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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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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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마산 장수굴
    서창동 중앙부에 있는 백마산은 해발고도 162.1m의 나지막한 야산에 불과하지만 수려하면서도 골짜기가 깊어 임진왜란 때 의병장인 삽봉에 얽힌 전설이 많이 남아 있지요. 삽봉은 조선조 연산군 때 일어난 무오사화戊午士禍 당시 문민文愍 김일손金馹孫(1464~1498)이 조의제문사초弔意帝文史草 사건에 연루돼 참살당하는 화를 입자 그의 아버지 김석경이 종6품 벼슬인 종부시주부의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경남 함안군 마륜동을 떠나 이곳 서창 관내 세동마을로 옮겨왔습니다.삽봉은 관직에 있을 때 이이와 같이 외침에 대비한 양병론養兵論을 주장했으나 ‘태평시대에 양병은 부질없는 민심을 소란케 하는 사론邪論’이라는 간신배들의 반대에 의해 묵살되고 말았지요. 늘 외침을 염려한 김 장군은 임진왜란 4년 전부터 마을 뒤 백마산 골짜기에 연병장을 만들어 용력勇力있는 장정들을 규합하여 무술을 연마하기에 힘썼지요. 차츰 그 소문이 퍼지고 김 장군의 애국충정이 널리 알려져서 나주와 화순, 담양 등지에서 수많은 장정이 모여들었습니다. 그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정 수 백 명을 이끌고 의병장으로 출전, 금산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문인이자 의병장인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1533∼1592) 장군과 함께 장렬히 순절했습니다. 지금도 삽봉이 장정을 훈련시킨 백마산 골짜기를 ‘수련골’이라고 하고, 세동마을에서 절골로 넘는 고개를 ‘수련재’라 하지요. 또 장정들의 숙소와 휴식처로 차일을 쳤다는 차일봉, 그 당시 사용했던 옥동샘, 백마산 상봉에 깊이 3m 가량의 바위굴이 있는데 김 장군이 이 굴에서 기거하면서 심신을 단련했다 하여 ‘장수굴’이라 이르게 됐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팔월 추석이 되면 인근마을 청소년들이 떼를 지어 이 산에 올라 눈앞에 확 트인 서석들을 내려다보고 맑은 가을날의 하루를 보내면서 김 장군의 위업을 되새기고 기리는 것이 연례행사였어요.※백마산은 서구 서창동에 소재한 산으로 군사보호구역으로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돼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산들보다 때가 타지 않은 곳이었다. 어찌 보면 임진왜란을 앞두고 의병장 삽봉揷峯 김세근金世斤(1550∼1592) 장군이 병사들을 훈련시켰던 훈련지가 있던 곳이어서 그랬는지는 모르나 오늘날까지 군사보호구역이었다고 하니 역사적 교집합 하나를 본 듯한 묘한 감정이 인다.
    2018-05-28 | NO.12
  • 백석골의 유래
    백석골에는 백석사白石寺 석불과 용수의 애절한 이야기가 서려 있습니다. 백석사는 운천동 방죽이 있었고, 그 방죽 일대에 울창한 숲이 있었는데 그 숲 속에 자리 잡았던 아주 작은 사찰이었어요. 그리고 용수는 아주 어릴 적에 어머니를 여의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정을 모르고 자랄 수밖에 없었지요. 용수는 일제 강점기인 1940년대 산골마을에 살았는데 앞서 밝힌 것처럼 어머니는 이미 여의었고, 늙은 아버지와 단둘이 가난하게 오두막집에 살았습니다. 오두막집에는 뽕밭이 있었고, 한 가운데 오래된 석불이 서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사실 반년 전에 네 살의 어린 나이로 죽은 동생 용덕이가 있었지요. 이 용덕이 때문에 용수는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그 석불 앞에 돌멩이를 하나씩 바쳤습니다. 그 앞에 앉아 간절하게 빌었어요. "돌부처님, 제 동생 용덕이는 너무 어려서 제 발로 걷지도 못해요, 그래서 딴 애들처럼 냇물을 건너지 못하고 울고만 있을 겁니다. 그러니 도로 집으로 돌려보내 주시던가, 아니면 돌아가신 엄마 곁으로 데려다 주세요." 이렇게 빌고 난 용수는 눈물어린 얼굴로 석불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날따라 그 석불의 얼굴이 가끔 꿈속에서나 보는 어머니의 얼굴과 너무나 닮아 보인 것이죠. 좀 일그러진 낮은 코까지 그렇게 똑같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부터 용수의 마음에는 한 가지 믿음과 기쁨이 싹텄습니다. 용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 석불 앞에 꿇어앉아 여러 가지 소원을 빌었던 것이죠.그토록 정성들여 바치는 돌멩이는 어느새 석불의 무릎을 덮고 앙상한 뽕나무가지에도 새싹이 움트기 시작한 어느 이른 봄날이었습니다. 아침 일찍 용수는 아버지를 따라 풀을 매고 돌아오는 길에 혼자서 그 석불을 찾아갔습니다.그런데 어제 석양 때까지 그곳에 서있던 석불은 온데간데없고, 사람들 발자국과 쌓아둔 돌멩이만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어요. 용수는 한참동안 넋 나간 사람처럼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고추밭에서 거름을 주고 있던 윗마을 아저씨에게 다가가 "저! 아저씨, 저기 뽕나무 밭둑에 있던 돌부처님 어떻게 된지 모르세요?" 하고 물었습니다. 아저씨는 용수의 두 눈에 괴인 눈물을 보고 놀라며 "아까, 읍내 어느 부잣집에서 파서 가지고 갔어. 아마도 자기 집 정원에 세워놓고 볼 모양이지, 나도 차에 실을 때 거들어 줬지만" 하는 것이었습니다.용수는 먼 산을 바라보며 슬프디 슬픈 얼굴을 지었습니다."이젠 동생을 위해 소원을 빌 데가 없어졌으니 걘 저승으로 건너는 냇가에서 자꾸만 허물어지는 돌자갈을 쌓으면서 울고 있을 거예요." 어렵게 수소문해 찾아 나선 용수는 한 아주머니로부터 석불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됩니다. 그 아주머니는 말하기조차 지긋지긋 하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고 "아, 글쎄 그 돌부처를 집에 갖다놓은 그날 밤부터 어떤 낯선 여인이 꿈속에 나타나 머리맡에서 울지를 않나, 우리집 꼬마 녀석이 시름시름 앓지를 않나, 그래서 점을 쳐봤더니 그 돌부처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글쎄" 하고 고개를 내젓는 것이었습니다. 더 좀 자세히 들어보니 얼마 전 시골 밭둑에서 파왔다고 했어요. 그 크기와 생김새가 용수가 찾는 그 석불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이 아주머니는 석불을 옮겨온 뒤 집안에 자꾸 액이 껴서 결국 석불을 절간에 바치게 됐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용수는 그날 땅거미가 드는 석양 무렵 돌부처가 옮겨진 백석사로 갔어요. 그런데 그 절에도 용수가 찾는 돌부처는 없었습니다. 돌부처를 옮겨다놓은 그날부터 주지스님이 앓아눕는 등 흉흉한 일이 생겼기 때문에 절 앞 물 속(운천호수)에 버렸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용수는 바로 호수로 발길을 옮겨 자신도 모르게 어머니를 부르면서 방죽 속으로 뛰어들었어요. 그 후 용수는 다시는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그 일대의 돌들이 하얀 백석으로 변해 ‘백석골’이 됐다고 전해집니다.※백석골의 유래는 ‘전남의 전설’이나 ‘광산부지’, ‘내 고장 전통가꾸기-광산군’, ‘명소지명유래지’에 부분 부분 발취된 내용이 여러 단행본에 인용, 수록돼 있다. 한 포털의 오픈지식에는 ‘엄마보살이야기’라는 이름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 이야기에는 1946년이라고 하는 시대적 배경과 등장인물인 용수의 성이 방씨이고, 보통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읍내 이발소에 다닌다는 것이 제시된다.
    2018-05-28 | NO.11
  • 벽진동 거부 탁씨
    고려 말, 서구 벽진동 산촌 마을에 탁씨卓氏 성을 가진 만석꾼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탁씨에게는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걱정거리가 있었어요. 그것은 바로 대를 이를 아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자여도 뭘 해. 후사가 없으면 재산도 다 필요 없는 법인데."탁씨는 장성 땅에 유명한 ‘점쟁이’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 점쟁이를 불러들여 점을 치게 했어요. 탁씨 집을 찾아온 이 점쟁이는 집의 형세와 탁씨의 사주를 받아 음양오괘로 풀어보더니 딱하다는 듯 살래살래 고갯짓을 하면서 말했습니다."일 년 후, 아드님 하나를 얻게 되지만 오래 살지는 못할 겁니다. 정말 안됐군요."이 점괘占卦를 들은 탁씨는 고민이 됐지요. 복채도 두둑이 줬지만 점쟁이는 훗날의 불길한 낌새 때문에 복채를 받지 않고 그냥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로부터 일 년 뒤 탁씨는 아들을 낳았지만 점쟁이의 예언대로 그 아들은 세이레(아이가 태어난 후 스무하루 동안)를 넘기지 못했어요. 비탄에 잠긴 탁씨는 그 점쟁이를 다시 불러들여, 한 번 더 점을 쳐달라고 부탁했지요.점쟁이는 고민 끝에 말을 했어요. "앞으로 아들을 낳기는 하지만 그 아들이 오래 살지는 못합니다."또 다시 아들을 잃어버릴 수 없다는 생각에 탁씨는 점쟁이을 붙잡고 "그렇다면 무슨 좋은 방법이 없겠습니까? 제발 부탁입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후사만은 이어야하지 않겠소" 하고 애걸했습니다. 그러자 점쟁이는 조심스럽게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게 말처럼 이행이 될런지…"라며 말끝을 흐리는 것이었다. "그럼, 그 방법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십시오. 꼭 그 방법대로 하겠습니다."그 점쟁이는 아들의 단명을 막을 방도를 알려주었습니다. "이번에 낳은 아들이 요절夭折을 면하려면 그의 나이 열세 살이 된 동짓날 초하루에 집을 나가 부모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서 5년을 지낸 뒤에 돌아와야 합니다. 그래야 목숨을 잃지 않고 장수할 수 있을 겁니다."그로부터 1년이 지난 뒤 탁씨의 집에는 또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탁씨는 아들을 애지중지 키웠지요. 영리한 신동처럼 사자소학四字小學이며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두루 깨쳐나갔습니다. 그런 아들이 어느덧 시간이 흘러 열세 살이 되었어요.탁씨는 점쟁이의 말을 아들에게 전했어요. 그러자 그 영특한 아들은 그 말을 듣고 세상 구경하며 이런 저런 경험을 하고 5년 후에 돌아오겠노라고 대답을 한 뒤 열세 살 난 동짓날 초하루가 되자 점쟁이의 말대로 노자 한 푼 없이 집을 떠났습니다. 결국 집을 떠난 아들은 거지가 되어 문전걸식을 해가며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보성 땅 어느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게 됐어요. 5년이 되는 날 밤 머슴살이를 하고 있는 그 집에 귀신이 나타나 탁씨의 아들을 잡아가려 하자 그의 사연을 들어 알고 있던 주인집 딸이 그를 안방 뒤주 속에 숨겨놓고는 열쇠를 치마 속에 감추고 내놓지를 않았습니다. 주인집 딸은 그의 아들을 남몰래 사랑했기 때문에 그 귀신이 열쇠를 건네 달라고 했음에도 결국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주인집 딸의 칠대 조 할아버지 되는 그 귀신은 하얀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점잖은 노인으로 변신하면서 "내가 너의 칠대 할아버진데 윗대 선조의 원한을 갚기 위해 하는 일을 네가 막다니…. 그래서야 되겠느냐, 어서 그 열쇠를 내 놓아라"하고 호통을 쳤어요. 그런데도 주인집 딸은 귀신의 말을 무시한 채 열쇠를 끝까지 내놓지 않았습니다. 첫 닭이 울자 귀신은 조상에게 복을 받으려거든 "저 년을 얼른 탁가 놈 집으로 보내버려!"라고 하면서 알쏭달쏭한 분부를 남기고 새벽닭 울음소리가 끝나기 전에 허겁지겁 떠나버렸어요 그 후 탁씨 아들은 그녀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와 아들 딸을 낳고 행복하게 살았지만 그 부인은 조상님에 대한 죄책감으로 일생동안 한 번도 친정집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벽진동 거부巨富 탁씨卓氏는 사월산獅月山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이 산은 조선 초엽 광주시내 쪽에 살던 탁씨들의 선산이었다. 본디 탁씨들의 선산은 현재 광주공원이 들어선 성거산이었다. 그런데 광주향교가 처음에는 장원봉, 다음에는 광주읍성 안의 북문 쪽에 있다가 결국 성거산(광주공원)에 이전하게 될 처지가 되자 자신들의 선산을 기꺼이 희사하고 그 대체부지로 택한 것이 사월산이었다. 이 설화가 벽진동에서 유래한 근거다.
    2018-05-28 | NO.10
  • 어느 청백리 이야기
    청백리淸白吏 이야기는 역사상 청빈한 관리로부터 비롯되곤 하지요. 전라도사全羅道事로 새로 부임해온 조공趙公의 이야기입니다. 조공은 청백리와 무척 연관이 돼 있습니다. 눌재 박상의 후임으로 부임한 조공은 나이에 비해 성품이 칼날같이 예리하고 엄격해 일체의 부조리와 결코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이 점은 눌재와 닮았다 할 수 있겠지요. 조공이 부임했을 무렵 광주 고을은 흉흉한 소문이 돌았어요. "오늘은 동헌 뜰 은행나무 가지에 공방工房 아전의 목 하나가 걸렸고, 내일은 뉘 목이 대롱거릴까." 이렇다 보니 관아 안은 말할 것도 없고, 민가에까지 밤중에 불이 꺼진 것처럼 으스스한 찬 기운만이 감돌았지요..이처럼 부조리를 걷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던 그에게는 이 지방 유일의 지기知己이자 말동무인 한의사 정소죽鄭小竹, 그리고 이런 저런 심부름과 뒷바라지를 해주는 계집종 연옥蓮玉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조공은 늦어지는 정소죽을 기다리면서 계집종 연옥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조공은 연옥에게 "서울로 가고 싶지 않냐"고 묻습니다. 물어보는 저의를 알아채지 못한 연옥은 조공의 물음에 간단하게 "네" 하고 대답했지요. 조공은 "음 그럴 테지" 하며 섭섭한 여운을 남기며 조용히 가라앉은 말투로 대화를 이어갔습니다."옳아 가고 싶을 게다. 교활하고 간사한 수전노들만 우굴거리는 이곳 관아官衙, 도둑과 거러지를 합쳐서 둘로 나눈 것 같은 그런 놈만 있는 내 주위에서 하루가 급하다 떠나고 싶을 거야." 조공은 독백처럼 이렇게 내뱉고 침통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습니다. 연옥 또한 그 말에 대한 대답은 안했지만 그런 자(탐관오리)들에 사정없이 철퇴를 내리고 있는 사또 마님이 그지없이 좋고 자랑스러웠어요.조공이 이처럼 정소죽을 기다리는 데는 보이는 것, 들리는 것이 모두 언짢고 거슬리는 것 뿐인데 정소죽 단 한 사람만 예외로 소통이 됐기 때문이지요.조공이 "왜 이렇게 늦어?"라고 묻자 정소죽은 "용무가 별로 긴치 않은 것 같아서요. 의사는 환자가 더 중하지 원님의 말상대 같은 건 그 다음 일이 아닙니까?" 하며 웃지도 않고 스스럼없는 말대꾸를 늘어놓습니다. 곧 조촐한 주안상이 나오고 연옥의 시중으로 단 두 사람만의 술자리가 벌어졌지요. "이건 함평에서만 나는 백어白魚인데 이 귀한 것을 어떻게 구하셨지요? 이러한 진선珍膳을 늘 상미嘗味하신다니…과연 원님벼슬이 좋긴 좋군요. 이것도 남도에 오신 덕분 아닙니까?"정소죽은 충청도 태생으로 극도의 이 지방 혐오증에 걸린 듯 싶은 조 도사를 어르는 말투로 말했어요. "하긴 이런 싱싱한 백어는 임금님도 잘 못 잡수는 귀한 생선이지!. 생선만은 이곳 것도 좋거든…""어찌 생선뿐인가요. 인걸人傑은 또 어떻구요? 이 고장 출신 박눌재(눌재 박상) 박사암(사암 박순) 기고봉(고봉 기대승) 어디 더 세어볼까요? 밑천이 딸린가?""허허!, 이 사람 또 향토 자랑이 시작되는구먼. 의술은 변변치 못하면서 보학譜學만은 제법이거든 핫…"이렇게 해서 거리낌 없는 정담이 오가는 가운데 정소죽은 요즘 수하 이속吏屬에 대한 추죄追罪가 너무 가엄苛嚴하다는 항간의 소문을 있는 그대로 간언諫言을 했지요. 조 사또의 노여움과 꾸지람까지를 각오한 마음으로 부터의 충언이었습니다.그러나 조공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두 눈을 지그시 감고 한동안 말이 없었지요. 조공이 서울에서 착임하던 날, 그러니까 석 달 전의 일이었어요. 선례에 따라 많은 관속官屬들이 장성 경계까지 마중을 나갔었습니다.가을철 좀 차가운 날씨에 검은 무명배 고의적삼에 관복을 걸친 신관 사또의 너무나 검소한 옷차림에 마중 나온 이속吏屬들은 대경실색을 했지요. 값진 비단으로 감싼 자기네들의 사치스런 복색이 너무도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몰라 했습니다. 가마에서 내린 조 사또는 앞에 늘어선 수하 이속들에게 즉석 훈시를 했어요."이처럼 먼 곳까지 마중을 나와 주어서 고맙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그런데 한 가지 미리 일러둘 것은 빙공영사憑公營私로 사복私腹을 채우거나 무고한 백성을 괴롭히는 일이 있으면 나는 결단코 용서치 않는다. 이 지방의 아전들은 대개 치부가 대단하다고 들었는데…이렇게까지 사치스럽게 잘 입고 지내는 줄은 미처 몰랐다. 어쩐지 오늘부터 내 자신이 무슨 ‘광대’나 ‘기생오라비’의 우두머리라도 된 것 같구나."훈시라기보다는 지독한 야유와 통갈(으름짱)이 곁든 일종의 폭탄선언이었지요. 조공은 신임 초부터 기강을 세우기 위한 대수술을 거침없이 단행했습니다. 그것은 비단 수하 아전들에게만 그치지 않고 지방세도가나 양반들에게까지 미치는 아주 엄정하고도 철저한 것이었어요. 조금이라도 법을 어기고 비리, 부정을 저지른 자가 있으면 지위 고하나 반상班常을 가리지 안고 가차 없이 엄벌로 다스려 나갔지요.그는 조상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손꼽히는 양반이었지만 놀고먹는 양반이라는 자들을 몹시 혐오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무위도식食으로 애잔한 백성들의 등이나 쳐서 호의호식하는 지방토호들을 오장이 뒤틀리도록 미웠했지요. 도임 후 3개월 동안 수하 이속을 포함해 그런 자들을 잡아 족치고 물고를 냈습니다. 그동안 죽어서 효수梟首(목을 베어 나무 같은 데에 매닮)된 자의 수효만 해도 열 명을 넘겼던 것입니다.그 중에는 시정 무뢰배들과 어울려 투전판(도박판)이나 벌리고 부녀자를 희롱, 강간하는 행패를 일삼던 전직 고관의 자제가 두 사람이나 끼어 있었구요.정소죽을 상대로 밤늦도록 술잔을 나눈 조공은 아무리 마셔도 취기는 돌지 않고 얼굴은 더욱 창백해져만 갔지요. 조공은 "소죽 자네 눌재 박상 선생이 이곳 도사都事로 계실 때 나주 사는 우부리를 쳐 죽인 그 일화를 잘 알지?"라고 물었습니다. 정소죽이 "알구 말구요, 그런데요?"라고 대답했지요. 사실 조공은 눌재 선생을 구했다고 하는 그 고양이를 낮에 잠깐 조는 사이에 꿈속에 보게 됩니다. 그것도 장성 갈재에서요. 근데 그 고양이는 조공을 보자 바로 산위로 달아나버렸습니다. 조공은 그 오묘한 꿈 이야기를 한 뒤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습니다. 한동안 침묵하다가 "술맛이 쓰게 느껴지는 건 어쩔 때 그런 걸까? 의사인 자넨 그 이유를 알고 있지 않는가?"라고 묻자 정 소죽은 "술은 본래가 쓴 게 아닙니까, 그게 정상이죠, 반대로 달게 느낄 때는 미각기관에 이상이 있는 거구요, 우리 그리 되기 전에 그만 납배拉杯를 하시지요"라고 제안했지요. 조공은 "자네씨와 마지막 별배別杯(이별의 순간에 나누는 술잔)가 이렇게…좀 미련이 남지만 그만두지"라고 말했습니다. 손에 든 술잔을 비우고 섭섭한 눈빛으로 천장을 쳐다봤다 지그시 감은 조공의 눈에 배인 눈물이 양 볼을 적시고 방바닥에 굴러 떨어졌습니다.소죽은 그 같은 조공의 거동에서 중대하고 불길한 뭔가를 직감했지요. 굳세고 담대한 그에게 여간해서는 그 같은 거동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까닭을 물을 처지도 아니었어요.한참 후 조공은 결연한 말투로 "내일 서울에서 귀한 손님 한분이 날 찾아 내려오시네. 아마도 약사발을 들고 말일세. 내가 그동안 너무 많이 사람을 죽였거든…" 하고 호탕하게 웃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정색을 하며 "정공, 내 저승에 가서도 자네씨와의 깊은 정리만은 두고두고 잊지 않겠어! 그런데 한 가지 연옥이 그 아이를 곡 자네씨 힘으로 무사히 서울로 보내주시게. 이것만이 나의 간절한 부탁일세"라고 말했지요.순간 정소죽은 두 손을 모아 방바닥에 엎드리고, 옆방에서는 계집종 연옥이의 처절한 오열이 터져 나왔습니다.※청백리淸白吏는 관리 가운데 최고로 청렴한 관리를 말한다. 오직 백성과 나라를 위해 일할 뿐 사리사욕을 챙기거나 부정부패와는 담쌓고 사는 깨끗한 관리를 지칭한다. 하지만 청백리의 사표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간신배들로부터 모함을 당해 단죄에 처해진 청백리들이 있었다는 것은 그 시대가 얼마만큼 부패했고, 부조리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청백리의 실천은 모든 시대의 숙제다.
    2018-05-28 | NO.9
  • 옥녀봉과 김덕령 장군의 사랑
    풍암지구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금당산金塘山은 해발 304m로 옥녀봉과 황새봉을 거느리고 있지요. 금당산에서는 일찍부터 옥녀봉과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인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1567∼1596) 장군 사이에 얽힌 설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먼저 옥녀봉을 알면 이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요. 풍암지구가 조성되기 전부터 이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어른들로부터 김덕령 장군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전해 들었다고 합니다. 옥녀봉은 금당산의 한 봉우리예요. 산 정상이 있고, 양 옆으로 옥녀봉과 황새봉이 있습니다. 주민들은 산꼭대기가 옥녀봉일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아요. 산의 정상에 오르면 김덕령 장군의 기개를 볼 수 있는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금당산에는 유독 김덕령 장군의 흔적과 자취가 서린 공간들이 많아요. 산 정상 옥녀봉에는 김덕령 장군을 가리키는 장사바위와 장사농짝이 있고, 김덕령 장군이 백마를 타고 온 말 발자국과 김덕령 장군이 말에서 내릴 때의 발뒤꿈치 흔적, 그리고 옥녀와 나란히 앉아 무등산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던 물동이바위의 자국 등이 있지요. 옥녀봉에는 이처럼 김덕령 장군과 관련된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죠. 다만 지금은 많이 퇴색되고 닳아져 아쉬움을 더한다는 것이 주민들의 반응입니다. 옥녀봉이라 부르는 바위들을 눈여겨 살펴보면 예전의 모습이 완연하게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김덕령 장군이 말을 타고 달려와 산 정상까지 단숨에 오르다보니 말 발자국이 생겼다고 합니다.김덕령 장군은 무등산에서 금당산으로 와서 나중에 옥녀를 만나게 되지요. 무등산에서 무술연습을 하다가 잠시 쉬고 있을 적에 멀리 보이는 금당산에서 가끔씩 어여쁜 아가씨의 모습이 스쳐 지나가는 듯한 환상을 보곤 했다고 해요. 김 장군은 이 환상이 꿈이 아니고, 현실이길 바라며 자주 금당산 쪽을 바라봤습니다. 이를 지켜본 휘하 장군이 금당산에 옥녀라는 아가씨가 있는데 이를 본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고 일러주자 김 장군은 옥녀에 대해 오매불망 연정을 품게 되었다는 것이지요.그러던 어느 날 옥녀의 환상이 너무 가깝게 느껴지자 김 장군은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백마를 타고 단숨에 무등산에서 금당산 봉우리 까지 건너 뛰어갔다고 합니다.이렇게 해서 김덕령 장군이 옥녀를 만나게 되는데 이 때 옥녀는 신암 마을에 살면서 금당산 절에 올라가 날마다 기도를 드리며 절집 물을 길러갔다고 합니다. 김 장군은 옥녀를 만나 그녀에게 매일같이 무등산에서 옥녀의 환상을 봤다며 무등산 쪽을 보고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고 합니다.옥녀는 김 장군을 만날 때마다 금당산 약수를 뜬 조그만 항아리를 통째로 드리곤 했지요. 물을 마신 김 장군은 그 항아리를 옆 자리에 놓았는데 어찌나 그 손의 힘과 기氣가 셌던지 바위에 물동이 자국이 나게 됐다는 것 아닙니까.옛날 쓴 책을 보면 평소에도 김덕령 장군은 용맹과 힘이 뛰어나 달아나는 개를 쫓아가 잡은 뒤 그 고기를 찢어서 다 먹기도 하고, 말을 타고 달려서 작은 창문으로 한 칸 방에 들어갔다가 곧 말을 돌려서 뛰어 나오기도 하며, 누각 지붕 위에 올라가 옆으로 누워 굴러서 처마를 타고 내려와 누각으로 들어가기도 할 정도로 힘도 세고 말 타기를 자유자재로 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또 활과 창을 늘 가지고 다녔던 김 장군이 대숲에 있던 사나운 범을 향해 박두樸頭(조선시대 무과 시험 때나 교습용으로 사용하던 화살)로 먼저 쏘니 범이 입을 벌리고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들었고 다시 창을 뽑아 대적하니 창날이 범의 턱 아래로 나와 땅에 박혀 꼬리만 흔들 뿐 더 이상은 움직이지 못했다고 합니다.이 같은 김 장군의 용맹스러움에 조선 중기의 문신 이귀李貴가 천거하는 글에는 "지혜는 공명孔明과 같고 용맹은 관우關羽보다 낫다"고 하자 이에 세자가 불러서 익호장군翼虎將軍에 임명했지요. 나중에 임금이 다시금 초승장군이라고 고쳐 불렀다고 합니다. 일찍이 철퇴 두 개를 허리 아래 좌우에 차고 다녔는데 그 무게가 각각 백 근이 되니 온 나라에서 그를 신장神將이라고 부를 만큼 힘이 셌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김 장군이 금당산으로 옥녀를 만나러 왔다가 돌아갈 때면 반드시 물통골에 들러 목욕을 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물통골은 원광대학교 한방병원 방향으로 지금의 신암교회 뒤편에 있는 계곡을 가리키지요. 한편 임진왜란이 끝난 뒤 김덕령 장군이 용력이 있으면서도 출전하지 않았다고 하여 나라에서 역적으로 몰아 죽이려고 했으나 그를 쉽게 죽일 수가 없었지요. 이 때 김덕령 장군이 "나를 죽이려면 ‘만고충신 효자 김덕령’이라는 비를 써 달라"고 요구해 그대로 만들어주자 김 장군은 "내 다리 아래의 비늘을 뜯고 그곳을 세 번 때리면 죽는다"고 알려 주어 죽음을 당했다고 전해옵니다. 나중에 김 장군이 죽은 뒤 비문의 글자를 지우려고 해도 더욱 또렷해지자 그냥 그대로 두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죽은 김덕령 장군을 두고 옥녀는 그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산 정상에서 매일같이 무등산을 바라보며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옥녀봉과 김덕령 장군의 사랑은 여기 수록된 이 설화는 전국문화원연합회 광주시지회 향토사료조사 광주광역시 구전설화(2005)에 수록된 것을 재각색한 것으로, 실재하는 김덕령 장군을 설화 속의 김덕령 장군으로 만날 수 있다.
    2018-05-28 | NO.8
  • 왕조대와 견훤대
    예로부터 광주에는 왕조대王祖臺라 명명하던 곳이 있었지요. 왕조대는 왕이 머문 곳 또는 왕이 군진軍陣을 친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왕이란 다름 아닌 고려 왕조의 건국자인 태조 왕건을 말합니다. 이 왕조대에 얽힌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1천 년 전으로 올라갑니다. 어느 해 광주천 하류의 너른 들에서 왕건과 견휜의 군대가 결전을 앞두고 대치했지요. 광주는 견훤의 심장과 다름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왕건이 나주에서 오다련의 딸(왕건의 둘째부인인 장화왕후 오씨)과 결혼했듯 견훤도 광주 북촌이란 동네에서 한 여인을 만나 사랑을 키웠지요. 그만큼 그들에게 나주나 광주는 자신들의 정치기반을 이룬 소중한 공간이었지요. 이들은 현지인과 관계를 통해 지지기반을 굳건히 다져나갔죠.당시 왕건과 견훤은 결전을 앞두고 지휘소를 차렸습니다. 왕건의 지휘소는 훗날 ‘왕조대’라고 하고, 견훤의 지휘소는 ‘견훤대甄萱臺’라 부르던 관행은 이때부터 비롯됐다고 보면 됩니다. 왕조대는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와 19세기 조선의 지리학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언급되고 있어 그 위치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왕조대는 광주 관아에서 서쪽으로 30리 지점에 있고, 견훤대와 마주보고 있습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왕조대가 서창마을 북쪽에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지요. 특히 여지도서’ 왕조대와 견훤대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거리에 있다고 명기된 기록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견훤대를 다룬 옛 문헌들은 하나 같이 그곳이 광주 관아로부터 북쪽으로 15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어요.견훤대는 오늘날 북구 생룡동 뒷산에 있는 토성 터일 것이란 추정이 있어요. 이 추정의 근거는 고려 충렬왕 때의 보각국사 일연一然 스님이 신라 고구려 백제 3국의 유사를 모아서 지은 역사서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견훤이 광주 북촌의 여인에게서 태어난 인물이었다고 적고 있는 점, 생룡동 근처인 담양군 대전면 사람들이 예전부터 자기 동네에 무진주의 치소治所가 있었다고 믿었던 사실, 생룡生龍이라는 동네 이름이 용, 즉 임금이 태어난 곳이란 의미를 함축하고 있을 것이라는 추정 등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더욱이 생룡동 뒷산에 토성의 흔적까지 있어 이런 심증을 더욱 굳히게 합니다.생룡동은 옛 거리상 북쪽 40리에 있었던 동네인데 견훤대가 북쪽 15리에 있었다는 기록과 40리는 큰 차이가 납니다. 나아가 견훤대의 위치에 대해서는 조선시대부터 다른 주장이 있었는데 ‘대동여지도’에는 견훤대가 황계면(현재의 운암동 일대)의 남쪽에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현재 지형도로 보면 그 위치에 있는 산은 대마산(일명 석산) 입니다.1879년 간행된 『광주읍지光州邑誌』에 황계면은 서북쪽 20리에 있다고 했고, 18세기에 제작된 비변사인방안지도備邊司印方眼地圖에도 황계면은 관아에서 가깝게는 10리, 멀게는 15리에 걸쳐 있다고 합니다. 황계면은 옛 광주읍성의 북문을 통해 갈 수 있는 곳이므로 북쪽 20리로 추정돼 견훤대가 있다는 15리와 비슷한 거리이기 때문에 거리 기록상으로 대마산을 견훤대로 보는 것은 무리가 없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견훤대의 위치만큼이나 왕조대의 위치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일부에서는 남구 대촌동의 백마산 혹은 그 주변의 여러 산봉우리 중 하나가 왕조대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어요. 여지도서에 따르면 왕조대의 위치를 언급하며 ‘견훤대와 서로 마주보고 있다’[與甄萱臺 相對]라고 하는 문구가 나오죠. 왕건이 머문 나주시 노안면 학산리의 봉호마을로도 또한 왕조대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여지도서나 광주읍지 등에는 왕조대가 광주 관아에서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고 했고, 김정호의 또 다른 지리서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는 생압진나루가 서쪽 30리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 생압진나루 옆에 있는 산이 사월산獅月山인 것입니다.실제 사월산 정상에 오르면 견훤대로 추정되는 대마산이 보여야 하는데 건물들로 가득 메워져 건너편 대마산이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육안으로 바라볼만한 거리에 대한 입증을 하기가 어려워진 것이죠. 눈앞의 건물들이 없다면 손에 잡힐 듯 가깝고 또렷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사월산 역시 옛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과 맞서 싸울 때 전투지휘소를 차렸던 왕조대의 후보지가 될 만한 곳 가운데 하나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물론 사월산을 왕조대라고 꼭 집어 단정 지을 수는 없어요. 벽진동의 사월산이나 유덕동의 덕산 등 영산강변에는 견훤과 관련된 설화가 깃든 곳이 많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문신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이 풍영정 주변의 풍광을 읊은 시詩 가운데 이 정자 앞에 과거 견훤이 왕건의 군대로부터 포위당했다가 용케 벗어난 곳이 있다고 한 구절도 있어요. 이중 유덕동 덕산도 그 후보지였겠지만 ‘대동여지도’에는 덕산과 견훤대는 전혀 위치가 다른 곳으로 표시돼 있어 그 후보지가 아닐 가능성도 높습니다. 여지도서에는 왕조대의 지명 유래가 언급되어 존귀한 이의 성명을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된다는 예법에 따라 ‘왕조대’라는 이름을 쓰게 됐다고 해 원래 이름은 왕건대王建臺가 아니었나 추정하고 있습니다.※사월산은 서창동 관할인 벽진동에 소재한 산으로, 고도 101.6m로 아담하다. 광주-송정리간 도로에서 공항 혹은 순환도로 접어들기 전 좌측에 솟아있는 산으로, 광산 탁씨 시조산과 공군 탄약고 등성이를 지나 자리하고 있다.
    2018-05-28 | NO.7
  • 용이 된 잉어할머니
    이 이야기는 서구 세하동 동하洞荷마을 앞 조용한 만귀정晩歸亭 연못 속에서 벌어진 일을 그리고 있어요. 물고기들 사이에서 벌어진 논의를 통해 해결해가는 과정이 드러나지요. 인간들에 의해 연못의 평화가 깨지고 있어 물고기들의 논의가 열린 것입니다. 물고기와 인간 사이 갈등을 풀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때 묻은 인간과는 달리, 순수한 물고기들의 세계를 배울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이야기는 왜, 화목하고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지를 우리 인간들에게 알려주고 있어요. 이 연못에는 잉어가 많이 모여 살았지만 몰려드는 낚시꾼들이 문제였어요. 잉어들이 제대로 자랄 틈이 없을 정도였죠. 연못에는 나이 많은 ‘잉어’ 한 마리만 남았어요. 잉어 외에도 붕어, 메기, 가물치, 송사리와 같은 여러 가지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어우러져 살고 있었어요. 하지만 잉어와 같이 비늘이 노랗고 눈자위가 새까만 얼굴을 가진 물고기는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잉어는 좀 외롭고 쓸쓸하기는 했지만 그윽한 연잎 향기를 맡으면서 넓고 깊은 물속에서 마음껏 헤엄을 치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초저녁 무렵에 비단같이 보드랍고 매끈매끈한 잉어가 창포 잎을 깔고 막 잠자리에 들려는 참이었어요.평소에 자기를 친할머니처럼 따르던 새끼붕어 한 마리가 허겁지겁 찾아와서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할머니, 큰일 났어요. 제 동생이 실에 달린 지렁이를 빼먹다가 하늘로 올라간 뒤 돌아오질 않아요. 엄마 아빠는 저녁도 안 드시고 울고만 계세요."새끼 붕어는 어찌 해야 할 바를 모르면서 이 연못 속에서 가장 오래 살고 있는 잉어할머니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그거 참, 야단났군. 네 동생이 낚시 바늘을 문 게로군!"잉어할머니는 쩍 쩍 입맛을 다시면서 붕어의 집으로 달려가 붕어 엄마 아빠를 위로하는 한편,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자신이 겪은 끔찍했던 순간의 슬픈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위로했어요. "갑자기 내 몸에 섬뜩한 손길이 와 닿더니 눈 깜짝할 사이도 없이 캄캄하고 좁디좁은 바구니 속에 갇히고 말았어. 그 속에는 나의 부모님을 비롯해 여러 물고기 형제들이 갇혀있더군. 나는 두려움과 목마름에 그저 입을 쩍 벌리고 울고만 있었지."잉어할머니는 이렇게 말하곤 입을 벌린 채 그 때의 놀란 표정을 다시 지어보였어요.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그 당시 아버님이 해준 말을 잊지 않고 그 말을 그대로 붕어 가족에게 전했어요."우리는 지금 인간이라는 아주 고약하고 잔인한 족속의 손에 붙들린 거란다. 그러니 우리 어른들은 도저히 살아 나가지 못할 것이지만 어쩌면 나이 어린 너만은 살아날지도 모른다. 인간은 워낙 욕심이 많아, 약아빠져서 어린 너희들을 더 키워서 잡아먹을 궁리만 하거든. 네가 살아나거든 이 연못을 떠나 너의 외가가 있는 이 앞들 ‘넓은 냇가’로 가거라. 그리고 얼마 후 장마철이 되어 방죽물이 둑을 넘거든 그 물줄기를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된다. 알았지?"잉어할머니는 말하는 동안 말 뿐만이 아니라 그 표정과 꼬리 흔들기를 아버지가 하던 대로 똑같이 해보였습니다. "내 아버님은 이렇게 말한 후 얼굴을 옆으로 돌려버리시더군. 그동안 어머니는 내 볼에 자기 얼굴을 부비시면서 울고만 계셨지."잉어할머니는 그때의 슬픔이 되살아난 듯 한동안 말이 없다가 목멘 소리로 다시 말을 이어 갔어요. "나는 그 얼마 후 아버님의 말씀대로 이 연못 속에 다시 던져졌고 그 후 사람들에게 부대끼면서 같은 동족들의 시달림을 받아가며 여러 번 죽을 고비를 겪었지. 그러면서 외갓집을 찾아 헤맸지만 어느 곳에도 찾을 수 없었고 모두가 허사가 되어 이곳에 다시 돌아왔어. 그리고는 홀로 살다가 이렇게 늙어 버렸어! 알고 보면 우리네 사회에서 온 식구가 오붓이 모여살기를 바란다는 건 애당초 잘못된 생각인지도 모르지!"붕어 가족은 잉어할머니의 말을 듣고도 슬픔이 가시질 않았습니다. 그 후 그 연못에는 똑같은 일들이 반복돼 견디다 못한 물고기들이 그 방죽 안에 제일 어른인 잉어할머니를 모시고 대책을 의논하는 회의를 열게 되었어요. 회의시간이 되자 창포꽃이 노랗게 물가를 수놓은 연못가로 붕어 날치 피라미들이 긴장된 얼굴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항상 사이가 좋지 않은 메기, 가물치, 뱀장어들의 얼굴은 끝내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니네들끼리 잘해, 우린 걱정 말라고!”라고 말했어요. 이 말을 전해들은 잉어할머니는 몹시 언짢은 표정으로 한동안 말이 없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어요."여러분, 우리가 꽃향기 그윽한 이 아름다운 연못에서 편안히 지내왔는데 인간이라는 욕심 많고 고약한 동물이 우리가 여기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으니 참으로 큰 야단이 아닐 수 없소!"잉어할머니는 큰 목소리로 말머리를 꺼낼 때 급한 날치가 뾰족한 주둥이로 다른 물고기들을 떠밀고 나오면서 한 마디를 했습니다."아니, 잉어할머니, 거 참 답답하지 않소? 무턱대고 야단났다고만 하실 게 아니라 어쩌면 좋다든가, 어떻게 하자든가, 그 방법을 말씀해야 할 게 아니에요?"그러나 잉어할머니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어요."우리가 살 길은 지나친 욕심을 버리고 이제까지 먹곤 했던 지렁이 같은 것을 일체 입에 대지 않으면 되는 거요. 더욱이 미꾸라지나 송사리 같은, 우리 동족을 잡아먹는 고약한 것들의 못된 버릇부터 고쳐야 하오."차근차근 말을 계속하려고 할 때 연잎 위에서 낮잠을 자고 있던 개구리가 그 옆을 나는 파리 한 마리를 날름 채먹고 쩍쩍 입맛을 다시면서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그건 가물치나 메기 영감더러 물어 보라지, 개굴개굴…"이번에는 배가 복쟁이처럼 볼록하고 쭉 째진 입가에 송곳처럼 날카로운 수염까지 단 자가사리가 입을 벌름거리면서 말참견을 했어요."저, 잉어할머니, 전 그 말씀에 불만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전 생고기만 먹고 사는 놈인데, 그리되면 나 같은 놈은 아주 굶어죽어 버리란 말씀과 다름이 없잖소. 하루 종일 다방에 앉아 맹물마시고 사는, 일없는 인간들도 아침밥은 먹고 나오는데… 아무런들 내가 그들만도 못하다는 말이요? 내 참…."무지스런 까만 얼굴을 한 자가사리는 제법 핏기까지 올려가며 소리를 높였으나 잉어할머니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조용한 말투로 자가사리를 타이르는 듯 말을 계속 이었습니다. "이 연못 속에는 우리끼리 아웅다웅 싸우거나 서로 잡아먹지 않아도 먹고 살 것이 얼마든지 있어. 산에서 흘러내리는 고소한 나무열매, 풀잎에서 떨어지는 갖가지 벌레들, 그리고 연잎 위에 진주알처럼 고였다가 흘러내리는 맑은 물방울, 나는 한평생을 살면서 같은 동족을 조금도 괴롭히지 않고 그런 것만 먹고 지금까지 살아왔어. 너도 이제부턴 같은 동족을 해치는, 그 고약하고 모질스런 짓은 하지 말고 착하게 살아야 하는 거야."그리고 한층 목청을 높여 모두를 향해 말했어요."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이곳의 안녕과 평화는 말할 것도 없고, 여러분 자신의 목숨까지도 지탱할 수 없을 테니 깊이 명심하시오."잉어할머니의 긴 말은 여기서 끝을 맺었어요. 이제 남는 것은 연못 속에 사는 물고기들의 결정뿐이었습니다.그 자리에 모인 물고기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잉어할머니의 말에 따르기로 굳게 맹세를 했다. 하지만 그때 그곳에 없었던 가물치, 메기, 뱀장어는 자가사리가 일러바친 그 소식을 듣고 코웃음을 칠뿐이었습니다.그들은 제각기 한마디씩 빈정거리면서 입을 삐죽거렸어요. 그 후 잉어할머니 말씀에 순종한 물고기들은 지렁이를 무는 일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낚시꾼들이 먹이를 지렁이가 아닌, 미꾸라지나 개구리로 바꾸게 되었습니다.이 연못 속에 살던 가물치, 메기, 뱀장어와 같은, 생고기 좋아하는 사나운 물고기들은 앞을 다투어 그것을 물고 채다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오랜만에 그곳에는 진정한 평화가 찾아왔어요. 그리고 그 후로도 여러 번 연꽃이 피고지고 많은 세월이 조용히 흘러갔습니다.그동안 잉어할머니는 그 곳 모든 동족 물고기들의 존경과 극진한 사랑을 받으면서 남은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던 어느 가을날의 일이었어요. 갑자기 맑은 하늘에 먹구름이 일고 장대같은 비가 그 연못을 내리 덮더니 잉어할머니를 감싸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그렇게 비구름 속에 하늘로 올라가는 잉어할머니의 모습은 잉어가 아닌, 마치 용이 꼬리를 흔들며 올라가는 듯 했어요. 그때 그 광경을 본 것은 유일하게 연잎 위에 앉아 낮잠을 자다가 깬 개구리뿐이었습니다. 평소에 말썽꾸러기 개차반으로 이름난 그 놈도 용이 되어 승천하는 잉어할머니의 그 장엄하고 거룩한 모습을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그만 넙죽 큰 절을 했지요. 개구리가 공손히 앞발을 모으고 엎드려 절을 하는 버릇이 생긴 것은 바로 이때부터라고 합니다. ※서구 세하동 동하마을은→세하동 동북쪽에 있는 큰 마을로, 마을 뒤에 백마산과 옥녀봉이 솟아 있고, 마을 앞에는 송정 평야의 넓은 들이 펼쳐져 있다. 그 들판 가운데로 극락강이 흐르고 있다. 조선 초에 청주한씨가 들어와 생성된 마을로, 마을 앞에 연꽃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앞 1000평 남짓한 연못 안에 만귀정, 습향각, 묵암정사 등 정자가 있어 경관이 빼어나다.
    2018-05-28 | NO.6
  • 읍궁암(눈물바위)의 푸른 이끼
    서구 용두동 봉학마을에는 읍궁암泣弓巖이 있어요. 엄이재掩耳齎 뒤편에 있는 푸른 이끼가 낀 바위를 말합니다. 이 엄이재는 한말 유학자이자 깨어있는 지식인으로 평가받는 현와弦窩 고광선高光善(1855∼1934) 선생이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봉황산鳳凰山에 들어가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한 곳이죠. 엄이는 ‘귀를 닫았다’는 뜻이에요. 스스로 세상과의 단절 혹은 절연을 실천한 셈이죠. 푸른 이끼가 낀 바위 역시 말이 없었겠지요. 어지러운 세상에 ‘귀를 닫아버리고[掩耳] 싶다‘는 뜻을 지닌 엄이재는 혼돈의 세상에서 새 세상을 기다리는 행위였는지도 모를 일이죠. 아마도 제 힘으로 어쩔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귀 앞에 커다란 벽을 두고, 스스로를 침묵의 세상에 가두고 싶은 심정이 들지 않았을까요. 현와도 마찬가지였겠죠. 옛날 학자들은 대개 성품은 청렴하고 정직하지만 그 행동이 우유부단하고 연약한 것이 흠이었지요. 안다는 것이 자칫 이성에만 치우쳐서 결단을 저해하고 고고한 채 세상을 달관하려 들기 때문입니다.그에 비하면 한말의 명유名儒 현와 고광선 선생은 그 범주를 벗어난 정의감이 꿋꿋한 인물이었다고 봅니다. 귀를 닫아버리고 세상과 담을 쌓고 싶다는 것은 그만큼 세상과 맞서는 강직한 심정을 헤아리게 만드는 셈이죠. 제봉 고경명의 후손인 현와는 1855년 12월23일 지금의 남구 압촌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1862년에 부친으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어려서부터 모습이 민첩하고 단정했다고 합니다. 또 글 읽기를 하면 송독誦讀에 능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늘상 칭찬을 받았지요. 일찍이 조선 후기의 학자 덕암 나도규(1826~1885) 선생에게 취학하고 조선을 대표하는 마지막 유학자인 노사 기정진(1798년∼1879) 문하에서 수학했습니다.이런 현와가 이곳에 엄이재를 만들게 된 데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이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었지요. 소위 을사오적乙巳五賊에 의해 1905년 일본과 보호조약이 맺어지고 민영환, 조병세 등 지사들의 자결소식을 듣고 격분한 나머지 홀로 압촌을 떠나 서창면 용두동 산 79번지 봉황산 중턱으로 찾아들었다고 해요. 고광선 선생은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망국의 비운을 강개하여 귀를 막고 아무 것도 듣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1906년 엄이재를 짓고 봉황산 기슭에 들어앉게 된 것입니다. ‘엄이掩耳’는 앞서 말했듯 ‘귀를 막고 듣지 않는다’는 뜻으로, 세상과의 의도적인 단절을 원했던 것이지요. 엄이재의 유래는 이처럼 한말 망국의 비운을 강개하여 귀를 막고 아무 것도 듣지 않겠다는 현와의 의중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귀를 닫는다고는 하지만 선생의 학덕을 기리는 이 지방 선비들이 그대로 내버려 두지를 않았어요. 이들이 몇 번이고 부탁을 해 사양하지를 못하고 결국 후학들을 가르치게 된 거에요. 그러자 어느새 그의 산중처소에는 제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게 되고 봉황산 일대는 글 읽는 소리가 메아리쳤다고 합니다. 선생은 제자들에게 학문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구국救國의 지절志節을 일깨우고 선비의 덕의德義와 사변思辯을 가르쳐 이 마을이 학자들이 많이 나오는 마을이 된 거에요.엄이재가 있는 아랫마을은 봉학鳳鶴이라 불리는 데 은행나무와 감나무가 어우러져 멀리서 보면 황금빛으로 빛나 보여요. 마을길을 가로질러 300여m 오르면 엄이재와 봉산사가 한눈에 들어옵니다.읍궁암은 마치 큰 무덤처럼 생겼고 그 앞에는 제단처럼 생긴 바위가 가시덤불 속에 남아있는데 쏜살같이 흘러간 시간의 무상함을 보여주는 듯 하지요. 바위가 여기저기 푸른빛이 나도는데 이끼처럼 보여요. 마치 지금은 다 말라서 아예 바위로 채색된 것 같아요. 고광선 선생은 1910년 국치일을 맞게 되자 백의배립白衣白笠으로 북향 통독한 후 두문불출 한 채 엄이재에 은둔하면서 그 왼편 뒤쪽에 왕릉처럼 생긴 이 바위에서 국권회복國權回復을 위해 노력하다 슬픔 속에 가신 고종임금을 몹시 흠모하여 그 바위를 고종임금의 능묘陵墓로 삼고 조석으로 그 앞에서 백의백립하며 3년간 곡哭하며 지냈다 하지요. 그때 흘린 눈물이 바위를 덮은 파란 이끼가 됐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선연히 우리에게 슬픔을 전해주고 있는 듯합니다. 마지막으로 고광선 선생이 드러나는 ‘현와유고’ 수록작 ‘엄이재掩耳齎 원운’原韻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엄이동 골짜기에 집지어 놓으니/날마다 골짜기는 구름과 이웃하오/밤이면 밝은 달 샘물에 뜨고/새벽이면 외로운 섬에 노을 흐르네/바위틈에 죽은 자취 드리우는데/나라 잃고 세상 등진 백성의 뜻/더러운 세상사 말하지 마오/산빛은 아득히 먼 옛 봄이라오’재미있는 것은 읍궁암이 우울한 역사와 관련이 된다는 것입니다.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에 화양구곡이 있는데 거기에도 읍궁암이 있지요. 조선 후기 문신 겸 학자, 노론의 영수, 주자학의 대가였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조선 제17대 왕 효종孝宗(1619~1659)이 붕어하자 엎드려서 통곡했다는 곳이에요. ※현와弦窩 고광선高光善은 1855년 12월 23일 광주 복촌復村(남구 압촌 마을)에서 호은湖隱 고박주高璞柱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장흥으로 제봉 고경명의 후손이다. 문과 좌랑으로 기묘명현이었으며, 맹영은 문과 부제학이다. 서구 용두동 봉학마을 봉황산에 들어가 엄이재掩耳齎를 짓고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 1934년에 만귀정 중건기를 쓴 이가 현와다. 그의 사후 30여년이 지난 1962년 박하형朴夏炯 등 문인들이 편집. 간행한 『현와유고弦窩遺稿』(16권 8책)에 시 165수. 서書 442편 등이 수록됐다.
    2018-05-28 | NO.5
  • 정충신-거지 사행(使行) 2천리
    조선 중기의 무신이자 광주 지역 아전이었던 충무공 정충신鄭忠信(1576∼1636)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 권율權慄 장군의 휘하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충신은 거지 복장을 했지요. 임금에게 장계狀啓를 전해야 하는 데 왜군들이 길을 점령하고 있어 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장계를 전달할 사람을 찾았으나 아무도 자원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당시 17세에 불과했던 정충신이 선뜻 자원, 장계를 무사히 전달해 주위를 놀라게 했지요.이 무렵 호남의 정세도 긴박하게 돌아갔습니다. 권율 장군은 왜적이 침입하자 호남 각지에서 들고 일어선 수천의 의병을 이끌고 전북 일대와 호남 각지에서 왜적을 무찌른 승전의 소식과 이곳 호남의 정세를 의주에 계신 임금에게 알려야만 했어요.그러나 왜적이 팔도에 들끓어 임금에게 보고하는 장계를 전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권율 장군은 장계를 행재소에 전달할 사람 모집에 나설 수밖에 없었지요. 아무도 응하지 않았는데 정충신이 그 중대하고 위험한 일을 하겠다고 선뜻 자청하고 나선 것이지요. 주위에서 말렸지만 그는 끝까지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더구나 그때는 삼복이어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로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잘못하면 장계를 전달하러 가는 길에 왜군에게 붙잡혀 죽을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정충신은 행동이 민첩하고 지략이 뛰어난 인물답게 아랑곳하지 않았지요. "온몸에 ‘옻칠’을 발라 나병환자로 가장해서 갈 거예요. 장계를 가늘게 노끈으로 꼬아 배낭을 만들어 등에 지고 걸인행색으로 가면 임금에게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 것입니다."별로 배운 것은 없었지만 바탕이 영민한 정충신은 천문지리天文地理와 ‘점술’에 능통했습니다. 그는 적진을 피해 가던 중에도 더러는 정탐까지 수행했습니다. 일부러 적진에 찾아들어가 걸식을 하면서 밤낮으로 북행을 계속한 것이죠. 이렇게 해 무사히 행궁行宮에 당도한 그는 메고 간 배낭을 풀어 장문의 장계를 임금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는 왜군으로 가득한 길을 단신으로 뚫고 행재소에 도착, 임금께 장계를 올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이런 과정에서 정충신은 한양에서 이항복 선생과 귀한 인연을 맺게 되지요. 병조판서로 선조 임금을 호위하고 있던 오성 이항복이 정충신의 비범함을 한 눈에 알아차리고 그를 자기 집에 머무르게 했습니다. 오성은 집에 머무르는 동안 그 비범함에 반해 손수 사서삼경 등 글을 가르쳤어요. 머리가 총명한 정충신을 아들같이 사랑도 했지요. 정충신은 학문이 날로 발전하고 문리文理에 대한 깨달음이 빠른데다 어려운 일을 척척 해내는 뛰어난 재간을 발휘했어요. 그리고 그해 겨울에 행재소에서 실시되는 무과에 응시해 합격하는 기쁨을 누립니다.정충신은 이항복 선생과의 인연 이후로 정말 나라의 귀중한 재목이 됐지요.정충신은 1621년(광해군 13) 만포첨사로 국경을 수비했으며, 이때 명을 받고 여진족 진에 들어가 여러 추장을 만나기도 했지요. 북방 여진족에 대해 항상 경계하고 방비할 것을 주장했으며, 지략과 덕을 갖춘 명장으로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이항복은 일찌기 그를 극찬한 바 있어요."정충신이 만약 칼을 버리고 책을 취하면 일대의 훌륭한 명사가 될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1623년(인조 1) 안주 목사로 방어사를 겸임하고, 그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도원수 장만張晩의 휘하에서 전부대장前部大將으로서 이괄의 군사를 황주와 서울 안산에서 무찔러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으로 금남군錦南君에 봉해졌습니다. 그 후 승전을 거듭해 포도대장,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지내는 출장입상出將入相의 훌륭한 명신이 됐습니다. 광주광역시의 척추를 이룬, 최대 간선도로인 금남로는 정충신의 군호君號를 딴 이름입입니다.1636년 정충신의 병이 심해지자 왕까지 나서서 “의관은 정충신의 치료에 진력하라.” 며 특별 분부를 했건만 효험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요. 그의 사후 왕은 다시 내시에게 명을 내렸습니다. “호상하게 하고, 어복御服을 주어 수의壽衣로 하게 하라.” 관청에서 의로써 장사를 치르게 했습니다.    ※거지 사행使行 2천리 주인공 정충신은 전남 나주 출생 고려 명장 정지鄭地(1347∼1391) 장군의 9대손으로 광주목의 좌수를 지낸 금천군 정윤錦川君 鄭綸의 아들이다. 키가 작으면서도 씩씩했고, 덕장이라는 칭송을 들었으며, 민간에 많은 전설을 남겼다. 천문. 지리. 복서. 의술 등 다방면에 걸쳐서 정통했고, 청렴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그에게 얽힌 많은 설화가 전해지지만 무등산이 갈라지며 청룡과 백호가 뛰어나와 안겼다는 태몽이 대표적인 이야기다. 저서로는 『만운집晩雲集』, 『금남집錦南集』, 『백사북천일록白沙北遷日錄』 등을 남겼으며, 시호는 충무忠武다.
    2018-05-28 | NO.4
  • 정화 군수와 보성보
    보성보寶城洑는 옛날에 보성군수를 지냈던 정화鄭和 군수가 지금의 광주 화정동 일대에 만들어놓은 보를 말하지요. 서구 화정2동 광주은행 화정지점 옆 자리는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조그만 수문이 있었습니다. 이곳을 가로질러 보성보라 불리는 일종의 방죽이 있어 인근에 농사를 짓는데 필요한 물을 공급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지요. 허허벌판 농지였을 적에 보성보가 있었기에 큰 어려움 없이 이 일대 농사짓기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근 농성동과 화정동 일대는 보성보의 덕을 많이 봤지요. 나중에는 농성보農城洑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는 것이 『광주읍지』에 나와 있어요. 그런데 광주 땅 안에 보성이라는 지명이 있어 세인들의 관심을 일으킬만 하지요.정화 군수가 군수직을 마치고 광주로 이사와 사패지賜牌地(나라에서 내려주던 땅)를 받아 보성보를 만들었습니다."사연은 이렇지요. 보성 출신의 군수가 보를 만들었다 하여 보성보라는 이름이 자연스레 붙여졌고 지금에까지 이르게 됐지요. 어떻게 해서 보성군수가 광주에 보를 지었냐 하면 군수직을 마치고 사패지를 받아 광주로 이사 왔는데 농사를 지으려고 보니 물막이가 없어서 어려움을 겪게 되자 할아버지 때부터 배운 보를 만들었지요."정화 군수는 조선 초기 벼슬길에 올랐다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영향으로 음사蔭仕로 성종 때에 보성군수(1472~1477)로 특채되면서 처음 보성에 입향入鄕하게 되었습니다. 음사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특권신분층인 공신, 양반 등의 신분을 우대하고 유지하기 위해 친족, 처족 등의 음공에 따라 그 후손을 관리로 채용하는 제도로 음서蔭敍, 즉 과거에 의하지 않고 특별히 서용하는 제도입니다.정화 군수는 보성군수로 발령이 나자 두 동생인 정직鄭稷 및 정세鄭稅와 같이 보성읍 구계동에 입향했습니다. 정화 군수는 재임 중 수많은 선정을 베풀었는데 교육의 중심지였던 향교를 현재의 장소로 이축했을 뿐만 아니라 용문지언龍門池堰과 도개제언道開堤堰을 축조해 인근 농지가 대대로 겪어온 가뭄을 해갈하는 데 큰 기여를 했고, 면화 재배를 시도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정화 군수는 부임 첫 해에 당시 대한大寒의 해가 겹쳐 지역농민들이 어려움을 겪자 육방관속六房官屬(이방 호방 예방 병방 형방 공방)의 민폐 근절을 비롯해 잘못된 관행과 제도의 개선, 주을정注乙井이라는 샘을 파고 둑(보洑)를 막고 제언을 축조했으며 군민을 진휼하는데 힘을 쏟았지요.부임 이듬해에는 지역민들에게 감초 재배를 권장하고 왜구 침입을 막기 위해 병기 확충과 성채 및 오봉산성을 축조했으며, 3년째는 면화의 적지재배를 장려하고 쇠락한 향교를 중창해 학문을 진작시키는 등 지역의 경제와 학문의 발전에도 큰 기여를 했습니다. 정화 군수의 ‘청백리’라는 칭호는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아닌가 싶었어요. "정 군수는 할아버지 때부터 청백리로 유명했지요. ‘성종실록’에 따르면 정화 군수는 재임 중 엄격한 청백리로 군정을 처리하자 몇몇 군의 녹봉을 받는 관리들이 부수입이 줄어든 것에 앙심을 품었다고 해요. 그래서 아전 2명이 병권을 다루는 신표인 발병부發兵符를 절취, 은닉해두어 군사동원훈련에 참가하지 못하게 되었어요. 이 때문에 국가에서 군사훈련에 참가하지 않은 죄를 물어 의금부에서 곤욕을 치룬 적이 있었지요. 하지만 나중에 그 사실이 무고로 밝혀져 풀려나고 아전 2명은 벌을 받았다고 해요."나중에 보성 군수를 지내다가 무고의 사실이 밝혀져 옥살이를 면한 뒤 벼슬에 뜻을 접고 나라로부터 광주 화정동 인근의 땅을 사패지로 받아 광주로 입향을 하게 됐습니다. 특히 정화 군수는 만 5년을 보성군수로 재직하면서 1477년(성종 8) 윤 2월에 임금께 아뢴 수령칠사守領七事를 실천했지요. 그 수령칠사란 농상성農桑盛, 호구증戶口增 , 학교흥學校興, 부역균賦役均, 사송간詞訟簡, 간활식奸猾息 등이었지요.사패지로 받은 땅 가운데 일부는 농지로 쓸 만한 땅이 있으나 상당 부분 농지로 쓰기에는 물이 부족한 실정이었는데 정화 군수는 ‘농사직설’을 엮은 정초의 영향을 받아 어릴 때부터 효율적인 농사짓기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어른들로부터 배운 방죽 만들기와 다리 만들기에 힘을 쏟았는데 그 노력으로 보성보와 보성다리라는 성과를 낸 것이죠. 보는 논밭에 물을 대기 위해 하천에 둑을 쌓아 만든 저수시설을 말하는데 전통적인 농업 국가였던 우리나라에서의 치수治水는 국가 주요정책의 하나였기 때문에 정화 군수의 치수야 말로 귀감이 되고도 남았죠.보성보는 농성동과 화정동의 인근 야산이 있어 이를 설치하는 데 최적의 입지조건이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역사를 가진 보성보는 도시개발과 도로망 확충 등에 따라 지금은 모두 복개가 되어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게 돼 아쉬움을 더하고 있습니다.   ※정화 군수는 1434년(세종 16) 경기도 장단長湍 출생으로,1449년(세종 31) 16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466년(세조 12) 33세에 원주 판관으로 있다가 1472년(성종3) 39세 때에 성종의 특명으로 보성군수로 제수 받게 됐다. 정화 군수는 조선 초기 경사經史와 천문天文, 역산曆算 등에 통달한 대학자이자 일반 경종법耕種法에 대한 현존 문헌으로 가장 오래된 농서인 『농사직설農事直說』을 엮은 문경공文景公 정초鄭招의 종손이며, 성균관 대사성과 좌찬성을 지낸 문절공文節公 정수충鄭守忠의 아홉 아들 중 장자이다.
    2018-05-28 | NO.3
  • 주역각시
    서구 매월동 회산懷山마을 출생으로 선조가 ‘호남의 충의신’이라 극찬했던 임진왜란 때의 공신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1526~1592) 선생에게는 영특한 따님이 있었어요. 어려서부터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달하고 동물 소리까지 알아듣는, 총명한 재주를 지녔지요. 그 따님의 나이 과년(여자 나이 15.16세 때를 이름)이 되어 전북 남원의 명문가로 이조판서를 지낸 노정盧楨(1518-1578)의 아들과 혼례를 올렸지요.결혼 첫날밤에 신랑과 함께 자리에 누워 있다가 방구들에 숨어있던 쥐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듣고 웃은 것이 화근이 돼 시집에서 퇴박을 맞고 말았습니다. 식혜를 놓고 쥐들끼리 나누는 대화였는데 그게 이렇게까지 일이 커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요."쥐 한 마리가 식혜항아리에서 단맛이 나 그것을 먹고 싶은데 항아리가 미끄러워서 올라가지 못한다고 말하자 다른 쥐가 항아리 밑의 흙을 파면 결국 항아리가 엎어질 것이고 그 때 먹으면 되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이었어요." 이처럼 쥐의 이야기를 들은 새 신부가 잠자리에서 웃자 옛 남자를 잊지 못해 웃는 것이라면서 시집에서 퇴박을 맞게 된 것이죠. 엉뚱한 트집이었지만 그때 당시의 풍습으로 갓 시집 온 양가집 규수가 신혼 첫날밤에 웃는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어요. 아무리 변명을 해도 소용이 없었죠. 결국 그녀는 결혼 첫날밤 이후 친가에서 보내게 되었지요. 남편과의 접촉이 일체 끊어진 상태에서 그 억울한 이야기를 씻을 길도 없었습니다.그로부터 몇 년의 세월이 흘러간 뒤의 일이었습니다. 나뭇잎이 짙은 초록빛으로 물든 초여름 어느 날, 시아버지 노정공盧禎公이 불쑥 이곳 사돈댁을 찾아왔어요. 사돈 박 회재 선생과는 전부터 친숙한 사이로 자식들 간의 불합不合은 그렇다 해도 옛 친구의 두터운 정리情理까지를 저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죠. 노공盧公은 사돈댁에 들어는 길에 집 앞의 큰나무에 제비집이 있고, 그 안에는 아직 제대로 거동하지 못하는 제비새끼가 있는 것을 보았지요. 노공은 정말로 며느리가 쥐들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인지 시험해보기 위해 일부러 제비 새끼 한 마리를 도포 속에 넣고 집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노공은 자부子婦의 인사를 받고 차려 내온 술잔을 손에 들면서 사돈 박공에게 사과 겸 이렇게 말을 꺼내는 것이었어요."영조英祖 임금께서는 아드님 장묵세자(사도세자思悼世子)를 뒤주 속에 가뒀다지만 우리야 어디…"하고 씁쓸한 얼굴로 말끝을 흐리는 거예요. 자기 말을 듣지 않고 아내를 퇴박한 아들을 탓하고 자신의 무위無爲를 자책하는 말이기도 했지요. 박공朴公은 그저 쓸쓸히 웃을 뿐 별다른 말이 없자 방안 분위기는 금방 무겁고 침울해졌어요. 그때 대문 옆의 큰 나무에 어미 제비 한 마리가 날개 짓을 하면서 우는 것이었어요. 노공은 이 때 며느리를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아니, 대문 옆 저 나무의 제비는 이 댁에 손님이 왔는데도 왜 저렇게 슬피 우는지 모르겠구나."다소곳이 꿇어앉아 술시중을 들고 있던 자부子婦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태연한 말투로 술을 따르면서 대답을 했습니다."아버님 , 어서 약주 드셔요. 저 어미 제비가 저리도 슬프게 우는 이유는 내 새끼가 이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고기로도, 가죽으로도, 털로도 쓰지 못하니 돌려달라고 하네요. 아버님 도포 속에 있는 제비새끼를 놓아 주십시오."과연 어미제비 한 마리가 이쪽을 보고 슬픈 목소리로 재잘거리고 있었습니다. 노공은 조용히 일어서서 도포 속에 넣고 온 제비새끼를 꺼내어 마룻바닥에 놓아주었어요. 그러자 어미제비는 재빨리 그것을 입에 물고 날아갔습니다. 그래서 박광옥 선생 따님에 대한 오해는 완전히 풀리고 신원伸寃은 되었지만 노씨 문중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때가 늦어버렸어요. 그녀는 일생을 친정에서 지내면서 아버지를 도와 막대한 가산을 이루게 하고, 그 재산으로 임진왜란 때 군량미를 제공했으며 개금산에 노적가리를 쌓아 군량미가 많은 것처럼 보이게 하는 등 많은 창의倡義를 도와 큰 공훈을 세우게 했습니다.그녀는 사서는 물론, 주역까지를 통달하여 만물을 꿰뚫어보고 심지어 짐승의 말소리까지를 알아듣는 재능을 추앙하여 세칭 ‘주역각시’라는 칭호로서 지금도 널리 인구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더욱이 임종할 때 한 유언 내용은 예지력까지 보여줘 그의 영특함이 죽는 순간까지도 발현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줘요. "‘나는 끝내 친정에서 생을 마치고 이곳에 묻히지만 앞으로 세월이 흘러 시집이 7대손을 지나면 나를 이장해 갈 것이니 그 때까지만 잘 부탁한다’고 말하고는 눈을 감았지요. 그런데 이렇게 묘를 쓴 후 200여년이 지나 그 말대로 노씨 문중의 7대손이 이장해 가 지금은 남원 땅 노씨 문중 선산에 묻히게 되었어요. 후대까지를 내다보면서 묏자리를 썼는데 유언처럼 후손들이 이장해 간 것이죠. 그의 시신도 거의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고 해서 더욱 놀라게 했다지요."그때의 묏자리는 현재 순천 박씨의 묘로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모부인 수연가母夫人壽宴歌日中(일중) 金(금)가마괴 가지 말고 내 말 들어너는 反哺鳥(반포조)라 鳥中(조중)의 曾參(증삼)이니오날은 날을 위하야 長在中天(장재중천) 하얏고자   - 노정 盧禎(1518-1578), <병와가곡집>(甁窩歌曲集)반포조 = 까마귀. 까마귀는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주어 효성을 다한다고 한다.조중의 증삼 = 새 가운데 효성이 지극한 새. 증삼(증자)이 효자였기에 한 말이다.장재중천 = 하늘에 오래 머물다. * 이 시조는 작가가 연로하신 어머니의 생신잔치에서 어머니의 만수무강을 빌면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노정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형조참의, 도승지 등의 벼슬을 지냈다. 호는 옥계玉溪). 1537년 생원시에 급제한 뒤 지례현감이 되었는데,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에 이름을 올렸다. 뒤에 예조판서, 이조판서에 내직을 받았으나 병 때문에 나아가지 못했다. 어머니께 지극한 효도를 해서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옥계집>玉溪集이 있다.
    2018-05-28 | NO.2
  • 풍암동 12당산과 도둑
    서구 풍암동의 옛 신암마을을 비롯 인근 매월동 동산마을, 임암동 화방마을엔 남아있는 고인돌군은 신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다는 흔적을 보여주는 것으로 주거의 역사가 장구한 곳이지요. 풍암지구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신암근린공원과 금호아파트 옆의 근린공원에는 이들 마을에서 옮겨온 신석기시대의 역사를 증명하는 고인돌과 선돌이 옮겨져 복원돼 있습니다. 지금 옮겨져 오기 전의 고인돌과 선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통마을의 역사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지요. 풍암지구 금호아파트 근처에 있는 ‘근린공원’과 주은모아아파트 뒤편에 있는 ‘신암근린공원’이 있는데 예전에 온 동네 대소사가 전해지던 사랑방 같은 ‘시암(샘)터’가 있었어요. 신암마을은 시암이 신암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신암마을 안에는 옛날에 샘이 많았어요. 특히 지금 이 할머니 당산나무가 있던 인근 금호아파트 1차 단지 안에는 ‘말샘물’이라 해 겨울에는 따뜻한 샘물이, 여름에는 차디찬 샘물이 나오는 곳이었어요. 신암마을 사람들은 여름이건, 겨울이건 이곳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마을의 대소사를 서로 논의했지요.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이 살아온 신암마을은 뒤쪽으로는 금당산이 자리하고, 앞으로는 저수지와 너른 들판이 있어 전체가 명당으로 불릴만했지요. 이 신암마을 입구에 수백 년의 수령을 지닌 당산나무가 있었죠. 어른들한테 들은 이야기로는 이 마을에 무려 ‘12당산나무’가 있었다고 해요. 그런데 어렵사리 나무들이 자라더니 지금은 두 그루만 남았죠. "어릴 때는 이 당산나무를 붙잡고 동네 아이들과 놀았어요. 할아버지 당산은 아래쪽에 큰 구멍이 뚫려있어 그곳에서 놀기도 하고, 겨울에는 구멍 안에서 불을 지피고 앉아 놀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40여 년 전에 할아버지 당산이 죽었지요. 아무래도 우리가 죽인 것 같아 늘 죄송스런 마음뿐이지요. 다행히 할머니 당산이라도 살아남아 당산제를 지낼 수 있으니 그나마 걱정을 덜게 됐습니다."신암근린공원에서 100여m 쯤 떨어진 금호아파트 101동과 102동 뒤편에는 두 팔을 뻗은 것 마냥 푸른 잎이 무성한 ‘당산나무’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당산나무는 지금 ‘할머니 당산이라 부르는데 할아버지 당산은 아깝게도 1960년대 중반 고목이 되어 유실되고 말았습니다. 오래 전 이곳에 12당산이 있었는데 각 당산마다 큰아버지 당산, 큰어머니 당산, 작은아버지 당산, 작은어머니 당산 등 이름이 붙여져 있었고, 마을사람들은 매년 정월 보름이 되면 지성으로 당산제를 올렸지요.1982년 1월3일 ‘왕버들 보호수’로 지정된 이 할머니 당산나무는 둘레가 4.6m, 높이가 15m로 풍암지구 인근에서 발견된 선돌 및 고인돌과 함께 자리하고 있어요. 마을 입구에서 있던 당산나무는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뿌리째 뽑혀져 버릴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마을 주민들이 건설회사와 싸워가면서 이 나무를 지켰다고 합니다.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면서 없어질 번한 것을 주민들 요구에 따라 공원 한 켠에 자리하게 됐지만 여전히 위력을 잃지 않은 모양새예요. 12당산나무는 옛날부터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었지요. 그래서 옛날 신암마을에 도둑이 들어도 쉽게 도망가지 못했다고 그래요. 이와 관련한 옛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한 번은 도둑이 들어 한 밤중에 어떤 집의 소[牛]를 훔쳐 갔어요. 도둑은 이 소 고삐를 잡고 밤새도록 마을길을 꼬불꼬불 걸어 나갔다고 해요. 이미 한 번 들러서 나가는 길을 봐둔 터라 나름대로 ‘작은 안터’와 ‘큰 안터’를 지나 염주마을을 넘어 빠져나갔다고 생각했죠. 도둑은 이렇게 밤새도록 걸어 새벽녘이 다가오자 상당한 거리를 나왔다고 안심하고 한 나무 밑에 앉아 숨을 돌리며 담배 한 대를 물고 있었어요. 그런데 소 주인이 나타나 ‘이 소도둑놈아, 내 소를 훔쳐가려고 하느냐’라고 달려오자 도둑은 마치 이른 아침 농사를 짓기 위해 소를 몰고 나온 다른 마을 주민인 냥 ‘무슨 소리요, 이것은 내 황소요’라고 대꾸하다가 소주인이 ‘너는 이 마을 사람도 아닌데 여기서 무슨 황소를 끌고 간다는 말이냐’하며 멱살을 쥐어잡았습니다."이렇게 도둑은 멱살을 잡힌 채 정신을 차렸으나 신암마을 입구를 떠나지도 못한 채 열두 당산나무 주위만 빙빙 돌았던 것이지요. ※당산제는 논농사를 짓던 시절 마을 주민들은 해마다 정월대보름에 올렸다. 주민들이 농사를 짓고 생활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이 당산나무에서 지신제, 천신제, 용신제 등 갖가지 당산제를 지내왔다. 보통 당산제는 마을의 조상신이나 수호신에게 지내는 제사로 이것은 마을의 평안과 풍요 등을 기원하기 위해서 지낸다. 당산제는 제사와 굿의 이중성격을 갖고 있는 점이 특이하며 축제 분위기로 부락민의 유대강화에 큰 역할을 한다. 풍암지구에서는 아파트 대단지가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2018-05-28 | N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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