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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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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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덕석이 떠내려가도 공부만 한 남편
    광주광역시 동구 용산동 화산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덕석이 떠내려가도 공부만 한 남편」은 다른 일에 집중하여 덕석이 떠내려가도 그 상황을 알지 못하는 남편에 관한 이야기이다. 2018년 2월 21일 광주광역시 동구 용산동 화산마을에 거주하는 주민 성귀덕[여, 85세]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수록되었다.옛날에 한 부인이 곡식을 많이 널어 놓은 채 일하러 나갔다. 그 사이 남편은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공부에 집중하여 덕석이 떠내려가도 덕석에 넌 곡식을 담아 놓지 않았다. 여자는 곡식이 다 떠내려가도 잡지 않는 남편과 함께 살 수 없다 생각하여 집을 나갔다.후 남편은 과거를 보고 큰 벼슬을 받았고, 그 아내는 후회를 하였다. 지금도 누가 게으르게 자고 있으면, 할머니들이 '덕석 다 떠내려가도 모른다' 고 하는 것은 「덕석이 떠내려가도 공부만 한 남편」의 상황과 똑같다는 말이다.이 이야기의 주요 모티프는 '속담의 유래'이다. 속담은 어떤 사실을 비유로 표현하여 풍자하거나 교훈을 전달하는 기능을 가진 관용어구이다. 이 이야기에서 남편은 다른 일에 전념한 나머지, 아내가 널어 놓은 덕석이 떠내려가서 곡식이 흩어져도 다시 줍지 않았다. '덕석이 떠내려가도 모른다'는 말의 의미는 '행동이 게으르거나 어떤 일에 전념한 나머지, 즉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모습'을 풍자한 것이다.[참고문헌]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11-10 | NO.27
  • 도깨비 둠벙
    광주광역시 광산구 안청동 안청마을의 둠벙에는 도깨비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물고기가 둠벙에 많이 살아서 마을 사람들이 물을 퍼냈지만, 물고기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었고, 밤이 되면 주변에 도깨비불이 자주 나타난다는 이야기이다.광주광역시 광산구 안청동 안청마을에 거주하는 제보자 박열규의 이야기를 1989년에 채록해서, 1990년 광주직할시가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하였다.안청마을에는 도깨비 둠벙이 있는데 농지 정리를 하면서 사라졌다. 도깨비 둠벙에는 물고기가 많았다. 마을 사람들이 물고기를 잡으려고 둠벙의 물을 다 퍼냈는데, 물고기가 한 마리도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실망하고 집으로 돌아가다 보면, 들판에 물고기들이 널려 있었다. 도깨비가 마을 사람들에게 물고기를 주지 않으려고 장난을 친 것이었다. 어느 날 낚시꾼들이 도깨비 둠벙에 와서 물고기를 잡았다. 투망을 던지니 큰 붕어며 잉어, 가물치 등이 잡혔다. 욕심이 생긴 낚시꾼들이 발동기를 가져와서 도깨비 둠벙의 물을 퍼내기 시작하였다. 물이 워낙 많아서 퍼내는시간이 오래 걸렸다. 낚시꾼 중의 한 사람이 기다리다 못해 둠벙에 들어가서 고기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물에 들어간 사람은 추운 겨울 얼음물에 죽을 뻔했고, 사람들의 도움으로 겨우 구조되었다. 낚시꾼들은 발동기를 놓아두고 돌아갔다. 저녁이 되니 둠벙 근처에서 밝은 불이 번쩍번쩍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누가 와서 발동기를 훔쳐가는 것으로 생각했다. 마을 사람들은 날이 밝자 발동기를 확인하러 갔다. 그런데 발동기는 그대로 있었고, 사람들이 다녀간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어젯밤에 본 불빛이 도깨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전에 마을 사람들은 도깨비 둠벙에서 물고기를 잡을 때는 백마를 끌고 가서 매어 놓았다. 도깨비가 자주 나와서 마을 사람들에게 장난을 쳐서 물고기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런데 백마는 도깨비와 상극이다. 백마를 매어 놓으면 물고기가 잘 잡혔다고 한다.「도깨비 둠벙」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안청동 안청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도깨비 이야기이다. 도깨비는 물가와 둠벙에 자주 나타난다. 도깨비는 물고기에 욕심이 많아서 간혹 사람들이 물고기를 잡으려면 장난을 친다. 물고기로 장난을 치는 도깨비 이야기는 육지와 해안가 등에서 자주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도깨비 둠벙」도 이러한 도깨비 이야기의 한 종류이다.청마을 사람들은 도깨비가 자주 나타나는 둠벙에서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으며, 과거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도깨비 둠벙’이라는 지명을 붙였다. [참고문헌]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11-10 | NO.26
  • 도깨비 정체
    광주광역시 여러 곳에서 전해 내려오는 도깨비의 정체에 관한 이야기. 도깨비는 괴이한 재주와 강한 힘으로 사람을 홀리거나 괴롭히기도 하지만, 인간에게 물고기를 몰아 주거나 부자로 만들어 주는 등의 도움을 주기도 한다. 주로 밤에 활동하는 도깨비를 낮에 보면 본래의 정체가 밝혀지는데, 대체로 빗자루 몽둥이나 나무막대기, 부지깽이 등이라는 이야기이다. 2018년 광주광역시 동구 지원동에 거주하는 주민 이정애, 광산구 본덕동에 거주하는 주민 류임, 북구 생용동에 거주하는 주민 서판순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수록되었다.도깨비불은 빗자루처럼 길다. 옛날에 도깨비를 묶어 놓았다가 아침에 가서 보면 대빗자루였다. 도깨비불은 비가 오려고 할 때 사방에 나타나서 왔다갔다한다. 지금은 도깨비불을 볼 수 없다. 어떤 사람이 밤 동안 도깨비에게 홀려 다니다가 나무에 도깨비를 묶어 놓았다. 그다음날 가 보니 나무막대기였다. 막대기 이외에도 부지깽이나 낡은 빗자루가 도깨비의 정체이다. 지금 세대는 도깨비를 보지 못하지만 더 윗세대 사람들은 도깨비를 보았다. 도깨비는 다리가 없고 도깨비불만 왔다갔다한다. 밤에 술을 마시고 집에 오다 보면 도깨비가 씨름을 하자고 한다. 도깨비와 씨름을 하고 나무에 묶어 두고 다음날 가 보면 불에 탄 방앗공이나 빗자루 몽둥이가 있다. 그러한 물건에 도깨비가 붙는다.「도깨비의 정체」의 주요 모티프는 ‘도깨비를 본 경험담’과 ‘도깨비의 정체’이다. 도깨비는 조선시대 야담집 등의 문헌기록에도 등장하지만, 현대 이야기판에서도 여전히 등장하고 있다. 특히 도깨비는 직접 보았다거나 만나서 씨름을 했다거나 혹은 주변의 아는 사람[아버지, 할아버지 등]이 직접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등의 경험담의 형태로 전승되고 있다. 제보자들이 도깨비를 직접 보지 못하였지만, 도깨비의 정체가 무엇이고, 도깨비가 언제 나타나는지 등의 단편적인 이야기를 한다. [참고문헌] 장덕순, 『구비문학개설』(일조각, 1971) 『한국민속문학사전』설화 1-2(국립민속박물관, 2012)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11-10 | NO.25
  • 도깨비가 망쳐 놓은 물고기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동에서 전해 내려오는 도깨비에 관한 이야기. 바닷가에서 만난 도깨비가 고기를 달라며 쫓아왔다는 경험담이다. 2018년 3월 23일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동에 거주하는 주민 최정백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수록되었다.제보자 최정백이 전라남도 무안에 살던 총각 시절, 밤에 바다에서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숭어를 한 열 마리 잡아서 집에 돌아오고 있었는데, 갯벌에서 "뻥뻥뻥" 하고 무언가 빠지는 소리가 났다. 제보자는 "뻥뻥뻥" 하는 소리가 계속 따라오자 무서움을 느꼈다. 그 소리는 도깨비가 고기를 달라며 쫓아오며 내는 소리였다. 집에 돌아와서 보니 도깨비가 물고기를 칼로 다 헤집어 망쳐 놓았다. 도깨비에게 물고기 몇 마리를 주었으면 그런 일이 없었을 것인데, 물고기를 주지 않으니 다른 곳에 팔지도 못하게 해 놓은 것이다. 「도깨비가 망쳐 놓은 물고기」의 주요 모티프는 ‘도깨비가 쫓아온 경험’이다. 도깨비담은 하위 유형 중 경험담의 비중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해안 지역에서 채록된 경험담에서는 밤에 고기를 잡는 중에 도깨비가 고기를 달라며 쫓아온 경험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다. 도깨비불이 쫓아왔다거나 도깨비가 "뻥뻥뻥" 하고 쫓아왔다는 경험이다. 그리고 도깨비에게 고기를 주면 무사히 돌아올 수 있고, 고기를 주지 않으면 병에 걸리거나 고기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도깨비와의 씨름 등 대결을 하게 된다. 도깨비의 발자국 소리라고 여겼던 "뻥뻥뻥" 하는 소리는 갯벌에서 물이 빠지는 소리를 착각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장덕순, 『구비문학개설』(일조각, 1971) 『한국민속문학사전』설화 1-2(국립민속박물관, 2012)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11-10 | NO.24
  • 도깨비불
    광주광역시에서 전해 오는 도깨비불에 관한 이야기.제보자가 도깨비불을 직접 보았다는 경험담이다. 예전에는 도깨비불이 많이 보였는데, 지금은 안 보인다고 한다.2018년 광주광역시 남구 양과동에 거주하는 제보자 윤정이에게 채록하여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수록하였다.제보자가 시집와서 집 마루에 앉아 산을 보면 시퍼런 불을 많이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불을 '호랑이'라고도 하고 '도깨비불'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예전에 지금은 돌아가신 어떤 사람이 밤에 돼지고기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갑자기 앞이 캄캄해져서 돼지고기를 던져 버리고 겨우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에 그곳에 가 보니 고기가 그대로 있었다. 「도깨비불」의 주요 모티프는 ‘도깨비불을 본 경험’이다. 도깨비불을 봤다는 이야기는 도깨비를 만난 경험보다 더 많이 채록된다. 그러나 도깨비불 이야기는 서사구조를 갖추고 있기보다는 단편적인 언급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다. [참고문헌] 장덕순, 『구비문학개설』(일조각, 1971) 『한국민속문학사전』설화 1-2(국립민속박물관, 2012)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11-10 | NO.23
  • 도깨비와 씨름
    광주광역시에서 전해 내려오는 도깨비와 씨름한 경험에 관한 이야기.도깨비와의 씨름에서 이겨서 도깨비를 묶어 놓고 집에 왔는데, 다음 날 가 보니 빗자루가 묶여 있었다는 경험담이다.2018년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동에 거주하는 최정백, 남구 원산동에 거주하는 최찬, 광산구 본량동에 거주하는 오성교, 광산구 본량동에 거주하는 나종철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주관하는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에 수록되었다.채록 당시 제보자들이 구연한 도깨비와 씨름을 한 이야기는 조금씩 다르다. 마을의 할아버지가 시장에 다녀오고 있었다. 술에 많이 취한 채 밤길을 걸어오는데, 도깨비가 나타나 씨름을 하자고 하였다. 도깨비와 씨름을 하였으나 결국 졌다. 씨름에 져서 오도 가도 못하다가 아침에 깨어나 보니 옆에 빗자루 몽둥이가 있었다. 제보자의 조카가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던 중에 도깨비와 씨름을 하였다. 결국은 도깨비를 이겨서 꽉 묶어 놓고 다음 날 아침에 가서 보니 빗자루였다. 젊고 힘이 좋아야 도깨비를 이기고, 도깨비를 못 이기면 죽는다고 한다. 제보자의 외할아버지가 장동에서 당산고개를 술에 취한 채 넘어오던 중에 도깨비와 씨름을 하였다. 어두운 밤이라 도깨비인 줄 몰랐는데, 아침에 일어나 가 보니 빗자루 몽둥이였다. 약 60년 전 제보자의 친구가 송정리 시장에서 돼지고기를 사서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어두운 밤에 술에 취해 제방 둑길을 따라 걷고 있는데, 도깨비불이 나타났다. 도깨비불은 제보자의 친구에게 씨름을 하자고 하였다. 술에 취한 와중에 도깨비와 씨름을 할 때 왼다리를 걸면 이긴다는 어른들의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도깨비의 왼다리를 걸어 씨름에서 이겼고, 말밥풀로 도깨비를 감아서 묶어 놓았다. 아침에 가서 보니 들고 오던 돼지고기는 사라지고 빗자루 몽둥이가 길가에 묶여 있었다.「도깨비와 씨름」의 주요 모티프는 ‘도깨비와 씨름하기’이다. 도깨비와 씨름하기에서 주인공은 공통적인 조건을 갖고 있다. 주인공이 밤에 혼자 술에 취해 가던 중에 도깨비를 만나 씨름을 하고 이겨서 도깨비를 묶어 둔다. 그리고 다음 날 도깨비의 정체를 확인하게 된다. 도깨비와 인간의 대결 구도에서 인간은 대체로 승리한다. 그런데 도깨비와의 대결에서 패배를 하면 도깨비에게 홀려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주위를 빙빙 돌고 있거나 얼마 후 병이 들거나 죽게 된다. 주인공인 제보자 혹은 제보자의 지인과 같은 실존 인물과 도깨비라는 허구적 존재의 만남으로 인해 실제와 허구의 경계를 분간하기 어렵게 되면서 서사적 긴장감과 함께 흥미를 끌어내는 이야기이다.[참고문헌] 장덕순, 『구비문학개설』(일조각, 1971) 『한국민속문학사전』설화 1-2(국립민속박물관, 2012)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11-10 | NO.22
  • 도래산의 유래
    광주광역시 광산구 평동의 도래산의 지명전설이다. 비가 오던 날, 산고개를 넘던 오누이 중 남동생이 누이에게 성욕을 느껴 자신의 성기를 때리다가 죽었다. 그걸 본 누이가 "차라리 도라고나[달라고나] 해 보지"라고 해서 도래산이 되었다.2000년 8월 24일 광주광역시 광산구 평동 용곡마을에 거주하는 황문애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2000년에 광주민속박물관에서 간행한 『광주의 설화』에 수록되었다.광주광역시에서 나주 남평으로 가는 길목에 도래산이라는 작은 산이 있다. 어느 날 인근 마을의 누이와 남동생이 산으로 도라지와 나물을 캐러 갔다. 한참을 캐다가 소나기가 내려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오누이는 비에 옷이 젖은 채 누이가 앞서고 동생이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뒤따라가던 동생이 옷이 젖은 누이를 보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천천히 걸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그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동생은 마음의 갈등을 느끼다가 결국은 자신의 성기를 돌로 때리다가 죽고 말았다. 한참을 지나도 동생이 따라오지 않자, 누이가 동생을 찾기 시작했다. 죽은 동생을 발견한 누이가 "차라리 도라고나[달라고나] 해 보고 죽지"라고 통곡하였다. 이러한 사연 때문에 도래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도래산의 유래」의 주요 모티프는 ‘근친상간의 금기’이다. 모티프를 가진 설화는 「달래강전설」이나 「달래고개전설」 등으로 광포전설이다. 이러한 전설은 ‘남자 형제의 성 충동과 죽음’이라는 사건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이러한 모티프는 누나와 남동생, 오빠와 여동생 등의 변이와 장소의 변이 등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건이 벌어진 곳의 지명이 ‘달래강’이나 ‘달래고개’, ‘도래산’ 등으로 동생을 발견한 누이의 말인 "달라고나 해 보지"와 관련하여 생긴다. 누이의 마지막 외침에서 본능적 충동과 윤리적 규범 사이의 갈등과 생명의 중요성을 살펴볼 수 있다.[참고문헌] 『광주의 설화』(광주민속박물관, 2000)『한국민속문학사전』(국립민속박물관, 2017)[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11-10 | NO.21
  • 도적을 잡은 칠석동 당산나무
    「도적을 잡은 칠석동 당산나무」는 광주광역시 남구 칠석마을에 있는 당산나무와 그 나무를 지나다가 봉변을 당한 도적에 관한 이야기이다. 광주광역시 남구 칠석마을에서 이인식의 이야기를 채록하였고, 1990년 광주직할시에서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되었다.옷돌[칠석]마을은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소가 쪼그리고 앉아 있는 와우상 형상이어서 터가 거세다고 한다.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그 터의 거센 기운을 누르기 위해서 매년 정월에 당산제를 하고, 마당밟이 굿을 치며 고싸움 놀이를 했다. 칠석마을의 당산제는 마을 위 할아버지당인 소나무와 마을 앞 할머니당인 은행나무에서 지냈다. 할아버지당은 술도 안 마시고 비린 것도 먹지 않아 무나물과 미역국, 냉수로만 제사를 지냈다. 반면에 할머니당은 술과 고기를 다 잘 먹어서 푸짐하게 장만하여 정성껏 지냈다. 지금도 마을 사람들은 당산제를 정성껏 지내고 있다. 어느 해의 당산제에서는 세 사람이 색깔 있는 잉크를 가져와 주변에 뿌렸다고 한다. 그때 붉은 잉크를 뿌린 사람은 집에 불이 나서 망하고, 파란 잉크를 뿌린 사람은 목수가 사용하는 옥자귀에 찍혀 불구가 되었으며, 또 다른 사람은 아버지가 정신이상자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아이들 셋이 당산나무에 올라가 똥을 싸다가 가지가 부러져 두 명이 죽고, 한 명이 상처를 입기도 했다. 옛날에는 마을에서 도적질을 하고 당산나무 앞을 지나가던 도적이 빠져나가지 못하고 날이 밝을 때까지 당산나무에게 붙잡혀 있었다는 전설도 있다「도적을 잡은 칠석동 당산나무」의 주요 모티프는 '당산나무의 영험성'이다. 칠석마을은 죽령산 아래의 평야 지대에 있다. 그러나 풍수지리에 따르면 소가 누워 있는 형국으로 그 터의 기운이 드셌기 때문에 이 소를 잡아두기 위해 은행나무를 심었다는 설이 있다. 마을 사람들은 당산나무인 은행나무에 정월 대보름마다 제를 지냈다. 마을 최대 행사인 고싸움놀이를 하기 전에도 고를 들고 당산나무 둘레를 도는 등 마을 사람들은 당산나무를 신성하게 여긴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화를 당하는 모습을 통해 마을 사람들은 당산나무의 영험성을 믿고 당산나무에 대한 경외심을 가진다. [참고문헌]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11-10 | NO.20
  • 도천동 참샘과 비석등에 대한 지명 전설
    광주광역시 광산구 도천동 참샘의 전승 이야기와 비석등의 유래에 관한 이야기이다.광주광역시 광산구 하남동의 제보자 김채균의 이야기를 1989년 채록한 것으로, 1990년 광주직할시가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하였다.광주광역시 광산구 도천동 도촌마을은 광산김씨, 순천박씨, 장흥고씨가 주류를 이루며 살아왔다. 옛날에 박씨들이 몇 집 모여 살고 있는 곳에 풍양조씨 댁 부인이 산고가 들었다. 풍양조씨 댁 부인은 마을에서 제일 덕이 있는 안청공의 집에 가서 아들을 낳았다. 풍양조씨 집안은 아들을 낳은 기념으로 큰 잔치를 베풀었다. 마을 인근의 관리들이 아들 출산을 축하하기 위해서 마을에 모였다. 도촌마을에는 물이 마르지 않은 참샘이 있었는데, 잔치에 온 많은 사람들을 대접하느라 참샘이 말라 버렸다. 풍양조씨 5대손 조군헌이라는 사람이 광주목사가 되었다. 조군헌은 할아버지의 태 자리에 비석을 세웠고, 많은 사람들이 조군헌의 출세를 축하하기 위해서 마을을 찾았다. 이때에도 마을의 참샘이 말라 버렸다. 조군헌 할아버지의 비석이 세워진 곳을 비석등이라고 불렀다. 「도촌동 비석등」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도천동 도촌마을관련항목 보기 비석등의 지명 유래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도촌마을이 형성된 유래를 짧게 소개하고 있으며, 마을에서 출세한 사람이 자신의 가문을 높이기 위해서 세운 비석 때문에 비석등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참고문헌]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11-10 | NO.19
  • 동산마을 송도박굴
    광주광역시 동구 운림동 동산마을에 있는 큰 바위는 송도에 성을 쌓기 위해 가져가려던 바위였으나 가져가지 못해서 송도바위라고 부른다고 한다. 1988년 12월 25일 광주광역시 동구 운림동 성촌마을 주민 최두진에게 채록하여 1990년에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되어 있다.광주광역시 동구 운림동 동산마을 뒤쪽에 송도바위라는 이름의 큰 바위가 있다. 고려 때 송도[개성]에 성을 쌓으려고 각 지방에서 돌을 가져갔다. 이 바위도 송도로 가져가려고 했으나 가져가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바위를 송도바위라 부르게 되었으며, 송도바위가 있는 골짜기를 '송도박굴'이라 불렀다.광주광역시 동구 운림동 동산마을 뒤쪽에 있는 송도바위와 송도박굴에 대한 지명전설이다. 「울산바위 전설」처럼 바위의 이동과 실패에 대한 모티프를 보여주고 있다. [참고문헌]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11-10 | NO.18
  • 두꺼비 허물은 화수분
    업으로 여겨지는 두꺼비의 허물을 발견하고 집안의 쌀 독에 붙여두면 가세가 늘어 부자가 된다는 이야기로 업 신앙과 관련이 있다.2018년 1월 30일 광주광역시 북구 효령동 주민 김봉희의 이야기를 채록한 것과 2018년 4월 12일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주민 정임순의 이야기를 채록한 것으로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수록되었다.두꺼비는 허물을 벗으면 바로 허물을 먹어서 사람들은 쉽게 볼 수 없다. 그런데 운이 좋아서 잘살게 될 사람한테는 그 허물이 보인다. 그래서 그 허물을 쌀독 밑에 붙여 놓으면 쌀이 줄어들지 않는다. 쌀을 퍼도 쌀이 안 줄어든다는 것이 아니라, 손해나 나쁜 일이 안 생겨서 재물 나갈 일이 없어 살림이 늘고 부자가 된다고 뜻이다. 두꺼비는 영물이라 집에서 키우는 개도 함부로 물지 않는다. 두꺼비가 집안에 들어온 것은 그 집이 잘되려고 나타난 것이며, 두꺼비에는 재앙이 붙지 않는다.「두꺼비 허물은 화수분」의 주요 모티프는 ‘우연히 들어온 업’이다. 업은 집안의 재물을 관장하는 신격으로 대표적으로는 구렁이, 족제비, 두꺼비 등이 있다. 또는 사람이 들어온 경우도 업이라고 하는데, 이를 인업이라고 하며 흔히 ‘업동이’라고 부르는 아이를 말한다. 구렁이나 두꺼비가 우연히 집에 들어오면 업이 들어왔다고 귀히 여기며, 잘 보살피면 가세가 늘어나 집안이 부유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설화의 모티프는 민간의 업신앙에 대한 믿음이 구체적인 설화로 형상화된 것이다. [참고문헌] 장덕순, 『구비문학개설』(일조각, 1971) 『한국민속문학사전』설화 1-2(국립민속박물관, 2012)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11-10 | NO.17
  • 두꺼비의 보은
    이 설화는 보통 두꺼비가 소녀에게 입은 은혜를 갚기 위해 지네를 죽이고, 제물로 바쳐진 소녀를 구하는 내용입니다. 이 지역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는 조금 다르게 어머니와 딸이 등장하지만 대체적으로 한 소녀와 홀아비 장님 아비가 등장하지요. 옛날 무등산 계곡 어느 조그만 마을에 어머니와 딸, 단 두 식구만이 가난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 봄날 두 모녀가 사는 조그만 초가집에 커다란 두꺼비 한 마리가 동그란 두 눈을 굴리면서 뚜벅뚜벅 기어들어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난해 겨울 지독한 추위에 그놈이 좋아하는 벌레들이 얼어 죽어 먹을 것이 없게 되자 굶주림에 못 이겨 무턱대고 찾아든 것이 분명했지요. 그 집 딸 순이는 그 두꺼비가 몇 년 전에 죽은 남동생 순동이처럼 귀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순이는 "두껍아 너 배고프지? 이 밥 먹어" 하고 제 몫을 떼 내어 나눠 주었어요. 이렇게 해서 순이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나는 동안 그 미아 두꺼비는 머슴방 목침만큼이나 투박하고 튼튼하게 자랐습니다. 그런데 순이가 사는 그 산촌마을에는 옛 부터 큰 근심거리가 있었어요. 몇 년째 큰 괴물 지네가 나타나 마을사람들을 괴롭히며 피해를 입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어요. 그 괴물에게 여자 어린이를 제물로 바쳐 제사를 지내는 방법이었습니다. 그처럼 제사를 지내주면 10년 동안은 무사히 지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때마침 그해가 10년이 지나 제사를 지내야 하는 시점이 됐어요. 거기에 바칠 제물로 순이의 차례가 됐습니다. 직감적으로 자기의 차례를 안 순이는 두꺼비를 보살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슬픔에 빠졌지요. "이젠 너에게 밥을 먹여주고 거둬 줄 수도 없겠구나." 순이는 두꺼비를 어루만졌어요. 슬픈 것도 슬프지만 두꺼비가 무척이나 마음에 걸렸습니다. 제삿날을 맞아 제물로 바쳐질 순이는 어쩔 수 없이 괴물이 사는 굴 앞까지 걸어가서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윽고 고싸움에 쓰는 용줄 만큼이나 큰 지네 한 마리가 굴속에서 나타나 쓰러진 순이 곁으로 다가왔지요. 그때 순이 뒤를 몰래 따라온 두꺼비가 지네를 향해 뿌옇게 독안개를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흠칫 놀라 한 발짝 물러선 지네도 두꺼비를 보고 독 안개를 뿜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몇 십 분이 지났을까요. 보기에도 끔찍스런 커다란 지네가 똬리를 꼰 채 죽어 있었고, 그 옆에는 두꺼비가 커다랗게 눈을 뜬 채 네발을 쭉 뻗고 잠든 듯이 누워 있었습니다. ※칠석마을 고싸움은 광주광역시 남구 칠석동 옻돌마을에서 정월 초순경부터 2월 초하루까지 하는 놀이다. 1970년 7월22일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됐다.
    2018-05-28 | NO.16
  • 매월동 과부와 도깨비
    매월동 들마을에 과부의 꾀임에 빠진 도깨비 이야기가 전해오지요, 옛날 욕심 많은 과부가 이곳 들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이 과부의 소원은 도깨비와 한번 친해 보고 싶은 것이었어요. 만일 도깨비와 친해지면 무엇이든지 소원을 들어주지만 도깨비의 비위를 거스르면 논밭의 곡식은 거꾸로 심어지고, 솥뚜껑이 솥 안에 들어가며, 밤이 되면 집안에는 모래나 돌이 날아 들어오는 등 무시무시한 변괴가 일어난다고 합니다.그러나 아무라도 쉽게 도깨비와 친해질 수는 없고 우연한 기회에 친해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에요. 그러므로 과부도 우연히 친해지는 시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언제까지 기다릴 수 없어 도깨비와 사귀면 금세 부자가 된다는 생각에 그 과부는 도깨비가 좋아하는 메밀묵을 쑤어서 부엌 벽에 드린 선반인 살강 밑에 놔두고 도깨비가 오기만을 기다렸지요. 드디어 도깨비가 밤중에 몰래 부엌에 들어와서 메밀묵을 맛있게 먹고 돌아가려 할 때 과부가 부엌문을 열고 "아니 내 메밀묵을 먹고 가버리면 나는 아침을 어떻게 하냐"고 말했습니다. 과부는 결국 도깨비를 방안으로 불러들여 한 이불 속에서 밤을 지냈어요. 이렇게 해서 며칠이 지난 뒤 과부는 도깨비에게 돈과 금, 은, 보화를 갖다 달라고 졸랐습니다. 도깨비는 과부와 함께 지내는 며칠 동안 몽땅 정이 들어 이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어요.과부가 원하는 대로 도깨비는 돈과 귀한 보물을 많이 가져다주었지요. 이 일로 과부는 벼락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시간이 흐른 뒤 부자가 된 과부는 도깨비가 귀찮고 싫어졌어요. 과부는 도깨비에게 내색도 해봤지만 모처럼 아기자기한 생활에 재미가 붙은 도깨비는 과부의 행동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하루 밤도 거르지 않고 찾아왔습니다.과부는 도깨비를 떼어낼 궁리를 하게 됐지요. 과부는 도깨비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당신이 가장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것이 뭐예요"그러자 도깨비가 "그건 왜?" 하자 과부는 "당신이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것은 모두 치워 없앨려고요"라고 말했지요.과부가 어리광을 떨면서 대답하자 도깨비는 그저 고맙고 흐뭇해하면서 말대가리(피)가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섭다고 실토를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과부는 그날 밤 자기 집 대문에 피가 질질 흐르는 말대가리 하나를 걸어놓고 도깨비가 이를 보고 도망가기를 소원했습니다. 밤이 되자 도깨비가 발걸음도 가볍게 과부 집을 들어가려다가 대문에 걸린 말대가리(피)를 보고 그만 질겁을 하고 달아나면서 “마을사람들아 나처럼 여자에게 속 주지 마소"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고 합니다. ※흔히 도깨비는 나무, 돌, 빗자루, 부지깽이 등이 변해서 된 것이라고 한다. 도깨비는 사람들과 함께 살지만 주로 마을 근처의 빈집이나 음침한 굴속에서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산다고 한다. 도깨비는 인간과 같은 희로애락을 느끼며 곧잘 인간의 흉내를 내기도 한다. 도깨비는 남자로도 변신하고 여자로도 변신하는 존재인데 항상 사람보다 영리한 것이 아니라 주로 사람들에 당하는 순진함이 있다. 도깨비는 대개 밤에 나타나며, 메밀묵과 팥죽을 좋아하는데 이는 붉은 색을 띠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2018-05-28 | NO.15
  • 박눌재와 고양이
    눌재 박상 하면 고양이 설화가 유명하죠. 이 고양이가 아니었더라면 눌재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을지도 모릅니다. 다행히도 고양이를 만나 사약을 모면했다고 하니 눌재에게 고양이는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사연인즉 눌재 박상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였지요. 당시 희대의 폭군이자 패륜아로 낙인찍힌 연산군이 전국 각지에 채홍사採紅使를 내려 보내 궁비를 뽑아 궁 안의 일을 돕도록 하던 중 나주에 사는 우부리牛夫里라는 자의 딸이 뽑혀 왔습니다. 우부리의 딸은 대단한 미색이어서 연산군의 눈에 금방 들어 총애를 받는 후궁後宮이 됐는데 이때부터 비극은 시작됐습니다. 후궁이 되자마자 그 아비 우부리는 마치 연산군의 장인이라도 된 것처럼 기세등등해졌지요. 우부리는 나주목사를 함부로 대하고, 토지를 강탈하는가 하면, 세도를 부려 남의 처자를 빼앗아 첩으로 삼는 등 우부리에 대해 일대의 원성이 자자했습니다. 이처럼 우부리의 행패가 극심했지만 나주목사는 그 어떤 손도 쓰지 못했습니다. 나주목사가 우부리 자신의 행패를 막으려 들면 서울 궁성의 딸에게 일러바쳐 목사의 목을 잘랐기 때문이에요. 이로 인해 나주 고을의 민심은 날로 흉흉해졌지요. 이렇듯 목사로 부임하면 직책은 고사하고 목숨부지까지 위태로워지자 그 누구도 나주목사로 가려하지 않았어요. 그러던 중 우부리의 만행을 들어 익히 알고 있던 눌재가 자청해 부임해 왔습니다. 눌재가 부임해 왔을 당시 동료나 예하 이속들이 이구동성으로 우부리에게 ‘부임 인사’를 해야 한다고 했으나 눌재는 그 권유를 듣지 않고 오히려 우부리의 죄상을 밝히기 위해 그를 동헌으로 잡아들였습니다.그는 엄명을 내려 우부리를 잡아들인 뒤 그에게 죄를 묻고 취조한 결과를 조정에 보고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부리도 기세등등해져 "목사, 네 놈의 목을 자르겠다"고 큰소리를 치자 곤장을 쳐 장살杖殺의 형벌로 그를 죽게 하고 말았습니다.이 일이 있은 후 우부리의 집에서는 그의 시체를 치울 생각도 하지 않고, 우선 사람을 서울로 보내 연산군에게 고하자 연산군이 대노大怒한 뒤 금부도사를 보내 놀재에게 사약을 내리도록 명했어요.눌재는 이런 상황을 모른 채 우부리의 죄상을 글로 조정에 낱낱이 밝히는 한편, 당당히 임금에게 대죄待罪를 청하려고 나주목사 사표를 들고 전남 장성 갈재를 넘어 입암산笠岩山 아래 갈림길에 이르렀는데, 난데없이 들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그 들고양이는 "야옹 야옹" 하며 눌재의 바지가랑이를 물어 채면서 끌기에 이상히 여겨 그 고양이가 끄는 대로 따라갔지요. 도착한 곳이 진천사라는 절이었는데 나중에 이곳은 백양사가 되었다는군요. 그동일한 시각에 금부도사가 반대쪽 큰길로 오고 있었기 때문에 고양이가 아니었더라면 눌재의 일행은 금부도사와 마주쳐 사약을 받고 황천에 갈 뻔했지요. 고양이 때문에 서로 길이 엇갈려 절체절명의 위기를 모면한 셈이죠. 얼마 뒤 조선 제10대왕 연산군을 몰아내고 진성대군晉城大君(이역)을 왕으로 추대한 중종반정中宗反正.(1506)이 벌어지고 그로 인해 우부리 사건은 불문에 붙여지게 됐지요. 그 일을 겪고 난 눌재는 벼슬을 그만둔 뒤 낙향하여 고양이에게 제사를 지낼 목적으로 논(묘답苗畓 고양이의 은혜를 갚는 전답)을 만들 정도로 고양이의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눌재訥齋 박상朴祥(1474~1530)은 조선 중기 중종 때의 문신으로 성종 5년인 1474년 광주시 서구 서창동 절골마을 출생으로 훈구파와 사림파가 대립하던 조선 중종 때의 관료로 사림 운동에 전력한 학자이자 정치가였다. 전라도사, 담양군수, 순천부사 등을 역임했으며 그의 학식과 인품에 대해 후배였던 퇴계 이황이 ‘원우元祐의 완인完人(명예와 신분에 전혀 흠이 없는 완전한 인간)’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눌재집訥齋集』을 남겼으며 이조판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추증되어 광주 월봉서원에 제향祭享됐다.
    2018-05-28 | NO.14
  • 백마산 장사와 무등산 장사
    서창동 백마산에는 수련골과 수련재, 차일봉, 장수굴 등 삽봉揷峰 김세근金世斤(1550∼1592) 장군과 관련된 지명들이 유독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백마산에는 임진왜란 때 공신인 삽봉 김세근 장군의 전설이 서려 있지요. 삽봉은 조선 연산군 시절 일어난 무오사화에 김일손金馹孫이 연루돼 참살을 당하자 종6품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경남 함안을 떠나 이곳 서창동 세동마을로 옮겨와 정착을 하게 됩니다. 세동은 70여 가구 200여명의 주민들이 모여 사는 마을로, 백마산을 배산背山으로, 극락강을 임수臨水로 두고 너른 세동들녘이 발달했는데 ‘서창 만드리 풍년제’의 무대가 되는 곳이지요. 외침에 대비하기 위해 병력을 길러야 한다는 양병론養兵論을 율곡 이이와 함께 펼친 삽봉은 낙향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4년 전부터 마을 뒷산인 백마산에서 장정들을 모아 무술을 가르쳤어요. 그 후 실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군은 장정 500여명을 이끌고 의병장으로 출전, 혁혁한 전공을 세우게 되지요. 그러나 고경명 장군과 함께 와평들의 금산대전에서 왜군과 싸우다 순절하고 맙니다. 이런 삽봉은 생전에 힘이 무척이나 셌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조금 더 정밀한 정리를 위해 세동의 한 토박이 어르신의 증언을 참조해 재구성해 보겠습니다. "김 장군의 뛰어난 용력勇力이 엄청났다고 해요. 백마산 장사와 무등산 장사 간에 바위 던지기로 힘을 겨루었다는 것인데 그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지요. 다름 아닌 백마산 자락 동하마을 김성(김세근 장군의 후손)의 집에 큰 바위 한 개가 끼워져 있는 데 그것이 증거지요."현재도 그 큰 바위는 그 당시의 모습대로 남아 있어요. 백마산에 살던 김장사(김 장군을 지칭함)와 무등산에 사는 김장사가 서로 누가 힘이 센가 하는 힘겨루기를 하게 됩니다. 서로의 산에서 큰 바위를 상대편의 산에 던졌습니다. 백마산 김장사가 백마산에서 던진 바위는 무등산 한 중턱에 떨어졌지만 무등산 김장사가 무등산에서 바위를 던졌는데 백마산에 좀 못 미쳐 이 마을에 떨어지고 말았어요. 바로 그 바위가 김성의 집 담에 박힌 큰 바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겨루기 결과는 무등산 김장사가 지고 백마산 김장사가 이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또 삽봉이 백마산에서 의병 훈련을 했다는 정황들이 여럿 있지요. "여기 백마산은 조선시대 때 김세근 장군이 의병들을 모아 적에 대항하는 훈련을 했다고 해요. 그래서 이 산꼭대기에는 김 장군이 기거했다는 장수굴이 지금도 있고 병사들이 훈련했다는 수련골과 수련재, 차일봉 등의 이름이 남아있지요."백마산 중턱에는 임진왜란 당시 군사훈련을 했던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흔적은 사실 찾아보기 힘들지만 산 정상에 헬리콥터 착륙장이 있어요.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전해오는 이야기처럼 일부 군사시설이 한때 있었다는 주민들 말의 행간에 집중해보면 아마도 백마산은 군사훈련의 적격지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삽봉이 군사를 길러냈던 백마산은 그 모습이 수려하고 골짜기가 깊은 편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너른 평지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함께 훈련할 수 있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백마산은 말 그대로 하얀 말이라는 뜻인데 멀리서 보았을 때 산잔등이 하얀 말의 형상을 하고 있어서 그렇지. 특히 겨울에 눈이라도 날리면 그 눈발 속에 갈기를 세운 흰 말의 잔등이 어슴푸레 떠오르는 것처럼 보여요."아마 이런 점들 때문에 삽봉이 머무르던 공간이기도 했지만 병사들을 훈련하는 장소로 선택했던 것입니다.   ※김세근은 호는 삽봉, 자는 중빈이며 김해 사람으로 1550년(명종 5년) 4월16일에 출생했다. 28세에 문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 등의 벼슬을 지낸 데 이어 35세 때는 종6품 벼슬인 종부시주부宗溥寺主簿의 벼슬을 지냈다. 삽봉의 묘는 서창동 불암마을 팔학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의 거룩한 넋을 추모하는 학산사鶴山祠를 건립, 매년 음력 3월22일에 배향하고 있다.
    2018-05-28 | NO.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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