1635)의 호이다.[주-D007] 계곡(谿谷) : 장유(張維, 1587~1638)의 호이다.[주-D008] 박잠야(朴潛冶) : 잠야는 박지계(朴知誡, 1573~1635)의 호이다. 저서로는 《잠야집(潛冶集)》이 있다.[주-D009] 여장은 …… 불행이다 : 한국문집총간 80집에 수록된 《잠야집》 권6 〈제이방숙문(祭李方叔文)〉에 나온다.[주-D010] 기수(沂水)에 목욕하게 되었다 : 기수는 노(魯)나라 도성 남쪽에 있는 물 이름이다. 공자(孔子)가 일찍이 제자들에게 각기 포부를 물었는데, 모두들 정치에 관심을 두었으나, 증점(曾點)만은 “봄에 여러 친구들과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舞雩)에 바람 쏘이고 시 읊으며 돌아오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공자는 자연을 즐기려는 그의 높은 뜻을 칭찬하였다. 《論語 先進》 이 때문에 한가로이 자연을 즐기는 말로 흔히 쓰이게 되었다. 여기서는 유학에 입문하여 성리학을 이루게 된 것을 말하였다.[주-D011] 횡거(橫渠)의 용기 : 횡거는 송(宋)나라 학자 장재(張載)이다. 《심경(心經)》 〈군자반정(君子反情)〉에 주자(朱子)가 “횡거는 학문한 공력이 일반인들보다 뛰어나서 허물을 고치는 데에 더욱 용감하였고……” 하였다. 장재가 젊어서 지기(志氣)가 뛰어나 병사(兵事)를 좋아하였는데 범중엄(范仲淹)에게 가르침을 듣고는 번연히 뜻을 바꿔 도학에 정진하였다고 한다. 여기서는 권필(權韠)이 처음에는 시문으로 이름을 날리다가 후반에 성리학에 관심을 두고 매진하게 된 것을 장재가 용감하게 진로를 바꾼 데에 비유하여 말하였다.
    2020-09-23 | NO.164
  • 동문선 제116권 / 뇌(誄); 채순희
    동문선 제116권 / 뇌(誄)중서시랑 평장사 태자 소사 채공 뇌사(中書侍郞平章事太子少師蔡公誄詞)이규보(李奎報)대장부로 세상에 태어나서 벼슬이 재상에 이르고, 70이 되어서는 벼슬을 내놓고, 정신을 깨끗이하며, 천성을 수양하여 능히 타고난 수명을 다 누리며 일생을 착하게 살아간 이는 고금에서 구한다 하더라도, 많이 얻을 수 없는 것이온데, 우리 소사(少師) 채공은 이것을 향유하였다. 공의 휘는 순희(順禧)이고, 가계는 광주(光州) 출신이다. 아버지의 휘는 아무인데, 벼슬이 아무 관직에까지 이르렀다. 공이 의종(毅宗) 때 내정(內廷)에 적을 두고, 명종(明宗)이 선위할 때까지도 오히려 임금의 측근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다. 상감께서 일찍이 수창궁(壽昌宮)에 계실 때 적신(賊臣) 조원정(曹元正)과 석린(石麟)들이 불궤(不軌)를 도모할 때 밤에 담을 넘어 금중(禁中)에 들어와 난을 일으켰다. 이날 밤에 대궐 안에 들어와 숙직하던 가까운 신하들이 난리를 듣고 놀라고 무서워서 모두 담을 넘어 피해 달아났는데, 공만이 홀로 자신(紫宸 임금 있는 내정)에 입시하여, 잠깐 동안이라도 임금님의 곁에서 떠난 일이 없었다. 상감께서 감탄하여 말씀하시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빠른 바람에 굳센 풀이 있음을 안다’ 하더니, 바로 그대를 이름이로다.” 하였다. 벼슬이 오조(五朝)에 이르러 두루 높은 자리를 거쳤고, 금상폐하 아무 해에 이르러 지위가 중서시랑 평장사 태자 소사(中書侍郞平章事太子少師)에 나아갔다. 사직을 원하여 물러와 평안히 있을 때, 거문고와 술로 소요하였다. 대체로 몇 해를 지나 운명할 시기가 문득 이르러 이 세상을 떠나셨으니, 슬프고 영화스러운 시종(始終)이 다 갖추어져 하나도 부족함이 없었으니, 이것은 대장부가 일컬을 만한 것이다. 천성이 너그럽고 온화하여 대중을 용납하니, 일찍이 노한 얼굴을 보지 못하였다. 비록 헌 자리에 토한 아전을 용서하고, 국을 쏟는 종을 용서하는 자라도 그 어찌 이에서 더하겠는가. 그러나 조석(曹石)의 난리에 임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굳센 기개가 독특한 절개를 볼 수 있었으니, 이 어찌 “인자(仁者)는 반드시 용기가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부음이 들려오자, 상감께서 애도하여 정사 들으심을 폐하시고, 유사에게 칙명하여 명기(明器)와 노부(鹵簿 필요한 의장)를 갖추도록 하였다. 아무 산에 장사 지내시고, 시호를 아무공이라 내리며, 거듭 소신에게 명하여 사실을 엮어서 뇌사를 짓게 하니, 그 글에 이르기를, “왕좌(王佐)의 재주를 먼저 기량을 점치게 하였네. 과감한 우리 공이여, 기량을 지님이 본래부터 달랐다. 조석이 난을 일으켜 밤에 금문(禁門)을 두들기자, 내신들이 쥐구멍을 찾아 담을 넘어 달아났는데, 공이 홀로 들어가 지킴이 신색(神色)이 변하지 아니하니, 나중에 시드는 절개를 날이 추어진 뒤에야 바로 알겠도다. 절개를 지킴이 이와 같으니 귀하고 영달함이 옳겠도다. 과연 다섯 임금님의 재상이 되어, 덕망이 태형(台衡)에 높았다. 급히 서둘러 벼슬에서 용감하게 물러나니 이름이 온전하고 덕이 높았다. 하늘이 어찌 조상하지 아니하리요. 나라의 들보가 부러졌는데, 임금님이 마음으로 슬퍼하여 임종에 물건과 시호를 보내어 예를 갖추게 하였다. 누가 그 아름다움을 찬양하리요. 소신(小臣)이 뇌문(誄文)을 지었나이다.” 하였다.[주-D001] 헌잘에 …… 용서하고 : 한 나라 선제(宣帝) 때에, 병길(丙吉)이라는 정치가가 정승으로 있을 때에, 그의 마차를 속관이 타고 가다가 술이 취하여 모두 토(吐)해서, 그 있는 자리를 더렵혔다. 그것으로 하여 그 속관을 면직시키려 하니, 병길이, “그것은 겨우 정승의 방석 하나 더럽힌 일인데, 면직시킬 이유가 되지 못한다.”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주-D002] 국을 …… 자 : 후한(後漢) 장제(章帝) 때에 유관(劉寬)이란 사람이 성질이 매우 너그러워서, 좀처럼 화를 내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그 부인이 그가 얼마나 너그러운가를 시험하는라고, 그가 조회에 들어가려고 관복(官服)을 입은 위에다가 종을 시켜서 잘못한 체하고 국을 엎질렀으나, 단지 “네 손은 데지 않았느냐.” 하고, 아무말도 더하지 않았다.[주-D003] 나중에 …… 알겠도다 : 《논어》에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라는 말이 있는데, 일기가 더운 여름에는 어느 나무나 다 푸르지만, 가을이 되어 날이 차면 모두 낙엽이 지고 오직 소나무ㆍ잣나무만이 푸른 것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것을 인간사회에 비유하면, 보통 때에는 모두 애국지사이지만 나라가 망하게 되면 참으로 애국 애족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말이다.[주-D004] 태형(台衡) : 하늘의 삼태성(三台星)은 인간의 정승을 맡은 별이라 하여, 또 정승은 이 세상을 저울질하는 권한이 있으므로, 태형은 정승을 말하는 것이 된다.
    2022-05-06 | NO.163
  • 동문선 제97권 / 설(說); 경렴정 명 후설(景濂亭銘後說)
    동문선 제97권 / 설(說)경렴정 명 후설(景濂亭銘後說)정도전(鄭道傳)겸부(謙夫) 탁(卓)선생이 광주(光州) 별장에 못을 파고 연꽃을 심고, 못 가운데에 흙을 쌓아 작은 섬을 만들고, 그 위에 정자를 짓고 날마다 올라서 즐거움을 삼았다. 익재(益齋) 이문충공(李文忠公)이 그 정자를 경렴(景濂)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염계(濂溪)의 연꽃을 사랑하는 뜻을 취하여 우러르고 사모하고자 해서이다. 그 물건을 보면 그 사람을 생각하고, 그 사람을 생각하면 반드시 그 물건에 마음을 쓰게 되니, 느끼기를 깊이하고 후하게 하기를 지극히 해서이다.일찍이 생각하건대, 옛 사람이 화초에 있어서 각각 사랑하는 것이 있으니, 굴평(屈平)의 난초와 도잠(陶潛)의 국화, 염계의 연꽃이 그것이다. 각각 그 마음에 있는 것으로써 물건에 붙였으니 그 뜻이 은미하다. 그러나 난초는 꽃답고 향기로운 덕이 있고, 국화는 은일(隱逸)의 높은 것이 있으니, 두 사람의 뜻을 볼 수 있다. 또 염계의 말에 이르기를, “연은 꽃 중의 군자라.” 하고, 또 말하기를, “연꽃을 나와 같이 사랑하는 자 누구인고.” 하였으니, 자기가 즐거워하는 것으로써 남과 함께 하는 것이 성현의 마음 씀이다. 당시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 주는 이가 없음을 탄식하고 후에 알아주는 자를 무궁한 세상에서 기다렸으니, 진실로 연이 군자 되는 것을 안다면 염계의 즐거움을 거의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물건을 인하여 성현의 즐거움을 알아내는 것을 어찌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황노직(黃魯直)이 말하기를, “주무숙(周茂叔)은 가슴 속이 쇄락(洒落)하여 산들 바람과 개인 달 같다.” 하였고,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주무숙을 본 뒤로는 매번 중니(仲尼)와 안자(顔子)의 즐거운 곳과 즐거워하던 것이 무슨 일인가를 찾아 보게 하였다. 이 뒤로부터 바람을 읊조리고 달을 읊고 돌아온다 하는 것에 내가 증점과 같이 하였다.” 하였다. 내가 가만히 혼자 생각하건대, 염계를 경모하는 것에 방법이 있으니, 모름지기 쇄락의 기상(氣象)을 알아서 증점과 같은 뜻이 있는 연후에야 말하여 이를 수 있는 것이다. 문충공이 지은 명(銘)에 말하기를, “발을 걷고 꿇어 앉아 있노라면 바람과 달이 가이 없다.” 하였으니, 이 한 구절이 옛 사람이 단정한 공안(公案)이다. 어떻게 하면 한 번 그 정자에 올라서 함께 참여할까.
    2022-05-06 | NO.162
  • 동사강목 부록 상권 상 / 고이(考異) ; 진훤(甄萱)의 별전(別傳) 175
    2022-05-07 | NO.161
  • 동사강목 제10하; 광주(光州))의 백저포(白苧布) 세를 덜어주다
    동사강목 제10하경술년 고종 37년(송 이종 순우 10, 몽고 황후칭제 2, 1250)춘정월 최항이 여러 고을의 별공(別貢)과 어량(魚梁)ㆍ선박(船舶)의 세를 그만두게 하였다.항은 교정별감첩(敎定別監牒)으로 청주(淸州)의 설면(雪綿), 안동(安東)의 견사(蠒絲), 경산(京山)의 황마포(黃麻布), 해양(海陽 지금의 광주(光州))의 백저포(白苧布) 등의 별공 및 김주(金州)ㆍ홍주(洪州) 등지의 어량과 선박의 세를 덜어주고, 또 여러 도의 교정수확원(敎定收穫員)을 소환하고 그 소임을 안찰사에게 맡겼는데, 이는 인심을 얻으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뒤에 다시 전과 같아져서 사람들이 모두 분개하였다.○ 몽고에 사신을 보냈다.○ 궁궐을 승천부(昇天府)에 지었다.이때에 몽고가 고려의 조정이 육지로 나오지 않는 것을 문책하므로 이것을 경영하여 장차 옮길 것처럼 하였다.
    2022-05-07 | NO.160
  • 동사강목 제11상 , 몽고군이 무등산에 주둔하고 압해도 공격에 실패하다
    동사강목 제11상 신해 고려 고종 38년부터, 을해 고려 충렬왕 원년까지 25년간병진년 고종 43년(송 이종 보우 4, 몽고 헌종 6, 1256)8월 최항이 신흥창(新興倉)을 열어서 그의 가병(家兵)을 진휼하였다.○ 장군 송길유(宋吉儒)를 보내어 청주(淸州) 백성을 섬으로 옮기게 하였다.○ 몽고군이 갑관강(甲串江) 밖에 둔쳤다.앞서 차라대가 해양(海陽)의 무등산(無等山)지금의 광주부(光州府 동쪽 10리에 있다 꼭대기에 주둔하였다. 군사 1천 명을 남쪽으로 보내 노략질하고 또 수군[舟師] 70척[艘]을 거느리고 압해(押海)지금의 나주(羅州) 압해현(壓海縣) 를 쳤다. 압해 사람들이 큰 배[大艦]에다 대포를 설치하고 기다리니, 차라대가 바라보고 말하기를,“우리 배가 포를 맞으면 다 부숴질 터이니 당해낼 수가 없다.”하고, 다시 배를 옮겨서 공격하게 하니, 압해 사람들이 옮기는 곳을 따라 대포를 비치하므로, 차라대가 이기지 못할 줄 알고 마침내 수공(水攻)하는 기구를 파해 버리고 왕준ㆍ홍복원 등과 더불어 갑관강 밖에 이르러 크게 기치를 늘어세우고, 밭에 말을 먹이며 통진산(通津山)에 올라 강도의 형세를 바라보고, 물러가 수안현(守安縣)폐현(廢縣)으로 지금 통진부(通津府) 남쪽 15리에 있다 에 주둔하였다.
    2022-05-07 | NO.159
  • 동사강목 제16하; 왜적이 규봉사 일대에 숨다
    동사강목 제16하신유년 전폐왕 우(前廢王禑) 7년(명 태조 홍무 14, 1381)하4월 순문사(巡問使) 이을진(李乙珍)이 무등산(無等山)에서 왜적을 쳐서 이를 모두 섬멸하였다.왜적이 지리산(智異山)으로부터 무등산 지금의 광주(光州)에 있다. 으로 도망해 들어와 규봉사(圭峯寺) 암석 사이에 목책(木柵)을 쳤는데, 3면은 깎아지른 절벽이고 좁은 길이 절벽에 잇대어 있어 겨우 한 사람이 통행할 정도였다. 이을진이 결사대 1백 인을 모아 높은 곳에 올라가 돌을 굴리고 화전(火箭)을 쏘아 목책을 불사르니, 적들이 다급하여 벼랑에 떨어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적들은 해변으로 달아나 소선(小船)을 훔쳐 타고 도망갔는데, 소윤(少尹) 나공언(羅公彦)이 빠른 배로 추격하여 모두 죽여버렸다.
    2022-05-07 | NO.158
  • 동사강목 제17상; 왜(倭)가 광주(光州)를 함락하다
    동사강목 제17상기사년 후폐왕 창(後廢王昌) 즉위년(6월 즉위)추7월 도당(都堂)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폐왕(廢王)에게 의대(衣帶)를 바쳤다.우(禑)의 생일이기 때문이었다. 곧 우를 여흥(驪興)으로 옮겨서 그 고을의 군사로 숙위(宿衛)하고 세(稅)를 거두어서 공봉(供奉)하게 하였다.○ 왜(倭)가 광주(光州)를 함락시켰다.
    2022-05-07 | NO.157
  • 동사강목 제17하; 원상(元庠)을 광주(光州)에 유배하다
    동사강목 제17하경오년 공양왕 2년(명 태조 홍무 23, 1390)하4월 흰 무지개가 해를 꿰었다.○ 이색 등을 옮겨 다시 먼 곳으로 유배하였다.이색은 함창(咸昌)에, 정지(鄭地)는 횡천(橫川)에, 이림(李琳)은 철원(鐵原)에, 이귀생(李貴生)은 고성(固城)에, 우인열(禹仁烈)은 청풍(淸風)에 유배하고, 이을진(李乙珍)ㆍ이경도(李庚道)는 곤장을 쳐서 유배하고, 왕안덕(王安德)은 풍주(豊州)에, 우홍수(禹洪壽)는 인주(仁州)에, 원상(元庠)은 광주(光州)에 유배하였다.
    2022-05-07 | NO.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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