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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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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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방 할아버지와 개미 떼
    광주광역시 동구 계림동과 신안동에서 경양방죽과 김방에 관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경양지(慶陽池)는 조선 시대 세종 때 김방(金倣)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1967년까지 광주광역시의 계림동과 신안동 사이에서 볼 수 있었던 인공 못이다. 그런데 1968년에 태봉산(胎封山)을 허물고, 그 흙으로 경양지를 매립하였다. 김방이 경양방죽 공사 중에 무너진 개미집을 옮겨 주었는데, 개미 떼들이 그에 보답하려고 쌀을 물어다 주었다. 김방은 공사에 필요한 식량을 얻었고, 제방 축조를 완성했다는 전설이다.경양지는 조선 시대 1440년(세종 22)에 광주의 효천 출신인 김방이 축조했다고 전해진다. 김방은 김제에서 군사(軍事)로 있을 때 김제 벽골제(金堤碧骨堤)[전북 김제시 부량면 월승리 119, 사적 제111호]를 중수하여 김제평야를 곡창지대로 만들었다. 그리고 광주목사(光州牧使)로 전임해 와서 경양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해마다 가뭄이 들어 흉년이 계속되던 광주와 백성을 걱정하던 김방이 무등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모아 옥토로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경양방죽을 파게 되었다. 거대한 공사와 계속되는 가뭄으로 인해 일꾼들의 식량도 부족하게 되어 김방의 걱정이 매우 깊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방죽을 파던 중에 큰 개미집이 무너지게 되었다. 김방은 이 개미집을 가까운 무등산의 장원봉에 옮겨 주었다. 얼마 후 김방의 집 마당에 쌀이 한 가득 쌓여 있었다. 그 다음 날도 계속 쌀이 쌓여 있었다. 이를 이상히 여겨 아침 일찍 지켜보니 개미 떼들이 쌀알을 물고 와서 마당에 쌓은 것이었다. 김방은 개미들의 보은(報恩)으로 여기고, 이 쌀을 인근의 백성들과 일꾼들에게 나눠 주어 경양방죽을 완성할 수 있었다. 광주의 경양방죽을 축조하는 데 있어 개미 떼의 도움으로 일꾼들을 먹일 식량을 충당하였다는 제방 축조와 관련된 전설이다. 개미 떼가 돕게 된 이유는 김방이 무너진 개미집을 구해 줬고, 개미들이 김방에 보은을 한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보은담은 거의 대부분이 동물담으로 동물에 빗대어 보은의 논리를 제공한다. 특히, 개미의 보은은 개미가 가진 특성, 작고 부지런하고 힘이 센 특성이 부각되어 작은 쌀알들을 수많은 개미들이 옮겨 수북이 쌓은 것으로 표현된다. [참고문헌] 김홍삼, 『경양방죽의 역사』(제일문화사, 1968)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7 | NO.42
  • 김방원이가 던져 버린 비석
    광주광역시 광산구 평촌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마을 뒤에 있었던 비석에 관한 이야기.  「김방원이가 던져 버린 비석」은 김방원이라는 도적이 길에 있는 비석을 사람이 서 있는 것으로 착각하였다가, 그 비석을 뽑아 마을 앞에 있는 방죽에 버렸다는 이야기이다. 2018년 4월 27일 광주광역시 광산구 평촌마을에 거주하는 주민 김종수[남, 85세]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주관하는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에 수록되었다.평촌마을 뒤편에 묘가 하나 있는데, 그 묘를 심총(沈塚)이라 불렀다. 그런데 청송심씨(靑松沈氏)와 광주정씨(光州鄭氏) 집안이 서로 자기 집안의 묘라 주장하면서 제를 모셨다. 결국 조선 말기에 두 집안의 싸움은 소송으로 번졌는데, 두 집안이 같이 제사를 모시라는 판결이 나왔다고 하며, 아직까지도 논쟁은 해결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두 집안이 묘지 앞에 비를 세우기 이전에 원래 비석이 하나 있었다. 김방원이라는 힘이 센 도적이 도적질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비석을 보고 사람이 서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였다. 이에 김방원은 그 비석을 뽑아 마을 앞에 있는 방죽에 던져 버렸다고 한다. 현재 비석이 던져진 자리는 논이 되었는데, 심씨 집안에서 논을 파서 정말 비석이 있는지 확인하자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김방원이가 던져 버린 비석」의 주요 모티프는 '오해로 인한 행동의 결과'이다. 묘비석은 죽은 사람의 사적이나 행적 등을 돌에 새겨 사자를 기념하는 것으로, 죽은 사람의 신분, 성명, 행적, 자손, 출생일, 사망일 따위의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김방원이라는 도적이 비석을 사람으로 착각하여 자신의 죄가 드러나는 것을 염려한 나머지 비석을 방죽에 던져 버렸다. 이로 인해, 현재까지도 두 집안이 묘지에 묻힌 사람의 성명과 가문을 확인하지 못하여 누구 집안의 묘인지 확인하지 못한다. 만일 김방원이라는 도적이 비석을 방죽에 던지지 않았다면, 두 집안이 묘지 문제로 싸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참고문헌]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7 | NO.41
  • 까마귀가 갓을 물어다 놓은 터
    광주광역시 북구 생용동 생룡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마을 정착에 관한 이야기.「까마귀가 갓을 물어다 놓은 터」는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이 까마귀의 도움으로 생용마을에 정착하고 살게 된 이야기이다. 2018년 1월 30일 광주광역시 북구 생용동 생용마을에 거주하는 주민 범희인[남, 82세]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주관하는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에 수록되었다. 생용마을은 처음에 마을 아래쪽에 터를 잡고 있었는데, 비가 오면 물이 범람하여 집이 침수되곤 하였다. 어느 날 까마귀가 갓을 물어와 어느 땅에 던져 놓았다.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원래 살던 곳에 살지 말고 다른 곳으로 옮겨서 살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마을 사람들은 까마귀가 갓을 던진 곳으로 이사를 갔는데, 그곳은 홍수가 나지 않아서 쉽게 정착할 수 있었다. 이후 까마귀가 갓을 놓은 자리가 생용마을 터가 되었다고 한다. 「까마귀가 갓을 물어다 놓은 터」의 주요 모티프는 '동물의 상징에 기반한 마을유래'이다. 까마귀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새인데, 신령스러운 새 혹은 죽음이나 불길한 징조를 알리는 새의 상징성을 함께 갖고 있다. 이 설화에서는 생용마을 사람들이 이전에 살던 터가 홍수로 피해를 입자, 까마귀가 갓을 물어다 물이 범람하지 않은 곳을 점지하였다. 이때의 까마귀는 불길함의 상징이 아닌 신의 의지를 전달하는 신령스러운 존재이다. [참고문헌]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7 | NO.40
  • 꽃뫼마을과 화산가
    광주광역시 동구 용산동 화산마을의 지명에 관한 이야기.  「꽃뫼마을과 화산가」는 화산마을의 지명에 관한 유래와 화산마을 노래에 관한 이야기이다. 2018년 2월 21일 광주광역시 동구 용산동 화산마을에 거주하는 주민 박진규[남자, 73세]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주관하는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에 수록되었다. 꽃뫼마을에는 노적봉에 꽃이 많이 피어 '화산(花山)'이라고도 불렀다. 특히 봄에는 진달래꽃이 많이 피었는데, 사람들이 산에 나무하러 다니던 시기에 진달래 뿌리를 다 뽑아 이제는 예전의 모습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마을 아래의 냇물은 물이 강처럼 많이 흘러 '용강(龍江)'이라고 불렀다.이곳과 학동 위쪽에서부터 화순에서 넘어온 곳까지를 합쳐 오늘날 용산동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골뫼'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원래 이름은 꽃뫼였지만 사람들이 계속 골뫼라고 불렀더니 이름도 골뫼로 바뀐 것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꽃뫼마을에는 「화산가」라는 제목의 마을 노래가 만들어져 전해졌다. 「화산가」의 가사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내 고향 산꼴짝 화산이라네/ 앞에는 비들바위 가로 놓이고/ 뒤에는 노적봉이 우뚝 솟았네/ 그 사이에 맑은 물이 졸졸 흐르니/ 꽃 피고 새 우는 화산이라오 [모티프 분석] 「꽃뫼마을과 화산가」의 주요 모티프는 '지형에 따른 지명유래'이다. 화산마을의 이름은 마을의 뒷산인 노적봉에 진달래꽃이 많이 피었기 때문에 '꽃뫼' 혹은 '화산'이라고도 부른 것으로 알 수 있다. 특히 「화산가」라는 노래의 가사가 아직 남아 있고, 마을 사람들이 부르고 있어서 마을 이름의 유래를 증거할 수 있다. [참고문헌]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7 | NO.39
  • 나숭대와 누나의 힘겨루기
    광주광역시 북구 효령동 종방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나숭대와 누이에 관한 이야기.「나숭대와 누나의 힘겨루기」는 역적으로 몰린 나숭대와 나숭대의 누이가 피신한 와중에 내기를 하였던 이야기이다. 2018년 1월 30일 광주광역시 북구 효령동 종방마을에 거주하는 주민 김봉희[남, 71세]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주관하는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에 수록되었다. 나숭대가 역적으로 몰려 죽을 위기에 처해 처마 밑으로 숨을 때, 나숭대의 누나는 나숭대의 긴 옷고름을 짧게 잘라서 들키지 않게 하였다. 나숭대와 누나가 내기를 하였는데, 나숭대는 금성산을 한 바퀴 돌고, 누나는 한복을 짓는 내기였다. 누나는 한복을 완성했지만 나숭대가 돌아오지 않자, 한복을 다시 뜯고 짓기를 계속하였다. 이후 집으로 돌아온 나숭대는 누이가 옷을 짓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옷을 완성하지 않았다고 오해하여 누나를 칼로 죽이고 말았다. 「나숭대와 누나의 힘겨루기」의 주요 모티프는 '위기에 대처하는 기지'와 '영웅으로서의 한계'이다. 나숭대는 1728년 이인좌(李麟佐)[1695~1728]의 난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참형을 당한 인물이다. 나숭대의 누이가 나숭대를 숨기기 위해 긴 옷고름을 일부러 잘라서 보이지 않게 하였다는 내용으로 보아, 나숭대의 누나가 뛰어난 기지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내기 중에, 나숭대의 누나는 옷을 다 완성했지만 나숭대가 돌아오지 않아 계속 옷을 풀고 만드는 행위를 반복했다. 나숭대는 누나가 옷을 다 짓지 않은 것으로 오해하고, 내기에서 진 누나를 죽인다. 나숭대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고, 뛰어난 누나를 죽이는 것은 나숭대가 영웅이 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7 | NO.38
  • 남평 드들강의 유래
    광주광역시 서구 유덕동 덕흥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남평 드들강에 관한 이야기. 전라도 나주 남평의 드들강의 지명에 관한 전설이다.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에서 도곡을 지나 나주 남평을 거쳐 영산강과 합쳐지는 지류를 지석강 혹은 남평천이라고 하는데, 흔히 드들강이라고 한다. ‘드들’이라는 처녀가 큰 메기에게 잡아먹힌 이야기와 남평천의 홍수를 막기 위해 ‘드들’이란 처녀를 제물로 바친 이후 ‘드들강’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이다. 2000년 9월 19일 광주광역시 서구 유덕동 덕흥마을에 거주하는 이경수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2000년에 광주민속박물관에서 간행한 『광주의 설화』에 수록하였다.옛날에 '드들'이라는 처녀가 있었다. 드들이가 강가에서 빨래를 하는데, 갑자기 큰 메기가 나타나 드들이를 삼켜 버렸다. 드들이가 집에 돌아오지 않자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이 드들이를 찾아나섰다. 드들이를 찾던 중, 배가 불룩한 큰 메기를 발견하였다. 메기를 잡아 배를 갈라 보니 죽은 드들이가 있었다. 이때부터 드들이가 빠져 죽은 강이라고 하여 드들강이라 부른다. 드들강의 메기는 드들 처녀의 기운이 남아 있어 약이 된다는 말이 있다. 또 다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남평천은 예부터 홍수가 잦았다. 마을 사람들은 남평천 강의 신이 심술을 부리는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강의 신을 달래기 위해 마을의 처녀를 제물로 바치자고 하였다. 가난한 집안의 처녀인 드들이는 제물로 바쳐지면 쌀 백 석을 준다는 소리에 자신을 희생하기로 하였다. 이 소식을 알게 된 부모의 반대로 드들이는 포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드들이는 가난한 가족들을 위해 제물로 희생하기로 다시 결심하였다. 마을 사람들도 하는 수 없이 드들이의 투신을 추진하였다. 그날 아침 드들이는 부모 몰래 집을 나와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의 가족을 잘 부탁한다며 강으로 뛰어들었다. 드들이가 강에 투신한 이후로 홍수가 나지 않아 마을은 평온해졌다. 이후 큰 물이 지면 드들강의 물소리가 ‘드들드들’ 하는 소리를 내며 흘러간다고 한다.「남평 드들강의 유래」의 주요 모티프는 ‘인신공희(人身供犧)’이다. 인신공희는 초자연적인 존재에게 인간이 숭배와 복종의 의미로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행위이다. 이러한 설화의 모티프는 집단의 안위를 보장받기 위해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친다는 점에서 집단의 이기심을 보여 준다. 인신공희의 모티프를 가진 설화는 많지만, 지명과 관련된 설화로는 「공갈못전설」이 있다. 「공갈못전설」은 공갈못을 완성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공갈이라는 아이를 제물로 바쳐 완성하였다는 이야기이다. 「남평 드들강의 유래」처럼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고 그 사람의 이름을 딴 지명이 유래했다는 공통적인 구조를 보여 주고 있다. [참고문헌] 『광주의 설화』(광주민속박물관, 2000) 『한국민속문학사전』(국립민속박물관, 2017)[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7 | NO.37
  • 내지마을은 큰 인물이 날 형국
    광주광역시 동구 내남동 내지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마을의 풍수지리에 관한 이야기.  「내지마을은 큰 인물이 날 형국」은 내지마을의 풍수지리적 특성에 관한 이야기로, 내지마을이 명당이기 때문에 큰 인물이 날 것이라는 내용의 지명설화이다.  2018년 6월 27일 광주광역시 동구 내남동 내지마을에 거주하는 주민 신현덕[남, 77세]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주관하는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에 수록되었다. 내지마을은 풍수학적으로 '회룡고저(回龍顧祖)'형 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조산(祖山), 즉 무등산의 능선을 용이 두르는 형국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때 내지마을은 ‘산진수회(山盡水廻)’, 산의 끝이면서 물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모양이기 때문에 반드시 명당이라고 보았다. 그만큼 이곳이 길지(吉地)이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마을에 큰 인물이 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내지마을은 큰 인물이 날 형국」의 주요 모티프는 '풍수지리에 기반한 명당에 대한 믿음'이다. 이는 내지마을의 형국이 풍수지리적으로 유리한 요소가 있는 길지에 자리했기 때문에 마을의 지명 또한 '육판서 마을'이라는 이칭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큰 인물이 날 것이라는 말은 육판서나 삼정승 이야기, 그리고 풍수지리에 입각한 마을의 형국을 통해 마을 사람들 사이에 믿음으로 자리잡았다. [참고문헌]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 「여섯 판서가 안 부럽다」(시민의 소리, http://www.siminsori.com)[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7 | NO.36
  • 내지마을의 명당
    광주광역시 동구 내남동에서 명당 자리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광주광역시 동구 내남동 내지마을에 전해지는 이야기로 암소 등은 마을의 안산으로 명당자리이다. 문씨가 이 명당자리에 묏자리를 쓰기 위해 꾀를 내어 차지했다는 전설이다. 1989년 광주직할시 동구 내남동에 거주했던 제보자 김영조의 이야기를 채록하여, 1990년 광주직할시가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하였다. 광주광역시 동구 내남동 내지마을 앞산에는 암소 등처럼 생긴 작은 혈이 있었는데, 예전부터 명당이었다. 문씨는 그 자리에 묘를 쓰고 싶었다. 그런데 그 자리는 마을의 안산이라서 마을 사람들은 묘를 쓰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러자 문씨는 꾀를 내었다. 문씨가 마을 앞으로 상여를 메고 들어오니 마을 사람들이 나와 앞을 막아섰다. 문씨는 마을 사람들과 실랑이를 하다가 해가 지자 상여를 놓아두고 돌아갔다. 다음날 아침 일찍 문씨는 마을 사람들의 눈을 피해 시신을 옮겨 명당에 묘를 쓰고 돌아갔다. 문씨가 나타나지 않자 마을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상여를 열어 보니 시신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문씨에게 속은 것을 알고, 묏자리에 가 보니 새로 쓴 묘가 있었다. 묘는 한 번 쓰면 함부로 파헤칠 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문씨에게 보복하려고 묘소 주령(主嶺)[연이어 있는 고개 중 가장 높은 고개]의 지레목을 잘랐다. 이로 인해 문씨 집안에서는 째보[언청이]가 태어나기 시작했다.마을사람들이 명당자리에 묘를 쓰는 것을 반대하자 꾀를 내어 묏자리를 얻은 이야기이다. 실제로 조선 후기에 남의 눈을 속여 매장하는 암장(暗葬)이나 투장(偸葬) 등이 발생하였고, 구비설화의 소재가 되었다. [참고문헌] 『광산군지』(광산군지편찬위원회, 1985) 『광주시사』(광주시, 1985)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7 | NO.35
  • 눌재 박상과 우부리 그리고 김숙화
    연산군의 말년은 '도가니'였다. 과거로 인재 뽑듯 '흥청과(興淸科)'를 두고 각처 기생을 끌어왔다. 임금을 포기한 '흥청망청'이었다. 애첩의 세도는 가관, 장녹수(張綠水)는 온갖 송사에 간여하여 뇌물 받고 종친 재산까지 빼앗았다.김숙화(淑華)도 만만치 않았다. 논 50결과 한달 갈이 밭을 하사받았다. 요즘 80정보, 24만평 정도였다. 부안 땅의 어살[魚箭]도 차지하였다. 동진강 일대의 어업권을 도리깨질한 것. 또한 이웃한 종친 집터를 빼앗으려고 모함하여 온 가족을 손발 묶고 칼을 씌워 가두게 하였다. 언니를 첩 삼은 양반에게는 목사 자리까지 주선하였다. 나주 관기에 뽑힌 백견(白犬), 나주 관노 김의(金依)의 딸이었다.김의도 대단하였다. 그가 당상관 품계를 받고 어주(御酒)에 취해 관마 타고 금의환향하였다. 지나는 고을마다 부산스레 접대하였는데, 서둘러 술잔을 건네는 수령도 있었다. 재산 강탈, 부녀자 겁탈 등 온갖 패악을 저질렀다.사람들은 의(依)에서 인(人)을 떼고 윗도리[衣]라 부르며 이를 갈았다. 김의가 우부리(牛夫里) 혹은 소부리(小夫里)로 쓰인 까닭이다. '윗'의 방언이 '웃'이라, 우가 되고, 우는 소다. 그렇다면 백견(白犬)은 임금의 하얀 아랫도리[裳]로 조롱하였음이 틀림없다.누구도 김의를 징계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감사의 막료인 도사(都事)가 나섰다. 행정부지사 정도다. 나주 금성관으로 김의를 잡아들여 모질게 형장을 쳤는데 목숨까지 앗았다. '우부리장살사건'이었다. 그 도사는 "죽을 죄라면 피하지 않겠다"며 즉각 상경하였다. 연산군도 금부도사를 보냈다. 길이 엇갈렸다. 전라도의 남과 북을 가르는 갈재 너머 입암산 아래 천원역 갈림길이었는데, 고양이가 바짓가랑이를 물어 당기자 숲으로 따라갔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리고 보름 후, 중종반정이었다.도사는 연산군 2년(1496) 생원, 5년 후 문과 급제했다. 국립출판기구에 해당하는 교서관과 외교문서를 담당하는 승문원에 봉직하고, 병조좌랑을 거쳐 연산군 11년(1505)에 내려왔다. 그가 박상(朴祥·1474∼1533)이었다.선대는 충청도 회덕에 살다가 부친 박지흥(朴智興)이 광주에 터를 잡았다. 계성 서씨(桂城徐氏) 처가 근처였다. 서구 서창동 사동마을이다. 본관은 충주. 전라감사 김종직이 '나라의 큰 그릇이 될 것'이라던 형, 박정(朴禎)에게 배웠다. 그러나 형은 성종 23년(1492) 생원이 되고, 몇 년 후 세상을 버렸다.박상은 꾸밈없고 숨김없었다. 중종 2년(1507) 아우 박우(朴祐)가 진사 장원한 잔칫날이었다. 자신이 대과할 때 부친이 계시지 않음을 슬퍼하였던 형을 회상하며 마냥 좋아할 수 없는 까닭을 풀었다. "즐거움 끝에는 슬픔이 따르는 법이다." 그리고 덧붙였다. "네가 대과에 발탁되면 누구를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다." 경삿날 담론치고는 싸늘하다.세상을 향한 눈은 부릅떴다. "하하 크게 웃고 또 하하, 변방 백성 살리고 싶어도 어찌 할 줄 모르겠네. 닭 묶는 아전들 호통 소리 길에 펼쳐지니, 송아지 코를 꿰는 처자식은 거위처럼 울부짖네." 그만큼 백성을 아낌이었다./조선일보 2011.10.17.
    2020-09-18 | NO.34
  • 눌재 박상의 어머니 이천서씨
    광주광역시 광산구에서 전해 내려오는 눌재 박상과 어머니 이천서씨 부인에 관한 이야기.눌재 박상의 아버지 박지흥은 세조의 왕위 찬탈을 통분해 호남으로 내려왔고, 입암산 산신령의 도움으로 광주에 터를 잡게 되었다. 박지흥이 광주에 터를 잡고 이천서씨(利川徐氏) 부인과 재혼해서 박정(朴禎), 박상(朴祥), 박우(朴祐)를 낳았다.1989년 『무등일보』에 「호남여인열전(10)」으로 수록되어 있다. 1990년에 광주직할시가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가문을 일으킨 이천서씨 부인」으로 수록되어 있다.눌재(訥齋) 박상(朴祥)[1474~1530]의 아버지 박지흥(朴智興)[1411~1489]은 고려 후기 정지(鄭地)[1347~1391] 장군의 손자사위로 충청도 대전에서 살았다. 박지흥은 세조(世祖)[재위 1455~1468]의 왕위 찬탈을 통분(痛憤)하여 처의 고향이 있는 광주 쪽으로 이주하였다. 박지흥이 장성 입암새재를 넘어가는데, 마침 날이 저물어 근처 허름한 주막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주막 주인은 박지흥에게 “이곳을 지나게 되면, 입암산 산신령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하였다. 박지흥은 입암산 산신에게 자신의 안위 때문에 조정을 버리고 도망가는 것에 대해 산신령께 용서를 빌었다. 그날 밤, 산신령이 박지흥의 꿈에 나타나 쌍마(雙馬)를 타고 가다가 말이 멈추는 곳에 표시를 해두라고 하였다. 쌍마는 광주목 방하동 방마산 남쪽에 이르러 멈추었다. 박지흥은 잠에서 깨어나 꿈에서 보았던 장소로 가서 정착하였다. 그곳은 현재 광주광역시 서창동 절골이다. 박지흥은 광주에 정착한 지 2년 만에 부인을 잃었다. 박지흥은 나이 50살에 같은 마을에 살고 있는 이천서씨 처녀와 재혼하였다. 이천서씨 부인은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박지흥과 결혼하였으며, 박정·박상·박우 3형제를 낳았다. 박지흥은 막내아들이 14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고, 큰아들도 요절하였다. 이천서씨 부인은 남편 대신 두 아들을 잘 키웠으며, 박상과 박우는 과거에 급제하여 관료가 되었다. 박우의 둘째 아들은 박순(朴淳) [1523~1589]으로 전라도가 배출한 유일한 조선 시대 영의정이었다. 눌재 박상은 32세에 전라도사가 되었다. 당시는 연산군 시절이었다. 연산군은 채청사(採靑使)를 풀어 궁비를 뽑았는데, 궁비 중에 나주의 황쇠부리 딸이 있었다. 황쇠부리 딸은 연산군의 총애를 받았으며, 황쇠부리는 딸을 믿고 지역에서 갖은 행패를 부렸다. 나주목사가 황쇠부리의 행패를 막으려 했지만, 오히려 나주목사의 목이 날아가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전라도사 박상은 황쇠부리의 소문을 듣고 나주로 내려가서 매를 쳐서 황쇠부리를 죽였다. 박상은 애당초 죽을 각오를 하고 황쇠부리를 처벌하였으며, 임금의 처분을 달게 받겠다며 한양으로 떠났다. 그런데 박상이 입암새재에 이르렀을 때,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자꾸 길을 막았다. 박상은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고, 고양이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박상은 며칠 동안 고양이를 따라갔고, 결국 도착한 곳이 금강산 정양사(正陽寺)였다. 박상이 정양사에 머무는 동안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났다. 박상은 고양이 때문에 목숨을 건졌다고 생각하였다. 박상은 고향에 있는 논과 밭을 고양이 먹이는 데 쓰도록 정양사에 시주했다. 처녀의 몸으로 50살의 홀아비와 결혼했던 이천서씨 부인의 혜안이 눌재 박상을 낳고 길렀던 것이다. 「눌재 박상의 어머니 이천서씨」는 조선 전기 전라도 광주의 대표적인 선비인 눌재 박상의 집안에 관한 이야기이다. 역사적 사실과 허구의 이야기가 결합되어서 인물전설을 구성하고 있다. 비범한 역사적 실존인물은 탄생담과 성장담에서 특이성을 지니게 된다. 박상의 아버지가 산신령의 도움으로 광주에 정착한 것과 이천서씨 부인의 혜안과 노력으로 박상을 낳고 기른 것은 인물의 비범성을 강화시키는 이야기의 요소가 된다. 여기에 인물의 대담한 행동과 조력자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난 이야기가 첨부되어 박상의 비범성을 더욱 강화시켜주고 있다. [참고문헌]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 「호남여인열전(10)」(『무등일보』, 1989. 2. 19.)[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7 | NO.33
  • 눌재 선생과 고양이 비석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 절골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눌재 선생과 고양이에 관한 이야기. 「눌재 선생과 고양이 비석」은 눌재(訥齋) 박상(朴祥)[1474~1530] 이 모략을 피해 달아나던 도중에 만난 고양이에 관한 이야기이다.  2018년 3월 6일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 절골마을에 거주하는 주민 이우춘[여, 80세]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주관하는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에 수록되었다.  옛날, 눌재 선생이 모략에 몰려 사람들을 피해 달아나던 도중에 고양이를 만나게 되었다. 고양이는 눌재 선생의 도포 자락을 자꾸 잡아당기면서 왼쪽 길로 눌재를 이끌었다. 눌재 선생은 이를 수상하게 여기고 고양이를 따라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눌재 선생이 고양이를 따라서 왼쪽 길로 가서 화를 피할 수 있었다. 반면에 오른쪽 길로 갔다면 사람들에게 잡혀서 죽었을 것이었다. 눌재 선생은 고양이 덕분에 살 수 있었다. 이후, 눌재 선생은 고양이를 기리기 위해 비석을 만들어 산소에 세웠다.  「눌재 선생과 고양이 비석」의 주요 모티프는 '동물에 대한 보은'이다. 눌재 박상이 모략을 피해 달아나던 도중에 만난 고양이가 길을 인도하여 잡혀서 죽지 않게 해 준 것이다. 이에 눌재 선생이 목숨을 구해 준 고양이를 기리기 위해 비석을 세워 보은했다. 박상과 고양이에 관한 다른 이야기도 전한다. 눌재가 연산군(燕山君)[재위 1494~1506]의 애첩이었던 딸의 권세를 믿고 악행을 일삼은 쇠부리란 자를 죽인 일이 있었다. 눌재가 자수를 하러 한양으로 가던 도중, 고양이가 자신의 도포 자락을 당겨 어느 절로 이끈 일이 있었다. 조정에서는 임금의 장인을 죽인 눌재에게 사약을 내렸는데, 고양이가 눌재를 절로 이끄는 바람에 눌재의 부임지로 사약을 가지고 내려가던 사람들과 길이 엇갈리게 되었고, 그 덕분에 눌재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후 눌재 선생은 고양이에게 밭[묘답]을 주어 그 은혜를 갚았다. [참고문헌]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7 | NO.32
  • 달마산
    광주광역시 광산구 대산동 가산마을에 있는 달마산은 달리는 말의 형세를 띠고 있다고 붙여진 지명이며, 주변에는 달마산과 관련한 지명이 많이 전해 온다는 이야기이다.광주광역시 광산구 삼도동 신동마을에 거주하는 제보자 임익주의 이야기를 1989년에 채록해서 1990년 발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했다. 달마산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대산동 가산마을에 있는 산이다. 산의 모양이 말이 달리는 모습을 띠고 있다고 해서 달마산이라 불렸다. 샘이 가산마을 앞에 있는데, 말이 물을 마신다고 해서 구시샘이라고 불렸다. 금바위라 불리는 바위는 말을 탄 장군이 칼을 갈았던 장소이다. 달마산 주변에는 장군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전승되고 있다. 장군은 마을 주변에 있는 망우산에 가서 망을 보았고, 달마산에 와서 신을 삼았다. 장군이 달마산에서 신을 삼은 장소가 아직도 남아 있는데, 너비가 넓다. 또 장군이 오줌을 눈 흔적이 남아 있는 곳도 있다.  「달마산」은 달리는 말의 형세를 띠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전설이다. 지명전설은 장군 모티프와 결합하여 주변의 특이한 지형과 지물에 다양한 지명을 만들어 낸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구시샘을 말이 물을 마신 장소로, 금바위를 장군이 칼을 갈았던 장소로 이야기한다. 「달마산」은 지형과 장군 모티프가 결합된 지명전설이다. [참고문헌]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11-10 | NO.31
  • 닭으로 친정아버지 속인 딸
    「닭으로 친정아버지 속인 딸」은 딸이 자신의 닭은 하루에 달걀 열 개를 낳는다면서 친정아버지를 속이는 이야기이다. 2018년 3월 23일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대동 송정마을에 거주하는 주민 최옥순[여, 71세]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수록되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장에 가다가 시집간 딸네 집에 들렀다. 딸은 아버지에게 달걀을 쪄서 대접하였다. 아버지가 집에도 달걀이 많다고 말하자, 딸은 자기 집에 있는 닭 한 마리가 하루에 달걀 열 개를 낳는다고 자랑하였다. 그러자 친정아버지는 딸에게 그 닭을 팔라고 말하였다. 딸은 아버지에게 닭을 팔면서, 닭한테 '훠이' 하고 소리를 지르면 닭이 하루에 달걀 한 개밖에 낳지 않는다고 당부하였다. 마침 마당에서 베를 짜고 있었는데 닭이 훌쩍 뛰며 넘어다니자 아버지는 자신도 모르게 '훠이' 하는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닭으로 친정아버지 속인 딸」의 주요 모티프는 '친정아버지 속이기'이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닭은 꿩과에 속하는 중형 조류로,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의 시조설화에 등장할 정도로 친숙한 가축이다. 특히 닭은 생후 170~200일이 지나면 번식 능력을 갖게 되고, 연간 100~220개의 달걀을 낳기 때문에 민간에서는 닭을 경제적으로 중요한 수입원으로 삼았다. 때문에 친정아버지는 딸이 기르는 닭이 하루에 달걀 열 개를 낳는다고 해서, 딸에게 닭을 팔라고 한 것이었다. 원래 딸이 기르는 닭도 하루에 한 개의 달걀을 낳았다. 하지만 딸은 닭한테 '훠이' 하고 소리를 지르면 닭이 하루에 달걀 한 개밖에 낳지 않는다고 친정아버지를 속여서 닭을 팔았다. 어리석은 친정아버지는 딸이 당부한 점만 지키면 닭이 하루에 열 개의 달걀을 낳을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친정아버지가 딸의 속임수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점에서 이 이야기는 해학적이다. [참고문헌]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11-10 | NO.30
  • 담뱃대 뺏어간 귀신
    광주광역시 북구 생용동 생용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담뱃대를 뺏은 귀신에 관한 이야기.「담뱃대 뺏어간 귀신」은 제보자 최영숙의 아버지가 경험한 귀신에 관한 이야기이다.2018년 1월 30일 광주광역시 북구 생용동 생용마을에 거주하는 주민 최영숙[여, 78세]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수록되었다.최영숙의 아버지가 술을 먹고 돌아가는 길에 점세라는 하인을 만났다. 점세는 아버지에게 담뱃대를 하나 달라고 부탁하였다. 아버지는 술에 취해 담뱃대를 들고가지 못하니, 점세가 대신 들어주려는 줄 알고 점세에게 담뱃대를 주었다. 그러나 점세는 담뱃대를 빼앗고는 사라졌는데, 알고 보니 하인 점세가 아닌 귀신이었다. 다음 날 아침, 아버지는 담뱃대를 뺏긴 곳으로 다시 가서 담뱃대를 찾아서 돌아왔다고 한다.「담뱃대 뺏어간 귀신」의 주요 모티프는 '귀신의 장난'이다. 귀신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인간 세계와 저승 세계를 오가며 인간에게 도움을 주거나 해를 끼친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귀신은 최영숙 아버지의 하인으로 둔갑하여 아버지에게서 담뱃대를 빼앗는 장난을 친다. 인귀설화의 유형은 많고도 다양한데, 귀신이 원귀로 변하여 원한을 주었던 사람들에게 복수하는 설화가 많다. 그러나 「담뱃대 뺏어간 귀신」 설화처럼 장난을 치는 유형도 있어서 우리나라 귀신의 유형이 다양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참고문헌]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11-10 | NO.29
  • 당산나무가 잡은 도둑
    광주광역시 남구 칠석동 옻돌마을의 당산나무 덕분에 마을에 들어온 쌀 도둑을 잡은 이야기이다.2003년 광주광역시 남구 칠석동 옻돌마을에서 채록한 이야기를 2004년에 고싸움놀이보존회에서 간행한 『옻돌마을 사람들과 고싸움놀이』에 「당산나무가 잡은 도둑」으로 수록하였다. 어느 마을에 도둑이 들어 쌀가마니를 훔쳐 갔다. 쌀을 훔쳐 집으로 가려던 도둑들이 그만 당산나무 쪽으로 가고 말았다. 집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밤새 당산나무 주위만 뱅뱅 돌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 마을 사람들이 도둑이 들었단 사실을 알고 밖에 나와 보았다. 그때까지도 도둑들이 당산나무를 돌고 있었다. 당산나무 덕분에 마을 사람들은 쌀 도둑을 잡을 수 있었다.「당산나무가 잡은 도둑」의 주요 모티프는 ‘마을을 지켜 주는 당산나무’이다. 당산나무는 마을의 수호신이 깃들어 있다고 여겨지는 나무이다. 당산나무는 마을의 자그마한 언덕이나 산기슭 혹은 마을의 중심 등에 있다. 당산나무가 있는 곳은 마을 사람들에게 심리적 중심으로 신성한 곳으로 인식된다. 이 당산나무는 다른 나무와 구별하기 쉽다. 당산나무 앞에 제단이 놓여 있거나, 새끼줄이나 흰 종이가 감겨 있는 경우가 많아 쉽게 찾을 수 있다. 당산나무는 마을의 시조신이나 마을을 지켜 주는 신으로 여겨진다. [참고문헌] 『옻돌마을 사람들과 고싸움놀이』(고싸움놀이보존회, 2004)[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11-10 | NO.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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