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87
게시물 검색 폼
  • 김덕령 오누이의 경주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서 전해 내려오는 김덕령 오누이의 힘겨루기 이야기.김덕령(金德齡)[1567~1596]은 남다른 용력(勇力)을 지니고 있으며, 자신의 용력으로 다른 사람을 굴복시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였다. 김덕령의 누이는 김덕령의 자만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옷 짓기와 성 쌓기 시합을 했는데, 일부러 져주면서 동생의 자존심을 세워주었다는 이야기이다.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 거주하는 제보자 김종관의 이야기를 채록해서, 1990년 광주직할시가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하였다. 김덕령의 누이는 평소 도량이 넓고 힘과 지혜가 뛰어난 여장부였는데, 청계(淸溪) 김경회(金慶會)와 혼인했다. 김덕령의 누이가 어머니의 병환 때문에 친정에 와 있었는데, 김덕령이 형제들과 함께 화순을 다녀오면서 주막집에서 행패를 부리던 불한당을 제압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누이는 김덕령을 불러서 용력을 과신하거나 자랑하지 말라며 주의를 주었다. 누이는 김덕령에게 시합을 제안했다. 누이는 정오까지 자신은 무명베로 도포를 짓고, 김덕령은 환벽당 밑의 언덕에 돌로 성을 쌓기로 했다. 누이는 정오가 되기 전에 이미 도포를 지었고, 마지막 마무리인 동정을 달지 않고 기다렸다. 김덕령이 성을 다 쌓고 누이가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누이는 그때서야 비로소 동정을 달기 시작했다. 김덕령은 누이가 동정을 다는 것을 보면서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했다. 김덕령은 누이를 이긴 승리감보다는 자신이 하려고 노력하면 능히 이룰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김덕령 오누이의 경주」는 김덕령의 인물전설로서 오누이가 힘을 겨루는 이야기 유형에 해당한다. 오누이 힘겨루기 전설은 한국의 비극적 영웅전설을 구성하는 이야기 유형이다. 오누이 힘겨루기 전설은 남성과 여성의 대결에서 여성이 일부러 져주거나, 어머니가 개입해서 남성이 승리하게 되고, 그 대가로 여성이 죽으면서 끝을 맺는다. 이러한 결말은 남성 주인공에게 반인륜적 특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김덕령 후손들은 오누이 힘겨루기 전설을 차용하지만, 김덕령의 비범성과 누이의 지혜로움을 함께 보존하면서 이야기 결말을 비극적으로 처리하지 않는다. [참고문헌]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4 | NO.57
  • 김덕령 오누이의 씨름 시합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서 전해 내려오는 김덕령 오누이의 힘겨루기 이야기. 김덕령(金德齡)[1567~1596]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씨름판을 돌아다녔다. 김덕령의 누이는 동생의 이러한 행동이 걱정스러워 남장(男裝)을 하고 씨름판에 나섰고, 김덕령을 이겼다. 김덕령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다시는 씨름판에 나서지 않았으며, 학문과 무술을 익히는 데 전념했다.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 거주하는 제보자 유몽룡의 이야기를 채록해서, 1990년 광주직할시가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했다.김덕령은 어려서부터 무등산에서 무술을 익혔고, 남다른 용력(勇力)을 과시하기 위해서 씨름판을 돌아다녔다. 김덕령의 누이는 동생의 이러한 행동이 걱정스러웠다. 어느 날 누이는 김덕령의 기를 꺾어 씨름판에 나서는 버릇을 고쳐주기로 결심했다. 누이는 김덕령이 담양 창평 장터의 씨름판에 출전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누이는 남장을 하고 씨름판으로 갔다. 김덕령은 창평 출신 ‘홍장사’를 물리치고 씨름판을 휘젓고 있었다. 판장[심판]이 김덕령과 맞서고 싶은 이가 더 있느냐고 물었다. 이때 남장을 한 누이가 나섰다. 김덕령은 이전까지 본 적도 없고, 체격도 왜소한 사람이 나서는 것을 보고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씨름이 시작되자 김덕령은 상대방의 힘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김덕령은 상대에게 지고 말았다. 김덕령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겸손하게 씨름판에서 물러났다. 누이는 패배를 인정하고 떠나는 동생 김덕령이 대견했고, 오히려 동생의 기를 꺾은 것이 아닌지 걱정하였다. 김덕령은 이후 더 이상 씨름판에 나서지 않고 학문과 무술을 익히는 데 전념하였다. 「김덕령 오누이의 씨름 시합」은 김덕령 인물전설로서 오누이 힘겨루기 이야기 유형이다. 오누이 힘겨루기 유형의 이야기에서 여성은 남자 주인공보다 힘과 지혜 측면에서 뛰어나다. 그러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힘과 지혜를 드러낼 수 없다. 동생이 용력(勇力)을 과신하고 오만해지는 것을 자중(自重)시키기 위해서 누이가 남장을 하고 씨름판에 나선다. 누이가 승리하고, 이후 동생은 자신이 진 상대가 누이라는 것을 알고 분개하거나 누이를 죽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김덕령 오누이의 씨름 시합」은 이러한 오누이 힘겨루기 이야기의 일반적 서사 내용을 삭제하고, 시합에서 진 김덕령이 자성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영웅적 자질을 갖추어 가는 형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러한 변개(變改)는 김덕령에 대한 지역민의 긍정적 인식이 반영된 결과이다. [참고문헌]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4 | NO.56
  • 김덕령 장군과 불한당
    광주광역시 광산구에서 전해 내려오는 김덕령의 비범한 능력에 관한 이야기.김덕령(金德齡)[1567~1596]이 소년 시절에 불한당(不汗黨)이 모여 산다는 서봉사(瑞峯寺)에 가서 비범한 능력으로 굴복시켰고, 불한당이 개과천선했다는 이야기이다.1981년 전라남도 광산군이 간행한 『광산군지』와 1990년 광주직할시가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되었다.김덕령은 호남이 낳은 위대한 장군이며 숱한 전설을 남기고 떠난 민중 영웅이다. 김덕령이 열다섯 살 때, 어머니의 병환에 좋다는 잉어를 구하기 위해서 외갓집이 있는 전라도 화순군 남면 배소마을에 갔다. 소년 김덕령은 불한당이 근처 서봉사를 강점하고 노략질을 일삼는다는 소문을 들었다. 의협심이 남다른 김덕령은 불한당이 우글거리는 서봉사로 갔다. 김덕령은 글공부를 하러 온 도령처럼 위장하고, 불한당과 함께 며칠을 생활하였다. 김덕령이 본 불한당은 악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김덕령은 그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계략을 짰다. 김덕령은 불한당과 내기 씨름을 해서 힘으로 불한당을 굴복시켰다. 김덕령은 지붕으로 올라가서 몸에 줄을 묶어서 불한당에게 그 줄을 던진 다음에 자신을 끌어내리도록 하였다. 김덕령은 일곱 명의 장정이 밑에서 줄을 잡아당겨도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김덕령이 힘을 쓰니 불한당이 끌려 올라갔다. 불한당은 힘으로는 김덕령을 제압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무릎을 꿇고 빌었다. 인정이 많은 김덕령은 불한당과 함께 밤을 지새우며 다시는 도적질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김덕령은 이 일로 인해서 용맹과 도량이 세상에 알려졌고, 훗날 수천 명의 의병을 거느리는 대장군이 되었다. [모티프 분석] 「김덕령 장군과 불한당」은 김덕령의 비범한 능력을 보여 주는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김덕령의 담력과 용맹이 사람들에게 알려진 계기를 설명한다. 비범한 능력을 지닌 김덕령이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는 불한당을 물리치고 지역 사회에 안정을 가져다 준 모티프는 김덕령이 민중 영웅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참고문헌] 『광산군지』(광산군지편찬위원회, 1981)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4 | NO.55
  • 김덕령 장군과 용천마
    광주광역시 동구 용산동 화산마을에서 전해 오는 김덕령 장군과 용마에 관한 이야기.  「김덕령 장군과 용천마」는 김덕령 장군과 용마와의 내기에 관한 이야기이다.  「김덕령 장군과 용천마」 이야기는 광주광역시 동구 용산동 화산마을에 거주하는 최복연[남, 87세]에게 채록하여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수록한 것이다. 화산마을은 지리적으로 외진 곳에 있다.앞서 최복연이 분적산이 무등산의 아들이라는 이야기를 구현한 뒤, 조사자들이 무등산 이야기가 나왔으니 김덕령 장군 이야기를 구현해 줄 것을 부탁하여 채록하였다.김덕령 장군은 무등산에서 용천마를 타면서 활을 쏘곤 하였다. 어느 날, 김덕령 장군은 용천마와 자신 중에서 누가 먼저 가는지 내기를 하였다. 이에 김덕령 장군이 화살을 쏘고 말이 출발하였는데, 말보다 화살이 먼저 도착했다고 한다. 「김덕령 장군과 용천마」 이야기는 전라도 광주 지역에서 수집되는 김덕령 장군과 용마와의 내기에 관한 이야기를 최복연이 구술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최복연의 기억에 의존하여 구술하다 보니 이야기가 많이 생략되어 있다.[참고문헌]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4 | NO.54
  • 김덕령과 누이의 재주 겨루기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동에서 전해 내려오는 김덕령에 관한 이야기. 김덕령(金德齡)[1567~1596] 장군이 큰 인물이 될 수 있었던 이유에 관한 이야기이다. 김덕령의 누이가 김덕령보다 힘과 재주가 좋았는데, 누이의 희생으로 김덕령이 깨우치고 큰 인물이 되었다는 김덕령에 관한 인물전설이다. 2000년 9월 27일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동에 거부하는 주민 강복동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2000년에 광주민속박물관에서 간행한 『광주의 설화』에 수록되었다.김덕령 장군은 힘이 세고 용맹하였다. 그런데 김덕령의 누이는 김덕령보다 힘도 세고 지혜가 남달랐다. 김덕령의 누이는 뛰어난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조금 부족한 사람이 힘에 눌려서 큰 사람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김덕령의 누이는 힘과 재주로 본다면 자신이 낫지만, 여자는 출가외인이 되기 때문에 남자인 동생이 출세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김덕령의 누이는 김덕령에게 재주를 겨루자고 제안하였다. 김덕령에게는 말을 타고 무등산을 한 바퀴 돌아오라고 하고, 자신은 그동안에 도포 한 벌을 짓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겨루기에서 진 사람이 이긴 사람을 위해 기꺼이 죽어서, 이긴 사람에게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울 기회를 주자고 하였다. 김덕령은 누이를 감당할 재주가 없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작은 뜻도 못 펴고 누나에게 죽겠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착잡해졌다. 그러나 어차피 죽게 될 것이라면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김덕령의 누이도 옷감과 반짇고리를 준비하고, 김덕령은 말을 타고 겨루기를 시작하였다. 겨루기가 시작되었고, 김덕령의 누이는 김덕령이 돌아오기 전에 이미 옷을 다 지었다. 김덕령의 누이는 이대로라면 자신이 살고 동생이 죽을 것이며, 또 자신도 젊은 나이에 죽기는 아까웠다. 마음의 갈등을 느끼고 있는 사이, 말방울 소리가 가까이 들리기 시작하였다. 순간 김덕령의 누이는 도포의 옷고름을 잡아떼었다. 김덕령이 집으로 들어와 누이를 보니, 김덕령의 누이는 아직 옷고름을 달지 못하였다며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였다. 그리고 그날 밤 노끈으로 목을 매어 죽고 말았다. 다음 날 누이의 죽음을 알게 된 김덕령은 통곡하다가 혹시나 하고 도포 자락을 살펴보니 일부러 옷고름을 뜯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김덕령은 자신을 살리기 위해 희생한 누이의 뜻을 받들어 밤낮없이 학문과 무술을 연마하여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였다. 큰 인물이 나려면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모티프 분석] 「김덕령과 누이의 재주 겨루기」의 주요 모티프는 ‘오누이의 힘내기’이다. 오누이가 서로의 목숨을 걸고 힘 대결을 하거나 재주 겨루기를 하는 이야기이다. 내기의 조건은 짧은 시간에 끝날 것, 남보다 힘이 셀 것, 먼 거리를 빨리 다녀올 것 등이다. 대체로 여자는 힘에 관한 재주, 남성은 거리에 대한 속성이 있다. 그런데 후대로 올수록 여자의 힘 속성이 약화되면서 옷 짓기, 밥 짓기 등으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설화 유형에서는 누이의 힘이 동생의 힘보다 우월하다. 그럼에도 누이가 죽고 남동생이 대결에서 이긴다. 이는 공존할 수 없는 두 주체 사이에 일어나는 필연적인 갈등으로, 주체가 오누이로 설정된 것은 모권 사회에서 부권 사회로 교체된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광주의 설화』(광주민속박물관, 2000) 『한국민속문학사전』설화 1-2(국립민속박물관, 2012)[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4 | NO.53
  • 김덕령과 문바위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서 전해 내려오는 김덕령과 관련한 용마 이야기.김덕령은 무등산의 문(門)바위에서 용력을 기르고 술법을 익혔다. 김덕령은 문바위에서 활을 쏜 뒤에 용마(龍馬)를 타고 달려가기를 반복했는데, 이는 용마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다. 김덕령은 섣부른 판단으로 용마를 죽이고 말았다.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 거주하는 제보자 유몽룡의 이야기를 채록해서, 1990년 광주직할시가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하였다. 지공너덜은 무등산 정상 아래, 해발 약 1,000~1,100m 사이의 남쪽에 있으며, 폭은 150m에 이르고 상부 경계가 아래로 들어간 혀 모양의 형태로 되어 있다. 옛날 인도 승려 지공대사(指空大師)가 이곳에 와서 석실(石室)을 만들고 좌선 수도하였다고 해서 지공너덜이라 불렸다. 보조국사(普照國師)는 지공너덜의 석실에 문바위를 세웠다. 김덕령은 용마를 타고 문바위에 와서 용력을 기르고, 술법을 익혔다. 어느 날, 김덕령은 용마에게 “내가 큰 일을 하려면 너부터 잘 달려야 한다. 이제 내가 활을 쏠 터인데 화살이 건너편 화순 마실리에 이르기 전에 네가 먼저 거기에 당도해야지 그렇지 못하면 네 목을 치겠노라”고 하였다. 용마도 김덕령의 말을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화살이 김덕령의 활시위를 떠나자마자 용마도 김덕령을 태운 채 쏜살같이 달렸다. 김덕령은 목적지에 도착했으나 화살이 보이지 않자 용마를 죽이려 했다. 이때 하늘 위로 화살이 지나갔다. 김덕령은 용마를 상대로 이와 같은 시험을 자주 하였다. 김덕령은 마지막 시험이라 생각하고 광주의 경양방죽을 향해 활을 쏘았다. 용마는 김덕령을 태우고 쏜살같이 달렸다. 김덕령은 경양방죽에 도착해서 한참을 기다려도 활이 보이지 않자 과감히 칼로 용마의 목을 쳤다. 잠시 후, 화살이 날아왔고, 이를 지켜본 김덕령은 크게 후회하였다. 이 광경을 지켜본 마을 사람들은 용마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방죽 근처에 말을 묻고 용마비(龍馬碑)를 세웠다. 용마비는 경양방죽이 메워질 때 함께 묻혔다.「김덕령과 문바위」는 김덕령의 용마 관련 이야기이다. 용마는 영웅의 신이성과 비범성을 배가시킨다. 하지만 한국의 민중 영웅은 신화적 인물과 유사한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성장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결핍을 지니고 있어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김덕령의 조급성과 섣부른 판단은 김덕령이 비범한 능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비극적 죽음을 맞이하게 된 이유가 된다. 용마전설은 민중 영웅으로서 김덕령의 결핍을 드러내고 있다. [참고문헌]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4 | NO.52
  • 김덕령과 사검
    광주광역시 북구 효령동 종방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김덕령과 사검에 관한 이야기.「김덕령과 사검」은 김덕령(金德齡)[1567~1596]이 하늘에서 내려준 사검(蛇劍)을 받은 이야기이다. 2018년 1월 30일 광주광역시 북구 효령동 종방마을에 거주하는 주민 김봉희[남, 71세]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주관하는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에 수록되었다. 김덕령이 씨름판에 가려고 길을 지나가는데 매우 큰 구렁이가 길을 가로막았다. 김덕령은 바윗덩이를 가져다 뱀을 눌러 버렸다. 어느 날 김덕령이 어디를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길에 뱀을 눌렀던 자리를 보니, 그 자리에 칼이 있었다. 하늘에서 김덕령에게 내려준 사검(蛇劍)이었다. 이후, 김덕령은 하늘에게 내려준 사검으로 싸움에서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김덕령과 사검」의 주요 모티프는 '인물의 비범성'이다. 김덕령은 임진왜란 당시에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인물이며, 광주광역시나 인근 지역에서 김덕령의 비범한 능력에 관한 설화가 다수 전해진다. 사검(蛇劍)의 경우, 검신(劍身)이 S자형으로 구불구불해서 마치 뱀이 움직이는 모습과 같아서 이름이 붙여진 검이다. 이 검은 일본에서 '사행검(蛇行劍)', 또는 ‘곡신검(曲身劍)’이라 불리며 다수 출토된다. 한국에서는 1972년 전라북도 임실군 관촌면 금성리 고분에서 발견된 사곡검(蛇曲劍)이 유일하게 알려질 정도로 드물다. 이처럼 한국에서는 사검이 드물고, 김덕령이 바위로 누른 뱀이 사검으로 변하였으며, 하늘이 김덕령에게 내려준 검이라는 이야기는 뱀 앞에서 담대했던 김덕령의 비범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4 | NO.51
  • 김덕령과 주검동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서 전해 내려오는 김덕령이 임진왜란을 대비해서 무기를 만들고 군사를 훈련시켰다는 장소와 관련한 지명에 관한 이야기. 김덕령(金德齡)[1567~1596]이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무등산 원효계곡 상류의 주검동(鑄劍洞)에 대장간을 세우고 칼과 창을 만들어서 군사들을 훈련시켰다는 이야기이이다.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 거주하는 제보자 유몽룡의 이야기를 채록해서, 1990년 광주직할시가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하였다. 주검동은 무등산 원효계곡 상류 삼전동[삼밭실]으로 올라가는 길 왼쪽에 있다. 김덕령이 왜군들이 침입해 올 것을 예견하고 이를 대비해 군사들을 훈련시켰던 곳이 주검동이다. 주검동 주변의 큰 바위에는 “만력계사(萬曆癸巳) 의병대장 김충장공 주검동”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김덕령은 수많은 장정들을 모아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부터 나무가 울창하게 들어선 주검동에 드나들기 시작하였다. 쇠붙이 소리와 장정들의 기합 소리가 주검동으로부터 흘러나와 원효계곡에 밤낮으로 울려 퍼졌다. 김덕령은 주검동에 세 개의 대장간을 세우고 칼, 창, 화살, 투구, 갑옷 등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김덕령은 20여 명의 장정들을 모아서 칼과 창을 다루는 법과 활쏘기를 가르쳤다. 『광주읍지(光州邑誌)』 고적조(古蹟條)에는 “주검동은 무등산 서석 밑 계곡에 있다. 김덕령 장군이 거사할 때 주검동에서 칼을 치니 뇌성(雷聲)이 산에 울리고, 흰 기운이 계곡에서 하늘로 솟아올라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김덕령과 주검동」은 김덕령과 관련된 지명전설이다. 김덕령은 왜군이 침입할 것을 예견하고 무등산 원효계곡에서 전쟁을 대비하였다. 김덕령이 대장간을 세워서 무기를 만들고 군사들을 훈련시켜서 ‘주검동(鑄劍洞)’이라는 지명을 얻게 되었다. [참고문헌]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4 | NO.50
  • 김덕령의 뜀바위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서 전해 내려오는 김덕령이 담력과 무술을 연마한 장소와 관련한 지명 이야기. 김덕령(金德齡)[1567~1596]이 어렸을 때부터 담력을 기르고 무술을 연마한 장소라고 전해 내려오는 데서 유래한 지명 관련 이야기이다.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 거주하는 제보자 유몽룡의 이야기를 채록해서, 1990년 광주직할시가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하였다. 무등산(無等山) 정상은 천왕봉(天王峯), 지왕봉(地王峯), 인왕봉(人王峯)의 삼대봉으로 형성되어 있다. 무등산 정상의 삼대봉은 주상절리로 되어 있어서 마치 선돌을 세워 놓은 것처럼 솟아 있다. 그 모습이 기이하고 장엄하여 다른 곳에서는 보기 드문 경관이다. 삼대봉 가운데 지왕봉은 비로봉(毗盧峯)이라고도 하는데, 정상에 ‘뜀바위’라 불리는 장소가 있다. 충장공 김덕령은 유년시절부터 지왕봉 정상의 이쪽 바위에서 저쪽 바위로 뛰어다니면서 무술을 연마하고 담력을 기르는 훈련을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을 ‘뜀바위’라고 불렀다. 일제강점기에 일본군 장교가 김덕령의 뜀바위 전설을 듣고, 자기도 할 수 있다면서 무등산에 올라가 뛰어내리다가 떨어져 죽었다. 「김덕령의 뜀바위」는 조선시대 전라도 광주 지역의 실존인물 김덕령과 관련된 지명전설이다. 광주광역시에는 김덕령과 관련된 다양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그중 지명과 관련한 전설도 다수 전승되고 있다. 「김덕령의 뜀바위」는 김덕령과 관련한 지명전설 중 하나이다. [참고문헌]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 『무등산권지질공원(https://geopark.gwangju.go.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4 | NO.49
  • 김덕령의 어머니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서 전해 내려오는 김덕령의 출생과 관련된 이야기. 김덕령(金德齡)[1567~1596]은 광주광역시 충효동에 태어난 조선시대 인물이다. 호랑이가 밭에서 일하고 있는 김덕령 어머니를 잡아먹고 사람으로 환생하려다가 신의 방해로 실패한 이야기이다.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 거주하는 제보자 김종영의 이야기를 채록해서, 1990년 광주직할시가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하였다.김덕령의 어머니가 김덕령을 임신하였을 때의 일이다. 김덕령의 어머니는 호식(虎食)을 당할 운명이었다. 어느 날 늙은 중이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 말했다. “나는 중이 아니고 호랑이다. 나는 저기 밭에서 일하고 있는 여자를 잡아먹고 사람으로 환생할 예정이다.” 중은 말을 마치고 재주를 세 번 넘고 나서 호랑이로 변해서 밭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호랑이는 밭에서 다시 재주를 세 번 돌고 중으로 변해서 돌아왔다. 중은 “저 여자를 잡아먹기 위해서 밭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불칼에 삥 둘러싸여 들어갈 수가 없다. 오늘은 시간을 놓쳐서 사람으로 환생할 수 없게 됐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김덕령의 어머니는 호식을 당할 운명이었는데, 명산의 정기를 지닌 김덕령이 배 속에 있었기 때문에 천지신령이 불칼로 김덕령의 어머니를 보호했던 것이다.  「김덕령의 어머니」는 김덕령 관련 인물전설의 한 편이다. 김덕령 인물전설은 전국에서 전승되지만 「김덕령의 어머니」 이야기는 다른 지역에서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한국의 설화에서 호랑이는 양가적(兩價的) 특성을 갖는다. 호랑이는 사람들을 보호해 주는 선신(善神)이기도 하며,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악신(惡神)이기도 하다. 「김덕령의 어머니」의 호랑이는 악신이다. 악신 호랑이가 김덕령의 어머니를 잡아먹으려고 하지만, 김덕령을 보호하는 신들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했다는 내용이다. 김덕령의 신이성(神異性)을 예비하는 이야기이며, 광주광역시 충효동에서만 전승되고 있다. [참고문헌]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4 | NO.48
  • 김덕령의 용기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서 전해 내려오는 김덕령의 용력에 관한 이야기. 김덕령(金德齡)[1567~1596]은 광주광역시 충효동에서 태어난 조선시대 실존인물로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켰다. 김덕령이 열다섯 살 때에 글공부를 위해서 서봉사에 갔다가 호랑이를 잡은 이야기이다.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 거주하는 제보자 김동호의 이야기를 채록해서, 1990년 광주직할시가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하였다.김덕령은 열다섯 살 때에 글공부를 하기 위해서 친구들과 함께 담양의 서봉사(瑞峰寺)로 갔다. 김덕령과 친구들은 서봉사에서 글공부에 열중하였다. 서봉사는 주변 환경이 조용해서 글공부를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런데 밤만 되면 사나운 짐승들이 울며 서봉사 주변에 자주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덕령은 담력이 남달라서 사나운 짐승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밤에도 거리낌 없이 서봉사 주변을 돌아다녔다. 김덕령이 서봉사에 온 지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밤에 화장실을 가게 되었다. 그때 갑자기 어둠 속에서 큰 호랑이가 나타나서 김덕령을 덮쳤다. 김덕령은 주저하지 않고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리, 발로 배를 걷어찼다. 김덕령은 침착하게 호랑이를 대청 기둥에 밧줄로 묶었다. 김덕령이 화장실을 다녀온 후에 대청 기둥을 보니 호랑이가 마루 밑에 들어가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김덕령은 친구들에게 마루 밑에 있는 짐승을 찾아보라고 하였다. 친구들은 마루 밑에 큰 호랑이가 죽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서봉사 스님들과 친구들은 김덕령의 담력에 또 한 번 감탄하였다.  「김덕령의 용기」는 인물전설로서 김덕령의 성장담에 해당한다. 「김덕령의 용기」는 김덕령이 성장하면서 일반 사람들과 다르게 비범하였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만든 이야기이다. 김덕령의 성장담은 ‘오누이 힘겨루기’ 이야기 등이 다른 지역에서 전승되고, 이러한 이야기가 김덕령이 비극적 영웅이 될 수밖에 없는 근거로 활용된다. 하지만 김덕령이 태어난 광주광역시 충효동에서는 김덕령 성장담의 결핍 요소를 보여주기보다는 김덕령이 비범한 영웅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등을 설명하는 이야기로 인물전설을 구성하는 경향이 있다. [참고문헌]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4 | NO.47
  • 김덕령의 의리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서 전해 오는 김덕령의 비범성과 관련된 이야기. 어린 김덕령(金德齡)[1568~1596]이 논에 물을 대는 외갓집 식구들과 물싸움이 벌어진 이웃집 사람들을 징치[징계하여 다스림]하면서 비범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광주직할시 북구 충효동에 거주하는 제보자 김종영의 이야기를 채록해서 1990년 발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하였다. 김덕령이 어렸을 때 전라남도 담양에 있는 외갓집에 갔다. 그해 여름은 비가 오지 않아서 몹시 가물었고, 마을 사람들은 논에 물을 대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다. 물싸움이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일어났다. 김덕령의 외갓집이 물을 대는 날이었다. 그런데 이웃집 사람들이 자신들의 힘을 믿고 김덕령 외갓집의 물을 빼앗았다. 외갓집 식구들이 항의를 하면서 다시 논에 물을 대려고 하니 이웃집 사람들이 괭이를 들고 몰려와 위협하였다. 김덕령은 물싸움을 말리려고 하였으나, 이웃집 사람들은 어린 김덕령을 무시하면서 어른들의 일에 끼어들지 말라고 협박하며 괭이를 휘둘렀다. 김덕령은 날아오는 괭이를 손을 잡아서 엿가락처럼 늘려서 이웃집 사람을 땅에 박아 버렸다. 「김덕령의 의리」는 인물전설로서 김덕령의 성장담이다. 김덕령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비범성을 보임으로써 민중적 영웅이 될 수밖에 없었던 징후적 당위성을 보여 주고 있는데, 이러한 서사가 영웅 성장담의 특징이다. 물싸움, 부도덕한 인물들의 위협과 대결, 징치는 비범한 영웅의 성장담에 자주 차용되는 전설 모티프이다. [참고문헌]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4 | NO.46
  • 김덕령의 지혜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서 전해 오는 김덕령 관련 이야기.김덕령(金德齡)[1567~1596]과 함께 글공부를 하는 친구가 모친상(母親喪)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냇가의 물이 불어서 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김덕령이 지혜를 발휘하여 친구가 냇가를 건널 수 있게 도와주었다는 이야기이다. 광주직할시 북구 충효동에 거주하는 김동호에게 채록하여 1990년 발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하였다. 김덕령이 서봉사에서 친구들과 함께 글공부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폭우가 내리고 냇가의 물이 넘쳐서 절과 마을을 이어 주는 길이 끊기게 되었다. 김덕령과 친구들은 냇가에서 물 구경을 하고 있었다. 이때 한 총각이 냇가 건너편에 와서 김덕령의 친구 중 한 명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친구는 갑작스러운 소식에 망연자실하였고,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에 좌절하고 있었다. 김덕령은 서봉사 중에게 큰 함지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는 친구를 함지에 태워서 물을 건널 수 있게 도와주었다. 김덕령은 친구를 냇가 건너편으로 옮겨 주고, 자신은 함지에 올라서 다시 돌아왔다. 친구들과 중은 김덕령의 지혜와 용기에 탄복하였다.  「김덕령의 지혜」는 김덕령의 인물전설로서 성장담에 해당한다. 김덕령이 친구의 위기 상황을 자신의 지혜와 용기로 해결해준다. 김덕령은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위기 해결 능력과 용기를 보여 준다. 이야기는 김덕령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보여 준 비범성을 강조하고 있다. [참고문헌]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4 | NO.45
  • 김덕령의 태몽 이야기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서 전해 내려오는 김덕령의 태몽과 관련된 이야기.김덕령(金德齡)[1567~1596]은 전라도 광주 충효동에 태어난 조선 시대 실존 인물이다. 김덕령의 어머니가 호랑이꿈을 꾸고 김덕령을 낳았다는 이야기이다.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 거주하는 제보자 김종영의 이야기를 채록해서, 1990년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했다.광주광역시 충효동은 과거부터 광산김씨(光山金氏)의 집성촌이다. 충효동 출신의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벼슬을 했다. 김붕섭(金鵬燮)의 부인 남평반씨(南平潘氏)가 마을 아녀자들과 함께 길쌈을 하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부인은 골짜기에 스치는 바람에 취해서 잠이 들었다. 부인은 꿈을 꾸었다. 자신 앞에 큰 호랑이가 나타나 느닷없이 자신의 품에 들어와 안겼고, 부인은 아무 두려움 없이 호랑이를 쓰다듬어 주었다. 호랑이는 남평반씨를 물지도 않고 다소곳이 있었다. 남평반씨는 잠에서 깼지만 꿈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남편이 때마침 들어왔고, 그녀는 함께 길쌈하는 여자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녀는 남편에게 꿈 이야기를 했다. 반평반씨는 일 년 뒤에 사내 아이를 출산했다. 하인들은 아이의 출산을 알리기 위해서 사랑채로 가다가 호랑이 두 마리가 웅크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호랑이는 이내 산으로 올라갔다. 김붕섭은 하인들의 말을 듣고, 호랑이가 산신령임을 알게 되었다. 산신령이 내려와서 김덕령이 안전하게 태어나는 것을 지켜보았던 것이다. 「김덕령의 태몽 이야기」는 광주광역시 충효동에서 전승되는 김덕령의 출생담이다. 김덕령 전설은 전국적으로 전승되고 있고, 다양한 유형(type)과 각편(version)이 있다. 「김덕령의 태몽 이야기」는 태몽이라는 장치를 통해서 김덕령 출생의 현실적 개연성을 확보하고 있으며, 호랑이로 변한 산신령을 통해서 비범한 존재로서 김덕령을 강조한다. [참고문헌]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4 | NO.44
  • 김덕령의 환벽당 참새 잡기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서 전해 내려오는 김덕령의 비범한 능력을 보여 주는 이야기.김덕령(金德齡, 1567~1596)이 여덟 살 때에 환벽당(環碧堂) 처마에 올라가 새둥지를 나무 위로 옮겨 주었고, 이를 지켜본 할아버지의 훈계를 듣고 글공부에 전념하였다.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 거주하는 제보자 김동영의 이야기를 채록해서, 1990년 광주직할시가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하였다. 김덕령이 여덟 살 때 아이들과 함께 환벽당에 놀러갔다. 환벽당 주위에는 나무가 무성하였고, 처마 밑에는 많은 새들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 저녁이 되자 새들이 둥지로 돌아왔다. 동네 아이들은 김덕령에게 환벽당 처마 밑에 있는 새를 잡아 달라고 하였다. 김덕령은 새를 잡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었지만 환벽당 처마가 계속 더러워져서 무슨 수를 써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김덕령은 훌쩍 뛰어서 처마에 올라갔고, 처마 밑에 있는 둥지에 손을 넣어서 새를 잡았다. 아이들은 김덕령이 잡은 새를 갖고 싶었으나, 김덕령은 환벽당 주변에 있는 나무 위에 새 둥지를 만들어서 잡은 새를 옮겨 주었다. 아이들은 김덕령의 용력(勇力)을 알기에 따지지도 못하고 보기만 할 뿐이었다. 김덕령이 집으로 돌아가는데 할아버지가 김덕령을 불러 세웠다. 할아버지는 김덕령에게 힘이 있다고 자랑하거나 뽐내지 말고, 남이 모르게 힘과 실력을 길러야 한다고 충고하였다. 김덕령은 할아버지의 훈계를 듣고는 크게 깨달아 글공부에 전념하였다.「김덕령의 환벽당 참새 잡기」는 인물전설로서 김덕령의 성장담에 속한다. 김덕령의 능력 과시와 김덕령에 대한 훈계 등이 순차적으로 연결되어 김덕령의 영웅적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김덕령의 능력 과시는 역사적으로 비극적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이유로 제시된다. 그러나 실존 인물이 출생하고, 후손들이 현재까지 살고 있는 곳에서는 이야기가 순화되고 교훈적인 형태로 변형되는 경우가 있다. 「김덕령의 환벽당 참새 잡기」는 순화되고 교훈적인 내용으로 이야기가 변형된 것이다. [참고문헌]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4 | NO.43
  • 광주광역시
  • 한국학호남진흥원
  • 사이버광주읍성
  • 광주서구청
  • 광주동구청
  • 광주남구청
  • 광주북구청
  • 광주광산구청
  • 전남대학교
  • 조선대학교
  • 호남대학교
  • 광주대학교
  • 광주여자대학교
  • 남부대학교
  • 송원대학교
  • 동신대학교
  • 문화체육관광부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 국립아시아문화전당
  • 광주문화예술회관
  • 광주비엔날레
  • 광주시립미술관
  • 광주문화재단
  • 광주국립박물관
  • 광주시립민속박물관
  • 국민권익위원회
  • 국세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