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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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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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곡동 석인상
    매곡동 석인상은 매곡동 313-1번지 김용학 가옥의 하은 김희수시혜비 우측면 가까이에 세워져 있다. 석인상의 얼굴은 약간 계란형이며 일자형 입으로 꼭 다물고 숙연한 모습을 하고 있다. 얼굴에 비해 코는 오똑한 편이며 일자형 눈썹에 눈은 지그시 감고 있다. 목은 가느다란 선으로 처리하였으며 가슴에는 양손을 모은 공수자세로 중읍례 모습을 보인다. 하부는 생략되어 법수라기 보다는 문인석에 가깝다. 조성시기는 1980년대이며 규모 62cm × 31cm × 20cm의 화강암재로 되어있다.
    2020-05-19 | NO.5
  • 서창동 발산 석인상
    발산마을 석인상은 서창동 538번지 가정집 정원 언덕받이에 세워져 있다. 석인상의 모습은 머리와 몸이 변성암질의 1매석으로 되어있으며 전체적인 모습은 장승의 모습과 유사하다. 머리에는 쪽을 찐듯한 머리털 모습과 뒷머리를 약간 튀어나오게 조각하여 여성적인 모습을 표현하였다. 얼굴은 둥글고 눈과 눈썹은 밝은 표정을 하고 있다. 코와 입은 음각으로 처리하였으며 목은 생략되었고 어깨는 사각형의 재료를 그대로 놓고 두 손은 가슴 약간 아래부분인 배꼽부분에서 공수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다리와 발은 생략되었다. 크기는 길이 148cm, 폭 48cm, 얼굴길이 40cm, 폭 30cm, 상부 어깨폭과 하부폭은 50cm이다.
    2020-05-19 | NO.4
  • 송산동 미륵불
    광주시 광산구 송산동 산2-1 삼도동 송동마을에  송산동松山洞  미륵불彌勒佛이 있다. 조선시대 후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미륵불은 송산동 송동마을을 등지고 왼쪽 소로를 따라 구릉하단에 마을과 300여미터 거리를 두고 위치해 있다.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부칫머리(부처머리)라고 부른다. 미륵불을 모시어 명칭이 유래되었는지, 풍수형국의 비보첵으로 미륵을 모셨는지는 전하지 않는다.한국사지총람에는 석조여래입상, 다른 여러 자료에 송동리 미륵불상으로 설명되어 있다. 미륵불의 형상을 세부적으로 살펴 보면, 길이83cm,폭42cm,두께 30cm의 화강석에 양각으로 두부와 목·신부(身部)를 조식(彫飾)하였다.두부(頭部)의 방향은 동서방향으로 눈·코·입·귀등이 비교적 상세히 표현되었으나 치졸한 편이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없고 수인(手印)의 표현도 생략되었다. 따라서 홀을 양손에 쥔 전형적인 무덤가의 동자상으로도 해석된다.전체적 윤곽은 얼굴이 둥글고 나발등은 없으며 하부도 생략되어 있고, 높이는 70cm, 어깨폭 42cm, 두부폭 33cm, 목 12cm이다.어느 시기에 본래 자리의  무덤이 훼손되어 이곳으로 옮겨온 것으로 추측된다. 불상, 문무인석, 동자석, 입석 구분보다는 우리에게 험한 세파에 나투실 미륵불로 여겨진다.또 산구릉에 위치한 미륵불  정면에는 큰 하천이 흐르고 넓은 들판이 전개되어 있다. 따라서 미륵불은 하천의 범람과 재해를 예방하고 풍요를 기원하는 민속신앙의 예배물로 조성한 사례로 판단된다.  
    2020-05-18 | NO.3
  • 운림동 돌벅수
    운림동 돌벅수는 광주시내 유일의 돌벅수 한쌍으로 원래는 성촌마을 앞에 있었으나 1981년에 이곳에서 1km 떨어진 학운초등학교 교정으로 옮겨놓았다가 다시 성촌마을 입구로 옮겼다.마을에서는 돌벅수를 할아버지벅수, 할머니벅수로 불렀으며 마을앞에 있었을 때에는 도둑이 마을에 들어와 물건을 훔쳐 달아나다가 밤새 벅수 주변만 맴돌다가 주인에게 잡혔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이곳 돌벅수는 액맥이 기능을 지녔고 해방 이전까지는 마을앞에서 당제(별신제)를 지냈다고 한다. 할아버지벅수는 얼굴에는 수염이 표시되어 있고 석인상과 같이 머리에는 유건과 같은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양손은 몸앞에서 맞잡고 있으나 손가락의 표현 등 세부기법은 둔탁한 느낌을 주고 있다.이 석장승에 대한 신앙 사항은 이 마을 동제가 행해졌던 한국전쟁 이전에는 마을의 제4 당산이었으며 농악을 치면서 마을의 수호와 무병을 기원했다. 개인적으로는 아이 못난 사람이 이곳 장승에게 치성을 드리거나 그 옆에 성황당이 함께 자리하여 길가는 이들이 이곳에 돌을 던져 쌓아 다리 아픔을 잊게 했다고 한다. 동제가 없어진 이후에는 마을의 이정표 역할을 한다.
    2020-05-19 | NO.2
  • 장등동 수곡 석장승
    석장승의 위치는 북구 장등동 171-1번지 수곡마을 버스정류장에 해당 된다.이 석장승은 수곡마을 맞은편 용강마을로 들어가는 버스정류장 길목에 2기가 동서 2m 간격으로 나란히 위치해있는데 서쪽의 담양 대전면 대치를 등지고 수곡마을 안쪽을 향해 서 있다. 대체적으로 이러한 종류의 석장승들은 사대부 가문의 묘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으나 수곡마을의 석장승은 그 출처가 어디인지는 자세하지 않다. 좌측에 위치한 석인상은 입술은 꼭 다물고 근엄한 모습을 취하고 있으며 머리에는 사모관대를 쓴 고위직 문관으로 보인다. 또한 두 손을 공손하게 모아 마치 중읍례 자세를 하고 홀대를 턱높이까지 들고 있으며 얼굴과 몸이 균형을 이루는 전형적인 문인석으로 보인다. 우측에 위치한 석장승은 얼굴에 비해 눈이 약간 크고 코와 입은 잘 조화롭게 조각되어 있다. 이 석장승 역시 문인석으로 홀을 휴대하고 있는 것은 공통적이나 우측 장승과 달리 조선시대 중인들이 썼던 탕건과 유사한 모자를 쓰고 있어 좌측 장승보다 신분이 약간 낮은 석장승으로 표현하고 있다. 풍수적으로는 이러한 문인석이 외부로부터 오는 재액災厄이나 사귀邪鬼를 막는 의미보다는 안에서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이 마을의 기운을 담아 둔다는 의미를 강조하는 뜻에서 이런 배치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들 석상들은 액막이보다는 수구막이의 의미가 더욱 중시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이것은 '금반옥호金盤玉壺, 옥녀가 소반을 앞에 두고 있는 형상'의 명당을 이루는 기운들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막는다는 의미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문인석 뒤편에 '수곡영모계기적비'가 함께 있어 북구지역 뿐만 아니라 광주광역시 전체에서 위친계기적비가 있는 곳은 이곳과 용전동을 제외하고는 그 사례가 드물고 석장승 역시 도로변에 일괄로 있어 지역 문화유산으로 보존할 가치가 높다고 하겠다.
    2020-05-19 | N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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