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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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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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의 설화
    광주광역시에서 옛날부터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일정한 서사 구조를 지닌 이야기. 1. 설화의 정의  설화는 입으로 전해 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입으로 전해 오는 모든 이야기가 설화는 아니다. 일상의 신변잡기, 역사적 사실이나 현재적 사실을 입으로 전하는 이야기는 설화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 설화는 일정한 서사 구조를 지닌 꾸며낸 이야기이다. 설화 중에는 사실을 가장한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사실적인 이야기이며, 사실 여부보다는 문학적인 흥미와 교훈 때문에 존재한다. 현대는 과거와 같은 이야기판을 찾기 힘들고, 설화가 과거와 같이 강한 전승력을 보이지 않아 소멸의 위기에 처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설화를 대신해서 자신의 경험과 체험을 이야기로 구성하여 전승하는 경우도 있다. 경험담이 인간의 실제적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구성의 과정을 살펴보면 허구성과 교훈성, 문학적 흥미성이 첨부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경험담 또한 현대의 이야기 문화 중 한 부류로 설정할 수 있다.   2. 설화의 특징  설화는 구전된다는 특징이 있다. 설화의 구전성은 구절구절 완전히 기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핵심이 되는 구조를 기억하고 이에 화자 나름대로의 수식을 덧보태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설화는 단순하면서 잘 짜인 구조를 지니며, 표현 역시 단순하다. 설화의 두 번째 특징은 산문성이다. 설화는 보통 말로 구연되며, 규칙적인 율격은 발견되지 않는다. 설화의 세 번째 특징은 구연 기회의 무제한성이다. 설화는 언제 어느 때나 가리지 않고 이야기를 하고 들을 분위기가 되면 구연될 수 있다. 설화의 네 번째 특징은 화자와 청자가 대면하는 과정에서 이야기가 구술된다는 것이다. 설화는 스스로 즐기기 위해서 구연되는 이야기 장르가 아니다. 화자는 청자를 상정하고, 청자의 반응을 살피면서 설화를 구연한다.   3. 설화의 분류  설화는 세 가지로 분류되는데, 신화·전설·민담이다. 설화는 전승자의 태도, 시간과 장소, 증거물, 주인공과 행위, 전승 범위를 기준으로 분류가 가능하다.  첫 번째 전승자의 태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신화의 전승자는 신화를 진실되고 신성하다고 생각한다. 전승자는 신화를 일상적 경험 이전에 또는 일상적 합리성을 넘어서 존재한다고 믿고, 그 진실성과 신성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전설의 전승자는 이야기가 신성하다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으나, 진실되다고 믿는다. 민담의 전승자는 이야기가 신성하다거나 진실되다고 믿지 않는다. 단지 흥미성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승한다.  두 번째로 시간과 장소이다. 신화는 아득한 옛날, 비일상적인 경험으로 측정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시간에 일어난 일이고, 특별한 신성 장소를 무대로 삼고 있다. 전설은 구체적으로 제한된 시간과 장소를 갖는다. 민담은 뚜렷한 장소와 시간이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세 번째로 증거물이다. 신화의 증거물은 매우 포괄적이다. 천지창조 신화는 천지 증거물이고, 건국신화는 국가가 증거물이다. 전설의 증거물은 특정의 개별적 증거물을 갖는다. 전설의 증거물은 자연물, 인공물, 인물 등 다양하다. 민담은 증거물이 없으며, 이야기 자체로 존재할 뿐이다.  네 번째로 주인공과 행위이다. 신화의 주인공은 신(神)이며, 그의 행위는 신이 지닌 능력이다. 신은 보통 사람보다 탁월한 능력을 가진 신성한 자이며, 인간과 명확히 구별되는 존재이다. 전설의 주인공은 한정될 수 없는 여러 종류의 인간이며, 그의 행위는 인간과 인간, 또는 인간과 사물 사이에서 일어나는 예기치 않던 일이 대부분이다. 민담의 주인공은 일상적인 인간이다. 민담의 주인공은 난관에 부딪혀도 결국 극복하며, 그의 행위는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전승 범위이다. 신화는 민족적 범위에서 진실성과 신성성이 인정된다. 씨족적·부족적 신화도 있으나, 민족적인 것으로 확대될 때 신화로서의 생명을 갖는다. 전설은 증거물의 성격상 대체적 지역적 범위에서 전승된다. 민담은 지역적인 유형이나 민족적인 유형이 있으나, 어느 지역이나 민족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민담의 전승은 공동의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이루어지며, 분포는 세계적이다.   [광주광역시의 신화]  신화는 신성성이 인정되는 집단의 범위에 따라 크게 네 가지로 분류된다.  1. 건국신화: 국가적인 범위에서 신성성이 인정되는, 건국의 주인공에 관한 이야기  2. 시조신화: 성씨의 범위에서 신성성이 인정되는, 시조(始祖)에 관한 이야기  3. 마을신화: 자연마을의 범위에서 신성성이 인정되는, 마을신에 관한 이야기  4. 기타 신화: 신성성을 인정하는 범위가 일정하지 않은 일반적인 신화  광주광역시는 신화에 있어서 전승적 토대가 약한 지역이다. 과거 광주광역시를 배경으로 국가를 건국한 역사적 사건이 없어서 건국신화를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신화적 성격을 파편적으로 지니고 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견훤(甄萱)[867~936]의 인물전설이다. 견훤은 후백제를 건국한 인물로서 고려 왕건(王建)[877~943]과의 투쟁에서 패배한 인물인데, 견훤에 대한 이야기가 광주광역시 지역에 단편적으로 전승되고 있다. 광주광역시는 도시 확장과 개발로 인해서 자연마을이 많이 사라졌다. 자연마을의 소멸은 마을신화의 소멸로 이어졌고, 더이상 전승 채록된 이야기도 찾아보기 어렵다.   [광주광역시의 전설]  전설은 전승 장소, 발생 목적, 설화 대상에 따라 분류된다.  1. 전승 장소: 지역적 전설, 이주적 전설  2. 발생 목적: 설명적 전설, 역사적 전설, 신앙적 전설  3. 설화 대상: 자연물, 인공물, 인간, 신앙 행위  광주광역시에는 다양한 종류의 전설이 전승되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전설은 인물전설이다. 김덕령(金德齡)[1567~1596] 인물전설은 광주광역시 전역에서 다양하게 전승되고 있다. 김덕령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동한 인물이며, 조정 관료들과 갈등하면서 비극적으로 죽었다. 김덕령 인물전설은 출생담, 비범담, 활약담, 죽음담 등이 전해지고 있다. 이 외에도 눌재 박상, 양만용, 배중손, 기대승, 정충신, 나숭대 인물전설이 전한다. 지명전설은 지역마다 다양한 유형으로 전해오는데, 특히 광주광역시의 진산(鎭山)이라 일컬어지는 무등산 주변의 지명전설이 강한 전승력을 지니며 구전되고 있다. 또한 과거에 있었지만 현재는 사라진 인공물인 태봉산과 경양방죽 관련 이야기도 지명전설로 전해지고 있으며, 광주광역시 광산구를 중심으로 「신거무 장터의 유래」가 다양한 각편으로 전해지고 있어서 주목된다.   [광주광역시의 민담]  민담은 다음과 같이 세 항목으로 분류된다.  1. 동물담: 동물유래담, 본격동물담, 동물우화  2. 본격담: 현실담, 공상담  3. 소화: 과장담, 모방담, 치우담, 사기담, 경쟁담  광주광역시의 민담은 전설에 비해서 전승력이 약하다. 가장 많이 전승되는 민담은 효행담이다. 「둘째아들이 효자」, 「어머니와 지렁이」, 「아들을 버린 효부」, 「불효의 결과」 등이 광주에서 전승되는 대표적인 효행담이다. 인물전설·지명전설과 연결된 동물보은담도 눈에 띈다. 대표적인 작품이 「광주 경양지」인데, 가난한 농부가 개미를 구해줘서 보은으로 부자가 되어 경양방죽을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김방 할아버지와 개미 떼」는 실존인물인 김방이 개미집을 구해주고, 보은으로 쌀을 받아서 경양방죽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이다. 이와 함께 한국 전역에서 전승되는 「구렁덩덩신선비」 유형의 이야기가 광주광역시에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참고문헌]장덕순, 『구비문학개설』(일조각, 1971)『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광주의 설화』(광주민속박물관, 2000)『한국민속문학사전』설화 1-2(국립민속박물관, 2012)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7-31 | NO.72
  • 광주의 지세
    광주광역시 서구 양동에서 전해 내려오는 광주의 지세에 관한 이야기. 광주광역시의 풍수와 지세(地勢)에 관한 이야기로 태봉산과 학동, 네 곳의 샘과 세 마리 학에 관한 이야기이다.2000년 7월 18일 광주광역시 양동에 거주하는 주민 심봉섭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2000년에 광주민속박물관에서 간행한 『광주의 설화』에 수록되었다. 광주광역시는 무등산에서 삼각산과 옥녀봉을 거쳐 정기가 흐른다. 삼각산은 배꼽 부분이고 옥녀봉은 청옥등이다. 광주의 탯줄이라 할 수 있는 자리는 현재 광주역 자리로 근방에는 태봉산이 있었다. 옛 어른들은 태봉산이 없어지면 광주광역시가 크게 발전한다고 말하였다. 조선대학교 병원 부근을 학동이라고 하는데, 그곳의 산세가 학(鶴)의 형국이라서 그렇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풍수적으로 학동에서 큰 사람이 날 것이라면서, 학의 목에 해당하는 산의 끝자락을 잘라 남광주역을 만들었다. 그 뒤로 광주광역시에 큰불이 자주 났는데, 이상하게 일본인의 집에서만 났다. 광주광역시에는 네 곳의 유명한 샘이 있었는데, 서동과 양동, 지산동, 서방의 한새암이다. 이곳의 물은 짠맛이 없고 물맛이 좋았다. 그런데 일본인들이 네 곳의 샘을 막은 후부터 광주광역시에 환자들이 많이 생겼다. 예전부터 광주에 돛대[공장 굴뚝] 3개가 생기면 광복이 된다는 말이 있었다. 그런데 일본인들이 광주 지역의 노동력을 침탈하기 위해 공장들을 계속 세웠는데, 옛 전라남도청 인근인 원머리에 공장을 세웠고, 유동에 제사(製絲) 공장, 그리고 종방[종연방직]을 세운 얼마 후에 광복이 되었다. 그리고 광주광역시에는 세 군데의 학이 있다고 전해지는데, 조선대학교 병원에 학이 있고, 운암동이 백로의 끝자락이고, 상무대 자리가 학의 형국이다.「광주의 지세」의 주요 모티프는 ‘지역의 지세에 관한 풍수’이다. 풍수담의 여러 갈래 중 지역의 형세에 관한 이야기로 지역의 흥망을 지형과 연관 지어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광주의 지세를 바꿨다는 언급이 나온다. 이는 일제강점기에 생긴 광주의 여러 변화 양상을 지형의 변화로 연관지어 해석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광주의 지세」는 태봉산, 학동의 유래, 네 곳의 샘, 세 곳의 학 등을 광주의 지형과 지세와 연관 지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참고문헌] 장덕순, 『구비문학개설』(일조각, 1971) 『광주의 설화』(광주민속박물관, 2000) 『한국민속문학사전』설화 1-2(국립민속박물관, 2012)[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1 | NO.71
  • 괘고정과 광산이씨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에서 전해 내려오는 괘고정이라는 나무와 광산이씨에 관한 이야기.「괘고정과 광산이씨」는 마살메마을에 있는 괘고정[괘고정수]이라는 왕버드나무와 광신이씨(光山李氏)에 얽힌 지명전설이다.1989년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만산마을에 거주하는 이승만과 이동휴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1990년 광주직할시에서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하였다.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마살메[만산동]마을에는 광산이씨가 살고 있으며, 광산이씨의 선조인 필문(蓽門) 이선제(李先齊)[1390~1453]의 부조묘(不祖廟)가 있는 곳이다. 이선제는 마살메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이선제가 죽은 이후, 이곳에 묘를 쓰고 이선제의 다섯 형제가 시묘(侍墓)를 할 때 많은 선비들과 관리들이 출입했기 때문에 만호동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마을 어귀에 이르면 논 가운데 한쪽이 썩은 버드나무가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괘고정(掛鼓亭)이라 불렀다. 괘고정은 이선제가 심은 나무로, 이선제가 죽기 전에 "이 나무는 내 자손들의 성쇠와 그 수를 같이 할 것이다"라는 예언을 하였다는 말이 전설로 전해 내려왔다. 실제로 이 나무는 이선제의 5대손인 동암(東巖) 이발(李潑)[1544~1589] 형제 일가들이 정여립(鄭汝立)의 난에 몰려 장살을 당할 때 말라죽었다가 300여 년이 지나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이 나무가 심어진 이후 이선제의 아들과 손자들이 대대로 벼슬에 올랐는데, 이선제의 부조묘에 아들과 손자들이 모여 나무에 북을 걸고 삼현육각(三絃六角)을 잡아 축하연을 베풀곤 하였다. 이런 연유로 '북을 걸어 놓은 정자나무'란 의미에서 이 나무를 괘고정[괘고유]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선제의 5대손이 뿔뿔이 흩어진 뒤부터 괘고정은 말라 죽기 시작하여 나뭇가지가 모두 곰삭아 없어졌다. 그러나 원목만은 계속 형태를 유지하며 지탱하고 있었다. 숙종(肅宗)[재위 1674~1720] 때에 이르러 동암과 광산이씨들의 죄가 신원(伸冤)이 되고, 그 자손들 중 일부가 이곳으로 다시 이주하여 살게 되었다. 이곳에 살게 된 이상엽은 이 나무와 광산이씨들의 일화를 듣고, 아들 주신을 시켜 나무를 태워 흔적을 없애도록 하였다. 괘고정은 나무 가운데가 썩어서 보기가 흉했다. 주신은 집안 머슴들과 함께 괘고정 가운데에 마른 나무를 가득 채우고 3일간 불에 태웠다. 하지만 괘고정은 불에 타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끼질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주신이 아버지께 이러한 사실을 고하자, 이상엽은 썩은 나무 사이를 파고 양자 나무를 심도록 하였다. 주신은 정자나무로 알맞은 느티나무 묘목을 괘고정 사이에 심었다. 이 느티나무가 30년가량 자라자, 300년 전에 죽은 나무 한쪽에서 새 움이 트기 시작하였다. 현재 괘고정은 두 가지가 서북편으로 뻗어 높이 15m가량의 고목이 되었으며, 그 옆의 양자나무인 느티나무도 나란히 자라고 있다. 「괘고정과 광산이씨」의 주요 모티프는 '인물에 의한 지명유래'이다. 괘고정은 이선제가 자손들의 성쇠와 나무의 수명이 같이 갈 것이라는 예언을 하며 심었던 버드나무다. 실제로 이선제의 자손들은 5대손까지 벼슬에 올랐고, 이를 이선제에게 알리기 위해 나무 앞에 북을 걸고 축하연을 베풀었다고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선제의 5대손인 동암 이발이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난에 연루되어 형제와 노모, 자식까지 죽임을 당하였고, 광산이씨들도 마을을 떠나 뿔뿔이 흩어졌다. 숙종 때 이발과 광산이씨의 죄가 신원되었고, 광산이씨 가문의 성쇠를 함께했던 괘고정 또한 살아났다고 하니 나무의 신이함을 볼 수 있다. [참고문헌]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 정인서 외 5명, 『광주역사 바로보기』(대동문화재단, 2014)문화재청(https://www.heritage.g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2023.11.21 수정
    2023-08-01 | NO.70
  • 구강의 전설
    광주광역시 남구 구동에서 전해 오는 성거산(聖居山)에 관한 이야기.광주광역시 남구 구동에 있는 광주공원 일대의 형국이 거북과 모습과 같아서 옛날부터 구강(龜岡)이라 불렸다. 이 거북이 광주를 지켜 준다고 믿어서 떠나지 못하도록 거북의 목에 해당하는 곳에 성거사와 오층석탑을 세웠다는 전설이다. 1985년에 광주시에서 간행한 『광주시사』에 수록되어 있다. 1990년에 광주직할시에서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구강의 전설」로 수록되어 있다. 광주 사람들은 거북이 광주를 지켜 주고 있다고 믿었고, 거북이 광주를 떠난다면 광주는 발전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거북이 떠나지 못하게 목덜미에 성거사(聖居寺)와 오층석탑을 세웠다. 이 덕분에 거북이 광주를 떠나지 못하였고, 광주가 지금까지 발전할 수 있었다고 믿는다. 이러한 전설 때문에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그들의 신사(神社)를 세우고 거북의 등을 파헤치고 발을 끊기도 하였다.「구강의 전설」의 주요 모티프는 풍수형 지명유래담이다. 광주광역시 남구 구동의 성거산이 거북의 형세를 지녔기에 이 거북이 광주를 떠나지 못하도록 성거사와 오층석탑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풍수지리의 형세를 바탕으로 지역의 이름을 짓고 그에 관한 전설이 지속되는 것은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지명유래담의 모티프이다. 이 지역의 사람들은 이 거북의 덕에 광주가 지금까지 발전할 수 있었다고 믿고 있다. [참고문헌] 『광주시사』(광주시, 1985)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1 | NO.69
  • 구렁덩덩신선비
    광주광역시 북구 운암동에서 전해 내려오는 구렁덩덩신선비에 관한 이야기우리나라 전역에 넓게 분포하는 ‘구렁덩덩신선비’ 설화 유형으로 지역 정서에 맞추어 변형된 이야기이다. 2000년 5월 23일 광주광역시 북구 운암동에 거주하는 윤혜준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2000년에 광주민속박물관에서 간행한 『광주의 설화』에 수록하였다. 옛날 전라도 어느 고을에 박첨사라는 부잣집이 있었다. 이 집에서 품삯을 받고 일하는 나주댁이 있었는데, 서른 살이 되도록 아이가 없었다. 어느 날 나주댁의 꿈에 옥황상제가 나타나 커다란 금덩이를 주었다. 이후 태기가 있어 아기를 낳았는데, 사람 얼굴에 몸은 뱀인 뱀아기였다. 뱀아기는 태어나고 얼마 안 지나 말을 하고, 밥그릇이 아닌 탕 그릇에 밥을 먹었다. 동네 사람들이 궁금해했으나, 나주댁은 아기를 보여 주지 않았다. 나주댁이 아기를 낳았다고 하자 박첨사는 축하하기 위해 자신의 세 딸을 보냈다. 큰딸과 둘째 딸은 뱀아기를 보자마자 도망쳤다. 그러나 셋째 딸은 선물로 쌀과 미역을 들고, 좋은 옷을 갖춰 입고 찾아갔다. 셋째 딸은 나주댁에게 아기는 ‘구렁덩덩신선비’니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하였다. 뱀아기가 자라 장가갈 나이가 되었는데, 아무도 자신에게 시집오려는 여자가 없었다. 뱀아기는 박첨사의 셋째 딸을 아내로 만들기 위해 어머니에게 자신과 혼인할 것이라고 소문을 내 달라고 하였다. 소문을 들은 박첨사는 화를 냈지만, 셋째 딸은 소문이 난 이상 뱀총각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하였다. 결국 두 사람은 혼인을 하고 첫날밤에 신방을 차리게 되었다. 뱀총각은 아내에게 자신이 허물을 벗으면 땅이 흔들리고 큰비가 올 것이니 너무 놀라지 말고, 자신의 허물은 버리지 말고 작게 접어 옷 속에 넣어 다니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뱀총각은 허물을 벗고 용모가 단정한 신선비로 변했다. 뱀총각의 말을 엿들은 둘째 딸은 뱀총각이 보통 인물이 아님을 알고 다음 날 몰래 동생의 옷에서 허물을 떼어 자신의 옷에 붙였다. 그 순간 셋째 딸과 둘째 딸의 얼굴이 바뀌었다. 처가에서는 잘난 사위로 바뀌었다며 잔치도 열었다. 잔치가 끝나자 뱀총각은 바뀐 아내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갔다. 어느 날, 언니에게 남편을 빼앗기고 말도 못 하고 살던 셋째 딸은 부모에게 실을 꿴 바늘을 주었다. 자신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바늘이 반짝거리고, 그렇지 않으면 녹이 슬 것이라고 하였다. 셋째 딸은 패랭이를 쓰고 남자 행색을 하고 서울로 향하였다. 서울에 도착해 첫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부탁하였다. 주인 할머니는 셋째 딸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인 것을 알고, 자신의 며느리를 삼고 싶었다. 주인 할머니는 아들을 부추겼고, 아들은 셋째 딸에게 청혼을 했다. 그러자 셋째 딸은 닷새만 참아달라고 하며, 자신의 소원 하나를 들어 달라고 하였다. 셋째 딸의 소원은 임금님을 모셔 연회를 열어 달라는 것이었다. 주인집 아들은 산해진미를 장만하여 임금님을 초대하였다. 셋째 딸은 임금이 오기 전에 임금의 수저만 나무로 바꿔 놓았다. 임금은 자신의 수저만 나무인 것을 보고 손님 접대가 형편없다며 자리를 떠났다. 화가 난 임금은 그 처자를 잡아들이라고 명하였다. 잡혀온 셋째 딸은 죽기 전에 중전을 만나게 해달라고 하였다. 중전이 셋째 딸 앞에 나타나자 셋째 딸은 중전의 옷 속에서 구렁이 허물을 뜯어냈다. 셋째 딸이 자신의 언니인 중전에게 달려들자 큰 소동이 일어났다. 임금 앞에 선 셋째 딸은 그간의 일을 말하며, 수저 바뀐 것은 알아도 아내가 바뀐 줄은 모르냐며 소리를 쳤다. 그제야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은 임금은 셋째 딸에게 사과하였고, 중전인 둘째 딸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셋째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이 순간 박첨사의 집에 달린 바늘이 반짝 빛을 내었다. 「구렁덩덩신선비」의 주요 모티프는 ‘구렁이 모습의 남편과 아내의 이별과 재결합’이다. 「구렁덩덩신선비」는 우리나라 전역에 널리 전승되는 민담으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사한 서사 유형의 설화가 있다. 각편에 따라 변이가 심한데, 이 각편은 신선비가 왕으로 변한 것이나 신선비를 찾아나선 아내의 역경이 생략된 점 등 그 변이의 폭이 다른 각편에 비해 심하다. 「구렁덩덩신선비」는 환상적인 전래동화로서 어린이에게 부부 사이의 사랑과 역경을 극복하고 부부가 재결합하는 과정을 흥미 있게 진술하여 여성의 인내와 지성(至誠)이 가정을 유지하고 집단을 보전하는 길이라는 교훈을 담고 있다.[참고문헌] 『광주의 설화』(광주민속박물관, 2000) 『한국민속문학사전』설화 1-2(국립민속박물관, 2012)[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1 | NO.68
  • 구렁이 도와서 목숨을 구하다
    광주광역시 북구 용강동 입암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업구렁이에 관한 이야기. 김선자가 직장에서 겪었던 구렁이에 관한 일화와 그에 따른 생각을 담은 경험담이다.2018년 1월 18일 광주광역시 북구 용강동 입암마을에 거주하는 주민 김선자[여, 69세]의 이야기를 채록한 것이며,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주관하는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에 수록되었다. 김선자는 12년간 식품 회사를 다닌 적이 있었다. 어느 날 김선자가 음식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기계를 다루던 중에, 기계가 움직이지 않았다. 김선자가 기계를 살펴보니 구렁이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구렁이가 계속 공장에서 보였는데, 김선자는 구렁이에게 공장은 있을 곳이 아니라면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라고 타일렀다. 그런데 구렁이는 김선자의 눈에만 보이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김선자를 이상하게 생각하여 식품 회사 회장에게 김선자를 보냈다. 회장은 김선자의 말을 듣고는, 구렁이를 죽이지는 말고 달래라고 말하였다. 구렁이를 처음 발견한 지 일주일이 되었을 때, 구렁이는 김선자 외에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뜨였다. 다른 사람이 구렁이를 죽이려 하자, 김선자는 구렁이를 죽이면 안 된다고 말렸다. 이 사건 이후, 구렁이를 죽이려 한 사람의 나이 먹은 아들이 앉은뱅이가 되고 말도 못 하게 되었다. 회장은 쌀죽을 쑤고, 김선자에게 새 가운을 입게 하여 구렁이에게 쌀죽을 주라고 하였다. 구렁이를 제일 많이 본 사람인 김선자가 꽃밭에 가서 인사를 하고 구렁이를 데리고 가서 기도를 하였다. 구렁이는 회장 책상 위와 공장 내 설탕과 밀가루 더미 위에서 똬리를 틀다가 결국 밀가루 포대[자루] 속으로 들어갔다. 모두가 구렁이에게 물릴까 두려워해서, 김선자가 포대에 갈고리를 걸어 회장과 함께 뒤뜰로 포대를 끌고가서 구렁이를 풀어 놓았다. 김선자가 구렁이에게 인사하자, 구렁이는 연신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김선자를 돌아보는 행동을 반복하다 사라졌다. 이후, 김선자는 광산구에 있는 하남공단[하남일반산업단지]의 빵공장으로 이직하였다. 김선자는 그곳에서 이유 없이 설사를 하는 증세를 보였고, 기계의 센서를 고치고 있던 중에 사고를 당하였다. 9개월 동안 병원 신세를 진 김선자는 회사에서 주는 보상금도 거부하고 사직서를 냈다. 회사는 김선자의 고발이 두려워서 김선자에게 미뤘던 나머지 퇴직금을 퇴사 3일 전에 주었다. 이후 김선자가 다녔던 회사는 김선자가 퇴사한 지 5일 만에 부도가 났고, 회사 직원들은 퇴직금도 받지 못하였다. 「구렁이 도와서 목숨을 구하다」의 주요 모티프는 '업구렁이를 통한 전화위복', 혹은 '업신에 대한 경험담'이다. 민간 속신(俗信)에서 업(業)은 한 집안의 재물을 관장하는 신격(神格)으로, 주로 구렁이나 족제비, 두꺼비 등의 동물로 형상화된다. 특히 구렁이가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 집안이 망하거나 우환이 생긴다고 생각하여 머리카락을 태워 노린내를 내거나 쌀죽을 먹여 구렁이가 다시 돌아가기를 기원한다. 김선자가 직장에서 업구렁이를 보고는 구렁이를 타일렀고, 회장과 함께 구렁이에게 기도하는 이야기를 보면, 김선자와 회장이 업신을 믿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김선자는 업구렁이에게 호의적으로 대하였고, 비록 공장에서 상해를 입었지만, 결과적으로 전화위복이 되어 일이 좋게 끝났다. 반면, 업구렁이를 죽이려고 하였던 다른 사람은 아들이 장애를 입게 되었다. 이는 김선자는 업구렁이를 믿었고, 다른 사람은 업구렁이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대조적인 결과이다. [참고문헌]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 한국민속신앙사전(https://folkency.nfm.go.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1 | NO.67
  • 구렁이업 달래기
    광주광역시 북구 용강동 입암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업구렁이에 관한 이야기. 「구렁이업 달래기」는 범막례가 친정 동네에서 들은 이야기로, 당시 부잣집이었던 곳에 나타났던 업구렁이에 관한 이야기이다. 2018년 1월 18일 광주광역시 북구 용강동 입암마을에 거주하는 주민 범막례[여, 79세]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주관하는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에 수록되었다. 범막례의 친정 동네에 큰 부잣집이 있었는데, 어느 날 곳간에 커다란 구렁이가 나타났다. 주인 아주머니가 찹쌀죽을 쑤어 큰 그릇에 담아 구렁이에게 주었더니, 하루 만에 접시에 담긴 죽이 싹 비워졌다고 한다. 그 이후, 구렁이가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집안 사람들에게 우환이 생기고 가세(家勢)가 기우는 등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구렁이업 달래기」의 모티프는 '구렁이로 나타난 업(業) 달래기'이다. 업은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서 전승되고 있는 신격(神格)으로, 한 집안의 재물을 관장하는 신으로 알려져 있다. 업은 아기나 구렁이, 뱀, 그리고 족제비 등의 형태로 나타나지만, 주로 구렁이의 모습으로 나타나며 지붕에 살고 있다고 한다. 또한, 사람들은 구렁이가 집안에 모습을 드러내면 집안이 망하게 된다고 믿고 있다. 구렁이가 나타나면 흰 쌀로 죽을 쑤어 구렁이에게 주거나, 머리카락을 태워서 누린내를 나게 해서 구렁이가 들어가기를 기원한다. 「구렁이업 달래기」에서도 구렁이가 나타나자 주인 아주머니가 찹쌀로 죽을 쑤어 구렁이에게 주면서 구렁이가 들어가기를 기원한다. 하지만 업은 업 자체의 판단으로 나타나는 것이기에, 업이 들어가기를 기원해도 집안에 우환이 일어난다고 한다. 이후 이야기에서 보듯이, 구렁이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 것으로 알 수 있다. [참고문헌]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 한국민속신앙사전(https://folkency.nfm.go.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1 | NO.66
  • 구렁이와 신랑 신부의 대결
    광주광역시 남구 대촌동에서 전해 내려오는 구렁이를 물리친 부부에 관한 이야기.위협을 가하는 구렁이를 물리친 부부의 이야기로 뜻밖의 행운을 바르게 이용하지 않으면 금방 사라질 수 있으니, 지나친 욕심을 경계하고 이웃을 챙기라는 교훈을 주는 이야기이다. 2000년 9월 19일 광주광역시 남구 대촌동에 거주하는 전삼순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2001년 광주민속박물관에서 간행한 『광주의 설화』에 수록되었다. 옛날 전라도 광산 고을에 가난한 부부가 살았는데, 부인이 임신을 하자 고기가 먹고 싶었다. 부인이 고기를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밭일을 하고 있는데, 큰 구렁이가 꿩 한 마리를 잡아먹으려 하고 있었다. 이를 본 부인은 임신 중이라 살생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잊고, 고기가 먹고 싶은 마음에 구렁이를 때려 쫓아내고 꿩을 뺏어 삶아 먹었다. 세월이 흘러 태어난 아들이 자라서 장가갈 때가 되었다. 아들이 가마를 타고 옆 마을로 장가를 가고 있는데, 길 한가운데 큰 구렁이가 나타나 새 신랑을 잡아먹겠다고 하였다. 신랑은 지금은 자신이 장가를 가는 길이니 혼례를 마치고 내일 다시 여기를 지날 테니 그때 잡아먹으라고 하였다.그러자 구렁이는 순순히 길을 비켜 주었고, 신랑은 무사히 혼례를 치를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신랑의 얼굴이 어두워져만 갔다. 신랑의 표정을 본 신부는 걱정이 되어 신랑에게 무슨 일인지 물었다. 신랑이 지난 일을 이야기하니 신부는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위로와 격려를 하였다. 다음날 부부는 가족들에게 자신들의 위험을 말하지 않고 신행(新行)길에 올랐다. 부부가 길을 가는데 지난번의 그 길목에서 구렁이가 나타났다. 그러자 각시는 구렁이에게 가서 왜 죄 없는 사람을 잡아가려고 하냐며 소리를 치고는, 차라리 자신을 잡아가거나 아니면 혼자 살 수 있게 금은보화를 달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구렁이는 처자식이 딸린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신이 갖고 있는 보물을 신부에게 주기로 하였다. 그 보물은 네모난 판에 4개의 꼭지가 달린 것으로 누르기만 하면 도깨비방망이처럼 원하는 것이 나오는 신기한 물건이었다. 구렁이는 신부에게 하나는 밥이 나오고, 가운데는 옷이 나오고 세 번째는 돈이 나온다고 하였다. 그리고 제일 위에 있는 것은 미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꼭지라고 하였다. 보물을 넘겨준 구렁이는 이제 신랑을 잡아먹으려고 하였다. 구렁이가 입을 벌리고 달려오는 순간 신부는 미운 사람 죽이는 꼭지를 눌러 구렁이를 죽였다. 구렁이를 죽여 위기를 넘기고 신기한 보물까지 얻은 부부는 남부럽지 않게 부자가 되어 살았다. 그런데 부부는 신기한 보물만 믿고 열심히 일을 하지 않고 게으름 부리고 살다가 돈 문제로 서로 다투기까지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서 키우던 개가 그 보물을 입에 물고 다니다가 그만 물에 빠트리고 말았다. 그 보물만 믿고 일하지 않던 부부는 금방 살림이 거덜났다. 그러자 부부는 이제부터라도 착실하게 살자며 다짐하였다. 그리고 2년이 흐른 어느 날 강가에서 낚시꾼이 물고기를 잡아 올리자 부부가 키우던 개가 나타나 물고기를 낚아채 도망갔다. 가난하게 살던 부부가 개가 물고 온 물고기를 끓이려고 배를 가르니 그 속에 사라진 보물이 들어 있었다. 부부는 그 보물 덕에 다시 부자가 되었고, 전처럼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주변의 이웃들도 도우며 오랫동안 잘 살았다. 보물을 잃어버린 것도 나태해지고 욕심만 챙기려고 하니 일어났던 일이며, 뜻밖의 행운도 그것을 바르게 이용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써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이야기이다.「구렁이와 신랑 신부의 대결」의 주요 모티프는 ‘구렁이와 꾀 많은 신부’이다. 민담에서 구렁이는 사람을 잡아먹는 무서운 동물로 나타나며, 인간과 적대적인 구도를 취한다. 구렁이를 만난 신랑은 아직 결혼 전이며, 완전하지 않은 인간의 모습으로 죽음의 위기 앞에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 그러나 혼례를 치르고 여성의 짝을 만나면서 두 사람은 공동운명체로 결합된다. 그래서 신랑이 처한 위기는 곧 신부의 위기가 된다. 그러나 보물의 획득은 신부의 지혜 덕에 가능하였는데, 이는 「두꺼비의 보은」과 같은 설화에서 처녀가 지네에게 제물로 바쳐지는 상황과 관련이 있다. 집단을 위해 제물로 바쳐진 여성의 영웅적인 면모가 후대에 변이되어 ‘꾀 많은 신부’로 변이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설화 유형에는 인간의 지혜로 운명을 주체적으로 극복하려는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참고문헌] 장덕순, 『구비문학개설』(일조각, 1971)『광주의 설화』(광주민속박물관, 2001) 『한국민속문학사전』설화 1-2(국립민속박물관, 2012)[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1 | NO.65
  • 구룡이 살았던 곳
    광주광역시 북구 생용동 생용마을 관련항목 보기에서 전해 내려오는 마을 지명에 관한 이야기. 「구룡이 살았던 곳」은 생용마을의 유래에 관한 이야기로, 생용마을 사람들이 아홉 용이 살았던 곳에 터를 잡았다는 지명설화이다. 2018년 1월 30일 광주광역시 북구 생용동 생용마을 마을회관에서 주민 범희인[남, 82세]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주관하는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에 수록되었다.생용마을을 비롯한 인근 마을의 이름에는 '용(龍)’ 자가 붙어 있다. 그 지명에 있는 용을 모두 합하면 아홉 용이 되는데, 특히 생용마을은 날 '생(生)’ 자에 용 ‘용(龍)’ 자를 붙여 용이 태어난 곳, 즉 임금이 태어난 곳이라 하여 생용마을이란 이름이 붙었다. 또 다른 이야기에는 담양에 있는 병풍산과 생용산 안쪽에 넓은 들판이 있었는데, 거기에 있는 마을 이름에 각각 아홉 마리의 용을 붙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구룡이 살았다'고 생각하여, 그곳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구룡이 살았던 곳」의 주요 모티프는 '용과 관련된 지명유래'이다. 생용마을과 인근 마을에 용 아홉 마리가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실제 마을 지명에서도 봉룡, 용두, 생룡, 용전, 용산, 오룡, 신룡, 용강, 응룡 등 '용(龍)’ 자가 붙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생용마을의 지명유래에는 용이 태어난 곳, 즉 임금이 태어난 곳이라는 의미가 있다. 후백제를 통치했던 견훤과 관련된 이야기가 이 마을에서 상당수 전승되는 것으로 보아, 왕의 상징인 용을 마을 이름과 연관시킨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구룡과 죽취봉, 후백제 견훤의 전설」(시민의 소리, http://www.siminsori.com)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1 | NO.64
  • 궁글바위 이야기
    광주광역시 남구 칠석동에서 전해 오는 궁글바위에 관한 이야기.광주광역시 남구 칠석동 옻돌마을에는 궁글바위가 있는데, 예로부터 전라도 나주 지역의 처녀들이 이 바위를 보면 바람이 나서 옻돌마을로 시집왔다는 이야기이다.2003년 광주광역시 남구 칠석동 옻돌마을에서 채록한 이야기를 2004년에 고싸움놀이보존회에서 간행한 『옻돌마을 사람들과 고싸움놀이』에 「궁글바위 이야기」로 수록되었다. 옻돌마을 옆에 궁글바위가 있다. 둥그렇고 잘 굴러갈 것처럼 생겨 궁글바위라고 한다. 근방의 나주에서도 이 바위가 보이는데, 나주의 처녀들이 궁글바위를 쳐다보면 바람난다고 한다. 그래서 실제로 옻돌마을로 시집온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이 일부러 밀어 떨어뜨렸더니 그 뒤로는 바람이 안 난다고 한다. 실제로도 예부터 나주 동곡이나 노안에서 옻돌마을로 시집오고, 옻돌마을에서 나주 등지로 많이 시집갔다.  「궁글바위 이야기」의 주요 모티프는 ‘바위 이름의 유래’이다. 바위나 산, 강과 같은 지형지물 이름의 유래에 관한 모티프는 대체로 그 생김새에서 많이 따온다. 바위나 산의 형태와 유사한 사물에서 이름을 따오고, 그에 관한 설화들이 전해진다. ‘말바우’도 말발굽 모양이 남아 있는 바위이고, ‘궁글바위’ 역시 둥그런 형태라서 잘 굴러갈 듯이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참고문헌] 『옻돌마을 사람들과 고싸움놀이』(고싸움놀이보존회, 2004)[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1 | NO.63
  • 금남군 정충신의 어린 시절
    광주광역시에서 전해 내려오는 조선 중기 선조 때의 공신 정충신의 비범한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조선 후기 인조(仁祖)[재위 1623~1649] 때의 공신인 정충신(鄭忠信)[1576~1636]의 어린 시절의 비범함을 알 수 있는 세 가지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들은 당시 광주목사이던 권율 장군과 관련되어 있다. 1981년에 광산군지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광산군지』에 수록되어 있다. 1985년에 광주시에서 간행한 『광주시사』에 수록되어 있다. 1990년에 광주직할시에서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되어 있다. 정충신은 조선 선조(宣祖)[재위 1567~1608] 때의 충신으로 고려 말 명장 경열공(景烈公) 정지(鄭地) 장군의 7대손이다. 정충신이 어렸을 때 임진왜란이 발생하였다. 전라도 광주에서 조정으로 상소문을 전달할 사람이 없었는데, 어린 정충신이 나섰다. 주위 사람들이 말렸으나 권율(權慄)[1537~1599] 장군은 비범함을 알아보고 믿고 맡겼다. 어린 정충신은 상소문을 담뱃대 속에 말아 넣는 지혜를 발휘하여 들키지 않고 전달하였다. 정충신은 어려서부터 영민해 당시 광주목사인 권율 장군의 통인(通引)으로 있었다. 하루는 권율 목사가 여섯 살 정충신의 지혜를 시험하고 싶었다. 권율 목사는 덧문을 아래에서 위로 높이 올려 처마 밑에 걸어두고 문짝 위에 물을 가득 담은 그릇을 두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급히 문을 내리면 쏟아지는 물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다음 권율 장군은 정충신을 불러 비가 와서 날이 쌀쌀하니 덧문을 내려 닫으라고 하였다. 정충신은 이 말을 듣자마자 바로 덧문을 닫지 않고, 광으로 가서 나무 의자와 대막대를 가져왔다. 차분하게 발판을 마루에 놓고 대막대로 문짝 위를 훑어서 물그릇이 걸리자 조심히 물그릇을 내려놓고 덧문을 내려 닫았다. 권율 장군은 이 광경을 목격하고 정충신의 비범함을 알아보았다. 얼마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은 난을 피해 의주로 몽진(蒙塵)하였다. 각 전선에서의 보고가 두절되었고, 권율 목사도 장계를 올리지 못해 걱정이 컸다. 이때 정충신이 권율 목사에게 자신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권율 목사는 깊이 생각하다가 정충신이 어리지만 영민하기에 믿고 맡길 만하다고 생각해 장계를 써서 정충신에게 건네주었다. 다음날 권율 목사는 길을 떠나는 정충신의 행색을 보고 매우 놀랐다. 장계는 지니고 있지 않고, 더벅머리 땔나무꾼 행색에 망태기를 메고 있었다. 정충신은 의아해 하는 권율 목사에게 메고 있는 망태기가 장계라고 하였다. 그리고 장계를 그대로 지니고 무사히 적진을 통과하기는 어렵기에 장계를 길게 찢어 새끼를 꼬아 망태기로 엮었다고 하였다. 권율 목사는 정충신의 기지에 매우 놀랐다. 정충신은 무사히 적진을 뚫고 도착하여 장계를 순서대로 다시 펴서 이항복(李恒福)[1556~1618]에게 전달하였다. 이항복은 어린 정충신의 비범함과 용기를 알아보고 거두어 들였다. 정충신은 이곳에서 학문과 무예를 닦으며 장유(張維)와 최명길(崔鳴吉) 등과 친교를 맺었고 얼마 후 무과에 급제하였다. 정충신은 광해군 때 청나라에 잠입하여 적정(敵情)을 탐지하였고, 인조 때는 이괄의 난을 평정하여 진무공신으로 사호(賜號)를 받고 금남군(錦南君)에 봉해졌다. 또 다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이 전라도 광주목사로 있을 때의 일이다. 권율 장군은 호남 각지에서 왜적을 대파한 승첩보와 호남의 정세를 선조가 몽진(蒙塵)하였던 의주(義州)의 행재소(行在所)[왕이 상주하는 궁궐을 떠나 거둥할 때 임시로 머무르는 행궁]에 알려야 했는데, 왜적이 가득하여 장계를 전할 길이 없었다. 이때 나이 어린 정충신이 사자(使者)를 자청하고 나섰다. 때는 삼복 한더위로, 민첩하고 지략이 있는 정충신은 온몸에 옻칠을 발라 나병 환자로 가장을 하였다. 그리고 장계를 가늘게 노끈으로 꼬아 배낭을 만들어 걸인 행색을 하고 길을 떠났다. 천품(天稟)이 영민한 정충신은 적진을 피해 가다가도 정탐을 위해 일부러 적진을 찾아들어가기도 하며 밤낮으로 의주를 향해 갔다. 정충신은 무사히 행궁에 도착하였고 메고 간 배낭을 풀어 장계를 원상태로 만들어 왕에게 전달하였다. 병조판서 이항복이 정충신의 비범함을 한눈에 알아보고 정충신을 자신의 집에 머무르게 하며 손수 글을 가르쳤다. 이항복은 정충신에 대해 만약 칼을 버리고 책을 취하면 훌륭한 명사가 될 것이라 하였다. 그해 겨울 정충신은 무과에 급제하였고, 이괄의 난 때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후에는 경상도병마절도사를 지내는 등 훌륭한 명신이 되었다. 비범한 인물의 어린 시절을 당대의 유명 인물이 미리 알아보고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는 인물전설이다. 당대의 유명한 인물이 어린 아이를 시험하거나 우연한 사건을 목격하여, 그 지혜로움과 비범함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어린 인물은 후에 나라에 큰 공을 세우거나 큰 학자가 된다.[참고문헌] 『광산군지』(광산군지편찬위원회, 1981) 『광주시사』(광주시, 1985)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1 | NO.62
  • 금동마을과 삼형제 다리
    광주광역시 광산구 삼도동에서 전해 내려오는 금동마을과 삼형제 다리에 관한 이야기. 「금동마을과 삼형제 다리」는 금동마을과 삼형제 다리의 유래에 관한 지명전설이다. 금덩어리를 뜻하는 '금(金)' 자와 삼형제를 지칭하는 아이 '동(童)' 자가 합쳐져 금동마을이 되었으며, 삼형제가 놓았다는 다리는 경지정리사업으로 인해 땅속에 묻혔다. 「금동마을과 삼형제 다리」는 1985년 광산군지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광산군지』에 처음 수록되었고, 이후 1990년 광주직할시에서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다시 수록되었다. 아주 먼 옛날, 광산군 삼도면 김동리에 힘이 센 삼형제가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가난하게 살았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병세가 위중한 상태에 놓이게 되자, 삼형제는 의논 끝에 약초를 구하러 집을 나섰다. 이곳저곳을 헤맸지만 약초는 보이지 않았고, 지친 삼형제는 기진맥진하여 마침내 쓰러지고 말았다. 그런데 꿈속에서 산신령이 삼형제 앞에 나타나서 "나는 이 산의 산신령인데, 너희들이 찾는 약초는 이 산에는 없다. 이 산을 내려가면 큰 냇가가 있을 것이니 그 내를 건너가거라. 그러면 하늘에서 별 하나가 떨어지고, 그때 너희들이 찾고 있는 약초가 보일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이에 삼형제가 그 큰 냇가를 어떻게 건널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산신령은 "냇가에 이르면 큰 조약돌 세 개가 있을 테니, 그 돌을 냇물에 던지도록 하여라. 그러면 다리가 놓여질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삼형제는 잠에서 깨어나 서로 꿈이야기를 하면서 산을 내려갔다. 과연 큰 내가 나오고 큼직한 조약돌 세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삼형제가 기쁜 마음으로 조약돌을 들어 냇물에 던지려 하는 찰나, 살려 달라는 젊은 여인의 비명이 들려왔다. 깜짝 놀란 삼형제가 소리가 나는 곳을 살펴보니, 큰 호랑이가 여인을 입에 물고 있었다. 힘이 센 삼형제가 일시에 돌을 던졌고, 호랑이는 머리에 돌을 맞아 뻗고 말았다. 삼형제는 실신한 여인을 등에 업고 집으로 데려가 극진히 간호하였다. 얼마 후, 약초 생각을 다시 한 삼형제는 당황하였다. 삼형제는 의식을 잃은 여인을 방에 눕혀 두고는 다시 냇가로 달려가 산신령이 일러주었던 조약돌 한 개를 집어 힘껏 물속으로 던졌다. 이후 연거푸 조약돌 두 개를 다 던지자, 다리가 완전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삼형제는 조심조심 다리를 건넜고,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얼마 후, 별 한 개가 꼬리를 끌고 냇가 쪽으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삼형제가 별이 떨어진 곳으로 급히 가 보니, 땅이 크게 파인 곳에 풀뿌리 같은 것이 있었다. 삼형제는 풀뿌리를 캐어 집으로 돌아가기가 바쁘게 약탕관에 넣어 달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삼형제는 호랑이에게 물려갈 뻔했던 여인을 생각하고는 급히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 여인은 온데간데없었다. 깜짝 놀라 삼형제가 이불을 들추니, 그 이불 밑에 눈부신 황금덩이가 놓여 있었다. 이후, 풀뿌리를 달여 마신 아버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병환이 완쾌되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 마을을 '금동'이라 부르게 되었고, 그때 놓인 다리를 '삼형제 다리'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 다리는 1980년대 초에 경지정리사업으로 인해 땅속에 묻혔다. [모티프 분석] 「금동마을과 삼형제 다리」의 주요 모티프는 '효성과 우애에 기반한 지명유래'이다. 삼형제는 병든 아버지를 모셨는데, 아버지의 병환이 깊어지자, 의논하여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해줄 약초를 구하러 길을 나섰다. 삼형제는 서로 합심하여 산신령의 명에 따라 조약돌을 던져 다리를 만들었다. 또한, 호랑이에 물려 죽을 위기에 놓인 여인도 지나치지 않고 합심하여 구하여 간호하였다. 삼형제의 효심과 우애, 의협심은 산신령이 꿈속에서 삼형제가 약초를 캘 수 있도록 조력하는 계기가 되었다.또한, 삼형제들은 그동안의 행동과 성품에 대한 보상으로 금덩이를 받았다. 삼형제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한 여인이 금덩어리로 변한 것이다. 그래서 금덩어리를 뜻하는 '금(金)' 자와 삼형제를 뜻하는 아이 '동(童)' 자가 합쳐져 마을 이름이 금동마을로 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삼형제 다리는 금동마을 인근에 위치한 삼도동 내기마을과 복골마을 사이에 있었는데, 1980년대 초에 경지정리사업으로 인해 땅에 묻혔다. [참고문헌] 『광산군지』(광산군지편찬위원회, 1985)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 광주광역시 광산구청(https://www.gwangsan.go.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1 | NO.61
  • 기대승과 고경명의 국화시 사설
    광주광역시 광산구에서 전해 내려오는 기대승과 고경명에 관한 이야기. 고경명(高敬命)[1533~1592]이 기대승(奇大升)[1527~1572]을 찾아갔으나 만나 주지 않자 자신의 서운한 감정을 시로 적어서 표현하였고, 기대승이 고경명의 시를 읽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사죄하면서 교유 관계를 시작하였다는 이야기이다. 1985년 광산군지편찬위원회가 간행한 『광산군지』에 수록되었고, 1990년 광주직할시가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되었다.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과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은 한 시대를 같이한 전라도 광주 지역의 대학자이자 명현(名賢)이다. 고경명이 평소에 존경하던 기대승을 만나기 위해 임곡면 신룡리에 있는 고봉의 집으로 갔다. 하지만 기대승은 얼굴과 이름도 모르는 고경명을 만나 주지 않았다. 고경명은 기대승의 태도에 섭섭한 감정을 느끼고, 국화를 소재로 한 시를 지어서 하인에게 주고 떠났다.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색황위기 천자백역기(正色黃爲貴 天姿白亦奇)[국화꽃의 색깔은 노래서 귀한 것이지만 본래 색깔은 하얀 것으로 이 또한 진기하고 아름답다] 세인간자별 균시오상지(世人看自別 均是傲霜枝)[세상 사람들 보는 눈이 이처럼 다르긴 해도 국화꽃을 좋아하는 것은 한결같이 모진 서리를 이겨내는 절개를 숭상하고 사랑함에 있다] 기대승은 하인에게 전해 받은 시를 읽고는 고경명의 시재(詩才)와 호걸의 기상에 감명을 받았다. 기대승은 몸소 4㎞를 쫓아가서 고경명을 붙잡고, 자신이 소홀히 대한 것을 사죄하고 집으로 다시 맞아들였다. 기대승과 고경명은 이를 계기로 두터운 교분을 이어 나갔다.「기대승과 고경명의 국화시 사설」은 일화적 성격을 지닌 이야기이다. 연배가 높은 기대승이 자신을 찾아온 청년 고경명을 소홀히 대하고, 이에 고경명이 시로 자신의 감정을 전달한다. 기대승은 고경명의 시를 읽은 뒤에 반성하고, 두 사람의 교유 관계가 이루어졌다는 내용이다. [참고문헌] 『광산군지』(광산군지편찬위원회, 1981)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1 | NO.60
  • 김덕령 누나가 세운 바위들
    광주광역시 북구 용강동 입암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김덕령 장군의 누나에 관한 이야기.  「김덕령 누나가 세운 바위들」은 김덕령(金德齡)[1567~1596] 장군의 누나가 세운 바위에 관한 지명설화이다.2018년 1월 18일 광주광역시 북구 용강동 입암마을에 거주하는 주민 김용례[여, 79세]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주관하는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에 수록되었다. 김덕령 장군이 힘이 없었지만 유명하였던 반면, 김덕령 장군의 누나는 유명하지 않았지만 힘이 무척 세었다. 그래서 김덕령의 누나는 자신의 치마에 바위를 가지고 다니면서 곳곳에 바위를 세우곤 하였는데, 세운 바위를 선바위와 꽃바위, 너럭바위라고 불렀다. 김덕령의 누나가 강했기 때문에 김덕령이 누나와 겨루려 하지 않았다.  「김덕령 누나가 세운 바위들」의 주요 모티프는 '인물에 의한 지명유래'이다. 김덕령 장군은 임진왜란 시기에 호남 지역에서 의병으로 활약했던 인물로, 광주 일대에는 김덕령과 김덕령 누나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다. 설화에서 김덕령 장군의 누나는 김덕령 장군보다 힘이 더 세고 능력이 좋은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김덕령 장군의 누나가 입암마을 뒤에 있는 삼각산 줄기에 선바위와 꽃바위, 너럭바위를 세웠다고 하는 지명의 유래를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광주광역시 북구문화원(http://gjbukgu.or.kr)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4 | NO.59
  • 김덕령 아버지가 훔친 명당자리
    광주광역시 동구 용산동 화산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김덕령과 명당에 관한 이야기. 「김덕령 아버지가 훔친 명당자리」는 김덕령의 탄생 배경과 관련된 풍수담이다.2018년 2월 21일 광주광역시 화산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 최복연[남, 87세]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주관하는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에 수록되었다. 김덕령의 아버지는 주막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던 인물이었다. 어느 날 중국에서 온 풍수가가 주막에 머무르면서 묫자리를 보고 다녔는데, 하루는 김덕령 아버지에게 달걀을 하나 구해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김덕령의 아버지가 곤달걀을 풍수가에게 주었더니, 풍수가는 새벽에 산으로 올라가 달걀을 묻고 기다렸다. 그러나 날이 새도 닭이 우는 소리가 나지 않자 풍수가는 낙심하며 돌아왔다. 김덕령의 아버지는 그 모습을 몰래 지켜보고 모른 척하고 있다가 풍수가가 다시 달걀을 가져다 달라는 부탁을 하자 이번에는 멀쩡한 달걀을 주었다. 풍수가가 전에 곤달걀을 묻었던 자리에 성한 달걀을 묻자, 그 자리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났다. 이 자리는 달걀이 닭이 되는 길지(吉地)였던 것이었다. 풍수가가 중국으로 돌아가자, 김덕령의 아버지는 몰래 그 묫자리에 아버지의 묘를 썼다. 이후, 중국에서 돌아온 풍수가는 자신이 알아놓았던 묫자리를 찾아갔는데, 누군가 이미 묘를 쓴 것을 알게 되었다. 풍수가는 묫자리의 안대(案帶)가 틀린 것을 발견하고, 김덕령의 아버지에게 묫자리의 방향을 다시 잡아 주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김덕령의 아버지는 풍수가가 괜히 해코지를 할 것을 염려하여 그 부탁을 거절하였다. 때문에 사람들은 묫자리를 제대로 맞추지 못해서 김덕령이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능력이 부족하였던 것으로 생각하였다.「김덕령 아버지가 훔친 명당자리」의 주요 모티프는 '명당자리 빼앗기'이다. 풍수는 바람과 물의 위치에 따라 복이 발생한다는 믿음에 근거한 것으로, 풍수와 관련된 이야기는 다양한 방식으로 전승되고 있다. 김덕령의 아버지가 중국에서 온 풍수가가 정한 명당자리를 빼앗아서 김덕령의 할아버지를 묻었기 때문에 김덕령이라는 뛰어난 인물이 태어났다고 한다. 즉, 이 이야기는 명당자리를 빼앗은 것을 합리화하고 있다. 풍수가가 묫자리를 제대로 바로잡으려고 하였으나, 김덕령의 아버지가 이를 거절하였는데, 이 때문에 김덕령이 능력을 발휘하는 데 한계를 겪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표인주, 「김덕령 설화의 기호적 의미와 전승집단의 인식-『광주전설』을 중심으로-」(『석당논총』 72,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2018)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04 | NO.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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