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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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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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구신도비
    광주시 북구 탑골길 35(장등동) 사성재(思誠齋)이 정구신도비(鄭球神道碑)는 장등동 장등마을에 있다. 기우만이 찬했다.
    2018-12-01 | NO.22
  • 정지장군예장석묘
    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 산 176정지장군 예장석묘는 경열사내에 있다. 광주시 기념물 제2호이다.
    2018-06-11 | NO.21
  • 제주양씨충민공산숙신도비명
    광주시 광산구1819년濟州梁氏忠愍公山璹神道碑銘은 양산숙의 신도비로 풍산 홍양호가 찬했다.
    2018-12-02 | NO.20
  • 조언수-증병조참판조공언수비명
    광주시 광산구 명도동순의원종증병조참판조공언수비명殉義原從勳贈兵曹參判曺公彦壽碑銘은 월성 최영조가 짓다.1592년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의병으로 왜적과 싸우다가 순절했다. 호남절의록에 올라 있다.창녕조씨삼강정려(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8호)에 충에 해당한다.
    2018-12-02 | NO.19
  • 죽헌거사송공묘갈명
    광주시 광산구 대지마을1974년죽헌거사(竹軒居士)송공묘갈명은 홍주 송씨 송래만의 묘비이다.죽헌 송래만은
    2018-07-02 | NO.18
  • 증승정원좌승지석초최공묘비(贈承政院左承旨石樵崔公墓碑)
    남구 진월동 진제마을증승정원좌승지석초최공묘비(贈承政院左承旨石樵崔公墓碑)는 진제마을 앞 방죽 아래의 산기슭에 있는 탐진 최씨 재실 앞에 있다,
    2018-06-13 | NO.17
  • 증이조참판임회선생신도비명
    광주시 광산구贈吏曹參判林檜先生神道碑銘은 김해 김헌태가 찬했다.
    2018-12-02 | NO.16
  • 증이조판서금호임형수신도비명
    광주시 광산구贈吏曹判書錦湖林亨秀神道碑銘은 진성 이가원이 찬하고 여산 송성용이 글씨를 썼다.
    2018-12-02 | NO.15
  • 참의 고경명 공 신도비명 병서 -월정집
    참의 고공 신도비명 병서 〔參議高公神道碑銘 幷序〕 -월정집 제6권 / 비명(碑銘) :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 1537~1616)만력(萬曆) 임진년(1592, 선조25)에 왜란이 일어나 참의 고공(高公)이 목숨을 바쳐 큰 절개를 드러내었는데, 그 후 십여 년이 지나도록 아직 신도비문(神道碑文)을 맡긴 데가 없었다. 어느 날 공의 자제 고용후(高用厚)가 나에게 찾아와 청하기를,“선친께서 공의 형제와 교유하시어 순국(殉國)의 전말을 공께서 분명히 알고 계시니, 감히 공의 비문을 얻어서 선친의 사적이 묻히지 않도록 하고자 합니다.”하고, 또 그 모부인(母夫人)의 명으로 거듭 당부하였다. 아, 공의 사적과 행실을 말하노라면 슬픔의 눈물을 참을 수가 없다. 내가 글을 잘 짓지는 못하지만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왜적이 대거 몰려올 당시에 공은 광주(光州) 시골집에 있었다. 우리 군대가 전투마다 번번이 패하여 조령(鳥嶺)의 요새가 무너지는데도 호남 순찰사에게 왕실을 지킬 뜻이 없다는 소식을 듣고는 공은 아들 고종후(高從厚), 고인후(高因厚)와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자 계획하였다. 얼마 뒤 또 어가(御駕)가 서쪽으로 파천하고 도성이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는 공은 밤낮으로 목놓아 통곡하였다. 순찰사가 근왕병(勤王兵)을 이끌고 금강(錦江)에 이르렀다가 도성이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허둥지둥 군진을 파하니, 온 도내의 인심이 흉흉하였다. 공이 순찰사에게 편지를 보내어 후일의 성과를 기대하였는데, 말이 대부분 적절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공은 나라가 기울어 가는 것에 통분하여 나주(羅州) 사람 전 부사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다시 나라를 일으킬 것을 꾀하며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공이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였다.5월 무자일에 담양부(潭陽府)에서 회합을 가졌는데, 옥과(玉果) 사람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 등이 공을 추대하여 맹주(盟主)로 삼았다. 공은 본디 군사(軍事)에 능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개연히 장단(將壇)에 오르고 늙고 병들었음을 내세워 사양하지 않았다. 이어 도내에 격문을 돌리니 의병에 자원하는 자들이 날마다 모여들었다.6월 기해일에 공이 담양부에서 출병하였다. 이때 세 도의 군사들이 용인(龍仁)에서 무너져 호서와 호남의 민심이 더욱 동요하던 터라 유독 공에게 기대가 많았다. 공은 전주(全州)에서 군대를 정비하여 북쪽으로 올라가 여산(礪山)에 주둔한 다음 직접 격문을 지어 여러 도에 차례로 통고하고 관서 지방까지 전달되게 하였다. 공이 이산(尼山)으로 향하려는데, 적이 황간(黃澗)에서 금산(錦山)으로 넘어와 군수가 전사하고 적의 기세가 걷잡을 수 없다는 소식이 들렸다. 휘하의 군사들이 너도나도 돌아가 본도를 구하고자 하였고, 공 또한 그렇게 생각하였다.7월 경신일에 공이 마침내 진산(珍山)으로 군대를 옮겼다. 금산의 적을 치려 할 때엔 정예병이 갈수록 많이 모여들어 군대의 위용이 더욱 높아졌다.병인일에 드디어 군사를 나누어 금산으로 들어가 방어사 곽영(郭嶸)의 군대와 좌ㆍ우익으로 진을 편성하였다. 공이 먼저 수백의 정예 기병을 내어 곧장 적의 소굴을 향해 돌격하였으나, 적에게 패하여 물러났다. 공이 북을 울려 독전하자 군사들이 모두 죽을 각오로 싸워 도리어 적병을 토성으로 밀어붙였다. 성 밖의 관사를 불태우고 또 쇠뇌를 쏘아 성 안을 잇달아 불태우자 더욱 기세가 올랐다. 왜적이 죽음을 무릅쓰고 돌격해 나오자 의병이 사면에서 포위하여 공격하였는데, 사상자가 많아지자 적병이 감히 더 나오지 못하였다. 마침 날이 저물자 관군이 또 전투를 도우려 하지 않고 토성이 견고하여 쉽게 함락시킬 수 없었기에 퇴군하여 본진으로 돌아왔다. 이날 밤 방어사가 사람을 보내어 다음날 연합하여 싸울 것을 약속하였다. 공의 맏아들 고종후가 말하기를,“오늘 아군이 승리하였으니 이 승세를 지닌 채로 군대를 온전히 보전하여 돌아갔다가 기회를 보아 다시 출전하여 적을 공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적과 대치하여 노숙한다면 밤에 기습당할 우려가 있습니다.”하니, 공이 대답하기를,“너는 부자간의 정리로 내가 죽는 것을 두려워하느냐? 나는 나라를 위해 한 번 죽는 것이 직임일 뿐이다.”하였다. 이날 밤에 적이 과연 기습을 모의하여 몰래 나와 매복하였으나, 나졸에게 발각되었다.이튿날 정묘일에 공이 방어사와 함께 출격하였는데, 공은 적진과 5리쯤 떨어진 곳에 진을 치고서 방어사의 진과 마주 보았다. 공이 기병 8백여 명을 보내어 싸움을 걸었으나 교전하기도 전에 적이 먼저 성을 비우고 나와 관군을 공격하니, 방어사 휘하의 장수 김성헌(金成憲)이 말을 몰아 먼저 달아났다. 왜적이 광주(光州)와 흥덕(興德) 두 진을 압박하자 방어사의 진이 그 기세를 보고는 그대로 무너졌다. 공은 단독으로 적을 상대할 작정으로 모든 군사들에게 활을 당긴 채로 대기하게 하였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다급하게 “방어사의 진이 무너졌다.”라고 외쳤다. 이에 의병군이 따라서 무너졌다. 공이 이전에 말하기를,“나는 말타기에 능숙하지 못하니, 불행히도 싸움에 진다면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다.”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좌우에서 말을 타고 도망가기를 청하였다. 공이 말하기를,“내가 구차히 죽음을 모면하려는 사람이겠느냐.”하였다. 공의 부하가 공을 부축하여 말에 앉혔는데, 공은 이내 말에서 떨어지고 말은 달아났다. 공의 휘하에 있던 유생 안영(安瑛)이 말에서 내려 공을 태우고 자신은 도보로 뒤따랐다. 공의 종사관 유팽로(柳彭老)가 건장한 말을 타고 먼저 탈출하다가 노복에게 묻기를,“대장은 탈출하였느냐?”하니, 노복이 아직 탈출하지 못했다고 대답하였다. 유팽로가 갑자기 말을 몰아 다시 혼전을 벌이는 속으로 들어가 공을 모셨다. 공이 돌아보고서 말하기를,“나는 필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니, 너는 말을 달려 빠져나가야 한다.”하였다. 이에 유팽로가 말하기를,“어찌 차마 대장님을 버리고 살 길을 찾겠습니까.”하였다. 마침내 적의 칼날이 다가와 공은 끝내 죽음을 맞이했다. 유팽로는 자신의 몸으로 공을 감싸다가 죽었으며 안영도 여기에서 죽었다.공의 둘째 아들 고인후(高因厚)는 병사들을 독려해서 날아오는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제일선에서 싸웠는데, 군대가 궤멸되자 말에서 내려 전열(戰列)을 정비하고 진에서 전사하였다.인근 고을 백성들이 공의 패전 소식을 듣고는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모두 피난 짐을 지고 엎어지고 넘어지면서 “우리들은 이제 죽었다.”라고 통곡하였는데 그 소리가 들판에 진동하였다. 군대가 궤멸되어 군사들이 공의 생사를 알지 못했는데, 점점 와서 모였다가 공의 죽음을 듣고는 모두 울부짖으며 흩어졌다. 남도 백성들은 공을 알건 모르건 간에 서로 조문하면서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공이 백발의 서생으로 국가가 어려운 때를 당하여 의를 내걸고 기병하여 양호(兩湖) 의병의 선창이 되니, 산중으로 도피했던 어리석은 사람과 사나운 병졸들도 모두 소문을 듣고 다투어 모여들어 한 달 사이에 의병의 수가 수천 명에 달했다. 이는 지성에서 우러난 공의 의로운 기백이 사람들을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공이 임진년 봄에 천문(天文)을 보고서 집안사람에게 말하기를,“올해 장성(將星)이 불길하니, 장수된 자들이 필시 좋지 못할 것이다.”하고, 또 말하기를,“나는 올해 횡액이 있을 것이다.”하였다. 그렇다면 공이 본래 생사의 이치에 밝았던 만큼 의병을 일으키던 날에 이미 목숨을 버릴 작정을 했던 것이다. 금산의 왜적을 토벌할 때에는 사위 박숙(朴橚)에게 편지를 보내어 가속(家屬)을 부탁하였으니, 공이 죽기로 자처했던 것은 대개 평소에 결정하였던 것이다.왜적이 금산을 점거하고 있을 때에 병권을 맡은 문무(文武) 장수들은 두려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지만, 공은 일의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직접 적의 소굴로 들어가 혈전을 벌여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비록 승첩의 공을 세우지는 못했지만, 공이 죽은 뒤 공의 순국을 보고서 적을 공격하는 자들이 이어졌다. 이 때문에 왜적이 여러 차례 전투에 이기고도 사상자가 절반이 넘어 결국 무기를 버리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니, 국가에서 호남을 지켜 뒷날 국토를 회복하는 바탕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그 공적이 공에게 있다고 하겠다. 참찬 성혼(成渾) 공이 행조(行朝)에서 “공의 충렬(忠烈)이 왕실에 큰 공로가 있다.”라고 극력 주장한 것은 이런 점을 보았기 때문이다.공의 시신은 금산 산중에 암매장되어 있었는데, 적병이 가로막고 있어서 즉시 거두지 못하다가 공의 아들 고종후 등이 의병(義兵)과 승군(僧軍)에게 부탁하여 8월 모 갑일에 시신을 찾아 왔다. 대략 40여일 만에 염습하였는데, 여러 날 무더위와 비를 겪고도 안색이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생기 있어 보는 자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고향으로 시신을 받들고 돌아오자 백성들이 탄식하고 슬퍼하였는데 더러 정신없이 울부짖는 자들도 있었다.어가가 의주에 있을 때에 성상께서 공이 의병을 일으켜 온다는 말을 들으시고 얼굴색을 바꾸시며 기뻐하셨다. 공에게 공조참의 지제교 겸 초토사를 제수하고 교서를 내려 위로하셨는데, “열읍을 지휘하여 대책을 세워서 도성을 회복하라.”라는 말씀이 있었다. 이때 공조 좌랑 양산숙(梁山璹)이 행재소(行在所)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성상께서 면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돌아가 고경명(高敬命)과 김천일(金千鎰)에게, ‘그대들이 제때에 도성을 회복하여 내가 하루빨리 그대들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하라.’라는 말을 전하라.”그러나 작명(爵命)이 이르기 전에 공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0월 경인일에 화순현(和順縣) 흑토평(黑土坪) 언덕에 장사 지냈다. 장사 지낸 다음날 풍설(風雪)이 번갈아 일어나고, 긴 무지개가 무덤 왼쪽부터 묘역을 가로질러 수십 리까지 뻗쳐 특이한 광채가 하루가 지나도록 사라지지 않으니, 사람들은 공의 충분(忠憤)에 감응한 것이라 여겼다. 뒷날 묏자리가 좋지 못하여 모년 모월 모일에 모읍 모지 모좌의 언덕으로 이장하였다.공이 순국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성상께서 슬퍼하시어 자헌대부 예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사 지춘추관사 지성균관사에 추증하였다.공이 죽자 순찰사가 예전의 원한으로 “어두운 밤에 행군하다가 군대가 궤멸되어 죽었다.”라는 장계를 올려 공을 무함하였다. 그 후에 후임 순찰사로 온 이정엄(李廷馣)이 공이 순국한 일을 드러내기를,“고모(高某)는 제일 먼저 의병을 일으켜 대의를 표방하여 왕실을 보호하였으며, 몸소 적진에 들어가 혈전을 벌이다가 불행히 군대가 패하여 부자가 함께 죽었다.”하니, 비로소 그 실상이 제대로 드러났다고 하겠다.을미년(1595, 선조28) 여름에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마을 문에 정려하게 하였다. 신축년(1601, 선조34) 가을에 공의 문생(門生) 전 감찰 박지효(朴之孝) 등의 상소로 인해 특명을 내려 광주(光州)에 별도의 사우(祠宇)를 세우게 하였다. 포충(褒忠)이라 사액(賜額)하여 예관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이어 봄가을로 제향을 받들어 대대로 끊어지지 않게 하였으니, 아, 이것으로 군신간의 의를 볼 수 있겠다.공의 휘는 경명(敬命), 자는 이순(而順)이다. 본관은 제주(濟州)인데, 그 선세에서 장흥(長興)으로 관향(貫鄕)을 하사받아 마침내 장흥 고씨(長興高氏)가 되었다. 증 통훈대부 통례원좌통례 행 충좌위부사직 휘 상지(尙志), 증 통정대부 공조참의 휘 자검(自儉), 증 가선대부 예조참판 겸 동지춘추관사 행 승의랑 형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 휘 운(雲)이 바로 공의 고조, 증조, 조부이다. 부친 휘 맹영(孟英)은 품계가 통정대부에 이르고 관직이 사간원 대사간에 이르렀다. 남평 서씨(南平徐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성균관 진사 서걸(徐傑)의 따님이다. 가정 계사년(1533, 중종28) 11월 30일 무진일에 공을 낳았다.공은 어린 시절부터 어른처럼 의연하였는데, 참찬 백인걸(白仁傑) 공이 한번 보고는 중하게 여겨 큰 그릇이 될 것을 알아보았다. 공은 어렸을 때에 매우 영특하여 책을 몇 번만 읽어도 바로 암송하였는데, 관례를 올리기 전에 서울에 유학하여 학업이 날로 진보하였다. 당시의 거유(鉅儒)들이 모두 공을 사모하여 교유하니 명성이 더욱 성대하였다.임자년(1552, 명종7)에 진사 1등으로 합격하였다.무오년(1558) 여름에 공헌왕(恭憲王 명종(明宗))이 성균관에 친림하여 유생들을 시험하였는데, 공이 수석을 차지하여 전시(殿試)에 곧바로 응시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해 전시에서 또 갑과 1등으로 선발되어 처음에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뒤 호조 좌랑으로 옮겼다.기미년(1559) 봄에 세자시강원 사서에 제수되었다.경신년(1560) 봄에 사간원 정언으로 옮겼다. 여름에 체차되어 형조 좌랑에 제수되었다가 병조 좌랑 지제교로 옮겼는데, 이때부터 항상 지제교를 겸하였다. 얼마 뒤에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신유년(1561) 봄에 사간원 헌납에 제수되었다. 여름에 홍문관 수찬에 제수되고 얼마 뒤 사간원 헌납으로 옮겼다가 사헌부 지평으로 옮겼다. 가을에 홍문관 부수찬에 제수되었다. 관서(關西)로 사명을 받들어 나갔는데, 돌아오자 성상께서 연로에서 지은 시를 써서 올리라는 명을 내렸다. 겨울에 부교리로 승진하였다.임술년(1562) 봄에 병으로 체차되어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었다. 여름에 홍문관 수찬에 제수되고 또 부교리로 승진하였다. 일찍이 명화 62폭을 내려 공에게 시를 지어 올리라는 명을 내렸으니, 특별히 은사를 내려 포창한 것이다. 공이 시를 잘 지어 한창 명성이 있었지만 명리(名利)에 전혀 욕심이 없어 퇴근하면 늘 서책에 정신을 쏟은 채로 하루를 마쳤을 뿐, 한 번도 여러 공들을 찾아다닌 적이 없었다.계해년(1563) 봄에 서차(序次)에 따라 홍문관 교리로 승진하였고, 가을에는 성균관 전적으로 좌천되었다. 울산 군수(蔚山郡守)에 보임되었다가 부임하기도 전에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향에서는 오로지 옛 전적(典籍)을 탐구하여 의미를 찾고 간혹 산수를 유람하며 스스로 즐겼으며 불우하게 쫓겨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고향집에 머문 것이 19년이었다.만력 신사년(1581, 선조14)이 되어서야 다시 기용되어 영암 군수(靈巖郡守)에 제수되었다. 이때 국가에서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해 사신을 보내는데, 주청사(奏請使) 김계휘(金繼輝) 공이 서장관(書狀官)에 공을 임명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공이 성균관직강 겸 사헌부지평으로 연경에 입조(入朝)하였다.임오년(1582) 봄에 다시 서산 군수(瑞山郡守)에 제수되었다. 가을에 한림원 편수관(翰林院編修官) 황홍헌(黃洪憲)과 급사중(給事中) 왕경민(王敬民)이 조서를 반사(頒賜)하러 왔는데, 원접사 이이(李珥) 공이 국가를 빛낼 만한 재주가 있다고 공을 종사관으로 천거하여 종부시 첨정에 제수되었다. 경박하고 조금 글재주 있는 사람이 대신 종사관이 되고자 언관을 사주하여 공을 탄핵하였는데, 이공(李公)이 또 조정에서 공의 재주를 간곡히 진술하여 그 의론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종부시 첨정에서 사섬시 첨정으로 옮겼다. 이공은 본래 공을 알지 못했는데, 공을 처음 보자마자 존중하여 거리낌 없이 마음을 열었다. 명나라 사신과 시문을 주고받을 적에 공이 지은 시가 가장 많이 채택되었다.계미년(1583) 봄에 한성부 서윤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뒤 한산 군수(韓山郡守)에 제수되었다. 겨울에 문장에 능한 사람이 필요하여 공을 예조 정랑에 제수하였는데, 공은 사양하고서 곧바로 고향집으로 돌아갔다.갑신년(1584) 여름에 종부시와 사복시 첨정에 차례로 제수되었다. 겨울에 성균관 사예에 제수되었다.을유년(1585, 선조18) 봄에 성상께서 공처럼 문장이 뛰어난 사람을 낮은 자리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여기시어 마침내 세 품계를 건너뛰어 군자감 정(軍資監正)에 제수하였다. 이때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자가 있었으므로 공은 병을 이유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여름에 순창 군수(淳昌郡守)에 보임되었다가 무자년(1588)에 연루되어 파직당하였다.경인년(1590, 선조23)에 사섬시 정에 제수되었다. 대신들이 탑전(榻前)에서 공을 문장으로 천거하여 승문원판교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에 제수되었다. 이때 재상들이 모두 공의 재주를 아껴서 공론으로 끌어주고자 하였는데, 공은 겸손하게 물러나 시사(時事)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말을 잘 못하는 사람처럼 하였다. 가을에 승진하여 통정대부의 품계에 오르고 동래 부사(東萊府使)에 제수되었다. 동래부는 바닷가에 위치해 왜인들이 머무는 곳이라 물화가 유입되고 객상(客商)이 모여들어 명목 없는 세금과 몰수되는 재물이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았다. 그러나 공은 청렴결백하게 자신을 지키고 조금도 불미스러운 일이 없었으니, 아전들과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였다.신묘년(1591) 봄에 광국 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을 책록하는데 공도 포함되었다. 여름에 파직당하여 서울에 들어왔는데, 당시 좌상 정철(鄭澈)을 탄핵하면서 정공의 천거를 받은 자로 공이 지목된 듯하다. 공은 필마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듬해 임진년(1592)에 왜란이 일어났다.공은 일찍이 자호(自號)를 제봉(霽峯)으로 하였는데, 태헌(苔軒)이라고도 하고 태사(苔槎)라고도 하였다. 공은 장대한 풍채에 넓은 식견과 깊은 도량을 지녔으며 엄중한 위엄을 갖춘 진실하고 꾸밈없는 사람이었다. 기쁘거나 서운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여러 차례의 부침을 겪으면서도 태연하게 처신하였다. 일을 할 때엔 또 구차하게 이해를 따지려 하지 않았으며, 사람들을 대할 때에도 비위를 맞추며 억지로 웃거나 말하지 않았으며 마음이 화평하였다. 공은 평소에 남의 험담을 하지 않았는데, 아들이나 조카가 혹 그런 말을 입에 담으면 그 자리에서 호되게 꾸짖었다.관직을 맡아서는 일처리가 간결하고 평이하였으며 꼼꼼하게 살피는 것을 능사로 삼지 않았는데 항상 공이 떠난 뒤에 사람들이 그리워하였다. 집에 있을 때에는 처자가 빚을 질 만큼 살림이 어려웠으나 공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태연하였다.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집안에서 물려준 노비와 전답을 아우에게 모두 양보하고 자신은 늙은 노비와 황폐한 땅을 가졌다.공은 달리 즐기는 것은 없었으며, 오직 서책 수천 권을 쌓아놓고 한번 책을 잡으면 침식(寢食)에 구애받지 않고 끝까지 다 읽었다. 삼교(三敎)와 구류(九流)의 서책을 모두 정밀하게 연구하였고 상수(象數)에도 밝았다. 문장 중에서는 특히 시에 능하였는데, 시구를 다듬지 않아도 남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출중하였다. 문집 다섯 권을 남겼는데, 한 시대에 문장을 논하는 선비치고 그 글을 암송하고 그 이름을 중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여러 차례 지방관을 역임하면서도 집안에는 남아 있는 재물이 없었으니, 순국하던 때에도 이웃의 도움으로 간신히 장사를 지냈다. 비록 벼슬길이 험난하여 녹위(祿位)가 드러나진 못했으나 공은 당세가 칭송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세상에서 공을 아는 자들은 공의 훌륭한 문장만을 알 뿐이니, 공이 세상 잇속에 초연하고 마음가짐이 성실했다는 것과 깨끗하게 자신을 닦는 지조와 절절하게 나라를 걱정하는 충성을 지녔다는 것은 다 알지 못하고 있다.공의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울산 김씨(蔚山金氏)로, 홍문관 부제학 김백균(金百鈞)의 따님이다. 슬하에 아들 여섯과 딸 둘을 두었다. 장남 종후(從厚)는 정축년(1577, 선조10)에 문과에 급제하고, 임피 현령(臨陂縣令)을 역임하였다. 상차(喪次)에서 군사를 일으켜 아비의 원수를 갚기를 맹세하고 영남 지방에서 이리저리 옮겨가며 싸우다가 진주성(晉州城)이 함락되자 강에 투신자살하였다. 승정원 도승지에 추증되었다.차남 인후(因厚)는 기축년(1589, 선조22)에 문과에 급제하고 권지 성균관 학유에 제수되었는데, 공과 함께 싸우다가 진중에서 죽었다. 예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삼남 준후(遵厚)는 장가도 들기 전에 일찍 죽었다. 사남 순후(循厚)는 신묘년(1591, 선조24)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는데, 공의 순국으로 은혜를 미루어 특별히 사헌부 감찰에 제수되었다. 오남 유후(由厚)는 공의 죽음을 애통해 하다가 병이 들었는데, 탈상하고서 그 이듬해에 죽었다. 막내 용후(用厚)는 을사년(1605, 선조38)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였다. 장녀는 광주(光州) 사인(士人) 박숙(朴橚)에게 출가하였다. 막내딸은 영광(靈光) 사인 노상룡(盧尙龍)에게 출가하였는데, 정유년(1597, 선조30) 난리에 왜적에게 굴하지 않고 꾸짖고는 칼로 자결하였다.손자가 일곱인데, 부립(傅立)과 부언(傅言)은 종후의 소생이고, 부림(傅霖), 부천(傅川), 부즙(傅楫), 부량(傅良)은 인후의 소생이고, 부철(傅哲)은 순후의 소생이다. 부천은 을사년(1605, 선조38) 진사시에 합격하였다.아, 공의 두 아들과 딸 하나가 모두 병란에 목숨을 버렸으니, 충효와 의리가 어찌 이리도 한집안에 모여 있단 말인가. 비록 이들이 남보다 뛰어난 자질을 타고났다 하더라도 가정의 가르침으로 성취된 것이 깊었던 것이다.공의 평생을 개괄하면, 젊은 나이에 장원 급제하여 청직(淸職)을 역임하고 독서당에서 학문을 배양하며 논변을 펼치고 문장을 지어 명성이 성대하였던 만큼 당대에 본래 문인으로 불리던 사람이었다. 인수를 품고 지방관으로 나가 외직을 전전할 때에는 가는 곳마다 청렴한 생활로 직임을 봉행하고 공평무사한 일처리로 관리들과 백성들의 신임을 얻었으니, 바로 옛날의 이른바 순리(循吏)라 하겠다.나라에 병란이 생겨 왜적에게 계속 잠식당하자 관찰사는 두려워 몸을 움츠리고 무장들은 흩어져 달아났다. 반면에 공은 향리로 돌아간 유신(儒臣)으로서 국토를 수호할 책임이 없는데도 단독으로 군대를 이끌고 강한 적에게 대항하고 약한 군대를 분발시켜 견고한 적을 공격하여 나라에 보답하기를 맹세하였다.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부자가 함께 순국하였으니, 충절을 바치고 죽은 그 누구보다 장렬하다고 하겠다. 세상에서 평소에 문인더러 쓸모가 적다고 비난하던 자들이 이에 이르러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것이니, 공이야말로 한 시대의 완전한 사람이 아니겠는가.가형(家兄) 의정공(議政公 윤두수(尹斗壽))과 공이 교유할 때 모두 관례(冠禮)를 올리기 전이었고, 나도 나이가 어려서 형제처럼 따라다닐 수 있었는데, 당시 공은 풍채가 훤하고 얼굴이 빙옥(氷玉)처럼 빛나 신선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함에 꿈속에서도 그 모습이 생생하니 50년의 세월이 마치 열흘처럼 느껴진다. 젊어서는 공을 경모하여 가르침을 받기를 원하였고, 늙어서도 공을 향하는 그리움이 그치지 않는데, 공은 지금 세상을 떠나고 나는 공보다 오래 살아 이렇게 비석 세우는 일을 돕게 되었다. 이 또한 무슨 운명이 그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 슬프다. 고용후가 손수 쓴 가장(家狀)에 따라 대략 서술하고 나서 명을 지어 붙인다. 명은 다음과 같다.장원 출신으로 순국한 이 / 壯元死國예전에 문산이 있었는데 / 古有文山공이 뒤이어 일어나니 / 惟公代興실로 우열을 가릴 수 없네 / 寔伯仲間사람들이 말하기를 / 人亦有云장원이 부끄럽지 않다 하니 / 不愧科名문장은 선비 중에 으뜸이요 / 文冠多士절의는 목숨을 돌보지 않았네 / 節則忘生국난에 눈물을 뿌리며 / 灑泣國難외로운 군대 강적에 항거하니 / 孤軍抗勁목숨을 버려 천성을 보전하고 / 毁魄全天부자가 함께 목숨을 버렸구나 / 父子駢命죽었으나 죽은 것이 아니니 / 死而不死그 정신 장렬하여라 / 其神烈烈죽어도 눈 감을 수 없기에 / 目不可瞑적의 멸망 보리라 맹세했었지 / 誓見賊滅정문을 세우고 작질을 내려 / 旌忠錫秩떠난 넋을 위로하니 / 以慰遺魂공은 구천에서 / 公在九京성은에 재배하리라 / 再拜湛恩공은 시에 능했으니 / 公深於詩수많은 작품 밝게 빛나고 / 炳琅千篇문단에 솜씨를 떨치니 / 掉鞅詞林문사들 으뜸으로 추대하네 / 作者推先문장과 충절이 / 文苑忠義함께 전해지니 / 合爲一傳예전에도 드문 일을 / 在古鮮覯공에게서 보게 되었네 / 於公乃見깊숙한 새 무덤이 / 新阡鬱然어진 이를 감싸주니 / 大庇象賢천년이 흐른 뒤에도 / 有來千年숭고한 빛 하늘을 비추리라 / 精光燭天[주-D001] 참의 고공 신도비명 : 이 글은 의병장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의 신도비명이다. 고경명의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峰)ㆍ태헌(苔軒)이다. 1558년(명종13)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서산 군수, 한성부 서윤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격문을 돌려 담양에서 6천여 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곽영(郭嶸)의 관군과 함께 금산(錦山)에서 왜군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주-D002] 공이 …… 돌격하였으나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25년 7월 7일 기사에는 “곽영이 먼저 정예병 수백을 보내어 적을 시험하다가 적에게 패하여 물러났다.”라고 되어 있다.[주-D003] 모년 …… 모좌 : 한국문집총간 97집에 수록된 《백주집(白洲集)》 권18 〈증의정부좌찬성제봉고공시상(贈議政府左贊成霽峯高公諡狀)〉에 “기유년 3월 경인일에 장성현(長城縣) 오동리(梧桐里) 오좌자향(午坐子向)의 언덕에 다시 장사 지냈다.”라는 기록이 있다.[주-D004] 삼교(三敎)와 구류(九流) : 삼교는 유교(儒敎), 불교(佛敎), 도교(道敎)이고, 구류는 유가(儒家), 도가(道家), 음양가(陰陽家), 법가(法家), 명가(名家), 묵가(墨家), 종횡가(縱橫家), 잡가(雜家), 농가(農家)이다.[주-D005] 순리(循吏) : 법을 지키고 이치를 따르는 관리라는 뜻으로 백성에게 선정(善政)을 베푼 지방관을 말한다. 《사기》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 “법을 받들고 이치를 따르는 관리는 공로를 자랑하고 능력을 과시하지 않아 백성의 칭송은 없지만 또한 잘못된 행적도 없다. 그러므로 순리 열전(循吏列傳)을 짓는다.”라고 하였다[주-D006] 문산(文山) : 신국공(信國公) 문천상(文天祥)을 말한다. 문천상은 남송(南宋) 길수(吉水) 태생으로 자는 송서(宋瑞), 호는 문산이다. 송 이종(宋理宗) 4년(1256)에 21세로 전시(殿試)에 장원 급제하였다. 원(元)나라 군대가 침입하여 수도가 함락되자 단종(端宗)을 받들고 근왕군(勤王軍)을 일으켜 대항하다가 사로잡혔는데, 굴복하지 않고 절의를 지키다가 처형되었다. 《宋史 卷418 文天祥列傳》
    2020-12-31 | NO.14
  • 창의사 김공 정렬사 비(倡義使金公旌烈祠碑)- 계곡선생집 제13권 / 비명(碑銘) 9수(首)
    만력(萬曆) 계사년(1593, 선조 26) 봄, 명(明) 나라 군사와 우리 군대가 진격하여 경성(京城)의 왜적에게 육박해 들어가자 경성의 왜적들이 남쪽으로 달아났다. 이에 창의사 김공이 군사를 거느리고 왜적을 추격하여 영남에 들어간 뒤 진주(晉州)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이해 6월 갑진일에 왜적이 무리들을 총동원하여 진주를 포위하였는데, 9일 만에 성이 함락되면서 김공과 성을 지키던 여러 장수들이 모두 죽었다. 이에 선묘(宣廟)가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면서 공에게 좌찬성을 증직(贈職)하고 조제(吊祭)를 올리도록 명하였다.그 일이 있고 난 14년 뒤에 호남의 인사들이 공을 위해서 나주(羅州)에 사당을 세웠는데, 사당을 낙성하고 나서 조정에 사액(賜額)해 줄 것을 청하니 정렬(旌烈)이라는 편액(扁額)을 내렸다. 그러고 나서 또 20년이 지난 천계(天啓) 병인년(1626, 인조 4)에 나주 인사들이 공의 사당에 희생(犧牲)을 묶어 두는 빗돌을 장차 세우려 하면서 나에게 글을 보내 공의 훈열(勳烈)을 기록하여 돌에 새기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이에 앞선 임진년에 왜노(倭奴)가 대대적으로 쳐들어와 부산(釜山)을 결단내고 동래(東萊)를 함락시킨 뒤 북쪽으로 마구 짓쳐 들어오자 여러 성진(城鎭)들이 소문만 듣고도 저절로 무너져 버리는 상황에서 이일(李鎰)과 신립(申砬)의 군사마저 잇따라 패몰(敗沒)당하고 말았다. 이에 선묘가 계책을 결단하여 서쪽으로 피난을 떠나자 왜적이 마침내 경성을 함락시켰다.이때 공은 전(前) 부사(府使)로서 관직을 떠나 나주의 전사(田舍)에 물러와 살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는 울부짖고 통곡하며 거의 까무러칠 정도까지 되었다가 이윽고 떨쳐 일어나면서 말하기를,“내가 통곡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나라에 난리가 일어나서 군부(君父)가 파월(播越)하고 있는 때에 세신(世臣)인 내가 새처럼 뿔뿔이 흩어져서 목숨만 건지려고 해서는 안 될 일이다. 나는 장차 의로운 군사를 일으켜 난리 속으로 뛰어들 것이다. 가령 강하고 약한 면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때는 오직 죽음이 있을 따름이니, 죽지 않고서는 나라에 보답할 길이 전혀 없다.”하였다. 그리고는 글을 급히 보내 고경명(高敬命), 박광옥(朴光玉), 최경회(崔慶會), 정심(鄭諶) 등에게 이 일을 고하였는데, 의사(義士) 송제민(宋濟民), 양산룡(梁山龍), 양산숙(梁山璹), 임환(林懽), 이광주(李光宙), 서정후(徐廷厚) 등도 소식을 듣고 달려와 집결하였다. 이에 정예(精銳) 수백 명을 얻어 6월 3일에 삽혈(歃血)의 의식을 행한 뒤 군사들과 맹세를 하고 군대를 지휘하여 서쪽으로 나아갔다.공은 본래 허약한 체질로 병든 몸이었으나 이때에 이르러서는 매우 기뻐하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오늘 내가 칼을 차고 말을 타니 기분이 쇄락하여 날아갈 것만 같다.”하였다. 이때 마침 3도(道)의 근왕병(勤王兵)이 용인(龍仁)에서 궤멸되었으므로 군중(軍中)에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이에 공이 군사들에게 유시하기를,“우리 군대는 의(義)를 위하여 일어났으니 오직 진격만 있을 뿐 후퇴는 없다. 가고 싶은 사람은 마음대로 떠나도록 하라.”하자, 군사들 모두가 감격하여 분발하면서 몰래 도망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무너진 군사들도 점차 공에게 돌아와 호서(湖西)에 이를 무렵에는 수천의 병력을 확보하게 되었는데, 마침내 수원(水原)에 진격하여 진(陣)을 치면서부터 군세(軍勢)가 조금씩 떨쳐지기 시작하였다.공이 장사(壯士)를 모집하여 간간이 나가서 왜적을 치게 한 결과 수확을 상당히 거두었으며, 또 금령(金嶺 용인(龍仁)의 속원(屬院))의 왜적을 습격하여 패배시키기도 하였다. 그리고는 막하(幕下)의 양산숙(梁山璹) 등을 보내 소(疏)를 받들고 사잇길로 가서 행재(行在)에 보고하게 하였다.당시 번곤(藩閫)의 제수(諸帥)들이 의병의 사기를 저상(沮喪)케 하는 경우가 많았고 또 왜적의 공격이 갈수록 심해지자 공이 장좌(將佐)와 계책을 정하고는 병력을 이동시켜 강화(江華)로 들어가서 근거지를 삼았다. 이에 도망쳐 숨어 있던 관리들도 공의 도착 소식을 듣고는 비로소 조금씩 나왔으며 각 부대의 관군들도 많이 와서 모였다.그러자 공이 여러 군사들과 약속을 단단히 하고서 강 연안에 목책(木柵)을 세우고 함선(艦船)을 배치하는 등 공수(攻守)에 대한 대책을 완비하였는데, 기보(畿輔)의 사민(士民)들 역시 곳곳에서 단결하여 모두 의병이라 칭하며 공을 응원하였다.이때 양산숙 등이 행재(行在)에서 돌아와 공을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로 임명하고 창의사(倡義使)의 호(號)를 내리는 조정의 명을 전하였다. 그리하여 이로부터 행조(行朝 행재소와 같은 말임)의 명령이 양호(兩湖)에 하달되기 시작하였다.왜적이 경성을 오랜 기간 점거하자 피난갔던 도성 백성들이 많이들 경성에 돌아와 왜적들과 섞여 살게 되었다. 공이 이에 결사대를 모집하여 도성 안으로 잠입시킨 뒤 순역(順逆)과 이해(利害)의 도리를 가지고 타이르게 하니, 도성 안의 백성들이 모두 감격하여 열복(悅服)하면서 수만 명이나 공에게 정성을 바쳐 왔다. 그런가 하면 왜적을 몰래 죽여 군전(軍前)에 헌괵(獻馘 적을 죽여 왼쪽 귀를 잘라 바치는 것)하기도 하고, 스스로 몸을 빼쳐 공에게 돌아오는 자의 숫자가 날마다 1백 명을 헤아렸다. 그 결과 엄려(庵廬 군대 막사)가 사방에 온통 들어차면서 땅이 비좁아 더 이상 받아들일 공간이 없을 정도까지 되었다.공이 때때로 병력을 출동시켜 강 연안에 둔(屯)치고 있던 왜적을 습격하자 적들이 서로 잇따라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공이 이에 여러 장수들과 몽충(蒙衝 적선(敵船)에 돌입하는 옛날 전함의 이름) 4백 척을 거느리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곧바로 진격하였다. 그리고는 양화도(楊花渡)에서 북치고 함성을 지르며 군세(軍勢)를 떨친 뒤 수길(秀吉)의 죄상(罪狀)을 내걸어 도성 안의 왜적들을 자극시켜 나오게 하려 했으나 성안의 왜적들은 끝까지 감히 움직이려고 하지를 않았다.이듬해 정월, 명 나라 대장인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평양(平壤)을 수복한 뒤 개성부(開城府)로 진격하여 주둔하면서 장차 경성의 왜적을 토벌하려고 하였다. 이에 공이 거리와 지세(地勢) 및 왜적의 정형(情形)을 상세히 갖추어 제독에게 보고하는 한편, 선유봉(仙遊峯)으로 진군하여 제독을 성원(聲援)하면서 간간이 군대를 나누어 내보내 적의 기세를 꺾곤 하였다. 왜적이 날로 형세가 궁박해지자 그만 도성 안의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하고 집을 다 불태운 뒤 성을 버리고 남쪽으로 도망쳤다. 이에 공이 장좌(將佐)를 거느리고 도성에 들어가 종묘(宗廟)의 구허(舊墟)에 자리를 잡았다.이때 마침 공에게 왜적을 추격하라는 조정의 명령이 떨어졌는데, 공이 바야흐로 병석에 누워 있는 몸이었으나 이 명령을 듣고는 벌떡 일어나 말하기를,“내가 이제 죽을 곳을 얻게 되었다.”하였다. 당시 공이 거느리고 있던 부대 모두를 제수(諸帥)에게 뺏긴 상황에서 그래도 겨우 남아 있던 수백 명만을 이끌고 공이 남쪽으로 내려가게 되었다.왜적은 그때 산과 바닷가에 근거지를 설치하고서 장차 서쪽으로 호남을 넘보려 하고 있었는데, 제군(諸軍)은 대부분 그 예봉(銳鋒)을 피하려고 다른 곳에 진을 친 채 몸을 사리고 있었다.그러나 공은 생각하기를 ‘호남이야말로 나라의 근본이 되는 지역인데, 진주(晉州)는 실로 호남의 울타리 역할을 하는 곳이다.’ 하고는, 진주를 지켜 호남으로 가는 길을 차단하겠다고 청한 뒤 회보를 기다리지 않고 곧장 진주로 들어갔다.그런데 진주는 그야말로 여지없이 결딴난 상태여서 성지(城池)나 기계(器械) 모두 믿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 공은 절도사(節度使) 최경회(崔慶會), 황진(黃進) 및 복수장(復讐將) 고종후(高從厚), 의병장 장윤(張允) 등과 함께 죽음으로써 지킬 것을 약속하였다.며칠이 지나자 왜적의 유병(遊兵)이 벌써 성의 동쪽에 나타났는데 공이 정기(精騎)를 출동시켜 격퇴하였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왜적이 대거 이르러 성 주위에 목책을 둘러 세우더니 보병과 기병이 곧장 성문 앞까지 육박해 왔는데, 공이 경노(勁弩)를 그들 위에 퍼붓게 하니 적들이 근접하지 못하였다.그러자 왜적이 대나무를 엮어 큰 방패를 만든 뒤 그 가운데에 포혈(砲穴)을 끼워 넣고는 성을 공격해 왔으나, 우리 군사 역시 임기응변으로 대처하였다. 이번에는 왜적이 또 토산(土山)을 쌓고는 그 산 위에 망루를 세워 성안을 내려다보면서 포환(砲丸)을 비오듯 쏘아 대었다. 이에 공도 성안에다 이를 마주 보는 토산을 쌓고는 대포를 발사하여 토산 위에 세운 왜적의 망루를 부숴 버렸다. 그리고 마침 적장(賊將) 몇 사람이 성 동쪽의 산마루에서 모이는 것을 공이 탐지하고는 몰래 대포를 발사하여 두 번째 앉은 자를 맞춰 쓰러뜨리기도 하였다.공은 평소 다리에 병이 생겨 걷지를 못했는데 가마를 타고 성을 돌아다니면서 낮이나 밤이나 조금도 쉬지 않았다. 그리고는 손수 죽을 쑤워 성첩(城堞)을 지키는 군사들을 먹여 주곤 하였으므로 군사들이 모두 감격하여 더더욱 목숨을 바칠 각오를 새롭게 하였다.당초에 왜추(倭酋) 수길(秀吉)이 제로(諸路)의 왜적들 모두가 공을 세우지 못하는 것을 분하게 여긴 나머지 사신을 보내 꾸짖었는데, 이에 왜적의 장수들이 반드시 유명한 도회지 하나를 결딴냄으로써 수길의 인정을 받고자 하였다. 그래서 이 전투에서 성이 오래도록 떨어지지 않는 가운데 죽은 왜적들의 수가 엄청나게 많았는데도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던 것이었다.그런데 당시에 오래도록 비가 내려 성곽의 흙이 질퍽해진 나머지 곧잘 무너져 내렸고, 또 대장 황진(黃進)과 장윤(張允) 등이 적탄에 맞아 잇따라 전사하였으므로 성안의 사기가 많이 저하되었다. 그러자 왜적이 더욱 병력을 증강하여 급하게 성을 공격해 오기 시작하였다.그리하여 고함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는 가운데 육박전을 벌이며 다투어 성 위로 올라왔는데, 성안에는 화살과 돌이 다 떨어져 오직 대나무 창으로 치고 찌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왜적이 마침내 승세를 타고 난입해 들어와 성이 결국 함락되고 말았다.이때 공은 촉석루(矗石樓) 위에 있었는데, 좌우에 있던 사람들 모두 흩어져 없어지고 오직 장남인 상건(象乾)과 막하(幕下)의 양산숙(梁山璹) 등 편비(褊裨)와 친병(親兵) 10인만이 공의 옆에 있으면서 떠나지 않았다. 이들이 울부짖으며 말하기를,“일이 끝장났으니 이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하자, 공이 온화한 기색으로 말하기를,“의거를 일으키던 날에 나는 이미 죽기로 결정을 하였다. 다만 너희들이 애달프기만 하구나.”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나 북쪽을 향해 절을 하고, 먼저 병기(兵器)를 물속에 던져 넣은 뒤, 아들 상건과 서로 부둥켜안은 채 누대(樓臺) 위에서 강물로 몸을 날렸다. 이때 공을 따라 죽은 장좌(將佐)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러나 이 전투를 치른 뒤로 왜적 역시 힘이 다하여 감히 다시는 호남을 넘보지 못하게 되었다.명 나라의 지휘(指揮) 오종도(吳宗道)가 평소부터 공을 경복(敬服)해 오다가 공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사신을 보내 글을 지어서 제사를 올리게 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비통하였다. 그리고 총독(總督) 형개(邢玠) 역시 ‘충성스럽고 굳센 그 혼백, 늠름하게 앞에 보이는 듯하다.’고 공을 칭송하였다. 이렇게 해서 공의 충의(忠義)가 천하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군자는 말한다. ‘공이 맨 먼저 대의(大義)를 부르짖으며 국난에 뛰어든 것으로 말하면 안노공(顔魯公)보다도 못할 것이 없고, 강도(江都)에 웅거하면서 행조(行朝)와 연락을 통했던 것으로 말하면 설경선(薛景仙)이라도 더 나을 것이 없다. 그리고 외로운 성을 사수(死守)하여 강성한 오랑캐의 길목을 차단하였고 몸은 죽었으나 적들 역시 기진맥진하여 호남이 온전히 보존될 수 있게 한 것으로 말하면 그 일이 장회양(張睢陽)의 경우와 그대로 들어맞고, 부자(父子)가 함께 죽어 충효(忠孝)를 이룬 것으로 말하면 또 변성양(卞成陽)의 경우와 여합부절(如合符節)한다.’라고.공의 휘(諱)는 천일(千鎰)이요, 자(字)는 사중(士重)이다. 그 선조는 광주(光州) 사람인데 나주(羅州)에 옮겨 온 지 2대가 되었다. 공은 어려서 고아가 된 뒤 일재(一齋) 이항 선생(李恒先生)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는데, 뜻을 독실히 하고 실천을 힘쓰면서 무슨 일이건 성현(聖賢)을 자신의 법도로 삼곤 하였다. 유일(遺逸)로 천거된 뒤 내외의 직책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모두 걸맞게 임무를 수행하였고, 특히 대관(臺官)으로 있을 때는 강직한 자세로 할 말을 과감하게 다하였다.공의 생김새로 말하면 풍채가 그다지 탐탁스럽게 보이지 않아 옷 무게도 이겨 낼 것 같지 않았으나 의리에 용맹스러운 점은 분육(賁育 진(秦) 나라 무왕(武王) 때의 용사였던 맹분(孟賁)과 하육(夏育)을 말함)이라 할지라도 그 뜻을 뺏을 수가 없었다. 충의(忠義)의 정신을 천성적으로 품부받은 위에 학문으로 또 보완을 하였으니, 전(傳)에서 말한 바 ‘지사(志士)와 인인(仁人)은 자기 몸을 죽여 인(仁)을 이룬다.’고 한 경우가 바로 공에게 해당되는 말이라고 하겠다. 그러니 하나의 절조(節操)만을 가지고 공을 평가한다면, 이는 공을 제대로 아는 자가 아니라고 할 것이다.공의 사당은 나주 행정 소재지 서쪽 옥정봉(玉井峯)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내가 일단 대략이나마 공의 시말(始末)을 기술하였는데, 여기에 초사체(楚辭體) 1장(章)을 함께 묶어 신령을 영송(迎送)하는 나의 뜻을 덧붙이면서 이 시도 아울러 새기도록 부탁하였다.그 시는 다음과 같다.영산강 연안 옥정봉 언덕 / 榮之滸兮玉之岡공의 사당 위엄 있게 버티고 섰네 / 儼奕奕兮公之堂잘 익은 술에 맛있는 안주 / 椒漿兮蕙殽각종 제기(祭器)도 향기롭게 진설됐네 / 陳瑤勺兮薦芬芳노기 띤 공의 머리칼 관을 찌르고 / 公誰怒兮髮衝冠한 손엔 큰 칼 또 한 손엔 도끼날 번뜩이도다 / 慫雄劍兮翼戚揚신령스런 분위기 하늘가에 감돌면서 / 橫天宇兮揚威靈음침하게 구름 끼며 흙비 내리네 / 雲曀曀兮霾光아 기다렸던 공께서 오시는가 / 望公兮公來바람 불어오며 장막이 흔들리네 / 靈風肅兮帷房씩씩하고 굳센 영웅의 모습 / 孔武兮且毅앞뒤 좌우로 발걸음 옮기도다 / 紛或前兮或旁안주도 굳어지고 술도 맑아지는 사이 / 肴旣昲兮酒旣淸환락 못다 누린 채 강개한 빛 띄우더니 / 懽未極兮慨慷잠시도 지체 않고 홀연히 사라지니 / 歘去兮不少留하늘 문만 휑하니 환하게 열렸어라 / 天門闢兮皇皇공에게 상제 명하시길 남방을 보호하며 / 龔帝命兮芘南土못된 놈 때려잡고 악귀(惡鬼) 쫓아 버리라고 / 斮䲔鯢兮捎獝狂난국(蘭菊) 향기 그윽한 봄철과 가을철에 / 春蘭兮秋鞠풍성하고 향기나는 제사를 올리리니 / 牢有腯兮廩有薌천추 만세토록 / 千秋兮萬歲기꺼이 공의 고향 찾아와 주시라 / 公無斁兮公之鄕[주-D001] 안노공(顔魯公) : 노군공(魯郡公)에 봉(封)해진 당(唐) 나라 안진경(顔眞卿)을 말한다. 안녹산(安祿山)의 난 때 평원 태수(平原太守)로 있으면서 그 지역을 온전히 지켰고, 의병을 모집하여 토벌하면서 하삭(河朔) 제군(諸郡)의 맹주(盟主)로 추대되었다. 뒤에 이희열(李希烈)이 반란을 일으키자 초유(招諭)하러 갔는데, 그의 회유를 듣지 않고 역적이라고 꾸짖다가 목졸려 죽었다. 《舊唐書 卷128》[주-D002] 설경선(薛景仙) : 당 나라 현종(玄宗) 때 진창 영(陳倉令)으로 있었는데, 마외(馬嵬)에서 양국충(楊國忠)이 죽음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 괵국부인(虢國夫人 양 귀비(楊貴妃)의 언니)이 진창으로 도망쳐 오자 추격하여 죽였으며, 뒤에 무리를 이끌고 부풍군(扶豐郡)을 수복하여 행조(行朝)와 통하게 한 공로로 부풍 태수(扶豐太守)가 되었다. 《舊唐書 卷10》 《新唐書 卷138》[주-D003] 장회양(張睢陽) : 안녹산의 난 때 회양성(睢陽城)을 지키다 죽은 장순(張巡)을 말한다. 회양 태수 허원(許遠)과 함께 성을 지키며 적장 윤자기(尹子琦)와 싸워 몇 번이나 물리쳤으나, 몇 달이나 고수하다가 중과부적에 식량마저 떨어진 상태에서, 그의 명성을 시기한 임회 절도사(臨淮節度使) 하란진명(賀蘭進明)이 고의로 구원병을 보내지 않는 바람에 성이 함락되면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舊唐書 卷187》[주-D004] 변성양(卞成陽) : 진(晉) 나라 성양(成陽) 사람으로 소준(蘇峻)의 반란 때 맞아 싸우다 전사한 변호(卞壺)를 말한다. 진 나라의 육군(六軍)이 패한 상태에서 수백 인을 이끌고 고전(苦戰)하다 마침내 죽었는데, 두 아들 진(眕)과 우(盱)가 아비의 죽음을 목격하고 서로 적진 속으로 뛰어 들어가 함께 해를 당하고 말았다. 변문 충효(卞門忠孝)의 고사로 전해져 온다. 《晉書 卷70》[주-D005] 지사(志士)와 …… 이룬다 :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에 나오는 말이다.[주-D006] 안주도 …… 사이 : 한참 시간이 흐른 것을 말한다. 시간이 지나면 안주도 굳어지고 술 윗부분이 맑아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열자(列子)》 권3 주목왕(周穆王)에 “술도 아직 맑아지지 않았고 안주도 굳어지지 않았다.[酒未淸 肴未昲]”라는 표현이 있다.*조선 중기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 중 한 사람인 계곡(谿谷) 장유(張維 1587~1638)의 시문집 《계곡집(谿谷集)》을 국역한 것이다. 이 책의 대본은 36권 18책의 목판본으로, 원집(原集) 34권, 만필(漫筆)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표제(表題)는 ‘계곡선생집(谿谷先生集)’이며, 판심(版心)은 ‘계곡집(谿谷集)’으로 되어 있다.이 판본은 인조 21년(1643) 전라도 광주(光州)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초간본이다. 이후 중간(重刊)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중간본은 간행되지 않은 듯하다. 그러므로 국역 대본으로 삼은 이 책에는 저자에 관한 행장ㆍ연보ㆍ제문ㆍ만장(挽章)ㆍ유사(遺事) 등의 부록 문자가 전혀 수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저자의 생애 및 교유 관계를 살펴볼 만한 자료가 적다. 지금까지 저자의 행장 및 묘갈명 병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다행히 황경원(黃景源)이 지은 묘지명 병서와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신도비명 병서가 남아 있어 저자의 생애를 개략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2022-04-29 | NO.13
  • 최사전묘지 (崔思全墓誌)
    최샤전묘지(崔思全墓誌)는 1140년(인종18 ) 의 것으로  국립광주박물관에 있다.국립광주박물관은 고려시대 명의로 불렸던 최사전 의원의 유물을 2011년 2월에 전시한 바 있다. 이 전시회는 무양서원(탐진 최씨)이 2009년 기증한 '최사전 묘지'로 고려시대 임금의 의원이었던 최사전(崔思全, 1067~1139)의 행적이 해서체(楷書體)로 기록되어 있다.또 최사전에 대해 관람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국립광주박물관은 최 의원이 당시 약을 조제했던 기관인 '상약국(尙藥局)'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보물 제1023호 청자음각운룡문 상약국 명합(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을 함께 전시했다.최사전 묘지는 탐진 최씨 문중이 일제강점기에 일본 동경대박물관으로 반환청원서를 제출해 1921년 반환받은 유물이다.한편 최사전은 1126년(인종4) 이자겸의 난을 평정한 공을 세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
    2023-07-17 | NO.12
  • 최형한-사헌부장령 최공 신도비
    광주시 남구 지산재길 51이 사헌부장령최공신도비는 지산재 뒤에 있다. 영사정 주인인 최형한이다.
    2018-11-30 | NO.11
  • 최형한-영사정 최선생 묘갈추지
    광주시 남구 지산재길 51영사정최선생묘갈추지는 영사정 최형한의 비문이다.
    2018-11-30 | NO.10
  • 최형한-영사정 최선생 묘비
    광주시 남구 지산재길 51
    2018-12-17 | NO.9
  • 충장공김덕령묘비
    광주시 북구 금곡동 10231975년김덕령 묘비는  충장사 내에 있다. 김남중이 글을 짓고 김상필이 글씨를 써서 1975년에 세웠다.
    2018-10-26 | NO.8
  • 광주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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